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역만리 3·1운동의 불씨를 찾아서

 

조선 유학생들, 도쿄서 외친 '2·8 독립선언'

뉴욕에서 전해진 독립의 열망(1월 10일자 15면보도)은 식민 본거지인 일본 동경(도쿄)에까지 급속히 전파됐다. 소약속국동맹회의에서 제기된 '조선과 일본의 합방은 무효'라는 주장에 힘입어 동경의 혈기왕성한 조선 유학생들은 궐기하기 시작했다. 1919년 2월 8일 기독교청년회관에서 처음 열린 유학생대회는 곧 '조선독립청년단대회'로 명칭을 바꾸고 본색을 드러냈다. 그 곳에서 '조선청년독립단'을 발족하고 '독립선언서'도 낭독됐다. 이것이 '2·8독립선언'의 전말이다. 이는 곧 조선독립운동의 신호탄이 됐던 3·1 만세운동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하지만 오늘날 다시 찾은 도쿄는 2·8독립선언의 자취를 찾을수 없었다. 2·8 독립선언을 이끈 학생 상당수가 와세다 대학 출신인데, 그 중 '신간회 도쿄지회'가 와세다 대학 스코트홀에서 창립됐다. 그러나 현재 와세다 교회건물로 사용되는 스코트홀을 방문했을 땐 신간회 창립과 관련한 어떠한 이야기도 들을 수 없었다.도쿄 히비야 공원도 마찬가지다. 2·8독립선언이 발표된 4일 후 재일 유학생 100여 명이 히비야 공원에서 독립선언서를 다시 발표하고 만세운동을 벌였다. 비슷한 시기 같은 장소에서 조선청년독립단 민족대회촉진부 취지서가 배포되고 시위운동이 일어났지만 오늘날 히비야 공원에는 어떤 흔적도 남아있지 않았다.기억해야 하는 것을 기억하지 않은 땅에서 3·1만세운동 100년의 의미를 되새긴다. /김종화기자 jhkim@kyeongin.com

