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에서 찾는 고려 1100년의 흔적

 

[경기에서 찾는 고려 1100년의 흔적·10·(끝)]경기천년과 고려 개성(開城) 정도(定都) 천백년

토풍·화풍 조화 속에서 다듬어진 고려 문화새 천년 끌어가기 위해 축적된 것 정리하고'개성특급시' 현재적 상황 받아들여야 할 때2018년은 경기제도가 실시된 지 천년이 되는 해이다. 여기서 경기제(京畿制)는 지방행정제도라는 것이 일반적인 이해이지만, 필자 생각은 그렇지 않다. 경기제는 수도 개경을 위시한 특별 범위에 속한 것이지,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지방행정제도 안에서의 '경기도'와는 다르다.《고려사》지리지에는 '왕경개성부(王京開城府)'라고 하여 다른 지방의 도(道)→주(州) 또는 군현과 달리 '왕경'과 '개성부'의 내용을 함께 서술하며, 경기의 내용을 포함하고 있다. 경기가 지방행정제도와 다른 성격의 위상을 가지고 있음을 보여준다.고려왕조는 황제국 체제를 기반으로 3~4개의 별도(別都)를 운영하는 다경제(多京制)에서 경기제도를 운영했다. 물론 그 중심은 국도(國都)인 개경(開京, 개성)의 경기제도에 있었다. 반면에 조선왕조는 도읍인 한성부(4대문 안)를 위한 경기제도를 운영했다. 당연히 고려왕조의 경기제도에는 국도인 개경이 포함되었지만, 조선왕조의 경기제도에서는 한양이 빠지게 되었다. 고려의 경기제가 단팥이 꽉 찬 빵이라면, 조선의 경기제는 도넛이었다. 서울(중심)이 빠진 주변 문화가 경기문화라는 잘못된 인식의 전환이 시급하다.경기천년을 기념하는 것은 우리가 쉽게 착각하고 있는 '경기 정명(定名) 1000년'을 기념하려는 것이 아니다. 현재의 경기문화가 천년의 역사적 경험과 문화적 축적의 소산임을 재인식하고, 미래의 방향을 다지기 위해서이다. 경기문화는 서울의 주변문화가 아니라 중심문화, 주류문화라는 것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고려는 918년 건국 이후 통일까지 18년이 필요했다. 936년 후삼국의 통일이다. 그리고 1018년, 해동천하의 고려경기문화를 이루어내는데 백년이 걸렸다. 고려문화는 토풍(土風, 國風)과 화풍(華風, 선진 문물)의 조화 속에서 다듬어졌다. 송나라·거란·여진을 넘어 아라비아까지 교류하여 코리아(Corea, Korea)를 세계에 알렸다. 그것은 고려사회의 특징 중 하나인 다원사회(多元社會, A plural society)로 귀결되었고, 포용성·역동성·다양성·개방성 등의 문화적인 특징으로 정리되었다. 1018년. 경기제도의 시행은 경기문화가 곧 고려문화임을 드러내는 문화사적인 의미를 가진다. 그런 결과들이 현재 대한민국문화의 원형이 되었고, 그 중심에 경기문화가 있었다는 사실이 분명하게 인식되어야 한다.우리 사회의 지향은 세계를 향한 보다 개방적인 다원사회에 있다. 이를 위해서는 천년, 또는 천백년 동안 축적된 문화양상들을 정리할 필요가 있다. 새로운 천년문화를 끌어가기 위한 저력의 불씨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2019년은 고려가 개성에 도읍을 정한 지 천백년이 되는 해이다. 분단의 상흔으로 쓸쓸한 이미지의 개성에 머물러 있을 때가 아니다. 경기의 옛 영역으로서 개성이라는 우리의 우선적인 시각도 교정되어야 한다. 개성은 북한의 평양 다음의 두 번째 도시이고, 그 위치도 황해남북도와는 다른 개성특급시라는 현재적인 상황을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한다. 그러면 거기에서 새로움을 찾을 수 있다. 그것이 이루어져야 한껏 기대에 부풀어 '펑!'하고 터지지 않을 남북교류의 기반을 만들 수 있다. 경기천년의 올해(2018)에 이어 고려 개성 정도 천백년의 내년(2019)에는 이런 것부터 시작되었으면 좋겠다. 그런 가운데 '경기(京畿)', '경기인(京畿人)'의 모습과 내용들은 자연스레 정리되고 진전될 것이다. 그것이 또 경기문화의 정체성을 찾고 가꾸는 작업임은 분명하다. 거기에는 다양성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2019년, 고려 개성 정도(定都) 천백년은 그렇게 맞아야 한다. /김성환 경기문화재단 정책실장맑은 여름날, 임진각 전망대에서 바라본 북한의 개성. /경기문화재연구원 제공맑은 여름날, 임진각 전망대에서 바라본 북한의 개성. /경기문화재연구원 제공붉은색으로 군사분계선이 표시된 한반도 지도

