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은식의 다시 보는 한국 프로야구 명장면

 

[김은식의 다시 보는 한국 프로야구 명장면·21]1995년, 방위병 출장금지 조치 (下)

대학들과 '스카우트 경쟁' 심해져고졸 신인 쏟아져 들어온 프로팀2군 '미래 스타의 산실' 자리잡아병역 문제로 고등학교를 졸업하는 선수들이 대거 프로 직행을 택하기 시작했다. 1980년대까지만 해도 대학진학을 포기하고 프로직행을 택하는 것은 '소년가장'들이나 하는 일로 여기던 분위기가 있었다. 프로원년, 진흥고와 광주상고를 졸업한 김정수와 장채근이 해태 코치의 꼬임에 넘어가 프로선수가 되겠다고 가출까지 감행했다가 뒤늦게 아버지에게 뒷덜미 잡혀 대학 기숙사에 던져졌던 것은 그런 분위기를 드러내는 대표적인 사건이었다. 그래서 비로소 대학과 프로팀이 대등한 위치에서 '스카우트 경쟁'을 벌이기 시작한 것은 대학의 문호가 좀 넓어지고 집집마다 살림에 구김살도 좀 펴기 시작하던 1990년대 초반 들어서부터였다. 특히 방위병 출장금지조치가 내려지기 직전이었던 1994년은 프로와 대학의 경쟁이 절정에 달했던 시기였는데, 그 해 고교무대 최고의 타자 김재현과 김동주가 각각 첩보전을 방불케하는 사연 속에 프로와 대학으로 갈라섰던 것은 그 대표적인 사례였다.하지만 '병역과 선수생활을 병행하는 것'이 불가능해진 이상, 대학에서 보내야 하는 4년의 세월은 너무 버겁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고등학생 선수들이 갑자기 머리를 누르기 시작한 2,3년의 공백을 메우기 위해 4년간의 대학생활을 포기하기 시작한 것이다. 1996년부터 대졸 선수들만을 대상으로 진행해오던 드래프트에 고졸선수들까지 포함시키게 된 것 역시 그 때문이었다. 또한 방위병 경기출장 금지조치는 그로부터 몇 해 뒤 터져 나오게 되는 대규모 선수 병역비리의 씨앗이 되기도 했고, '합법적 병역 회피수단'인 국제대회 대표 선발과 메달 획득에 대한 열망을 치솟게 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1998년 방콕 아시안게임부터 '야구드림팀'의 역사가 시작된 것 역시 그것과 무관하지 않다. 하지만 좀 더 의미 있는 변화도 있었다. 그렇게 젊은 고졸선수들이 쏟아져 들어오기 시작하면서부터 프로팀 입장에서는 신인 선수들을 '느긋하게 한두 해 가르칠' 시간을 가지게 된 것이다. 따라서 2군이 종전의 '부상자 회복실' 내지는 '애매한 부실자원 관리소'의 낡은 의미를 벗고 비로소 '미래 스타들의 산실'로서 자리 잡기 시작했다는 점도 그에 속한다.야구선수들에게 병역이란 보기보다 중요한 문제다. 누구라도 첫발을 내딛는 순간, 결코10년을 장담하기도 쉽지 않은 것이 프로선수생명이라면 그 중 두 해 이상의 공백과 정체는 초일류와 삼류의 갈림길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병역이라는 것이 대부분의 남자들에게 참 어렵게 넘어서는 성장의 한 고비라는 점에서 선수들만 동정하고 마음 쓸 일이 아니긴 하다. 그래서 오직 그들만을 위해 새로운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고 목소리 높이기도 민망한 부분이 있다. 그리고 극히 특별한 몇몇의 사례가 기준이라고 윽박지르는 것도 억지스러운 일이기에 모든 선수들에게 정답이라고 제시할 길이 있는 것도 아니다. 다만 박찬호에서 추신수에 이르기까지 당당하게 국위선양하면서 문제를 돌파한 이들도 훌륭하고, 상무나 경찰청을 거치며 한 단계 올라서서 돌아오는 선수들도 대견하다고 인정해줄 뿐이다. 하지만 벽의 가장 단단한 부분에 부딪히고도 좌절하지 않고 뛰어넘어 돌아온 이들의 분투에 대해서는 한 번 더 돌아보고 박수를 쳐줄 이유가 충분히 있다. 예컨대 일반전투부대, 혹은 해병대에서 복무하고 돌아와 다시 프로야구 판도를 쥐락펴락 했던 윤상균(LG)과 임훈(SK)이 바로 그들이다. /김은식 야구작가

2018-09-17 경인일보

[김은식의 다시 보는 한국 프로야구 명장면·20]1995년, 방위병 출장금지 조치

퇴근후 평일 저녁·주말 이용 출전 양준혁 시즌절반 소화 홈런왕경쟁'특권' 불편한 시선 10년 관행 사라져1995년 4월 22일, 부산 사직에서 롯데가 삼성을 불러들여 홈경기를 벌이고 있었다. 롯데의 선발투수는 1989년 부산고등학교를 대통령배 우승으로 이끌고 최우수선수로 선정되며 전국적으로 이름을 날렸던, 그리고 1994년 롯데의 1차 지명을 받고 입단해 곧장 7승을 올리며 기대를 모은 2년 차 강상수였다. 시즌 두 번째 등판이었던 강상수는 그날도 3회까지 삼성의 강타선을 잘 막아내고 있었다.하지만 그는 4회 초가 채 끝나기 전 마운드를 내려와야 했다. 김실과 이정훈을 연속 볼넷으로 내보내기는 했지만 크게 흔들린 것까지는 아니었고, 무엇보다도 아직 경기 초반이었다. 관중들은 어리둥절해할 수밖에 없었는데, 그 이유는 저녁 뉴스를 보면서야 알 수 있었다.그가 갑자기 강판해야 했던 이유는 TV를 통해 경기를 보고 있던 누군가가 경기장으로 전화를 걸어왔기 때문이었다. 강상수는 첫 시즌을 마무리할 즈음 방위병으로 입대한 군인 신분이었고, 주말을 이용해 홈경기에 등판하고 있었다. 하지만 마침 그 경기를 TV를 통해 보게 된 소속부대 관계자가 경기장으로 직접 전화를 걸어 '중단'을 요구했던 것이다. 10년 이상 불안하게 이어져 온'방위병의 홈경기 출장'이라는 관행은 그렇게 확실히 깨졌고, 그 이후 한국야구의 물줄기는 크게 방향을 바꾸어 흐르기 시작했다.1982년, 프로야구위원회 초대 총재였던 서종철은 국방부장관을 지낸 인물이었고, 무엇보다도 '프로야구의 성공을 위해 각 부서가 전폭적으로 지원하라'는 전두환 대통령의 지원을 등에 업고 있었다. 그런 그의 요구를 국방부가 거절할 수 없었고, '복무에 지장을 주지 않는 한에서 방위병의 경기 출장을 허용한다'는 양해가 이루어지게 된다. 물론 '위수 지역'을 벗어나지 않기 위해 홈경기에만 출장하는 조건이었지만, 퇴근 후의 시간인 평일 저녁이나 주말에만 경기가 열린다는 점에서 '시즌의 절반'은 치를 수 있는 환경이었다. 그 첫 수혜자는 1984년에 입대한 OB의 '학다리' 1루수 신경식이었고, 1993년 프로 입단과 동시에 상무에서 방위부대로 소속을 바꾼 삼성의 신인 양준혁은 그렇게 시즌의 절반만 뛰면서도 치열한 홈런왕 경쟁을 벌이는 충격을 몰고 오기도 했다. 대개 대졸 신인들은 첫 시즌을 보내며 '프로감각'을 익힌 뒤 2년차를 방위병 신분으로 보냈고, 3,4년차부터 전성기를 향한 본격적인 스퍼트를 시작하곤 했다. 하지만 문민정부 3년 차를 맞이하던 한국인들은 슬슬 '특권'을 불편하게 생각하기 시작했고, 그것은 그동안 사회적 논의의 대상조차 될 수 없었던 '군대'의 영역으로까지 확장되고 있었다. 그것은 무려 30여 년간 군사정권 아래 살아온 한국인들에게 군대라는 것이 가지는 모순된 의미를 반영하는 것이기도 했다. 군대란 그 자체로 가늠할 수 없는 위력을 발휘하는 공포의 대상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힘 좀 쓴다는 이들이라면 어렵지 않게 자기 아들만큼은 빼고 돌려 '빡빡 기며' 삼 년을 보내는 서민의 자식들을 서럽게 만드는 공간이기도 했던 것이다.'문민'이라는 정체성에 대한 자부심이 남달랐던 당시의 정부는 그런 국민적 감성의 흐름을 외면할 수 없었다. 문제라면 그들이 늘 그랬듯, 맥락 없이 터뜨리는 '깜짝쇼' 방식의 일 처리에 있었다. 그 해 봄, '군인은 영리행위를 하거나 겸직할 수 없다'는 군인복무규율에 근거해 각 부대가 해당지역의 프로야구팀에 방위병 선수의 출장 불가방침을 통보했고, 그렇게 갑작스레 내려진 방위병 출장금지 조치는 프로야구에 떨어진 날벼락이었다. 1995년 봄을 기준으로, 방위병 신분의 프로야구선수는 모두 55명이었다. 10명과 9명이 아침마다 도시락을 싸서 군부대로 출퇴근했던 방위병은 태평양과 빙그레가 가장 많았고, 5명씩이었던 OB와 해태가 가장 적었다. 하지만 정작 방위병 출장금지 조치로 가장 큰 타격을 입게 된 것은 LG와 해태였다. LG는 박종호(2루수)-유지현(유격수)-송구홍(3루수)으로 이어지는 주전 내야수 전원이 방위병이었고, 해태는 투수·타격의 새 기둥 이대진과 이종범이 방위병이었다. 4월27일, 이정린 국방부 차관은 '오랜 관행을 바꾸면서 유예기간도 두지 않으면 큰 혼란이 빚어진다'는 이유를 들며 한 발 물러섰다. 연말까지는 그대로 출장을 허용하되, 12월 이후로는 규정대로 출장을 금지하겠다고 밝힌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며칠 사이 이쪽 끝에서 저쪽 끝으로 오가며 프로야구판을 들었다 놓았던 갈지자(之) 행보에 대한 비판여론이 치솟자, 다시 정부는 5월21일 국방부 제1차관보 손병익에게 책임을 물어 해임하는 것으로 일을 마무리했다. /김은식 야구작가

2018-09-10 경인일보

[김은식의 다시 보는 한국 프로야구 명장면·19]1994년, 현대의 제2리그 창단 추진과 '피닉스' (下)

