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역만리 3·1운동의 불씨를 찾아서

 

주민 모두가 만세운동 '뜨거웠던 화성의 봄'

100년 전의 수원과 화성은 한 지역이었다. '수원군'으로 통칭했고 동향의 정을 나누는 한동네 주민이다. 100년 전 가장 뜨거웠던 그 봄, 수원과 화성의 주민은 한마음, 한뜻이었다. 오직 대한의 독립을 열망했고 양반, 농민, 남성, 여성 할 것 없이 주민 전체가 만세운동에 뛰어들어 '대한독립만세'를 부르짖었다. 특히 화성지역의 만세운동은 열기가 더 뜨거웠다. 주민 모두가 '주동자'라 할 만큼 자주적인 독립운동의 양상을 띤다. 우정과 장안면 등 2개 면에 불과한 일부 지역에서만 2천여 명의 주민들이 만세운동에 동참했다.이들의 성과도 눈부시다. 일제 수탈의 본거지였던 면사무소 2개와 일본 순사가 상주하는 주재소 1개를 파괴하고, 총을 쏘는 일본 순사에게 달려들어 처단했다. 나라 잃은 민족의 굳건한 독립의지를 여실히 드러낸 역사의 명장면이다.이 때문에 3·1만세운동 뿐 아니라 우리 독립운동사에서 수원·화성의 만세운동이 갖는 역사적 가치는 재평가돼야 한다. 민중이 중심이 된, 가장 자주적이면서 공격적인 만세운동은 전국으로 알려지며 확산세를 보였고, 겁을 먹은 일제가 제암리 학살사건을 자행했다. 이후 일제는 문화통치로 지배방식을 바꾸기도 했다. 이뿐인가. 향토 학계에서는 이 지역의 만세운동은 임시정부 설립은 물론 무장독립투쟁의 단초가 됐다는 점을 다시 평가받아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공지영기자 jyg@kyeongin.com

