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진석의 新 '새 말, 새 몸짓'

 

[최진석의 新 '새 말, 새 몸짓'·(2)]논리성을 회복하여 민주화 다음을 도모할 때

시대의식 적중, 정점 찍은후 점점 효력 잃어건국·산업화는 민주화만큼 '빛나는 봉우리'성취 완수한 후 바로 다음 단계로 이행해야세계는 찰나의 순간에도 가만히 있지 않고 쉼 없이 달라진다. 인간은 세계가 달라지는 속도와 폭에 적응해야 한다. 세계를 자신이 지배한다고 말들은 할 수 있지만, 변화무쌍한 그 세계에 대한 적응의 효과가 크면 지배하는 것처럼 보이고, 효과가 작으면 지배당하는 것처럼 보일 뿐이다. 그 적응의 효과를 어떻게 키울 것인가가 거의 모든 인간적 활동의 핵심 기반이다. 가장 효과 있게 적응하는 장면에 우리는 '적중'(的中)이라는 팻말을 건다. 스콜라 철학자들이 말하는 '관조'나 동양에서 말하는 '중용'이나 다 사실은 이 '적중'을 제대로 완수하기 위한 태도이거나 관점일 뿐이다. '조용히 관찰하기'(靜觀)나 '무심'(無心)이나 '무아'(無我) 혹은 '무위'(無爲)도 모두 그렇게 하면 훨씬 더 잘 '적중'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모든 이론과 지식도 다 어떤 특별한 변화 상태를 제대로 포착한 지적 체계이다. 역시 '적중'의 결과물들이다. '적중'은 원래 과녁을 제대로 겨누어 맞춘다는 뜻이다. 한 나라가 발전하기 위해서는 겨눠야 할 과녁을 정확히 포착한 후 온 신경을 모아 거기에 역량을 제대로 집중시켜야 한다. 근대 초기 일본의 요시다 쇼인은 쇼카숀주쿠라는 조그만 학교를 세워 겨우 2년여 동안 90여 명을 배출한 후, 그들을 앞세워 산업화를 성공시킨다. 같은 시기 조선에는 수백 개의 교육 기관에서 수 많은 젊은이들이 밤을 새워가며 열심히 공부를 했으나 그렇게 조그만 하나의 학교 쇼카숀주쿠 출신들의 힘을 이겨내지 못하고 식민지가 되었다. 우리가 식민지가 된 이유는 그리 복잡하지 않다. 일본은 그 시대에 해결해야 할 실질적인 문제에 적중하여 부강할 수 있었고, 우리는 그 시점에서 해결해야 할 실질적인 핵심 문제에 적중하지 못하고 그냥 하던 대로 주자학을 외우는 데에만 온 힘을 기울이면서 헛발질을 했기 때문이다. 부강한 길을 가지 못하고 대내적으로나 대외적으로 모두 위정척사만 부르짖었다. 지금도 우리는 사실 위정척사의 시절을 살고 있다. 배척과 반동의 시절이다. '적중'한 후에는 적중의 효과가 일정 기간 유지되는데, 그 효과에도 생로병사가 있다. 시공간 안에 존재하는 것은 어떤 것도 영원할 수 없다는 큰 원칙이 있지 않은가. 당연히 '적중'이라는 성취도 정점을 찍은 후에는 부패와 부식과 권태라는 생명 활동을 피하지 못하고 점점 효력을 잃는다. 여기서 이 사실을 인정하는지 인정하지 않는지부터 스스로 물어보자. 그래야 다음 이야기들을 감정적으로 대하지 않고 논리적으로나 지적으로 대할 수 있기 때문이다. 건국(새정부 수립)이나 산업화는 우리나라의 성공 사례 가운데 민주화만큼이나 빛나는 봉우리들이다. 이 두 봉우리 없이 우리 기적의 역사를 말할 수는 없다. 건국이나 산업화 자체를 부정하는 사람과는 어떤 대화도 시작하기 어렵다. 