우수선수 확보위해 경쟁 하던 중현대, 1995년 '태평양' 인수 발표피닉스, 결국 현대 선수공급처로현대는 우선 '피닉스'라는 실업야구팀을 창단하기로 했고, 조만간 뜻을 함께하는 다른 기업들을 규합해 제2의 프로야구리그를 출범시키겠다는 구상을 내놓았다. 그리고 수십억의 현금가방을 들고 예의 저돌적인 기세로 대학야구팀 숙소를 밤낮으로 누비기 시작했다. 1994년 6월 무렵 이미 그 해의 대졸 빅4로 불리던 문동환, 심재학, 안희봉, 위재영을 비롯한 상위랭커 25명이 모두 현대 쪽과 계약을 맺었다는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다. 잘 골라서 지명만 해놓으면 선수들로서는 별 수 없이 입단하게끔 되어있었기에 느긋하기만 했던 8개 프로구단에 비상이 걸린 것은 물론이었다. 10월31일까지는 아마추어 팀 소속의 선수와 계약을 할 수 없도록 되어 있던 아마와 프로 사이의 합의는 더이상 의미를 가질 수 없게 되어 버렸다. 몸이 달아오른 프로팀들은 '현대보다 한 장 더 얹어 주겠다'며 달려들었고, 결국 그렇게 한 개의 아마추어 팀과 여덟 개의 프로팀 사이에 치열한 돈 싸움이 시작되었다. 먼저 7월 들어 태평양이 4년 전부터 매달려온 투수 위재영을 2억 이상의 계약금과 4년 전 대학과 이중계약에 휘말렸을 때 깨끗이 물러나고 기다려준 인정에 호소한 끝에 '구두약속'을 받아냈고, 곧 LG 역시 비슷한 액수와 방식으로 타자 심재학을 잡아냈다. 그러나 대부분의 구단들은 현대와의 돈 싸움에서 밀리고 있었고, 그 와중에 전선이 고졸예정자들에게까지 확대되면서 김승관(삼성)과 조현(LG) 등이 각각 억대의 기록적인 계약금을 받으며 프로행을 확정했다. 그 무렵 끝내 대학행으로 결론이 난 고졸 최대어 김건덕에게 건네진 제안은 2억이 넘을 정도였다. 프로팀 사장들은 '한 구단이 한 명씩만 책임지고, 배상금을 지불하고라도 선수를 빼옴으로써 현대를 저지하자'고 서로를 독려해가며 전의를 불태웠고, 그만큼 모든 면에서 지난해보다 배 이상 부풀어 오른 뜨거운 돈싸움이 펼쳐졌다. 애초에 역시 1억 가량의 계약금으로 현대를 택했던 김재걸을 돈싸움에 자존심 싸움까지 벌인 끝에 삼성이 2억1천만원이라는 황당한 액수를 던지며 끌어낸 것 역시 그런 와중에서 벌어진 해프닝이었다. 그리고 문희성, 조경환, 조태상은 그렇게 프로팀으로 한 발을 옮기려다 다시 '그 돈에 다시 한 장 더'를 외친 현대의 품에 안기기도 했다. 이듬해인 1995년에도 피닉스의 기세는 가라앉지 않았다. 프로 출신의 김시진과 김봉연이 코칭스태프로 가세했고, 이듬해에는 임선동과 박재홍을 LG와 해태로부터 빼앗아내며 기세를 올렸다. 그런 화려한 멤버들의 힘으로 피닉스는 실업야구리그에서 어린애 팔 비틀 듯 승리를 잡아냈고 1995년과 1996년 사이 실업무대의 거의 모든 대회를 휩쓸며 공룡으로 군림하기도 했다.하지만 그 1995년이 채 지나가기도 전, 제 2 프로야구리그의 창설 멤버라는 선수들의 꿈을 일시에 박살 내버리는 소식이 들려오게 된다. 1995 8월31일, 현대건설 이내흔 사장이 태평양을 인수하기로 했다는 발표를 했기 때문이다. 매입대금은 무려 470억원. 피닉스 선수들에게 쏟아 부었던 경악스런 계약금 수십억 원도 사실 미끼에 불과했음이 드러난 엄청난 규모의 머니게임이었고, 이제 피닉스는 프로팀 현대 유니콘스의 전력을 빠르게 보강하기 위한 선수공급처 혹은 선수거래소로 전락하고 말았다. 현대는 96년 재출범을 앞두고 태평양 시절부터 고질적인 약점이었던 1번 타자감으로 박재홍을 보강할 수 있었고, 그 박재홍이 1번보다는 3번으로서 더 큰 효용을 가지고 있음이 입증되자 다시 문동환을 롯데로 보내면서 전준호를 불러들일 수 있었다. 그 힘은 그대로 창단 첫해 한국시리즈에 오른 데 이어 3년차인 1998년에는 인천연고팀 사상 첫 우승을 이루어낸 원동력이었다.피닉스는 그저 하나의 평범한 실업팀으로 전락했고, 2002년에는 실업리그의 소멸과 함께 간판을 내리는 운명을 맞게 되었다. /김은식 야구 작가

2018-09-03 경인일보

[김은식의 다시 보는 한국 프로야구 명장면·18]1994년, 현대의 제2리그 창단 추진과 '피닉스' (上)

임직원 사기 올리려 '스포츠 주력'기존 구단들, 수백억 가입금 텃세정회장 '제 2리그' 창설 파격 행보1982년, 대한체육회장을 맡고 있던 현대그룹의 정주영 회장은 올림픽 유치전에 몰두하고 있었고, 동시에 프로야구의 성공에 대해서는 확신을 가지지 못하고 있었다. 인천을 중심으로 경기도와 정 회장의 고향인 강원도 지역까지를 연고지로 하는 프로야구팀을 맡아 달라는 프로야구 추진세력의 제안을 거절한 것은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원년부터 만루홈런이 펑펑 쏟아져 나오고 박철순과 최동원의 투혼이 드라마를 연출해내면서 프로야구가 모두의 예상을 깬 대성공을 거두기 시작했을 때도 정주영 회장의 인식은 크게 달라진 것이 없었다. 1989년 MBC가 매물로 나왔을 때도 '적자기업은 인수하지 않는다'는 원칙론을 반복해 프로야구무대에 '저렴하게' 입성할 마지막 기회를 걷어차기도 했다. 하지만 1992년에 벌어졌던 갑작스러운 사건들이 상황을 완전히 바꾸어놓게 된다. 그 해 봄 정주영 회장은 국민당을 창당해 직접 '정권 접수'에 나서게 되고, 국민당은 불과 창당 한 달여 만에 참가한 14대 총선에서 31석을 확보해 일약 3당으로 올라서게 된다. 그리고 이어서 그해 겨울 대선에서는 '반값아파트'와 '공산당 합법화', 혹은 '사재 2조 원 국가헌납' 등의 파격적인 공약과 안기부가 개입된 '초원복국집'에서의 관권선거공작을 도청해내 폭로할 정도의 정보력과 조직력을 바탕으로 파란을 일으키며 김영삼, 김대중과 더불어 '빅3'로 군림하기도 했다. 그 와중에 모은 400만 표는 결코 만만하게 볼 것이 아니었지만 결과는 3위 낙선이었다. 정권 핵심층의 관권선거공작을 도청할 만큼의 배짱을 부리고도 낙선한 정주영은 곧 정치 이력을 1년 만에 마감하고 경영일선에 복귀했다. 그리고 그가 직면해야 했던 문제는 마치 총수의 사조직처럼 움직였던 현대그룹 임직원들의 사기 저하, 그리고 국민당의 외곽조직 혹은 패잔병조직 정도로 전락한 대외적인 그룹의 이미지였다.정주영 회장은 경영에 복귀해 처음으로 가진 사장단 회의에서 '임직원들의 사기와 대외적인 이미지를 끌어올리기 위해 스포츠에 주력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그것은 각 종목별 스포츠협회의 후원자를 찾기에 골몰하고 있던 정권의 고민을 풀어주며 자연스럽게 화해무드를 만들 수 있는 방편이기도 했다. 그래서 정몽준 현대중공업 회장이 축구협회장에 취임한 것을 시작으로 정세영 그룹회장(수상스키), 박재면 현대건설회장(수영), 이내흔 현대건설사장(역도), 이현태 현대석유화학회장(아마야구) 등이 일시에 스포츠계로 산개하게 된 것이 그 무렵이었다. 정몽구 현대정공 회장이 9년째 양궁협회장을 맡고 있었던 것을 합치면 무려 여섯 종목의 수장을 현대그룹이 휩쓸게 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프로야구단 창단 작업은 내내 헛바퀴를 돌리고 있었다. 기존에 프로야구단을 운영하던 여덟 개의 기업들은 굳이 현대라는 강력하고도 껄끄러운 경쟁자를 끌어들이면서까지9, 10구단으로 리그를 확장할 필요를 느끼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기존 구단들은 7구단으로 빙그레가 가입할 당시 30억 수준이었던 리그 가입금을 많게는 400억까지 불러대며 어깃장을 놓았다. 그런 텃세에 허리를 굽힐 사람이 아니었던 정주영 회장의 선택은 '제2의 프로야구리그 창설'이라는 어마어마한 기획이었다. 사실 미국과 일본의 '양대리그' 역시 기존의 프로야구 질서 밖에서 후발주자들이 나름의 독자적인 리그를 만들어 대항하면서 시작된 것이었고, 그런 점에서 현대의 발상이 황당무계하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애초에 '사업'보다는 '정책'으로서 출범한 한국의 프로야구에서 그것은 가능한 방식이 아니었다.하지만 그것이 실제 기획이었든, 아니면 단지 또 다른 노림수를 위해 외곽을 때리는 명분이었든, 현대가 '새로운 리그를 만들 만큼의' 선수들을 끌어들이기 시작한 이상 한국야구계는 격랑 속으로 빨려들 수밖에 없었다. /김은식 야구작가

2018-08-27 경인일보

[김은식의 다시 보는 한국 프로야구 명장면·17]1993년 재건에 나선 LG와 태평양(下)

LG, 1년간의 시험 끝에 전력 완성막강 마운드·타선, 압도적인 우승태평양도 10승대 투수 4명등 배출LG 못지 않게 반복되는 무리와 몸살의 악순환을 고민하던 팀은 태평양이었다. 태평양은 1989년, 김성근 감독의 지휘 아래 만년꼴찌에서 3위까지 수직 상승하는 경이로운 돌풍을 연출했던 팀이었지만 김성근 감독이 떠난 그 이듬해부터 곧장 정명원, 최창호, 박정현 그리고 정민태와 김홍집까지 돌아가며 부상으로 이탈, 단 한 번도 최상의 투수전력을 운용하지 못하는 유령선 같은 팀이 되어 있었다. 그 악몽의 절정은 1993년이었다. 그 해 돌핀스는 공교롭게도 모든 주전급 투수들이 동시에 드러눕는 불운 속에 신생팀 쌍방울에게마저 멀찍이 따돌려진 채 선두 해태와 무려 43.5경기차로 벌어진 압도적인 꼴찌로 내팽개쳐지는 대참사를 맞게 되었다. 하지만 정동진 감독은 선수들에게 무조건 재활 우선의 사인을 보냈고, 감독 생명 연장을 위한 무리를 과감히 포기했다. 그래서 많게는 7승, 적게는 3승을 올렸을 뿐인 투수 여섯 명이 고르게 한 경기씩을 책임지고 가는 여유로운 운영을 이어갔고, 정명원과 박정현과 정민태 등이 통째로 한 해를 쉬며 느긋하게 몸을 가다듬을 수 있었다.물론 그렇게 급할수록 돌아가는 운영의 대가는 한 해 뒤에 돌려받을 수 있었다. 이듬해인 1994년, LG는 1년간의 시험가동 끝에 완성된 신무기를 내놓을 수 있었고, 태평양은 1년간의 넉넉한 시간 동안 충분히 고치고 날을 세운 칼을 쥐고 나설 수 있었다. 1994년, LG의 마운드는 18(이상훈)-16(김태원)-15승(정삼흠)의 막강 선발 삼각편대로 시작해 김기범, 차명석, 차동철, 전일수로 두터워진 계투진을 거쳐 35세이브포인트의 마무리 김용수로 이어지는 완벽한 포메이션을 완성했다. 타선에서 터져 나온 유지현-김재현-서용빈 트리오의 폭발력과 만나 역사상 가장 압도적인 우승 중 한 장면을 일궈낼 수 있었다. 그리고 비록 그에 견주기에 너무나 초라하지만, 태평양 역시 팀타율 최하위라는 악재 속에서도 네 명의 10승대 선발투수와 40세이브 신기록의 마무리투수를 배출하며 인천 팀 최초의 한국시리즈 진출까지 이루어낼 수 있었다. 하지만 그들의 성공에 조금 더 큰 의미를 부여하고 싶은 것은 그들이 드디어 '천운의 동행'이 없이도 우승할 수 있는 길을 찾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그래서 한 명의 에이스를 기다리고 그에게 매달리고 애원하고 강요하는 시대에 조금씩 막을 내리게 했기 때문이다. /김은식 야구작가

2018-08-20 경인일보

[김은식의 다시 보는 한국 프로야구 명장면·16]1993년 재건에 나선 LG와 태평양(中)

