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준의 재밌는 클래식

 

[김영준의 재밌는 클래식·(72)브람스를 좋아하세요]43세에 첫 교향곡 발표한 거장

우상 베토벤 전통 계승 중압감총 4곡 완벽한 합일체 만들어클래식 음악 학도들의 꿈과 사랑을 그린 드라마 '브람스를 좋아하세요?'가 지난달 16부를 끝으로 막을 내렸다. 드라마가 종영한 지 한 달이 지났지만, 드라마 속 음악들로 구성된 앨범이 얼마 전 출시되는 등 그 여운은 이어지고 있다. '브람스를 좋아하세요'는 프랑수아즈 사강의 소설 제목이다. 사강은 1959년 소설 '브람스를 좋아하세요…'를 발표했다. 사강은 이 소설에서 파리를 배경으로 중년 여인 폴의 사랑과 연관된 심리를 예리하게 포착해 냈다.폴 보다 14세 어린 시몽은 둘 만의 시간을 가질 기회를 모색하며 폴에게 편지를 보낸다. "오늘 6시에 플레옐홀에서 아주 좋은 연주회가 있습니다.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어제 일은 죄송했습니다." 제목 '브람스를 좋아하세요…'가 소설 속에서 드러나는 대목이다. 1961년엔 이 소설을 아나톨 리트박 감독이 영화화했다. 영화는 프랑스에서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미국에선 '굿바이 어게인', 우리나라에서는 '이수(離愁)'로 각각 개봉했다. 소설에선 폴과 시몽이 공연장에서 브람스의 협주곡을 듣는다고만 표현된다. 영화에서 둘이 감상한 작품은 교향곡 1번과 3번이다. 브람스는 교향곡을 네 곡 작곡했다. 네 작품은 정사각형의 네 변과 같이 강력한 힘과 완벽함의 합일체를 이룬다. 한 작곡가의 교향곡 전곡이 이처럼 안정되고 집중력 있는 경우는 브람스와 그의 우상인 베토벤을 제외하곤 찾기 힘들다. 브람스는 43세에 이르러서야 첫 번째 교향곡을 발표했다. 베토벤이 세운 교향곡의 전통을 이어야 한다는 중압감으로 선뜻 작곡에 임하지 못했던 거였다. 때문에, '교향곡 1번'은 브람스가 늘 두려움을 가지고 바라보던 대상(베토벤)에 걸맞은 형식과 성숙함으로 우뚝 서 있다. 균형 잡힌 베토벤의 '교향곡 8번'에 비견되는 브람스의 '교향곡 3번'의 3악장은 영화에서 주제음악 역할을 했다. 멜로디가 아름답고 로맨틱해서 대중의 사랑을 받는 곡이다.브람스의 처연한 음색과 깊은 상념을 간직한 남성적인 울림은 굳이 구분하자면 가을과 잘 어울린다. 늦가을에 브람스의 교향곡을 들어보면 어떨까. 네 곡 중 어느 곡을 들어도 괜찮다. /김영준 인천본사 문화체육부장

2020-11-26 김영준

[김영준의 재밌는 클래식·(71)실내악]왕과 귀족 사랑방 채운 '행복 사중주'

교향곡·오페라 비해 섬세함 매력하이든이 확립·베토벤 명곡 남겨'서울스프링실내악축제'가 지난달 서울 곳곳에서 8일 동안 열렸다. 코로나19로 인해 봄이 아닌 가을이 돼서야 개최될 수 있었고, 좌석 띄어 앉기로 진행됐다. 올해로 15회째를 맞은 이 축제는 실내악(Chamber Music)의 묘미를 알려주는 국내 음악제로 유명하다. 클래식 애호가들 사이에선 "교향곡을 듣고 오페라도 듣다가 가장 나중에 듣게 되는 것이 실내악"이라는 말이 통용된다. 음악 장르 중 실내악은 즐기기 쉽지 않다는 것을 빗댄 것이다. 잘못된 선입견을 심어준 말이기도 하다. 베토벤의 피아노 삼중주와 현악 사중주, 브람스의 목관 오중주 등을 듣고 느낄 수 있는 여운과 행복감은 그 무엇에 비길 수 없다. 교향곡이나 오페라에 비해 상당 부분 비워낸 실내악은 섬세한 매력을 발산하고 있는 것이다.실내악의 사전적 의미는 한 악기가 한 성부씩 맡아 연주하는 기악 합주곡이다. 성부 수에 따라 이중주, 삼중주, 사중주, 오중주 따위로 나뉘는데, 바이올린 둘, 비올라 하나, 첼로 하나의 현악 사중주가 실내악의 중심이다. 실내악이라는 용어는 이탈리아어 '무지카 다 카메라(Musica da Camera)'에서 왔다. 극장이나 교회에서 연주되는 음악과 구별하기 위해 17세기 이탈리아 사람들이 쓰기 시작했다. 21세기에 '카메라'라면 사진기를 먼저 떠올리겠지만, 당시 카메라는 왕이나 귀족의 저택 안 사랑방을 의미했다. 유추해 보면, 실내악은 바로크 시기에 왕이나 귀족의 소규모 홀에서 소통과 교류를 통해 친밀감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이후 하이든에 의해 현악 사중주 형식이 확립됐다. 베토벤은 현악 사중주 열여섯 곡을 남겼다. 이 곡들은 베토벤의 아홉 개의 교향곡, 서른 두 개의 피아노소나타와 함께 인류의 위대한 음악 유산으로 남아있다. '작은 교향곡'이라고도 불리는 현악 사중주의 명곡들은 19세기에 슈베르트와 브람스, 드보르자크, 20세기에 쇤베르크와 버르토크, 쇼스타코비치 등이 남겼다. 우리나라에선 1930년대 '체임버 뮤직'의 번역어로 실내악의 개념이 도입됐다. 홍난파가 주축이 된 삼중주단에 이어 채동선의 사중주단 등이 연주 활동을 펼쳤다. 우리나라 최초의 실내악 작품으론 채동선의 '현악 사중주'(1936년)와 김성태의 '현악 사중주'(1939년) 등이 있다. /김영준 인천본사 문화체육부장

2020-11-12 김영준

[김영준의 재밌는 클래식·(70)오케스트라 ③]광복 직후 시작된 '한국의 오케스트라'

그리운 금강산 작곡 최영섭 지휘애협 교향악단이 인천시향 '뿌리'우리나라 오케스트라의 역사는 광복 직후 시작됐다. 1945년 9월 우리나라 최초의 오케스트라인 고려 교향악단이 창단했다. 훗날 인천시립교향악단의 제2대 지휘자로 부임하는 고(故) 임원식은 고려 교향악단의 초대 상임지휘자가 됐다. 하얼빈 제일음악학원과 도쿄 음악학교에서 공부한 임원식은 당대 우리나라 유일의 전문 지휘자였다. 그러나 6개월 정도 후 사임하고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고려 교향악단의 재정난이 시작되던 시기였다. 2년 후 남한에 단독정부가 수립되고, 1948년 10월 정기연주회를 끝으로 고려 교향악단은 해체했다. 단원들은 서울 교향악단으로 흡수됐다. 1947년 12월 인천 관현악단이 창단 연주회를 개최했다. 23명으로 구성된 인천 관현악단은 인천공회당과 애관극장 등을 공연장으로 사용했다. 한국전쟁의 발발로 활동이 오래가진 못했지만, 전쟁 후 설립되는 지역 교향악단의 주춧돌을 놓았다. '인천 음악애호가협회(필하모닉)'는 1956년 산하 교향악단을 발족했다. 인천 애호가협회 교향악단은 후일에 '그리운 금강산'을 작곡하는 최영섭을 비롯해 단원 30여명으로 구성됐다. 1957년 11월에 열린 연주회에서 애협 교향악단의 지휘는 최영섭이 맡았으며, 당시 중학교 1학년이었던 백건우가 그리그 '피아노 협주곡 a단조'를 협연했다. 최영섭은 1964년 동아방송 편곡자와 지휘자로 스카우트되어서 서울로 거처를 옮길 때까지 애협 교향악단을 이끌었다. 이 시기에 인천 필하모닉이 창단했다. 애협 교향악단원들은 새 오케스트라에 편성됐다. 10여회의 연주회를 연 인천 필하모닉은 1966년 창단하는 인천시립교향악단의 모체가 되었다. 인천시립교향악단의 초대 상임지휘자는 서울대 작곡과를 졸업하고 제물포고 음악교사로 있던 26세의 김중석이었다. 창단 초기 인천시향의 주 레퍼토리는 하이든과 모차르트, 베토벤의 초기 작품을 비롯해 낭만주의 전반부까지였다. 임원식이 베를리오즈의 '환상교향곡'을 연주하며, 레퍼토리를 확대했다. 제4대 지휘자 금노상이 부임하면서 인천시향은 현재의 모습을 갖췄다. 금노상은 구스타프 말러와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작품들을 인천시향과 선보였다. 그는 말러의 '교향곡 2번, 부활'을 1996년 지휘했으며, 슈트라우스의 '알프스 교향곡'을 선보였다. 제7대 지휘자였던 정치용은 2016년 정기연주회에서 슈트라우스의 '영웅의 생애'를 연주하며 인천시향 50주년을 기념했다. /김영준 인천본사 문화체육부장

