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상철 칼럼

 

[윤상철 칼럼]'적'과 동침하는 민주주의

다수를 존중하고 소수를 배려하는'자유민주적 질서'가 체제운영원리선거통해 권력의 정당성 상호인정특정이익 추구땐 사회적반발 초래복원시키려면 엄청난 희생 불가피대한민국의 정치체제는 헌법 전문에 이어 제4조에서 반복되듯이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로 규정되어 있다. 헌법 전문의 내용들은 대부분 대한민국의 역사와 정체성 그리고 국가의 목표 등으로 구성되어 있고, 체제운영원리는 오직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에 담겨 있다. '자유와 민주주의에 기반한 질서'에서 민주적 기본질서는 헌재의 판례에 따르면 '모든 폭력적, 자의적 지배를 배제하고, 다수를 존중하면서도 소수를 배려하는 민주적 의사결정을 기본원리로 하는 민주적 기본질서'이다. 즉, 헌법에는 체제 운영의 기본 원리만이 제시되어 있을 뿐, 적극적이고 공격적인 정의는 찾기 어렵다. 이렇듯 광의의 방어적 정의로 인하여 어떤 체제운영원리가 수용 가능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통합진보당의 위헌정당해산에서 볼 수 있듯이 명확하지 않다. 그러나 최근의 정치상황과 국민의식을 살펴보면, 민주적 기본질서 역시 혼란스럽기는 마찬가지이다.민주주의는 극단적으로 표현하면 일정한 절차에 따라 움직이는 '적과의 동침'이다. 화해불가능한 적도 있고, 적인지 친구인지 불명확한 대상도 있고, 이해를 같이 하는 친구도 있다. 그러한 관계가 항상 고정되어 있지는 않다. 상황에 따라서 적이 친구로 될 수도 있고 친구가 적으로 둔갑할 수도 있다. 이러한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의 상황에서 가능하면 더 많은 친구를, 가능하면 더 적은 적을 두고 있을 때에 더 안전하고 더 지속가능한 미래를 담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적을 완전히 없앨 수는 없다. 적이 없는, 모두가 평등한 사회를 추구했던 실험들은 결국 국가체제 자체를 붕괴시키거나 국민들의 삶을 나락으로 빠뜨렸다.민주주의는 특정한 세력이 주장하는 선과 정의를 실현하는 체제가 아니다. 그러한 목적을 향해 가는 과정에서 장단기적 목표들을 서로 합의해내고 실현하기 위한 형식적 규칙들이다. 적과의 갈등을 풀어내는 제도화의 방식이다. 잠을 자지 않고 살 수 없는 인간들이 안전하게 적과 동침하기 위해 만들어낸 제도의 묶음이다. 내가 생존하기 위해 적의 생존을 보장하는 제도인 것이다. 즉, 친구도 아니지만 적도 아닌 기묘한 사회관계의 양식이 민주주의로 서로 얽힌 것이다.그 민주주의는 극단적인 갈등과 폭력적인 충돌을 피하기 위해 새로운 규칙들을 만들어낸다. 정기적인 선거를 통하여 권력을 위임하고, 그 권력의 정당성을 상호 인정한다. 위임의 내용과 한계, 그 절차 등은 헌법과 법률에 의하여 규정되지만 완벽하지 않다. 이 경우에 우리는 상식과 관행에 따라 법의 미비점을 보완한다. 역사적 선례와 과거의 지도자들은 좋은 지침이 될 수 있다. 예기치 않게 법을 재해석하거나 사문화된 법률조항을 되살려내는 행위는 법논리상 옳다 하더라도 민주주의의 합의정신과 충돌한다.일반적인 사회규범 역시 민주주의를 만들어가는 제약조건이자 균열을 메우는 시멘트이다. 평등과 차별금지의 에토스는 그 어떤 가치나 이데올로기로도 유보될 수 없다. 유교적 권위주의적 질서는 사회에 짙게 드리워져 있지만, 신분과 계급의 질서를 덧씌우기는 어렵다. 기회의 균등과 결과의 평등이 갈등하고 있지만 공정성을 배반하는 행위에 분노한다. 자본주의가 낳는 사회적 양극화에는 분노하지만, 그렇다고 경쟁의 가치와 사적 소유를 거부하지는 않는다. 반드시 유교에 기반한다고 보기는 어려운 생래적 가족주의적 가치관 역시 강하게 사회를 지배하고 있다. 어떤 진보나 보수라도 이에 대항한다면 그 긍정적 가치를 실현하지도 못하고 무너지게 된다. 산업화와 민주화, 민족주의와 반외세 등의 가치도 어느 것 하나 양보하기 어렵다. 자유의 가치 역시 또다른 사회적 억압이 체제화된다면 국민 모두가 호출할 것이다.이렇듯 민주주의는 여러 가지 정치적, 역사적, 사회적 유산과 제약들을 담고 있다. 특정한 가치를 추구하기 위하여, 특정한 이익을 추구하기 위하여 민주주의를 파산시킨다면, 그들이 추구했던 것들을 이루기도 힘들 뿐만 아니라 민주주의를 또다시 복원시키기 위해 엄청난 희생과 시간을 보내야 할 것이다. 인류의 집단지혜는 민주주의가 '불가피한' 선택이라고 말한다. 어렵게 만들어낸 민주주의를 민주주의의 이름으로 훼손시키지는 말아야 할 것이다./윤상철 한신대 사회학과 교수윤상철 한신대 사회학과 교수

2020-07-06 윤상철

[윤상철 칼럼]탈성역의 민주화

날로 커지는 '정의연·윤미향 사태' 사회공동체 파수꾼 역할이 목표인시민단체의 권력유착 폐해를 본다문제는 그 이후 '은폐·호도' 집착땐사회운동 대의는 살아남기 어려워정의기억연대와 윤미향 전 이사장의 사태가 날로 걷잡을 수 없이 커지고 있다. 성금 횡령이나 배임의 의혹은 시민단체가 경제적 이권을 찾아 타락하였다는 비판을 면하기 어렵다. 국회의원 당선자인 윤 전 이사장에게 시민단체 활동은 정치권력으로 나아가기 위한 통로였을 수 있다. 시민단체 활동가가 위안부 문제에 당사자들을 배제하고 개입함으로써 국가간 외교를 왜곡시키고 국내정치까지 소용돌이치게 한 사실은 국가적으로나 사회적으로 돌아볼 일이다.세계적인 사회학자 찰스 틸리는 '동원에서 혁명으로'라는 저서에서 정치세력이 시민사회세력을 동원하고 호선하는 양상은 다원민주주의체제 하에서 불가피하다고 갈파한 적이 있다. 그 과정에서 시민단체가 권력화하거나 시민운동가가 출세하는 일은 사회적으로는 부수적인 현상일 뿐이다. 모든 사회구성원들이나 집단이 사회문제를 의사결정하는 정치권력을 추구하는 한 불가피하다. 사회문제를 위임하거나 대표하지 않고 스스로 정책적으로 해결하려는 노력 또한 부적절하다고 보기 어렵다.그럼에도 시민운동단체가 특정 정치권력과 지속적 유착관계를 맺는 모습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 비정부기구로서 정파적, 계급적, 집단적 이해관계를 넘어서서 전체 사회공동체의 생존과 발전에 기여해야 할 시민운동단체가 그 안에 갇힘으로써 우리 사회가 잃는 손실은 너무도 크다. 더군다나 그들이 공식적으로 지키고자 했던 피해당사자들이 자신들의 소망을 펴보지도 못하고 사라져가거나 자신들의 행위에 대해 비난을 받거나 심지어 매도되면서 거듭된 피해와 고통을 받는 것 또한 바람직하지 못하다. 뿐만 아니라 정치권력이 그들의 지지에 기반을 두고 정치적, 정책적 선택을 수구할 수밖에 없다면, 변화하는 현실에 무능한 결과를 낳을 수 있다.여기까지는 누구나 말할 수 있다. 어떤 진영에 속한 사람이든 합리적이고 객관적인 이성을 가지고 있다면 여기까지는 쉽게 말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그 이후의 문제이다. 시민운동단체가 정치권력이라는 뒷배와 묻지마 지지를 외치는 진영 내의 군중을 믿고서 은폐와 호도를 일삼는다면 우리는 더 이상 시민운동을 우리 사회의 파수꾼으로 기대할 수 없다. 손잡고 협력해왔던 부적절한 동거가 무너지면서 스스로의 권력기반이 약화될까 두려워 정치권력이 이들을 두둔하고 나아가 타락한 정치공세를 지속한다면 이 나라의 정치와 역사는 다시 곤두박질치게 될 것이다.여기부터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자유주의와 공화주의를 경험하지 못한 이 나라의 민주주의는 끝없이 확장되고 심화됨으로써 그 완성으로 가는 과정에 있다. 이 과정에서 우리는 산업화에 따르는 국가주의와 발전주의를 넘어서는 과정에서 그러한 이데올로기가 갖는 성역과 금기들을 무너뜨렸다. 그럼에도 민주주의를 실현하는 과정에서 또 다른 성역들을 만들어냈다. 민주주의를 촉발시키고 밀어준 사람, 장소, 사건, 그리고 이데올로기들이 성역화되었다. 보수적 산업화세력의 역사적 성찰성 결핍과 개혁적 민주화세력의 권력집착으로 인하여 우리 국민들은 진지하게 성찰하고 토론하면서 합의로 나아가기 보다는 사람들이 더 이상 건드려서는 안되는 성역들을 쌓아올렸다. 불가피했다고 항변할 수 있다. 그러나 이렇게 쌓아 올린 성역들은 약간의 틈새나 지진에도 쉽게 무너져 버림으로써 그 가치들을 훼손시켜버린다. 강변한다고 해서 사회운동의 대의는 살아남기 어렵다.여전히 우리 사회에는 성역 만들기가 횡행하고 있다. 민주주의에 대한 사회적 합의가 이미 이루어졌음에도 민주주의의 이름으로 여기저기 성역을 쌓아 올린다. 압축비약적 발전이 천민자본주의를 낳음으로써 가진 자들의 갑질과 사회적 양극화를 낳았었다. 그럼에도 토론과 합의가 부재한 민주주의는 5·18민주화운동을 지속적으로 폄훼와 반동에 시달리게 한다. 이처럼 졸속적 민주화의 길을 간다면 사회적 평등과 삶의 질, 생명과 안전이라는 기본적인 가치들도 페미니즘에 대한 냉소와 세월호에 대한 비인륜적 패악질로 나타날 것이다. 스스로 납득할 기회와 과정을 만들지 못하였으니 그들은 틈만 나면 못들은 체 하면서 트집을 잡을 것이다. 그럼에도 이들을 법과 제도로 짓누르겠다고 하면 우리 사회는 과거의 권위주의체제로 다시 돌아가겠다는 것인가? 아무리 정의로운 가치와 이념이라도 비민주적 권위주의체제를 만들어낼 수 있다./윤상철 한신대 사회학과 교수윤상철 한신대 사회학과 교수

2020-05-25 윤상철

[윤상철 칼럼]문제는 키잡이가 아니라 항로이다

진영논리 여야 커지는 '갈등의 골'코로나 사태로 총선 쟁점 '블랙홀'세계경제 위기 '무질서 시대' 예고자본·기업 국가와 사회 개입 확장미국배제 친중은 매우 위험한 전략주중에 총선거가 치러지면 여야는 승패에 따라 극단적으로 반응할 것이다. 승리한 여권은 지난 3년간의 실정을 모르쇠로 일관하면서 공수처를 내세워 자신들의 부패와 비리를 파헤치던 검찰과 야당을 핍박할 것이다. 승리한 야권은 국정을 중단시키고 정권비리에 대한 총체적 수사와 대통령 탄핵마저 밀어붙일 것이다. 정치권은 곧바로 대권경쟁에 돌입하면서 국가적 경제위기 등 산적한 국정과제는 진영논리에 휘말릴 것이다. 유권자인 국민들도 이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채 휩쓸려 왔다는 사실을 부정하기는 어렵다.더구나 코로나19 사태는 블랙홀처럼 총선거의 쟁점을 희석시켜 버렸다. 코로나19 사태는 전세계적으로 사회적 거리두기와 국가간, 지역간 경제봉쇄를 낳으면서 지구를 정지시켜버렸다.IMF총재인 크리스탈리나 게오르기에바는 1930년대 세계대공황 이후 최악의 경제난이 목전에 와 있으며 170여개국 이상이 마이너스성장을 기록할 것이라고 전망하고 있다. 한국정부의 희망처럼, 잘 나가던 경제가 코로나19 사태로 인해 주춤하고 있지만, 이 사태가 끝나면 다시 회복될 수 있을지 알 수 없다. OECD 최하위권의 경제성장률을 기록하던 경제가 잘 나가고 있었다고 동의하기 어려우며, 세계적인 팬데믹 사태가 가까운 시일 내에 가라앉을지도, 설사 수습된다 하더라도 세계경제가 이전 수준으로 복귀할지는 알 수 없다. 최근 경제분석기관, 신용평가사, 투자은행 등이 내놓은 한국의 경제성장률 평균치는 -0.9%의 역성장이다. 이미 1, 2분기의 경제가 역성장을 보인 만큼 그러한 전망이 뒤집힐 가능성은 높아 보이지 않는다. 가장 비관적인 노무라증권이 제시한 성장률은 -6.7%이다. 1998년 아시아 외환위기(-5.1%)와 1980년 2차 오일쇼크(-1.6%)보다도 더 심각한 경제침체이다.더욱 치명적인 사실은 세계와 한국이 직면한 상황이 코로나19 사태로 인한 일시적인 상황이 아니라는 점이다. '거대한 분기'를 비롯하여 많은 저작들이 2008년 이후 신자유주의의 위기와 붕괴를 주장해 온 바 있다. 한국은행 등 국내의 주요 경제분석기관들도 2012년부터 GVC(지구적 가치사슬)가 눈에 띄게 약화되고 있다고 진단한 바 있다. 지정학 전략가인 피터 자이한은 '21세기 미국의 패권과 지정학'이란 책에서 브레튼우즈체제가 완전히 붕괴하면서 2015~2030년간에 자유무역질서의 해체, 세계적인 인구역전 현상, 유럽과 중국의 붕괴가 나타난다고 지적한다. 미국의 시장, 해군력, 전략적 우산에 의해 가능했으나 미국의 입장에서 보면 전혀 실속없는 이 체제가 사회주의체제의 붕괴, 패권국가로서의 중국 등장, 세일가스혁명의 진전 등에 의해서 새로운 무질서의 시대,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 시대로 변화하고 있다고 진단한다.신자유주의체제 하에서나 미국 주도의 국제무역질서 하에서도 중국과 한국은 가장 많은 혜택을 받았던 나라였다. 특히 한국은 지구적 상품 사슬이나 지구적 가치 사슬에 있어서 미국이 제공한 국제적 평화체제 하에서 급속한 경제적 성장을 이루었던 나라였다. 이 체제가 무너지는 과정에서 한국은 대내적으로는 진보적 재분배전략으로, 대외적으로는 중국과의 정치적, 경제적 관계를 중시하는 전략으로 대처해왔다. 노동자들의 임금수준을 높이고 사회복지와 의료체계를 급속하게 확충하는 한편 자본과 기업에 대한 국가와 사회의 개입을 확장하는 전략이 적절했는지는 의심스럽다. 미국의 배제전략과 과도한 기업부채로 인하여 성장률이 둔화되고 기업부도와 유령도시가 속출하는 데다 한국에 대해 정치, 군사적 종속까지 강요하는 중국에 접근하면서 기존의 다차원 동맹과 거리를 두는 전략 또한 근시안적이다. 다시 말하면 한국은 비우호적인 국제환경 속에서 매우 위험한 전략으로 대처했다고 볼 수 있다. 금번 코로나19 사태는 이러한 대내외적인 상황을 더욱 악화시켰고, 분열적, 고립적 방향으로의 변화의 속도를 더욱 진척시켰다고 볼 수 있다. 풍랑이 더욱 거칠어지는 바다에서는 선장과 항해사, 조타수 가운데 누가 키를 잡을지가 중요하기 보다는 누가 선택하든 정해지는 항로가 어디인가가 더 중요할지 모른다./윤상철 한신대 사회학과 교수윤상철 한신대 사회학과 교수

