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준의 재밌는 클래식

 

[김영준의 재밌는 클래식·(22)원전(原典)음악]옛 음악 원형 재현 '순수성 되살리기'

바로크 등 '그 시대 악기'로 연주약동하는 템포·사운드 신선 매력"원전음악이 도대체 뭐야?""옛날 악기로 연주하는 거 있잖아. 그것도 다 유행이어서 곳 사라질 거래."2000년대 초반 한 연주회장에서 들었던 옆 청중 일행의 대화다. 옛날 악기로 연주한다는 말은 맞았고, 유행이 사라질 거라는 얘기는 틀렸다. 원전(原典)음악은 1980년대 중반 국내에 소개되었다. 2000년 이후 원전음악 연주단체의 내한 연주회가 간헐적으로 이뤄지고 있으며 완성도가 높은 음반도 수월하게 접할 수 있게 됐다. 국내 자생 연주단체도 활동을 하고는 있지만 유행으로까진 번지지 못했다. 그렇다고 사라지지도 않았다.원전음악은 'Authentic Music'을 번역한 것으로, 르네상스와 바로크, 고전주의 등 옛 음악을 그 시대의 악기로 연주하는 것을 말한다. 정격(正格)음악으로도 불린다. 21세기엔 연주에 관한 연구나 해석에 의미를 부여해 '음악'보다는 '연주(Performance)'로 표기하는 경향이 짙어졌다. 유럽에서 원전연주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서스톤 다트, 니콜라우스 아르농쿠르 등에 의해 시작됐다. 이어서 존 엘리엇 가디너, 크리스토퍼 호그우드, 프란스 브뤼헨, 구스타프 레온하르트, 안너 빌스마 등의 노력으로 1980년대 이후 대중화에 성공했다.원전연주가들은 악기와 연주법이 시대에 따라 변한다는 점에 주목했다. 근대식 악기로 연주하는 옛 음악이 아닌, 옛 음악 본래의 순수성을 되살리자는 거였다.원전연주가들은 관악기는 키와 밸브가 달리지 않은 19세기 초반 이전의 악기를, 현악기는 19세기 후반에 등장한 금속제 현 대신 양의 창자를 꼬아 만든 '거트'를 사용했다. 현대 관점으로 봤을 때 연주법은 더 어렵고 음량은 작아졌다. 또한, 이들은 작곡가가 필사한 악보나 필사본에 가장 가까운 원형을 재현해 연구했다. 이를 통해 연주 속도와 강약, 비브라토(음을 떨어주는 기법) 등도 철저한 고증을 거쳤다. 부드러우면서도 순수한 소리, 작위적이지 않은 템포에 많은 사람이 매료됐다.원전연주가들의 원본 악보와 음향 탐구는 음악계 전반의 악보 해석과 연주에도 영향을 끼치고 있다. 원전연주가들은 과거의 음악을 미래지향적으로 해석하고 표현하는 선봉에 서 있다고 할 수 있다. 실제로 듣는 원전음악은 약동하는 템포 설정에 원전악기들의 신선한 사운드가 어우러져 현대인의 감성에 잘 어울린다. 이들의 연주에서 종종 만날 수 있는 '파격'(학구적인 악보 연구를 통한) 또한 미래를 지향한다. /김영준 인천본사 문화체육부장

2019-08-15 김영준

[김영준의 재밌는 클래식·(21)표절(剽竊)Ⅱ]표절 앞에 '내로남불'이었던 로시니

여러 작품 섞어낸 제자에 비아냥본인은 마감일 코앞 베끼기 빈번르네상스와 바로크 시기, 궁정과 교회에 고용돼 창작활동을 했던 음악가들의 작품은 고용주의 소유였다. '작곡가=작품의 주인'이라는 인식은 베토벤 시대에 와서야 자리 잡았다. 18세기 후반부에 들어서면서 작곡가들은 산업도시에서 주로 작품을 발표했다. 이때부터 형성된 작곡가의 '자기 작품'이라는 개념은 예술적 의지의 표현이었다. 또한 지적 재산권 개념의 등장이었다.그러나 19~20세기에 와서도 자신 혹은 남의 작품에 대한 도용이 없어진 것은 아니었다. 영감을 받은 선대 작곡가의 작품 일부분을 자신의 작품에 배치하는 경우는 꾸준히 이어졌다. 이는 특정 영화의 장면이나 대사를 인용해 해당 작품과 연출자에 대한 존경을 표시하는 '오마주(Hommage)'와 유사성을 띤다. 또한 선배들의 음악이나 민요 등의 특정 주제를 활용한 변주곡과 광시곡들도 탄생했다. 몰래 가져다 쓰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이탈리아의 작곡가 로시니(1792~1868)는 '표절'과 관련한 일화를 다수 만들었다. 어느 날 로시니는 제자가 작곡한 오페라 '사막'의 초연을 봤다. 공연 후 로시니는 제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좀 전에 본 오페라 말이야, '사막'이 아니라 '네거리'더군. 알 만한 사람(작곡가)들은 다 만나게 되던 걸." 여러 작곡가의 작품들을 요소요소에 도용한 것을 힐난한 거였다. 이처럼 남의 표절을 지적했던 로시니는 정작 자신의 표절에 대해선 관대했다. 깊은 사색이나 고뇌 끝에 작품을 만들어 내는 스타일이 아니었던 로시니는 출판업자나 흥행사가 정한 마감 일에 이르러서야 쉽게 작곡했다. 창작력이 떨어지면, 자신이든 남의 작품이든 도용도 빈번했다. 우리 귀에 익숙한 오페라 '세비야의 이발사' 서곡은 오페라 '영국 여왕 엘리사베타'와 '파르미라의 아우레리아노', '너무한 오해'에서도 서곡으로 쓰였다.또한 로시니는 '세비야의 이발사'에 하이든의 '현악 4중주 46번'의 일부분을 갖다 썼다. '면도칼'이라는 부제가 붙은 하이든의 작품이 도용된 것을 눈치챈 친구가 비난하자, 로시니는 "이발사가 면도칼을 좀 썼기로 문제 될 게 있나"라며 익살을 부렸다고 한다. 로시니의 낙천적 음악관은 '표절'과 관련된 일화들에서도 잘 드러난다. 로시니는 현재의 법 기준으로 판단한다면 엄연한 범죄자였다. /김영준 인천본사 문화체육부장

2019-08-08 김영준

[김영준의 재밌는 클래식·(20)표절(剽竊)Ⅰ]서로 베끼면서 기반 다진 바로크시기

당시엔 '고유 창작품' 개념 없어바흐·헨델도 숱하게 편곡·인용"클래식에도 표절이 있을까?" 답은 "그렇다"이다. 18세기 중반 바로크 시기까지, 특정 작곡가의 '고유한 창작품'이라는 개념은 존재하지 않았다. 당시 작곡가들은 궁정과 교회에서 열리는 각종 행사에서 연주될 곡을 만들었다. 이처럼 궁정과 교회에 고용돼 창작활동을 했던 작곡가들의 작품은 행사 후에는 궁정이나 교회의 문서고로 들어갔다. 작품은 작곡가의 소유가 아닌 고용자의 소유였던 거였다.사정이 이렇다 보니 작곡가들은 수시로 열리는 행사에 맞춰 새 작품을 쓸 때 자신의 이전 작품이나, 다른 이의 작품을 다시 쓰고는 했다. 작곡가끼리의 표절이 공공연하게 있었던 거였다. 하지만 요즘의 표절 기준에 대입해서 본다면, 바흐와 헨델은 도덕적 비난은 물론이고 법적 책임까지 져야 할 정도로 심각했다. 바흐의 작품에 이바지한 작곡가로 비발디를 비롯해 파헬벨, 프레스코발디, 북스테후데 등 많은 이들이 거론된다. 바흐는 또 자신의 이전 작품을 편곡해 숱하게 재활용했다. 바흐의 대작 '마태 수난곡'이나 '요한 수난곡'의 일부는 이전에 발표했던 칸타타들이다.헨델은 '표절의 제왕'이라 할 만큼 남의 것 베끼기에 거리낌이 없었다. 3막으로 구성된 오페라 '무지오 스케볼라'의 경우 3막만 헨델의 작품이며, 1막은 아마데이, 2막은 보논치니의 작품을 그대로 옮겨 적었다. 헨델은 오라토리오 '메시아'를 단 3주 만에 완성했다. 몇몇 전기 작가들이 "경건한 신앙심(하늘에서 받은 영감)으로 헨델이 3주 만에 대작을 완성했다"고 기술하면서 더욱 유명세를 탔다. 하지만 후대의 전문가들은 순수한 창작 시간이 아닌 다른 이들의 작품을 더러 인용하는 과정이었을 것으로 의심했다. 20세기 전반기의 음악학자 앨프리드 아인슈타인은 "헨델은 도둑질을 통해 뭔가를 만든 사람이다. 그를 거치면 돌이 금이 된다"고 평가했다.이처럼 바로크 시기 작곡가들은 서로의 작품을 '표절'하면서 음악사의 기반을 다졌다. 18세기 후반부를 지나 19세기에 진입하면서 소위 자본주의 시대를 살아가는 '개인 예술가'가 탄생했다. 자기 작품에 대한 의식 또한 강화됐다. 작곡가는 악보를 소중히 취급했으며, 일일이 작품료와 인세를 챙겼다. 이때부터 표절은 인용이 아닌 범죄로 인식되었다. /김영준 인천본사 문화체육부장