2018-08-06 김성환

[경기에서 찾는 고려 1100년의 흔적·9]남과 북에 함께있는 문화유산

계단식으로 조성된 능역, 호석·돌짐승 배치개성 주변부 60여기 자리… 세계유산 등재도여몽전쟁시기 강화에 만든 4기 '교류 매개체'전근대 국가에서 왕은 특별한 존재였다. 그래서 왕의 안식처는 보통 사람의 무덤과 구별해 능(陵)이라 부른다. 최고 권력자의 무덤인 만큼 왕릉은 도읍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자리한다. 500여 년 고려의 수도였던 개성 주변에는 태조 왕건릉을 비롯해 60여기의 고려 왕릉이 있다.고려 왕릉은 통일신라시대의 왕릉 제도를 계승 발전한 것이다. 능역에 석인상과 돌짐승을 배치하고 12지신을 새긴 호석을 봉분 주위에 설치하는 방식은 중국 영향을 받아 통일신라시대부터 유행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내부 구조는 고려만의 독특한 모양을 갖추고 있어 계승과 창조가 함께한다. 개성 일대 왕릉 가운데 태조 현릉과 공민왕 현릉, 충목왕 명릉, 7릉떼 왕릉 군이 2013년 '개성역사유적지구'로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된 유적에 포함되었다.고려 왕릉은 대개 좌우로 산줄기가 감싸고 그 사이에 천이 흘러가는 산 중턱에 터를 잡았다. 능역은 산지의 경사를 따라 3~4단의 계단식으로 조성되었다. 계단식 구조는 산지의 지형 훼손을 최소화 하면서도 능의 위엄을 높일 수 있는 고려인의 지혜였다. 능역의 가장 위에는 석실을 조성하고 그 위에 쌓은 봉분 주위에는 호석을 두르고 돌짐승을 배치하였다. 아랫단에는 석인상과 장명등을 설치하고 제례를 지내기 위한 전각도 배치했다. 고려시대에는 왕릉에 현릉, 장릉처럼 우리에게 익숙한 이름을 붙이기 시작했다. 공민왕릉에서 완성된 고려의 능제(陵制)는 이후 조선 왕릉의 원형이 되었다.고려 왕릉은 도굴의 피해를 입은 경우가 많아 온전한 부장품의 양상을 확인하기 어렵지만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된 (傳)인종 장릉 출토 청자 참외모양 병(국보 94호)과 청자 합, 잔, 청동 도장, 은제 수저, 시책(諡冊) 등을 통해 당시 왕릉의 위상을 짐작 할 수 있다.고려 왕릉은 개성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남쪽 강화에도 있다. 강화는 임시 피난처가 아니라 여몽전쟁기간 동안 개경을 공식적으로 대체한 도읍이었기 때문이다. 고려 사람들은 강화를 강도(江都)라 했고 황제의 도읍으로 인식했다. 1232년 천도 당시 강화로 옮겨졌던 태조 왕건의 관은 개경으로 돌아갔지만 강도시기에 세상을 떠난 왕과 왕비의 능은 남았다. 국왕이었던 고종의 홍릉을 비롯해 희종의 석릉, 고종의 어머니 원덕태후의 곤릉, 고종의 며느리 순경태후 가릉 등 4기의 왕릉이 그것이다. 이 밖에 인산리석실분과 능내리석실분, 연리 석실분 등 아직 주인을 알 수 없지만 왕릉이 분명해 보이는 석실분도 있다.강화에도 고려 왕릉이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생각보다 많지 않다. 어찌 알고 이곳을 찾은 사람들 가운데 생각보다 작고 초라한 모습에 실망하는 이도 종종 있다. 그러나 아쉬워 할 필요는 없을 듯하다. 강화의 고려 왕릉은 단순한 문화재가 아니라 오늘날 분단의 현실에서 개성의 왕릉과 함께 남과 북이 공유하면서 서로를 잇는 매개가 될 수 있는 살아있는 유산이기 때문이다. /이희인 인천광역시립박물관 유물관리부장강화 곤릉 석실. /이희인 인천광역시립박물관 유물관리부장 제공왕건릉. /정학수씨 제공

2018-07-23 이희인

[경기에서 찾는 고려 1100년의 흔적·8]고려의 찬란한 도자문화 경기에서 시작되다

용인·시흥등 백자와 함께제작상감기법도 가장 먼저 도입해사원·행궁역할하던 경기사찰당시 최고급제품과 같이 사용고려시대 청자는 왕실과 귀족의 취향을 나타내는 대표적인 공예품이다. 고려청자는 12~13세기에 전라남도 강진과 전라북도 부안을 중심으로 전성기를 맞이하였는데, 처음에는 색깔과 형태가 가장 우선이었다. 좋은 청자색은 '비색(翡色)'이라 불리며, 이러한 고려청자의 비색을 가리켜 동시대 중국에서는 '천하제일'이라 일컫기도 했다.전성기 고려청자의 형태를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은 동물이나 식물, 인물을 표현한 상형(象形) 청자이다. 상형청자의 모티브는 크게 원앙·오리, 참외·죽순·표주박 등 자연적 소재와 불상·보살상·나한상·연꽃·기린(麒麟)·봉황 등 종교적 소재로 나누어진다. 전성기 고려청자의 주된 관심과 가치는 시간이 지나면 색깔·형태보다도 상감(象嵌) 무늬로 옮겨가게 되었다.상감청자의 무늬 표현은 높은 제작 기술을 갖추어야만 가능한 것으로, 상감의 기법 자체는 중국의 영향으로 시작되었지만 고려청자에서 독보적으로 꽃피웠다.고려의 찬란한 도자문화가 시작된 곳은 10세기 무렵 경기도 용인 서리와 시흥 방산동의 가마이다. 시흥 방산동에서는 초기청자를 소량의 백자와 함께 제작하였고 용인 서리는 청자와 백자를 함께 만들다가 고려백자를 주로 제작하는 가마로 바뀌어갔다. 이들 가마에서는 초기에 찻그릇[완碗]을 대량으로 생산하였는데, 차를 마시는 것이 일상생활의 중요한 습관 중 하나였던 고려에서 중국 도자기 찻그릇을 수입하여 사용하다가 고려청자 찻그릇을 만들게 된 것이 우리나라 청자 제작의 시작이다. 용인 서리와 시흥 방산동 가마에서는 점차 찻그릇 뿐 아니라 대접·접시·잔·항아리·병·주자 등 각종 생활용기와 크고 둔중한 모습의 제기(祭器)를 생산하였다. 우리나라 최초로 상감 기법을 시도한 것도 이들 가마이다.11세기 이후 고려청자 생산의 중심이 강진과 부안으로 이동하여 12~13세기 전성기를 맞이한 후에도 경기도에서는 도자 생산이 계속되었는데, 특히 주목할 만한 곳이 용인 보정동 가마이다. 시흥 방산동과 용인 서리에서 청자 생산 초기부터 백자를 함께 만들던 전통이 이어져 용인 보정동에서도 청자와 소량의 백자를 함께 제작하였다. 뿐만 아니라 대형의 화분·반·장고와 불상·보살상·나한상 등을 생산하여 동시대 강진·부안의 생산품과 내용면에서 가장 유사하다는 평을 듣는다.경기도의 가마에서 제작한 고려도자는 주변의 사찰에서 사용되었는데, 경기도 일대에 있는 사찰은 고려시대 개경에서 비교적 가까운 곳에 위치했던 점에서 의미가 크고 강진·부안에서 제작한 고려청자 고급품과 중국자기가 함께 출토되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여주 고달사지, 여주 원향사지, 안성 봉업사지, 용인 마북동사지, 파주 혜음원지 등인데, 특히 파주 혜음원의 경우는 사원과 행궁(行宮)의 역할을 겸하였던 까닭에 최고급의 고려청자를 사용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파주 혜음원지에서 출토된 향로의 파편은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청자 연꽃모양 향로'와 비교할 수 있다. 파주 혜음원지 출토 두꺼비장식이 붙은 청자 편(片)은 비색 상형청자의 한 예라 할 수 있으며, 물가풍경무늬가 새겨진 상감청자 자판(磁板)도 발견되었다. /임진아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사파주 혜음원지 출토 청자 두꺼비 장식 편. /한백문화재연구원 소장 제공(국립중앙박물관 '고려왕실의 도자기' 수록)시흥 방산동 가마 출토 청자·백자 완. /국립중앙박물관 제공용인 보정동 가마 출토 청자·백자 발·접시.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2018-07-09 임진아

