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경이 있는 에세이

 

[풍경이 있는 에세이]고달사지의 봄

통일신라 경덕왕시절 창건한 사찰폐사지 입구 늙은 느티나무 신고식석조 지나 상부의 원종대사탑 웅장노란산수유 계곡옆 거니시는 스님내가 꿈꾸던 '한폭의 그림' 펼쳐져내 기억에 저장된 여주 신륵사는 메타세쿼이아가 붉게 물드는 늦가을 타종소리가 강을 건너는 오후 6시쯤 강 맞은편에서 바라볼 때 가장 아름답다. 그러나 오늘 나의 목적지는 멀찍이서 신륵사를 볼 수 있는 강천이다.겨우내 움츠렸던 마음에 기지개를 펴보겠다고 봄 강물 따라 강천으로 향했다. 강가에는 버들가지가 다투어 피고 저 멀리 연노랑 물감 번지듯 퍼지는 산수유 꽃이 행자를 유혹하기 바쁘다. 눈앞에서 유유히 흐르는 한강은 강원도 태백 검룡소에서 발원하여 김포 월곶 보구곶리에서 서해에 합류하는 강으로 강원 오지에서 눈 녹은 물이 흘러 모인 것이니 해빙기가 되면서 강의 유속이 빨라지는 건 조금도 이상한 일이 아닐 것이다. 나이와 상관없이 강에만 오면 부질없는 장난을 한다. 납작한 돌멩이를 찾아 물수제비를 떠보는 것이다. 더러는 성공한 것도 있지만, 대개는 얼마 못 가 강 속으로 몸을 숨기는 돌, 강은 바닥에 내려앉은 돌을 자기 몸처럼 안아주기 위해 얼마의 품을 허락했을까. 부드러운 햇살을 받으며 강천을 걸은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어느새 시간은 오후로 건너뛴다.이번엔 강천에서 멀지 않는 고달사지로 향한다. 지난 가을에 다녀왔지만 새봄의 고달사지는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아직 잔디가 온전히 초록을 띠지는 않았지만 여기저기 피어있는 노란 산수유 꽃 덕분인지 봄의 향기가 물씬 풍긴다. 고달사지, 언제 가도 한적해서 걷기 좋은 길로 이만한 곳도 없을 듯하다.여주시 북내면 혜목산 동쪽에 자리 잡은 고달사는 일명 고달원(高達院)이라고도 하며 통일신라시대 764년(경덕왕 23)에 창건한 사찰로 알려지고 있다. 근처 다른 폐사지와 비교하면 터가 넓어 예전 사찰의 규모를 가늠해보는 건 물론, 보는 이로 하여금 숨을 트이게 한다. 차에서 내리면 폐사지 입구 400살 나이를 가진 늙은 느티나무에게 신고식을 마치고 낮은 스펜스 안으로 들어서면 지정된 관람로를 따라 걷는 건 지극히 정석이다. 사찰이 번성했을 당시 수조로 쓰였을 석조 구조물은 단아한 지붕을 이고 있어 그것이 중요 유적임을 말해주고 있다.석조의 용도는 사찰에 큰 행사가 있을 때 곡물을 씻기도 하지만 평소엔 물을 담아두거나 사찰 중심 공간에 두고 부처님 전에 나갈 때 몸을 깨끗이 씻고 가라는 의미도 있다. 지붕이 있는 두 개의 석조를 지나 가운데 상부에 자리 잡은 원종대사탑은 스케일이 웅장하고 위쪽 부서진 모서리 부분을 제외하면 비교적 형태는 양호하다. 탑신부에는 사천왕상이 새겨져 있고 아래 석탑에 새긴 조각은 흘러가는 구름 사이로 거북이와 용이 꿈틀거리며 노니는 형상이다. 넓은 폐사지에는 부도, 석불대좌, 석불좌, 승탑, 쌍사자 석등 총 7종의 보물이 있으며 중앙 위쪽에 자리 잡은 원종대사탑을 지나면 폐사지 고달사와 무관한 고달사란 절이 기다린다.그 고달사를 왼편에 끼고 산 쪽으로 올라가면 평평한 터에 최근에 세운 듯한 2기의 석불을 만날 수 있다. 이 석불에서 오른쪽 숲길로 꺾어들면 오래 전 불심이 가득한 석공들의 섬세한 숨결을 느낄 수 있는 단아한 석등이 반긴다. 거기까지 갔다면 등이 있는 자리에서 아래 너른 폐사지를 내려다보는 여유는 누구라도 놓치지 않았으면 싶다. 홀로 석등 주변을 서성대다 폐사지로 내려오니 노란 산수유가 망울을 트기 시작한 맞은편 계곡 옆으로 스님 한 분이 봄햇살을 받으며 한가로이 거니신다. 내가 꿈꾸던 한 폭의 그림이 완성되는 순간이다. 그날 나는 집으로 돌아와 폐사지에 핀 노란 산수유꽃이 지난해 결실인 붉은 열매를 그대로 안고 있는 걸 보고 '고달사지의 봄'이란 시를 썼던가 아니었던가.꽃의 사리, 열매의 사리,저 고운 것이 하늘에서 떨어졌겠느냐.아니면 누가 몰래 매달기라도 했겠느냐.꽃이 부르니 열매가 왔겠지.열매가 부르니 꽃도 좋아서 같이 살자 했겠지.-시(詩) '고달사지의 봄' 중에서/김인자 시인·여행가김인자 시인·여행가

2020-04-02 김인자

[풍경이 있는 에세이]'사회적 거리'의 두얼굴

사람 얼굴 맞대고 만나는걸 삼가라처음엔 당혹스러웠으나 이젠 익숙 좋게 말하면 격리 조금 심하면 유폐차별과 동시에 배려의 의미도 담겨 예방위해 거리는 멀리 실천은 함께요즘 코로나19가 전염되는 걸 막기 위해 소위 '사회적 거리두기'를 권하고 있다. 사람 사이에 얼굴을 맞대고 가까이 만나는 걸 삼가라는 뜻이다. 처음 당혹스러웠던 이 말도 꽤 익숙해졌고 이젠 다른 사람을 만나지 말라는 요구에도 거부감을 느끼지 않게 되었다. 전염병이 우리의 의식과 생활을 적잖이 바꾸고 있다. 바이러스에 감염이 되었든 아니되었든 거의 한 달 이상 우리는 스스로 정해놓은 거리를 넘지 않으려 애쓰고 있다. 좋게 말하면 '격리', 조금 심하게 말하면 자발적 '유폐' 생활을 하는 셈이다.이 '사회적 거리(social distance)'라는 용어는 1900년대 초, 독일의 사회학자 게오르그 짐멜이 미국 사회를 연구하면서 등장했다고 한다. 그는 개인보다는 집단 사이의 거리, 즉 인종이나 계급 사이의 물리적 거리에 연구 초점을 두었다. 미국에선 흑백 사이의 오래된 인종차별은 물론, 20세기 초에 빈부격차라는 새로운 차별이 생겨났고, 세계 각 지역에서 온 이민자 사이에서도 갈등이 빚어졌다. 즉 짐멜의 연구에서 말하는 '사회적 거리'는 '차별'을 의미했다. 요즘 우리나라에서도 장애인 학교가 들어오는 걸 주민이 막거나, 임대아파트 거주자의 통행을 막기 위해 담장을 치는 등의 문제가 불거진 바 있다. 빈부격차가 계급 간 '사회적 거리'를 만든 예이다.거리가 멀수록 차별이 심하다 할 것인데, 나는 짐멜의 연구로부터 거의 1세기가 지난 때, 미국 인디애나폴리스에서 좋은 예를 목격한 일이 있다. 시내에서 조금 벗어난 곳에 바다처럼 큰 호수가 있었는데, 더운 여름날 호기심 가득한 마음으로 수영을 갔다. 그런데 호숫가 백사장에 누가 금을 그은 것도 아닌데 백인과 흑인이 100m쯤 거리를 두고 수영을 즐기고(?) 있었다. 지금이 마틴 루터 킹 목사가 살던 1960년대도 아닌데, 나는 너무나 놀라 무엇을 잘못 본 건 아닌가 싶었다. 그리고 백인도 흑인도 아닌 나는 어느 쪽으로 가서 수영해야 하나 참으로 난감했었다.짐멜의 개념은 이후 많은 학자에 의해 더욱 심화한 연구로 발전했다. 그중에서 1950년대 에모리 보가르두는 '사회적 거리'의 물리적 측면보다 심리적 측면에, 또 집단보다 개인에 주목하여 '거리'를 결정하는 요인들을 측정했다. 예를 들면 같은 집단 내의 사람이라 해도, 늘 가까이 있고 싶은 사람과, 가급적 멀리하고 싶은 사람이 있기 마련이다. 엄마와 아기 사이의 거리는 0m(100)일 것이고, 가족은 10m(101), 이웃사촌끼리는 100m(102)…. 그리고 보기 싫은 원수지간이라면 1천km도 부족할지 모른다.보가르두의 연구는 모든 개인에겐 고유의 영역이 있다는 걸 보여준다. 낯선 사람 사이에는 접근이 불허되는 거리가 있고, 만약 그 안으로 들어가야 할 때는 양해와 감사를 표시하는 것이 기본이다. 오래 전에 이민갔다 고국을 방문한 한 친구의 말이 생각난다. 그는 40년 가까이 미국에 살았으니 그쪽 문화에 더 익숙할 터, 오랜만에 돌아온 한국인의 관습이, 어릴 적 익숙했던 그것이, 아주 새롭게 달리 보인다는 것이었다. 그중 하나는 서울 시내를 걷다가 타인과 너무 자주 몸을 부딪는다는 것, 게다가 아무도 '실례' 혹은 '죄송'하다고 말하지 않더라는 것이다.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제 갈 길로 가더란다. 한국인의 친밀성 때문이라고 설명하기엔 사뭇 아쉬움이 남더라는 것이다.'사회적 거리'는 차별과 동시에 배려의 의미를 담고 있다. 지금 우리가 '사회적 거리두기(social distancing)'를 강조하는 것은 우선 전염병을 막기 위한 조치이지만, 나는 그 안에 차별 철폐와 배려 실천까지 포함하면 좋겠다. 일전에 '국제엠네스티'로부터 받은 한 메일에 'Socially distant, but together'라는 글귀가 적힌 포스터가 동봉되어 있었다. 코로나 전염을 차단하기 위해 사람 사이의 거리는 띄어야 하지만, 그 실천은 '함께' 해야 한다는 뜻이다. 어느 한 사람의 노력으로는 전염병을 막을 수 없다. 지금이 타자에 대한 배려가 어느 때보다 필요한 때가 아닐까 싶다./정한용 시인정한용 시인

2020-03-26 정한용

[풍경이 있는 에세이]바이러스와 모카빵

구로콜센터 확진 88명은 모두 여성비정규직삶 장거리거주 동선 치열대구아파트 감염 46명도 근로여성세간은 신천지 교인 사실에만 주목 집단감염조차 불평등한 현실 씁쓸코로나19 사태가 진정되나 싶어 마음을 놓으려 할 때쯤, 구로 콜센터 집단 감염이 터졌다. 88명의 확진자 모두 여성이었다. 새벽에 여의도에서 녹즙을 배달하고 콜센터로 출근해 근무했다는 어느 확진자의 동선은 너무 치열해서 슬프기까지 했다. 교대 근무를 하며 실적 압박에 시달리는 콜센터의 특성상 아파도 쉬기 어려웠을 근무자들의 거주지는 서울은 물론, 의정부와 인천까지 뻗어 있었다. "인천 확진자의 64%는 인천이 아닌 서울 직장에서 감염되었다"는 사실을 기사로 확인하고 나자 두 배로 씁쓸해졌다. 장거리 출퇴근의 피로감을 잘 알기에, 확진자들의 동선이 공개될 때마다 그 시간대와 장소에 언젠가의 나 자신이 있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면 너무 나간 걸까? 확진 판정을 받은 88명의 여성들이 직장이 폐쇄된 지금 어떻게 지내고 있을지 나는 알지 못한다. 집단 감염 이후 발음이 정확하게 전달되지 않아 마스크를 쓰는 것조차 쉽지 않다는 콜센터의 근무 환경은 나아지기는 했을까 궁금할 따름이다.대구 한마음아파트에서 확진 판정을 받은 여성 46명도 크게 다르지 않다. 언론은 이들이 모두 신천지 교인이었다는 사실에 특히 주목했다. 1985년 지어진 여성근로자 임대아파트는 2명이 36.36㎡(약 11평)의 공간을 나눠서 쓰는 구조다. 대구에서 3개월 이상 일한 35세 미만 미혼 여성이라면 입주가 가능했다고 한다. 이런 아파트는 대구에만 있는 것도 아니고 인천을 비롯한 전국 각지에 산재해 있다. 대부분 공단 바로 옆에 지어져 있고 공장에서 일하는 여성 근로자가 '잠만 자고' 출퇴근하며 열심히 일할 수 있기 위해 지어진 산업 성장시대의 유물 같은 곳이다. '한마음' 신천지의 실체를 파헤친다며 비장한 내래이션과 음악이 계속되는 시사 고발프로그램에서 내 기억에 남은 장면은 그러니까, 의외로 모카빵 레시피가 적혀 있는 것으로 짐작되는 화이트보드였다. 버려진 지 오래된 듯 색바랜 화이트보드에는 '모카빵' 글자가 크게 쓰여져 있고 그 아래에는 재료로 보이는 강력분, 물, 이스트, 소금, 설탕, 마가린, 분유, 계란, 커피, 건포도 등의 용량이 함께 적혀 있었다. 여러 가지 이유로 집을 나와 모여살고 있던 신천지 신도들이 "새로운 교인을 포섭하기 위해 정기적으로 문화 교실을 열면서 제빵 클래스, 비누 만들기, 자신에게 맞는 소원 팔찌 찾기 등의 프로그램을 진행했을 가능성이 높다"는 설명이 이어졌다. 신천지에 '청춘 반환 소송'을 냈다는 한 여성은 1심에서 승소했지만 "지나간 시간은 돈으로도 보상받을 수 없을 뿐더러 가족 누구와도 연락을 하고 있지 않다"고 털어놓았다. 20~30대의 젊은 여성들은 그 낡고 좁고 오래된 아파트에서 생면부지의 사람들과 모여 살면서 무엇을 했을까? 신천지 교인들은 가족과도 연락을 끊고 친구 만날 시간도 없이 신천지의 각종 활동에 전념했으며 지방자치단체에서 지원해주는 각종 마을만들기나 공동체 프로그램, 문화예술 지원 프로그램도 적극 활용했다고 한다. 신천지와 상관없이 살던 청년 누군가는 자신을 환대해주고 재미있는 프로그램을 함께 하자고 끈질기게 권하는 또래 친구들과의 교류를 거절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TV 프로그램이 끝난 후에도 한 무리의 여성들이 제빵 클래스에 모여앉아 빵을 만들며 이야기 나누는 풍경을 오랫동안 생각했다. 종교의 자유가 보장된 나라에서 자신이 선택한 것이니 누구를 원망할 일도 아닐지도 모른다. 하지만 한마음아파트가 뉴스에 등장할 때마다 그 좁은 아파트 한 켠에 모여앉아 모카빵을 만들고 있었을, 포교 활동 전략인지도 모르고 친구들을 만났다고 좋아했을 얼굴 모를 20대의 여성들을 자꾸 생각하게 되는 것만은 어쩔 수 없어서 마음을 자꾸 달래야 했다.콜센터와 요양원처럼 비정규직 여성 노동자가 많이 일하는 곳에서 집단 감염이 일어났다는 사실은 바이러스의 감염조차 결코 평등하지 않다는 현실을 보여준다. 이 바이러스가 바꿔놓은 풍경과 앞으로 달라질 일상이 낯설면서도 두려운 요즘, 가보지 않은 길 앞에서 다시 생각한다. 아무리 세상이 달라진다고 해도 동네 옆집에 놀러가 모카빵을 만들며 함께 하는 시간을 의심해야 하는 일은 없었으면 좋겠다고…/정지은 문화평론가정지은 문화평론가

