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을 꿈꾸는 DMZ

 

[희망을 꿈꾸는 DMZ·18·끝]에필로그/미래는 과거에서부터 시작된다

분단국가에서 살면서 분단의 현실을 느끼는 것은 쉽지 않다.간혹 TV에서 차가워지고 있는 남북관계를 볼 때 비로소 분단을 느낄 수 있고 간헐적이기는 하지만 남북간의 물리적 충돌이 발생했을 때나 분단을 다시금 생각하게 한다. 분명한 것은 지금 한반도는 남북으로 각각 다른 정치 체제를 가지고 대치하고 있다.개발을 중시하는 한국의 사회·경제적 풍토상 DMZ라는 공간은 미래의 개발 대상지인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생각한다면 천혜의 보고인 DMZ 그 자체가 또 하나의 자산일 수도 있다.한반도 DMZ는 원시 자연이 그대로 남아 있어 연구 가치가 높다. 그리고 한반도 DMZ는 전 세계에서 유일하게 냉전시대의 아픔을 다시금 되새겨 볼 수 있는 공간이기도 하다. 한반도 DMZ의 가치에 대해서 정의하기가 쉽지 않지만 분명한 것은 후손들에게 물려 주어야 할 큰 우리의 자산 중 하나라는 것이다.한반도 DMZ 일대의 모습을 재조명하기 위해 이번 기획을 준비하며 가장 고민스러웠던 부분은 어떤 방향으로 접근하냐였다. 전문적인 지식이 요구되는 생태적인 접근, DMZ 내에 위치한 역사적인 자산에 대한 가치 평가, 그리고 DMZ 부근의 현재 모습에 대한 심도있는 접근 등.이런 다양한 접근 중 이번 기획에서 선택한 방법은 DMZ의 오늘을 보여 주고자 했다. 잊혀 있는 공간 DMZ의 오늘의 모습을 느낄 수 있는 경의선과 경원선의 끊어진 선로, 민간인통제구역 안에 위치한 마을들, 평화누리길을 걸으며 만날 수 있는 경기북부지역의 기초지방자치단체들을 찾은 건 그런 이유에서였다.그리고 DMZ의 보존 문제에 대해 어떻게 준비해 나가야 할지에 대한 해법을 찾기 위해 독일을 찾았다. 독일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수십년간 동서로 나뉘어 있었다. 독일은 1989년 통일 이전부터 동·서독의 국경선인 그뤼네스반트 일대에 대한 보존 문제를 논의하기 시작했고 현재 중앙정부와 지방정부, 시민사회단체가 함께 보존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이뿐만 아니라 민간이 중심이 돼서 그뤼네스반트 일대에는 국경박물관이라는 이름의 분단 당시 잔재들을 모아 놓은 박물관들이 들어서 있다. 국경박물관은 민간에서 건립을 추진해 지방정부의 지원을 받아 운영되고 있다. 한국의 DMZ박물관이 중앙정부와 지방자치단체가 운영하는 것과는 차이가 있다.독일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파괴된 도시들을 전쟁 이전의 모습으로 복원하는 데도 노력을 아끼지 않고 있고 유대인 수용소를 비롯해 각종 전쟁 관련 시설들을 다양한 형태로 활용해 사용하고 있었다.뮌헨 근교에 위치한 다카우 수용소의 경우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어떻게 수용소로 사용했는지를 다양한 시각 자료를 설치해 소개하고 있다. 다카우 수용소는 1945년 4월 연합군에 의해 해방될 때까지 약 20만명이 수용됐고 3만5천여명의 유대인이 학살됐다.독일인들은 자신들의 불편한 역사지만 그 사실을 왜곡하지 않고 그대로 보여 주고 있다. 또 수용소 시설 한편에는 이들을 추모하는 공간을 만들어 두기까지 했다. 같은 제2차 세계대전 전범 국가인 일본이 자신들이 저지른 행위를 왜곡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과는 다른 모습이다.또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의 최고 통치자였던 히틀러가 이용했던 켈슈타인하우스는 당시 모습 그대로를 활용해 영화 촬영장소와 관광자원으로 활용되고 있다.한반도가 전쟁과 관련된 흔적들이 잊히고 있는 상황에서 독일은 그 흔적들을 통해 미래에 전쟁이 재발하지 않도록 교훈으로 활용하고 있다. 또한 관광자원으로서 그 가치를 인정하고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있는 점은 한국 사회에서 배워야 할 점이다.특히 국경지역(그뤼네스반트) 생태자원으로서 연구와 활용을 고민하고 있는 독일의 모습은 분단 60주년을 앞두고 있는 한국인에게 전달하는 바가 크다.※이 취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글·사진┃김종화기자

2012-12-05 김종화

[희망을 꿈꾸는 DMZ·17]인터뷰/그뤼네스 반트 리아나 가이데치스 박사

독일 자연보호단체 그뤼네스 반트(이하 반트)에는 현재 4명의 상근 직원이 근무하고 있다.반트에서 진행하는 자연보전과 관련한 업무를 총괄하고 있는 리아나 가이데치스(Mrs. Dr. Liana Geidezis) 박사는 "독일 휴전선 지역의 보전 문제는 국가뿐 아니라 전 국민적인 관심 사항"이라고 소개했다.가이데치스 박사는 "1989년 통일 되기 전부터 보전문제를 독일 사회에서 심각하게 고민했고 그뤼네스 반트라는 단체가 설립되게 됐다"며 "현재 휴전선이 있는 9개 자치주에 지역에 맞는 프로젝트를 개발해 지원하고 있다"고 설명했다.그는 "반트의 중요한 재원은 중앙정부와 시민들의 기부금으로 확충된다"며 "기부금 문화가 잘 형성되어 있어 기부금만으로도 단체 운영 비용의 상당 부분을 충당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이어 가이데치스 박사는 "기부한 시민들에게는 기부금 증서를 주고 있다"며 "증서는 반트에서 주최하는 전세계 자연보호운동가들이 모이는 세미나에서 발급해 의미가 크다"고 말했다.반트에서는 휴전선 지역의 보전 문제 뿐 아니라 어린이와 청소년들의 교육도 중요한 사업으로 생각하고 진행하고 있다.멜라니 크러이츠(Mrs. Melanie Kreutz) 프로젝트 어시스트는 "휴전선 지역에는 보전되어야 하는 동·식물들이 많다. 이 동·식물들이 소중하다는 것을 다음세대를 이끌어 갈 어린이나 청소년들이 안다면 미래에는 더 많은 사람들이 휴전선 일대의 소중함을 알 수 있을 거라고 판단해 교육을 집중하고 있다"고 설명했다.크러이츠 프로젝트 어시스트는 "독일도 처음에는 휴전선 일대 보전 문제의 필요성에 대해 의문을 갖는 분위기도 있었다. 하지만 꾸준히 대화를 나눠 분위기를 형성했고 앞으로도 더 많은 활동을 하기 위해 대화를 나누고 있다"고 소개했다.그는 "한국의 휴전선에도 보전되어야 할 많은 자연 자원들이 산재해 있을 거라고 생각된다. 한국과 독일이 교류를 통해 서로 배워야 할 점을 배우며 함께 지켜 나갔으면 한다"고 말했다.

2012-11-28 경인일보

[희망을 꿈꾸는 DMZ·17]나치의 흔적 남아있는 뉘른베르크와 그뤼네스반트

# 뉘른베르크와 나치당바이에른 주에 속한 뉘른베르크는 독일의 대표적인 상공업 도시 중 하나다. 뉘른베르크는 중세시대 성 안에 교회와 다양한 르네상스 양식의 건물이 남아 있다. 고풍스러운 느낌을 주는 뉘른베르크는 나치의 거점 도시였다. 특히 1933년부터 1938년까지 나치전당대회가 열린 장소도 뉘른베르크다. 또 나치는 1935년 인종차별과 유대인 학살의 법적 근거가 되는 뉘른베르크법을 제정했다.독일 대표적 상공업 도시구도심밖에 나치당사전범재판소 발길 이끌어생태지구 보전 여론 형성총 1400km자연 그대로멸종위기 600여종 보호뉘른베르크 외곽에는 이런 나치 만행의 중심이 됐던 나치당사가 남아 있다.옛 건물 그대로 남아 있는 나치당사는 현재 나치가 저지른 만행을 알려주는 전시실로 사용되고 있다.뉘른베르크에 제2차 세계대전과 관련된 시설물로는 전범들을 재판한 재판소를 들 수 있다. 1945년 10월11일 독일 뉘른베르크시의 '정의의 전당' 법정에서 재판이 열렸는데 이듬해인 1946년 9월 30일부터 10월 1일까지 2일간에 걸쳐 판결이 언도됐다.# 휴전선의 생태지구를 꿈꾸는 그뤼네스반트독일에서 그뤼네스반트는 분단 당시 휴전선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그 지역을 보전하기 위해 시민운동을 이끌고 있는 시민사회단체의 이름이기도 하다.그뤼네스반트의 보전 문제가 처음 거론된 것은 1970년대 초반부터다.그뤼네스반트 일대에서 멸종 위기 새가 발견되자 독일 내에서는 이 지역을 보전지구로 지정해 보전 및 연구활동이 이뤄져야 한다는 여론이 일었다.이런 여론이 일었지만 1989년 통일 이전까지는 보전을 위한 단체 설립이 본격화 되지 않았다. 하지만 1989년 통일이 된 후 사람들의 자유로운 왕래와 사유지에 속한 곳의 토지이용이 높아져서 이 곳이 파괴될 위험에 처했다. 그래서 그해 독일 자연보호단체 그뤼네스 반트(이하 반트)가 설립됐다.총 길이 약 1천400㎞에 이르는 예전 휴전선 지대는 철조망이 놓인 지역과 정찰 차량이 접근할 수 있는 폭 50~200m에 이르는 곳이 인간의 손길이 미치지 않아 자연 그대로 남아 있었다.바로 이곳이 반트가 핵심적으로 보호하는 지역이다. 말 그대로 야생의 지역인데, 반트는 이 곳에서 자라거나 거주하는 멸종위기 야생 동·식물 약 600종을 지금까지 보전해 왔다.반트는 이러한 그뤼네스 반트를 독일의 역사를 말해주는 하나의 살아 있는 문화재로 보존하려고 노력하고 있으며, 나아가 예전 국경지역뿐 아니라 그 주변지역까지 보호지역을 확장하려 하고 있다.반트에서 하고 있는 그뤼네스 반트 체험 프로그램은 현재 3군데의 특정구역에서 진행되고 있고 사전 등록 후 도보 및 자전거 등으로 이 구역을 다니면서 역사 체험 및 자연보호 체험을 할 수 있다.프랑켄 지방에 위치한 뉘른베르크는 크리스마스 마켓과 장난감, 소시지로 유명한 도시다.뉘른베르크 도심은 성곽 내부 구도심과 외부의 일반 주거지역으로 구분되어 있다. 뉘른베르크 도심을 거닐다 보면 전쟁의 상흔을 손쉽게 찾아 볼 수 있다. 특히 뉘른베르크의 대표적인 관광 자원인 카이저부르크와 구 시청사 벽면에는 포탄과 총탄의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다. 이처럼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전쟁의 흔적이 남아 있는 건 뉘른베르크에 나치당의 당사가 위치해 있었기 때문이다.뉘른베르크 구도심 밖에는 의미 있는 곳이 2곳이 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당이 사용하던 당사 건물과 의회당, 전쟁이 끝난 후 전범 재판을 진행하던 재판소 등이다.뉘른베르크가 독일인에게 많은 관심을 끄는 또 한가지는 동·서독 분단 당시 휴전선을 생태지구로 보전하기 위해 독일 국민들의 의지를 모으는 시민단체인 그뤼네스반트의 본부가 있다는 것이다.글·사진┃김종화기자※이 취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2012-11-28 김종화

[희망을 꿈꾸는 DMZ·16]인터뷰/현지 한국인 의사 이승보씨

"독일 사람들은 과거의 잘못을 잊지 않고 있습니다."드레스덴에서 만난 한국인 독일 의사 이승보(37)씨는 한국인으로서 독일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느냐고 묻자 "과거의 잘못을 잊지 않고 반복하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부분이 배울 점이다"고 말했다.10여 년 전 의학 공부를 위해 독일에 온 이씨는 "독일 곳곳에 제2차 세계대전 당시의 모습이 남아 있는 건물과 시설들을 전시관으로 활용하고 있다. 이 전시관들에서는 전쟁 당시의 참혹한 모습을 통해 전쟁이 재발되지 않도록 하는 노력을 엿볼 수 있다"고 소개했다.이씨는 "통일 이후에 독일에 온 사람으로서 독일인들이 통일 이후 하나의 국가가 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하는 모습을 보고 놀랐다. 한국도 통일을 생각한다면 통일에 대한 철저한 준비 과정이 필요하고 통일 이후에 어떤 방식으로 하나의 국가가 될지에 대한 생각도 공론화해야 한다"고 말했다.그는 "독일인들은 산업화를 이뤄내면서도 자신들의 문화를 지키기 위한 노력도 많이 하고 있다. 정부가 주도하는 부분도 있지만 지방자치단체가 시민들과 함께 고민하고 하나의 의견으로 도출해 나가는 과정을 끊임없이 반복한다. 한국 정부와 한국인들도 이런 독일인들의 노력을 배워서 한국에 맞는 방안을 찾았으면 하는 생각도 해 본다"고 했다.

