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순대의 '대사 한 줄로 읽는 연극'

 

[권순대의 '대사 한 줄로 읽는 연극']무슨 빛깔이노

"할머니는 무채색이라고만 생각했다. 그런데 그녀는 빨갛고 노랗다." 다큐멘터리 '황보출, 그녀를 소개합니다'(지민 감독, 2007년)의 내레이션이다. 그 무렵 황보출은 일기에 다음과 같이 적었다. "가슴에 있는 말을 나는 못한다. 그래서 입이 쓰다. 참고 참고 또 참고 있다. 그래도 언젠가는 나도 내 말을 하겠다. 가슴에 있는 말을 하겠다." 2016년, 황보출은 시집 '가자 뒷다리'(도서출판 돋보기)를 간행한다. 연극 '화전가'를 보면서 황보출을 떠올린 것은 아마도 그 빛깔 때문일 것이다.지난 8월6일부터 18일까지 명동예술극장에서 '화전가'(극작·배삼식 극작, 연출·이성열) 공연(2월28일 초연 예정이었으나 8월6일 초연, 23일까지 공연 예정이었으나 18일까지만 진행)이 있었다. 1950년 4월의 경북 안동지역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 연극 '화전가'는 여러 면에서 독특한 작품이다. 그 독특함은 이야기를 구성하는 전략으로 생략과 부재의 기법을 활용한 결과로 보인다.거대 사건이 없다. 작품의 제목과 달리 화전놀이가 펼쳐지지도 않는다. 환갑을 맞은 김씨를 찾아온 식구들이 밤을 새며 소소한 이야기를 나누다가 떠나는 것으로 이야기는 끝난다. 시대극에 나올 법한 거대 서사는 어디에도 찾아볼 수 없다. 한국전쟁 두 달 전으로 설정한 배경이 사건을 촉발하는 힘으로 작동하지도 않는다. 극적 긴장을 불러일으키는 중심 사건을 만들지 않는 이 전략으로 인해 이 작품은 일상의 시간과 삶에 특별한 무게감을 부여한다. 거대 서사를 중심으로만 삶이나 역사를 구성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증명이라도 하고 싶은 것처럼 말이다.남성이 없다. 이 작품에 등장하는 아홉 명은 모두 여성이다. 중심인물 김씨, 딸 셋(금실이, 박실이, 봉아), 며느리 둘(장림댁, 영주댁), 고모 권씨, 독골할매와 그의 딸인 홍다리댁, 독립운동을 하던 남편은 20여 년 넘게 소식이 없다. 장남은 4년 전 병으로 죽고 차남은 감옥에 있다. 다분히 의도적으로 보이는 남성 부재의 인물 설정은 거대 서사의 생략과 함께 이 작품이 소소한 이야기만으로도 극적 긴장을 유발하도록 한다.잔칫날 사람이 모이면 이야기가 쏟아지게 되어 있다. 보통이라면 그 시간이 무르익을 무렵 사건이 터진다. 떨어져 있던 시간의 두께만큼 이야기뿐만 아니라 거기에 더해 묻어두었던 사연이 폭발하여 큰 사달이 나는 것이다. 그런데 '화전가'는 그 방식을 취하지 않는다. 한 사건 다음에 이어질 다음 사건을 궁금하게 하는 전략이 아니라 한 인물 다음에 이어지는 다음 인물을 궁금하게 하는 전략을 취하고 있다. 저마다의 시간을 소소하게 이야기할 뿐이다.밤은 이야기의 시간이다. 낮이 물러가고 밤의 시간이 열리자 속내 이야기가 조금씩 흘러나온다. 하지만 '화전가'는 이야기가 모이는 방식이 아니라 이야기가 흘러가는 방식을 취하고 있다. 그 시간은 어느 한 인물에게 집중하거나 어느 한 사건으로 정점을 만들기 위한 시간이 아니다. 그 시간은 저마다에게 주어진 자신의 리듬과 호흡을 찾아가는 시간이다. 그렇게 그들은 그 밤의 시간을 이야기한다.김씨의 환갑잔치를 위해 딸들이 친정으로 오면서 시작한 연극은 그들이 돌아가면서 끝난다. 화전놀이나 화전가 한 번 부르지 않고 끝난 연극의 제목을 화전가라고 한 까닭을 물어야 하는 것은 이제 관객의 몫이다. 그것은 아마도 아홉 명의 인물 하나하나에 주목하라는 표지일지도 모른다. 저만치 떨어진 산중을 가리키며, "무슨 빛깔이노"라며 김씨가 제안했던 화전놀이는 떠나지 못한 것이 아닌 것이다. 어쩌면 이야기의 시간인 밤 내내 흘려보낸 그 속내가 저마다의 색깔로 만든 화전가일지 모른다. 그것은 "많은 언어들이 존재하는 세계는 마치 색색의 꽃들로 가득 찬 들판 같아야 한다. 색깔, 혹은 모양 때문에 한층 더 꽃다운 꽃은 없다"고 응구기와 시옹오가 말한 것처럼, 이 세계가 단일한 하나의 고정된 중심으로만 돌아간다고 믿는 시선으로는 보이지 않는 빛깔일지 모른다./권순대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권순대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2020-09-06 권순대

