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진석의 '새 말, 새 몸짓'

 

[최진석의 '새 말, 새 몸짓'· (8)]용기, 시대를 건너가는 지적(知的) 인내

정치적 진영 논리 갇힌 '종속성' 시선·사유 '독립' 확보로 극복 '용기' 발휘 못할땐 제자리 맴돌 것조선 시대의 학자들은 나라가 위태로워진다고 판단이 되면 목숨을 걸고 왕에게 그 폐단을 낱낱이 까발리고 개선을 요구하는 상소를 하였다. 그 상소를 '진시폐소'(陳時弊疏)라고 하는데, 율곡은 세상을 뜨기 2년 전인 1582년에 선조에게 올렸다. 율곡이 '적폐청산'을 주제로 한 상소문을 올린 지 10년 후, 일본이 침략해 들어와 강토를 유린했다. 율곡이 임진왜란 전에 부르짖었던 '적폐 청산'을 437년이 지난 후의 대한민국에서도 듣는다.이런 문장들이 있다. "과거부터 쌓여온 뿌리 깊은 적폐들을 해소하지 못한다면 국민 행복도 국민 안전도 이뤄낼 수 없다.", "적폐들은 꼭꼭 숨어있어서 좀처럼 드러나지 않지만, 드디어 드러났다면 이것은 적폐근절의 시작", "지금 바꾸지 않으면 기회는 다시 오지 않는다는 각오로 근본부터 하나하나 바꿔 가겠습니다.", "우리 사회 곳곳의 묵은 적폐를 바로잡아서 새로운 대한민국을 반드시 만들어 가겠습니다!", "저와 정부는 우리 경제가 다시 회복세를 이어가고, 그 온기가 구석구석 퍼져 나가도록 모든 역량을 총동원할 것입니다.", "한반도에 평화통일의 기반을 구축하는 일에도 더욱 박차를 가할 것입니다.", "우리가 힘을 모아 국가혁신을 이뤄내지 못한다면 결코 국민의 신뢰를 얻지 못할 것입니다." 문재인 대통령이 했을 법한 말이겠는가, 아니면 박근혜 전 대통령이 했을 법한 말이겠는가. 문재인 대통령의 말이라고 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다. 그러나 2014년 7월 14일에 당시 새누리당 전당대회에서 한 박근혜 전 대통령의 축사에 나오는 말들이다.이런 문장도 있다. "상황이 점점 더 안 좋아지다가 이제는 매우 위태롭다. 상황이 어떻길래 위태롭다고 하는지를 죽을 각오로 말해보겠다. 나라의 문화 풍토는 정해진 것만을 따르거나 프레임 씌우기로 더욱 나빠지고, 관직은 능력과 관계없이 나눠주어 나라의 이익이 되는 일은 없이 그저 월급만 받고, 정치는 생산적이지 않은 시빗거리를 만들어 거기에 나라 전체가 매달리면서 혼란스럽고, 온 국민은 과거의 규제에 묶여 신음한다." 적폐(積弊)라는 단어가 선명하게 보이는 이 문장은 누구의 말을 정리한 것일까? 박근혜 대통령의 임기 중에 나온 말일까? 아니면 문재인 대통령이 재임 중인 요즘의 누군가가 한 말일까? 놀랍게도 조선 시대 중기 율곡(栗谷) 이이(李珥)의 말이다. 조선 시대의 학자들은 나라가 위태로워진다고 판단이 되면 목숨을 걸고 왕에게 그 폐단을 낱낱이 까발리고 개선을 요구하는 상소를 하였다. 그 상소를 '진시폐소'(陳時弊疏)라고 하는데, 율곡은 세상을 뜨기 2년 전인 1582년에 선조에게 올렸다. 율곡이 '적폐청산'을 주제로 한 상소문을 올린 지 10년 후, 일본이 침략해 들어와 강토를 유린했다. 율곡이 임진왜란 전에 부르짖었던 '적폐 청산'을 437년이 지난 후의 대한민국에서도 듣는다.우리가 지금 어느 정도로 망가지고 있는지를 대변하는 말로는 '이게 나라냐?'도 있고 '이건 나라냐?'도 있다. 어느 진영의 말이 옳은지 그른지를 따질 필요도 없다. 누가 옳든지 간에 나라 꼴이 말이 안 된다는 것만큼은 어느 진영에서나 동의하고 있지 않은가. '나라 꼴이 말이 아니다'라는 말이 지금에서야 출현하였다면 차라리 다행으로 여기겠다. 그러나 이런 말투는 율곡의 시대에도 이미 있었다. 율곡은 나라 꼴이 말도 안 된다는 의미를 "국비기국"(國非其國)이라는 표현에 담았다."국비기국"(國非其國)이라는 말은 훨씬 더 오래전 중국의 고전인 '묵자'(墨子)나 '관자'(管子)에서 나오긴 한다. 나라가 행정 명령이 제대로 시행되지 않거나 3년 정도 버틸 재정이 확보되지 않으면 나라라고 하기 어렵다는 의미로 주로 쓰였다. 율곡은 이와 달리 당시의 폐단을 구체적으로 지적하면서 그 폐단들이 청산되지 않고 있다는 의미에서 이 말을 쓰고 있다. 즉 민심이 분열되고 권력이 간신들에 둘러싸여 혼란스럽다는 의미에서 '나라가 나라 꼴이 아니다'고 했던 것이다. 이전 정권들에도 맞고, 지금 정권에도 맞는 말이다. 우리는 분열된 민심으로 야기된 혼란과 간신들에 둘러싸여 실상을 정확히 알지 못하게 된 권력자가 내린 비효율적인 판단들로 고통받고 지낸 지 이미 오래다.율곡의 시대와 지금의 시대가 440여년이라는 그리도 큰 시간의 격차가 있다는 사실을 느낄 수 없을 정도로 유사한 것을 보면서 그저 놀라울 따름이다. 임진왜란 직전의 동인과 서인이 극단적이면서도 맹목적으로 대립하여 국가를 비효율 속으로 빠뜨린 것을 보면서 그것이 지금의 시대와 너무도 흡사하다는 것을 알고 나서는 또다시 놀라울 따름이다. 긴 시간 사이에서만 달라진 것이 없는 것은 아니다. 시간을 거의 공유하는 짧은 시간 사이에도 유사함은 존재한다. 가장 앞에서 예로 들었던 문장들은 박근혜 전 대통령의 말이지만 지금의 문재인 대통령이 했다고 해도 전혀 이상할 일이 아니다. 언론 장악, 낙하산 인사, 어용 지식인의 득세, 인사 실패, 꽉 막힌 불통, 협치 실종 등등, 거의 모든 것들이 다른 정권들 사이에서도 똑같이 나타나는 것이다.이명박은 자신을 노무현과 다르다고 주장하고, 문재인은 자신을 박근혜와 전혀 다르다고 주장하겠지만, 구체적으로 드러나는 일들을 놓고 본다면 별 차이가 없이 대동소이하다. 이명박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스스로 노무현을 지지하는 세력과는 전혀 다르다고 할 것이고, 문재인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박근혜와 별 차이가 없다는 말에 경기를 일으키겠지만, 지금까지 드러난 사실만으로도 그 경기를 무색하게 할 수 있다. 정치 지도자들만 그런 것이 아니다. 지지자들도 모두 다른 척하면서 똑같다. '태극기 부대'와 '대깨문' 사이에 무슨 차이가 있는가. 다른 옷을 입은 같은 사람들이다. 지적 반성력을 근거로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맹목적으로 받아들인 지도자에 대하여 감성적인 숭배를 하는 단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궁극적으로는 우상숭배의 다른 형태일 뿐이다. 임진왜란 직전의 동인과 서인, 그 이상도 아니고 그 이하도 아니다.적어도 율곡의 시대에서 지금까지, 우리가 역사에서 배우고 깨달아 한 단계 크게 상승하지 못한 것은 분명하다. 물론 물질적인 풍요나 국제적인 위상을 들라치면 어찌 그 시대의 그것과 같겠냐 만은, 시선의 높이랄지 세계와 관계하는 수준 혹은 태도는 지금까지도 여전한 점이 분명히 있다. 그래서 같은 내용이 그때에도 있고, 지금도 있는 것이다. 구조적인 유사성 때문이다. 이것은 시간적으로 긴 계기 안에서만 일어나는 일이 아니다. 동시대 안에서 봐도 학습과 진화는 일어나지 않았다.왜 정치적인 대립각 사이에서도 구조적으로나 내용적으로 달라지지 못하는 것인가. 이 말을 달리 표현하자면, 왜 수직적인 진화가 일어나지 않고 그 자리를 뱅뱅 돌고만 있는가. 시간적 공간적으로 수직적 진화를 가로막는 문화적 요인은 무엇인가. 그것을 나는 한마디로 '종속성'이라고 말한다. 율곡의 시대와 지금의 시대까지 관통하는 하나의 속성이 바로 '종속성'이다. 박근혜 시대와 문재인 시대를 관통하는 하나의 속성도 '종속성'이다. '종속성'은 사유나 생각이 자신 내부에서 생산되지 않고 외부의 것을 그대로 수용한 후 그것을 외부를 향해 집행하는 삶의 형태를 취하면서 스스로는 자신의 생각에 따라 사는 것으로 착각하는 상태이다. 내가 생각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집단이 가진 생각을 내면화하여 그것을 그대로 집행하는 것에 불과하면서도 스스로를 독립적 주체로 착각하는 상태이다. 자신이 만든 것으로 삶을 채우려 하지 않고, 외부의 누군가가 만든 것을 빌려오거나 그것을 따라 만들면서도 심리적으로 불편함을 느끼지 못하는 상태이다. 지식을 생산하려는 도전에 나서는 것보다 생산된 지식을 수입해서 쓰는 것을 더 효율적인 것으로 착각한다. 내 삶의 방식을 내 자신으로부터 확인받지 않고, 주변의 동의에 더 의존한다. 기능적인 활동에 빠지느라 예의 염치를 쉽게 상실하는 상태이다. '태극기 부대'나 '대깨문'으로도 표현되는 모든 '빠'들은 그 진영의 '논리'에 갇혀 그것을 진리화 하느라 예의염치를 상실하고도 부끄러운 줄 모르게 된다. 모두 종속적인 상태이다. 감각과 감성에 빠져 선동적인 행위를 일삼지 차분하고 논리적인 지적 활동을 하지 못한다. 집단적 광기와 우상숭배를 하는 것으로 존재적 위안을 얻는 허망한 상태에 빠진다. 하지만, 본인은 그것을 자각하지 못하는 상태, 이것이 바로 종속적 삶의 전형이다. 우리는 지금 이런 삶을 길고도 길게 살고 있는 것이다. 우리의 물질적 풍요와 민주적 발전도 모두 이 종속성의 범위 안에서 한 발전임을 깨달아야 한다.그렇다면, '헌 말 헌 몸짓'을 버리고 '새말 새몸짓'으로 무장한다는 말은 다름 아니라 '종속성'을 극복하여 '독립'을 확보하는 것이다. 이 '독립'은 영토나 정치적인 의미에 한정되지 않는다. 근본적으로는 시선이나 사유의 독립을 말한다. 종속적 사고는 당연히 진영에 갇히고 감각과 감성에 휘둘리는 경향을 보인다. 독립적 사고는 근본적으로 감각과 감성을 이겨낸 지적 사고의 형태를 띤다. 진영에 갇힌 사고가 비효율적이며 미래적이지 않다는 것은 진영적 사고를 하는 사람들도 모르는 바가 아니다. 그러나 왜 벗어나지 못하는가. 감성적 확신에 더 의존하기 때문이다. 진영적 사고를 벗어나려면, 우선 진영적 사고를 자세히 관찰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모든 각성이 일어나는 이 '관찰'을 시작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에 가까울 정도로 어렵다. 관찰한 후에는 각성을 하고, 거기서 벗어나려는 태도를 결정해야 하는데, 이것 또한 불가능에 가까울 정도로 매우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이 어려운 일들을 해내지 않으면 앞으로도 긴 시간 우리는 율곡의 시대를 살며 선조의 무능을 견디다 임진왜란을 당하는 것과 같은 비극에 다시 직면할 수 있다는 사실을 직시해야 한다.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감행하는 행위를 '용기'라고 한다. 따라서 '용기'는 매우 지적인 활동이다. 지적이라는 말을 단순히 학력이 높은 것으로 오해하지는 말자. 감각과 감성과 맹목적인 믿음에 빠지지 않고 곰곰이 생각할 수 있으면 지적이다. 감각과 감성에 갇혀 있는 사람은 지적이지 않기 때문에 용기를 발휘할 수 없다. 그래서 소크라테스도 용기를 '지적인 인내'라고 하는 것이다. 긴 시간 우리를 지배했던 '종속성'을 이겨내는 용기, 즉 지적인 인내를 발휘하지 않으면, 우리는 앞으로도 박근혜와 문재인의 시대를 왕복할 것이다. 동인과 서인 사이의 싸움판 구도를 앞으로도 깨지 못할 것이다. 율곡의 경고를 앞으로도 동시대인의 것처럼 반복해서 듣는 시대를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율곡이 선조에게 올린 상소문이다. 지금이라도 지적 인내를 발휘할 수 있으면 문재인 대통령이 최소한 선조는 되지 않을 것이다. "요즘 정책들이 시대와 맞지 않아 날로 잘못되니 백성들의 의욕이 매일 소진되고 있습니다. 이는 간신들이 권력을 휘두르며 행세할 때보다 더 심합니다. … 이렇게 계속하면 10년도 안 돼서 난리가 날 것입니다. … 언로(言路)를 넓게 열어서 전하의 뜻과 다르더라도 많은 의견을 받아들이십시오."/최진석 건명원 초대 원장·서강대 철학과 명예교수송필용 作 '무제'. /광주일보 제공

