최진석의 노장적(老莊的) 생각

 

[최진석의 노장적(老莊的) 생각·21]노자도 공자도 선진국을 꿈꿨다

'안빈낙도', 공자가 '옹야'편에서 제자 안회에게 한 말이 '시초'가난 속에서도 당당하게 '도(道)' 실현의지 발휘 높이 사 안빈낙도(安貧樂道), 살면서 모질고 거친 파고를 이겨내려 몸부림치는 사람들은 다 한 번은 입안에서 웅얼거려 보았을 것이다. 모든 것을 버리고 산 속으로 들어가 비록 가난하더라도 걱정 하나 없이 맘 편히 지내는 일상 말이다. 이 말은 공자(孔子)가 『논어』의 「옹야」편에서 제자 안회를 평하는 문장에서 시작된 것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안회야, 너 참 대단하구나! 한 바구니의 밥과 한 바가지의 국물로 끼니를 때우고, 누추한 거리에서 구차하게 지내는 것을 딴 사람 같으면 우울해하고 아주 힘들어 할 터인데, 너는 그렇게 살면서도 자신의 즐거워하는 바를 달리하지 않으니 정말 대단하구나!" 여기서 '즐거워하다'는 '악'(樂)을 번역한 말이다. 공자가 살던 당시의 용법으로 볼 때, 이 '악'은 그냥 감각적인 쾌락으로 마음이 들뜬 상태를 말하는 것 정도에 머물지 않는다. 감각적 쾌락은 절제 없이 탐닉[淫]으로 빠지지 않을 수 없다. 탐닉으로 빠지지 않을 정도의 고양되고 절제된 즐거움인 '악'(樂)은 '음'(淫)을 거부한다. '악이불음'(樂而不淫)인 것이다. 당시에는 사회를 유지하고, 교화를 완성하도록 만들어진 체계를 '예악'(禮樂) 체계라고 했다. 사회에 '도'를 실현하는 장치다. 그래서 안회가 즐거워하던 바를 달리하지 않았다는 것은 '도'의 높이에서 실현되는 삶을 추구하는 태도를 잃지 않았다는 뜻이다. 이런 연유로 「옹야」편의 이 문장을 '안빈낙도'(安貧樂道)로 개괄한 것은 아주 옳다.이 표현을 삶속에서 생산못하고 '안빈'에 초점 가볍게 사용돼지식생산국에 진입못한 '중진국'그런데 이 표현을 자신의 직접적인 삶속에서 생산하지 못하고, 그냥 말로만 들여와서 쓰는 사람들은 생산될 때의 두터운 의미를 놓친 채 왕왕 얇고 가볍게 사용한다. '안빈낙도'가 원래 가진 두터움을 '안빈'과 '낙도'로 쪼개 얇게 쓰면서, '안빈'에만 무게를 두고 '낙도'는 가볍게 여긴다. 그냥 세상사의 무게를 내던져버리고, 가난하더라도 아무 걱정 없이 맘만 편하면 '안빈낙도'로 여기는데, 그렇지 않다. 가난을 맘 편하게 대하는 것 정도에서 그칠 말이 아니다. 가난하더라도 그 가난 때문에 자신의 수준을 낮추지 않고, 당당함을 잃지 않는 것이 '안빈'이다. 이 가난은 자신의 무능이나 게으름 때문에 야기된 것이 아니라, 부를 일구는 일보다는 원래 가졌던 더 높은 지향을 지키고 실현하느라 부를 일굴 겨를이 없어 맞이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적극적으로 자초한 가난이다. 그 높은 지향은 바로 '도'(道)를 향한다.당연히 '안빈낙도'에서 방점은 '안빈'보다는 '낙도'에 있다. 삶 속에서 '도'를 실현하려는 의지를 즐거움으로 받아들이는 정도의 높이를 가지고 있는 가난한 사람이 비로소 '안빈낙도' 할 수 있다. 가난 속에서도 당당함을 잃지 않고 '도'를 실현하려는 의지를 발휘하는 것이 '안빈낙도'다.세계와 관계하는 인격이 얇고 가벼우면 무게감 있는 것들을 쉽게 잘라버리고, 감성과 도덕으로 삶을 분칠해버린다. 구체적 삶의 현장에서 자신의 문법을 스스로 생산하는 능력을 갖추고 있지 않으면, 다른 곳에서 생산된 문법을 들여와 쓸 수밖에 없는데, 이런 경우에는 대개 감성적이고 도덕적이거나 이념적 태도를 갖기 쉽다. 이론으로만 들어오면서 그 이론이 생산될 때의 배경이 된 삶의 구체적 현장성이 떨어져 나가기 때문이다. 그래서 구체적 현장성까지 붙어있는 두께는 구현하지 못하고, 감각적이며 얇고 가벼워진다. 혁명에도 독립적 혁명이 있고, 종속적 혁명이 있다. 혁명을 스스로 생산한 이념으로 하면 독립적이고, 자기 문제를 해결하려는 혁명이면서도 이미 생산되어 있는 이념을 구현하는 형태로 하면 종속적이다. 독립적이면 두텁지만, 종속적이면 가볍고 얇다. 가볍고 얇아지면 이념과 도덕을 지향하는 조급함을 넘어설 수 없다. 우리는 중진국 함정에 빠져 있다. 단순히 경제적이거나 군사적인 문제만 놓고 하는 말이 아니다. 세계와 관계하는 방식, 자신의 삶을 지배하는 문법 등에서 아직 독립적인 생산 단계에 들지 못했다는 뜻이다. 하나만 따로 놓고 말해본다면, 지식의 생산국에 진입하지 못하고 아직까지 총체적인 지식 수입국이라는 뜻이다. 이런 비독립적 한계가 경제와 군사적인 문제의 높이까지 결정한다. '독립적인 생산 단계'에 든 나라를 선진국이라고 한다. 그래서 이 모든 문제를 개괄하여 나는 선진국으로 진입하는 도전에 나서자고 말하는 것이다. 우리 사회에서 '선진국'이라는 단어 자체가 식상하기도 하고, 너무 비문화적이고 비도덕적으로 들리는 지경이라는 것도 잘 안다. 이런 지경에 있는 분위기 속에서 몇몇은 이렇게 말한다. "선진국은 전쟁으로 이루어진 경우가 많다. 포악한 전쟁을 쉽게 하는 그런 단계는 올라갈 필요도 없다.", "왜 꼭 선진국이 되어야 하는가. 그냥 이 단계에서 평화롭게 살면 되지.", "공자도 도덕적으로 사는 삶을 말하지 않았는가.", "더구나 도가 철학을 공부한 사람이 왜 노자와 전혀 다른 말을 하는가. 노자는 나라의 통치 자체를 부정한 사람이다." 공자와 노자가 선진국을 지향했다는 것만 말해도 많은 말다툼은 줄 것 같다. 이제 그것을 말해본다.공자 논어에 "나라를 흥성하게"'덕(德)'을 통한 국가발전 주장노자 도덕경서 '무불위''취천하''나라 키워 큰 지배력 행사' 말해감성적이고 도덕적인 편협함에 빠진 사람들은 공자를 정의와 개인적인 덕성의 함양만을 논하지 국가를 흥성시키고 부강하게 하려는 개혁에는 관심이 없었던 사람으로 얇게 해석하곤 한다. 하지만 공자는 『논어』에서 '나라를 흥성하게'(興邦)하는 일을 매우 중요한 목표로 제시하기도 하고, 덕성의 함양 자체를 국가의 부강과 직접적으로 연결시킨다. 「자로」편에 나오는 한 대목. "번지가 농사짓는 법과 원예를 가르쳐 달라고 청하니, 공자가 말한다. '나는 경험 많은 농부나 원예사만 못하다.' 번지가 나가자 공자가 다시 말한다. '번수가 소인이구나. 위에서 정의로우면 아래서 따르지 않을 수 없다. 위에서 믿어주면 아래서 진정을 다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하다면, 사방에서 자식들까지 업고 몰려올 텐데 꼭 농사로만 하려고 해야겠느냐.'" 공자가 강조하는 정의와 신뢰도 그것 자체가 가지고 있는 도덕적인 의미로만 작동되는 것이 아니라 '사방에서 자식들까지 몰려오는' 현실적이고 국가적인 이익이 있기 때문이다. 당시에 인구는 노동력과 군사력의 원천이다. 산업을 발전시키고 국방을 강화시키려면 반드시 있어야만 하는 자원이다. 다른 한 구절. "섭공이 공자에게 정치에 대해서 묻자 공자가 답한다. '가까이 있는 사람들은 설득하거나 기쁘게 해주고, 멀리 있는 사람들은 오게 한다.'" 다른 나라 사람들이 스스로 찾아오게 하는 것을 정치의 실력으로 보고 있다. 다른 나라 사람들이 매력을 느껴 찾아오게 하여 산업과 국방을 더 강화하는 것이다. 공자는 '도덕적 자각 능력'을 성숙시켜서 윤리적 개인과 윤리적 국가를 이루면 그 매력을 만들 수 있다고 믿었다. 「위정」편에 나오는 대목은 이렇다. "공자가 말한다. '덕을 기본으로 하는 정치, 즉 덕치를 하는 것은 북두성이 제 자리를 잡으면 모든 별이 우러르며 따르는 것과 같다.'" 덕치(德治)는 모든 별이 우러르며 따르는 효과를 갖기 때문에 의미가 있다. 덕치 자체의 윤리적 정당성으로만 가질 수 있는 의미가 아니다. 공자에게서 '덕'은 국가 발전 강령의 핵심이다.세상에서 국가의 이익이나 발전과 더 관련 없는 사상가로 치부되기는 공자보다도 노자(老子)가 더 심하면 심했지 조금이라도 덜하지 않을 것이다. 길게 말할 필요도 없다. 『도덕경』 제48장만 봐도 된다. "무위하면 되지 않은 일이 없다."(無爲而無不爲) 보통은 세상사에 어떤 욕망도 품지 않고, 그냥 되는대로 흘러가게 내버려 두는 것을 '무위'(無爲)로 보면서 개인의 안빈낙도와 연결시키기도 한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노자가 말하고 싶었던 것은 '무위'보다도 '되지 않은 일'이 없는 '무불위'(無不爲)의 결과다. '무위'라는 지침은 '무불위'라는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의미를 가진다. 내가 해석하여 억지로 하는 말이 아니라 노자가 그의 책에서 그렇게 써 놨지 않은가. 노자의 시선은 오히려 '무불위'에 가 있다. 그렇다면, '무불위'라는 효과에서 가장 큰 것은 무엇인가. 노자에게서 이 점은 매우 분명하다. 바로 이어서 말한다. 바로 '취천하'(取天下), 즉 천하를 갖는 일이다. 나라를 키워서 여러 나라들 가운데 가장 큰 지배력을 행사하는 것이다. 22장에서도 말한다. "구부리면 온전해지고, 덜면 꽉 찬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노자를 '구부리고, 덜어내는' 것만 주장한 것으로 받아들이려 한다. 노자가 '온전해지고 꽉 채우는' 것도 말했다. 사실 노자는 온전하고 꽉 채워지는 결과를 기대하는 마음이 더 컸다. 7장에서도 말한다. "자신을 내세우지 않지만, 자신이 앞서게 된다. 자신을 소홀히 하지만, 오히려 보존된다." 노자는 앞서고 보존되기 위해서, 내세우지 않고 소홀히 할 뿐이다. 노자의 시선은 앞서고 보존되는 결과에 가 있지, 내세우지 않고 소홀히 하는 소극적인 과정에만 멈춰있지는 않다. 얇은 지성은 '무불위'로 대표되는 결과를 읽는 대신, '무위'만 읽는다. '안빈'만 보고, '낙도'는 보지 못하는 것과 같다. 공자에게서 '덕'(德)이 국가 발전에 봉사하듯이, 노자에게서는 '무위'가 국가의 선도적 역량을 갖게 한다.둘다 사상 내용 달라도 목표 같아선도력으로 우위점한 나라 꿈꿔부국강병해야 느리지만 진짜 평화공자와 노자가 살던 시기는 중국의 기존 지배 이데올로기가 무너지면서 새 세상이 열리는 과정에서 여러 나라들이 서로 지배적 우위를 점하려고 각축하던 때다. 이 두 사상가들은 사상 내용이야 다르지만, 목적은 같았다. 바로 지배력을 가진 나라를 만드는 일이다. 선도력과 지배력으로 우위를 점하는 나라를 꿈꿨는데, 요즘 말로는 바로 선진국이다. 그 목적을 공자는 '덕성'을 기반으로 해서 완성하려 했고, 노자는 자연 질서를 인간 질서로 응용하는 방식으로 완성하려 했을 뿐이다. 영혼의 완성을 이루려는 사람이 잡다한 현실을 따돌리기만 하면 될 것으로 믿다가는 얇고 창백하며 정체 모를 환각에 싸일 뿐이다. 공동체의 평화를 말하면서 정작 나라의 힘을 키우는 데 소홀하다가는 그 평화 한 조각도 자신의 땅 위에 세우지 못할 것이다. 나라를 걱정하면서 부국강병을 말하기 어려워하는 사람은 다 가짜다. 얇고 가벼운 것은 감각적이어서 빨리 오고, 두텁고 무거운 것은 느리게 온다. 느리게 오는 것이 진짜다./최진석 건명원 원장·서강대 철학과 명예교수송필용 作 '안빈낙도' /광주일보 제공최진석 건명원 원장·서강대 철학과 명예교수

2018-10-15 최진석

[최진석의 노장적(老莊的) 생각·20]좌우 날개의 성숙과 새의 비상

'새는 좌우 날개로 난다'협력·균형에 의한 '비행' 의미'좌'건 '우'건 자신의 입장 갇혀한쪽만 주장땐 제대로 못 날아시선이 낮아 실력이 없으면'좌-우' 하위 기능에만 집중'날아오르기' 상위 어젠다 도외시정권마다 '협치' 거론하지만 '난망'자기 각성 통해 양보함으로써큰 이익 실현하는 '유연성' 없어최저임금제·4대강 '찬반 논란''정도' 살피는 성숙없어 극단화 노자·공자도 '자기만 옳다' 경계진영 넘어 시선 높일때 '비상'새는 좌우의 날개로 난다는 말이 있다. '우'가 일방적으로 힘을 행사할 때, 밀려 있던 '좌'들이 살아남으려고 하면서 '우'를 향해 필사적으로 내뱉는 말이다. 또 '좌'가 일방적으로 패권을 휘두르면 밀려나지 않으려고 발버둥치는 '우'들이 '좌'를 향해 내뱉기도 한다. 이 경우에 '좌'가 하는 말이나 '우'가 하는 말이 절실하기는 하지만, 그렇게 진실하지는 않다. 좌우의 날개로 난다는 말은 새의 비행은 왼쪽과 오른쪽으로 갈라져 있는 두 날개의 상호협력과 균형에 의해서만 완수된다는 뜻인데, 말을 하면서 좌우의 균형이나 협력은 의식하지 않고, 반대쪽과의 투쟁에서 자기 입지를 강화하려는 목적으로 한 말이기 때문이다. 살아남으려니까 절실하기는 하지만, 비행의 완수보다 자기 자리의 확보만 목적으로 두고 하는 말이니 균형이나 협력은 애초에 관심도 없다. 수준도 높지 않다. 이런 어법이 횡행하는 곳에서는 '우'와 '좌' 사이에 주도권만 왕래하지 '비행'은 효과적으로 완수되지 않는다. '비행'이 완수되지 않은 책임은 누구도 지지 않는다. 이륙도 못하는 새만 불쌍하다.'좌'에서건 '우'에서건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난다는 말을 하더라도, 막상 비행의 주도권을 가지게 되면 자기 날개 하나로만 날려고 한다. 마치 새에게 날개란 원래 하나밖에 없는 것으로 알고 살아온 듯하다. 좌우의 날개가 상호 협력을 통해 균형을 잡아야만 날 수 있다는 말은 하는 사람이나 듣는 사람이나 모두 알아듣는다. 또 어느 쪽에서나 맞는 말이라고 한다. 그런데 협력과 균형을 갖춘 비행은 이뤄지지 않는다. 왜 이럴까? 실력 때문이다. 시선의 높이 때문이다. 새가 두 날개의 협력과 균형으로 난다는 말을 이해는 하지만, 사실은 알지 못한다. 지적으로는 이해하더라도 자신의 행동으로 구현될 정도로 철저하게 인식하지는 못한 까닭이다. 자기가 처한 한쪽 날개의 입장을 주장하고 관철시키기 위해서 좌우 날개의 협력을 말한 것뿐이다. 협력과 균형이라는 상위의 어젠다가 하위의 '좌'나 '우'를 지배해야 하는데, 하위의 '좌'나 '우'가 상위의 어젠다를 치받는 형국이다. 시선이 높아 실력이 있으면 상위의 어젠다로 하위의 기능을 지배하고, 시선이 낮아 실력이 없으면 하위의 기능에만 집중하다가 상위의 어젠다를 도외시한다. 새의 균형 잡힌 비행을 목적으로 하면 좌우의 치열한 대립이 상호 협력으로 바뀔 수도 있지만, 좌나 우가 처한 진영의 입장만을 목표로 하면 새의 비행은 이뤄지지 못한다. 시선이 좌나 우의 입장에 닿아 있는 한, 새의 비행은 그리 급하거나 중요한 일로 다뤄질 수 없다. 강한 왼쪽 날개와 또 그만큼 강한 오른 쪽 날개를 가졌지만 새는 날지 못한다.부부도 가끔 싸운다. 어떤 부부는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길가에서도 싸운다. 길가에서 싸우다가 지나가는 사람이 보는 것 같으면 바로 싸움을 멈추기도 하지만, 싸움을 멈추지 않고 누가 보든 말든 계속 하는 부부도 있다. 누가 볼 때 싸움을 멈추는 부부가 시선이 높을까, 아니면 계속 하는 부부가 시선이 높을까. 싸움에 대한 몰입도나 충성도 혹은 치열함은 싸움을 멈추지 않고 계속 하는 부부가 훨씬 높을 수 있다. 그러나 삶을 운용하는 격이나 높이에서 본다면, 싸움을 멈추는 부부가 높다. 시선이 높으면 삶을 운용하는 실력도 좋다. 둘이 싸우는 풍경에 지나가는 사람이 하나 더해지는 일은 생소한 한 사람이 더해지는 것에 그치지 않고, 사실은 전혀 다른 풍경화로 바뀌는 일이다. 이 변화를 알아채지 못하면, 하고 있는 싸움이 세계 전체로 받아들여질 수밖에 없다. 그러면 싸움을 멈출 이유가 없다. 싸움을 멈추는 일은 오히려 진실하지 않은 태도로 받아들여질 수도 있다. 높은 시선으로 무장한 실력을 갖춘 부부에게는 싸움을 멈추는 것이 진실이고, 시선이 높지 않은 부부에게는 싸움을 계속 하는 것이 진실이다. 어느 집에서 고양이를 샀다고 치자. 그러면 거실 풍경에 고양이 하나만 더 그려지는 것으로 그치지 않는다. 고양이를 중심으로 가족 관계가 새롭게 정비되어 전혀 다른 가족이 된다. 거실에서 TV를 치우면, 거실 풍경에서 단지 TV 한 대가 사라진 것이 아니라, TV를 중심으로 만들어졌던 권력관계나 시간을 쓰는 내용도 함께 사라져서 새로운 가정, 새로운 가족으로 바뀐다. 전혀 다른 새 풍경화가 되는 것이다. 변화를 이런 식으로 인식하는 것을 인문적 통찰이라고 할 수도 있다. 인문적 통찰의 높이까지 사유 능력이 고양되어 있으면 다른 사람이 자신들의 싸움을 구경하는 일이 전혀 다른 풍경화를 펼치는 사건이므로 놀라지 않을 수 없다. 반면에, 그런 통찰의 높이에 도달해 있지 않으면 싸움 풍경에 그저 모르는 한 사람이 더해져 있는 것 이상이 아니므로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계속 싸움을 해나간다. 결국은 부부싸움 이상의 높이를 가지고 있느냐 있지 않느냐의 문제다. 아무리 화가 나더라도 가정의 명예나 평판 등과 같이 한 단계 더 높은 지향을 가진 사람이라면 싸움을 멈출 수 있다. 지향점이 새의 비행에 닿아 있다면 좌우의 두 날개 짓은 협력과 균형으로 진화할 것이지만, 수준이나 실력이 좌우의 각 진영에 갇혀 있다면 비행의 완수보다 좌우의 싸움에 더 몰입할 것이다. 부부싸움의 이치와 다르지 않다. 더 높은 시선에서 아래 단계의 기능을 통제하느냐 하지 못하느냐의 일이다.한국은 새 정권이 들어설 때마다 협치를 말하지만, 협치는 아직까지 난망이다. 굳이 어느 편의 책임이라고 할 필요 없다. 우리의 실력이다. 새가 좌우 날개의 균형을 맞춰 비상하는 것도 사실은 엄청난 실력이다. 이 실력이 없는 상태라면 각각의 날개가 각자의 방향성과 작용력으로 분리되어 날지 못하는데, 실력을 발휘하려면 각각의 날개가 자기 정당성과 고집을 줄이고 상대의 입장을 받아들이면서만 가능해진다. 이것을 우리는 각성이라고 한다. 이 각성을 가진 대립면의 충돌은 성숙과 진화를 보장하고, 미 성숙된 대립은 분열과 비효율만 쌓는다. 사실 우리가 지금 이러고 있다. 결국은 성숙과 실력이다.실력의 내용은 무엇인가. 유연성이다. 유연성은 자기 각성과 반성을 통해서 상대에게 양보함으로써 내 이익을 더 크게 실현시킬 수 있는 실력이다. 실력이 없으면 견강해지고 극단화된다. 오른쪽 날개가 높은 시선의 실력을 갖추고 있으면, 자기 날개 짓의 강도와 방향만 고집하는 것이 아니라, 왼쪽 날개와 함께 펼치는 판의 형편을 잘 살펴서 새가 날 수 있도록 조정하여 '정도'를 맞춘다. '정도'를 살펴 자신의 날개 짓을 새의 비상이라는 과업에 공헌시키고 자신의 성취를 이룬다. 왼쪽 날개도 실력이 있다면, 이와 다르지 않다. 서로 날개가 붙어있는 방향만 다르지 '정도'를 살피는 실력으로 협력하여 새의 비상이라는 과업을 완수한다. 극단화되면, 이론과 이념과 개념에 집착하고, 유연해지면 현실을 살펴서 정도를 잘 가늠할 수 있다. 최저임금제만 봐도 그렇다. 나라의 규모를 보거나 발전 방향을 보더라도 최저임금제를 실시하는 것은 시대에 맞는 일이다. 실력이 없으면 개념에 집착하여 극단화된다. 그래서 최저임금제라는 이슈가 등장하자마자 바로 찬성파와 반대파로 나뉜다. 최저임금의 정도를 살피는 숙고는 사라지고, 반대 방향으로 누가 더 극단화하는가의 게임으로 변질된다. 최저임금을 하되 정도를 살펴 너무 과격하게 하지 말자고 하면 반대파로 매도하고, 최저임금을 하자고 하는 사람들은 누가 더 세게 할 수 있는가를 가지고만 논쟁한다. 그 결과로 최저임금제를 주장했던 장하성 실장 스스로도 최저임금 인상률이 과해서 놀랐다는 말을 하는 지경에 이른 것이다. 실력은 이론이나 이념의 주장에 있지 않고, 개념의 순수한 적용에도 있지 않다. 잡다하고 변화무쌍한 현실과 대화하여 '정도'를 잘 살필 수 있는 데에 있다. 누가 더 강하고 질 좋은 교과서를 가지고 있는가는 의미 없다. 교과서를 가진 사람의 '정도' 가늠 능력만이 의미 있다. 각성과 반성은 '정도'를 살펴 유연한 탄성을 가지게 하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모든 학문의 목적은 '정도'를 살피는 능력을 배양하는 것에 있지, 이론 그대로 적용하는 능력을 기르는 데에 있지 않다. '4대강'도 사실 '정도'를 살피는 데에 실패한 정책이다. 앞으로 기후변화에 따른 가뭄이나 홍수는 작지 않은 문제다. 게다가 우리나라는 물 부족국가임에도 빗물을 가두는 저수 능력은 매우 낮다. 이 문제는 심각하게 다루어 선재적인 - 이미 많이 늦었지만 - 대응을 해야 할 근본 문제다. 한꺼번에 다 처리하려는 과격함보다 '정도'를 살펴 하나하나 조금씩 해나가는 유연성을 가졌다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을 갖는다. 이렇게 된 연유도 '4대강'이라는 이슈가 나오자마자 '정도'를 살피는 숙고 대신에 찬성과 반대로만 극단화된 것과 관련이 깊다. 누가 정권을 잡든지 아직까지는 '정도'를 살피는 성숙을 보여주지 못한다는 점에서 별 차이 없다. 그래서 노자가 이념이나 개념에 매몰된 지식인들이 과감하게 자신의 뜻대로만 하려는 것을 막아야 한다("使夫智者不敢爲也" 『도덕경』3장)고 일갈한 것이다. 공자라고 다르지 않다. 공자도 각성 없이 자신의 뜻만 옳다고 여기며 반드시 해내고야 말겠다고 고집부리는 일을 끊자("子絶四, 毋意, 毋必, 毋固, 毋我." 『論語·子罕』)고 한다. 그런데 끊자고 해서 끊어지는 것이 아니다. 각성하자고 해서 각성이 되는 것이 아니다. 높은 시선으로 인도되는 실력이 있어야만 가능하다. 좌우의 날개가 아무리 협력하려고 해도 안 된다. 오직 한 길. 자신의 진영을 넘어선 상위의 시선을 갖추고, 그 시선에 의해 인도되어 새의 비상이라는 위대한 과업을 자신의 일로 삼을 때만 가능하다. 매우 높은 단계의 인격이다. 상위의 어젠다가 하위의 기능들에 의해 흔들리면 안 된다. 하위의 기능들이 상위의 어젠다에 의해 이끌리고 통제되어야 한다. 새의 비상이나 나라의 비상이 다 같은 일이다. 부부싸움도 다르지 않다. 인생이 원래 다 그렇다./최진석 건명원 원장·서강대 철학과 명예교수송필용作 '비상' /광주일보 제공

2018-09-10 최진석

[최진석의 노장적(老莊的) 생각·19]쓸모 있음과 쓸모없음

기업들 '뽑을 인재없다' 아우성대학 교육, 현장 적용 쓸모없어새로 가르쳐야한다고 '하소연'요즘 모든 면에서 급격히 변화세상 달라지면 '쓸모'도 달라져이를 먼저 알아차려서 대응'선견지명' 발휘때 부·권력 차지정해진 기준만 따르는 것은과거에 종속 미래적 발전 못해'쓸모없음으로 큰 쓸모 완성'장자의 '인간세' 기묘한 방식 말해꿈 없이 작은 쓸모 '기능' 추구땐본질 놓치고 '한계' 분명'쓸모없음' 향한 새 도전 나서야일자리에 관해서 하는 얘기들을 들어보면, 구직자와 기업 간에 생각이 일치하지 않는 점도 있어 보인다.청년들은 일자리가 없다고 아우성이고, 기업들은 뽑을 인재가 없다고 한다. 기업들이 뽑을 인재가 없다고 할 때, 그 내용은 대개 대학에서 가르친 것들이 현장에서 바로 적용하는 데에 별로 쓸모가 없어서 기업에서는 새로 다 가르쳐야 한다는 하소연이다. 기업은 항상 쓸모 있는 것들을 요구해왔다. 특히 요즘처럼 모든 면에서 변화가 급격히 일어나고 있는 때라면, 쓸모 있는 것에 관한 내용 자체가 달라져서 그 요구는 더 급할 수 있다. 세상의 변화는 쓸모 있는 것이라는 말을 채워주는 내용의 변화다. 세상이 달라지면 쓸모 있는 것도 달라진다. 이런 쓸모 있는 것에서 저런 쓸모 있는 것으로의 이동이 변화의 실제 모습이다. 여기서는 쓸모 있던 것이 저기서는 쓸모가 없거나 줄어든다. 똑같이 저기서 쓸모 있던 것들이 여기서는 쓸모가 확 줄거나 아예 없다. 쓸모없던 것이 쓸모 있어지거나 쓸모 있던 것이 쓸모없어지는 것을 먼저 알아차려 대응하는 것도 선견지명(先見之明)이다. 이런 선견지명을 효율적으로 잘 발휘한 사람들이 항상 부나 권력을 차지했다. 학술이나 예술이나 문화적인 성공도 이런 선견지명과 매우 가깝다. 쓸모 있는 것이 쓸모 있는 것으로 자리 잡기 전에는 쓸모없다는 소리를 듣는다. 그리하여 어쩔 때는 쓸모없는 것이 쓸모 있는 것의 조상이 되기도 한다. 『장자』라는 책의 「소요유」편에는 이런 얘기가 나온다. "혜자가 장자에게 말한다. '나한테 큰 나무가 한 그루 있는데, 사람들은 그것을 가죽나무라 합니다. 줄기는 하도 울퉁불퉁해서 먹줄을 치지 못하고, 가지는 하도 꼬여서 자를 대지 못합니다. 길가에 서 있지만 목수들이 거들떠보지도 않아요. 선생께서 하시는 말씀들이 다 크지만 쓸모가 없어 사람들이 외면하니 처지가 이 나무와 같습니다.' 그러자 장자가 말했다. '선생은 너구리나 살쾡이를 아시죠. 몸을 낮게 웅크려 닭이나 쥐를 노리면서 높고 낮은 데를 가리지 않고 이리저리 뛰다가 덫이나 그물에 걸려 죽지요. 그런데, 큰 검은 소는 하늘에 드리워진 구름처럼 커서 큰일은 해도 쥐는 잡지 못합니다. 선생은 큰 나무를 가지고 있으면서 그것이 쓸모가 없는 것을 걱정하시는데, 어째서 아무것도 없는 들판에 심어 놓고 그 곁에서 마음 내키는 대로 한가롭게 쉬면서, 그 그늘 아래에 누워 유유자적 해보지 않소. 도끼에 찍히는 일도 누가 해를 끼칠 일도 없을 것이오. 쓸모없다고 해서 어찌 괴로워한단 말이오.'" 얼핏 읽으면 쓸모없게 사는 것이 차라리 해를 입지도 않고 오래 갈 뿐만 아니라 여유롭고 유유자적한 삶을 누릴 수 있다는 정도의 의미로 보이기도 한다. 그냥 편하게 오래 사는 것이 최고라는 낭만적 태도로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여기에는 더 실제적인 의미가 담겨 있다. 장자가 말할 때, 유유자적하고 장수를 누린다고 하는 것은 최고 단계의 성취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쓸모없음을 비판할 때 '먹줄을 치지 못하고' '자를 갖다 대지 못한다.'고 표현한다. 먹줄은 나무를 재단하기 위해 선을 긋는 데 사용하고, 자는 길이를 정확하게 재는 데에 사용한다. 재단하고 길이를 재기 위해서는 이 먹줄과 자를 피할 수 없다. 만드는 모든 과정을 지배하는 기준이다. 만들어지는 어떤 것도 이 먹줄과 자의 지배력 아래서 생산된다. 먹줄과 자는 지배적인 능력을 가지고 군림한다.문제는 세상이 먹줄과 자처럼 정해진 기준을 따르는 것만으로는 과거를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이다. 결국 과거를 벗어나 새로운 현재를 만들고 또 거기서 미래를 지향하는 영속적인 발전을 하지 못할 수 있다. 기준은 그대로지만 세상은 변한다. 변화는 항상 먹줄과 자의 범위를 벗어난다. 먹줄이나 자가 변화를 일사불란하게 통제하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변화에 따라 오히려 먹줄과 자의 쓰임새가 달라져야 한다. 변화에 맞춰 먹줄이나 자의 쓰임새가 습관적 사용법을 벗어나야 한다면, 아직 먹줄이나 자의 접근로가 개발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그것은 분명히 쓸모없는 것이라는 평가에 직면하지 않을 수 없다. 시간적으로 아직 펼쳐지지 않은 것을 쓸모없는 것으로 볼 수도 있지만, 시선의 높이나 역할의 대소에 따라 수준이 아직 안 되는 것이 자신의 수준을 넘어서는 것으로 또 필요 없는 것으로 볼 수도 있다. 다음의 얘기가 바로 그러한 내용을 말하고 있다. 『장자』의 「인간세」편에 나오는 대목이다. "장석이 제나라로 가다가 곡원이라는 곳에 당도하여 토지신을 모시는 상수리나무의 사당을 보았다. 얼마나 큰지 수천마리의 소를 가릴 정도이며, 굵기는 백 아름이나 되고, 높이는 산을 내려다볼 정도이며, 여든 자쯤 되는 데서 가지가 나와 있었다. 그 가지도 배를 만들 수 있을 정도의 것이 수십 개나 되었다. 그 나무 둘레에 구경꾼이 장터처럼 모여 있으나 장석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그냥 지나쳐 버렸다. 제자가 나무를 지켜보다가 장석에게 달려와 물었다. '저는 도끼를 잡고 선생님을 따라다니게 된 뒤로 이처럼 훌륭한 재목은 아직 본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선생님께선 거들떠보지도 않고 지나쳐버리시니 어찌 된 일입니까?' 장석이 대답했다. '그런 소리 말게. 그것은 쓸모없는 나무야. 배를 만들면 가라앉고, 널을 짜면 금방 썩으며, 기물을 만들면 곧 망가지고, 문을 만들면 진이 흐르며, 기둥을 만들면 좀이 생기지. 그러니 저건 재목이 못되는 나무야. 아무 쓸모없으니까. 저처럼 오래 살 수 있었지.' 장석이 집에 돌아왔는데, 상수리나무 사당의 나무가 꿈에 나타났다. '너는 나를 무엇에다 비교하려느냐. 너는 나를 쓸모 있는 나무에 비교하려는 거냐. 대체 아가위, 배, 귤, 유자 따위 열매들은 익으면 잡아 뜯기고, 뜯기면 가지가 부러진다. 큰 가지는 꺾이고 작은 가지는 잡아당겨 찢긴다. 이는 그 초목이 맛있는 열매를 맺기 때문에 제 삶이 괴롭혀 지는 것이다. 그래서 천명을 다하지 못하고 도중에 죽게 된다. 즉 스스로 세속의 타격을 받은 자이다. 세상의 사물이란 다 이와 같다. 또한 나는 쓸모 있는 데가 없기를 오랫동안 바라왔다. 그동안 여러 차례 죽을 뻔 했으나 오늘 자네가 쓸모없다고 했기 때문에 비로소 뜻을 이룬 셈이다. 쓸모없음이 내 큰 쓸모가 되었다. 가령 내가 쓸모가 있었다면 어찌 이토록 커질 수 있었겠는가.'"쓸모없음으로 큰 쓸모를 완성하는 기묘한 방식을 말해준다. 배, 귤, 유자 등은 특정한 맛을 잘 내서 매우 쓸모 있는 것으로 환영받는 과일들이다. 이런 특정한 능력, 즉 기능에 갇힌 단계에서 보면 상수리나무는 그야말로 아무 쓸모가 없어 보인다. 그러나 이 상수리나무는 천명(天命)을 실현한다. 즉 우주의 질서를 구현하거나, 시대의 소명을 구현하는 정도다. 너구리나 살쾡이는 닭이나 쥐를 잡는 기능으로 매우 의기양양 하지만, 소는 하늘을 드리우는 구름같이 거대한 일을 한다. 너구리나 살쾡이의 시각에서 보면, 큰 소는 그저 덩치만 클 뿐 아무 쓸모가 없다. 닭이나 쥐를 잡아서 배불리 먹기만 하면 충분한데, 하늘에 구름을 드리우는 큰 일 같은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하고 보는 것이다.기능에 빠져 사는 것에 익숙해지면, 기능을 넘어서 있으면서 기능을 지배하는 더 높은 단계의 비전이나 꿈을 그냥 장식처럼 다루거나 심지어는 불필요한 것으로 여긴다. 성적을 특히 중시하는 교육에서는 성적만 좋으면 된다. 운동을 안 해도 되고, 심부름을 안 해도 되고, 부모가 모든 것을 대신 해줘도 되고, 봉사를 하지 않아도 된다. 학업 내용과 관련 없는 독서는 안 해도 되는 것이 아니라 할 필요가 없는 것으로 치부된다. 성적이라는 기능적 성취만 중요하지 상위의 지배력 있는 가치는 쓸모없을 뿐이다. 성적을 높여서 대학에 가기만 하면 되지, 꿈같은 것을 꿔서는 오히려 안 된다. 그러나 꿈이 없이 닦은 기능적 학업은 한계가 분명하다. 쓸모 있음에 갇혀서 쓸모없음을 지향하는 동력을 상실하면 새로운 도전이나 높은 상승이라는 것은 불가능하다. 나는 꿈을 가진 사람이 꿈 없이 기능만 행사하는 사람보다 훨씬 더 큰 성취를 이루는 것을 많이 봐왔다. 사실 지적 성장이라는 것도 근본적으로는 아직 쓸모없어 보이는 것을 향한 부단한 도전에 다름 없다. 쓸모 있음에 갇혀 있으니 이미 있는 것을 다루는 '대답'만 할 줄 알고, 쓸모없는 것으로 넘어가려는 '질문'이 없는 것이다. 대한민국은 따라 하기라는 기능적 활동을 잘해서 발전하였다. 쓸모 있는 것을 잘 수행해 온 것이다. 그래서 모두들 목표를 세워 추구할 줄은 잘 알지만, 목적을 추구하는 훈련은 되어 있지 않다. 방송국은 시청률만 추구하다가 방송의 본질을 세우지 못하고, 고등학교는 대입 진학률만을 따지다가 교육의 본질을 놓치며, 대학은 취업률에 갇혀서 대학으로서의 본질을 포기한다. 방송국에는 시청률 너머에 방송국으로서의 목적이 있을 것이고, 고등학교에는 진학률 너머에 고등학교로서의 목적이 있으며, 대학에는 취업률 이상의 목적이 있을 것임에도 지금은 모두 시청률이나 진학률이나 취업률과 같은 기능적인 목표에만 빠져있다. 작은 쓸모에 빠져 쓸모없게 보이는 큰 쓸모를 놓친 형국이다. 우리 모두가 지금 이렇지 않은가?우리는 쓸모 있는 것을 이루는 것으로는 가장 잘한 민족이다. 이제 쓸모없음을 향하는 도전의 길이 남았다. 목표 수행 능력은 아주 높다. 이제 목적을 세워보는 것이다. 쓸모없음으로 쓸모 있음에게 길을 내줘야 한다. 기업도 쓸모 있는 인재만을 구하는 일을 넘어서서 쓸모없음을 향할 줄 알아야 한다. 깨달은 자는 쓸모 있음과 쓸모없음 사이에서 왕복 운동 한다./최진석 서강대 철학과 명예교수·건명원 원장송필용作 '무제' /광주일보 제공