2020-03-19 정지은

[풍경이 있는 에세이]가난이 부끄럽지 않았던 임벽당

조선시대 3대 여류시인으로 불려궁핍한 삶 시에 가식없이 드러내'이별한 님에게 바치다' 널리 회자나그네 꿈 거울속 시든얼굴과 겹쳐'헤어진 님'은 자신의 초췌한 모습가문으로 보면 임벽당은 가난하게 살지 않았어도 될 일이었다. 시아버지인 유기창은 중종반정 때 거제 유배에서 풀려 병조참의 혹은 동지중추부사를 제수 받았으나 두 임금을 섬길 수 없다는 결의로 사양하고 서천군 비인면 남당리로 낙향했다. 남편 유여주는 신진사류로 조광조와 함께 이름을 날렸으나 기묘사화에 연루되자 고향 남당리에 우거하면서 벼슬길에 나가지 않았다. 그녀의 가난은 그렇게 시작되었던 것이다.임벽당 부부는 집 근처에 연못을 만들고 연못 가운데 소나무와 대나무를 심어 선취정과 임벽당을 조성하고 주변에 배나무와 복숭아나무를 가꾸어 봄이면 배꽃과 복사꽃 흐드러진 풍광을 즐겼다. 부부는 가난하지만 정신적으로 여유로운 삶을 살았다. 유여주가 학인이나 현인 또는 의인으로 불렸던 것은 그들의 이와 같은 청빈한 삶과 권력을 멀리한 때문이었을 것이다.남당리에는 부부가 중국을 다녀와서 심었다는 500년 된 은행나무가 우울한 봄 하늘을 이고 있어 세월의 무상함을 느끼게 한다. 김임벽당(金林碧堂·1492~1549)은 신사임당, 허난설헌과 함께 조선시대의 3대 여류시인으로 불린다. 그녀는 사후에 더 유명해진 시인이다. 1683년, 김두명이 중국 사행을 다녀오면서 청나라의 전겸익이 1652년에 편집한 명대의 2000여 명의 유명한 시인들의 작품을 엮은 '열조시집'을 구해 왔다. 이 시집에 그녀의 시 '증별(贈別)' '빈녀음(貧女吟)' '고객사(賈客詞)'가 수록되어 있었다. 이를 본 조선시단에서는 명나라에까지 유명해진 임벽당의 시세계에 경탄과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그녀는 자수에도 조예가 깊어 베갯모에 '임벽당'이라는 제목의 시를 새겨 넣었다. '그윽히 깊은 작은 고을에/자연을 사랑하니 마음의 근심 잊을만 하네/인간의 옳고 그름 얽매이지 않고/꽃 피면 봄인줄 알고 잎 지면 가을인가 하노라'라는 시 속에는 세월을 깁고 있는 그녀의 애잔하고 초탈한 모습이 보인다. '가난한 여인의 노래'에는 그녀의 궁핍한 삶이 가식 없이 드러나 읽는 이의 마음이 저려온다. '궁벽한 곳에 살다보니/산골이 깊어서 속세의 일 접하기 힘드네/집안이 가난하여 말술조차 담가놓기 어려우니/잠재워 보내야할 손님도 그 밤길로 돌려 보내네'. 가난하게 살다보니 궁벽한 곳으로 찾아온 귀한 손님에게 술을 낼 수도 없고, 잠을 재워 보낼 수도 없어 그 밤으로 돌려보내야 하는 처지가 안타까워 부른 노래다. '조카 강에게 주는 노래'에는 흩어졌던 피붙이가 찾아와주어 재회의 기쁨과 함께 정성껏 차린 가난한 밥상이 부끄럽지 않다고 노래한다. '피붙이가 뜬 구름처럼 흩어졌는데/오늘 이같이 만나볼 날이 있을 줄 어찌 알았으리오/멀리서 찾아와 주는 그 마음이 고마워/명아주잎과 콩나물국만으로 밥을 먹여도 부끄럽지 않구료'가 주는 감동은 혈육 간의 깊은 정이다. 서로 가난하게 살고 있는 형편을 알고 있으니 명아주잎과 콩나물국만을 먹여도 부끄러운 게 아니더라는 그녀의 심사 뒤에는 넉넉히 살았다면 진수성찬으로 조카 강에게 먹이고 싶은 간절한 소망도 보인다.'이별한 님에게 바치다'라는 시는 그녀의 작품 중에서 가장 널리 회자되고 있는 시다. '안타깝게 헤어진 지 3년이 넘었는데/가죽 옷 한 벌로 추위를 막네/가을바람은 짧은 귀밑머리에 불어오고/차가운 거울은 시든 얼굴을 비추네/나그네 꿈은 먼지바람 속을 떠돌고/이별의 아픔은 관문처럼 막아서네/이리저리 거닐며 지난날 생각하니/흐르는 눈물 방안 가득하네'로 끝을 맺는 이 시는 특정 대상을 염두에 두고 쓴 시인지, 아닌지를 분별하기 어렵다. 그녀의 다른 시와는 구별되는 것이 시적 자아와 시적 대상이 혼재되어 있다는 점이다. 가죽 옷 한 벌로 겨울을 나야 하는 사람은 그녀이기도 하고 헤어진 님이기도 하다. 따라서 자신의 궁핍한 삶이기도 하고 님의 곤궁한 삶이기도 한 것이다. 먼지바람 속을 떠도는 나그네의 꿈은 거울에 비친 시든 얼굴과 겹쳐진다. 헤어진 님은 그녀 자신의 초췌한 모습이기도 한 것이다./김윤배 시인김윤배 시인

2020-03-12 김윤배

[풍경이 있는 에세이]바이러스가 던진 사소한 질문들

빠르게 적응하며 안정된 집 생활'아프면 연락하라'는 어색한 전화오랜만의 외출서 만난 유팀장에"마스크 왜 안썼냐"고 묻자 울상'사기 힘들다'는 말에 "선물입니다"한동안 집 안에서만 지냈다. 늦겨울 추위가 갑작스레 찾아든 2월 중순의 며칠을 바깥에서 종종거리다 감기에 걸린 후, 자의 반 타의 반으로 격리에 든 것이다. 목이 아프고 열이 나는 데다 잔기침이 쏟아지는 걸로 봐서 단순 감기가 아닐 수도 있겠어, 괜히 나돌아다니다 엄한 사람들한테 폐 끼치지 말자, 마음먹었다. 혹시, 혹시 모르니까 말이다. 프로그램을 진행하던 서점에 전화를 걸어 양해를 구하고 다이어리에 기재된 몇몇 약속을 취소하고 이런저런 계획을 모조리 생략했다. 당분간 집에만 있기로. 워낙에 집순이를 지향해왔으나 더 열심히 집순이가 되기로. 프리랜서라 가능한 일이다. 자고 일어나도 내리지 않는 열 때문에 보건소에 가 검진을 받아봐야 하나 망설이기를 몇 차례. 약국에서 사다 둔 감기약을 아침저녁으로 챙겨 먹자 컨디션은 조금씩 나아졌다. 그런데 주변 분위기는 점차 심각해져만 갔고. 바이러스의 기세가 하루가 다르게 거세지더니 확진자가 단숨에 수백수천명으로 불어났다. 업무와 관계된 회의나 미팅이 줄줄이 취소되면서 사태의 심각성을 실감할 수 있었다. 학교에서 함께 일하는 강사들 사이에선 어쩌면 개강이 더 미뤄질 수도 있겠다는 얘기가 오가기도 했다. 자의 반 타의 반의 이 격리 생활도 자연히 길어지겠구나 싶었다.생필품을 공수하기 위해 이따금 들른 동네 마트를 제외하고는 어디에도 가지 않았다. 누구도 만나지 않았다. 그렇게 일주일 정도 지났을까. 빠르게 적응해가는 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들쭉날쭉하던 혼자만의 일과에도 어느 정도 체계가 잡히면서, 집 생활은 제법 안정되었다. 솔직히 말해, 더없이 좋았다. 밖에 나가지 않아도 된다! 사람들과 얽히지 않아도, 귀찮은 일에 골머리 앓지 않아도 된다! 나는 좀처럼 맛볼 수 없었던 해방감까지 느꼈다. 생활은 간소했고, 군더더기가 없는 만큼 여러모로 무해했다. 이 속에서 마침내 안전하고 또 온전하다는 느낌. 책상 앞에 앉아 밀린 일을 처리하면서, 간간이 일과 관계된 전화와 메일을 주고받으면서 불과 며칠 만에 그 일이라는 것들이 너무도 낯설어졌음을 나는 알았다. 평범한 사회적 대화가 오히려 비현실적으로 느껴질 정도였으니. 문득 고민이 일었다. 나, 이대로 괜찮을까? 이런 식으로 적응해버려도 좋을까? 몇 달 몇 년을, 어쩌면 평생을 지금처럼 계속 혼자만의 집에, 세계에 살아야 한다면 그래도 나는 좋아, 괜찮아, 답할 수 있을까? 어떤 대답을 다그치듯 불쑥 걸려온 전화. "별일 없죠? 감기는 좀 어때요?" 하는 말. "아프면 꼭 연락해요"하는 당부. 고마운 사람 같으니…. 어색하지만 참 따뜻하구나. 이런 나날들 속에 나를 염려하는 그는 과연 누구일까? 곰곰 되짚어보았다. 여태껏 그와 나는 어떤 일들을 통과해왔는지. 어떤 이야기를 나누어왔는지. 그래서 우리는 지금 얼마나 먼지, 혹은 생각보다 훨씬 가까운지. 내일이라도 아프면 그에게 연락을 할 수 있을까? 나 좀 도와줄래요, 말하게 될까? 그리고 잇따라 떠오르는 얼굴, 얼굴들. 불쑥 전화를 걸어 안부를 묻고 싶은 충동. 무탈하신가요? 행여 혼자 앓고 계신 건 아닌지? 궁금해지는 그는 또 누구일까? 나는 왜 하필 그를 떠올렸을까? 오래전 이미 연락이 끊어진 그를.몇 달 같은 며칠이 지났다. 실로 오랜만의 외출. 피할 수 없는 일 약속 때문이었다. 마스크를 눈 밑까지 바짝 당겨쓰고서, 어딘가 조금 달라진 듯한 대로변의 풍경을 두리번거리면서. "어, 왜 마스크 안 끼셨어요?" 묻자, 일로 만난 사이의 유 팀장님은 울상을 지었다. "마스크 사기 너무 힘들어요. 여기저기 검색을 해도 죄다 품절이라고 하니…." 직장에 매인 그는 마트나 약국을 뒤지고 다닐 수도 없었을 것이다. "에그…. 자, 선물입니다!" 가방에 여분으로 챙겨둔 마스크를 주섬주섬 꺼내 내밀면서 속으로 잠시, 그러나 실로 짧지 않은 시간 동안 온갖 자질구레한 것들을 떠올리고 재고 망설인 나는 과연 누구일까? 어떤 사람일까?/박소란 시인박소란 시인