[경기에서 찾는 고려 1100년의 흔적·7]고려건축, 비움의 공간과 채움의 길

긴장된 배치로 깊이감 완성 '회암사'자연스럽게 주변 경관 확장 '고달사'불사·역원 결합 실용성 더한 '혜음원'땅·건립배경·기능 맞춘 독창적 구성고려는 다양성과 역동성이 담긴 문화를 꽃피웠다. 고려인의 열린 사고와 미적 감각은 유적과 유물을 통해 우리 곁에 남아있다. 그 중에서도 선승들이 머문 고달사와 왕실의 지원을 받으며 성장한 회암사, 역원의 기능이 강조된 혜음원은 단연 독보적이다. 이 세 절은 옛 기록과 함께 그 터가 발굴되어 당시 시대상과 불교사원의 모습을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다.이들은 모두 야트막한 산자락과 물길로 에워싸인 완만한 경사지에 영역을 구성해 나갔다. 회암사가 긴장된 배치를 통해 공간의 깊이감을 완성했다면, 고달사는 자연스레 이끌려 들어서며 주변 경관 속으로 공간을 확장했다.이에 비해 혜음원은 불사공간과 역원공간을 적절히 결합시켜 실용성을 더하였고, 후면에는 행궁영역이 부가되면서 공간의 위계를 부여하였다.여주 고달사지는 고려시대 대표적인 선종사원이면서 남한강변 사원으로 알려져 있다. 나말려초 남한강 유역에는 여러 선종사원들이 들어서면서 육로와 수로를 통해 승려는 물론 장인과 여행자들의 왕래와 교류가 이루어지면서 다양한 형태의 공간을 만들어냈다. 절의 측면을 따라 어느 사이 넓은 마당에 들어서면 불전과 탑이 살며시 보이고, 그 앞으로 지나쳐온 승방과 수행공간이 물결치듯 내려다보인다. 그 위로는 고승들이 머물렀던 행적을 기념하는 건물과 탑비, 부도가 놓여 있다. 이처럼 고달사는 비어둔 공간의 절점에 부도와 탑, 석등을 설치하여 공간의 흐름과 성격을 유도하며, 10세기 수준 높은 조형예술의 경지를 보여주었다.양주 회암사지는 고려 말의 문인 이색이 262칸이라 기록한 것처럼 궁궐에 비견될 만큼 질서 있는 건물 배치와 규모를 자랑한다. 건물구성을 보면 주지의 거처인 방장과 설법하는 법당, 부처님을 모신 불전, 승려들이 모여 정진하고 공양하는 승당, 음식을 조리하는 부엌, 각종 요사, 창고, 화장실 등 다양한 기능의 건물들이 건립되었다. 이들 건물들은 밀집된 배치 속에서도 빛과 물길의 흐름을 따라 내·외부공간을 조화롭게 구성하였으며, 이제까지 볼 수 없었던 독특한 형태의 온돌구조도 이루어냈다.개경에서 남경으로 가는 길목에 위치한 파주 혜음원지는 예불 공간 앞쪽으로 많은 행인들이 잠시 쉬어가거나 하룻밤 자고 갈 수 있도록 여러 겹의 행각을 배치하였다. 이러한 배치는 기능에는 충실하나 정적이고 단조로운 구성을 하고 있는데, 여기에 숨을 불어 넣어주는 것이 물의 흐름이다. 후원에서 끌어들인 계곡물과 지붕에서 떨어지는 물은 건물지 사이를 부유하다가 연못에서 잠시 멈추기도 하고, 다시 흘러나와 건물 옆 또는 계단, 축대 등을 종횡무진하며 공간의 수직적 변화와 수평적 풍광을 이끌어낸다.이것은 자연을 거스르지 않으면서도 탁월한 기술력과 조형감각으로 조화로운 아름다움을 창출한 것이다. 고려시대 건축은 그것이 자리한 땅이나 건립배경, 기능에 맞게 독창적으로 구성되었으며, 이들 모두 자연과 인간, 마당과 건물, 길과 사람이라는 '비움과 채움'의 의지를 담아 극적인 전이감과 역동성을 표현해 내고 있다. /이승연 경기문화재연구원 선임연구원여주 고달사지 근경. /경기문화재연구원 제공양주 회암사지 서승당지. /경기문화재연구원 제공