2018-08-06 최진석

[최진석의 노장적(老莊的) 생각·18]적후지공(積厚之功)과 자유

성철 스님의 책 보지 말라는 말부단한 책 읽기 없이 실천한다면지적인 게으름에 지나지 않아착실한 보폭이 결여된 경지란항상 우연에 기댈 수밖에 없어생계에 대한 책임 없이혁명을 꿈꾸는 것과 같아대붕은 조그맣던 물고기가엄청난 축적을 거치고 커진 영물적후지공 의식하지 않은 채대붕의 자유만 흉내 낸다면다 방종에 가까울 뿐이다손맛과 경험에만 기대서 만든비빔밥은 매력 갖기 어려워6월21일자 어느 신문 인터넷 판에 다음과 같은 기사가 실렸다. 마크롱 대통령은 18일(현지시간) 파리 외곽 몽 발레리앙 추모공원에서 열린 샤를 드골의 대독 항전 연설 78주년 기념식에 참석했다. 이날 마크롱 대통령은 행사장 앞에 모여 있던 청소년들을 발견하고는 반갑게 인사를 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한 10대 남학생이 자신의 차례를 기다리면서 "잘 지내요? 마뉘?"라며 마크롱의 이름(에마뉘엘)을 제멋대로 줄여 불렀다. 이 남학생은 노동해방을 노래한 혁명가요 '랭테르나시오날'(C'est la lutte finale)의 후렴구도 흥얼거렸다. 별다른 악의는 없는 표정이었지만 약간은 빈정거리는 듯한 인상을 풍겼다. 이때 마크롱 대통령은 소년과 악수를 한 뒤 곧바로 "아니야 아니야"라고 고개를 저으며 "오늘 공식적인 행사에 왔으면 거기에 맞게 행동해야지"라며 훈계를 시작했다. 그는 "오늘은 '라 마르세예즈'(프랑스 국가), '샹 데 파르티잔'(레지스탕스의 투쟁가)을 부르는 날이야. 그러면 나를 '므슈'(성인남성에게 붙이는 경칭)나 '므슈 르 프레지당'(대통령님)으로 불러야 한다. 알겠니?"라고 설명했다. 이 남학생은 바로 주눅이 들어 "죄송합니다. 대통령님"이라고 말했다. 이에 마크롱 대통령은 "아주 좋아!"라고 칭찬했다. 그러면서 "절도 있게 행동해야 해. 네가 만약 언젠가 혁명을 하고 싶다면 먼저 학교를 마치고 스스로 생계를 책임질 줄도 알아야 해"라며 팔목을 툭툭 치면서 충고했다. 저항감 있는 젊은이에게 호응하며 공감해주는 대통령도 멋있지만, 이렇게 훈계하는 대통령도 멋있다. 마크롱은 젊은이의 '혁명'을 부정하지 않았다. '혁명'을 잘하기 위한 방법을 말해주는 방식으로 훈계의 격을 지켰을 뿐이다. '절도 있는 행동'과 '졸업' 그리고 '생계에 대한 책임'이 '혁명'의 성공을 결정한다고 말해주었다.'혁명'은 이름 붙은 세계의 경직성을 부수고 아직 이름 붙지 않은 세계를 펼치려는 도전이라는 점에서 이미 충분히 아름답다. 혁명은 '질서'를 일거에 '야만'으로 몰아넣으며, '환상'을 현실화 하려고 시도한다. 모든 종교도 다 근본정신은 혁명이다. 그래서 혁명과 종교의 염원은 모두 다음과 같다. "이 세계는 너무 낡았어요. 이제 낡은 이 세계를 버리고 저 세계로 넘어가야 해요. 그래야 사는 것처럼 살다갈 수 있어요." '저 세계'는 주장하는 자 외에는 아직 아무도 모른다. 저 세계를 설명하는 문법은 아직 없다. 공허하게 시작된 이 외침을 깃발로 흔들며 사람들을 설득해서 모은 것이 종교들이다. 종교의 근본정신은 '혁명'이다. 종교에서 혁명이라는 근본정신이 사라지고, 조직 관리에 더 많은 힘을 들이고 있다면 이미 많이 낡았다는 뜻이다. 혁명을 조금 낮추고 순화해서 흔히들 '혁신'이라고 한다. 세계가 변화한다는 것을 진실로 받아들인다면 혁신은 생명 혹은 세계의 존재 방식이다. 생존하려면 혁신해야 한다. 혁신을 다른 형태로 표현하면 창의다. 이렇게 보면, 창의도 생명의 존재 방식들 가운데 중심 자리를 차지한다. 창의니 혁신이니 하는 것들은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선택 사항이 아니라 참 생명이나 참 존재로 살고 싶다면 반드시 해야만 하는 필수 사항이다.혁명은 아무리 환상이고 야만이어도 '절도 있는 행동', '학업' 그리고 '생계에 대한 책임'과 함께 할 때라야 효율적으로 완수될 수 있다. 혁명의 주체들은 왕왕 혁명적 환상과 야만에 빠져, 혁명의 길과 관계없어 보이지만 매우 중요한 '착실한 보폭'을 중시하지 않는다. '착실한 보폭'이 나라에서는 '정책'으로 현실화된다. 혁명이 정치로만 남고 정책으로 열매를 맺지 못하는 일들은 '착실한 보폭'을 소홀히 한 결과다. 그럼 왜 '착실한 보폭'은 소홀히 다뤄질까? 지적으로 게을러서 걸어야 할 길이 지루하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 과정을 건너 뛰어 바로 혁명의 경지로 올라서려고만 한다.성철 스님은 지독한 독서광이었다. 하지만 수자오계(修者五戒) 즉 '수행자를 위한 다섯 가지 가르침'에서는 '책보지 말라'는 가르침을 남겼다. 평소 수행하는 제자들에게도 '진리는 문장 아닌 마음에 있다'는 것을 자주 강조하였다. 높은 단계의 경지에 오르려는 포부는 가졌으되 근기가 그 포부의 무게를 감당할 정도로 갖춰지지 못한 사람이 성철 스님의 이 말을 듣는다면, 바로 책읽기를 끊을 수 있다. 그것이 훨씬 간편하게 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책 읽지 말라'는 이 말이 독서광으로 불릴 정도로 수많은 책을 읽고 난 다음에 '문장과 마음'의 관계를 깨달은 사람으로부터 나왔다는 사실이다.부단한 책읽기의 과정도 거치지 않았으면서 바로 책 끊기의 경지에 오르려 하다가는 인생에서 큰 낭패를 볼 것이다. 어떤 큰 스님은 깨달음에 이르고 나서 계율을 넘나들 수 있었다. 이것을 본 새끼 스님도 덩달아 계율을 넘나든다. 계율을 넘나든 것은 같으나 그 높이와 깊이는 다르다. 높이와 깊이가 다르면 감화력이 다르다. 새끼스님도 큰 스님이 아주 긴 시간동안 수계(受戒)의 고통과 지난함을 정성껏 거치고 나서 높은 위치에 오른 후에야 수계(受戒)의 한 형식으로서 계율을 넘나든다는 것을 안다. 하지만 새끼 스님은 그 고통과 지난함을 피하고자 계율을 넘나드는 행위만 따라서 한다. 지적인 게으름이다. '착실한 보폭'이 없는 깨달음은 늘 경박하게 쪼그라든다. 한 때 음식 한류를 일으키고자 노력들 했다. 그러나 녹록치 않다. 일본의 스시가 국제적으로 가지고 있는 위상에 비하면 아직 한참 부족하다. 스시와 비빔밥은 왜 이리 차이가 날까? 한국과 일본이 가지고 있는 국제적 위상이나 이미지의 차이가 이유일 수도 있다. 전략의 경험과 치밀함의 차이가 이유일 수도 있다. 그러나 느닷없지만 이런 이유가 있을 수도 있겠다. 바로 제품 자체의 문제다. 철저함이 부족하여 제품 자체에 매력이 더해지지 않은 것도 이유일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 계기가 있다. 내 고향은 비빔밥으로 제법 유명한 동네다. 늦은 시간 고향에 도착하자 내가 다니는 단골 비빔밥 집이 벌써 문을 닫았다. 나는 새로 문을 연 것처럼 보이는 다른 집으로 발길을 돌렸다. 거기도 비빔밥이 있었다. 주문한 비빔밥을 비비면서 나는 매우 난감한 상황에 빠졌다. 밥이 너무 뭉쳐져 있어 잘 비벼지지가 않았다. 숟가락으로 잘게 부숴가며 비볐다. 비비기 어려운 비빔밥이라니… 그러고 보니 비빔밥을 먹다가 이런 일을 가끔 당했던 것 같다. 물론 이 상황은 드믄 경우다. 내가 어쩌다 들른 어느 초라한 집에서 겪은 경험을 가지고 비빔밥을 다 말해서는 안 된다는 것도 안다. 하지만 나는 이런 난감한 상황을 겪으며 비빔밥을 되돌아보는 시간을 갖기는 했다. 비빔밥에 가장 적합한 쌀 품종은 무엇일까? 비빔밥에 최적화된 밥의 점도는 어느 정도여야 할까? 밥의 온도는? 나물의 온도는? 최적화된 나물의 삶기는? 밥과 나물의 비율은? 그릇의 온도는? 비빔밥에 잘 맞는 그릇의 재료는? 집에 와서 인터넷을 뒤져 비빔밥에 관한 정보를 아무리 뒤져도 이런 의문은 해소될 길이 없었다. 내가 찾지 못했을 수도 있지만, 어느 것 하나 표준화된 연구는 보이지 않았다. 그 후로 약 한 달 뒤 어느 스시 집을 가는 일이 생겼다. 나는 일부러 요리사와 마주 앉을 수 있는 자리를 잡았다. 식사하면서 몇 가지를 물었다. 비빔밥을 먹다가 생긴 의문들을 스시로 바꿔 죄다 물어봤다. 그 요리사는 모두 말해줬다. 스시에 적합한 쌀 품종들이나 밥의 온도나 밥의 점도 등을 막힘없이 대답했다. 구체적인 수치들은 기억나지 않지만 대개는 어느 것에나 표준화된 규격을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사실 개성이나 경지도 다 이 표준화된 규격을 수행한 다음의 일이어야 제대로다.세심하게 살피면 쩨쩨하게 보일 수 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나를 쩨쩨하다고 힐난할 수 있다. 한국 음식은 손맛이 최고라거나 경험에서 우러난 자신만의 경지가 있다고 말하기도 할 것이다. 이것이 한국 문화의 특징이라고 말 할 수도 있다. 온도계를 갖다 대거나 자를 들이미는 것은 하수들이나 하는 일들이고, 진짜 고수는 어림짐작으로 해도 다 최고의 경지를 산출할 수 있다고도 할 것이다. 손맛이라고 하면서도 우리는 손맛의 비밀을 궁구하지 않고 그냥 말한다. 손맛을 말하려면 손맛이 연구되어야 한다. 그러지 않았다면 사실 대충한다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다. '착실한 보폭'이 결여된 경지란 항상 우연에 기댈 수밖에 없다. 마치 '절도 있는 행동'과 '졸업' 그리고 '생계에 대한 책임'을 배우지 않고 '혁명'을 꿈꾸는 것과 같다. 지난한 수계의 고통을 겪지 않은 채, 계율을 넘나드려는 것과 같다. 착실한 보폭만이 일관성과 지속성을 보장한다. 어떤 경지도 일관성과 지속성이 결여된 것은 운이 좋은 것에 불과하다. 품질이 들쭉날쭉 할 수밖에 없다. 어떤 개성도 '착실한 보폭'을 걸은 다음의 것이 아니면 허망하다. 허망하면 설득력이 없고 높은 차원에서 매력을 가질 수가 없다. 그러면 많은 일을 그냥 '감'에 맡겨 해버린다. 스시 정도의 위상을 갖고 싶으면서도 스시 정도의 연구 과정을 거치지 않는다면 결과는 허망하다. '착실한 보폭'이 없는 높은 경지란 없다. 도가 철학을 좀 아는 사람들은 '무위'를 아무것도 하지 않거나 무슨 일이건 그냥 되어가는 대로 내버려두는 것으로 이해하고는 '착실한 보폭'을 하수의 것으로 치부해버린다. 지적인 게으름이다. 우선 『장자』 첫 페이지를 보라. 곤(鯤)이라고 하는 조그만 물고기가 천지(天池)라고 하는 우주의 바다에서 몇 천리나 되는지 알 수 없는 크기로 자라나자 어느 날 바다가 흔들리는 기운을 타고 하늘로 튀어 올라 붕(鵬)이 되었다. 『장자』에 나오는 대부분의 얘기는 다 이 대붕의 경지다. 그래서 도가 철학에 우호적인 감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대붕의 모습만 인정하고 따르려 한다. 그러나 반드시 간과하면 안 되는 것이 있다. 대붕은 조그맣던 곤이 엄청난 축적의 과정을 겪은 후, 몇 천리나 되는지도 모를 정도로 커지고 나서 된 영물(靈物)이라는 것이다. 매우 두터운 축적의 과정이 영물을 만들었다. 두터운 축적의 공, 즉 적후지공(積厚之功)을 의식하지 않은 채, 대붕의 '자유'나 '소요유'를 흉내 낸다면 다 방종에 가까울 뿐이다. 우리는 흔히 근대를 제대로 겪지 않았다고 한다. 식민지를 겪은 일과 관련이 깊을 것이다. 하지만 외세의 억압과 관계없이 우리 스스로 근대를 학습하여 해낼 수 있는 것들도 있다. 근대를 특징짓는 몇 가지 내용이 있는데, 대표적으로 표준화와 객관화다. 근대란 인류가 진화를 해나가면서 만든 매우 빛나는 한 고리다. 표준화를 해내지도 못했으면서 하는 표준화에 대한 현대적 비난은 다 경솔하다. 결과는 허망할 것이다. 객관화 과정을 바닥까지 겪지 않고 객관화를 비판하는 것도 경솔하다. 결과는 비참할 것이다. 손맛과 경험에만 기대서 만든 비빔밥은 매력을 갖기 어렵다. 더 철저해져야 한다. 두터운 축적이 없는 창의성도 있기 어렵다. 야성을 유지하면서 하는 축적! 철저함! 당신을 영물로 만들어주는 비결이다./최진석 서강대 철학과 명예교수·건명원 원장·섬진강 인문학교 교장송필용作 '적후지공' /광주일보 제공

2018-07-02 최진석

[최진석의 노장적(老莊的) 생각·17]철학의 시선과 야성

세계를 이해·관리하기 위해 만든고효율의 장치가 '철학'역사에 대한 헌신·책임 거쳐 탄생우리는 수입했기에 '추상적' 간주도전보다 누구 누구처럼 살려해스스로 문제 해결 '야성' 잃고남이 정해준 정답찾아 실현 집착결국 타인의 이론에 '종' 돼버려지켜야할 것 많고 선악 기준 중시노자 "적은 규제가 오히려 효과적" 윤리도 스스로 힘으로 지배해야짐승처럼 덤비면 되레 '큰 인간'돼과거 잡히지 않고 미래 열기 위해마음속에 '야수'를 키우자'탁월한 사유의 시선'을 출간하고 나서 나온 몇 가지 반응들이 나를 상념에 들게 한다. 철학자가 이제 중진국을 넘어 선진국으로 올라가자고 하는 말을 불편하게 생각하는 것도 그 가운데 하나다. 철학은 인간이 세계를 이해하고 관리하고 통제하기 위해서 만든 매우 고효율의 장치다. 철학과 비슷한 높이에 수학이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그동안 철학을 추상적 이론으로만 간주해왔다. 철학을 생산한 것이 아니라 수입하였기 때문이다. 철학이 생산되는 바로 그 순간은 육체적이고 역사적이다. 거기에는 피 냄새, 땀 냄새, 아귀다툼의 찢어지는 음성들, 긴박한 포옹들, 망연자실한 눈빛들, 바람소리, 대포소리가 다 들어있다. 망연자실한 눈빛들 속에서 쓸쓸하지만 강인한 눈빛을 운명처럼 타고난 한 사람이 역사를 책임지려 앞으로 튀어나가면서 인간으로서 발휘할 수 있는 가장 높은 단계의 시선을 화살처럼 써서 철학 이론이 태어난다. 이처럼 철학 생산과정에는 역사에 대한 치열한 책임성과 헌신이 들어 있다. 우리가 배우는 플라톤, 데카르트, 칼 맑스, 니체, 공자, 노자, 고봉 기대승, 다산 정약용이 다 이랬다. 철학 수입자들에게는 애초부터 육체적이고 역사적인 울퉁불퉁함이 지적 사유 대상이 되기 어렵다. 그런 울퉁불퉁함은 특수하다. 공간과 시간에 갇혀 개별적 구체성으로만 있다. 이런 개별적 구체성에서 잡다하고 번잡한 것들이 모두 제거되고 나서 보편 승화의 절차를 거친 다음에 창백하고 추상적인 이론으로 겨우 남는 것이다. 당연히 철학 수입자들은 창백한 이론을 진실이라고 하지, 울퉁불퉁한 역사와 육체를 진실이라고 하기 어렵다. 그들은 사유를 사유하려 들지 세계를 사유하려 들지 않는다. 이와 달리 철학 생산자들은 직접 세계를 사유한다. 사유를 사유하지 않는다. 철학을 한다는 것은 자신이 서 있는 곳에서 구체적으로 울퉁불퉁한 것을 보편으로 승화하는 일이지, 다른 데서 생산된 창백한 보편을 가져와 그것으로 자신의 울퉁불퉁함을 재단하는 일이 아니다.울퉁불퉁함이라 선진국 시민으로 사느냐 후진국 국민으로 사느냐, 독립적으로 사느냐 종속적으로 사느냐, 전략적으로 사느냐 전술적으로 사느냐, 주인으로 사느냐 노예로 사느냐, 영혼의 높이에서 사느냐 그 아래서 사느냐하는 문제들이 다양한 굴곡을 그린 것이다. 수입된 창백한 이론을 내면화하거나 자세히 따지는 것을 철학 활동으로 알고 있는 사람에게는 선진국이니 독립이니, 주인이니 종이니 하는 것은 철학이기 어렵다. 그들에게는 이데아니, 정신이니, 물질이니, 초인이니, 도(道)니, 기(氣)니, 인(仁)이니 하는 것들만 철학이다. 그러다보니 이 땅에서도 주자학을 닮은 것만 철학이라 하고, 동학 같은 자생적 고뇌는 철학으로 치지도 않는 자기 비하가 오히려 당당해지는 지경이다. 자신의 삶을 철학적으로 다루지 않고, 기성의 철학 이론으로 삶을 채우려고만 한다. 그래서 자기 삶을 철학적으로 살려는 도전보다는 천년이 두 번 이상이나 지난 지금도 공자나 노자처럼 살려 하고, 플라톤이나 니체를 살려내려 한다. 자기도 버리고, 자신의 역사도 버린다. 자기를 플라톤화, 맑스화, 공자화, 노자화 하려 하지, 플라톤 등을 자기화 하지 못한다. 이런 사람들은 자신의 구체적인 삶의 현장을 철학화 하지 못하고, 정해진 철학을 이념화해서 그것으로 자신의 삶을 지배하고 평가한다. 쉽게 이념이나 신념에 빠진다. 스스로 문제를 발견해서 해결하려는 야성을 잃고, 남이 정해준 정답을 찾아 얌전히 실현하려고만 한다. 결국 세련되고 정밀한 이론이 그들의 구세주다. 아직 거칠고 정리 안 된 자신의 현실은 깎여야 할 미숙한 어떤 것일 뿐이다. 세련되고 정밀한 이론은 그들을 매혹시킨다. 그래서 절절한 마음으로 기꺼이 그것의 충실한 종이 된다.종은 지켜야 할 것이 많다. 지켜야 할 그것은 자신이 만들지도 않았다. 자신이 만들지 않은 기준으로 자신의 삶을 인도하는 모순적 상황은 내면의 불균형을 가져온다. 그 분열적 상황을 이겨내는 방법이 있다. 선명성과 불타협의 철저함을 발휘하여 마치 주인인 것처럼 자기기만을 해낸다. 목에 힘줄을 세우고, 눈에 핏발을 감추지 않으며, 팔뚝을 휘젓고 목소리를 높인다. 타협이 없는 선명성을 내세워 진실한 주체로 드러나려 하지만, 아무리해도 자신이 얼마나 충성스런 종인가 만을 드러낼 뿐이다. 이는 눈 어두운 사람들끼리는 알 수 없다. 눈 밝은 사람은 안다.기준을 신념처럼 가진 사람은 이 세상을 모두 참과 거짓이나 선과 악으로 따지기 좋아한다. 그런 사람에게는 세상이 기준에 맞느냐 맞지 않느냐가 중요하다. 기준에 맞으면 선이고 맞지 않으면 악이다. 기준에 맞으면 참이고, 맞지 않으면 거짓이다. 기준을 만들거나 기준을 지키는 일을 당연시 하고 중요하게 다룬다. 무엇이나 기준을 만들어 윤리적 접근을 하려 한다. 윤리적 행위에 익숙해지면 열심히 규제를 만든다. 세계가 새로운 유형의 산업으로 재편되는 데에도 온 나라가 규제로 가득차서 움직이질 못한다. 새로운 세계를 구시대의 규제로 다루고 있다. 바보짓을 하면서도 워낙 확신에 차 있기 때문에 윤리적 부담은 전혀 없다. 4차 산업혁명을 다루는 일에서도 비중 있게 다뤄지는 것 가운데 하나가 윤리 문제다. 인공지능 때문에 야기되는 직업의 상실 문제도 윤리 문제 가운데 하나다. 인공지능을 윤리적으로 어떻게 대할 것인가, 인공 지능을 가진 로봇에 대해서 인간은 어떤 윤리적 태도를 가져야 하는가 하는 점들이다. 선악의 문제를 다뤄야 진실하게 사는 느낌을 갖도록 훈련받았기 때문에, 당장은 해당 사건의 주도권도 갖고 있지 못하면서 윤리 문제에 초점을 맞춘다. 자기 착각이거나 자기 착시다. 우리는 아직 인공지능의 주도권을 갖지 못했다. 로봇도 그렇다. 그것들을 윤리적으로 다룰 수준에 아직 도달해 있지 않다. 구체적인 현장이 펼쳐지고 나서 윤리가 있다. 주도권을 가진 선진국에서는 다 그렇다. 거친 야성이 먼저 있고 나서야 순하고 질서 잡힌 행위가 요청된다. 드론 시장을 윤리(규제)가 필요할 정도로 키워놓지도 못한 상황에서 그것을 윤리적(규제적)으로 다루다가 드론 시장에서 주도권을 상실했다. 윤리적 주도권보다 시장의 주도권이 더 세고 중요하다. 윤리는 시장 성숙 다음의 일이다. 이 말이 나쁜 말로 들리면, 전략적이거나 선도적인 높이를 아직 모르거나 거기에 서본 경험이 없어서다. 선한 규제가 악을 생산한다. 이런 맥락에서 노자도 지켜야 할 것이 적어야 한다고 말했다. "하늘의 그물은 구멍이 촘촘하지 못해 엉성하지만 오히려 빠져나가지 못한다."(天網恢恢 疏而不漏) 적은 규제가 오히려 제대로 된 효과를 낸다는 말이다. 『장자』 「변무」편에 나오는 대목 하나. "곡선이나 동그라미를 그리는 그림쇠, 직선을 긋는 먹줄, 네모꼴을 만드는 곱자를 들이대면 본래의 활동성이 손상된다. 밧줄이나 갖풀이나 옻칠로 세상을 꼭 묶거나 고정시키면 세상이 제대로 전개되지 못한다." 여기서 그림쇠, 먹줄, 곱자, 밧줄, 갖풀, 옻칠은 모두 윤리적 신념이나 규제들이다.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신념을 세상에 선제적으로 부가하는 한, 세상의 효율성은 극도로 약화된다는 뜻이다.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잣대를 먼저 가져다 대면 세상 전개가 위축된다. 게다가 윤리 관념이라는 것이 상대에 따라 유동적으로 쓰인다. 칼을 의사가 잡으면 생명을 살리고 폭력배가 잡으면 생명을 상하게 하는 예는 너무 단순하다. 윤리 도덕은 선과 악을 임시적으로 나눌 뿐이다. 여기서 정의가 저기서는 불의다. 국민을 위한다는 명분으로 행하는 선이 결국은 해가되기도 한다. 어디선가 강의를 하고 나니 주최자가 청중들에게 내 강의 내용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나는 선진과 창의와 독립과 모험심 등등을 연결하는 강의를 했다. 주최자는 선진이라는 말이 거슬린듯했다. "교수님께서 말씀하신 선진은 경제적이고 군사적인 의미에서가 아니라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의미에서의 선진일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꼭 선진국이 될 필요가 있는지 생각해봐야 합니다. 후진국이 차라리 더 가치 있고 행복할 수 있습니다." 경제와 군사와 윤리와 도덕은 한 몸이다. 윤리적 기준이나 이념을 가지고 윤리 영역 밖에 자리한 것으로 보이는 것들을 적대적으로 대하는 한, 스스로 세상을 좁히는 결과를 가져온다. 『장자』 「거협」편에는 이런 얘기도 나온다. "도둑질에도 윤리가 있다. 방안에 무엇이 있는지 잘 알아맞히면 성스럽고, 앞서서 선두에 서서 침입하면 용기가 있다하고, 나올 때 맨 나중에 나오면 정의롭다 하고, 도둑질에 성공할지 못할지를 아는 것을 지혜롭다 하며, 분배를 공평하게 하면 인간답다고 한다." 윤리 도덕을 매개로 해서 성인과 도둑은 분리되는 것이 아니라 교차될 뿐이다. 선과 악도 분리되지 않고 교차된다. 장자의 얘기는 다음처럼 이어진다. "성인이 생기면 큰 도둑도 따라 생긴다. …성인이 죽으면 큰 도둑이 일어나지 못하게 되고, 천하가 평화롭고 무사하다. 성인이 죽지 않으면 큰 도둑이 없어지지 않는다. 비록 성인을 존중하고 천하를 다스린다 해도 결국 그것은 도둑의 우두머리인 도척 같은 인간을 존중하고 이롭게 하는 꼴이다." 성인은 윤리 도덕의 집행자고 사회를 효율적으로 만드는 주인공이다. 도척은 윤리 도덕의 파괴자로서 사회를 비효율로 몰고 가는 주범이다. 이것이 일반적인 인식이다. 장자는 좀 달리 말한다. 윤리 도덕의 내용을 담고 있는 규제가 많고 조밀할수록 선한 기풍과 효율이 커질 것 같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오히려 정반대다. 세상에 대하여 윤리적으로 접근하는 것이 습관이 되면 넓디넓은 이 세상에서 얼마나 좁고 비효율적으로 헤매게 되는지를 알아야 한다. 윤리 강령이나 윤리적 접근 습관에 깊이 빠질 일이 아니다. 윤리도 스스로의 힘으로 지배해야 한다. 윤리를 지배할 정도로 함량을 키우는 일이 시급하다. 당연히 짐승처럼 과감하게 덤비는 것이 윤리적 인간이 되는 것보다 훨씬 실속 있다. 짐승처럼 덤비면 짐승이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큰 인간이 된다. 너무 인간적이면 자잘한 인간으로 남는다. 과거에 잡히지 않고 미래를 활짝 열기 위해 마음속에 야수를 한 마리 키우자./최진석 서강대 철학과 명예교수·건명원 원장·섬진강 인문학교 교장송필용作 '시선과 야성' /광주일보 제공