선발-계투-마무리 '투수 분업'김용수 뒷문 단속, 역전패 불허정규리그 4위, 플레이오프 진출이광환 감독이 처음 지휘봉을 잡은 것은 서울 라이벌 OB에서였다. 프로원년 김영덕 감독 아래서 코치로 프로지도자의 이력을 시작한 그는 1988년 시즌을 마친 뒤 OB의 2대 사령탑이던 김성근 감독이 구단과의 불화 끝에 자진해서 물러난 자리를 물려받았고, 그곳에서 미국 유학 시절부터 가슴에 품어왔던 '자율야구'의 기치를 올렸다. 자율야구란 선수들이 책임감을 가지고 각자의 부족한 부분을 스스로 채워가도록 유도하는 것을 의미했다. 하지만 평생 엄하고 험한 규율 속에서만 자라고 살아온 선수들이 자율을 이해하고 움직이기까지는 적지 않은 시간이 필요했고, 반면 구단이 성적이 나쁘지 않았던 전임자를 밀어내고 이광환 감독에게 기회를 준 이유는 당장 우승을 해 보이라는 단순한 요구 때문이었다. 1989년에 일찌감치 하위권으로 밀려난 채 5위로 시즌을 마감한 데 이어 1990년에는 시즌 초반부터 연패를 반복했고, 결국 10연패에서 벗어나자마자 다시 11연패에 빠져버렸던 6월19일에 그는 전격 해임당하는 쓴맛을 봐야 했다. 그래서 잠시 공백을 거친 뒤, 이번에는 백인천 감독이 자존심 싸움을 벌이다가 털고 일어선 빈자리를 물려받은 LG에서 그는 무작정 각자에게 과정을 맡기는 대신 각자의 책임감을 끌어낼 수 있는 '구조'를 고민했고, 그 결과 1993년에 세상에 내놓은 것이 이른바 그가 명명한 '스타시스템'이었다. 정확히 표현하자면 선발 로테이션의 고정, 그리고 계투와 마무리로 이어지는 확실한 투수 분업 시스템이었다. 1993년 LG는 선발진에 김태원과 정삼흠을 축으로 삼아 김기범과 차명석, 그리고 신인 이상훈을 배치했고 8년차 베테랑 우완 차동철과 신인 좌완 강봉수를 필승계투요원으로, 김용수를 마무리로 고정했다. 그리고 선발투수에게는 특별한 일이 없는 한 이기든 지든 6이닝 이상을 맡겼고, 화급한 사정이 없는 한 마무리 투수에게 2이닝 이상은 맡기지 않았다. 물론 결과가 아주 신통한 것은 아니었다. 선발진의 에이스 정삼흠이 15승을 기록한 것을 제외하면 김기범과 이상훈이 9승, 김태원이 8승씩을 기록하며 각자 꼭 같은 숫자의 패전까지 떠안았고, 5선발 차명석은 그나마 7승 9패로 패전이 조금 더 많은 평범한 기록을 남겼다. 그래서 한 번 이기면 한 번 지는 흐름이 시즌 내내 계속되었고, 연타를 당하고 있는 선발투수를 좀처럼 교체하지 않는 모습은 '승리에 대한 집착이 없다'는 비난을 불러오기도 했다. 하지만 차동철과 강봉수를 거쳐 김용수로 이어지는 불펜만큼은 시즌 내내 강인한 모습을 보였고, 그래서 한 번 잡은 리드는 빼앗기지 않는 강팀의 면모를 서서히 드러낼 수 있게 되었다. 특히 마무리로 뛰던 80년대 후반 내내 매시즌 100이닝 이상(1986년 178이닝) 던져댔던 김용수는 그 해 만큼은 50경기에서 단 75.2이닝만을 던지는 여유를 누리며 5승과26세이브로 뒷문을 단속해 주었고, 그 덕에 정규리그 4위를 거쳐 플레이오프까지 진출하는 절반의 성공을 거둘 수 있었다. /김은식 야구작가

2018-08-13 경인일보

[김은식의 다시 보는 한국 프로야구 명장면·15]1993년 재건에 나선 LG와 태평양(上)

단단했던 투수진 부상·부진 연속임기응변 마운드 운용도 '독으로'1992년 이광환 감독 부임 안정화 1993년의 프로야구는 한국시리즈 3차전에서 문희수, 선동열, 송유석을 홀로 상대하며 181개의 공을 던진 라이온즈 박충식의 투혼과, 하지만 투혼 따위로 넘을 수 있는 벽이 아니라는 듯 소리 없이 진군해 일곱 번째 왕좌에 오른 해태의 능숙한 세리머니 속에서 저물었다. 선동열이 부상으로 이탈했던 1992년 정상 고지에서 내려서야 했던 해태는, 이번에는 마무리투수로 재기해 0.73이라는 역대 최저 평균자책점 기록을 세운 선동열의 힘으로 다시 정상을 탈환했다. 선동열이 완벽하게 뒷문을 틀어막자 온기가 선발진으로까지 번지며 다승왕 조계현을 필두로 송유석, 김정수, 이강철, 이대진까지 무려 다섯 명의 10승 대 투수가 배출됐다(선동열 자신까지 모두 여섯 명이 10승 이상을 기록). 그런 압도적인 마운드 아래서는 팀 타율이 2할5푼에 턱걸이한 물 방망이도 큰 장애요인이 될 수 없었다. 우승은 늘 그런 압도적인 위력의 에이스가 가져다주는 선물이었다.원년 OB는 우승의 제단에 박철순의 허리를 내놓았고, 1984년 롯데는 최동원의 어깨를 바쳤다. 그리고 1986년부터 해태의 왕조시대가 시작된 이래 잠시나마 그 숨 막히는 행군을 멈춰 세운 것은 한 편으로는 선동열의 부상이었고, 다른 한 편으로는 LG와 롯데에 내려진 김태원과 김용수, 염종석과 박동희 같은 '벼락같은' 축복이었다. 하지만 1993년의 진정한 의미는, 그런 축복과 동떨어진 침침한 변두리에서 묵묵히 전진했던 이들에 의해 또 다른 길이 개척되었다는 데서 찾을 수 있다. 바로 이듬해 패권의 주인공이 되는 LG, 그리고 부분적으로는 그 대항마가 되는 태평양 돌핀스에 관한 이야기다.1990년에 창단하자마자 해태의 5년 연속 우승을 저지하며 왕좌에 올랐던 트윈스는 1991년 6위, 1992년에는 7위로 전락하며 바닥을 기어야 했다. 선수단의 명단은 1990년 우승 당시와 달라진 것이 거의 없었다. 김재박과 이광은이 1991년을 끝으로 각각 팀을 떠나면서 내야진을 새로 꾸려야 하는 문제가 있긴 했지만, 대부분 20대 선수들과 20대 못지않은 내구력의 김용수, 정삼흠으로 꾸려진 투수진만큼은 우승 당시보다 못할 것이 없었다. 타격이 약하고 수비조직력이 흐트러진 팀이 정상을 넘볼 수는 없는 법이다. 하지만 단단한 투수진을 보유한 팀이 하위권으로 처지는 것도 마찬가지로 보기 드문 일이다. LG가 첫 우승 이후 두 해 동안 오히려 뒷걸음질을 쳐야 했던 것은 오로지 투수들이 돌아가며 전력에서 이탈하는 부상과 부진의 릴레이 때문이었다. 물론 그 부상과 부진이란 상당부분'내년을 생각하지 않는' 임기응변식 마운드 운용 때문이었고, 그래서 적절하고 효율적인 몸 관리를 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1990년에 18승을 올리며 정규시즌을 이끌었던 김태원은 이듬해 8승으로 주저앉았고, 12승을 올린 데 이어 한국시리즈에서 다시 2승을 거둬 MVP가 되었던 김용수도 1992년에는 세이브 없이 5승으로 내려앉았다. 각자 훈련에 전념할 수 없었던 개인사정이나 크고 작은 부상들 때문이었다. 하지만 다른 한 편 우승 당시 23세이브를 기록했던 정삼흠이 1991년 시즌이 개막하자마자 내리 세 번이나 블론 세이브를 기록하고 갑작스레 선발진으로 복귀하면서 투수들의 보직이 한꺼번에 뒤엉켰던 것도 크게 영향을 미쳤다. 1992년부터 지휘봉을 잡은 이광환 감독이 '돌발변수에 흔들리지 않는 안정적인 마운드'를 구상하게 했던 배경이었다. /김은식 야구작가

2018-08-06 경인일보

[김은식의 다시 보는 한국 프로야구 명장면·14]연습생 출신 홈런왕 신화(下)

1992년 41개 3경기당 1개 담 넘겨타격 순간 양팀 응원석 탄성 교차데뷔 5년만에 '완벽한 타자' 등극한국 프로야구 역시 홈런의 열매를 따먹으며 태어났고 자라왔다. 프로원년, 역사적인 개막전 연장 10회 말 이종도의 끝내기 만루홈런과 그 해의 패권을 가른 한국시리즈 6차전 9회 초 김유동의 만루홈런은 당대 자타공인 최고의 선수들이 국가대표로 묶여있던 공백에도 불구하고 프로야구가 자리를 잡을 수 있게 했다. 그리고 이만수와 김봉연의 영호남 홈런대결은 1980년대 내내 야구장을 끓어오르게 만든 최고의 연료였다. 하지만 1982년 80경기에서 22개의 홈런을 기록한 김봉연으로부터 1988년에 108경기에서 30홈런을 때려낸 김성한에 이르기까지, 날고 긴다던 홈런왕들이 기록한 홈런은 경기당 0.27개를 넘지 못했다. 1986년의 김봉연은 경기당 0.2개에도 미치지 못하는 108경기 21개의 홈런으로 홈런왕에 오르기도 했었다. 말하자면 4, 5경기쯤 연달아 관전해야만 그 선수가 홈런을 날리는 모습을 볼 수 있는 셈이었던 것인데, 경기당 0.4개의 홈런을 기록했던 베이브 루스가 '베이브 루스가 홈런 치는 걸 보기 위해 야구장에 가는' 풍경을 만들었던 것에 비하면 많이 부족한 것이었다.장종훈이 1992년에 기록한 홈런 41개는 시즌 경기당 0.325개에 해당했고 대략 세 번 경기장을 찾으면 한 번 정도는 '장종훈의 홈런'을 구경할 수 있는 빈도였다. 90년대 초반 서울과 부산의 '빅 마켓 팀'들의 강세와 더불어 장종훈의 홈런쇼는 관중을 야구장으로 불러모으는 가장 확실한 이벤트였다. 그렇게 한국프로야구는 300만 시대를 넘어 400만 시대의 코앞까지 성장할 수 있었다. 특히 그 해 그가 홈런을 때리는 순간 상대팀 응원석에서마저 탄성이 흘러나오는가 하면 그저 평범한 안타로 끝나는 순간에는 이글스 팬들마저 야유를 터뜨리는 기이한 현상을 볼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입장료를 '안타가 아닌 홈런을 보는 값'으로 생각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1992년 시즌 마지막 두 경기를 남겨둔 채 39홈런을 기록하고 있던 장종훈은 17일에 40홈런을 날리며 송진우의 19승째를 만들어냈고, 18일에는 이강철의 19승 도전을 좌절시키는 41호 결승 홈런을 날리며 다시 송진우에게 단독 다승왕 타이틀을 선물했다. 그리고 그 자신은 '한국의 베이브 루스'라는 칭호와 함께 2년 연속 MVP의 영광을 누릴 수 있었다.장종훈은 고등학교를 졸업하던 1986년, 불러주는 곳이 없어 신생팀 빙그레의 월급 40만 원짜리 연습생으로 입단한 뒤 이듬해 팀의 주전 유격수 이광길이 부상으로 이탈한 틈에 1군 무대에 올라설 수 있었다.그는 프로 유니폼을 입은 뒤 8㎝나 자란 키만큼 기량도 쑥쑥 성장해 불과 4년 만에 홈런왕 타이틀을 접수했고, 1991년에는 한국프로야구 35홈런과 114타점으로 두 부문 신기록을 세웠다. 여기에 더해 0.345의 타율과 21개의 도루까지 성공시키며 '역사상 가장 완벽한 타자'로 평가받게 된다. 그리고 1992년, 시즌 종료를 코앞에 두고 기어이 40홈런 벽을 넘어서며 후배들에게 새로운 과제를 던질 수 있었다. 그가 세운 41홈런의 벽은 98년에 42개를 기록한 우즈에 의해 무너졌고, 99년에 50개의 벽을 넘은데 이어 2003년에 56개까지 달려간 이승엽의 기록 뒤편으로 넘겨지게 되었다. 마지막 두 경기에서 터져 나온 장종훈의 홈런 두 방은 방그레 팬들에게 희망의 증거가 되기에 충분했다. 압도적인 격차로 정규시즌 우승을 확정지은 데 이어 '눈엣가시' 해태의 기를 꺾는 기분 좋은 결정타들이었기 때문이다. /김은식 야구작가

2018-07-30 경인일보

[김은식의 다시 보는 한국 프로야구 명장면·13]연습생 출신 홈런왕 신화(上)