2019-01-16 김종화

[이역만리 3·1운동의 불씨를 찾아서·(3)도쿄서 울려퍼진 2·8독립선언] '민족자결' 고무된 조선 유학생… '적국의 심장'에 꽂아넣은 일침

1919년 2월8일 '조선독립청년단대회'서 일제규탄 선언서12·23일 히비야공원서 또 시위… 훗날 신간회 지회 창립헌정기념관엔 이토 저격 안중근 탄환… 역사적 설명 없어침략 반성 흔적 없는 도쿄, 사죄공간 마련 베를린과 대조지금으로부터 100년 전, 도쿄에 한반도의 독립을 꿈꾸는 청년들이 있었다. 이들은 1918년 1월 8일 미국 대통령 윌슨이 주창한 민족자결주의에 마음이 일렁였다. 같은해 12월 아사히신문 등을 통해 재미동포들의 독립운동과 뉴욕에서 열린 소약속국동맹회의 2차 연례총회에서 파리강화회의 및 국제연맹에서 약소민족의 발언권을 인정, 독립시켜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된 소식도 전해 들었다.1919년 2월8일 기독교청년회관에서 학우회의 결산 총회가 있다는 명목 아래 유학생 대회가 열렸고 개회가 선언된 후 대회의 명칭을 '조선독립청년단대회'로 바꿨다. 그리고 '조선청년독립단' 발족을 선언했고, 곧이어 '독립선언서'가 낭독됐다. 독립선언서는 일제침략행위를 역사적으로 설명하고 조선 병합이 한민족의 의사를 무시한채 일제의 군국주의적 야심에 의해 이뤄졌음을 규탄하는 내용이 담겼다. 3·1운동에 결정적인 영향을 준 이 역사적인 사건을 '2·8독립선언'이라고 한다.# 기억해야 하는 것과 기억하지 않는 사람들도쿄에서 100년 전 2·8독립선언의 흔적을 찾기 위해 역사의 현장인 도쿄YMCA를 찾았다. 입구에는 2·8독립선언의 의의를 오랫동안 알리기 위해 재일본대한민국청년회와 함께 조성한 '1919.2.8 조선독립선언기념비'가 서 있다. 건물 안으로 들어서면 '2·8독립선언 기념자료실'이 있다. 기념자료실은 재일본한국YMCA 창립100주년기념 사업의 하나로 국가보훈처의 지원을 받아 만들어졌다.기념자료실의 각종 자료들은 2·8독립선언이 한민족의 독립 의지를 고취시킨 3·1운동의 시작점임을 설명해 주고 있다. 넓은 공간은 아니지만 당시 도쿄로 유학온 조선 유학생들이 어떤 생각을 했고,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후 어떤 고통을 겪어야 했는지 여실히 드러나 있다. 도쿄YMCA가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기념 자료실을 운영하고 있는 것은 2·8독립선언의 주역이었던 학생들을 기억하고, 그들을 도왔던 일본인 변호사들과 일본 지식인들이 있었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다. 2·8독립선언은 적국의 중심인 도쿄에서 이렇게 기억되고 있다.2·8독립선언을 이끈 학생 중 상당수는 와세다대학 출신이다. 이들은 2·8독립선언 이후에도 다양한 활동을 펼쳤다. 그 중 하나가 신간회 도쿄지회다. 신간회 도쿄지회는 1927년 5월7일 와세다대학 스코트홀에서 창립됐다. 현재 와세다교회 건물로 사용되고 있는 스코트홀은 신간회가 창립된 곳이지만 건물 주변 어디에서도 신간회 창립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2·8독립선언이 있은 후 4일 뒤 재일 유학생 100여명이 도쿄 히비야공원에서 독립선언서를 다시 발표하고 독립을 부르짖었다. 또 같은달 23일 히비야공원에서 조선청년독립단 민족대회촉진부 취지서가 배포됐고 시위운동이 일어났다. 히비야공원은 100년 전 두 사건의 현장이었지만 100년이 지난 지금 당시 유학생들의 처절한 독립의지를 되뇔 수 있는 어떠한 흔적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 도쿄에서 만난 안중근 의사의 탄환 일본 국회의사당 바로 앞에는 헌정기념관이 있다. 헌정기념관에는 일본 현대사와 관련한 다양한 전시물들이 설치되어 있다.그러나 헌정기념관 2층 본전시실로 올라가면 안중근의사가 이토히로부미를 사살할 때 사용한 총알이 전시되어 있다. 이토히로부미는 1909년 10월 26일 만주 하얼빈역 앞에서 안중근에게 저격당했다. 당시 이토히로부미 외에도 수행원 3명이 부상을 당했다. 이 총알은 이토히로부미가 아닌 그를 수행했던 만주이사 다나카(田中淸次郞)의 환부에서 나온 것이다.안중근 의사가 이토히로부미를 왜 저격했고, 또 당시 한반도와 동북아시아 상황이 어땠는지에 대한 설명 없이 총알 곁에는 '이등박문(伊藤博文)의 조난(遭難)'이라고 적혀 있다. 한국인에게 이 총알은 식민지시대의 아픔을 되뇌며 독립을 부르짖었던 열사들의 투지를 떠올리게 한다. 반면, 일본인들은 후대에 어떤 의미를 전해 주기 위해 헌정기념관이라는 의미 있는 공간에 이 총알을 전시하고 있는지 언뜻 이해하기 어렵다.# 일본과 독일 서로 다른 행보독일의 수도 베를린 한복판에는 자국의 부끄러운 역사인 유대인 대학살이라는 사건을 반성하는 공간이 있다. 매년 이곳은 350만명이 방문한다. 독일인들은 자국의 부끄러운 역사가 반복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하고 있다. 2·8독립선언에 대한 흔적을 찾기 위해 도쿄시내 여러 장소를 방문했지만 독립을 꿈꾸던 우리 조선 유학생들의 발자취를 찾아볼 수 없다는 점이 아쉬웠다. 반면 작금의 일본은 역사를 망각하고 자가당착적 역사인식으로 아직도 군국주의 망령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 /김종화기자 jhkim@kyeongin.com 일러스트/성옥희기자 okie@kyeongin.com도쿄YMCA에 입구에 설치 되어 있는 '1919·2·8조선독립선언기념비'./김종화기자 jhkim@kyeongin.com도쿄YMCA '2·8독립선언 기념 자료실'을 통해 공개된 자료. /김종화기자 jhkim@kyeongin.com100년전 유학생들이 독립선언서를 부르짖었던 히비야공원 전경. /김종화기자 jhkim@kyeongin.com일본 헌정기념관 자료실에 있는 안중근 의사의 탄환.1927년5월7일 신간회 도쿄지회 창립 행사가 열린 스코트홀(현재 와세다교회). /김종화기자 jhkim@kyeongin.com