2019-10-21 최진석

[최진석의 '새 말, 새 몸짓'· (7)]부끄러워 할 줄 안다는 것

자기반성 능력 인간적 활동 출발점 기업 윤리의식 관심땐 지속 성장 수치심 모르면 파렴치 사회로공자도 "특히 지도자급에 해당하는 높이의 사람이라면 기능에 빠지지 않아야 한다"(君子不器)고 말한 것이다. 본질과 기능 사이에서 본질을 선택하는 용기와 지혜를 발휘해야만 제 자리에서 뱅뱅 돌거나 좌우를 수평 이동하는 데 머물지 않고 사회를 차원을 높여가며 전진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기능에 빠지지 않는' 행위를 할 수 있으려면 최소한 부끄러움을 아는 내면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이것이 가장 기본이고, 이 기본이 본질을 선택하게 할 수 있다.일만 하면서 앞만 보고 달리던 사람이 어느 날부터 낯선 질문에 빠지기 시작한다. 나는 왜 사는가? 삶의 의미란 무엇인가? 나는 제대로 살고 있는가? 누구나 인정하는 참된 가치는 존재하는가? 이런 것들을 근본적인 질문 혹은 본질적인 질문이라고 부르자. 이런 질문들에 빠지면 대개는 내면에서 큰 혼란을 겪게 된다. 생활도 이전과 결이 달라지면서 많이 흐트러질 수 있다. 기존의 것들은 다 뒤틀린다. 알 수 없는 힘에 이끌린 듯, 본 적도 없는 곳으로 이끌리며 흔들리고 또 흔들린다. 10대나 20대에 이런 질문들에 봉착하기도 하지만, 보통은 40대 50대의 나이에 일어나는 일들이다. 왜 사람들은 앞만 보고 열심히 달려오는 삶을 살다가 갑자기 이런 질문들에 빠지는가. 이 나이가 되면 어느 정도의 성취도 얻게 되지만 열심히 앞만 보고 달려온 데서 오는 피로감을 느끼고 스스로 지치거나 고갈되어 간다는 위기감에 빠지기도 한다. 그래서 잠시 멈춰 서서 본질적인 질문들을 붙잡은 채 삶의 의미를 따져보는 일은 버겁기도 하지만 약간은 고상해 보이기도 하면서 위로를 주기도 한다.그런데 이런 질문들 앞에서 스스로 지쳤다거나 고갈되어 간다는 느낌에 빠진 채, 자신이 좀 약해진 것이 아닌가 하는 걱정을 하면서 의기소침해지기도 한다. 그러면서 스스로를 위로나 휴식이 필요한 사람으로 다독이려 한다. 많이 지쳐서 위로가 필요할 수도 있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지쳤다는 그 기분은 한 걸음도 더 나갈 수 없을 정도의 장벽이나 절벽 앞에 선 것과 같은 부정적 심리 상태가 아닐 수도 있다. 그것은 오히려 기능적이고 양적으로 살던 삶이 정점을 찍거나 한계에 도달한 후, 고도가 높아지지 않으면 안 되는 절실한 필요가 생겼기 때문에 질적 상승을 위해 혁신의 대문 앞에 선 상태일 것이다. 기능적이고 양적인 삶의 고도가 자신의 크기만큼 커져 버리면 한계를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여기서는 이전에 경험해본 적이 없는 환경에 처하는 기분이 들기 때문에 자신도 모르게 지금까지의 삶에 직접적으로 등장한 적이 없는 한 단계 더 높은 본질적인 질문이 제기될 것이다."왜사는가?"와 같은 본질적인 질문이 제기되는 이유는 지칠 만큼 지쳐서 휴식이나 위로가 필요한 것이 다는 아니다. 자신도 모르게 휴식 다음의 더 나은 단계로 나아가라는 전진의 명령 앞에 서 있는 중일지도 모른다. 약해져서가 아니라 혁신의 요구 앞에 선 상황이다. 사실 본질이나 근본이라고 이름이 붙은 것들은 기능적인 것들보다 높다. 왜 사는가, 삶의 진정한 가치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직면했다는 뜻은 그런 '가치'나 '본질'이 작동하는 높이를 향해서 내몰리고 있다는 뜻이다. 이런 낯선 질문들은 질문자의 수준이 높아져 가고 있음을 자신 스스로와 세상에 알리는 호루라기 소리다.윤리적인 기업이 윤리적이지 않은 기업보다 더 지속적인 성장을 한다는 것이 요즘은 거의 상식이다. 윤리는 구체적이고 기능적인 행위 다음의 원리적인 높이에 있다. 기능이기만 했던 행위가 행위 자체의 본질적인 이유나 가치적인 평가와 만나려 하면 윤리가 된다. 하나하나의 행위는 기능이지만, 윤리는 본질적인 높이다. 윤리적인 기업은 수준이 높고, 아직 윤리에 관심을 두지 않는 기업은 수준이 높지 않다. 윤리를 추구하면 본질적 가치를 중요하게 본다는 뜻이고, 윤리 의식에 관심이 쏠리고 있지 않다면 본질보다는 기능에 갇혀 있다고 볼 수 있다. 시선이 높은 기업에는 지속적인 큰 성장이 보장되고, 시선이 낮은 기업에는 그것이 보장되지 않는다. 본질이란 이런 역할을 한다. 본질은 그냥 텅 빈 상태로 존재적 위상만을 지시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작동하면서 높이와 두께를 가지게 되고, 삶의 다양한 영역에서 크기와 생명을 더 효과적으로 보장해주는 무기가 된다.개봉 된 지 5년이나 지난 영화가 떠오른다. 이반 라이트만이 감독하고, 케빈 코스트너가 주연한 '드래프트데이'(Draft Day)이다. 케빈 코스트너가 연기한 미식축구 클리블랜드 구단장인 써니가 선수 선발을 하는 과정에 얽힌 얘기이다. 켈리헨이라는 선수가 있다. 위스콘신 대학 선수인데 올해의 선수상을 받았을 뿐 아니라 대학 성적 우등상까지 받은, 어느 프로 구단에서나 가장 탐내는 대학 졸업 선수이다. 두 개의 일화가 중요하다. 하나는 켈리헨이 대학에서 선수 생활을 할 때 자신의 생일 파티에 100여명의 손님을 초대했지만 그 가운데 같은 팀원의 선수는 한 명도 없었다. 자신의 팀 동료는 한 명도 초대하지 않은 것이다. 또 하나의 일화가 더 있다.어느 구단에선가 자기 팀에 관심 있어 할 만한 선수들에게 작전설명서를 보내는데, 그 작전설명서 마지막 장에 100달러짜리 지폐를 붙여놓았다. 그것을 받은 선수들에게 나중에 설명서를 읽었는지 물어보니 모두 읽었다고는 하면서도 절반 정도가 100달러짜리 지폐 얘기를 하지 않았다. 읽지 않았으면서 읽었다고 한 사람이 절반이었던 것이다. 그 절반의 선수들에게 마지막 장에 100달러짜리 지폐를 붙여두었었다는 사실을 밝히자 모두들 당황하였고, 대부분은 읽지 않은 사실을 털어놓았다. 그런데 켈리헨은 지폐 얘기를 하고 추궁하니까 안타깝게도 거짓말을 한 번 더한다. 읽지도 않았으면서 "아! 이제 생각나네요"라고 말한 것이다. 다른 선수들도 이상하게 생각하였지만, 특히 클리블랜드 구단 경호실장은 이런 식으로 자신을 방어하는 사람이라고 켈리헨을 비판적으로 평가한다. 브라이언 드류라고 하는 선수만이 지폐를 우편으로 돌려보내면서 카드를 동봉하는데, 카드에는 "우승을 안겨드릴 때까지 이건 아껴두세요"라는 문구를 적었다.브라이언 드류는 언젠가 게임에서 터치다운을 성공시킨 후, 그 공을 관중석의 어떤 여인에게 준다. 이것은 규정 위반이었던 것 같다. 그 사건으로 브라이언 드류는 징계를 당한다. 그런데 공을 받은 여인은 6개월 시한부 인생을 살고 있던 브라이언의 누이였다. 누이는 얼마 후 사망하였다. 징계까지 각오하고 브라이언은 누이에게 터치다운을 한 공을 선물하였다. 가족을 사랑하는 마음은 그를 징계도 감수하는 행위를 하게 한 것으로 해석된다.써니는 켈리헨이 욕심났지만, 가장 본질적인 인성 문제에서 안심이 되지 않자, 마지막 선택의 시점에 한 번 더 켈리헨에게 확인한다. "당신 생일에 팀 동료가 왔었는지 진실만 말해 달라." 진실을 알고 싶어 하는 써니에게 한 켈리헨의 대답은 끝까지 바른 길 위에 서지 못한다. "부끄럽지만… 그날 밤 일이 생각나지 않습니다." 진실을 말하는 대신 생각나지 않는다는 말로 자신을 위장한다. 켈리헨은 "부끄럽지만…"이라고 말은 했지만 아직 부끄러움을 모르는 사람이다. 염치가 없는 것이다. 기능적인 것을 추구하는 욕망이 도덕적 반성 능력이라는 본질적 태도보다 컸다. 써니는 제1지명권을 행사하면서 켈리헨을 선택하지 않는다. 대신 브라이언 드류를 선택한다. 운동선수에게는 운동 능력이 제일 중요하게 보인다. 그러나 수준 높은 단계에서는 운동 능력이 단순한 기능이 아니라 인격의 총화임을 안다. 인격적인 문제는 본질이고, 현상적으로 보이는 운동 능력은 기능이다. 이 영화에서는 우리에게 삶의 매 순간에 무엇을 선택해야 하는지를 교훈적으로 보여준다. 더 잘하고 싶으면, 기능보다는 본질을 선택해야 한다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대개 이런 수준의 선택을 하면서 앞서 나간다. 목표보다는 목적을 선택한달지, 성적보다는 인성을 강조한달지, 시청률보다는 작품성을 더 중시한달지, 진학률보다는 인간으로서의 완성도를 높이 본달지 하는 것들이다. 왜 미식축구 선수에게서도 거짓말을 하는지의 여부나, 언행일치가 이뤄지고 있는지의 여부나, 가식적인 변명으로 자신을 방어하는 치졸함이 있는지의 여부나, 동료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려고 노력하는지의 여부를 매우 중요하게 봐야 하는지는 더 수준 높은 실력이란 기능적인 운동 능력보다도 결국 그런 점들로부터 영향을 더 많이 받는다고 믿기 때문이다. 이것이 높은 수준의 삶이다. 선진적이고 창의적이며 자유롭고 독립적인 인격들은 이렇게 산다. 인간으로서 지켜야 할 가장 본질적인 문제가 지켜지지 않더라도 운동만 잘하면 된다는 수준에서의 선택은 삶을 기능 속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게 만들며, 그것은 진정한 승리의 길을 보장하지 않는다. 승리의 길 대신에 종속적인 삶으로 인도할 뿐이다.이런 의미에서 공자도 "특히 지도자급에 해당하는 높이의 사람이라면 기능에 빠지지 않아야 한다"(君子不器)고 말한 것이다. 본질과 기능 사이에서 본질을 선택하는 용기와 지혜를 발휘해야만 제 자리에서 뱅뱅 돌거나 좌우를 수평 이동하는 데 머물지 않고 사회를 차원을 높여가며 전진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기능에 빠지지 않는' 행위를 할 수 있으려면 최소한 부끄러움을 아는 내면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이것이 가장 기본이고, 이 기본이 본질을 선택하게 할 수 있게 한다. 제자 자공이 학문을 닦고 인격을 도야하는 사람이 지켜야 할 가장 기본적인 태도가 무엇이어야 하는지를 묻자 공자는 "부끄러움을 아는 것"(行己有恥)이라고 답한다. 부끄러움을 아는 내면을 가졌는가의 여부가 그 사람이 어느 정도의 성취를 이룰 것인지를 결정한다고 본 것이다. 맞는 말이다. 이것을 우리는 소위 염치라고 한다. 수치심, 즉 부끄러움을 아는 자기반성 능력이 인간적인 활동의 출발점이란 뜻이다. 수치심을 모르면 정의로운 길을 선택하기 위해서 불의가 주는 잠깐의 이익을 거부하는 용기를 발휘할 수 없다. 수치심을 모르면 자식 앞에서도 정의롭지 않은 행동을 서슴없이 하거나 심지어는 자식을 데리고 함께 부정한 일을 하기도 하는데, 자식과 더불어 누릴 아주 사소한 이익이 삶의 본질적 가치를 오히려 압도해버리기 때문이다. 이런 태도가 자식을 망치는 것인 줄을 모르는 것은 부정한 일을 통해서 얻을 작은 이익을 본질적 가치를 지켜서 얻을 이익보다 큰 것으로 여기는 무지와도 관련된다. 지적 능력이 전인적으로 배양되지 않으면, 아무리 학식이 높아도 수치심을 알기는 어렵다.기능적인 잠깐의 이익을 거부하고 본질을 선택하는 태도에는 용기가 필요하고, 용기는 수치심(부끄러움)을 알아야만 발휘된다. 그래서 '중용'은 "수치심을 알아야 용기에 가까워질 수 있다"(知恥近乎勇)고 기록한 것이다. '관자'는 더 적극적이다. 국가의 기틀 네 가지, 즉 '예(禮)·의(義)·염(廉)·치(恥)'라는 4유(四維)를 제시한다. 수치심은 나라를 지탱하는 기둥 가운데 하나이다. 그 가운데서도 수치심은 정의를 실현하는 기둥이다. 사회에 부끄러움과 수치심을 느끼는 자기 반성력이 사라지면 나라의 근간이 흔들려서 파멸을 면치 못한다. 수치심이라 불리는 염치가 사라지면 파렴치(破廉恥)한 사회가 되는 것이다. 파렴치한 사회라면, 거기서 무슨 일이 가능하겠는가.개혁을 완수하고 싶은가? 혁명을 이루고 싶은가? 좋은 부모가 되고 싶은가? 자녀를 잘 기르고 싶은가? 창의적이고 싶은가? 자유로운 삶을 꿈꾸는가? 다른 사람들로부터 인정받고 싶은가? 선도력을 갖고 싶은가? 훌륭한 운동선수가 되고 싶은가? 좋은 가수가 되고 싶은가? 종합적으로 말 해, 한 층 더 오르고 싶은가? 기능에 빠지지 않고 더 본질적인 것을 선택하면 된다. 어떻게 하면 선택의 순간에 더 본질적인 것을 고르게 되는가? 염치를 알면 된다. 최소한 부끄러워할 줄만 알아도 한 층 더 오를 수 있다./최진석 건명원 초대 원장·서강대 철학과 명예교수송필용 作 '무제' /광주일보 제공

