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인하의 만화세상

 

[박인하의 만화세상] 섬과 섬을 이어가는 소중한 가치

정현종 시인은 두 행으로 끝나는 짧은 시 '섬'에서 이렇게 노래했다. "사람들 사이에 섬이 있다 / 그 섬에 가고 싶다" 시인은 사람들 사이에서 섬이 있다고 했다. 망망한 바다에 홀로 떠있는 섬. 사람과 사람 사이에 섬이 있는데 우리는 무심하다. 때론 그 섬들은 사람들 사이에서 완전히 추방되고, 고립된다. 이 섬의 이름은 장기 농성장이다. 김선수 변호사는 "이 고립된 섬들은 21세기 대한민국의 민낯이자 가장 아픈 곳들"이라 부른다. 만화가와 르포 작가들이 짝을 이뤄 장기농성장을 찾았다. 그들은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현장을 살펴 만화를 그리고 글을 썼다. 그들은 섬과 섬을 이어보자고 한다. 감성적이면서 힘이 있는 주장이다. 2014년 첫 번째 권이 출간되었고, 2015년 12월 두 번째 권이 나왔다. '섬과 섬을 잇다 2'에서는 총 다섯 곳의 섬이 나온다. 광화문 지하보도에서 3년째 자리를 지키는 '장애인 등급제와 부양의무제 폐지'를 주장하는 농성현장. 민주노조에 가입한 조합원에게 의도적으로 안전상태가 의심스러운 차로 장거리 코스에 배치하는 전주버스, 싼값에 산 회사를 비싸게 팔기 위해 희망퇴직을 권하는 사측에 맞서 1년이 넘게 굴뚝에 올라가있는 스타케미칼, 문자 하나로 해직되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다시 회사로 돌아가기 위해 10년 동안 싸움을 이어가는 기륭전자, 심야노동폐지라는 단순한 요구로 시작해 5년 넘게 이어진 유성기업. 신문 기사나 소셜 미디어에서 공유된 글에서 한번쯤 본 것 같은 낯익은 섬들이다. 다섯 곳의 섬을 찾아간 만화가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섬을 찾아간다. 장애등급제, 부양의무제 폐지서명을 받는 광화문 지하를 찾은 앙꼬는 섬뜩한 직관으로 서명운동현장을 스쳐가는 이들을 멀리 관찰한 뒤 카메라 앞으로 불러내 인터뷰를 한다. 평범한 이들을 인터뷰한 중간에 2014년 4월 17일 화재로 사망한 송국현 씨 에피소드를 넣었다. 전주지역 버스 노조를 찾아간 조남준은 충실하게 현장의 사정을 전달한다. 최악의 노동환경을 벗어나기 위해 파업을 했고, 736일만에 파업을 끝내고 업무에 복귀했지만 회사는 낡은 차로 가장 힘든 구간을 운행하게 하고 헤고 작은 트집으로 해고를 통지한다. 2천500억 들어간 공장을 400억 헐값에 인수하고 2년 만에 공장 문을 닫았다. 하루아침에 일자리를 잃은 노동자들은 굴뚝에 올랐다. 원혜진은 굴뚝에 오른 '스타케미칼' 해고노동자 차광호의 이야기를 그렸다. 주호민은 기륭전자 해고노동자들의 이야기를 대화형식으로 풀어갔다. 최규석은 노조를 파괴하는 '유성기업지회'의 사례를 극화로 구성했다. 만화가 채 담지 못한 현장의 자세한 이야기는 강혜민, 송기역, 유영자, 연정, 송경동의 르포기사가 다룬다. 만화는 치열한 현장을 옮기는데 적합하다. 작가 1인이 맨몸으로 현장에 다가가 그곳의 이야기를 기록할 수 있다. 현장을 경험하고, 시각적으로 풀어낼 수 있으니 글보다 효과적이다. '내가 살던 용산'(2010년) 이후 현장을 찾아가는 완성한 작품들이 꽤 늘어났다. 만화라는 매체를 빌려 고립된 이들에게 다가가고, 은폐된 진실을 드러내는 뜻깊은 작업이다. 그 중에서도 고립된 투쟁의 현장을 이어가는 '섬섬프로젝트'는 연속성에 있어서나, 이 탐욕의 시대에 꼭 필요한 연대를 위해서나 소중한 결과물이다./박인하 청강문화산업대학교 만화창작전공 교수박인하 청강문화산업대학교 만화창작전공 교수

2016-01-24 박인하

[박인하의 만화세상] 엄마와 딸, 다시 엄마와 딸로 이어지는 상처의 고리

일본 만화에는 ‘에세이 만화’라는 구분이 있다. 명칭 그대로 장르의 틀 안에서 서사가 진행되는 ‘장르 만화’와 다른, 작가 개인의 이야기를 담은 만화를 ‘에세이 만화’라고 부른다. 1990년대 이후 주로 일본의 장르 만화가 번역, 소개되다가 최근 몇년 사이에 에세이 만화도 번역되는 중인데, 에세이 만화는 만화잡지뿐만 아니라 일반 잡지에도 연재되고 있다. 에세이 만화는 여성 작가와 여성 독자들의 비중이 높다. 우리나라에 수입되어 많은 사랑을 받은 마스다 미리도 여성 만화가다. 마스다 미리 만화가 히트하자, 다른 에세이 만화들도 출간되는데, 마스다 미리의 만화만큼 알려지지는 않았다. 에세이 만화는 음식이나 여행·패션·뷰티처럼 세부 주제에 집중하는 만화와 삶의 전반적 이야기를 담아내는 만화로 나뉜다. 우리나라에서는 세부 주제를 설명하는 만화보다는 마스다 미리의 만화처럼 ‘지금 이대로 괜찮은 걸까?’라며 자신의 삶을 드러내는 공감형 만화가 독자들에게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 마스다 미리 만화가 여성의 일상에 대한 에세이 만화였다면, ‘그래도, 우리 엄마’는 ‘엄마와 딸’로 묶인 여성에 대해 생각하게 해 보는 에세이 만화다.다케시마 나미 ‘그래도, 우리 엄마’는 2014년 1월에 일본에서 출간된 ‘저는 나쁜 엄마입니다(私がダメ母だったわけ)’를 6월에 (발 빠르게) 번역한 책이다. 우리나라에는 통 안 알려졌는데, 읽으면 읽을수록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드는 솔직한 만화다. 작가는 프롤로그에서 자신이 무척 낯을 가리지만, 낯가리는 걸 티 내지 않으려 애를 쓰는 사람이라 소개한다. 그래서 사람을 만나기 전에 엄청 긴장하고, 타인에게 자신의 의견을 말하지 못하고, 심지어 전화도 제대로 걸지 못한다 고백한다. 그리고 32년간 성실하고 착한 딸이었지만, 아이를 키우며 인생 최대의 위기를 맞이했다고 고백하고 이 만화가 ‘나쁜엄마 극복기’라고 설명한다. 아이를 낳아 육아를 시작하는데, 순간순간 아이에게 짜증을 낸다. 힘들어 짜증을 낼 수 있다고 다들 말하지만 작가는 자신의 짜증이 뭔가가 다르다고 생각한다. 심지어 “틀림없이, 분명히 애정이 있는데 대체 왜 짜증을 내고 마는지 계속 자책”도 한다. 아이와 함께 노는 것도 힘들고, 매일 밤 딸 아이에게 그림책을 읽어주는 것도 역시 힘들기만 하다. 그러던 중 배변훈련을 하다가, 실수를 한 딸 아이에게 짜증을 내고 만다. 어느 날 자신의 눈치를 보는 딸 아이의 모습을 마주한다. 그리고 딸 아이에게서 어린 시절 자신의 모습을 발견한다. 작가는 자기 마음 속에 응어리진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어린 시절을 회상한다. 늘 화를 내던 엄마, 자식들에게 과도한 애정을 표현하고, 엄마에게는 폭력적인 아빠. 그리고 그 안에서 자라며 상처를 받은 자신의 유년시절을 담담하게 고백한다. 작가는 엄마가 되어 자식을 기르며 기억 저편에 밀쳐놓았던 유년시절과 엄마를 직시한다. 작가는 짜증내는 엄마에 대한 기억을 중심으로 유년시절을 돌아본다. 하지만 ‘그래도, 우리 엄마’는 엄마와 딸의 관계회복을 그린 만화가 아니다. 엄마와 딸, 다시 엄마와 딸로 상처의 고리가 이어지고 있음을 드러낸 만화다. 장르 만화처럼 멋진 클리이맥스는 없지만, 함께 고민해야 할 화두는 충분하다./박인하 청강문화산업대학교 만화창작전공 교수박인하 청강문화산업대학교 만화창작전공 교수

2015-12-27 박인하

[박인하의 만화세상] 삶을 돌아본다는 것

얼마 전 우편물을 뜯어 보고 깜짝 놀랐다. 1977년부터 1993년까지 월간지 ‘여성중앙’에 매달 4쪽씩 연재된 ‘와이프행진곡’ 전체를 묶은 두툼한 만화였다. 표지에는 금혼식 기념만화라고 적혀있었다. 박수동 작가가 결혼 50주년을 기념해 책을 묶었다. 매월 독자들을 울고 웃겼던, 작가의 표현대로 “자식 키우고 살림하고 남편 뒷바라지 하는 인생살이 만화”가 고운 옷을 입고 나타났다. 무려 17년간 연재되었으니 달동네 문간방에서 시작한 신혼부부는 아파트 전세를 거쳐, 1985년에 15평 아파트에 입주한다. 1988년 어린이날에는 ‘마이카’를 구입하고, 매번 승진에서 탈락한 남편은 1990년 10월 ‘드디어’ 차장으로 승진한다. 연재하는 동안 독자들이 바뀌기는 했어도, 작가는 작품과 함께 나이를 먹었을 터이니 연재분 전체를 묶은 ‘와이프행진곡’안에는 시대의 삶의 기억과 시간이 녹아있다. ‘와이프행진곡’은 ‘신혼행진곡’으로 연재된 막 결혼한 신혼 부부의 문간방 셋집에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젊은 남녀의 밀고 당기는 신혼생활 사이로 가끔은 처연한 생활을 드러낸다. 너무 더운 여름날, 부엌에 다라이를 놓고 물을 받아 들어가 있으니 대번에 주인집 아주머니가 말한다. “수도물 아껴써요. 지난 달에 수도값이 8천원이 넘게 나왔어!” 이런 구박 끝에 억울해 적금타면 마이홈으로 가자고 이야기하자 아내가 말한다. “코딱지만한 집도 천만원이 다 넘어요.” 남편이 손가락으로 계산해 보니 “2년에 100만원씩 모은다치고 1천만원이면 20년”이 걸린다고 말한다. 아내는 “20년동안 집 값은 가만히 있는가요?”라고 소리 지르고, 남편도 “왜 나같은 놈에게 시집”왔냐고 화를 낸다. 둘은 울며 화해하고, ‘아마 날씨 탓인가 봅니다. 신랑도 울고 각시도 한참 울었습니다’는 내레이션이 깔린다. 문간방 에피소드 뿐만이 아니다. 승진을 위한 남편의 노력, 새벽 3시에 일어나 연탄불 갈기와 같은 오래전 풍경에서 시작해 최근 이야기까지 우리가 알고 있는 시대의 이야기가 구슬픈 엘레지처럼 깔려있다. 물론 당대에 사회적으로 규정된 성 역할에 충실한 중산층 가정이 구성된다. 하지만 그 시대의 다른 작품들이 아무런 문제의식 없이 묘사하는 남자의 의식이나 행동이 자주 소재로 활용해 반성하는 남자를 그린다. 어린이 만화의 걸작 ‘번데기야구단’은 평범하고 가난한 ‘번데기동’의 어린이들이 구성한 야구단 이야기다. ‘효자물꽁’이란 에피소드는 시장에 좌판을 펼친 어머니 대신 동생들을 돌보는 물꽁의 이야기가 나온다. 그 시대에 이처럼 처연하게 가난을 정면에서 마주한 작품을 난 아직도 보지 못했다. 명랑만화에서도 ‘가난한 골목’을 외면하지 않았던 작가라서, 남자의 반성을 만화에 담아낼 수 있었던 것이라 생각한다. 더불어 당대의 다른 성인만화에서 흔히 활용되는 대상화된 여성이 아니라 오히려 욕망하는 여성이 나온다. 그래서 ‘와이프행진곡’은 시대의 증언이다. ‘와이프행진곡’에 담긴 1977년에서 1994년이 우리에게 어떤 말을 걸고 있는 것인가?‘와이프행진곡’은 박수동 작가가 금혼식을 기념해 직접 출간했다. 보고 싶어도 구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이런 만화를 서점에서 언제라도 살 수 있는 환경이 될 때 우리는 만화문화를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박인하 청강문화산업대학교 만화창작전공 교수박인하 청강문화산업대학교 만화창작전공 교수