'정규시즌 1위' 확정지은 빙그레천적 해태와의 치열했던 17차전장, 0-0 박빙서 130m짜리 대포1992년 9월 17일, 빙그레(현 한화)가 해태(현 KIA)를 대전으로 불러들여 시즌 17차전을 벌이고 있었다.이미 열흘 전에 2위 그룹과 10경기 이상의 격차를 벌리며 일찌감치 정규시즌 1위를 확정지은 빙그레였지만, 해태와의 승부만큼은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없었다. 1988년과 1989년에 이어 1991년까지 세 차례 연속으로 한국시리즈에서 만나 우승 문턱에서 좌절하게 만들었던 아픈 기억 때문만은 아니었다. 바로 그 해 역시 한국시리즈에서 만날 가능성이 가장 높은 것이 2위를 달리던 해태였고, 또 역대 최강이라던 '다이너마이트 타선'을 완성하고도 빙그레는 유독 해태에게만은 시즌 4승 12패로 일방적으로 밀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뭔가 해법을 찾지 못한다면 그 해 역시 정성껏 쑨 죽으로 호랑이 밥을 챙기는 꼴을 벗어나기 어려울 듯 했다. 게다가 양 팀의 기둥투수 송진우와 이강철이 나란히 18승으로 다승 공동 선두에 올라 있었던 것도 은근히 신경을 쓰게 만들고 있었다. 정규시즌의 남은 경기는 17일과 18일 두 경기 뿐이었고, 그 안에 뭔가 결판이 나야 했다. 그 밖에 해태의 이순철도 롯데의 박정태를 누르고 최다안타 타이틀을 챙기기 위한 안타 한 개가 필요했다. 물론 어느 만큼 예상할 수 있었던 일이지만, 빙그레의 김영덕 감독은 6-0으로 결정적인 승기를 잡은 5회 초에 선발투수 한희민을 내리고 송진우를 등판시켜 프로야구 최초의 '다승(19승)-구원(25 세이브포인트)' 2관왕을 배출했다. 그러자 이강철의 동료 문희수가 5회에 자진등판해 이정훈과 장종훈의 몸통에 화풀이를 하고 퇴장당하는 소동을 빚었고, 그렇게 격앙된 틈에서 다시 해태의 이순철은 7회 기습번트를 성공시키며 최다안타 타이틀을 확정짓는 150개째 안타를 만들어냈다. 그렇게 뜨겁게 달아올랐던 열기가 모두 세월 속으로 날아가버린 지금에도 야구팬들의 기억 속에 새겨져 남은 또 다른 대목이 있었다. 0-0으로 팽팽히 맞선 4회 말, 무사 1,2루에 주자를 놓고 타석에 선 빙그레의 4번 타자 장종훈이 원 스트라이크 투 볼에서 해태 선발 신동수의 4구째를 때려 펜스 가운데의 가장 깊숙한 곳을 넘기는 130m 짜리 홈런을 날렸던 순간이다. 바로 그 순간, 한국프로야구는 사상 처음으로 한 시즌에 40개의 홈런을 날리는 타자를 만날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어쩌면 홈런은 야구가 품고 있는 가장 반 야구적인 현상인지도 모른다. 야구는 촘촘하게 짜인 팀플레이와 눈에 보이거나 보이지 않는 수많은 작전과 협력플레이들로 이루어져 있다. 그리고 3할 타자와 2할5푼 타자 사이에 존재하는 단 5% 차의 확률에 근거해 주전과 후보를 나누고 타순을 짜고 작전을 선택하며, 스타와 후보 선수를 구분하게 된다. 하지만 홈런은 그 모든 과정들을 순식간에 무의미한 것으로 만들어버리는 사건이다. 그래서 경기 종반 결정적인 한 점 싸움의 순간에 터져 나오는 홈런 한 방은 그 앞의 타자가 아웃카운트 하나와 바꾸며 성공시킨 희생번트, 혹은 주자가 횡사의 위험을 무릅쓰고 시도해 유니폼에 온통 흙물을 들여가며 성공시킨 과감한 도루의 모든 숨 가쁜 순간들을 허무하게 만들어버리기도 한다. 그리고 경기 막판에 터져 나온 만루 홈런 한 방은 기선을 잡는 선취점이니, 안전궤도에 올리는 추가점이니, 사실상 승부를 가른 쐐기점이니 하며 세 시간 넘도록 해설가가 열을 올리던 모든 순간들을 지워버리기도 한다. 물론 홈런을 치겠다는 일념으로 배트를 휘두르는 타자도 있을 수 없고, 폭죽 같은 홈런포에 의지해 경기를 승리로 이끌겠다는 감독도 있을 수 없다. 야구감독은 경기장의 선수들을 향해 수많은 사인을 날리지만 '홈런을 치라'는 사인은 있을 수가 없다. 하지만 바로 그런 역설적인 매력 때문에 홈런은 야구장으로 팬들을 끌어 모으게 된다. '왜 내야수와 외야수 사이의 적당한 곳에만 떨구면 안타가 되는 것을, 굳이 외야수가 지키고 선 곳까지 멀리 때려내느라 헛수고들이냐'고 질타했다는 초창기 어느 야구단 사장의 생각처럼, 복잡한 생각을 할 필요 없이 '멀리 강하게 때릴수록 대단한 것'이라는 단순함. 그리고 어떤 궁지에서도 '번쩍' 한 순간에 뒤집어내고 마침표를 찍을 수 있는 호쾌함.그래서 야구를 미국인들의 삶으로 만든 것은 베이브루스(미국에서 가장 인기가 많았던 프로야구 선수로 메이저리그를 대표하는 홈런 타자)였고, 일본인들의 자존심으로 만든 것은 오 사다하루'(일본에서 태어난 중화민국 국적의 전 프로 야구 선수이자 야구 감독)였다. /김은식 야구작가

2018-07-23 경인일보

[김은식의 다시 보는 한국 프로야구 명장면·12]1991년, 롯데가 처음 달성한 '백만 관중'

1984년 우승후 열기 사그라졌지만박동희·장효조·김민호 등 맹활약'탄탄해진 전력' 팬들 발길 줄이어1991년 9월 15일, 롯데는 그 해의 마지막 홈경기에 해태를 불러 들여 5-1로 승리했다. 시즌 내내 시달렸던 난적이었고, 그날의 승리를 합해도 6승 12패의 적자였지만, 어쨌든 깔끔한 마침표였다. 마운드에서는 오랜만에 제구가 잡힌 박동희가 해태 타선을 힘으로 짓눌렀고, 타석에서는 그 전 해 트레이드의 정신적 충격을 벗어나지 못한 채 '처음 3할 이하로 떨어져보는' 수모를 당했던 타격의 달인 장효조가 대타로 출장해 홈런을 날리며 승부의 쐐기를 박았다. 그리고 그날, 롯데는 한국 프로야구사에 또 하나의 빛나는 기록을 세우게 된다. 일요일이었던 그 날 관중석을 가득 채우며 그 해 100만 1천920명 홈관중을 기록해 첫 번째 '백만 관중 동원 팀'이 된 것이다. 그 해 롯데가 백만 관중을 야구장으로 불러 모을 수 있었던 데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다. 우선 만화에서나 볼 수 있을 것 같던 극적인 우승을 이루어낸 1984년을 기점으로 폭발한 부산의 야구열기가 있었고, 1985년 10월에 완공된 3만 석 규모의 사직야구장이 그 열기를 그득히 받아내는 그릇이 되고 있었다. 하지만 1984년의 우승 뒤 무려 6년 동안 가을야구에서 소외된 채 입맛만 다셔야 했고, 1989년에는 1984년 드라마의 주인공으로서 롯데와 부산 야구의 상징이기도 했던 최동원을 쫓아내듯 떠나보내는 자책골로 끓어오르던 열기에 찬물이 끼얹어지기도 했다. 최동원만큼의 존재감을 보여주는 투수도 찾기 어려웠고, 최동원에 이어 떠나보냈던 김용철만큼의 파괴력을 보여주는 타자도 다시 만나기 어려웠다.1991년, 부산야구에는 다시 봄기운이 돌아왔다. 박동희가 14승을 올리며 아마추어 시절부터 달고 다니던 '제 2의 최동원'이라는 수식어가 야구팬들 머릿속에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지난 시즌 2승으로 삐끗했던 윤학길이 17승을 기록하며 제자리로 돌아왔다. 거기에 3년차 김청수와 고졸신인 김태형이 각각 두 자리 승수를 올리며 롯데는 일약 네 명의 10승대 선발투수를 보유한 팀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타선도 제법 안정된 해였다. 4번 타자 김민호가 20홈런과 3할을 기록하며 중심을 잡았고, 투수에서 전향한 김응국이 3할과 25도루를 기록하며 짝을 이루었다. 거기에 타격의 달인 장효조가 부활하며 3할 4푼대의 고타율로 제 2의 전성기를 시작했고, 신인 박정태와 전준호가 각각 타점과 도루로 팀을 이끌며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기 시작했다. 특히 속 터지도록 느긋했던 강병철 감독의 배짱은, 막 피어오르는 숯불 같던 선수들의 열기와 어우러지면서 묘하게도 그 해만큼은 궁합이 맞았다. 역전패를 거듭하면서도 선발 로테이션은 무너지지 않았고, 선수들 역시 오늘 지면 내일 이긴다는 자신감으로 조급한 모험을 자제했다. 그렇게 롯데의 전력은 오히려 후반기가 되면서 더 단단해져갔고, 8월 14일에 반 경기차로 앞서가던 LG를 잠실에서 5-1로 잡고 4위로 올라선 뒤 한 번도 그 아래로 떨어지지 않은 채 시즌을 완주해내며 가을야구의 티켓을 손에 쥘 수 있었다.물론 그 해도 마땅한 마무리투수를 만들지 못한 약점은 여전했고, 그래서 시즌 내내 최강의 자리를 넘볼 수는 없었다. 하지만 매 경기 희망의 이유를 떠올릴 수 있었고, 지더라도 허탈하게 경기장을 빠져나오지 않을 수 있었던 그해, 부산의 팬들이 야구장을 찾는 발걸음에 거리낄 것은 없었다. /김은식 야구작가

2018-06-18 경인일보

[김은식의 다시 보는 한국 프로야구 명장면·11]1990년 꼴찌 LG의 '각성'

백인천 감독 '선 굵은 야구' 뒷심문병권, 5연속 완투승 만점 활약젊고 힘있는 선수들 주축 상승세1990년 6월 3일, 태평양과의 일요일 홈경기에서 5-0으로 완패한 LG 선수단은 한동안 경기장 밖으로 빠져나가지 못한 채 라커룸에 숨어 있어야 했다. 100여 명의 분노한 팬들이 잠실구장의 본부석 출입문으로 몰려들어 백인천 감독에 대한 청문회를 요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1990년은 한국 프로야구사에 유례를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의 대혼전이 벌어진 해였다. 개막 후 두 달이 넘은 6월 초까지도 1위 빙그레부터 5위 삼성까지 1경기 차로 뒤섞여 있었고, 매 경기가 예비 한국시리즈라 불릴 만한 혈전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5년 연속우승에 도전하는 해태는 말할 것도 없고, 그 해태에 세 번째 도전장을 던진 창단 5년 차 신흥강호 빙그레가 칼을 갈고 있었다. 거기에 전통의 강호 삼성과 지난 시즌 김성근 감독의 지휘 아래 첫 플레이오프 진출의 기적을 연출했던 돌풍의 팀 태평양이 상위권을 형성하고 있었다. 전년도 꼴찌 팀 롯데도 거물신인 박동희와 투수에서 타자로 전향한 김응국을 앞세워 봄 한때나마 선두경쟁에 비집고 들어와 있었다. 하지만 유독 LG만 홀로 6경기 차로 멀찍이 떨어진 채 갈지자 걸음을 계속하는 태평세월이었다. 그리고 지난 3년 동안 5위, 6위, 6위로 뒷걸음질 친 끝에 끝내 꼴찌까지 밀려나자 팬들도 더는 참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8년 만에 복귀해 MBC에 이어 LG에서도 초대 감독이 된 백인천은 그런 난감한 상황에서도 여유가 넘쳤다. 특유의 '힘의 야구'를 구사하며 한 점에 연연하지 않았고, 감독석에서 연신 파안대소하는 모습도 다르지 않았다. 어쩌면 그런 속 모를 여유가 서울 팬들의 가슴을 긁어놓았는지도 모른다.어쨌든 그날의 청문회 소동이 약이 되었던지, 그 다음 경기일인 6월 5일 트윈스는 광주에서 김영직의 연속경기 홈런에 힘입어 해태와의 더블헤더 두 경기를 독식하며 탈꼴찌에 성공하게 된다. 그리고 마치 문득 정신을 차린 맹수처럼 그대로 자리를 차고 일어나 달리기 시작했고, 6월 13일까지 무려 8연승을 질주해 단숨에 5위로 올라서며 중위권 싸움으로 전장을 옮겨놓았다. 분위기의 반전을 이끈 것은 경북고 시절 4관왕 투수로 유명세를 떨쳤지만 프로무대에서는 별다른 활약을 보이지 못했던 문병권이었다. 그는 팀이 꼴찌로 처져있던 5월부터 5연속 완투승을 거두며 연패탈출과 연승연결의 주역 노릇을 했다. 그리고 그렇게 흐름을 타기 시작하자 김태원과 김용수, 그리고 마무리 정삼흠으로 이어지는 주축투수들이 동시다발적으로 폭발하며 서너 번 이기고 한 번 쉬어가는 흐름을 시작했다. 강점과 약점이 뚜렷이 갈리고, 그에 따라 팬들의 호와 불호가 극명하게 갈리는 것이 지도자 백인천이다. 하지만 감독 중심의, 선 굵은 야구를 추구하는 그의 스타일이 대개 젊고 힘 있는 선수들로 이루어진 팀과 궁합이 맞는 것은 사실이었다.그해 LG는 만년유망주 김태원과 문병권이 18승과 10승으로 올라섰고, 김동수, 노찬엽, 윤덕규, 이병훈 등 젊은 타자들이 새로운 중심으로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주축 선수들의 컨디션에 연연하지 않는 감독의 배짱은 신인급 선수들에게 확실한 기회가 됐고 한 점과 1승에 안달복달하지 않는 감독의 여유는 선수들이 조금 더 멀리 내다보며 달릴 수 있는 조건을 마련해 주었다. 그리고 시즌 개막 직전 김기범이 부상으로 이탈하고, 김건우의 재활이 생각보다 늦어지면서 뚫린 선발진의 공백을 막기 위해 김용수와 정삼흠의 보직을 맞바꾼 도박이 대성공을 거두었다. 선수인생 내내 팀 마운드의 가장 믿을 만한 버팀목이었던 김용수는 역시나 선발투수로서도 12승을 올리며 제 몫을 했고, 선발로서는 기복이 있던 정삼흠이 마무리로서 짧게 던지면서 오히려 안정을 찾고 23세이브를 올렸다.게다가 후반기에 들어서자 후배들의 분발에 자극받은 김상훈, 이광은, 김재박, 신언호 마저 차례로 제 몫을 해내기 시작하며 불붙은 상승세에 기름을 끼얹어댔다. /김은식 야구작가

