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준혁의 역사산책

 

[김준혁의 역사산책]다산의 지조(志操)

다산 정약용 선생이 강진으로 유배를 간지 몇 년이 지난 뒤 아들에게서 편지가 왔다. 아버지 자신과 함께 가족을 위해 조정의 집권 세력들에게 고개를 숙이면 중앙정계에 복위시켜 주겠다는 내용이었다. 그 편지를 받아든 다산은 아들에게 답신을 썼다. 그리하는 것이 올바른 것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힘들지만 자존심을 지키자는 간단하면서도 단호한 내용이었다.다산은 천하에 두 가지 기준이 있는데 그 하나는 옳고 그름의 기준이요, 또 하나는 이롭고 해로움의 기준이라고 했다. 그리고 이 두 가지의 기준에 네 종류의 등급이 생긴다고 하였다. 옳은 것을 지켜서 이익을 얻는 것이 가장 높은 등급이고, 그 아래가 옳은 것을 지켜서 해를 받는 것이며, 그다음으로는 나쁜 것을 좇아서 이익을 얻는 것이요, 가장 낮은 것은 나쁜 것을 좇아서 해를 보는 것이라 하였다. 참으로 대학자다운 식견이다.옳은 일을 해서 이익을 얻으면 그 얼마나 좋겠느냐마는 옳은 일을 하다 해를 당해도 좋다 생각한 것이다. 국가를 위해 올바른 이야기를 하다 유배를 가는 해를 당하더라도 마땅히 선비가 해야 할 일이라고 다산은 생각한 것이다. 다만 나쁜 일을 하며 이익을 얻는 것을 절대 받아들일 수 없다고 했다.다산은 자식들에게 자신을 유배 보낸 자들에게 고개를 숙이고 그들과 한통속이 되어 살아가는 것은 나쁜 것을 좇아 이익을 얻는 것이고, 마침내 이익도 얻지 못하고 해만 입는 것이라 하였다. 이는 해를 입지 않기 위해서가 아니라 정의로움이 무엇이고 자신을 지키는 일이 무엇인지를 이야기하는 것이다.다산의 편지 말미에 두 가지를 이야기했다. 그래서 너희들은 어떤 사람이 되고 싶으냐? 그리고 또 하나는 폐족(廢族)이지만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공부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다산의 편지를 읽은 두 아들은 자신들의 잘못을 뉘우치고 폐족으로 전락한 가문의 자식이지만 백성들로부터 존경받는 사람이 되기 위한 실천적 공부를 시작했다. 그래서 아버지 다산 버금가는 위대한 학자로 성장할 수 있었다.최근 박근혜 대통령 탄핵국면과 함께 시작된 조기 대통령선거로 정치적 이합집산이 나타나고 있다. 자신의 지조를 버리고 이익이 되는 곳으로 자신을 팔고 있다. 그러나 이는 다산의 말처럼 올바른 것도 아니고 이익이 되는 것도 아니다.아무리 어려운 처지에 있어도 양심과 영혼을 팔아서는 안 된다. 막대한 자본으로 유혹하는 일들이 엄청나게 많다. 이 정도면 환경과 생명에 큰 지장이 생기지 않을 거라며 당근으로 유혹하는 사례들이 날로 늘어날 것이다. 지금 세상은 그렇게 변했다. 영혼을 잃은 전문가와 관료들이 거대한 자본과 합작하여 자연을 파괴하고 만백성이 숨을 쉬지 못하게 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때일수록 우리는 다산의 의리와 자존심을 배워야 한다. 모든 사람이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세상, 비루한 모습으로 살지 않는 세상, 그것이 진정 다산이 꿈꾸었던 한 세상이 아닐까 한다. 다산이 아들에게 보낸 편지의 마지막 구절이 무섭다.'명예롭게 살다 빛나게 죽고자 한다.'/김준혁 한신대 정조교양대학 교수김준혁 한신대 정조교양대학 교수

2017-02-05 김준혁

[김준혁의 역사산책]민수(民水), 만천(萬川), 명월(明月)

군주민수(君舟民水)! 지난 2016년에 교수신문이 뽑은 올해의 사자성어다. 해석을 하자면 아주 간단하다. 임금은 배고, 백성은 물이라는 것이다. 즉 임금을 백성이 세우지만 임금이 잘못하면 백성들이 임금을 끌어내릴 수 있다는 이야기다. 아마도 작년 후반기 박근혜 대통령과 최순실의 국정농단으로 충격을 받은 국민들이 촛불을 들어 대통령이 탄핵된 것을 말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군주민수를 정확히 이해한 국왕은 동양의 역사에서 수도 없이 있겠지만 그중 대표적인 인물이 조선의 22대 국왕 정조(正祖)가 아닐까 한다. 정조는 항상 백성을 물로 보고 임금을 배로 보았다. 자신의 싱크탱크인 규장각 각신들과의 대화에서도 국왕과 백성의 관계를 늘 이야기하며 국왕 스스로가 경계를 하였다. 정조는 군주민수와 연계하여 독특한 자신의 철학을 내놓고 자신이 국왕된 지 22년째인 1798년에 이를 자호(自號)로 삼기도 하였다. 그것이 바로 '만천명월주인옹(萬川明月主人翁)'이다.'만천(萬川)'이란 한자 그대로 일 만개의 시내를 의미하는 것이다. 여기서 시내란 작은 시내뿐만이 아니라 조선의 8도에 있는 모든 물길을 의미하는 것이다. 한강과 대동강 등 서해로 흘러가는 큰 강과 8도 곳곳에 있는 크고 작은 천을 말한다. 이는 곧 민수(民水), 즉 백성을 말하는 것이다. 명월(明月)은 말 그대로 하늘에 떠 있는 밝은 달을 의미하는 것이다. 밝은 달은 군주(君舟) 즉 국왕 그 자체를 의미하는 것이다. 결국 만천명월이란 우리 땅에 있는 수많은 천을 고루 비쳐주는 밝은 달을 의미하는 것이다. 정조는 이렇게 이야기한다. 하늘에 떠 있는 밝은 달이 어느 천은 작은 것이기에 작게 비춰주고, 어느 강은 큰 것이기에 더 많이 비춰 주어서는 안된다. 국왕이 힘 있고 돈 많은 사람에게 은혜를 많이 베풀어 주고, 힘없고 가진 것 없는 서민들에게는 적게 베풀어주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이들에게 공평하게 베풀어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요즘 시대는 명월이 만천을 고루 비춰주지 않고 힘있고 권세있는 소수 세력들에게 더 많이 비춰주는 것이 아닌가 한다. 그랬기 때문에 자신들이 철저하게 무시하던 백성들에 의해 배가 뒤집혀 져 탄핵을 당한 것이다.정조는 '만천명월'의 의미를 이 정도로만 해석하지 않았다. 그는 크고 작은 천과 강물이 갖고 있는 힘을 정확히 알고 있었다. 바로 '군주민수'의 힘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정조는 '만천명월'의 진정한 의미를 이렇게 이야기한다."천이 흐르면 달도 흐른다. 천이 멈추면 달도 멈춘다. 천이 고요하면 달도 고요하다. 그러나 천이 소용돌이치면 달은 이지러진다." 즉 하늘에 있는 밝은 달이 흐르는 물과 함께 흘러 가는 데 그 물이 고요할 때는 같이 고요하여 평화로운데 천이 계곡을 만나거나 불규칙한 지형을 만나 소용돌이치면 달은 본래의 둥근 모습을 잃어버리고 모나거나 찌그러진 모습으로 제 모습을 잃게 된다는 것이다. 이는 곧 거센 물결로 배가 뒤집힌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결국 군주(君舟)와 명월(明月), 민수(民水)와 만천(萬川)은 같은 것이다.이제 새로운 한해 정유년이 시작된다. 새벽을 알리는 닭과 같이 정유년은 늘 새로운 시작을 하는 해이기도 하다. 만약 올해 봄에 조기 대선(大選)이 치러진다면 국가지도자가 되고자 하는 사람들은 백성의 존재가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를 깨닫고 그들에게 군림할 것이 아니라 그들을 위해 얼마나 힘써서 복무할 것인가를 고민하고 실천해야 할 것이다./김준혁 한신대 정조교양대학 교수김준혁 한신대 정조교양대학 교수

2017-01-01 김준혁

[김준혁의 역사산책]1894년의 승리와 패배

1894년 3월 조선에서는 최대의 이변이 일어났다. 농민군이 전주성을 점령한 것이다. 고종과 조정 관료들은 자신들이 저지른 학정을 생각하지 않고 오로지 백성들이 국왕과 조정의 위세에 대항하는 것을 막으려고 하였다. 그래서 초토사(招討使)로 홍계훈을 임명하고 당대 최고의 군대인 장위영을 파견하였다. 더불어 청나라로 하여금 군대를 보내 자신에게 항거하는 백성들을 죽여달라고 요청하였다. 고종의 이러한 술책에도 농민군은 전주성을 공격하는 홍계훈의 군대를 막아내었다. 도저히 전주성을 다시 빼앗기 어렵다고 판단한 고종은 전라감사로 김학진을 임명하고 그에게 전권을 주어 농민군과 협상하라고 하였다. 그 결과 집강소를 설치하고 청상과부의 재가를 허용하며, 탐관오리를 처벌하는 등의 폐정개혁안 12조의 전주화약(全州和約)이 성립되었다. 농민군의 승리였다. 이 성과로 전라도 일대에서 백성들이 직접 지역의 행정을 책임질 집강을 선발하기 시작하였다. 전 세계 민주주의 역사에서 혁명적인 일이었다. 하지만 고종을 비롯한 조정의 관리들은 이를 용납하려 들지 않았다. 백성들이 주인이 되는 나라를 그들은 용인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고종이 불러들인 청나라 군대로 인하여 일본 군대도 천진조약을 근거로 조선에 진주하였다. 청나라와 일본의 군대는 조선을 도우려고 온 것이 아니라 조선을 병합하려는 의도였기에 이 두 나라의 군대는 조선 땅 안에서 조선의 지배권을 갖기 위한 전쟁을 시작하였고, 마침내 일본의 승리로 끝나고 말았다. 조선의 지배권을 갖게 된 일본은 이제 조선의 관군을 동원하여 외세를 배격하여 자주 국가를 수립하려는 농민군 척결하고자 하였다.이러한 일본과 조정의 의도를 알고 있던 농민군의 지도자 전봉준은 서울로 진격해 외세와 기득권 세력을 물리치고 조선을 구하자고 하였다. 하지만 그때 갑오농민전쟁의 3대 지도자는 길을 달리 하기 시작했다. 온건론의 손화중과 급진파의 김개남, 그리고 중도파의 전봉준이 백성의 나라를 만들겠다는 대의(大義)는 같이했으나 실행방식을 달리했다. 백성들에 의한 완전한 혁명을 추진하여 왕조체제를 타파하고자 하는 김개남과 두 사람의 의견이 달랐고, 손화중과 전봉준 역시 양반 출신과 평민 출신의 신분적 한계로 인하여 생각이 달랐다. 그래서 김개남은 남원으로, 손화중은 나주로 가고 말았다. 이후 전봉준의 공주성 점령에 김개남은 참여하지 않고 청주성을 단독으로 공격하다 실패하였다. 하나로 힘을 모아 전주성을 점령했던 농민군의 힘은 세 지도자의 분열로 쪼개졌고, 결국 한양으로 진격하던 중 공주 우금치에서 몇 만명의 농민군이 일본군의 기관총에 목숨을 잃어야 했다. 그리고 세 지도자 역시 모두 체포되어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고 진정한 백성의 나라를 만들고자 했던 농민군들의 꿈은 사라지고 외세의 총칼 아래 식민지 국가로 전락하고 말았다.지금 박근혜 대통령 탄핵에 온 국민이 지지하고 있다. 광화문과 서울시청 광장에 수백만의 촛불이 켜지고 있다. 100여 년전 갑오농민전쟁의 죽창이 오늘날 촛불로 바뀌었다. 그런데 두렵다. 100여년 전 세 지도자의 분열로 혁명이 실패하였듯이 지금 3야당이 국민들의 촛불을 외면하고 자신들의 정파적 이익만을 앞세우려고 하는 것이 아닌지 불안하다. 그러면 우린 100년 전의 실패를 또다시 재현하며 향후 몇 십년간 민주주의가 위협받을 수도 있을 것이다. 지금 야당과 새누리당 비박 국회의원들은 보다 큰 대의를 위해 자신의 이익을 내려놓는 진심이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오늘의 춧불이 죽창이 되어 그들에게 다가갈 것이다. 국민들의 촛불이 두렵지 않은가!/김준혁 한신대 정조교양대학 교수김준혁 한신대 정조교양대학 교수