2018-05-28 최진석

[최진석의 노장적(老莊的) 생각·16]윤편의 손

글과 말로는 '진실'에 접근 못해'창의성'과 '포용'의 진실은단어나 말 너머에 감춰져 있다보이지도 않고 들리지도 않는다그래서 신비하고 비밀스럽다인간이 인간으로 완성되고더 높이 승화되는 길은이 신비에 접촉해야 가능하다바퀴 깎을 때 너무 깎으면 헐겁고덜 깎으면 빡빡해 안 들어가헐겁지도 빡빡하지도 않게 하는그것은 손에서 이루어지고거기에 마음이 응하는 것입으로 말해질 수 있는 게 아냐윤편의 '손'은 전달되지 못한다내 손, 내 손에 집중하라교육은 어디까지 가능할까? 나는 무엇을 가르칠 수 있을까? 내 직업이 내게 끊임없이 들이밀던 송곳이다. 창의성에 대한 수없이 많은 주장들과 방법들을 물고 늘어져 탐색한 후에 '교육'으로 포장하여 전달하고자 한다. 제대로 되었다면, 창의성을 발휘하는 사람들이 등장해야 한다. 그러나 그런 경우는 매우 희박하다. 우리나라에서 그렇게 다양하게 교육을 하고 있지만, 현실적으로 긴 시간동안 창의성이 발휘되지 않은 것을 보면 안다. '성공하는 사람들의 7가지 습관'이라는 세계적으로 많이 팔린 책이 있다. 그것을 함께 읽고 토론하여 성공하게 된 사람들은 몇 명이나 될까? 그 책 안에는 '자신의 삶을 주도하라'는 제목이 첫 번째로 걸쳐 있다. 이 내용을 읽었다고 자신의 삶을 주도적으로 바꿀 수 있을까? 또 그런 사람이 생겨날까? 공자는 인격을 완성하는 최고의 방법을 말해준다. "자기가 하기 싫은 것은 남에게 시키지 말라." 문제는 이 말을 듣고 실생활에서 정말로 자기가 하기 싫은 일을 남에게 시키지 않게 되는가의 여부인데, 대개는 시험지 답안에만 쓰고 끝난다. 그것을 구체적인 생활로까지 끌고 나가는 사람을 만나기는 쉽지 않다. 포용을 이야기 하면서 포용의 혜택을 입으려고만 하지, 자신을 양보하여 포용의 주도자가 되려 하지는 못한다. 포용에 대해서 아무리 토론하고 가르쳐도 포용이라는 가치 있는 일이 생기지 않는다. 포용 가르치기와 포용하게 하기가 밀접한 관계에 있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 교육이 가능하기나 한가라는 깊은 회의에 빠지기도 한다.포용이나 창의성이나 하는 것에 관하여 수없이 많은 글들이 있다. 논문도 있고 에세이도 있고 철학책도 있고 자기 계발서도 있다. 문제는 이런 '글'들과 '말'로는 '창의성' '바로 그것'이나 '포용' '바로 그것'에 접근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런 고민은 인간으로서의 완성이나 승화를 기대하는 사람들에게는 고래로 가장 큰 고민 가운데 하나였나 보다. 2000년도 훨씬 더 되는 과거의 중국 어느 땅에 장자(莊子)도 이 점을 말하고 있다. "세상 사람들은 책을 소중히 여긴다. 책은 말을 펼쳐 놓은 것에 지나지 않는데, 말은 또 귀하게 여기는 것이 있다. 말이 귀하게 여기는 것은 의미다. 의미는 또 무언가를 가리키는데, 그 의미가 가리키는 것은 말로 전해줄 수가 없다. 그런데도 세상에서는 말을 중요하게 생각하여 책에 담아 소중하게 전한다. 세상이 아무리 소중하게 생각한다고 해도 사실 그렇게 소중하게 생각할 만한 것이 못된다. 세상 사람들이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이 진짜 소중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눈으로 봐서 보이는 것은 형체와 색깔이고, 귀로 들어서 들리는 것은 이름과 음성이다. 슬프도다. 세상 사람들은 그 형체, 색깔, 이름, 음성으로 진실에 도달할 수 있다고 생각하다니. 형체, 색깔, 이름, 음성으로는 진실에 접근할 수가 없다. 그래서 '말하는 자는 알지 못하고, 아는 자는 말로 하지 않는다'고 한 것이다. 그런데 이 세상에서 누가 이 사실을 알기나 하겠는가?" 글이나 말로는 '진실'에 접근하기 어려운 한계가 있다고 말한다. '창의성'의 진실은 '창의성'이라는 단어 너머에 있다. 속에 감춰져 있다고 할 수도 있다. '포용'의 진실은 '포용'이라는 단어나 말 너머에 감춰져 있다. 보이지도 않고 들리지도 않지만, 그것들을 직접 행하게 해 줄 수 있는 동력으로서의 진실은 은폐되어 있다. 그래서 신비하고 비밀스럽다. 인간이 인간으로 완성되고 더 높이 승화되는 길은 바로 이 신비에 접촉하면서만 가능하다. 그 신비스런 비밀에 관하여 장자는 우화 한 토막으로 설명한다."제(齊)나라의 환공(桓公)이 사랑채 쯤 되는 곳의 마루에 앉아 책을 읽고 있었다. 윤편(輪扁)이 그 아래 마당에서 수레바퀴를 만들다가 연장을 내려놓고 올라가 환공에게 물었다. '감히 묻겠습니다. 전하께서 읽으시는 것은 어떤 말들을 엮은 것입니까?' 환공이 대답했다. '성인의 말씀들이지.' 윤편이 그 말을 받아 다시 물었다. '그 성인은 아직 살아 있습니까?' 환공이 답했다. '이미 죽었지.' 윤편이 다시 말했다. '그러면 전하께서 읽고 계신 것은 옛사람의 찌꺼기일 뿐이군요.' 환공이 화가 나 말했다. '내가 책을 읽고 있는데, 바퀴나 깎는 목수 따위가 어찌 시비를 건단 말이냐! 제대로 설명하면 괜찮지만, 설명을 못하면 죽을 줄 알아라.' 윤편이 대답했다. '저는 제가 하는 일로 보건대, 바퀴를 깎을 때 너무 깎으면 헐거워서 튼튼하지 않고, 덜 깎으면 빡빡하여 들어가지 않습니다. 헐겁지도 않고, 빡빡하지도 않게 하는 것은 손에서 이루어지고, 거기에 마음이 응하는 것이지, 입으로 말해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거기에 비결이 있습니다만, 제가 제 자식에게 알려줄 수도 없고, 제 자식 역시도 저로부터 그 비결을 얻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70이라는 이 나이 돼서도 제가 수레바퀴를 깎고 있습니다. 옛 사람도 전해줄 수 없는 바로 그것을 따라 죽어버렸습니다. 그런즉 전하께서 읽고 계시는 것이 옛 사람의 찌꺼기일 뿐인 것입니다.'" 진실은 '전해줄 수 없는 것' 바로 거기에 있다.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는 거기서 모든 색깔과 음성이 출현한다. 색깔과 음성 너머의 바로 그곳을 각자의 내면에 현현(顯現)되도록 할 수 있는 장치를 가질 수 있다면, 어떤 경우에라도 적절하게 반응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만 현현되면 마치 비밀의 방 열쇠를 손에 넣은 사람처럼 강해진다. 그렇지 않으면 '전해줄 수 없는 것'을 가진 사람의 밑에서, 그 사람이 적절한 태도로 남긴 결과들을 받아먹고 그것들을 숙지하려 노력하면서 살 수밖에 없다. 바로 자유가 아니라 종속이다. 그 '전해줄 수 없는 것'을 나름대로 갖는 것이 독립이다. 독립이나 자유로 이끌 수 있는 비밀은 환공이 읽는 책 속에 있거나, 그 책을 쓴 사람의 말 속에 있지 않고 윤편의 '손'에 있다. 지식에 있어서는 생산자가 되느냐 수입자가 되느냐가 가장 분명한 정치 구도다. 지식의 생산자는 자유롭고 독립적이며 주도적이며 효율적이지만, 지식의 수입자는 결국 종속적이다. 인간이 세계를 이해하고 관리하고 통제하기 위해서 만든 가장 고효율의 장치가 지식(이론)이기 때문에, 그것에 대한 주도권이 세계에 대한 주도권을 결정한다. 그래서 종속적인 국가의 국민들은 강대국으로 지식을 배우러 간다. 소위 유학이다. 우리나라만 해도 오랜 세월 수많은 학인들이 해외에 나가 배우고 돌아왔다. 돌아와서는 사회의 각 분야에서 요직을 맡았다. 어떻게 보면 우리나라는 유학한 사람들이 운영해 온 나라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유학하고 온 사람들로 인해서 도달해야 할 궁극적인 곳에 도달했는가? 도달해야 할 궁극적인 곳인 어디인가? 유학하고 온 사람들로 인해서 갈 수 있는 궁극적인 곳이란 바로 다름 아닌 지식 생산국이다. 지식을 생산하면 세계에 대한 통제권을 가지게 되므로 결국은 독립적이고 자유로운 국가를 이룬다는 뜻이 된다. 하지만 우리는 아직 그러지 못하고 있다. 물론 기능적으로는 상당히 발전했지만, 여전히 지식 수입국이며 종속적이다.왜 아직도 이러한가? 그것은 윤편의 '손'을 보지 않고, 환공의 책에 적힌 '글'만 보고 오기 때문이다. 그들의 말만 들었지, 그들의 '말'이 나오는 '비밀스런 그곳'에 관심을 두지 않았기 때문이다. '비밀스런 그곳'은 보이지도 않고 들리지도 않으므로 '전해주기 어려운 곳'이다. 유학 가서 윤편의 '손'이 만들어낸 수레바퀴만 얻어오고 '전하기 어려운' 윤편의 손놀림을 보지 않으면 지식의 생산에는 나서지 못한다. 그래서 지식 생산이라는 독립적인 도전 대신에 내내 습득해 온 콘텐츠를 전달하고 지키는 일 만 하다 간다. 이것은 '찌꺼기'에 빠져 있는 일과 같다. 지식은 모험과 도전의 결과다. 지식 생산에는 반드시 모험과 도전이라는 비밀스런 덕목이 작용한다. 지식 생산국에 가서는 생산된 결과를 습득하기 보다는 지식이 생산되는 과정을 배울 일이다. '생산된 결과'는 보이고 들린다. 생산 과정에 투입되는 모험과 도전은 눈에 보이지 않는 비밀스런 활동이다. '생산된 결과'는 환공의 책이며, 생산 과정은 윤편의 손놀림이다. 종속적인 삶에서 벗어나는 일은 자유롭고 독립적인 삶을 영위하는 사람들의 비밀을 접촉하는 일에서 시작될 수 있지, 그 사람들이 비밀스런 활동을 해서 낳은 결과를 배우는 것으로는 이뤄지지 않는다. 그래서 윤편의 '손'은 '글'이나 '말'에 가깝지 않고, 오히려 '모험'이나 '도전'에 가깝다. 말이나 글을 배운 것으로는 자유를 획득하지 못한다. '모험'이나 '도전'으로는 자유를 획득할 수 있다. '글'이나 '말'은 전수할 수 있어도, '모험'이나 '도전'은 전수할 수 없다. '모험'과 '도전'은 오직 한 사람의 고유한 욕망으로만 세상에 드러나지, 전수하고 못하고의 차원에 있지 않다. 글이나 책 너머의 비밀스런 곳에 있다. 윤편의 '손'은 전달되지 못한다. 아들도 그 '손' 그대로 전수받지 못한다. 결국 신비스런 그곳, 전해줄 수 없는 그것은 그저 각자의 몫으로 남는다. 얼마나 안타깝고 쓸쓸한 일인가. 그래도 어쩔 수 없다. 그 쓸쓸함의 그늘 아래서만 자유와 독립이 고개를 든다. 그 쓸쓸함의 그늘 아래서 '전해줄 수 없는 그것'을 모험과 도전으로 실현해 내는 일이 사는 맛 아니겠는가. 내가 나로 사는 일 말이다. 그래서 내가 또 하나의 윤편이 되거나 윤편의 대행자가 되지 않고, 내 안에서 윤편을 실현해버린다. 윤편의 내가 아니라, 나의 윤편으로 재편하는 일, 이것이 바로 자유다. 이곳저곳 기웃거리며 자유의 결과를 주우러 다니는 일을 멈춰야 한다. 내가 자유여야 한다. 나를 자유롭게 할 내 안의 신비처를 지키다 보면, 천천히 내 손이 윤편의 손을 넘어선다. 내 손, 내 손에 집중하라. 윤편도 찌꺼기다./최진석 서강대 철학과 명예교수·건명원 원장·섬진강 인문학교 교장송필용作 '무제' /광주일보 제공

2018-04-23 최진석

[최진석의 노장적(老莊的) 생각·15]우물 안 개구리

우물 속 개구리에게 '바다'를여름벌레한테 '얼음' 말해도 자신의 좁은 진리 갇혀 소용없어인간은 동물과 달리 진화아닌'문화' 선택… 확장성 훨씬 커인식의 범위 밖으로 나가는 시도'무모한 상상력'이 그 핵심익숙함 빠져 제한성 넘기 어려워우리는 '밖' 꿈꾸는 '질문' 아닌과거지향 '대답' 기능 머물러그들만의 진영 갇혀 종속적 전락진영교체를 '새 세상'인냥 착각中 루쉰, 이들을 '아큐'라 비판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장자'라는 중국 고전에는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 "우물 속에 있는 개구리한테는 바다에 대해서 말해줘도 소용없다. 그 이유는 그가 우물이라는 좁은 세계에 갇혀있기 때문이다. 여름벌레한테는 얼음을 말해줄 수 없다. 여름이라는 시간만 살다가기 때문이다. 함량이 작은 사람에게 도(道)를 말해봐야 아무 소용없는 것은 그가 자신만의 좁다란 진리에 갇혀 있기 때문이다."인간은 자신이 믿고 있는 신념 체계나 시간적 경험 혹은 공간적 제약을 벗어나기 어렵다. 그래서 대개는 자신의 믿음 체계나 시공간적 제약으로 빚어진 함량만큼만 살다가는 것이다. 일반적인 소시민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학자나 종교인이나 정치인 등을 망라하여 누구나 그러하기 쉽다. 그래서 철없는 어른도 있고, 신도들의 이해 안에서 겨우 연명해나갈 수밖에 없게 된 성직자도 있으며, 제자들의 아량에 기대 살게 되는 교수도 있고, 시대의 버림을 받게 된 큰 정치인이 생기는 것이다. 우물 안에 사는 개구리한테는 자기가 사는 우물이 자기 경험과 인식의 전체다. 그런데 인간은 개구리와 다르다. 진화를 선택한 동물과 달리 인간은 문화를 선택하였다. 문화는 진화에 비해 시공간적 또는 질적이고 양적인 면에서 모두 확장성이 훨씬 더 크다. 진화는 '필요'가 만들지만, 문화는 지금 당장 필요치 않은 것을 향해 나아가는 무모함에 기대는 바가 크다. 인식의 범위 밖으로 나가 보려는 무모한 상상력이 문화의 핵심이다. 우물 안 개구리는 우물을 자신의 전 세계로 알고 살다 가지만, 인간은 가본 적도 없는 자신의 우물 밖을 꿈꾸는 것이다. 결국 무모한 꿈을 꾼 한 사람에 의해 인간은 우물 밖의 세계를 자신의 영토로 갖는다. 당연히 문화의 확장성은 한계 밖을 향해 무모하게 덤비는 상상력이 결정한다. 상상력 즉 자신의 제한성을 넘어서려는 무모함이 있으면 문화적 활동을 크게 할 수 있고, 그것이 없으면 문화적 활동을 작은 테두리에서 따라 할 수밖에 없다. 자신의 한계를 넘어서려는 시도의 크기가 큰 문명을 살 것인지 아니면 작은 문명을 살 것인지를 결정한다. 결국 상상력은 익숙함에 갇히지 않고 생경한 곳으로 나를 끌고 가서 새로운 세계를 열게 한다.문제는 이 제한성을 넘어서기가 매우 어렵다는 점이다. 그래서 작은 문명은 일정한 패러다임 안에서는 계속 작게 유지되고, 큰 문명은 일정한 패러다임 안에서는 계속 크게 유지된다. 후진국 형 국가에서는 후진국 형 일이 일어나고, 선진국 형 국가에서는 선진국 형 일이 일어난다. 우리나라에 후진국 형 재난이 끊이질 않는 것도 바로 이런 연유다. 후진국적 제한성 혹은 후진국적 시선을 극복하고 한 단계 더 높고 큰 시선을 갖지 못했기 때문이다. 어느 단계에서나 시선의 제한성에 갇혀 있으면, 다시 말해 익숙한 시선을 벗어나지 못하면, 그 단계를 세계 전체로 여기며 살 수 밖에 없는데, 이런 상황을 비판적인 언사로 '우물 안 개구리'라고 하는 것이다. 더 단순화해서 말하면 우물 안 개구리 형 인간은 자신만의 익숙함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인간이다.우물 안에서 우물 밖을 꿈꾸는 상상력이 발동될 때, 가장 먼저 일어나는 지적 활동이 바로 '질문'이다. 반면에, 자신이 머무는 우물 안으로만 시선이 향해 있을 때 작동되는 지적 활동이 '대답'이다. 지금 우리의 현실적인 문제는 '대답'의 기능으로 닿을 수 있는 가장 높은 곳에 이미 도달해버렸기 때문에, 그 다음을 노려야 하는데, 계속 우물 안에만 머물려 하거나 우물 안에 머물던 습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점이다. 이것을 달리 말하면, '대답'하던 습관을 '질문'하는 습관으로 바꿀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점이다. 우물 안 개구리로 남을 것이냐, 아니면 우물 밖을 향해 튀어나가는 도전을 할 것이냐 하는 점이라고 말해도 되겠다.대답이란 무엇인가. 이미 있는 지식과 이론을 그대로 먹은 후, 누가 요구할 때 토해내는 것이다. 이때 승부는 누가 더 빨리 뱉어내는가, 누가 더 많이 뱉어내는가, 누가 더 원래 모양 그대로 뱉어내는가에 따라 갈린다. 여기서 인간의 성장에 크게 영향을 미치는 것은 '원래 모양'그대로 뱉어내는 일이다. 대답이라는 기능을 하면 할수록 자기도 모르게 '원래 모양'을 중시하고 거기에 집착한다. 그런데 '원래 모양'을 시제로 따져보면, 그것은 미래적이라기보다는 과거적이다. 그래서 '원래 모양'을 중시하는 데 익숙해지면 과거를 따지는 일을 중시하게 되고 과거를 분명히 하는 일을 제대로 해야 진실한 삶을 사는 것 같은 느낌을 가질 수 있다. 그래서 대답에 익숙하도록 훈련된 사람들이 채우는 사회의 논쟁은 거의 대부분이 과거 논쟁으로 흘러 버린다. 그런 사람들에게 우선적인 사명은 과거를 지키고 밝히거나 과거의 횃불이 꺼지지 않게 하는 데에 있지 미래를 여는 일에 있지 않다. 오히려 미래를 이야기 하는 사람들을 우선 분명히 해결해야 할 시급한 문제를 내버려 두고 뜬구름이나 잡으려 하는 사람으로 치부할 것이다. 그래서 지금 당장 가까이에 있는 현실의 기능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 집중하지, 미래를 향해 열려있는 꿈을 꾸거나 비전을 세우는 일을 하지 못한다. 오히려 비전이나 꿈을 현실성 없는 한가한 소리로 치부하기 쉽다. 그래서 일상에서도 고등학생들에게 꿈을 꾸는 일보다 우선은 대학 합격이 더 중요하니, 꿈은 대학에 가서나 꾸라고 말해주는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우리의 청춘들은 점점 고갈되어 간다. 나라도 마찬가지다.또 '원래 모양'은 바탕이나 근거가 되거나 모범적인 모습을 표현하기 때문에 그것을 쉽게 기준으로 사용하는데, 기준이라는 것은 언제나 구분하는 역할을 한다. 기준이 없이 구분은 일어나지 않고, 구분을 하지 않는 기준이란 있을 수 없다. 구분 가운데 가장 분명한 것은 시비와 선악의 기준이다. 자기가 가진 기준에 맞으면 옳거나 선이고, 기준에 맞지 않으면 그르거나 악이 된다. 이런 연유로 '원래 모양'을 중시하는 '대답'이라는 기능을 잘하도록 훈련된 인재들은 진위나 선악을 따지는 일에 쉽게 빠진다. 그러다가 결국은 세계와 관계를 맺을 때, 옳고 그름을 가장 중요한 기준으로 사용하고, 선과 악의 윤리적 기준을 적용하는 것을 철저한 삶의 모습으로 믿게 된다. 그래서 대답에 익숙하도록 훈련된 인재들로 채워진 사회에서는 대부분의 논쟁이 진위 논쟁이나 선악 논쟁으로 빠진다. 이런 사람들에게 진위나 선악을 넘어서거나 혹은 비켜서서 새로운 길을 내려는 사람들은 종종 사이비나 회색분자 혹은 변절자로 취급되어 가혹한 냉대를 당하고 배척된다. 변절이나 변화나 제3의 길은 회색분자의 길로 치부되기 때문에 이런 사회에서는 종종 기준에서 이탈하지 않고 그것을 공유하는 사람들끼리 뭉치게 된다. 바로 진영이 형성되는 것이다. 이제 모든 활동이나 논의는 진영의 논리로 귀결된다. 이런 사람들에게 진리는 진영에 있지 세계에 있지 않다. 나에게도 있지 않다. 나는 진리의 입법자가 아니라 진영의 진리를 대행하는 대리인으로만 존재한다. 능동적이거나 독립적인 주체가 아니라 바로 종속적 주체로 전락하는 것이다. 문제는 이 종속성을 스스로는 의식하지도 못하고, 또 인정하지도 않는다는 점이다. 그래서 불행하게도 평생 종속성을 벗어나지 못할 수도 있다. 종속성은 종속성 그 자체로 불행한 것이 아니라 그 종속성으로 채워진 주체들이나 또 그런 주체들이 이루는 사회나 국가가 종속성을 벗어나지 못하게 하는 것이 더 큰 불행이다. 한 번 종속성에 갇히면 종속성을 벗어나기 어려워지는 운명 앞에 던져져 버리는 것, 이것이 비극인 것이다. 그래서 진영에 갇힌 사람은 대부분이 근본주의자다. 우물 안의 개구리는 다 근본주의자다. 우물 안 개구리는 우물 밖을 넘보는 무모함 자체를 죄악시 할 수 있다. 우물 안은 이미 진영이 되었고, 그 진영을 벗어나는 일은 옳지도 않고 선하지도 않다. 진영에서 공유한 논리와 맞지 않은 것은 다 나쁘고 악하다. 그래서 모든 일들은 진영 안에서만 유효하다. 변화도 진영 안에서만 의미를 갖는다. 당연히 작은 변화에 만족하고 큰 변화를 시도하지 못한다. 우물의 왼쪽에 있다가 오른 쪽으로 옮기고 또 오른 쪽에 있다가 왼쪽으로 옮기는 것을 큰 변화나 생명력으로 착각한다. 왼쪽과 오른쪽을 바꾸는 것을 스스로는 새 세상을 연 것으로 착각한다. 이 착각은 자신도 우물 속에 가두고 사회도 우물을 벗어날 수 없게 붙잡는다. 그래서 한 번도 미래를 실현하지 못하고 평생 과거만을 살다간다. 전술적 차원에만 머물다 전략적 차원으로 건너가지 못한다.우물 안에서 볼 때 우물 밖은 다른 곳이거나 없는 곳이거나 불가능한 곳이거나 위험한 곳이다. 상상력은 다른 곳을 꿈꾸는 무모한 행사다. 다른 곳을 적대시하지 않는 포용력이 없이는 우물 안 개구리의 신세를 면하기 어렵다. 우물 안에서 왼쪽 오른 쪽은 '다른 곳'이 아니라 '같은 곳'이다. 우물 안에서 왼쪽과 오른 쪽을 바꾸는 것은 변화가 아니다. 조삼모사일 뿐이다. '대답'으로만 훈련된 사람들끼리 하는 진영의 교체를 우물 밖으로 나간 것이라고 우기거나 새로운 우물이라고 우기면 안 된다. 진영의 교체를 새 세상으로 착각하면 착각할수록 넓은 세상의 큰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고 우물 안의 한 쪽만 지키다가 속절없이 작아진다. 그래도 말할 것이다. 작아진 것이 패배가 아니라, 진정한 승리라고 말이다. 이런 우물 안 개구리들을 중국의 루쉰(魯迅)은 '아큐'(阿Q)라고 하면서 중국인의 종속성을 비판하고, 중국이 우물 안을 벗어나 새로운 곳으로 나아갈 것을 주장하였다. 과거에 갇힌 우물 안의 중국에서 왼쪽 오른쪽의 교체를 말한 것이 아니라 '새로운 중국'을 꿈꿨던 것이다. 아직 '아큐'(阿Q)의 속성을 탈각하지 못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대답만 해 왔던 우리는 어찌해야 하는가?/최진석 서강대 철학과 명예교수·건명원 원장·섬진강 인문학교 교장송필용作 '상상력' /광주일보 제공

2018-02-12 최진석

[최진석의 노장적(老莊的) 생각·14]우리는 최고점을 찍었나

사람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시선의 높이'까지만 살다죽어국가도 마찬가지, 어디에 있는가 사람의 생각이 드러나는 '문명''종속적' 문명의 최고 높이 도달문제는 중진국 레벨 넘어서독립·창의적 단계로 갈 수 있나정치, 진영 못벗어나 '분열' 지속'국익' 초점 시대적 지식인 귀해교육 역시 '기능인'만 양성문제 해결 '사유하는 인재' 아닌숙지된 기준 적용 판단만 할 뿐"생각하는 민족이라야 산다"함석헌 선생 말씀 다시 들려한 사람의 삶은 전적으로 그 사람이 가진 시선의 높이에 의해 결정된다. 사람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시선의 높이까지만 살다간다. 나라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문명은 세 개의 층으로 구성된다. 가장 아래층은 구체적인 물건들로 채워진다. 둘째 층은 구체와 추상 사이에 있는 것처럼 보이는 제도다. 가장 높은 층은 추상적인 형태를 띠는 철학이나 윤리나 문화 같은 것이다. 제도는 인간이 사는 길이다. 그 길을 따라 물건들이 생산되고 삶이 영위된다. 풍요롭고 정의로운 삶은 그런 것들이 보장되는 길(제도)에서 만들어진다. 그런데 제도는 또 철학이나 문화적 지향에 의해 결정된다. 이렇게 살고 싶은 사람은 이런 식의 길을 내고, 저렇게 살고 싶은 사람은 저런 식의 길을 낸다. 이런 꿈을 꾸는 사람은 이렇게 살고, 저런 꿈을 꾸는 사람은 저렇게 살 수 밖에 없는 이치다. '사람'이 가장 중요하다. '사람'의 생각(철학)이 길을 내고 또 그 길을 따라 물산(物産)의 질과 양이 결정되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문명'은 '사람'의 생각이 구체적으로 드러난 결과다. 높은 생각은 높은 문명을 만들고, 낮은 생각은 낮은 문명을 만든다. 앞선 생각은 선진 문명을 만들고, 뒤따라가는 생각은 후진 문명을 만든다. 이런 이유로 시선의 높이가 삶의 높이다라고 말하는 것이다.우리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구체적인 물건들을 예로 들어 보자.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물건 가운데 우리가 만들기 시작한 것이 몇 개나 되는가. 거의 없다. 다른 나라에서 누군가가 최초로 만든 것들을 들여와서 살고 있다. 이 말은 우리가 먼저 생각하거나, 먼저 불편을 느끼고 해소해보려 했거나, 먼저 문제를 발견하고 해결해보려고 한 적이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모든 물건들은 다 발상이나 불편함이나 문제를 해결한 결과들이기 때문이다. 물건만 그런 것이 아니라 제도도 그렇다. 우리가 사용하는 제도도 대부분 외부에서 온 것들이다. 총체적으로 볼 때, 우리는 '따라 하기'의 문명을 살아왔다. 다른 사람이 생각해서 낸 길을 따라 다른 사람들이 만든 물건들을 누리며 산 것이다. 인정하기 싫지만,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자유롭지도 독립적이지도 주체적이지도 않고 아직까지는 다만 종속적일 뿐이다. 그런데 우리는 종속적인 문명이 닿을 수 있는 최고의 높이에 도달했다. 중진국 상위 레벨에 이미 도달했다는 뜻이다. 문제는 중진국을 넘어서 선도력을 행사할 수 있는 단계, 즉 독립적이고 자유롭고 주체적인 단계로 넘어설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이다. 이 말을 달리 표현하면 창의가 일어나는 사회를 열 수 있느냐 없느냐 라고 할 수도 있고, 대답하는 기능에 머물지 않고 질문이 감행되는 사회를 이룰 수 있느냐고 할 수도 있고, 전술적인 높이를 넘어 전략적인 단계에 이를 수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라고도 말할 수 있고, 분열을 넘어 통합을 이룰 수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라고도 말할 수 있다. 종합적으로 말하면 지금까지 우리가 익숙하게 발휘하였던 시선을 한 단계 더 높이 상승시킬 수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다. 종속적인 단계의 특징은 스스로 생각을 하는 것이 아니라 타인이 해 놓은 생각의 결과나 집단적으로 공유하는 이념을 수용하고 키우며 그것을 기준으로 해서 산다. 그러므로 나라 전체나 대국을 보기보다는 기준이나 이념의 공유체인 진영을 중심으로 해서 사고하는 습성을 갖는 다. 세계의 진실에 접촉하는 것이 아니라 진영의 진실을 세계에 부과하려 애쓴다. 또 기준이 분명하므로 그 기준에 맞으면 참이고 맞지 않으면 거짓이다. 그래서 항상 자신의 기준을 중심으로 하는 진위 논쟁에 힘을 쓴다. 또 이 진위는 과학적으로 확인된 진위가 아니라 특정한 가치관에 싸인 정치적인 판단이 하는 진위로서 쉽게 선악이라는 가치판단으로 연결된다. 보통 과학적 판단보다는 정서적인 판단에 빠진다.사회를 움직이는 엔진은 크게 두 개다. 정치와 교육. 사실 우리 정치는 소란스럽기는 하지만 박제되어 있다. 본질에 도달하지 못하고 기능에 갇힌 것이다. 진영의 정치는 기능을 벗어나지 못한 채, 적대적 공생 관계로 유지된다. 기능과 진영의 논리는 분열을 낳는다. 현대 한국 정치의 큰 특징은 누가 뭐래도 '배타성'을 위주로 하는 '분열'이다. 그러다가 결국 대한민국이라는 하나의 국호 아래 "두 국민 국가"라는 침울한 풍경만 남았다. 한국의 정치사를 단순화 해보자. 해방 후 지금까지 한국의 정치는 이승만과 김구의 대결 구도 그대로다. 이승만/김구, 친미/반미, 반북/친북, 보수꼴통/친북좌빨, 박정희/김대중, 국가/민족으로 양분된 대립이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 아마 이런 대결에는 조선시대 영남학파/기호학파, 이언적/서경덕의 구도가 그대로 계승되고 있는지도 모른다. 자신들이 체결한 FTA에 대해서도 정권이 다른 진영으로 바뀌면 바로 반대로 돌아선다. 제주 해군기지 건설을 결정한 정권에 참여한 인사들도 정권이 다른 진영으로 넘어가면 격렬한 반대론자로 바뀐다. 미군이 낸 사고에는 격렬한 저항 투쟁을 하지만, 중국 해적에게 우리 해경이 맞아죽어도 그 흔한 데모 한 번이 없다. '독립'이라는 높은 시선에서 태도가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진영'이라는 낮은 기능에 갇혀 있기 때문에 유사한 사안에 대해서 미국에 대하는 태도와 중국에 대하는 태도가 전혀 다르게 나타난다. '국익'이라는 전략적인 높이가 아니라 '진영'의 논리로 문제를 다루면 같은 사안을 놓고도 이 정권에서는 이렇게 행동하고 저 정권에서는 저렇게 행동하는 기능적 태도가 나타날 수밖에 없다.정치가 기능에 갇히듯이, 정해진 지식을 지키고 전파하는 지식 기사들은 넘쳐나도 세계를 응시하며 그 시대에 맞는 지적 해결책, 즉 지식을 생산하는 지식인이 귀해졌다. 타도하는 자리에 올라앉으려는 반항아는 많아도, 국가의 명(命)과 틀과 비전을 바꾸는 일에 헌신하는 혁명가는 사라졌다. 반항만 넘치고 혁명은 씨가 말랐다. 중진국에서 선진국으로 진입하는 일은 '명'(命)이 바뀌는 일이고, 이것이 바로 진정한 혁명이다. 동일한 단계 내에서 의자 싸움하는 일은 반항일 뿐이다. 지금 우리에게 기능적 반항을 넘어서는 혁명 역랑이 있기나 한가. 이제 우리에게는 기능에 갇혀 내뱉는 순결한 사자후가 아니라 전략적 단계로 올라서려는 굵고 거친 발걸음이 필요할 것이다.교육에서 기능인을 양산하기 때문에 정치가 기능적이다. 우리 교육은 내용을 정해놓고 그것을 숙지하는 것으로 이뤄져왔다. 자신 안에서는 숙지해야 하는 내용이 주도권을 갖지 실제 자신은 그 내용들이 들락거리는 통로나 중간 역으로만 존재한다. 자신의 의식이나 사유에서 자신이 주인 노릇을 하지 못한다. '생각'하는 인재가 아니라 기준을 적용만 하는 '판단' 주체로 길러진다. '문제'나 '불편함'을 발견한 후, 그것을 해결하려고 집요하게 붙들고 늘어지는 사람이 아니라, 정답을 찾는 사람으로만 길러지는 것이다. 독립적 주체가 아니라 종속적 주체다. 이렇게 배양된 인재들은 이미 숙지한 내용을 기준으로 쓰는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판단에 빠지기 쉽다. 예를 들어보자. 우리는 '전쟁'이라고 하면 무조건 피해야 하는 것, 해서는 안 될 것으로서, 악한 것으로 정해놓고 대화를 시작한다. 내가 미국이나 일본 학생들과의 대화를 통해 경험한 바에 의하면, 그들은 '전쟁'을 무조건 피해야 하는 것으로 정해놓지 않고 질문을 했다. 즉 전쟁에서 주도권을 잡기 위해서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은 무엇인지 등을 묻는 것이다. 전쟁을 피해야 하는 것으로 정해놓은 문명과 전쟁을 통제하고 제어하며 주도권을 잡아야 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개방적 태도가 일구는 문명은 크게 차이가 난다. 세계에서 마주치는 대상이나 사건에 대하여 도덕적 판단을 쉽게 하는 인재들은 숙고하고 사고하는 능력이 떨어진다. 세계의 진보는 이미 굳건히 자리 잡은 기준이나 가치관으로 하는 '판단'에 의존하기보다는 개방적으로 진행되는 '사유'에 더 크게 의존한다. '판단'에만 빠진 채 '사유' 능력을 기르지 못하면, '판단'이 제공할 수 있는 문명만 누리지 '사유'하는 능력이 제공하는 더 높은 문명은 누릴 수 없다.새해 첫날, 새해의 희망을 담은 성스러운 기원을 하려고 일출을 보러 온 사람들 가운데 일부가 경포119안전센터 앞, 소방차를 세워야 할 곳에 주차를 해 놓았다. 소방관들이 일일이 전화를 해서 차를 빼는 데에만 40분이 걸렸다 한다. 경포119안전센터 관계자는 "대부분이 해돋이를 보러 온 사람들이었다. 계도 차원에서 과태료를 부과하진 않았다"고 한다. 얼마 전 KTX를 타고 가는데, 딸 둘을 데리고 젊은 부부가 나와 같은 칸에 탔다. 딸들이 보는 앞에서 아버지는 내내 큰 소리로 전화 통화를 하였다. 보다 못한 어떤 사람이 지나가는 역무원에게 전화 좀 통로로 나가서 하게 해달라고 부탁하였다. 역무원은 그냥 지나친 후, 방송으로 기차 안에서의 예절에 대해서 간단히 방송하는 것으로 끝냈다. 여기 두 풍경에서 소방차 세울 자리에 주차를 한 사람들이나 기차 안에서 전화 통화를 하는 사람들은 모두 편리한 기능을 좇느라 시민으로서의 책임성이나 존엄성을 포기하였다. 이런 부모들 앞에서 어떤 교육이 이뤄지겠는가. 그리고 공적 기관의 책임자들도 당연히 행사해야 할 '강제력'을 전혀 행사하지 못했다. 모두 당시의 불편함이나 정서적 갈등을 피하는 등과 같이 기능적으로 편하려고만 했지, 누구 하나 독립적이고 공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지 못하다. 모두 기능에 빠져 있다.우리는 우리에게 익숙한 방식으로는 도달할 수 있는 가장 높은 곳에 도달했다. 지금 정도의 시민의식, 지금과 같은 인재 배양 방식, 지금과 같은 정치 수준으로 도달할 수 있는 높이로는 여기가 가장 높을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우리는 우리에게 익숙한 방식으로 할 일은 이미 다 해버린 민족인지 모른다. 이제는 어떤 주장도 어떤 정책도 새롭거나 참신하지 않다. 모두 전에 들어봤던 얘기들이다. 알고 있는 것이나 익숙한 것을 넘어선 "다음"을 말 할 수 있는 것이 지혜다. 이제 우리는 한 층 높은 단계의 지혜로 재무장하여, 이 한계를 돌파하려는 용기가 절실하다. 아인슈타인이 말한다. "이 세상에서 가장 큰 바보는 다른 결과를 기대하면서 같은 방법을 계속 쓰는 사람." 귀담아 듣지 않을 수 없다. "생각하는 민족이라야 산다"는 함석헌 선생의 말씀이 다시 들린다./최진석 서강대 철학과 교수·건명원 원장·섬진강 인문학교 교장송필용作 '시선의 높이' /광주일보 제공

