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밭위의 식사

 

풀밭위의 식사<332>

글 백시종 그림 박성현승마하기 좋은 날18상대에게 이미 배우자가 존재하건, 존재하지 않건 그것은 무의미하다. 중요한 것은 그녀를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행위가 무엇이냐이다. 세상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할 수 있는 것은 그녀에 대한 배려가 아니다. 오로지 나만이 감당할 수 있는, 견딜 수 없는 고통이 수반되는 행위, 바로 그것이 정체성 찾기이며 스카이 홍에 대한 진정한 사랑의 표현인 것이다.그날 용패를 벗으며 할아버지 죄송합니다라고 말했던가. 할아버지 대를 잇는 호령 박씨 후손의 번영보다 한 여자를 사랑하는 일에 더 열중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그처럼 단순하게 표현했던 터다. 어찌합니까. 불충하다 해도, 어리석다 해도 그 길밖에 선택할 수 없는 걸 어떻게 합니까. 그 길이 아니면 한 발짝도 더 떼어놓고 싶지 않는 걸 어찌합니까.그 날 달이 밝았던가. 달무리 번짐이 유난히 아름다웠던 싱그러운 지리산의 밤. 교교한 달빛을 털어내듯 바람 한 줌에도 오도방정을 떨어대는 대밭의 수선스러움. 그런 번짐과 떨림과 수선스러움 속에서 박준호는 용패를 벗어 패물함에 쑤셔박듯 집어넣었던 것이다.한때 톰라더 부인과 시루코 여사에게 1백프로 위력과 위용을 발휘했던 호령 박씨 문중의 비밀병기, 물론 병기를 원위치했다고 해서 위용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용패를 착용했으므로 더 맹위를 떨치리라는 믿음 탓인지, 박준호는 괴물처럼 상대를 맘껏 유린할 수 있었던 것이다.오죽 했으면 용패와 같은 옥 재질로 만들어진 용 목걸이를 무덤까지 가져갈 생각을 했겠는가. 시루코도 그러하지만 톰 라더 부인, 아니 패티는 또 어땠는가. 시루코 여사의 남편인 오카모토가 보낸 괴한들에게 박준호의 심벌이 잘릴 뻔 했던 그 칠흑 같은 밤, 그녀가 얼마나 질겁하며 호들갑을 떨었는가. 조금 과장한다면 세상에 종말이 오는 것처럼 펄쩍펄쩍 뛰어마지 않았던 것이다.그 모든 것이 용패의 비방이라고 박준호는 믿었었고, 그래서 위험한 병기를, 흡사 핵 보유 포기를 선언하듯 과감히 거둬들였던 터다.한데, 이제 다시 장미꽃 피는 시절이 대두하고 있다. 전쟁이 아니라 평화의 한 방편으로 활용하기 위해 자연스럽게 병기를 집어든 것이다. 박준호는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용패를 음낭에 착용한다. 물론 착용하기 전부터 바람 잔뜩 먹은 풍선인 양 그 위용을 한껏 과시하고 있다. 박준호 본인이 내려다 봐도 괴물은 괴물이다.12년간 한 차례도 실전에 임하지 않았기 때문일까. 스코틀랜드 벤네비스 통나무 집에서 그 위력을 발휘하고 나서 정말 단 한 번도 써먹지 못한 병기라면, 아니 지리산 분이 누나가 그토록 노골적인 공략을 유도했지만, 베트남 호야가 유혹의 눈길을 그처럼 은밀히 보냈지만 끝내 순결을 잃지 않았다고 하면 세상 사람 누가 믿어줄까. 세상 사람들 모두가 고개 잘잘 흔드는 판에 스카이 홍인들, 어머, 어찌 그런 일이…… 눈물 글썽이며 볼이라도 쓰다듬어 줄까.박준호는 오랜만에 넥타이를 맨다. 물론 검은색 슈트에 검정색 넥타이다. 그는 검정색 포켓치프도 가슴에 꽂는다. 모자도 쓴다. 검정색 모자다. 그 밑에 검은색 선글라스도 낀다. 영락없는 영화 '대부'의 알파치노가 장례식장에서 보여 주었던 세련된 풍모 그대로다.박준호는 검정색 신형 벤츠도 렌트한다. 운전 또한 처음엔 고수길에게 맡길까 하다가 탄차우로 바꾼다. 홍주리에게 전화를 걸었던 장본인 윤성식도 차에 태우지 않는다. 고수길도 마찬가지다. 모두 다 병원에 기다리게 하고 혼자 너르디너른 벤츠에 올라앉는다."공항까지 얼마나 걸리지?"박준호가 손목시계를 들어 보이며 묻는다."막히는 때가 아니니까, 반 시간이면 충분합니다."박준호의 주문에 의해 넥타이 차림을 한 탄차우가 대답한다."시간은 충분하구만. 가다가 꽃가게에 좀 들르자구.""알겠습니다.""오늘 날씨 기막히게 좋구만."박준호가 푸른 하늘을 올려다본다. 그리고 혼잣말처럼 한마디 더 한다."승마하기 진짜 좋은 날이야."

2007-04-18 경인일보

풀밭위의 식사<331>

글 백시종 그림 박성현승마하기 좋은 날17"어서 오쇼!"무하마드가 손을 번쩍 들어올려 반긴다. 그러나 그녀는 무하마드의 인사를 미처 받지 못한다. 그녀의 시선이 박준호에게 고정되어 있었던 탓이다. 아르므아르가 말한다."운명하셨는데요."솔직히 처음에는 무슨 소린가했다. 하나, "그 수술 환자 분이 사망했다니까요."그녀가 또 한번 반복했을 때, 그 주인공이 서승돈이라는 사실을 박준호는 금세 감지한다.그랬구나. 서승돈이 죽었구나. 집도한 의사들이 예견했던 그대로 기어이 혼돈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절명하고 말았구나.서승돈이 누군가. 아버지 박상구의 공군사관학교 십수 년 후배였으며, 아버지의 반골 기질에 매료되어 전도가 창창한 전투기 조종사에서 쫓겨나지 않았던가. 그래, 서승돈이 아니었으면 양아버지 대니 라일러가 아버지를 죽인 공범 중의 한 명이라는 사실을 알아낼 수 있었을까.아니, 서승돈이 아니었으면 그처럼 용감하게 대니 라일러 그늘에서 탈출할 수 있었을까. 서승돈이 아니었으면 노근리 양민 학살 사건 규명때문에 타계한 작은 아버지 박상길 원혼을 그처럼 통쾌하게 풀어줄 수 있었을까. 서승돈이 아니었다면…….박준호는 고개를 흔든다. 그래, 그는 갔어. 기어코 가 버린거야. 통킹 만 가스 개발 프로젝트를 계기 삼아, 화려한 재기를 꿈꾸던 서승돈이 저처럼 허무하게 이승을 등지고 말았구나.무하마드와 방금 나눈 기쁜 소식을 듣고 누구보다 감격하고 기뻐해야 할 사람이, 그 소식조차 접해 보지 못하고 눈을 감고 말았구나.박준호도 눈을 감는다. 두 손을 모으고 고개를 숙인다.'위빠사나.''위빠사나.'박준호는 오전 10시에 사우나를 한다. 평소 같으면 새벽 샤워를 했으므로, 설사 땀 흘리는 운동을 했더라도 간단한 샤워로 끝내든가, 아니면 타월로 대충 해결하곤 했었다.한데 오늘은 다르다. 굳이 프랑스 산 향내 나는 비누와 샴푸를 찾아들고 사우나장 문을 힘차게 연다.머리를 두 번 세 번 감고, 몸 구석구석을 샅샅이 씻는다. 콧수염도 자르고, 면도도 다시 한다. 손톱도 깎는다. 그리고 실로 오랜만에 여행용 가방 깊숙이 보관해 놓았던 패물함을 꺼낸다. 흡사 한 마리 아름답고 날렵한 새처럼 지리산 야생 녹차농장 위를 유유히 날아다닐지도 모르는 할아버지. 그 할아버지가 살아생전 박준호에게 하사했던 패물함이다. 호령 박씨 문중의 비밀 병기인 용패가 잠자고 있는 패물함. 할아버지의 준엄한 명령에 의해 박준호의 음낭에 깊이 박혀있는 용패가 다시 패물함으로 원위치한 것이 12년 전이든가.보디발 장군 부인의 적극적인 공세에도 굴하지 않고 오히려 감옥행을 선택한 요셉처럼 박준호도 세상의 수많은 여자들로부터의 유혹에서 자유로워지기 위해 과감히 용패를 벗어 패물함 깊이 묻어버린 것이다.물론 요셉의 그것은 전지전능한 신과의 약속 때문이었지만 박준호의 그것은 한 여자가 빌미가 된 자기와의 피나는 싸움이다. 그것도 계약이나, 언약에 의한 행동이 아니다. 스스로 그렇게 하겠다고 결정해 버린 일종의 자기 극기다.상대 여자가 그 사실을 알건 모르건 일단 그 여자를 진실하게 사랑하고 갈망한다는 표현을 그렇게밖에 표현할 수 없는 자신이 안타깝기도 했지만, 지금껏 박준호는 그 사실을 한 번도 후회한 적이 없다. 그렇다. 사랑하므로 미래를 같이 하겠다고 약속한 남자를 위해 여자만 정조를 지키라는 법이 어디 있는가. 할 수만 있다면 남자도 여자를 위해 얼마든지 순결을 고집할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이 곧 자신만이 갖고 있는 특유의 정체성인지도 모른다.