2018-06-11 경인일보

[김은식의 다시 보는 한국 프로야구 명장면·10]1989년, 부산 '라이온즈' vs 대구 '자이언츠'

'구단내 문제아' 'KS 새가슴' 낙인삼성-롯데 트레이드 성사 '팬 분노'자존심 상처 하락세 '쓸쓸한 퇴장'롯데는 해마다 연봉싸움에서 질기게 버티며 '물을 흐리는' 데다가 선수회까지 만들겠다고 앞장섰던 골칫거리 최동원을 처분하고 싶었고, 우승을 위해 필요한 것은 '잘하는 선수'가 아니라 '독한 선수'라고 판단했던 삼성은 김시진을 내주고라도 최동원을 가지고 싶었다. 매번 한국시리즈 우승의 문턱에서 걸려 넘어지던 삼성으로서는 최동원이 1984년 한국시리즈에서 혼자 거둔 4승이 김시진의 통산 111승보다 훨씬 무게있는 기록으로 여겨졌다. 김시진은 한국시리즈에서만큼은 그 때까지 7연패만을 기록하고 있었을 뿐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회심의 트레이드는 두 팀과 두 선수, 그리고 두 팀의 연고지 팬들 모두에게 만족이 아닌 상처만을 안겨 주고 말았다. 아직 너무나 단단하게 붙어있던 서로의 머리와 심장을 떼어내 바꿔 끼워 넣는 어설픈 수술이 너무 많은 피를 흘리게 하고 말았던 것이다. 최동원은 구단의 고유권한인 트레이드 결정에 대해서는 토를 달지 않았지만, 자신의 고유권한인 새 구단과의 계약을 거부하며 버텼다. 조건은 엉뚱하게도 롯데 박종환 단장의 퇴진이었다. 반면 김시진은 곧장 새 팀으로 옮겨 칼을 갈기 시작했고, 롯데 유니폼을 입고 처음으로 등판하던 1989년 4월 14일 OB와의 대전경기에서 자신은 절대 새가슴이 아니라는 것을 항변하는 듯 14이닝동안 219개의 공을 던지는 오기를 발휘하며 완투승을 기록했다. 하지만 분노도 오기도 오래도록 힘을 쓸 수는 없었다. 김시진은 곧 4연패의 늪에 빠지며 허우적거리기 시작했고, 6월 말이 되어서야 삼성 입단계약서에 도장을 찍고 합류한 최동원은 준플레이오프 2차전과 3차전에 연달아 선발등판 했지만 모두 초반에 강판당하며 사상 첫 플레이오프 진출에 성공한 태평양 돌핀스가 벌이던 자축연의 조연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그리고 부산의 팬들은 삼성의 유니폼을 입고 맞은편 더그아웃에 앉은 최동원이 눈에 띌 때마다 응원가 가사를 잊었고, 대구의 팬들은 롯데 유니폼을 입고 돌아온 김시진을 보며 눈시울을 적셨다. 섣부른 판단으로 성적도, 팬들의 호응도 모두 잃어버린 채 밀려드는 부산팬들의 항의전화에 질려버린 롯데의 단장과 사장이 정말 최동원이 삼성과의 계약서에 사인을 하던 날 사표를 내야만 했다. 그것도 그해 트레이드가 몰고 온 후폭풍의 한 요소였다. 그 시기 있었던 트레이드에서, 장효조와 김용철은 잠시의 충격을 딛고 일어서 다시 자신의 이름에 부끄럽지 않은 마무리를 할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하지만 타자와 달리 예민한 것이 투수였고, 그중에서도 자존심 하나로 존재하던 이름이 최동원과 김시진이었다. 김시진은 92년 중반까지 3년 반을 더 롯데에서 뛰면서 13승과 24패를 통산기록에 추가했고, 최동원은 두 해 동안 7승과 7패만을 더한 뒤 90년을 끝으로 옷을 벗고 말았다. 선수생명이 짧았던 시절이긴 했지만, 충격적인 트레이드가 막 서른을 넘어서던 두 전설적인 투수의 허리를 꺾어놓은 것이다.각 프로야구단들이 연고지 안에서 마음껏 고를 수 있는 선수의 수는 3명에서 2명을 거쳐 1명으로 줄었고, 이제는 그나마 전면드래프트제가 도입되면서 옛날일이 돼 버렸다. 그래서 연고지와 구단의 연결관계는 상징적인 것으로 격하되었고, 구단과 선수의 관계는 그리 특별할 것도 없는 직장과 직원의 계약관계로 돌아갔다. 지금에야 누군가 트레이드 매물이 되었다고 해도 자신이 팀의 필수요원이 아니라는 서운함이야 있을 수 있겠지만, '뿌리 뽑힌다'는 위기감을 느낄 리 없다. 하지만 그게 꼭 좋은 변화인지는 또 모르겠다. 개방화도 좋고 평준화도 좋지만, 그래도 야구가 제일 재미있는 것은 구단과 팬이 한 몸이라고 느껴질 때가 아닌가 해서다. 최동원과 김시진은, 1988년 11월 23일 이후 다시는 고향 팀에 돌아갈 수 없었다. 선수로서도 그랬고 지도자로서도 그랬다. 하지만 아직도 누군가는 최동원과 김시진이라는 이름에서 떨림을 느끼고, 그리워하고, 애틋해한다. 잘려나간 분신들에게서 20년이 넘도록 아픔을 느끼는 것, 기껏 공놀이 따위가 가슴에서 암세포처럼 번져버린 야구광들 이야기다. /김은식 야구작가

2018-06-04 경인일보

[김은식의 다시 보는 한국 프로야구 명장면·9]1988년 '의외의 노히트노런'

느린 공 앞세워 삼진 없이 '대기록'선동열 상대, 버린카드였던 이동석무4사구 기적의 투구로 '깜짝 승리'선발투수가 단 한 개의 안타도, 점수도 내주지 않은 채 경기를 마무리하는 것을 노히트노런(No hit - No run)이라고 부른다. 하지만 점수와 안타 외에 4사구나 실책으로라도 한 명의 주자도 살려 내보내지 않고 경기를 마무리한다면 퍼펙트게임(perfect game)이라는, 한 층 더 명예로운 기록이 만들어진다.노히트노런을 달성한다고 해서 투수에게 2승이 주어지는 것도 아니고, 그렇게 당한다고 해서 상대 팀이 2패를 감수해야 하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늘 나오는 기록이 아니다보니 삼십여 년 전에 작성된 기록도 늘 누군가에게 기억되고 언급되고 되새겨진다. 1988년에는 두 번의 노히트노런이 작성되었다. 그리고 두 번 다 도저히 나올 것 같지 않던 순간에 튀어나온 의외의 기록이었고, 또 노히트노런 치고도 자주 보기 어려운 희귀한 기록들이었다.그 희귀한 이변이 시작된 것은 시즌의 출발점인 4월 2일이었다. 그날 사직 개막전의 OB 베어스 선발로 내정되어있던 김진욱이 경기 당일 오전 연습 때 동료 타자 김광림의 연습타구에 급소를 맞아 병원으로 실려가는 사고가 터져버린 것이 발단이었다. 김성근 감독이 김진욱을 대신할 선발투수로 낙점한 것은 장호연이었다.그 무렵 OB 안에서 가장 빠르고 위력적인 공을 던지는 투수가 김진욱이었다면, 반대로 가장 느린 공을 던지는 투수는 장호연이었다. 하지만 장호연은 당대의 해설가들이 미처 따라가며 이름붙일 수도 없을 만큼 다양하고 기괴한 변화구를 던질 수 있었고, 무엇보다도 만루에서 4번 타자를 상대하는 순간에조차도 '이깟 공놀이쯤'이라고 말하는 듯 한 표정으로, 혹은 열 살짜리 아들에게 배팅볼이라도 던져주는 듯한 느낌으로 싱글거리고 이죽거릴 수 있는 별난 여유가 있었다.그 날의 투구가 그랬다. 장호연은 거의 스트라이크존에 들어가는 공이 없을 만큼 빙빙 돌며 '낚시질'을 했고, 롯데 타자들은 대단한 모욕이라도 당했다는 듯 앞 다투어 초구와 2구에 방망이를 휘둘렀다. 시속 120키로미터 후반대를 중심으로 형성되는 공들이 딱 배팅볼처럼 친근하게 느껴졌기 때문이고, 또 그 날 갑자기 등판하느라 제대로 컨디션을 끌어 올리지 못한 상태라는 약점을 활용해야만 한다는 강박관념 때문이기도 했다.볼 넷이 두 개, 몸에 맞는 공이 한 개 있었지만 병살타 역시 두 개 기록되며 타석 수는 28이었고, 투구수도 딱 99개에 불과했다. 그리고 점수 0, 안타 0. 삼진도 실책도 0. 노히트노런, 그것도 '개막전, 무삼진 노히트노런'이라는 세계적으로도 희귀한 기록이었다.그로부터 불과 보름이 지난 뒤, 이번에도 그 못지 않게 충격적인 사건이 또다시 벌어지고 말았다. 4월 17일, 광주 무등야구장. 3연속 우승에 도전하고 있던 자타공인의 최강팀 해태와 그 해 역시 탈꼴찌 싸움을 벗어나기 어려울 것으로 보이던 창단 3년차의 신생팀 빙그레의 경기가 있던 날이었다. 더구나 해태의 선발은 '천하의' 선동열이었고, 그 선동열을 누구보다도 두려워했던 빙그레의 김영덕 감독이 선동열의 맞상대로서 미련 없이 버린 카드는 2년차 신인투수 이동석이었다.선동열은 역시 선동열이었다. 그날 그는 이강돈, 유승안, 강정길에 이정훈과 장종훈이 가세하며 힘이 붙기 시작하던 빙그레 타선을 상대로 무려 11개의 삼진을 빼앗아내며 9이닝을 완투했고, 점수는 단 한 점만을 내주었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는 그날 시즌 2패째를 당하며 쓴웃음을 삼켜야 했다. 맞상대했던 이동석이 덜컥, 또 한 번의 노히트노런을 기록해버리고 말았기 때문이다.그날 이동석이 기록한 노히트노런은 장호연의 것보다도 더 놀라운 면이 있었다. 바로 '무4사구 노히트노런', 즉 단 한 개의 안타도 맞지 않았을 뿐 아니라 단 한 개의 볼 넷이나 몸에 맞는 공도 내주지 않는 기적적인 투구였기 때문이다.그 해 이동석은 선발과 구원을 오가며 7승을 올리며 한 몫을 했다. 그리고 빙그레는 기존의 한희민, 이상군에 더해 이동석, 김홍명, 김대중, 김용남 등의 투수들이 전반기에만 54경기중 20경기를 완투한 대활약을 토대로 전후기리그에서 모두 2위를 차지하며 창단 3년만에 한국시리즈에 진출하는 경사를 맞을 수 있었다.하지만 그 해 이후 이동석은 다시는 야구팬들의 기억에 남을 만한 성적이나 장면을 만들어내지 못했고 7년만에 프로선수생활을 마감해야 했다. /김은식 야구작가

