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 영원을 꿈꾸다

 

[문화재, 영원을 꿈꾸다·14]에필로그

하포리 지석묘 무성한 넝쿨속 방치석조여래입상 군에서 체계적 관리삼국시대 성곽 덕진산성 상태 양호파주 민통선지역 마지막으로 취재산성·고택·절터·서원·관방유적 등6개월동안 도내 다양한 유물 재조명경기도 돌봄사업 현장서 확인하기도개인 소유 유산은 관리 소홀 아쉬워지난 8월 1일 민간인 출입통제구역(이하 민통선)안에 있는 문화재를 취재하기 위해 파주지역을 찾았다. 지난 3월부터 시작한 기획시리즈 '문화재 영원을 꿈꾸다'의 대미를 장식하기 위해서다. 경기문화재단 경기문화재연구원 조유전 원장, 김웅신 책임연구원, 문화재돌봄사업단 관계자들과 함께 한 이날 취재진이 만날 문화재는 파주시 진동면 하포리의 지석묘(파주시 향토유적 제26호)와 파주시 군내면 읍내리의 석조여래입상(경기도 문화재자료 제139호)이었다.먼저 하포리의 지석묘를 찾아가기 위해서는 군부대의 협조를 받아야 했다. 지석묘가 민통선내에 위치해 있기 때문이다. 하포리의 지석묘는 가로 240㎝, 세로 225㎝ 규모다. 바둑판식 지석묘로 추정되며 전체적으로 거북 형상을 하고 있다. 지석묘가 위치한 곳은 인근에 임진강이 흐르고 구릉지가 형성돼 있어 선사시대 때 이 일대가 선사인들의 생활 주거지였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하포리의 지석묘는 민통선내 군부대 인근 밭 한가운데에 펜스로 둘러처져 있었지만 취재진이 찾았을 당시 한여름이어서 무성한 넝쿨 등이 지석묘를 가리고 있어 지석묘를 찾는데 다소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방문이 쉽지 않은 민통선내의 문화재 관리·보존에 대한 대책 마련이 절실한 대목이다.이어 취재진은 읍내리의 석조여래입상을 찾아가려 했으나 석조여래입상이 위치해 있는 해당 부대와의 취재협조가 원활(?)하지 않아 발길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다행스러운 것은 민통선내 문화재 관리가 어려운 가운데에서도 석조여래입상은 군부대에서 관리대상으로 선정, 제를 지내는 등 관리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대신 군내면 장지리의 덕진산성(경기도 기념물 제218호)을 찾았다. 덕진산성은 삼국시대에 축조된 것으로 추정된다. 덕진산성은 임진강의 북안에 위치해 있으며 동쪽으로 초평도와 임진나루 일대, 남쪽으로는 수내나루와 문산읍 장산리 일대에 대한 조망이 매우 양호하다.덕진산성은 임진강변에 위치해 있는 호로고루나 당포성, 은대리성, 무등리보루 등과 함께 임진강 북안에 설치된 주요 삼국시대 성곽이다. 조선시대에 들어서도 전략적 가치를 인정받아 외성을 확장·수축해 사용했다. 덕진산성은 현재 깔끔하게 정비돼 생태탐방코스로 개방되고 있다.이번 취재에 함께 한 조유전 원장은 1990년대 초 문화재관리국 문화재연구소 학술조사단장을 맡아 파주시 관내 군사보호구역내 문화유적 학술조사를 실시해 덕진산성 등의 귀중한 문화유적 등을 대거 발견했던 주역이다.민통선내 파주 문화재 취재를 마지막으로 지난 3월부터 기획을 시작한 기획시리즈 '문화재 영원을 꿈꾸다'는 6개월여의 대장정을 마감했다.한국의 11번째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된 남한산성을 시작으로 연천 고인돌, 용인과 안성의 고택, 여주 고달사지와 신륵사, 남양주 다산 유적지, 양주 회암사지, 평택·화성의 관방유적, 안성 칠장사와 죽주산성, 파주 자운서원과 파산서원, 북한산성 등 도내의 다양한 문화재들을 재조명해 왔다.이들 문화재를 취재하는 과정에서 때로는 뿌듯함을, 때로는 아쉬움을 느꼈다. 정부와 각 지자체들의 문화재 복원·보존 노력에 힘입어 대부분의 문화재들이 잘 관리가 되고 있었지만 개인 소유인 일부 문화재의 경우는 문화재 관리의 한계에 부딪힐 수밖에 없었다. 개인 재산이다 보니 보다 적극적인 문화재 관리 행정을 펼 수 없기 때문이다.문화재는 우리 조상들이 물려준 만큼 온전하게 후손들에게 물려줘야 할 귀중한 유산이다. 숭례문 화재는 문화재 보존에 대한 경각심을 우리에게 다시 한 번 일깨워줘 현재 정부와 각 지자체에서는 문화재 관리·보존에 더욱 힘을 쏟고 있다.그 중 대표적인 것이 문화재 돌봄사업이다. 경기도의 경우 지난해부터 도내 문화재 517개소의 상시관리를 위해 경기문화재단 경기문화재연구원내에 문화재 돌봄사업단을 구성, 운영하고 있다. 문화재 돌봄 인력들은 도내에 산재한 문화재들을 수시로 찾아 배수로·수목 정비, 소화설비 점검 등 문화재 위해 요인을 사전에 차단하는 일들을 수행하고 있다. 취재진은 연천 미수 허목 묘역과 용인이주국장군고택, 파주향교 등을 취재하는 과정에서 경기문화재단의 문화재 돌봄 사업단 관계자들을 만나기도 해 문화재 돌봄 사업이 활발하게 진행되는 것을 눈으로 확인하기도 했다.지금 우리 주변에는 아직도 많은 문화재들이 우리들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다. 국보와 보물, 기념물, 사적 외에도 보존가치가 높은 수많은 비지정문화재들이 우리 주변에 산재해 있다.남한산성이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됐다고 해서 마냥 기뻐할 수는 없다. 앞으로 이들 문화재를 어떻게 관리 보존해야 하는지는 여전히 우리에게 남아 있는 숙제다. 후손들에게 우리 조상들의 얼이 담겨 있는 문화재들을 온전히 물려주기 위한 우리 모두의 노력이 필요하다. 글=김신태기자/ 사진=조형기 프리랜서▲ 조유전 경기문화재연구원 원장.

2014-08-26 김신태

[문화재, 영원을 꿈꾸다·13]북한산성

지난달 성벽아래 고려때 세워진 중흥산성 기저부 확인군 초소·회각로도 발굴 축조시기 400~500년 앞당겨전란 대비 임시궁궐 등 역사·학술적 가치 큰 유적도, 복원 기초자료 확보 유네스코 유산 신청 탄력조선 유림 대표적 명소 누각 '산영루' 이달 재탄생시민 휴식공간 개방… 복합문화공간 탈바꿈 기대지난 7월 31일 북한산성(사적 제162호)에서 성벽 발굴에 대한 현장설명회가 열렸다. 그동안 조선시대에 축조된 부분만 남은 것으로 알려졌던 북한산성에서 고려시대 성벽이 발견됐기 때문이다.경기문화재단 경기문화재연구원은 최초로 북한산성 대서문~수문 구간과 부왕동 암문 구간의 성벽절개지를 조사한 결과, 조선 숙종 37년(1711년)에 축성한 현재 성벽 아래에서 고려시대에 세워진 중흥산성의 기저부를 확인했다고 밝혔다. 경기문화재연구원은 이번 발굴로 북한산성 축성방법이 규명됐을 뿐만 아니라 중흥산성 기저부의 존재를 확인, 현재 남아있는 북한산성이 처음 축조된 시기를 400~500년 앞당기게 됐다고 설명했다.이번 조사에서는 1745년(영조 21) 편찬된 북한산성 관련 지리서 북한지(北漢誌)에 기록된 성랑(군 초소)도 발굴됐다. 이와 함께 성에 설치된 회곽로(군사들의 이동로)의 존재도 처음 확인됐다. 경기문화재연구원은 이번 발굴조사를 통해 향후 복원을 위한 기초자료를 확보했고 북한산성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신청하는데 힘을 실어줄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이번 발굴조사를 주관한 경기문화재연구원 북한산성문화사업팀은 경기도, 고양시와 함께 북한산성의 연구, 정비, 복원, 활용 등의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북한산성이 지닌 역사적, 문화재적 가치를 발굴해 풍부한 문화콘텐츠 개발과 문화유산에 대한 체계적인 학술조사를 실시, 문화재 정비와 복원을 통해 북한산성 전체를 하나의 복합문화공간으로 탈바꿈시키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백제가 수도를 하남 위례성으로 정했을때 도성을 지키던 북방의 성인 북한산성은 백제 개루왕 5년(132)에 토성으로 축조됐다. 이어 고려 우왕 13년(1387)에 중흥산성이 세워졌고 1711년 석성으로 개축되면서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지금의 서울 일대 북쪽을 방어하는 주요 시설로 사용됐다. 11세기초 거란의 침입 당시 현종이 고려 태조의 관을 북한산성으로 옮겨 오기도 했고 고려 고종 19년(1232)에는 몽고군과의 격전이 벌어진 곳이다. 우왕 13년(1387)에 다시 고쳐 지었다. 그리고 조선시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 도성 외곽을 고쳐 짓자는 의견이 나와 숙종 37년에 왕명으로 토성을 석성으로 고쳐 지었다.북한산성은 고양시 덕양구 북한동과 서울시 강북구·종로구·은평구 경계의 북한산 정상 능선을 따라 위치해 있다. 고양시 덕양구 북한동에 위치한 북한산성행궁지(사적 제479호)는 남한산성 행궁, 강화행궁과 더불어 전란을 대비한 임시궁궐이다. 그만큼 다른 행궁과는 특별한 의미를 갖고 있으며 중요한 문화유적으로 역사적·학술적 가치가 크다.북한산성이 위치한 북한산(837m)은 지난 1968년 북한 특수부대 요원이 청와대를 습격한 '김신조' 사건 이후 민간인의 거주를 극히 제한했고 국립공원관리공단에서 직접 관리, 그 원형이 고스란히 잘 보전돼 있다.북한산성문화사업팀은 지난 2012년부터 행궁지에 대한 발굴조사에 들어가 지난해 10월 행궁 내전지 1차 발굴조사와 관련한 현장발굴설명회를 열기도 했다. 발굴된 행궁 내전지는 1712년(숙종 38)에 준공돼 사용되다 1915년 산사태로 매몰돼 일부 파괴됐고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에 의해 완전히 파괴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북한지(北漢誌))'에 따르면 행궁 규모는 내전이 좌·우 상박 각 2칸, 대청이 6칸, 사면퇴 18칸을 합한 총 28칸이었다. 이 정전 외에 또 좌·우각방·청·대문·수라소 등의 부속건물이 35칸이나 됐다. 외전 역시 내전과 같은 규모의 정전 28칸, 내행각방 12칸을 위시한 누(樓)·청·고간(庫間)·대문 등 총 33칸의 부속 건물이 있었다. 북한산성 행궁지는 경기도 기념물 제160호(1996년 7월 22일)로 지정됐다가 사적 제479호(2007년 6월 8일)로 변경, 지정됐다. 북한산성내에는 중흥사를 비롯한 12개의 사찰과 99개의 우물, 26개의 작은 저수지, 그리고 8개의 창고도 있었다.북한산성내에는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87호인 '북한산성금위영이건기비 (北漢山城禁衛營移建記碑)'가 있다. 북한산성내 대성암이란 암자 아래에 놓여있는 비로, 수비를 맡고 있던 금위영의 터를 옮긴 후 이를 기념해 세운 것이다.원래 금위영은 동소문안에 있었으나 그 지대가 높아 무너지기 쉬워 보국사(輔國寺) 아래로 자리를 옮겼다. 화강암인 이 비는 누워있는 일종의 와비(臥碑) 형태로, 뒷면은 흙속에 묻혀 있고 비몸 한쪽으로 낙수면을 새긴 지붕돌이 있다. 비에 새긴 명문으로 보아 숙종 41년(1715년)에 세웠다.경기도 기념물 제136호인 '북한산 중흥사지'는 북한산성내 장군봉과 구암봉 사이에 위치해 있다. 중흥사는 고려때 창건됐다는 구전이 있지만 정확한 창건연대는 알 수 없다. 고려말 태고보우국사에 의해 중수됐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중흥사는 본래 30여칸의 작은 사찰에 불과했지만 북한산성이 완성된 1715년 당시 증축해 136칸의 큰 사찰이 됐다. 당시 조정에서는 8도의 절에 명을 내려 1년에 6차례 번갈아 의승을 뽑아 산성내 절에 주둔시켰다. 승군들이 주둔했던 용암사, 노적사, 경흥사, 보국사, 보광사, 부왕사, 원각사, 국녕사, 서암사, 태고사, 진국사, 중흥사를 관리했던 중요한 곳이었다. 1894년 화재, 1915년 홍수로 큰 피해를 입어 현재는 주춧돌과 축대만 남아있다.북한산 서원사지(경기도문화재자료 제140호)는 수문일대의 산성 수비 역할을 담당하다가 19세기말에 폐사된 것으로 추정된다.최근 눈에 띄는 것은 조선시대 북한산 유림의 대표적 명소였던 누각 산영루(山映樓·경기도기념물 제223호)가 이달 안에 복원돼 시민 휴식공간으로 개방된다는 것이다. 산영루는 북한산성내 태고사 계곡과 중흥사 계곡이 만나는 바위 위에 세워진 누각으로, 고려말 북한산성 개축과정에서 지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임진왜란때 불에 탄 뒤 18세기 초 스님들에 의해 복원됐으나 1915년 대홍수로 유실돼 10개의 초석만 남아 있었다. '산 그림자가 물에 비치는 곳'이라고 해서 '산영루'란 이름을 갖고 있다. 북한산의 수려한 경관을 조망하기 쉬운 곳에 위치해 있고 조선시대 도성에 인접해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던 북한산 유람의 대표적인 명소였다.이밖에 북한산성 입구에서 백운동계곡을 따라 대남문으로 가는 길 용학사 아래에는 20여개의 비석이 있다. 이것이 바로 북한산성선정비군이다. 이 곳의 비석들은 북한산성 관리 최고 책임자가 재임할 당시의 선정과 공덕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것으로 알려졌다. 선정비의 건립시기는 모두 19세기로 이 시기 북한산성의 관리는 총융청(조선 후기에 설치된 중앙 5군영(五軍營)의 하나)과 무위소(고종때 궁궐수비를 위해 설치한 관청)가 맡고 있었다. 이에따라 비문에는 해당 관청의 관리책임자였던 총융사와 무위소 제조, 경리사의 선정을 기리고 있다. 글=김신태기자 / 사진=조형기 프리랜서▲ 복원된 북한산성.▲ 동장대.▲ 보국문.▲ 대남문.

