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공감]'하남시 백년도시위원회 위원장' 김신일 前 교육부총리

김상호 시장이 위원회 의견 존중하겠다는 분명한 의지 밝혀 참여 결심집단지성 발현 통해 갈등 최소화, 위원회 논의 품질 끌어올리는게 핵심3기 신도시 선정 교산지구, 먼저 주민 마음 이해하고 목소리 대변할 것하남시는 김상호 하남시장 취임 이후 중요 정책과 현안 사업을 소수 정책결정자의 판단이 아닌 민간의 자문과 제안을 바탕으로 추진해 나가기로 했다. 민간의 자문과 제안을 할 기구가 바로 '하남시 백년도시위원회'다.대학교수·기업인·시민·시의원·공무원 등 지난해 말 공모를 거쳐 선발된 50여 명의 위원으로 구성된 백년도시위원회는 시 중요정책과 현안사업에 대한 자문 및 제안에 대한 역할을 수행하며 숙의 민주주의를 기본원칙으로 합의적 의사결정을 통해 운영될 예정이다.김신일 전(前) 교육부총리를 위원장으로, 일자리경제위원회(10명), 복지문화위원회(10명), 안전도시위원회(10명), 교통환경위원회(10명), 자치행정위원회(10명) 등 5개 분과로 나눠 운영될 백년도시위원회는 하남시 미래발전에 대한 목표 및 방향성 설정, 공약사항 이행 평가, 중요정책의 자문 형성 과정에 직접 참여해 민선 7기 시장의 개혁 의지를 실천할 방침이다.백년도시위원회를 이끌고 있는 김 위원장과 인터뷰를 통해 백년도시위원회의 의미와 역할을 알아봤다.김 위원장은 백년도시위원회에 대해 "지방자치단체는 단체자치(지방분권)와 주민자치(주민참여)라는 두 가지 부문으로 구성되는데 지난 1987년 지방자치단체가 부활한 이후 30년 동안 단체자치 부문은 상대적으로 많은 진전이 있었으나, 주민자치 부문은 아직 보완할 부분이 많다"며 "문재인 정부도 단체자치보다 주민자치를 강조하고 있고 백년도시위원회 역시 주민참여를 위한 제도적 장치 중의 하나"라고 소개했다.백년도시위원회는 5개 분과 위원회를 운용해 전문성을 높이고 위원회 자체적 판단에 의한 자문활동과 공론화를 포함한 다양한 자문 방법의 활용 등이 보장돼 있어 '강화된 형태의 자문위원회'로 평가된다. 위원회를 어떻게 활용하느냐에 따라 더 높은 수준의 주민참여를 위한 훌륭한 가교역할이 가능할 것으로 기대를 받고 있다."중앙정부에는 각종 위원회가 있고 그 위원회를 통해 국민과 전문가들의 목소리를 듣고 국정을 운영해야 했지만 그렇지 못했다. 지방자치단체도 시장이 권력을 휘두르거나 자기 주변 소수의 얘기만 들으면서 부정부패가 만연해 왔다"고 지적하며 "김 시장이 위원회를 제대로 운영하고 위원회 의견을 존중하겠다는 분명한 의지를 밝혀 위원회에 참여하게 됐다"고 참여하게 된 이유를 설명했다.백년도시위원회가 출범한 지 한 달밖에 되지 않은 점도 있지만, 명확히 어떤 활동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는 지적에 대해 김 위원장은 "기본적으로 위원회는 시장이 부의한 시정 사항을 자문하는 기구이지만, 제3기 신도시 교산지구와 관련한 긴급 현안회의를 진행했던 것처럼 위원회 자체적으로 활동계획을 세워 심의 및 자문할 수 있다"고 말했다.또 "각 분야 전문가들로 구성된 위원들이 참고할 수 있는 100년을 내다보고 하남의 밑그림을 그려보는 역할을 하겠다는 것"이라며 "워크숍 등을 통해 역량을 키워 올 하반기부터는 적극적인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고 덧붙였다.신고리 원자력발전소 5, 6호기 재추진 여부를 결정하면서 널리 알려진 숙의 민주주의를 기초자치단체에서는 최초로 백년도시위원회가 도입해 기대와 함께 우려도 있다는 것에 대해 김 위원장은 "신고리 5, 6호기 재추진 여부를 결정하는 과정에서 숙의 민주주의 구현을 위해서는 충분하지 않다는 지적도 있지만, 한 단계 높은 의사결정이었다는 점은 분명하다"고 설명했다.또 "집단지성의 발현 과정을 통해 갈등을 최소화하자는 것이 숙의 민주주의의 기본목표"라며 "하남시는 원도심과 신도시, 그리고 새로운 인구 유입으로 인한 갈등요소가 많을 수밖에 없는데 이러한 갈등을 해결하는데 숙의 민주주의 활용이 무엇보다 필요하다"고 평가했다.그는 "위원회를 통한 심의는 그 자체로 숙의 민주주의적 성격을 띠는데 위원회의 논의 품질을 어떻게 끌어 올릴 수 있느냐가 핵심으로, 정확한 정보 제공, 개인적인 이해관계에서 벗어난 의견 개진, 안건에 가장 적합한 논의 방법이 관건"이라며 "숙의 민주주의가 정착된다면 행정은 결정자에서 조력자로, 시민사회는 행정의 대상으로부터 정책과정의 참여자로 이동하게 될 것"이라고 전했다.제3기 신도시로 하남 교산지구가 선정된 것과 관련, 찬성과 반대 목소리가 공존하면서 이 문제를 백년도시위원회가 어떻게 풀어갈 것인가에 관심이 높아지고 있는 데 대해 김 위원장은 "먼저 개발제한구역으로 묶여 50여 년 동안 재산권을 제한받았는데 또다시 신도시로 지정된 주민들은 억울한 감정을 가질 수밖에 없다"면서 "먼저 주민들의 마음을 이해해야 한다"고 강조했다.또 "지난번 자문회의에서 시장에게 교산지구 대책을 제안했는데 중앙정부에서 일방적으로 지정했다고 비판만 할 것이 아니라 신속하게 대응해야 할 것과 중장기적으로 대응할 것을 구별하고 하남시의 여러 구성원과 함께 대응에 나서야 한다고 주문했다"며 "신도시에 시민들의 의견이 최대한 반영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위원회의 역할이 될 것"이라고 전했다. 김 위원장은 "개발결과와 관련해서는 시민이 원하는 신도시의 구체적 청사진을 제시하는 것이 중요하다"며 "위원회도 주어진 상황에서 개발과정의 부작용을 최소화하고, 개발의 결과가 최대한 미래지향적인 것이 되도록 도울 것"이라고 말했다.글·사진/문성호기자 moon23@kyeongin.com■김신일 백년도시위원장은▲학력-청주고 졸-서울대 사범대 교육심리학과 졸-서울대 대학원 교육학과 졸-교육학박사(미국 피츠버그대) ▲경력-1993~2003년 교육개혁과교육자를위한시민회의 공동대표-1994~1998년 대통령자문 교육개혁위원-1998년 대통령자문 새교육공동체위원-2000년 동아시아사회교육포럼 회장-2006년 서울대 교육학과 명예교수(현)-2006~2008년 부총리 겸 교육인적자원부 장관-2010~2012년 UNESCO 국제교육상심사위원-2010~2015년 백석대 대학원 석좌교수-2011~2012년 대통령직속 사회통합위원회 위원 ▲상훈-홍조근정훈장(2006)-청조근정훈장(2009)김신일 하남시 백년도시위원회 위원장은 백년도시위원회를 통해 숙의 민주주의로 하남의 미래를 설계하겠다고 강조했다.하남시 백년도시위원회가 첫 워크숍을 열고 첫발을 내딛었다.하남 백년도시위원회 위원들이 제3기신도시로 지정된 교산지구에 대해 설명을 듣고 있다. /하남시 제공

2019-01-22 문성호

[인터뷰… 공감]초등 교과서속 '까만나라 노란추장' 주인공, 농학자 한상기 박사

■영국행 포기하고 아프리카 간 계기는1971년 당시 내전으로 피폐 기근 심각'식량안전으로 국위선양' 서울대 휴직■23년간 현지서 연구생활 성과는카사바·얌 등 품종개량 73개국에 보급석박사 수십명 배출 '고기잡는 법' 교육그의 삶을 거슬러 얘기하면 한편의 위인전이 된다. 실제로 그의 얘기는 1980년대 초등학교 교재 '생활의 길잡이'(3학년 2학기)에, 최근에는 초등학교 6학년 1학기 '국어읽기'에도 소개됐다. 한 출판사가 2001년도에 펴낸 '까만나라 노란추장'이란 책은 그의 얘기를 동화로 만들었는데 지금까지도 아이들에게 큰 공감을 얻으며 47쇄나 발행되기도 했다. 외국 특히 나이지리아에선 '추장(농민의 왕)'으로까지 추대되며 신문 1면을 여러 번 장식하기도 했다. 국제적으로 권위 있는 상까지 수차례 받아 세계적인 학자로 두루 명성을 떨치기도 했다. 그는 바로 농학자 한상기(87) 박사다.슈바이처 박사가 아프리카에서 의료활동으로 사람들을 구원했다면, 한상기 박사는 식물유전육종학으로 이들을 구해냈다. 요즘 세계 곳곳에서 한국의 명예를 드높이는 이들로 나도 모르게 가슴 뿌듯해지고, 절로 자부심이 드는 경험을 하곤 한다. 베트남의 영웅이 된 축구감독 박항서, 빌보드 차트를 석권하며 전 세계적 팬덤을 형성한 BTS(방탄소년단)가 현재를 대표한다면, 한 박사는 1970~80년대 아프리카에서 식량난을 이겨내는데 지대한 공을 세운 인물로 추앙받는다. '한국에서 온 아프리카 성자'라고까지 불렸다.# '일왕불퇴' 각오로 아프리카 광야에 서다1933년 충청남도(청양군 청남면 인량리) 칠갑산 자락에서 한상기 박사는 7남매 중 여섯째로 태어났다. 정산향교의 전교(典校, 교장격 관리자)를 지낸 유학자인 아버지와 자식을 위해 먼 길을 마다 않고 불공을 드리며 헌신하는 어머님 밑에서 그는 엄하게 자랐다. 어릴 때부터 농업에 관심이 많아 식물유전 육종학자가 되고자 서울대 농대에 입학(1953년)했고, 미국 미시간주립대를 유학해 유전육종학 박사학위를 딴 후 1961년부터 서울대 농대 교수로 재직했다. 서른도 채 되지 않은 나이에 그야말로 '탄탄대로'가 열린 것이다. 누가 봐도 명예롭고 선망의 대상인 서울대 교수직."그때(교수직 역임 당시) 나에게 두 갈래 길이 주어졌다. 하나는 영국 케임브리지대학의 초청을 받아 식물유전 육종학을 연구하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가난과 굶주림에 허덕이는 아프리카 사람들의 식량 안전을 위해 나이지리아 이바단에 창설된 국제열대농학연구소로 가는 것이었다." 그는 망설임 끝에 케임브리지행을 포기했다. 가난하고 굶주리는 아프리카인들의 주식작물개량을 위한 연구의 길을 택한 것이다. 서울대 교수생활 10년만인 1971년, 그의 나이 38세였다. 그해 5월 그는 아이들 셋만 데리고(큰 딸은 학교문제로 한국에 남음) 아내와 나이지리아로 떠났다. 직항이 없어 비행기를 2번이나 경유하고 거의 닷새 만에 도착한 곳. 그 당시 나이지리아는 200만명의 희생자를 낸 내전(1967~1970년)이 끝난 직후라 더없이 피폐하고 농토까지 황폐해져 심각한 기근에 시달렸다. 50여만명이 굶어 죽을 정도로 최악의 상황이었다."1971년부터 1994년까지 23년을 나이지리아에서 '일왕불퇴(一往不退, 서산대사가 한 말로 '한번 갔으면 되돌리지 말라'는 뜻)'의 각오로 하루도 결근하지 않고 일하면서 살았다. 데리고 온 아이 셋은 결국 교육문제로 뿔뿔이 흩어지게 됐고, 우리 부부만 나이지리아 연구소 사택에 살면서 외롭고 쓸쓸하고 솔직히 어렵게 지냈다. 일종의 수도생활과도 같았다"고 그는 회고한다. 한 박사는 그곳에서 아프리카 사람들이 주로 먹는 카사바와 얌, 고구마, 바나나 등을 연구해 기존 품종보다 병충해에 강하고 아프리카 땅에서 잘 자라는 품종으로 개량했다. 오랜 연구 끝에 수확량도 세배나 늘었고 기존보다 크기도 훨씬 커졌다. 그곳 사람들도 서서히 굶주림에서 벗어나기 시작했다. 내병다수성 카사바를 만들어 나이지리아를 비롯해 아프리카 73개국(토고, 가나, 카메룬 등) 농민들에게 대대적으로 보급했다.그가 서울대를 떠날 때 총장에게 제출한 휴직계에 써낸 '가난한 아프리카 사람들의 식량 안전에 기여하고 국위 선양을 위해 휴직코자 한다'는 당찬 꿈이 이뤄진 것이다. 1983년에는 나이지리아의 대표 부족 가운데 하나인 요루바족 사람들이 자신들을 위해 헌신한 한 박사를 기려 이키레읍 '추장'으로 추대했고, 대관식까지 치른 이야기는 널리 회자됐다. 추장은 이곳 농민들이 할 수 있는 최고의 예우였던 것이다.■아프리카 경험중 유명해진 일화는나이지리아 한 부족 '추장' 추대해줘헌신 감사 대관식까지… 최고의 예우■반세기만에 귀국, 수원 정착 했는데대학시절 보낸 곳, 고생한 아내 간병마음 달래려 시·서예 '문학상' 받기도# '고기잡는 법' 현지 후학 배출… 그리고 귀국그는 품종개량을 통한 기근 구제에서 멈추지 않았다. 인재육성도 함께 해 나갔다. "배고픈 사람에게 물고기를 잡아주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물고기 잡는 법을 가르치는 것이다. 아프리카 사람들이 순박한 마음으로 서로를 도우면서 풍요롭게 살아갈 수 있도록 이들에게 공부하고 연구할 기회를 열어 달라."그는 국제농업기구에도 도움을 요청했다. 그가 속한 열대농학연구소에서는 아프리카 각국의 농학자 700여명을 훈련시켜 보냈다. 그중 40여명이 석박사들이고, 그중 절반은 한 박사가 직접 지도한 제자들이었다. 1994년 1월 한 박사는 23년간의 생활을 마감하고 아프리카를 떠났다. 이들 스스로 농업을 발전시켜 나갈 수 있다고 확신했기 때문이다. 은퇴 이후 그는 아내와 함께 그동안 떨어져 지냈던 세 아이들과 가까이 살고자 미국 클리블랜드에 정착해 21년을 살았다. 그리고 지난 2015년 40여년의 길고 긴 타국생활을 마감하고 귀국해 큰딸이 살고 있는 경기 수원에 자리 잡았다. 수원은 대학 시절을 보낸 곳이기도 하다."사실 치매에 걸려 근 10년간 허덕이는 집사람을 데리고 한국에 묻히려고 반세기 만에 귀국했다. 수십년을 아프리카 낯선 땅에서 나를 위해 무진 고생하다 아내가 병든 것이다. 내가 보살펴 줘야 한다"는 그는 매일 아내를 위해 기도한다. 그는 무겁고 복잡한 마음을 다잡기 위해 기도와 시, 서예로 달랜다. 그러다 보니 시는 작품(제66회 한국문인 신인문학상 수상)이 됐고 서예는 수준급 실력이다. 기도는 '무아경(無我境, 정신이 한곳에 온통 쏠려 스스로를 잊고 있는 경지)'에 들었을 때 적은 것이 공책 170권 분량에 달한다. 최근에는 그중 내용을 정리해 '나는 나이고 싶다(학자원 펴냄)'란 5권짜리 책을 펴내기도 했다.한국생활 5년차. 44년 전 고국을 떠나던 당시와 비교하면 한국은 천지개벽 수준의 발전이 이뤄졌다. 하지만 청년들을 볼 때면 왠지 모를 안타까움이 든다고 한다. "젊은이들이 물질적, 향락적 사치에 너무 치우치는 것 같다. 남을 너무 의식하다 보니 정작 자신의 본질, 더 나아가 오늘을 있게 만들어준 전 세대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아 아쉽다"고 말한다. 그는 "'그대 아끼게나 청춘을. 오늘도 가슴에 큰 뜻을 품고. 젊은 하루를 뉘우침 없이 살게나'란 스승 류달영 박사의 좌우명을 빌려 젊은이들이 좀 더 자신을 돌아보고 패기를 가졌으면 한다"고 전했다.글/이윤희기자 flyhigh@kyeongin.com 사진/김종택기자 jongtaek@kyeongin.com■한상기 박사는?▲ 1933년 8월 충남 청양군 출생▲ 1950~1953년 대전고▲ 1953~1957년 서울대 농과대 ▲ 1957~1959년 서울대 농학석사, 국내 최초 '잡초학' 연구▲ 1965~1967년 미국 미시간주립대 대학원 식물유전육종학 박사▲ 1971~1994년 아프리카 나이지리아 국제열대농학연구소 구 근작물개량연구원▲ 1982년 대한민국 대통령 표창, 영국 기네스과학공로상 수 상, 나이지리아 이키레읍 추장(농민의 왕)▲ 1984년 국제 구근작물학회 우수봉사상 수상(영국 세계농업 명사록에도 실림)▲ 1989~1994년 미국 코넬대학교 명예교수▲ 1991~1997년 국제 구근작물학회 회장 ▲ 1996년 자랑스러운 서울대인상 개교 50주년 ▲ 2006년 브라질 환경장관 공로상▲ 2009년 영국 생물학회 펠로상 수상▲ 1998~2010년 미국 조지아대학교 명예교수# 저서: '과학도를 위한 통계학(1968, 집현사)' '신비의 땅 아프리카(1990, 교육과학사)' '아프리카 아프리카(1999, 생활성서)' 'Africa 아프리카 사람 아프리카 격언(2010, 풀과 별)' '아프리카, 광야에서(2014, 따뜻한손)' '500년간 잊혔던 뿌리와 정신 찾다(2016, 학자원)' '나는 나이고 싶다. 5권 시리즈(2018, 학자원)'가난하고 굶주린 아프리카인들의 주식작물 개량을 위해 연구의 길을 선택한 한상기(87)박사가 23년간 아프리카에서 겪었던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아프리카인들과 어울리는 한상기 박사. /한상기 박사 제공