2020-11-05 김영준

[김영준의 재밌는 클래식·(69)오케스트라②]'필하모닉' '교향악단' 시작은 달랐다

'필' 후원 통해 운영 동아리 지칭20세기 의미 퇴색, 구분도 사라져'김영준의 재밌는 클래식' 12편(2019년 5월 24일자 1면=김영준의 재밌는 클래식·(12)런던 빅 파이브와 토머스 비첨]'후계자 포기' 유산으로 만든 오케스트라)에선 영국 런던을 기반으로 공연 활동을 펴고 있는 오케스트라들 중 오랜 역사와 뛰어난 연주력을 갖춘 다섯 단체를 일컫는 '런던 빅 파이브'에 대해 다뤘다. 단체들 중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이하 심포니 오케스트라는 교향악단으로 표기)와 런던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는 현재까지도 런던의 양대 산맥을 이루며 세계의 음악팬들을 만나고 있다. 런던 외에도 오스트리아 빈, 독일의 베를린과 뮌헨, 러시아의 모스크바와 상트페테르부르크 등지엔 필하모닉과 교향악단이 별개의 단체로 존재하며, 각각의 연주 활동을 펴고 있다.클래식 애호가가 아니라면 혼동하기 쉬운 이 같은 명칭은 어떻게 생겼을까? '사랑하는', '좋아하는'을 의미하는 '필(Phil)'과 화음을 뜻하는 '하모닉(Harmonic)'에서 엿볼 수 있듯이 '필하모닉'은 1800년대 초기 시민 사회에서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들의 동아리를 지칭했다. 이들의 세력이 커지면서 자신들의 자금(후원)으로 오케스트라를 창단했는데, 왕실이나 정부, 시가 운영하는 형태와는 차별성을 강조하며 필하모닉으로 명했다. 교향악단은 관현악의 최고 장르인 '교향곡(Symphony)'을 연주하는 단체라는 점을 부각했다.20세기 들어서 자본주의가 더욱 발전하고 오케스트라의 재정 자립도가 높아지면서 필하모닉의 의미는 퇴색했다. 오히려 교향악단이 과거 필하모닉의 경우처럼 후원자 그룹의 지원을 받는 경우도 생겼다. 그 때문에 현재 필하모닉과 교향악단은 명칭의 차이만 있을 뿐이며, 형태와 수준 등 여타 차이점을 찾거나 분류하는 것은 무의미해졌다. 미국 프로야구를 예로 들어보자. 뉴욕(양키스와 메츠)과 시카고(화이트삭스와 컵스)엔 메이저리그 소속 연고 팀이 두 개씩 있다. 필하모닉과 교향악단도 팀 명칭 정도로 봐도 무방하다. 현대 오케스트라와 프로야구단, 크게 동떨어진 비교는 아니다. 단순히 지명만을 내건 악단들도 있다. 지난해 이맘때 아트센터 인천에서 공연을 한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를 비롯해 클리블랜드 오케스트라, 파리 오케스트라 등이다. 또한,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 오케스트라와 베를린 콘체르트하우스 오케스트라, 로열 콘세르트헤바우 오케스트라 등은 상주 공연장의 이름을 붙인 경우다. 이 밖에 30~40명 규모로, 실내악단에 근접하는 오케스트라는 체임버(Chamber) 오케스트라로 불린다. /김영준 인천본사 문화체육부장

2020-10-29 김영준

[김영준의 재밌는 클래식·(68)오케스트라 ①]말러 '교향곡 8번' 연주에 1천명 필요

그리스시대 노래 하던 공간 의미'4관 편성' 후기 낭만주의서 확립오케스트라(Orchestra)는 관현악 또는 관현악단을 지칭한다. 관(管)과 현(絃)을 비롯해 타(打)악기를 사용해 연주하는 곡의 총칭 및 그러한 악기 편성에 의한 연주단체를 말한다. 오케스트라의 어원은 고대 그리스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그리스시대 원형극장의 정면 무대에선 무희들이 춤을 추거나 가수들이 노래했는데 이 공간을 '오케스트라'라고 불렀다. 르네상스 시기에 들어와서 '합주단'을 뜻하는 말로 변했다. 오케스트라의 현재 모습은 언제 갖춰졌을까. 교향곡이 확립된 초기 고전주의 시기 오케스트라의 인원은 고작 30~35명 선이었다. 제1·2 바이올린과 비올라, 첼로, 더블베이스로 구성된 현악 주자들이 20명 안팎이었다. 여기에 플루트, 오보에, 클라리넷, 바순이 각각 2명씩, 호른과 트럼펫이 각 1~2명씩으로 구성돼 10여명의 관악 주자와 타악(팀파니) 주자가 가세했다. 이러한 오케스트라의 형태를 '2관(管) 편성'이라고 한다. 플루트와 오보에 등과 같은 목관악기를 2개씩 배치한 편성이라는 뜻이다. 18세기 후반, 관악기의 성능이 향상돼 균형을 맞추기 위해 더욱 큰 규모의 현악 파트가 필요해졌다. 또한 귀족들만의 오락이었던 음악을 중산층이 즐기기 시작하면서 많은 청중을 수용하기 위해 큰 연주 홀에서 공연이 펼쳐졌다. 때문에, 같은 2관 편성이라도 이전 시기와 비교했을 때 오케스트라의 인원은 2배 넘게 늘어난 70명에 달했다.현재 공연장에서 주로 볼 수 있는 100~120명으로 구성된 '4관 편성' 오케스트라는 후기 낭만주의 작곡가들인 구스타프 말러와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에 의해 확립됐다. 특히 말러의 '교향곡 8번'엔 '천인(千人)'이라는 별명이 붙었는데, 이 작품을 연주하는 데 1천 명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1910년 뮌헨에서 열린 '천인 교향곡'의 초연엔 858명의 성악가가 참여했으며, 특수 악기를 포함해 오케스트라 단원은 171명으로 구성됐다. 지휘자까지 포함하면 초연 무대엔 1천30명이 올랐다. 슈트라우스 또한 자신의 '알프스 교향곡'에 8대의 호른을 배치하며 오케스트라의 규모를 늘렸다. 말러와 슈트라우스는 당대 최고의 지휘자들이었다. '오케스트레이션(관현악법)의 귀재'였던 두 사람은 대편성 오케스트라 곡에서도 매우 정제된 실내악적 음향을 구현할 수 있었다. 두 사람이 현대 오케스트레이션에 기여한 공로는 매우 크다. /김영준 인천본사 문화체육부장

