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순대의 ‘대사 한 줄로 읽는 연극’

 

[권순대의 '대사 한 줄로 읽는 연극']그 애는 작아도 너무 작아

1987~1991년 서울의 백골단2017년 시리아 알레포의 구조대원두곳의 장소 설정한 연극 '더 헬멧'두 사건으로 관객 울림 못 준다면그 거리는 결코 좁혀지지 않는다흥미로운 상황을 발견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주는 연극이 있다. 상황은 연극의 이야기를 여는 문이다. 언제, 어떤 장소에서, 어떤 인물이 그 문을 여는가에 따라 이야기가 결정된다. 이 문은 연극의 이야기 안에 있다. 그 문을 여는 방식에 변화를 준 연극이 바로 '더 헬멧'(세종문화회관 S씨어터, 1월 8일~2월 27일)이다.'더 헬멧'은 두 개의 장소와 네 개의 방을 설정하여 관객에게 선택하게 한다. 두 개의 장소는 각각 서울과 알레포이다. 서울과 알레포는 다시 빅 룸과 스몰 룸으로 나뉜다. 경우의 수는 넷(더블 캐스팅의 경우까지 더하면 배로 늘어난다.) 이다. 이런 식이다. 관객은 서울의 빅 룸 혹은 스몰 룸 중에서, 알레포의 빅 룸 혹은 스몰 룸 중에서 선택을 해야 한다. 어떤 장소와 방을 선택하는지에 따라 관극할 연극이 결정된다. 이제 연극 안으로 들어가 보자. 서울. 1987년~1991년 어느 서점의 지하실. 대학생과 백골단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알레포. 2017년 시리아 알레포의 어느 건물. 테러리스트와 화이트 헬멧 구조대원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그런데 왜 서울과 알레포일까. 유사성을 발견하는 것이 어렵지는 않다. 제목이 강렬하게 보여주는 것처럼 백골단의 헬멧과 구조대원의 헬멧이 쉽게 겹친다. 폭력으로 인해 사라진 일상의 삶이 가져온 잔혹함을 발견하는 것도 어렵지 않다. 그럼에도 왜 서울과 알레포일까를 여전히 묻는다면 그것은 아마도 우리 현실에서 시리아가 너무 멀리 있다고 느껴지기 때문일 것이다.그렇다. 거리의 문제가 핵심이다. 어떤 사건이든 그 사건이 누군가의 문제로 다가가기 위해서는 사건이 일어난 지점과 그 사건을 전달받는 지점 사이의 거리가 좁혀져야 한다. 