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영직의 여시아독(如是我讀)

 

[고영직의 여시아독(如是我讀)]'손으로 생각한다'는 것

"아이들의 꿈에는 / 도무지 땀 흘리는 게 없다." 공고에서 오랫동안 아이들을 가르쳤던 시인 최기종이 '장래희망'이라는 작품에서 쓴 표현이다. 아이들에게 장래희망을 물어보면 "농부가 되고 어부가 되고 화부가 되는 꿈 / 석공이 되고 목수가 되고 잡역부가 되는 꿈" 따위는 전혀 고려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학교 현장에서 기술수업이 퇴출되고, 부모들이 '펜대' 굴리는 직업을 선호하며, 육체노동을 경멸하는 문화가 견고히 형성된 것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특정한 기술을 습득하면 그것으로 아이들의 삶이 결정된다고 믿는 어른 세대의 불안감이 작용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손으로, 생각하기'의 저자인 매튜 B. 크로포드는 육체노동을 예찬하며 자립적인 기능인으로서의 삶을 적극 권장한다. 무엇보다 저자의 이력이 이채롭다. 시카고대학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고 워싱턴에 있는 싱크탱크 책임자로 일했던 저자가 어느 날 모터사이클 정비사로 변신했던 것이다. 화이트칼라였던 저자가 자발적으로 블루칼라 노동자가 된 셈이랄까. '손으로, 생각하기'는 '손으로 생각한다'는 것에 대한 철학적 사유와 무엇이 좋은 노동인지에 대한 성찰을 기록한 책이다. 인간의 직관적인 판단조차 알고리즘으로 대체하는 것을 당연시하며 공포 마케팅을 하고 있는 지능공학 시대에 대한 어느 '반골' 철학자의 사유를 보여주는 책이라고도 할 수 있다. 크로포드는 우리가 손을 쓰지 않게 되면서 소비사회에 의존하는 인간이 되었다고 주장한다. 표준화된 시험 문제를 잘 풀고 잡다한 정보들은 알고 있지만 정작 아무것도 할 줄 모르고, 무엇인가를 할 수 있는 자유가 아니라 마켓에서 무엇인가를 선택할 여지만 남게 되었다는 것이다. 모터사이클 정비사로서 겪은 육체노동의 경험과 노동에 대한 철학적 사유를 통해 무엇인가를 '할 줄 아는' 개인의 감각적 지식이 갖는 힘의 중요성을 역설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육체노동을 통해 토착적이고 실천적인 암묵지를 갖게 되고, 자기 물건의 주인이 되려는 열망을 통해 탐구정신과 연계될 수 있다고 말한다. 암묵지란 그리스적 의미에서 토착적이고 실천적인 지혜를 뜻하는 메티스(metis)라고 할 수 있으며, 그것은 실제 사물과의 대면을 통해 생겨난다. 왜 손을 사용하는 노동이 중요한가. 크로포드는 "우리의 세계를 책임지려면 우리가 사용하는 물건들의 출처를 더 확실히 알아야 한다"고 말한다. 물건의 구조를 숨기며 '계획적인 진부화'를 의도적으로 꾀하는 최근의 엔지니어링 문화와 소비사회 문화에서는 물건을 직접 만들고 수리하는 과정에서 터득되는 행위주체성과 자신의 능력에 대한 감각적 이해를 얻을 수 없다는 것이다. 헨리 포드가 1917년 처음 어셈블리 라인을 도입했고, 1917년 행동과 생각을 노동 현장에서 분리하는 것을 골자로 하는 스미스-휴즈법이 적용됨에 따라 오늘날 화이트칼라와 블루칼라가 분리되었다고 말하는 저자의 설명은 설득력이 있다. '손으로, 생각하기'는 '눈'으로 터득한 지식과 노동이 아니라 '손'으로 터득한 지식과 노동의 중요성을 역설하는 책이다. '구경꾼의 지각과 정비사의 지각이 다르다'는 저자의 주장은 사실에 대한 지식보다 갈수록 방법에 대한 지식이 더 중요해지는 시절에 손과 몸을 쓰며 사는 삶이 왜 중요하고 행복한지 환기하는 힘이 있다. 공허한 미래주의를 운운하는 대신에 실과(實科) 수업이 학교 현장에서 부활되어야 하고, 육체노동을 바라보는 우리 안의 관점이 근본적으로 달라져야 하며, 먹고사는 데 쓰잘데기없는 일을 하는 것을 권장하는 생활문화운동이 필요하다. 자유라는 말이 소비시장에서 물건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로 제한되는 사회에서의 노동은 좋은 노동이 아니기 때문이다./고영직 문학평론가고영직 문학평론가