2020-10-22 김영준

[김영준의 재밌는 클래식·(67)지휘자②]지휘계 거장, 피아니스트가 많은 이유

두 손 완전 독립… '멀티' 특화조율·외우는데 익숙함이 도움브루노 발터, 조지 셸, 드미트리 미트로폴로스, 게오르크 솔티, 레너드 번스타인.'위 인물들의 공통점은?' 클래식 애호가라면 단번에 20세기 지휘계의 거장들임을 알아맞힐 것이다. 그 외에 하나 더 공통점을 찾으라고 하면 고개를 갸웃거릴 분들이 꽤 있을 것으로 보인다. 다른 하나는 피아니스트로서도 뛰어난 커리어를 쌓았다는 점이다. 현존하는 지휘와 피아노의 거장으론 블라디미르 아슈케나지, 크리스토프 에센바흐, 다니엘 바렌보임, 정명훈, 미하일 플레트뇨프 등을 꼽을 수 있다.19세기 들어서 오케스트라의 편성이 커지고, 그만큼 큰 콘서트홀에서 연주하게 되면서 필요하게 된 전문 지휘자는 주로 건반(피아노) 연주자 출신들이었다. 대표적 인물로 펠릭스 멘델스존, 한스 폰 뷜로, 세르게이 라흐마니노프, 구스타프 말러 등이 해당한다. 연주자들의 역할이 세분화하는 20세기 이후엔 처음부터 지휘자로 기반을 닦고 잔뼈가 굵어진 이후 거장의 반열에 올라서는 경우가 많아졌다. 그럼에도, 피아노 등을 연주하면서(했거나) 지휘자로도 명성을 얻는 기조는 어느 정도 이어졌다. 그에 따라 '피아노 연주자로서의 경력이 지휘자에게 어떤 장점으로 작용할까'에 대한 의문과 질문은 현재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이에 대한 답변도 여러 가지가 있는데, 몇 가지를 꼽아보면 다음과 같다.피아노 연주는 두 손이 완전히 독립되어야 한다. 그 때문에 두 줄의 음악을 동시에 읽어내는 방법을 배울 수 있으며, 여러 가지 작업을 동시에 해낼 수 있는 능력이 생긴다. 또한, 실내악에서 자신 이외의 파트까지 포함한 악보를 보는 것은 피아노 연주자뿐이어서 피아니스트는 조율하고 외우는 데 익숙하다는 견해도 있다. 즉, 피아노 연주가 지휘에 도움을 주는 부분으로 양손을 사용할 수 있는 능력과 더욱 쉽게 악보를 읽을 수 있는 능력, 반주를 다루는 능력, 많은 양의 곡을 외우는 능력 등을 꼽을 수 있다.발터는 생전에 "훌륭한 지휘자는 자신만의 분명한 내적 이미지 또는 이상적인 소리를 가지고 있어서 음색의 조절이 가능하다"고 말한 바 있다. 이 거장은 피아노 연주자들에겐 이런 능력이 있으며, 그 결과 지휘에 남다른 재능을 갖게 된다고 봤다. 결국, 지휘자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단순히 연주자들이 함께 연주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하나가 되도록 이끄는 것이다. /김영준 인천본사 문화체육부장

2020-10-15 김영준

[김영준의 재밌는 클래식·(66)한글날과 우리 음악]'K-클래식' 주춧돌 놓은 윤이상

서양음악 '주체적 인식' 시도전통 유산 연결 가곡 등 남겨훈민정음(訓民正音)의 창제와 반포를 기념하고, 한글의 우수성을 기리기 위한 국경일인 한글날에 'K-클래식'의 초창기를 반추했다.1910년 경술국치 이후 일제는 의도적으로 우리 말과 글, 음악을 탄압했다. 여기에 더해 기독교와 함께 들어온 서구의 찬송가는 우리나라 사람들의 음악적 감수성을 바꿔놓았다. 우리 음악을 듣고 즐기던 감수성이 서양식 노래를 듣고 즐기는 감수성으로 바뀐 거였다.이 시기 우리 작곡가들은 주로 노래를 만들었다. 아쉬운 점은 서양음악의 유입과 수용에 집중한 작곡가들이 고려하지 않은 '한국적 음악'이었다. 당시 우리 음악은 소위 말하는 '작가 정신' 속에서 탄생한 작품이 아닌, 새 문화를 공감하고 즐겼던 음악인들의 산물이었다. 가사에 대한 정서로 인해 한국적 애환이 묻어난다는 평가도 받지만, 엄밀히 말하면 반주 붙은 서양 노래의 틀에 민요적 가락과 장단을 도입한 정도다. 즉, 도래한 서양음악에 대한 반성이나 한국의 고유 음악양식에 대한 추구 없이 만들어진 거였다. 우리 음악계에서 서양음악에 대한 반성(주체)적 인식을 도모했던 작곡가들도 있었는데, 그 대표적 인물이 윤이상이다. 윤이상은 1956년 프랑스로 유학을 떠가기 전 국내에서 가곡과 기악곡을 비롯한 다양한 작품을 남겼다. 1950년부터 부산사범학교 음악교사로 재직 때 동요 70여곡을 작곡했다. 당시 초등학교 1~6학년 음악책에 수록된 동요 100여곡 중 윤이상의 작품이 70%를 차지했다고 한다. 동요 다음으로 많은 윤이상의 곡은 교가다. 해방 직후 부산으로 거주지를 옮기기 전 고향인 통영의 문화협회와 통영공립고등여학교, 통영공립여자중학교 등에 재직한 윤이상은 4년 동안 시인 유치환, 김상옥과 함께 '교가 지어주기 운동'을 벌였다. 이를 통해 윤이상이 작곡한 교가는 아홉 개에 이르며 학교마다 특색을 살려서 만들어졌다.윤이상이 한국 생활기에 발표한 가곡을 비롯한 작품들은 우리 전통 음악 유산과 연결되어 있다고 평가받는다. 함께 활동했던 안기영, 김성태, 채동선, 김순남, 이건우 등과 영향을 주고받으며 서양과 우리 음악 사이에서 균형감을 유지했을 것으로 보인다. 윤이상의 균형감은 유럽 활동기에도 이어졌다.'서양 현대음악 기법을 통한 동아시아적 이미지의 표현'이라는 평가를 받으며 20세기 서양음악사에 거대한 획을 그은 작곡가 윤이상은 우리 음악의 비전을 제시했다. /김영준 인천본사 문화체육부장

2020-10-08 김영준

[김영준의 재밌는 클래식·(65)지휘자①]점점 복잡해진 오케스트라… '두 손 자유로운' 리더 요구

초기엔 작곡가·연주자가 맡아오늘날 작품해석까지 전문화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오케스트라의 지휘는 중세 시기의 손짓으로 멜로디 라인, 리듬, 빠르기 등을 지시하며 합창을 이끌었던 카이로노미(chironomy)에서 발전했다. 르네상스 시기를 거치면서 좀 더 굴곡 있는 음조와 옥타브 내에서의 많은 변화가 생기며, 그 효율성을 잃지 않기 위해 카이로노미의 지시 방법은 확장되어야 했다. 17~18세기의 초기 기악 앙상블에선 건반 악기(쳄발로 혹은 오르간)를 비롯해 악장이 지휘를 겸했다. 특히 바흐와 헨델, 하이든, 모차르트 등은 작곡과 건반 악기(지휘)를 비롯해 모든 악기에 정통한 음악가였다. 때문에, 자신의 작품은 자신이 연주(지휘)하는 게 정석이었다.네 사람에 이어 베토벤이 활동하던 시기에 오케스트라는 발 빠른 변화를 겪었다. 관악기의 성능이 향상돼 균형을 맞추기 위해 더욱 큰 규모의 현악 파트가 필요해졌다. 앙상블의 규모가 커지면서 음악도 복잡해졌다. 또한, 과거에는 귀족들만의 오락이었던 음악을 중산층이 즐기기 시작했다. 더 많은 청중을 수용할 수 있는 큰 연주 홀에서 공연이 펼쳐진 것이다.위대한 피아니스트이기도 했던 베토벤은 지휘와 관련한 유명한 일화를 남겼다. 어느 날 베토벤은 공연장에서 피아니스트가 지휘를 겸한 자신의 피아노 협주곡을 보다가 크게 실망한 나머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고 한다. 베토벤이 무대에 올라 오케스트라 앞에서 연주를 이끌자 피아니스트는 자신의 파트에 집중했으며, 그제서야 연주가 조화를 이뤘다. 두 손 모두를 사용해 연주하는 건반 연주자는 잠깐씩 한 손이 쉴 때에만 박자를 잡아줄 수 있었는데, 곡의 편성이 복잡해지면서 그마저도 어렵게 된 거였다. 수석 바이올리니스트도 늘어난 현악 주자들을 관리하기에 바빴다. 결국, 오케스트라는 악기를 연주하지 않는 리더를 필요로 하게 됐고, 전문 지휘자가 등장했다. 이후 지휘자의 역할은 더욱 전문화하면서 작품의 해석까지 맡게 됐다.연주회장이나 무수한 음반을 통해 접할 수 있는 훌륭한 지휘는 오케스트라 연주자들의 음악적 의지를 조화롭게 다루고 있으며, 이를 통해 청중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미국의 지휘자이자 피아니스트, 작곡가였던 앙드레 프레빈은 생전에 지휘에 대해 "지휘자는 기본적으로 독선적인 직업이다. 오케스트라의 연주자들은 자신이 맡은 악기에 대해 지휘자보다 더 높은 능력을 갖춘 사람임에도, 지휘자가 원하는 방향으로 연주하라는 지시를 따른다"고 말했다. /김영준 인천본사 문화체육부장