2019-07-25 김영준

[김영준의 재밌는 클래식·(19)리베르탱고]춤이 아닌 감상을 위한 '탱고'

'아르헨티나 작곡가' 피아졸라바로크 기법 가미 새음악 내놔아르헨티나의 반도네오니스트이자 작곡가 아스토르 피아졸라(1921~1992)는 1974년 '리베르탱고'를 발표했다.가장 널리 알려진 피아졸라의 작품인 '리베르탱고'는 춤곡인 고전 탱고가 아니라 콘서트장에서 감상하는 '새로운(Nuevo) 탱고'를 상징하는 곡이다. 탱고는 19세기 후반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의 항구 동네 술집에서 생겨났다. 이민자들이 많이 살던 곳이다. 어린 피아졸라는 아버지가 사준 반도네온으로 탱고를 연주했다. 피아노도 배운 그는 10대 후반부터 음악 활동을 시작했다. 알베르토 히나스테라의 제자가 되면서 작곡을 익혔다. 피아졸라는 탱고 편곡과 연주로 생계를 이어가면서 한편으로는 교향곡과 소나타 등을 작곡했다. 이 시기의 그는 허름한 카바레에서 반도네온을 연주하는 자신의 모습을 부끄럽게 생각했다. 작곡에 매진한 이유가 됐다. 1953년 발표한 교향곡 '부에노스아이레스'로 파비엔 세비츠키 작곡 대회에서 우승하면서 1년 동안의 파리 유학길에 오른 피아졸라는 파리음악원에서 작곡과 교수 나디아 블랑제를 만났다. 블랑제는 피아졸라가 제출한 작곡 과제에 대해 "이 부분은 스트라빈스키, 이 부분은 버르토크, 여기는 라벨, 어디에도 피아졸라는 없다"고 평가했다. 블랑제는 제자에게 어떻게 살았고, 무엇을 연주했는지 과거를 캐물었다. 피아졸라는 창피함을 무릅쓰고 "카바레에서 반도네온을 연주했다"고 밝혔다. 탱고를 연주해 보라는 스승 앞에서 피아졸라는 자작곡 '승리'를 선보였다. 연주 후 블랑제는 이같이 말했다. "아스토르, 이게 바로 너야. 탱고를 절대로 그만 둬서는 안돼."고국으로 돌아온 피아졸라는 바로크 시기의 모음곡(Suite) 양식과 작곡 기법을 탱고에 가미했다. 피아졸라의 '새로운 탱고'가 태동하는 순간이다. 그러나 탱고는 춤을 위해 존재한다는 관념에서 벗어나지 못한 아르헨티나 사람들은 피아졸라의 음악을 외면했다. 그로 인해 수입은 변변치 않았다. 하지만 피아졸라는 '고인 물은 썩듯이, 탱고도 진화해야 한다'며 의지를 꺾지 않았다. 탱고를 작은 오페라 형태로 확장한 걸작 '부에노스아이레스의 마리아'를 비롯해 3천여 곡을 남긴 피아졸라는 1990년 뇌출혈로 쓰러졌다. 피아졸라는 1992년 3월 11일 71번째 생일을 기념해 아르헨티나의 방송사들이 앞다퉈 편성한 프로그램들을 통해 자신의 '새로운 탱고'를 들었다. 그리고 4개월 뒤 눈을 감았다. /김영준 인천본사 문화체육부장

2019-07-18 김영준

[김영준의 재밌는 클래식·(18)말러의 시대]사후에 인정받은 '교향악 절대기준'

기존 체계 탈피 시도 외면당해동화 요소·폭력등 골고루 담겨"나의 시대는 반드시 올 것이다." 오스트리아의 유대계 작곡가 말러(1860~1911)가 생전에 남긴 이 말은 완벽하게 실현됐다. 20세기 후반 이후, 클래식을 얘기할 때 말러는 피해갈 수 없는 존재가 됐다. 전 세계 지휘자와 오케스트라는 말러 교향곡의 연주 성과에 의해 평가받는다. 말러가 교향악의 절대 기준으로 떠오른 것이다.1889년 초연된 '교향곡 1번'은 철저히 무시당했다. 기존 교향곡 체계에서 벗어나려는 대담한 시도에 아무도 호응하지 않았다. 생전에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던 그의 작품은 사후 50년 가까이 지나서 평가받기 시작했다. 해외에서는 1960년대, 우리는 1990년대에 들어서면서다.'후기 낭만주의'로 분류되는 말러의 음악에는 동화적인 요소, 아름다움과 모성애에 대한 동경, 전쟁과 폭력에 관한 묘사 등이 골고루 담겼다. 세기말의 염세적이며 퇴폐적 풍조와 어우러지기도 한다. 전반적으로 탐미적이고 음울한 분위기를 자아낸다는 평가를 받는 이유이다. 당대 최고 지휘자 중 한 명이기도 한 그는 대편성 오케스트라에 의한 풍부한 음향과 함께 매우 정제된 실내악적 음향으로 작품의 미묘한 분위기를 극대화 시킨다. 말러의 음악에는 다양한 매력적인 요소들이 있으며, 그만큼 열혈팬들도 많다.말러를 테마로 1999년 국내 인터넷 포털에 문을 연 한 카페는 아직도 활발하다. 올해가 20주년이다. SNS의 발달로 오래된 다른 인터넷 커뮤니티가 쇠퇴했지만, 이 카페는 11일 현재 2천200명의 회원이 가입해 있으며, 하루 평균 100명 정도가 꾸준히 카페를 찾고 있다. 카페는 정기적으로 서울에서 음악 감상회를 여는 등 말러 음악에 대한 매력과 묘미를 공유하고 있다. 월간 '객석'의 편집장을 지낸 박정준씨는 말러의 음악을 '고요의 바다'(달의 표면에 있는 달의 바다)로 지칭했다. 그는 말러의 마지막 교향곡인 '9번' 1악장에 밀려왔다가 다시 밀려가는 듯한 악상의 움직임이 보인다고 했다. 말러는 교향곡을 통해 '하나의 우주'를 구현하려고 했다. /김영준 인천본사 문화체육부장

2019-07-11 김영준

[김영준의 재밌는 클래식·(17)'카르멘']비제의 하층민 이야기 '사실주의 오페라 효시'

