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공감]11년 만에 돌아온 '마지막 해고자' 김득중 민주노총 쌍용차 지부장

'10년내 해결' 공감대 일괄아닌 순차 복직 선택버텨온 46명에 10여일전 '무기 연기' 통보 상식밖일각 '추가 정부지원·복수노조 우려'탓 이해안돼구속된후 아내가 일해 가족들에게 가장 '빈자리'당시 勞 대화해결 노력… 정부 반노동정책 희생양기업 위기땐 노사 머리 맞대고 정부 역할 찾아야지난 7일 쌍용자동차 마지막 복직자들이 공장 정문으로 들어섰다. 돌아오기까지 10년7개월이 걸렸다. 46명의 해고 복직자는 사원증은 받지 못하고 사번만 부여받았다. 복직은 됐으나 생산라인에는 투입할 수 없다는 게 쌍용차의 입장이다. 복직 출근 5일째인 13일 평택에서 김득중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 쌍용자동차지부 지부장을 만났다.- 세어보니 2014년 국회의원 재선거 출마 당시, 2018년 이낙연 총리가 공장을 방문했을 때, 지난해 한 번 이렇게 3차례 공장에 들어가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 방문이 아니라 복직자로 공장에 돌아가게 된 건 햇수로 11년 만입니다."예전엔 해결이 안 된 상태였잖아요. 한 발 건너서 바라봤죠. 반가움은 그때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습니다. 2014년에도 정문 앞에서 인사를 했는데(2009년 파업부터) 한참 지난 시간이었지만 낯설거나 다가가기 어렵지 않았어요. 그때와 차이라고 한다면 지금은 복직자로, 쌍용차 직원으로 신분을 회복한 상태입니다. 동료들이 제가 쌍용차 직원이 됐다는 사실은 인지하고 있죠. 생산 라인까지 가보지는 못했지만 지나가다가 혹은 식당에서 동료들을 만나면 반갑게 맞아 주기도 하고, 이 상황을 잘 모르는 분들은 '저 사람이 왜 여기 들어왔지' 이러기도 합니다."- 복직에 대한 사회적 합의가 나온 2018년 9월 21일부터 오늘(13일)이 꼬박 480일째 되는 날이더군요."당시 이 문제를 만 10년은 넘기지 말자는 공감대가 있어서 사측과 노조가 한 발씩 양보해서 합의했죠(노조는 전원 일괄 복직 대신 순차 복직을 택했고, 46명은 마지막 순서로 복직이 예정된 해고자들이다). 우선 71명이 복직을 해야했기 때문에 2018년에는 우선 복직자를 정했고, 10년 동안 자기 일처럼 도와줬던 시민사회 각계각층에 복직 이후에도 연대·나눔을 하자고 논의하며 하반기를 보냈습니다. 2019년에 넘어와서는 쌍용차 노·노·사(쌍용차지부·기업노조·회사측)가 같이 종교 지도자를 찾아뵙고 인사를 드렸습니다. 각계 단체 행사가 있으면 찾아가 감사 인사를 전했죠. 쌍용차 정상화에 힘을 모아달라고 부탁드리기도 했습니다. 손해배상청구 소송 때문에 대법원 앞에서 1인 시위를 하기도 했죠."- 완전한 복직, 부서 배치와 더불어 가장 중요한 문제가 손배소일 겁니다. 2009년 파업에 따른 손해로 배상액을 청구한 게 경찰 20억원·회사 80억원, 합쳐서 100억원이 넘습니다."대법원에 의견 같은 건 다 보냈습니다. 앞으로 정치권 의견도 받아서 보내려고 합니다. 경찰 인권침해사건조사위원회가 지난해에 소송 철회를 권고했습니다. 인권침해사건조사위 보고서의 내용이 나오기 전에 1·2심이 끝났거든요. 보고서에 기초해서 대법에서 올바른 판단을 해줬으면 좋겠다고 바라고 있는 상황입니다."- 회사가 복직은 결정해 놓고 생산 라인 배치를 미루는 가장 큰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십니까."도저히 납득할 수가 없어요. 회사가 아무리 노사 관계를 모른다고 해도 지난 10년7개월을 46명이 어떻게 생활해 왔고 버텨왔는지 조금이라도 알았다면 이렇게 하지 않죠. 이분들에게 공장 부서 배치가 어떻게 다가가는지, 너무 작게 보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에요. 불과 복직 10여 일도 남겨 놓지않고 12월 24일에 부서 배치를 할 수 없다고 무기한 복직 연기를 통보했단 말이에요. 부서 배치 앞두고 다른 직장에 사표도 내고 이사까지 한 사람들한테 열흘도 남지 않았는데 일방적으로 통보한다는 건 상식적으로 이해가 안 됩니다. 이유는 상당히 많기는 하겠지만 하나하나 말씀드리긴 좀…."- 이유가 뭘까요."굳이 말씀드리자면, 설문조사에서도 드러난 게 있잖아요(지난 11일 쌍용차 범국민대책위원회가 쌍용차 복직대기자 46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실시했다). 응답자 중 11분이 '쌍용차 지원금을 더 받아내기 위해서' 복직을 연기했다고 대답했거든요. 우리를 볼모로 해서 정부 지원을 받아내려는 거 아니냐는 의혹이 있는거죠. 현장에선 복수노조 탄생에 대한 염려도 있었다고 해요(쌍용차에는 2009년 파업을 이끈 민주노총 쌍용차지부 외에 기업노조가 있다). 회사가 어렵다고도 합니다. 지난해 내내 노사가 회사 어려움에 대해 얘기했어요. 저도 주변에 쌍용차를 사달라는 얘기를 해왔어요. 한상균 전 지부장은 교도소에서 쌍용차 50대를 팔았다고 해요. 정말 위기라면 노·노·사가 각자의 장점을 최대한 살려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기업노조가 마힌드라 대주주와의 관계에 강점이 있다면 그대로 살리고 쌍용차지부가 소수지만 사회적 힘이 있다면 이것도 쌍용차 정상화에 최대한 장점을 살려내는 게 필요하다고 말했어요. 이게 복수노조 진영의 문제가 아니라 회사 위기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에 머리를 맞대야 한다고 말했고, 충분히 공감했다고 생각해요. 이런 얘기를 해왔기 때문에 그것(추가 정부지원·복수노조 우려)때문에 복직을 연기했다고는 이해할 수 없어요."- 올 초에 트위터에서 누이들과 나눈 얘기를 올리신 글을 본 기억이 납니다. "막내야 괜찮니?","언니, 막내도 이제 쉰둘이야.","그래도 막내야"라고 누이들이 대화를 나눴다는 짤막한 글이었습니다."저는 5남4녀의 막내입니다. 그 SNS는 집에 있다가 요양원에 계시는 어머니를 찾아갔다 누이들을 만나서 나눈 얘기를 올린 거예요. 각자 생활터전이 달라서 연락도 취하지 않고 어머니 뵈러 갔다가 우연히 만났어요."- 2009년부터 투쟁해오다 보니 집안 반대가 심했을 것 같습니다. 해고 이후에 사모님이 생계를 꾸려나가신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누이와 형님들은 제가 하는 활동으로 아내나 자녀들에게 누가 되지 않을까 걱정을 많이 하셨죠. 2009년도 사태로 구속되기도 했으니까요. 그때 상황이 안 좋아지면서 아내가 일을 가졌고, 11년째 생계활동을 하고 있어요. 큰 아이는 이제 대학 3학년 올라갑니다. 작은 아이는 중학교 2학년 올라가요. 터울이 있죠. 2009년 공장 점거 파업할 때도 아이들이랑 아내가 현장에 왔었어요. 작은 아이가 4살 때였습니다. 제가 조직쟁의실장이어서 집회 사회를 하는 상황이었거든요. 그때는 아내도 '당연히 노동자 간부니까' 이렇게 생각했던 것 같아요. 그러다 파업 과정을 보고, 제가 파업 이후에 1년3일을 구속돼 있었고 그 기간에 모든 것들이 아내와 아이들에게 집중됐죠. 혼자 극복해 나가려고 하고, 주변에서 도움을 주려고 해도 지역의 시선·사회적 시선을 고스란히 받았습니다. 힘들어서 저한테 하소연도 많이 했어요. 그래도 '안했으면 좋겠다. 당신 할 만큼 했다' 이런 정도로만 얘기했지, '당신 계속하면 갈라설거야' 이런 얘기는 아니었습니다. 지난 10년 많은 명절과 연휴, 연말 연초 이런 시간을 대부분 바깥에서 보냈습니다. 아이들하고 같이 있지 못했어요. 제 빈자리가 컸죠." - 10년7개월의 시간을 견뎌오셨습니다. 과거로 돌아가 지금이 2009년이라면, 똑같은 상황이 온다면 같은 선택을 하실 건가요."저희들은 그런 선택을 계획하지 않았어요. 작년 조사에서 공식적으로 밝혀졌지만 당시 정부가 반노동 정책을 밀어붙이기 위한 수단이 있어야 했고, 그게 법정 관리에 놓여 있던 쌍용차였죠. 상하이차가 먹튀하고 기술 유출해 빼가고 회계조작해서 던져놓은 건데 누구도 책임지지 않은 거잖아요. 노동조합은 대화로 풀려하고 방법을 찾자고 해서 퇴직금 담보로 1천억원 대출해서 신차 개발에 넣자, 일을 절반으로 줄여서 잡셰어링으로 임금을 적게 받더라고 함께 살자, 비정규직 계약해지 막기 위해서 노동조합 조합비로 비정규직 인건비를 출연하겠다. 정말 노동진영에서 보면 '저것들 미쳤나'하는 소리를 들을만한 일이지만 할 수 있는 한 모든 것을 내려놓자고 했죠. 그런 게 참 우리만의 고민이었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때가 2009년 3월 말~4월 초거든요. 노조는 미련하게 계속 교섭을 얘기했고, 결국 한 달 반이 지나도 태도 변화가 없었습니다. 해고 통지가 5월 8일 어버이날 2천640명에게 왔죠. 그런 상황에서 어느 노동조합이 수용하겠습니까."- 선택에 내몰리신 거군요."기업에 위기가 올 수 있어요. 그러면 노사가 머리를 맞대고, 정부는 할 수 있는 역할 찾아야 합니다. 노사 문제가 심각한 상황으로 치달으면 정부 역할이 중요해집니다. 쌍용차 문제도 결국 정리해고 문제잖아요. 정부의 희생양이었다는 생각을 문득 문득합니다. 아까 예전에 공장에 들어갔을 때와 지금이 뭐가 다르냐고 물어보셨잖아요. 공장 밖에서 동료를 만나는 것과 공장 안에서 만나는 것은 사뭇 달라요. 포근합니다. 손을 잡아도 더 따뜻합니다. 예전에는 바깥에서 고생하는 저희를 보는 측은지심이나 위로를 담은 악수였고 마음이었다고 하면 요즘 공장 안에서 손을 잡아보면 '우리 함께 하자', '함께 이 상황을 극복하자'는 그런 마음이 느껴져요."누군가에겐 매스컴 속 트러블메이커로 누군가에겐 거리의 투사로 비치는, 한때 노동자 정치인을 꿈꿨던 사람 김득중은 네 명의 누이와 네 명의 형님을 둔 막둥이 동생, 두 아이의 아버지이자 무엇보다 다시 생활인을 꿈꾸는 가장이었다.글/신지영기자 sjy@kyeongin.com 사진/김금보기자 artomate@kyeongin.com■김득중 지부장은?▲ 1969년 평택시 청북면 출생 ▲ 1993년 쌍용자동차 입사▲ 2008년 민주노총 쌍용차지부 조직쟁의실장▲ 2014년 평택을 국회의원 재선거 노동자 후보▲ 2013년~현재 민주노총 쌍용차지부장11년만에 복직한 김득중 민주노총 쌍용차 지부장이 지난 13일 오후 경인일보와의 인터뷰에 앞서 평택 쌍용차 정문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김득중 민주노총 쌍용차 지부장이 지난 13일 오후 평택 쌍용차 정문에서 퇴근하는 동료들과 인사하고 있다.

2020-01-14 신지영

[인터뷰… 공감]이달 정식 개장 인천 독서·문화·가구융합공간 '베리굿타임' 황찬희 대표

베스트리빙과 민간서 드물게 염전로 인근에 조성공연·전시 개최… 공장지대 물류창고 화려한 변신수백명 모임가능 북콘서트·독서동아리 '특화장소'곳곳 책 놓인 '가구 판매장' 소파등 마음껏 이용을'꿈의 우체통' 사연 받아서 '실현' 1년간 지원 계획인천 미추홀구 염전로 인천산업용품유통센터 인근엔 공장들이 줄지어 있다. 그중 형형색색으로 외관을 꾸민 건물이 있다. 복합문화 공간이자 가구 판매장인 '베리굿타임'이다. 가구를 보관했던 물류창고를 1년6개월 동안 새롭게 단장했다. 지난달 베리굿타임의 본격적인 개장을 앞두고 '베리 굿 페스티벌'이라는 이름의 행사를 열었는데, 수천 명이 다녀가는 등 시민들의 호응을 얻었다. 베리굿타임은 이달 중 정식 개장한다.베리굿타임은 주변에 있는 건물과 다를 바 없는 창고였다. 가구 판매·제조기업인 (주)베스트리빙이 가구를 보관하는 용도로 썼다. 베스트리빙과 디자인기업인 '시오데코' 황찬희 대표가 뜻을 모아 베리굿타임을 탄생시켰다. 베스트리빙은 공간을 제공하고, 시오데코 황찬희 대표가 공간 활용 등에 대한 기획을 총괄했다. 베리굿타임은 민간에서 만든 독서·문화공간이며 이처럼 대규모로 복합문화공간을 민간에서 조성한 사례는 흔치 않다. 특히 가구와 독서·문화를 융합한 공간이라는 점에서 다른 문화공간과 차별성을 지닌다. 베리굿타임 황찬희 대표는 "베리굿타임은 '시간을 파는 장소'"라고 설명했다. 그는 "베리굿타임은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시간을 보낼 수 있는 곳이다. 가구를 판매하기도 한다"며 "많은 분이 이곳에서 좋은 시간을 보냈으면 하는 바람으로 공간을 마련했고, 그러한 의미를 담아 이름을 지었다"고 했다.베리굿타임은 크게 1층 커피숍 '사랑해', 2층 'VGT존'과 '베북존'으로 구성됐다. VGT존은 가구 제품의 전시장 역할을 하면서 공간 곳곳에 '책'이 스며 있다. 벽면에 책이 꽂혀 있는가 하면, 전시된 가구에 책이 놓여 있기도 했다. 가구를 사지 않더라도 편하게 이용할 수 있는 공간으로 꾸며졌다. 건물 가장자리에는 모두가 앉을 수 있는 소파를 마련했다. 가족 단위 방문객이 편하게 쉴 수 있도록 배려한 것이다. 황 대표는 매달 8차례 공연을 개최하는 등 VGT존을 다양한 복합문화 공간으로 활용할 계획이다.베북존은 책을 의미하는 'BOOK'을 조합해 이름을 지었다. 페이스북을 줄인 '페북'과 유사한 발음에 착안했다. 이곳은 '독서인'을 위한 공간으로 꾸며진다. 베리굿타임은 독서 프로그램 '베리리1'과 '베리리2'를 운영할 예정이다. 베리리1은 각자가 준비한 책을 정해진 시간 동안 읽는 방식이며, 베리리2는 정해진 책을 읽고 참여자가 토론하는 프로그램이다.황 대표는 "우리가 주최하는 독서 프로그램 외에도 (시민들이) 자체적으로 운영하는 독서 모임을 위한 공간을 마련했다"고 했다.독서 동아리 대부분은 마땅한 장소를 찾지 못해 커피숍을 빌려서 하는 경우가 많다. 베리굿타임은 독서 모임에 특화된 공간이다. 원하는 인원에 맞춰 테이블과 의자 등을 배치할 수 있다.카페 '사랑해'는 공장이 많은 지역 특성을 고려해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업무상 미팅 등으로 이 카페를 찾게 됐을 때 이름인 '사랑해'라고 말하는 것 자체로도 긍정적인 효과를 낼 것으로 기대했다. 황 대표는 "'사랑해'라는 말이 입에 오르내리는 것만으로도 좋은 분위기를 자아낼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고 말했다.베리굿타임은 건물 연면적이 3천㎡에 이른다. 이 중 절반가량을 가구 전시와 공연 등을 진행하는 용도로 사용한다. 나머지는 전시회, 독서 모임, 독서 프로그램 운영 등을 위한 공간이다. 또 유튜버를 위한 작은 스튜디오도 마련했다.베리굿타임은 한꺼번에 수백 명이 모일 수 있는 공간도 있다. 이를 활용해 대형 회의, 파티, 미술품 전시, 북 콘서트, 출판기념회 등 다양한 행사를 열 계획이다.황 대표는 디자인기업을 운영하고 있다. 브랜드 컨설팅 등의 업무를 맡아 공간을 꾸미는 일을 해오고 있다. 그는 '독서광'이기도 하다. 가족 모두 각각 서재가 있을 정도로 온 가족이 독서를 즐긴다고 한다. 황 대표는 "책을 읽는 사람이 많아진다면 이 사회가 더 나은 사회가 될 것으로 믿는다"며 "직원들을 채용할 때도 '독서'는 가장 중요한 평가 기준"이라고 했다.황 대표는 베리굿타임에 대해 "거창한 목표를 가지고 시작한 것이며,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돈도 벌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다가 찾은 것"이라고 했다. 그는 자신의 능력을 활용해 누군가의 꿈을 이뤄주고 싶다고 했다. 이를 위해 설치한 것이 베리굿타임 한쪽에 있는 우체통이다. 이름은 '꿈의 우체통'이다. 그는 "누구든 이 우체통에 자신이 이루고 싶은 꿈을 적어 넣을 수 있다"며 "베리굿타임은 이 사연 중 한 명을 선정해 1년 동안 그 꿈을 이룰 수 있도록 컨설팅 등 지원할 것"이라고 말했다.베리굿타임 공간 하나하나에는 황 대표의 손길이 스며 있다. 화장실, 수유실, 직원 휴게실 등 모든 공간에 디자인을 입혀 보기 좋을 뿐 아니라 편하게 사용할 수 있도록 했다.그는 "이곳은 침대와 소파 등 모든 가구를 마음껏 이용할 수 있는 공간"이라며 "데이트 비용이 부족한 연인이나 가족이 편하게 와서 가구를 이용하고, 책을 경험할 수 있는 장소가 됐으면 한다"고 했다. 이어 "매일은 아니지만 지속해서 열리는 공연과 전시 등의 행사가 방문객의 만족도를 높일 것"이라고 덧붙였다.그는 "베리굿타임을 통해 이루고 싶은 것은 더 많은 분이 책을 쉽게 접하는 것"이라며 "공간 운영을 위한 비용은 가구 판매 수익으로 충당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고 했다. 또 "베리굿타임이라는 공간에서 해보고 싶은 일이 많다"면서 "책을 좋아하거나 책에 관심이 있는 분들이 만족하는 공간으로 운영해 나갈 계획"이라고 말했다.그는 가장 좋아하는 책으로 파울로 코엘료의 소설 '연금술사'를 꼽았다. 그는 "책의 내용이 너무 좋아서 만나는 분들에게 선물하기도 했다"며 "많은 분이 베리굿타임에서 좋은 책을 많이 만나길 기대한다"고 말했다.글/정운기자 jw33@kyeongin.com 사진/김용국기자 yong@kyeongin.com황찬희 베리굿타임 대표는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아지면 이 사회가 조금은 더 나은 모습이 될 수 있을 거라 믿고 있다. 베리굿타임을 통해 책과 가까워지는 이들이 많아졌으면 하는 바람"이라고 했다.베리굿타임 내부. 수유실과 화장실 등 모든 공간에 디자인을 입히고 편하게 사용할 수 있도록 꾸몄다.베리굿타임 내부.베리굿타임 내부.꿈의 우체통-우체통에 자신의 꿈과 사연을 넣으면 이 중 1명에게 베리굿타임이 꿈을 이뤄줄 수 있도록 지원한다.