2020-09-24 김영준

[김영준의 재밌는 클래식·(64)터키 음악]평화무드 타고 '오스만 군악' 유럽으로

모차르트·베토벤 '행진곡' 영향큰북·심벌즈·트라이앵글 등 채용클래식을 잘 모르는 사람이라도 '터키 음악' 하면 떠올릴 만한 곡이 있다. '터키 행진곡'이라는 제목으로 친숙한 모차르트의 '피아노 소나타 11번, K 331'이다. 이 곡이 '터키 행진곡'으로 불리게 된 이유는 3악장에 알라 투르카(Alla Turca·터키 풍으로)로 연주하라는 지시어가 적혀 있기 때문이다. 또한, 베토벤의 극 부수 음악 '아테네의 폐허, Op 113' 가운데 네 번째 곡 '터키 행진곡'도 잘 알려져 있으며, '군대 교향곡'으로 불리는 하이든의 '교향곡 100번'의 2·4악장에도 역시 '터키풍'의 리듬이 쓰였다.하이든, 모차르트, 베토벤의 공통분모는 고전주의를 풍미한 작곡가들로, 제1 빈 악파로 묶인다. 18세기 중·후반 오스트리아 빈에서 활동한 세 작곡가의 작품에서 나타나는 '터키풍'에는 시대상이 반영됐다.터키의 전신인 오스만 제국(1299~1922)은 16세기 술레이만 1세 때 가장 번성했다. 아시아와 유럽, 아프리카에 걸쳐 거대한 이슬람 제국을 형성했다. 이러한 대 제국의 건설에는 군대의 용맹성이 절대적인 역할을 했다. 전사들의 사기를 끌어 올리는데 굳건하고 당당한 군악(軍樂)이 한 몫 했을 터였다.큰북과 심벌즈, 트라이앵글 등이 곁들어진 당당하면서도 흥겨운 리듬에 기반을 둔 오스만 제국의 군악은 인근 국가들에 큰 영향을 끼쳤다. 특히 1683년 제2차 빈 공방전에서 오스만 군대는 오스트리아와 폴란드 연합군에 막혀 빈을 함락시키지 못하고 패퇴했다. 당시 남기고 간 군악대의 악기들이 유럽으로 전파되기 시작했다.18세기 들어서 세력이 약해진 오스만 제국은 유럽 국가들과 전쟁 대신 교류를 택했다. 이때 군악대는 평화의 사절 역할을 했다. 18세기 초 오스만 제국의 군악대는 폴란드에 선물로 보내지고, 이어서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 영국에도 전해졌다. 오스만 제국의 악기인 큰북과 심벌즈, 트라이앵글이 유럽 군악대에 채용됐다. 또한, 이슬람 제국의 악기였던 팀파니 등의 타악기도 수출돼 발전해오다가 베토벤 시대에 이르러 오케스트라 편성의 일부로 정착했다. 오스만 제국에서 도입한 악기와 연주법을 서양음악의 이론에 맞춰 재해석한 것이다. 당대 음악의 중심지였으며 '터키풍'이 가장 유행한 빈에서 활동한 하이든, 모차르트, 베토벤은 이국적인 행진곡풍의 작품을 발표했고, 이들 작품은 현재에도 당시 시대상과 분위기를 일깨우고 있다. /김영준 인천본사 문화체육부장

2020-09-17 김영준

[김영준의 재밌는 클래식·(63)베토벤이 존경한 작곡가]케루비니 '구출 오페라' 영향받은 베토벤

그의 의견 경청 '피델리오' 밑거름레퀴엠을 썼다면 롤모델 삼았을것르네상스 시기 이후 서양 음악은 이탈리아와 나머지 나라로 양분돼 발전해 왔다. 이탈리아는 나머지 나라들의 극복 대상이었다. 이탈리아 음악가들은 19세기 중반까지 유럽 전역에서 높은 대우를 받았다. 260년 전 이맘때(9월 14일) 태어난 루이지 케루비니(1760~1842) 또한 프랑스를 주 무대로 활동한 이탈리아 작곡가였다. 케루비니는 26세에 프랑스 파리로 건너가 20년 넘게 파리음악원 교수와 원장으로 활동하며 프랑스 음악계에 큰 영향을 끼쳤다. 그는 10년 후배 베토벤에게도 적잖은 영향을 줬다. 케루비니의 오페라 '로도이스카'(1791년 초연)는 위험에 처한 주인공을 구출하는 줄거리를 갖는 '구출 오페라'의 효시 격이다. 프랑스 대혁명 이후의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서 사람들은 쫓기는 자의 심정에 강한 동정을 표했고, 불의에 쫓기는 정의로운 사람의 탈출을 돕는 영웅의 등장을 갈망했다. 이 같은 시대상이 구출 오페라를 하나의 유행으로 만들었다. 1800년에 초연돼 극찬을 받은 '2일간'은 케루비니의 구출 오페라 가운데 대표작이라 할 수 있다. 특히 이 작품은 베토벤의 유일한 오페라이자 역시 구출 오페라인 '피델리오'에 큰 영향을 준 것으로 알려졌다. 1805년 베토벤의 오페라 '레오노라'가 초연됐다. 케루비니도 공연장을 찾았다. 공연을 보고 난 그의 반응은 냉소적이었다고 한다. 케루비니의 위상을 높이 산 베토벤은 케루비니를 비롯해 자신의 작품에 비판적이었던 사람들의 의견을 경청했다. 후일 이 곡을 개작해 '피델리오'로 재연했다. '피델리오'는 현재까지 상연되는 걸작 오페라 중 하나다.케루비니의 종교음악을 대표하는 '레퀴엠 c단조'는 1816년 1월 루이 16세의 추모 미사 때 초연됐다. 케루비니가 루이 18세 아래서 왕의 음악 담당자이자, 궁정 교회의 음악 총책임자로 활동하던 때였다. 그로 인해 케루비니는 교회음악의 작곡에 노력을 쏟았는데, 그 산물 중 하나가 c단조 레퀴엠이다.베토벤은 레퀴엠을 작곡하지 않았지만, 만약 자신이 레퀴엠을 쓴다면 케루비니가 모델이 될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베토벤의 장례식에선 케루비니의 레퀴엠이 연주됐으며, 슈만과 브람스 등 후대 작곡가들도 이 곡을 예찬했다. 20세기 들어서 케루비니에 대한 평가는 다소 박해진 가운데, 1948년 영국 런던에 '케루비니협회'가 설립된 이후 서서히 재평가받고 있다. /김영준 인천본사 문화체육부장