2012-11-20 경인일보

[희망을 꿈꾸는 DMZ·16]분단의 흔적을 만날 수 있는 드레스덴과 플라우엔

베를린을 출발해 나치당의 수도로 이용했던 뉘른베르크로 향했다. 베를린에서 뉘른베르크까지는 약 480㎞가량 떨어져 있어 중간에 2개 도시를 거쳐서 가기로 했다. 거쳐 갈 도시로 제2차 세계대전으로 인해 도심 주요 시설이 파괴됐던 드레스덴과 구동독 도시 중 가장 먼저 평화적으로 정권이 교체됐던 플라우엔을 선택했다. 특히 플라우엔에서 1시간여 떨어져 있는 뫼들라로이트 국경박물관을 살펴보기로 했다. 뫼들라로이트 국경박물관이 위치한 작은 시골 마을은 제2차 세계대전 후 휴전선이 마을을 가로질러 미군들에 의해 '작은 베를린'이라고 불리기도 했다.제2차 세계대전후 잿더미된 츠빙거궁전 아직도 공사중정전후 시민 수만명 자발적 참여·추모 기념비도 건립군수물자 생산하던 플라우엔, 평화적 정권교체 이끌어# 전쟁의 상처가 남아 있는 드레스덴드레스덴은 오래된 옛 건축물이 많이 남아 있는 도시다.드레스덴은 한국인에게 많이 알려져 있지 않은 도시이지만 독일인들이 옛 문화유적을 감상하기 위해 가장 많이 찾는 도시 중 하나다. 이곳에는 화려한 츠빙거 궁전, 가톨릭 궁정교회, 구도심 중심에 위치한 광장 주변 바로크 양식의 수많은 건축물들이 관광객들의 시선을 잡는다. 드레스덴에는 30여개의 미술관과 박물관이 있어 예술의 보고라고도 불린다.이런 아름다운 도시에도 전쟁의 아픔은 남아 있었다. 드레스덴을 찾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방문하는 츠빙거 궁전은 전쟁 당시 대부분이 파괴됐던 곳이다. 츠빙거 궁전은 작센 지역과 폴란드를 함께 다스렸던 아우구스트 왕이 서기 1710년부터 1732년까지 건설한 궁전이다. 현재까지도 츠빙거 궁전은 복원 공사가 진행 중이다. 지난 6월 츠빙거 궁전을 방문했을 당시에도 복원 공사가 한창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 이전 드레스덴은 인구 64만명 규모의 독일에서 7번째로 큰 도시였다.제2차 세계대전 막바지인 1945년 2월 13일부터 15일까지 3일간 연합군은 5번에 걸쳐 대규모 공중 폭격을 했고 현재 관광지로 인기를 끌고 있는 드레스덴 구시가지 대부분이 파괴됐다. 당시 사망자만도 2만5천여명에 1천200만㎡에 이르는 지역이 잿더미가 됐다고 한다. 연합군이 이처럼 대규모 공습을 감행한 것은 드레스덴이 독일 제국 군인을 양성하는 곳이기도 했고 특히 1935년 공군기지가 세워지며 공군양성학교가 들어서 있기 때문이었다. 전쟁이 종료된 후 드레스덴 시민 수만명이 자발적으로 폭격으로 인해 파괴된 잔해를 치우는 작업에 나서기 시작했다. 1950년대 초반에는 주거지와 도시의 대표적인 건물들의 복원이 이뤄졌고, 이와 함께 추모 및 기념비들도 세워졌다.츠빙거 궁전은 1964년 복원이 마무리됐고 1985년에는 드레스덴의 대표적인 오페라극장인 젬퍼오퍼가 다시 건축된다. 하지만 구동독 지역이 그렇듯 드레스덴도 경제적인 어려움으로 인해 아직도 많은 곳이 복원 되지 못하고 있다.# 플라우엔과 뫼들라로이트인구 6만여명의 작은 도시인 플라우엔은 평화적인 정권교체를 이끈 도시로 알려져 있다. 도시 전체적인 전경이 숲과 함께 있어 아름다운 휴양지와 같은 느낌을 주는 곳이다.플라우엔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군의 군수물자를 생산하는 곳이었기 때문에 연합군의 공습으로 큰 피해를 입었다. 분단 당시에는 구동독 정권하에서 섬유공업이 발전했지만 전쟁의 피해에서 완전히 복구되지 못했다. 플라우엔이 독일인에게 각인된 것은 1989년 10월 7일 동독 정부에 불만을 가졌던 시민들이 평화시위를 하면서부터다. 이 평화시위는 주변 도시로까지 펴졌고 23주 동안 매주 토요일 시청 앞 광장에 모여 정권 교체 기도모임으로 이어졌다. 플라우엔은 통일 후에는 구동독 지역 도시 중 가장 먼저 자본주의 문화를 받아들인 곳이다.플라우엔에서 1시간여 거리에 떨어져 있는 뫼들라로이트는 한적한 시골마을이다.뫼들라로이트 마을을 가로지르는 하천을 중심으로 동독과 서독으로 나뉘어져 미군에 의해 작은 베를린이라는 별칭을 얻었다. 뫼들라로이트는 1989년 12월 9일 처음으로 국경이 열렸고 1990년 6월17일에 비로소 장벽들이 부분적으로 철거됐다. 장벽 철거와 동시에 'Deutsch-Deutsches Museum Moedlareuth'(독일의 독일 박물관 뫼들라로이트) 국경박물관이 세워졌다. 이곳 뫼들라로이트 국경박물관에서는 플라우엔과 그 인근 지역의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피해 모습과 이 지역 일대에서 생산한 군수물자들을 전시하고 있다. 특히 뫼들라로이트 국경박물관 야외 전시실은 마을을 가로지르는 하천 곁에 들어서 있는 휴전선 일대가 그대로 남아 있어 분단 당시의 모습을 알 수 있게 해주고 있다. 글·사진┃김종화기자 ※이 취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2012-11-20 김종화

[희망을 꿈꾸는 DMZ·15]인터뷰/김진복 베를린 한인회장

"독일 통일의 순간 베를린 거리는 감격의 물결로 가득 찼다."베를린에서 만난 김진복 베를린 한인회장은 독일 통일 당시를 묻는 질문에 "베를린 거리가 감격의 물결로 가득 찼다"고 회상했다.김 회장은 여느 독일 정착 1세대들과 마찬가지로 1960년대 광부로 독일 땅을 밟았지만 30여 년간 택시 운전으로 다양한 경험을 쌓았다.김 회장은 "처음 광부로 독일에 왔을 때 독일인들이 한국 사람을 신기하게 바라보기도 했다. 독일인에 맞게 공사현장 시스템이 되어 있어 광부로 온 분들은 고생을 많이 했다"고 말했다.이어 김 회장은 "1960년대 청년기를 살아 온 한국 사람들은 공부에 대한 갈증이 컸지만 그럴 수 없는 생활형편이었다. 독일에 올때 독일이라는 국가에 대한 호기심으로 첫 발을 내디뎠지만 막상 와서 또다시 공부에 대한 욕심이 생겨 원예공부를 했다"고 했다.김 회장은 "원예 공부를 했지만 택시 운전으로 생계를 꾸렸다. 30년간 베를린에서만 20만명을 손님으로 태웠고 손님들에게 베를린에 대해 소개하기 위해 여행가이드 국가시험도 합격했었다"고 귀띔했다.그는 "독일인은 성실하고 정직한 사람들이다. 비록 전쟁으로 인해 어려운 시간을 보냈지만 바로 그 성실하고 정직한 면이 있었기에 지금의 경제 대국 독일이 있을 수 있었다"며 "독일 통일은 정치인들이 아닌 국민들이 이뤄냈다는 것은 한국 사회도 배워야 할 점이다"고 소개했다.김 회장은 "한국이 통일을 이루기 위해서는 남북 간의 대화가 우선시 되어야 한다. 최근 한국의 남북 간에 냉각기를 갖고 있는 점은 아쉽게 다가온다"고 말했다. ※이 취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2012-11-13 경인일보