2015-11-29 박인하

[박인하의 만화세상] 우리를 만든 건 첫사랑의 힘

갑자기 추워졌다. 새벽에 일어나면 서리가 내린다. 채 걷지 못했던 고추는 붉은 열매만을 남기고 말라붙었다. 추운 겨울을 맞이하려는 마음으로 아꼈던 다니구치 지로의 ‘겨울동물원’을 보았다. 이 겨울에 어울리는 만화다. 고등학교 졸업 후 고향 돗토리에서 교토로 이주해 직장을 다니던 주인공 하마구치 미쓰오는 의도치않게 사장 딸의 사랑의 도피를 돕게 된다. 도쿄에서 신문배달하며 야간 디자인학교에 다니는 친구 다무라에게 난처한 상황을 털어놓았더니, 상경해 인기 만화 곤도 선생의 화실에서 일하기를 권한다. 도쿄에 온 첫날부터 곤도 선생의 마감에 동참하게 된 하마구치. 그렇게 만화가의 길을 걷게 된다.다니구치 지로가 등장하는 자전만화는 아니지만, 자전만화로 읽힌다. 다니구치 지로도 돗토리의 상업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교토의 섬유회사에서 근무하다, 도쿄로 상경해 잡지 ‘만화소년’ 등에 만화를 연재한 이시카와 큐타(石川球太)의 어시스턴트로 만화계에 발을 딛는다.‘겨울동물원’은 중의적 제목인데, 동물원은 주인공 하마구치가 즐겨 찾으며 동물을 그리던 곳이고, 교토 섬유회사 사장의 딸이 유부남 연인을 따라 도망간 곳이며, 마지막으로 아픈 연인과 데이트를 하던 곳이기도 하다. 사랑의 사정은 모르겠지만, 적어도 동물을 즐겨 그렸던 건 분명하다. ‘겨울동물원’의 주인공 하마구치와 작가 다니구치의 삶의 여정의 큰 줄기는 동일하다. 디테일도 대부분 경험에서 나왔을 것으로 보인다. 60년대 후반 새로운 만화를 내세운 잡지 ‘가로’와 ‘COM’이 등장하고, 쯔게 요시하루의 ‘나사식(ねじ式)’을 보며 충격을 받은 만화가들의 분위기와 매주 정신없이 마감을 하는 주간소년잡지의 풍경도 생생하다. 일본의 학생운동이 가장 격렬하던 시대의 풍경도 얼핏 보여준다. 가부키초 뒷골목 지하의 스낵바에 모인 이들은 혁명의 노래를 부른다. “찢어라! 부숴라! 혁명전사!” 힘이 넘치는 60년대 후반 일본만화의 풍경을 만나는 것도 흥미롭지만,‘겨울동물원’의 진짜 재미는 첫 사랑의 풋풋한 이야기다. 하마구치는 지인의 부탁으로 도쿄에 요양온 마리와 데이트 아닌 데이트를 하게 된다. 마리와 데이트를 통해 그동안 구상만 하던 만화를 완성하게 된다. 첫사랑의 떨리는 감성으로 완성한 만화는 데뷔작이 된다. 요양 온 소녀와 데이트, 그리고 건강이 안좋아 고향으로 내려가는 소녀와 그 소녀를 잊지 못하는 소년. 상투적인 이야기지만 다니구치 지로는 시대와 공간과 만화를 그리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넣어 생생하게 만들었다. 특히 갑자기 고향으로 떠난 그녀를 잊지 못하고, 원고를 보여주고 싶어 몰입하는 하마구치의 모습 위로 깔리는 1인칭 내레이션을 따라가다 보면 마치 내가 하마구치가 된 듯 몰입감이 뛰어나다. 마침내 원고를 완성하고 그녀의 언니에게 부탁해 원고를 그녀에게 보낸다.“나는 그녀에게 진심으로 감사했다. 그녀는 내게 가르쳐 주었다. 만화를 그리는 즐거움과 이야기를 만드는 기쁨을.” / 소년은 기차를 타고 그녀를 만나러 간다. 병원을 찾아 야윈, 하지만 여전히 예쁜 소녀를 만난다. 소년은 마음을 쉬 전하지 못한다. 소년은 소녀를 끌어안고 말한다. / “좋아해!”‘겨울동물원’의 띠지에 ‘거장 다니구치 지로를 만든 것은 사랑이었다!’고 써있다. 어디 다니구지 지로 뿐이랴. 나도 그렇고, 당신도 그럴 것이다. 이 겨울에 그 사랑을 추억해 보자./박인하 청강문화산업대학교 만화창작전공 교수박인하 청강문화산업대학교 만화창작전공 교수

2015-11-01 박인하

이런 군대여야 할까?

2014년 한 해 동안 세계에서 지출한 군비는 1조7천760억 달러이고, 이는 세계 GDP(국내총생산량)의 약 2.3%에 해당한다(스톡홀름국제평화문제연구소). 세계 모든 나라가 같은 돈을 군비로 사용하는 건 아니지만, 부자 나라는 부자 나라대로, 가난한 나라는 가난한 나라대로 많은 돈을 들여 군대를 유지하고 있다. 우리나라도 10번째 군비지출국이며, 세계에서 몇 안되는 징병제 국가 중 하나다. 심지어 현대사의 상당기간을 군사정권 아래에서 보냈다. 그러다 보니 우리나라의 많은 시민들은 “군사적 가치들을 택하여 그 자체를 더 중요하게 여기며, 군사적인 해결 방식을 각별히 효율적이라 생각하고, 군사적 태도로 접근하는 것을 최선으로 여겨 세상을 위험한 곳”으로 보도록 군사화되어있다.(신시아 인로 <군사주의는 어떻게 패션이 되었을까>, 바다, 2015) 군사화된 대한민국은 법과 토론에 의한 문제해결 방식보다는 힘과 위계에 의한 문제해결이 우선된다. 사회에서도 마치 군대처럼 말이다. 최경민의 <아무 것도 변하지 않았다>는 제목처럼 변하지 않은 군대에 대한 자기고백의 보고서다. 작가는 “부조리를 전통이라 배우고, 보잘 것 없는 내무실 권력을 뺏기지 않으려 또래 후임들에게 폭력”을 가한 과거를 고백한다. 만화는 이제 막 자대 배치를 받은 기두식 이병의 1인칭 시점으로 전개된다. 휴식해야 할 일요일 기두식 이병이 속한 소대는 구 면회실에 모여있다. 구타는 부대 고참인 남상엽 병장부터 시작해 아래로 내려온다. 구타의 이유는 간단하다. 남 병장이 천주교 종교행사에서 나오는 피자를 가져오라고 명령했는데, 눈치 없는 정병수 이병이 한 조각 나온 피자를 먹어버렸기 때문이다. 이 말도 안되는 일이 벌어지는 곳이 바로 작가가 경험한 군대다. 작가가 경험한(만화에서는 두식이 들어간) 부대는 효율성을 내세우며 계급에 의한 폭력과 억압으로 굴러간다. 소대라는 작은 조직 안에서 폭력은 끊임 없이 대물림된다. 두식도 폭력에 익숙해지고, 정당성을 부여한다. 단, 눈치 없고 행동이 굼뜬 두식의 동기 병수만 익숙해 지지 못한다. 타부대에서 총기난사 사건이 벌어지자 모든 부대의 실태를 조사하고, 병수의 증언으로 두식과 선임병들은 모두 영창에 간다. 기두식은 “수많은 생각과 감정이 교차되던 그때, 나는 정병수를 원망했다”고 회고한다. 이 만화의 진짜 가치는 군대폭력의 고발이 아니라 후일담에 있다.두식이 제대하고 2년이 지난 뒤 후배들이 군대에 가는 자리에서 술자리에서 자신의 경험담을 말하며 “그냥 시키는대로, 흘러가는 대로 흐름에 몸을 맡기라고 충고한다. 삶의 지혜를 전해준듯 뿌듯해 하는 두식에게 여자 후배가 묻는다. “군대 갔다 오면 다 그러나요?” 두식은 더 큰 소리로 “야, 군대 가봤어? 다 그렇게 하는 거야. 맞고 때리고 그만큼 챙겨주고. 다 서로 잘 되자고 하는 거야”라고 자신을 정당화한다. 후배는 다시 “맞는 사람은 그렇게 생각 안 할걸요?”라고 반문한다. 두식은 ‘뭘 안다고 이러지?’라는 마음으로 “단체생활에서 남한테 피해만 주고 못 따라온 게 비정상이야!”라고 자신의 정당함을 설교한다. 후배는 “비정상은 사람이 아니라 환경이죠”라고 못 박는다. 이 후일담 에피소드는 군사화된 우리 사회를 드러낸다. 작가의 말처럼 “비겁한 생존을 체험”한 우리는 사회에 만연한 군사적 가치들에 정당성을 부여한다. 우리는 ‘군대가 과연 필요할까?’라는 질문을 감히 하지 못한다. 이미 우리 사회가 군사화 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 만화는 우리에게 묻는다. “군대가 필요할까?” 이 질문이 부담스럽다면, “이런 군대여야 할까?”정도라도 다시 생각해 보자./박인하 청강문화산업대학교 만화창작전공 교수박인하 청강문화산업대학교 만화창작전공 교수