2018-01-09 최진석

[최진석의 노장적(老莊的) 생각·13]침묵을 영접하라

인간-원숭이 2% 유전자 차이가거대한 '신분·계급적 差' 만들어동물의 진보 '진화' 의존 반면인간은 '문화, 변화 야기' 달려수용·답습·관행·종속적 아닌전혀 다른 반응, 새로운 도전이문화활동 주도하는 '창의력'익숙한 행위·언어 사라진 '정적'전진-역진의 바로 그 교차점'침묵' 통해 내면 깊숙한 곳 도달성스러움 만나고 '새 세상' 열려장자曰 "참된, 창의적, 모험하는 인간의 모습은 고요하다"침묵으로 '위대함'이 자라나유전자로만 본다면 인간과 원숭이 사이에는 약 2% 정도의 차이밖에 없다. 100분의 2만 다르다. 인간과 동물로 구별하는 것이 무색할 정도로 가깝다. 심지어는 아메바와도 차이가 14%밖에 되지 않는다. 이런 숫자로 본다면 인간과 아메바 사이도 뭐 그리 멀겠는가. 하지만 14%라는 차이만으로도 아메바는 맘먹고 관심을 표하기 전에는 인간에게 없는 거나 마찬가지다. 인간과 원숭이 사이는 더 하다. 겨우 2%다. 그것도 커봐야 그렇다. 사실은 2%가 안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원숭이는 동물원에 갇히고 인간은 유유자적 구경한다. 신분이나 계급적으로는 98% 이상의 차이가 난다. 이건 하늘과 땅만큼의 차이다. 미미한 유전자적 차이를 거대한 신분의 차이로 바꿔버리는 요인은 무엇인가. 문화다.동물이나 식물은 자신의 진보를 전적으로 진화에 의존하지만 인간은 문화에 더 의존한다. 이것이 결정적이다. 인간의 가장 큰 특징은 문화적이라는 점이다. 그래서 가장 인간다운 인간은 문화적 활동에 철저한 사람이다. 문화(文化)는 글자 그대로 무엇인가를 만들어서 혹은 그려서(文) 변화를 야기(化)하는 일이다. 변화를 야기하는 인간이 더 인간일 수밖에 없는 구조다. 인간으로는 상급이라는 말이다. 변화를 야기하는 동력을 흔히 창의력이라고 한다. 이렇게 본다면 창의력은 가장 문화적이며 인간적인 활동력이다. 창의력을 통해 인간은 변화를 야기한다. 변화를 야기하려고 시도하는 인간에게 우리는 비로소 자유롭고 독립적이며 주체적이라고 말해준다. 그렇지 않고 누군가 야기해놓은 변화를 수용하거나 답습하기만 하면 종속적이다.그렇다면, 변화를 야기하고 수용하는 일은 어디서 어떻게 일어나는가. 어디서 출발하는가. 과거 아프리카의 타조 사냥은 이렇게도 했다고 한다. 타조를 일정한 간격을 두고 계속 쫓는다. 타조와 쫓아가는 사람들 사이에 유지되는 일정한 간격 사이에는 팽팽한 긴장감이 존재하게 되는데, 쫓고 쫓기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쫓기는 쪽의 긴장감은 커지기만 한다. 타조가 쫓기고 쫓기다가 긴장감이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커지면 도망가는 것을 멈추고 그 자리에 서서 대가리를 뜨거운 모래땅에 처박는다. 사람들은 그냥 가서 꼼짝 않고 머리를 박고 있는 타조를 잡아오면 되었다. 타조들은 다 그래왔다. 그리고 또 다른 타조들도 그렇게 잡혀죽을 것이다. 그런데 모두 그런 집단적으로 속성화 된 습관에 갇혀서 함께 어울리던 타조 가운데 어느 한 타조가 자폐증을 앓고 있었는지는 몰라도 다른 타조들을 따라서 머리를 처박지 않고 무리에서 이탈하여 갑자기 뒤를 돌아보며 쫓아오는 사람들을 노려보는 일을 저질렀다. DNA에 박혀 있는 일정한 방향을 지키다가 돌발적으로 선회(旋回)하여 습관적이고 집단적으로 공유하던 방향을 혼자서 바꾼 것이다. 모든 타조들과 공유하던 언어와 문법들에서 이탈하여 친구 하나 없는 곳으로 스스로 던져진다. 세계는 인간에게 항상 무엇인가 반응을 강요한다. 우리 삶은 모두 그 강요에 대한 나름대로의 반응일 뿐이다. 사실 우리 모두는 타조고, 타조를 쫓아가는 사람들은 인간에게 반응을 강요하는 세계 전체로 비유된다. 내내 쫓기기만 해왔던 무리에서 이탈한 어떤 한 타조가 뒤를 돌아보고 갑자기 이전에는 있어 본 적이 없는 전혀 다른 반응을 시도했다면, 이것이 바로 새로운 도전이다. 일단 뒤돌아보면 그 이전의 관행과는 전혀 다른 반응이 시도될 것이고 그것은 세계에다가 이전에 있어본 적이 없는 어떤 무늬를 그리게 될 것이다. 문화적 활동의 결과를 수용하던 타조가 주도적으로 문화적 활동을 하는 타조로 변했다. 창의적인 타조다.타조가 한 미증유의 창의적 도전은 어디서 출발하는가? 집단적으로 함께 내달리던 정해진 방향에서 급선회하던 바로 그 지점이다. 대가리를 처박도록 길이 잡힌 방향을 향해 앞으로만 달리던 타조가 갑자기 방향을 틀어 뒤로 돌았다. 전진(前進)하다 역진(逆進)하는 타조는 두 방향을 다 경험하지만, 이 경험의 여정에는 전진과 역진이 교차하는 신비한 지점이 탄생할 수밖에 없다. 여기가 바로 문화적이고 창의적이며 인간적인 활동의 자궁이다. 이 신비한 지점에서는 세계에 내몰리느라 떼를 지어 달리면서 나누던 수없이 많고 부산스러운 말들이 갑자기 끊긴다. 익숙한 모든 행위와 언어가 갑자기 사라지며 정적에 휩싸이는 순간이 있다. 언어의 길이 끊기는 언어도단(言語道斷)의 지경이며 어떤 문자나 표지판도 더 이상의 쓸모가 사라져버리는 불립문자(不立文字)의 상태다. 언어의 길이 끊기는 바로 거기서 새로운 언어가 태어나서 새 길이 난다. 그러니 새 길은 당연히 언어가 끊기던 바로 그 찰나에 뿌리를 둔다. 무너진 표지판 곁에 새 표지판은 아직 서지 않고, 어떤 말도 의미를 담지 못한 미숙의 상태, 어떤 숫자도 얹혀있지 않은 좌표답지 못한 좌표, 방향을 잃은 아둔한 의식, 이것을 우리는 침묵(沈默)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전진의 문법과 역진의 언어가 사멸과 탄생으로 운명을 달리 하며 서로 등을 대는 바로 그 교차점이다. 여기는 새 언어가 태어나는 곳이기도 하지만 철지난 언어가 사라지는 곳이 아니던가. 언어가 끊긴 곳에서는 유령처럼 침묵만이 태어난다. 모든 방향의 선회는 침묵을 지나간다.건명원(建明苑)을 열어 새 시대를 여는 창의 전사를 양성하고 있다. 역진(逆進)의 충동을 이기지 못하는 강한 기운을 갖게 해주고 싶다. 반역의 기운이다. 그런 충동적 기운을 배양할 목적으로 구성된 프로그램 가운데 '걷기명상'이 있다. 모든 원생(苑生)들이 함께 5시간 정도를 걷는다. 핵심은 1시간 정도를 빼서 '묵언(默言)'하는 시간을 갖게 하는 것이다. 아무 말 없이 걷는다. '침묵'을 지나가보라는 것이다. 뜨거운 모래 바닥에 머리를 처박도록만 훈련된 사람들에게는 함께 어울려 부산스러운 잡담을 나누는 일이 더 익숙하고, '침묵'은 큰 곰을 어깨에 앉혀놓고 걷는 것보다 어렵다. 그러나 한 번 '침묵'을 내면 깊숙한 곳까지 끌고 가 본 사람은 - 전진과 역진 사이의 교차점에 서 본 사람은 - 그 '신비한 유령'을 피하지 못한다. 그것은 '마법의 양탄자' 같아서 '침묵'을 경험한 그 사람을 새로운 어딘가로 반드시 데려간다. 그 사람은 가는 내내 알 수 없는 힘을 발휘하며 새 길을 낸다. 이것이 침묵의 힘이다. 원래 있었던 것이라도 이제는 더 이상 원래의 것이 아니다. 전혀 다른 어떤 것으로 재탄생하여 현현한다. 잡담과 부산스러움을 극복하고 원래 있었던 것의 감춰진 진실을 등장시킨다. 새로운 세상을 여는 일이 시작되는 것이다.저 멀리 산이 있다고 하자. 사람들은 그 산을 고압선을 놓을 자리로도 보고, 돌을 캘 곳으로도 보고, 산삼을 감추고 있는 곳으로도 보고, 전원주택을 지을 곳으로도 본다. 그러나 그것들은 모두 산의 진실이 아니다. 그렇게 보는 그 사람의 진실일 뿐이다. 조작된 것이다. 잡다하고 폭력적인 '소유'적 발상일 뿐이다. 산의 진실은 고압선이나 돌이나 산삼이나 전원주택으로 보는 시각이 끊긴 곳에서 드러나는 그 무엇일 뿐이다. 그런 잡다한 시각이 끊긴 곳에서 '침묵'이 유령처럼 등장한다. 그 침묵의 유령만이 감춰진 산의 진실을 영접할 수 있다. 그 사람은 산을 어떤 특정한 소유적 시각으로 제한하지 않고 그저 한마디 할 뿐이다.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다." 산의 진실은 우리가 정하지 않고 산이 스스로 드러낸다. 드러나는 그것은 산을 산이게 하는 것으로서 산에만 있는 성스러움이다. 이 성스러움은 침묵의 간이역에만 등장한다. 당연히 침묵은 또 외부의 성스러움을 영접할 수 있는 준비다. 그런데 침묵으로 외부의 성스러움을 받아들여본 사람은 또 자신의 성스러움을 깨우지 않을 수 없게 된다.이태리 가서 메디치 가문을 보고 온 부자들이 많다. 메디치 가문에 대해서는 이태리 사람보다도 더 많이 알기도 한다. 세 번을 보고 왔다는 사람도 만난 적이 있다. 그들은 메디치 가문을 보고 이해하는 대열 속에서 계속 경쟁적으로 '전진'한다. 그런데 메디치 가문을 세 번이나 보고 와서 그 사람은 무엇이 달라졌는가. 메디치 가문에 대한 지식이 증가한 것 외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다. 메디치 가문을 구경하는 '전진'만 있었지 '역진'으로 선회할 '침묵'을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침묵'을 경험하면 '역진'으로 선회하여 내가 내 나라에서 할 수 있는 메디치 가문 같은 역할은 무엇일까를 고민한다. 이 반성만이 그를 다시 태어나게 할 수 있다. 그가 다시 태어나면서 그가 속한 사회도 비로소 달라진다. '전진'하던 사람끼리 공유하는 문법과 언어의 잡다한 수다를 끊고, 스스로 무리에서 이탈하여 고독 속으로 자폐하는 것이다. 그 자폐의 통증을 동력삼아 '역진'하여 그는 아직 열리지 않은 새 세상의 문고리를 잡는다. '역진'의 기운이 꿈틀대는 '침묵' 속에서 삶이 확장성을 회복한다. 자신의 감춰진 성스러움이 서서히 현현한다. 이제 무엇인가를 그려서 변화를 야기하는 가장 인간적인 인간이 되는 것이다. 인간을 인간으로 활동할 수 있게 해주는 바로 그 힘은 인간에게는 성스러움 그 자체다. 그러니, 인간은 '침묵'의 간이역에서만 성스러워질 수 있다. '침묵'은 스스로를 성스럽게 하는 힘이자 외부의 성스러움을 영접하는 장치다.장자는 말한다. "참된 인간(眞人), 즉 무엇인가 그려서 변화를 야기하는 인간, 창의적 인간, 모험하고 도전하는 인간의 모습은 고요하다. 외부 세계를 소유적 시각으로 제한하지 않으니 어디에 갇혀있는지 알 수가 없다."(是之謂眞人. 其容寂…與物有宜, 而莫知其極. 『莊子·大宗師』) 참된 인간은 고요하게 침묵을 지나간다. 침묵은 자신의 성스러움을 드러내며, 외부의 성스러움을 영접한다. 여기서 위대함이 자란다. 새 세상을 꿈꾸는 자, 우선 침묵하라./최진석 서강대 철학과 교수·건명원 원장·섬진강 인문학교 교장송필용作 '침묵' /광주일보 제공최진석 서강대 철학과 교수·건명원 원장·섬진강 인문학교 교장

2017-12-04 경인일보

[최진석의 노장적(老莊的) 생각·12]성스러움, 불편을 자초하기

같은 이야기 들어도 반응 달라주장·행동 일치하는가 하면각각 따로인 자들도 있어그 사람만의 '바탕' 다른 탓제대로 살려면 노고 감당해야불편의 최고 단계 '장애' 내면화본바탕, 존재의 근본 '德' 작동'덕' 지키는 게 자신 키우는 것내면 속 '깊은 고요' 간직할때경박함 흡수하는 중후함 일고타인 압도하며 비범함 생겨나불편·장애 자초하지 않고는德의 활동 '성스러움' 얻을수 없어'시민'으로 사는 일도 마찬가지몇 마디 말을 나눠보지도 않았지만, 괜히 믿음이 가는 사람이 있다. 많은 말을 나누고도 뭔가 허전한 느낌만 남기는 사람이 있다. 여럿이 모여서 어떤 일을 결정할 때 마지막 매듭을 짓는 역할을 하는 사람이 꼭 있다. 강의를 듣고 나서 강의 내용을 물고 늘어져 자기 멋대로 다음 이야기를 구성해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강의 내용을 기억하는 데에만 집중하는 사람도 있다. 물론 듣고 나서 죄다 흘려보내버리는 사람도 있다. 똑같은 내용의 얘기를 들어도 사람마다 반응은 모두 다르다. 같은 내용에 각자 다른 반응을 하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무엇 때문에 사람들은 같은 일에 각기 다른 깊이로 반응하는가? 인간으로서 가지고 있는 근거, 즉 그 사람만의 바탕이 다르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들이 쓰레기를 함부로 버리는 일에는 분개하면서 정작 자신은 쓰레기를 버리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가 하면, 다른 사람들이 쓰레기 버리는 일을 탓하지 않고 묵묵히 봉지 하나를 들고 집을 나서는 사람도 있다. 기차를 탔을 때 전화가 오면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통로로 나가 받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안하무인격으로 앉은 자리에서 전화 통화를 하는 사람도 있다. 다른 사람의 글을 분석하고 비판하는 것으로 날을 새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묵묵히 마음을 내려놓고 자신만의 글을 쓰는 사람이 있다. 밖에서는 민주를 외치지만, 집에 오면 독재자로 변하는 사람도 있다. 책을 읽을 때 질문이 마구 샘솟듯이 일어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책 내용을 수용하기만 하는 사람도 있다. 환경 보존을 외치면서 일회용 컵이나 접시들을 마구 쓰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철저히 자제하는 사람도 있다. 주장과 행동이 일치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각각이 따로인 사람도 있다. 무엇 때문에 이렇게 달라지는가. 인간으로서 가지고 있는 근거, 즉 그 사람만의 바탕이 다르기 때문이다. 내 집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교회가 있다. 일요일이면 교회에 나오는 사람들이 끌고 온 차들 때문에 주변 도로의 교통 상황은 엉망이 된다. 도로 양쪽에 모두 불법주차를 하는 바람에 상당한 거리의 차도가 극심하게 좁혀져서 오가는 데에 여간 불편한 것이 아니다. 교회에 나와 모두 이웃 사랑에 관한 설교를 듣고 결심하고 다짐하는 일을 하느라 이웃에 큰 폐를 끼친다. 이웃을 사랑하는 그 다짐과 이웃에 폐를 끼치는 일 사이에는 도대체 무엇이 있는가. 제대로 사는 일. 힘들고 불편하다. 쓰레기 함부로 버리는 일을 비판하기는 쉽고, 자신이 직접 그것들을 줍는 일은 힘들다. 이웃은 아랑곳하지 않고 편리를 위해 차를 끌고 오는 것은 쉽고, 이웃에 폐를 끼치지 않기 위해 걷거나 대중교통을 이용해서 오면 불편하다. 이웃 사랑을 말하기는 쉽다. 그것을 실천하려면 반드시 일정 분량의 불편과 노고를 감당해야 한다. 일회용 물건을 쓰기는 쉽고, 그것들을 안 쓰기 위해서는 자신만의 컵을 가지고 다니는 등의 불편을 감수해야 한다. 기능적인 일은 쉽다. 사람의 본바탕이 작동하는 일은 어렵고 불편하다. 대답은 기능적 활동이고 질문은 그 사람에게만 있는 내면의 호기심이 발동하는 일이라 인격적 활동에 속한다. 당연히 질문은 어렵고 대답은 쉽다. '따라 하기'는 쉽고 창의가 어려운 이치다. 우리는 쉬운 쪽으로 쉽게 기울게 되어 있어 질적인 상승이 더디다. 그래서 제대로 사는 일은 언제나 어렵기만 하다. 간단히 정리하면, 인간으로서 제대로 사는 일은 스스로 불편을 자초하는 일과 같기도 하다. 불편의 최고 단계인 '장애'의 지경으로까지 끌고 가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다양한 수행의 모든 과정은 사실 '불편'한 것들로 짜여 있다. '장애'를 내면화하여 그것과 일치되는 경험을 유도한다. 불편과 장애와 한 몸이 되는 단계에서 인간의 본바탕이 구출되곤 한다. 편하고 자극적인 기능에 갇히지 않고 '장애'의 상태를 자초하면서 성숙은 시작된다.아주 오래전 중국 노(魯)나라에 형벌을 받아 발 하나를 잘린 왕태(王 )라는 사람이 있었다. 덕망이 높아서 따르는 제자가 공자만큼이나 많을 정도였다. 공자의 제자 가운데 한 명인 상계(常季)가 공자에게 묻는다. "왕태는 외발이 장애자입니다. 그런데도 따르는 제자 수가 선생님만큼이나 많습니다. 그는 가르치는 것도 없고 토론도 하지 않는데, 빈 마음으로 찾아갔다가 무언가를 가득 얻고 돌아간다고들 합니다. 그는 과연 어떤 사람입니까?" 공자가 답한다. "그분은 성인이시다. 나도 찾아뵈려했지만 꾸물대다가 아직 뵙지 못했을 뿐이다. 나도 그분을 스승으로 삼으려 하는데, 나만 못한 사람들이야 더 말해 무엇 하겠느냐. 노나라 사람뿐이 아니라 온 천하 사람들을 다 데리고 가서 그를 따르려 한다." 장애인인데도 모두 그를 따르려 한다면 도대체 그 사람은 어떤 마음가짐을 가진 것인지를 상계가 묻자 공자는 '근본'을 지키고 있다고 말해준다. 왕태는 자신의 지혜로 자신의 본마음을 터득한 것이다. 이에 상계가 또 묻는다. "자신의 지혜로 자신의 본마음을 터득했을 뿐인데 왜 모든 사람들이 그를 따르는지요?" 그러자 공자가 답한다. "사람은 흐르는 물을 거울삼지 않고 잔잔하게 가라앉은 물을 거울삼는다. 올바른 본심은 뭇사람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다."(『장자·덕충부』) 도가에서는 이런 본마음, 즉 존재의 근본 상태를 '덕'(德)이라고 표현한다. 덕이 있는 사람은 타인을 압도하는 힘을 갖는다. 타인들은 이 사람을 추종하고 싶어 한다. 중후함이 경박함을 흡수하는 이치다.기능적인 활동에 갇힌 사람은 편한 것을 추구하며 가벼운 잡담과 비교 욕망에 빠져서 자신의 본바탕을 놓치고 가볍게 흔들린다. 하이데거는 이런 상태를 "존재자에게서 존재가 빠져 달아나버렸다"고 말한다. 가벼운 기능과 비교와 잡담에 빠져 인간으로서 가져야하는 성스러운 어떤 본바탕을 상실하였다고 비판한 것이다. '장애'의 상태를 자초하여 불편을 감수하면서 '덕'이라고 불리는 본바탕을 지키는 것이 자신을 키우는 일이다. 이 '덕'의 유지가 바로 인간을 기능적 활동에서 벗어나 본래적인 인간으로 서게 만든다. 기차 안에서도 전화가 오면 전화를 받는 기능에 빠지지 않고 인간으로서 품격을 유지하기 위해 통로로 걸어 나가는 불편을 감수한다. 교회에 갈 때 이웃에 폐를 끼치지 않기 위해 차를 몰고 가지 않는 불편을 스스로 받아들인다. 아는 것에 매몰되지 않고 모르는 곳으로 넘어가려고 불편한 몸부림을 친다. 이렇게 하면 자신의 질량이 커지고 또 커져서 다른 가벼운 것들을 제압하는 힘을 갖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매력이고, 존경을 유발하는 요소다. 장애인 왕태가 존경을 받고 수많은 추종자를 거느린 이유다.또 아주 오래 전 중국 고대의 위(衛)나라에 애태타(哀 )라는 추남이 살고 있었다. 그와 함께 지낸 남자들은 그 곁에서 떠나지 않으려 하고, 그를 본 여자들은 다른 이의 아내가 되느니 차라리 그의 첩이 되겠다고 한다. 그는 자기 의견을 내세우지도 않고 늘 다른 이에게 동조할 뿐이었다. 군주의 자리에 있어서 죽음의 위기에 처한 사람을 구해준 것도 아니고, 쌓아둔 재산으로 남의 배를 채워준 것도 아니었다. 게다가 그 흉한 몰골은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할 정도다. 지식도 사방 먼 곳까지 미칠 정도는 아니다. 그런데도 많은 남녀가 그를 따르려 모여드는 까닭은 무엇인가? 장자는 이것을 온전한 덕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드러나게 하지 않는[德不形] 깊은 내공 때문이라고 한다.(『장자·덕충부』) '덕'을 갖추고 있음에도 드러내지 않는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비유하여 말하면 물이 잔잔하게 멈추어 수평을 이룬 상태다. 안에 깊은 고요를 간직하고 출렁이지 않는다. 덕이 출렁출렁하게 드러나지 않을 정도가 되면 사람들은 거기에 이끌려 떨어질 수가 없다는 것이다. 외적으로 출렁이는 모습은 기능에 갇혀 경박하게 움직이는 모습을 말한다. 쓰레기를 버린다는 비판을 하면서도 자신 역시 버리는 이중적 가벼움 같은 것이다. 아는 것을 지키기만 하지 모르는 곳으로 넘어가려는 지적 부지런함을 발휘하지 못하는 모습이다. 눈앞의 편리함을 위해 공공의 책임감을 포기하거나 불편을 감수하지 않으려는 경박함이다. 이런 경박함을 버리고 불편함을 감당하며 인간으로서 품격을 지키려고 노력하는 자가 덕이 있는 자다. 여기서 매력과 존경이 생길 뿐 아니라 비범하고 특별하며 위대한 일들도 덩달아 일어난다.하이데거의 "존재자에게서 존재가 빠져 달아나버렸다"는 문장에서 '존재'는 바로 존재자의 고향이자 '덕'이 활동하는 곳이다. 가볍고 번잡한 기능들을 지배하는 힘을 가진 비밀스런 곳이자 일상 속의 다양한 이중성 속에서 인간으로서 더 나은 선택을 하는 힘이 드러나는 곳이다. 창의적이고 비범하며 특별한 일들이 시작되는 곳이다. 그래서 '존재', 즉 '덕'의 활동은 성스러운 것이라 할 수밖에 없다. 여기서 사는 사람을 우리는 인간 가운데 가장 뛰어난 자, 즉 '성인'(聖人)이라고 부른다. 왕태나 애태타는 존재자에게서 존재가 빠져 달아나지 않게 하고 그것을 잘 지킨 사람들이다. '불편', 심지어는 '장애'적 상황을 피하지 않고 오히려 감수한 사람들이다. 경박하지 않고 성스러운 삶은 스스로 '불편'과 '장애'를 자초하지 않고는 얻을 수 없다. 시민으로 사는 일도 마찬가지다. 불편을 자초하며 경박함을 벗어나면서라야 비로소 가능하다. 그것을 우리는 시민의식이라 하지만, 사실은 인간으로서의 성스러움을 지키려는 태도다. 성스러운 삶은 불편을 감수하거나 자초한다./최진석 서강대 철학과 교수·건명원 원장·섬진강 인문학교 교장송필용作 '덕(德)' /광주일보 제공최진석 서강대 철학과 교수·건명원 원장·섬진강 인문학교 교장