2020-09-10 김영준

[김영준의 재밌는 클래식·(62)]노르웨이]조국의 자연 사랑한 그리그, 작품에 투영

당시 주류 독일음악서 탈피 시도입센 만나면서 '페르귄트' 등 빛봐유난히 길었던 올여름 장마와 어우러진 국지성 폭우에 우리 기상청의 날씨 예보가 엇나가면서 해외 기상예보 사이트를 찾는, 이른바 '기상 망명족'이 늘었다. 이들이 가장 많이 찾은 곳은 노르웨이 기상청으로, 국내 포털 검색 사이트의 상위권에 오를 정도로 인기를 끌었다. 노르웨이 기상청은 우리나라 네티즌들의 접속이 늘자 한국어 지원 서비스를 시작했다고 한다. 코로나19로 인한 언택트 시기에, 노르웨이와 관계는 더욱 두터워졌다. 서양음악사에서 노르웨이는 에드바르 하게루프 그리그(1843~1907)만으로 각별한 위치를 점한다. 노르웨이의 문학과 미술을 각각 대표하는 헨리크 입센과 에드바르 뭉크는 그리그와 비슷한 시기를 살았다. 세 예술가 중 작품에 조국을 보다 적극적으로 투영한 사람은 그리그였다. "사람은 자연의 느낌 속에서 살아야 한다"고 주장하며, 누구보다도 조국의 자연을 사랑했던 그리그는 자신의 지론을 작품에 반영했다.그리그는 6세에 어머니에게서 피아노를 배우며 음악의 기초를 닦았다. '북유럽의 파가니니'로 불린 바이올리니스트 올레 불은 15세의 그리그를 보자마자 천부적인 재능을 알아봤다. 불은 그리그를 독일 라이프치히 음악원에 입학시켰다. 당시 라이프치히는 멘델스존 풍의 보수적인 독일 낭만주의 경향이 지배했다. 북유럽에서 온 음악학도는 라이프치히의 음악 분위기에 곧 흥미를 잃었다. 그리고선 4년 동안의 유학을 마치고 1862년 고향인 베르겐으로 돌아갔다.고향에서 그리그는 독일 음악으로부터 자유로워질 것이며, 노르웨이 스타일로 구성된 대작을 발표하겠다고 결심했다. 그 기초 작업으로 민요를 찾아 전국을 돌아다녔다. 이후 그리그의 열망은 입센을 만나면서 구체화 됐다. 입센은 그리그에게 자신의 극 '페르귄트'의 부수 음악을 만들어 달라고 부탁했다. 1874년부터 2년간 작곡된 극음악 '페르귄트, Op 23'은 유명한 '솔베이지의 노래'를 비롯해 24곡으로 구성됐다. 나중에 제 1·2 모음곡으로 편집되는데, 네 곡씩 담긴 두 모음곡은 오늘날 빈번히 연주된다. '페르귄트 모음곡, Op 46과 Op 55' 외에 '피아노협주곡 a단조, Op 16', '첼로 소나타 a단조, Op 36', '바이올린 소나타 3번, Op 45' 등이 현재에도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1905년 독립까지 무려 500여년 동안 덴마크와 스웨덴의 지배를 받은 노르웨이는 그리그를 배출함으로써 북유럽 어느 나라 보다도 뚜렷한 민족음악을 갖게 됐다. /김영준 인천본사 문화체육부장

2020-09-03 김영준

[김영준의 재밌는 클래식·(61)러시아 피아니즘]대자연 품은 러시아, 감정표현도 다르다

조성진 라이벌 트리포노프 눈길다이내믹한 소리에 서정성 담아다닐 트리포노프(29·러시아)는 요즘 가장 뜨거운 피아니스트 중 한 명이다. 트리포노프는 2011년 차이콥스키 콩쿠르에서 우승하며 세계 음악계에 이름을 알렸다. 손열음(34)이 2위, 조성진(26)이 3위에 입상한 이 대회는 우리 음악팬들의 기억에도 각별하게 남아있다.조성진이 우승한 2015년 쇼팽 콩쿠르에서 트리포노프는 3위를 차지한 바 있다. 두 대회에서 1·3위를 나눠 가진 인연(?)으로 당시 조성진과 트리포노프는 종종 비교됐다. 두 피아니스트는 현재 최고의 기량과 지명도, 인기 면에서 비슷하다.2013년 6월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열린 트리포노프의 독주회는 현재까지도 기자의 기억에 또렷하게 남아있다. 리스트와 스크랴빈 등의 작품으로 구성된 연주회에서 트리포노프는 뛰어난 기교와 전곡을 장악하는 통찰력으로 작품들을 주조했다. 강하지만 섬세한 터치. 직관을 통해 단숨에 해치우는 듯하지만, 그 안에 동반된 스마트함(스토리텔링)까지 매력적인 요소들을 품고 있었다. 연주회 후 국내 음악계는 '예브게니 키신 이후 최고의 러시아 피아니스트가 출현했다'고 평가했다. 블라디미르 호로비츠와 스비아토슬라프 리히테르, 에밀 길렐스를 비롯해 키신까지 러시아 피아니스트들은 빼어난 테크닉, 뛰어난 음악성으로 세계 음악팬들을 사로잡아 왔다.트리포노프의 감정표현은 대자연을 품은 러시아적 기질과 연장선에 있다. 모스크바 차이콥스키 음악원의 경우 피아노 학도들에게 먼저 큰 소리를 요구한다. 큰 소리를 내야 피아니시모도 낼 수 있다는 것이다. 즉, 러시아 피아니즘은 다이내믹을 기본으로 하되 그 위에 서정성을 담는다. 이는 러시아 대가들의 연주에서 고스란히 확인할 수 있다. 올해로 타계 25주기를 맞은 슈라 체르카스키는 생전에 '은둔자'로 불렸다. 실력과 비교해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체르카스키는 연주회를 통해서만 자신을 드러낸 대가였다. 음반에서 접할 수 있는 그의 실황 연주들은 해당 작품의 새로운 모습을 보게 한다. 포르티시모에서 풍부하고 아름다운 톤을 유지하는 체르카스키는 여타 피아니스트의 연주에서 드러나지 않는 선율선을 명징하게 이끌어낸다. 뛰어난 기교와 함께 자신만의 해석으로 차별화된 연주를 선보이는 것이다.경직되지 않은 유연한 사고에 의한 감정표현은 러시아 피아니즘의 핵심이다. 십수 년 정도 후엔 코리아 피아니즘을 정의 내릴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김영준 인천본사 문화체육부장

2020-08-20 김영준

[김영준의 재밌는 클래식·(60)왼손의 피아니스트]한손 잃은 연주 '음악의 본질' 일깨워

손가락 마비 극복 플라이셔 타계회복이후 양손 내한무대 '인상적' '왼손의 피아니스트', '피아노의 오비완 케노비(영화 '스타워즈'에 나오는 이상적인 스승)'로 불린 레온 플라이셔가 지난 3일 미국 볼티모어에서 타계했다. 향년 92세.우리에게 고인은 국내 정상급 피아니스트이자 교육자들인 신수정·문용희·이대욱·강충모의 스승으로 잘 알려져 있다. 또한 2005년 6월 서울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개최된 초청 독주회에서 회복한 오른손과 함께 유려한 양손 연주를 들려준 거장 피아니스트로 깊이 각인됐다.1928년 샌프란시스코에서 태어난 플라이셔는 4세에 피아노를 치기 시작해 8세에 첫 독주회를 했다. 플라이셔의 공식 데뷔는 16세에 이뤄졌다. 피에르 몽퇴가 지휘하는 뉴욕 필하모닉과 브람스의 '피아노협주곡 1번'을 연주해 주목받았다.1952년 세계 3대 콩쿠르 중 하나인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에서 미국인으론 처음 우승한 플라이셔는 이후 조지 셀과 브루노 발터 등 화려한 진용의 지휘자와 오케스트라를 거느린 미국 음반사 CBS와 계약을 맺고 여러 음반을 남겼다. 특히 셀과 함께 녹음한 베토벤과 브람스의 피아노협주곡들은 현재까지도 명반의 대열에 올라있다.31세에 피바디 음대 교수가 되면서 교육자로서의 경력을 더한 플라이셔는 37세에 '반복성 스트레스 증후군' 진단을 받는다. 오른손의 세 번째와 네 번째 손가락이 마비돼 연주할 수 없게 된 것이다. 과도한 연습 때문이었다.자살까지 생각했던 플라이셔는 '피아노 연주가 음악을 구현하는 한 가지 방법에 지나지 않는다'는 걸 깨닫고선 새로운 음악 인생을 시작했다.교육자로서 제자들에겐 음악의 궁극적 방향을 제시하며 '음악의 본질'을 일깨웠다.1967년 지휘자로 첫발을 내디딘 플라이셔는 피아니스트로도 왼손을 위한 작품 1천여 개를 찾아서 연주했다. 제1차 세계대전 때 오른팔을 잃은 오스트리아의 피아니스트 파울 비트겐슈타인을 위해 쓰인 작품이 다수며, 동시대 음악가들이 플라이셔를 위해 왼손 연주곡들을 작곡해주었다. 1990년대 들어 의학이 발달하면서 플라이셔의 오른손 마비 증상의 정확한 원인이 밝혀졌다. 그에 따른 치료법도 고안됐다. 1995년부터 양손 연주를 재개한 플라이셔는 2005년 내한 무대에서 브람스와 슈베르트 등을 구현하며 청중을 매료시켰다.고인을 기리며 되짚어본 연주와 교육관은 화려한 기교와 볼거리에 치중하는 요즘 공연계를 생각해보게 한다. /김영준 인천본사 문화체육부장