2018-01-14 고영직

[고영직의 여시아독(如是我讀)]'치매'라는 말부터 바꾸자

치매(dementia)라는 말은 라틴어에서 유래된 말로서 '정신이 없어진 것'을 의미한다. 최근 정부는 치매국가책임제를 표방하며 치매친화사회를 위한 사회적 기반을 구축하겠다고 밝혔다. 중증 치매환자의 의료비 부담 완화를 위해 건강보험에서 90%를 국가가 책임지는 산정 특례 적용 계획을 밝혔다. 환영할 만한 처사이다. '인간은 인간에 대해 인간적이어야 한다'는 명제는 의료와 돌봄 부문에서 특히 실감되는 영역이기 때문이다. 사람을 문제로 보려는 시선에서 벗어나 존재로 전환하려는 사회문화의 형성과 정착이 요청되는 것은 당연하다. 그렇지 않고서는 '세상에는 아무도 버릴 사람이 없다'는 인간 존중의 가치를 실현하는 사회문화 형성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우리 사회에서 사람은 여전히 '쓸모' 유무로 판단되는 경향이 완고하다. 교육부 명칭이 '교육인적자원부'라는 이름으로 불리던 시절이 있었다. 아이들을 교육하는 목적이 '인적자원'을 양산하는 것에 있는가. 치매라는 말도 그렇다. 나는 이 말을 들을 때마다 사람을 폄하하고 모욕하는 언어라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반인권적이고 모욕적이고 차별적인 용어로는 자연스러운 노화에 대한 제대로 된 정의와 노인에 대한 새로운 이해가 불가능하다. 그런 반인권적인 용어로는 노인 혹은 치매환자에 대한 상상력의 개입을 더 이상 허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치매라는 말을 지금 당장 폐기처분하자. '나쁜' 언어로는 오염된 우리의 생각을 바꿀 수 없기 때문이다. 치매라는 용어를 대체하는 용어로 인지장애가 꼽히지만 아직 정착되지는 않았다.치매친화사회는 어떻게 가능한가. 이 책 『치매와 싸우지 마세요』는 제목 그대로 "치매와 싸우지 말라"는 주장을 한다. 『치매와 싸우지 마세요』는 인지장애(치매) 환자를 돌보는 마을의사인 나가오 가즈히로와 돌봄 공무원인 곤도 마코토가 문답 형식으로 쓴 책이다. 저자들은 치매친화사회를 위해 인간중심돌봄 혹은 위마니튀드(humanitude) 같은 좋은 돌봄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인간중심돌봄이란 환자 개개인을 존중하고 그 사람의 시점과 입장에서 이해하고 돌봄을 행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람(human)과 태도(attitude)의 합성어인 위마니튀드 또한 환자의 인격을 중요시하는 돌봄을 뜻한다. 나는 두 저자가 당사자인 환자 또한 '1인칭 연구회'가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장면이 퍽 인상적이었다. 자신의 인생을 다른 사람에게 맡기지 않겠다는 각오가 선 시민들이 늘어나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경우 65세 이상 노인 10명 중 1명이 치매 환자로 추정된다. 무엇보다 빠른 고령화 속도로 그 규모가 2024년에는 100만 명을 돌파할 것으로 추산된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인지장애(치매) 환자는 아리셉트 처방을 비롯해 약물치료 위주의 처방을 받고, 요양원 같은 '시설'에 수용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환자보다 가족을 더 우선하는 우리의 돌봄문화와 관련 있다. 그러나 그렇게 할수록 환자들은 말할 상대가 더 없어지고, 다른 사람과의 커뮤니케이션 또한 기대하기 어려워지는 것이 아닐까. '치매 서포터 100만명 캐러밴' 캠페인을 벌여 수백만 명의 회원을 확보하고, 일부 지자체에서 '배회해도 괜찮은 마을 만들기'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일본 사례를 면밀히 참조할 필요가 있다.결국, 중요한 것은 사람이다. 인지장애 환자의 개별성을 중시하고 생활을 중심으로 바라보는 관점으로의 전환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는다. 『치매와 싸우지 마세요』는 사람을 하찮게 여기고, 치매 노인을 쓸모없는 삶이라고 간주하는 우리의 돌봄문화를 비판적으로 돌아보게 한다. 그런 사회에서는 우리의 미래 또한 결코 밝지 않다. '우리를 빼고 우리 일을 결정하지 말아요'라는 표현이 오래도록 여운을 남긴다./고영직 문학평론가고영직 문학평론가