2019-02-13 공지영

[이역만리 3·1운동의 불씨를 찾아서·(6·끝)]화성지역의 만세운동

4월3일 2천여명 시위, 3·1운동사 가장 격렬수촌교회 집결 면사무소 불태우고 독립선언무자비한 탄압… 제암리·고주리 학살 자행횃불이 피어올랐다. 칠흙같은 어둠을 뚫고 피어오른 하나의 횃불은 곧 마을의 산등성이마다 이어졌다. 해가 뜨는 낮 동안엔 차마 드러낼 수 없었던 무언의 약속이 피어오른 것이다. 화성지역은 우리 3·1 만세운동사(史)를 통틀어 가장 격렬했던 현장이다. 마을 주민 모두가 '주동자'였고, 의지는 강렬했으며 행동은 거침없었다. 송산, 발안에서 발화한 화성 지역의 독립운동은 수촌, 우정, 장안에서 정점에 치달았고 제암, 고주리에서 처참하게 끝이 났다. 그 중에서도 가장 '영화'같았던 하루가 있다. 그 날의 만세길을 따라 걸어본다.# 1919년 4월 3일, 가장 뜨거웠던 그 날1919년 3월 1일 이후 당시 '수원군'이었던 수원·화성 지역 역시 자주독립의 열망이 거세졌다. 사람이 모이는 장날마다 알음알음 이야기들이 퍼져갔고 더 이상 가만히 있을 수 없다는 마음들이 이어졌다. 첫 신호탄은 송산, 발안지역에 장터가 열리는 날, '대한독립만세'가 울려퍼진 일이다. 총을 맞고 쓰러진 마을의 어른을 보고는, 지켜만 보던 이들조차 모두 돌멩이를 들고 시위에 나섰다. 이후 총칼을 앞세운 일제 경찰이 주민들을 무참히 짓밟았다는 소식이 다른 마을로 전해지자, 어스름한 새벽 마을 산등성이마다 횃불이 피어올랐다. 그 날의 약속이 소리 없이 이루어진 것이다.1919년 4월 3일, 아직 동도 트지 않은 새벽녘 차회식의 집에 주곡리 주민 30~40명이 모여들었다. 그리고 곧장 이 마을의 만세운동을 주도한 것으로 알려진 차병혁과 이들 시위대가 만났다고 전해진다. 이들 무리는 수촌리에 있는 수촌교회로 이동했다. 수촌리는 장안·우정면 만세운동에 가장 많은 수의 주민들이 참여했다. 그 날, 수촌교회에 집결한 이들은 대한독립을 위한 만세운동을 결의했다. 그리고 장안면사무소로 쳐들어갔다. 장안면장에게 만세운동에 동참할 것을 요구한 뒤 면사무소를 불태웠다. 식민지배의 상징이자, 수탈의 근원인 면사무소를 불태우면서 이들은 일제를 향해 강렬하게 저항하기 시작했다.면사무소를 불태운 이들이 향한 곳은 쌍봉산이다. 높지 않은 산이지만, 장안·우정면 전경이 모두 내려다보이는 곳이다. 쌍봉산에 올라 불타오르는 면사무소를 바라보며 그들은 독립선언문을 읽고 독립의 의지를 다졌다.쌍봉산에서 내려온 이들은 이번엔 우정면사무소로 돌격해 초가집이었던 면사무소를 부수고 집기와 서류를 불태웠다. 그 길로 한각리 광장에 모였는데, 이 때 모인 인원이 2천여 명에 달했다고 한다. 한각리 주민들은 광장으로 들어오는 시위대를 열렬히 환영했다. 그리고 이들의 무리에 합세했고 대열을 정비해 화수리 주재소로 향했다. 일제 경찰이 주둔해있는 화수리 주재소는 이날 만세운동의 정점이었다. 시위대는 두 무리로 나뉘어 화수리 주재소에 접근해 주재소를 둘러싸고 일제히 만세를 부르기 시작했다. 놀란 가와바타 순사가 시위대를 향해 총을 쏘며 달아나자 성난 시위대가 순사를 맹렬하게 쫓아 처단하기에 이르렀다. "당연한 일" 훗날 훈장 서훈 거부한 주민도만세 100주년, 수원·화성시 기념사업 준비무심했던 지난날 반성, 잊힌 역사 되새겨야# 그 날의 기억 따라 만든 '화성 3·1운동 만세길'4월 3일 장안·우정면의 만세운동은 화성시가 '화성 3·1운동 만세길'로 구성하고 있다. 화성 내 다른 지역에 비해 당시의 흔적이 남아있는 장소가 많기도 하지만, 주민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했고, 가장 적극적이고 공격적인 만세운동이었다는 것을 후대에 제대로 알리기 위해서다. 4월 3일의 만세운동을 주도했던 차병혁의 집은 다행히 사랑채가 그대로 남아있고 후손들도 마을에 거주 중이다. 그의 후손들은 화성 만세운동의 상징인 할아버지의 집을 '만세길의 안내소'로 활용할 수 있도록 기꺼이 내주었다.취재 중 만난 차병혁의 증손자 차재천씨는 "6, 7살쯤 할아버지 손을 잡고 서울에 올라가 할아버지가 건국훈장 독립장을 받는 것을 보았다"며 "돌아가실 때까지 고문 후유증에 고통받았지만 단 한번도 만세운동한 것을 후회하지 않았다.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이라고 말했다"고 할아버지의 기억을 꺼냈다. 다행히 차병혁은 1962년 독립운동의 공훈을 인정받아 건국훈장 독립장을 받았지만, 지역의 주민들 중에는 서훈을 받지 못한 이가 부지기수다. 차씨는 "당연한 일을 했다고 여기며 서훈을 받는 것도 거부했던 마을 주민들도 있었다. 독립유공자 후손들은 태생이 양심적이라 나쁘게 살지 못한다. 그래서 지금도 힘들게 살고 있다"고 전했다.가장 많은 수의 주민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했다는 이유로 수촌리는 마을 전체가 불타고 수촌교회도 불탔다. 지금 남아있는 초가집 형태의 수촌교회는 1922년 선교사 아펜젤러가 다시 건립한 것으로 화성시가 향토유적으로 보존하고 있다.주민들이 처음 면사무소를 파괴한 후 다함께 올랐던 쌍봉산 정상에 서면 우정·장안의 풍광이 전부 내려다보인다. 화성시는 정상 위 동그란 전망대에 만세길 유적지를 표기할 계획이다. 만세길을 전부 걷지 못하더라도 전망대에 올라 만세길 위 역사를 공부할 수 있도록 구성한다. 일제 경찰을 처단한 화수리 주재소는 현재 화수초등학교로 바뀌었다. 정문 앞에는 그 날 시위대의 행적을 알리고 기리는 기념비와 함께 안내판이 설치돼있다. 김승섭 화성시 문화유산과 주무관은 화수초등학교 운동장 축구골대가 있는 위치 정도에 주재소가 있었다고 추정한다. 안내판에도 그 날의 기록이 상세하게 기록돼있을 만큼 화수리주재소는 이 지역 만세운동의 가장 상징적인 장소로 만세운동의 종착점이자, 독립운동의 시작점이기도 하다. 그래서 만세길을 알리는 방문자센터를 이 곳에 준비하고 있다"고 말했다. 오는 4월에 개장하는 장안·우정의 만세길을 미리 걸어보니, 공교롭게도 '31㎞'다. 단 하루 동안 차회식 집터에서 시작해 화수초등학교까지 이어진 31㎞의 길 위에서 그 날의 만세운동이 펼쳐졌다. 그 날 이후 수촌리, 한각리, 석포리 등 우정·장안면 대부분의 마을이 일제의 보복에 불탔고, 4월 13일에는 제암리에서 주민들을 마을 교회에 몰아넣고 학살을 자행했다. 고주리에서도 일가족 6명이 몰살당하는 잔혹한 보복이 일어났다. 학살의 현장을 목격한 생존자들은 "민가마다 불을 지르고 보이는 대로 찔려 죽였다. 제암리는 그 이튿날까지 온 마을에 탄내가 진동했다"고 당시 상황을 말했다. 일제가 가장 자주적이었던 우리 지역 선조들의 독립운동이 전국으로 확산되는 것에 극심한 공포를 느꼈고, 제암리교회 학살사건을 무리하게 감행하면서까지 이를 저지하고 싶었다는 사실을 증명한다.지금껏 수원·화성 지역의 만세운동은 그 가치를 제대로 인정받지 못했다. 우리가 밟고 선 땅 위에는 독립을 위해 피땀을 바친 선조들이 묻혔다. 그럼에도 그 역사를 까마득하게 몰랐던 것도, 유관순 열사와 같은 후대의 열렬한 관심을 받는 독립투사를 발굴하지 못한 것도, 모두 부끄러운 자화상이다.다행히 무관심했던 지난 날을 반성하고 수원시와 화성시가 힘을 합쳐 '3·1 운동 100주년'을 빛내기 위한 다양한 사업을 준비 중이다.무엇보다 중요한 건 100년 전, 나라의 주권을 되찾기 위해 총칼의 위협을 무릅쓰고 시민 스스로 일어난 것처럼 100년의 전환점을 도는 지금, 잊혀진 역사를 되새기고 정신을 이어가는 일은 결국 우리 시민들의 몫이다. /공지영기자 jyg@kyeongin.com/아이클릭아트화성 우정장안지역의 만세운동의 전환점이 됐던 수촌교회. 일제가 보복삼아 불태운 것을 1922년 재건립, 현재에 이르고 있다. /공지영기자 jyg@kyeongin.com우정장안 만세운동을 주도한 것으로 알려진 차병혁의 생가. 현재 사랑채가그대로 남아 만세길 안내소로 쓰일 예정이다.화수초등학교 앞 삼일운동 기념비.우정장안 만세운동 후 일제의 보복으로 제암리와 고주리 주민들이 학살당했다.이를 기억하고 추모하기 위해 세워진 화성제암리3·1운동순국기념관.

