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경이 있는 에세이

 

[풍경이 있는 에세이]지재 강담운의 붉은 마음

김해의 기녀… 시문으로 이름 날려스무살시절 문인화가 차산 배전 만나서로의 예술세계 흠모 '뜨거운 사랑'차산은 10년간 과거 보러 서울 오가지재의 그리움은 세월 갈수록 깊어져김해의 기녀로는 거문고의 명인이었던 옥섬섬과 시문으로 이름을 날린 지재 강담운이 있다. 옥섬섬은 고려시대 감찰대부를 거쳐 문하평리를 지낸 야은 전녹생(1318~1375)으로부터 '김해기녀 섬섬에게 주다'라는 연시를 받는다. '신선이 노닌 바닷가 산은 일곱 점으로 푸르고/거문고 속엔 흰 달이 한 바퀴 밝았네/세간에 옥섬섬의 솜씨가 없다면/뉘라서 능히 태고의 정을 탈 수 있으랴'라는 시에는 섬섬에게 보내는 애틋한 마음이 읽힌다.지재 강담운(1863~1907)은 평양에서 기녀의 딸로 태어나 여덟 살 때 김해로 옮겨와서 김해 관아의 기적에 오른 것을, 그녀가 남긴 시편을 통해 알 수 있다. '옛날을 추억하며'라는 시에서 '옛날을 생각하고 또 생각하네/유영의 봄에 나고 자랐지/여덟 살에 어머니를 따라/ 배를 타고 남쪽 나루를 건넜네/분성객관에 잘못 떨어져/구란에 이 몸 맡겼네'에서 유영은 평안도의 병영을 이르는 말이고 분성은 김해이며 구란은 기녀들이 거처하는 곳이다. 분성객관에 잘못 떨어졌다고 한 것으로 보아 최종 목적지가 김해가 아닐 수도 있었다.열 일곱 살 때 어머니를 여의고 천애고아가 된 그녀는 스무 살 전후해서 김해의 뛰어난 문인화가인 차산 배전(1843~1899)을 만나 뜨거운 사랑에 빠진다. 서로의 예술세계를 흠모하던 두 사람은 당나라 시인 가도의 시구 '지재차산중(只在此山中)이 산중에 있기야 하겠지만'에서 강담운은 지재를 호로 삼으며 세상 끝날까지 배전이라는 산중에 살겠다고 언약했고 배전은 차산을 호로 삼으며 세상 끝날까지 강담운을 품으며 살겠다고 언약했던 것이다.차산은 문인화로는 널리 알려진 인물이었지만 과거에 급제하지 못한 양반이었다. 사랑이 불타오른지 얼마 되지 않아 차산은 한양으로 과거를 치러 올라갔다. 지재는 '과거 보러가는 차산 낭군을 보내며 강가에서 이별을 읊네'라는 시를 짓는다. '봄바람이 역랑을 일으켜/푸른 강가에 말을 세웠네/먼 이별될까 근심 마시고/힘써 청운의 뜻 이루소서/몸 마른 건 원래 병 때문이니/그립다고 감히 임을 원망하리오/난꽃과 사향 귀한 줄 모르겠으니/계수나무 향기 물들기 바라옵니다'로 끝맺는 시에서 몸 마른 것은 그리움 때문이 아니라 병이 있었던 연유니 근심 마시고 계수나무 월계관을 쓰고 오시라는 염원이 절절한 시다.그러나 차산은 서울을 오가는 생활을 거의 10여년이나 계속 한다. 과거급제는 그 시대에도 녹록지 않았던 것이다. 지재의 그리움은 세월이 갈수록 깊고 아팠다. 그리움은 죽음에 이르는 병인 것을 알고 있던 지재는 병을 이기기 위해 여러 편의 연시를 남긴다. '서울로 가는 사람과 이별하며'라는 시에는 차산이 헤어지며 주고 간 귤 하나를 손에 끼는 반지인 듯 아낀다는 문장으로 가슴이 저린다. '시월 강남에 비 내리니/북쪽엔 눈 내리리라/북쪽에서 눈 만나시거든/비속에서 그리워하는 저를 생각 하소서/떠날 때 주신 귤 하나 /손의 반지인 듯 아낍니다/양주로 오시게 되면/돌아오시는 날, 만 개를 드리오리라' 음력 시월이면 양력으로 11월이다. 남쪽에 비오면 북쪽에서는 눈이 내릴 텐데 혹 눈 만나시면 빗속에서 하염없이 임을 그리워하는 지재를 생각해 달라는 시문이 안타깝기 그지없다. 차산이 만 개의 귤을 받으려면 과거에 급제하는 길 밖에 없었을 것이다. 지재의 애절하고 아름다운 사랑은 가이없다. 그 붉은 마음을 '봄꿈'에서 읽을 수 있다. '수정 주렴 밖 해 기울고/길게 늘어진 버들 푸른 난간 덮었네/가지 위 꾀꼬리 울음 상관하지 말고/그대 찾아 꿈에 장안에 이르렀네'. 사랑하는 사람이 보고 싶어 꿈에 장안을 찾아간 지재다.차산은 과거급제를 포기하고 김해로 돌아온다. 그는 그림에 나머지 생을 바쳤다. 차산은 술을 즐겼던 것으로 보인다. '차산 낭군이 술 취함을 조롱함'이라는 시는 미소를 짓게 한다. '비취 주렴의 향기와 호박 비녀/옥가락지 산호패물 값이 얼마인데/훔쳐다가 어느 집에 맡기고 술 마셨는지/철쭉꽃 앞에서 잔뜩 취하셨네요'. 유쾌한 시다./김윤배 시인김윤배 시인

2020-08-06 김윤배

[풍경이 있는 에세이]엄마, 정말 괜찮은 거예요?

코로나19로 사회적 거리두기 시국맞벌이 여동생네 두아이 맡은 엄마밥·공부 챙기랴 종일 실랑이 진빠져"모두가 못할짓" 한계 다다른 푸념나중에 이 시기를 어떻게 기억할까요사이 엄마는 밤 아홉 시만 되어도 잠이 든다. 잠 없는 분이라 열한 시쯤, 아니면 그 넘어라도 종종 내게 전화를 걸어와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나누곤 했는데 지금은 그럴 일이 없다.맞벌이 여동생네 아이들 둘을 보느라 진이 빠져 그렇다. 초등 3학년과 5학년. 사실 작년만 하더라도 아버지가 더 바빴다. 아이들의 등하교부터 요일별 학원 라이딩을 아버지가 도맡았기 때문이다.70대 중반이면 운전면허를 반납할 때도 되지 않았느냐며 걱정하는 이들도 많지만 나만 하더라도 아버지의 운전 실력을 아직은 걱정하지 않는다. 공고 자동차과 출신인 아버지는 33년 한 직장에서 근속하면서도 아주 오랫동안 운전학원 강사로 투잡을 뛰었던 사람이다. 아직도 세상에서 제일 재미있는 장난감이 자동차인 줄로만 아는 분이다. 그런 분이 벌써 반 년이 넘도록 꼼짝없이 집에 묶여 있다. 아이들이 학교도, 학원도 가지 않는 데다 풀렸다 말았다 하는 사회적 거리두기 때문에 아버지의 집 밖 출입은 애초에 금지당했다.며칠 전에는 이가 욱신거려 치과에 가려 했지만 엄마가 버럭 소리를 쳤단다."갔다가, 코로나라도 걸려오면 애들은? 애들은 어쩌라고요? 애들 엄마랑 애들 아빠 회사는?" 아버지는 아픈 이를 타이레놀로 겨우겨우 달랬단다. "야, 지금 얻다 대고 느이 아버지 걱정이야? 제일 죽을 맛인 사람은 나야! 이 나이에 내가 애들 둘이랑 느이 아버지까지 셋을 밥해 먹이느라 골병이 들어!"온라인 개학으로 큰 녀석은 아버지 컴퓨터를 차지했고 엄마의 스마트폰은 둘째 녀석 차지가 되었다더니, 엄마와 아버지가 불편할까 봐 아이들 각각에게 태블릿을 사주었단다. 그랬더니 이제는 하루종일 태블릿을 들고 게임만 하려드는 손주들을 말리느라 엄마와 아버지의 일이 더 늘었다. 손주들 사진으로 범벅이던 가족 단체 카톡방은 알 수 없는 암호로 가득하다.'엄마, 영어학원 온라인 클래스 비번은 4kjsi89uu예요', '엄마, 온라인 알림장 캡처해서 보낼 테니 확인 좀 해줘요'.여동생은 하루에도 몇 번씩 메시지를 적어놓지만 엄마가 과연 저걸 다 알아듣고 다 처리할 수 있을까, 멀리 사는 나는 머리통만 긁적일 뿐이다. 도대체 이 시국은 대한민국의 할머니들을 다 말려죽일 셈인가. 엄마, 정말 괜찮아요?그쯤 되는 실정이니 여섯 살 아이랑 온종일 방구석을 뒹구는 나 따위는 팔자 편한 처지라고 되레 욕이나 먹을 것 같아 입을 다물고 만다. 아이는 7개월 만에 드디어 유치원에 나가기 시작했지만 2주도 안 되어 방학을 맞고 말았다. 맙소사. 정말 모두가 못할 짓이다.식구들 밥 먹이는 일을 세상에서 가장 중한 줄 알고 살던 엄마도 한계에 다다른 모양이다."야, 무슨 애가 밥을 그렇게 많이 먹냐? 나는 참말로 기가 차서. 밥상 치우고 뒤돌아서면 또 배가 고프대. 그래서 고구마 삶아주면 두 개, 세 개, 홀랑 집어먹고는 또 뭐 먹을 거 없냬. 하이고, 애들 엄마가 인터넷으로 장을 봐서 우리 집으로 보내는데 뭘 산처럼 우리 집에 쌓아놔도 이틀이면 하나도 없어. 정말이야, 농담이 아니라니까." 그러면 스피커폰으로 듣고 있던 아버지가 슬그머니 끼어든다. "나는 귤 한 개도 못 집어먹는다. 애들 먹을 거 없다고. 난 생선도 한 점 못 집어먹어. 진짜야."우리는 나중에 이 시기를 어떻게 기억하게 될까. 어머, 정말 돌이켜보니 믿을 수 없어. 우리 어떻게 그렇게 집에 콩 처박혀 살 수 있었을까. 그러면서 까르르 웃게 될까. 지금이야 놀이터 뽀얗게 덮은 미세먼지 보며 한숨이나 쉬고 있는 처지지만./김서령 소설가김서령 소설가

2020-07-30 김서령

[풍경이 있는 에세이]불타의 그림자가 서린 불영사

대웅보전 떠받들고 있는 돌거북고찰 위엄 보여주는 듯 '믿음직'삼층석탑 등 불교건축물의 전형꽃과 열매가 함께 달린 석류나무삶과 죽음 또한 다르지 않다는 듯먼 곳 마다 안고 달려가면 어느 아름다운 영혼 하나 버선발로 달려나와 반겨줄 듯한 사찰 불영사(佛影寺), 대체 얼마 만에 이 길을 가는 것인지. 때가 때이니만큼 계절은 어느새 한여름을 치닫고 있으니, 폭염을 피해 사람들은 강으로 바다로 달려가기 바쁘지만 나는 여전히 숲을 떠나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지난 봄부터 나를 부르는 절이 있었으니 경북 울진 불영계곡에 자리한 이름하여 불타의 그림자가 서린 불영사다. 불영사는 강원도 최남단 나의 고향 원덕과 그리 멀지 않은 경북 울진에 자리한 절이어서 초등학교 때 석류굴과 함께 수학여행을 다녀온 곳이지만, 성년이 되어 고향을 떠나온 후엔 숲에 매료되어 금강송을 찾아 서너 번 갔던 사찰이다.이런 저런 인연이 있었지만 내가 특별히 불영사를 기억하는 이유는 딸만 내리 셋을 낳고 끝내 아들을 두지 못한 채 마흔일곱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내 어머니 이춘란(李春蘭)의 영을 모신 절이라 불영사에 갈 때마다 곱디 고왔던 어머니의 품을 떠올릴 수밖에 없다.일주문 곁 매표소에서 입장권을 끊으면 약 1㎞ 내리막과 오르막을 번갈아 걸어야 한다. 어렸을 적엔 이 길이 정말 멀고 험했는데, 주변에 송림이 좋아선지 계곡과 명상의 길을 따라 걷다보니 어느새 넓은 분지에 자리를 잡은 요사채가 하나 둘 보이기 시작한다. 요사체 앞 채마밭에는 호박 가지 고추 등의 농작물들이 자라고 있었는데 풀 하나 없이 어찌나 깔끔하게 잘 가꿔놓았는지 역시 비구니 사찰은 다르구나 했다. 내가 절을 찾아간 그날은 어느 망자의 천도제를 지내는 행사가 있어 그동안 나름 사찰기행을 한다고 했으나 이렇게 많은 스님을 한 자리에서 뵙는 건 처음인데 역시 절이 절다우려면 스님이 계셔야 하는 게 맞다.대웅보전을 향해 걷다보니 왼편(바깥)으로 석가모니불이 모셔져 있고 그 옆 불영지에는 잠자는 연꽃이라는 별명을 가진 흰 수련과 노랑 어리연이 행자를 반긴다. 법영루에서 불영지를 바라보는 풍경은 그만이다. 불영지를 지나 나는 내 어머니 사모하는 마음으로 아담한 건물 대웅보전 앞에 섰다. 법당 안을 들여다보니 부처님 뒤편의 화려한 불화가 시선을 사로잡는다. 법당을 둘러보고 한낮의 폭염을 피해 설법전 돌계단에 앉아 단아함의 극치를 보여주는 삼층석탑 뒤로 대웅보전을 떠받들고 있는 듬직한 두 기의 돌거북은 고찰의 위엄을 보여주는 듯 믿음직스럽다.이 사찰은 불교건축물의 전형을 보여주는 듯 당우 하나하나가 저마다 개성 있고 아름답다. 그러나 가장 인상 깊은 보물을 꼽으라면 역시 대웅보전 앞에 자리한 삼층석탑을 최우선에 둘 것이다.날씨는 더웠지만 사찰의 구석구석을 살피는 맛이 지극하고 의미가 깊다. 마음 같아선 설법전 돌계단에 앉아 염불소리를 들으며 석탑을 한나절 바라보거나 법당 안에 모신 불화를 찬찬히 감상하고도 싶었지만 그럴 수 있는 시간도 분위기도 아니다. 의상전으로 이어지는 길을 따라 석류나무에 꽃과 열매가 함께 달린 걸 봤다. 삶과 죽음이 다르지 않다는 걸 보여주는 듯했다.불영사는 여느 사찰처럼 임진왜란 등 나라에 환난이 있을 때마다 불에 타 여러 번 증·개축한 기록을 갖고 있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보물 제730호인 응진전을 비롯해 극락전, 대웅보전, 명부전, 조사전, 칠성각, 범종각, 산신각, 황화당, 설선당, 응향각 등이 있다. 문화재로는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135호인 불영사삼층석탑을 비롯하여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162호인 불영사부도, 대웅전 축대 밑에 석귀, 배례석, 불영사사적비 등이 있다.사찰을 나와 바다를 보겠다고 왕피천을 따라 관동팔경의 하나인 망양정으로 향한다. 망양정 주변의 어촌마을은 예전과 다른 변화를 보였지만 동해는 여전히 푸르고 힘이 넘쳤다. 망양정을 건너에 두고 강과 바다가 만나는 경계점에 차를 세우고 왕피천 하류를 살핀다. 불영계곡에서 흘러들어 왕피천을 경유, 동해로 합수하는 이곳, 건너 모래밭에선 많은 갈매기들이 자유롭게 시간을 즐기고 있다. 저들에게도 내게도 저녁은 차별 없이 올 것이다./김인자 시인·여행가김인자 시인·여행가