[희망을 꿈꾸는 DMZ·15]분단의 상징에서 평화의 상징으로, 베를린과 포츠담

독일의 수도 베를린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분단의 상징이 됐다. 하나의 도시를 2개의 각기 다른 정치체제를 가진 국가가 수도 또는 중심도시로 사용한 사례는 독일이 유일하다고 할 수 있다. 특히 베를린을 동·서로 나눈 장벽은 냉전시대 분단으로 아픔을 겪었던 사람들의 한을 상징하기도 한다.2012년의 베를린은 유럽의 대도시로 역동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하지만 그 안으로 한 발짝 들어서 보면 전쟁으로 인한 고통, 분단이 가져다 준 아픔을 잊지 않으려는 독일인들의 노력을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었다. 특히 과거사 문제로 갈등을 빚고 있는 일본과 달리 독일인들은 여러 가지 전쟁 유적을 통해 과거의 잘못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을 엿볼 수 있었다.'2711개의 콘크리트 숲' 지하엔 유대인 학살 생생한 영상·자료 전시도심곳곳 장벽의 흔적… 찰리 검문소엔 국경 탈출 슬픈 이야기 남아체칠리엔 궁전곁 '글리에니커 다리' 냉전시대 스파이 교환장소 이용# 유대인 홀로코스트 기념관베를린에 도착해서 첫 번째로 발길을 옮긴 곳은 베를린 홀로코스트 기념관이다. 한국의 독일 안내책자를 통해서는 많이 알려지지 않은 곳이지만 독일의 상징과 같은 브란덴부르크문을 보기 위해 가는 방문객들은 한번쯤 들르게 된다.브란덴부르크문 곁에 있기 때문이다. 브란덴부르크문은 분단 당시 공식적으로 동·서독 베를린을 오고 갈 수 있는 유일한 공간이었다. 베를린 제국의회 의사당에서도 가까운 곳에 위치한 홀로코스트 기념관은 2만여㎡에 이르는 평평한 부지 위에 자리하고 있다. 2천711개의 각기 다른 모양을 한 콘크리트 기둥들이 콘크리트 숲을 이루고 있는 홀로코스트 기념관 지하에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유대인들의 학살이 어떻게 이뤄졌는지 자세하게 알려주고 있다. 지하 전시관은 한 번에 많은 사람이 들어갈 수 없기 때문에 시간대 별로 일정 인원이 감상할 수 있도록 운영되고 있다. 이 곳에서는 당시 유대인들이 수용소로 가는 모습과 생활, 학살 장소 등 당시의 모습을 영상물과 사진을 통해 소개하고 있다.# 분단의 상징 베를린 장벽과 찰리 검문소베를린의 분단은 독일 전역을 연합군 4개국(미국·소련·영국·프랑스)이 분할 점령하면서 시작됐다. 포츠담 회담 이후 4개국이 베를린도 분할 점거하게 됐고 이후 4개국 외무장관 회의가 열렸다. 하지만 미국과 소련 측의 의견이 대립해 충돌함으로써 1947년 소련 측에서 당시 점령하고 있던 지역에 공산주의 정권을 세우며 분단되게 됐다. 독일이 통일된 1987년까지 40여㎞에 이르는 길고도 두꺼운 콘크리트 담장이 동서독을 갈라놓았다.통일이 된 현재 베를린 도심에서는 당시 베를린 장벽의 흔적을 쉽게 찾아 볼 수 있다.우선 독일 정부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히틀러정권 비밀경찰기관 건물터 앞에 장벽을 보존하고, 야외 전시관을 설치 운영하고 있다. 야외 전시관에는 전쟁 직후의 폐허가 된 베를린의 모습과 베를린 장벽의 변화, 동독을 탈출하는 독일인들의 모습, 베를린 장벽의 붕괴 모습을 현재 남아 있는 베를린 장벽을 따라 전시하고 있다. 또 베를린 장벽 곁에 위치한 전시관에서는 당시 사진과 신문자료로 히틀러 정권에 대해서 소개하고 있다.찰리 검문소는 베를린 장벽이 붕괴되기 전 목숨을 걸고 국경을 넘었던 사람들의 슬픈 이야기가 남아 있는 곳이다. 찰리 검문소 곁에 있는 찰리박물관에서는 독일이 분단될 때부터 서독으로 탈출하는 사람들과 베를린 장벽 붕괴까지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제2차 대전의 종전을 알린 포츠담포츠담은 독일의 16개 주 중의 하나인 브란덴부르크의 주도다.프로이센 왕가의 거주지로서 역사적으로 유명한 성 및 공원들이 많다. 1990년대에 유네스코에 의해 독일에서 가장 많은 보호되어야 할 문화유산을 가진 도시로서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됐다. 포츠담의 여러 문화유산 중 사람들이 가장 많이 찾는 곳은 체칠리엔 궁전이다. 독일의 마지막 황태자 빌헬름 프로이센(Wilhelm von Preussen)이 거주했던 곳이기도 한 체칠리엔 궁전은 1945년 7월 17일부터 8월 2일까지 포츠담 회의가 있었던 장소로 유명하다. 포츠담 시 또한 베를린 장벽을 통해 다시 동·서로 나눠지게 됐다. 체칠리엔 궁전 곁에는 제2차 세계대전 중 파괴된 글리에니커 다리가 있다. 포츠담 회담을 위해 체칠리엔 궁전으로 향했던 연합군 4개국 대표가 지나기도 해 '통합의 다리'라는 별칭을 얻기도 했다. 1949년부터 통일 전까지는 동맹국의 군인 및 정치가들만 다닐 수 있었지만 통일된 이후 모두에게 공개됐다.이 곳은 냉전시대 각국 스파이들의 정보교환 장소로 이용되기도 했다. 이 다리의 냉전시대 다양한 사연, 그리고 주변 지역 경관이 아름다워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됐다.글·사진┃김종화기자

2012-11-13 김종화

[희망을 꿈꾸는 DMZ·14]슈빈마르크 국경박물관장 디트리히 빌헬름 리쯔만

"동독 사람들이 자유를 찾아 넘어오는 모습을 잊을 수 없다."슈빈마르크 국경박물관장 디트리히 빌헬름 리쯔만씨는 "분단 당시의 아픔을 잊지 않기 위해 박물관을 설립하게 됐다"고 박물관 설립 목적을 소개했다. 슈빈마르크 국경박물관이 위치한 괴어 지역에서 태어난 리쯔만씨는 어린 시절부터 동·서독으로 분단되어 있는 모습을 보고 성장했다. 그가 살고 있는 괴어 지역은 서독지역이다.그가 기억하는 분단은 아픔이다.리쯔만씨는 "통일이 돼서 자유와 먹을 것을 찾아 서독으로 오는 사람들의 행렬을 잊을 수 없다. 당시 이 지역을 지나는 사람들에게 간단한 요기 거리와 돈을 나눠 줬었다. 당시의 모습도 사진으로 담았다"고 회상했다.그는 "역사가 반복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는 분단 당시의 모습을 잊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리쯔만씨는 세계에서 유일한 분단국가인 한국에 대해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3년 전 북한을 방문했었고, 평양을 비롯한 북한 지역의 모습을 보며 많은 생각을 하고 왔다고 한다. 리쯔만씨는 "판문점을 통해 남한으로 가고 싶었다. 하지만 분단된 상황에서는 그럴 수 없었다. 한국도 독일처럼 통일을 준비해 하나의 국가가 됐으면 한다"고 했다.

2012-11-06 경인일보

[희망을 꿈꾸는 DMZ·14]베를린 가는 길에서 만난 국경박물관

1천400㎞에 이르는 독일 DMZ, 그뤼네스반트 일대는 독일을 남북으로 가로지르고 있다. 그뤼네스반트는 통일 이후 개발과 보존 문제로 논란의 중심이 되기도 했다. 하지만 과거의 잘못을 바로잡아야 밝은 미래를 준비할 수 있다고 믿는 독일인들은 그뤼네스반트 인근에 분단 당시의 흔적들을 모아 전시하는 국경박물관이라는 것을 만들었다.한국의 DMZ박물관이 정부와 지방자치단체가 중심이 돼서 건립되었다면 독일은 독일인들 스스로 박물관을 건립하고 관리해 오고 있다. 독일 정부와 지자체들은 민간에서 만든 박물관이 유지될 수 있도록 지원을 하고 있다.함부르크에서 전쟁과 분단으로 아픔을 겪었던 독일의 발전 과정을 살펴본 후 베를린으로 가는 길목에서 국경박물관을 만났다.민간 자발적 건립… 정부에서는 유지 위한 지원 맡아슈빈마르크 박물관, 그뤼네스반트 관련 자료 전시동독 탈출 엘베강변 '슈낙켄부어그' 국경모습 복원# 슈빈마르크 국경박물관과 그뤼네스반트함부르크를 출발해 2시간가량 떨어져 있는 슈네가(Schnega)라는 마을에 있는 괴어(Goehr) 지역의 국경박물관으로 향했다. 이 박물관은 실제 국경에서 5㎞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다. 슈빈마르크(Swinmark) 국경박물관이라고도 불리는데, 슈빈마르크는 이 박물관을 지원해 주는 지원단체의 이름이다. 슈빈마르크는 오직 35명 회원의 회비와 기부금으로 운영되는 단체지만 박물관 지원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면 누구나 회원이 될 수 있다.슈빈마르크 국경박물관에 도착하자 푸근한 인상의 할아버지 한 분이 반갑게 맞아 줬다. "3년 전 북한을 방문한 적이 있다"며 한국에 대한 호감을 드러낸 이 할아버지는 슈빈마르크 박물관을 세운 디트리히 빌헬름 리쯔만(Dietrich-Wilhelm Ritzmann)씨다.리쯔만씨는 "분단의 참혹함과 통일 후의 기쁨을 기록하기 위해 박물관을 세우게 됐다"고 소개했다.이 곳에 전시되어 있는 전시물들은 괴어 지역을 중심으로 한 그뤼네스반트 관련 자료들이다. 리쯔만씨가 청소년 시절부터 찍은 사진 500여장 중 일부가 전시되어 있고, 그뤼네스반트 지역의 휴전선은 어떤 형태로 조성되어 있었는지도 소개하고 있다. 철조망도 당시에 있던 그대로를 전시했고, 분단 당시 군용차량들과 물자, 서류 등도 전시되고 있다.리쯔만씨는 자신이 수집한 각종 자료들을 소개한 후 휴전선이 있던 지역으로 이동해 분단 당시 동독 초소와 막사 등도 소개해 줬다.# 강변에 위치한 슈낙켄부어그 국경박물관 두 번째 국경박물관을 위해 엘베강 유역 니더작센주에 위치한 슈낙켄부어그로 향했다. 슈낙켄부어그(Schnackenburg)는 분단 당시 강을 통해 동독을 탈출하는 사람들이 많이 이용했던 지역이다. 슈낙켄부어그 지역에도 당시 모습들을 보여주는 국경박물관이 건립되어 있다. 독일 지역의 여느 국경박물관과 마찬가지로 이 곳도 지역 이름을 따 슈낙켄부어그 국경박물관이라고 불리고 있다. 슈낙켄부어그 국경박물관은 내륙에 위치한 슈빈마르크 국경박물관과 달리 해상에 위치한 국경지역의 모습을 사진과 당시 서류, 신문자료 등을 통해 소개하고 있다. 특히 1970년대에 동독에 있는 국경지역 주민들을 국경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곳으로 강제 이주를 시켰는데, 그것을 피하고자 강을 넘어 서독으로 탈출하는 장면이 담긴 사진도 전시되어 있다.1998년 슈낙켄부어그 국경박물관 지원단체와 그 주변 지역의 도움으로 국경선을 따라 10㎞에 이르는 길에 당시 구동독 지역의 국경모습을 복원했다. 강 주변이면서 많은 이들의 발길이 닿지 않은 곳이어서 각종 희귀 동·식물들이 관찰되고 있다.지난 2000년에는 자연학습 체험지역으로 선정되어 칼 카우스(Karl-Kaus) 재단의 지원을 받아 자연 그대로 보전되고 있다.글·사진┃김종화기자※이 취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2012-11-06 김종화

