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준의 재밌는 클래식

 

[김영준의 재밌는 클래식·(30)왜색 용어]'라 트라비아타'를 '춘희' 해석 일제잔재

'마탄의 사수'도 日 자의적 표현組曲은 '모음곡'으로 표기 적당 지난 여름, 일본의 경제보복 조치는 우리 사회에 아직도 남아 있는 일제잔재 청산운동을 일으키는 촉매가 되기도 했다. 클래식 분야에도 일제 잔재는 여전하다. 오랜 기간 습관적으로 쓰면서 굳어졌지만 꼭 청산해야 한다.베르디의 오페라 제목인 '라 트라비아타'(La Traviata)는 '길을 잃은 여인' 혹은 '방황하는 여인'을 뜻한다. 그런데 한동안 우리나라에선 '춘희'로 불렸다. 이 오페라는 프랑스 작가 알렉상드르 뒤마 피스의 소설 '동백꽃 여인'을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일본에선 제2차 세계대전 이전부터 원작 소설 제목을 일본어로 번역해 '스바기히메(椿姬·춘희)'로 썼고, 우리도 일본식 표현(한자)을 그대로 받아들인 거였다. 더욱이 춘(椿) 자는 우리와 중국식 한자에선 동백나무가 아닌 참죽나무를 뜻한다. 엉뚱한 말이 되어버린 거다. '춘희'라고 써서는 안 될 일이다. 우리말로 자연스럽게 풀어서 쓰는 것이 이상적이겠지만, 현지 언어(이탈리아)의 발음을 살려 표기하는 것도 하나의 해결책이 아닐까 한다.독일 낭만주의 오페라의 막을 연 베버의 '마탄(魔彈)의 사수(射手)' 또한 일본에서 써온 말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는 경우다. 독일 전설에 기반한 이 오페라의 독일어 원제는 'Der Freischutz'로, 공개 사격대회의 사수를 뜻한다. 일본에선 계몽적 이념을 내세운 이 오페라의 내용을 보다 친숙하게 표현하기 위해 극에 나오는 백발백중의 '마법 탄환'을 제목에 가미한 것으로 생각한다. '라 트라비아타'의 경우처럼 원제목인 '프라이쉬츠'로 쓸 수 있다.오펜바흐의 유명 오페레타 제목('천국과 지옥') 또한 일제의 잔재다. 원제는 '지옥의 오르페우스'이다. 글룩의 오페라 '오르페오와 에우리디체'와 함께 그리스 신화를 소재로 했지만, 오펜바흐는 자신의 극에 천국과 지옥을 설정했다. 그 때문에 일본에서 자국어로 옮기면서 '천국과 지옥'으로 변형시켰을 것으로 보인다. '지옥의 오르페우스'가 올바른 표현이다.다양한 음악들을 모아서 만든 작품을 지칭하는 '조곡(組曲)' 또한 '스위트(Suite)'를 일본식으로 번역·표기한 것이다. 우리는 '모음곡'으로 표기하면 알맞다. 조곡이라고 하면 '애도하는 음악'을 떠올릴 수 있는데, 평소 모음곡으로 쓰면 그와 같은 걱정은 붙들어 맬 수 있다. /김영준 인천본사 문화체육부장

2019-10-17 김영준

[김영준의 재밌는 클래식·(29)목신(牧神)]말러·드뷔시에 의해 소환된 '목신'

기존 작법 벗어나려던 '세기말'새로운 음악 창조 소재로 활용'목신'은 숲, 사냥, 목축을 관장하는 신이다. 그리스신화 속 판(Pan)과 로마신화에 등장하는 파우누스(Faunus)를 통칭한다. 농경시대를 거치며 목신을 표현한 문학과 미술작품은 르네상스 이후 계속해서 나왔다. 그에 반해 음악에선 드뷔시(1862~1918)의 '목신의 오후에의 전주곡'(1894년)과 말러(1860~1911년)의 '교향곡 3번'(1895년) 등 비슷한 시기의 두 작품에서 목신이 등장한다.두 작곡가의 작품관과 세기말이라는 시대적 배경이 낳은 걸로 볼 수 있다. 서양 음악계에선 바흐 이후 200년 가까이 이어진 기존의 작법에서 발전(확대) 혹은 결별하려는 움직임이 일었다. 두 작곡가는 목신을 소재로 새로운 음악을 창조하고자 했다.말러의 작품을 초·중·후기로 나눌 때, '교향곡 4번'까지를 초기로 본다. 초기 작품 중 정점에 있는 3번 교향곡은 6악장으로 구성됐으며, 연주시간은 100분에 달한다. 각 악장마다 부제를 달고 있는데, 여덟 대의 호른 합주로 시작해 큰북에 맞춰 장송행진곡으로 이어지는 1악장 도입부의 부제가 '목신이 깨어난다'이다. 여기서 목신은 자연을 의인화한 것이며 세계와 우주를 의미한다. "교향곡을 작곡한다는 것은 가능한 모든 기교를 이용해 하나의 세계를 창조해내는 것을 의미한다"고 했던 말러는 목신을 내세워 파격적 작품을 창조해 냈다.19세기 후반 프랑스에선 인상주의 미술과 상징주의 시(詩)가 유행했다. 드뷔시는 당대 미술과 시의 경향을 작곡의 자양분으로 삼았다. 기존의 작법과는 다른 방식을 택한 드뷔시는 옛 중세 선법과 음계, 1889년 파리 만국박람회에서 처음 본 자바음악 등으로 대체한 새로운 음악을 창안했다. 그의 출세작이자 최초의 인상주의 음악인 '목신의 오후에의 전주곡'은 그렇게 세상이 나왔다. 드뷔시는 이 작품의 초연 때 곡해설에서 "나는 말라르메의 시('목신의 오후')를 자유롭게 회화로 표현했다. 시 전체를 샅샅이 다룬 것은 아니고 하나의 배경으로 삼아 그 분위기를 그렸다"고 썼다.마침 인천시립교향악단(지휘·이병욱)이 오는 18일 오후 7시 30분 인천문화예술회관에서 '목신의 오후에의 전주곡'을 연주한다. 125년 전 출현한 위대한 인상주의 음악을 인천에서 확인할 흔치 않은 기회다. /김영준 인천본사 문화체육부장

2019-10-10 김영준

[김영준의 재밌는 클래식·(28)타계한 '블랙디바' 제시 노먼]격조있는 소프라노 '오페라의 검은 여왕'

밀라노 라스칼라·런던 코벤트가든 굴지의 무대 섭렵… 인권운동 앞장지난 1일 오전(한국시간) 우리 언론은 AP통신 등을 인용해 '오페라의 검은 여왕', '여자 파바로티'로 불린 미국의 세계적인 소프라노 제시 노먼의 타계 소식을 알렸다. 향년 74세.2015년부터 척수손상을 앓았던 노먼은 합병증인 패혈성 쇼크와 다기관 기능 부전으로 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영면에 들었다.1945년 미국 조지아주 오거스타에서 태어난 노먼은 어려서 피아노를 배우고, 교회 성가대 활동을 했다. 아프로-아메리칸 성악가의 시조격인 마리아 앤더슨과 흑인 가수로는 처음으로 1961년 메트로폴리탄 무대에서 주역을 노래한 레온타인 프라이스 같은 흑인 성악가의 오페라 아리아를 들으며 꿈을 키웠다. 워싱턴DC에 있는 하워드대에 장학금을 받고 입학한 노먼은 이후 피바디음악학교와 미시간대학에서 공부했다. 노먼은 대학 졸업 후 유럽으로 건너갔다. 1968년 독일 뮌헨 라디오 방송국이 주최한 국제 음악 콩쿠르에서 우승을 차지하면서 노력의 결과를 봤다. 우승자에게 주어지는 데뷔 무대로, 바그너의 '탄호이저'에서 엘리자베트 역을 맡아 호평받았다. 흑인 가수가 오페라 무대에 서는 것에 부정적인 시선도 있었지만, 그는 탁월한 실력으로 극복했다. 이후 밀라노 라스칼라와 런던 코벤트가든 등 세계 굴지의 오페라 무대들을 섭렵했다.주가를 올리던 1975년 돌연 무대를 떠나 재충전의 시간을 가진 노먼은 1980년 복귀해 한층 성숙하면서도 깊어진 목소리와 연기로 10여년 동안 최전성기를 구가했다. 노먼은 1983년 메트로폴리탄 개관 100주년 기념 공연으로 기획된 베를리오즈의 '트로이 사람들'의 주역으로 초대받았다. 프랑스와 독일 오페라의 드라마틱한 역에 특출했던 노먼은 이 공연을 통해 자신의 진가를 유감없이 발휘했다.노먼은 사회 문제에도 관심을 기울였는데, 루푸스 환자를 위해 재단을 만들고 집 없는 사람을 위해 후원회를 조직하는 등 흑인들의 인권을 보호하는 일에도 앞장섰다. 1989년 7월14일 파리 콩코르드 광장에서 열린 프랑스 혁명 200주년 기념식에서 부른 '라 마르세예즈'는 전 세계인들에게 감동을 선사한 바 있다.20세기 후반 캐슬린 배틀, 바버라 핸드릭스와 함께 '3대 흑인 소프라노'로 불린 노먼은 오페라 외에도 독일 가곡과 흑인 영가, 브로드웨이 뮤지컬의 히트곡과 재즈에 이르기까지 언제나 격조 있는 최고의 노래를 들려준 위대한 가수였다. /김영준 인천본사 문화체육부장

