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민호 칼럼

 

[방민호 칼럼]트럼프 대통령

우방 관계 해친다는 비판 '아랑곳'김정은 치켜올리면서도 대북제재 사업가 출신… 협상 성공법 '자신'평화 유지될 수 있으니 나쁘지 않아기대·우려 함께 품고 기다려 볼 뿐미국 트럼프 대통령이 군사분계선을 넘는 장면은 아주 인상적이었다. 그는 북한의 김정은 위원장의 안내를 받으며 북한 쪽 지역으로 건너가 미국 대통령으로서는 북한 지역에 발을 디딘 첫 대통령이 되었다. 트럼프 대통령이 미국 대통령으로 당선될 때 말들이 아주 많았다. 미국의 지성인들은 모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고 했다. 유럽에서도 트럼프 당선은 무슨 재앙이라도 만난 듯 충격을 받고 있다고 했다. 지금도 그는 미국의 언론 주도층의 지지를 얻고 있는 것 같지는 않고, 때문에 페이스북 같은 신종 '독립' 매체를 통한 직접 호소 방식을 즐겨 활용한다. 그가 한국인들의 관심 대상이 된 것은 지난 대통령 선거 때가 고작이었던 것 같다. 처음에 그의 이미지는 그렇게 긍정적이었던 것 같지 않다. TV 화면에 나타난 그의 모습은 어딘지 모르게 과장된 것 같았다. 강한 자신감을 피력한다기보다는 연기를 하고 있는 것 같은 인상을 주었다. 바다 건너에서 보기에도 어째서 미국인들이 저렇게 안정감 없어 보이는 사람을 대통령으로 뽑은 걸까 하고 의구심을 갖게 만드는 점이 없지 않았다.원래 미국 공화당은 우파, 보수파라 하고, 민주당은 좌파도 더러 섞인 진보파라 생각하는 게 통상적이다. 당연히 미국 공화당은 한국으로 보면 현재의 야당에 가까운 정강 정책들을 가졌을 법하다. 민주당은 또 우리의 여당에 가까울 것이라 생각하게 된다. 트럼프의 대북 정책은 그런 통념을 바꾸어 놓았다. 지금 민주당의 유력 후보 가운데 하나인 존 바이든은 사람들이 모인 곳에서 트럼프의 대북 정책을 맹렬하게 비판했다고 한다. 그의 대북 유화 제스처가 일본과 한국 같은 전통적 우방들과의 관계를 해치고 있다는 것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전혀 아랑곳하지 않는다. 김정은과 자신은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며 앞으로 북한이나 김정은에게서 어떤 일들이 일어날지 지켜보자는 것이다. TV 앞에서 한국과 북한의 지도자들을 양옆에 세우고 사진을 찍은 그는 자신이 주도하는 대북 정책이 북한 수뇌부의 태도 변화를 끌어낼 수 있다고 확신하는 듯했다. 한편으로 김정은을 치켜올리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대북 제재를 쉽게 끝낼 수는 없다는 그는 쥐를 가지고 노는 고양이의 여유 같은 것을 내비치고 있었다. 그는 기자 회견 중에 국무장관 어디 있느냐며, 그가 협상을 이끌 것이라고 고개를 돌려 폼페이오를 찾았는데, 이 또한 미리 예정한 연기 같은 인상을 주었다. 한편으로는 김정은과 계속 협상을 하겠다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북한의 비핵화를 강하게 밀어붙이는 폼페이오에 대한 신임을 거듭 재확인한다?듣기에 트럼프 대통령은 원래 사업가였다고 한다. 사업가라면 밀고 당기는 협상이 가장 중요한 일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그는 오랜 경험을 통해서 협상을 성공으로 이끄는 법을 알고 있다고 자신하는 듯도 하다. 그 하나의 예로 지난 대통령 선거 때의 인상적 기억 하나. 그는 공화당 지지자들을 향해 자신은 이기는 법을 알고 있다며 팔을 치켜세우고 흔들었던 것이다. 과연 트럼프는 자신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을까? 이기는 법을 알고 있는 그는 다가오는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재당선될 수 있는 전략을 찾고 있다. 외교 분야에서 그것은 아마도 직접적인 군사적 충돌이 아니면서도 북한으로 하여금 핵무장을 스스로 풀게 만드는 일일 것이다. 가장 값이 싸게 먹히는 것은 말로 하는 것이니 그는 여유 있게 북한의 최고 지도자를 치켜올리 며 핵무장을 풀기만 하면 뭔가 획기적으로 좋은 일이 일어날 수 있는 것처럼 말한다. 실제로 그런 좋은 일이 일어날 수도 있기는 할 것이다. 하지만 북한이 자신이 의도한 대로 핵무장을 당장 풀지 않아도 나쁠 것은 없다. 한반도 문제가 자신의 손안에서 움직이고 있음을, 자신과 마찬가지로 연기를 즐기는 북한의 지도자와 함께 자주 등장하면서 웃고 이야기를 나눔으로써 입증하면 그뿐이다.한국 정부도 그것이 꼭 나쁘지는 않다. 평화와 대화가 그로써 그만큼은 유지될 수 있으니 말이다. 앞으로 과연 어떻게 될까? 무대가 무대만은 아니라 현실이기를, 연기가 연기만은 아니기를 기대와 인내와 우려를 함께 품고 기다려 볼 뿐이다./방민호 문학평론가·서울대 국문과 교수방민호 문학평론가·서울대 국문과 교수

2019-07-08 방민호

[방민호 칼럼]'부끄러움을 가르칩니다'

박경리~최인훈 사이 세대 박완서첫 소설 '나목' 욕망·양심 드라마단편 '…가르칩니다' 병적 감수성윤리적 양심의 뿌리, 늘 의식하는'부끄러움'의 능력에 무릎을 탁 쳐작가 박완서 선생은 1931년에 경기도 개풍군, 지금은 갈 수 없는 휴전선 위쪽에서 나서 2011년 불과 몇 년 전에 담낭암으로 유명을 달리한 작가다.나는 먼저 선생의 세대적 위치를 가늠해 본다. 박경리 선생은 1926년생 그의 성장기 전체는 일제 강점기에 걸쳐졌다. 태평양 전쟁과 이후 육이오 한국전쟁을 통하여 문학의 문제를 생명의 문제로 초점화할 수 있었다. 최인훈은 1936년생이고, 함경북도 회령에서 태어나 원산에서 중·고등학교를 다니던 중 사회주의 체제 교육을 접했다. 1·4후퇴를 얼마 앞두고 원산철수로 부산에 내려온 선생은 평생을 사회주의와 자본주의적 자유주의, 이 두 20세기 사상이 내건 숙제들과 싸우는데 바쳤다.박완서 선생은 이 둘 사이에 끼인 세대의 작가였다. 그녀는 일제 말기에 숙명여고에 들어가 해방 후에 숙명여고로 졸업했으니 1950년 5월이었다. 곧이어 육이오를 맞는 바람에 대학 입학과 더불어 수학은 좌절되고 6·28 서울 함락부터 9·28 수복에 이르는 3개월여를 인민군 치하에서 보낸다. 다시 1·4 후퇴 이후의 정적 감도는 서울에 남은 끝에 전쟁의 죽음과 폐허, 모순과 불합리를 겪을 만큼 겪은 사람으로 남게 된다.이 선생의 첫 작품은 젊었을 때 미군 PX 초상화부에서 일하면서 알게 된 박수근의 그림을 모델로 삼은 장편소설 '나목'이다. 선생은 여기서 선생 자신을 썩 빼어 닮은 여성 주인공 이경과 박수근을 모델로 그린 화가 옥희도의 사랑을, 그리고 대학을 두 해 다니다 군대에 갔다 온 전공 '황태수'와 미군 '죠오' 사이에서의 방황과 선택을 그렸다.이경은 여기서 자신의 잘못된 제안으로 행랑채에 숨어 있던 두 오빠의 죽음을 목도해야 했다. 그럼에도 젊고 살아 있기 때문에 사랑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갈망하는 여성이었다. 이 이경은 자연으로 돌아가는 박경리의 '생명'의 여인도 아니요, 좌우익 선택 문제에 귀착하는 최인훈의 '이념'의 청년도 아니다. 전쟁이라는 사회적 부조리, 불합리 속에서 온갖 고통을 떠안은 채 죄책감에 시달리며 그러면서도 한 삶을 살아내고자 하는 세속적 여성의 욕망과 양심의 드라마가 바로 '나목' 그것이다.이 '나목'은 어째서 선생이 이 육이오를 겪은 1950~1953년으로부터 근 이십 년이나 동떨어진 1970년에야 '여성동아' 현상 공모라는 독특한 형식을 통하여 빛을 볼 수 있었던 것일까? 선생은 그보다 훨씬 더 '문학적으로', 더 일찍 모습을 드러낼 수도 있었던 것이 아닐까? 스무 해 동안 선생의 침묵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이었을까?민음사 판 새로운 '나목'에 단편소설 '부끄러움을 가르칩니다'가 함께 붙어있어 다시 한 번 눈길이 갔다. 여기에는 세 번이나 결혼하면서 농사꾼 부자, 가난한 전임강사에 이어 일본 무역상을 자처하는 사업가에게 시집을 간 한 결벽증적 여인이 등장한다. 이 소설은 꽤나 풍자적이어서 이야기 전개에 재미가 있는데, 그 한가운데에는 이 여성 특유의 독특한 '부끄러움'이 자리 잡고 있다. 그녀는 세 번 결혼한 것쯤이야 하등 부끄러울 것 없지만 돈 많다고 떠벌리는 것, 겉으로는 고상한 척하면서도 속으로는 물욕과 명예욕에 허덕이며 사는 것, 육체를 팔아서라도 먹고는 살 수 있어야 한다는 식의 물질주의, 육체주의를 지독히도 혐오한다.그런 그녀가 작중에서 하는 말이 있다. "……혹시 내가 쓴 작문을 잘 됐다고 선생님이 아이들 앞에서 읽어주기라도 하면, 저 구절은 어디서 표절한 것, 저 느낌은 어디서 훔쳐온 것 하고 한 구절 한 구절이 읽을 때마다 나를 찌르는 것 같아 안절부절 못했다. / 분명히 내 내부에는 유독 부끄러움에 과민한 병적인 감수성이 있어서 나는 늘 그 부분을 까진 피부를 보호하듯 조심조심 보호해야 했다."이 작중 여성 인물의 자기 인식에 관한 대목을 읽으며 나는 속으로 무릎을 탁, 쳤다. 바로 이 '부끄러움'의 능력. 정말 자기 것이 무엇인지, 자신이 무엇을 했는지 생각하고 아는 능력이야말로 박완서 선생을 오늘 우리 문학사에 남은 존재로 만들어 준 근본이었다는 사실이다. 작가로서 박완서는 무엇보다 윤리적 양심을 느끼는 사람이었다. 생명처럼 근본적이지도 이념처럼 숭고하지도 않되 자신의 양심의 뿌리를 늘 의식하고 써나간 작가였다./방민호 문학평론가·서울대 국문과 교수방민호 문학평론가·서울대 국문과 교수

2019-05-27 방민호

[방민호 칼럼]신동엽을 읽는 봄

금강 제9장 '누가 하늘을 보았다…구름 한송이 없는 맑은 하늘을…'지금 우리들 하늘엔 몇겹의 구름이눈부신 햇살 가로막고 있는가심지어 스스로 하늘이라고도 한다황사라는 말이 미세먼지로 바뀐 지 얼마나 되었나. 오늘은 실로 오랜만에 깨끗한 공기를 맛보는 날이다. 봄꽃들 피었으나 다시 춥고 어둡고 비까지 내려, 봄은 왔으되 봄 같지 않았다. 과연 깨끗한 눈으로 세상 본다는 건 얼마나 어려운 일이던가. 한갓 큰 것 같지만 작은 정치에 눈이 흐려져 옳은 것, 근본적인 것을 보지 못하던 일이 그 얼마나 많던가. 큰 배를 타고 수학여행 가던 학생들이 기가 막힌 일들을 겪고 수중 원혼이 되고 이로부터 수년 내 이어진 항의가 모여 새로운 정부가 세워졌건만 그로부터 벌어진 일들 맑기만 했던가.마흔 살 나이로 세상 떠난 시인 신동엽(1930.8.18~1969.4.7)의 전집을 펼쳐들고 서사시 '금강'의 페이지를 열었다. '금강'은 아주 긴 시, 그중에서도 나는 다른 사람들처럼 제9장을 사랑한다. 그는 외쳤다."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누가 구름 한 송이 없이 맑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당신이 본 것은 먹구름, 당신은 그것을 하늘로 알고 일생을 살았다.""닦아라. 사람들아, 네 마음속 구름. 아침저녁으로 당신의 마음속 구름을 닦고 티 없이 맑은 '영원의 하늘' 볼 줄 아는 사람은 '외경'을 알리라."외경, 참으로 어려운 말이다. 공경하면서 두려워함을 이름이다. 그러나, 무엇을 공경하며 두려워한다는 말일까. '금강'은 동학의 이야기다. 제4장에 수운 최제우의 역사가 나온다. 그는 집에 있는 '노비 두 사람을 해방시켜 하나는 며느리로, 하나는 양딸로 삼았다. 가지고 있던 금싸라기 땅 열두 마지기를 땅 없는 농민들에게 무상으로 나누었다.' 무상 소리만 나오면 자라 보고 놀란 가슴들 솥뚜껑도 보고 놀라는 우리.'바다의 달' 최시형은 관헌의 추적을 피해 전국 방방곡곡 가지 않은 곳이 없다. 어느 여름 동학교도 서 노인의 집에서 저녁상을 받을 때 바깥에서 베 짜는 소리가 들려왔다. 해월이 무슨 소리냐고 묻자 며느리가 베를 짜고 있노라고 대답한다. 이에 해월이 이렇게 말한다. "서 선생, 며느리가 아닙니다. 그분이 바로 한울님이십니다. 어서 모셔다가 이 밥상에서 우리 함께 다순 저녁 들도록 하세요." 하룻밤을 자고 나오는데 그 집 막내아들이 따라 나오며 우는 것을, 서 노인이 쫒아버리려 한다. "이 어린 분도 한울님이세요. 소중히 받드세요."혁명이란 무엇이냐, 신동엽 시인이 생각하기에 그것은 모두가 평등하게, 아니 한울님처럼 되는 것이었다. 그것은 그러면 경제적 평등이냐, 하면 그렇지 않다. 옛날부터 천도교, 곧 동학에 이르기를, 이 우주의 삼라만상, 산천초목, 짐승과 사람은 모두들, 남자나 여자나 어른이나 아이나 양반이나 상민이나 돈 가진 사람이나 못 가진 사람이나 큰 하나인 한울로부터 나온 것이니 같다. 평등하다. 높고 낮음 없다.사람들은 평등을 말하면 경제적 평등을 가리키는 것으로만 알고 대경실색들을 한다. 부자도 얼마나 한없이 불쌍하며 가난한 사람도 그 얼마나 깨끗하게 행복한가. 그러나 먹구름을 하늘로 알고 살아오는 우리는 정말로 된 하늘을 보지 못한다.'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누가 구름 한 송이 없이 맑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과연 우리는 하늘을 보았는가. 나는 하늘을 보았는가. 구름 한 점 없이 깨끗한 하늘을, 영원의 하늘을 본 사람은 외경을 알련만.우리는 아무것도 모른 채 각자 자신이 하는 일이 옳은 일이니, 바른 주장이려니, 행동이려니, 한다.외경이란 참으로 어려운 말이다. 공경할 것을 공경할 줄 알고 두려워해야 할 것을 두려워할 줄 아는, 그런 사람 되기는 참말 어려운 말이다.우리들 하늘에는 지금 얼마나 두꺼운 구름이 몇 겹씩 끼어 눈부신 햇살을 가로막고 있는가. 그래도 저마다 하늘을 보았노라고 한다. 심지어는 스스로가 하늘이라고도 한다. 아무도 두려움을, 공경을 알지 못한다./방민호 문학평론가·서울대 국문과 교수방민호 문학평론가·서울대 국문과 교수