이 거리는 단지 물리적인 거리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사건의 수신자가 그 사건에 반응하여 자신의 문제로 느끼고,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실천으로 나아가기 위한 전환가능성의 거리이다. 사건 앞에서 공감과 연대할 수 있는 역량이 거리를 좁히는 힘이다. 매몰된 건물 잔해에서 식어버린 아이를 보며, "이 애는 작아도 너무 작아"라고 말하는 시리아 알레포의 구조대원의 대사가 관객에게 울림을 주지 못한다면 그 거리는 결코 좁혀지지 않는다.1987년부터 1991년 사이를 다루는 서울 이야기도 마찬가지이다. 시위 현장에서 마주한 상대를 향해 "안 미워할 수 있을까."라고 말하는 상황을 헤아리지 못한다면 오히려 시리아 알레포보다 더 멀게 느껴질 수 있다. 백골단인 그는 어제까지 대학생이었다. 대학으로 돌아가야 하는 그가 마주한 전투조는 불과 얼마 전까지 함께 수업을 듣던 동료였다. 그들이 서로에게 "안 미워할 수 있을까"라고 말해야 하는 상황은 얼마나 끔찍한가. 서울 이야기에서 서점 지하실을 공간으로 설정한 것은 무척 흥미로운 부분이다. 요즘도 그러하지만 서점이 책만 파는 곳은 아니지 않는가. 당시 서점이 어떤 곳이었는지를 헤아리는 정도에 따라 관객은 서울 이야기의 시간적 거리를 저마다 갖게 된다.이제 연극 밖으로 나와 보자. 여기 한 장의 사진이 있다. 2009년 10월 17일, 몰디브 기리푸쉬섬 앞바다 해저 6m. 대통령과 각료들이 온실가스 배출규제 촉구 결의안에 서명하는 장면의 사진. 이 뉴스는 세계에 전해지며 곧바로 이슈가 되었다. 하지만 10년 가까이 지난 오늘까지 몰디브가 처한 상황에 긍정적인 변화가 생겼다는 뉴스는 전해지지 않고 있다. 뉴스는 금세 묻혔다. 해저 회의 퍼포먼스는 뉴스로 소비되고 정말 퍼포먼스로 그쳤다. 세계의 시민들이 공감과 연대의 장으로 나아가게 하는 그 거리를 좁히지 못했다. 대체 어떻게 말을 걸어야 그 거리를 좁힐 수 있을까.사물이 놓인 지점이 달라지고 그 연결하는 고리가 바뀌면 세계를 구성하는 방식에 변화가 생길까. 세계를 바라보는 위치에 변화가 생기면 우리의 삶과 세계가 움직이게 될까. 연극 '더 헬멧'은 그것을 궁금하게 하는 공연이다. 어떤 방을 선택할지는 여러분이 결정해야 한다./권순대 경희대 객원교수권순대 경희대 객원교수