2019-10-03 김영준

[김영준의 재밌는 클래식·(27)자작자연(自作自演)]비례하지 않는 작곡 실력과 연주 능력

전문 연주자에 못미치는 게 통설라흐마니노프 등 손꼽히는 경우도1900년대 초 레코딩 기술이 크게 발달했다. 그때 활동하고 있던 후기 낭만주의 작곡가들이나 20세기 작곡가들은 자신의 작품을 연주해 음반으로 남길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었다. 오래 전 유명 작곡가들의 작품이 그들의 손에 의해 연주된 것을 감상할 수 있다는 것은 대단히 흥미로운 일이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자작자연이란 그리 놀랍고 별스러운 것은 아니다. 지금에서야 전문 연주자와 작곡가 사이에 어느 정도 구분이 생겼지만, 예로부터 많은 음악가가 연주(혹은 지휘)와 작곡을 병행했다. 녹음되지 못했을 뿐이다.바흐는 당대 최고의 오르가니스트 겸 합창 지휘자였다. 모차르트와 베토벤도 피아니스트이자 지휘자로 자신의 작품을 연주했다. 쇼팽과 리스트는 생전에 피아니스트로 더 큰 명성을 얻었으며, 이는 라흐마니노프까지 이어졌다. 또한 멘델스존과 말러, R. 슈트라우스는 탁월한 지휘자로 인정받았다.음악은 작곡가 자신이든, 전문 연주가이든 어느 누군가의 연주를 통해 재현된다. 이때 만일 창작자와 연주자가 동일인이라면 작곡 당사자인 만큼 완벽한 형태로 재현해내지 않겠느냐는 점에서 기대하게 된다. 애호가들은 기대와 호기심으로 자작자연 음반을 접했다. 라흐마니노프가 피아니스트로 자신의 협주곡을 연주하고 R. 슈트라우스가 자신의 교향시를 연주한 음반들은 연주력과 곡 해석 측면에서 하나의 모범을 보여줬다. 하지만 이러한 예외를 제외한다면 지금까지 통설은 '자작자연은 보잘 것 없다'는 쪽이다. 비록 자신이 만들어낸 창작물이어서 작품에 대해 가장 잘 알지만, 표현의 치밀함이나 섬세한 조형능력은 트레이닝을 거친 전문 연주자에 미치지 못했다. 충실한 작곡가의 역량과 달리 작품을 연주해 청중의 감동을 이끌어내기에는 역부족이었던 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0세기 최고 지휘자 반열에 오른 인물인 오토 클렘페러, 레너드 번스타인, 피에르 불레즈가 들려주는 자신의 작품들은 듣는 이의 기대에 부합하는 최고의 연주로 꼽힌다. 이 밖에도 스트라빈스키와 코플랜드(이상 지휘), 쇼스타코비치(피아노)가 연주하는 자작들도 '작곡가의 연주가 감상용이 되기에는 역부족'이라는 선입견을 걷어내게 하는 명곡들이다. /김영준 인천본사 문화체육부장

2019-09-26 김영준

[김영준의 재밌는 클래식·(26)기차]관현악으로 표현한 기관차의 질주

오네게르 '퍼시픽 231' 인상적라이히는 사이렌 등 소음 가미국내 첫 철도인 경인선이 지난 18일로 개통 120주년을 맞았다. 경인선은 1897년부터 노량진~제물포 간 33.2㎞ 구간에 건설됐다. 그 경인선을 달리는 기차는 120년 전인 1899년 9월 18일 오전 9시 첫선을 보였다. '화륜거(火輪車)'로 불린 육중한 모갈(Mogul·거물) 증기기관차가 희뿌연 증기를 내뿜으며 굉음과 함께 노량진을 떠나 제물포로 향했다. 서양 철도의 시원은 19세기 초로 거슬러 올라간다. 20세기에 들어서, 근대 문명과 진보의 상징인 철도를 소재로 한 흥미로운 음악과 에피소드도 많다. 근대 프랑스 음악의 최선봉으로 평가받는 '프랑스 6인조(Les Six)' 중 한 명인 작곡가 오네게르(1892~1955)는 1923년 기차의 기계적 소리를 관현악으로 표현한 '퍼시픽 231'을 발표했다. 어려서부터 기차를 좋아한 오네게르는 그 뿌리 깊은 애착을 '퍼시픽 231'로 표출했다. '3개의 교향적 악장' 중 제2곡에 배치된 이 곡은 300t이나 되는 거대한 기관차 '퍼시픽 231'이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해 차츰 속도를 높여 질주하는 모습을 표현했다. 기관차의 바퀴 배열에 의한 특유의 리듬, 불협화음을 통한 기계음의 묘사 등 근대적인 작곡 요소로 거대한 기관차를 효과적으로 드러냈다. 미국의 미니멀리즘 작곡가 라이히(1936~ )는 1988년 현악4중주곡 '서로 다른 기차(Different Trains)'를 작곡했다. 어린 시절 라이히는 LA에 사는 부모를 만나러 가기 위해 뉴욕에서 기차를 탔다. 유대인인 그는 기차를 타고 가면서 만일 자기가 유럽에 있었다면 홀로코스트 기차를 탔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 가정이 전쟁의 공포를 담아낸 섬뜩한 음악인 '서로 다른 기차'를 탄생시켰다. 현악기들의 반복되는 단순한 모티브와 리듬에 사이렌 소리 등 다양한 소음들이 가미됐다.체코의 작곡가 드보르자크(1841~1904)는 기차를 소재로 한 작품은 내놓지 않았지만, '기차 마니아'의 원조로 불린다. 드보르자크는 9세 때 프라하 인근의 완공된 철길로 쏜살같이 지나가는 열차를 보았다. 기관차의 육중한 외관, 빠른 속도, 지축을 뒤흔드는 굉음 등은 어린 드보르자크에게 음향적으로 영감을 줬을 것으로 보인다. 훗날 제자에게 반농담식으로 "기관차를 내가 발명할 수 있었다면, 내가 쓴 교향곡 전부를 포기해도 좋을 텐데"라고 한 말은 유명하다. /김영준 인천본사 문화체육부장

2019-09-19 김영준

[김영준의 재밌는 클래식·(25)어린이 눈높이 음악]인물·동물 악기로 묘사 '피터와 늑대'