2019-09-23 최진석

[최진석의 '새 말, 새 몸짓'· (6)]자기 확신에 갇힌 몽환적 통치

현 정권 '자족감' 빠져 현실 인식 취약'아무나 흔들 수 있는 나라' 전락'징비록의 교훈' 되새겨야'자기 확신'은 지적 활동 능력을 현저히 떨어뜨린다. 자기 확신에서 벗어나려는 지적인 노력이 바로 '반성'이고 '점검'이다. '자기 확신'에 빠진 사람은 비이성적이며, 감각이나 감성을 믿고, 과거 지향적이며, 이념으로 현실을 지배하려 하고, 세상을 보고 싶은 대로보거나 봐야 하는 대로 본다. 지적인 사람은 이성적·논리적이고, 미래 지향적이며, 소유한 것을 바탕으로 그다음으로넘어가려 하고, 현실에서 이념을 생산하려 하고, 세상을 보여지는 대로보려 한다.세상을 보고싶은 대로 보거나 봐야하는 대로 보는 사람은 보여지는 대로 볼 수 있는 사람에게 항상 진다.동아시아에서 중국의 철학자 주희가 차지하는 비중은 서양에서 칸트가 차지하는 그것 만큼이나 무게감이 있다. 그의 말이다. "오늘 배우지 아니하고서 내일이 있다고 하지 말며, 올해에 배우지 아니하고 내년이 있다고 하지 말라."(勸學篇) 더 나은 내일과 더 발전된 내년을 원하거든 반드시 공부해야 한다. 공부(배움)는 지적 활동이다. 미래는 지적 태도를 가진 사람이 연다.인류 역사에서 가장 철저하게 살다간 사람을 꼽을 때 소크라테스는 빼지 못한다. "나는 숨을 쉬는 한, 그리고 지적 능력을 잃지 않는 한, 철학을 가르치고, 사람들을 훈계하고, 만나는 사람들을 위해서 진리를 명료하게 밝히는 일을 결코 멈추지 않을 것이오."(변명) 세상을 진보시키려는 자신의 노력과 '지적 능력'의 발휘를 일치시켰다. 소크라테스에게 있어 지적인 활동에 반대되는 행위는 이미 흡수한 신념을 자세히 점검하지 않은 채 계속 소유하면서, 자신을 거기에 맹목적으로 맡겨버리는 무책임한 태도이다. 이때 소유된 신념이 '스스로 참되다고 확신하는 믿음'(true belief), 즉 '자기 확신'이다. 이것은 지적 점검을 거친 '지식'(knowledge)과 구분된다. 중국의 철학자 장자는 이것을 '정해진 마음' 즉 '성심'(成心)이라 했다. 장자에 의하면, 제대로 된 공부는 '성심'을 깨면서 비로소 시작된다. '성심'을 깨지 않는 자에게 미래는 없다.미래는 점검을 거치지 않은 자기 확신이 아니라, 지적인 점검 과정을 통해서만 열린다. '자기 확신'은 지적 활동 능력을 현저히 떨어뜨린다. 자기 확신에서 벗어나려는 지적인 노력이 바로 '반성'이고 '점검'이다. 그래서 지식을 '점검된 자기 확신'(justified true belief)이라고 하는 것이다. '자기 확신'에 빠진 사람은 비이성적이며, 감각이나 감성을 믿고, 과거 지향적이며, 소유한 것을 지키려 하고, 이념으로 현실을 지배하려 하고, 세상을 보고 싶은 대로 보거나 봐야 하는 대로 본다. 지적인 사람은 이성적이며, 논리적이고, 미래 지향적이며, 소유한 것을 바탕으로 해서 그다음으로 넘어가려 하고, 현실에서 이념을 생산하려 하고, 세상을 보여지는 대로 보려 한다. 세상을 보고싶은 대로 보거나 봐야하는 대로 보는 사람은 보여지는 대로 볼 수 있는 사람에게 항상 진다.점검하는 습관이 길러지지 않아서 지적 수고를 하려고 하지 않으면, 점검하고 생각하는 일을 귀찮아하면서 '자기 확신'에 빠지는데, 이때는 주로 프레임 씌우기로 날을 보낸다. '종북 좌빨'이나 '토착 왜구'나 '친일파'나 '반일파'라고 하는 것들은 다 사유의 정지를 의미한다. 이렇게 되면, 세계를 보여지는 대로 보지 못하고 봐야 하는 대로 보거나 보고 싶은 대로 보게 되는데, 그렇게 하도록 지배력을 행사하는 것이 바로 '이념'이다. 현실에서 이념을 생산하는 것이 아니라, 이념으로 현실을 지배하려고 한다. 여기서는 어떤 생산적인 효율도 생기지 않고 제자리에 멈춰선 채 시대를 과거에 묶어두기만 한다. 우리는 철저히 과거에 묶였다. 미래 담론은 사라진 지 오래다. '이념가'들은 지적인 진보가 멈췄거나 오히려 그것을 차단하는 역할을 한다. 우리나라에 진보 우파나 진보 좌파는 모두 사라지고, 그저 보수 우파와 보수 좌파만 남은 연유이다. 이념가들은 저 높은 곳에 이념을 걸어놓고 거기를 향해 과감하게 비상하려다 보니 현실을 구제하려는 사명감보다는 오히려 몽환적인 자기 확신에 빠진다. 몽환적인 감성과 확신 속에 도덕적 우월감이 깃들어 있지만, 이는 헛된 자기기만일 뿐이다. 이런 구조 속에서 '내로남불'이 일상화 된다. 염치와 부끄러움도 사라진다.1894년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이 시모노세키에서 청과 강화조약을 체결하는데, 조약문의 제1조가 "조선이 완전한 독립국임을 승인한다"는 것이었다. 이 조문에 대하여 청나라 대표인 이홍장은 양국 모두 조선의 내정에 간섭하지 않는다는 내용을 추가하자고 했으나 일본이 거부하였다. 1876년 일본이 운요호 사건을 빌미로 해서 강화도에서 조선과 조일수호조약을 체결하는데, 그 조약의 제1조도 "조선은 자주국으로 일본과 평등한 권리를 가진다"는 것이었다. 청나라와 일본이 자기들끼리 전쟁을 한 다음에 조약을 맺으면서 제1조를 조선의 독립으로 삼았고, 일본이 우위를 점한 채 조선과 맺은 불평등 조약의 제1조도 조선의 독립이었다. 당시 조선은 무능하고 무지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1896년 독립협회를 세워 중국 사신을 맞던 영은문을 부수고 독립문을 세웠다. 그즈음 고종은 아관파천으로 1896년 2월 11일부터 1897년 2월 20일까지 세자 순종을 데리고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해 있다가 나와 1897년 10월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황제 즉위식을 갖는다. 이때 즉위식 행렬은 일본군이 호위를 했다. 대한제국에서 '제국'은 다른 나라의 속국이 아니라 자주 독립국임을 의미하지만, 자주 독립국의 기상은 찾기 힘들다. 8년 후, 1905년 을사조약으로 대한제국은 외교권을 박탈당한다. 외교적 주권은 일본이 가져갔다. 그 후 다섯 해가 지나 1910년에 조선은 일본에 합병된다. 나라가 사라졌다. 지금도 우리는 이런저런 '영은문'들을 부수면서 자주와 번영과 독립을 확보한 듯한 심리적이고 몽환적인 자족감에 취해 있다. 자기 확신에 갇혀 몽환의 시절을 다시 보내고 있는 것은 아닌가.1840년 아편전쟁으로 중국이 영국 등의 서양 세력에 굴복당하고, 1853년 일본은 미국에 의해 강제 개항 당했다. 중국과 일본은 굴복당하고 나서 과감히 과거와 단절하고 새로운 시대적 변화를 받아들이려고 전면적인 쇄신에 나섰다. 쇄신의 주요 내용은 '서양 학습'이었다. 그러나 조선은 무지몽매했으며, 무지가 만든 몽환적 자기 확신으로 서양을 배우기는커녕 오히려 무시하면서 위정척사로 편을 갈라 내부적인 싸움에만 골몰하였을 뿐이다. 내부적인 작은 싸움에 갇힌 채, 그것을 세계적인 큰 싸움인양 착각하는 몽환의 상태였다. 점검되지 않은 자기 확신 때문이다. 이때도 모두 힘을 합치기만 하면 서양을 물리칠 수 있다는 결사 항전의 선동과 결기가 무성하고도 무성했다. 자기 확신에 빠져 선동과 결기만으로 버티다가 결국은 나라를 뺏겼다. 우리는 지금도 위정척사의 세월을 살고 있지 않은가.'자기 확신'은 우리 전체 모두에게 해당하지만, 지금은 주도권을 가진 통치 세력의 그것이 더 큰 문제이다. 통치 주도 세력의 주요 인물인 문정인은 한국이 처한 상황을 "북한의 '민족 이익'과 미국의 '동맹 이익' 요구 사이에 낀 샌드위치 신세"로 평하면서, 우리의 '국가 이익'을 위해 양쪽 모두에 "쓴소리를 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시사IN 제612호) 북한을 민족 이익을 수호하는 국가로 보는 것이 통치 주도 세력의 공통된 인식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핵무기도 민족 이익 수호 차원의 것이고, 미사일 발사로 하는 협박이나 문재인 대통령을 향한 악담이나 조롱들도 모두 민족 이익을 수호하려는 목적에서 나온 것이 된다. 그래서 아무 반응도 못하는지 모르겠다. 이전의 글 "국가란 무엇인가"에서 밝혔듯이 국가와 민족 사이에서 중심을 잡지 못하고 있는, 국가로서의 대한민국에서 북한을 '민족 이익'을 수호하는 국가로 본다는 것은 민족적 정통성을 북한에 두고 있다는 것으로 읽힌다. 북한 추종의 근거이다. 사실 여기서부터 모든 몽환적인 통치 행위가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북한을 '민족 이익'을 수호하는 국가로 보는 인식을 토대로 하여 우리가 형성한 주변 국가와의 관계를 한마디로 정리하면, '종북굴중혐미반일'(從北屈中嫌美反日)이다. 북한을 추종하여 무조건 이해하고 편을 들며, 중국에 굽신거리고, 미국을 미워하며, 일본을 반대한다. 문제는 추종하여 이해하고 편을 들어주지만, 북한은 계속 위협하고 조롱하며 업신여긴다는 점이다. 뒷골목도 아니고 국가 간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어떤 위협과 조롱에도 말 한마디 못하고, 오히려 선의로 해석하려고 몸이 달았다. 세계 외교사 어디를 봐도 국가 사이에 이런 관계를 형성해서 자존을 지키거나 생존을 담보하거나 실익을 얻었던 예는 없을 것이다. 자존과 생존과 국가적 실익을 포기하더라도 얻을 수 있는 더 중요한 어떤 몽환적 주제가 설정되어 있지 않다면 불가능할 일이다. 이런 태도가 정권에는 의미가 있는지 몰라도 대한민국 국민의 한 사람인 나는 자존감에 큰 상처를 입는다. 중국의 철학자 노자는 통치의 핵심적인 지혜를 간결한 언어로 남겼는데, 이런 대목도 있다. "최상의 통치는 아랫사람들이 통치자가 있다는 것 정도만 의식한다. 그다음 단계에서는 백성들이 통치자에 친밀감을 느끼며 떠받든다. 그다음은 어려워하고 두려워하는 단계이다. 마지막 가장 낮은 단계에서는 통치자를 조롱한다."(도덕경 17장) 국가 통치의 효율성이나 건강성의 정도를 순서대로 밝혔다. 조롱받는 단계에서 국가는 제대로 운영되지 않는다는 뜻이다. 여기저기서 업신여김을 당하거나 조롱을 당하는 일이 있다면, 문제가 매우 심각하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조롱으로 끝나지 않기 때문이다. 조롱 다음의 단계는 순서도 매길 수 없을 정도로 파국적인 일일 가능성이 크다. 조롱도 자기 의도에 따라 심리적이고 주관적으로 해소해버리고 나서 이성적이고 논리적으로 살피지 않으면 조롱 다음에 예견된 파국을 막지 못한다. 자기 확신에 빠지면 감각을 믿고 사실을 믿지 않기 때문이다. 심리적 기대를 객관적 사실로 착각하는 것이다. 지금 이 나라는 자기 확신에 갇힌 몽환적 통치에 의해 '아무나 흔들 수 있는 나라'가 되었다. 독도 주변의 카디즈나 영공에 중국과 러시아 비행기가 멋대로 들락거리고, 일본은 경제를 통해 한국 흔들기에 나섰고(미국이 뒤에서 함께 벌인 일일 수도 있다), 미국은 문재인 대통령 어투까지 흉내 내가면서 방위비 증액 등으로 압박을 하고, 한미동맹은 이혼 직전인 부부처럼 불안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북한은 협박과 위협과 조롱에 거침이 없다. 대한민국은 어떤 자신감에 의한 것인지 몰라도 진정한 '우방'이 없는 나라가 되었다. 이 상황에서 '아무나 흔들 수 없는 나라를 만들겠다'는 구호가 선동이나 결기에 머문 주장이 아닐 수 있을까? '종북굴중혐미반일'(從北屈中嫌美反日)의 구도를 유지하면서 '아무나 흔들 수 없는 나라'를 만들 비책은 무엇인가? 일본과 실전이 벌어지고 있는 상황에서, 조건문으로 '평화 경제'만 이루어진다면 일본을 이길 수 있다고 주장할 때, 이를 어찌 받아들여야 할지 망연자실할 뿐이다. 모든 경제 지표가 다 악화일로인데, 대통령은 경제의 기초체력이 튼튼하다고 한다. 몽환적 자기 확신에 빠져 세상을 보고 싶은 대로 보거나 봐야 하는 대로 보기 때문이다. 보여지는 대로 볼 수 있어야 가능한 정확한 현실 인식이 취약한 것 같다.'자기 확신'에 빠지면 점검 능력과 반성 능력이 현저히 떨어지지만, 최소한의 지적인 능력이라도 있다면, 반성하고 점검하는 일을 할 수 있다. 그러면 실수를 하더라도 반복하지 않고, 되도록 빨리 교정도 한다. 반성 능력이 떨어지면, 하던 실수를 반복한다. 나라들 사이에도 침략을 하던 나라가 또 침략을 하고, 침략을 당했던 나라가 다시 침략을 당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반성과 점검 능력이 잘 변하지 않기 때문이다. 지금 정권도 바뀌지 않을 가능성이 훨씬 크다. 우리나라 역사에서 임진왜란은 뼈에 새겨야 할 치욕이다. 임진왜란과 같은 치욕을 다시 당하고 싶지 않으면 분노하고 결기만을 보일 일이 아니라 우선 서애 유성룡이 남긴 징비록(懲毖錄)부터 읽어야 한다. 이 책에 반드시 새겨야 할 세 가지 교훈이 들어 있다. 첫째, 한 사람이 정세를 잘못 판단하면 천하의 일을 그르칠 수 있다. 둘째, 한 나라의 최고 지도자가 국방을 다룰 줄 모르면, 나라를 적에게 넘겨주는 것과 같다. 셋째, 전쟁 같은 큰 일이 닥쳤을 때에는 반드시 나라를 도와줄 만한 우방이 있어야 한다. 차라리 섬뜩하지 않은가. 당신은 어디에 있는가./최진석 건명원 초대 원장·서강대 철학과 명예교수송필용 作 '무제' /광주일보 제공