2020-01-07 정운

[인터뷰… 공감]경기도 출신 첫 농협중앙회장 꿈꾸며… '두번째 도전' 나선 이성희 前낙생농협조합장

#24대 선거 주요 공약·대표 계획은농가 안정적 소득제도 '월급제'등 주력유통 개선·4차 혁명맞춰 농업 디지털화#현재 농촌 상황·경제 진단개도국 지위 포기따른 경쟁력 강화책과잉생산 조절·예측시스템 구축 필요#앞으로 농협중앙회의 역할은인력·농경지 감소에 공동체 유지 '과제'농축협 이익 증진·발전 '기본'에 충실"현재 우리 농업·농촌이 처한 국내외 환경은 미·중 무역분쟁, 농업 개도국 지위 포기, 가축 질병, 고령화 등으로 어느 때보다 어렵습니다. 45년 넘게 농협에 몸담아 온 풍부한 경험을 토대로 농협의 새로운 길을 제시하고자 합니다."제24대 농협중앙회장 예비후보자로 등록한 이성희 전 낙생농협조합장이 제23대 농협중앙회장선거에 이어 두 번째 위대한 도전에 나섰다. 직전 선거에서는 아쉽게 떨어졌지만, 그는 농협과 농민을 위해 다시 한 번 힘을 모으기로 했다.■ 농협중앙회장 두 번째 위대한 도전인데지난 23일 성남에서 만난 이 후보자는 밝은 모습으로 나타났다. 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입가에는 잔잔한 미소를 보였다. 하지만 인터뷰 내내 중앙회장 선거에 대해선 전문인답게 명확한 답변을 했다.그는 농협중앙회장에 다시 도전하게 된 배경에 대해 "이제는 4차 산업혁명 시대다. 기존에 상상하지도, 경험해 보지도 못했던 변화가 엄청난 규모와 속도로 다가오고 있다"며 "향후 10년의 농업환경도 과거 100년간의 변화보다 더 클 것으로 전망되는데, 준비가 없다면 도태는 불 보듯 뻔할 것이다. 우리 농업 발전에 힘을 보태기로 다시 마음을 먹었다"고 출사표를 던졌다.이어 "그동안 농협 발전에 크게 기여해온 경기도 농민들은 상대적으로 타지방에 비해 비싼 땅값 등 환경적 요인으로 어려움이 많았다"며 "경기도 최초로 농협중앙회장에 당선된다면 경기 농민은 물론 우리나라 농업 발전에 이바지하고 싶다"고 밝혔다.그는 농촌농협에서 30년, 도시농협에서 8년, 중앙회에서 7년 등 총 45년간 농협에 몸담아 온 대표 인물이다. 그 누구보다 농업과 농촌, 농협에 대해 풍부한 경험이 있다고 자부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물론 지난 2016년 제23대 회장 선거에서는 결선에서 아쉽게 고배를 마셨다. 하지만 이 후보자는 포기하기는커녕 성찰의 시간을 통해 4년 동안 일선 현장에서 농업인 조합원들의 다양한 의견과 조합장들의 고견을 바탕으로 농업·농촌·농협의 미래를 만들어 가기 위해 고민하고 답을 구했다. 이를 바탕으로 새로운 농촌과 농협을 만들기 위해 다시 시동을 걸었다.■ 주요 공약과 선출될 시 추진할 대표적인 계획은이 후보자가 그리는 농협의 비전은 '함께하는 농협'이다. 우선 안정된 농가 기본소득 체계를 만드는 것이 목표다. 정부·지자체·농협·농업인이 함께 참여해 '농민 월급제' 등 농업인의 안정적인 소득제도를 도입할 수 있도록 한다는 것이다. 그는 "고정적인 수입원을 통해 소득이 안정된다면 농가경제에 큰 보탬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두 번째 추진 목표는 농축산물 유통의 대규모 변화다. 사전에 계획적으로 생산하고, 병폐가 많은 기존의 복잡한 유통구조를 개선해 중간에서 빠져나가는 손실을 막겠다는 게 그의 구상이다. 이 후보자는 "농축산물유통의 대변화를 위해 유통의 패러다임을 전환하고 이를 통해 적정한 생산과 투명한 유통 체계를 구축하겠다"고 강조했다.세 번째 목표는 농업과 농협의 미래를 대비하기 위해 4차산업 혁명을 바탕으로 한 디지털 농협 구축이다.고령화와 생산력 절감, 소농구조에 적합한 '인공지능 비닐하우스', '스마트팜', '농사용 드론·로봇 장비 보급 및 지원' 등을 추진할 생각이다. 아울러 각각의 특성을 반영하고 금융과 유통의 시너지를 구축한 '디지털농협'을 만들고 우리 농업과 농협의 미래를 위해 상당한 재원도 투자할 계획이다.■ 개발도상국 지위 포기로 농민들의 피해가 예상되는데정부는 지난 10월 25일 1995년부터 세계무역기구(WTO)에서 적용받았던 개도국 지위를 포기한다고 발표했다. WTO 농업 협상인 도하개발어젠다(DDA)가 회원국 간 이견으로 무려 20년째 진전이 없는 상태기 때문에 당장 영향은 없다고는 하지만 향후 협상이 진전돼 타결 시에는 큰 피해는 불가피하다.이 후보자는 농업부문에 대한 선제적 투자와 지원대책 마련이 절실하며, 국민적 합의를 바탕으로 농업부문 전반에 대한 산업재편 방안이 조속히 추진돼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회장이 되면 농업예산 확대, 공익형 직불제 도입, 농업의 공익적 가치 보상방안, 고향사랑 기부제 등 정책도입을 위해 정부와 국회에 적극적인 농정활동을 추진할 것"이라고 밝혔다.'농업경쟁력 강화 4개년 추진방안(가칭)'을 만들어 농업인이 잘사는 나라, 농업인이 사랑하는 농협을 만들겠다는 게 그의 목표다.■ 최근 양파·감자 등 '풍년의 역설' 등으로 과잉생산이 큰 문제인데이 후보자는 "과잉생산이 될 때마다 소비촉진운동을 전개하고 긴급하게 산지폐기 등을 하고는 있지만 가격하락을 막을 수 있는 근본적인 방안은 아니"라고 잘라 말했다.그는 "생산 단계에서부터 계획적인 생산이 될 수 있도록 세밀하고 정확한 '수급예측 정보시스템'을 구축해 적정 생산량을 유지하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며 "유통단계도 기존 유통구조에서 패러다임 전환을 통해 안정적인 공급이 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이어 "제도적 측면에서 여·야·정 합의를 바탕으로 2017년에 도입한 '농어촌상생협력기금'을 활성화해 자금지원을 마련하고, 미국의 가격손실보상제도(PLC)와 같이 농산물의 가격 리스크를 완충하는 '가격변동대응직불제'를 도입해야 한다"고 해법을 제시했다.■ 우리 농촌 경제 진단은그는 "위기라는 말에 공감하면서도 아직 기회가 많다"고 단언했다. 소득 불안정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농민월급제', '농민수당' 등 기본적으로 일정수준의 소득이 유지될 수 있는 공적 부문의 제도도입이 필요하다는 것이다.이어 "농업이라는 직업은 직업으로서의 불안정성이 존재하다 보니 '공익형직불제' 등 국내농산물 보호를 위한 정부의 정책도 수반돼야 한다"고 덧붙였다. 또 인력과 도시 개발로 줄어드는 농경지에 대응하기 위해서도 정부 차원의 특례제도 법제화 등이 시급하다는 게 그의 주장이다.그는 "'지역 소멸'이 거론되는 현재 농협도 생산자 단체의 역할 강화라는 그동안의 노력에 더해 지역공동체의 유지·발전이라는 시대적 과제를 깊이 인식하고 명실상부한 지역 종합센터의 역할을 강화해야 한다"고 밝혔다.■ 앞으로 농협중앙회의 역할은?항상 농협법 제1조(농협의 목적)와 113조(농협중앙회의 목적)를 떠올린다는 그는 "농축협을 바탕으로 농업인의 지위 향상, 농업의 경쟁력 강화, 농업인의 삶의 질 제고, 국민경제 이바지 등 중앙회는 이런 농축협의 공동이익 증진과 건전한 발전을 도모하는 게 가장 기본적인 역할이 아니겠느냐"고 밝혔다. 이어 이 후보자는 "농업·농촌의 현실이 무척이나 어렵다. 이런 엄중한 시기에 농협중앙회장 선거에 나서게 됐다"며 "중책이 맡겨진다면 임기 4년간 사즉생의 각오로 농업인의 주름이 없어지고 농업인이 활짝 웃는 농촌을 만들겠다"고 피력했다. 끝으로 "국민, 농업인, 조합장, 임직원과 '함께하는 농협!'을 만들어 농업에 대한 열정과 헌신으로 더 건강하고 행복한 미래를 열어 가겠다. 4년의 시간이 지나고 퇴임할 때 모두로부터 박수받으면서 떠나는 회장이 되고 싶다"고 포부를 밝혔다.대담/신창윤부장 shincy21@kyeongin.com글/황준성기자 yayajoon@kyeongin.com ■이성희 前낙생농협조합장은?▲ 1949년 성남 출생▲ 장안대학교 졸업. 고려대학교 고위자연자원정책과정 수료. 서울대학교 최고감사인과정 수료▲ 1971~1997년 성남 낙생농협 입사 및 상무·전무 역임▲ 1998~2008년 성남 낙생농협 조합장(3선)▲ 2003~2010년 농협중앙회 이사▲ 2008~2015년 농협중앙회 감사위원장▲ 2004 산업포장▲ 2006 법무부장관 표창▲ 2008 농식품부장관 표창농협중앙회 회장선거에 나서는 이성희 전 낙생농협 조합장은 '함께하는 농협'을 비전으로 내세웠다. 그는 45년간 농협에 몸담아 온 경험을 바탕으로 "경기 농민은 물론 우리나라 농업 발전에 이바지하고 싶다"고 밝혔다. 사진/김도우기자 pizza@kyeongin.com사진/김도우기자 pizza@kyeongin.com사진/김도우기자 pizza@kyeongin.com

2019-12-24 황준성

[인터뷰… 공감]모범사례 꼽히는 '국내 최대 스포츠클럽' PEC스포츠아카데미 백성욱 대표

정부 '생활체육 활성' 좋지만 日정책 유사 우리문화 융합돼야승패 없앤 화합방식에 지원 더하면 엘리트 스포츠 발전할 것아동부터 성인까지 다양한 종목 투자·육성 '공로' 표창 다수'수평적 관계·동기 부여'로 직원들과 협업 매출 성장 일궈내"우리나라의 체육정책은 공급자·행정 중심이 아닌 아이와 부모가 함께 참여하고 즐길 수 있는 수요자 중심으로 변해야 합니다."수원과 용인, 화성 동탄 등 경기 남부권을 중심으로 한 국내 최대의 스포츠클럽인 백성욱(45) PEC스포츠아카데미 대표가 화제다. 비록 개인이 설립해 운영하는 클럽이지만, 생활체육에서 엘리트(전문)체육 육성에 이르기까지 각종 지원을 아끼지 않는 등 정부 주도의 공공 스포츠클럽과 경기도교육청의 G-스포츠클럽 등 관련 정책의 모범사례로 꼽힐 수 있기 때문이다. 1만명의 회원이 다니고 있는 PEC스포츠아카데미는 수원·용인 일대에 8개의 본점과 지점을, 5천명의 회원을 보유한 아이풀 역시 권선·동탄·죽전·수지·영통·일산에서 가동 중인 가운데 유소년 회원만 1만4천여명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졌으며, 축구를 비롯해 야구·농구·인라인 등 다양한 종목의 클럽을 육성하고 있다.백 대표는 국내에서 추진 중인 스포츠클럽에 대해 "정부와 경기도교육청에서 관심을 갖고 생활체육 지원·육성에 힘을 싣는 것은 좋다"면서 "경우에 따라 운동선수 출신이 아니더라도 체육을 잘 이해할 줄 알고, 존중과 사랑이 있는 인물이 정책을 주도해야 한다"고 운을 뗐다.그러면서도 "현재 한국에 도입해 운영 중인 스포츠클럽은 일본의 정책과 매우 유사하다.한국과 일본의 문화가 다른데, 별도의 연구나 한국화를 거치지 않은 체육정책을 거의 그대로 도입한 것과 같다. 또는 지역 스포츠 클럽의 연계를 통해 추진하는 등 시행착오를 거쳤어야 했다"며 "지난해 경기도체육회의 '생활체육 혁신모델'을 바탕으로 한 스포츠클럽이 인성 교육적 측면에서도 상당한 만족도를 보였다. 우리의 문화와 정책을 융합하는 노력이 수반돼야 한다. 급작스러운 변화는 결국 엘리트체육을 망가뜨리는 일"이라고 자신의 입장을 밝혔다. 경희대 체육학과 출신인 그는 지난 1999년부터 스포츠가 교육의 중심이라는 의미를 담은 PEC(Physical Education Central)스포츠아카데미와 2012년부터 친환경 인공 해수풀인 아이풀(IPOOL) 등에서 축구·수영·야구·농구·인라인 등의 종목에 참여한 유소년들에게 연령별·수준별 교육을 해 오고 있다.이 같은 노력에 2014년부터 현재까지 국무총리 표창, 대한민국 스포츠산업대상 우수상(문화체육부장관상)과 산업통상자원부 장관 표창, K-스포노믹스대상 한국스포츠경제 사장상 등 매년 정부와 도내 각 기관으로부터 공로를 인정받아 왔다.이와 함께 백 대표가 가동 중인 축구 유소년 클럽인 수원 PEC UNITED도 올해 좋은 활약상을 보였다. 학년별로 각종 대회에서 우승을 거두는 등 고른 성적을 보이고 있는 가운데 6학년 팀은 화랑대기 전국유소년축구대회에서 전승으로 E그룹 우승을 차지한 데 이어 전국 주말리그 초등 축구대회 '경기 9권역' 1위에 올랐다. 아울러 PEC에서 배출한 9명의 학생 선수들은 수원 매탄고와 수원FC, 성남FC, FC서울, 서울E, 용인FC 등의 유스팀으로 입단시켰다.백 대표는 "스포츠 페스티벌을 진행하면서 우리 아이가 뛴다는 마음으로 승패를 거의 없애고 화합하는 방식, 즐기는 방식으로 변화를 줬다. 이 부분에 많은 수요자들(학부형)로부터 굉장히 좋은 반응을 얻었다"며 "이런 페스티벌이 반복되고 좋은 지원이 이뤄진다면 엘리트 스포츠가 발전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면서 우리가 현재까지 이어오고 있는 체육을 어우러지게 하는 정책이 필요하다. 체육을 무조건적인 적폐로 모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제시했다.처음부터 백 대표가 체육 교육 분야에 대한 지식이 많았던 것은 아니라고 한다. 그러면서도 지속적인 교육과 공부를 병행해 자신의 지식과 노하우를 축적해 오늘날에 이르게 됐다는 후문이다.그는 "처음 학생들을 지도하다 보니 아이들에게 신체 발달을 병행한 교육이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됐다"며 "그러나 일을 처음하게 된 20여년 전에는 체육교육 분야에 얕은 지식만 있었다. 회사 운영이 바쁘더라도 부족한 부분을 채우기 위해 외국 출장길에 올라 해외 스포츠클럽 운영 방식에 대한 공부에도 신경 썼다"고 소개했다.이어 "최근 15년 이상 장기 근무자를 포함해 직원들과 함께 PEC스포츠아카데미 창립 20주년을 기념할 겸 미국을 다녀오기도 했다. 수평적인 관계로 대하며 직원들에게 동기를 부여해 회사 발전 방안을 모색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했다"며 "가급적 체계를 지키면서도 대표라고 해서 무조건 윗사람 대우는 받지 않으려고 한다. 직원들이 가장 중요한 고객이지 않겠냐"며 미소 지었다.실제 스포츠아일랜드의 매출은 지난해의 경우 지난 2017년 대비 20%의 매출이 올랐으며, 올해는 지난해 대비 30%의 매출 상승효과를 이뤘다는 보고다. 월평균 입장객 또한 5천명 이상 증가한 것으로 나타나는 등 대표와 직원의 협업을 통해 이뤄낸 실적으로 보여진다. PEC스포츠아카데미와 아이풀, 스포츠아일랜드 등 직원 230명이 정규직인데, 내년 초에는 나머지 계약직을 재차 전환해 250명으로 정규직을 확대한다는 방침이다. 수익 창출에 우선하지 않고 더 나은 서비스를 통해 기업의 가치를 높이기 위해 필요한 조처라는 판단이다. 이를 통해 고객에게 존중받으며 지속적인 발전을 이뤄나가겠다는 의지다.여기에 수원 우만동 지역 주민 대상으로 설맞이 이웃사랑 쌀 및 김장 나눔 행사를 비롯해 뇌성마비장애인 축구대회 봉사활동, 경기도 대학생 장학금 지원 사업, 무료 야외 어린이 수영장 운영, 2019 작은 음악회 실시 등 사회공헌활동도 빼놓지 않았다.백 대표는 "더 나은 가치를 목표로 직원들과의 화합을 통해 회사 가치를 충분히 높일 수 있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자신도 있다"며 "젊은 CEO로서, 최신 경영 트렌드에 맞추며 체육 분야에서 일궈낼 수 있는 자산들이 제게는 많이 있다고 생각한다"고 전했다.백 대표는 이에 모범적인 체육기업 구축을 목표로 하면서 동시에 한국 최고의 체육기업을 이루겠다는 포부도 피력했다. 백 대표는 "스포츠아일랜드를 보다 발전시켜 국내를 대표하는 선도기업으로 발돋움하는 게 제 1차 목표"라며 "이후에는 중국 등 해외로 무대를 넓히려고 모색하고 있다"고 강조했다.끝으로 "서비스를 단순 노동으로 생각하지 않는다"며 "많은 사람을 운용하기 때문에 리스크는 있을 수 있지만, 성장할 수 있는 충분한 요소가 있다고 여기기에 충분한 고려를 통해 적극적으로 세계 무대에 진입하려 한다. 스포츠로 행복한 세상을 만들기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고 다짐했다.글/송수은기자 sueun2@kyeongin.com■백성욱 대표는?▲ 1974년 전남 영광 출생▲ 2001년 2월 경희대 체육학과 졸▲ 2011년 2월 경희대 체육대학원 스포츠산업경영전공 석사▲ 2017년 8월 경희대 체육대학원 스포츠산업경영전공 박사▲ 1999년~현재 PEC스포츠아카데미 대표▲ 2012년~현재 아이풀 대표▲ 지난해~현재 스포츠아일랜드 대표▲ 2009년~현재 (사)한국유소년스포츠클럽협회장▲ 스포츠아일랜드 관련, 청소년수련활동 정부 인증 획득·KPGA 인증 골프연습장 협약·한국산업기술진흥협회 기업부설연구소 인증백성욱 PEC스포츠아카데미 대표는 "우리들의 서비스를 통해 국내 무대를 벗어나 이제부터 적극 세계 무대에 진입하려 한다. 스포츠로 행복한 세상을 만들기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고 밝혔다. /스포츠아일랜드 제공

2019-12-17 송수은

[인터뷰… 공감]20여년간 향토역사 발굴 '외길' 강덕우 인천 개항장연구소 대표

인천서 옥살이 청년 김창수에서 '김구' 변화 계기 의미심장한 곳싸리재길·우각로… 탈출로·모친 눈물 스민 옥바라지길등 남아문화관광자원 활용 '위대한 인물 잉태' 신포동일대 널리 알려야타 지역과 항구도시등 함께 연구 '내용·외형적 범위' 확장할 것백범 김구가 인천을 의미심장한 역사지대라고 부른 이유는 그가 청년 김창수에서 독립운동의 주역 김구로 다시 태어난 계기가 됐던 곳이기 때문이다. 백범은 인천에서 두 번이나 옥살이를 하며 죽을 고비를 넘겼다. 인천에서의 담금질로 그의 삶은 더 단단해졌고, 중국에서 임시정부를 이끌 수 있는 원동력이 됐다. 독립운동과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은 올해 인천의 역사학계도 백범 김구의 인천 행적과 발자국을 쫓아 의미를 알리는 일에 나섰다. 20년 가까이 인천시 역사자료관에서 인천 역사를 발굴하고 알리는 일에 헌신했던 강덕우(63) 개항장연구소 대표가 그 주인공이다."백범 김구는 독립운동가로서의 명성에 비해 청년 시절에 대해서는 그다지 잘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김구 선생 일생 전체를 살폈을 때 그가 새로운 세계를 접하게 되는 결정적 계기가 바로 치하포 사건과 그로 인한 인천 옥살이입니다."강덕우 대표는 지난 8일 경인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인천이 백범 김구를 기억하고 조명해야 하는 이유에 대해 이같이 말했다. 강덕우 대표는 올해 인천 중구와 함께 백범 김구를 중심으로 한 인천의 독립운동 역사 문화 콘텐츠 발굴 작업을 진행했다. 강 대표가 언급한 치하포사건은 1896년 3월 황해도 안악군 치하포에서 명성황후 시해 사건에 대한 반감으로 일본군 중위 쓰치다를 살해한 사건이다. 그는 이 사건으로 해주부에 체포됐다가 외국인 사건을 담당하던 인천감리서로 이송돼 옥살이했다. 김구는 여기서 사형을 선고 받았다.강덕우 대표는 "해주에서 체포된 백범이 인천으로 온 것은 인천감리서 개항장재판소에서는 일본이 정치적 압력을 가할 수 있었기 때문"이라며 "인천과 백범 김구의 역사적인 만남은 일본에 의해 이뤄진 셈"이라고 설명했다.1883년 개항된 인천에는 그해 8월 통상 업무를 담당하는 감리서가 설치됐고, 1886년 개항장재판소가 별도로 세워졌다. 지금의 중구 신포동 스카이타워 아파트 자리다. 당시 행정사법제도상 백범은 인천과 필연적 인연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는 게 강 대표의 설명이다.강덕우 대표는 백범 김구가 단순히 인천에서 옥살이한 것에만 주목하지는 않는다. 인천감리서 주변 인천사람들이 보낸 백범 김구에 대한 열렬한 지지와 어머니 곽낙원 여사의 옥바라지가 어쩌면 지금의 백범을 있게 한 것일지도 모른다고 했다.강 대표는 "비록 사형을 언도 받았지만 '국모의 원수를 갚았다'는 대의명분을 내세운 김구의 진술이 인천지역에 전해지면서 일본에 맞선 '의로운 청년'으로 떠올랐다"며 "인천항 객주와 지사들이 구명에 나섰고, 결국 고종황제가 사면하는 결과로 이어졌다"고 말했다.곽낙원 여사는 인천항 객주 박영문의 집에서 식모살이를 하며 매일같이 아들이 있는 감옥으로 밥을 지어 날랐다. 황해도 출신의 곽 여사는 생면부지 인천 사람들의 도움으로 그렇게 옥바라지를 할 수 있었다.강덕우 대표는 "인천은 옥바라지 하던 어머니의 눈물 어린 고행이 얽힌 곳이다"며 "백범이 해방 후 처음 순시한 지역이 인천이었고, 의미심장한 역사지대라고 한 이유도 그의 옥중 생활과 모친의 고생을 추억했기 때문"이라고 했다.백범이 고종으로부터 사면을 받은 것은 무죄가 아니라 사형 집행을 피한 것뿐이었다. 1898년 기약 없는 옥살이에서 벗어나기 위해 그는 탈출을 감행한다. 강덕우 대표는 당시 지도 등 옛 문헌과 백범일지 등을 토대로 백범의 탈출로를 재구성했다. 1박 2일에 걸친 그의 도피 여정을 최대한 사실과 가깝게 복원하려 했다. 애석하게도 고증이 불가능한 탈출로도 있었다.강 대표는 백범의 탈출 이야기에 아버지 김순영도 빼놓아선 안 된다고 했다. 아버지도 인천 객주 집에 더부살이하며 인천 감옥에 유교 경전 중 하나인 대학(大學)을 넣어 김구가 옥중에서도 공부를 할 수 있도록 독려했다. 김구는 아버지의 도움 덕에 인천감옥을 '학교'로 만들 정도로 수감 동료에 대한 교육활동에 매진했다. 강 대표는 "김구가 탈옥할 때 사용한 모서리가 3개인 '삼릉창'을 만들어 전달해 준 이도 아버지 김순영"이라며 "김순영은 아들 대신 인천의 감옥에서 1년 동안 대신 옥살이를 하기도 했다"고 말했다.김구가 인천과 다시 인연을 맺게 된 때는 그가 1911년 안악사건에 연루돼 징역 15년을 언도 받아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됐다가 1914년 인천으로 이감되면서다. 백범은 지금의 인천 축항 공사 노역에 동원됐다. 지금의 내항 일대다. 인천항에도 그의 피와 땀이 서려 있다.강 대표는 "인천에서 매일 쇠사슬로 허리를 묶인 채 강제로 인천 축항공사 현장에서 노역을 해야만 했다"며 "김구가 동원된 노역 장소는 지금의 인천항 1번 게이트로 추정되는데 아마 매립된 신포동 해안길을 통해 공사장을 드나들었을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백범 김구는 1915년 8월 가석방돼 인천감옥을 나오게 됐다. 그 뒤의 행적은 너무나도 잘 알려졌다. 강덕우 대표는 인천과 백범 김구의 이 같은 역사적 인연이 인천만이 가진 역사문화 자산이라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백범 탈출길 ▲옥바라지길 ▲축항 노역길 등 백범의 길을 복원해 어떤 식으로든 활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강 대표는 "백범이 탈출했던 예상 경로를 따라서 가다 보면 도시화 과정 속에서도 싸리재길이나 우각로 등 120년 전 옛길이 아직도 다수 남아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며 "이런 길에 백범 김구라는 스토리를 얹혀 탐방로를 만들면 하나의 문화 관광 코스가 될 수도 있다"고 제안했다.또 곽낙원 여사가 아들을 위해 밥을 실어 날랐던 옥바라지길과 백범이 축항으로 노역을 하러 오갔던 길을 복원하면 신포동 개항장 일대가 단순한 옛 동네가 아니라 백범 김구라는 위대한 인물을 잉태했던 곳이라는 점을 알릴 수 있다고 강조했다.강덕우 대표는 "독립운동하면 임시정부를 떠올리고, 임시정부 하면 백범이 떠오르는데 백범 하면 인천이 떠오르지는 않는다"며 "앞으로 인천과 백범의 이야기를 복원해 알리는 게 독립운동 100년을 맞이한 우리 인천지역 사회의 숙제"라고 말했다.인천 역사학계의 '큰형' 역할을 하는 강덕우 대표는 2000년부터 인천시 역사자료관에서 인천시사편찬 업무와 역사총서발간, 향토사 강연 등에 매진했다. 2018년 공직에서 은퇴한 후에는 인천의 역사학계 동료들과 함께 설립한 사단법인 개항장연구소 대표로서 지역 역사문화 연구를 이어가고 있다.강덕우 대표는 인천의 역사문화 연구가 당장 생산적인 일이 아니라고 여겨지더라도 훗날 인천이 성장하는 데 큰 밑거름이 될 것이라 믿고 있다. 백범 김구가 오직 한없이 갖고 싶어 했던 것이 무력이나 경제력이 아닌 바로 '문화의 힘'이었다.강덕우 대표는 "지금 군·구에서도 역사편찬위원회가 생기고 있고 외연이 확장되는 추세라는 점에서 긍정적인 신호가 감지되고 있다"며 "앞으로는 인천 역사만을 연구했던 '우물 안 개구리'에서 벗어나 인천과 비슷했던 항구도시, 당시의 국제 정세 등을 함께 연구해 내용적으로나 외형적으로나 연구 범위를 확장하는 것이 숙제"라고 했다. 강 대표는 또 "역사 연구는 당장 표가 나는 것은 아니고 더디게 진행되지만, 어떤 문제가 발생했을 때 행정에서 하지 못하는 방향제시를 할 수 있는 가장 기본적인 영역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글/김민재기자 kmj@kyeongin.com 사진/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강덕우 대표는?1956년 경기도 화성에서 태어나 인하대학교 사범대학 역사교육과, 대학원 사학과를 졸업하고 인하대학교 사학과 조교, 강사 등을 거쳐 2000년 6월부터 2018년 5월까지 인천광역시 역사자료관 시사편찬위원회 전문위원으로 봉직했다. '인천역사 칼럼', '문답으로 엮은 인천역사' 등 다수의 공저와 논문이 있다. 현재 중구 인천개항장 문화지구 발전위원, (사)인천학회 편집위원, 미구홀구사편찬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강덕우 인천 개항장연구소 대표가 중구 옛 인천감리서 터(신포스카이타워아파트)에서 백범 김구의 탈출로를 설명하고 있다.강덕우 대표가 인천 중구 신포동 사무실에서 인천 개항장 지도를 배경으로 백범 김구의 탈출로와 옥바라지 길, 축항 노역장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2019-12-10 김민재