2019-01-27 권순대

[권순대의 '대사 한 줄로 읽는 연극']거기가 고향같네

해방 55년 만에 귀환한 동포들극단적 선택 이유 관객에 물어일제가 남긴 상흔 여전히 진행중우리 모두 그들에게 빚지고 있어등장인물 세 명, 그들의 다른 이름지난 11월 9일부터 12월 9일까지 대학로 소극장 공유에서 지공연협동조합의 '고향마을' 공연이 있었다. 지공연은 조합원 모두가 공동제작자로 참여하는 공연예술인 협동조합이다. 열악한 연극 제작 환경에서 지속가능한 공연 제작 생태계를 만들기 위해 2017년에 창립한 지공연협동조합이 두 번째 정기공연으로 '고향마을'을 무대에 올린 것이다.연극 '고향마을'은 사할린에서 영주귀국한 세 명의 할머니에 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연극의 시간은 한일월드컵이 열린 2002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연극의 공간은 경기도 안산에 있는 한 아파트다. 그곳에서 세 명의 할머니가 국회의원을 납치하여 경찰과 대치하고 있는 상황에서 연극은 시작한다. 연극 '고향마을'은 그토록 갈망하던 고국으로 돌아와 이제 막 정착한 할머니들이 왜 그러한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는지에 관해 말하고 있다. 연극은 사할린 동포는 누구인지 관객이 스스로에게 묻지 않을 수 없게 만들며 끝난다.연극 '고향마을'의 제목은 경기도 안산에 있는 임대아파트 단지 이름인 고향마을에서 가져왔다. 2000년 고향마을에는 총 489세대 967명이 입주하게 된다. 입주민은 모두 영주귀국한 사할린 동포이다. 해방이 된 지 55년 만의 귀환이다. 사할린 동포는 안산 고향마을을 포함하여 지금까지 4천300여 명 정도가 영주귀국하였다. 하지만 영주귀국의 조건이 1945년 8월 15일 이전 사할린 이주 또는 사할린 출생자 등으로 제한되어 있어 이들 중에는 사할린에 있는 가족과 다시 이산의 아픔을 겪게 된 경우도 있다. 연극 '고향마을'은 그들 중에서 세 명의 할머니를 호명하여 일제가 남긴 상흔이 여전히 진행형이라는 것을 말하고 있다.연극 '고향마을'의 인물인 할머니들의 귀국은 미완의 귀향이다. 세 명의 할머니는 안산에 살면서도 정작 고향 땅을 찾지는 않고 있다. 고국에 돌아왔으나 고향 땅은 낯설기만 하다. 평생을 살았던 삶의 시간은 고향 땅이 아니라 사할린에 있기 때문이다. 아마도 세 명의 할머니는 사할린에서 음력을 적어 넣은 달력을 직접 만들었을지도 모른다."초복 4일 전에 배차(배추) 심고, 중복 때 무 심어요. 그러면 그거 가지고 김장하요.", "물 빠지면 바다에 나가서 조개나 새우 같은 거 많이 잡았어. 미역도 건지고. 그러려면 음력으로 언제 물이 나가고 들어오는지 알아야 했지."(최상구, '사할린', 2015)라는 대목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사할린의 시간은 고국에서 사용하던 음력으로 기록되고 있었다. 사할린에서의 삶의 시간으로부터 다시 단절된 세 명의 할머니가 정작 고국에서 "거기가 고향 같네."라고 말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최상구의 '사할린'에는 사할린 동포의 삶이 생생하게 기록되어 있다. 그중에서도 안명복의 증언은 강제동원으로 인한 이산의 가장 잔혹한 사례이다.그의 아버지는 1939년에 사할린으로 강제동원을 갔다. 어머니와 4남매는 이듬해인 1940년 6월에 사할린으로 가서 가족이 함께 살게 된다. 하지만 아버지가 1944년 9월에 다시 일본으로 강제동원을 당하면서 이산의 아픔을 또 겪게 된다. 당시 13세의 안명복은 해방 이후에도 아버지를 만나지 못한다. 일제에 의해 1944년에 시행된 이중동원은 사할린 북서부 지역에 위치한 14개의 탄광에서 조선인 광부 3천여 명을 일본 본토로 다시 동원해 간 사건을 말한다. 안명복의 아버지를 포함하여 그들은 배제된 사람들 중에서도 배제된 사람들이다.우리 모두는 그들에게 빚지고 있다. 지금까지 영주귀국한 4천300여 명의 동포와 여전히 사할린에 살고 있는 한인들에게, 뿐만 아니라 유즈노사할린스크 공동묘지, 고르노자보드스크 공동묘지, 우글레고르스크 인근의 사라진 공동묘지 터에 묻힌 한인들에게, 그리고 그 기나긴 세월이 지나도록 국가에 의해 단 한 번도 셈해지지 않고 사라진 사할린의 무연고 한인들에게 빚지고 있는 것이다. 연극 '고향마을'의 인물인 세 명의 할머니, 한미옥, 김순영 그리고 조인숙은 그들의 다른 이름이다./권순대 경희대 객원교수권순대 경희대 객원교수