러 동화 바탕 프로코피예프 작품'청소년을 위한 관현악'과 쌍벽러시아 작곡가 프로코피예프(1891~1953)는 러시아 동화를 바탕으로 직접 쓴 이야기와 어우러지는 음악 '피터와 늑대, Op 67'을 1936년에 완성했다. "어느 날 아침, 호기심 많은 소년 피터는 문을 열고 집 앞의 넓고 푸른 목장으로 나갔습니다. 피터가 처음 만난 친구는 나뭇가지 위에 앉아 지저귀는 작은 새로, 즐겁게 노래하고 있습니다…."내레이터의 해설로 시작하는 '피터와 늑대'는 회색 늑대를 사로잡은 용감한 소년 피터의 이야기를 줄거리로 한다. 프로코피예프는 간결한 문장과 음악으로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려준다.작곡자는 음악을 듣는 어린이들을 위해 등장인물과 동물을 성격에 맞춰 각각의 악기로 묘사했다. 주인공 피터는 현악합주의 울림으로 표현되며,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는 화사한 음색의 플루트, 늑대에 잡아먹히는 오리는 근심 어린 모습을 연상시키는 오보에, 고양이는 스타카토(음을 짧게 끊어서 연주하는 기법)로 이어지는 클라리넷, 할아버지는 바순, 늑대는 호른을 중심으로 한 당당한 금관 악기의 울림, 사냥꾼은 행진곡과 함께 나타나며, 총소리는 팀파니에 의해 표현됐다.순수 음악에 흥미를 잃기 쉬운 어린이들을 클래식으로 이끄는 마력을 지닌 '피터와 늑대'는 브리튼(1913~1976)의 '청소년을 위한 관현악 입문'과 함께 가장 뛰어난 어린이를 위한 음악으로 평가받는다.영국 작곡가 브리튼의 '청소년을 위한 관현악 입문, Op 34'는 1945년 영국 정부가 만든 교육영화 '관현악단의 악기'의 음악으로 작곡됐다. 바로크 시기 영국을 대표했던 작곡가 헨리 퍼셀의 곡에서 모티브로 삼은 이 작품의 부제는 '퍼셀 주제에 의한 변주와 푸가'이다. 주제부 연주에 이어 13곡의 변주곡에서 각각의 악기를 소개하며, 푸가에서 모든 악기가 차례로 등장해 다 함께 연주하며 마무리된다. 악기를 설명하는 해설을 붙여 연주할 수 있도록 했다. 두 작품이 함께 수록된 음반들이 많은데, 특히 동화를 구연하는 '피터와 늑대'의 경우 화제의 인물을 해설자로 등장시켜 음반 판매에서 성공을 노리는 경우가 많았다. 레너드 번스타인과 앙드레 프레빈 등은 지휘와 해설을 같이 했으며, 글램록의 대부 데이비드 보위와 가수 스팅, 소프라노 조수미 등이 해설자로 참여해 화제를 모은 바 있다. /김영준 인천본사 문화체육부장

2019-09-05 김영준

[김영준의 재밌는 클래식·(24)브람스-차이콥스키]독일음악 3B vs 발레의 최고봉

'브' 모델로 삼고 극복 노력 '차'러시아 교향·협주곡에도 큰 획 브람스(1833~1897)는 바흐, 베토벤과 함께 독일 음악의 '3B'로 꼽힌다. 세 작곡가는 자신들이 자부했던 '위대한 독일 정신'을 담은 최고의 작품들을 선보였다.극장 관현악단의 더블베이스 주자였던 아버지에게서 기초를 배운 브람스는 일찍부터 음악적 재능을 드러냈다. 가정 형편이 좋지 않았기 때문에 10대 초·중반부터 술집과 식당, 사교장 등에서 피아노를 연주했다.브람스는 17세 때 헝가리의 바이올리니스트 레메니이를 알게 되었다. 3년 후 둘은 첫 연주 여행을 떠났다. 이때 브람스는 레메니이의 친구인, 헝가리의 위대한 바이올리니스트 요아힘과 친교를 맺었다. 헝가리 음악과 집시음악의 감수성을 익힌 브람스는 1869년 스물한 개의 '헝가리 춤곡'을 완성했다. 1868년 어머니의 죽음 앞에 바친 대작 '독일 레퀴엠'을 잇는 걸작이 탄생한 것이다. '헝가리 춤곡'은 두 사람이 한 대의 피아노로 연주하도록 작곡됐다. 그중 브람스가 1번과 3번, 10번을 관현악으로 편곡했고, 드보르자크를 비롯해 후대 작곡가들이 나머지 곡에도 오케스트라 버전을 더했다. 에너지 넘치는 헝가리의 민속 선율이 브람스에 의해 불후의 명작으로 다시 태어났다. 브람스는 1876년 '베토벤의 10번 교향곡'으로 불리는 '교향곡 1번'을 작곡했으며 이후 걸작들을 줄줄이 발표했다.차이콥스키(1840~1893)는 어려서부터 음악과 문학에서 재능을 보였다. 페테르부르크의 법률학교에 다녔으며, 졸업 후 법무성에 근무한 차이콥스키는 1862년 공무원 생활을 접고 음악에 전념했다. 브람스 앞에는 바흐와 베토벤을 잇는 독일 음악의 전통이 있었지만, 차이콥스키 앞에는 러시아의 광활한 대지만이 펼쳐져 있었다. 독일 낭만주의의 영향을 받아 러시아 음악이 새롭게 부상하던 때, 차이콥스키는 러시아와 서유럽의 음악을 유기적으로 결합했다. 차이콥스키를 '러시아 5인조'로 대표되는 국민악파로 분류하지 않는 것은 이 때문이다. 그는 '5인조'가 외면했던 협주곡들을 통해 바이올린과 피아노의 연주 영역을 확대했으며, 교향곡을 통해선 낭만주의의 절정을 노래했다.브람스는 변방의 차이콥스키를 크게 의식하지 않았지만, 차이콥스키는 브람스를 자신의 모델이자 극복 대상으로 삼았다. 차이콥스키는 브람스가 작곡하지 않은 장르인 오페라와 발레 음악에 다가갔다. 차이콥스키는 자신의 3대 발레 음악인 '백조의 호수', '잠자는 숲 속의 미녀', '호두까기 인형'으로 19세기 발레의 최고봉이 되었다. /김영준 인천본사 문화체육부장

2019-08-29 김영준

[김영준의 재밌는 클래식·(23)베르디 vs 바그너]19세기 오페라의 쌍두마차

伊 노래-獨 드라마에 초점 맞춰두 작곡가 작품세계 확연히 달라베르디(1813~1901)는 이탈리아를, 바그너(1813~1883)는 독일을 각각 대표하는 오페라 작곡가이다. 19세기 오페라의 쌍두마차라고 할 수 있는 두 사람은 탄생 연도와 활동 시기가 일치한다. 그러나 개인적 성격과 취향, 작품세계는 확연히 구별된다.일반적으로 이탈리아 오페라는 노래를 중시한다. 그래서 가수 중심의 오페라로 불린다. 드라마는 노래를 묶어내는 수단으로 작용하기 때문에, 독자적인 문학작품으로서의 가치는 떨어진다. 반면, 문학과 연극의 전통이 강한 독일의 오페라는 드라마의 완성도에 비중을 둔다. 노래만큼이나 기악 부분을 중시한다. 이러한 요소들은 두 작곡가의 작품에 여실히 드러난다. 바그너는 대단한 카리스마의 소유자였으며, 혁명가였다. 그는 자신의 저서 '미래의 예술작품'(1849년)을 통해 "분리된 예술 장르를 하나의 종합 예술로 만드는 것이야말로 혁명 예술"이라고 밝혔다. 이러한 이론을 기반으로 '음악극(Musikdrama)'을 창안했다. 노래가 지배하고 대본은 주로 음악을 위한 윤곽의 역할만 하는 전통적 오페라와 달리 '음악'과 '극'의 일치와 조화를 꾀한 거였다. '음악극'의 면모는 '트리스탄과 이졸데'(1859년)와 '니벨룽의 반지' 4부작(1854~1874년), '파르지팔'(1882년)에서 여실히 드러냈다.베르디는 혁명가가 아니었다. 바그너처럼 멀리 보고 전진한 것이 아니라 시간이 흐르면서 자연스럽게 변화했다. 베르디의 작품을 관통하는 '휴머니즘'은 더욱 깊어졌으며, 극의 완성도도 높아졌다. 수년 전 한 해외 매체는 세계적으로 가장 빈번하게 공연되는 오페라의 순위를 발표했다. 베르디의 '라 트라비아타'(1853년)가 1위였으며, 비제의 '카르멘'과 푸치니의 '라보엠' 등이 뒤를 이었다. '리골레토'(1851년)와 '아이다'(1871년) 등 베르디의 또 다른 작품도 10위권 안에 들었다. 멜로디의 아름다움과 호소력 짙은 이탈리아 오페라가 더 자주 공연된다는 얘기다.베르디는 생전에 이탈리아 오페라와 독일 오페라의 차이를 예리하게 지적하면서 둘이 라이벌 관계에 있음을 밝혔다. "독일이 바흐의 아들인 것은 행운이다. 팔레스트리나(16세기 르네상스 최고의 작곡가)의 후예인 우리도 위대한 전통을 갖고 있다. 독일 음악은 교향악적이고 처음부터 구조와 화성에 주목한다. 이탈리아 음악의 핵심은 선율이다. 팔레스트리나의 후손인 우리가 바그너를 모방한다면 음악의 범죄를 저지르는 일이다." /김영준 인천본사 문화체육부장

