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로, 광복 70년을 말하다

 

[원로, 광복 70년을 말하다·8] 우제찬 前 경인일보 사장

1969년 신문사 첫 발 유신 검열·통폐합등 오롯이 겪어관보형태 ‘계도지’ 시절 관 비판못해 언론 스스로의 암흑기땅투기 실태기사 외압 심했지만 ‘경인일보’ 알려외환위기때 사장 취임 ‘情’으로 뭉쳐 위기 극복공개채용등 인재 키워내는게 ‘경영의 핵심’처음 본 북한사람들 모습에 충격을 받았죠.김정일 위원장 빼고는 전부 로봇 같았어요.시키는 것만 하는거죠. 그래서는 발전할 수 없어요.자기가 찾아서 해야 하고, 그럴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어야 해요. 그래야 언론이 건강해집니다.영화나 드라마에 기자가 등장하는 일이 많아졌다. 화면 속의 기자들은 수습기자를 막 대하거나 특종을 맹종한다. 이런 모습은 차라리 애교스럽다. 더러운 유착과 권력화의 한 축으로 그려지기도 한다. 매체에 등장하는 기자의 이런 면모를 대중은 ‘어떻게 기자가 저럴수가!’ 라는 놀라움 없이 받아들인다. 험하고 부패한 기자의 이미지가 대중성을 획득한 것이다. 실제로도 기레기라는 말이 대명사처럼 쓰이고, 기사가 조롱거리로 회자되는 경우도 많다. 이런 때에, 경인지역 언론계 원로와 만났다. 경인일보와 경기방송 대표이사 사장을 역임한 우제찬(74) 전 사장이다. 그와 나눈 이야기는 언론계 안팎의 사람들에게 위안이 될 듯 싶다. 한 분야에서 40년 세월을 바친 우직함 때문에 그렇고, 퇴직한 뒤로도 굳건하게 지니고 있는 기자 정신 때문이다. 그래서 정신이 번쩍 들기도 한다. 그는 오래되어도 변함없이 중요한 것들에 대해 이야기 했다. 그의 현역시절 별명은 ‘우보태’였다. 기자라면 사회에 보탬이 돼야 한다고 늘 이야기하고, 실천하는 그에게 주위 사람들이 붙여준 별명이다. 스스로도 그 별명을, 기자라는 직함만큼이나 아꼈다. 1969년 신문사에 입사했다. 당시 사명은 연합신문이었다. 본사는 인천에 있었고, 주재기자를 다 합쳐도 50명 정도였다고 그는 기억했다. 함께 일하던 동료들 중 언론인으로 퇴직한 이는 손으로 꼽아볼 것도 없이 드물다. 기자가 교수도 되고 정치도 하고 사업가로 방향을 트는 경우는 지금도 부지기수다. 언론인으로 42년, 그의 인생 굴곡은 경인지역 언론 역사의 궤적과 일치했다.그 세대의 어른들이 다 그렇게 살았듯 우 전사장 역시 한동안 가난했고, 사회의 혼란에 휩쓸렸다. “첫 월급이 얼마였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데, 어쨌든 가계를 꾸릴만한 액수는 아니었어요. 동네 가게마다 외상이 하도 많아서 월급날에는 다니던 길을 놔두고 멀리 돌아서 집으로 갔어요. 월급날에도 외상값을 못 갚아서 집까지 가는 길에 있던 구멍가게와 세탁소와 연탄가게 앞을 지나갈 수 없었던거죠. 아내가 옷가게를 해서 생활을 유지했어요. 한 달 생활이 가능할 만큼의 월급을 받은 것은 80년대부터였죠.”언론인의 과거를 논하는데 유신시절이 빠질 수 없다. “검열도 검열이지만 언론사 구조조정을 정부가 나서서 하던 시절이었죠.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 지역 언론이 전두환 정권의 1도1사 언론통폐합으로 경인일보 하나만 남은 줄 알고 있지만 유신시절에 통합돼 70년대부터 경기인천지역의 유일한 매체로 역할을 하고 있었어요.” 언론계를 포함한 사회 전반의 암흑기였다. 그러나 그는 정작 언론의 암흑기는 따로 있었다고 말했다. “시·군에서 신문 구입 비용으로 예산을 편성하던 때가 있었어요. 그리 오래된 이야기도 아니죠. 이장이나 새마을회장을 통해 관보형태로 신문을 마을에 배포했어요. 계도지라고 불리기도 했죠. 이러면 관 비판기사를 쓰기 어렵죠. 독자를 위해서가 아니라 관을 위해서 기사를 쓰는 구조가 돼 버린 겁니다. 스스로 클 수 있는 기회를 그 때 많이 져버린거죠.”기자로서 그의 화양연화는 편집국장을 하던 때다. 대기업의 경기도내 토지 투기 실태를 파헤치는 기획기사를 연재하기 시작했는데, 18회 만에 중단됐다. 기사를 내리면서 편집국장 직에서도 물러났다. “외압이 심했어요. 당시 사장도 이제 제발 그만하라고 사정했고, 취재 대상이 된 기업들의 임원들이 회사로 찾아오고, 어떤 기업은 경인일보 주식을 모두 살테니 우리 회사 이름을 빼달라는 딜을 제안하기도 했어요. 그래도 다들 열심히 했어요. 토지대장에 파묻혀 지냈고, 땅 보러 다니고. 이 기사로 경인일보 이름이 많이 알려졌고, 구독신청이 하루에 50~60건씩 들어오기도 했습니다.”그는 수습기자로 입사한 지 30여 년이 지난 97년 대표이사로 취임했다. 그러나 회사의 곳간은 텅 비어있었다. “IMF여파로 당시 월급 줄 돈은 커녕 신문 인쇄할 종이도 못 샀어요. 사장이 되면서 강조했던 것이 情으로 뭉친 신문사가 되자는 것이었어요. 회사 안팎의 부패를 줄이고 어려운 시절을 이겨나가기 위해서는 그 방법 밖에 없었어요. 그래도 그때는 다들 내 회사 내 일터라는 생각을 하면서 일했던 것 같아요.”경영자로 10년 세월을 보낸 우 전 사장은 나름대로의 조직을 보는 눈을 가졌다. “어느 조직이든 조직에는 없어도 좋을 인사가 5% 있고, 있으나 마나 한 사람이 20%, 자기 몫을 겨우하는 사람이 30%, 꼭 필요한 인재는 5~10% 정도 있어요. 꼭 필요한 인재가 10%가 넘으면 잘 되는 기업이에요. 이들의 키워내는 게 경영의 핵심이어야 하죠. 특히 신문사는요. 요즘은 능력은 다 가지고 있어요. 이걸 조직에 어떻게 쓰느냐가 문제인거죠.”우 전 사장은 인재를 키우는 일의 중요성을 거듭 강조했다. “경인일보가 제일 잘한 일은 81년 공채를 시작한 거예요. 7~8명 뽑으면 3년 안에 1~2명 남고 모두 서울, 중앙지로 떠났어요. 일좀 할 만하게 키우면 빼가는 거예요. 하도 인재 유출이 심해서 나중에는 입사시험성적 1등부터 5등까지는 떨어뜨리고 6등부터 뽑았어요. 어차피 나갈 사람들이라고 여길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어요. 80년대 후반에서 90년대 초반까지 신생언론이 많이 등장하던 시절 언론계에 기자 수혈하는 역할을 한 셈이죠. IMF직전까지 이런 상황이 계속됐어요. 다른 언론사분들을 만나면 경인일보 기자들은 뭐 하나 버릴 게 없다는 칭찬을 많이 들었어요. 기자사관학교라는 소리도 들었죠. 경인일보로서는 좀 손해를 보긴 했어도 언론 전체를 보면 보탬이 되는 일이죠.”그는 자신의 삶이 만족스럽다고 망설임 없이 말했다. 그 이유 역시 사람이다. “이만하면 성공한 인생이죠. 나는 내 꿈을 이루었어요. 기자로 살고, 편집국장도 하고 사장도 하고. 이건 모두 좋은 후배가 있어서 가능했어요. 그들 때문에 저는 지금도 보람을 느낍니다. 가장 중요한 건 후배를, 인재를 키우는 것이에요.”그래서 요즘 언론계를 보는 그의 마음은 더 씁쓸하다. “내가 편집국에서 지내던 시절에는 데스크와 기자들이 싸우는 걸 자주 봤어요. 언쟁의 이유는 십중팔구 기사였죠. 서로 기자의 자존심을 걸고 논쟁을 했어요. 쌍욕도 오고 가고 종종 하극상도 벌어지고 했지만 좋은 신문 만든다는 마음이었으니 잘잘못을 가릴 것도 없었죠. 그런데 요즘은 개인에 집착하는 것 같아 보여요. 스스로 공기라는 생각을 가지고 보탬이 되려하기 보다는 개인의 삶을 중시하는 거죠. 물론 이게 나쁜 건 아니에요. 시키는 것만 해서는 개인의 발전도 이루기 어렵죠.”그는 2001년 북한을 방문했을 때의 경험을 들려주었다. “햇볕정책으로 남북관계가 좋을 때 언론인 초청 행사가 있어서 북한에 갔어요. 처음 본 북한사람들 모습에 충격을 받았죠. 김정일 위원장 빼고는 전부 로봇 같았어요. 시키는 것만 하는거죠. 그래서는 발전할 수 없어요. 자기가 찾아서 해야 하고, 그럴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어야 해요. 그래야 언론이 건강해집니다.”■ 우제찬 前사장 약력▲ 경기도 화성 출생▲ 1969년 연합신문 입사▲ 1997년 경인일보 사장 취임▲ 2007년 경기방송 사장▲ 사회복지 공동모금회 경기지회장(2003~2007)▲ 대한결핵협회 경기도지부장(2008년)/글 = 민정주기자 zuk@kyeongin.com · 사진 = 김종택기자 jongtaek@kyeongin.com우제찬 前 경인일보·경기방송 사장이 경인일보와 가진 인터뷰에서 “자기 스스로 일을 찾아서 해야 하고 그래야 언론이 발전할 수 있다”며 지난 시절을 회상하고 있다.