2014-08-19 김신태

[문화재, 영원을 꿈꾸다·12]파주 자운서원·파산서원

자운서원율곡 이이 기리기위해 1615년 세워이후 학자 김장생·박세채도 모셔한국전쟁때 파괴 1970년 새로 지어파산서원지역유생이 건립 현재 사당만 복원성수침·백인걸등 위패 모시고 제사파주시 법원읍에 위치한 자운서원(紫雲書院·경기도기념물 제45호)은 광해군 7년(1615)에 율곡 이이(李珥·1536~1584)의 학문과 덕행을 기리기 위해 세워졌다.율곡은 조선 중기의 대표적인 학자이자 경세가(經世家)로, 파평면 율곡리에서 성장했다. 법원읍 동문리 자운서원안에는 경기도 기념물 제15호로 지정된 묘가 있다. 주변에 사임당 신씨의 묘(경기도기념물 제14호)를 비롯한 가족묘 13기가 있다.율곡의 본관은 덕수, 판관 의석의 증손이고 사헌부감찰 원수의 아들로 1536년(중종 31) 외가인 강릉 오죽헌에서 태어났다. 율곡의 생애와 관련이 깊은 지역은 세곳이다. 첫째는 그가 태어난 외가가 있었던 강원도 강릉의 오죽헌이고 둘째는 처가인 황해도 해주의 석담, 그리고 셋째는 덕수 이씨 가문의 세거지(世居地, 조상 대대로 살고 있는 곳)이면서 그가 성장했던 파주시 파평면 율곡리다. 그의 호 율곡은 율곡촌에서 유래된 것인만큼 그의 생애에서 파주는 대단히 중요하다. 파평면 율곡리에 있는 화석정은 5대조인 강평공 명신이 1443년(세종 25)에 세운 뒤 증조부인 의석이 증축했다. 율곡이 어린시절 학문을 익히고 관직에서 물러나 후진을 양성했던 곳으로 그의 학문과 사상 형성에 중요한 장소가 됐다.임진왜란을 앞두고 10만 양병설을 주장했던 율곡은 조선시대 대표적인 성리학자였을뿐만 아니라 정치, 경제, 사회 전반에 걸쳐 개혁을 주장한 대표적인 정치개혁가였다. 대동법 실시 등 사회정책에 대한 획기적인 선견을 제시, 조선후기 실학자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자운서원은 효종 1년(1650)에 '자운'이란 이름과 토지, 노비 등을 임금으로 하사받아 사액서원(賜額書院)이 됐다. 숙종 39년(1713)에 율곡의 뒤를 이은 학자 김장생(1548~1631)과 박세채(1632~1695)를 추가로 모셨다. 하지만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고종 5년(1868)에 폐쇄됐다. 그 뒤 서원 터에 제단을 세워 제사를 지내왔으나 한국전쟁으로 완전히 파괴돼 빈터에 묘정비(경기도 유형문화재 제 77호)만 남아있었다. 지금 있는 건물은 1970년 유림의 기금과 국가 지원을 받아 새로 지은 것이다. 최근에 사당 전면에 강당과 동재, 서재 , 협문, 외삼문을 신축하고 주변을 정비했다.사당안에는 이이의 영정을 중심으로 좌우에 김장생과 박세채의 위패를 모셨다. 매년 음력 8월 중정(中丁, 음력으로 그달의 두번째 정일(丁日)을 이르는말)에 제향을 올려왔으며 최근에는 가을에 열리는 율곡문화제 행사때 제향을 지낸다.자운서원내 내삼문 바깥 왼쪽에 세워진 묘정비(경기도 유형문화재 제77호)는 자운서원의 건립 내력을 적은 비다. 1683년(숙종 9)에 세워졌다. 또 자운서원 왼쪽 산기슭에는 율곡의 일대기를 적은 이이 선생 신도비(향토유적 제6호)가 세워져 있다. 이이가 세상을 떠난지 47년이 지난 1631년(인조9) 4월에 세워졌다.파주시 파평면 늘노리에는 파산서원(坡山書院·경기도문화재 자료 제10호)이 있다. 조선중기 학자인 청송 성수침(1493~1563)과 그의 아들 우계 성혼(1535~1598), 형제 절효공 성수종(1495~1533) 및 휴암 백인걸(1497~1579)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지낸다. 휴암 백인걸의 본관은 수원이며 파주시 월롱면 덕은리에서 태어났다. 이이, 성혼 등 당대의 사림계 인물들과 널리 교유했다.파산서원은 조선 선조 원년(1568)에 율곡 이이 등 파주지역 유생들이 세웠고 효종 원년(1650)에 나라에서 현판을 내려 사액서원이 됐다. 건물은 임진왜란때 불탄 것을 후에 복구했으나 한국전쟁으로 다시 불탔다. 1966년 서원의 사당만을 복원했다. 사당 주위에는 담장이 둘러져 있고 정면 가운데에 솟을삼문을 뒀다. 건물의 주춧돌과 기단석 등은 처음 건물을 세울 당시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도 없어지지 않았던 전국 47개 서원중 하나다. 파산서원 입구에는 하마비(下馬碑)가 세워져 있다.글=김신태기자 / 사진=조형기 프리랜서▲ 자운서원과 강인당.▲ 자운서원 건립 내력을 적은 묘정비.▲ 자운서원 안에 있는 율곡 이이의 묘.▲ 파산서원 경현당.

2014-08-12 김신태

[문화재, 영원을 꿈꾸다]향토학문기반으로 설립된 서원·향교 제향중심서 살아있는 문화공간으로

서원(書院)이 유교문화뿐만 아니라 지역의 전통문화를 간직한 요람으로 되살아나기 위한 기지개를 켜고 있다.문화재청이 향교·서원의 활성화 방안을 추진하고 있기 때문이다. 서원은 지역별 학문 전통 기반 위에 설립됐던 사립 교육기관으로서 학문 발전과 지역여론을 형성하던 곳이다. 서원의 이런 특징은 우리나라만의 독자적인 조선유학 전통을 확립하는데 토대가 됐다. 또 지역실정에 맞게 제정한 향약을 통해 풍속을 교화시켜 왔다. 학문을 연구하고 후학을 배출하며 정치적으로도 성장해 중앙에 맞서는 지역세력을 형성하기도 했다.문화재청은 이런 향교·서원의 문화재 가치를 재발견하고 인문정신을 현대적으로 계승·발전시키기 위해 전국 광역 및 기초자치단체를 대상으로 8월말까지 '2015 살아 숨쉬는 향교·서원' 활용사업 공모에 들어갔다.추진 대상은 국가지정 및 시·도 지정 향교·서원 문화재다. 향교·서원을 과거 선현의 덕을 기리고 인재를 양성하며 옛 선비들의 지혜와 삶을 융·복합적으로 체험하는 살아 숨쉬는 문화사랑방으로 만든다는 계획이다. 교육의례와 전통교육(체험), 문화유적과 인물사상(답사), 공간활용, 자료관 등 다양한 활용프로그램을 이용한 사업을 지원할 방침이다.문화재청은 이에 앞서 지난해 말 '향교·서원문화재 활용운영모델 및 기본계획'을 마련했다. 문화재청이 활동 대상으로 삼고 있는 것은 지정문화재인 향교 230건(국가지정 문화재 9건, 시·도지정문화재 221건)과 서원 169건(국가지정문화재 11건, 시·도지정문화재 158건)이다. 문화재청은 매년 지자체를 대상으로 향교·서원문화재 활용 공모사업을 추진, 2018년까지 120개 향교·서원문화재의 역동적·체험적 프로그램을 발굴해 지원키로 했다. 이를 통해 향교와 서원문화재가 경쟁력 있는 '생생활활(生生活活)' 문화공간으로 거듭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그리고 향교·서원문화재 총서 발간과 전자도서관 구축, 교육사 제도 마련, 평생교육원 개설, 교재·관광 상품을 개발하는 등 향교·서원문화재 활용기반을 조성할 계획이다. 이를 통해 엄격한 성리학적 공간인 향교·서원이 주민참여형 역사교육장과 전통문화마당 등 대중적으로 활용돼 문화재 향유 국민 행복지수를 높이고 고품격 관람환경을 이루는 기대효과가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문화재청이 마련한 '향교·서원문화재 활용 운영모델 및 기본계획'은 문화재 5개년 기본계획 이행과 국정과제 성과목표를 달성하고 국가지정문화재 9개 서원의 세계문화유산 등재에 성공하는 정책환경을 조성, 수요자 눈높이에 맞는 문화재 활용정책 실현을 위해 마련한 것이다.문화재청은 이 계획을 통해 그동안 엄격한 제향문화 중심의 지루하고 폐쇄적인 향교·서원문화재를 전통교육기관으로서 본질적 가치를 계승하고 다양한 지역문화 거점으로 살릴 계획이다. 또 특화된 콘텐츠를 발굴하고 개성있는 프로그램을 보급·운영, 사람과 이야기로 생기가 가득하고 누구라도 쉽게 찾아갈 수 있는 문화공간으로 만들 방침이다.

2014-08-12 경인일보

[문화재, 영원을 꿈꾸다·11]안성 칠장사와 죽주산성

648년 신라 고승 자장율사의 창건설궁예의 무예연마·병해대사 제자 임꺽정명부전엔 각종 설화 벽화로 남겨져 있어경기도 절 중에서 가장 많은 유물 간직혜소국사비·국보 오불회괘불탱 등 보존안성시 죽산면 칠장리 칠현산(七賢山)에 위치한 칠장사(七長寺,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24호)는 유서 깊은 전통사찰이다. 경기도내 사찰 중 가장 많은 유물을 갖고 있고 궁예와 임꺽정 등의 다양한 설화가 전해지는 곳이다. 특히 어사 박문수가 칠장사 나한전에서 기도를 드리고 난 후 장원급제를 했다고 해서 지금도 수험생 학부모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곳으로도 유명하다.대한불교조계종 사찰인 칠장사의 창건 시기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신라 고승 자장율사가 진덕여왕 2년인 648년에 창건했다는 설이 전해지고 있다. 그리고 칠장사 사적비에 의하면 고려시대 대선사인 혜소국사가 중창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 혜소국사는 고려 광종 23년(972) 안성 죽산 출생이다. 9세에 수원 광교사에서 충회대사에게 출가했다. 훗날 문종에 의해 왕사(王師)로 추대됐고 83세에 국사가 돼 칠장사에서 입적했다.칠장사의 원래 이름은 '아미산(峨嵋山) 칠장사(漆長寺)'였으나 혜소국사가 7명의 악인을 교화해 칠현(七賢)이 된 이후 '칠현산(七賢山) 칠장사(七長寺)'로 바뀌었다고 전해진다.칠장사는 여러차례 화재에 의해 소실됐다. 1383년(우왕 9)과 1506년(연산군 12)에 각각 중건됐다. 왜구가 침입했을 때는 충주 개천사의 사적(史籍)을 칠장사로 옮겨 보관하기도 했다.이후 칠장사는 크고 작은 보수와 중건, 이건 등이 꾸준히 이뤄졌다.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대웅전과 원통전, 명부전, 나한전, 산신각, 천왕문 등이 원형으로 남아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요사채와 박물관, 혜소국사 비각, 일주문 등은 새롭게 지어졌다.칠장사에는 사찰의 오래된 역사만큼 중요한 문화재들이 많다. 국보 296호인 칠장사오불회괘불탱, 보물 488호인 칠장사 혜소국사비, 보물 1256호인 칠장사 삼불회괘불이 있다. 이중 대사의 생애와 업적을 기록하고 있는 혜소국사비(문종 14년, 1060)에는 다음과 같은 설화가 전해진다. 임진왜란 당시 왜의 장수인 가토가 이 절에 왔을 때, 어떤 노승이 홀연히 나타나 그의 잘못을 꾸짖자 화가 난 가토가 칼을 빼어 베었다. 노승은 사라지고 비석이 갈라지면서 피를 흘리니 가토는 겁이 나서 도망을 쳤다고 한다.이밖에 칠장사 철당간(경기도 유형문화재 39호), 칠장사 대웅전(경기도 유형문화재 114호), 칠장사 천왕문과 소조사천왕상(경기도 유형문화재 115호), 안성칠장사대웅전목조석가삼존불좌상(경기도 유형문화재 213호), 안성 칠장사 목조지장삼존상과 시왕상 일괄(경기도 유형문화재 227호), 안성 칠장사 범종(경기도 유형문화재 238호), 안성 칠장사 대웅전영산회상도(경기도 유형문화재 239호) 등 셀 수 없는 문화재가 산재해 있다.칠장사의 수많은 문화재중 '인목왕후 어필 칠언 시'는 경기도 유형문화재였다가 지난 2010년 1월 보물 1627호로 지정됐다. 선조의 계비인 인목왕후(1584~1632)가 큰 글자로 쓴 칠언절구의 시다. 인목대비는 억울하게 죽은 부친과 아들 영창대군의 명복을 빌기 위해 칠장사를 원당(願堂)으로 삼으면서 중수한다음 '금광명최승왕경' 10권과 함께 이 시를 하사했다. 시의 내용은 "늙은 소 힘쓴 지 이미 오래되었으니, 목덜미 쭈그러들고 가죽은 헤져서 다만 졸리울 뿐 쟁기질 다 끝나고 봄비도 넉넉한데, 주인은 어찌하여 또 채찍을 든단 말인가"다. 이 시는 늙은 소의 고달픔과 그것을 바라보는 주인의 애처로운 마음을 자신의 처지에 비유하고 있다.또 보물 983호인 봉업사지 석조여래입상은 원래 봉업사지에 있던 것을 죽산중학교로 옮기고 그 뒤 칠장사로 이전한 것이다. 파손이 심한 상태이지만 전체적인 조각수법이 우수해 고려시대 초반의 매우 우수한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칠장사 명부전에는 칠장사와 얽힌 갖가지 이야기들이 벽화로 그려져 있다. 벽화에서는 한눈을 가린 궁예의 모습이 보이고 임꺽정과 병해대사의 모습도 찾아 볼 수 있다. 후고구려의 왕이었던 궁예는 이 곳 칠장사에서 13세까지 활쏘기와 무예를 연마했다고 전해진다. 궁예의 어릴적 활쏘는 모습이 명부전의 벽화로 그려져 있다. 또 백정의 아들로 천민이라 설움을 받던 임꺽정은 칠장사에 법력이 높은 고승(병해대사)이 있다는 소리를 듣고 칠장사를 찾았고 병해대사는 임꺽정과 그 도적무리들을 제자로 받아들인다. 벽에 그려진 병해대사와 임꺽정 등이 칠장사의 옛이야기를 전해주고 있다.혜소국사의 나눔과 소통사상을 계승하기 위해 칠장사는 매년 일정량의 쌀을 안성시에 전달, 지역의 저소득층을 지원하고 있다. 혜소국사는 당시 가난한 백성들을 구휼, 칠장사 아랫마을 백성들은 굶는 사람이 없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칠장사 주지 지강스님은 "삼의일발(三衣一鉢), 즉 옷 세벌과 밥그릇 하나면 족하다"며 "너무 많은 걸 가진 이들이 나누지 않고 물질을 좇아 화와 불행을 만들고 있는게 현실"이라며 "안성불교사암연합회 사찰들과 함께 부처님의 자비나눔을 실천하고 있다"고 설명했다.충청과 접경 삼국시대부터 군사요충산성안엔 몽고 침략 막은 송문주사당죽주산성은 안성시 북동쪽에 위치한 해발 372m 높이의 비봉산과 이어지는 동쪽 자락에 위치해 있다. 죽주산성은 조망이 사방으로 양호해 과거 서울에서 삼남지방으로 연결되는 교통의 요충지를 방어하기에 적합한 위치에 있다.죽산은 충청북도와 경계를 이룬다. 죽산은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현재 행정단위인 안성과는 독립된 행정구역을 유지해 왔다. 지형이나 수계로 볼때 죽산은 남한강 유역에 위치하지만 금강 유역권에 속하는 진천, 청주지역과 안성천 유역권에 속하는 안성·평택지역과 접하고 있어 타 지역으로 나가는 관문 구실을 했다. 이런 지리적 조건 때문에 고대부터 죽산은 교통의 중심지, 군사적 요충지로 주목 받아왔다.죽주산성은 삼국시대부터 그 중요성을 인정받았다. 북쪽에서 차령산맥 이남으로 진출하는 전진기지 구실을 한다면 반대로 남쪽에서 한성으로 진출하거나 아산만의 국제무역항인 당진으로 진출하기 위한 교두보로 죽주산성을 활용했던 것으로 보고 있다. 죽주산성의 지리적 조건과 역사적 배경을 고려할때 고구려나 백제보다 신라쪽에서 죽주산성의 활용도가 더 컸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몽고 침입때 죽주산성에서 전투가 벌어진 것도 죽주산성이 삼남으로 통하는 요충지였기 때문이다. 몽고군은 개경-한양-용인-죽산-충주로 이어지는 교통로를 따라서 영남지역으로 침입했다. 죽산은 영남과 충청도로 연결되는 교통의 요지였기 때문에 몽고군 주력부대의 치열한 공격을 받게 된 것이다.조선시대 죽산은 영남대로에서 진천-청주-보은 등으로 통하는 도로가 결절되는 지점이었으므로 죽산은 충청·영남 방면에서 서울로 향하는 인마와 물자가 집결되는 교통의 요지로 기능했다. 이런 이유로 조선후기에 들어 죽주부사 자리는 재주와 명망이 있는 문관을 가려 보냈다. 죽주산성내에는 고려때 몽고 침략시 죽주산성에서 적의 공격을 물리쳐 좌우위장군(左右衛將軍)에 오른 송문주 장군을 모시는 사당이 있다. 정조대에 영의정을 지낸 채제공이 비문을 썼다는 기록이 있고 조선시대 고지도 상에 대부분 송문주 장군의 사당이 표시돼 있는 등 과거부터 죽주산성에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시설물이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현재도 매년 '동안성 죽주문화축제'때 송문주 장군 고유제가 열리고 있다.본관이 진천인 송 장군은 1차 몽고 침입시 박서 장군의 휘하에서 종군해 그 공로로 고종 23년(1236) 죽주의 방호별감으로 승진됐다. 이해 9월 몽고군은 죽주성에 이르러 항복을 권유했으나 성중의 군리들과 합심해 몽고군을 격퇴, 다시 한번 큰 공을 세웠다. 그는 귀주성의 전투경험을 통해 몽고군의 공성술을 잘 알고 있었다. 그의 뛰어난 지략을 보고 군사들은 모두 그를 신명(神明)이라 일컬었다.복원 동문에서 송문주 장군 사당으로 가는 길 오른편에는 산신각이 위치해 있고 산신제각에서 동문으로 내려가는 길 좌측에도 2개의 건물로 이뤄진 사찰이 하나 존재하고 있다. 죽주산성 동문 안쪽에 위치한 약수터는 수량이 풍부하고 약수를 뜨기 위해 약수터를 찾는 주민이 있을 정도로 물 맛이 좋다는 평을 받고 있다. 글=김신태기자 / 사진=조형기 프리랜서▲ 칠장사 대웅전.▲ 칠장사 혜소국비.▲ 봉업사지 석조여래입상.

