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상철 칼럼

 

[윤상철 칼럼]'내로남불'의 집단극단화

국가 구성하는 개인들 생각이다른 사람과 다르다고 하면소통통해 먼저 풀어 나가야그 뿌리 사회에서 정치로 뻗었다면치유의 출발은 사회안에 있다는것이른바 '내로남불'이란 말이 갈등하는 집단 간에 상대를 비난하거나 자신을 변명하는데 자주 사용된다. 정치와 언론을 넘어 지식인까지 두루 사용하고, 나무위키에 열거된 사례들을 보면 희소한 일탈현상은 아닌 듯하다. 개인적 에피소드에서 집단과 사회조직, 나아가 정치권력과 국가권력에 이르기까지 나타나는 현상이다. 얼핏 보면 크게 다를 바 없는 현상을 상대에 대하여 전혀 다르게 극단적으로 규정하는 점도 독특하다. 새정부 들어 인사청문회의 기준이 흔들리면서 여당의 '적폐청산'에 야당은 '내로남불'로 맞섰다. 6년 전의 국가정보원 여론조작사건(혹은 대선개입사건)과 작년부터 발생한 드루킹 댓글조작사건은 행위자와 이해당사자가 다를 뿐 민주주의의 근간인 국민의 여론형성을 심각하게 왜곡한 사례들이었다. '제왕적 대통령제'에 이어 '국가주의'를 둘러싼 논쟁에서도 야당은 '촛불혁명'을 초래한 국정농단에 대해 반성하지 않고, 여당은 시장과 국가의 역사적 성패에 대해 성찰하지 않는다. 내로남불은 주로 정치의 언어로 사용되지만, 돌아보면 그 뿌리는 넓게 퍼져있다. 정치인 팬덤현상들도 제3자의 눈에는 크게 다르지 않다. 이른바 '깨시민'이나 그들의 비판대상이나 진리에 있어서는 똑같이 독선적이다. 내부자 출신 정치인들에 대해서 모호한 태도를 취하는 참여연대나 비정규직 문제해결은 정부와 재계에 넘기고 정규직 노동자들의 권리만을 옹호하는 민주노총도 다르지 않다. 워마드는 이른바 미러링으로 변명하면서 그들의 비판대상인 '한남'을 닮아갈 뿐 아니라 범죄를 예고하는 일탈을 쉽게 벌인다. 일부 기독교계는 입국 금지된 이슬람국가에 들어가 선교하면서도 무슬림의 국내 입국에 대해서는 공포증을 조장한다. "롤리콤은 범죄지만 쇼타콤은 취향"이라고 말하는 교수나 여성과 남성의 비혼에 대해 근거 없이 상반된 기준을 들이미는 교수의 편협한 시각도 이제 낯설지 않다. 어쩌면 내로남불은 전 사회적인 현상인지도 모른다. 그들은 "지금은 옳고 그때는 틀리다"라는 상황논리로 변명하지만 냉정하게 들여다보면 그때나 지금이나 다 옳거나 다 틀렸기 쉽다. 더 아쉬운 사실은 서로 분열된 집단 내에서 상대에 대해 동의하거나 이해하는 목소리도, 자기 집단에 대한 반성과 비판의 목소리도 듣기 어렵다는 점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가 지키려는 민주주의의 근간인 다양성, 토론과 합의, 그리고 양보와 협력은 더 이상 가능하지 않다. '넛지'의 저자인 캐쓰 R. 선스타인은 '우리는 왜 극단에 끌리는가'라는 책에서 이러한 집단의식의 모습을 '집단극단화'로 규정한다. 그에 의하면 사람들은 서로 생각이 유사한 집단 속에 들어가면 극단으로 흐를 가능성이 높아진다는 것이다. 극단주의 성향이 심화되고, 내부 다양성은 저하되며, 나아가 상대집단과의 격차는 더욱 벌어진다는 것이다. 집단 내부에 동일한 성향의 정보가 쏟아지고 사람들은 사회적 평판을 고려하여 이에 적극적으로 동의하며, 일반적으로 극단적인 입장일수록 훨씬 설득력을 얻는다는 것이다. 나아가 정보화시대에 들어서면서, 인터넷 공간은 더 신속하고 폐쇄적인 정보순환을 가능하게 하여 집단극단화를 더욱 가속화시킨다. 선스타인은 집단극단화를 막는 세 가지 대안을 제시한다. 전통주의 혹은 선인들의 지혜에 대한 존경은 늘 새로운 것을 추구하고 과거를 시대적 한계가 아닌 적폐로 치부하는 우리에겐 적합하지 않다. 결과를 면밀하게 분석하고 미래에 적용하는 대안이 있지만, 우리는 과거로부터 배우지 않으며 인물과 조직의 대체를 선호한다. 마지막 대안은 견제와 균형이다. 링컨이나 루스벨트가 그랬듯이 동조하는 집단들로 이루어진 '정보의 반향실'이 아닌 반대하는 집단들로 '정보의 풀'을 넓히거나, 유유상종을 회피하고, 제도적으로는 3권 분립과 헌법상 독립기관의 권위를 존중하는 일이다. 그마저도 '청와대정부'를 가득 채우고 있는 같은 뿌리의 정치인들의 모습에서 찾기 어렵다. 우리에게 남은 대안이 있다면, "정부는 그 나라를 구성하는 개인들을 반영한다"는 샤무엘 스마일즈의 말처럼 국가를 구성하는 개인들이 생각이 다른 사람과의 소통을 통하여 먼저 내로남불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그 뿌리가 사회에서 정치로 뻗어나간 것이라면 그 치유의 출발은 사회 안에 있다는 말이다. LA흑인폭동의 주인공 로드니 킹은 사건 이후 진행된 인종 간의 분노와 혐오, 그리고 좌절을 겪은 후에 이렇게 말했다. "우린 다 같이 사이좋게 지낼 수 있잖아요?"/윤상철 한신대 사회학과 교수윤상철 한신대 사회학과 교수

2018-08-20 윤상철

[윤상철 칼럼]누구를 위한 지역공동체인가?

지역공동체는 시민이든 기업가든그들의 사회·문화·경제적 교류통해자연스럽게 이뤄지는 집단…누구만의, 누구들만의 것도 아니다官이 주도한다는 것은 더욱 어려워성남시에서 지역화폐로 아동수당을 지급하는 문제를 둘러싸고 의견이 분분하다. 신임시장은 지역화폐로 지급하여 지역경제를 활성화함으로써 풍요로운 지역공동체를 만들어보겠다고 한다. 그러나 정작 아동수당을 받아 사용하게 될 엄마들은 자율에 맡기는 현금지급을 선호한다. 그들은 지역화폐가 사용지역과 용도가 제한되어 육아현실에 맞지도 않을뿐더러 시민의견을 수렴하는 절차도 없었다고 반발한다. 또 다른 당사자인 기업이나 판매업체들은 아직 뚜렷하게 목소리를 내고 있지 않다. 이 사안은 보편복지와 선별복지 간의 논란이자 이를 둘러싼 중앙정치와 연관되어 있지만 지역공동체를 어떻게 만들어갈 것인가의 문제이기도 하다.최근에 화성시의 한 시민단체가 주최하는 심포지엄에 주제발표자로 갔던 적이 있었다. 회의 주제가 '화성시민과 기업의 상생발전방향'이었던 만큼 심포지엄을 주최한 시민단체 회원뿐만 아니라 시의회, 상공회의소, 기업지원협의회 관계자들이 다수 참석해 있었다. 의례 그렇듯이 시정을 수행하는 데 있어서 이 기업들을 규제하는 한편 지원하는 시청 고위 공무원들도 참석하였고 직접 제도와 정책을 홍보하고 있었다. 주제발표에서 나는 기업의 사회적 책임의 목적이 기업의 이미지를 개선하여 그 주식가치를 높이거나 이해당사자들의 만족도를 제고함으로써 기업의 지속가능성을 높이는 데에 국한되지 않는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오히려 기업 자체가 지역공동체의 시민이고 기업의 사회적 책임은 일종의 사회적 규범으로서 그 기원이나 의미와 무관하게 당연시되면서 따라야 한다는 사실을 주지시키고자 했다. 이 심포지엄의 분위기는 그야말로 진짜(?) 시민들이 등장하면서 주최 측의 의도에서 빗겨난 듯했다. 기업 직원들의 출퇴근 시간대와 지역 농산물의 출하 시간대가 겹치면서 농민들의 고충은 더 심각해졌다고 했다. 기업들은 농촌의 생태계를 적극적으로 보호하겠다는 약속을 하고 농촌마을 안으로 들어오지만 막상 그 뒷감당은 고스란히 주민들의 몫이 된다는 것이다. 농민들은 겨울 농한기에 일자리를 원하지만 그들이 보는 것은 공장을 드나드는 외지인들뿐이라고 불평한다. 넓은 심포지엄 강당에 불과 몇 십 명의 청중들이 듬성듬성 자리한 이유는 억센 비 때문이 아니고 진짜 시민들에게 알리지 않은 탓이라는 성토도 있었다. 1990년대 말경이니 벌써 20년 전의 일이다. 나는 교환연구자로 미국의 스탠포드대학에 2년간 머무르면서 그 옆의 팔로알토시에 살았었다. 그곳에 도착하자마자 대학에 온 외국 연구자나 유학생들의 현지 적응이나 언어학습을 도와주는 자원봉사자 한 분을 만났다. 덴마크 국적의 그는 미국시민권을 취득할 자격을 갖추고 있었지만 자신의 조국에 대한 애정과 부채감 때문인지 30년 넘게 그린카드를 바꾸지 않았다. 그럼에도 자신이 거주하는 도시의 지역공동체를 뜨겁게 사랑하고 그 일원이라는 자부심을 감추지 않았다. 자신이 늙은 나이에 왜 주변 지역의 흑인들에게 집을 마련해주기 위하여 '해비타트 포 휴머니티' 사업에 열심히 참여하는가를 설명하고 자랑스러워했다. 북유럽 출신의 완벽한(?) 백인이 흑인들과 하이파이브와 허그를 즐기는 모습은 늘 생소하기만 했다. 우리에게도 익숙한 마이크로소프트, 휴렛팩커드, 구글, 엡손 등의 회사와 사무실 등을 자랑스럽게 소개했고, 그들의 창업주나 가족들이 자신의 동료 시민임을 뿌듯해했다. 그리고 휴렛의 장남이 운영한다는 자그만 극장으로 안내하였다. 평생을 사업가로 살다가 은퇴한 그였지만 대기업가의 장남이 지역주민들에게 철 지난 영화를 보여주면서 젊은 시절의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그러나 아무런 이익도 남기지 못하는 사업에 몰두한다는 사실에 감동스러워했다. 시정부나 시민단체가 주최하는 공청회는 늘 만석이었고 그는 그 자리에 다녀온 이야기를 길게 늘어놓곤 했었다. 대형할인매장과 아웃렛에 익숙한 미국사람인 그가 마지막에 알려준 이야기는 "그들이 돌아오고 있어. 걸어가서 그들의 가게에서 물건을 사야겠어. 저 가게의 주인은 우리 옆집에 살던데"였다. '그들'은 더 이상 외지인이 아닌 다운타운 사업자들이었다. 그러나 그에게서 시장과 시공무원의 이야기는 별로 들어본 적이 없다. 지역공동체는 일반 시민이든 기업시민이든 그들 사이의 사회적, 문화적, 경제적 교류를 통해 이루어진다. 누구만의, 누구들만의 공동체가 아니다. 누가 일방적으로 주도하거나, 특히 관이 주도하는 자리에 공동체의 싹이 트고 자라기는 어렵다./윤상철 한신대 사회학과 교수윤상철 한신대 사회학과 교수