2015-11-30 민정주

[원로, 광복 70년을 말하다·7] 정기철 경기도체육인회 회장

81년 경기도 분리때 체육회 초대 사무국장3개월만에 전종목 팀 꾸려 ‘체전 7위’ 성과비인기·기초종목 시·군 실업팀 이끌어내 경기체고 설립등 道체육발전 디딤돌 역할선수·지도자 은퇴후 ‘막막’ 미래 관심 필요언론 ‘엘리트·생활체육 통합’ 대안 제시를붓을 제대로 굴려라. 언론이 정곡을 제대로 짚어주길 바란다.의기소침하지 않고 사기를 진작시킬 수 있는,그런 기사가 요즘 체육인들에게 필요하다“언론의 힘은 정직한 붓에 있다.”경기도 체육의 기반을 다져온 장본인하면 생각나는 인물이 있다. 경기체육이 전국체전에서 통산 28번째 우승컵과 세계 글로벌스타를 배출해낼 수 있었던 것도 바로 경기체육의 초석을 다져준 원로들이 있었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이 가운데 팔순을 넘긴 나이에도 젊은이들 못지 않게 경기체육을 위해 왕성한 활동을 하는 원로가 있다. 주인공은 경기도체육인회 정기철(81) 회장이다.지난달 29일 수원 경기도체육회관 임원실에서 정 회장을 만났다. 그에게 지나온 경기체육에 대해 묻자 대뜸 이런 얘기부터 꺼냈다. “언론의 힘은 정직한 붓에 있는 거야. 똑바로 써야 체육이 바로 서는 거야. 지금 (엘리트-생활체육)통합체육회 문제로 골머리를 앓고 있는데 언론은 뭐하는 거야”라고 말이다.정 회장은 1981년 경기도와 인천시가 분리된 후 경기도체육회 초대 사무국장을 맡아 16년 동안 도체육회를 이끌었고, 도체육회 부회장으로 5년간 봉사하는 등 20여년을 경기체육의 발전에 기여해왔다. 또 2008년부터 경기도체육인회 회장을 맡아 경기체육의 자문역할을 해주고 있다.우선 경기체육에 대해 그는 “1981년 인천시가 광역시로 승격돼 경기도가 분리되자 무척 난감했다. 그해 7월13일 도체육회를 맡아달라는 부탁을 받고 어디부터 시작해야 할까 걱정이 앞섰다”면서 “당시 도체육회가 인천으로부터 받은 것은 달랑 체육회기 한 개가 전부였고 가맹단체라고는 조정협회만 있었다. 직원이나 서류도 없이 체육회를 만들어야 했고, 3개월 뒤 열리는 전국체전 출전 선수는 30%도 안돼 감당하기 어려웠다”고 회상했다.그러나 그는 ‘이제부터 시작이다’라는 목표로 착실히 기초를 쌓아 올렸다. 우선 사무실을 마련하기 위해 수원운동장(수원종합운동장) 토담(흙으로 쌓아올려 만든 담) 밑에 방 하나를 꾸렸고, 체육에 관여했던 사람들을 모아 조언을 들어가면서 가맹경기단체를 만들었다. 특히 정 회장은 전국체전에서 꼴찌를 면하기 위해 동분서주했고, 참가점수를 얻고자 각 학교 체육 동아리 회원들을 찾아 나섰다. 정 회장은 “당시 동아리 학생들을 체전에 출전시키기 위해 출전비와 숙박비 등을 무료로 제공하는 당근책을 썼다. 학생들도 경기도 대표로 출전한다는 말에 무척 좋아했다”고 전했다. 정 회장은 1개월 뒤 예산도 없이 수원상공회의소에 도체육회 사무실을 꾸몄다. 그는 전세금 2천만 원이 없어 전전긍긍하며 상공회의소 총무과장을 피해 출장만 다녔다고 했다.우여곡절 끝에 27개 전 종목의 팀을 꾸린 정 회장은 1981년 제62회 전국체전에 ‘경기도’라는 이름으로 첫 출전했다. 물론 성적은 나쁘지 않았다. 13개 시·도 가운데 7위를 기록한 것. 그러나 그의 생각은 멈출 시간이 없었다. 도지사를 통해 가맹경기단체의 회장들을 선임했고, 1년 내 33개 종목을 만들었다.하지만 경기도는 83년부터 3년 연속 종합 5위에 머물며 더 이상 성적을 끌어올리지 못했다. 원인은 비인기종목의 선수 부재였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그는 시·군에 실업팀을 창단하는데 앞장섰다. 도지사로 하여금 시장·군수에게 실업팀 창단을 맡겼고, 가맹경기단체 회장 및 전무이사들과 협의를 통해 종목 활성화에 앞장섰다. 물론 체육인 지도자 양성 및 취업 계획도 포함시켰다.정 회장은 “당시 지사님이 36개 시장·군수들을 모아놓고 1~2개 팀씩 창단을 지시했다. 이것이 전국 최초의 시·군 직장운동경기부였다. 당시 이 계획은 획기적이었고, 그 결과 인천 분리 후 5년만인 1986년에 첫 종합우승컵을 차지할 수 있었다”고 설명했다. 평택시청의 요트, 화성시청 사격·펜싱 등은 현재까지 명맥을 이어오고 있는 전통의 팀이 됐다.물론 정 회장은 검도, 유도 종목 활성화에 이어 국군체육부대까지 경기도 소속팀으로 끌어들여 종목 다변화에 힘을 쏟았고, 이후 서울과 1위 자리를 놓고 치열한 다툼을 벌였다.정 회장의 체육 열정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꿈나무 육성에 다시 박차를 가했다.정 회장은 ‘경기체고가 있어야 겠다’는 생각에 경기도와 교육청을 설득했지만, 도 의회에서 부결되는 아픔도 겪었다. 그러나 그는 시·군체육회 사무국장들을 소집해 경기체육고 설립의 당위성에 대해 설명했고, 결국 지금의 경기체고를 탄생시켰다.수원시 장안구 장안로에 위치한 경기도체육회관도 정 회장의 손길이 없었으면 만들어지지 않았다. 그는 “체육회관을 짓기 위해 도에 요청했고, 도지사의 지시로 체육인들에게 배지를 팔아 13억원의 기금도 조성했다”면서 “관선지사 때니까 가능했던 일이다. 약 73억원을 들여 1992년 5월 마침내 회관이 건립됐다”고 피력했다.도체육회 사무처장과 지역 언론에 대한 따끔한 충고도 했다. 정 회장은 “사무처장은 적어도 4~5년 정도는 해야 한다. 도체육회 가맹경기단체가 50여 개가 넘는다. 그럼에도 1~2년 안에 그만두면 체육회 운영이 잘 되겠는가. 사무처장이라면 중앙단체도 알아야 하는 만큼 오랜 경험을 쌓는 게 중요하다”고 밝혔다. 또 “경기도는 전국에서 경제면이나 인구수에서 가장 많다. 그런 이유로 체육도 1등을 당연시하고 있다”면서 “체육인들이 대접을 받을 수 있도록 여론을 조성하는 것은 언론의 임무일 것”이라고 강조했다.이어 정 회장은 “초창기 때 지역 언론은 경인일보 밖에 없었다. 특히 지금처럼 언론매체가 다양하지 않았던 시절, 경인일보는 미래를 밝혀주는 빛과도 같았다”면서 “대부분의 도민들은 경인일보 신문을 외울 정도로 열독률이 높았다”고 전했다. 또 “경인일보 스포츠는 경기체육이 초석을 다지고 발전하는데 큰 도움을 줬다. 내가 어려울 때 담당 기자에게 부탁도 했다(웃음)”고 덧붙였다.앞으로 경기체육의 방향에 대해서도 정 회장은 “이제 체육인들도 머리를 맞대고 미래 먹거리를 생각해야 한다. 정부도 체육인들에 대한 배려와 관심을 가져줘야 한다”면서 “현재까지도 선수나 지도자들이 은퇴 후 갈 곳이 없다. 일부는 불법 도박에 범죄까지 이르고 있다. 대안이 절실하다”고 설명했다.대한체육회와 국민생활체육회 통합에 대해서도 그는 “과연 지금 이 시점에서 통합이 얼마나 제대로 이뤄지겠는가”라며 “엘리트 선수들은 설 자리를 잃을 수도 있고, 생활체육은 양적으로 늘려갈 수도 있다. 양 단체가 밥그릇 싸움만 이어질 것이 자명하다”면서 “언론에서도 통합에 관한 장·단점을 분석해 대안을 제시해야 한다. 엘리트 스포츠나 생활체육을 국민들에게 제대로 알려주는 것이 언론의 역할이 아닌가. 이 점을 인식해줘야 한다”고 밝혔다.그러면서 그는 “붓을 제대로 굴려라. 언론사마다 사정이 있겠지만, 정곡을 제대로 짚어주길 바란다. 모든 체육인들이 의기소침하지 않고 사기를 진작시킬 수 있는 그런 기사가 요즘 체육인들에게 필요하다”고 말했다.끝으로 체육인들에 대해 “체육계도 경쟁력보다는 서로 존중하고 상대를 이해해 주는 관계가 필요하다. 각박한 요즘 세상이지만, 체육이야말로 국민들에게 용기와 자부심을 심어준다는 점에서 희망을 갖고 각 분야에서 최선을 다해주길 바란다”고 당부했다.■ 정기철 회장 약력▲1934년 경기 화성 출생▲1953년 수원고 졸업▲1957년 건국대 정치대 법과 졸업▲1972~1980년 화성군 정남면장·오산읍장▲1981~1996년 경기도체육회 이사 겸 사무처장▲1985~1997년 대한체육회 이사▲1990년 베이징아시아경기대회 한국선수단 임원▲1991~1993년 민주평화통일정책자문위원▲1994~2007년 새오산신용협동조합 이사장▲1997~2001년 경기도체육회 부회장▲2001~ 경기도체육회 고문▲2008~ 경기도체육인회 회장<수상경력>▲1973년 내무부장관 표창▲1987년 경기도문화상▲1990년 대통령 표창(제70회 전국체전 유공)/글 = 신창윤기자 shincy21@kyeongin.com · 사진 = 임열수기자 pplys@kyeongin.com경기 체육의 초석을 다지며 체육 발전을 이끌어 온 정기철 경기도체육인회 회장이 ‘전국체육대회 종합우승배’를 들어 보이며 웃고 있다. 이 종합우승배는 1980년대 종합우승을 차지한 시·도에 주어졌다. 그러나 2007년 제88회 대회부터는 새로운 도자기 모양의 종합우승배가 만들어져 현재까지 이어오고 있다.