2016-12-04 김준혁

[김준혁의 역사산책]다산과 박대통령의 숫자 18의 차이

다산 정약용에겐 18이란 특별한 숫자가 따라다닌다. 국왕 정조와 함께 조선의 개혁을 위해 노력했던 시간이 18년이었고, 정조의 죽음 이후 유배를 갔던 시간이 18년이었다. 그리고 유배지 강진에서 풀려나 고향으로 돌아와 살다가 죽을 때까지의 시간이 18년이었다. 그래서 다산에게 18이란 숫자는 특별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다산 정약용만큼이나 18이란 숫자가 따라다니는 인물이 바로 박근혜 대통령이다. 박근혜 대통령에게 18이란 숫자는 사실 그녀의 부친인 박정희 전대통령으로부터 시작한다. 박정희 전대통령은 18년 집권하다가 부하인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의 총에 맞아 죽었다. 박근혜 대통령은 아버지 박정희 전 대통령이 죽은 이후 18년 동안 야인생활을 하다가 1998년 처음으로 국회의원이 되었다. 그리고 그녀는 대한민국의 18대 대통령이 되었다. 18이란 숫자가 그녀에게 특별한 의미로 다가온 것이다. 그런데 박근혜 대통령에게 18이란 숫자가 다시 인생에 다가왔다. 국회의원으로 정치를 시작한 지 18년이 되는 2016년인 올해 그녀의 소울메이트로 이야기되는 최순실로 인하여 인생의 최고 위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그래서 그녀는 지난 금요일 국민들에게 최순실 파동으로 인한 자신의 잘못을 사과하게 되었다. 이러한 여파로 문고리 3인방이라 불리는 그녀의 최측근들인 정호성 등 비서관 3명이 18년 만에 박근혜 대통령을 떠나게 되었다. 그렇다면 다산 정약용의 18과 박근혜 대통령의 18이란 숫자는 같은 의미일까? 동양 유학의 최고 저서라고 평가받는 것이 공자가 마지막에 완성한 '주역(周易)'이다. 사서삼경(四書三經) 중 최고의 경전으로 평가받는 주역은 인간이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알려준다. 주역은 64괘로 구성되어 있어 그 내용마다 의미와 쓰임이 다르다. 64괘중 18번째 괘는 '산풍고(山風蠱)'란 괘다. 위에 산이 있고 아래에 바람이 있어 좀이 먹어 썩어들어간다는 것이다. 시간이 흐를수록 반듯해지고 좋아지는 것이 아니라 썩어서 부패하여 망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이렇게 썩는 것일까? 산(山)은 간방(1시 방향)으로 우리 조선을 말하는 것이고, 풍(風)은 손방(5시 방향)으로 일본을 말하는 것인데 우리나라 산속에 일본의 바람이 들어 단풍이 떨어지듯 나라를 병들게 한다는 것이다. 박근혜 대통령이 집권한 이후 최순실로 인한 국정 혼란이 있었던 것은 어쩌면 일본의 바람이 가득했기 때문일 수도 있다. 박근혜 정부가 친일을 미화하고 일본과 말도 안되는 위안부 협상을 추진하였으며, 친일의 역사를 가르치지 않게 하는 국정교과서를 만들고, 일본이 평화헌법을 파괴하고 2차 세계대전 이전과 같은 군사 대국화로 발전하는 것을 인정한 것이다. 일본의 바람이 한반도를 뒤덮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 강산과 사회에 온통 좀이 먹고 썩어들어 간 것이다.주역에는 산풍고이지만 썩어들어가게 하지 않는 방법을 알려주고 있다. 그것은 군주가 백성을 진작시키고 덕을 기르는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면 썩지 않고 오히려 길할 수 있다고 했다. 다산은 비록 군주는 아니었지만 덕을 기르는데 힘써서 18이란 숫자의 운명을 백성을 위한 개혁의 숫자로 만들었고, 박근혜 대통령은 덕을 기르지 못해 온 나라를 썩어들어가게 한 것이다. 그래서 국가지도자가 덕을 기르고 백성을 귀하게 여기는 것이 그 무엇보다 중요하다. 참으로 부끄러운 시절에 18이란 숫자를 다시 생각해 본다./김준혁 한신대 정조교양대학 교수김준혁 한신대 정조교양대학 교수

2016-11-07 김준혁

[김준혁의 역사산책]훈민정음과 정조(正祖)

1790년 4월 29일. 정조가 국방강화를 위해 추진했던 '무예보도통지'가 간행되었다. 조선의 무예를 비롯하여 중국과 일본의 무예를 24가지로 정리한 무예서가 간행된 것이다. 조선이 건국된 후 군영마다 익히는 무예가 달랐고, 무과 시험 역시 표준무예가 없었다. 그래서 정조는 국방 강화의 핵심으로 표준 무예 정립이 그 무엇보다도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정조는 1759년 아버지 사도세자가 18가지 무예를 정리하여 간행한 '무예신보'를 바탕으로 마상무예 6가지를 추가하여 새로운 무예서를 만들어냈다. 이러한 엄청난 성과를 더욱 빛나게 하는 것이 있었으니 그것은 다름 아닌 '무예도보통지'의 훈민정음 언해본을 동시에 간행한 것이다. 백성들이 어려운 한문으로 된 '무예도보통지'를 읽을 수 없기 때문에 백성들이 읽고 무예를 익히게 하도록 언해본을 간행하게 한 것이다.사실 조선왕조에서 백성들을 위한 다양한 서적의 언해본을 거의 간행하지 않았다. 세종이 훈민정음을 창제하였지만 세종이 죽고 난 후 훈민정음은 정음(正音)이 아닌 언문(諺文)으로 천대받기 시작하였다. 세종의 생각과 달리 한문만을 중요시 여기는 양반사대부 등 기득권 세력들에 의해 훈민정음은 철저히 외면받았다. 그들에 의해 훈민정음은 천한 글 혹은 여자들이 사용하는 글이라는 뜻을 가진 '언문'으로 격하되고 활용되지 못했다. 조정에서 훈민정음으로 책을 낸 것이 세종대 용비어천가와 월인천강지곡 그리고 세조 대에 석보상절 등이지 나머지 국왕 대에는 거의 없었다. 양반사대부들이 읽는 경서를 훈민정음으로 번역하거나 아니면 국가의 정책과 법률을 훈민정음으로 번역하여 백성들이 읽고 생각할 수 있게 하는 일도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이와 같이 훈민정음이 천대받던 시절에 국왕 정조는 전혀 다른 생각을 하였다. 백성들이 읽고 쓸 수 있어야 국가가 올바르게 발전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정조는 즉위 후 가난으로 버려진 아이들과 전염병으로 부모가 죽어 고아가 된 아이들을 기르기 위한 '자휼전칙'이란 법을 제정하였다. 이 법대로 하자면 해당 고을의 수령은 고아가 된 아이들이 10살이 될 때까지 반드시 책임지고 관아에서 생활비를 제공하여 살아갈 수 있게 해야 했다. 정조는 이 법의 존재를 백성들이 알아야 한다고 생각해서 이를 훈민정음으로 번역하여 간행하게 하였다. 정조는 그 후 죄를 지어 관아에서 심문을 받는 죄수들의 인권을 생각하여 가혹한 체벌을 금지하는 '흠휼전칙'이란 법을 제정하였다. 수령이나 관원들이 비록 죄인이라 하더라도 가혹한 매질과 고문을 가하지 못하게 하고, 감옥 안을 반드시 청결하게 유지할 수 있게 만든 법이었다. 이 역시 훈민정음으로 번역하여 반포하였다. 이처럼 정조는 국가의 법률과 정책 그리고 새로운 지식을 제공하는 서적들의 상당수를 훈민정음으로 번역하여 간행하였다. 새로 간행된 언해본 '무예도보통지'를 통해 무예에 자질이 있는 백성들이 표준 무예를 익힐 수 있었고, 무과에 당당히 합격하여 새로운 신진 무반이 될 수 있다. 백성들을 똑똑하게 만드니 자연스럽게 국방도 강화될 수 있었다. 기득권층들이 자신들만 문자를 알고 백성들은 무지하게 하려는 것이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일반적이다. 하지만 정조는 그리하지 않았다. 그래서 오늘날 위대한 군주로 평가받는 것이다. 한글날을 지내면서 오늘의 한반도에 있는 두 나라의 지도자와 정조를 생각해보았다. 그저 씁쓸할 따름이다./김준혁 한신대 정조교양대학 교수김준혁 한신대 정조교양대학 교수