2020-03-05 박소란

[풍경이 있는 에세이]50세 서 부장

47세때 처음 내집을 갖게된 독신녀집들이친구들 반응 대단해 축하해근데 너 곧 퇴직? 대출금은 어쩌니조카 챙기는것도 노후걱정 타박해삶이 멋진데… '오지랖시선'은 그만서 부장은 한국 나이로 50세가 되었다. 집을 산 건 3년 전이다. 수도권의 30평대 아파트였다. 스스로 생각하기에는 또래보다 집 장만이 늦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소담하게 벌인 집들이 날, 친구들의 반응은 달랐다. "뭐야, 완전 멋져. 네가 집을 사다니. 너무 놀랐잖아!""정말 대단해. 내 친구지만 진짜 기특하다. 축하해."서 부장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지방대를 졸업하고 서울로 올라온 후 한 번도 쉬어본 적 없이 직장엘 다녔다. 그리고 마흔일곱 살이 되어 서울도 아닌, 작은 위성도시에 아파트를 샀는데 왜들 이렇게까지 놀라는 것일까. 서 부장은 고추잡채와 유부전골을 식탁에 날랐다. 맞춤제작을 한 아카시아나무 식탁은 아무리 봐도 색이 고왔다. 마음에 들었다. "결혼 안 하고 혼자 산다 할 때 걱정 많이 했는데, 이렇게 잘 사는 거 보니 내가 다 기분이 좋네. 집도 너무 예쁘고.""그런데 너도 곧 회사 나올 때 되지 않아? 대출금은 어떡해?"아하, 그제야 서 부장은 친구들의 반응이 이해되었다. 결혼하지 않은 47세의 독거여성의 노후를 지금 걱정하고 있는 것이었다. 분명히 말해두지만 서 부장의 친구들은 예의 없는 사람들이 아니다. 그들은 사심 없이 집들이에 참석한 따뜻하고 다정한 친구들이었다. "대출은 없어. 회사는 언젠간 그만두게 되겠지. 이후에 뭘 할는지는 고민 중이고."대출이 없다는 말에 더 눈이 동그래진 친구들 앞에서 서 부장이 말했다. "아이고, 별걸 갖고 다 놀라네. 한 사람 월급 갖고 세 식구 살고 두 사람 월급으로 네 식구가 사는 거랑 한 사람 월급 갖고 한 사람이 사는 거, 어느 편이 낫겠어? 이 간단한 계산법이 어려워?"서 부장에게는 조카가 둘 있다. 조카들이 어릴 땐 자주 만나 소고기도 먹이고 그랬지만 이제는 제법 컸다고 이모 집에 오려고 하지 않는다. 그래서 소고기를 먹이는 대신 옷을 사보내고 가방을 사주고 운동화를 사준다. 학원비를 내줄 때도 있고 연수를 떠날 때 비용을 내주기도 했다. 그럴 때면 친구들이 타박을 했다. "그런다고 걔들이 나중에 이모한테 효도할 것 같아? 네 앞길이나 챙겨. 100세 시대야. 노후 준비 제대로 못 하면 끝장이야. 돈 아껴."한 달에 조카들 사교육비로 100만원, 200만원을 내주는 것도 아니고 이모가 생색 좀 내는 일에 무얼 그리 걱정을 하나, 생각했는데 나이 든 독거여성을 안쓰럽게 생각하는 시선은 참말 고칠 요량이 없다. 그래도 친구들이니 '안쓰러운' 정도이지 낯 모르는 사람에 이르자면 숫제 패배자 취급이다. 아이고, 불쌍해라. 나이 들어 새끼 하나 없이 외로워 어쩌나. 그들은 표정을 숨기지도 않았다. 서른 살엔 예쁘고 좋았지? 마흔 살만 해도 자유롭고 좋았지? 그런데 쉰 살 되니 너도 두렵지? 고독사할까 봐 겁나지? 그런 시선에 살이 따가울 때가 많다. 한 마디 한 마디 대꾸하기 싫어 그냥 하하 웃고 말지만. 서 부장은 우리 옆집에 산다. 가끔 나와 맥주를 마시고 고추잡채를 만들어준다. 서 부장 언니의 고추잡채 솜씨는 정말 끝내준다! 언니네 회사에서 만든 화장품을 늘 공짜로 갖다 주고, 사실 나는 과일을 살 필요가 없다. 언니가 박스째 사서 나에게 언제나 넉넉히 나누어주기 때문이다. 30대 독신들이 40대 독신으로 자라고 또 50대 독신으로 무럭무럭 자라 대한민국 세금의 한 축을 만든다는 걸 깨치고, 늦게라도 좋은 짝 만나 노후 편하게 보내라는 오지랖 따위 부리지 않는 그런 세상이 얼른 왔으면 싶다. 서 부장은 멋지다. 이대로 쉰 살이 되어서 더욱 멋지다./김서령 소설가김서령 소설가

2020-02-27 김서령

[풍경이 있는 에세이]원주 부론의 거돈사지

숱한 역사 품고 잔잔해진 폐사지기단 돌·나무·새들마저도 고요앞쪽 중앙엔 삼층석탑만 덩그러니정산저수지 둑에 앉아 내려다보며늙은나무 향해 나만의 의식을 한다어느 시인은 부론에서 길을 잃었다는데 나는 부론을 눈앞에 두고 어디쯤에서 길을 버린 걸까. 예기치 못한 만추 풍경에 끌려 두 번이나 다른 길로 드는 실수를 하고 말았다. 이럴 때 이것이 일이 아니고 여행이라 생각하면 초조나 불안이 안도로 바뀌는 건 신기하다.나는 차장을 열어 싸한 바람을 들이킨 후 마음을 다독여 달리기 시작했다. 자동차는 남한강을 끼고 여주를 지나 내비가 알려주는 대로 얌전히 좁은 길을 따라 들어갔다. 오른쪽에는 붉은 함석지붕을 가진 작은 폐교건물이 눈에 들어오고 왼쪽으론 석축 기단 모서리에 서있는 한 그루 노거수, 내가 찾고자 했던 바로 그곳인가 싶었는데 역시 이런 예감은 한 번도 나를 배신한 적이 없다. 때는 만추였고 추적추적 비가 내리는 저녁 답이었다. 곧 날이 어두워질 것 같아 부론 어디쯤에서 돌아갈까 하다 예까지 왔으니 거돈사지는 보고 가야지 하면서 고집을 부렸던 것이다. 어느 해 거돈사지와의 첫 만남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그날은 금세 날이 어두워지고 비까지 내려 변변한 사진 한 장 건지지 못한 채 귀가를 서둘러야만 했다. 그래서 그런가. 거돈사지는 내게 그냥 뭔가 보여주려다 보여주지 못한 그 무엇으로 남았던 폐사지였다. 그리고 수년이 흘렀고 나는 지난 늦가을 다시 그곳을 찾게 되었다. 이번에는 시간에 쫓기지 않으려고 조금 일찍 서둘러가서 찬찬히 둘러보고 싶었다. 빈 절터에 서서 지난 시간의 흔적을 지켜본다는 것이 딱히 무슨 의미가 있을까 하는 생각을 나답지 못하게 왜 이제야 하는 것인지.그래, 다 왔다. 거돈사지다. 나는 천년의 나이를 가진 느티나무 아래 차를 세우고 시동을 껐다. 햇살이 노거수 아래로 부서져 내렸다. 굳이 외면하고 싶은 것들은 늘 왜 그리도 눈에 잘 들어오는지. 운전석에서 차 문을 열고 왼 발을 땅에 놓고 일어서려는 순간 자연스럽게 살짝 아래로 닿은 시선, 석축 사이에 기다란 무엇이 자석처럼 나를 끌어당긴다.나의 나쁜 시력은 그것이 무엇이든 상상을 고무시키는데 일조를 해온 건 사실이다. 저게 뭘까? 어찌 보니 긴 지느러미를 가진 물고기가 헤엄을 치는 것도 같고 그게 아니면 뭔가 산 녀석이 꿈틀거리는 것도 같았다. 그러노라니 나의 생각은 이미 추월선을 넘었고 심장이 쿵쾅거렸다. 심호흡을 하고 몸을 낮춰 가만히 들여다보니 맞다. 뱀의 허물이다. 어쩌면 돌과 돌 사이에 한 생의 풍파를 감당한 제 몸의 껍질을 철저히 인간의 눈높이를 무시하고 저토록 가지런히 벗어둔 채 뱀은 천년의 비밀을 간직한 느티나무 아래나 모퉁이가 닳은 삼층석탑 어디쯤에서 이른 동면에 든 건 아닐까.무심한 듯 생각이 많아지는 곳으로 폐사지만 한 곳이 있을까. 한때는 건물과 승려와 부처님의 말씀이 그리워 찾아온 불자들로 붐볐을 이곳, 비어있다는 것, 오래되었다는 것, 황량하다는 것, 숱한 역사를 안고 사라졌으나 영 지워지지 않는 그 무엇들, 세월이 흘러 모두가 평면으로 잔잔해진 이곳 폐사지, 기단을 둘러싼 돌도 나무도 심지어 새들도 고요하기만 하다. 그러나 그보다 더한 절대 고요, 그것을 대변하는 조형물, 바로 폐사지에 남아있는 고고하기 이를 데 없는 석탑이 아닐까 싶다. 가파른 돌계단을 올라 앞쪽 중앙에 위치한 삼층석탑을 향해 걸어가는데 발밑으로 무언가 스멀거리는 듯한 이 간지러움의 정체는 뭘까.기록을 보면 원주는 남한강을 따라 100여개의 절터가 흩어져 있었으나 대부분 사라지고 현재 남아있는 폐사지로는 거돈사지, 흥법사지, 법천사지다. 모두가 신라시대에 창건된 것으로 거돈사지는 대웅전이 있었던 자리로 추측되는 금당터와 불좌대, 그 앞에 삼층석탑이 전부지만 세 개의 절터 중 가장 넓고 주변 분위기가 고즈넉하다. 한나절 탑 주변에서 시간을 보내고 근처 현계산자락에서 발원한 정산저수지 주변을 둘러보고 저수지 둑에 앉아 거돈사지를 내려다본다. 무심한 세월을 대변하듯 천년을 고독하게 자리를 지키고 서있는 늙은 나무를 향해 나만의 의식을 하다 보니 어느새 해가 기운다. 매번 이런다. 서둘러야겠다. 쫓기듯 서두르지 않고 돌아가는 길은 없는 걸까./김인자 시인·여행가김인자 시인·여행가

2020-02-20 김인자

[풍경이 있는 에세이]혐오라는 바이러스

누군가를 증오하면 증오로 '부메랑'중국에서 '코로나19' 시작됐지만중국인 자체가 바이러스는 아냐역지사지만이 피해 막는 지름길이해와 관용으로 극복해 나가야엊그제 봉준호 감독의 영화 '기생충'이 아카데미상 네 개 부문을 휩쓸었다. 비영어권 영화가 하나 받기도 어려웠던 전례를 깬, 그야말로 역사적인 '사건'이었다. 영화 자체에 대한 찬사는 물론 봉 감독의 수상 소감도 주목을 받았다. 그는 한국어와 영어를 섞어가며 유머러스하게 소감을 말했다. 그런데 남이 잘 되는 걸 못 보는 놀부 심보는 어디에나 있는지, 그의 어투에 딴죽을 거는 어느 미국인의 SNS 포스팅이 알려져 우리 눈살을 찌푸리게 하고 있다. 그 미국인은 '영어와 한국어를 섞는 말투가 미국을 파괴하고 있다'고 썼다. 대부분 언론이 봉 감독의 재치에 열광하는 것과는 사뭇 다른 적대적 태도이다.혐오는 또 다른 혐오를 낳는다. 미국 사회의 인종차별 의식은 뿌리 깊이 박혀있다 어떤 계기가 되면 슬그머니 머리를 들곤 한다. 꽤 오래전 미국 아이오와 대학의 국제창작 프로그램에 참석했을 때 일이다. 지역 주민이 여는 환영 파티에 나를 포함해 각국에서 온 작가 이십여명이 참석했다. 우리를 초대한 주민 중에는 중국계 미국인도 있어, 나는 같은 동양인이라는 사실에 너무나 반가워 인사를 건넸다. 그런데 나이 지긋한 그 부인은 내가 한국에서 왔다는 걸 확인하는 순간, 마치 징그러운 벌레라도 본 듯 얼굴을 찡그리며 돌아섰다. 백인으로부터 평생 받았을 인종차별을, 자기보다 열등하다고 여기는 한국인에게 분풀이로 퍼붓는 순간이었다.이런 혐오는 해외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지금 중국 우한에서 시작된 코로나바이러스가 국경을 넘어 다른 나라로 퍼져가고 있다. 현재로선 언제 이 역병이 수그러들지 예측하기 어려운 듯하다. 각국의 대응이 조금씩 달라, 어떤 나라는 중국인 입국을 전면 통제하는가 하면 어떤 나라는 선별적으로 허용하기도 한다. 우리나라는 후자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니까 중국인이라고 해서 무조건 막지는 않고, 대신 바이러스가 유입되지 않도록 나름 최선의 방역대책을 실시하고 있다. 그런데 SNS가 전하는 바에 의하면 우리나라 한 젊은이가 중국인을 멸시하는 글귀와 대통령을 '재앙'이라고 적은 팻말을 들고 일인시위를 하는 모습을 사진으로 보여준다. 다시 말하지만 혐오는 혐오를 낳는다. 한 미국인의 억지 주장에 봉 감독이 말투를 바꿀 리도 없고, 한국인이 갑자기 모두 영어를 잘 하려고 노력할 리도 없다. 오히려 그 '영어 중심주의'에 우리가 분개할 뿐이다. 또 그 중국계 미국인의 한국인 멸시가 중국이 한국보다 우월하다는 표시이거나 자신이 백인 그룹으로 편입되는 계기가 될 리가 없다. 우리가 소위 '중화주의'에 더 반감을 느낄 뿐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입장을 바꿔 지금 우리가 중국인을 '더러운 바이러스'라고 부른다고 해서 중국인이 한국을 깨끗한 나라로 동경할 리가 없다. 그런 일은 절대 일어나지 않는다. 증오는 증오를 낳고 혐오는 혐오로 되돌아올 뿐이다.누군가를 싫어한다면 거기엔 나름의 이유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미국에선 영어만 쓰라고 주장한 사람이 한국에 온다면 그는 한국어를 사용할까? 우리도 그에게 "너도 한국에 왔으니 한국어만 쓰라"고 요구한다면 얼마나 웃기겠는가. 그 노부인도 자신과 비슷한 처지에서 인종차별을 당해온 사람들, 예컨대 히스패닉계나 아프리카계 사람들을 보아왔을 것이다. 그런데도 자기보다 처지가 어려운 사람을 멸시한다면 그 역시 피해자가 아니라 가해자가 되는 것 아닐까? 언제든 처지는 바뀔 수 있기 때문이다. 타자를 혐오하는 건 자신을 '혐오의 바이러스'라고 고백하는 것과 같다. 중국에서 코로나바이러스가 시작되었지만, 중국인 자체가 바이러스는 아니다. 더구나 SNS상의 그 시위꾼이 목적하는 바, 현 정부에 대한 근거 없는 '비난'(비판이 아닌)은 그다지 효과가 없다. 현실적으로 중국을 봉쇄했을 때 더 큰 손해를 누가 볼 것인지는 대충 계산을 해도 답이 뻔하기 때문이다. 역지사지만이 혐오라는 바이러스를 막는 지름길이다. 쉽게 전염되는 혐오 바이러스, 이를 극복하는 길은 내가 그 혐오의 대상이 되어 보는 것이다. 그러면 이해와 관용은 저절로 생겨난다./정한용 시인정한용 시인