2018-12-09 권순대

[권순대의 '대사 한 줄로 읽는 연극']질문이 곧 답인데…

연극 '오이디푸스…' 관객 능동적 위치 전환배우가 의문 던지면 함께 공론장 참여 형식사회성숙도 힘 아닌 대화로 갈등 조정 직조지연·중지담론 경계 질문 그치면 진실 닫혀지난 10월 11일부터 14일까지 대학로 예술극장 소극장에서 극단 놀땅의 '오이디푸스-알려고 하는 자'(2016년 초연) 공연이 있었다. 오이디푸스는 소포클레스 이후 여러 이미지로 변주되어 온 인물이다. 스스로를 희생하여 역병에서 도시를 구하는 인물, 눈이 멀어 볼 수 없으나 통찰력을 지닌 인물, 왕을 죽이고 왕이 된 인물, 그리고 은폐된 진실을 조사하는 인물 등 시대와 작가에 따라 다양하다. 극단 놀땅의 오이디푸스는 그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질문하는 자로 조사하는 인물에 가깝다. 올해로 세 번째인 이번 공연은 우리 사회가 왜 오이디푸스를 다시 호명할 수밖에 없었는지에 대해 말하고 있다.연극이 시작하면 무대는 광장으로 바뀌고, 관객은 시민의 역할을 부여받는다. 아니다. 도시의 광장에 시민이 모이자 비로소 연극이 시작한다. 광장으로 바뀐 무대에서 관객은 처음에는 관찰자의 위치에 놓이게 되지만 연극이 진행되면서 참여자의 위치로 점차 옮겨가게 되며 종국에는 배심원의 자리에 앉게 된다. 무대의 배경은 세월호 이후 역병이 창궐한 도시이다. 눈이 먼 거지로 등장하는 오이디푸스가 의문을 던지면 관객은 배우와 함께 공론장을 만들게 된다. 우리 사회가 생명과 인간의 존엄성을 존중하는 사회로 전환하였는지 아니면 생명과 안전을 경시하는 사회에 여전히 머물러 있는지에 대해 관객이 답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으로 연극은 끝난다.샤츠슈나이더는 정치가 갖는 역동성의 기원이 갈등에 있다고 주장하며 갈등을 민주주의의 엔진으로 보았다. 그에 따르면 정치의 과정과 결과는 갈등을 구성하는 네 가지 차원(범위, 가시성, 강도, 방향)에 달려 있다. 그 중에서 갈등의 범위는 누가 그리고 얼마나 많은 사람이 갈등에 관여하는가의 문제이다. 관찰자의 위치에 있던 사람이 행위자로 참여하게 되면 힘의 균형에 변화가 생긴다. 기존 질서의 힘에 균열을 가해야 하는 약자는 다수가 개입하도록 해서 갈등의 범위를 확장하여야 한다. 연극 '오이디푸스-알려고 하는 자'가 관객을 수동적 위치에서 능동적 위치로 전환하는 형식을 가져온 까닭이 여기에 있다.질문이 사라진 사회는 얼마나 위태로운가. 질문하지 않는 사회는 겉으로 평온해 보일지 모른다. 그러나 질문이 없어 역동성이 사라진 사회는 죽은 사회이다. 문제의 심각성은 사라진 질문으로 인해 갈등마저 없는 것처럼 보이게 하는 데 있다. 극 중에서 오이디푸스가 아무리 "질문이 곧 답인데…"라고 외쳐도 시민이 나서지 않는다면 아무 소용이 없는 것처럼 말이다. 무대가 광장이나 교실로 바뀐다고 해서 달라질 것은 없다. 한 사회의 성숙한 정도는 그 사회가 갈등을 조정하는 과정에서 드러난다. 물리적 힘에 의한 해결이 아니라 대화를 통한 갈등의 조정 과정에서 그 사회의 빛과 그늘이 직조하는 무늬가 그려지기 때문이다.갈등의 사회화 과정에서 경계해야 하는 대표적인 두 목소리는 지연과 중지의 담론이다. 지연의 담론은 "당신에게 권리가 있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다"라고 말한다. 몫의 배분을 결정하는 현재의 조건을 아직은 바꿀 때가 아니라고 말하며 미래로 지연시킨다. 중지의 담론은 "당신은 할 만큼 했다. 그러므로 이제 그만하라"라고 말한다. 이미 충분히 노력했으니 이제 어쩔 수 없고 우리는 지쳤다고 말하며 현재에서 중지시킨다. 두 담론 모두 지금의 경계선을 유지하려는 목소리이다. 갈등의 범위를 확장하고 그 방향을 전환하려는 주장을 무력화하는 것이다. '오이디푸스-알려고 하는 자'는 주로 후자의 담론을 극장으로 가져와 관객과 함께 토론하는 연극이다.질문이 그치면 진실의 문은 닫히고 만다. 진실의 문을 여는 질문의 힘은 '오이디푸스-알려고 하는 자'의 초연이 있던 2016년 겨울에만 유효하지 않다. 광장에서 촛불과 외침이 잦아들었다고 해서 물어야 마땅한 질문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아직 우리 사회가 세월호 이후 생명안전사회의 건설로 전환하지 못했다면 더욱 그러하다./권순대 경희대 객원교수권순대 경희대 객원교수