2019-01-15 이윤희

[인터뷰… 공감]'마당발 시민기자' 약산초 문경숙 돌봄교사

#인천 방과후 보육교사협회 창립 주도퇴직금 회피 꼼수계약·일방해고 만연2009년 첫 회장직 맡아 처우개선 노력#20년 한곳 근무, 아이들 교육 자세는가르치는 게 아닌 함께 살아간다 생각제자 찾아와 "선생님과 같은 길" 뿌듯문경숙(54)씨가 경인일보 지면에 처음 소개된 건 인천 초등방과후보육교사협회 회장을 맡았던 2010년 2월 22일자였다. 당시 신문에는 협회 창립 1주년을 맞아서 길지 않은 인터뷰를 통해 초등학교 방과후 보육교사의 처우 개선과 복지향상을 위한 활동을 지속적으로 진행할 것이라는 문씨의 이야기가 담겼다.이후에도 문화면과 사람들면을 통해 다양한 문씨의 활동이 단편적으로 소개됐다. 경찰인권영화제에 영화를 출품했다는 내용부터 지난해에는 인천의 섬들을 찾아 사진과 영상으로 담고 있는 '섬 사랑꾼'으로서의 활동과 지역의 오래된 건물과 삶의 흔적을 기록하는 활동 등이 지면에 담겼다.문씨의 명함 앞면에는 방송통신위원회 시청자미디어재단 인천센터 시청자 제작단장이라는 직함과 함께 5개의 직함이 더 있으며, 뒷면에는 22개의 다른 직함이 적혀 있다.다양하게 전개한 활동에 대한 소회와 새해를 맞아 세운 계획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 지난 7일 인천 약산초등학교 방과후 돌봄 교실을 찾았다. 겨울 방학 기간 돌봄 교실을 이용하는 학생들이 모두 돌아간 오후 5시 이후였다.문씨는 약산초등학교 돌봄 교사로 20년째 근무하고 있다. 1999년 우리나라에 돌봄 교사 제도가 시작된 이후부터 쭉이다. 돌봄 교사라는 명칭도 수차례 바뀌었고, 최초 일당제에서 월급제, 연봉제까지 급여 체계도 변하였고, 처우도 파견직에서 1년 계약직, 무기 계약직으로 변화한 모든 과정을 몸소 겪었다. "2005년만 해도 1년 계약 직제였을 때였어요. 당시 1년을 채우면 퇴직금이 발생하기 때문에 3월 2일부터 이듬해 2월 28일까지 계약하는 등 꼼수가 만연할 때였죠. 1년 계약이다 보니 계약 후 일방적으로 해고되는 경우도 있었고요. 때문에, 5년 정도 준비해서 2009년 인천 초등방과후보육교사협회를 창립했습니다. 저는 2년 임기의 회장을 역임한 후 다른 분들이 이어서 협회를 운영해 주고 계시죠. 현재 전국 단위로 구성돼 인천지부로 활동을 이어가고 있습니다."아이들을 가르치는 게 아닌 함께 살아간다는 의미로 아이들을 대하고 있다는 문씨는 자존감을 키워주기 위한 활동을 많이 했다고 한다. "수년 전 대학교에 갈 나이가 된 제자가 찾아와서 선생님과 같은 길을 가고 싶어서 사회복지학과에 간다고 했을 때 커다란 행복과 뿌듯함을 느꼈습니다."돌봄 교사 외의 일들로 화제를 옮겼다. 문씨는 어떤 활동이든 기본 10년은 하겠다는 생각으로 시작한단다. 또한, 새롭게 시작하는 일로 인해 기존의 다른 일을 제대로 처리 못 하는 상황을 만들지 않기 위해 더욱 열심히 해 왔다고 했다."주위의 우리 세대분들을 봤을 때, 인터넷을 빨리 접한 사람들은 다양한 경험을 하면서 살고 있어요. 반대의 경우는 활동 반경이 줄어드는 것 같아요. 2004년 인천시에서 인터넷 신문을 시작할 때 시민기자 활동에 참여했습니다. 1년 후 최우수 활동가로 선정되어서 일본으로 연수도 다녀올 수 있었습니다. 이후 인천을 비롯해 수도권 지역의 지자체와 기관 등의 인터넷 매체와 블로그 기자단이 더욱 많아졌죠. 시작하는 매체들에선 기존에 열심히 활동하고 있는 제게 연락해왔고 새롭게 꾸려질 단원들을 이끌어주는 역할을 해달라는 요청을 했습니다. 그렇게 활동 반경이 넓어졌습니다."#수 많은 취재활동 기억에 남는 일은요절 음악가 권혁주 마지막 공연 촬영영상 본 어머니가 '고맙다' 댓글 울컥#작업한 자료의 양과 활용 계획은영상 1천여개… 사진은 수십만장 찍어좋아서 한 일, 공적사용 대가없이 제공문씨는 KBS와 MBC, SBS의 시민 리포터도 거쳤다. 특히 SBS의 U포터로 활동할 때 국내에 서서히 동영상이 나오기 시작했단다. 2008년 문씨는 작은 디지털 카메라로 첫 동영상을 제작했다. "2008년 5월 말 바다의 날 행사 때 인천에서 독도함 공개 행사가 있었어요. 당시 신문에 나온 독도함 관련 기사를 통째로 외워서 1분30초 동안 배 주위를 돌면서 리포팅 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이후 지역의 문제점들을 찍어서 U포터에 올리는 작업을 했고, 그 중 전문 방송기자가 취재해 기사화된 것들도 다수 있습니다."문씨는 이같이 취재하고 기록하는 작업이 지금도 재미있다고 했다. "새로운 분들을 만나는 게 재미있어요. 저와 관계도 없는 남동산단에 가서 외국인 노동자를 만나고, 그들을 도와주는 분들을 알게 되면서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이 넓어졌어요. 아마도 이 교실에만 있었으면 새로운 것을 볼 수 없었을 거예요. 또한 인천 초등방과후교사협회도 만들 생각을 못 했을 겁니다."문씨는 인천의 박물관 자원봉사를 하면서 매주 토요일 서울에선 궁궐 지킴이 활동을 펼쳤다. 이같은 활동을 하다가 2012년 인천시민 섬 조사단에 지원한 이후 섬에 관심을 갖게 됐다. 2014년 8월 인천시청자미디어센터가 개관하면서 혼자 깨우쳤던 영상 기법을 기초부터 다시 배웠다. 센터에 편집실도 있고 해서 더욱 수월하게 작업을 할 수 있었다. 지금까지 작업한 영상과 사진 작업들을 수치로 개량화 할 수 있는지 물어봤다. "영상을 저장하는 홈페이지가 있는데, 어제 확인하니 1천37건이었어요. 사진은 섬에 한 번(1박2일) 들어갈 때마다 600컷 정도는 찍으니 수십만장은 될 거예요."기억에 남는 기록들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요절한 바이올리니스트 권혁주의 인천 공연(2016년 8월 부평아트센터)을 우연한 기회로 촬영하게 됐어요. 그러고 나서 2개월도 안돼서 부산에서 공연을 앞두고 숨을 거두죠. 제 영상이 마지막 공연 영상으로 여겨졌어요. 의미 있을 이 영상을 유튜브에 올렸는데, 연주자의 어머니께서 댓글을 달아주셨어요. '이렇게라도 아들의 모습을 볼 수 있고 기억해 줘서 고맙다고'요. 글을 보는 순간 울컥했죠. 그리고 송암 박두성 선생의 장녀 수채화가 박정희의 인터뷰도 영상에 담았는데 얼마 후 돌아가셨어요. 문갑도에서 뵈었던 마지막 남자 만신이었던 김현기 만신의 생전 마지막 모습도 담을 수 있었습니다."이러한 활동을 통해 문씨는 자신이 좋아서 하는 기록이지만, 나중에 다른 누군가에게 좋은 자료가 될 것이라고 느꼈다고 한다. 자료들은 유튜브에 올린 것도 있고 외장 저장소에 있는 것도 있다. 방송에서 공적으로 사용 요청하면, 대가 없이 제공하고 있다. 문씨의 향후 계획에 대해 들어봤다."돌봄 교사로서의 활동은 정년까지 잘 마무리하고 싶어요. 섬의 변화 모습과 주민의 삶을 기록하면서 섬에 사람들이 많이 찾게 하고 그와 함께 섬 환경과 문화의 보존에 대해서도 지속적으로 이야기할 것이고요, 우리 주변에서 사라지는 것들에 대한 기록도 평생 해 나갈 계획입니다."문씨에게 인천은 어떤 곳이냐고 물으니 "제주도는 태어난 곳이라면 인천은 저에게 굉장한 기회를 주고 키워준 곳"이라고 했다. 몰랐던 재능을 깨우쳐주고 경험할 수 있게 해줬다는 것이다. 이어서 "제주도에 있었어도 글 쓰는걸 좋아해 시민기자 활동은 했겠지만, 주변에 대한 소중함을 알려주고 관심을 갖게 해준 곳은 인천이다. 개항의 역사도 있고, 이와 같은 역사의 흔적을 고민 없이 새 것으로 대체하는 건 아쉽다" 고 덧붙였다.자비를 들여서 영상과 사진을 제작하고 사진과 글로 구성된 책자까지 만드는 작업을 10년 넘게 펼쳐나가고 있는 문씨와 인터뷰를 마무리하고 학교를 나서니 이미 어둠이 깔려 있었다. 어두운 복도를 걸어나와서 운동장을 가로 질러 오는데 "사람의 감성은 옛것으로 돌아갑니다. 삶도 본래의 사람 본성으로 돌아가죠. 디지털화되고 AI(인공지능)가 나오더라도 사람의 손길이 닿는 게 가장 가치있는 것이 될 것입니다. 그런 걸 알리기 위해 기록하는 것입니다. 사회관계망서비스망을 통해 올려 누군가는 관심을 갖는 계기가 된다면 더할 나위가 없겠습니다"고 한 문씨의 말이 귓가를 맴돌았다.글/김영준기자 kyj@kyeongin.com 사진/김용국기자 yong@kyeongin.com■문경숙 선생님은?제주도에서 태어나 어린시절을 보내고 동생들 뒷바라지를 위해 중학교를 중퇴하고 상경해 서울의 작은 공장에서 일을 하면서 검정고시로 중·고교 과정을 마쳤다. 결혼 후 인천으로 이주해 초등학교 돌봄교사로 20년째 일하고 있다. SBS U포터, 궁궐지킴이, 경인방송 라디오의 시민리포터 등의 활동을 했다. 현재 '9회말 투아웃'을 쓴 작가이자 다큐멘터리 감독, 학산문화원 문화PD, (사)황해섬네트워크 섬해설사, 해반문화사랑회 문화재지킴이 지도교사, 인천시청자미디어센터의 제작단 단장과 미디어스카우트봉사단 단장을 맡고 있으며, 못다한 공부를 위해 방송통신대에 재학 중(현재 휴학)이다.2019년 새해 벽두에 만난 문경숙씨는 "섬을 기억하는 주민들이 줄어들고, 풍경들도 점점 바뀌고 있는 안타까움에 섬을 기록하는 작업을 7년째 하고 있고, 앞으로도 지속할 계획"이라면서 "인천의 오래된 건물이나 시민의 삶 등을 기록하는 작업들이 시간이 지나면 누군가에게 필요한 기록이자 역사가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사진/김용국기자 yong@kyeongin.com

2019-01-08 김영준

[인터뷰… 공감]'32회 기독교문화대상 수상' 고된 민중 어루만지는 정세훈 시인

가난에 고교진학 포기, 30대까지 공장 근로자 생활 '직업병' 앓기도검정고시 준비중 '글쓰기 꿈' 되살려… 주변 이야기 닥치는대로 써거대조직 대기업 노조, 비정규직·일용직 등 소외된 이들 대변 안해공단마을 아이들 동시집 준비… 열악한 삶 공감하며 더불어 살아야'아프지 말라.'정세훈(63) 시인이 시를 쓴 지 30년을 맞아 지난달 2~15일 인천민예총 문화공간 해시에서 연 시화전의 제목이다. 그는 민예총 기부를 위한 기금 마련 차원에서 서울과 충남 홍성을 거쳐 인천에서 시화전을 개최했다. 사전작업으로 올 9월 발간한 시화집 '우리가 이 세상 꽃이 되어도'에 쓴 시인의 말 첫 문장도 '아프지 말라'. 시인이자 노동자였던 그의 작품세계를 함축하는 말이라 할 수 있다. 다음은 정세훈 시인이 2016년 쓴 시집 '몸의 중심'의 표제작인 '몸의 중심' 전문이다. "몸의 중심으로/ 마음이 간다/ 아프지 말라고/ 어루만진다// 몸의 중심은/ 생각하는 뇌가 아니다/ 숨 쉬는 폐가 아니다/ 피 끓는 심장이 아니다// 아픈 곳!// 어루만져 주지 않으면/ 안 되는/ 상처난 곳// 그곳으로/ 온몸이 움직인다"정세훈 시인은 최근 이 작품으로 기독교계가 문화예술인에게 주는 가장 권위 있는 상인 '제32회 기독교문화대상' 문학부문 수상자로 선정됐다. 시상식은 내년 2월 28일 서울 대학로 한국기독교성령센터 황희자홀에서 열린다. 기독교문화대상 심사위원회는 심사평에서 "정세훈 시인은 시 '몸의 중심'에서 삶의 현장 속, 끝 모를 깊은 고통의 심연을 노동시어로 지상으로 퍼올렸다. 정세훈의 시는 가난하고 병든 노동민중을 문학세계로 환원해 예수 구원의 절대성을 추구했다"고 선정 이유를 밝혔다.왜 '아프지 말라'고 끊임없이 외칠까. 지난 24일 인천문화예술회관 근처 카페에서 만난 정세훈 시인은 답변에 앞서 최근 태안화력발전소 컨베이어 벨트에 끼여 숨진 비정규직 노동자 고(故) 김용균 씨가 안타깝다는 말부터 꺼냈다. 정 시인은 "김용균 씨가 일하던 공간이 내가 청년 시절 일했던 공장의 공간과 닮았다"며 "노동문학은 2000년대 들어서 거의 없어지다시피 했는데, 공단마을 같은 곳을 가보면 노동자의 삶은 더 나아지지 않은 것 같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김용균 씨를 보면 아픈 민중들에게 아프지 말라고 시를 통해 계속 보듬을 수밖에 없는 이유가 나온다"고 했다. 그는 시를 쓰기 시작한 30대 초반까지 온전히 노동자로 살았다. 일제강점기 사할린에서 광부로 강제노역을 했던 아버지는 고향인 충남 홍성에서도 광부로 일했다. 어머니는 한국전쟁 때 정세훈 시인의 두 형을 잃고 오랫동안 마음의 병을 앓았다. 아버지는 월급 대부분을 아내의 약으로 쓴 아편을 사는 데 썼다. 가난 때문에 고등학교 진학을 포기한 그는 16살인 1972년부터 서울, 부산 등지를 돌며 조리보조, 옷가게 점원 등을 했다. 이후 정세훈 시인은 서울 중랑천에 있는 '에나멜 동선'을 만드는 소규모 공장에 취직했다. 동선에 열처리를 해 도료로 피복을 입히는 작업이었는데, 고열을 유지하기 위해 썼던 보온재가 석면포와 석면가루였다는 것을 몸이 아프고 나서야 뒤늦게 알았다.30대 초반 인천 부평 청천동에 있는 공장에서 일하면서 인근 공단마을에 살기 시작했다. 정세훈 시인의 아내도 부평4공단에서 일한 여공이었다. 그는 "20대 후반부터 몸에서 진물이 나고 피부가 벗겨지는 이상증세가 나타나기 시작했고, 그 무렵 교회에 나가면서 성경책을 접했다"며 "결정적으로는 32살 때 검정고시를 준비하면서 한용운의 '님의 침묵', 이육사의 '광야'를 읽고, 잊고 있던 글쓰기에 대한 꿈이 되살아났다. 그때부터 노동자, 공단마을 같은 주변 이야기를 닥치는 대로 시로 썼다"고 말했다. 공장에서는 포장지에다 틈틈이 썼고, 퇴근해서는 늦은 밤까지 원고지에 써내려 갔다. 1988년에 비문학 잡지에 시가 실리기도 했고, 1989년에는 '노동해방문학'에 작품이 발표되기도 했다.그해 정세훈 시인은 주변의 도움으로 첫 시집인 '손 하나로 아름다운 당신'을 냈다. 이듬해에는 창작과비평사에서 두 번째 시집 '맑은 하늘을 보면'을 출간했다.노동자 시인으로 꾸준히 활동해온 그에게 2000년대 초반 '직업병'이 엄습했다. 정세훈 시인은 "진폐증이라는 진단이 나왔는데, 공장에서 썼던 석면이 원인일 것이라고 생각했다"며 "2006년에는 합병증이 와서 흉부외과와 신경외과가 동원되는 대수술을 받았다"고 했다. 이때 유고시집처럼 낸 것이 여섯 번째 시집 '나는 죽어 저 하늘에 뿌려지지 말아라'이다."나는 죽어 저 하늘에 뿌려지지 말아라/ 저 하늘의 해와 달과 별 무리로 뿌려지지 말고/ 뿌려지어 뿌려지어/ 외롭지 않은/ 이 산천에 뿌려지거라// 내 주검이 이 산천에 뿌려지어/ 곰삭은 흙이 되면/ 이름 모를 초목들과 이름 모를 들꽃들이 달려오고/ 때로는 이름 모를 벌레들이/ 쓴 입맛을 다시며 고단하게도 하겠지"('나는 죽어 저 하늘에 뿌려지지 말아라' 中, 2006)오랜 투병생활을 마친 시인은 더욱 적극적으로 사회참여활동을 펼쳤다. 계속해서 소외된 사람들의 '아픔'을 다독이고 있다. 그는 여덟 번째 시집 '몸의 중심'의 시인의 말에서 대기업 노조에 대해서도 "거대한 조직의 힘으로 자신들의 목소리를 내는 것에는 자본 못지 않게 혈안이 되어 있다. 그렇지만 심화되어가고 있는 중소기업, 하청, 비정규직, 특수고용, 일용직 등의 중·하류 노동자들을 대변하지 않는다"며 쓴소리를 아끼지 않았다. 이와 관련, 정세훈 시인은 "내가 영세한 공장에서만 일해봐서 비정규직처럼 소외된 노동자들의 목소리를 힘주어 내는 것"이라고 했다.정세훈 시인은 내년에 공단마을 아이들을 소재로 한 동시집 출간을 준비하고 있다. 제목 또한 '공단마을 아이들'로 지었고, 동명의 시도 수록될 예정이다. 정세훈 시인은 "산업화 때 공단마을에 살았던 아이들은 지금쯤 40대를 넘어 50대가 되었을 것이고, 4차 산업으로 이행돼 가는 지금도 공단마을에서 극빈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어린이들이 있다"며 "소수의 공단마을 어린이들 정서를 담은 동시집이 한 권도 출간되지 않아 안타까웠다"고 말했다.주변에서는 대다수 어린이들이 공감할 수 있을지 의문이 든다며 동시집을 내는 것을 극구 만류했다고 한다. 그는 "문학은 반드시 선제적으로 다수의 공감만을 덕목으로 하는 것은 아니다"며 "많은 어린이들이 동시집을 통해 열악하기 그지없는 환경에서 자라는 소수의 또래들 삶에 공감하고, 더 나아가 더불어 살아갈 수 있을 것이라고 확신한다"고 했다.글/박경호기자 pkhh@kyeongin.com 사진/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정세훈 시인은?1955년 충남 홍성에서 태어났다. 16세 때부터 20여 년간 소규모 공장을 전전하며 노동자 생활을 하던 중 1989년 '노동해방문학', 1990년 '창작과비평'에 시를 발표하며 문단에 나왔다. 시집 '손 하나로 아름다운 당신'(1989), '맑은 하늘을 보면'(1990), '저별을 버리지 말아야지'(1992), '끝내 술잔을 비우지 못하였습니다'(1994), '그 옛날 별들이 생각났다'(1998), '나는 죽어 저 하늘에 뿌려지지 말아라'(2006), '부평 4공단 여공'(2012), '몸의 중심'(2016) 등이 있다. 또 시화집 '우리가 이 세상 꽃이 되어도'(2018), 장편동화집 '세상 밖으로 나온 꼬마송사리 큰눈이'(2000), 포엠에세이집 '소나기를 머금은 풀꽃향기'(2002) 등을 간행했다. 인천작가회의 회장, 박영근시인시비건립위원회 위원장, 리얼리스트100 상임위원(대표), 한국작가회의 이사, 제주 4·3제70주년범국민위원회 공동대표, 한국민예총 이사장 대행, 소년희망센터건립추진위원회 위원 등을 역임했다. 현재 인천민예총 이사장, 인천민주화운동기념관 건립공동준비위원장, 박영근시인기념사업회 운영위원, 소년희망센터 운영위원, 위기청소년의좋은친구어게인 이사 등으로 활동하고 있다.기독교계가 문화예술인에게 주는 가장 권위 있는 상인 기독교문화대상 문학부문을 수상한 정세훈 시인이 지난 24일 인천종합문화예술회관에서 "많은 어린이들이 동시집을 통해 열악하기 그지없는 환경에서 자라는 소수의 또래들 삶에 공감하고, 더 나아가 더불어 살아갈 수 있을 것이라고 확신한다"고 밝히고 있다.