2020-04-13 윤상철

[윤상철 칼럼]정보민주주의? 정보포퓰리즘!

조국이어 코로나19 사태 사회 쟁점인터넷이 '해법 공론장' 기대했으나국가·자본의 네트워크 개입 사유화개개인은 의견 취합전에 편식·잡식집단간 대화·토론부정 반민주공간최근 두 가지의 정치사회적 쟁점이 한국사회를 뿌리부터 흔들고 있다. 하나는 소강상태에 이른 '조국사태'이고 다른 하나는 절정을 향해 치닫는 '우한폐렴 사태'이다. 두 사건 모두 국민의 일상적 삶에 깊숙하게 관여하는 사안인 만큼 국민들은 이에 높은 관심을 갖고 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견해를 명확하게 드러내려 한다. 이미 국민들은 자신들이 모두 발언할 자격과 능력을 갖추고 있다고 믿고 있다. 두 사안의 의미를 진단하고 해석하는 데 있어서나 해법을 제시하는 데 있어서도 국민들은 극단적으로 상반된 입장으로 대립하고 있다. 이미 국민들은 사안들에 대해 너무 잘 알고 있다고 서로 확신한다. 또한 으레 그렇듯이 두 사안 모두 정치세력들간의 결사항전의 메뉴로 소비되고 있다는 점에서도 유사하다. 국민들을 대표하는지 아니면 동원하는지 알 수 없는 세력들이 존재한다. 물론 두 사안 다 권력관계에 의해 결정되고, 외적 상황에 의해 봉합될 수도 있지만, 여진이 가시지 않은 휴화산일 뿐 언젠가 다른 쟁점으로 다시 소환될 것이다. 1980년대 이후의 한국사회는 거대하고 중층적인 변화를 겪었다. 권위주의체제로부터 민주화된 직후부터 지구화의 거대한 흐름에 휩쓸렸다. 정확하게 말하면 민주화 자체도 지구화의 한 흐름이었다. 그러나 지구화와 함께 대중들의 일상생활을 더 근본적으로 변화시킨 흐름은 정보화였다. 민주화를 성취한 한국인들은 정보화에 대해서도 진보적 낙관론을 가질 수 있었다. 권위주의체제의 폐쇄성, 즉 정보의 비대칭성이 민주주의를 진전시키는 데 결정적 장애였다고 생각하고, 정보화는 이러한 장애를 넘어서 정보로 무장한 민주적 시민들의 풀뿌리 민주주의를 배양할 거라고 기대했다. 심지어 자본주의체제의 불평등성도 기본적으로 노동자와 자본가 간 정보격차를 해소하면 완화될 수 있다고 믿었다. 민주주의와 미디어 간의 관계를 갈파한 미국의 언론학자 로버트 맥체스니는 '디지털 디스커넥트'라는 책에서 미디어는 더 이상 하버마스가 그렸던 '공론장'이 아니라고 말한다. 정부 간섭이나 통제로부터 벗어나 국가의 정책에 대해 시민들이 자유롭게 토론과 논쟁을 벌이는 공간이기를 멈추고 자본에 의해 사유화되고 소비자의 정보가 상품화되고 광고의 경제학이 지배하는 철저하게 자본주의적인 공간이 되었다는 것이다. 정보화사회의 꽃인 인터넷 역시 자본의 욕망과 국가권력의 통제가 투사되면서 민주적이고 자율적이고 사회적인 대중소통의 공간이 아니라고 지적한다. 즉, 정보화가 보다 풍요롭고 평등하게 정보를 공유하게 해줄 거라는 기대는 전혀 실현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강한 국가와 자본에 의해 분절된 사회인 미국에서 정보민주주의의 희망이 사라졌다면, 그나마 상대적으로 강한 사회를 지닌 한국은 세계적 수준의 정보화를 기반으로 네트워크로 연결된 민주주의를 이루었을까? 미국과 마찬가지로 한국에서도 국가와 자본은 정보화사회의 네트워크에 엄청난 영향력을 가지고 개입한다. 물론 정보화 자체의 왜곡 혹은 결함도 있다. 사이버공간의 압도적 이미지는 사적인 욕망과 기호가 분출하면서 정보의 경중과 정오를 가리기 힘들어진 정보의 쓰레기장이다. 대부분의 개인들은 정보를 취하기 전에 그 막대한 양에 압도당하고 만다. 전문성과 도덕성 등의 기준이 없는 그 공간에서 개인들은 자신의 기호에 따라 편식하거나 잡식할 뿐이다. SNS 등으로 대표되는 정보화의 또 다른 특징은 이른바 '유유상종' 혹은 '호모필리(homophily)'이다. 카카오톡, 라인 등 다양한 DM(Direct Message)뿐만 아니라 페이스북, 트위터, 팟캐스트나 유튜브 등도 자유로운 공론장이기보다 비슷한 특성과 취향에 따라 모여서 확증편향을 강화하는 공간일 수 있다. 결과적으로 인터넷 공간은 일군의 사람들이 정보의 쓰레기장의 한 귀퉁이를 자신들의 영토로 선언하고 다른 집단간의 대화와 토론을 부정하는 반민주주의적 공간이 되고 있다.정보화가 계층간, 세대간, 지역간 정보불균형을 해소하여 더 깊은 민주주의를 만들어내려면, 이에 덧붙여 집단간 소통과 타협이 더욱 활성화되어야 한다. 뿐만 아니라 그 집단들은 국가와 자본의 개입으로부터 자유로워야 한다. 그러나 정보의 쓰레기 더미 속에서 집단간 격리와 균열을 더욱 확산시켜 '디지털 디스커넥트'를 만들어낼 수도 있다. 나아가 일부 시민들은 국가와 자본에 의해 분리되거나 동원되고, 나머지 시민들은 또다른 비집권 정치세력에 의해 동원되는 사회는 더 확신에 찬 '정보포퓰리즘'을 낳을 수 있다. 그 포퓰리즘 안에서 민주주의는 질식된다./윤상철 한신대 사회학과 교수윤상철 한신대 사회학과 교수

2020-03-02 윤상철

[윤상철 칼럼]청년, 여성, 그리고 광장민주주의?

젊은 학자들 비정규직 미래 불투명남성중심 기득권체제서 女 더 열악직접민주주의 목청 포퓰리즘 양상과도할땐 특수이익만 배타적 반영공화주의, 민주주의적 독재 처방전지난주에 한 학회의 워크숍에 참석했다. 토론의 주제는 '갈라진 진보, 세대와 광장의 정치'였다. '진보'라는 말이나 좌파·우파의 구분은 정치세력들의 자의적 개념 사용으로 인해 그 '정명(正名)'이 어렵기는 하다. 그럼에도 참석자들의 논의를 대략 정리하면, 현집권세력은 한국의 정치 지형상 좌파로 규정할 수 있고, 집권 전까지 단일한 대오로 뭉쳐 있던 좌파세력이 집권 후반기로 가면서 이른바 '조국사태'를 계기로 내부적으로 분화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서 이들에 친화적이었던 청년, 여성 세력들이 점차 이탈하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또 다른 문제 제기는 자유민주주의의 통치형태인 의회민주주의가 그 정치적 효용성과 대표성을 확보하지 못하고 광장민주주의 등의 직접민주주의를 대체재 혹은 보완재로 불러오고 있다는 점이었다. 특히 이른바 '86세대' 남성엘리트에 의해 주도되고 있는 의회와 정당체제가 여성이나 청년들의 이해관계를 전혀 대변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직시하면서 학계가 이에 대한 대안을 제시해야 한다는 주장들이 쏟아졌다.청년과 여성의 목소리가 높아지는 상황은 우리 사회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으며, 학계 역시 예외는 아니다. 교수 및 연구자의 길을 가고 있는 젊은 학자들은 학령인구의 감소에 따르는 대학구조개혁의 찬바람을 맞으면서 비정규직 강사와 연구원으로서 열악하게 살아가고 있으며 그 미래도 대단히 불투명하다. 그 이유는 국가발전의 토대인 지식생산자들을 국가와 사회가 여전히 유한계급으로 인식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이들 역시 취업절벽 앞에서 헬조선을 부르짖기는 여느 청년들과 마찬가지이다. 여성의 상황은 더 열악하다. 예비연구자들의 성비나 여성들의 연구역량 등이 과거와 다르게 변화했음에도 불구하고 남성 중심의 기득권적 대학교원체제는 요지부동이다. 사회가 빠르게 변화하고 있지만 여성들은 나이가 들수록 결혼, 출산, 육아 등의 압력을 더 받고 있으며 남녀의 상대적 차이를 논할 바가 아니다. 그로 인해 이들은 이제까지 결과적 평등과 소수자 및 약자의 배려를 주장해왔던 좌파들을 정치적으로 지지하면서 그들과 연합해온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이제 그들은 한국 좌파에 실망하고 전지구적 좌파의 무관심과 무능력에 좌절하면서 현재의 정치적 거버넌스를 부정하고 새로운 급진민주주의적 개혁의 수레에 올라타고자 한다.정치적 대표성을 상실했다고 생각하는 세력들은 의회민주주의 자체를 부정할 수도 있지만, 우회적인 수단으로 의회에 영향을 미치고자 한다. 최근 우리 사회를 뒤흔들고 있는 이른바 '광장민주주의'와 같은 직접민주주의적 양상들이다. 서초동과 광화문, 그리고 혜화동은 소용돌이치는 대중들의 반란이다. 이 광장에서 청년과 여성을 비롯한 다양한 이익들이 정치적으로 이슈화되고 동원된다. 일부 이슈들은 정치세력들을 통해 의회민주주의의 방향을 이끌기도 한다. 그러나 그 정치적 과실은 이들에 편승하거나 이들을 동원하는 정치 세력의 차지일 뿐이다. 더 안타까운 일은 대통령권력의 위임민주주의나 야당세력의 권력정치의 포퓰리즘적 선동에 동원되는 양상이다. 또한 광장민주주의가 갖는 감성적 소용돌이는 대중독재와 광장파시즘을 우려하게 하면서 체제의 불안정성을 키우기도 한다. 그들이 스스로를 동원하면서 내심 요구하고 있는 이익들은 일시적으로 표면적으로 정치적 담론에 반영되는 듯하다가 정치적 담합에 의해 어느덧 사라진다. 광장민주주의는 광장에서 먼지처럼 사라지고 잊혀간다. 그럼에도 민주주의가 과도하게 주장되면, 그 결과 힘을 지닌 집단의 특수한 이익이 선택적으로 수용되면, 다양한 집단의 이익갈등을 조정하여 최선의 일반의지를 만들어낼 수 있다는 민주주의를 배반하게 된다. 이에 일반적 정의와 모두의 이익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주체로 나서는 공화주의가 거론된다. 공화주의는 한국의 민주주의가 특수한 이익만을 배타적으로 반영하는 민주주의적 독재로 변모하지 않도록 하는 처방전일 수 있다. 동양이나 한국의 공화주의는 그 서구적 경험이 없고 진영논리가 팽배한 상황에서 이른바 협치 거버넌스를 통하여 모두의 이익이 대표되면서 상호조정되는 그러한 사회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다. 과도한 광장민주주의는 공화주의가 부재한 사회에서 민주주의를 파탄케 할지도 모른다./윤상철 한신대 사회학과 교수윤상철 한신대 사회학과 교수