2019-02-13 공지영

[이역만리 3·1운동의 불씨를 찾아서·(5)]민중이 이끈 수원의 3·1만세운동

1919년 3월16일 '화성 제일 봉우리' 만세지식인·지도층 중심서 시민 확산 변곡점소작농 전락 농민 가세·상인들 철시투쟁김향화 열사 등 기생 33명 봉수당서 시위바람이 차갑다. 옷깃을 여미고 단단히 마음을 먹었다. 경기도청 후문에서 출발해 천천히 언덕을 걸어 올랐다.지금처럼 잘 닦인 아스팔트 길도 아니었을텐데, 그 날 수백명의 선조들은 흙으로 뒤덮인 언덕길을 힘차게 올랐을 것이다. 겨울바람만큼 매서운 현실에 분노하면서, 함부로 내뱉지 못한 울분을 토하기 위해 맨주먹을 불끈 쥐었을 테다. # 민중의 힘으로 이어진 수원의 3·1운동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수원 화성의 제일 봉우리, '서장대'에 도착했다. 수원 시내가 한눈에 들어오는 시원한 풍광만큼 이 곳은 그 옛날 수원의 중심이었다. 1919년 3월 1일, 서울에서 시작된 '대한독립만세'의 함성이 같은 날 수원 화성의 '방화수류정'에서도 울려 퍼졌는데 수원의 지식인과 학생이 주축이 돼 수원면 화성 인근에 살던 지역민들과 함께 3·1 운동이 일어났다.이때의 시위로 교사 김노적이 주도자로 검거됐고 일제의 지독한 고문으로 머리 한쪽이 함몰되고 왼쪽 손목이 으깨지는 중상을 입었다. 그로부터 15일이 지난 3월 16일은 수원 종로거리에 사람이 가장 많이 모인다는 '장날'이었다. 수원화성 서장대로 사람들이 몰렸다. 잔인한 폭력에도 굴하지 않고 3월 1일보다 더 많은 민중이 모여들었다. 3월 16일의 시위는 3월 1일과 분명 달랐다. 1일의 시위가 지식인과 학생이 중심이었다면, 16일의 시위는 일반 민중이 더 많았다. 서장대를 중심으로 연무대 등지에서 일제히 대한독립만세의 함성이 울려 퍼졌고 수백의 민중들이 수원 종로거리로 쏟아졌다. 이 날의 시위 역시 일제 경찰과 헌병 등에 의해 강제 해산되고 주동자가 검거됐다. 그러나 이에 굴하지 않고 종로의 시장상인들은 생업을 포기한 채 가게 문을 닫고 체포된 이들의 석방을 요구하는 철시투쟁을 벌였다고 전해진다.서장대를 내려와 반대편으로 조금 걸어가면, '3·1독립운동 기념탑'이 있다. 1969년 3월 1일 국권 회복을 위해 항쟁한 선열의 성업을 길이 빛내고 명복을 빌기 위해 건립한 기념탑인데, 삼일동지회가 수원시민이 자주 찾는 팔달산 중턱에 옮겨놓은 것이다. 이 기념탑 옆, 안내판에 적힌 숨겨진 이야기가 뭉클하다. 본래 일제 강점기 당시 수원경찰서 노구찌 소위가 3·1 운동의 여파로 격분한 민중에게 맞아 죽었고, 일제가 노구찌를 추모하기 위해 순국비를 세웠는데, 광복 후 그 순국비를 허물고 그 위에 당당히 3·1운동 기념탑을 세웠다. 그 건립비용도 수원시내 학교와 학생들이 자발적으로 모금했다고 적혔다.서장대를 내려와 수원 화성행궁으로 향했다. 평일임에도 행궁은 관광객으로 북적였다. 특히 고등학교, 대학교 학생들이 이 곳을 많이 찾았고 외국인 학생들도 꽤 눈에 띄었다. 정조임금이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진찬연을 열었다는 '봉수당'에 도착했다. 정조와 혜경궁 홍씨의 아름다운 추억만 이 곳에 남았더라면. 그러나 봉수당은 흔적도 없이 사라진 적이 있다. 일제가 이 곳을 자혜의원으로 사용하면서다. 자혜의원은 1910년 강제합방을 강행한 일제가 조선인에게 자애로운 은혜를 베푼다는 미명 아래 세운 병원이다. 조선 왕실의 권위를 상징하는 화성행궁을 파괴하던 일제의 눈에 행궁의 중추인 봉수당은 식민지배의 수모를 안길 수 있는 상징이었다. 마구잡이로 봉수당을 자혜의원으로 활용하던 일제는 심지어 1923년 완전히 봉수당을 헐고 2층짜리 벽돌건물을 세웠다. 가슴 찢어지는 역사지만, 봉수당은 수원 독립운동사에 길이 남을 역사적 장면이 탄생한 곳이기도 하다. 1919년 3월 29일 기생이었던 김향화 열사가 기생 33명과 함께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자혜의원이었던 봉수당 앞 북군영 건물은 수원경찰서로 활용되며 총칼을 찬 헌병 경찰이 버티고 있었다. 만세를 외치고 곧바로 헌병에 붙잡혔을 것이다. 그 순간의 김향화를 떠올리는데, 재잘재잘 떠들며 봉수당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는 젊은 학생들이 보였다. 이들 중 그 순간을 아는 이가 얼마나 될까. 우리가 웃으며 봉수당을 다시 마주할 수 있는 것은 그 날 퇴로조차 마련하지 않은 채 나라 뺏긴 울분을 토하며 의로운 삶을 선택한 스물 셋, 꽃다운 젊음이 있었기에 가능했다는 것을. 비록 아픈 과거지만 봉수당 한쪽 끝에 자혜의원 시절의 사진이라도 걸어둔다면 우리가 봉수당을 오래도록 기억하지 않을까. 안타깝게도 현재 봉수당은 진찬연을 재현한 것 외에는 다른 흔적이 없었다. 씁쓸하게 행궁을 빠져나와 걷던 중 복원사업현장을 가리기 위해 설치해둔 안전펜스 위에서 자혜의원 시절의 봉수당 사진을 발견했다. 그렇게 한참을 그 자리에 섰다.광복후 日警 순국비 허물고 기념탑 세워복원 봉수당, 만세운동 흔적없어 아쉬움수원시, 올 100주년 상징물 건립비 모금# 100년의 함성, 시민의 힘으로 다시 외치다수원의 독립운동은 3·1 만세운동의 '변곡점'으로 평가해도 무방하다. 사회 지도층으로 분류되는 지식인과 학생이 중심이 돼 3·1운동이 시작됐지만, 수원에 이르러서는 그 양상이 달라졌다. 일반 민중이 만세 운동의 중심이었다. 먹고 사는 것에는 지장이 없던 지도층과 달리, 나라 뺏긴 설움을 삶 속에서 온몸으로 체감한 이들이 당시의 일반 민중이었다. 앞서 설명한 종로거리에서 일어난 상인들의 만세운동과 더불어 수원 서호에서 일어난 만세운동이 그 대표 사례다. 수원 지역의 소작농 대부분이 일본인 농장의 소작농으로 전락했는데, 특히 서호 부근에 있던 권업모범장은 수탈의 핵심이었다. 서호에서 시위가 거세게 일어난 것도 권업모범장과 일본 대지주의 농장이 서둔벌에 있었기 때문이다. 이들의 만세운동은 당시 수원 민중의 삶과 직결된 '생존권'의 문제였고 그만큼 절박했다. 그래서 서울의 시위보다 훨씬 가열차고 적극적인 형태로 시위의 양상이 변했고 이는 곧 다른 지역에까지 강력하게 전파되는 효과를 낳았다.이에 3·1독립운동 100주년을 준비하는 수원시의 마음가짐도 남다르다. 수원시는 100년 전 과거 민중이 앞장섰던 그 날들의 시위처럼, 100주년을 기리는 중심에 '시민'을 앞세웠다. 100주년을 기념하는 상징물 건립도 시민들의 자발적인 기부금을 토대로 세우겠다는 방침이다. 또 '기억하는 백년의 울림, 기약하는 백년의 미래'를 주제로 시민들 스스로 100주년을 기억하는 시민문화제를 진행한다. 3월 1일에만 기억하는 단발성 행사 대신, 100년 전 역사를 오래도록 기억하는 다양한 시민교육도 마련했다. /공지영기자 jyg@kyeongin.com/공지영기자 jyg@kyeongin.com 그래픽/성옥희기자 okie@kyeongin.com서장대3·1독립운동 기념탑.(왼쪽부터)1923년 봉수당을 허물고 세운 경기도립병원·자혜의원 사용시절 옛 봉수당.(왼쪽부터)대한민국독립기념비·복원된 봉수당.