2018-07-09 윤상철

[윤상철 칼럼]또다시 사회적 민주주의로…

네트워크화 된 젊은 세대들과양극화에 시달리는 비정규직 등서서히 성장하며 저항력 키워사회적 민주주의 제기함으로써지배자들에게 민주주의를 요구이전에 우리 사회에서 사회적 민주주의의 가능성을 말한 바 있다. 이른바 '제3의 물결 민주화' 초기에 다수가 낙관적으로 기대했던 민주주의의 확장 및 심화 가능성이 현실의 정치와 경제에 의해 왜소화되거나 부정당했지만, 사회적 민주주의에 대해서는 희망을 걸 수 있다고 주장했었다. 현실의 정치를 살펴보자. 선거는 정규적으로 반복되고 여·야간의 수평적 정권교체도 세 번에 걸쳐 이루어졌다. 그 누구도 쿠데타와 같은 비선거적 방식을 도모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국민들은 정치권을 신뢰하지 않는다. 정치적 이슈들이 부단히 동원되지만 진영논리에 매몰되거나 제도적 한계에 갇히어 국민들의 기대를 충족시키기엔 부족하다. 현실의 경제는 어떠한가? 경제성장은 지속되고 한국의 국가 명목 GDP는 세계 12위이고 국가신용등급도 매우 높고 안정적이다. 그러나 사회경제적 양극화가 심하고 비정규직 등 고용의 질이 낮다. 그럼에도 이를 극복하기에는 세계화와 경쟁, 남북관계 등 국내외적 상황이 우호적이지 않다. 정치적 민주주의가 제도화와 진영의 논리에 위축되고, 경제적 민주주의가 성장과 효율의 늪에 빠져 있다면 사회적 민주주의는 어떠한가? 정치적 권력관계에서 비롯된 전근대적 사회관계는 성희롱과 성폭력 등 사회적 민주주의의 파탄을 보여준다. 고용과 하청 등 경제적 지배관계에서 비롯된 갑질 사례 역시 사회적 민주주의의 민낯을 보여준다. 산업은행은 퇴직자들을 낙하산으로 받아주는 조건으로 기업들에게 돈을 대출해준다. 은행경비원들은 은행과 고객, 그리고 용역업체로부터 3중 갑질을 당한다. 정수기 설치기사들의 정규직화와 치킨업체 가맹점 착취 등은 우리 사회가 여전히 전근대적 권위주의를 해체하지 못했음을 보여준다. 언론의 폭로기사, 공정거래위원회의 경고, 그리고 동반성장위원장의 엄포만으로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사회적 민주주의마저 이렇다면 우리 민주주의의 희망은 없는가? 다행스럽게도 정치 및 경제 영역 안에서, 그리고 그 효과에 의해 질식된 사회적 민주주의는 개인화, 자유화, 정보화, 세계화 속에서 그 희망의 불씨를 키워냈다. 성차별을 배격하고 평등한 인권을 지향하는 미투운동은 정치와 경제에 대한 발본적 성찰과 재구조화 없이는 멈추기 쉽지 않을 것이다. 사회의 모든 영역에서 인권 보호 및 차별 철폐와 더불어 내부 권력구조의 변화가 동반될 때에 비로소 미투운동을 촉발한 원인들을 해소할 수 있을 것이다. 가령, 성희롱과 성폭력은 남성 지배의 정치, 행정조직을 성평등한 조직으로 바꿈으로써 해결될 수 있다. 일찌감치 성평등적 인사정책이 이루어졌더라면 검찰 내 성폭력은 상상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성차별적 임금구조는 기업 내의 차별적 인사구조와 더불어 대기업과 중소기업 간 불평등구조를 혁파하지 않고는 해소되기 어렵다. 대한항공 직원들의 '갑질 규탄 촛불집회'는 4차로 이어지면서 광화문과 보신각으로 중앙을 향하고, 이를 지원하는 크라우드 펀딩이 이어지며, 매 집회마다 시민들이 합세한다. 재벌가의 갑질은 과거에도 더 끔찍한 형태로 발생했지만 이처럼 사회적인 반향을 일으키지 않았었다. 오너 일가가 저지른 갑질행위를 규탄하는 집회는 이제 총수 일가의 퇴진을 외치고 시민들이 이에 동조함으로써 재벌기업의 가족 승계구조는 물론 재벌체제의 작동방식에 대해 근본적 문제 제기를 하고 있다. 재벌개혁은 정치적 민주주의의 위로부터의 공격보다 사회적 민주주의의 아래로부터의 저항에 의해 시작될 수도 있지 않을까 기대해본다. 요컨대, 한국 민주주의의 심화 가능성은 사회적 민주주의에서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 사회적 민주주의의 자원은 네트워크화된 젊은 세대, 양극화에 시달리는 비정규직 노동자들, 학생, 중소기업, 가맹업자 등에서 서서히 성장하면서 저항과 민주주의의 잠재력을 키우고 있다. 그들은 사회적 민주주의를 제기함으로써 사회적 지배자이자 정치적, 경제적 지배자들에게 민주주의를 요구한다. 과거와 달리 이제는 사회적 민주주의가 다른 영역의 민주주의를 추동하는 뇌관으로 작동한다. 모름지기 국가와 정치권력은 권위주의적 공포로부터 인지적 해방을 경험한 이들의 요구를 차단하거나 우회시키지 말고 사회구조의 민주주의적 재구성으로 이끌 수 있도록 지원과 찬사를 보내야 한다./윤상철 한신대 사회학과 교수윤상철 한신대 사회학과 교수

2018-05-28 윤상철

[윤상철 칼럼]사회적 민주주의로 문열기

사회적 차별·지배 쉽게 발견되지만찰과 상처럼 취급돼 방치되기 쉬워미봉적 타협 불과한 민주주의조차제대로 실현하기에는 항상 어렵고깊은 민주주의 실현 더더욱 힘들다이른바 '제3의 물결' 민주화가 1970년대 중후반부터 20여년 이상 전 지구를 휩쓸었다. 대표적 민주주의 논자였던 길레르모 오도넬은 민주주의를 3차원으로 나누고, 정치적 민주주의는 민주주의로의 문열기에 불과하고 경제적 민주주의와 사회적 민주주의로 확산된다고 믿었다. 그러나 많은 나라에서 민주주의는 정치적으로 의례화한 최소요건 민주주의로 전락했다. 경제적 민주화는 신자유주의의 지구적 지배상황에서 저항의 주체들이 약화되면서 정체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회적 민주주의는 새로운 가능성을 열고 있다. 민주화 이전의 상황을 보자. 권위주의적 가족 안에서 명령하는 아버지와 복종하는 자식이 있고, 어머니는 그 갈등관리에 지쳐 있다. 기업조직 안에서는 권위적인 의사결정이 이루어지고, 임용 및 인사 과정의 시혜를 미끼로 성적 지배와 학대까지도 일상적으로 발생한다. 교회 안에서는 신처럼 군림하는 성직자와 힘없는 평신도들 사이에서 교리해석과 신앙행위에 대한 독점적 지배관계가 자연스럽다. 지역 간에도 패권주의적 지배와 실리적 복종이 요구된다. 학교 안에서도 봉건적 권위주의와 자본주의적 교환으로 구성되는 교사와 학생 간의 비민주적 관계가 발견된다. 세대 간에도 노동현장에서도 이 모든 전(前)민주주의적, 비민주주의적 관행이 여전하다. 우리가 아는 한, 체제의 이행은 단속적이다. 역전되기도 하고 건너뛰기도 한다. 그러나 사람들은 체제진전이 그들에게 준 자존감과 행복감을 기억하고 이행의 지속을 선호한다. 따라서 경제적 민주주의가 정체하더라도 사회적 민주주의의 진전은 계속된다. 지역불균형 발전을 극복하고 지역차별과 패권을 철폐하는 일은 지속 될 것이다. 노동자이든 근로자이든 차이를 가르는 명명들이 존재할지라도 노동에 대한 사회적 차별은 감소될 것이다. #Me Too를 내걸든 #With You를 내걸든 권력과 결부된 성적 차별과 폭력은 결단코 사라져 갈 것이다. 기대에 미흡하더라도 그 진전으로 인간의 품격이 높아진다면 사람들은 계속 나아갈 것이다. 모두가 다 동의하지는 않는다. 그들은 타인의 자유와 권리를 해하지 말라고 말한다. 가해자들에게도 인격과 권리가 있고 사법적 판단 이전에 여론 재판을 가하지 말라고 한다. 스스로를 해명할 기회조차 갖지 못했다고 가해자들을 옹호하기도 한다. 가해자에게도 가족이 있고 그들의 인권은 중시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피해자들은 너무 어리고 판단 능력을 갖지 못할 수 있다고 한다. 여전히 권력을 가진 자들의 반격과 역주행에 유의하라고 충고한다. 심지어 다른 소수자들의 권리를 인식하고 그들의 상처와 피해까지도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고 한다. 더 시선을 넓혀 다른 소수자와 연대하여 더 큰 민주주의를 이루라고 한다. 어떤 정치적 음모가 있다고 속삭이고, 해일이 일고 있는데 조개를 줍고 있다고 핀잔하기도 한다.수용하기도 비난하기도 쉽지 않은 이러한 언설에 대해, 한 방송인의 말이 와 닿는다. 세월호 유가족들에게 '이제 그만 좀 하라'고 말하는 사람들에게 그는 "슬픔의 기한은 우리가 정하는 게 아니라, 유가족의 눈물이 멈출 때까지"라고 말한 적이 있다. 차별에 상처받은 이들에게 시한을 정하지 마라. 또한 사람들은 변증법적 발전을 상식적으로 수용한다. 다소 격하게 보이더라도 관행처럼 익숙해진 것들을 변화시키려면 그야말로 '역편향'까지도 수용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폭력적 혁명의 최종적 결과는 별로 진보적이지 않은 민주주의이듯이 아직 크게 변하지도 않은 차별을 뿌리뽑기 위한 사회적 노력에 법과 제도에 근거한 차분하고 점잖은 태도를 조언하지 마라. 아직 아물지도 않은 자기 상처를 치유하기에 몰입하는 이들에게 다른 이들의 상처까지도 전가하지 마라. 각자 자기 상처의 고통을 말하면서 다소 불균형적 치유가 흡족하지 않더라도 보이는 것은 일단 치료하고 보자. 단 한 번의 촛불집회로 민주주의는 완성되지 않는다. 심지어 그 촛불집회를 야기한 농단조차도 쉽게 철폐되지 않는다. 사회적 문화와 관행에 깊이 녹아들어가 있는 차별과 지배는 쉽게 발견되지만, 찰과상처럼 취급되기 쉬워서 무관심과 방치의 대상이 되기 쉽다. 찰과상에 몰두해있는 아이를 가볍게 바라보면서 시선을 바꿀 것을 강요함으로써 그 뿌리까지 제거하기가 쉽지 않다. 모든 것의 출발에 불과한, 그런 의미에서 미봉적 타협에 불과한 민주주의조차 제대로 실현하기는 늘 어렵고 보다 깊은 민주주의는 더더욱 실현하기 어렵다. 신문마다 무수한 기둥(column)들을 세우고 있지만 여전히 사회를 떠받들기는 어렵기만 하다./윤상철 한신대 사회학과 교수윤상철 한신대 사회학과 교수