[권순대의 '대사 한 줄로 읽는 연극']바다엔 경계선이 그어져 있지 않아

대학로 연극 '이카이노의 눈'오사카 재일조선인 집단거주지강제동원과 4·3, 전쟁에 떠난 이들1973년 동네 이름 지워졌어도정체성의 물음은 사라지지 않아지난 7월 2일부터 12일까지 대학로 예술극장 소극장에서 '이카이노의 눈'(원수일 원작, 김연민 연출, 2019년 초연) 공연이 있었다. 작품의 공간인 이카이노는 일본 오사카시에 있는 재일조선인 집단거주지역의 이름이다. 시간은 1970년대 말로 설정되어 있다.서울 대학로에서 오사카의 이카이노를 이야기하는 까닭은 어디에 있을까? 지금 1970년대의 이야기를 가져와야 하는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 이 물음에 답하는 것은 이카이노가 지금 여기의 우리와 어떤 고리로 연결되어 있는가 하는 물음에 답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연극의 중심 인물은 영춘이다. 영춘은 남편의 첫 기일에 남편이 남긴 비망록을 다시 읽는다. 해방, 4·3, 전쟁…. 허망하기 그지없다. 유언이라 할 수도 없다. 재산 목록은 더더욱 아니다. 근현대사의 사건이 그저 나열되어 있을 뿐이다. 그 사건의 목록을 읽는 것으로 연극은 시작한다. 남편은 왜 그런 비망록을 남겼을까. 영춘의 비망록 다시 읽기를 통해 그 물음은 관객에게 전달된다.비망록의 물음에 답하기 위해서는 연극 밖으로 나와야 한다. 원작 소설인 원수일의 '이카이노 이야기'를 포함하여 재일작가의 다른 텍스트나 근현대사의 콘텍스트를 참고해야 한다. 이카이노가 도일 제주민들의 '작은 제주'로 불리게 된 배경에는 지난 역사의 시간이 응축되어 있기 때문이다. 1922년 제주와 오사카를 오가는 여객선이 운항하면서 제주민들이 대거 이주하게 되는 과정, 강제동원의 역사, 해방 이후에도 돌아오지 못한 사람들, 4·3으로 제주를 떠난 사람들, 그리고 전쟁.극중 인물인 영춘 세대의 정체성을 잘 담고 있는 목소리 가운데 하나는 김시종의 '조선과 일본에 살다'이다. 부제가 '제주에서 이카이노로'였던 것에서 알 수 있듯이, 김시종은 4·3으로 제주에서 밀항하여 이카이노에 정주한 재일시인이다. 그는 '보이지 않는 동네'에서 이렇게 노래했다. "없어도 있는 동네./ 그대로 고스란히/ 사라져버린 동네." "누구나 다 알지만/ 지도엔 없고/ 지도에 없으니까/ 일본이 아니고/ 일본이 아니니까/ 사라져도 상관없고."1973년 2월1일, 이카이노는 보이지 않는 동네가 되었다. 주거 표시를 변경한다는 행정방침으로 지역명이 사라진 것이다. 고향 제주를 떠나 객지인 이카이노에 정착한 1세대는 "고향이 객지"이며, "바다엔 경계선이 그어져 있지 않아"라고 말할 수 있다. 이는 "'일본국 이카이노'라는 주소만으로도 제주도에서 보낸 우편물이 배달되는 마을"에서 자란 연극의 원작자인 원수일 세대의 감각이다.동네 이름이 지워져도 사라지지 않는 정체성에 관한 물음은 극중 인물인 전홍과 마리를 통해 다른 감각으로 제기된다. 영춘의 손자인 전홍은 자신이 누구인지를 묻기 위해 서울로 유학길에 오르지만 재일동포 유학생 간첩사건에 휘말린다. 이제 전홍은 무대에 부재한다. 연극 무대는 구명운동의 이야기로 전환한다. 서울에서 함께 유학하고 있던 전홍의 사촌인 마리가 돌아와 펼치는 구명운동의 서사는 정체성에 관한 물음이 세대를 이어 지속할 수밖에 없는 현실을 드러낸다. 전홍과 마리는 분단체제에서 조국이 버린 사람들에 속한다. "한국에서도 못 살고 고향에서도 낯설고"라는 마리의 대사에서는 분리의 경계선이 바뀐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 경계선에는 사라진 이카이노가 여전히 끈끈하게 달라붙어 떨치기 힘겨운 무게를 담고 있다.주디스 버틀러는 "경계가 분명한 영역에서 다른 영역으로 이동하는 망명 서사는 떠남과 도착이 필연적으로 이어지며, 동화와 소외가 그 중심 주제가 됩니다"라고 말했다. 근현대사에서 이주와 정주 사이, 고향과 타향 사이에서 정체성의 물음 앞에 얼마나 많은 목소리가 사라졌을까. 연극 '이카이노의 눈'은 영춘과 전홍을 통해 그들이 속한 시간의 문법 안에서 떠남과 도착, 동화와 소외의 이야기를 펼친 것이다. 이제 관객인 우리가 연극이 시작할 때 영춘이 읽었던 그 비망록에 이어 쓰기를 해야 할지 모른다. 지금까지 드러난 기록에 대항하거나 덧붙여야 하는 이야기는 과연 더 없는지 말이다./권순대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권순대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2020-07-19 권순대