기존 신화·귀족서 탈피 여공 다뤄초연 '혹평' 반면 작곡가들은 '찬사'19세기 중반 프랑스에선 구노와 마스네의 그랑 오페라, 오펜바흐의 오페레타, 베르디의 이탈리아 오페라가 유행했다. 같은 시기 독일에서는 바그너의 '음악극(Musik Drama)'이 뿌리를 내리고, 유럽으로 퍼져나가고 있었다.파리 태생으로, 파리음악원을 나온 비제(1838~1875)는 오페라 '진주조개잡이'(1863), '페르트의 아름다운 아가씨'(1867) 등을 발표했다. 작품성을 인정받으며 이름을 알렸지만, 흥행에서는 실패했다. 빈곤한 생활 속에서 슬럼프에 빠진 비제는 몇 개의 오페라를 작곡하다가 포기하고 말았다. 완성에 이르지 못하지만, 당시 작곡한 음악들은 이후에 나오는 오페라 '카르멘'을 비롯해 극 부수음악 '아를르의 여인' 등의 모티브가 되었다.비제는 1873년 '카르멘'의 작곡을 시작했다. 메리메의 동명 소설에 의한 이 작품은 1875년 초에 완성됐으며, 그해 3월 파리의 오페라코미크 극장에서 초연됐다. 혹평이 쏟아졌다. "바그너와 베르디의 예술적 성과가 공존하는 시대에 이 같은 저질 이야기를 다뤘다는 사실에 놀라움을 금할 수 없다", "오페라계의 쓰레기" 등의 표현마저 나왔다. 악평 속에 평소 건강이 좋지 않았던 비제는 '카르멘' 초연 3개월 후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 불과 37세의 나이였다.'카르멘' 이전, 오페라는 화려한 신화나 귀족들의 호사스러운 생활을 보여주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카르멘'에는 담배공장 여공과 집시, 사병 계급의 군인과 밀매업자 등이 나온다. 스페인 하층민의 어두운 삶을 배경으로 '사랑'과 '죽음'이라는 두 가지 주제를 강하게 대비시켰다.동시대 작곡가들은 이 작품에 최고의 찬사를 보냈다. 재공연에서는 청중의 평가도 호평으로 돌아섰다. 청중의 격렬한 찬사 속에 '카르멘'은 오페라코미크에서 무려 48회에 이르는 공연을 이어갔다. 1876년 오페라코미크에서 작품을 접한 차이콥스키는 "모든 면에서 걸작인 '카르멘'은 세계에서 가장 인기 있는 오페라가 될 것임을 확신한다"고 평가했다. 생상스, 브람스, R.슈트라우스, 드뷔시 등도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하층민의 삶을 사실적으로 그린 비제의 '카르멘'은 사실주의(베리스모) 오페라의 효시로 불린다. 마스카니와 푸치니의 주옥같은 작품을 낳았다는 평가를 받는 '카르멘'은 현재 세계에서 가장 인기 있는 오페라 중 하나다. /김영준 인천본사 문화체육부장

2019-07-04 김영준

[김영준의 재밌는 클래식·(16)플라시도 도밍고]60년간 4천회 공연 '오페라의 제왕'

고령 무색 "쉬면 녹슬 것" 의지테너서 바리톤으로 바꿔 '활약' 젊은 시절 반짝 빛나는 스타는 많지만, 오랜 세월에 걸쳐 꾸준히 사랑을 받는 스타는 많지 않다. 누구나 나이가 들면 전성기의 기량을 보여주지 못하고 후배들에 자리를 내주게 된다. 몸이 악기인 성악가의 경우 다른 음악가들에 비해 기량의 퇴조는 빠르다. 그런 점에서 여전히 세계 오페라 무대를 누비는 스페인 출신 성악가 플라시도 도밍고(78)는 독보적이다.2008년 영국의 권위 있는 음악 저널인 'BBC뮤직매거진'의 평론가들은 투표를 통해 '역사상 가장 위대한 테너'로 도밍고를 선정했다. 스리 테너의 일원이었으며 오랜 라이벌이었던 루치아노 파바로티뿐만 아니라 엔리코 카루소와 베니아미노 질리, 마리오 델 모나코 등 전설적인 테너들의 평판도 넘어선 것이다. 그즈음 도밍고는 테너로서 고음이 흔들리는 부침을 겪고 있었다. "그만 품위 있게 은퇴해"라고 평론가와 동료들은 이야기했다. "쉬면, 녹이 슬 것(When I rest, I rust)"이라며 의지를 꺾지 않은 도밍고는 2009년부터 바리톤으로 무대에 오르고 있다. 전성기의 테너 시절에 비하면 성량이 줄었지만, 바리톤으로서 깊이 있는 음색을 선보이고 있다.도밍고는 지난 4월 베르디의 오페라 '시몬 보카네그라'의 주역으로 오스트리아의 빈 슈타츠오퍼 무대에 올랐다. 그의 4천 번째 오페라 공연이었다. 4천 회는 레코딩을 뺀 순수 무대 출연 횟수이다. 18세이던 1959년 멕시코시티에서 공식 데뷔한 이래, 60년 만이다. 도밍고는 그동안 테너 132개와 바리톤 18개를 합한 150개의 오페라 배역을 소화했다. 파바로티는 이탈리아 오페라에 한정된 30여 개의 배역을 맡았으며, 20세기를 풍미한 테너 카루소와 소프라노 마리아 칼라스가 생전에 맡은 배역은 각각 60개와 50개였다.도밍고는 지난 5월 미국 LA 오페라와 독일 베를린 슈타츠오퍼 무대에 올랐다. 이달 초엔 드레스덴 잼퍼오퍼 무대에 섰다. 많은 성악가들이 성대 보호를 위해 오페라 출연 횟수를 조절하고 나이가 든 뒤엔 힘이 덜 드는 콘서트 위주로 활동하는 것과는 사뭇 다르다. 도밍고에게 오페라는 늘 활동의 중심이었다. 영화배우와도 같은 외모와 연기력에 드라마틱한 가창력을 겸비한 그는 반세기 넘게 오페라 팬들을 매료시켰다. 이탈리아와 독일 오페라 모두에 정통한 거의 유일한 테너였던 도밍고에 따라붙는 '오페라의 제왕'. 매우 타당한 수식어다. /김영준 인천본사 문화체육부장

2019-06-27 김영준

[김영준의 재밌는 클래식·(15)'레퀴엠']시대별로 변화 '죽은 자를 위한 미사곡'

장례 기도문 입당송 문장서 유례20세기 들어 연주회용으로 작곡레퀴엠(Requiem)의 정식 명칭은 '죽은 자를 위한 미사곡'이다. '진혼곡(鎭魂曲)'이라고도 한다. 많은 작곡가들이 살아남은 자의 슬픔을 어루만져주기 위해 레퀴엠을 작곡했다. 수많은 레퀴엠 중 프랑스 작곡가 포레(1845~1924)의 작품이 매우 아름다운 수작으로 꼽힌다. 이 작품은 죽음의 고통이나 절망감, 비통함 등의 정서를 걷어내고 정갈한 슬픔만을 담았다는 평가를 받는다.포레의 레퀴엠에서 슬픔과 함께 아름다움과 따스함도 느낄 수가 있는데 이는 작품의 색다른 구성에 기인한다. 입당송과 키리에, 봉헌송, 상투스 등의 전반부 배치는 다른 레퀴엠들과 비슷하다. 하지만 진노의 날이 빠졌다.이는 죽음(심판)에 이른 인간의 비극과 그로 인한 두려움을 되새기지 않으려는 작곡자의 의도로 읽힌다. 작품의 후반부는 자비로운 예수, 신의 어린 양, 자유롭게 하소서, 천국에서 등으로 구성됐다. 위안을 주는 기도문(가사)만을 택해서 배치했다.이 같은 구성과 어우러진 음악적 아름다움은 포레의 레퀴엠을 슬프면서도 정화의 효과가 큰 작품으로 자리잡게 만들었다.레퀴엠은 본래 '안식'을 뜻한다. 그렇다면 레퀴엠이 어떻게 '죽은 자를 위한 미사곡'을 의미하게 되었을까. 가톨릭 미사 중 장례 미사 기도문의 가장 처음에 놓인 입당송(Introitus)의 첫 문장은 '그들에게 영원한 안식을 주소서(Requiem aeternam dona eis)'이다. 그 첫 단어인 레퀴엠으로 '진혼 미사(곡)' 혹은 '죽은 자를 위한 미사(곡)'를 일컬어 온 습관이 굳어진 것이다.음악사에서 르네상스를 지나 초기 바로크 시기인 1620년까지 70여개의 레퀴엠이 작곡됐다. 이때까지의 레퀴엠은 기악 반주가 없는 아카펠라 스타일의 다성음악이었다. 이후 1750년까지 320여개의 레퀴엠이 발표됐다. 고전주의 시기로 진입하면서 왕족이나 귀족을 비롯해 유명 인사의 장례식을 위한 위탁 작곡이 늘어난다. 고섹과 케루비니의 작품을 비롯해 미완성작인 모차르트의 레퀴엠 등이 유명하다. 낭만주의 시기엔 종교음악 장르가 쇠퇴하지만, 삶과 죽음이라는 '근원의 낭만성'을 드러내는 레퀴엠에 많은 작곡가들이 빠져들었다. 1825~1910년에 620여개의 레퀴엠이 작곡됐다. 이 중 베를리오즈와 베르디의 레퀴엠은 그랜드 오페라의 개념이 접목돼 장대한 규모로 만들어졌다. 20세기 중·후반에 레퀴엠은 자유로운 텍스트를 취하거나 아예 가사 없이 작곡되었다. 가톨릭의 전례용이 아닌 연주회용으로 작곡된 것이다. 1910년 이후 작곡된 레퀴엠은 400여곡에 달한다. /김영준 인천본사 문화체육부장