2015-11-02 신창윤

[원로, 광복 70년을 말하다·6] 이귀복 인천항발전협의회 회장

내·외항에 남·북항… 해외 경쟁요건 갖춰 신항 ‘원양항로’ 유치위해 수심 증심 시급 배후단지 ‘자유무역지대’로 경쟁력 높여야 크루즈 거점항 전략·해양대학 유치도 필요 ‘통일대비’ 北에 인프라 제공 교류 넓히길 부산은 주민과 국회의원·항만관계자 등이 똘똘 뭉쳐 해양특별법 제정 등 항만을 발전시키는 데 적극적이다. 인천은 이런 부분이 조금 아쉽다. 또 부산이나 목포와 비교했을 때 인천에 없는 것이 딱 하나 있다. 바로 해양대학. 해양대학 유치로 인천항이 더 발전할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다면 좋겠다. 40여년 전 인천은 항구도시라는 명칭을 갖고 있었지만 화물선이 접안할 수 있는 부두시설을 제대로 갖추지 못했다. 화물선이 인천항으로 들어오면 외항에 닻을 내리고 화물을 작은 배로 하역했다. 그 사이에 제물포 등에서 출발한 통선들이 화물선에 붙어서 선원들을 옮겨 태우고 육지로 올려보냈다. 화물선 한 척이 접안할 수 있는 시설이 변변치 못했던 인천이 지금은 내항을 비롯 북항과 남항, 올해 초에는 신항까지 개장했다. 명실공히 인천항이 내·외항 시대를 열면서 국내의 주요 수출입항만으로 자리잡았다. 이귀복 인천항발전협의회 회장은 인천항이 발전하는 모습을 현장에서 가장 열정적으로 지켜본 인물 중 한 명이다. 그는 화물선을 타고 20년 동안 세계의 다양한 항만을 방문했다. 배에서 내린 뒤에는 인천항의 도선사로서 20년 간 근무했다. 이 회장은 인천항이 세계적인 항만으로 발돋움해 나갔으면 좋겠다는 애정으로 인천항에 쓴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배를 타면서 20년, 도선사로서 20년 등 40년 이상을 인천항만 바라봤습니다. 해외의 다른 항만을 보면서 인천항을 세계적인 항만으로 발전시켜나가고 싶었습니다. 40여년 간 바다에서 근무했던 경험과 지식을 바탕으로 인천항 발전을 위해 나서고 있는데 나의 경험과 지식이 인천항 발전에 보탬이 될 수 있다는 것 만으로도 만족합니다.” - 인천항을 40년 가까이 지켜봤다. 부두시설 조차 변변치 않았던 인천항이 지금은 명실공히 내·외항시대를 열고 있다. 감회가 남다를 것 같다. “인천항은 내항이 있기 전에 투묘지에 본선 크레인을 두고 화물선이 오면 화물을 하역했다. 그렇게 하역하다 보니 조류의 영향으로 하역에 불편함이 있어서 내항이 조성됐다. 내항이 인천항의 발전을 끌어왔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물동량이 늘어나면서 화물선이 하역을 못하고 떠나야 하는 상황도 빈번했다. 또 갑문에 들어오기 위해 물때를 맞춰야 하는 등 어려움도 많았다. 결국 이런 불편함을 개선하기 위해 외항에 북항과 남항 등이 만들어졌다. 최근 신항까지 개항하는 것을 보면서 이제는 인천항이 본격적으로 해외 항만과 경쟁할 수 있는 기본적인 부두시설을 갖췄다는 생각이 든다. 이제는 신항이 개장했으니 인천항에 미주나 유럽 등에서 오는 대형 선박이 들어올 수 있도록 수심 등을 확보해 나가는 것이 인천항이 나가야 할 길이다.” - 인천신항이 개장하면서 인천항은 명실공히 컨테이너 전용 항으로 발돋움하고 있다. 인천신항이 어떤 역할을 해야 하고, 필요한 전략은 무엇인가? “인천신항은 컨테이너 전용 항만으로 개발된 만큼 미주·유럽 등 원양항로의 컨테이너 화물을 유치해야 한다. 미주 라인이 인천신항 개장과 함께 개설됐지만 아직 부산 등과 비교하면 미미한 수준이다. 원양항로 라인이 유치되기 위해서는 우선 항로 수심을 16m로 깊게 하는 증심사업을 빨리 진행해야 한다. 8천TEU급 대형 화물선이 상시 입항할 수 있는 길이 만들어져야 인천신항에 원양항로가 개설될 수 있다. 또 항만은 배후단지가 반드시 갖춰져야 한다. 인천신항에 배후단지를 조기에 일부라도 공급해야 물동량도 증가하고, 인천신항 활성화에도 긍정적인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 인천신항을 비롯해 인천항이 국내외 항만들과의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한 장·단기 전략은. “인천은 수도권 정비계획법에 의해서 여러 제약을 많이 받고 있다. 국내 타 항만과의 경쟁에서도 인천은 배후단지 임대료 등에서 경쟁력이 떨어진다. 결국 업체들은 인천의 비싼 임대료를 피해 평택 등 타 도시로 이전하고 있는 현실이다. 수도권 정비계획법은 항만이나 공항의 배후단지를 고려해 만든 것이 아니고 인구의 집중을 막기 위해 제정한 법인만큼 인천항 배후단지에 대한 규제를 우선 풀어나가야 한다. 또 인천신항 배후단지 등을 자유무역지대로 설정해서 임대료를 낮춰 나가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다. 더 나아가 세계적으로 화물선이 대형화하는 것에 대응하기 위해 항로의 수심을 깊게 하고, 항만을 대형 화물선에 맞춰 개발해야 한다. 아울러 중국에서 크루즈산업이 발전하고 있고, 인천항에 새국제여객터미널이 2~3년 내에 개장하는 만큼 인천항을 크루즈 거점항으로 발전시켜 나갈 수 있게 전략을 세워야 한다. 특히 크루즈 관광객들이 인천에 잠깐 왔다 가는 항이 아니라 인천에서 머물고, 인천에서 즐길 수 있도록 개발해야 할 것이다.” - 인천의 경우 바다를 곁에 두고 바다를 직접 보거나 만질 수 없다는 주민들의 불만이 높다. 주민들과 인천항은 어떻게 관계를 유지해야 하나? “그동안 인천항이 발전하면서 주민들과의 관계를 크게 고려하지 않았기 때문에 불만이 많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국제적으로 항만은 보안시설로 지정돼 있기 때문에 주민들이 항만에 자유롭게 들어왔다 나갔다 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인천시민들이 바다를 볼 수 없다는 건 사실이다. 인천내항 1·8부두 항만재개발이 본격적으로 추진되는 만큼 지금 시점에 인천시민들이 바다를 볼 수 있게 친수시설을 만들어야 한다. 단 내항 등이 도시 속에서 공존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 발전해야 한다.” - 광복 70주년의 의미가 인천항에도 있을 것 같다. 특히 통일을 대비하는 인천항의 발전방향은 어떤 것들이 있을까? “대한민국과 북한은 교류와 상생을 해야 한다고 모두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방법이 달라서 시간이 늦어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인천항도 통일에 대비해 항상 전략을 세워야 한다고 본다. 통일에 앞서 우리가 북한에 항만을 건설해 주고, 도로를 놔주는 등 국가인프라를 만들어주면서 교류를 넓혀나가야 한다. 이를 통해 인천항이 북한의 항만들과 교류할 시기가 올 것이다. 이에 대비한 다양한 정책을 세워야 한다. 우리 정부가 원칙을 세우고 북한과 대화를 해 나갈 수 있다면 북한과의 교류와 상생도 머지않은 일이다.” - 마지막으로 인천항에 필요한 것을 몇 가지만 꼽아 본다면. “부산은 주민과 국회의원·항만관계자 등이 똘똘 뭉쳐서 해양특별법을 만들어 나가는 등 항만을 발전시키는 데 적극적이다. 인천은 이런 부분이 조금 아쉽다. 인천항이 국내의 대표적인 항만인데도 부산이나 목포와 비교했을 때 없는 것이 딱 하나 있다. 해양대학이다. 인천에도 해양대학을 유치하고, 이를 통해 인천항이 더 발전할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다면 좋겠다.” ■ 이귀복 회장 약력 ▲ 1947년 강화 출생 ▲ 1972년 한국해양대학교 항해학과 졸업 ▲ 1972년~1994년 범양상선(주) 항해사 및 선장 ▲ 1995년~2015년 인천항도선사회 도선사 ▲ 1998년~2005년 한국도선사협회 이사 ▲ 2003년~2005년 인천항도선사회 회장 ▲ 2006년~2008년 국제도선사협회(IMPA) 부회장 ▲ 2006년~2009년 한국도선사협회 제14대 협회장 ▲ 2008년~2009년 인천항만공사 항만위원장 ▲ 2014년~현재 인천항발전협의회 회장, 인천항만공사 항만위원 /글 = 신상윤기자 ssy@kyeongin.com · 사진 = 임순석기자 sseok@kyeongin.com▲ 40여년 전 화물선 한 척이 접안할 수 있는 시설이 변변치 못했던 인천이 지금은 내항을 비롯해 북항과 남항, 올해 초 신항까지 개장해 명실공히 인천항이 내·외항 시대를 열면서 국내의 주요 수출입항만으로 자리잡았다며 이제는 인천항이 통일을 대비한 전략을 세워야 한다고 밝히고 있는 이귀복 인천항발전협의회 회장.