2019-01-16 김종화

[이역만리 3·1운동의 불씨를 찾아서·(2)]뉴욕의 '소약속국동맹회의'

1차대전후 약소국들 민족자결 주장 동맹 결성'맥알핀 호텔'서 1917·1918년, 조선독립 천명3·1운동 자극받은 한인 필라델피아 시내 행진우두커니 도시 한복판에 멈춰 섰다. 하루에도 수만의 인파가 오가는, 세계의 심장이라 불리는 이 곳, 뉴욕에서 100여 년 전 독립을 열망했던 선조의 발자취를 따라 떠나왔는데, 흔적은 온데간데 없고 그 사실을 아는 이조차 드물다. 이역만리에 조선이 '독립 국가'임을 알리고자 험한 뱃길을 마다치 않았을 텐데, 망망대해보다 더한 대도시에서 얼마나 막막했을지, 이 도시의 비정함에 선조들이 겪었을 약소국의 설움이 고스란히 다가왔다.제일 먼저 '맥알핀 호텔'을 찾았다. 지금은 뉴욕 시민들이 거주하는 고급주상복합건물로 변한 맥알핀 호텔은 1917년과 1918년 두 번에 걸쳐 조선의 독립을 세계에 천명한 '소약속국동맹회의'가 열린 곳이다. 다행히 건물의 외관은 옛 모습 그대로지만, 내부엔 옛 흔적이 없다. 건물 관리인에게 건물에 얽힌 우리의 사연을 이야기했더니, 꼭대기 층에 있는 관리사무실로 인도했다. 호텔 시절에 사용했던 물건과 사진 일부를 모아두었지만, 어디서도 그 날의 모습은 찾을 수 없었다. 분명 그 날의 회의는 민족의 운명을 좌우하는 것이었는데, 힘없는 민족의 운명이 이토록 초라한 것인가, 절감한 순간이다.이 회의는 핍박받는 약소국들이 절박한 마음을 담아 민족 자결을 주장하며 동맹을 결성하고자 모였다. 1917년에 열린 1차 동맹회의에는 대한인국민회 하와이 지방총회에서 파견된 박용만이 참석한 것으로 알려졌고 제 1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개최될 평화회의 및 각종 국제 회의에서 약소국들이 의견을 제시할 권한을 획득하는 것을 결의했다. 1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열린 1918년 제 2차 동맹회의에는 뉴욕신한회가 총회를 통해 '독립결의서'를 채택한 뒤 미 국무부와 하원외교위원장에게 수교하는 동시에 김헌식을 이 회의에 참석시켰다. 한국을 비롯해 레토니아, 스코틀랜드, 우크라이나, 그리스, 인도, 아일랜드 등 당시 식민지배를 받고 있던 약소국가들이 대거 참석한 회의는 파리강화회의에서 '민족자결'을 주장할 것을 결의했다. 또 김헌식이 '일본의 조선 합병은 위법'이라는 내용을 중심으로 한 12개항 결의문을 제출해 채택됐다. 힘없는 이들의 외침은 강대국의 잇속싸움에 영향을 미치지 못했지만, 먼 타국에서 치열하게 독립을 주장하는 동포의 모습이 국내외로 전해지며 3·1 만세운동의 시발점이 됐다.1921년 맨해튼 '더 타운홀'서 1300여명 "만세"유학생, 한글 기관지 '우라키' 문화보전 노력한인회, 십시일반 모금 '이민사박물관' 문열어뉴욕에서 영향을 받은 3·1 만세운동은 다시 뉴욕의 한인들에게 큰 자극을 주었다. 1919년 4월, 필라델피아에서는 3일간 필라델피아 시내 리틀극장에서 미국 내 3·1 운동이라 할 수 있는 제 1차 한인대회를 개최했다. 대회를 마친 100여 명의 독립지사들은 필라델피아 시의 협조 아래 미국 독립기념관까지 행진을 한 뒤 서울에서 발표된 독립선언서를 낭독했다. 특히 이 대회는 당시 필라델피아에 거주하던 서재필이 이승만, 정한경 등과 함께 주도했다고 알려졌다. 조선 최초의 한글신문인 '독립신문'을 발행한 서재필은 1884년 갑신정변이 실패로 돌아가자 일본을 거쳐 미국에 망명해 한인 최초로 1890년 미국 시민권을 취득했다. 또 뉴욕에서 한인 커뮤니티를 주도하며 한국통신부와 한국친우회를 설립하는 등 독립운동에 헌신했다. 