2018-04-16 윤상철

[윤상철 칼럼]'저녁이 있는 삶'은 가능한가?

양극화·실업·고용불안정 속에서'저녁이 있는 삶' 같은 환상보다'국민성공시대' 같은 현실 택했던국민들 뭔가 다른 생각하기 시작물질적 욕구 다 채워졌을때주어지는 덤이 아니기 때문이다2012년 대선주자 손학규는 '저녁이 있는 삶'을 캐치프레이즈로 내걸었다. 자정을 넘어 귀가하기 일쑤인 회사원들과 대학입시 학원을 전전하는 고3들의 노곤한 일상까지 다독여주는 따뜻하고 품격있는 슬로건이었다. 개인의 자유, 삶의 질, 공동체에 대한 존중 등과 같은 탈물질적 욕구를 국민들에게 약속하는 호소였다. 40줄을 넘어선 장년들은 "얼룩백이 황소가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 질화로에 재가 식어지면… 늙으신 아버지가 짚벼개를 돌아 고이시는" 장면을 상상했을 듯하다. 영화 '원더'에서 '옮음과 친절함 중에서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면 친절을 선택하라'는 말처럼 정치인으로서는 처음으로 이성적 정의 대신에 감성적 친절을 내세운 슬로건이었다. 그러나 국민들은 '국민성공시대'를 내건 이명박 후보를 선택했고, 그의 정의로운(?) 목표, 이른바 '747공약'은 오로지 국가와 국민의 경제적 성공만을 목표로 국민들을 내몰았다.우리의 선택은 우리의 자유를 앗아갔다. 외환위기에 어쩔 수 없이 선택한 신자유주의는 과거의 발전지상주의를 불러들이면서 더 정의로운 사회적 가치이자 삶의 양식이 되었다. 우리 사회는 더 자본주의적이고, 더 시장지향적이며, 더 경쟁지상주의적인 모습으로 변모해갔다. 도덕적 경건함, 행복과 즐거움, 휴식과 평안, 가족과 공동체를 찾기 위해 만들어진 공간에서도 시장과 경쟁, 사적소유와 빈곤, 서열과 차별 등이 더 자연스러웠다. 신에 대한 경배, 사람에 대한 사랑과 용서, 자신의 죄악에 대한 반성과 회개의 공간인 교회에서는 더 많은 신도, 더 많은 헌금, 더 큰 교회당을 두고 경쟁한다. 고인의 명복을 빌고 그 가족들의 상처를 위로하는 빈소에서 그 자손들의 사회적 성공 네트워크를 드러내는 근조문구들이 경쟁한다. 결혼식장에서는 본인과 부모의 출신과 성공을 보여주는 화환들이 경쟁한다. 심지어 고단한 사회생활에서 벗어나 심신의 휴식을 취하려는 동호회 활동에서도 사회적 지위의 우열경쟁과 그에 따른 갈등, 심지어 운동능력의 차이를 둘러싼 과도한 경쟁과 차별, 구별짓기가 난무한다. 고교 동문회는 주식투자와 부동산 투기를 위한 정보교류의 장에서 경제적 성공에 걸맞은 감투를 흥정하는 투기판으로 변해간다.그 와중에 평창동계올림픽이 성공적으로 끝났다. 올림픽 기간에는 항상 금메달 수와 (우리나라만 센다고 알려져 있는) 국가순위, 그리고 메달리스트들의 판에 박힌 성공담이 언론을 뒤덮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여느 때와 달랐다. 처음에는 북한의 일거수일투족이 뉴스를 압도하다가 중후반으로 가면서 우리 선수들의 경기 자체에 온 국민들이 분노하고 환호하면서 몰입하는 양상을 드러냈다. 이성적 정의로움에 식상해 하면서 감성적 정서로 소통하는 모습은 이전과는 달라 보였다.스피드스케이팅 여자 팀추월 경기에 분노한 국민들은 의성 '팀킴'의 여자컬링에 환호를 보냈다. 이전에도 올림픽을 보던 국민들을 격분케 한 일들이 여럿 있었다. 쇼트트랙의 김동성, 펜싱의 신아람, 피겨의 김연아 등의 사례들은 선수의 속임수, 심판의 오심, 주최국의 정치적 영향력 등이 스포츠의 순수성을 훼손하고 그 본질인 공정성을 앗아가 버린 사건들이었다. 이와 달리 여자 팀추월 경기에서 국민들이 분노한 이유는 저조한 실력이나 불공정성이 아니었고, 팀워크를 붕괴시킨 선수간의 불화와 그러한 사태를 촉발한 빙상연맹 내부의 파벌갈등이었다. 이에 반해 여자컬링은 5명의 선수들이 교환하는 눈빛과 열정적인 사투리를 들으면서, 국민들은 소외와 차별을 이겨내고 '하나의 팀'을 만들어낸 그들의 동지애와 노력을 느끼면서 더 큰 하나가 되었다.선수들이 분열하면 국민들은 통증을 느꼈고 서로 화합하면 편안한 행복감을 느끼는 과정이 반복되었다. 게임에 승리하여 메달을 획득하면 온 국민이 열광하면서 쾌감을 느끼고, 불공정한 상황에서 패배하면 분노하던 이전의 상황이 바뀐 것이다. 지극히 경쟁지상주의적이고 능력위주의 사회를 추구해왔던 국민들이 이제는 동일한 경쟁을 보면서 다른 가치와 느낌을 찾고 있다는 기대감이 든다. 사회적 양극화와 실업, 고용불안정 속에서 '저녁이 있는 삶' 같은 환상보다는 '국민성공시대' 같은 현실을 선택했던 국민들이 뭔가 다른 생각을 하기 시작하였다는 희망이 떠오른다. '저녁이 있는 삶'은 물질적 욕구가 다 채워졌을 때에 결과로써 주어지는 덤이 아니다./윤상철 한신대 사회학과 교수윤상철 한신대 사회학과 교수

2018-03-05 윤상철

[윤상철 칼럼]정현신드롬 이후

지금의 정현에 대한 환호제2 정현 나올 때까지 이어질지…이성적 근거없이 만들어진정치적 지지는 아무 책임감 없이또 다른 '~빠'가 만들어질 때까지 맹목적으로 지속될지 모른다정현이 호주오픈 4강에 진출하자 대중은 열광하였다. 우리 국민들이 국가대항전이 아닌 개인스포츠에 주목하는 현상은 낯설지는 않지만, 스포츠 자체가 문화적 기호(嗜好)라는 점에서 기이하기도 하다. 이들 중에는 테니스 경험이 전혀 없거나, 아파트 단지의 테니스장을 주차장으로 만드는 데에 기꺼이 동조했던 이들도 있다. 이제 그의 안경이나 신발, 그리고 라켓이 관심을 끌게 되고, 부모들은 자식들에게 테니스 레슨을 권할 것이다. 정작 신세대 정현의 자유로운 열정이나 성장과정, 그와 상대한 페더러가 건네준 배려는 그의 성공신화를 장식하는 에피소드로 동원되었다. 정현현상은 그 이전에 나타났던 박세리나 김연아의 신드롬과 다르지 않다. 오로지 세계적인 선수의 반열에 올라야 관심을 받고 그를 위해 희생되는 다른 것들은 가려지는 지극히 단선적이고 동질적이고 목표상향적인 사고와 행태가 지배해왔다. 탄탄한 생활체육 기반, 폭넓은 사회시설과 제도, 수많은 일선지도자들과 그 직업환경 등은 뒷전이다. 외국인 지도자와 훈련시스템도 히딩크와 고드윈처럼 신화와 전설로 부풀려지고 그 기여의 내실은 묻힌다. 오로지 개인 선수의 화려한 성공 이미지만 환호 받으면서 유포되고 소비된다. 배경과 결과에 대한 객관적이고 이성적인 성찰 없이 오로지 목표만을 위하여 치닫고 그 이미지만 감성적으로 소비되는 행태는 우리 사회의 다른 영역에서도 나타난다. 암호화폐 열기처럼 지극히 경제적이고 합리적이어야 하는 경제행위도 다르지 않다. 투자인지 불분명한 암호화폐 거래는 평창롱패딩을 사려는 장사진과 유사하게 반복되지만 그에 필수적인 블록체인 등은 뒷북치듯이 거론된다. 암호화폐 투자로 거부가 된 사례가 기사화되고 이를 모르는 사람은 시류에 뒤떨어진 사람으로 간주된다. 즉, 우리 사회의 목표지상주의는 동질성 선호로 인해 강화된다. 남들이 하면 해야 하고 그에 동조하지 않는 사람은 왕따 당하거나 비난받거나 바보로 취급된다. 사회적이고 문화적인 행위는 타인이나 사회에 미치는 영향이 상대적으로 적을 수 있기 때문에 창조적 모험으로서 용인될 수 있다. 그러나 그 사회적 파장이나 영향력이 훨씬 큰 경제적 행위나 국가와 국민 전체에 영향을 미치는 정치적 행위에 대해서는 다른 시선을 필요로 한다. 오래전 미국 외교관이자 학자인 그레고리 핸더슨은 '소용돌이의 한국정치'라는 저서에서 한국 민주주의의 구조적 취약성을 설파한 적이 있다. 한국 정치는 사회의 동질성과 중앙집권적 통일성이 상호 악순환하면서 원자화된 개인, 가족, 집단은 오로지 중앙권력을 향해 질주한다고 요약된다. 그의 통찰력은 조선과 대한민국 초기에 적용되었으나 대기업과 노동조합의 등장에도 불구하고 지속되는 이른바 '제왕적 대통령제'에서 여전히 빛을 발한다. 권력에의 목표지상주의와 동질성의 강요는 정치인에 대한 팬덤으로서 이른바 "~빠"문화라는 일상적 행위에도 나타난다. 민주화와 자유화는 큰 소용돌이를 해체하기보다는 그 부정적 유산들과 결합한 작은 소용돌이들을 낳았을 뿐이다. 처음에는 정치인이나 정당 등에 의해 동원되었던 지지가 점차 지지 동인(動因)들보다는 지지대상의 이미지에 대한 감성적 선호로 대체되었다. 지지의 정당성이 상대적으로 희미해지다 보니 지지자간의 동류선호를 통한 확증편향만 강화시켜가고 있다. 즉, 특정한 이미지를 선호하는 사람들끼리 폐쇄적 집단을 만들어 그 안에서 서로의 믿음을 키워가는 양상이다. 결과적으로 특정한 이념과 정책을 위해 특정 정치인을 수단으로 지지하던 양상에서 그 정치인을 지지하는 일이 목적으로 전치되는 일이 벌어진다. 그 정치인을 위하여 그와 대립하는 정치인이나 정책 등에 막무가내로 비판하는 반정치적 현상이 발생한다. 정현에 대한 환호는 또 다른 정현이 나올 때까지 맹목적으로 이어질지 모른다. 이성적 근거없이 만들어진 정치적 지지는 스스로 아무런 책임감도 없이 또 다른 "~빠"를 만들 때까지 지속될지 모른다. 정현신드롬을 돌이켜 보듯이 정치적 "~빠"문화 역시 공론적 성찰을 요구한다./윤상철 한신대 사회학과 교수윤상철 한신대 사회학과 교수