2018-06-25 이승연

[경기에서 찾는 고려 1100년의 흔적·6]고려시대 남경길과 혜음원지

고려중기 현재 서울에 '남경' 건설파주·고양 경유 노선 이용 활성화예종, 혜음령에 숙박시설 '원' 설치1122년 완공·재공사 후 행궁 마련국왕 거처 사용·나그네 식량 도움김부식, 보수 기념 '혜음사신창기'기록상으로만 '존재' 전해져 오다1999년 '기와' 발견되며 발굴 진행고려시대 국가 기간교통로는 역도(역로)라 불리는 길이었다. '고려사'에 의하면 총 22개의 역도가 있었다. 역도를 따라서 전국에 525곳에 역이 배치되어 있었다. 역은 원래 공무로 여행하는 여행자와 행정 명령을 전달하기 위해 설치됐다. 역을 이용할 수 있는 사람들은 주로 고급관리나 지체 높은 승려들이었다. 하급 관리들은 공무라 해도 이용의 제한이 있었다. 사실 고급관리나 지체 높은 승려들과 같이 역에 머물러 보았자 뒤치다꺼리만 늘어날 뿐이었다. 이런 하급관리나 일반인들이 역도를 따라 여행할 때, 이용할 수 있는 교통시설로 원이 있었다.원은 원래 절에서 일종의 대민시혜를 목적으로 설립해 여행자는 물론 행려병자, 가난한 백성 등도 구휼하기도 했다. 그러나 국가가 원의 설립을 주도하는 경우도 있었다.고려 중기에 현재의 서울에 남경을 건설했다. 개경에서 남경으로 가는 길이 중요 교통로로 부상했으며 교통체계도 변했다. 원래 개경에서 남쪽, 삼남지방으로 가는 길은 개경에서 장단을 거쳐 적성과 양주를 지나는 길이다. 그런데 고려 중기부터 남경이 개발되면서 개경에서 남경에 이르는 길은 파주와 고양을 거치는 노선이 더 활발히 사용됐다. 개경과 남경을 왕래하는 사람들의 수도 점점 증가했다.하지만 새로운 남경길에는 민간여행자가 안전하게 통행하고 묵어 갈수 있는 교통시설이 빈약했다. 특히 혜음령 일대는 인적이 드물고 도적떼가 많아 통행에 가장 위험한 구간이었다. 혜음령은 여행자를 노리는 도둑들의 소굴이 됐다. 무엇보다 여행객의 안전과 숙박을 보장하기 위한 시설을 갖추고 여행자를 노리는 불한당들을 쫓아낼 방도가 필요했다.1120년 고려 예종은 측근 신하 이소천에게 현재의 파주시 용미리 혜음령 고개 부근에 원을 축조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이소천은 국왕의 명을 받고 응제, 민청 등 승려들의 도움을 받아 약 2년 만인 1122년에 혜음원을 완성했다.하지만 혜음원은 완공되자마자 다시 재공사에 들어갔다. 국왕이 남경에 행차할 경우 국왕이 머물 공간이 없었기 때문에 국왕의 별도의 공간을 마련하기 위해서 재공사를 시작했다.공사가 끝나자 별원(행궁), 절, 원 등 세 부분으로 나눠진 혜음원이 완성됐다. 사용되는 집기와 여행자들에게 공급되는 식량은 왕실에서 도움을 줬다. 그러나 인종 즉위 후 이자겸의 난, 묘청의 난 등이 연이어 발생하면서 정치적 혼란에 처하게 됐고, 혜음원은 운영의 위기를 맞이하게 된다. 하지만 예종 때와 달라진 환경에서 운영난을 극복할 묘책을 찾기 어려웠다. 혜음원이 다시 왕실의 지원을 받게 된 것은 1140년 이후로 추정된다. 이번에는 인종의 비 공예태후 임씨가 왕실 지원을 주도하였다. 왕실의 주도로 혜음원은 다시 활기를 찾고 대대적인 보수도 이루어졌다. 김부식은 이를 기념하여 '혜음사신창기'를 지은 것으로 보인다.그동안 혜음원은 기록에만 전하여 올 뿐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었다. 1999년 '혜음원(惠蔭院'이라는 글씨가 새겨진 기와가 지금의 혜음원터에서 발견되어 세상에 알려졌다. 2001년부터 2015년까지 단계적으로 혜음원지 발굴조사가 이루어졌다. 그 결과 혜음원의 전체 규모와 구조 및 역사적 성격이 밝혀지게 됐다.혜음원의 전체 면적은 약 2만3천930㎡이다. 산 능선을 계단식으로 깎고 다져서 모두 11단의 건물터를 조성했다. 둘레에는 기와를 얹은 담장을 설치해 외부와 구분했다. 담장 내부에는 현재까지 조사 결과 총 37동에 달하는 건물을 세웠던 것으로 밝혀졌다.그 특징은 고려시대 궁궐 건축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는 것이다. 건물터의 배치와 구조 및 출토되는 유물은 개성의 고려 궁터 '만월대'와 아주 유사하다. 이 밖에 계곡의 물을 끌어서 연못과 물을 활용한 조경시설을 건물지 사이사이에 배치한 것도 주목된다. 마치 혜음원이 물위에 떠 있는 모습을 연상하게 한다. /서영일 한백문화재연구원장혜음원지 출토 수막새. /파주시·문화재청 제공혜음원지 전경. /파주시·문화재청 제공북쪽에서 본 혜음원지 건물터. /파주시·문화재청 제공