2020-07-23 김인자

[풍경이 있는 에세이]몸이 없는 영혼은 거짓이다

고흐 작품 컴퓨터 집어넣고 프린트진품과 닮았다고 해도 인정할수 없어 창작품은 '작업' 거쳐야 비로소 완성악단 지휘나 대하소설 집필도…훌륭한 예술 연마 이시대도 같다생각해 보면 참 어이없는 일이지만 에리히 프롬의 '사랑의 기술(The Art of Loving)'이 우리나라에 처음 소개되었을 때, 그 제목을 '사랑의 예술'이라 번역한 적이 있다. 이 책은 우리가 흔히 '사랑에 빠진다'고 말하는 바처럼 사랑은 그렇게 수동적인 것이 아니라 '참여하는' 능동적인 행위이며, 본래 주는 것이지 받는 것이 아니라고 가르친다. 그러면서 사랑은 단순한 감정이 아니라 하나의 '기술'이기에 다양한 지식과 노력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즉 '사랑하기(loving)'는 추상적인 개념이 아니라 실천적 연마가 필요한 '기술'이라는 것이다.그건 그렇고, 왜 'art'라는 한 단어에 '기술'과 '예술'의 두 뜻이 동시에 들어가게 된 걸까. 둘은 별개일까 아니면 겹칠까. 원래 하나인데 영어와 한국어의 틈에서 빚어진 오해일까. 이와 관련해 최근에 예술과 기술의 관계에 대해 고민해볼 만한 흥미로운 사건이 하나 있었다. 예전에 유명 가수였던 어떤 이가 언제부터인가 화가로 변신해 성공했고, 그림을 상당히 비싼 값에 팔았다고 한다. 그런데 알고 보니 그가 직접 그린 것이 아니라, 아이디어만 내고 실제 '작업'은 일당을 받는 대리 작가에게 시켰다는 것이다. 이 그림을 그의 '작품'이라 할 수 있을까?약 4년의 법정 다툼 끝에 대법원은 결국 작가의 손을 들어주었다. 그는 "작가가 아이디어를 제공하고 조수가 작품을 만드는 것은 현대 예술의 관행"이라고 변명했다. 이 주장을 지지하는 이론가들도 꽤 있어, 소위 '개념예술'을 근거로 제시하곤 한다. 유명한 예로 마르셀 뒤샹의 작품 '샘'의 경우, 잘 알다시피 기성 제품인 변기를 갤러리로 가져와 전시했을 뿐이다. 요즘 최고가를 달리는 작가 제프 쿤스의 '풍선 개' 같은 경우는, 우리 눈에는 그저 시중에서 파는 아이들 장난감 아닌가 싶기도 하다. 현대의 많은 설치미술은 이미 만들어진 물건을 특정한 장소에 그냥 가져다 놓는 것으로 작품을 '재생산'함으로써 완성한다. 이런 예는 끝이 없다.이런 게 예술이라면 개나 소나 다 예술을 할 수 있는 것 아닐까? 예술이란 정말 무엇일까? 참 난감한 질문이다. 나는 이 질문을 "작가란 무엇인가?"로 바꾸면 답이 조금 수월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작가는 대상을 해석하는 자이며, 동시에 그것을 수용자에게 구체적 형태로 전달하는 주체이다. 이러한 정의는 예술의 형식이 달라진다고 해서 변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주체가 개입하지 않은 생산품은 작품이 아니기 때문이다. 즉, 반 고흐의 작품을 코드화하여 컴퓨터에 집어넣고 프로그램으로 변형한 뒤 프린트한 것을, 겉보기에 아무리 고흐의 진품과 닮았다고 해도, 고흐의 작품으로 인정할 수 없는 것과 같다.주체가 중요한 또 하나의 이유는 우리가 인간으로서 '몸'이라는 특권과 한계를 동시에 지니고 있다는 점이다. 하나의 창작품은 아이디어뿐 아니라 몸을 통한 '작업'을 거쳐야 비로소 완성된다. 머리에 든 개념만으로는 감상자가 수용할 수 있는 작품이 되지 않는다. 예컨대, 베토벤의 '비창'을 희극적으로 해석할 기막힌 발상이 떠올랐다 해도, 실제 악기로 재현하지 않는 한 음악이라 할 수 없다. 한국 근현대 백 년의 공간에서 3대에 걸친 수난사를 머리에 짜냈다 해서, 그게 저절로 스무 권짜리 대하소설이 되지 않는다. 악단을 지휘하려면 긴 시간 피나는 연습을 해야 하고, 대하소설을 쓰려면 책상에 쭈그리고 앉아 수십만 글자를 써야 한다.앞의 '개념미술'도 오브제를 '옮기고 조정하고 배치할' 때, 즉 주체가 개입할 때 비로소 작품이 된다. 내 생각으론, 그 전직 가수가 가게에서 사 온 화투를 직접 캔버스에 붙이는 방식으로 작업했더라면 나름 새로운 작품이 될 수도 있었을 것 같다. 몸과 분리된 예술이란 거짓에 지나지 않는다. 앞서 'art'가 예술인지 기술인지 헛갈렸다지만, 사실 둘은 떨어질 수 없는 하나이다. '완당전집'에 보면 "칠십 평생에 벼루 열 개를 구멍 냈고 붓 일천 자루를 닳게 했다"는 구절이 있다. 훌륭한 예술은 이런 수련과 연마를 거쳐야 나오는 법, 지금 이 시대라고 해서 다르지 않다./정한용 시인정한용 시인

2020-07-16 정한용

[풍경이 있는 에세이]"밥 좀 사주죠"

마음에 남은 드라마 女주인공 대사대기업 부장·파견직 직원의 '우정'망가져도 행복할 수 있음 보여줘누군가에 '선한 영향력' 줄수있다면그것만으로도 '괜찮은 인생'이다"밥 좀 사주죠." 드라마 '나의 아저씨' 속 대사다. 여자 주인공 지안(아이유 분)이 남자 주인공 동훈(이선균 분)에게 말 그대로 툭, 던지는 짧은 대사. 명대사가 유난히 많은 것으로 유명한 이 드라마 속 대사 중에서 마음에 가장 오래 남았던 말이기도 하다.대기업 부장인 동훈은 처음 함께 밥을 먹으면서 파견직인 지안의 존재를 제대로 인식하게 된다. 두 주인공들만 밥을 먹는 건 아니다. 드라마는 상당 부분을 할애해 밥을 먹고 술을 마시고 밥상을 차리고 치우며 밥이나 술을 먹자고 권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조기축구회가 활발하고 동네만의 건배사가 따로 있는 동훈의 동네 사람들, 매일같이 만나는 삼형제들은 만나면 밥을 먹거나 술을 마신다. 밥 한 번 먹기도 쉽지 않은 데면데면한 사이이던 둘은 서로의 상처를 내보이게 되고, 자신도 모르게 치유하고 치유받아가면서 밥도 먹고 술도 마시는 사이가 되어간다. 남녀간이지만 사랑은 아니다. 연민이나 동정도 아니고, 뭐라고 규정할 수 없지만 친구보다 가까운 관계로 발전하는 느낌이다. 그렇게 동훈은 계약직도 아닌 파견직 직원인 지안에게 신경써준 최초의 사람이 되고, 외롭고 힘들기만 하던 지안의 인생에 없어서는 안 될 존재가 된다.그렇게 두 사람은 만남을 이어간다. 끈끈하다고 할 수 없는 사이지만, 감정의 농도는 꽤 진하다. 두 사람의 첫 건배, 서로를 마주보고 짓던 첫 웃음, 늘 우울하기만 했던 지안의 첫 미소는 그래서 감동적이었다. 거창한 자리도 아니고 그저 동네 술집에서 맥주 한 잔을 나눴을 뿐인데 두 사람은 그 순간 정말 편안하고 좋아 보였다. 이성간의 사랑이 아니어도 그렇게 좋을 수 있고, 사람과 사람의 관계가 참 다양할 수 있구나 싶은 장면이었다. 사람이 살다보면 누군가는 어떤 식으로든 마음에 남게 된다. "어디서 어떻게 만나든 너가 잘됐으면 좋겠다"고 이야기하는 동훈의 마음이 좋아보였던 것은 이런 말을 하고 헤어지기 쉽지 않다는 걸 너무 잘 알고 있기 때문이기도 했다. "내 인생이 네 인생보다 낫지 않고, 너 불쌍해서 사주는 거 아니고 고마워서 사주는 거야"라고 말하는 부장이라니, 판타지에 가깝지 않은가? 처음에는 비현실적이라고 생각했지만 드라마를 보다 보니 적어도 이 드라마 속에서만큼은 충분히 가능한 일처럼 느껴졌다.지안의 할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동네 사람들이 자기 일처럼 와서 도와주고 자리를 함께해주며 말없이 지안을 위로하는 모습도 그랬다. 코로나19로 조문조차 조심스러운 요즘이라 더 좋아보였는지도 모르겠다. 사업 실패로 돈 없이 사는 동훈의 큰형은 화환 하나 없던 썰렁한 빈소에 모아둔 비상금을 탈탈 털어 화환을 채운다. 비용 대비 효율성을 생각하면 말도 안 되는 비상식적인 행위다. 어차피 화환은 장례식에만 필요하고 가져갈 수도 없는데 그 하루 이틀을 위해 저 돈을 쓴다고? 게다가 지안은 내가 도움을 주면 줬지 나에게 뭘 해줄만한 사람도 아니다. 천만원이라는 거금을 쓰고도 "내 생에 가장 의미있는 돈을 쓰게 해줘서 고맙다" 라고 말할 수 있는 마음이라니! '동네도 망가진 것 같고 사람들도 다 망가진 거 같은데 전혀 불행해보이지 않는' 동훈의 동네 사람들은 그렇게 "망해도 괜찮은 거구나, 아무것도 아니었구나. 망가져도, 행복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마지막회, 서로의 길을 가게 된 동훈과 지안은 정말 우연히 만나 인사를 나눈다. 동훈은 "지안, 편안함에 이르렀나"를 묻고 지안은 말 그대로 편안하게 웃는다. 단 한 사람의 관심과 애정이, 누군가의 인생을 전혀 다르게 바꿀 수 있는 힘이 있다는 걸 보여주는 장면이었다. 가상의 인물이지만 그제서야 이름대로 편안함(安)에 이른(至) 지안을 나도 모르게 응원하게 되는 순간이었다. 어떻게 보면 두 사람은 고작 3개월 한 회사에서 일한 것뿐이니 상사라고 하기도 애매한, 뭐라 규정할 수 없는 관계에 가깝다. 하지만 오래 함께했다고 좋은 것이 아니며, 짧더라도 긴 여운으로 남아있는 사람도 있기 마련이다. '10년 후든 20년 후든 길에서 만나면 반갑게 아는 척 할 수 있는' 사람을 만들어가는 것, "밥 좀 사주죠"라고 이야기하거나 나에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생기면 좋겠지만 꼭 누군가와 인연을 만들지 않아도 된다. 드라마 속 동훈처럼, 누군가의 인생에 '선한 영향력'을 보탤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그 사람의 인생은 꽤 괜찮은 인생일 테니까./정지은 문화평론가정지은 문화평론가