2019-08-22 김영준

[김영준의 재밌는 클래식·(22)원전(原典)음악]옛 음악 원형 재현 '순수성 되살리기'

바로크 등 '그 시대 악기'로 연주약동하는 템포·사운드 신선 매력"원전음악이 도대체 뭐야?""옛날 악기로 연주하는 거 있잖아. 그것도 다 유행이어서 곳 사라질 거래."2000년대 초반 한 연주회장에서 들었던 옆 청중 일행의 대화다. 옛날 악기로 연주한다는 말은 맞았고, 유행이 사라질 거라는 얘기는 틀렸다. 원전(原典)음악은 1980년대 중반 국내에 소개되었다. 2000년 이후 원전음악 연주단체의 내한 연주회가 간헐적으로 이뤄지고 있으며 완성도가 높은 음반도 수월하게 접할 수 있게 됐다. 국내 자생 연주단체도 활동을 하고는 있지만 유행으로까진 번지지 못했다. 그렇다고 사라지지도 않았다.원전음악은 'Authentic Music'을 번역한 것으로, 르네상스와 바로크, 고전주의 등 옛 음악을 그 시대의 악기로 연주하는 것을 말한다. 정격(正格)음악으로도 불린다. 21세기엔 연주에 관한 연구나 해석에 의미를 부여해 '음악'보다는 '연주(Performance)'로 표기하는 경향이 짙어졌다. 유럽에서 원전연주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서스톤 다트, 니콜라우스 아르농쿠르 등에 의해 시작됐다. 이어서 존 엘리엇 가디너, 크리스토퍼 호그우드, 프란스 브뤼헨, 구스타프 레온하르트, 안너 빌스마 등의 노력으로 1980년대 이후 대중화에 성공했다.원전연주가들은 악기와 연주법이 시대에 따라 변한다는 점에 주목했다. 근대식 악기로 연주하는 옛 음악이 아닌, 옛 음악 본래의 순수성을 되살리자는 거였다.원전연주가들은 관악기는 키와 밸브가 달리지 않은 19세기 초반 이전의 악기를, 현악기는 19세기 후반에 등장한 금속제 현 대신 양의 창자를 꼬아 만든 '거트'를 사용했다. 현대 관점으로 봤을 때 연주법은 더 어렵고 음량은 작아졌다. 또한, 이들은 작곡가가 필사한 악보나 필사본에 가장 가까운 원형을 재현해 연구했다. 이를 통해 연주 속도와 강약, 비브라토(음을 떨어주는 기법) 등도 철저한 고증을 거쳤다. 부드러우면서도 순수한 소리, 작위적이지 않은 템포에 많은 사람이 매료됐다.원전연주가들의 원본 악보와 음향 탐구는 음악계 전반의 악보 해석과 연주에도 영향을 끼치고 있다. 원전연주가들은 과거의 음악을 미래지향적으로 해석하고 표현하는 선봉에 서 있다고 할 수 있다. 실제로 듣는 원전음악은 약동하는 템포 설정에 원전악기들의 신선한 사운드가 어우러져 현대인의 감성에 잘 어울린다. 이들의 연주에서 종종 만날 수 있는 '파격'(학구적인 악보 연구를 통한) 또한 미래를 지향한다. /김영준 인천본사 문화체육부장

2019-08-15 김영준

[김영준의 재밌는 클래식·(21)표절(剽竊)Ⅱ]표절 앞에 '내로남불'이었던 로시니

여러 작품 섞어낸 제자에 비아냥본인은 마감일 코앞 베끼기 빈번르네상스와 바로크 시기, 궁정과 교회에 고용돼 창작활동을 했던 음악가들의 작품은 고용주의 소유였다. '작곡가=작품의 주인'이라는 인식은 베토벤 시대에 와서야 자리 잡았다. 18세기 후반부에 들어서면서 작곡가들은 산업도시에서 주로 작품을 발표했다. 이때부터 형성된 작곡가의 '자기 작품'이라는 개념은 예술적 의지의 표현이었다. 또한 지적 재산권 개념의 등장이었다.그러나 19~20세기에 와서도 자신 혹은 남의 작품에 대한 도용이 없어진 것은 아니었다. 영감을 받은 선대 작곡가의 작품 일부분을 자신의 작품에 배치하는 경우는 꾸준히 이어졌다. 이는 특정 영화의 장면이나 대사를 인용해 해당 작품과 연출자에 대한 존경을 표시하는 '오마주(Hommage)'와 유사성을 띤다. 또한 선배들의 음악이나 민요 등의 특정 주제를 활용한 변주곡과 광시곡들도 탄생했다. 몰래 가져다 쓰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이탈리아의 작곡가 로시니(1792~1868)는 '표절'과 관련한 일화를 다수 만들었다. 어느 날 로시니는 제자가 작곡한 오페라 '사막'의 초연을 봤다. 공연 후 로시니는 제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좀 전에 본 오페라 말이야, '사막'이 아니라 '네거리'더군. 알 만한 사람(작곡가)들은 다 만나게 되던 걸." 여러 작곡가의 작품들을 요소요소에 도용한 것을 힐난한 거였다. 이처럼 남의 표절을 지적했던 로시니는 정작 자신의 표절에 대해선 관대했다. 깊은 사색이나 고뇌 끝에 작품을 만들어 내는 스타일이 아니었던 로시니는 출판업자나 흥행사가 정한 마감 일에 이르러서야 쉽게 작곡했다. 창작력이 떨어지면, 자신이든 남의 작품이든 도용도 빈번했다. 우리 귀에 익숙한 오페라 '세비야의 이발사' 서곡은 오페라 '영국 여왕 엘리사베타'와 '파르미라의 아우레리아노', '너무한 오해'에서도 서곡으로 쓰였다.또한 로시니는 '세비야의 이발사'에 하이든의 '현악 4중주 46번'의 일부분을 갖다 썼다. '면도칼'이라는 부제가 붙은 하이든의 작품이 도용된 것을 눈치챈 친구가 비난하자, 로시니는 "이발사가 면도칼을 좀 썼기로 문제 될 게 있나"라며 익살을 부렸다고 한다. 로시니의 낙천적 음악관은 '표절'과 관련된 일화들에서도 잘 드러난다. 로시니는 현재의 법 기준으로 판단한다면 엄연한 범죄자였다. /김영준 인천본사 문화체육부장