2018-06-11 서영일

[경기에서 찾는 고려 1100년의 흔적·5]고려불교의 본산, 경기의 사찰

훈요10조 "부처 호위에 의지"문벌귀족 등장에도 지속 지원몽골침략후 황폐, 회암사 중창대장경·불화 대표적 문화유산고려는 불교 국가였다. 태조 왕건은 후대 국왕들에게 유언으로 '훈요10조'를 남겼다. 그는 "우리 국가의 대업은 반드시 모든 부처의 호위에 의지해야 한다"라고 선언하면서, 연등회와 팔관회의 꾸준한 시행을 부탁했다. 그는 호법(護法)을 고려 국가의 안녕과 융성의 기준으로 제시했다.왕건은 건국 이듬해에 개경을 수도로 삼고서 법왕사·왕륜사 등 사찰 10곳을 창건한 뒤 북한산과 관악산 주변에 중흥사와 삼막사를 창건하거나 수리했다. 찬유, 여엄, 경보 등 왕건에 귀의했던 선승(禪僧)도 개경으로 이어지는 남한강 주변에 고달사, 용문사, 사나사, 회룡사 등을 중창하거나 창건했다. 특히 봉업사는 왕건의 초상화를 모신 여러 사원 가운데 하나로 운영되기도 했다.후삼국 통일 전후 교선합일(敎禪合一)의 분위기가 확산되자, 교종 사찰도 전통을 이어갔다. 최치원의 '화엄십산' 중 하나인 청담사, 교종 불교를 아우른 선승 탄문과 관련한 장의사와 봉선사, 김제 금산사, 익산 미륵사와 연고된 혜거가 창건한 도봉사 등은 경기의 대표적인 화엄종과 법상종 사찰로 자리했다.교선 불교의 어울림 속에서, 광종은 고달원, 희양원, 도봉원에만 대장경을 소장하고, 대대로 단절되지 않도록 특별히 명령했다. 도봉사의 흔적은 온전히 확인할 수 없지만, 사방 30리의 사역에 수백 명의 승려가 주석했던 고달사에는 현재 가장 큰 불상 받침돌과 함께 웅장한 크기에 세련된 조각을 담은 승탑이 전하고 있다. 고려 초부터 지금의 경기도 사찰은 왕실의 특별한 관심을 지속적으로 받았다.11세기에 경기 사찰의 영향력은 주변 지역으로도 확대되었다. 정현은 칠장사를 창건하고서 삼천사와 도봉사의 법상종을 개경 현화사로 연결했고, 원주 법천사 해린, 김제 금산사 소현과 인주이씨 이자연, 문종의 아들 도생에게도 이어지게 했다. 안산김씨 김은부의 아들 난원은 문종의 아들 의천, 숙종의 아들 징엄을 거쳐, 서봉사에 머물면서 부석사의 화엄사상을 아우른 인종의 아들 덕소에게 화엄과 천태 불교를 전하기도 했다. 문벌 귀족의 등장 속에서도 경기 사찰은 여전히 왕실의 적극적인 지원을 받으며 고려 불교계를 주도했다.무인정권이 등장하고 연이어 몽골이 침략하자, 경기의 사찰은 여느 지역처럼 대부분 폐허화했다. 다만 교선융합과 유불교섭(儒佛交涉)의 사상 경향이 점차 성행하면서, 지눌과 제자 승형은 현등사와 보광사를 창건하여 중흥의 기반을 마련했다. 14세기에 들어서 지공과 제자 나옹은 꾸준히 회암사를 중창하여, 회암사를 전국 사찰의 총본산이자 경기 불교 중흥의 터전으로 삼았다. 그 뒤 회암사를 중심으로 혜근과 보우는 청룡사와 태고사를 중창하거나 창건했고, 자초도 회룡사와 보광사를 중창하면서 신륵사의 대장경 불사도 이끌었다. 특히 보우와 혜근은 사나사, 고달사와 관계하면서 고려 초 경기 사찰의 사세를 다시 일으켰고, 공민왕은 봉업사를 중창하여 경기 사찰에 담긴 태조 왕건의 위상을 다시 부각했다. 이후 경기 불교계는 태조 이성계와 연고되어 조선 건국에 기여했다.대장경, 불화로 상징되는 고려 불교는 고려 역사문화를 이룬 한 축이다. 현재 경기도의 사찰은 대체로 흔적만 남은 편이지만, 지리적 조건을 고려한 학술 조사를 통해서 그 진면목을 상세히 알려야 할 필요가 있다. /장일규 동국대학교 연구교수여주 신륵사 보제존자 석종/아이클릭아트양주 회암사터 전경. /장일규 교수 제공

2018-05-28 장일규

[경기에서 찾는 고려 1100년의 흔적·4]만월대·선죽교, 개성 고려유산을 기억해야 하는 까닭

송악산 자락의 地氣 살린 '만월대'많은 부침끝 1361년 화재로 폐허충신 정몽주 피살된 장소 '선죽교'지금도 붉은 빗물 흐른다 전해져남북 화해 분위기 공동발굴 기대서울에서 약 80km, 승용차로 불과 한 시간. 파주시 도라산 남북출입사무소를 나서면 거기 북한 땅 개성이 나온다. 개성은 고려 건국 이듬해인 919년 수도가 된 이래 강화로 수도를 옮겼던 기간(1232~1270년)을 제외하고 440여 년 동안 고려의 중심지였다. 비 오는 날 개성에서 국제무역항 벽란도가 있는 예성강까지 처마 밑으로 비를 맞지 않고도 갈 수 있었다는 얘기가 전해올 정도로 개성은 번창한 도시였다.개성에 남아 있는 고려의 흔적 가운데 가장 먼저 꼽아야 할 것은 북한 국보 122호인 고려왕궁 만월대(滿月臺)의 터다. 만월대는 송악산을 북쪽에 배경으로 두고 남쪽의 구릉 지대에 널찍하게 펼쳐져 있었다. 동서 373m, 남북 725m, 둘레 2170m. 만월대는 흙을 높이 돋운 뒤 건물들을 세웠다. 송악산 자락의 지기(地氣)를 그대로 살리고 고려 왕조의 권위와 위엄을 드높이기 위해서였다. 만월대라는 명칭은 당초에는 높은 축대를 쌓고 지은 정전(正殿)인 회경전(會慶殿)의 앞뜰을 가리켰는데, 훗날 궁궐 전체를 가리키는 표현으로 바뀌었다.만월대는 개성에 있는 여러 고려 궁궐 가운데 가장 중요한 법궁(法宮) 역할을 했다. 외곽의 황성과 내부의 궁성으로 이루어졌으며 궁성 권역은 크게 회경전 중심의 외전 일곽, 장화전(長和殿) 중심의 내전 일곽, 서북쪽의 침전 일곽으로 이뤄져 있었다.만월대는 현종 때 거란의 침입, 인종 때 이자겸의 난, 고종 때 몽골 침입 등으로 인해 소실과 중건을 거듭하면서 시련을 잘 견뎌냈다. 하지만 1361년 공민왕 때 홍건적의 침입으로 큰 화재를 입고 폐허로 변해 버렸다. 지금의 만월대 터는 그때부터 이어져 온 것이다. 폐허가 된 만월대 터에서 인상적인 것은 회경전에 오르는 장대한 33계단이다. 쓸쓸함과 웅장함이 교차하는 그 모습 속에 고려 500년 영욕이 고스란히 전해온다. 만월대의 서쪽 구역에서는 2007년부터 2015년까지 모두 7차례에 걸쳐 남북 공동발굴이 진행되기도 했다.비극적인 사연이 담겨 있는 선죽교(善竹橋, 북한 국보 138호)도 빼놓을 수 없는 고려 문화유산이다. 고려의 명운이 다한 1392년, 고려의 충신인 포은 정몽주(圃隱 鄭夢周, 1337~1392년)는 이곳에서 이방원(李芳遠, 훗날의 조선 태종) 일파에 의해 피살됐다. 선죽교는 1216년에 처음 만들어졌고 애초의 이름은 선지교였다. 정몽주가 죽고 난 뒤 그 자리에 참대나무가 자랐다고 해서 대나무 죽(竹)자를 넣어 선죽교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선죽교에는 아직까지 정몽주의 핏자국이 남아 있고 지금도 비가 오는 날이면 선죽교 아래로 붉은 빗물이 흐른다고 한다. 선죽교라는 이름이나 핏자국 이야기에서 고려 충신의 일편단심(一片丹心)을 기억하고픈 후대인들의 바람을 절절하게 느낄 수 있다.불교의 나라답게 수도 개성에는 수많은 석탑들과 거대한 목탑이 세워졌다. 그러나 세월과 전란을 이기지 못하고 대부분 사라졌고, 지금은 영통사(靈通寺) 5층 석탑(북한 국보 133호), 불일사(佛日寺) 5층 석탑, 현화사(玄化寺) 7층 석탑 등만이 남아 고려 석탑의 순박한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독특한 모습의 화장사(華藏寺) 지공(指空)화상 승탑은 고려 석조불교미술의 파격을 구현한 명품으로 꼽힌다. 태조 왕건릉(顯陵, 북한 국보 179호)과 공민왕릉(공민왕의 玄陵과 노국대장공주의 正陵, 북한 국보 123호)도 우리가 꼭 기억해야 할 고려의 문화유산이다.북한 땅 개성은 쓸쓸하다. 도처가 분단의 상흔이다. 그렇지만 개성이 고려의 수도였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천년을 견뎌낸 고려의 문화유산들이 이를 웅변한다. 최근 남북 화해 분위기에 힘입어 개성에 남북연락사무소를 개설하기로 했다. 만월대 공동발굴도 재개될 것이란 소식이 들려온다. 개성의 고려 문화유산은 통일시대 경기도의 소중한 역사문화의 당당한 한 축이 되어야 한다. 우리가 '개성과 고려'에 주목해야 하는 까닭이다. 글·사진/이광표 동아일보 논설위원개성 만월대 터 전경.만월대 남북공동 발굴 모습.개성 선죽교.