2018-12-25 박경호

[인터뷰… 공감]'아트플랫폼 인천서점' 설계한 이의중 건축재생공방 대표

#'인천서점' 구조가 참 독특한데사하라인들의 전통 주거지 모티브오롯이 책에 집중 안락한 흙집으로#고쳐쓰는 '재생건축' 결심 계기는유년 보낸 잠실동네 전면철거 상실감성급히 없애고 또 지으면 기억 잃는 듯인천 관련 책만을 모아 놓은 '인천 서점'이 인천시 중구 신포동 '인천아트플랫폼'에 둥지를 틀었다. 인천을 소재로 한, 인천 사람이 주인공인, 그야말로 '인천 책'의 집합소다. 서점의 테마도 특별하지만 서점 안 구조가 참 독특하다. 도톰한 흙집이 유리 방 안에 떡하니 자리 잡은 모양새다. 서점 벽면이 유리로 돼 있는 터라 바깥에서 안이 훤히 들여다보이는데도, 마치 요새처럼 생긴 황토색 서가(書架) 안으로 쏙 들어가면 안락하기 그지없다. 흙과 나무 냄새, 책 냄새가 무뎌질 때쯤이면 어느새 서점의 분위기와 책 속에 푹 빠져 있는 자신을 발견할지도 모른다. 서점은 모로코의 아틀라스(Atlas) 지방에 사는 사하라인들의 전통 주거지 '아이트 벤 하두(Ait-Ben-Haddou)'의 크사르(Ksar·요새)를 모티브로 꾸며졌다. 아이트 벤 하두는 건조한 사막 위에 있는 주거지로, 마을 전체가 방어벽으로 둘러싸인 요새 도시다.이곳을 설계한 건축가 이의중(39·사진) 건축재생공방 대표는 "서점의 4곳 벽면이 유리로 돼 있어 따가운 직사광선이 내리쬐는 여름엔 사막처럼 더운데, 이곳을 찾는 사람들이 직사광선을 피해 휴식을 취할 수 있는 공간으로 설계했다"고 했다. 그는 또 "햇빛이 서가 사이로 난 틈으로 들어오기 때문에 빛이 움직이는 것에 따라 시간의 흐름을 자연스럽게 인지할 수 있는 것도 이곳만의 특징"이라고 덧붙였다.이 대표는 이어 "책이 인테리어 장식용으로 쓰이는 북 카페 같은 모습으로 만들고 싶지 않았다"며 "인천 서점이라는 특징을 살려 오롯이 서적과 콘텐츠에 집중해 안락한 흙집에서 책을 읽는 듯한 느낌을 주고자 했다"고 설명했다.흙벽 사이로 뻗은 서가는 작은 골목길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어느 곳으로 들어와도 한데 만날 수 있는 작은 마을 같기도 하다. 이의중 대표는 '인천 책'만을 위한 첫 서점인 만큼 인천을 닮은 서점을 만들고자 했다고 한다. 그는 "여러 사람들이 서가 골목 사이사이로 들어오거나 나갈 수 있고 그러다가 마음이 맞는 사람끼리 앉아서 독서 모임도 꾸릴 수 있도록 설계했다"며 "밖에서 보면 배타적인 것처럼 보여도 다양한 사람이 만나 섞여 사는 모습이 꼭 인천을 닮았다"고 말했다.이의중 대표는 오래된 건축물에 '숨'과 '이야기'를 불어넣는 명실공히 '건축 재생 전문가'다.오래된 건축물을 부수고 다시 짓는 것이 아니라, 오래된 건축물에 가치를 부여해 살만한 곳으로 재탄생시키는 것이다. 여기에 지나간 역사, 사람들의 이야기를 덧대는 것은 덤이다. 이의중 대표가 있는 아카이브 카페 '빙고(氷庫)'는 그의 건축철학이 담긴 첫 작품이다. 1920년에 지어진 얼음 창고를 리모델링해 1층은 카페, 2층은 건축공방 사무실로 꾸려 2015년 말 오픈했다. 카페 빙고는 최근 국책연구기관 AURI(건축도시공간연구소)로부터 '건축자산 활용 우수 사례'로 꼽히기도 했다. 이밖에 1965년에 지어진 산업시대 쪽방형 여관을 개조해 만든 '인천여관X루비살롱', 1930년대 일본식 벽돌창고를 재생한 인천영상위원회 커뮤니티 공간 역시 그의 작품이다.이 대표는 "근대 건축 양식은 아직 '이렇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의 시간이 지나지 않았는데 애경사처럼 필요 없다고 없애고 새로운 건물을 짓는 건 성급한 판단일 수 있다"며 "빙고 카페 역시 최근 문을 닫고 다시 의미 있는 공간으로 만들기 위해 지역의 작가들과 머리를 맞대고 있다"고 말했다.이 대표가 이렇게 '고쳐 쓰는 건축'을 하겠다고 결심한 것은 유년 시절부터였다. 그는 서울 잠실에서 나고 자랐다. 그가 살던 잠실 주공 저층 아파트는 전면 철거되면서 한순간에 사라졌다. 재건축이 되면서 부동산 가치가 10배 이상 올라 부모님 세대야 좋았을지 몰라도, 그에겐 큰 '상실감'을 느낀 순간이었다고 한다. 이 대표는 "친구들과 유년시절을 보낸 놀이터, 떡볶이집, 마을 공동체 모두가 송두리째 사라져버려 마치 기억을 잃어버린 것만 같았다"고 당시를 회상했다.#안정적 직장 버리고 인천 온 이유오래된 자산 많고 역사적 배경 풍부군집 아닌 중·동구 퍼져 분포 매력적#바람직한 '원도심 재생정책'이란관주도 진행, 형식적 시민 소통 그쳐기한없이 세대 이어가며 가치부여를대학에서 건축학을 전공한 이의중 대표는 '재생 건축'이라는 화두를 잡고 2004년 서울의 한 디자인 사무실에 입사했다. 그러나 그는 건축물의 '비포(Before)'와 '애프터(After)'가 확실해야 했던 당시 분위기에 절망하고 결국 1년 만에 사무실을 나와 2006년 일본 유학길에 올랐다.그는 일본 유학 시절 도시재생의 대표 도시인 오카야마 현 쿠라시키(Kurashiki)에서 일본의 재생공방들과 함께 일했다. 도시 미관지구와 전통보전지구의 200~300년 된 건축물을 재생하는 프로젝트를 성공적으로 수행하는 성과를 거뒀다. 이 대표는 "1천 년 이상 된 건축물이 모여있는 일본의 오래된 마을을 답사하며, 건축물이 문화재적 가치가 있다고 쓰지 않는다면 '박제된 마을'에 그쳐 숨이 끊긴다는 것을 배웠다"고 말했다. 그는 일본에서의 다양한 경험을 통해 "건축물은 잘 쓰는 게 잘 지키는 것"이라는 철학을 안고 2012년 한국으로 다시 돌아왔다.2012년은 한국이 '도시재생'이라는 정책을 막 도입했을 시기였다. 그 덕에 이 대표도 LH(한국토지주택공사)에서 국토부 도시활력증진지역 개발사업 담당 연구원과 AURI(건축도시공간연구소) 국토부 도시재생 선도사업 담당 연구원으로 2년 남짓 일했다. 하지만 당시 정부의 재생 정책은 여전히 재개발 쪽에 치중할 때였다. 안정적인 직장을 박차고 나와 연구원 시절 답사했던 현장 중 가장 흥미로웠던 도시인 '인천'에 뿌리를 박기로 했다. 2015년 카페 '빙고'는 그렇게 다시 태어났다.이 대표는 "인천은 오래된 건축 자산이 많고 역사적 이야기가 많은데도 가치가 저평가돼 있다"며 "다른 지역의 경우 오래된 건축물이 한데 군집해 있는 것에 반해 인천은 중·동구 지역으로 분포돼 있단 점도 매력적이었다"고 말했다.그는 재생건축을 하는 건축가로서 최근 인천시에서 중점적으로 추진 중인 '원도심 도시재생' 정책에 대한 소신도 이야기했다.이 대표는 "내항재개발, 개항창조도시 사업을 앞두고 최근 에코누리호를 타고 시민들과 내항을 둘러봤는데 물고기가 살만큼 물이 깨끗하다"며 "인천 시민들이 드디어 바다를 만지고 느낄 수 있는 공간이 생긴다는 것은 매우 의미가 깊은 일"이라고 말했다. 이의중 대표는 그러면서도 "이러한 의미 있는 사업이 너무 관 주도로 진행되고 시민과의 소통이 형식에 그치거나 잘 알려지지 않은 채 진행되고 있다"며 "시민들이 직접 들어가서 걸어보고 상상하고 제안하는 과정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는 또 "개항창조도시의 거점 사업인 '상상플랫폼'을 대기업이 운영하게 되는 방식이나 제물포구락부에서 술을 파는 것 역시 충분히 좋은 아이디어가 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시에서 먼저 아이디어를 일방적으로 내세운 것이 아쉽다"고 말했다.이 대표는 '도시재생' 사업의 기한을 정해두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한 세대가 가치를 부여하면 그다음 세대가 고민해 다시 만들어나가는 것이 '도시'라는 게 그의 철학이다.이의중 대표는 "우리가 현재 생각하는 가치를 후대에 억압해서는 안 되고, 우리가 보전할 수 있는 부분은 잘 갖춰놓고 다음 세대가 또 이야기를 부여할 수 있는 여지도 만들어야 한다"며 "앞으로도 인천에서 다양한 건축공방을 하는 사람과 후배들이 모여 따로, 또는 같이 재밌는 이야기를 만들고 싶다"고 말했다.글/윤설아기자 say@kyeongin.com 사진/김용국기자 yong@kyeongin.com■이의중 대표의 경력과 대표작품▲ 2007~ 2009 일본(시라가와코)/중국(왕가대원) UNESCO세계문화유산 조사단(문부과학성)▲ 2009~ 2012 쿠라시키 건축공방 나라무라 설계실(건축문화재 복원 및 건축재생)▲ 2012~ 2013 LH 한국토지주택공사(국토부 도시활력증진지역 개발사업 담당 연구원)▲ 2013~ 2014 AURI 건축도시공간연구소(국토부 도시재생 선도사업 담당 연구원)▲ 2015~ 현 건축재생공방 대표(건축자산을 활용한 건축재생)- 인천 아카이브 카페 빙고(근대 얼음창고 1920년), 2015년- 인천 송학동 일본주택(마치야형태의 목조건물 1936년), 2016년- 인천여관x루비살롱(산업시대 쪽방형 여관 1965년), 2017년- 인천시 영상위원회 커뮤니티공간(일본식 근대벽돌창고 1930년대), 2017년- 공유공간 52치(서울시 청년허브, 구 질병관리본부 공간활용 1960년대), 2017년- BE IN HOUSE(서울시 금천문화재단 빈집프로젝트 1호 1980년대), 2017년- 인천 차이나타운 화교협회 회의청 설계(청나라 목조건물 사무동 1887년), 2018년- 인천서점(인천아트플랫폼), 2018년- 인천 근대문학관 기획전시관(구 미츠이물산 인천출장소 1920년대), 2018년공사 후 얼음창고에서 카페 '빙고'로 다시 태어난 건물 내외부 모습. (왼쪽부터 공사전, 공사후) /이의중 건축재생공방 대표 제공공사 후 얼음창고에서 카페 '빙고'로 다시 태어난 건물 내외부 모습. (왼쪽부터 공사전, 공사후) /이의중 건축재생공방 대표 제공

2018-12-18 윤설아

[인터뷰… 공감]'화교 출신 父子 한의사' 중화한의원 아들 강서원씨

'수원사람' 외치는 부친 뜻 이어 지역사회 역할·해외 의료봉사까지 팔걷어도수체조시연 등 강의도 남달라… 피부미용 시술·추나요법 더해 '治本' 추구진찰실서 틈틈이 운동·미술활동… 환자에 자유로움·건강함 전해지길 바라40년 가까이 한 자리를 지키며 지역 주민들의 몸과 마음을 어루만진 화교 출신 한의사가 있다. 그의 아들도 옆방에서 환자들을 기다리며 아버지와 선의의 경쟁을 하고 있다.수원 북수동에서 중화한의원을 운영하는 부자(父子) 한의사 강학천(64)씨와 강서원(36)씨가 그 주인공이다. 한의원에서 만난 서원씨는 한의사처럼 보이지 않았다. 노란색 한의사 가운에 패션 감각을 숨겼지만, 청셔츠에 청타이를 더한 파격적인 조합에 허리 벨트는 자메이카 레게 영웅 밥 말리의 녹·황·적색 줄무늬였다.서원씨는 "아버지와 함께 채워주고 비워주고, 다시 메워주면서 한의원을 운영하고 있다"며 "전통 한의학과 젊은 한의학의 콜라보레이션을 통해 지역민들의 아픈 곳뿐 아니라 치인치심(治人治心)하고 싶다"고 말했다.# 한국에서 이방인 한의사로 살아가기강씨 부자는 모두 대만 국적을 지닌 화교다.학천씨의 아버지 강여천(87)옹의 고향은 중국 산둥성 웨이하이시다. 강옹은 10대 시절인 1940년대 부산을 통해 한국에 들어왔다. 경북 대구와 전남 광주를 거쳐 강옹은 수원에 터를 잡았다. 강씨 3대가 수원 시민으로 살아온 세월만 어언 70년이다.강옹은 현재 강씨 부자의 한의원 자리에서 '동화원'이라는 중식당을 운영하다 미국으로 역이민을 떠났다. 당시 한국과 중국 수교가 이뤄지지 않아 자유로운 왕래가 불가능했기 때문이다.가족들과 떨어져 수원에 남은 학천씨는 원광대 한의대를 졸업한 직후인 1980년 5월 지금의 자리에서 한의원을 개원했다. 30년 뒤 아들 서원씨도 대구한의대를 졸업하고 아버지 옆 진찰실을 꿰찼다.'피터팬 증후군'(어른아이)이 의심되는 서원씨가 아버지의 한의원에 더해졌지만, 21세기 IT 강국 대한민국에서 중화한의원은 홈페이지 하나 없다. 마음과 몸이 아파 찾아온 환자들에게 시간을 쏟고 진심을 다하면 그만이라는 부자의 신념 때문이다. 서원씨는 "토요일 진료 때는 환자 세 분이 오셨는데, 3시간 동안 같이 이야기하면서 시간을 다 보냈다"며 "아버지께서 40년 가까이 일궈오신 한의원에서 진실과 진심을 팔기 위해 노력할 것이고 앞으로도 지금처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아버지의 수원, 아들의 수원수원은 강씨 부자의 고향이다. 수원에서 나고 자란 데다 한 곳에서 38년째 한의원을 운영하다 보니 애착이 남다르다는 것.학천씨는 "한의원 개원 초기만 해도 중국사람이라고 생각하고 행동하고 살았지만, 수원에서 태어나고 자랐으니까 나는 '수원 사람'"이라며 "수원화교중정소학교장을 맡았던 것도 다 내 고향 수원을 위한 봉사였다"고 말했다.한의원 자리에서 태어난 서원씨도 '수원 사랑'을 강조했다. 최근에는 지역의 자발적 민간 봉사단체인 소나무회에 가입해 지역민들과의 친밀도를 높이고 지역 사회를 위해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일들을 찾아다닌다.서원씨는 "화교 출신은 학연과 지연이 사실상 없어 어려움이 많아 한국 학교로 가는 친구들도 많지만, 내 정체성이 있기 때문에 초·중·고교 모두 화교 학교를 나왔다"며 "좋은 사람들과 함께 지역민들에게 재능기부 형태로 봉사할 수 있는 방법을 계속 찾고 있다"고 귀띔했다.# 외국인으로 살아가면서 얻은 인생은 '덤'강씨 부자의 한의원은 수원 구도심 한 편을 올곧게 지켰다. 덕분에 단골 손님들도 많아지고 구안와사(얼굴마비) 치료를 받으러 전국 각지에서 환자들이 찾고 있다.학천씨는 '수원 사람'으로 살아가며 받은 인생의 덤을 지역민들에게 나눠주기 위해 수원시 한의사협회 회장과 경기도한의사협회 수석부회장을 역임했으며, 수원경실련 집행위원으로도 활동했다.아버지와 함께 한의원을 지키는 서원씨는 자신의 '자유분방함'을 봉사에도 적용했다. 수원 팔달구보건소에서 노인들을 상대로 한의학 강의를 하며 직접 도수체조를 시연하고, 보건소 신고 하에 침술 치료를 하기도 했다. 대부분의 한의사들이 보건소 강의 봉사를 나와 화면을 띄워놓고 일방 강의를 하는 것과 확연히 다르다는 후문이다.# 국내외를 막론한 '덤' 나누기아버지 한의사가 한의원을 지키는 동안 아들 한의사는 최근 두 차례 해외 의료 봉사를 다녀왔다.서원씨는 지난달 3일부터 닷새간 캄보디아 시엠립주 '수원마을'에서 현지 주민들을 돌봤다. 의료 봉사는 개발도상국 개발을 돕고자 추진한 ODA(공적개발원조)사업의 일환으로 수원시가 캄보디아에 건립한 수원중·고교 개교 기념일 행사와 맞물려 진행됐다.당시 행사에는 염태영 수원시장, 조명자 수원시의회 의장 등 300여명이 참석했고, 서원씨는 수원시한의사협회 팔달구 수석반장 자격으로 침구와 뜸, 부항 등 장비를 챙겨 함께 했다.캄보디아 봉사보다 앞선 지난 7월 중순에는 필리핀 클락에서 경기도청 주관 5개 의약단체(치과·의사·간호사·한의사·약사협회) 소속으로 의료 봉사를 다녀왔다.서원씨는 "아버지와 제 고향 수원, 한국에서 얻은 모든 것들은 말 그대로 덤"이라며 "지역민들뿐 아니라 동남아 등 해외 오지의 현지 아이들과 어르신들에게 내가 가진 기술을 사용해 도울 수 있다는 것 자체가 기쁘다"며 환한 미소를 지었다.# 전통 한의학과 젊은 한의학의 콜라보아버지의 전통 한의학에 '젊은' 한의학을 더해 한의원을 찾는 이들의 질병의 근원을 치료하는 '치본'(治本)이 서원씨의 목표다.전통 한의학은 침, 뜸, 부항, 약으로 지칭할 수 있는데, 서원씨는 여기에 더해 약침과 매선(녹는 실로 처진 살을 끌어올리는 시술) 등 피부미용 시술과 추나요법을 더해 30대 한의사의 젊음을 더하겠다는 것.삭발 수준의 심히 단정한 헤어스타일이 독특한 외모로 비쳐 '어르신' 환자들의 외면을 받기도 했지만, 건강한 기운을 전달해드리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고 있다.서원씨의 진찰실에는 보통 한의원에서 찾아볼 수 없는 턱걸이 철봉과 미술 도구도 있다. 환자들이 뜸한 오후 5시 30분부턴 운동복으로 갈아입고 턱걸이와 팔굽혀펴기를 각 100~150개씩 하거나 그림을 그리다 환자를 맞이하곤 한다.서원씨는 "운동을 하다가 진찰을 하더라도 자유로움과 건강한 느낌을 몸이 불편한 환자분들께 그대로 전해드릴 수 있다고 생각한다"며 "앞으로 나이를 먹더라도 지금처럼 언제나 자유롭게 내가 받은 것을 나누며 살고 싶다"고 전했다.글/손성배기자 son@kyeongin.com 사진/김종택기자 jongtaek@kyeongin.com■한의사 강서원씨는?▲ 1982년 수원 출생▲ 2007년 대구한의대 한의학과 졸업▲ 2007년 천진중의약대학제일부속의원 침구과 보통 내과 수료▲ 2011년 경희대 한의학석사 취득▲ 2014년 경희대 한의학박사 취득▲ 2014년~ 현재 수원시한의사협회 팔달구 수석반장▲ 2014년~ 현재 경기도한의사협회 국제이사▲ 2014년~ 현재 대한한의사협회 중앙대의원수원 북수동에서 중화한의원을 운영하는 한의사 강서원(36)씨는 "아버지께서 40년 가까이 일궈오신 한의원에서 진실과 진심을 팔기 위해 노력할 것이고 앞으로도 지금처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2018-12-04 손성배

[인터뷰… 공감]'아시아태평양 평화·번영 국제대회' 지휘한 이화영 경기도 평화부지사

경기도가 이재명 도지사 체제인 민선 7기에 들어서면서 급부상한 인물이 있다. 이화영 도 평화부지사다. 민선 7기가 시작된지 이제 4개월여. 짧은 기간 여러 국면에서 그는 이슈의 중심에 섰다. 이 지사가 취임 후 자신의 파트너로 일할 인사를 처음 지명했을 때, '탈당론'까지 대두될 정도로 당과의 관계에서 어려움에 봉착했던 이 지사가 이해찬 당 대표 체제에 돌입하며 전화위복의 기회를 맞았을 때, 4·27 남북정상회담으로 북한과의 교류 협력에 대한 물꼬가 다시금 트였을 때 번번이 그가 조명됐다. 남북 문제에 정통한, '이재명의 파트너'가 된 '이해찬의 측근'. 그를 가리킬 수 있는 수식어는 이것 뿐일까.지난 26일 오후 이 부지사를 도청 집무실에서 만났다. 지방정부에서 주최한 행사에 처음으로 북측 인사들이 찾아 이목을 집중시켰던 아시아태평양 평화·번영을 위한 국제대회가 끝난지 막 열흘이 지난 시점이었다. 이 지사에게 각종 악재가 집중돼 도 안팎이 혼란스러웠던 때이기도 했다. 30분 남짓 길지 않은 인터뷰를 통해 여러 질문을 던졌다. 그 역시 속도감 있게 막힘 없이 답했다.# 노동 운동 매진하던 청년, 남북 평화 선두에 서다민주화의 열기가 뜨거웠던 80년대, 성균관대에서 학생운동을 하던 그에게 1988년은 생의 전환점이 됐다. 당시 국회에 노동위원회가 설치됐는데 보좌진으로 일하게 된 것이다. 당시 노동위에는 노무현·이해찬·이상수 의원이 있었다. 훗날 대통령으로, 국무총리로, 노동부 장관으로 일했던 이들 틈새에서 20대 청년은 노동관계법을 개정하는 과정에서 노동자들의 목소리가 조금이라도 반영될 수 있도록 하는 일을 맡았다. 정치적 행보를 함께해 온 이해찬 대표와도 이때 연이 닿았다. "당시 노무현 의원실에선 이호철 전 수석, 이해찬 의원실에선 유시민 전 장관, 이상수 의원실에선 제가 역할을 나눠서 공동 보좌진처럼 일을 했다"고 회고한 그는 2004년 서울중랑갑에서 국회의원에 당선됐다.남북 문제에 관심을 두게 된 것도 이 무렵부터다. 여의도 정치에 본격적으로 뛰어들게 되면서 그는 스스로의 역할을 고민했다. "대한민국의 여러 정치·사회적 현안은 보수 대 진보 구도에서 빚어지는데 그 가운데 분단으로 벌어진 모순이 끼어있는 게 본질적 문제라고 봤다. 결국 우리나라가 더 좋은 나라가 되려면 남과 북이 서로 화해, 협력해서 최소한 왕래는 할 수 있을 정도가 돼야만 이런 문제들도 해소되지 않을까 라는 생각을 했었다"고 당시 상황을 설명한 그는 국회의원 당선 후 국회 통일외교통상위원회에서 활동했다.북한 땅도 이때 처음 밟았다. 2005년 남북청년정당인 대회를 통해서였다. 여야의 젊은 정치인들이 북측의 김일성사회주의청년동맹 소속 청년 정치인들을 만났다. 당시 남측대표단 수석단장을 이 부지사가 맡았었다.그가 지금 남북 평화 협력의 선두에 서게 된 것도 이 때의 만남이 단초가 된 것이다. 특히 2006년 북한이 2차 핵실험을 했을 당시에는 노무현 전 대통령의 요청으로 단독으로 방북, 노 전 대통령의 메시지를 북에 전달하는 역할을 수행하며 이듬해인 2007년 2차 남북정상회담이 성사되는 마중물 역할을 했다. 당시 북측 인사들과의 교류는 10년이 지난 현재 새로운 남북관계를 만드는 밑거름이 됐다.# 이해찬의 측근, 이재명의 파트너그에게 이해찬 당 대표의 측근인지 물었다. 잠시 생각하던 그는 "측근이라는 표현도 맞을 것"이라고 답했다."1988년에 처음 뵙고 30년 동안 어려운 시기, 이 대표가 국회의원을 하지 않았던 원외 시절에도 함께 일했으니까. 말하자면 '보좌'진, 측근이라면 측근일 수도 있을 것"이라면서도 이재명 지사의 당내 입지가 이해찬 대표 체제 들어 한결 안정된 데 그의 역할이 있었다는 세간의 시선에는 선을 그었다. 이 부지사는 "그건 아주 우연"이라며 "오히려 제가 선거기간 이 지사 캠프에서 일을 도왔을 때는 이해찬 대표가 당 대표를 하게 되리라곤 생각을 못했었을 때다. 이 대표 역시 제가 캠프에서 일을 도왔던 것을 몰랐다. 이 대표가 저를 이재명 지사 쪽에 보냈다. 이런건 정말 아니다. 결과론적 해석"이라고 밝혔다.이재명 지사와는 과거 노동·사회운동으로 간접적인 연을 맺었다. "저도 성남에서 활동한 적이 있다. 사회운동할 때부터 알고 지내던 인권변호사였다. 정치적 행보를 함께 했던 건 아니지만 지난해 대선 경선에 도전했을 때 남북협력 분야에서 조언을 해드린 적이 있다"고 이 지사와의 연을 설명한 그는 "판단이 신속, 정확하고 명쾌한 분"이라고 이 지사를 평가했다. 그러면서 "저는 국회의원을 했고 오랫동안 정당 생활을 했다보니 소위 '여의도 정치'에 네트워크가 있다고 한다면 이 지사는 지역 운동, 행정에 주력했고 여의도에는 거의 오지 않았다. 그런 점에서 제가 보완적인 역할을 하는 것 같다"며 "이 지사가 남북 교류협력 방안에 대해 전폭적으로 지지해줘서 편하게 일하고 있다"고 했다.# 경기도 남북교류협력 '희망'그가 주도한 아시아태평양 평화·번영을 위한 국제대회는 지난 7월 민선 7기 경기도가 시작된 이래 가장 큰 이벤트였다. 이를 진두지휘했던 이 부지사는 "북측 대표단이 방남한 것 자체가 큰 성과"라고 평했다. "한편에선 아태 지역에서 일본 식민 지배를 받았던 지역들이 진정한 사과를 받아내고 배상을 받아내자는 데 한목소리를 냈다는 게 매우 큰 의미가 있었다"고 설명한 그는 "내년에는 평양에서, 그 이후에는 동남아시아 다른 국가에서 대회를 개최하려고 한다. DMZ 평화포럼도 준비 중인데 한국의 다보스포럼 같은 위상을 가질 수 있도록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많은 부분 정부의 통제 속 엇박자를 냈던 점은 아쉬운 점으로 꼽았다. 이 부지사는 "북측 인사들과는 '남한에 가면 치맥을 실컷 하자'는 얘기까지 서슴없이 나왔었다. 그런데 아무래도 과잉 통제가 이뤄지다 보니까, 그럴 수 있는 분위기는 아니었다. 불가피한 측면이 있겠지만 새로운 시대에 맞춰서 개선할 부분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고 말했다.북측과 협력을 약속한 부분을 착실히 준비해 성과를 내는 게 그의 내년 목표다. 남북교류 협력 방안을 묻자 그의 표정이 한층 밝아졌다. "세계인이 주목하는 DMZ 평화공원을 조성하고 관광·문화·생태 콘텐츠도 그 안에 담을 수 있을 것이다. 철도 연결도 합의가 됐는데 아주 큰 의미를 갖는다. 황해도 시범농장 사업 등도 우리 기업 진출에 유리한 교두보가 될 것이고, 한강하구 공동조사도 내년 4월부터 시행될 것"이라고 기대감을 드러냈다. 31개 시·군과 함께 하겠다는 점도 덧붙였다.인터뷰 말미 그는 '희망'을 말했다. "사실 전에 북에 다녀와서 발표했을 때도 많은 분들이 '설마'라고 했습니다. 최악에는 안 될 수도 있지만 희망을 가지면 일이 됩니다. 한 번에 다 완성하려고 하기 전에, 작은 규모라도 뭔가 먼저 시작해보는 게 의미가 있지 않을까요?" 그의 '희망'에는 남과 북이 자유롭게 왕래하고 기차로 서울에서 베를린을 가는, 평화로운 대한민국이 있다. 글/강기정기자 kanggj@kyeongin.com 사진/김종택기자 jongtaek@kyeongin.com■이화영 평화부지사는?▲1963년 강원 동해 출생▲성균관대 사회학과 졸업▲17대 국회의원(열린우리당/서울중랑갑)▲열린우리당 원내부대표(전략 담당)▲국회 통일외교통상위원회 간사▲민주당 남북교류협력특별위원장, 동북아평화위원장▲19대 대선 문재인 대통령 선거대책위 국정자문단 공동단장, 동북아평화경제위 공동위원장▲(사)동북아평화경제협회 이사장, 동북아평화연대 기획위원▲지방자치실무연구소(소장·노무현) 연구위원▲한국방정환재단 이사장이화영 경기도 평화부지사는 아시아태평양 평화·번영을 위한 국제대회가 "내년에는 평양에서, 그 이후에는 동남아시아 다른 국가에서 대회를 개최하려 한다며 DMZ 평화포럼도 준비 중인데 한국의 다보스포럼 같은 위상을 가질 수 있도록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사진/김종택기자 jongtaek@kyeongin.com사진/김종택기자 jongtaek@kyeongin.com사진/김종택기자 jongtaek@kyeongin.com사진/김종택기자 jongtaek@kyeongin.com