[권순대의 '대사 한 줄로 읽는 연극']이유가 있겠지요

대학로 연극 '이게 마지막이야'파인텍 노동자 고공농성 모티브편의점 직원·주인·배달 알바…'삶의 마지막' 내몰린 사람들절박함에 터져나온 목소리 담아지난 5월7일부터 31일까지 대학로 연우소극장에서 연극 '이게 마지막이야'(이연주 작, 이양구 연출, 2019년 초연) 공연이 있었다. 파인텍 노동자의 고공농성을 모티프로 하고 있는 이 작품이 재공연 중이던 지난 29일 강남역 철탑 위에서 김용희씨가 내려왔다. 철탑에 오른 지 355일만의 일이다.지붕, 옥상, 다리, 망루, 굴뚝, 크레인, 광고탑, 전광판, 조명탑, 철탑. "땅에서는 더 이상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란 말을 전하기 위해 올라간 곳. 1931년 평양 을밀대 지붕에 올랐던 강주룡에서부터 2019년 서울 강남역 철탑에 올랐던 김용희에 이르기까지 이 땅의 노동자가 마지막으로 택한 곳. 연극 '이게 마지막이야'가 모티프로 하고 있지만 무대에 나오지 않는 고공.작품의 배경은 편의점이다. 좀 더 정확하게는 편의점 뒷마당이다. 왜 편의점일까. 편의점은 주인공 정화의 일터이다. 그의 일터에 다른 인물이 찾아오며 이야기가 모인다. 명호, 선영 그리고 보람이 그들이다. 그들을 따라 사건이 편의점 뒷마당에 펼쳐지고 쌓여간다.명호는 정화를 누나라고 부른다. 명호는 정화 남편의 회사 동료다. 남편은 굴뚝 위에 있었고 명호는 그 아래에 있었다. 밧줄 하나로 묶인 두 사람이었으나 남편이 굴뚝에서 내려온 뒤로는 그 끈이 끊어졌다. 집밖을 나가지 않는 남편을 대신해 생계를 꾸리는 정화의 입장에서는 명호를 마주할 수 없다. 그런 명호가 편의점으로 찾아온 것이다. 남편이 빌려간 돈을 돌려 달라며.선영은 학습지 교사이다. 교사로 처음 가르친 학생이 정화의 아이들이다. 밀린 학습비를 대납할 정도로 애정이 많다. 하지만 3개월이 지나며 그도 더 이상 버티기 어려워졌다. 실적이 좋지 못해 학습지 교사 자리가 위태롭다. 하루에 만원씩이라도 받아야겠다며 편의점에 찾아온 것이다. 보람은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하다가 지금은 배달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다. 편의점 점주가 지급하지 않은 임금을 받기 위해 편의점에 온다. 점주를 만나지 못하고 정화에게 서류를 맡기고 간다. 배달로 바쁜 시간에 왜 오는지 모르겠다는 점주에게 "시간이 아까우니까 오는 거겠지요"라는 말은 하지만 정작 서류를 전달하지 못한다. 명호에게 줄 돈 삼백만원을 빌려야 하는 처지여서 내밀었던 서류를 다시 가져간다.점주는 2호점을 내고 싶어 한다. 단시간노동자를 짜내는 방법도 안다. 달래거나 협박하는 화법에도 능하다. 정화의 노동시간도 그렇게 녹아내리고 있었다. 2호점을 내려면 본사와의 관계가 좋아야 한다는 생각으로 밀린 임금 사백오십만원보다 많은 돈을 보람에게 계좌로 입금한다. 그러나 무엇을 잘못했는지는 모른다.그렇게 90분간의 연극은 마지막 한 장면을 위해 차곡차곡 쌓여간다. 돈을 받는 것으로 문제가 해결된 것이 아니라는 보람의 생각은 행동으로 이어진다. 유리창에 "근로기준법을 지켜라"라고 포스트잇을 붙이고 편의점 문을 안에서 잠근다. 이 장면에서 정화는 지금까지의 태도를 바꾼다. 정화는 비상키로 문을 열라는 점장의 명령을 따르지 않고 "안에 사람이 있어요. 들어간 이유가 있겠지요"라며 점장을 호출한다. 그리고 문 밖에서 보람의 곁에 앉는다. 명호와 선영도 따라 앉는다. 옆에 함께. 그렇게 연극은 끝난다.연극 '이게 마지막이야'는 마지막으로 내몰린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이게 마지막이야", "약속할게". 더 이상 버티기 힘든 순간에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나오는 말, 입 밖으로 튀어나오고 나서야 처음이 아니라 여러 번 반복했다는 사실에 멈칫하게 되는 말, 무너지는 자존감보다 절박함이 앞서 다시 튀어나오는 말. 그러면서도 옆에 함께 앉는 사람들의 이야기이다.일상의 공간이 어쩌면 지붕, 옥상, 다리, 망루, 굴뚝, 크레인, 광고탑, 전광판, 조명탑, 철탑의 고공이 되어버린 사람들의 밀려난 목소리를 남기며 연극 무대는 어두워진다. 어둠 속에서 "안에 사람이 있어요. 들어간 이유가 있겠지요"라는 정화의 말은 무대에 한 번도 등장하지 않은 남편에게 전하는 말로 바뀌는 듯하다. "위에 사람이 있어요. 올라간 이유가 있겠지요."/권순대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권순대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2020-06-07 권순대