2018-05-14 이광표

[경기에서 찾는 고려 1100년의 흔적·3]태조 왕건의 고려 건국이야기

농민반란 '민생파탄' 수습 호족세력 설득 윈윈 통합동아시아 선진정치 중심 '유교이념' 정책 실행 기준황제제도·발해유민 규합 북방경영 제도적 틀 만들어태조 왕건동상, 고구려신상양식 제작 연관성 입증돼태조 왕건(王建)은 918년에 고려를 건국, 후삼국으로 분열된 혼돈 속의 천하를 통일하고 새로운 시대 질서의 방향을 제시했으며, 황제국체제와 '해동천하(海東天下)'(후술)의 형성에 기초를 닦은 인물이다.왕건이 활동한 시대는 신라 각 지역에 반란이 일어나 무정부 상태의 약탈과 살육이 광범위한 지역을 휩쓸던 난세(亂世)였다. 당시 시대적 당면과제는 신라의 지배력 붕괴를 초래한 두 가지 사안의 해결이었다. 하나는 신라 사회를 순식간에 붕괴시키고 농민반란의 원인이 된 '민생파탄'을 수습하고 수취체제의 모순을 해결할 새로운 방안을 찾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각지에 등장한 새로운 지배층인 호족세력들을 통합하고 그들이 참여하는 새로운 정치체제를 형성하는 것이다. 두 현안의 해결 방향을 찾지 못하면, 견훤과 궁예처럼 사회적·정치적 안정을 확보하기 어렵고, 분란과 패망을 초래할 수밖에 없었다.왕건은 현안에 대한 문제의 핵심을 잘 파악하고, 그것과 밀착된 정책을 추구했다. 그는 새로운 지배층으로 부각된 각 지역의 호족들을 정치적으로 통합하기 위해 세력에만 의존하지 않고 설득과 타협에 노력했다. 그 타협은 중앙정부와 호족 양쪽이 윈윈하는 방향으로 진행됐다. 그러기 위해 새로운 사회 질서로 나아갈 정책 실행의 기준 및 방향을 분명히 제시하고 있었다. 그 기준과 방향 설정에 많은 영향을 준 것은 당시 동아시아 선진정치문화의 중심요소인 '유교정치이념'이었다.왕건은 즉위 초부터 학사(學士)들과 국정을 의논하는 것이 기록에 나타나며, 새로운 성격의 관부인 내의성(內議省)을 설치하였다. 내의성은 왕에게 정치적 고문 역할을 하고, 간쟁(諫諍)을 담당하는, 유교정치이념을 실현하는 기구였다.왕건의 후삼국통일은 단지 통일신라의 회복에만 그치지 않았다. 왕건은 즉위한지 네 달 만에 황폐해져 방치됐던 평양을 대도호부로 삼았다가 곧 서경(西京)으로 격상시켰다. 남방의 백성들을 사민(徙民)시켜 충실하게 하고, 성을 쌓아, 당제(堂弟) 왕식렴(王式廉)에게 지키게 했다. 왕건은 서경을 자주 순행했으며, "삼한을 평정하고 장차 이곳에 도읍(都邑)을 정하려 한다"고 했다. 그는 또한 북변의 진성(鎭城)을 설치하고 개척했다.왕건의 적극적인 북방 경영의식은 고구려 계승의식과도 연관됐다. 그것은 그가 자라난 지역문화의 토양에 뿌리를 둔 것이다. 송악군이 포함된 한반도 서북부 옛 고구려지역에는 동명신앙(東明信仰) 등 고구려계의 토속문화가 민간에 뿌리박고 고려말기까지 내려오고 있었다. 동명신상 등 고구려계통의 신상은 옷을 입히는 나체상 양식으로, 동아시아일대에서 제례용 신상으로는 특이한 것이다. 광종대에 제작된 태조 왕건동상이 고구려신상양식으로 제작된 것은 고려가 고구려를 계승했다는 의식과 연결된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셈이다. 태조 왕건은 즉위한 첫 날, 국호를 고려(高麗)라 하고, 황제제도에 따라 연호를 천수(天授)라 하였으며, 즉위 조서(詔書)를 반포했다. 그가 황제제도를 시행한 주요 동기는 무엇보다도 고려가 중심이 된 천하를 결집시켜 거란의 군사적 위협에 대처하고, 북방경영의 제도적 틀을 만들기 위한 것이다.발해가 망한 후 동만주 일대에는 거란에 항거하며 자치 상태에 들어간 발해유민이나 생여진(生女眞) 집단들이 많이 존재했다. 생여진 집단 등은 고려에 찾아와 방물을 바치는 형태의 교역을 하기도 하고, 그 수장은 고려의 관작을 받기도 했다. 이 고려를 중심으로 한 생여진·발해유민 집단의 규합은 군사적 대거란 동맹의 성격을 띠었다. '송사'나 '요사' 기록에 의하면 그들은 거란의 고려 침입 전쟁이 일어났을 때, 거란군의 움직임에 대한 사전 첩보를 알려 오기도 했고, 거란군을 공격해 큰 타격을 입히기도 했다. 거란도 이러한 대거란동맹을 분명히 파악하고 있었다.고려는 그 여진 집단 등을 제후의 강역이라는 의미의 '번(蕃)'으로 불렀다. '제왕운기'에서 고려의 역사를 서술하며, "요하(遼河) 이동에 별도의 천지(즉 천하)가 있다"는 것은 고려와 그러한 주변 번을 아우르는 천하의 관념을 서술한 것이다. /노명호(서울대 명예교수)고려 왕건 동상. /노명호 교수 제공