2019-06-20 김영준

[김영준의 재밌는 클래식·(14)쇼스타코비치 '레닌그라드']포화속에서 탄생한 '교향악적 레퀴엠'

전쟁 3부작 첫번째 80분짜리 대곡시민 150만명 사망한 포위전 다뤄"내 교향곡은 대부분이 묘비다." 러시아의 작곡가 쇼스타코비치(1906~1975)가 죽기 직전에 남긴 말이다. 쇼스타코비치는 러시아 혁명을 어린 시절에 겪었고, 제2차 세계대전도 지켜봤다. 예술가의 창작물에 관여했던 옛 소련의 사회주의 체제에서, 발표하는 작품에 따라 '영웅' 음악가로 대접받으며 훈장을 받지만 이내 '반동'으로 낙인 찍혀 죽을 고비도 수차례 넘겼다. 그는 자신의 경험을 고스란히 교향곡에 녹여냈다. 그로 인해 쇼스타코비치의 교향곡들은 전쟁이나 혁명을 소재로 한 것들이 많다. 이들 작품에는 민중의 피 냄새가 짙게 배어 있다.쇼스타코비치의 '교향곡 7번, 레닌그라드'는 서양 전쟁사에서 가장 길고 파괴적인 포위전으로 꼽히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레닌그라드(현 상트페테르부르크) 포위전' 속에서 탄생했다.1941년 6월 히틀러 정권은 소비에트를 침공했다. 이들은 9월 레닌그라드의 마지막 육상 통로(보급로)를 차단했다. 이후 1943년 1월까지 2년 반 동안 이어진 포위전에서 레닌그라드 시민 250만명 중 150만명이 폭격과 굶주림, 질병으로 죽었다.이곳에서 나고 자란 작곡가 쇼스타코비치는 포화가 빗발치는 절망 속에서 일곱 번째 교향곡을 쓰기 시작했다. 당시 쇼스타코비치의 작곡 소식이 알려지자 시민들은 환호했다고 한다. 스탈린 또한 이 작품이 소비에트의 붉은 군대에 힘을 줄 것으로 기대했다.6개월 정도의 작곡 기간을 거쳐 1941년 말에 완성된 '교향곡 7번, 레닌그라드'는 쇼스타코비치의 '전쟁 3부작' 중 첫 번째로, 연주시간이 80여분에 달하는 대곡이다.1942년 3월, 작품의 초연 이후 소비에트 당국은 쇼스타코비치를 반나치 투쟁의 선봉으로 치켜세웠다. 작품이 워낙 서사적이며 영웅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쇼스타코비치는 자신에게 쏟아진 찬사를 마냥 반기지는 않았을 것 같다.1악장의 거친 행진곡으로 표출되는 '침략' 에피소드는 초연 이후 한동안 독일군을 표현한 것으로 이해됐다. 그러나 작곡가 사후에 출판된 한 전기는 이러한 인식을 불식했다.쇼스타코비치는 전기에서 "7번 교향곡은 나치에게 포위된 레닌그라드를 위한 것이 아니다. 스탈린에 의해 이미 파괴되고 히틀러가 그저 마지막에 거들었던 그 레닌그라드를 위한 것"이라고 밝혔다.이 작품은 전쟁과 폭력에 의해 희생된 이들을 위한 '교향악적 레퀴엠'이다. /김영준 인천본사 문화체육부장

2019-06-13 김영준

[김영준의 재밌는 클래식·(13)봄의 제전]'극한 리듬' 20C 모더니즘 불멸의 이정표

스트라빈스키의 '3대 발레 음악'불규칙한 박자 호불호 갈린 '혁신'"나는 미쳐 버렸다/ 질서가 광기에 무너지고 있었다/ 지휘자에게 린치를 가하라!/ 드럼의 목을 잘라라!/ 금관악기를 도륙내라!/ 현악기를 피에 적셔라!/ 플루트의 목을 졸라라!/ 스트라빈스키의 봄이/ 성스러운 봄의, 무자비한 영화와 고통을 거느리며 도래하나니" 106년 전 이맘때(1913년 5월 29일) 프랑스 파리 샹젤리제 극장에서 열린 '봄의 제전' 초연에 다녀온 영국의 전위 시인 지크프리드 새순은 공연장에서 받은 충격을 시로 표현했다.새순뿐만이 아니라 당시 공연장에 있던 청중은 이해할 수 없는 극한의 리듬과 폐부를 찌르는 날카로운 오케스트라 음향에 큰 충격을 받았다. 바슬라프 니진스키의 안무 또한 이전까지 러시아 발레가 보여주던 것과는 전혀 달랐다. 야만적 줄거리와 음악에 어우러지는 무용도 관객들을 자극했다. 공연 시작 후 객석에서는 "이따위 공연 집어치워"라는 고함과 야유가 터져 나왔다. 이에 "거 좀 조용히 합시다"라는 다른 쪽의 항의가 이어지면서, 두 파로 나뉜 관객 간에 욕설과 주먹다짐이 오갔다고 한다. 그래도 공연은 이어졌고, 출동한 경찰도 어찌할지 몰라서 지켜만 봤다는 '봄의 제전' 초연은 공연 역사상 가장 큰 스캔들로 기록됐다.'봄의 제전'은 '불새'(1910년)와 '페트루슈카'(1911년)를 잇는 러시아 태생의 작곡가 스트라빈스키(1882~1971)의 3대 발레 음악으로 꼽힌다. 곡의 구상은 1910년 봄,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불새'의 작곡을 거의 마무리할 무렵 작곡자의 공상에서 시작됐다. 스트라빈스키는 공상 속에서 그려본 이교도의 엄숙한 의식을 무용 음악으로 형상화하겠다고 생각했다. 작곡자는 봄의 신을 예찬하기 위해 살아있는 젊은 여인을 제물로 바치는 의식을 떠올렸다. 늙은 현자를 중심으로 둘러앉은 이교도들은 제물로 간택된 여인의 춤(죽음에 이르는 의식)을 지켜본다는 내용이다.'봄의 제전'이 이전 음악과 가장 크게 대비되는 부분은 리듬이다. 이전 음악들에서의 리듬은 맥박처럼 일정하고 정확했다. 하지만 이 작품에서 박자는 따라갈 수 없이 불규칙하다. 반복되는 리듬이 없어서 듣는 이들에게 두려움을 주었다. 초연 이후에야 이 같은 부분을 알아차렸던지, 1914년에 감행된 두 번째 공연(발레 없이 연주회만으로 진행)은 청중의 환호와 열광의 도가니 속에 막을 내렸다.'봄의 제전'은 20세기 모더니즘 음악으로서 불멸의 이정표를 세웠다. 당시의 대단한 '혁신'은 이제 위대한 '고전'이 되었다. /김영준 인천본사 문화체육부장