2016-10-09 김준혁

[김준혁의 역사산책] 사헌부 장령 김호, 대한민국 부장검사 김형준

1687년(숙종 13) 3월 17일 사헌부의 정5품 지평으로 근무하는 김호(金灝)를 한 등급 승진시켜 정4품의 장령으로 임명하였다. 사헌부는 오늘날 검찰과 같은 기능을 하는 기관으로 '경국대전'에 시정(時政)을 논집(論執)하고, 백관을 규찰하고, 풍속을 바로잡고, 원억(寃抑)을 풀어주고, 유언비어 날조를 금하는 등의 일을 맡는다고 되어 있다. 이러한 직무에 따라 조정의 모든 관리의 비위 사실에 대한 탄핵감찰권과 일반범죄에 대한 검찰권을 아울러 행사할 수 있는 동시에 불복공소(不服控訴)에 대한 고등법원으로서의 구실까지 겸하는 등 국왕의 뜻을 받아 법률을 집행하는 법사(法司)로서의 기능을 갖고 있었다. 거기에 더해 인사(人事)와 법률개편의 동의 및 거부권 등 국정 전반에 걸쳐 힘이 미치지 않는 곳이 없었다. 이처럼 중요한 기관이었기 때문에 사헌부의 관원 임명은 자신의 소신을 굽히지 않는 강직한 젊은 엘리트들을 임명하였다. 특히 장령은 오늘날 검찰의 핵심인 대검찰청 부장검사에 해당하는 지위로 사헌부의 핵심 관료였다. 그래서 사헌부 장령이 조정의 회의에 참여하여 엄숙한 얼굴을 하고 있으면 대소신료들 모두가 떨었다고 할 정도였다.사헌부 장령으로 임명된 김호는 국왕 숙종의 국정운영에 문제가 있다고 판단하였다. 장희빈을 총애하다 못해 그녀의 오빠인 장희재와 그의 측근들이 권력의 중심이 되어 국정을 농단하는 것을 도저히 용서할 수 없었다. 그는 장령으로 임명된 지 7년 뒤인 1694년(숙종 20) 10월에 숙종에게 장희빈과 장희재 등의 권력농단에 대한 상소를 올렸고, 국왕 숙종의 무능한 국정 수행능력에 대해서도 날카로운 비판을 하였다. 이로써 조정의 대신들은 김호를 사헌부 관원중 최고의 인물로 평가하였다.이와 같은 목숨을 걸고 파격적인 상소를 올린 김호를 장희재와 가까운 이조판서 유상운이 아주 못마땅하게 생각하였다. 그래서 그를 외직의 수령으로 보내 조정에서 간쟁을 하지 못하게 하였다. 유상운은 인사권을 갖고 있는 자신의 지위를 이용하여 김호를 두 달 뒤인 12월에 전염병이 발생하여 수령으로 가면 죽을 수도 있는 울산군수로 발령을 냈다. 그러자 이건명을 비롯한 조정의 신료들이 반발을 하자 이건명을 함경도 병마절도사의 막료인 북평사로 발령을 내어 조정에 남아 있는 것을 원천적으로 막아버렸다. 상당수의 조정의 신료들도 함께 항의하였으나 유상운은 강행하고 말았다. 평소 몸이 병약했던 김호는 울산군수로 임명되어 온 정성을 다하다 3개월 만에 관아에서 사무를 보던중 44살의 나이에 죽고 말았다. 조선시대 가장 강직한 사헌부 장령이 멀고도 먼 바닷가의 고을에서 의도된 타살을 당한 것이다.최근 우리는 조선시대 사헌부와 같은 검찰의 검사들에 대한 뉴스를 자주 듣는다. 국민을 위해서 일하는 검사가 아닌 자신들의 지위를 이용하여 부정부패를 일삼는 검사들의 이야기이다. 특히 전 국회의장의 사위인 김형준 부장검사의 파렴치한 행위는 국민들에게 분노를 넘어 좌절을 주고 있다. 우리가 사헌부 장령인 김호 같은 강직한 검사를 바라지 않더라도 최소한의 양심을 가진 검사가 우리 검찰에 있기를 바랄 뿐이다. 이것이 희망이라면 대한민국은 희망이 없는 나라다./김준혁 한신대 정조교양대학 교수김준혁 한신대 정조교양대학 교수

2016-09-11 김준혁

[김준혁의 역사산책] 암행어사 정약용의 상소(上訴)

1794년(정조 18) 가을, 흉년으로 농사를 망쳐 백성들이 고통에 빠져있는데 경기도의 여러 수령들이 백성들을 돌보지 않고 부정부패를 하고 있다는 소문이 도성에 가득했다. 이처럼 어려운 상황이 되자 수령을 신뢰하지 못하는 백성들이 암행어사를 파견하여 탐관오리를 해결해달라고 조정에 간곡하게 요청하기 시작했다. 그 소식을 들은 정조는 11월 초에 젊은 관리들 15명을 은밀히 불러 모았다. 정조는 청렴결백한 젊은 관리로 평가받고 있는 그들을 경기도 전역에 암행어사로 보내기로 하였다. 정조는 이들에게 "수령의 잘잘못을 규찰하고 백성들의 괴로움을 살피는 것이 어사의 직임이다. 비단옷을 입는 것은 그 은총을 드러내는 것이요, 도끼를 지니는 것은 그 권위를 높이려는 것이다" 라며 철저한 조사를 지시하였다.이 청년 관리들중에 32살의 정약용도 포함되어 있었다. 정조가 정약용에게 조사하라고 지시한 지역은 경기 북부의 적성, 마전, 연천과 삭녕의 네 고을이었다. 정약용은 이곳에 가서 은밀히 조사를 시작하였다. 조사를 하던 정약용은 너무도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전직 삭녕군사 강명길과 전직 연천현감 김양직의 부정부패가 일반 수령들에 비해 극에 달한 것이다. 김양직은 마음대로 환곡을 나누어 주어 높은 이자를 받아 자신이 챙겼고, 강명길은 가난한 백성들이 스스로 개간한 화전(火田)에 높은 세금을 부과하여 자신이 착복하였다. 강명길은 부평부사로 자리를 옮기고도 그 못된 행위를 그만두지 않고 더욱 심한 비리를 저지르고 있었다. 정약용은 이 두 사람의 죄는 도저히 용서할 수 없으니 유배형에 처해야 한다고 정조에게 상소를 올렸다. 정조는 매우 곤혹스러웠다. 왜냐하면 이 두 사람이 자신이 매우 총애하는 관료들이었기 때문이다. 강명길은 자신의 건강을 책임지는 내의원의 태의(太醫)였다. 강명길은 정조의 체질을 가장 잘 알기 때문에 치료를 전담하다시피 하였다. 과도한 업무와 스트레스로 몸이 좋지 않았던 정조는 자신의 건강을 지켜준 강명길을 무척 신뢰하였고, 그에 대한 보답으로 수령으로 보내준 것이다. 김양직은 정조의 부친인 사도세자의 묘자리인 수원 현륭원의 터를 잡아준 지관(地官)이었다. 부친 사도세자에 대한 지극한 효심을 갖고 있던 정조는 김양직이 잡아준 묘자리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연천현감을 제수한 것이다. 의관과 지관이 고을의 수령으로 임명된 것은 조선 역사에서 매우 드문 일이었다. 이만큼 이들은 정조의 신뢰를 받던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그들은 정조의 신뢰를 이용하여 엄청난 비리를 저지르며 백성들에게 피눈물을 흘리게 하였다. 정약용은 "법의 적용은 마땅히 국왕의 가까운 신하로부터 하여야 합니다"라며 정조가 잘못을 저지른 이들을 유배형에 처해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했다. 국왕의 측근이 법을 지키지 않거나 법에 따라 처벌받지 않는다면 다른 관료들에게 법을 지키라고 요구할 수도 없고, 관료들의 불법을 처벌하여 국가의 법질서를 확고히 세울 수도 없기 때문이다. 정조는 사적 감정을 배제하고 이들을 유배형에 처했다. 최근 대통령의 측근인 우병우 민정수석 문제가 온 나라 국민들의 관심이다. 여러 행태의 배임과 부동산 관련 비리가 분명히 존재하는데 대통령은 그를 해임하지 않고 오히려 감싸고 있다.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 일이다. 200여년 전 정조와 정약용이 다시 태어나 이 모습을 본다면 무어라 할지 궁금하다. 지금 권력자들이 청렴하게 살지는 못하더라도 부끄러운 것을 부끄럽게 여기었으면 좋겠다. 너무 큰 기대인가!/김준혁 한신대 정조교양대학 교수김준혁 한신대 정조교양대학 교수

2016-08-15 김준혁

[김준혁의 역사산책] 파리동양어학교 도서관의 한국 서가(書架)