2014-08-05 김신태

[문화재, 영원을 꿈꾸다·10]평택·화성의 관방유적

서해와 육로·수로가 연결되는 요충지산성·봉수대 축조해 침입자 상륙 막아평택 안정리 농성 유일하게 보존 양호다른 성곽문화재 유실돼 규모만 짐작화성 당성 건물터·우물터만 남아있어 평택시가 지난 2004년과 2007년에 각각 발간한 평택서부 관방산성 발굴조사보고서와 학술연구보고서에 따르면 아산만과 주변 지역은 내륙 수로와 육로가 서해 연안항로와 연결되는 전략적 요충지로, 삼국시대 이후 군사적으로 중요시돼 왔던 지역이다. 교통의 요충지는 곧 군사적 요충지가 된다. 이에 따라 삼국시대에는 서해의 해상권을 장악하기 위해 치열한 다툼이 벌어졌다. 삼국시대 이후 아산만 일대는 서해에서 아산만을 통해 중부 내륙지방으로 진출하려는 세력을 방어하기 위해 꼭 확보해야 할 요충지였다. 따라서 곳곳의 야산에는 산성이나 봉수대를 축조해 적대적인 세력이 상륙하는 것을 방어하고자 했다.특히 남양만에 있었던 것으로 알려진 당항진은 대(對) 중국교역의 영향으로 삼국이 이 곳을 서로 차지하기 위해 투쟁했던 곳이다. 통일신라시대에 들어서 당항진의 군사적 중요성은 다소 약화됐지만 국제무역항으로서의 가치는 여전했다. 고려 성종 12년경 아주(牙州·충남 아산시의 고려시대 이름)에 하양창(고려시대 세미(稅米)의 운송을 위해 지방에 설치한 조창(漕倉)의 하나)이 설치된 이후 아산만은 조운(漕運)의 중심지 역할을 했다. 또한 고려 후기 이후 주변에 간석지가 농토로 개간되면서 점차 농업생산력이 확대됐고 인구도 증가했다.고려말 조선초에는 왜구의 약탈이 이 곳에 집중되면서 피해가 극심했다. 왜구의 출몰이 빈번해지면서 중앙정부에서는 이 지역의 해안방어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곳곳에 성곽(城郭)을 축조, 왜구의 상륙에 대비했기 때문이다. 안성천 하구와 아산만 일대에는 당시에 축조하거나 활용한 다양한 형태의 성곽이 분포돼 있다.1999년 경기도박물관에 의해 실시된 지표조사에 따르면 평택 서부지역에는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형태의 성곽과 봉수(烽燧)대가 분포돼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성곽들은 현재 간척사업 등으로 내륙 깊숙이 위치해 있지만 원래의 지형을 고려하면 대부분 해안에 위치한 구릉이나 야산에 축조된 것들이다. 일종의 해안 방어를 목적으로 축조된 성곽들이다.평택서부지역에 위치한 성곽들은 조선시대 기록에서도 언급돼 있지 않아 축조시기와 사용시기에 대해서는 분명하지 않다. 다만 그 위치로 볼때 삼국시대 이후 아산만 일대의 해안방어와 밀접한 관련을 갖고 있는 유적들로 주목받고 있다.성곽과 봉수를 포함하는 광의의 개념이 바로 관방유적(關防遺蹟). 고대로부터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방어체계 및 문화양상을 밝히는데 중요한 학술적 자료를 제공하고 있다.평택지역에는 농성을 비롯해 경기도지정 성곽문화재만 6개에 달하지만 농성과 덕목리성지에만 안내판이 세워져 있을뿐 나머지 성지에서는 안내판을 찾아 볼 수 없다. 특히 그나마 농성만 체육공원으로 조성돼 관리가 되고 있을뿐 대부분의 성지들은 사유지여서 각종 개발과 인근 주민들의 농사, 분묘 등의 조성으로 지금은 그 위치와 흔적조차 확인하기 어려운 실정이다.안정리 농성(경기도기념물 74호)은 팽성읍사무소로부터 1.5㎞정도 떨어져 있다. 평지성인 농성은 삼국시대에 도적이 심해 양곡을 보관하기 위해 쌓았다는 설과 신라 말기 중국에서 건너온 평택 임씨의 시조인 임팔급이 축조해 생활 근거지로 삼았다는 설이 전해진다. 농성은 해발 24m의 낮은 구릉의 정상부를 중심으로 그 외곽을 감싸는 형태로 축조됐다. 전체 둘레는 332m다. 성내부에는 5천964㎡의 평탄지가 형성돼 있다. 전체적인 보존상태는 양호한 편이다. 현재 체육공원으로 복원된 농성 앞에는 안내판과 함께 임팔급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덕목리성지(경기도기념물 206호)가 위치해 있는 현덕면 덕목리 원덕목 마을은 통일신라시대 수성군(水城郡)의 4영현 가운데 하나였던 광덕현의 치소가 있었던 곳으로 추정되는 마을이다. 덕목리성지는 동성(東城)과 서성(西城)으로 나눠져 있는 평지 토축성이다. 서성은 1980년대 이뤄진 경지정리로 동벽과 서벽 일부, 남벽 전체가 유실된 상태지만 북벽과 동벽의 일부, 그리고 서벽의 일부가 남아있어 이전의 성의 규모를 짐작케할 뿐이다. 그리고 서성 한 가운데에는 밭이 자리잡고 있다. 그러나 동성의 경우에는 마을이 들어서 있어 성의 형태나 그 규모를 확인하기 어려운 상태다. 그나마 덕목리성지에는 안내판이 설치돼 있어 이 곳이 덕목리성지라는 것을 알려주고 있다.무성산성지(경기도기념물 202호)는 청북면 옥길리에 있다. 해발 104.7m의 무성산에 조성돼 있다. 산 정상부에는 이동통신 기지국 송신탑이 세워져 있다. 무성산성에 관한 기록은 1942년 일제가 편찬한 조선보물고적조사 자료에 처음 등장한다. 1977년 편찬한 문화유적 총람에는 "이 일대는 자미산, 피라산이 남쪽으로 연결되는데 위치해 있으며 속칭 퇴미산이라 부르는 산정(山頂)에 있다. 높이 약 4m, 폭 3m, 주위 800m의 이 성지는 조선초기 임경업 장군이 자미산성 쌓기 내기를 한 전설과 연관된 성으로 전해질뿐 확실한 연혁이나 사적은 알 수 없다"고 돼 있다. 이 산성은 해양과 인접한 지형때문에 해안방어를 목적으로 축성된 것으로 보여진다. 일제시대와 해방 후 간척사업이 있기전 무성산 서남쪽 옥길리 신기마을 해망산 앞까지 바닷물이 들어왔으며 무성산 남쪽방면으로 가까운 거리에 있는 안중면 학현리에도 바닷물이 들어왔었다. 특히 무성산 동쪽 용성현은 고려초까지만 해도 독립된 현(縣)으로 고려말 왜구의 노략질로 큰 피해를 입은 지역이어서 군사적 방비가 크게 요구되던 지역이었다. 현재 무성산성지에는 참호 등 군시설물들로 인해 훼손이 심한 상태다.지금 간척사업으로 내륙으로 깊숙이 들어와 있지만 그 옛날 바닷가였던 안중읍 용성리 일대에는 산성이 많다. 자미산성지(경기도기념물 203호), 비파산성지(경기도기념물 204호), 용성리성지(경기도기념물 205호) 등이다. 이중 대표적인 산성은 자미산성과 비파산성이다. 비파산성은 1천600여m나 되는 포곡식 산성으로 경기도박물관 발굴조사를 통해 고려시대 용성현의 읍치(邑治)였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또 자미산성은 평택지역에서는 드물게 돌로 쌓은 석성이다. 용성리 일대에 성곽이 많은 것은 바닷가에 위치한 마을이다 보니 왜구의 침입이 많았기 때문이다. 왜구들은 세곡(稅穀)을 운송하는 조운로나 조창이 있는 지역에 자주 출몰했는데 고려시대 전국 13대 조창이 있었던 경양현(팽성읍)이나 용성현이 자주 습격을 당했다.대당(對唐) 무역항인 당항진을 배후로 낀 남양만 일대는 조선 중기 효종 이전까지 수군(水軍) 기지인 영종포영첨사(永宗浦營僉使)가 자리잡고 있었고 삼국시대에는 전략요충지인 당성(唐城)이 있었던 곳이다. 화성 당성(사적 217호, 화성시 서신면 상안리 위치)은 당항성이라고도 한다. 둘레 1.2㎞로 계곡을 따라서 쌓은 포곡식 산성이다. 산정상에서 서해가 보인다. 원효대사가 의상과 당나라로 유학길을 떠나던 도중 해골물을 마시고 깨달음을 얻은 곳이 당성 일대란 학설도 있다. 현재 동문·남문·북문 터와 우물터, 건물터가 남아 있다. 이 지역은 처음 백제의 영역이었다가 고구려의 영토로 한때 편입되면서 당성군이라 했으나 신라가 이 지역을 점령, 당항성이라고 불렀다. 당성이 소재하는 남양지역은 지금은 화성시지만 신라 경덕왕때는 당은군으로 중국과의 교통로로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신라 후기에는 당성진을 설치해 청해진과 함께 신라 해군의 근거지로 중요시됐다. 글=김신태기자 / 사진=조형기 프리랜서▲ 평택 안정리 농성 전경.▲ 경기도기념물 206호 평택 덕목리성지 안내 표지.▲ 평택 안정리 농성 내부 모습.▲ 사적 217호 화성 당성의 우물터.