2020-08-06 김영준

[김영준의 재밌는 클래식·(59)초고령 연주자들]세살 시작 여든 넘어 '영원한 현역'

'이다 헨델' 80대 중반까지 활동국내엔 95세 피아니스트 제갈삼지난해 이맘때 개최된 제15회 제천국제영화음악제에선 폴란드에서 태어난 영국의 바이올리니스트 이다 헨델(1928~2020)의 80대 모습을 포착한 다큐멘터리 영화 '이다 헨델, 삶의 변주곡'이 상영됐다. 2009~2017년 사이에 촬영된 영상들로 완성된 이 영화에서 여든이 넘은 이다 헨델의 낙천적이고 사교적인 모습과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모습은 깊은 인상을 남겼다. 3세에 바이올린을 시작해 7세에 국제 콩쿠르에서 입상한 '천재 소녀'였던 이다 헨델은 80대 중반까지 활동하며 '영원한 현역'으로 불렸다. 그러나 그도 흐르는 시간은 거스르지 못하고 이달 초 미국 마이애미의 자택에서 세상을 떠났다. 향년 92세.헨델의 죽음에 대해 세계 음악계는 "에리카 모리니, 지넷 느뵈, 요한나 마르치, 롤라 보베스코, 이다 헨델로 이어진 '전설의 시대'가 막을 내렸다"며 안타까워했다.헨델처럼 인생의 황혼기를 넘겨서도 지치지 않은 열정을 보여주고 있는 연주자로 국내에선 피아니스트 제갈삼(95)을 꼽을 수 있다. 우리나라 1세대 피아니스트인 제갈삼은 부산대 음대 교수를 지냈으며, 한국음악협회 부이사장 등을 역임했다. 그는 지난 11일 부산문화회관 중극장에서 연주회를 했다. 현장을 취재한 현지 언론에 따르면, 제자들과 함께 꾸민 연주회에서 제갈삼은 자작곡인 '감각적인 환상곡'과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14번, 월광'의 1악장을 연주해 관객의 큰 박수를 받았다. 관객들은 박수로 이 원로 음악인의 100세 기념 공연을 염원했다고 덧붙였다.20세기 정상급 3중주단인 '보자르 트리오'를 이끌었던 피아니스트 메나헴 프레슬러(97) 역시 무대를 누비고 있다. 그는 2008년 보자르 트리오가 해산하자 본격적인 솔로 연주자로 새 출발을 선언했다. 이후 다양한 무대에 오른 프레슬러는 2018년엔 드뷔시의 독주곡을 녹음하는 등 녹슬지 않은 기량을 선보이고 있다.이 밖에 파블로 카살스(첼로)의 피아노 파트너로도 유명한 폴란드 태생의 미국 피아니스트 미에치슬라프 호르소프스키(1892~1993)는 99세까지 연주회를 열며 최고령 피아니스트로 기록됐다.연주자의 은퇴 시기는 나이가 들었을 때가 아니라, 연주자 자신이 최선이 아니라고 느낄 때라고 한다. 상기한 연주자들의 공통분모는 끊임없는 노력과 뛰어난 자기관리, 낙천적인 삶의 태도 등이다. 이들은 다가오는 '100세 시대'의 본보기이기도 하다. /김영준 인천본사 문화체육부장

2020-07-30 김영준

[김영준의 재밌는 클래식·(58)크로스오버]시대적 요구 대중성에 응답한 클래식

20세기말 입문자 위해 영역 확장국내외 메들리 형식 음반도 선봬1980년대 들어서 세계 음악계는 '크로스오버(Cross-over)'라는 단어를 만들어낸다. 크로스오버는 독립된 장르가 서로 뒤섞이는 현상을 말한다. 처음엔 클래식과 팝, 국악과 양악의 결합 등 주로 음악용어로 쓰였다. 그러다가 뮤지컬·연극·무용 등을 혼합한 공연이나 TV·통신·컴퓨터 등 미디어의 통합추진 등 크로스오버는 그 영역을 확장했다.20세기 말에 왜 크로스오버 음악들이 등장하고 확장했을까? 의문을 품어봄 직하다. 우선, 자신의 영역을 더욱 확대하려는 문화 생산자의 욕구와 새로운 것을 갈구하는 소비자의 심리가 맞아떨어진 결과로 볼 수 있다. 즉 '대중성'이라는 시대의 과제에 클래식이 응답한 것이다. 특유의 고답성과 전위성을 내려놓고서 말이다. 또한 20세기 후반으로 갈수록 팽창하는 음반 산업도 크로스오버 음악에 힘을 실어줬다. 영국의 음악 산업 주간지 '뮤직 위크'의 1990년 보도에선 다음과 같은 표현을 볼 수 있다. "1980년대 중후반으로 넘어가면서 가정마다 CD와 CD플레이어의 보급이 늘었고, 이에 따라 자연스럽게 클래식 음악의 대중성도 확장됐다." 당시 레코드와 카세트테이프보다 훨씬 비싼 CD의 소비자 중 일부는 한번 듣고 싫증 날 우려가 있는 대중음악보다는 클래식에 눈길을 돌렸고, 이들을 수용할 초보적인 클래식 혹은 클래식과 함께 경계선에 놓인 음반들이 다수 필요하게 됐다는 거였다.이후 세계적 대가들은 물론 수많은 젊은 연주자들, 재즈계의 명인들이 이 분야에 뛰어들었다.이들은 대체로 대중음악의 클래식화를 꾀했다. 반면에 클래식의 대중음악화를 통해 인기를 끈 경우도 있었는데, 그 대표적인 예가 루이스 클라크와 로열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훅드 온 클래식스(Hooked on Classics)'였다. 클라크는 클래식 명곡을 짧게 토막 내서 이를 디스코 리듬에 메들리 형식으로 이어 붙였다. 1981년 1집 발매를 시작으로 1988년에 4집까지 발매되었는데, 전 세계적으로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다. 우리나라에선 서울음반(RCA)에서 '클래식 하이라이트 메들리'라는 제목으로 발매된 바 있으며, 각종 방송의 배경음악이나 삽입곡으로 많이 쓰였다. 40대 이상의 음악팬들에겐 보는 것만으로도 미소 짓게 만드는 마력의 음반이다. 요즘은 장르를 뛰어넘는 '컬래버레이션(collaboration)'이 대세다. 따라서 장르의 세부적 구분 또한 무의미하다. 20세기 후반의 크로스오버가 21세기 음악의 한 맥락으로 자리 잡았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김영준 인천본사 문화체육부장

2020-07-23 김영준

[김영준의 재밌는 클래식·(57)신경쇠약 피아니스트]비대면 연주로 시대 앞서간 '글렌 굴드'