[권순대의 '대사 한 줄로 읽는 연극']살든지 뒈지든지

연극 '조치원해문이' 팬데믹·'햄릿'과 연결된 작품불합리·모순과 결별 새 세계 선언연극 매체도 제작·관객 수용 등또다른 전환 모색해야 할때연극 '조치원해문이'(이철희 작·연출, 대학로예술극장 소극장)는 두 사건과 만나는 작품이다. 하나는 작품 외적 상황인 현재의 팬데믹과 연결되어 있고, 다른 하나는 작품의 구조가 셰익스피어의 '햄릿'과 연결되어 있다.지난 4월은 이른바 랜선 공연이 기존 공연을 대체했다. 대표적으로 국립극단 온라인 상영회를 통해 네 작품, 남산예술센터 온라인 스트리밍 상영을 통해 다섯 작품이 랜선을 따라 관객을 만났다. 해외의 유명 작품을 유료로 제공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들 랜선 공연은 기존 공연을 영상으로 기록했던 경우도 있었고, 기획 단계부터 영상 제작을 목표로 제작했던 경우도 있었다. 그 편차야 어떠하든 극장에서 직접 관극하는 것과는 또 다른 경험을 제공한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연극 '조치원해문이'는 극장 공연(10일~12일, 17일~19일)과 랜선 공연(16일)을 함께 올린 작품이다. 거리두기 객석제 운영으로 60여 명이 관극한 12일의 극장 공연과 달리 16일의 랜선 공연 관객은 이만 명이 넘었다. 관객 수만 단순 비교하자면 랜선 공연이 압도적이다. 실시간으로 제공하는 관객 수 정보와 채팅 창을 통한 감상의 공유는 랜선 저 너머의 관객을 상상하게 만들 정도였다.'조치원해문이'는 재난이나 역병을 다루는 작품이 아님에도 팬데믹 이전과 이후를 성찰하게 하는 작품이다. 과거 구술문화에서 문자문화로의 전환을 맞이한 이후에도 비록 그 영향력이 축소되기는 하였으나 연극 매체는 그 고유한 기능을 수행해 왔다. 마찬가지로 팬데믹 이후의 연극 매체는 공연 예술의 제작 방식에서부터 관객 수용 방식에 이르기까지 또 다른 전환을 모색해야 할 것이다.'조치원해문이'는 '햄릿'을 소환하고 있는 작품이다. 단지 '조치원해문이'의 갈등 구조가 '햄릿'의 그것을 그대로 차용하고 있다는 점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전환의 시대를 모색하려는 사람이라면 마땅히 가져야 할 태도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다.그러한 전환과 관련하여 그 유명한 햄릿의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로다"(To be, or not to be that is the question)라는 독백은 다시 읽어야 한다. '조치원해문이'도 "내가 살든지 뒈지든지 매조지를 져야 되여"라는 대사로 옮겼다. 하지만 이 대사는 살고 죽는 선택의 문제를 말하고 있지 않다. 왜냐하면 살고 죽는 선택의 문제로 읽는 한에는 대부분 사는 것을 택하기 때문인데, 정작 '사느냐'를 번역한 'To be'는 전혀 다른 함의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햄릿에게 있어 'To be'의 상태는 지금의 세계 상태, 곧 불합리하고 모순에 가득 찬 현재의 세계 상태를 말한다. 그 세계 상태는 삼촌이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결혼한 상태, 왕위를 찬탈한 삼촌으로부터 살해당할 위기에 놓여 있는 햄릿의 상태를 말한다. 그러니까 아버지의 장례식에 썼던 음식을 어머니의 결혼식에 그대로 썼던 상태의 지속을 견디고 목숨만 겨우 유지하면서 살아도 사는 것이 아닌 삶이 'To be'의 상태인 것이다. 그러므로 앞의 독백은 "견딜 것인가 말 것인가, 그것이 문제로다"로 읽는 것이 불합리하고 모순에 가득 찬 세계로부터 복수를 결행하려는 햄릿의 고뇌를 더욱 잘 드러나게 한다. 그 결단은 자신의 목숨을 걸어야만 가능한 것이다. 목숨을 걸고 불합리하고 모순에 가득 찬 이전의 세계와 결별하고 이후의 세계로 전환을 선언하는 독백 장면인 것이다.연극 '조치원해문이' 혹은 '햄릿'은 낡은 시대의 모든 견고한 것을 녹이는 전환을 모색하려는 자라면 마땅히 가질 수밖에 없는 고뇌와 결단의 순간을 담고 있다. 이전의 세계와 결별하고 이후의 세계로 나아가려는 전환은 거저 오지 않는다는 것을 담고 있다. "다 태워버릴겨"라고 외친 해문이는 자신이 태워버리고자 했던 그 낡은 것과 함께 스러져간다. 햄릿과 마찬가지로.어쩌면 해문이와 햄릿은 전환의 시대를 맞이하려는 자는 낡은 모든 것을 태워버릴 용기가 있는가라는 물음 다음에 마저 쓰지 않은 한 줄을 남기고 있는지도 모른다. 자신까지도./권순대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권순대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2020-05-03 권순대