[인터뷰… 공감]정장선 평택시장 평택항 출입국 지연 발빠른 대처 '눈길'

정원 1500명 페리 취항후 '최대 7시간' 정체 현상국회의원·CIQ등 관계기관 불러모아 해결책 모색자동심사대 설치 휴게공간 확대 인력 충원등 나서입국 수속에 최대 7시간이 걸리는 평택항 국제여객터미널 출입국 지연 문제가 도마에 오르자 정장선 평택시장은 관계 기관 회의 개최 등 발 빠른 대응에 들어갔다. 평택시는 법무부 인력 확충 요청을 비롯해 입국심사확인증 발급기 설치 운영, 자동출입국심사대 설치를 위한 본예산 편성 등 승객들의 터미널 이용 불편을 최소화 하기 위한 대책들을 발표했고 CIQ(세관, 출입국사무소, 검역본부) 등 관계 기관들의 협조도 이끌어내는 성과를 거뒀다. 평택항 국제여객터미널 개선을 위해 앞장서고 있는 정 시장을 통해 평택항 국제여객터미널 시설 확충을 위한 평택시를 비롯한 관계 기관들의 노력과 평택항 국제여객터미널이 앞으로 나가야 할 청사진을 들어봤다.3일 평택시청에서 만난 정 시장은 입국 심사에서 최대 7시간까지 지연되는 평택항 국제여객터미널 상황에 대해 공감하고 있었다고 되돌아봤다.정 시장은 "A선사가 지난 9월 신규 항로를 개설했고 예상보다 많은 인원이 여객터미널로 들어오면서 입출국 정체 현상이 벌어졌다"며 "승객들이 늘어나게 되면 반겨야 하는 상황임에도 오히려 입국 지연 등 불편 사항으로 이어져 안타깝게 생각하고 있었다"고 말했다.실제 지난 10월 A선사가 정원 1천500명을 실을 수 있는 신규 페리를 취항하면서 휴게소 수용 인원 부족, 출입국 사무소 인력 부족 등으로 입국 심사 지연 사태가 반복되고 있었다. 평택항 국제여객터미널의 10월 한 달 이용객은 전월에 비해 49% 가량 증가한 것으로 집계됐다.문제가 불거지자 평택시는 지난달 13일 조찬간담회를 개최하고 평택시, 바른미래당 유의동 국회의원, CIQ 등 관계 기관들과 평택항 국제여객터미널의 애로사항을 논의하고 대응책 마련에 나섰다.평택시는 자동출입국심사대 설치(4억5천만원), 출국장 시설 개선(1억원) 등을 위해 관련 예산을 확보하기로 했으며, 여객터미널 이용객을 위한 휴게 공간 확보 차원으로 평택항 마린 센터 1, 2층을 임대(예비비 4억3천500만원)해 시설 공사에 돌입했다.이밖에 출입국관리소는 평택항 국제여객터미널 출입국 인력을 기존 8명에서 10명으로 늘렸고 오는 2020년까지 12명의 인력을 확보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평택세관과 국립인천검역소 평택지소, 농림수산검역소 평택사무소 등도 근무 인력 조정 및 증원 작업에 돌입했다. '사드갈등 해소 모드' 중국 산둥성 교류 확대 노력신여객터미널 설계 재개·관광자원 상품화등 추진항만에 친수시설 평택호 연계 '국제 무역항' 도약정 시장은 "평택항의 발전을 위해 오는 10일 경기도, 평택시, 관계 기관들이 종합 대책 회의를 하려고 했는데 회의에 앞서 이런 문제들이 나오게 된 것"이라며 "법제사법위원회에서 활동하고 있는 더불어민주당 정성호 의원과 금태섭 의원에게도 평택항 국제여객터미널 문제 해결을 위해 협조 요청을 했고 해결 방안 마련에 도움을 받았다"고 설명했다.정 시장은 현재 발생하고 있는 출입국 지연 문제와 더불어 한·중간 사드 갈등 해소로 내년에는 중국인 관광객들이 올해보다 더욱 늘어날 가능성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새로운 국제여객터미널 준공 이전에 중국인 관광객 유치를 위한 대책 마련이 시급했다는 것이다.그는 "경기 남부 지역은 중국 산둥성과 가깝지만 그동안 인적 교류는 많이 없었던 터라 인적 교류를 확대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며 "용인, 화성 등 경기 남부권과 평택의 관광 자원을 패키지 상품화하는 관광 코스 개발 작업을 경기관광공사와 함께 진행하고 있다"고 밝혔다. 이어 "중국과 인적 교류를 늘려야 하는데 현재 여객터미널 규모로는 중국인 관광객 유치에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며 "신여객터미널 준공 이전까지는 이와 같은 방향으로 확장 작업을 추진할 계획이다"라고 덧붙였다.아울러 신국제여객터미널의 신속한 착공도 강조했다. 신국제여객터미널은 평택지방해양수산청 주관으로 설계 발주 됐지만 이용객 증가에 따른 예산 증가 등 이유로 현재 설계 단계에서 멈춰 있는 상태다. 당초 올해까지 설계를 마무리할 계획이었지만 기획재정부가 설계 적정성 재검토에 나서면서 설계 완료 예상 시점이 내년으로 늦춰졌다.정 시장은 "이번 문제 제기로 신국제여객터미널 건설을 서두를 수 있는 계기가 됐다"며 "기재부 등 정부에 국제여객터미널 공사가 조속하게 진행될 수 있게끔 요청할 방침이다"라고 말했다.이밖에 정 시장은 평택항 국제여객터미널이 중국과 평택을 오가는 새로운 관문으로 떠오르자 시민 친화적인 항만으로 발전할 수 있는 방안들을 모색하고 있다고 소개했다.평택시는 신국제여객터미널 준공 이후 국제여객터미널 배후부지에 친수 시설을 조성하는 방법을 평택해양지방수산청과 추진 중이다. 친수공간이 조성되면 평택항 동부두 배후 도로와 항만 배수로 정비 사업 부지, 평택호가 연결되는 녹지축이 조성된다. 평택항 국제여객터미널과 평택호 관광 단지 이용객 방문으로 평택항은 당당히 국제 무역항으로서 본연의 모습을 갖추게 된다.정 시장은 "이와 별도로 가칭 '평택항 종합발전계획 수립 용역'을 재정사업으로 추진해 줄 것을 중앙 정부와 협의하고 있다"며 "평택항과 황해경제자유구역 평택 포승지구(BIX), 평택호 관광단지 등과 연계 개발로 평택항이 동북아 무역 물류 중심 항만으로 거듭날 수 있도록 최선의 노력을 다하고 있다"고 소개했다.글/김종호·이원근기자 lwg33@kyeongin.com■정장선 시장은?▲ 1958년 평택 출생▲ 성균관대학교 행정학 학사 ▲ 연세대학교 행정대학원 행정학 석사▲ 2000년∼2004년 제16대 국회의원▲ 2004년∼2008년 제17대 국회의원▲ 2008년∼2012년 제18대 국회의원▲ 2016년 더불어민주당 총선기획단장, 총무본부장▲ 2018년∼ 평택시장정장선 평택시장이 3일 경인일보와 인터뷰에서 평택항 국제여객터미널의 미래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평택시 제공평택항 항만배후단지와 국제여객터미널. /경인일보DB

2019-12-03 김종호·이원근

[인터뷰… 공감]'제1회 이용악 문학상' 수상한 인천 김영승 시인

번민 많이해… 문인 이름 내건 상에 '권위'가 부여되길 바라북방정서 함축 평가 수상작 '저항', 나름의 '인간 선언' 담아20~70대 다양한 연령 꾸준한 발걸음에 25년째 문화원 강의주자의 시경 수업·발표작등 하나하나 정리해 책 내놓을 것인천의 김영승(61) 시인이 이달 초 '제1회 이용악 문학상'을 수상했다. 수상작은 지난해 여름에 발표한 시 '저항'이었다.올해로 창간 10주년을 맞은 계간 '문학청춘'은 통일시대를 염원하면서 민족시인 이용악의 문학정신을 기리기 위해 '이용악 문학상'을 제정했으며, 그 첫 수상자로 김영승 시인을 선정해 시상했다. 심사위원회는 '저항'에 대해 "세심한 언어 선택에 고심하면서 주제를 내면화하려는 응축의 미학을 겨냥한 흔적을 보여준다"며 "시인이 축적해온 시적 성취의 연장선에서 공동체적인 연민과 연대 의식을 함축하면서 북방 정서를 노래하고 있다는 점에서 수상작으로 손색없다"고 평했다. 함경북도 경성에서 태어난 이용악(1914~1971)은 1930년대 서정주, 오장환과 함께 우리나라 3대 시인으로 꼽히기도 했다. 북방시인으로 불린 이용악의 시는 주로 강한 의지력, 침통한 정조, 예민한 감수성과 풍부한 사상성을 겸비했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받고 있다. '이용악 문학상' 수상 후 2주 정도 지난 22일 김영승 시인을 만났다. 인천 미추홀구 석암초교 인근의 카페 '안단테 에스프레시보'에서였다. 시 모임 카페로도 잘 알려진 이 곳은 지난달 김 시인의 '시경(詩經) 낭송회'가 펼쳐지기도 했다. 수상 소감을 묻자 김 시인은 잠시 머뭇거리다 입을 열었다."이용악은 백석만큼 작품이 많진 않지만, 시의 톤이 굵고 북방적 정서가 짙죠. 많이 꾸미려 들지도 않았어요. 월북작가이다 보니 다소 희소성도 있기 때문에 문학상의 형태로 접근했다고 보고요. 시상의 주체를 떠나서 저 김영승이 제1회 수상자로서 이 상에 권위가 부여되길 바라고 있습니다. 수상 수락까지 번민을 하다가, 강하게 의미 부여하기로 하고 수락했죠. 21세기 복잡다단하고 분단된 우리 현실에서 이용악이 재생·복원되는 그런 계기가 되길 바랍니다."김영승 시인의 수상을 축하하기 위해 시상식장을 찾았던 소설가 박정규 전 서울과기대 문창과 교수는 행사 후 개인 SNS에 "큰 족적을 남긴 문인을 기리기 위해 문인의 이름을 내건 문학상을 제정했다면 최소한 제1회 시상식에서만이라도 문학상 제정의 의의와 그 이름을 건 문인의 문학사적 의미를 밝히기 위한 간단한 세미나라도 가져야 이름을 내건 문인이나 그 문학상의 수상자에 대한 예의가 아니겠는가"라고 남겼다. 첫회 시상식에 걸맞은 다채로운 부대행사가 따르지 못했다는 아쉬움이었다. 마음이 여리디여린 것으로 소문이 난 김영승 시인의 입장은 어땠을지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그건 어디까지나 주최측의 문제일 뿐, 행사의 부족함이 이용악이나 김영승 시인의 작품세계를 폄훼할 수는 없을 터.이용악과 김영승 시인을 연결해 준 '저항'을 작가는 어떻게 생각할까."지난해 발표된 시예요. 많이 잊혀졌는데, 구 소련 체제에서 핵 발전소 건설에 강제 동원됐던 우리나라 사람들에 대한 기록을 접했어요. 재미 한국인으로서 모스크바 대학에 연구하러 간 학자가 희생자에 관한 기록을 찾은 거였죠. '저항'은 정치적이거나 피압박자들의 저항은 아니에요. 거기서 머물렀다면 모든 시의 패턴화에서 벗어나지 못했을 겁니다. 더 나가서 나의 삶이 약간 투영됐어요. 알베르 까뮈 식의 '반항'으로 볼 수 있죠. 저항을 한다는 것은 약자로서의 저항이 아니라 인간을 선언하는 것입니다. 아프건 슬프건 억울하건 행복하건 그것의 의미를 부여하고 통찰하는 삶이 저항이며, 시를 통해 저 나름의 인간 선언을 한 것이었습니다."대화는 자연스레 시인의 이름을 전국에 알린 1천302편의 연작시 '반성'으로 이어졌다. '반성'은 올해로 출간 32주년을 맞았다."1천302편('반성·序'를 더할 경우 1천303편)의 연작시 '반성'은 그 자체로 시인의 '지금 여기(Now and Here)'이며 '삶의 자리(Sitz im Leben)'에서의 문학입니다. 주로 내가 처했던 가난에 관한 구체적 육화의 소산이며, 고도의 비유문학이에요. 정통적인 예쁜 서정시라고도 할 수 있어요. '반성'이 먼저 알려져서 그렇지, 이전에 쓴 서정시가 많습니다. 건강이 좋지 않고 슬프더라도 서정시를 쓸 때 나는 건강하다고 느낍니다. 연작시로는 '반성'을 비롯해 각각 2천 편이 넘는 '권태'와 '희망'이 있고요. '반성'의 내용이 파격적이다 보니 문단과 언론에서 조명이 많이 됐는데, '반성'에서 추구한 것은 쉬운 시였어요. 아주 쉬운 언어로 깊은 내용을 전달하는 게 좋은 시라는 생각에서였습니다. 정서법을 구사했으며, 문법 일탈도 없습니다. 요즘에야 젊은 비평가들이 이러한 부분에 관심을 갖고 있다고 합니다."요새 젊은 독자들은 한자어라면 질색을 하곤 한다. 김영승 시인의 이번 수상작 '저항'에서도 그렇지만 그동안 써 온 '반성' 등 여러 작품에 한자어가 많다. 작가는 어떻게 생각할까."출판사에서도 자주 연락이 와요. '한자를 한글로 바꾸거나 한글과 병기하면 안 되냐'고요. 제 대답은 '안 된다' 입니다. 지식 자랑하려는 건 절대 아니에요. 한자 자체의 미학이 있어요. 시각적인 것도 좀 다르고요. 그리고 시를 썼을 때 초고를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걸어가면서 쓰기도 하고, 식당에서 전단지 뒷면에 쓰고, 신문의 여백에도 쓰는데, 쓸 당시의 시어를 한글로 썼으면 한글로, 한자로 썼으면 한자로 그대로 발표하고 있습니다."김영승 시인에게 인천은 어떤 공간일까."인천은 태어나 살고 있는 '삶의 세계(Lebenswelt)'입니다. 앞에서 얘기했던 '지금 여기(Now and Here)'이며 '삶의 자리(Sitz im Leben)'이기도 하고요. 소재주의에 빠져서 인천항, 소래포구, 맥아더 동상이 드러나야 인천이 아니라, 나의 움직임인 동선 전부가 인천입니다. 인천에서 좌절하고 상처받고, 절망하기도 하고, 꿈도 꾸고 감사함도 느꼈습니다. 인천에서의 성장과 나의 삶은 내 수만 편의 시에서 나타납니다."김영승 시인은 대학과 같은 교육기관 강의는 중단하고, 인천의 연수문화원과 부평문화원에서 각각 두 개 강좌씩 만을 맡고 있다. 두 문화원 설립 이후 꾸준히 강의를 이어오고 있는데 올해로 벌써 25년째가 되었다."당시 65세 할머니 한 분을 대상으로 시작한 강의가 소문을 타면서 지금까지 진행됐습니다. 현재 연수문화원에선 '문예창작특강'과 '해설과 함께하는 한국현대시 100년의 명시 감상'을, 부평문화원에선 '시창작교실'과 '동양고전강독-주자의 시경집전을 저본으로 한 김영승 주해·번역 시경' 강의를 하고 있어요. 수강자들의 연령대도 20대부터 70대까지 다양합니다. 제가 이곳을 못 떠나는 이유는 눈이 오나 비가 오나 꾸준히 수강해 주시는 분들 때문입니다. 장애를 안고 있는 분들도 계신데, 힘든 길을 마다하지 않고 오시는 분들을 보면서 '이런 분들 앞에서 내가 잘난 척하면 안 된다'는 생각입니다. 또한, 한번 하면 오래 이어가는 제 습성도 한몫했을 겁니다. 지금은 제 생활 리듬을 문화원 강의와 창작에 맞추면서 더욱 건강해진 느낌을 받고 있습니다. 특히 시경 강의는 책으로도 출판할 예정이에요. '시경'을 그동안 철학의 한 분야로 다뤘는데, 방대한 번역과 주해만큼이나 오류도 많아요. 시경은 시적 언어이기 때문에 첫 행에 있는 말이 마지막 행에 걸리기도 하죠. 또한, 자리를 바꿔서 의미가 통하는 것들도 있고요. 그런 언어 감각이 기존 시경을 번역한 학자들에게선 부족했어요. 수강생들과 어려운 시경 수업을 하고 있는데, 강의용 노트에 풀어 쓴 내용이 더해져서 방대한 책으로 묶일 것 같습니다."김영승 시인은 그동안 출판사와 약속은 했지만, 이행치 못해 발간되지 못한 수십 권의 책들을 하나하나 정리해서 내놓을 예정이다. "발표된 (책으로 엮이지 못한) 시만 해도 10여 권 분량은 될 정도입니다. 모든 시에 동등한 비중을 두다 보니 시를 편집하고 추리는 부분에서 시간이 오래 걸리고 어려움을 겪었어요. 때문에 출판사엔 시를 보내준다고 해놓고 못 지킨 적이 있었고요. 소설 출판 약속도 지키지 못했는데, 차근차근 이행할 것입니다."글/김영준기자 kyj@kyeongin.com 사진/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김영승 시인은 2014년 형평문학상과 함께 올해 이용악문학상 제정 후 첫 번째 상을 받았다. 인천 주안의 카페에서 만난 시인은 수상의 의미와 자신의 작품 세계, 고향 인천에 관해 2시간 가량 이야기했다.