2020-07-09 정지은

[풍경이 있는 에세이]죽향의 짧은 만남 긴 이별

대동강 연관정에서 처음만난 김립아버지 소식에 함께 찾아나섰지만이미 세상떠난이 거처서 대성통곡평양으로 돌아와 강나루에 이르러울먹이며 남긴 詩한수 이후 못만나지금쯤 대동강은 짙은 녹색으로 물들어 유유히 흘러갈 것이다. 대동강에는 시인과 묵객들이 즐겨 찾았던 부벽루나 을밀대, 연관정 같은 명소가 줄지어 있다. 연관정은 절벽 위에 날아갈 듯 솟아 있는 정자다. 성종 때 평안감사 허굉이 지은 것으로 규모가 크고 건축미가 뛰어난 것이 특색이다.연관정에서 굽어보는 풍광은 아름답기 그지없다. 신비한 은종을 감추고 있다는 백은탄이 건너다 보이고 능라도가 대동강을 가른다. 대동강에는 수많은 놀잇배가 떠 있었을 것이다. 여러 시인들이 대동강에 와서 사랑과 이별을 강물에 얹어 노래했다. 대동강은 사랑 앓는 시인들의 영원한 은유였던 것이다. 조의겸은 '사월이라 첫 여름 꽃은 이미 져버리고/주렴 바깥 훈풍에 제비가 날아드네/언덕 위 푸른 풀에 강물도 푸르니/이즈음 어느 누가 헤어지고 애태울꼬'라고 노래했다.김립(병연, 삿갓 1807~1863)은 '깎아지른 절벽 위엔 높은 문이 서 있고/만경창파 대동강엔 푸른 물결 굽이치네/지나가는 봄 나그네 말술에 취했는데/천만 가지 수양버들 십리 강촌에 늘어졌구나/외로운 따오기 노을빛 끼고 날아들고/짝지은 갈매기 눈발처럼 휘나르네/물결 위에 정자 있고 정자 위에 내가 있어/초저녁에 앉았는데 밤이 깊자 달이 뜨네'라고 연관정을 노래했다.진달래 만개한 봄이었다. 연관정 옆에서 퇴기 10여 명이 화전놀이를 하고 있었다. 그곳을 지나던 김립은 고소한 기름 냄새에 발길을 멈추었다. 화전 몇 장과 술 몇 잔을 얻어먹고 일어서려는데, 그를 알아본 퇴기들이 자작시를 내밀었다. 시답지 않은 시를 훑어보던 중, 눈에 확 띄는 시 한편을 읽게 되었다. 죽향의 시 '강촌의 저녁 풍경'이었다. '실버들 천만 가지 문 앞에 휘늘어져/구름인양 눈을 가려 마을을 볼 수 없네/목동의 피리 소리 그윽이 들리는데/보슬비 내리는 강촌에 날이 저무네.'로 끝나는 시였다. 이 시의 화답시가 앞의 김립의 시인데 그걸 아는 사람은 죽향 뿐이었다. 죽향은 고개를 끄덕였다. 퇴기라고는 하지만 서른을 막 넘긴, 곱고 순수해서 매력 있는 여인이었다.죽향은 이튿날 김립이 머물고 있는 영명사로 찾아왔다. 그녀는 이미 영명사 주지 벽암대사가 불가에 입문시키고 일영이라는 법명을 준 불자였다. 그녀는 80이 넘은 아버지, 예동철 옹을 찾아야 한다며 눈물을 지었다. 김립이 아는 인물이었다. 예 옹은 평양서 50리쯤 떨어진 중화고을 성인주막에 살았었다.그 밤 김립은 죽향의 집에서 하룻밤을 신세지고 날이 밝자 죽향을 앞세워 중화고을로 향했다. 김립은 걸음을 옮기며 즉흥시를 읊었다. '봄은 갔는데 늙으신 몸 어떠하실까/방에 앉아 나들이도 안 하셨다니/두견새야 뭐가 그리워 애타게 우느냐/울음소리에 못다 핀 꽃 떨어질세라' 걸음을 멈추고 조용히 시를 감상하고 있던 죽향은 아버지를 위해 부르는 노래라는 걸 알고 서러운 마음을 담아 시 한 편을 읊는다. '간절히 그리운 임은 산속에 계시건만/소식 모르는지 너무도 오래였어요/오늘은 오솔길 밟으며 찾아오건만/석양에 사립문 닫힌 집은 어디에 있을까요' 그녀는 시를 읊고 나서 그 자리에 주저앉는다. 불길한 예감이 밀려오는 것이었다. 찾아간 성인주막에는 예 옹의 지방이 놓여있을 뿐, 이미 세상을 떠난 후였다. 죽향은 대성통곡을 했다. 김립은 그녀를 부축하고 평양으로 돌아왔다. 대동강 나루에 이르러 죽향은 김립에게 "언제 또 뵈올 수 있을는지요, 꼭 다시 뵈옵고 모시기를 원하나이다'라고 울먹이며 시 한 수를 남긴다. '대동강에서 정든 님과 헤어지는데/천만가닥 실버들도 잡아매지 못하네요/눈물 어린 눈으로 눈물 젖은 눈 바라보니/님도 애가 타시는가 나도 애가 끊깁니다' 김립은 차마 죽향의 눈빛을 바로 보지 못하고 화답시를 읊는다. '꾀꼴새는 버드나무 숲에서 울어 대고/나는 누각에 기대어 풀밭만 바라보노라/그대 보내고 나 홀로 언덕에 남으면/달이 질 때 설움을 어이 달래리' 김립은 목이 메어 더는 노래하지 못한다. 그 후 죽향은 김립을 만나지 못했다./김윤배 시인김윤배 시인

2020-07-02 김윤배

[풍경이 있는 에세이]아무도 증명해주진 못하겠지만

옛 애인과 한 테이블에 앉았는데"정말 여전해" 이건 무슨 소리람?지금도 난 골뱅이소면 비비지 않아매일 강남까지 출근시켰다니…15년도 더 지난 이야기에 웃음꽃15년도 지난 일이다. 그러니 가물가물한 것이 당연한가? 나는 어렸고 자신만만했으며 낙천적이고 또 예의발랐다. 아마도 겁나는 일이 없어서 그랬을 것이다. 우아한 취미를 가진 여자가 되고 싶어서 예쁜 접시를 모으는 여자가 되어야겠다 생각했다. 하지만 나는 요리를 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접시를 사봐야 수납장 한쪽 구석에 차곡차곡 쌓일 뿐 내 집에 드나드는 손님들이 그 접시들을 볼 일도, 나조차도 그걸 볼 일이 없었다. 그래서 시시했다. 방향을 바꾸었다. 목공소에 전화를 걸었고 머그잔 진열장을 주문했다. 접시야 수납장 신세지만 머그잔 정도라면 손님들 보기 예쁘라고 거실 한편에 쭉 진열할 수 있으니 말이다. 그리고 한 달에 한 개씩 예쁜 머그잔을 골랐다. 내 삼십대 초반은 그랬다.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건 나를 기쁘게 하는 일이었다.얼마 전, 15년도 전에 만났던 옛 애인과 한 테이블에 앉게 되었다. 사람들 사이에서 우리는 이제 나이를 먹어 불편할 것도 없이, 무람없이 어깨를 치며 인사했다. 생맥주가 날라졌고 치킨과 골뱅이소면이 테이블마다 놓였다. 그는 젓가락을 들어 골뱅이무침과 국수를 비비다가 나를 보았다."여전해. 정말 여전해." 내가 물었다. "뭐가?", "내가 열 번을 비비면 네가 한 번은 비벼야지. 정말 한 번을 안 비벼. 맨날 옆에서 웃고만 있어.", "내가?" 나는 까르르 웃었다. 농담인 줄 알았다. 나는 예의바른 사람이란 말야. 그랬을 리 없어. 아마 그런 생각을 했을 것이다. 그런데 또 말한다. "말도 마. 기억나? 아침마다 일산에서 강남까지 너 출근시키느라 나는 매일 지각한 거?" 이건 또 무슨 소리람?광화문에 살던 15년 전의 나는 일산으로 집을 옮겼다. 김치냉장고와 도마 살균기가 딸린 오피스텔이 퍽 마음에 들었고 길쭉한 아일랜드 식탁 앞에 빨갛고 검은 긴 다리 의자를 들여놓으며 혼자 헤벌쭉 웃었다. 그런데 곧 일이 닥쳤다. 강남역에 위치한 회사로 옮기게 된 것이었다. 강남역이라니. 꼬박꼬박 왕복 네 시간씩을 길거리에 뿌리고 다니게 된 것이었다. 기가 막혔지만 어쩔 수 없었고 나는 매일 만원버스에 시달리며 녹초가 되고 말았다. 가끔, 아주 가끔 그가 출근길에 나를 태워 합정역에다 몇 번 떨구어준 적은 있었는데. 그게 다인데."뭐라고? 합정역에 너를 몇 번 떨구어줬다고? 그것도 가끔?" 그는 기겁을 했다. "힘들다고 매일 징징거려서 나는 아침마다 너희 집에 들렀다고. 너를 강남역까지 태워다주고 그다음에 출근을 했다고! 너 그때 우리 회사가 어디였는지는 기억나? 마포였어! 마포! 나는 매일 지각이었어!" 그 말에 주변 사람들이 와아, 웃음을 터트렸지만 나만 웃지 못했다. 아닌데. 그런 기억이 없는데. 아…… 다시 생각해보니 그런 적이 몇 번 있었던 것 같기는 해. 그런데, 설마 일산에서 강남역까지 매일 데려다줬을 리가! 그는 약이 올라 팔짝팔짝 뛰었다. "8개월이었다고. 자그마치 8개월 동안 그 짓을 했다고!" 8개월이라는 말을 듣자 나도 긴가민가해졌다. 내가 일산에서 강남역까지 출퇴근을 한 기간이 진짜 8개월이었기 때문이었다.8개월 만에 나는 일산 집을 내놓고 강남역으로 이사를 했다. 도어 투 도어, 회사에서 집까지 걸어서 딱 5분이었다. 그러고는 얼마 안 가 그와는 헤어졌다. 15년도 더 지나 이제 그런 이야기를 하면서 우리는 웃었다. 골뱅이소면을 단 한 번도 비비지 않았다던 나, 지각일 걸 빤히 알면서도 기어이 강남역까지 데려다주게 만들었다던 나, 새로 한 머리와 새로 산 지갑을 알아봐주지 않는다고 며칠을 토라졌다던 나. 그 기억이 낯설고도 재미나 나는 웃음을 멈출 수가 없었다. 예의바르지 않았나 봐. 나는 소면 속에 파묻힌 골뱅이 살을 골라먹으며 생각했다. 우아하게 접시를 모으는 여자가 되고 싶었지만 실패했고 머그잔 콜렉터라도 되겠다고 마음 먹었지만 그 많은 칸을 반도 채우지 못하고 진열장은 내다버렸다. 머그잔은 한 달에 두어 개씩 깨뜨려 급기야 이젠 없다. 자신만만했다던 그 삼십대 초반, 나는 정말 자신만만했을까? 사랑은 했었을까? 아무도 증언해주지 못할 과거의 시간들. 하지만 이러한들 저러한들 아무 상관없이 그저 우습기만 한 걸 보니 내가 낙천적인 사람이었다는 사실만큼은 분명한 듯./김서령 소설가김서령 소설가