2019-01-30 공지영

[이역만리 3·1운동의 불씨를 찾아서·(4)]러시아 연해주의 독립운동

연해주 이주 조선인 19세기말 2만명 넘어일제의 강제합병후 국권회복 지사들 몰려1911~1937년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 융성홍범도·이범윤·안중근 등 무력투쟁 전개거부 최재형, 사재 쏟아 독립운동 지원에이상설 "조국 독립 못봤으니 제사도 말라"한민족이 러시아 연해주로 이주하기 시작한 건 조선시대 말 착취와 기근 때문이다. 러시아 공식 문서에 한민족 관련 내용이 나오는 건 1864년이다. 이해 9월 남우수리스크 포시에트지구 노브고로드 경비대장인 레자노프가 상급 지휘관에게 보낸 보고서에 "함경도 무산 출신 최운보와 경흥 출신 양응범이 이끄는 14가구 65명이 이주해 포시에트의 지신허(地新墟·치진헤) 마을을 개척하며 농사를 짓고 있다"고 적고 있다. 또 1869년에는 조선 북부 지방에 홍수로 인한 '기사흉년'이 발생해 함경도 농민 5천500여 명이 연해주로 대거 이주했다. 이후 1897년 인구 조사에 따르면 연해주 지역 한인 숫자는 2만6천여 명이 넘어섰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고 1910년 일본이 조선을 강제합병을 하자 빼앗긴 국권을 되찾기 위해 우국지사들이 연해주로 몰려들었다.# 항일 운동의 요람 연해주만주에 서전서숙을 세워 항일지사를 길러내던 이상설은 헤이그 특사의 임무를 마친 뒤 연해주에서 권업회와 동지회를 결성하고 대한광복군정부를 세우는 등 애국혼을 불살랐다. 이동휘와 이동녕은 북간도에서 민족의식을 고취하며 국권 회복을 꾀하다가 연해주로 옮겨 이상설 등과 독립투쟁을 이끌었다. 봉오동 전투의 영웅 홍범도는 연해주와 만주를 넘나들며 일본군을 괴롭혔다. 러시아 이민 초기 연해주에 정착해 사업을 벌인 최재형은 모은 돈과 구축한 네트워크로 독립운동과 민족교육의 든든한 후원자가 됐다. 간도관리사를 지내다 의병을 조직해 일본군과 싸우던 이범윤은 러일전쟁 직후 연해주로 옮겨 국내 진공작전을 펼쳤고, 안중근도 그와 함께 전투를 펼치다가 이토 히로부미 처단 계획을 세워 거사에 성공했다. 1917년의 러시아혁명은 연해주 한인사회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이동휘를 비롯한 민족주의적 사회주의자들과 김알렉산드라·오하묵 등 한인 2세 볼셰비키 당원들은 1918년 5월 13일 아시아 최초의 사회주의 정당인 한인사회당을 결성했다. 1917년 5월 21일부터 31일까지 11일 동안 한인대표 100여 명이 참가한 가운데 우수리스크에서 '전로한족회 대표자회의'가 개최됐다. 같은해 12월에는 제2차 대표자회의를 우수리스크에서 개최해 위원장 문창범, 부위원장 김립을 중심으로 전로 한족 중앙총회(고려국민회)를 조직했다. 우수리스크에 본부를 둔 전로 한족 중앙총회는 연해주 각 지역에 지방회를 설치했고 기관지로 '청구신보'를 간행했다. 전로 한족 중앙총회는 러시아 한인의 최고자치기관이자 대표적인 항일 독립운동기관이었다. 이후 전로 한족 총회는 1919년 2월 대한국민의회로 확대 개편되며 노령 임시정부를 수립했다.# 신한촌과 블라디보스토크신한촌은 러시아 연해주 한인 사회를 대표하는 한인 거주지다. 블라디보스토크 최초의 한인 집단 거주구역인 개척리가 폐쇄되면서 이를 대체하기 위해 1911년에 건설됐다. 일제 강점 초기국 한인 사회의 대표적인 민족운동단체인 권업회의 본부를 비롯해 한민학교, 권업신문사 등이 신한촌에서 활동했다. 신한촌 건설 직후인 1911년 9월경 일제 정보기록에 의하면 이곳에 들어선 가옥은 모두 204개 동이었지만 그 뒤 한인이 계속 집중되어 신한촌 인구는 1만 명 규모로 커졌다. 1920년 신한촌 입구에는 3·1운동 1주년 기념식과 함께 삼일 독립문을 세웠었다. 하지만 신한촌은 1937년 한인 강제이주로 인해 완전히 폐허가 되었고, 현재는 신한촌 일대가 아파트 단지로 변모해 있어 그 원형을 확인하기 어렵다.블라디보스토크에는 오래된 건물들이 많다.그 중 시베리아 횡단열차의 종착역이자 시작 역인 블라디보스토크는 한인들이 한참 이 지역을 개척해 나가던 1907년부터 1912년에 건설됐다. 연해주를 개척하며 독립운동을 했던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이 역을 통해 이동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중 안중근 의사도 1909년 하얼빈을 가기 위해 이곳에서 출발했다. 1937년 강제 이주 당시에는 이곳 블라디보스토크 역에서 출발한 열차 화물칸에 우리 민족이 실려 쫓겨 났다.# 잊지 말아야 할 인물 최재형과 이상설최재형은 연해주 한인 사회의 최고 지도자인 동시에 독립운동가였다. 최도헌으로 불리며 거부였던 그는 사재를 독립운동자금으로 제공하면서 이범윤과 함께 연해주 의병의 최고 지도자가 됐고, 1919년에는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되자 초대 재무총장에 선임됐다. 하지만 1920년 연해주를 침공한 일본군에 붙잡혀 김이직·엄주필 등과 함께 총살당했다. 우수리스크에는 최재형 선생이 일본에게 끌려가기 전 거주했던 생가가 남아 있다. 당시 가옥의 원형은 대체로 잘 보전되어 있으며 2010년 한러수교 20주년 기념으로 철제 안내판을 도로 쪽 벽면에 부착해 놓았다.1917년 3월 2일 이곳 연해주에서 4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독립운동가 이상설 선생은 동지들에게 조국 독립을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는 자신을 이곳 우수리스크 수이푼 강가에서 화장해 강물에 뿌려달라는 유언을 남기고 사망한다. 이 과정에서 선생은 자신의 육체와 함께 자신이 연구하고 쓰고 입고 있던 모든 자료와 물품들을 함께 태워달라는 부탁을 해 현재까지 선생의 업적을 연구하는데 난항을 겪고 있다. /김종화기자 jhkim@kyeongin.com 일러스트/성옥희기자 okie@kyeongin.com노령 임시정부를 수립한 제2차 전로한족중앙총회가 열렸던 건물.블라디보스토크 최초 한인 집단 거주지역인 개척리가 폐쇄된 후 건설된 신한촌의 기념비. 신한촌은 민족운동단체와 독립운동가들이 활동했다. /김종화기자 jhkim@kyeongin.com한인 독립운동가들의 활동 무대였던 블라디보스토크 전경.안중근 의사의 손도장이 새겨진 단지동맹비.