2016년 7월 1일. 프랑스 파리 동양어학교 도서관에 있었다. 파리동양어학교는 루이 16세때 아시아로 파견하는 외교관을 위하여 언어를 집중적으로 교육하기 위해 만든 349년 교육기관이다. 이 교육기관에서 양성된 수많은 외교관과 제국주의 국가 건설의 신봉자들이 중국과 일본 그리고 조선으로 퍼져나간 것이다. 아시아를 식민지화 하거나 국제 교류를 통해 자국의 이익을 얻겠다고 치밀하게 준비한 프랑스 사람들을 생각하면 무섭기 그지없다. 유로 2016 축구대회 열기로 가득한 시기에 이곳을 찾아간 것은 특별한 이유 때문이었다. 그것은 바로 이곳에 한글로 작성된 정리의궤(整理儀軌) 때문이다. 이 정리의궤는 주한 프랑스 초대공사인 블랑시(Collin de Plancy)가 구입하였다가 자신의 모교에 기증한 것이었다. 우리나라에 너무도 잘 알려진 수원에서 개최된 혜경궁 홍씨의 회갑진찬연을 비롯한 8일간의 화성행차가 기록된 글이다.이 의궤는 매우 귀중한 자료임에도 불구하고 파리동양어학교에서 한국에서 활용할 수 있는 권한을 주지 않았기 때문에 필자를 포함한 4명의 방문단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협의를 진행하고자 하였다.필자는 이곳에서 너무도 큰 충격을 받았다. 그것은 한글본 정리의궤를 본 것 때문이 아니었다. 다름 아닌 파리동양어학교 도서관을 관람하고 나서였다. 전 세계의 수많은 자료들을 보관하고 있고, 전 세계인들이 전문적으로 혹은 대중적으로 공부하고 책을 볼 수 있는 곳이 바로 파리동양어학교 도서관이었다. 우리들에게 호의를 베풀기 위해 아시아담당관은 개방된 아시아 서가로 방문단을 안내했다. 그는 자신들이 2차 세계대전 이후 한국에서 간행된 역사와 문학을 비롯한 여러 책들을 소장하고 있다고 환하게 웃으면서 이야기했다. 한국 서적들이 꽂혀있는 서가는 아시아관 가장 뒤편에 있었다. 그런데 기대한 서가의 책은 달랑 2개의 서가에 그것도 상단부 2~3칸 정도만 있을 뿐이었다. 한국 서가 옆으로 일본 서가와 중국 서가가 있었는데 일본 서가는 한국 서가의 10배가 넘었고, 중국 서가는 그 이상이었다. 완전히 충격이었다. 유네스코 본부가 있는 프랑스 파리에 전 세계 최고의 도서관 안에서 대한민국의 위상을 본 것이다. 이 부끄럽고 화가 나는 현상에 대해 질문을 했더니 일본 정부가 지속적으로 책을 보내주기에 이렇게 책이 많다는 것이다. 그 순간 과연 우리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전 세계 수많은 지성들이 이 도서관을 찾았다가 아시아관에서 일본과 중국 한국의 서가를 보며 어떤 생각을 할 것인가? 과연 한국을 문화국가로 인정할 것인가? 그 순간 정조가 즉위했던 1776년 이덕무와 박제가가 정조의 명으로 중국 연경 유리창에서 '고금도서집성(古今圖書集成)'을 살 때의 광경이 떠올랐다. 서점 주인이 이들에게 던진 한마디는 비수였다. "조선이 문명국가인줄 알았더니 이제 겨우 고금도서집성을 한질 사러 왔구려, 일본은 이미 10년 전 두질을 사갔는데!" 200년 전 일본은 작은 섬나라 국가가 아닌 문명국가로 나가려 했는데 조선은 허울만 문명국가였지 실제 문화를 높이기 위한 노력은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200년이 지난 21세기 오늘도 역시 우리는 변하지 않았다. 그것이 바로 파리동양어학교 도서관 한국서가에서 너무도 적나라하게 보여진 것이다. 정부가 우리의 역사와 문화를 알려줄 수 있는 책을 사서 그들에게 지원하지 못한다면 당장 필자의 책이라도 그들에게 보내야겠다. 너무도 부끄러운 시절이다./김준혁 한신대 정조교양대학 교수김준혁 한신대 정조교양대학 교수

2016-07-18 김준혁

[김준혁의 역사산책] 뇌물이 나라를 망친다

1899년(고종 36) 2월 2일 고종은 8도의 관찰사를 새롭게 임명했다. 수시로 관찰사들을 임명하기는 했지만 이번 임명은 모두 새로운 인물들이었다. 이때 경상북도 관찰사로 임명된 사람이 바로 나주 군수 김직현이었다. 김직현은 11년 전 일개 성균관 유생에서 구일제(九日製)라는 특별과거시험에 합격하여 관직에 들어와 승승장구한 인물이었다. 그가 과거에 합격하고 요직에 임명된 것은 국왕과 고위 관리들에게 뇌물을 사용했기 때문이었다. 김직현은 나주군수를 하면서 백성들이 낸 세금 8만원을 고을의 아전이었던 김용규로 하여금 서울에 올라가 고위 관리들에게 뇌물로 전달했다. 이 뇌물로 김직현은 경상북도 관찰사에 임명되었고, 일개 아전에 불과했던 김용규 마저도 해남군수가 되었다. 뇌물로 관직을 사고팔고 하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고종시대에 수시로 발생했다. 일본에 의해 나라를 빼앗긴 것에 분노해 스스로 목숨을 끊은 매천 황현이 저술한 역사서 '매천야록'에 보면 고종과 민왕후의 방탕은 극에 달했다. 이들은 원자인 순종이 태어나고 나서 어린 아들을 위해 8도의 명산에 기도한다고 엄청난 재물을 썼다. 거기에 더해 고종과 민왕후는 향락에 물들어 새벽까지 연회를 베풀고 유흥을 즐기느라 엄청난 돈을 썼다. 밤늦게까지 놀다가 오후에 일어나 나랏일을 하는 군주가 어떻게 온전하게 국가를 경영할 수 있었겠는가? 거기에 민왕후의 사치가 더해 국가의 재정은 붕괴되고 있었다. 나라 재정이 붕괴되다보니 국왕과 왕비는 유흥을 위하여 엄청난 뇌물을 받기 시작했다. 이러한 뇌물의 대가로 관직을 주었고, 관직이 수시로 변경되어 국가의 행정이 올바르게 이어질 수 없었다.김직현은 관찰사가 되자마자 본색을 드러냈다. 김직현은 관찰사를 하며 엄청난 비리를 저지르기 시작했다. 그가 얼마나 심했으면 고종마저도 김직현의 엄청난 비리에 참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고종은 17개월 뒤 다음과 같은 하교를 내리며 그를 파직시켰다. "나라에서 관청을 세우고 벼슬자리를 설치한 것은 백성을 양성(養成)하기 위한 것이지 백성을 괴롭히려는 것이 아니다. 풍속을 관찰하는 지위와 백성들을 인도하는 책임을 위임한 중요성이 얼마나 큰 것이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더러는 재물을 긁어모으는 것만 일삼으면서 백성들의 고통을 생각지 않고 더러는 잇속만 다투면서 체면을 훼손시키고 있어 듣기에도 놀랍고 분통스러움을 금할 수 없다. 이런 것을 그대로 놓아 둔다면 오히려 나라에 법이 있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참으로 지당한 이야기이지만 고종의 이러한 하교는 참으로 어이가 없을 따름이다. 고종을 이런 말을 할 자격이 있는 국가지도자라고 인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결국 조선이 망한 것은 나랏님으로부터 하급 관리들까지 뇌물이 만연하고 부정과 비리가 횡횡했기 때문이다. 김직현은 비리로 파면된 후 5개월 만에 사면을 받았다. 역시 뇌물의 힘이었을 것이다.지금 대한민국은 온통 뇌물과 비리의 이야기만 가득하다. 전직 판사출신인 최유정 변호사의 법조 비리, 국민의당 김수민 의원과 관련된 홍보물 비리 의혹, 국방부의 방산비리, 롯데그룹과 이명박 정부와의 스캔들까지 참으로 기가막힌 일만 가득하다. 나라가 온전히 운영되고 발전하려면 이러한 뇌물과 비리는 마땅히 없어져야 한다. 이제 자신들의 권력과 이익을 위해 뇌물을 주고받는 기득권층들은 대한민국의 국민들이 조선시대 혹은 독재정권 시대의 침묵하는 바보가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김준혁 한신대 정조교양대학 교수김준혁 한신대 정조교양대학 교수

2016-06-19 김준혁

[김준혁의 역사산책] 미국과 일본

1905년 7월 29일, 미국의 26대 대통령인 테어도어 루스벨트의 지시를 받은 미국 육군장관 태프트(Taft,W.)는 동경으로 가서 일본 수상 가쓰라(桂太郞)와 비밀리에 미국은 필리핀을 지배하고, 일본은 조선을 지배한다는 비밀 협정을 맺었다. 남하하는 러시아를 막기 위하여 조선을 일본에 주어 성장시키자는 것이 미국의 논리였다. 당시 주한미국공사 알렌은 일본의 야욕이 커지고 있어 향후 일본이 반드시 미국과 대결을 할 것이니 일본의 조선 지배를 용인해서는 안된다고 강변하였다. 하지만 미국 대통령의 일본에 대한 호감과 조선에 대한 경멸로 알렌의 주장은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비밀리에 맺은 가쓰라 태프트 밀약으로 일본은 미국의 은밀한 지원하에 조선을 지배할 수 있었다. 그러나 30여년이 지나 일본은 알렌의 주장대로 미국의 진주만을 공격하며 2차 세계대전을 일으켰다. 미국과 일본의 동맹은 서로의 국익 때문에 깨졌고, 미국은 일본을 공격하기 위하여 1945년 8월 6일 히로시마에 리틀보이라 부르는 원자폭탄을 투하하였다. 이 결과로 7만8천명이 사망하고 1만명이 실종 되었으며, 3만7천명이 부상을 입었다. 그로부터 41년이 지난 1996년 12월에 히로시마의 원자폭탄이 떨어진 곳이 히로시마 평화기념관이란 이름으로 유네스코의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이는 세계 평화를 위하여 다시는 핵무기가 사용 되어서는 안된다는 메시지를 주고자 한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히로시마 평화기념관의 세계유산 지정이 그 의도와 달리 일본을 피해자로 둔갑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와 같이 이상한 현상을 더욱 부추기는 일이 최근에 발생하고 있다. 그것은 다름 아닌 미국 오바마 대통령의 26일에 있을 히로시마 평화기념관 방문이다. 오바마 대통령이 히로시마 평화기념관 위령탑에서 1945년에 희생된 일본인들을 위하여 추모를 한다는 것이다. 최근 미국이 중국의 성장을 막기 위하여 일본과 깊은 교류를 맺으며 일본의 군사력을 확장하게 하고 있는 처지이니 오바마의 일본 방문을 이해할 수는 있다. 하지만 이러한 행위가 더욱더 일본이 가해자가 아닌 피해자라는 것을 인식시켜줄 수 있는 행동이 될 수 있다.당시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투하되었을 때 죽은 재일 조선인 피폭자는 그 수가 무려 7만~10만 명으로 일본인 피폭자의 10분의 1이 넘는다. 이들은 엄청난 피해자였음에도 불구하고 미국이나 일본으로부터 사과는 물론이고 단 1원의 보상금도 받은 적이 없다. 이러한 현실임에도 불구하고 미국은 아무 죄도 없이 죽어간 조선인에 대해 일언반구도 없다.오바마 대통령이 일본의 피폭 피해자들에 대해 추모하는 것은 인류의 평화를 위하여 옳은 일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당시 일본에서 냉대받고 고생하다 죽음의 이유도 모른 채 죽어간 조선인들에 대해 추모하지 않는다면 오바마 대통령의 추모는 진정성이 없는 것이다. 미국이 대한민국과 우방이라고 자처하면서 역으로 우리 대한민국을 우습게 보고, 과거 적이었던 일본에 대해 신우방으로 일본의 비위만을 맞추려 한다면 그것은 진정한 역사의 반성도 아시아의 평화도 이룰 수 없는 것이다. 미국은 이를 정확히 알아야 하고 이들에 대한 보상을 반드시 해야 한다./김준혁 한신대 정조교양대학 교수김준혁 한신대 정조교양대학 교수