2020-02-13 정한용

[풍경이 있는 에세이]나의 미니멀리즘 도전기

'설레지 않으면 버려라'美에 유행 신드롬 신조어 '곤도잉' 집정리 하면서 어렴풋이나마 이해버리자니 아깝고 두자니 안쓸 물건중고 앱 활용 '비우는 삶' 깨달아 미니멀리즘(minimalism) 열풍을 기억한다. 사실 몇 년 전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을 때만 해도 별 관심이 없었다. '곤도잉(Kondo-ing)'이라는 신조어를 미국에 유행시키며 미니멀리즘 신드롬의 중심에 섰던 곤도 마리에의 '설레지 않으면 버려라' 프로그램을 보면서도 영 시큰둥했다. 곤도 마리에는 정리를 시작하기 전에 무릎을 꿇고 앉아 집과 대화를 나누는 명상의 시간을 갖고, 의뢰인에게 버릴 물건을 끌어안고 작별 인사를 하라고 시킨다. 오리엔탈리즘처럼 보이기도 하고 선뜻 이해가 잘 가지 않는 행동이었는데, 이번에 집 정리를 하면서 그 이유를 어렴풋이나마 알게 됐다. 정리를 하다 보니 버리긴 아깝고, 그냥 두자니 안 쓸 것이 뻔한 물건들이 꽤 나온다. 요즘 유명하다는 동네 중고거래 앱을 깔고 방치되어 있는 자전거부터 올려보기로 했다. 하도 안 타다 보니 바퀴 바람이 빠진 지 오래지만 상태는 괜찮다. 사진 몇 개 찍어서 싼 가격으로 올렸는데, 올리자마자 신기할 정도로 실시간으로 관심과 채팅이 쏟아진다. 그 밤에 당장 집 앞으로 오겠다는 사람까지 등장했다. 덜컥 겁이 나 제대로 가격을 올린 게 맞는지 고민스러워 게시물을 지웠다. 그러다 어차피 내가 안 쓰는 물건인데 이 돈을 받는 것도 충분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격을 좀더 올려도 되지 않을까 욕심이 없었던 건 아니지만 처음 올렸던 저렴한 가격을 유지하기로 결정하고 나니 마음이 편하다. 가장 먼저 구매 의사를 밝힌 분과 만나기로 했다. 바람 빠진 자전거를 힘겹게 끌고 나가면서 '거래가 안 되면 어쩌지' 걱정했는데 차를 몰고 달려오신 그분, 몇 번 만져보더니 7만원을 현금으로 주고 떠나갔다. 중고 거래인 만큼 "무르거나 환불 요청하지 않겠다"는 쿨한 약속과 함께. 연이어 판매가 성사되자 다른 사람들의 물건이 궁금해진다. 선물세트들이 유독 많이 올라와 있어 살펴보니 중고거래 앱에서 사기 가장 좋은 아이템이 명절 직후 올라오는 각종 식품 선물세트란다. 내가 원하는 품목으로 구성된 상품을 고르고 유통기한까지 꼼꼼히 확인한 후 거래 약속을 잡았다. 동네 지하철역 입구에서 접선, 물건과 현금을 교환하고 집에 돌아와 시세가 대비 50% 저렴한 가격에 '득템'한 캔들을 쌓아놓고 나니 뿌듯하면서도 비워낸 것보다 더 채워넣은 것 같아 기분이 묘하다. 물론 모든 물건이 이렇게 인기리에 팔리는 건 아니다. 올려둔 지 한참이 지났지만 거래는커녕 문의 한 건 없는 물건들도 많다. 그래도 무조건 버리는 게 아니다 보니 정리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오늘도 평화로운 중고나라'로 표현되는 중고거래에 대한 뿌리 깊은 불신을 사는 동네 공개를 통해 부분이나마 극복했다고 해야 할까. 일단 가까운 동네 사람들끼리 내놓은 물건이고 가격도 싼 물건이 대부분이라 부담이 덜하다. 뭐 이런 것까지 내놓았나 싶은 물건도 누군가에게는 필요한 모양인지 사람들의 취향이 다양하다는 것도 새삼 확인하게 된다. '폐가전 무료수거 서비스'가 있다는 것도 처음 알게 됐다. 소형 가전 5개 이상이면 무료로 와서 가져간다. 중고 거래마켓에 내놓기도 민망하고 어떻게 버려야 할지도 난감한 오래된 토스터, 프린터기 등을 헤아려보니 마침 5개가 넘는다. 모바일로 신청하고 문 앞에 내놓으면 정해진 날짜에 수거해가는 것으로 끝이다. 현관 앞에 한 짐 가득 부려놓았던 짐들이 싹 사라져있는 걸 보니 신기하면서도 속이 다 시원하다. 물론 아름다운가게나 옷캔 같은 곳에 기부하면 연말정산 세액공제를 받을 수 있으니 편한 방법을 선택하면 된다. 처음엔 단순하게 내다 버린다고 생각하고 시작한 일이었는데 어느 순간부터 내 마음도 함께 정리되고 있다는 걸 깨닫게 됐다. 물건을 정리하다보니 그때 이 물건을 왜 사고 싶었는지, 왜 사게 됐는지, 산 후에 얼마나 썼는지, 왜 안 쓰게 됐는지… 여러 가지 기억과 함께 당시의 내가 뭐에 꽂혀 있었는지까지 떠오르기 때문이다. 지금 돌이켜보면 대체 왜 샀는지 이해가 안 가지만 그때는 이걸 사기만 하면 세상 누구보다 알차게 잘 사용할 자신이 있었고, 실제로 한동안 열심히 잘 쓰기도 했다. 내가 산 물건들을 살펴보는 시간은 내 경제적 능력과 욕망 사이 줄타기의 흔적을 들여다보는 시간이기도 했다. 궁극적으로 지금 나에게 무엇이 필요하고 필요하지 않은지, 그렇다면 무엇을 해야 하고 하지 말아야 할지까지 생각하게 되는 계기가 되어주었다. 아직 미니멀리즘에 성공했다고 보긴 어렵다. 그렇게 치우고 버렸는데도 여전히 물건은 많고, 마스크나 손 세정제처럼 상황에 따라 살 수밖에 없는 물건은 생기기 마련이다. 다만 곤도 마리에의 말대로 결국 물건은 '남기느냐 버리느냐' 양자택일할 수밖에 없으니 이왕이면 최대한 버리는 쪽으로, 아니 버릴 물건이 애초에 없도록 노력하는 것만이 최선의 방법이겠다./정지은 문화평론가정지은 문화평론가

2020-02-06 정지은

[풍경이 있는 에세이]섬강에 비낀 금원의 소복

기녀 되기전 여행 '호동서락기' 남겨김덕희 소실로 들어가 용산서 생활박죽서 등과 여성시동인 이끌기도남편 죽자 삼호정 떠나 고향 원주로섬강 서서 '지난 날' 풀어보냈으리라그해 삼월이었으니 섬강은 진달래꽃 흐드러진 강안의 풍경을 모두 담고도 흐름이 더디었을 것이다. 강물은 조용하여 먼 산수유 노란 꽃그늘을 부르기도 하고 아스라이 등성이로 사라지는 산길을 부르기도 했으리라.금원은 소복을 벗지 않고 삼강에 섰을 것이다. 섬강은 금원의 유년의 강이어서 어린 날들의 아름다운 기억을 담아 흐르고 있었을 것이다. 남편 김덕희를 떠나보낸 정월의 용산 삼호정은 스산하고 춥고 시렸을 것이다. 그녀는 삼호정에서 백일을 울고 그곳을 떠나 고향인 원주 봉래산 기슭으로 내려갔을 것이다. 그녀는 지난 날들의 섧고 아리고 쓰라렸던 기억과 아름답고 미쁘고 벅찼던 추억을 모두 풀어 보내려고 섬강에 섰을 것이다. 섬강은 보랏빛으로 물들어 무거워지는 산색을 안고 조용히 흐르고 있었을 것이다. 사방이 어두워지고 그녀의 소복만 오래도록 섬강에 비겼을 것이다.금원(1817-1853 이후)은 원주의 몰락한 양반 아버지와 기생 어머니 사이에 태어난 것으로 알려졌지만 그녀는 어떤 글에도 가문의 기록을 남기지 않았다. 운명적으로 기녀의 삶을 살아가야 하는 금원은 기적에 오르기 전인 1830년, 열네 살의 어린 나이에 남복을 하고 금강산과 서울과 강원도와 충청도를 여행하고 그 후 평안도에서 살아보고 나서 1850년, '호동서락기'라는 여행기를 남긴다. 그녀가 살아서 남긴 마지막 글이다. 생몰연대를 1853년 이후라고 말하는 것은 남편 김덕희의 죽음이 그 해이기 때문이다. 그녀는 '호동서락기'에 여러 편의 시를 남기고 있다. 여행기의 첫 시는 제천 의림지를 보고 지은 연시다. '호숫가 버들은 푸른 실처럼 늘어져/봄날 암담한 마음을 아는 것일까/나무 위 꾀꼬리 하염없이 우니/임 보내는 슬픔 이기지 못하겠네'라고 읊어 별리의 아픔을 보인다. 금강산 유점사는 그녀로 하여금 또 다른 흥취를 부르게 했다. '낭떠러지 하늘가 암자 하나/산 북쪽 맑은 종소리 남쪽까지 울리네/흰 구름 일어 흩어지니 골짜기가 눈 앞에 펼쳐지고/밝은 달은 연못 속에 고요히 잠겼구나/부질없는 꿈에서 불현듯 깨어/고요히 부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네/오십삼 부처 계신 맑은 이곳에 서/오래도록 영험한 지혜의 등불을 밝히고 싶구나' 열네 살의 깨달음이 심상치 않은 시편이다. 금강산을 나와 올라간 곳이 함경도 원산이다. 명사십리의 해당화를 놓칠 수 없어 시를 남긴다. '봄은 가고 꽃 이미 졌는데/해당화만이 붉게 피었구나/이 꽃마저 지고나면/헛되고 헛된 봄날이여'는 열네 살의 정서는 아니다. 되돌아 내려오며 여행한 곳이 강원도의 관동팔경이다. '평해로 향하다가 월송정에 올랐다. 바람이 고요하고 물결이 잠잠하고 날씨가 청명하여 섬들을 바라보니 있는 듯 없는 듯 바다색이 하늘에 닿아서 구름 끝을 볼 수 없었다. 차가운 이슬에 뜬세상의 삶이 참으로 가련하다는 느낌이 들었다'라고 그녀는 '호동서락기'에 적는다. 이어서 서울행이었다. 북촌의 삼청동을 거닐며 시 한 수를 떠올린다. '온갖 꽃 핀 아침 조그만 누각이 환한데/또각또각 발소리 날개 단 듯 가볍다/복잡한 생각을 다 씻어 없애니/산에 가득한 안개는 저 멀리 펴져 있네'. 그녀에게는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시였으며 깨달음이었다. 여행에서 돌아온 금원은 관기로 양반들의 모임에 불려나가면서 김덕희를 만나 그의 소실이 된다. 남편이 의주 부윤을 그만두고 낙향했을 때 금원은 남편의 별장인 용산의 삼호정으로 내려와 '삼호정시사'라는 여성시동인을 이끌었다. 여기에 참여한 여류 시인이 박죽서, 김운초, 김경산, 김경춘이다. 여인들은 선녀였다. '봄뜻으로 서로 만나 고운 놀을 아끼며/버들눈썹 처음 펼치니 예스런 뺨이 곱기도 하여라/시를 찾으며 꽃 보는 복을 마음껏 누리니/누가 선녀들에게 베틀 일을 쉬라했나'는 동인들에게 바치는 헌사였다. 삼호정시사는 죽서의 죽음으로 해체된다. 김덕희가 동지사로 중국을 다녀온 후 자리에 눕게 되고 금원의 정성 어린 간호에도 세상을 뜨면서 금원은 삼호정을 떠난다./김윤배 시인김윤배 시인