2019-01-23 김종화

조선 유학생들, 도쿄서 외친 '2·8 독립선언'

뉴욕에서 전해진 독립의 열망(1월 10일자 15면보도)은 식민 본거지인 일본 동경(도쿄)에까지 급속히 전파됐다. 소약속국동맹회의에서 제기된 '조선과 일본의 합방은 무효'라는 주장에 힘입어 동경의 혈기왕성한 조선 유학생들은 궐기하기 시작했다. 1919년 2월 8일 기독교청년회관에서 처음 열린 유학생대회는 곧 '조선독립청년단대회'로 명칭을 바꾸고 본색을 드러냈다. 그 곳에서 '조선청년독립단'을 발족하고 '독립선언서'도 낭독됐다. 이것이 '2·8독립선언'의 전말이다. 이는 곧 조선독립운동의 신호탄이 됐던 3·1 만세운동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하지만 오늘날 다시 찾은 도쿄는 2·8독립선언의 자취를 찾을수 없었다. 2·8 독립선언을 이끈 학생 상당수가 와세다 대학 출신인데, 그 중 '신간회 도쿄지회'가 와세다 대학 스코트홀에서 창립됐다. 그러나 현재 와세다 교회건물로 사용되는 스코트홀을 방문했을 땐 신간회 창립과 관련한 어떠한 이야기도 들을 수 없었다.도쿄 히비야 공원도 마찬가지다. 2·8독립선언이 발표된 4일 후 재일 유학생 100여 명이 히비야 공원에서 독립선언서를 다시 발표하고 만세운동을 벌였다. 비슷한 시기 같은 장소에서 조선청년독립단 민족대회촉진부 취지서가 배포되고 시위운동이 일어났지만 오늘날 히비야 공원에는 어떤 흔적도 남아있지 않았다.기억해야 하는 것을 기억하지 않은 땅에서 3·1만세운동 100년의 의미를 되새긴다. /김종화기자 jhkim@kyeongin.com

2019-01-16 김종화

[이역만리 3·1운동의 불씨를 찾아서·(3)도쿄서 울려퍼진 2·8독립선언] '민족자결' 고무된 조선 유학생… '적국의 심장'에 꽂아넣은 일침

1919년 2월8일 '조선독립청년단대회'서 일제규탄 선언서12·23일 히비야공원서 또 시위… 훗날 신간회 지회 창립헌정기념관엔 이토 저격 안중근 탄환… 역사적 설명 없어침략 반성 흔적 없는 도쿄, 사죄공간 마련 베를린과 대조지금으로부터 100년 전, 도쿄에 한반도의 독립을 꿈꾸는 청년들이 있었다. 이들은 1918년 1월 8일 미국 대통령 윌슨이 주창한 민족자결주의에 마음이 일렁였다. 같은해 12월 아사히신문 등을 통해 재미동포들의 독립운동과 뉴욕에서 열린 소약속국동맹회의 2차 연례총회에서 파리강화회의 및 국제연맹에서 약소민족의 발언권을 인정, 독립시켜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된 소식도 전해 들었다.1919년 2월8일 기독교청년회관에서 학우회의 결산 총회가 있다는 명목 아래 유학생 대회가 열렸고 개회가 선언된 후 대회의 명칭을 '조선독립청년단대회'로 바꿨다. 그리고 '조선청년독립단' 발족을 선언했고, 곧이어 '독립선언서'가 낭독됐다. 독립선언서는 일제침략행위를 역사적으로 설명하고 조선 병합이 한민족의 의사를 무시한채 일제의 군국주의적 야심에 의해 이뤄졌음을 규탄하는 내용이 담겼다. 3·1운동에 결정적인 영향을 준 이 역사적인 사건을 '2·8독립선언'이라고 한다.# 기억해야 하는 것과 기억하지 않는 사람들도쿄에서 100년 전 2·8독립선언의 흔적을 찾기 위해 역사의 현장인 도쿄YMCA를 찾았다. 입구에는 2·8독립선언의 의의를 오랫동안 알리기 위해 재일본대한민국청년회와 함께 조성한 '1919.2.8 조선독립선언기념비'가 서 있다. 건물 안으로 들어서면 '2·8독립선언 기념자료실'이 있다. 기념자료실은 재일본한국YMCA 창립100주년기념 사업의 하나로 국가보훈처의 지원을 받아 만들어졌다.기념자료실의 각종 자료들은 2·8독립선언이 한민족의 독립 의지를 고취시킨 3·1운동의 시작점임을 설명해 주고 있다. 넓은 공간은 아니지만 당시 도쿄로 유학온 조선 유학생들이 어떤 생각을 했고,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후 어떤 고통을 겪어야 했는지 여실히 드러나 있다. 도쿄YMCA가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기념 자료실을 운영하고 있는 것은 2·8독립선언의 주역이었던 학생들을 기억하고, 그들을 도왔던 일본인 변호사들과 일본 지식인들이 있었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다. 2·8독립선언은 적국의 중심인 도쿄에서 이렇게 기억되고 있다.2·8독립선언을 이끈 학생 중 상당수는 와세다대학 출신이다. 이들은 2·8독립선언 이후에도 다양한 활동을 펼쳤다. 그 중 하나가 신간회 도쿄지회다. 신간회 도쿄지회는 1927년 5월7일 와세다대학 스코트홀에서 창립됐다. 현재 와세다교회 건물로 사용되고 있는 스코트홀은 신간회가 창립된 곳이지만 건물 주변 어디에서도 신간회 창립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2·8독립선언이 있은 후 4일 뒤 재일 유학생 100여명이 도쿄 히비야공원에서 독립선언서를 다시 발표하고 독립을 부르짖었다. 또 같은달 23일 히비야공원에서 조선청년독립단 민족대회촉진부 취지서가 배포됐고 시위운동이 일어났다. 히비야공원은 100년 전 두 사건의 현장이었지만 100년이 지난 지금 당시 유학생들의 처절한 독립의지를 되뇔 수 있는 어떠한 흔적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 도쿄에서 만난 안중근 의사의 탄환 일본 국회의사당 바로 앞에는 헌정기념관이 있다. 헌정기념관에는 일본 현대사와 관련한 다양한 전시물들이 설치되어 있다.그러나 헌정기념관 2층 본전시실로 올라가면 안중근의사가 이토히로부미를 사살할 때 사용한 총알이 전시되어 있다. 이토히로부미는 1909년 10월 26일 만주 하얼빈역 앞에서 안중근에게 저격당했다. 당시 이토히로부미 외에도 수행원 3명이 부상을 당했다. 이 총알은 이토히로부미가 아닌 그를 수행했던 만주이사 다나카(田中淸次郞)의 환부에서 나온 것이다.안중근 의사가 이토히로부미를 왜 저격했고, 또 당시 한반도와 동북아시아 상황이 어땠는지에 대한 설명 없이 총알 곁에는 '이등박문(伊藤博文)의 조난(遭難)'이라고 적혀 있다. 한국인에게 이 총알은 식민지시대의 아픔을 되뇌며 독립을 부르짖었던 열사들의 투지를 떠올리게 한다. 반면, 일본인들은 후대에 어떤 의미를 전해 주기 위해 헌정기념관이라는 의미 있는 공간에 이 총알을 전시하고 있는지 언뜻 이해하기 어렵다.# 일본과 독일 서로 다른 행보독일의 수도 베를린 한복판에는 자국의 부끄러운 역사인 유대인 대학살이라는 사건을 반성하는 공간이 있다. 매년 이곳은 350만명이 방문한다. 독일인들은 자국의 부끄러운 역사가 반복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하고 있다. 2·8독립선언에 대한 흔적을 찾기 위해 도쿄시내 여러 장소를 방문했지만 독립을 꿈꾸던 우리 조선 유학생들의 발자취를 찾아볼 수 없다는 점이 아쉬웠다. 반면 작금의 일본은 역사를 망각하고 자가당착적 역사인식으로 아직도 군국주의 망령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 /김종화기자 jhkim@kyeongin.com 일러스트/성옥희기자 okie@kyeongin.com도쿄YMCA에 입구에 설치 되어 있는 '1919·2·8조선독립선언기념비'./김종화기자 jhkim@kyeongin.com도쿄YMCA '2·8독립선언 기념 자료실'을 통해 공개된 자료. /김종화기자 jhkim@kyeongin.com100년전 유학생들이 독립선언서를 부르짖었던 히비야공원 전경. /김종화기자 jhkim@kyeongin.com일본 헌정기념관 자료실에 있는 안중근 의사의 탄환.1927년5월7일 신간회 도쿄지회 창립 행사가 열린 스코트홀(현재 와세다교회). /김종화기자 jhkim@kyeongin.com