2018-05-28 경인일보

[김은식의 다시 보는 한국 프로야구 명장면·8]최동원-선동열 마지막 맞대결

최, 209구 던지며 8탈삼진 2실점선, 232구 10탈삼진 2실점 '맞불'두 태양의 '전설로 남은' 명경기1984년에 정규리그 27승과 한국시리즈 4승을 기록하며 가장 높은 곳에 떠올랐던 최동원이라는 태양은 85년 20승, 86년 19승으로 중력을 무시하는 궤도를 그렸고, 1985년에 혜성처럼 나타난 선동열은 86년과 87년에 거푸 0점대 평균자책점을 기록하며 무섭게 솟구치기 시작했다.선동열이 24승과 0.89의 평균자책점을 기록하며 최고의 자리에 올라섰던 1986년, 최동원 역시 19승과 1.55를 기록하며 아직은 물러설 때가 아니라는 오기를 불태우고 있었다. 그 해에는 최동원과 선동열이 두 번에 걸쳐 선발 맞대결을 벌여 한 번씩의 완봉승과 한 번 씩의 완투패를 나누어 갖기도 했다. 그리고 그렇게 미처 판가름내지 못했던 승부가 이어진 것이 1987년, 5월 16일이었다. 1회 초와 말이 모두 삼자범퇴로 처리되며 싸늘하게 시작된 경기는, 그러나 2회 말 롯데가 김용철의 볼넷과 김민호, 정구선의 연속안타로 만든 무사 만루의 위기에서 해태 내야실책을 틈타 먼저 2점을 선취하며 균형이 깨졌다. 하지만 최동원도 완벽한 컨디션은 아니었다. 몇 해 동안 조금도 늦추지 않고 전력투구만을 강행해온 무모한 행보 탓인지 구속은 '최동원'이라는 이름값에 어울리지 않는 평범한 것이었고, 그렇게 무뎌진 속구는 커브의 위력마저 반감시키고 있었다. 그는 3회 초 2사 2루에서 서정환에게 적시타를 맞아 추격의 1점을 내주었고, 5회에도 선두타자 김일권에게 안타를 내준 데 이어 차영화에게 큼지막한 2루타까지 내주는 불안한 모습을 노출했다. 해태 김무종의 번트 실패 덕분에 선행주자 김일권을 잡아낸 데 이어 롯데 포수 김용운이 정확한 홈 블로킹으로 해태의 대주자 이순철까지 홈에서 잡아내며 실점 없이 넘겼지만, 위기는 이어졌다.하지만 그 날의 승부의 핵심은 힘과 기술이 아닌 자존심과 뚝심이었다. 선동열은 초반의 흥분을 가라앉히며 곧 냉정을 되찾았고, 최동원은 초반의 안일함을 자책하듯 열정을 끌어올렸다. 해태와 롯데의 타자들은 삼진, 혹은 기껏해야 내야 땅볼을 주고 받으며 부지런히 타석과 더그아웃 사이를 오고갔다. 하지만 흐름이 이어지는 한 이미 초반에 만들어진 한 점의 열세를 안은 해태 쪽은 초조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9회 초, 해태의 김응용 감독은 선두타자 6번 한대화가 안타를 치고 출루하자 7번 김일권에게 보내기번트를 지시했고, 8번 타순의 포수 장채근마저 빼고 왼손 타자 김일환을 내세우는 최후의 선택을 하게 된다. 그리고 최동원은 그 마지막 한 고비를 넘기지 못하고 그 어느 것보다도 짜릿했을 1승의 기회를 놓치게 된다.결국 김일환이 우익수 키를 넘기는 커다란 2루타를 때려 2루의 김일권을 불러들이며 동점을 만들었고, 경기는 연장전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늘 경기 전에 이미 남들 한 경기 던질 만큼의 공을 뿌리며 몸을 풀던 최동원의 어깨는 이미 한계를 한참 넘은 상태였다. 하지만 롯데는 자존심 하나로 버텨온, 그리고 늘 그 자존심에 대한 책임을 완벽하게 져왔던 최동원을 함부로 내릴 수도 없었다. 상황은 여전히 동점이었고, 더구나 상대는 다른 투수도 아닌 선동열이었다.하지만 문제는 해태 쪽에도 있었다. 선동열 역시 만만치 않게 많은 공을 던지고 있었지만 네 살이나 많은 최동원보다 먼저 '체력'을 핑계 삼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게다가 주전포수 김무종과 백업포수 장채근, 그리고 포수 수비가 가능한 이건열마저 모두 소진해버린 난감한 처지에 빠져 있었다.결국 연장 10회, 마운드에 다시 선 것은 최동원과 선동열이었다. 그리고 해태는 내야수 백인호가 포수마스크를 쓰고 앉는 진풍경까지 연출해야 했다. 하지만 경기의 양상은 오히려 단순해졌다. 삼자범퇴, 삼자범퇴. 말 그대로 '신들린 듯' 던지는 투수들. 바로 그렇게 최동원과 선동열은 신들린 듯 다시 6이닝을 던졌고, 연장 15회 말 선동열이 롯데의 마지막 세 타자를 연달아 삼진으로 잡아내며 길고 긴 승부의 끝이 맺어졌다.232개의 공을 던져 7피안타 6사사구 10탈삼진을 기록하며 2실점한 선동열, 그리고 209개의 공을 던지며 11피안타 7사사구 8탈삼진과 역시 2실점을 기록한 최동원. 물론 경기 결과는 무승부였다.그 순간 이후 두 선수 사이의 맞대결은 다시는 벌어지지 않았다. /김은식 야구작가

2018-05-21 경인일보

[김은식의 다시 보는 한국 프로야구 명장면·7]시대를 뛰어 넘은 큰 별과 국보 에이스

최, 홀로 팀 정상으로 이끈 슈퍼맨'비교 불가' 강속구로 마운드 호령선, 韓야구 전무후무 '0점대' 투수최동원의 이름이 세상에 알려진 것은 경남고 2학년 시절이던 1975년, 전국우수고교초청대회에서 당대 최강 경북고와 선린상고를 상대로 무려 17이닝 연속 노히트노런 행진을 벌이면서부터였다. 그리고 그는 한국야구가 니카라과 슈퍼월드컵에서 처음으로 국제대회를 제패했던 1977년과 이탈리아 세계야구선수권대회에서 3위에 올랐던 1978년 이후 국가대표팀 에이스로 자리 잡게 된다. 이제 막 대학 1, 2학년이던 시절이었다.그로부터 1982년까지 6년 동안 그는 연세대와 실업팀 롯데에서 늘 팀이 치르는 경기의 절반 이상을 감당하는 마당쇠였고, 그렇게 거의 혼자 힘으로 늘 팀을 정상에 끌어올리는 슈퍼맨이었다. 부상으로 거르다시피 했던 1979년을 제외하면 해마다 대학무대에서 한 번 이상씩 최우수선수에 선정되었고, 1981년에는 실업리그와 캐나다 대륙간컵대회에서 다시 최우수선수로 선정됐다. 특히 혼자 6차전까지 모든 경기를 책임지다시피하며 김시진이 이끌던 경리단을 물리치고 롯데의 역전우승을 이끌었던 1981년 실업리그 코리언시리즈는 최동원이라는 이름이 곧 투수, 혹은 야구 자체를 상징하게 만든 대사건이었다.하지만 그동안 한국야구사를 수놓았던 수많은 별들의 이름 속에서도 최동원의 이름이 각별한 빛을 발하는 데는 또 다른 이유가 있다. 그는 단순한 '당대최고'가 아니라 '당대가 요구하는 것보다 훨씬 높은 수준을 보여준' 투수였기 때문이다.그의 공은 요즘처럼 '공의 위력으로' 배트를 누르며 파울을 양산하는 '강한 공'과는 차이가 있었다. 그의 속구는 그야말로 다른 투수들의 빠른 공과 시속 10㎞ 이상의 차이를 내는 비현실적인 스피드로 상대 타자의 인지능력과 운동능력의 한계를 비웃는 '마구'였던 것이다.프로무대에서 1984년에 시즌 27승을 올린 데 이어 한국시리즈 4승을 전담하며 팀의 우승을 이끌었던 것을 비롯해 4년간 75승을 기록한 뒤 맞이한 1987년, 최동원의 나이는 서른이었지만 이미 신체능력은 절정기를 한참 지나고 있었다. 선동열이라는 이름이 알려진 것은 1980년이었다. 그 해 광주일고 3학년이던 선동열은 봉황기대회에서 경기고를 상대로 노히트노런을 기록하더니 황금사자기대회에서는 팀을 결승까지 이끌며 감투상을 받았고, 대통령기대회에서는 팀에 5년만의 전국대회 우승을 안기고 최우수선수로 선정되며 한 해 내내 신문지상에 이름을 올려두었던 것이다.그리고 고려대에 진학한 1981년에는 세계청소년선수권 창설대회에 참가해 초대 MVP에 선정되며 미국 프로야구 스카우트들의 관심을 받기도 했고, 동년배들에 비해 월등히 빠른 공을 던지는 유망주였고, 해마다 몇 명씩 야구기자들이 선심 쓰듯 붙여주었던 '제 2의 최동원' 중의 하나였다.하지만 1982년에 서울에서 열린 세계야구선수권대회를 계기로 그는 '제 2의 최동원'이라는 이름을 넘어서게 된다. 선동열은 대학 2학년, 만 19세의 나이로 그 대회 대표로 발탁된 데 이어 컨디션 난조를 보이던 최동원과 김시진을 대신해 미국과 대만, 그리고 사실상 우승을 놓고 맞붙은 일본과의 최종전에 투입됐다. 그리고 그는 그 세 경기를 모두 완투해 3승(평균자책점 1.00)을 기록하며 감격적인 우승을 이끌었고, 결국 대회 MVP에 오르며 새로운 에이스의 탄생을 알렸다.그렇게 일찌감치 거물로 자리매김한 덕분에 1985년에는 프로와 실업리그가 법정싸움까지 벌이는 대소동 끝에 '전기리그는 근신하는' 조건으로 프로무대를 밟았고, 그 해 시즌의 절반만 뛰면서도 평균자책점 타이틀을 따내는 능력을 발휘했다.그리고 1986년, 선동열은 24승을 기록하며 프로무대 슈퍼에이스의 반열에 합류했다. 더구나 그 해 그는 19번이나 완투하는 등 262.2이닝을 던지는 강행군 속에서도 0.99라는 묘한 숫자를 기록지에 남겼는데, 그것은 한국프로야구사상 전무후무한 '0점대 투수의 등장'을 알리는 사건이었다.선동열 역시 최동원에 버금가는 강속구를 던지는 투수였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무기는 명석한 두뇌와 유연한 몸이었다. 그는 타고 난 유연한 몸에 끊임없이 기름을 치고 조이는 부지런하고 신중한 선수였으며, 항상 필요한 곳에 필요한 만큼의 힘을 투입해 필요한 구종의 공을 뿌려 최대한의 성과를 만들어내는 투수였다. /김은식 야구작가

2018-05-14 경인일보

[김은식의 다시 보는 한국 프로야구 명장면·6]1986년, 한국야구 첫 번째 세대교체 (하)