2015-10-04 박인하

주거·직장·가족·연애를 포기하고 살아남기

나인 투 파이브의 고용이 사라진 자리에 젊은이들은 카페에서 일한 뒤 심야극장에서 맥주를 마시며 자기를 위로한다. 낯설지 않게 한국의 오늘이 떠오르지만, 브루클린의 창문도 없는 작은 방에 사는 20대 줄리아 워츠의 삶이다. 줄리아 워츠는 2005년 웹 사이트를 개설하고 만화를 발표한다. D.C와 마블 같은 미국의 주류 만화 시스템에 편입되지 않고, 인터넷을 통해 자신의 이야기를 드러내는 독립작가의 길을 선택한 것이다. 자신을 가감없이 드러내고, 때론 스스로를 풍자하는 줄리아 워츠의 유머러스한 만화는 웹에서 인기를 얻은 뒤 2007년 ‘방귀 파티(Fart Party)’ 1권, 2009년 2권이 출간된다. 후속작 ‘뉴욕에서 살아남기(Drinking at the Movies)’는 2010년 미국의 대형 출판사인 랜덤하우스에서 출간되었고, 2011년 아이스너상 후보에 오를 정도로 호평을 받는다.‘뉴욕에서 살아남기’는 2007년 ‘방귀파티’ 1권을 출판한 뒤 고향인 샌프란시스코를 떠나 문화의 중심(이라고 이야기하는) 뉴욕에 이주해 아르바이트와 후속작업을 하던 시기의 이야기다. 어느 작품에서도 볼 수 없었던 뉴욕과 젊은이들의 솔직한 일상은 기묘하게 7년이 지난 우리나라 젊은이들의 삶과 겹쳐진다.정장을 잘 차려입은 월 스트리트의 직장인들과 브루클린의 힙스터들이 함께하는 뉴욕. 만화를 그리는 스물다섯 줄리아 워츠의 뉴욕은 고단한 생활의 현장이다. 비싼 집세에 집을 옮겨야 하고 겨우 구한 아르바이트 자리에서 하루아침에 쫓겨나며, 거리에서는 노숙인들이 치근거린다. 퇴근 후 집으로 돌아오니 도둑이 집안을 엉망으로 만들어 놓기도 했다. 신고해 봐야 경찰은 수개월 후에나 올 터이니 포기. 고단한 생활, 음주와 후회가 교차하는 그녀의 뉴욕 생활기는 그리 낯설지 않다. 옮긴이의 말처럼 “지금의 우리도 경험했고, 경험하는 이야기들이기 때문”이다. 2008년 새벽 3시 뉴욕 브루클린의 24시간 빨래방에서 파자마 차림으로 크래커를 씹다가 정신을 차린 스물다섯 번째 생일 밤에서부터 이야기가 시작된다. 2007년 봄 대학을 갓 졸업하고 주거, 직장, 가족, 연애에서 모두 스트레스를 받던 줄리아 워츠는 충동적으로 뉴욕으로 이주를 결심한다. 버락 오바마가 대통령 선거 출마를 발표하던 그 때, 스탠바이 티켓(빈좌석이 있을 경우 예약 가능)으로 며칠에 걸려 뉴욕에 도착한다. 뭔가 다를 줄 알았던 뉴욕에서의 사정도 마찬가지였다. 주거는 여전히 취약했고, 직장은 아르바이트를 전전했으며, 마약 중독을 치료하는 오빠가 다시 약을 먹었다는 소식이 전해졌고, 연애는 꿈도 꾸지 못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만화는 시종일관 유쾌하게 전개된다. 우울한 이야기를 할 때도 농담을 한다. 칸 안이 너무 심각하면 칸 바깥에서 농담을 건넨다. “나는 얼간이고 한심한 인생이라고.” 이야기는 만화가 시작한 2008년 새벽 3시 아무도 없는 빨래방으로 돌아온다. 아무 것도 변한 것이 없고, 절망의 틈에서 술에 의존하지만 유머는 잃지 않는다. 마지막 화 ‘만약 그때 알았다면 좋았을 것들’에서 2009년 전업작가로 나서면서 앞치마를 벗고, 술을 끊었다고 말한다. 새 아빠의 암은 나아지고, 오빠도 약을 참고 있다. “마침내 어른 될 준비가 됐다”고 내레이션이 설명하자, 만화의 주인공이 묻는다. “오, 정말 그렇게 생각한다고?” 마지막 칸에서 스스로 대답한다. “글쎄, 뭐 나름대로….” 많은 젊은이들의 삶이 줄리아 워츠의 삶과 비슷하다. 자기가 하고 싶은 무언가를 선택하는 젊은이들이 늘고 있다. 그리고 줄리아 워츠는 아직 작가로 살아가고 있다./ 박인하 청강문화산업대학교 만화창작전공 교수▲ 박인하 청강문화산업대학교 만화창작전공 교수

2015-08-30 박인하

음식은 일상에서 나온다, 유쾌한 음식만화

나폴리탄 스파게티, 시칠리아 피자, 미네스트로네, 파니노가 나오는 음식만화다. 아니, 더 중요한 건 야마자키 마리의 만화다. 스스로 ‘유목민형 만화가’라고 자신을 소개하는 작가는 14세에 독일과 프랑스를 여행했고 그때 알게 된 도예가 할아버지의 초청을 받아 17세에 이탈리아로 그림을 배우러 떠난다. 하지만 도예가 할아버지가 돌아가실 때까지 다시 만나지 못한다. 15년이 지난 뒤, 작가 대신 마르코 할아버지와 그 가족과 친하게 지냈던 어머니의 권유로 할아버지 딸네 집에 방문했다가 할아버지의 손자이자 14살 어린 이탈리아 남자와 결혼해 이집트, 시리아, 이탈리아, 포르투갈, 미국 등 여러 나라에서 살게 된다. 작가 야마자키 마리의 독특한 삶의 여정에서 먹고 사는 문제인 동시에 특정 지역에 대한 문화적 경험이며 때론 문화적 충돌이기도 하다. 그래서 요리와 음식이 일상과 밀착되어 존재한다. 만화는 작가가 유학과 결혼생활로 오래 머문 이탈리아를 중심으로 전개된다. 거기에 일식이 첨가되고, 과거의 경험이 맞물리며 포르투갈이나 브라질 등의 에피소드가 추가된다. 초반 2개의 에피소드는 예상할 수 있는 내용이다. 일본에서 가장 익숙한 나폴리탄 스파게티와 작가가 유학간 이탈리아 나폴리에서 항상 먹는 아마트리치아나 스파게티는 전혀 다른 레시피와 모양과 맛을 하고 있다. 이탈리아의 대표 음식 피자도 시칠리아와 나폴리의 것이 전혀 다르게 생겼다. 인터넷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이런 접근은 이 만화만의 장점이 아니다. 3화부터는 더 노골적으로 일상을 소환한다. 작가가 유학 갔던 1990년대 초반은 일본이 버블경제의 절정기를 구가하던 시절. 멋지게 차려입은 여성들이 명품 쇼핑백을 들고 이탈리아를 활보한다. 그러나 작가는 늘 빈곤하다. 공교롭게 함께 살던 4명이 모두 무일푼이 되자, 작가는 거리에 나가 초상화를 그려 돈을 번다. 값싸고 배부르게 먹을 용도로 여러 채소를 사 2차 대전 때 먹었음직한 미네스트로네를 끓인다. “몸도 마음도 훈훈”해지자마자 전기세를 못내 전기가 끊긴다. 네 명의 친구들은 맞은편 집의 불빛을 배경으로 미네스트로네를 먹는다. 일본식 바삭한 돈카츠를 먹기 위해 빵가루가 필요하다. 작가는 빵을 잘게 쪼개 햇볕에 말렸는데, 잠깐 쉬다 나와보니 함께 사는 이탈리아 친구가 잘게 찢은 빵이 들어간 토스카식 샐러드 판자넬라를 만드는 데 사용해 버린 뒤였다. 유학 시절의 경험 뿐만 아니라 이탈리아 시댁에서의 경험도 흥미롭다. ‘식사는 하셨어요?’는 음식을 요리해 먹는 에피소드를 아주 흥미로운 작가의 독특한 일상에서 불러낸다. 요리와 음식은 그 자체로 고고하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늘 일상의 어느 기억과 맞물리며 의미를 얻는다. 그런데 작가가 보여주는 일상은 ‘우리 어머니의 손맛’과 같은 약간은 상투적인 수사를 피하고 가난뱅이 유학시절, 무지막지하게 먹어대는 이탈리아의 명절, 휴가를 떠났던 알프스산에서 조난 당했던 기억 등을 불러낸다. 일상에는 늘 음식이 있으니까. 이런 생생한 경험은 캐릭터의 능숙한 표정연기와 재치 넘치는 대사와 내레이션과 함께 유쾌하게 전개된다. 모두 17개의 에피소드가 들어있고, 소개한 음식의 레시피가 함께 수록되어있다./박인하 청강문화산업대학교 만화창작전공 교수▲ 박인하 청강문화산업대학교 만화창작전공 교수