2017-12-03 고영직

[고영직의 여시아독(如是我讀)]자존심과 자존감의 차이

자존심과 자존감의 차이는 무엇인가. 가난하고 소외된 백인 하층민의 빈곤문화를 당사자의 눈으로 냉정히 성찰하는 J.D.밴스의 회고록 '힐빌리의 노래'를 덮으며 드는 생각이다. '힐빌리의 노래'는 가난이 가난을 낳고, 가난이 대물림되는 미국 애팔래치아 산맥 인근 쇠락한 공업지대인 오하이오 미들타운에서 성장한 저자가 사회적 고립과 학습된 무기력이라는 빈곤문화를 형성해온 비관적 무리에서 벗어나 어떻게 계층이동의 사다리를 밟으며 아메리칸 드림을 이루었는지를 회고하는 책이다. 오해는 마시라. 이 책은 결코 상투적인 아메리칸 드림 신화를 회고하는 책과는 거리가 멀다. 저조한 사회적 신분 상승에서부터 빈곤과 이혼, 마약 중독과 십대 임신에 이르기까지 오만 가지 불행의 중심지인 미국의 '힐빌리 문화'를 내부자의 눈으로 신랄히 성찰하며 더 나은 삶을 향한 희망의 필요성을 역설하는 역작이다. 힐빌리 문화는 레드넥, 화이트 트레이시라는 모욕적인 이름으로도 유명한데, 이들의 문화는 지독히 의리를 중시하고 외부인을 난폭하게 다루는 것으로 악명이 높다. 다시 말해 법보다 주먹이 더 가깝고, 복지 여왕을 비난하며, 가난이 가풍(家風)이 되어버린 가난한 백인들의 빈곤문화를 의미한다. 지난 미 대선에서 가난한 백인 남성들이 민주당의 포퓰리즘 정책을 혐오하며, 왜 트럼프를 대통령으로 선출했는지 이해할 수 있는 책으로도 유명하다. J.D.밴스는 1984년생 스코틀랜드계 아일랜드인 출신의 후손이다. 그는 힐빌리 문화권에서는 '세상에 믿을 놈 없다'는 것을 신봉하는 마음의 습관을 형성하게 된다고 말한다. 기회를 가로막는 장애물들은 집과 학교 주위에 널려 있고, 노력 부족을 능력 부족으로 착각하는 문화 또한 완고하다. 그런 환경에 둘러싸인 저자가 자신의 학창 시절을 회상하며 '덫에 걸린 기분'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전혀 어색하지 않다. 쉽게 말해 이들은 자존심이 센 척하지만, 자존감이 그리 높지는 않았던 것이다. 저자는 십대 시절을 회상하며, 자신은 완전히 다른 세상으로 옮겨간 '문화적 이주자'라고 비유한다. 자신이 문화적 이주자가 된 데에는 자신을 이해하는 사람들에게 터놓고 이야기하는 것이 중요하고, 타인과 대화하는 법을 배워야 하며, 낙관을 배웠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해병대에 입대하고, 오하이오주립대를 다니고, 예일대 로스쿨에서 법을 공부하며, 저자는 그런 환경에 노출되는 경험을 통해 배웠다고 말한다. 그리고 가난이 가난을 낳으며, 가난이 대물림되며 형성되는 빈곤문화를 극복하는 방안으로 사회적 자본(social capital)의 필요성을 강조한다. 정치학자 로버트 D. 퍼트넘이 '나홀로 볼링'에서 역설한 사회적 자본이란 개인들 사이의 연계와 사회적 네트워크 형성 그리고 호혜성과 신뢰의 규범을 의미한다. 러스트 벨트(rust belt) 지역 고유의 자신을 비하하는 '골창 문화'를 바꾸려는 교육의 힘을 역설하는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다. '힐빌리의 문화'는 힐빌리의 한국적 버전인 '태극기 부대' 시위에 참여하는 우리나라 가난한 노인들의 빈곤문화를 돌아보게 한다는 점에서 퍽 유의미하다. 또 가난한 사람들은 왜 보수정당을 지지하는가에 대한 사회문화 보고서로서도 의미가 없지 않다. 책을 보며 십대 시절의 암담했던 고립의 나날들이 연상되어서인지 책을 꼼꼼히 탐독했다. 계층이동의 사다리를 어떻게 놓아야 하고, 사회통합을 위한 좋은 정책은 무엇인지 고민하게 한다. '힐빌리의 노래'를 보며 자존심과 자존감의 차이를 이해하는 것이 퍽 중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결국, 나 자신의 노래를 부를 수 있고, 또 기꺼이 부를 줄 아는 건강한 마음생태학이 중요하다. 교육과 문화의 힘을 바탕으로 한 좋은 정책이 좋은 정치라는 점을 인식하고 실천해야 할 때이다./고영직 문학평론가고영직 문학평론가