2020-06-25 김서령

[풍경이 있는 에세이]내장사, 피안으로 이끄는 독경소리

백제 무왕때 전북 정읍에 창건 사찰단풍나무 108그루 자리한 숲길 유명대웅보전 앞 통나무의자 잠시 빌려목탁·독경소리 아름다운 진언 위안내마음에 새긴 또하나의 장소된 셈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마치 어머니의 품 안에서 듣던 결 고운 자장가처럼 피안으로 인도하는 듯한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독경이란 이런 것이 아닐까. 숨을 죽이고 침을 꼴깍 삼키면서 소리에 젖어들었다. 독경은 대웅보전이 가까워질수록 귀를 뚫고 마음으로 들어가 영혼까지 전달되는 듯 차고 맑다. 일정한 리듬으로 반복되는 목탁소리와 독경 소리, 스님의 목소리엔 음의 고저나 리듬에 기복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고 무심한 듯 단정하게 반복되는 나무아미타불과 관세음보살('아미타'라는 부처님과 '관세음'이라는 보살은 인간을 위해 가장 많은 헌신을 하신 분으로 '아미타' 부처님의 상이 '아미타불'이고, '관세음' 보살님의 상이 '관세음보살'이다). 그것도 녹음된 소리가 아니라 바로 눈앞의 법당 안에서 라이브로 들려주는 스님이 계시니 사찰을 찾아간 보람은 물론 여간 위안이 되는 게 아니었다.이 평온하고 아름다운 게송을 나는 얼마 만에 들어보는 것일까. 물론 내장사는 비구니 사찰이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대웅보전 법당에서 독경을 읊는 목소리는 앳되고 어려 아직 변성기를 거치지 않는 듯 아무리 들어도 비구인지 비구니인지 헷갈린다. 그러나 내가 지금껏 들어온 어떤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도 저렇게 음의 고저를 초월하진 않았다. 그것은 마치 무(無)와 공(空)의 세계를 보여주는 듯했다면 상상이 되시려나.우리에게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아미타불과 관세음보살에게 귀의한다는 의미)이 있다면 티베트 같은 불국토에선 어딜 가나 흘러나오는 옴마니 받메훔(온 우주에 지혜와 자비가 충만하여 지상의 모든 존재에게 그대로 실현되라는 의미)이 있다. 진언이란, 참 자아에 이르는 의미도 중요하겠으나 같은 음절로 감정의 흔들림 없이 반복적인 소리를 내거나 들음으로써 속가의 중생들이 무아(無我)에 이를 수 있도록 길을 터주는 역할을 하는 건 아닐까.내장사는 단풍나무 숲으로 유명한 사찰이다. 입구 멀찍이 차를 세우고 단풍나무가 도열해 있는 숲길을 걸어보기로 했다. 단풍이라고 반드시 붉어야만 하는 건 아니다. 아기가 손가락을 활짝 편 모양의 단풍나무 이파리는 연두에서 초록으로 건너가는 6월도 사랑스러움으로 치자면 가을 단풍 못지않다. 한참을 걸어 대웅보전 앞마당 늙은 단풍나무 밑에 서니 누군가 손으로 깎아 공양한 못난이 통나무 의자 4개가 나를 반긴다. 그 중 하나를 잠시 빌린 것도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의 아름다운 진언을 듣기 위해서였으니, 폭염을 잊을 만큼 아름다운 독경을 한 시간 이상 듣고도 질리지 않게 하는 힘은 무엇일까. 그래서 진언일까. 주변 산세나 풍광에 비해 사찰은 그다지 웅장하지도 화려하지도 않다. 어쩌면 내 마음을 움직인 것도 바로 그 점인데 뜻밖에 아름다운 진언을 듣게 됨으로써 내장사는 전날 방문한 선운사와 내소사를 잠시 잊을 만큼 내 마음에 새긴 또 하나의 사찰이 된 셈이다.전북 정읍에 소재한 내장사는 호남의 으뜸 산으로 알려진 내장산의 정기를 받아 백제 무왕 때 창건된 사찰이다. 유감스럽게도 많은 사찰이 그러하듯 한국전쟁 때 전소되어 예전의 그 화려함을 대할 순 없지만 108그루의 단풍나무가 자리하는 단풍나무 숲길을 따라 걷다 보면 그 길이 피안으로 가는 길임을 알게 된다. 일주문에서 사찰 뒤 서래봉까지의 비경은 언제 봐도 스케일부터 다르다. 중생의 번뇌와 성찰을 상징하는 숲도 아름답지만 이 사찰의 묘미는 사계절이 모두 특색이 있고 아름답다는 것. 일주문에서 북쪽으로 약수터를 지나 산길을 오르면 과거 벽련암지가 있던 곳이 옛 내장사의 자리라 한다. 산중의 산 내장산 내장사 경내에 남아있는 정혜루기에 의하면 남원의 지리산 등과 함께 호남의 5대 명산의 하나로 손꼽힌다. 폭포가 있고 깊은 계곡과 비자림, 굴거리나무군락지 등 천연기념물을 포함해 아름다운 숲은 물론 숲의 주를 이루는 단풍나무의 유명세는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김인자 시인·여행가김인자 시인·여행가

2020-06-18 김인자

[풍경이 있는 에세이]'언택트'와 '비접촉'

엉터리영어 알면서도 만든 'untact' 일종의 '스노비즘' 아닐까 의심 '비대면' 보다 '비접촉'이 낫다언어는 이데올로기 담는 그릇일단 만들어지면 고치기 어려워우리 희망과 달리 코로나19 사태가 쉽게 진정되지 않고 있다. 겨울에 시작한 전염병이 온 봄을 지나 여름으로 접어든 지금도 기세가 여전하다. 우리나라는 그래도 잘 대처하여 조금은 안심할 수 있게 되었지만, 저개발 국가에서는 계속 매우 우려스러운 상황이다. 오늘 뉴스를 들으니 인도에서는 매일 일만 명이나 되는 환자가 발생하고 있다고 한다. 이 불행이 언제 끝날지 알 수 없어 더욱더 안타깝다. 아마도 백신이 나와 손쉽게 치료할 날이 와야 좀 가라앉지 않을까 염려된다.불과 반년 만에 이 세상은 아주 많이 달라졌다. 어떤 이는 "이제 인류는 코로나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고 극단적으로 짚기도 한다. 코로나가 가져온 변화 중 우리의 삶을 근본적으로 바꾼 핵심은, 지금까지 사람 사이의 소통과 접촉이 미덕이라 믿었던 믿음을 반대 방향으로 틀어놓은 것이 아닐까 한다. 즉 얼굴을 대고 만나는 접촉이 이제는 불편한 것이 되었다. 물론 소통과 연결은 여전히 필요하기에 접촉하지 않고도 만나는 방법들을 열심히 찾고 있다. 접촉 없이 물건을 사고, 접촉 없이 직장을 다니고, 접촉 없이 사랑하는 것, 이런 트렌드가 이제 우리 일상을 지배하게 되었다.이 비접촉성에 대해 많은 이들이 분석하고 진단하고 있다. 그 핵심 키워드로 '언택트'라는 용어가 급부상하였는데, 오늘은 바로 이 용어의 타당성에 대해 한번 따져보고 싶다. 짐작하다시피 '언택트'는 접촉을 뜻하는 '콘택트(contact)'에 부정접두사 'un-'을 붙인 것, 즉 'uncontact'를 축약한 말이다. 그런데 문제는 'untact'는 물론 'uncontact'라는 단어조차 사전에 나오지 않는, 말하자면 '콩글리시'라는 사실이다. 자료를 조사해보니 '언택트'는 2017년에 김난도 교수가 중심이 된 '트렌드코리아연구팀'이 만든 신조어이며, 그들 자신도 이게 엉터리 영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고 한다.'언택트'에 해당하는 정확한 영어는, 명사로는 'non-contact'와 접촉이 전혀 없다는 걸 강조하기 위해 'zero contact'라는 표현을 쓰고, 형용사로는 'contactless'라 쓴다. 이 지점에서 고민거리가 생겨난다. '언택트'가 짧고 강렬한 느낌이 들지만, 꼭 영어를 그것도 잘못된 영어를 일부러 만들어 써야 하나? 나는 언어 국수주의자도 아니고 근본주의자도 아니지만, 이런 식의 '창의적' 조어에는 찬성하고 싶지 않다. 한국에서만 통하는 영어는 영어도 아니고 한국어도 아니다. 영어 비슷하게 만들면 좀 멋있어 보일지 모른다는, 일종의 '스노비즘(snobbism)'이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든다.근래 우리 언론에서는 '언택트'에 해당하는 '비대면'이라는 말도 사용하고 있다. '비대면'이 어떤 뜻인지는 알겠는데, 문제는 '얼굴'이라는 이미지 때문에 사람 사이의 접촉으로 한정될 수가 있다. 근래 연결이 필요 없는 기술이 발전하면서 지금의 '비대면적' 삶을 도와주고 있다. 예를 들어 스마트폰에 저장된 앱으로 신용카드 스캔 없이 돈을 지불할 수 있다. 이것을 '비대면 결제'라고 하면 이상하다. 또 영어의 'contactless'에 해당하는 형용사적 서술어로 '비대면적이다'라고 하면 상당히 어색한 표현이 된다. 사람과 도구에 모두 사용 가능하고, 문맥의 연결이 편하면 좋겠다. 그래서 나는 '비대면'보다는 '비접촉'이 낫다고 본다. '대면'보다 '접촉'이 우리에게 친근하고 활용성이 너그럽다.물론 이 생각에 동의하지 않는 분도 있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언어는 한 사회의 이데올로기를 담는 그릇이어서 일단 만들어지면 고치기 매우 어렵다는 것이다. 잘못이 발견되면 빨리 수정해야 한다. 잘 알다시피 '핸드폰'은 보편화한 콩글리시, 이제와서 우리말 '휴대전화'로만 부르자거나, 정확한 영어인 '셀룰러폰'으로 쓰자고 해봐야 소용없다. 그러기엔 너무 늦었다. 한번 거꾸로 걸려 익숙해진 그림은 되돌려 걸어 놓아도 바른 그림이 되지 않는다. 단지 외래어 용어만이 아니다. 모든 제도와 법과 관습도 잘못 굳어지기 전에 곧바로 돌려놔야 한다./정한용 시인정한용 시인

2020-06-11 정한용

[풍경이 있는 에세이]슬기로운 주거생활을 위하여

집에 머물라는 정부의 안전 조치주거여건 열악 가구엔 삶의 위협대면 서비스 비중 높은 저소득층일자리 잃기 쉬워 퇴거위기 노출1인 가구 일반적 형태로 인정해야마스크가 얼굴의 일부처럼 느껴지는 요즘, 우연히 '코로나 시대, 사회적 거리두기 가능 여부에 따른 주거 상황 양극화 경로'라는 표를 접했는데 상황이 꽤 심각한 수준이다.국토연구원 조사에 따르면 사회적 거리두기가 가능한 경우에는 재택근무를 통해 소득 유지가 가능하고, 안전과 워라밸이 유지되면서 주거 면적 수요가 증가한다. 감염병 위기 상황이 '슬기로운 주거 생활'을 가능케 하는 역설이다. 하지만 사회적 거리두기가 불가능한 경우에는 재택근무를 할 수 없어 소득이 감소하고 임대료를 체납하다가 퇴거 위기에 내몰려 노숙에까지 이르게 된다. 극단적인 비교일 수 있지만, 비대면이 대세가 되고 있는 시대에도 양극화는 어김없이, 오히려 심화된 형태로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재택 근무를 잠시나마 경험해본 결과 집은 또 다른 느낌으로 다가왔다. 막상 TV를 보고 쉬는 공간이던 거실에서 노트북을 켜놓고 업무를 하려니 영 일하는 맛이 나지 않았다. 하지만 출퇴근을 하지 않고도 집에서 상당 부분의 업무를 해결할 수 있다는 점에서 나는 꽤 괜찮은 조건에 속했다. 혼자 사는 동료는 집에 인터넷이 설치되어 있지 않아서 재택근무 기간 동안 부모님 집으로 거주지를 옮겨야 했다. 장기간 재택근무를 경험한 20대 직장인은 "처음에는 좋아서 신났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빨리 회사에 나오고 싶었다"면서 "좁은 원룸에 하루 종일 혼자 앉아있으려니 힘들고 지치는 것은 물론이고, 어느 순간부터 집이 답답하고 힘들어졌다"는 재택근무 소감을 전하기도 했다.이 직장인의 하소연은 재택 근무를 할 수 없는 사람들에게는 배부른 소리일 수 있지만, 적절한 휴식과 이완의 기능을 할 수 있는 주거 공간의 확보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생각해보게 한다. 남의 집에 놀러가는 서비스를 제공하는 스타트업이 생길 정도로 누군가에게 집은 취향의 전시장이자 재충전의 공간이지만 주거 환경이 취약한 많은 사람들에게 집은 편안한 쉼터가 아니라 오히려 더 위험하고 힘든 공간이다. "자기 집에 머물라"는 정부 조치가 주거 여건이 열악한 가구에게는 안전의 확보가 아닌 삶의 위협으로 작용하기도 한다.지금과 같은 감염병 상시 위기 상황에서 1인 가구의 위험성과 취약성은 더 가중된다. 재택근무가 활성화되었다고 하지만 불안정 직업군에 더 많이 종사하고, 최저 주거기준 가구가 많은 1인 가구일수록 더 많은 위험에 노출된다는 것이다. 대면 서비스가 필수적인 직종에 종사하는 경우가 많은 저소득 임차가구일수록 일자리를 잃기 쉽기 때문에 소득 하락에 직접적인 영향을 받고, 이는 임대료 체불과 연체로 인한 퇴거 위기에 노출된다. 100년 전 스페인 독감 유행 시기에도 기저질환자 외에 주거 과밀가구, 주거 기준 미달 가구, 공공임대주택 거주자가 고위험군이었다고 하지 않는가.국토연구원 조사 결과 직업군, 점유형태, 보증금 규모를 고려할 때 6개월 내에 주거 위기에 노출될 1인 가구의 규모는 41만6천 가구에 달한다. 특히 1인 가구의 거의 절반이 보증부 월세 또는 순수 월세 거주자인 것을 감안하면 위험도는 더 높아진다. 임대료 동결 및 납부 유예, 임대료 연체에 따른 퇴거 금지, 연체 가구 추적 및 긴급 임대료 지원, 공과금 납부 유예 및 기본 서비스 지속 공급, 공공임대주택의 사회안전망 기능 강화 등의 정책적 지원도 필요하지만 무엇보다 1인 가구를 일반적인 가구 형태로 인정하는 발상의 전환이 시작일 것이다.'사회적 거리 두기'가 가능한 집단과 불가능한 집단 간의 괴리가 발생하고 더 커지는 요즘, 이것이 주거 정책만의 문제는 아니다. 사실 주거 정책은 보건 정책과 긴밀히 연결되어 있으며, 역사적으로도 주거 정책의 혁신적 변화는 콜레라 발병 등 위생, 보건상의 위험과 직접 관련이 있어 왔다. 당장 역대급 폭염이 예고된 이번 여름, 무더위 쉼터 등 공공 영역에서 최소한의 안전을 담보할 수 있는 공간들을 더 많이 확보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언제 끝날지 모르는 불확실성의 시대, 감염병의 발병을 주거 정책을 진일보시키는 계기로, 모든 이가 '슬기로운 주거생활'을 누릴 수 있는 기회로 삼아야 할 때다./정지은 문화평론가정지은 문화평론가