2020-01-20 윤상철

[윤상철 칼럼]세대의 지배, 전근대의 지배

'신분제 해체·서로 존중 사회…''자유로운 개인·독립의 개체…'두 주장 틀렸다고 탓하기보다우리사회 어떤 결핍 보았는지동의하지는 않았는지 생각해야'불평등의 세대'란 책이 올해 학계와 대중의 관심을 받고 있다. 주로 정치적인 해석이 덧붙여지고 있지만, 독자들은 자신이 속한 세대에 따라 다양한 감정을 표출한다. 계급적 시각에서 불평등을 바라보던 진보진영에서는 사회적 균열에 대한 세대적 시각에 동의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자신들의 정치적 정당성의 근간이었던 민주주의연대가 오히려 다른 세대에 대한 독점적 지배의 자원이 되었다는 점에 매우 부당해 한다.저자인 이철승 교수는 세대의 정치가 어떻게 불평등의 구조를 낳게 되었는가를 다각도로 조명한다. 그는 386세대의 '네트워크 위계'가 '한국형 위계 구조'로 진화했다고 본다. 여기에서 위계구조는 첫째, 나이에 기반한 '연공구조'를 한편으로 하고 둘째, 세계화로 인한 노동시장 유연화 기제, 대·중·소기업 간 지배종속 관계, 그리고 노동조합을 통해 3중으로 중첩된다. 이 우연적 결합의 중심에 386세대의 네트워크가 최대의 수혜자로 살아남았다고 한다. 그들은 이른바 민주주의연대를 매개로 자본주의 하의 시민사회를 처음으로 조직한 세대였다. 또한 그들은 이전 산업화세대가 퇴출된 공간을 차지하고 후세대의 편입을 선별함으로써 정치적으로 과대대표될 뿐만 아니라 경제적, 사회적으로 과대독점하고 있다는 것이다. 더구나 이제는 경제적으로도 비생산적이고 비효율적일 뿐만 아니라 그들이 약속했던 민주주의의 확장을 저버렸다는 점에서 정치적으로 비도덕적이라고 주장한다.'반일종족주의'란 책은 역사학과 사회과학뿐만 아니라 정치권과 사회운동권에 두루 초미의 관심사로 떠올랐다. 인문학 도서로는 보기 드물게 10만부 이상 판매되었다 한다. 독자들은 자신의 역사관이나 정치관에 따라 격분하기도 하고, 합리적 정당화의 지적 자원을 찾았다고 득의만만하기도 한다.이영훈 교수 등의 주장도 기존 역사학계의 통념을 뿌리째 흔들고 있을 뿐만 아니라 유년기부터 그렇게 교육받고 성장한 국민들의 민족주의적 정서와 충돌하고 있다. 많은 이들이 그들의 주장에 귀 기울이기보다는 분노를 드러내며 친일파 혹은 '토착왜구' 등으로 먼저 낙인찍는다. 일본제국주의의 경제적 수탈을 시장적 교환으로 해석하고, 강제노동과 민족간 임금차별, 그리고 강제징병을 부정하고, 한일회담이 식민지배에 대한 배상 청구가 아니라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한민족 민족주의의 상징인 백두산과 독도 문제의 뿌리 얕은 내막을 드러내고, 쇠말뚝신화의 허구성을 밝히며, 구총독부 청사의 해체를 반달리즘식 문화테러로 보기도 한다. 고종을 망국의 암주가 아닌 개명군주로 둔갑시키는 정치적, 역사적 '조작'에 맞서서 백성과 국민에 무책임한 이 나라 지배층과 엘리트들을 성토한다. 위안부와 공창제 문제는 이미 널리 알려진 바 그대로다.나는 위의 두 책의 주장에 대해서 부분적으로 동의할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왜 이 연구에 대해서 '동의'에서 나아가 '환호'하는지 진지하게 고려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먼저 이철승 교수는 시장의 근본적 모순인 자본과 노동 간의 근본적 해결을 주장하는 구조주의 좌파에 맞서 '사회적 자유주의'를 주장한다. 계급의 덫에 빠져서 실제의 사회적 지배와 신분제에 눈감고 이를 존속시키는 우에서 벗어나고자 한다. 그는 시장경쟁의 폭압에 국가가 개입해 사회와 공동체를 지켜야 한다고 하지만, 근본적으로 국가와 사회의 속박을 공히 부정한다. 이영훈 교수는 샤머니즘적 반일종족주의에서 벗어나 자유민주주의와 근대화된 세계주의를 열고자 한다. 반일종족주의의 기형적 산물인 북한의 신정체제는 말할 것도 없고 우리 사회 곳곳에서 나타나는 전근대적 권위주의가 어떻게 근대적 민주주의의 확산과 심화를 억누르고 있는지를 지적한다. 이철승 교수는 "신분제 사회를 해체하고 내 자식과 다른 자식들이 자유로운 개인으로 서로를 존중하고 사회적 위험을 분담하며, 노동의 대가를 적절히 공유하는 사회"를 꿈꾸고 있다. 이영훈 교수는 "자유로운 개인, 독립하는 개체, 충일한 개성, 고양하는 예술, 과학하는 정신, 협력하는 사회, 경쟁하는 기업, 세계와 통상하는 나라, 그러한 아름다움… 근대문명", 즉 자유로운 개인의 근대국가를 꿈꾼다.진단이 틀렸으니 처방인들 맞겠는가 탓하기보다 그들이 우리 사회에서 어떠한 결핍을 보았는가, 그리고 그들의 독자인 시민들이 또한 그러한 진단에 동의하지 않았는지 생각해볼 만하다./윤상철 한신대 사회학과 교수윤상철 한신대 사회학과 교수

2019-12-09 윤상철

[윤상철 칼럼]거짓말로 무너지는 사회

'사기' 발생건수 모든 범죄 중 1위OECD국가 중 관련범죄율도 최고권력과 이익 취하기 위한 '거짓말'교양있는 시민도 진위 파악 어려워신뢰 상실하고 밑으로부터 '붕괴'영국의 총리 디즈레일리는 "세상에는 3가지 거짓말이 있다"고 말했다. 거짓말, 지독한(새빨간) 거짓말, 그리고 통계라고 한다. 선의의 거짓말이나 위선적 거짓말은 사회적으로 권장되지는 않지만 스스로의 편익을 취하지 않는다면 그나마 용납될 수도 있다. 그러나 자신의 권력과 이익을 취하기 위한 지독한 거짓말은 사회적 신뢰를 약화시켜 사회적 행위의 비용을 증가시키고 나아가 온 사회를 타락하게 한다는 점에서 묵과하기 어렵다. 더구나 "하나의 거짓말을 참말처럼 하기 위해서는 항상 일곱 가지 거짓말을 필요로 한다(마르틴 루터)." 여기에 불공정한 언론과 정치편향적인 조사기관, 그리고 이해당사자들이 만드는 통계까지 더해진다면 그 사회의 성원들은 정의/부정의, 삶의 목표, 후세대의 교육 등 일상적인 삶에서 아노미 상태에 이른다. 예부터 우리 사회의 '중요한 타자'들은 "착하지. 거짓말은 하지 마라"며 아이들을 격려하곤 했다. 이렇게 자리 잡은 사회적 규범은 경제적 저발전과 빈곤에도 불구하고 가족과 이웃, 나아가 사회를 신뢰하는 기반이었다. 그러나 어느 때부터인가 거짓말이 많아졌다. 대검찰청의 '2018년 범죄현황'에 따르면, 2015년부터 사기발생건수가 모든 범죄 가운데 1위를 차지했다. 세계보건기구의 2013년 발표한 '범죄유형별 국가 순위'에 따르면 대한민국은 경제개발협력기구(OECD)의 37개 회원국 중 사기범죄율 1위를 기록했다. 무고사건 역시 2015년을 고비로 연 1만건을 넘어섰고, 김영란법과 맞물리면서 급속하게 증가할 것으로 예측되고 있다. 일본의 한 경제잡지에는 한국에서 위증죄로 기소된 사람 수가 일본의 66배, 인구 대비로는 165배라는 기사가 실리기도 했다. 최근 이른바 조국사태에서 우리들은 한 번의 거짓말을 정당화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거짓말을 만들어내는지, 한 사람의 거짓말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추가적 거짓말을 필요로 하는지 직접 체험했다. 조국 전 법무장관은 기자간담회와 국회청문회에서 자신을 향한 의혹에 대해 '모른다'거나 '사실과 다르다'고 해명 아닌 해명을 했었다. 블라인드펀드, 펀드의 실제 소유자, 자녀 입학 관련 논란 등은 위법 여부를 떠나 곧바로 확인된 거짓말들이다. 법무장관과 그 가족들의 거짓말은 더 많은 거짓말을 만들어냈다. 국무총리의 압수수색 언급은 그가 중요한 정보로부터 차단당해 있거나 정파적 이해관계에 따라 새빨간 거짓말을 했다고 볼 수밖에 없다. 여당대표는 조국관련 보도건수 언급이나 검찰의 결론 없는 먼지떨이 수사 등의 근거 없는 거짓말로 검찰을 압박하거나 국민들을 현혹시켰다. 조국 전 장관의 강력한 지원자인 유시민씨의 '증거보전'논란이나 김어준씨의 SAT점수 혹은 논문제출논란 등은 정치적, 사회적으로 영향력 있는 인사들이 곧바로 확인될 거짓말로 자기 대중을 포획하는 사례들이었다. 조국씨가 장관직을 사퇴한 이후에도 그들의 거짓말은 스스로에 의해 확인되지 않았다.같은 시기에 문재인 대통령은 자신만을 위한 개별 대통령기록관 예산을 본인이 주재하는 국무회의에서 의결해놓고도 언론이 문제 삼자 "지시도 원치도 않은 일이라 격노했다"고 청와대 브리핑은 전한다. 박원순 서울시장은 서울시 산하 교통공사의 고용세습과 채용비리가 감사원 감사로 확인되자 "채용비리는 사실이 아니었다"고 대담한 거짓말을 하면서 거꾸로 언론을 비난하기도 했다. 도스토예프스키의 말처럼 거짓말을 하는 사람은 누구보다도 쉽게 화를 내는 모양이다. 스스로를 정당화시키기 위해 타인을 공격하거나 비난하기도 한다. 교양있는 시민이라 하더라도 타인의 말이 거짓말인지 아닌지 쉽게 간파하지 못할 수 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을 얼마 동안 속일 수는 있고, 또 몇 사람을 늘 속일 수는 있지만, 모든 사람을 늘 속일 수는 없다고 링컨은 말한다. 또한 그 거짓말은 스스로에게 자살행위일 뿐 아니라 건전한 인간사회에 대해 칼을 꽂는 행위라고 에머슨은 일갈한다. 거짓말이 횡행하고 거짓 선동이 이뤄지는 동안 우리 사회는 인간 상호 간의 신뢰를 상실하고 밑으로부터 붕괴하고 있다. 심지어 그 거짓말을 지켜내거나 반박하기 위해 대중들이 동원되기도 한다. 전혀 무관한 정치적 명분을 제시하지만 사실은 그 거짓말을 정당화하기 위해 그 거짓말에 정치적 경제적 명운을 건 세력들을 지키기 위해 우리 사회는 막대한 사회적 비용을 치르는 셈이다. 젊은이들이 말하는 '헬조선'은 그러한 거짓말이 세운 사상누각일지도 모른다./윤상철 한신대 사회학과 교수윤상철 한신대 사회학과 교수

2019-10-28 윤상철

[윤상철 칼럼]불공정의 사회, 불신의 사회

공정·진보 상징 법무장관 임명자자녀 입시과정서 특혜·편법 의혹분노한 20代 청년 후보퇴진 호소대통령은 "나쁜 선례될 것" 훈계개혁 배반 가치 내장 사회는 파산아들과 엄마는 설전 중이다. 대학 졸업과 취업을 앞두고 모자는 예민해져 있다. 엄마의 눈에는 취업을 준비하는 아들이 느슨해 보이지만, 아들은 자기 나름대로 최선을 다한다고 생각한다. 모자간의 대화 아닌 갈등은 길게 이어지지만 세대 간의 균열을 보여줄 뿐이다. 엄마는 걱정 섞인 질책을 하고, 아들은 물려줄 건물이 있는지, 소개해줄(아들 세대는 '꽂아줄'로 표현한다) 인턴이나 일자리는 있는지 항변하면서 간섭하지 말 것을 요구한다. 이미 아들은 취업이 결코 녹록지 않다는 사실을 체득하고 있다. 우리 사회 곳곳에서 경쟁의 공정성이 무너졌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 아들은 대학 입시와 군복무를 마칠 때까지 이 사회의 공정성을 의심하지 않았다. 부모와 학교로부터 배운 공정성과 정직성의 가치를 부정하지도 않았다. 열심히 노력하면 사회는 자신에게 반드시 보상하리라고 기대하였다. 이제 불공정한 이 사회에서 살아갈 방법을 깨달은 듯했다. 아마도 아들은 부모의 시대착오적 현실인식이나 사회적 무능력을 탓하거나 스스로 좌절하고 있는 지도 모른다. 부모는 아들의 판단과 선택을 그저 조용히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이 시점에 이른바 최고 대학의 법대 교수이자 공정하고 정의롭고 평등한 사회의 진보적 상징이었고, 젊은 세대의 멘토였으며, 이른바 촛불정부의 민정수석을 거쳐 법무부장관에 임명된 사람의 특권적 민낯이 적나라하게 드러난 것이다. 보통사람들에게는 가시밭길이자 지뢰지대인 고교 이후 의학전문 대학원까지의 입시과정을 그의 자식들은 공항의 무빙워크를 걷는 듯했다. 그 과정에서 온갖 특혜와 편법 등이 동원되었고, 위법으로 의심되는 사안들도 더러 있었다. 그럼에도 그들에게는 사회적 격려가 주어지기도 했다. 20대 청년들은 즉각 분노했다. 직접 관련된 대학의 학생들은 극한의 자괴감을 느꼈을 것이다. 그들은 위법이나 불법, 탈법이나 편법을 넘어서서, 가치와 도덕의 아노미에 빠진 이 사회를 고발하고 그 위선적인 당사자의 퇴진을 외쳤다. 국민들은 '법은 최소한의 도덕'이라는 경계를 넘나드는 법무장관 후보에 대해 대통령이 바로 잡아 줄 것이라 기대했다. 그러나 '개혁성이 강한' 후보를 격려하는 반면 국민들에게는 '의혹만으로 임명하지 않는다면 나쁜 선례가 될 것'이라고 훈계하였다. 지식인들은 익명으로 자신의 견해를 피력하거나 심지어 답변을 거부하기도 했다. 개인적 일탈이나 위선으로 판단하거나 심지어 세대의 문제로 보기도 한다. 어떤 이들은 지배집단의 도덕적 불감증으로 보기도 한다. 다른 이는 자기주장이나 자기 정당화가 강하여 객관적인 자기평가를 할 수 없다고 한다. 환경 안에서의 인간의 한계로 말하기도 한다. 자녀교육의 문제라고 설득하려 한다. 심지어 큰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 작은 것은 희생할 수도 있다고 강변하기도 한다. 자신들의 문제인 양 다양한 변명을 만들어낸다.설사 이 문제가 특정한 개인이나 세대의 문제인가? 그 개인의 과거와 현재를 정치적, 진영적 논리로 덮어버리는 다른 정치지도자나 정치지지자들이 있는 한, 이제 우리 사회가 함께 감당해야 할 문제이다. 이러한 사실들이 밝혀졌을 때에 특정한 개인이나 세대의 문제로 만들 수 있는 다른 개인이나 세대가 있었다면, 20대뿐만 아니라 이 나라의 모든 개인들과 세대들은 이제까지 견지해온 사회적 가치와 사회에 대한 신뢰를 유지하면서 안도하는 심정으로 조용히 퇴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러지 못하고 있다. 우리 사회의 구성원들이, 특히 젊은 세대들이 그러한 편법적, 탈법적 행태에서 도덕과 가치를 붕괴시키고 오로지 더 많은 것들과 성공을 위해서는 수단을 가리지 않는 것을 사회적 가치로 체화한다면, 그 장관과 이 정부가 이루고자 하는 개혁은 사상누각일 뿐이다. 젊은 세대를 좌절시켜 사회적 삶의 준거를 잃어버리게 한다면 누구를 위하여 무엇을 위하여 개혁을 한다는 것인가? 보다 정의롭고 평등하고 공정한 사회를 만들고자 하는 개혁이 정치적 권력 경쟁의 슬로건으로 전락하고, 그로 인해 시민들에게 개혁에 배반하는 가치를 내장하게 한다면 이 사회의 파산은 불을 보듯 명확할 뿐이다./윤상철 한신대 사회학과 교수윤상철 한신대 사회학과 교수