2015-07-05 박인하

고령화 사회 우리 부모님의 이야기

‘우리 부모님’은 스웨덴에서 노인과 장애인에게 도움을 주는 도우미센터에서 근무하는 간호보조사들의 이야기를 축으로 인생의 황혼을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은 만화다. 나이를 먹어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 노인들을 위해 도우미센터를 운영하고, 이곳에 근무하는 도우미들이 집을 방문해 식사, 목욕 등 일상생활에 도움을 준다. 이 만화는 스웨덴 세인트보딜 도우미센터에 근무하는 펠레의 도움을 받는 노인들과 노인을 둘러싼 가족들의 이야기를 다룬 8개의 짧은 에피소드로 구성되어있다. 한쪽을 직사각형의 4칸으로 구분하는 서구만화의 정형적 연출을 사용하는데, 이런 연출은 칸 안의 내용에 집중하게 한다. 간략한 그림 스타일이지만, 정확하게 인물의 특징을 묘사하고 있어 역시 독해에 효율적이다. 형식이 내용을 끌어가는 것을 최대한 배제하고, 내용에 집중하도록 한다. 주인공인 펠레는 작가의 이름이다. 작가는 한국 독자들에게 보내는 글에서 “2000년대 초반 홈케어 서비스 직업에 종사하고 있을 당시 나는 노인을 돌보는 일과 나이 들어가는 삶에 대해 여러 가지 생각을 하게 되었고 또 그에 대해 많은 경험을 했습니다”고 밝힌다. 자신의 경험에서 이야기를 끌어냈는데, 이런 자전적 이야기는 자칫하면 경험에만 집중하게 된다. 하지만 ‘우리 부모님’은 개인(작가이자 만화의 화자인 펠레)의 경험에서 더 나아가 노인과 가족, 그리고 홈케어 시스템의 문제에 접근하고 있다. 펠레는 매일 여러 노인의 집을 방문해 그들을 돌본다. 가장 당혹스러운 건 가족들이다. 구넬 할머니의 딸 아니카는 펠레가 준비한 버섯 요리가 “보기만 해도 밥맛이 뚝뚝 떨어지는 음식”이라며 자신이 해 온 소고기 스튜를 드린다. 두 번째 숟가락을 삼키던 할머니 목에 소고기가 걸리고, 펠레의 응급처치로 문제가 해결되었다. 음식을 먹여준 건 딸이었지만, 아니카는 펠레의 근무태만을 센터에 신고한다. 한 주가 지난 후 신문에 “학대받는 어머니”라는 기사가 나온다. 기사의 요지는 맞지만 틀리다. 펠레의 입장과 구넬 할머니의 딸 아니카의 입장에서는 각자의 주장이 맞고, 타인의 주장이 틀리다. 그러던 중 구넬 할머니가 돌아가신다. 도우미 펠레, 구넬 할머니, 할머니의 아들 오케와 딸 아니카. 할머니의 죽음을 둘러싼 갈등은 오케가 펠레를 감시하기 위해 숨겨놓은 카메라에 찍힌 의외의 장면으로 쉽게 해결된다. 첫 화 ‘가족’편을 보면 노인을 돌보는 도우미와 그 가족의 갈등이 이야기의 중심일 것으로 생각한다. 하지만 만화는 노인케어 시스템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의 문제로 나아간다. ‘끓는 물’편에서는 펠레가 돌보는 엘린 할머니의 오래 묵은 트라우마를, ‘잉그마르’편에서는 잉그마르 할아버지의 집착에 대해, ‘장례식’편에서는 죽음을 마주하는 어린이들의 이야기를 그린다. 심지어 ‘마스팔로마스’편에서는 ‘가족’편에 나오는 중년 오케를 통해 중년의 무력함과 내면의 갈등을 보여준다. 마지막 에피소드 ‘블랙&화이트’편은 누워있는 노인이 바라보는 1인칭 시점을 잡아낸다. 노인문제의 본질은 노인 그 자신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마무리다. 먼 나라 이야기처럼 보이지만, 노인 문제는 우리의 발등에 떨어진 불이다. 그래서 ‘우리 부모님’의 이야기다./박인하 청강문화산업대학교 만화창작전공 교수▲ 박인하 청강문화산업대학교 만화창작전공 교수

2015-06-07 박인하

아랍의 과거에서 바라본 오늘의 아랍

아랍의 오늘은 당혹스럽다. 아랍이란 공간에 대해 학교에 다니며 배운 것이라곤 사막과 석유에 불과했다. 그것도 1970년대 근로 역군들이 해외진출한 열사의 땅으로 알려졌을 뿐이다. 그런 중동이 공포의 모습으로 변화한 것은 민항기를 납치해 세계무역센터빌딩에 충돌한 9·11 테러부터였다. 유유자적 터번을 두르고 느릿하게 낙타를 타고 이동하는 대상이 폭탄을 온몸에 두른 테러범이 됐다. 탈레반, 알케에다와 같은 낯선 이름이 뉴스에 자주 등장했고, 시아파와 수니파 같은 이슬람 종파도 알게 됐다. 하지만 예전에 중동이라 부르던, 구체적으로 서아시아와 북아프리카 지역에 대한 우리의 지식은 여전히 평면적이다. 이 지역을 흔히 인종적으로는 아랍, 종교적으로는 이슬람이라 생각하지만, 인종적으로 볼 때 아랍계·투르크계·페르시아계·유태계가 살고 있고, 종교적으로 기독교·유대교가 섞여 있다.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 문명이 시작된 곳이며, 인종·종교·언어·역사적으로 수많은 다양성이 존재하는 곳이다. 리아드 사투프의 <미래의 아랍인>은 복잡한 맥락의 서아시아와 북아프리카 지역 중에서도 아랍어가 공용어인 리비아와 시리아에서 보낸 유년시절 이야기다. 1980년 프랑스에서 태어난 만 두 살 금발 소년 리아드는 시리아 수니파 집안에서 태어나 프랑스 소르본 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받은 아버지를 따라 아랍으로 간다. 리아드가 건너간 리비아와 시리아는 카다피와 하페즈 알아사드의 초상화로 가득 찬 독재국가였다. 1969년 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한 카다피는 종일 텔레비전에 나왔고, 사람들은 카다피가 쓴 ‘그린북’을 삶의 지침으로 삼았다. 창문 밖 공사장이 2년 동안 아무런 변화가 없다는 걸 깨달은 1982년, 리아드 가족은 아랍 인민의 나라 리비아를 떠나 프랑스로 돌아갔다. 그리고 얼마 뒤 1971년부터 전투기 조종사 출신 하페즈 알아사드가 통치하며 이스라엘과 전쟁 중인 시리아로 이주한다. 시리아의 공항에서 마주한 건 콧수염을 기른 하페즈 알아사드의 초상화였고, 오래도록 프랑스에서 공부하느라 군대에 가지 않은 아빠 문제는 달러 몇 장으로 해결했다. 이후 초등학교에도 들어가지 않은 리아드의 시선을 통해 완고한 아랍의 전통과 독재의 풍광이 뒤섞인 시리아의 모습을 그려낸다. 리아드의 시선은 아랍에서 벌어지는 일들에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는다. 그냥 바라보고, 지나간다. 1978년에 태어나 1980년 아랍으로 건너간 리아드 사투프는 30년이 지난 뒤 담담하게 어린 시절을 회상한다. 아주 세세한 전통과 풍광, 심지어 굴러다니는 쓰레기 하나와 냄새까지 만화에 담아내는 섬세함은 이 책의 장점이다. 특히 시리아 출신 무슬림이면서 프랑스에서 공부를 한 리아드의 아버지는 서구의 지식인인 듯 보이지만 아랍 독재자를 옹호한다. 아랍의 완고한 전통을 바꿔야 한다고 이야기하지만 경우에 따라 전통을 앞에 내세운다. 종교적 제약을 싫어하지만, 아들에게 꾸란을 외우게 하고 서구의 자본주의를 혐오하면서도 메르세데스 벤츠와 고급 별장을 갖고 싶어한다. 이 통합될 수 없는 복잡한 인물을 통해 <미래의 아랍인>은 당대의 아랍을, 그리고 다가올 아랍을 보여준다./박인하 청강문화산업대학교 만화창작전공 교수▲ 박인하 청강문화산업대학교 만화창작전공 교수

2015-05-10 박인하

엄마와 또 다른 엄마에 대한 이야기

친구와 함께 작은 학원을 운영하는 효진의 삶은 평탄하지 않다. 학원이 임대한 건물은 재개발로 철거될 예정이고, 학생들에게 조금 잘못을 지적하자 학원을 그만둔다. 사촌 동생과 함께 살며 반찬집을 하는 엄마는 안그래도 복잡한 효진에게 전화해 무언가를 하소연한다. 온통 짜증 나는 일 투성이. 유일한 위로는 선배의 카페에 들러 심리상담을 공부하는 정우와 이야기하는 일이다. 그런 효진에게 이년 전 사고로 죽은 남편의 동생이 찾아와 남편의 아들을 돌봐주던 외할머니가 치매에 걸려 요양원에 있다는 이야기를 해 준다. 결국 서른두 살의 효진과 열여섯 살 종욱은 함께 살게 된다. 두 사람은 서로가 낯설다. 어느 날, 종욱이 집을 나간다. 효진에게 이야기는 하지 않았지만, 엄마를 찾았던 것. 종욱을 찾아 집으로 데려오던 날, 효진은 하혈을 한다. 병원에서는 갑상선 기능 저하증이라고 진단한다. 몸이 먼저 아픈 건지, 아니면 마음이 먼저 아픈 건지…, 둘 다 한꺼번에 탈이 났을 수도 있다. 마음도 몸도 불편한 상태에서 정우를 만난다. 사귀자고 고백을 한 정우는 “어릴 때 TV에서 잘사는 나라에 입양된 사람들 보면 솔직히 부러웠어요”라고 이야기한다. 효진은 참지 못하고 폭발한다. 자신이 결혼도 했고, 남편도 있었으며, 애도 있다고 말한다. 얼마 뒤 종욱이 아침 일찍 집을 나가자, 효진은 종욱의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종욱이 ‘엄마를 찾으러 다닌다’는 걸 알게 된다. 효진은 종욱과 함께 요양원에 들른 뒤, 무속인으로 살고 있는 오연화를 만나러 간다. 연화는 종욱이 여섯 살 때 신병을 앓다 집을 나갔다. 하지만 친엄마는 아니었다. 효진은 “종욱이한테… 엄마라고 해 주시면 안 될까요?”라고 부탁한다. 그날, 민박집에서 효진이 묻는다. “엄마랑 얘기했어?” 종욱이 대답한다. “엄마 아닌 거 알아요.” 종욱은 집을 나간 엄마가 친엄마가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만나서 “왜 버리고 갔는지 물어보려”했다고 대답한다. 효진이 “그래서, 물어봤어?”라고 묻자, 종욱은 불쌍해서 물어보지 않았다고 대답한다. ‘당신의 부탁’은 한 권, 300쪽 분량의 책이다. 하지만 그 안에는 한 권 이상의 무게가 있다. 누군가를 잃어버리고, 마음에 상처를 안은 두 사람이 불안한 고리로 가족이 된다. 둘은 서로에게 조금씩 다가간다. ‘당신의 부탁’은 가족에 대한, 구체적으로 엄마에 대한 만화다. 효진은 형식적으로 종욱의 엄마다. 종욱이 찾아다닌 연화는 친엄마는 아니지만, 종욱을 떠난 엄마다. 효진에게는 늘 잔소리를 하는 엄마가 있다. 효진과 함께 학원을 했던 미란은 아이를 낳는다. 종욱의 여자 친구도 임신을 하고 아이를 낳는다. 엄마와 또 다른 엄마에 대한 이야기를 작가는 다양한 연출을 통해 전달한다. 그리고 ‘당신의 부탁’은 선택을 이야기한다. 아이를 낳고, 떠나고, 함께 살고. 결국 삶은 선택이고, 선택이란 한쪽을 포기하는 것이다. ‘당신의 부탁’은 단편영화를 만들고, 시나리오를 쓰는 이동은 작가와 디자인을 전공한 정이용 작가의 ‘환절기’에 이은 두 번째 작품이다. 첫 장부터 효진과 종욱의 상황을 교차 편집하여 담아내기도 하고, 빠르거나 느리게 전개되는 칸 연출은 전작보다 더 능숙하다. 한 작품에 매달려 처음부터 끝까지 완성해 낸 끈기가 대단하다. 세 번째 작품이 더 기대된다./박인하 강문화산업대학교 만화창작전공 교수▲ 박인하 강문화산업대학교 만화창작전공 교수