2007-04-17 경인일보

풀밭위의 식사<330>

글 백시종 그림 박성현승마하기 좋은 날16"됐습니다."박준호가 고개를 흔든 다음 계속한다."우리는 지금 베트남 정부에 제출할 개발자금 보증서 외에는 그 어떤 것에도 신경 쓸 여유가 없습니다.""안 그래도 그 일 때문에 급히 만나자고 한 거요."무하마드도 비로소 신중한 표정을 짓기 시작한다."실은 당신이 말한 에너지산업 장관 말이요. 박준호 씨 당신을 만나기 하루 전에 면회 신청을 했었소.""그래서 만나셨습니까?"박준호가 묻는다."만나지 못했소. 왜냐하면 장관과 인터뷰하기로 약속한 날짜에 나는 이 병원에 누워 있었으니까. 하지만 우리 걸프은행이 나를 대신해서 다른 통로로 장관을 만났고, 장관으로부터 박준호 당신들이 추진하는 프로젝트에 대한 자세한 개요를 확인하게 된 거요. 우리 걸프에서는 그 내용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지원하기로 합의 결정했소.""아니, 그게 정말입니까!"박준호가 맨 바닥에 철퍼덕 주저앉을듯이 무하마드의 손을 붙잡는다."사실은 오래 전부터 우리도 이 계획을 검토하고 있었소. 프랑스 국영 석유로부터 파트너십 제의도 여러 번 받았었소. 솔직히 말하자면, 내가 박준호 당신을 만나기 전까지만 해도 우리 걸프는 프랑스 국영 석유와 손을 잡기로 은연중 내정해 놓고 있었던 상태였소. 하지만, 당신을 만나고 그리고 당신이 내 생명을 구해 준 뒤로 상황이 많이 바뀌었소. 다행히 걸프 본사 중역들도 내 발언과 주장에 귀를 기울여 주었고, 프랑스도 한 발 뒤로 물러서 주었소. ……말이 난 김에 얘기지만, 어쩌면 우리는 4자 합작을 해야 도리일지도 모르겠소.""4자 합작이라뇨?"박준호가 묻는다."걸프은행, 대한민국, 베트남, 그리고 프랑스 말이요.""좋습니다. 무하마드 씨."박준호는 망설이지 않고 대답한다. 기실 대답 못할 이유가 없다. 어차피 기술쪽 파트너와 따로 손을 잡아야할 입장이기 때문이다. 무하마드가 설명을 계속한다."사실은 어제 총재의 결재가 났지만, 마지막 신규 사업 자문위원회 재가를 거치지 못했기 때문에 발표를 보류했었소. 대체로 총재 결재가 난 뒤에도 자문위원회를 공식적으로 통과하려면 일주일은 족히 걸려야 하는데, 내가 세차게 밀어붙였소. 왜냐하면 마감일이 며칠 남지 않았기 때문에.""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박준호가 붙잡은 무하마드의 손을 마구잡이로 흔든다."감사는 무슨…… 이건 우리한테 너무나 중요한 사업이요. 며칠 전에도 말했다시피 우리는 이익이 없다고 판단되는 사업에는 단 1달러도 지원하지 않소. 아시겠소?""알다마다요."이번에는 박준호가 계속한다."우리도 자신 있습니다. 텍사코도 미쯔비씨도 이길 자신이 있습니다. 아니, 이길 방책을 따로 세워 놓고 있습니다.""아, 그 문제라면 걱정마시오. 미쯔비씨한테는 4년전 우리 집 안방에서 당한 수모를 되갚기 위해서라도 반드시 밀어내고 말 거요. 더구나 그 당시 우리에게 비열한 술수로 결정타를 먹인 오카모토씨가 대사로 취임해서 진두 지휘하고 있는 모양인데, 우리는 그 점을 좌시하지 않을거요. 텍사코도 마찬가지요. 박준호 당신이 현장을 목격한 증인이니까. 더 할 말이 없소만, 그들은 날 알카에다로 몰아서 잔인하게 살해할 작정이었소. 그들의 음모가 박준호 당신의 도움으로 수포로 돌아갔지만, 이건 내 개인적인 보복 차원에서도 그들에게 호락호락 밝힐 생각이 없소."바로 그 순간 아르므아르 양이 병실 문을 노크하고 들어선다.

2007-04-16 경인일보

풀밭위의 식사<329>

글 백시종 그림 박성현승마하기 좋은 날⑮말 그대로 쟈크린느는 베트남을 움직이는 몇몇 유명 인사 중의 한 사람이다. 어쩌면 통킹 만 가스 개발사업에 대해 결정적인 영향력을 발휘하게 될지도 모른다.아니, 그녀가 마음만 먹는다면 충분히 역할을 감당하고도 남을 여자다.그런 거물급 인사를 어쩌면 봉삼이 같은 날라리가, 그것도 만인이 보는 앞에서 공공연하게 시식할 수 있단 말인가.아무리 생각해도 그런 황당한 일이 또 있을까 싶다.정말 세상은 요지경 속이다. 상식으로 해결할 수 없는 일이 너무 많다. 천하의 봉삼이 같이 한심한 놈한테도 그런 중대한 배역이 맡겨지다니, 어느 누가 저절로 돌아가는 세상사 이치에 대해 왈가왈부 진단할 수 있단 말인가. "탄차우도 바쁜 일이 많은 모양인데, 봉삼이 자식 데려 올까요?"고수길이 볼멘소리로 말한다."원장 사는 집을 알아?"박준호가 묻는다."알구말구요. 병원 사택인데, 그리 멀지 않습니다.""관둬."박준호가 어느새 거리를 메우기 시작하는 자전거 인파에게 시선을 고정 시킨채 계속한다."관두라구.""네?""원장이 출근하면 그 자식도 따라 나오겠지 뭐.""그래도 형님, 봉삼이를 하루 이틀 겪었습니까? 그 자식 그 집에서 무슨 실수를 저지를지 안심할 수가 없잖습니까.""글쎄, 관두라고 하잖아!" 박준호가 또 한차례 강력한 쐐기를 박는다.무하마드는 침대에 등베개를 하고 앉아 있다. 아주 기분 좋은 얼굴이다. 휴대용 컴퓨터를 무릎 위에 올려놓고 있다."좋은 아침이요."무하마드가 말한다."좋은 아침입니다."박준호도 화답한다."오늘같이 좋은 날씨는 승마하기 안성맞춤인데 말이요."무하마드는 여전하다. 첫 상면 때처럼 승마가 아니면 화두가 없다는듯이 그 속사포 같은 말투를 계속 쏟아낸다."박준호 씨 승마 솜씨 일품이던데, 어디서 배우셨소?""특별히 배운 적은 없습니다. 그냥 기회가 주어지면 열심히 탔을 뿐입니다.""처음 말을 탔던 곳이 어디요?""영국입니다. 헤이스팅스.""아, 길버트 경의 농장 말이구려."무하마드의 눈빛이 또 반짝이기 시작한다. 박준호는 생각한다. 이 중요한 아침을 끝없는 승마 얘기로만 일관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박준호가 말한다."참, 이런 때, 질문을 드리게되어 죄송합니다만…….""말씀하세요, 뭐든 좋으니까.""통킹 만 가스 프로젝트 말입니다. 어떻게 생각하시는지……."무하마드가 씨익 웃는다. 대답 대신 무릎에 올려놓은 휴대용 컴퓨터의 자판을 두들긴다. 뭔가 화면에 떠오른다. 무하마드가 입을 연다."오늘 아침 내가 누구하고 이 메일을 주고받은 줄 아쇼? 헤이스팅스의 길버트 경이었소. 여기 그가 보내온 내용이 있소. 읽어 보시겠소? ……아니, 내가 읽는 게 좋겠소. 미스터 박은 내가 신뢰하는 아시아 출신 젊은이들 중의 한 사람이요."무하마드가 컴퓨터 화면에서 눈을 떼며 말한다. "더 읽기를 바라시오?"

2007-04-15 경인일보

풀밭위의 식사<328>

글 백시종 그림 박성현승마하기 좋은 날⑭아니, 더 정확하게 서승돈이 어제 아침 침대에서 일어나지 못한 순간, 그리고 몇 군데 병원을 거쳐 마지막 밀르떼르에 도착했을 때, '결과를 장담할 수 없습니다'라고 담당의사가 너무나 처연하게 말했을 때, 윤성식이 어느 순간에 덮칠지 모르는 서승돈의 임종을 가족에게 미리 알려야하지 않겠느냐고 물었을 때, 박준호의 심장 박동은 이미 정상 수치를 넘어선 상태였던 것이다. 벌떡벌떡 뛰다못해 숫제 공중으로 치솟을 지경이다.그래, 이제 저 울창한 숲 입구에서 서승돈을 불러도 그 대답을 듣지 못하게 될지도 모른다.아니, 아예 서승돈은 없다. 숲에는 오로지 홍주리와 박준호만이 존재한다.숲 이름이 벤네비스이던가. 침엽수와 떡갈나무가 하늘을 찌르고 있다. 비가 쏟아지고 있다. 바람이 불고 있다. 캄캄한 밤이다. 박준호는 그녀와 또 한번 대결을 벌여야 한다. 마지막 대결이다.기회는 다시 오지 않는다. 그녀가 더이상 도망치지 못하도록 일단 퇴로부터 차단시켜야 한다.그녀를 더이상 자유롭게 방치해 둘 수가 없다. 그러나 그녀가 순순히 박준호 앞에 무릎을 꿇어 줄까.박준호의 두 다리를 끌어안고 재회의 눈물을 흘리며 실은, 어느 한 순간도 잊은 적이 없었다고 울먹여 줄 수 있을까.지금 김상도에게 가 있는 아들 일규도 실은 그날 밤 벤네비스 산장에서의 그 일이 아니었으면 존재할 수 없었을거라고 또박또박 말해줄 수 있을까.박준호는 혼자 고개를 흔든다. 솔직히 자신이 없다. 그때처럼 또 철썩, 뺨이라도 올려치지 않을까 겁이 난다. 박준호는 두 손을 모은다. 고개를 숙인다.'위빠사나.'침착과 욕망으로부터 그녀가 자유로워지도록 하소서.번민과 고통에서 벗어나게 하소서.진정한 숲 속의 자유를 만끽하게 하소서.위빠사나.위빠사나.그때, 고수길이 박준호를 허겁지겁 찾아 들어온 것이다."형님, 무하마드 씨가 찾습니다."박준호가 눈을 번쩍 뜬다."뭐라구?""지금 바로, 병원으로 나오시랍니다.""아니, 무하마드 씨가 직접 그렇게 말한거야?""네, 형님. 무하마드 씨가 나한테 직접 그렇게 부탁했습니다.""그럼, 전화로 할 일이지, 거기서 여기까지 왜 와?""형님 명상에 들어갔다하면 두 시간은 깜깜무소식인데, 누가 감히 형님을 깨울 수 있습니까?""하긴…….""중차대한 일 같아서 제가 직접 달려온 겁니다.""……잘했어."고수길이 운전하는 자동차에 올라 앉으며 "봉삼이는 병원에 있냐?"고 박준호가 묻는다."병원에 없습니다.""병원에 없다니?""어젯밤, 탄차우를 대신 데려다놓고 나가서는 지금까지 종무소식입니다.""어디 갔지? 혼자 도장에 와서 자나?""방금, 가 봤는데, 여기서 잔 흔적은 없습니다.""그럼…….""그 여자한테 간게 틀림 없습니다."쟈크린느다. 하노이에 하나밖에 없는 외국인 종합병원 원장이다. 아니, 베트남 최고 권력자의 주치의라고 해야 더 걸맞은 수식어다.