2014-07-29 김신태

[문화재, 영원을 꿈꾸다·9]양주 회암사지

회암사, 12세기경 궁궐과 유사한 양식으로 창건 추정폐사후 절터만 남아 1997년부터 유물 발굴·복원 공사회랑·장식기와 위용 가늠 부도탑 조각 석조미술 걸작유교와 갈등으로 퇴색된 수선도량 부흥 꿈꿔양주 회암사지(楊州 檜巖寺址·사적 제128호)는 양주시 회암동 천보산 산자락에 위치한 절터다. 현재는 절터의 흔적만 남아 있지만 그동안 발굴조사를 통해 복원된 절터 규모와 이 곳에서 출토된 각종 유물들을 살펴보면 당시 회암사의 위상을 알 수 있다.1964년 사적으로 지정된 양주 회암사지는 1997년 시굴조사를 시작으로 그동안 10차례 넘게 발굴조사와 복원공사가 진행됐으며 현재도 복원공사가 한창이다.발굴조사 결과, 옛 회암사는 일반적인 사찰과는 달리 궁궐과 유사한 건축 양식을 갖추고 있었음이 확인됐다. 가람(伽藍)의 배치가 평지가 아닌 산간에 위치하면서도 8단의 단축을 이루면서 남쪽에 회랑(回廊)을 두고 있는 점에서 고려시대의 궁궐이나 사찰 배치 형식을 보이고 있는 것이 주목받고 있다. 회랑은 종교 건축이나 궁전 건축 따위에서 건물의 중요 부분을 둘러싸고 있는 지붕이 달린 복도다.그리고 절터에서는 지붕 처마나 추녀마루에 올라가는 토수(吐首), 용두(龍頭), 잡상(雜像)과 같은 장식기와들이 다량으로 출토됐다. 이들은 방화(放火), 호법(護法) 등의 의미로 궁궐의 중심 건물에만 올려졌던 조형물이다. 또한 사천왕상을 장식했던 소조장식편과 보살상을 장식하기 위해 별도로 제작된 영락장식 등은 어느 사찰에서도 출토되지 않았던 유물들이다.여기에 고려시대의 청자와 조선시대 청자와 백자, 분청사기를 비롯한 다양한 종류의 도자기가 출토됐다. 출토된 도자기 중에는 당시 궁궐이나 왕실과 밀접하게 연관된 왕실사찰 등에서만 사용되던 왕실용 명문백자를 비롯해 사찰에서 기거하던 승려나 불교도들이 사용하던 조질백자까지 여러 종류의 도자기가 망라돼 있다.지난 2012년 발행된 '회암사지박물관 개관도록'에 따르면 회암사가 언제 창건됐는지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다만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권2에 고려 명종 4년(1174)에 금나라의 사신이 이곳을 다녀갔다는 기록이 있으며 고려 충선왕 5년(1313)에 태고 보우(太古 普遇·1301~1382)선사가 이 곳에서 광지(廣智)선사에게 출가한 것으로 전해진다. 이런 기록을 볼때 회암사는 늦어도 12세기 무렵에 창건됐으며 사신이 다녀갈 정도로 상당한 규모를 갖추고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회암사가 현재의 절터처럼 거대한 규모로 중창될 수 있었던 이유는 고려말, 조선초 왕실의 적극적인 후원으로 많은 불사(佛事)가 이뤄졌고 당시 불교계를 주도하던 고승들이 머물던 최고의 사찰이었기 때문이다. 고려말인 공민왕 21년(1372)에는 나옹(懶翁·1320∼1376)선사가 공민왕의 명으로 이 절에 와서 원나라를 통해 들어 온 승려 지공(指空·1300~1361) 선사의 사리탑을 건립했고 1374년부터 2년동안 266칸의 대규모 불사를 벌였다. 이후 우왕 2년(1376) 나옹선사의 제자인 각전에 의해 지금과 같은 규모의 대찰로 완공됐다.조선시대에 들어서는 유신들의 거센 반발속에서도 회암사는 왕실의 원찰로 그 자리를 굳건하게 지켰다. 태조 이성계는 1393년 무학(無學·1327~1405)대사를 회암사에 머물게 하고 불사와 법회에 참석하기 위해 7번이나 이 곳을 다녀갔다. 태조는 또 왕위에서 물러나서도 태종 2년(1402) 무학대사에게 계를 받고 회암사에서 수도생활을 했을뿐만 아니라 태종 5년에 무학대사가 입적하자 그의 탑비를 세우기도 했다.그리고 회암사는 효령대군, 정희왕후, 문정왕후를 비롯한 많은 왕실들이 불사를 후원했다. 조선 초기의 문신·학자인 김수온(1409∼1481)이 쓴 '회암사중창기'에 따르면 성종 3년(1472)에 세조의 비인 정희왕후가 회암사를 대대적으로 중건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또 명종때 수렴청정을 했던 문정왕후(1501~1565)는 승려 보우(普雨)를 통해 불교중흥정책을 펼치면서 회암사를 전국 제일의 수선도량으로 크게 일으켰다.하지만 국가적 차원의 비호와 후원을 받던 최대 사찰 회암사는 문정왕후 사후 사세가 급격하게 기울어진다. '명종실록'에 "유생들이 회암사를 불태우려 한다(명종 21년)"란 기록이나 '선조실록'에 "회암사 옛터에 불탄 종이 있다(선조 28년)'란 기록을 볼때 1566~1595년 무렵 유생들의 방화로 소실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비록 옛 회암사는 폐사돼 현재 그 흔적만 남아있는 상태지만 양주 회암사지에는 중요 문화재들이 그대로 남아 옛 회암사의 부흥을 말해주고 있다.양주 회암사지 가장 안쪽 깊숙한 곳에 세워져 있는 약 6m 높이의 회암사지부도탑(경기도 유형문화재 제52호)은 회암사의 옛 모습을 그려볼 수 있는 귀중한 문화재다. 웅대한 크기와 부도탑 각 면에 새겨진 뛰어난 조각은 조선전기 석조미술을 대표하는 걸작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양주 회암사지 경내에는 이 부도탑 이외에 별도의 불탑이 없어 이것이 승려의 부도인지, 아니면 불탑의 역할을 하는 특별한 예배대상물인지에 대해서는 명확하게 밝혀내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양주 회암사지 경내에는 회암사지 당간지주(향토유적 제13호), 맷돌(경기도민속자료 제1호), 석조, 집수정 등의 건물 흔적들이 남아있다.그리고 절터에서 500여m 올라가면 현재의 회암사가 자리잡고 있다. 19세기에 세워진 것으로 알려진 현 회암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25교구 본사인 봉선사의 말사다. 이곳에는 조선시대에 세워진 지공선사 부도 및 석등(경기도유형문화재 제49호), 지공선사 부도비(경기도 문화재자료 제135호), 나옹선사부도 및 석등(경기도 유형문화재 제50호), 무학대사 홍융탑(보물 제388호), 무학대사비(경기도 유형문화재 제51호), 무학대사 홍융탑 앞 쌍사자석등(보물 제389호) 등이 위치해 있다.특히 회암사 삼성각 옆쪽으로 난 돌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회암사지선각왕사비(보물 제387호)가 우뚝 서 있다. 고려말 승려인 나옹을 추모하기 위해 고려 우왕 3년(1377)에 건립했으나 997년 성묘객의 부주의로 인한 화재로 파손됐다. 비는 지난 2001년부터 경기도박물관에 위탁·보관돼 있고 현재의 자리에는 받침돌이 그대로 남아 있다. 그 앞쪽에 1999년 원형모습 그대로의 모조비가 세워져 있다.양주 회암사지 앞쪽에는 지난 2012년 양주시가 개관한 '회암사지박물관'이 자리잡고 있다. 이 곳에는 양주 회암사지에서 출토된 각종 유물들을 전시하고 있다. 양주 회암사지에 올라가기 전 박물관에 들러 공부를 하면 회암사를 보다 더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박물관은 이 곳에서 출토된 기와들을 중심으로 전국에서 출토된 각종 기와들을 전시하는 '마루장식기와-건물의 위용과 품격을 담다'란 전시를 24일부터 10월 12일까지 연다. / 글=김신태기자 / 사진=조형기 프리랜서▲ 회암사지와 부도탑.▲ 나옹선사부도 및 석등.▲ 용두▲ 토수

2014-06-24 김신태

[문화재, 영원을 꿈꾸다·8]다산 정약용과 번암 채제공

'생활에 필요한 학문' 실학 정립 대학자남양주 마재마을서 어린시절·말년 보내생가 여유당서 형제들과 매일 경전 공부1925년 홍수로 떠내려가 1970년대 복원마을 중심부엔 다산과 부인 합장묘역조선초 창건 추정되는 수종사 자주 들러茶山실학(實學)은 17세기 중엽부터 19세기 초반까지 조선 말기 사회에서 나타났던 새로운 사상으로 실생활에 도움이 되는 실용적인 학문을 말한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으로 국가 기능이 마비되고 국토가 황폐화되면서 이에 대처하기 위한 여러 개혁이 진행됐다. 이 과정에서 농업 생산력과 새로운 상업이 발전하게 됐다. 당시 학문은 백성들을 위한 학문이 아니었지만 실학은 생활에 필요한 학문이어서 백성들에게 큰 도움이 됐다. 이런 실학을 발전시키기 위해 노력한 사람이 바로 다산 정약용이다. 그리고 번암 채제공은 다산 정약용의 정치적 스승이자 든든한 버팀목이었다.다산 정약용(丁若鏞·1762~1836)은 조선 후기의 실학자로 본관은 나주(羅州)고 호는 사암(俟菴), 자하도인(紫霞道人), 다산(茶山) 등이며 당호는 여유(與猶)다. 정약용은 17~18세기 실학(實學)을 종합한 조선 후기 대학자로 그의 생가와 묘가 있는 곳이 남양주 마재(馬峴)다. 마재마을은 그가 어린 시절과 말년을 보냈던 고향으로, 남양주 두물머리의 쇠내(苕川: 마재라고도 한다)다. 마재마을은 전형적인 배산임수 지형으로 마을 앞으로는 한강이 휘감아 흘러가고 북한강과 남한강이 만나는 마을의 동쪽 한강을 '두물머리(斗江)'라고도 한다. 양수리(兩水里)란 명칭도 양쪽물이 합쳐진다고 해서 생겨난 지명으로 두물머리의 다른 이름이다. 마재마을과 강 건너 보이는 분원(分院·현 광주시 남종면 분원리) 사이의 한강은 초천·초내·쇠내·소천·소내·우천(牛川) 등으로 불렸으며 강변에 우거진 갈대숲과 강물이 어우러져 생긴 이름으로 알려졌다. 그는 15세에 과거시험을 본 후 부인 홍혜원과 결혼하면서 서울로 이사할 때까지 두물머리를 배경으로 한 이곳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약현, 약전, 약종, 약용 4형제와 함께 고향인 마재마을에서 많은 추억을 쌓았다. 운길산(雲吉山), 수종사(水鐘寺), 천진암(天眞菴)도 그가 마재마을 주변에서 자주 찾았던 곳으로 유명하다.다산은 1784년 서학(西學)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1792년 수찬으로 있으면서 서양식 축성법을 기초로 한 성제(城制)와 기중가설(起重架設)을 지어 올려 축조중인 수원성(水原城) 수축에 기여했다. 1801년(순조1) 정조가 세상을 떠나자 천주교도를 박해했던 신유교난(辛酉敎難)때 포항 부근의 장기에 유배된 뒤 황사영 백서사건에 연루돼 전남 강진으로 이배됐다. 황사영 백서사건은 천주교도 황사영이 신유박해로 청나라 신부 주문모 등의 천주교도가 처형되거나 귀향을 가자 교회를 재건하고 포교의 자유를 얻기 위해서는 프랑스 함대를 파견해 조선 정부에 압력을 가하는 것이 좋겠다는 내용의 편지를 북경에 있던 프랑스 주교에게 보냈다가 이 사실이 발각돼 일당이 모두 체포돼 처형된 사건이다. 이 백서는 현재 로마 교황청에 보관돼 있다.그 곳에서 다산은 유배에서 풀려날 때까지 18년간 학문에 몰두, 정치기구의 전면적 개혁과 지방행정의 쇄신, 농민의 토지균점과 노동력에 의거한 수확의 공평한 분배, 노비제 폐기 등을 주장했다. 이런 학문체계는 유형원과 이익을 잇는 실학의 중농주의적 학풍을 계승한 것이며 박지원을 대표하는 북학파의 기술도입론을 받아들여 실학을 집대성했다. 어릴 때부터 시재(詩才)에 뛰어나 사실적이며 애국적인 많은 작품을 남겼고 역사·지리 등에도 특별한 관심을 보여 주체적 사관을 제시했다. 합리주의적 과학정신은 서학을 통해 서양의 과학지식을 도입하는 계기가 됐다.1800년(정조 24) 가을 유배에서 풀려나 57세의 나이로 고향으로 돌아온 다산은 약전, 약종 등 형제들과 매일 경전(經典)을 공부하며 자신의 집을 '여유당'이라고 이름지었다. 그 뜻은 "겨울에 시내를 건너는 것처럼 신중하게 하고(與), 사방에서 나를 엿보는 것을 두려워하듯 경계하라(猶)"는 노자(老子)의 말을 인용한 것이다. 여유당은 다산의 5대조부터 자리를 잡은 곳으로, 다산은 여기서 세상을 떠났고 이 집 뒷산에 묻혔다. 이후 다산 생가는 1925년 여름에 큰 홍수로 떠내려가 1970년대 복원됐다. 여유당은 본래 다산유적지 입구 주차장 부근으로 추정되며 복원되면서 현재의 위치로 옮겨졌다. 다산은 환갑이 되던 1822년(순조 22)에 그동안 자신의 평생을 되돌아보고 다시 출발한다는 뜻에서 집 뒤편 유산(酉山)에 자신이 묻힐 곳을 정하고 그 곳에 묻을 묘지명도 직접 지어 뒀다. 이때부터 '사암(俟菴)'이란 호를 사용했는데 후세를 기약한다는 뜻을 담고 있다.다산의 묘역은 마재마을의 중심에 위치해 있다. 1972년 경기도 기념물 제7호로 지정됐다. 묘는 그의 부인(풍산 홍씨)과의 합장묘다. 여유당 인근에는 2009년 개관한 실학박물관이 있다. 실학박물관은 조선 후기 실학사상을 오늘날 계승하기 위해 실학의 형성과 전개, 천문과 지리 등 실학사상 전반을 전시하고 있다. 또 실학의 역사와 문화를 밝히는 조사 연구사업, 실학자들이 남긴 소중한 문화유산을 수집·보존·관리하는 사업도 진행하고 있다. 또 1990년에 개관한 다산기념관에는 다산의 친필 서한인 간찰(簡札) 및 산수도 등과 대표적 경세서인 '목민심서', '경세유표', '흠흠신서' 사본이 전시돼 있다. 다산문화관에는 다산이 설계한 배다리를 이용해 정조가 수원에 있는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소를 참배하러 갈 때의 모습을 그린 능행도와 500여권에 달하는 방대한 저술을 분야별로 기록해 놓았다.인근에 위치한 수종사(水鐘寺)는 대한불교조계종 제25교구 본사인 봉선사(奉先寺)의 말사다. 수종사가 언제 창건됐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신증동국여지승람' 광주목 불우(佛宇)조에도 연혁이 나오지 않는다. 다만 1939년 석조부도를 중수하면서 1439년(세종 21)에 조성된 부도가 발견돼 최소한 조선 초기에 창건됐을 것으로 추정할 뿐이다. 수종사는 조선 초기 왕실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수종사란 이름을 세조가 지어준 것으로 전해져 오기 때문이다. 수종사는 마재에 살던 정약용 형제들의 학문을 닦고 연구하는 곳이었다.특히 수종사는 세조로부터 정약용에 이르기까지 조선 전 기간동안 시인 묵객뿐만 아니라 정치 일선에 있었던 정치가에서부터 서거정, 김종직, 김집 등 내로라하는 학자들의 빈번한 출입처였다. 고종때 조정의 내탕금으로 화려하게 중창을 했지만 한국전쟁으로 화마를 입어 한 줌의 재로 변했다. 현재 남아있는 전각은 1974년에 중건한 것으로, 문화재적 가치는 없지만 수종사의 격을 알려주는 유물이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돼 있다. 보물 제259호인 수종사부도(경기도유형문화재 제157호)내 유물이 있는데 석조부도탑에서 발견된 청자유개호와 그 안에 있던 금동제9층탑 및 은제도금6각감 등 3개의 일괄 유물이 그 것이다.■번암 채제공과 뇌문비수원성곽 축조에 큰 공 조선후기 명신정조가 직접 공덕 칭송하며 비문에 글'용인 채제공(蔡濟恭·1720~1799) 뇌문비'(경기유형문화재 제76호)는 용인시 역북동 낙은마을 채제공 선생의 묘역 입구 산기슭 북서쪽을 향한 곳에 위치해 있는 비각내에 보존돼 있다. 연립주택 사이를 지난 뒤 출입금지 표시가 있는 개인주택 입구 왼쪽의 돌계단을 올라가면 비각이 보인다. 뇌문비(뢰文碑)는 죽은 사람의 생전의 공덕을 칭송하는 글을 새긴 비다. 조선 후기 명신이자 영의정이었던 채제공의 장례일에 정조가 채제공의 명복을 신에게 기원하면서 내린 제문(祭文)의 일종인 뇌문을 새긴 것이다. 비는 방형의 백색화강암제 비좌와 오석의 비신 및 팔작지붕 옥개석 형태다. 비문의 내용은 채제공의 공적을 기리고 애도의 뜻을 표한 것이다. 건립연대는 비문 말미의 제문을 통해 1899년(정조 23) 3월 26일에 지어진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채제공 묘(경기도기념물 제17호)는 뇌문비에서 숲속 좁은 길을 따라 50m 정도 올라간 곳에 위치해 있다.번암(樊巖) 채제공은 영조 19년(1743)에 문과에 급제해 이조참판·우의정·좌의정·영의정 등의 주요 관직을 거쳤고 '열성지장'과 '국조보감'의 편찬사업에 참여했다. 영조와 정조대에 걸친 기간 중 정치·경제·문화·사회 등 각 분야에 많은 업적을 남겼다. 특히 수원 성곽 축성에 많은 공을 세워 정조로부터 두터운 신임을 받았다.특히 채제공은 사도세자의 신원을 주장하고 정조의 탕평책을 추진한 핵심적인 인물이다. 그는 영조때 도승지(1758년)가 된 후 사도세자를 미워한 영조가 세자를 폐위하란 명령을 내리자 죽음을 무릅쓰고 건의해 이를 철회시킨 인물이다./글=김신태기자 /사진=조형기 프리랜서▲ 다산 정약용 선생의 생가 여유당과 재현된 배다리 모형. 배다리는 정조의 수원 행차 때 다산이 노량진에 설치했던 것이다.▲ 다산 정약용 초상화. 작자 미상.개인 소장.▲ 채제공 선생의 공덕을 칭송하는 글을 새긴 뇌문비.▲ 번암 채제공 초상화. 이명기 작품.수원화성박물관 소장.