2020-01-30 김윤배

[풍경이 있는 에세이]사과하세요

세탁소·인터넷쇼핑몰 잇단 실수에의례적 "죄송해요"조차 없어 찜찜잘못은 있어도 잘못한 사람은 없어'사과의 멸종' 냉엄한 세상 생존전략죄책감·부끄러움 희석 결과 아닐지세탁물을 맡긴 지 열흘이 지났지만 세탁소에선 연락이 없었다. 평소라면 '세탁물 찾아가세요'하는 메시지가 몇 번은 왔을 텐데, 이상하네. 전화로 문의하자 "아, 그 옷? 진작 다 됐어요" 한다. "왜 문자가 안 왔을까요?" 물으니 대수롭지 않다는 듯 "글쎄요. 가끔 그런 일이 있더라고요" 한다. 덧붙이는 어떤 말도 없다. 의례적인 "죄송해요" 정도는 기대했는데. 좀 따져 묻고도 싶었지만 별일도 아닌데 싶어 "알겠습니다" 하고 말았다.인터넷 쇼핑몰에서 운동화를 산 뒤 반품 신청을 했다. 쇼핑몰에서 보내온 메시지에 따라 택배회사에 전화를 걸어 회수 요청을 했는데 뜻밖에도 일이 복잡해졌다. 택배회사가 엉뚱한 곳으로 가 엉뚱한 물건을 회수한 것. 어떻게 이런 일이? 한바탕 소란이 일었다. 알고 보니 내가 받은 메시지에 송장 번호가 잘못 기재돼 있었던 것이다. 쇼핑몰과 어렵사리 통화가 되었으나 "아, 저런…" 할 뿐. 이 사고는 쇼핑몰과는 무관한 운동화 판매업체의 과실이라고 선을 긋는 듯했다. "그럼 지금 확인된 송장 번호로 다시 회수 요청을 하면 되나요?" 그뿐인가요? 그런가요? 그렇군요. 잘못은 있었으나 잘못한 사람은 거기 없었다.최근 이런 식의 찜찜한 일들을 연거푸 겪은 뒤 나는 화가 좀 났다. 분명 뭔가 이상해. 그 누구도 자기 잘못이 아니라고만 하잖아. 미안하단 말 한마디 하지 않고. 은근슬쩍 사과를 회피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미안을 말하는 순간 실로 엄청난 재앙이 일 것처럼. 나는 모르는 어떤 매뉴얼이 그들 사이에 있는 건지? '사과는, 사과만은 절대 해선 안됩니다. 사과하는 순간 돌이킬 수 없는 파국으로 치닫게 될 거예요.' 요상한 경고를 받기라도 한 것 같다. 하긴, 길을 걷다 어깨를 슬쩍 부딪혀도 "아, 죄송합니다" 대신 쌍욕부터 날아오는 경우가 허다하다. 최소한의 예의를 기대하는 것조차 지금은 무리일까. 미국에 사는 친구에게 토로하자 이런 얘기를 들려준다. "6년 전 처음 미국에 왔을 때 말이야. 유학생 선배들이 일러준 팁이 있어. 운전하다 작은 접촉사고를 내더라도 '아임 쏘리'가 아니라 '아 유 오케이?'로 시작하라는 것. '쏘리' 하는 순간 상황이 불리해질 수 있다는 거지." 한국에서 하듯 사과를 남발했다간 호구가 되기 십상이라고. 친구가 전제한 바와 달리, 이제 한국에서도 '아임 쏘리'를 듣기란 어렵게 되었다. 앞으로는 더더욱 사과가 귀해지겠지. 멸종 위기에 처한 사과. '사과의 멸종'은 냉엄한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해 너도 나도 익힐 수밖에 없었던 일종의 생존 전략과 유관한 것일까. 얕잡아 보이지 않기 위한 처세이기 이전에 죄책감이나 부끄러움 같은 고유의 감정들이 점차 희석된 결과는 아닐까. 최근 본 영화 '경계선'의 황량한 풍경이 떠오른다. 영화는 루이비통을 메고 이케아로 집을 꾸민 채 그럴듯한 일상을 영위하지만 정작 그 내면은 죄와 병으로 일그러진 인물들을 비춘다. 그들 깊은 곳에 자리한 죄책감, 수치심, 분노를 감지하는 것은 역설적이게도 인간 자신이 아니라 '트롤'이다. 트롤의 입장에서라면, 죄책감과 부끄러움조차 모르는 인간, 그 인간다움이란 과연 어떤 것인지 되묻지 않을 수 없겠다. 몇 년 전 봤던 영화 '만추' 생각도 난다. 거기 이런 장면이 있다. 남자 주인공은 식사를 하다 말고 느닷없이 화를 내며 옆 사람에게 주먹을 휘두른다. 놀란 여자 주인공이 달려와 무슨 일이냐 묻자 그는 말한다. "이 사람이 내 포크를 썼어요, 내 포크를. 그런데 사과도 안 하잖아요. 이래도 되는 거예요?" 그러자 잠시 주춤하던 여자 주인공 역시 같은 편이 되어 "사과해요. 포크 쓴 거 사과하라고요" 소리친다. 당황한 옆 사람은 결국 "미… 미안해" 용서를 빈다. 너무 늦은 용서를. 물론, 이 속에는 숨은 이야기가 많다. 그러나 정말이지 실수로 남의 포크를 사용했을 뿐이라 해도 적절한 사과를 건너뛰어선 안된다. 우리 포크는 생각보다 예민하고 또 날카롭다./박소란 시인박소란 시인

2020-01-16 박소란

[풍경이 있는 에세이]옛날 엄마 뱃속에서는

다섯살 아이에게 만삭영상 보여주니"같이 놀고싶어 빨리 나갔으면 했어"이제 여섯살 되니 제법 말대꾸도진실인지 농담인지 알 도리 없는 말어쨌거나 나에게는 예쁜 위로였다트래버스의 동화책 <메리 포핀스>에는 아기 쌍둥이가 나온다. 존과 바바라. 아기들은 참새와도 이야기하고 나비, 두더지와도 얼마든지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 발을 입에 물고서 양말을 벗을 수도 있다며 존이 참새에게 자랑을 하는 장면은 정말이지 너무나 사랑스럽다. 아기들이 더 이상 동물들과 이야기를 나누지 못하게 되는 건, 사람의 언어를 배우면서부터다. 아기들은 사람의 말을 흉내 내기 시작하면서 더는 새와 두더지와 나비와 이야기를 할 수 없다. 그건 좀 슬픈 장면이었다.아기들이 훌쩍 자라기 전에 엄마 뱃속에서 있었던 일을 물어보면 꽤나 그럴듯하게 대답을 한다고들 했다. 그럴 법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사람이 사는 방식을 다 배우기 이전, 아직 세상에 닿지 않았던 시절을 기억할 수도 있지. 다 배우면 그제야 잊겠지. 존과 바바라가 그랬듯. 그래서 나도 아기가 마저 자라기 전 꼭 물어봐야지, 생각했다.다섯 살이 되어 제법 말을 하기 시작해 나는 동영상 하나를 보여 주었다. 만삭 무렵 태동이 한창인 내 배를 찍어둔 영상이었다. 아이는 쿨렁쿨렁 혼자 움직이는 엄마의 부른 배를 눈이 동그래져선 쳐다보았다. "웃기지? 네가 엄마 뱃속에서 축구를 한 거야. 그래서 이리로 뛰고 또 저리로 뛰고 그래서 엄마 배가 이렇게 막 움직이는 거야." 아이는 몇 번이나 들여다보더니 아주 자랑스러운 표정으로 내게 말했다. "이거 축구하는 거 아니야. 심심해서 화가 났고, 그래서 엄마를 내가 때린 거야!" "그랬던 거야?" 나도 신이 났다. 어떤 이야기든 듣고 싶었다. 많이 심심했느냐고, 춥지는 않았냐고, 엄마의 목소리가 들리더냐고 물었다. 아이는 따박따박 대답했다. "심심할 때도 있었어. 그러면 엄마를 막 간지럽혔어. 그러면 엄마가 막 웃었어. 엄마 뱃속은 따뜻한데. 하지만 엄마랑 놀고 싶어서 빨리 나가고 싶었어." 오래전 잊었던 아이의 태동이 떠올라 나는 웃었다. 여름이었고 몸이 무거워 만날 소파에 널브러졌던 날들이었는데. "무섭진 않았어? 깜깜했겠다." 아이는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안 깜깜했어. 엄마 배꼽으로 노란 불빛이 들어왔는데?" 맙소사. 이렇게 예쁜 단어들이라니. 엄마의, 배꼽으로, 노란, 불빛이, 스며들었다니. 그 말이 하도 예뻐 나는 폴짝폴짝 뛰었다. 물어보길 참말 잘했다고, 다섯 살 아이의 이 말은 두고두고 나에게 생의 커다란 위로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제 아이는 여섯 살이 되었다. 또래보다 키도 크고 말도 많고 머리숱도 내 세 배는 될 참이다. 물론 말대꾸도 하루에 열댓 번. 요즘은 부루마불 게임에 한참 재미를 들였다. 유치원에 가지 않고 하루 종일 부루마불만 했으면 좋겠다고 한숨도 쉴 줄 안다. 그날도 나와 둘이 앉아 부루마불을 하던 중이었다. 이제 받침 없는 한글을 조금씩 읽을 줄 알아서 보드게임 속 세계 도시의 이름을 더듬더듬 읽어내린다. 마드리드…… 엄마 여기 가봤어? 이스탄불, 이건 너무 어려워. 그러다가 하와이에 가 닿았다. "엄마는 하와이에 가봤어?" 나는 끄덕였다. 아이가 다시 묻는다. "누구랑?" "아빠랑." "나는 왜 안 데려갔어?" "넌 그때 엄마 뱃속에 있었지. 그러니까 같이 간 거나 똑같아." "하지만 난 뱃속에 있어서 바다도 못 봤잖아!" "배꼽으로 봤을 거야." 내 말에 아이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엄마. 배꼽은 막혀 있거든?" "꽉 막혀 있진 않아. 노란 불빛도 스며들 수 있잖아." 나는 그 말을 하며 또 행복한 미소를 지었는데. "엄마, 그때 내가 배꼽으로 노란 불빛이 들어왔다고 한 거, 그거 엄마 놀라게 해줄라고 한 말이거든." 다시 맙소사. 이게 무슨 소리람. 야아아아, 내가 소리를 쳤고 아이는 까르르 웃으며 냉큼 달아났다. 다섯 살의 말은 진실이었고 여섯 살, 지금의 말이 농담인지 아니면 애초 다섯 살의 말이 농담의 시작이었는지는 알 도리 없다. 어쨌거나 그 시절의 나에게 예쁜 위로 하나 던져주었으니 혼내지는 않기로 한다./김서령 소설가김서령 소설가