2017-11-06 경인일보

[최진석의 노장적(老莊的) 생각·11]무엇인가를 그려서(文) 변화를 야기(化)한다

진사 관직 버린 재야학자 황현식자인(識字人)의 비통함 담아경술국치일에 스스로 목숨 끊어삶 지배 '문자' 존재 의의 가치인간은 무언가를 생산 만들고변화 일으키는 '문화적 존재'문화력 높은 나라가 앞서창의력 발휘해 '새 세상' 열거나누군가는 '그 결과' 수용하기만독립 또는 종속, 여기서 결정돼우리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건물명·가요… 외국어 투성이독립적 소화 '2차 개념화' 못해자신의 문자로 세계 전략화해야한반도 남쪽 구례 땅에 황현(黃玹 1855~1910)이라는 사람이 살고 있었다. 호는 매천(梅泉)이다. 그는 20대에 큰 뜻을 품고 상경하여 과거 시험을 보았는데, 초시(初試)에서 첫째로 뽑히고도 전라도 시골출신이라는 이유로 둘째로 내려앉혀졌다. 이로 인해 매천은 온 나라에 가득 찬 편견과 부패를 몸소 겪어보게 되었고, 바로 분기탱천하여 다음 시험은 보지도 않은 채 고향으로 내려가 버렸다. 그렇게 5년을 보냈다. 나중에 부친의 바람이 하도 간절하여 어쩔 수 없이 다시 상경해 생원회시(生員會試)에 응시했다. 장원 급제하여 진사(進士)가 된다. 34세의 나이에 성균관의 생원으로 활동을 시작했지만, 눈에 보이는 것이라고는 조금도 개선되지 않고 여전한 관료계의 부정부패였다. 이에 신물을 느낀 매천은 관직을 버리고 다시 귀향한다. 관리의 길을 포기하고 재야 학자로서의 삶을 선택한 것이다.매천이 초야에 묻혀 학문을 닦고 있을 당시 대한제국은 급격히 비극적인 상황으로 내몰렸다. 나라는 분열되어 통합하지 못했고, 당연히 국력은 서 있기도 힘들 정도로 약해졌다. 그러다보니 대한제국은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결정할 수조차 없었고, 한반도 온 천지에 '독립'이라는 단어가 설 자리는 반 뼘만큼도 보이지 않았다. 우리나라를 서로 차지하려고 중국과 일본은 전쟁을 일으켰다. 일본은 전쟁에서 이겼고, 우리는 일본의 손아귀로 넘어갔다. 나라가 사라져버렸다. 매천은 "반드시 죽어야 할 의리는 없지만, 나라에서 선비를 500년이나 길러왔는데, 나라가 망한 처지에 이르러도 죽는 사람이 없다는 것은 견딜 수 없다."는 말을 자식에게 남기고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그는 매천이라는 야인(野人)의 자격으로 쓴 비사( 史), 『매천야록』(梅泉野錄)을 남겼다. 고종1년(1864)부터 융희4년(1910년)까지의 47년을 담았다. 마지막 문장에서 비통함은 극에 이른다. "나라가 망했다. 전 진사 황현, 약을 먹고 죽다."(韓亡. 前進士黃玹, 仰藥死之.) 경술국치(庚戌國恥) 바로 그날이다. 그가 목숨을 끊기 전에 남긴 절명시(絶命詩) 한 편이 이 비참한 풍경에 겹친다. "새도 짐승도 슬피 울고, 산과 바다도 찡그리누나./ 무궁화 피는 우리나라는 이미 망하고 말았다./ 가을 등불 아래 읽던 책 덮고 지난날 돌아보니/ 세상에 글자 아는 사람 노릇 어렵기도 하구나."(鳥獸哀鳴海岳嚬/ 槿花世界已沈淪/ 秋燈掩卷懷千古/ 難作人間識字人) 이렇게 보면 매천은 글자(문자) 아는 사람, 즉 식자인(識字人) 노릇하느라 스스로 죽었다.대체 글자(字)니 문자(文字)니 하는 것이 무엇이어서 매천은 그것을 아는 사람 노릇하느라 목숨까지 내 놓았을까? 문자의 가치가 목숨에까지 올라가는 것이라면, 그것이 인간의 존재 의의와 붙어 있다는 말 아닌가. 문자를 잘 못 다루면 독립도 지키지 못하고, 문자를 아는 사람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하면 살아도 사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 되기도 하겠다. 그럼 문자라는 것은 도대체 얼마나 높이 있다는 말인가.인간은 자연이라는 세계에 내려와 무형 유형의 무엇인가를 만들고 제조하고 생산하여 변화를 야기한다. 무엇인가를 만들고 제조하고 생산하는 일을 '그린다'(文)라는 말로 포괄한다. 다시 정리하면, 인간은 가장 원초적인 의미에서 무엇인가를 그려서[文] 변화를 야기하는[化] 존재, 즉 문화(文化)적 존재다. 인간이 누리는 문명은 모두 제작하고 생산하는 문화적 활동의 결과다. 인간이 가장 근본적인 의미에서 문화적 존재라면 문화적 활동 즉 무엇인가를 제작하고 생산하여 변화를 야기하는 일의 효율성이 생존능력을 좌우한다. 어떤 의미에서 인간의 모든 활동은 이 문화력의 증진에 맞춰진다. 문화력의 증진이 바로 생존의 질과 양을 결정하기 때문이다. 당연히 문화력이 높은 나라는 앞서고, 문화력이 뒤처진 나라는 뒤따른다. 문화력에서는 '상징'하는 능력이 강한 힘을 발휘한다. 예를 들어 숫자가 있다. 숫자는 상징의 한 형태다. '2'를 보자. 구체적인 세계에 '2'라는 상징 기호에 해당하는 경우는 무한대로 많다. 무한대로 많은 그 경우들을 그냥 하나의 숫자 '2'로 모두 압축할 수 있다. 얼마나 편리한가. 숫자를 아는 사람은 무한대의 다양한 '2'의 모든 경우를 하나의 숫자로 압축하지만, 모르는 사람은 그 다양한 경우를 모두 형편에 따라 열거해야 한다. 이 편리함이 효율성을 보장한다. 더하기 빼기만 할 줄 아는 사람과 3차 방정식을 풀 줄 아는 사람이 있다. 둘 사이에는 상징의 높이가 다르다. 더하기 빼기의 높이보다 3차방정식이 높다. 더 높으면 더 큰 통제력을 가진다. 더 큰 통제력을 가지면 더 큰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 상징성이 높으면 높을수록 통제력과 영향력은 더 커진다. 예술은 예능에 비해 더 추상화되었다. 당연히 예술의 높이가 예능의 높이보다 높다. 그래서 예능의 높이에 있는 사람보다는 예술의 높이에 있는 사람이 더 큰 힘을 갖는다. 기능은 기술보다 추상화의 정도가 낮다. 기능은 기술보다 힘이 약하고, 기술은 기능보다 강하다. 이처럼 문화력은 결국 능력 혹은 힘으로 나타난다. 중요한 것은 '숫자'를 구성하는 내용이 아니다. 숫자를 생산하고 사용하는 바로 그 높이다. 문자는 문화 활동의 정점이자 문화 활동을 가능하게 하는 가장 근본적이며 효율적인 장치다. 문자는 문화력의 시원(始原)이자 정점이다. 문자에 있어서도 중요한 것은 개별 문자가 함축하는 내용을 살피는 일이 아니라 문자가 생산되고 유통되는 높이에 도달하는 일이다. 문자나 숫자는 그것이 담고 있는 내용보다도 그것이 상징하는 '높이'의 맥락에서 살펴져야 한다. 문화력이 생존 능력이나 높이를 결정한다. 여기서 사람이나 국가가 갈래지어진다. 누군가는 문화적 활동으로 변화를 야기하고, 누군가는 문화적 활동으로 야기된 변화를 수용한다. 변화를 야기한다는 말은 아직 열리지 않은 곳으로 이동한다는 뜻이다. 바로 창의적 활동이다. 문화적 활동이라면 당연히 창의적 활동을 동반할 수밖에 없다. 여기서 앞의 말을 달리 표현하면, 누군가는 창의력을 발휘해서 세상을 새롭게 여는데, 누군가는 창의적 결과를 받아들이기만 한다. 독립적인가 종속적인가 하는 것은 여기서 결정된다. 자유와 부자유가 갈래지어지는 곳도 바로 여기다. 문자를 안다는 것은 문화적인 활동이 일어나는 정점의 높이에 있다는 것이고, 그것은 또 독립적이고 자유로우며 창의적이라는 말과 같다. 매천은 식자인(識字人)으로 살기 어렵다는 말로 자신과 조국이 자유롭고 독립적이기 어려운 상황에 처했음을 밝힌다. 그는 점점 독립과 자유를 상실하고 종속성의 나락으로 빠져가는 조국과 자신을 발견한 것이다. 이것이 특별한 높이에 도달해 있던 한 지성인으로 하여금 죽음으로 '자존'을 지키게 한 이유다. 매천은 문자를 기능적인 도구로 이해하여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를 논하는 일에 빠져있던 학자가 아니다. 그는 문자가 인간 정신의 승화이자 문명의 정점에서 삶을 지배하는 것이라는 것을 철저히 인식한 매우 높은 자리에 선 사람이었다. 문자가 문화적인 높이에서 작동할 때 나오는 중요한 일은 개념 제조 능력, 즉 '개념화' 능력이다. 문자적인 높이에 있는 사람은 '개념화'를 하고,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개념화'의 결과인 '개념'을 수용한다. '개념화'는 인간이 세계를 전략적(전술적이 아님)으로 다루는 일이다. '개념화'는 바로 세계를 장악하는 일이다. 부연하면, 세계에 의미를 부여했다는 뜻이고, 그 개념을 매개로 새롭게 판을 짠다는 뜻이다. 그래서 개념을 제조하는 일은 창의적인 활동의 대표적인 한 유형이다. 이것은 자유롭고 독립적인 지위를 확보해나가는 매우 진보적인 상황으로 설명될 수 있다. 이와 달리 '개념'을 수입한다는 말은 개념 제조자가 벌인 판 속으로 기어 들어가서 그 의도를 받아들인다는 뜻이다. 동아시아에서 근대화의 주도권은 일본에 있었다. 과학, 철학, 세포, 해부 등등 근대를 상징하는 거의 모든 개념이 일본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으로도 알 수 있다. '개념화'를 하면 앞서고, '개념화'의 결과인 '개념'을 수용하기만 하면 뒤따르게 된다. 이렇게 되면, 남에 의해 이미 정해진 명제를 분석하는데 열심인 자신을 마치 명제를 만든 사람과 동격인 것으로 착각하며 자신을 속이기도 한다. 그러면서 이미 있는 것을 따르고 분석하고 이해하는 것으로 활동의 대부분을 채우며, 이것으로도 충분히 만족해한다. 이미 있는 것에 협조하거나 따라하는 것만으로도 만족을 얻는 삶, 종속적인 삶의 전형적인 형태다. 우리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우리는 우리의 문자 세계를 스스로 파괴하고 있다. 외부의 개념들을 따라 우리 삶을 꾸리는 것으로 만족해한다. 새로 지은 건물이나 아파트 이름은 죄다 외국말이다. 외국에서도 일상적으로 쓰이지 않는 라틴어로 짓기도 한다. 기본적인 소통도 안 되는 말들을 걸어놓고, 서로 바라보며 웃고 고개를 끄덕이는 일로 채워지는 삶이 어떻게 독립적일 수 있겠는가. 삶의 현장과 그 현장을 다루는 상징이 분리되어 있는 삶이라면 거기서는 어떤 문화적 생산성도 일어날 수 없다.삶과 개념이 분리된 상황에서는 삶의 현장을 자신의 경험으로 구체화해낼 수 없기 때문이다. 대중가요 안에 영어 몇 소절은 반드시 들어간다. 가수들 이름도 외래어 일색이다. 일본의 '오타쿠'는 그대로 한국의 '덕후'가 된다. 외부의 개념화 결과를 그대로 내면화 한다. 독립적으로 소화해서 최소한의 2차적 개념화도 시도하지 않는다. 창의적 결과가 터져 나오지 않는 일, 시민 의식이 약한 일, 지식과 이론을 수용만 하고 생산하지 못하는 일 등등이 모두 '문자'를 대하는 이런 일들과 따로 있지 않다. 매천은 문자를 아는 사람, 즉 식자인(識字人) 노릇을 못한다는 사실을 목숨과 바꿨다. 문자의 높이는 따라 하기를 넘어선다. 따라 하기로 여기까지 온 우리는 '식자인(識字人)'의 품위를 회복해야 한다. 비록 거칠고 투박하더라도 '문자'적 독립의 길을 걷기 시작해야 한다. 이제는 '개념'이 아니라 '개념화'다. 자신의 문자와 자신의 언어로 자신의 세계를 전략화 한다. 이것이 죽지 않고 사는 길이기 때문이다.『장자』(莊子)「추수」(秋水)편에 나오는 얘기다. 수릉(壽陵)에 사는 젊은이가 조(趙)나라의 서울 한단(邯鄲)으로 걸음걸이를 배우러 갔다. 그때는 그곳의 걸음걸이가 세계적으로 유명할 때다. 그런데 그 젊은이는 한단의 걸음걸이를 제대로 배우지도 못하고 오히려 자기 자신의 고유한 걸음걸이마저 잊어버려 나중에는 기어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최진석 서강대 철학과 교수·건명원 원장·섬진강 인문학교 교장송필용作 '우리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광주일보 제공최진석 서강대 철학과 교수·건명원 원장·섬진강 인문학교 교장

2017-10-09 경인일보

[최진석의 노장적(老莊的) 생각·10]희망은 길과 같다

큰 사람, 넓고 높은 시야 지녀공적인 '시대의 병'에 아파해개항 충격넘어 흥성기 일군 日그 중심엔 '요시다 쇼인' 있어근대 격동기 중국 '루쉰' 그 역할정권·정치 집단 차원 아닌미래 향한 '국가 어젠다' 제시현실보다 '고정된 생각'에 집착우매한 '아Q'들 이끌고"희망이란 땅 위에 길 같은 것" 묵묵히 '혁명의 길' 걸어장자 "길은 다녀서 생긴 것"분석·비판 일삼는 '구경꾼' 아닌열린 마음으로 새로운 발 디뎌야세계를 높은 시야로 넓게 보는 큰 사람은 자신에게 필요한 것을 찾으려 애쓰지 않고 시대의 병을 아파하며, 그 병을 치료하는 데에 헌신한다. 달리 표현하면, 자신이 필요로 하는 것과 시대의 병을 치료하는 일이 일치한다. 자신이 독립적으로 발견했지만, 그 병은 시대의 모두에게 해당된다는 점에서 공적(公的)이다. 또 온 몸을 바쳐 치료에 헌신하며 윤리 행위자로 등극한다. 그래서 큰 사람은 공적이고 윤리적 인격으로 우뚝 선다. 이런 사람이 진정한 의미에서 지도자다.문제는 시대의 병을 자신이 고수하는 생각의 틀에 맞춰 해석하고 치료하려 덤비면 오히려 해가 된다는 점이다. 이런 경우에 그 사람은 시야가 일단 높고 넓지는 않은 것이 분명하다. 그래서 높은 수준의 지식도 필요하고, 개방적이며 융통성 있는 심리상태도 필요하다. 게다가 병은 대부분 앓아본 적이 없는 새로운 것일 가능성이 크다. 굳고 철지난 마음으로 새롭게 등장한 병을 다루게 되면, 병은 치료되지 못하고 악화되거나 더 수선스러워질 수 있다. '텅 빈 마음'으로 시선을 새롭게 하여 새로 등장한 병을 대면하고, 그것을 치료하려 거기에 자신을 전부 던진 사람이 진정한 지도자다. 그런 사람을 가진 나라는 흥하고, 그러지 못하면 어려움에 처한다.일본은 미국에 강제 개항을 당하면서 충격과 어려움에 직면하고도 바로 수준 높은 차원에서 전열을 정비하여 근대의 흥성기를 구가한다. 이런 흥성으로 형성된 힘을 가지고 우리나라에게 씻을 수 없는 고통을 가했지만, 어쨌든 일본은 나름대로 탄탄하고 모범적인 국가로 성장했다. 물질문명의 발전은 정신문명의 발전 없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정신문명이 물질문명의 발전으로 이행되려면 여기에는 정신적 통합으로 빚어진 일치된 단결이나 공동의 선을 향한 협력이 필수적이다. 이것을 우리는 흔히 사회통합이라고 부른다. 일본은 시대의 병을 앓기 시작하자 바로 일군의 지식인들이 세력을 형성하여 치료에 돌입한다. 정점에 요시다 쇼인(吉田松陰)이 있었다. 요시다 쇼인이 일본의 근대를 이룩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무엇보다도 그는 다른 문화권과 다른 일본 만의 정신으로 간주되던 것을 다시 살려내어 '대화혼'(大和魂)이라는 일본 통합의 정신을 제시하였다. 그가 일본의 근대를 주도한 인물들을 배출한 것도 의미 있지만, 일본 정신을 통합하고 방향을 제시한 것이 가장 핵심이다. 이와 필적할 인물이 중국에는 누가 있을까? 근대 격동기에 중국인들을 통합할 '정신'을 형성한 사람은 누굴까? 나는 루쉰(魯迅)이라고 본다. 루쉰은 원래 의사가 되어 중국인들의 육체적인 병을 고쳐주려고 하다가 과거에 갇혀 깨어나지 못하고 있는 중국인들의 정신을 먼저 깨우치지 않으면 안 되겠다고 생각한 후 바로 의학 공부를 그만두고 문필가, 사상가, 혁명가의 길로 들어선다. 혁명은 외부와의 투쟁으로만 되어 있는 것 같지만 사실은 내부의 투쟁이 더 격렬하다. 혁명의 분열상은 혁명의 진행에 매우 치명적이지만 언제나 있는 일이다. 하지만 루쉰만은 그렇지 않았다. 그의 장례식이 이를 증명한다. 1936년 10월 22일에 치러진 그의 장례식은 중국 역사상 최초의 민중장(民衆葬)이었고 또 분열을 일삼던 문단도 이날만큼은 일치된 모습으로 모든 문학잡지가 일제히 추도호를 발행했다. 통합의 아름다운 행렬이다. 이때 루쉰의 시신은 '민족혼'(民族魂)이라 쓰인 하얀 천에 감싸졌다. 중국 혁명의 여정에 루쉰이 이뤄낸 정신적 통합과 방향 제시는 핵심적이며 또 결정적이다.요시다 쇼인이나 루쉰이 새로운 정신으로 나라를 통합해 미래로 끌고 나갈 수 있었던 이유는 그들이 국가가 가져야 할 수준의 어젠다를 가졌기 때문이다. 정권이나 정치 집단 차원의 어젠다가 아니라 국가 차원의 어젠다였던 것이다. 그들은 이 정권에서 저 정권으로 이동하자고 말한 것도 아니고, 이 세력을 저 세력으로 교체하자는 것도 아니었다. 더 높은 차원에서 이런 나라를 저런 나라로 만들자고 하며 미래 지향적인 어젠다를 제시하여 통합을 이뤘다. 높고 넓은 시선을 사용한 결과다. 통합을 이루려면 어젠다가 그 이전의 것들보다 높고 넓어야 한다.국가 수준에서의 어젠다를 제시하고, 그것을 삶 전체를 통해 추진할 수 있었던 힘은 젊은 시절부터 보인다. 무엇 때문에 그렇다고 말하는가? 바로 그들의 시선 자체가 시작부터 공적이고 윤리적이기 때문이다. 루쉰만 보더라도 의학을 전공으로 선택한 이유가 단순히 동포들의 병든 육체를 고쳐주는 것에 머물지 않는다. 심리적인 배경을 따지면 그가 의학을 선택한 것이 부친이 병을 앓다 세상을 뜬 것과도 관계가 없지는 않겠지만, 무엇보다도 높고 큰 틀에서 새로운 중국을 꿈꿨던 것으로 짐작된다. 왜냐하면, 그가 일본의 메이지 유신 성공을 관심 있게 보면서 그 성공의 출발선이 현대 의학에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이때 의학은 단순하게 특정한 한 분야의 학문이 아니었다. 국가 개혁이 시작되는 지식의 원천이었다. 그래서 루쉰은 의학을 자신이 전공해야 할 학문으로 선택한 것이다. 그런데 극적인 전환은 의학을 공부하는 과정에서 나온다.루쉰이 듣던 과목 가운데 세균학이 있었다. 환등기를 사용하여 세균의 모습이나 움직임을 보면서 수업을 했는데, 시간이 남을 때는 시사성이 있는 영화를 보여주기도 했다. 내용이란 것이 대부분은 일본이 러시아와의 전쟁에서 승리하는 다양한 동정들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영화 속에서는 러시아군의 밀정 노릇을 하다 붙잡힌 중국인들이 일본군에 의해 처참하게 처형되는 장면이 나왔다. 그런데 그 처참한 처형 장면을 구경하는 사람들은 대부분이 중국인들이었고, 게다가 동포가 처참하게 죽어가는 것을 빙 둘러싸서 구경하는 것도 모자라 그들 가운데 일부는 박수치고 환호까지 하였다. 이 장면을 본 루쉰은 비통한 충격에 휩싸인다. 내가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다. 직접 루쉰의 말을 들어보자. "그때 이후로 나는 의학이 전혀 중요하지 않은 일이라 생각하게 되었다. 우매하고 연약한 국민은 체격이 아무리 온전하고 건장하다 하더라도 아무 의미 없는 시위의 구경꾼밖에 될 수 없고, 병사자가 아무리 많다 해도 이를 불행이라 여길 수가 없다. 따라서 우리 중국인에게 가장 중요하고 시급한 것은 정신을 뜯어고치는 것이고, 정신을 뜯어고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문학예술에 힘써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문학예술운동을 제창하게 된 것이다."(『喊』「自序」) 얼마나 큰 충격을 받았는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그 결과로 루쉰은 스스로의 인생행로를 전혀 다른 각도로 바꾼다. 루쉰도 말한다. 우매하고 연약한 국민은 바로 구경꾼으로 전락한다. 자기 자신의 생명이 좌우되는 일에서마저도 구경꾼 역할밖에 하지 않는다. 구경꾼들은 비판하고 분석하는 데에 재능을 발휘한다. 그리고 분석 비판 이후에는 할 일을 다 했다고 스스로 인정하면서 진실한 삶을 살고 있다고 자인하며 도덕적 우월감을 갖기도 한다. 그 우월감은 자신을 정당화하는 데에 매우 효용적이다. 그래서 언제나 자신은 자신에 옳은 사람으로 남는다. 물론 다른 사람들에게는 비웃음을 사지만, 자신은 알지 못하고 또 알더라도 인정을 하지 않는다. 루쉰의 고뇌는 늙고 병든 중국이 이런 구경꾼들로 채워져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는 구경꾼이면서 또 스스로를 도덕적으로 옳은 사람으로 조작해버리는 우매한 사람을 '아Q(阿Q)'라 이름 지었다. 루쉰이 보기에 당시 중국인들은 모두 '아Q'들이었다. 『아Q정전』(阿Q正傳)의 앞부분에 나오는 대목이다. "건달들은 그것도 모자라서 그저 그를 놀려대며 마침내는 손찌검까지 했다. 아Q는 형식상으로는 졌다. 건달들은 그의 노란 변발을 휘어잡고 담벼락에 소리가 나도록 네댓 번 머리를 짓찧었다. 놈들은 그제야 이겼노라고 흡족해하며 가버렸다. 아Q는 잠시 멍하니 서서 이렇게 말했다. '아들놈에게 얻어맞은 셈이야. 요즘 세상은 정말 말이 아니야.' 그리고는 흡족해하며 의기양양하게 돌아갔다." 아Q는 건달들에게 모욕을 당하고도 아들놈에게 얻어맞은 꼴로 바꿔버린다. 이것을 '정신승리법'이라고도 하는데, 아비를 때린 아들이 나쁜 놈이기 때문에 나쁜 아들의 역할을 한 건달들이 나쁜 놈들이므로 자신은 오히려 선을 지탱했다는 것이다. 결국 이긴 거나 다름없는 것으로 해석해버린다. 현실에서의 패배를 정신적인 승리로 바꿔서 자위하는 비굴한 모습이다. 루쉰은 아Q를 통해 외세에 늘 시달리면서도 외세를 멸시하고 게다가 스스로 조작한 우월감이나 안정감 속에 빠져 있는 그의 조국을 신랄하게 비판한다. '아Q'들은 펼쳐지는 판을 자신의 방식대로 혹은 자신이 해석하고 싶은 대로, 더 나아가서는 자신의 기대에 따라서 해석한다. 심리적 기대를 객관적 사실로 착각하는 것이다. 이런 비판을 가한 루쉰의 가슴은 쓰리고 아팠을 것이다. 그런데 혹시 지금 우리에게 '아Q'는 전혀 없을까?구경꾼들은 대개 구체적인 현실보다는 가지고 있는 고정된 생각에 더 집착한다. 현실은 두텁고 유동적이지만, 고정된 생각은 얇고 고정적이다. 얇고 고정적인 생각으로 현실을 지배하려다 보면, 항상 현실에는 삐져나오는 부분이 있을 수밖에 없다. 이 여분의 현실은 '정해진 생각'의 제어 능력을 벗어난다. 여기서 해결할 수 없는 부분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 유일한 방법은 정당화, 정신승리법 밖에 없다. '아Q'가 정신승리법에 빠져 있는 이유다. 그런데 혹시 지금 우리는 정신승리법으로 버티는 아Q와 닮은 점이 하나도 없을까?요시다 쇼인이나 루쉰은 모두 '아Q'로 살지 않으려고 발버둥친 사람들이었다. '아Q'들을 끌고 새로운 세상을 향해 봉우리를 넘으려고 거친 길을 죽어라 걸었던 사람들이다. 그리하여 자신도 해방되고, 민중들도 해방시켰다. 루쉰이 20여 년 만에 정들고 추억에 젖은 고향에 돌아와 보니 고향 사람들은 여전히 구태의연하고 우매하였다. 하지만 그는 그들을 버리지 못하고, 오히려 그들에게 희망을 걸고 묵묵히 혁명의 길을 걷는다. 그는 이렇게 심정을 토로한다. "희망이란 본시 있다고 할 것도 아니고, 없다고 할 것도 아니다. 그것은 마치 땅위에 있는 길과 같다. 사실 땅에는 본래부터 길이 있었던 것이 아니다. 다니는 사람이 많아지다 보니 길이 생겨났다."(『故鄕』) "길은 사람들이 다녀서 생긴 것이다"(『장자』「제물론」)는 장자의 말이 루쉰에게까지 닿아있다. 넓고 큰 시야를 가지고, 먼저 발을 내디딜 것인가, 아니면 분석과 비판을 일삼으며 구경만 할 것인가. 뜻이 있다면, 나라를 보라. 그리고 구경꾼 무리에서 빠져 나와 갇히고 고정된 마음이 아니라 미래로 활짝 열린 마음으로 두려운 첫 발을 내딛자./최진석 서강대 철학과 교수·건명원 원장·섬진강 인문학교 교장송필용作 '통합' /광주일보 제공최진석 서강대 철학과 교수·건명원 원장·섬진강 인문학교 교장

2017-09-11 경인일보

[최진석의 노장적(老莊的) 생각·9]번잡한 세속과 순수함

제물론서 구작자가 묻기를"이익 좇지 않고 추구함이 없고이런식으로 세상 밖서 '유유자적'이것이 최고 수준의 '성인'인가?"장오자 "'도(道)' 실천하는 것은만물과 어그러지지 않고오랜 세월 세상사 섞여있으면서자신만의 순수함 지키는 것"고유한 특질 '자기(自)' 굳건하면 어느 한 쪽으로 쏠리지 않아한 가지 기준에 나를 고정시켜우주 운행에 방해를 주면 안돼진짜 자유인, 자연 이치 깨닫고자신을 관조하며 천천히 움직여이 세상의 일을 열심히 하면바로 여기서 저 세상이 구현돼철이 나기 전, 아주 어릴 적에 참으로 얼토당토않은 생각을 잠깐 한 적이 있다. 출가(出家)를 하면 어떨까? 출가를 해볼까? 원래 출가의 근기를 타고 난 사람이라면 절대 입 밖에 내지 않고 혼자만 품은 채 열병을 앓고 또 앓다가 결행하기 직전에 공표하였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가볍기가 한량없어서 생각이 들자마자 몇 밤도 넘기지 못하고 어머니에게 말해보았다. 초여름의 이른 오후였다. 적당히 데워진 마룻장에 등을 대고 누워 어머니를 빤히 쳐다보며 종알댔다. 그런데 의외로 어머니께서 내 말을 너무 진지하게 듣고 놀라시자 얼른 포기했다. 훗날 어머니는 내가 등산 가는 것도 싫어하셨다. 저 높은 산에 들어가 어머니 본인이 살고 계시는 낮고 거추장스런 이곳으로 내려오지 않을까봐 걱정하셨던 듯하다. 당신이 낳고 당신이 기르면서도 그 아들의 성정이 얼마나 폴폴 가벼운지는 내내 모르셨던 것 같다. 자식에게 사랑과 기대만 퍼부으시느라 정작 본바탕을 애써 외면하셨던 그런 분을 괜히 괴롭혀 드렸다. 그렇게 하여 나는 성불(成佛)의 길보다 효자(孝子)의 길을 택했다. 성불은 저 먼 곳에서 빛나는 이상적인 달관의 경지로 보였고 효자는 구구절절 생활의 때가 묻은 이곳의 일 같았다. 그 뒤로 내 어깨와 견줄만한 높이에 있는 것들은 어쩐지 하찮고 심드렁했다. 아주 특별하고 높은 곳에서만 빛나는 어떤 것을 포기한 사람이 갖는 약간 비굴해진 느낌이랄까. 그것을 감추느라 내 어깨 아래의 삶 속에서 얼마간은 더 뻣뻣했는지도 모르겠다. 효성은 어쩐지 땔감들 사이를 직선으로 헤집고 들어와 잠든 먼지들을 다 깨워놓은 석양빛 드는 부엌의 아궁이에서나 일어나는 평범하고도 평범한 일 같았다. 밥은 나오지만 눈길은 머물지 않는… 어쩔 수 없이 한동안 내 눈길은 차라리 파르스름한 빛이 남몰래 감도는 젊은 탁발승의 쓸쓸한 '삭발'에 닿으려 했다.노자나 장자를 많이 읽는다는 것을 아는 친구들은 내게 항상 크고 특이한 얘기들을 듣고자 했다. 일상의 규칙들을 무시하면 더 환호하고 내가 학문적으로 이해한 것을 몸소 실천까지 한다고 인정해주기도 했다. 시험을 열심히 준비해도 친구들은 노장(老莊) 학도답지 않다고 했다. 성공하고 싶어 하는 마음이 조금이나마 비치면 장자의 소요유(逍遙遊)를 배운 사람이 왜 그러냐고 했다. 신발과 옷가지만 남기고 홀연히 사라져버리는 성선(成仙) 차원 정도의 얘기는 되어야 다들 만족했다. 볕이 낮게 들어오는 봄날 오후, 어느 맥줏집 창가에 앉아 수업에 들어가지 않은 날이었다. 먼저 일어서면서 친구들은 나를 널리 이해한다는 뜻으로 말했다. "쟤는 도가 철학을 하니까 저래. 괜찮아." 이 일탈은 도가 철학과 아무 상관없다. 게으름이자 방종일 뿐이다. 그저 각자 한 편으로 치우쳐 있는 사람들끼리의 부족한 교류였을 뿐이다.구작자(瞿鵲子)라는 사람이 있었다. 이름에는 깜짝 놀라 이리저리 두리번거리는 까치라는 의미가 들어있다. 장오자(長梧子)라는 사람이 있었다. 아주 오래 산 오동나무라는 뜻을 가졌다. 오동나무[梧]는 깨달음을 나타내는 글자인 '오'(悟)자와 발음이 같아서 가끔 섞어서 쓰기도 한다. 여기서 장오자는 깨달음에 이른 도가적 인물을 나타내고, 구작자는 아직 거기에 이르지 못한 사람, 즉 유가적인 인물을 나타낸다. 구작자가 장오자에게 이렇게 묻는다. "제 스승에게서 들은 얘깁니다만, 최고 높은 수준에 이른 사람인 성인은 세상일에 빠지지 않고, 이익을 좇지 않으며, 해가 닥쳐도 피하지 않고, 무언가 추구하는 것도 없고, 정해진 길을 따르지도 않고, 말을 하지 않아도 무언가 말해지고, 말하지만 사실은 아무것도 말한 바가 없으며, 이런 식으로 하면서 이 세상 밖에서 유유자적 한다고 합니다. '도'(道)를 실천한다면 이 정도는 되어야 된다고 생각하는데, 이 얘기를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여기에 장오자는 이렇게 대답했다. "이런 말은 황제(黃帝) 정도 되는 사람이라도 알아듣지 못할 것이요. 그러니 당신 스승인 공자가 어찌 알 수 있겠소. 또한 당신도 이런 얘기를 '도'를 실천하는 말이라고 생각하는데 제가 보기에는 지나친 단견이오. 달걀을 보고 새벽을 알리기를 바라고, 탄알을 보고 곧바로 새 구이를 찾는 것처럼 급하오. 그냥 당신을 위해서 내 생각을 아무렇게나 말해볼까요? 그러니 편하게 아무렇게나 들어주시오. 해나 달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우주를 겨드랑이에 낀 채, 만물과 잘 맞아 서로 어그러지지 않고, 모든 것에 억지로 자기 뜻을 부과하지 않은 채 그대로 놓아두고, 가치 판단 기준으로 귀천을 나누지도 않소. 세상 사람들은 온 힘을 들여 힘들게 살지만 성인은 우둔하며, 오랜 세월 동안 세상사에 섞여있으면서도 자신만의 순수함을 지키고 있소."(『장자 · 제물론』) 가장 높은 경지나 깨달음 혹은 절대 성숙은 '이곳'을 떠나서 훨훨 높이 날아올라, 이곳과 전혀 다른 저 먼 곳의 어디에 안착해 있으면서 이곳을 내려다보는 어떤 것이 아니다. 장오자가 말하듯이 세상사와 함께 하면서 그것들과 어그러지지 않고 함께 나아가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함께 나아가면서 자신만의 '보물'만은 절대 놓치지 않는다. 그 보물을 장자(莊子)는 '순수함'(純)이라고 말했다. 바로 자신을 자신이게 하는 자신만의 고유한 특질인 것이다. 여기서 자신이 평생 수행해야 할 '사명'이 나온다. 그럼 자신의 '순수함'을 지키는 바로 그 '우둔한' 성인은 어떤 높이에 있는 사람인가. 장자는 말한다. "해나 달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우주를 겨드랑이에 낀" 정도의 사람이다. 지식이 되었든 사고의 폭이 되었든 감각이 되었든 간에 해나 달이나 우주의 높이 내지는 넓이에 닿아 있다는 뜻이다. 그런 후에야 세상사와 어그러지지 않을 사고의 두께를 가진 자로서 자신만의 편협한 잣대로 귀하고 천한 것을 나누어 세상을 대하지 않게 된다. 이것이 바로 장자가 말하는 '우둔함'이다. 자신만의 잣대가 없기 때문에 속세에서는 그를 바보나 우둔하다고 말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도시에서 지친 사람들은 오지의 발길 끊긴 산 속을 꿈꾼다. 그래서 많은 시간을 들여 숨어들 곳을 찾아 헤맨다. 도시에서의 일을 끊고 산 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승리로 여길지도 모른다. 그러나 자연 속이라도 자신만의 '순수함'을 지키지 못한다면, 방만과 게으름을 벗어날 길이 없다. 지력이나 감각이 꼭 '해나 달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우주를 겨드랑이에 낀' 정도가 될 것까지야 없겠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만 유지되어도 매일 동네 사람들과 어울려 술을 마시며 삼겹살을 구워먹는 한가한 유흥으로는 자유나 자족의 경지를 맛볼 수 없다. 자족이나 자유의 중심 자리는 항상 '자기'(自)가 차지한다. '자기'가 지켜져야 자연스럽기도 하고 자유스럽기도 하고 자족하기도 한다. '자기'가 지켜지지 않은 자유가 방종이고, '자기'가 지켜지지 않은 '자족'이 나태함이고, '자기'가 지켜지지 않은 '자연스러움'은 촌스럽다. 최종 승리의 길은 자신만의 순수함을 지키느냐 지키지 못하느냐가 결정한다. 자기가 굳건하게 지켜지는 사람은 절대 어느 한 쪽으로 쏠리지 않는다. 도시에 있든 시골에 있든 자신이 중심을 지키면 된다. 자기가 중심을 지키는 한 도시에서도 시골을 살 수 있고, 시골에서도 도시를 살 수 있다. 도시도 이상향이 아니고, 시골도 그 자체만으로는 절대 이상향이 아니다. 자기가 약한 사람은 도시에 있을 때 시골을 꿈꾸고, 시골에 있으면서 도시를 꿈꾼다. 자기의 순수함을 지키는 사람은 도시에 있건 시골에 있건 자신이 있는 곳에서 두 세계를 '우둔'하게 실현한다. 자아의 실현이나 완성은 장소에 좌우되지 않는다. 오히려 장소를 지배하는 자신의 사명이 결정적이다. 자기 자신만 가지고 있는 고유한 그 '순수함'이 바로 이상향을 좌우하는 손잡이다. '순수함'이 장소를 지배하게 해야 한다.인간의 삶은 따로 있지 않다. 유동적 우주에 섞여가는 한 형태인데,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닌 이상 그것 자체가 바로 우주적이다. 이런 점에서 자연과 인간은 분리되지 않는다. 인간성 안에 자연성이 들어있고, 자연성이 인간성의 토대다. 이렇다면 인간이 하나의 관점을 고집하며 자기 정체성(整體性)을 주장한다면 매우 정체적(停滯的)이거나 부분적일 수밖에 없다. 장자는 세계를 이렇게 묘사한다. "아지랑이나 먼지, 이는 하늘과 땅 사이에서 생물이 서로 입김을 내뿜는 현상이다. 이렇게 본다면 하늘이 새파란 것은 진짜 원래부터 그 색깔인 것일까? 아니면 멀리 떨어져서 끝이 없기 때문일까? 9만리 높은 하늘을 나는 대붕 또한 위에서 내려다보면 파랗게 보일 것이다."(『장자 · 소요유』) 야마(野馬)로 표현되는 아지랑이와 진애(塵埃)로 표현되는 먼지는 정해진 방향 없이 계속 움직인다. 정해놓은 방향이나 목적도 없이 그저 움직일 뿐이다. 왜 움직이는지 알 수 없다. 그것이 자연이다. 이것은 존재하는 모든 것이 서로 다른 방향으로 운동하면서 우주의 완결성을 이루는 것과 같다. 여기서 자유가 태어난다. 장자는 이 문장을 통해 특정 지점에서 결정되는 관점의 기능을 철저히 무화시킨다. 하늘은 여기서 올려다 볼 때만 파란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렇기 때문에 한 가지 기준으로 나를 고정시켜 우주 운행에 방해를 주면 안 된다. 이것이 우주적 원리이고 거대한 성취가 시작되는 출발점이다.이제 나는 조금이나마 알게 되었다. 이 세상의 일을 열심히 하면 바로 여기서 저 세상이 구현된다는 것을. 저 세상은 따로 분리되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진짜 자유인은 도시에 살면서도 자연의 이치를 깨닫고 자신을 관조하며 천천히 움직이는 사람이란 것을. 원수를 사랑하는 일이 왜 나를 살리는 일인지를. 용서하고 용서 받는 일이 왜 인간의 편협성을 벗어나는 우주적인 사건인지를. 서울 시내의 호텔과 나무 위의 새둥지가 그리 크게 다른 것이 아님을. 협력이라는 것은 나를 줄이고 반대하는 쪽을 수용하는 일이란 것을. 부엌 흙바닥에 쭈그려 앉아 석양빛을 모로 받으며 어머니를 위해 아궁이 불을 살리던 일이 바로 성불(成佛)의 길이었음을./최진석 서강대 철학과 교수·건명원 원장·섬진강 인문학교 교장송필용作 '순수' /광주일보 제공최진석 서강대 철학과 교수·건명원 원장·섬진강 인문학교 교장