건국이 빛나는 성취가 된 이유는 그 시대에 중심 문제였던 건국이라는 시대 의식에 적중하였기 때문이다. 적중하였다고 해서 건국이라는 주제를 계속 붙들고 있을 수는 없다. 적중한 후에는 어떤 것도 바로 과거가 되어간다. 건국은 빛나는 성취를 완수한 후에 바로 부식되기 시작하여 다음 시대로 이행해야 한다. 그래서 다음 단계로 이행하여 산업화라는 시대 의식에 적중한 후 우리는 또 빛나는 성취를 이룬다. 산업화에 적중하여 성취를 완수한 후에는 그것이 아무리 빛나는 성취라고 해도 부식을 피하지 못하고 또 다음 단계로 이행해야 한다. 우리는 또 다음 단계로 과격한 이행을 해서 시대 의식에 적중하였다. 민주화라는 큰 봉우리를 또 쌓은 것이다. 지금의 시대 의식은 민주화 다음으로의 이행이다. 민주화 다음으로 넘어가야 한다는 말에 기분이 나쁜지 아닌지를 우선 점검하자. 기분이 조금씩 나빠지기 시작하면, 당신은 지적이지 않다. 법과 논리보다 감정을 중시하는 인식의 초보적 단계를 지나지 못했다. 산업화를 넘어서기 위해서 조금이나마 산업화를 비판하는 것을 견디지 못하는 산업화 세력과 민주화 다음을 말하기 위해서 민주화의 부식 내용을 지적하는 것을 견디지 못하는 민주화 세력 사이에는 논리적으로 아무런 차이가 없다. 물론 감정적으로는 큰 차이가 있을 것이다. 이것을 인정해야 다음 대화가 가능하다. 봄은 정점을 찍고 나면 바로 봄 자신을 부정하는 준비에 든다. 이것이 봄의 성숙이고, 성숙한 봄의 격조이다. 여름으로의 이행을 받아들인다. 봄이 봄 자신의 성취와 정당성에 취해 여름으로 넘어가기를 거부하면, 봄 자신이 반동으로 전락할 뿐 아니라 전체 자연의 진화를 망친다. 산업화 세력이 산업화에 취해 산업화의 정당성만 고집하면 산업화 세력 스스로가 반동으로 전락할 뿐 아니라 나라 전체의 진보를 해치게 되는 것과 같다. 여름도 여름으로 완성되고 나면 바로 여름 자신의 정당성을 고집하지 않고 가을에 자신의 자리를 양보한다. 그리하여 여름 자신의 명예를 지킬 뿐 아니라 종내에는 전체 자연의 완성에 기여한다. 가을은 자신의 정점을 찍은 후 바로 자신의 정당성을 겨울에 양보한다. 겨울도 마찬가지다. 사계절이 다 이렇게 성숙한 협력을 하면서 전체 자연을 항상 완성의 단계로 유지할 수 있다. 겨울이 겨울 자신의 정당성에 취해 봄으로 넘어가기를 거부하면, 겨울 자신이 반동으로 전락할 뿐 아니라 전체 자연의 진화를 망친다. 민주화 세력이 민주화 시대의 세계관에 취해 민주화의 정당성만 고집하면 민주화 세력 스스로가 반동으로 전락할 뿐 아니라 종내에는 나라 전체의 진보를 망친다. 지금 우리는 이 단계에 있다. 민주화는 부식하고, 새로운 어젠다는 세우지 못하고…산업화세력이 역사발전 장애물 취급 받았듯 민주화 세력도 진보와 진화 가로막는 길 가성숙·격조 스스로 포기하고 염치 상실 우려요즘 나는 문재인 대통령의 정치를 '자기 확신에 갇힌 몽환적 통치'라 비판하기도 하고, 민주화 세력들이 깃발을 찢어 완장으로 만들어 차고 다니는 것을 비판하기도 한다. 민주화의 부식을 지적하는 것이다. 