청보 김신부 언더핸드 '느린 공'해태 차동철도 변화구가 주무기프로데뷔 첫해 막상막하 맞대결 하지만 그 해 신인투수들이 보여준 가장 극적인 장면이 연출된 것은, 7월27일 인천 도원야구장이었다. 그 날 청보 핀토스와 해태 타이거즈가 내세운 선발투수는 각각 김신부와 차동철이었고, 두 사람 모두 그 해 한국프로야구 무대에 첫 발을 내디딘 이들이었다.차동철은 치열했던 1981년 광주일고를 이끌고 늘 전국무대에서 일정한 성적을 내던 에이스급 투수였다. 하지만 팀 내에서는 한 해 선배 선동열과 비교되고, 전국무대에서는 박노준, 김건우, 성준 같은 동기생들과 비교되며 조명받지 못했던 처지였다. 건국대를 거쳐 입단한 그 해에도 같은 광주 출신의 김정수에게 밀리며 큰 기대를 받지는 못 하는 처지였다.반면 김신부는 일본 프로야구 난카이 호크스를 거친 재일교포였다. 한국만큼이나 대단한 고교야구 열풍이 불었던 1981년 일본에서 김신부는 거의 혼자 힘으로 고시엔 우승을 이끌며 일본프로야구 신인드래프트에서 긴테스에 전체 1번으로 지명되었던 김의명과 관서지역에서 오랜 라이벌관계를 맺어온 투수. 김신부 역시 난카이에 1차로 지명됐고 김의명과 나란히 2억 원에 가까운(6천만 엔) 초고액의 계약금을 요구하며 자존심 싸움을 벌여 파란을 일으켰던 화제의 주인공이었다.하지만 결국 4년간 1군 무대에서 단 한 경기도 경험하지 못한 채 방출된 뒤 한국으로 건너왔고, 그 시점에서는 대학에서 4년을 보낸 차동철과 똑같은 23세의 동갑이었다. 그리고 어쨌거나 두 사람 모두 한국에서건 일본에서건 '프로야구 1군 무대'는 처음 경험하는 처지였다.그 두 투수가 만났던 7월27일이 그 해를 상징한다고 했던 것은 이유가 있다.그 날 두 투수는 나란히 15이닝을 던졌고, 두 사람 모두 단 한 점의 실점도 하지 않았다. 한국프로야구역사상 전무후무한 '15이닝 완봉 맞대결 무승부경기'였다. 차동철의 기록은 10피안타6탈삼진이었고 김신부의 기록은 8피안타 10탈삼진이었다.김신부는 원래 정통파 스타일에서 사이드암을 거쳐 언더핸드로 전향한 스타일로서, 직구도 시속 130킬로미터를 간신히 오르락내리락하던 '감속구 투수'였다. 그리고 차동철 역시 빠르기보다는 변화구로 승부하는 축이었는데, 특히 투심 스타일의 직구와 포크볼 같은 '떨어지는 공'을 섞어 던지면서 헛스윙을 유도하는 투수였다.나름대로 강했지만 더 강한 이들때문에 묻혔던 선수들. 그리고 힘은 부족했지만 그것을 우회하는 스타일로 버텨냈던 투수들. 그 두 사람은 그 해 나란히 10승을 올리며 기대 이상으로 활약했고, 또 각자의 팀에서 버려진 먼 훗날 LG 트윈스에서 잠시 한솥밥을 먹는 인연으로 재회하기도 했다.세대의 구분이 꼭 10년이나 100년을 주기로 이루어지지는 않는다. 사람이 나고 성장하는 것이 꼭 미리 정한 일정대로 따라가지 않기 때문이다. 1986년, 한국프로야구에는 유례 없이 좋은 투수들이 쏟아져 들어왔고, 그들은 곧 앞서거니 뒤서거니 주축투수로 자리를 잡으며 그동안 괴물 같은 선수 한 명의 출현에 좌지우지되며 널뛰기하던 각 팀의 안정적인 기틀을 잡기 시작했다.그리고 그들에 더해 지난 해 후반기에야 첫선을 보였던 2년차 선동열이 무려 262.2이닝을 소화하면서도 0.99라는 기이한 숫자의 평균자책점을 기록하며 시즌을 압도했다.역시 실업팀을 거쳐 뒤늦게 프로생활을 시작했던 2년차 투수 김용수도 그 해 35세이브포인트를 기록하며 마무리투수 시대를 안착시키기 시작했다. 그렇게 다섯 해째를 맞은 한국프로야구가 한 번의 성공적인 세대교체를 경험했고, 또한 뚜렷한 '업그레이드'를 완성했다.더구나 박노준과 윤학길이라는 선두주자들이 출발선에 걸려 넘어졌음에도, 김건우와 성준, 혹은 김신부와 차동철 같은 2인자 3인자들이 활개 쳐 날아오르며 그려내던 싱싱했던 풍경.바로 그런 것들이 1986년을 더욱 멋진 해로 기억하게 하는 이유들이기도 하다. /김은식 야구작가

2018-05-07 경인일보

[김은식의 다시 보는 한국 프로야구 명장면·5]1986년, 한국야구 첫 번째 세대교체 (상)

'최대어' 朴, 부상·피로누적 침체金, 데뷔 시즌 최다 18승 '신인왕'성준·이상군도 15승·12승 맹활약프로야구가 출범하기 직전이었던 1981년, 한국야구의 메이저무대였던 고교야구 최고의 팀은 단연 선린상고였다. 선린상고의 쌍두마차 박노준과 김건우는 2학년생이던 1980년에 이미 한 해 선배들인 선동열(광주일고)과 이상군(천안북일고)을 때려 부수며 전국적인 선수로 자리잡고 있었다.같은 해 경북고의 성준, 광주 진흥고의 김정수 등이 나름대로 이름을 알리고 있었지만 선린상고 듀오와는 이름값에서 한 단계의 격차를 안고 있었다. 그리고 그 두 사람 중에서도 대중의 관심과 주목을 받은 것은 단연 박노준이었다.박노준은 리틀야구 시절부터 나가는 대회마다 자신의 독무대로 만들었던 '천재'였다. 그리고 고교 2학년이던 1980년에는 이미 초고교급으로 불리던 대형투수 선동열과 황금사자기 결승에서 맞대결해 타자로서는 홈런 포함 3안타 3타점을 뺏는가 하면 투수로서도 5이닝 2안타 1실점으로 광주일고 강타선을 잠재우는 KO승을 거두기도 한 일인자였다.게다가 날카로운 콧날과 턱선에 눈이 잘 보이지 않을 정도로 깊게 눌러썼던 모자와 헬멧이 풍기던 과묵한 카리스마가 '독일병정'이라는 멋진 별명을 얻게 했다.각자의 팀을 우승으로 이끌기 위해 반드시 박노준을 쓰러뜨려야 했던 성준뿐만 아니라, 늘 뒤지지 않은 활약으로 함께 우승컵을 들어 올리고도 늘 초점 흐린 배경으로만 남겨지던 김건우도 마찬가지였다.박노준 하나만을 떠올리며 절치부심했던 성준은 그 해 경북고에 전국대회 3관왕의 영광을 안길 수 있었고, 뒤늦게 투수훈련을 시작한 김건우는 그 해 7월 미국에서 열린 제1회 세계청소년야구선수권대회에서 노히트노런을 기록하며 우승의 주역이 되기도 했다. 하지만 그 해 끝내 무관의 제왕으로 전락한 선린상고는 불운의 절정이었던 1981년 8월26일, 그 모든 영광들을 한 편의 비극에 쓸려 보내고 말았다.그날 봉황기 고교야구대회 결승전에서 홈 슬라이딩을 하던 박노준의 스파이크가 덜 마른 그라운드에 박히면서 발목이 부러지는 사고가 벌어졌다. 이미 팔꿈치에서 뼛조각이 떨어져나간 상태로 전날 완투하는 무리를 감수했던 김건우는 다시 마운드에 올라 투혼을 펼쳤고, 성준이 이끌던 경북고는 '박노준 없는 선린상고에게마저 밀리는 대참극'을 피하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했다.결국 역전에 성공하면서 우승컵과 최우수선수 트로피를 손에 쥔 경북고의 성준은 '박노준을 꺾겠다는 일념으로 땀흘려왔다'고 비장한 소감을 남겼고, 이튿날 우승컵을 들고 박노준의 병실을 찾아 우정의 악수를 건네는 풋풋한 장면을 연출하기도 했다. 그 1981년의 고교야구세대들이 프로무대로 진입한 것이 바로 1986년이었다. 그 해 대학을 졸업한 박노준, 김건우, 성준, 김정수가 각각 OB, MBC, 삼성,해태의 1차 지명을 받고 입단했다. 한 발 뒤에 늘어서있던 김태원, 차동철, 한희민 역시 MBC, 해태, 빙그레 유니폼을 입었다. 게다가 한 해 전에 입단한 소속팀 빙그레가 그제서야 1군 무대에 진입하면서 사실상 함께 데뷔하게 된 이상군이 있었고, 상무를 거치느라 두 해를 거른 윤학길도 있었다.물론 '최대어'는 박노준이었다. 그 박노준을 잡기 위해 서울 팀 MBC와 OB가 신경전과 협상을 벌인 끝에도 합의를 보지 못하면서 처음으로 동전던지기를 해야 했다. 하지만 정작 시즌이 시작되자 예상을 완전히 깨는 양상이 전개되기 시작했다. 대학 시절에 누적된 무리와 부상, 그리고 프로입단 후에도 투수와 타자를 놓고 분명한 결정을 내리지 못한 채 우왕좌왕했던 여파로 박노준은 기대에 훨씬 미치지 못하는 기나긴 침체의 시간을 시작해야 했던 것. 반면 늘 일찌감치 타자로 방향을 잡았다가 해외전지훈련장에서 준비해 간 배트를 모두 부러뜨리는 바람에 '그냥 놀 수는 없어서' 투구연습을 하다가 코치의 눈에 띈 김건우는 역대 데뷔시즌 최다승인 18승을 기록하며 당당히 신인왕에 오르게 된다. 그리고 그 김건우와 고교시절에는 숙적으로, 대학시절에는 절친한 동반자로 맺어졌던 성준이 15승으로 뒤를 이었고, 이상군이 승수는 12에 불과했지만 혼자 243.1이닝을 던지며 3연속 완봉승을 기록하는 등 꼴찌팀 빙그레의 대들보 노릇을 해 찬사를 받았다. /김은식 야구작가

2018-04-30 경인일보

[김은식의 다시 보는 한국 프로야구 명장면·4]1985년 김시진-최동원 맞대결

결정적 순간마다 고개 숙였던 金숙적 崔 상대 7.2이닝 2실점 승리기세 오른 삼성, 그 해 '통합우승'1985년 8월 6일과 7일에는 부산에서, 그리고 하루 건너 9일부터 12일까지는 대구에서 선두 롯데와 2위 삼성의 5연전이 치러져야 했다. 후기리그 일정의 절반을 막 넘어서던 그 시점에서 롯데와 삼성의 승차는 4.5였고, 삼성과 3위 해태의 승차는 2였다. 롯데로서는 2승만 건져도 승차 3.5를 유지하며 선두자리를 굳힐 수 있는 기회였고, 삼성으로서는 더 이상의 격차를 허용하면 2위 자리마저 위협받을 수 있는 위기였다.부산에서의 2연전은 말 그대로 탐색전이었다. 롯데는 1차전에 박동수를 세웠고 삼성은 진동한과 권영호로 맞섰다. 그리고 타격전 끝에 7대 5로 삼성이 승리했지만, 2차전에서도 롯데는 그 해 단 한 번도 승리를 기록하지 못한 이진우를 내세웠고 다시 삼성 황규봉에게 완봉패를 당하며 2연패로 몰리게 된다.더 이상 밀릴 수 없었던 롯데에게는 '언제라도 필요한 1승을 만들어 줄' 구세주 최동원이 있었다. 8월 9일 대구에서 열린 3차전에 롯데가 최동원을 선발로 내보낸 것은 당연한 선택이었다. 하지만 문제는 삼성이 에이스 김시진을 그 경기에 등판시키는 맞불을 놓은 것이었다.만약 그 5연전에서 4승 이상을 잡겠다는 욕심을 가졌다면, 삼성의 김영덕 감독은 그 경기를 버리는 대신 4,5차전에 김시진과 김일융을 투입하는 쪽을 선택했을 것이었다. 잡을 경기와 버릴 경기를 뚜렷이 구분하는 것이 그의 스타일이었기 때문이다.하지만 어차피 선두 팀을 상대로 한 5연승이란 기대하기 어려운 것이었고, 반대로 이미 전기리그를 우승한 삼성 입장에서는 져도 큰 타격이 없을 상황에서 최동원의 기를 꺾어보자는 모험을 걸어볼 여유를 가지고 있었다.먼저 흔들린 것은 김시진이었다. 동갑내기로서 고교시절부터 실업시절을 거치며 라이벌로 불렸지만 늘 결정적인 고비에서 패퇴하며 2인자로 낙인찍혔던 김시진으로서는 필생의 숙적을 상대로 또다시 썩 유쾌하지 않은 시험대에 오른 것이 마음을 흔들었기 때문인 지도 모른다.롯데는 1회 초 경기가 시작되자마자 볼넷을 골라 출루한 데 이어 내야안타로 간단히 한 점을 만들어냈다. 김시진의 슬라이더는 여전히 위력적이었지만 감각이 무뎌진 듯 제구에 애를 먹는 모습이었다. 반면 최동원은 별다른 위기 없이 5회까지 무실점으로 막아냈다.하지만 김시진은 빠르게 컨디션을 회복했고, 2회부터는 칼날같은 제구력을 자랑하는 예전의 김시진으로 돌아가 있었다. 최동원은 주무기인 직구의 구속이 많이 떨어져있었고, 롯데는 5회에 배대웅의 중전안타로 동점을 만든 데 이어 6회에 들어서자마자 5안타를 집중시켜 4점을 뽑아내며 드디어 최동원을 쫓아낼 수 있었다.김시진의 7.2이닝 5안타 2실점 호투에 힘입은 3번째 승리. 삼성은 그 날 경기를 통해 5연전에서 최대목표로 삼았던 3승을 이미 확보한 데다 최동원 마저 깨뜨리며 김시진과 타선의 기를 살려놓는 망외의 소득까지 올릴 수 있었다. 그리고 남은 두 경기에서 롯데가 그런 삼성의 기세를 감당할 수는 없었다.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던 5연승. 결국 우려는 현실이 되었고 4.5경기차는 뒤집혀 삼성이 0.5경기차 선두로 올라서는 결과가 빚어졌다.롯데는 그 충격의 5연패를 시작으로 13일 잠실에서 MBC에게, 다시 16일과 18일에는 광주에서 그 해 내내 쥐고 흔들었던 해태에게마저 반격을 당하며 연패행진을 8로 늘려놓은 채 선두싸움을 계속할 기력을 잃고 만다. 반면 삼성은 5연전이 끝난 뒤 한 호흡 쉬어 8월 25일부터 9월 17일까지 무려 13연승의 아찔한 질주를 벌이며 전기리그에 작성한 최다연승 기록을 경신하게 된다. 최동원을 상대하며 부활한 에이스 김시진은 그 연승 기간 중 무려 6승을 추가하며 최동원과의 통산승수 경쟁에서도 한 발 앞서 나가게 된다.삼성이 후기리그마저 석권하며 그 해 통합우승을 결정지은 것은 그로부터 한 달여 뒤였다. /김은식 야구작가