2018-10-21 권순대

[권순대의 '대사 한 줄로 읽는 연극']저기, 안에 있어요?

그가 살아 있는 동안에방문 두드린것은 월세 독촉하거나 욕정의 대상을 찾을 때였다그때의 '저기'는 그를 사람이 아닌 사물로 대하는 그저 소리였을 뿐지난 8월 14일부터 19일까지 연극실험실 혜화동 1번지에서 극단 나베의 '예술이 죽었다' 공연이 있었다. '예술이 죽었다'는 한 사람의 죽음에 관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나이는 28세. 직업은 소설가. 등단한 적은 없으나 신춘문예 심사평에 언급되었고 소설을 쓰고 있으니 소설가라 해도 되지 않을까. 비록 자신이 쓰고 싶은 소설이 아니라 먹고 살기 위해 잡지사가 요구하는 대로 써야 하지만 말이다. 그럼에도 벌이가 신통치 않아 월세는 밀렸고, 냉장고는 비어 있다. 지병이 악화되어 상태가 심각하나 치료는 엄두를 낼 수 없다. 그런 상황에서도 그는 쓴다. 쓰는 것 외에 달리 할 일이 없는 것처럼.연극은 그의 죽음으로 끝난다. 아니 주검이 발견되지 않은 채 끝난다. 사회에서 밀려나고 밀려나 홀로 고립된 죽음 뒤에 그의 몫으로 남겨진 것은 밀린 고지서 다발이다. 학자금 대출에서부터 신용카드까지 각종 고지서 다발만이 그가 죽음에 이르는 동안 벌인 사투의 시간을 말해주고 있다. 밀린 고지서의 두께는 그가 고립된 채 버틸 수 있었던 시간의 두께이다. 그 두께가 두꺼워지는 동안 그의 고립은 깊어 갔다. 짐작했겠지만, 이 연극은 연극이 아니다. 우리 사회의 이야기이다. "며칠째 아무것도 못 먹어서 남는 밥이랑 김치가 있으면 저희 집 문 좀 두들겨 주세요."라는 마지막 문장을 남긴 한 시나리오 작가의 죽음을 이제는 망각하지 않았는지 연극은 묻고 있다.문화체육관광부가 발표한 '2015 예술인 실태조사'에 따르면, 지난 1년간 예술 활동 수입의 중앙값은 300만원이며 평균값은 1천255만원이다. 조사 대상에 포함된 분야는 평균값이 높은 순으로 건축, 방송, 만화, 영화, 음악, 연극, 대중음악, 공예, 국악무용, 사진, 미술, 그리고 문학이다. 문학 분야의 중앙값은 10만원이며 평균값은 214만원이다. 연극분야의 중앙값은 500만원이며 평균값은 1천285만원이다. 연극분야의 경우 '연극인, 우리 스스로의 복지' 실태조사(2017년)에서 1천319만원으로 비슷한 결과가 나왔다. 다만 수입에서 연극공연 수입은 351만원이며, 연극공연 외 활동이 385만원, 연극외 예술 활동이 241만원, 예술과 무관한 활동이 393만원으로 조사되었다. 예술인 복지법이 시행되고 있는 지금의 통계들이다.언제까지 할 수 있을까? 이 문장은 물음이 아니다. 누군가에게 건네는 말이 아니라 스스로에게 던지는 문장이다. 단지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으로부터 오는 불안 정도만 담고 있다면 미지의 가능성을 창조할 힘이 그 속에 있으니 스스로의 재능을 갈고닦으라고 말해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문장은 생존의 위기 앞에서 '언제까지 꿈꿀 수 있을까'가 아니라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까'로 그만 탈바꿈하고 만다. 물론 이른바 예술을 하는 사람에게만 해당한다고 할 수는 없겠으나 '언제까지 할 수 있을까'라는 말이 자성의 문장이 아니라 탄식과 자조의 문장으로 전락하게 되는 배경에는 창작자의 능력과 무관한 사회적 요인이 자리하고 있다. 자기 좋아서 하는 일이며, 그래서 모든 책임이 스스로에게 있다고 말하는 사회는 얼마나 참혹한가. 적어도 '언제까지 할 수 있을까'라는 말이 그런 답으로 돌아와서는 안 되는 것이다.연극 '예술이 죽었다'의 그는 이야기를 만들다가 그만 이야기의 주인공이 되고 말았다. 그가 단칸방에 고립된 채 죽어가는 동안 "저기, 안에 있어요?"라며 그의 방문을 두드린 이웃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가 살아 있는 동안에 방문을 두드린 '저기'는 밀린 월세를 독촉하거나 욕정의 대상을 찾을 때였다. 그때의 '저기'는 그를 사람이 아니라 사물로 대하는 그저 소리였을 뿐이다. '저기'가 단지 소리에 그치지 않고 이웃에게 말을 거는 감탄사의 '저기'로 복원되어야 하는 것 아닌가. 죽는 것이 예술이 아니라 사람이기에. 연극 마지막 장면에서처럼 음식을 들고 찾아온 이웃의 말을 그가 끝내 듣지 못하는 비극을 만들지 않으려면 말이다./권순대 경희대 객원교수권순대 경희대 객원교수

2018-08-26 권순대

[권순대의 '대사 한 줄로 읽는 연극']"우리는 같이 있고 가치 있다"