2019-08-26 최진석

[최진석의 '새 말, 새 몸짓'· (5)]척박한 땅에서는 거친 풀이 자란다

현 대한민국 극단적 양분지적 개방성 없는 '프레임' 위험감성보다 사실에 기대 '곰곰이 생각'해야헤르만 헤세도 '데미안'에서 이렇게 말했는지 모른다. "세계를 그냥 자기 속에 지니고 있느냐 아니면 그것을 알기도 하느냐, 이게 큰 차이지. 그러나 이런 인식의 첫 불꽃이 희미하게 밝혀질 때, 그때 그는 인간이 되지." 알려고 하는 태도는 머무르려는 것이 아니라 다음을 향한 욕망이다. 그것이 바로 지적인 태도다. 인간을 인간답게 살게 해주는 근본적인 힘이다. '알려고 하면'(곰곰이 생각하면) 인간의 주체성을 지키며 살 것이고, '알려고 하지 않으면'(곰곰이 생각하지않으면)그것을 지키지 못할 것이다.경인일보를 붓 머리로 하여 광주일보, 전북일보, 매일신문 등에 "국가란 무엇인가"를 발표하고 나서 많은 지지와 격려를 받았다. 그러나 비난도 없지 않았다. 비난을 받을 때 마음이 아프기도 하고 잠깐이나마 의기소침해지기도 했지만, 그렇다고 하여 그것이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었던 것은 전혀 아니다. 오히려 당연한 일이다. 생각은 사람의 수만큼이나 많을 수밖에 없다. 사람의 수만큼이나 많아야 할 생각이 개수가 준 나머지 몇 개의 생각으로 뭉쳐서 활력을 잃는 것이 더 위험하다. 문제는 지지나 비난이 어느 높이에서 일어나는가가 중요하다. 지지가 되었건 비난이 되었건, '곰곰이 생각'하고 하는 것과 그러지 않고 감(감각과 감성)으로만 하는 것은 매우 다르다. 생각을 해야 도달할 수 있는 단계가 있다. 거기서는 지적 개방성이 최소한이나마 작동한다. 이리하여 싸움판 같은 논쟁이라도, 그것이 끝나는 곳에는 협치도 자라나고 합의도 피어나서 사회를 앞으로 미는 전진의 기운이 생겨난다. 최소한의 지적 개방성도 보장되지 않은 정도의 수준에서라면, 논쟁은 그저 비난전에 불과하다. 여기서는 한 치의 전진도 없다. 그저 제자리를 뱅뱅 돌거나 과거로 퇴행한다. 내가 보는 현재의 대한민국은 불행하게도 감각과 감성의 작동 기재에 갇혀 최소한의 지적 개방성도 허용되지 않는 매우 극단적인 양분 상태이다. 한 나라 두 국민이 된 지 이미 오래다. 어느 쪽에서나 '내로남불'을 대놓고 하고 얼굴색도 바뀌지 않는다. 상대방을 비난하는 일에는 마치 활시위를 당기듯이 결사적이다.이젠 논쟁에 휘말리지 않는 것이 차라리 장수하는 비결이 될 지경이다. 우리나라에서는 누군가의 주장을 객관적으로 들어주는 경우가 아주 귀하다. 대개는 어떤 주장을 들으면서 우선 자기 맘에 드는지 안 드는지를 결정하고, 거기서 출발한다. '맘'이 과학과 논리를 앞선다. 맘에 들면 맘에 들게 논리를 만들고, 맘에 안 들면 맘에 안 들게 논리를 만든다. 그러니 개념의 적용 범위를 무시하거나, 억지스럽거나, 논리적이지 않거나, 인신 공격적이거나, 프레임을 쉽게 씌운다. 국가주의니 획일주의니 패권주의니 하는 등등의 '주의'에 쉽게 갇힌다. 가치가 개입될 여지가 많은 철학이나 정치나 종교의 영역에서는 더욱 심하다. 지적인 훈련이 되어 있으면, 논리로 감각을 지배하지만, 지적인 훈련이 되어있지 않으면 감각에 논리를 복종시킨다. 감각에 논리를 복종시킨다는 말은, 논리를 편의대로 만든다는 말이다. 특히 우리나라는 정치적 주장에서 이런 경향이 매우 심하게 고착되어 있기 때문에 사실 지적 독립성이 훈련되지 못한 사람들은 정치의 늪을 피하지 못한다. 고도로 지적 훈련을 받은 증명서를 가진 지식인들이라고 해서 크게 다른 것도 아니다. 그래서 정치가 모든 지적 활력을 다 빨아드린 후 소진 시켜 버리는 블랙홀로 기능한다. 정치라는 블랙홀의 흡인력에 얼마나 저항할 수 있는가가 얼마나 높은 강도로 지적 훈련을 받았는가를 증명할 것이다. 이것은 지식인이 정치를 하면 안 된다는 말이 아니다. 지적 훈련을 받은 사람답게 정치를 해야 한다는 뜻이다. 감각과 감성을 이겨내라는 뜻이다. 상황이 이러하기 때문에 우리 모두는 지금 감성이 배제된(완벽한 배제란 인간에게 불가능하다는 것을 모르고 하는 말이 아니다) 객관적인 대화를 하지 못하는 병을 앓고 있다. 남북관계에서나 한일관계에서나 건강한 논쟁을 할 토양은 사라졌다. 논쟁을 통해 무슨 조그마한 소득이나마 산출할 토양이 아닌 것이다. 근본적인 면에서는 경제지표가 하락하는 것보다도 훨씬 더 큰 문제이다. 극단적인 이전투구 판에 있으면서도 죽기 전에 바늘 끝만 한 아름다움이나마 거두고 싶은 욕망이 남아 있다면 이 정도까지 천박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렇게 되어버린 내 나라가 나는 너무 슬프고 무섭다. 앞에서 '지적 훈련'이라는 말을 듣고 기분 나빠하는 분들도 계실 것이다. 학벌 좋고 가방끈이 긴 사람들끼리의 말로 오해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건 아니다. 지적 태도라는 것은 인간이 세계와 관계하는 가장 효율적인 한 방식일 뿐이다. 세계를 지적으로 다루는 사람은 세상을 더 넓고 깊게 접촉한다. 좁고 얕게 접촉하는 사람은 넓고 깊게 접촉하는 사람을 이기지 못한다. 피상적인 수준에서 이기고 지는 승부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가치와 의미까지도 포함하여 모든 것을 종합한 인생 전체에서의 승리 여부를 말한다. 지구는 평평한가, 둥근가? 배운 것을 즉각적으로 내뱉으며 둥글다고 아주 쉽게 말하지만, 조금이라도 생각이 있는 사람이라면 경험하지도 않은 것을 자신 있게 말하기란 적잖이 조심스럽다. 지구가 둥글다는 것은 전혀 경험되지 않는다. 감각과 본능으로 보면 지구는 평평하기만 하다. 가만히 생각하고 자세히 따져 봐야 둥글다. 지적이라는 것은 지식의 양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가만히 생각하고 자세히 따져 보는 능력을 발휘하는지의 여부이다. 지구를 평평한 것으로 아는 사람이 세계를 접촉하는 범위는 좁고 얕을 수밖에 없다. 가만히 생각하고 곰곰이 따져 봐서 지구를 둥근 것으로 이해하는 사람은 세계를 넓고 깊게 접촉한다. 삶의 효율성이 누구에게 더 있을지는 길게 말할 필요 없다.이렇게 보면, 지적 태도는 우선 감각과 본능을 극복하는 태도이다. 감각과 본능을 극복한다는 말은 감각과 본능을 소멸시키거나 제거한다는 뜻이 아니라 곰곰이 생각하는 지적 능력으로 감각과 본능을 정련시킨다는 말이다. 지적이면 가만히 생각하고 곰곰이 따지면서 반응하기 때문에 덜 감성적이고, 지적이지 못하면 생각을 하지 않고 즉각적으로 반응하기 때문에 정련되지 않은 감각이 그대로 튀어나와 훨씬 더 감각적이며 감성적이다. 지적이면 생각을 하고, 지적이지 못하면 생각을 하지 않는다. 학력이 아무리 높아도 지식의 양만 넘쳐나고 곰곰이 따지는 능력이 배양되어 있지 않다면, 지적이라고 말할 수 없다. 그 대신 학력이 낮거나 지식의 양이 적더라도 곰곰이 생각할 줄 알면 지적인 사람이다. 이것은 세계와 반응하는 기술이자 태도이다. 곰곰이 생각할 줄 알면 세계를 이해하고 관리하고 통제하는 능력이 커지는 데도 인간은 왜 곰곰이 생각하지 않은가? 생각이라는 것은 하나의 정신적인 수고이다. 힘이 든다. 감각과 감성은 정신적인 수고를 할 필요가 없다. 그냥 자극에 맡겨 본능에 즉각적으로 반응하면 된다. 특정한 이념에 갇혀도 인간은 생각하는 능력이 떨어진다. 그 이념만 기준으로 사용하면 되기 때문에 생각할 필요가 없다. 이념가들이 더 감성적인 이유이다. 분명한 것은 '이념'이란 '미래'가 아니라 '과거'라는 점이다. 이념을 강하게 소유하면, 진실하고 헌신적으로 보일 수는 있지만, 생각하는 능력이 떨어져서 과거를 지키거나, 거기에 자발적으로 갇힌다는 문제가 있다. '이념적이다', '과거에 갇혔다', '생각이 없다', '감성적이다'라는 표현들은 서로 매우 가깝게 있다. 이런 사람들이 만일 권력을 갖게 되면 쉽게 자기 확신에 빠진다. 자기 확신에 빠져, 자기가 만든 진실에 자기가 도취 되어 역사에 철저한 태도로 헌신한다는 느낌을 스스로 제조한다. 그래서 현실을 보지 않고 자기 이념을 본다. 현실에서 이념을 생산하는 수고를 하지 못하고, 이념으로(그것이 낡은 이념임에도 불구하고) 현실을 제어하려는 무모함을 행한다. 봐야 하는 대로가 아니라 보여지는 대로 보는 승리의 길을 포기하고 '자아 도취에 빠져 몽환적 정치'를 하게 되는 노정은 이와 같다. '일상'과 '현실'이 아무리 피폐해져도 오히려 그 피폐함을 진실에 접근하는 통로로 간주한다. 곰곰이 생각할 줄 아느냐 모르느냐 하는 점은 이렇게 중요하다. 감각과 감성에 의존하는 태도를 갖느냐 지적인 태도를 갖느냐 하는 점은 이렇게 큰 차이를 만든다.우리의 근대 역사에는 동학 혁명이라는 불꽃같은 기록이 있다. 우리는 동학의 정신을 잘 살피고 더욱 계발해야 한다. 동학도 없었으면, 우리는 정말 아무것도 아닐 수 있었다. 여기서 우선 김태유 교수의 '패권의비밀; 4차산업혁명시대, 부국의 길'이라는 제목을 단 유투브 영상을 소개해야겠다. 모두 꼭 한 번 보시기 바란다. 김태유 교수에 의하면 동학 농민군이 일본군에 의해 3만명 사살될 때 일본군은 한 명 죽는다. 엄청난 격차다. 무기가 달랐다. 일본군은 전설의 소총인 스나이더 소총을 자신들의 신체에 맞게 개선한 무라다 소총을 썼고, 우리는 여전히 화승총을 들었다. 무라다 소총은 엎드린 자세에서 장전하며 1분간 15발을 쏠 수 있었고, 사거리는 800m였다. 반면 화승총은 2~3분 동안 선 채로 1발을 장전하여 쏠 수 있었고 사거리는 120m였다. 이런 화승총에 죽창을 곁들인 무력으로는 아무리 큰 결기로 뭉쳤다 하더라도 무라다 소총을 든 적을 이길 수 없다. 결국 산업화의 결과가 전쟁의 승패를 좌우하고, 국가의 운명을 좌우한다는 것이다. 무라다 소총과 화승총의 차이는 산업화의 차이를 상징한다. 그럼 왜 누구는 산업화에 성공하고 누구는 산업화에 성공하지 못하는가?그것은 세계에 반응하는 '태도'가 좌우한다. 무엇을 '제작한다' 혹은 '개선한다'는 것은 '이미 있는 것을 그대로 소지'하는 태도가 아니라 불편함과 문제를 느껴서 '그 다음'을 '알려고' 하거나 '설명하려고' 하는 강력한 의지가 발현된 것들이다. '이미 있는 것을 그대로 소지'하는 태도를 가지면 곰곰이 생각할 필요를 느끼지 못해서 주로 감각과 본능이나 감성을 표하는 것으로 자기 태도의 대부분을 채운다. 반면에 '그 다음'을 곰곰이 생각하는 태도를 가지면, 불편이나 문제를 발견한 후 그것을 붙들고 늘어지는 수고를 스스로 감당한다. 이것이 지적인 태도이다. 스나이더 소총을 무라다 소총으로 개선했다는 것은 일단 감각과 본능을 극복하여 지적인 태도로 문제를 대했음을 알 수 있다. 있던 화승총을 별 개선 없이 계속 썼다는 것은 우선 '곰곰이 생각'하는 지적인 태도로 세상을 대하지 못했음을 뜻한다. 곰곰이 생각하는 지적인 태도를 우리보다 먼저 혹은 더 철저히 발휘했던 일본은 우리보다 더 인간적으로 살았고, 상대적으로 그러지 못했던 우리는 우리의 '인간성'을 그들에 의해서 짓밟히는 치욕을 살았다. 이런 의미에서 헤르만 헤세도 '데미안'에서 이렇게 말했는지 모른다. "세계를 그냥 자기 속에 지니고 있느냐 아니면 그것을 알기도 하느냐, 이게 큰 차이지. 그러나 이런 인식의 첫 불꽃이 희미하게 밝혀질 때, 그때 그는 인간이 되지." 알려고 하는 태도는 머무르려는 것이 아니라 다음을 향한 욕망이다. 그것이 바로 지적인 태도다. 인간을 인간답게 살게 해주는 근본적인 힘이다. '알려고 하면'(곰곰이 생각하면) 인간의 주체성을 지키며 살 것이고, '알려고 하지 않으면'(곰곰이 생각하지 않으면) 그것을 지키지 못할 것이다.동학 농민 혁명이 일어나기 약 20여 년 전, 지금 일본의 기초를 세우는 데 큰 공헌을 한 후쿠자와 유키치는 여러 저술을 통해 일본을 근대화의 길로 나아가도록 한다. 그의 성공은 바로 우리의 고통이었다. 네이버 열린논단에서 한 미야지마 교수의 강연 내용에 의하면, 1872년에서 1876년 사이에 후쿠자와 유키치가 출간한 '학문의 권장'이라는 계몽서가 300만부나 팔렸다. 당시 일본의 인구가 3천500만명이었음을 감안한다면, 조금 과장하여 당시 일본인 10명 가운데 한 명은 이 책을 읽었다고도 할 수 있다. 후쿠자와 유키치가 우리에게 어떤 사람이었는지 하는 평가는 뒤로 하고, 그의 시대에 그가 300만의 독서 인구를 가졌다는 그 사실이 부럽고 놀라울 따름이다. 독서는 '곰곰이 생각하는' 훈련이 아주 잘 된 사람들이 남긴 결과(그것이 책이다)를 접촉하여 자신도 '곰곰이 생각하는' 능력을 갖게 되는 가장 아름다운 방법이다. 우리는 '무라다 소총'과 300만 독서 인구의 존재가 같은 것임을 이해해야 한다. 300만 독서 인구와 후쿠자와 유키치는 따로 존재하는 두 개가 아니라 하나다. 300만 독서 인구를 가진 당시 일본 사회가 후쿠자와 유키치의 토양이다.우리가 일본에 패배한 적이 있다면, 그것은 근본적인 의미에서 '곰곰이 생각하는 능력'의 차이 때문이었다. '곰곰이 생각' 해야 지식이 나오고, 또 거기서 산업이 나오고, 국력이 커지는 이치 때문이다. 우리에게는 '곰곰이 생각'하는 지루한 수고를 기꺼이 감당하는 미덕이 사라졌다고 해도 될 정도로 많이 줄어들었다. 그 대신 생각하는 수고를 포기한 감성의 배설과 감각적 판단이 요즘은 난무한다. 이미 소지한 각자의 신념을 지키는 일로만 세월을 보낸 지 이미 수십 년이다. 이제는 프레임 씌우기가 더 자연스러워져 버렸다. 빨갱이라는 프레임 씌우기로 고통받은 적이 있던 사람들은 위치가 바뀌자 친일파라는 프레임 씌우기에 바쁘다. 이런 토양에서 건설적인 정치와 외교와 정책이 실현될 수는 없다. 척박한 땅에서는 거친 풀이 자란다. 더 나은 세상을 꿈꾼다면, 더 나은 사람이 되는 수밖에 없다. 지금 우리에게 더 나은 사람이란 '곰곰이 생각'하는 사람이다. 감각과 감성보다는 숙고와 사실에 기대는 사람이다. /최진석 건명원 초대 원장·서강대 철학과 명예교수송필용 作 '무제' /광주일보 제공