2017-10-29 고영직

[고영직의 여시아독(如是我讀)]'도시침술'이라는 상상력

'도시는 문제가 아니다. 오히려 해결책이다.' 브라질 도시계획가 자이미 레르네르(Jaime Lerner)는 '도시침술'에서 문제가 아니라 해결책으로서 도시를 상상하며 '도시침술'이라는 새로운 도시재생 전략을 제시한다. 도시침술(urban acupuncture)이란 어두운 골목을 밝히는 가로등, 특별한 기억을 담은 공원 벤치 같은 작은 요소를 통해 도시 생활을 바람직한 방향으로 이끄는 '최소한의 개입'을 의미한다. 아픈 부위에 침을 한 대 놓아 낫게 하듯이, 우리 사는 도시 또한 침술이 지닌 마법 같은 힘을 발휘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자이미 레르네르가 1970년대 초반부터 최근까지 인구 180만 명의 브라질 쿠리치바 시장을 세 번 지내고, 파라나 주지사를 두 차례 역임하면서 이러한 도시침술의 방법을 통해 '꿈의 도시 쿠리치바'를 만들어온 주역이라는 점에서 신뢰할 만하다. 도시의 중추신경을 잘 파악하여 문제가 있는 부위를 정확한 침술로 소생시킨 것이다. 오늘날 쿠리치바가 2003년 파나마시티와 더불어 아메리카 문화수도로 선정된 데 이어, 세계적인 창의도시 또는 존경의 수도라는 별칭을 갖게 된 데에는 재미와 장난의 요소를 결합해 도시침술이라는 독특한 시정철학을 바탕으로 한 창조도시 프로젝트를 적절히 수행해온 것이 한몫한 것이다. 쿠리치바가 삶의 질, 쾌적성, 편의성, 정주성이 높은 공동체형 문화도시의 전형이라는 평가를 받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이 책은 저자가 브라질 쿠리치바를 비롯해 세계 각지의 도시를 여행하고 다양한 프로젝트에 참여하면서 느낀 자신의 소감을 적은 핸드북에 가깝다. 그러나 이 책의 행간에 스며 있는 메시지는 결코 단순한 실용적 팁에 머물지 않는다. 한마디로 말해 '도시는 사람이다'라는 메시지를 줄기차게 주장하는 책이다. "도시의 기억은 오래된 가족사진과 같다"라든가, "도시에 대한 자부심을 높이는 게 도시침술의 핵심이다"라는 진술에서 여실히 확인할 수 있으리라. 로마클럽 보고서인 '성장의 한계'(1972)를 집필한 도넬라 메도우즈가 쿠리치바를 '희망의 도시' '시민을 존경하는 존경의 수도' '웃음의 도시' 같은 애칭을 붙인 데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던 셈이다. 이 책을 읽을수록 도시에 대한 비전을 제시할 줄 아는 능력이야말로 리더의 조건이라는 점을 확인하게 된다. 최근 문재인 정부는 '국정운영 5개년 계획'에서 도시 경쟁력 강화 및 삶의 질 개선을 위한 도시재생뉴딜 사업을 추진하겠다고 발표했다. 지역 주민의 삶의 질을 개선하고, 도시 활력 제고를 위해 구도심과 노후 주거지 등을 도시재생뉴딜사업 대상으로 선정하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5년 간 50조원이 투입되는 도시재생뉴딜 사업에 대해 시민사회에서 우려의 목소리가 그치지 않는다. 다수의 지자체 단체장과 지역 주민들의 경우 여전히 도시재생뉴딜 사업을 '길이 뚫린다, 물길이 열린다, 땅값이 오른다'식의 마인드로만 접근하려 하기 때문이다. '도시침술'은 '도시는 사람이다'라는 관점이 어떻게 솔루션화할 수 있는지 예시한다는 점에서 꼭 읽혀져야 하는 책이다. 미국 사회운동가 제인 제이콥스가 한 말은 다시 한 번 강조될 필요가 있다. "꿈의 도시를 설계하는 일은 쉽다. 하지만 살아 있는 도시를 재건축하려면 상상력이 필요하다." 이 책과 더불어 2007년 테드(TED) 강연을 같이 감상하면 더 흥미진진할 것이다. '도시의 노래'를 부르며 흥겹게 춤추는 자이미 레르네르 같은 리더가 더없이 그리워서일지도 모르겠다./고영직 문학평론가고영직 문학평론가