2007-04-12 경인일보

풀밭위의 식사<327>

글 백시종 그림 박성현승마하기 좋은 날⑬홍주리는 두서가 없다. 앞뒤가 없는 말을 마구잡이 식으로 쏘아 대고 있다.윤성식이 박준호를 쳐다본다. 어떻게 대답했으면 좋겠는가를 묻는 눈치 같다. 박준호는 대답 대신 시선을 외면해 버린다. 어떻게 대응하건, 그것은 철저히 윤성식 몫이기 때문에."아침에, 사장님은 침대에서 일어나시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병원으로 모시고 온 겁니다."윤성식이 대답한다. 홍주리가 입을 연다."몇 시간 걸리죠? 서울서 하노이까지 말이에요.""일단 비행기만 타면 대충 다섯 시간입니다. 사모님.""알았어요. 비행기 예약 스케줄 나오면 전화할게요."홍주리한테서 전화가 걸려 온 것은 서승돈의 수술이 아직 끝나지 않은 시간이다. 그러니까 한 시간도 채 안 되어 전화를 걸어 준 셈이다.그녀는 아까처럼 두서없이 마구잡이로 쏴 대지 않는다. 어느새 본연의 자리로 돌아갔는지, 유별나게 격식을 갖춘 목소리로 말한다."낼 오후 도착하는 비행기예요. 십삼 시 정각 하노이 공항에 내릴 거예요."그리고 끝이다. 더 이상 묻지도, 그쪽 사정에 대해 왈가왈부 설명하지도 않는다.박준호가 예상했던 그대로다.막힌 동맥을 뚫고 플라스틱 관을 연결했다는 데도 서승돈이 의식에서 깨어나지 못하는 반면, 무하마드는 언제 그런 일을 겪었느냐는 듯, 그 팽팽한 기력을 한껏 자랑해 마지않는다.박준호가 무하마드의 부름을 받고 부랴부랴 병실로 찾아간 것은 이튿날 이른 아침이다.박준호에게는 한참 명상에 빠져 있을 시간이다. 하노이에 도착하기 전에도 박준호는 새벽 4시면 정확하게 잠자리에서 일어난다. 그리고 달리기와 '솟구쳐차기'와 '얼렁발질'과 '얼러 메기기' 따위 기본 동작으로 몸을 푼다.땀 투성이 새벽 몸을 샤워로 씻고 나오면 대개가 여명이 퍼렇게 물들기 시작하는 여섯 시이기 마련이다.박준호는 명상에 들어간다. 단전호흡이다. 모든 집착으로부터 벗어난다. 대의를 위해 사사로운 욕심은 버린다. 오로지 세속을 이길 수 있는 것은 마음의 자유뿐이다.마음을 비우면 새처럼 가볍게 날 수 있다. 자유롭게 날 수 있는 새. 허공에서 내려다볼 수 있는 새의 평화로운 눈…….'위빠사나.''위빠사나.'오늘 아침 박준호가 깊이 깊이 자맥질하는 명상의 끝에 마사요시가 우뚝 서 있다. 호치민 시에서 중국 제일의 무술인을 꺾었다는 일본 가라데 일인자 마사요시.그에게 전격적으로 도전장을 내민 운명의 대결은 이제 하루밖에 남지 않았다. 내일 오후 2시다.그를 이겨야 한다. 그를 쓸어뜨려야, 박준호가 우뚝 설 수가 있다. 그것도 많은 구경꾼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마사요시의 항복을 받아 내야 한다.그렇다. 마사요시의 무릎을 꿇게 하기 위해서는 오로지 위빠사나의 경지에 오르는 수밖에 다른 방도가 없다.'위빠사나.''위빠사나.'또 있다. 홍주리다. 어쩌면 마사요시나, 베트남 대사로 공식 취임한 오카모토보다 더 두려운 상대가 홍주리인 줄도 모른다. 그녀가 오늘 오후 정각 한 시에 하노이 노이바이 공항에 도착한다.벌써부터 초조하다. 가슴이 두근거린다.

2007-04-11 경인일보

풀밭위의 식사<326>

글 백시종 그림 박성현승마하기 좋은 날⑫"네, 박 선생님.""영림전자에 오래 근무하셨죠?""그렇습니다.""그럼, 홍주리 여사도 아시겠군요?""물론 알고 있습니다.""그 분한테 연락하세요.""네?""아마 본인도 홍주리 여사가 먼저 찾아오기를 갈망할지도 모릅니다. ……연락처는 아시죠?""알다마다요.""그럼, 지금 연락하세요. 이쪽 상황을 있는 그대로 정확하게 전달하고, 처분을 기다리세요."윤성식이 전화를 걸기 위해 대기실을 나간다. 박준호도 따라 나선다. 아르므마르 양을 찾아 병원 전화를 쓰도록 하기 위해서다.윤성식은 버튼을 누른다. 영림전자 인사부에 먼저 콜을 해서 홍주리의 전화번호를 알아낸다.운이 좋은걸까. 홍주리가 곧바로 수화기를 들어준다."여기, 하노입니다."윤성식이 정중하게 운을 뗀다."저는 서승돈 사장님을 오래 모셨던 윤 대립니다.""알아요. 윤성식 대리. 서 사장님한테 얘기 많이 들었어요. 모시던 상사때문에 영림에서 동방실업으로 옮겨 앉으셨다면서요?""아, 뭐…… 그야…….""용기있는 자 아니면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녜요. 그래서 나도 윤성식 대리를 특별히 기억해두고 있는 거에요.""감사합니다.""그런데, 웬일이세요?"그제야 제 임무를 생각해냈다는듯이 윤성식이 허겁지겁 입을 연다."사장님께서…… 쓰러지셨거든요.""쓰러지다니?""심근경색이랍니다.""뭐라구요? 어제 밤늦게까지 통화를 했는데, 심근경색이라뇨?""지금 수술실에 들어갔습니다.""그게 사실이에요?""사실입니다. 상태가 좋지 않습니다. 아무래도…….""그게, 무슨 말이에요? 무슨 말이냐구!"이윽고 홍주리의 음성이 고조되기 시작한다. 하지만 윤성식은 침착하다."의사들 얘기로는 생명이 위독하다는 겁니다.""생명이 위독하다구!""네, 사모님."갑자기 수화기 속에 정적이 감돈다. 전화가 고장인가 했는데, 어디서 돌연히 튀어나오듯 홍주리가 말한다."아직, 죽지 않았죠? 그쵸?""물론입니다, 아직은…….""우리 그이, 뭐라고 말할 수는 있죠? 전화 좀 바꿔 줘 볼래요?""안 됩니다. 지금 수술 중이니까요.""거기 어디예요? 베트남 병원은 다 낙후됐다는데…….""여긴, 프랑스 가톨릭에서 운영하는 병원입니다.""의사들도 프랑스 사람들인가요?""그렇습니다. 사모님.""의사들은 뭐라고 그래요? 아니, 심근경색이라고 했죠? 수술 들어가기 전, 그이가 무슨 말씀하시던가요?"

2007-04-10 경인일보

풀밭위의 식사<325>

글 백시종 그림 박성현승마하기 좋은 날 ⑪"…방치한 게 아니고, …병원에서 환자를 받지 않았습니다. 큰 병원으로 가 보라는 바람에…병원만 두 곳을 들르다 보니….""어쨌든 심장에 문제가 있는 것 같군요. 동맥이 막혔습니다. 곧 수술을 하겠지만, 좋은 결과를 기대할 수는 없을 것 같군요.""아니, 그럼 어떻게 되는 겁니까?" 황당해진 박준호가 묻자 "한 시간만 일찍 데려 왔어도…한마디로 이 환자는 시기를 놓쳤습니다."당연한 결과라는듯이 너무도 냉정하게 또박또박 대답한다."그래서 죽기라도 한단 말입니까?""만에 하나 죽지 않는다 해도 정상인으로 살기는 어려울 듯 싶군요. 벌써 마비가 왔습니다."그러고 보니, 눈알도 휘휘 풀렸고 팔 다리도 제 맘대로 놀고 있다. 흐느적 흐느적이다. "깨어나게 해 주십쇼. 제발!"윤성식이 두 손을 모아 쥐고 젊은 의사에게 호소하고 있다. 의사들은 들은 척 만 척이다. 아니, 너무 급한 나머지 윤성식에게 일일이 응대할 시간적 여유가 없다.서승돈이 수술실로 옮겨지고 문이 닫힌다. 이제 어떻게 손을 쓸 방도가 없다. 수술이 끝날 때까지 숨죽이고 기다릴 수밖에."어떻게 하죠? 서 사장님 가족에게 연락을 해야죠?"윤성식이 말한다."그래요. 그렇게 해야죠."박준호가 건성으로 대답한다."사모님이 미국에 있다는 얘기만 듣고…혹시 박 선생님이 연락처를 아시는지….""몰라요."박준호가 고개를 저으며 계속한다."그 어른에 대해서 난 아무 것도 아는 것이 없소."자신이 생각해도 어색할 정도로 박준호는 신경질적으로 대답한다. '미국에 있는 부인이 그렇게 버티다가 이번에 이혼 합의서에 도장을 찍었다는 거 아뇨'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지만, 박준호는 잠자코 삼켜 버린다. 따지고 보면 서승돈이 은행 지급 보증서 한 장 해결하지 못한 상태이면서도, 그토록 기분 좋아했던 것도 부인과 법적으로 갈라서게 되었다는 사실 때문이 아니던가.이제 비로소 그는 비 오는 날에도 선글라스를 끼는 따위 어설픈 변장술을 부리지 않고서도 홍주리를 만날 수 있는 자격을 당당히 획득한 것이었다.박준호는 생각한다. '그래, 적어도 어제 오후까지는 아니, 오늘 새벽까지는 서승돈이 홍주리를 완벽하게 소유했던 거였어. 그래, 진정한 사랑은 인생의 모든 것. 이를테면 그 동안 쌓아올린 지위도, 재산도, 심지어 이름까지도 미련없이 내던진 뒤에야 비로소 얻어지는 것이라고 하지 않았는가.' 박준호는 다시 생각한다. '이게 누구 이야기인가.'서승돈이 아니라 바로 박준호, 그 자신의 얘기를 하고 있지 않은가. 맞아. 박준호에게도 홍주리는 절대적인 존재 아니던가. 어쩌면 서승돈의 그것보다 더 절실한지도 모른다.생각해 보라. 어느 한순간 그녀 이름을 잊은 적이 있었던가.박준호인들 주어진 것을 포기하지 않고, 그녀를 거저 얻으려 한 적이 있는가. 그 자신 역시 최소한 변호사라는 직업이 보장된 옥스퍼드 법대 입학도, 전형적인 영국 처녀 마거릿도, 하다못해 부담 없는 이모처럼 오로지 헌신과 봉사로 일관되게 접근했던 톰 라더 부인까지 깡그리 내던지지 않았던가. "윤성식씨."박준호가 입을 연다.