2017-08-14 경인일보

[최진석의 노장적(老莊的) 생각·8]도전이 초월의 동력이다

지금의 나를 넘어 더 나아지는 것인간에게 '초월'의 욕구 있어자기 통제력의 두께로 '가늠'그 과정속 '역사적 학습' 중요해미국에 의해 강제로 문호 연 일본'탈아입구' 배우려는 자발적 열기22년만에 조선 개항시킬 힘 키워역사속으로 뛰어든 요시다 쇼인美 군함 밀항시도등 '도전' 열정日 근대 발전 '핵심 동력' 역할자신을 점점 높게 넓혀가면나 아닌 '시대의식' 집중하게 돼뒤돌아보지 않는 과감한 행보가'초월의 확장' 실현할 수 있어인간에게는 초월의 욕구가 있다. 초월이 다 언어를 벗어날 정도로 어려운 것은 아니다. 초월은 지금의 나를 넘어서는 것, 지금의 나보다 더 나아지는 것, 더 확장되는 것, 더 넓어지는 것, 더 높아지는 것 등등을 한꺼번에 가리켜 하는 말이다. 가장 높고 크게 확장되어 있는 존재로 인간은 일단 '신'(神)을 모셔 놓고, 부단히 그곳을 향해 나아가려 한다. 초월의 욕구다. 외재적 초월도 가능하고 내재적 초월도 가능하다. 내면으로도 가능하고 외면으로도 가능하다. 정신으로도 가능하고 물질로도 가능하다. 초월의 정도가 자기 통제력의 두께다. 통제력의 내용은 복잡 다단하게 현현한다. 얼마나 초월되었느냐가 얼마나 크게 통제력을 발휘할 수 있느냐를 결정한다. 개인적인 초월의 여정에 사회가 있고 국가가 있고 세계가 있고 우주도 있다. 여기에 환경도 있고 인권도 있고 자유도 있고 혁명도 있고 저항도 있고 역사도 있다. 학습도 바로 여기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한다.학습과 역사는 매우 밀접하게 붙어있다. 역사적 경험에서 학습에 성공하면 그 역사는 빛나고, 학습에 소홀하면 그 역사는 찬란하기 어렵다. 동아시아의 근대 역사는 서양 침탈로 시작한다. 서양에 대한 반응이 곧 동아시아 역사의 많은 내용을 차지할 수밖에 없다. 당연히 한국도 이렇다. 중국의 개항은 1842년 제1차 아편전쟁의 결과로 맺어진 난징조약이 시작이고, 일본의 공식적인 개항은 1854년 미일화친조약이 시작이다. 우리는 서양의 대리인 격인 일본에 의해 강제개항을 당하는데, 바로 1875년 일본이 강화 해협을 불법 침입하여 이듬해에 강제로 맺은 강화도 조약이 그 시발이다. 그러니까 일본은 미국에 의해 강제 개항을 당하고 나서 22년 만에 힘을 키워 다른 나라를 강제 개항시킬 정도가 된 것이다. 물론 강제 개항의 그 시점에 일본과 조선 사이에는 벌써 국력에서 큰 차이가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어쨌든 22년이다. 이 22년 동안 일본에서는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가. 바로 학습이다. 서양에 당하고도 그 서양을 배우려는 열기가 왕성했다. 이것은 "탈아입구"(脫亞入歐)라는 표어에 집약되었다. 이런 점은 중국도 마찬가지다. 중국도 영국을 필두로 한 서양에 굴욕을 당하고 나서 나라 전체가 "서양을 배우자!"("向西方學習")라는 구호로 가득 찼다. 조선은 굴욕을 당하고 나서 서양(일본)을 배우자는 자발적 열기가 성숙되지 않았다. 막부정권의 쇄국정책으로 일본은 220여 년간이나 닫혀 있었다. 1853년 7월 8일 오후 5시경 매튜 페리(Matthew C. Perry) 제독이 이끄는 미국 군함, 소위 흑선(黑船, 쿠로후네) 4척이 에도 앞바다에 들어오면서 일본은 엄청난 변화 앞에 직면한다. 쇄국을 유지하려는 막부와 개방을 요구하는 거대국가 미국과의 대결로 판이 전개된 것이다. 물론 막부가 전면적인 쇄국을 시행하면서도 네덜란드를 예외로 두고 서양 연결 통로를 열어둔다거나 1814년에 영일사전을 편찬한다거나 하는 등의 미래를 향한 개방적인 도전을 제한적으로나마 시행한 점이 훗날의 역사 발전에 큰 역할을 하였던 점도 눈여겨봐야 한다. 이때 시대적 사명감을 가진 예민한 지식인들의 투쟁과 학습에 대한 열망은 일본으로 하여금 '당황스런 새 판'을 적극적이고 생산적으로 맞이할 수 있게 하였다. 뜻있는 일본의 젊은이들은 도전적인 자세로 과감하게 역사 속으로 뛰어든다. 여기에 일본 발전의 핵심이 있다. 그들은 역사를 위하려 하지도 않았고 자신들의 조국을 위하려고 한 것도 아니었다. 바로 자신이 역사 자체가 되려 했고 자신을 '일본' 자체로 만들려 했다. 이들 가운데 앞장서서 스스로 일본의 '역사'로 완성되려 했던 젊은이가 그 시대의 중심에 살았다. 요시다 쇼인(吉田松陰)이다. 요시다 쇼인은 우리에게 큰 고통과 치욕을 안겨준 일제 식민지 침략의 이론적 근거인 정한론(征韓論)을 완성하고, 대동아공영론(大東亞共榮論)의 기초를 다진 장본인이다. 궁극적으로는 침략자 일본의 심장이다. 흑선을 직접 본 쇼인은 큰 충격에 휩싸인다. 그 전에도 서양 문명의 강대한 변화를 듣기는 했지만, 구체적으로 구미 열강과의 격차를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배도 대포도 적수가 안 된다'라는 위기감을 친구에게 편지로 쓸 정도였다. 그러나 기득권과 타성에 젖은 막부는 쇼인의 간언에도 불구하고 과감한 개혁을 도모하지 않았다. 답답한 마음에 강국을 직접 경험하고 싶어 마침내 시모다 항에 정박 중이던 미군의 함선에 접근하여 밀항을 시도하기까지 하지만 결국 실패하고 국법을 어긴 죄로 감옥에 수감된다. 출옥 후에도 일본의 미래를 향한 착실한 행보를 이어간다. 고향 하기(萩)에 쇼카손주쿠(松下村塾)를 운영하며 근대형 인재들을 배양하는 데에 힘을 쏟은 것이다. 3년 정도의 짧은 기간이었지만 여기서 배양된 인재들이 메이지 유신의 주역으로 성장하여 일본 근대를 튼튼하게 발전시킬 수 있었다. 우리에게 익숙한 이토 히로부미도 요시다 쇼인의 제자며, 아베 신조 현 총리도 가장 존경하는 인물로 요시다 쇼인을 들면서 그를 계승하는 일을 사명으로 하고 있음을 감추지 않는다. 심지어 이들은 쇼인이 강조했던 가르침을 좌우명으로 삼고 있기까지 하다.근대 이후로 일본과 한국의 국력 차이가 난 근본적인 이유를 한마디로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일본에는 요시다 쇼인이 있었고, 한국에는 요시다 쇼인 같은 인물이 없었다." 그렇다면 그의 내면에 있는 무엇이 '요시다 쇼인'을 만들었을까? 나는 가장 근본적인 요인을 밀항까지 감행했던 그의 도전 정신에서 찾는다. 도전은 '초월'의 동력이다. 도전을 하느냐 하지 않느냐가 밝고 강한 미래를 보장하느냐 하지 않느냐를 결정한다. 페리도 이 점을 주의 깊게 본 듯하다. 요시다 쇼인이 밀항하려고 그의 제자와 함께 군함에 접근한 것을 보고 페리는 말한다. "이 사건은 우리를 매우 감격시켰다. 법을 어기고 목숨을 걸면서까지 지식을 넓히려는 두 청년의 뜨거운 열정에 놀랐다.… 지금은 엄격한 법에 억눌렸지만 만약 모든 일본인이 이 두 젊은이와 같다면 일본은 미국만큼 강대해질 것이다."(Japan Expedition, 1854) 페리는 도전과 발전을 일치시켜 보는 안목이 있었고, 페리의 말대로 일본은 강대해졌다.최근에 14명의 한국 젊은이들과 함께 하기 시에 갔다. 하기 시의 거리 곳곳에는 요시다 쇼인의 제자들이거나 같이 활동했던 인사들의 포스터가 붙어있었다. 재밌게 그려진 캐릭터는 매우 친근감을 주게 되어 있었고, 그 아래에 쓰여진 업적들은 그들을 존경할 수 있도록 꾸며져 있었다. 일본은 승자임에도 불구하고 역사 학습의 지속성을 전혀 잃지 않고 있었다. 일본의 젊은이들은 이 역사속의 인물들과 그들의 업적을 어려서부터 매우 친근감 있게 받아들일 수 있게 되어있었다. 요시다 쇼인 빵도 있고 과자도 있고 책받침도 있다. 생활 속에서 역사를 학습하는 것이다. 우리는 어떤 역사를 일상 속에서 만날 수 있는가. 역사 학습이 사라졌다. 하기 시에 가려면 후쿠오카 공항을 거치는데, 그 도시에는 구시다 신사(櫛田神社)가 있다. 이곳은 일본 낭인들이 명성황후를 시해할 때 사용했던 칼이 보존되어 있는 곳으로 알려져 있다. 다른 신사와 마찬가지로 여기도 소원을 써서 걸어 두는 곳이 있는데, 거기에 한국인들의 소원패도 많이 걸려 있었다. 우리가 역사를 조금이나마 학습했다면, 어떻게 구시다 신사에다가 자신의 소원패를 걸 수 있겠는가. 일말의 자존심은 있어야 하지 않을까? 학습은 도전을 하게도 하지만 최소한의 기품을 지킬 수도 있게 해준다. 초월의 욕구는 자신을 점점 높고 넓게 확장하므로 시대 의식을 포착하게 한다. 그래서 뜻있는 사람은, 즉 초월의 욕구가 살아있는 사람은 자신에게 필요한 것을 찾으려 애쓰기 보다는 시대의 병을 함께 아파할 수밖에 없다. 시대의식에 집중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시대 의식은 나를 보편의 단계로 확장시키는 방아쇠다. 이 방아쇠를 당기는 일을 도전이라고 한다. 젊은이들과 얘기를 하면서 도전을 강조할 때가 있는데, 그 때 나오는 대부분의 질문들이 다음과 같다. "도전을 했다가 실패하더라도 사회에서 그 실패를 허용하거나 보살피는 시스템이 준비되지 않았다. 도전하다 실패하면 어떻게 하는가? 그 위험을 누가 책임지는가?" 도전, 모험 그리고 탐험을 말할 때는 항상 나오는 질문이다. 이것은 나의 매우 협소한 경험인데, 다른 나라 젊은이들에게 도전에 대해서 얘기하고 나면 다음과 같은 질문이 나오곤 했다. "도전이 중요하다는 것은 알겠다. 그런데 내게 도전하려는 마음이 생기지 않으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어떻게 하면 도전할 마음이 생기는가?" 초월의 견지에서 볼 때, 도전해서 실패하였을 경우를 걱정하는 질문과 도전할 마음이 생기지 않을까 걱정하는 질문 사이에는 질적인 차이가 크다. 도전은 우선 뒤를 돌아보는 조심성이 결여되어 있어야 미덕이다. 이런 미덕이 갖춰져 있어야만 '초월'의 확장이 실현된다. 학습을 통해 두텁고 두터워진 존재는 뒤를 돌아볼 필요가 없다. 그가 당기는 도전의 방아쇠는 역사의 순방향에 조준되어 있을 것이 거의 분명하기 때문이다. 긴 시간 스스로 역사가 될 준비를 진실하게 한 사람은 항상 옳다. 스스로 역사가 되었기 때문에 보상을 기대하거나 결과에 전전긍긍 하지도 않을 것이다. 자유롭다. 두려움도 없다.절대 자유와 한계 지우지 못하는 큰 업적을 이루는 경지를 장자(莊子)라는 철학자는 '소요유'(逍遙遊)라 말했다. '소요유'의 상징은 '대붕'(大鵬)이다. 대붕은 원래 작은 물고기였다. 우주의 바다에서 긴 시간 학습한 공력(積厚之功)이 극한까지 커져서 질적인 전환을 도모하지 않을 수 없던 찰나에 바다가 흔들리자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과감하게 9만리를 튀어 올라 새가 되었다. 이것이 '대붕'(大鵬)이다. 대붕은 9만리를 튀어 오르는 내내 한 번도 뒤를 돌아보지 않는다./최진석 서강대 철학과 교수·건명원 원장·섬진강 인문학교 교장송필용作 '초월' /광주일보 제공최진석 서강대 철학과 교수·건명원 원장·섬진강 인문학교 교장

2017-07-17 경인일보

[최진석의 노장적(老莊的) 생각·7]'정해진 마음' 장례 지내기

삶의 일거수일투족 '정치행위'강약·크기 차이만 있을 뿐자신만의 신념·판단 기준각자 '정해진 마음' 가지고 살아맹목적 방향으로 자가발전하면타협없는 '근본주의'로 흘러어떠한 합의도 애초 '불가능''수주대토·각주구검' 고사심리적 기대-객관적 사실 '혼동'달라진 상황 판단못해 '비웃음''고정된 틀' 갇히면 염치 없어져감정 극복 '과학적 사고'해야장자 "마음으로 듣지 말고 기(氣)로 들어라"어떤 모임에서나 앉자마자 정치나 종교 이야기를 꺼내는 사람은 촌스럽다. 무지하고 강박적이기 때문이다. 자신의 신념을 선(善)으로 확신하고 들이미는 행위다. 신념을 전면에 내세우면서도, 전인격으로서의 자신은 뒤로 감추고 나타내지 않는다는 점에서 매우 큰 실례다.보통의 경우 정치와 종교를 주제로 하는 대화에서 논리적으로 합의점을 찾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합의점을 찾았다면 아마 논리 너머의 다른 어떤 요인들이 개입되어서일 것이다. 정치와 종교는 기본적으로 신념의 활동이다. 매우 세련되고 현란하며 또 권위까지 갖추고 있어서 객관적이고 과학적인, 게다가 보편성으로 해석될 무늬의 외피까지 두르게 되었지만 일상 안에서는 신념의 차원을 넘지 못한다. 가끔 정치와 종교의 최고 지도자들 가운데 높은 차원의 포용을 보여주는 경우가 있는데, 이때는 분명히 자신의 신념을 조금이나마 양보했을 때다. 신념은 각자에게 진리다. 진리를 양보하고 마음 편할 수는 없다. '자기 진리'를 양보하고 여유로울 수 있는 것, 아마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가장 높은 곳일지 모른다. 정치와 종교의 영역에 모두 순교자가 있고 또 그들이 떠받들어지는 한 그것들이 강력한 신념 체계라는 것을 부인하지 못한다. 신념이 맹목적인 방향으로 자가 발전하면 타협이 원천 봉쇄되는 근본주의로 흐른다. 그런데, 삶 속에서 일어나는 일거수일투족은 다 정치행위다. 말 한 마디도 모두 정치행위다. 상황을 자신의 의지대로 끌고 가려는 욕망을 실현시키려 하는 한 이 정치 행위를 벗어날 수 없다. 삶이 정치 행위라면 인간은 모두 크거나 작거나 혹은 강하거나 약하거나 하는 점에서만 차이가 있을 뿐, 모두 각자의 신념 속에 갇혀 있다. 그래서 모든 인간은 자신만의 판단 기준을 갖는 것이다. 이것을 장자는 '정해진 마음'(成心)이라 했다. "사람들은 대부분 정해진 마음을 스승처럼 모시고 산다. 현자나 어리석은 사람이나 다 똑같다. 따지고 보면 누구나 정해진 마음을 기준으로 해서 시비판단을 한다. 그래서 정해진 마음이 없이 시비판단을 한다는 말은 오늘 월(越)나라로 떠났는데 도착은 어제 했다는 말만큼이나 이치에 맞지 않다."(『장자 · 제물론』) '정해진 마음 - 시비판단- 정치행위- 삶'이 하나의 유기적 구조를 이루고 있다는 뜻이다. 이런 삶의 형태에서라면 어떤 합의도 애초에 불가능하다. 다시 말해 각자의 기준은 각자에게 진리이기 때문이다. 다음에 말하는 장자의 얘기를 들으면 수긍하지 않을 수 없다. "나와 당신이 논쟁을 한다고 합시다. 당신이 나를 이기고, 내가 당신에게 졌다면 당신은 옳고 나는 틀렸을까요? 내가 당신을 이기고 당신이 졌다면 내가 옳고 당신은 틀렸을까요? 한 쪽은 옳고 다른 쪽은 틀린 경우일까요, 아니면 두 쪽 다 옳은 경우일까요? 두 쪽 다 틀린 경우일까요? 이런 일은 둘 다 알 수 없소. 제3자는 더 알 수 없소. 그렇다면, 누구를 불러 이를 판단하게 할 수 있겠소. 당신과 입장이 같은 사람을 불러 판단하게 한다면, 그는 당신과 같으니까 공정하게 판단할 수 없소. 나와 입장이 같은 사람을 불러 판단하게 하면, 나와 같은 입장이라 공정한 판단을 할 수가 없게 됩니다. 우리 둘 모두와 입장이 다른 사람을 불러 판단하게 하면, 그는 나하고도 다르고 당신하고도 다르니 역시 공정한 판단을 할 수가 없소. 우리 둘 모두와 입장이 같은 사람을 불러 판단하게 하면, 그는 우리 둘 모두와 같기 때문에 공정한 판단을 할 수가 없소. 그렇다면 나도 당신도 그리고 제3자도 모두 공정한 판단을 할 수가 없는 거요. 그런데 누구에게 기대한다는 말이요?"(『장자 · 제물론』) 이처럼 '정해진 마음'에 갇혀 사는 것이 세상 속 인간이다. 이 '정해진 마음'을 치장하는 데에 거의 대부분을 쓰는 존재가 또 인간이다. 자신만 모른다. 이 '정해진 마음'을 치장하며 사는 한 자신은 한 곳에 뿌리를 내린 결박된 존재가 되고, 자신이 하는 일은 대부분 과거를 지키는 일이 된다는 것을 알기 어렵다. 어쩌랴. 새롭고 신선한 일은 죄다 자신의 '정해진 마음'에서 이탈해서야 가능한 일인 것을….한 농부가 있었다. 하루는 밭에서 일을 하다가 내달리던 토끼가 밭 가운데 있는 나무 그루터기에 부딪쳐 죽는 것을 보았다. 죽은 토끼를 주워 집으로 돌아 온 농부는 그 다음 날부터 농사는 짓지 않고 그루터기만 지켜보며 또 그런 토끼가 나오기를 기다리기만 했다. 하지만 그 뒤로 한 마리도 보지 못하고 결국에는 온 동네의 웃음거리가 되었다. '수주대토(守株待兎)'라는 말이 출현한 이야기다.어떤 검객이 배를 타고 양자강(陽子江)을 건너고 있었다. 그런데 강 중간쯤에서 물결이 크게 출렁거리던 차에 차고 있던 칼이 강물에 빠지고 말았다. 놀란 검객은 급히 작은 단도(短刀)로 칼을 떨어뜨릴 때 앉아있던 뱃전의 한 곳에 표시를 하였다. "이곳이 칼을 떨어뜨린 곳이다." 건너편 나루터에 도착하여 여유가 생기자 검객은 칼을 찾기 위해 뱃전에 표시한 바로 그 밑의 물속으로 들어갔다. '각주구검(刻舟求劍)'이라는 말로 회자되는 고사다. 이 두 고사에 나오는 주인공들은 모두 비웃음을 사지 않을 수 없다. 비웃음이라는 것은 어디서 오는가. 바보 같은 상황에 있으면서 정작 자신은 알아채지 못한 채 어떤 고정된 행위를 벗어나지 못하면 비웃음을 살 수 밖에 없다. 달라진 상황에 다르게 반응하지 못하고 계속 같은 반응을 하면서 다른 결과를 기대하는 것도 같은 일이다. 다른 시대에 다른 비전을 생산하지 못하고 고정되고 철 지난 틀로 새 시대를 맞자고 주장하는 것도 같은 일이다. 그런데 문제는 비웃음이 비웃음만으로 끝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 비웃음을 사는 행위 때문에 비효율이 발생되어 힘 자체가 빠지는 것이 더 큰 문제다. 이처럼 '정해진 마음'은 한 번 토끼를 얻은 기억을 떨쳐내지 못하고, 그 자리에 박혀서 계속 토끼만 기다리게 한다. 토끼를 기다리는 동안 이 농부는 어떤 생산 활동도 하지 못한다. 막연한 심리적 기대가 객관적 사실로 착각되기 때문이다. 이 사람은 토끼를 주워서 먹을 수 있다는 기대와 확신이 너무 커서 지금의 배고픔을 불평할 틈도 없다. 다른 모든 사람들이 그러고 있다가는 굶어 죽을 수 있다고 해도 그런 말이 귀에 들어올 리 없다. 오히려 그런 말 하는 사람들을 무지하거나 사악한 부류로 몰아붙이기까지 할 것이다. '정해진 마음'에 지배되는 상태가 되면, 그 사람의 온 마음과 행동이 이 '정해진 마음'의 변주에 불과해진다. 한 사람이 하는 모든 심리적 활동의 터전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진짜로는 '심리적 기대'와 '심리적 확신'인데, 그것을 '객관적 사실'로 믿는다. 이처럼 '정해진 마음'은 한 사람을 과거에 묶어두고, 변화하는 현실에 적응할 수 없도록 만들어버린다. 토끼를 기다리는 이 농부의 이야기는 『한비자(韓非子)』의 「오두(五 )」편에 나오는데, '오두'는 나라를 망가뜨리는 다섯 종류의 '좀 벌레'를 말한다. 즉 나라를 망하게 하는 다섯 가지 요인이라는 뜻이다. 비효율적으로 운용되는 나라에서는 심리적 기대와 객관적 사실을 혼동하는 일이 자주 일어난다.우리 경제는 선진국의 문턱에서 몇 년째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다. 1인당 국민소득은 2007년에 2만 달러대에 진입하고 나서 선진국 진입의 경계선으로 여겨지는 3만 달러의 벽을 여태껏 넘지 못하고 있다. 심한 정체에 빠져 있다. 무엇이 정체되어 있다는 것은 새로움이 시도되지 못하고 있다는 뜻과 같다. 여러 가지 요인이 있겠지만, 선진국 진입을 기대하면서 중진국에 이를 때 사용하던 방법을 계속 쓰고 있는 것은 아닌가 생각해 봐야 한다. 게다가 후진국에서 중진국으로 이르는 일과 중진국에서 선진국으로 도약하는 일은 성격이 전혀 다르다는 것도 알아야 한다. 후진국에서 중진국에 오르는 일은 선진국에서 먼저 닦아 놓은 길, 즉 있는 길을 가는 것과 같다. 하지만 선진국으로 도약하는 일은 없는 길을 열면서 가야 한다. 있는 길을 가는 것과 없는 길을 열면서 가는 길은 차원이 다르다. 뱃전에 긁어놓은 표식만을 마음속에 담고 있다가는 자신이 배를 타고 얼마나 흘러왔는지를 망각한다. 이 망각은 사람을 맹목적인 상황 속에서 헤매게 만든다.'정해진 마음'을 가지고 있으면 염치(廉恥)가 없어진다. '정해진 마음'이 자신의 마음을 차지하는 덩어리가 크면 클수록 '정해진 마음'이 주인이 되어버리기 때문에 그 '정해진 마음'을 철저히 지키는 일이 가장 중요한 일이자 진실을 지키는 일로 바뀐다. 따라서 아무리 크고 중한 일이라도 그것이 '정해진 마음'을 발휘하는 데 방해가 되면 바로 사소한 것으로 취급된다. 이럴 때 사용하는 비굴한 논리들은 모두 상황을 상대적인 묘사 속으로 끌고 간다. "다른 사람보다는 그래도 덜하다"고 하거나 "나만 그런 것이냐"고 하는 식으로 자신을 정당화 한다. 남보다 더 낫기만 하면 된다는 종속적 사고에 빠져 있다. 독립적이고 자유로운 사람이라면 남보다 더 나은 것으로는 만족하지 못하고, 남과 다를 뿐만 아니라 나만의 고유한 것이 있어야만 만족할 것이다. 비굴한 논리를 사용하는 것도 자신을 자신의 존엄 위에 세우지 못하고 '정해진 마음' 위에 세우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불행하게도 염치를 잃어버린다. 자신이 뭐하고 있는지도 모르게 된다. 예를 들어, 이런 일이 있다고 하자. 법을 어긴 사람을 법무장관으로 추천하고, 악의적 표절을 한 사람을 교육부 수장으로 추천한다. 법무장관은 법을 관장해야 하고, 교육부 수장은 표절을 하지 못하도록 감독해야 할 직책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추천한 사람들이나 추천된 사람들이나 모두 아무렇지 않은 양 당당하다. '정해진 마음'을 공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니고, 스스로 말한 원칙을 스스로 깨면서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소위 '정치'를 버리고 '정치 공학'을 선택하는 것이다. 게다가 '정해진 마음'을 공유한 사람들은 객관적 비판 능력보다는 감성적 동질감에만 의존하면서, 갑자기 호위무사로 등장한다. 자존감이나 품격이나 진실성은 사라진다. 오직 '정해진 마음'들의 굳건한 연대만 남는다. 참 무섭고 슬픈 일이다. 이처럼 무섭고 슬픈 풍경 안에서 아무도 몰래 비효율은 두꺼워진다. 우리가 '정해진 마음'에 좌우되는 감정을 극복하고 과학적으로 사고해야 하는 이유다. 그래서 장자는 말한다. "마음으로 듣지 말고 기(氣)로 들어라." "'정해진 마음'에 갇힌 자기를 장례지내라."/최진석 서강대 철학과 교수·건명원 원장·섬진강 인문학교 교장송필용作 '흐름'. /광주일보 제공최진석 서강대 철학과 교수·건명원 원장·섬진강 인문학교 교장