2019-08-08 김영준

[김영준의 재밌는 클래식·(20)표절(剽竊)Ⅰ]서로 베끼면서 기반 다진 바로크시기

당시엔 '고유 창작품' 개념 없어바흐·헨델도 숱하게 편곡·인용"클래식에도 표절이 있을까?" 답은 "그렇다"이다. 18세기 중반 바로크 시기까지, 특정 작곡가의 '고유한 창작품'이라는 개념은 존재하지 않았다. 당시 작곡가들은 궁정과 교회에서 열리는 각종 행사에서 연주될 곡을 만들었다. 이처럼 궁정과 교회에 고용돼 창작활동을 했던 작곡가들의 작품은 행사 후에는 궁정이나 교회의 문서고로 들어갔다. 작품은 작곡가의 소유가 아닌 고용자의 소유였던 거였다.사정이 이렇다 보니 작곡가들은 수시로 열리는 행사에 맞춰 새 작품을 쓸 때 자신의 이전 작품이나, 다른 이의 작품을 다시 쓰고는 했다. 작곡가끼리의 표절이 공공연하게 있었던 거였다. 하지만 요즘의 표절 기준에 대입해서 본다면, 바흐와 헨델은 도덕적 비난은 물론이고 법적 책임까지 져야 할 정도로 심각했다. 바흐의 작품에 이바지한 작곡가로 비발디를 비롯해 파헬벨, 프레스코발디, 북스테후데 등 많은 이들이 거론된다. 바흐는 또 자신의 이전 작품을 편곡해 숱하게 재활용했다. 바흐의 대작 '마태 수난곡'이나 '요한 수난곡'의 일부는 이전에 발표했던 칸타타들이다.헨델은 '표절의 제왕'이라 할 만큼 남의 것 베끼기에 거리낌이 없었다. 3막으로 구성된 오페라 '무지오 스케볼라'의 경우 3막만 헨델의 작품이며, 1막은 아마데이, 2막은 보논치니의 작품을 그대로 옮겨 적었다. 헨델은 오라토리오 '메시아'를 단 3주 만에 완성했다. 몇몇 전기 작가들이 "경건한 신앙심(하늘에서 받은 영감)으로 헨델이 3주 만에 대작을 완성했다"고 기술하면서 더욱 유명세를 탔다. 하지만 후대의 전문가들은 순수한 창작 시간이 아닌 다른 이들의 작품을 더러 인용하는 과정이었을 것으로 의심했다. 20세기 전반기의 음악학자 앨프리드 아인슈타인은 "헨델은 도둑질을 통해 뭔가를 만든 사람이다. 그를 거치면 돌이 금이 된다"고 평가했다.이처럼 바로크 시기 작곡가들은 서로의 작품을 '표절'하면서 음악사의 기반을 다졌다. 18세기 후반부를 지나 19세기에 진입하면서 소위 자본주의 시대를 살아가는 '개인 예술가'가 탄생했다. 자기 작품에 대한 의식 또한 강화됐다. 작곡가는 악보를 소중히 취급했으며, 일일이 작품료와 인세를 챙겼다. 이때부터 표절은 인용이 아닌 범죄로 인식되었다. /김영준 인천본사 문화체육부장

2019-07-25 김영준

[김영준의 재밌는 클래식·(19)리베르탱고]춤이 아닌 감상을 위한 '탱고'

'아르헨티나 작곡가' 피아졸라바로크 기법 가미 새음악 내놔아르헨티나의 반도네오니스트이자 작곡가 아스토르 피아졸라(1921~1992)는 1974년 '리베르탱고'를 발표했다.가장 널리 알려진 피아졸라의 작품인 '리베르탱고'는 춤곡인 고전 탱고가 아니라 콘서트장에서 감상하는 '새로운(Nuevo) 탱고'를 상징하는 곡이다. 탱고는 19세기 후반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의 항구 동네 술집에서 생겨났다. 이민자들이 많이 살던 곳이다. 어린 피아졸라는 아버지가 사준 반도네온으로 탱고를 연주했다. 피아노도 배운 그는 10대 후반부터 음악 활동을 시작했다. 알베르토 히나스테라의 제자가 되면서 작곡을 익혔다. 피아졸라는 탱고 편곡과 연주로 생계를 이어가면서 한편으로는 교향곡과 소나타 등을 작곡했다. 이 시기의 그는 허름한 카바레에서 반도네온을 연주하는 자신의 모습을 부끄럽게 생각했다. 작곡에 매진한 이유가 됐다. 1953년 발표한 교향곡 '부에노스아이레스'로 파비엔 세비츠키 작곡 대회에서 우승하면서 1년 동안의 파리 유학길에 오른 피아졸라는 파리음악원에서 작곡과 교수 나디아 블랑제를 만났다. 블랑제는 피아졸라가 제출한 작곡 과제에 대해 "이 부분은 스트라빈스키, 이 부분은 버르토크, 여기는 라벨, 어디에도 피아졸라는 없다"고 평가했다. 블랑제는 제자에게 어떻게 살았고, 무엇을 연주했는지 과거를 캐물었다. 피아졸라는 창피함을 무릅쓰고 "카바레에서 반도네온을 연주했다"고 밝혔다. 탱고를 연주해 보라는 스승 앞에서 피아졸라는 자작곡 '승리'를 선보였다. 연주 후 블랑제는 이같이 말했다. "아스토르, 이게 바로 너야. 탱고를 절대로 그만 둬서는 안돼."고국으로 돌아온 피아졸라는 바로크 시기의 모음곡(Suite) 양식과 작곡 기법을 탱고에 가미했다. 피아졸라의 '새로운 탱고'가 태동하는 순간이다. 그러나 탱고는 춤을 위해 존재한다는 관념에서 벗어나지 못한 아르헨티나 사람들은 피아졸라의 음악을 외면했다. 그로 인해 수입은 변변치 않았다. 하지만 피아졸라는 '고인 물은 썩듯이, 탱고도 진화해야 한다'며 의지를 꺾지 않았다. 탱고를 작은 오페라 형태로 확장한 걸작 '부에노스아이레스의 마리아'를 비롯해 3천여 곡을 남긴 피아졸라는 1990년 뇌출혈로 쓰러졌다. 피아졸라는 1992년 3월 11일 71번째 생일을 기념해 아르헨티나의 방송사들이 앞다퉈 편성한 프로그램들을 통해 자신의 '새로운 탱고'를 들었다. 그리고 4개월 뒤 눈을 감았다. /김영준 인천본사 문화체육부장

2019-07-18 김영준

[김영준의 재밌는 클래식·(18)말러의 시대]사후에 인정받은 '교향악 절대기준'

기존 체계 탈피 시도 외면당해동화 요소·폭력등 골고루 담겨"나의 시대는 반드시 올 것이다." 오스트리아의 유대계 작곡가 말러(1860~1911)가 생전에 남긴 이 말은 완벽하게 실현됐다. 20세기 후반 이후, 클래식을 얘기할 때 말러는 피해갈 수 없는 존재가 됐다. 전 세계 지휘자와 오케스트라는 말러 교향곡의 연주 성과에 의해 평가받는다. 말러가 교향악의 절대 기준으로 떠오른 것이다.1889년 초연된 '교향곡 1번'은 철저히 무시당했다. 기존 교향곡 체계에서 벗어나려는 대담한 시도에 아무도 호응하지 않았다. 생전에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던 그의 작품은 사후 50년 가까이 지나서 평가받기 시작했다. 해외에서는 1960년대, 우리는 1990년대에 들어서면서다.'후기 낭만주의'로 분류되는 말러의 음악에는 동화적인 요소, 아름다움과 모성애에 대한 동경, 전쟁과 폭력에 관한 묘사 등이 골고루 담겼다. 세기말의 염세적이며 퇴폐적 풍조와 어우러지기도 한다. 전반적으로 탐미적이고 음울한 분위기를 자아낸다는 평가를 받는 이유이다. 당대 최고 지휘자 중 한 명이기도 한 그는 대편성 오케스트라에 의한 풍부한 음향과 함께 매우 정제된 실내악적 음향으로 작품의 미묘한 분위기를 극대화 시킨다. 말러의 음악에는 다양한 매력적인 요소들이 있으며, 그만큼 열혈팬들도 많다.말러를 테마로 1999년 국내 인터넷 포털에 문을 연 한 카페는 아직도 활발하다. 올해가 20주년이다. SNS의 발달로 오래된 다른 인터넷 커뮤니티가 쇠퇴했지만, 이 카페는 11일 현재 2천200명의 회원이 가입해 있으며, 하루 평균 100명 정도가 꾸준히 카페를 찾고 있다. 카페는 정기적으로 서울에서 음악 감상회를 여는 등 말러 음악에 대한 매력과 묘미를 공유하고 있다. 월간 '객석'의 편집장을 지낸 박정준씨는 말러의 음악을 '고요의 바다'(달의 표면에 있는 달의 바다)로 지칭했다. 그는 말러의 마지막 교향곡인 '9번' 1악장에 밀려왔다가 다시 밀려가는 듯한 악상의 움직임이 보인다고 했다. 말러는 교향곡을 통해 '하나의 우주'를 구현하려고 했다. /김영준 인천본사 문화체육부장