2018-01-29 윤상철

[윤상철 칼럼]금지되어야 하는 것!

타인의 생각을 '정치적 올바름''영악함'으로 대처해온 우리는차이와 차별 반복적으로 재생산자유주의 출발점은 사고의 자유사회적으로는 사람간의 생각차인정해주는데서 출발해야한 정치학자는 한국민주화의 한계로서 자유주의 혁명의 부재를 지적했었다. 그 결과 한국인들은 자신의 요구 주장에는 익숙하지만, 권력으로부터 개인의 자유를 보호하고, 개인의 자유를 상호간에 침해하지 않는 데에 둔감하다는 것이다. 민주화 이후에도 여전히 제왕적 대통령제와 위계적 관료체제로 장착된 한국에서 개인의 자유는 행정편의적 관료주의와 충돌한다. 가령 한국인들은 모터사이클(이륜자동차)의 고속국도 주행이 금지된 유일한 나라라는 사실을 당연시한다. 총기소지허용을 옹호하는 미국인을 이해하지 못하고 분개하기도 한다. 사회적으로 토론되고 사회규범으로 제어되어야 하는 일들이 국가권력의 '금지와 전용' 포고로 대체된다. 그럼에도 정작 최우선적으로 금지되어야 하는 것들은 방치된다. 국가권력의 선별적 차별논리가 개인간의 차별에도 관철된 탓이다. 유엔 경제사회문화적권리위원회는 대한민국 정부에 대해 포괄적 차별금지법 제정을 수차례 권고하였지만 현 대통령조차 후보시절에 이미 반대했었다.돌이켜보면, 우리 사회를 뿌리째 균열시킨 계급적·지역적 차별, 그리고 그에 근거한 사회집단간 혐오를 정치적 경쟁에 내맡기고 근절하지 못한 상황에서 더 보편적이고 덜 가시적인 차별에 대한 감수성이 있을 리 없다. 오히려 우리 사회는 차별 자체가 부당하다는 인권 차원의 인식을 민주주의의 심화를 통해 극복하기보다는 차별을 정치적 선악으로 대체하여 혐오를 확산시키는 방식을 택했었다. 지역간, 계층간 차별과 불평등을 극복하고 이 시각을 한반도와 민족의 문제로 넓히고자 했던 세력들에 대해서 '종북좌파'로 매도하여 그 혐오를 증폭시켰다. 특정 지역과 여성에 대한 혐오와 국가를 사유화한 국정농단을 일베와 적폐로 규정함으로써 이 나라의 경제발전을 이끌어내고 유연한 민주화의 길에 동참한 세력을 모두 배제해버리고 있다. 어떤 나라가 종북좌파와 적폐세력으로 유지될 수 있을까? 왜란과 호란의 와중에서 주전파와 주화파로 나뉘어 백성과 국토의 유린을 방치했던, 그리고 사색당파 싸움으로 나라의 비전과 인재들을 고갈시켰던 역사와 크게 다르지 않다.역사는 상이한 사회세력과 정치적 목소리, 그리고 사회구성의 비전이 경쟁하면서 진행된다. 때로는 협력을 통해서 때로는 정반합의 논리를 통해서 역사발전에 기여한다. 그러나 자유주의의 경험이 부재한 우리 사회는 차이의 논리를 선악의 논리로 바꾸고 나아가 최악의 순환적 차별논리를 만들어낸다. 산업화와 민주화 과정에서 그러한 독선적 논리를 키워왔다. 한때는 반공과 정치발전론, 그리고 산업화론이 그랬었고 맑스주의나 주체사상도 다르지 않았다. 최근에는 페미니즘 역시 그러한 사상적 검증의 규준으로 작동한다. 심지어 친노, 친박, 친문의 이름으로 어설픈 정치논리조차 그러한 독선적 검증규준에 나선다. 물론 많은 사람들은 이른바 '폴리티컬 코렉트니스'(political correctness)로 영악하게 대처하고 있다. "힐러리가 대통령답게 보이지는 않지만 그렇게 말하지는 않겠다"는 트럼프의 정치적 산술에서 보이듯이. 그러나 그러한 자유주의의 부재 혹은 우회로는 민주주의를 더 심화시키기 어렵다. 타인의 생각을 '정치적 올바름'의 배타적 기준으로 재단하는 방식이나, 그에 대해 '정치적 영악함'으로 대처하는 방식으로 이어져온 우리 사회는 차이와 차별의 문제가 해소하기보다는 반복적으로 재생산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자유주의에 있어서 그 출발점은 사고의 자유가 아닌가 싶다. 그리고 사회적으로는 사람간의 생각의 차이를 인정해주는 데서 출발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기생충학자 서민교수나 배우 유아인 씨를 둘러싼 최근의 논란도 이제 우리 사회의 성원들이 생각의 차이를 열어가는 단초가 아닌가 싶다. 경제학자 대니얼 카머넌이 말한 '시스템1'에서 벗어나고 있다는 징후로 보고 싶다. 복잡한 사회적 쟁점일 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얽혀 있는 사안들에 대해서 직관과 감성에 의거하여 판단하고 그 프레임으로 타인들의 사고를 얽매는 데 익숙하고, 다른 쪽에서는 침묵하거나 거짓 동조하는 '정치적 영악함'으로 대처하는 자유주의 부재의 침묵의 사회를 이제는 보다 본격적으로 해체할 시점에 이르고 있다./윤상철 한신대 사회학과 교수윤상철 한신대 사회학과 교수

2017-12-25 윤상철

[윤상철 칼럼]국가에 대한 헌신

국가의 잘못 적폐로 질타하면서그 책임 누군가에 묻기 보다는모두의 거룩한 희생 수용 필요누구도 국가에 헌신 역할 없다면끝없이 요구하면서 비판하거나공격하는 길 찾기 마련이다케네디대통령은 "국가가 당신에게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묻지 말고 당신이 국가에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물으세요."라고 요청한다. 문재인대통령은 "국민들이 '국가의 존재이유가 무엇이냐'고 물었습니다. 국가가 국민을 든든하게 지켜주고 있다는 믿음을 주어야 합니다"라고 말했다. 대중적 인기가 높은 두 대통령의 말은 언뜻 상보적으로 보이지만 국민들에게 국가를 보는 상반된 관점을 제시한다. 1990년대 초반에 필자는 국회의원 보좌관으로 일했었다. 가까이서 볼 수 있었던 여야 거물급 정치인들 중에는 훗날 대통령, 국무총리, 장관 등이 된 이들도 있었다. '신성한 국회의사당'의 뒤편에서 이른바 '4류 정치인'들의 부패나 무능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필자에게 난감했던 사실은 그들 구세대에게는 이른바 "애국심"이 있었다는 점이다. 그들은 정치적 스승으로 이승만과 김구를 내세웠다. '추한 담합'으로 지탄받으면서도 '국민과 국익을 위하여' 협상할 줄 알았다. 그들보다 젊은 정치인들도 그 애국심을 폄훼하지 않았다. 반면, 당시 86세대나 X세대에게 '민주화된' 국가는 군부권위주의체제의 잔재와 IMF위기를 촉발한 무능정부로부터 자유롭지 않았다. 국가를 공격하여 시민의 자유, 민주, 나아가 평등을 쟁취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국가는 헌신과 봉사의 대상이 아니고, 그 약탈과 지배로부터 자기보호와 자유를 쟁취해야 하는 대상이었던 것이다. 이들에게 애국심이란 애초에 보이지 않거나 또 다른 정치적 억압이었다. 1980년대 중반부터 이미 사회과학계에 뿌리내린 맑스주의 또한 젊은 세대의 경험적인 국가개념을 정당화하는 데 일조했다. 맑스주의는 사회가 계급들로 구성되고, 국가는 명목적일 뿐이라는 국가론과 계급론을 제공하였다. 사회 안에는 계급간의 투쟁만 존재할 뿐이고 국가는 특정 계급의 공동관심사를 다루는 위원회에 불과했으며, 소외되고 배제된 계급들에게 국가는 폐기의 대상이었다. 어떤 국민들이 체험을 통해 국가의 존재를 재구성했던 반면 우리는 그 과정에서 국가를 부정하는 길을 밟았다. 국가가 원천적으로 부정되면 국민이 국가에 바쳐야할 헌신과 의무는 존재하기 어렵다. 그럼에도 우리 국민들은 링컨, 케네디, 그리고 처칠에게서 국가를 배운다. 링컨은 게티스버그 연설에서 "우리에게 남은 일은 오히려 명예로이 죽은 이들의 뜻을 받들어, 그 분들이 마지막 모든 것을 바쳐 헌신한 그 대의에 더욱 헌신하는… 이 땅에 새로운 자유를 탄생시키며 인민을 위한, 인민에 의한, 인민의 정부가 지구상에서 사라지지 않도록 하는 것입니다"는 내용으로 국가의 존재와 그 국가의 민주주의를 위한 거룩한 희생과 지속적인 헌신을 웅변함으로써 미국 애국주의 전통에 기여했다. 처칠은 "나는 피, 수고, 눈물, 그리고 땀밖에는 달리 드릴 것이 없습니다."라는 말로 전쟁으로 절망한 국민에게 달콤한 희망 대신 국가와 공동체에 대한 헌신을 호소하였다.국가가 부정되고, 국가가 사적 정권 혹은 정파적 정부와 동일시되면 국민은 국가에 대해 뭔가를 요구할 수밖에 없다. 상상적 국가를 채울 국민들의 헌신은 '금모으기 운동'을 넘어선다. 그러나 국민들은 요구하고 정부와 정치권은 대답하는 형국이라면, 국가를 만드는 작업에서 국민들은 소외되고 수동적인 객체로 둔갑한다. '민주'는 살아있으나 '공화국'은 사라진 기형이다. 국가와 더불어 모든 조직공동체들이 부정되면서 노동자, 공무원, 교직원, 군인 등이 오로지 요구만 한다면 기업, 정부, 학교, 군대는 제대로 작동할 수 있을까? 중동의 건설노동자, 대학의 과학기술자들, DMZ의 군인들, 바다의 등대지기들, 그을린 농부들이나 원양어선의 선원들 등을 과거 권위주의시대와는 다른 방식으로 불러내어 그들의 국가에 대한 헌신을 국민과 더불어 공유하는 것은 어떤가? 국가의 잘못을 적폐로 질타하면서 그 책임을 누군가에 묻기보다는 남군과 북군 모두의 거룩한 희생으로 수용하면서 국가를 위한 헌신에 기여할 수 있도록 길을 여는 방법이 우리의 역사와 사회에는 존재하지 않는 것일까? 누구라도 국가에 헌신하는 역할이 주어지지 않으면 끝없이 요구하면서 비판하거나 공격하는 길을 찾기 마련이다. 그때 우리 모두의 국가는 사라지게 된다./윤상철 한신대 사회학과 교수윤상철 한신대 사회학과 교수