출구가 보이지 않는 시간이 갖는 절망의 무게가 얼마인지그 순간에 사로잡힌 청소년들그 시간 스스로만 버텨야 한다면 대체 사회란 무엇이란 말인가지난 6월 15일부터 7월 1일까지 백성희장민호극장에서 '죽고 싶지 않아' 공연이 있었다. '죽고 싶지 않아'는 2015년 안무가이자 연출가인 류장현과 8명의 청소년이 '자유를 위한 몸의 낙서'를 주제로 함께 작업한 워크숍에서 출발하여 2016년 국립극단 청소년극으로 초연한 작품이다. 이번 2018년 공연은 청소년 17명이 예술교육 활동, 워크숍, 그리고 오픈 리허설을 배우들과 함께 작업한 결과물이다. 팸플릿에 소개한 17명의 생생한 기록은 공연에서 본 배우의 에너지가 어디로부터 왔는지 짐작하게 한다.연극 '죽고 싶지 않아'는 좌절의 시간을 건너는 법에 관한 청소년의 보고서이다. 청소년에게 우리 시대의 교실은 무엇일까. 어느 초등학교 교문 위에 "6학년 목숨 걸고 공부하는 기간"이란 문구의 현수막을 거는 사회에서 말이다. 짧게는 3년, 길게는 6년의 기간도 모자라 초등학교에서부터 경쟁으로 내몰리는 사회에서 교실은 학생들에게 어떤 말을 전달하고 있을까. 승자독식의 경쟁을 부추기며 "견뎌라, 견뎌라, 대학에 가면 천국이 열리리라"라는 말이 유예하는 시간 동안 청소년들은 그 시간을 어떻게 건너고 있을까. 막상 대학에 가면 그 문장은 다음과 같이 바뀌는 사회에서 말이다. "견뎌라, 견뎌라, 취직을 하면 천국이 열리리라." 대학을 졸업한 이후에 또 어떤 다른 문장이 기다리고 있는지는 덮어두자.팸플릿에 소개한 어느 청소년이 전하는 말은 단지 오픈 리허설을 함께한 소감에 그치지 않고 우리 사회에서 청소년이 놓인 지점을 적확하게 짚고 있다. "바다에 있어야 할 물고기들이 땅에서 펄떡거리는 느낌", "심장이 멈춰서 죽는 게 아니고 내가 살아있음을 느끼지 못할 때의 죽음"이라는 그들의 말을 귀담아들어야 할 대상은 청소년들이 아니다. 오히려 그들의 말은 "너희에게도 권리가 있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다"라는 담론을 향해 있다. 그 담론이 유예하는 시간 동안 현재의 권리를 독차지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향해 있다. 연극 '죽고 싶지 않아'와 함께한 17명의 청소년은 "우리는 같이 있고 가치 있다"라고 동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에게 말을 걸고 있다. 일인칭 대명사인 '우리'를 청소년들로만 한정할 필요도 없고, 한정해서도 안 되는 까닭은 여기에 있다.연극 '죽고 싶지 않아'를 보는 동안 겹쳐 보이는 영화 한 편이 있었다. 8 마일(8 Mile, 2002년, 에미넴 주연). 영화 8 마일은 미국 자동차공업의 중심지였던 디트로이트가 1980년대 후반부터 쇠락한 이후의 디트로이트 8마일 로드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디트로이트 8마일 로드는 이 도로를 경계로 북쪽에는 백인이, 남쪽에는 흑인이 주로 거주하고 있어 분리의 선이기도 하다. 백인 래퍼(에미넴)가 8마일 로드 남쪽에서 흑인들과 랩 배틀을 펼쳐 래퍼로 성공한다는 이야기는 성장 플롯의 전형에 속한다. 그러므로 이 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에미넴이 랩 배틀을 펼치며 상대를 물리치는 절정의 장면이 아니다. 오히려 에미넴이 좌절의 시간을 건너는 정적이며 서정적인 장면들이다. 그 장면들 중 하나가 에미넴이 황폐한 디트로이트 도시를 버스를 타고 이동하는 장면이다. 창밖 풍경을 보던 에미넴이 주머니에서 종이를 꺼내 메모를 한다. 접혀 있던 종이를 두 번 펼친다. 바랬고 고깃고깃하다. 그런데 그 종이에는 이미 다른 메모로 빼꼭하다. 메모의 방향이 제각각이다. 빼곡한 종이의 여백에 또 다른 메모를 하는 짧은 순간은 얼마나 긴 시간을 말하고 있는가. 연극 '죽고 싶지 않아'에 참여한 청소년들의 메모와 목소리가 결코 짧거나 가늘지 않은 이유다.출구가 보이지 않는 시간의 지속이 갖는 절망의 무게가 얼마인지를 그 시간에 사로잡힌 청소년들만이 재야 한다면 대체 연극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그 지속의 시간을 청소년들 스스로만 버텨야 한다면 대체 사회란 무엇이란 말인가. 연극 '죽고 싶지 않아'는 청소년과 어른이 함께 봐야 하는 청소년극이다./권순대 경희대 객원교수권순대 경희대 객원교수