2019-07-11 김영준

[김영준의 재밌는 클래식·(17)'카르멘']비제의 하층민 이야기 '사실주의 오페라 효시'

기존 신화·귀족서 탈피 여공 다뤄초연 '혹평' 반면 작곡가들은 '찬사'19세기 중반 프랑스에선 구노와 마스네의 그랑 오페라, 오펜바흐의 오페레타, 베르디의 이탈리아 오페라가 유행했다. 같은 시기 독일에서는 바그너의 '음악극(Musik Drama)'이 뿌리를 내리고, 유럽으로 퍼져나가고 있었다.파리 태생으로, 파리음악원을 나온 비제(1838~1875)는 오페라 '진주조개잡이'(1863), '페르트의 아름다운 아가씨'(1867) 등을 발표했다. 작품성을 인정받으며 이름을 알렸지만, 흥행에서는 실패했다. 빈곤한 생활 속에서 슬럼프에 빠진 비제는 몇 개의 오페라를 작곡하다가 포기하고 말았다. 완성에 이르지 못하지만, 당시 작곡한 음악들은 이후에 나오는 오페라 '카르멘'을 비롯해 극 부수음악 '아를르의 여인' 등의 모티브가 되었다.비제는 1873년 '카르멘'의 작곡을 시작했다. 메리메의 동명 소설에 의한 이 작품은 1875년 초에 완성됐으며, 그해 3월 파리의 오페라코미크 극장에서 초연됐다. 혹평이 쏟아졌다. "바그너와 베르디의 예술적 성과가 공존하는 시대에 이 같은 저질 이야기를 다뤘다는 사실에 놀라움을 금할 수 없다", "오페라계의 쓰레기" 등의 표현마저 나왔다. 악평 속에 평소 건강이 좋지 않았던 비제는 '카르멘' 초연 3개월 후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 불과 37세의 나이였다.'카르멘' 이전, 오페라는 화려한 신화나 귀족들의 호사스러운 생활을 보여주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카르멘'에는 담배공장 여공과 집시, 사병 계급의 군인과 밀매업자 등이 나온다. 스페인 하층민의 어두운 삶을 배경으로 '사랑'과 '죽음'이라는 두 가지 주제를 강하게 대비시켰다.동시대 작곡가들은 이 작품에 최고의 찬사를 보냈다. 재공연에서는 청중의 평가도 호평으로 돌아섰다. 청중의 격렬한 찬사 속에 '카르멘'은 오페라코미크에서 무려 48회에 이르는 공연을 이어갔다. 1876년 오페라코미크에서 작품을 접한 차이콥스키는 "모든 면에서 걸작인 '카르멘'은 세계에서 가장 인기 있는 오페라가 될 것임을 확신한다"고 평가했다. 생상스, 브람스, R.슈트라우스, 드뷔시 등도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하층민의 삶을 사실적으로 그린 비제의 '카르멘'은 사실주의(베리스모) 오페라의 효시로 불린다. 마스카니와 푸치니의 주옥같은 작품을 낳았다는 평가를 받는 '카르멘'은 현재 세계에서 가장 인기 있는 오페라 중 하나다. /김영준 인천본사 문화체육부장

2019-07-04 김영준

[김영준의 재밌는 클래식·(16)플라시도 도밍고]60년간 4천회 공연 '오페라의 제왕'

고령 무색 "쉬면 녹슬 것" 의지테너서 바리톤으로 바꿔 '활약' 젊은 시절 반짝 빛나는 스타는 많지만, 오랜 세월에 걸쳐 꾸준히 사랑을 받는 스타는 많지 않다. 누구나 나이가 들면 전성기의 기량을 보여주지 못하고 후배들에 자리를 내주게 된다. 몸이 악기인 성악가의 경우 다른 음악가들에 비해 기량의 퇴조는 빠르다. 그런 점에서 여전히 세계 오페라 무대를 누비는 스페인 출신 성악가 플라시도 도밍고(78)는 독보적이다.2008년 영국의 권위 있는 음악 저널인 'BBC뮤직매거진'의 평론가들은 투표를 통해 '역사상 가장 위대한 테너'로 도밍고를 선정했다. 스리 테너의 일원이었으며 오랜 라이벌이었던 루치아노 파바로티뿐만 아니라 엔리코 카루소와 베니아미노 질리, 마리오 델 모나코 등 전설적인 테너들의 평판도 넘어선 것이다. 그즈음 도밍고는 테너로서 고음이 흔들리는 부침을 겪고 있었다. "그만 품위 있게 은퇴해"라고 평론가와 동료들은 이야기했다. "쉬면, 녹이 슬 것(When I rest, I rust)"이라며 의지를 꺾지 않은 도밍고는 2009년부터 바리톤으로 무대에 오르고 있다. 전성기의 테너 시절에 비하면 성량이 줄었지만, 바리톤으로서 깊이 있는 음색을 선보이고 있다.도밍고는 지난 4월 베르디의 오페라 '시몬 보카네그라'의 주역으로 오스트리아의 빈 슈타츠오퍼 무대에 올랐다. 그의 4천 번째 오페라 공연이었다. 4천 회는 레코딩을 뺀 순수 무대 출연 횟수이다. 18세이던 1959년 멕시코시티에서 공식 데뷔한 이래, 60년 만이다. 도밍고는 그동안 테너 132개와 바리톤 18개를 합한 150개의 오페라 배역을 소화했다. 파바로티는 이탈리아 오페라에 한정된 30여 개의 배역을 맡았으며, 20세기를 풍미한 테너 카루소와 소프라노 마리아 칼라스가 생전에 맡은 배역은 각각 60개와 50개였다.도밍고는 지난 5월 미국 LA 오페라와 독일 베를린 슈타츠오퍼 무대에 올랐다. 이달 초엔 드레스덴 잼퍼오퍼 무대에 섰다. 많은 성악가들이 성대 보호를 위해 오페라 출연 횟수를 조절하고 나이가 든 뒤엔 힘이 덜 드는 콘서트 위주로 활동하는 것과는 사뭇 다르다. 도밍고에게 오페라는 늘 활동의 중심이었다. 영화배우와도 같은 외모와 연기력에 드라마틱한 가창력을 겸비한 그는 반세기 넘게 오페라 팬들을 매료시켰다. 이탈리아와 독일 오페라 모두에 정통한 거의 유일한 테너였던 도밍고에 따라붙는 '오페라의 제왕'. 매우 타당한 수식어다. /김영준 인천본사 문화체육부장

2019-06-27 김영준

[김영준의 재밌는 클래식·(15)'레퀴엠']시대별로 변화 '죽은 자를 위한 미사곡'