2020-01-09 김서령

[풍경이 있는 에세이]한 해의 끝과 시작, 보현사와 주문진항

하던 일 마무리짓고 찾은 대관령산길 사이에 익숙한 사찰 이정표고찰연륜 상징 대웅보전 '한눈에'사천항 거쳐 항구등대 한해 정리묵은 해 갔으니 새로운 희망 오길겨울 대관령의 백미는 역시 푸짐하게 내려주는 눈(雪)이다. 눈의 매력은 아름다운 것이나 추한 것이나 분별없이 순백으로 평정한다는 것인데, 눈 덮인 산야는 습음으로 몸과 마음이 차분해지고 정화되는 겨울이 주는 선물이지 싶다. 내가 거주하는 대관령은 국내 스키의 발상지이자 평창 동계올림픽을 성공리에 치른 눈의 고장이다. 이번 겨울은 11월 하순에 두어 차례 이른 폭설이 내린 후 아직 큰 눈이 없었다. 눈뿐만 아니라 해가 바뀌도록 기온이 내려가지 않아 덕장에 명태를 걸지 못하는 걸 보면 온난화로 인한 이상기온은 눈앞에 닥친 현실이지 싶다. 이 고원의 겨울 풍경을 대변하는 건 누가 뭐라 해도 스키장과 고랭지 밭에 설치한 대규모의 황태덕장인데 춥지 않고 눈 없는 겨울 대관령을 상상하는 일은 여전히 생소하기만 하다. 특히 훈훈한 집안에서 사방에 널려있는 황태덕장으로 휘몰아치는 눈폭풍을 보는 일은 대관령 겨울 풍경 중 압권에 속하지만 올해는 조금 더 기다려야 하나보다.2019년 끝자락과 2020년 새해 시작이 맞물려 있는 요즘이다. 나는 하던 일을 마무리 짓고 한 해를 정리할 겸 머리를 비울 심산으로 차를 몰아 대관령 옛길로 내려선다. 바다를 보는 것이 목적이지만 바다가 아니면 또 어떠랴. 내리막이 거의 끝나갈 즈음 왼편으로 눈에 익은 첫 번째 보현사 이정표가 눈에 들어온다. 그 길을 따라 얼마쯤 가다 보니 다시 왼편으로 다른 이정표가 길을 안내하는데 오르막을 올라 막다른 길에 서서 더는 갈 수 없을 때 기다렸다는 듯 방문자를 환영하는 곳이 바로 보현사다. 고요해서 그런가, 겨울이지만 계곡의 물소리는 제법 크다. 사찰을 중심으로 앞에는 보현천이 흐르고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주변은 아름드리 노송이 자리하고 있어 고찰의 연륜을 대변하는 듯 한 눈에 봐도 사찰의 규모가 만만치 않음을 알 수 있다. 보현사는 중정식 산지가람배치 형식을 보여주는데 중정식이란 마당을 중심으로 전각들이 배치된 것을 말한다. 절 입구 보현천을 따라 걷다 보면 보현사를 상징하는 석물들이 눈에 들어온다. '방하착(放下着)'과 '평상심시도(平常心是道)'라는 글귀가 새겨진 바위를 지나면 모양이 다른 20여기의 석종형 부도전과 '화광동진(和光同塵)'이 새겨진 바위가 기다린다. 길 오른편에 있는 낭원대사탑비(보물 제192호로 지정)는 신라시대에 보현사를 중건한 낭원대사의 일대기를 기록한 비석으로 귀부와 탑신, 머릿돌에 해당하는 이수(螭首)가 비교적 잘 보관되고 있다.이쯤에서 가람배치도를 살펴보자. 이곳은 대웅보전을 중심으로 평상심시도, 방하착, 부도군을 지나 시계방향으로 화광동진, 낭원대사탑비, 금강루, 수선당, 동정각, 삼성각, 목우당, 지장전, 영산전, 보현당, 오관당, 지장선원 순이며 목우당 뒤편으로 조금 올라가면 낭원대사부도탑이 자리하고 있다. 한적하기 만한 법당엔 나이 많은 신도 두 분이 기도를 하고 계신다. 사찰을 한 바퀴 돌고 요사채 툇마루에 앉아 염불소리를 기대했으나 염불 대신 계곡물소리로 지친 심신을 달래고 잠시 짧은 겨울 해를 품어보는 것으로 위안을 얻는다. 보현사까지 갔으니 조금 욕심을 내어 성산면 보광리 일대 흩어져있는 우리의 중요 무속신앙의 모태인 6개(보광1리에 4곳, 보광2리에 2곳)의 서낭당을 둘러보고 싶었으나 해가 짧아 서낭 둘러보기는 봄으로 미룰 수밖에 없었다. 보현사를 뒤로하고 사기막으로 내려선다. 전에 마을 끝에서 저수지를 본 기억이 있어 찾아갔더니 수면이 얼어있어 접근이 쉽지 않다. 숲을 따라 저수지 주변을 서성거리다 추위에 밀려 물회마을 사천포구로 향한다. 거기까지 갔으니 칼칼한 물회를 맛보지 않을 수 없다. 늦은 점심으로 물회 한 그릇을 비우고 사천항을 거쳐 소돌해변을 따라 주문진항으로 향한다. 삶이 시들해질 때 갓 잡아 올린 항구의 살아있는 생선을 보는 일은 또 얼마나 삶을 푸들거리게 하던가. 주문진항 등대 아래 바닷바람을 등지고 앉아 한 해 동안 내게 안위를 준 세상의 모든 신들께 감사드리고 서쪽 백두대간 등줄기를 타고 넘는 해를 마중하고 자리를 뜬다. 하나가 가면 다른 하나가 온댔으니 묵은 해가 가면 보다 희망찬 새해가 오지 않겠는가./김인자 시인·여행가김인자 시인·여행가

2020-01-02 김인자

[풍경이 있는 에세이]한 해를 정리하는 마음

한해 추억·반성 또 다른 시작 바탕내게 가장 큰 즐거움 해외여행 2번문학상·전자책 작은시집 기획·출간가족 건강·무탈 바랄 것 없이 행복세상의 어둠 잊지말되 밝은면 봐야올해도 며칠 남지 않았다. 해가 바뀌는 것은 달력의 구분일 뿐, 사실 시간의 흐름은 끊임이 없다는 걸 우리는 알고 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한 해의 끝에 의미를 부여하고, 지난 일 년을 반추하며 정리하곤 한다. 과연 내게 소중했던 일이 있었던가, 가장 큰 괴로움은 무엇이었나 생각해본다. 이런 추억과 반성이 내년 또 다른 시작을 위한 바탕이 되리라 믿어, 나름 한번 정리해보고 싶어진다. 사람마다 살아온 내력이 다르니 각기 목록과 기억이 상이할 텐데, 여기 누군가는 이렇게도 사는구나 여기며 읽어주시길 바란다.나쁜 것보다 좋은 일부터 적는 게 순서 일 듯. 내게 올해 가장 큰 즐거움은 두 번 여행을 다녀온 일이다. 지난 봄에 쿠바·멕시코를 두 달여, 가을에는 노르웨이·페로·아이슬란드를 한 달 보름간 다녀왔다. 쿠바에서는 가난하지만 낙천적인 사람들의 웃음을, 멕시코에서는 아름다운 숲과 바다를, 노르웨이와 페로에서는 경이로운 자연을, 아이슬란드에서는 황홀한 오로라를 만났다. 모두 자유여행이었으니 꽤 고생도 했지만, 가장 먼 곳에서 자유를 갈구하는 나 자신을 만날 수 있었다. 전혀 기대하지 못했던 낯선 사람과 풍경을 만났을 때의 경이로움은 나에게 거듭 여행을 떠나도록 만든다.두 번째로 즐거웠던 일은 어느 잡지사로부터 문학상을 받은 것이었다. 우리나라에 시인도 많고 잡지사도 많고 문학상도 많다고 하지만, 그래도 '내가' 책을 내고 상을 받는 일은 만만한 일이 아니다. 더구나 나는 공식 문인단체에도 가입되어 있지 않고, 소위 '문단 권력'과도 거리를 두고 지내왔으며, 다른 사람의 인정을 받을 만큼 작품을 잘 쓴다고 생각하지도 않기 때문에, 이번 수상이 매우 의외로 받아들여졌었다. 세상에 내 작품을 읽는 독자가 얼마나 될까, 곰곰이 헤아려본 적이 있다. 그리 많지 않을 것 같다. 그런 내게 상을 주다니, 혹시 내가 모르는 어떤 계략이 있는 건 아닐까, 잠시 궁금했었다.세 번째는 내가 운영하는 전자책 출판사에서 '작은시집'이라는 이름으로 기획하고 있는 책을 스무 권 정도 차질 없이 낸 것이다. 시리즈 마지막에 내 책도 한 권 슬쩍 끼워 넣었다. 책을 내서 우리 문화발전에 이바지하고, 많은 독자가 읽고, 출판사는 돈을 벌고, 저자에게 수익을 듬뿍 배분해 주고… 혼자 이런 상상을 해보곤 한다. 하지만 아시다시피 상상은 공상으로 끝나곤 한다. 요즘 시를 읽는 독자는 극히 드물고, 출판사나 저자에게 생기는 수익은, '수익'이라는 말을 쓰기가 부끄러울 만큼 빈약하다. 그래도 기획을 하는 입장에서 디지털 시대에 맞춰 시집 출판의 새로운 틀을 제시하고 있다는 걸 자랑으로 삼고 싶다. 현재 40여 권이 나왔으니, 수년 뒤에 백 권을 채운다면 형편이 좀 나아질 수도 있을까?네 번째는 아주 개인적인 일이어서 공개해도 될지 모르겠다. 오늘 여기 필자의 에세이는 어차피 내 삶을 보여주기로 했으니, 널리 이해해주시길 빈다. 나는 큰아들이 미국으로 유학을 가서 물리학을 전공했는데, 5년 만에 지난여름 박사학위를 마쳤다. 지금은 박사후과정으로 한 대학의 연구소에서 일하고 있다. 작은 아이는 국내 모 기업에 취업해 잘 근무하고 있다. 가족이 모두 건강하고 무탈하게 한 해를 살았으니, 지금의 행복 이상 더 바랄 것이 없다. 내가 이렇게 살 수 있게 해준 주변의 모든 분들에게 고마울 따름이다.자, 이젠 지난 일 년간 겪은 어려움을 적을 차례이다. 앗, 그런데, 어쩐다? 정해진 원고 분량이 다 됐다. 내게도 어찌 아픈 일이 없겠는가. 나는 조금씩 나이 들며 세월이 기울어지고 있다는 걸 몸으로 느낀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거리를 잘 유지하는 것도 점점 어려워진다. 잠시라도 밖을 보면 살기 힘든 세상이라고 모두 아우성친다. 하지만 지금은 세상의 어둠을 잊지 말되, 밝은 면을 보려고 노력하는 것이 인생을 잘 익혀가는 길이 아닐까 싶다. 옛말에 '일소일소 일로일로'라 하지 않았나. 행복은 내 마음먹기에 달려 있다고 한다. 새해엔 독자들께서도 밝은 웃음만 가득 넘치시길 바란다./정한용 시인정한용 시인

2019-12-26 정한용

[풍경이 있는 에세이]느슨한 연결의 시대

'기브 앤 테이크' 익숙한 결혼식문화개인 가치관 따라 결정하는 '불매'몇번 못본 타인이 더 편하다는 시대'혼자 좋지만 외로움 싫다' 트렌드난 누구와 관계되는지 생각해볼 일모노클, 슈프림, 최인아책방, 퍼블리, 제주맥주, 다노, 스타일쉐어, 띵굴마켓, 무신사, 오늘의집, 직방, 하우즈, 링크드인, 페이스북, 인스타그램, 위넷, 낯선대학, 월간서른, 트레바리, 문토, 트립, 비어스픽, 헤이조이스, 열정에 기름붓기, 취향관, 버핏서울, 남의집프로젝트… 자, 위에서 열거한 27개 서비스 중에 당신이 알거나 사용하고 있는 서비스는 몇 개나 되는가? 이 글을 읽고 계신 분들 중 "모두 알고 있다"고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될지 궁금하다. 이 서비스들의 공통점은 바로 '커뮤니티' 기반 비즈니스라는 것이다. 돈을 받고 모임(커뮤니티)을 만들어주거나 사람들을 연결하는 사업이다. 아직은 비즈니스라기보다는 프로젝트에 가까운 커뮤니티도 있지만 실제 사업적 성격의 비즈니스로 커뮤니티를 활용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온라인 플랫폼 기반 커뮤니티, 인플루언서 채널 플랫폼, 목적이나 정체성 중심 커뮤니티 비즈니스도 있다. 이처럼 만들어진 커뮤니티에서 만나는 사람들의 종류는 다양하다. 창업에 관심 있는 사람, 일하는 여성, 책 읽기가 좋은 사람, 영어 공부를 원하는 사람, 운동을 꾸준히 하고 싶은 사람까지…. 기성세대에게는 낯설뿐더러 '사람 만나는 모임에 왜 그렇게 돈을 많이 내야 하는지' 이해하기 어려운 문화일 수도 있다. 일례로 2015년 서비스를 시작한 주제별 유료 독서모임 '트레바리'는 4개월 회비로 19만원에서 29만원까지를 내야 하는데도 높은 인기를 누리고 있다. 이런 커뮤니티의 가장 큰 특징은 발표자만큼이나 참여자들이 중요하다는 점이다. 잠깐 와서 강사의 일방적인 강의만 듣고 사라지는 청중은 없다. 참여자들은 자기소개를 하고, 발표가 끝나면 서로 연락처를 주고받으며 인맥을 넓히고, 한 번 참여한 사람들이 다음번에 지인을 데리고 온다. 지식을 전달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모르는 타인을 만나기 위해 참석하고, 함께 모여서 이야기하면서 새로운 관계를 맺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는 것이다. 적당히 친하면서도 서로 도움이 될 수 있는 모임을 새로 만들어 나가는 셈이다.주문형 콘텐츠 소비(Contents On Demand)의 시대다. '누구나 좋아하는 취향'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으며, 2~3명만 모여도 상관없으니 높은 밀도로 만나서 서로의 취향과 관심을 공유한다. 인간관계의 확대는 원하지만 신상털이가 수반되는 '끈적한' 관계는 사절이다. 관심사를 공유하는 개인들이 수평적인 관계로 모였다가 흩어지고, 다른 곳에서 연결되기도 하면서 '단발적 관계의 재구성'을 통해 자신의 일상을 취향따라 구성해 나가는 것이다. 원하지 않는 사람을 만나고 관계를 맺는 것은 '감정 노동'이므로 끈끈한 연대나 관계 없이도 불편하지 않다. '막연한 교류나 친목'을 목적으로 타인을 만나지 않기에 결혼식은 불필요한 절차이거나, 하더라도 투자한 만큼 회수해야 하는 이벤트에 가깝다. 잘 알지도 못하고 친하지도 않은데 시간을 투자해 참석하고 축의금을 내는 기존의 결혼 문화는 이해 불가다. 결혼식 직전 청첩장을 개별적인 점심 모임을 통해 받았다면 반드시 '봉투'라도 보내야 하며, 밥을 사기로 한 동료가 팔천원짜리 에비동을 주문했는데 밥을 얻어먹는 입장에서 만이천원짜리 특 에비동을 주문하는 건 상도에 어긋나는 행동이다. '기브 앤 테이크'로 이뤄지는 교환 논리에 익숙한 요즘 세대의 결혼식 문화는 신예 소설가 장류진의 단편 '잘 살겠습니다'에 더 리얼하게 묘사되어 있다.그래서일까? 요즘은 불매운동도 '길고 오래' 간다. 소비자 단체가 주도하는 대신 개인이 판단하고 남들이 불매하지 않는다고 해서 신경 쓰지 않는다. 내 가치관에 따라 판단해 불매를 결정한 것이기 때문에 '나쁜 기업'의 개과천선 없이는 불매가 끝나지 않는다. 잠깐이면 사그라들 줄 알았던 일본 제품 불매가 오래가는 것은 아마 이런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몇 번 보지 못한 관계의 타인이 더 편하게 느껴진다"는 사람이 50%에 가까운 시대, 공동체 해체를 걱정하지만 외로움이 비즈니스가 되는 지금, '혼자 있고 싶지만 외롭기는 싫다'는 느슨한 연대가 기존 관계의 대안으로 등장한 요즘 트렌드임은 분명하다. 사람들 사이의 연결과 연대조차 새로운 형태로 발전 중인 느슨한 연결의 시대, 연말을 맞아 당신은 누구와 어떻게 연결되어 살아가고 있는지 한 번쯤 생각해보면 어떨까?/정지은 문화평론가정지은 문화평론가