2019-09-16 윤상철

[윤상철 칼럼]'없는 것'과 '가진 것'

집착·보상 욕구 부르는 빈곤·결핍집단 확산땐 조급증·의구심 낳기도결과의 평등, 사회 발전잠재력 침식강한 열망 오늘의 한국 만든 원동력역사의 변증법 개인·국가 성찰해야최근 주말드라마를 보다가 사람들의 내면에 있는 어떤 결핍감이 이후의 삶을 얼마나 왜곡할 수 있는지를 새삼 돌이켜 보게 되었다. '어머니를 존경하거나 사랑한 적이 없다'는 남자의 내면에 깔려 있는 결핍이 자신의 딸을 평생 짓누르게 될 걸 걱정하는 다른 어머니의 모습이 보인다. 갑작스러운 부자들이 자신의 자식을 교육수준이나 사회적 지위가 높은 집안사람과 맺어주려는 정략적 결혼이 낳은 파국들은 TV드라마들의 흔한 소재이기도 하다. 빈곤과 결핍이 낳는 '상대적 박탈'이나 '지위불일치'가 가져오는 좌절과 보상현상이기도 하다. 그러나 거리를 두고 보면, 사람들은 자신에게 '없는 것'에 과하게 집착하고, 스스로 '가진 것'을 가볍게 여기기 쉽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개인 차원의 보상 욕구가 사회 수준의 문제로 확산되면 좀 더 복잡해진다. 제도, 법, 그리고 정책을 통한 사회적 조정의 과정에서 또 다른 불일치를 낳아 더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식민지와 전쟁을 겪은 국민들은 군사쿠데타와 돌진적 산업화를 용인했고, 그 과정에서 민주주의와 인권이 유린되었고 노동자들은 장시간 노동과 산업재해, 그리고 사회안전망 없는 저임금에 시달려야 했다. 국가주의적, 자본주의적 발전전략은 사회경제적 불평등과 양극화를 낳았기에 이를 낙수효과가 부재한 이윤주도성장으로 인식하고 노동자를 중시하는 소득주도성장으로 나아갔지만 급속한 최저임금인상과 52시간 근무제, 그리고 과도한 복지확장은 경제성장을 지연시킨다. 과도하게 이상적이고 지연된 적폐청산은 우리 사회의 바람직한 미래를 제시하고 있지만 충분한 사회적 합의 없이 권력을 활용하여 급하게 진행되다 보니 또 다른 유사 적폐를 낳고 있다.우리에게 없는 것은 더 커 보이고 우리가 이룬 것은 누구나 어느 나라나 다 쉽게 이룰 수 있는 자연스러운 사회의 진화발전과정이라는 생각이 경제발전과 정치발전을 동시에 성취해낸 이 나라의 현재와 미래 진로를 너무 조급하고 더 소용돌이치게 만들고 있다.오랜 남북갈등은 평화를 희구하게 했고 민족분단은 민족적 완성체를 당장의 대안으로 생각하게 한다. 전쟁과 충돌이 지속되는 상황에서 경제적으로 곤궁해지고 정치적으로 왜곡되고 사회적으로 균열과 갈등을 체험하면서 평화적 결과보다 평화적 과정을 우선시하는 조급증은 국가의 영토가 유린되고 국민들이 기본적인 안전망에 의구심을 갖게 되는 상황에 이르렀다. 민족분단은 늘 국제지정학에 의해 국가와 민족의 행로가 좌우되는 불편한 경험을 가져다주었지만, 그 대안이 폐쇄적 쇼비니즘적 '우리 민족끼리'를 앞세워 우리 사회를 어떠한 가치와 이념 속에서 세울 것인지에 대한 대안 없이 수십 년간 같이 해온 정치군사적 경제적 동맹들을 다 뿌리치는 편협한 홀로서기로 갈 일은 아니다.사려깊게 구상되지 못한 평등은 타인의 자유도 사회의 발전도 침해하기 마련이다. 결과의 평등에 사로잡히다 보면 구사회주의의 길이 아니더라도 국가주의의 함정에 침몰할 수 있다. 개인들은 자유와 삶의 동기를 잃음으로써 이 사회의 발전잠재력은 침식되게 된다. 아직까지도 역사적 시대와 사회적 집단의 우열은 사회적 생산력에 의해 좌우되기 때문이다. 바람직한 사회는 생산력의 발전 위에서 분배와 평등, 그리고 개개인의 자유와 성취가 확산된다. 사회집단 간 불평등을 해소하는 데 있어서도 또 다른 불평등의 도래에 유의해야 한다. 모든 사회는 역사적으로 계승되지만 항상 새로운 개인들에 의해 재구성된다. 과거의 불평등에 대한 연좌제적 복수가 불가할 정도로 사회의 구성원은 계속 바뀌고 그들에 의해 새로운 사회계약을 맺게 된다. 최근 인류의 발전은 정당성 있는 주체가 씨족, 부족, 가족, 국가가 아닌 집단에서 개인으로 진화해왔다. 그러나 사회의 지속은 개인만으로 이뤄질 수 없고 사람들의 삶을 문화적으로 정서적으로 촘촘히 메우고 연결하는 다양한 사회단위를 필요로 한다. 너무 과도한 개인주의와 국가와 사회의 무능력은 장기적으로 그 사회를 해체하게 될 수 있다. 다른 희망이었던 민족은 더더욱 멀어지게 된다.우리가 갖지 못한 것에 대한 강한 열망은 오늘의 한국사회를 만들어내는 원동력이었다. 그러나 인간이 추구해온 모든 가치들은 다 특정한 역사와 발전시기에 필요한 덕목이었고 당시 사회를 추동하는 힘이었다는 점을 성찰해야 한다. 역사의 변증법적 발전은 이전에 추구했던 가치가 현재에 어떻게 녹아들어 있는가를 말할 뿐 결코 이를 폐기하거나 대체하지는 않는다. 500년된 예멘의 아파트를 고집하지는 않더라도 30년이 되기도 전에 재개발을 시도하는 우리들이 "시체에서 악취가 나지 않게 하려는 것보다 어렵고 비싸지만 쓸데없는 일은 없다"라는 말이나 어설픈 진보로 변명하고 있지는 않은지 개인적으로나 국가적으로나 성찰해볼 일이다./윤상철 한신대 사회학과 교수윤상철 한신대 사회학과 교수

2019-08-05 윤상철

[윤상철 칼럼]정치시민교육이 필요한가?

서구 민주화 과정보면 값을 치러야반복할 필요 없지만 건너뛸 수 없어한국사회, 방향·내용 합의 쉽지않아재사회화된 시민, 자유 실현할 주체가치 지탱할 훈련해야 하지 않을까지난 주말에는 컴퓨터 앞에서 폭력예방교육을 받으며 보냈다. 양성평등기본법 등 여러 법률에 따르는 법적 의무로서 대학 교직원 모두가 연 1회를 이수해야 한다고 한다. 교육내용은 양성평등, 성희롱, 성매매, 성폭력, 가정폭력 예방교육 등 5개 과목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한 과목당 2시간 이상 지속되는 교육을 제한된 시간 내에 마치지 못하고 결국 비이수자로 남게 되었다. 교육을 받은 주변 사람들의 반응은 제각각이다. 유용하다고 하는 이들도 있지만, 별로 와 닿지도 않는 내용으로 국가예산 낭비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 내용을 판단하기 전에 국가주도의 일방적인 주입식 교육방식이 적절한 것인가에 대해서는 회의적이다. 사회적으로 충분한 합의의 과정이 이뤄졌다고 보기도 어렵고, 더러 다른 사안들과 충돌하는 윤리적, 정치적 내용들을 국가가 정치적으로 올바르다고 판단하고 이를 전파하는 방식이 자못 불편하다. 대부분 사회학적으로 재사회화에 해당되는 내용들이어서 더 조심스럽다.서구의 민주화 과정을 돌이켜보면, 민주주의정치야말로 그만큼의 값을 치러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신진민주주의의 동요와 내파를 보면 인권과 민주주의, 자유와 평등, 나아가 양성평등의 쟁점들까지도 시민들의 의식 속에 쉽게 내장되기는 어렵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무슨 방안이 가능할까? 우리가 어떻게 인류보편적 가치에 동의해갈 수 있을까? 세계화의 시대에서 우리가 서구의 과거 역사를 반복할 필요는 없지만, 그렇다고 건너뛸 수도 없다. 그래서 나는 압축적 정치시민교육을 주장한다. 정치인이 아닌 시민으로서 살기 위해서도 정치시민교육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물론 연고 및 정파, 그리고 그 집단적 극화가 심각하고, 정치적 가십을 정치로 혼동하고, 정치인들을 술자리의 안주거리로 삼지만 동시에 과도하게 동일시하는 사회에서 쉽지 않을 것이다. 실제로 어느 커뮤니티에서나 정치와 종교, 그리고 젠더를 금기시하는 고착된 한국사회에서 정치시민교육은 그 방향과 내용에 합의하기 쉽지 않을 것이다. 민주주의정치를 잘 알고 실천한다고 믿는 이들에게는 더욱 그렇다.여기에서 플라톤의 원취지와는 다르지만 그 시민적 버전인 "정치적 무관심의 대가는 자기보다 못한 사람의 통치를 받는 것이다"는 말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또한 정치적 무지는 정치권력자들의 선거놀음의 대상일 뿐이다. 물론 정치에 대한 교육과 토론은 극단적인 갈등을 낳을 수 있다. 그러나 정치에 대한 대화가 없으면 정치적 사고는 더 극화될 뿐이다. 탐욕스런 권력자는 스스로의 권력만을 추구하는 '총탄형 정치가'이거나 대중의 선호에 휘둘리는 '뗏목형 정치가'이거나 간에 시민들에게 바람직한 정치를 주지 않는다. 이 중간 어느 지점에서 우리 사회의 활로를 찾아야 할 것이다.정치시민교육의 장에서는 자신의 생각을 말하되, 타인의 생각을 경청할 수 있어야 한다. 지난 대통령선거의 토론처럼 서로 비난만 하거나 딴전을 부려서는 안 된다. 상대는 생각을 달리하는 공동체의 구성원일 뿐, 제거되어야 하는 적폐일 수 없다. 우리는 대선 토론에서 특정 후보와 말하지 않겠다는 후보들처럼 일상을 살 수는 없다. 서로 의견이 다르지만 정답은 그 사이에 존재한다고 생각하기로 하자. 상대의 어떤 생각도 존중되어야 하고 이 사회에 반드시 필요한 요소라고 생각해보기로 하자. 정치인이나 정당은 우리가 선택하는 대상일 뿐, 우리가 동일시하면서 추종해야 하는 대상은 아니다. 상황에 따라 언제라도 바꿀 수 있는 우리의 대리인일 뿐이다. 우리의 미숙한 정치행위의 결과에 대해 직접민주주의를 대안으로 내세우지 말자. 아직도 우리는 이렇게 생각하지도 행동하지도 않는다. 그렇게 가기까지 우리는 서로 싸우거나 교육받아야 한다. 우리 사회는 포스트 자본주의의 시대로 접어들고 있다. 한국 사회에서 제조업의 고용규모나 부가가치 생산이 낮지 않지만 더 확장될 가능성은 회의적이다. 탈산업사회라고 보기는 다소 성급하지만 제4차 산업혁명의 물결이 주변에 밀려오고 있다. 더 많고, 더 어려운 사회적 정치적 이슈들을 해결해내야 한다. 과거의 민주주의를 구성하던 주체들, 부르주아 혹은 프롤레타리아, 나아가 대중적 포퓰리즘도 더 이상 새로운 민주주의를 이끌 수는 없다. 정치교육을 받으며 성장하고 이후 재사회화된 시민들이야말로 이른바 포스트자본주의 시대에 민주주의와 인권, 자유와 평등을 실현할 주체들이다. 특히 젊은 청년들에게는 평생의 직장도, 근대적 보호막으로서의 조직도 집단도 없다. 디지털 노마드의 시대에 스스로 인류가 만들어낸 가치를 지탱할 수 있도록 훈련해야 하지 않을까?/윤상철 한신대 사회학과 교수윤상철 한신대 사회학과 교수