2019-04-15 방민호

[방민호 칼럼]하노이발 뉴스에 관하여

우리는 통일이라는 것을 단순하게정치·경제로 논할 수 있는게 아냐'한국인' 인류적 종 존속위해 필요냉정과 침착속에서 서로 공존하고北동포들과의 미래위한 슬기 모아야하노이발 뉴스를 접하고 선배 작가 한 분은 충격을 받았다고 했다. 글쎄요. 저는 언젠가부터 현안에 어두워져서 잘 모르겠는데요, 했다. 다른 한 분은, 충격이라니, 나는 트럼프와 김정은이 만난 것부터 의외였거든, 하고 들뜬 사람들을 쉽게 타박한다.지금 청년들 중에는 이데올로기에 찌들고 가난한 북한 싫다고 통일이 절대적 필요 명제는 아니라 한다. 입만 벌리면 경제, 경제하고 경제병 걸린 나이 든 분들도 우리 먹고살기도 바쁜데, 한다. 아무리 속물적으로 느껴지더라도 그 안에도 일단의 진실은 있다고 봐야 한다.필자로 말하면 386세대, 어려서부터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라는 노래를 배우며 자란 세대의 일원이다. 유신체제 때 '국민학교'를 다녀, '나'는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난 줄 알았고, 국가와 민족을 지상 명제로 끌어안고 성장했다. 이른바 '범생'이었기에 다른 친구보다 더하면 더했을 것이다. 중고등학교 때 배운 것도 철학이 아니라 국민윤리였으니, 왜 국민 윤리가 철학보다 먼저이고 철학은 중고등학교 과정에 있지도 않은 건지 물음표조차 생기지 않았다.이 국가 교육 때문에 생긴 부작용의 하나는 강렬한 정치 감각일 것이다. 필자가 서울로 대학에 진학하게 되자 부모님은 절대 현실 문제에 휩쓸리지 말고 공부만 하라 당부하셨다. 그러나 한 일 년 지나는 사이에 사람이 달라져 버렸는데, 그 이유 중의 하나가 바로 유신 교육에 있다고 생각한다. 국가와 민족이 어디로 가는지, 민족중흥의 사명을 띠고 태어난 자들이 어떻게 외면할 수 있단 말인가. '조국'의 통일이라는 것도 필자에게는 처음에는 그런 차원에서 당위적인 명제로 받아들여졌다. 1945년 해방과 독립이 미완에 그쳤고 그나마 분단으로, 전쟁으로 치달았으니 원래의 상태를 회복해야 함은 당연지사 아닌가. 그래도 '통일 지상주의'에는 용케 빠지지 않았으니 다행이라면 다행이라고 해야겠다. 나중에는 우리나라가 섬 같아서 갑갑해졌다. 동서남 쪽이 모두 바다에 접해 있고 북쪽은 철책으로 가로막혔으니 어디 먼 곳으로 떠나기도 어렵지 않은가. 비행기 타고 날아가면 되지 않느냐 해도 땅을 밟고 바깥 풍경이 시시각각 변해가는 것을 보는 것과 공중 이동은 달라도 너무 다르다고 해야 한다.여행 핑계를 댔지만 사실 어디 여행 같은 문제일 뿐이겠는가. 아무리 세계화, 국제화가 전개되어도 한국 사람들의 '고인 물' 같은 우물 감각은 좀처럼 벗을 수 없는 것이 위쪽 통로가 막힌 데도 이유가 있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대륙에서 내려온 사람들인데 그 대륙과 살을 맞대고 살 수 없는 상황은 사람들을 비좁게 만들기 쉬운 것이다. 필자는 얼마 전부터 신채호를 즐겁게 읽는다. 그는 한말의 유생 출신으로 비범한 재능과 목숨을 건 공부를 통해 '조선사'의 '비밀'을 캐내는데 접근할 수 있었던 드문 선각자였다. 사람들은 그가 역사를 주관적으로 해석했느니, 상상과 공상이 많았느니 하지만 비난은 쉽고 깊이에 도달하기는 어렵다. 과연 중국 청대의 사고전서를 접하여 우리 역사책에 잘 안 나오는 우리 역사를 사리에 맞게 맞추려 한 사람 얼마나 되던가. 이 선생 신채호를 통해 역사라는 것을 생각해 보건대, 대저 역사라는 사람살이의 기억은 만만히 볼 것 아니요, 경제나 정치 따위로 논단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한 인류적 종의 '자연사'를 정리해 놓은 것이니, 이것 없이는 그 종의 현재의 삶도 있을 수 없고, 현재를 살아도 덧없는 삶에 그치기 쉽다. 우리는 통일이라는 것을 단순히 '정치적', '경제적' 같은 '현재' 때문에만 아니라 이 '한국인'이라는 말로 대표되는 한 인류적 종의 존속을 위해 필요로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어찌 되었든 무슨 무슨 '지상주의자'는 되지 않아야 할 일이다. 냉정과 침착 속에 우리 안에서도 서로 공존하고, 북한 동포들과도 함께 나눌 수 있는 미래를 위한 슬기를 모아야 할 때다./방민호 문학평론가·서울대 국문과 교수방민호 문학평론가·서울대 국문과 교수

2019-03-04 방민호

[방민호 칼럼]'태움'

간호사 사회 '괴롭히며 규율잡기'김용균군 희생된 火電 '사람 차별'책임 면하는 '이상한 논문 표절'썩을대로 썩은 문화 없애지 못하면영혼은 늘 굶주리고 고통은 연속며칠 전에 신문에서 한 간호사가 세상을 떠나면서 스스로 목숨을 끊으면서 유서에 썼다는 말이 머리를 떠나지 않는다. "병원 사람들 조문도 오지 마라." 오죽 괴로웠으면 죽고 나서도 병원 사람들은 만나고 싶지 않다 했을까?이런 일이 이번만의 일은 아니었고, 얼마 전에도 이와 유사한 일이 벌어졌을 때 네이버에 들어가 도대체 이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찾아본 적이 있다. '태움'. 이 말은 이렇게 정의되어 있다. '태움'은 '영혼이 재가 될 때까지 태운다'는 뜻에서 나온 말로, 선배 간호사가 신임 간호사를 가르치는 과정에서 괴롭힘 등으로 길들이는 규율 문화를 지칭하는 용어다.참 이런 문화도 있을까 싶다. 어떻게 해서 사람은 다른 사람을 집단의 이름으로 길들이고 말 듣지 않거나 적응 못하는 사람은 그 사람이 태워져 재가 될 때까지 태워 버리는 것일까. 참 말도 실감 나게 지었다는 생각이 든다. 사람이 얼마나 괴롭힘을 당하면 그렇게 태워져 버린다는 말이냐. 그러나 이 말을 처음 들은 후 그 생생한 어감의 놀라움과 함께 나를 괴롭힌 것은 이 '태움'이 병원 간호사 사회뿐 아니라 한국 사회 곳곳에 없는 곳 없다 할 정도로 사람들을 지독히 괴롭히는 형태로 끈질기게 작동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나는 사실 카풀 문화라는 것이 왜, 얼마나 필요한지 알지 못하지만 서구에서도 그런 문화가 있다고들 하고 우리나라에도 그런 것이 도입되어야 한다고도 하니,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귤이 회수를 건너면 탱자가 된다는 말이 있잖던가. 그것은 아무리 좋은 제도라 해도 바다 건너 이 나라에 들여오려면 이곳 사정에 얼마나 맞는지, 어떻게 해야 무리 없이 들여올 수 있는지, 그런 제도가 시행될 때 피해를 입을 수 있는 사람들에게는 어떤 배려를 해야 하는지 이리저리 고민도 해봐야 할 게 아닌가? 정말 그렇게 한 후 그 카풀이라는 제도를 시행하려고 하는 걸까. 결과가 얼마나 좋을지는 아직 기다려 보고 지켜봐야 하겠지만 이 새로운 제도를 시행한다고 하니, 사람 '태우는' 사람들이 광화문 앞이며 어디 앞에 십여 만 명씩 빽빽하게 서서 시위를 하고 항의를 하고 파업을 벌이는 통에 그 추운 한겨울 밤에 택시를 '타는' 사람도 새벽길을 걷고 걸어 집에 지쳐 떨어지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급기야 택시 기사 두 분이 자신의 몸을 태우는 일까지 일어났다. 김용균 군을 태안 화력발전소의 어이없는 희생양으로 만들고 만 것도 알고 보면 우리 사회의 그 '태움' 문화 때문이 아니던가. 석탄을 태워야 하는 화력 발전소가 정규직과 비정규직을 가르고 사람을 차별하고 자격을 '못 갖춘' 사람들은 나이가 어떻든 성별이 어떻든 그가 내몰릴 대로 내몰려 몸과 영혼이 몽땅 태워질 때까지 몰아대는 것이 바로 한국 사회 아니던가. 그 어린 젊은이가 전생에 어디서 무엇을 얼마나 잘못했기에 이생에 와서 그런 처절한 고통을 맛봐야 한단 말인가. 도대체 이 '태움'은 어디에서 와서 이렇게 병원 간호사들뿐 아니라 이 나라 곳곳에서 귀신같은 힘을 발휘한단 말인가. 대학교에도 온갖 태움 문화가 만연하는 가운데, 그중 이상한 태움 문화로 표절이라는 것도 있다. 남의 논문이나 글을 몰래 가져다 쓴 사람이 3년만 그 소행이 밝혀지지 않으면 그 사실이 드러난다 해도 '절대' 처벌을 할 수 없다는 것이니, 그런 이상한 '태움' 때문에 표절한 사람은 요행히 책임을 면할 수 있겠지만 정작 그 일을 당한 사람이나 그 일을 저지른 사람에게서 강의를 들어야 하는 학생들은 속이 타도 탄다고 어디에 말할 곳조차 없이 숨어서나 괴로워하는 끝에 영혼 자체가 태워져 버린 것만 같은 고통을 당해야 한다. '태움'을 태워버려야 한다. 그러지 않고는, 상처가 곪을 대로 곪고 문제가 썩을 대로 썩을 때까지 몸과 마음을 다 태워 버리는 식의 문화를 없애지 않고는 이 사회는 아무리 돈을 벌어도 영혼은 늘 굶주리고 태움을 당하는 고통을 맛봐야 할 것이다./방민호 문학평론가·서울대 국문과 교수방민호 문학평론가·서울대 국문과 교수