[희망을 꿈꾸는 DMZ·13]독일 경제 재건을 이끈 함부르크

독일은 제2차 세계대전의 패전으로 전범국으로 전락했다. 일반적으로 전쟁에서 패한 국가는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지만 독일은 이런 일반적인 사례와 다른 모습을 보이고 있다. 독일은 2012년 상반기 기준 국내총생산(GDP)이 3조4천787억달러로 세계 4위의 경제 대국이다. 독일 앞에 이름을 올리고 있는 국가는 미국(15조6천억달러), 중국(7조9천억달러), 일본(5조9천억달러)이다. 한국은 GDP 1조1천억달러로 15위에 올라 있다. 독일의 국내총생산이 한국의 3배에 이르는 것에서 알 수 있듯 독일은 세계경제, 특히 유럽연합을 이끌고 있는 경제 대국이다.자유한자도시 함부르크 중세부터 특권 / 패전·통일 악재속 '유럽 무역의 중심' 버팀목1956년 복원이후 비약적 발전 / 엘베강 유람선 관광·아름다운 항만시설 사람들 몰려냉전시대 서독경제는 '자유방임주의'가 아닌 '사회적 시장경제'를 채택했다. 한국인에게 생소한 '사회적 시장경제'는 생산·소비·직업선택 등에 대해서는 자유 경쟁에 맡기지만 시장형태 등을 포함한 사회적 질서의 형성·유지에 대해서는 국가가 경제·사회 정책을 통해 책임을 지는 것을 말한다.서독은 냉전시기 '사회적 시장경제'로 빠르게 경제 회복에 성공해 '서독 경제의 기적'이라고 불리는 경제 부흥기를 맞았다. 하지만 통일 후 독일 경제는 또다시 혼란에 빠지게 된다. 통일 당시 동독주민의 노동생산성이 서독의 5분의 1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독일정부는 구동독경제의 전면적인 개편을 통해 2000년대 경제 대국으로서 다시 한 번 우뚝 선다.# 중세부터 시작된 함부르크의 역사함부르크의 역사는 9세기 초로 거슬러 올라간다.당시 칼 대제는 작센주를 거점 삼아 그 주변 지역 및 북유럽의 선교활동을 위해 교회를 세웠다.칼 대제는 교회와 주민들을 보호하기 위해 작은 성을 쌓았는데 그 성의 이름이 하마부르크(Hammaburg)였고, 그것이 현재 함부르크(Hamburg)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된 것이다. 그 후 1189년 황제 바바로사 프리드리히 1세는 당시 십자군전쟁 때 함부르크의 큰 도움에 감사하는 의미로 황제의 이름으로 특권을 허락하게 되는데 그 특권은 총 4가지로 이루어졌다.함부르크에서 북해에 이르는 지역까지 세금을 내지 않아도 되었으며, 군대의 의무가 없어졌으며(다만 자체도시를 지키기 위한 군인은 존재), 함부르크 주변 15㎞ 지역까지 성을 짓지 않아도 됐다. 가축을 기르고 물고기를 잡으며 산지를 개간할 수 있게끔 허락이 되었다. 이러한 일들로 인해 함부르크가 중세 이후부터 유럽 상업에 있어서 중요한 도시 중 하나로 자리 잡을 수 있게 됐다. 19세기에 이르러 엘베강에 많은 부두가 형성되어 발전되어 왔다.# 독일 경제의 중심 함부르크항독일 경제가 제2차 세계대전의 패전, 통일이라는 악재 속에서도 빠르게 재건될 수 있었던 건 유럽 무역의 중심이었기 때문이다.독일도 유럽의 여느 나라와 마찬가지로 원유와 전기공학제품 등은 수입하지만 자동차, 기계류, 화학제품 등은 수출을 하고 있다. 하지만 수출과 수입의 비중을 따졌을 때 수입하는 것보다 수출의 비중이 높다. 2005년 독일은 수출 1조295억달러, 수입 8천185억달러로 흑자를 기록했다.독일 경제를 이끈 무역의 중심은 함부르크다.함부르크의 정식명칭은 자유한자도시 함부르크다.현재 함부르크는 독립된 주이자 시이기도 한데, 항구를 가지고 있다는 지리적 장점 외에 수세기 동안 자유 한자도시로서 정치적 독립을 유지할 수 있어서 베를린에 이어 독일에서 두 번째로 큰 도시를 이루는 계기가 되었다.1930년대 세계공황으로 인해 많은 실업자가 생기고, 선박주문 및 물동량이 줄어들게 되어 산업전반이 침체됐지만, 이는 나치시대로 이어지면서 외부로의 물동량이 금지되는 등 항구의 이용이 줄어들었다. 하지만 군함 및 잠수함 그리고 많은 군수산업품의 생산지로 변했고 군수물자의 생산을 막기 위해 연합군의 주 폭격이 이뤄져 80%가 파괴됐다. 1956년에 복원이 결정됐고 처음에는 발전소와 저장소가 설치됐다. 컨테이너 터미널이 생기고 컨테이너를 옮기는 기계들이 새로 변형 발전되어 나옴에 따라 발전하기 시작했다. 그 후 함부르크항은 사회주의 국가들의 개방과 여러 아시아 국가들과의 계약으로 다시금 세계적인 항구로 발돋움하게 된다. 1990년에서 2007년 사이에 총 매출은 두 배 이상 올랐으며, 2008년에는 1억4천만t에 이르렀다. 2011년에는 1억3천200만t으로 약간 줄었다.유럽 무역의 중심 함부르크는 관광지로도 인기를 끌고 있다. 유럽에서 출발하는 크루즈 여행의 중심 항구 역할을 하기도 하고, 아름다운 항만시설 자체가 인기 관광 상품으로 꼽히기도 한다.유람선을 타고 함부르크항의 역사와 다양한 시설을 둘러보는 관광 상품은 가장 많은 사람들이 찾는다. 또 중세부터 사용해 오고 있는 함부르크 시청사, 도시 주변에 흐르고 있는 엘베강 지류를 이용한 유람선 관광 등도 인기를 끌고 있는 관광 상품이다.함부르크는 무역항으로서의 역할을 바탕으로 문화유산, 자연환경 등을 활용한 관광 상품으로 독일 경제를 이끌고 있다.글┃김종화기자 ※이 취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2012-10-30 김종화

[희망을 꿈꾸는 DMZ·12]분단국가에서 세계의 중심에 선 독일

분단국가란 본래는 하나의 국가였지만 전쟁이나 외국의 지배로 인해 강제로 2개 이상으로 나뉜 국가를 말한다. 제2차 세계대전이 종료된 후 분단국가는 3곳에서 탄생했다. 아시아에서는 한국과 베트남, 유럽에서는 독일이다. 베트남은 1945년 일본이 패전하자 재빨리 독립을 선언한 호찌민을 중심으로 한 베트남 민주공화국(월맹)과 북위 17도선 북쪽에 위치한 북베트남으로 나뉘었다. 베트남은 20여년에 걸친 긴 전쟁을 거쳐 지금은 하나의 국가가 됐다. 제2차 세계대전에 패하며 동서로 나뉘었던 독일도 1990년 하나의 국가가 됐다. 그 결과 한국은 세계에서 유일한 분단국가가 됐다. 독일 통일에 시선이 가는 이유는 전쟁 없이 평화통일을 이뤄냈다는 점이다.뤼벡~체코 국경 이어진'그뤼네스 반트'환경자원 가치 커정부차원 프로젝트 진행자치주별 특화프로 운영미래세대에 체계적 교육# 제2차 세계대전과 분단독일의 분단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문제를 논의한 포츠담협정에서부터 시작된다. 1945년 8월 포츠담회담에서 미국과 영국, 프랑스, 소련 등 4개의 연합국이 독일을 점령하기로 합의한다. 하지만 자유진영 세력인 미국과 영국, 프랑스는 점령지에 자유주의(서독) 정권을 출범시켰고 소련도 공산주의(동독) 정권을 출범하며 하나의 국가가 두개로 나뉜다. 독일의 수도인 베를린도 4개국 공동 관리 하에 놓여 있었지만 미국을 중심으로 한 서방 3개국과 소련의 갈등으로 동·서 베를린으로 나뉘었다.각기 다른 정치 체제를 바탕으로 갈등을 빚어 오던 동·서독은 1972년 '동·서독기본조약'을 체결해 관계 정상화에 성공했다. '동·서독기본조약'의 주요 골자는 양국 관계를 갈등에서 평화공존체제로 전환하는 것과 상호방문, 이산가족결합, 경제와 문화적 교류 등이다. 다음해인 1973년에는 유엔에 동시 가입함으로써 국제 사회에 2개의 국가로 인정받았다.동독은 1민족 2국가를 주장하고 있었고 대외적으로는 제2차 세계대전으로 인한 통일 이후 독일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높아 통일에 대한 논의는 본격적으로 진행되지 못했다.독일 통일의 본격적인 논의는 80년대 중반 소련이 개방·개혁 정책 노선을 걷기 시작하면서 이뤄졌다. 많은 동구권 국가들이 소련의 개방·개혁 정책을 수용하는 분위기였지만 동독 정치권에서는 개방을 거부하고 있었다. 하지만 동독 주민의 저항운동이 거세졌고 급기야 1989년에는 동베를린에 있는 서독 상주대표부에 대거 출국 신청을 하는 상황이 발생했다.같은 해 10월 동독 건국 40주년 기념일에 대규모 시위가 드레스덴에서 발생했고 이후 전국적으로 저항운동이 확산됐다.1989년 12월 동독 정부가 베를린장벽을 공식적으로 개방함과 동시에 정치 개혁을 단행했다. 1990년 7월1일 동·서독 정부가 경제·통화·사회통합 등에 합의하며 통일을 이뤄냈다.# 독일의 DMZ 어제와 오늘독일인들은 동·서독 분단당시의 휴전선을 '그뤼네스반트'(Gruenes band)라고 부른다.그뤼네스반트는 슐레스빅 홀스타인(Schleswig-Holstein) 주의 뤼벡(Lubeck)부터 체코의 국경까지 이어지는 1천400여㎞ 구간에 이어져 있었다. 한국의 DMZ는 휴전선을 기준으로 남쪽으로 2㎞, 북쪽으로 2㎞로 총 4㎞의 폭으로 되어 있는데 비해 독일의 DMZ인 그뤼네스반트는 휴전선을 기점으로 각각 남북으로 좁은데는 50m 넓은데는 200m의 폭으로 되어 있었다.보통 한국 사람들이 독일을 떠올리며 생각하는 분단 장벽은 베를린 뿐 아니라 독일 전역의 그뤼네스반트에 걸쳐 세워져 있었다. 독일인들에게 그뤼네스반트는 분단을 상징하기도 하지만 환경 자원으로서의 가치도 높이 평가 받고 있다.독일 정부와 그뤼네스반트가 위치한 자치주, 시민사회단체인 반트(BUND)라는 단체가 중심이 돼서 체계적인 관리 방안을 모색 중이다.특히 독일 정부는 시민사회단체인 반트의 전문직 채용을 지원해 독일 전역에 걸쳐져 있는 '그뤼네스 반트'의 운영 방안에 대해 중장기 프로젝트를 운영하고 있고, 반트 관계자가 독일 정부와 함께 수립한 중장기 프로젝트는 자치주별 특성에 맞게 운영되고 있다는 점도 특이하다.그뤼네스 반트에 대한 독일 정부와 독일 국민들의 관심은 미래 세대들이 그 가치를 배울 수 있도록 어린이와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한 그뤼네스 반트 환경 교육을 진행하는데서도 알 수 있다.시민사회단체인 반트는 '그뤼네스 반트'의 환경을 조사해 교육 프로그램을 만들어 보급하고, 자치주에서는 주별 특화 프로그램을 개발해 국민들이 이용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글┃김종화기자 ※이 취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2012-10-16 김종화