2016-05-22 김준혁

[김준혁의 역사산책] 집강소(執綱所)와 민주주의

우리 역사상 가장 위대한 날 중 하나가 1894년 4월 27일이다. 이날은 바로 부정부패 세력들을 일소하고 백성들의 나라를 건설하겠다고 기치를 올린 동학농민군이 호남의 심장인 전주성을 점령한 날이었다. 오만에 가득한 관군은 죽창밖에 들지 않은 농민군을 우습게 보고 대처하다가 황토현에서 대패하고 마침내 전주성에서도 패배하여 도망을 갔다. 전주는 단순한 도시가 아니었다. 전주가 조선 왕실의 본향이었기 때문에 조정의 충격은 너무도 대단했다. 관군이 전주성을 빼앗긴 것은 군사들의 무능도 있었지만 호남지역 수령들에 대한 백성들의 지지가 없었기 때문이다. 당시 호남지역 수령들은 토색질에 전념했고 동학농민군의 투쟁이 일어나자 필요한 재물만 챙겨 도망을 갔다. 당시 조선의 국왕인 고종은 전라감사 김학진에게 전권을 위임하여 농민군과 협상하라고 하였다. 전주성을 점령한 전봉준과 농민군은 백성이 진정한 주인이 되어 상하 차별없이 평화롭게 살 수 있는 나라를 만들기를 희망하였고 조정과 폐정개혁안 12조를 협의하고 선포하였다. 노비제도에 대한 혁파와 과부의 재가 허용, 그리고 탐관오리에 대한 처벌 등이 그 안에 포함되었다. 귀한 자와 천한 자가 없는 평등세상, 바로 당시 백성들이 꿈꾸던 사회로의 첫발을 내디딘 것이다. 이 폐정개혁안에서 가장 주목해야 하는 것이 바로 집강소의 설치였다.집강소는 전라도 53주(읍)의 관아 안에 설치된 일종의 민정기관이었다. 집강(執綱)이란 각 고을마다 설치한 동학의 조직 접(接)의 수령인 접주를 말하는 것이다. 이 집강소의 설치로 동학교도가 각 읍의 집강이 되어 지방의 치안과 행정은 사실상 이들이 담당하게 되었다. 전주에는 집강소의 총본부인 대도소(大都所)를 두고, 집강소에는 분장을 나누어 집강 밑에 서기·집사·동몽 등 임원을 두어 행정사무를 분담케 하였다. 오늘날 국민투표와 거의 같은 것으로 민주주의의 시작이었다.호남지역에서 실시한 집강 선발은 기존 수령들의 반발이 있었지만 백성들의 적극적인 지지로 차분히 수령을 선출하였다. 이로써 관료들의 고압적 행정은 쇄신되고 실질적인 백성의 삶을 헤아리는 지도자가 모든 고을을 책임지게 되었다. 이 얼마나 대단한 일인가! 참정권을 얻고 올바른 지도자를 뽑기 위한 목숨을 건 투쟁의 결과였다. 결국 백성들에 의해 선발된 지도자가 백성들의 실제적 삶을 나아지게 올바른 정치적 행위와 행정을 하게 만든 것이다. 이는 단순히 우리 민족사만이 아닌 세계사적 자랑거리이다.이와 같이 위대한 민주주의의 역사를 갖고 있는 우리나라는 이를 계승 발전시킬 책임과 의무가 있다. 얼마 전 우리는 20대 국회의원 총선거를 실시하였다. 그간의 여론조사와 달리 충격적인 여소야대의 정국으로 민심의 결과가 나왔다. 박근혜 정부의 경제적 무능과 민주주의의 후퇴 그리고 개성공단 폐쇄 등 남북관계의 파탄이 국민들의 마음을 현 정부와 여당에서 떠나게 한 것이다. 그렇다고 야당이 잘해서 그들을 지지해준 것이 절대적으로 아님을 야당 모두는 알아야 한다. 이제 새롭게 국회의원으로 당선된 이들은 120여년 전 백성의 나라를 만들기 위하여 피를 흘린 수많은 선조들을 기억하면서 민심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정확히 파악하고 이를 위한 노력을 해야 한다./김준혁 한신대 정조교양대학 교수김준혁 한신대 정조교양대학 교수

2016-04-24 김준혁

[김준혁의 역사산책] 다산 정약용의 정치론(政治論)

정(政)의 뜻은 바로잡는다(正)는 말이다. 똑같은 우리 백성인데 누구는 토지의 이택(利澤)을 겸병(兼幷)하여 부유한 생활을 하고, 누구는 토지의 이택을 받지 못하여 빈한하게 살 것인가. 이 때문에 토지를 개량하고 백성들에게 고루 나누어 주어 그것을 바로잡았으니 이것이 정(政)이다. 똑같은 우리 백성인데 누구는 풍요로운 땅이 많아서 남는 곡식을 버릴 정도이고, 또 누구는 척박한 땅도 없어서 모자라는 곡식을 걱정만 해야 할 것인가. 때문에 주거(舟車)를 만들고 권량(權量)의 규격을 세워 그 고장에서 나는 것을 딴 곳으로 옮기고, 있고 없는 것을 서로 통하게 하는 것으로 바로잡았으니 이것이 정(政)이다. 똑같은 우리 백성인데 누구는 강대한 세력을 가지고 제멋대로 삼켜서 커지고, 누구는 연약한 위치에서 자꾸 빼앗기다가 멸망해 갈 것인가. 때문에 군대를 조직하고 죄 있는 자를 성토하여 멸망의 위기에 있는 자를 구제하고 세대가 끊긴 자는 이어가게 하는 것으로 바로잡았으니 이것이 정(政)이다.똑같은 우리 백성인데 누구는 상대를 업신여기고 불량하고 악독하면서도 육신이 멀쩡하게 지내고, 누구는 온순하고 부지런하고 정직하고 착하면서도 복을 제대로 받지 못하는가. 때문에 형벌로 징계하고 상으로 권장하여 죄와 공을 가리는 것으로 바로잡았으니 이것이 또한 정(政)이다. 똑같은 우리 백성인데 누구는 멍청하면서도 높은 지위를 차지하여 악(惡)을 전파하고 있고, 누구는 어질면서도 아랫자리에 눌려 있어 그 덕(德)이 빛을 못 보게 할 것인가. 때문에 붕당(朋黨)을 없애고 공도(公道)를 넓혀 어진이를 기용하고 불초한 자를 몰아내는 것으로 바로잡았으니 이것이 정(政)이다.밭도랑을 준설하고 수리(水利) 시설을 함으로써 장마와 가뭄에 대비하고, 소나무·잣나무·밤나무 등속을 심어서 궁실(宮室)도 짓고, 관곽(棺槨)도 만들고, 또 곡식 대신 먹기도 하고, 소·염소·당나귀·말·닭·돼지·개 등을 길러 군대와 농민을 먹이기도 하고, 노인들 봉양도 한다. 산림과 하천을 담당하는 관리들은 시기를 가려 산림(山林)에 들어가서 짐승과 새들을 사냥함으로써 해독을 멀리하기도 하고, 또 고기와 가죽을 제공하기도 하며, 공인(工人)도 계절따라 산림에 들어가서 금·은·구리·철과 보옥(寶玉)을 캐다가 재원을 확보하기도 하고, 또 모든 쓰임에 공급도 하며, 의사는 병리(病理)를 연구하고 약성(藥性)을 감별하여 전염병과 젊은 나이에 억울하게 죽는 요절을 미연에 방지하게 하는 것이 바로 왕정(王政)인 것이다. 왕정이 없어지면 백성들이 곤궁하게 마련이고, 백성이 곤궁하면 나라가 가난해지고, 나라가 가난해지면 세금의 부과가 엉망이 되고, 세금 부과가 엉망이 되면 인심이 흩어지고, 인심이 흩어지면 천명(天命)도 가버린다. 그러므로 급히 올바르게 서둘러야 할 것이 정(政)이다.이는 필자의 글이 아니다. 다산 정약용 선생님의 '원정(原政)'이란 글이다. 정치의 고전적 의미가 무엇인지를 밝히는 글이다. 이 글대로 정치를 하는 것이 진짜 정치다. 다산이 생각한 정치는 바로 올바른 것이다. 국회의원을 뽑은 총선을 바로 앞에 둔 시기에 과연 우리는 올바른 정치를 하고 있는 것인가 다시 한번 생각해본다./김준혁 한신대 정조교양대학 교수김준혁 한신대 정조교양대학 교수

2016-03-27 김준혁

[김준혁의 역사산책] 개성 벽란도(碧瀾渡)

개성은 예로부터 송도(松都)라고 불렀다. 소나무가 많은 도시라는 의미이다. 개성의 주산인 송악(松嶽) 역시 소나무가 너무도 많아 붙여진 이름이다. 개성은 한편으로 개경(開京)이라고도 한다. 왕건이 고려를 건국하고 이곳을 수도로 삼았기 때문에 서울을 열었다는 의미로 개경이라 했다.이처럼 여러 이름을 가진 도시 개성은 고려시대 세계적인 도시였다. 중세시대 유럽 최고의 도시인 베네치아의 인구가 겨우 10만 명이었는데 개성의 인구가 20만 명이었으니 개성은 정말 세계적인 도시였다. 이 도시가 이처럼 세계적인 도시가 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무역항 벽란도(碧瀾渡)가 있었기 때문이다. 벽란도는 개성에서 서해로 흘러가는 예성강 끝자리에 있는 포구였다. 서해와 바로 만나는 지점에 있는 벽란도는 말 그대로 푸른 물결이 넘치는 곳으로, 밤도 낮처럼 환하게 밝혀진 곳이었다. 이곳은 중국 상인들이 대부분이었지만 멀리 아라비아 상인들과 유럽의 상인들도 교역하러 왔다. 지중해에서부터 고려의 벽란도까지 무역하러 올 정도로 개성에는 없는 물품이 없었다.당시 송나라에서 배가 들어오는 날이면 벽란도 일대가 인파로 뒤덮였다. 1014년(현종 3)부터 1278년(충렬왕 4)까지 모두 120여 차례, 총 5천여 명에 달하는 중국인이 입국했다. 벽란도에서 개경까지는 삼십 리(12㎞)였는데, 외국 사절들은 벽란도에서 하루 유숙한 뒤 다음날 도성으로 향했다. 벽란도에는 중국인을 상대하는 술집이 따로 있었고, 개경에는 청하관, 충주관, 사점관 같은 전용 숙소까지 있었다. 송나라 사절의 한 사람으로 고려에 왔던 중국인 서긍(徐兢)이 쓴 책 '고려도경'에 따르면 당시 개성엔 화려한 저택이 즐비했고 외국인 전용 숙소도 여럿 있었다. 여성은 물론 남성도 비단으로 치장했다. 기름·종이·말(馬)·돼지의 시장이 각각 있을 정도로 상업이 발달했다.벽란도가 국제 무역항으로 번성할 수 있었던 것은 그 뛰어난 지리적 여건과 세심한 외국인 배려정책에 힘입은 바가 크다. 외국인들의 편의를 위해 외국 사신이 들어오면 벽란정으로 안내해 우벽란정에 조서(詔書)를 안치하고 좌벽란정에서 사신을 대접해 사신이 도착하거나 떠날 때 반드시 하루씩 묵었다가 갈 수 있게 했다. 타인들에 대한 고려인들의 배려는 외국인들이 벽란도를 찾게 하는 기반이었다. 이처럼 고려인들의 개방성과 신뢰를 주는 행동은 개성을 세계적인 도시로 만들었고 자연스럽게 금속활자와 같은 전 세계 최고의 문화를 만들어 냈다. 최근 북한의 인공위성 발사로 인해 북·미간의 갈등이 남북 갈등으로 변화하면서 개성공단이 폐쇄됐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북한의 핵개발은 용납할 수 없는 일이지만 6·15정상회담 이후 남북 화해의 상징이었던 개성공단을 폐쇄하는 일은 서로의 신뢰를 없애는 참으로 안타까운 조치이다. 개성이라는 도시가 역사적으로 개방과 신뢰로 성장한 도시였기에 그 안타까움은 더욱 크다고 할 수 있다. 개성이 다시 개성다워지기 위해서는 우리 남북이 모두 조금씩 양보해 개성공단을 부활하고 개성의 역사문화도시 관광을 재개하는 길이다. 이러한 노력으로 북·미간의 평화협정을 체결하고 한반도에서 완전한 비핵화를 이뤄내 남과 북의 화해와 평화가 있기를 간절히 기원한다./김준혁 한신대 정조교양대학 교수김준혁 한신대 정조교양대학 교수