2019-01-14 방민호

[방민호 칼럼]창랑의 물이 흐리거든

입은 먹는것 말고 말하기도 한다남을 칭찬만 않고 험담도 일삼아정화하자 해놓고 더러운 말 더 써말이 무서운 올해 이제 한달 남아더러움 속에서 자기도 보라… 몇 날 며칠째 입안에 맴도는 시구절이 있다. 창랑 뭐라 했는데 그게 어땠더라. 갓끈, 뭐라고도 했는데. 옛날 같으면 나중에 찾지 하고 말 것을, 인터넷은 뭐든 단번에 답을 주고야 만다. 어디? 아하, 굴원이었다. '어부사'에 나오는 시구였다. 한문도 모르는 사람이 어떻게 옛사람의 이야기를 알까만, 그래도 한번 들추어 보자면. 옛날에 굴원(약 B.C.~B.C. 278년)이라는 초나라 사람이 정계에서 물러나 강가에 머물러 있었다 한다. 그때 어부 하나를 만나 세상 한탄하기를, "온 세상이 모두 흐린데 나만 홀로 맑구료. 모든 사람이 다 취했건만 나만 홀로 깨어 있었구료. 이로 인해 추방을 당하고 말았소"라 하였다. 이 어부는 한갓 이름없이 살아가는 이겠지만 굴원의 '고고' 포즈가 마음에 들리 없었으리. 세상에서 물러나 세월의 흐름에 뜻을 맡기는 이는, 저희들끼리 중앙이니 서울이니 자부하는 곳에서 아웅다웅 다투는 꼴 한없이 부질없이 느껴졌으리라. 몇 번 문답 끝에 노옹이 남기고 떠나간 시구가 다음과 같다. 滄浪之水淸兮(창랑지수청혜)/可以濯吾纓(가이탁오영)/滄浪之水濁兮(창랑지수탁혜)/可以濯吾足(가이탁오족). 큰 바다 물이 맑으면 갓끈을 씻고 그 물이 흐리면 발을 닦으리. 시원스럽기 짝이 없는 말 같지만 간단치는 않다. 아니, 이 무슨 해괴한 '시류'주의자의 요설이란 말인가? 창랑이라 하면 큰 바다 물이라 할 텐데, 이 시는 왜 강물이라 해도 될 것을 굳이 바다라 했나. '나'는 아무리 커도 작다는 것을 알려주려 한 것일까? 바다 위에 떠 있으면 '나'만큼 작은 것도 없으리니 말이다. 세상이란 가뒀다 풀 수 있는 한갓 강물 따위가 아니요 제 혼자 힘으로는 너무나 감당하기 벅찬 산더미 바다라는 것이다. 그 물을 퍼내어 내 맘대로 깨끗하게 할 수 없고 또 제 맘대로 더럽힐 수도 없다. 곧 세상은 창랑, 큰바다 물, 내가 수초처럼 떠 있는 곳이다. 몇 날 며칠 그 더럽다는 그 한 단어가 자꾸 입안에 맴돌아 어찌할 수 없다. 충청도나 그 이남 사투리에 '더럽다'는 '드럽다'라고 한다. '더'와 '드'가 큰 차이 없건만 하필 드럽다고 하면 정말 더러운 느낌이 난다. 그러고 보면, 십 년도 전에 서울 북쪽 어느 큰 대학교 선생님들을 뵙는데, 송 아무개 선생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사람 입처럼 드런 게 없어"하고, 혼잣말하시는 것이었다. 그때 우리는 손이니 발이니 하는 사람 몸이 다른 생물 것들보다 깨끗하지 않단 말을 하고 있던 것으로 기억한다. 입이 더럽다? 딴은 그런 것도 같다. 손발은 온갖 더러운 것 다 만지고 밟은 '도구'지만, 그래도 눈에 잘 보여 늘 씻고 닦기를 게을리하지 않는다. 입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거울 보고 이를 닦을 때도 입안은 좀처럼 들여다보고 싶지 않다. 그 입안으로 사람들은 온갖 것을 쓸어 넣는데, 사람처럼 안 가리고 먹는 짐승도 드물다. 쓴 것, 매운 것, 싱싱한 것, 썩은 것, 냄새 고약한 것, 향기 나는 것, 못생긴 것, 탐스럽게 생긴 것, 이 모두가 입을 통해 사람 몸으로 든다. 그러니 입이 어찌 깨끗하랴. 그런데 지금 생각하면 그분의 그 말씀은 사람의 몸에 관한 얘기가 아닌 것도 같다. 사람의 몸의 각 부위는 한 가지 역할만 하지는 않아서 입도 먹는 것 말고 또 한 가지 일, 말하는 일을 한다. 그 입으로 남을 칭찬만 하지 않고 온갖 험담을 일삼는다. 있는 일 갖고 비난만 하는 게 아니요 없는 일 갖고도 더러운 말을 지어낸다. 남자만 더럽게 말하는 게 아니고 여성도 그런 말들을 꾸며낸다. 없는 사람, 낮은 사람, 못난 사람의 말은 차라리 그럴 수라도 있다 하지, 가지고 높고 잘난 사람이 더러운 말도 상급이다. 말을 정화하자며 더러운 말을 하고 우리끼리만 말하자며 더 더러운 말을 한다. '더럽다'라는 이 한 마디 말이 요즘처럼 실감나게 들릴 때가 없다. 어떻게 사람들이 모여 살며 벌이는 일이 어떻게 이렇게 치사스러울 수 있나. 문제는 창랑의 물만 더러운 게 아니라는 사실. 나도 더럽다 아니할 수 없어, 창랑의 물만 보고 더럽다, 더럽지 않다 할 계제가 아니다. 올해 무술년이라 했다. 심상찮은 바람, 광풍이 분다 했다. 이제 양력으로 한 달, 음력으로 두 달. 말이 무서운 이 해가 언제 가려나 한다. 어느 신문에서 올해의 한자성어를 뽑았다. 왜 '지록위마'는 후보에 없었나. 하지만 명심하라. 무명 어부의 지혜를 배우라. 더러움 속에서 자기도 보라./방민호 문학평론가·서울대 국문과 교수방민호 문학평론가·서울대 국문과 교수

2018-12-03 방민호

[방민호 칼럼]지금, 국가와 정부, 그리고 시민들

현재 국민들 환상에 머무는데 익숙보여주는것에 만족하고 찬사 보내그 덕에 인터넷이 언론과 표현 점령오늘날 민주주의 과거보다 더 위험진실 가리는 정보들 교묘하게 작동어느 순간, 더 이상은 나라가 돌아가는 일에 관심을 둘 수 없겠다고 생각하게 되는 때가 있다. 예전에는 무엇이 옳고 어느 쪽이 그른지 비교적 명백한 것으로 여겨졌다. 그때는 '나'도 주류가 될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단순하게, 투명하게 생각할 줄 알면 행복할 수 있다. 하지만 사태는 결코 명백하지 않고, 늘 알 수 없는 베일에 가려져 있다. 뭔가 이상한 점이 있다고 의문을 갖는 순간, 복잡함, 불투명함을 자기 사유의 기반으로, 근본적 조건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가능성이 생긴다. 이 순간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 부주의하거나 둔감하게 지나치면 이 순간은 다시 사라져버린다.국가를 믿고, 국가가 시민들의 의지에 의해 수립되어야 한다고 믿고, 그러지 않은 정부라면 뒤집어 버리면 새로운 세상을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었던 때, 국가가 없는 세계야말로 유토피아겠지만 그 국가 없는 세계를 건설하기 위해서는 '국가 아닌 국가', '국가를 폐절시키는 국가'의 단계가 필수적이라고 생각할 수 있을 때도 순진하다면 순진했다. 그런 국가가 얼마나 타락했던가를 깨닫고 국가 없는 세계에 대한 꿈도 함께 잊었을 때 국가라는 문제는 곧 어떤 정부냐 하는 문제로 바뀌어버렸다. 국가를 심문하지 못하게 되자 '근본주의'적 사유는 빛을 잃고 앞에 놓인 정부들 중 하나를 양자택일 식으로 골라잡는 일에 매달리게 되었다. 어리석기 짝이 없는 순진함이여, 썩 물러가라. '내'가 선택하고 지지한 어떤 정부도 선하지만은 않았으니, 다시는 '내' 의지를 어떤 정부를 위해 사용치 말라. 아깝지 않느냐, 낭비해 버린 젊음의 시간들이. 위선에서 교활을 거쳐 야만으로. 그리고 이제 다시 쇼로. 쇼가 펼쳐지는 무대 뒷면에서는 어떤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지? 홉스는 만약 정부가 없다면 사람들은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으로 날을 지새우게 될 것이라고 했다. 이 자연 상태의 위험에서 벗어나기 위해 사람들은 자신들의 권리를 정부에 위임코자 했다는 것이다. 우리는 그런 정부를 갖고 있는가? 악 대신에 선이 활동하는 국가 말이다. 살의에 관해서 생각한다. 만약 정부가 선으로 무장되어 있다면 사람들의 살의는 정부의 선한 중재에 의해 사그라들 수 있겠다. 과연 정부는 그런 선의로 시민들 위에 군림하는가?과거에 어떤 정부는 자신이 저지른 악 때문에 전전긍긍했다. 그런 때만 해도 좋은 통치를 위한 가능성은 사라지지 않았다고도 할 수 있다. 선의를 위한 타협과 거짓, 선을 행하기 위해 메피스토펠레스와 단 한 번 계약을 맺었을 뿐이니까. 하지만 메피스토펠레스의 본분은 유혹에 빠뜨려진 자를 파멸에 이르게 하는 것. 유혹에 응한 욕망의 대가를 치르게 하는 것. 그 어떤 정부는 악마의 손아귀에 들어 갈기갈기 찢기우고 말았다. 악수인 줄만 알았던 것이 수렁에 빠진 격이 되어 끝 모를 이중성을 이어가다 마침내 파멸해 버린 것이다. 만약 순진했던 정부가 악에 익숙해지면 어떻게 될까. 정부를 이끄는 사람들이 이중성에 익숙해지면, 무대에서는 선을 보이고 장막 뒤에서 악을 행하는 데서 편리를 취하는 기술을 익힌다면. 그 어떤 파산한 정부의 뒤를 이은 정부들은 사실상 그러했다. 그들은 교활하기도 했고 야만적이기도 했지만 나아가 보여주고 보임 뒤에서 다른 수를 내는데 익숙했다. 오늘날에도 시민들은 순진하고 환상에 머무는데 익숙하다. 그들은 보여주는 것에 만족해서 찬사를 보내며 머물기 좋아한다. 옛날에 어떤 지도자는 그래서 국민들보다 반 보만 앞서 가라 했지만, 차라리 반 보를 늦게 가야 더 큰 찬사를 받을 수 있는지 모른다. 보여지는 것에 약한 시민들 덕분에 인터넷 가상 현실이 언론과 표현을 점령하다시피 한 오늘날 민주주의는 과거보다 더 큰 위험과 도전에 직면해 있다. 이 빠르고 광범위한 전파 능력은 보여주는 세력에게만 이점이 되는 것은 아니다. 환각 이면의 진실을 탐색하는 사람들에게도 기회를 제공하기는 한다. 그러나 사태는 절대 간단치 않다. 진실을 가리는 정보들의 숱한 집적과 '좋은' 정보를 향한 접근 자체를 가로막는 온갖 교묘한 기술과 트릭이 작동한다. 지난 여름부터 가을까지 정치가 어떤 식으로 움직이는지 실감하게 되면서, 아하, 이제 천치가 되자 생각한다. 무엇이 진실인지 진정한 친구가 어디 있는지 생각하지 않으면 편할 것 같다. 이미 모든 게 뒤얽히고 엎어져 버렸다. 이 비관은 어디에서 오는가. 말할 수 없는 것은 말할 수도 없다./방민호 문학평론가·서울대 국문과 교수방민호 문학평론가·서울대 국문과 교수

2018-10-22 방민호

[방민호 칼럼]말의 피흘림

세상 사람은 모두 불쌍한 존재월급 못받고 주지도 못해 딱하다서로의 처지 관대하게 볼 줄 알고이해·동정의 마음 담은 말들아름답고 사랑스럽게 썼으면 한다인터넷이 지금처럼 활성화되기 시작한 때는 노무현 대통령 시절이었던 것 같다. 그때 말의 피흘림도 함께 시작되었다. 인터넷 댓글은 피 흘리는 말들의 전시장 같았다. 댓글은 어떤 기사나 의견에 대한 반응을 나타내는 글인데, 정치적이거나 사회적인 문제를 다룰 때 그것은 거의 언제나 비판을 넘어 비난과 비방, 비아냥, 냉소로, 또 한도를 넘는 잔인한 공격으로 나타나곤 했다. 옳은 견해도 말을 아름답고 깨끗하게, 정중하게, 유머러스하게 사용하지 않으면 그 거침과 투박함, 공격성으로 인해 듣고 보는 사람의 오해를 사고, 반발심을 불러일으키고, 심지어 그 올바름마저 옳지 못한 것으로 뒤바뀌기까지 한다. 옛날부터 말을 곱게 해야 한다 했다. 옛날에 국왕이 남면해야 한다고 한 것은, 단순히 남쪽을 바라보고 앉아야 한다는 것만 아니라 부드럽고 따뜻하게 다스려야 한다는 뜻을 내포한다. 국왕부터, 그러니까 지금 식으로 말하면 정치 지도자부터 말을 부드럽고 따뜻하게, 간결하면서도 유머러스하게, 때로는 곡진하고, 때로는 완곡하게 표현할 수 있어야 민심이 덩달아 편안해질 수 있다는 뜻이리라.말을 어떻게 쓰느냐 하는 것은 그러니까 우리 사회에서 지긋지긋할 정도로 넘쳐나는 좌니, 우니, 보수니, 진보니 하는 것보다는 그 말을 쓰는 사람이나 집단의 성정에 관계하는 것이다. 돌아가신 어느 대통령께서는 텔레비전 화면을 통해 보면 부드럽고 완곡하게 말씀하시는 장면을 잘 보여주지 않았고, 이 때문인지 그분을 열렬히 지지하는 사람들 중에는 정치적 견해가 조금만 차이나도 입에 담을 수 없는 말을 자유자재로 퍼나르는 이들이 적지 않았다. 조롱과 풍자는 사회적으로 필요한 말의 쓰임 가운데 하나일 수 있지만 이것이 지나쳐서 같은 '편' 사람들조차 눈살을 찌푸리지 않을 수 없는 정도가 되면 아주 곤란하다. 그래도 그분은 뜨거운 사람이어서 그 안에 어떤 모순과 잘못됨이 있었는지 몰라도 자신이 옳다고 생각한 것은 감추지 않고 솔직하게 표현하는 능력을 갖추고 있었던 것 같다. 그 후 말이 피 흘리는 일은 점점 더 심각해졌다. 지난 십 년 사이에 사람들은 진정함이 결여된 말의 성찬, 차라리 교활하다고까지 해야 할 어법에 잔인하고 비정한 짓누름의 말들을 '위'에서 보고 '아래'에서 함께 썼다. 말로 이루어지는 온갖 담론 장들, 토론과 댓글과 선언, 성명 같은 모든 곳에서 말들은 피를 흘린다. 상처가 덧나 염증이 생기고 병세가 아무리 심각해져도 사람들은 말쯤이야 자신들의 의지와 올바름과 욕망을 실현하기 위한 한갓 도구에 불과하다고 생각하는 듯하다. 예전에 우리에게도 뛰어난 말의 예술사 한 분이 계셨다. 돌아가신 대통령 가운데 한 분으로, 늘 비방, 마타도어에 시달리는 처지였건만 야당 지도자일 때도 여간해서는 화내는 표정을 보이지 않으셨다. 기자들과 인터뷰를 하거나 새해 인사를 할 때는 특유의 유머 감각으로 좌중을 따뜻하고 부드럽게 이끌곤 하셨다.이 분이 돌아가셨을 때 필자는 동교동의 어떤 출판사에서 책 편집 일을 하다 장례 주최 측에서 나누어주는 그분의 일기 발췌본을 받아보았다. 그중 어떤 부분은 음력설을 앞둔 때의 기록이었다. 거기서 그분은 설을 앞두고 생활에 시달리는 사람들을 향한 안타까운 마음을 표현하면서, 월급을 받지 못한 사람들뿐 아니라 월급을 주지 못한 사람들에 대해서도 동정을 금치 못하셨다. 그때 필자는 세상 경험이 적은 데다 없는 사람 편을 들어야 한다는 마음만 확고하던 때였다. 제때 월급 못 받으며, '노동 착취' 당하는 사람들을 말할 수 없이 동정하면서도, 월급을 주지 못해서 당하는 괴로움 같은 것이 있으리라고는 별반 헤아려 보지도 못했었다. 확실히 세상 사람은 모두 불쌍한 존재인 것이다. 월급을 받지 못하는 사람도, 주지 못하는 사람도, 그리고 돈이 아주 많은 사람도 사실은 불쌍하다. 사람들은 서로의 처지를 보다 관대하게 볼 줄 알아야 하고 이 이해와 동정의 마음을 담은 말들을 아름답고 사랑스럽게 쓸 수 있어야 한다. 그런 때가 와야 한다고 생각한다./방민호 문학평론가·서울대 국문과 교수방민호 문학평론가·서울대 국문과 교수