2015-08-31 신상윤

[원로, 광복 70년을 말하다·5] ‘광복군’ 김우전 선생

1944년 강제징집 日軍 탈출 독립군 투신 광복후 백범선생과 정부수립에 ‘한평생’광복군 국내진격 불발 통일안돼 ‘아쉬움’과거 기억·순국선열 존경이 ‘애국의 시작’요즘 日행태 ‘착잡’ 일제때보다 험한시대강대국에 민족성 자신감 갖고 상대하길김 동지!힘이 제일 센때가 20대적이야.20대에 독립운동을 못하는 자는 사내가 아니고, 20대에 나라에 목숨을 내놓지 못하는 자는 독립투사가 아니야-김우전 저 ‘김구선생의 삶을 따라서’ 중任命狀(임명장)右 同志를 本 主席 辦公室 機要秘書로 任命함.(위 동지를 본 주석 판공실 기요비서로 임명함)大韓民國臨時政府 主席 金九(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 김구)大韓民國 二十七年 三月(대한민국 27년 3월)1945년 4월 어느날 이른 아침이었다. 갑작스런 부름을 받고 중국 중경의 임시정부청사 백범 선생의 방으로 갔다. 백범 선생이 하얀 명주천에 쓴 임명장을 주셨다. 그리고 윤봉길 의사가 찼던 시계를 보이며, “윤 의사가 거사를 하기 전 내 시계와 바꾸자고 했었는데, 나는 이것을 조선으로 들어가는 날 윤 의사의 아들을 찾아서 돌려 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또 “김 동지! 힘이 제일 센때가 20대적이야. 20대에 독립운동을 못하는 자는 사내가 아니고, 20대에 나라에 목숨을 내놓지 못하는 자는 독립투사가 아니야”라고 말씀하셨다.이 말을 들으며 나의 젊은 투지는 또 한번 불탔다.(김우전 저 ‘김구선생의 삶을 따라서’ 中)1944년 8월 강제 징집된 일본군에서 가까스로 탈출해 독립군에 투신한 김우전 선생이 중국 중경의 임시정부에서 백범 선생에게 직접 막중한 임무를 부여받았다. 임시정부와 국내 독립운동가와의 연계뿐 아니라 국내 조직 또는 개인간 연결을 해야 하는 막중한 임무였다. 생명을 담보로 활동해야 하는 임무이니 만큼 임명장을 받는 자리에는 백범 선생과 당시 주석판공실장(비서실장) 민필호 선생 등 3명만이 자리했다.백범 선생은 숨조차 쉴수 없는 엄숙함 속에 임명장을 수여했다. 그리고 덤덤히 임무를 설명했다. “지금 중국 중경에 있는 독립운동가는 모두 임시정부에 집결되었고 의열단 계열연안과도 장건상 선생이 왕래하여 임시정부와 연합해서 항일투쟁을 하고 있고, 미주동포와도 완전히 연합전선을 구축하고 있으며 조국 본토에서도 김 동지와 같이 많은 애국청년이 임시정부를 찾아왔지만 막상 조국 본토에서는 민족통일전선구축이 미흡한 상태이므로 하루 속히 국내 지도자와 연대하는 것이 임시정부의 남은 과제니 이때 김동지가 국내에 잠입하여 그 임무를 수행해 주기를 바란다.”독립군에 투신한지 1년만인 20세 약관의 나이, 김우전 선생의 어깨엔 조국 광복이라는 대업이 짊어지어 졌다. 김 선생은 곧바로 조국으로 돌아갈 준비에 돌입했다. 임시정부의 도움을 받아 조국내 독립운동가와 애국청년들의 명단을 확보했고, 이들과 연계할수 있는 각각의 방법과 일정을 짰다.하지만 김 선생은 임무를 수행하지 못했다. 4개월여만의 준비기간을 마치고 조국으로 출발하는 날짜를 잡아 놓고 기다리던중 일본군의 패망과 함께 꿈에도 그리던 광복소식이 전해졌다.이후 백범 선생을 모시고 조국으로 돌아온 김 선생은 정부수립과 조국통일을 위해 한평생을 몸바쳤다.광복 70주년을 앞두고 일제치하 암울했던 시절, 조국광복을 위해 강제징집된 일본군에서 탈영해 사선을 넘나들며 독립운동을 벌여온 김우전 선생을 만났다. 올해 93세의 광복군은 ‘또랑또랑’ 총기어린 눈동자뿐 아니라 우렁차고 단호한 목소리가 여느 젊은이들 못지 않았다.김 선생은 광복 70주년을 맞아 남다른 아쉬움을 토로하며, 그 시절을 회고했다. 또 일본을 비롯 중국, 미국, 러시아 등 우리를 둘러싼 강대국들과의 관계를 통해 현시대를 살고 있는 젊은이들에게 역할과 지침, 애국심에 대해 전했다.-생존해 있는 몇 안되는 광복군으로서, 광복 70주년을 맞는 감회가 남다를 텐데.“쓸쓸하다. 매번 광복절이 되면 쓸쓸하다. 1945년 일본 나가사키에 두번째 원자폭탄이 떨어질 때 중국에 있는 OSS(CIA의 전신)본부 장교식당에 있었다. 이날 원폭 투하 소식이 전해지고 미군들은 난리였다. 전쟁이 끝났다고. 하지만 김구 선생을 비롯해 우리들은 허탈했다. 광복군이 국내로 진격을 못해서였다. 그 이후로 김구 선생이 남북이 분열되는 걸 막기 위해 남북협상에 나설 때 함께였다. 남북협상을 이뤄내지 못한 것도 허탈했다. 나는 두 가지를 못했다. 광복군이 국내로 진격하는 걸 못 봤고, 통일 운동을 완성하지 못했다. 광복절이 되면 그 두 가지 다하지 못한 임무가 생각난다. 올해는 광복 70주년으로 허탈한 마음이 더 크다.”-광복군 입대 후 활동 당시를 이야기 해달라.“당시 중국 각지에 한국광복군간부 훈련반이란 게 있었다. 거기서 5월부터 10월까지 6개월 간 훈련을 받았다. 같이 훈련을 받았던 사람 중에 장준하도 있었다. 훈련이 끝난 뒤 전방으로 가게됐다. 거기서 만난 OSS장교가 미군이 상륙작전을 할 때 현지인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귀띔해 줬다. 그래서 국내에 있는 독립군이랑 연락을 해서 지원할 수 있다고 전했다. 첩보를 맡겠다고 했다. 그래서 한글을 숫자 암호화 하는 작업을 했다. 일본군과 일본 공장에서 일하는 한국인을 대상으로 선전물도 제작해 배포했다. 그렇게 일하고 있던 중 김구 선생이 불러 독립군 좌우 합작이 완료돼 곧 국내로 진격할 건데, 이 사실을 국내에 알려야 한다고 임무를 주셨다. 45년 4월 6일이다. 광복 후에는 국내로 들어가서는 경교장에서 비서로 김구 선생을 모셨다. 48년 남북협상을 위해 김구 선생이 평양에 가셨을 때 옆에서 수행했다.”-정말 힘들게 지킨 대한민국이다. 현재를 살고 있는 국민들에게 던지고 싶은 메시지는.“역사에 기록되지 않은 광복군 중에 한성수라는 사람이 있다. 나와 같이 한국광복군간부학교를 졸업한 사람으로, 졸업생 중 5명이 일본군 안에 침투하는 임무를 받았는데 한성수는 정체를 들켜 체포됐다. 재판을 받는 과정에서 한성수는 일본말을 한 마디도 안했다. 일본어가 유창했지만, 한국말로만 말했다.독립운동했다고해서 무조건 사형을 받지는 않았다. 그런데 한성수는 재판장에서 일본을 모욕했다고 사형을 받았다. “나는 조국에 충성한 것 같지만 사실은 조선에 충성한거다. 나는 조선인이니까 조선에 충성할거다”며 끝내 한국말로 말했다. 2001년부터 한성수 재판 기록을 찾으려고 노력해서 2005년 동경지방검찰청에서 판결문을 입수했다. 판결문을 보니 한성수에게 사형을 언도한 날이 5월 10일이었고, 사형이 집행된 날은 5월13일이다. 3일 만에 사형한거다. 대한민국은 이렇게 이름없이 사라져 간 무명용사들이 이룩한 나라다. 목숨과 맞바꾸며 소중히 지킨 나라다. 지난날을 기억하고, 자랑스러운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역사에 누가 되지 않는 마음으로 살아가길 바란다.또 요즘 일본의 행태를 보면 항일 운동을 한 사람으로서 착잡하다. 일본과 중국 등 강대국들과의 관계에 있어서도 민족성에 대한 자신감을 갖고 임했으면 좋겠다.”-매년 광복절 즈음이면 애국심이 대두된다. 애국심이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독립운동을 할 당시 광복군들을 보면 “이 사람들이 나라를 위해 죽을 각오를 했구나”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애국심에 목숨을 걸었다는 것이다. 먼저 애국을 위해 목숨을 달리하신 순국선열들을 존경하는 것이 애국심의 시작이라 생각한다.특히 한국은 열강 틈에 끼어 고생하고 있다. 중국·미국·러시아·일본 등의 틈바구니에서 상당히 어렵다. 일제시대보다 지금이 더 험한 시대라고 본다. 선진국에 돌입했다고 하지만 갈 길이 멀고, 이런 시기에 젊은이들이 제일 중요하게 생각해야 할 것은 ‘통일’이라고 생각한다. 통일이 돼서 국력을 강화해 이북을 경제적으로 발전시키고 안보 문제도 해결해야 길이 생긴다고 본다. 통일을 하는 데 전력을 기울여달라. 이게 제가 하고 싶은 이야기 전부다.”■ 김우전 선생 약력▲ 1922년 2월 12일 평안북도 정주군 갈산면 출생▲ 1935년 고덕보통학교 졸업▲ 1937년 교토 리쓰메이칸대학 법학과 입학▲ 1944년 강제 징집▲ 1944년 김구 주석 기요비서, OSS본부 파견근무▲ 1945년 김구 주석 비서▲ 1992~1999년 광복회 부회장▲ 1999년 제10대 한국광복군동지회 회장▲ 2003년 제15대 광복회 회장, 백범김구선생기념사업협회 고문/글 = 김대현기자 kimdh@kyeongin.com · 사진 = 김종택기자 jongtaek@kyeongin.com▲ 조국의 독립운동을 위해 투신한 김우전 선생이 광복 70주년을 앞두고 현시대의 젊은이들에게 순국선열의 애국심을 본받아 조국통일의 밑거름이 돼 달라고 말하고 있다.▲ 1945년 4월 중국 중경의 임시정부청사에서 백범 선생이 준 하얀 명주천에 쓴 임명장.