2017-11-20 윤상철

[윤상철 칼럼]우리에게 나라는 있는가?

트럼프와 김정은 말폭탄 이어북, 핵·미사일 도발 강도 높이고미, 북에 군사적 압력 '긴장 고조'이 틈에서 한국정부 갈팡질팡아무 대책없이 선택 수용 한다면이미 존재하지 않는 것과 같아지금 한반도는 일촉즉발의 위기에 처해 있는 듯하다. 미국 대통령은 "미국과 동맹을 방어해야 한다면 우리는 북한을 완전히 파괴하는 것 외에 다른 선택이 없을 것"이라고 사실상의 선전포고를 한 반면, 김정은 북한노동당위원장은 "미국의 늙다리 미치광이를 반드시 불로 다스릴 것"이라고 반격했다. 말뿐만이 아니다. 북한은 핵실험을 거듭하고 탄도미사일의 발사거리를 늘려가는 반면, 미국은 B1B 전략폭격기 편대를 한반도 상공에 출격시키고 핵추진 항모전단을 한반도로 이동시키면서 북한에 대해 군사적 압력을 한껏 높이고 있다.이 틈에서 정작 한국정부는 갈팡질팡한다. 정부는 북한에 800만달러를 지원하면서 '인도적 지원은 정치적 상황과 분리하여 지속 추진'하겠다고 하는 반면, 문재인 대통령은 "우리는 북한의 도발을 조기에 분쇄하고 북한을 재기불능으로 만들 힘이 있다"고 강력하게 압박했다. 반면 야당은 '코리아 패싱', '무기력 행정부', '환상에 빠진 청와대' 등으로 거칠게 비판하면서 '전술핵 재배치'와 핵무장, 전시작전권 환수 재고 등을 거론하면서 대북 압박과 제재를 주문한다.사자와 하이에나의 틈바구니에서 양과 여우의 전략이 다투는 형국이다. 그러나 양과 여우가 기실 같은 배를 타고 있다는 인식은 그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다. 어처구니없게도 그 일단은 공식적인 정책결정자도 안보전문가도 아닌 사람들의 말에서 찾아진다. 대통령의 통일외교안보특보인 문정인 교수는 "한미 동맹이 깨진다고 하더라도 전쟁은 안 된다"고 말하면서 북미간 우발적, 계획적 충돌과 핵전쟁의 가능성을 경고하고 있다. 소설가 한강은 '미국이 전쟁을 언급할 때 한국은 몸서리친다'는 제목의 NYT 기고문에서 "평화가 아닌 어떤 해결책도 의미가 없고 승리는 공허하고 터무니없는 구호일 뿐"이라고 절규한다.외교안보 전문가들이 즐비한 우리나라에서 한국, 나아가 한반도가 핵전쟁으로 맞게 될 파괴와 절멸의 위기에 대응하여 그 어떤 헤게모니적 합의를 이끌어내지 못한다. 촛불혁명에 참여한 시민들이 외쳤던 "이게 나라냐"를 다시 되뇔 때가 아닌가 싶다. 그 때는 국정농단과 같은 내우를 한탄하는 말이었다면, 이제 외환에 대해서 아무런 대책도 없이 정파적 대결이 횡행하는 상황을 질타하는 말이다. 나라의 백성과 강토가 사라지거나 이제껏 이룩한 정치경제적 발전을 과거로 되돌릴 수 있는 형국에서 나라의 가장 본질적인 목표인 생존전략조차 합의하지 못하는 정치인들과 국민들이 살고 있다면 '상상의 공동체'로서 나라는 이미 해체된 거나 다름없다. 이런 일이 한반도의 21세기에서만 나타나는 상황일까?임진왜란 1년 전에 일본에 갔던 조선통신사 황윤길과 김성일은 일본의 동정에 대해 상반된 보고를 한다. 정사 황윤길은 '필시 병화가 있을 것이다'라고 보고하였지만 김성일은 '그러한 정상을 발견하지 못했는데… 민심을 동요하게 한다'고 상반된 보고를 올린다. 정파적 이해가 다르더라도 그 실낱같은 가능성이 일본의 조선지배를 초래할 일이었으면 조선의 집권세력은 병란을 대비했어야 했다. 불과 40년 후에 일어난 병자호란도 나라의 생존을 둘러싸고 이해를 달리하는 척화파와 주화파 간의 대립으로 아무런 대책 없이 쟁론만 벌이다가 백성들은 전쟁의 참화를 겪고 강토는 유린되고 왕은 굴욕을 당한다. 나라의 생존이 무엇인지에 대한 최소한의 합의만 있었더라면 임진왜란 이후 전쟁에 대비하고, 명분만 앞세워 강력한 적에 맞서는 우를 저지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남북분단이나 한국전쟁의 상황에서도 이러한 적전분열의 양상은 다르지 않았다.전근대시대라면 인접국과는 동맹상태를 유지해야 하는 만큼, 북한이나 중국과는 적어도 적대관계를 만들지는 말아야 한다. 오랜 냉전으로 굳어진 대립관계를 우호적 관계로 돌리기란 기대하기 어렵다. 반면, 전국시대의 진나라나 신라처럼 원교근공의 방법으로 통일을 이루기에는 미국도 중국도 우호적이지 않다. 그렇다고 동북아 균형자론은 상황인식도 주제파악도 안된 공상처럼 들린다. 이 시점에 마키아벨리라면 미국과 중국, 미국과 북한이 대립하는 형국에서 어느 한쪽을 명확히 선택하라고 주문했을 것이다. 그는 인접한 두 강국이 싸우는 형국에서 중립은 결국 궤멸을 초래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더구나 대립하는 두 국가들이 전쟁으로 갈지, 현상유지로 갈지 알 수 없는 형국이다. 그 결과가 북미간의 빅딜이건, 미중간의 빅딜이건 간에 한국이 한반도 운전자가 될 가능성은 없어 보인다. 마키아벨리라면 아무 것도 선택하지 않는 방법이 최악이라고 말했을 것이고, 서로 다른 전략으로 우왕좌왕하는 것은 아무 것도 선택하지 않는 것이라 말했을 것이다. 아무런 입장이 없어서 패싱 당하고 남들의 선택을 수용해야 하는 나라는 이미 존재하지 않는 것과 다름없다. "이게 나라냐?"/윤상철 한신대 사회학과 교수윤상철 한신대 사회학과 교수