[권순대의 '대사 한 줄로 읽는 연극']봄이 온 줄도 모르고

탐욕 눈먼채 중요한 가치 못보는 가족 이야기 다룬 '터널구간'지혜롭게 빠져 나오기 위해선마땅히 경계할 행동 중요하지만터널 연장 않도록 하는게 더 중요지난 2월 7일부터 16일까지 대학로예술극장 대극장에서 연극 '터널구간'(이상례 작·오유경 연출) 공연이 있었다. 이 작품은 삶의 은유를 길과 계절에서 가져오고 있다. 길은 출생과 죽음의 과정이며 계절은 그 과정에서 순환하는 리듬이다. 연극은 한 가족이 터널구간에 갇혀 "봄이 왔는데 봄이 온 줄도 모르고" 있는 상황을 다루고 있다. 물론 터널구간과 봄은 관객이 풀어야 하는 은유이다.여기 한 가족이 있다. 건물주인 아버지의 칠순 잔칫날이다. 비혼인 딸과 아들이 골칫거리인 아버지가 특단의 조치를 내린다. 돈이면 뭐든지 할 수 있다고 믿는 아버지는 아들을 위해 여자를 준비한다. 잔치 음식이 식기 전에 결혼을 하라고 명령한다. 대체로 이야기가 잔치 장면에서 시작하면 장례 장면으로 끝나는 것처럼 이 연극은 아버지가 계단에서 굴러 사망하고 집안이 풍비박산이 나는 것으로 끝을 맺는다. 10층 건물이 빚으로 쌓아올린 모래성이었던 것이다.터널 비전(tunnel vision)이라는 말이 있다. 터널 속으로 들어갔을 때 터널 안만 보이고 터널 밖은 보이지 않는 것처럼 주변을 보지 못한 채 시야가 극도로 좁아지는 현상을 뜻한다. 한 가지에 집중하면 다른 것을 인식하지 못해 생긴다고 한다. 연극 '터널구간'은 탐욕에 눈먼 시선으로 삶을 살아가는 한 가족의 이야기이다. 삶을 오로지 돈으로 재단함으로써 정작 더욱 중요한 가치를 보지 못하는 사람들의 이야기이다.터널 비전에 갇힌 사람은 어떻게 그 터널에서 무사히 빠져나올 수 있을까. 괴물 미노타우로스를 물리친 테세우스의 이야기에서 그 열쇠를 찾아볼 수 있다. 미노타우로스를 물리치기 힘겨운 이유는 그 괴물이 미궁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한번 들어가면 되돌아올 수 없는 미궁에서 테세우스 이전에는 살아나온 사람이 없었다. 그 미궁에서 테세우스가 괴물을 물리치고 밖으로 무사히 나올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실타래 덕분이었다. 미궁에 들어갈 때 풀어놓았던 실타래를 따라 되돌아온 것이다. 아리아드네가 건네준 실타래가 지혜의 실이라 불리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터널구간'의 가족에게 지혜의 실타래가 있었다면 조금은 달랐을까. 아리아드네의 실은 여러 관점에서 해석할 수 있지만 미궁 바깥으로 이어주는 통로이자 연결이라는 점에서 바깥 세계를 망각하지 않게 하는 징표이다. 자신이 어디에서 왔는지, 그래서 돌아가야 하는 곳이 어디인지를 가리키는 기호이다. 삶의 가치를 돈으로만 바라보는 터널 비전에 사로잡힌 '터널구간'의 가족에게도 삶의 길에서 아리아드네의 실타래가 있었을지 모른다. 돈으로 살 수 없는 것과 돈으로 사서는 안 되는 것까지 돈으로 사려 했던 순간부터 실타래는 그들의 손에서 멀어져 간 것이 아닐까."봄이 왔는데 봄이 온 줄도 모르고 있었구나"라는 자탄은 그들에게도 실타래가 있었음을 암시하고 있다. 삶의 길에서 터널이 겨울이라면 터널의 바깥은 봄이다. 그들에게도 봄이 있었고 봄을 만끽할 줄 알았던 것이다. 돈이라는 미노타우로스에게 사로잡히지만 않았다면 과거형이 아닌 현재형이나 미래형으로 봄을 만날 수 있지 않았을까.터널을 지혜롭게 빠져나오기 위해서 우리가 마땅히 조심해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 연극 '터널구간'은 말하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괴물을 물리치기 위해 미궁에 들어갔으나 그들은 되돌아오지 못했다고 한다. 그 자신이 미궁과 하나가 되었기 때문이다. 미궁과 하나가 되었다는 것은 괴물과 하나가 되었다는 것이다. 물리쳐야 하는 괴물과 동일화한 그는 이제 미궁 그 자체인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마땅히 경계해야 하는 것은 터널을 빠져나오기 위한 행동이 터널을 연장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 아닐까. 그렇지 못해서 비록 터널 바깥에 나온 것처럼 보일지라도 터널 안에서 진 빚을 갚아야 한다면, 그래서 그 대가를 톡톡히 치러야 한다면 진정으로 터널구간이 끝났다고 어찌 말할 수 있겠는가. 그렇게 만난 봄이 어찌 봄이겠는가. 저만치 봄이 와 있는 길목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아마도 저마다의 손에 알맞은 아리아드네의 실타래가 아닐까./권순대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권순대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2020-03-15 권순대