2017-09-17 고영직

[고영직의 여시아독(如是我讀)]'현재 진행형' 분단 트라우마

지방의 한 읍에서 읍 승격 20주년을 맞아 마을의 역사를 기록하는 읍지(邑誌)를 발간하고자 한다. 발간 전체를 통괄하는 편찬위원회가 결성되고, 실무를 책임지는 편집위원회가 꾸려진다. 역사학 전공 교수진에게 분야별로 원고를 의뢰했고, 완성된 원고에 대한 편찬위원회의 윤독회가 순조롭게 진행된다. 사단이 난 것은 작중 어느 교수가 읍의 근현대사에 대해 쓴 '해방정국과 6·25전쟁'편이다. 이른바 '좌빨' 시비가 빚어진 것이다. 사건의 발단은 '병산읍'에서 전쟁 당시 일어난 국민보도연맹(보련) 사건에 관한 서술 때문이다. 국민보도연맹은 1948년 12월 국가보안법 시행 이후 좌익쪽에서 활동했던 사람들을 전향시켜 이들을 보호하고 인도한다는 취지로 조직된 관변단체이다. 읍에서는 700여명 전후로 추산되는 희생자들이 발생했다. 그런데 더 많은 보련 희생자들이 발생할 수 있는 상황에서 영화 '쉰들러 리스트' 같은 사건이 일어났다. 면장 김후곤이 허형도 지서장을 찾아 구금 중인 보련원들을 풀어주면 어떻겠냐고 제안했고, 허 지서장이 이에 응해 90여명의 보련원들을 풀어준다. 그 사건 이후 보련원들을 처리하라는 본서의 명령은 더 이상 내려오지 않았고, 민간인들에 대한 재판과정 없는 불법 학살은 중단된다. 원로작가 조갑상의 소설집 '병산읍지 편찬약사'는 위와 같은 문제설정을 통해 계속되는 분단 트라우마를 성찰하려는 만만치 않은 작가의 내공을 보여준다. 역사적 사실(fact)을 어떻게 서술하고 편집할 것인가 하는 문제를 제기하고 있지만, 분단 트라우마가 지금·여기 살아 있는 뜨거운 쟁점이라는 점을 하나의 축소판으로 보여준다. 다시 말해 과거사를 둘러싼 기억투쟁은 아직도 현재 진행형이다. 보도연맹 사건이 6·25의 전부가 아니다, 좌빨 글 싣는 데 한 푼도 예산 쓸 수 없다…, 같은 언사들이 작중 인물에게 가해진다. "요즘 이런 저술들의 추세가 그 고장의 변화 발자취를 통해 긍정적 측면의 발전사를 알리는 것 아닙니까." '긍정적 측면의 발전사'라는 표현이 예사롭지 않다. 해방 이후 역사 서술과 편집에 있어서 오직 하나뿐인 공식 이데올로기는 긍정적 측면의 발전사라는 사관(史觀)이 의식적·무의식적으로 강력히 짓눌러왔기 때문이다. 오직 하나의 관제(官製) 기억인 국정화 역사교과서를 도입하고자 한 박근혜 정부의 시도는 그 좋은 예가 된다. 이 점에서 조갑상이 소설에서 빚어낸 병산읍은 분단 트라우마로부터 아직도 자유롭지도 못하고, 자유로울 수도 없는 분단 한반도를 환유한다. 조갑상은 독자들에게 국민보도연맹 같은 분단 시대 비극의 역사에 대한 의미화란 결국 누구의 손에 의해 어떠한 방식으로 이루어져야 하는가 결코 간단치 않은 화두를 제시한다. 작가는 1980년 데뷔 이후 줄곧 보도연맹 문제에 천착해오다 문제작 '밤의 눈'(2012)을 발표했다. 그는 '밤의 눈'에서 분단 트라우마의 실상이란 길들여진 공포가 작동해온 시절이었음을 사실감 있게 묘사한다. 죽음에 대한 공포를 드러내고, 사회적 생매장에 대한 공포에 시달리는 인물 형상들은 21세기 분단문학의 소중한 결실이다. 그는 분단 트라우마를 치유하는 길은 역사적 사실은 사실로 수용하되 역사적 사실을 넘어 문학적 진실을 중단 없이 추구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소설집에 수록된 '해후'의 마지막 문장을 아프게 읽어야 하는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다. "증산이 장인만이 묻힌 땅은 아니었다. 산소조차 쓰지 못한 죽음들도 새겨야 했다." 8·15, 72번째 광복절이 오고 있다./고영직 문학평론가고영직 문학평론가

2017-08-13 고영직

[고영직의 여시아독(如是我讀)]한국 우익의 '적통'