2017-06-19 경인일보

[최진석의 노장적(老莊的) 생각·6]경계에 서면 밝고 환해진다

인간의 이탈욕구 사실은 긍정적발전, 부정적 형식이 빚은 결과천성 해칠까봐 문명을 거부한근본주의적 철저함에 충격문명의 착실한 건설 주장하는공자와 전혀 다른 생각내면과 외면 동시에 다스려야장자 "한 편만 지키는 건 부족"문명비판이 부정에 멈추지 않고또 다른 문명 초청하는 힘 돼야한 쪽을 택하면 이념화되기 쉽고경계에 서면 생산적 효과 가능인간에게는 이탈의 욕구가 있다. 부정적으로 들릴 수도 있는 동작이지만, 사실 이는 매우 긍정적이며 생산적이기도 하다. 모든 생물은 자기 존재를 보존하며 확장하려 애쓰도록 태어났는데, 서로 확장하려 하다가 경쟁을 피할 수 없게 되기도 한다. 확장은 다양한 의미에서 기존의 터전에 고착되지 않고 벗어나려는 율동이다. 이것이 이탈이다. 어쩔 수 없이 이탈은 부정의 자세를 취할 수밖에 없다. 정반합의 '반'이다. '합'을 기약하는 '반', 그래서 또 인간은 이탈을 하면서 스스로를 확장한다. 생산적이지 못한 상황에 처한 인간은 지루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그 지루함을 이기려고 그것을 부정한다. 부정이 없다면 얼마나 지루할까. 또 지루함을 견디지 못하는 인간의 속성은 얼마나 공격적이며 생산적인가. 부정할 수 있어서 우리는 고정되지 않고 움직인다. 발전도 부정의 한 형식이 빚은 결과다.여기에도 문제는 있다. 부정이 어느 순간에는 또 멈추어 고정될 수 있다는 점이다. 부정의 죽음이다. 싫증난 한 편을 부정한 후에 채택한 새로운 한 편이라고 해서 계속 새롭거나 영원한 선인 것은 아니다. 새로운 부정이 기약될 때만 새롭고 선하다. 부정의 동력이 끊기고, 뿌리를 내려 자리를 잡으면 폐색과 멸망만이 기다릴 뿐이다. 이는 매우 미묘한 원칙이다. 불교에서는 일찍부터 이 점을 주의 깊게 살피고 이중 부정이나 지속 부정을 말했다. 바로 양공(兩空)이니 중현(重玄)이니 하는 것들이다. 장자는 양행(兩行)을 말한다. 시인 이갑수는 이렇게 적었다. "신은 시골을 만들었고/인간은 도회를 건설했다/신은 망했다."('신은 망했다' 민음사) 사태가 어떠하든지 간에 우리의 중심 자리는 '신'이 아니라 '인간'이다. '신'은 인간이 가고 싶어 하는 방향이거나 완성이거나 원본이거나 모델이거나 초청된 감독자다. 인간 확장의 절정이다. 그런데 인간은 도회를 건설하면서 확장에 가속도를 냈다. 우리가 누리는 문명은 모두 도회의 산물이다. 그렇다면, 도회적 확장의 절정은 신이 만든 시골을 닮아가야 할 것이다. 도회의 시골화는 이상적인 차원에서 완성된 모습일 수 있지만, 현실 속에서의 확장은 시골의 도회화다. 그래서 우리는 도회에 있으면서 시골을 갈망한다. 시골을 갈망하는 농도가 강해질수록 도회에 대한 비판은 격렬하다. 도회에 대한 비판이 격렬해질수록 그는 신적인 영역에 가까워지는 환상을 차지한다. 도회를 공격할수록 진실하고, 신을 닮은 참된 인간으로 치장할 수 있다. 하지만 그는 도회를 떠나지 않는다. 시골에서 도회를 동경하는 것도 도회에서 도회를 비판하는 강도만큼이나 인정을 받아야 공평하다. '신은 망했다'는 이갑수의 말이 시골을 택하고 도회를 버리라는 웅변은 아닐 것이다. 신이 망하면서 인간의 승리를 몰래 감추듯이 말해준다. 그런데, 도회의 승리가 시골을 품어야 진정한 완성이 되듯이, 인간의 승리도 신의 승리를 품을 수 있다. 도회에 살면서 배타적 자세로 도회를 부정하고 시골을 갈망하는 것으로는 아무리 격렬해도 성숙한 완성의 길이 아니다. 시골과 도회가 상호 교차되거나 포섭되는 길만이 인간적인 완성에 가깝다. 이것도 사실은 부정이 부정으로 고착되지 않고, 스스로 부정되어 다시 새로워지는 한 형태다. 이것이 진정한 완성이다.스스로를 생태주의자로 자리매김하는 어느 분의 인터뷰 대상자가 된 적이 있다. 그는 인터뷰를 시작하기 전에 마당에 난 민들레의 꽃대를 꺾어 피리 만드는 법을 내게 가르쳐 주었다. 나는 시골 출신이면서도 난생처음 민들레 피리를 만들어 불어보았고, 나중에 다른 사람들에게 가르쳐주기도 하였다. 민들레 피리를 불 때, 나는 잠시 잊었던 시골의 정서를 다시 불러올 수 있었다. 이야기가 깊어갈수록 그는 매우 절실하고 진실한 사람임을 드러냈다. 생태주의의 철저한 복원을 꿈꿨다. 시골을 건설해놓고 망한 신을 살려내려는 전사 같았다. 당신이 사용은 하지만, 사실은 냉장고도 부정한다고 했다. 강남에 살지만, 사실은 많이 가지는 생활 방식을 부정한다고도 했다. 인터뷰 중간쯤에서 나는 지식의 생산이나 창의력이 탐험이나 모험과 깊게 연관된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서양에는 직업으로서의 탐험가가 먼 옛날부터 존재했지만, 동양에는 그러지 않았다는 점을 언급했다. 그러자 그 분은 탐험이 오히려 삶의 환경을 악화시켰다고 강조한다. 탐험을 통해서 대륙 간에 교류가 활발해지고, 이 교류가 세상의 생태 환경을 악화시켰다고 한다. 지식의 생산이나 생산된 그 지식을 통한 과학 기술 문명의 발달도 추구할 일이 아니라고 한다. 이는 그냥 단순한 서양추수주의일 뿐이며 결과적으로 삶을 나쁘게 끌고 가는 악이라고 하였다. 그러면서 천성을 해칠까봐 문명의 이기인 기계 자체를 사용하지 않는 노인의 이야기를 해 주었다. 그는 그 이야기의 반 만 알고 있었다. 나는 나머지 반을 이야기 해주고 싶었지만, 그저 조용히 있었다. '장자'의 '천지'편에 나오는 한 대목이다. 얘긴즉슨 다음과 같다. 공자의 제자인 자공이 여행길에 밭에서 일하는 노인을 보았다. 굴을 뚫고 우물에 들어가 항아리로 물을 퍼 나르고 있었다. 그러자 자공이 힘겹게 일하는 그 모습이 딱해서 두레박이라는 기계를 쓰면 하루에 백 이랑도 물을 줄 수 있고 아주 편하니 그렇게 해 보시라고 권했다. 그러자 노인이 웃으면서 기계를 쓰면 기계에 사로잡히는 마음이 생겨나서 순진 결백한 본래의 것이 없어지고, 그러면 또 정신이나 본성의 작용이 안정되지 않으며, 더 나아가서 도가 깃들지 않게 되니 기계를 안 쓰는 것이지 기계를 모르는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이 말의 의미가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깊고 크게 느껴진 자공은 넋을 잃었다가 30리나 걷고 나서야 제정신이 들었다고 한다. 자공은 왜 정신을 잃을 정도로 충격을 받았을까? 문명의 착실한 건설을 주장하는 스승 공자와 전혀 다른 생각을 펼쳐 보이면서 문명 자체를 부정하는 근본주의적 철저함을 나타냈기 때문이다. 자공에게도 제자가 있었다. 그 제자하고 나눈 대화를 보면 자공이 왜 그리 놀라고 또 감탄했는지를 알 수 있다. 안색이 변하고 정신을 잃을 정도로 놀란 자공을 보고 그 제자는 그 사람이 도대체 어떤 사람이어서 그렇게 놀라신 것이냐고 묻는다. 그러자 자공이 말해준다. 자공은 원래 스승인 공자로부터 옳은 것을 하고 공을 이루려고 애쓰며 수고를 덜하고도 큰 효과를 거둬야 한다고 배우고 그 가르침을 최고로 알았는데, 이 노인네는 확실히 근본의 도를 지키고 있어서 덕과 육체와 정신이 모두 온전하니 확실히 공자보다도 훨씬 더 성인의 도를 구현하고 있는 것으로 보고 경탄한 것이다. 자공이 머릿속에 그린 성인의 도는 일의 편리함이나 거짓 기교 따위로 자유롭고 소박한 원래의 마음을 손상시키지 않는 것이었다. 그런 경지에 있는 사람은 마음이 내키지 않으면 어디에도 가지 않고, 마음이 원치 않으면 아무 일도 하지 않으며, 온 세상 사람들이 칭찬해도 돌아보지 않고, 모두가 비난해도 들은 체를 않는다. 성인의 도를 이렇게 생각하고 있던 자공에게 기계가 주는 편리함을 누리다가 거짓 기교에 빠져 본마음을 잃지 않으려 하는 이 노인네의 모습은 자공을 놀라게 하기에 충분 했다.귀향 후에 공자에게 이 이야기를 전했다. 아마 자공의 속마음에는 그 노인네를 스승보다 더 높이 놓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주의할 점은 장자라는 책에는 '중언'(重言)이라는 기법이 사용되는데, 그것은 유명한 사람의 입을 통해 필자 자신의 말을 하는 것이다. 권위에 기대 설득력을 배가시키려는 기술이다. 당연히 여기에 나오는 공자는 '논어' 속의 공자라기보다는 도가적 사상가로서의 공자다. 공자가 자공에게 그 노인네는 도가 정신을 잘못 배워서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른다, 즉 자신의 내면만 다스리고 외면을 다스리는 법은 모른다고 일러준다. 참된 본성만 품고 무위자연의 순박한 모습을 지키는 것이 다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 정신으로 속세적인 삶을 살면서도 유유자적하는 경지를 보여야 제대로 된 것이라고 말한다. 장자는 내면과 외면을 동시에 다스릴 수 있어야 최고지, 어느 한 편만 지키는 것은 아직 부족하다고 분명히 말한다.양자택일의 논리에 익숙한 사람들은 '장자'에 나오는 이 이야기를 들을 때도 한 쪽 만을 택해서 장자를 문명 부정론자로 끌고 간다. 이런 일은 노자를 읽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쉽게 나타난다. '도덕경'에는 분명히 "무위이무불위"(無爲而無不爲), 즉 "무위하면 모든 일이 잘 이뤄진다"고 쓰여 있는데, 양자택일의 전사들은 '무위'만 보고 '무불위'는 애써 외면한다. 하지만 사실 노자의 시선은 모든 일이 잘 이뤄지는 현실적인 효과로서의 '무불위'에 가 있다. 노자의 사상은 뒤로 물러서는 것이라고들 한다. 하지만 꼭 그렇지만도 않은 것이 물러서는 것도 앞서기 위해서다. '도덕경' 제7장에 분명히 기록되어 있다. "후기신이신선"(聖人後其身而身先), 즉 뒤로 물러서지만 결국 앞서게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한 편을 지키는 일에 익숙한 사람들은 뒤로 물러서는 일만 챙기고, 책에 분명히 기록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앞서는 일은 애써 외면한다. 노자나 장자나 모두 문명 부정론자가 아니다. 철저한 문명론자다. 다만 다른 또 하나의 문명을 주장할 뿐이다. 문명 비판을 문명 부정으로 바로 끌고 갈 일이 아니다. 문명 비판이 문명부정에서 멈추지 않고 다른 또 하나의 문명을 초청하는 힘이 되어야 한다. 우리는 보통 대립된 두 면 가운데 하나를 취하는 데 익숙하다. 이 쪽 아니면 저 쪽을 택하면서 상대방에게도 그러기를 은연중에 강요한다. 한 쪽을 택한 후, 그것을 철저하게 지키는 것을 순수하고 절실하고 진실한 삶의 태도로 여기기도 한다. 이단이나 극단적 근본주의는 다 이런 곳에서 성장한다. 하지만 두면을 동시에 장악하거나, 두 면 사이의 경계에 처하지 않으면 전면적 인식이나 진보적 삶은 구현되지 못한다. 이것을 부정하다가 저것에만 빠지는 것은 부정의 고착화다. 지속 부정을 통해 부정을 살아있게 해야 한다. 그것이 성숙한 이탈이다. 한 쪽을 택하면 과거에 박히고, 경계에 서면 미래로 열린다. 한 쪽을 택하면 이념화되기 쉽고, 경계에 서면 생산적인 효과를 낸다. 한 쪽을 택하면 얼굴에 짜증기가 새겨지고, 경계에 서면 밝고 환해진다./최진석 서강대 철학과 교수·건명원 운영위원송필용作 '경계' 41x53cm 2017, 캔버스에 유채. /광주일보 제공최진석 서강대 철학과 교수·건명원 운영위원

2017-05-22 경인일보

[최진석의 노장적(老莊的) 생각·5]문명은 용기의 소산이다

삶의 무대는 자연·문명 두 세계인간이 만든 文, 생각에 좌우돼높이·초점 맞춘 생각이 '시선'시선 높였을때 결과가 '발전'그러려면 익숙함 떠나 도전해야모르는 곳으로 과감히 넘어가는'탐험정신'이 새 이론·지식 생산장자 "인간의 일을 아는 사람은알고 있는 것을 가지고모르는 곳을 기른다" 말해지적인 확장은 아는 것 바탕알지못하는 곳으로 가는 '발버둥'창의 발휘될때 더 나은 삶 도모용기내야 '참된 지식' 얻어인간이 삶을 꾸리는 하나의 무대는 '문명'과 '자연'이라는 두 개의 세계로 구성되어 있다. '자연'은 인간의 의지와 상관없이 내장되어 있는 스스로의 법칙에 따르는 저절로[自] 그러한[然] 세계고, 문명은 인간이 그려 넣은[文] 세계다. 인간이 그린 세계를 문명이라고 할 때, 그것을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인간이 의도를 개입시켜 제조한 세계라고 할 수 있다. 문명을 제조하는 의도를 의지나 의욕, 욕망 혹은 영혼 등등으로 다양하게 말할 수도 있겠지만, 통괄하여 일단 '생각'이라고 하자. 그래서 각자 누리는 문명의 수준이나 내용은 각자 가지고 있는 생각의 그것들에 좌우된다. 나는 이것을 '탁월한 사유의 시선'에서 "시선의 높이가 삶의 높이다"고 표현하였다. 당연히 앞 선 문명은 앞 선 생각이 만들고, 뒤따라가는 문명은 생각이 뒤따라간 결과다. 먼저 생각을 하여 문명의 새 길을 내는 일이 창조고, 창조의 의지가 발휘되는 일이 바로 창의다. 창의를 통해서 새로운 길을 열어 흐름을 만들면, 그것을 '선진'이라고도 하고 '일류'라고도 하며 선도력을 가졌다고도 한다. 이미 있는 길을 가는 것이 아니라, 없는 길을 열어서 새로운 흐름을 만들었다는 뜻이다. 이리하여 창의는 결국 삶의 영토를 확장하는 셈이다. 따라서 창의적인 인간은 영토를 확장해주는 역할을 하기 때문에 언제나 높은 자리에 올려 진다.생각은 들쑥날쑥하고 들락날락한다. 무엇을 만들거나 개척하려면, 그 들쑥날쑥하고 들락날락 하는 것이 일정한 높이에서 초점을 맞춰 작동해야 한다. 높이와 초점을 맞춘 생각을 시선이라고 하지 않겠는가. 왜 시선이 중요한가? 사람은 자신이 가진 시선의 높이 이상을 살 수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어떤 기관이나 국가도 마찬가지다. 시선은 삶과 사회의 전체 수준을 결정한다. 시선의 높이가 삶의 높이다. 그래서 보통 일컫는 발전이나 진보라는 것도 사실은 시선의 상승이 이뤄낸다. 여기 있던 이 시선이 한 단계 더 높이 저 시선으로 상승하여 이루는 구체적 결과가 바로 발전인 것이다. 그런데, 이 발전을 경험하기 위해서는 우선 자기를 지배하는 정해진 생각의 틀을 벗어나는 도전이 감행되어야 한다. 익숙함과의 결별이다.'장자'의 '소요유'편에 나오는 이야기다. 혜자(惠子)가 위(魏)나라 왕으로부터 큰 박이 열리는 박 씨를 선물로 받아와서 뒤뜰에 심었다. 아니나 다를까 자라나 엄청나게 큰 박이 열렸다. 그런데 크기가 너무 커서 물을 담자니 무거워서 들 수가 없을 지경이고, 쪼개서 바가지로 쓰자 해도 납작하고 얕아서 한 방울도 담을 수가 없었다. 위나라 왕이 말한 대로 박이 크기는 컸지만 아무 쓸모가 없어서 부숴버리고 말았다. 혜자의 말을 다 듣고 나서 장자(莊子)가 말했다. "그렇게 큰 박이 열렸다면 어째서 그 속을 파내 큰 배로 만들어 강이나 호수에 띄워 놓고 즐기려 하지 않고, 납작하여 아무 것도 담을 수 없다는 걱정만 하셨소? 선생은 생각이 꼭 쑥대 대롱에 난 작은 구멍만큼이나 좁디좁군요."우리는 보통 익숙한 생각에 갇힌다. 혜자가 그랬던 것처럼 '박'이라는 말을 듣자마자 물을 담아 다니거나 쪼개서 바가지로 쓰는 일을 먼저 떠 올리고, 그 생각에 '박'의 용처를 제한해버린다. 이러면 '박'은 물을 담고 뜨는 기능에만 갇혀 그 이상으로 확장되기 어렵다. 갇힌 생각은 이처럼 갇힌 세계를 조성한다. 세계를 일정한 틀로 가두어버린다. 이미 있는 익숙한 생각을 가지고 살면서 우리는 부단히 새로운 환경을 접한다. 인간의 역할은 새로운 세계를 맞닥뜨렸을 때 적절한 대응방안을 찾느냐 찾지 못하느냐로 수준이 결정된다. 이미 가지고 있는 생각으로 새로운 세계를 관리하려고 하는 일은 보통 누구나 하는 일이다. 새로운 영토를 확장하는 역할은 새로운 세계를 맞닥뜨렸을 때 새로운 적응 방법을 찾아내야만 비로소 가능해진다. 이 이야기에서 예상 밖으로 '큰 박'은 이전에 대면해 본 적이 없는 새로 맞닥뜨리는 세계다. 기존의 생각에 갇혀있는 혜자는 이 '큰 박'으로 상징되는 새로운 세계에 대한 적응력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래서 새로운 세계가 혜자에게는 '없는 세계'가 되었다. 박을 깨서 새로운 세계 자체를 부정해버린 것이다. 장자는 새로운 세계에 맞는 새로운 적응 방법을 만들어 냈다. 창의가 일어난 것이다. 이제까지 세계에 존재해본 적이 없는 '박 배'가 탄생하였다. 바로 창조다. 이런 창조가 일어날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장자가 '박'에 대한 기존의 관념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거기에 매몰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닐까? 이런 일은 기존의 관념이 주는 무게감을 이겨낼 수 있는 단련된 자아를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에게는 일어나지 못한다. 자아가 이념과 관념의 지배를 받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들을 자유자재로 가지고 놀 수 있을 정도로 고도로 단련된 상태, 사실은 이것이 모든 창의적 활동의 핵심이다.창의는 익숙하게 알고 있는 것이 부과하는 무게를 이겨내고 모르는 곳으로 과감하게 넘어가는 일이다. 모르는 곳으로 넘어가는 일에다 '과감'이라는 단어를 붙인 이유가 있다. '모르는 곳'으로 넘어가는 일은 일종의 모험이자 탐험이기 때문이다. 아직 알려지지 않은 '모르는 곳'은 명료하게 해석될 수 없기 때문에 항상 이상하고 불안한 곳으로 남는다. 그래서 위험한 곳이기도 하다. 위험한 곳으로 넘어가는 탐험과 모험의 여정이 시작되기 위해서는 언제나 '과감'한 결단이 필요하다. 모든 창의가 아직 알려지지 않은 곳으로 넘어가는 일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철저히 탐험의 결과다. 장자의 '박 배'도 장자가 가지고 있었던 지식이 아니라, 그의 탐험 정신이 만들어냈다. 그 탐험 정신은 장자를 여기서 저기로 성큼 건너가게 만들었다. 탐험 정신이 살아있는 문명은 강하다. 새로운 이론이나 지식이 생산되기 때문이다. 이것이 왜 문명을 강하게 만드는가? 문명은 생각이 만든다. 생각이 문명을 통제한다는 뜻이다. 인간은 문명을 확장하고 통제하는 매우 효율적인 생각의 얼개를 만들어내는데, 그것이 바로 지식이자 이론이다. 앎의 체계인 것이다. 당연히 지식이나 이론을 생산하는 문명은 문명의 통제력이 클 수밖에 없고, 통제력이 큰 문명은 강할 수밖에 없다. 반면에 지식이나 이론을 수입하는 문명은 종속적이기 때문에 주도권이 없어 강한 면모를 보이기 어렵다. 그런데 우리는 무엇인가에 대해서 안다고 할 때, 보통은 그것에 대하여 지적으로 이해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이것은 앎을 매우 좁게 이해하는 것이다. 앎이 문명을 통제하고 확장하는 이론을 생산하는 기초인데, 앎을 이렇게 제한적으로 이해하고 있는 사회에서는 이론의 생산이라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이론의 생산까지 보장할 수 있는 앎은 어떤 것에 대해서 지적으로 이해하는 것에 머물지 않고, 반드시 이미 알고 있는 것을 바탕으로 하여 모르는 곳으로 넘어가려고 발버둥치고 몸부림친다.앞에서 말한 대로 인간이 사는 무대는 '문명'과 '자연'으로 되어 있다. 문명은 인간이 만들고, 자연은 저절로 그러하다. 그래서 인간은 이 두 세계에 대해서 제대로 알면 지적으로 완벽해진다. 자연은 내장되어 있는 자연 그대로의 원리에 따라 움직이므로 인간은 그것을 이해하고 거기에 맞추면 되지만, 문명 세계는 인간이 계속 만들어 나간다. 어쩔 수 없이 아직 알려지지 않은 곳 혹은 아직 모르는 곳을 열며 나아간다. 이것을 장자는 '대종사'편 첫머리에서 이렇게 말한다. 즉, "인간의 일을 아는 사람은 알고 있는 것을 가지고 모르는 곳을 기른다."(知人之所爲者, 以其知之所知, 以養其知之所不知) 장자에 의하면, 아는 것을 바탕으로 하여 모르는 곳으로 넘어가려고 하는 발버둥이 문명을 전개시키는 토대다. 이렇게 되면, 지적인 최고 단계는 엉뚱하게도 지식의 영역을 벗어나서 '태도'의 문제가 되어버린다. 확장성을 포기한 앎은 이론의 구축이나 생산까지는 엄두를 낼 수도 없다. 이론의 생산이 이루어지지 않는 사회에서 진보적인 선진 문명을 꿈꿀 수는 없다. 앎의 진보는 모르는 곳으로 넘어가려는 바로 그 '발버둥'이나 '몸부림'에 있기 때문이다. '발버둥'이나 '몸부림'은 지적인 영역 밖의 것으로서, 차라리 인격적인 활동이나 '태도'나 기질'이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따라서 어느 한 문명이 다른 문명과 비교했을 때, 압도적인 과학 기술 문명을 가졌다는 것은 그런 과학 기술을 구체화 시킬 수 있는 상위의 지식과 이론을 가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상위의 지식과 이론을 가졌다면, 분명히 그들은 지적인 '발버둥'이나 '몸부림'을 훨씬 더 강하게 발휘하였을 것이다. 더 탐험적이었고 더 모험적이었을 것이다. '발버둥' '몸부림' '탐험' '모험'이 없이는 새롭고도 높은 지식과 이론을 생산하는 일은 불가능하다. 생각-지식-이론은 문명을 확장하고 통제하는 가장 효율적인 무기다. 이런 것들이 세계를 새롭게 열며 앞으로 나아가게 하기 때문이다. 세계를 새롭게 열 때 인간이 발휘하는 능력을 '창의'라고 하였다. 이렇게 본다면, '창의'는 인간의 능력 가운데 고도의 어떤 것이 분명하다. 절대 평범한 것은 아니다. 그래서 더 나은 삶을 도모하는 곳에서는 어디서나 모두들 창의력을 발휘하자고 서로 독려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하지만 애석하게도 창의력이 나타나는 일은 그렇게 일반적이지 않다. 왜 그런가? 발휘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혜자로 살기는 쉬워도 장자로 살기 어려운 이유다. 보통은 창의력을 발휘한다고 하는데, 이는 틀렸다. 창의력을 기능적으로 발휘할 수 있는 것이라면, 그냥 해버리면 될 것이다. 그러나 누구나 알 듯이 창의력은 발휘하려 한다고 해서 쉽게 되는 일이 아니다. 창의력은 '발휘하는 것'이 아니라 '발휘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내적으로 단련된 어떤 사람의 내면에서 튀어나오는 것이지 해보려고 맘먹는다 해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창의력이 튀어나올 수 있는 내면이 준비되어있지 않으면 그것은 이 세상에 나타나지 못한다. 이렇게 하여 창의력은 기능적인 범위를 넘어서서 인격적인 문제로 바뀌어버린다. 결국 사람의 문제다.장자가 지적인 상승과 확장은 아는 것을 바탕으로 하여 모르는 곳으로 넘어가려고 발버둥 치는 일에서 이루어진다는 뜻을 피력하고 난 후, 바로 이어서 한 말은 그래서 더욱 울림이 크다. "참된 사람이 있고 나서야 참된 지식이 있다."(有眞人而後有眞知) '사람'은 근본적으로 이론이나 지식이나 관념이나 이념의 수행자에 제한 될 수 없다. 그것들의 생산자이거나 지배자일 때만 '사람'이다. 그래서 '사람'을 채우는 진실은 차라리 '모르는 곳'으로 덤벼드는 무모함에 있다. 탐험이고 모험이고 발버둥이고 몸부림이다. 이것을 우리는 용기라고 말한다. 이렇다면, 문명은 사람이 발휘하는 용기의 소산일 뿐이다./최진석 서강대 철학과 교수·건명원 운영위원송필용作 '사유의 시선' 72.7x53cm 2017, 캔버스에 유채. /광주일보 제공최진석 서강대 철학과 교수·건명원 운영위원

2017-04-24 경인일보

[최진석의 노장적(老莊的) 생각·4]금방 죽는다

단절같은 두려움, '죽음'모호하게 무섭기만한 어떤 한기잠들기 전 느꼈던 그 의식에오히려 인생의 유한함과시간이 금보다 귀하다는 것두려워하지 않는 만용 배워장자의 '소요유' 절대자유투철한 삶과 위대한 성취들은죽음에 대한 진실한 인식에 기초인생 짧디 짧다는 것 기억해야더 소중하고 중요한 일에 '집중'삶을 튼실하게 하는 비결금방 죽는다.이 단어를 떠올리면 느리고도 느리게 평정이 흔들린다. 이런 비슷한 기분이 들 때 착 가라앉는다고 표현하곤 했던 것 같은데, '착'이라는 단어가 바늘 끝처럼 거슬린다. 어딘가에 딱 달라붙어버린 느낌. 그래서 유동성이 제거되어 상승이나 승화의 기운은 아예 휘발되어버릴 것 같은 두려움. 밀폐성의 답답함. 그러나 내 기분은 사실 '착'을 울타리 치는 이런 느낌들과는 많이 다르다. 차라리 좀 붕 뜬 기분 같기도 하다. 부력을 받는 중량감. 그러면서 흘러가는 그런 상태다. 이 단어는 바로 '죽음'이다.고등학교 1학년 여름 방학 초입의 조금 늦은 초저녁이었다. 나는 마당에 덕석을 깔았다. 거기 둘러앉아 우리 식구들은 닭백숙을 먹을 것이다. 엄마가 준비를 하시는 동안 모깃불을 피우고 덕석에 벌렁 누웠다. 하늘에는 초저녁 별들이 부산스러웠다. 그렇게 이른 시간에 벌써 서둘러 달려가는 별똥별도 있었다. 별동별은 달리다가 가속도를 타고 사라졌다. 나는 이유 없이 별똥별의 궤적을 내 안의 어딘가에 한참 동안 가둬두었다. 어느 것이 먼저이고, 어느 것이 나중인지를 모를 정도로 잠깐이었다. 항상 하던 일을 하면서 잠깐 누운 순간에 나는 아주 다른 세계로 급히 이동하고 있었다. 그것은 처음 경험한 것이라고 말하기도 부족하다. 정확하게 말하려고 애써 본다면,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어떤 것으로서 태초 같기도 하고 종말 같기도 하였다. 음험한 어떤 기운이 모든 땀구멍에다가 표식을 달아 놓고 나를 훑으며 아주 천천히 지나갔다. 나는 한기가 서린 그 기운을 감당할 수 없었다. 그냥 무너졌고, 방향을 잃었으며, 끝없이 추락했다. 구체적으로 체온도 떨어졌다. 닭백숙이 담긴 그릇을 들고 가벼운 발걸음으로 웃으며 다가오시는 엄마도 갑자기 남이 되었다. 누나와 동생의 재잘거리던 소리들도 내게 다가오지 못하고 그냥 먼 곳에서 멈추어 웅성거릴 뿐이었다. 매우 무서운 경험이다. 닭백숙을 한 점도 뜯지 못하고, 나는 별똥별이 남긴 기억 속의 궤적을 따라 희미하게 소멸되어갔다. 몇 날을 아무것도 먹지 못했다. 우물에서 기력을 놓고 쓰러지기 전까지. 잠들기 전에는 항상 그 덕석의 찬 기운을 느꼈다. 긴 시간동안 그것은 하나의 의식이 되어버렸다. 내 기운은 방향 없이 소멸되면서 맥없는 분말처럼 소실점도 갖추지 못한 채 흩어지고, 정신은 안개처럼 흐려진다. 체온이 내려가다가, 공포도 아니고 두려움도 아니지만 모호하게 무섭기만 한 어떤 한기에 의해 정신이 아득해질 때쯤 갑자기 온 몸에 식은땀이 나면서 나는 축축해진다. 그 축축함은 그늘진 깊은 계곡 큰 낙엽 아래의 음습한 어떤 곳 같기도 하다. 많은 것을 습관처럼 감추기만 하는 응큼한 파충류의 눈 주위 같기도 하다. 아무것도 아니면서 매우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기만 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얼마나 두려운 것인가. 사실 수시로 덤비는 그것들에 속수무책인 채 몇 십년동안 그저 식은땀만 흘리다 잠들었다. 나는 매일 이런 의식을 치르며 잠든다.그런 의식을 치르기 시작하던 16살에 나는 분명히 딴 사람이 되었다. 그 단절 같은 두려움 앞에서 원래 열심이던 것에는 게으름을 피우고, 눈길을 주지 않던 것들에 눈길을 주었다. 허용된 모든 것이 지루해 죽을 맛이었다. 대신 금지된 것들은 죄다 재밌고 좋아서 깊이 빠져들었다. 내 성실성의 초점도 대상을 바꾸었다. 대학에 가는 일보다 정체모를 '의미'가 커보였다. 그런데 그 내면의 두려움은 오히려 내게 그 어떤 것도 두려워하지 않는 만용과 거친 숨결을 주었다. 방탕한 생활 속에서도 시간이 금보다 귀하다는 것을 천천히 배워나갔다. 무엇보다도 내가 금방 죽는다는 것을 몸으로 느꼈다. 밤마다 치르는 의식은 내게 인생의 유한함을 알 수 있게 해주었다. 돌이켜보면, 이보다 더 큰 학습은 없었다. 어찌 보면, 나는 내가 금방 죽는다는 이 체득 위에 흔들리며 서 있기 시작했고, 서있던 그 자리는 점점 견고해졌다. 또 알게 되었다. 나뿐만 아니라, 내가 아는 사람이나 모르는 사람이나, 내가 예뻐하는 사람이나 미워하는 사람이나 내 아내나 내 아들들까지도 모두 금방 죽는다는 것을. 금방 죽는다는 사실에 대한 체득은 언뜻 생각하면, 모든 것을 소멸시키고 포기해버리려 할 것 같지만, 정 반대로 내게 두려움 대신 순간을 영원으로 확장하려는 강한 의지를 주었다. 순간에 대한 체득은 필연적으로 영원성에 대한 갈망을 낳게 한다. 사실을 객관적으로 인식하는 것에 멈추지 않고, 그것을 흔들어서 무한 확장하려는 예술적인 높이의 도전으로 이끌어주었다. 시를 읽고 외우게 하였다. 문자보다는 그 문자들 사이를 비집고 다니는 소리의 아름다움을 알게 하였다. 이제는 더욱 분명히 안다. 죽음에 대한 체득이 삶을 튼실하게 북돋운다는 것을. 이것은 모든 크고 위대한 성취의 가장 강력한 비결이다. 곧 죽는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바람직한 일보다는 자기가 바라고 좋아하는 일을 선택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장자'(莊子)는 매우 두꺼운 책이다. 그 안에서 장자가 한 많은 얘기들은 인간의 무한 확장을 도모한다. 그것을 장자는 '소요유'(逍遙遊)라는 단어로 묘사했지만, 절대자유라고 말해도 된다. '제물론'에 나오는 말이다. "해와 달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우주를 겨드랑이에 낀 채, 만물의 흐름과 하나도 어긋나지 않는다. 모든 것을 혼돈의 상태 그대로 두고 귀천 같은 것은 구별도 하지 않는다."('제물론'편) 한 인간이 우주를 겨드랑이에 낄 수 있을 정도로 성장하였다. 그래도 이 정도는 좀 친절하게 말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장자'를 펼치자마자 읽히는 내용은 더욱 광활하다. "우주의 북쪽 바다에 몇 천리나 되는 지 알 수 없을 정도로 큰 곤(鯤)이라는 물고기가 살았는데, 변해서 붕(鵬)이라는 새가 되었다. 붕의 등 넓이도 몇 천리나 되는지 모른다. 힘차게 날아올라 날개를 펼치면 마치 하늘 가득 드리운 구름 같다. 이 새는 바다가 크게 출렁거려 대풍(大風)을 일으킬 때, 그 기운을 타고 천지(天池)라고 불리는 남쪽 바다로 날아간다."('소요유'편) 곤은 그냥 붕이 되는 것이 아니다. 우선 긴 시간의 축적을 통해 몇 천리나 되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크기를 키워야 한다. 크기가 충분히 커진 어느 날 우주의 바다(그냥 바다가 아니다)가 출렁대며 일으키는 회오리바람을 타고 거대한 날갯짓을 해 구름을 뚫고 9만리를 솟구쳐 오른다. 상승하는 동력이 극점에 이르러 멈추는 순간 존재 차원에 극변이 일어나 새가 되는 것이다. 적후지공(積厚之功), 즉 두텁게 쌓은 공력이 실현되는 순간이다. 이 장엄한 전 과정을 장자는 높은 창공에서 남쪽으로 날아가는 긴 여정으로 묘사했다. 이것은 위대한 승리의 여정이다. 그 안에는 삶에 대한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헌신이 깃들어 있다. 성실한지도 모를 정도로 펼치는 무극의 성실이다. 어떻게 이 정도의 삶이 가능할까? 이 정도의 삶이 가능할 수 있도록 하는 근저의 힘은 무엇일까? 한 참 그것을 찾던 어느 날 내 눈에 한 구절이 들어왔다. 곤이 붕이 되어 남쪽으로 날아가는 이 장엄한 성실성의 기초는 모두 이 한 구절에 담긴 체득에서 나온다. 내가 별똥별의 궤적을 내 안의 어딘가에 감추곤 하던 시절, 지붕은 초가에서 슬레이트로 바뀌었지만 벽은 여전히 흙벽이었다. 나뭇단이 쌓인 부엌은 특히 석양볕이 길고 낮게 들어왔다. 부엌에 찾아드는 석양볕은 흙벽의 갈라진 틈새를 거침없이 밀고 들어왔는데, 겨우 책받침 두께 정도에 불과했다. 당연히 흙벽의 갈라진 틈은 책받침보다도 얇다. 그 틈의 간격을 천리마가 달리며 지나치는 시간은 얼마나 짧을까? 아마 순간보다도 더 순간적이고, 찰나보다도 더 찰나적일 것이다. 이 얇은 두께의 틈새를 보통은 극(隙 혹은 郤)이라고 한다. 장자에 의하면, 우리의 일생은 고작 이 찰나적인 간격을 천리마가 지나치는 그 시간 정도 밖에 안 된다고 갈파한다. 이것이 바로 근본적인 체득으로 이끈다고 앞에서 말한 바로 그 한 구절이다. "하늘과 땅 사이에서 사람이 사는 시간이라는 것은 마치 천리마가 벽의 갈라진 틈새를 내달리며 지나치는 순간 정도이다. 홀연할 따름이다!"('지북유'편) 장자가 말하는 무한 확장, 덕후지공, 절대 자유, 위대한 성취들은 모두 금방 죽는다는 이 처절하고도 두려운 체득에 푹 빠졌다가 건진 결과들이다. 순간에 대한 체득만이 영원으로 확장하려는 강한 욕망을 갖게 한다. 장자 철학의 핵심은 절대적으로 이 한 구절의 인식에 뿌리를 두고 있다. 장자가 살았던 자유롭고 투철한 삶은 모두 죽음에 대한 진실한 인식을 기초로 한다.죽음은 경험되지 못한다. 경험하는 순간 경험하는 주체의 의식이 원래 차지하고 있던 자리를 이탈해버리기 때문이다. 그래서 죽음은 누구에게나 제3자의 일로 다가올 수 있을 뿐이다. 우리는 타자의 죽음을 통해서 죽음을 간접적으로 경험하는 것이 전부다. 내 죽음을 경험할 수는 없다. '금방 죽는다'는 말을 듣거나 의식하는 당시에는 평정이 허물어지고 내면이 동요하기 때문에 체득이 일어나는 것 같지만, 잠깐 지나면 '금방 죽는다'는 문장이 나의 일로 남지 않는다. 나에게 경험되지 않기 때문에 항상 '죽음'으로만 존재하지 죽어가는 일로서의 '사건'으로 의식되지 못하는 것이다. 보자. '죽음'은 없다. 있는 것이라고는 '죽어가는 일'이 있을 뿐이다. 체득은 '죽음'에 대하여 내용적으로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죽어가는 사건'으로 직접 경험한다는 것이다. 문제는 '죽어가는 사건'을 내가 경험할 수 없다는 데에 있다. 다만, 죽음의 구체적 상황 비슷한 경우 속으로 나를 밀어 넣을 수는 있다. 나에게 직접 닥치는 '사건'으로 체득하려면 '죽음'이라는 말을 들으면서 '평정'이 무너지며 내면이 동요하는 그 경험의 시간을 계속 늘려나가는 수밖에 없다. 기억하고 의식하는 수밖에 없다. 죽음에 대한 공포가 운명처럼 우연히 다가와서 집요하게 머물러 죽음을 '사건'으로 대면할 수 있기도 하지만, 보통 그런 경우는 매우 희박하므로 우리는 튼실한 삶을 위해 죽음을 의식적으로 자주 불러들이는 수밖에 없다. 인생이 짧디 짧다는 것을 항상 의식적으로 기억해야 한다. 나는 '금방 죽는다'는 사실과 '죽어가는 사건'의 실재성을 연속적으로 붙들어 놓고 싶다. 그것이 삶을 튼실하게 하는 비결임을 알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침에 일어나면 조용히 앉아 "나는 금방 죽는다"고 서 너 번 중얼거린다. 그러면 적어도 그 날 하루는 덜 째째해질 수 있다. 최소한 그날 오전까지 만이라도 덜 째째해질 수 있다. 나 자신을 번잡하고 부산스러운 곳에 두는 일을 그나마 조금 줄일 수 있게 된다. 시간을 조금이라도 더 소중하게 쓸 수 있게 된다. 급한 일보다는 중요한 일에 더 집중할 수 있게 된다. 그래도 사는 것이 이 모양 이 꼴인 것을 보면 나는 아직 덜 죽은 것이 분명하다. 더 철저하게 죽어버려야겠다./최진석 서강대 철학과 교수·건명원 운영위원송필용作 '소요유' 41×53㎝, 캔버스에 유채. /광주일보 제공/최진석 서강대 철학과 교수·건명원 운영위원