2018-09-03 방민호

[방민호 칼럼]고독한 항해사 최인훈 선생

소년시절 북한 초기사회주의 경험월남이후 그의 문학에 결정적영향전후 남북 이념대립 '광장'에 녹여자신을 난민간주 이상적사회 추구고단했던 탐색자여 고이 잠드소서작가 최인훈 선생이 영면에 드셨다. 공식적으로는 1936년생이라지만 실제로는 1934년생, 1·4 후퇴를 앞두고 북한 원산에서 부산으로 월남해서 목포에서 고등학교를 다니셨다. 원래 원산에서 고등학교를 다니고 계셨지만 여기 와서 다시 입학해야 했고 부모님이 학교 다니기 좋게 출생 연도를 낮춰 주었다고 한다. 필자는 요즘 이른바 월남문학이라는 것에 관심이 간다. 처음 이 말을 쓸 때는 국문학자가 베트남 문학을 공부하느냐는 말까지 나올 정도였지만 지금은 그렇지만은 않다. 1945년 8월 15일 해방부터 1948년 남북한 단독정부 수립을 거쳐 1950년 6월 25일부터 1953년 7월 27일에 이르는 약 8년의 세월 동안 남으로 내려올 사람들은 '전부' 내려오고 북으로 올라갈 사람들은 '전부' 올라갔다. 최인훈 선생은 원산고등학교 1학년 학생으로 이른바 원산철수라는, 흥남철수 직전의 철수 작전 때 한 가족 모두가 미군 수송선을 타고 남쪽으로 내려왔다. 최인훈 문학은 바로 이러한 '월남'이 낳은 문학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문제는 결코 간단치 않은데, 왜냐하면 소년 최인훈은 해방부터 월남하기까지 모두 5년 정도 북한 초기 사회주의 체제를 경험한 사람이 되었고 이것이 그의 문학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다. 해방이 되자 소년 최인훈의 모든 것이 달라졌다. 나중에 최인훈은 그의 긴 소설에서 해방이 되자 가장 많이 달라진 것은 무엇보다 사람을 때리지 않는 것이었다고 했다. 해방되기 전에는 조선 사람은 어디서든 얻어맞았다고 했다. 병원에서까지 사람을 때렸다는 문장을 읽을 때 필자는 가슴이 아팠다. 해방이 되자 북한 사회주의 정권은 학교나 병원에서 아이들을 때리지 않는 대신 유산자들의 재산을 몰수하고 살던 곳에서 추방시키고 학교에서는 계급주의 사상교육을 기계적으로 시행했다. 함경북도 회령에서 목재소를 운영하던 최인훈의 부친은 유산자 계급으로 몰려 재산을 내놓아야 했고 원산으로 이주했다. 원산 중학교의 소년 최인훈은 소설에 따르면 공부를 잘했어도 계급이 다르다는 이유로 담임선생이 사주하는 냉혹한 '자아비판'에 시달려야 했다.원산고등학교에 가서는 경험의 빛깔이 달라지기는 한다. 그러나 전체주의-사회주의 체제에 대한 체험적 인식은 월남 후 그가 자신의 이념적 방향을 조율해 나감에 있어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과연 이상적인 사회는 어떤 사회인가? 자본주의냐, 사회주의냐 하는 이분법적 대립을 거절하는 최인훈 문학의 고유한 특질에 주목해야 한다. 그의 문제작 '광장'의 주인공 이명준은 친일파가 득세하는 남한 사회를 떠나 월북하지만 북한 체제에 대한 환멸을 느낀다. 그는 6·25 전쟁 중 거제도 포로수용소에 갇혔다 남과 북이 아닌 제3국을 선택한다. '회색인'이라는 소설 속 주인공 독고준은 '임박한 파국'을 앞두고 혁명에 뛰어들어야 한다는 친구의 주장을 거절하고 사랑을 원리로 삼는 이상적 사회를 구상하기 위한 고독한 작업에 몰두한다. 앙가주망, 곧 참여냐, 순수냐 하는 이분법적 선택을 거절하는 독고준의 '회색빛' 이념은 순백색이나 순적색보다 진실에 가까운 빛이라고, 필자는 늘 생각하고 있고, 지금도 그것은 그러하다.미군 수송선을 타고 월남했던 그는 그 자신을 '난민'으로 간주했고 전후의 한국 사회 또한 '난민촌'과 같은 것이라 생각했다. 오늘날 한국사회는 스마트폰, 인터넷에 온갖 첨단 문화로 들썩이고 있으므로 이런 규정은 비록 비유적일지라도 마음에 들지 않을지 모른다.그러나 이 고도 사회의 이면을 들여다보면 현대 문명이라는 거친 바다를 풍파에 휩쓸려 이리저리 떠도는 폐선의 이미지를 떠올릴 수 있으리라. 아무리 높이 쌓아 올리는 고층 아파트에서도 싸구려 임시가옥 냄새가 나지 않던가? 오래된 것들은 어느 사회에서보다 일찍 제 빛을 잃고 혼탁한 대기 속으로 사라져버리지 않던가?최인훈은 한국 사회가 난파선으로 현대의 바다를 이리저리 표류하는 상태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한지, 어떻게 해야 하는지 고민한 작가였다. 그러기 위해 그는 '화두'라는 소설이 보여주듯 미국과 구 소련이라는 두 개의 제국을 차례로 순례했다. 제국과 식민지, 좌와 우, 남과 북이라는 이항대립의 주박에서 벗어나기 위해 그는 평생을 건 긴 여행을 했다.고단하고 외로웠던 문명의 탐색자여, 풍랑치는 현대 바다 위 고독한 항해자여, 이제 고이 안식을 취하소서. 그대의 오랜 손때 묻은 키를 누군가는 이어받을 수 있으리니./방민호 문학평론가·서울대 국문과 교수방민호 문학평론가·서울대 국문과 교수

2018-07-24 방민호

[방민호 칼럼]무궁화호 타기

바랑·트렁크·백팩 등 다양한 가방맨발·농구화·샌들 갖가지 신발들빽빽한 기차안의 '사람 사는 풍경'사람 살리는 정치라는게 무엇일까그들 삶 이해하는 일 생각케 한다요즘엔 무궁화호 타는 게 옛날보다 쉽지 않다. 한두 시간 전에도 코레일 어플에 좌석표가 남아 있던 시절은 지나갔다. 휴일 날 대전에 가려고 급하게 표를 찾으면 없다. 비상이다.4호 칸은 열차카페라 하는데 실상은 입석 승객 천국이다. 카페 기능은 잃어버린 지 오래다. 차내 서비스가 없는데 카페란 말은 어울리지 않는다. 자판기가 이 차 중 카페의 전부다. 그래도 앉아서 먹으라고 창을 향해 앉을 수 있는 좌석도 2~3인용이 셋 있다. 반대편에는 서서 먹으라고 긴 배튼도 놓여 있다.한 이십 분 전에 이 카페를 찾으면 입석이라도 버젓한 좌석 자리를 잡을 수 있다. 아뿔싸, 늘 늦듯 이번에도 늦었다. 방법이 있기는 하다. 긴 배튼 아래 바닥에 '철푸덕' 앉아 가는 것이다. 긴 좌석 의자에 셋이 비좁게 앉아 가는 것보다 훨씬 나을 수도 있다.그래도 꽤 일찍 플랫폼에 들어온 덕분에 제법 좋은 자리에 '일요신문'을 깔고 앉았다. 바닥에 깔고 앉으려고 '스토리웨이'에서 일부러 샀다. 인터넷, 휴대폰을 지금만큼 많이 안 볼 때는 '일요신문' 어지간히도 봤다. 그걸 봐야 갈증이 풀릴 것 같은 때가 있었다. 지금은 정치에서 멀어졌다. 지방선거라는데도 뉴스가 귓등 바깥으로 스쳐 지나간다.출발할 때가 가까워오자 드디어 사람들이 '꾸역꾸역' 밀려들어 온다. 옛날 전쟁 때 피난 갈 때야 비할 바 없고 비둘기호 때보다도 낫겠지만 그래도 사람 많다. 먼저 내 옆에 사람들이 혹은 서고 혹은 앉더니 그 앞사람 지나다니는 곳에도 엉덩이 붙이고 앉고들 한다. 기차가 영등포에 서자 다시 한 번 사람들이 밀려든다. 공기가 점차 사람들 숨으로 덥혀진다. 아직 사람 냄새는 여름이 덜 되어 나쁘지 않다.한 스님이 사람들 꽉 들어찬 곳으로 커다란 바랑을 짊어지고 문간에 나타났다. 어떻게 될까. 스님은 사람들을 헤집고 들어오시더니 나와 흰 트렁크를 모셔놓고 선 키 큰 젊은이 사이 약간의 빈 공간에 커다란 엉덩이를 '들이밀고' 나처럼 '철푸덕' 앉아버리신다. 그보다 먼저 짊어지고 오신 바랑은 내 에코백이 놓여 있는 모퉁이에 털썩 던져 놓으셨다. 이런 경우에 화가 나는 사람은 유머 감각 없거나 야박한 치다. 다 같은 신세인 때문이다. 자리를 슬쩍 옮겨 공간을 드린다. 스님의 엉덩이는 '크다'. 스님 앞에 있게 된 여학생 둘이 고개를 돌리고 휴대폰에 더욱 열중한다.나는 스님의 모습을 옆으로 살펴본다. 승복은 낡디낡으셨는데 걷어붙인 팔뚝에 검버섯이 졌다. 얼굴은 햇볕에 그을린 데다 원래 붉어 보인다. 연세가 있으시다. 예순은 넉넉히 넘으셨다. 기차가 떠나자마자 크록스 신발을 아예 벗어놓고 맨발이 된 채 발을 뻗고 주무신다. 수원까지 내리 주무시다 문득 잠을 깨셔서는 옆에 사람한테 동대구까지 간다고 사투리 섞인 말씀 툭 던지시고는 또 주무신다. 천안에서 문득 잠을 깨셔서는 여기 대전이냐고 물으시고 또 주무신다. 휴대폰만 보던 여학생 둘이 일어선다. 자리가 여유가 났다. 트렁크 젊은이도 천안에서 나간다. 인총 빽빽하던 카페가 갑자기 숨통이 트인다.이제 여유로운 마음으로 카페에 둘러앉고 선 사람들을 엿볼 수 있게 된다. 사람보다 차라리 가방들이 보인다. 바랑에, 트렁크에 비닐백에, 에코백에, 가죽 가방, 캐리어, 백팩에, 가방도 가지가지다. 이번에는 발들을 본다. 맨발에, 농구화에, 축구화에, 샌들에, 슬리퍼에, '삐딱구두'에, 스니커즈, 삼선화도 있다.가끔 무궁화호는 뜻하지 않은 곳에도 선다. 이번에는 부강역이다. 언젠가는 전의역에도 섰다. 나는 작은 역도 빠짐없이 쉬어가던 비둘기호가 지금도 그립다. 스님은 여전히 수면 삼매경이시다. 크록스 신발은 벗어 두 다리 사이에 끼워 놓으셨다.사람 사는 일이 무엇이냐. 사람을 살리는 정치라는 것이 무엇이냐. 나는 고개를 가로젓고 사람들 삶을 이해하는 일을 생각한다. 기쁘게도 슬프게도 생각 말고 더 깊이 들어가야 할 때다./방민호 문학평론가·서울대 국문과 교수방민호 문학평론가·서울대 국문과 교수