2019-07-29 최진석

[최진석의 '새 말, 새 몸짓'·(4)]국가란 무엇인가

안전·이익 공유 배타적 '국가'대통령, 민족 지도자 아닌 대한민국 원수민족 시각으론 국가문제 풀지 못해민족은 상상의 공동체이다. 언어나 문화나 풍습을 공유한다는 믿음으로 구성되는 정서적 공동체이다. 법률로 관리되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민족에 빠지면감정적이고 정서적이 된다. 국가는 감성과 정서를 배제한 법률과 이성으로 관리된다. 민족은 따뜻하지만, 국가는 차가울 수도 있다. 민족은 정서적이고 심리적인 기대가 허용될 수도 있지만, 국가는 철저히 이성적이고 사실적 효과에만 기댄다.대한민국이라는 국호, 즉 국가의 명칭을 100년이나 사용하고도 새삼스럽게 다시 '국가란 무엇인가'를 물어야 하는 것은 우리 스스로에게 매우 복잡한 일이다. 아니 내게만 갑자기 복잡해졌는지도 모르겠다. 지금 대한민국의 지성계나 정치계를 둘러볼 때, 나만 혼자서 심사가 복잡한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내가 미쳤는지 스스로 의심이 된다. 그렇더라도 나를 복잡하게 하는 이 질문을 그냥 넘기지는 못한다. 왜냐하면, 내가 보기에, 우리는 지금 국가를 국가의 단계에서 대하고 있지 못한 것 같기 때문이다. 일단 미쳤을지도 모를 사람이 국가란 무엇인가에 대해서 말해본다.개인의 세계가 가장 넓게 확장된 공적 영역은 국가이다. 한 개인은 자신의 사고나 가치 혹은 생활의 영역을 자신의 주관적인 뜻대로 5대양6대주나 우주까지 확장할 수도 있겠지만, 법적인 제약을 공유하면서 보호를 받고 권리를 주장하는 공적인 영역으로는 국가가 가장 크다. 자기가 속한 국가를 벗어나서도 최소한의 보호나 권리를 향유하려면 여권을 사용해야 한다. 그것마저도 국가 간의 협의를 거쳐 허락되어야만 가능한 일이니 개인의 삶이 보호되고 또 허용되는 일이 일어나는 가장 큰 단위는 국가이다. 보호와 허용은 이미 정해진 규칙에 따른다. 이 규칙은 누구나 한 국가 안에서 다 지켜야 하기 때문에 공적 영역이다. 다시 말해, 공적인 체계를 구성하고 공유하면서 서로 북돋우고 견제하는 삶의 장치로는 아직까지 국가보다 더 큰 것이 개발되지 않았다. 물론 이것이 달라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아직까지는(앞으로도 상당 기간) 개인에게 가장 큰 공적 공간으로 국가를 넘어선 것은 없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국가는 안전과 이익을 공유하는 배타적 집단이다.국가가 가지고 있는 가장 큰 특징은 배타성이다. 배타성은 배타적 동일성을 필연적으로 수반한다. 그래서 동일성은 대내적으로 적용되고, 배타성은 대외적으로 적용된다. 배타성을 발휘하고 동일성을 유지하려는 힘이 폭력이다. 그래서 국가는 폭력을 사용할 수 있는 배타적 집단이라고 해도 된다. 국가 안에서 폭력은 관리되어야 한다. 모든 사람들이 폭력을 임의대로 사용하면 국가가 유지되기 어렵기 때문에 구성원들이 가진 모든 폭력성을 다 거두어서 국가가 총체적으로 관리한다. 국민은 폭력을 사용하면 안 되고, 국가는 폭력을 사용할 수 있다. 국가가 대외적으로 폭력을 사용할 때는 군대가 나서고, 대내적으로는 경찰이 나선다. 군대와 경찰로 한 국가의 폭력은 관리되고, 내외적으로 생명과 재산이 보호되는 것이다. 국가가 안전과 이익을 공유하는 배타적 집단임을 감안할 때, 결국 최종적인 일은 전쟁으로 나타난다. 그렇다면, 국가는 전쟁을 하는 집단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군대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알 수 있다. 한 국가의 자부심과 역량은 최종적으로 군대로 표현된다. 그래서 대통령은 군 통수권자가 된다. 대통령을 규정하는 어휘 가운데 대통령과 가장 일치하는 것이 바로 군통수권자이다. 헌법 제66조에서 대통령을 국가원수로 규정할 때, 그 핵심적인 내용은 군통수권자라는 뜻이다. 제74조에서는 따로 대통령을 군통수권자로 명문화해놓고 있다. 군 통수권자로서의 대통령은 다른 나라에 선전포고를 할 수 있고 또 강화도 할 수 있다.(헌법 제73조) 따라서 국가의 목표는 단 하나가 될 수밖에 없다. 그것은 '부국강병'(富國强兵)이다. 부국강병을 이루는데, 도움이 안 되는 것은 어떤 것이라도 국가 단위에서는 배제되어야 한다. 문중이나 시민단체나 동아리나 정치집단 등에서는 부국강병과 다른 길을 가려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국가에게는 부국강병만이 유일한 길이다. 사실 부국강병에서도 '부국'이 '강병'을 위하는 것인 만큼, 국가에게는 '강병'이 최종 목적지다. 그래야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강병(强兵)이 빠진 부국(富國)은 체력은 없이 체격만 커진 꼴과 같이 허망(虛妄)하다. 이 허망함을 감추려다보면, 정신승리법으로 겨우 버티는 아큐(阿Q)가 된다. 우리는 이미 아큐(阿Q)인지도 모른다.대통령이 현충일 추념사에서 김원봉을 언급하여 많은 논란이 일었다. 대통령도 말했듯이 "현충원은 살아있는 애국의 현장"인데, '애국'(愛國)이라고 할 때의 '국'(國)은 국가로서의 '대한민국'이다. "애국 앞에 보수와 진보가 없습니다"고도 했는데, 애국으로 통합되어야 할 보수와 진보는 중국의 보수와 진보도 아니고, 미국의 보수와 진보도 아니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보수와 진보도 아니다. 배타적으로 대한민국의 보수와 진보일 뿐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이 말을 할 때, 말로는 애국이라고 하면서 느낌은 '민족'을 가졌을지 모른다. 민족적 의미에서 기려야 한다면, 민족적으로 기리면 된다. '애국의 현장'은 대한민국만을 중심에 놓고 배타적으로 적용해야만 한다. 국가는 원래 이런 것이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수립에 기여하고, 6·25 전쟁 중에 대한민국의 파괴를 위해 적극적인 활동을 한 사람을 '애국'의 한 전형으로 제시하고 싶어 하는 것은 아직 논리적으로 부족하다. 하지만 민족과 국가 사이에서 중심을 잡지 못하면 논리를 좌충우돌 끼워 맞추려 할 것이다.남한이나 북한이나 권력을 배타적으로 응집하여 완전한 독립의 상태에서 자력으로 국가를 세우지 못했다. 해방 자체를 우리 힘으로 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나라도 근본에서는 미국과 소련이 도와서 선 것이나 마찬가지다. 여기서 누가 더 자주적이었는가 하는 논쟁은 정치적인 우격다짐일 뿐이지, 별다른 의미가 없다. 근대 국가를 세워본 경험도 없이 독립을 상실한 우리는 일본에 저항하고 독립의지를 키우기 위해서 '민족'이라는 개념에 기댈 수밖에 없었다. 민족은 근대국가 안에서 국가를 이루는 구성 중심이 되지만, 굳이 구분해서 말한다면 국가가 민족을 리드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국가가 민족 개념을 리드해서 국민 국가를 이룬 프랑스와 달리, 독일은 여러 요인 때문에 민족 개념으로 국가를 리드하려다가 나치즘에 빠지는 우를 범하였다. 우리의 민족관은 아직 과거의 독일 쪽에 더 가까운 특성을 보인다. 우리는 국가가 무엇인지, 무엇이어야 하는지에 대하여 삶의 뿌리에서 인식을 형성하지 못한 상태에서 국가를 가졌기 때문에 국가를 국가의 높이에서 다룰 실력이 아직 부족한 것으로 나타난다. 국가보다 민족이 더 생생한 상태다.민족은 상상의 공동체이다. 언어나 문화나 풍습을 공유한다는 믿음으로 구성되는 정서적 공동체이다. 법률로 관리되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민족에 빠지면 감정적이고 정서적이 된다. 국가는 감성과 정서를 배제한 법률과 이성으로 관리된다. 민족은 따뜻하지만, 국가는 차가울 수도 있다. 민족은 정서적이고 심리적인 기대가 허용될 수도 있지만, 국가는 철저히 이성적이고 사실적 효과에만 기댄다. 민족에 빠지면 호소하려들고, 국가관이 투철하면 힘을 길러 판을 조정하려 한다. '힘'을 믿지 않고 설득과 호소와 간절한 눈빛과 따뜻한 태도를 앞세워서 일을 이루려고 한다면, 이는 아직 '국가'가 무엇인지를 모르기 때문이다. 혹시 상상의 공동체인 민족을 앞세우면 이런 태도들을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국가의 일은 국가적 단계에 맞는 태도로만 성사된다. 대통령은 대한민국의 원수이지, 민족의 지도자가 아니다. 이것을 분명히 하지 않으면 나라의 모든 일이 복잡해지고 해결이 난망해진다. 모든 것이 꼬일 수 있다.외국의 귀빈이 방문하면 군인들로 이뤄진 의장대를 사열하곤 한다. 의장대의 사열을 베푸는 국가의 입장에서는 따뜻하고 친근함을 표현하려는 의도로 하는 것이 절대 아니다. 자국의 군대가 얼마나 군기가 잡혀 있으며, 얼마나 강한지를 과시하려고 하는 것이다. 자국의 폭력성이 얼마나 잘 정련되어 있는지를 알게 해주려는 것이다. 국군의 날도 마찬가지이다. 대내적으로는 자국의 국민들에게 국가의 폭력성이 얼마나 잘 훈련되어 있고 잘 관리되고 있는지를 보여줌으로써 자신들의 생명과 재산이 잘 지켜질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을 주려는 것이고, 대외적으로는 우리가 이렇게 강하니 함부로 건들지 말라는 것을 과시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국군의 날은 '무력 과시의 날'이지, 흥을 돋우고 위로를 나누는 날이 아니다. 그런 일은 따로 하면 된다. 유엔참전용사의 희생과 헌신에 경의를 표하기 위해 '어메이징 그레이스'를 열창하는 날이 아니다. 국군의 날은 참전용사의 희생과 헌신을 기리는 날이 아니다. 그런 날은 따로 있다. 군인들을 위로하고 격려하는 날이 아니다. 그런 일은 날을 따로 잡아 해야 한다. 군사퍼레이드도 없이 야밤에 가수들 불러 쇼로 국군의 날을 보내는 일이 처음으로 벌어졌다는 것은 이제 국가가 무엇인지 모르는 단계를 벗어나 국가는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방치의 단계로 간 것이 아닌가 하는 우려를 금할 수 없다. 국가가 아무래도 상관없다면, 과연 상관있는 것은 무엇인가. 군대와 대통령의 마음속에 국가보다 더 상관있는 것이 있다면, 이는 보통 심각한 문제가 아니다. 아덴만에서 임무를 마치고 귀항한 해군 청해부대의 '최영함' 입항 환영 행사 도중 사고로 군인 한 명이 사망하고 네 명이 부상을 당했다. 군통수권자인 대통령은 국방장관을 대동하고 바로 달려와야 한다. 여의치 않으면, 빈소에라도 와야 한다. 대통령이 비서관을 통해 조화를 보내고 직접 조문하지 않은 것은 군통수권자로서의 사명감이 아직 부족하기 때문이다. 서해 수호의 날에 대통령이 연속 참석하지 않은 것은 국가가 무엇이고, 대통령은 어째야 하는 것인지에 대한 인식이 없는 것으로 보인다. 민간 사고의 희생자보다 군 사망자들이 대접을 덜 받을 뿐만 아니라 국가의 관심 밖으로 밀려나는 것 같은 느낌을 주고 있는 것이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작은 문제가 아니다. 이런 일들이 국가에 대한 인식이 부족해서 일어났어도 문제이지만, 더 큰 문제는 누군가를 배려하고 눈치를 보느라 그리되었다면, 그보다 더 심각한 일은 없을 것이다. 골목에서야 배려하고 눈치를 보며 굽실거리면, 무엇인가 얻어질 수도 있다. 그러나 국가는 절대 그렇지 않다. 국가가 이렇게 하면 아무것도 못 얻고 치욕만 남긴다. 골목과 국가를 분명히 구분해야 한다. 골목길의 평화는 싸울 의지를 보이지 않고, 비굴한 태도를 보이고, 망신을 당하고도 그냥 모른 체하고 넘어가면 얻어지기도 한다. 그러나 나라의 평화는 싸울 의지를 더 분명히 하고, 당당한 호전성을 거침없이 과시해야만 얻어질 수 있다. 북한 비핵화는 한 걸음도 진척이 없는데, 군 대비태세를 스스로 허물고 있는 것도 국가를 국가의 높이로 경영하고자 했다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군대에는 언제나 목적한 일이 다 풀리고 난 후, 마지막 단계에서나 겨우 조금 손을 댈 수 있다. 우리는 비핵화 진행과정에서 가장 나중에 손을 대야 할 군대에 가장 먼저 손을 댔다. 대통령이 대통령으로서 가져야 할 최소한의 자세를 가지고 있는지 자세히 살펴볼 필요를 느끼게 한다.대한민국의 거의 모든 문제는 국가를 국가의 높이에서 경영하지 않는 것에 뿌리를 두고 있다. 국가와 민족 사이에서 대통령이 중심을 잡지 못하고 있을 수도 있다. 분명한 것은 민족의 시각으로는 국가의 문제를 풀지 못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국가의 시각으로는 민족의 문제를 풀 수 있다. 국가가 민족을 살리지, 민족이 국가를 살리는 일은 없다. 게다가 우리는 민족들로 둘러싸여 있는 것이 아니다. 국가들에 둘러싸여 있다. 국가들과는 다 등을 돌리고, 민족이라고 상상하는 북한에만 목을 매고, 그 북한과 가까운 중국에만 굽실거리는 것으로는 국가의 높이에 있는 문제는 풀리지 않는다. 阿Q가 되어 풀리지 않은 현실을 풀린 것으로 "정신승리"하는 것이 전부일 수도 있다. 심지어 북한과 중국도 민족적 처신을 하고 있지 않다. 철저히 국가적 처신을 하고 있다. 우리만 그것을 애써 알려고 하지 않을 뿐이다. 우리만 환상 속에서 꿈을 꾸고 있는 것은 아닌지 걱정이 크다. 국가란 무엇인가, 이제부터라도 다시 공부해야 한다./최진석 건명원 초대 원장·서강대 철학과 명예교수송필용 作 '무제' /광주일보 제공