2019-12-19 정지은

[풍경이 있는 에세이]혈육에 대한 그리움의 시인 김호연재

고향에 두고 온 가족 생각 못 견뎌술·담배 즐겼지만 보고픔은 더해적의 뜰에 있는것같다는 '시집살이'문학적 역량 따른것은 시댁 조카들원군있었지만 병 얻어 42세로 생 마감사계절 중에 특별히 겨울이 좋은 사람이 있을 것이다. 산맥도 강물도 나무도 묵묵하여 깊은 생각에 들게 하는 계절이기 때문이다. 김호연재의 겨울 또한 그랬을 것이다. 그녀는 스스로 산속에 들어 세상과 소통하는 문을 닫고 도가의 경전인 황정경을 읽으며 마음을 달랬던 것이다. '스스로 산이 깊고 속세 간섭하지 않음을 사랑하여/쓸쓸히 떨어지는 물과 구름 사이에 문을 닫고 있네'라고 노래한 그녀의 '산이 깊다'라는 시에 여인의 사유 깊은 계절이 잘 나타나 있다.김호연재(1681~1722)는 고성군수를 지낸 김성달의 딸이며 소대헌 송요화의 부인이다. 그녀는 학문을 중시하는 가풍을 지닌 가정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문학수업을 체계적으로 받았다. 친가는 우의정을 지낸 선원 김상용의 후손이며 시가는 좌참찬을 지낸 동춘당 송준길의 후손이었으니 명문가들의 혼인이었다. 그러나 아들 익흠은 '아버지께서는 할머니를 서울이나 백부의 임지에서 모시고 있느라고 항상 집에는 계시지 않았다'고 쓰고 있고 외손자인 김종걸은 '할아버지께서는 젊어서 호방하여 법도에 매이지 않았다. 할머니의 고결함이 쌓여 마음에 숨은 근심이 있으므로 가끔 시름의 사무친 뜻이 가슴에 있었다'고 쓰고 있어 순탄하지 못했던 결혼 생활을 엿보게 한다.그녀는 홍성군 갈삼면 오두리에서 태어났다. 병자호란 때 강화도에서 순절한 김상용의 손자 김광현이 식솔들을 배에 태워 피난 내려오다 정착한 곳이 오두리 바닷가였다. 오두리의 후손들로는 김좌진과 김을동이 있다. 김호연재는 그리움의 시인이다. 그녀의 그리움은 언제나 고향에 두고 온 혈육에 닿는다. 그리움을 견딜 수 없어 매일 술을 마시고 담배를 즐겼지만 그리움은 세월 흐를수록 깊어졌다. '한 번에 몇천 리 이별하고/쑥처럼 이곳저곳 떠돌아다니노라니/십년을 돌아가지 못했네/서로 만나는데 다시 어떤 이유가 있나/만나지 못하는 마음을 어찌 말로 다 하리/힘들고 어려움이 모두 근심이라네/마음은 고향의 달빛을 따라가니/밤마다 서쪽으로 흐르지 않은 적 없네'라고 노래한 '넷째 형에게 부치노라'에는 오랫동안 만나지 못한 혈육에 대한 그리움이 사무쳐, 마음은 달빛을 따라 고향으로 가고 밤마다 오두리를 향해 흐르는 생각을 달랠 길 없어 애달파한다. 그런가 하면 시집살이가 늘 적의 뜰에 있는 것 같다는 괴로움과 회한도 보인다. '암담하고 괴로우니/늘 적의 뜰에 있는 것 같네/다시 만날 인연도 없이/저마다 시집을 가야만 하네/길이 머니 편지를 부치기 어렵고/봄이 깊으니 기러기도 날지 않네/서로 헤어진지 십년이 가까우니/꿈속에서도 얼굴이 잘 보이지 않네'라는 '다섯째 형에게 부치노라'에서는 멀리 떨어져 있어 안부조차 전할 수 없는데, 혈육들은 꿈속에서도 볼 수 없다고 한탄한다. 시집살이의 신산함과 혈육에 대한 곡진한 그리움이 애처롭다.'취해 짓다'라는 시에서는 술 취하면 세상이 넓고 마음은 평화롭다고 노래하고 있으나 평상심이 아닌, 취중의 노래여서 안쓰럽다. '취한 뒤에는 천지가 넓고/마음을 여니 만사가 평화롭다/초연히 자리 위에 누웠으니/오직 즐거워 잠깐 정을 잊었네'라고 노래하지만 잠간 잊었던 정이 진정한 정일 것이다. '부질없이 읊다'라는 시에서 그녀는 '인간의 사십년을 짚어보니/가난과 굶주림과 병과 고통이 연하여 있구나/깊이 궁리를 하는 것과 영예와 치욕은 다 내 운명이니/다만 몸과 마음을 살펴 성현을 배우리라'라고 노래한다. 그녀의 삶은 병고와 가난과 남편의 무관심과 무능으로 가슴에 응어리가 맺힐 수밖에 없었다. 이 시는 그녀가 세상을 떠나기 2년 전에 자신의 삶을 돌아보며 쓴 시여서 가슴이 아프다. 그녀의 남편은 번번이 과거시험에 낙방하여 실망이 컸다. 뼈대 있는 가문으로서는 치욕스런 일이었다.시댁을 적국 같다고 노래했던 김호연재의 학문과 문학적 역량을 존경하고 따른 것은 역설적이게도 시댁의 조카들이었다. 조카들은 김호연재의 원군이었으나 그녀는 병을 얻어 42세에 세상을 떴다./김윤배 시인김윤배 시인

2019-12-12 김윤배

[풍경이 있는 에세이]욕 생각

난데없이 곤욕을 치른 여성종업원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혹은 잠자리에 누워 울게될 것이다만약 머지않아 그녀가 병이 든다면 그건 분명 그 욕 때문이라 생각한다욕에 대해 생각한다. 남을 저주하는 말, 남을 무시하는 모욕적인 말, 이라고 사전에 적힌 욕설에 대해. 지금 바로 뇌리를 스치는 몇 가지 단어가 있다면, 맞다. 바로 그거다. 요 며칠간 나는 그 몇 가지 단어를 곱씹고 있다. 일말의 화도 흥분도 없이, 그러나 제법 심각한 표정으로. 욕의 역사란 곧 말의 역사. 욕은 아주 긴 시간 도처에서 제 나름의 역할을 수행해왔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을 보니 '욕은 애칭이자 감탄사, 자기비하, 그리고 농에서 악담과 저주, 경구에서 질책으로까지 기능하고 있다'며 일상언어로서 욕이 갖는 다층성에 대해 상세히 설명하고 있다. 뭐 뭐니 뭐니 해도 남을 얕잡고 업신여기는 데 가장 큰 힘을 발휘해왔지만. 사실 새삼스러울 것도 없다. 욕을 하고 욕을 먹고 욕을 보는 게 하루 이틀 일은 아니다. 그럼에도 사회인이 된 후 나는 한동안 욕으로부터 꽤 멀리 있다고 여겼던 것 같다. 주변은 대체로 자신의 지위와 체면을 좀처럼 버리지 않는, 이 사회의 노련한 구성원들이었다. 설사 울화통이 터지는 일을 겪는다 해도 욕은, 욕만은 속으로 조용히 할 줄 아는. 면전에 대고 쌍욕을 주고받는 치들을 나는 거의 보지 못했다. 문제는 우리가 아는 이 '점잔 가면'이 너무 얄팍하고 헐겁다는 데 있다. 제대로 간수하지 않으면 언제 어디서고 훌러덩 벗겨져버린다.얼마 전의 일. 오랜만에 친구들과 만난 나는 자정이 지난 시각까지 술자리에 남았다. 시내의 한 감자탕집이었고, 평일 새벽 그곳 분위기는 다소 한산했으나, 곧 왁자한 무리가 들어와 테이블을 채웠다. 말끔한 차림의 중년 남성 손님들이었다. 한둘은 이미 거나하게 취해 있었는데, 들어오자마자 멀찍이 떨어진 테이블을 붙여달라 법석이었다. "손님, 여긴 가스 때문에 테이블을 떼고 붙이기가 어려워요." 자리가 충분했지만 취한 사람의 억지를 어쩔 도리란 없었다. 불콰한 얼굴로 막무가내 떼를 썼고, 종업원은 연신 같은 말을 되풀이했다. 그때 취한 이의 입에서 대뜸 튀어나온 말. "나쁜 년!" 자질구레한 갖가지 소음들 속에서 나는 그 말을 똑똑히 들었다. 고개를 돌리자 사십 대 후반쯤으로 보이는 여성 종업원의 굳은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나쁜 년이라니…. 무엇보다 나는 어리둥절해졌다. 이 순간 욕이, 더구나 이런 욕이 어울리는 것인가, 의문이 솟았다. 나를 위해 기꺼이 테이블을 끌어다 붙여주지 않는 너는 정말이지 나쁜 년? '욕이 남을 흠집 내고 욕보이는 양상은 결코 단순하지 않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고 하니 자세한 사항은 일단 생략. 그렇다 하더라도…. 거기엔 가벼운 불만을 넘은 극도의 분노와 혐오가 담겨 있었다. 고르고 골라 그 말을 뱉은 사람의 심리란 얼마나 악랄한 것인지. 욕은 얼마간 계속되었다. 일행도, 식당 측 누구도 나서서 저지하지 않았다. 취한 사람이 으레 그러려니, 넘겼을지도 모른다. 난데없이 곤욕을 치른 종업원 역시 이내 묵묵히 버너의 불을 켜고 반찬을 날랐다. 피로가 짙게 밴 얼굴로. 나는 문득 알 수 있었다.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혹은 쓰러지듯 잠자리에 누워 그녀는 좀 울게 될 것이다. 그리고 두고두고 떠올리겠지. TV를 보며 웃거나 식구들과 둘러앉아 밥을 먹을 때조차. 나쁜 년, 나쁜 년, 나쁜 년. 펄펄 끓는 냄비가 날아와 얼굴을 덮치듯이, 다른 어느 곳도 아닌 일터에서 불쑥 쌍욕을 듣는 처지를 상기하게 될 것이다. 만약 머지않아 그녀가 병이 든다면 그건 분명 그 욕 때문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만에 하나 죽음에 이른다 해도 또한 그 날의 욕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녀가 지금 무너지기 직전 안간힘으로 버티고 있는 사람이 아닐 거라는 확신이 내게는 없다. 욕에 대해 생각한다. 욕을 말한 사람과 욕을 들은 사람. 한 사람이 한 사람에게 저지른 돌이킬 수 없는 잘못에 대해. 여느 날과 같이 그저 취해 곯아떨어졌을 사람 또한 알아야 한다. 자신이야말로 얼마나 나쁜 새끼인지. 그 나쁜 새끼도 낮에는 누군가의 대표님, 선생님으로 멀쩡히 살겠지만./박소란 시인박소란 시인