2016-02-28 김준혁

[김준혁의 역사산책] 환향녀(還鄕女), 위안부(慰安婦)

병자호란이 터졌다. 무능한 인조와 서인 세력들은 오로지 자신들의 권력만을 위하여 국제정세나 백성들의 삶은 돌아보지 않았다. 그들에게는 오로지 사라져가고 있는 명나라밖에 없었다. 명나라가 아니었다면 조선은 이미 사라지고 없는 것이라며 명에 대한 충성을 고집하고 있었다. 중국땅은 이미 여진족의 세상이 되어 가고 있었지만 조선의 기득권들은 명나라에 대하여 조금이라도 비난의 소리를 하면 대역죄인으로 몰아 죽였다. 자신의 나라와 백성들의 삶을 위해 주체적 국가 건설을 이야기하는 것이 가장 큰 죄악이었으니 어느 누가 사대를 버리고 주체를 선택하겠는가! 결국 이러한 무지가 오랑캐라 부르던 그들 여진족에게 항복하는 조선 역사상 최악의 사태를 맞이하였다.이러한 과정에서 가장 큰 피해를 입은 사람들은 백성들이었다. 그 백성 중에서도 청나라로 끌려간 여인들이 가장 큰 피해자였다. 여진족들은 조선 여인들이 아름답고 일을 잘한다고 하여 사대부의 여인이나 평민 여인이나 가리지 않고 만주로 끌고 갔다. 그 여인들은 노비로 팔려가거나 여진족들의 성 노리개가 되었다. 조선 지도자들의 무능으로 결국 피해는 조선의 이름없는 나약한 여인들이 받게 된 것이다. 물론 지금도 이러한 불합리는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이 여인들 중 만주를 탈출하여 조선의 압록강을 건넌 여인들도 있고, 집안에서 돈을 주고 풀어내어 고향으로 돌아온 여인들도 있다. 그래서 이 여인들을 '고향[鄕]으로 돌아온[還] 여인[女]'이라고 해서 '환향녀'라고 불렀다. 그런데 양반사대부 집안으로 돌아온 여인들은 배척을 받았다. 이 여인들이 여진족에게 몸을 더럽혀진 것이기 때문에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녀들은 '환향녀'가 아닌 '화냥년'이라는 욕설의 주인공이 되었다. 아니 이 여인들이 어떻게 만주까지 가게 된 것인가? 그것은 여인들의 잘못이 아니라 바로 나라의 잘못이요, 자신들의 권력과 금력만을 위하여 나라를 잘못으로 만든 무능하고 거짓된 관료들과 사대부들의 잘못이 아닌가! 그럼에도 이들은 자신들의 잘못은 꼭꼭 숨겨두고 온갖 고생을 하다 돌아온 슬픈 여인들에게 죄를 뒤집어씌운 것이다. 그들은 거꾸로 이 여인들을 이용하여 가문의 명예를 빛내고자 하였다. 그래서 이 여인들에게 죽음을 강요하거나 아니면 비밀리에 살해하고 그녀들이 스스로 가문의 명예를 위해 자결했노라고 거짓말을 했다. 그래서 그녀들을 죽인 그들은 나라로부터 열녀문을 하사받고 세금 면제와 군역 면제 등 온갖 특혜를 받으며 지역 사회에서 명망가 행세를 하였다. 이것이 바로 환향녀의 진실이다.최근 대한민국 정부와 일본 정부가 태평양전쟁 시기 일본군의 성(性) 욕구를 해결하기 위한 성 노리개 역할로 강제 끌려간 우리 할머니들에 대한 배상문제를 해결했다고 한다. 100억원도 안되는 10억엔을 한국 정부에 주면서 모든 것을 해결한다고 선전한다. 그 과정에서 일본대사관 앞의 '평화의 소녀상'도 대한민국 정부가 이전해주기로 했다고 일본 정부가 발표했다. 이 말도 안 되는 일을 보며 300년 전 환향녀가 생각났다. 우리가 다시 이 여인들을 화냥년으로 만들 것인가? 지옥보다 더 지옥 같은 곳에서 살았던 이 가녀린 여인들에게 300년전의 기득권들처럼 오늘의 정부와 보수 세력들이 똑같이 그녀들을 상대하는 것을 보며 소름이 돋았다. 이 나라는 아직도 300년 전의 그 어리석은 조선인가?/김준혁 한신대 정조교양대학 교수김준혁 한신대 정조교양대학 교수

2016-01-10 김준혁

[김준혁의 역사산책] 혼돈주(混沌酒)

우리 민족이 즐겨 마시는 술은 크게 청주(淸酒)와 탁주(濁酒)로 나뉜다. 술은 거른 형태에 따라 청주와 탁주로 나뉘며, 또 이를 기준으로 자연스럽게 고급술과 대중술로 나뉜다고 볼 수 있다. 옛 사람들은 술꾼들의 은어를 빌려 소주인 청주를 ‘성인(聖人)’으로, 탁주를 ‘현인(賢人)’으로 표현하기도 했다.시성(詩聖) 이백은 공자의 수제자인 안회(顔回)가 밥을 짓던 중에 티끌이 묻은 밥이 아까워서 먹다가 동료들에게 의심을 받았던 고사와 현인으로 일컬어졌던 윤길보의 아들 백기가 계모의 옷에 붙은 독벌을 떼어 내려다가 참소를 받은 고사를 소재로, “티끌이 묻은 밥을 걷어 내고 독벌을 떼어 내려고 하였건만, 사람들은 성인을 의심하고 현인을 시기했네.(拾塵철蜂 疑聖猜賢)”라는 시구를 지었다. 그는 이를 통해 청주를 성인으로, 탁주를 현인으로 표현했다.물론 이러한 중국 고사는 자연스럽게 우리나라에도 전해졌는데, 당대 지식인이었던 목은 이색에 의해 전파된 듯하다. 조선 초기 청주, 즉 소주는 특정계급인 양반들에게만 접근 가능한 기호품이었고, 사치스런 고급주로 인식됐다. 그 이유는 곡식을 발효시켜 증류하기 위해서는 많은 양의 곡식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조정에서는 곡식 낭비를 이유로 소주를 금지하자는 간언이 있기도 했다. 조선 성종 대 조효동은 “세종 대에는 사대부들이 집에서 소주를 드물게 썼는데, 지금 연회에서 모두 쓰므로 낭비가 심하니 금지하자”고 국왕에게 요청했고, 실제로 성종은 이를 받아들였다. 또한 소주는 너무 많이 마시면 중독이 되어 얼굴이 파랗게 되고 말을 못하는 구금증이 나타나고 혼미하여 의식을 잃게 되기도 하는 폐단이 있기도 했다.이처럼 소주는 독하기도 하여 건강에 폐단을 주기도 하였지만 양반사대부가를 중심으로 빚어지고 사용되었기에 조선의 백성들은 주로 탁주를 즐겨마셨다. 탁주는 백성의 술로, 거르지도 짜지도 않고 그대로 마시는 술이다. 그래서 조선시대 문인 정희량은 이를 ‘혼돈주(渾沌酒)’라고 불렀다. 내 막걸리 내 마시고 我飮我濁, 내 천성을 내 보전하네 我全我天, 내가 스승 삼는 술은 我逎師酒, 성인도 아니고, 현인도 아니네 非聖非賢정희량은 비운의 인물이었다. 그는 백성들의 지지를 받았지만 조정의 관료들과 기득권층은 그를 인정하지 않았다. 그는 ‘무오사화’로 인해 김해로 유배간 뒤 집으로 돌아왔다 어느 날 산책 간다고 하고는 사라져 신선으로 화했다는 소문까지 돌았다. 그가 세상을 한탄하며 탁주인 막걸리를 혼돈주라 이름 한 것은 어쩌면 백성들의 한(恨)이 그 술에 담겨 있기 때문이다. 그는 “사람이 누가 나의 이 술을 즐기는 뜻을 알 것인가”라며 혼돈주를 마셨다. 백성들과 함께 하던 정희량이 마셨던 혼돈주, 즉 탁주는 백성들의 술이기도 했다. 그래서 조선시대 그 숱한 금주령 시대에도 살아남을 수 있었다.벌써 한해가 저물고 있다. 특히 올해는 나랏일 때문에 술 마실 일이 많았다. 지금도 이런 상황은 변하지 않았다. 그야말로 혼돈스런 세상에 혼돈주를 마시다가 한 해가 가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혼돈주가 비록 혼돈스러운 것 같지만 술한잔으로 혼돈스러운 세상을 마감시킬 수 있는 힘을 가지고도 있다. 그래서 혼돈주는 혁명의 술이기도 하다. 하여 혼돈주는 위대하다. 이 어지러운 세상, 오늘 밤에도 목놓아 외치겠다. 혼돈주를 위하여!/김준혁 한신대 정조교양대학 교수김준혁 한신대 정조교양대학 교수