2019-07-01 최진석

[최진석의 '새 말, 새 몸짓'· (3)]종속성의 극복과 자유로운 삶

인간 독립성 근본은 '사유' 일상 태도부터 외부 의존 심화본질보다 기능에 빠진 삶 '자각'해야프로그램 제목들에서 종속성이 습관이 되어버린 모습을 볼 수 있다. '오마이베이비', '배틀트립', '시니어 토크쇼', '돈워리스쿨', '미스터리 키친', '애니멀 레스큐', '맨인블랙박스', '나이트 라인', '모닝 와이드', '스포츠 다이어리', '해피 투게더', '스포츠 투나잇' 등등. 굳이 이래야만 하게 된 우리는 누구인가. 언어가 주체의 독립을 지키는 근본 장치 가운데 중요한 한 가지라는 것을 알지 못하기때문일 것이다. 자기 언어를 소외시키는 방송은 또 우리에게 무엇인가?인간의 독립성은 근본적으로 생각, 즉 사유의 독립으로 보장된다. 정치적 독립도 사상과 사유의 독립이 뿌리다. 지금의 우리에게 가장 가까운 왕조인 과거 조선시대를 들여다봐도 우리는 우리의 사유로 살지 못했다. 중국이란 땅에서 중국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생산된 주자학을 우리는 우리의 땅에 그대로 적용하려 무던히 애를 썼다. 정치 외교적으로도 중화질서를 지키고 수행하는 데에 치중했다. 이것이 당시 세계 질서의 큰 판이었고, 어쩔 수 없었으며, 생존의 한 방식이었고, 형식적으로는 그리 보여도 내용적으로나 실질적으로는 독립적이었다는 등의 여러 얘기들을 할 수 있겠지만 총체적으로는 종속적이었다. 중화 질서 속에서 형성된, 그것도 긴 시간동안 형성된 종속성은 아직도 다양한 방면에서 지속되고 있다. 우리는 과연 이것을 자각하고 있는가. 종속성의 끝은 식민지다. 우리는 일본의 식민지로 36년을 살았다. 종속성을 내면화하기에 충분한 시간이다. 해방 후에 북한은 소련과 중국의 이데올로기를 수용했고, 우리는 미국의 그것을 수용했다. 북한과 남한 사이에 서로 더 독립적이고 주체적인지를 다투곤 한다. 그러나 오십보백보다.종속성에 갇혀 있으면 나타날 수 있는 대표적인 심리 현상이 주도적인 사고력을 행사하지 못하고, 다른 사람들이 한 생각을 추종하거나 따라하는 것이다. 자신이 사라지고 외부의 어떤 것이 들어와 자기 대신 주인 행세를 하는 것이 종속성이다. 더 나아가서, 외부의 것에 지배되어 나타나는 종속성에 익숙해지면, 자기 안에 내면화된 기존의 이념이나 신념을 반성 없이 그대로 수호하려고만 하고 세계의 흐름에 맞춰 변화시키려는 노력을 하지 못한다. 이것도 종속성의 한 표현이다. 종속성은 외부의 것을 추종하는 형식으로도 있지만, 내부에 자리 잡고 있는 이념을 변화 없이 맹목적으로 추종하는 형식으로도 있다. 지금 우리는 이 두 형식 모두에 사로잡혀 있다. 독립적이면 부드럽고 유연하지만, 종속적이면 뻣뻣하고 경직된다. 독립적이면 주도적인 사고력을 갖지만, 종속적이면 사고력이 현저히 떨어진다. 독립적이면 자기에게 무엇이 필요한지를 자각하고 자기에게 필요한 것을 스스로 만들려고 덤비지만, 종속적이면 다른 사람이 만든 것을 그대로 들여와 쓴다. 종속적이면 자기 필요를 각성하지 못한다. 남의 필요에 의존한다. 자기는 남의 그 필요를 내면화 한다. 독립적이면 자기가 직접 보고 만지는 것이나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그리지만, 종속적이면 타인이 좋아하는 것을 '좋은 것'으로 받아들여 그것을 그린다. 독립적이면 '나'를 그리지만, 종속적이면 '남'이나 '우리'를 그린다. 독립적이면 '나'를 노래한다. 그러나 종속적이면 '남'이나 '우리'를 노래한다. 자신이 경험한 '사실'을 그리지 못하고, 주입된 '관념'을 그리는 것이다. 독립적이면 선례를 만들려 하고, 종속적이면 선례를 찾는다. 독립적이면 벤치마킹의 대상이 되고, 종속적이면 습관적으로 벤치마킹을 시도한다. 독립적이면 내 언어와 내 문자를 쓰지만, 종속적이면 외부의 그것들로 나의 그것들을 흐트러뜨린다. 독립적이면 지적인 경향을 보이고, 종속적이면 감각과 본능에 더 의존한다. 독립적이면 전략적이 되고, 종속적이면 전술적 단계에 머문다. 독립적인 나라에서는 이익을 추구하는 것이 좋은 명분이고, 종속적인 나라는 명분을 추구하는 것이 좋은 명분이다. 독립적이면 선진국까지 올라서고, 종속적이면 중진국이 오를 수 있는 최고 높이다. 독립이 습관이 된 나라의 정치는 사실에 의존하고, 종속성이 팽배한 나라의 정치는 도덕에 붙잡힌다. 독립적이면 몸이 앞으로 기울어 미래를 향하지만, 종속적이면 뒤로 기울어 과거에 갇힌다. 독립적이면 본질을 선택하고, 종속적이면 기능을 선택한다. 독립적인 나라의 정치는 국가 전체를 조망하며 나아가고, 종속적인 나라의 정치는 극히 편향적이거나 진영을 위주로 한다. 그래서 박정희 비판하다가 김일성을 향하게 되고, 미국 일본 비판하다가 중국으로 기울어 버린다. 박정희 비판할 때 사용하는 도구를 김일성한테는 적용하지 않고, 미국 일본 비판할 때 쓰는 기준을 중국에는 적용하지 않는 비이성적 감성에 함몰된다. 독립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내 이야기로 내 노래를 하지 않는 일이나, 내가 본 것보다는 다른 사람이 본 것을 그리는 일이나, 내 물건을 내가 만들지 못하는 일이나, 정치가 진영에 갇히는 일이나, 외교가 객관적 사실보다는 심리적 기대에 의존하는 일이나, 실용보다는 이념에 빠지는 일이나, 정치에 협치가 실현되지 않는 일들이 다 같은 틀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현상들일 뿐이다. 종속적이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의 번영과 생존은 독립을 다시 생각해야만 보장되는 단계에 이르렀음을 깊이 깨달아야 한다. 종속적인 방식으로는 도달할 수 있는 가장 높은 단계까지 이미 도달했다. 새로운 도전은 종속성을 극복하여 한 번 독립적 단계로 올라서는 일로만 의미를 가질 것이다. 독립성은 독립적 사고와 독립적 생활 방식으로 훈련된다.일상에 가까운 일부터 먼저 돌아보자. 일상부터 독립적인 태도로 살아야 사유의 독립이 가능하다. 일상이 종속적이면 삶이나 공동체가 독립적일 수 없다. 우리는 습관적으로 우리를 외부의 어떤 것과 비교하면서 존재 가치를 확인하려 드는 경우가 많다. 송도, 통영, 김포, 부산, 평택이 모두 한국의 베니스라는 간판을 경쟁적으로 앞에다 건다. 송도가 송도면 되지, 왜 꼭 베니스의 인정을 받아야 하는가. 월악산, 노고단, 대관령이 서로 한국의 알프스라고 한다. 영남에는 아예 영남 알프스가 있다. 대관령이 대관령으로 존재해야 진정한 가치를 부여받지, 알프스에 인정받음으로써만 대관령이 될 수 있다면, 대관령은 위대해지기 어렵다. 걷는 길을 만들어놓고는 서로 '한국의 산티아고 길'로 불리려고 안달이다. 이런 일들은 거의 모든 영역에서 나타난다. 한국의 스티븐 호킹, 한국의 나폴리, 한국의 간디, 한국의 파바로티, 한국의 마돈나, 한국의 퓰리처상, 한국의 센트럴 파크, 한국의 조르바, 한국의 라이온 킹, 한국의 히말라야, 한국의 이치로, 한국의 아인슈타인, 한국의 호날두, 한국의 알랑드롱, 한국의 로버트 파커, 한국의 로버트 타우니, 한국의 로버트 드 니로, 한국의 톰 크루즈, 한국의 톰 행크스, 한국의 톰 포드, 한국의 마이클 볼튼, 한국의 마이클 잭슨, 한국의 마이클 조던드버그, 한국의 에디슨, 한국의 슈바이처, 한국의 페스탈로치, 한국의 다빈치, 한국의 헐리우드, 한국의 만델라, 한국의 빅토르 위고, 한국의 레이 찰스, 한국의 주윤발, 한국의 테일러스위프트, 한국의 샤론스톤, 한국의 아브라함 링컨, 한국의 MIT 등등. 다 셀 수가 없다. 자신을 자신의 특징으로 증명하려는 의도가 거세된 종속적 습관이다. 남의 이름에 연관되어야만 비로소 자기가 된 느낌. 자기를 자기의 눈으로만 보면 왠지 부족한 감이 드는 느낌. 모두 종속적이기 때문이다. 이런 느낌에 빠져 있다는 것은 독립의 방향으로 나아가는 정서적 준비가 아직 되어 있지 않다는 뜻이다.아름답기로 유명한 어느 섬에서 걷기 대회를 하는데 이름이 '슬로우 걷기 대회'라고 한다. '느리게 걷기 대회'라고 못하는 우리는 도대체 누구인가. 지방자치단체도 '옐로우 시티', '판타지아', '국제 슬로 시티' 등의 표어들이 앞에 붙어 있다. 공공 기관의 표어치고는 너무 외부 의존적이다. 자주성과 독립성의 최후 보루라고 할 수 있는 국방부도 '국방 헬프콜'을 운용한다. '국방 도움전화'는 왜 안 되는가. 어떤 부대는 구호 자체가 필승이나 단결이 아니라 '아이 캔 두'(I can do.)인 것을 보았다. 자기가 자신의 언어로부터 소외되어 있다면, 자신이 자신의 언어로 확인되지 않을 것이다. 용기는 자기가 자신의 존엄을 지키며 자기로 살기 위해 발휘하는 주체적인 활동이다. 자기 언어에서 스스로 소외된 주체가 용기를 발휘할 수 있을까? 이처럼 우리나라는 지금 일상의 종속성까지도 심화되고 있는 상황이다. 외부의 것에 의존해서만 비로소 가치를 인정받는 지경이고, 더욱이 외국말로 포장해야만 더 권위 있게 보이는 줄 안다. 언어를 다루는 방송도 마찬가지다. 프로그램 제목들에서 종속성이 습관이 되어버린 모습을 볼 수 있다. '오마이베이비', '배틀트립', '시니어 토크쇼', '돈워리스쿨', '미스터리 키친', '애니멀 레스큐', '맨인블랙박스', '나이트 라인', '모닝 와이드', '스포츠 다이어리', '해피 투게더', '스포츠 투나잇' 등등. 굳이 이래야만 하게 된 우리는 누구인가. 언어가 주체의 독립을 지키는 근본 장치 가운데 중요한 한 가지라는 것을 알지 못하기 때문일 것이다. 자기 언어를 소외시키는 방송은 또 우리에게 무엇인가?조선 전기부터 중기까지 조선의 화가들은 조선을 그리지 않았다. 산천도 조선의 산천이 아니라 중국 산천을 그리고, 옷이나 집이나 물건들도 모두 중국의 것을 그렸다. 조선의 그림에 나오는 소도 조선의 소가 아니라 긴 뿔이 난 중국 남방의 소였다. 그림을 매개로 나를 표현하는 예술 행위를 한 것이 아니라, 머리 속에 주입된 종속적 관념을 재현하기만 했다. 자기 세계를 그리는 것이 아니라 관념을 그린 것이다. 지금은 상상하기도 어려운 일이지만, 남이 주입한 관념을 그리면서도 그것을 보고 감탄을 하고 서로 칭찬을 주고받으며 산 것이다. 그런 태도를 주입한 사람들이 볼 때는 얼마나 우스웠을지 짐작이 된다. 조선 후기에 와서야 비로소 조선을 그리기 시작한다. 소위 겸재의 진경산수이다. 외부에서 주입된 관념을 그리는 것도 진경산수가 아니지만, 내게 만들어진 이념을 수십 년 간 바꾸지 못하고 계속 그리던 것만 그리는 것도 진경산수가 아니다. 수십 년 간 변한 세상과 호흡하지 못하고, 정해진 자기 이념만을 고집하는 것도 자신의 세계를 그리지 못하고 주입된 관념을 그리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다.독립적으로 자신의 세계를 그리지 못하고, 장기간 내적으로 소유하고 있는 정해진 관념이나 외부에서 온 관념만을 그리는 종속적 태도는 본질보다는 기능에 빠진 삶을 살게 한다. "이것이면 어떻고 저것이면 어떤가. 멋있게만 보이면 되지."나 "'오마이베이비'면 어떻고 '애니멀 레스큐'면 어떤가. 멋있게만 들리고 시청률만 높으면 되지."라는 경박함에 빠진다. 이것은 "인성이 좀 나쁘면 어떤가, 공부만 잘하면 되지."라고 하는 말과 완전히 일치한다.기능에 빠진 삶으로는 독립적 단계에 오를 수 없다. 기능에 빠진 태도를 가진 사람은 '독립'을 모른다. 독립을 모르면 창의가 없다. 독립과 창의가 없다면, 부강하고 자유로운 삶을 이룰 수가 없다. 이제는 종속성을 자각하고, 그것을 극복하려고 노력해야할 때다. 그러지 않으면 생존이 위협받을 수도 있기 때문에 하는 말이다./최진석 건명원 초대 원장·서강대 철학과 명예교수송필용 作 '무제' /광주일보 제공