2017-03-27 경인일보

[최진석의 노장적(老莊的) 생각·3]이념에 빠지지 말고, 세계에 직접 접촉하라

자연이 하는 일 인간이 하는일다 알면 가장 '수준 높은 사람'2천여년전 장자 통찰력 정확지식 '진짜'를 개괄하는 것일뿐이론은 구체적 세계 아냐높은 지식인 '진짜 세계'를 사유지적인 완성은 현실서 검증돼지식 생산국 아닌 수입국 한국과정 모른채 '이념' 가져다 써세상 변해도 바꾸지않고 '집착'성리학 고집 조선 결국 日에 당해현실 기반 혁신가가 '진화' 이뤄시선의 무게 '구체적 세계'에 둬야독립적 창의적으로 사는 길철학자 장자(莊子)는 보통을 훨씬 넘어선 그의 시각을 기록으로 남겼다. "수준이 가장 높은 사람은 하늘이 하는 일을 알면서, 인간이 하는 일을 아는 사람이다."(知天之所爲, 知人之所爲者. 至矣.) 「대종사」 편 첫머리에 등장하는 말이다. 지금부터 2000년도 훨씬 전에 이렇게 가장 높은 곳에서 인간사를 개괄했다는 것이 놀라울 따름이다. 원래 인간은 두 세계를 겹쳐 놓은 무대에서 사는데, 하나는 자연의 세계요, 다른 하나는 문명의 세계다. 자연은 인간이 없을 때부터 존재했으며, 사실상 인간과 상관이 없던 세계다. 문명은 오롯이 인간이 건설한 세계다. 인간은 이 두 세계 외에 다른 세계를 가지지 않는다. 그러므로 한 사람이 이 두 세계를 가장 높은 차원에서 알게 된다면, 그는 지적으로 가장 탁월한 능력자다. 설령 가장 탁월하지는 못할지라도 인간으로서 이 두 세계에 대하여 균형 잡힌 이해를 하고 있으면, 어느 정도는 높은 단계에서 능력을 발휘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두 세계를 다 아는 것은 나처럼 적당한 지력을 가진 사람에게는 버거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 한 쪽이라도 제대로 아는 것에서 출발하자고 제도적으로 합의한 결과, 고등학교 2학년 올라갈 때 영역을 구분한다. 즉 문과와 이과를 각자 선택하여 우선 한 쪽을 집중적으로 공부하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문과와 이과를 어떤 기준으로 선택했냐고 물으면 가장 많은 답으로 '수학Ⅱ'를 든다. '수학Ⅰ'은 어떻게 해보겠는데, '수학Ⅱ'까지는 자신이 없을 때 문과를 택한다는 것이다. 결국 '수학Ⅱ'가 부담이 안 되는 사람이 이과를 간다. 그러나 문/이과를 선택하는 데에 이보다는 깊은 의미의 이유가 있을 것이다. 문과를 가서 배우는 학문을 보자. 철학, 사학, 문학, 정치, 경제, 법률, 신문방송학 등이다. 이과로 진학한 다음에는 주로 생물학, 물리학, 지구과학, 천문학, 수학, 화학 등을 배운다. 이렇게 나눠놓고 보면, 두 영역을 가르는 기준이 희미하게 드러난다. 이렇게 물어보자. 이 지구상에서 어떤 연유인지는 모르나 인간이 갑자기 한 명도 남김없이 모두 사라져버렸다고 치자. 그렇다면 문과에서 배우는 학문 분야는 인간이 사라져버려도 여전히 남아 있는가? 아니면 함께 사라져 버리는가? 함께 사라져 버린다. 똑같은 질문을 이과 학문 대상들에게도 할 수 있다. 인간이 모두 사라져버려도 이과에서 배우는 학문 대상들은 여전히 존재한다. 이렇게 본다면 우리가 문/이과를 선택할 때, 인간이 사라져도 여전히 남아 있는 것에 관심이 있으면 이과를 가고, 인간이 사라질 때 함께 사라져버리는 것에 관심이 있으면 문과를 가는 것이라고 알 수 있다. 인간이 개입되어 있느냐 개입되어 있지 않느냐가 관건이다.세계를 통괄하는 능력을 가진 인간형을 추구한다면 문과와 이과를 나누는 것보다는 당연히 문/이과를 함께 다루는 교육 제도를 가져야 할 것이다. 세계는 문(文)과 이(理)의 두 영역으로만 되어 있고, 이 두 영역은 인간의 실존적 전체 공간이기 때문이다. '자연이 하는 일과 인간이 하는 일을 다 알면 가장 높다'는 장자의 통찰은 얼마나 정확한가. 이제 자연세계와 인간세계를 모두 이해한 가장 지적인 인격이 태어났다.자연 세계와 문명 세계의 이치를 모두 아는 사람은 얼마나 위대할까? 그 정도의 사람이 하는 일은 또 얼마나 거창할까? "하늘이 하는 일과 인간이 하는 일을 모두 아는" 비범한 높이의 인격을 가진 사람을 창조한 장자는 이런 높이의 사람이 가지는 구체적인 효과를 다음처럼 말한다. "천수를 누리고 중도에 요절하지 않는다. 이것이 지적으로 최고의 단계다."(終其天年, 而不中道夭者. 是知之盛也.) 지적으로 최고의 단계에 이른 사람이라면 무언가 초월적이고 추상적이고 월등한 무엇을 할 수 있는 능력을 보여줄 것이라고 생각했던 사람들은 거의 아연실색할 지경이다. 그렇게도 높은 단계의 지적인 완성으로 누릴 수 있는 것이 고작 요절하지 않는 것이라니…! 뭔가 갑자기 촌스러운 골목 모퉁이를 도는 착각이 들 정도다. 최소한 자유나 행복이나 정의나 완벽함이나 성스러움 등이 나올 줄 알았는데, 고작 천수를 누리는 정도라니, 이해가 가질 않는다.도대체 죽는다는 일은 무엇일까? 인간이 실제 생활에서 감당하는 구체적인 일 가운데 가장 무거운 것이다. 실제로 벌어지는 일 가운데 이보다 큰일은 없다. 그런데 지식에는 끝없이 분화하는 속성이 있다. 무한히 분화하면서 한없이 확장한다. 지식의 분화에는 원심력이 작용하고, 실재 세계는 중력의 영향을 받는다. 지식의 분화에 몸을 맡긴 사람은 진짜 세계로부터 계속 이탈하고 벗어날 수밖에 없다. 유한한 생명을 가진 인간이 무한 분화하는 지식을 따라 원심력에 몸을 맡기면 매우 위험하다는 경고판을 장자는 이미 「대종사」편 앞의 「양생주」 첫머리에 세워 놓았다.(吾生也有涯, 以知也無涯, 以有涯隨無涯, 殆已) 그는 지식이란 실재 세계, 즉 구체적인 세계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을 말하고 싶어 했다. 그는 단호하게 말한다. "개념이라는 것은 실재 세계의 손님일 뿐이다."(名者, 實之賓也.「逍遙遊」) 세계 그 자체는 구체적으로 유동한다. 그것이 실재이고 진짜이다. 지식이란 원래 구체적으로 존재하는 진짜 세계를 개념이나 관념의 형식으로 구성한 것이다. 지식은 진짜가 아니라, 진짜를 개괄하는 것일 뿐이다. 당연히 지식이나 이론은 진짜 세계일 수 없다. 지적으로 완벽한 인간은 세계를 믿지, 지식에 전적으로 의존하지 않는다. 어설픈 지식인은 지식이나 이론을 화려하게 나열한다. 하지만, 높은 단계의 지식인은 투박하더라도 세계에 대하여 직접 말한다. 세계를 사유하지, 사유를 사유하는 일을 하지 않고 구체적인 세계에 직접 접촉한다. 장자는 구체적인 세계에 직접 접촉하고, 거기서 성숙해지는 것이야말로 지적으로 완성된 사람이 보여주는 경지라고 말하고 싶었던 것 같다. 결국 지적인 완성은 현실에서 검증될 뿐이다.우리는 지식 생산국이 아니라 지식 수입국이다. 지식은 구체적인 진짜 세계를 밭으로 삼아 바로 거기서 출생한다. 지식 수입국은 밭에서 지식이 생산되는 과정을 모른 채, 수확된 이론 체계만을 가져다 쓴다. 생산 과정을 모른 채 이론을 수입한 나라는 그 이론을 바로 진리로 여긴다. 밭에서 생산된 것이라는 인식이 있으면 밭을 터전으로 삼지만, 그 과정을 모른 채 수확물을 수입만 해서 쓴다면 수확물 자체를 보물로 여기기 때문이다. 그래서 구체적인 생산 과정에 익숙한 사람들은 주도권을 세계에 두고, 이론을 수입한 나라의 사람들은 주도권을 세계가 아니라 이론에 둔다. 당연히 지식 생산국에서는 세계가 변하면 이데올로기나 이론을 바꾸며 변화해 가지만, 지식 수입국은 한 번 받아들인 이론을 끝까지 믿으며 절대 바꾸려 하지 않고, 오히려 그 이론으로 진짜 세계를 통제하려 든다. 한 쪽은 변화하며 앞으로 나아가지만, 한쪽은 정체될 수밖에 없다. 지식과 실재 세계를 대하는 이런 태도의 차이가 바로 독립과 종속을 결정해버린다.조선 시대에는 이런 일이 있었다. 패망의 기운에 붙잡힌 고려 말의 모순을 극복하고 새로 성립된 나라인 조선은 고려하고는 전혀 다른 통치 구조나 이데올로기를 쓸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성리학(性理學)과 중앙집권 관료체제를 선택한다. 성리학은 중국 송나라 때 형성된 새로운 형태의 유학적 이데올로기다. 조선은 원나라와 명나라가 교체되는 시기에 성리학을 받아들여 그것을 통치 이데올로기로 정하고 난 후, 줄곧 원래의 성리학 모습을 지키려 매우 노력한다. 하지만 중국은―물론 왕조가 교체되는 정치적 격변을 동반하였다는 점을 이해하더라도―구체적인 현실 세계의 사회 경제적 조건이 달라지면 바로 거기에 맞춰 이데올로기를 바꿨다. 그래서 같은 유학이라도 명나라 때에는 양명학(陽明學)으로 변하고 청나라 때에는 고증학으로 변한다. 다시 조선을 보자. 조선은 1392년에 건국하면서 성리학을 이데올로기로 채택한 후 사상 논쟁의 핵심은 모두 누가 더 성리학의 원래 모습을 철저히 지키느냐에 집중되었다. '순수 집착'에 빠진 조선의 엘리트들은 사회 경제적 조건이 어떻게 변하더라도 중국에서 들어온 '진리'로서의 '성리학'을 손톱만큼도 바꾸려 하지 않았다. 모름지기 한 나라가 발전한다는 것은 이데올로기 혹은 어젠다나 비전 같은 것들이 그 사회가 처한 요구와 일치하였을 때에만 이루어진다. 그 사회가 처한 현실적 요구와 비전이 일치하지 않을 때는 바로 비효율이 쌓이기 시작한다. 비효율이 쌓여가면서 국가는 허약해지고, 길을 잃는다. 조선은 이데올로기를 현실에 맞춰 바꾸는 대신, 현실을 이데올로기에 맞추려는 노력만 했다. 세계에서 이론을 생산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를 정해진 이론에 꿰맞추려 한 것이다. 진리를 지키려는 순수한 집착,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물론 여러 가지 효율적이며 실재적인 일들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큰 틀에서는 이 흐름을 줄곧 유지하였다. 이런 식으로 이론에만 집착하는 일을 장장 200년 동안이나 한 것이다. 200년 동안 하나의 이데올로기를 변함없이 지키려고 노력한 결과 국가는 극단적인 비효율에 빠져 허약해졌다. 결국 1592년 일본의 침략 앞에 맥없이 당하는 치욕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그렇다면 중국은 어떻게 이론 틀에 세상을 맞추려 하지 않고, 세상이 달라짐에 따라 대담하게 이론을 바꾸는 일을 할 수 있었을까? 간단하다. 중국은 그 이론을 생산한 나라이기 때문이다. 이론을 생산한 나라는 이론이 현실이라고 하는 밭에서 생산된 것이라는 것을 안다. 그래서 그들은 시선의 무게 추를 이론에 두지 않고, 직접 현실에 둔다. 구체적인 세계와 현실을 중심에 놓고 생각하지, 이미 정해진 이론을 금과옥조로 여기지 않는다. 이론은 그저 현실에서 생산된 부산물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이와 달리 이론을 수입한 나라는 이론이 생산되는 그 과정을 경험하지 못한 채, 이미 생산된 이론만을 수입해서 쓰기 때문에 이론을 불변하는 진리로 여기기 십상이다. 이런 경우에는 이론이나 이데올로기를 바꾸면 바로 정의롭지 않은 변절자로 취급받기 십상이다. 그러나 세상의 진화는 현실에 기반을 둔 변절자(혁신가)가 해내지, 이념이나 이데올로기에 충실한 근본주의자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그래서 지적인 완결성은 구체적인 현실에 시선의 무게 추를 두고, 거기서 사유의 밭갈이를 하는 우직함에서 드러날 뿐이다. 그 밭갈이의 완성은 또 이 세상에서 가장 구체적일 수밖에 없는 자신의 생명 앞에 좌우된다. 지식의 원심력을 극복하고, 실재의 중력을 항상 느껴야 한다. 그것이 독립적이고 창의적으로 사는 길이다.서강대 철학과 교수·건명원 운영위원송필용作 '자연과 문명' 캔버스에 유채 41x53cm 2017. /광주일보 제공

2017-02-27 경인일보

[최진석의 노장적(老莊的) 생각·2] 이룬 공(功)을 차고앉지 말라

성공한 사람의 가장 '큰 적'은상황·조건·환경 변하는데'성공 기억·과거' 갇히는 것노자 '공성이불거(功成而不居)'혁명 이룬후 고착돼선 안돼단순히 정권·권력 교체 아닌'정치 발전·상승' 새 세상 펼쳐야中 유방 황제된 후 경전 공부혁명가서 국가 경영자로 '변신'한국 통치자 권력 잡는데만 성공건국·산업화·민주화 세력자신들이 '진리'라고 싸우는 꼴새로운 사명 찾아 각성해야'무위'로만 위대함 이룰수 있어성공한 사람의 발목을 잡는 가장 큰 적은 무엇일까? 한 번 성공을 해 본 사람이라면 그것을 바탕으로 하여 또 다른 성공을 이루고 싶어 할 텐데, 그것을 못하도록 하는 가장 센 요인은 도대체 무엇인가? 그것은 '성공 기억'일 가능성이 가장 크다. 한 번 강력한 성공을 경험한 사람이라면 대개 성공할 때 사용하였던 그 방법과 섬광 같았던 결정의 순간을 짜릿한 신화의 중심 줄기로 붙잡게 된다. 하지만 그 신화의 줄기가 다시 자라는 일은 있을 수 없다. 왜냐하면 세월이 그리도 무정하기 때문이다. 세월은 원래 있던 환경을 지우고 전혀 다른 환경을 세워가며 질주해 나간다. 이 동작은 한 번도 멈추지 않는다. 그래서 성공할 때 발을 딛고 있던 그 상황과 조건은 두 번 다시 반복되지 않는다. 한 번 더 성공을 꿈꾸는 그 사람이 마주해야 할 상황은 언제나 새롭고 처음 직면하는 것이다. 이러한 데도 '성공 기억'에 갇힌 사람은 새롭게 나타나는 조건마저도 과거에 했던 그 성공의 기억으로 다루려 한다. 움직이는 세상을 자신의 기억 속에 가두려는 무모한 시도와 다르지 않다. 한 번 더 큰 성취를 이루고 싶다면, 우선 그 짜릿한 기억에서 벗어나야 하리라. 기억은 과거이고, 한 번 더 해야 할 성공의 결정적 순간은 이미 과거를 벗어난 환경 앞에 있다. 문제는 이 새로운 조건 앞에서 어떻게 새로운 결정을 새로운 방식으로 할 수 있는가이다. 노자는 말한다. "공이 이루어지면, 그 공을 차고앉지 말아야 한다."(功成而不居) 공을 차고 앉았다는 말은 바로 성공 기억에 갇혔다는 뜻이다.노자는 처음에 이 말을 정치적인 의미에서 주로 사용하였다. 정치인이 지속적인 지배력을 유지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백성들의 마음속에 영원히 살아남는 생명력 있는 권위는 어떻게 가질 수 있는가? 우선 자기가 이룬 공, 바로 그것에 함몰되지 않아야 한다. 그리고 그것을 이룰 때 사용하였던 방법에 고착돼서는 안 된다. 에리히 프롬은 말한 적이 있다. 어떤 혁명가가 자신이 타도하려고 하는 대상을 타도하고 나서 그 자리를 차지하고 앉으면 그것은 이미 혁명가가 아니라 반항아에 불과하다고…. 왜 진실한 표정을 지은 채 혁명가로 자처하며 목숨을 불사하던 헌신적인 사람들이 혁명을 이룬 후에는 쉽게 비판받고 버림받는가. 그것은 혁명 대상을 타도하고 나서 그 자리를 차고앉으려 시도하면서 이미 자신이 타도하려던 그 대상과 부지불식간에 닮아버리기 때문이다. 정치 자체를 상승시키지 못하고, 정권만 교체한 형국이다. 혁명의 기운이 감돌 때, 백성들이나 국민들이나 시민들은 모두 지금과는 다른 세상을 꿈꾼다. 다른 세상은 다른 정치로만 가능하다. 혁명가들은 대개 다른 정치를 제공하겠다고 선동하지만, 결국 타도 대상이 앉았던 자리에 자신이 앉음으로써 다른 정치의 길은 요원해져 버린다. 정치가 상승하는 길은 사라지고, 권력만 교체된다. 이 정권이 저 정권으로 바뀐 것에 불과하다. 더 좋은 세상을 위해서 필요한 것은 정치의 발전이지 정권이나 권력의 교체가 아니다.당연히 혁명이라는 공을 이룬 후에는 그것을 차고앉으면 안 된다. 왜 아직도 현대의 유일한 혁명가로 체 게바라를 드는지 알 수 있다. 아르헨티나 출신의 체 게바라는 쿠바를 혁명시키고 나서 쿠바의 권좌에 눌러앉지 않았다. 바로 다음 혁명지인 볼리비아를 향해 떠났을 뿐이다. 체 게바라에게는 혁명만 있었지 권력이라는 의자에 앉으려는 정주(定住)의 욕구가 없었다. 그래서 혁명을 또 혁명하며 비로소 유일한 혁명가로 남을 수 있었다. 그렇다면, 우리 주위에서 들리는 익숙한 혁명가의 이름들은 사실 반항아일 가능성이 매우 크다. 사회가 진보하지 못하고 있다는 말은 혁명가가 아니라 반항아가 권력을 가지고 있다는 방증이다. 지금의 대한민국 현실에서도 정권 교체를 강조하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으로 보아서는 권력의 교체는 있을지 몰라도 정치의 상승을 기대하기란 어려울지도 모른다.이런 반항아들은 스스로 혁명가라 자처하고, 자신들이 했던 반항의 활동을 혁명적이었던 것으로 포장한다. 진실한 혁명가는 스스로를 혁명가(革命家)라고 말하지 않는다. 부단한 혁명만 있기 때문에 자기를 어떤 집안(家)에 앉혀 둘 수 없기 때문이다. 특정한 집안(家)의 의자에 앉아 혁명을 말하려 하는 순간 그는 바로 반항아로 전락하지 않을 수 없다. 반항아들은 모두 무엇인가를 타도하고 난 후, 바로 그 자리를 차고앉아 바로 정주(定住) 형태의 집안(家)을 이루어버린다. 혁명이 성공한 그 순간을 차고앉는다. 혁명의 기억에 갇힌다. 이렇게 하여 앞으로 일어나는 어떤 일들도 이 혁명의 기억을 가지고만 재단한다. 그 기억에 맞으면 선이고, 그 기억에 맞지 않으면 반동이다. 혁명의 '깃발'이 바로 '완장'으로 바뀌는 순간이다. 모든 혁명의 과실은 역사 속으로 스며들지 못하고 조작된 기억으로 담장을 친 이 집안으로 흘러들어가 버린다. 어쩔 도리가 없이 혁명의 동네는 이 집안의 지배를 받는다. 역사가 더 흐르고 싶어도, 동네가 더 진보하고 싶어도, 혁명을 지속하고 싶어도, 혁명 시기 쌓인 증오를 벗어버리고 싶어도, 화해하고 싶어도, 다른 새 세상을 만들어보고 싶어도, 혁명의 그 기억에 갇힌 집안에 발목이 잡혀 있는 한, 한 발짝도 떼지 못한다. 혁명이란 지속적으로 혁명될 때에만 혁명이 된다. 권력의 교체에 머무르지 않고, 정치의 상승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렇지 못하면, 진보적 혁명도 결국은 보수화되고, 혁명가들은 또 다른 권력자로 남을 뿐이다. 그래서 공이 이루어지고 난 후에는 그것을 차고앉지 말자고 말하는 것이다.혁명의 기억에 갇히지 않음으로써 정치 발전을 이루고 새 세상을 펼친 예로는 중국의 유방(劉邦)을 들 수 있겠다. 유방은 항우와의 치열한 전투를 거쳐 승리자가 된 후, 한(漢)이라는 이름을 단 새로운 정치 마당을 펼친다. 황제가 되어 새 정치를 펼치고 있는 유방에게 육고(陸賈)라는 신하가 말한다. "황제께서는 이제 경전을 공부하십시오." 여기서 경전은 철학이나 문학 혹은 역사 등 경세의 근본에 관한 학문을 가리킨다. 그러자 유방이 화를 내면서 말한다. "나는 경전 공부 없이도 말 잔등에 올라탄 채 천하를 차지하였다. 이런 경전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그러자 육고가 차분한 어조로 대들며 재차 주장한다. "말 잔등에 올라탄 채로 천하를 차지했다고 해서, 말 잔등에 올라탄 채로 천하를 다스릴 수는 없습니다." 유방의 위대한 점은 육고의 이 충고를 그 즉시 알아들었다는 데에 있다. 육고의 지도 아래 유방은 바로 경전 공부에 들어가는데, 이런 경청(傾聽)의 능력으로 유방은 천하를 차지할 때의 기억에 갇히지 않을 수 있었다. 만약 혁명의 그 기세와 기억에 사로잡혀 있었다면 유방도 분명히 말 잔등에 올라탄 형상으로 국가를 다스리려 했을 것이다. 그러나 유방은 공이 이루어질 때의 그 기억에 갇히지 않고 바로 변신을 감행하였다. 혁명가에서 국가 경영자로 변신함으로써 오히려 혁명을 완수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지금까지 대한민국의 통치자들은 모두 권력을 잡는 데까지는 성공하지만, 결국 권력을 잡을 때의 그 기억에 갇혀 국가 경영자로 변신하는 데에는 실패하였다. 정치인에서 국가 경영자로 진화하지 못한 것이다. 바로 공이 이루어지고 난 다음에 그것을 꿰차고 앉은 결과다.통치자들이 연이어 정치인에서 국가 경영자로 변신하는 데에 실패하면, 나라의 진보나 진화는 어느 단계에서 멈출 수밖에 없다. 그 결과 대한민국은 신생 독립국으로 출발한 지 70년 만에 한계에 갇혀 긴 시간 새로운 출로를 찾지 못함으로써 탄력을 상실하고 낡아버렸다. 한계에 갇혀 늙어버린 형편의 내용은 무엇인가. 공을 이룬 후에 그것을 꿰차고 앉은 결과다. 늙었다는 평가를 받기 전까지의 우리는 세계가 주목할 만한 직선적 발전을 구가하였다. 바로 해방 후 건국, 건국 다음에 산업화, 산업화 다음에 민주화를 시대적 요구에 맞춰 잘 해낸 것이다. 건국-산업화-민주화의 직선적 역사발전은 국가에 효율을 가져다주어 사회 각 부문이 모두 탄성 있고 탄력 있었다. 풍모가 젊고 싱싱하여 도전적이었다. 그러나 민주화까지 내달리고 난 다음에 우리는 그 다음의 목표를 설정하지 못하고 있다. 다음 목표가 설정되어야만, 그 목표를 새로운 사명으로 삼아 나아가면서 이미 이룬 공을 꿰차고 앉는 퇴행적 탐욕을 부리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민주화 다음의 새로운 목표가 서지 않고 있으니, 민주화 세력은 민주화의 공을 꿰차고 앉아 있고, 산업화 세력은 산업화의 공을 꿰차고 앉아 있으며, 심지어 건국세력까지도 건국의 공을 꿰차고 앉아 있다. 꿰차고 앉아서 자신이 세운 공(功)이 진리라고 주장하며 싸우는 모습이 지금 우리의 민낯이다. 화려했던 그 성공의 기억을 붙들고 해왔던 얘기를 계속 해대며 자신의 입장을 권력화하려고만 한다. 그러나 정권이나 세력에 묻지 않고 역사에게 묻는다면, 대답은 의외로 간단하다. 이제 건국 세력도 과거이고, 산업화 세력도 과거이며, 민주화 세력도 과거이다. 각 세력 집단들은 우선 자신이 벌써 과거가 되었음을 인식해야 한다. 과거가 되었음을 인식해야만, 자신의 공을 꿰차고 앉지 않을 각성이 가능하고, 이 각성이 있어야만 새로운 탄력과 탄성이 시작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을 새 정치라 하고, 새 역사라 하는 것이다. 과거가 미래의 발목을 잡으면 안 된다."공이 이루어져도 그것을 차고앉지 않는 일"(功成而不居)은 노자 철학의 핵심인 '무위'(無爲)의 한 형태이다. 노자에 의하면, '무위'로만 위대함을 이룰 수 있다. '무위'하면 '안 되는 일이 없다.'(無不爲) 독일의 문호 괴테는 스스로를 뱀과 같은 존재로 생각했다. 허물을 벗고 항상 새로운 시작을 시도한다는 뜻이다. 괴테만큼의 성취를 이루고 간 사람이 몇이나 될까. 괴테의 성취는 부단한 허물벗기의 결과다. 허물을 벗는 뱀은 살고 허물을 벗지 못하는 뱀은 마침내 죽을 수밖에 없다. 공(功)이라는 허물에 갇히면 안 된다.서강대 철학과 교수·건명원 운영위원송필용 작가의 '역사는 흐른다'. 캔버스에 유채 53x72.7cm 2017. /광주일보 제공

2017-01-30 경인일보
1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