그 이유는 여름이 자신의 정당성을 고집하느라 가을로 이행하기를 거부하면서 스스로 반동으로 전락하고, 그 결과로 전체 자연의 진보를 가로막는 것과 똑같이, 산업화 세력이 산업화의 정당성만을 고집하며 산업화 다음으로의 이행을 거부하면서 스스로 반동으로 전락하고 역사 발전의 장애물 취급을 받았듯이, 민주화 세력도 과거의 반동 세력들과 전혀 다르지 않게 스스로 반동으로 전락하면서 나라의 진보와 진화를 가로막는 길을 가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 이 시대에 해결해야 할 가장 중요한 문제나 의식에 '적중'하지 못하고 자신의 성공 기억에 갇혀서 자신과 국가의 시제를 미래화하지 못하고 과거화하는 것을 우려하는 것이다. 자신의 성숙과 격조를 스스로 포기하면서 부끄러움과 염치를 상실하는 것을 우려하는 것이다. 이 우려의 제일 앞에 대통령이 맹목적 지지자들과 함께 콘크리트처럼 굳건하다. 자신이 자신에게 갇힌 형국이다. 모든 논리와 법은 사회적 활동에 필요해서 나온 생산물들이다. 인간이 사회적 동물이 아니라면 아무 필요 없는 것들이다. 자신이 자신에게 갇혀 고립되어 있다면, 논리도 법도 굳이 필요하지 않다. 자신이 자신에게 갇혀서 유기적 사회성을 잃으면 법과 논리는 필요치 않고 오직 감정이나 감각의 정체 없는 심리에 빠져 논리와 법을 무시하거나 거부한다. '내로남불'을 일상사로 삼거나 논리의 환각 상태에 빠지는 것이다. 이러면 국가의 진화나 진보를 가로막게 되고, 결국은 내 삶을 피폐하게 한다. 지도층의 피폐한 삶은 전 사회를 피폐하게 한다. 나는 이것을 걱정하는 것이다.비판자들을 제압하려는 논리의 환각 상태는 이미 만연해 있다. 이런 것들은 모두 감정적 악다구니이지 전혀 논리가 아니다. '민주화 투쟁기에 당신은 무엇을 했느냐?'라고 묻는 입막음도 있다. 여기에는 그 시기만 우리가 살아야 할 시대라는 자폐적 우월감이 도사리고 있다. 여름에게 절대 양보하지 않으려는 완고한 봄의 기세를 닮았다. 그리고 민주화 시기에 대오를 이루어 힘을 보태던 이름 남기지 못한 대중들을 민주화의 소비재로 격하하고 도외시하는 자폐적 선민의식도 있다. 요즘 현 정부와 대통령에 대한 비판적 글을 쓰고 나면 댓글들 가운데 박근혜 대통령 때는 아무 소리도 안 하다가 왜 문 대통령만 갖고 그러느냐는 내용도 있다. 감정을 벗고 논리에 집중하면 사람은 치우치지 않는다. 완벽하지는 않더라도 사적이지 않고 공적인 태도를 유지할 수 있다. 감정은 사적이고, 논리는 공적이다. 그러면, 모두가 '최순실 게이트'라고 말할 때 비교적 빨리 사태를 '박근혜 게이트'로 정리하고 "본질은 '박근혜 국정농단'이다"는 글을 발표할 수 있다. 이렇게 자기가 한 일을 예로 들어가며 글을 써야 하고 자신을 변명해야 하는 공포가 엄습하는 지금은 '문장의 수난 시대'나 '논리의 시궁창' 같은 시대이다. 극복의 대상이었던 '그때 그 시절'이 다시 돌아왔다. 어느 코미디언이 전두환 전 대통령에 대해서 한 "왜 나만 갖고 그러느냐?"는 표현은 논리와 법을 무시하고 감정에 휩싸이다가 불편해지면 누구나 쉽게 사용하는 말이다. 시험 중 부정행위를 하다가 발각된 학생이 "왜 나만 갖고 그러느냐?"고 반응했다면, 이는 논리보다는 감정에 호소하여 논점을 흐려버리는 큰 오류를 범하고 있다. 