장례 기도문 입당송 문장서 유례20세기 들어 연주회용으로 작곡레퀴엠(Requiem)의 정식 명칭은 '죽은 자를 위한 미사곡'이다. '진혼곡(鎭魂曲)'이라고도 한다. 많은 작곡가들이 살아남은 자의 슬픔을 어루만져주기 위해 레퀴엠을 작곡했다. 수많은 레퀴엠 중 프랑스 작곡가 포레(1845~1924)의 작품이 매우 아름다운 수작으로 꼽힌다. 이 작품은 죽음의 고통이나 절망감, 비통함 등의 정서를 걷어내고 정갈한 슬픔만을 담았다는 평가를 받는다.포레의 레퀴엠에서 슬픔과 함께 아름다움과 따스함도 느낄 수가 있는데 이는 작품의 색다른 구성에 기인한다. 입당송과 키리에, 봉헌송, 상투스 등의 전반부 배치는 다른 레퀴엠들과 비슷하다. 하지만 진노의 날이 빠졌다.이는 죽음(심판)에 이른 인간의 비극과 그로 인한 두려움을 되새기지 않으려는 작곡자의 의도로 읽힌다. 작품의 후반부는 자비로운 예수, 신의 어린 양, 자유롭게 하소서, 천국에서 등으로 구성됐다. 위안을 주는 기도문(가사)만을 택해서 배치했다.이 같은 구성과 어우러진 음악적 아름다움은 포레의 레퀴엠을 슬프면서도 정화의 효과가 큰 작품으로 자리잡게 만들었다.레퀴엠은 본래 '안식'을 뜻한다. 그렇다면 레퀴엠이 어떻게 '죽은 자를 위한 미사곡'을 의미하게 되었을까. 가톨릭 미사 중 장례 미사 기도문의 가장 처음에 놓인 입당송(Introitus)의 첫 문장은 '그들에게 영원한 안식을 주소서(Requiem aeternam dona eis)'이다. 그 첫 단어인 레퀴엠으로 '진혼 미사(곡)' 혹은 '죽은 자를 위한 미사(곡)'를 일컬어 온 습관이 굳어진 것이다.음악사에서 르네상스를 지나 초기 바로크 시기인 1620년까지 70여개의 레퀴엠이 작곡됐다. 이때까지의 레퀴엠은 기악 반주가 없는 아카펠라 스타일의 다성음악이었다. 이후 1750년까지 320여개의 레퀴엠이 발표됐다. 고전주의 시기로 진입하면서 왕족이나 귀족을 비롯해 유명 인사의 장례식을 위한 위탁 작곡이 늘어난다. 고섹과 케루비니의 작품을 비롯해 미완성작인 모차르트의 레퀴엠 등이 유명하다. 낭만주의 시기엔 종교음악 장르가 쇠퇴하지만, 삶과 죽음이라는 '근원의 낭만성'을 드러내는 레퀴엠에 많은 작곡가들이 빠져들었다. 1825~1910년에 620여개의 레퀴엠이 작곡됐다. 이 중 베를리오즈와 베르디의 레퀴엠은 그랜드 오페라의 개념이 접목돼 장대한 규모로 만들어졌다. 20세기 중·후반에 레퀴엠은 자유로운 텍스트를 취하거나 아예 가사 없이 작곡되었다. 가톨릭의 전례용이 아닌 연주회용으로 작곡된 것이다. 1910년 이후 작곡된 레퀴엠은 400여곡에 달한다. /김영준 인천본사 문화체육부장

2019-06-20 김영준

[김영준의 재밌는 클래식·(14)쇼스타코비치 '레닌그라드']포화속에서 탄생한 '교향악적 레퀴엠'

전쟁 3부작 첫번째 80분짜리 대곡시민 150만명 사망한 포위전 다뤄"내 교향곡은 대부분이 묘비다." 러시아의 작곡가 쇼스타코비치(1906~1975)가 죽기 직전에 남긴 말이다. 쇼스타코비치는 러시아 혁명을 어린 시절에 겪었고, 제2차 세계대전도 지켜봤다. 예술가의 창작물에 관여했던 옛 소련의 사회주의 체제에서, 발표하는 작품에 따라 '영웅' 음악가로 대접받으며 훈장을 받지만 이내 '반동'으로 낙인 찍혀 죽을 고비도 수차례 넘겼다. 그는 자신의 경험을 고스란히 교향곡에 녹여냈다. 그로 인해 쇼스타코비치의 교향곡들은 전쟁이나 혁명을 소재로 한 것들이 많다. 이들 작품에는 민중의 피 냄새가 짙게 배어 있다.쇼스타코비치의 '교향곡 7번, 레닌그라드'는 서양 전쟁사에서 가장 길고 파괴적인 포위전으로 꼽히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레닌그라드(현 상트페테르부르크) 포위전' 속에서 탄생했다.1941년 6월 히틀러 정권은 소비에트를 침공했다. 이들은 9월 레닌그라드의 마지막 육상 통로(보급로)를 차단했다. 이후 1943년 1월까지 2년 반 동안 이어진 포위전에서 레닌그라드 시민 250만명 중 150만명이 폭격과 굶주림, 질병으로 죽었다.이곳에서 나고 자란 작곡가 쇼스타코비치는 포화가 빗발치는 절망 속에서 일곱 번째 교향곡을 쓰기 시작했다. 당시 쇼스타코비치의 작곡 소식이 알려지자 시민들은 환호했다고 한다. 스탈린 또한 이 작품이 소비에트의 붉은 군대에 힘을 줄 것으로 기대했다.6개월 정도의 작곡 기간을 거쳐 1941년 말에 완성된 '교향곡 7번, 레닌그라드'는 쇼스타코비치의 '전쟁 3부작' 중 첫 번째로, 연주시간이 80여분에 달하는 대곡이다.1942년 3월, 작품의 초연 이후 소비에트 당국은 쇼스타코비치를 반나치 투쟁의 선봉으로 치켜세웠다. 작품이 워낙 서사적이며 영웅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쇼스타코비치는 자신에게 쏟아진 찬사를 마냥 반기지는 않았을 것 같다.1악장의 거친 행진곡으로 표출되는 '침략' 에피소드는 초연 이후 한동안 독일군을 표현한 것으로 이해됐다. 그러나 작곡가 사후에 출판된 한 전기는 이러한 인식을 불식했다.쇼스타코비치는 전기에서 "7번 교향곡은 나치에게 포위된 레닌그라드를 위한 것이 아니다. 스탈린에 의해 이미 파괴되고 히틀러가 그저 마지막에 거들었던 그 레닌그라드를 위한 것"이라고 밝혔다.이 작품은 전쟁과 폭력에 의해 희생된 이들을 위한 '교향악적 레퀴엠'이다. /김영준 인천본사 문화체육부장

2019-06-13 김영준

[김영준의 재밌는 클래식·(13)봄의 제전]'극한 리듬' 20C 모더니즘 불멸의 이정표

스트라빈스키의 '3대 발레 음악'불규칙한 박자 호불호 갈린 '혁신'"나는 미쳐 버렸다/ 질서가 광기에 무너지고 있었다/ 지휘자에게 린치를 가하라!/ 드럼의 목을 잘라라!/ 금관악기를 도륙내라!/ 현악기를 피에 적셔라!/ 플루트의 목을 졸라라!/ 스트라빈스키의 봄이/ 성스러운 봄의, 무자비한 영화와 고통을 거느리며 도래하나니" 106년 전 이맘때(1913년 5월 29일) 프랑스 파리 샹젤리제 극장에서 열린 '봄의 제전' 초연에 다녀온 영국의 전위 시인 지크프리드 새순은 공연장에서 받은 충격을 시로 표현했다.새순뿐만이 아니라 당시 공연장에 있던 청중은 이해할 수 없는 극한의 리듬과 폐부를 찌르는 날카로운 오케스트라 음향에 큰 충격을 받았다. 바슬라프 니진스키의 안무 또한 이전까지 러시아 발레가 보여주던 것과는 전혀 달랐다. 야만적 줄거리와 음악에 어우러지는 무용도 관객들을 자극했다. 공연 시작 후 객석에서는 "이따위 공연 집어치워"라는 고함과 야유가 터져 나왔다. 이에 "거 좀 조용히 합시다"라는 다른 쪽의 항의가 이어지면서, 두 파로 나뉜 관객 간에 욕설과 주먹다짐이 오갔다고 한다. 그래도 공연은 이어졌고, 출동한 경찰도 어찌할지 몰라서 지켜만 봤다는 '봄의 제전' 초연은 공연 역사상 가장 큰 스캔들로 기록됐다.'봄의 제전'은 '불새'(1910년)와 '페트루슈카'(1911년)를 잇는 러시아 태생의 작곡가 스트라빈스키(1882~1971)의 3대 발레 음악으로 꼽힌다. 곡의 구상은 1910년 봄,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불새'의 작곡을 거의 마무리할 무렵 작곡자의 공상에서 시작됐다. 스트라빈스키는 공상 속에서 그려본 이교도의 엄숙한 의식을 무용 음악으로 형상화하겠다고 생각했다. 작곡자는 봄의 신을 예찬하기 위해 살아있는 젊은 여인을 제물로 바치는 의식을 떠올렸다. 늙은 현자를 중심으로 둘러앉은 이교도들은 제물로 간택된 여인의 춤(죽음에 이르는 의식)을 지켜본다는 내용이다.'봄의 제전'이 이전 음악과 가장 크게 대비되는 부분은 리듬이다. 이전 음악들에서의 리듬은 맥박처럼 일정하고 정확했다. 하지만 이 작품에서 박자는 따라갈 수 없이 불규칙하다. 반복되는 리듬이 없어서 듣는 이들에게 두려움을 주었다. 초연 이후에야 이 같은 부분을 알아차렸던지, 1914년에 감행된 두 번째 공연(발레 없이 연주회만으로 진행)은 청중의 환호와 열광의 도가니 속에 막을 내렸다.'봄의 제전'은 20세기 모더니즘 음악으로서 불멸의 이정표를 세웠다. 당시의 대단한 '혁신'은 이제 위대한 '고전'이 되었다. /김영준 인천본사 문화체육부장