2014-06-17 김신태

[문화재, 영원을 꿈꾸다·7]여주 고달사지와 신륵사

■고달사지고달산 경사면에 위치한 절터 신라 경덕왕때 창건 18세기말 폐사 추정고려 왕실 적극적 후원 사세 떨쳐… 터 훼손되자 발굴 조사·보존 작업원종대사혜진탑·석불대좌 등 웅장함 표현한 석조유물 사찰 위상 짐작여주 고달사지(高達寺址·사적 제382호)는 해발 400~500m의 산으로 둘러싸인 분지 서북쪽 고달산(혜목산, 현지명은 우두산) 동쪽 경사면에 위치한 절터다. 지난 2005년 편찬된 '여주군사(驪州郡史)'에 따르면 고달사의 정확한 창건 기록은 남아 있지 않은 상태로, 764년(신라 경덕왕 23)에 창건됐다고 전해지지만 확실하지 않다.고달사는 신라 이래의 유명한 삼원(三院)인 도봉원(道峰院, 도봉산 영국사), 희양원(曦陽院, 경북 문경 봉암사), 고달원(高達院) 중 하나로, 고려시대에는 국가가 관장하는 대찰이어서 왕실의 비호를 받았던 곳이다.특히 고달사의 역사에 있어서 중요한 인물인 원종대사 찬유는 고려초 국사의 예우를 받으며 활약한 승려로, 고려 광종때의 불교 교단 정비와 사상의 통일에서 일정한 역할을 담당했던 법안종의 성립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고달사와 고려 왕실의 관계는 원종대사 사후에도 광종이 특별히 명을 내려 도봉원·희양원과 함께 고달사를 삼부동선원(三不動禪院)으로 삼고 977년(고려 경종2)에 원종대사혜진탑을 건립하는 등 고려 왕실의 적극적인 후원을 받았고 이 시기에 크게 사세를 떨쳤을 것으로 추정된다.고달사가 언제 폐사됐는지에 대한 기록은 확실하게 남아 있지 않다. 다만 1799년(정조 23)에 쓰인 '범우고'에 비로소 고달사가 폐사지로 기록돼 있어 적어도 18세기말 이전에 폐사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고달사지는 관련학계에서 일찍부터 그 중요성을 인식, 1993년 사적으로 지정됐다. 그러나 당시 절터에 민가들이 들어서 마을이 형성돼 있었고 일부는 경작지로 이용되면서 절터의 파괴가 진행됐다. 이에 경기도와 여주군은 사역의 정비와 보존 필요성을 인식, 1998년 고달사지의 정비 및 보존에 필요한 기초자료를 확보하기 위해 사역 전체에 대한 시굴 및 발굴조사를 경기도박물관에 의뢰했다. 그리고 이후 주변 민가를 매입, 철거한 후 경기도박물관과 기전문화재연구원(현 경기문화재연구원)에 발굴조사를 의뢰했으며 10세기말 이후의 건물지로 추정되는 15동의 건물지를 확인했고 2006년까지 6차 발굴조사를 완료했다.고달사지에는 현재 국보 제4호인 고달사지 부도를 비롯해 보물 6호인 원종대사 혜진탑비 귀부 및 이수, 보물 7호인 원종대사혜진탑, 보물 8호인 고달사지 석불대좌 등 고려시대의 웅장한 기운을 표현한 여러 석조물들이 국가문화재로 지정돼 있다. 이 문화재들은 그 규모와 조각기법 등 당대 최고의 기술로 표현된 것으로 당시 고려시대 고달사의 위상을 설명해주는 중요한 유물이다. 보물 제282호인 쌍사자석등은 경복궁으로 옮겨져 있는 상태다.이중 원종대사혜진탑비 귀부와 이수는 원종대사의 행적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는 탑비로 975년에 만들어졌으며 통일신라말에서 고려시대 초기로 넘어가는 탑비형식을 잘 보여주고 있다. 원종대사혜진탑은 원종대사의 묘탑으로 아름답고 화려한 조각이 있어 고려시대 부도의 조각 수법이 잘 나타나 있다. 여주시는 현재 국립중앙박물관 수장고에 보관돼 있는 비신(碑身)을 복제, 원종대사 혜진탑비를 오는 8월까지 복원키로 했다. 현재 고달사지 위쪽에는 임시도량인 '고달사(대한불교 조계종)'가 위치해 있으며 몇몇 스님들이 수행정진하고 있다. 그리고 고달사는 지난 2009년부터 고달사의 복원과 재도약, 그리고 원종국사를 조명하는 다례재를 지내고 있다. ■신륵사신라 원효대사 창건설… 봉미산 남쪽기슭 위치 남한강 흘러 경관 수려고려말 나옹 선사 입적으로 '유명세' 세종대왕릉 원찰돼 대대적 중수대한불교조계종 제2교구 본사인 용주사(龍珠寺)의 말사인 여주 신륵사(神勒寺)는 낮고 부드러운 곡선의 여주 봉미산 남쪽 기슭에 자리잡고 있다. 절 앞으로 '여강(驪江)'이라 부르는 남한강이 흐르고 있는 아름다운 사찰이다. 신라 진평왕때 원효대사가 창건했다는 설이 있지만 창건 시기를 뒷받침할 만한 자료는 없는 상황이다.신륵(神勒)이란 사찰 이름은 신기한 미륵(혹은 나옹선사, 혹은 인당대사)이 신기한 굴레(勒)로 인간에게 피해를 주는 용마(龍馬)를 막았다는 전설에 의한 것이라고 전해진다.신륵사가 유명해진 시기는 고려말부터인 것으로 추정된다. 김수온(1409~1481)은 '신증동국여지승람' 권 7 여주목 불우조(佛宇條)에서 "옛날 현릉의 왕사 나옹과 목은선생 두 사람이 서로 이어와서(신륵사에서) 놀았다. 이로부터 이 절이 드디어 기좌(畿左)의 유명한 절이 됐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처럼 나옹과 신륵사는 밀접한 연관성을 갖고 있으며 이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관계는 바로 1376년(고려 우왕2)에 나옹선사가 신륵사에서 입적했다는 사실이다.나옹선사 입적 후 조정에서는 그에게 선각(禪覺)이란 시호를 내리고 이색에게 선각탑명(禪覺塔銘)을 짓게 했다. 그리고 입적 3개월 후인 1376년 8월 15일에 나옹의 제자들이 중심이 돼 신륵사 북쪽 언덕에 나옹의 정골사리(頂骨舍利)를 봉안한 석종형의 부도를 세웠으며 동시에 대대적인 중창이 이뤄졌다.조선시대들어 신륵사는 영릉(英陵)의 원찰이 되면서 또 한번 중창의 기회를 맞게 된다. 경기도 광주 대모산에 있던 세종의 영릉을 여주군으로 천장한 것은 예종 원년(1469)의 일이다. 곧이어 영릉의 원찰을 짓는 일이 거론되다가 한명회 등의 건의에 따라 가까이에 있는 신륵사를 원찰로 해 중수하게 됐다. 신륵사의 중수불사가 끝난 다음해 세조의 비인 정희왕후 윤씨가 유사(有司)에게 명을 내려 신륵사의 이름을 보은사(報恩寺)로 바꾸게 하고 세종대왕릉의 원찰로 삼았다.조선중기에는 임진·정유란의 병화로 피폐된 신륵사를 1671년(현종 12)과 1702년(숙종 28)에 여러 스님이 다시 중수했다. 그리고 1726년(영조2)에 동대(東臺)에 있는 전탑을 중수하고 중수비를 세웠다.현재 신륵사 경내에는 보물로 지정된 다층석탑(제225호), 다층전탑(제226호), 보제존자석종(제228호), 보제존자석종비(제29호), 대장각기비(제230호), 보제존자석등(제231호), 조사당(보물 제180호)과 경기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된 극락보전(제128호), 팔각원당형석조부도(제195호) 등이 있다.당초 나옹 진영 봉안을 목적으로 세워진 조사당은 현재 지공(指空), 나옹(懶翁), 무학(無學) 세분의 영정을 모시고 있다. 현재 보수정비공사가 진행중이어서 일반에게 개방되지 않고 있다. /글=김신태기자/사진=조형기 프리랜서▲ 고달사지 석조대좌.▲ 고달사지 원종대사탑.▲ 신륵사 강월헌과 삼층석탑.▲ 신륵사 다층전탑.

2014-06-10 김신태

[문화재, 영원을 꿈꾸다·6]용인과 안성의 고택

이주국장군 생가 영조29년 건축 조선 살림집 특징 잘 간직목은 이색 후예 이자선생 옛집 '경기지역 주택 표본'인물 배출한 오정방고택 현재 오씨종부 거주문화재돌봄사업단, 수리·주변 상시관리용인이주국장군고택(경기도 문화재자료 제96호)은 오백 이주국(李柱國·1721~1798)장군의 생가로 전해지는 가옥이다. 이주국 장군은 조선 후기 무신이며 조선 정종의 아들인 덕천군의 후손으로 1721년(경종1) 이곳 용인시 원삼면 문촌리에서 태어났다. 영조 16년(1740)에 벼슬길에 올라 형조판서 자리에 오르기도 했다. 현재 이곳에 전해지는 관련 유적으로는 묘소와 신도비, 생가, 정자터 등이 전한다. 묘역은 향토유적 제4호로 지정돼 보존되고 있다.이 가옥의 건축연대는 안채의 망와(望瓦·용마루의 끝에 끼어 그 마구리를 장식하는 암막새)에 기록된 명문을 참조, '건륭18년계유일조작(건륭)'이라고 돼 있어 1753년(영조 29)에 건축된 것을 알 수 있다. 안채 종도리를 받치고 있는 장여 측면의 상량문을 보면 1990년에 중수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현재는 대문안으로 들어서면 사랑마당과 안마당이 연속돼 있으나 원래는 사랑마당과 안마당을 구획하는 담장과 중문 채가 있어서 각각의 공간이 분리돼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전체적으로 가옥의 입지와 채 구성, 공간 분할, 조경 수법 등에서 조선시대 살림집의 고전적인 특징을 잘 간직하고 있다. 이 고택에는 현재 사람이 거주하고 있다. 그러나 이 고택에 거주하는 집주인은 이주국 장군의 후손은 아니다. 몇차례 매매를 통해 주인이 바뀌었기 때문이다.경기문화재단 부설 경기문화재연구원 문화재 돌봄사업단이 이 고택을 상시관리하고 있다. 최근 이 고택을 방문했을 당시에도 문화재 돌봄 사업단 관계자들이 고택 앞마당의 쓰레기와 나무들을 정리하고 화단에 꽃씨를 뿌리는 등 돌봄사업을 진행하고 있었다. 문화재 돌봄사업단 관계자는 "현재 사람이 거주하고 있어 고택 안쪽은 관리를 제대로 못하고 있지만 건물 외벽 등이 부서지거나 하면 바로 복구하는 등 항상 깨끗한 모습을 유지할 수 있도록 돌봄사업을 진행하고 있다"고 말했다.용인시 기흥구 지곡동에 위치한 용인전음애이자고택(경기도 민속자료 제10호)은 조선 중종때 덕행 높은 이자(李자·1480~1533)선생이 살던 곳이라고 전해지는 옛집이다. 용인민속촌에서 지곡동으로 향하는 도로변에 동북향으로 앉아있는 이자 고택은 현재 행랑채는 불에 타 없어지고 본채만 남아 있다. 얼마전까지 사람이 살았던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지만 현재는 거주하는 사람이 없다.이자 선생의 본관은 한산(寒疝)이고 자는 차야(次野), 호는 음애(陰崖)다. 고려말기의 문신이자 정치인, 유학자인 목은 이색(1328~1396)의 후예다. 1501년 사마시를 거쳐 식년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한 뒤 감찰을 지내고 천추사의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곧 이조좌랑에 올랐으나 연산군의 난정으로 사직했다. 그후 1518년 종계변무 주청부사로 명나라에 다녀와 한성판윤 겸 경연관에 올랐다. 기묘사화를 당해 파직되자 용인, 음성, 충주 등지에 퇴거해 학문을 닦으며 여생을 보냈다. 사후 의정부 좌찬성에 증직되고 문의란 시호가 내려졌다. 저서로는 '음애일기'와 시문집인 '음애집'이 있다.본채는 사랑채와 안채가 연결돼 'ㄷ'자형 평면을 갖추고 있다. 별도로 사당을 짓는 일반 양반집과 달리 이 집에는 사당을 따로 두지 않았다. 다만 본채 북서쪽에 청방을 두고 단청을 해 이곳을 제사공간으로 사용했다고 한다. 사랑채와 안채가 한 건물로 연결돼 있으면서도 내외가 사용하는 공간이 구분되는 특이한 평면구조를 보이는데 인근 안성 정무공 오정방 고택, 이해룡 고가 등과 연관성을 보이는 조선시대 경기지역 중류주택의 일면을 보여준다. 고택 앞마당에는 우물이 위치해 있다. 문화재 돌봄사업단이 최근 부엌의 부서졌던 부분들을 새롭게 정리했다. 고택 좌측에는 근래에 건립된 '효문의공부조지묘'란 현판이 걸린 사당이 있다. 또 고택 바로 옆에는 이자 선생을 기리는 문학비가 세워져 있다. 고택에서 동북쪽으로 도로를 건너 지곡동 달래울 신갈승마클럽 뒷산 줄기 능선에 이자 선생의 묘가 있다.안성시 양성면 덕봉리에는 안성정무공오정방고택(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75호)이 자리잡고 있다. 1510년(중종5)에 처음 건립된 이래 정무공 오정방(吳定邦·1588~1634), 천파공 오상, 충정공 오두인(1624~1689)에 이르기까지 해주 오씨 명현들을 배출한 유서깊은 곳으로 내려온다.오정방의 본관은 해주(海州), 자는 영언(英彦), 호는 퇴전당(退全堂)이다. 호군을 지낸 오수천의 아들이며 수군우후를 지낸 숙부 오수억에게 입양됐다. 조선 중기의 무신이다. 선조 16년(1583) 무과에 장원급제하자 이이로부터 영재란 칭찬을 받았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도총부도사로 영흥지방에서 의병 수천명과 함께 많은 전공을 세웠다. 광해군때 인목대비의 폐위를 적극 반대하다가 삭직당했다. 인조 1년(1623년) 인조반정 후 포도대장에 등용됐으며 경상좌도 병사를 끝으로 관직에서 물러났다. 1624년 이괄의 난 때에는 왕을 따라 공주까지 호종했다.특히 충정공은 이 집에서 성장해 나라에 크게 공훈을 떨친 바 있어 우암 송시열이 편액을 써서 보내오기도 했다. 당초에는 덕봉리 252에 세워졌지만 1650년(효종1)에 현재 위치로 이전했다고 전해진다. 현존하는 건물은 문간채, 안채 및 사랑채, 사당으로 구성돼 있으며 문간채와 안채, 사랑채과 일곽을 형성하고 사당은 사랑채 뒤쪽에 조금 비켜서 별도로 세워졌다. 현재 안채 부분만 담장이 둘러져 있으며 사랑채 부분은 주변에 아무런 경계가 없이 외부에 노출 돼 있다. 원래 외곽에 별도의 행랑채나 문간채, 담 등이 있어 외부와 경계를 형성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 이 고택에는 해주 오씨 종부가 살고 있다.오정방 고택과 길 하나 사이를 두고 해주오씨 정무공파 종중 재실이 위치해 있다. 덕봉리 선비마을은 해주 오씨 집성마을로, 종중은 50여억원의 종중재산을 들여 재실을 신축했다. 제례실, 전시실, 식당, 교육장, 정자 등을 갖추고 있다. 선비마을은 지난 2007년 문화관광부에서 추진하는 '문화역사마을 가꾸기 사업'에 선정된 마을이다. 글=김신태기자/ 사진=조형기 프리랜서▲ 용인 이주국 장군 고택의 사랑채.▲ 용인이주국장군고택의 대문 및 행랑채.▲ 용인전음애이자고택의 기둥과 초석.▲ 안성정무공오정방고택의 사당.