2017-10-16 윤상철

[윤상철 칼럼]공적 권력의 공공성

권력 장악에 정치적 참여하거나집권자와 가까운 사람들은누구라도 공적권력 접근 가능가장 위험한 경우는 시민들 조차그런 상황 추종 사적 집단화하고사회가 분열돼 자정능력 상실'블랙리스트 사건' 재판장은 정부의 문화예술정책의 헌법적 규준으로 '팔길이 원칙'이란 표현을 판결문에 담았다. 정부는 예술활동을 지원하되 '팔길이만큼 거리를 두고' 예술의 독립성을 존중한다는 원칙이다. 더 중요한 의미는 '헌법이 보장한 문화표현과 활동에서 차별받지 않을 권리를 침해하지' 말아야 한다는 뜻이다. 이어서 '국정농단 부역자'를 엄벌하라는 촛불의 시대정신을 외면하고 낮은 형량을 선고한 '적폐판사'에 대한 인신공격성 마녀사냥이 뒤따르고 있다는 관련 기사들이 눈에 띈다. 팔길이 원칙의 정신은 공적 자원의 분배뿐만 아니라 공적 권력의 점유나 행사에 있어서도 공정하고 평등해야 한다고 확장하여 해석하고 싶다. 공적 권력 자체도 중요한 사회적 자원일 뿐만 아니라 자원분배의 차별이 권력과 지위의 잘못된 분배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이 원칙이 쉽게 무너지는 이유는 집권세력이나 그 지지자 집단들이 공적 권력에 대한 우선적이고 배타적인 소유와 통제를 원하거나 당연시하기 때문이다. 정치권력이 바뀌면 역편향의 팔길이 원칙이 다시금 문제 될 수 있다고 쉽게 예견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심지어 담당 판사에 대한 도가 지나친 대중적 비난 역시 공적 권력에 대한 집단적, 사적 이해가 낳은 결과가 아닌가 싶다.선출된 권력이든 아니든 공적 지위에서 나오는 공적 권력은 그야말로 공공의 권력이고 공적 자산은 공공의 자산이다. 모든 공적 권력에 견제와 균형의 제도적 장치를 부과하고 그 권력행사의 방향과 범위를 정해 놓은 이유는 공적 권력은 공공을 위해 공정하게 쓰여져야 하기 때문이다. 정치권력도 구체적으로는 사람의 기획과 판단에 의해 행사되는 것이니만큼 사적인 요소가 깃들여지는 경우가 많지만, 스스로 공공의 권력임을 제도적으로 구체적으로 늘 드러낼 수 있을 때에 그 정치적 정당성을 확보할 수 있다. 우리 국민은 그러지 못한 극단적인 경우를 전임 대통령의 탄핵사태에서 엄청난 사회적 비용을 치르면서 목도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현실의 우리 사회는 공과 사의 경계가 어디인가에 대해서 별로 밝지 못하다. 사적 개인적 이해관계로 갈등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이를 제도적으로 조정하는 자유민주주의 사회에서 너무도 흔하게 '우리'라는 말을 쓰면서 그 경계를 가르는 노력을 폄하하기 일쑤다. 흔한 예로 드는 영화관 좌석 사이의 팔걸이를 어떻게 사용하는가도 쉽지 않다. 초등학교 시절 2인 책상의 경계를 둘러싼 싸움은 1인 책상으로 정리되었지만, 영화관 팔걸이는 같이 쓰기도, 한쪽만 쓰기도, 번갈아 쓰기도, 심지어 아예 안 쓰기도 어렵다. 어떤 육군대장 부부는 공관병을 군 직위에 따라 부여된 기능을 수행하는 공적 관계로 보지 않고 사적 관계의 사노비 다루듯 했으니 우리 사회의 공사구분이 얼마나 혼란스러운지 알 수 있다. 대학에서도 교수는 학생을 사적으로 지배하려 들고, 자기와 가까운 신임교수를 뽑기 위해 난투를 불사하고, 보직교수는 자기 학과나 교수집단의 이해만을 대변하려 든다. 기업의 임원은 동문과 동향을 챙기고 심지어 시민단체에서도 사적 관계를 중시한다. 심지어 SNS 등 인터넷 공간에서도 서로 다른 견해를 용인하지 못하고 집단적인 사적 점유가 일상화된다. 바라건대 경계가 명확하지 않거든 공적 권력은 행사하지도 말고 공적 자산은 사용하지도 말아야 한다. 차라리 팔걸이를 비워두거나 공관병을 없애야 한다. 우리에게 익숙한 정치적 선출권력은 일정한 가치와 정책을 내세워서 일정한 집단의 지지를 받아 형성된다. 그러나 일단 선출되면 국민 모두를 위한 공적 권력이 된다. 국회는 당연히 다양한 집단과 가치 간의 토론과 합의를 통해 조정된 권력과 정책으로 작동한다. 대통령과 행정부 또한 그렇게 조정된 정책을 통해 국가와 국민을 이끌어야 한다. 그렇기에 장관은 인사청문회를 거쳐서 조정된, 수용 가능한 인물을 임명하게 된다. 청문 대상이 아니라 할지라도 언론과 여론에 의한 국민청문회가 진행되기 마련이다. 부패한 엽관제의 유혹을 뿌리칠 수 있어야 정치권력은 명실상부한 공적 권력이 된다. 공적 권력 형성의 걸림돌은 정치인들이나 정치세력들이 국가권력에 대한 광의의 팔길이 원칙을 포기하는 일이다. 권력장악에 정치적으로 참여하거나 집권자와 사적으로 가까운 사람은 그 누구라도 공적 권력에 접근할 수 있다는 발상이다. 더 우려할만한 사실은 집권세력이 추구하거나 연대하는 가치를 수용한 사람은 그 가치의 정당성이 사회적으로 충분히 검증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 누구라도 공적 권력을 담당할 수 있다고 믿는 점이다. 정치세력이나 정치인들이 그러한 인식에서 벗어나지 않는다면 국가권력은 사적 권력으로 변모하게 되고 국가권력은 블랙리스트와 화이트리스트만을 가진 팔길이 원칙의 위배자가 된다. 그러나 가장 위험한 경우는 정치적 지지자 시민들조차 그러한 경향들을 추종하면서 배타적 사적 집단화하고 그 결과 사회가 철저히 분열되어 스스로 자정능력을 상실하는 상황이다./윤상철 한신대 대학원장윤상철 한신대 대학원장

2017-09-04 윤상철

[윤상철 칼럼]포퓰리즘과 더불어, 거리두기

민주주의 시대별 지지세력 존재공동체 열망 형상화 대중 동원포퓰리즘 '긍정적 효과'정치·경제적 과도한 비용 소요국가 거버넌스 위협 '문제점'중간세력 동원·협치로 극복해야<독재와 민주주의의 사회적 기원>이란 역사사회학의 명저를 남긴 베링턴 무어는 "부르주아지 없이 민주주의 없다"라고 썼다. 중세봉건체제에서 근대자본주의와 대의민주주의로의 출구를 열었던 부르주아지계급의 역사적 역할을 가리킨다. 케임브리지대학의 맑스주의 사회학자 괴란 테르본은 "프롤레타리아트 없이 민주주의 없다"라는 주장으로 노동자계급이 대의민주주의의 보편적 확장을 이끌었다고 설파했다. 이른바 '제3의 물결 민주화'의 끝자락을 경험했던 테리 칼이나 필립 슈미터 등 스탠포드의 정치학자들은 "국가(State)없이 민주주의 없다"는 말로 신생 민주주의의 취약성을 경고했었다. 역사적으로 민주주의 정치체제를 만들고 지탱케 하는 집단이 존재했다는 말이다. 정치세력은 그 집단들을 동원하고 대표하면서 정치적 민주주의를 주조해냈다. 현존 민주주의체제 역시 지지세력의 사회적 힘에 의해 떠받쳐지고 있다. 그러나 지지세력의 요구와 희망을 정치적으로 대표하는 일은 결코 녹록하지 않다. 그 대중적 요구를 받아들이는 사회적 비용이 만만찮고 결과적으로 국가의 거버넌스를 위협하기 때문이다. 새 정부가 들어선 이후, 이른바 적폐청산이 일상적 화두로 등장했다. 전략적 모호성을 거두어버린 사드 배치뿐만 아니라 세월호도 미수습자 문제의 해결 수준을 넘어서고 있다. 지지자를 부르던 대선 캠페인은 이제 그들의 허기를 채워줄 정책적 실행과제로 대두되고 있다. 탈원전, 최저임금인상, 전교조합법화, 비정규직의 정규직화, 특목고 및 자사고 폐쇄 등이 촛불혁명의 이름 아래 혹은 적폐청산의 대상으로 거론되고 있고 일부는 전격적으로 실행되었다. 매양 그렇듯이 모든 적폐는 양면적이다. 모든 제도는 일정한 사회적, 정치적 지지에 힘입어 유지되었기에 어떤 제도를 적폐로 규정하는 순간 이를 둘러싼 양 진영간의 대결은 불가피하다. 대통령선거는 표의 대결이었지만 선거 이후에는 말과 이미지, 그리고 여론의 대결이 된다. 명백한 우열을 확인할 수 없기에 포퓰리즘이라는 보다 넓은 범위의 강력한 대중동원이 필요해진다. 단순다수가 아닌 현저한 다수를 확보하기 위해서는 진영갈등의 외곽에서 뚜렷한 지지를 이끌어내야 한다. 그럼에도 포퓰리즘은 대중적 열망을 형상화하고 공동체의 의지를 조직하고 동원한다는 점에서 긍정적이고 유효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포퓰리즘은 정치체제의 안정성을 해칠 수 있다. 포퓰리즘적 정치동원은 반대 진영에 대해 과도한 정치적 압력을 행사함으로써 그들도 고도로 정치화되고 동원된다. 정치적 반대압력이 집중되고 강화되면서 진영과 파벌의 논리가 심화된다. 지난 보수정부 9년은 개혁정부 10년의 협치없는 포퓰리즘에 대한 반사적 동원 혹은 역편향의 효과이기도 하다. 다른 한편으로는 정치적, 경제적으로 과도한 비용이 소요됨으로써 국가의 거버넌스를 위협하게 된다. 즉, 포퓰리즘은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 파국을 예비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현실적으로 포퓰리즘이 의회의 지형상 녹록하지 않다는 사실은 일견 다행스럽다. 물론 포퓰리즘적 위임민주주의를 부정하기는 어렵다. 실제로 새로운 대통령권력이 가진 정당성의 우위에 근거하여 의회권력을 최대한 우회하고 대중적인 압력을 의회에 구사하고 있다. 그럼에도 중간세력들을 잘 동원하면서 반대진영과의 협치를 이끌어내고 동시에 국가재정위기나 자본의 저항과 같은 경제적 위기를 슬기롭게 극복해낸다면 비정상적이면서 성공적인 체제로 볼 수 있다. 어쩌면 정권교체는 우파포퓰리즘 대 좌파포퓰리즘, 혹은 경제적 포퓰리즘 대 정치적 포퓰리즘의 경쟁과 갈등을 표현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 과정에서 분산되고 형해화된 대중적 정치열망들이 보다 다수의 지지를 확보할 수 있는 방향으로 모아지고 조정된다고도 볼 수 있다. 그 격변 속에서도 국가의 거버넌스가 잘 유지된다면 사회발전의 필수적 경로일 수 있지만, 포퓰리즘의 행로는 결코 낙관적일 수 없고 극단적 파국으로 쉽게 침몰한다는 사실을 역사는 말하고 있다./윤상철 한신대 대학원장윤상철 한신대 대학원장

2017-07-31 윤상철

[윤상철 칼럼]정치적 대표자를 신뢰하는가?