"오늘의 대한민국을 설계하고 만든 사람들은 누구인가." 국문학자 김건우의 '대한민국의 설계자들'은 해방과 한국전쟁 이후 오늘의 대한민국을 설계해온 한국 우익의 사상사적 기원을 인물 중심으로 탐사하고 있는 책이다. 친일 논란에서도 비교적 자유롭고 공산주의 이념과도 친연성이 없었던 '양심적' 우익의 실체를 추적하며, 산업화/민주화라는 이분법적 구도에서 벗어나 대한민국 우익 사상사의 흐름을 서술하고자 한 기획이다. 최근 국문학 연구에서의 신(新)역사주의적 문학연구의 한 모델을 제시하고 있는 책이다. 해방과 한국전쟁 이후 대한민국의 당면 과제는 근대적 민족국가 건설과 근대화 프로젝트였다. 문제는 나라 만들기와 전후 복구를 주도하는 이승만, 장면 같은 기성세대의 경우 '친일' 논란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는 점이다. 1950년대 중반 이후 대한민국의 설계자들로서 이른바 '학병(學兵) 세대'가 두각을 드러내는 데에는 이러한 시대상황이 놓여 있었다. 1920년을 전후해 1917년생부터 1923년생까지를 아우르는 일제 말 학병 세대는 선배 세대의 친일 논란으로부터 비교적 자유로웠고, 일본 유학파라는 엘리트 의식이 강했다는 점에서 하나의 세대의식을 형성한다는 것이 저자의 진단이다. 1944년 당시 고등교육을 받는 조선인 학생 숫자가 약 7천200명 정도라고 저자는 추산한다. 그렇다면 김건우가 생각하는 한국 우익의 기원은 무엇인가. 저자는 세 그룹을 주목한다. 월남 지식인, 서북(평안도) 출신의 기독교인들, 1960년대 이후 등장한 민족주의자 그룹이다. 저자는 세 그룹 가운데 광복군의 '적통(嫡統)'이라는 인식이 강했던 장준하·김준엽이 창간한 잡지 '사상'-'사상계' 그룹이 그 기원이라고 파악한다. 이들은 우익 반공 국가주의의 선봉에 서서 근대화 프로젝트에 대한 구상을 '사상계' 지면을 통해 펼쳐낸다. 이들이 말하는 근대화는 실상 미국화에 가깝다고 말할 수 있다. 1960년대 중반 양호민·유경환·선우휘 등 '사상계' 편집위원들이 '조선일보'로 흡수되는 과정은 '서북 출신'이라는 지역주의를 빼놓고는 설명되지 않는다. 예컨대 '사상계'가 주관한 동인문학상 수상자인 선우휘가 '조선일보'에 입사하고, 훗날 동인문학상을 '조선일보'가 주관하게 되는 과정도 '서북'이라는 지역주의와 무관할 수 없다는 것이다. 한편 월남한 서북 출신의 기독교 보수파가 오늘의 대한민국 우익을 형성했다는 저자의 진단은 결코 간과되어서는 안되는 주장이다. 저자가 말하는 보수우익이라는 기표와 우리가 익히 아는 보수우익이라는 기의와는 판이한 점이 이 책의 매력이라면 매력이다. 다시 말해 이 책의 논리에 따르면, 한국 우익의 기원은 지금의 자유한국당과 태극기집회 세력보다는 더불어민주당 측이 더 가깝다고 말할 수 있으리라. 이 책은 극우-반공이라는 일방으로 환원되지 않는 한국 우익의 사상사적 기원과 형성을 탐색한 책이라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물론 책에서 말하는 '설계자'들이라는 이념틀이 지금·여기 대한민국에서 제대로 현실화되었다고 볼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무엇이 진짜 보수(保守)이고, 무엇이 진짜 우익(右翼)인지 말한다는 점에서 논의할 지점들이 적지 않다. 보수라는 말은 '보전하여 지킨다'는 뜻이다. 그러나 한국의 보수와 우익은 자신의 '자리'를 지키고, 자신의 '재산'을 지키는 데에만 신경 쓰고 있는 것이 아닌지 모르겠다. 보수의 몰락은 진보의 발전에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자신의 가치를 지키고, 자신의 문화적 이념을 보존하려는 제대로 된 양심적 보수의 부활이 필요하다./고영직 문학평론가고영직 문학평론가

2017-07-09 고영직

[고영직의 여시아독(如是我讀)]눌변의 힘

사회학자 김찬호의 '눌변'은 회복력에 관한 책이다. 다시 말해 나를 나이게 하고, 우리를 우리이게 하는 회복력은 어디에서 비롯하는가 하는 질문에 대해 사회학자로서 성실히 자문자답하려는 사유와 성찰의 여정을 보여주는 칼럼집이다. 지난해 출간되었으나, 대선 이후 사회 전 부문에서 공론영역의 공공성과 더불어 우리 안의 회복력 복원이 그 어느 때보다 더 절실해진 지금·여기에서 읽혀져야 하는 책이 아닌가 싶다. "정치적이라는 것, 즉 폴리스에서 생활한다는 것은 힘과 폭력이 아니라 말과 설득을 통하여 모든 것을 결정함을 의미한다"는 한나 아렌트의 언명처럼, 리셋 대한민국을 위한 사유와 성찰에 충분히 값하기 때문이다. 그렇다. 대선 이후 우리 사회의 회복력은 말과 설득을 통해 비정상성에 대한 저항을 수행하는 동시에, 정상성에 대한 저항의 과정을 얼마나 성공적으로 수행하느냐에 달려 있다. 그런 점에서 김찬호가 말하는 눌언(訥言)의 미덕은 적잖은 신뢰를 준다. 갈수록 나만 옳다는 확언의 수사학이 아니라 판단유보 능력이 요청되는 탈근대적 지성을 위한 방편으로써 눌언의 미덕이 필요하다고 보기 때문이다. 왜? 인간이 발견한 진리는 언제나 부분적이고 가설적인 것에 지나지 않을지 모르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내 안의 과도한 자기애를 극복하고, 허약한 정체에 대한 두려움 또한 넘어서자는 저자의 말에 공감하게 되는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다. 김찬호의 이러한 신중한 제안은 협력을 위한 의례로서 대화적 대화(dialogic coversation)의 방법을 강조한 사회학자 리처드 세넷의 주장과도 통한다. 대화적 대화란 "서로에 대한 이해를 넓히는 대화"를 말한다. 그런 대화적 대화가 성립하기 위해서는 사람과 사람 사이에 공감보다는 감정이입의 능력이 더 중요하다. 타자에 대한 단정적 태도를 삼가고, 영어의 'as if'처럼 가정법을 사용하자고 세넷이 제안하는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리라. 다시 말해 '내가 너라면'이나 '아마 나라면' 같은 식의 어법을 사용하자는 것이다. 눌언의 힘을 강조하는 '눌변' 또한 대화적 대화의 원리에 충실한 책이다. 눌변(訥辯)의 사전적 의미는 "서툴게 더듬거리는 말솜씨"를 뜻한다. 시쳇말로 '고구마'라고 한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어눌한 말솜씨를 의미하는 눌변을 대체로 좋아하지 않는다. 어느 사안이든 간에 속 시원한 '사이다' 맛을 연상시키는 쾌도난마식 확언의 수사학을 더 선호한다. 후보 시절 문재인 대통령의 언행을 둘러싸고 고구마 논란이 그치지 않은 것도 그런 이유와 무관하지 않다. 김찬호의 '눌변'은 사회적 상호작용 능력을 의미하는 대화적 대화와 협력의 의례를 강조했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작지 않다. 나는 특히 새로운 '창의한국'을 위해서는 놀이와 예술 그리고 (문화예술)교육의 가능성을 적극 모색함으로써 공생의 사회로 가는 율동과 리듬이 창조되리라는 저자의 제안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나는 이 '눌변'을 통해 말하는 자의 인격뿐만 아니라, 들음에도 인격이 있다는 점을 배웠다. 우리는 좀처럼 현상 너머를 성찰하려 하지 않는다. 나는, 우리는, 우리 사회는, 왜 이렇게 되었는지 성찰하고 사유하고자 한다면 이 책이 좋은 벗이 되지 않을까 한다. 나의 자아와 너의 자아가 만나 유대를 맺는 능력이 중요하고, 서로의 내면을 연결하는 안내자 역할을 하는 책이라는 점을 당신도 느끼게 될 것이다./고영직 문학평론가고영직 문학평론가