2019-06-06 김영준

김영준의 재밌는 클래식·(12)런던 빅 파이브와 토머스 비첨]'후계자 포기' 유산으로 만든 오케스트라

음악 독학, 런던필·로열필 창단5곳중 4곳과 연관 열정 쏟아내영국 런던에는 세계적인 축구 클럽들이 여럿 있다. 축구 클럽만큼이나 세계적으로 유명한 오케스트라들이 런던을 기반으로 연주 활동을 펼치고 있다. 그중 오랜 역사와 함께 뛰어난 연주력을 갖췄다고 평가받는 오케스트라 5곳을 '런던 빅 파이브'라 한다. BBC 교향악단은 1930년 라디오 방송을 위해 창단했다. 초대 상임지휘자 에이드리언 볼트가 20년 동안 오케스트라의 기반을 다지고, 발전시켰다. 영국 최고의 음악 축제인 프롬스(Proms·Promenade Concerts)의 메인 오케스트라로도 유명하다.1932년 토머스 비첨(1879~1961)은 런던 필하모닉을 만들었다. 비첨의 아버지는 다국적 제약회사로 유명한 글락소 스미스클라인의 전신인 비첨즈 필스의 사장이었으며, 음악 애호가였다. 일찌감치 비첨은 아버지를 이을 후계자로 낙점받았다. 하지만 독학으로 음악을 공부한 비첨은 비범한 해석을 무대에서 펼쳐 보이며 음악가의 길로 들어섰다.런던 교향악단은 빅 파이브 중에서도 최고라고 자부한다. 1904년 창단한 런던 교향악단은 초기에 비첨을 비롯해 독일 지휘자들과 무대에 올랐다. 1974년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에 참가한 최초의 영국 오케스트라이기도 하다.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는 음반회사에서 녹음을 위해 만든 단체다. 음반사 EMI는 전쟁 후 미국에서 돌아온 비첨과 함께 단원을 보강해 1945년 이 단체를 설립했다. 비첨에 이어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이 베를린 필로 가기 전까지 많은 음반을 냈으며, 1955년 오토 클렘페러가 부임하면서 오케스트라의 전성기를 구가했다. 1946년 창단한 로열 필하모닉의 설립자도 비첨이다. 노년으로 접어든 비첨은 이 오케스트라에 열정을 쏟아부었다. 비첨의 타계 후 상임지휘자로 부임한 루돌프 캠페와 로열 필은 1972년 바이올리니스트 정경화와 브루흐의 '바이올린 협주곡'과 '스코틀랜드 환상곡'을 담은 음반(데카)을 내놓으면서 우리나라에도 많이 알려졌다.비첨은 런던 빅 파이브 중 BBC 교향악단을 빼고 4대 오케스트라와 연관된 인물이었다. 물려받은 재산으로 런던 필과 로열 필을 창단하고 운영하는 데 바친 비첨은 말년에는 가진 재산이 거의 없었다고 한다. 비첨은 경제적으로는 빈손으로 떠났지만 전 세계 음악애호가들이 아직도 찾는 음악적 성과를 영원히 남겼다. /김영준 인천본사 문화체육부장

2019-05-23 김영준

[김영준의 재밌는 클래식·(11)20세기 '음악 황제']베를린 필의 전설 '지휘자 카라얀'

단원투표로 선출 많은 음반 남겨잘츠부르크 페스티벌 감독 겸임며칠 전 인터넷 실시간 검색어 순위에서 오스트리아 출신의 지휘자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1908~1989)이 상위권에 오른 적이 있다. 지난 주말 방송된 한 토크쇼 프로그램에 출연한 소프라노 조수미가 카라얀과의 인연을 소개한 여파였다. 방송을 봤거나 방송 리뷰 영상이나 기사를 본 네티즌들이 올해로 타계 20주기를 맞은 '세기의 거장'을 소환했다.'오페라는 이탈리아, 기악은 독일'이라고 한다. 1882년 창단한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는 '기악의 나라=독일'의 등식을 현재까지 증명하고 있는 세계 최정상급 오케스트라이다. 베를린 필은 한스 폰 뷜로-아르투르 니키쉬-빌헬름 푸르트벵글러에 이어 1955년 단원 투표를 통해 제4대 상임 지휘자로 카라얀을 선정했다. 1945년 푸르트벵글러가 나치 동조죄로 구금되자 30대 초반의 루마니아 출신 지휘자 세르지우 첼리비다케가 자리를 메웠다. 2년 후 푸르트벵글러가 석방된 뒤에도 두 사람은 함께 베를린 필을 지휘했다. 첼리비다케는 평소 "음반은 깡통에 담긴 콜라와 같다"며 레코딩을 거부했다.1954년 푸르트벵글러가 사망하고 1년 후 진행된 차기 베를린 필 상임지휘자 선정 투표에서 단원들은 첼리비다케가 아닌 카라얀을 택했다.오케스트라(단원)의 주요 수입원인 레코딩을 하지 않았으며, 완벽주의적 성향을 앞세워 리허설 때 막말도 서슴지 않았던 첼리비다케 대신 카라얀을 택한 것이다.카라얀은 베를린 필 입성 후 이듬해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의 음악감독 자리도 얻었다. 이 음악제의 메인 오케스트라는 빈 슈타츠오퍼 오케스트라(빈 필하모닉)였다. 베를린 필과 빈 필이라는 양대 산맥을 거느리게 된 카라얀은 타계까지 33년 동안 양쪽의 지위를 적절히 활용했다. 그의 눈에 들어야 베를린 필과 협연할 수 있었으며, 잘츠부르크 페스티벌 무대를 밟을 수 있었다. 그에게 '황제', '제왕'의 칭호가 따라붙게 된 연유다.그는 음반뿐만 아니라 영상물을 촬영하는 데에도 관심을 쏟았다. 카라얀과 베를린 필의 레코딩(영상 포함)은 1천여 종에 달하며, 전 세계에서 1억3천만 장이 팔린 것으로 집계됐다. 지금 이 순간에도 그의 음반은 팔려나가고 있다. 1989년 카라얀이 타계하자 그의 뒤를 이을 베를린 필의 지휘자로 여러 인물이 거론됐다. 세계 음악계의 관심 속에, 베를린 필의 제5대 상임 지휘자로 이탈리아 출신의 클라우디오 아바도가 부임했다. 이후 베를린 필의 지휘봉은 사이먼 래틀(영국)을 거쳐 키릴 페트렌코(러시아)로 이어지고 있다. /김영준 인천본사 문화체육부장

2019-05-16 김영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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