관객 방해꾼 치부 '레코딩 전념'다양한 기행만큼 '정교함' 자랑코로나19 사태로 문화예술 이벤트들은 취소되거나 온라인 중계 등 언택트 방식으로 진행되고 있다. '예술의 현장성'을 강조하는 예술가들은 난감한 상황에 부닥쳤다. 캐나다 출신의 위대한 피아니스트 글렌 굴드(1932~1982)라면 작금의 예술 활동 형태를 반겼을지도 모르겠다. 최고의 바흐 스페셜리스트이자 천재 혹은 기인으로 불린 이 거장은 공개 연주회를 피하고 레코딩 만으로 자신의 존재 가치를 알린 유일한 피아니스트였다. 그는 객석의 관객을 싫어했다. 자신은 음악의 구도자이며, 관객은 소음이나 만드는 방해꾼으로 치부했다.굴드의 범상치 않은 행위들과 연주 스타일은 강한 집착과 편집증에서 기인한 것으로 알려졌다. 거의 평생을 신경쇠약 상태로 산 그의 연주는 정교함으로 충만했다. 음반을 통해 그의 연주를 들어보면, 음표의 정확한 음가(音價)와 이에 어우러지는 장식음의 균질함에 놀라게 되며, 섬세하고 치밀한 타건(打鍵)은 과한 울림이 아닌 적절한 음량으로 맑은 음색을 냈다. 굴드는 23세였던 1955년 미국 음반사인 CBS(컬럼비아)에서 바흐의 '골트베르크 변주곡'을 녹음했다. 그해 6월 녹음을 위해 뉴욕에 온 굴드는 많은 일화를 남겼다. 그는 초여름 날씨에도 두꺼운 코트에 머플러를 두르고 베레모에 장갑을 끼고 있었다. 연주에 들어가기 전엔 두 손을 20분 동안 더운물에 담그고 자신이 가져온 수건으로 물기를 닦아냈다. '미친 사람'으로 오해받을 만한 모습이었는데, 후에 굴드는 "연주 전에 일정한 체온을 유지하려는 방편"이었다고 설명했다. 굴드는 녹음에 들어가서도 기행을 일삼았다. 그는 피아노를 치면서 도취한 상태로 입을 벌리고 노래를 이어갔다. CBS의 녹음기술자들은 굴드의 허밍을 녹음하지 않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연주자의 신음에 가까운 노랫소리는 곳곳에 담겼다. 녹음 이듬해인 1956년 출시되자마자 이 음반은 곧 베스트셀러 반열에 올랐다. 이후 한 번도 절판되지 않고, 오늘날까지 팔리고 있다.많지 않은 공개 연주회 무대였지만, 그마저도 32세에 은퇴를 선언한 굴드는 이후 레코딩에 전념했다. 한 번 레코딩한 곡은 재차 녹음하지 않았던 굴드는 유일하게 '골트베르크 변주곡'을 49세에 재녹음했다. 20대 때와 다른 해석이 담긴 이 음반은 이듬해 굴드의 급사(뇌졸중) 후 세상에 나왔다. 굴드에게 '골트베르크 변주곡'은 데뷔작인 동시에 사망 전 은퇴작이 됐다. /김영준 인천본사 문화체육부장

2020-07-16 김영준

[김영준의 재밌는 클래식·(56)엔니오 모리꼬네]불멸의 선율로 기억될 'OST의 거장'

'시네마천국' 등 500여편 탄생장르따라 다양한 스타일 시도1964년 제작된 영화 '황야의 무법자'의 휘파람소리는 많은 이들의 뇌리에 남아있다. 유령의 울음처럼 울려 퍼지는 음산한 휘파람 소리(팬플루트로 연주)와 어우러지는 황량한 음악. 이탈리아판 서부영화의 효시로 평가받는 '황야의 무법자'는 당시 무명에 가까웠던 배우 클린트 이스트우드와 음악가 엔니오 모리꼬네를 세상에 알렸다.이어서 '천국의 나날',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 '미션', '언터쳐블', '시티 오브 조이', '시네마 천국', '사선에서', '폭로', '러브 어페어', '유턴', '캐논 인버스', '언노운 우먼', '헤이트풀8' 등 무려 500여편의 영화음악을 쓰며 '영화음악의 거장'으로 칭송받은 엔니오 모리꼬네. 그가 지난 6일(현지시간) 이탈리아 로마의 한 병원에서 숨을 거뒀다. 향년 91세. 이 거장은 최근 낙상 사고로 대퇴부 골절상을 입고 병원에서 치료를 받아온 것으로 알려졌다. 거장의 타계 이후 전 세계 영화·음악계 관계자들의 추모가 이어지고 있다.1928년 로마에서 태어난 엔니오 모리꼬네는 이탈리아의 명문 음악학교인 산타체칠리아음악원에서 트럼펫과 작곡, 합창지휘를 전공했다. 그는 20세기 모더니즘 음악의 성지인 독일 다름슈타트의 1959년 현대음악제에서 '우연성음악'의 대표 작곡가인 존 케이지를 만나 사사했다. 이듬해 베네치아의 라 페니체극장에서 자신의 '관현악을 위한 협주곡'을 지휘(초연)했다. 그러나 생활고로 라디오와 TV 방송 음악의 편곡을 맡았고, 영화음악에도 손을 대기 시작했다. 1961년 영화 '일 페데랄로'의 음악을 담당하면서 영화음악가로 출발했으나, 클래식을 전공한 자존심 때문에 본명 대신 '레오 니콜스', '댄 사비오' 등 여러 가명을 썼다. '황야의 무법자'의 성공 이후 본격적으로 활동했다. 모리꼬네의 작업 스타일은 영화 장르에 따라 약간씩 달랐다. 클래시컬한 자국 영화에선 고전적 오케스트레이션을 썼으며, 미국식 블록버스터 영화에선 전자악기의 하나인 신시사이저를 과감히 도입하기도 했다. 영화에 따라 분위기는 다르지만, 전반적으로 그는 어렵지 않고 단순한 멜로디로 음악을 만들었다. 이와 함께 탄탄한 베이스로 유려한 선율을 떠받쳐 내는 마력으로 청자들을 매료시켰다. 이는 한때 변방에서 활동한 영화음악가로 푸대접받은 모리꼬네를 전 세계인이 사랑하는 음악가로 변모시키는 요소가 되었다. /김영준 인천본사 문화체육부장

2020-07-09 김영준

[김영준의 재밌는 클래식·(55)승리 교향곡]독일 작곡가 곡으로 승리 염원한 연합군

BBC 뉴스 시그널로 베토벤 '운명' 적이 아닌 인류대표 음악가 인정먼 거리에 정확한 통신문을 전송하려면 전건을 길게 누르거나 짧게 눌러서 신호를 보내는데 이게 우리가 아는 모스부호였다. …(중략)… 짧은 신호는 '돈', 긴 신호는 '스'였다. A는 약속 신호가 짧게 한 번 길게 한 번이었고, '돈스'로 읽었다. B는 긴 신호 한 번 짧은 신호 세 번, 그러니 '스돈돈돈'. 한글 ㄱ은 돈스돈돈 식이었다. 무선놀이할 때 우리 입에서는 스돈돈돈돈 스돈스 돈돈돈 하면서 '돈'과 '스'가 무한대로 흘러나올 수밖에 없었다. - 양진채 소설집 '검은 설탕의 시간'(강 刊) 가운데 '북쪽 별을 찾아서' 중에서.사무엘 모스가 창안한 '모스부호'는 1844년 미국 워싱턴과 볼티모어 간에 연결된 전선 65㎞ 구간에서 첫 공개 전송됐다. 이후 가장 간단한 방법으로 세계를 연결했다. 우리나라에선 1885년 인천(제물포)과 서울(한성) 사이 전신업무 개시와 함께 도입됐다.우리가 '운명'이라고 부르는 베토벤 '교향곡 5번, Op 67'(1808년 초연)은 서양에선 작품의 주요조성인 'C단조' 교향곡으로 불린다. 베토벤을 수식하는 '악성(樂聖 )'이니 이 작품의 부제 '운명(運命)'은 이름 붙이기 좋아하는 일본인들이 만들었다. 때문에, 우리와 일본에서 주로 통용되는 '운명'은 서양에서 '승리' 교향곡으로도 잘 알려졌다. 우연이겠지만, 유명한 셋잇단음 모티브인 '딴딴딴따~'의 리듬이 승리(Victory)를 의미하는 'V'의 모스부호(돈돈돈스)와 일치하기 때문이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연합군은 베토벤의 이 작품으로 승리를 다짐했다. 당시 영국 BBC 방송은 전쟁의 승리를 염원하면서 라디오 뉴스 시그널로 '운명'의 첫 소절을 사용했다. 이는 레지스탕스를 비롯해 나치의 통제 아래 있는 유럽 가정에 전파되는 희망의 신호였다. 전시(戰時)에 적국(독일) 작곡가의 음악을 방송 시그널로 사용하는 것에 대한 찬반이 영국에서 있었지만, 당시 총리였던 윈스턴 처칠은 '불에는 불'이라는 견해를 밝혔다. 전제주의를 부정했던 베토벤의 음악이 나치의 비뚤어진 명분에 대항하는 것으로 본 거였다. 또한 처칠과 영국, 연합군에 포함된 유럽인들은 베토벤을 독일 작곡가가 아니라 인류를 대표하는 음악가로 인정했기 때문에 가능했을 터였다.투쟁적이며, 궁극에 승리를 쟁취하는 베토벤의 다섯 번째 교향곡 '운명'은 작품의 성격과 함께 순번 '5'를 뜻하는 로마숫자(Ⅴ)마저도 영문 'V'와 일치하며 '승리'의 이미지를 굳혔다. /김영준 인천본사 문화체육부장