2018-06-11 방민호

[방민호 칼럼]작가 김사량을 생각한다

사상범으로 日서 보여주기식 체포해방 되자 북한으로 돌아갔고6·25 참전중 9·28 수복때 전사왜 덧없이 희생되어야 했던가?참으로 지혜가 필요한 시대였다작가 김사량의 본명은 김시창이다. 그는 1914년에 평양의 잘 사는 집안의 아들로 태어나 공부도 잘한 사람이었다. 평양고등보통학교를 거쳐 일본 도쿄제국대학에 독문학을 공부하려 유학까지 했다. 본디 잘 사는 사람은 래디컬한 생각을 갖기 어렵건만 그는 달랐던 것 같다. 고등보통 1학년때 광주학생의거가 일어나자 시위에 참가해서 일본 관헌에게 쫓겨다녔고 5년 졸업반 때는 일본 장교의 학교 배속에 반대하는 동맹휴교에 참가하여 끝내 졸업하기 어려운 지경으로 몰렸다. 손창섭 장편소설 '낙서족' 주인공이 그러하듯이 김사량도 반도 안에서는 공부하기 어렵게 되자 일본에 밀항해서 공부를 계속하고자 한다. 안우식이 쓴 '김사량 평전'에 따르면 그의 형이 이미 도쿄대학에 재학 중이었다. 부산에까지 갔는데 거기서 특고들 눈에 띄어 경찰서까지 끌려갔다 도망 나왔고 형이 소식을 알고 보내준 학생복이며 학생증 위조한 것을 가지고 일본으로 건너가 고등학교에 들어갔다. 그때부터 본격적인 문학 수업을 시작하여 동인 그룹에서 창작으로 나아갔고 도쿄 제대에 들어가서도 동인 활동을 했다. 물론 일본어를 통한 문학 창작활동이었다. 그러나 김사량은 확실히 달랐던 것이 이른바 세틀먼트 운동이라 해서 빈민 지역에 몸소 들어가 거주하면서 그들의 삶과 의식을 개량하는, 일종의 도시 '나로드니키'로 활동하다 다시 경찰에 체포된다. 이로써 김사량은 3개월 구류 처분되었고 뿐만 아니라 일종의 블랙리스트에 오르는 인물이 되었다. 읽은지 오래되어 명확하지 않으나 대학교 재학 중에 '조선예술좌' 같은 연극운동단체에 적을 붙인 것도 그로 하여금 시련의 길을 걷게 한 일로 남았다. 세틀먼트 운동의 경험을 소설로 옮긴 것이 바로 일본어로 쓴 단편소설 '빛 속으로', 그에게 아쿠타가와 상 후보의 '영예'를 안겨 준 작품이다. 그는 한국어와 일본어 두 개의 언어로 창작활동을 했는데, 이 세대의 작가들에게 언어 선택이라는 문제는 지금 생각하기보다 아주 미묘하고도 어려운 문제였다. 고등보통 시절에 중국 유학을 꿈꾸었고 나아가 미국으로 가 영어소설을 쓸 생각을 했던 그이니만큼 일본을 괄호에 넣고자 하는 반제국주의 성향이 강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 일본에 유학하고 아쿠타가와 상 같은 제도 문단권으로부터 인정을 받으면서 그의 문학 언어 선택은, 일본인들에게 조선인들의 삶의 실상을 제대로 알린다는 명분 아래 일본어 쪽에 더 많이 기울었다. 이런 상황에서 문제작이라 할 만한 '천마'라는 일본어 소설이 나왔고 이것이 한국어로도 남겨지지 않은 것을 무척 아쉽게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더욱 흥미로운 것은 그 다음 국면이다. 1941년 벽두부터 조선사상범 예방 구금령이라는 것이 발동되자 사상범 전력이 있던 김사량은 일본에서 본때 보여주기 격으로 체포되었다 부친의 도움으로 간신히 풀려난다. 이 법령은 전두환 정부 시절의 사회안전법 같은 것으로 이미 치안유지법 사범, 즉 오늘날의 국가보안법 사범이 되었던 자는 다시 죄를 저지를 우려가 있다는 '추측'만으로 잡아 가둘 수 있는 이상한 법이었으며, 이것이 당대 사람들에게 미친 영향은 작가 김남천의 단편소설 '등불'에 아주 잘 묘사되어 있다. 이 일제 말기 체제 아래서 김사량은 3,4년 '보호색'을 띠고 체제에 동화될 수 있는 사람처럼 살았지만, 1945년이 되자 중국으로 파견된 틈에 냅다 탈출의 길을 선택, 연안으로 들어가 저항군이 된다. 이런 그에게 해방은 무엇이었을까? 필자는 요즈음 문학인들의 1945년 8·15 이후에 관해 생각한다. 그는 해방이 되자 북한으로 '돌아갔고' 6·25 전쟁 중에 참전, 남쪽으로 내려왔다 9·28 수복의 와중에 전사해 버리고 만다. 그는 정말 사회주의자였을까? 왜 그는 북한을 선택했던 것일까? 조국의 현실에 괴로워하는 양심가였던 그는 왜 그렇게 덧없이 희생되어야 했던가? 참으로, 지혜가 필요한 시대였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지금도 다르지 않다. 눈에 보이는 상황이 달라 보일 뿐, 험한 세상은 지식을 쌓은 사람들에게 냉정할 것을 요구하는 것이다./방민호 문학평론가·서울대 국문과 교수방민호 문학평론가·서울대 국문과 교수

2018-04-30 방민호

[방민호 칼럼]봄에 통영으로

그리운 박경리 선생님의 고향홀로 원주서 25년 '토지'와 싸우던그분 생각하며 서피랑에 오른다깊이 세속 물든 속물 같은 사람이그래도 세상 끝에 와 서니 좋다맑은 바다에 몸 깨끗이 씻고 싶다3월 이른 봄에 통영에 간다. 박경리 고향 통영이다. 작곡가 윤이상과 화가 전혁림의 고장 통영이요, 문학연구가 김재용의 고향 통영이다. 아침 8시 25분 용산발 케이티엑스 열차다. 옛날에는 용산에서는 호남만 갔는데, 이제는 용산에서 마산도 가고 부산도 간다. 서울역에서 목포도 간다. 참 좋은 변화다. 옛날에 시인 백석이 통영 처녀 박경련을 사모해서 그곳에 갔다 했다. 그때 마산까지 가서 거기서는 배를 타고 갔다 했다. 친구 허준의 결혼식에서 만난 그녀를 그는 마음에 두었고, 그래 세 번이나 그녀를 만나러 그곳에 갔다 했다. 친구 신현중이라는 사람이 주선을 놓았다는데, 나중에는 오히려 그가 그녀와 맺어지고 말았다. 세상에는 이런 아이러니가 많다. 마산역에서 내려서는 버스를 타고 통영으로 향한다. 한 시간 걸렸을까, 도착한 우리가 처음 찾아든 곳은 물론 식당, 금강산도 식후경이니까. 점심 메뉴로 생선구이가 나왔다. 고등어는 알겠고, 나머지는 분명치 않아 묻는데, 어느 한 분께서 이건 돔이고 이건 서대고 이건 뭐라고 가르쳐 주신다. 아무래도 바닷가에서 자란 분만 같다. 이에 덧붙이는 말씀, 서대와 박대는 다르다는 것이다. 그게 무슨 말씀인가 궁금해들 하니, 이렇게 말씀하신다. 서대는 검고 박대는 불그스름하단다. 또 말려서 찌면 서대는 박대보다 살이 깊단다. 마지막으로 서대는 남해안에서 나고 박대는 서해안에서 난다기도. 햐. 잘도 아신다. 그러자 시인 백석 생각이 바로 난다. 백석 수필 가운데 '동해'라는 것이 있다. 여기서 백석은 운치 있고 맛깔스럽게 동해안 풍경을 읊어가다 말고 뜬금없이 툭 이런 말을 던진다. "……그대나 나밖에 모를 것이지만 공미리는 아랫주둥이가 길고 꽁치는 윗주둥이가 길지."하, 공미리라. 공미리가 뭐냐. 옛날에 이 수필을 읽고 백과사전을 찾아본즉, 공미리란 학꽁치의 다른 말이라 했다. 그러자 저절로 무릎이 쳐졌다. 학꽁치와 꽁치, 생긴 것은 비슷한데 한 놈은 아랫주둥이가 더 길고 또 한 놈은 윗주둥이가 더 길다는 것이다. 문인이 이렇게 섬세하게 바다 것을 잘 아는 수도 있을까.서대와 박대를 이렇게 간명하게 구별하는 걸 보면 세상에는 자연을 속세보다 더 잘 아는 사람들도 많은 것 같다. 부러운 일이다.이제 우리는 세병관으로 향한다. 통영은 옛날에 통제영이 있던 곳, 여기에 서울의 경회루, 여수의 진남관과 더불어 한국에 남은 웅장한 목조 건축물의 하나, 세병관이 우뚝 서 있다. 여기서 걸어서 조금만 가면 서문고개, 통영성의 여러 문의 하나에서 유래한 이름이고, 그곳에서 문호 박경리 선생이 세상에 났다. 우리는 박경리 선생의 생가를 찾아 큰 길에서 좁은 골목으로 꺾어든다. 리어카도 다니지 못할 작은 골목 안쪽 어디에 박경리 선생 생가라는 붉은 벽돌 두 장 정도 크기밖에 안 되는 안내판이 붙어 있다.박경리 하면 나는 눈물이 날 만큼 그리운 분이다. 세상 뜨시던 해 봄에 근황을 여쭈러 갔더니 말씀이 이리 흩어지고 저리 흩어졌다. 전에 없이 그러시기에 이상도 해서 어디 몸이 아프시냐고 물었다. 그러자 천연덕스러운 거짓말을 나중에 알고 보니 '늘어놓으신' 것이었다. 연말에 회를 잘못 먹은 게 탈이 나서 이렇게 오래간다는 것이셨다. 하지만 그때 이미 선생께서는 당신의 깊은 병을 알고 계셨다. 홀로 원주 들어가 25년을 '토지'와 싸우던 그분 생각을 하며 거기서 멀지 않은 서피랑에 오른다. 바람이 따뜻한 날 답지 않게 자못 차다. 통영 포구가 한눈에 들어온다. 하얀 건물들과 흰 물감 섞은 하늘색 물감 풀어놓은 것 같은 바다.세상 끝에 와 있는 것 같다. 너무 깊이 세속에 물든 속물 같은 사람이, 그래도 세상 끝에 와 서니 좋다. 저 맑은 바다에 몸을 깨끗이 씻어내고 싶다./방민호 문학평론가·서울대 국문과 교수방민호 문학평론가·서울대 국문과 교수

2018-03-19 방민호

[방민호 칼럼]많이 아픈 후배를 위해

말수 적고 다정했던 후배에게모진 병고 시달림 뒤늦게 알아시대의 격류 요란하다지만난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 오직 그녀에게 생명의 따스한 빛 다시 돌아와 주기만을 바랄뿐얼마 전이다. 밀양에서 큰 불이 나서 제천에 이어 사람들 가슴을 아프게 하더니 서울 세브란스 병원에서도 불이 났다고 했다. 소식을 들은 건 불을 다 끈 다음이다. 이번 불은 다행히 소방시설이 잘 되어 있어 번지지 않았다는데, 그래도 소식을 듣고는 화들짝 놀랐다. 마침 아는 사람이 바로 그때 입원해 있었다.혈액암에는 두 종류가 있어 특히 그 한 종은 고치기 어렵다. 고등학교 때부터 알던 후배가 그로 인해 고생하다 그 병원에 들어가 있었다. 조혈모 이식 수술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었다.고등학교 2학년 여름방학을 맞이할 때쯤 학업에 대한 꿈을 거의 완전히 잃어버렸다.무슨 일인가를 겪으면서 사람은 평범하게, 평균적으로 사는 게 좋다고 생각하게 됐다.여름방학 지나 늦가을에 이르자 정신적 긴장이 극도에 다다른 나머지 밤에 발작적인 증세가 나타났다.분명 꿈을 꾸고 있었는데 현실에서처럼 행동하고 있었다. 현관문 여는 소리에 부모님이 일어나 나와보니 내가 내복 바람에 맨발로 현관문을 열고 있었다고 했다. 그때 우리집은 단독주택이었다.달려와 무슨 일이냐고 만류하자 '몽유병' 환자는 기를 쓰고 바깥으로 뛰쳐 나가려고 했다. 서슬에 아버지의 러닝셔츠가 찢어지고 물어뜯는 바람에 팔뚝에도 피가 흘렀다.이웃집 사는 아버지 후배까지 달려와서야 겨우 택시에 몽유인을 밀어넣고 병원으로 향할 수 있었다.한 병원에서 거부당하고 또다른 병원으로 향하던 중에야 몽유인은 겨우 꿈에서 깨어났다. 그렇게 가을, 겨울이 다 가고 봄이 오자 학교는 견디기 힘든 곳으로 변했다.연합 서클이라고, 남학생과 여학생이 함께 어울리는 독서 동아리가 대전에 있었다. 남들은 공부하러 제각기 학교로 돌아간다는 3학년 봄에 몽유인은 본격적으로 서클활동을 시작했다. 카뮈의 '이방인'을 읽고 이어령의 '장군의 수염'도 읽었다. 그 무렵에는 다들 실존주의에 열을 올렸다.5월이 되자 일요일을 빌려 체육대회를 했다. 남학생들끼리는 농구 시합을 했다. 전반전 끝난 휴식시간에 여자 후배 하나가 다가왔다. 내 셔츠에 운동장 흙이 묻어 있는 것을 말없이 털어주는 것이었다.'운영전'을 보면, 안평대군 궁궐에서 글씨를 쓰던 김진사의 먹물 한 방울이 벼루 시중을 들던 운영의 손가락에 잘못 튄 것이 불타는 사랑의 도화선이 된다. 몽유인도 그날 이후로 정신이 없어졌다.그때는 휴대전화는커녕 삐삐도 없었다. 집집마다 전화가 겨우 한 대 있고 전화비도 꽤나 아낄 때였다. 부모님이 주무실 때를 기다려 전화를 시작해서 그 집 시누이가 새벽밥 지으러 일어날 때까지 무슨 이야기들인가를 한없이 나누기도 했다. 그런 일이 가능한 것이 바로 십대라는 나이대일 것이다.그 시절에는 그후로도 오래 계속된 등화관제라는 것도 있었다. 십대의 소년과 소녀가 제과점에서 나와 비가 세차게 내리는 어느 고등학교 담길을 걷는데 사방이 갑자기 완전한 어둠으로 변했다. 가로등이 모두 꺼져버린 것이다.우산조차 하나를 쓰지 못하고 두 우산 속에 나란히 걷는데 무슨 다른 용기를 낼 수 있었으랴. 등화관제 그날조차 손과 손의 거리를 이겨내지 못했는데, 다른 날들이라고 무슨 사건이 가능할 수 있었으랴.대학입학 시험도 보고 정신병 환자가 서울로 가는 게 결정된 후에 서클 지도 선생님 댁을 둘이 방문한 일도 있다. 흰 눈이 소담스럽게도 내리던 날, 그때 아직 총각이던 국어 선생님 하숙집을 찾아가 몇 시간을 함께 놀았다.그러고 나서 어언 세월이 흐르고 흘렀다. 말수 적고도 다정한 후배에게 모진 병고가 찾아 들었음을 뒤늦게야 알았다.세상 사람들의 시간은 저마다 다르다. 시대의 격류가 요란한 소리를 내고 있다지만,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 이 정신병 환자는 다른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 오직 하나, 이 후배에게 생명의 따스한 빛이 다시 돌아와 주기만을 간절히 바랄 뿐이다.며칠 전부터 후배의 휴대전화는 전원이 끊어졌다. 그래도 이 수술 이후 나타난다는 숙주반응을 이겨내고 후배는 다시 웃는 얼굴을 보여줄 것이다./방민호 문학평론가·서울대 국문과 교수방민호 문학평론가·서울대 국문과 교수