2015-08-03 김대현

[원로, 광복 70년을 말하다·4] 한국전쟁 참전용사 서재송옹

대학시절 미군에 징병돼 상륙작전 참여“전사자들 유해발굴 등 명예 세워줘야”휴전후 고향 덕적도서 이장·서기등 지내신부님 권유로 혼혈아등 1천여명 보살펴美 신자들에 수천통 편지 양부모 찾아줘“아이들 성인된후도 연락·초청방문도…경제 좋아졌지만 미혼모등에 고아 여전”한국전쟁으로 민족 간에 쓰라린 일을 겪고, 고아들이 생기면서 그들을 보살피고 입양시키는 일을 시작했습니다.대한민국이 부유해지면서 입양갈 아이들도 없어질 것으로 생각했고요. 하지만 여전히 미혼모와 이혼 등의 문제로 고아들이 계속 생기고 있습니다.65년 전 미군복을 입고 상륙작전에 참여한 스무 살 청년은 폭격으로 잿더미가 된 고향(인천) 땅을 밟았다. 휴전 후 40여년 간 전쟁 고아를 비롯해 미군 아버지와 한국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들을 돌보며 입양을 주선했던 참전 용사는 고향에 핵폐기장이 설치된다는 정부의 결정에 70대의 나이에 공동 대표로서 전면에 나서 핵폐기장 철회를 위한 시민운동을 전개하기도 했다.6월 말 인천광역시 옹진군 덕적도의 자택에서 만난 서재송(86)씨는 한국전쟁 참전에서부터 최근까지 60여년 간의 과정을 세 시간에 걸쳐 들려줬다. “얼마나 폭격이 심했는지, 땅을 내딛는데 무릎까지 빠졌어요. 상륙한 곳은 내항으로, 지금 인천우체국이 있는 부근입니다. 주민들은 한 명도 보지를 못했습니다. 우리 사단(미 7사단)은 바로 숭의동 공설운동장으로 이동했습니다. 경기도 시흥 쪽 수수밭·콩밭에서 잤는데, 다음 날 일어나서 보니 인민군 시체가 즐비했어요.”전쟁이 터졌을 때 서씨는 국립 부산수산대학교(현 부경대) 1학년이었다. 6월 25일 전쟁 발발 후 학교는 휴교했으며, 집에서 하숙비도 안 오는 상황에서 하숙집 주인도 “우리 가족들 살기도 벅차니 나가달라”고 하는 바람에 먹고 지내기 막막한 상황이었다. 호구지책으로 부산 국제시장에서 풀빵 장사를 시작했는데, 이튿날 미군에 징병됐다. 서씨는 “‘여기 있어도 고생인데, 젊은 사람으로서 나가서 싸우자’는 생각을 했다”고 말했다.이후 배를 타고 일본 요코하마로 이동한 서씨는 1주일 동안 밤낮으로 상륙작전과 전투에서 처해질 수 있는 상황을 가정한 훈련을 받았다. 매일같이 군복은 땀에 절어 허옇게 변했다.9월 초 다시 부산으로 돌아왔다. 얼마 후 7사단을 태운 배는 제주도를 돌았다.“동해로 가면 원산이고, 서해로 가면 군산 아니면 인천, 해주로 상륙작전을 할 것으로 예상하고 있었어요. 제주도를 도는 모습을 보면서 서해로 가는 걸로 확신했습니다. 그러다가 얼마를 갔는데, 덕적도의 밧지름 모래 사장이 빤히 보이지 않겠어요. 인천으로 가는 걸 확신한 순간이었습니다.”상륙작전을 감행할 당시 특별한 반격은 없었다. 이미 폭격으로 쑥대밭을 만들었기 때문이다.고향 땅을 밟은 아쉬움도 잠시, 곧 기차로 시흥, 안양, 여주, 충주를 거쳐 다시 부산으로 내려갔다고 한다.곧 이어 원산 위 이원으로 다시 상륙했다. 서씨는 삼수·갑산 전투와 혜산진 전투, 장진호 전투, 흥남부두 철군 등 한국전의 주요 전장에 있었다.그 중 1950년 혹한의 장진호 전투가 가장 참혹했다고 회상했다.“장진호에서 아군 5천명이 죽었을 거예요. 낙하산으로 보급품을 받았는데, 미군과 중공군이 서로 그 보급품을 따내려 했고, 얼어서 물이 안 나오는 우물에 물을 퍼내기 위해 들어갔다가 모두 죽었던 일도 있었습니다. 동상으로 팔과 발이 썩는 모습도 많이 봤고요.”밀고 밀리는 전쟁이 이어진 가운데 이곳저곳 지원을 한 서씨는 휴전 후 한국군에 편입해 문산에서 포로 교환 등의 임무에 차출됐다. 이후 만 4년의 군 생활을 마치고 일등중사로 제대했다.한국전쟁에 관한 이야기를 마무리하면서 서씨는 정부가 나서서 조국을 위해 희생한 사람들의 명예를 세워줘야 한다고 제언했다.“한국전쟁으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었습니까. 미국은 북한에 와서 유해도 발굴해 갑니다. 우리도 조국을 위해 희생한 사람들의 한을 풀어줘야 합니다. 어떤 전투에서 어떻게 죽었는지를 가족들에게 알려줄 필요가 있습니다. 과학기술이 발달한 현재 DNA 분석 등을 통해 보다 쉽게 전사자의 가족을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한국전쟁에 자발적으로 참전한 재일학도의용군은 전쟁 후 돌아가려하니, 입국 허가가 안나와서 못 가고 있는 현실입니다. 일본 측도 문제가 있지만, 우리 정부에서 도움을 줘야 할 것으로 보입니다. 저도 학생으로 참전했었지만, 가족을 못 찾아가는 모습을 보면서 마음이 아팠습니다. 미국 뉴욕 맨해튼에는 한국전쟁 참전 인원과 전사한 사람 등 위령탑이 잘 세워져 있습니다. 우리도 참조해야 할 부분입니다.”제대 후 고향인 덕적도로 돌아온 서씨는 전쟁 후 어려워진 가정 형편으로 인해 복학을 포기했다. 대신 전쟁 후 설립된 덕적고등공민학교 교사로서 3년간 활동했으며, 덕적면 서포1리 이장으로 2년 가까이 근무했다. 곧 이어 덕적면 서기로 1년 정도 일했다.미국 출신의 최분도(Benedict Zweber) 신부와의 만남은 서씨가 면에서 일하던 시기에 이뤄진다.“1962년 연평도 본당 신부로 부임한 최 신부님이 면 일을 관두고 같이 일하자는 제안을 하셨어요. 6개월을 고민하다가 신부님과 보다 뜻있는 일을 하기로 마음 먹었습니다. 그 분이 1966년에 덕적에 부임하시면서 본격적으로 함께 고아들을 살피는 일을 했습니다.”최 신부가 바닷일을 하다가 태풍에 부모를 잃고 고아가 된 아이들을 한두 명씩 데려오기 시작하면서 공소회장인 그의 집은 금세 고아원이 되어버렸다.최 신부와 서씨, 서씨의 아내 인현애(84)씨는 덕적에서부터 인천 송현동 본당, 부평3동 본당 등을 옮겨 다니면서 아이들을 돌봤다.전쟁 고아를 비롯해 미군과 한국 여성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아 등이 모이면서 적을 때 15명, 많을 때는 30명의 아이들이 북새통을 이루며 살았다. 평균적으로 3년 정도 있다가 양 부모를 찾아 떠났다.“학교에서 소풍이나 운동회가 열릴 때면 일일이 도시락을 싸줄 수가 없어서 지게꾼을 사서 밥을 실어 날랐어요.”이렇게 입양 보낸 아이들의 수가 40년 동안 1천600명이다. 입양이 안 된 단 한 명의 어린이는 서씨의 큰 딸이 입양해 돌보고 있다.나이가 어려 입양이 쉬운 아이들은 입양기관으로 보냈고, 서씨는 연령이 차거나 장애가 있는 어린이들을 직접 입양시켰다.주로 미국 가톨릭 신자들을 대상으로 서씨는 성탄절과 부활절 때 1천 통씩 미국에 편지를 보냈다. 입양을 기다리는 아이들의 사진과 신상을 기록한 편지를 보내고, 상대방이 입양을 원한다고 답장이 오면 보내는 형태로 진행했다.입양 후에는 사후관리도 했다. 서씨는 1982년 최 신부와 함께 미국에 처음으로 간 이후 2년에 한번 꼴로 아이들을 만나고 있다.미국에 가면 지금은 성인이 된 자식들이 서로 연락해서 한 곳에 모인다. 만사를 제쳐놓고 공항에 마중을 나오는 자식도 있다.“지금도 저와 집사람을 찾아 많이들 오고 있습니다. 집사람이 아파서 입원했을 땐 미국에서 병문안 온 아이도 있었고요. 오는 9월 17일에는 초대 받아서 미국에 다녀올 예정입니다.”1994년 부평의 ‘성 원선시오의 집’을 정리한 이후 고아들을 보살피진 않고 있지만, 여전히 사후관리를 비롯해 일을 놓지 못하고 있다.“요즘도 결혼식 날짜를 정해 놓고 비행기 표를 보내오는 아들도 있고, 친부모를 찾아 달라는 딸도 있어요. 아직 일을 멈추지 못하는 이유입니다.”성 원선시오의 집을 정리한 12월 초 덕적도 바로 옆 굴업도에 정부가 핵폐기장을 추진한다는 사실이 언론을 통해 알려졌다.서씨는 굴업도 핵폐기물 처리장 건설 결사반대 덕적면 투쟁위원회의 부위원장으로 임명됐다. 이후 공동대표로 활동하면서 1년여의 활동 끝에 ‘굴업도 핵폐기장 지정·고시 해제’를 이끌어낸다.“돌이켜 보면, 정부의 잘못된 결정이었죠. 당시 아홉 가구 정도였던 굴업도에 핵폐기장을 설치하는 게 쉬울 걸로 예상했던 거 같아요. 덕적주민들 상당수가 반대를 했기 때문에 인천의 각계각처에서 도움을 받을 수 있었어요. 당시 핵폐기장을 찬성했던 주민과 반대했던 주민 간에 여전히 앙금이 남아 있어요. 반대를 주장했던 많은 사람들은 대의적으로 봤을 때 정의로운 결정을 내렸다고 생각합니다.”인터뷰를 마무리 하면서 서씨에게 우리 사회가 과거보다 살기 좋아졌다고 생각하는지를 물었다.“한국전쟁으로 민족 간에 쓰라린 일을 겪고, 고아들이 생기면서 그들을 보살피고 입양시키는 일을 시작했습니다. 대한민국이 부유해지면서 입양갈 아이들도 없어질 것으로 생각했고요. 하지만 여전히 미혼모와 이혼 등의 문제로 고아들이 계속 생기고 있습니다. 현재 다문화 가정이 일반화되면서 혼혈아에 대한 멸시는 없어졌다고 생각합니다. 입양 문제가 하루속히 우리 국가 안에서 해결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서재송옹 약력▲ 1929년 경기도 부천군(현 인천광역시 옹진군) 덕적면 출생▲ 1950년 국립 부산수산대학교 입학 한국전쟁 발발로 입대▲ 1954년 일등 중사로 제대▲ 1961~1962년 부천군 덕적면 서포1리 이장▲ 1966~1980년 성 가정 원장▲ 1980~1994년 성 원선시오의 집 원장▲ 1995년 굴업도 핵폐기물 처리장 건설 결사반대 덕적면 투쟁위원회의 공동대표▲ 2001~현재 덕적 천주교회 사목회장/글 = 김영준기자 kyj@kyeongin.com · 사진 =임순석기자 sseok@kyeongin.com▲ 한국전쟁 참전 용사이자, 전쟁 후 고아와 혼혈아동의 입양사업을 40년간 벌인 서재송씨는 “전사한 용사들의 명예회복을 위해 국가가 나서야 할 시점이며, 고아들의 입양도 국가 내에서 해결돼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2015-07-06 김영준