2019-06-24 윤상철

[윤상철 칼럼]국가의 길, 국민의 길

국민 가치관 따라 '정부개입' 차이착취보다 포용적 경제 성장에 유리집단주의 성향 강해도 성공한 한국우리 사회 '국가가 분배 주도' 요구자본·민주중 한쪽 희생해야할 상황배링턴 무어의 저서, '독재와 민주주의의 사회적 기원'은 "부르주아 없이 민주주의 없다"는 테제로 요약된다. 부르주아계급의 존재가 민주주의, 독재, 그리고 파시즘의 경로를 결정했다는 내용이다. 물론 현대의 확장적 대의민주주의는 여기에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혁명적 역할이 더해진다. 이후 남미, 동구, 아프리카의 '제3의 물결' 민주화를 지켜본 정치경제학자들은 "국가 없이 민주주의 없다"라고 주장한다. 즉, 계급 간의 투쟁으로 국가가 불안정하면 민주주의도 자리 잡기 어렵다는 말이다.국가는 민주주의 정치만 제도화하는 게 아니다. '국가는 왜 실패하는가'라는 공저에서 경제학자 대런 애스모글루와 정치학자 제임스 로빈슨은 "우리 이론의 요체는 포용적 정치·경제 제도와 번영의 관계다. 사유재산권을 보장하고, 신기술에 대한 투자를 장려하는 포용적 경제제도는 경제활동에 인센티브를 제공하지 못하는 착취적 경제제도에 비해 경제성장에 훨씬 더 유리하다"고 말한다. 즉, 포용적 국가 없이 경제적 번영은 없다는 주장이다. 이들이 제시한 사례는 아니지만, 미국에 비해 최대 3배의 셰일가스 매장량을 가진 중국이 그 생산량에서 훨씬 못 미치는 배경에 대해서도 포용적 국가제도가 거론된다. 지진 빈발 혹은 물 부족과 같은 자연환경적 요인보다는 셰일가스의 개발이익 분배와 같은 제도가 민간의 창의적 개발의욕과 기술개발에 큰 격차를 유발한다고 지적한다.중요한 것은 어떠한 국가인가의 문제이다. 자유주의자인 김정호 교수에 따르면 토지의 소유제한, 분배 등 경제적 헌법조항을 가진 나라들은 주로 사회주의 혹은 저개발국들이고, 대부분의 선진국들은 세세한 정부개입조항을 가지고 있지 않다고 한다. 그는 이러한 차이가 국민들의 가치관에서 비롯된다고 추정하면서, 전자의 국가들은 집단주의적 성향이 강하고 후자의 국가들은 개인주의적 성향이 강하다고 보고 있다. 개인주의적 시민들은 국가의 개입을 거부하고 자신의 삶은 자신이 책임진다는 세계관을 가진 반면, 집단주의적 시민들은 집단적 삶을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국가가 개인의 삶을 책임져야 한다는 세계관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자본주의적 발전의 경험이 개인주의적 성향을 더 심화시키는 역의 인과관계로 해석할 수도 있다. 그러나 국민들은 집단주의적 가치관을 가지고 있지만 OECD에 들어간 나라들이 그리스, 포르투갈, 이탈리아, 스페인, 터키, 멕시코 그리고 대한민국 등이고, 이 국가들이 어떠한 정치체제를 통해 경제발전을 이루었고 이후 어떠한 경로를 밟아가는가를 살펴보면 그 인과의 방향을 판단할 수 있다.대한민국은 집단주의적 가치관이 더 지배적임에도 불구하고 자본주의적 경제성장에 어떻게 성공할 수 있었을까? '한국은 하나의 철학이다'의 저자인 오구라 기조 교수는 한국의 현대사를 '힘=문화'라고 생각하는 입장과 '힘=철'이라고 생각하는 입장 간의 쟁투로 보고 있다. '힘=문화'로 보는 전통적인 유교 사대부적 입장에 반해, 후자에 선 이들은 공업화와 산업화를 추진하고 국력을 기르는 것은 국가의 존망과 관계된다고 생각하고 '하면 된다'는 슬로건을 제창하고 효율적인 통제를 위하여 군사적인 힘을 강화했다고 보고 있다. 집단주의적인 가치관이 지배하는 한국에서 자본주의적 경제성장이 가능했던 이유일 것이다. 현재 우리 사회는 기로에 서 있다. 집단주의적인 가치관이 지배적인 한국사회가 민주주의적인 대의제를 통하여 국가권력을 재생산하고 있다. 군사정권이나 권위주의적 국가권력이 사라진 21세기 대한민국에서 국민 대중이 대의제 민주주의를 통해 만들어내는 국가체제는 자본주의적, 개인주의적 성장주도체제라기보다 국가주의적, 사회주의적 분배주도체제일 가능성이 높아진다. 국가의 발전전략에 이끌려왔던 우리 사회는 국가가 다시 분배를 주도하도록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한국의 발전과정이 기적인 이유는 국가와 경제의 파국을 막고 자본주의와 민주주의의 동시적, 순차적 발전을 이끌어냈다는 점이다. 이제 한국사회는 그 적절한 조합이 아닌 어느 한 쪽을 희생시키면서 다른 쪽을 선택하는 국면에 처해 있다. 그리고 그 선택의 칼자루는 국민에게 쥐어져 있다. 이제까지 걸어왔던 길과 전혀 다른 길을 걸어가고 있는 것이다./윤상철 한신대 사회학과 교수윤상철 한신대 사회학과 교수

2019-05-13 윤상철

[윤상철 칼럼]아랫목이나 윗목이나

국민총생산 세계 11위 오른 한국'삶의 질'은 20위권 후반 머물러소득주도성장, 자영업자 좌절 초래국가는 부자지만 국민은 가난해장기적 관점서 정책 처방 찾아야현재의 86세대는 1980년에 미래학자 앨빈 토플러의 '제3의 물결'을 접했다. 군부권위주의정권 시대에 접했던 정보사회의 예언서에서 불과 15년쯤 후를 가늠하기는 어려웠다. 구로공단의 여공들과 청계피복노조의 전태일, 그리고 중화학공업의 산업재해와 중동건설 붐을 경험했던 세대들에게 정보화는 열악한 노동으로부터 인간의 해방을 열어주는 신기루였을까?그 후 40여년이 흐르면서 민주화도 산업화도, 그리고 정보화도 성취해냈다. 국민총생산은 세계 11위를 점하고, 1인당 국민총소득은 3만달러를 넘어섰으며, 인구가 5천만이 넘는 한국은 이른바 30-50클럽에도 들어갔다. 그 클럽의 회원국은 한국을 제외하면 모두 G7국가들이다. 그러나 정치체제는 민주공화국을 완성시키기 위한 적폐청산에 매진하고 있다. 사회경제적 양극화는 사회적 균열과 갈등을 격화시키고 있다.그러나 냉정하게 살펴보자. 우리나라의 1인당 국민총소득(GNI)은 40위권을 맴돌다가 작년에는 31위 수준이다. '삶의 질'은 20위권 후반에 머물고 있다. 놀랍게도 작년도 가계 1인당 가처분소득이 1천900만원 선에 그치고 있다. 국민들은 처한 위치에 따라 엄청난 혼란과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고 있는 셈이다. 더구나 경기불황, 실업, 가계부채 등에도 불구하고 연휴기간 동안 인천공항을 채우는 여행객들, 여전히 성업 중인 고급 식당들, 부동산 투자로 엄청난 수익을 올린다는 소식들은 누군가의 소득은 3만불을 훨씬 상회하리라고 믿게 한다. 소득 양극화에 대응하여 현 정부는 소득주도성장정책을 내걸었다. 그러나 중산층의 배아픔이나 상류층 따라잡기 욕망을 해소하기보다 하위 1분위 저소득층의 배고픔과 소득저하 그리고 자영업자의 좌절을 초래했을 뿐이다. 정규직 중심의 고용시장 재편이 자본의 반발과 양극화의 심화를 낳았을 뿐이다. 부동산으로 인해 자산증가율이 소득증가율을 앞지르고 나아가 높은 이자와 조세 부담을 지움으로써 양극화를 더욱 심화시켰다는 진단에서 내놓은 정부의 반시장적 부동산정책은 불과 1년 사이에 서울지역의 아파트 가격을 이전 정부 4년에 필적할 수준으로 올려놓았다. 전 청와대 정책실장, 청와대 대변인, 여당 시의원의 뉴스들은 정책입안자들조차 믿지 않은 정책에 따르고자 했던 대중들을 격앙시키고 있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2017년 우리나라 경제주체들이 GDP에 기여한 비중은 가계 56%, 기업 20%, 정부 24%인 것으로 나타났다. 기업에게는 동반성장정책, 사내유보금 과세, 정경유착 청산과 정규직화, 국민연금 스튜어드십 코드 등이 제안되었고, 국가주도의 일자리 창출이 현 정부 내내 진행되었다. 그러나 국가는 부자이지만 국민은 가난한 현상황을 바꿀 것 같지 않다.문재인정부도 어느덧 집권 3년 차에 접어들고 있다. 한국사회의 사회적 양극화에 대한 지난 2년간의 진단이나 처방이 타당하거나 효과적이었다고 보기도 어려운 상황에서 이미 레임덕의 문턱에 이르렀다. 미시적인 대증요법으로는 경제와 사회가 처한 위기를 극복하기는 쉽지 않다. 그래선지 정부는 내부 구조조정보다는 불확실한 외부시장확대전략에 의존하고 있었던 듯 하다. 제국주의 국가의 식민지 개척처럼 북한을 시장으로 편입시키고 나아가 그를 발판으로 더 먼 유럽까지의 길을 열고자 했지만 그 결과를 지금이나 현 정부의 집권 기간 내내 확언하기는 어렵다. 세대, 성별, 지역 등 우리나라의 사회적 균열의 양 축 간의 양보와 타협으로 극복할 수 있기를 기대했지만 우리 사회의 어떤 주체들도 그렇게 할 의지와 리더십을 갖추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 드러나고 있다. 보다 근본적이고 구조적인 데서 원인을 진단하고 보다 장기적인 관점에서 정책적 처방을 찾아야 할 것이다. 제3차 산업혁명의 냉기가 국민의 피부에 와 닿기도 전에 제4차 산업혁명의 한기가 함께 몰려오고 있다. 세상은 더 글로벌화되고 대외적 환경은 더욱 비우호적으로 바뀌고 있다. 방안의 한기가 이불과 구들의 문제가 아니라 더 먼 데서 날라와 벽 틈을 타고 오는 것이라면……./윤상철 한신대 사회학과 교수윤상철 한신대 사회학과 교수

2019-04-01 윤상철

[윤상철 칼럼]열지 못한 세대, 닫혀가는 세대

유튜브·페북·밴드·카톡 SNS매체유유상종·동종교배 네트워크 작동정치 '적폐 對 개혁'등 흑백균열 심화소통도 대안도 없이 분열사회 남겨민주화 불구 '그 그늘' 못 벗어난듯이른바 '밀레니얼세대'가 '꼰대' 586세대들을 당혹스럽게 한다. 수메르인들처럼 '요즘 젊은이들은 너무 버릇이 없다'라고 점토판에 쓰거나 소크라테스처럼 "요즘 아이들은 폭군과도 같다. 아이들은 부모에게 대들고, 게걸스럽게 먹으며, 스승을 괴롭힌다"고 말할 수 없는 한국의 꼰대들은 우왕좌왕할 뿐이다. 1990년대 초반부터 태어나 2008년 금융위기 이후에 성인이 된 20대 '밀레니얼세대'는 '디지털 네이티브'로 살아왔다. 그래서인지 이들은 대면커뮤티케이션보다 온라인, 모바일 커뮤니케이션에 더 익숙하다. 간결하고 즉각적인 소통을 선호하고 줄임말을 구사하고 막말이나 아무 말도 서슴지 않는다. 수평적이고 효율적인 소통에 익숙하고, 정보수집에 능하며 멀티태스킹을 할 수 있다. 그러나 자기중심의 세계를 설정하고, 사회적 인간으로서 기성세대와 그들의 사고, 이미 주어진 사회 및 세계에 적응하는 데 어색하다. 불합리성, 불공정성, 불투명성 모두에 적대적이고 고리타분하고 형식화된 절차를 기피한다. 어렵게 들어간 회사에서도 업무는 스스로 구획하려 하고, 상사의 대화시도를 간섭으로 불편해하고, 자신의 계획에 따라 거침없이 뛰쳐나오기도 한다. 그들과 다른 세대와의 소통은 가정과 사회에서 시도되기도 전에 장애에 직면한다.586세대인 고등학교 동창들의 모임이 있다. 지천명을 넘어섬에도 모두들 젊은 시절부터 민주화 흐름에 몸담으면서 다진 결기가 대단하다. 그러나 촛불집회와 탄핵, 그리고 대선으로 이어지면서 우파정치세력이 거의 몰락하다시피 한 이후에는 서로 다른 목소리가 표출되기 시작했다. 상당하게 동질적인 집단이었지만, 연령효과로 인한 꼰대들에게는 약간의 차이도 크게 느껴졌다. 여러 가지 이유들로 포장되기도 했지만, 그들 일부의 공통적인 희망은 '나와 다른 이야기로 나를 침해하지 마라'는 것이었다. 평생의 믿음이 조금이라도 부서질까 두려워한다. 종교와 달리 정치는 개인의 자유로운 신념의 영역만은 아니고 서로 간의 관계와 경계를 정하는 일이니만큼 충분히 상호 존중하면서 토론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던가? 평생을 민주주의를 의식하면서 살아왔지만, 그들에게 민주주의는 타인을 향한 요구일 뿐 내장된 가치가 아닌 듯했다. 그들을 엮어주던 공통토대인 정치가 화제로 오르지 못하게 되자 그들의 단톡방은 가끔 안부만 전하는 공동묘지로 바뀌어 버렸다. 밀레니얼세대나 586세대에게나 온라인, 모바일 커뮤니케이션이 주요한 소통방식으로 자리 잡아가고 있다. 20대는 성장과정부터 대면적, 전면적 소통에 능하지 않지만, 50대 역시 점차 대면적 소통의 비중을 줄여가고 있다. 20대는 자기중심적으로 세계를 재구성하고 자신과 다른 세대를 수용하지 못하지만, 50대는 이미 경직되어가는 세계관 내로 소통을 좁혀가고 있다. 이러한 소통방식의 변화는 인터넷과 SNS가 일상화되면서 가능해졌고, 그에 따라 정보화의 빛과 그림자가 함께 나타나기 시작했다. 정보화는 개인의 지식접근이 넓어지고 개인들 간의 지적 교류가 쌍방향적으로 전 지구적으로 확대되면서 인류 수준의 집단지성을 꿈꾸었다. 그러나 사람들은 차이의 인정과 상호 대화보다는 생각이 같은 사람들끼리 모여 서로의 생각을 격려하고 극단화시키는 반대의 길을 가고 있다. 20대는 사회구조에 대한 인식이 부재함으로써 소통의 도구를 제한적으로 사용하는 반면, 50대는 그 특유의 꼰대성으로 인해 대화의 소재와 대상들을 제한하게 된다. 여기에 유튜브, 페이스북, 밴드, 카카오톡 등 SNS매체들은 대부분 개방과 공유의 시대를 열기보다는 유유상종과 동종교배의 네트워크로서 작동하고 극단화된 승자독식 시장을 열어간다는 점에서 이러한 추세를 더 심화한다. 여기에 최근 한국의 정치상황은 적폐세력 대 민주개혁세력, 재벌자본세력 대 노동민중세력, 남성집단 대 여성집단, 친원전세력 대 탈원전세력 등 극단적인 흑백의 사회균열을 부추긴다. 즉 사회적 소통방식과 정치적 균열이 상호 악순환하면서 극단적 분열의 사회로 치닫고 있다. 선민적 자기집단의식으로 무장하거나 악마적 적폐집단으로 규정하거나 상관없이 소통도 없고 대안도 없이 분열된 사회로 나아간다. 그러나 1987년 민주화 이행 이후 보여준 모습들은 모두 다 민주주의의 넓은 스펙트럼 내에서 가능한 형태라고 봐야 하지 않을까? 그들의 생각도 우리의 생각처럼 충분히 가능한 사회적 지향이 아닐까? 오로지 하나의 대안만이 있다고 생각하는 전체주의 혹은 권위주의를 벗기 위해 길고 긴 민주화의 과정을 걸어왔건만 그 그늘에서 벗어나지는 못한 것만 같다./윤상철 한신대 사회학과 교수윤상철 한신대 사회학과 교수