2018-02-12 방민호

[방민호 칼럼]새해엔 어떤 삶을 살아야 할지

우리들이 상상하는 모든 슬픔기쁨이 들어 있는 놀라운 삶입신양명·돈 벌기도 중요하지만지금은 풍요롭고도 절박한 시간올해엔 미래 기약할 수 없는나에게 '은총' 가득하길 기원한다또 새로운 한해가 열렸다. 이 개띠 해도 벌써 열흘 가까이 흘러갔다. 이 새해에는 어떤 삶을 살아야 할지 생각해 본다. 지난 몇 년 동안 텔레비전을 보지 않았다. 마지막 몇 년은 팟캐스트만 끼고 살았다. 세상에 무슨 일이 벌어지는가는 직장에 배달되는 신문 헤드라인으로만 알았다. 정부 입맛에만 맞추는 방송 언론에 대한 혐오에서 비롯된 습관이었다. 좋은 점이 없지 않았다. 시장 논리가 겨냥하는 것, 대중들이 원하는 것을 아예 모르게 되다시피 했다. 무슨 새 물건이 나왔는지, 어떤 가수가 인기를 끄는지, 무슨 영화가 수입됐는지 알지 못했다. 아이들이 바다에서 무참하게 죽어가는 세상에서 아무렇지도 않은 척 벌어지는 일들을 알지 않아도 되었다.정부가 바뀌고 방송사들이 달라져서일까. 이제 겨우 브라운관에 눈을 주게 된다. 아직도 드라마 같은 것은 무엇을 하고 있는지도 알지 못한다. 그래도 잠깐씩이라도 앉아 뉴스 화면도 본다. 내가 원하는 세상만이 아닌, 뭇사람들의 세상에도 관심을 '표명'해 본다. 그러다 알게 된 것 하나가 교육방송에서 하는 의학 관련 논픽션 프로다. 아픈 삶을 그리는 것으로 그중 많은 사람들이 기약 없는 투병 생활을 하기도 한다. 끝내 삶의 마지막 국면에 다다르는 사람들의 이야기도 있다. 새로 시작한지 그리 오래된 것 같지 않다. 이상한 일은, 사람들이 병에 걸려 신음하는 상황을 지켜보는 일이 위안을 준다는 사실이다. 왜 그럴까? 자신은 아직 살아 있다는 안도감 때문일까? 남의 불행을 보고 쾌감을 느끼는 잔인한 심리가 작동하기 때문일까? 그런 것도 없지 않을 것이다. 인간은 확실히 이기적이다 못해 철면피한 요소를 가진 존재다. 그것만은 아닐 것이다. 사람들의 고통과 불행 속으로 들어가는 심리에는 다른 선한 면도 작용할 것이다. 사람들은 더 깊이 들여다보면 자기 아닌 존재를 향한 이해와 동정의 마음을 가진 존재인 것이다. 텔레비전 화면 속의 사람들 때문에 눈물을 흘릴 때 우리에게는 자기도 모르게 선량한 심성이 작동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타자' 이해와 동정의 더 깊은 바닥에는 우리 자신도 그들과 다를 바 없는 운명을 타고난 존재라는, 본능적 감각이 작동하고 있는 것도 같다. 그것을 가리켜 고대 그리스의 한 비극은 "죽어야 할 운명을 타고난 존재"라고 정의했다. 인간은 이 땅에 태어나 삶이라는 것을 만들어 가다 어느 지점에 다다르면 그것을 끝내야 하는 한시적 존재다. 그로부터 사람들의 삶을 좌우하는 모든 문제가 생겨났고 그 가장 중요한 현상이 바로 종교다. 사람들은 종교를 믿는다. 그 이유는 영원히 살기 위해서다. 지상에서 불멸할 수 없는 사람들이 천상에서의 불멸을 꿈꾸는 것. 죽어 육신을 땅에 묻어야 할 사람들이 영혼만은 살아 영원에 귀속될 것이라 믿는 것. 이것을 가리켜 종교적 염원이라 할 것이다. 세상에는 불멸을 지향하는 다양한 형태의 종교들이 있고, 그 어느 것에나 신심이 깊은 사람들은 그 속에서의 신이, 아니, 믿음이 그로 하여금 불멸에 들게 하리라 믿는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 깊은 믿음 속에서도 비록 순간적일지라도 두려움과 슬픔에 잠길 때가 있다. 이를 가리켜 의심이라고, 회의라고 할 수도 있다. 그렇더라도 이것은 이 땅과 대지에 결부된 삶의 기쁨과 즐거움과 행복이 죽어서는, 다시 말해 영혼의 불멸과 영원성 속에서는 다시 주어지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에 대한, 어떤 실물적 감각에서 오는 것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의학 프로그램에 나오는 고통스러운 사람들의 삶 속에서 사람들은 자신들의 삶의 본질을 느끼고 있다고 생각한다. 지금 건강하고 아무렇지도 않은 듯해도 어느 일정한 시점이 되면 그 삶에 죽음이 깃들기 마련이다. 뜻하지 않게 암이나 희귀한 병에 걸려 고통 받는 사람들은 바로 우리들 자신의 삶의 말로이기도 한 것이다. 독일 철학자 니체는 이러한 필멸의 운명을 종교에 바치는 것에 반대하여 그 삶을 그 필멸 때문에 사랑할 것을 가르쳤다. 모든 종교도 삶을 사랑하라 하지만 그는 그것이 필멸하는 삶에 대한 근본적인 혐오에 바탕을 두고 있다고 느꼈다. 만약 이 지상에서의 삶의 모든 것이 신의 뜻에 바쳐지는 것이라면 그것은 삶 자체에 대한 혐오를 의미하는지도 알 수 없기는 하다. 그러나 새해 벽두를 논쟁으로 끌어가지는 않도록 하자. 여기서 중요한 것은 우리들의 이 지상에서의 삶이 그만큼 중요하다는 사실이다. 이 삶 속에 우리들이 상상하는 모든 슬픔과 기쁨이 들어 있다. 그 놀라운 복합물이 바로 우리들의 삶이라는 것이다. 정치도, 문화도, 국가 대사도, 입신양명도, 돈을 버는 것도 중요하다. 하지만 그보다 우리는 그처럼 풍요롭고도 절박한 삶을, 삶의 시간을 보내고 있는 것이다. 올해에는 이 사실을 하루도 잊지 않기로 한다. 그리하여 미래를 기약할 수 없는 '나'의 삶이 그 삶의 '은총'으로 가득하기를 기원해 본다./방민호 문학평론가·서울대 국문과 교수방민호 문학평론가·서울대 국문과 교수

2018-01-08 방민호

[방민호 칼럼]찬(讚) 안재성

증언·어렵게 모은 자료로'박헌영'이란 역사적 존재 통해우리가 아는 한국사 새롭게 구성우리는 근대·공산주의 삶 싫고인간이 존중되는 세계 바란다'밥'만 원치 않는건 사람이기에지지난 주 읽은 '박헌영 평전' 생각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는다. 박헌영이라면, 그의 시대로부터 세월이 많이 흘러 이제는 아는 사람만 아는 사람이다. 이 평전의 작가는 왕년의 '노동소설가' 안재성 씨다. 이 평전은 그는 놀라운 작가적 능력의 소유자임을 보여 주었다. 박헌영은 충청남도 예산군 광시면 태생. 필자는 면을 하나 격하여 있는 덕산면에서 출생했다. 가깝다면 아주 가까운 사이. 그보다 필자는 1980년대와 1990년대에 학창시절을 보냈다. 역사라는 것에 관심을 가져야 했던 시대였다. 그에 대해서 아주 잘 알 수밖에 없었다. 그는 1920년대부터 일생을 공산주의로 일관한 사람이요, 해방공간의 이름 '높은' 남로당 당수다. 그의 말로는 비참했다. 6·25 전쟁이 계속되던 1953년 3월 11일 제국주의의 간첩이라는 혐의로 북한당국에 체포, 1955년 12월 15일 사형을 언도받고 1956년 7월 19일 한밤에 권총으로 밀살되고 말았다. 최근 필자의 관심사는 해방 직후부터 6·25 전쟁 끝날 때까지의 8년사를 새롭게 보는 것. 1979년에 "해방 전후사의 인식"이 있었고 2006년에는 "해방 전후사의 재인식"이 있었다. 그로부터 10년이 다시 흘렀다. "해방 전후사의 인식"은 일제말기부터 해방공간까지의 역사적 상황을 민족사의 시각에서 새롭게 재구성하고자 했다. 해방과 더불어 분단이 시작되고 남쪽에서 미군정이 시작되고 단독 정부들이 수립되고 6·25 전쟁이 예비되는 과정들을 대한민국 체제의 관점에서 보는 대신, 어찌하여 한국인들이 미완의 근대를 살게 되었으며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어떤 문제들이 해결되어야 하는지 살피고자 했다. "해방 전후사의 재인식"은 그러한 해방 전후의 한국사를 다시 한 번 재검토할 것을 주장했다. 그 배경이 있다. 1990년 전후로 한 이른바 현실사회주의 체제 붕괴 이후 세계는 미국 중심으로 재편되었다. 프란시스 후쿠야마의 '역사의 종언' 담론이나 신자유주의라는 새로운 정치경제학적 상부구조가 한 시대를 풍미했다. 때마침 한국에는 야만적인 3당합당으로 김영삼 정부가 들어섰다. 이 작은 나라의 어느 한 지역을 고립시키고 그곳을 진보로 몰아붙여 보수끼리 대통합을 하자는 논리였다. 이를 주창한 정치도, 동조한 정치도 민주주의일리 없다. 나중에 김대중, 노무현 정부가 나왔으나 김영삼 정부 말기에 직면한 외환위기로 인해 한국은 깊이 성찰할 여유가 없었다. 경제를 살린다는 것은 곧 미국 중심의 신자유주의 체제에 깊숙히 편입되는 길밖에 없는 것처럼 보였다. 그렇다고 이 정부들의 무지나 실책이나 위선 같은 것까지 변명해줄 생각은 없다."해방 전후사의 재인식"은 이러한 시대가 15년을 경과한 끝에 나왔다. 식민지 체제가 근대화를 가능케 했다면 그와 같은 아이러니를 승인해야 하지 않겠는가? 라는 것이 이 책의 대전제였다. 그로부터 이승만 독재도, 일본의 위안부 문제 책임도, 박정희 5·16 쿠데타와 유신 체제 선포도 '자동적'으로 승인될 수 있었다.필자의 판단에 따르면 이제 우리는 "해방 전후사의 인식"과 "해방 전후사의 재인식"을 동시에 뛰어넘어 새로운 눈으로 우리의 과거를 돌아보아야 할 역사의 '계단'에 다다라 있다. 두 책을 떠받치고 있는 두 상이한 담론의 지위는 물론 같지 않다. 그래도 어쨌거나 새로운 입각점에 서지 않는 한 8·15 해방에서 6·25 전쟁으로 이어진 민족사의 비극을 극복할 새로운 시각을 얻을 수 없다.이러한 상황에서 출간된 지 벌써 8년이나 된 안재성 작가의 새로운 "박헌영 평전"은 하나의 경이다. 옛날에 왕년의 "해방일보" 기자 박갑동이 쓴 "박헌영 평전"을 읽었던 필자였다. 그에 대해서는 웬만큼은 안다고 생각했다. 역시 지식의 세계에 '안다'는 것은 없다. 안재성 작가는 그동안 축적되어 온 증언들, 쉽게 눈에 뜨이지 않는 자료들, 소련 해체 이후 공개된 구소련 문서들과 미국 쪽 자료들을 망라하면서 박헌영이라는 한 역사적 존재를 통해 우리가 안다고 생각하는 한국사를 새롭게 구성해 보였다. 그가 무엇을 썼느냐 하고 묻는다면, 이렇게 대답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는 박헌영의 일생을 단순하게 영웅화시키지 않고도, 또 좌익 공산주의를 예찬하거나 승인하지 않고도, 우리 역사를 식민지 근대화론자들이 간과하거나 의도적으로 무시하는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생각을 새롭게 일깨울 수 있었다. 우리는 '근대주의' 사회나 공산주의 사회에서 살기를 원하지 않는다. 인간이 인간으로서 존중되는 세계를 원한다. 우리는 '밥'만을 원하지 않는다. 그것이 우리가 사람인 이유다./방민호 문학평론가·서울대 국문과 교수방민호 문학평론가·서울대 국문과 교수