2014-05-20 기자명

[문화재, 영원을 꿈꾸다·5]시흥의 선사유적과 문화유산

북부·남서부·남부 섬전체 패총 다수 발견빗살무늬토기 확인 서해안 연구 새 지평능곡동유적 선사~조선 유물 다량 발굴수도권 최대 규모 신석기마을 가치 높아소래산 암벽에 마애보살입상 섬세·세련된 표현 기법조선 4대 문장가 장유선생 신도비 높이 2.65m 국내 최대시흥시 정왕동에 위치한 오이도(烏耳島). 오이도는 이제 섬이 아닌 육지다. 1922년 일제가 염전을 만들기 위해 오이도와 안산시간 제방을 쌓은 뒤부터 자동차가 드나드는 섬같은 육지가 됐다.오이도에는 지난 1960년대 최초로 학계에 보고된 서해안 지역의 대표적인 신석기시대 패총(貝塚)을 간직하고 있는 오이도 유적(사적 제441호)이 자리잡고 있다. 섬 전체 곳곳에서 발견된 패총은 선사시대 사람들이 먹고 버린 조개껍데기 등이 쌓여 이뤄진 퇴적층 유적. 조개껍데기가 쌓였다고 해서 조개무덤·조개무지·조개더미로 부르기도 한다.# 시흥시 선사 유적= 오이도에서는 섬 전체가 패총으로 이뤄졌다고 할 정도로 곳곳에서 패총이 발견됐다. 오이도 패총은 크게 북부지역 패총군과 남서부지역 패총군, 남부지역 패총군으로 구분되고 있다. 남부지역 패총군은 신포도 패총으로 2개소다. 1988년과 1999년 두 차례에 걸쳐 조사됐으며 야외 노지(불땐 자리) 2기를 비롯해 많은 양의 빗살무늬토기 및 석기, 골각기(짐승의 뼈·뿔 등으로 만든 도구) 등이 발굴됐다. 남서부지역 패총군은 살막 패총으로 3개소다. 1988년과 1999년 두차례에 걸쳐 조사됐다. 빗살무늬토기편·석기류 등 1천여점과 수혈 주거지(원시시대 살림집 형태의 하나로, 땅에 10~100㎝ 깊이로 넓은 구덩이를 파고 위쪽에 지붕을 덮은 것) 3기, 야외 노지 3기 등이 나왔다. 북부지역 패총군은 안말 패총·뒷살막 패총·소래벌 패총 등이다. 뒷살막 패총은 2000년 조사했으며 적은 양의 빗살무늬토기, 석기가 발굴됐다.오이도 유적은 우리나라 신석기 문화 연구에 새로운 자료를 제시했다는 점에서 높게 평가받고 있다. 빗살무늬토기 확인으로 서해 도서지방 신석기 문화 편년(編年)의 새로운 자료를 보여줬다. 출토된 토기들 중에는 중국 산둥지방 신석기 문화인 용산문화의 흑도(黑陶)와 그 제작 방식이 비슷한 토기 1점을 비롯해 중국의 황해 연안지방 신석기 유적 출토품과 비슷해 동아시아 선사문화 비교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오이도 유적은 지난 2002년 4월 1일 국가사적으로 지정됐으며 2012년 5월에는 '시흥부오이도 선사·해안문화특구'로 지정됐다. 시흥시는 현재 오이도 유적을 중심으로 역사공원화 사업을 추진중에 있다. 시는 2017년까지 377억여원을 들여 오이도 일대 37만2천389㎡에 전시관, 전망대, 탐방로, 야생화 단지, 체험학습장 등을 갖춘 역사공원을 조성할 계획이다.현재 오이도 유적지 일부는 1.5㎞ 길이의 초대형 벽화 울타리에 둘러싸여 있다. 벽화는 지난해 5월 국내 최대 인원인 1천400여명이 참여한 가운데 가장 큰 벽화를 그린 것으로, 대한민국 최고 기록이 인증돼 기네스북에 오른 상태다. 울타리 안 오이도 유적 곳곳에는 분묘를 이장한 흔적들이 남아있고 현재 울타리안에서는 일부 사람들이 생활하고 있다. 오이도에는 안말, 살막, 신포동, 고주리, 배다리, 소래벌, 칠호, 뒷살막 등의 자연부락이 있었으나 시화지구 개발로 1988년부터 2000년 사이에 모두 사라졌다.시흥 능곡동 선사유적(향토유적 제20호)은 6천여년 전으로 추정되는 신석기시대 유적이다. 이 시기는 농사를 본격적으로 짓기 전이어서 열매 채취, 물고기 낚시, 수렵 등으로 인간이 살았던 시기다. 2005년 능곡택지개발지구(당시 한국토지공사)에 대한 발굴조사를 통해 발견됐다. 능곡동 선사유적은 현재 능곡고등학교와 마주보고 있으며 물왕저수지로 우회하기 직전에 통과하는 터널식 도로 위 언덕에 선사유적공원이 조성돼 있다. 이곳은 선사시대 문화유산 배움터로 활용되고 있다.능곡동과 군자동 일원에 계획된 능곡택지개발지구의 7개 지점에 대한 대규모 발굴조사는 경기문화재단 부설 경기문화재연구원에 의해 2004년 10월부터 2007년까지 이뤄졌다. 이 곳에서는 신석기시대 집자리 24기 이외에 청동기시대 집자리 6기, 구덩이 2기, 삼국시대(백제)와 통일신라시대 무덤 6기, 조선시대 이후 무덤 107기, 구들, 석렬 등 여러 시대의 다양한 유구들이 확인됐다.서울·경기지역에서 발견된 최대 규모의 신석기시대 마을유적이란 점에서 우리나라 서해안 지역의 선사문화연구를 위한 매우 중요한 발견으로 평가받고 있다.하지만 최근 능곡동 선사유적이 위치한 언덕 바로 아래에 자동차관련시설(세차장) 공사가 진행돼 유적지 훼손을 우려한 인근 주민들의 반발을 사고 있다.조남리 지석묘(경기도 기념물 제103호)는 청동기 시대의 탁자식 고인돌이다. 시흥시 조남동 소릉뫼(小陵山) 서남쪽 안골 비닐하우스와 논 등으로 둘러싸인 논둑에 위치해 있다. 덮개돌의 크기는 길이 4.2m, 너비 3m, 두께 70㎝다. 덮개돌은 윗면에 금이 많이 가 있다. 가운데 쪽에도 깨진 흔적이 남아있다. 덮개돌 아래에서 3개의 굄돌이 확인됐고 지석묘에서는 어떤 유물도 발견되지 않았다. 시흥시가 1995년 진입로를 마련했고 1999년 지석묘 자체의 성격 규명과 청동기 시대의 문화층을 확인하기 위해 한양대 박물관에 의뢰, 발굴조사를 실시하고 주변을 정리했다. 2007년 7월 지반 침하로 훼손됐으나 2008년 보존·강화 처리해 원래의 모습을 되찾았다.# 시흥시 문화재= 등산객들이 많이 찾는 시흥시 소래산 중턱 병풍바위 암벽에는 마애보살입상(보물 제1324호)이 새겨져 있다. 고려 초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며 자연 암벽에 부조나 선각 등으로 불상을 조각했다. 높이 14m, 보관 높이 1.8m, 발길이 1.24m, 발톱길이 15㎝, 귀 1.27m, 눈크기 50㎝, 입크기 43㎝, 머리높이 3.5m, 어깨너비 3.75m로 지난 2001년 보물로 지정됐다. 지금은 암벽의 풍화가 심해 그 형상을 뚜렷하게 알아보기 힘들지만 그 기법이 우수하고 회화적 표현이 뛰어난 세련된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머리에 화사한 보관을 쓰고 보관 내부는 덩굴무늬로 장식돼 있다. 양 어깨를 덮은 대의(설법하거나 걸식을 할 때 입는 거사)는 어깨에서부터 옷주름이 활 모양을 그리며 무릎까지 자연스럽게 흘러내려와 있다. 오른손은 가슴 앞에서 들어 엄지와 중지를 맞대고 있으며 왼손은 띠매듭 아래 부분에서 손바닥을 위로 향해 펴고 있다. 연꽃무늬가 새겨진 받침대 위에 서서 두발을 벌리고 있으며 발가락은 발톱까지 알아볼 수 있도록 매우 섬세하게 표현돼 있다.향토유적 제2호인 장유 선생(1587~1638) 묘 및 신도비는 시흥시 조남동에 위치해 있다. 신도비는 묘에서 서쪽으로 70m쯤 떨어져 있는데 1676년(숙종 2년)에 세워졌다. 높이 2.65m, 폭 1.3m, 두께 32㎝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신도비다. 비문은 우암 송시열이 짓고, 글씨는 청평위 심익현이 썼다. 전자는 광성부원군 김만기가 했다. 인선왕후는 장유 선생의 딸로 봉림대군(효종)과 혼인해 왕후가 됨으로써 장유 선생은 신풍부원군에 봉해졌다. 장유 선생은 이정구·신흠·이식과 더불어 조선시대 4대 문장가 가운데 한 사람이다. 우암 송시열은 "선생의 문장은 우리나라 제일"이라고 평했다. 저서중 '계곡만필', '음부경주해 '등이 전해진다. /글=김신태기자 /사진=조형기 프리랜서▲ 2001년 소래벌 패총 조사 현장. /서울대박물관·시흥시 제공▲ 능곡 선사 유적지에 복원돼 있는 원시시대 주거지.▲ 청동기 시대 탁자식 고인돌인 조남리 고인돌.▲ 소래산 마애보살입상.▲ 장유선생 신도비.

2014-05-13 김신태

[문화재, 영원을 꿈꾸다·4]삼남길 지나는 수원·오산

조선 육로교통의 중심축 삼남대로 복원한 도보길90.1km 경기 구간중 수원·오산 코스 문화유산 풍부서호천길엔 정조 효심 깃든 지지대 비각·노송지대인공저수지 축만제와 수인천 흔적 남은 중복들길독산성길엔 권율장군 이야기와 백제 고찰·공자사당삼남길은 한양에서 경기도를 거쳐 각각 충청 수영과 해남 땅끝마을, 통영으로 이어지는 조선시대 육로교통의 중심축이었던 삼남대로를 기본 원형으로 한 도보길이다. 삼남길 경기도 전체 구간은 옛길을 고증해 원형을 확인하고 끊겼거나 사라진 도로 대신 걷기 좋은 대체로를 개척해 완성했다. 총 길이는 90.1㎞다. 삼남길 경기도 구간은 과천의 제1길(한양관문길)부터 평택의 제10길(소사원길)에 이르기까지 온온사, 인덕원터, 임영대군 묘역, 사근행궁터, 지지대비, 용주사, 독산성, 진위향교, 대동법기념비 등 풍부한 문화유산을 갖고 있다. 옛 삼남대로는 정도전과 정약용이 나주와 강진으로 유배를 가면서 걸었던 길인 동시에 정조가 아버지 사도세자의 능인 현륭원(지금의 융릉)으로 가기위해 자주 이용했던 길이기도 하다.■4 서호천길삼남로의 제4길인 서호천길은 골사그내에서 시작해 지지대비, 지지대쉼터, 해우재, 이목2교, 국립원예특장과학원, 여기산앞, 서호공원까지 이어지는 7.1㎞ 구간이다. 지지대고개는 정조가 아버지가 잠들어 있는 현륭원을 찾았다가 돌아가는 걸음이 못내 아쉬워 자꾸 행차를 늦췄다는 이야기에서 그 이름이 유래한 곳으로, 정조의 애틋한 효심을 느낄 수 있는 곳이다. 그래서 고개이름을 늦을 지(遲)자를 붙여 '지지대(遲遲臺)'고개로 부르게 됐다. 이 같은 정조의 효심을 본받고 추모하기 위해 정조의 아들인 순조가 1807년에 지지대비(경기도 유형문화재 제24호)와 비각을 건립케 했다. 지지대비로 올라가는 계단 중간에 지지대 각자가 음각돼 있고 계단 바로 옆에는 '하마비(下馬碑)'가 세워져 있다.지지대고개는 서울에서 수원을 연결하는 1번 국도의 수원경계지점에 위치해 있다. 광교산에서 서쪽으로 뻗은 능선을 통과하는 국도로 '지지대비'는 고개 정상부에 세워져 있다.문화재는 아니지만 지난 2007년에 문을 연 화장실 문화전시관 '해우재'는 옛 추억을 되새기며 화장실문화를 살펴볼 수 있는 곳이다. 그리고 해우재를 지나 서호천변의 길을 따라 걷다보면 여기산에서 대규모 백로서식지를 만나볼 수 있다.지지대고개 바로 앞에는 불란서참전기념비(한국전쟁 참전)가 있는 장소를 시작으로 옛날 경수국도였던 구 도로를 따라 파장동·이목동·송죽동 일대 도로변 약 5㎞ 구간에 노송들이 즐비하게 서 있다. 이 '노송지대(경기도기념물 제19호)'는 정조가 현륭원에 행차하던 수원 초입에 해당하는 길로, 정조의 명에 의해 식재된 나무로 수령이 250년된 고유 수종이다. 한때는 수천그루에 달했지만 일제시대때 배를 만든다거나 송진을 채취하기 위해 베어버려 현재는 120여 그루의 노송들만 남아 있다.이어 길을 가다 발견한 여기산(101m) 선사유적지(수원시 향토유적 7호)는 농촌진흥청 구내에 위치해 있다. 여기산 선사유적지는 1979~1981년 3차에 걸친 발굴조사에 의해 청동기시대 주거지 4기와 초기 철기시대 주거지 3기가 조사됐다. 이곳 여기산성은 내를 낀 낮은 야산에 위치한 소규모의 머리띠 토성이고 성안에서는 무문토기와 김해식 토기편들이 출토됐다. 우리나라 초기 산성의 특징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5 중복들길삼남로의 제5길인 중복들길은 서호공원 입구에서 시작된다. 서호(축만제·祝萬堤·경기도기념물 제200호)는 정조가 수원을 신도시로 개발하면서 농업을 장려하기 위해 만든 인공저수지다. 제방 너머로 농촌진흥청 시험장이 자리하고 있다. 축만제 표석은 농촌진흥청에서 경수선 철도쪽으로 놓은 둑의 1천350m라고 표기돼 있는 곳에서 둑을 따라 50m가량 지난 곳에 있다. 축만제는 1799년 준공된 인공저수지다. 서호의 저수량은 67만8천t으로 몽리면적(논밭 등이 저수지에 의해 물을 공급받는 면적) 2천107㏊며 만수위의 수면면적은 33.4㏊다. 서호저수지는 지난 1월 AI(조류인플루엔자) 발병으로 한때 출입이 금지됐으나 2월말부터 출입통제가 해제됐다. 하지만 농촌진흥청에서 서호저수지를 출입하기 위한 출입문은 여전히 잠겨 있는 상태다. 그럼에도 서호저수지는 여전히 농촌진흥청 직원들과 인근 시민들의 산책로로 각광받고 있다.서호저수지의 항미정(沆眉亭·수원시 향토유적 제1호)은 서호저수지의 남동쪽에 위치한 정자다. 당초 서호 동북쪽에 있던 폐사의 건축자재를 이용해 1831년(순조 31년) 현재의 자리에 건축했다. 그 뒤 유수 신석희와 관찰사 오익영이 중수했다. 수원팔경의 '서호낙조'는 서호에 비치는 노을을 찬미한 것이다. 정자의 이름은 소동파의 '항주(杭州)의 미목(眉目·눈썹과 눈을 아우르는 말)'이란 시에서 따온 것이다. 호수가의 여기산 그림자가 수면에 잠겨 있는 경관이 중국 항주의 서호에 비견된다는 의미를 갖고 있다.축만제 부근에는 일제강점기 권업모범장이 들어서면서 정조시대의 농업연구기관을 이어받게 된다. 이것이 모태가 돼 오늘의 농촌진흥청과 작물과학원 등이 들어섰다.중복들길에는 옛 수인선 협궤철도의 흔적이 남아있기도 하다. 수인선은 인천 송도와 수원을 잇는 협궤철도로 총길이 52㎞에 달했다. 수원역을 출발한 열차는 고색-어천-야목-사리-일리-고잔-원곡-달월-논현-남동-용현-남인천을 운행했다. 수인선의 협궤철로는 본래 경기만의 소래와 남동, 군자 등의 염전지대에서 생산되는 소금을 수송하기 위해 1935년 착공한 철도선이다. 해방후 1960년대까지만 해도 하루 평균 7차례 운행했으나 1979년부터 구간씩 운행을 중단한 뒤 1995년 12월 31일 운행을 마지막으로 폐선이 됐다. 수원시 오현초등학교 옆에 수인선 교각이 아직 남아 있어 옛 수인선의 흔적을 알아 볼 수 있다.■7 독산성길삼남길 제7길인 독산성길에서는 오산 독산성 세마대지(사적 제140호)에 올라 주변을 한눈에 바라볼 수 있다. 세마교를 지나 황구지천변길을 걷다보면 등산로를 이용해 독산성에 오를 수 있다. 임진왜란 당시 독산성에 주둔했던 권율 장군이 말에 쌀을 부어 물이 많은 것처럼 위장해 왜군을 물리쳤다는 이야기가 남아 있다. 독산성은 경기 남부의 중요한 군사요새였고 성곽길을 걷다보면 주변 경관을 한눈에 감상할 수 있다. 백제고찰 보적사가 독산성과 함께 하고 있다. 그리고 세교지구의 아파트 곁을 잠시 걷다보면 궐리사(경기도기념물 제147호)를 만날 수 있다. 궐리사는 공자를 모신 사당으로 우리나라에서 유일한 관림 사당이다./글=김신태기자 /사진=조형기 프리랜서▲ 삼남길 경기 구간 독산성길.▲ 지지대 비각.▲ 축만제 표석.▲ 독산성 세마대지.