2019-06-06 김영준

김영준의 재밌는 클래식·(12)런던 빅 파이브와 토머스 비첨]'후계자 포기' 유산으로 만든 오케스트라

음악 독학, 런던필·로열필 창단5곳중 4곳과 연관 열정 쏟아내영국 런던에는 세계적인 축구 클럽들이 여럿 있다. 축구 클럽만큼이나 세계적으로 유명한 오케스트라들이 런던을 기반으로 연주 활동을 펼치고 있다. 그중 오랜 역사와 함께 뛰어난 연주력을 갖췄다고 평가받는 오케스트라 5곳을 '런던 빅 파이브'라 한다. BBC 교향악단은 1930년 라디오 방송을 위해 창단했다. 초대 상임지휘자 에이드리언 볼트가 20년 동안 오케스트라의 기반을 다지고, 발전시켰다. 영국 최고의 음악 축제인 프롬스(Proms·Promenade Concerts)의 메인 오케스트라로도 유명하다.1932년 토머스 비첨(1879~1961)은 런던 필하모닉을 만들었다. 비첨의 아버지는 다국적 제약회사로 유명한 글락소 스미스클라인의 전신인 비첨즈 필스의 사장이었으며, 음악 애호가였다. 일찌감치 비첨은 아버지를 이을 후계자로 낙점받았다. 하지만 독학으로 음악을 공부한 비첨은 비범한 해석을 무대에서 펼쳐 보이며 음악가의 길로 들어섰다.런던 교향악단은 빅 파이브 중에서도 최고라고 자부한다. 1904년 창단한 런던 교향악단은 초기에 비첨을 비롯해 독일 지휘자들과 무대에 올랐다. 1974년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에 참가한 최초의 영국 오케스트라이기도 하다.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는 음반회사에서 녹음을 위해 만든 단체다. 음반사 EMI는 전쟁 후 미국에서 돌아온 비첨과 함께 단원을 보강해 1945년 이 단체를 설립했다. 비첨에 이어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이 베를린 필로 가기 전까지 많은 음반을 냈으며, 1955년 오토 클렘페러가 부임하면서 오케스트라의 전성기를 구가했다. 1946년 창단한 로열 필하모닉의 설립자도 비첨이다. 노년으로 접어든 비첨은 이 오케스트라에 열정을 쏟아부었다. 비첨의 타계 후 상임지휘자로 부임한 루돌프 캠페와 로열 필은 1972년 바이올리니스트 정경화와 브루흐의 '바이올린 협주곡'과 '스코틀랜드 환상곡'을 담은 음반(데카)을 내놓으면서 우리나라에도 많이 알려졌다.비첨은 런던 빅 파이브 중 BBC 교향악단을 빼고 4대 오케스트라와 연관된 인물이었다. 물려받은 재산으로 런던 필과 로열 필을 창단하고 운영하는 데 바친 비첨은 말년에는 가진 재산이 거의 없었다고 한다. 비첨은 경제적으로는 빈손으로 떠났지만 전 세계 음악애호가들이 아직도 찾는 음악적 성과를 영원히 남겼다. /김영준 인천본사 문화체육부장

2019-05-23 김영준

[김영준의 재밌는 클래식·(11)20세기 '음악 황제']베를린 필의 전설 '지휘자 카라얀'

단원투표로 선출 많은 음반 남겨잘츠부르크 페스티벌 감독 겸임며칠 전 인터넷 실시간 검색어 순위에서 오스트리아 출신의 지휘자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1908~1989)이 상위권에 오른 적이 있다. 지난 주말 방송된 한 토크쇼 프로그램에 출연한 소프라노 조수미가 카라얀과의 인연을 소개한 여파였다. 방송을 봤거나 방송 리뷰 영상이나 기사를 본 네티즌들이 올해로 타계 20주기를 맞은 '세기의 거장'을 소환했다.'오페라는 이탈리아, 기악은 독일'이라고 한다. 1882년 창단한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는 '기악의 나라=독일'의 등식을 현재까지 증명하고 있는 세계 최정상급 오케스트라이다. 베를린 필은 한스 폰 뷜로-아르투르 니키쉬-빌헬름 푸르트벵글러에 이어 1955년 단원 투표를 통해 제4대 상임 지휘자로 카라얀을 선정했다. 1945년 푸르트벵글러가 나치 동조죄로 구금되자 30대 초반의 루마니아 출신 지휘자 세르지우 첼리비다케가 자리를 메웠다. 2년 후 푸르트벵글러가 석방된 뒤에도 두 사람은 함께 베를린 필을 지휘했다. 첼리비다케는 평소 "음반은 깡통에 담긴 콜라와 같다"며 레코딩을 거부했다.1954년 푸르트벵글러가 사망하고 1년 후 진행된 차기 베를린 필 상임지휘자 선정 투표에서 단원들은 첼리비다케가 아닌 카라얀을 택했다.오케스트라(단원)의 주요 수입원인 레코딩을 하지 않았으며, 완벽주의적 성향을 앞세워 리허설 때 막말도 서슴지 않았던 첼리비다케 대신 카라얀을 택한 것이다.카라얀은 베를린 필 입성 후 이듬해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의 음악감독 자리도 얻었다. 이 음악제의 메인 오케스트라는 빈 슈타츠오퍼 오케스트라(빈 필하모닉)였다. 베를린 필과 빈 필이라는 양대 산맥을 거느리게 된 카라얀은 타계까지 33년 동안 양쪽의 지위를 적절히 활용했다. 그의 눈에 들어야 베를린 필과 협연할 수 있었으며, 잘츠부르크 페스티벌 무대를 밟을 수 있었다. 그에게 '황제', '제왕'의 칭호가 따라붙게 된 연유다.그는 음반뿐만 아니라 영상물을 촬영하는 데에도 관심을 쏟았다. 카라얀과 베를린 필의 레코딩(영상 포함)은 1천여 종에 달하며, 전 세계에서 1억3천만 장이 팔린 것으로 집계됐다. 지금 이 순간에도 그의 음반은 팔려나가고 있다. 1989년 카라얀이 타계하자 그의 뒤를 이을 베를린 필의 지휘자로 여러 인물이 거론됐다. 세계 음악계의 관심 속에, 베를린 필의 제5대 상임 지휘자로 이탈리아 출신의 클라우디오 아바도가 부임했다. 이후 베를린 필의 지휘봉은 사이먼 래틀(영국)을 거쳐 키릴 페트렌코(러시아)로 이어지고 있다. /김영준 인천본사 문화체육부장