2019-06-03 최진석

[최진석의 '새 말, 새 몸짓'· (2)]인간적이고 문화적인 높이에서 새로 살자

공수처·대입 등 격렬한 논쟁제도에 머문 우리는 아직 중진국문화·철학적 단계로 상승해야 가장 인간적인 삶은 무엇인가를 하거나 만들어서 변화를 야기하는 삶이다. 다시 말해, 자유롭고 독립적이고 주체적이고 창의적으로 사는 삶이다. 이런 삶의 태도는 있던 곳에서 없던 곳으로 나아가게 한다. 즉 변화를 야기한다. 아직 인식되지 않은 곳, 아직 경험된 적이 없는 곳으로 이동한다. 그래서 근본적인 의미에 닿아있는 인간이라면 머무르지 않는다.혁명의 깃발을 완장으로 바꾸지 않는다. "지속 부정"과 "새말 새몸짓"으로 무장한다.멈춰야 하는가, 달려야 하는가. 버려야 하는가, 가져야 하는가. 계속 붙잡고 있어야 하는가, 그만 내려놓아야 하는가. 쉼 없이 근면해야 하는가, 이제 그만 소위 힐링을 구해야 하는가. 지지부진한 삶 속에서도 이런 질문들은 종횡무진 파고든다. 이 질문다발은 결국 어떻게 할 것인가, 어떻게 살 것인가로 합쳐진다. 참 어려운 일이다. 누구는 이렇게 해야 옳다 하고, 다른 누구는 또 저렇게 하라고 한다. 이렇게 살라는 사람이나 저렇게 살라는 사람 모두 틀리지 않아 보이니 선택은 더욱 어렵다. 모두 틀리지 않아 보이는 이유는 이쪽이나 저쪽이나 다 맞아서라기보다 필시 자기만의 각성이 이뤄지지 않았거나 부족하기 때문이다. 쉽게 말해 뭘 모르기 때문인 것이다. '무명'(無明)에 빠져있으면 돌고 도는 윤회의 틀을 못 벗어나는 것과 같다. 당연히 삶의 무대를 알아야 한다. 어떻게 살아야 되는지 말하기 전에 어디서 사는지를 알아야 한다. 연극배우도 연기를 잘하려면 자기가 서는 무대의 정체에 밝아야 한다.인간이 사는 무대는 두 덩어리로 되어 있다. 하나는 인간이 만든 덩어리, 다른 하나는 인간이 안 만든 덩어리. 이 세계의 모든 존재는 인간이 만든 것 아니면, 안 만든 것이다. 인간이 안 만든 덩어리는 인간과 별 관계없이 자기가 가진 원칙에 따라 자기 알아서 스스로 돌아간다. 자기 알아서 스스로 돌아가는 것을 '자연'(自然)이라고 한다. 다른 한 덩어리는 인간이 만들었다. '문명'(文明)이다. '문명'(文明)이라 할 때의 '문'(文)이라는 글자가 들어가면 다 인간의 손이 닿았다는 뜻이다. 인간이 만든 것이다. 문자(文字)는 인간이 '만든' 기호이고, 문학(文學)은 인간이 '만든' 이야기에 관한 지적 활동이다. '문명'은 '문화'(文化)라고 하는 인간의 독특한 활동이 만든 결과이다. 인간은 무엇인가 '하거나 만들어서'[文] 변화를 야기[化]한다. 이런 의미로 인간은 가장 근본적인 차원에서 문화적 존재다. 인간으로 존재하는 한 무엇인가를 하거나 만들어서 변화를 야기하는 일을 가장 근본적인 사명으로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다. 만년필을 만들었다 치자. 만년필이 없던 세상과 만년필이 새로 등장한 세상은 다르다. 어찌 되었건 이제 세상은 만년필이 있는 세상과 없던 세상으로 갈라진다. 달라진 것을 변화라고 한다. 만년필을 만든 사람은 이 세상에 변화를 야기한 격이다. 변화를 야기함으로써 인류의 삶은 더 넓어지고 편리해진다. 인류에게 하는 중요한 공헌이다. 만년필을 만든 사람은 인간 삶에 변화를 야기하였고, 만년필을 만들지 않고 사용만 하는 사람은 야기된 변화의 결과를 그저 수용했다. 물론 만년필을 수용하여 사용하면서, 자신만의 다른 변화를 야기할 수도 있다. 이것도 문화적 활동이다.인간은 근본적인 차원에서 문화적 존재다. 즉 무엇인가를 하거나 만들어서 변화를 야기하는 존재다. 이 정의가 내려지는 순간, 인간은 두 층으로 격이 나뉜다. 누군가는 변화를 야기하고, 누군가는 야기된 변화를 받아들인다. 변화를 야기하는 문화적 활동을 하는 사람을 '자유롭다', '주체적이다', '독립적이다'고 표현하고, 야기된 변화를 받아들이는 사람을 '종속적이다'고 칭한다. 인간이 근본적인 의미를 잃지 않고 활동하면, '자유롭다-독립적이다-주체적이다'는 말을 듣게 되는데, 이것은 결국 문화적인 높이로 산다는 뜻이다. 만년필을 만든 사람은 자유롭고, 독립적이고, 주체적인 사람이고, 누군가 만든 만년필을 수용하기만 하면 종속적이다. 자유롭고, 독립적이고, 주체적인 사람이 하는 활동이 창의적 활동임은 매우 자명하다. 그래서 '자유-독립-주체-창의'는 같은 차원에서 하나로 모여질 수밖에 없다.문명은 세 개의 층으로 이루어진다. 가장 낮은 층을 이루는 것이 물건들이다. 물건은 보이고 만져지는 것들로서 분명하고 구체적이다. 대포, 컴퓨터, 군함, 연필 등등이다. 물건은 물건 자체의 역량으로 그냥 태어나는 것이 아니다. 태어나는 길과 돌아다니는 길이 잘 만들어져 있어야 좋은 물건이 나온다. 물건이 나오고 돌아다니는 길을 제도라고 한다. 도시, 농촌, 민주제, 공화제, 사회조직 등등이다. 이것은 구체적이면서도 추상적이다. 좋은 제도는 좋은 물건이 등장하도록 보장한다. 그런데 제도는 또 좋은 세계관이나 생각의 방식, 즉 철학에서 비롯된다. 철학은 추상적이다. 좋은 철학이 좋은 제도를 만드는 것은 당연하다. 구체적인 일상의 삶은 좋은 물건으로 보장되고, 구체적인 좋은 물건은 구체적이면서도 추상적인 좋은 제도가 만들며, 좋은 물건들과 좋은 제도는 추상적인 좋은 철학이 책임진다. 한 사회 구성원들의 시선이 '물건'에만 가 있으면 후진국, 물건과 제도에 가 있으면 중진국, 물건과 제도와 철학에 모두 가 있으면 선진국이다. 우리는 어디에 있는가. 선진국이라 불러도 그냥 넘어갈 수 있을 정도로 높은 단계에 와 있지만, 아직은 중진국이다. 우리 사회의 격렬한 논쟁들은 여전히 제도의 차원에 머물러 있다. 공수처를 만드느냐 안 만드느냐, 내각제로 바꿔야 하나 아니면 대통령 중심제를 유지해야 하는가, 대학입시에서 수능을 몇 퍼센트로 하고 자사고를 폐지하느냐 유지하느냐, 선거제를 이렇게 하자 저렇게 하자, 재벌을 개혁해야한다 말아야 한다 등등 수준 높은 거의 모두가 제도와 관련된 것들이다. 의식도 매우 제도 의존적이다. 자녀들을 교육 시키고 싶은 방향은 이런데, 교육 시스템 때문에 그렇게 못하고 어쩔 수 없이 따라간다고 하는 말이나 나는 이렇게 살고 싶었는데 내 삶이 사회구조 때문에 이리 되었다고 하는 한탄들도 결국은 모두 제도에 깊이 의존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교육은 자신과 사회를 독립적으로 책임질 인재를 양성하는 일이다. 여기서는 사람을 어떻게 만드는가, 어떤 사람을 만드는가가 당연히 가장 핵심적인 사안이다. 그런데도 우리의 교육은 입시 제도에 함몰되어 있다. 고등학교라는 제도에서 대학이라는 제도로 이동하는 데에만 초점이 맞춰져 있지 대학이나 고등학교라는 제도를 이용해서 어떤 사람을 만드는가나 어떤 사람이 되는가는 옆으로 밀쳐져 있다. 교육 현장의 황폐화는 교육의 정신과 철학이 사라지고, 제도를 지키려는 종속적 습관에서 비롯된다. 우리 사유의 높이는 제도까지는 도달했으나 문화나 철학에는 도달하지 못했다. 이는 중진국 상위 단계까지는 왔으나 선진국으로 진입은 하지 못했다는 뜻이다. 종속적 단계로는 가장 높지만 자유롭고 주체적이고 독립적인 단계에는 이르지 못했다. 이 모든 말들을 다 묶으면 결국 우리는 아직 문화적이지 않다는 말로 귀결된다.우리는 어느 단계에 사는가. 자유롭고 독립적인가. 아직 아니다. 우리 삶을 채우며 편리와 풍요를 제공하는 거의 모든 물건 가운데 우리가 만들기 시작한 것은 거의 없다. 우리가 독립적으로 만들어 가지고 있는 것으로는 '한글'이 거의 유일하다. 우리는 제조업 강국이라 물건을 잘 만들고 또 수출해서 먹고 산다. 그러나 아무리 잘 만들어 수출까지 하는 물건이라 해도 우리가 만들기 시작한 것은 아니다. 다른 나라에서 만들기 시작한 것을 들여와 따라 만들었을 뿐이다. 물건만 그런 것이 아니다. 우리 삶을 지배하는 제도를 우리가 만들어서 쓰고 있는가. 그렇지도 않다. 우리 삶의 구체적 구성물인 물건과 제도 모두 외부에서 들여왔다. 독립적이기 보다는 종속적인 구조 속에서의 번영과 발전이다. 지금 단계에서 우리가 시도해야 할 새로운 도전은 매우 분명하다. 제도적인 차원이 아니라 문화적인 차원에서 진정한 독립을 쟁취하는 일이다. 정치적이고 감성적인 독립이 아니라 삶의 독립, 생각의 독립, 과학적이고 철학적인 높이의 독립이다.인간을 규정하는 말들은 적지 않다. 호모 하빌리스, 호모 에렉투스, 호모 파베르, 호모 루덴스, 호모 이코노미쿠스 등등. 무엇인가를 하거나 만드는 일을 기준으로 한 분류들이다. 이런 모든 분류를 하나로 통합하여 가장 근본적인 차원에서 말하면, '인간은 문화적 존재다'라고 할 수밖에 없다. 이런 의미에서 본다면, 무엇인가를 하거나 만들어서 변화를 야기하는 도전에 나서지 않는 인간은 인간적이지 않다. 문명은 인공적이고 조작적인 것이며, 이런 문명을 쌓는 인간은 인공적이고 조작적인 활동을 하는 존재라는 것을 철저하게 인식해야 한다. 인공과 조작을 거부하고, 그냥 아무렇게 하거나 내버려 두는 것을 자연이라고 하면서 높은 차원의 것으로 인식하는 흐름이 있는데, 이는 인간적이라기보다는 패배적인 자세일 뿐이다. 문명을 건설하는 사명을 가진 인간에게 '자연적'이라는 말은 인위와 조작적 활동의 결과를 원래 있었던 것 같은 느낌을 주는 경지까지 끌어올린 것이지, 인위와 조작을 거부하거나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가장 인간적인 삶은 무엇인가를 하거나 만들어서 변화를 야기하는 삶이다. 다시 말해, 자유롭고 독립적이고 주체적이고 창의적으로 사는 삶이다. 이런 삶의 태도는 있던 곳에서 없던 곳으로 나아가게 한다. 즉 변화를 야기한다. 아직 인식되지 않은 곳, 아직 경험된 적이 없는 곳으로 이동한다. 그래서 근본적인 의미에 닿아있는 인간이라면 머무르지 않는다. 혁명의 깃발을 완장으로 바꾸지 않는다. "지속 부정"과 "새말 새몸짓"으로 무장한다. 지금 우리에게 "새말 새몸짓"은 무엇인가. 제도의 높이에서 멈춘 상태를 넘어서서 삶의 태도와 관점의 혁신을 감행해야 한다. 철학과 과학과 문화적인 높이로 상승하는 일이다. 중진국의 함정에서 벗어나 선진국 높이로 올라서는 도전을 감행해야 한다. 바로 문화적이고 철학적이고 과학적인 단계로 상승하는 일이다. 건국과 산업화와 민주화의 성공신화는 물건과 제도의 높이에서 이룬 발전이다. 후진국과 중진국 정도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이제 이런 성공 신화를 뒤로 물리치고 한 단계 더 높고 새로운 신화를 써야 한다. 산업화 세력이 건국 세력을 도태시키고 새로워졌듯이, 민주화 세력이 산업화 세력을 밀어내며 나라를 새롭게 했듯이, 이제 우리가 할 일은 '새말 새몸짓'으로 무장한 새로운 세력이 민주화 세력을 도태시키는 도전이다. 민주화 단계까지 올라서면서 하던 얘기와 주장을 아직도 계속하면서 그것을 지키려고만 하고 있다면, 당신이 아무리 높은 자리에 있다하더라도 아직 인간적이지 않다. 권력과 재력으로는 어쩔지 모르지만, 인간으로는 미성숙 상태에 있다. 깃발을 완장으로 바꿔 차고 그저 그렇게 살고 있는 사소한 사람일 뿐이다./최진석 건명원 초대 원장·서강대 철학과 명예교수송필용 作 '무제' /광주일보 제공