2014-05-06 김신태

[문화재, 영원을 꿈꾸다·3]'유물의 보고' 연천

'한반도 중앙' 예로부터 전략요충지 삼국시대부터 절벽 성 다수 축조구석기 연구학설 뒤집은 주먹도끼 발견으로 전곡리 세계적 유적 되다송시열과의 '예송논쟁' 유명 근기실학 사상가이자 예술가말년 고향서 저술활동… 집과 서원터 복원·콘텐츠 개발중임진강과 한탄강을 끼고 있어 비옥한 토지가 발달한 연천은 지리적으로 한반도 중앙에 위치, 육로와 수로가 발달한 교통의 요지로서 선사시대부터 한국 고인류의 발상지와 교두보 역할을 했다. 삼국시대에는 정치적으로 중요한 국경지역이었던 만큼 각 국이 영토전쟁을 벌였던 치열한 다툼의 현장이었다. 고려 수도인 개경과 조선시대 수도인 한양으로부터 중간 지점에 위치해 있고 풍수적으로 온화한 지세(地勢)로 수많은 인걸을 길러냈다.■성#성(城)삼국이 각축을 벌이며 영토전쟁을 벌이던 시기, 고구려는 한반도 남쪽으로 영토를 확장하면서 연천지역은 초기 백제의 영역에서 고구려의 영토가 됐다. 그리고 임진강과 한탄강을 따라 형성된 자연절벽(현무암 주상절리) 등 특수한 자연조건을 이용해 성들이 축조된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후에도 고구려 시기에 축조된 이 성들을 계속 보수, 사용했다.호로고루(瓠蘆古壘·사적 제467호)는 개성과 서울을 연결하는 중요한 길목에 위치해 있다. 원당리에서 임진강으로 유입되는 지류가 흐르면서 형성된, 약 28m 높이의 현무암 수직단애를 이루는 긴 삼각형 대지위에 조성된 강안평지성(江岸平地城)이다. 이곳은 조수간만의 영향을 받는 감조구간의 상류에 위치해 있어 임진강 하류에서부터 배를 타지 않고 도하할 수 있는 최초의 여울목에 위치한다. 평양에서 출발한 고구려군이 백제수도인 한성으로 진격하기 위한 최단 코스는 평양에서 개성을 거쳐 문산 방면으로 직접 가는 것이 아니라, 동쪽으로 15㎞ 우회해 장단을 지나 호로고루 앞의 여울목을 건너 의정부방면으로 진격하는 것이었다. 호로고루가 있는 고랑포 일대의 임진강은 삼국사기에도 여러차례 전투기사가 등장할 정도로 전략적으로 중요한 지역이었다. 한국전쟁 당시에도 북한의 전차부대 등의 도하지점이 됐던 전략적 요충지다.은대리성(隱垈里城·사적 제469호)은 한탄강과 장진천이 합류되는 지점에 위치한다. 역시 강안평지성이다. 유적을 감싸고 남서향하는 한탄강은 곧 임진강에 합류하고 서울과 원산을 잇는 교통로로 활용돼 왔던 추가령구조곡(楸哥嶺構造谷)도 주변을 지나고 있다. 수로와 육로 어느쪽이든 주변 지역과의 교통이 편리해 전략적 요충지임을 쉽게 알 수 있다. 당포성(堂浦城·사적 제468호)은 당포나루로 흘러들어오는 당개 샛강과 임진강 본류 사이에 형성된 약 13m 높이의 삼각형 절벽위 대지의 동쪽 입구를 가로막아 쌓은 성곽이다. 강안평지성으로 입지조건과 평면형태는 호로고루 및 은대리성과 매우 유사하다.비지정문화재인 대전리산성(大田里山城)은 대전리와 장탄리의 경계를 이루는 성재산(해발 137.5m)에 축조돼 있다. 지난해 경기문화재연구원이 첫 발굴조사를 실시한 곳이다. 주변 마을 사람들에게 물어봐도 그 위치를 모를 정도로 아직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문화재연구원은 조사결과 성벽 몸체가 중심성벽을 중심으로 바깥쪽 성벽에 다시 덧대어 쌓은 것으로 확인했다. 연구원은 성벽 몸체 축성기법으로 미뤄 대전리산성을 처음 만든 시기와 주체는 삼국시대 후기 신라로 판단하고 있다. 역시 비지정문화재인 수철성(水鐵城)은 전곡읍 양원리 해발 397m봉의 정상부에 위치해 있다. 수철성 앞 도로는 양주지역에서 적성이나 연천방면으로 가는 주요한 교통로여서 이 교통로를 통제하기 위해 축성된 것으로 여겨진다.■터#선사유적연천 전곡리유적(사적 제268호)은 한탄강변 해발 61m정도의 구릉지대에 위치한다. 1978년 미군병사 그렉보웬이 우연히 채집한 4점의 석기를 서울대 고(故) 김원용 교수에게 전달해 알려지게 됐다. 이 석기들은 아슐리안형 석기(주먹도끼)로 밝혀져 당시까지 정설로 받아들여졌던 모비우스학설을 바꾸게 된 세계적인 구석기 유적이 됐다. 모비우스학설이란 세계 구석기 문화를 유럽·아프리카는 아슐리안석기문화, 동아시아는 찍개문화 등으로 나눴던 것이었지만 전곡리 유적 발견으로 구석기 연구의 근간을 바꾸게 된 계기가 됐다. 2001년까지 11차례에 걸쳐 발굴조사가 이뤄졌고 약 4천점 이상의 석기가 출토됐다. 현재 전곡리 유적내에는 발굴조사를 토대로 한 토층전시관과 발굴피트, 구석기시대의 생활을 이해할 수 있는 '구석기 생활상 복원 존'이 있다. 2011년 4월 개관한 전곡 선사박물관은 경기문화재단이 운영하고 있다. 전곡리유적에서는 매년 5월 초 구석기축제가 열리고 있으나 올해는 세월호 침몰사고로 인해 잠정 연기된 상태다.연천 고인돌공원(향토문화재 제7호)은 전곡에서 연천으로 가는 3번 국도상에서 연천읍 방향으로 가는 갈림길 바로 오른편 구릉상에 위치해 있다. 고인돌 공원은 원상태 보존이 어려운 연천지역의 고인돌을 조사한 후 효율적으로 관리·보존하고자 이곳으로 이전·복원해 공원으로 조성했다. 현재 이곳에는 16기의 고인돌이 이전·복원돼 있으며 이중 2기는 발견 당시 위치에 원형 그대로 복원돼 있다. ■묘#미수 허목 묘역경기도 기념물 제184호로 지정돼 있는 미수 허목 묘역은 연천군 왕징면 강서리 민통선내에 위치해 있다. 안월천을 건너는 강서5교를 지나 북쪽으로 300m정도 직진하면 좌측 능선 해발 100m에 위치해 있다. 선조인 허자의 묘와 약 100m의 거리를 두고 있다. 미수 허목의 묘는 동남향 나지막한 구릉에 6기의 묘 가운데 제일 아래에 위치해 있다. 그의 묘는 부인 전주이씨와 합장묘다.최근 미수 허목 묘역을 찾았을 때, 마침 경기문화재단 경기문화재연구원 문화재돌봄사업단 관계자들이 묘에 떼를 입히는 작업을 벌이고 있었다. 묘역이 인적이 드문 민통선내에 있다보니 야생 멧돼지에의해 묘역이 훼손됐기 때문이다. 문화재돌봄사업단 관계자는 "멧돼지가 묘역 이곳저곳을 파헤쳐 놓았다"며 "돌봄사업 대상지가 여러곳이지만 미수 허목 묘역의 보수가 급해 우선 보수를 하게 됐다"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이어 "최근 문화답사 등을 통해 많은 사람들이 미수 허목 묘역을 찾고 있는만큼 관리하는데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덧붙였다.미수(眉수) 허목(許穆·1595~1682)은 연천군의 대표적인 역사문화 아이콘이다. 조선 후기 남인의 한 일파인 청남의 영수로, 당대 우암 송시열(1607~1689)과 '예송논쟁(禮訟論爭)'으로 맞섰던 대학자로 평가받고 있다. 예송논쟁은 임금의 죽음에 그 계모가 상복(喪服)을 얼마동안 입어야 하느냐 하는 것이었다. 조선 제17대 효종이 승하하자 그의 계모이던 조대비가 어떤 복(服)을 입을 것인가로 논쟁이 벌어진다. 성리학에 근거한 예론(禮論)에서는 자식이 부모에 앞서 죽었을때 그 부모는 그 자식이 장자인 경우 '3년상'을, 차자일때는 '1년상'을 하도록 규정했다. 따라서 효종이 임금이지만 인조의 둘째아들이었으므로 조대비는 종법(宗法)에 따라 1년상을 해야 했다. 그래서 송시열을 중심으로 한 서인계열은 1년상을 주장했다. 하지만 남인계열의 허목, 윤선도 등은 둘째 아들일지라도 일단 왕위에 오르면 장자로 봐야 하며 조대비는 3년상을 해야 한다는 주장을 폈다. 논쟁은 결국 조선의 법전인 '경국대전'의 '장자와 차자 구분없이 1년복을 입게 한다'는 규정에 의거해 결말지어지고 허목은 외직인 삼척부사로 밀려나게 된다.허목은 이황의 퇴계학과 서경덕의 화담학 등 다양한 학문을 계승 발전시켜 근기실학이 태동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한 사상가다. 또 다른 한편으로는 뛰어난 예술가로도 정평이 나 있다. 그의 독특한 전서체는 그 형태와 아름다움을 동양제일로 평가받기도 한다. 대표적인 작품으로 강원 삼척의 '척주 동해비'를 들 수 있다.묘역에서 500m 거리에는 그가 생전에 살던 집인 은거당(恩居堂)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은거당에는 10가지의 늘푸른나무가 있다고 해 십청원이라 불린 정원과 기이한 암석을 모은 괴석원이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한국전쟁으로 전소된 이후 현재는 그 터(연천군 향토문화재 제14호)만 남아있으며 허련이 그린 심청원에서 그 옛모습을 엿볼 수 있다.은거당은 허목이 말년에 고향인 연천에 머물면서 주로 저술활동을 했던 곳이다. 허목이 84세가 되던 해인 1678년(숙종 4) 국가에 공이 많은 신하를 예우하기 위해 특별히 왕명에 의해 건립된 7칸 규모의 가옥이다. 현재 은거당터에는 '은거당 옛터'라 음각한 커다란 안내비가 조성돼 있다.경기문화재연구원은 현재 연천군과 함께 미수 허목의 정비복원사업에 나서고 있다. 그의 집터인 은거당과 그를 배향하던 미강서원터 발굴·정비·복원 등이다. 미수 허목의 정신과 학문의 계승·현양사업을 중심으로 다양한 문화콘텐츠를 개발하고 이를 연천군의 문화자산으로 발전시켜 나간다는 계획이다./글=김신태기자 /사진=조형기 프리랜서▲ 보물 제1509호 '미수 허목 초상화'. /문화재청 홈페이지▲ 호로고루성.▲ 당포성.▲ 수철성.▲ 전곡리 구석기 유물 발굴터 모형.▲ 미수 허목 선생 묘역석.