2019-01-16 김종화

[이역만리 3·1운동의 불씨를 찾아서·(2)]뉴욕의 '소약속국동맹회의'

1차대전후 약소국들 민족자결 주장 동맹 결성'맥알핀 호텔'서 1917·1918년, 조선독립 천명3·1운동 자극받은 한인 필라델피아 시내 행진우두커니 도시 한복판에 멈춰 섰다. 하루에도 수만의 인파가 오가는, 세계의 심장이라 불리는 이 곳, 뉴욕에서 100여 년 전 독립을 열망했던 선조의 발자취를 따라 떠나왔는데, 흔적은 온데간데 없고 그 사실을 아는 이조차 드물다. 이역만리에 조선이 '독립 국가'임을 알리고자 험한 뱃길을 마다치 않았을 텐데, 망망대해보다 더한 대도시에서 얼마나 막막했을지, 이 도시의 비정함에 선조들이 겪었을 약소국의 설움이 고스란히 다가왔다.제일 먼저 '맥알핀 호텔'을 찾았다. 지금은 뉴욕 시민들이 거주하는 고급주상복합건물로 변한 맥알핀 호텔은 1917년과 1918년 두 번에 걸쳐 조선의 독립을 세계에 천명한 '소약속국동맹회의'가 열린 곳이다. 다행히 건물의 외관은 옛 모습 그대로지만, 내부엔 옛 흔적이 없다. 건물 관리인에게 건물에 얽힌 우리의 사연을 이야기했더니, 꼭대기 층에 있는 관리사무실로 인도했다. 호텔 시절에 사용했던 물건과 사진 일부를 모아두었지만, 어디서도 그 날의 모습은 찾을 수 없었다. 분명 그 날의 회의는 민족의 운명을 좌우하는 것이었는데, 힘없는 민족의 운명이 이토록 초라한 것인가, 절감한 순간이다.이 회의는 핍박받는 약소국들이 절박한 마음을 담아 민족 자결을 주장하며 동맹을 결성하고자 모였다. 1917년에 열린 1차 동맹회의에는 대한인국민회 하와이 지방총회에서 파견된 박용만이 참석한 것으로 알려졌고 제 1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개최될 평화회의 및 각종 국제 회의에서 약소국들이 의견을 제시할 권한을 획득하는 것을 결의했다. 1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열린 1918년 제 2차 동맹회의에는 뉴욕신한회가 총회를 통해 '독립결의서'를 채택한 뒤 미 국무부와 하원외교위원장에게 수교하는 동시에 김헌식을 이 회의에 참석시켰다. 한국을 비롯해 레토니아, 스코틀랜드, 우크라이나, 그리스, 인도, 아일랜드 등 당시 식민지배를 받고 있던 약소국가들이 대거 참석한 회의는 파리강화회의에서 '민족자결'을 주장할 것을 결의했다. 또 김헌식이 '일본의 조선 합병은 위법'이라는 내용을 중심으로 한 12개항 결의문을 제출해 채택됐다. 힘없는 이들의 외침은 강대국의 잇속싸움에 영향을 미치지 못했지만, 먼 타국에서 치열하게 독립을 주장하는 동포의 모습이 국내외로 전해지며 3·1 만세운동의 시발점이 됐다.1921년 맨해튼 '더 타운홀'서 1300여명 "만세"유학생, 한글 기관지 '우라키' 문화보전 노력한인회, 십시일반 모금 '이민사박물관' 문열어뉴욕에서 영향을 받은 3·1 만세운동은 다시 뉴욕의 한인들에게 큰 자극을 주었다. 1919년 4월, 필라델피아에서는 3일간 필라델피아 시내 리틀극장에서 미국 내 3·1 운동이라 할 수 있는 제 1차 한인대회를 개최했다. 대회를 마친 100여 명의 독립지사들은 필라델피아 시의 협조 아래 미국 독립기념관까지 행진을 한 뒤 서울에서 발표된 독립선언서를 낭독했다. 특히 이 대회는 당시 필라델피아에 거주하던 서재필이 이승만, 정한경 등과 함께 주도했다고 알려졌다. 조선 최초의 한글신문인 '독립신문'을 발행한 서재필은 1884년 갑신정변이 실패로 돌아가자 일본을 거쳐 미국에 망명해 한인 최초로 1890년 미국 시민권을 취득했다. 또 뉴욕에서 한인 커뮤니티를 주도하며 한국통신부와 한국친우회를 설립하는 등 독립운동에 헌신했다. 국내에서는 3·1 만세운동 이후 극심해진 일제의 탄압에 그 기세가 사그라졌지만 뉴욕에서는 꾸준히 이어졌다. 이국땅에서 또다시 울려퍼진 만세삼창을 따라 뉴욕 맨해튼 중심가의 극장 '더 타운홀'을 찾았다. 3·1만세운동이 일어난 지 2년이 지난 1921년 3월 2일, 타운홀에서는 한인연합대회가 열렸다. 그리고 1천300여명의 한인들이 동시에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3·1 운동의 정신을 계승했다. 현재 다시 찾은 타운홀은 100여 년 전 사진 속 모습과 달라진 게 없는데, 우리의 만세삼창을 기억하는 이가 없었다. 100년 전 그 날 이 곳에는 누가 모였을까. 어떤 마음으로 이 곳을 찾았을까.그 답을 찾아 한인 유학생의 거점이었다는 컬럼비아대학교 '인터내셔널 하우스'로 향했다. 미국 최고 명문대학교인 컬럼비아대에는 당시 미국의 선진문물을 배우고자 떠나온 한인 유학생들이 있었다. 이 곳 학생들이 중심이 돼 조선의 문화와 정신을 이어가고 독립을 알리기 위한 다양한 활동이 펼쳐졌다고 전해진다. 그 활약상을 볼 것이라 기대하고 찾아간 인터내셔널 하우스에는 그 무엇도 남아있지 않았다. 하우스 관리자들에게 수차례 질문을 던졌지만, 제대로 아는 이가 없었다. 1924년께 찍은 것으로 보이는 사진 하나만 덩그러니 벽에 걸렸다. 사진을 유심히 살펴보니 우리와 같은 생김새를 한 동양의 청년들이 눈에 띈다. 갈 길을 잃었다. 서글픈 막막함이 몰려왔다. 그때 한창 보수 공사 중인 뉴욕 한인교회 관리인이 뉴욕한인회의 이야기를 들려줬다. 뉴욕한인회가 맨해튼에 박물관을 열었다는 소식이다. 들뜬 마음을 부여잡고 맨해튼으로 돌아갔다. 체류기간 동안 지나쳤을 법한 거리, 그 건물 사이로 태극기가 눈에 들어왔다. 좁고 길다란, 전형적인 뉴욕건물에 이민사박물관이 자리했다. 꼭대기 층에 올라서자 벽면 가득 한인 이민의 역사를 보여주는 자료들이 전시됐다. 그토록 찾아 헤맸던 뉴욕에서의 독립운동 자료들이 잘 정돈돼 있었다. 특히 한인 유학생들의 활약은 눈부셨다. 뉴욕과 하와이, 샌프란시스코, 로스앤젤레스, 시카고, 보스턴 등 미국 내 유학생 대표들이 인터내셔널 하우스에 모여 '북미한인유학생총회'를 창설하고, 한글 '우라키'와 영문 'The korean government bulletin' 등의 기관지를 발행하며 우리 문화를 지키고자 노력했다. 컬럼비아대 학생을 중심으로 한국문화를 미국에 홍보하기 위해 '조선문화회'를 설립, 미국 학자에게 한국문화를 알리는 한편 한국도서수집운동을 펼쳐 한국학생들에게 기증했다. 이때 기증된 도서들이 씨앗이 돼 현재 컬럼비아대에는 10만 여 권이 넘는 한국도서가 자리하고 있다. 세계적 명화들이 즐비한 대형 박물관을 찾은 것보다 더 뭉클한 감동이 밀려왔다. 뉴욕의 한인들이 오랜 시간 힘겹게 이민자로 살아가면서 십시일반 종잣돈을 모아 공간을 마련하고, 우리 역사의 뿌리를 보존해 온 것에 감사하고 한편으로 부끄러웠다. 뉴욕한인회는 3·1운동 100주년을 맞는 올해 3월 1일, 뉴욕시청 앞에서 대규모 한인대회를 재현하며 만세삼창을 외칠 것이라 고전했다. 조국과 타국에서 울릴 그 힘찬 함성이 벌써 마음을 들뜨게 한다. /공지영기자 jyg@kyeongin.com 일러스트/박성현기자 pssh0911@kyeongin.com3·1만세운동의 시발점이 됐던 뉴욕 '맥알핀 호텔'의 현재 모습. /공지영기자 jyg@kyeongin.com3·1만세운동이 일어난 2년 뒤, 1921년 3월2일 맨해튼에 위치한 극장 '더 타운홀'에서 3·1운동을 재현하는 한인연합대회가 열렸다. /공지영기자 jyg@kyeongin.com독립운동가 안창호(왼쪽 세번째)와 농장 일꾼들. 1903~1904년 추정.북미주한인유학생총회가 발행한 한글기관지 '우라키'.