2018-04-30 노명호

[경기에서 찾는 고려 1100년의 흔적·2]고려 속 경기, 천년 미래의 답 있다

현종, 왕실직할지 '경기' 배경 지배층 안정 도모문벌귀족층 배출… 사상·문화 다원성 확장 계기벽란도 상징 경기만 통한 청자 교역 '고려' 알려오늘날 첨단 중심지 맥 닿아… 미래전략 참고를1천 년 전 1018년(현종9) 수도 개경과 주변 12개 군현을 묶어 '경기'라는 특별 행정구역이 신설되었다. 1018년은 고려왕조 건국 백년이 되는 해이자, 고려군 사령관 강감찬이 소손녕의 거란 10만 대군을 격퇴해 고려-거란의 30년 전쟁이 종결되어 왕조 최대의 위기가 해소된 해이기도 하다. #왕조 중흥의 기점이 된 경기 설치왜 건국 백년이 된 시점에 경기라는 행정구역을 설치했을까? 거란의 침입으로 수도가 함락된 고려는 12개 군현을 편입시킨 영역의 확장을 통해 수도 개경을 효과적으로 방어하고자 했다. 1029년(현종20) 개경 외곽을 두르는 나성(羅城)을 축조해 수도 개경의 방어망을 완성했다. 또한 경기지역을 왕실과 조정의 직할지로 삼아 이곳의 조세와 생산물을 핵심 지배층에게 공급해 경제적 안정을 보장했다. 이를 주도한 현종(1009~1031년 재위)은 전쟁을 종식시키고 각종 제도를 정비한 공로로, 중흥(中興)의 군주로 평가받았다. 따라서 경기 설치는 전후 수도 개경의 면모를 일신했을 뿐 아니라 왕조 중흥의 상징성을 갖는다.또한 경기는 고려전기 정치를 주도한 문벌귀족층을 배출한 곳이다. 안산 출신 김은부(金殷傅)는 두 딸이 현종의 비가 돼 처음으로 왕실의 근친혼 관례를 깨고 왕실의 외척이 됐다. 김은부의 외손인 문종은 인주(인천) 출신 이자연(李子淵)의 세 딸을 왕비로 맞았다. 이자연의 첫째 딸인 인예태후는 순종, 선종, 숙종 세 국왕과 유명한 학승 대각국사 의천을 낳았다. 인주 이씨 일문은 이자겸(李資謙)에 이르는 3대에 걸쳐 일곱 국왕을 배출하는 고려전기 최고의 문벌귀족 가문이 됐다. 인주 이씨로 대표되는 문벌귀족은 불교는 물론 유교, 도교, 풍수지리 등 다양한 사상과 문화의 공존을 허용해 고려문화의 다원성을 확장시켰다. 경기지역은 대장경, 나전칠기는 물론 초기 청자 생산의 중심지였다. 이들 제품은 문벌귀족층의 문화 수요에 따라 생산됐지만 송, 거란, 여진 등 동아시아에서도 호평을 받을만큼 기술 수준이 높았다. 벽란도로 상징되는 경기만 일대의 항구와 바다는 이들 제품을 유통하는 중심지였다. 활발한 교역과 유통으로 고려는 서방세계에 한반도를 호칭하는 '코리아'의 원조가 되었다. 고려왕조의 개방성을 보여주는 좋은 예다. 사상과 문화의 다원성, 통합성, 정치와 사회의 개방성과 역동성을 특징으로 하는 고려 다원사회는 이같이 경기지역에서 개화했고 번성했다. 고려왕조를 상징하는 주요 문화유산이 경기도 일대에 집중된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이 지역 출신 문벌귀족층의 후원과 지원 없이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경기지역이 갖는 역사적 위상을 잘 보여주는 예다.#경기 천년의 미래그렇다면 천년의 해를 맞은 경기도는 미래 전망을 어떻게 세울 것인가? 2015년 경기연구원이 경기도민을 대상으로 경기도 이미지와 특색을 조사한 결과, '수도권'을 가장 많이 들었다. 경기도 소속 31개 시군은 경제, 교통, 의료, 산업생산 등 여러 측면에서 비대해진 수도 서울과 불가분의 관계에 놓여있다. 서울과 함께 보완과 상생의 새로운 비전과 위상 정립을 해야 하는 것이 '수도권' 경기의 과제다. 그 대안이 보고서 안에 있다. 수도권 다음으로 많이 언급된 것이 도농 복합도시, 풍부한 산업(시설) 및 관광 인프라 등 '다양성'이다. 다양성을 통합해 경기도의 정체성을 확립하는 것이 서울과의 상생과 보완 관계의 대안이 될 수 있다.현재 경기도는 대한민국의 미래를 키우는 핵심지역이다. 판교 테크노밸리, 수원과 파주의 전자단지, 이천의 반도체 등 밀집된 첨단기술과 주변에 항공, 항만 시설 등 훌륭한 물류시스템이 잘 갖춰져 있다. 천 년 전 고려와 맥이 닿아 있는 첨단 융합기술의 중심지로서 체계적인 발전 전략 수립에 경기 천년의 미래가 달려 있다./박종기 국민대 명예교수초조본대방광불화엄경주본 권제일(경기도박물관 소장)청자상감포류수금문돈(경기도박물관 소장) /경기문화재단 제공청자음각국화문 잔탁(경기도박물관 소장)박종기 국민대 명예교수