정치인들 공약 실현되기 위해선시민들의 이해에 등 돌릴 수 있는조건 갖추지 않았는지 살피고이후엔 그들이 이를 지키도록정치적 지지의 사회관계망을지속적으로 가동시켜야 한다실패한 대통령에 대해 지지자들은 "내가 이럴 줄 알았냐?"고 자조와 배신감을 토로한다. 다음 선거에 이르면 부정과 분노를 넘어서서, 좌절하는 이는 기권을, 타협하는 이는 유사하지만 다른 후보를, 수긍하는 이는 결이 다른 후보를 선택한다. 물론 완벽한 반대자를 선택하지는 않는다. 그들이 애초에 왜 그 정치인을 선택했는지, 이후에 왜 다른 선택을 하지 않는지는 불분명하고, 스스로 성찰하지도 않는다. 시민들은 지지한 정치인이 자신을 대표한다고 믿는다. 그러나 시민들은 계층, 성, 교육, 지역, 세대뿐만 아니라 시장적 지위, 문화적 성향, 종교적 신봉 등에서 다중적인 정체성과 이해관계를 갖기 때문에 정치인이 그 모든 요구를 알기도 수용하기도 어렵다. 또 정치인은 메이저시장에서 승자독식의 경쟁을 이겨내야 한다. 비슷한 다수의 경쟁자가 다툴 경우에는 틈새시장만으로 최종 승자가 될 수 있지만, 양자경쟁 상황에서는 테이크올(Take all) 전략을 취하기 마련이다. 요컨대, 시민들은 정치인이 자신을 대표한다고 믿지만 정치인은 모두를 대표한다고 말하는 모순이 존재한다. 선거가 끝나면 이 모순은 드러나게 된다. 정치인은 상대적 자율성을 지니게 되는 반면, 유권자들은 항상 조직되고 동원될 수 없기 때문이다. 희망하기를, 시민유권자들은 자신들의 맹목적 기대에 매몰되지 않고 정치인들의 행위를 사전에 합리적으로 예측해야 한다. 사적유물론이 아니더라도 사람들은 상식적으로 사회적 존재조건에 따라 그 사회적 의식과 태도가 다를 수 있다고 믿는다. 정치인들이라고 다를까 싶다. 특히 선거 이후의 다소 자유로운 정치인들이라면. 언론은 정치인들에 대해서 인물, 정책, 정당 등을 판단기준으로 제시한다. 인물요인으로 도덕성 등이 거론되지만 앞서의 사회적 존재조건이 더 중요할 수 있다. 정책요인으로 정치인의 상대적 자율성보다는 공약(公約)이 빈번하게 공약(空約)이 되고, 대통령 비서실장이 "선거캠페인과 국가운영은 다르다"고 말하는 현실에 주목한다. 정당은 정치세력과 그 지지자들로 구성되는 만큼 그 안의 개인들은 집단의 정치적 지향에 의해 제약되지만 그 제약이 집단적 이해관계 혹은 취향일 경우에는 심각해진다. 인물요인은 정치인이 자신(들)의 사회적 존재조건과 갈등하는 정치적 대표를 할 가능성이 약하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특정 지역 출신의 정치인이 그 지역의 이해에 반하는 정책을 제안하고 실행하기란 쉽지 않다. 상류층 출신의 정치인이 자산계급의 이해에 반하는 정책을 내려면 아웃사이더의 고독을 감수해야 한다. 강남좌파가 잘 보여주듯이 노동자 출신이 아닌 정치인들이 노동자들을 위한 정치를 하겠다는 공약도 국회의원이나 대통령은 특정 집단의 대표가 아닌 '전 국민의 대표'라는 모호한 표현 속에서 신기루처럼 사라져 버린다. 검사출신의 정치인이 검찰개혁을 하기는 상상하기 어렵다. 결국 정치인들이 공약한 정치적 대표가 현실화되기 위해서는 우선 그들이 시민들의 이해에 등을 돌릴 수 있는 조건을 갖추지 않았는가를 먼저 살피고 이후에는 그들이 이를 지키도록 정치적 지지의 사회관계망을 지속적으로 가동시켜야 한다. 이와 달리 정치적 'XX빠'문화는 정치인들의 다중성과 유권자들의 '확증편향'이 결합하여 정치인들의 유권자 대표성을 그들 간의 권력경쟁에 종속시키는 최악의 결과를 낳는다. 투키디데스의 말마따나 "그들이 그토록 갈망하던 것은 헛된 희망에 의탁하고 그들이 선호하지 않는 것들은 그저 멀리 치워놓는 것이 인간의 습성이다." 정책과 공약으로 위장한 정치인들을 그 본분에 충실하게 하기 위해서는 시민들이 그들을 선별하고 감시하는 데 있어서 훨씬 섬세하고 능동적이어야 한다. 웨렌버핏은 "인간이란 새로운 정보를 입에 맞는 대로 해석하는 것에 능통한 존재이다. 그들의 의견은 절대 바뀌지 않는다"고 말한 바 있다. 더 나아가 사람들의 이러한 '정해진 생각'은 흔히 신념이나 세계관으로 포장되지만 그 생각이 이성적으로 판단하고 합리적으로 결론지어졌다고 보는 것은 큰 착각이다. 시민들은 자신들이 믿고 싶은 대로 믿고, 보고 싶은 대로 보면서도 그 인식과 신념이 타당하고 정의롭다고 생각하는 관성을 지니고 있을 뿐이다. 당신들의 생각은 게으른 뇌가 인지적 지름길을 찾으려는 착각일 수 있다./윤상철 한신대 대학원장윤상철 한신대 대학원장

2017-06-26 윤상철

[윤상철 칼럼]국민(?)은 누구를 왜 지지하는가?

이번 대선 탄핵정국속 부정·비리과거청산 회고적 투표 경향 높아盧정권 정치적 동원 성공한 반면그 지지대중의 경제적 이익 실현만족시켜 주지 못함으로써 실패신정권이 가장 꺼리는 '반면교사'1.1. 19대 대통령선거가 끝났다. 선거결과를 두고 지역선거가 세대선거로 대체되었다고 평가한다. 정치적 지지양태가 호남과 영남 간의 지역균열에서 50대 이하와 60대 이상의 세대균열로 바뀌었다고 한다. 특징적인 모습은 50대 유권자들이 연령효과보다는 세대효과에 의해서 보수가 아닌 진보의 대열에 동참했다는 점이다. 일반적으로 연령효과는 젊은 층이 진보정당을 지지하고 장년층 이상이 보수정당을 지지하는 양상으로 작동하는데, 이른바 '86세대'인 50대의 세대효과가 작동하면서 세대간 균열지점이 높게 이동하였다고 한다. 1.2. 선거는 정치세력과 유권자 시민이 만나서 정치적 지지를 동원하고 정치적 지향을 요구하는 접점이다. 이 교환은 민주주의에서 항상적으로 이루어지지만 주기적인 선거가 교환의 구조와 안정성을 결정한다. 누가 누구를 어떻게 지지하는가? 첫째는 다원주의적 이익집단 패러다임으로서 개인과 집단의 이익을 정치적 지지를 통하여 표출하는 방식이다. 둘째는 엘리트주의 패러다임으로서 대규모 관료조직들의 엘리트간의 경쟁을 통해서 정치적 대표를 결정하는 방식이다. 셋째는 계급주의적 패러다임으로서 계급정당체제를 통하여 특정 계급의 정치적 지향으로 국가를 조직하는 방식이다. 자본주의국가의 지배적인 교환방식은 원론적인 계급정당체제라기보다는 다양한 사회조직을 대표하는 엘리트간의 경쟁과 조정을 통한 이익집단 패러다임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 무엇을 교환하는가? 경제적 전유와 문화적 헤게모니, 즉 경제적 이익과 이념적 정체성을 매개로 선거가 이루어지고 그 결과를 통해 정치세력과 유권자 시민들이 결합되는 양식을 취한다. 1.3. 정치적 지지의 균열이 세대로 나타나건 지역으로 나타나건 그 배경에는 나름대로의 근거와 동원의 맥락이 존재한다. 전통적인 지역균열은 자본주의적 산업화가 경부축을 중심으로 진행되면서 상대적으로 혜택을 누린 영남지역과 상대적으로 소외된 호남지역간의 균열이었다. 군부-기업-관료-영남의 엘리트 연합과 야당-재야-사회운동-호남의 피지배연합이 대치하는 형국이었다. 그 결과 이념적 정체성에 있어서도 영남지역은 보수-성장-안보 이념으로 호남지역은 진보-민주-통일 이념으로 각각 분리되면서 동원되었다.1.4. 1997년 외환위기와 더불어 신자유주의체제가 공고화되면서 이러한 상황은 급변하였다. 이념적 정체성보다는 경제적 이익의 문제가 더 중요해졌다. 이명박정권은 '747공약'으로 박근혜정권은 '경제민주화'와 '474경제비전'을 통해 집권에 성공하였다. 이념적 정체성을 외부화시키면서 경제적 이익에 대한 해답을 제시했기 때문이었다. 보수대연합은 기존의 이념적 균열을 유지하면서도 진보연합을 위축시킬 수 있었다. 1.5. 이번 대선은 대통령의 탄핵과 구속 이후에 이루어졌음에도 불구하고 경제적 이익을 둘러싼 미래전망적 투표라기보다는 과거청산적 회고적 투표의 경향이 더욱 압도적이었다고 볼 수 있다. 문제는 이념적 정체성에 기반한 정치적 지지는 즉발성과 휘발성이 강해서 쉽게 동원되고 철회될 수 있지만, 경제적 이익에 따른 정치적 지지는 구조적이어서 쉽게 동원되지는 않지만 일단 동원되면 대단히 공고하다는 사실이다. 설사 많은 유권자들이 탄핵정국 속에서 양극화에 따른 상대적 박탈을 강하게 인식하고 표출하였다 하더라도 정치적 선택의 지형이 탄핵과 정치적 보수/진보 구도 하에서 치러지면서 경제적 이익 자체가 선택의 대상은 아니었다. 1.6. 대통령 선거가 회고적 투표로 이루어졌다면 실제 정치적 교환은 새 정부가 들어선 이후부터 본격적으로 진행될 것이다. 유권자들은 탄핵정국 속에서 부정과 비리, 그리고 헌정문란과 가장 거리가 먼 정치세력이 경제적 이익의 실현에 있어서도 상대적으로 유능하리라는 기대감을 갖고 투표에 임했을 것이다. 집권세력들이 지지자들의 잠재적 요구에 부응하지 않는다면 지지의 철회는 불가피하지만 기대 이상의 성취를 보여줄 경우에는 지지의 확장이 이루어질 수 있다. 정치적 교환은 결코 멈추지 않는다. 노무현 정권은 정치적 동원에 성공한 반면 그 지지대중의 경제적 이익을 실현시켜 주지 못함으로써 실패했다고 볼 수 있다. 신 정권이 가장 피하고 싶은 '반면교사'의 사례일 것이다./윤상철 한신대 대학원장윤상철 한신대 대학원장