[원로, 광복 70년을 말하다·3] 문병대 삼성전자 前대표이사

1969년 수원 삼성디지털시티 건설시작68년 입사 17년간 수원근무 ‘제2의 고향’‘혁신적 투자·공정인사·투명경영’ 핵심日 소니 제치고 韓 ‘반도체 신화’ 이끌어中 무서운 추격 경기도 첨단기술기지돼야‘수도권 발전=나라 발전’ 규제는 시대역행‘정직’이 가장 좋은 처세술 불변의 진리역사를 보면 기술이 우수한 나라가 세계를 제패했어요. 그런데 요즘은 인재들이 전부 의대 법대 같은, 자격증 따는 데로 가죠. 하지만 앞으로는 창조적인 일을 해야 먹고 살 수 있게 될 거예요. 사회 전체가 창의력을 살릴 수 있는 방향으로 나가야 하는데 아직 너무 권위적입니다.‘가장 빨리 가난을 벗어 던진 나라’. 세계는 우리나라를 이렇게 기억한다. 또한 이 사실은 우리의 자부심이고, 이를 토대로 민주주의와 교육문화를 발전시켜왔다. 원로에게 듣는 이야기의 두 번째 주제는 경제다. 문병대 전 삼성전자 수원사업장 대표이사는 삼성에 뿌리를 두고 수원을 토대로 경기도 경제발전의 과정을 현장에서 지켜본 인물이다. 42년 동안 삼성그룹에서 일하면서 그가 직접 체험한 기업과 국가의 성장기를 들려주었다.기업활동이 서울에 집약돼 있던 1960년대 말, 수원에 현재의 삼성디지털시티 건설이 시작됐다. 1969년의 일이다. 문병대 전 대표는 그보다 1년 앞선 68년 삼성그룹에 입사했다. 50여년이 지났지만, 푸르던 청년시절의 상황을 그는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한국전쟁과 5·16군사정변에 대한 기억과 상처가 가시지 않은 때죠. 경제와 정치계가 ‘재건’에 몰두하고 있을 때고요. 한일합섬, 선경직물 등의 섬유회사들이 속속 등장하고 있었어요. 선경직물은 수원의 평동에서 조그맣게 사업을 시작했죠. 수원에는 그 말고는 딱히 산업이랄게 없었고, 농업인구가 대부분인 시골마을이었어요. 지금은 상상하기 어렵지만요.”삼성이 시골마을 수원에 당시로서는 최첨단 산업이던 전자분야 사업의 터를 닦은 것은 한 정치인의 애향심과 고(故) 이병철 전 삼성그룹 회장의 결단이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그는 회상했다. “1963년 국회의원이 된 고(故) 이병희 전 의원은 수원의 발전을 위해 애를 많이 쓰셨죠. 경기도청을 수원에 유치하고 여러 기업체도 수원으로 끌어오려고 노력했어요. 이 회장과 동기간으로 친분이 두터웠어요. 삼성전자 유치위원회를 만들고 땅을 사줄 테니 수원에 터를 잡으라고 권유했죠. 이 회장은 부지 45만평을 요구했어요. 그 분 꿈의 크기를 알 수 있는 거죠. 당시는 한 기업의 부지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규모였어요. 이 회장은 부품부터 완제품까지 생산 가능한 모든 공장을 한 곳에 집약할 수 있는 산업단지를 꿈꾸었죠. 당시 일본의 경쟁사인 산요가 도쿄에 40만평 부지의 공장을 운영하고 있어서 그것보다 크게 짓겠다는 생각도 있었던 거고요. 수원 유지들이 적극 나서서 유치에 성공했지요.”문 전 대표는 1983년 처음 수원에 왔다. 임원으로 승진하고 처음 발령받아 온 곳이 삼성전자였다. 이후 1999년 퇴직할 때까지 17년동안 수원을 떠나지 않았다. 임원이 한 곳에서 이토록 오래 일한 것은 삼성그룹에서는 처음 있는 일이었다. “회장님으로부터 물류단지 부지를 매입하라는 특별 지시를 받고 수원에 왔어요. 처음에 수원공장 관리담당 이사로 왔는데, 당시에는 수원공장에 임원이 3명뿐이었어요. 인사, 총무, 경리 등 다양한 직무를 맡아서 했고, 경기도에서 삼성전자를 대표하는 역할도 해야 했지요. 대외 섭외나 교류가 사업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으니 중요한 자리였지요.”그는 수원과 경기도의 도움이 없었다면 삼성전자의 성장은 불가능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대기업이 들어서는 것 자체가 지역의 도움이 없으면 할 수가 없어요. 수도권 규제 때문에 기흥공장도 들어서지 못할 거였는데, 당시 전두환 대통령이 나서서 도와줬습니다. 물론 경기도도 도와주었고요. 반도체는 기술인력이 사업의 필수인데, 그 인력들을 모으려면 사업장이 수도권에서 가까워야 해요. 인프라도 중요하고요. 구도심밖에 없던 수원에 1984년 동수원이 조성되기 시작했어요. 수원 최초의 신도시죠. 이를 기점으로 수원이 현대적인 도시로 변모하기 시작했지요. 그 이전에는 수원 진입로가 편도2차선이었어요. 삼성전자 삼거리 진입로에 8차선이 생길 때 무슨 길을 저렇게 넓게 내나 했는데, 지금은 그 길도 좁아졌죠.”그가 수원에서 대표이사까지 오르는 동안, 삼성은 세계 일류기업으로 성장했다. 성장의 비결을 물었다. “삼성의 장점은 신속하고 과감한 의사결정이에요. 전문경영인은 그런 면에서는 힘이 없죠. 삼성은 오너가 경영을 했어요. 이 점이 지금은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하지만, 오너가 유능한 경우에는 최상의 효과를 발휘합니다. 그런 점에서 이병철, 이건희 회장의 존재는 삼성은 물론이고 우리나라의 복이었어요. 우리가 일본의 소니를 이길 수 있었던 것은 과감한 투자 결정이 주효했기 때문이에요. 일본은 책임문제 때문에 불황기에 투자를 못했습니다. 이병철 회장의 일화를 말씀드릴게요. 반도체 사업을 처음 시작할 때 여러 전문가들에게 자문을 구했지만 긍정적인 전망이 전혀 없었다고 해요. 한국에서 반도체 사업이 가능하지 않을 거라 생각했죠. 이 회장은 반도체가 기업이 아닌, 우리나라를 위한 산업이라고 생각했어요. 기흥공장에 라인 하나를 설비하는데 500억원이 필요했습니다. 80년대 초반이니까 전체 이익이 200억원이었던 시절이에요. 반도체라인 설비 투자를 하면 기업이 흔들릴 상황이었죠. 실제로 부도설도 났었어요. 심지어 투병 중이셨는데 1987년 8월에, “내일 반도체 공장 기공식할거니까 삽 준비하라”고 지시하셨어요. 그리고 3개월쯤 후에 돌아가셨죠. 그 다음해인 88년 완공해서 그 해부터 지금까지 흑자를 내고 있어요. 그 분의 뒤를 이은 이건희 회장 역시 혁신적인 투자를 했죠. 이런 투자가 몇 번 성공해서 우리가 그들을 앞지를 수 있었던 거예요. 또 한가지는 공정한 인사시스템입니다. 삼성의 인사는 합리적으로 평가하고 그에 따라 승진하도록 시스템화돼 있어요. 매우 공정하고 한편으로는 매섭기도 한 인사죠. 청탁이 통하질 않으니까요. 세번째는 깨끗한 경영 풍토에요. 부정이 아주 없지는 않겠죠. 그러나 경영에 대한 정신이 살아있는 기업이라고 저는 평가합니다.”문 전 대표는 32년 동안 경기도에 있었다. 제2의 고향이라고 주저없이 말할 수 있는 세월이다. 퇴임 후에도 경기도경제단체연합회, 육상경기연맹, 자원봉사단체협의회, 대한적십자사경기도지사 등을 이끌었다. 생의 가장 화려한 시간들을 경기도에서 보낸 그는 경기도의 미래를 위한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수원은 울산보다 큰 도시에요. 그런데 울산은 광역시고 수원은 아니죠. 경기도는 인구수로 서울을 앞질렀고, 우리나라 산업체의 3분의 1이 경기도에 있습니다. 어떤 면에서 서울을 능가하는 우리나라 제일의 지자체에요. 그런데 규제 또한 제일가죠. 다른 많은 나라들이 수도권 규제를 하다가 결국에는 수도권에 제일도시의 자리를 넘겨줍니다. 수도권의 발전이 나라의 발전과 직결돼요. 경기도는 첨단 기술기지가 돼야 합니다. 그러면 한국의 경제를 이끌어 갈 수 있어요. 더군다나 중국이 무섭게 따라붙는 이때, 수도권 규제는 시대에 맞지 않죠.”국가경제를 위한 제언도 남겼다. “옛날에는 미국 일본이 최고였어요. 영어는 물론이고 일본어도 많이 배웠죠. 지금은 중국이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어요. 우리는 중국을 넘어서야 합니다. 중국이 따라올 수 없는 기술제품을 만들어야 합니다. 역사를 보면 기술이 우수한 나라가 세계를 제패했어요. 그런데 요즘은 인재들이 전부 의대 법대 같은, 자격증 따는 데로 가죠. 그래야 평생 먹고 살 수 있다면서요. 하지만 앞으로는 창조적인 일을 해야 먹고 살 수 있게 될 거예요. 사회 전체가 창의력을 살릴 수 있는 방향으로 나가야 하는데 아직 너무 권위적입니다. 아직도 우리가 세계 경제 몇 위라는 것을 강조하지만, 부정부패가 심하죠. 이게 큰 걸림돌이에요. 경제만 죽어라고 애쓴다고 경제가 성장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닌거죠.”그는 긴 이야기를 단순한 명제로 끝맺었다. 정직을 신조로 삼아 평생을 살았다는 그는 기업에 몸담고 있을 때부터 지금까지 정직이 가장 좋은 처세술이라고 믿고 있다. “정직한 사람은 우선 상사의 총애를 받아요. 대표이사를 할 때도 거짓말을 하지 않았어요. 그러면 기업은 소비자의 총애를 받습니다. 기업경영은 인간경영이고, 모든 경영은 인간이 하는 것이에요. 그건 70년 전이나 지금이나, 700년 후에도 변함 없는 사실입니다. 지금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이 단순하고 자명한 진리일 것입니다.”■ 문병대 前대표이사 약력▲ 1941년 충남 부여 출생▲ 1967년 고려대학교 법학과 졸업▲ 1968년 삼성그룹 입사, 47년 재직▲ 1994년 삼성전자 수원사업장 대표이사▲ 2000~2006년 삼성전자 상근경영고문▲ 1989~1999년 경기도육상경기연맹 회장▲ 2004~2005년 경기도자원봉사단체협의회 회장▲ 1999~2007년 경기도경제단체연합회 회장▲ 2007~2013년 대한적십자사 경기도지사 회장▲ 2013~현재 경기도경제단체연합회 고문 - 수상경력 ▲ 1996년 대통령 산업포장 ▲ 1997년 석탑산업훈장 수훈 - 저서 ‘선진경제로 가는 길’/글 = 민정주기자 zuk@kyeongin.com · 사진 = 하태황기자 hath@kyeongin.com▲ 문병대 삼성전자 전 대표이사가 경인일보와 가진 인터뷰에서 “수도권 발전은 곧 나라의 발전이며, 수도권 규제는 시대역행이다”고 밝히고 있다.