국내에서는 3·1 만세운동 이후 극심해진 일제의 탄압에 그 기세가 사그라졌지만 뉴욕에서는 꾸준히 이어졌다. 이국땅에서 또다시 울려퍼진 만세삼창을 따라 뉴욕 맨해튼 중심가의 극장 '더 타운홀'을 찾았다. 3·1만세운동이 일어난 지 2년이 지난 1921년 3월 2일, 타운홀에서는 한인연합대회가 열렸다. 그리고 1천300여명의 한인들이 동시에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3·1 운동의 정신을 계승했다. 현재 다시 찾은 타운홀은 100여 년 전 사진 속 모습과 달라진 게 없는데, 우리의 만세삼창을 기억하는 이가 없었다. 100년 전 그 날 이 곳에는 누가 모였을까. 어떤 마음으로 이 곳을 찾았을까.그 답을 찾아 한인 유학생의 거점이었다는 컬럼비아대학교 '인터내셔널 하우스'로 향했다. 미국 최고 명문대학교인 컬럼비아대에는 당시 미국의 선진문물을 배우고자 떠나온 한인 유학생들이 있었다. 이 곳 학생들이 중심이 돼 조선의 문화와 정신을 이어가고 독립을 알리기 위한 다양한 활동이 펼쳐졌다고 전해진다. 그 활약상을 볼 것이라 기대하고 찾아간 인터내셔널 하우스에는 그 무엇도 남아있지 않았다. 하우스 관리자들에게 수차례 질문을 던졌지만, 제대로 아는 이가 없었다. 1924년께 찍은 것으로 보이는 사진 하나만 덩그러니 벽에 걸렸다. 사진을 유심히 살펴보니 우리와 같은 생김새를 한 동양의 청년들이 눈에 띈다. 갈 길을 잃었다. 서글픈 막막함이 몰려왔다. 그때 한창 보수 공사 중인 뉴욕 한인교회 관리인이 뉴욕한인회의 이야기를 들려줬다. 뉴욕한인회가 맨해튼에 박물관을 열었다는 소식이다. 들뜬 마음을 부여잡고 맨해튼으로 돌아갔다. 체류기간 동안 지나쳤을 법한 거리, 그 건물 사이로 태극기가 눈에 들어왔다. 좁고 길다란, 전형적인 뉴욕건물에 이민사박물관이 자리했다. 꼭대기 층에 올라서자 벽면 가득 한인 이민의 역사를 보여주는 자료들이 전시됐다. 그토록 찾아 헤맸던 뉴욕에서의 독립운동 자료들이 잘 정돈돼 있었다. 특히 한인 유학생들의 활약은 눈부셨다. 뉴욕과 하와이, 샌프란시스코, 로스앤젤레스, 시카고, 보스턴 등 미국 내 유학생 대표들이 인터내셔널 하우스에 모여 '북미한인유학생총회'를 창설하고, 한글 '우라키'와 영문 'The korean government bulletin' 등의 기관지를 발행하며 우리 문화를 지키고자 노력했다. 컬럼비아대 학생을 중심으로 한국문화를 미국에 홍보하기 위해 '조선문화회'를 설립, 미국 학자에게 한국문화를 알리는 한편 한국도서수집운동을 펼쳐 한국학생들에게 기증했다. 이때 기증된 도서들이 씨앗이 돼 현재 컬럼비아대에는 10만 여 권이 넘는 한국도서가 자리하고 있다. 세계적 명화들이 즐비한 대형 박물관을 찾은 것보다 더 뭉클한 감동이 밀려왔다. 뉴욕의 한인들이 오랜 시간 힘겹게 이민자로 살아가면서 십시일반 종잣돈을 모아 공간을 마련하고, 우리 역사의 뿌리를 보존해 온 것에 감사하고 한편으로 부끄러웠다. 뉴욕한인회는 3·1운동 100주년을 맞는 올해 3월 1일, 뉴욕시청 앞에서 대규모 한인대회를 재현하며 만세삼창을 외칠 것이라 고전했다. 조국과 타국에서 울릴 그 힘찬 함성이 벌써 마음을 들뜨게 한다. /공지영기자 jyg@kyeongin.com 일러스트/박성현기자 pssh0911@kyeongin.com3·1만세운동의 시발점이 됐던 뉴욕 '맥알핀 호텔'의 현재 모습. /공지영기자 jyg@kyeongin.com3·1만세운동이 일어난 2년 뒤, 1921년 3월2일 맨해튼에 위치한 극장 '더 타운홀'에서 3·1운동을 재현하는 한인연합대회가 열렸다. /공지영기자 jyg@kyeongin.com독립운동가 안창호(왼쪽 세번째)와 농장 일꾼들. 1903~1904년 추정.북미주한인유학생총회가 발행한 한글기관지 '우라키'.