2019-01-09 공지영

100년 전 그 날 '뉴욕서 휘날린 태극기'

세계의 심장, 뉴욕에 태극기가 펄럭인다. 100년 전 그 날에도 커다란 태극기가 휘날렸다. 3·1 만세운동이 한창이던 때, 수천의 조선인들이 대한의 독립을 외치며 뉴욕 거리를 활보했다. 그래서 한인 유학생의 허브였던 컬럼비아대학교 인터내셔널 하우스에는 여전히 성조기 옆에 태극기가 당당히 펄럭인다. 뉴욕은 국내에 잘 알려지지 않은 3·1 만세운동 유적지가 살아 숨쉬는 땅이다. 3·1 만세운동의 기폭제가 된 '동경 2·8 학생독립선언'은 뉴욕 맥알핀 호텔에서 열린 '소약속국동맹회의'의 영향을 받았다. 이 회의에서 일본과 조선 합병 무효를 주장하는 결의문이 채택됐고 이 소식이 적국의 땅, 동경(도쿄)에 전해지며 유학생들의 심장을 뛰게 했다. 뉴욕에서의 외침이 도화선이 된 3·1 만세운동은 들불처럼 조선 팔도를 뒤덮었고, 다시 바다를 건너 미국 뉴욕 한복판에서 한인들이 만세운동을 전개했다. 국내 3·1 만세운동을 기점으로 상하이, 연해주, 만주 등 해외 지역에서 적극적인 독립운동이 시작됐고, 미국 내에서도 독립운동이 활발하게 펼쳐졌다. 특히 뉴욕은 한인 유학생을 중심으로 '조선문화회' 등 우리의 것을 지키기 위한 문화독립운동을 전개했고 3·1운동 정신을 계승 발전시키고 독립정신을 구현한다는 취지로 1928년 6월 뉴욕 최초의 한글신문인 '3·1 신보'를 발행하기도 했다. /공지영기자 jyg@kyeongin.com

2019-01-09 공지영

[이역만리 3·1운동의 불씨를 찾아서·(1)프롤로그]들불처럼 일어난 외침 "대한독립 만세"