2018-11-27 강기정

[인터뷰… 공감]KS우승컵 선물하고 떠난 트레이 힐만 前 인천 SK와이번스 감독

"땡큐, 힐만~".벌써 2년 전 일이다.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시간이다. 미국 텍사스로 향하는 항공편에 몸을 실었다. 그는 멀리 인천에서 온 손님들을 따뜻하게 집으로 맞이했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대화를 나눴다. 기대는 확신으로 바뀌어 갔다. 그렇게 3시간이 훌쩍 지났다. 그는 일어서려는 손님들을 붙잡았다. 저녁 식사로 바비큐를 손수 대접했다. 격의 없는 대화가 3시간이나 더 오갔다. 그가 두꺼운 파일 2개를 건넸다. 진지하게 팀을 고민한 흔적들이 녹아 있었다. "그게 '변화'의 첫 시작이었죠." 류준열 인천 SK 와이번스 대표이사는 2년 전 트레이 힐만 감독과의 첫 만남을 이렇게 기억했다.포스트시즌 개막 전 힐만은 고향에 있는 노부모를 돌보기 위해 아쉬운 작별을 고했다. 하지만 플레이오프와 한국시리즈 승리까지 포기한 것은 아니었다. 류 대표는 "미국으로 돌아가는 힐만 감독이 유종의 미를 거두기 위해 (한국시리즈) 우승의 열망이 강한 것 같다"고 했었다.힐만 감독은 SK를 2년 연속 포스트시즌으로 이끌었다. 그 원동력은 '소통'의 리더십이었다. 더그아웃에 크고 작은 변화가 일었다. '소통'을 중시하는 미국 스타일의 자연스러운 스킨십이 생겨났다. 힐만 감독은 격의 없이 선수들을 대했다. 농담도 자주 건네고 짓궂게 장난도 쳤다. SK의 미래를 이끌어 나갈 젊은 선수들이 이런 변화에 잘 녹아들었다.힐만 감독은 지난 16일 출국을 앞두고 열린 15일 감독 이·취임식 간담회, 경인일보와 서면 인터뷰를 통해 우승 소감과 2년 간의 소회를 피력했다. 그는 "한국 선수들과 관계를 형성하는 데 생각보다는 시간이 오래 걸리지 않았다"면서 "내가 다가서면 (SK 감독을 맡기 전에 경험한 미국·일본 선수들 보다) 더 빠르게 다가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고 돌아봤다.SK가 공을 들여 키워오던 장타력을 갖춘 선수들도 '믿음'을 기초로 한 힐만의 야구 철학에 힘입어 급성장한다. SK의 차세대 거포 한동민이 대표적이다. 포스트시즌 들어 극심한 부진을 겪은 그는 "고개를 못 들고 다닐 정도였다"고 했다. 하지만 힐만 감독은 그를 믿었다. 결국, 한동민은 플레이오프에 이어 한국시리즈 마지막 경기에서도 승부의 쐐기를 박는 결승 홈런을 터뜨리며 힐만의 기대에 부응했다. 두 경기는 모두 한국 야구사에 남을 명승부였다. 힐만 감독이 꽃피운 '홈런 군단' SK는 통산 네 번째 한국시리즈 우승 트로피를 들어 올리며 이른바 '제2의 왕조시대'를 활짝 열었다. 그리고 힐만 감독은 한국시리즈 우승을 일군 KBO 리그 최초의 외국인 사령탑으로 인천 시민은 물론 한국의 모든 야구팬에게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 그는 "2년 동안 모든 순간이 행복했고 뜻깊은 시간을 만들 수 있었다"면서 특히 "지난 3주 동안의 시간이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환상적이었다"고 말했다.무엇보다 힐만 감독은 선수들을 각별히 대했다. 결코, 무리하게 선수를 기용하는 법이 없다. 당장 눈앞의 승부에 집착해 선수를 혹사하지 않았다. 힐만 감독은 시즌 초 왼쪽 팔꿈치 인대 접합 수술을 하고 2년 만에 복귀한 에이스 김광현과 관련한 네 가지 관리 매뉴얼을 제시한 바 있다. ▲선발 등판 후 24~48시간 내 팔꿈치 상태와 피로 등 체크 ▲투구 수와 이닝 수 관리 ▲팔꿈치에 무리가 가는 직구 구속과 평균구속의 차이 확인 ▲얼마나 힘겨운 이닝을 소화하고 내려왔느냐 등이다. 이를 통해 김광현의 성공적인 복귀와 포스트시즌 호투를 이끌어 냈다.힐만 감독은 "김광현이 올 시즌 복귀해 잘 해줬다. 득점 지원이 부족하거나 특정 이닝에 투구 수가 많아지면 결과가 안 좋았던 적도 있지만, 부상으로 한 해를 거른 것을 고려한다면 기대 이상으로 좋은 시즌을 보낸 것"이라고 평가했다.힐만 감독의 야구는 그라운드 밖에서도 빛이 났다. 그는 소아암으로 투병 중인 어린이들을 돕기 위해 머리카락을 일부러 길렀다. 힐만 감독을 따라 김광현도 시즌 초 성공적인 복귀전을 치른 뒤 길렀던 머리카락을 잘라 기부했다. SK 선수들의 헌혈 행렬도 이어졌다. 힐만 감독은 폭염이 기승을 부리던 여름에는 산타클로스 복장을 하고 소아암을 앓고 있는 김진욱(11) 군의 학교를 직접 찾아가는 깜짝 이벤트를 열기도 했다. 건강한 모습으로 플레이오프 6차전에서 시구를 했던 김군은 이·취임식에서 떠나는 힐만 감독에게 감사의 꽃다발을 건넸다. 힐만 감독은 팬서비스에 대한 소신을 밝혔다. 그는 "승리도 당연히 중요하지만, 팬들에게 SK는 야구를 정말 열심히, 재미있게 한다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면서 "이러한 모습을 통해 수도권에 있는 타 팀 팬과 심지어 축구팬들도 야구장에 오게 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이어서 "프로야구 선수들은 팬들이 있기 때문에 존재하는 것은 맞다"면서 "하지만 내성적인 선수들도 있고, 가족과 보다 많은 시간을 보내고 싶어하는 선수들도 있다. 팬들도 배려해줘야 한다"고 덧붙였다.끝으로 힐만 감독에게 물었다. 한국시리즈 우승을 계기로 제2의 전성기를 맞이한 SK에 가장 필요한 것은 무엇이냐고. 지체 없이 '변화'라는 답변이 돌아왔다. 힐만 감독은 "이번 우승은 모두가 하나가 되었기에 가능했다"며 "여기에 만족하지 않고 계속 새로운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했다. 염경엽 신임 감독에 대해서도 "소통에 탁월한 능력을 갖췄다. 선수들을 잘 이끌어 나갈 것"이라며 깊은 신뢰를 보냈다. 힐만 감독은 홈 팬들에게도 "그저 감사하다는 말 밖에 드릴 말씀이 없다. 언제나 보여주었던 열정적인 응원과 지지에 진심으로 감사드린다"고 마지막 인사를 건넸다.글/임승재기자 isj@kyeongin.com 사진/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트레이 힐만 감독은?▲ 미국 텍사스주 애머릴로(1963년 출생)▲ 클리블랜드 인디언스 선수(1985년 입단)▲ NPB 니혼햄 파이터스 감독 (2003~2007년 10월)▲ 캔자스시티 로열스 감독 (2007년 10월 ~ 2010년 5월)▲ LA 다저스 코치 (2010년 11월 ~ 2013년 10월)▲ 뉴욕 양키스 어시스턴스 코치(2014년)▲ 휴스턴 애스트로스 벤치 코치 (2015~2016년)사진/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트레이 힐만 전 SK 와이번스 감독(왼쪽)이 박남춘 인천시장으로부터 명예 시민증을 받은 뒤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트레이 힐만 전 인천 SK 와이번스 감독이 지난 12일 오후 서울 잠실야구장에서 열린 2018 프로야구 두산 베어스와의 한국시리즈 6차전 경기를 우승으로 이끈 후 소감을 밝히고 있다. 사진/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산타클로스 복장을 하고 소아암 어린이가 다니는 학교를 찾아간 힐만 감독. /SK 제공/연합뉴스

2018-11-20 임승재

[인터뷰… 공감]올 만해문학상·구상문학상 영예 '노동자 시인' 김해자

김해자(56) 시인은 상복이 많은 사람이다. 봄에 펴낸 시집 '해자네 점집'으로 지난달 제33회 만해문학상 본상에, 이달에는 제10회 구상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됐다. 한 달여 사이에 권위도 있고 상금도 두둑한 상을 두 개나 받았다. 지난해에는 아름다운 작가상을 2016년에는 이육사시문학상을 받았고, 2008년 백석문학상, 1998년 전태일문학상 등을 받았다. 지난 9일 오전 인천 부평 백운공원 인근에서 김 시인을 만났다. 그는 충남 천안에서 농사를 지으며 살고 있는데, 전날 노동자교육기관에서 진행하는 글쓰기 수업 때문에 잠시 인천에 들렀다고 한다. 수상 축하 인사를 전하니 그는 전라도 사투리가 섞인 말투로 "이제는 호(號)를 수상자로 바꾸라는 친구들도 있네요"라고 말하고는 크게 웃었다.상과 인연이 잦은 이유를 무엇 때문이라고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심각한 표정으로 한참을 고민하더니 "사주를 면밀하게 분석해 보니 이맘 때가 횡재할 시기"라며 "지난 8월 꿈에 108 염주를 한 스님을 만나는 꿈을 꿨는데, 염주와 열매 선물을 받았던 것도 이유였던 것 같다"고 말하고 또 웃었다.웃으며 답하긴 했지만, 상 받는 일이 조금은 불편한 구석도 있다고 한다. "사실 시(詩) 라는 것이 큰 차이가 나지 않거든요. 누구에게는 제 시가 마음에 들지 않을 것이고요. 사람이니까. 불편한 마음 대신 이번 상들을 앞으로의 '독립자금'이라고 생각하며 살려고 합니다."김해자 시인을 '노동자 시인'이라고 부르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하지만 그는 자신을 활동가라고 소개했다. 시를 심사한 한 심사위원은 심사평에서 자신을 시인이 아닌 '활동가'라고 표현 하기도 했단다. 그는 "어라, 내가 시인이 아니었네" 하며 웃은 기억도 있다고 했다.그는 1984년부터 1999년까지 15년의 시간을 인천에 머물렀다. 초등학교와 중고등학교를 다닌 항구 목포보다 더 많은 15년이란 세월, 그의 가장 빛나는 젊은 시절을 인천의 모든 동네를 떠돌아다니며 살았다고 했다.그의 작품 가운데 정말 많은 것들의 뿌리가 인천에 있다고 그는 말했다. 시인은 그 시인은 시로 소개하는 것이 가장 좋을 것 같다는 그는, 자신의 행적이 압축되어 있다는 시 '어진내에 두고 온 나'(시집 집에 가자, 삶창, 2015)를 추천해 줬다."지금도 청천동 콘크리트 건물 밖에는 플러그 뽑힌 채 장대비에 젖고 있는 도요타 미파 브라더 싱가 미싱들이 서 있죠…(중략)…아득하고 고운 옛날 어진내라 불리던 인천, 갈산동 그 쪽방에는 연탄보다 번개탄을 더 많이 사는 소녀가 살고 있네요 야근 마치고 돌아오면 늘 먼저 잠들어 있는 연탄불 활활 타오르기 전 곯아떨어지는 등 굽은 한뎃잠…(중략)…교도소가 마주 보이던 학익동 모퉁이 키 낮은 집 흙벽 아궁이가 있던 옛 부엌엔 전단지 속 휘갈긴 어린 해고자 메모 '배가 고파요 이렇게 살고 싶지 않았어요' 애호박 몇 조각 둥둥 떠다니는 밀가루 죽이 아직도 부글부글 끓고 있는 효성동 송현동 송림동 바람 몰아치던 주안 언덕배기 그 작고 낮은 닭장집 창문마다 한밤중이면 하나둘 새어 나오는 쓸쓸하고 낮고 따스한 불빛…(후략)"그는 오갈 곳 없는 힘든 시기에 인천에 왔다. 고려대학교 4학년에 재학 중인 1984년 학내에서 '광주학살진상조사위원장'을 맡았다. 4월부터 6월까지 두 달 내내 시위를 주도했다. 얼굴은 새카맣게 변했고 체중은 38㎏까지 줄었을 정도로 힘겨웠다. 학교에서 제적됐고, 이후 벌어진 학생들 사이의 노선 투쟁으로 큰 상처를 입었다. 마땅히 기댈 곳이 없어서 찾아온 곳이 인천이었다. 그해 10월 효성동에 보증금 20만원, 월세 4만원짜리 '닭장집'으로 첫 인연을 맺었다. 영등포에 있는 산업선교회에서 배운 미싱 기술로 청천동, 효성동, 갈산동 일대 마찌꼬바(작은 영세 봉제공장)를 전전했다. 맘씨 좋은 사장은 "시다일 조금만 버티면 미싱사로 올려 줄게"라며 다독였고, 성질 못된 사장을 만날 때는 "하나도 안 해 봤구먼!"하는 호통을 들었다. 2개월여 만에 7~8곳을 전전했다. 미싱 기술이 늘면서 큰 사업장으로 옮기게 됐고 백경물산, 소명실업, 태평양물산 등에서 일했다.그는 지금도 그 마찌꼬바에서 만났던 얼굴을 다 기억에 남았다고 한다. 그 노동자들이 보여줬던 삶, 때로는 거칠고 일당이 밀리면 시끄럽기도 하던 그들. 그들과 나눠 먹었던 밥. 휴식 시간에 씨름하고 춤추고, 일을 끝마치고 곱창집에서 술을 마시고 그랬던 청춘들이다."가끔 공동수돗가에서 만나면 사알짝 웃기도 했는데, 마당 끝에 있는 변소 앞에 줄 서 있기라도 하면/출근길 그 남자 미안한 듯 고개 숙이고 지나갔는데, 어느 차가운 밤 골목 입구에서, 고구마 냄새나는 따뜻한 비닐 봉다리 안겨주고 도망가기도 했는데, 충청도 어디 바닷가에서 왔다던가 사출공장 다닌다던가(후략)"('벽 너머 남자', 해자네 점집, 2018)그의 시는 관념적이지 않고 쉽다는 평을 듣는다고 한다. 그는 돌이켜보면 자신의 머리가 아닌 몸이 그런 청춘들을 기억하고 있기 때문인 것 같다고 했다."한편으로는 인천에서 보낸 15년은 잿빛 같아요. 나는 빠져나오고 싶은데, 나는 그 자리에 있는 것 같은, 인천이 늘 저에겐 그래요. 너무 괴로운 일도 많았고, 죽음도 많았고요. 그러니까 내가 (시를) 쓸 때는 그 많은 것을 모아요. 시 속에 수많은 리얼리티가 들어가 있는 거예요. 그걸 1,2,3,4 쓰기는 괴로우니까요."그의 시에는 인천이라는 공간에서 그가 만난 '시로 쓰일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 주인공으로 자주 등장한다."한 집 건너 지하공장/미싱 소리 드르륵대던 곳/사철 시꺼먼 하늘만 내려앉던 청천동/십자약국 골목 파란 대문/빨간 닭장집 안 녹색 부엌문/방문 벽에 걸린 푸른 작업복/왼편에 하얀 명찰 생산2과 김정례/앉은뱅이책상 앞에 「해고무효소송 승소판결문」/옆에 방송통신고등학교 교재, 안에 쓰다만 편지/"공부 열심히 해. 돈 걱정 말고 누나만 믿어라"/방문턱에 걸린 두 발/부엌 바닥에 늘어뜨린 긴 머리칼/아궁이에 타다 만 연탄/잠긴 문 바라보다 멈춘/반쯤 열린 눈/밖에 하얀 눈"(축제,예지, 2007)"아픈 현실의 땅에서 발을 떼지 않고, 땅속 벌레처럼 몸으로 길을 뚫는 그 미물의 눈을 잃지 않는 것, 그리고 글로 부당함을 고발하고 삶의 켜켜이 말할 수 없는 아프고 억울한 자들의 삶을 받아적고 그들의 삶을 존엄한 자리에 올려놓는 일 그것이야말로 제가 뒤늦게 받은 분에 넘치는 공감과 약간의 찬사 그리고 주어진 '상'에 보답하는 길인 듯합니다. 유용과 필요가 넘쳐나는 이 행성에서 무능하고 무용하기까지 한 '시'라는 바늘과 '민중의 서사'라는 실을 가지고 이 세계를 기꺼이 그리고 아름답게 기워나가는 사람으로 남고 싶습니다."글/김성호기자 ksh96@kyeongin.com 사진/김용국기자 yong@kyeongin.com■김해자 시인은?1961년 전남 신안에서 태어났다. 고려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했다. 조립공, 미싱사, 학원 강사 등을 하며 노동자들과 시를 쓰다가 1998년 《내일을 여는 작가》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무화과는 없다』(2001), 『축제』(2007), 『집에 가자』(2015), 『해자네 점집』(2018)을 펴냈다. 민중구술집 『당신을 사랑합니다』(2012), 산문집으로 『내가 만난 사람은 모두 다 이상했다』(2013), 시평 에세이 『시의 눈, 벌레의 눈』(2017) 등이 있다. 전태일문학상(1998), 백석문학상(2008), 이육사시문학상(2016), 아름다운작가상(2017) 만해문학상(2018) 구상문학상(2018) 등을 받았다. 시골에서 농사 조금 지으며 이웃의 이야기를 받아적으며, 노동자 치매병동 알코올병동 홈리스 기초수급자 등 부르는 데마다 찾아가 강연과 강의를 하며 살고 있다. 한국작가회의 부이사장을 맡고 있다.지난 9일 인천 부평 백운공원 인근에서 만난 김해자 시인은 인천에서 보낸 지난 시간을 떠올리며 "자신의 많은 작품의 뿌리가 인천에 있다"고 말했다./아이클릭아트