2018-04-23 경인일보

[김은식의 다시 보는 한국 프로야구 명장면·3]1984년 '마무리 투수' 도입한 OB

年 200이닝 이상 소화 선발 희생 커김성근 감독 투수 능력 끌어 올리려윤석환에 후방 맡겨 로테이션 완성1984년은 한국프로야구사에서 각 팀의 에이스들이 가장 처절한 희생을 감수해야 했던 해였다. 팀당 100경기가 치러지던 그 해 무려 여섯 명의 투수들이 각 팀의 운명을 짊어지고 200이닝 이상을 던져야 했기 때문이다.물론 200이닝 투구라는 것이 투수 혹사의 절대적인 기준이 될 순 없다. 오히려 200이닝을 소화한다는 것은 내구력과 안정성을 겸비한 완성형 선발투수, 즉 진정한 에이스의 자격을 갖추었음을 입증하는 단면으로 인정되기도 한다.하지만 최소한 2000년대 이후의 200이닝이란 온전히 선발투수로서 일정한 등판간격과 투구수 관리를 받으며 만들어내는 기록들이라는 점, 그리고 경기수가 130경기 안팎으로 늘어난 환경이 전제된다는 점에서 30여 년 전과는 다른 이야기가 된다.1984년, 200이닝을 넘겼던 여섯 명의 투수들은 선발등판경기의 절반 이상을 완투했음에도, 대개 선발로서 등판했던 경기의 수는 전체 출장경기수의 절반 정도 밖에는 되지 않았다. 길어야 사나흘에 한 번씩 마운드에 올라 별일 없으면 완투를 해야 했고, 쉬는 날에도 경기 흐름이 묘하다 싶으면 구원 등판해 마침표를 찍어주는 것이 에이스의 역할이라는 데 이견을 가진 사람은 거의 없었다.이런 흐름을 정면으로 거스르는 이단적인 투수운용을 했던 팀이 있었다. 바로 OB다. 그해 라이벌 팀 삼성으로 자리를 옮긴 김영덕 감독의 뒤를 이어 1984년 OB의 2대 감독으로 취임한 김성근 감독은 예나 지금이나 열악한 조건 속에서 최선의 대안을 찾는 데 최고의 능력을 가진 이였다.두 해 전 모두의 예상을 뒤엎고 우승을 할 수 있었던 원동력인 박철순의 허리부상은 쉽게 호전될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었고, '박철순 급'의 에이스란 훈련을 통해 끌어올릴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OB는 원년 멤버 계형철, 박상열과 신예 장호연, 최일언, 김진욱 등 좋은 재목을 많이 가지고 있었지만 그 중에서 박철순의 대역을 할 수 있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김성근 감독은 결국 여러 명의 투수들이 각자 가장 강력한 순간만을 마운드 위에 설 수 있도록 치밀한 분업 체계를 설계했다. 그리고 그 핵심은 '선발로 나서지 않으면서 전천후로 후방지원을 하는 투수'인 윤석환이었다.선린상고 3학년이던 1979년 대통령배 고교야구대회 결승전에서 부산상고의 윤학길과 맞대결해 15-1로 이겨 우승을 이끌며 주목을 끌었던 윤석환은 성균관대를 거쳐 그 해 처음 프로무대로 들어섰다. 좌투수로서 빠른 공과 안정된 제구력도 겸비하고 있었고, 무엇보다도 낙천적인 성격이 두드러지는 선수였다. 신인으로서 연투의 경험이 적다는 것이 약점이었지만, 짧은 이닝만 던지게 한다면 장점들을 모두 살릴 수 있다는 것이 김성근 감독의 판단이었다.그렇게 강속구 투수 계형철과 김진욱, 우리나라에서는 처음으로 포크볼을 던지던 최일언 그리고 제구력으로 승부하는 박상열과 장호연이 돌아가며 선발 마운드에 오르는 '로테이션'이 만들어졌다. 그리고 누구든 경기 중 문제가 생겼을 때는 상부상조하며 서로를 갉아먹는 대신 늘 대기하고 있던 윤석환에게 공을 넘기는 분업체계도 자리를 잡았다.한국야구가 마무리투수의 중요성을 제대로 인식하고, 그럼으로써 에이스들의 어깨를 아껴주기 시작한 것은 그로부터 다시 몇 해가 지난 뒤부터였다. 1980년대 후반의 김용수는 약체팀을 최약체로 떨어뜨리지 않는 것이 마무리라는 점을 증명했고, 90년대 초반의 송진우와 선동열은 강팀을 최강팀으로 끌어올리는 것이 또한 마무리라는 점을 증명했기 때문이다.하지만 만약, 1984년에 OB가 조금 더 전진했다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한두 해라도 일찍 마무리의 중요성을 발견하고, 한두 해라도 먼저 투수들을 '아낀다'는 개념이 자리 잡았다면, 우리 기억 속에 남은 숱한 영웅들의 이름 앞에서 적지 않은 '비운'의 딱지들이 지워질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 때문에 말이다. /김은식 야구작가

2018-04-16 경인일보

[김은식의 다시 보는 한국 프로야구 명장면·2]상대 혼 빼앗는 MBC 청룡의 발야구

김재박·이해창 등 도루 10걸 5명내야수플라이만으로 홈 파고들어기동력 활용 전후기 통합승률 1위 1983년 MBC 청룡은 10개 이상의 홈런을 기록한 타자가 단 한 명도 없었을 뿐 아니라, 3할이 넘는 타율을 기록한 선수조차 단 한 명도 배출하지 못했다. 하지만 도루 10걸 안에 무려 다섯 명의 선수들(김재박, 이해창, 이광은, 이종도, 김인식)이 포함되어 있었고, 청룡이 기댈 수 있는 득점루트는 그들의 다리 뿐이었다.특히 발야구를 이끌었던 김재박과 이해창의 위력은 단지 도루의 개수만으로 표현되기 어려운 것이었다. 그 둘은 숱한 단타를 2루타로, 또 2루타를 3루타로 바꾸어냈고, 조금 깊숙한 내야수 플라이만으로도 3루에서 홈으로 파고드는 명장면을 연출하곤 하는 송곳 같은 선수들이었다. 9월 14일 경기에서의 대역전극도 그 해 팀의 1,2번으로 나란히 출격해 상대 팀의 넋을 빼놓았던 숱한 명장면들의 한 단면이었다.그리고 나아졌다고는 해도 아직은 조직력이 엉성했던 그 시절 대포보다 더 효과적인 무기는 송곳이었다. 타구를 쫓아가기에도 급급했던 수비수들에게 주자들의 발놀림까지 묶으라는 것은 무리한 요구였고, 생각지도 않은 타이밍에 도루나 리터치를 허용한 수비수들은 제풀에 무너지기 십상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한 차원 높은 기동력을 활용해 상대팀 수비진의 빈틈을 집요하게 후벼 파는 움직임으로 청룡은 후기리그 우승을 차지했고, 전후기 통합승률 1위로 기록될 수 있었다.물론 그해의 청룡은 끝이 좋지 않았다. 단지 한국시리즈에서 해태 타이거즈에 1무 4패로 철저히 무너지며 준우승에 머물렀기 때문만은 아니다. 1차전과 2차전에 김동엽 감독은 끊임없이 교체신호를 보내는 선발투수 오영일과 유종겸을 7점과 8점을 내주도록 방치한 채 완투시키는 심술을 부렸다. 선수들도 태업에 가까운 움직임으로 승리에 대한 집념을 포기해버리는 한국시리즈 사상 최악의 졸전을 벌였기 때문이다.뒷날 밝혀진 것은 후기리그 막바지에 선수들을 독려하기 위해 내걸었던 우승보너스 약속이 제대로 지켜지지 않으면서 시작된 갈등 탓에 이미 한국시리즈가 시작되기도 전에 MBC의 선수와 감독과 구단이 산산이 쪼개져 버렸더라는 것이었다. 그 해의 준우승을 끝으로 청룡은 다시는 포스트시즌에 얼굴을 내밀지 못하는 팀이 돼 버리고 만다. 한국시리즈에서 노출되었던 불화 탓에 김동엽 감독이 다시 반 년 만에 옷을 벗었고, 선수들 내부에서도 팀의 주도권을 놓고 갈등을 빚으며 가지고 있던 역량을 흐트러뜨리고 말았기 때문이다. 결국 청룡은 한국야구에 새로운 패러다임을 열었던 팀이었지만, 그 주도권을 계속 유지할 수 있을 만한 자기혁신을 이룰 여력을 가지지 못했다. 그래서 여전히 빠른 팀이긴 했지만, 가장 빠르지도 못하면서 파괴력도 가지지 못한 애매한 팀컬러로 하위권을 전전했고, 결국 1989년을 끝으로 간판을 내리게 된다.만년 꼴찌 팀 삼미 슈퍼스타즈와 비교해보더라도, 요즘 MBC 청룡을 기억하는 사람이 많지는 않다. 차라리 인상적인 꼴찌조차 해본 적이 없어서일 수도 있고, LG가 청룡을 인수해 트윈스로 새출발하던 첫해 우승을 이루어내며 청룡 팬들의 아쉬움마저 흡수해버렸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하나를 더 꼽는다면, 청룡이 정말 청룡다운 모습을 보였던 유일한 해였던 1983년에 유종의 미를 거두지 못하며 기억 속에서마저 '철인 장명부'와 '해태왕조의 개막'에 밀려버렸기 때문일 것이다.하지만 오늘날 '강함보다는 세밀함', 그래서 '한 베이스 더 가고 30㎝를 더 빠르게 선점하는 야구'를 통해 세계의 중심으로 진입한 한국야구의 한 뿌리가 어디에서 나온 것인지는 한 번 쯤 되새겨볼 만하다. 1983년은 장명부가 427.1이닝을 던져 30승을 거둔 해였고, 해태 타이거즈가 첫 우승에 성공하며 왕조시대의 첫걸음을 시작한 해다. 하지만 또 하나 그 해의 프로야구에서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그 해에 MBC 청룡이 '야구에서 점수를 내는 것은 빠른 공과 강한 방망이가 아니라 지능적이고 역동적인 인간의 발'이라는 사실을 널리 알렸다는 점이다. /김은식 야구작가

2018-04-09 경인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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