2019-01-09 공지영

100년 전 그 날 '뉴욕서 휘날린 태극기'

세계의 심장, 뉴욕에 태극기가 펄럭인다. 100년 전 그 날에도 커다란 태극기가 휘날렸다. 3·1 만세운동이 한창이던 때, 수천의 조선인들이 대한의 독립을 외치며 뉴욕 거리를 활보했다. 그래서 한인 유학생의 허브였던 컬럼비아대학교 인터내셔널 하우스에는 여전히 성조기 옆에 태극기가 당당히 펄럭인다. 뉴욕은 국내에 잘 알려지지 않은 3·1 만세운동 유적지가 살아 숨쉬는 땅이다. 3·1 만세운동의 기폭제가 된 '동경 2·8 학생독립선언'은 뉴욕 맥알핀 호텔에서 열린 '소약속국동맹회의'의 영향을 받았다. 이 회의에서 일본과 조선 합병 무효를 주장하는 결의문이 채택됐고 이 소식이 적국의 땅, 동경(도쿄)에 전해지며 유학생들의 심장을 뛰게 했다. 뉴욕에서의 외침이 도화선이 된 3·1 만세운동은 들불처럼 조선 팔도를 뒤덮었고, 다시 바다를 건너 미국 뉴욕 한복판에서 한인들이 만세운동을 전개했다. 국내 3·1 만세운동을 기점으로 상하이, 연해주, 만주 등 해외 지역에서 적극적인 독립운동이 시작됐고, 미국 내에서도 독립운동이 활발하게 펼쳐졌다. 특히 뉴욕은 한인 유학생을 중심으로 '조선문화회' 등 우리의 것을 지키기 위한 문화독립운동을 전개했고 3·1운동 정신을 계승 발전시키고 독립정신을 구현한다는 취지로 1928년 6월 뉴욕 최초의 한글신문인 '3·1 신보'를 발행하기도 했다. /공지영기자 jyg@kyeongin.com