2018-11-13 김성호

[인터뷰… 공감]'5만의 창, 미래의 벽' 어린이벽화프로젝트 10년 맞은 강익중 작가

안산 화랑유원지에 위치한 경기도미술관 1층 로비가 사람들로 북적였다. 미술관에 사람들이 북적이는 것이 특별한 일은 아니지만 이날의 북적임과 소란은 무언가 달랐다. 상기된 표정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청년들, 시끌벅적 신이 난 아이들의 손을 꼭 붙잡고 감회에 젖은 중년의 부부. 삼삼오오 모여 반가운 마음을 표현하고 근황을 묻는 모양새가 흡사 동창회라도 열린 듯 싶다. 지난 달 25일 오후, 경기도미술관은 아주 특별한 행사를 열었다. 이른바 '홈커밍데이'. 최북단 대성동 초등학교부터 최남단 가파도 초등학교까지 전국 5만 명의 어린이들과 함께 만든 벽화프로젝트 '5만의 창, 미래의 벽'이 올해로 꼭 10년이 돼서다.강산도 변한다는 10년의 세월 동안 그림을 그렸던 아이들은 어떻게 자랐을까. 벽화에 담았던 아이들의 꿈은 이루어졌을까. 고사리 같은 꿈을 소중하게 다루었던 자원봉사자들은 지금 어떤 삶을 살고 있을까. 10년이라는 숫자를 앞에 두고 미술관은 재밌는 상상을 펼쳤다. 그때의 모두가 한자리에서 만나 과거의 꿈과 현재의 우리, 미래의 희망을 나누는 자리를 마련하기로. 10년만에 집으로 돌아온 꿈은 또 어떤 이야기를 우리에게 들려줄까. 정겹고 설레는 소식에 벽화프로젝트를 기획하고 제작한 강익중 작가가 미국 뉴욕에서 한달음에 달려왔다. 그는 몹시 설레고 흥분된 모습이었다. "벌써 10년이 됐다는 소식을 전해듣고 솔직히 놀랐어요. 아직도 그때의 기억이 생생해 얼마되지 않은 일 같거든요. 10년 만에 그때의 아이들을 만나보니, 정말로 다 큰 아이들도 있고 이제 어엿한 가장이 된 친구도 있어 새삼 감회가 새로워요." 실제로 이 날 행사에는 당시 벽화프로젝트를 함께 했던 이들이 참석해 자리를 빛냈다. 그중에서도 당시 소위였던 최원정씨는 소령으로 진급해 현재 육군사관학교 교수로 일하고 있다. 강익중 작가의 어린이벽화프로젝트는 현재도 진행형이다. 20년간 그는 100만 여장의 어린이벽화를 모았다. 벽화는 꿈을 담았다. 그는 작품을 어린이 병원과 학교, 미술관 등 어린이를 위한 다양한 공간에 기증했다. 뉴욕 휘트니미술관에 그의 초기 3인치 그림 6천점이 소장됐을 만큼 그는 한국을 대표하는 세계적인 예술가다.가난한 유학생 신분으로 아르바이트를 가려고 탄 버스 안에서 그림을 그리기 위해 캔버스를 가로·세로 3인치로 잘라 들고 다녔다. 그것이 훗날 강익중의 '시그니처'가 됐다.그는 왜 어린이의 꿈을 담을까. "어른들은 과거의 경험을 통해 현재를 재단하지만, 아이들은 자기의 미래를 끌고 와서 현재를 바라봐요. 자기들이 상상하는 만큼 현재가 완성되죠. 그래서 아이들의 꿈을 통해 미래를 가보고 싶었어요. 그게 5만의 창, 미래의 벽의 최초 기획의도였죠. 그때의 시도가 저에게 아주 큰 의미가 됐고 성공적이었다고 봐요. 그래서 지금까지 미국, 아프리카 등 세계 각지의 어린이들의 꿈을 담은 그림을 모았어요. 아이들의 희망이 담긴 상상의 미래와 긍정의 에너지가 세계를 치료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그의 작업을 유심히 살펴보면, '이롭다'는 느낌을 받는다. 굳이 그가 공공미술을 해서가 아니라, 강익중에게서 흘러나오는 에너지가 밝고 긍정적이다. "보통 예술은 'to the people' 인 경우가 많아요. 사람들에게 작품을 보여주는 거죠. 근데 제가 생각하는 공공미술은 'with people'에 가까워요. 사람들과 함께 하는 예술이죠. 그래서 저는 공공미술을 저만의 별칭으로 바꿔 부르는데, '명랑한 혁명'이라고 불러요. 혁명엔 지도자와 사람 그리고 대의명분이 필요해요. 공공미술도 나로 인해 프로젝트가 시작됐지만, 아이들이 모이고 어른들이 함께 하면서 의미가 확장돼요. 특히 5만의 창 프로젝트의 대의명분은 '평화'예요, 하나의 몸인데, 우리는 갈라져야 하는 상처를 겪었어요. 하지만 상처가 있어야 치료백신도 만들수 있는 만큼, 대립과 갈등의 아픔을 겪어본 우리야말로 세계의 평화를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들이에요. 그래서 우리 아이들은 평화를 그리고, 평화가 찾아 온 이후에 무엇을 할 것인지 상상할 수 있어야 해요."남북의 평화, 세계의 평화를 모티브로 꾸준히 작업을 해 온 그에게 올 한해 연이어 열린 남북정상회담은 남다른 영감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전세계 언론이 남북의 두 정상이 만나서 악수하고 포옹하는 모습을 주요 장면으로 선택했는데, 우리와 같이 분단의 아픔을 겪은 독일만 달랐어요. 독일의 권위지인 프랑크푸르트 알게마이네 차이퉁에는 대성동 초등학교의 어린이 그림이 남북정상회담을 상징하는 주요 장면으로 선택됐죠. 독일은 통일을 어린이의 미래로 바라본 거예요. 저도 독일과 마찬가지 생각을 합니다. 통일은 어망을 짜는 일이에요. 우리는 어망을 짜는 일에만 급급해요. 어망이 완성된 다음에 함께 어떤 꿈을 꿀 것인지, 하물며 월드컵 챔피언이 되겠다, 달에 우주선을 띄우겠다 등 미래의 꿈을 꿔야 해요. 그건 아이들의 몫이죠. 그래서 아이들이 아주 자유롭게, 꿈을 너무 크게 꿔서 우주로 날아가버린다해도 좋을 만큼 상상의 나래를 펼쳤으면 좋겠어요. 벽화는 그것을 표현하는 매개체가 되는거죠."그래서 그는 오래 전부터 가슴 속에 품어왔던 꿈을 끄집어냈다. 언젠가 임진각에 아이들의 꿈을 그린 벽화가 가득 뒤덮인 '꿈의 다리'를 연결해 남과 북을 잇는 것. 인터뷰마다 심심찮게 밝혀 온 그의 꿈은 요즘 더욱 그를 설레게 한다. "작가로서 꼭 해보고 싶은 도전이에요. 제가 계속 떠들고 다니다보면 정말로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하나 둘 모여요. 그렇게 서로 힘을 합치면, 분명히 언젠가 가능해질겁니다. 누군가는 묻죠. 강익중씨, 당신은 정치인입니까. 저는 딱 잘라 아니라고 말하진 않습니다. 왜냐면 작가는 어망을 던지고, 과학자는 고기를 끌어올리고, 경제인은 도마에 고기를 올려 자르며, 정치인은 자른 고기를 배분하는 것이라 생각해요. 정치의 목적이 사회적 배분이고, 예술의 목적은 사회의 화두를 던지는 일이거든요. 결국 예술이나 과학, 경제, 정치 모두 하나의 사이클에서 움직이는 거예요. 예술이 화두를 던지고 가능성을 열기 때문에, 비록 작은 움직임일지라도 나비효과처럼 기적이 일어날 수 있어요. 경기도에서 자란 아이들의 꿈이 전국에 퍼지고, 전세계로 흘러가 강력한 메시지가 될 수 있어요. '상상력'은 우리를 어디로든 데리고 갈 수 있으니까요."글·사진/공지영기자 jyg@kyeongin.com■강익중 작가는▲1960년 충청북도 청주 출생 ▲홍익대학교 서양화과 학사▲프랫대학교 대학원 석사▲수상 내역1997년 오늘의 젊은 예술가상1997년 제47회 베니스 비엔날레 특별상2007년 엘리스 아일랜드상▲전시회1994년 백남준, 강익중 2인전 - 멀티플 / 다이얼로그 (휘트니미술관, 코네티컷)1999년 십만의 꿈2001년 amazed World (UN)2007년 광화문 가림막 - 광화의 꿈2008년 희망의 벽2009년 백남준, 강익중 2인전 - 멀티플 / 다이얼로그 (국립현대미술관)2010년 2010 상하이 엑스포 한국관 외벽 - 내가 아는 것2011년 강익중 대 강익중 (포스코미술관, 서울)2016년 Floating Dreams (런던 템스강, 영국)2017년 내가 아는 것 (아르코미술관,서울)강익중 작가가 10년 만에 경기도미술관 벽면에 설치된 '5만의 창, 미래의 벽' 앞에 섰다.10주년을 맞아 리뉴얼 된 강익중 작가의 '5만의 창, 미래의 벽' 홈커밍데이를 찾아온 현재의 가파도 초등학교 아이들. /경기도미술관 제공

2018-11-06 공지영

[인터뷰… 공감]취임 3개월 서갑원 신한대학교 총장의 교육철학

'젊음을 수용할 자세를 갖추고 젊은 마음이 충만한 사람.' 대학은 학생들이 탐구할 여건을 조성하고 이들의 사회 진출을 돕는 것이 그들이 해야 할 일이다. 직원들이 그런 자세를 갖췄다면 상아탑을 이끌 수 있다고 본다. 정치인에서 학자로, 저돌적이고 강한 젊은 정치인의 상징에서 이 시대 최고 지성집단인 대학 총장으로 발탁된 서갑원 신한대학교 총장(56). 옳고 그름의 판단보다는 목적과 목표를 향해가는 길에 어떤 방법이나 방식이 효율적일까를 판단해야 한다. 대학은 그 판단할 근거의 기준을 공부하고, 판단하는 방법을 가르치는 곳이다. 그를 만나기 전 쉽게 이해하지 못할 느낌이었지만 예측이 빗나간 선입견이었다는 생각이 굳어졌다. 서 총장은 허기진 젊음의 빈 마음 공간에 지식뿐만 아니라 지혜를 채워주는, 상아탑의 젊은 기운을 한없이 풀어 헤쳐줄 역량을 갖춘 총장이란 평가다. 이뿐만 아니다. 그는 정치와 교육, 이 두 가지 상반된 것 같지만 결국은 동일한 경험은 중요한 경쟁력의 바탕이 될 것으로 믿고 있다는 강한 신념을 갖고 있다.말단 철도원의 장남으로 자란 청년은 젊은이의 고민을 함께해 왔다. 보릿고개가 극심했던 시절, 전남 순천에서 나고 자란 그의 아버지는 철도보선사무소 기능직 공무원이었다. 전라선과 호남선의 철로를 보수하고 늘 자신이 일한 결과를 자랑스럽게 생각했다. 그의 생활철학인 진지함과 부지런함은 여기서 비롯됐고 그런 아버지의 검소한 정신적, 경제적 자양분으로 지금의 서 총장은 성장했다.무슨 인연이었을까? 기독교 선교사들이 순천 매산등(언덕)에 세운 미션스쿨을 졸업한 후 상경해 대학과 대학원을 졸업하던 날, 당시 노무현 국회의원과 인연이 돼 정치의 길로 들어섰다. 이후 그는 그렇게 정치 일선으로 나섰다. 국회의원 보좌관 시절에도 대학의 겸임교수로 학교를 떠나지 않았다. 청와대 정무비서관을 거쳐 재선 국회의원을 지내는 동안에도 늘 잠재의식 속에 대학이라는 자리가 차지하고 있었다. 그런 그가 25년 만에 대학 총장으로 돌아왔다. 기독교 정신으로 개교한 신흥학원 산하 신한대학은 설립자 강신경 목사의 '영성과 지성을 겸비한 인재양성으로 새로운 시대 발전에 공헌한다'를 교시로, 지난 2014년 의정부 최초의 4년제 대학으로 개교했다. 학교법인 신흥학원 이사회는 지난 7월 이사회를 열어 만장일치로 서갑원 교수를 제2대 총장으로 선출했다. 가을이 깊어가는 캠퍼스에서 그를 만났다. 북한방문에 연이어 멕시코 대학과 현지 캠퍼스설립 협의를 위해 맥시코에 갔다 하루 전 24시간 비행기를 타고 왔다고 한다. 피곤함에도 그에게는 에너지가 넘쳐났다.-총장으로 임명된 배경은."지난 몇 년간 대학에 있으면서 교육 현장의 고충과 대학 교육이 개선해야 할 문제점들을 실감할 수 있었다. '교육 문제의 해결이 바로 정치구나'하는 깨달음을 얻었다. 그래서 대학 총장을 맡아달라고 한 재단 이사회의 제안에 '네 한 번 해보겠습니다'라고 답한 것이다. 물론 의정부 최초 4년제 종합대학을 어떻게 명문으로 발전시켜야 할 것인지 학교재단의 고민이 컸을 것이라고 털어놨다. 자신에게 내재된 정치적 역량과 대학교육 경력이 조화를 이뤄 시너지 효과를 거둘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바람이 고려됐다고 본다고 말한다. 향후 추진될 대학 평가 등과 자신의 학생들에게 어떤 희망을 심어주고 또 어떤 준비를 시켜 사회로 내보낼 것인가를 깊이 고민하고 있다."-취임사에서 '교자정야(敎者正也)'를 강조했는데."논어에 나오는 '정자정야(政者正也)'란 말이 있다. '정치란 것은 바르게 하는 것'이란 뜻이다. '교자정야(敎者正也)'. 저는 교육이란 것도 역시 바르게 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세상을 바르게 하는 목표를 가졌다는 점에서 정치와 교육이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젊은 신한대를 향한 의정부시민의 기대가 크다."혁신하지 못하는 조직은 도태되고 사라지게 된다. 꿈은 한계를 뛰어넘는 상상이며, 세상에 없던 것을 만드는 창의다. 학생들에게 사회에 꼭 필요한 인재가 되겠다는 꿈, 최고의 대학을 만들겠다는 꿈, 교육 100년지대계의 초석이 되겠다는 꿈을 꿀 수 있도록 모든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 많은 사람들이 대학의 위기를 말하고 있지만 신한대는 지역대학의 한계를 이미 극복했으며 이를 바탕으로 수도권의 명문대학을 넘어 한반도의 명문대학으로 나아갈 것이다."-제2기 총장 취임 이후 행보가 발 빠르다. 주마가편(走馬加鞭·달리는 말에 채찍질한다는 뜻)을 행하는 이유."문제가 있으면 빨리 처리하고 대책을 강구해야 한다. 각 부처의 현황과 문제점을 파악, 문제 해결의 방향과 해법을 제시해야 한다. 학교는 학생이 대학의 주인이자 중요한 자원이다. 장학금, 셔틀버스, 식당운영 등 캠퍼스 복지를 위해 중장기적 학생 복지 현실화의 방안을 도출해야 한다. 서 총장은 취임 후 신한대와 중남미, 러시아 등지로 국제교류의 보폭을 넓혀왔다. 멕시코 UANE(Universidad Autonomad Noreste)대학과 교류협력 협정(MOU) 체결 후 현지에 신한대 캠퍼스 운영을 추진하고 러시아 카잔연방대학교(Kazan Federal University)와 협력방안을 논의하고 있다.서 총장은 마지막으로 "캠퍼스에서 생활하는 사람은 학생들과 내면의 통로를 만들어 그들의 아픔을 보듬어야 한다. 더 높은 상아탑을 향한 진학, 취업 등 진로에 대한 미래세대의 고민을 타개할 고통을 함께하는 총장으로 캠퍼스를 껴안으려 노력하겠다"고 강조했다.의정부/김환기기자 khk@kyeongin.com 사진/최재훈기자 cjh@kyeongin.com■서갑원 총장은▲1962년 전남 순천 출생▲국민대학교 대학원 법학 석사▲2012~2018 국민대학교 행정대학원 특임교수 중국 베이징대학교 초빙교수▲2009~2011 국회 정치개혁특별위원회 간사, 예결특위 간사▲2008~2011 민주당 원내 수석부대표(운영위원회 간사)▲2008~2011 제18대 국회의원▲2004~2008 제17대 국회의원▲2003 대통령비서실 정무1비서관 대통령비서실 의전비서관▲2002 노무현 대통령후보 정무특보▲1999 노무현 국회의원 보좌관▲1992 민주당 노무현 최고위원 비서서갑원 신한대학교 총장은 "지난 몇 년간 대학에 있으면서 교육 현장의 고충과 개선해야 할 문제점을 실감했다"며 "'교육 문제의 해결이 바로 정치구나'하는 깨달음을 얻었다"고 말한다. 사진/최재훈기자 cjh@kyeongin.com사진/최재훈기자 cjh@kyeongin.com사진/최재훈기자 cjh@kyeongin.com

2018-10-23 김환기

[인터뷰… 공감]'계양산 골프장 백지화 불씨' 신정은 인천녹색연합 녹색참여국장

롯데 신격호 명예회장은 그룹을 총괄하던 1974년 계양산 전체 면적의 3분의2에 해당하는 275만㎡(약 78만평)를 매입했다. 계양산 북사면 일대를 골프장이 포함된 위락단지로 개발하는 계획을 추진했지만, 번번이 가로막혔다. 인천의 진산(鎭山)이면서 시민들의 쉼터인 계양산에 골프장을 만드는 일이 간단한 문제는 아니었다. 그러던 중 롯데건설은 2006년 6월 인천시에 테마파크 조성과 친환경 구상을 덧입힌 '새 계획'을 제출했다. 개발 논리가 확산됐다. 계양산 골프장 개발을 주저하던 인천시의 입장 변화가 감지되기 시작했다. 8월 인천의 40여 개 시민·사회단체가 모여 '계양산 골프장 저지 인천시민 대책위원회'(이하 대책위)가 발족해 총력 대응에 나섰지만 뭔가 부족한 게 있어 보였다. "개발 행정은 빠르게 움직이는 반면 그에 대응하는 이슈를 만드는 일에 한계"를 느꼈다. "평화적으로 많은 사람에게 계양산의 가치를 알리는 방법이 없을까" 고민했다. 어느 날 대책위 한승우 사무처장이 미국의 환경 운동가 줄리아 버터플라이 힐(Julia Butterfly Hill)의 '삼나무 시위'를 얘기했다. 1997년 12월 미국 캘리포니아주에서 당시 스물 두 살의 줄리아 버터플라이 힐은 '수백 년이 된 삼나무를 베지 말자'며 삼나무 55m 높이에 오두막을 짓고 목재 회사와 738일을 싸웠다. 그렇게 계양산에서는 2006년 10월 26일 자정 무렵 인천녹색연합 신정은(40) 녹색참여국장이 목상동 솔밭의 소나무 위에 올라가 56일을 지냈다. 계양산 골프장 반대 시위는 인천뿐 아니라 전국의 이슈가 됐다. 차기 지방선거 후보들은 '계양산 골프장 반대 공약'을 내걸어 선거를 치렀고, 당선 이후 계양산 골프장 계획을 폐지했다. 이런 행정절차가 부당하다며 롯데 측이 소송을 제기했지만, 최근 대법원 판결로 패소해 계양산 골프장 건설은 백지화됐다. 계양산 소나무 시위 12년 만의 일이었다. 12년 전 계양산의 소나무에 오른 신정은 국장을 만났다.-계양산 골프장 반대 투쟁에서 시민단체가 긴 싸움을 거쳐 대기업을 이겼습니다."우선 저 혼자 한 일이 아니었다는 것을 말씀드리고 싶어요. 여러 단체가 힘을 합쳐 이뤄낸 일이에요. 시민들의 지지와 성원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고요. 저는 초기에 불씨를 붙이는 역할을 했을 뿐이에요. 제가 소나무에서 내려온 뒤 바통을 이어 소나무 시위를 약 150일간 하신 윤인중 목사님도 기억해야 합니다. 계양산 골프장 반대 운동에 동참하면서 그 안에서 같이 성장하고 커 왔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인천녹색연합 박주희 사무처장은 2008년 인턴으로 들어와 실무를 보며 기자회견, 삼보일배, 시민조직, 서명운동 등을 현장에서 지켜봤어요. 이한구 시의원은 계양산 주민으로서 골프장에 반대했고 '시민의 후보'로 시의회에 입성해 골프장을 막아내는 데 큰 역할을 했어요. 오카리나 연주가 정미영 선생님은 골프장 반대 촛불문화재 때 매번 나오셨고, 이제는 '거리의 어려운 이들'이 있는 현장에서 연주하고 계세요. 저마다의 방식으로 이 싸움에 동참하신 분들이 많아요. 그래서 이런 생각을 했어요. 계양산이 크게 여러 사람을 품어온 것 같다고."-12년 전 소나무 시위, 무섭지 않으셨나요."2006년 10월 26일 자정 무렵 녹색연합 암벽팀 녹색친구들, 인천녹색연합 활동가 등 10여 명이 다남동에서 20~30분간 고개를 넘어 목상동 솔밭으로 넘어갔어요. 암벽팀 선배님들이 소나무 3그루에 올라가 못질 하나 안 하고 노끈으로 대나무를 엮어 1.5평 공간을 만들어 주셨어요. 소나무 시위 이틀째 되는 날 '관리인'이라는 분이 나무에 낫을 들고 올라와 집기를 밖으로 던지는 소동이 있었는데, 그때 관리인 측에서 나무에 오르기 위해 박은 못이 지금도 남아 있어요. 나무 위에 한참 있다 보면 소나무 향기가 몸에 배어요. 이러다가 나무가 되지 않을까 생각하기도 했어요. 인간이 해에 큰 영향을 받는 것도 느낄 수 있었어요. 한밤에 비가 쏟아져도 아침에 해가 뜨면 물기가 마르고, 바람이 그렇게 불어도 해가 뜨면 잦아들어요. 바람이 불 때 산골짜기에서 바람이 후후후 밀려오는 소리가 들려요. 초반에는 공포감을 느낄 정도였는데 나중에는 바람과 같이 흔들리니까 무섭지 않더라고요."신정은 국장은 녹색연합 암벽팀 회원으로 활동한 경력이 있다. 등산 실력이 수준급이고, 암벽 등반 기술도 익혔다.-환경 운동에 관심 갖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요."20대 초반에 우연한 기회에 녹색연합이 발행하는 '작은 것이 아름답다'를 접해 읽기 시작했어요. 삶의 방식이라든가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의 변화가 시작됐어요. 그 책을 인천에서 안 팔아 서울 영풍문고까지 가서 사다 봤어요. 그것을 쉽게 받아보려고 (서울)녹색연합 회원이 됐어요. 터진개 문화마당 황금가지에서 사람들을 만나고 공부를 시작한 것도 변화의 계기가 됐어요. 인천에서 나고 자랐지만, 인천에 애정이 크게 없었는데 그게 잘 몰라서였던 것 같아요. 그냥 별 고민 없이 '그 시기에 해야 할 것 하면서 사는 인생'이었거든요. 사부님(이종복 대표)이 '그딴 식으로 공부하면서 세상을 산다고?'라고 말씀하셔도 싫거나 그러지 않고 잘 받아들였어요. 산이 좋다고 열심히 다녔는데 제가 기억하는 계양산은 힘든 산이었어요. 남사면 쪽은 계단이 많고 경사가 가팔라 썩 좋은 숲이 아니라고 봤어요. 녹색연합 하고 와보니 너무 좋은 거예요. '이렇게 좋은 곳이 인천에 있는데 바깥의 좋은 데만 찾아 다녔구나' 하는 미안한 마음이 들었어요."-환경 운동에 본격적으로 나서기 전 회사 생활은 어땠나요."대학에서 산업디자인을 전공했어요. 인천에 있는 건설 설비 회사에서 일하면서 인천공항 옥외 배관 그림을 그렸어요. 당시에는 맨날 영종도 공항 건설 현장으로 출근했어요. 또 용인에 있는 회사에 다니면서 원전 설계에 참여한 적도 있고요."-환경운동가가 개발 분야에서 일했다는 점이 특이합니다."직장 생활이 힘들었어요. 보수도 너무 낮았고 파견직, 계약직으로 일해 비정규직의 어려움을 몸소 겪었어요. 녹색연합 회원으로 다양한 활동에 참여하는 것과 제가 하는 일의 괴리감도 있었던 것 같아요. '여기는 돈을 벌기 위한 수단'이라고만 생각했던 것 같아요. 계약 끝나고 외국 여행을 준비하고 있을 때 인천녹색연합 자원봉사를 시작했어요. 그러던 중 활동가 1분이 그만두게 됐고, 사무처 상근을 제안받으면서 활동가를 시작했어요."신정은 국장은 상근 활동가를 처음 제안받았을 때 "활동가? 그거 아무나 하는 게 아니잖아요. 그건 제 일이 아닌 것 같아요"라며 거절했다고 한다. 그러던 그는 인천녹색연합 회원 교육을 담당하는 중견 활동가로 성장했다. 환경 관점에서 사람들을 변화시키는 게 그의 임무다. 신 국장은 "제가 바르게 잘 사는 것을 옆에 사는 사람이 보고 귀감이 될 때, 그 사람이 변한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글/김명래기자 problema@kyeongin.com 사진/김용국기자 yong@kyeongin.com■신정은 국장은?1978년 인천 송현동에서 태어나 축현초, 인천여중, 인화여고를 졸업한 인천 토박이다. 부천대 산업디자인과를 졸업하고 설비 설계 분야의 민간 기업에서 일했다. 2006년 1월 인천녹색연합 녹색교육팀 간사가 되면서 환경운동에 본격 나섰다. 같은 단체에서 생태보전팀 간사, 조직지원팀 간사 등을 거쳐 현재 녹색참여국 국장을 맡고 있다.지난 2006년 계양산 소나무 시위에 나섰던 신정은 국장이 12년 전 오른 소나무 눌직이를 15일 찾아가 두 팔로 껴안았다. 신 국장은 소나무 3그루에 기대 시위를 벌였다. 신 국장에 이어 소나무에 오른 윤인중 목사는 그 이름을 우직이, 묵직이, 눌직이로 지어 불렀다. 사진/김용국기자 yong@kyeongin.com신정은 국장은 2006년 10월 26일 밤 계양산 소나무에 올라가 그 이튿날인 27일 오전 6시부터 시위를 시작했다. 사진은 시위 첫 날 모습이다. /경인일보DB사진/김용국기자 yong@kyeongin.com