2019-05-13 최진석

[최진석의 '새 말, 새 몸짓'· (1)]새 말, 새 몸짓

'한강의 기적' 따라하기 한계도약 못하면 하강 '세상 이치'혁신적 사고·태도 무장해야과거에 정해진 규제로 있어본 적이 없던 미래의 변화를 제어하는 일이 얼마나 우스운 일인지를 모르는 것이다. 빅데이터의 시대에 데이터를 모으지 못한다.초융합 연결의 시대에원격 의료를 막는다.4차 산업혁명의 주요 주제 가운데 하나인 공유경제를 경험하지 못하도록 막고 있다. 이것은 과거로 미래의 발목을 잡고 있는 형국이다.더 큰 문제는 그렇게 해야 진실한 삶을 사는 것 같은 느낌이 들도록 우리가 훈련되었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4차 산업혁명이라는 이름을 달고 일어나는 문명적인 혁명의 시기에도 과거로 과거로만 계속 회귀하려 한다.새로워져야 할 때, 새로워지지 않으면 현재 가지고 있는 새로움 정도가 계속 유지되는 것이 아니라 급속하게 더 낡아지는 것이 세상의 이치다. 한 단계 도약해야 할 때, 도약하지 못하면 지금 수준을 계속 유지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급속한 하강을 하게 되는 것 또한 세상의 이치다. 우리는 지금 답답한 처지에 있다. 중진국의 함정이라고도 한다. 말레이시아, 태국, 브라질, 남아프리카 공화국은 그 함정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다. 남미의 아르헨티나나 칠레도 그 함정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대표적 사례다. 우리의 한계를 구체적으로 알려주는 말들이 있어 온지 오래다. 2013년 한국 경제를 끓는 냄비 속 개구리에 비유하면서 한국의 침체와 하락 가능성에 경종을 울렸던 컨설팅 업체 맥킨지가 2018년에 한국 경제가 더 나빠졌다고 재차 경고를 했다. "한국 경제는 여전히 물이 끓는 냄비 속 개구리 상태다. 5년 전보다 물 온도는 더 올라갔다." 나는 이 말 속에서 날카로움도 읽지만 조롱도 발견한다.이런 조롱을 받을 나라는 아니었다. 대한민국의 경제발전을 세계에서는 '한강의 기적'이라고 표현하면서 박수를 보내주던 일이 그리 오래전도 아니다. 현대사에서 '한강의 기적'을 말할 때, 독일이 이룩한 '라인강의 기적'도 함께 말하지만, '기적'이라면 '한강의 기적'만이 기적이다. 독일의 그것은 있다가 없어진 것을 회복한 것이지만, 우리는 없던 것을 있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기적을 이룬 나라고, 기적을 이룬 국민이다. 이런 기적을 이룬 나라는 사실상 인류 현대사에 대한민국이 유일하다. 식민지 시절을 보내다 독립하여 이 정도의 성취를 이룬 나라가 대한민국 외에는 없다. 정치발전과 경제발전을 동시에 이룬 유일한 나라다. 원조 받던 국가에서 원조 하는 나라로 탈바꿈한 것도 우리가 유일하다. 자원과 기초적인 물적 토대 없이 이 정도의 발전을 이룬다는 것은 매우 어렵다. 그러나 우리는 해냈다. 다른 나라들은 모두 식민지 착취를 통해서 발전의 토대를 갖췄지만, 우리는 외부의 착취 없이 우리만의 힘으로 이룬 것이니 발전의 내용 또한 다른 나라와 비교 하자면 더 도덕적이다.그러나 문제는 우리에게 익숙한 방법으로 우리가 도달할 수 있는 높이는 딱 여기까지라는 점이다. 끓는 냄비 속에 있으면서도 뜨거워지는 줄을 모르는 형국이다. 기적을 이룰 정도로 그렇게 근골을 잘 사용하고 영특하던 우리가 끓는 냄비 속에 있다는 것조차 알아채지 못하는 무지 속으로 빠져버렸다. 우리는 한계에 갇혔다.우리를 한계에 가둘 정도로 몸에 밴 익숙한 방법은 무엇인가. 그것은 '따라 하기'라고 표현할 수 있는 '종속성'이다. 해방된 이후부터 지금까지 이룬 발전과 번영은 이 '따라 하기'의 속도와 효율성이 빚어낸 결과다. 우리는 물건을 우리가 만들기 시작한 것으로 돈을 벌지 않고 다른 사람들이 만들기 시작한 것을 들여와 만들어 돈을 벌었다. 우리가 만든 제도로 우리 삶을 제어하고 북돋운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만든 제도를 들여와 우리 삶을 거기에 맞췄다. 우리가 독립적으로 한 생각으로 우리의 세계관을 삼은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만든 철학을 우리의 비전으로 하며 살았다. 이것이 지금까지 우리가 이룬 발전과 번영의 속살이다. 이 일을 세계 유례없이 잘해냈다. 그러나 '따라 하기'로 살 수 있는 높이는 여기까지다.따라 하기에 습관이 되면 삶의 태도와 사유 구조가 한 쪽으로 치우치거나 종속적인 삶을 살기 쉽다. 그렇게 되면, 이익보다는 명분에 집착하고, 지적이기 보다는 감각적이고, 실재보다는 도덕에 빠지며, 본질보다는 기능에 집중한다. 명분과 도덕은 정해진 기준을 수행하는 일이므로 과거의 것이 아닐 수 없다. 이런 태도에서는 미래를 여는 도전보다는 과거를 헤집는 일에 빠진다. 당연히 이미 알고 있는 것이나 믿고 있는 것만을 수행하려 들지, 그것들을 바꿔 새로움을 기약하는 혁신적 도전에 나서지 못한다. 사회가 멈추고 썩기 시작하는 이유다. 새로워져야 할 때 새로워지지 못하면, 썩는다. 도약해야 할 때 도약하지 못하면 하강한다. 우리는 조선 말기에 이미 경험했다. "이 나라는 털끝 하나인들 병들지 않은 게 없다. 지금 당장 개혁하지 않으면 나라는 반드시 망하고 말 것이다."우리가 다급한 이유는 조선 말기 다산 선생의 이 절절한 경고가 지금 우리에게 어느 하나 어긋남 없이 해당되기 때문이다.국가 단계의 높이에서 통치력을 행사했던 대통령은 김대중 대통령이 마지막이다. 김대중 대통령 이후의 통치력은 감성적 민족주의에 매몰되거나 권위주의적 시대가 남긴 탐욕과 특권을 벗어나지 못하거나 과거의 운동권 이념을 넘어서지 못한 상태에서 반대쪽 진영을 부정하려는 기능적 프로젝트를 수행하는 정도 이상을 보여주고 있지 못하다. 이명박과 노무현 사이나 박근혜와 문재인 사이에 있는 수평적 차이를 수직적 차이로 착각하지 말자. 높이에서는 아무 차이가 없다. 같은 높이에서 다른 색깔의 옷을 입고 있을 뿐이다. "이게 나라냐"라는 구호로 시작한 진영이 이젠 "이건 나라냐"라는 말을 듣는다. "이게 나라냐"라고 주장한 쪽과 "이건 나라냐"라고 주장한 쪽 사이가 얼마나 멀까? 4대강 보를 만든 쪽과 허무는 쪽 사이는 또 얼마나 멀까? 같은 높이에서 다른 일을 하고 있을 뿐이다. 방송 장악은 어느 정권에서나 똑같다. 안하무인의 인사, 어용 기자들의 득세, 표현의 자유 억압, 불통, 협치 실종, 권력의 청와대 집중, 낙하산 인사, 블랙리스트 등은 어느 정권에서나 모두 나타났다. 다름이 없다. 같은 높이에 있으면서는 사실 다르기가 더 어렵다. 다름이 없는 이 현상은 어쩌면 당연한 귀결이다. 아무리 다르다고 각자 주장해도 모든 진영이 실제로는 같은 높이의 한계에 갇혀 있기 때문이다.이제 한계를 뚫고 올라서는 일을 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이 점을 인정하는 데서부터 시작하자. 즉 우리는 우리에게 익숙한 방법으로는 이미 할 일을 다 해버린 민족이라는 사실이다. 익숙하지 않은 방법으로 도달할 그 높이에 이르는 도전 이외에는 가져야 할 사명도 달리 없다. 중진국의 한계에 이른 우리는 이제 선진국으로 나아가는 도전에 나서야 한다. 전술적 차원에서의 사고를 전략적 차원으로 끌어 올려야 한다. 대답에 익숙한 지적 활동성을 질문을 시도하는 방향으로 바꿔야 한다. 건국 세력이 산업화 세력에 의해 도태되고, 산업화 세력이 민주화 세력에 밀려나는 과격한 운동을 통해서 우리의 역사가 진보했듯이 이제는 민주화 세력도 도태되어야 한다. 민주화 세력도 이미 구세력이다. 민주화 세력을 도태시킬 새로운 세력의 형성을 도모해야 한다. 당연히 창의적이고 독립적인 삶의 태도가 필요해진 이유다. '따라 하기'로 갈 수 있는 최고점까지 왔으니, '따라 하기'가 아닌 방법으로만 그 한계를 벗어날 수 있다. 다른 결과는 다른 방법으로만 얻을 수 있다. 다른 결과를 기대하며 방법과 태도를 바꾸는 것을 혁신이라고 하지 않은가.그런데 전략적이고 선진국적인 높이로 상승하는 일이 가능하기는 한가? 사실 우리에게 익숙한 문명의 패러다임이 일정하게 유지되는 상황에서라면 이는 불가능에 가깝다. 1820년 대분기 이후에 후진국과 선진국 사이의 교체는 없었다. 이 말은 한 번 후진국은 계속 후진국에 머물기 쉽고, 한 번 선진국은 계속 선진국이기 쉽다는 말이다. 각 단계를 결정하는 높이의 시선에 지배를 받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에게 축복이 왔다. 바로 몇 백 년 계속되던 패러다임이 깨지고 있다. 4차 산업혁명으로 기존의 패러다임에 균열이 생기고 틈이 생긴 것이다. 후발 주자들이 자신의 단계를 뛰어넘어 한 단계 더 상승할 수 있기 위해서는 반드시 기존의 패러다임이 깨져야 하는데 우리의 국력이 가장 강해진 지금 그런 현상이 일어나고 있으니 얼마나 큰 축복인가. 문제는 우리가 그 축복을 직시하고 있는가의 여부와 그 축복을 받아들일 준비를 하고 있는가의 여부다. 애석하게도 아직까지는 그렇지 못하다.우리는 본질보다는 기능, 실재보다는 도덕, 이익보다는 명분, 질문보다는 대답에 더 비중을 두는 것에 익숙해 있기 때문에 시선이 항상 미래보다는 과거를 향해 있다. 미래를 여는 도전보다는 먼저 과거를 한 점 오차 없이 헤집는 일을 해야 더 진실하게 사는 것 같은 생각이 들도록 훈련되었다. '따라 하기'에 익숙해지면 결국 미래보다 과거를 더 중시하게 되는 심리를 갖게 된다. 입으로는 미래를 말하지만 사실은 과거를 산다. 그래서 과거의 규정으로 미래의 전개를 제어한다. 과거에 정해진 규제로 있어본 적이 없던 미래의 변화를 제어하는 일이 얼마나 우스운 일인지를 모르는 것이다. 빅데이터의 시대에 데이터를 모으지 못한다. 초 융합 연결의 시대에 원격 의료를 막는다. 4차 산업혁명의 주요 주제 가운데 하나인 공유경제를 경험하지 못하도록 막고 있다. 이것은 과거로 미래의 발목을 잡고 있는 형국이다. 더 큰 문제는 그렇게 해야 진실한 삶을 사는 것 같은 느낌이 들도록 우리가 훈련되었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4차 산업혁명이라는 이름을 달고 일어나는 문명적인 혁명의 시기에도 과거로 과거로만 계속 회귀하려 한다.이 절박한 시점에 삶의 방식이나 태도가 전면적이고도 근본적인 각성을 통해 바뀌지 않으면 안 된다. 각성이 없으면 여기까지만 살다 가지 이 이상의 삶을 누리지는 못한다. 최악의 경우에는 후손들에게 영광이 아니라 치욕을 물려줄 수도 있다. 진영 지키기에 빠진 우물안 개구리들은 역사의 열차에서 내려야 한다. 낡은 문법을 지키는 투사들은 이제 필요 없다. 차라리 경쾌한 도전에 나서는 젊은 무모함이 더 의미 있다. 우리가 어떻게 생존해 온 민족인데, 우리가 어떻게 되찾아 어떻게 발전시킨 나라인데, 여기까지만 살다가도 괜찮겠는가? 낡은 문법과 결별하여 새로운 문법으로 무장하고 새로운 태도를 가져야만 한다. 그래서 다음과 같이 노래할 수밖에 없다. "부질없다, 부질없다. 정해진 모든 것. 흐르지 못하고 고여 있는 모든 언어들, 모든 생각들. 백설의 새 바탕에 새 이야기 새로 쓰세. 새 세상 여는 일 말고 그 무엇 무거우랴. 새 말 새 몸짓으로 새 세상 열어보세."/최진석 건명원 초대 원장·서강대 철학과 명예교수■작가 약력▲최진석-서강대학교 철학과 명예교수·건명원 초대원장 -서강대학교 대학원 동양철학 석사, 베이징대학교 대학원 철학 박사-저서 '탁월한 사유의 시선'· '나는 누구인가'·'생각하는 힘, 노자 인문학'·'저것을 버리고 이것을'·'경계에 흐르다'▲송필용-전남대 미술교육과, 홍익대 대학원 서양화과 졸업-서울 학고재갤러리, 이화익갤러리 등 개인전 20회, 1996년 제2회 광주미술상 수상, 국립현대미술관, 서울시립미술관 작품 소장※ 경인일보는 한국지방신문협회와 공동기획으로 서강대 철학과 명예교수의 '새 말, 새 몸짓'을 연재합니다. 최 교수는 한국의 대표적 철학자로 삶과 세상을 읽는 통찰과 혜안을 독자 여러분께 선보일 것입니다. 이번 기획은 4월 23일자부터 총 10차례 게재됩니다.송필용 作 '새 말, 새 몸짓'. /광주일보 제공송필용

2019-04-22 최진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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