2017-05-22 윤상철

[윤상철 칼럼]국민의 자격

민주화 이룬 국민들 스스로가높은 민주주의 의식 가졌더라면아직도 진행중인 촛불집회라는거대한 사회적 비용 필요치 않아이제 자격 갖춘 시민으로 성장거대한 시험대를 응시하고 있다사람들이 서로 다투다 보면 "당신이 그렇게 말할 자격이 있냐?"고 묻는다. 그 말은 상대에 대해 이미 권위나 영향력의 우열이 무너진 경우에 드러난다. 국가 '지도자의 자격'이 극적으로 실추된 상황에서 '국민의 자격'은 우리 공동체를 다시 세우기에 신뢰할만한지 묻고 싶다. 흔히 '부모의 자격'은 운위되지만 '자식의 자격'은 없는 것처럼, '지도자의 자격'은 거론되지만 '국민의 자격'을 논하지는 않는다. '자식의 자격'은 가부장주의적 억압을, '국민의 자격'은 국민국가의 비민주적 동원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과거 시대처럼 지배 규범이 없이 서로 다른 윤리적 규범들이 상충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헌법에는 지도자의 소명이자 자격의 예로 국회의원이나 대통령에 대해 청렴의 의무, 국가이익을 우선하는 직무수행, 국가의 독립이나 헌법을 수호할 책무, 조국의 평화적 통일을 위한 성실한 의무 등이 적시되어 있지만, 법을 위반하지 않는 한 이를 실행하지 않더라도 제재를 받지 않는 윤리적 혹은 정치적 자격들이다. 이와 달리 '국민의 자격'은 납세와 국방의 의무를 제외하면 따로 규정되어 있지 않다. 선거권과 공무담임권을 가진 국민들이 그 권한을 수행하기 위하여 공화주의적 자격과 능력을 스스로 갖추고 고양해야 하는가에 대해서는 아무런 말도 없다. 혹자는 서로 다른 이해관계와 가치관 속에서 자연스럽게 형성되는 집단지성이 민주주의를 이루어 나간다고 믿는다. 노조나 정당 등이 이른바 '민주시민교육'의 이름 아래 시민들에게 민주적 규범과 가치를 심어주고 그 기반 위에서 민주주의라는 불안정한 체제가 자리잡도록 한다고 믿기도 한다. 그러나 어떤 보수언론인이 일정한 역사관, 국가관, 대북관을 공유해야 국민으로서의 자격을 지닌다고 주장할 때에 우리는 그 이념적 배후를 의심한다. 평화주의적인 종교인이 9·11테러에 대한 보복적 성전에 동의하는 미국인들을 세계를 이끄는 국가의 국민으로서 자격이 없다고 비판하는 모습에서 과도한 보편적 이념주의를 발견한다. 누구도 감히 말하지 못하는 국민의 자격은 아직도 이어지고 있는 비폭력 평화혁명 촛불집회에서 광장의 시민으로서 그 형체를 드러낸다. 시민들의 동원된 힘은 뇌물수수와 직권남용 등의 혐의를 받고 있는 대통령을 탄핵하고 구속하게 함으로써 민주주의를 기사회생시켰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민적 자긍심과 해외 언론의 상찬에도 불구하고 "부패한 정치는 부패한 국회의원을 선출했기 때문이요, 부패한 국회의원을 선출한 것은 부패한 국민인 까닭이다"라는 영국의 격언이 여전히 우리와 무관하지 않다. 우리들은 누차에 걸쳐 대통령권력의 타락을 미리 예단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에 눈감고 귀를 막았을 뿐만 아니라 아무런 자정적 제도화를 이루지 못했었다. 이제 대통령과 그 주변의 부패한 정치모리배들을 몰아낸 것만으로 과연 자긍심을 가질 수 있을까? 한반도 안보위기가 극한적으로 치닫고 있지만, 대통령 후보자들은 그 어떤 해결책이나 제안조차 해볼 수 없는 이 상황이 지도자로서의 자격이 결여된 그들만의 탓으로 돌리기는 쉽지 않다. 자격있는 국민의 부재를 빗댈 수 있는 괴테의 말이 우리와는 무관하기를 희망한다. "다수라는 것보다 분개하게 하는 것은 없다. 다수를 구성하는 것은 소수의 유력한 선구자 외에는 대세에 순응하는 건달과 동화된 약자와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조차 전혀 모르고 따라 붙는 대중들이기 때문이다." 민주화를 이룬 국민들이 스스로의 높은 민주주의 의식을 항상 곧추세우고 있었더라면 무려 22차에 걸쳐 1천500만 이상을 동원하면서 아직도 진행되고 있는 촛불집회라는 거대한 사회적 비용을 치르지 않아도 되지 않았을까? 괴벨스라면 "이것은 그들 스스로 자초한 일이라고…. 그리고 그들은 지금 그 대가를 치르고 있는 거야"라고 조소하고, 히틀러라면 "사람들이 생각하지 않는 것이 권력자에게는 얼마나 큰 행운인가?"라고 흐뭇해하지 않았을까? 우리 국민은 민주주의를 쟁취하고 지켜오고 있는 동안 민주주의적 교양을 갖춘 자격있는 시민으로 성장했고, 이제 다시 거대한 시험대를 응시하고 있다. 히틀러와 괴벨스는 아니라도 더 추한 정치지도자들이 우리를 지켜보고 있지는 않은가?/윤상철 한신대 대학원장윤상철 한신대 대학원장

2017-04-17 윤상철

[윤상철 칼럼]우리 안에 우리의 미래가 있다

지금 우리는 다양한 생각들과이해관계 지닌 사회관계란 점을시인하며 시작해야 하지 않을까복잡하게 이합집산하는 집단들정당·세대·지역이든 서로 같음을강요않고 인정하는데서 출발해야'다른 백년'을 꿈꾸는 지식인들이 있다. 대선후보들은 "역사교체"와 "시대교체"를 주장한다. 어떤 시대를 환골탈태하는 새로운 시대를 열어야 한다는 말이다. 새 시대에 대한 희망과 의지를 같이 하자는 데 누가 탓할 것이며, 모름지기 지식인이건 정치인이건 국민과 더불어 앞장설 일이다. 이러한 현상은 어제 오늘에 나타난 일은 아니다. 민주화 30년 동안 우리는 매번 새로운 정부를 만나야 했다. 개혁적 정부는 '문민정부' '국민의 정부' '참여정부'로 자칭했고, 보수정부도 이전 정권과의 단절을 강조했었다. 그 어떤 대통령도 전임 대통령에게 이어받을 유산을 찾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의 한국 민주주의는 선진적 민주정부라 하기에는 더없이 치욕적인 이유로 탄핵사태를 맞게 되었다. 안창호 헌재재판관의 보충의견이 30년 전에 나왔어야 할 말처럼 낯설기만 하다. "이 탄핵심판은… 미래 대한민국이 지향해야 할 헌법적 가치와 질서의 규범적 표준을 설정하는 것"이다. 잠시 사회학자 짐멜의 사회관계론으로 돌아가자. 그는 사회관계를 다이애드(이자관계, Dyad)와 트라이애드(삼자관계, Triad)로 나누어 설명한다. 트라이애드는 한 명의 구성원이 다이애드에 추가된 데 불과하지만 그 사회관계의 속성은 근본적으로 변화한다. 개인의 목소리와 개인의 영향력이 약화되고 사회적 갈등이 완화된다는 것이다. 다이애드와 달리 집단의 생존 가능성이 높아지고 집단의 정체성이 강화되는 반면, 트라이애드의 개인들은 덜 자유롭고, 덜 독립적이고, 더 제한적이라는 말이다. 다시 우리 사회로 돌아와 보자. 이제까지 우리 사회에서는 양당제가 바람직한 정당체제로 받아들여져 왔다. 진보와 보수, 여당과 야당, 경상도당과 전라도당, 부자의 당과 노동자·서민의 당으로 늘 나뉘어져왔다. 전형적인 다이애드 관계가 정치세력이나 정치적 이념 속에 존재하고 있었다. 제3의 세력은 늘 '사꾸라' 혹은 '이중대'로 매도되거나 외면당했다. 깊게 들여다보면 나와 '나 아닌 것'으로 나뉘어져 있을 뿐이었다. 'x사모' 혹은 'x빠'의 이름으로 나(I)와 동일한 우리(we)를 가두어 놓고 나 아닌 다른 모두를 밀어내고 있었다. 머리 속에는 오로지 나 밖에 없지만 그런 나를 돋보이기 위해 나 아닌 남을 상대로 치켜세우는 이른바 '적대적 공존'만이 존재하였다. 다이애드에 집단의 정체성이 없듯이 '적대적 공존' 안에는 우리가 없고, 민족이 없고, 국가가 없고, 대한민국이 없다. 심지어 모두가 동의하는 우리 역사도 없다. 오로지 갈등하는 다이애드만 있을 뿐 이를 매개하고 조정하는 제3의 무엇이 없다. '탄핵인용'과 '탄핵기각'은 있지만 그 중간은 없었다. 대선후보들이나 국회의장까지 나서서 '탄핵심판'의 결과를 승복하자고 했지만 자신이 희망하는 결과가 나올 수밖에 없다고 강변했다. 정치세력간의 싸움이 존재하더라도 이른바 감사원이나 검찰, 국정원이나 군대 등 이른바 '헌법상 독립기구'들이 뭔가 중립적으로 양자를 조정하거나 그 상황에서도 우리의 정체성을 확인해주는 기구는 있어야 하지 않을까? 서로 다른 이념들이 충돌하더라도 헌법은 존재하고, 역사적 전통이나 민주주의의 보편적 가치가 '디케의 저울'로 존재해야 하지 않을까? 만일 그마저도 없는 상황이라 하더라도 분열된 다이애드로 싸울 일은 아니다. 우리를 확인시켜 줄 제3의 구성원을 찾아 트라이애드를 만들 일이다. 조너선 하이트는 '바른 마음'에서 사람들은 감성적 직관으로 결론을 정해놓고 나중에 논리적 정당화를 한다고 말한다. 결국은 가장 민주적인 사회는 다양한 직관을 지닌 사람들이 서로 스스로의 의견들을 잘 드러낼 수 있도록 조직된 사회라는 것이다. 어쩌면 지금 우리는 다양한 생각들과 이해관계를 지닌 그런 사회관계라는 점을 인정하는 데서 출발해야 하지 않을까? 복잡하게 이합집산하는 집단들, 그게 정당이든 세대든 지역이든 뭐든 서로 같아야 한다고 강요하지 않고 인정하는 데서 출발할 수 있지 않을까? 그렇게 스스로를 상대화할 수 있을 때에 비로소 우리를 찾을 수 있고 매번 헌법재판소의 판단을 물어보지 않아도 될 것이다. 지금의 상황은 우리 안에서 그러한 다이애드의 독재가 붕괴하고 있다는 점에서 결코 비관적이지 않다./윤상철 한신대 대학원장윤상철 한신대 대학원장

2017-03-13 윤상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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