2007-04-09 경인일보

풀밭위의 식사<324>

글 백시종 그림 박성현승마하기 좋은 날 ⑩"주치의?"박준호는 또 한 번 놀라마지 않는다. 이번에는 호아가 나서 친절하게 배경 설명을 한다."우리 쟈크린느 원장님 아니었으면 보치콩 의장님, 파리에서 개죽음 당하셨을 거예요. 프랑스 망명 시절, 청년 보치콩이 길거리에 쓰러져 있는 것을 길가던 쟈크린느가 병원으로 데려가, 그것도 직접 집도하여 수술을 끝냈어요. 물론 급성 맹장염이었지만,…그대로 방치했으면 죽는거죠 뭐.""그래서 주치의로 베트남까지 모셔 온 거군요."호아도 아르므아르 양도 똑같이 고개를 끄덕인다. 순간 박준호는 아, 하늘이 돕는구나라고 혼자 소리치고 있다. 하늘이 저 무식하고 무지막지한 조봉삼을 통해 새 역사를 쓰도록 점지해 주시는구나. 드디어 보치 콩 의장을 움직일 수 있는 결정적인 의인을 만나게 해주는구나. 박준호가 고수길을 봤을 때, 그 역시 반짝이는 섬광이 핑글 돌고 있다. 고수길 또한 머리 회전만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니까. 박준호가 쟈크린느 원장을 대면한 것은 그녀의 집무실이 아닌, 무하마드 입원실이다. 쟈크린느는 급하게 샤워만 끝냈으므로 아직 머리조차 마르지 않은 어정쩡한 모습이다.게다가 화장도 하지 않은 맨 얼굴이다. 한데도 그녀는 부끄러워하거나 멋쩍어 하는 기색이 아니다. 부끄러워하기는커녕 그렇게 당당할 수가 없다.더구나 그녀는 조봉삼의 손을 놓지 않고 있다. 무하마드의 회복상태에 관해 세세한 설명을 늘어 놓으면서도 조봉삼의 어깨를 쓰다듬곤 하는 일을 그만두지 않는다.언제 그런 일을 벌였느냐 오리발을 내놓는다기보다 왜 그것이 부끄러운 일이냐는 항의 같은 태도다.하긴 박준호도 그것을 모르는 바 아니다. 예컨대 톰 라더 부인이 그러하지 않았는가. 배고플 때 빵을 집듯이 집무실이든, 소파든 끓어 오르는 욕구를 조용히 잠재울 수 있다면 그보다 더 아름답고 행복한 인생이 어디 있느냐는 식이다.어쨌거나 박준호는 조봉삼을 따로 호출하지 않는다. 그녀가 그 왕성하고 시끄러웠던 작업을 끝내고 원장실 빗장을 풀고 난 뒤부터 조봉삼을 금이야 옥이야 끼고 돌았기 때문이다. 아니, 솔직히 쟈크린느 원장이 보치콩 의장의 주치의만 아니었어도, 박준호가 그만큼 자제력을 보였을 리 만무하다.봉삼이 녀석을 화장실이나 병원 뒷뜰로 불러 내 헉 소리나게 육체적인 고통을 주었어도 수십 번 주었을 박준호다. 그런 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조봉삼은 아예 박준호를 쳐다보지도 않는다. 슬슬 눈길을 피한다.'아이고 행님, 봐 주이소. 오랜만에 몸 한 번 풀었다 안 캅니꺼. 행님, 한 번만 눈감아 주이소 그마.'녀식이 꼬리를 잔뜩 내리고 그렇게 사정하는 듯 눈길을 땅바닥에 박고 있다. 다행스럽게 무하마드의 상태는 아주 좋다. 워낙 건강 상태가 양호한데다, 일찍 손을 썼으므로, 잠에서 깨어나 식사만 제대로 하면 정상인으로 간주해도 좋을 것이라고 쟈크린느가 설명한다. 바로 그때다. 고수길이 병실로 뛰어든다. "왜 그래?""서승돈 사장이 응급실에 도착했다는데요.""서 사장이 밀르떼르 병원에 왔다구?""그렇습니다, 형님."박준호는 고수길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몸을 날려 응급실을 향한다. 서승돈이 실려 있는 침상 옆에 의사들과 간호사들이 눌러붙어 있다. 한참 그렇게 승강이하던 의사 중 한 사람이 보호자로 망연히 서 있는 윤성식 동방실업 지사장에게 말한다."왜 환자를 이렇게 방치했죠?"

2007-04-08 경인일보

풀밭위의 식사<323>

글 백시종 그림 박성현승마하기 좋은 날⑨"왜, 그래? 왜!"어느 틈에 호아도 방 안을 들여다보았는지,"어머, 어머! 원장님이……."아르므아르만큼은 아니지만, 그녀 역시 혼비백산한 얼굴이다. 박준호도 본다. '아뿔싸.' 이게 뭔가. 조봉삼이다. 조봉삼이 여자를 겁탈하고 있다. 얼마나 그 일에 열중하는지 쾅쾅 두들기다시피 하는 노크 소리도 듣지 못하고 있다. 박준호의 머리끝이 쭈뼛 선다. 놈이 사고를 치는구나. 기어코 일을 벌이고 마는구나. 일순 눈앞이 캄캄해진다는 말을 그토록 실감할 수가 없다.'빌어먹을!' 박준호는 주먹을 불끈 쥔다. 놈을 그대로 둘 수가 없다. 놈이 일을 다 끝낼 때까지 다른 구경꾼들처럼 낄낄거리며 기다릴 수가 없는 것이다. 방문을 부수고라도 들어가 놈의 멱살을 끌고 나와야 한다."이런 개뼈다귀 같으니!"박준호가 무서운 기세로 방문을 막 걷어차려는 순간, 아르므아르 양이 말한다."아녜요! 문을 부수면 안 돼요!"그녀는 숫제 두 팔을 벌려 박준호를 막고 있다."아니, 그게 무슨 소리야?""우리 원장님도 함께 즐기고 계시잖아요.""뭐라구?""똑똑히 보세요. 두 사람이 끌어안고 있어요."아닌게 아니라 조봉삼이보다 여자 쪽이 더 적극적이다. 여자가 조봉삼의 허리를 두 팔로 감아 옥죄고 있다. 그리고 '아흐아흐' 소리치고 있다. 땀을 비오듯 흘리고 있다.역시 놈은 의젓하고 당당하다. 아니, 군림하고 있다. 다섯 손가락을 여자의 젖은 머리칼 속에 집어넣어 휘젓고 있고, 또 다른 손으로 여자의 젖가슴을 닭 모가지를 그렇게 하듯 움켜 비틀고 있다. 그 아래는 흡사 거대한 피스톤의 율동같다. 천박스런 말로 흔히 떡치기라고 하던가. 정말 조봉삼의 완력에 대해 그 어떤 표현도 떡치기만큼 절묘할 수는 없을터다.그것도 끝이 뭉툭한, 그리고 질이 잘난 박달나무 절구다. 얼마나 우람한지 보기만해도 의뭉스럽다. 그 엄청난 절구로 떡을 쫀득쫀득 치고 있다. 여자 쪽이 원하는지, 아니면 봉삼이 놈의 객기인지 모르지만 일순 피스톤 작동을 중단하고 소파 위에 누워있던 여자를 일으켜 세운다. 아니, 그녀가 소파 등받이를 잡고 말처럼 엎드린 포즈를 취한다. 벌써 놈의 박달나무 절구는 뽑아진 채 기다리고 있다. 아닌게아니라 엄청나다. 때리면 '티잉─팅' 소리가 날 것 같다. 이번에는 뒤쪽이다. 뒤쪽으로 공략해서 계속 쫀득쫀득 떡을 친다.그때, 누군가 뛰어 온다. 병원 사무처 직원이다."아니, 어떻게 된 거요? 왜 전화를 안 받으시죠?"사무처 직원이 수선을 떨어 마지않는다. 방 안의 사태를 감지하고 "원장님 찾는 전환데, 어떻게 하죠?"하며 발을 동동 구른다."어디서 왔어요! 전화 말이에요?"아르므아르 양이 나선다."의장님 관저요.""의장님이 직접 전화 하셨어요?""아뇨, 비서요.""비서라면 조금 기다리라고 해요. 원장님 잠시 자리를 비우셨다구."사무처 직원이 아래층으로 달음박질쳐 내려가자 박준호가 입을 연다."의장님이라면…… 베트남국가평의회 의장 말이죠?""네, 보치콩 의장님이요.""아니, 의장님이 왜 원장을 찾죠?""우리 원장님이 보치콩 의장님 주치의니까요."