2020-06-04 정지은

[풍경이 있는 에세이]누가 매화를 비난하리

미색·문장 탁월 황해도 곡산 기생기녀가 되었어도 순결을 생명처럼관찰사 어윤겸과 인연 부실이 되나뒤늦게 수령 홍시유와 진정한 사랑홍, 병신옥사 죽자 절명시 쓰고 자결매화는 황해도 곡산의 기생이다. 그녀는 미색과 문장과 춤과 노래가 뛰어났다. 17세기 초입의 곡산은 궁벽한 곳이었지만 기녀 매화의 이름은 널리 알려져 그녀에게 구애하려는 한량들이 수없이 곡산을 찾았으나 점잖게 거절당하고 곡산을 물러났다. 어린 나이에 기녀가 된 매화는 정절을 생명처럼 알고 순결을 지켰다.매화가 열일곱이 되던 해의 어느 봄날, 황해도 관찰사 어윤겸이 순시차 곡산에 들러 하루를 묵게 되었다. 그 저녁 어윤겸의 시중을 들게 된 게 매화였다. 칠십을 바라보던 어윤겸은 매화의 아름다운 모습을 보자 첫눈에 반했다. 금침을 깔아놓고 나가려는 매화를 불러 앉혔다. 머리를 올리지 않은 동기인 연유를 물었다. 그녀는 남정들은 많았으나 한번 몸을 허락하면 그분을 위해 평생 수절해야 하는데 아직 그런 분을 만나지 못했노라고 얼굴을 붉혔다.어윤겸은 '네 정절관에 감탄했다'하고 '물러가라' 일렀다. 이에 매화가 '오늘 밤 소녀는 이방에 머물러 있을까 하옵니다'라고 말했다. 어윤겸의 인품에 끌렸던 것이다. 매화는 다음 날 어윤겸의 부실이 되어 해주감영으로 옮겨 관찰사의 작은 댁 마님이 되었다.어윤겸이 곡산의 수령이던 홍시유를 불러올렸다. 관찰사(감사)를 뵙는 자리에서 매화를 보게 된 홍시유는 정신이 혼미해지도록 그녀에게 빠졌다. 사또는 곡산에 돌아와서도 밤낮으로 매화 생각뿐이었다.사또는 곡산에 살고 있는 매화의 어미에게 매달렸다. 한번 만이라도 매화를 볼 수 있게 해주면 살 수 있겠다고 애원했다. 어미는 딸에게, 어미가 병들어 죽게 되었으니 한번 다녀가라는 편지를 썼다. 매화는 울며 감사에게 어미의 병을 돌보게 해달라고 청해 보름간의 간병 허락을 받고 부랴부랴 곡산을 향해 떠났다.어미는 멀쩡한 모습으로 매화를 맞았다. 그 연유를 들은 매화는 망설이다가 사또 홍시유를 만났다. 물 오른 이십대의 매화와 패기만만한 젊은 관리 홍시유는 서로를 향해 뜨거운 마음을 열었다. 보름 동안 홍시유의 품에 있던 매화가 떠나던 날, 홍시유는 이극감의 '남포'라는 시를 적어주었다. '강 위에 눈 녹으니 강물이 불었는데/밤이 되니 강 위엔 대나무 가지의 슬픈 곡조/당신을 보내고 나면 그리움을 어찌하오'. 이를 받아든 매화가 '살뜰히도 그리운 내 마음과/알뜰히도 정겨운 임의 정을/한 번 만나는 일이 이렇게 그리워도/창자를 끊어 내는 그리움은 참기 정말 어렵구려/하물며 몇몇 날을 이런 그리움으로 지내란 말입니까'라고 화답시를 읊으며 눈물지었다. 그 눈물 속에 어 감사의 모습도 있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다시 돌아오겠다는 다짐을 하고 그녀는 해주로 돌아갔다.남편의 품에 안기어서도 그녀는 홍시유의 뜨거운 가슴을 생각했다. 홍 사또의 젊은 몸을 통해서 비로소 여자가 되었던 순간들을 잊을 수 없었다. '밤 깊은 새벽까지 잠 못 들어/이리저리 뒤척일 제/궂은 빗속 방울소리 들려/그리움으로 창자가 끊어지네/뉘라서 임을 그리는 내 모습/그려다가 임의 앞에 전할까'. 그리움은 병이다. 그녀의 병은 점점 깊어졌고 몸져 누웠다가 미친 듯이 소리치며 들판을 뛰어다녔다. 어 감사는 감당할 수 없어 매화를 고향집으로 보냈다. 매화는 홍시유를 만나기 위해 광녀의 모습을 연출했던 것이다.그리움이 얼마나 사무쳤으면 사생결단 하겠다고 노래하겠는가. '죽어 잊어야 하랴, 살아 그리워 해야 하랴/죽어 잊기도 어렵고 살아 그리기도 어려워라/저 님아 한 말씀만 하소서, 사생결단 하리라'라는 시를 통해 그녀가 목숨을 걸고 홍시유를 사랑했음을 짐작할 수 있어 숙연해진다.홍시유가 병신옥사로 처형되자 그의 아내도 목숨을 끊었다. 매화는 두 사람의 장례를 치르고 나서 소위 '매화사'로 불리는 절명시를 남기고 홍시유의 무덤 옆에서 자결한다. '매화나무 옛 등걸에도/봄이 다시 돌아오니/옛날 아름다운 꽃을 피웠던 그 가지에/다시 아름다운 꽃이 필만도 하다만은/봄눈이 어지럽게 내리니 필지 말지 하구나'. 후세 사람들은 그녀를 재가열녀라고 부른다. 누가 그녀를 비난할 수 있을까./김윤배 시인김윤배 시인

2020-05-28 김윤배

[풍경이 있는 에세이]혼술 하는 밤

국민이 다 아는 단어 '혼술' 즐긴다몇년 전까지도 생각조차 못했는데아이를 재우고 영화 한편 틀어놓고코로나 격리 속 단톡하며 맥주 한캔처음겪는 변화의 세상 적응해야지표준국어대사전에 없는 단어는 글에 쓰지 않는 편인데, 이제 '혼술'은 전 국민이 다 아는 단어 같다. 써도 될 것 같다. 표준국어대사전에 없다 해도 말이다. 혼자 마시는 술, 혼술.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나는 혼술 같은 건 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술이란 그저 좋은 사람들과 웃고 떠들며 마시는 것이라고만 생각했다. 오래 전, 내가 꽤 예쁜 집을 계약했을 때 친구들은 축하의 의미로 돈을 추렴해 작은 냉장고를 사주겠다고 말했다. 그 냉장고의 첫 칸부터 끝 칸까지 모조리 맥주로 채우라며 말이다. 뭔가 어른이 된 것 같고, 그것도 대단히 멋진 어른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지만 나는 정중히 거절했다. 혼자 작은 소파에 앉아 축구 경기를 보며 맥주 한 캔을 따도 그걸 다 마셔본 적이 없었다. 혼자 마시는 맥주는 쓰고 텁텁했기 때문에 나는 작은 맥주용 냉장고가 탐나지 않았다.그러던 내가 이제는 아이를 재우고 난 뒤 슬그머니 나와 넷플릭스 영화 한 편 틀어놓고 혼술을 한다. 평소엔 살 일 없었던 주전부리도 혼술을 위해 마트에서 하나둘씩 챙기며 밤 시간을 즐길 줄 알게 된 거다. 여윳돈이 생기면 맥주용 작은 냉장고부터 살 거다.스무 살 때였다. 첫사랑을 여태 드문드문 만나고 있었고 어느 여름, 우리는 아마 피자집에 앉아 지루하고 권태로운 데이트를 하고 있었을 것이다. 콜라 한 잔을 앞에 둔 나를 두고 그 애는 생맥주 한 잔을 주문했다. 술을 주문하는 그 애를 본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덥잖아. 더울 땐 차가운 생맥주 한 잔이 그만이야."갑자기 그 애가 다 자란 어른인 것처럼 느껴졌고, 또 그래서 생경했다. 그 애가 말을 이었다. 약간은 무르춤한 표정을 하고서."그런 남자가 되고 싶다고. 더울 때 생맥주 한 잔으로 시원하다, 느낄 수 있는 그런."그러니까 그 애에게도 아직 생맥주는 쓰고, 낯설고, 배부르기만 한, 그저 차가운 물 같은 거였다. 아직 자라려면 한참이 남은 소년이었을 뿐.어느새 나는 자라, 자발적 자가격리 같은 것, 딱 내 스타일이라며 친구들에게 농담을 한다. 코로나19로 강의가 다 끊겨 신세 한탄을 밤새 해도 모자랄 판에 우리는 각자 맥주 한 캔씩 들고 앉아 단톡방 수다를 이어가는 것이다. 얼굴 마주 보지 않아도 우리는 건배를 할 줄 알고 상대방의 표정을 읽을 줄 알고 서로의 처지를 눈감고도 이해한다."온라인 강의도 처음엔 힘들었지만 이젠 할 만해." 누군가 말하면 "정말? 아직 엄두가 안 나서 시작도 못 했는데." 누군가 하소연을 하고 "아냐, 내가 쉬운 프로그램 알려줄게. 나도 하는데 너라고 왜 못 해?" 누군가 도닥이고 "코로나 정국이 끝나도 이런 방식은 계속되겠지? 편하단 걸 모두가 알아버렸잖아." 누군가 겁을 준다. 사실 우리는 다 알겠다. 코로나19라는 전염병은 언젠가 사라지겠지만 한번 변화한 세상은 제자리로 결코 돌아가지 않는다는 것을. 그리고 가여운 프리랜서들은 그 변화의 한복판에 있다. 나이도 먹을 만큼 먹어서 변화라는 것이 쉽지도 않은데 말이다. 얼굴을 보지 않고 얼굴과 마주하는 것은, 마치 '혼술'처럼 그간 겪어보지 못했던 일들이다. 술친구보다 넷플릭스가 좋아졌듯 얼굴을 마주하지 않는 일도 자연스러워지겠지.추억은 내 뒤, 그대로인데 미래는 급하게도 달려온다. 해서 마음이 바쁘다. 어쩌자고 오늘 밤엔 냉장고에 맥주 한 캔 없을까. 코로나가 걷힐 때 미세먼지도 따라 걷혔으면 좋으련만, 세상이 그리 만만할 리도 없고. 날이 한없이 따사로워 더운 일회용 마스크 대신 삼베 마스크만 여러 개 주문했다. 우리 어린 날 그렸던 그림 속 미래는 이런 풍경이 아니었는데, 그런 말은 이제 너무 꼰대스러워 참겠다. 다만 잘 적응하겠다. 서글프긴 하지만./김서령 소설가김서령 소설가

2020-05-21 김서령

[풍경이 있는 에세이]강릉 신복사지에 부는 솔바람

봄바다와 고택의 햇살이 그리웠다그래서 찾은 곳이 허난설헌의 생가 시공을 넘은 햇빛·해안바람을 쐰다해파랑 길까지 걸은 후 폐사지 도착온화한 석탑·불상은 당시 번창 전언봄 바다가 보고 싶었다. 그리고 고택 툇마루에 내려앉은 솜사탕처럼 달콤하고 따사로운 봄 햇살이 그리웠다. 그렇다면 길게 고민할 필요가 없겠지. 한달음에 닿을 수 있는 강릉이 발아래 있으니까. 나는 허난설헌 생가에 들러 후원을 지키는 믿음직한 아름드리 소나무를 두 팔 가득 안아보고 싶었고 안겨보고도 싶었다. 그리고 고가 툇마루에 앉아 봄병아리처럼 꾸벅꾸벅 졸아보고도 싶었다. 이런 날엔 경포해안을 따라 길게 이어지는 해파랑길(동해안의 상징인 '태양과 걷는 사색의 길'로 총 길이는 770㎞로 남한 최장 트레일)을 짧은 구간이라도 유유자적 걸어보는 것도 좋을 거야, 하는 생각이 끝나기도 전 이미 나는 대관령 고개를 넘어가고 있었다.그러나 정작 내가 가고자 했던 곳은 강릉시 내곡동에 위치한 고려시대의 범일국사가 창건했다는 신복사(神福寺) 절터, 신복사지다. 허난설헌이 태어났다는 생가와 폐사지, 어느 곳을 먼저 가는 게 좋을지 고민하다 나는 내곡동을 지나 경포호 가까운 허난설헌의 생가에 먼저 도착하고 말았다. 때가 때이니만큼 나들이객은 현저히 줄었고 평일이라 그런지 주차장 역시 한산했다. 지난 가을에 둘러 보고 다시 봄이니 가장 좋은 계절에 이 고택의 정취를 누릴 수 있다는 것이 내겐 여간 호사스러운 일이 아닌 듯하다. 나는 고택의 뜰을 거닐다가 햇살이 가장 많이 머무는 툇마루에 자리를 잡고 해안 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심호흡으로 맘껏 들이켰다.시공을 초월해 지금 내게 도착한 이 빛은 허난설헌이 살던 시대를 넘어 예까지 끊어짐 없이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는 걸 느끼기에 아쉬움이 없다. 토담 아래엔 난초가 꽃으로 환생을 거듭하고 미풍은 내 살갗을 간질이고. 햇살 아래 달달한 꿈도 잠시, 자리를 털고 일어나 후원을 걷는다. 강릉을 대표하는 나무가 소나무여서 강릉을 소개할 때 반드시 붙은 이름 '솔향강릉', 이곳 소나무는 그 명성에 걸맞게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는 아닌 듯, 그도 아니면 어떤 특별한 흡인력이나 에너지가 있는지 언제 봐도 믿음직스럽고 든든해 누구라도 안아보거나 기대거나 다가가게 만든다. 솔밭을 뒤로 하고 허난설헌의 생가를 나와 경포에서 사천으로 이어지는 해파랑길을 걷고 난 후 돌아오는 길에 신복사지로 향한다.시간은 오후 2시를 통과하고 있다. 강릉 시내를 벗어나 신복사지에 도착하니 시내에 근접한 곳이지만 폐사지가 주는 분위기는 역시 고적한 평화다. 낮엔 다소 더위를 느낄 정도였지만 서쪽 대관령에서 내려오는 솔바람으로 이곳은 더위보다 차라리 추위에 가깝다. 복잡하지도 화려하지도 휑하니 넓지도 않은 그래서 안정감이 있는 신복사지, 여기저기 초록 잔디를 뚫고 나온 노란 민들레가 방문자를 반기고 사람은 눈을 씻고 봐도 없으니, 그렇다면 나는 제대로 찾아온 걸까. 주변은 야트막한 숲으로 둘러싸여 있고 저만치 도심의 고층 아파트가 시야에 거슬리긴 해도 눈앞에 초록이 있어 금세 그 사실을 잊게 만든다.폐사지에 들자 삼층석탑(보물 제87호)과 그 앞에 무릎을 꿇고 공양하는 자세로 같은 고려시대의 불상인 석조보살좌상(보물 제84호. 높이 181㎝)은 월정사 석조보살좌상(보물 제139호), 개태사 석조보살좌상(머리 부분 결손)과 함께 고려 초에 만든 공양상으로 세간의 주목을 받아온 보살상이 시선을 끈다. 역시 이곳 신복사지에 남아있는 불상은 풍만한 몸과 후덕하고 온화한 인상을 품고 있어 누가 봐도 친숙한 느낌을 갖기에 부담이 없다. 그 시대 석공은 돌 안에 저토록 후덕한 보살이 숨어있다는 걸 어떻게 알았을까. 그러나 반타원형으로 조각된 보발(寶髮)이나 일정한 무늬를 가진 옷주름 등에서 진보된 형식을 보여준다는 것은 아이러니다.범일국사가 창건한 것으로 전해지는 신복사, 신복사지의 배치는 삼층석탑을 기준으로 뒤로는 금당지, 양옆에는 회랑지가 있는 고려시대 사찰에서 볼 수 있는 전형적인 양식이다. 현재 폐사지에는 삼층석탑과 석조보살좌상만이 남아 이곳이 한때 번창했던 사찰로 부처님의 말씀을 받들고자 많은 불자들이 드나들던 도량이었음을 조용히 전언할 뿐이다./김인자 시인·여행가김인자 시인·여행가