2017-12-04 방민호

[방민호 칼럼]헌책방 사연

세상이 바뀌고 나서도숱한 일들이 일어나고 있다하지만 정녕 중요한 것은역시 한 사람이 나고 살고 가는것몇 권 그의 책을 사들고나오면서 다시 한번 생각했다어젯밤이다. 뭔가 허전하다 싶으면 헌책방을 찾게 된다. 어젯밤에는 더구나 박완서 수필집 보아둔 것을 꼭 사야 할 용무도 있었다. 지난번에 만오천 원이라 했었다. 다른 책도 제법 많이 산 데다 초판도 아닌 3판째 수필집이라 미루어 둔 책이었다. 서울에서도 마포 홍익대학교 근처, 그래도 이런 곳에 헌 책을 살 수 있는 곳이 있다는 게 다행이라면 다행이다.가끔 싼 값에 좋은 책을 만나면 그보다 아기자기한 즐거움도 드물다. 옛날에, 청계천 근처 헌책방에서 오스카 와일드의 희곡 '살로메'를 일제 강점기에 한국어로 낸 문고판 책을 발견하고 얼마나 기뻤던가. 이런 경우를 요즘 세속 말로 '득템'이라 한다던가. 그러나, 사실, 요즘은 꼭 그렇게 기쁘다고만은 할 수 없다. 그 헌책 흥정이라는 것이, 요즘은 인터넷에서 경매가 벌어지고 인터넷 유통망을 통한 가격 비교가 언제든 할 수 있게 되면서 간단치만은 않게 되었다. 어쩌다 주인 모르는 책을 싸게 사게 되면 혹여 사람을 속여 넘긴 게 아닌가 찜찜하기 짝이 없다. 그렇다고, 인터넷 유통망으로 가격을 일일이 확인하고 헌책 값을 받을 대로 받으려는 주인님을 보면 어쩐지 얄밉게 느껴질 때도 있다. 이래저래, 귀한 책은 귀한 값 그대로는 못될망정 적당히 쳐주고 그렇지 않은 책은 이유까지 알려 드리며 제 가격대로 사는 게 마음 편하다. 왔다 간 게 불과 한 달 전쯤이었나? 그런데 그 짧은 사이에 헌책들이 꽤 좋은 것들이 진열되어 있는 것 같다. 누가 소장하고 있던 책들을 내놓은 것 같기도 하고. 이 업계에서는 '나까마'(なかま, 仲間)라고 한단다. 이 어원이 맞나 모르겠는데, 내놓아진 책을 싸게 사다 헌책방 같은 곳에 되파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이다. 중간 상인일텐데, 다들 아직까지 일본어로 그렇게들 부른다. 청계천 헌책방 같은 데 서서 그분들 이야기 나누는 것 보면, 좋은 책 나오려면 꼭 어느 분이 돌아가시든가 해야 한다. 책을 사랑해 수집하고 아껴 소장해온 사람이 어느덧 나이가 들어 병석에 들고 그 자손들이 그 무겁고 부피 나가는 것을 어떻게 할 수 없어 처분해야 하는 때가 오면 나카마 분들께는 대목 같은 것이 되는 것이다. 물론 이 나카마 장사를 잘 하려면 책 볼 줄 아는 눈이 있어야 한다. 일제 강점기에 나온 책이면 쇼와(昭和) 25년이 서기력으로 몇 년인지 정도는 알아야 하고, 해방 직후나 1950년대 책을 알아보려면 단기력에서 2333년을 빼야 서기력이 나온다는 것쯤도 알아야 한다. 뿐만 아니라 웬만한 작가나 시인 이름 정도도 그 존재는 알고 있어야 무게로 달아 나오는 헌 책에서 값이 되는 것을 뽑아낼 수 있다. '박노갑'이라면 그렇게 유명한 작가라고 할 수도 없지만 점점 책이 귀한 세상이 되고 보면 그런 작가 책도 가볍다고만 볼 수 없고, 더구나 그가 박완서 작가의 스승이기도 했다고 생각하면 한 번 더 무게를 두어야 한다.박완서 수필집 3판 것을 오천 원을 깎아 주어 쉽게 사고난 후 새로 들어온 헌책들을 살펴보는데, 그 중에 '창작과비평' 1970년대 것들도 그런대로 깨끗한 게 뭉치로 있고, 김성동의 장편소설이며 수필집도 초판 나온 게 있다. 이런 책들은 요즘 쉽게 나오지를 않는 것이다. 어떤 분이 갖고 계시던 건가요? 단골 된 덕에 알아보는 주인께서, 모모한 사람인데, 이름은 알려줄 수 없고, 그런데 그분이 오래 아파서 어쩔 수 없이 내놓는 책들이라고, 당신 보기에도 마음이 편치 않았다 한다. 어느 한 분야에 오래 있다 보면 남들 잘 모르는 데까지 생각이 미치는 법도 있다. 생각이 짚이는 데가 있다. 하지만 그 이름을 발설하지 않는다. 그러면 더 마음이 편치 않아질 것 같아서다. 세상이 바뀌고 나서도 숱한 일들이 일어난다. 하지만 정녕 중요한 것은 역시 한 사람이 나고 살고 가는 것이라고, 헌책방을 몇 권 그의 책을 사들고 나오면서 다시 한 번 생각했다. 밤이 이미 많이 깊었다./방민호 문학평론가·서울대 국문과 교수방민호 문학평론가·서울대 국문과 교수

2017-10-30 방민호

[방민호 칼럼]한반도 재통합을 향하여

통일보다는 차이를 인정하고새 복합체인 '재통합'은 어떨까몸 담아온 사회·체제로 부터거리를 유지하기란 쉽지 않다그러나 새로운 하나가 되려면자신을 이상화 하지 말아야 지난 17일, 이호철 작가를 기념하는 통일로 문학상 제1회 시상식은 재일 한국인 문제를 새롭게 인식하도록 한 각별한 계기였다. 시상식이 거행된 장소가 독특했다. 캠프 그리브스, 판문점에서 멀지 않은 곳이었다. 수상자는 김석범, '화산도'를 쓴 재일 한국인 작가였다. 김석범은 일본에서 지금껏 '조선' 적을 유지하며 작품 활동을 해온 한반도 통합을 위한 상징적 존재라 할 수 있었다. 오래 전에 사이요이치(최양일) 감독의 영화 '피와 뼈'를 동숭 아트홀에서 혼자 본 적이 있다. 이 영화는 일제 때 일본으로 건너간 '한국인' 사내 '김준평'이라는 인물의 일대기를 그린 작품인데, 결코 만만히 볼 수 없는 영화였다. 이 영화에서 김준평 역을 맡은 일본 영화배우 기타노 다케시는 일본이라는 사회를 생존을 위한 투쟁의 무대로 인식하고 본능적인 생존 욕구를 따라 처절하게 적응해 가는 한 재일 한국인의 초상을 그야말로 리얼하게 연기해 냈다. 재일 한국인 문제는 필자의 관심사 가운데 하나였다. 작가 손창섭의 삶과 일본행을 추적한 것도, 그가 일본에 있으면서 '한국일보'에 연재한 장편소설 '유맹'을 책으로 만들며 해설을 붙인 것도 그 때문이었다. '유맹'에는 일제 때 홋카이도로 징용 간 한국인들의 일본에서의 삶이 아주 상세하게 그려져 있는데, 그중 한 사내의 행적은 '피와 뼈'에 등장하는 김준평과 하나도 다르지 않은 듯한 인상을 자아낸다.과연 해방된 다음에도 일본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어떤 의미를 띠는 것일까? 생활의 필요는 그들로 하여금 일본을 떠나 고국으로 돌아오게 하지 못했을 것이다. 일본에 남은 그들은 다른 나라에서 살아가는 것과는 같을 수 없는 삶의 상황에 직면해야 했을 것이다. 먼저, 그들은 일본이 지배했던 나라의 사람들이었다. 차별이라는 문제는 그들의 삶의 운명과도 같은 차원에서 인식되어야 한다. 다음으로, 그들을 더욱 곤란케 한 것은 그들의 '조국'이 둘로 나뉘어 골육상쟁의 전쟁을 치르고 반목, 대립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이 적대가 재일 한국인 사회 내부에 그대로 투영되었음은 물론이다. 재일 한국인들은 구 제국의 이국 땅에서 둘로 나뉜 민족의 불행을 함께 떠안은 채 살아와야 했다. 그들은 한국인이 되거나 북한인이 되거나 일본인으로 귀화를 선택해야 했다. 이도 저도 선택할 수 없다고 생각한 사람들은 아무 것도 선택하지 않았으며, 그들에게는 '조선' 적이라는 지상에 존재하지 않는 상징적인 나라의 '국적'이 붙여졌다. 현실의 국적이 없었기에 그들은 해외로 여행을 떠날 수도 없었다. 이호철 통일로 문학상 수상자 김석범이 아직도 이 조선 적을 가진 사람이라고 한다. 많은 사람들이 남과 북을 이야기할 때 1970년대 전반기까지만 해도 국민총생산이 서로 비슷한 수준이었다고 한다. 또 1970년대 초 북한에서 유일사상 체계가 확립, '영구불변' 체제로 들어섰지만 반면에 한국도 유신체제라는 종신 집권 체제가 군림하지 않았느냐고도 한다. 하지만 어떤 사회, 어떤 체제가 더 나으냐 하는 것은 경제적 수준 이상의 문제다. 또한 겉이 같다고 속까지 같은 것은 아니며 외면상의 유사성만에 매달린다면 사회의 전망을 찾는 문제는 미궁, 미로에 빠질 수밖에 없다. 필자는 생각한다. 일본에 살면서 남과 북의 어느 쪽도 아니고, 일본인도 되지 않는 삶을 산다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 선택인가? 그는 제국, 식민지 체제의 유산으로서, 이 역사적 유산이 최종적으로 해체되는, 미래의 통합된 한반도를 위해 지금 어느 사회, 어느 체제를 선택하는, 생활의 편리를 외면하며 산다. 오갈데 없는 이상주의자이며 현실에 발 뻗기 어려운 '이데올로그'다. 양분없이, 물없이 사는 식물처럼 그는 허공에 떠서 미래에 뿌리 내리기를 고대한다. 필자는 통일이라는 말을 경계한다. 이 말에서는 왠지 살아온 경험의 차이를 용납하지 않을 것 같은 뉘앙스가 느껴진다. 그것보다, 차이를 안고, 새로운 하나, 복합체로서의 하나로 맺어지는 '재통합'은 어떨까. 자기가 몸담아온 사회, 체제로부터 거리를 유지하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새로운 하나가 되려면 자기조차 이상화 하지 않는 조심스러움, 겸허가 필요하다. 고등학교 같은 데서 비무장지대에 대해 많이들 가르친다. 앞으로 비무장지대를 어떻게 만들어야 할까? 그 초록의 야생지대를 이 한반도 남쪽처럼 부동산 투기 대상이 되도록 할까? 북한 땅처럼 황무지로 만들까? 지금 한반도 재통합을 위한 새로운 전망이, 계획이, 겸허가 필요하다. 지금 새로운 역사가 바야흐로 열려 나가야 한다. 이를 위한 '최후의' 시련이어야 한다./방민호 문학평론가·서울대 국문과 교수방민호 문학평론가·서울대 국문과 교수

2017-09-18 방민호

[방민호 칼럼]북한 동해안으로

일제시대 금강산은 민족의 성소이광수가 '금강산 유기'를 썼고원산엔 최인훈·이호철 작가가문학인들의 일이 많았던 함흥한반도 등뼈 훑어 오르듯동해안 북한 문학기행 떠났으면두어 달 전에 "서울문학기행"이라는 책을 펴내 놓고 이번에는 "남해안 문학 기행"을 해볼까 했다. 그것도 좋지만 뭔가 더 새로운 얘기를 써보는 것도 좋겠다, 하고 생각을 돌리니 눈에 들어오는 것이 북한 쪽 동해안이다. 지금은 가지 못하는 땅, 그나마 금강산이라도 왕래는 했었는데, 지난 두 정부 동안 관광 갔던 국민 한 사람이 죽고 남북대화가 단절되면서 그것조차 끊어졌다. 세월이 바뀌었으니, 지금은 전쟁이라도 날 것 같은 분위기지만 머지않은 시기에 다시 오갈 수 있게 되리라고 생각한다. 기왕이면 7번 국도 타고 한반도 등뼈를 훑어 오르듯 금강산 위로 원산, 함흥도 갈 수 있으면 좋으련만. 북한 동해안 문학기행, 이라고 해도 지금은 갈 수 없으니 현재를 쓸 수는 없고, 과거, 함경선 타고 저 두만강 어귀까지 거슬러 오를 수 있었던 때로 한번 가보자. 일제시대 때 금강산은 민족의 성소였다. 이광수가 '금강산유기'를 썼고 "개벽"지 발행인 박달성도 기행을 남겼지만, 뭐니 뭐니 해도 김동인이 "창조"지에 발표한 '약한 자의 슬픔'(1920)의 주인공이나 이광수 장편소설 "재생"의 여주인공이 금강산에 오르는 대목은 인상 깊다 하지 않을 수 없다. 원산에는 누구보다도 최인훈과 이호철 같은 작가들의 기억이 생생하게 남아 있다. 그들은 모두 원산고등학교 다니다 말고 6·25 전쟁을 맞아 우여곡절 끝에 미군 수송선 타고 부산으로 내려와 남한에서의 삶을 시작하게 된다. 6·25중 미군 원산 폭격의 '문학적' 의미는 심각한 숙고의 대상이 아닐 수 없다. 이광수, 메논 등과 밀접한 관계에 놓인 모윤숙도 원산 태생이다. 함흥에 가면 문학인들의 일들이 더욱 많다. 일제 말기에 조선어학회 사건이 함흥영생 여고보 학생의 일기장 내용이 도화선이 되어 일어났다. 이극로, 최현배, 이희승 등 많은 한글학자들이 체포되어 곤욕을 치렀고 이윤재, 한징 두 분은 함흥형무소에서 끝내 옥사하고 말았다. 시인 백석이 함흥영생고보 영어교사로 있으면서 '함주시초' 연작을 썼다. 수필 '동해'도 필시 이쪽에 머물 때 썼으리라. 지도를 보면 '북관'의 관문이라는 함주는 함흥을 에워싼 듯한 모양을 하고 있다. 백석은 평안북도 정주 태생으로 이곳에 와 머물렀지만 고향이 함흥 쪽인 문학인들이 많다. 순서 없이 한설야, 박연희, 안수길, 김은국, 강용흘, 이북명, 김송, 박순녀 같은 이름을 명기해 본다. 낙원, 홍원, 신포를 따라 거슬러 올라 북청에 이르면 작가 전광용의 고향이요, 해방 공간 때 활동한 시인 이찬도 이곳 태생이다. 김동환의 시 '북청 물장수'를 생각하게 한다. 또 "해방전후"를 쓴 여성작가 임옥인의 길주를 옆에 두고 명천으로 해서 단천에 이르면 작가 최정희, 시인 설정식 등이 이곳 태생 사람들이다. 필자는 특히 최정희의 삶과 작품에 관심이 있고 논문도 써본 적이 있다. 아직도 공부해서 쓸 게 많은 작가다. 어떤 곳에서는 성진 태생이라고도 써 있으니, 오늘 한번 최정희의 수필을 직접 찾아보아야겠다. 오늘날 김책시라 명명된 곳은 과거에는 함경북도 성진이었고, 아주 의미 깊은 시인이자 비평가 김기림이 이곳에서 났고 신경향파 작가 최서해, 또 다른 비평가 박치우 등도 여기 사람이다. 김기림에 관해서 최근에 필자는 그와 박인환의 사상적 교호 관계에 관심을 가진 적이 있지만, 그보다 그가 일제 말기에 고향 근방으로 물러나 붓을 꺾고 경성고보 영어 교사로 버틴 일을 너무나 귀하게 여긴다. 경성 출신 시인 김규동이 그에게 배웠다.명천, 어랑 지나 경성에 이르면 작가 이효석의 아내 이경원이 여기서 났고 그런 연유로 이효석이 경성농업학교에 머무르며 자신의 문학세계를 바꾸어 나갔다. 경성은 또 김동환 시인과 손소희 작가가 난 곳이기도 하며, 근처에 유명한 '주을온천'이 있기도 하다. 이 주을온천은 주을에 온천이 있기도 하지만 본래 여진말인 '주을온'에 '천'자가 붙어 이 말이 된 것이라 한다. 수필 등에 자주 나오는 곳이다. 이제 어랑 거쳐 청진에 이르면 영화 "아리랑"의 나운규가 이곳 청진형무소에 있었고, 평론가 이봉래, 동화작가 김요섭, 영화감독 신상옥 등이 여기서 났으며, 부령 태생 작가 장용학이 해방 직후 월남전에 청진여자중학에서 교사로 있기도 했다. 탈북작가 이지명 씨, 김정애 씨도 여기서 살다 남쪽으로 왔는데, 칠보산이 널리 알려져 있다고 했다. 그러고 나면 나진, 웅기, 한반도의 북단에 가까워진다. 유명한 작사가 양인자가 나진, 근대문학 연구가 주종연 선생이 웅기 태생이다. 유난히 더웠던 이번 여름, 동해안으로 떠나는 자동차 행렬이 길고 길었다. 이제 좀 북녘땅 동해안을 따라 거슬러 오르고 올랐으면 싶다./방민호 문학평론가·서울대 국문과 교수방민호 문학평론가·서울대 국문과 교수