2019-05-16 김영준

[김영준의 재밌는 클래식·(10)베토벤 콤플렉스 Ⅱ]21년이나 걸린 브람스의 교향곡

'거인의 발걸음 소리' 같은 부담'베토벤의 제10번' 작품 평가도독일 함부르크 태생의 작곡가 브람스(1833~1897)는 22세였던 1855년 스승인 슈만의 '만프레드 서곡'을 듣고 깊은 감동을 받았다. 브람스는 슈만에게 편지를 보냈다. '만프레드 서곡'의 감동과 그로 인해 생겨난 자신의 교향곡 작곡 의지를 전하기 위해서였다.브람스는 곧바로 작곡에 착수했다. 하지만 7년 뒤인 1862년에야 겨우 1악장을 완성할 수 있었다. 이미 '헝가리 춤곡'과 '피아노 소나타' 등을 발표하며 소위 '잘 나가는 젊은 작곡가'로서의 입지를 다진 브람스였지만, 자신의 첫 교향곡의 구상과 설계 모두 극도로 신중했다. 선배 작곡가인 베토벤을 의식했기 때문이다. 평소 존경하는 베토벤의 아홉 개 교향곡에 비견되는 작품을 쓰겠다고 다짐하던 브람스였지만 이게 오히려 엄청난 부담감으로 작동했다. 브람스는 말했다. "등 뒤에서 들려오는 거인의 발걸음 소리"라고.1악장 완성 후 12년 동안 중단된 브람스의 교향곡 작곡은 1874년에 재개됐다. 2~4악장을 1년여 만에 완성한 후 1악장도 대폭 손질해 완성한 해가 1876년이었다. 착상에서 완성까지 21년이나 걸렸다.브람스 '교향곡 1번' 1악장은 화산 분화구의 용암처럼 모든 것이 녹아 응축된 폭발 직전의 상태를 보여준다. 주제의 구성은 멜로디라고 부를 수 없을 정도의 짧은 편린의 연속이다. 평화와 아름다움을 향한 갈망, 운명을 거스르는 투쟁 등이 대비되며 전개되는 악상은 에너지가 넘친다. 2악장은 1악장의 긴장을 완화 시켜주는 아름다운 사색의 악장이다. 3악장에선 단조롭고 목가적인 평화 속에 스며드는 희망의 빛을 통해 마지막 악장을 예견케 한다. 마침내 모든 기대와 희망을 모아놓은 마지막 악장. 먹구름을 뚫고 비치는 햇살과 같은 호른의 찬란한 울림이 곡 전반을 휘감고 있던 어두운 기운을 걷어내며, 악장의 중반 이후 베토벤 '교향곡 9번, 합창'의 마지막 악장에 필적하는 희망의 선율이 흘러넘친다.19세기의 명 지휘자 한스 폰 뷜로는 이 작품을 "'불멸의 9개'에 이어지는 '베토벤의 제10번 교향곡'"이라고 일컬었다.'어둠에서 빛으로'의 주제, 형식과 스케일의 강조로 인해, 혹자는 "지나치게 베토벤을 의식한 나머지 브람스다움이 덜 하다"고 평가하기도 한다. 하지만 장중함과 엄숙함, 논리적 전개에 더해진 브람스만의 우수는 작곡가 특유의 인상을 잘 드러낸다. 브람스는 이후 3개의 교향곡을 더 작곡했다. 작품 수는 많지 않지만, '베토벤 이후 가장 위대한 교향곡 작곡가 브람스'에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김영준 인천본사 문화체육부장

2019-05-09 김영준

[김영준의 재밌는 클래식·(9)환상교향곡]사랑과 죽음 묘사, 첫 내러티브 교향곡

베를리오즈 경험 담아낸 출세작비극적 내용처럼 10년만에 이혼프랑스 작곡가 베를리오즈(1803~1869)의 출세작 '환상교향곡'이 1830년 파리에서 초연됐다. '환상교향곡'의 초연은 한 시대를 풍미한 음악 전통(고전주의)을 대체하는 새로운 사조(낭만주의)의 등장을 알리는 것이었다.1824년 발표된 베토벤 '교향곡 9번, 합창' 이후 가장 놀라운 작품으로 꼽히는 '환상교향곡'에서 베를리오즈는 예술가의 사랑과 죽음을 묘사했다. 그가 사용한 전대미문의 다채로운 관현악법과 교향곡에 처음으로 시도한 내러티브(이야기) 구조는 후대 작곡가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의대생의 길을 걷다가 독학으로 작곡을 공부했으며, 끝내 의사 아버지의 뜻을 거역하고 20대 중반 파리음악원에 입학한 베를리오즈는 유럽 최고의 배우로 주가를 올리던 해리에트 스미드슨을 짝사랑하게 되었다. 런던 셰익스피어 극단의 파리공연을 본 베를리오즈가 무대에 선 스미드슨에 반한 것이다.20대 청년의 어설픈 구애는 결국 실패했고, 베를리오즈는 그 경험을 바탕으로 5악장으로 구성된 '환상교향곡'을 작곡했다. 작품은 주체할 수 없는 사랑에 빠지는 순간을 그린 1악장을 시작으로, 무도회에서 다시 마주친 그녀(2악장), 마음을 달래려 산책에 나섰으나 그녀의 모습을 떨쳐버릴 수 없었던 3악장으로 중반부까지 구성됐다. 4악장에선 환각에 빠져 그녀를 살해하고 자신도 사형당하며, 5악장은 마녀였던 그녀가 자신의 죽음을 조장한 것이며 비웃는다는 내용이다.'환상교향곡'의 완성을 앞두고 베를리오즈의 인생에 반전이 일어났다. 프랑스 정부가 유망한 젊은 음악가에게 수여하는 '로마 대상'의 1830년 수상자로 베를리오즈를 선정한 것이다. 네 번의 도전 끝에 선정된 베를리오즈는 5년 동안 3천프랑의 장학금을 받고 이탈리아에서 공부할 수 있는 장학생이 됐다. '환상교향곡'의 초연 이후 작곡가로서 인정받은 베를리오즈는 우여곡절 끝에 스미드슨과 1833년 결혼에 성공했다. 하지만 10년 만에 이혼하고 말았다. 작품 속에서 죽여버린 사람과 끝까지 사랑하기는 힘들었을까?'환상교향곡'은 독보적인 명연주가 남아 있는 작품이다. 프랑스의 지휘자 샤를 뮌시가 보스턴 교향악단을 이끌고 녹음한 음반(1954년·RCA)은 스테레오 도입기에 탄생했다. 60여년이 흘렀지만 지금 들어도 사운드의 매력은 여전하다. 듣는 이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유연한 곡 해석이 돋보인다. 이 낭만주의 교향곡의 걸작을 경험해 보자. /김영준 인천본사 문화체육부장

2019-05-02 김영준

[김영준의 재밌는 클래식·(8)우주를 항해하는 바흐·베토벤]'교향곡 선율'로 외계인과 교류 시도

탐사선에 실린 골든 레코드판브란덴부르크 협주곡등 수록1977년 8월과 9월, 미국은 무인 우주 탐사선 보이저 1·2호를 발사했다. 35년 후인 2012년 보이저 1호가 태양계와 다른 항성계 사이의 공간을 의미하는 성간우주(인터스텔라)에 들어섰다. 2호는 6년 터울을 두고 지난해 성간우주로 진입했다.탐사선에는 지름 30㎝ 크기의 구리 레코드판에 수 억년을 버틸 수 있도록 금박 코팅을 한 '골든 레코드'가 실렸다. 골든 레코드는 언젠가 외계인들이 보이저 1·2호와 접촉할 경우 그들에게 지구인의 존재를 알리고, 우호적 교류를 제안한다는 의미에서 만들어졌다. 우리 인사말인 "안녕하세요"를 포함한 55개 언어로 된 인사말과 클래식, 지구(자연)의 소리, 민속 음악 등을 3장의 레코드에 실었다. 레코드는 재생장치와 함께 알루미늄 케이스에 담았다. 또한 이 탐사선이 어디에서 왔고, 재생 방법을 설명하는 문구도 달았다.골든 레코드에 가장 많은 곡을 올린 이는 바흐이다. '평균율 클라비어 2권의 C장조 전주곡과 푸가'(피아노·글렌 굴드), '브란덴부르크 협주곡 2번 1악장'(지휘·칼 리히터/뮌헨 바흐 오케스트라), '무반주 바이올린 파르티타 3번의 가보트와 론도 악장'(바이올린·아르투르 그뤼미오)까지 3곡이 바흐의 작품이다. 베토벤의 것은 2곡이 수록됐다. '교향곡 5번, 운명 중 1악장'(지휘·오토 클렘페러/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 '현악4중주 13번 중 카바티나 악장'(부다페스트 현악4중주단) 등이다. 수록된 작품의 연주 시간으로 따지면 베토벤 것이 가장 길다.두 작곡가 외에 모차르트의 음악으로는 오페라 마술피리 중 '밤의 여왕 아리아'(소프라노·에다 모져/지휘·볼프강 자발리쉬/바이에른 슈타츠오퍼)가 실렸으며, 20세기 대표로 스트라빈스키의 발레곡 봄의 제전 중 '희생의 춤'(작곡가 자신이 지휘하는 컬럼비아 교향악단)이 수록됐다.골든 레코드를 기획한 사람은 20세기 천문학자로, 세계적 베스트셀러 '코스모스'를 쓴 칼 세이건(1934~1996)이다. 세이건과 팀원들이 고심 속에 선정했을 수록곡들은 우리가 그냥 지나쳐서는 안 되는 명곡들이다. 지구의 대표 작곡가들의 음악이 우주 공간을 항해하고 있다. 지구에 사는 우리는 외계인보다 클래식과 친해질 수 있는 더 유리한 여건에 있다. 클래식을 모를지라도 외계인보다는 먼저 알아야 하지 않을까. /김영준 인천본사 문화체육부장