2017-06-04 고영직

[고영직의 여시아독(如是我讀)]우리 안의 '먹고사니즘'

김훈 소설 '공터에서'는 우리 안의 '먹고사니즘'에 관한 소설이다. 먹고사니즘은 오로지 지금 당장 나와 내 가족의 끼니를 해결하며 사는 일이 하나의 신앙처럼 작동하는 마음의 생태학을 이르는 말이다. 소설 속 마동수-마장세·마차세 부자(父子)는 먹고사니즘의 생생한 문화적 실체라고 간주할 수 있다. 1910년생인 마동수는 일제 식민지와 전쟁 그리고 분단과 군사독재 시절 내내 자신의 '거점'을 마련하고자 했지만, 끝내 자식들에게 발 디딜 곳 하나 물려주지 못한다. 한국전쟁 당시의 표어 '식량 문제는 각자 해결하자!'라는 구호는 어쩌면 마동수 세대가 처한 굶주림에 대한 공포를 잘 요약한다. 마동수가 임종을 앞두고 일제 시절 만주 길림으로 떠난 형 마남수와의 기억을 떠올리며 술회하는 대목은 소설의 핵심적 전언이 되기에 충분하다. "그때, 세상은 무섭고, 달아날 수 없는 곳이었다." 그런 마동수와 그 세대의 삶에서 '생활'을 발견하는 것은 쉽지 않다. 오직 '생존'의 공포가 마동수 세대의 삶을 압도했다고 할 수 있다. 이 점은 마동수의 후속세대인 마장세·마차세의 경우에도 사정은 다르지 않다. 베트남전쟁 당시 전우 김정팔을 사살하고, 괌에서 고철무역을 하며 지내는 마장세는 누구보다 '물적 토대'에 대한 집착이 강하다. 이윤을 위해서라면 범죄를 저지르는 것 또한 당연시한다. '먹이'를 벌기 위해 오토바이 배송을 하는 마차세 또한 '쯩(證)'도 없고 줄도 없기 때문에 세상 질서에 활착(活着)하기 위해 갖은 애를 쓴다. 한마디로 말해 오직 생존의 논리만이 마장세·마차세의 의식을 사로잡고 있는 셈이다. 그런 마차세의 눈에 비친 세상은 어떤 모습일까. 작가 김훈은 "사냥감은 보이지 않았고 사냥감을 찾아다니는 사람들이 거리를 메우고 흘러갔다"라고 쓰고 있다. 김훈의 '공터에서'는 지금은 노년 세대가 된 전후 세대의 삶을 통해 오로지 '밥이 노선'이 되어버린 지금·여기의 현실을 묘파하고자 한 소설이다. 작가는 마동수-마장세·마차세라는 인물을 통해 개인의 진실이 그대로 역사의 진실이 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환기하고자 한다. 어느 누구도 한 개인의 인생과 내력에 대해 함부로 왈가왈부할 권리는 없다. 그러나 개인의 진실을 절대화하려는 지금·여기 노년 세대의 의식과 무의식의 차원에 이르기까지 더 집요하게 탐사했어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아쉬움을 금할 수 없다. 헌법재판소의 대통령 파면 심판 이후에도 태극기 집회를 개최하며 불복하는 어버이연합 어르신들의 행태란 결국 먹고사니즘이란 반(反)지성주의에 다름 아니라는 점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던가. 오히려 자신만의 아상(我相)을 고집하려는 노년 세대의 행태와 심리에 더 철저히 집중했으면 어땠을까 싶다. 이른바 꼰대 문화의 본질은 개인의 진실을 강변하고 후속세대에게 강요하려는 마음의 태도와 습관에서 비롯한다. 물론 소설 '공터에서'는 영화 '국제시장'의 경우처럼 노년 세대의 자기 합리화를 위한 알리바이로서의 독백을 제공하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설을 보며 노년은 무엇으로 사는가에 대한 질문이 부재하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개인의 진실과 역사의 진실을 하나로 일치시키려는 지행합일의 삶의 양식을 다루는 노년문학은 불가능한가./고영직 문학평론가고영직 문학평론가