2015-12-13 김준혁

[김준혁의 역사산책] 모화적 사대주의(慕華的 事大主義)

조선이 건국되면서 내건 이념은 사대교린(事大交隣)이었다. 큰 나라를 섬기고 이웃 나라와 사귄다는 사대주의를 천명한 것은 오늘날 시각에서 보면 부끄러운 일일 수도 있다. 자주 국가의 모습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당시 조선건국의 주체들이 명나라에 대한 사대를 천명한 것은 진정한 사대가 아닌 정책적인 것이었다. 신라가 비록 당나라를 동원해서 삼국을 통일했지만 끝내 당나라와 전쟁을 벌이며 당나라 세력을 몰아낸 것부터 우리 역사에서는 우리가 힘이 부족할 때에는 정책적인 사대를 취해왔다. 조선 건국 주체였던 이성계와 정도전이 사대를 천명하면서도 다시 요동정벌을 추진했던 것도 마음속 깊이 중국을 사대한 것이 아님을 증명하는 것이다.그러나 병자호란과 삼전도의 치욕 이후 조선의 집권자들과 사대부들에게는 정책적 사대주의가 사라지고 어느 순간인가 모화적 사대주의가 나타나고 있었다. 이들은 이성과 주체성을 잃고 국가의 이익보다는 사대의 명분만을 중시하는 자아 상실의 사대주의 중독증에 걸렸다. 그들은 임진왜란으로 나라를 잃을 위기의 조선을 명나라가 구해주었으니 명나라에 대한 은혜를 반드시 갚아야 한다는 감은사상(感恩思想)에 너무도 깊숙이 취해 있었다. 임진왜란을 극복하기 위해 온 힘을 다 바친 의병들의 투쟁이 그들에게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조선 후기에는 이미 사라지고 없는 명나라를 위해 국왕들은 창덕궁 후원 깊숙한 곳에 대보단(大報壇)을 만들어 중국 황제들에게 제사를 지내고, 사대부들도 오로지 명나라의 연호만을 사용했다. 그리고 이러한 모화적 사대주의는 국시(國是)가 되어 국가와 백성들을 위한 자주적이고 합리적인 이야기를 하는 이들을 이단으로 몰아붙여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게 했다.하지만 가만히 들여다보자! 과연 중국이 조선을 구했는가? 당시 참전한 명나라는 평양성 탈환에 공을 세운 것 말고 한 것이 없다. 그나마 평양성 탈환은 목숨을 건 사명당 유정과 영규 대사를 비롯한 승군들과 조선 관군의 참전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오히려 명나라 장수들은 일본군으로부터 막대한 뇌물을 받고 더 이상 일본과 전쟁을 하려 하지 않고 오히려 조선 백성들을 수탈하는 데 힘을 기울였다. 오죽하였으면 조선의 백성들이 일본군보다 명나라 군대의 가혹한 행위가 심하다고 조정을 원망했겠는가! 그런데도 모화적 사대주의자들은 명나라의 허물은 숨기고 그저 재조지은만 강조하면서 모화적 사대주의를 이어나갔다. 이러한 명나라에 대한 모화적 사대주의는 현대사회에 와서 사라지지 않고 미국에 대한 모화적 사대주의로 변했다. 한국전쟁으로 공산화될뻔한 대한민국을 미국이 구했기에 이들에 대한 은혜를 갚아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이 점에 대해 부정할 생각은 없다. 하지만 극단적인 친미 모화적 사대주의는 우리 사회의 다양한 의견을 수용하지 않는 폐단을 낳게 된다. 그로 인하여 사회의 분열을 더욱 가속화 하고, 4대 핵심기술 이전을 거부하는 총 사업비 18조원이 드는 KF-X(한국형 전투기 개발 사업)를 미국에 일방적으로 끌려가는 우를 범하게 된다. 이제 우리 대한민국도 세계를 이끌어 나가는 국가가 되었다. 이제 미국만의 모화적 사대주의가 아닌 국가의 이익을 위한 다양하고 실용적 외교관계를 수립하고, 나아가 분단을 고착하는 모화적 사대주의를 청산하고 통일을 지향하는 자주적 국가정책을 추구하기 바란다./김준혁 한신대 정조교양대학 교수김준혁 한신대 정조교양대학 교수

2015-11-15 김준혁

[김준혁의 역사산책] 사관(史官)과 한국사 국정교과서

1648년(인조 26) 9월 18일 소현세자의 큰 아들 경선군(慶善君) 석철이 제주도에서 19살의 나이로 죽었다. 역적으로 몰려 제주도로 유배 간지 1년 4개월 만에 죽은 것이다. 아버지 소현세자는 이미 3년전에 의문사했다.인조의 무능으로 조선은 병자호란으로 큰 치욕을 겪었고 나라는 혼란스러웠다. 병자호란 후 8년만 에 청나라의 수도인 심양으로 끌려간 소현세자가 조선으로 돌아왔다. 소현세자는 어려웠던 심양에서의 인질 생활을 오히려 역이용하여 서양의 선교사들을 만나 국제정세를 파악하고, 청나라의 고위관리들과 사귐으로써 그들의 신뢰도 얻었다. 오랑캐라고 생각했던 청나라가 어떻게 강한 나라로 특히 조선의 문화보다 발전된 문화국가로 성장하는지 유심히 살펴보아 이를 배우고자 하였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조선 조정에서는 그에 대한 거부감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주자 성리학만을 고집하고 명나라의 은혜만을 생각하는 조선에서 보면 소현세자는 완전히 이단아였기 때문이다. 극단적으로 이야기하자면 장차 국왕이 될 사람이 조선의 정체성을 배신한 역적이었다. 그럼에도 백성들은 소현세자를 열광했다. 그가 조선을 개혁할 것이라는 희망을 백성들은 갖고 있었다. 하지만 조선의 백성보다는 자신의 권력을 중요시 여겼던 인조는 끝내 34살의 아들 소현세자를 은밀히 독살했다. 소리 없이 진실이 퍼져나가도 이 엄청난 사건을 어느 누구도 이야기하려 하지 않았다. 그런 이야기를 꺼내거나 아니면 기록한다면 가문 전체가 죽을 수 있는 대역(大逆)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시 사관은 소현세자가 독살된 것이라는 증거를 ‘인조실록’에 남겨 놓았다. 목숨을 건 것일 것으로 생각했지만 조선 시대 사관들의 역사 기술을 어떠한 형태로도 제지하지 않았기 때문에 가능할 수 있었다.소현세자를 죽인 인조는 아들의 핏줄도 남기지 않기 위해 3명의 어린 손자들을 죽이기로 결정하고 제주로 유배를 보냈다. 경선군의 죽음을 기록한 사관은 결기있는 역사기술로 인조를 질타했다.“석철이 비록 폐빈 강 씨의 아들이기는 하지만 성상의 손자가 아니었단 말인가. 할아버지와 손자 사이의 지친으로서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 아이를 장독(장毒)이 있는 제주도로 귀양보내어 결국은 죽게 하였으니, 그 유골을 아버지의 묘 곁에다 장사지낸들 또한 무슨 도움이 있겠는가. 슬플 뿐이다.” 사관은 국왕 인조의 행동을 비판하였고, 이를 통해 인조시대의 비정한 정치를 후대의 우리가 알 수 있게 된 것이다. 이것이 바로 올바른 역사 기술이다. 현재 대한민국 정부가 역사학자를 비롯한 수많은 국민의 반대에도 한국사 중등 교과서를 국정화 하기로 결정하였다. 이는 자신들의 입장에 맞는 역사기술만을 하겠다는 후안무치한 행동이다. 더불어 이는 대한민국 헌법 정신에도 위배되고 유엔이 강조하는 문화 다양성 인정에도 동떨어진 것이다. 전 세계의 지식인들이 대한민국의 후진국으로 가고 있다고 비아냥대고 있다. 하다못해 조선 시대도 사관들도 아무런 제지 없이 자유롭게 역사를 기술하였는데 21세기 개명된 사회에서 자유로운 역사기술의 역사책을 학생들이 읽을 수 없게 한다는 것은 차마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조선 시대 사관이 오늘날 다시 돌아온다면 무어라 하겠는가? 참으로 부끄러울 따름이다. 정부는 이제라도 방침을 철회하고 다시 검인정 체제로 돌아가야 한다. 그것이 역사에 대해 죄짓지 않는 것이다./김준혁 한신대 정조교양대학 교수김준혁 한신대 정조교양대학 교수

2015-10-18 김준혁

징비록(懲毖錄)