극복 대상이었던 '그때 그 시절' 다시 돌아와시험 부정행위 학생 "왜 나만 갖고 그러느냐"감정에 호소하여 논점 흐려버리는 오류 범해추미애 법무부장관이 "단순히 알 권리보다 조금 있다가 알아도 될 권리가 있을 것 같다"는 말로 현 상황을 지배하려 한다. 정말 민주화를 건너온 우리나라의 법무부 장관이 한 말로 상상이 되는가. 이 말이 누가 했는지 모를 때는 화가 났는데, 추미애 장관이 했다는 말을 들으니 이해가 되고 수긍이 된다면, 당신은 아직 논리나 법보다는 감정의 단계에서 살고 있다. '조금 있다가 알아도 될 것'은 우리가 정할 테니 너희들은 그냥 가만히 있으라는 독재적 태도이다. "대통령 측근 수사 때 검찰개혁 추진하는 건 수사 방해로 비친다." 이 말은 맞는 말인가 틀린 말인가. 누가 한 말인지 모를 때는 맞는 말처럼 들리는데, 문재인 대통령이 한 말인 것을 알고 나니 듣기 싫어지거나 틀린 말로 들리면 당신은 아직 논리보다는 감정에 빠져 있다. 임미리 교수를 고발하는 일이 정말 가능한 일로 보이는가? 이 일로 화가 나면 당신은 논리적이며 공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을 가능성이 있다. 상황 논리로 이해하려고 애쓰고, 얼른 잠잠해지기를 기다리고 싶어지면 당신은 아직 감정을 극복한 정도는 아니다. 논리의 환각 상태에 빠지거나 감정의 지배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왜 문제인가. 그것들에 좌우되는 한 우리는 이 시대에 해결해야 할 가장 중요한 문제에 적중할 수 없기 때문이다. 민주화 다음의 단계는 선도력을 갖는 단계이다. 과학의 단계이며 인문의 단계이며 논리의 단계이며 법의 단계이다. 종속성을 벗어난 단계이다. 더 독립적이고 더 자유스러운 단계이다. 이 시대의 급소에 적중할 수 있는 능력이 감정인지 아니면 논리나 법인지 잘 살필 일이다. 민주화 다음으로 상승하는 진정한 혁명을 꿈꿔야 한다. 감정을 벗어나 논리력만 회복하면 할 수 있다./최진석 건명원 초대 원장·서강대 철학과 명예교수송필용 作 '무제' /광주일보 제공

2020-02-17 최진석

[최진석의 新 '새 말, 새 몸짓'·(1)]혁신은 상승 운동이다

리더, 보통사람보다 진실 폐활량 커야中 고대 탕왕 세숫대야에 각성제 새겨인간으로 산다는 건 새로워진다는 것2020년, 새해가 밝았다. 보통은 새해를 '새로운 해'나 '새로워진 해'라고 이해하지만, 난 여기서 멈추면 안 된다고 본다. '새로운'이나 '새로워 진'은 상태를 형용하는 것 이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는 명사를 사는 것이 아니다. 삶 자체는 동사다. 모든 존재가 동사적 형태의 특별한 양태일 뿐이다. 돌도 집도 나무도 해까지도 모두 다 사실은 동사다. 삶은 명사적 상태로 정지하려는 것을 동사화 하는 노력이라고 해도 된다. 그래서 나는 '새해'를 '새롭게 하는 해'로 받아들인다. 새로운 상태를 소유하는 것보다 새롭게 하는 동적 활동이 삶의 진실일 것이다. 새롭게 하려는 노력이 없이 느끼는 '새로움'은 다 허구다. 허구를 피하고 진실에 참여하자.리더는 보통 사람들보다 진실의 양을 크게 가져야 할 뿐 아니라 진실의 폐활량이 더 커야 한다. 