2018-07-08 권순대

[권순대의 '대사 한 줄로 읽는 연극']이제 나도 당신의 자리에 있어요

'처의 감각'을 보고 우리 사회가극장은 누구를 위해 있는가라는물음에 다시 답해야 할 때다둔감함 아닌 민감성 촉수를 지닌주인공인 여자의 감각으로극장은 누구를 위해 있는가. 이 물음에 매력적인 답을 제출한 건축가가 있다. 한스 샤로운(Hans Scharoun). 그는 당시까지 일반적이던 프로시니엄 극장이 아닌 원형 극장으로 음악당을 설계한다. 1963년의 일이다. 독일 시민의 세금으로 짓는다면 그 극장은 마땅히 시민의 것이어야 한다는 생각. 이 감각의 차이가 지금의 베를린 필하모닉 음악당을 만들었다. 카라얀이 지휘를 했던 바로 그곳이다.극장 건축에서 프로시니엄은 무대를 지탱하는 기둥을 뜻한다. 프로시니엄 무대는 프로시니엄을 기준으로 무대와 객석이 분리된다. 무대를 이상적으로 관극할 수 있는 자리는 객석 중앙에 위치하게 된다. 최고 권력자의 자리이다. 원근법의 원리에 따라 설계된 프로시니엄 극장은 객석의 위치에 따라 무대를 보는 시선에 차이가 발생한다. 반면 원형 극장은 무대와 오케스트라를 중앙에 둔다. 중앙에 위치한 무대를 객석이 원형으로 둘러싸고 있는 구조여서 사각이 발생하지 않는다. 한스 샤로운은 음악당에서 울려 퍼지는 소리가 시민 모두에게 골고루 전해지기를 바랐던 것이다. 한국에서도 비슷한 시기에 한 극장이 개관한다. 남산 중턱에 위치한 드라마센터. 1962년의 일이다. 원형 극장을 응용한 돌출무대로 설계된 드라마센터는 정부로부터 불하받은 땅에 록펠러재단의 기금을 주로 해서 세워지게 된다. 그러나 1년여 만에 재정난으로 운영이 중단된 후 학생들의 실습전용무대로 사용하게 된다. 2009년부터는 서울시와 서울문화재단이 매년 10억원의 임대료를 지불하고 운영하고 있다. 지금의 남산예술센터 드라마센터이다.지난 4월 12일 '처의 감각'(고연옥 작·김정 연출)을 남산예술센터에서 관람했다. 굳이 신화적 상상력을 작동하지 않더라도 우리 사회의 이야기로 충분히 치환할 수 있는 무대였다. 연극의 마지막 장면에 이르러 여자는 "이제 나도 당신의 자리에 있어요."라고 말한다. 그 자리는 "사랑할 수 없는 것을 사랑하다가 남김없이 빼앗기고 쫓겨나야 했던, 세상에서 제일 가난한 사람"이 선 곳이다. "세상에서 제일 약한 사람"이 된 여자는 그곳에서 다시 길을 찾는다. 이번 '처의 감각' 공연은 두 가지 단상을 남겼다. 하나는 도시의 삶이 주는 둔감함에 관한 것이다. 한때 곰의 아내였던 여자는 동굴을 떠나 도시에 와서 살게 되지만 그녀에게 도시의 문법은 버겁기만 하다. 여자는 도시에서 밀려난 자이다. 도시의 리듬이 요구하는 둔감함을 유지하지 못하는 여자의 감각은 말해지지 않는 말에 예민하고 전해지지 않는 냄새에 민감하다. 짐멜의 말처럼, 둔감함의 본질이 "사물의 차이에 대한 마비증세"라면 여자는 길들여지지 않은 날것의 감각을 지닌 것이다. '처의 감각'이 말하고 있는 것은 현대 사회가 상실한 사람과 사람, 사람과 사물 사이의 민감성과 그 회복이 아닐까. 다른 하나는 극장의 공공성에 관한 것이다. 공연을 관람한 날 남산예술센터에서는 '공공극장으로서의 드라마센터 정상화를 위한 공개토론회'가 마침 열렸다. 5월 14일에는 2차 공개토론회가 열렸다. 계약 만료 기간이 다가오는 남산예술센터 드라마센터를 공공극장으로 정상화하기 위한 토론의 자리였다. 드라마센터의 공공성은 그 설립 과정뿐만 아니라 극장의 구조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아마도 드라마센터를 통해 한국 연극의 "후진성을 극복하여" "연극을 세계적 수준까지 끌어올리고 싶어"했던 유치진의 바람도 그와 다르지 않았으리라. 우리 사회가 극장은 누구를 위해 있는가라는 물음에 다시 답해야 할 때이다. 둔감함이 아닌 민감성의 촉수를 지닌 '처의 감각'의 주인공인 여자의 감각으로./권순대 경희대 객원교수권순대 경희대 객원교수

2018-05-20 권순대

[권순대의 '대사 한 줄로 읽는 연극']"오늘 주택 할부금을 다 갚았어요."