이순신 장군이 왜 마지막 노량해전에서 갑옷을 입지 않았을까 늘 궁금했다. 역사를 공부하는 연구자로서의 궁금증이 아닌 한 인간으로서의 궁금증이었다. 우리는 흔히 이순신 장군이 살아있다 하여도 결국 선조에 의해 죽음을 맞이하게 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어 일부러 죽음을 택한 것이라고 말한다. 이 말에 부정을 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선조는 이순신을 좋아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백성이 그를 임금인 자신보다 높이 평가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본의 재 침입을 뻔히 예상하면서도 이순신을 파직시키고 대신 원균을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하여 정유재란 초반 칠천량에서 조선의 수군이 궤멸당하게 만든 것이다. 선조는 또한 임진왜란 당시 일어난 이몽학의 난에 의병장 김덕령이 연루되었다고 하여 아무 죄가 없는 천하명장 김덕령을 죽이기까지 했다. 하니 이런 상황을 알고 있는 이순신이 죽음을 택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했다. 하지만 그보다 더 심각한 이유가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것은 바로 당시 재상이었던 유성룡을 선조가 파직하였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이다. 물론 이는 추측이기는 하다. 하지만 당시 기록에 의하면 이순신이 유성룡의 파직 소식을 노량해전을 위해 출전하는 날 아침에 들었다는 것이다. 한양 건천동에서 어린 시절 같이 자랐고, 자신을 정읍현감에서 전라좌수사로 추천하여 오늘에 이르게 한 유성룡을 파직하였다는 이야기를 들은 이순신은 참담하였을 것이다. 그러면서 그는 나라와 백성에 대한 끝없는 애정은 존재하지만 권력과 인간에 대한 문제를 새삼 고민하면서 자신의 삶에 대한 욕구는 상실했는지 모른다. 그래서인가! 그는 갑옷을 벗음으로써 스스로 자신의 삶을 마감했다. 하지만 유성룡은 그러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평생의 삶을 참으로 안타깝지만 모욕으로 마무리하게 되었다. 서인(西人)들은 남인(南人)인 그를 부정축재자로 몰았다. 그의 지혜와 탁월한 역량으로 전란을 극복했지만 권력의 중심부에 있던 세력들은 더 이상 그가 필요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들은 유성룡을 부정축재자로 몰아 조정에서 내쫓았다. 백성들이 그를 지지하여 서인들이 더 이상 그를 탄압하지 못하였지만 유성룡의 비애는 상상할 수 없었을 것이다. 아마도 웬만한 사람이라면 이런 상황에서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거나 아니면 국왕과 조정, 아니 나라 전체에 대해 미련을 버리고 더 이상 세상에 관여하려 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유성룡은 그러지 않았다. 그는 고향으로 낙향한 후 마음을 다잡고 자료를 준비하고 3년 뒤부터 징비록을 쓰기 시작하였다. 그가 붙인 제목인 ‘징비’는 시경(詩經) 소비편(小毖篇)의 ‘예기징이비역환(豫其懲而毖役患)’, 즉 “미리 징계하여 후환을 경계한다”는 구절에서 따온 것이다. 후환을 경계하기 위해 자신의 수모를 딛고 나라를 위해 글을 남긴 것이다. 부끄러움에 대한 기록, 자신들이 저지른 잘못, 전쟁 중에 백성들이 입은 고통 그 모든 것들은 징비록에 담았다. 승전에 대한 기록이 아닌 잘못에 대한 기록을 통해 더 이상 외세의 침입에 고통받지 않기 위한 준비를 해야 한다는 그의 진정성을 보여주었다. 그래서 그는 위대한 인물이다. 그런데 오늘의 우리 사회를 보자! 정치인들과 행정가들은 자신의 권력과 지위를 놓지 않으려 국민들이 보기 민망할 정도로 싸움을 한다. 그들은 유성룡을 이야기하지만 그들의 행위는 유성룡과 너무도 다르다. 어려운 국가 현실을 타개하기 위해 제발 자신들의 이익만을 생각하지 말고 국민 전체를 위한 행동을 해주기 바란다. 그러면 후대 국민들에 의해 기억될 것이다. / 김준혁 한신대 정조교양대학 교수▲ 김준혁 한신대 정조교양대학 교수

2015-09-13 김준혁

신흥무관학교

광복 70주년 기념일인 8·15를 기점으로 영화 ‘암살’이 천만 관객을 넘어섰다. 영화 중 가장 강렬한 인상을 준 인물은 신흥무관학교 출신의 속사포였다. 죽는 순간까지 동지들을 지키며 신흥무관학교 출신임을 자랑스럽게 생각했다. 비록 광복 이후 북으로 넘어가 부수상을 역임해서 독립운동가로 서훈되지 않았지만 영화 속 의열단 단장인 김원봉 역시 우리에게 대단한 인물로 각인되었다. 백범 김구 선생이 창설한 애국단과는 다른 형태의 일본 요인 암살과 폭탄 공격을 감행한 의열단의 핵심 멤버들은 신흥무관학교 출신들이었다. 가장 대표적인 이가 바로 김산(金山)이었다. 신흥무관학교가 있었기에 임시정부와 항일무장투쟁 세력들이 존재할 수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신흥무관학교는 우리나라 항일운동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증거이기도 하다.이런 신흥무관학교는 어떻게 해서 만들어질 수 있었는가? 물론 조국 독립을 원하던 사람들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기는 하지만 특별히 우당 이회영 형제들의 헌신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흔히 삼한 갑족중의 갑족이라 불리는 경주 이씨 집안인 이들은 영의정을 6명이나 배출한 명문가이자 조선 제일의 재산가였다. 이들이 자신들의 지위와 재산을 포기하고 모든 재산을 팔아 압록강을 건너 유하현 삼원보에 정착하고 학교를 설립하였다.이관직의 ‘우당 이회영 실기(實記)’에는 이회영이 형제들에게, “지금 한일합병의 괴변으로 인하여 한반도 산하가 왜적의 것이 되고 말았다. 우리 형제가 당당한 명문 호족으로서 차라리 대의가 있는 곳에 죽을지언정 왜적 치하에서 노예가 되어 생명을 구차히 도모한다면 어찌 짐승과 다르겠는가?”라고 설득했다고 전한다. 이회영은 만주로 이주해 일제와 싸우는 것이 “대한 민족된 신분이요 또 왜적과 혈투하시던 백사(白沙:이항복) 공의 후손된 도리라고 생각한다”면서 함께 만주로 가자고 설득했다. 이회영은 6형제 중 넷째로서 위로 이건영·석영·철영이 있었고 아래로 시영(초대부통령)·호영이 있었다.고종 대 영의정이었던 이유원의 양자로 가서 그의 모든 재산을 물려받은 이석영은 단 한마디의 반대도 없이 자신의 재산을 처분했다. 너무도 급하게 재산을 처분하느라 온전한 값을 받지 못했는데 그 비용이 무려 40만원이었다. 당시 쌀 한 가마가 3원이고 50가마면 좋은 집을 한 채 사던 시절이니 40만원이라는 돈은 실로 어마어마한 돈이었다. 이처럼 많은 돈을 조국 독립에 바친 이석영은 만주땅에서 끝내 영양실조로 굶어 죽고 말았다. 더욱 놀라운 것은 바로 이회영 형제들의 아내와 딸들이었다. 불과 며칠 전만 하더라도 자신이 거느리고 있던 종들이었는데, 우당 형제들이 이들을 신흥학교의 학생으로 입학시켜 독립운동가로 양성하면서 명문가의 마님들이 손수 밥을 짓고 빨래를 하며 학생들을 위해 온갖 헌신을 다 하였다. 이런 헌신이 있었기에 비록 분단으로 인하여 완전한 광복은 이루지 못했지만 온전하게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참으로 기쁜 것은 광복 70주년 기념일인 8월15일에 신흥무관학교 6대 교장을 지낸 필동 임면수 선생의 동상이 수원시민들의 자발적 모금에 의해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역사인물을 발굴하고 현양을 하는 것이 전문 연구자들에 의한 것만이 아니라 시민주도로 이루어진 최초의 일이기에 더욱 뜻깊다 할 수 있다. 이기주의가 팽배하고 공동체성이 사라진 오늘, 아직도 친일파가 청산되지 못하고 거꾸로 그들에 의해 기득권이 유지되는 이 부끄러운 현실에서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다시 되돌아보는 한주가 되었으면 한다./김준혁 한신대 정조교양대학 교수▲ 김준혁 한신대 정조교양대학 교수

2015-08-16 김준혁

망은(忘恩)의 정치

1623년 3월 12일, 조선에 격변이 일어났다. 아니 격변의 주체세력 표현대로 하자면 반정(反正)이 일어난 것이다. 그들이 말한 반정이란 올바른 것을 반대한다는 것이 아니라 올바른 것으로 돌아간다는 것이다. 연산군의 가혹한 횡포로 일어난 중종반정과 달리 이들의 명분은 백성들의 지지를 받지 못했다. 권력을 얻기 위한 그들만의 반정이었기 때문이다.북인 세력들에게 밀려 정치적으로 소외되었던 서인 세력들의 중심 인물인 김류, 최명길 등은 선조의 뒤를 이어 국왕이 된 광해임금이 선조의 적자인 영창대군을 죽이고, 선조의 계비인 인목대비를 폐하였다는 ‘폐모살제(廢母殺弟)’의 잘못을 명분으로 쿠데타를 일으켰다. 그리고 이들은 온갖 부정부패를 자행했던 선조의 5번째 서자 정원군의 아들 능양군을 국왕 인조로 옹립함으로써 새로운 정권을 수립하였다.그런데 인조반정 세력들이 진짜 명분으로 내세운 것은 국왕 광해의 폐모살제가 아닌 망은(忘恩)의 정치 때문이었다. 은혜를 잃어버린 정치를 했다는 광해를 더 이상 국왕으로 받들 수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국왕 광해는 누구에 대한 망은을 한 것인가? 아니 조금 더 쉽게 이야기하자면 누구에 대해 배신을 했다는 것인가?광해의 망은(忘恩), 즉 배신은 바로 명나라에 대한 것이었다. 조선의 사대부들에게 명나라는 모국(母國)이나 마찬가지였다. 임진왜란으로 피폐해진 조선을 회복하기 위해 광해가 취했던 신흥 강대국 후금과 명나라 사이의 중립외교는 조선의 사대부들로서는 받아들일 수 없는 망은이었다. 망해가는 조선이 명나라의 구원으로 겨우 살아났는데 어찌 그 두터운 은혜를 배반하고 오랑캐인 후금과 외교관계를 맺을 수 있느냐며 그들은 분노를 지우지 않았다. 비록 조선이 망한다 하더라도, 아니 조선의 전 백성이 죽는다 하더라도 이들은 후금에 의해서 쓰러져가는 명나라를 위해 조선의 모든 것을 주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것이 바로 하늘 아래 살아가는 조선의 선비가 해야 할 책무라고 그들은 생각했다.명나라가 온전한 하늘인 그들에게 광해의 중립외교는 바로 망은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망은의 정치를 하는 세력을 용서할 수 없었다. 그래서 백성들은 전혀 원하지 않는데 국왕 광해를 왕좌에서 끌어내리고 강화도로 제주도로 유배를 보내 평생 햇빛을 보지 못하게 위리안치(圍籬安置)를 시키고 말았다. 그 결과 조선은 병자호란으로 백성들이 헤아릴 수 없이 죽어 나갔고, 국왕은 끝내 삼전도에서 오랑캐의 우두머리라고 비웃던 청나라 황제 홍타이지에게 항복을 하고 말았다. 그럼에도 그들은 부끄러움을 전혀 모르고 명나라에 대한 사대(事大)만이 진정한 의리라고 강요하고 조선이 망할 때까지 이미 사라지고 없는 명나라에 대한 의리를 지켰다. 그리고 의리를 지키지 않고 자주를 외치는 이들에게 역적의 누명을 씌웠다. 그러는 사이 백성은 죽어 나갔고 나라는 일본의 손아귀에 들어가고 말았다. 그 사대를 외치던 그들은 또다시 새로운 주인 일본에 사대하는 친일파로 변해있었다. 그리고 해방을 맞아 그들은 사대의 DNA를 숨기지 못한 채 다시 새로운 강대국 미국에 사대하기 시작했다. 망은의 정치를 외쳤던 이들이 오히려 나라와 백성들에게 망은과 배신을 한 것이다. 오호통재라! 백성이 진정한 나라의 주인임을 그들은 끝내 몰랐다./김준혁 한신대 정조교양대학 교수▲ 김준혁 한신대 정조교양대학 교수

2015-07-19 김준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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