2019-11-26 김영준

[인터뷰… 공감]'이재명 경기도지사의 정책 브레인·30년 지기' 이한주 경기연구원 원장

그는 늘 그의 곁에 있었다. 때로는 한 발짝 뒤에 서 있었고, 때로는 몇 발짝 앞에서 그를 이끌었다. 그럼에도 비교적 베일에 싸여있었다. 이재명 경기도지사의 '정책 브레인'으로 불리는 이한주 경기연구원 원장 이야기다.이 원장과 이 지사는 30년 지기다. 실용주의·공정이 핵심인 이 지사의 정책 철학을 마련해준 멘토였고 성남시장일 때도, 도지사에 당선됐을 때도 시·도정의 큰 그림을 그리는 설계 총책임자였다. 곁에 머무는 것에 그치지 않고 스스로의 길을 치열하게 달렸다. 경제학자로서 이론을 현실에 접목하는데 부단한 노력을 쏟았고, 학교의 구성원으로서 번듯한 학교를 만들기 위한 각종 학내 문제 해결에 앞장섰다.상대적으로 이 지사의 멘토, 정책 브레인으로만 조명됐던 이 원장의 이야기를 19일 오전 그의 집무실에서 좀 더 자세히 들어봤다. 법정 다툼 속 기로에 서 있는 이 지사, 그리고 그가 총괄하는 경기연구원에 대한 이야기도 빠지지 않았다.■李지사·성남과 인연은 어떻게배무기 은사 권유로 경원대서 교수직'철거민' 모습 경제학도에 자못 '충격'"실질적 도움주자" 시민운동서 알게돼# 호헌철폐 교수 성명 1호, 중심에 서 있던 젊은 교수6·10 민주항쟁은 전두환 정권의 4·13 호헌 조치에서부터 불붙었다. 직선제로의 개헌이 좌초될 위기 속 전국 대학교수들은 일제히 시국 성명을 발표했다. 첫 번째 성명은 설립한 지 10년도 채 되지 않은 성남시의 작은 대학에서 나왔다. 중심에는 당시 경원대학교(현 가천대학교)에서 경제학을 강의하던 젊은 교수가 있었다. 이 원장이었다.나무 냄새가 좋아 목수를 하고 싶던 소년은 서울대학교에 진학 후 경제학도가 됐다. 지금의 가천대와 연을 맺은 것도 당시 은사였던 배무기 전 울산대학교 총장 때문이었다. 이 원장은 "제게는 아버지 같은 분인데, 그분 밑에서 오래 있었다. 어느 날 그분이 경원대에 가서 강연을 하고 오라더라. 어딘지도 모르는데, 아버지 같은 분이 말씀하시니까 무턱대고 갔다"며 "당시는 학원 자주화 운동이 굉장히 세게 일어났을 때였다. 그런데 무슨 일을 하더라도, 스스로 어떤 길로 가고 있는지는 알아야 하지 않나. 선배들이 별로 없었던 학교니까, 그런 상황 속에서 학생들과 부딪히면서 다양한 내용을 강연했다. 그러다 교수협의회를 만들었고 부정입학 등 학내 문제에 맞섰다. 사표를 내기도 했다"고 회고했다. 반평생을 가천대에 몸담은 이유이기도 하다. "시작부터 함께 했으니 학교에 대한 애정이 깊을 수밖에 없지 않겠나"라고 말한 이 원장은 "성장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은 바르게 크는 것인데, 그런 측면에서 퇴직할 때는 '그래도 웬만큼 알아주는' 대학에서 퇴직하고 싶다"고 웃었다.가천대에 가면서 성남을 처음 알게 됐다. 가천대 뒷산에 선 그의 눈에 비친 성남은 마치 거대한 인삼밭 같았다. 아스팔트루핑 지붕이 다닥다닥 붙어있는 철거민들의 집. 이론 속에 있던 경제학도에겐 자못 충격적인 모습이었다. 시민운동에 참여하게 된 계기다. "관념·이념에 머무를 게 아닌, 실질적인 삶에 도움이 될 수 있게끔 해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던 그는 기독교 학생운동을 했던 경험을 토대로 당시 이해학 목사가 중심이 됐던 시민운동에 동참하게 됐다. 막 변호사가 된 청년 이재명과 본격적으로 연을 맺은 것도 그 무렵이다. 하루가 멀다 하고 민주화 운동에 뛰어든 그의 제자들이 연행될 때쯤, 이 지사는 전속 변호사처럼 관심을 기울여줬다. 열악한 성남을 그래도 살만한 곳으로 만들기 위한 시민운동도 함께 이어갔다.■1년 2개월째 맡아온 경기연구원적응 좀 됐지만 갈수록 책임감 무거워져'한국 축소판' 저출산·규제등 과제 많아민주주의 발전·도민 삶의질 향상 고민도# 이재명, 그리고 경기연구원각자의 삶을 치열하게 살며 함께 걸어온 이 지사와 이 원장 모두 서로에게 떼려야 뗄 수 없는 존재다. 성남시장에 취임하자마자 시행한 모라토리움 선언, '이재명표' 3대 무상복지로 일컬어지는 무상교복·청년배당·산후조리 지원 등이 이 원장의 손을 거쳤다. 이 지사가 경기도지사에 당선된 후에도 공동 인수위원장을 맡아 도정 청사진을 그렸고, 아예 도 싱크탱크인 경기연구원 원장을 맡았다.지난해 9월부터 1년하고도 2개월째 연구원 원장으로 일하고 있다. 1년간의 소회를 묻자 "지금은 적응이 좀 됐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책임감이 무거워진다"고 답했다. "선거 기간 중에 공약도 만들고 실제로 경기도를 들여다보기도 했는데, 가면 갈수록 경기도는 대한민국의 축소판 같다는 생각이 짙어진다. 구조 자체가 31개 지역의 부족 연맹체인데, 저출산 문제도 심하고 규제·난개발 문제도 그대로다. 그러면서 민주주의를 발전시키고 도민들의 삶의 질을 높여가야 하는 과제도 있다. 기관 내부적으로는 인력도 충원해야 하고 노사 관계도 풀어야 한다. 할 일이 많다"고 토로(?)했다.수장인 이 지사의 운명과 맞물린 도정이 올해 안에 정상화됐으면 하는 바람도 내비쳤다. 이 원장은 "이 지사가 두 번째로 시장을 할 때는 오랜 기간 근무한 공무원들이 정책들을 내놓기 시작했다. 일선에서 오랜 기간 시민들과 호흡해온 공무원들이 내놓는 정책들은 정말 실현가능성이 높다. 결국 정책은 일종의 예술이라, 방향이 맞다고만 해서 좋은 정책이 아니다. 결국 좋은 정책은 실현되는 정책"이라며 "도는 이 지사가 송사에 자꾸 흔들리니까 공무원들도 영향을 받지 않을 수가 없다. 그렇다 보니 아직까지 공무원들의 오랜 경험이 담긴 정책들이 생각만큼은 많지 않다. 빨리 정상화돼야 하는데, 올해 안에 그렇게 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이날 인터뷰 직전 14명의 시·도지사들이 이 지사의 무죄를 탄원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전날에는 변호사들이 2심 판결의 부당함을 호소했고 조계종 총무원장 원행 스님도 탄원에 동참했다. 이에 대해 이 원장은 "사실 정치인에 대한 범국민대책위원회가 꾸려진 것은 한명숙 전 총리 이후 처음"이라며 "생각보다 많은 분들이 탄원에 참여했다. 물론 엄벌에 처해 달라는 진정도 많다. 그렇지만 전체적으로는 시민사회, 그리고 정치권 전반에서 포용하는 분위기인 것 같다"고 평했다.그러면서 "결국 총선이든, 대선이든 다 떠나서 경기도에서 실적을 못 쌓으면 무슨 소용이겠나. 아마 이 지사는 도에서 실적을 못 내면 스스로 아무 것도 안 한다고 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건 곧 그의 이야기이기도 할 터다.글/강기정기자 kanggj@kyeongin.com 사진/김금보기자 artomate@kyeongin.com■이한주 원장은?▲ 1956년 서울 출생▲ 서울대학교 경제학 박사▲ 가천대학교 글로벌경제학과 교수▲ 2017 ~ 2018년 가천대학교 특임부총장▲ 2018년 ~ 경기연구원 원장▲ 2018년 새로운경기위원회 공동위원장▲ 2017년 대통령직속 국정기획자문위원회 경제1분과 위원장▲ 2017 ~ 2018년 대통령직속 정책기획위원회 경제분과위원장▲ 2019년 ~ 예금보험위원회 위원※ 다니엘 라벤토스 '기본소득이란 무엇인가' 번역19일 이재명 경기도지사의 '정책 브레인'으로 잘 알려진 이한주 경기연구원 원장이 집무실에서 이 지사와의 인연과 경기도 정책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2019-11-19 강기정

[인터뷰… 공감]인천 출신 첫 '전국항운노조연맹' 수장 선출된 최두영 인천항운노조 위원장

#'부산' 제치고 당선 9월 취임했는데IMF때도 물동량 늘었는데 최근 '정체'영광스럽지만 어려운 상황 어깨 무거워#인천항 물동량 감소 심각… 대안은일자리 창출 효과 큰 벌크화물 유치 필요중고차 수출 '남항 클러스터' 조성 시급#'내항 재개발 사업' 속도 조절론'성공모델' 獨 하펜시티 항만 운영 '공존'1·8부두엔 주거시설 2~7부두 기능 유지를우리나라 노동운동은 항만에서 처음 시작됐다. 1898년 함흥 성진부두 노동조합을 시작으로 일제강점기 항만 노동자들은 노동시간 단축과 임금 인상 등을 요구하며 일제에 저항했다. 해방 이후인 1949년 3월 항운노동조합의 모태인 대한노총 전국항만자유노동조합연맹이 출범했다. 이후 70년이라는 시간이 흘러 명칭은 전국항운노동조합연맹으로 바뀌었고, 항만뿐만 아니라 철도·연안·농수산시장·정기화물·창고 등 국내 물류산업 종사자 2만5천여 명이 참여하는 거대 노조가 됐다. 노조의 모습은 크게 변화했으나, 지난 70년 동안 전국항운노조연맹 위원장은 부산 지역에서 도맡아 왔다. 전체 연맹 조합원 중 부산항운노동조합 조합원이 3분의 1에 달하기 때문에 다른 지역에서 전국항운노조연맹 위원장에 도전하기도 어려웠다.올해 9월 열린 전국항운노조연맹 대의원대회에서 역사상 처음으로 인천 출신이 위원장 자리에 올랐다. 인천항운노동조합 최두영(55) 위원장이 그 주인공이다. 최 위원장은 "인천 출신으로는 처음으로 전국연맹 위원장에 오른 것을 매우 영광으로 생각한다. 하지만 전국적으로 물류산업이 어려움을 겪고 있는 상황에서 취임했기 때문에 어깨가 매우 무겁다"고 했다. 이어 "선발투수가 아닌 구원투수로 투입된다는 마음가짐으로 노조가 직면하고 있는 여러 문제를 해결해 나가겠다"고 했다.최 위원장은 "우리나라 항만이 역사상 최대 위기를 겪고 있다"고 말하며 현재 상황을 진단했다. 올 들어 3분기까지 국내 전체 항만 물동량은 12억1천525만t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0.7% 증가하는 데 그쳤다. 이 중 벌크 화물 물동량은 7억8천770만t으로, 전년 동기 대비 0.4% 감소했다. 그는 "IMF 경제 위기 시절에도 항만 물동량은 꾸준히 늘었는데, 최근에는 거의 정체돼 있다"며 "우리나라 산업구조는 수출입 의존도가 높기 때문에 경제가 어려워지면 항만이 맨 처음 직격탄을 맞는다"고 설명했다.최 위원장은 해양수산부와 항만공사 등이 컨테이너뿐만 아니라 벌크 화물 유치에도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벌크 화물은 하역 과정이나 재가공 과정에서 여러 일자리를 창출할 수 있고, 국내 산업과의 시너지 효과도 매우 크다"며 "그럼에도 인천항만공사를 포함한 여러 항만 관리 기관에서는 컨테이너 화물을 더 중요시하고, 벌크는 등한시하고 있다"고 안타까워했다. 이어 "전 세계적으로 벌크에서 컨테이너로 화물 운반 형태가 바뀌고 있지만, 벌크 화물 유지 방안도 마련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인천항의 물동량 감소세는 심각한 수준이다. 올 1~9월 인천항 물동량은 지난해 같은 기간(1억2천122만t)보다 5.5% 줄어든 1억1천464만t으로 집계됐다. 2014년 1~9월 1억1천581만t을 처리한 이후 5년 만에 최저 수준을 기록했다. 올 들어 인천항 물동량이 많이 줄어든 이유는 벌크 물동량이 전년 같은 기간보다 9.8%나 감소했기 때문이다. 벌크 물동량이 줄면서 항운노조원의 일자리가 감소하거나 임금이 큰 폭으로 줄었다고 최 위원장은 설명했다.최 위원장은 "벌크 물동량 감소를 막으려면 인천 남항 '중고 자동차 물류 클러스터'를 이른 시일 안에 조성하고, 인천 '내항 재개발' 사업의 속도를 조절할 필요가 있다"고 자기 생각을 밝혔다.중고차는 인천항의 주요 벌크 화물이다. 인천항에서 수출되는 중고 자동차는 전국 중고차 물동량의 80%에 달한다. 인천시와 인천항만공사는 인천항의 중고차 수출 물량을 유지하기 위해 2025년까지 인천 남항 인근에 중고차 물류 클러스터를 만들 계획이다. 옛 송도유원지 일대에 자리 잡은 중고차 수출 업체들을 이곳(중고차 물류 클러스터)으로 이전시키겠다는 게 인천시와 인천항만공사의 생각이다. 하지만 인근 주민들의 반발에 부딪혀 사업이 제대로 추진되지 못하고 있다.최 위원장은 "중고차 물류 단지는 공해를 유발하는 혐오 시설이 아니다. 선진국 사례를 살펴보면 얼마든지 깨끗하게 운영될 수 있다"며 "인천시 등은 이러한 점을 주민들에게 적극적으로 알려야 하는데, 미온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다"고 꼬집었다.인천의 중고차 물류 클러스터 조성이 지연되는 사이 전북 군산과 경기도 평택, 울산 등에서는 중고차 수출단지 조성사업을 구체화하고 있다. 최 위원장은 "자동차 운반선은 중고차와 신차를 함께 싣기 위해 인천항에 기항하는 것"이라며 "중고차 수출 물량을 다른 지역에 빼앗기면 인천항의 신차 물동량도 줄어들 수 있다"고 우려했다.내항 재개발 사업과 관련해선, 주민과 개방을 합의한 내항 1·8부두는 재개발을 진행하더라도 항만 기능이 유지되는 2~7부두는 계속 운영돼야 한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해수부와 인천시는 내항 8개 부두를 5개 구역으로 나눠 재개발하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다. 인천 항만업계에선 내항 재개발로 항만 기능이 사라지면 인천지역 산업계에도 악영향을 끼친다고 주장하고 있다. 남항·북항·신항 등이 잇달아 개장하면서 내항의 물동량이 감소했지만, 곡물·사료 부원료·원당·자동차 등의 화물은 내항을 통해 하역되고 있다. 대체 부두 마련 없이 내항에서의 화물 하역이 중단되면, 이들 화물을 활용하는 공장들이 인천을 떠나 다른 지역으로 이전할 가능성이 높다.최 위원장은 "최근 항만 재개발을 성공적으로 진행한 독일 하펜시티를 방문해 보니 재개발과 항만 운영이 공존하는 방안을 마련해 놓고 있었다"며 "내항 1·8부두에 아파트 등 주거시설을 짓더라도 하펜시티를 참고해 항만 관련 민원을 제기하지 않겠다는 서약을 쓰고 입주시키는 등 공존 방안을 사전에 준비해야 한다"고 했다.최 위원장은 1990년부터 인천항운노동조합에서 일했다. 그는 "솔직히 당시 대졸 노동자 임금보다 항운노조원의 월급이 2~3배 정도 높아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항운노조에 들어왔다. 그때는 전국항운노조연맹 위원장까지 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고 웃으며 말했다. 그는 "물동량이 감소하는 데다, 항만 자동화가 본격적으로 시작되고 있어 항운노조원이 그 여느 때보다 어려운 시기를 보내고 있다"며 "항운노조를 대표한다는 책임감으로 (조합원들과 함께) 현재의 어려움을 극복해 나가겠다"고 말했다. 글/김주엽기자 kjy86@kyeongin.com 사진/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최두영 위원장은?▲ 1964년 인천 출생▲ 1981년 인천고 졸업, 1991년 중앙대 경제학과 졸업▲ 1990년 인천항운노동조합 가입▲ 1999년 전국항운노조연맹 쟁의부장▲ 2013년 인천항운노조 부위원장▲ 2019년 5월 인천항운노조 위원장 당선▲ 2019년 9월 전국항운노조연맹 위원장 취임전국항운노조연맹 최두영 위원장은 "위기에 빠진 물류산업의 구원투수로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2019-11-12 김주엽

[인터뷰… 공감]어우러짐&나눔 실천하는 남양주 천년고찰 '봉선사 새 주지' 초격 스님

20대 사미승으로 머물러 추억서려… 30여년만에 고향온 듯 감회 새로워지난달 취임법회때 화환 대신 '지역 쌀' 받아 소외이웃에 전달 '상생'청소년쉼터등 운영 '함께 행복한 세상' 꿈꿔… 교회찾아 '화합' 행보도스님들 '청빈·봉사 삶' 펼칠 수 있게 노후대책등 수행환경 보장하고파가을이 깊어가는 봉선사에는 스님들의 빗자루에 모여진 낙엽들이 연신 바스락 소리를 냈다. 임진왜란과 한국전쟁 때 소실돼 여러 차례 중건되기는 했지만, 광릉숲에서 이어지는 고즈넉한 풍광과 잘 어우러진 절의 분위기는 천년고찰(969년 창건)의 면모를 고스란히 담아내고 있었다. 남양주와 포천 등 경기북부 지역에 84개 말사를 둔 대한불교조계종 제25교구 본사. 조선 시대 승과시가 치러졌던 곳. 전국의 승려와 신도들을 대상으로 교학 진흥의 중추기관 역할을 해온 교종본찰 봉선사의 새 주지로 임명돼 지난달 25일 취임법회를 연 초격스님은 1987년 바로 이 곳에서 사미계를 받을 만큼 봉선사와 인연이 깊다. 연어가 강을 거슬러 오듯 부처님의 인연에 따라 되돌아 온 것일까, 파릇파릇하던 20대 사미승은 30여 년만에 명실상부 '큰스님'으로 돌아왔다. 휴대전화 컬러링에 가수 이문세의 '나는 행복한 사람'이 흘러 나오는 사람, 천일기도에 묵언까지 병행하면서 성탄절에는 교회와 성당을 찾아 축하인사를 하는 승려, 삼성을 상대로 문화재 반환을 이끌어내며 '문화재 제자리 찾기'운동의 첫 불을 지폈던 행동가 초격스님을 봉선사 경내에서 만났다. "봉선사는 젊은 나이에 뛰놀던 곳입니다. 청년의 나이로 큰스님을 시봉했죠. 연꽃이 피고 지는 연못과 그 곳의 자라 한 마리까지 곳곳에 추억이 서려 있습니다. 속세로 치자면, 서울로 공부하러 갔다가 나이 들어 고향으로 돌아온 셈인가요, 감회가 새롭습니다."30여년만에 돌아온 절은 놀랍게 발전했지만 여전히 달라지지 않은 것이 있었다. 사찰 곳곳이 잘 정비되고 신도와 관광객도 크게 늘었지만, '오는 사람 막지 않고 가는 사람 잡지 않는' 일주문처럼 봉선사는 예나 지금이나 대중들에게 여전히 열려 있는 공간이다. 절에 문화재가 즐비하지만 입장료는 물론, 그 흔한 주차비도 받지 않는다. 신도든 비신도든 점심때 절을 찾은 사람은 누구나 무료로 절밥을 먹을 수 있다. "누구든지 편하게 찾아와서 마음의 안정을 찾고, 힐링을 할 수 있도록 하는 것, 어쩌면 그것이 종교의 역할이자 존재 이유 아닐까요."이런 열린 마음은 스님이 각별히 강조하는 '종교간 화합'으로 이어진다. 초격 스님은 관내 기관장과 정치인들을 만날때면 그가 비록 불심이 깊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특정 종교를 내세우지 마라'고 엄중하게 당부한다. 지도자가 내 종교만 두둔하고 남의 종교를 멀리하면 지도자의 자격이 없다는 것이다. 스님이 성탄절에 교회와 성당을 찾아 축하하고, 목사와 신부가 부처님 오신날에 절에 와 함께 차를 마시는 모습을 보여야 신도들에게도 그대로 영향을 미쳐 사회 화합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게 스님의 지론이다. 조계종 제25 교구장으로서의 여러 포부도 '화합'과 맥을 같이 한다. "가족 없이 혼자 사는 스님들에게 기본적인 노후대책을 보장하고 싶습니다. 단순히 종교인의 복지를 말하고 싶은 게 아닙니다. 수행 환경이 보장돼 있지 않는데 어떻게 청빈한 마음으로 사회와 신도들에게 봉사할 수 있겠어요. 열심히 수행해 그 결과를 이웃에게 베풀고 나눌 수 있어야 합니다. 무슨 건물을 세울지, 어떤 문화 축제를 기획할지도 중요하지만, 선원에서 수행하는 스님들과 학림에서 공부하는 스님들에게 복지기금과 장학금·노후 생활비를 보장하는 것이 중요한 이유입니다." 스님은 지난달 25일 열린 주지 진산식에서 축하 화환 대신 '자비의 쌀'을 모아 20㎏ 들이 1천 포대를 남양주시에 전달했다. 행사 때 쌀을 기부받아 나누는 것이 이젠 그리 드문 풍경도 아니지만, 스님은 여기에 한 가지를 더해 '기왕이면 북부지역 쌀을 보내달라'고 당부했다. 작지만 지역 사회와의 상생을 염두에 뒀기 때문이다. 또 다른 배려도 포함됐다. 남양주시를 통해 어려운 이웃들에게 전달된 쌀에는 '증 봉선사' 대신 기부자 개개인의 이름이 새겨졌다. 입장료도 주차 요금도 받지 않고 무료 점심 공양까지 시행한다는 얘기에, 문득 큰 절의 '살림살이'가 팍팍하지 않겠느냐 물었더니 스님은 "마음으로 나누면 마음으로 모아진다"는 답을 내놓았다. 나눔에 대한 '복(福)'은 나눔을 실천한 사람의 몫이고, 누군가 그 복을 가로채지 않는다는 게 일반화 돼야 기부와 나눔이 선순환된다는 논리였다. 여기에 '평등공양 차등보시'란 말을 보탰다. 밥은 공평하게 나눠먹고, 베푸는 것은 능력에 따라 차등이 있어야 한다는 얘기다. 자기의 나눔이 투명하게 쓰인다는 믿음이 있으면 나눔은 샘솟듯 계속된다는 말도 덧붙였다. 초격스님은 현등사 주지이던 지난 2006년 삼성문화재단이 소유하고 있던 '현등사 사리구'에 대한 반환운동 과정에서 조계종 실행위원장을 맡았다. 조계종이 법원에 반환청구소송을 제기했다 패소한 터였지만 스님은 '낮에는 협박, 밤에는 읍소'를 이어가며 결국 삼성의 대승적 결단을 이끌어냈다. 사리를 '문화재'로 본 삼성과 '성보'라 믿은 스님과의 줄다리기는 힘겨운 노력끝에 삼성이 사리를 영구기증하는 형식으로 매듭지어졌다.스님에게 휴대전화를 걸면 익숙한 대중가요 '그대 사랑하는 나는 행복한 사람, 잊혀질 때 잊혀진대도~' 노래가 흘러 나온다. "스님이 남들이 갖는 것을 갖지 못하고, 하는 것을 하지 못한다고 해서 결코 불행한 것이 아닙니다. 고관대작이라고 한들 집을 몇 십 채 씩 갖고 있겠어요. 하지만 스님들은 전국 명산 곳곳의 절이 다 내 집이고, 나물 반찬 한 개만 있어도 진수성찬이니 진정한 자유인이고, 모든 걸 소유한 사람들입니다. 행복하지 않을 이유가 없죠."그런 이유에서 일까. 스님은 봉선사를 '가고 싶은 곳', '가면 행복을 나눌 수 있는 절'로 만드는데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겠다고 거듭 강조한다. 봉선사가 남양주 노인복지관을 포함해 어린이집, 청소년쉼터, 가정폭력을 겪는 아이들을 위한 보호소 등을 운영하는 것도 함께 행복한 세상을 꿈꾸는 스님의 소망과 무관치 않다. 절에 기도를 하러 간 어머니를 만나기 위해 '불주사' 맞은 통증도 잊을 만큼 한달음에 산을 올랐다가 불심에 이끌려 아예 절집 생활을 시작한 초등학교 5학년 어린 아이. 이제 경기북부의 대표 사찰 주지가 된 초격 스님은 절의 문턱을 낮추고 국민들과 종교가 함께 모두가 행복해지는 것을 불가에서의 또다른 소명으로 여기는 듯 했다. 글/강보한기자 kbh@kyeongin.com 사진/강승호기자 kangsh@kyeongin.com ■초격 스님은?▲ 1987년 운경스님 계사로 사미계▲ 1994년 중앙승가대학 졸업▲ 1998년 청하 스님 계사로 구족계▲ 1998~1999년 불교방송 '살며 생각하며' 생방송 진행▲ 2012년 동국대 경영전문대학원 수료▲ 2002년~현재 제 13~17대 중앙종회의원▲ 현등사 주지, 보광사 주지, 한국문화연수원장, 사단법인 해피월드 이사장, 아산 윤정사 회주, 불교신문 사장, 총무원장, 종책특보단장, 중앙종회 수석부의장 역임지난달 25일 경기북부의 대표 사찰 봉선사의 새 주지로 임명되면서 20대 청년시절 큰스님을 시봉했던 곳으로 30여년 만에 다시 돌아온 초격 스님은 취재진에게 봉선사의 구석구석을 소개하며 "신도든 비신도든 언제든 찾을 수 있도록 절의 문턱을 낮추는 데에 소명을 다하겠다"고 강조했다. /강승호기자 kangsh@kyeongin.com지난달 25일 경기북부의 대표 사찰 봉선사의 새 주지로 임명되면서 20대 청년시절 큰스님을 시봉했던 곳으로 30여년 만에 다시 돌아온 초격 스님은 취재진에게 봉선사의 구석구석을 소개하며 "신도든 비신도든 언제든 찾을 수 있도록 절의 문턱을 낮추는 데에 소명을 다하겠다"고 강조했다. /강승호기자 kangsh@kyeongin.com지난달 25일 경기북부의 대표 사찰 봉선사의 새 주지로 임명되면서 20대 청년시절 큰스님을 시봉했던 곳으로 30여년 만에 다시 돌아온 초격 스님은 취재진에게 봉선사의 구석구석을 소개하며 "신도든 비신도든 언제든 찾을 수 있도록 절의 문턱을 낮추는 데에 소명을 다하겠다"고 강조했다. /강승호기자 kangsh@kyeongin.com지난달 25일 경기북부의 대표 사찰 봉선사의 새 주지로 임명되면서 20대 청년시절 큰스님을 시봉했던 곳으로 30여년 만에 다시 돌아온 초격 스님은 취재진에게 봉선사의 구석구석을 소개하며 "신도든 비신도든 언제든 찾을 수 있도록 절의 문턱을 낮추는 데에 소명을 다하겠다"고 강조했다. /강승호기자 kangsh@kyeongin.com지난달 25일 경기북부의 대표 사찰 봉선사의 새 주지로 임명되면서 20대 청년시절 큰스님을 시봉했던 곳으로 30여년 만에 다시 돌아온 초격 스님은 취재진에게 봉선사의 구석구석을 소개하며 "신도든 비신도든 언제든 찾을 수 있도록 절의 문턱을 낮추는 데에 소명을 다하겠다"고 강조했다. /강승호기자 kangsh@kyeongin.com지난달 25일 경기북부의 대표 사찰 봉선사의 새 주지로 임명되면서 20대 청년시절 큰스님을 시봉했던 곳으로 30여년 만에 다시 돌아온 초격 스님은 취재진에게 봉선사의 구석구석을 소개하며 "신도든 비신도든 언제든 찾을 수 있도록 절의 문턱을 낮추는 데에 소명을 다하겠다"고 강조했다. /강승호기자 kangsh@kyeongin.com