2015-06-01 민정주

[원로, 광복 70년을 말하다·2] 백선엽 장군

1950년 대구 방어 ‘다부동 전투’ 못잊어방어선 뚫리면 미군 철수할까 두려움 커총 잘 못쏘면서 기적 바라며 앞장서 지켜독립 70년만에 피·땀으로 ‘눈부신 성장’우리 목표는 ‘평화’ 주변국 모두와 협력을비상사태 대비 군사력 강화·군 신뢰 필요이제 우리는 물러설 곳이 없다. 우리가 밀리면 미군도 철수한다. 그러면 대한민국은 끝이다. 내가 앞장서겠다. 내가 두려움에 밀려 후퇴하면 너희가 나를 쏴라.-‘내가 물러서면 나를 쏴라. 1128일의 기억’ 중“내가 물러서면 나를 쏴라.”1950년 8월, 다부동에서 백선엽 장군이 후퇴하는 부대원들을 불러 모아 말했다.“지금까지 정말 잘 싸웠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물러설 곳이 없다. 여기서 밀린다면 우리는 바다에 빠져야 한다. 저 아래에 미군들이 있다. 우리가 밀리면 저들도 철수한다. 그러면 대한민국은 끝이다. 내가 앞장서겠다. 내가 두려움에 밀려 후퇴하면 너희가 나를 쏴라. 나를 믿고 앞으로 나가서 싸우자.”(‘내가 물러서면 나를 쏴라. 1128일의 기억’ 중)6·25 전쟁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 백선엽 장군이 창간 70년을 맞은 경인일보사를 방문했다.올해 95세의 노 장군은 지팡이를 의지했지만 목소리 만큼은 젊은이들 못지않게 혈기가 넘쳤다. 백선엽 장군은 직접 쓴 ‘내가 물러서면 나를 쏴라. 1128일의 기억’이라는 책을 전달하면서 70여 년의 세월을 회고했다.-벌써 광복 70주년이 됐다. 70여년 전, 나라를 찾은 기쁨도 잠시, 우리는 동족상잔의 잔혹한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렸다. 당시를 회고해 달라.“1945년 독립은 목숨 바쳐 일제에 항거한 선조들의 피와 2차 세계대전에서 연합군의 승리로 얻은 소중한 희생의 결과였다.하지만 불행하게도 한반도 중심의 38선을 두고 이북은 소련이, 이남은 미국이 들어왔다. 우리 남쪽은 미군이 주둔, 미 군정이 실시 됐고, 북쪽은 소련을 등에 업은 김일성이 점령한 상태였다. 전쟁의 서막은 이때부터 시작됐다.당시 남·북의 군사력은 엄청난 차이를 보였다. 이북에는 전차 300대, 대포 1천200문, 폭격기 200대 등 소련의 군사원조로 20만 대군을 양성했지만 이남에는 9만명의 국방경비대와 대포 100여 문이 전부였다.1950년 6월 25일, 치밀하게 준비된 김일성의 기습남침에 우리는 속수무책이었다. 하지만 3년을 싸웠다. 문제는 중공군이었다. 대규모로 밀고 들어오는 중공군의 남하에 우리 강산은 시산혈하(屍山血河)를 이뤘다. 유엔감시하에 이뤄진 선거로 이승만 정부가 수립된 지 불과 2년 만에 일어난 전쟁에 온 국민의 삶은 피폐해 졌다. 아니, 하루를 산다는 것조차 감사해야 할 정도였다. 하루에도 수백, 수천 명이 죽어갔다.얼마나 살기가 힘들었는지를 말하자면 소나무 껍질이 하나도 없었다. 먹거리가 없어 주민들이 소나무 껍질을 벗겨 물에 담가 뒀다가 식량으로 이용했기 때문이다. 모두들 정말 빈곤했다.서로에게 상처만 남긴 동족상잔의 비극이 끝난 뒤 우리 국민들은 정말 온몸을 바쳐 열심히 일했다. 국민소득 2만 달러의 시대는 이들의 피와 땀의 결과물이다. 전쟁 당시 우리는 16개국의 도움을 받았지만 이제는 우리가 다른 나라를 돕는다. 독립 쟁취 70년 만에 이룬 눈부신 성장이다.”-전투마다 죽을 고비를 넘겼을 텐데, 그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전투가 있다면….“1950년 8월, 대구방어의 핵심인 다부동 전투를 잊을 수 없다. 한적한 촌락인 다부동은 민가가 30호도 채 되지 않는 곳이었다. 하지만 다부동은 상주와 안동에서 대구로 향하는 교통의 요지로 방어선이 뚫리면 대구 전체가 백척간두(百尺竿頭)의 위기에 봉착하게 되는 탓에 목숨을 걸지 않을 수 없었다. 대구를 내주면 제주로 향해야 하는데, ‘결국 미군이 대한민국을 버리지 않을까’라는 두려움이 컸던 것 같다. 반드시 다부동을 지켜야 하는 이유였다.다부동으로 향하는 길, 운전병이 포탄 파편에 맞는 바람에 위생병에게 보내고 전장까지 뛰고 또 뛰어가며 기도를 했다. ‘이번의 위기에서 구해주신다면 앞으로 열심히 믿겠습니다’라는 간절한 기도였다.전투에서는 선봉에서 적들을 맞아 싸웠다. 솔직히 말해 총도 잘 쏘지 못하는 장군이지만 ‘기적’을 바랐다. 누군가 “사단장님 이제 그만 나오세요. 우리가 앞장서겠습니다”라며 나 대신 뛰어 나가기 전까지 사지(死地)를 누볐던 전장이 바로 다부동이다.지휘관이 선봉에 선 것은 바보짓이었다. 전쟁에서는 이등병 소총수부터 참모총장까지 자기 자리가 있다. 이중 사단장은 전략의 단위에 있는 사람이다. 더 넓은 측면에서 전장을 다뤄야 할 장군이 총을 뽑아 들고 돌격을 감행했으니….다부동의 승리 후 나는 수원을 통해 평양으로, 압록강으로 진격했다.”-젊은이들의 안보의식이 점점 흐려지고 있다. 전쟁 당시 청년들은 어떻게 나라를 지켰나.“지금의 대한민국은 전쟁 당시 군적(軍籍)도 없이 사라진 이 땅의 수많은 젊은이들의 희생이 있었기에 존재할 수 있었다. 그 중에서도 지금으로 치면 중·고등학생 정도의 청년들이 기초적인 군사훈련만 받고 전장에 투입, 구국의 정신으로 적과 맞서 싸웠다. 자세한 내용은 책에 나온 내용으로 갈음하고자 한다.”‘아주 짧은 훈련을 받은 뒤 바로 전선으로 올라갔다. 참혹한 전쟁의 현장을 보면서 무척이나 겁이 났을 것이다. 분대장의 지휘를 받아 참호로 들어가 공격을 준비하다가 소변을 보러 분대장이 참호 밖으로 나가면 어찌할 줄을 몰라서 따라 나가던 어린 병사들이었다.’ (내가 물러서면 나를 쏴라. 1128일의 기억 중)‘어머니! 나는 사람을 죽였습니다. 돌담 하나를 사이에 두고 10여 명은 될 것입니다. 적은 다리가 떨어져 나가고, 팔이 떨어져 나갔습니다.어머니! 전쟁은 왜 해야 하나요?어제 내복을 빨아 입었습니다. 물내 나는 청결한 내복을 입으면서 저는 왜 수의(壽衣)를 생각해냈는지 모릅니다. 어쩌면 제가 오늘 죽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저는 살아가겠습니다. 꼭 살아서 가겠습니다.어머니! 상추쌈이 먹고 싶습니다. 찬 옹달샘에서 이가 시리도록 차가운 냉수를 한없이 들이키고 싶습니다.아! 놈들이 다가오고 있습니다.다시 또 쓰겠습니다. 어머니 안녕! 안녕! 아, 안녕은 아닙니다. 다시 쓸 테니까요. 그럼….’ (다부동 구국전투사 중 이우근(李佑根) 학도병의 부치지 못한 편지 일부)-정말 힘들게 지켜온 대한민국이다. 하지만 우리를 둘러싼 동북아 5국 사이에서 또 어떤 사태가 발생할지 모른다. 정부는 물론 국민들이 앞으로 어떻게 해나가야 하나.“동아시아 극동에는 한반도가 중심에 있다. 동쪽에는 일본이, 북쪽은 연해주와 시베리아의 러시아, 서쪽에는 거대한 인구와 경제력을 갖춘 중국이, 우리의 우방국인 미국은 이들의 한 가운데에 있으며 대한민국은 북한과 마주하고 있다.누구와 어떻게 합종연횡(合從連衡)을 할지가 중요한 게 아니다. 우리가 추구하는 최종 목표는 평화 아닌가. 오로지 평화를 위해 이들과 협력해야 한다.이와 함께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 강력한 군사력도 갖춰야 한다. 우리는 60만 대군을 50년 이상 유지하고 있다. 이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모든 국민들의 노력에 의해 이뤄낸 결과다. 동시에 군에 대한 무한한 신뢰와 믿음을 줘야 대한민국 국군이 선진강군으로 발돋움할 수 있을 것이다.”■ 백선엽 장군 약력▲ 1920년 11월 23일 평안남도 강서군 덕흥리 출생▲ 1940년 평양사범학교 졸업 ▲ 1942년 봉천군관학교 졸업▲ 1952년 최연소 육군 참모총장▲ 1960~1965년 중화민국, 프랑스, 캐나다 대사▲ 1969년 제19대 교통부 장관▲ 1971~1980년 충주, 호남 비료와 한국종합화학 사장▲ 2000년 자유수호의 상▲ 2003년 한미우호상▲ 2006년~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자문위원장 ▲ 2010년~ 한국전쟁 60주년 기념사업위원회 위원장▲ 2013년 주한미8군 명예사령관/대담 = 박승용 사회부장·정리 = 강영훈기자▲ 올해 95세의 노장 백선엽 장군이 경인일보와의 인터뷰에서 6·25전쟁 당시의 기억을 회상하며 말을 이어가고 있다. /김종택기자▲ 올해 95세의 노장 백선엽 장군이 경인일보와의 인터뷰에서 6·25전쟁 당시의 기억을 회상하며 말을 이어가고 있다. /김종택기자▲ 올해 95세의 노장 백선엽 장군이 경인일보와의 인터뷰에서 6·25전쟁 당시의 기억을 회상하며 말을 이어가고 있다. /김종택기자