2017-04-30 고영직

[고영직의 여시아독(如是我讀)]슬픔의 조사(弔辭)

운명적으로 망각에 서툰 사람들이 있다. 한국문학 현장에서 소설가 임철우가 그런 사람이다. 임철우는 1981년 문단 데뷔 이후 지금까지 '가만히 있으라'며 망각을 재촉하고 강요하는 시대의 감정구조에 맞서 기억과 죽음에 관한 사유를 행간에 부려놓는 글쓰기를 멈추지 않았다. 1980년 오월 광주의 상흔을 기록한 대하소설 '봄날'이 그랬고, 전쟁과 분단 그리고 베트남전쟁의 상처와 그늘을 잊지 않으려 한 '백년여관'이 그러했다. 국익이라는 이름으로 행해지는 국가의 통치에 의해 희생된 자들의 넋을 위무하고 희생자들의 얼굴과 마주하려는 고통의 글쓰기를 해온 것이다. 소설집 '연대기, 괴물'에서도 기억술사로서의 글쓰기는 여일하다. 소설집 '연대기, 괴물'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죽음 앞의 인간이 된 노인들이다. 그는 혼자 살다 혼자 죽어가는 무연사회의 어두운 그늘을 묘사하는 데 관심을 쏟는다. 오직 나 자신의 죽음을 선택하려는 '흔적'의 '당신'과 더불어 쪽방에서 고독사를 맞게 되는 '세상의 모든 저녁'의 '허만석'이 그들이다. '간이역'과 '물 위의 생'의 인물들 또한 사정은 별반 다르지 않다. 그는 죽음 앞의 인간이 되어버린 존재들에 대한 침통한 붓질을 통해 '죽음이 죽은' 사회를 성찰하며, 인간의 인간성은 무엇이고 죽음에 대한 예의는 무엇인지 묻고 있다. 죽은 지 일주일 넘도록 방치된 주검을 묘사하는 '세상의 모든 저녁'은 너무나 참혹하다. "거기, 시간의 덩어리 하나, 세월의 불룩한 자루 하나가 홀로 방치된 채 소리 없이 녹아내리고 있다." 이런 죽음을 '고독사'라고 명명하는 것은 예의가 아니다. '고립사'라고 불러야 마땅하다. 죽음을 성찰하는 임철우의 글쓰기는 죽임의 권력에 의해 반복되는 '죽임의 시대'를 증언하고자 하는 작가적 욕망에서 비롯한다. 고통은 오로지 기억하는 자의 몫이라는 작가적 태도를 확인할 수 있으리라. 보도연맹 사건, 베트남전쟁, 1980년 오월 광주 그리고 세월호 참사를 한 작품에서 다루고 있는 표제작 '연대기, 괴물'은 연대기(年代記) 형식으로 괴물이 되어버린 국가의 오·작동 상태를 비판적으로 성찰한 수작이다. 전작 '백년여관'의 축소판이되, 더 이상의 '굴욕'을 견디지 않겠다는 작가적 결기를 느낄 수 있는 작품이다. 특히 세월호 아이들의 죽음이 모욕당해서는 안된다는 어떤 절박감이 감지되는 것은 어찌할 수 없다. 그것은 죄책감 때문이리라. 시대에 대한 부채감은 임철우 소설의 출발점이다. 이러한 부채감은 '남생이'에서도 어느 소녀의 강렬한 '눈빛'으로 변주되어 나타난다. 소녀는 자신이 나병 환자 가족이라는 사실을 목격한 소년에게 묻고 또 묻는다. "너, 아무한테도 말 안했지?"라고. 소녀의 강렬한 눈빛에서 표제작에 등장하는 세월호 참사 아이들이 살기 위해 선체의 벽을 긁어대던 손톱들을 떠올리게 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 지난 25일 밤, 세월호가 침몰 1천75일 만에 인양되었다. 그것은 1천75일 간의 슬픔의 결정체이고, 1만t의 한숨과 눈물이다. 잔인했던 그해 사월의 슬픔을 잊지 않기 위해 그날의 죽음들에 대한 예의가 필요하다. 기억술사 임철우의 소설이 죽은 넋들의 씻김을 위한 진혼의 조사(弔辭)가 될 것이리라. 우리는 아직 상중이고, 탈상은 아직 끝나지 않았으므로./고영직 문학평론가고영직 문학평론가

2017-03-26 고영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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