[권순대의 '대사 한 줄로 읽는 연극']사람을 나누려는 게 아니래요

'수정의 밤' 공간은 두만강 근처'있는 듯 없는 듯' 그랬던 경계가강력한 분리의 국경선으로 작동삶의 터전 떠나 이동 시작한 사람 등도착한 곳 시간·조건 사로잡힌 이들지난 12월27일부터 1월5일까지 대학로예술극장 소극장에서 연극 '수정의 밤'(김도영 작, 이준우 연출) 공연이 있었다. 이 작품의 시간은 1962년 북한과 중국이 국경조약을 체결한 직후이다. 공간은 두만강 근처에 있는 조선족 마을의 한 골동품 가게이다. 함오일이 운영하는 이 가게는 국경을 넘는 사람들에게 은신처를 제공하기 위한 위장용이다. '있는 듯 없는 듯 그랬던' 경계가 조약 체결 이후 강력한 분리의 국경선으로 작동하면서 이야기는 시작한다. 떠남은 있으나 도착은 없는 사람들의 이야기 말이다.연극이 시작하면 골동품 가게에서 함오일이 아들 함구제를 기다린다. 아내와 며느리도 함께 기다린다. 함구제가 강을 건너는 사람들을 무사히 데려오기를 기다리는 이 시간은 지금처럼 생계를 이어갈 수 있을지 없을지가 결정되는 시간이다. 얼마 전에는 여섯 명이 강을 건넜다. 조약이 체결된 이후에는 강을 건너는 사람 수나 횟수가 급격히 줄었다. 함구제는 최성락, 고은마 부부와 함께 돌아온다.함오일의 유일한 관심은 돈이다. 강을 건너는 사람들이 어디에서 출발했는지, 어떤 사연이 있는지, 어디로 가려고 하는지에 관해서는 무관심하다. 국경 조약 체결 이후에 강을 건너는 사람들이 줄어드는 것을 걱정할 뿐이다. "땅을 나누는 거지 사람을 나누려는 게 아니래요"라는 말에도 "땅을 나눠서 갈라놓는 것 자체가 사람을 나누는 거야"라고 답하지만 그 말이 간직한 박탈의 조건과 상태에 대해서는 둔감하다. 아니 둔감해야만 생계를 이어갈 수 있다. 아버지의 고향이 함경도이지만 "나는 중국 사람이야"라고 말할 수 있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그의 선친이 지금 강을 건너는 사람들처럼 과거에 이곳에 도착한 사람이라는 사실은 생계를 이어가는 데 어떤 보탬도 되지 않기 때문이다.최성락과 고은마는 위장한 부부이다. 강을 건너 골동품 가게까지는 도착했으나 이곳은 종착지가 아니다. 도착할 곳 없는 곳을 향해 다시 길을 떠나야 한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들보다 앞서 강을 건넌 여섯 명이 궁금하다. 내일 자신들의 모습이 아닐 수 없는 여섯 명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 함씨 일가가 가장 답하기 곤란한 물음이다. 뒷돈을 받으며 가게 일을 눈감아 주던 중국 공안이 세 배나 많은 돈을 요구하는 것보다 더 곤란한 물음이다. 여섯 명 중 한 명으로 짐작할 수 있는 부랑자의 출현에 함오일이 대응하는 방식이 그것을 말해준다. 함오일은 제거라는 말 아닌 다른 말로 부르기 힘든 방식으로 그를 처리한다. 골동품 가게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다른 방법이 없다는 듯.최성락과 고은마는 어느 곳에 가 닿았을까. 사천과 운남을 지나 치앙마이까지 가려던 최성락은 어디쯤에 있을까. 강릉에 가려던 고은마는 어디까지 이동했을까. 두 인물이 겪을 이후의 서사가 궁금함이 아니라 허망함으로 다가오는 것은 최성락을 넘기기로 한 중국 공안과의 거래 때문이 아니다. 그들이 떠난 뒤에도 골동품 가게가 여전히 유지되고 있기 때문이다. 연극은 연극이 시작하는 장면과 같은 장면에서 끝난다. 함오일이 아들 함구제를 기다린다. 아내와 며느리도 함께 기다린다. 그 장면에서 연극은 끝난다.그러므로 관객은 질문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과연 함구제는 강을 건너는 사람들을 데리고 다시 돌아올까. 관객은 답하게 될 것이다. 최성락, 고은마 부부의 이야기와 그에 앞서 강을 건넌 여섯 명의 이야기를 어떤 입장에서 보는지에 따라 그 답을 얻게될 것이다. 그리고 연극이 끝난 이후 극장 바깥의 세계로 눈을 돌릴 것이다. 현재에도 도착을 선택할 수 없는 사람들이 이동하고 있는 현실에 귀를 기울일 것이다. 국적국을 떠난 사람들, 난민이라는 이름이 붙여진 사람들이 2천590만명(2018년)이 넘는 현실에 대해.연극 '수정의 밤'은 미완의 도착에 관한 연극이다. 삶의 터전을 떠나 도착할 곳 없는 이동을 시작한 사람들, 방문도 아니며 체류도 아니며 통과도 아닌 것으로 도착하는 사람들, 그로 인해 셈해지지 않으며 더 이상 어떤 권리도 주어지지 않아 그저 도착한 곳의 시간과 조건에 사로잡힌 사람들의 이야기이다./권순대 경희대 객원교수권순대 경희대 객원교수