2020-05-14 김인자

[풍경이 있는 에세이]바이러스는 죄가 없다

모든 질병은 해롭다는게 상식이나인간이 아닌 자연의 관점에서 보면지독한 편견… 다양한 메시지 전해감염병은 누구도 차별하지 않는다이번 사태 인간격리 이기심에 경고큰 어려움을 겪고 나면 삶이 달리 보이듯, 코로나19를 거치고 난 요즘 우리는 과연 잘 살아가고 있는지 묻게 된다. 전염병에 직접 걸린 적이 있든 없든, 그 공포를 통과해온 우리는 모두 삶의 방식에 어떤 깊은 '구멍'이 있었지 않나 고민할 수밖에 없다. 가벼운 감기 정도로 지나갈 줄 알았던 이 바이러스가 지구 전체를 뒤흔드는 데에는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불과 서너 달 만에 중국을 넘어 아시아를 거쳐 유럽과 북미대륙을 점령했다. 지금은 남미와 아프리카까지 가서 무고한 사람을 대책 없는 죽음으로 몰고 있다. 아직 끝이 보이지 않고, 어쩌면 아주 오래 우리를 괴롭히게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지울 수가 없다.모든 질병은 해롭고 '나쁜' 것이라 보는 게 상식이지만, 관점을 조금 바꾸어 다시 살펴보면 의외로 바이러스가 인간에게 전하는 메시지가 많다는 것을 알게 된다. 여러 해석이 나와 있어 독자들께서도 이미 알고 있으리라 본다. 그중에서 빌 게이츠가 썼다고 알려진(그렇지 않다는 반론이 나와서 정체가 궁금한) 편지 기고문에는 우리를 일깨우는 중요한 지적이 들어 있다. 그가 제시한 관점과 필자가 쓰는 이 글이 사뭇 겹칠 수 있지만, 그래도 소위 '인간중심주의'를 벗어나 존재를 바라봐야 한다는 점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기에, 다시 한번 언급하고 싶어진다. 나의 주장을 요약한다면 바이러스는 아무런 죄가 없다는 것, 즉 '이롭다'·'해롭다'는 구분 자체가 인간의 지독한 편견을 전제한다는 사실이다.우선 사람은 과학을 통해 자연을 정복해왔고, 이제 자연을 어느 정도 통제할 수 있다고 믿었는데, 이제 보니 그게 아닌 것 같다는 사실이다. 바이러스는 오래전부터 생명과 함께 진화를 해왔다. 대표적인 것이 기억에도 생생한 사스나 메르스 등일 터인데, 그 공격 때마다 인간은 일방적으로 당했으며 앞으로도 이런 일은 비슷하게 반복될 것이다. 바이러스는 강인한 생명력으로 인간보다 먼저 지구에 나와 인간보다 더 오래 남을 게 분명하다. 인간이 백신을 만들어 내기도 전에 바이러스는 변이를 일으키므로, 이 싸움은 승패가 이미 결정된 게임이다. 오히려 바이러스가 인간을 조종하듯, 오랜 진화 과정에서 이미 우리 몸에 들어와 자리를 잡고 공생하는 경우가 매우 많다고 한다.또 이번 사태가 전개되는 과정에서 보았듯, 바이러스는 인간을 차별하지 않는다. 어떤 편견도 없다는 것이 오히려 흥미로울 정도이다. 특정 사람을 골라 공격하거나 아프게 하지 않는다. 중국인도 걸리고 이탈리아인도 걸리고 미국인도 걸리고, 당연히 한국인도 걸린다. 흑과 백을 가르지 않는다. 빈부 차별도 하지 않는다. 영국 총리도 걸리고 할리우드 배우도 걸리고, 우리나라 요양원 노인도 걸린다. 고급 맨션에 사는 사람도 걸리고 인도의 가난한 어린이도 걸린다. 또한, 종교도 구별하지 않는다. 이슬람교도도 걸리고 불교도도 걸리고, 우리나라 신천지 교인도 걸리고, 무신론자도 걸린다. 인간은 권력과 돈을 가진 자가 약한 사람들을 차별하고 나눌 때, 이를 비웃기라도 하듯 바이러스는 인간을 공평하게 대하고 있다. 어쩌면 평등에 관해 한 수 가르치러 온 것은 아닐까.하나 더 주목하고 싶은 것이 있다. 지금껏 문명화란 인간이 자연을 격리해온 과정이었다고 요약할 수도 있을 터인데, 이번에 거꾸로 자연이 인간을 격리하자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사람의 이동이 금지되자, 중국 하늘에서 먼지가 사라지고, 베네치아 운하에 물고기가 돌아오고, 타지마할의 아름다움이 맑게 드러났다는 소식을 듣는다. 봄이면 몰려오던 미세먼지와 황사가 올해는 거의 발생하지 않았다는 걸 우리나라에서도 체험했다. 환경론자이거나 생태론자가 아니라 하더라도, '가이아'의 입장에서 보자면 바이러스는 나쁜 존재가 아니다. 오히려 '나쁜' 오염원인 인간의 이기심을 경고해 주었기에 그에게 고마워하고 있을지 모른다. 인간이 지구의 한정된 용량을 한계치 이상으로 착취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그래서 바이러스를 시켜 제동을 걸고 싶었던 건 아닌지 염려하게 되는 것이다./정한용 시인정한용 시인

2020-05-07 정한용

[풍경이 있는 에세이]메일함의 풍경

영화·책·시사·TV프로그램 등까지요약·정리·재가공 '서머리…' 인기신문, 평균 기호·이슈 잘차린 한상뉴스레터, 골라먹을 수 있는 '뷔페'연휴 쌓여있는 메일함 정리해볼것업무로 뉴스레터를 만들던 시기가 있었다. 나름 열심히 만들었고, 읽을 만하다고 생각했는데 발송 후 확인해본 클릭 수는 처참한 수준이었다. 기관의 뉴스레터라는 한계도 있었겠지만, '읽히는 뉴스레터'를 만드는 것이 매우 어렵다는 당연한(?) 사실을 그때 확인했다. 일전에 이 지면에 구독 서비스들에 대해 쓴 적이 있는데 뉴스레터는 구독이라는 점에서는 같지만 또 다른 서비스다. 그때의 교훈을 거울삼아 발신자가 아닌 수신자로 여러 가지 뉴스레터들을 받아보고 있다. 행사나 기관의 소식을 체크하기 위한 목적의 기관 뉴스레터, 관심이 적어 찾아보지 않을 분야의 이슈 체크용, 관심있는 주제의 뉴스레터, 큐레이션이 괜찮은 뉴스레터, 개인이 전문성을 살려 만드는 뉴스레터 등이 있다. 정부나 기관에서 보내는 뉴스레터는 개별 콘텐츠에 대한 소식보다는 요즘 그 기관이 집중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새 소식은 무엇인지 위주로 살펴본다.마지막으로 개인 창작자들에게 돈을 내고 받아보는 유료 뉴스레터가 있다. 신인이나 비등단 작가들이 작품을 발표할 지면을 발표하기 위해 독자를 모집해 전달하는 '구독형 메일링 서비스'의 일환이다. 뉴스레터라기보다는 개인 창작자의 콘텐츠를 돈 내고 받아보는 형식이다. 다른 플랫폼에서는 볼 수 없는, 창작자의 콘텐츠를 매일매일 받아보는 즐거움이 크다. 실제 한 달 원고료 1만원을 받고 구독자를 직접 모집해 '셀프 연재'를 한 '일간 이슬아'의 성공 이후, 메일링 서비스만을 소개하는 계정이 생길 정도로 많은 작가들이 이용 중이다. 한 달에 1만원인 경우가 많은데 이 구독 신청을 갱신하는 것도 일이라, 요즘엔 아예 석 달치를 한꺼번에 받는 경우도 생겼다. 한 번의 구독으로 다른 창작자가 참여하는 다양한 콘텐츠를 받아볼 수 있고, 신인들의 편집 없는 콘텐츠를 실시간으로 확인하는 재미도 쏠쏠하다. 주로 그림이나 에세이 종류인데, 돈을 내는 번거로움을 감수하면서까지 받아볼 만한 콘텐츠여야 한다는 생각에 좀더 꼼꼼히 읽게 된다고나 할까. 좋아하는 창작자에게 직접적으로 도움을 줄 수 있어 기쁘고, 즉각적인 피드백이 가능하다는 이점까지 함께 누릴 수 있다.메일을 분류하는 것도 일이다 보니, 아예 뉴스레터 수신용으로 이메일 계정 하나를 따로 만들어볼까 고민 중이다. 정보가 너무 많으니 큐레이션이 필요하다고 생각해 뉴스레터들을 구독하기 시작했는데, 이제는 그 큐레이션한 정보들이 늘어나서 큐레이션된 정보마저 다시 큐레이션해야 할 상태라고나 할까. 나 같은 사람이 많은지 원래 콘텐츠를 요약, 정리해 재가공한 콘텐츠, 그러니까 '서머리 콘텐츠(summary contents)'가 인기라고 한다. 내용 요약에 배경 설명, 알면 도움 되는 사소한 정보까지 확인할 수 있으니 짧은 시간 안에 알맹이만 떠먹여주는 셈이다. 영화나 책은 물론이고 시사, TV프로그램 요약 서비스까지 인기몰이 중이라니, 읽거나 보지 않아도 '아는 척' 하기 참 쉬운 세상이다. 이렇다 보니 종이 신문을 좋아하는 나조차도 종이 신문을 언제 읽었는지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종이신문이 구독자 평균의 기호와 이슈 등을 고려해 잘 차린 한 상이라면, 뉴스레터들은 내가 좋아하는 것들만 골라 먹을 수 있는 뷔페에 가깝다. 종이 신문을 직접 읽는 대신, 몇 가지 이슈만을 정리해 보내주는 시사 뉴스레터를 읽고 있는 나 같은 독자들을 위해 앞으로는 종이 신문도 뉴스레터를 만들어야 할지도 모르겠다.거의 클릭하지 않고 삭제하기 바쁜 뉴스레터도 있다. 영문 뉴스를 요약해 매일 보내주는 서비스인데, 영어 공부를 하겠다는 의욕에 붙타 신청했지만 제목만 읽고 넘어가는 경우가 다반사다. '이럴 거면 왜 구독했나' 싶어 구독 해지를 누르고 싶지만 막상 누르지는 못하다보니 여전히 내 메일함에는 각종 뉴스레터들이 쌓여가고 있는 중이다.연휴도 시작되었으니 이 김에, 두서없이 쌓여가고 있는 메일함을 천천히 정리해봐야겠다. 정리를 하더라도 등단 후 100통의 편지를 목표로 메일을 보내주고 있는 시인의 메일만큼은 지우지 않을 예정이다. 시인이 보내고 있는 '밤편지'는 시인에게도, 메일을 받고 있는 수신자들에게도 '함께 앉았다가 함께 일어서'는 일이니까./정지은 문화평론가정지은 문화평론가