2018-10-16 김명래

[인터뷰… 공감]박태원 서해5도평화수역 운동본부 상임대표의 막중한 임무

눈앞에 두고도 갈 수 없었던 황금어장. 인천 서해 최북단 도서 지역 어민들은 분단 이후 보이지 않는 선에 갇혀 살아왔다. 서해북방한계선(NLL) 일대를 넘나들며 불법조업을 하는 중국어선을 눈 뜨고 지켜만 봐야 하는 현실에 분노를 느꼈고, 툭하면 대피소에 몸을 숨겨야 하는 현실에 비통함마저 느꼈다. 서해5도 어민들은 남북을 자유롭게 오가는 점박이 물범과 철새들을 보면서 평화의 날을 꿈꿀 뿐이었다. 한반도 깃발을 배에 달고 조업하면서 언젠가는 남북 어민들이 함께 꽃게를 잡고 어획물을 사고파는 날이 오기만을 기다려왔다.바람으로만 그칠 줄 알았던 일들이 4월 판문점 선언과 9월 평양공동선언 이후 현실로 성큼 다가왔다.분쟁의 바다에 불어오는 평화의 바람을 가장 가까이서 맞이하는 이가 있다. 연평도에서 태어나 평생을 고향을 떠나지 않고 섬을 지켜온 박태원(58) 서해5도 평화수역 운동본부 상임대표다.연평도 어촌계장으로 더 잘 알려진 그는 단순히 서해5도 어민들의 권익을 대변하는 역할에만 그치지 않고, 서해가 평화의 중심지로 다시 태어나야 한다며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불과 1년 사이에 많은 변화가 있었습니다. 특히 요즘 한반도와 서해에 평화의 분위기가 빠르게 퍼지고 있는 것을 느낍니다. 제 생애에 통일이 되는 게 아닐까 기대감마저 듭니다."박태원 상임대표는 2일 경인일보와의 전화 인터뷰에서 상기된 목소리로 이같이 밝혔다. 그는 9월 평양공동선언에서 남북이 서해에 공동어로구역을 시범 설치하겠다고 합의했다는 소식이 전해진 이후 어깨가 더 무거워졌다고 한다. 어민들의 목소리를 담아 정부와 인천시에 전달해야 할 막중한 임무가 그에게 있다.그는 "일단 현 정부의 대북정책 기조를 지지한다"며 "어렵게 찾아온 이 평화의 분위기를 잘 살려 '진정한 한반도 평화 정착'을 위한 활동을 펼쳐야 한다는 책임감을 느낀다"고 말했다.서해5도 주민들은 안보를 이유로 정부의 통제 아래 제한된 시간과 협소한 어장에서 조업하는 피해를 감수하며 살고 있다. 야간 항행 금지로 야간조업이 금지된 게 올해로 45년째라고 한다. 그는 "긴 세월 동안 서해5도 어민들의 하루는 24시간이 아닌 12시간이었다"고 표현했다.주민의 정주권도 접경지역이라는 이유로 많은 규제를 받았다. 연평도 포격사건 이후 섬은 군사 요새화 됐고, 여객선의 야간 운행도 안보 문제로 제한됐다. 그러는 사이 중국어선이 연평도 앞바다를 점령했고, 2년 전 연평도 어민들은 불법조업을 하던 중국어선 2척을 직접 나포하기도 했다.박태원 상임대표는 "365일 분쟁지역에 사는 당사자인 서해5도 주민의 생존과 인권의 문제를 논의하는 게 우선시돼야 한다"며 "우리도 '대한민국 주권 국민'입니다. 행복을 추구할 권리'가 있으며, 국가는 이를 보장할 의무가 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서해5도 평화수역 운동본부는 백령도와 대청도, 연평도 등 서해5도 어민단체와 인천지역 시민사회단체들이 모여 만든 단체다.2016년 중국어선 나포 사건을 계기로 '서해5도 생존과 평화를 위한 인천시민대책위원회'라는 이름의 단체가 결성됐고, 정권이 바뀌면서 서해 평화를 위한 범시민 캠페인 등 활동 범위를 넓히기 위해 명칭을 바꿨다.박태원 상임대표는 "서해5도는 정전 후 유일하게 북한의 군사 도발로 인한 민간인 피해가 발생했고 서해 최북단에 있다는 이유로 주민들의 이동권, 정주권 등이 제약된 곳이다"며 "남북 긴장 관계 완화를 통한 평화 분위기 정착, 불법조업 중국어선 단속 강화, 서해5도 주민 이동권·정주권 보장 등을 위한 활동을하고 있다"고 했다.판문점선언과 평양공동선언으로 공동어로구역 시범적 설치가 합의됐다. 서해 평화수역 조성의 첫 발걸음이다. 남북은 시범 공동어로구역을 남측 백령도와 북측 장산곶 사이에 설정하되, 구체적인 경계선은 남북군사공동위에서 협의해 정하기로 했다.박태원 상임대표는 "5월과 9월 정부와 가진 2차례 비공개 회의 때 우리가 제시한 의견이 어느 정도는 반영된 것 같다"며 "특히 올해 봄에 어민들이 평화의 마음을 담아 한반도기를 배에 달고 조업을 했는데, 이번 합의에 남북 어선들이 한반도기를 달고 평화수역에서 조업하자는 내용이 포함된 것이 인상적이었다"고 말했다.또 "장산곶을 공동어로구역에 포함한 건 중국어선이 들어오는 길목을 막으면서 남북 간의 NLL 해상파시, 해조류 공동양식, 공동조업 등 다양한 확산사업이 가능하기 때문으로 해석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공동어로구역은 조업의 문제뿐만 아니라 서해5도를 둘러싼 군사적 긴장을 해소하고 주민이 평화로운 일상을 보낼 수 있는 상징적인 정책수단이다. 단기적으로 불법조업 중국어선이 줄고 어족자원이 풍부해질 것으로 그는 보고 있다.박태원 상임대표는 "이 분위기가 이어진다면 남북 어민들의 조업이 활성화되고 수산물 경제협력 사업도 가능할 것이다"며 "이를 위해 분쟁의 바다를 평화의 바다로 만들고, 서해5도 옹진반도 해역을 '수산자원의 보고'로 관리해야 한다. 그것이 미래 한반도의 수산자원을 보존하는 길이다"고 강조했다.현재 서해5도 어민단체, 지역 시민단체, 해수부, 인천시, 옹진군 등이 민관 공동협의체 구성에 합의했고, 조만간 3차 회의를 열 예정이다. 박태원 상임대표는 이제 정부가 더는 새로운 약속을 하기보다는 기존의 약속을 지켜야 할 때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더는 속지 않겠다는 얘기다.그는 "대한민국 건국 이래 역대 정권 모두 서해5도 주민들에게 수많은 약속을 했다"며 "우리는 더 이상 새로운 약속을 요구하지 않을 것이다. 이미 정부가 한 약속에 부합하는 행동을 요구할 뿐이다"고 했다. 그는 고향 연평도를 비롯한 서해 5도가 평화의 바다로 정착하길 바라고 있다. 이를 위해 정치권이 정쟁을 멈추고 평화를 위해 힘을 합쳐 나아가야 한다고 힘주어 말했다."서해5도에는 젊은 장병들이 많습니다. 누군가의 소중한 아들입니다. 분단의 환경이 계속된다면 이 아들의 아들이 또다시 그 자리를 지켜야 할지 모릅니다. 이곳 주민과 군인 모두 국가와 국민을 위해 희생하고 있습니다. 소모적인 정쟁을 멈춰야 합니다. 특히 서해5도 주민들 가운데는 실향민이 많습니다. 이들이 고향 북녘땅을 밟을 수 있게 해주길 바랍니다."글/김민재기자 kmj@kyeongin.com■박태원 서해5도 평화수역 운동본부 상임대표 프로필▲ 1960년 연평도 출생▲ 1975년 연평중학교 졸업▲ 옹진군 장애인협회장(전)▲ 옹진수협 비상임 이사(전)▲ 옹진부천산림조합 대의원(전)▲ 연평어촌계장(전)▲ 서해5도 평화수역 운동본부 상임대표▲ 1980년부터 38년 간 어업종사박태원 서해5도 평화수역 운동본부 상임대표가 2일 인천 옹진군 연평도 당섬 선착장에서 서해 평화에 대한 바람을 이야기하고 있다. /서해5도 평화수역 운동본부 제공지난 4월 남북정상회담을 앞두고 인천시 옹진군 연평면 당섬선착장 인근 해상에서 한 어선이 '서해5도 한반도기'를 달고 이동하고 있다. 서해5도 한반도기는 흰색 배경에 푸른색의 한반도가 독도와 함께 그려진 기존 한반도기에 서해5도를 추가해 제작된 깃발로 서해 평화와 어장 확장에 대한 염원이 담겼다. /연합뉴스

2018-10-02 김민재

[인터뷰… 공감]자카르타AG 여자 복싱 '대한민국 사상 첫 금메달' 오연지 (인천시청)

아시안 게임 매 경기마다 간절함금메달 아직도 실감 안나 얼떨떨인천AG·리우올림픽 선발전 좌절잇단 판정논란 '국내 최강자' 울분짧은 방황후 다시 오뚝이처럼 재기최대 고비 4강 北 최혜송 꺾고 영광11월 세계선수권·2년뒤 도쿄올림픽아시아 넘어 세계정상 '두주먹 불끈'"지금 이 순간, 흘리는 땀방울도 값지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죠. 올림픽 金메달이 제 인생의 전부가 아니란 것을."올림픽 금메달만 바라보고 샌드백을 두드렸다. 선수촌에서도 연습벌레로 통했다. 그의 스승은 "훈련량으로 치면, 전 세계에서 이 녀석만큼 열심히 하는 선수는 없다"고 잘라 말했다. 국내에는 적수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국가대표 선발전에서 석연치 않은 판정이 그의 발목을 잡았다. 꿈꿔오던 올림픽 무대를 밟지 못한 그는 상심이 클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방황의 시간은 길지 않았다. 어느날 불현듯이 떠오른 생각. '올림픽 금메달이 전부는 아니잖아. 난 지금 이 순간, 최선을 다하고 있잖아….'홀가분한 마음이 들었다. 그래서 훈련에 더욱 집중할 수 있었다. 한국 여자복싱 사상 첫 아시안게임 금메달에 도전한 그는 상대를 향해 마음껏 두 주먹을 날렸다. 치열한 혈투 끝에 마지막 3라운드 종료를 알리는 종이 울렸다. 땀으로 뒤범벅이 된 그의 손을 심판이 번쩍 들어 올렸다. 정적을 뚫고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아시아 최정상의 자리에 오른 그는 무릎을 꿇고 기도했다.한국 여자복싱이 새 역사를 썼다. 오연지(28·인천시청)는 이달 초 막을 내린 2018 자카르타-팔렘방 아시안게임에서 한국 여자복싱 사상 첫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한국 복싱 남녀 대표팀을 통틀어 유일한 메달이다.소감부터 물었다. 마음고생이 컸던 것일까. 오연지는 한참 동안 말문을 열지 못했다. "부담이 컸어요. 한 경기, 한 경기 간절한 마음으로 임했던 것 같아요. 사실, 아시안게임 무대에 섰다는 것 자체도 실감이 안 났죠. 아직도 얼떨떨해요."오연지는 국내 대회를 평정했다. 가장 대표적인 전국체육대회에서 여자복싱이 정식 종목으로 채택된 2011년 우승을 차지한 이후 지난해까지 7연패의 대기록을 세웠다. 전국의 내로라하는 라이트급(60㎏) 여성 복서들이 모이는 이 대회에서 한 차례도 금메달을 놓치지 않은 것이다.그의 주먹은 아시아에서도 통했다. 2015년과 2017년에 아시아복싱연맹(ASBC) 아시아선수권대회에서 한국 여자복싱 사상 최초로 2연패를 일궈냈다. 한국 여자복싱의 역사가 오연지의 주먹에 의해 쓰이고 있는 셈이다.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오연지는 이달 1일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의 자카르타 국제 전시장(JIEXPO)에서 열린 2018 자카르타·팔렘방 아시안게임 여자복싱 라이트급(60㎏) 결승에서 태국의 슈다포른 시손디에게 4-1(29-27 28-28 27-29 27-29 28-28) 판정승을 거두며, 한국 여자복싱 사상 첫 금메달의 주인공이 됐다. 오연지는 참아왔던 눈물을 왈칵 쏟아냈다. 그 눈물의 의미를 스승인 김원찬 인천시청 복싱팀 감독은 잘 안다. 김 감독은 오연지의 어깨를 두드려줬다.이 자리에 오기까지 우여곡절이 많았다. 오연지는 2014년 인천 아시안게임 국가대표 선발전에서 해당 체급 국내 최강자답게 시종일관 우세한 경기를 펼쳤지만 석연찮은 판정으로 패하며 울분을 삼켰다. 몸 담고 있는 인천에서 열리는 아시안게임이었기에 더욱 간절했던 그였다. 당시 오연지의 세컨드였던 김태규 인천시청 코치는 링에 올라가 항의하다가 최종 5년 자격정지 징계를 받기도 했다.올림픽 출전이란 오랜 꿈도 바로 눈앞에서 놓쳤다. 오연지는 2016년 리우데자네이루 올림픽 아시아·오세아니아 지역 선발대회 8강전에서 또다시 석연찮은 판정으로 올림픽 출전이 좌절됐다. 그야말로 시련의 연속이었다."힘든 순간들을 잘 견뎌왔던 것 같아요. 특히 (리우) 올림픽은 정말 간절했거든요. 좌절도 했죠. 저의 오랜 꿈이었으니까…. 올림픽 출전을 위해 준비했던 시간을 떠올려봤는데, 금메달이 전부는 아니더라고요. 제가 흘린 땀이 더욱 값진 것이었어요."오연지는 이를 악물고 오뚝이처럼 다시 일어섰다. 물론 이번 아시안게임은 시작부터 녹록지 않았다. 매 경기가 결승전이나 다름없었다. 대진표를 확인한 김 감독도 표정이 좋을 리 없었다. 16강(베트남 류띠듀엔), 8강(중국 양원루), 준결승(북한 최혜송)은 물론, 결승까지 오연지가 상대한 선수들은 모두 우승 후보들이었다.최대 고비는 북한 최혜송과의 4강전이었다. 그는 지난해 러시아에서 열린 국제 복싱대회에서 양원루를 3-2로 제압하고 금메달을 목에 건 선수였다. 오연지와 최혜송은 당시 대회에서 서로의 경기를 지켜보며 이번 아시안게임을 대비해 왔다.오연지는 전북 군산이 고향이다. 1988·1992년 올림픽 국가대표 출신인 외삼촌(전진철)이 운영하는 복싱 체육관에 놀러 갔다가 복싱과 인연을 맺었다. 중학교 3학년 때의 일이다. 오연지는 부모님(오광열, 전진순)의 만류를 무릅쓰고 군산상고에서 본격적으로 복싱을 시작해 현재에 이르렀다.오연지에게 복싱이란 무엇일까. 이 질문에 "도전"이라는 답이 돌아왔다. 오연지의 머릿속은 벌써 올해 11월 세계선수권에 이어 2년 뒤인 2020년 도쿄 올림픽을 향해 있다. 아시아를 넘어 세계 정상으로 가는 길에 도전장을 내민 것이다. 오연지가 한국 여자복싱 역사에 또 다른 획을 긋는 상상을 하니 은근히 마음이 들뜬다.글/임승재기자 isj@kyeongin.com 사진/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오연지 선수는?▲ 전북 군산 출생(1990년)▲ 군산상업고등학교, 호원대학교 졸업▲ 전국체육대회 7연패(2011~2017년)▲ 아시아복싱연맹(ASBC) 아시아선수권 2연패(2015·2017년)▲ 2018 자카르타-팔렘방 AG 金2018 자카르타-팔렘방 아시안게임 한국 여자복싱 사상 첫 금메달을 획득한 오연지 선수가 18일 오후 인천시 남동체육관에서 2020년 도쿄 올림픽을 목표로 훈련을 하고 있다.지난 1일 오후(현지시간) 인도네시아 자카르타 인터내셔널 엑스포에서 열린 2018 자카르타·팔렘방 아시안게임 여자복싱 라이트급(60㎏) 결승에서 한국 오연지가 태국 선수를 상대로 경기를 하고 있다. /연합뉴스금메달을 획득한 한국 오연지가 태극기를 들고 환호하고 있다. /연합뉴스

2018-09-18 임승재

[인터뷰… 공감]'정류장 시인' 선희석 경기도재난안전본부 재난종합지휘센터 소방위

광교호수 바라보며 느낀 애환… 수원시 정류장 인문학글판 입상글쓰기 배운적 없지만 현장 '트라우마' 속앓이 소방관 돕고자 시작2년간 커뮤니티에 '힐링 아침 편지'… 기념일 직접 손으로 써 전달문체부 기념수기·공무원 문예대전 등 수상… 라디오 DJ 되기 새꿈인명을 구조하고 화재를 진압하던 한 소방관의 손끝에서 묻어난 가슴 찡한 이야기가 사람들의 심금을 울린다. 마음의 평화를 찾으려 속에 맴도는 생각을 정리하던 그는 소방관 동료들, 더 나아가 시민들에게 위로와 희망을 주는 '글쟁이'가 되려 한다. 선희석(53) 경기도재난안전본부 재난종합지휘센터 상황4팀 소방위의 별명은 '정류장 시인'이다. 지난 2015년 수원시에서 주최한 하반기 버스정류장 인문학글판 창작시 공모에서 '광교호수에서'라는 시로 입상한 뒤 광교신도시 신대저수지 부근 하동의 한 버스정류장에 시를 게시하는 영예를 안았다. 그는 어떤 별명보다 정류장 시인이라는 별명에 애정을 가지고 있다. 시민들이 오가는 거리에서 자신이 광교 호수를 바라보며 느낀 애환을 전달할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한다.'수원팔경 돌아서니 호수에 드리운 님의 얼굴 곱구나 / 해를 삼킨 광교호수 어둠마저 풋풋하여라 / 살랑대는 미풍에 님의 숨결 아득할 때 / 백리길 마다 않고 달려온 발걸음은 어느새 새털구름 / 내마음 들킬까봐 나도 몰래 빠져드는 광교호수'수원역 로터리 식당 '백구옥'의 둘째 아들로 수원에서 나고 자란 그에게 광교 호수는 아름다운 공간만은 아니다.광교 호수를 원천 저수지라고 부르던 시절인 1995년 7월 송탄소방서내에서 지방소방사로 공직을 시작한 그는 2000년 12월 수원남부소방서로 발령받았다. 근무 한지 얼마 안돼 당시 한 식당으로 이용되던 원천 저수지 수상 건물에서 큰불이 났다.선 소방위는 방화복을 착용하고 무거운 장비를 들고 동료들과 함께 화마(火魔) 속으로 뛰어들었다. 그러나 몇 걸음 떼기도 전에 눈 앞에서 목조 다리가 무너져 동료 대원이 사라졌다. 선 소방위는 머리 위로 불타는 건물이 있었고 발을 짚은 목조 다리는 위태로웠지만, 동료의 산소탱크를 붙잡아 물속에서 끄집어냈다. 소방관으로 살아가면서 몇 차례 죽음의 공포를 맞닥뜨렸지만, 그 당시만큼 두려웠던 적은 없었다고 그는 회상한다.소방관들은 재난 현장에서 말 그대로 '생고생'을 한다. 몸도 많이 다치지만, 마음의 병을 치유하지 못해 속앓이를 하고 있다. 선 소방위는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동료들의 마음을 어루만지기 위해 펜을 잡았다.그는 "원천저수지의 일 말고도 화재 현장의 엘리베이터 안에서 꼼짝없이 갇혀 '이대로 죽는구나' 싶었던 적이 있었어요. 그런 죽음의 공포를 수도 없이 느끼며 삶을 이어가는 동료들에게 위로가 되는 글을 적기 시작했지요"라고 글을 쓰기 시작한 이유를 설명했다.그는 단 한 번도 전문적으로 글쓰기를 배워본 적은 없다. 외모도 시와는 거리가 멀다. 당근색 소방대원 옷을 입은 그에게 '시 냄새'는 전혀 나지 않았다. 목이 굵고 피부가 거뭇거뭇하게 그을린, 운동을 좋아할 것만 같은,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중년의 사나이 풍모다.그는 청소년기 태권도 선수로 활동하다 부상으로 꿈을 접었다. 학업을 마치고 특전사 중사로 전역한 뒤에는 택시도 몰고 가스 배달을 하다가 경기도 소방공무원 구조 특채(1995년 7월)로 임용됐다. 고등학교 시절 백일장에서 글을 써 입상을 하며 국어 선생님이 용기를 불어 넣어준 기억이 그를 다시 창작의 길로 인도했다.2년 전부터 수원소방서 온라인 커뮤니티에 동료들을 위로하기 위한 '힐링 아침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그는 결혼기념일이나 자녀 돌을 맞은 후배들에게 손글씨로 편지를 써 선물하려고도 펜을 잡는다. 함께 근무하는 모든 동료들의 소중한 날, 자신의 편지를 쥐어 주는 것이 퇴직 전 목표다."글을 적으면서 가장 감사한 순간은 무대에 올라 상을 받았던 것보다는 동료들이 과거에 선물한 손편지를 꺼내 보이며 '제 아들 첫 생일날, 주임님이 주셨던 편지 이렇게 아직도 갖고 있어요'라는 후배의 한마디를 들었을 때예요."꾸준한 글쓰기로 연마한 실력은 전국 단위 공모전에서의 수상으로 인정받았다. 지난 6월 문재인 정부 출범 1주년 기념 문화체육관광부 주최 기념 수기 공모전에서 '시간의 벽을 넘어서'라는 작품으로 최우수상을 받았고, 2016년에는 제19회 공무원 문예대전 시 부문 은상을 받았다.수기 공모전에 출품한 '시간의 벽을 넘어서'에는 공직 생활을 하면서 갖게 된 나라에 대한 봉사정신과 주변 동료, 가족들에 대한 마음을 담아내 호평을 받았다. 공무원 문예대전에서는 '옥자'라는 제목의 시를 출품했다.가족을 먼저 떠나보내고 가족과 떨어져 살아야 했던 아픔도 선 소방위에겐 집필 욕구를 강하게 하는 요인 중 하나다. 초등학교 입학을 앞둔 남매를 남기고 아내가 먼저 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주야를 막론하고 근무해야 하는 소방관이었기 때문에 여동생에게 어린 남매를 맡기고 근처에 혼자 살아야 했다."아들과 가까이 산 지 얼마 안 됐어요. 제 자식들과 한 건물 오피스텔에 각자 방을 얻어서 이제야 붙어서 지내고 있는데, 떨어져 있을 때 몰랐던 부(父)정이 제 안에 있다는 것을 새삼 느끼고 아버지의 손길이 필요할 때 더 함께 해야 했다는 후회도 하고 있습니다."가족과 함께 시간을 보내지 못한 아쉬움을 달래기 위해 수원시 사회관계망서비스(SNS) 시민 기자로 활동하며 숨겨진 수원의 명소들을 함께 찾아다니고 사진과 글로 기록을 남기고 있다. 그의 페이스북에는 화성행궁, 행궁동 벽화골목, 일월공원 등 수원의 가볼 만한 명소들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글로 전달하는 기쁨을 넘어 목소리로 사람들에게 다가가 시 읽어주는 라디오 DJ가 되는 것이 그의 새 꿈이다.지난해 6월 선 소방위는 수원시가 주최하고 한국성우협회와 KBS성우극회가 주관하는 '제18회 시와 음악이 있는 밤' 공모전에 당선돼 수원 야외음악당에서 자신이 쓴 시를 낭독하기도 했다. 주변 사람들의 격려가 그에게 새로운 목표를 갖게 한 동력이 됐고, 조직 내에서 아침마다 좋은 글을 읽어 주는 방송하는 프로그램에 참여하기도 했다."제 글과 목소리로 누군가를 위로할 수 있다면 그것보다 더 한 기쁨이 없을 거예요. 앞으로도 보이고 들리는 모든 것을 기록하고 시로 표현해 시민들에게 다가가고 싶습니다. 퇴직 후에는 작은 카페를 운영하며 해왔던 일들을 정리하고 사람들과 소통하고 싶습니다."그의 소망이 이뤄지는 그날을 기대해 본다.글·사진/손성배기자 son@kyeongin.com■선희석 소방위는?선희석 소방위는 1995년 7월 경기도 소방공무원 구조 특채로 임용돼 송탄소방서, 수원남부소방서, 수원중부소방서 등에서 근무. 1998년 수해복구지원 유공 경기도지사 표창, 2014년 11월 제52주년 소방의 날 유공 수원시장 표창. 문재인 정부 출범 1주년 기념 문화체육관광부 주최 기념 수기 공모전에서 최우수상 수상. 직원 커뮤니티에 글을 쓰기 시작. 최근 손글씨를 배워 편지를 써 전달. 새 정부 출범 1년 동안 개인적으로 변화된 삶의 무게와 고민을 '시간의 벽을 넘어서'라는 작품을 통해 담아냈다. 2016년 제19회 공무원 문예대전 시 부문 은상을 수상했다.경기도재난안전본부 재난종합지휘센터 상황 4팀 소속으로 왕성한 시·수필 창작 활동을 하고 있는 선희석 소방위가 자신이 근무하는 자리에 앉아 포즈를 취하고 있다.