2007-04-05 경인일보

풀밭위의 식사<322>

글 백시종 그림 박성현승마하기 좋은 날⑧그대는 마그마를 옐로스톤의 올드페이스 필처럼 공중 100로 치솟게 할 마법을 아는가. 부글부글 혼자 끓다가, 혼자서 지하 깊은 곳을 휘돌다가, 혹은 기폭으로, 혹은 용틀임으로, 혹은 아우성으로, 혹은 아름다운 비명으로 바둥대다가 이윽고 강력한 펌프질에 의해 기어코 솟구치는 그 환희, 그 영광, 그 아름다움, 그 풍요함, 그 아련함, 그 얼얼함, 그 몽롱함……."벌리라! 더 벌리라 안 카나!"조봉삼은 쟈크린느의 다리 틈새가 더 커지도록, 그래서 늪이 더 잘 보이도록, 아니 질펀한 생크림 같은 즙액이 더 많이 분출되도록 계곡 주변의 잡동사니를 치우고, 벌리고, 짼다.그리고 그 큰 입으로 흡사 베드윈 족의 원색 텐트처럼 금빛 여우색 숲을 완벽하게 덮어 버린다.다음은 보아뱀이다. 윤활유를 가득 묻힌 보아뱀이 분탕질을 시작한다. 전신을 뒤틀며 계곡과 늪, 두 쪽의 분홍빛 날개를 인정사정없이 빨고, 손바닥에 올려놓은, 물고 뱉고, 잘근잘근 씹고, 강아지풀 요요요, 흔들어 부르듯 부드러운 분탕질을 계속 반복하는 것이다."아, 으으음…… 아뮈제 브라보─."무의식에서 깨어나지 않는 서승돈을 앰뷸런스 아닌 체육관 소형 버스에 싣는다. 이곳저곳에 전화로 에스오에스를 쳤지만 득달같이 달려와 주는 앰뷸런스가 없었기 때문이다.동방실업 윤성식 지점장이 서승돈을 부축하다시피 하고 가까운 병원으로 냅다 달리기 시작한다. 응당 박준호도 그 뒤를 따라야 옳지만, 무하마드 일 역시 화급을 요했으므로 윤성식에게 모든 것을 맡기고 밀리떼르 병원을 향한다.호아도 동행이다. 한데 병실 앞을 지키는 사람은 고수길뿐이다."봉삼이 어디 갔어?""바람 쐬러 갔겠죠 뭐.""자식, 지금이 어느 땐데, 바람을 다 쐬러가?"아무리 투덜거려봐야 쇠귀에 경 읽기인 줄 뻔히 알면서도 박준호는 한 번 더 강조한다."그 자식은 매양 왜 그래?""본래, 그런 부류 아닙니까?"고수길이 마지못해 한마디 거든다."아무래도 잘못했어."박준호가 말한다."서울에 떨어뜨려 놓고 오는건데……."무하마드는 아직도 잠에 빠져 있다. 박준호에게 특별히 관심을 보이는 간호사를 불러 환자의 차도를 묻는다.이름이 아르므아르라든가. 그녀가 상냥한 목소리로 담당의사 정기 검진이 끝나지않아 자세한 내용은 모르지만, 대체로 빠른 속도로 회복중이라고 대답한다."담당의사가 왜 정기 검진을 하지 않죠?""글쎄요, 시간이 지났는데…… 오시지 않아, 저희도 기다리고 있는 중이거든요.""그럼 선생님을 찾아가 뵙죠, 뭐."아르므아르 간호사가 앞장서고, 호아와 박준호가 뒤따른다. 2층 담당의사 방 앞에 사람들이 붙어 서 있다. 하나같이 유리창 안으로 드리워진 블라인드 틈새로 방 안을 엿보고 있다."왜, 저러죠?"박준호가 묻는다."글쎄요."아르므아르가 방문을 노크한다. 분명 인기척이 나는데도 문이 열리지 않는다. 손잡이를 억지로 당겨 본다. 잠겨져 있다. 그녀도 마지못해 다른 구경꾼처럼 유리 틈새로 방 안을 본다. 그리고 "어머낫!" 놀라 자빠지는 시늉을 한다.

2007-04-04 경인일보

풀밭위의 식사<321>

글 백시종 그림 박성현승마하기 좋은 날⑦실제로 마법사 조봉삼은 계속 주문을 외우고 있다. 쟈크린느만 알아 듣지 못하는, 그러나 음색의 강도만은 너무나 선명한, 흡사 영원의 울림같은 목소리다.'뽈아라 쓰으파알, 뽈아라 더 쎄게.'마법사의 손이 쟈크린느의 주억거리는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고 있다. 머리카락이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도록 한 움큼 집었다가 다시 놓고 있다. 마치 선풍기 바람에 꽃씨 날려보내듯 보드랍게 쓰다듬고 있다."하모, 그리 허는기라 바로 그기라! 바로… 으흐흐흐."너무 깊은 황홀경이라서, 이제 금방 빗자루를 타고, 길고 까만 망토를 펄럭이며 허공을 날아갈 것 같은 마법사가 갑자기 거대하고 탱탱한 트레이드 마크를 그녀 입에서 거둬들인다. 그리고 또 주문을 외운다. 적어도 쟈크린느가 듣기에 그러하다.'담은 니 차롄기라. 인자, 니가 받는기라. 내가 그리 헐끼라 내가 양코베기 니 년을 죽이주는기라!'드디어 조봉삼의 손이 마법을 부리기 시작한다.우선 그 커다란 두 손으로 그녀 허리에 깍지를 끼고 의자에서 일으켜 세운다. 그리고 벽에 그녀의 등이 닿도록 옮겨 놓는다. 다음 순서는 옷 벗기기다. 아니, 옷을 벗긴다기보다 체온계, 청진기 따위가 꽂혀있는 흰 가운을 들치고, 그 속에 드러나는 검은색 원피스 밑으로 마법의 지팡이 같은 손을 거칠게 집어넣는다. 그녀는 팬티도 검정색이다. 조봉삼은 그것을 단숨에 벗겨 내린다. 쟈크린느가 몸을 사릴 틈을 주지 않는다. 오히려 팬티를 벗기는데, 스스로 돕는 행동을 유발시킨다. 여전히 마법의 주문을 입에 달고 있다. 손에 쥐면 한 움큼도 안되는 팬티를 조봉삼은 재빨리 바지 주머니에 쓸어 넣는다. 그리고 바닥에 무릎을 꿇는다. 전혀 반대 자세다. 마법사가 밑이고 충직한 중세 여인은 우뚝 서 있다. 마법사의 입술이 그녀 둔덕에 닿는다.쟈크린느의 체모는 금빛 여우색이다. 그윽한 숲을 이루고 있다.황금 갈대를 헤치고 여우 사냥을 하는 사냥꾼처럼 조봉삼의 젖고 끈끈한 혀가 갈대를 쓸어뜨리며 길을 내고 있다. 언덕을 내려오고 있다. 미끄러지지 않기 위해 몸을 똑바로 세워 보지만, 경사도가 워낙 심해 마음대로 균형이 잡혀지지 않는다.엉덩방아를 찧는다. 아니, 앉은 자세로 언덕을 미끄러져 내려오고 있다. 갑자기 일자형으로 파인 작은 계곡이 나타난다. 습기가 많다. 수맥은 보이지 않지만, 쏴쏴 흐르는 물소리가 지하 어디선가 들려 올 것 같다.골 깊은 계곡에 혀 끝을 집어넣는다. 따뜻하다. 아하, 이건 그냥 물이 아니라, 지하 온천이야. 알칼리성 유황 성분이 가득한 온천. 전신을 담그면 류머티즘성 질환이 없어지고, 신경증, 신경마비, 운동기 장애, 불안 초조, 대인공포증, 여자 무섬증 등도 깡그리 치료되는 신비의 유황온천.안그래도 즙액으로 가득 찬 혓바닥이 일자형 계곡을 미끄러져 내려오자, 허부죽 허부죽 깊은 늪이 기다리고 있다. 늪 주변은 생크림 같은 즙액으로 질퍽질퍽하다. 하나 즙액은 어디까지나 지하 깊은 곳에서부터 치솟아 올라올 물기둥의 예고편에 지나지 않는다.엘로스톤 국립공원을 왜 찾아 가는가. 왜 올드페이스필의 장관을 보기 위해 줄을 서서 기다리는가. 지하로부터 강력한 힘으로 뿜어져 올라오는 거대한 물기둥, 물기둥의 뜨거운 열기, 콧등이 싸아해지는 짙은 유황 냄새.저 속 깊은 곳에 무엇이 있기에 그처럼 대지를 흥분의 도가니로 몰아넣는가.그대는 마그마를 아는가. 수억년 습곡운동(褶曲運動)을 통해 단련된 열원(熱源). 용융의 경지에 이른 마그마가 꿈틀거리기 시작하면 지표 위는 온통 생크림 같은 즙액으로 질펀해지지 않던가.

2007-04-03 경인일보

풀밭위의 식사<320>

글 백시종 그림 박성현승마하기 좋은 날⑥의자에서 삐걱 소리가 난다."어머나!"조봉삼은 과감하다. 연속적인 행동을 중단하지 않는다. 말 그대로 한치의 틈도 없다. 마치 증기 기관차의 피스톤 같다.피스톤이 잠시라도 멈추거나 느슨해진다는 것은, 그녀가 여유를 가질 수 있는 빌미를 제공하는 것이나 진배없다.상대가 가닥을 잡지 못하게 전광석화처럼 몰아붙여야 한다. 정신을 빼 놓아야 한다.실제로 쟈크린느가 생각해도 이건 뭔가 마법 같은데 잔뜩 홀린 느낌이다. 도저히 상식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다.이 무단 침입자의 폭력적이고 야만적인 행동에 대처할 기회도, 시간도, 기력도 없다는 사실이 그녀를 더욱 황당하게 한다.그녀의 앉은 키는 그리 크지 않다. 조봉삼이 그녀 코 앞에 바짝 접근한다. 이미 발기될 대로 발기된 조봉삼의 트레이드마크, 그러나 그것은 처음 만나는 상대가 아니다. 아무리 무의식적이라 해도 불과 몇 시간 전에, 쟈크린느가 붙잡고 한참이나 승강이를 했던 바로 그 만남 아닌가.그 거대한 물건이 그녀 코 앞에 다가와 있다. 뭔가를 찢어발기고 말겠다는 듯이 분기탱천해 있다. 조봉삼은 다짜고짜다. 왼손으로 그녀의 머리를 움켜쥐고, 오른손으로 과감하게 지퍼를 연다."어머나 맙소사!"엄청난 크기의 페니스가 툭, 소리를 내며 튀어나온다. 때마침 저녁 햇빛이 창 유리를 통해 그 강렬한 빛을 자랑하며 들어왔는데, 그것이 조봉삼의 웅장한 귀두를 정통으로 관통하는 것이었다.탱탱하다 못해 저 혼자 건들거리는 머리통이 햇살로 하여 더 검붉은 빛을 머금기 시작한다. 보라색도 있고 연분홍색도 있다. 두 개의 색이 귀두 테두리에서 핑글 돈다. 그만큼 돌기가 강대한 탓이리라.하나 그녀는 그것을 오래 쳐다볼 여가가 없다. 조봉삼이 "뽈아라!"라고 소리쳤기 때문이다. 아니, 소리만 친 게 아니다. 왼손으로 잡고 있던 그녀의 머리도 앞으로 당겨, 그 엄청난 괴물에 그녀의 입술이 맞비벼지도록 하는 것이다."뽈아, 이 쓰으파알 년아!"물론 쟈크린느는 소리들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 줄은 대충 짐작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이 욕설과 뒤범벅이 되어 뱉어지고 있다는 사실은 알지 못한다.조봉삼이 더 강렬한 힘으로 그녀의 입술에 물건을 꽂을 듯이 밀어붙인다. 그통에 회전의자가 뒤쪽으로 밀린다.'어, 어, 어.'처음엔 뭐 이런 따위가 다 있어, 고함을 지르거나 책상 위에 설치된 비서를 호출하는 차임벨 버튼을 누르거나 할 요량이었는데도, 이젠 팔을 벌려도 손이 닿지 않는다.그리고 그녀 자신도 놀라 마지않는다. 어디서 그런 용기와 용단이 우러나왔을까. 어떻게 몸과 머리가 따로 따로 놀게 되었을까.'맞아, 이건 내 의지가 아니야.'쟈크린느는 어떤 알 수 없는 힘에 이끌려 덥석, 그것을 움켜쥐고 있는 자신을 부정하고 있다. 아니, 붉고 축축한 것을 내밀어, 거대한 귀두를 천천히 빨기 시작한 자신의 혀를 깨물어 버리고 싶은 생경감에 사로잡힌다.하나 단순한 충동일 뿐이다. 스쳐가는 바람 같은 충동.그녀 역시 허겁지겁이다. 마치 마법에 걸린 중세(中世) 여인 같다. 그것도 보통 마법이 아니다. 꼼짝없이 순종하고 복종해야 하는 강렬한 마법.예컨대 그 마법의 주문이 있다면,'뽈아라, 뽈아라, 뽈아라'일 터이다.