2017-08-14 방민호

[방민호 칼럼]'연산군 일기'에서 글줄을 뽑아보다

사람들의 말, 항간에 떠도는 말책줄이나 읽었다는 사람들이멋대로 뱉는 말속에도 진실 있고세상에 대한 판단 있다는 것을알지 못하는 정부는 미래가 없다어느 시대나 유념해야 할 일 아닐까현대문학 전공자이건만 어쩌다 보니 '연산군일기'를 접하게 됐다. 그 시초인즉슨, '서울문학기행'이라는 졸저를 쓰다가 옛날 이광수 홍지동 산장 근처에 탕춘대성이라는 게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 탕춘대성이라는 것은 서울 도성과 북한산성을 잇는 성을 가리키는 말이고 그때 그 탕춘대성이란 근처에 탕춘대가 있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 했다. 탕춘대 또는 탕춘정은 기록에 따르면 연산군 12년 정월에 완성을 본 정자로서, '연산군 일기' 61권, 연산 12년 3월 7일자 기록을 보면 다음과 같이 썼다."정자는 장의사(藏義寺) 서편 기슭 우뚝 솟은 꼭대기에 있는데 청유리와 기와로 이었으며, 위아래의 횡각이 냇물을 수백 보나 걸터 타고 있는데, 모두 청유리 기와로 이고 내를 막아서 저수하였다. 산 안팎에서는 다 두견화를 심고 그 정자 이름을 탕춘정(蕩春亭)이라 하였다. 왕이 자주 거둥하였는데, 왕비 이하도 모두 말을 타고 따랐다. 이 때문에… 항상 말을 수천 필씩 길렀다."연산 12년은 연산군의 재위 마지막 해였다. 그 정자 이름이 봄을 탕진한다는 것인데, 이것을 짓고 이제부터 한판 진짜로 즐겨보겠다 했건만 사실은 그해가 그의 마지막 해였던 것이다. 그는 중종반정(1506)으로 왕위에서 쫓겨난 지 두 달 만에 세상을 떠났다. 탕춘정을 지은 그의 뜻이 무색하게도 그는 정자를 지은 해에 세속의 영화를 잃고 인생마저 마감했던 것이다.연산 12년 기록을 보다, 연산군이라는 인물에 대한 탐구욕이 어쩔 수 없이 일었고 그러다 보니 이제 연산군 재위 첫해의 기록부터 찾아보게 된다.선왕이 세상을 떠나고 새 왕이 뒤를 잇자마자 신하들의 항소가 빗발치기 시작했다. 요샛말로 하면 '군기잡기'인지도 모르겠는데, 이유인즉슨 새 왕이 세상 떠난 아비를 위하여 불교식 재를 지내려 한다는 것 때문이었다. 이것이 사단이 되어 해가 바뀌어 정월이 다 가도록 대신들, 간원들, 선비들이 난리가 났다. 어찌하여 유교 섬기는 나라의 제왕이 선왕의 뜻을 거스르고 왕조의 법통을 제대로 지키지 않고 불교에 기우냐 하는 것이었다.그 중에 상소를 올리는 유생들이 있었는데, 그 말이 꽤나 극언에 가까웠던 모양이다. 드디어 왕이 참지 못하고 죄를 주려 하자 이번에는 또 그것을 가지고 난리들이 났다. 그들은 유생의 극언 담긴 상소를 가리켜 '광망(狂妄)'이라 일컬으면서도 그것을 빌미로 죄를 주면 안 된다고들 했다. 그 중의 한 논리는 이와 같다."유생의 말이 비록 광망하고 경솔한 듯하오나, 옛사람이 이르기를 '말이 격절(激切)하지 못하면 임금이 귀를 기울이게 하기에 부족하다'고 하였으니, 이것은 그 말을 격절하게 하고자 하여서 그런 것이요, 그 뜻으로 말하면 … 간하여 막으려던 것뿐입니다. 비록 평상시에 있어서도 오히려 가두심은 불가하온데, 하물며 즉위한 처음에리까. 국문하지 마소서."또 다음과 같은 '광'자 해석도 나오는데 자못 그 뜻이 깊다 하지 않을 수 없다. "광(狂)이란 것은 그 뜻이 크고 큰소리하는 것이라, 말이 도리에 맞지 아니하고 행위가 생각에 맞지 아니하나, 성인이 허여한 것은 대개 뜻이 커서 장차 진취하는 것이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대저 유자(儒者)는… 임금을 사랑할 줄 알되, 세상에 아첨할 줄을 알지 못하니, 그 뜻을 힘씀이 유속(流俗)과 같지 아니하고, 그 말을 높게 함이 흔히 시의에 어긋나므로 바로 공자가 이른바 광이란 것인데, 적절히 할 줄 모른다는 것입니다. …광이란 것이 충직의 기본이며, 준열한 말은 제 몸을 알기 위한 것이 아니므로 장차 국가에 이익이 있기 때문입니다."이 나라에 새 정부가 서서 독단과 감시가 사라지고 새 기운이 세상에 번짐을 다행스럽게 생각하지 않을 수 없으되, '연산군 일기'로 인하여, 뜬금없이, 과거 정부가 어찌하여 그렇게 한 순간에 무너지지 않을 수 없었는지 새롭게 생각해 보게 된다. 사람들의 말, 이언(邇言), 즉 항간에 떠돌아다니는 말, 그리고 책줄이나 읽었다는 사람들이 제멋대로 말하는 쓸데없고 부질없는 말들 속에도 진실이 있고 정부와 시대, 세상에 대한 판단이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면 그 정부는 미래가 없는 것이다. 어느 시대나 유념해야 할 일이 아닐까 한다./방민호 문학평론가·서울대 국문과 교수방민호 문학평론가·서울대 국문과 교수

2017-07-10 방민호

[방민호 칼럼]작가에게 고향이란 무엇일까?

진정한 작가에게 고향은 없다마음속에 그리는 곳이 진짜 고향여기서 저기서 살아라 할것 없고정해놓고 삶 방향 택할 수 도 없다이효석 시절에도 지금도 말 많아세상은 혼탁하고 어지러운 것평창 동계 올림픽이 이제 코앞으로 다가왔다. 소설 연구자인 까닭에, 필자에게 이 겨울 올림픽은, 다른 무엇보다, 작가 이효석의 고향 평창의 올림픽으로 이해된다. 과연 이효석이란 존재를 평창 올림픽은 어떻게 다룰 것인가? 이미 근 한 해 전에 필자는 평창에서 이효석을 가지고 뭔가를 만드는 사업의 자문 역할을 한 번 한 적 있는데, 한마디로 끔찍한 경험이었다. 정부나 기관에서 부를 때 응하지 않으면 도도하게 구는 것도 같고 또는 눈총을 받을 것도 같아서 싫어도 좋아도 가는 쪽을 택하게 마련이기는 하다. 하지만 그렇게 해서 차려진 자리가 한갓 구색 맞추기에 불과했으며, 문학에 대한 어떤 배려도 없었다는 것을 알게 되는 순간, 도대체 '내'가 왜 여기 와 있나? 하는 자괴감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이효석은 평창이 고향이었지만 고향을 표나게 내세운 적은 없다. 고향이 상기시키는 자연을 너무나 사랑한 작가였지만 그 고향의 특권적인 위상을 주장한 적은 없다. 대신에 그는 고향이란 과연 무엇인가를 말하면서, 어떤 사람이 태어난 곳만이 고향이 아니요, 그가 그리며 살고 싶어 하는, 아직 가보지 못한, 미지의 고향이 또한 이상 속의 고향이라 했다. 필자는 작가 연구를 좋아하고 작가의 생애 속에서 피어난 작품을 사랑하기 때문에 최근에는 최인훈과 이호철의 작품에 좀 더 관심을 표명해 왔다. 때문인지 이호철 작가께서 지난해에 애석하게 세상을 떠난 서울 은평구에서는 고향이 이북 원산인 그분이 오랫동안 터를 잡고 살아온 세월을 기려 이호철 문학관도 만들고 더하여 뭔가 의미 있는 작업도 계획하는 듯했다. 여기 필자가 또 오지랖 넓게 참여하게 되기는 하였는데, 이 은평구의 작가 기리는 방식, 작고한 작가를 현재에 의미 있게 만들고자 하는 방식에는 뭔가 성의 같은 것, 사려 같은 것이 있어 보여 좋았다. 그렇다면 이호철이라는 이 고향 잃은 실향민 작가는 저 세상에서도 자신이 깃들여 살아온, 미성 아파트 있는 은평을 또 다른 고향으로 위안 삼아도 좋으리라. 그러니 자기 타고난 고향만 고향이 아니요, 그 어떤 사람이 그리는 이상적인 삶의 공간은 또 다른 고향이 될 수 있는 것이요, 고향 떠나 잃어버린 사람도 다시 정 붙이고 생활의 구체적인 에너지를 오래 쏟아부으면 고향이라 불러도 손색없게 되는 것이라 생각해 볼 수 있으리라. 그러나 개중에는 아예 고향 없는 사람, 고향을 그리되 이상의 고향을 아직도 못 찾고 심중으로만 그런 공간을 그리면서, 아직 나타나지 않은 그 고향 대신에 고향을 아직까지 찾기만 하고 있는 자기 자신을 '수선화'처럼 사랑하는 사람도 없지 않을 것이다. 문학을 연구하면서, 필자는 최인훈 같은 작가가 바로 그런 문학인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왜냐하면 그는 저 한반도 북쪽 회령에서 태어나 원산으로 옮겨와 해방 공간을 보내고 6·25 전쟁이 발발하자 어떤 계기로 인하여 부산까지 배를 타고 남하하지 않을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바로 그러한 자기 삶의 궤적으로부터 기인하여 자기 스스로를 일종의 '난민'이라고, 전쟁과 분단과 대립으로 얼룩진 한반도는 일종의 난파선과 같고, 그 자신은 그런 난파선에 올라타 바다를 헤매며 진짜 고향을 찾고 고향으로 돌아갈 날을 손꼽아 기다리는 난민 같은 존재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필자가 이 작가에 관해 생각하기에 그렇다는 것이고, 필자가 그렇게 헤아릴 수 있는 한 이 작가는 그렇게 생각하며 오늘에까지 살아왔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는 지금 서울 근교 일산하고도 화정인가 하는 곳에 거주하고 있는데, 그 아파트라는 것이라야 별반 특별할 것도 넓을 것도 기념할 만한 것도 없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미 그가 그곳에 오래 산 것을 보면 누군가 나중에 그를 기념해야 할 일이 있다면, 그곳은, 그가 언젠가 청춘 시절에 살았다는 서울 용산 청파동 아니면 바로 이 서울 근교 같은 곳이 되어야 하리라고 생각은 할 것이다.진정한 작가에게 사실은 고향이란 없는 것이고, 있어도 없는 것이나 같은 것일 수도 있고, 마음속에 그리는 고향이 더 진짜 고향일 수도 있다. 그리고 작가는 고향 같이 안주할 곳은 생각하지 않고 나아가 자기가 도대체 어느 페루의 바닷가에서 생을 마칠지 아이슬란드의 화산 밑에서 끝낼지 몰라야 할 수도 있다. 페루에 바다가 있다면 말이지만 아마 '다행히' 있을 것이다. 그러니 일반 사람들이야 작가를 보고 여기 살아라 저기 살아라 할 것도 없는 일이요, 작가도 구태여 정해 놓고 삶의 방도와 방향을 택할 수도 없는 일, 그럼에도 세상은 이효석 시절에도 고향을 놓고 말이 많았고, 지금도 누가 어디 있느냐를 놓고 설왕설래가 많다. 이때나 저때나 세상은 혼탁하고 어지러운 것이다./방민호 문학평론가·서울대 국문과 교수방민호 문학평론가·서울대 국문과 교수

2017-06-05 방민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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