2015-04-12 박인하

고통받는 여성들을 위한 용기있는 외침

새로운 예술 학교에 다니게 된 오사에게 어느 날 저녁 꿈만 같은 일이 벌어진다. 학교 최고 인기남 닐이 그녀에게 고백한 것. 오사는 “이런 행복을 느껴본 적이 없었다”고 고백한다. 하지만, ‘달콤하고 행복한 꿈’은 곧 ‘악몽’으로 변한다. 듣고 싶은 모든 말을 해주던, 기사처럼 온갖 악마로부터 오사를 지켜주는 것 같던 닐이 간혹 이상한 태도를 보이기 시작한다. 닐은 오사의 작은 행동에 꼬투리를 잡아 화를 내고 윽박지른다. 오사는 닐이 왜 화를 내는지 잘 이해할 수 없지만, “최대한 그의 입장이 되어서 차근차근 되짚어”본다. 고심 끝에 이야기하면, 닐은 더 크게 화를 낸다. 오사는 이 모든 일이 자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그날 이후 오사는 귀고리를 뺐고, 머리를 염색하지 않게 되었으며, 화장을 그만두고, 즐겨 입던 검은색 옷을 버려야 했다. 오사다운 개성이 점점 사라지고, 닐이 제시한 틀에 맞춰진 오사가 되었다. 다른 사람들은 둘을 완벽한 커플로 보았다. 오사의 친구들은 “너희는 정말 멋진 커플”이라며, “닐은 정말 너밖에 모르잖니”라며 치켜세웠다. “나도 너처럼 나만 위해주는 남자가 있으면 좋겠다”고 부러워했다. 하지만 언어폭력으로 오사를 틀 안에 가두었던 닐은 서서히 신체적 폭력도 가하기 시작했다.자신의 끔찍한 경험을 자전적 만화로 옮긴 오사 게렌발은 내레이션을 통해 이때의 감정을 말한다. “이제 슬슬 이런 생각도 들어. 내가 어떻게 그렇게까지 어리석을 수 있었는지. 바보같이 보인다는 거 알아. 하지만 모든 게 해결되고 더 나아질 거라 생각했어. 함께 지내다 보면 그도 결국 나에 대해 믿음을 갖고 행복해질 거라 생각했어. 그가 행복하다면 나 또한 그렇게 될 거라고!” 상황이 좋은 쪽으로 변하지 않았다. 닐의 폭력은 더 과격해졌다. 오사는 그 상황에 붙잡혀 파괴되어갔다. 해가 바뀌고 생일을 맞이한 오사에게 아빠가 전화를 걸었다. 닐의 허락을 받아 통화했지만, 곧 끊으라고 화를 낸다. 오사를 때리던 닐은, 다리미를 던진다. 며칠 뒤 닐은 함께 차를 타고 가다 오사의 손을 물어 버린다. 살점이 뜯긴 오사는 용기를 내 헤어지자는 말을 한다. 그 뒤 주변 사람들과 제도의 도움을 통해 병원에 가서 진단을 받고, 진단서를 발급받은 뒤, 닐을 고소한다.오사는 개성 넘치고 사랑스러운 여성이었다. 그랬던 그녀가 닐의 폭력에 속수무책으로 무기력해 진다. 그럴수록 폭력의 수위도 높아진다. 몹시 어렵게 용기를 내고 주변 이들의 도움을 받아 자신을 회복한다. 지난 3월 8일 한국 여성의 전화는 2014년 한 해 동안 1.7일에 1명꼴로 여성이 남편이나 애인에게 살해당하거나, 살해 위협을 받은 것으로 조사되었다고 발표했다. 남편이나 애인에게 살해당한 여성이 최소 114명, 그리고 가까스로 목숨을 건진 여성이 95명이나 되었다고 한다. 모두 보도된 기사를 조사한 내용이다. 보도되지 않은 내용을 포괄하면 더 많은 여성이 사랑이란 이름의 폭력에 내몰려 있을 것이다. ‘7층’은 보기 드문 스웨덴 만화다. 작가는 연출보다는 오히려 자유로운 선의 활용을 통해 감정을 담아낸다. 고통스러운 증언이겠지만, 여전히 이런 증언이 필요한 이유는, 여전히 사랑이란 이름으로 자기의 모든 것을 포기한 채 고통을 감당하는 여성들이 있기 때문이다./박인하 청강문화산업대학교 만화창작전공 교수▲ 박인하 청강문화산업대학교 만화창작전공 교수

2015-03-15 박인하

아름답지만은 않은 청춘의 일상이야기

작고 예쁜, 팬시해 보이는 일러스트 책처럼 보인다. 도시의 멋진 카페에 앉아있는 젊은 여성의 가방 안에서 슬쩍 얼굴을 내밀고 있다가, 테이크아웃 커피잔을 들고 급히 사무실로 함께 들어갈 것 같은 책이다. 멀리는 ‘프렌즈’나, 아니면 ‘섹스 앤 더 시티’ 같은 느낌이랄까. 버드아이뷰로 젊은 활력이 넘치는 도시를 바라보는 표지가 있어 더더욱 그런지도 모르겠다. ‘사사롭지만 좋은 날’이라는 만화 제목도 그저 기쁘고 좋았던 20대의 이야기처럼 보인다.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 이 만화는 20대의 사사로운 이야기다. 사사롭다는 건, 시간이 지나면 그저 ‘그런 적도 있었지’하며 추억할 수 있다는 말이다. 하지만 우리 일상은 늘 사사로움과 사사로움이 만나 의미를 얻는 것. 그래서 만화를 읽다 보면, 마음 한구석이 짠하다. 뭔가 잃어버린 감성들이, 하지만 어쩌면 다시 돌아가고 싶지 않은 기억들이 나에게 손짓을 하는 것 같다. 디자인을 전공하는 학생들 이야기인데, 매화 새로운 이야기가 사람과 사람을 거쳐 꼬리를 물고 진행된다. 첫 화는 연두의 이야기다. 실기실에서 밤을 샌 연두는 친구 현서에게 ‘샴푸’를 빌려달라고 한다. 현서는 아무렇지 않게 승빈이 샴푸를 사용하라고 하는데, 사실 연두는 승빈에게 마음이 있다. 실기실 책상을 옮기며 처음 만났을 때, 우연히 손이 닿았을 때, 콘셉트 스케치 모티브를 가져온 작가를 승빈이도 좋아한다고 할 때, 전시회에 같이 가자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좋아하는 감정이 조금씩 싹텄다. 하지만 승빈은 무심히 소개팅에 나간다. 사소한 순간이 쌓여 만든 두근거림과 그 기억을 떠올리는 샴푸의 냄새. 보통의 청춘 로맨스라면 그다음이 준비되어 있지만, ‘사사롭지만 좋은 날’은 이걸로 끝이다. 어쩌겠는가? 우리의 일상은 원래 그렇게 드라마틱하지 않다. 샴푸 냄새가 기억을 소환하지만, 일상은 거침없이 돌아간다. 시범은 부모님에게 돈을 받아 편하게 학교를 다닌다. 사고 싶은 한정판 신발을 사고, 처음 생긴 식당에는 꼭 가야 하고, 헤어스타일과 패션에 돈을 쓴다. 그런 시범이 어렵게 구한 한정판 신발을 기다릴 때, 현서는 낡은 신발을 신고 아르바이트에 간다. 한 공간 안에 문득 다른 친구들이 있다는 걸 안 시범은 자신의 삶에 대해 잠깐 고민을 한다. 시범과 현서는 서로를 신경 쓰게 된다. 영민은 결혼해 아기를 낳은 언니 영선에게 놀러 간다. 처음 보자마자 살쪘다는 말을 하고, 빨랫거리에 있던 속옷을 보고 “헐 이거 완전 할머니 팬티잖아”라고 놀란다. 언니는 “너도 얘기 낳아봐~ 다 살찌고 그런데 편해”라고 대답한다. 언니가 시장을 보러 나간 사이 영민은 문득 어린 시절 동경의 대상이었던 언니를 떠올린다. 승빈은 사사로운 일상에 스스로 내기를 하는 걸 좋아한다. 집에서 나올 때 요구르트를 파는 아주머니가 있으면 소개팅에 예쁜 여자아이가 나오고, 버스 정류장에 3번 버스가 먼저 오면 지각하지 않는다는 정도의 자질구레한 내기다. 잠깐의 낭만을 지나 다시 과제를 보는 것처럼, ‘사사롭지만 좋은 날’은 오늘을 사는 20대 젊은이들의 날이다. 그래서 그 날들은 그들이 지닌 다양한 갈등과 고민에서 나온다. 정말 사사로운 이야기지만, 그 안에는 삶이 있다./박인하 청강문화산업대학교 만화창작전공 교수▲ 박인하 청강문화산업대학교 만화창작전공 교수

2015-02-15 박인하

아기가 태어날 때까지, 엄마의 마음

서른일곱의 인형그림책 작가 백홍치와 서른하나의 요리사 마수철. 부모의 나라에 몇 번이나 들어섰다가 다시 쫓겨나 서성거리던 부부에게 아이가 찾아온다. 임신 진단기에 두 개의 줄이 나오고, 불안하고 설레는 마음으로 병원을 찾아가고, 임신호르몬 수치가 너무 약해 일주일 뒤에 겨우 임신이라는 판정을 받게 된다. 여성 커뮤니티 사이트 '마이클럽'에 연재된 뒤 애니북스에서 출간된 <내가 태어날 때까지>는 "우리는 드디어 그 어렵고도 흔한 부모"가 된 이야기를 들려준다. 임신에 대한 여러 가지 실용 정보들은 넘쳐나지만, 지금까지와 완전히 달라진 모든 것들과 마주해야 하는 부부의 마음을 담은 책은 많지 않다. 이 만화는 변화하는 감정에 집중한다.임신한 후 당연하게도 많은 것들이 바뀐다. 몸도 마음도 마치 놀이기구처럼 위 아래로 출렁거린다. 그 작고 사소한, 하지만 당사자들에게는 험난한 파도를 헤치는 것 같은 변화의 순간들을 잡아낸다. 한국을 대표하는 일상만화를 그린 작가의 힘이다. 난다 작가는 2010년 다음에 <어쿠스틱 라이프>를 연재하며 데뷔했다. <어쿠스틱 라이프>는 게임회사에 다니는 남편 한군과 난다 작가의 이야기를 담은 작품이다. 시즌 9까지 총 200화를 연재했다. 연재를 하던 중 난다 작가도 엄마가 되었다.6주가 되어 심장소리를 듣는다. 8주가 되면, 먹고 싶은 것들이 계속 바뀌는 입덧이 시작된다. 그리고 순간순간 몸의 변화를 실감한다. 문득 "내 몸이 어떤 목적성을 띠고 배열을 바꾸고 있다"고 느낀다. 만화는 임신과 출산에 이르는 시간의 일상적 이야기들을 담아낸다. 특히 주인공 백홍치의 담담한 내레이션이 자주 등장하는데, 탁월하다.20주가 되면서 엄마 백홍치는 태동을 느낄 수 있다. 결국 아빠 마수철도 태동을 느끼는데 성공한다. 놀랍게도 잊어 버렸던, 혹은 지쳐서 밀쳐놓았던 그 때의 기억들이 고스란히 돌아왔다. 첫 아이를 가졌을 때 아내의 배 안에서 꼬물거리던 작은 손과 발의 느낌. 이 만화는 그 시절을 가졌던 사람들에게는 생각지 못했던 감동을 줄 것이다. 작가는 아무렇지 않은 듯 담담하게 시간들을 드러내지만, 우리는 그 시간을 잊고 있었기에 더더욱 그렇다.드라마틱하고도 격렬한 변화를 느끼는 백홍치의 시선으로 이야기를 전개하지만, 마수철도 변화에 동참할 수밖에 없다. 만화는 임산부의 몸과 마음의 변화는 물론 사회적 문제에 대한 고민도 함께 나눈다. 임산부를 위한 배려, 작업과 육아를 병행해야 하는 문제 같은 고민들이 이야기 안으로 들어온다. 난다는 일상의 순간을 유쾌하게 잡아내는 '일상만화'의 작가다. 일상과 마주하는 힘으로 임신과 출산의 순간까지 함께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를 정리했다. 이 만화가 지닌 가장 큰 힘은 공감이다. 이를 위해 구태여 멋진 그림을 고민하지도 않았고, 다양한 정보를 제시하지도 않았다. 대신 <내가 태어날 때까지>에는 그 때의 기억들이 있다. 그리고 마침내 아기와 마주하고 인사를 나누는 벅찬 감동이 있다. "안녕, 아가야. 엄마야."/박인하 청강문화산업대학교 만화창작전공 교수▲ 박인하 청강문화산업대학교 만화창작전공 교수