[희망을 꿈꾸는 DMZ·11]분단현실을 느끼는 '평화누리길' 3-고양·김포구간

고양시와 김포시는 수도권 시민 중 전원 생활을 꿈꾸는 사람들이 선호하는 도시다.조용하고 아름다운 자연 환경이 매력인 고양과 김포는 도심 내에 다양한 문화 레저시설이 위치해 있다는 점도 장점이다. 서울 번화가와 1시간 이내에 접근할 수 있다는 점, 청정한 경기도 북부지역과 강원도 지역의 교통 연계성이 뛰어난 점 등도 고양과 김포에서의 전원생활을 꿈꾸는 이유다. 정작 그 도시 속을 거닐다 보면 분단의 아픔이 스며들어 있다. 한강을 사이에 두고 나란히 위치해 있는 고양과 김포는 혹여 발생할지 모르는 남북간의 극한 상황을 대비하기 위해 시 경계선을 따라 휴전선이 위치해 있다. 이로 인해 한강 주변의 개발이 제한되기는 했지만 오히려 자연 그대로 보전될 수 있었다.고양구간 23.7㎞ 행주산성~장항습지~호수공원~심학산 둘레길 '유유자적'김포구간 北 마을 한눈에 들어오는 애기봉 전망대… 전류리 포구서 마침표# 도심 외곽의 한적함을 느낄 수 있는 고양평화누리길 고양구간은 행주산성에서 시작해 파주 출판도시로 이어지는 23.7㎞ 구간이다. 주산성은 조선 임진왜란 3대 대첩으로 불리는 행주대첩 역사의 현장이다. 덕양산의 능선에 축조된 행주산성은 삼국시대부터 토성을 쌓을 만큼 군사적으로 중요한 위치에 있다. 산성에는 권율 장군의 사당인 충장사와 행주대첩비가 자리한다. 행주산성에서는 서해바다로 흘러가는 한강의 아름다움을 살펴 볼 수 있다. 1구간은 이곳 행주산성에서 호수공원까지 가는 10.1㎞ 구간이다.동네 뒷길을 걷는 듯한 느낌이 드는 1구간은 이정표를 따라 행주나루터를 지나 제2 자유로 밑 터널을 지나기도 하고, 밭을 일궈 채소를 심는 풍경을 볼 수도 있다. 행주대교 아래에서는 농로를 걷는 길이 다소 지루하기도 하지만 한적한 도시 외곽 마을과 농촌 풍경을 함께 즐길 수 있다는 점이 매력이다. 한강변을 거닐때는 철책선 밖으로 한강과 그 곁에 자리한 장항습지가 펼쳐진다. 2구간은 고양의 상징으로 불리는 호수공원에서 출발해 심학산 둘레길을 거쳐 파주 출판도시까지 이어지는 13.6㎞구간이다. 13.6㎞라는 구간이 길게 느껴질 수 있지만 보통 성인이 평지를 1시간에 4㎞를 걷는다는 생각을 한다면 여유 있게 거닐더라도 4시간이 채 안되는 거리다. 2구간은 호수공원을 거쳐 킨텍스를 지나면 우리나라에서 가장 먼저 벼농사가 이뤄진 송포평야에 들어서게 된다. 송포평야에서 한가로운 한때를 즐긴 후 심학산 둘레길을 따라 삼림욕을 즐기면 코스가 끝난다.# 철책선을 따라 거니는 김포총 39.4㎞ 길이의 평화누리길 김포구간은 대명항에서 시작해 전류리포구까지 이어져 있다. 길이가 긴 까닭에 3개 구간으로 나뉘어 있고 대명항에서 시작돼서 문수산성까지 이어지는 1구간(15.4㎞)은 강화해협을 따라 거닌다. 문수산성에서 애기봉으로 이어지는 2구간(8.0㎞)은 접경지역의 다양한 풍경을 느낄 수 있고 애기봉에서 시작해 전류리 포구로 이어지는 3구간(14.9㎞)는 한적한 시골길을 거닐며 자신을 돌아볼 수 있다. 1구간의 시작점인 대명항은 김포시에서는 하나 밖에 없는 포구다. 규모는 작지만 어시장과 어판장에서 서해의 풍요로운 해산물을 맛볼 수 있다. 또 덕포진과 덕포진교육박물관 등은 함께 둘러볼 수 있는 곳이다. 문수산성은 1866년(고종3년) 병인양요 때 프랑스군과의 격전지로 호국안보의식을 되새겨 볼 수 있는 문화 유적지고 애기봉 전망대는 정상 높이가 155m의 그리 높지 않은 위치에 있지만 전망대에서 망원경으로 북한의 선전마을과 송악산 등을 볼 수 있어 관광객과 실향민이 많이 찾는 곳이다.애기봉에는 병자호란 때 애기라는 이름의 여인이 청나라에 끌려간 사랑하는 사람을 그리워하며 병들어 죽어 가면서 '님'이 잘 바라보이는 봉우리에 묻어 달라고 유언했다고 한다. '애기' 사연을 들은 박정희 대통령이 1966년 애기봉이라 명명하고 친필로 휘호를 써서 비석을 세웠다. 애기봉 전망대는 민간인통제구역 안에 위치해 있기 때문에 출입통제소에서 신고서를 작성해야 출입할 수 있다.김포구간의 마지막인 전류리 포구는 강건너 북한의 개풍군과 마주하고 있는 최북단의 포구다. 서해의 밀물시 강물을 거꾸로 흐르게 하여 전류리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주변에 조강포, 신리포 등이 있었지만 분단으로 인해 사람들의 출입이 통제되면서 전류리 포구가 남한에서 가장 북쪽에 위치한 포구가 됐다.글┃신창윤·김종화기자 ※이 취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2012-10-09 신창윤·김종화기

[희망을 꿈꾸는 DMZ·10] 분단 현실을 느끼는 '평화누리길' 2-파주구간

경기 북부권역 기초지방자치단체 중 파주시는 전원생활을 꿈꾸는 수도권 시민들이 살고 싶어하는 도시 중 하나다. 파주는 최북단 도시라는 이유로 개발이 제한된 탓에 대표적인 도농 복합도시로 발전해 왔다. 자유로를 타고 파주로 들어서면 차창 밖으로 부지런한 농부들이 일궈 놓은 논과 밭에서 여러가지 곡식들이 자라고 있다.철책선 인근에 위치한 연천군과 철원군, 양구군 등과는 달리 파주에서는 곳곳에 공업단지가 자리하고 있는 것도 볼 수 있다. 최근에는 국내·외 안보관광객이 급증하며 임진각을 비롯해 통일촌, 해마루촌, 제3땅굴 등도 관심을 끌고 있다.4개구간 57.5㎞ 출판도시 시작으로재두루미 도래지·평화누리공원 두루 거친후덕진산성등 문화유적 덤으로 구경… 장단콩축제·황포돛배 체험도 빠지면 섭섭# 강변을 따라 걷는 평화누리길 파주구간총 4개 구간 57.5㎞인 '평화누리길' 파주구간은 볼거리와 즐길거리가 풍성한 구간이다.'평화누리길' 파주구간은 트레킹 코스 전체 구간이 한강과 임진강을 따라 있다.강변을 따라 걷는 길이 자칫 지루할 수도 있지만 파주구간은 그렇지 않다.우선 파주 출판도시에서 시작해 성동사거리까지 이어져 있는 첫째 길에는 한강하류 재두루미 도래지와 공룡천하구습지, 통일동산과 오두산통일전망대, 프로방스 등을 거쳐 가게 되어 있다. 둘째길도 반구정까지 20.5㎞를 걸으며 자유로아쿠아랜드, 낙하나루, 사목나루, 문산습지 등을 둘러 볼 수 있고 셋째길에서는 임진각과 평화누리공원을 들른 후 걸을 수 있도록 코스가 되어 있다.마지막 코스인 넷째길에서는 조용한 전원마을 따라 황포돛배까지 사색을 하며 거닐 수 있는 길이다.무엇보다 파주구간이 매력적인 것은 여느 안보관광과 달리 문화유적지를 살펴 볼 수도 있고 아름다운 한탄강변의 풍광을 감상하며 자신을 돌아보고 산책하듯 거닐 수 있다는 점이다.# 한국 최대 안보관광지 파주휴전선 인근에 위치해 있다는 것은 개발에 제한을 받는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파주시도 마찬가지였다. 파주는 정부의 경기북부지역 개발 독려로 인해 공단이 조성되기도 하고 몇몇 대기업이 공장을 이전시키기도 했지만 개발이 자유롭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또 휴전선 인근의 수많은 부대, 그리고 민간인통제구역으로 인한 지역 개발의 한계 등 파주는 여타 경기도지역 기초지방자치단체와 달리 분단으로 인해 여러가지 제약을 받고 있지만 그 단점을 장점으로 극대화 시키고 있다.그 대표적인 곳중 하나가 임진각과 평화누리공원이다. 200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실향민들이 갈수 없는 고향에대한 그리움을 달래기 위해 방문했던 곳이 임진각이다. 하지만 평화누리공원이 조성되며 서울을 비롯해 수도권 시민들의 주말 여행지로 인기를 끌고 있다. 최근 몇년 사이 중국 단체 관광객을 유치하며 국제 관광도시로 발돋움할 기세다.# 안보 관광과 체험형 관광경기도와 파주시가 의욕적으로 개발하고자 하는 안보관광지는 통일촌과 해마루촌 일대다. 비무장지대 남쪽 민간인통제구역 내에 위치한 통일촌과 해마루촌은 인근에 도라전망대와 제3땅굴, 121무장공비침투로 등의 안보 유적이 위치해 있다.또 덕진산성, 문성부원군묘, 허준선생묘, 마애사면석불 등의 문화유적도 함께 위치해 있다.90년대까지 남북간의 냉전 분위기로 인해 민간인들이 접근할 수 없는 곳이었지만 2000년대 화해 분위기가 조성되며 특별한 사유가 없는 한 미리 신청한 사람에 한해 방문이 허락되고 있다.파주는 이들 민간인통제구역 안에 위치한 다양한 관광 상품들과 연계한 체험형 관광상품을 개발해 타 기초지방자치단체와의 차별화에도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대표적인 것이 통일촌의 장단콩을 활용한 체험 상품 개발이다. 통일촌은 1998년 영농조합법인을 설립해 지역 대표 축제로 자리잡은 파주 장단콩 축제를 매년 개최하고 있다. 또한 2004년 슬로푸드 마을로 지정된 후 장단콩 꼬마 장승제, 지신밟기, 콩밭메기, 멧돌체험, 장 담그기. 김장, 전통문화 배우기 등의 체험상품을 개발해 운영해 오고 있다.또다른 파주시의 체험형 관광상품은 황포돛배다.황포돛배는 조선시대 조운선으로 활용되기도 했고 한강을 왕래하는 서민들의 대표 운송 수단으로 이용되기도 했다. 남북이 분단되며 임진강은 일반인의 출입이 금지되고 있다. 군부대로부터 허가를 받은 일부 어민만이 어업활동을 할 수 있는 정도다. 하지만 민·관·군의 협의 끝에 황포돛배가 임진강에서 운행하던 모습을 재현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두지나루에서 출발한 황포돛배가 고랑포 여울목까지 6㎞ 구간을 운행하며 거북바위와 자장리적벽, 괘암, 호로고루성, 원당리 적벽과 흑도, 상룡바위 등을 유람할 수 있다. 황포돛배를 타며 황토염색, 가을농사 수확체험, 솟대만들기, 도자기체험 등 전통 문화체험도 함께 할 수 있다. 글┃신창윤·김종화기자 ※이 취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2012-10-02 신창윤·김종화