리더의 위치가 높으면 높을수록 이런 요구는 더 크고 강해진다. 중국의 고대 은나라 탕왕이 그랬던 것 같다. 그는 자신이 매일 사용하는 세숫대야에다 진실의 폐활량을 키우거나, 최소한 줄어들지 않게 할 요량으로 각성제를 새겨 넣었다. '대학'에서는 그것을 이렇게 전한다. '일신일일신우일신'(日新日日新又日新) 인간이 인간으로 산다는 것은 새로워진다는 것이다. 삶이란 새롭게 하는 일 이상도 이하도 아님을 우선 자신에게 각성시키려 애쓰는 통치자의 면모가 보인다. 수준이 높은 통치자의 자세다. 최고의 위치는 최소한 이 정도가 되는 사람이 차지해야 한다. 그렇지 않고 각성제는 찾지 않고 하나의 의견만을 붙잡고 멈춰선 채 고집스럽기만 하면 세상이 엉망진창이 된다. 새로워지려는 노력에 부가한 자신만의 진실의 양, 이것이 공적 자리의 높낮이를 결정해야 할 것이다. 여기서 나는 '진실'이라는 단어를 너무 많이 쓰고 있는 느낌이 든다. 내가 이 단어를 이리 자주 쓰는 데에 이유가 없지 않다. 이 정도의 각성제는 진실의 양이 얼마인가로 약효가 결정되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서는 탕왕이 세숫대야에 이 문장을 기록하면서 실제로 '진실'이라는 글자를 가장 앞에다 새겼기 때문이기도 하다. 바로 '구'(苟)라는 글자다. '진실로'를 의미한다. 그래서 이 문장은 이렇게 완성된다. '구일신일일신우일신'(苟日新日日新又日新) 진실로 날마다 새로워져야 한다. 새로워지는 일에는 거짓이 없이 착실하고 철저해야 한다는 뜻이다. 왜 이렇게 새로워지는 일에 진실해야 할까? 새로워지는 일이 생명 현상이고, 그 생명 현상을 제대로 하지 않으면 쪼그라들거나 죽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새롭게 하는 일이 '혁신'(革新)이다. 자기를 가두고 있는 가죽이나 껍질을 벗고 새로워진다는 뜻이다. 이것이 생명 현상인 한에 있어서 새롭게 하는 일은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일이 아니라 해야만 하는 일이고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것이 탕왕이 세숫대야에 새긴 '진실로'(苟)의 의미이다. 당연히 '혁신'은 어느 단계에서 수행해야 하는 하나의 과업이 아니다. 뱀은 1년에 한두번 허물 벗고 생명활동가시 찔리거나 해서 염증이라도 생기면껍질을 벗을수 없게 돼 그 다음해 죽어그런 과업이 잘 이뤄질 수 있도록 하는 유기체적 조건 같은 것이다. 혁신은 생명을 가진 유기체나 조직이 움직이는 생명 활동이지, 생명 활동과 달리 따로 하는 특수한 과업이 아니다. 니체는 뱀을 들어 이 점을 알려준다. "허물을 벗을 수 없는 뱀은 파멸한다. 의견을 바꾸는 것을 방해받는 정신들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정신이기를 그친다." 뱀은 일 년에 한두 번 허물을 벗으며 생명 활동을 한다. 그러나 뱀이 가시에 찔리거나 해서 상처를 입고 거기에 염증이라도 생기면 허물을 벗을 수 없게 되는데, 이런 뱀은 바로 다음 해에 죽는다. 껍질을 벗을 수 없게 되면 죽는 것이다. 