2019-04-25 김영준

[김영준의 재밌는 클래식·(7)결혼행진곡]1858년 영국서 시작된 '딴딴 따단~'

입장 바그너·퇴장 멘델스존 작품反유대주의자·유대인 '아이러니'대부분의 결혼식에서 신부는 '딴 딴 따단~'의 음악에 맞춰 입장한다. 바그너의 오페라 '로엔그린' 중 '혼례의 합창'이다. 우아하면서도 절제된 느낌을 준다. 순백의 드레스를 입은 신부의 발걸음과 어우러지면서 식장에 모인 사람들에게 인상적인 장면을 제공한다. 반면 예식을 마치고 신랑과 신부가 함께 행진할 때 울려 퍼지는 음악은 멘델스존의 극 부수음악 '한여름 밤의 꿈' 중 '결혼행진곡'이다. 트럼펫의 팡파르가 가미된 화려한 이 음악은 신랑 신부의 앞날을 축복하는 하객들의 박수와 함께 결혼식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데 제격이다.흔히들 '결혼행진곡'으로 통칭하는 두 음악이 언제부터 실제 결혼식에 쓰였을까. 시작은 19세기 중반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영국의 공주 빅토리아 아델레이드 메리 루이즈는 1858년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3세와 결혼하면서 바그너의 곡을 입장할 때, 멘델스존의 곡을 퇴장할 때 연주해 달라고 요청했다. 그 후 많은 상류층 여성들이 선망의 대상이었던 황실 결혼식을 따라 하게 되면서 오늘날까지 이어졌다.빅토리아 공주는 바그너의 열렬한 팬이었으며 음악에 조예가 깊었다고 한다. 결혼을 소재로 했지만, 성격이 상반된 두 곡을 입장과 퇴장에 알맞게 배치한 것만 봐도 알 수 있다.바그너의 '결혼행진곡'은 1850년 초연된 오페라 '로엔그린'의 3막 첫 번째 합창곡이다. 3막 전주곡을 통해 결혼식 직전의 축제 현장을 표현해내며, 전주곡의 종료 없이 이어서 '혼례의 합창'이 연주된다. 결혼식 후 비극으로 끝나는 연인의 운명을 암시하듯이 다소 어두우면서 성스러운 느낌이 강하다. 아름답지만, 마냥 밝지도 않으며 너무 가볍지도 않다.멘델스존의 '한여름 밤의 꿈'은 1843년 셰익스피어의 동명 희극의 부수음악으로 작곡됐다. 부수음악은 요즘으로 치면 드라마나 영화의 오리지널 사운드 트랙(OST)과 같은 것으로 생각하면 된다. '결혼행진곡'은 5막에서 연주된다. 연인이 여러 사건에 휘말리는 우여곡절 끝에 행복한 결혼식을 올린다는 해피엔딩에 맞추어 웅장하면서 밝고 희망차다.멘델스존은 바그너보다 네 살 위였다. 바그너가 중기 작품인 '로엔그린'을 작곡했을 때 멘델스존은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유대인이었던 멘델스존과 유대인을 혐오한다는 사실을 공공연히 밝힌 반(反)유대주의자였던 바그너, 사상이나 작풍(作風) 등 모든 면에서 상반된 두 작곡가의 작품이 아이러니하게도 결혼식에서 어우러진다. /김영준 인천본사 문화체육부장

2019-04-18 김영준

[김영준의 재밌는 클래식·(6)빨강머리 사제의 '사계']음악으로 시각효과 구현한 비발디

병원학교 교사로 근무하며 작곡같은 선율 지적속 '표현력 최고'비발디의 '사계'. 우리나라 사람들이 가장 좋아하는 클래식으로 꼽힌다. 1725년 이탈리아 베네치아에서 탄생했다. '사계'는 협주곡집 '화성과 창의의 시도, Op 8'(전체 12곡)의 1번부터 4번까지이다. '사계'를 듣고 있노라면 봄에 피어나는 신록과 새들의 노래, 여름의 무더위와 그것을 식혀주는 소나기, 가을의 풍성한 들판, 겨울의 매서운 눈보라와 집 안 난롯가에 모여 앉아 정담을 나누는 농부들의 모습 등이 풍경처럼 지나간다. 이처럼 비발디가 음악으로 구현해 낸 시각적인 효과는 오늘날 영화에서 컴퓨터그래픽(CG)을 통해 만들어내는 획기적인 장면만큼이나 당대에는 크나큰 충격을 줬을 게 분명하다. '사계' 중 '봄'을 보자. 우리처럼 4계절이 뚜렷한 곳에 사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만한 봄 풍경을 담아냈다. 음악이 시작되면 새들의 지저귐이 메아리치는데, 바이올린으로 구현한 새의 지저귐과 메아리는 당시 상상하지 못한 표현이었다. 화창한 날에 이어 갑자기 내리는 봄비와 꽃샘추위 등 '봄의 변덕'은 또 어떤가. 현악기만으로 어찌 그렇게 명료하게 표현할 수 있는지 궁금할 정도다. 그 자체로 대단한 발명이다.비발디는 15세였던 1693년 가톨릭 사제가 되고자 마음 먹었으며 10년 후 사제가 되었다. 하지만 천식으로 인해 미사를 집전할 수 없었다. 머리털이 붉었던 비발디에게 '미사를 올리지 않는 빨강 머리의 사제'라는 별명이 붙은 이유이다. 이때부터 비발디는 부모를 잃은 소녀들을 위한 베네치아 자선 병원 부속 학교에서 성직자이자 음악교사로 20여 년 일하면서 학생들을 위해 수많은 작품을 남겼다. 이때 비발디가 가르친 학생들의 합주력이 프랑스 베르사유 왕립악단을 능가할 정도였다고 한다.하지만 20세기 작곡가 스트라빈스키는 "(하나의 선율로) 똑같은 협주곡을 수백 곡 쓴 사람"이라고 비발디를 평가절하했다. 스트라빈스키의 말처럼 비발디는 선율의 창의력 면에서는 뛰어나지 않았지만 그 당시 작곡가들과 비교했을 때 화성과 다이내믹, 표현력 면에서 최고의 성과를 일궈냈다.비발디가 이 같은 업적을 남길 수 있었던 배경에는 바로크 시대 이탈리아 장인들의 악기 개량과 제작 기술이 있다. 현재까지도 그 명성을 떨치고 있는 바이올린 제작자 스트라디바리와 과르네리가 대표적이다. 비발디는 이들이 제작한 훌륭한 악기에 걸맞은 표현력을 창안하는 것으로 답했다. /김영준 인천본사 문화체육부장

2019-04-11 김영준

[김영준의 재밌는 클래식·(5)베토벤 콤플렉스]작곡가들에게 벽이 돼버린 '운명'