2019-02-18 윤상철

[윤상철 칼럼]세대의 성찰에 대한 기대

일자리·노후복지 등 둘러싸고세대간 분배투쟁 불가피하게 보여갈등조정·완화제도 아직도 논쟁실패집단 해결주체 내세우기보다서로 반성하는데 눈을 돌려보자사회조사들은 설문 말미에 응답자의 사회적 배경을 묻는다. 성별, 연령, 교육수준, 거주지역, 직업, 소득 등이다. 여기에는 성별, 세대 등 사회적 조건에 따라 사회와 국가정책에 대한 인식과 행위가 다를 것이라는 암묵적 전제가 깔려 있다. 그러나 선거 결과 등은 예측과 반드시 일치하지는 않는다. 사람들이 사회적 배경에 따라 움직이지 않기 때문이다. 다른 요인이 중첩적으로 작용하거나 그 사회적 배경을 압도하는 사건이 우연하게 발생했을 수 있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원래의 전제를 훼손하기보다 더 적극적으로 적용하여 여성과 남성을, 어떤 세대를, 어떤 지역민을, 어떤 계층을 사회문제를 해결하는 행위자로 불러내기도 한다.경제성장의 잠재력은 이미 소실되었고 마침내 위기가 오고 있다는 진단이 들린다. 주로 취업률, 고용률, 성장률, 경기선행지수, 그리고 지니계수 등 불평등지수가 거론된다. 그로 인해 더 심화된 사회적 불평등이 경제성장을 오히려 가로막고 있다는 견해들도 피력된다. 인과가 불명확하거나 역전되기도 하지만 사회적 불평등이 우리 사회의 근본적 문제로 부각된다. 먼저 정권의 책임론이 거론된다. 이전 보수 정권들의 적폐와 무능, 그리고 부자와 재벌 편들기가 낙수효과를 낳기는커녕 한국경제를 위기의 늪에 빠트렸다고 한다. 신정부의 소득주도성장이 산업구조의 변경 없이 급속하게 진행되면서 성장과 분배를 악화시켰다고 한다. 구체적으로 사회경제적 집단에게 책임을 묻기도 한다. 재벌구조가 중소벤처기업의 창의성과 일자리 창출을 고갈시키고 사회적 양극화를 낳았다고 한다. 민주노총과 대기업 귀족노조가 중소기업 노동자들의 임금조건을 악화시키고 비정규직의 취업난을 낳았다고 비판한다. 더 나아가 경제위기와 사회적 불평등의 원인을 특정 계급에게 묻거나 정치권력구조 혹은 경제조직 및 분배구조에게 묻기도 한다. 그러나 우파정권이나 좌파정권이나 경제구조를 재구성하고 성장의 잠재력을 이끌면서 사회적 불평등을 완화시키는 데는 그다지 성공적이지 못했다. 재벌과 노조는 서로를 비난함으로써 그 입지를 찾는 적대적 공존관계로서 저소득 노동자들이나 비정규직, 그리고 실업자들의 현실을 개선할 의지를 가지고 있지 않다. 그렇다고 분단체제하에서 왜곡되어 미형성된 계급들이 변화의 주체가 되기는 어렵고, 권력구조나 생산분배구조는 모든 행위 주체들을 사면하는 변명일 뿐이다. 더러 또 다른 사회집단들이 호명되기도 한다. 페미니스트들은 성차별적 사회구조가 여성의 사회진출과 지위를 악화시켰다고 주장하지만 산업구조와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는 성차별의 구조를 해체하기 위해 어떤 주체들을 부를지는 모호하다. 여기에 일부 사회학자들은 세대문제를 제기한다. 이른바 베이비부머들인 86민주화세대가 사회적 기회를 절대적, 상대적으로 많이 점유함으로써 후세대들과의 불평등한 분배구조를 낳았다고 지적한다. 특히 최근의 청년실업은 86세대들을 그 수혜자로 만든 2016년부터의 근로자 정년연장의 결과로 더 악화되었다고 지적한다. 더불어 정치권력의 분배에 있어서도 일찍 사회운동 및 시민사회의 권력을 딛고 제도정치에 진출하여 지금까지 후속세대들을 압도하고 있다고 본다. 현재의 사회상황에 대한 세대논쟁은 이미 작년 여름에 이루어졌다. 카이스트의 이병태 교수는 헬조선을 말하는 젊은 세대들에게 앞 세대의 분투를 폄하하지 말고 넓은 세상을 보고 더한 노력을 먼저 시도하라고 말한다. 이에 한양대의 박찬운 교수는 '5000년 역사 최고 행복세대의 오만'에서 벗어나 그들에게 성장과 경쟁만을 물려준 일에 대해서 성찰하고 반성할 줄 알아야 한다고 반박한다. 다시 이 교수는 앞 세대는 주어진 상황에서 최선을 다했으며 젊은 세대에게 던지는 립서비스는 그 어떤 해법도 아니라고 비판하지만, 박 교수는 가진 것을 공유하자는 젊은이들에게 공감하면서 대안과 희망을 주어야 한다고 응답한다.고령화 사회를 거쳐 고령사회에 진입한 한국에서 일자리와 노후복지 등을 둘러싼 세대 간 분배투쟁의 문제는 불가피해 보인다. 그러한 세대갈등을 조정하고 완화할 제도들은 아직도 논쟁 중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족 내의 분배문제를 이미 경험한 사람들이 사회적 분배문제를 재구성할 인식과 실천을 준비하고 있지는 않을까? 어떠한 의식과 경험도 없는, 이미 등장하여 실패한 집단들을 이 사회문제를 해결할 주체로 다시 호명하기보다는, 이제 세대와 그 세대의 성찰에 눈을 돌려보자./윤상철 한신대 사회학과 교수윤상철 한신대 사회학과 교수

2018-12-31 윤상철

[윤상철 칼럼]학문 부재의 위험사회

인류 정체성 마저 흔드는 사회변동미래 더 복잡하고 불안하게 만들어우리에 대한 지식 남에게 의존하며'스스로 잘 알고 있다'고 착각해 와이젠 '자유로운 학문'으로 벗어나야최근에 '학문기본법'에 대한 논의가 일군의 인문사회과학자들과 여러 학문공동체 내부에서 제기되고 있다. 학문의 자유와 대학의 자치는 헌법이 보장한 국민의 기본권으로서 국가와 사인의 침해행위로부터 보호되어야 하고, 이를 규율하는 절차적 제도가 마련되어야 하며 시설, 인력, 재정 등 그 물적 기반이 사회권으로서 국가에 의해 제공되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학문의 자유도 대학의 자치도 빈곤한 사회 현실에 대한 자성이면서 미래위험사회를 맞이하여 국가와 사회에 대한 절박한 호소이기도 하다.실제로 대학은 학생들에게 학문도야의 공간이라기보다 취업을 위한 디딤돌 정도로 인식된다. 대학교수가 되려는 이들은 학문에 대한 소명의식을 갖기보다는 어떤 연구분야와 대학(원)이 더 유망한지를 중시한다. 국가와 사회도 다르지 않다. 학문은 정부관료와 정치세력의 입장과 정책을 정당화하고, 교육은 기업이나 산업의 성장에 기술적으로 혹은 인력 수급에 있어서 도움을 주는지가 관건이다.역사적으로도 학문의 역할과 효용은 제한적이었다. 조선시대의 학문과 교육은 유학을 지배이데올로기로 재생산하는 역할을 수행했고, 학자선비들에게는 입신양명의 지적 수단이었다. 일제강점기에는 식민통치에 필요한 관료들을 선발하고 이에 순치된 신민을 양성하였다. 개발독재기와 신자유주의시기에 학문과 교육은 자본주의적 경제발전에 기여하는 도구였고, 서구 선진국가를 복사하여 따라잡기 위한 지적 도구였다.학문과 교육이 국가와 기업에 의해 그 사회적 역할이 제약되는 상황에서 본질적 자유이자 기본권으로서 수용되기는 어렵다. 학문과 교육에 대한 사회적 존경과 조건 없는 충분한 지원을 기대하기는 더더욱 어려웠다. 그로 인해 학문생산은 분산적이고 파편적인 생산체제하에서 이루어졌고 독립적이고 자율적인 재생산체제를 갖추지 못하였다. 학문생산의 기지이자 후속세대의 교육장인 대학원은 국가지원 프로젝트에 연명하는 부실한 교육체제였고, 해외유학은 지금도 여전히 우리 사회의 학문연구자들을 주도적으로 양성한다. 따라서 연구자들의 사회적 배경이 유학이 가능한 계층으로 편중되고, 그들의 지적 기반과 우리 사회의 현실은 여전히 디커플링(Decoupling)을 보여준다.그럼에도 불구하고 학문의 존재와 역할은 훨씬 근본적이다. 즉, 학문은 학자 개인의 지적 호기심을 충족시키거나 사회적 성공을 이루기 위한 도구적 지식이 아니라 그 학문적 성과를 바탕으로 지역, 사회, 국가, 인류공동체 나아가 지구생태계의 지속과 발전에 기여할 수 있다. 학문이 다루는 대상이나 학문의 성과와 연관된 사람들이나 집단이 다양하기 때문에 학문에 대한 기대는 서로 다를 수 있지만 그 모두를 위한 사회적 공공재를 생산함으로써 공동선을 실현할 수 있다. 이러한 문제제기는 이른바 '한국 사회과학의 토착화'로부터 시작되어 주기적으로 제기되어 왔지만, 사회적으로는 비주류 학자들의 자기변호이자 집단이익추구로 받아들여지기도 했다. 그러나 우리 사회가 선진국들의 과거를 발생학적으로 따라가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역사적으로 경험하였고 향후 전개될 지속불가능한 위험사회는 그야말로 과거에 경험하지 못했고 그 적절한 대안도 내지 못한 완벽하게 새로운 사회임을 깨닫고 있다. 경제와 과학이 발전하면서도 인간이 통제하기 어려운 재난들이 출현하고, 후기후발자본주의국가가 경험한 적이 없었던 극도의 고용불안이 나타나고, 고령화와 저출산으로 인구절멸국가의 경고를 받고 있으며, 이주노동자와 해외 취업으로 국가간 경계가 불명확한 초이동사회로 변모하고 있다. 특히 4차산업혁명과 지식정보사회는 인류 자체의 정체성마저도 흔들고 있다. 이렇듯 대안없는 극심한 사회변동의 상황에서 한국의 지정학적 위치, 세계경제체제 내 위상, 사회체제와 역사적 유제 등은 우리의 미래를 훨씬 복잡한 위험사회로 만들고 있다.마크 트웨인은 ''사람들은 몰라서 곤경에 빠지는 게 아니라 잘 알면 곤경에 빠지지 않으리라는 착각 때문에 곤경에 빠진다"고 말했다. 정작 우리 사회는 우리에 대한 지식을 남에게 의존하면서 스스로 잘 알고 있다고 착각해왔다. 근거 없는 착각보다 더 위험한 것은 무모한 무지일지도 모른다. 학문, 특히 자유로운 학문이야말로 그 출구를 찾아줄 이정표일 수 있다./윤상철 한신대 사회학과 교수윤상철 한신대 사회학과 교수