냉장고·자동차 그리고 집"내 인생에 한 번이라도 좋으니내 것이었으면 좋겠네"라던 윌리는'자동차 할부 끝나니 폐차 직전'인삶의 사이클에서 못 벗어났다.올해 독일 하이델베르크 페스티벌에 한국이 주빈국으로 초청되었다. 오는 4월 27일부터 29일까지 무대에 올리게 된 연극 3편에는 극단 성북동비둘기의 '세일즈맨의 죽음'이 포함되었다. 아서 밀러의 '세일즈맨의 죽음'은 1949년 초연된 이후 지금까지 꾸준히 공연되는 작품이다. 성북동비둘기의 이번 공연에서 주인공 윌리 로먼은 런닝타임 내내 트레드밀 위에서 달린다고 한다. 트레드밀 위에서 쉼 없이 달려야 하는 윌리 로먼은 우리 사회의 보통사람과 닮아 있다. 아서 밀러의 '세일즈맨의 죽음'은 대공황 이후 20년이 지난 미국 사회의 이야기이고, 성북동비둘기의 '세일즈맨의 죽음'은 IMF 이후 20년이 지난 지금 여기의 이야기이다.윌리가 트레드밀 위에서 달려야 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지금 여기의 보통사람이 집을 사기 위해서 얼마나 달려야 하는지를 신한은행 '2018 보통사람 금융생활 보고서'가 잘 보여주고 있다. 보고서에 따르면 전세 거주자는 전국 평균 7.3년이 걸려야 집을 구입할 수 있다. 현재 거주 중인 전세 보증금에 생활비를 제외한 자금을 모두 모았을 때 이야기다. 서울에서는 20.7년이 걸리고 서울 강남에서는 26.5년이 걸린다. 웰세 거주자는 전국 평균 18.4년이 걸린다. 서울에서는 40.1년이 걸리고 서울 강남에서는 49.3년이 걸린다. 그런데 향후 집을 구입할 의향이 있다고 답한 사람은 54.1%에 이른다. 프랑스의 지리학자 발레리 줄레조가 '아파트 공화국'에서 "주택이 유행 상품처럼 취급되는 것은 놀라운 일"이라고 한국의 아파트 열풍에 대해 말한 지 10년이 지났으나 그 사이 정책과 제도, 그리고 주택에 대한 인식이 바뀌었다는 소식은 잘 들리지 않는다. 오히려 달려야 하는 시간이 더 늘어났을 뿐이다.'클라이맥스를 산다'라는 카피가 있었다. '아파트 공화국' 출간보다 조금 앞 선 시기의 한 아파트 광고였다. 메시지는 그럴 듯해 보인다. '이 아파트를 사세요. 인생의 클라이맥스를 살게 될 거예요'. 정도로 들린다. 인생 최고의 순간을 살게 된다는 메시지가 그럴듯하지 않은가. 그런데 이 광고가 어느 날 느닷없이 자취를 감춘다. 사달이 난 사연이 조금은 짐작된다. 클라이맥스는 연극에서 절정을 가리키는데 이게 문제였을 것이다. 한 편의 연극이 발단, 전개, 위기, 절정, 결말의 순서로 이루어진다고 할 때, 클라이맥스는 긴장도가 가장 높은 정점의 순간이다. 하지만 동시에 클라이맥스는 결말 바로 앞에 위치하여 '마지막 바로 직전'이라는 뜻도 포함하고 있다. 아무리 인생의 클라이맥스를 산다고 한들 그곳이 마지막 바로 직전이라면 누가 구입을 원하겠는가.윌리는 25년이 걸렸다. 대공황이 있기 전 30대 중반에 구입해서 이제 예순을 넘긴 나이에 이르렀다. 25년을 내리 달려 도착한 그곳에서 아내 린다가 말한다. "오늘 주택 할부금을 다 갚았어요"라고. 그러나 그는 아내의 말을 들을 수 없다. 린다가 말하는 오늘은 윌리의 장례식이 있는 날이다. 눈물조차 흐르지 않는다는 린다가 반복해서 말한 마지막 네 번의 단어는 '해방'(free)이다. 빚진 것이 없는 해방의 날을 그는 그렇게 맞이하였다. 이제 윌리는 더 달리지 않아도 된다. 윌리에게 꿈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미지의 세계로 모험을 떠나고 싶어도 했으나 그의 발목을 잡은 것은 늘 할부금이었다. 냉장고, 자동차, 그리고 집. "내 인생에 한 번이라도 좋으니 고장 나기 전에 내 것으로 가져 봤으면 좋겠네!"라던 윌리는 "자동차 할부가 끝나니 폐차 직전"인 삶의 사이클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가장 오래 달린 주택 할부금을 갚아야 하는 트레드밀 위에서 그는 마지막까지 내려오지 못했다. 그 위에 한 번 올라서게 되면 좀처럼 내려설 수 없게 된다. 트레드밀의 속도와 다른 삶의 속도를 상상할 수 없게 된다. 이렇게 우리 시대의 윌리는 지금도 트레드밀을 달리고 있다. 클라이맥스를 달리고 있다./권순대 경희대 객원교수권순대 경희대 객원교수

2018-04-01 권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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