2007-04-02 경인일보

풀밭위의 식사<319>

글 백시종 그림 박성현승마하기 좋은 날 ⑤눈에 보이는 것은 온통 하나뿐이므로, 어느 누구도 말릴 수도 막을 수도 없다. 그야말로 의기양양에 유아독존이다.기실 조봉삼은 프랑스 말도, 영어도, 베트남 말도 거의 한마디 구사할 수도 알아 들을 수도 없는 수준이다.쟈크린느 역시 한국말에 대해서는 완벽한 벽창호다. 그렇다면 두 사람은 너무 확연하다. 대화 불통이다. 흡사 선 끊어진 전화기 꼴이다. 서구 세계와 아랍 세계처럼 소통이 안 되는 이른바 문명 충돌의 최일선 현장이나 진배없다.한마디로 쟈크린느와 조봉삼은 기름과 물처럼 애당초 어울릴 수 없는 사이다. 비록 나이는 한참 연상이라 해도 프랑스 그랑프리자동차경주 파견 공식 닥터로 수십 년 유명 레이서의 인기를 독차지했던 가장 전형적인 프랑스 미인 아닌가.두문불출을 생활 신조로 삼고 있는 지금이니까 그렇지, 2년 전만 해도 미리 스케줄을 잡아야 만날 수 있는 사람이 바로 쟈크린느였던 터다. 오죽하면 포뮬러 레이스를 3연패한 세계 에이스급 카레이서 주안 마뉴엘 같은 사람도 반년여 쟈크린느를 따라다니며 애걸복걸하여 결혼 승낙을 얻어냈을 정도겠는가.그런 그녀에 비하면 조봉삼은 그야말로 모기 다리에 워커격이다. 솔직히 말해서 그동안 단련한 태권도, 합기도 따위 무예를 빼면 전혀 내세울 것 없는 시쳇말로 조폭의 조직원에 불과한 남자다.일반적인 세상 이치로서는 전혀 이뤄질 수 없는 상대다. 한데 막상 뚜껑을 열고 보니 다르다. 하긴 세상사 중에 공식도, 법규도, 이치도, 나이도, 귀천(貴賤)도, 아니 오죽하면 국경조차 없는 유일한 관계가 바로 남녀 간의 사랑이라고 하지 않던가.얘긴즉슨 이러하다. 코뿔소처럼 씩씩 불고 다니던 조봉삼이 그녀의 집무실을 쳐들어 간 것은 이날 오후 퇴근 무렵이다.보무도 당당히, 노크도 없이 불쑥 들어선 조봉삼은 발꿈치를 내리찍는 소리와 동시에 빗장을 철컹 걸어 버린다.그녀가 미처 의식하지 못하게끔 머리를 쓴 조봉삼이다.그러는 조봉삼을, 쟈크린느가 문득 바라보았는데, 이건 뭐라고 표현할 수가 없다.쌍불이다. 자동차 헤드라이트다. 불이 벌겋게 붙어 있다."웬일이세요?"라고 말해도 조봉삼은 대답하지 않는다. "미안하지만……."쟈크린느가 혹 못 알아들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재빨리 프랑스어에서 영어로 바꿔 계속한다."지금은 업무중이에요. 반 시간 후에 들러 주실래요?"그래도 막무가내다."이봐요? 무슨 일이냐고 묻잖아요?"마찮가지다. 그냥 뚜벅뚜벅 걸어 들어올 뿐이다. 조봉삼이 눈으로 말한다.'아무리 씨부리 봐라. 아니, 괌 질러 봐라. 내가 콧똥이나 뀔 줄 아냐? 내는 지금 니를 묵으로 온기라. 내가 니를 묵기 전에는 절대로 여그서 꼼짝 안 헐끼다. 절대로!'조봉삼은 주춤거리지 않는다. 머뭇거리지도 않는다. 곧바로 그녀가 앉아 있는 회전의자 쪽으로 책상을 비껴 돌아 들어선다.쟈크린느 역시 너무 어안이 벙벙한 모양이다. 얼마나 어리벙벙했으면 벌린 입을 닫지 못할 정도일까.조봉삼이 그녀 앞에 우뚝 선다. 거구의 몸이다."왜 이러냐구요?"쟈크린느가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 서는데, 조봉삼이 그녀의 어깨를 왼손으로 움켜잡는다. 그리고 가볍게 눌러 앉힌다.

2007-04-01 경인일보

풀밭위의 식사 <318>

글 백시종 그림 박성현승마하기 좋은 날 ④손사래를 치는 그녀 얼굴은 금세 홍당무다. 정말, 모르고 있었던 것 같다. 살결이 뽀얀 우윳빛이라서 그럴까. 배경색인 검정 원피스에 흰 살결이 유난히 돋보인다. 아니, 두 볼이 사과빛으로 물드는 모습이, 르누아르의 만년작인 '탬버린을 가진 무용수'의 분홍볼처럼 그윽하기 그지 없다.놀랍게도 그녀의 직업은 의사다. 그것도 신경과 전문의다. 물론 프랑스 남부 마르세유 출신이다. 이름이 쟈크린느다.지금 나이 마흔일곱. 마흔다섯살까지 3번 결혼했고, 마지막 남편이 1년 전에 교통 사고로 세상을 떠났다.남편의 직업은 카레이서. 남편이 마의 코스인 알제리 사막에서 엔진 폭발로 산화하고 나서, 그녀는 1년간 검은 상복을 벗은 적이 없다. 알제리 사막에 남편을 묻자마자 그녀는 오래 전에 사양했던 베트남 정부 초청을 수락, 부랴부랴 하노이로 거처를 옮기고 두문불출하며 병원 일에만 전념해 왔던 터다.그녀의 하노이와의 인연은 베트남 국가평의회의장의 파리 망명 시절 가진 친분탓이다. 더 정확히 설명하자면 우연한 기회에 그를 치료해 준 일이 빌미가 되었다고 해야 옳다. 어쨌든 그녀는 세상과 의절한 종교인처럼 고립된 생활을 해 온 것이 사실이다. 그래서일까. 처음부터 조봉삼에게 접근할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부끄럽거나, 수줍거나 해서가 아니라, 의도적으로 멀리하는 느낌이다.'쓰으팔노무 늙은 가수나, 확 찢어 삘끼다!'조봉삼이 처음부터 저주를 퍼붓는다."내꺼 가득 움켜잡고 허공 볼 때는 언제고, 묵사발로 으깨어질 년 구해 놓은께는 머라코? 오르부아르! 다음에 또 만나자코! ……이런 쓰팔노무 경우가 오디 또 있는가 말이야!"조봉삼이 불같이 투덜거린다. 그렇다. 그는 절대로 슬그머니 물러날 위인이 아니다. 다른 건 몰라도 그 일에 관해서만은 너무나 명확하다. 확실하게 뿌리 뽑아야 직성이 풀린다. 그것이 조봉삼의 근성이다. 생각해 보라. 먼저 잡아 달라고 통사정했던 것도 아니고, 잡히려고 요리조리 포즈를 잡았던 것도 아닌, 제 스스로 불끈 움켜잡지 않았던가.'헌데, 머시 우쩌고 우째? 그냥 감사합니다. 또 만나요 한마디 허고 돌아서? 니, 그리 나오모, 내도 생각이 다른기라. 확! 그마…….'그는 지금도 잊지 않고 있다. 조봉삼은 그 야릇한 기억을 더 오래 붙잡고 싶은 충동에 진저리를 친다. '아, 불끈 움켜잡았던 그녀 손힘이 얼마나 뜨겁고 짜릿했던가.'"아먼."조봉삼은 혼자 고개를 끄덕이며 다짐한다."내 절대로 가만 안 있을끼다."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것이 무엇인가. 해법이나 공식, 그리고 과정 따위를 무시하고 무지막지 대시하는 추진력. 앞뒤 가리지 않고, 사람 분별하지 않고, 그 다음에 올 후유증 계산하지 않고, 무작정 진격, 또 진격하는 돌격성.흔히들 그것은 무식이라고 정의한다. 세상 일이 무서운 줄 아는 사람, 두려워 할 줄 아는 사람, 예의에 어긋나는 일은 가능한 피할 줄 아는 사람, 당장의 작은 이익보다 뒤에 올 큰 손해를 미리 계산할 줄 아는 사람…….그런 상식적인 사람들은 전혀 무서울 것이 없다. 두려워 할 것도 없다. 한데 조봉삼처럼 오로지 한 가지만 알고 아홉 가지는 알려고도 하지 않고, 또 알 필요도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 예컨대 럭비공처럼 언제 어디로 튈지 예측 불허인 사람이야 말로 세상에서 가장 무섭고 두려운 존재일 수밖에 없다. 뭐랄까. 무식이 사람 잡는다기보다, 사람을 잡으려면 반드시 무식해야 된다는 논리라고 할까. 그렇다.