2015-01-18 박인하

로봇을 통해 사람을 말하다

가장 서글픈 삶의 단편을 4칸에 담아낸 '자학의 시'의 작가 고다 요시에의 작품 두편이 출간됐다. 한편은 지상에 내려온 신에 대한 우화인 '신 이야기'고, 다른 한편은 정교한 로봇들이 사람들을 도우며 사는 근미래의 이야기를 그린 '기계장치의 사랑'이다. 육아·간호 같은 일상적 조력은 물론 목회활동도 하고 또 전쟁과 고문도 담당하는 로봇들이 있다. 정교하지만 로봇처럼 보이고, 로봇이라는 걸 알고 있으며, 에너지를 사용하면 충전해야 하고, 메모리를 지우면 기억도 지워진다. '기계장치의 사랑'은 사람의 감정을 최대한 배제한 로봇을 통해 역설적으로 인간다움에 대해 질문한다.'기계장치의 사랑'이 이야기하는 인간다움은 바로 '감정' 즉, '마음'이다. 이 만화는 한 세계관을 공유하는 단편모음인데, 여러 단편에서 감정을 갖게 된 로봇이야기가 주제가 된다. 1권의 첫번째 에피소드 '애완로봇'은 우리 기억에 남아있는 감정에 대한 이야기다. 2년 동안 소녀로봇을 키우던 부부는 소년로봇을 새로 구입한다. 이제 다시 중고로 팔려갈 것을 예감한 소녀로봇은 기억에 남아있는 제일 좋았던 엄마를 찾아간다. 아이와 함께 행복하게 사는 엄마모습을 지켜보다 경찰에 붙들려 가는 소녀로봇은 진한 오일 눈물을 흘린다. 결국 모든 메모리가 삭제돼 다시 매장에 나온다. 이 로봇을 예전의 엄마가 다시 구입하자 점원은 메모리가 이미 삭제됐다고 미안해한다. 점원에게 엄마는 자신이 기억하니까 괜찮다고 말한다. 두번째 에피소드인 '가족증원법'은 가족의 재구성에 대한 이야기다. 혼자 사는 늙은 노동자와 결혼하지 못한 젊은 노동자가 부자의 연을 맺고, 그들이 만드는 자동출산기를 통해 아이를 낳는다. 그렇게라도 가족이 된 세사람은 행복하다. 세번째 에피소드인 '열등로봇 열등군'은 '우수한 점장로봇'에 대한 사람들의 반발을 줄이기 위해 의도적으로 배치한 '열등로봇'에 대한 이야기다.'기계장치의 사랑'은 평범한 일상과 공존하는 분쟁 지역의 이야기를 보여준다. 종자를 장악한 다국적기업에 맞서, 자살하는 농민들을 구하고 진짜 씨앗을 보존하는 일을 도와주는 신부로봇이 있다. 결국 이 신부로봇은 '기계주제에 사람을 속여 피조물 의무위반'으로 붙들려 간다. 신부로봇은 담담하게 자신이 붙들려 죽을지라도 '마음만은 하느님의 것'이라 말한다. 반체제파에게 총살당한 부모의 시신을 2개월 동안이나 보고 있어야 했던 소년은 바보가 된다. 하지만 그도 총에 맞아 죽는다. 이전 체제의 감시로봇이었다가, 바보소년에 의해 메모리가 자동 삭제되도록 세팅돼 진짜 고양이가 된 로봇만이 그를 추모한다.'기계장치의 사랑'의 로봇들은 프로그램에 의해 움직인다. 한번 약속을 하면 끝까지 지키고, 박애라는 감정이 인스톨됐으면 그에 맞게 행동한다. 비록 자신이 파괴되고, 사라진다고 해도 말이다. 이런 로봇의 모습을 통해 이 세상을 움직여 온 사람의 마음을 본다. 나보다 약한 이를 비웃고, 그들을 몰아붙이는 세상에서 로봇은 우리에게 '왜, 어떻게'살아야 하는지를 묻는다. 2권 마지막 에피소드에서 작가는 작은 힌트를 준다. 지구에서 1천200광년 떨어진 별에는 '큰-눈-꽃'이 있다. 이 거대한 꽃은 지구에서 날아온 빛의 그림자를 본다. 우리가 보낸 순간이 1천200년 뒤 그 별에 도착하는 것이라면 우리는 좀 더 인간답게 살아야 한다./박인하 청강문화산업대학교 만화창작전공 교수▲ 박인하 청강문화산업대학교 만화창작전공 교수

2014-12-21 박인하

옷의 이야기는 사람의 이야기다

옷을 만드는 사람, 그 중에서도 남성 양복을 짓는 사람인 테일러에 대한 만화다. 전문직종을 다룬 만화는 보통 그 직업의 세계에 대한 지식을 깔고 그 위에 어떤 과제를 해결하기 위해 대결하는 구조를 갖게 된다. 하지만 승부의 드라마보다 더 마음을 울리는 건 사람의 이야기다. 맞춤 양복이 사람(들)의 이야기를 전달할 수 있을까? 이 질문에 다음에 연재된 웹툰 '신사의 집'은 '그렇다'고 답한다. 옷은 사람이 입어야만 의미를 얻는 것이고, 당연히 옷 이야기의 주체는 옷을 입는(입을) 사람이니까. 남산 밑 어디쯤 멋진 할아버지 이명수씨가 테일러인 33년 전통의 맞춤양복점 '신사의 집'이 있다. 그리고 외국의 유명 패션학교를 졸업하고, 승승장구하다 어떤 사건으로 한국으로 돌아온 이명수의 손자 이승이 "맞춤양복이라는 옷과 그것을 입는 사람들의 마음, 그것들의 '가치'를 배워가고 있는 중"(5화)이다. 어느날, 이명수는 오랜 단골이었지만, 불법을 저질러 감옥에 간 전 은행 부지점장 장민구의 양복을 그의 딸에게서 전화로 주문받아 만들다 쓰러져 병원에 입원한다. 이승은 할아버지를 대신해 양복을 완성하고,결혼식에 가지 않겠다는 장민구를 설득해 식장에 데려가기까지 한다. 하지만 병원에서 퇴원한 할아버지는 "누구 맘대로 그따위 옷을 만들어!!"라고 화를 낸다. 이승이 할아버지에게 묻는다. "내가 접착식으로 만들어서 화가 나신 건가요? 아니면 전과자 장민구씨가 신사의 집에서 만든 옷을 입을 자격이 없다고 생각해서 화가 나신 거예요?" 이승은 할아버지의 친구 최복돌(최다니엘) 부사장의 부탁으로 굴지의 패션그룹 HU에 취직한다. 이승은 전통의 남성복 쟈비르를 새롭게 살리는 과제를 수행하게 된다. 하지만 HU에는 이승과 함께 패션학교에서 공부한 차수호 실장이 있고, 그는 자체 디자인을 운영하지 않고 최대한의 수익을 생각한 새로운 패션 브랜드 스팟을 론칭한다. 고길동 회장이 건강이 안 좋아 은퇴한 뒤 회사를 경영하는 부회장은 다음 이사회까지 쟈비르와 스팟의 성과를 보고 둘 중 하나만 남기겠다고 한다. 이 정도 구조라면, 고난 끝에 이승이 가치를 지켜야 하겠지만, '신사의 집'은 그 길을 걷지 않는다. 이승과 적대 관계를 형성해야 하는 차수호는 단지 추구하는 철학과 가치관이 다를 뿐이다. 거슬러 올라가면 친구 사이지만 이명수와 최복돌의 가치가 달랐고, 이제는 최복돌과 부회장의 가치가 다르다. 이승과 차수호의 가치가 다르다. 격한 갈등보다는 서로를 이해하고 깨닫게 되는 과정이 있다. 누가 결국 이기는가는 중요하지 않다. 진짜 중요한 건 옷을 입는 사람이니까.그래서 '신사의 집'은 기본 드라마보다 중간중간 나오는 사람들의 이야기에 독자들이 더 많이 감동한다. 가장 많은 호응을 얻은 연재분은 7화 '당신의 옷장'이다. 자개장롱의 시점으로 한 남자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젊고, 열정적이고, 자신감이 넘치던 그는 퇴직자가 되어, 양복이 아니라 아웃도어옷만 입는다. 그러다 아들의 결혼으로 집을 줄여야 돼서, 자개장롱을 버리게 된다. 서른다섯 해를 함께 한 자개장롱이 말한다. "그동안 / 매일 아침 새옷을 입는 당신을 / 매일 저녁 열심히 일한 당신의 하루를 / 내 안에 담아둘 수 있어 행복했습니다./ 앞으로 살아갈 당신의 인생을 응원하겠습니다"/박인하 청강문화산업대학교 만화창작전공 교수▲ 박인하 청강문화산업대학교 만화창작전공 교수