2019-11-05 강보한

[인터뷰… 공감]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6대 이사장 지선 스님

#한국 민주사 100년 소회는'영원히 지향해야 할 이상' 섣부른 자부심 경계과거엔 이데올로기 미래엔 종교가 '방해 요소'#진보 서초동-보수 광화문 '대립 상황'헤게모니 쟁탈전 불과 둘다 민주화에 도움안돼욕망 버려야… 헌신하지 않는 사회 장래 어두워#교단 반대 무릅쓰고 헌신수행 목적은 나만 깨닫는 것이 아닌 세속 구제가르침은 '현실적인 모순' 극복하기 위해 필요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이사장·지선 스님)는 대한민국 민주주의 100년사를 아우르는'민주·인권·평화 박람회'를 29일 서울 남영동 민주인권기념관(옛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개최했다. 한 달 동안 열리는 이번 박람회는 3·1운동 및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아 전시, 포럼 등을 통해 대한민국 민주주의 100년사를 조망한다.박람회 개최를 앞두고 지난 26일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의 6대 이사장 지선스님이 방장으로 있는 백양사를 찾았다.단풍을 기다려온 상추객들이 벌써부터 산사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미소를 머금고 여유롭게 거니는 사람들의 표정을 눈에 담고, 지선 스님에게 한국 민주사 100년을 맞이하는 감회를 들었다.지선 스님은 1980~90년대 민주화 운동에 참여한 대표적인 종교계 인사다. 1987년 6·10 민주항쟁 당시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 상임 공동대표를 맡은 그는 성공회 서울대성당 종탑에 올라 민주화 운동의 시작을 알리는 종을 울렸다. 같은 해 구속돼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고초를 당했다. 30여년이 지난 지난해 비민주, 비인권의 상징물인 대공분실은 민주인권기념관으로 변모했다. 2022년 정식 개관을 목표로 민주주의를 더욱 발전시키기 위한 다양한 콘텐츠 개발과 연구가 진행되고 있다. 지선스님은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의 이사장이 돼 이런 변화를 지켜봤다. # "민주화 운동은 인류가 영원히 지향해야 할 이상입니다."100년의 민주주의 역사를 아우르는 행사가 곳곳에서 열리고 있는 때, 지선 스님은 민주화를 달성했다는 섣부른 자부심을 경계했다. 그는 "우리나라에서 현대적 의미의 민주화 운동이 시작된 건 사·오십 년에 불과하다. 민주주의란 말은 대한제국이 생길 때부터 나왔고, 북한의 나라 이름에도 민주주의란 말이 들어간다. 수백 년 전에 민주주의가 시작됐다는 서구사회에서도 비민주적인 일들이 일어나고 있다"며 민주화 운동은 인류가 영원히 지향해야 할 이상임을 강조했다. 모든 사람이 역사와 사회의식에 각성해 민주화를 위한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는 한편, 민주화를 방해하는 것들에 끊임없이 반항해야 한다는 것이다. 살아있는 존재로서 자유와 인권을 누리고 살기 위해서는 피할 수 없는 과제라고 그는 말했다. 민주화를 방해하는 요소로는 이데올로기와 종교를 지목했다. 지선스님은 "과거에는 이데올로기가 민주화의 걸림돌이 됐다. 미국과 소련으로 대표되는 자본주의와 사회주의가 양극화해 민주주의를 묵살했다. 지금은 다극화를 거쳐서 다시 양극화로 가려는 것이 미국이나 중국의 생각이라고 본다. 그들은 양극화의 주의주장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오늘날, 또 미래에 이보다 더 문제가 될 것은 종교다. 미래에는 종교가 더욱 끈질기게 민주화에 장애가 될 것이라고 본다. 우리나라의 경우 최근 광화문 집회에서 헌금을 모금하는 사례가 있었다. 그곳에 모인 사람들은, 그들은 과거 파시스트 정권 때는 거리로 나오지 않았다. 만약 지금 부당한 계엄령이 발포된다면 그들이 광화문을 나올 것이라고 생각할 수 없다. 민주화의 형식을 흉내 내며 방해하고 있다고 생각한다"고 비판했다. 또한 "시민사회의 민주화 운동과 정치권력과 종교세력은 계속해서 부딪힐 것"이라며 "이를 막을 수 있는 것은 각성한 시민들의 지속적인 민주화 운동"이라고 말했다.# "우리나라는 아직 민주주의 국가가 아닙니다."지선스님은 민주화란 '남에게 불이익을 주지 않고 지배하지 않고, 자유와 평등 행복을 추구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므로 민주화에는 진보도 보수도 없고 완성도 없다. 진보세력은 서초동에서, 보수세력은 광화문에서 대립하는 상황을 두고 지선스님은 "주의주장을 강하게 내세우는 한 어느 쪽도 민주화에 도움이 되지 못한다"고 했다. 그는 "보수와 진보의 공통점은 애국애민"이라며 "우리나라는 독립운동할 때까지는 보수가 있었지만, 이승만 이후로 보수가 사라졌다"고 비판했다. "이승만 집권 당시 상당수의 일본 잔재 세력이 살아남았다. 애국애민과 정반대의 행보였다"고 말했다. 또한 "진보 역시 자기 고집을 버리지 못해 민주주의와 멀어지고 있다. 그들은 결국 헤게모니 쟁탈전을 벌이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고 평했다.촛불혁명으로 정권을 교체한 경험을 통해 어떤 사람들은 우리나라 민주주의가 성숙했다고 평가하거나 혹은 '완성'을 거론하지만 지선스님은 민주화를 위해 헌신하고 싶다면 우선 나쁜 습관을 버리라고 조언했다. 내가 하기 싫은 일을 남에게 미루지 말고, 내가 더 갖고 싶은 욕망, 내가 더 잘 되고 싶다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민주화 운동에 헌신한 이들의 희생을 통해 민주주의를 확장했는데, 그 수혜자들이 중산층이 되고 돈이 생기니 정치에 관심을 갖고 권력에 욕심을 부린다. 인간의 본질적인 욕망이다. 가진 자와 아는 자가 헌신하지 않는 사회는 장래가 어둡다. 한편으로는 먹고살아야 한다는 생존논리가 강하니 각성이 힘들다. 그래서 민주화는 시간이 많이 걸릴 수밖에 없다. 꾸준히 하는 것밖에 없다"고 말했다.# "모든 것은 현실과 떨어져서 존재할 수 없다."지선스님이 민주화운동에 자신을 내던진 유신독재 시절, 천주교와 개신교가 반유신투쟁에 나설 때 불교는 침묵하고 있었다. 16살에 출가해 나와 우주의 근원을 탐구하고 자기 구제를 위한 수행에 정진하던 지선스님은 교단의 반대를 무릅쓰고 민주화 운동을 시작했다. 외롭고 고달픈 시간이었다. 함께하는 사람들 덕분에 용기를 얻을 수 있었다. 그러나 승려로서 그는 개인 수행과 중생구제가 동시에 가능할 수가 있는가, 개인 구원과 사회구원을 한 사람의 몸으로 이룰 수 있는가를 스스로에게 던지고 답을 구해야 했다. 그는 "답을 물어볼 사람이 없었다. 한용운 스님이나 계시면 찾아가서 물어봤을 텐데, 아무도 없으니 외로웠다. 다행스럽게도 승가대와 동국대 젊은 스님들이 열심히 함께 해줘서 외로움을 이겨내고 답을 구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그가 구한 답은 자비에 있었다. 지선 스님은 "수행의 목적은 세속을 구제하는 데 있다. 나만 깨닫는 것이 수행의 목적이 아니다. 수행자는 결국 현실 참여를 해야 한다. 초월적인 논리나 가르침은 현실적인 모순, 업보와 정면으로 맞닥뜨려서 극복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다. 회피하는 것은 초월이 아니다. 모든 것은 현실과 떨어져서 존재할 수 없다. 현실참여를 하지 않고 수행만 하면 종교는 필요 없다"고 말했다.지선스님은 어느덧 민주화 100년의 역사를 헤아리고, 촛불 혁명을 이루어낸 우리 사회가 앞으로 '모든 것을 넘어선 아름다움'의 의미를 깨닫고 추구해 나가기를 희망했다. 그는 "달라진 사회 현실에 따라 민주화운동도 변화하며 계속돼야 한다"며 "올해를 기념하고자 한다면 비본질적인 것, 내가 아닌 것을 나라고 착각하고 나만을 위한 주장을 고집하는 행동을 멈추고, 모든 생명이 나와 똑같이 공존공생하며 아름답게 사는 것을 추구하는 시작점으로 삼기를 바란다"고 말했다.글/민정주기자 zuk@kyeongin.com■지선 스님은?▲ 백양사 승가대학교 졸업(1970년)▲ 전남 영광 불갑사 주지(1972년)▲ 제주 관음사 주지(1976년)▲ 대학생 불교연합회 결성(1980년대)▲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 공동대표, '6·10국민대회' 주도하다 구속(1987년)▲ 전남 장성 고불총림 백양사 주지(1994년)▲ (사)6월민주항쟁계승사업회 제2대 이사장(2007~2010년)▲ 고불총림 백양사 방장(2014년~)1980~90년대 민주화 운동에 참여한 대표적인 종교계 인사인 지선 스님은 "민주화 운동은 인류가 영원히 지향해야 할 이상"이라며 "민주화에는 진보도 보수도 없고 완성도 없다. 남에게 불이익을 주지 않고 지배하지 않고, 자유와 평등 행복을 추구하는 것이 민주화다"라고 강조했다.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제공

2019-10-29 민정주

[인터뷰… 공감]옛 추억 상기시킨 '신포동 포크음악축제' 주역 인천 출신 디스크자키 김유철씨

일하다 건강 나빠져 요양 음악다방 매일 찾으니 DJ 제의받아 '유명세'1980년대 디스코텍에 밀리며 음반기획사行… 대박·손해 '우여곡절'인천 돌아와 '비틀즈' 운영 신청곡 들려주며 가슴 따뜻한 여행 이어가가을 저녁 인천 중구 신포동에 포크 음악 바람이 일었다. 1960~1980년대 젊은 세대에 큰 영향을 끼친 포크 음악을 주제로 한 '제1회 신포동 포크 음악축제'가 지난 12일과 13일 저녁 신포시장 인근 문화의 거리에서 펼쳐진 것이다. 인천 출신 가수 백영규씨가 기획과 연출을 맡은 이 축제는 거리를 가득 메워준 지역 주민과 음악팬들의 큰 호응 속에 막을 내렸다. 성공 요소들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1980년대 '음악다방'을 무대에 소환한 점이 성공의 요소 중 하나였다. '음악다방'이 관객들의 옛 추억을 상기시켰고, 그만큼 호응도 컸던 것이다.그 중심에는 1970~1980년대 인천을 주름잡던 디스크자키(DJ) 김유철(62)씨가 있었다. 축제의 오프닝을 맡은 김유철씨는 무대에 재현된 DJ 박스 속에서 당시를 떠올리게 하는 정겨운 멘트와 가수 소개로 관객들을 미소짓게 했다. 특히 옛 인기 드라마 '아들과 딸'에서 도끼빗 DJ(준이 오빠)로 출연했던 인천 출신 배우 윤철형씨가 김씨의 후배 DJ로 출연해 무대 위 DJ 박스 안에서 나누는 대화는 옛 DJ 문화를 고스란히 보여주는 것이었다. 이어 팝페라그룹 엘루체의 리더가 김씨를 찾아와 새로 나온 음반을 건네며 꼭 좀 소개해달라고 부탁하는 모습도 수십년 전 모습이었다. 이에 김씨는 축제 무대에서 엘루체가 부를 'Perhaps Love'를 멋들어지게 소개하면서 관객들을 음악의 세계로 안내했다.김씨에게 30여년 전 우리 대중 문화에 영향을 끼친 DJ에 관한 이야기를 들어보고 싶었다. 지난 21일 오후 김씨가 운영하는 인천문화예술회관 인근 뮤직카페 '비틀즈'에서 만나 이야기를 나눴다.4년째 '비틀즈'를 운영하고 있는 김씨는 벽을 가득 메운 9천여장의 LP판들 앞에서 옛 DJ 방식으로 그날의 날씨를 언급하고, 곡 해설을 하면서 손님들의 신청곡을 들려주고 있다.그는 "아날로그 감성을 원하는 분들에겐 LP판으로, 깨끗한 음질을 원하는 분들에겐 컴퓨터 파일화 되어 있는 곡을 틀어주고 있다"면서 "멘트는 그날그날 옛 뮤지션들의 기념할 만한 일이 있었는지를 챙기고, 당일 날씨 등을 토대로 준비하고 있다"고 설명했다.연평도에서 태어난 김씨는 인천기계공고에 입학하면서 뭍으로 올라와 생활했다. 고3 때 울산현대조선소로 취업 나갔다가 용접 때 발생한 가스를 많이 마신 관계로 건강이 나빠지면서 인천으로 돌아왔다."당시 회사에서 취업 중 장기요양으로 처리를 해준 덕분에 학교에 나가지 않아도 되는 상황에서 선배들과 어울려 동인천의 음악다방에 매일 출근하다시피 했어요. 하루 종일 음악만 들었던 거죠. 그런 모습을 눈여겨본 석다방의 DJ 선배들이 제의를 해왔고, 그렇게 새끼DJ 생활이 시작되었어요. 하지만, 마이크는 잡아볼 수 없었고, 6개월 동안 LP판만 정리하고 음악실 청소만 했어요. 그러다가 차츰 마이크를 잡을 기회가 생겼는데, 그때의 감격은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죠."이후 꽤 잘나가는 DJ가 된 그는 돈도 많이 벌었다. 유림다방, 석화다방, 2001음악다방, 혜성음악다방, 심지음악감상실, 대동분식 등은 그가 DJ로 활동했던 곳이다. "일했던 다방에 손님들이 몰리면서 단박에 유명세를 탔죠. 여성팬들의 열광적인 선물 공세가 이어졌고요. 노래 한 곡을 신청하기 위해, 정성껏 그리고 오려 붙인 신청엽서들이 날마다 쏟아졌죠. 유명 가수들조차 새 음반이 나오면 제일 먼저 전국의 유명 음악다방을 돌며 직접 곡을 선보이곤 했어요. 음악다방에서 먼저 입소문을 타야 방송순위진입이 가능했을 정도였죠. 당시에는 음악을 향유할 수 있는 통로가 음악다방이 거의 유일했거든요. 물정 모르던 젊은 혈기에 기고만장하기도 했었죠."1983년 심지음악감상실을 직접 인수한 김씨는 에피소드 음악감상실로 간판을 바꿔달고 경영했는데, 1년 만에 후배에게 넘기고 말았다. 1980년대 들어서 디스코텍이 생겨나면서 음악다방은 하나둘 카페로 바뀌었다. DJ들도 디스코텍으로 자리를 옮기던 상황이었다. 김씨는 여의도에 있는 음반기획사로 자리를 옮겼다. 음악에 대한 열정과 박식함은 음반제작자로 인정 받기에도 충분했다. 1985년 인천 출신 그룹 '솔개 트리오'의 앨범 제작을 시작으로, 1986년 서울 아시안게임 지정곡인 윤항기의 '웰컴 투 코리아', 1987년 도시의 아이들의 '달빛 창가에서'를 제작했다."'달빛 창가에서'는 대박 났죠. 인천 출신 작곡가 김창남이 박일서 형과 함께 '도시의 아이들'이라는 그룹을 만들어 대박을 친 거죠. 덩달아 저 역시 잘 나갔어요. 하지만, 세상일은 한치 앞도 모르는 거더군요. 1989년 PD들이 유흥업소에서 접대 받은 게 기사화되면서 인기 기획사를 대상으로 수사에 들어갔고, 회사는 문을 닫아야 했죠. 1990년 솔개트리오를 재결성해 3집 앨범을 제작했지만, 반응이 신통치 않았어요."이후 김 사장은 영화에 지분 투자했다가 손해를 봤으며, 2000년이 지나고 인천으로 돌아와 학익동에 규모가 제법 큰 음악카페를 냈다가 다시 손해를 봤다. 2016년 3월 '비틀즈'를 열었다."이 공간은 음악 좋아하는 제가 혼자 운영할 수 있는 규모에요. 요리 부분은 아내가 도와주고 있고요. 단골들이 꽤 되기 때문에 좋은 음악과 함께 즐겁게 비틀즈를 운영하고 있죠.""세월이 많이 흘렀고 세상은 변했지만, 처음 나를 품어줬던 음악들은 지금도 그대로"라는 김씨의 바람은 음악에 재능이 있고, 즐기는 사람들의 무대를 만들어서 꿈을 펼칠 수 있게 도와주는 것이다."이 공간 한 편에 작은 무대가 있는데, 밴드가 공연하기에는 다소 좁아요. 밴드가 설 수 있는 공간이 확보된 이 곳보다 조금 더 큰 곳에서 가슴 따뜻한 음악여행을 이어갔으면 합니다."글/김영준기자 kyj@kyeongin.com 사진/김용국기자 yong@kyeongin.com■DJ 김유철은?부모님이 한국전쟁으로 인해 황해도 연백에서 피란와 정착한 연평도에서 태어났으며, 인천기계공고에 입학해 뭍 생활을 시작했다. 고교 졸업한 1975년부터 본격적으로 DJ 생활을 시작, 당시 동인천 지역의 유림다방, 석화다방, 2001음악다방, 혜성음악다방, 심지음악감상실, 대동분식 등에서 DJ로 활동했다. 1984년 음반 제작자로 변신해 이듬해 '솔개 트리오'의 앨범제작을 시작으로 1986년 윤항기의 '웰컴 투 코리아', 1987년 도시의 아이들의 '달빛 창가에서' 앨범을 제작했다. 1998년 한국포크송연합회 상근 홍보이사를 2년 동안 했으며, 2016년부터 음악카페 비틀즈를 운영하고 있다.1970~1980년대 음악다방 최전성기 시절에 DJ로 활동했던 김유철씨는 LP판처럼 돌고 도는 인생 속에 인천으로 복귀해 음악카페 '비틀즈'를 운영하면서 DJ로 활동하고 있다. 외부 활동도 하고 있는데, 오는 26일 청라 호수공원 플라워 아일랜드 일대에서 열리는 '정서진 원 아일랜드 뮤직 피크닉'에서도 DJ로 무대에 올라 관객들과 만난다.