구태의연한 생각에 갇혀서 사고와 의식의 신진대사가 멈춘 것을 니체는 '의견을 바꾸는 것을 방해 받는 것'이라고 표현했다. 이미 생명활동을 활발히 하는 정신으로서는 자격을 상실한 것이다. 그렇다면, 정신력은 분명히 사유의 활발한 신진대사 능력을 말함에 다름 아니다. 사고의 신진대사가 막혀 있을 때, 그것을 과격하게 뚫어서 다시 생명력을 복원시키는 일이 혁명이다. 사고의 신진대사가 막힌 상태 안에 갇힌 채 이리저리 수선만 피우는 일은 혁명이라 불리지 못하고 겨우 반항으로 취급될 뿐이다. 답답한 껍질을 벗어던져 새로운 생명 현상을 출현시키면 혁명이고, 답답한 껍질은 벗지 못하고 그 안에서 무엇인가 소란만 피우면 반항이다. 혁명은 새로운 생명력을 주지만, 반항은 구태의연한 생명력으로 죽음의 시간을 아주 조금 연장시킬 뿐이다. 혁명은 진실의 언어가 채우지만, 반항에는 거짓말이 난무한다.모든 생명 현상에 혁신은 필수적이다. 그러나 동물과 인간의 혁신 사이에는 차이가 크다. 동물의 혁신은 반복하는 혁신이다. 할아버지 뱀이 허물을 벗듯이 비슷한 시기에 같은 방법으로 아버지 뱀도 허물을 벗는다. 아버지 뱀이 하던 그대로 아들 뱀이 허물을 벗는다. 손자도 다르지 않다. 같은 것을 반복한다는 점에서 동물의 혁신에 혁신이라는 간판을 달아주기는 매우 아깝다. 인간의 혁신은 상승하는 운동이다. 더 나아지는 것이다. 인간의 문명적이고 의도적이며 인위적인 혁신이 혁신이다. 정부수립(건국)의 단계에서 산업화 단계로 상승하고, 산업화 단계에서 민주화 단계로 상승하는 것이 혁신이었다. 정부수립(건국)의 단계를 맴돌거나 산업화를 맴돌거나 민주화를 맴도는 일은 혁신이 아니다. 혁신할 실력이 안 돼서 껍질을 벗지 못하면 맴돌게 된다. 덧셈과 뺄셈을 할 줄 아는 학생이 다양한 형태의 덧셈과 뺄셈만 하고 있으면, 덧셈과 뺄셈의 껍질 안에서 맴도는 것이다. 이 학생이 곱셈과 나눗셈을 할 줄 알게 되는 것이 혁신이다. 덧셈과 뺄셈을 하던 학생이 방정식을 풀 줄 알게 되어야 혁신이 지속되는 것이며, 방정식을 풀 줄 알게 되었다고 또 이런저런 방정식 안에서 맴돌면 혁신이 멈춘 것이다. 방정식을 넘어 기하학의 세계로 진입하면 또 이것을 혁신이라 한다. 우리는 덧셈과 뺄셈을 넘어 나눗셈과 곱셈을 거쳐 방정식을 지나 기하학까지 부단히 상승해야 한다. 이것이 자연스런 혁신적 생명활동이다. "일신일일신우일신"(日新日日新又日新)이 진실로(苟) 진행되는 모습이다. 부단 혁신만이 혁신이다. 혁신이 생명활동이기 때문이다.탕왕은 새로워져야 한다는 뼈대만 말했지만, 니체는 탕왕보다 조금 더 친절하게 살도 붙여 말해준다. 좀 더 구체적인 언급이 있어서 내용과 방향을 가늠하기가 더 쉽다. 니체는 뱀의 생명 활동을 껍질을 벗는 것으로 말하면서 바로 '의견을 바꾸는 것'과 연결시켰다. 또 '의견을 바꾸는 것'을 정신 활동의 근본으로 본다. 정신이라면 최소한 정해진 곳에 붙박이처럼 멈춰있지 않다. 이미 있는 지식이나 이론을 그대로 먹어서 누가 요구할 때 원래 모습 그대로 뱉어내는 일인 대답은 정신 활동의 근본에 닿지 못한다. 껍질을 벗는 일이 아니라 정해진 껍질 안에 머무는 일이다. 궁금증과 호기심으로 무장하여 지금 아는 것, 지금 멈춰 있는 곳의 '다음'으로 이동하려는 욕망인 질문이 정신의 근본을 구현한다. 