2007-03-29 경인일보

풀밭위의 식사<317>

글 백시종 그림 박성현승마하기 좋은 날③조봉삼의 고함 소리 또한 그에 못지 않다. 아무리 고릴라처럼 큰 체구라 해도 운동으로 다져진 몸에다, 태권도, 합기도 고단자의 날렵한 운동 신경은 어디 내놔도 결코 뒤지지 않는 조봉삼이다. 그는 객사 기둥 같은 두 다리를 쩍 벌리고, 두 팔을 고릴라처럼 들어올린다. 흡사 방어율 영점대의 골키퍼 같다. 절대로 점수는 허용할 수 없다는 굳은 의지가 분기탱천해 있다. 조봉삼은 떨어지는 여자를 겨냥하며 위치를 이리저리 바꾼다. '어서 와라, 어서!'드디어 여자가 폭풍처럼 조봉삼에 들이닥친다."어멋!""얍!"조봉삼은 기합을 넣는다. 그리고 그녀를 안전하게 끌어안는다. 말 그대로 성공이다. 성공적인 안착이고, 성공적인 방어다. 그러나 아무리 객사 같은 다리라도 가속력 받은 여자의 몸체를 아무런 반동없이 받아 안을 수는 없다. 비틀비틀 몇 걸음 뒤로 물러서다가 그대로 넘어진다.그렇다고 해서 여자도 조봉삼도 몸에 이상이 생길 정도로 벌렁 나자빠진 것은 아니다. 기껏해야 엉덩방아가 고작이다. 하나 그 반동으로 인해 정방위로 끌어안았던 그녀를 놓치는 꼴이 되었고, 그녀 역시 떨어지지 않기 위해 본능적으로 손에 잡히는 대로 뭔가를 움켜쥐는 순발력을 발휘한 것이었다.일이 풀리려면 그런 절묘한 해프닝이 벌어지는 법이다.조봉삼의 경우가 그러하다. 조봉삼이 그렇게도 자랑해 마지않는, 게다가 계단 위의 여자를 보며 햐, 거 삼삼하다 반응과 함께 탱탱해질대로 탱탱해진, 흡사 어른 팔뚝만하게 꼿꼿해진 그것일 줄이야. 말 그대로 조봉삼의 트레이드 마크다. 여자는 한동안 그것을 놓지 않고 있다. 계단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괜찮냐고 달려 들었고, 응급실에서는 이동 침상까지 밀고 나올 지경으로 주위가 떠들썩 해졌는데도, 그녀는 그것을 그대로 움켜쥐고 멀뚱멀뚱 허공을 쳐다보고 있다."괜찮으세요?"달려온 베트남 간호사가 묻는다."괜찮아…… 괜찮……."그때까지도 오른손은 그대로다. 조봉삼은 이런 호사가 어디 또 있느냐는 식이다. 해죽해죽 미소를 머금고 그녀에게 하체를 통째로 내맡기고 있다.하지만, 하늘로 붕붕 뜨는 듯이 마냥 좋은 것은 아니다. 그녀의 모습 때문이다. 분명 계단 위에서 있었을 때의 얼굴은 아르므아르 양이었는데, 떨어지는 여자를 기껏 받아 안고 보니 그게 아니다. 그처럼 콧대 높이 세우고 찬바람 쌩쌩 날리던 아르므아르 양이 아닌 것이다. 처음 보는 여자다. 나이도 아르므아르 양보다 열 살은 더 들어 보인다. 몸매도 더 통통하고 허리도 개미가 아니다. 여우쯤 되는 것 같다. 검정색 원피스에 검정색 리본을 가슴에 달고 있다.'빌어묵을, 기왕지사 비단치마였시모 올매나 좋았씰꼬?'하나 더운 거 찬 거 가릴만큼 여유작작한 조봉삼이 아니다. 주어지는 기회만해도 그 얼마나 감지덕지인가. 막말로 하늘이 내리지 않고서는 절대로 올 수 없는 행운이다."선생님, 뭐 하고 계세요?"베트남 간호사가 아무래도 심상치 않다는 듯이 귀엣말로 소곤거린다."내가 뭘?""잡고 계시잖아요. 지금?""내가?"그제야 자신의 상황을 제 눈으로 확인한 그녀가 "어머멋!" 소스라치게 놀라며 움켜잡고 있던 물건을 내팽개친다."어머머, 이럴 수가……."

2007-03-28 경인일보

풀밭위의 식사<316>

글 백시종 그림 박성현승마하기 좋은 날②그녀는 흰 간호복을 입고 있었는데, 유난히 치마 길이가 짧아 보인다. 그만큼 다리가 늘씬하게 길다는 뜻이다. 그렇다고 삐쭉하게 키만 큰 여자가 아니다. 허벅지 쪽으로 올라갈수록 통통해지는 요염함이라든가, 풍만한 가슴이라든가, 개미처럼 잘록한 허리라든가, 한마디로 갖춰야할 사이즈를 골고루 구비한 전형적인 어인이다.하나 그녀는 조봉삼을 거들떠도 보지 않는다. 조봉삼이 병실 앞을 지키며, 드나드는 그녀를 눈알이 시도록 쳐다봐도, 눈웃음치며 배냇병신처럼 입을 찢어보여도, '안녕하쇼, 정말 좋은 날씹니다.' 프랑스어도, 영어도, 베트남어도 아닌, 순수한 한국말로 치근덕거리며 바짝 붙어도, 그녀가 보이는 반응은 고작 "메르씨"라는 간결한 인사말 한 가지 뿐이다. 도통 관심이 없다.특히 박준호와 나란히 병실을 들어설 때나 병실을 나갈 때는 더 그러하다.박준호와는 뭐 그리 할 말이 많은지 재잘재잘 혀 꼬부라진 소리를 마구 쏟아내면서도 막상 조봉삼의 대시에는 얼굴 한 번 돌아봐 주는 법 없이 '메르씨' 하고 찬 바람 쌩쌩 날리며 복도 끝으로 사라지곤 한다.'씹헐…… 병실 문이나 지키는 경호원 신세라코 사람 무시허고 괄시허는 기가? 확, 쎄리 박을 끼다. 그마! 내 맛 진짜 봤다쿠모 니는 까무라치는기라. 뒤로 벌렁 넘어지는기라. 하모, 유순자가 남편 눈 피해가며 와, 나한테 목을 매것노? 그년도 내 맛 봤다쿠모 까무라쳐서 뒤로 벌렁벌렁 넘어 안 가나! 아니, 엘리시온 안 있나? 그 가수나는 아예 벌리 보지도 못했다카이. 와 그랬겠노? 억지로 쌔리 넣으모 넣었겠지만, 그 길로 병원으로 내달리야 허능기라. 하모, 니는 내 진가를 모린다. 절대로 알 턱이 옶는기야. 내 맛을 실제로 봐야……'.지성이면 감천이라고 누가 그랬는가. 일이 기묘하게 만들어지려면 뭔가 계기가 있게 마련이다. 조봉삼이 그토록 니 맛 내 맛 입버릇처럼 되뇌던 그 외설스런 열망이 그런 식으로 쉽게 성사될 줄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조봉삼이 고수길을 붙들고 신세 한탄을 겸한 욕구 불만에 한창 열을 냈던 바로 그 시간, 문제의 여자가 등장한 것이다.조봉삼은 화장실을 다녀오는 길이라 1층 계단 밑에 있었고, 여자는 2층 계단 위에서 아래로 내려오는 찰나다.'두드려라, 그리하면 열릴 것이니라'.누가 말했는가.'햐, 그거 삼삼허다'라고 조봉삼이 넋을 잃고 계단 위를 올려다보는데, 중학생 또래의 사내 두어 명이 히히덕거리며 냅다 달리다가 느닷없이 계단 쪽으로 방향을 돌린다. 쫓고 쫓기는 게임에 몰두한 탓인지 아이놈들은 눈앞의 장애물에 별반 신경을 쓰지 않는 것 같다. 그러니까 그녀가 그곳에 있었으므로, 흡사 럭비 선수 어깨치기하듯 치고 내려오는 아이 놈에게 치일 수밖에 없다. 일순 하이힐이 벗겨져 허공에 뜨고, 왼쪽 다리가 휘청 꺾이고, 몸의 균형이 무너지는가 싶더니, 마치 다이빙을 시도한 미끈한 여자 선수처럼 전신이 계단 아래로 사정없이 쏟아지기 시작하는 것이었다.그렇다고 계단에 몸을 구르는 것이 아니다. 디즈니랜드 애니메이션 영화 한 장면처럼 발은 계속 계단을 밟아 뛰고 있는데 몸이 먼저 쏟아지는 것이다.그러니까 한 계단 두 계단이 아니라 한꺼번에 다섯 계단 여섯 계단을, 마치 비상하려다 마는 새처럼 통통, 곤두박질치는 것이다.그래서 몸이 더 빠르다. 가속력이 붙었기 때문이다. 만약 그녀를 그대로 방치 한다면 1층 계단 시멘트 바닥에 그대로 으깨어져 퍼질 참이다. 상처가 나도 크게 날 판이다."어머낫!""어, 어, 어─."