2019-10-22 김영준

[인터뷰… 공감]1970년대 한국 여성노동운동의 산실 '동일방직' 해고노동자 최연봉씨

국내 최초 女지부장 선출된 곳… 입사후 근기법 배우며 노조 알게돼출퇴근 시간 지키기·식사시간 30분 확보등 근로조건 개선위해 투쟁사측 똥물 투척등 탄압에 맞서 알몸시위·단식농성 항의 124명 쫓겨나40년이 지났어도 '노조활동 방해 책임' 국가배상소송 여전히 싸움중인천 여성 노동자의 권익을 위해 활동해 온 인천여성노동자회가 올해로 창립 30주년을 맞았다.인천여성노동자회는 1970~80년대 활발하게 펼쳐졌던 인천 여성노동운동을 주춧돌 삼아 창립했다. 인천 여성노동운동의 역사를 다룰 때 빠지지 않고 언급되는 사람들이 있다.바로 1970년대 동일방직 인천공장의 여성노동자다. 동일방직 여성노동자들은 사측의 노조 무력화 시도와 기관의 탄압에 맞섰다. 이들이 있어 동일방직 인천공장은 1970년대 한국 여성노동운동의 산실이라고 불렸다.동일방직 해고노동자인 최연봉(64)씨가 인천여성노동자회 30주년을 맞아 지난 14일 열린 여성노동자 토크콘서트에서 1970년대 대표로 나와 당시 여성노동자들의 치열한 삶을 이야기했다. 14일 부평아트센터에서 최연봉씨를 만나 동일방직 해고노동자의 못다 한 이야기를 들어봤다.최연봉씨는 1970년대 동일방직 인천공장에서 일하며 사측의 노조 탄압에 맞서 싸우던 여성노동자 중 한 명이다. 당시 동일방직 노조에서 총무차장으로도 활동하며 여성노동자의 권익 증진을 위해 앞장섰다. 전북 김제에서 7남매 중 막내로 태어난 최연봉씨는 중학교를 졸업했지만, 가정형편 등 문제로 고등학교에 진학하지는 못했다. 배움에 대한 미련이 있었던 그는 일하면서 공부를 해야겠다는 생각에 큰언니가 살고 있던 인천으로 올라왔다. 화수동의 솜공장에서 2년간 일하던 최연봉씨는 1975년 언니 지인의 소개로 동일방직에 입사했다. 당시 동일방직은 1972년 우리나라 최초로 노조 여성지부장이 선출된 이후 노조의 요구로 여성노동자들의 근로조건 개선 등이 이뤄지고 있었다. 최연봉씨는 입사 후 3개월이 지나 인천 도시산업선교회에서 근로기준법 공부를 하게 되면서 노조에 대해 알기 시작했다. 그는 "다른 부서에서 일하는 고향 친구가 산업선교회에서 한문, 영어, 꽃꽂이 등 이것저것 가르쳐준다고 해서 바로 따라갔다"며 "입사하면 자동으로 노조에 가입된다는 것을 알고 나서 노조 사무실을 찾아갔다"고 말했다. 그때부터 최연봉씨는 노조 활동을 적극적으로 하기 시작했다. 노동자가 누려야 하는 권리를 찾기 위해서였다.최연봉씨는 직포과에서 천을 짜는 일을 했는데, 그의 부서에는 식사시간이 거의 없었다. 조장이 5분 안에 밥을 먹고 오라고 하고 늦게 오면 눈치 주는 식이었다. 자신이 맡은 기계를 청소하기 위해 항상 1시간 일찍 출근해야 했고, 일이 끝나도 실이 끊어져 있으면 다시 이어놓고 나와야 했다. 그는 출퇴근 시간 지키기, 식사시간 30분 확보를 위해 투쟁했다. 노동조합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사측은 근로조건 개선의 목소리를 높이는 노조를 와해하기 시작했다. 1976년 이영숙 노조지부장이 경찰에 연행된 틈을 타 회사 측 방침에 따르는 대의원만 모여 대의원대회를 열고, 기숙사 문을 잠그는 등 여성노동자들의 출입을 막는 일이 발생했다. 이에 저항하기 위해 여성조합원들은 노동조합 사무실 앞 잔디에서 농성을 진행했고, 농성을 해산하기 위해 투입된 경찰에 저항하기 위해 '알몸시위'를 벌였다. 최연봉씨도 당시 상황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최연봉씨는 "20대 초반의 나이에 한 번도 경험하지 못했던 일이었기 때문에 방패를 들고 서 있는 경찰들이 다가올 때마다 들렸던 군화발 소리가 너무 무섭고 두려웠다"면서도 "노조가 없어지면 예전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에 간부들을 지키기 위해 버티고 있었는데 동료 중 누군가 '옷을 벗으면 경찰이 못 건드린다더라'고 했고 그 말을 들은 여성 노동자들은 수치심을 느낄 생각도 없이 옷을 벗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최연봉씨도 옷을 벗으려던 순간 직포과 담임이 그를 현장에서 데리고 나갔다. 이를 뿌리치고 농성 현장으로 돌아왔을 때는 이미 상황이 끝나 있었다. 연행되지 않은 최연봉씨와 조합원들은 농성장에 남아있는 옷가지를 들고 동부경찰서로 곧장 달려가 동료들을 내보내라고 항의했다. 그 날 저녁 연행된 동료들이 풀려놨는데 서로 얼싸안고 울었다고 했다.'알몸시위' 이후 조직을 추스르고 있을 때 또 한 번의 사건이 일어났다. 새로운 노조 집행부가 구성된 후 대의원선거가 열린 1978년 2월 당시 선거관리위원이었던 최연봉씨는 선거 준비를 마치고 노조 사무실에서 조합원에게 투표용지를 나눠주기 위해 대기하고 있었다. 투표가 시작되는 오전 6시가 다 될 무렵 남성노동자 3명이 고무장갑을 낀 손에 양동이를 들고 노조 사무실로 들어왔다. 남성노동자들은 양동이에 들어있는 무언가를 사무실 책상과 바닥 곳곳에 뿌리기 시작했다. 이물질이 머리와 옷에도 튀었다. 뒤늦게 코를 찌르는 역한 냄새를 맡고 나서야 이물질이 분뇨라는 것을 깨달았다. 너무 기가 막혀서 눈물조차 나오지 않았다. '동일방직 노동조합 똥물투척사건'이었다.'동일방직 노동조합 똥물투척사건' 이후에도 사측의 탄압은 계속됐다. 동일방직 여성노동자들의 상황을 알려야겠다는 생각에 여성 조합원들은 그해 3월 10일 장충체육관에서 개최한 노동절 행사에서 항의 시위를 하기로 했다. 최연봉씨도 준비한 플래카드를 들고 동료들과 장충체육관을 찾았다. 입구에 들어가려던 순간 한 남성이 그를 붙잡더니 "어디서 왔느냐"며 기다리라고 했다. 잘못하면 붙잡혀 있겠다는 생각에 그는 남성이 방심한 틈을 타 행사장으로 재빨리 들어갔다. 놀란 가슴은 진정될 틈 없이 두근두근 뛰었다. 행사가 시작하고 최연봉씨와 여성 조합원들은 플래카드를 꺼내고 "동일방직 문제 해결하라", "똥을 먹고 살 수 없다"고 외쳤다. 이 외침은 이후 동일방직 해고 노동자들이 만든 희곡 '동일방직 문제를 해결하라'에서도 재현돼 이를 지켜본 모두가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장충체육관 항의시위 이후 명동성당에 들어가 단식 시위 등 농성을 진행하던 중 사측은 여성노동자 124명을 해고했다. 최연봉씨도 이 중 한 명이었다. 최연봉씨를 비롯한 해고노동자들은 산업선교회에서 공동체 생활을 하며 해고·복직 투쟁을 했다. 하지만 40년이 지난 지금도 최연봉씨 등은 동일방직 노조 활동 방해 책임을 묻는 국가배상 소송을 진행하는 등 싸움을 계속하고 있다.최연봉씨를 비롯한 해고노동자가 떠난 자리에는 여전히 그들이 사용하던 기숙사 등 건축물이 남아있다. 동일방직 인천공장의 가동이 멈추면서 기숙사 건물 등은 현재 방치돼 있다. 최연봉씨는 동일방직 기숙사 등 건축물이 노동자들이 필요로 하는 곳으로 활용됐으면 좋겠다는 의견을 전하기도 했다. 그는 "인간답게 살고 싶었고, 이를 위해서는 노조가 필요하니까 이를 지키기 위해 노력한 것이 노동운동이 됐다"며 "우리의 기억 속에 생생히 남아 있는 공간이 노동사 도서관·박물관 등으로 재탄생하면 좋을 것 같다"고 말했다.최연봉씨는 "해고를 당했어도 우리가 잘못한 것이 없어 다시 들어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20대 초반 봄날에 해고돼 시간이 흘러 60이 넘은 나이에도 동일방직 해고자라고 이야기하는 상황이 한편으로는 씁쓸하기도 하다"며 "동일방직에 복직해 단 하루라도 일하고 떳떳하게 사표를 내고 떠나는 것이 우리의 바람"이라고 했다.글/김태양기자 ksun@kyeongin.com 사진/김용국기자 yong@kyeongin.com■최연봉씨는?▲ 1955년 전북 김제 출생▲ 1975년 동일방직 입사 (前 동일방직 노동조합 총무차장)▲ 1978년 동일방직 해고 (해고·복직투쟁 전개)▲ 1987년 인천노동자복지협의회 운영위원장▲ 1999년~2005년 녹색환경운동연합 운영위원장▲ 2010년 인천미추홀자원봉사센터 소장동일방직 해고노동자 최연봉씨가 "동일방직에 복직해 단 하루라도 일하고 떳떳하게 사표를 내고 떠나는 것이 우리의 바람"이라고 말하고 있다.

2019-10-15 김태양

[인터뷰… 공감]경기실내악축제 예술감독 맡은 첼리스트 송영훈

#제안을 승낙하게 된 배경은20대 중반부터 세계 각국 축제 많이 다녀직접 무대 꾸며보고 싶다는 꿈이 생겼다#중점을 두고 준비한 것이 있다면낯선 장르인 만큼 쉬운 곡들로 프로 구성계속 접하다 보면 매력을 느낄 수 있을것#지역 축제 아쉬움도 느꼈다는데너무 쉽게 생겼다 사라지는 경우가 많아최고의 연주로 오래도록 이어지게 할 것한 분야에서 오랜 시간 활동하는 것은 생각처럼 쉬운 일은 아니다. 똑같은 일이 반복되면 어느 순간 슬럼프가 찾아오기도 하고, 새로운 일을 찾아 떠나고 싶은 마음이 들기 때문인데 첼리스트 송영훈은 한 분야에서만 37년을 활동했다. 그가 꾸준히 자신의 자리를 지킬 수 있었던 건 음악이 주는 가르침과 새로운 매력 때문이다. 송영훈은 "첼로를 아무리 오래 했어도 관객에게 감동을 주는 연주를 선물하기 위해 지금도 학생의 자세로 배우고 있다"고 말했다.시간을 거슬러 보면 그의 길다면 긴 음악 사랑은 이미 어린 나이부터 예고됐다.그는 9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한국을 대표하는 오케스트라 서울시립교향악단과의 협연 무대를 통해 클래식 세계에 발을 들여 놓았는데 당시 그는 어린 연주자임에도 불구 당찬 연주를 선보이며 국내를 뛰어넘어 세계적인 주목을 받았다. 이후 그는 세계 최고의 줄리어드 예비학교를 거쳐 줄리아드 음대, 영국 왕립 노던 음악원, 시벨리우스 아카데미까지 전문적인 음악 교육을 받으며 연주실력을 쌓아왔다.이런 음악 내공을 바탕으로 그는 세계 무대로 발을 넓혀 활약했다. 솔로이스트로서 잉글리쉬 체임버 오케스트라, 뉴욕 체임버 오케스트라, 헬싱키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등 세계 유수 오케스트라와 협연하는 등 세계적인 연주자로 거듭났다. 또 클래식의 매력을 대중에게 전하기 위해 자신의 이름을 걸고 지난 2015년부터 2018년까지 3년간 라디오 DJ로 활동하기도 했다. 최근에는 이 라디오 진행을 다시 맡아 대중과 소통하고 있다. 그는 "아직도 첼로를 연습하면서 새로운 무언가를 알아가고 있다. 첼로를 통해 보람, 뿌듯함, 곡에 대한 수 많은 감정을 알아간다. 음악과 예술은 끝이 없는 길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무한한 매력이 있기 때문에 오랫동안 다양한 음악 활동을 이어올 수 있었다"고 말했다. 연주자, 라디오 DJ 등 다방면으로 활약하고 있는 그가 이번에는 예술감독이라는 새로운 도전에 나선다. 올해부터 '경기실내악축제'의 연출을 맡고, 10월 한 달 동안 경기도 곳곳에서 실내악으로 관객들을 만난다. 송영훈은 "20대 중반부터 세계 각국의 실내악 축제를 많이 다녔다. 해외 곳곳에는 이런 축제가 많이 펼쳐지고 있다. 20년 동안 이런 축제들을 다니면서 한 가지 꿈이 생겼다. 언젠가 축제를 직접 기획하고, 실내악에서 활발한 활동을 펼치고 있는 아티스트들을 초청해 무대를 꾸며보자는 것이었다. 그래서 경기도문화의전당에서 예술감독 제안이 들어왔을 때 기쁜 마음으로 승낙을 했다. 좋은 마음이 크지만 한 편으로는 책임감과 부담감도 가지고 있다"고 소감을 밝혔다.사실, 실내악 장르는 클래식 보다 더 낯선 장르다. 실내악은 솔로이스트 2명 이상인 소규모 팀이 공연을 펼치는 것을 말하는데, 서로 다른 색을 가진 연주자가 서로 양보하고, 맞추는 과정이 필요해 연주자들 사이에서도 어려운 장르로 꼽힌다. 이렇다 보니 국내에서 실내악 공연을 접하는 일은 생각보다 쉽지 않다. 이런 어려운 장르를 끌고 가야 하는 만큼 부담도 크다. 그는 "이전 축제와 차별점을 두기보다 관객의 눈높이에 맞춘 축제를 준비하기 위해 노력했다. 어려운 곡들이 아닌 관객들이 쉽고 재미있게 즐길 수 있는 쉬운 곡들로 프로그램을 구성했다"고 설명했다.이어 "국내 관객에게 오케스트라 공연, 독주회 등은 익숙하지만, 실내악을 알고 즐기는 이들은 생각보다 많지 않다. 국내에 실내악 공연이 많지 않은 탓도 있을 것이다. 익숙하지 않은 장르이기 때문에 프로그램을 어려운 곡들로 구성하면 더욱 다가가기 어렵다는 생각을 심어줄 수 있어 관객에게 익숙하고 친숙한 곡들을 준비했다"고 덧붙였다.아울러 "어려운 책은 시작은 힘들지만 넘기다 보면 읽게 된다. 이런 책들은 두고두고 보게 되고, 매번 읽을 때마다 새로운 감동을 받게 된다. 실내악에도 그런 깊이와 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처음 시작은 어렵겠지만, 접하다 보면 매력을 느낄 수 있다. 이런 점을 알게 되면 다음 번에도 자연스럽게 축제를 찾을 거라 생각한다"고 말했다.처음 예술감독을 맡은 만큼 어려움도 있었다. 우선 경기도 지역에서 발생한 아프리카 돼지열병 확산으로 발생 지역의 공연이 취소돼 장소가 변경되면서 한 차례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또 악기만 연주 하던 때와 달리 많은 사람들의 다양한 의견을 모두 반영해야 하기에 이런 부분을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많은 시간을 고민했다고 했다. 송영훈은 "왜 이 커다란 축제의 감독을 맡고 싶었는지, 왜 실내악 공연을 좋아하는지 내 자신에게 되물어보는 시간을 가졌다. 결론은 함께할 수 있어 괜찮다는 것이었다. 실내악은 덜 외롭다는 장점이 있다. 모두 함께할 때, 같은 메시지를 주고받고 음악의 즐거움을 찾을 수 있다. 근본적인 관점에서 마음을 되새겼더니 문제를 풀고, 해결하는 것이 훨씬 수월했다"고 전했다. 다양한 해외 축제를 접해 온 그는 이번 축제를 준비하면서 지역 축제에 대한 아쉬운 점도 있었다고 말했다. 수십 년 진행되는 외국 축제와 달리 국내에서는 많은 축제가 꾸준히 이어지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는 이제 막 시작하는 '경기실내악축제'가 오랫동안 지속되기 위해서는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항상 관객에게 감동을 줄 수 있는 무대를 선보여야 한다고 강조했다.그는 "이런 축제들이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감사한 일이지만 너무나 쉽게 생겼다 사라지는 경우가 많다. 축제는 규모가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정말 많은 사람을 위해 진행되는 축제가 있어야 한다. 경기실내악축제는 이제 겨우 5회째를 맞는 축제다. 이 축제가 오래 이어지기 위해서는 흥행도 중요하지만 최고의 연주로 관객에게 감동을 줘야 한다고 생각한다. 좋은 영향을 받은 축제는 분명 다시 찾아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게 한다. 그렇게 되면 축제는 오래도록 이어질 수 있다"고 설명했다. 30여년 오롯이 한 길만 걸어 왔기에 지칠 법도 한데 그는 아직도 하고 싶은 일들이 많다. 송영훈은 "9월부터 가을 시즌이 시작되면서 연주회 투어를 다니고 있다. 또 앞으로 남은 실내악 축제도 성공적으로 마무리하기 위해 많은 준비를 하고 있다. 최근 라디오 진행도 다시 맡게 되면서 DJ로서 활동도 이어갈 예정이다. 축제가 끝나면 겨울부터는 음악제들을 준비할 계획이다. 앞으로도 끊임없이 무대에 오르고 감동을 주는 연주를 많은 관객에게 선보이고 싶다"고 말했다. 글/강효선기자 khs77@kyeongin.com연주자, 라디오 DJ 등 다방면으로 활약하고 있는 첼리스트 송영훈이 '경기실내악축제'의 연출을 맡아 예술감독이라는 새로운 도전에 나선다. /경기도문화의전당 제공

2019-10-08 강효선

[인터뷰… 공감]'중앙정치 핵심' 꼽히는 전해철 국회 예결위 간사

#2020년도 513조 '슈퍼예산' 어떻게일본 수출규제 대응·경제 활력 되살리기 '집중 투자'GTX-A·미군공여지 지원등 합리적 요구 반영 노력정부가 총 513조5천억원에 달하는 '슈퍼 예산'을 편성하고 국회의 심의를 받고 있다. 세계 경기 둔화와 일본 수출 규제 등으로 내년도 우리 경제에 그늘이 질 것이라는 우려가 커지고 있는 상황에서 정부가 확장적 재정운용에 나선 것이다. 경기도에서도 국비 확보에 사활을 걸고 각종 현안 사업이 국가 예산안에 포함될 수 있도록 총력을 다하고 있는 상황이다.지난달 국회 예결위 간사를 맡은 더불어민주당 소속 전해철(안산 상록갑) 의원은 "광역 예산뿐 아니라 각 기초단위에서 꼭 필요한 사업들도 의견을 들어 검토하겠다"고 약속했다. 친문의 핵심인사이자, 이해찬 대표의 특보단장을 맡아 중앙 정치에서 핵심 중의 핵심으로 꼽히면서도 신안산선 개통과 같은 지역 현안을 꼼꼼히 살피기로 유명한 전해철 의원에게서 내년도 정부의 구상과 경기도의 현안, 그리고 내년도 제21대 총선에 이르기까지 2020년도를 미리 본다.■ 예산으로 본 2020년 대한민국전해철 의원은 최근 수차례의 고사 끝에 국회 예결위 간사직을 수락했다. 민주당은 이번 예결위가 총선을 앞두고 특히 중요한 시점인 만큼 당내 사정을 잘 알고 추진력이 강한 인물이 필요하다는 판단에 전 의원에 대한 '삼고초려'를 마다하지 않은 것이다.꼭 총선이 아니더라도 이번 예결위는 정부의 '슈퍼예산'을 다룬다는 점에서 예년보다도 많은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정부는 올해 본예산 대비 9.3% 증가한 513조5천억원 규모의 2020년 예산안을 확정해 발표했다. 예산안을 들여다보면 미래 먹거리가 될 신산업 육성 예산과 미래성장 동력 중심으로 국가 R&D 예산을 대폭 확대하는 등 '혁신성장 속도 내기'에 역점을 둔 것으로 보인다.전 의원은 "일본의 수출 규제와 경제 보복 조치에 맞서 소재·부품·장비 산업의 경쟁력 강화를 뒷받침하는데 올해보다 두 배 이상 늘어난 2조1천억원을 집중 투자하기로 했다"며 "경제 활력을 되살리기 위한 지원도 대폭 확대했다. 무역금융과 투자 활성화 정책자금을 통해 기업에 힘을 보태고 제조업 등 주력산업의 경쟁력을 강화하는 예산도 대폭 늘렸다"고 설명했다.하지만 이와 관련해 국가채무가 늘어날 것이라는 우려의 목소리가 있는 것도 사실이다. 전 의원은 "일각에서 재정 건전성 악화를 걱정하기도 하지만 우리나라 재정 건전성은 외국에 비해 양호한 상황"이라며 "정부의 체력이 강해진 만큼 우려할 상황은 아니다"라고 일축했다.실제 올해 한국의 국가채무비율은 38.9%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5개 회원국과 비교해보면 일본(214.6%)의 5분의 1 수준, 프랑스(110.0%)와 영국(108.6%), 미국(99.2%) 등 주요 선진국보다도 낮은 수준이라는 설명이다.한편, 정부 예산에 담길 경기도 현안 사업에 대해서도 밝혔다. 전 의원은 "24일 예정된 예산정책협의회에서 도의 핵심사업에 대해 논의하고 꼭 필요한 예산에 대해 협의할 것"이라며 "주요 사업 등에 대해서는 미리 파악하고 있다"고 말했다.그는 경기도 현안 사업으로 지난 8월 착공에 들어간 '신안산선 토지보상비'와 '수도권 제2순환 고속도로 공사비', '수도권광역급행철도(GTX)-A 노선', '주한미군 공여구역 주변 지역 지원' 등을 꼽았다.전 의원은 "각 지역의 다양한 요구를 모두 다 수용할 수는 없겠지만, 예결위 간사로서 합리적인 요구사항에 대해서는 심의과정에서 최대한 반영시킬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말했다.#신안산선 개통'답보사업' 끈질긴 추진 국내 첫 BTO-rs방식 도입·착공주민과 약속지켜… 서남부권 교통·경제 파급효과 '기대'■ '신안산선 개통' 그리고 경기도전해철 의원은 중앙과 지역을 오가면서 어느 하나 소홀하게 다루지 않고 강한 추진력을 보이고 있다. 실제 주요 직책을 맡고 있으면서도 여러 지역의 현안을 두루 해결해온 그는 인터뷰에서 신안산선에 대해 유독 특별한 애정을 드러냈다. 그의 철학인 '신뢰의 정치'를 실현한 사례이기 때문으로 보인다. 전 의원은 19대 국회의원으로 당선된 지난 2012년부터 지역의 최대 현안인 신안산선 착공에 드라이브를 걸었다. 노선 외에 아무 것도 준비가 되지 않은 상태였지만 2019년 착공을 주민들에게 약속했다.전 의원은 "신안산선은 2003년 예비타당성 조사를 시작으로 무려 십수 년 이상 답보상태였다. 2010년 12월에야 Y자 구간으로 국토교통부 기본계획이 고시됐지만, 정부 내에서 조차 입장이 결정되지 않은 상태였다"며 "가장 먼저 예산안에 민자사업으로 추진하는 방안도 검토하도록 부대 의견을 달았고, 그 결과 속도를 낼 수 있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후에도 총 사업비 3조3천400억원에 달하는 신안산선이 쉽게 될 리는 없었다. 매 고비마다 전 의원은 주민들과 약속한 2019년 착공을 위해 뛰고 또 뛰었다.효용이 낮으면서도 높은 비용이 들어가는 여의도~서울역 구간을 생략하는 대신 안산에 호수·한양대역 등 2개 역을 신설하는 방안을 제안해 사업성을 끌어올렸고 예비타당성 조사에 안산시 사동 89·90블록 개발사업으로 발생할 교통수요를 미리 포함 시키면서 강하게 밀어붙였다.아울러 신안산선에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BTO-rs 방식이 도입된 것도 전 의원의 노력에 의한 것이다. 정부와 민간이 사업의 투자위험을 분담하는 BTO-rs는 민간 투자비의 일부에 대해 정부가 위험을 분담해 사업수익률과 이용요금을 낮출 수 있지만, 전례가 없어 전 의원이 직접 뛰며 정부와 국회를 설득하고 수차례의 토론회 끝에 성사시킨 것이다.전 의원은 "신안산선이 개통되면 수도권 서남부지역 주민의 교통편의는 물론, 경기테크노파크, 갈대습지, 80-90블럭 개발, 반월·시화 국가산단, MTV 등과 연계한 교통인프라 개선으로 지역경제 활성화 등 직간접적인 파급효과가 상당할 것"이라며 기대감을 표했다. 이어 "착공만은 미룰 수 없다는 생각에 한 단계 한 단계 마다 사업과 관계돼있다면 찾아가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로 최선을 다했다"며 "착공에 들어간 만큼 앞으로 큰 고비는 없을 것으로 보이지만, 개통까지 남은 과정과 사업 진행이 차질 없도록 필요한 역할을 계속하겠다"고 말했다.민주당 경기도당 위원장을 역임한 전 의원은 누구보다 도가 안고 있는 숙제들에 대해 속속들이 알고 있는 만큼, 신안산선 추진과정에서 보여준 '신뢰의 정치'로 산적한 도의 현안을 챙기겠다고 약속했다.#21대 국회의원 선거이미 '투명한 공천' 규정·절차 확정 당내 분란 여지없어선거구제 개편 변수… 민생정책으로 국민선택 받을 것■ 제21대 국회의원 선거내년 4월 총선이라는 초대형 정치 이벤트가 열린다. 이미 지역 곳곳에서는 물 밑 경쟁이 치열한 상황이다. 전해철 의원은 친문 핵심이자, 이해찬 대표의 특보단장을 맡고 있어 내년 총선에서의 역할이 기대를 모으고 있는 상황이다. 이에 대해 전 의원은 "문재인 정부 출범 이후 민주당 상황은 특정 계파가 있는 상황이 아니고, 모두 정부 성공을 위해 함께하고 있다"며 "특보단장을 맡은 가장 큰 이유 역시 이해찬 당 대표 체제의 성공과 내년 총선 승리를 위해 당이 화합하고 단일 대오로 나서야 한다는 의미에서 수락했다"고 설명했다.인터뷰에서 전 의원은 내년 총선 결과에 큰 기대를 내비쳤다. 그는 "총선 승리를 위해 제도적으로 공정하고 투명한 공천 시스템을 수립할 필요가 있는데 선거일 1년 전 관련 규정과 절차를 확정한 만큼 당내 분란이 생길 여지가 없다"며 "당연하지만 정당이 가야할 길이 '정책선거'인 만큼 민생 정책을 제시해 국민의 선택을 받겠다"고 말했다.다만 선거구제 개편을 최대 변수로 내다봤다. 전 의원은 "법사위에 넘겨진 선거법 개정안이 적용되면 앞으로 특정 정당이 과반 의석을 차지하기가 사실상 불가능해진다"며 "결국 당의 경쟁력을 키우고 국민들께 감동과 신뢰를 주면서 지지자들을 통합하는 과정이 총선 승리로 가는 길이 될 것"이라고 내다봤다.마지막으로 전 의원은 내년 3선 도전을 앞두고, "정당과 정책 중심의 책임정치, 대화와 타협을 통한 정치문화 실현을 위해 필요한 역할을 다하겠다"고 각오를 밝혔다.전 의원은 "지난 2007년 참여정부 민정수석을 그만두고 출마를 결심했을 때부터 노무현 정신과 참여정부의 철학인 정당정치, 의회정치가 뿌리 내리게 해서 대한민국을 잘되게 하겠다는 생각이 있었다"며 "정당이 잘 서 갈등을 해소하고 정치가 효용을 갖출 수 있도록 하겠다. 이를 위해 어떠한 역할도 하겠다"고 강조했다.글/김성주기자 ksj@kyeongin.com■전해철 의원은?▲ 2019년 8월~제20대 국회 예산결산특별위원회 위원(간사)▲ 2019년 7월~더불어민주당 당대표 특보단장▲ 2016년 8월~2017년 6월 더불어민주당 최고위원▲ 2016년 8월~2018년 1월 더불어민주당 경기도당위원장▲ 2016년 5월~제20대 국회의원 (안산시상록구갑/더불어민주당)▲ 2012년 5월~2016년 5월 제19대 국회의원 (안산시상록구갑/민주통합당)▲ 2007년12월~2012년 5월 법무법인 해마루 대표변호사▲ 2006년 5월~2007년 12월 대통령비서실 민정수석비서관2020년도 '슈퍼예산'관련 국회 예결위 간사를 맡고 있는 전해철 의원은 "광역 예산뿐 아니라 각 기초단위에서 꼭 필요한 사업들도 의견을 들어 검토하겠다"고 말했다. /전해철 의원실 제공