2020-01-19 권순대

[권순대의 '대사 한 줄로 읽는 연극']왜 그렇게 안 하세요

후안 마요르가 연극 '맨 끝줄 소년'선생 헤르만과 학생 클라우디오보는 입장따라 다양한 의미 생산경우에 따라 시선이나 창작때론 가족·삶에 대해 깨닫게 해후안 마요르가의 연극 '맨 끝줄 소년'(10월 24일~12월 1일, 예술의전당 자유소극장)은 수수께끼와도 같은 작품이다. 글쓰기 수업에서 선생과 학생으로 만난 헤르만과 클라우디오가 이 수수께끼의 주요 인물이다. 두 인물이 관객에게 제출한 수수께끼는 답을 구하기 힘든 수수께끼가 아니라 답을 구했다고 생각할 때 새로운 수수께끼가 시작하는 그런 수수께끼에 가깝다.클라우디오는 맨 끝줄에 앉아 있는 학생이다. "아무도 거기는 못 보는데 거기서는 모두를 보지." 헤르만이 아내 후아나에게 클라우디오가 제출한 글쓰기 과제물을 읽어주며 한 말이다. 헤르만이 무심코 던진 이 말은 연극의 마지막 장면에서 강력하게 되돌아온다. 물론 그 자리는 관찰하기 좋은 곳이다. 그러나 세상 모두를 보는 그런 좌표는 없다. 아내에 대해 다 알고 있다고 믿고 있는 헤르만이 그의 아내를 다 보지 못하는 것처럼 말이다.헤르만은 작가로서는 실패한 문학 선생이다. 헤르만이 클라우디오에게 부여하는 글쓰기 과제는 점차 요구로 바뀌어 간다. 마치 클라우디오에게서 자신의 유년을 찾기라도 한 듯하다. 헤르만은 첨삭을 핑계 삼아 창작에 관해 설파한다. 문학 창작을 위한 교본에 나올 법한 지침이 넘쳐난다. 이를테면, "등장인물은 뭔가를 원해, 그런데 원하는 걸 이루자니 문제들을 만나게 되는 거야. 그 등장인물에게 라이벌, 적들이 나타나는 거지. 주인공과 대립하는 적대자들 말이야." "등장인물의 기분을 네가 묘사하려고 하지 마, 등장인물의 행동들을 가지고 우리, 독자들이 파악하게 해." "좋은 결말을 위해 필요한 두 가지가 뭔지 아니? 독자가 이렇게 말해야 해, 이건 예상하지 못했어, 하지만 다른 방식도 안 되겠다. 이게 좋은 결말이야. 필연적이면서 예상하지 못했던 거. 그럴 수밖에 없으면서 반전이 있는 거." 그리고 마침내 제목까지 제안한다. "제목은 독자와 계약을 맺는 거야. 전쟁과 평화,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죄와 벌, 바냐 아저씨…. 맨 끝줄 소년 어때?"아리스토텔레스에서부터 로버트 맥키에 이르기까지 창작에 관해 수많은 사람들이 했던 말이 헤르만의 입에서 나온다. 그도 그럴 것이 그의 서재는 책으로 넘쳐난다. "이렇게 많은 책을 보면 질리지 않니? 여기서 헤르만은 노아의 홍수 때 배 안에 있는 것처럼 느끼고 있어. 여기를 벗어나면 홍수인 거지. 네 나이에 벌써 그랬어"라고 헤르만의 아내 후아나는 말한다. 창작에 관한 이론에는 전문가일지 몰라도 자신과 아내에 대해서는 무지한 인물이다.헤르만은 삶과 결합하지 않은 앎이 얼마나 허망한지를 보여주는 인물이다. 왜냐하면, "선생님은 어떻게 하는지 아시면서 왜 그렇게 안 하세요?"라는 클라우디오의 물음에 헤르만은 "나도 해봤어. 예전에. 내가 그다지 훌륭하지 못하다는 걸 깨달을 때까지"라고 답할 뿐이다. 그렇게 답한 이후에도 클라우디오의 글쓰기에 대한 제안을 멈추지 않는다. 오히려 "사람들은 이야기를 듣고 싶어 해. 이야기 없는 인생은 아무런 가치가 없어"라며 더 강력한 이야기를 요구한다. 헤르만과 클라우디오는 연극의 마지막 장면에 이르러서야 결별한다. "선생님을 처음 알았을 때부터 어떻게 사시는지 보고 싶었어요. 첫 수업부터요. 저 아저씨 집은 어떨까? 누가 저런 타입이랑 같이 살 수 있을까? 완전히 제정신이 아닌 여자가 있을 거야, 너무 제정신이 아니라…"라고 클라우디오가 마지막 일격을 가한다. 헤르만은 클라우디오의 따귀를 때린다. 헤르만이 그토록 주장했던 결말의 두 조건을 모두 갖춘 장면이 아닐 수 없다. 필연적이면서 예상하지 못했던, 그러나 그럴 수밖에 없으면서 반전이 있는 결말 말이다. 어쩌면 헤르만은 이제 자신의 서재인 방주에서 걸어 나올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면 클라우디오는? 수수께끼로 남는다.좋은 글을 다시 읽을 때마다 우리는 뭔가 새로운 것을 찾아내거나 새로운 깨달음을 얻는다는 헤밍웨이의 말처럼, "맨 끝줄 소년"은 보는 입장에 따라 다양한 의미를 생산하는 연극이다. 때로는 시선이나 창작에 관한, 경우에 따라서는 가족과 삶에 관한 연극으로 읽을 수 있는 작품이다./권순대 경희대 객원교수권순대 경희대 객원교수