2018-09-11 손성배

이정미 정의당 대표 "약자 대변·인천발전에 최선"

송도서 워터프런트 집회 방문 등환경·교육 지역구 현안 파고들어주 52시간이 도입된 후 정치판에도 바뀐 것이 있다. 오전 8시 30분께 진행하던 각 당 지도부 회의나 의원 총회 등 회의 일정이 1시간가량 늦춰졌다. 이런 변화를 이끈 건 이정미(52) 정의당 대표다. 출입 기자들의 근로 시간 단축을 위한 아이디어에서 시작됐다. 정의당이 시작하니 더불어민주당, 자유한국당 등 다른 당에서도 안 따라갈 수가 없었다.그런데 정작 이정미 대표는 퇴근은커녕 끼니를 거를 때도 허다하다고 한다. 비례대표 의원, 당 대표로서의 역할을 하기에도 버거운 판에 인천을 오가며 지역구 현안을 속속들이 챙기기 때문이다. 경인일보와의 인터뷰가 있던 지난 1일에도 인터뷰 시간 직전까지 송도 워터프런트 재심사 요구 집회 현장을 방문하고 왔다고 했다. 인터뷰를 시작하자마자 이정미 대표는 이마에 맺힌 땀을 채 닦기도 전에 집회 현장에서 만난 주민들의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이정미 대표는 "송도 워터프런트 재심사 요구는 단순히 수변 공간을 만들어 달라는 것 이상으로, 송도 주민들의 누적된 억울함이 상징적으로 드러난 것"이라며 "잘 사는 사람들이 사는 곳이라고 말하지만 실은 계획된 사업은 무산된 채 악취, 학교·인프라 부족 등의 문제를 겪으며 살아가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개발에 치우쳐 정작 소홀히 여겨졌던 사람, 환경, 교육 문제를 반드시 해결할 것"이라고 강조했다.비례대표 의원인 이정미 대표가 인천 송도에 지역사무소를 개소한 지 1년 하고 2개월이 조금 넘었다. 그는 송도의 3대 현안인 6·8공구의 학교·도로 등 인프라 부족 문제, 원인 불명의 악취 문제, 송도 워터프런트 조성 사업에 매달리고 있다. 이 대표는 "최근 교육부에서 직접 보고를 받았는데 6·8공구의 경우 학교 신설 재심사로 2개 학교만 신설된다 하더라도 평균 급당 인원이 67명이라 반드시 4개교가 신설돼야 한다"며 "가장 심각한 악취 문제는 원인 파악이 우선이라 악취 포집기를 추가 설치하는 데 노력했다"고 말했다.대한민국에서 가장 '핫한 정치인' 중 한 명이기도 한 이정미 대표는 지역구 의원보다 더 열심히 지역 현안에 파고든다는 평가를 받는다. 이정미 대표는 "약자를 대변하는 정의당의 역할을 계속해 나갈 것"이라며 "앞으로도 인천의 발전을 위해 모든 노력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윤설아기자 say@kyeongin.com

2018-09-04 윤설아

[인터뷰… 공감]인천에서 자란 정치인, 이정미 정의당 대표

#사무실 연 송도, 무엇이 과제인가6·8공구 인프라·악취문제 등 심각개발과정 주민피해 함께 해결해야#국비확보 의원 간담회 제외 논란유정복 시장때도 참여, 한국당 반대지역의원 협력해야… 자리 약속받아#선거구 획정 등 정치개혁 방향은다당제 민의 반영되는 국회구성 사활과도하게 높은 교섭단체 문턱 낮춰야#문재인 정부의 정책 어떻게 보나남북관계·적폐청산은 잘하고 있지만소득주도 성장·경제 민주화 속도내야이번 주 일요일, 그러니까 오는 9일은 노회찬 정의당 전 대표가 서거한 지 49일째 되는 날이다. 49재 풍습이 널리 퍼져 있는 우리에게는 아주 특별한 날이 아닐 수 없다. 대한민국 진보 정치계의 한 축이자 정의당에서 큰 자리를 차지했던 노 의원의 서거는 정의당에 '날벼락'과 같은 사건이었다. 민주평화당과 어렵게 구성한 공동교섭단체 지위도 잃었다. 그런데 이후 정의당의 반격이 심상찮다. 한 여론조사 기관의 조사에서는 노 전 의원 서거 이후 제1야당인 자유한국당 지지율을 넘어섰다. 4만 명이었던 당원 수는 5만 명으로, 몇 주 새 1만 명이 늘었다. 그 어느 때보다도 제1야당으로 도약하기 위한 당 안팎의 관심이 뜨거워진 요즘이다. 그 중심에 이정미 당 대표가 있다.이정미 정의당 대표는 "노회찬 전 대표의 서거는 정의당에게는 타격이 큰 사건이었지만 이후 정의당에 보내준 국민의 목소리를 들으니 더는 슬픔에 빠져 있으면 안 되겠다고 생각했다"며 "'당은 앞으로 나아가 달라, 정의당을 사랑해달라'는 노회찬 전 대표의 뜻을 따라 계속해서 약자들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정당이 돼야겠다고 다짐했다"고 말했다.당장 닥친 과제는 선거 개혁이다. 내년 4월까지 국회의원 선거구를 확정하려면 공직선거법상 10월에 선거구획정위원회가 구성돼야 한다. 이정미 대표는 "민의를 반영하기 위한 선거제도 개혁은 시대의 흐름이고, 여기에는 이해찬 민주당 대표는 물론 자유한국당, 바른미래당, 민주평화당이 모두 동의하고 있는 지금이 골든타임"이라며 "다당제 민주주의에서 여러 민의가 반영될 수 있는 국회를 구성할 수 있도록 선거제도 개혁에 사활을 걸겠다"고 했다. 국회의원 특수활동비 폐지에 이은 각종 정치 개혁에도 힘쓸 예정이다. 그는 "국회의원 특활비는 물론 모든 공직 분야에서의 특활비를 없애 국민들에게 돌려줄 수 있도록 할 것"이라며 "또한 이번 교섭단체 박탈로 절실히 느낀 만큼 교섭단체 문턱이 과도하게 높은 점도 개혁해 나갈 것"이라고 꼬집었다.정부의 정책에 대해서는 '잘하고 있는 점'과 '잘못하고 있는 점'을 분명하게 나눴다. 이정미 대표는 "남북관계, 이전 정부의 적폐청산은 잘하고 있지만 경제 정책은 우려스럽다"고 말했다. 그는 "수십 년간 재벌 위주의 경제 패러다임이 한계에 부딪혔는데 계속 여기에 머물러 있어선 안 된다. 소득주도 성장, 경제 민주화 정책에 지금보다 속도를 내야 하며, 중소기업과 자영업자를 살려 '을과 을의 싸움'이 나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진보 정치인 이정미 대표가 지난 2016년 정의당 비례대표로 국회에 처음 입성한 후 지역사무소로 둥지를 튼 곳은 '부자동네'로 이름난 인천 송도국제도시, 바로 '연수구 을' 지역이었다. 인천이야 유년시절 자라온 동네이자 노동운동을 시작한 본거지라 치더라도, 연수구는 크게 연이 있는 곳은 아니었다. 게다가 송도는 인천에서는 가장 잘 사는 사람들이 모인 '인천의 강남'으로 꼽혀 주로 사회적 약자를 대변해온 정의당과는 그 이미지부터 딱 맞아떨어지지 않았다.이정미 대표는 "처음에 이곳을 택했을 때 '노동자들이 많이 사는 도시로 가지 그랬냐', '왜 송도로 갔냐'고 하는 말들이 많았지만 송도 주민도 노동자들이 있고, 아이를 키우는 여성이 있고 악취 등 환경 문제가 어느 지역보다 중요해 정의당이 추구하는 목표와 다르지 않다고 생각했다"고 설명했다. 그는 "6·8공구의 경우 올해부터 입주인데 도로며 학교며 어떤 인프라도 없어 안전 문제도 우려되는 데다가 아이들이 '콩나물시루'에서 공부하게 생겼다. 밤에 송도 악취는 어느 때는 너무 심해서 토할 지경이고, 가스 냄새로 안전까지 우려된다. 그간 행정에서 이런 것들을 풀기 위한 노력을 하지 않고 도시만 발전시키려 했기 때문에 이제 이 과제를 모두 해결해나가는 데 집중할 것"이라고 말했다.이러한 활발한 활동에도 불구하고 이정미 대표는 최근 국비 확보를 위한 인천 국회의원 정책 간담회에서 제외되는 이른바 '이정미 패싱' 논란도 있었다. 이정미 대표는 "유정복 시장 때도 참여했던 자리인데 자유한국당의 반대로 참가하지 못했다"며 "인천에 의원이 한 명 더 생긴 거라고 생각하고 협력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이 인천 시민에게 더 좋은 일인데 배제한 것에 대해 거칠게 유감을 표했으며 앞으로는 함께 자리할 수 있도록 약속을 받은 상태"라고 말했다.이정미 대표는 "인천은 인천공항, 인천항이 있으며 물류도시, 국제도시로서의 가치를 충분히 높이는 데에는 여야가 힘을 합해야 할 것"이라며 "특히 송도는 아직도 많은 개발계획이 수립되고 진행되는 곳인데 이런 개발로 인해 주민들이 겪게 될 피해도 함께 해결해 나갈 것"이라고 말했다.이정미 대표는 부산에서 태어나자마자 바로 인천 미추홀구에 올라와 외할머니 손에서 자랐다. 초등학교에 입학하면서는 부산에서 부모님과 같이 지냈지만 중학교 때부터 다시 인천에서 학창시절을 보냈다. 박문여중과 인성여고를 나왔다. 최루탄 냄새가 진동하던 때 한국외대에 입학해 2년 만에 중퇴하고 노동 운동에 뛰어들었다. 가장 먼저 간 곳은 부평공단의 한 구두약 공장이었다. 이때부터 공단 노동 현장에서 노동조합을 만들며 본격적인 사회운동을 시작했다. 이정미 대표는 "2003년 권영길 민주노동당 당 대표 시절 중앙당에 당시 고위 당직자 30% 여성 할당제로 당시에는 굉장히 진보적인 당규로 중앙당에 처음 가게 됐는데 그때 사무총장이던 노회찬 전 대표를 만나면서 정치에 입문했다"고 말했다. 두 차례 낙선에 이어 지난 2016년 비례대표로 당선됐고, 지난해 당 대표로 선출됐다.이정미 대표는 "많은 유권자들이 정의당이 옳은 얘기는 한다면서도 힘이 없는 정당이지 않느냐며 선거 때 최종적 선택에서 배제하고 있다. 지난 지방 선거가 이를 잘 보여줬다"며 "이제는 다당제로 가고 있는 만큼 정의당에 힘을 실어주길 바란다. 정권 교체로 인한 변화가 현실화되는 과정을 잘 추진해 나가고 견제할 수 있는 정당이 바로 정의당임을 잊지 말아달라"고 강조했다.글/윤설아기자 say@kyeongin.com 사진/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이정미 정의당 대표가 인천 송도국제도시에 위치한 지역사무소 '정치카페테라스'에서 "이제는 다당제로 가고 있는 만큼 정의당에 힘을 실어주길 바란다. 정권 교체로 인한 변화가 현실화되는 과정을 잘 추진해 나가고 견제할 수 있는 정당이 바로 정의당임을 잊지 말아달라"고 밝히고 있다. 사진/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사진/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

2018-09-04 윤설아

[인터뷰… 공감]'산골 소년의 사랑 이야기' 순수를 노래한 가수 예민

젊은 시절 천재적인 재능… 박선주 데뷔곡 '귀로' 등 만들고 1·2집 내며 유명세성공 뒤로하고 미국서 공부… 2001년부터 자비 들여 122개 분교 음악회 대장정대중음악계 떠나 2007년부터 뮤뮤스쿨 운영, 아이들 '영감' 일깨우는 예술 교육아무 의미 없는 한적한 곳에서, 작은 과수원 가꾸며 곡도 쓰고 책도 읽고 싶어단출한 차림으로 활짝 웃으며 그는 나타났다. 요즘 서울과 제주를 오가며 치즈 만들기에 몰두해 있다고 소개했다. 밥 먹고 차 마시며 이어지는 대화 속에 굳이 자신을 꾸미려 하지 않았고, 카메라 의식 없이 이따금 편안하게 담배도 피워물었다. 언론 인터뷰에 좀처럼 응하지 않는 이유를 묻자 그는 "자연스럽게 잊히는 게 좋고, 잊혀도 상관없다"고 했다. 예민이라는 가수는 몰라도 자신의 음악은 끊임없이 새로운 연을 맺으며 살아움직이지 않느냐고 반문했다. 지난 2008년, 20여 년의 음악인생을 집대성한 앨범 '오퍼스'를 내고 가수활동을 접은 지 꼭 10년이 된 예민(52)은 "그냥 그때의 나는 그때의 나일 뿐이다. 한창 음악 활동할 때라든지 또 분교음악회 다닐 때의 내가 지금의 나와 동일인인가 싶다"고 말했다.당사자는 수긍하지 않지만, 예민은 젊은 시절 천재적인 재능을 보였다. 故김광석의 모교인 서울 대광고를 졸업한 그는 대학에 갓 진학한 1980년대 중후반부터 박선주의 데뷔곡인 '귀로', 여행스케치의 '난 나직이 그의 이름을 불러보았어' 등을 만들고 하수빈의 데뷔앨범을 프로듀싱했다. 스스로는 '아에이오우', '서울역'이 수록된 1집과 '산골 소년의 사랑이야기', '꽃이 바람에게 전하는 말'이 수록된 2집을 발표해 유명해졌다. 전부 3년이라는 짧은 시간에 이룬 것들이다. 이 시기 그의 서정적이고 아릿한 음악은 1980~90년대를 살아간 이들의 정서에 한 부분을 차지한다.예민의 음악은 자전적인 감성이 배어 있다. 노랫말에 실존 명칭이나 구체적인 연도가 심심찮게 등장한다. 그의 음악에 가장 영향을 끼친 인물은 아버지다. 국민들이 애창하는 '산골 소년의 사랑 이야기'는 아버지 페인트공장이 있던 경기도 의왕의 유년기를 배경으로 한다."아버지와 나눈 이야기, 아버지와의 생활공간과 주변 모든 게 내 생각이나 음악, 사람을 대하는 마음을 만들어줬어요. 안양역에서 시외버스 갈아타고 내려서도 20분을 걸어 들어가는, 그 당시 의왕은 서울에서 두 시간이 넘는 거리였어요. 공장 근처에 밭이 한 200평 정도 있는 조그만 농가주택이 있었는데 아버지가 1년에 대여섯 번씩 그 집의 색깔을 바꾸셨어요. 분홍색 초콜릿색 빨간색, 주말에 둘이 같이 칠하곤 했죠. 아버지는 직업화가도 아닌데 회화작품을 200여 점이나 남기고 항상 음악을 들려주시기도 했어요. 정원도 예쁘게 가꾸셔서 꽃 이름도 많이 알았고요. 일찍부터 자연과 예술을 가까이 접하게 해주신 게 저에게 컸어요. '산골 소년의 사랑 이야기'에 묘사한 풍광은 거의 그 동네 얘기예요."2집 발매 직후 예민은 대중적인 성공을 뒤로하고 돌연 미국으로 떠나 공부했다. '키요라', '세발 자전거와 바둑이'가 수록된 3집과 '마술피리', '기억 속에, 그 애가 있었네'가 수록된 4집 등 귀국 후 그의 음악은 자연의 품에서 삶을 관조하고 있었다. 계속 음악활동을 하는가 싶더니 그는 갑자기 또 기타 하나 메고 1년 여정의 분교음악회를 기획했다. 자비를 들여 2001년 9월부터 1년 동안 오산 삼미분교에서 도서벽지까지 전국 122개 분교, 7만여㎞를 순례하는 대장정이었다."음악은 무엇인가 하는 근본적인 물음이 나를 분교로 데려간 것 같아요. 나한테 있어 음악은 무엇일까. 주어진 무대에서 관객과 만나 노래를 부르던 게 일반적인 형식이었는데 과연 음악이 인간을 그렇게 만났을까? 어떤 틀에 갇혀서 그것만이 음악이고 옳은 표현이라며 살아왔던 건 아닐까? 내 노래가 항상 내 입을 쫓아다녔다는 생각이 문득 들면서 1년 동안 내 노래가 어울리는 곳, 내 노래가 불렸을 때 행복해하는 공간으로 찾아간 것이죠."첫 분교음악회에서 노래를 불러주자 아이들은 전혀 집중을 못 하고 떠들어댔다. 심지어 노래를 하고 있는 그에게 "옥수수 드시라"며 말을 건넸다. 일방적으로 음악을 들려주기만 하는 게 아니라 그들의 실정에 맞춰 접근해야겠다고 결심한 계기였다.이후부터는 음악회를 하기에 앞서 정성스럽게 식탁보를 깔고 둘러앉아 아이들에게 코코아를 대접하며 대화를 나눴다. 아이들을 성숙한 인격체로 존중한다는 의미였다. 아이들의 꿈을 키워 줘야 한다는 그의 뜻에 동참해 아나운서 이금희, 피아니스트 박종훈 등 문화예술인들도 힘을 보탰다. 분교음악회에서 잠깐 마주한 두세 시간의 기억을 곱게 간직한 아이들은 성인이 돼서도 여전히 이메일로 안부를 전해온다."최근에야 문화사각지대라는 말이 실감 나지 않을 텐데, 당시는 연예인이 문화소외지역을 찾아가 진행하는 프로그램이 없었어요. 분교를 섭외하려 들면 '애들 몇 명 데리고 무슨 음악회?'라는 반응이었고 당연히 무대랄 것도 없었죠."교사와 주민들에게 일일이 상황을 설명해 가며 분교음악회를 성공적으로 마치자 수많은 언론에서 관심을 가졌고, 찾아가는 문화예술프로그램에 대한 사회적인 공감대가 형성됐다. 분교음악회가 이슈로 떠오르면서 CF 섭외까지 들어오던 때 그는 다시 홀연히 미국으로 떠났다."별안간 이유 없이 떠나서 머물고 있었어요. 그런데 이라크와의 전쟁이 벌어진 날 미국의 거리는 여느 때처럼 사람들이 테라스에서 커피를 마시고, 아무 일 없다는 듯 전날과 똑같은 행동을 하는 거예요. 아, 이게 전쟁이 난 나라인가? 저쪽에서는 포탄이 터지고 공포에 휩싸여 있다는 걸 이들이 알까? 그런 괴리감이 들어 인도로 무작정 넘어갔다가 열병을 두 번 앓고 겨우 살아났죠."목숨 잃을 뻔한 경험을 하고 2000년대 중반 귀국한 예민은 버팀목이었던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작곡에 착수해 2008년 '연리지', '빛나호' 등이 수록된 마지막 앨범을 발표한다. 80대 고령의 할머니가 부른 이 앨범의 타이틀곡 '나의 할머니, 그녀의 첫사랑'에는 그의 음악과 인생에 대한 철학이 담겨 있다. 혹자는 산골 소녀가 나이 들어 부른 노래 같다고도 했고, 예민만이 만들 수 있는 작품이라는 호평이 따랐다."저는 음악프로그램에 출연해 노래해 본 게 총 세 번이에요. 제 음악이 홍보라는 매개로 사람들과 인위적인 연을 맺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어요. 먼 훗날 호흡과 성량이 희미해졌을 때 '산골 소년의 사랑이야기'를 불러보고 싶다는 바람은 있었는데, 음악을 재개하게 된다면 미련 없이 뒤돌아보지 않기 위해 정리한 게 마지막 앨범입니다."대중음악계를 떠난 예민은 2007년부터 음악인류학·고고학·음악교육학에 근간을 둔 아동 대상 문화교육프로그램 '뮤뮤스쿨'(Museum & Music School)을 운영하고 있다. 아이들에게 제3세계 악기를 두드리고 만지고 냄새 맡게 한다. 아이들은 악기의 소리가 아닌 두꺼비 소리와 비 오는 소리, 바람의 소리를 듣는다. 체험이 끝나면 저마다 원하는 재료로 세상 하나뿐인 악기를 창작하고 연주회를 열어 '내 악기만큼은 세계에서 내가 제일 잘 알고 내가 제일 잘 연주할 수 있다'는 성취감을 얻는다.한국문화예술교육진흥원의 의뢰로 올해 초 평창문화올림픽에서 '1학교 1국가 문화교류' 프로젝트를 감독했던 예민은 "영감을 통해 동기가 생기고 그 동기를 실현하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하는 경험, 그리고 피아노교본을 보며 예술이 아닌 손가락기술을 습득하는 경험 중 어느 방향으로 아이들을 이끌어야 할지 고민은 어른들의 몫"이라는 메시지를 남겼다. 다음 계획에 대해서는 "아무 의미 없는 한적한 곳에서 작은 과수원 가꾸며 곡도 쓰고 책도 읽고 싶다"며 미소 띤 채 먼 곳을 응시했다.글/김우성기자 wskim@kyeongin.com 사진/황성규기자 homerun@kyeongin.com■예민은?▲1966년 서울 출생▲2003년 美코니시예술대학 현대음악작곡 전공▲1990년 1집 '아에이오우'▲1992년 2집 '산골소년의 사랑이야기'▲1997년 3집 '노스탤지어'▲2001년 4집 '나의 나무'▲2008년 5집 '오퍼스'▲2003년 '분교음악회 숲이 된 122개의 추억'(샘터) 발간▲2007년 (주)아티움오퍼스 설립▲2018년 평창문화올림픽 '1학교 1국가 문화교류' 축제형프로그램 총괄기획예민은 머리가 아닌, 손과 땀방울이 기억하는 일을 해보고 싶다고 했다. 그 중 하나가 치즈만들기다. 주위에서는 "더 큰 일을 할 수 있으면서 왜 소박한 꿈만 꾸느냐"고 의아해 하지만, 그는 "의미 있는 일에는 크고 작은 게 없다"고 말한다. 사진/황성규기자 homerun@kyeongin.com사진/황성규기자 homerun@kyeongin.com/아티움오퍼스 제공문화소외지역을 대상으로 한 '찾아가는 음악회'에 대해 공감대가 전혀 없던 시절, 예민은 의문부호를 먼저 내미는 마을 주민과 교사들을 설득하고서야 아이들과 교감할 수 있었다. /아티움오퍼스 제공