2019-10-01 김성주

[인터뷰… 공감]국내외 악재 속 '기업대변 발벗은' 추연옥 초대 경기중소기업회장

적자 회사를 1년만에 '흑자로' 덜 자고 덜 먹고 고생해 기업 힘든 점 잘 알아전국 4곳중 1곳 경기도에 둥지 '中企특화지역'불구 정부·지자체 관심 부족노란우산공제 지원 강원도의 20% 불과등 '상대적 박탈감 문제' 해결 절실이미 완성된 대기업 주어진 일만 하고 정년 불안… 청년들 중소기업 도전을"그동안 쌓아온 경험을 토대로 지금의 어려움을 해소해야 합니다. '안돼', '못해'같은 부정적인 마음을 버리고 경기도 내 중소기업이 합심한다면 희망의 날은 꼭 올 겁니다."초대 경기중소기업회장으로 취임한 추연옥 회장은 미·중 무역전쟁, 일본의 수출규제 등 국내외적으로 산재해 있는 악재 속에서 어려움을 겪고 있는 도내 중소기업들에 이같이 당부했다. 추 회장은 1981년 합성수지 제조사 영광산업을 인수한 이후 지난 10여 년간 지역상공회의소 운영위원, 중기협동조합 이사 등 지역 기반의 경영활동을 통해 2013년에는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2016년에는 인천경기프라스틱공업협동조합 이사장으로 취임해 현재까지 경인지역 합성수지 관련 중소기업의 입장을 대변하고 있다.중소기업중앙회는 2007년 도입해 운영해 온 지역 회장제를 지난 3월 지역중소기업회장제로 개편했다. 선출 과정이나 자격 등은 이전과 동일하지만 명칭을 변경함으로써 지역 중소기업계의 대표성을 강화하고 오피니언 리더로서 역할을 확대하기 위함이다.도내 중소기업 대표 역할을 맡고 있는 추 회장도 과거에는 평범한 회사원이었다. 1972년부터 건설사 등에서 일하던 추 회장은 1981년 사우디아라비아로 해외파견을 나갔다 국내로 귀국한 이후 매형이 운영하던 영광산업이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추 회장은 경찰로 근무하다 자신의 사업체를 운영하고 싶다는 마음에 영광산업을 차린 매형이 사업에 소질이 없다는 것을 느끼고 설득 끝에 영광산업을 본인이 운영하기 시작했다.회사를 살릴 방안을 고민하던 추 회장은 해외 에서는 쇼핑팩 사용이 보편화 됐는데, 국내에는 쇼핑팩을 사용하는 곳이 없다는 아이디어를 토대로 쇼핑팩 제작 기계를 1대 들여왔다. 또 돈 안 되는 사업은 과감히 포기했다.결국 만년 적자를 기록하던 영광산업은 추 회장이 대표이사직을 맡은 지 1년여 만에 흑자를 기록하는 쾌거를 올렸다.추 회장은 "수익이 나지 않는 상태에서 회사를 인수해 제대로 된 회사를 만드는 데까지 크나 큰 노력이 필요했다"며 "당시 매출을 올리기 위해 영업도 뛰고 해서 하루에 3~4시간밖에 자지 못하고, 밥 먹는 시간도 아까워 하루에 2끼만 먹기도 했다"고 회상했다.힘겹게 중소기업을 운영해왔던 그였기에 지금 도내 중소기업이 겪고 있는 어려움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다른 건실한 중소기업 대표 중에서 추 회장이 만장일치로 경기중소기업회장으로 선택된 것도 이 같은 이유다.추 회장은 현재 중소기업이 직면하고 있는 어려움의 가장 큰 이유를 사회적 인식으로 꼽았다. 중소기업에 취업하는 것이 부끄러운 일이고 모두가 대기업, 공무원을 선호하고 있는 현상이 대표적인 예다. 이 때문에 중소기업들은 만년 인력난을 겪고 이는 회사의 성장을 더디게 하는 걸림돌로 작용하고 있다는 것이 추 회장의 설명이다.또 그는 주 52시간 근무제, 최저임금 인상도 중소기업의 상황을 더 악화시키고 있다고 주장했다. 이 같은 제도가 중소기업의 부담을 더욱 키우고 결국에는 생산성 하락이라는 결과를 낳는다는 것이다. 대기업은 협력사에 책임을 전가해 비용을 보전할 수 있지만 '을'의 위치에 있는 중소기업은 누구에게도 책임을 전가하지 못하고 고스란히 그 부담을 떠안게 된다.추 회장은 "물론 대기업에 다니면 높은 연봉과 좋은 복지를 누릴 수 있지만, 정년도 불안하고 자신에게 주어진 일만 해야 한다는 단점이 있다"며 "반면 중소기업은 개인의 능력만 제대로 발휘하면 장기간 근속할 수 있고 회사 내에서 다양한 의견을 낼 수 있어 자유도 높은 편"이라고 주장했다.이어 "모든 중소기업 대표들이 직원의 급여를 올려주고 근무환경을 개선하려는 생각을 하고 있지만 현실적으로 쉽지 않다"며 "직원보다 적은 월급을 가져가고 누구보다 어렵게 사는 대표들도 적지 않다"고 말했다.추 회장은 중소기업의 어려움을 해결하기 위한 방안에 대해선 새로운 것을 추진하기보다는 현재 풀지 못한 숙제를 하루빨리 해결하는 것이 먼저라고 강조했다.현재 추 회장이 중점적으로 추진하고 있는 사안은 단순히 도내 중소기업 대부분이 겪고 있는 지역 차별이다.노란우산공제의 경우 올해 누적 가입자 155만5천366명(올해 7월 기준) 중 도내 가입자는 25.4% 수준인 39만5천66명에 달한다. 하지만 지급 예정 지원금액은 월 1만원으로 강원도의 5분의 1에 불과하다. 다른 지역과 비교해도 턱없이 적은 수준이다. 노란우산공제는 소기업과 소상공인이 매월 일정액을 적립해 폐업, 질병, 사망, 퇴임, 노령시 생활안정과 사업 재기를 도모할 수 있도록 자립을 지원하기 위한 퇴직금 마련 제도다.이 때문에 노란우산공제에 가입한 도내 기업은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고 있다고 한다.또 중소기업 업종의 입장을 대변하는 협동조합의 지원금도 지역 차별을 겪고 있다.도내에는 업종별로 중소기업 협동조합이 108개, 회원사가 7천900여개, 회원이 6만9천명이라고 한다. 협동조합은 소속 중소기업의 목소리를 하나로 취합해 정부 또는 지자체에 전달하는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다.또 도로부터 지원금을 받아 공동마케팅, 상표개발 등에 사용하고 있는데 이 지원금액이 2017년 5억원에서 2018년 3억원으로 줄어들어 활동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다른 지역들이 지원금을 동결 또는 인상한 것과는 대조적인 모습이다.추 회장은 "경기도는 전국 중소기업 4곳 중 1곳이 자리 잡고 있는 명실상부 중소기업 특화 지역이지만, 중소기업에 대한 관심은 부족한 실정"이라며 "현재 중소기업이 겪고 있는 어려움을 해소하기 위해서는 정부 및 지자체의 지원이 절실하다"고 말했다.끝으로 추 회장은 "우리 시대에는 뭔가를 꼭 스스로 이뤄내겠다는 각오와 신념 있었는데, 요즘 젊은이들은 그런 패기와 도전정신이 부족한 것 같다"며 "중소기업에 취직하는 것도 도전정신이 필요하다. 이미 완성된 업체에 취직해 특별할 것 없는 일을 하기보다는 내가 회사를 키워보겠다는 사명감으로 중소기업에서 일해보길 권한다"고 했다.이어 도내 중소기업 대표들에게는 "분명 현재는 과거에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어렵고 힘든 시기지만 우리는 항상 위기를 잘 극복해 왔다"며 "이번 또한 잘 헤쳐나가 향후 뒤돌아 보면 그런 시절도 있었지 하는 추억으로 삼게 될 것이며, 중소기업들이 더욱 발전해 국가 경쟁력을 높이는 데 일조하는 계기로 삼게 될 것"이라고 전했다.글/이준석기자 ljs@kyeongin.com 사진/김금보기자 artomate@kyeongin.com■추연옥 회장은?▲ 1971년 재능고등학교 졸업▲ 1981년 영광산업 대표▲ 1997년 인천경기프라스틱협동조합 이사▲ 2001년 한국프라스틱공업협동조합 대의원▲ 2005년 주안부평국가산업공단협의회 운영위원▲ 2006년 인천상공회의소 남구경영자문협의회 운영위원▲ 2008년 재능고등학교 총동문회장▲ 2010년 남구 학산문화원 이사▲ 2019년 경기중소기업회장지난 4월 경기중소기업회장으로 취임한 추연옥 회장이 경인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일본의 수출규제·인력난등 도내 중소기업이 직면한 국내외 어려움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2019-09-24 이준석

[인터뷰… 공감]첫 회부터 올해 19회까지 '인천바로알기종주단' 이끄는 이동열 단장

동료들과 청량산~마니산 도보여행 계기 2000년 청소년 종주 본격화초기 예산난에 비 오면 물바다 '열악' 한때 중단… 시민 관심에 재개참여자들 성인돼 찾아오면 '멘토'로 활용 학생과 소통 '선순환' 이어져"청소년들이 인천 곳곳을 걸으며 인천이 고향이라는 사실에 자부심을 느끼길 바라는 마음입니다."지난달, 60여명의 인천지역 중·고등학생들이 6박 7일간 서해5도인 백령도와 대청도를 두 발로 누볐다. 무더운 여름 이들이 걸은 거리는 100㎞가 넘는다. 이들은 인천바로알기종주단 단원들이다. 이름 그대로 '인천을 바로 알자'는 취지에서 시작된 인천바로알기종주단은 매년 여름 100㎞가 넘는 인천지역 곳곳을 걷는다. 올해로 19회를 맞았다. 지금까지 종주단을 거쳐간 학생만 약 2천명. 이동열(64) 인천바로알기종주단장은 1회 때부터 이들과 모든 여정을 함께 하며 종주단을 직접 이끌고 있다.■ 인천바로알기종주단의 시작이동열 단장이 처음 종주단을 시작한 건 1999년이다. 21세기의 시작을 앞둔 이 단장은 2000년의 시작을 강화도 마니산 정상에서 맞고자 했다. 새로운 출발을 다짐하자는 마음에서였다. 이 단장은 차량이 아니라 도보를 택했다. 마니산을 목표로 14명의 동료들과 함께 연수구 청량산부터 걷기 시작했다. 청량산~남동구 만월산~부평구 원적산~계양구 계양산~강화대교를 거쳐 3박 4일의 종주 끝에 2000년 1월 1일 마니산 참성단에 올랐다. 이 여정이 인천바로알기종주단의 시작이 됐다. 이동열 단장은 "처음부터 종주단을 만들 목적은 아니었지만, 계속 걸으면서 인천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됐다"며 "요즘 청소년들은 인천에 살더라도 주로 사는 지역에 대해서만 알게 되는데, 이들에게 인천의 여러 길을 보여주고 인천에 대해 알게 하고 싶다는 생각이 가장 컸다"고 말했다.이 단장은 이듬해부터 본격적으로 청소년들을 모집해 인천 종주를 시작했다. 처음부터 100명이 넘는 참여 인원이 몰리는 등 관심이 뜨거웠다.하지만 종주단을 매년 이끄는 게 쉽지만은 않았다. 부족한 예산으로 100여 명의 인원을 이끌기에는 열악한 환경으로 인한 안전 등의 문제가 우려됐다. 종주는 2003년 한 차례 중단됐다. 이때 이동열 단장은 단원들로부터 '왜 올해는 종주를 하지 않느냐'는 불만 섞인 목소리를 듣고 시민들의 관심을 실감했다고 한다. 결국 그는 이듬해부터 다시 종주를 시작했고, 종주는 지금까지 매년 이어져 오고 있다. 현재까지 인천 종주가 진행되지 않은 해는 2003년이 유일하다. 2006년부터는 인천시의 지원을 받고 있다. 이동열 단장은 "초기에는 예산이 넉넉지 않다 보니 맨바닥에 은박지만 깔고 자기도 하고, 비가 오면 물바다가 되기도 하는 등 안전에 대한 위험이 컸다"면서도 "처음부터 함께 했던 이들을 실망시키지 않는 건 종주를 이어가는 것뿐이라는 생각에서 다시 종주를 시작했다"고 했다. 인천바로알기종주단의 참가 대상은 중·고등학생이지만, 종주에 참여했던 학생들은 성인이 된 뒤에도 종주에 참가하고 싶어 했다. 2009년, 이 단장은 이들을 참가자들의 '멘토'로 활용하기 시작했다. 이들의 경험을 활용하고 참가자들과의 소통을 담당하는 역할을 부여했다. 이 멘토링 체제는 지금까지 유지되고 있다. 이동열 단장은 "초기에는 산악회 동료들과 함께 종주단을 이끌었는데, 아무래도 세대 차이가 있다 보니 학생들과의 소통에 어려움이 있었다"며 "종주에 참여했던 학생들을 활용하니 '극기훈련'이 아닌 '여행'이라는 느낌이 들기 시작했고, 참가자가 다시 멘토로 종주에 참여하는 선순환이 시작됐다"고 했다.내년은 인천바로알기종주단이 20회를 맞는다. 종주 10회를 맞아 20여명의 대원들과 네팔 히말라야 랑탕 지역을 찾아 해발 약 5천800m의 '나야캉가봉'을 올랐던 것처럼 20회 역시 특별한 종주를 계획하고 있다. '걸어서 평양까지'라는 주제의 북한 종주다.통일 주역들 교류 '강화~개성~평양 여정' 변수 많지만 꾸준히 추진현지 환경 지키며 역내 소비 '공정여행' 가치 살린 섬 활성화도 필요■ '걸어서 평양까지' 20회 맞아 특별한 북한 종주 기획현재 인천시 평화도시조성위원회 위원이기도 한 이동열 단장은 인천과 북한 남포, 평양을 잇는 특별한 종주를 구상하고 있다. 통일의 주역으로 나설 남·북 청년들이 상호 교류를 통해 서로의 문화를 이해하고, 종주를 통해 지속적인 교류의 계기를 마련하겠다는 게 그의 목표다. 남·북 관계의 상황이나 정부의 협조 등 변수가 많지만, 이동열 단장은 내년 여름 북한을 방문하는 것을 목표로 계획을 추진하고 있다. 이 단장은 "오래전부터 '걸어서 평양의 빵 공장까지 걸어가 보면 어떨까'라는 막연한 꿈을 갖고 있었다"며 "북한에는 청년 단체가 많다고 하는데, 남·북 청년들이 고려의 역사가 숨 쉬는 강화에서 시작해 개성 왕건릉을 거쳐 평양의 단군릉까지 이어지는 육로를 함께 걷는 화합의 모습을 기대하고 있다"고 말했다.이 단장은 구체적인 계획도 마련했다. 29세 미만의 청년을 대상으로 하는 약 50명 규모의 남·북 종주단을 구성하게 된다. 강화 고려궁지를 시작으로 개성공업지구, 개성 시내, 평양 등을 거쳐 인천으로 다시 돌아오는 게 그의 구상이다. 북한 남포와 평양을 잇는 '청년영웅도로'를 남·북 청년들이 함께 걷는 계획도 추진하고 있다. 모든 여정은 도보를 기본으로 하며, 출입국 사무소 등 필요 지역은 차량으로 이동한다.청년들이 서로 소통할 수 있는 프로그램도 계획했다. 북한 지역의 공원, 광장 등에서 우리나라의 풍물 문화나 K-POP 등 다양한 합동 문화 공연을 펼치는 방안을 기획하고 있다. 남·북 화합의 모습을 그리겠다는 취지다. 또 강화 고려궁지의 흙을 개성 왕건릉에 묻고, 강화 참성단의 흙을 평양 단군릉에 묻는 등 통일을 기원하는 상징적인 퍼포먼스도 펼칠 계획이다. 약 13일간 총 222㎞의 인천, 북한 지역을 함께 걷게 된다. 이동열 단장은 "북한 종주가 성공적으로 이뤄진다면, 단원들이 남·북 화합에 선도적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며 "종주를 계기로 향후에는 우리나라 청소년들의 평양 수학여행, 백두산 답사단 등도 이뤄질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섬을 지키는 파수꾼이동열 단장은 인천 섬에 대한 관심도 크다. 현재 인천 섬 연구 단체인 (사)황해섬네트워크의 이사장 겸 공동 대표를 맡고 있기도 하다. 이와 함께 인천시 도서발전자문위원회 위원직도 맡고 있다.이 단장은 '공정여행'의 가치를 살려 인천 섬을 활성화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공정여행은 현지의 환경을 해치지 않으면서 현지인에게 혜택이 돌아가는 여행 개념이다. 승선비 외의 소비는 모두 섬 내에서 이뤄져야 한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또 섬 활성화를 위해 각 섬의 시장과 경매장 문화를 다시 살리고, 사라져 가는 나루터, 포구에 대한 연구 작업을 진행하는 계획도 추진하고 있다. 이동열 단장은 "20년 동안 인천바로알기종주단을 큰 탈 없이 이끌 수 있게 도와준 여러 분들에게 정말 감사하다"며 "앞으로도 학생들에게 인천을 바로 알리기 위한 노력을 이어가겠다"고 했다. 이어 "섬 원주민과 여행객이 서로 소통, 존중하며 지속 가능한 섬 발전이 이뤄질 수 있도록 하는 데도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글/공승배기자 ksb@kyeongin.com 사진/김용국기자 yong@kyeongin.com■이동열 단장은?▲ 1955년 경기 시흥 출생▲ 인천고등학교, 인하대학교 항공공학과 졸업▲ 인천바로알기종주단 대표▲ (사)황해섬네트워크 이사장 겸 공동대표▲ 인천시 평화도시조성위원▲ 인천시 도서발전자문위원▲ (전) 인천 승마협회 이사▲ (전) 한국산악회 인천지부 부회장▲ (전) 인천시 배드민턴협회 감사▲ (전) 대한산악연맹 인천지부 부회장인천지역 학생들이 인천 곳곳을 누비는 인천바로알기종주단이 내년 20회를 맞는다. 이동열(64) 단장은 1회부터 지금까지 종주단을 이끌고 있다. 이동열 단장이 올해 종주를 진행한 서해5도 코스를 가리키고 있다.