2018-11-19 윤상철

[윤상철 칼럼]창의성의 사회적 장애

자유화는 문화적 취향 소비 통해과시·타인과 구별 결과만 초래자발·독립성 찾아내기 어렵다정치적 억압 수동적 만들진 않지만창의력의 필요충분조건은 아냐2010년 G20 서울정상회의 폐막식에서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한국기자들에게 질문을 받고자 했다. 그러나 한국기자들은 오바마의 두 차례 요청에 거듭 침묵을 지켰고 정작 그 마이크는 중국기자에게 넘어갔다. 그 자리의 한국 기자들이 마땅한 질문거리를 준비하지 못했을까? 유창한 영어로 자신의 체면을 유지하고 국가의 위신을 세워야 한다는 우려에서 비롯된 울렁증 때문이었을까? 청와대 기자회견에서 기자들은 사전에 협의된 질문을 정해진 순서에 따라 발언하지만, 대통령의 두루뭉술한 답변에 대해 재차 캐묻거나 약속된 범위를 넘어서는 질문을 감히 시도하지 못하는 것을 보면 반드시 언어문제는 아니다.최근 조희연 서울시교육감은 '중고교생 두발자유화선언'을 발표했다. 그는 "머리 모양을 정하는 것은 학생들의 '자기결정권'에 해당하며 기본권으로서 보장해야 한다"고 말하면서 인권과 민주주의의 차원에서 각 학교 단위에서 이를 공론화할 것을 요청하고 있다. 나아가 그는 "4차 산업혁명 시대에는 학생들을 피동적, 수동적 존재로 보고 제한만 하는 낡은 교육관에 얽매여서는 안 된다"고 강조한다. 그가 기대하는 결과는 시대변화에 부응하는 능동적이고 개성적이고 창의적인 학생이자 시민이었을 것이다. 두발자유화가 기본적 인권의 문제이고 이를 민주적 공론화 과정을 통해 성취해내면 기자들이 보여준 억압된 피동성을 벗고 자유롭고 민주적인 창의성을 드러낼 수 있을까? 중국사회에서 성장하고 활동해온 중국인 기자가 보여준 무례할 정도의 당당한 모습은 인권과 민주주의를 그 핵심적 문제로 보기도 어렵게 한다. 이미 상당한 정도로 진전된 두발자유화가 교육감의 선언으로 촉발되어 설사 민주적 공론화 과정을 거치더라도 학교 내의 민주주의를 진전시키고 나아가 학생들의 자기주도성과 민주성, 그리고 창의성을 높일 것 같지도 않다.돌이켜보면, 자유화는 항상 기대했던 바의 바람직한 결과를 낳지는 않는다. 학생인권조례가 통과된 이후, 2011년에는 수십만원을 호가하는 이른바 '등골브레이커'점퍼가 유행하였고, 작년에는 연예인이나 축구선수들의 전유물이었던 롱패딩이 중고등학교 학생들의 새로운 '잇템'으로 떠올랐었다. 자유화 세례 이후 맘카페가 확산시킨 유기농 수제 '미미쿠키'를 먹고 자란 학생들은 '스타벅스'와 같은 카페브랜드를 소비하고, 이제는 프리미엄 취향의 '시그니처' 메뉴와 그 매장을 문화적으로 소비하게 된다. 이렇게 성장한 대학생들은 해외여행과 해외어학연수는 필수적으로 이수해야 하고, 독립적인 개성으로서의 워킹홀리데이와 해외생활을 시도해야 한다. 용돈을 마련하고자 많은 시간을 알바에 투입하면서도 해마다 바뀌는 휴대폰 신모델을 구입해야 한다. 자유화가 문화적 취향의 소비를 통해 자신을 과시하고 타인과 자신을 구별 짓는 결과만을 낳을 뿐 그 어디에도 자발성과 독립성, 그리고 창의성을 찾아내기 어렵다. 즉, 정치적 사회적 억압이 반드시 수동적 존재를 만들지도 않지만, 자유화가 창의성의 필요충분조건도 아니라는 말이다. 한국에서 대학과 대학원을 거쳐 교수로 자리 잡은 중국인 교수 동거는 "표현에 서투르고 토론을 기피하는 한국인들은 과정과 결과를 다 중시하는 문화 속에서 살면서 모든 이들에게 인정받기 위해 나만의 것에 대한 확신을 포기한다"고 말한다(중앙일보 10월 5일자). 자유화가 정치적 억압을 벗어버리고 원하는 바 풍성한 열매를 맺기 전에 사회적 억압이라는 장애물을 만나서 개인적 창의성보다는 비교적 안전한 선택인 사회적 유행의 따라잡기와 사회적 구별짓기로 전락한다는 것이다. 일찍이 사회학자 막스베버는 젊은이들이 '개성'과 '체험'이라는 우상을 숭배한다고 지적한 바 있다. 자기의 일에 대한 도취와 헌신, 그리고 영감을 통해 그 일의 정점에 오르기보다는 단지 남과 다른 체험을 자신의 독특한 개성으로 과시한다는 것이다. 에디슨의 '99%의 노력과 1%의 영감'과 달리 노력을 기울이지 않고 얻을 수 있는 체험을 영감으로 동일시한다. 정작 우리 사회 안에는 베버나 에디슨이 그리는 방향으로 젊은이들을 이끌고 격려하는 사회적 분위기가 결여되어 있다. 젊은 청년창업가 표철민씨의 말의 울림이 오래 느껴진다(중앙일보 10월 5일자). "성장이 느리지만 자기가 좋아하는 일은 평생 할 수 있습니다. 평생 할 각오로 꾸준히 임하는 데 성공하지 못할 일은 없습니다." 그가 지닌 용기와 확신이 살아온 동안의 불편을 연상시킨다. 자유화는 억압을 없애는 출발점일 뿐이고 그 열매는 사회적 자유화 속에서 영글어 갈 수 있다./윤상철 한신대 사회학과 교수윤상철 한신대 사회학과 교수

2018-10-08 윤상철

[윤상철 칼럼]'내로남불'의 집단극단화

국가 구성하는 개인들 생각이다른 사람과 다르다고 하면소통통해 먼저 풀어 나가야그 뿌리 사회에서 정치로 뻗었다면치유의 출발은 사회안에 있다는것이른바 '내로남불'이란 말이 갈등하는 집단 간에 상대를 비난하거나 자신을 변명하는데 자주 사용된다. 정치와 언론을 넘어 지식인까지 두루 사용하고, 나무위키에 열거된 사례들을 보면 희소한 일탈현상은 아닌 듯하다. 개인적 에피소드에서 집단과 사회조직, 나아가 정치권력과 국가권력에 이르기까지 나타나는 현상이다. 얼핏 보면 크게 다를 바 없는 현상을 상대에 대하여 전혀 다르게 극단적으로 규정하는 점도 독특하다. 새정부 들어 인사청문회의 기준이 흔들리면서 여당의 '적폐청산'에 야당은 '내로남불'로 맞섰다. 6년 전의 국가정보원 여론조작사건(혹은 대선개입사건)과 작년부터 발생한 드루킹 댓글조작사건은 행위자와 이해당사자가 다를 뿐 민주주의의 근간인 국민의 여론형성을 심각하게 왜곡한 사례들이었다. '제왕적 대통령제'에 이어 '국가주의'를 둘러싼 논쟁에서도 야당은 '촛불혁명'을 초래한 국정농단에 대해 반성하지 않고, 여당은 시장과 국가의 역사적 성패에 대해 성찰하지 않는다. 내로남불은 주로 정치의 언어로 사용되지만, 돌아보면 그 뿌리는 넓게 퍼져있다. 정치인 팬덤현상들도 제3자의 눈에는 크게 다르지 않다. 이른바 '깨시민'이나 그들의 비판대상이나 진리에 있어서는 똑같이 독선적이다. 내부자 출신 정치인들에 대해서 모호한 태도를 취하는 참여연대나 비정규직 문제해결은 정부와 재계에 넘기고 정규직 노동자들의 권리만을 옹호하는 민주노총도 다르지 않다. 워마드는 이른바 미러링으로 변명하면서 그들의 비판대상인 '한남'을 닮아갈 뿐 아니라 범죄를 예고하는 일탈을 쉽게 벌인다. 일부 기독교계는 입국 금지된 이슬람국가에 들어가 선교하면서도 무슬림의 국내 입국에 대해서는 공포증을 조장한다. "롤리콤은 범죄지만 쇼타콤은 취향"이라고 말하는 교수나 여성과 남성의 비혼에 대해 근거 없이 상반된 기준을 들이미는 교수의 편협한 시각도 이제 낯설지 않다. 어쩌면 내로남불은 전 사회적인 현상인지도 모른다. 그들은 "지금은 옳고 그때는 틀리다"라는 상황논리로 변명하지만 냉정하게 들여다보면 그때나 지금이나 다 옳거나 다 틀렸기 쉽다. 더 아쉬운 사실은 서로 분열된 집단 내에서 상대에 대해 동의하거나 이해하는 목소리도, 자기 집단에 대한 반성과 비판의 목소리도 듣기 어렵다는 점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가 지키려는 민주주의의 근간인 다양성, 토론과 합의, 그리고 양보와 협력은 더 이상 가능하지 않다. '넛지'의 저자인 캐쓰 R. 선스타인은 '우리는 왜 극단에 끌리는가'라는 책에서 이러한 집단의식의 모습을 '집단극단화'로 규정한다. 그에 의하면 사람들은 서로 생각이 유사한 집단 속에 들어가면 극단으로 흐를 가능성이 높아진다는 것이다. 극단주의 성향이 심화되고, 내부 다양성은 저하되며, 나아가 상대집단과의 격차는 더욱 벌어진다는 것이다. 집단 내부에 동일한 성향의 정보가 쏟아지고 사람들은 사회적 평판을 고려하여 이에 적극적으로 동의하며, 일반적으로 극단적인 입장일수록 훨씬 설득력을 얻는다는 것이다. 나아가 정보화시대에 들어서면서, 인터넷 공간은 더 신속하고 폐쇄적인 정보순환을 가능하게 하여 집단극단화를 더욱 가속화시킨다. 선스타인은 집단극단화를 막는 세 가지 대안을 제시한다. 전통주의 혹은 선인들의 지혜에 대한 존경은 늘 새로운 것을 추구하고 과거를 시대적 한계가 아닌 적폐로 치부하는 우리에겐 적합하지 않다. 결과를 면밀하게 분석하고 미래에 적용하는 대안이 있지만, 우리는 과거로부터 배우지 않으며 인물과 조직의 대체를 선호한다. 마지막 대안은 견제와 균형이다. 링컨이나 루스벨트가 그랬듯이 동조하는 집단들로 이루어진 '정보의 반향실'이 아닌 반대하는 집단들로 '정보의 풀'을 넓히거나, 유유상종을 회피하고, 제도적으로는 3권 분립과 헌법상 독립기관의 권위를 존중하는 일이다. 그마저도 '청와대정부'를 가득 채우고 있는 같은 뿌리의 정치인들의 모습에서 찾기 어렵다. 우리에게 남은 대안이 있다면, "정부는 그 나라를 구성하는 개인들을 반영한다"는 샤무엘 스마일즈의 말처럼 국가를 구성하는 개인들이 생각이 다른 사람과의 소통을 통하여 먼저 내로남불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그 뿌리가 사회에서 정치로 뻗어나간 것이라면 그 치유의 출발은 사회 안에 있다는 말이다. LA흑인폭동의 주인공 로드니 킹은 사건 이후 진행된 인종 간의 분노와 혐오, 그리고 좌절을 겪은 후에 이렇게 말했다. "우린 다 같이 사이좋게 지낼 수 있잖아요?"/윤상철 한신대 사회학과 교수윤상철 한신대 사회학과 교수

2018-08-20 윤상철

[윤상철 칼럼]누구를 위한 지역공동체인가?

지역공동체는 시민이든 기업가든그들의 사회·문화·경제적 교류통해자연스럽게 이뤄지는 집단…누구만의, 누구들만의 것도 아니다官이 주도한다는 것은 더욱 어려워성남시에서 지역화폐로 아동수당을 지급하는 문제를 둘러싸고 의견이 분분하다. 신임시장은 지역화폐로 지급하여 지역경제를 활성화함으로써 풍요로운 지역공동체를 만들어보겠다고 한다. 그러나 정작 아동수당을 받아 사용하게 될 엄마들은 자율에 맡기는 현금지급을 선호한다. 그들은 지역화폐가 사용지역과 용도가 제한되어 육아현실에 맞지도 않을뿐더러 시민의견을 수렴하는 절차도 없었다고 반발한다. 또 다른 당사자인 기업이나 판매업체들은 아직 뚜렷하게 목소리를 내고 있지 않다. 이 사안은 보편복지와 선별복지 간의 논란이자 이를 둘러싼 중앙정치와 연관되어 있지만 지역공동체를 어떻게 만들어갈 것인가의 문제이기도 하다.최근에 화성시의 한 시민단체가 주최하는 심포지엄에 주제발표자로 갔던 적이 있었다. 회의 주제가 '화성시민과 기업의 상생발전방향'이었던 만큼 심포지엄을 주최한 시민단체 회원뿐만 아니라 시의회, 상공회의소, 기업지원협의회 관계자들이 다수 참석해 있었다. 의례 그렇듯이 시정을 수행하는 데 있어서 이 기업들을 규제하는 한편 지원하는 시청 고위 공무원들도 참석하였고 직접 제도와 정책을 홍보하고 있었다. 주제발표에서 나는 기업의 사회적 책임의 목적이 기업의 이미지를 개선하여 그 주식가치를 높이거나 이해당사자들의 만족도를 제고함으로써 기업의 지속가능성을 높이는 데에 국한되지 않는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오히려 기업 자체가 지역공동체의 시민이고 기업의 사회적 책임은 일종의 사회적 규범으로서 그 기원이나 의미와 무관하게 당연시되면서 따라야 한다는 사실을 주지시키고자 했다. 이 심포지엄의 분위기는 그야말로 진짜(?) 시민들이 등장하면서 주최 측의 의도에서 빗겨난 듯했다. 기업 직원들의 출퇴근 시간대와 지역 농산물의 출하 시간대가 겹치면서 농민들의 고충은 더 심각해졌다고 했다. 기업들은 농촌의 생태계를 적극적으로 보호하겠다는 약속을 하고 농촌마을 안으로 들어오지만 막상 그 뒷감당은 고스란히 주민들의 몫이 된다는 것이다. 농민들은 겨울 농한기에 일자리를 원하지만 그들이 보는 것은 공장을 드나드는 외지인들뿐이라고 불평한다. 넓은 심포지엄 강당에 불과 몇 십 명의 청중들이 듬성듬성 자리한 이유는 억센 비 때문이 아니고 진짜 시민들에게 알리지 않은 탓이라는 성토도 있었다. 1990년대 말경이니 벌써 20년 전의 일이다. 나는 교환연구자로 미국의 스탠포드대학에 2년간 머무르면서 그 옆의 팔로알토시에 살았었다. 그곳에 도착하자마자 대학에 온 외국 연구자나 유학생들의 현지 적응이나 언어학습을 도와주는 자원봉사자 한 분을 만났다. 덴마크 국적의 그는 미국시민권을 취득할 자격을 갖추고 있었지만 자신의 조국에 대한 애정과 부채감 때문인지 30년 넘게 그린카드를 바꾸지 않았다. 그럼에도 자신이 거주하는 도시의 지역공동체를 뜨겁게 사랑하고 그 일원이라는 자부심을 감추지 않았다. 자신이 늙은 나이에 왜 주변 지역의 흑인들에게 집을 마련해주기 위하여 '해비타트 포 휴머니티' 사업에 열심히 참여하는가를 설명하고 자랑스러워했다. 북유럽 출신의 완벽한(?) 백인이 흑인들과 하이파이브와 허그를 즐기는 모습은 늘 생소하기만 했다. 우리에게도 익숙한 마이크로소프트, 휴렛팩커드, 구글, 엡손 등의 회사와 사무실 등을 자랑스럽게 소개했고, 그들의 창업주나 가족들이 자신의 동료 시민임을 뿌듯해했다. 그리고 휴렛의 장남이 운영한다는 자그만 극장으로 안내하였다. 평생을 사업가로 살다가 은퇴한 그였지만 대기업가의 장남이 지역주민들에게 철 지난 영화를 보여주면서 젊은 시절의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그러나 아무런 이익도 남기지 못하는 사업에 몰두한다는 사실에 감동스러워했다. 시정부나 시민단체가 주최하는 공청회는 늘 만석이었고 그는 그 자리에 다녀온 이야기를 길게 늘어놓곤 했었다. 대형할인매장과 아웃렛에 익숙한 미국사람인 그가 마지막에 알려준 이야기는 "그들이 돌아오고 있어. 걸어가서 그들의 가게에서 물건을 사야겠어. 저 가게의 주인은 우리 옆집에 살던데"였다. '그들'은 더 이상 외지인이 아닌 다운타운 사업자들이었다. 그러나 그에게서 시장과 시공무원의 이야기는 별로 들어본 적이 없다. 지역공동체는 일반 시민이든 기업시민이든 그들 사이의 사회적, 문화적, 경제적 교류를 통해 이루어진다. 누구만의, 누구들만의 공동체가 아니다. 누가 일방적으로 주도하거나, 특히 관이 주도하는 자리에 공동체의 싹이 트고 자라기는 어렵다./윤상철 한신대 사회학과 교수윤상철 한신대 사회학과 교수