질문에는 부단히 껍질을 벗으려는 욕망이 작동한다. 대답에 익숙하도록 훈련된 사람들은 혁신에 쉽게 나서지 못한다. 질문에 익숙하도록 훈련된 사람들만 혁신에 훨씬 부담을 덜 느낀다. 질문 자체가 혁신적 활동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긴 시간동안 질문보다는 대답에 익숙하도록 훈련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혁신을 해야 할 때 혁신을 주저하며 제자리를 맴돈다. 혁명을 해야 할 때 혁명 대신에 반항만 하면서 그것을 혁명이라고 포장하며 제 자리를 맴돈다. 우린 질문보다 대답에 익숙하도록 훈련의견을 바꾸는 일보다 지키는게 더 편해과거를 살지 미래를 살지 못하는 것이다지적 훈련을 대답으로만 하다 보니, '의견을 바꾸는 일'보다는 한 번 가진 의견을 지키는 것이 더 편하다. 그래서 대답에 익숙하도록 훈련된 인재들은 과거를 살지 미래를 살지 못하는 것이다. 혁신이 바로 미래를 사는 연습에 다름 아니다. 사실 우리의 현실은 혁신보다는 제자리를 맴도는 일을 하느라 멈춰선지 이미 오래다. 새롭게 하는 일이 멈추면, 생명 활동이 멈추고 생명력이 고갈된다. 비효율이 쌓이는 것이다. 비효율의 두께가 효율의 두께를 넘어서면서 국가든 생명유기체든 늙고 병들고 죽어간다. 낡은 사고의 껍질에 갇혀 있는 정신은 의견을 바꾸는 것을 방해받고 정신이기를 포기하며 파멸한다는 니체의 말을 주의 깊게 들을 필요가 있다.인간의 혁신을 동물의 그것과 달리 상승하는 운동이라고 한다면, 우리의 지금 혁신은 무엇이어야 할까? 산업화의 단계에서 혁신에 성공하여 도달한 곳이 민주화인데, 민주화에 도달한 이래로 여태 민주화를 맴돌고 있다. 혁신을 못하고 있는 것이다. 민주화가 단단한 껍질로 변질된 것을 인정해야 한다. 이것이 최소한이나마 '의견을 바꾸는 것을 강요받지 않는' 활동 능력을 가진 정신이라면 당연히 해야 하는 역할이다. 더 이상 민주화 시대에 젖은 굳은 의견을 바꾸는 일에 주저하면 안 된다. 혁신의 정신을 차리지 않고 껍질에 갇혀 시간을 보내면 그대로 죽는다. 늦었지만, 민주화 다음을 도모해야 한다. 선진화의 길이다. 지금 우리에게는 이것이 혁신이다. 뱀보다는 높은 수준의 인간적인 혁신인 것이다. 4차 산업 혁명이라는 전혀 새로운 문명이 기존의 모든 구조를 뒤틀며 새로운 틀을 짜고 있다. 우리 민족에게 주어진 마지막 기회일 것이다. 이렇게 판이 뒤틀릴 때 상승하는 혁신에 성공한 나라는 더 독립적이고 자유로운 지위에 올라서고, 그렇지 못하면 종속적 지위에 머무른다. 선진화를 향한 혁신다운 혁신을 도모하는 혁신적 도전 이외에 더 큰 일은 없다. 반항을 혁신이나 혁명으로 착각하지 않는 일부터 시작하자. 새해가 밝지 않았는가. 헌 말 헌 몸짓을 벗고 새말 새 몸짓으로 상승하자./최진석 건명원 초대 원장·서강대 철학과 명예교수송필용 作 '무제' /광주일보 제공

2020-01-22 최진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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