2019-01-09 공지영

[이역만리 3·1운동의 불씨를 찾아서·(1)프롤로그]들불처럼 일어난 외침 "대한독립 만세"

무력 식민통치 전분야 개인의 권리 침해기미년 1월22일 고종 승하, 반일감정 증폭美 대통령 윌슨 '민족자결주의' 기폭제로100년 전 전국적으로 거센 들불처럼 일어난 3·1운동은 민주주의, 평화와 비폭력의 정신이 빛난 독립운동이다.3·1운동이 일어나기 전 일본 제국주의의 무력 식민 통치가 고조되고 있었고 한국인에게 참정권, 집회결사의 자유, 언론출판의 자유를 박탈했다. 종교와 기업의 자유를 구속했으며 행정·사법·경찰 등 모든 통치기관이 개인의 권리를 침해했다. 이런 상황 속에 1918년 미국의 윌슨 대통령은 제1차 세계대전 후 패전국의 처리에 대한 문제를 논의한 파리 강화회의에서 '각 민족의 운명은 그 민족이 스스로 결정'하는 민족자결주의를 주장했다. 윌슨 대통령의 주장은 강대국에 의해 고통을 받던 약소국들에게 독립에 대한 의지를 키워주는 기폭제가 됐다. 또 1919년 1월22일 고종 황제가 갑자기 승하(죽음)하자 일본인들이 독살했다는 소문이 돌면서 일본에 대한 증오심이 극에 달했다.10여일이 지난 2월8일 일본에 유학 중이던 한국인 유학생들이 한국의 독립을 요구하는 선언서와 결의문을 선포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유학생들은 '한일합방이 한국민의 뜻에 반하는 것인만큼 일본은 한국을 독립 시킬 것, 미국과 영국은 일본의 한국합병을 솔선 승인한 죄가 있으므로 속죄의 의무를 질 것, 이에 응하지 않을 때는 우리 민족이 생존을 위해 자유행동을 취해 독립을 달성할 것' 등을 선언했다. 2·8독립선언이라고 불려지는 이 사건이 국내의 민족지도자와 학생들에게 알려졌고, 3·1운동이 벌어지는 한 계기가 됐다.3월1일 새벽 '독립선언서' 배포 시작 알려3월 하순~4월 초순 전국 각지 시위 절정인구 10%·200만명 참여, 2만3천명 사상# 한반도를 뜨겁게 달군 3·1운동3월 1일 서울의 만세시위는 이른 새벽에 학생들이 시내에 독립선언서를 배포하며 시작됐다. 정오 무렵부터 학교를 빠져나온 학생들은 속속 탑골공원에 집결했고 민족대표들은 태화관에 모였다. 오후 2시 민족대표들은 독립선언식을 갖고 경찰에 그 소식을 알렸다. 곧 헌병과 경찰에 체포됐다. 같은 시각 수천 명이 운집한 탑골공원에서는 독립선언서가 낭독됐다. 시위대는 독립만세를 부르며 시가행진을 시작했다. 철도역이 있는 평양, 진남포, 안주, 선천, 의주, 원산 등 6개 도시는 최남선이 작성한 '기미독립선언서'를 전날 혹은 당일날 전달 받아 낭독하는 등 만세 시위에 동참했다. 3·1운동 초기에는 북부 지방을 중심으로 만세 운동이 진행됐지만 3월 중순을 넘어서는 경기도를 중심으로 중남부 지방에서 주로 일어났다. 3월 하순에 북부지방에서 만세시위가 이어지면서 3월 하순부터 4월 초순까지 만세시위의 절정기를 이뤘다. 매일 50~60여회에 이르는 만세시위가 일어났다. 3·1운동은 3월 1일 시작되어 두 달이 넘는 기간 동안 도시에서 농촌으로, 국내에서 국외로 퍼져나갔다. 박은식의 '한국독립운동지혈사'에 따르면 인구의 10%나 되는 200만여명이 만세시위에 참여해 7천500여명이 살해당했고 1만6천여명이 부상했다. 49개의 교회와 학교, 715호의 민가가 불에 탔다. 