2019-09-17 공승배

[인터뷰… 공감]수원 '화성연구회' 김충영 이사장

신분·성별 구분 통념깨고 궁중·민간연희 함께 진행 '이례적'정리의궤등 기록 철저 고증… 올해 재현행사 완성도 높여예산탓에 '실제 장소' 낙남헌 아닌 화서문서 공연 '아쉬움'"낙성연이 가진 무형문화재로서의 가치를 키워나가기 위해서는 원형 보존이 필요합니다"올해로 축조 223주년을 맞은 수원화성을 연구하기 위한 자발적 시민모임인 '화성연구회'김충영 이사장은 낙성연에 대해 "수원화성 준공을 축하하기 위해 마련된 잔치"라고 설명했다. 1796년(정조 20) 10월 16일 화성행궁 낙남헌에서는 수원화성 준공을 축하하기 위해 잔치가 열렸다.'낙성연'이다. 시연은 지난 2010년 처음으로 이뤄졌다. 정조대왕 탄신 258주기를 기념한 그해 11월 수원 화성행궁 내 낙남헌에서 시민과 외국인 등 5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화성 축성 기념 낙성연(落成宴)'이 최초로 선보였다.낙성연은 정조대왕이 1796년 10월16일 당시 국왕을 중심으로 신분과 성별이 구분되는 잔치가 일반적이었던 사회적 통념을 깨고, 백성 모두가 함께 어울리도록 지시해 개최된 최초의 시민축제로 기록되고 있다. 당시 시연된 낙성연은 구체적인 문헌자료가 남아 있지 않은 상황에서 '화성성역의궤'에 '낙성연도'라는 그림과 전문가들의 고증을 토대로 최대한 당시 상황과 가깝게 재현됐다.올해 열리는 제56회 수원화성문화제(10월3일부터 6일까지) 전야제 행사로 10월 2일에 화서문 일원에서 재현되는 낙성연은 지난 2016년 7월 한글본 정리의궤 권 39 성역도(화성성역의궤)가 발견되면서 철저한 고증을 통해 완성도를 높였다.낙성연 공연을 준비하고 있는 화성연구회 김 이사장은 "낙성연은 정조대왕이 특별 지시해 마련한 잔치로 완성도가 더욱 높아졌다"며 "정조대왕이 특별 지시해 궁중행사로는 이례적으로 축성에 참여한 감독관과 기술자 및 일용노동자와 일반 백성에 이르는 많은 사람들이 참여해 낙성잔치를 즐겼다는데 의미가 있고 그 행사를 보게될 것"이라고 말했다.특히 그는 " 화성행궁 보계 위에서는 축성에 참여한 관료들과 경기도 내 수령들을 위한 궁중연희가 펼쳐졌고, 보계 아래에서는 축성 기술자 및 민간인들을 위한 민간연희가 열렸는데 채붕을 이용한 산대놀이가 연행되었다"고 부연 설명했다.실제 낙성연을 주관하는 화성연구회에서는 화성성역의궤, 채색본 낙성연도, 한글본 정리의궤 기록을 철저히 비교 분석해 고증·재현해 냈다.그러나 아쉬운 부분도 있다. 과거 이뤄졌던 낙성연을 원형 그대도 재현하기 위해서는 화성행궁 내 '낙남헌'에서 행사가 진행돼야 하지만, 예산 문제로 올해는 화서문에서 열린다. 김 이사장은 "낙성연은 무형문화재로서도 손색없다. 그렇다면 지금부터 낙성연이 가진 정체성을 고민해야 한다"며 "이 정도 수준으로 낙성연의 가치를 끌어올리기 위해서는 가장 기초적인 장소 선정부터 제대로 이뤄져야 한다"고 전했다. 마지막으로 김 이사장은 '트렌드'라는 단어로 낙성연이 가진 여느 축제들과의 차별성을 강조했다. 김 이사장은 "낙성연은 하나의 공간에서 궁중연희와 민간연희 공연을 함께 선보이고 있어 상하동락(上下同樂)의 애민정신을 구현했다는데 큰 의의가 있다"며 "민주주의·인권 등 가치가 중요시되는 요즘 같은 시대에 낙성연은 좋은 귀감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글/김영래·배재흥기자 yrk@kyeongin.com#수원화성 '낙성연' 관련자료■ 화성성역의궤 '채붕을 설치했다(設綵棚)'는 내용과 흑백 낙성연도 그림 등이 있다.보계 위는 포구락, 쌍무고, 연화대무 등 궁중정재 연행을, 보계 아래는 채붕을 이용한 민간연희 연행(사자춤, 호랑이춤, 만석승무, 취발이춤)등이 실렸다.■ 한글본 정리의궤 권39 성역도프랑스 국립도서관 소장본(2016년 7월 발견)으로 한글본 정리의궤 총 48책으로 구성되어 있다. 1789년부터의 '현륭원 원행', '원행을묘정리의궤', '화성성역의궤'의 내용을 포함하고 있으며 한글 필사본으로 현재 13책이 존재한다. 한글본 정리의궤 권39 성역도의 채색본 1권(프랑스 국립도서관 소장본)이 있다.한신대학교 김준혁 교수가 발견한 채색본 낙성연도 그림을 바탕으로 2016년 9월 수원문화재단에서 '수원화성 낙성연' 공연이 재현됐다.■ 한글본 정리의궤 권48화성연구회 한정규 회원은 한글본 정리의궤 권39 성역도의 채색본 낙성연도 그림과 한글본 정리의궤 권48의 수원화성 낙성연 절차를 고증하고 '수원화성 낙성연'을 복원해 공연(2018년 10월 4일 제55회 수원화성문화제 전야행사)을 재현했다. /화성연구회 제공화성 축조 223주년을 맞아 10월 2일 수원 화서문에서 낙성연 재현행사를 준비하고 있는 화성연구회 김충영 이사장이 실제 잔치가 열렸던 화성행궁 낙남헌에서 낙성연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배재흥기자 jhb@kyeongin.com'화성연구회' 김충영 이사장과 회원들. /배재흥기자 jhb@kyeongin.com낙성연의 민간연희 장면. /화성연구회 제공화성연구회 주관·수원문화재단과 경인일보 후원으로 화성행궁 봉수당에서 열린 제54회 수원 화성문화제 전야제 '낙성연' 공연. /경인일보DB'화성성역의궤'. /수원시 제공

2019-09-10 김영래·배재흥

[인터뷰… 공감]인천 노동자자주관리기업 키친아트 전신, 치열했던 투쟁의 역사 '경동산업' 노동자들

열악한 근로조건 '악명' 사측 구사대로 노동자 습격구속된 동료 돕는다 '해고' 농성·분신으로 이어져고통스런 기억 안 떠나… 30년간 거르지 않고 추모부도후 재탄생 '키친아트' 개인 아닌 모두의 것돼야1980년대는 한국 현대사에서 굵직굵직한 일이 많았다. 아시안게임과 올림픽이 열렸고, 전국을 휩쓴 민주화운동 영향으로 헌법이 개정돼 대통령선거는 직선제로 바뀌었다. 경동산업 노동자들에게 이 시기는 아픔으로 다가온다. 1985년 노동조합 설립을 위한 투쟁이 있었고, 1987년 열악한 근로조건을 개선하기 위한 노동쟁의가 있었다. 이때 수십 명이 구속되는 아픔을 겪었다. 30년 전 오늘인 1989년 9월4일엔 회사 측의 부당한 징계 방침에 항의하며 노동자들이 자신의 몸에 불을 붙였다.이들은 병원으로 옮겨졌지만 결국 숨을 거두고 말았다. 故 강현중·김종하 열사다.경동산업은 1960년 서울 구로구에 설립된 국내 최초 양식기 제조기업이다. 냄비와 프라이팬 등 주방용품을 생산했다. 1983년 인천 서구 가좌동에 제2공장을 설립했다. 1980년대 경동산업은 열악한 근로조건으로 악명이 높았다고 한다. 직원들이 과로로 쓰러져 숨지기도 하고, 분신으로 목숨을 잃는 사고까지 있었다. 30년이 지났지만, 당시 경동산업 노동자들은 당시 목숨을 잃은 열사를 추모하고 있다. 최근 경동산업의 후신인 인천 서구 가좌동 (주)키친아트 정문에서는 30주기 추모제가 열렸다. 이날 행사에 앞서 1980년대 '경동산업 투쟁'의 치열한 현장에 있었던 노동자들을 만났다. 강현중·김종하 열사의 동지들이다.김학철(62)씨는 1987년 해고를 당했다. 당시 경동산업은 저임금과 추가 근로 등으로 악명이 높았다. 자녀들의 학비를 벌기 위해 공장에 나온 여성 근로자들이 과로로 쓰러지는 일이 잇따라 발생하면서 임금인상에 대한 요구가 높아졌다. 김학철씨는 이 과정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하다가 4월21일 해고됐다. 이후 김학철씨는 출근 투쟁을 벌이며 노동자들의 임금 인상 투쟁을 독려했다. 경동산업 노동자들은 노동쟁의 중인 다른 사업장과 연대하기도 했다. 8월에는 파업을 진행했다. 보름간 이어진 파업 투쟁에서 경동산업 노동자들은 냄비를 두드리며 농성을 진행했다. 당시 인천 주안5·6공단 일대가 경동산업 노동자들의 냄비 두드리는 소리로 가득 찼다고 한다. 임금 인상을 얻어내는 성과를 얻었다. 하지만 한 달도 채 되지 않아 사측과 갈등이 다시 불거졌다. 노조가 폭력을 행사한 관리자에 대한 조치를 요구했는데, 사측이 이를 수용하지 않은 것이다. 회사 측은 구사대(노동운동을 진압하기 위해 사측에서 고용한 사람)를 이용해 노동자들을 구타했다. '머리에 노란띠를 두르지 않으면 불순세력으로 간주한다'는 내용이 퍼졌고, 노란띠를 두른 200여 명의 구사대가 당시 노동자 사무실을 습격했다. 이때 노동운동에 참여했던 이들 중 다수가 구속됐다. 이를 '노란띠 사건'이라 불렀다. 김학철씨는 해고자 신분이었기 때문에 구속은 피했다.김학철씨는 "노란띠 사건으로 구속된 노동자들을 뒷바라지했다"며 "해직자였기 때문에 노동자들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많지 않았다. 계속 이러한 활동을 했고 89년에 있었던 투쟁에서는 출근길 교통정리와 청소를 담당했다"고 말했다. 이어 "87년에 노란띠 사건이 발생하지 않고 제대로 된 민주노조가 세워졌다면, 89년의 비극은 없었을지 모른다"고 말했다.그동안 김학철씨는 노동 열사의 위상을 높이기 위한 활동을 했다. '민족민주열사 추모단체 연대회의', '국회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 등에 참여했다. 그는 "현재는 몸이 안 좋아 이전과 같은 활동을 하기 힘들어졌다"며 "2012년부터는 그림을 그리고 있다. 그림에는 그동안의 경험과 아픔 등이 배어 있다"고 했다.안중준(56)씨는 1989년 9월4일 강현중·김종하 열사가 분신했을 때 함께 있었다. 강현중 열사가 회장으로 있던 사내 모임 '디딤돌'의 총무로 활동했다. 디딤돌은 일일주점을 열고 풍물패를 운영하는 등 다양한 활동을 펼쳤다. 당시 회사 측은 디딤돌 간부인 강현중 열사와 안중준씨 등에게 해고를 통보했다. 추후 밝혀진 해고 이유는 디딤돌이 '해고자와 어울린다', '불법 티켓을 팔았다' 등이었다. 디딤돌 회원 등은 회사 측의 부당한 징계에 항의하는 농성을 진행했고, 결국 분신으로 이어졌다. 4명이 화상을 입었고, 1명이 할복했다. 회사 측 강의신 노무이사도 화상을 입어 목숨을 잃었다. 분신으로 인해 안중준씨도 전신에 큰 화상을 입었다.이때 사고는 당시 언론에도 크게 보도되는 등 주목을 받았다. 경인일보는 1989년 9월5일자 신문에서 '농성근로자 5명 분신소동'이라는 제목으로 보도했으며, 같은 날 '친목회 조직 징계가 도화선'이라는 제목의 기사로 사건 배경 등을 알렸다.안중준씨는 "당시 사고를 막기 위해 화기 같은 것을 수거했지만, 안타까운 사고가 났다"며 "조금만 더 치밀했으면 이길 수 있는 싸움이었다. 우리 동지들의 희생도 막을 수 있었다"고 했다.안중준씨는 사고 이후 자살 방조 등의 혐의로 3년간 복역했다. 그는 "동지들이 각자의 자리에서 고통스럽게 살고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30년 동안 한 해도 거르지 않고 추모 사업을 개최하는 동지들에게 감사하다"며 "엄청난 사건이었기 때문에 트라우마가 있다. 고통스러운 기억들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는다. 편안한 삶을 살 수 없었다"고 했다.경동산업 노동자들은 1989년 사고 이후 매년 묘소를 참배하며 열사들을 추모했다. 올해는 30주기를 맞아 지역 시민사회단체들과 함께하는 행사를 진행했다.이종화(56)씨는 경동산업 후신인 키친아트에서 일하고 있다. 이종화씨도 1989년 9월4일 분신 현장에 있었고, 전신에 화상을 입었다. 그도 '디딤돌'에서 활동했다. 그는 자살 방조 등의 혐의로 집행유예를 받았다.2명이 목숨을 잃은 '9·4 투쟁'에서 40여 명이 일자리를 잃었다. 이종화씨 등은 1994년 '경동산업 해고노동자 복직투쟁위원회'를 구성하고 농성을 진행했다. 4개월에 걸친 농성 끝에 복직이 이뤄졌다.하지만 경동산업은 점차 사세가 기울면서 2000년 부도를 맞았고, 2001년 키친아트로 재탄생했다. 키친아트는 '공동소유, 공동책임, 공동분배'를 사훈으로 내건 노동자자주관리기업이다.이종화씨는 "해고와 복직을 반복했지만, 이 기간을 모두 합하면 30여 년을 경동산업과 키친아트에서 일했다"며 "사훈처럼 공동소유, 공동책임, 공동분배가 이뤄지는 회사가 되었으면 좋겠다. 회사는 어느 한 개인이 아니라 직원 등 모두의 것이 되어야 한다"고 했다.글/정운기자 jw33@kyeongin.com 사진/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1980년대 경동산업에서 투쟁했던 이들이 (주)키친아트에 설치된 '경동산업 노동자 추모비' 앞에서 故 강현중·김종하 열사를 추모하고 있다. 사진 왼쪽부터 이영식, 안중준, 이종화, 김학철씨.

2019-09-03 정운

[인터뷰… 공감]취임 1년 '새로운 해법' 제시 나선 문진영 경기도일자리재단 대표이사

'기술·보상·정보 미스매치'가 문제의 본질… 교육·청년사업등으로 풀어이론·실천 통합 '연구기능 강화' 효율성 향상·정책 사각지대 해소 '기대'유관기관 4곳 통합·출범 '노하우 발전·시너지 효과' 더 나은 서비스 제공정부와 자치단체의 부단한 노력에도 일자리 문제는 여전히 풀리지 않는 문제로 남아있다. 청년 일자리 문제에서부터 경력단절여성 등의 재취업 문제, 최근에는 베이비부머세대의 은퇴와 맞물려 부각되기 시작한 '4060 신중년 문제'까지 되레 다양한 형태로 일자리 문제가 분화하는 양상이다. 날로 그 심각성을 더해가는 듯한 일자리 문제 해결을 위해 최전선에 나선 경기도일자리재단 문진영 대표이사가 취임 1년을 맞았다. 도일자리재단 역시 3년 차로 아직 출범 초기 단계지만, 학자 출신인 문진영 대표는 숱한 연구를 통해 도출한 비전과 깊이 있는 분석을 통해 조직 안정화에서부터 여러 모습을 하고 있는 일자리 문제를 하나씩 풀어가고 있다. 문진영 대표는 '일자리가 단순히 생활의 방도가 아니라 사회와 소통하는 창구이자, 자신의 발전을 통해 자아를 실현하는 것'이라는 철학을 갖고, 일자리 문제 해결의 새로운 모델을 제시하고 나섰다.# 일자리문제, 이제는 다른 해법을 제시할 때문재인 정부는 출범 초기부터 '일자리 정부'를 표방하고 나섰고, 경기도 역시 노동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일자리 부문에 역량을 집중하고 있는 상황이다. 하지만 여전히 탈출구가 보이지 않는 원인은 무엇일까.문진영 대표는 "일자리 문제는 정책적 의지나 방법을 통해 해결하는 데 한계가 있다"며 "사회 복지 문제의 경우에는 행정력을 동원하면 비교적 결과가 직선적으로 나오지만, 일자리 부분은 그렇지 못하다"고 설명했다.그는 "우리 사회의 경제 체질이 전반적으로 강화될 때 자연스럽게 나오는게 일자리인데, 경제구조 자체가 뒷받침되지 않는 상황에서 정책적으로 접근하다 보니 한계를 마주한 것"이라고 진단했다.문진영 대표는 일자리 문제의 본질은 3가지 미스매치가 주요한 원인이라고 진단하고, 재단을 통해 이를 해결하고 있다고 소개했다. 우선 '기술(숙련)의 미스매치'는 기술학교나 새일센터 등을 통해 해결하고, '보상의 미스매치'는 일하는 청년사업과 같은 보상을 늘려주는 방식이다. 또 '정보의 미스매치'는 일자리 포털 '잡아바'를 고도화해 일자리를 구하는 사람들의 다양한 요구에 대한 해답을 제시하고 있다.문진영 대표는 "경기도가 운영하던 일자리 유관기관 4곳이 하나로 뭉쳐 시너지를 일으키고 있다"며 "재단 출범 이전부터 이어온 재단의 자산을 꾸준히 이어간다면 일자리 문제 해결의 모델이 되지 않을까 기대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문진영 호의 일자리 해법, '공익적 일자리'노동시장정책 전문가인 문진영 대표가 제시하는 일자리 문제 해결 방안 중 한 축을 담당하는 것은 '공익적 일자리'다. 소득 양극화와 저성장에 따른 고용불안, 지역적·사회적 격차가 확대되는 등 구조적 문제가 발생함에 따라 사회적 가치의 중요성이 강조되고 있는 가운데, 공익적 일자리를 만들어 '사회적 부문 강화'와 '일자리'라는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겠다는 것이다. 올해 초 신설된 '공익적 일자리팀'이 그 동력을 맡고 있다. 문진영 대표는 "사회적 가치를 실현하는 것이 사회적으로 굉장히 필요하지만, 수익성이 따라오지 못해 시장에 진입하지 못하는 사회적 일자리를 통해 일자리 문제의 해법을 찾고 있다"며 "공익적 일자리팀을 통해 일정한 수준의 경제적 보상이 가능한 사회적 일자리 직업군을 창출하고 유지하는 과제에 도전하고 있다"고 소개했다.이미 영국이나 캐나다 등 선진국들은 튼튼한 지역사회의 역량을 활용해 공익에 도움을 주면서도 실업 문제를 해결하는 해법을 제시하고 있는 상황이다.문진영 대표는 "선진국의 경우 공익적 일자리의 역사가 깊어 배워야 할 점이 많다"며 "우리나라도 지금은 초기 단계로 많은 시행착오를 겪고 있지만 어느 정도 안정화되고 있어 재단이 앞장서 일자리 문제 해결의 지향점을 보여주고 싶다"고 말했다.이를 위해 사회적 경제의 생태계를 가꾸는 일까지 활동범위를 넓히기도 했다. 대표적으로 '사회적 경제 성장지원을 통한 일자리창출 사업'은 사회적 경제 기업을 단순히 일자리 창출의 동력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경영과 재정 측면까지 아우르는 패키지 형태로 지원하는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10년 이상의 경력과 전문 자격을 갖춘 신중년층 컨선턴트가 참여해 중장년 계층의 사회공헌형 일자리 창출에 나서고 있다. 이밖에 온라인 판촉마케팅 지원과 노동자 작업환경 개선 등을 통해 건강한 일자리 환경을 가꾸고 있다.# 일자리 문제 해결의 나침반, '연구기능 강화'일자리 사업에 막대한 예산이 투입되고 있지만, 이에 대한 진단은 미비한 것이 현실이다. 또 '일자리 창출'이라는 거대한 목표에 접근하기 위해 일자리 문제 해결을 재촉하면서 퇴고(推敲) 작업이 이뤄지지 않아 가장 빠르고 정확한 길을 찾기 보다는 당장에 할 수 있는 일을 찾아 따라가기 급급했던 것 아니냐는 지적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문진영 대표는 취임 당시부터 연구 기능 강화를 지속적으로 주장해왔다. 도일자리재단은 일자리 사업을 수행하는 기관이지만, 이론과 실천이 통합되는 연구기능을 강화해 효율적인 길을 열어가겠다는 각오인 것이다.문진영 대표는 "연구기능 강화에 앞서 숙려 과정을 밟고 있다"며 "최근의 인사에서도 사업부서와 연구부서 간 인적 교류를 염두에 뒀다"고 설명했다.사업부서와 연구부서 간 역할이 분담돼있어 각자가 보지 못하는 부분이 있는 데, 순환 배치를 통해 각자의 주된 영역을 객관적으로 살필 수 있는 기회를 준 것이다. 또 연구팀을 연구본부로 확대하는 방안이 대표 개인의 목표가 아닌 조직의 체력이자, 조직 구성원의 비전으로 자리 잡기 위해선 끊임없는 논의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문진영 대표는 "정책연구팀을 정책연구센터로 승격시켜 연구기능을 강화한다면 세부적인 일자리 현황을 정확하게 볼 수 있고 혹시 놓치고 있는 사각지대 일자리 사업을 추진하는데 큰 도움이 될 것"이라며 "정책 전달체계를 비롯한 다양한 일자리 문제 해결 방안이 나올 것이라는 데 기대를 걸고 있다"고 했다.# 출범 3년, 새로운 일자리 문제 해결 DNA 이식경기도일자리재단은 경기도가 운영하는 일자리 관련 유관기관이 결합하면서 출범했다. 재단 출범 초기부터 이어지고 있는 '일하는 청년 시리즈'는 청년 일자리 문제 해결이라는 하나의 DNA를, 여성능력개발센터부터 이어온 경력단절 여성 재취업 등 여성일자리 문제 해결의 DNA 등이 그것이다. 여기에 문진영 대표가 새로 이식한 재단의 DNA는 '4060 신중년' 일자리 문제 해결 능력이다.문진영 대표는 "베이비부머 세대가 은퇴를 하기 시작하면서 신중년 일자리 문제가 떠오르고 있다"며 "청년들은 사회 경험이 거의 없다는 점에서 동질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지만, 신중년의 경우 각자 걸어온 삶이 다르기 때문에 더 다양한 방식으로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고 진단했다.금전적인 동기보다는 사회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싶다는 욕구가 있는 신중년이 있고, 전혀 다른 일에 도전하고 싶어하는 신중년, 당장의 취업이 급한 신중년 등 특성이 모두 다르기 때문에 10이면 10가지의 접근방식이 필요하다는 것이다.문진영 대표는 "재단이 갖고 있는 소중한 DNA가 많이 있다. 그간의 자산을 발전시키는 동시에 신중년 일자리 문제 해결의 모델을 만들겠다"고 말했다.마지막으로 문진영 대표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자리가 일자리라고 한다. 더 많은 사람들이 일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 재단의 존재 이유"라며 "아직 연구센터 신설과 잡아바 앱 서비스 고도화 등 과제는 남아있지만, 재단이 축적한 경험과 노하우를 활용해 고용의 미스매치를 줄이고 도민들에게 더 나은 일자리 서비스를 제공하는 데 노력을 아끼지 않겠다"고 약속했다.글/김성주기자 ksj@kyeongin.com■문진영 대표이사는?▲ 1962년생▲ 1985 연세대학교 사회복지학과 졸업 ▲ 1988 연세대학교 대학원 사회복지학과 졸업▲ 1989~1994 영국 헐 대학교(University of Hull) 사회정책학 박사■주요 경력▲ 1998~ 서강대학교 사회복지학과 교수▲ 2006~2007 대통령 자문 양극화민생대책위원회 위원 ▲ 2013~2014 사회복지정책학회 회장 ▲ 2018~ 제2대 경기도일자리재단 대표이사문진영 경기도일자리재단 대표이사가 "더 많은 사람들이 일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 재단의 존재 이유"라고 말하고 있다. /경기도일자리재단 제공

2019-08-27 김성주
1 2 3 4 5 6 7 8 9 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