[희망을 꿈꾸는 DMZ·9]분단현실을 느끼는 길 '평화누리길' 1-연천구간

민간인통제선 부근을 걷는 트레킹 코스인 '평화누리길'은 중앙정부와 경기도가 안보 관광과 트레킹을 접목시켜 만든 이색적인 코스다. 김포에서 시작해 연천까지 경기도 지역 4개 시·군에 걸쳐 있는 '평화누리길'은 민간인통제선 부근의 풍광을 살펴 볼 수 있는 183.8㎞의 대장정이다. 제주도 '올레길', 지리산 '둘레길', 강릉의 '바우길', 강원도의 '산소길', 전라북도의 '마실길' 등 아름다운 풍광을 감상하며 거닐 수 있는 길들이 즐비한 요즘 '평화누리길'은 수도권 시민들에게도 생소하다.'평화누리길'에 대해 소개하며 '이색적'이라는 단어를 쓴 것은 여느 걷는 길과 달리 민간인통제선 부근을 걷기 때문이다.민간인통제선 부근을 걷는 까닭에 코스 중간중간 수많은 군부대들을 만난다. 또 군사보호지역인 까닭에 개발이 멈춰져 있는, 즉 시간이 멈춰져 있는 듯한 착각을 하게 만드는 소박한 시골풍경을 만날 수 있다.# 연천, 평화누리길 63.2㎞에서 만나는 풍경연천군 하면 대부분 전곡리선사유적지와 한탄강을 떠올린다. 연천군은 경기도 최북단에 위치하고 있는 기초지방자치단체다.남북이 대치하고 있는 DMZ 부근에 위치한 연천군은 삼국시대부터 치열한 각축전을 벌였던 전략 요충지였다. 백제가 건국 후 지배했던 연천군은 고구려 광개토대왕이 남진정책을 펼칠 당시 고구려 영역으로 편입됐다. 신라 진흥왕은 연천을 고구려로부터 빼앗아 한강 진출의 기반을 다지기도 했다.한국전쟁 직전에는 북한이 남한을 공격하기 위해 군사 요충지로 활용하려고 했던 곳이 연천이다.서울과 원산을 이어주던 경원선의 중간지점인 연천역에는 증기기관차에 물을 공급하기 위해 설치된 급수탑(등록문화재 제45호)이 남아 있다. 한국전쟁 발발 이전에 38선을 사이에 두고 남북한이 대립하고 있을 당시 북한은 남침용 전쟁물자와 전차를 전방 부근 역까지 수송하기 위해 240m가량의 화물 홈을 설치했었다.현재 경원선의 종단점인 신탄리역에서는 더 이상 북쪽으로 향하지 못하는 열차를 통해 분단의 현실을 느낄 수 있다. 3개코스 63.2㎞ 신탄리역서 마침표'분단 상징물' 경원선 거닐며 산책태풍전망대등 '안보 5경' 둘러볼만'평화누리길' 경기도 구간은 대한민국의 최북단 역인 신탄리역에서 끝난다. 반대로 생각한다면 평화누리길 경기도 구간은 신탄리역에서부터 시작된다고 말할 수도 있다.'평화누리길' 연천 구간은 3개 코스 총 63.2㎞ 길이다.첫번째 구간은 장남교부터 숭의전지까지의 21.7㎞고, 둘째 구간은 숭의전지부터 군남홍수조절지까지 18.9㎞, 세번째 구간은 군남홍수조절지에서 신탄리역까지의 22.6㎞ 구간이다.'평화누리길' 연천구간의 특징은 한탄강변과 경원선 철로를 거닐 수 있다는 점이다. 지금은 분단으로 인해 갈 수 없는 강원도 평강군에서 발원한 한탄강은 철원을 거쳐 연천을 지난다.분단된 한탄강과 경원선, 한반도의 현실을 대변하고 있는 상징물 중 하나다. 한강 이남에 거주하는 수도권 시민들에게 분단은 다른 나라 이야기와 같이 들린다. 하지만 '평화누리길' 연천구간에서 만난 한탄강과 경원선, 그리고 길 주변에 자리한 수많은 군부대들이 아직도 전쟁이 끝나지 않았음을 말해주고 있다.# 연천에서 찾은 분단의 흔적, 연천 안보5경연천 안보5경은 태풍전망대, 1·21무장공비침투로, 철도종단점, 열쇠전망대, 상승OP와 제1땅굴 등을 꼽아서 말한다.태풍전망대는 휴전선까지 800m, 북한초소까지는 1천600m의 거리에 떨어져 위치한 남쪽에 위치한 전망대 중 북한과 가장 가까운 거리에 위치해 있는 곳이다.태풍전망대에는 국군 장병들이 종교 집회를 가질 수 있는 교회·성당·성모상·법당·종각 등이 있고 북녘에 고향을 두고 떠나온 실향민의 망향비와 한국전쟁의 전적비, 6·25참전 소년전차병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전시관에는 이곳으로부터 2㎞ 떨어진 임진강 필승교에서 수습한 북한의 생활필수품과 일용품, 그리고 휴전 이후 수십 회에 걸쳐 침투한 무장 간첩들이 이용한 침투장비 일부가 전시되어 있다.1·21무장공비침투로는 1968년 1월17일 밤 11시 북한군 제124군 소속 김신조 외 30명이 남방한계선을 넘어 침투한 곳이다. 김신조 일당은 1월20일부터 30일까지 전개된 소탕작전을 통해 29명이 사망하고 1명 도주, 1명이 체포(김신조) 됐다. 이 곳 침투로에는 미군 제2사단 방책선과 경계부대에서 설치한 경계철책과 철조망을 뚫고 침투한 무장공비의 모형물이 전시되어 있다.열쇠전망대는 육군 상승 열쇠부대가 북녘을 한눈에 바라볼 수 있는 지역에 안보 교육과 망향의 한을 달래기 위해 설치한 전망대다. 상승OP는 적의 활동을 관측하기 위해 운용되는 최전방 관측소고 제1땅굴은 1974년 11월15일 발견된 북한의 남침용 땅굴이다.경원선이 회차역인 신탄리역에는 철도종단점이라는 표지가 있었지만 최근 신탄리역과 철원역 연결 공사가 진행되며 철거됐다. 하지만 분단의 흔적을 느끼기 위해 경원선을 탑승한 안보관광객들은 신탄리역에서 멈춰선 열차를 보며 더이상 달리지 못하는 철마의 아쉬움을 느낀다.글┃신창윤·김종화기자 ※이 취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2012-09-19 신창윤·김종화

[희망을 꿈꾸는 DMZ·8]잊혀진 마을, 희망을 일구는 마을

비무장지대(DMZ·demilitarized zone)와 민간인 출입통제선(CCL·Civilian Control Line)은 아직도 전쟁이 끝나지 않았음을 알려주고 있다. 전쟁이 멈춰져 있는 지금 비무장지대와 민간인 출입통제선은 또 다른 전쟁의 시발점이 될 수도 있지만 평화의 상징으로 남을 수도 있다. 비무장지대, 즉 DMZ는 1953년 7월 27일'한국군사정전에 관한 협정'에 따라 남한과 북한이 군사분계선을 중심으로 2㎞씩 물러나 비무장지대를 만든 것이다. 휴전선이라고도 불리는 군사분계선은 동해안의 간성 북방에서 서해안의 강화 북방까지 155마일(250㎞)이다. 민간인 출입통제선, 즉 민통선은 비무장지대 바깥 남방한계선을 경계로 남쪽으로 5~20㎞에 이르는 지역을 말한다. 비무장지대 바깥의 남쪽 철책선을 남방한계선, 북쪽 철책선을 북방한계선이라고 한다. 1953년 남북합의로 탄생한 '대성동마을' 북한 기정동과 800m 거리… 유엔사령부서 치안 담당파주지역 통일촌·해마루촌등 3곳 820명 거주재산권 행사·출입때 신원조회 많은 제약 받아남방한계선은 휴전 다음 해인 1954년 미군이 휴전선 일대의 군사작전과 군사시설 보호, 보안유지를 목적으로 남방한계선 바깥으로 5~20㎞ 지역을 민간인 출입을 통제하며 만들어졌다. 비무장지대 안은 유엔사령부에서 관리하고 있다. 미군에 의해 만들어진 민통선은 1958년 휴전선 방어 임무를 한국군이 담당하고 출입영농과 입주영농을 허가하면서 귀농선이 민통선이라는 이름으로 바뀐다.# 전쟁으로 인해 잊혀진 마을한국전쟁이 발생하기 전 DMZ와 민통선 안도 한반도의 여느 마을과 같이 평범한 삶을 일궈 오던 곳이었다. 한 연구자료에 따르면 한국전쟁 발생 전 이 곳에는 총 427개의 마을에 4천600여 동의 가옥이 있었다. 경기도는 244개의 마을에 2천200여동의 가옥이, 강원도는 183개의 마을에 2천300여개의 가옥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현재 사람이 살고 있는 DMZ와 민통선 안의 마을이 경기도 4개소, 강원도 6개소 등 모두 10개소에 1천여가구에 불과하지만 한국전쟁이 발발하기 전에는 수많은 마을이 있었다. 이 중 경기도 지역의 마을은 파주지역에는 군내면 조산리(대성동 자유의 마을), 군내면 백연리(통일촌), 진동면 동파리(해마루촌) 등 3개의 마을에 287세대 820명이 거주하고 있다. 연천군에는 중면 횡산리 1개 마을이 민통선 안에 위치해 있고 30세대 71명이 생업을 이어가고 있다. 이들 민통선 마을은 많은 제약을 받고 있다. 개발 제한으로 인해 재산권을 행사하지 못하는 것뿐 아니라 민통선 안에서 벗어나거나 다시 마을로 들어갈 경우 신원조회 절차를 밟아야 한다. 특히 이들 4개 마을 중 대성동 자유의 마을(이하 대성동 마을)은 비무장지대 안에 위치해 있어 유엔사령부가 치안을 담당하고 있다. # 희망을 꿈꾸는 마을 대성동 마을은 1953년 휴전협정에 의해 남북에 하나씩 민간인이 거주할 수 있는 마을을 두기로 합의하며 태어났다. 10개의 민통선 안에 위치한 마을 중 유일하게 DMZ 내에 위치한 대성동 마을은 군사분계선에서 400m밖에 떨어져 있지 않다. 대성동 건너편에는 북한의 DMZ 민간인 거주지인 기정동이 있는데 두 마을의 거리는 800m에 불과하다. 대성동 마을은 유엔군 사령부의 통제를 받는 치외법권지역이지만 대성동 마을 주민이 범법 행위를 하면 일단 마을에서 추방되는 형식을 거친 후 대한민국 법률에 의해 규제를 받는다.대성동 주민은 참정권과 교육을 받을 권리는 갖지만 국방의 의무와 납세의 의무는 면제된다. 대성동 주민 대부분은 농업으로 생계를 이어가고 있는데 여기서 나는 농산물은 청정한 자연에서 재배돼 비싼 가격에 판매되고 있다. 최근에는 대성초등학교의 특화 교육이 언론을 통해 알려지며 가고 싶은 학교로 인기를 끌기도 했다. 하지만 마을을 장기간 떠나 있을 때는 사령부의 허가를 받아야 하고 매일 저녁 호구 조사를 받는 등 제약을 받고 있다. 해마루촌과 통일촌은 DMZ 바깥 민통선 안에 위치해 있다. 통일촌은 1972년 박정희 대통령이 전방시찰 도중 '재건촌의 미비점을 보완한 전략적 시범농촌을 건설하라'는 지시에 의해 1973년 조성됐다. 통일촌 건설 당시 강원도 철원군 김화읍 유곡리에도 마을이 함께 조성됐다. 입주대상자는 군복무를 필한 사람, 전과가 없는 사람 등으로 제한해 제대를 앞둔 하사관 40세대와 지역 원주민 40세대 등 총 80세대가 입주했다. 장단콩 마을이라는 별칭은 이곳 주민들이 콩을 특산품으로 재배하면서 붙여진 이름이다. 해마루촌은 '동파리(東坡里)'라는 지명을 우리 말로 풀어서 쓴 이름이다. 해마루촌은 1998년 옛 장단군이 고향인 실향민 1세대와 2세대들을 위해 조성됐다. 해마루촌은 녹색농촌체험 마을을 꿈꾸고 있지만 민통선 안에 있다는 제약으로 인해 일반인의 숙박은 군에 의해 통제되고 있다. 해마루촌은 위성에서 보면 높은음자리표 형상을 띠고 있어 '높은음자리표 마을'이라고 불리기도 한다.글┃신창윤·김종화기자 ※이 취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2012-09-11 신창윤·김종화