2007-03-27 경인일보

풀밭위의 식사<315>

글 백시종 그림 박성현승마하기 좋은 날 ①승마하기 좋은 날 다급해하는 박준호와의 전화를 끊고 문 밖으로 나온 조봉삼이,"쓰펄, 이게 머꼬?"밑도 끝도 없이 투덜거린다.조봉삼은 박준호가 꺼덕하면 고수길만 찾는 일 말고도 유독 고수길에게 쩔쩔매는 이유를 잘 알지 못한다. 조봉삼에게 있어서 고수길은 어려운 사람이 아니다. 어렵기는 커녕 그렇게 만만할 수가 없다. 고수길도 조봉삼 앞에서는 제 기량을 다 발휘하지 못하는 편이다. 일종의 주눅이라고 할까. 매사를 완력으로 제압하려 드는 무지함 때문에 시쳇말로 대안이 없다. 피하는 게 상수다.'구길사' 조직 대표라면 당연히 고수길이 한 단계 위인데도 두 사람만 있으면, 금세 서열 파괴다. 조봉삼 혼자 북치고 장구 치고 다 한다. 제멋대로다. 오늘도 마찬가지다. 박준호의 지시를 이행하기 위해 한참 서울과의 전화 통화로 승강이를 하고 올라온 고수길에게 조봉삼이 "쓰팔, 미치것다 그마!" 눈알부터 허옇게 흘긴다."왜 그래?""니 정말 한 번 안 시키 줄끼가?""뭘 시켜 줘 임마."조봉삼은 저속하게 엄지손가락을 다른 손가락 사이에 끼어 넣고 얼마나 눌렀는지 불그죽죽, 더욱 쌍스럽게 만든 다음, "요거, 값 젤 싸다는 곳에 와서 아직 숏 타임 한 번 못 뛰었으니, 말이 되는기가?"고수길의 옆구리를 팔꿈치로 찌른다. 고수길이 너무 어이가 없다. 한마디로 기도 차지 않는다. 아예 대응을 포기해 버린다. 아니, 무시해 버린다고 해야 옳다. 그래서일까. 조봉삼이 더 기세등등하다."야, 고가야?"고수길이 눈도 마주치지 않는다."니는 생각 읍나"빌어먹을, 생각 같아서는 면상이라도 갈겨 주고 싶지만, 고수길은 꾹 참는다. 조봉삼이 계속한다."호아는 니 말대로 관장님 사모님이라 손 못 댄다 쿠고… 이 병원 간호사들은 어떻더노?"그러나 조봉삼은 고수길의 대답을 기다리는 눈치가 아니다. 그가 계속한다."코가 오똑, 눈이 쑥, 증말 미녀 아니드나? 입술은 또 어떻노? 루즈를 안 칠했는데도 불그잡잡, 보드랍고, …마, 내는 그 입술에다 그기나 드리대고 뽈아라, 뽈아라…야, 고가야?""왜 그래? 새꺄!"고수길이 적의를 드러내는 데도 조봉삼은 전혀 눈치 채지 못한다.그가 묻는다."프랑스 말로 '뽈아라'가 머꼬?"고수길이 숫제 입을 다물고 만다. "행님한테 물어보모 알끼야.""미친 자식! 그런 걸 형님한테 왜 물어 새꺄!""아는 게 힘이라코 안 카더나. 그것도 행님이 헌 소리다 그마."기가 찰 노릇이다. 말 그대로 무대응이 상책이다. 고수길은 다시 한 번 고개를 절절 흔든다. 실제로 밀리떼르 병원 간호사는 하나같이 미인들이다. 물론 베트남 출신이 더 많다. 열 명 중 일곱 명이 베트남이다. 그러니까 세 명이 프랑스에서 파견된 간호사인 셈이다. 한데도 병원 전체가 프랑스 간호사로 꽉 채워 놓은 것 같다.조봉삼의 말대로 입체적인 미인들이라서 그럴까. 나란히 서면 베트남 간호사는 숫제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다. 눈길이 자연스럽게 그쪽으로만 간다. 키도 그렇고, 몸매도 그렇고, 얼굴 윤곽도 그러하다.특히 무하마드를 담당하는 아르므아르 양이 더 그러하다. 조봉삼이 불그잡잡, 보드랍고…어쩌고 저쩌고 주책을 떨었던 것도 기실은 아르므아르 양이 그 대상이다.

2007-03-26 경인일보

풀밭위의식사<314>

글 백시종 그림 박성현 대결 21"그래, 그렇게 됐어.""야, 너 실력 좋구나.""실력은 뭐….""어쨌든 축하한다. 정말.""다아 준호 네 덕택인 줄 알고 있다. 솔직히 너 아니었으면, 나 이 직업 포기할 뻔했잖니. 나 절대로 그거 잊지 않을 거다.""쓸데없는 소리. 원래 국록 먹는 사람, 사사로운 것에 신경 쓰지 않는 법이야.""그래, 고맙다.""태훈아.""그래, 말해 봐.""너한테 부탁이 하나 있어. 그게 뭐냐면, 우리 직원이 자료를 보낼 거야. 자료대로 돈을 전달받아서, 동방실업이라는 회사에 전해 주는 일이야. 얘기만 들으면 복잡하지만, 사실은 복잡할 거 하나도 없어.""하지만, 어디서 얼마를 어떻게 받아서 동방실업에 전해야 하는지….""그거는 자료에 다 써 있을 거야. 다만 동방실업에 돈을 건넬 때 주식 인수계약서를 받아 두면 좋겠어. 주식은 현 거래 시가대로 계산해서 말이야.""알았어. 그렇게 할게.""고맙다. 태훈아.""고맙긴, 야, 누구 엄명인데 감히….""자식, 검사되더니, 철들었구나.""철든 게 아니고… 이건 정확히 아부다!""아부라니?""준호 네가 하느님처럼 모시는 분 말이야. 그 어른이 대통령 자리에 올라 계시잖니? 소문 들으니까, 이번 인사에 그동안 힘써 준 측근 인사들을 대거 기용한다더구나. 그렇게 되면 박준호 네 신분에도 변화가 있지 않겠어?""아서, 난 그런데 관심없어.""야, 그게 어디 관심없다고 피할 수 있는 일이냐? 각하께서 부르면 그냥 네, 하고 나갈 뿐이지.""어쨌든 나하고는 무관한 일이라구. 그리고 각하 주변에 워낙 인물들도 많고… 원래 인사는… 뚜껑을 열어 봐야 되는 거 아니니?""이번에는 달라. 야, 너 그 어른 덕분에 출세하면 나 모른 체 하지 마라.""나 같은 사람이 무슨….""너야말로 일등공신이지. 준호 너 그 어른 때문에 감옥에도 갔잖니? 아니, 어디 감옥뿐이냐? 후원금은 또 얼마나 많이 냈어?""그건, 후원금이 아니고, 노근리 양민학살사건규명기금이야."어쨌든 박준호는 기분이 좋다. 정말 출세라도 한 기분이다.서승돈 왈, 통킹만 가스개발권만 획득한다면, 경제장관 두 자리는 확보한 상태라고 하지 않았던가. '그래, 이제 비로소 세상같은 세상이 오는 거라구. 노근리도, 연좌제도 없어지는 세상….'박준호는 수화기를 놓자마자 서승돈 방으로 냅다 달린다. 문을 벌컥 연다."사장님, 그만 일어나시죠. 대낮입니다, 대낮!"소리쳤는데도 옴짝하지 않는다."사장님!"숫제 그를 흔들어 깨운다. 그래도 반응이 없다."어, 어."얼굴이 하얗다 못해 푸른 기가 돈다. 눈동자를 깐다. 벌써 휘휘 풀리고 있다. 심상치 않다. 손발이 차다. 의식불명이다. 가슴을 풀어 헤치고 숨 소리를 듣는다.다행스럽게 아직 심장은 가동중이다. 미미한 가동이다. 박준호는 침착하다. 밖으로 튀어나오자마자 소리친다."앰뷸런스를 불러. 빨리!"

2007-03-25 경인일보

풀밭위의 식사<313>

글 백시종 그림 박성현대결 20"글쎄요. 자세한 건 알 수 없지만, 아무튼 매스컴이 냄새를 맡고 대서특필하는 바람에 회사가 시끄러운 모양입니다. 무엇보다 충격을 많이 받은 쪽이 김상도 회장이고, 그 만큼 신경이 예민해 있다는 겁니다. 이상룡 전무 말은 그 일이 잠잠해진 뒤라야 결재를 올려도 올릴 수 있다는 얘깁니다.""그럼 이삼 일 사이에는 안 되겠구만.""그렇습니다, 형님.""그렇다면 말이야. 영등포 우리 체육관 있지? 그거 사겠다고 압력 넣었던 회사 있었잖아?""아니, 그걸 파시게요?""팔아야지.""형님, 설마 체육관 처분해서 동방실업 부도 막겠다는 얘긴 아니겠죠?""맞아. 바로 그거야.""그건 안 됩니다. 형님!""내 말대로 해. 큰 일을 위해서는 작은 것을 희생시킬 수밖에 없어.""그보다 지리산 야생 녹차농장을 처분하면 어떻습니까? 실제로 외국인 회사들이 눈독을 들이고 있잖습니까? 내놓기만 하면… 눈 깜짝할 사이에… 제가 왜 이런 말씀 드리느냐 하면 영등포 빌딩은 일 년만 더 묵히면 두 배 이상 값이 뛸 공산이 크기 때문입니다. 형님, 그 차액이 얼만 줄 아십니까? 자그마치 50억입니다, 50억. 50억이 누구 애 이름입니까?""이것 봐!"박준호가 더 듣고 있을 이유가 없다는 듯 단칼에 잘라버린다."내가 시키는 대로 해! 지리산 농장은 내 소유가 아니니까.""아니,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형님 이름으로 등기가 되어 있는데?""글쎄, 내가 그렇다면 그런 줄 알아!"박준호의 목소리는 준엄하다. 빈틈이 없다. 고수길도 뭔가 더 주장하려다가 스스로 자제하는 기색이 역력하다. 박준호가 혼자 되뇌이고 있다. 겉보기엔 내 이름이지만, 실제 안속은 박명한이라구. 박명한이 누군지 알아? 우리 할아버지. 지리산 야생녹차 밭에는 할아버지 혼이 살아서 새처럼 날고 있어. 아니, 아버지도, 어머니도 거기 다 모여 있어. 그분들을 누가 컨트롤하는 줄 알아? 남편이 버젓이 살아있는 데도 끊임없이 누군가를 연모하는 분이 누님이란 말이야. 아름답고 씩씩한 분이… 알겠어! 박준호가 단호하게 명령한다."큰 일을 위해서 영등포 빌딩은 과감히 포기하자구. 미련을 버려! 가능한 한 빨리 처분해. 오늘 내일 사이에 말이야. 이번 사법 고시에 합격한 내 친구, 한태훈이를 시키자구. 태훈이한테 지금 전화 걸어서 부탁해 놓을 테니까, 그쪽하고 만나게 해 줘. 알겠어?"박준호는 내친김에 한태훈에게 전화를 시도한다. 다행스럽게 한태훈은 아직 출근 전이다."나야, 준호.""야, 너 지금 어딨어? 어디서 전화하는 거야?"한태훈도 어지간히 반가운 모양이다."하노이야.""하노이라니?""베트남 하노이.""아, 그래서 그렇게 연락이 안 되었구나. 그래, 언제 귀국하니?"한태훈은 박준호의 긴급한 출국 사유를 모른다. 물론 노조원 생매장과 관련한 살인 혐의를 받고 있다는 사실도 마찬가지다."글쎄, …귀국은 아직 미정이야. 그건 그렇고, 너 사법 연수원 졸업 했다며?""응, 서울로 발령 받았어. 서울 지검 강력부.""강력부 검사?"

2007-03-22 경인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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