2014-11-23 박인하

들개이빨

음식만화는 세상 모든 음식이 우리에게 구원의 손길을 내미는 내밀한 순간들이 기록된 복음이다. 음식만화는 '맛의 달인'이 추구한 탐구와 '아빠는 요리사'의 여정과 '초밥왕'이 보여준 근성안에서 하나의 장르로 자리잡았다. 슈퍼히어로 만화가 미국의 발명품이라면, 음식만화는 일본의 발명품이다. 탐구와 여정과 근성은 후속작들을 통해 더 강력해지거나, 아니면 분화해 나갔다. 최근 독자들에게 사랑을 받은 음식만화는 '심야식당'과 '고독한 미식가'다. 만화가 드라마로 제작돼 우리나라에도 소개된 두 작품은 음식만화의 새로운 경향을 보여준다. '심야식당'은 간단한 음식을 매개로 평범한 이들의 사연을 들려준다. 서사의 무게는 당연히 '사람>음식'이다. 반면 '고독한 미식가'는 낯선 장소를 찾은 주인공의 식사만을 보여준다. '서사=음식=식사'다. 완전히 다른 만화처럼 보이는 두 작품은 사실 같은 이야기를 한다. 두 작품 모두 '외로운 현대인'을 보여주는 만화다.일본에서 시작된 음식만화는 한국에서도 다양하게 확산됐다. 특히 웹툰에서는 '코알랄라' '역전 야매요리'같은 일상적 음식(요리)만화가 크게 인기를 끌었다. 들개이빨의 만화 '먹는 존재'는 기존 음식웹툰에서 한 발 더 나간다. 사람을 '먹는 존재'라 선언하는 건 삶과 욕망에 대한 철학적 성찰이다. 그런데 심오하지도 않고, 진지하지도 않다. 가볍게 건너가고, '에미넴 랩하듯' 거침없다.주인공 유양은 '대중적으로 섹스어필하는' 긴 머리카락을 지닌, 야상을 입고, 팔자로 터벅거리며 걸으며, 험한 말을 내뱉는 미혼 직장여성이다. 유양은 자신을 "나같이 무리생활 싫어하고 야심없는 반골기질 게으름뱅이 헐랭이"라고 생각한다. 회식 자리에서 사장이 강권하는 술을 마시고, 한참 막말을 듣다가 안주로 나온 굴을 집어 던지고 회사에서 잘리는 것으로 만화가 시작된다. 자취방에 반찬을 싸온 엄마는 애인이 생겼냐고 묻다가 혼자 사는 것보다 장관되기가 더 쉬울 것이라고 말한다. "세끼 밥 먹고 숨 좀 쉬웠을 뿐"인데 통장 잔고의 자릿수가 하나 줄었던 걸 확인하고 친구의 소개로 다시 취직한 회사에서는 1주일만에 잘린다. 그리고 식중독 걸린 아픈 몸을 끌고 우연히 들른 클럽에서, 떡을 먹는 노란 추남 박병을 만나 사귀게 된다.직장에 다니고, 해고당하고, 새로 직장을 구하고, 다시 해고당하고, 애인을 만나고, 헤어지고, 다시 만나고. 낯설지 않은 평범한 삶이다. 하지만 이 평범한 삶은 예상치 못한 일들이 연속돼 만들어진다. 마치 먹어보기 전까지 맛을 모르는 음식처럼 말이다. '먹는 존재'에서 주인공 유양의 삶은 '브런치 따위에 환장하게 생긴' 친구 예리, 추남이지만 묘하게 끌리는 데가 있는 마성의 남자친구 박병, 주인집 할머니의 소개로 구한 과외 학생 등과 얽히게 된다. 당연하게도 예상치 못한 전개가 이어진다. 예를 들어 아무 부담없이 만나려던 박병과의 관계는 난데 없는 부모님과 조우로 급작스럽게 결혼이라는 현실적 난제를 만나며 냉·온탕을 넘나들게 된다.음식이야기는 결국 사람이야기다. '먹는 존재'에는 매회 특정 음식이 등장한다. 그리고 특정 음식을 먹(을 수 밖에 없)었던 상황이 나온다. 그 상황이 놀랍게도 딱 우리 시대의 풍광이다. 탁월한 비유와 노골적으로 치닫는 비속어들이 막 쓱쓱 그어내어 완성된듯 보이는 그림과 어울리며 2014년 대한민국을 재현한다./박인하 청강문화산업대학교 만화창작전공 교수▲ 박인하 청강문화산업대학교 만화창작전공 교수

2014-10-26 박인하

그 안에서, 서로를 위로하기 위하여

머리를 노랗게 물들인 주인공 '나'는 아버지가 물려준 낡은 가게를 찾아 그 골목에 들어선다. 커다란 목련에 대한 기억 하나만으로 문제없이 빈 가게를 찾아 그곳에 들어선다. 먼지가 가득 내린 가게에서 주인공이 입을 연다. "오랜만이네." 주인공은 가져온 물고기를 내려놓는다. 가방에 넣어온 물고기는 '샴 투어'(베타라고도 부른다). 태국물고기인데, 갓 부화한 새끼는 아가미가 성숙하지 않아 물에 빠져 죽기도 한다. 주인공이 이층에 올라갔다 오자, 그 사이 베타는 알을 낳았고, 수컷은 거품집을 만들어 어린 물고기를 물위로 올리고 있다. 만화는 이렇게 시작한다. 그리고 밤이 되고 주인공은 잠에 빠져든다.다음 날, 주인공은 한가한 골목, 커다란 목련 옆 낡은 가게에 애정수족관을 연다. 피곤에 지쳐 잠을 자다 밤에 깨어난 주인공. 한가한 골목에 불이 환하다. 그곳은 웃음과 몸을 파는 집창촌이다. 상심한 주인공 앞에 손님이 나타난다. 은수는 눈 바로 위쪽이 램프처럼 빛나는 물고기 '램프아이'를 사서 돌아간다. 이렇게 이질적인 두 공간에 사는 주인공들이 마주한다. 수족관을 연 주인공 '나'와 창녀 '은수'는 마음이 아프다. '나'는 어머니와 자신을 버리고 떠난 아버지 때문에 마음이 아팠고, 은수는 술취한 아버지에게 늘 두들겨 맞던 피해자다. 치유받지 못한 상처를 고스란히 마음에 두고 두 사람은 마주한다.전체적인 이야기의 라인은 조금은 상투적이다. 집창촌의 상처받은 여인에게 위로받는 남자라는 설정은 사실 '죄와 벌'의 라스꼴리니꼬프를 구원한 창녀 소냐에게서부터 이어져온 유구한 전통이다. 물론 '폐어'에서 두 주인공은 서로를 위로하고 위로받는다. 집창촌의 폐쇄가 예고되고, 은수는 주인공의 아이를 갖는다. 모든 게 잘될 것처럼 이야기가 전개되지만, 은수는 아버지에게 당했던 폭력의 기억에서 벗어나질 못한다. 사실 '나'도 마찬가지다. 오래된 기억들, 상처들이 그들을 붙잡는다. 은수는 "아무래도 난… 기억을… 지울 수 없어… 미안해. 다 포기하고 싶어"라고 말한다. 괴로움은 상투적이나 비장하다. 마무리를 향해 가며 이야기는 더욱 비극으로 치닫는다.그럼에도 이 만화는 상투적 비장미에 머무르지 않는다. 앞서 말한 물고기 때문이다. 집창촌의 수족관, 그곳에서 키우는 여러 물고기들. 이 낯설고 이질적인 요소는 주인공 두 명과 함께 하며 '폐어'의 상투성을 위로의 판타지로 바꾸어 놓는다. 끊임없이 새로운 물고기가 들어오고, '나'는 이 물고기의 생태를 설명한다. 순간순간 물고기와 주인공이 한데 어울리는 판타지한 공간이 펼쳐진다.1990년대 중반 데뷔했지만, 오래도록 애니메이션 작업을 한 작가는 21세기 들어 다시 만화를 시작했다. 2012년 자신이 직접 텃밭을 가꾼 경험을 만화로 옮긴 '텃밭' 이후 물고기를 기른 경험을 통해 이야기를 끌어간 작품이 '폐어'다. 두 주인공 내면의 치유되지 못한 뿌리 깊은 상처를 서로를 통해 대면하게 된다. 상투적 서사보다는 한 마리의 물고기가 더 큰 역할을 하기도 한다. 환상 같은 현실, 현실 같은 환상 속에서 '폐어'는 우리 마음도 위로한다. "그 작은 간판이 너를 불렀구나." "그래. 나도 모르게 문을 열고 들어서는데… 정말 새로운 세계가 기다리고 있더라. 처음으로 내 이야기를 들어준 사람… 내 손을 따뜻하게 잡아준 사람 말이야."(2권, p98-99)/박인하 청강문화산업대학교 만화창작전공 교수▲ 박인하 청강문화산업대학교 만화창작전공 교수

2014-09-28 박인하

유승하 '엄마 냄새 참 좋다'

90년대 초중반, 한창 일본판 격투영웅들이나, 순정소녀들이 주름잡고 있던 시기에 주류만화와 다른 만화를 모집해 상을 준 공모전이 있었다. 1993년 시작해 1995년까지 3회로 끝난 신한새싹만화상은 은행 후원으로 신인작가의 작품을 모집해 상을 주고, 책으로 제작해 보급했다. 고작 3회만 개최됐지만, 80년대 싹을 틔워 90년대로 이어진 새로운 만화에 대한 갈망은 이 공모전을 만나 꽃피웠다. 최호철·조남준·홍승우·이우일 같은 기존 만화 진영에서 활동하지 않은 새로운 작가들이 대거 신한새싹만화상을 통해 작품을 선보였다.이번에 자신의 첫 만화책 '엄마 냄새 참 좋다'를 출간한 유승하 작가도 1994년 신한새싹만화상에 '휘파람'으로 대상을 수상하며 데뷔했다. 데뷔 20년이 넘었다. 중견작가의 첫 만화책이라 뭔가 형용모순 같지만 활동무대가 달랐다. 유승하 작가는 데뷔 이후 주로 그림책과 단편을 발표했다. 그러니 독립된 만화책으로 묶이지 못했을 뿐이다.이번 책도 단편 모음집이다. 멀리는 2003년 출간된 인권만화책 '십시일반'과 가깝게는 2014년 출간된 무크지 '보고'에 실린 단편 일곱편과 사이사이 카툰을 함께 엮었다. 공교롭게도 '엄마 냄새 참 좋다'에 실린 작품은 20년 작가생활을 반으로 나누면 후반부에 완성된 작품이다. 그 이전까지 주로 그림책과 작업을 하던 작가는 2002년 국가인권위원회서 진행한 인권만화 프로젝트에 참여해 장애인운동가이자 '엄마' 최옥란씨를 취재하게 된다.작가의 말에 의하면 최옥란씨의 이야기를 듣고 (돌아오는)버스에서 줄줄 울었다고 한다. 이 작품을 계기로 작가는 현장으로 눈을 돌린다. 두번째 인권만화 '사이시옷'은 차별받는 비혼모이야기를 그렸고, 2009년 용산참사가 일어난 후 현장으로 달려가 그곳에서 보고 들었다. 최옥란씨의 이야기에서 작가의 새로운 만화가 출발했기 때문인지, 아니면 어느덧 두 아이를 키우고 있는 엄마인 작가 자신의 삶때문인지 모르겠지만. 유승하 작가는 엄마 대 엄마로, 여성 대 여성으로 현장을 찾았다.현장에서 만든 만화, '르뽀라 부르기도 하고 다큐멘터리라 부르기도 한다'는 대체로 허구보다 더 가혹하다. 게다가 우리의 삶이 그렇듯 이야기 가닥도 복잡해 그대로 담아내기에는 지면이 모자란다. 다큐멘터리 만화에는 유독 글이 많다. 더 많이 설명하고, 들려주고 싶어서다. 그런데 유승하 작가의 만화는 해설이 많지 않다. 중요한 지점을 잡아 그 이야기를 통해 전체를 보여준다. 세가구만 남은 철거지역에 사는 모녀 가족의 평화로운 한 때를 보여준다. 교복입은 딸아이가 학교에 다녀온 뒤 키우는 햄스터에 안부를 전하는 모습이 사랑스럽다. 며칠 뒤 세가구가 철거되고, 어제까지 재롱을 부리던 햄스터 해미랑 토리도 싸늘하게 숨을 거둔 상태다. 돌무덤을 만들어 햄스터를 묻어준 뒤 딸 아이에게 전화를 건다. "정아야, 지금 집에 일났으니 오면 안돼!" 딸 아이가 말한다. "알았어. 엄마. 해미랑 토리랑 꼭 데려다줘." 엄마는 그 날부터 싸움을 한다.앞의 네편은 현장을 찾아 그곳에서 싸우는 엄마/여성의 이야기를 그린 만화다. 뒤의 세편은 역사속에서 만난 엄마/여성들의 이야기다. 일제식민지시대 평원고무농장 여성노동자로 평양 을밀대에서 최초의 고공농성을 한 강주룡, 신사임당과 허난설헌이라 불리지만 진짜 이름은 신인선과 허초희였던 그녀들, 화가이자 소설가이자 만화가이기도 했던 나혜석까지. 이야기하지 않았으면 모르고 넘어갔을 엄마/여성들의 이야기를 들려준다.이렇게 일곱편, 그리고 사이사이 들어있는 한쪽짜리 만화들까지. 유승하 작가가 만나고, 경청하고, 다시 우리에게 들려주는 이야기는 엄마이야기다. 그래서 이 만화를 다 보고 나면 자연스럽게 냄새가 난다. 엄마냄새, 그리움과 아픔과 연민과 회한이 뒤섞인 그런 엄마냄새. /박인하 청강문화산업대학교 만화창작전공 교수▲ 박인하 청강문화산업대학교 만화창작전공 교수