2020-07-02 김영준

[김영준의 재밌는 클래식· (54) 숲]청력 잃은 베토벤에게 힘이 된 산책

자연속 깨달음 '걸작'으로 탄생말러 '탄식의 노래' 배경으로도'슈바르츠발트'(Schwarzwald)는 독일 남서부 라인강 동쪽에 160㎞ 길이로 뻗어있는 산맥이다. 우리말로 번역하면 '검은 숲'이다. 울창하게 자란 나무들 때문에 낮에도 햇빛이 들지 않아서 검은 숲으로 불린다. 도나우강의 발원지이기도 한 이 숲은 그림 형제의 동화 '헨젤과 그레텔', '빨간 모자'의 배경이다. 숲에서 길 잃은 어린 남매를 향해 식욕을 불태우는 마녀가 '헨젤과 그레텔'에 등장한다. '빨간 모자'엔 할머니를 잡아먹고서 소녀까지 노리는 늑대가 나온다. 이렇듯 과거의 숲은 으스스한 장소로 인식됐다.구스타프 말러는 빈 음악원 수학 당시 '탄식의 노래'(Das Klagende Lied)를 작곡했다. 합창과 독창, 오케스트라가 어우러지는 대 편성 칸타타인 이 작품은 깊은 숲 속을 배경으로 전개된다. 가사는 말러가 직접 썼는데, 그림 형제의 동화 '노래하는 뼈', 루트비히 베슈타인의 동화, 마틴 그라이프의 시를 참조했다. 가사의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백마 탄 왕자를 도저히 찾을 수 없다고 생각한 여왕은 숲 속의 붉은 꽃을 찾아오는 사람과 혼례를 치르겠다고 선언한다. 소식을 접한 형제는 숲으로 꽃을 찾아 나선다. 아우가 꽃을 찾아내자 형은 아우를 죽이고 꽃을 취한다. 동생은 그렇게 버드나무 아래에 묻히고 만다. 어느 날 버드나무 곁을 지나던 음유시인은 죽은 아우의 뼈를 발견해 플루트를 만든다. 형과의 결혼식 날 그 플루트를 불었는데 살인의 전모가 노래로 흘러나왔다. 결혼식 날 왕국은 와해했다.'탄식의 노래'는 훗날 말러가 선보인 후기 낭만주의 걸작 교향곡들의 밑거름이 되며, 작곡가 특유의 염세주의의 출발점이 되는 작품이다.오스트리아 빈에 있는 '비너발트'(Wienerwald)에는 베토벤 길과 동상이 함께 보존돼 있다. 이 숲 북쪽엔 휴양 도시인 하일리겐슈타트가 인접해 있는데, 베토벤은 요양차 1802년부터 이곳에 머물렀다. 수년 동안 앓은 귓병이 악화했기 때문이었다. 요양 초기, 음악가에게 사형 선고와도 같았던 청력 상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유서를 썼던 베토벤은 역경을 딛고서 1808년 교향곡 5번 '운명'과 6번 '전원'을 발표했다. 당시 베토벤은 하루도 빠짐없이 비너발트를 산책했다고 한다. 자연에서 얻은 깨달음으로 예술혼을 불태웠고, 그 영감으로 걸작을 만들어낸 거였다. 도피와 은둔, 고독과 사색, 휴식과 충전의 공간인 숲은 우리의 삶뿐만 아니라 예술과도 뗄 수 없는 요소다. /김영준 인천본사 문화체육부장

2020-06-11 김영준

[김영준의 재밌는 클래식·(53)커피]18세기 흔한 풍경 '카페 연주회'

바흐 관련된 '커피 칸타타' 인기베토벤·브람스도 직접 원두 추출 1743년에 창단한 독일의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 오케스트라(Leipzig Gewandhaus Orchester)는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관현악단이다. 열두 명으로 시작한 이 단체는 개인의 저택을 순회하면서 연주회를 개최했다. 이들의 연주 소식에 주민들의 관심 또한 커졌고, 그만큼 단원과 청중이 늘었다. 더 큰 공연 공간이 필요하게 되자 이들은 카페(커피 하우스)로 옮겨 연주회를 열었다. 얼마 후 카페마저 청중을 수용하는 데 한계에 부닥쳤다. 인기 폭발에 걸맞게 더 넓은 장소가 필요했다. 1781년 직물업자들이 모여서 회의하고 그들이 만든 제품을 전시하고 보관하는 용도로 지은 건물인 게반트하우스(의복협회 회관)로 연주장을 옮겼다. 이렇게 하여 오케스트라의 명칭에 게반트하우스가 붙게 됐다.18세기 상업도시 라이프치히에선 커피가 대유행했다. 가정마다 커피를 즐기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시내 곳곳의 카페에선 커피를 즐기면서 담소를 나누는 사람들로 성황을 이뤘다. 카페가 사교장 역할을 하다 보니 소규모 공연도 종종 열렸다. 창단 초기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 오케스트라의 카페 연주회 또한 그 일환으로 보면 된다.6년 동안 쾨텐의 궁정악장으로 활동한 바흐는 1723년 성 토마스 교회의 음악감독으로 부임하면서 라이프치히에서 음악 활동을 이어갔다. 바흐는 성 토마스 교회와 성 니콜라이 교회의 일요 예배를 위한 칸타타(Cantata)를 매주 두 곡씩 작곡했다. 1729년까지 교회 칸타타가 집중적으로 작곡되는데, 소규모 칸타타들과 함께 규모가 큰 수난곡 등 종교음악의 걸작들이 이 시기에 탄생했다.세속 칸타타인 '커피 칸타타, BWV 211'도 비슷한 시기에 작곡됐다. 바흐가 이끄는 콜레기움 무지쿰의 연주로 바흐가 자주 다니던 카페에서 소개된 이 칸타타는 큰 인기를 끌었다. 풍자와 익살로 가득한 '커피 칸타타'의 가사는 프리드리히 헨리키가 썼다. 커피를 광적으로 좋아하는 딸과 이를 못마땅하게 여기는 아버지의 이야기다. 극은 커피 예찬으로 마무리된다.커피를 좋아한 작곡가로 바흐와 함께 독일 음악의 '3B'로 불리는 베토벤과 브람스도 꼽을 수 있다. 베토벤은 매일 모닝커피용으로 원두 60알을 골라낸 뒤 추출해 마셨다. 그로 인해 커피에서 '60'은 베토벤 넘버가 됐다. 원두 60알은 8~10g 정도인데, 오늘날 에스프레소 한 잔을 뽑는 데 사용되는 양과 일치한다. 브람스는 자신이 마실 커피는 직접 추출해 마셨다고 한다. 브람스는 그 누구도 자신처럼 진하고 깊은 향의 커피를 내릴 수 없다는 자부심에 차 있었다. /김영준 인천본사 문화체육부장

2020-05-28 김영준
1 2 3 4

경인일보 채널

  • 강원일보
  • 경남신문
  • 광주일보
  • 대전일보
  • 매일신문
  • 부산일보
  • 전북일보
  • 제주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