2015-05-05 박승용·강영훈

[원로, 광복 70년을 말하다·1]목요상 대한민국 헌정회장

과거 日정권 2차대전 자성과 '대조' 북한 김정은 통일에 신념있는지 의문 정치권 리더십 부재… 양보·대화없어 국가·민족위한 '통큰타협' 풍토 되찾길 대통령 '계파지양' 與野와 자주 협의를 대한민국 부정·국가기강 문란 안돼'국익차원'서 진보·보수 이념 전개해야경인일보는 새해 광복 70년을 맞아 연중 기획 인터뷰 '원로, 광복 70년을 말하다'를 매월 연재합니다. 을미 신년은 한민족이 일제 치하에서 벗어나 광복을 맞은지 70년이 됩니다. 또한 미소 군정으로 한반도가 분단된 지도 70년 되는 해입니다. 근대가 일제에 유린당했다면 현대는 외세와 이념과 전쟁으로 분단의 고통에 시달려왔습니다. 이처럼 굴곡진 광복70년을 온 몸으로 겪어낸 경기, 인천지역 각계 원로들에게 우리가 걸어온 70년을 묻고, 우리가 걸어가야 할 미래를 탐문함으로써 시대를 관통하는 혜안을 얻고자 합니다. 올해 창간 70주년을 맞는 광복둥이 경인일보가 기획한 광복70년 맞이 원로와의 대담, 많이 기대해주십시오. ┃편집자 주목요상(80) 대한민국 헌정회장은 광복 70주년을 맞은 새해, 제일 먼저 일본 '아베 정권'의 역사 왜곡과 엔저 정책에 대해 목소리를 높였다. 새해 벽두에 우리의 수출 길을 막고 있는 엔저 정책의 근간인 '아베노믹스'가 못내 거슬렸던 모양이다. 그는 "우리 정부는 국민들의 마음을 사지 못하고 있고, 정치권은 리더십 부재로 대화와 타협을 끌어 내지 못하고 있다"고 일갈하면서 여야 정치권에 통큰 정치를 주문했다. 지난 2일 여의도 헌정회 사무실에서 연중기획 '광복70, 원로에게 듣다' 첫 대담에서, 대한민국의 대표적 원로정치인 중 한명인 그를 만나 갈수록 심화되고 있는 우리 사회의 양극화 현상과 지역·세대·이념 갈등을 짚어 보고 진정한 화해와 협력의 시대로 가기 위한 제언을 들었다. 정치원로 몇 분이 지켜보는 가운데 서울 정치팀 정의종 부장이 1시간여 동안 대담했다.- 광복 70주년이 주는 의미와 되새겨야 할 점은 무엇인가. "우리나라가 일본 식민지를 거쳐 전 세계에서 가장 빨리 경제 선진화 문턱에 들어선 나라이지만 한일 관계에선 아직도 역사를 부정하고 있는 일본과 난제에 엉키면서 국민들이 걱정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다시는 다른 나라에 침탈당하거나 위해를 당하는 일이 없도록 국민 모두가 자각하고 국가와 민족을 위해 헌신하는 새로운 토양을 만들어야 한다." - 우리는 조국을 되찾은 광복이지만, 일본은 패전 70주년이어서 한일 관계가 더 복잡하게 꼬일 수도 있지 않은가. "과거 일본 정권은 자기들이 2차대전을 일으켜 여러나라를 침탈하고 괴롭혔던 사실을 스스로 반성했는데 아베정권이 들어선 후에는 무라야마 담화에 대한 수정과 독도영토문제, 위안부 문제 등 역사를 왜곡하며 우리 국민을 자극하면서 관계가 더 비뚤어지고 있다. '아베노믹스'라는 게 경제적으로 긍정적인 평가를 받지 못하는데도 엔저 정책을 계속 밀어붙이는 걸 보면 자기들만 살기위해 주변 나라는 어떤 피해를 입어도 좋다는 식으로 해석된다. 이제 우리 당국도 금리인하라든지, 원화와 엔화의 환율 조절 문제라든지를 신중하게 검토해 국제경쟁력에서 밀리지 않게 대응 전략을 내놓아야 할 것이다." - 박근혜 대통령이 신년메시지를 통해 분단의 역사를 마감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김정은 국방위원회 제 1위원장도 남북관계의 대전환을 천명한바 있는데 어떤 전략이 필요한가."박 대통령이 지난해 신년에 '통일은 대박'이라며 정부 차원에서 통일준비위원회를 구성했는데, 그 걸 긍정적으로 수용하지 않고 원색으로 비난하고 폭언하는 행태를 보면서 과연 김정은정권이 통일에 대한 신념이 있는건지 의문이 들고, 오히려 대외적으로 자기 위치나 입장을 호도하기 위한 술책으로 제기한 게 아닌가 생각이든다. 진정으로 화해와 통일을 원한다면 지금 전 세계가 문제시 하고 있는 핵 문제를 억제하고, 막말식 대남 비방과 선전·선동을 중단해야 한다. 반면 박 대통령이 남북 합의를 통해 DMZ 세계평화공원 조성을 제안한 것은 첫 단계 과제로 아주 적절했고, 여기에 북한도 적절하게 응해서 DMZ 구역에 상호 자유로운 왕래와 통신·서신을 주고 받을 수 있는 분위기를 조성해 나가야 할 것이다." - 광복이후 한국 정치발전의 터닝 포인트가 된 사례들이 많은데 지금 정치권에서 본받을 교훈이 있다면. "잘 아시다시피 과거에는 신익희, 조병욱, 장면 선생 등 야당에 거물이 많았다. 또 윤보선 전 대통령, 이승만 전대통령도 이 나라 건국과 정치발전에 기여한 지도자들이다. 언필칭 3김 시대에도 지금처럼 대립이 있으면 정책적으로 서로 양보하면서 원만히 이끌어 나갔다. 지금은 그런 정치적 리더가 없다 보니 통큰 대화와 타협이 이뤄지지 않아 아쉽게 생각한다. 과거 훌륭한 정치 지도자를 본받아 국가와 민족, 국익을 생각하면서 통 크게 타협하는 정치 풍토를 만들어 나갔으면 한다." - 그런 측면에서 합리적 공존 방안은 없을까. "민주적 기본질서라고 해서 정당 정치의 자유가 너무 보장되면서 국가 이익에 반하는 행동도 정당화 되는 시대 흐름이 되고 있는데, 강력한 공권력 확립이랄까, 정치판의 정화라고 할까 그런게 이뤄져 '되는건 되고, 안되는 건 안되는' 기본 원칙을 세웠으면 좋겠다."- 광복 70주년을 맞았지만 우리 사회는 여전히 양극화와 진영의 논리로 지역과 이념에 이어 세대간 갈등까지 증폭되고 있다."정말 안타까운 일이다. 지역간 갈등은 과거로 거슬러 박정희·김대중 두 양반이 대권을 놓고 다투면서 영호남의 지역감정이 유발됐고, 덧붙여 경제가 어렵다보니 젊은층들이 기성세대들에게 '너희들만 잘먹고 잘 사느냐'는 반발 아닌 반감이 생긴 거다. 여기에 종북좌파까지 나왔는데, 어느 나라라도 진보가 있으면 보수가 있고, 우파가 있으면 좌파가 있기 마련이지만 국익차원에서 서로 이념을 전개해야지 우리나라는 부정하고 다른나라가 좋다는 식으로 진보를 내세워서는 안된다." - 새해엔 개헌문제가 정치변화의 주체로 떠오를 것 같은데. "사실 개헌에 대한 나의 입장은 찬성이다. 단임 5년 동안 대통령 한마디가 무소불위가 되고, 어떤 잘못을 저질러도 면책이 되는 그런 정부체제가 되다 보니 국민들도 사소한 문제가 터지더라도 전부 대통령에게 책임을 덮어 씌우고 비난의 화살을 돌리게 되는데, 대통령 임기를 4년으로 하고 다시 한번 중임 할 수 있는 헌법으로 고쳐야 한다. 대통령 권한도 국무총리와 배분해 적당한 선에서 조정해야 대통령이 독선한다는 비판이 사라질 것이다. 덧붙여 우리가 남북 여건 때문에 단임제 체제인데 궁극적으로 상원제로 가야한다. 지난 번 세월호 사건 때 5개월동안 단 한건의 안건도 국회에서 처리 못했는데 만약 그 때 상원이 존재했다면 조정할 수 있었을 것이다. 다만 올해 박근혜정부 3년차로 접어들면서 여러 장애요인으로 시기적으로 기회를 놓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정윤회 문건 사태는 어떻게 보는가."이번 정윤회 사건을 보면서 도대체 이 나라가 어디로 굴러갈지 (한심한) 생각이 든다. 어떻게 청와대 근무자가 문서를 들고 나올 수 있고, 그 문서를 유포할 수 있는가. 또 청와대밖에서 어떻게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가. 몇 사람의 장난으로 국민 전체가 혼란스럽게 되고 국정운영이 마비될 정도가 됐으니 국가 기강이 무너진 것이다. 국민들이 속시원하다고 할 정도로 쾌도난마식으로 소상히 밝혀 국민에게 공개하고 해당자는 가차없이 엄벌해 나라 기강을 바로 잡아야 한다." - 박 대통령의 소통에 문제가 있다는 지적이 많은데."(근심어린 표정으로) 대통령이 됐으면 친박계 대통령이 아니다. 대통령은 국민전체를 대표하는 대통령이지, 거기에 친박이 어디있고, 친이가 어디 있나. 여당, 야당도 가르면 안되는 것이다. 그런데 최근 어떤 이유에서인지 친박계 7인회동이 있었다는 언론 보도보면서 엄청난 비판이 쏟아지고 있다. 그게 바로 소통 부재의 원인이 되는 것이다. 꼭 여당 쪽의 얘기를 들어야 한다면 그 자리에 당 대표나 원내대표도 같이 합석시켜야지 그런 사람도 아닌 사람만 불러가지고 무슨 말을 주고 받았는지 잘 모르겠지만 그래가지고 국가난제를 풀어가는 데 무슨 도움이 되겠는가. 앞으로 그런 모임이나 계파간의 자리 마련은 지양하고, 대신에 여야 대표와 자주 만나고 정부 정당간의 당정회의를 통해 여러가지 문제를 풀어가는 협의 과정을 만들어야 한다." - 정부가 공무원연금법 개정을 4월 국회에서 처리한다고 하는데. "솔직한 얘기로 주던 돈을 적게 주겠다고 하는데 '그래 좋다'고 응하고 나설 사람이 어디 있겠나. 그럼 왜 그렇게 할 수 밖에 없는지 그 이유를 사전에 (공무원들에게)설명하고 이해 시키고 납득시켜야 하는데 나는 그런 과정을 거쳤다는 얘기를 들어본 적이 없다. 그러나 고치긴 고쳐야 한다. 공무원들도 시간이 지날수록 자연적으로 고갈되는 현실을 스스로 분석해 왜 개정하지 않으면 안되는지 고민하고, 정부도 이제 원망소리가 나오지 않게 국민들을 달래 주고 위로해주는 위무의 정치가 필요한 시기라고 생각한다." - 결국 정치의 문제인 것 같다. 마지막으로 정치권에 조언이 있다면."무엇보다 민주주의 기본 원리인 다수결 원칙이 국회를 지배해야 하는데, 이걸 부정하고 국회 선진화법이라는 얄궂은 법을 만들어 사실상 식물국회가 되고 있다. 여야간에 대국적 견지에서 서로 합의를 거쳐 선진화법을 고치고 대화와 타협을 통해 국정문제를 풀어가는 의연한 모습을 보여 주기 바란다. 야당도 오는 2월8일 전당대회를 통해 국민이 보기에 참 민주적으로 잘 처리하고 있다, 그래서 야당에 희망이 있다는 인식을 국민에게 심어주어야 희망이 있는 거다. 지금처럼 '친노'·'비노'로 서로 계파 싸움만 하면 국민들이 등을 돌릴 것이다. 여당도 옹졸하게 친박·친이 싸움으로 슬쩍슬쩍 모이다 보면 국민들에게 좋은 평가를 받기 어려울 것이다. 잘 해주길 기대한다."■ 목요상 헌정회장 약력 ▲ 1935년 경기 양주 출생 ▲ 서울사대부고·서울대 법대 졸업▲ 1961년 고시사법과 합격후 대구지법 판사, 서울 고법 판사 ▲ 1973년 서울고법에서 '오적시' '다리지' 양심판결, 판사 자격 박탈 후 '하방' ▲ 민주한국당 원내부총무, 대변인 ▲ 신한국당(새누리당 전신) 원내총무 ▲ 국회 법제사법위위원장 ▲ 한나라당(새누리당 전신) 정책위의장 ▲ 11, 12, 15, 16대 국회의원▲ 대한민국헌정회 회장(현)/글 = 정의종기자·사진 = 하태황기자▲ 목요상 대한민국 헌정회장이 "광복 70주년을 맞아 그 의미를 되새기고 국가와 민족을 위해 헌신하는 새로운 토양을 만들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2015-01-05 정의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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