2014-04-29 김신태

[문화재, 영원을 꿈꾸다·2]남한산성

해발 500m 험준한 산에 12㎞ 성벽 둘러싸'한강유역·수도의 요새' 함락당한 적 없어삼국~조선시대 성 쌓는 기법 오롯이 축적왕의 거처인 행궁 복원공사후 2012년 개방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 여부 6월말 결정올 6월 유네스코의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앞두고 있는 남한산성(국가사적 제57호). 요즈음 봄을 맞아 많은 행락객들이 남한산성을 찾고 있다. 하지만 남한산성은 단순히 자연경관(청량산)만을 자랑하지 않는다. 남한산성엔 수많은 문화재가 자리잡고 있어 문화답사 탐방객들이나 학생들도 많이 찾고 있다.남한산성에는 조선시대 20여개 행궁중 유일하게 종묘와 사직을 갖춘 행궁이 있어 국가전란시 임시 수도의 역할을 담당했다. 또 조선시대 5군영중 하나인 수어청의 근거지이자 광주 읍치를 관리하는 관아(행정)시설이 300여년간 운영되던 조선 최대의 산악 군사·행정도시였다.남한산성에는 유교, 불교, 천주교, 민속신앙 등 다양한 종교가 지금도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숭렬전(경기도유형문화재 제2호)과 현절사(경기도유형문화재 제4호)에서는 매년 음력 9월에 광주유림에서 유교예법에 따라 제향식을 거행한다. 불교는 조선시대 10개 사찰중 현재 4곳(개원사, 국청사, 장경사, 망월사)이 그 명맥을 이어오고 있다. 청량당(경기도유형문화재 제3호)에서는 매년 남한산성 대동굿보존회에서 대동굿을 진행하고 있다. 이외에 남한산성은 300여명의 순교자를 기리는 천주교 순교성지여서 지금도 수많은 순례자들이 찾아오고 있다. 남한산성 입구 주변에는 천주교 순교성지와 함께 순교자 현양비가 세워져 있다.남한산성은 삼국시대에서부터 고려,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한강유역 및 수도에 대한 방어적 기능을 담당했던 곳으로 단 한번도 함락당한 적이 없는 천하의 요새다.남한산성은 해발 500m가 넘는 험준한 자연지형을 따라 둘레 12㎞가 넘는 성벽을 구축, 쉽게 공략할 수 없는 지리적 여건을 갖추고 있다. 외성과 옹성을 제외한 남한산성 본성의 규모는 둘레가 7천545m고 성 내부 면적은 212만6천637㎡다. 부속시설을 포함한 성벽의 전체 규모는 1만2천356㎞에 달한다. 또 내부가 넓고 평탄하고 80여군데가 넘는 우물과 45개의 연못이 있었을 정도로 수원이 풍부해 비축된 군량미만 충분하다면 수만병의 병력 수용이 가능할 정도였다.본성은 신라 주장성의 성돌을 기초로 해 구축했고 외성은 본성과 시차를 두고 구축,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각 시기의 축성기법을 보여주면서 남한산성은 우리나라 성곽 발달사를 이해하는데 중요한 문화유적으로 손꼽힌다.남한산성은 천하의 요새답게 1231년 몽골이 고려를 침공했을 당시 광주부사 이세화의 지휘로 몽골의 공격을 막아냈다. 몽골군은 남한산성을 포기하고 남하했다가 고려조정과의 화의로 1232년 1월 요동으로 철수한다. 같은 해 몽골군의 2차 침입에도 이세화는 뛰어난 전술을 구사해 남한산성을 지켜냈다. 1636년 12월 청 태종이 13만 대군을 이끌고 조선을 침공한 병자호란 당시 인조는 강화도로 피신하려다 청군 선발대가 도착한 것을 알고 남한산성으로 피신해 항전했다. 하지만 강화도가 함락돼 패색이 짙어지면서 인조는 47일간의 항전끝에 1637년 1월 30일 성을 나가 항복했다.병자호란 당시 인조가 머물렀던 곳이 바로 남한산성 행궁(국가사적 제480호)이다. '광주행궁' 또는 '남한행궁'으로도 불렸다. 남한산성 행궁은 남한산성 북쪽 동서로의 정점에 배치됐다. 행궁은 왕이 한양의 궁궐을 떠나 도성 밖으로 행차하는 경우 임시로 거처하는 곳을 말한다. 남한산성 행궁은 전쟁이나 내란 등 유사시 후방 지원군이 도착할때까지 한양 도성의 궁궐을 대신할 피난처로 사용하기 위해 인조 4년(1626)에 건립됐다. 행궁은 산성도시 안에서 가장 중심의 높은 지대에 자리잡았으며 이 곳은 동·서로에서 직접 바라볼 수 없도록 낮은 언덕으로 가려져 있다.남한산성 행궁터는 1999년 한국토지공사 토지박물관에서 1차 발굴조사를 시작한 뒤 2000년 2차 조사발굴 완료, 2002년에 상궐 72.5칸을 복원했다. 2004년 하궐지의 발굴조사와 좌전(26칸)의 복원공사를 끝마친 뒤 2005년 한남루지 및 행궁 주변 일대 조사완료 후 2010년까지 복원공사를 마치고 2012년 5월 24일 일반에 개방됐다.수어장대(경기도유형문화재 제1호)는 조선 인조 2년(1624) 남한산성을 쌓을때 만들어진 4개의 장대중 하나로 현재 유일하게 남아있다. 장대란 지휘관이 올라서서 군대를 지휘하도록 높은 곳에 쌓은 대를 말한다. 수어장대는 산성안에서 최고봉인 일장산(지금의 청량산) 꼭대기에 자리잡고 있어서 성 내부와 인근 주변까지 바라볼 수 있었다. 처음에는 1층 누각으로 짓고 서장대로 불렸으며 영조 27년(1751)에 이기진이 왕의 명령으로 2층 누각으로 다시 지었고 외부편액은 수어장대(守禦將臺), 내부 편액은 무망루(無忘樓)라 이름했다. 무망루란 병자호란때 인조가 겪은 시련과 인조의 아들인 효종이 볼모로 심양(현 봉천)에 잡혀갔다가 8년만에 귀국해 청나라에 대한 복수심으로 북벌을 꾀하다 승하한 원한을 후세에 전하고 그 비통함을 잊지말자는 뜻에서 붙인 이름이다.수어장대 성벽쪽은 현재 석축이 바깥으로 튀어나오는 배부름 현상이 발생해 남한산성관광관리사업단이 보수공사를 진행하고 있다.성내 남쪽에 위치한 개원사(경기도기념물 제119호)는 일주문안 우측의 사찰 연혁을 보면 "개원사는 인조 2년에 임진왜란으로 파손된 남한산성을 수축하고 이를 지키기 위해 전국에서 모인 승도들을 총지휘했던 본영사찰로 창건됐다"고 설명하고 있다. 1907년 일제에 의해 소실된 뒤 현재의 모습으로 지어졌다. 또 산성 동문 안에서 동북쪽 약 500m거리의 산 중턱에 자리잡고 있는 장경사(경기도 문화재자료 제15호)는 산성내 사찰중 일제에 의해 가장 적게 피해를 당한 사찰이어서 당시의 모습을 일부나마 보여주고 있다.#남한산성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경기도와 경기문화재단 남한산성문화관광사업단은 지난 2009년부터 남한산성 유네스코 등재를 본격 추진해 왔다. 등재여부는 올해 카타르 도하 국립컨벤션센터에서 열리는 제38차 세계유산위원회 개최기간(6월 15~25일)중 신규 등재유산이 발표되는 6월 20~22일 사이에 결정될 것으로 보인다.유네스코 세계유산은 기본적으로 동산을 제외한 유형 부동유산을 대상으로 한다. 문화유산, 자연유산, 문화와 자연이 함께 등재되는 복합유산으로 구성된다. 통상 세계기록유산이나 인류무형유산 등재에 비해 복잡하고 오랜시간이 걸리는 까다로운 절차를 거친다.세계유산으로 등재되면 유산 보유국의 문화 국격 상승과 문화국민으로서의 자긍심 고취는 물론 국내외 관광객의 대폭 증대로 지역경제 활성화에 커다란 기여를 해 전세계는 앞다퉈 자국의 유산이 세계유산으로 등재되기 위한 총성없는 전쟁을 벌이고 있다.남한산성은 지난 2013년 1월 유네스코에 등재신청서를 제출, 등재신청서 평가를 통과한 뒤 같은 해 9월 현지 실사평가를 마쳤다.남한산성이 세계유산으로 등재되면 대한민국은 2010년 브라질리아에서 열린 제34차 세계유산위원회에서 등재 된 '한국의 역사마을 양동·하회마을' 이후 4년만에 11번째 세계유산 보유국이 된다. 현재 세계유산 최다 보유국은 이탈리아로 49건이고 두번째 중국은 45건이다. 일본은 17건의 세계유산을 보유하고 있다.경기도와 남한산성문화관광사업단은 문화재청, 외교통상부 등 중앙정부와 공동으로 카타르 도하에서 열릴 세계유산위원회에 참여해 등재여부가 결정되는 마지막 관문인 21개 세계유산위원국을 대상으로 남한산성의 등재 정당성과 지지를 위한 다각도의 캠페인을 벌일 예정이다.한편 경기문화재단 남한산성문화관광사업단은 2009년 3월에 출범, 남한산성 세계유산 등재 업무, 관련 역사연구와 문화재활용 및 문화콘텐츠 사업, 문화유산복원사업 등의 사업들을 추진하고 있다. 또 경기문화재연구원 문화재 돌봄사업단에서도 남한산성 문화재 돌봄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자료참조/남한산성 사료총서(남한산성문화관광사업단)/글= 김신태기자/사진=조형기 프리랜서▲ 남한산성 성벽.▲ 남한산성 행궁▲ 수어장대▲ 남한산성 찾은 행락객들

2014-04-22 김신태

[문화재, 영원을 꿈꾸다·1]프롤로그

오랜 고난 견디고 인류곁에 남은 존재선조들 희로애락 오롯이 담아낸 그릇그속의 이야기 현재·미래세대의 자산문화유산 알고, 찾고, 가꾸는 일 중요경기지역 유산 시대별·유형별로 소개경기도 돌봄사업 연계 보존·관리 점검사각지대 놓인 비지정문화재 특히 주목┃문화유산 헌장┃문화유산은 우리 겨레의 삶의 예지와 숨결이 깃들어 있는 소중한 보배이자 인류 문화의 자산이다. 유형의 문화재와 함께 무형의 문화재는 모두 민족문화의 정수이며 그 기반이다. 더욱이 우리의 문화유산은 오랜 역사 속에서 많은 재난을 견디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그러므로 문화유산을 알고 찾고 가꾸는 일은 곧 나라 사랑의 근본이 되며 겨레 사랑의 바탕이 된다. 따라서 온 국민은 유적과 그 주위 환경이 파괴·훼손되지 않도록 노력하여야 한다. 문화유산은 한 번 손상되면 다시는 원상태로 돌이킬 수 없으므로 선조들이 우리에게 물려준 그대로 우리도 후손에게 온전하게 물려줄 것을 다짐하면서 문화유산 헌장을 제정한다.1. 문화유산은 원래의 모습대로 보존되어야 한다.1. 문화유산은 주위 환경과 함께 무분별한 개발로부터 보호되어야 한다.1. 문화유산은 그 가치를 재화로 따질 수 없는 것이므로 결코 파괴·도굴되거나 불법으로 거래되어서는 안 된다.1. 문화유산 보존의 중요성은 가정·학교·사회 교육을 통해 널리 일깨워져야 한다.1. 모든 국민은 자랑스러운 문화유산을 바탕으로 찬란한 민족문화를 계승·발전시켜야 한다.1997년 12월 8일문화재는 우리 선조들의 삶, 즉 희로애락(喜怒哀樂)을 오롯이 담아낸 그릇이다. 문화재는 그것이 구석기 시대이든, 근대이든 시대 상관없이, 또 유형문화재든, 무형문화재이든 관계없이 그 당시의 예술과 과학, 종교, 도덕, 법률, 경제, 민속, 생활양식 등을 담고 있다. 그리고 문화재는 오랜 역사속에서도 각종 고난을 견디어 내고 지금 우리 옆에서 우리의 삶과 함께 하고 있다.문화재는 한번 손상되면 다시는 원상태로 돌아갈 수 없다. 화재로 소실됐던 숭례문의 복원 과정을 보면 그 해답을 쉽게 찾을 수 있다. 숭례문은 아직도 부실 복구 문제로 시끄럽다.문화재는 우리 조상들이 물려준 그대로 후손에게도 온전히 물려줘야 한다. 문화재를 알고, 찾고, 가꾸는 일은 그 어느 것보다 중요하다. 문화재 보존에 대해서는 다시 한 번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정부도 국민들에게 문화유산에 대한 중요성을 일깨워주기 위해 1997년 문화유산의 해를 맞아 12월 문화유산헌장을 제정했다. 문화유산의 보존·전승에 대한 공감대를 범국민적으로 확산시켜 스스로 아끼고, 가꾸는 마음을 지속적으로 갖도록 하고 문화유산의 보호의지를 다짐하기 위해서다. 하지만 이런 문화유산 헌장이 제정돼 있다는 것을 대부분이 모르고 있어 아쉬움이 크다.정부와 경기도는 현재 문화재 보존의 중요성을 인식, 문화재 돌봄사업을 통한 문화재 지키기에 나서고 있다. 도는 지난해부터 도내 문화재 517개소의 상시관리를 위해 인력을 채용, 현장에 배치한 뒤 문화재를 순회, 관리하고 있다. 실질적인 사업은 경기문화재단내 경기문화재연구원에서 맡아서 하고 있다. 문화재 돌봄 인력들은 배수로·수목 정비 등 문화재 위해 요인을 사전에 차단하는 일부터 소화설비를 점검하는 일까지 다양한 일을 해내고 있다. 이들의 문화재 돌봄 사업 덕분에 소중한 문화재 훼손에 대한 사전 방지가 가능해졌다. 또 문화재의 경미한 훼손 시에는 전문 인력이 신속하게 투입돼 복구가 가능한 예방적 문화재 관리시스템이 구축되면서 향후 보수 및 정비에 들어가는 예산을 절감할 수 있는 효과가 기대되고 있다.경기지역에는 수많은 문화유적이 분포하고 있다. 한강을 끼고 있는 경기도는 비옥한 평야가 펼쳐져 선사시대부터 사람들이 정착해 살았던 지역이기 때문이다. 도내에서 발굴된 연천군 전곡리의 구석기시대 유적지와 하남시 미사동의 신석기시대 유적, 여주시 흔암리의 청동기시대 유적 등이 이를 증명한다.문화재는 그 자체로도 소중하지만 문화재 하나하나에 담긴 이야기는 우리들에게는 귀중한 자산이다. 우리 선조들이 어떤 일을 겪으며 살았고 이를 어떻게 극복하며 살아왔는지를 보여주는 역사 교과서다.올 6월 유네스코의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앞두고 있는 남한산성은 현재 도립공원으로 지정돼 사시사철 수많은 사람이 찾는 관광지로 각광을 받고 있지만 그 뒤에는 우리 역사의 뼈 아픈 이야기를 담고 있다.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 때 왕이 이곳으로 피란왔지만 제대로 싸우지도 못하고 삼전도(三田渡)에서 청나라에 항복하는 굴욕을 당했다. 연천의 미수 허목 묘역은 효종 사후 당대의 유학자 송시열과의 예송논쟁으로 유명한 조선중기의 대학자인 허목(1595~1682)이 잠들어 있는 곳이다. 또 양주 회암사지는 태조 이성계가 상왕시절 기거했던 곳으로, 고려말에서 조선초까지 200여년 동안 왕실의 적극적인 후원속에 융성했던 사찰이었지만 조선 중기 선조 이후 폐사돼 현재는 터만 남아있다. 안성 칠장사에는 궁예, 임꺽정 등 다양한 설화와 함께 어사 박문수가 칠장사 나한전에서 기도 후 장원급제를 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지금 우리 주변에는 아직도 많은 문화재들이 남아 우리들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다. 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국보, 보물, 기념물, 사적 등도 있지만 잠정적인 문화유산으로서 보존가치가 높은 수많은 비지정문화재들이 관리인력과 사유지란 이유로 사각지대에 놓여 있는 경우가 많다. 다행히도 이번 문화재돌봄사업에 일부 비지정문화재가 포함돼 있지만 비지정문화재 보존에 대한 제도적 보완이 시급히 필요하다는 지적은 끊임없이 제기되고 있다.저마다 사연을 안고 있고 우리 후손들에게 물려줘야 할 문화재. 지면상 수많은 문화재를 다루지는 못하지만 경기지역의 대표적인 문화재들을 시대적, 유형별 등으로 분류해 소개하면서 그 역사적인 의미와 보존의 필요성 등을 다시 한 번 강조, 문화재 보존의 중요성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특히 문화재돌봄사업과도 연계해 이들 문화재가 어떻게 관리, 보존되고 있는지를 점검해 본다. /글=김신태기자 /사진=조형기 프리랜서▲ 고달사지 종대사혜진탑비 귀부 및 이수.▲ 일러스트/박성현기자▲ 사진 위쪽부터 남한산성, 연천의 미수 허목 묘역, 안성 칠장사 대웅전.

2014-04-15 김신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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