[희망을 꿈꾸는 DMZ·7]안보관광자원으로서의 DMZ

DMZ는 남과 북으로 나뉜 분단의 상징이기도 하지만 '개발'과 '보존'이라는 상반된 입장이 첨예하게 대립되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개발과 보존 문제는 최근 파주시를 비롯한 경기도지역 DMZ 접경지역에 위치한 시·군들이 겪고 있는 복잡한 문제다. 하지만 개발과 보존을 주장하는 양쪽 모두 수긍하고 있는 것은 관광자원으로서의 활용이다. DMZ를 관광자원으로 개발하는 문제, 원시 생태자원 그대로를 보존하며 가치를 알리기 위해 환경자원으로서의 활용 등이 개발론자와 보존론자들의 또 다른 입장일 것이다. 군부정권 시절 '안보'를 하나의 정치적인 도구로 활용하기 위해 사용했던 것과 달리 최근 관광 트렌드를 보면 안보는 이색적인 체험 관광으로 자리잡아 가고 있는 추세다.# 떠오르고 있는 안보관광지 DMZ와 맞닿아 있는 경기도와 강원도는 DMZ로 인해 개발을 할 수 없다는 단점을 관광자원으로의 활용으로 만회하고 있다.두 지방자치단체는 각각 관광을 개발할 수 있는 전문 부서를 두고 지역 맞춤형 관광 자원 개발과 관광객 유치에 집중하고 있다.경기도지역의 대표 안보관광지는 DMZ 북쪽에 고향을 두고 있는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임진각이 있는 파주시다.파주시는 제3땅굴과 도라산전망대, 도라산역 등 민간인출입통제선 북쪽 안보관광지를 관광 상품으로 개발해 지난해 60만명의 관광객을 유치했다. 파주시의 사례가 눈에 띄는 것은 수년째 관광객이 증가세를 보이고 있다는 점과 해외 관광객을 유치하고 있다는 점 등이다.파주시를 방문한 관광객은 2007년 41만7천명, 2008년 43만5천명, 2009년 44만6천명으로 소폭 증가세를 보이고 있다.DMZ 관광 자원 개발에 대한 적극적인 투자가 시작된 2010년에는 51만명 유치에 성공했고 2011년에는 60만명 유치에 성공했다. 외국인 관광객도 외국인 2009년 17만2천명을 유치했고 2010년에는 24만1천명을, 2011년에는 28만5천명을 유치해 30만명 돌파를 눈앞에 뒀다.파주시가 수도권과 인접해 있다는 점을 적극적으로 활용했다면 강원도 지역 기초지방자치단체들은 여러 개의 안보관광자원을 묶어 프로그램을 개발하기 보다는 자유 관광을 중심으로 관광객 유치에 집중하고 있다.인제군과 철원군 등은 한탄강과 연계를, 고성은 해안가와 연계한 관광 자원을 개발해 관광객 유치에 나서고 있다. 특히 양구는 펀치볼 분지와 민간인통제구역 안에 위치한 두타연 등으로 인해 국내 최대 안보휴양관광지로 떠오르고 있다. 지난해 철원군은 102만명을, 인제군은 100만명을 유치했고 고성군은 483만명을 유치하는 등 여느 광역자치단체의 한해 유치 규모와 맞먹는다.강원도는 이들 3개 지자체 외에도 춘천시, 화천군, 양양군 등에 위치한 안보 자원들을 이용해 관광 상품을 만드는데 집중하고 있다.# DMZ와 안보 관광임진각과 해마루촌, 제2땅굴과 제3땅굴, 펀치볼, 한반도섬, 각종 민간인통제구역 안의 전망대, 전시관 등.경기도와 강원도 지역의 안보관광 자원은 대부분 전쟁의 흔적을 살펴 볼 수 있는 자원들에 국한되어 있다.현재 활용되고 있는 안보 관광자원들이 지방자치단체들의 관광객 유치에 상당히 큰 역할을 하고 있지만 지속적인 관광객 유치를 위해서는 전쟁의 흔적을 살펴보는 안보 관광에 국한돼서는 안된다.더 많은 관광객 유치를 위해서는 원시 그대로 보존되어 있는 자연 자원을 이용한 생태 관광의 개발이 필요한 것이다.이런 대안으로서 성공한 사례가 금강산 가는 길로 알려져 있는 양구 두타연 방문 프로그램이다. 민간인통제구역 안에 위치한 두타연은 지난 2009년 50년 만에 처음으로 개방됐다.2010년 수천 명에 국한됐던 일반인들의 두타연 방문은 입소문을 타고 알려지며 지난해 2분기에 5천700여명을 유치한 것을 비롯해 3분기 9천962명이, 4분기 9천500여명이 방문했다.양구군은 내륙 깊숙이 있다는 단점에도 불구하고 두타연과 펀치볼 분지를 활용해 2010년 19만여명의 관광객을 유치했고 2011년에는 20만여명의 관광객 유치에 성공했다.지난해 말 기준으로 2만2천여명에 불과한 인구가 거주하는 양구군의 입장에서는 작은 기적을 일군 것이나 다름없다.양구군은 관광객 유치를 발판으로 청정한 자연에서 생산한 농산물 판매도 증가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글┃신창윤·김종화기자※이 취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2012-09-04 신창윤·김종화

[희망을 꿈꾸는 DMZ·6] 생태 자원의 보고

한반도를 가로지르고 있는 DMZ는 아픈 역사를 담고 있다. DMZ는 1970년을 전후한 개발과 성장이라는 국가 정책에서 비켜나 생태 보고로 우리에게 남을 수 있었다. 반세기 넘게 사람들의 접근이 통제되면서 세계 어디에서도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생태계가 됐다.DMZ의 지형은 한반도의 지형적 특징인 동고서저(東高西低) 지형을 잘 나타내고 있다. 가장 동쪽에 위치한 동해안 지역은 급경사의 산지와 해안지역이고, 중등부지역은 백두대간을 잇는 높은 산악지역이다. 연천군과 철원군 등의 중부 내륙지역은 용암대지로 이뤄져 있고, 서부해안은 구릉지와 염습지로 되어 있다. 이러한 지형적인 형태는 그대로 보존되며 다양한 생태환경을 형성해 자연 그대로의 한반도 생태를 연구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 주고 있다.# 경기도의 임진강과 한강하구 습지들습지의 보호와 지속 가능한 이용에 관한 국제 조약인 람사르협약은 습지에 대해 이렇게 정의하고 있다."습지는 자연적이거나 인공적이거나, 영구적이거나 일시적이거나, 물이 정체하고 있거나, 흐르고 있거나, 담수이거나 기수이거나 관계없이 소택지, 늪지대, 이탄지역 또는 수역을 말하고 여기에 간조시 수심 6m를 넘지 않는 해역을 포함한다. 즉 습지는 갯벌, 호수, 하천, 양식장, 해안은 물론 논도 포함한다." 대한민국의 습지보전법에는 습지를 "담수, 기수 또는 염수가 영구적 또는 일시적으로 그 표면을 덮고 있는 지역으로서 내륙습지 및 연안습지를 말한다"고 정의하고 있다.습지에 대한 정의가 기관마다 다르게 표현되고 있지만 습지란 보호되어야 할 가치있는 공간이라는 것은 공통적이다. 습지는 어류와 조류는 물론 포유류와 양서류, 파충류 등 각종 야생동물의 서식처가 되고 있다.임진강과 한강하구에는 습지보전법으로 보호받고 있는 10여개의 습지 보호지역이 있다. 습지별로 보면 그 생태적인 가치가 높은 것을 쉽게 알 수 있다.우선 임진강의 초평도습지는 쇠기러기와 재두루미가 관찰되고 있고 장단습지는 독수리·재두루미·두루미· 큰기러기가, 문산습지에는 흰꼬리수리·큰기러기 등 멸종 위기에 처해 있는 천연기념물들이 서식하고 있다.한강하구 장항습지, 산남습지, 공룡천하구습지, 시암리습지, 유도 등도 큰기러기와 재두루미, 해오라기, 흰기러기 등의 서식지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하지만 접경지역에 위치해 있기에 보전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한강과 임진강이 만나는 오두산통일전망대를 기점으로 행정구역상 고양시 지역인 산남습지와 장항습지 등은 환경부에서 습지보전지역으로 지정해 보전에 나서고 있다. 하지만 성동습지를 시작으로 문산습지, 임진강습지, 장단습지, 초평도습지 등 북한과 접경지역인 임진강 일대의 습지들은 제대로 보전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최근에는 개발을 주장하는 시민들과 보존을 주장하는 시민사회단체간에 치열한 논쟁을 벌이고 있는 지역이기도 하다.# 생태 자원의 보고 강원도 DMZ강원도 지역의 DMZ는 철원평야를 중심으로 한 생태권역과 백두대간을 지나는 산악지역, 고성군 일대의 해안지역 등으로 나뉘어 있다.철원 민통선 지역은 인적이 드물고 곳곳에 저수지와 습지가 있으며 넓은 철원평야에는 추수 후 곡식이 남아 있어 철새들의 낙원이라고 불리고 있다.또 1천m 이상의 높고 험준한 산악지역으로 되어 있는 중등부 산악지역에는 멸종위기 야생동물 1급종인 산양과 사향노루가 서식하고 있다. 내금강과 연결되어 있는 양구의 두타연은 국내 최대의 열목어 서식지다. 인제군에 위치한 대암산 정상 부근에 위치한 용늪은 고원 내륙습지로 그 희귀성과 생태적 가치를 인정받아 1997년 우리나라 습지 중에서는 처음으로 람사르협약 습지로 등록됐다. 2007년 국립환경과학원 정밀조사결과 삿갓사초, 끈끈이주걱, 물이끼 등 식물 252종과 까막딱따구리, 참매, 산양, 삵 등 동물 263종이 서식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고성의 화진포와 송지호는 바다에서 분리되어 호수가 된 석호로 천연기념물 제201호인 큰 고니의 도래지이며 검둥오리, 쇠오리 등 수많은 철새가 찾아들고 있다.※이 취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글┃신창윤·김종화기자 사진┃김종택기자

2012-08-28 신창윤·김종화

[희망을 꿈꾸는 DMZ·5]분단 간직한 한국철도

한국철도는 한반도의 아픈 역사를 상징한다.한국철도는 물류 유통을 위해 건설된 유럽과 달리 외국인의 필요에 의해 건설됐다.대한제국 시절에는 외국 세력들이 이권을 침탈하기 위한 방법으로 이용됐었고 일본 강점기 시대에는 대륙 침략을 위한 발판을 마련하기 위해 건설됐다.첫번째 철도 노선은 1899년 일본에 의해 개통된 경인선이다. 경인선은 제물포와 노량진 사이 33.2㎞ 구간의 노선이다. 이후 1905년에는 서울과 부산을 이어주는 경부선을, 1906년에는 서울과 신의주를 잇는 경의선이, 1914년과 1928년에는 호남선(대전~전라남도 목포)과 함경선(함경남도 원산~함경북도 청진)이 각각 개통됐다. 1931년 일본이 만주 침략을 본격화하면서 대륙과의 연결망을 확충하기 위해 평원선(평안남도 서포~함경남도 고원)과 만포선(평안남도 순천~만포), 혜산선 등이 잇따라 개통했다.현재 한반도의 철도 노선의 대부분이 일본 강점기 시절 연결된다. 1945년 8월15일 광복 당시 한반도 철도의 총길이는 6천362㎞였다.남북이 분단되며 끊어진 철도는 4개 노선이다. 서울과 신의주 사이를 연결하는 경의선 구간 중 분단으로 인해 문산~봉동간 20㎞ 구간이 끊어졌다. 그리고 서울과 원산을 잇는 경원선은 신탄리~평강간 31㎞ 구간이, 철원과 내금강 온정리를 잇는 금강산선은 철원~기성간 75㎞ 구간이, 양양과 원산을 잇는 동해북부선은 온정~강릉간 121㎞ 구간이 분단으로 인해 단절됐다.남한과 북한은 분단된 철도의 연결을 위해 논의를 시작했고 2000년 장관급회담에서 경의선 철도 연결에 합의, 2003년 완전히 연결됐다. 동해북부선도 2004년 4월 군사분계선을 건너는 선로가 복원됐고 다음해인 2005년 남북출입사무소인 제진역까지 연결됐다.2007년에는 한반도종단철도와 시베리아 횡단철도를 연결하려는 시도도 있었지만 의견이 제시된 상태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분단의 상징 임진각과 경의선파주 임진각을 떠올리면 생각나는 것은 '자유의 다리'와 한국전쟁 이전에 경의선을 달리던 증기기관차다.'자유의 다리'라는 이름은 1953년 휴전협정 이후에 한국군 포로 1만2천773명이 자유를 찾아 귀환한 다리라고 해서 붙여졌다. '자유의 다리'에 통일을 염원하는 수많은 글귀가 적혀 있지만 다리 너머 철조망을 바라보면 우리에게 통일은 이른 느낌으로 다가온다. 임진각의 상징물처럼 자리잡은 증기기관차는 등록문화재 제78호로 지정되어 있는 근대문화재다. 증기기관차는 한국전쟁 당시 경의선 선로를 이용해 신의주로 향하던 도중 폭탄을 맞아 멈췄다.임진각에서 끊어진 경의선은 더이상 남북을 이어주지 못하고 있다.녹슬어 가는 증기기관차가 포탄과 총탄의 흔적으로 아픈 역사를 대변하고 있을 뿐이다.더이상 달리지 못하는 열차, 그리고 끊어진 다리 주변에서 통일을 기원하는 사람들, 그것이 오늘의 한반도 현실이다.# 도시형 통근열차가 달리는 경원선인터넷에서 경원선을 검색해 보면 '현재 국토 분단으로 용산~신탄리 사이의 89㎞만 운행되고 있다'고 적혀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하지만 용산역 어디에도 경원선을 안내하는 글귀를 찾을 수 없다. 지금의 경원선은 용산에서 소요산역으로 가는 전동차를 타고 가다 동두천역에서 신탄리 방면 통근형 기차로 환승해야 이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동두천역에서 출발한 열차는 한탄강역, 전곡역, 연천역, 신망리역, 대광리역을 거쳐 신탄리역에서 멈춘다. 분단으로 인해 마을이 작아지다 보니 일부 역에서는 역사만 있을 뿐 역사를 관리하는 역무원이 없다.현재 남한에서 가장 북쪽에 위치한 기차역인 신탄리역의 안내판에는 북쪽 방면 다음역 이름이 적혀 있지 않다.분단 되기 전 한반도에서 가장 많은 사람과 물류를 나르던 열차 중 하나였던 경원선 열차는 지금은 작은 시골마을을 이어주는 관광열차로 전락했다.DMZ로 가로 막힌 철로는 우리에게 분단의 아픔과 통일에 대한 염원을 다시한번 마음 속에 남겨 준다. 글┃신창윤·김종화기자 사진┃김종택기자※이 취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2012-08-21 김종화