2018-04-16 박종기

[경기에서 찾는 고려 1100년의 흔적·1]경기문화유산을 열며

1018년 12개 고을 '경기'로 묶고 1414년 팔도제 시행 '경기도' 불려고려옛길·청자·건축문화의 아름다움·고려인의 생활 지면에 소개올 가을 경기문화유산학교 강좌 통해 소중한 문화적 의미 전할것올해 2018년은 고려(高麗) 건국 1천100년이 되는 해이면서, '경기(京畿)'라는 이름이 생겨난 지 1천년이 되는 뜻깊은 해입니다. '경기'의 유래는 1018년으로 올라갑니다. 고려 현종 9년에 도읍이었던 개성부 등 12개의 크고 작은 고을을 묶어서 '경기'(도읍으로부터 사방 500리 이내의 땅)'라 하였습니다. 그 때의 경기는 대체로 지금의 개성 주변과 오늘날의 한강 이북에 있는 경기도 지역 정도가 포함됩니다. 1414년, 조선의 태종이 8도제를 시행한 이후부터 비로소 '경기도'라고 불리기 시작했고 지금의 광주 · 수원 · 여주 · 안성 등 한강 이남의 땅이 경기도에 배속됩니다. 경기문화재연구원은 '경기 천년의 해'를 기념하고자 올해 '경기문화유산학교'의 문을 엽니다. 경기도의 문화유산을 중심으로 수준 높은 인문학 강의를 듣고 유적을 답사하면서 도민들이 일상 속 문화유산을 쉽고 재미있게 이해하면 좋겠다는 생각에서 출발합니다. 올해의 강의는 경기 천년의 해와 고려 건국 1100주년을 함께 기념하기 위해 '경기도 내 고려시대 문화유산'을 주제로 정했습니다. 가을에 문을 여는 경기문화유산학교에 앞서 강좌의 내용을 지면으로 간략하게 소개합니다. 경기의 역사적 의미와 통일한국시대를 대비하는 경기인의 마음, 한반도 최초로 진정한 의미의 통일국가를 세운 태조 왕건이 경기도에 남긴 이야기, 지금은 남북 분단 현실로 다가갈 수 없지만 옛 고려의 황도(皇都)인 개성에 남겨진 고려 문화유산 이야기, 고려인들의 삶의 애환이 서린 사통팔달 경기의 고려 옛길, 누가 뭐래도 천하제일의 으뜸 명품인 고려청자, 천년의 땅 속에서 깨어난 고려건축문화의 아름다움, 고려인이 살았던 옛 살림터와 그들의 영원한 안식처인 무덤 출토 자료로 살피는 고려인의 생활이야기 등을 흥미롭게 만날 것입니다. 독자 여러분들은 연재된 글을 통해 경기도의 고려문화유산이 우리들의 소중한 문화적 자산이라는 것을 알게 되고, 나아가 경기 천년이 우리에게 던지는 의미를 새기는 뜻깊은 시간이 되길 바랍니다. 경기도는 한반도의 중심부에 자리합니다. 서해와 한강 · 임진강 · 한탄강 · 안성천이 유입되는 경기만을 끼고 평야가 발달한 곳입니다. 역사적으로 고려의 개성과 조선의 한양으로 들어가는 사통팔달(四通八達)의 길목이었습니다. 지금도 우리나라 인구의 4분의1 을 차지하는 1천300만 명의 사람들이 31개 시군에 거주합니다. 광역성, 인구 밀집도, 거대한 경제 규모 등 다양한 경쟁력을 가지고 있지만, 서울을 둘러싼 이중성과 남부와 북부의 문화적 편차가 심하고 경기의 뿌리와 같은 개성과는 분단으로 인해 멀어졌습니다. 또 경기도는 초고속 압축 성장 시대를 거치며 난개발로 몸살을 앓고 있습니다. 그만큼 다른 어떤 지역보다도 지역의 역사와 문화 정체성을 고민해야 할 지역입니다. 이제 '경기 천년의 해'를 맞아, 고려문화의 특징인 개방성 · 국제성 · 다양성이 현재 경기도의 광역성 · 다문화성 · 복합성, 그리고 각 행정 단위별 지역의 정체성과 어떤 관련성이 있으며, 현재를 살아가는 경기도민의 삶 속에서 갖는 의미가 무엇인지 고민해야 할 때입니다. 나태주의 시 '풀꽃'은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너도 그렇다' 라고 노래합니다. 우리도 삶의 주변에 퍼져있는 경기문화유산을 그렇게 바라보면 좋겠습니다. 자세히 보아야 옛사람의 숨결을 느낄 수 있고, 오래 보아야 가까이 다가갈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문화유산과 함께하는 우리의 일상은 더욱 풍요롭고 향기로워질 것입니다. 경기문화유산학교는 도민과 더불어 경기도의 문화유산에 담긴 의미를 찾고 그 가치를 드높이며 새로운 경기문화의 꽃을 피우는데 힘을 보탤 것입니다. 경기문화유산학교의 문을 활짝 열고 기다리겠습니다. 고맙습니다./김성명 경기문화재연구원장안성 죽주산성. /경기문화재연구원 제공/아이클릭아트여주 고달사지 승탑김성명 경기문화재연구원장

2018-04-02 김성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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