2018-07-09 윤상철

[윤상철 칼럼]또다시 사회적 민주주의로…

네트워크화 된 젊은 세대들과양극화에 시달리는 비정규직 등서서히 성장하며 저항력 키워사회적 민주주의 제기함으로써지배자들에게 민주주의를 요구이전에 우리 사회에서 사회적 민주주의의 가능성을 말한 바 있다. 이른바 '제3의 물결 민주화' 초기에 다수가 낙관적으로 기대했던 민주주의의 확장 및 심화 가능성이 현실의 정치와 경제에 의해 왜소화되거나 부정당했지만, 사회적 민주주의에 대해서는 희망을 걸 수 있다고 주장했었다. 현실의 정치를 살펴보자. 선거는 정규적으로 반복되고 여·야간의 수평적 정권교체도 세 번에 걸쳐 이루어졌다. 그 누구도 쿠데타와 같은 비선거적 방식을 도모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국민들은 정치권을 신뢰하지 않는다. 정치적 이슈들이 부단히 동원되지만 진영논리에 매몰되거나 제도적 한계에 갇히어 국민들의 기대를 충족시키기엔 부족하다. 현실의 경제는 어떠한가? 경제성장은 지속되고 한국의 국가 명목 GDP는 세계 12위이고 국가신용등급도 매우 높고 안정적이다. 그러나 사회경제적 양극화가 심하고 비정규직 등 고용의 질이 낮다. 그럼에도 이를 극복하기에는 세계화와 경쟁, 남북관계 등 국내외적 상황이 우호적이지 않다. 정치적 민주주의가 제도화와 진영의 논리에 위축되고, 경제적 민주주의가 성장과 효율의 늪에 빠져 있다면 사회적 민주주의는 어떠한가? 정치적 권력관계에서 비롯된 전근대적 사회관계는 성희롱과 성폭력 등 사회적 민주주의의 파탄을 보여준다. 고용과 하청 등 경제적 지배관계에서 비롯된 갑질 사례 역시 사회적 민주주의의 민낯을 보여준다. 산업은행은 퇴직자들을 낙하산으로 받아주는 조건으로 기업들에게 돈을 대출해준다. 은행경비원들은 은행과 고객, 그리고 용역업체로부터 3중 갑질을 당한다. 정수기 설치기사들의 정규직화와 치킨업체 가맹점 착취 등은 우리 사회가 여전히 전근대적 권위주의를 해체하지 못했음을 보여준다. 언론의 폭로기사, 공정거래위원회의 경고, 그리고 동반성장위원장의 엄포만으로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사회적 민주주의마저 이렇다면 우리 민주주의의 희망은 없는가? 다행스럽게도 정치 및 경제 영역 안에서, 그리고 그 효과에 의해 질식된 사회적 민주주의는 개인화, 자유화, 정보화, 세계화 속에서 그 희망의 불씨를 키워냈다. 성차별을 배격하고 평등한 인권을 지향하는 미투운동은 정치와 경제에 대한 발본적 성찰과 재구조화 없이는 멈추기 쉽지 않을 것이다. 사회의 모든 영역에서 인권 보호 및 차별 철폐와 더불어 내부 권력구조의 변화가 동반될 때에 비로소 미투운동을 촉발한 원인들을 해소할 수 있을 것이다. 가령, 성희롱과 성폭력은 남성 지배의 정치, 행정조직을 성평등한 조직으로 바꿈으로써 해결될 수 있다. 일찌감치 성평등적 인사정책이 이루어졌더라면 검찰 내 성폭력은 상상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성차별적 임금구조는 기업 내의 차별적 인사구조와 더불어 대기업과 중소기업 간 불평등구조를 혁파하지 않고는 해소되기 어렵다. 대한항공 직원들의 '갑질 규탄 촛불집회'는 4차로 이어지면서 광화문과 보신각으로 중앙을 향하고, 이를 지원하는 크라우드 펀딩이 이어지며, 매 집회마다 시민들이 합세한다. 재벌가의 갑질은 과거에도 더 끔찍한 형태로 발생했지만 이처럼 사회적인 반향을 일으키지 않았었다. 오너 일가가 저지른 갑질행위를 규탄하는 집회는 이제 총수 일가의 퇴진을 외치고 시민들이 이에 동조함으로써 재벌기업의 가족 승계구조는 물론 재벌체제의 작동방식에 대해 근본적 문제 제기를 하고 있다. 재벌개혁은 정치적 민주주의의 위로부터의 공격보다 사회적 민주주의의 아래로부터의 저항에 의해 시작될 수도 있지 않을까 기대해본다. 요컨대, 한국 민주주의의 심화 가능성은 사회적 민주주의에서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 사회적 민주주의의 자원은 네트워크화된 젊은 세대, 양극화에 시달리는 비정규직 노동자들, 학생, 중소기업, 가맹업자 등에서 서서히 성장하면서 저항과 민주주의의 잠재력을 키우고 있다. 그들은 사회적 민주주의를 제기함으로써 사회적 지배자이자 정치적, 경제적 지배자들에게 민주주의를 요구한다. 과거와 달리 이제는 사회적 민주주의가 다른 영역의 민주주의를 추동하는 뇌관으로 작동한다. 모름지기 국가와 정치권력은 권위주의적 공포로부터 인지적 해방을 경험한 이들의 요구를 차단하거나 우회시키지 말고 사회구조의 민주주의적 재구성으로 이끌 수 있도록 지원과 찬사를 보내야 한다./윤상철 한신대 사회학과 교수윤상철 한신대 사회학과 교수

2018-05-28 윤상철

[윤상철 칼럼]사회적 민주주의로 문열기

사회적 차별·지배 쉽게 발견되지만찰과 상처럼 취급돼 방치되기 쉬워미봉적 타협 불과한 민주주의조차제대로 실현하기에는 항상 어렵고깊은 민주주의 실현 더더욱 힘들다이른바 '제3의 물결' 민주화가 1970년대 중후반부터 20여년 이상 전 지구를 휩쓸었다. 대표적 민주주의 논자였던 길레르모 오도넬은 민주주의를 3차원으로 나누고, 정치적 민주주의는 민주주의로의 문열기에 불과하고 경제적 민주주의와 사회적 민주주의로 확산된다고 믿었다. 그러나 많은 나라에서 민주주의는 정치적으로 의례화한 최소요건 민주주의로 전락했다. 경제적 민주화는 신자유주의의 지구적 지배상황에서 저항의 주체들이 약화되면서 정체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회적 민주주의는 새로운 가능성을 열고 있다. 민주화 이전의 상황을 보자. 권위주의적 가족 안에서 명령하는 아버지와 복종하는 자식이 있고, 어머니는 그 갈등관리에 지쳐 있다. 기업조직 안에서는 권위적인 의사결정이 이루어지고, 임용 및 인사 과정의 시혜를 미끼로 성적 지배와 학대까지도 일상적으로 발생한다. 교회 안에서는 신처럼 군림하는 성직자와 힘없는 평신도들 사이에서 교리해석과 신앙행위에 대한 독점적 지배관계가 자연스럽다. 지역 간에도 패권주의적 지배와 실리적 복종이 요구된다. 학교 안에서도 봉건적 권위주의와 자본주의적 교환으로 구성되는 교사와 학생 간의 비민주적 관계가 발견된다. 세대 간에도 노동현장에서도 이 모든 전(前)민주주의적, 비민주주의적 관행이 여전하다. 우리가 아는 한, 체제의 이행은 단속적이다. 역전되기도 하고 건너뛰기도 한다. 그러나 사람들은 체제진전이 그들에게 준 자존감과 행복감을 기억하고 이행의 지속을 선호한다. 따라서 경제적 민주주의가 정체하더라도 사회적 민주주의의 진전은 계속된다. 지역불균형 발전을 극복하고 지역차별과 패권을 철폐하는 일은 지속 될 것이다. 노동자이든 근로자이든 차이를 가르는 명명들이 존재할지라도 노동에 대한 사회적 차별은 감소될 것이다. #Me Too를 내걸든 #With You를 내걸든 권력과 결부된 성적 차별과 폭력은 결단코 사라져 갈 것이다. 기대에 미흡하더라도 그 진전으로 인간의 품격이 높아진다면 사람들은 계속 나아갈 것이다. 모두가 다 동의하지는 않는다. 그들은 타인의 자유와 권리를 해하지 말라고 말한다. 가해자들에게도 인격과 권리가 있고 사법적 판단 이전에 여론 재판을 가하지 말라고 한다. 스스로를 해명할 기회조차 갖지 못했다고 가해자들을 옹호하기도 한다. 가해자에게도 가족이 있고 그들의 인권은 중시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피해자들은 너무 어리고 판단 능력을 갖지 못할 수 있다고 한다. 여전히 권력을 가진 자들의 반격과 역주행에 유의하라고 충고한다. 심지어 다른 소수자들의 권리를 인식하고 그들의 상처와 피해까지도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고 한다. 더 시선을 넓혀 다른 소수자와 연대하여 더 큰 민주주의를 이루라고 한다. 어떤 정치적 음모가 있다고 속삭이고, 해일이 일고 있는데 조개를 줍고 있다고 핀잔하기도 한다.수용하기도 비난하기도 쉽지 않은 이러한 언설에 대해, 한 방송인의 말이 와 닿는다. 세월호 유가족들에게 '이제 그만 좀 하라'고 말하는 사람들에게 그는 "슬픔의 기한은 우리가 정하는 게 아니라, 유가족의 눈물이 멈출 때까지"라고 말한 적이 있다. 차별에 상처받은 이들에게 시한을 정하지 마라. 또한 사람들은 변증법적 발전을 상식적으로 수용한다. 다소 격하게 보이더라도 관행처럼 익숙해진 것들을 변화시키려면 그야말로 '역편향'까지도 수용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폭력적 혁명의 최종적 결과는 별로 진보적이지 않은 민주주의이듯이 아직 크게 변하지도 않은 차별을 뿌리뽑기 위한 사회적 노력에 법과 제도에 근거한 차분하고 점잖은 태도를 조언하지 마라. 아직 아물지도 않은 자기 상처를 치유하기에 몰입하는 이들에게 다른 이들의 상처까지도 전가하지 마라. 각자 자기 상처의 고통을 말하면서 다소 불균형적 치유가 흡족하지 않더라도 보이는 것은 일단 치료하고 보자. 단 한 번의 촛불집회로 민주주의는 완성되지 않는다. 심지어 그 촛불집회를 야기한 농단조차도 쉽게 철폐되지 않는다. 사회적 문화와 관행에 깊이 녹아들어가 있는 차별과 지배는 쉽게 발견되지만, 찰과상처럼 취급되기 쉬워서 무관심과 방치의 대상이 되기 쉽다. 찰과상에 몰두해있는 아이를 가볍게 바라보면서 시선을 바꿀 것을 강요함으로써 그 뿌리까지 제거하기가 쉽지 않다. 모든 것의 출발에 불과한, 그런 의미에서 미봉적 타협에 불과한 민주주의조차 제대로 실현하기는 늘 어렵고 보다 깊은 민주주의는 더더욱 실현하기 어렵다. 신문마다 무수한 기둥(column)들을 세우고 있지만 여전히 사회를 떠받들기는 어렵기만 하다./윤상철 한신대 사회학과 교수윤상철 한신대 사회학과 교수

2018-04-16 윤상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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