2014-08-31 박인하

그곳에는 사람이 있다

'아! 팔레스타인'. 이 책의 제목이자, 오늘 함께 공감하는 팔레스타인의 비극에 대한 우리의 마음이다. '아! 팔레스타인'이라는 한 마디에는 인간에 대한 존엄이 무너진 팔레스타인과 그곳에 사는 사람들에 대한 깊은 연민이 있다. 지난달 8일부터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의 가자 지구를 공격(더 정확하게는 학살)하고 있다. 수십만원짜리 싸구려 로켓이나 소총 따위로 무장한 하마스와 싸운다는 핑계로 비행기와 전차를 동원해 팔레스타인을 초토화시키고 있다. 민간인들을 노골적으로 겨냥한다. 유엔이 운영하는 학교를 폭격하기도 하고, 가족을 찾는 젊은이를 조준사격하기도 한다.만화를 그린 원혜진 작가는 2000년 9월 30일 아빠와 함께 중고차 시장에 다녀오던 팔레스타인 소년 라미 자말 알두라가 이스라엘 군의 총에 맞아 죽는 영상을 보게 된다. 당시 시위대를 진압하던 이스라엘 군은 비무장인 아빠와 아들에게 총구를 겨눴다. 아빠 자말 알두라는 "아이가 있으니 쏘지 말라"고 소리를 질렀지만, 이스라엘 군의 조준사격에 라미 자말 알두라는 그 자리에서 죽고 만다. 2000년, 고등학교를 졸업한 작가는 인터넷에서 이 사진을 보고 팔레스타인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된다. 이후 7년을 준비한 작가는 2007년 여름, 만화를 그리기 시작한다. 최근 벌어진 학살로 다시 한 번 비극적 상황을 알린 팔레스타인은 우리에게 지리적으로나 역사적으로 낯선 공간이다. 기원전 2100년경 메소포타미아 출신 유목민 아브람이 하나님의 계시에 따라 가족과 함께 이주한 가나안이 바로 팔레스타인이다. 셈족의 지도자 아브람은 가나안으로 이주한 뒤 후처 하갈에게 장자 이스마엘을 얻고,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 아브라함으로 이름을 바꾸고 본부인 사라에게서 이삭을 낳는다. 오늘날 아랍과 이스라엘은 형제들이다. 이스라엘이 역사 속에서 어떤 고난을 당했고, 마침내 수천년 만에 다시 돌아와 나라를 건국하게 되었다는 이야기는 우리에게 익숙하다. 한국과 이스라엘은 곧잘 닮은꼴로 비유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역사 안에는 그곳에 살던 사람들의 역사는 지워졌다. 작가는 팔레스타인의 고대사가 왜 사라졌는지를 탐구한다. 또한 팔레스타인의 비극을 이해하기 위해 유대인의 디아스포라와 박해의 역사도 함께 설명한다. 테러조직, 저항조직, 군사조직 하마스 때문에 팔레스타인 문제가 벌어진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스라엘도 하마스가 팔레스타인 민간인들을 방패로 삼고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문제의 본질은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점령이다. 1967년 3차 중동전쟁으로 이스라엘은 이집트와 요르단이 차지하고 있던 가자지구와 서안지구를 점령한다. 팔레스타인 저항세력이 반격하면, 이를 구실로 대규모 군사작전을 감행한다. 이 같은 비극은 19세기 말 시오니즘의 태동에서, 1948년 이스라엘 건국에서, 1967년 제3차 중동전쟁 후 팔레스타인 불법 점령에서부터 반복되어 온 참사다. 이 비극을 멈추기 위해 괴롭고 고통스럽지만 비극을 똑바로 직시해야 한다. 어떤 천국도, 어떤 신도 팔레스타인에서 벌어지는 학살을 정당화할 수 없다. 마지막으로 팔레스타인평화연대 활동가 덩야핑의 추천사 중 일부를 옮긴다. "이스라엘의 만행이 있을 때마다 팔레스타인 연대 운동에 동조한답시고 나치가 유대인을 전부 학살하지 못한 게 잘못이라는 끔찍한 얘기를 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이 이 책을 꼭 읽어보기 바란다. 당신들의 손쉬운 일회성 비난과 달리 공전을 위해 하루하루 노력하는 사람들이 이 책에 있다."/박인하 청강문화산업대학교 만화창작전공 교수▲ 박인하 청강문화산업대학교 만화창작전공 교수

2014-08-03 박인하

진짜 캠핑을 알려 주마

경기도의 한적한 동네에 살고 있다. 10년 전 신도시의 아파트를 떠나 이곳으로 이사왔을 때만 해도 2차선 도로 옆은 대부분 논·밭이었다. 매년 논·밭이 메워지더니 창고와 공장이 들어섰다. 얼마 전 논이었던 자리가 또 메워졌다. 공장과 창고가 들어서는 건가라고 답답해 할 무렵 '오토캠핑장'이라는 간판이 붙었다. 캠핑이라면 설악산이나 지리산 같은 곳을 떠올리던 나에게, 내가 사는 동네에 캠핑장이 생긴 건 충격이었다.토요일 저녁이면 캠핑장에 차와 텐트가 가득 들어찬다. (특별한 연휴나 휴가 기간이 아님에도)가끔 근방을 지날 때면, 멀찌감치 차를 세우고 텐트를 구경하기도 한다. 텐트에도 유행이 있는지 볼 때마다 조금씩 분위기가 달라진다. 하지만 기본 구성은 비슷하다. 자동차와 커다란 텐트를 함께 세우고, 멋진 조리대에 식탁도 보인다. 밤이 되면 한쪽에 스크린을 세우고 프로젝터로 영화를 보기도 한다. 그렇게 하루 밤이 지나고 나면 바로 철수준비를 한다. 어제, 가족을 위해 텐트를 설치했던 아빠는 오늘, 복귀를 위해 텐트와 장비를 정리한다. 휴일 서울 근교의 캠핑장에서 대자연의 호젓함을 찾는 건, 서울 가서 김서방 찾는 정도의 난이도다. 간격없이 붙은 텐트는 자연스럽게 장비경쟁을 하게 만든다. 간단한 장비로도 충분히 만족할 만한 캠핑을 즐길 수 있음에도, 지난주 본 옆 텐트의 장비를 떠올리며 내 장비를 탓한다. 어느 순간 캠핑의 목적이 애매해진다. 드디어 '글램핑'이란 난생 처음 들어보는 말도 등장했다. 화려한 캠핑이란 뜻이라는데, 호텔의 정원 등에 완벽하게 준비된 텐트가 마련되고, 요리사가 음식을 준비해 주기도 한다.캠핑의 열풍 속에 진짜 캠핑이 뭔가 좀 애매하다면, 하야세 준의 '두근두근 캠핑로드'를 보자. 이 만화는 1998년 '야외로 나가자!'는 제목으로 5권까지 출간된 뒤 절판된 만화를 완결권인 6권까지 새로 출간된 만화다. 일본에서 처음 출간된 건 1996년이다. 90년대는 일본에 중년층을 중심으로 100대 명산 투어 같은 제2차 아웃도어 붐이 불었던 때다. 1998년 초판이 나올 때 이 만화에서 이야기한 '캠핑'은 뭔가 판타지 같은 느낌이었는데, 2014년에는 어느덧 현실이 되었다.32세의 회사원 노부와 20세의 전업주부 메구미는 이사한 맨션에서 우연히 주민들의 바비큐 파티에 참여하게 된다. 노부의 "이러고 있으니 캠핑할 때 생각이 나는군요"라는 말을 들은 젊은 아내 메구미는 "나도 캠핑 가고 싶어! 멋진 데 좀 데려다 줘"라고 조르게 되고, 결국 캠핑을 그만둔 노부는 아내와 캠핑 라이프를 다시 시작하게 된다. 아내와 나선 첫 캠핑. 캠핑장에는 텐트가 가득하다. 메구미는 "완전 하루주쿠 같아"라며 캠핑의 첫 감상을 말한다. 이렇게 시작된 이야기는 뭐든 경험해 보고 싶은 메구미의 욕망과 캠핑 고수 노부의 노하우가 결합하며 산·바다·계곡·동네 하천 등으로 새로운 캠핑 장소를 넓혀 나간다.많은 일본만화가 그렇듯, '두근두근 캠핑로드'는 흥미로운 이야기가 살아있는 만화다. 가족의 갈등, 이혼한 엄마와 혼자 사는 아이, 홀로 부임한 샐러리맨 같은 사람들의 갈등과 고민을 캠핑을 통해 풀어간다. 이 만화의 원제인 '야외로 나가자'처럼, 이 만화에서 이야기하는 '캠핑'은 개인의 야외활동이다. 인공적이고 화려한 캠핑이 아니라 자연의 맛을 느끼는 캠핑이 궁금하다면, 이 만화가 제격이다. 꼭 이대로 캠핑을 하지 않더라도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재미있으니까 딱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만화다./박인하 청강문화산업대학교 만화창작전공 교수▲ 박인하 청강문화산업대학교 만화창작전공 교수

2014-07-06 박인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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