2020-04-30 정지은

[풍경이 있는 에세이]삼의당의 첫날 밤 언약

하연의 12대 손 담락당과 결혼한학자 김일손 후손인 김인혁의 딸혼례날 '만남·화목' 연시로 화답쇠락한 가문 남편 낙방 힘든 삶 속시부모 모시며 올곧게 평생 감수남원은 이몽룡과 성춘향의 러브 스토리로 잘 알려진 고장이다. 19세기 초 남원읍 동충리 서봉방의 유천마을은 교룡산성 아래 자리 잡은 한유한 마을이었다. 몰락한 양반들의 후예들이 평민과 함께 어울려 살던 시골이다.그 마을에서 한 날 한 시에 태어난 두 사람이 있었다. 두 사람은 어려서부터 소꿉 친구였다. 한 사람은 삼의당(三宜堂) 김씨(1769~1823)고 다른 한 사람은 담락당(湛樂堂) 하립(1769~1830)이다. 삼의당은 연산군 때의 학자인 김일손의 후손 김인혁의 딸이었다. 담락당은 세종 때 영의정을 지낸 하연의 12대 손으로 하경천의 아들이다. 두 집안 모두 쇠락한 양반가문이었다.그들은 열 여덟의 나이에 결혼을 했다. 두 사람은 그때 이미 시문에 밝았으니 여러 편의 시를 지어 서로 나누었을 터이다. 청춘들에게 어찌 설렘이 없었을까. 혼례를 마치고 하객들을 물리친 첫날 밤, 신랑과 신부는 먹을 갈아 연시 두 편씩을 지어 서로에 바친다. 가히 시인다운 첫날 밤이었다. 담락당이 먼저 붓을 든다. '함께 만난 우리는 광한전의 신선이었다오/오늘 밤부터 옛 인연을 계속하오/짝을 만나는 것도 원래 하늘이 정해준 것이니/세상의 중매쟁이들은 공연히 바쁘기만 했오//부부의 도리는 인륜의 시작이니/만복이 여기에서 근원하는 까닭이오/시경의 도요시 한 편을 다시금 살펴보니/온 집안의 화목함이 그대에게 달렸다오'라는 시문에는 운명적인 결혼 예찬과 온 집안의 화목함이 아내의 손에 달려있음을 환기케 하는 시편이었다.이에 대한 삼의당의 답시도 만만치 않다. '열여덟 새 신랑 열여덟 새 신부/아름다운 인연이 있어 신방에 촛불 밝혔네요/같은 해와 달에 태어나 같은 마을에 살았으니/이 밤의 우리 만남이 어찌 우연이겠어요//부부의 만남에서 백성이 생겨나니/군자들이 이 예법을 만든 까닭이지요/공경하고 순종함이 아내의 도리이니/종신토록 낭군님 뜻을 어기지 않겠어요' 이 답시가 첫날 밤의 언약이었다. 그녀는 첫날 밤의 언약을 평생 지켰다.삼의당에게 결혼은 고달픈 현실이었다. 청빈한 가문으로 시집 온 삼의당은 가난한 살림을 꾸리며 담락당의 과거 급제를 뒷바라지해야 하는 버거운 생활이 시작된 것이다. 산으로 공부하러 떠나는 남편에게 쓴 시가 있다. '옛사람 독서하다 시냇물에 편지 던졌다오/당신을 보내면서 이런 뜻을 전하오니/베틀의 실타래 베가 되지 않았거든/당신도 악양자를 닮지 마소서'. 악양자는 중국 동한시대의 사람으로 스승을 찾아갔다가 공부를 마치지 않고 돌아오자 아내가 베틀의 베를 자른 일화로 유명하다.그녀에게 남편의 과거시험은 가문을 다시 일으킬 유일한 계층이동의 수단이었다. 몇 년을 낙방하자 그녀는 남편을 한양으로 유학 보내 과거시험을 준비시켰다. 과거보러 가는 남편에게 바친 시가 있다. '부모께 영광드릴 일 아니면 /내 어찌 당신을 이별 하리오/이별 주 나눌 때 호수에 달 비치고/올라갈 서울 길에 구름 어렸네/붕새의 날개로 높이 올라서/준마들의 무리를 쫓아가소서/장부는 뜻을 위해 몸 바칠 때에/어찌 하여 아녀자를 못 잊으리오'에는 과거급제에 대한 아내의 간절함이 드러나 있다. 남편은 그 후 십 수 년을 낙방했다.그 긴 세월 삼의당은 시를 읊으며 마음을 추슬렀다. '인적 없는 사창에 날은 저물고/꽃은 떨어져 가득한데 문은 닫혀 있네/하룻밤 상사의 고통 알고 싶다면/비단이불 걷어놓고 눈물 자욱 살펴보오'는 '여자의 봄노래' 18수 중 한 수인데 그리움의 고통을 품격 있게 노래하고 있다. 그녀에게는 노부모를 모시는 일도 쉽지 않아 머리를 잘라 파는 일도 있었다.남편은 마침내 과거시험을 포기하고 10년 만에 낙향했다. 1801년, 남원을 떠나 진안군 마령면 방화리로 이사해 농사를 지었다. 부모상을 치르고 빚더미에 앉았을 때, 세 딸 중 첫째와 셋째 딸을 잃게 되는 슬픔을 겪었다. 그러나 모든 세속적 욕망을 내려놓으니 계절의 아름다움이 보이고 삶의 풍요로움이 다시 찾아왔다./김윤배 시인김윤배 시인

2020-04-23 김윤배

[풍경이 있는 에세이]마지막 인사

몇달전 P가 지구 반대편으로 갔다만남을 기약 못하는 서먹한 침묵 속서로 애써 "놀러와-자주 오면되지"지금 쓰는 신문의 마지막 칼럼처럼일상이 이별인데… 안녕. 응, 안녕몇 달 전 P가 이민을 갔다. 지구 반대편 먼 나라로. 한 해의 절반쯤 타국의 낯선 도시들을 전전하며 생활해오던 그는 지난해 말 아예 그곳 어디쯤에 일자리를 구한 뒤 완전히 떠나버렸다. 떠나기 전 몇몇이 모인 자리에서 P는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어떤 말을 해야 할지 정하지 못해 초조한 기색이었다. 나라도 그랬을 것이다. 이건 분명 마지막이니까. 손쉬운 다음을 기약할 수 없는, 이별이니까. 어색한 침묵이 감돌 때마다 그는 애써 찬 분위기를 데우려는 듯 "놀러 와", "막상 멀지도 않다니까, 꼭 놀러 와"를 반복했다. "뭘, 자주 들어오면 되지" 하기도 했다. 이런 말은 이별의 무게를 경감시키기 위한 일종의 제스처라는 사실을 우리는 모두 알고 있었다.사실 P가 한국에 있을 때도 우리는 그다지 자주 만나는 사이는 아니었다. 사는 게 바빠, 사는 게 바쁘다는 핑계로 두세 달에 한 번 정도 겨우 약속을 잡을 수 있었으니. '그가 이국에 산다 한들 크게 다를까. 페이스톡이며 스카이프며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얼굴을 볼 수 있는 방법이 있는데.' 이렇게 생각하면 그럭저럭 편해진다. 실상은 전혀 그렇지 못할지라도. 늘 그렇듯 마음 또한 서서히 멀어지고 말지라도. 하지만 우리는 "이제 만날 수 없겠네" 대신 "자주 톡 하자"를 택한다. 이별의 무게를 있는 그대로 받아 안기엔 너무 연약한 존재들인 것이다.마지막이란 왜 늘 이 모양일까. 어설프기 짝이 없을까. 한두 번도 아닌데 익숙해 지지 않는 이유는 뭘까. 곰곰 되짚어본다. 아무래도 여태껏 나는 대체로 마지막인 줄도 모르고 마지막을 맞아왔던 것 같다. "그날 병실에서 본 게 마지막이었잖아", "그게 우리의 마지막 통화일 줄이야" 이런 식이었던 것 같다. 그러고 나선 곧잘 '끝인 줄 알았다면 좀 더 잘했을 텐데' 하는 회한에 잠기곤 했던 것. (하지만 뭘 더 어떻게?) 그러니 마지막이란 사실을 알고 맞는 마지막은 퍽 친절한 것이라 해야 할까. '지금 이 순간이 우리의 마지막이구나. 마지막 술잔, 마지막 이야기, 마지막 웃음….' 안다 한들 그러나 회한이 남지 않을 리 없다. 도리어 사소한 일들에 대한 후회가 커지는 것도 같다. 그때 P가 속초로 놀러가자 했을 때 군말 않고 따라 나설걸. 지난번 생일에는 좀 더 근사한 선물을 할걸. 실은 내가 얼마나 P를 좋아하는지, 말할걸. 더 자주 말할걸. 마지막이란 알고 맞든 모르고 맞든 으레 피할 수 없는 어떤 감정에 사로잡히게 되는 것인가 보다.만나고 헤어지는 일을 반복할 수밖에 없는 것이 우리의 일상이라면, (따지고 보면 세상의 모든 순간은 결국 작별 인사. 지금 이 순간은 두 번 다시 없을 것이므로.) 이별 또한 밥을 먹듯 잠을 자듯 아주 자연스럽게 해낼 수 있다면 좋겠다. "맞아, 그 애가 떠나던 날 같이 밥을 먹었는데 말이야, 그때 후식으로 나온 푸딩이 참 맛있었지", "다행이지 뭐야, 맛있는 걸 먹여 보낼 수 있어서" 좀 더 가볍게, 좀 더 산뜻하게 그 마지막을 곱씹을 수 있다면. 기쁘게 추억할 수 있다면. 우리의 마지막이란 그런 것이라면 좋겠다.나는 지금 마지막 칼럼을 쓰고 있다. 지난 2년여 동안 '경인일보'에 연재하며, 신문에 글을 쓰는 일이란 참 어려운 것이구나 알게 되었다. 솔직하기 위해 애썼지만 때때로 나는 솔직하지 못했는데, 무엇보다 내 밑바닥에 자리한 편협한 생각이 언론의 고상한 품격을 떨어뜨릴지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늘 고만고만한 정도를 이야기하는 데 그치고 말았다는 자책이 나로 하여금 다른 시작을 재촉했는지 모른다. 좋았던 점 중 하나는 신문에 실린 글을 P가 꼬박꼬박 읽어주었다는 것. 멀리 떠난 지금도, 아직까지, 귀여운 이모티콘과 함께 잘 읽었다는 톡을 보내준다는 것. 이제 우리는 다른 구실을 찾아야겠구나. 또 다른 마지막과 또 다른 시작을 준비해야겠구나.그러고 보면 안녕, 이란 말은 참 괜찮은 것이다. 마지막일 때도 시작일 때도 우리는 이렇게 한다. 안녕. 응, 안녕./박소란 시인박소란 시인