경찰은 그해 12월까지 4만6천명을 검거해 1만9천54명을 검찰로 송치했고 이 중 7천여명이 유죄 판결을 받았다. 3·1운동을 모의한 민족대표 대부분은 '보안법', '출판법', '형법'의 소요죄 위반으로 징역 3년형을 선고받았다.일제탄압 피해 러시아로 한인 이주 급증1917년 첫 한인 중앙기관 '고려족회' 결성대한국민의회로 개편… 상해 임정과 합병# 연해주와 임시정부의 탄생한인의 러시아 이주는 1863년 13가구가 두만강을 넘어 포시에트 구역의 지신허(地新墟)에 정착하면서 시작됐다. 한인 이주는 시간이 경과하면서 연추·추풍·해삼위·소왕령·수청 등지를 중심으로 연해주 도처에 한인사회가 형성됐다. 1905~1910년 사이에는 일본의 탄압을 피해 정치적 망명인사들이 급증했다. 국내에서 의병전쟁이 확대 격화되던 1907, 8년을 전후해 연해주 한인사회에서도 항일의병이 편성되어 국내진공작전 등 활발한 항일전을 전개했다.국치 이후 러시아 한인사회는 현실적이고도 장기지속적인 독립운동을 위해 1911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자치결사 권업회(勸業會)를 조직했다. 이어 이듬해에는 '대동공보'가 발간되어 1910년 국치 때까지 항일언론을 폈다. 이후 신채호를 주필로 '대양보', 권업회가 운영한 '권업신문' 등이 활동했다. 신문 간행사업과 함께 권업회는 인재양성과 민족의식의 고취를 위해 민족주의교육 진흥에도 심혈을 쏟았다. 권업회가 운영한 대표적인 한인 교육기관이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의 한민학교이다. 한민학교는 블라디보스토크 시내 개척리 시절의 계동학교(啓東學校)에서 유래한다.제정 러시아가 붕괴되어 구심력이 약해지고 여러 계층과 민족이 자신들의 이익을 확보하려는 활동들이 일어나자 96명의 한인 대표들이 1917년 6월 우수리스크에 모여 '제1차 전러시아한인대표자대회'를 개최했다. 이 대회에서는 러시아 한인사회 첫 중앙기관인 전로한족회중앙총회(고려족회)가 결성됐다. 제1차 세계대전이 종결되고 국제 정세가 새롭게 전개되자 이에 대처하기 위해 총회는 1919년 3월 17일 대한국민의회로 개편했다. 최고의결기관인 총회와 이를 대행할 상설의회, 사법과 행정 기능까지 갖췄다. 의회는 대한민국의 독립과 일본 제국주의에 대한 혈전 결의를 선포했고, 국내에서 3·1운동이 일어나자 의연금을 모집하고 군사교육을 위해 뤄쯔거우(羅子溝)에 훈련소를 설치했다. 상해임시정부와 합병하고 1919년 8월 해산을 결의했다. /김종화·공지영기자 jhkim@kyeongin.com 일러스트/박성현기자 pssh0911@kyeongin.com광복회와 고려학술문화재단이 러시아 크라스키노지역에 안중근 의사가 1909년 3월초 항일투사 11명과 함께 동의단지회를 결성하고 독립운동에의 헌신을 다짐한 것을 기리기 위해 조성한 단지동맹 기념물.러시아 우수리스크에 위치한 고려인문화센터내 안중근의사 추모비. /김종화기자 jhkim@kyeongin.com

2019-01-01 김종화·공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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