2018-08-28 김우성

[인터뷰… 공감]신한용 (사)개성공단기업협회 회장

정부 결정 하루만에 추방, 31개월째 폐쇄… 그야말로 재앙'평화수역 합의' 계기로 진출, 남북관계 개선 자부심 생겨북한인력 단번에 우수성 느껴… 임금·물류비 절감도 강점남북·북미 정상회담후 후속조치 없어… 희망고문 끝내야"폭염에 타들어 가는 농작물처럼 우리 속도 새카맣게 타들어 갑니다." 신한용(58) (사)개성공단기업협회 회장은 당장 내일이라도 들어가 가동할 수 있을 것만 같던 개성공단 운영 시점을 아직도 기약할 수 없는 현실에 안타까워하며 이같이 말했다. 신 회장은 차갑기만 했던 남북관계가 올해 초 평창 동계올림픽을 계기로 급속히 풀리고 4·27 남북정상회담, 6·12 북미정상회담 등이 연이어 열리면서 개성공단 재가동에 대한 희망을 키우게 됐다. 하지만 개성공단 재가동을 위한 구체적인 후속 조치는 아직 감감무소식이다. 심지어 개성공단 시설 점검 등을 위한 기업인들의 방북 승인조차 이뤄지지 않고 있다. 개성공단 폐쇄 후 충남 예산에 따로 공장을 마련했지만, 운영은 어렵기만 하다. 신 회장은 "북한 핵 문제로 남북 경협에 대해 언급조차 금기시되던 상황에서 남북·북미정상회담 등이 진행되면서 개성공단 재가동에 희망과 기대를 걸었지만, 회담 이후 뚜렷한 후속 조치가 이뤄진 게 없다"고 했다. 이어 "문재인 대통령이 최근 광복절 경축사에서 남북 경협을 언급한 부분에 다시 희망을 갖게 됐지만, '희망고문'을 당하고 있다는 생각도 든다"며 "재가동할 수 없는 상황이라면 합당한 보상이라도 받아야 하지 않느냐는 목소리도 내부에서 나온다"고 했다.개성공단 전면 폐쇄가 결정된 건 31개월 전이다. 길다면 긴 시간이지만, 신 회장은 개성공단 폐쇄를 통보받은 '그날'의 상황을 여전히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당시 개성공단기업협회 부회장을 맡고 있던 신 회장이 통일부로부터 "가급적 많은 공단 업체 관계자들과 함께 좀 모여달라"는 연락을 받은 건 2016년 설 연휴 마지막 날이었다. 전달 북한의 핵실험이 있어 개성공단 운영이 중단될 수 있다는 얘기가 나오던 시기였다. 신 회장은 2010년 천안함 사건, 북한의 연평도 포격 등에 따른 위기 상황에서도 개성공단의 명맥이 유지된 만큼, 공단이 폐쇄되는 일은 없을 거라는 생각뿐이었다. 명절인 만큼 덕담을 주고받는 자리가 될 수도 있겠다 싶었다. 30명 정도의 회원사 관계자와 함께 들어선 약속 장소엔 통일부 장관 등을 비롯해 경제부처 차관 등 관료들이 나와 있었다.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그들은 신 회장의 예상을 벗어나는 얘기를 꺼냈다. 한 관료가 "오늘 오후 5시부로 개성공단을 닫는다"고 했다. 공단 폐쇄까지 2시간 30분 정도를 앞둔 시점이었다. 당혹스러웠다. 정부 관계자들은 개성공단 입주기업들에 피해가 없도록 맞춤형으로 지원하겠다고 했지만, 결과적으로 이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북한과 협상해서 공단 내 물건을 빼 올 수 있도록 3일의 시간을 주겠다고도 했다. 하지만 딱 하루가 지나고 북한이 모두 추방해 버렸다. 신 회장은 "그야말로 재앙이었다"며 "그렇게 군사작전 하듯 결정된 개성공단 폐쇄 조치가 지금까지 이르게 된 것"이라고 했다.신 회장은 개성공단에서 어망 제조업체를 운영했었다. 2007년 남북 정상 간 서해 공동어로수역 지정과 평화수역화 합의가 개성공단 진출의 직접적인 계기가 됐다. 당시 인천과 중국을 오가며 어망공장을 15년 정도 운영했던 신 회장은 서해 공동어로수역에서 사용할 그물을 개성공단에서 만들면 사업적 측면뿐만 아니라 남북문제 측면에서도 의미 있는 일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남북 관계 개선에 자신이, 그리고 개성공단 입주업체들이 나름의 역할을 하고 있다는 자부심이 점점 커졌다. 통일에 가까이 가는 데 역할을 해야 한다는 소명 의식도 생겼다.신 회장은 "처음엔 돈을 벌려고 개성공단에 갔던 것도 사실이지만, 시간이 갈수록 점점 생각이 바뀌었다"며 "개성공단을 더욱 놓지 못하는 건 이런 생각이 더욱 커졌기 때문이기도 하다"라고 했다. 개성공단기업협회 회원사는 120여 개에 달한다. 슈퍼나 세탁소 등 영업기업은 80여 개, 개성공단에 원부자재를 공급하는 협력업체는 5천여 개나 된다. 개성공단의 하루하루를 함께 일구던 이들이다.신 회장은 개성공단 공장에서 200명 정도의 북한 근로자와 함께 일했다. 계획경제에 익숙한 북한 근로자가 생산성이 떨어진다며 불만을 나타내는 사장들도 있었다. 중국에서 공장 운영 경험이 있는 신 회장은 북한 근로자들의 우수성을 단번에 느꼈다고 했다. 시장경제에 익숙지 않은 모습이었지만, 시간이 갈수록 높은 이해도를 보였다. 납기가 급하게 잡힐 경우, 이를 맞춰줄 테니 수당 등을 더 달라는 식으로 역제안하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서로의 삶에 조금씩 영향을 미치고, 또는 영향을 받으며 이해의 폭을 넓히게 된 것이다. 신 회장은 "개성공단은 서로에 대해 더 잘 알게 되는 통일 학습장 역할을 했다고 본다"며 "매일매일이 통일이 이뤄지는 작은 공간이었다"고 했다. 개성공단은 비교적 저렴한 인건비에, 오전에 원부자재를 공급하면 오후에 우리나라 유통시설에서 판매할 수 있는 등 물류비 면에서도 강점이 있었다. 무엇보다 '말이 통한다'는 건 해외 공장 운영 과정에선 느낄 수 없는 가장 큰 장점이었다. 신 회장은 "70년 가까이 남북이 찢어져서 살았지만, 그래도 한 동포"라며 "생각에 조금 차이가 있을 뿐이지, 그걸 극복하니 나중엔 눈빛만 봐도 알겠더라"고 했다.신 회장은 가진 것 없는 중소기업들의 자산을 찾기 위해, 또 남북 관계 개선에 기업들이 디딤돌 역할을 해야 한다는 소명을 다하기 위해 개성공단을 반드시 재가동해야 한다고 했다. 신 회장은 제2, 제3의 개성공단이 지속해서 확산되면 그것이야말로 통일의 지름길이 될 수 있다고 확신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선 멈춰 있는 개성공단을 다시 활기차게 가동해야 한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신 회장은 "우리가 살아서 개성공단에 들어가야, 우리를 보고 후발 기업들이 제2, 제3의 개성공단에 입주해 역할을 다하지 않겠느냐"며 "우리가 개성공단에 들어갈 수 있도록 정부와 정치권이 힘을 합쳐 미국과 유엔 등 국제사회의 제재문제를 해결하는 데 적극 나서야 한다. 우리가 하루빨리 개성공단에 들어갈 수 있도록 도와줬으면 한다"고 했다. 글/이현준기자 uplhj@kyeongin.com 사진/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 ■신한용 회장은?▲1960년 충남 태안 출생▲1988년 인하대 졸업▲1993년 중국 어망공장 운영▲1995년 신한물산(주) 설립▲2003년~ 현재 인하대 초빙교수▲2004년 인하대 대학원 경제학 박사 학위 취득▲2007년 개성신한물산(주) 설립▲2011년 신한물산(주), 인천시 비전기업 지정▲2014년 개성공단기업협회 부회장 및 기획분과위원장▲2017년~ 현재 개성공단기업협회 회장신한용 (사)개성공단기업협회 회장이 "우리가 개성공단에 들어갈 수 있도록 정부와 정치권이 힘을 합쳐 국제사회의 제재문제를 해결하는 데 적극 나서야 한다. 우리가 하루빨리 개성공단에 들어갈 수 있도록 도와줬으면 한다"고 밝히고 있다. 사진/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

2018-08-21 이현준

[인터뷰… 공감]'경인지역 첫 폐 이식 성공' 함석진 아주대병원 교수

사례 늘어나면 정부 지원 확대, 더 많은 사람에 기회 '선순환'신뢰 영향 끼치는 초기성적, 수술팀 2년 넘게 치밀하게 준비팀 워크·병원 차원 지원·윤리적 문제 얽혀… 리더십 강해야상태 나쁜 장기 활용 세계적인 추세… '기초 의학연구' 관심사진을 찍겠다고 하자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면도도 못했고…, 머리도 정돈하지 못했는데…." 말끝을 흐리며 그의 시선이 살짝 거울로 향했다. 그러더니 이내 체념한 듯 웃으며 인터뷰를 시작하자고 말했다. "늘 이 모습이니, 이대로 가죠." 아주대병원 함석진 교수와의 인터뷰는 퇴근 시간 무렵에야 겨우 이루어졌다. 그는 인터뷰를 시작하기 직전까지 환자를 만났고 입원환자의 상태를 확인했다. 함 교수는 폐를 전문으로 하는 흉부외과 의사다. 그는 올해 들어 2차례의 '폐이식' 수술을 성공했다. 폐이식 수술을 할 수 있는 국내 병원은 9곳 뿐이다. 하지만 상당수가 서울에 위치한 종합병원이고, 지역에선 시행할 수 있는 곳이 부산대병원 정도였다. 아주대병원에서 함 교수팀이 성공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신장, 간은 이식이 낯설지 않지만, 폐는 생소하게 느낄 것이다. "폐는 다른 장기에 비해 기증자도 별로 없어 수술이 이뤄지는 경우가 드물어요. 아직 우리 법에는 뇌사자의 폐만 기증할 수 있어서인데, 보통 뇌사상태에 빠지는 환자들이 낙상, 교통사고, 뇌출혈 등 갑작스러운 '사고'로 인한 것이에요. 특히 폐는 충격에 굉장히 약한데, 사고가 났을 때 폐가 부딪히면 금방 멍들고 상처가 납니다. 또 우리 장기 중에서 유일하게 외부 공기가 들어오는 곳이라 오염될 확률도 높구요. 그래서 우리나라에서는 이식이 활성화 되지 않았죠."하지만 폐 이식은 점점 필요성이 높아지고 있다. 고령화가 가속화되고, 미세먼지와 같은 대기오염의 심화에 직격탄을 받을 수 있는 것이 '폐'라서다. 특히 폐가 딱딱하게 굳는 병, 특발성 폐섬유증 환자들은 폐 이식 수술을 받아야 한다. 오직 그것 밖에 살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올 상반기 2차례 수술을 받은 환자들도 모두 특발성 폐섬유증이었어요. 특발성 폐섬유증은 폐가 굳는데, 왜 굳는지 이유를 알 수 없는 병입니다. 원인을 모르니 효과 있는 치료약도, 치료법도 없어요. 오직 폐이식 수술 외엔 방법이 없습니다. 첫 번째 환자의 경우 산소호흡기를 달고 화장실 정도는 혼자 갈 수 있는 상태였지만, 두 번째 환자는 한 달 가까이 중환자실에 누워만 있을 정도로 상태가 좋지 못했어요."함 교수는 올해 만난 두 환자의 케이스가 중요하다고 설명한다. "폐 이식의 목적은 기본적으로는 생명연장에 기반하지만, '삶의 질' 문제도 절대 간과할 수 없습니다. 첫 환자의 경우 산소호흡기를 달았지만 아주 기본적인 생활은 가능한 사람이었어요. 이 정도 상태만 돼도 수술을 받으면 일상생활이 가능해집니다. 이건 그 환자의 '삶의 질'이 달라지는 거예요. 폐섬유증 환자들이 가장 많이 하는 말은 '하루를 살더라도 인간답게 살고 싶다'는 거예요. 산소호흡기 없이 숨쉬고 싶다는 것. 제가 만난 환자 중에 유치원 다니는 아이를 둔 젊은 엄마가 있었는데, 이 엄마의 소원은 아이 소풍 도시락을 만들어주고 남편한테 따뜻한 아침밥 한번 차려주는 겁니다. 이 환자들 대부분이 하루를 살더라도 이식을 받겠다는 거예요. 수술이 성공하면 새로운 삶을 살 수 있거든요."하지만 우리 법은 꽤 엄격하게 폐 이식 수술을 제한하고 있다. 2년 이내 사망할 것으로 보이는 위중한 환자에게 우선적으로 수술 기회를 준다. "지금 당장 위중한 환자들이 수술을 받는 것도 굉장히 중요합니다. 하지만 '삶의 질' 차원에서 폐 이식 수술을 바라본다면, 살고는 있지만 자유롭게 숨쉬지 못하고 고통받는 많은 환자들에게 폭넓게 기회가 가야 된다고 보구요. 또 그래야 성공케이스가 늘어나 정부나 병원에서 지원을 확대할 것이고, 더 많은 환자들이 새 삶의 기회를 얻는 선순환이 가능해집니다."아주대병원에서 폐 이식 수술을 연달아 성공하면서 제대로 숨쉬지 못해 고통받던 경인지역 환자들이 굳이 서울에 나가지 않더라도 치료를 받을 수 있는 길이 열렸다. 이렇게 되기까지 함 교수를 비롯한 수술팀은 2년여 동안 철저하게 준비했다. "폐 이식 수술을 처음 하는 병원은 초기 성적이 상당히 중요합니다. 신뢰의 문제거든요. 이번에 수술한 두 번째 환자의 경우도 적당한 기증자가 나타나지 않은 채 3~4주 정도 시간이 지나니까 수술을 해도 될지 두려움이 앞섰어요. 다행히 환자가 생존의지도 강하고 기증자의 폐 상태가 좋아 성공했죠. 여러모로 운이 좋아 초기 성적이 잘 나온 편입니다. 또 폐이식 수술은 팀워크가 탄탄해야 해요. 저희 팀이 2년 넘는 시간 동안 다른 병원도 다니며 사례 연구도 많이 했고 실전을 위해 다양한 연습도 병행했어요. 무엇보다 병원 전체의 종합적인 지원이 정말 중요합니다. 모든 과의 의료적 지원은 물론이고 이식 수술은 아주 예민하게 윤리적 문제도 연관돼 있기 때문에 하다못해 정신과까지 동원됩니다. 예를 들면 이식한 환자가 수술을 하고 나서 새 삶을 얻었는데 정신적 문제로 스스로 생을 마감하면 다른 이의 삶의 기회도 뺏는 겁니다. 실제로 이런 경우도 꽤 있구요. 여러 조건과 상황이 잘 맞아야 하기 때문에 지역병원에서는 리더가 강한 의지를 갖지 못하면 하기 힘든 게 현실이죠."생명과 직결된 일. 말로 다 설명 못 할 무게의 책임감이 그의 말 여기저기서 묻어난다. 그는 어쩌다 이렇게 무거운 짐을 짊어졌을까. "흉부외과라는 곳이 드라마틱해요. 정말로 생과 사를 오가는 곳이거든요. 정말 '드라마틱'해서 드라마의 소재로 많이 활용되는 겁니다. 그 중에서도 이식받은 환자들의 변화가 가장 드라마틱합니다. 이대로 생이 끝날 것 같던 환자들이 이식을 받고 좋아지는 모습, 다시 사회에 나가 생활하는 모습을 보면 저는 그것이 참 극적으로 느껴졌어요. 흉부외과 의사로 살아온 지 19년째인데, 아직도 수술 하기 전에는 혹시 실패할까 두렵고 긴장되지만, 결과가 좋아 환자들이 건강하게 사는 것을 보면 보람을 가장 많이 느낍니다."문득 흉부외과와 같이 고난도의 수술을 하는 과에 지원하는 의사가 없다는 세간의 소식이 떠오른다. "정말 그렇습니다. 지금 흉부외과 의사가 배출되는 양이 1년에 20명 정도 뿐이에요. 향후 2~3년 내로 전성기 시절의 선생님들이 은퇴를 앞두고 있구요. 벌써 서울은 물론이고 지역의 병원들은 흉부외과 의사 인력난에 시달립니다. 모든 과가 다 중요해요. 하지만 흉부외과는 정말 생과 사의 한 가운데서 사람을 살리는 곳이거든요. 흉부외과 의사들 사이에서 우스갯소리처럼 말하지만, 너무 힘든 것 티 내지 말자고 합니다. 진짜 제가 레지던트이던 시절에는 1주일 내내 집에 못 가고 병원에 묶여 있었는데 정말로 이제는 그렇지 않아요. 법으로도 못하게 돼 있고 주중에 집에도 가고, 주말에도 좀 쉽니다(웃음). 아마 육체적, 정신적 문제도 있지만 전문의로 나왔을 때 진로가 제한된 것 아니냐는 우려에서 오는 경제적 문제도 클 거예요. 하지만 흉부외과의 장점은 생명과 관련된 모든 분야를 넓고 깊게 공부하기 때문에 어떤 분야에서든 도움이 될 겁니다."향후 계획에 대해서도 물었다. "폐 이식과 관련된 기초연구를 많이 해보고 싶습니다. 캐나다나 미국, 유럽 등에서는 안 좋은 상태의 폐를 향상시켜 환자에게 이식하는 방식을 활발하게 연구하고 시행 중입니다. 앞으로 폐와 관련된 질환은 늘어날 겁니다. 우리도 다양한 방법을 연구하는 기초 의학연구를 게을리해선 안돼요." 인터뷰를 마치고 진료실을 나오자 북적였던 병원 진료실 곳곳에 불이 꺼져 있었다. 이제 퇴근하느냐는 질문에 그는 "환자들 한번 더 보러 간다"고 서둘러 돌아섰다. 그 뒷모습을 바라보며 미안함과 동시에 알 수 없는 안도감이 들었다.글/공지영기자 jyg@kyeongin.com 사진/김금보기자 artomate@kyeongin.com■함석진 교수는?▲ 1973년 부산 출생▲ 1992년 부산 충렬고 졸업▲ 1999년 연세대학교 의과대학 졸업▲ 2004년 흉부외과 전문의 취득▲ 2007년 연세대학교 대학원 의학석사 ▲ 2016년 연세대학교 대학원 의학박사▲ University of Pittsburgh Medical Center, 흉부외과 Research Fellow▲ 연세대학교 의과대학 흉부외과 조교수▲ 現 아주대학교의과대학 흉부외과 부교수경인지역에서 폐이식 수술에 처음으로 성공한 함석진 아주대병원 교수가 "이식이 활성화 되지 않은 우리나라에서도 앞으로 폐와 관련된 질환은 늘어날 예정이어서 폐 이식과 관련된 기초연구를 많이 해보고 싶다"며 포부를 밝히고 있다. 사진/김금보기자 artomate@kyeongin.com사진/김금보기자 artomate@kyeongin.com

2018-08-14 공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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