[희망을 꿈꾸는 DMZ·4]끝나지않은 전쟁

DMZ는 분단의 상징이며, 냉전의 산물이다.한반도 분단에 가장 큰 영향을 준 것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자본주의 진영과 사회주의 진영 간의 갈등이다. 당초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진영은 일본군의 무장해제와 사회질서 유지를 위해 각각 38도선을 사이에 두고 한반도로 진입했다. 하지만 이런 목적과 달리 각 진영간의 이해관계가 더 크게 작용했다. 자본주의의 세력에는 동북아, 그리고 아시아대륙으로의 진출을 위해 한반도에 거점을 마련해야 할 필요성이 있었다.사회주의 진영에선 자본주의 진영의 아시아대륙 진출 차단과 태평양 진출을 위한 교두보 확보라는 당면 과제가 있었다. 각자 다른 목적을 갖고 한반도는 위도 38도선을 사이에 두고 자본주의 진영과 사회주의 진영을 대변하는 각자 다른 정치체제를 바탕으로 한 정부를 세웠다. 냉전 시대의 종결을 언제부터로 봐야할지 정확히 구분하기 어렵지만, 보편적으로 구소련의 붕괴와 독일 통일을 기준으로 보고 있다.독일 통일에는 독일을 강제적으로 분단시켰던 미국·소련·영국·프랑스 등 제2차 세계대전 전승국들이 독일의 통일을 인정하는 '대 독일 화해조약'에 조인함으로써 냉전체제의 상징처럼 여겨졌던 동·서독을 나눴던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다. '대 독일 화해조약'이 체결된 지 20여일 뒤인 1990년 10월3일 독일은 하나의 국가가 됐다. 독일 통일 기점으로 냉전 분위기의 화해 분위기로의 전환, 국제 사회의 치열한 경제 전쟁이 벌어지고 있지만 한반도는 아직도 냉전의 산물인 DMZ를 사이에 두고 치열한 대치 양상을 이어가고 있다.# 반공과 안보로 점철된 한반도한국전쟁이 1953년 7월27일 휴전협정을 통해 중단된 후 1960년부터 1975년까지 베트남 전쟁이 발생해 한반도로 쏠렸던 시선이 인도차이나반도로 향했다.베트남전쟁이 끝나자 한반도에선 남북한 대치 정국의 긴장감이 극도에 이르는 사건이 발생했다. 1983년 10월9일 버마(현 미얀마)를 방문 중이던 전두환 대통령 및 수행원들을 대상으로 자행한 테러 사건인 '아웅산 테러 사건'과 1987년 11월29일 바그다드에서 서울로 가던 대한항공 858편 보잉 707기가 미얀마 근해에서 북한공작원에 의해 공중 폭파된 'KAL기 폭파사건' 등이다.두 사건은 현대사 속에 남북한의 대치 상황을 느낄 수 있는 대표적인 사건으로 꼽힌다.'간첩', '안보', '반공' 등 분단과 대치를 상징하는 단어들은 뉴스에 간혹 등장했다. 이런 단어들은 앞서 '아웅산 테러 사건'과 같은 큰 사건이 아니더라도 한반도에서 남·북한의 치열한 보이지 않는 전쟁이 계속되고 있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게 해주고 있다.2000년대 전후 화해 분위기로 인해 남북한 대치 정국이 예전만 못하게 다가오는 게 현실이지만 아직도 우리에게 이 단어들이 멀게만 느껴지지 않는다. 아마 '간첩', '안보', '반공' 등의 단어가 멀게 느껴지지 않는 것은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는 남북한 체제를 은연 중에 느끼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사람의 인명을 앗아가는 큰 사건, 그리고 사람의 인명을 앗아가지는 않지만 남·북한 긴장 정국을 만드는 여러 단어들은 모두 '심리전'이라는 보이지 않는 전쟁을 이야기하고 있다.# 화해 분위기를 냉각시킨 사건들2000년을 전후해 남·북한은 치열한 대치 양상에서 화해 분위기로 급속도로 변화하기 시작했다.남한 정부와 경제계에선 북한을 개혁·개방으로 유도하기 위해 비료지원 및 쌀 지원으로 식량난 해결에 도움을 줬고, 금강산 관광사업과 개성공단 조성 등을 통해 경제가 안정될 수 있도록 지원했다.2007년 10월에는 대한민국 대통령으로는 처음으로 노무현 대통령이 군사분계선을 도보로 넘어 평양을 방문, 남북 정상회담을 열었다. 하지만 이후 관계는 급속도로 냉각됐다.2008년 7월11일 금강산관광지구를 방문 중인 여행객이 군사 경계지역을 침범했다며 피살되는 사건이 발생했고, 남한 정부의 진상규명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아 남북한 화해 분위기의 상징적 사업 중 하나인 금강산 관광 사업이 중단됐다.특히 서해안에서 일어난 천안함 사건과 연평도 포격 사건으로 인해 남북 교류는 거의 단절됐다.천안함 사건은 남한 해군의 초계함인 천안함(PCC-722 천안)이 2010년 3월26일 침몰, 당시 함선에 승선해 있던 104명 중 40명이 사망하고 6명이 실종됐다.연평도 포격은 북한이 2010년 11월23일 오후 2시30분경 대연평도를 향해 170여 발을 포격한 사건이다. 연평도 포격 사건으로 해병대원 2명이 전사하고 16명이 중경상을, 민간인은 2명이 사망하고 3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한국전쟁 이후 처음으로 남·북간의 교전으로 민간인이 사망했다.※이 취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글┃신창윤·김종화기자 사진┃김종택기자

2012-07-31 신창윤·김종화

[희망을 꿈꾸는 DMZ·3]14년전 경인일보 연재 '아 분단 반세기… DMZ를 가다'

경인일보는 지난 1998년 비무장지대(DMZ)가 있는 강원도 지역의 강원일보와 공동으로 연중기획시리즈 비무장지대 학술조사 보고'아 분단 반세기…DMZ를 가다'를 연재했다. 비무장지대의 학술적인 가치를 정확하게 평가하고 생생한 모습을 전달하기 위해경희대, 인하대 교수 등 전문가들과 함께 탐사보도에 나섰다. 당시 경인일보는 서해 5도와 연천·강화군, 파주·김포시 등 비무장지대와 인근 민통선에 대한 생태계와고고학, 지질·지리학, 역사 및 문화재 등에 대한 현장학술조사에 나서 다양한 정보를 독자들에게 전달하는 성과를 거뒀다.특히 비무장지대 생태계에 대한 학술적인 조사를 위해 식물, 조류, 동물, 어류, 곤충 등의 전문가와 함께 동행 취재했다.14년 전 수도권 시민들에게 비무장지대의 가치와 보존을 알리기 위해 연재했던'아 분단 반세기…DMZ를 가다'를 다시한번 돌아본다.# 장장 9개월 35회에 걸친 특별 기획연중기획시리즈 '아 분단 반세기…DMZ를 가다'는 1998년 6월16일 '판문점은 평화로웠다'를 시작으로 1999년 3월17일 전문가 대담까지 장장 9개월 동안 35회에 걸쳐 연재됐다.민족분단의 상징이자 남·북한간의 소통의 장으로 이용되고 있는 판문점에 대해 3회에 걸쳐 탄생과 현재 모습을 상세하게 소개했다.비무장지대 안에 있어서 잘 알려져 있지 않아 방치되다시피 한 문화재들에 대해 재평가 작업에도 들어갔다.비무장지대 연천군 지역 안에 위치한 허자·허목의 묘와 초기 백제사의 미스터리를 풀어갈 열쇠로 평가받는 '백제 적석총', 연천 경순왕릉에 대한 문화재적인 가치를 살펴봤다. 파주 허준의 묘, 강화 연미정과 까치아래돈대 등 비무장지대 안에 위치한 다양한 문화재를 소개했다.당시 체계적으로 연구되지 못하고 있던 서해 최북단 5도의 지질과 식생, 동물, 갯벌생태계, 향토문화를 조사한 것도 성과라고 할 수 있다. 서해 최북단 5도는 백령도, 대청도, 소청도, 연평도, 소연평도를 지칭한다.또 경희대와 공동으로 'DMZ하계탐사단'을 구성해 1998년 7월24일부터 30일까지 6박7일간 경기동북부 연천군 일대 비무장지대에서 파주시, 김포시, 강화군에 이르는 서진 코스를 선정해 집중적인 탐사활동을 벌였다.공동탐사단은 그동안 DMZ 생태계에 대한 종합적이고 체계적인 현장 연구가 없었다는 점과 언론 보도 또한 일회성에 그치고 있다는 판단아래 식물, 동물(어류와 조류 포함), 지질 지리 등 각 분야의 전문가들과 함께 탐사대를 구성해 나섰다.화보를 통해 파주시 장단면에 위치한 도라산전망대에서 바라본 당시 송악산과 개성시가지 등 북한의 모습과 통일촌 풍경을 생생한 사진으로 소개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연재 말미에서는 공동탐사단에 참여한 구태회, 안영희, 김영채, 공우석, 이승우 교수가 대담자로 나서 비무장지대의 학술적인 가치와 보존 필요성에 대해 의견을 모으기도 했다.# '흰 날개 해오라기'와 '모새달' 발견'아 분단 반세기…DMZ를 가다'의 가장 큰 성과를 꼽으라면 당시 잊혀져 있던 DMZ의 보존과 관리의 필요성에 대한 공감대를 이끌어 냈다는 점이다. 또한 9개월간의 연재를 위해 공동탐사단이 취재를 하며 세계적으로 희귀한 '흰 날개 해오라기'의 경기 서부지역(김포시 유도) 서식지를 발견했으며, '모새달'의 국내 자생지를 최초로 확인하기도 했다.'흰 날개 해오라기'는 여름철새로 1998년 공동탐사단이 경기 서부 비무장지역에서 발견하기 전까진 강원도 철원 등 동·중부 지역에서만 극히 드물게 발견됐었다. 공동탐사단은 비무장지대에 서식하고 있는 세계적 희귀조인 천연기념물 205호 저어새와 둥지를 최초로 촬영하는데 성공했고 연천군 백학면 사미천에서는 천연기념물 지정대상인 '조롱이'를 30년만에 발견하는 개가를 올리기도 했다.98년 10월19일에는 국내에서 처음으로 발견된 희귀식물인 '모새달'의 자생지를 발견했다고 보도했다. '모새달'은 그 동안 문헌에만 기록돼 있고 산림청이 희귀 및 멸종위기식물로 분류하고 있는 벼과의 식물이다. 모새달은 종자가 커 철새들의 먹이로 유용하고 갈대와 함께 바닷가 주변의 조경과 녹화에 식재할 수 있다는 점에서 환경보호와 복원차원에서 기대되는 식물이다.또 멸종위기 식물이며 희귀식물로 분류되고 있는 '노랑원추리'와 비무장지대 인근에서 점차 사라져가던 '솔나물'의 대규모 자생지를 찾는 개가를 올리기도 했다.글┃신창윤·김종화기자사진┃김종택기자※이 취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2012-07-24 신창윤·김종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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