무력 식민통치 전분야 개인의 권리 침해기미년 1월22일 고종 승하, 반일감정 증폭美 대통령 윌슨 '민족자결주의' 기폭제로100년 전 전국적으로 거센 들불처럼 일어난 3·1운동은 민주주의, 평화와 비폭력의 정신이 빛난 독립운동이다.3·1운동이 일어나기 전 일본 제국주의의 무력 식민 통치가 고조되고 있었고 한국인에게 참정권, 집회결사의 자유, 언론출판의 자유를 박탈했다. 종교와 기업의 자유를 구속했으며 행정·사법·경찰 등 모든 통치기관이 개인의 권리를 침해했다. 이런 상황 속에 1918년 미국의 윌슨 대통령은 제1차 세계대전 후 패전국의 처리에 대한 문제를 논의한 파리 강화회의에서 '각 민족의 운명은 그 민족이 스스로 결정'하는 민족자결주의를 주장했다. 윌슨 대통령의 주장은 강대국에 의해 고통을 받던 약소국들에게 독립에 대한 의지를 키워주는 기폭제가 됐다. 또 1919년 1월22일 고종 황제가 갑자기 승하(죽음)하자 일본인들이 독살했다는 소문이 돌면서 일본에 대한 증오심이 극에 달했다.10여일이 지난 2월8일 일본에 유학 중이던 한국인 유학생들이 한국의 독립을 요구하는 선언서와 결의문을 선포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유학생들은 '한일합방이 한국민의 뜻에 반하는 것인만큼 일본은 한국을 독립 시킬 것, 미국과 영국은 일본의 한국합병을 솔선 승인한 죄가 있으므로 속죄의 의무를 질 것, 이에 응하지 않을 때는 우리 민족이 생존을 위해 자유행동을 취해 독립을 달성할 것' 등을 선언했다. 2·8독립선언이라고 불려지는 이 사건이 국내의 민족지도자와 학생들에게 알려졌고, 3·1운동이 벌어지는 한 계기가 됐다.3월1일 새벽 '독립선언서' 배포 시작 알려3월 하순~4월 초순 전국 각지 시위 절정인구 10%·200만명 참여, 2만3천명 사상# 한반도를 뜨겁게 달군 3·1운동3월 1일 서울의 만세시위는 이른 새벽에 학생들이 시내에 독립선언서를 배포하며 시작됐다. 정오 무렵부터 학교를 빠져나온 학생들은 속속 탑골공원에 집결했고 민족대표들은 태화관에 모였다. 오후 2시 민족대표들은 독립선언식을 갖고 경찰에 그 소식을 알렸다. 곧 헌병과 경찰에 체포됐다. 같은 시각 수천 명이 운집한 탑골공원에서는 독립선언서가 낭독됐다. 시위대는 독립만세를 부르며 시가행진을 시작했다. 철도역이 있는 평양, 진남포, 안주, 선천, 의주, 원산 등 6개 도시는 최남선이 작성한 '기미독립선언서'를 전날 혹은 당일날 전달 받아 낭독하는 등 만세 시위에 동참했다. 3·1운동 초기에는 북부 지방을 중심으로 만세 운동이 진행됐지만 3월 중순을 넘어서는 경기도를 중심으로 중남부 지방에서 주로 일어났다. 3월 하순에 북부지방에서 만세시위가 이어지면서 3월 하순부터 4월 초순까지 만세시위의 절정기를 이뤘다. 매일 50~60여회에 이르는 만세시위가 일어났다. 3·1운동은 3월 1일 시작되어 두 달이 넘는 기간 동안 도시에서 농촌으로, 국내에서 국외로 퍼져나갔다. 박은식의 '한국독립운동지혈사'에 따르면 인구의 10%나 되는 200만여명이 만세시위에 참여해 7천500여명이 살해당했고 1만6천여명이 부상했다. 49개의 교회와 학교, 715호의 민가가 불에 탔다. 경찰은 그해 12월까지 4만6천명을 검거해 1만9천54명을 검찰로 송치했고 이 중 7천여명이 유죄 판결을 받았다. 3·1운동을 모의한 민족대표 대부분은 '보안법', '출판법', '형법'의 소요죄 위반으로 징역 3년형을 선고받았다.일제탄압 피해 러시아로 한인 이주 급증1917년 첫 한인 중앙기관 '고려족회' 결성대한국민의회로 개편… 상해 임정과 합병# 연해주와 임시정부의 탄생한인의 러시아 이주는 1863년 13가구가 두만강을 넘어 포시에트 구역의 지신허(地新墟)에 정착하면서 시작됐다. 한인 이주는 시간이 경과하면서 연추·추풍·해삼위·소왕령·수청 등지를 중심으로 연해주 도처에 한인사회가 형성됐다. 1905~1910년 사이에는 일본의 탄압을 피해 정치적 망명인사들이 급증했다. 국내에서 의병전쟁이 확대 격화되던 1907, 8년을 전후해 연해주 한인사회에서도 항일의병이 편성되어 국내진공작전 등 활발한 항일전을 전개했다.국치 이후 러시아 한인사회는 현실적이고도 장기지속적인 독립운동을 위해 1911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자치결사 권업회(勸業會)를 조직했다. 이어 이듬해에는 '대동공보'가 발간되어 1910년 국치 때까지 항일언론을 폈다. 이후 신채호를 주필로 '대양보', 권업회가 운영한 '권업신문' 등이 활동했다. 신문 간행사업과 함께 권업회는 인재양성과 민족의식의 고취를 위해 민족주의교육 진흥에도 심혈을 쏟았다. 권업회가 운영한 대표적인 한인 교육기관이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의 한민학교이다. 한민학교는 블라디보스토크 시내 개척리 시절의 계동학교(啓東學校)에서 유래한다.제정 러시아가 붕괴되어 구심력이 약해지고 여러 계층과 민족이 자신들의 이익을 확보하려는 활동들이 일어나자 96명의 한인 대표들이 1917년 6월 우수리스크에 모여 '제1차 전러시아한인대표자대회'를 개최했다. 이 대회에서는 러시아 한인사회 첫 중앙기관인 전로한족회중앙총회(고려족회)가 결성됐다. 제1차 세계대전이 종결되고 국제 정세가 새롭게 전개되자 이에 대처하기 위해 총회는 1919년 3월 17일 대한국민의회로 개편했다. 최고의결기관인 총회와 이를 대행할 상설의회, 사법과 행정 기능까지 갖췄다. 의회는 대한민국의 독립과 일본 제국주의에 대한 혈전 결의를 선포했고, 국내에서 3·1운동이 일어나자 의연금을 모집하고 군사교육을 위해 뤄쯔거우(羅子溝)에 훈련소를 설치했다. 상해임시정부와 합병하고 1919년 8월 해산을 결의했다. /김종화·공지영기자 jhkim@kyeongin.com 일러스트/박성현기자 pssh0911@kyeongin.com광복회와 고려학술문화재단이 러시아 크라스키노지역에 안중근 의사가 1909년 3월초 항일투사 11명과 함께 동의단지회를 결성하고 독립운동에의 헌신을 다짐한 것을 기리기 위해 조성한 단지동맹 기념물.러시아 우수리스크에 위치한 고려인문화센터내 안중근의사 추모비. /김종화기자 jhkim@kyeongin.com

2019-01-01 김종화·공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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