요즘 말로 빅히트 교향곡 5·9번같은 번호 쓸때 후배들 부담으로 베토벤 '교향곡 5번, 운명'은 이 세상의 교향곡 중 가장 유명하다고 할 수 있다. 작곡자 자신이 곡의 주제를 설명하면서 "운명은 이렇게 문을 두드린다"고 말한 게 '운명 교향곡'으로 불린 이유이다. 청중을 압도하는 힘은 유기적인 통일성과 리듬의 추진력에서 나온다. 인간의 운명에 맞선 사투와 그 극복 과정을 30분 정도의 작품 속에 빈틈없이 녹여냈다. 그 구성과 집중력이 놀라울 정도다. '5번'에서의 성취는 '9번 합창'으로 이어져 혼돈과 반목을 넘어 인류애의 메시지로 승화한다.문제는 베토벤 이후 교향곡을 작곡하는 이들에게 5번과 9번은 거대한 벽(콤플렉스)이 되어버렸다는 점이다. 후배 작곡가들은 교향곡 5번과 9번을 작곡할 때 베토벤의 위대한 두 작품을 염두에 둘 수밖에 없었다. 5번과 9번을 작곡할 때면 어김없이 베토벤의 그것에 필적할 만한 작품을 내놓아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시달렸다. '9번 교향곡의 저주'라는 징크스도 있는데 이 또한 베토벤의 9번에 맞먹는 역작을 만들기 위해 애를 쓰다가 작곡가가 타계하면서 붙여졌다고 할 수도 있다.차이콥스키와 말러, 쇼스타코비치는 자신들의 '5번 교향곡'에서 베토벤의 '5번'에 완벽하게 동조하면서도 자신의 음악적 어법으로 소화한 작품을 내놓았다. 전체적 구성 또한 베토벤의 것과 똑같이 '암흑에서 광명으로'이며, 위풍당당한 결말로 마무리된다.차이콥스키는 5번 교향곡을 작곡하다가 새벽에 식은땀을 흘리며 몇 번씩이나 잠에서 깼다고 한다. '베토벤 콤플렉스' 때문이라고 확언할 수는 없지만, 형식이나 악상이 더 자유로우며 비극적인 6번과 비교했을 때 '운명 교향곡'을 염두에 두고 자신의 5번을 작곡했을 것이란 유추는 충분히 가능하다.말러의 5번은 '운명 교향곡'의 동기음과 유사한 리듬의 트럼펫 팡파르로 시작한다. 마침 인천시립교향악단(지휘·이병욱)이 5일 오후 8시 아트센터 인천에서 말러 '교향곡 5번'을 연주한다. 후기 낭만주의 시기의 위대한 5번을 직접 듣고 느낄 절호의 기회이자 맘속으로 베토벤의 5번 운명과도 비교할 수 있는 자리가 될 것으로 보인다. /김영준 인천본사 문화체육부장

2019-04-04 김영준

[김영준의 재밌는 클래식·(4)위대한 피아니스트의 요건]강약·지속성 활용 '피아노로 노래하기'

기계적 이해 갖춰야 곡표현 훌륭지메르만 악기 가져와 연주 화제 지난 26일 저녁 아트센터 인천 콘서트홀에서 열린 크리스티안 지메르만의 피아노 독주회가 음악팬들 사이에서 큰 화제를 모았다. 폴란드 출신으로, 1975년 쇼팽 콩쿠르 우승자(당시 18세)인 지메르만은 16년 만에 성사된 내한 독주회에서 브람스의 소나타와 함께 자신의 주 레퍼토리 중 하나인 쇼팽의 스케르초를 연주했다. 그는 자신의 악기를 가지고 다닐 정도로 음색에 예민하다. 이번 송도 연주를 위해 그랜드 피아노를 비행기로 실어왔다. 아트센터 인천에 모인 2천여 청중은 위대한 피아니스트의 연주에 한껏 매료됐다.'위대한 피아니스트'의 요건엔 어떤 것들이 있을까. 작품(악보) 이해와 해석이 우선이다. 연주 기교와 작품의 구성력도 있어야 한다. 이를 완벽히 소화한다면 A급 연주자이다. 더 높은 단계가 있다. '피아노로 노래하기'다. 피아노의 기계적 이해가 필수다. 이를 작품의 성격에 맞춰 합당하게 활용해야 한다. 한 음을 낼 때 피아니스트가 의도할 수 있는 부분은 소리의 강약과 지속성이다. 대가들은 자신만의 노래를 통해 편안하고도 쉽게 원작을 들려준다.학생 시절 지메르만은 폴란드의 물류 체계가 원활하지 않아서 피아노 부품의 제작·수리를 직접 했다고 한다. 피아노의 구조와 소재 관련 지식을 축적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2003년 첫 내한 독주회 때도 자신의 피아노를 가져왔던 지메르만은 2006년 미국 카네기홀 연주를 위해 JFK공항을 통해 입국할 때, 그의 피아노가 폭발물로 의심받아 크게 망가지는 사고를 겪었다. 이후에는 아예 피아노를 분해한 뒤 현지에서 조립하기도 했다.이처럼 피아노의 기계적 이해까지 갖춘 지메르만은 인천의 음악팬들 앞에서 자신만의 노래를 들려줬다. 브람스 '소나타 3번'에서 1악장 1주제의 제시나 2악장에서 절정을 구축하고 노래하는 솜씨는 명불허전으로 평가하기에 손색이 없었다. 쇼팽 '스케르초'에선 복잡다단한 선율선을 명확하게 부각시키며 작품의 매력을 흠뻑 뿜어냈다. 청중의 커튼콜에 앙코르로 연주한 바세비츠의 '피아노 소나타 2번' 2악장 또한 백미였다. 페달을 적절히 활용하고 포르티시모에서 풍부하고 아름다운 톤을 유지할 수 있는 연주자는 강한 소리와 함께 '자신만의 노래'를 들려줄 수 있다는 점을 지메르만이 보여줬다. /김영준 인천본사 문화체육부장

2019-03-28 김영준

[김영준의 재밌는 클래식·(3)클래식에도 아홉수가?]베토벤으로 시작된 '9번 교향곡의 저주'

슈베르트·브루크너·말러 등많은 작곡가 '9'로 생애 마감우리나라 사람들만 아홉수에 몸을 사리는 게 아니다. 서양의 클래식계에도 이 아홉수 징크스는 지독했다. '9번 교향곡의 저주'로까지 불린다. 그 시작은 베토벤이었다. 거장 베토벤이 9개의 교향곡을 쓰고 타계한 거였다. 그 뒤로 이상하게도 많은 작곡가들이 9번 교향곡을 쓰기만 하면 더 이상을 작곡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슈베르트는 '미완성 교향곡'을 포함해 9개의 교향곡을 남겼으며, 브루크너는 0번부터 8번까지 9곡의 완성된 교향곡과 미완성인 9번을 남겼다. 드보르자크의 교향곡도 9번까지다. 말러 역시 9번 교향곡까지 완성했다. 10번은 시도는 했지만 끝내 완성하지 못했다. 이 밖에 글라주노프(9번 미완성)와 본 윌리엄스도 10번 교향곡에 진입하지 못했다. 작곡가 쇤베르크는 "'9번 교향곡의 저주'를 강하게 믿어서 수면 위로 끌어올린 인물은 말러"라고 했다. 말러는 교향곡 9번을 쓰면 이내 죽을 것으로 믿었고, 8번 교향곡 작곡 후 실질적으로 교향곡과 다름없는 작품을 내놓지만, 이 작품에 번호(9번)를 달지 않고 '대지의 노래'라고 표제만 붙였다. 징크스를 벗어났다고 생각할 만큼 시간이 흐른 뒤 곡을 완성해 교향곡 9번을 붙였다. 그런데 말러 역시 징크스를 피하지 못했는지 10번을 쓰다가 그만 숨을 거두고 말았다. 드보르자크의 경우는 '9번 교향곡의 저주'에 억지로 꿰맞춰졌다. '신세계 교향곡'으로도 불리는 교향곡 9번은 원래 교향곡 5번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드보르자크가 숨을 거둔 뒤 초기에 썼던 4개의 교향곡이 새로 발견되면서 마지막에 썼던 5번이 9번으로 바뀐 거다.쇼스타코비치는 '9번 교향곡의 저주'를 보기 좋게 깨버렸다. 스탈린은 제2차 세계대전 직후, 마침 9번 교향곡을 쓸 순서에 도달한 쇼스타코비치에게 자신을 찬양하는 합창과 독창이 포함된 교향곡을 쓰도록 압력을 넣었다.쇼스타코비치가 그 직전에 작곡한 7번과 8번 교향곡은 연주 시간이 70~80여분에 달하는 거대 편성의 작품이었다. 여기에 베토벤의 '교향곡 9번, 합창'의 경우처럼 가수들의 노래가 어우러지는 작품을 쓰도록 스탈린은 강요했다. 스탈린에 반대하는 건 목숨을 내놔야 하는 것이었지만, 쇼스타코비치는 기악으로만 구성된 소박한 연주 시간 25분 내외의 '교향곡 9번'을 선보였다. 스탈린은 크게 분노했다. 하지만, 세계적으로 이름이 알려진 위대한 작곡가를 숙청할 수는 없었다. 쇼스타코비치는 이후 6곡의 교향곡을 더 작곡했고, 그는 모두 15개의 교향곡을 남기고 숨을 거뒀다. /김영준 인천본사 문화체육부장

2019-03-21 김영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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