2019-12-05 박소란

[풍경이 있는 에세이]말의 즐거움

친구 '가음' 메시지 '과음'으로 오해선생님 말 잘못 이해해 울어본 적도 선배 아들 교통사고로 뇌사에 빠져목소리가 전하는 '위로의 힘' 안다 방정맞게 떠들어서 웃게 해줘야지'시어머니가 자꾸 가음을 쳐서 괴롭다'늦은 밤, 친구의 카톡 메시지였다. 무슨 말인가 고개를 갸우뚱했다가 곧 '과음'의 오타이겠거니 생각했다. 술 마시는 시어머니를 둔 친구를 위로도 하고, 또 오랜만에 묵힌 이야기도 나누고 싶어 전화를 걸었다. "시어머니가 술을 많이 드셔?" 물었더니 "술을 마시는 건진 모르겠지만 자꾸 가음을 친다"라고 친구가 대답했다. 아니, 술을 드시는지 안 드시는지 모르는데 과음이라니. "이유도 없이 맨날 가음이야. 힘들어 죽겠어." 한참이 지나서야 알 수 있었다. '과음'이 아니라 '고함'이었다는 걸. 경상도 출신 친구는 이제껏 '가음'이 사투리인지도 몰랐단다. 기가 막혔다. 그래서 시어머니를 함께 욕해줘야 할 타이밍을 놓치고 나는 그만 까르르 웃고 말았다. 강원도 바닷가 출신 할머니는 아버지를 늘 "행준이"라고 불렀다. 우리 아버지의 이름은 '형균'이다. TV에서 에어로빅을 하는 사람들이 나오면 '에어로빅' 발음이 도통 되지 않아 늘 '의료보험'이라고 했다. 언니의 이름인 '애령'도 '애룽이'로, 내 이름도 '서룽이'라 했다. 남자 형제들 사이에서 자란 고모는 우리 엄마를 부를 때 "형수!" 했고, 초등학교 3학년 때 처음 반장이 되었던 나는 나이 든 선생님이 "반장 됐으니까 이제 친구들 앞에 나와 절해라"라는 말에 기겁을 했다. "절 안 하고 뭐하노?" 채근에 당황한 나는 급기야 울어버리고 말았는데 그 절이 진짜 절이 아니라 고개 숙여 인사를 하란 소리란 건 한참 후에나 알게 되었다.아빠와 사이판으로 휴가를 떠난 아이가 나에게 전화를 걸어와 재잘재잘 떠든다. "엄마, 여기는 여름섬이야!" 눈 내리는 겨울섬에 사는 뽀로로는 종종 원숭이와 앵무새와 악어가 사는 여름섬으로 놀러 가곤 하는데, 다섯 살 아이 눈에 사이판은 영락없는 뽀로로의 여름섬이었던 것이다. 아이는 아쉬운 듯 한 마디를 덧붙였다. "그런데 펭귄은 없어." 대구에 강연을 갔던 때였다. 언제나 마지막 순서는 내 책을 가지고 온 분들에게 서명을 해드리는 건데 수줍은 표정을 한 여고생이 제 이름을 말했다. "김언희예요." 나는 또박또박 '김언희 님께'라고 써드렸다. 여고생이 얼굴을 찌푸렸다. "언흰데……" 뭐가 잘못되었는지 몰라 나는 잠깐 갈팡질팡했다. 알고 보니 '언희'가 아니라 '은희'였다. 책장을 망쳐버린 것이 미안해 어쩔 줄 몰랐다. 몇 분이 지나가고 그다음 선 분이 말했다. "류언희입니다." 이번에는 자신 있게 '류은희 님께'라고 썼다. 그분도 얼굴을 찌푸렸다. "언희라고요, 은이 아니라 언." 난감하기 짝이 없었다. 요즘은 서명할 땐 메모지를 옆에 둔다. 이름을 들은 다음 메모지에 써 보이고 확인을 받는다. 나도 경상도 토박인데 '은' 과 '언'은 정말 구분이 어렵다. 왜 이런 이야기를 늘어놓냐면, 나는 말을 참 즐거워하는 사람이라는 거다. 사투리를 못 알아들어 실수를 해도, 어르신들의 말씀을 잘못 이해해 엉뚱한 짓을 해도, 아기의 서툰 말이 우스워 깔깔대도 나는 말이 즐겁다. 조금 미운 사람이어도 말을 하다 보면…… 뭐, 어지간하면 도로 좋아진다. 말소리가, 목소리가 전하는 위로의 힘을 안다. 지난주, 선배 언니의 스무 살 아들이 교통사고로 뇌사에 빠졌다. "이제 보내줘야 해. 그전에 와서 인사해줄래?" 선배의 말에 병원으로 뛰었다. 내가 도착했을 땐 친지들이 그 아들 주변에 서서 마지막 인사를 건네던 참이었다. 나는 뒷전에 서서 가만히 혼자 인사했다. 잠시 후면 더는 말을 건네지 못할 아들을 둔 선배의 얼굴을 바로 볼 수 없었다. 선배는 앞으로 얼마나 많은 시간을 입 꾹 다물고, 견뎌야 할까. 아무 때나 찾아가 스무 살 아들 대신 흰소리를 많이 지껄여주어야지, 그래서 선배를 좀 웃게 해줘야지 생각하지만 빈말이 될 게 빤했다. 그래서 아무 약속도 못 하고 돌아왔다. 그래도 다음 주쯤엔 전화를 걸어야지. 방정맞게 떠들어서 선배를 잠깐이라도 웃게 해줘야지, 그런 생각을 하는 밤이다./김서령 소설가김서령 소설가

2019-11-28 김서령

[풍경이 있는 에세이]남한의 최북단 사찰, 건봉사

서기 520년 아도가 창건한 대사찰한국전쟁때 불 타 곳곳에 상흔삶이 본시 제행무상이라 했으니폐허가 된 빈 절터 서성거리며번성했던 때 떠올리는것도 의미속초 설악동에서 1박을 하고 서둘러 통일전망대를 향한다. 멀리서라도 한동안 보지 못한 푸르디푸른 북쪽 해금강을 조망하기 위해서다. 속초 시내를 벗어나 오른쪽으로 푸른 동해를 끼고 달리는 이 길은 부산을 시작으로 포항 울진 삼척 강릉 속초를 지나 통일전망대에서 끝나는 남한에서 가장 긴 7번 국도다. 분단으로 인해 갈 수 없으니 더욱 달려보고 싶은 길, 7번 국도의 마지막 지점인 통일전망대에서 북쪽으로 시선을 주는 일은 이제 익숙할 법도 한데 늘 처음처럼 생소하다. 초소에 신고를 마치고 전망대에 오르면 해안선 끝으로 해금강이 손에 집힐 듯 가까워 민간인으로선 분단의 비극을 느끼기에는 가장 근접한 거리가 아닌가 싶다. 바다의 갈매기들은 눈앞에서 어떤 규제도 없이 남과 북을 드나들지만 한 동포인 우리만 묶여 못 가는 곳이 북쪽 땅, 이런저런 생각으로 한나절을 통일전망대에서 보내고 돌아오는 길에 고성군 거진읍 냉천리 건봉사를 방문했다.6·25전쟁 전까지는 31본산의 하나였으나, 현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3교구 본사인 신흥사(神興寺)의 말사가 된 건봉사. 한국전쟁으로 완전히 폐허가 되기 전 이곳은 대웅전, 관음전, 사성전, 명부전 등 자그마치 642칸에 이르는 다양한 건물로 강원 최대의 대찰이었다고 전해진다. 세속을 뒤로하고 사찰로 드는 불이문은 한국전쟁 때 불타지 않은 유일한 것으로 기둥이 네 개라서 문이 아니라 집에 가까운 건축물이라 보는 이들의 주장이 조금은 이해가 되는 부분이다. 불이문에는 그때 맞은 총탄 자국이 아직도 선명히 남아 있고 일주문 기둥에 새겨놓은 금강저는 심리적 무기의 일종으로 사찰로 들어오는 액막이 역할을 한단다.이 사찰에선 많은 건물 중 그래도 비교적 잘 보존되고 무지개 모양의 아름다운 돌다리 능파교를 빼면 서운할 것이다. 그 능파교를 건너면 현 건봉사의 대웅전이 자리를 잡고 있으며 능파교 주위에서는 마멸은 심하지만 그래도 형체를 알아볼 수 있는 돌거북과 돌절구 등 옛 건봉사의 유서 깊은 석물들이 볼거리를 제공한다. 아울러 최근에 지은 팔상전 뒤에는 조선시대 유물로 추정되는 석종형 부도 2기와 팔각원당형의 사리탑과 부도비가 각기 하나씩 서 있다. 그러나 금당터로 추정되는 곳곳은 잡초만 무성해 세월의 무상함을 더한다.이렇게 사찰을 한 바퀴 둘러본다면 한국전쟁 이전 금강산의 남쪽 너른 자락에 대가람을 이루었을 건봉사 옛 모습과 그 규모를 짐작하기란 어렵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50여 기에 달하는 부도와 탑비가 서 있는 불이문 밖의 부도밭을 목격하는 순간 상상은 확신으로 이어진다. 한국전쟁 이전에는 경내에 200여 기의 부도와 비가 흩어져 있었으나 전쟁 이후 많은 수가 약탈 도굴되자 80년대 중반 남은 부도와 비를 모아 지금의 자리를 찾았다고 한다.예전의 건봉사는 대사찰이었지만 지금은 한국전쟁 당시 불타버린 후 폐허로 남은 건물터들이 곳곳에 전쟁의 상흔을 대변해주고 있다. 건봉사를 방문했다면 그 빈 절터를 서성거리며 삶이 본시 제행무상이라 했으니 한때 절이 번성했을 당시를 떠올려보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일 것이다.건봉사(乾鳳寺)는 서기 520년 아도가 창건한 사찰로, 창건 당시 이름은 원각사(圓覺寺)였으나 1358년 건봉사가 되었다. 한때 선종과 교종 양종의 대본산으로서 지금의 신흥사, 백담사, 낙산사가 그때는 건봉사의 말사였다. 임진왜란 때 사명대사가 승병을 모집하자 6천명 이상이 모여 봉기했다고 한다. 승려수만 700이 넘는 한국 4대 사찰의 하나로서 766칸에 이르던 가람은 6·25전쟁 때 전소되었고 휴전 후에는 민간인 통제선 북방에 위치하여 출입을 제한했으나 1989년 초 비로소 일반인들의 출입이 가능해졌다. 현재는 대웅전과 불이문, 사리탑, 능파교, 석비 11기, 부도 45기가 남아있다./김인자 시인·여행가김인자 시인·여행가

2019-11-21 김인자

[풍경이 있는 에세이]작가의 사회적 책임은 어디까지?

정치적 입장 분명한 작가의비정치적 작품 미학적 가치 갖는가반대로 정치적 내용 썼다는 이유로 도덕적 비판 또는 지지할 수 있나그 범위 모든 공인에 적용해야 할듯지난달 노벨 문학상 수상자로 올가 토카르축과 페터 한트케가 발표되었을 때, 나는 적잖이 놀랐다. 우선 토카르축이라는 이름이 너무나 생소해, 내 독서의 범위가 참 좁았다는 당혹스러움이 먼저 다가왔다. 나중에 그의 이력과 작품을 보면서, 내 시야를 더 키워야겠다고 크게 반성했다. 하지만 한트케의 경우는 좀 달랐다. 그는 이미 여러 권의 저서가 우리 말로 번역되어 있고, 희곡도 대학로 등에서 이미 공연되었기에, 내겐 익숙한 작가였다. '언어의 천재'라는 별명이 붙은 뛰어난 작가. 하지만 그래도 그렇지, 노벨 문학상이라니!!!페터 한트케는 매혹적인 작품에도 불구하고, 아니 그러기에 더욱, 늘 논란의 중심에 서 있던 인물이다. 1995년 세르비아에 의해 저질러진 보스니아 대학살을 부인하고, '그건 보스니아 무슬림의 자작극'이라고 왜곡했으며, 제노사이드 범죄자이자 '발칸의 도살자'라 불린 슬로보단 밀로세비치의 장례식에 참석한 전력이 있기 때문이다. 분명한 역사적 사실에도 불구하고 그는 '인종청소'를 옹호했던 것이다. 2014년 극작가에게 주는 '국제입센상'을 수상했을 때에도 그에겐 비난이 쏟아졌다. 더구나 2014년 그는 "노벨상 수상자를 그릇된 문학의 규범"으로 만든다며 노벨상 폐지를 주장한 바도 있다. 그런데 이번 자신의 수상에 대해서는 "스웨덴 아카데미가 용기 있는 결정을 내렸다"라고 평가했다.그의 수상에 대해 많은 이들이 우려했다. 슬로베니아 철학자 슬라보이 지제크는 "한트케에게 노벨상을 줄 것이 아니라, 줄리언 어산지에게 노벨 평화상을 주어야 한다"고 했다. 보스니아 내전 당시 비극의 현장을 목격한 바 있는 수전 손탁은 그를 "언급할 필요도 없는 작가"라 평했다. 1999년 한트케가 노벨상 후보에 올랐을 때 소설가 살만 루슈디는 그의 제노사이드 옹호를 비판해 "올해의 국제적 멍청이"라 부른 적도 있다. 국제인권위원회는 "역사적 진실을 폄훼하는 작가에게 상을 주다니 말문이 막힌다"고 논평했다. 이런 비난이 일자 스웨덴 아카데미는 "수상자 결정에 정치적 관점은 고려하지 않았다"고 해명했다.노벨상에는 이와 비슷한 논란이 이전에도 여러 번 있었다. 2010년 수상자 바르가스 요사도 우익 정치가를 지지해 비난을 받았다. 우익 지지만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라, 좌익 정치지도자에 대한 지지도 문제를 일으켰다. 마르케스는 쿠바의 지도자 카스트로를 지지했으며, 사르트르와 네루다는 소련의 스탈린을 지지한 바가 있다. 노벨상을 받을만했으나 받지 못한 보르헤스의 경우는, 그 이유가 아르헨티나와 칠레의 군부독재를 지지했기 때문으로 알려져 있다. 노벨상처럼 큰 상이 아니라도 정치적 스탠스 때문에 비난을 받거나 거꾸로 칭찬을 받는 예술가들의 예는 흔하다. 이렇듯 작가가 의도했든 아니든 예술작품과 정치는 분리하기가 쉽지 않다.이를 보며 우리는 다음과 같은 질문에 닿게 된다. 정치적 입장이 분명한 작가의 비정치적 작품은 미학적 가치를 갖는가? 그 반대로 정치적 내용을 담은 작품을 썼다는 이유로, 그 작가를 도덕적으로 비판 혹은 지지할 수 있는가? 더 범위를 넓혀 같은 방식의 질문이 예술가, 더 나아가 연예인, 운동선수, 교육자, 종교인, 공무원 등 공적 영역을 담당하는 모든 사람에게 동일하게 적용될 수 있으리라 본다. 예를 들면, 히틀러가 그린 그림은 예술적 가치가 있는가? 친일 작품을 쓴 서정주를 용서할 수 있는가? 피카소는 여성 편력이 심했다는데, 그렇다면 그는 위대한 화가인가 난봉꾼인가? 영화배우이자 감독인 멜 깁슨의 반유대주의는 널리 알려진 사실, 그렇다면 그의 영화를 어떻게 봐야 하나? 마이클 잭슨은 근래 소아성애자임이 밝혀졌는데, 그럼 그의 노래를 이제 버려야 하나? 태극기 집회에서 어떤 목사가 '청와대로 진격하자'라고 했다는데, 그를 여전히 종교지도자라 할 수 있는가? 참으로 많은 것을 생각하게 만드는 질문이다. 물론 나는 나름의 답을 갖고 있지만, 지금은 독자에게 자리를 양보하고 싶다. 이 글을 읽는 당신께서 먼저 깊이 고민해보시길 바란다./정한용 시인정한용 시인

2019-11-14 정한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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