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의 연인

 

[시인의 연인]딱따구리 소리

딱따구리 소리가 딱따그르르 숲의 고요를 맑게 깨우는 것은 고요가 소리에게 환하게 길을 내어주기 때문이다, 고요가 제 몸을 짜릿짜릿하게 빌려주기 때문이다. 딱따구리 소리가 또 한 번 딱따그르르 숲 전체를 두루 울릴 수 있는 것은 숲의 나무와 이파리와 공기와 햇살 숲을 지나는 계곡의 물소리까지가 서로 딱, 하나가 되기 때문이다. 김선태(1960~)'딱따구리 소리'를 봄의 언어라고 하자. '딱따그르르' 숲의 고요를 맑게 깨우고 있지 않은가. 이럴 때 '고요가 소리에게 환하게 길을 내어주고' 그 언어는 우리에게 봄을 감각하게 만든다. 고요가 이 땅의 모든 만물들 가운데 '짜릿짜릿하게 몸을 빌려주듯' 우리의 소리도 몸의 고요한 침묵을 깨고 그 안에서 비롯된다. 그렇다면 '와' '아' '야' '오' '우'하는 감탄사란 딱따구리의 '딱따그르르'와 유의한 기의를 가진 소리라고 할 수 있다. 봄이 오는 숲속에서 "딱따구리 소리가 또 한 번 딱따그르르/숲 전체를 두루 울릴 수 있는 것"과 같이, 봄의 자장에 놓인 우리는 누가 먼저라 할 것 없이 '와' '아' '야' '오' '우'가 저절로 나온다. 그것은 나무와 이파리, 공기와 햇살, 계곡 물소리 할 것 없이 '딱, 하나' 되어 터져 나오는 3월의 끝자락에 있기 때문이다. /권성훈 문학평론가·경기대 교수권성훈 문학평론가·경기대 교수

2018-03-25 권성훈

[시인의 연인]뿌리와 뿔

뿌리에서 멀어지면 단단한 뿔이 된다애초에 하나였으나 이제는 둘이다뼈 없이살 뚫고나와뼈가 되어 박힌다뿌리에 가까워져도 단단한 뿔이 된다안으로 뻗어가며 마음을 들이박는다뿌리는뿔처럼 뻗었으나뒤늦게 찔린 거다김남규(1982~)사물의 높은 곳에 달린 뿔은 자신의 몸을 뚫고 나와야 비로소 뿔이 된다. 뿔이 된다는 것은 자신을 먼저 찌른 다음 세계를 향해 그것을 들 수 있다. 뿌리에서 나온 뿔은 아이러니하게도 그 자체가 뿌리로서 존재하지만 뿔이면서 뿌리가 아니다. 헤르만헤세의 '데미안' 에서 "새가 알에서 나오려고 싸운다. 알은 곧 세계이다. 태어나려고 하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파괴해야만 한다. 그 새는 신을 향해 날아간다. 그 신의 이름은 아브락사스(Abraxas) 다." 이 뿔은 근원적으로 인간 욕망의 뿌리를 형상화해서 보여준다는 점에서 실재하는 화신이 아닐까. 또한 "뿌리에서 멀어지면 단단한 뿔이" 뿌리를 닮아 있는 것은 이 둘이 '애초에 하나'였음을 증명해 주기도 한다. '뼈 없이 살 뚫고나온 뼈'가 욕망에의 "단단한 뿔이" 되기 위해서 안으로 깊숙이 뿌리내리면서 자기를 파괴해야 세계 더 높게 뻗어나갈 수 있는 것 같이./권성훈 문학평론가·경기대 교수권성훈 문학평론가·경기대 교수

2018-02-11 권성훈

[시인의 연인]불투명한 영원

손바닥을 종이에 대고 펜으로 손의 윤곽을 따라 그린다/손목 위쪽은 닫히지 않는다/바닥에 찍힌 십자가 그림자/우리는 수수께끼 앞에 서 있다해변으로 밀려오는 손목들/불붙은 커튼/하늘은 주먹으로 두드려 맞은 것처럼 울퉁불퉁하고/나무들은 게으르게 흔들린다//흔들리지 않는 슬픔물속에 손을 넣으려고 하면//손을 잡기 위해 떠오르는 손이 하나 보인다/시계에 물이 찼다//기도가 끝났다 신철규(1980~)시인이 말하고자 하는 대상은 말해지는 지시 기호 사이의 연관성을 통해 그 의미가 확산된다. 실제 하지 않거나, 존재하지만 보이지 않는 '불투명한 영원의 언어'는 그것을 지시하는 상징어로 편재되기 마련이다. 말하자면 "손바닥을 종이에 대고 펜으로 손의 윤곽을 따라" 그린다고 할 때 손바닥은 영원이 기거하는 대상의 공간이며, 종이와 펜은 그것을 지시하는 기호로서 '손목 위쪽' 어딘가에 있을, '영원의 윤곽'을 감각적으로 투사시킨다. '바닥에 찍힌 십자가 그림자' '해변으로 밀려오는 손목들' '불붙은 커튼' 등이 상징하는 것 역시 가시성으로 영원이 연원하는 불가시성을 인식하는 역할을 한다. '흔들리는 나무'와 '물속에 손' 그리고 '시계에 물'과 '기도' 등은 대상 자체를 형상하는 것 보다 대용적인 것으로써 형이상학적인 '비대상의 수수께끼'를 풀어가는 방식이 아닐 수 없다. /권성훈 (문학평론가·경기대 교수)

2018-01-28 권성훈

[시인의 연인]미루나무

나는 오늘처럼 서서 이 겨울을 다 보았다수많은 눈이 저 호수 속으로 몸을 던지고 산짐승들은 밤낮으로 들판을 찾았다달빛이 산줄기를 뒤덮기도 했지만 온기는 전혀 없었다바람은 수시로 내게 거친 말을 건넸으나 나는 이 겨울을 바라볼 뿐이었다졸음을 몰고 오는 햇살이 발아래를 적신다 겨울이 흩어지고 있다나는 오늘처럼 서서 이 겨울을 그대로 보낼 것이다무슨 말을 하겠는가홍용희(1966~)오래된 것일수록 새 것이 모방하지 못하는 지혜가 담겨 있다. 세월을 견뎌낸 고목의 울퉁불퉁한 안쪽 겹겹의 결들은 사물의 이치를 배반하지 않고 그대로 감득한 기록이 아닐까. 흐르는 풍경을 떠나지 않는 지혜의 숲에 '오늘처럼 서서' 있는 '미루나무'는 무엇을 보았는가. '수많은 눈이 저 호수 속으로 몸을' 던지는 것과, '산짐승들은 밤낮으로 들판을' 찾는 것과, '달빛이 산줄기를 뒤덮기도' 하며 '졸음을 몰고 오는 햇살이 발아래를' 적시는 겨울을 미루나무 한 그루가 온 몸으로 적고 있다. 한 치 앞도 벗어날 수 없는 속박에서 결박당하지 않기 위해 '오늘처럼 서서 이 겨울을 그대로 보낼 것'이라는 담대한 사색에 있다면 우리는 '무슨 말을 하겠는가' 바라볼 뿐./권성훈 (문학평론가·경기대 교수)

2018-01-21 권성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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