2020-04-16 박소란

[풍경이 있는 에세이]피딱지는 함부로 떼는 것이 아니야

여섯살 먹은 딸아이가 떠드는 말"억지로 없애면 혈소판 또 죽어요"26년전 다리 붕괴·세월호 6주기기억과 선거前 터져나오는 막말미안함은 커녕 생채기 또 헤집어대학교 2학년 때였다. 나는 그때 혼자 쓰던 하숙집 내 방에 중고 텔레비전 한 대를 들여놨었고, 계절이 잘 기억나지 않는 그날 아침, 창문을 열자 꽤나 쌀쌀한 날씨에 놀라 도톰한 겉옷을 옷장에서 꺼냈다. 하숙집 아주머니가 왜 맨날 아침을 거르냐며 소리를 빽 질렀지만 나는 숭숭 썬 양배추에 마요네즈와 케첩을 범벅한 샐러드가 지겨워 먹을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었다. 그날 팔을 꿰고 단추를 여미던 그 코트의 색깔까지 선명한 이유는 지금도 모를 일이다. 26년이나 지난 일인데 그게 어찌 떠오를까. 마지막 단추를 여밀 때 낡은 텔레비전에서 들려오던 그 뉴스. 다리가 무너졌다니. 버스에 타고 있던 여고생들이 우르르 다리 아래로 떨어졌다니. 내 방을 광광 울렸던 뉴스는 하숙집 거실 텔레비전으로도 고스란히 전해졌기에, 하숙집 아주머니는 밥을 빨리들 먹으라며 더는 소리치지 않았다. 방문을 열고 나갔을 때 멍하니 텔레비전에 눈을 박고 있던 누군가의 숟가락에서 된장국 국물이 흘렀고 목에 수건을 두르고 욕실에서 나오던 누군가는 후들, 다리를 떨었다. 맛도 없는 양배추샐러드 양푼을 들고 하숙생들의 접시에 더 덜어주려던 아주머니도, 손을 들어 입을 막은 옆방 1학년 여자아이도 그 거대한 침묵에 섞인 하나의 정물로만 기억이 난다. 그래, 그러고 보니 그 옆방 1학년 여자아이가 무학여고 졸업생이었다. 그날 숨진 무학여고 학생만 여덟이었다.우리는 사람이라서, 슬픔을 오래 기억한다. 지금이야 이십대가 기절할 만큼 힘든 시기라지만 26년 전, 그때만 해도 스무 살은 자유와 해방을 뜻했다. 지겨운 모의고사와 내신에서 벗어나 마음껏 놀 수 있는 나이. 학사경고쯤 받으면 어때. 그런 것쯤 인생의 허물도 아니던 1990년대. 그런데 그런 일도 채 겪기 전에 검은 강물로 낙하했을 어린 청춘들과 어느 집의 아버지, 어느 집의 어머니, 누군가의 소중한 누군가들이 한순간 사라져버린 그 슬픔을 우리는 오래 기억한다. 더불어 남겨진 이들의 애끊는 슬픔까지도 우리는 알았다.하지만 우리는 쉽게 잊기도 한다. 그날 사고가 있기 직전, 먼저 다리를 건넌 사람들이 다리가 이상하다고, 아무래도 무너질 것 같다고 신고를 거듭했지만 아무도 조처하지 않았다. 26년 전 그 소식은 뉴스를 통해 전해졌을 것이고 그 순간 우리는 모두 분노했겠지만 이제 그런 것들은 대부분 잊었다. 분노와 슬픔은 그 유통기한이 애초 다르다. 분노와 억울을 제대로 기억하는 건 유가족들 뿐일 테다. 그것들은 유가족의 가슴에 영영 사라지지 않는 멍으로 남아 그들의 삶을 벌레처럼 갉아먹겠지만 나머지는 잊겠지. 다 잊겠지.세월호 6주기가 다가온다. 벌써 6년이라니. 배가 가라앉고 있다는 허무맹랑한 뉴스를 봄날 아침, 거실에 앉아 하릴없이 쳐다만 보고 있었던 그때가 벌써 6년 전이라니. 이상하잖아, 저렇게 배가 가라앉고 있는데 무언가를 해줄 수 있는 사람이 하나도 없다니. 저 아이들을 아무도 꺼내주지 못한다니. 우리는 끝없이 분노했고 억울했고 더할 수 없이 슬펐다. 뉴스를 끄고도 친구와 만나 와글와글 신나게 떠들 수 없었던 우울의 시기를 우리는 다 같이 지났다. 고작 6년밖에 지나지 않아 세월호는 아직 아물지 않은 피딱지다. EBS '호기심 딱지'를 제일 좋아하는 여섯 살 딸아이는 '호기심 딱지'의 등장인물들이 가르쳐준 것들을 내 앞에서 자랑하는데, "엄마, 피딱지는 함부로 떼면 안돼. 혈소판이 열심히 만든 거거든. 피딱지를 억지로 떼면 혈소판이 또 일을 해야 해. 피딱지를 만드느라 혈소판들이 죽었는데, 또 만들면 혈소판들이 또 죽어. 피딱지는 저절로 떨어질 때까지 기다려야 해. 알겠지?" 그렇게 내내 떠든다. 유가족들에게 그 피딱지야 저절로 떨어질 날이 있을까마는, 그 피딱지를 우리가 손댈 일은 아닌 거다. 선거를 앞두고 터져 나오는 세월호 막말에 가슴이 저린다. 슬픔만 기억하고 분노와 억울을 자꾸 잊어가는 이 무심함을 미안해하기는커녕 남의 생채기를 함부로 헤집고 피딱지를 마음대로 건드릴 거라면 이딴 선거, 왜 하는가 싶기도 하다./김서령 소설가김서령 소설가

2020-04-09 김서령

[풍경이 있는 에세이]고달사지의 봄

통일신라 경덕왕시절 창건한 사찰폐사지 입구 늙은 느티나무 신고식석조 지나 상부의 원종대사탑 웅장노란산수유 계곡옆 거니시는 스님내가 꿈꾸던 '한폭의 그림' 펼쳐져내 기억에 저장된 여주 신륵사는 메타세쿼이아가 붉게 물드는 늦가을 타종소리가 강을 건너는 오후 6시쯤 강 맞은편에서 바라볼 때 가장 아름답다. 그러나 오늘 나의 목적지는 멀찍이서 신륵사를 볼 수 있는 강천이다.겨우내 움츠렸던 마음에 기지개를 펴보겠다고 봄 강물 따라 강천으로 향했다. 강가에는 버들가지가 다투어 피고 저 멀리 연노랑 물감 번지듯 퍼지는 산수유 꽃이 행자를 유혹하기 바쁘다. 눈앞에서 유유히 흐르는 한강은 강원도 태백 검룡소에서 발원하여 김포 월곶 보구곶리에서 서해에 합류하는 강으로 강원 오지에서 눈 녹은 물이 흘러 모인 것이니 해빙기가 되면서 강의 유속이 빨라지는 건 조금도 이상한 일이 아닐 것이다. 나이와 상관없이 강에만 오면 부질없는 장난을 한다. 납작한 돌멩이를 찾아 물수제비를 떠보는 것이다. 더러는 성공한 것도 있지만, 대개는 얼마 못 가 강 속으로 몸을 숨기는 돌, 강은 바닥에 내려앉은 돌을 자기 몸처럼 안아주기 위해 얼마의 품을 허락했을까. 부드러운 햇살을 받으며 강천을 걸은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어느새 시간은 오후로 건너뛴다.이번엔 강천에서 멀지 않는 고달사지로 향한다. 지난 가을에 다녀왔지만 새봄의 고달사지는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아직 잔디가 온전히 초록을 띠지는 않았지만 여기저기 피어있는 노란 산수유 꽃 덕분인지 봄의 향기가 물씬 풍긴다. 고달사지, 언제 가도 한적해서 걷기 좋은 길로 이만한 곳도 없을 듯하다.여주시 북내면 혜목산 동쪽에 자리 잡은 고달사는 일명 고달원(高達院)이라고도 하며 통일신라시대 764년(경덕왕 23)에 창건한 사찰로 알려지고 있다. 근처 다른 폐사지와 비교하면 터가 넓어 예전 사찰의 규모를 가늠해보는 건 물론, 보는 이로 하여금 숨을 트이게 한다. 차에서 내리면 폐사지 입구 400살 나이를 가진 늙은 느티나무에게 신고식을 마치고 낮은 스펜스 안으로 들어서면 지정된 관람로를 따라 걷는 건 지극히 정석이다. 사찰이 번성했을 당시 수조로 쓰였을 석조 구조물은 단아한 지붕을 이고 있어 그것이 중요 유적임을 말해주고 있다.석조의 용도는 사찰에 큰 행사가 있을 때 곡물을 씻기도 하지만 평소엔 물을 담아두거나 사찰 중심 공간에 두고 부처님 전에 나갈 때 몸을 깨끗이 씻고 가라는 의미도 있다. 지붕이 있는 두 개의 석조를 지나 가운데 상부에 자리 잡은 원종대사탑은 스케일이 웅장하고 위쪽 부서진 모서리 부분을 제외하면 비교적 형태는 양호하다. 탑신부에는 사천왕상이 새겨져 있고 아래 석탑에 새긴 조각은 흘러가는 구름 사이로 거북이와 용이 꿈틀거리며 노니는 형상이다. 넓은 폐사지에는 부도, 석불대좌, 석불좌, 승탑, 쌍사자 석등 총 7종의 보물이 있으며 중앙 위쪽에 자리 잡은 원종대사탑을 지나면 폐사지 고달사와 무관한 고달사란 절이 기다린다.그 고달사를 왼편에 끼고 산 쪽으로 올라가면 평평한 터에 최근에 세운 듯한 2기의 석불을 만날 수 있다. 이 석불에서 오른쪽 숲길로 꺾어들면 오래 전 불심이 가득한 석공들의 섬세한 숨결을 느낄 수 있는 단아한 석등이 반긴다. 거기까지 갔다면 등이 있는 자리에서 아래 너른 폐사지를 내려다보는 여유는 누구라도 놓치지 않았으면 싶다. 홀로 석등 주변을 서성대다 폐사지로 내려오니 노란 산수유가 망울을 트기 시작한 맞은편 계곡 옆으로 스님 한 분이 봄햇살을 받으며 한가로이 거니신다. 내가 꿈꾸던 한 폭의 그림이 완성되는 순간이다. 그날 나는 집으로 돌아와 폐사지에 핀 노란 산수유꽃이 지난해 결실인 붉은 열매를 그대로 안고 있는 걸 보고 '고달사지의 봄'이란 시를 썼던가 아니었던가.꽃의 사리, 열매의 사리,저 고운 것이 하늘에서 떨어졌겠느냐.아니면 누가 몰래 매달기라도 했겠느냐.꽃이 부르니 열매가 왔겠지.열매가 부르니 꽃도 좋아서 같이 살자 했겠지.-시(詩) '고달사지의 봄' 중에서/김인자 시인·여행가김인자 시인·여행가

2020-04-02 김인자

[풍경이 있는 에세이]'사회적 거리'의 두얼굴

사람 얼굴 맞대고 만나는걸 삼가라처음엔 당혹스러웠으나 이젠 익숙 좋게 말하면 격리 조금 심하면 유폐차별과 동시에 배려의 의미도 담겨 예방위해 거리는 멀리 실천은 함께요즘 코로나19가 전염되는 걸 막기 위해 소위 '사회적 거리두기'를 권하고 있다. 사람 사이에 얼굴을 맞대고 가까이 만나는 걸 삼가라는 뜻이다. 처음 당혹스러웠던 이 말도 꽤 익숙해졌고 이젠 다른 사람을 만나지 말라는 요구에도 거부감을 느끼지 않게 되었다. 전염병이 우리의 의식과 생활을 적잖이 바꾸고 있다. 바이러스에 감염이 되었든 아니되었든 거의 한 달 이상 우리는 스스로 정해놓은 거리를 넘지 않으려 애쓰고 있다. 좋게 말하면 '격리', 조금 심하게 말하면 자발적 '유폐' 생활을 하는 셈이다.이 '사회적 거리(social distance)'라는 용어는 1900년대 초, 독일의 사회학자 게오르그 짐멜이 미국 사회를 연구하면서 등장했다고 한다. 그는 개인보다는 집단 사이의 거리, 즉 인종이나 계급 사이의 물리적 거리에 연구 초점을 두었다. 미국에선 흑백 사이의 오래된 인종차별은 물론, 20세기 초에 빈부격차라는 새로운 차별이 생겨났고, 세계 각 지역에서 온 이민자 사이에서도 갈등이 빚어졌다. 즉 짐멜의 연구에서 말하는 '사회적 거리'는 '차별'을 의미했다. 요즘 우리나라에서도 장애인 학교가 들어오는 걸 주민이 막거나, 임대아파트 거주자의 통행을 막기 위해 담장을 치는 등의 문제가 불거진 바 있다. 빈부격차가 계급 간 '사회적 거리'를 만든 예이다.거리가 멀수록 차별이 심하다 할 것인데, 나는 짐멜의 연구로부터 거의 1세기가 지난 때, 미국 인디애나폴리스에서 좋은 예를 목격한 일이 있다. 시내에서 조금 벗어난 곳에 바다처럼 큰 호수가 있었는데, 더운 여름날 호기심 가득한 마음으로 수영을 갔다. 그런데 호숫가 백사장에 누가 금을 그은 것도 아닌데 백인과 흑인이 100m쯤 거리를 두고 수영을 즐기고(?) 있었다. 지금이 마틴 루터 킹 목사가 살던 1960년대도 아닌데, 나는 너무나 놀라 무엇을 잘못 본 건 아닌가 싶었다. 그리고 백인도 흑인도 아닌 나는 어느 쪽으로 가서 수영해야 하나 참으로 난감했었다.짐멜의 개념은 이후 많은 학자에 의해 더욱 심화한 연구로 발전했다. 그중에서 1950년대 에모리 보가르두는 '사회적 거리'의 물리적 측면보다 심리적 측면에, 또 집단보다 개인에 주목하여 '거리'를 결정하는 요인들을 측정했다. 예를 들면 같은 집단 내의 사람이라 해도, 늘 가까이 있고 싶은 사람과, 가급적 멀리하고 싶은 사람이 있기 마련이다. 엄마와 아기 사이의 거리는 0m(100)일 것이고, 가족은 10m(101), 이웃사촌끼리는 100m(102)…. 그리고 보기 싫은 원수지간이라면 1천km도 부족할지 모른다.보가르두의 연구는 모든 개인에겐 고유의 영역이 있다는 걸 보여준다. 낯선 사람 사이에는 접근이 불허되는 거리가 있고, 만약 그 안으로 들어가야 할 때는 양해와 감사를 표시하는 것이 기본이다. 오래 전에 이민갔다 고국을 방문한 한 친구의 말이 생각난다. 그는 40년 가까이 미국에 살았으니 그쪽 문화에 더 익숙할 터, 오랜만에 돌아온 한국인의 관습이, 어릴 적 익숙했던 그것이, 아주 새롭게 달리 보인다는 것이었다. 그중 하나는 서울 시내를 걷다가 타인과 너무 자주 몸을 부딪는다는 것, 게다가 아무도 '실례' 혹은 '죄송'하다고 말하지 않더라는 것이다.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제 갈 길로 가더란다. 한국인의 친밀성 때문이라고 설명하기엔 사뭇 아쉬움이 남더라는 것이다.'사회적 거리'는 차별과 동시에 배려의 의미를 담고 있다. 지금 우리가 '사회적 거리두기(social distancing)'를 강조하는 것은 우선 전염병을 막기 위한 조치이지만, 나는 그 안에 차별 철폐와 배려 실천까지 포함하면 좋겠다. 일전에 '국제엠네스티'로부터 받은 한 메일에 'Socially distant, but together'라는 글귀가 적힌 포스터가 동봉되어 있었다. 코로나 전염을 차단하기 위해 사람 사이의 거리는 띄어야 하지만, 그 실천은 '함께' 해야 한다는 뜻이다. 어느 한 사람의 노력으로는 전염병을 막을 수 없다. 지금이 타자에 대한 배려가 어느 때보다 필요한 때가 아닐까 싶다./정한용 시인정한용 시인

2020-03-26 정한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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