2019-12-01 권순대

[권순대의 '대사 한 줄로 읽는 연극']이성을 되찾는 날 저들을 죽일 것이오

게오르크 뷔히너의 '당통의 죽음'배경은 1794년 프랑스 혁명과정"이성을 잃고 우리를 죽이지만이성을 되찾는 날 저들을 죽일것"카미유 데물랭 대사는 역설적지난 9월 27일부터 10월 13일까지 백성희장민호극장에서 게오르크 뷔히너의 '당통의 죽음'(이수인 각색·연출) 공연이 있었다. 이번 공연은 해설자 역할을 하는 배우가 샹송으로 연극의 시작과 끝을 장식하거나 라이브 반주에 맞춘 구음과 군무를 연출한 것이 특징이다. 연극 '당통의 죽음'은 제목 그대로 당통의 죽음에 관한 이야기이다. 배경은 1794년 프랑스. 1794년은 1789년 국민의회 선포와 바스티유 감옥 습격에서부터 1795년 혁명재판소 폐지와 국민공회 해산까지의 시간에 속해 있다. 1792년 공화정 선포, 1793년 루이 16세 처형, 그리고 1794년 4월 당통과 같은 해 7월 로베스피에르의 처형이 그 사이에 있었다. 혁명의 시간은 세계가 고정되어 있지 않다는 점을 가장 극명하게 드러낸다. 이미 아닌 것과 아직 아닌 것 사이에서 그 경계선이 때로는 모호하고 겹치며 전진과 후퇴를 반복하기도 하지만 혁명의 시간은 인간과 시민의 권리가 확장하는 방향으로 흐르고 있었다. 1794년 당통의 죽음도 그 속에서 흐르고 있었다.혁명의 시간을 지나며 인류에게 제출된 권리선언은 네 개의 판본을 가지고 있다. 첫째 판본은 1789년의 '인간과 시민의 권리선언'이다. 국민의회가 채택한 이 선언은 자연법을 계승한 인간의 권리와 혁명 후의 시민권을 포함하고 있다. 인류 역사에서 거대한 전진이 아닐 수 없다. 그럼에도 이 선언은 여러 한계를 지니고 있는데, 그 중에서도 "모든 인간은…"으로 시작하는 선언에서 '모든 인간'은 그저 형식적 수사에 불과하고 실질적으로는 백인, 남성, 부르주아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데는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둘째 판본은 1791년의 '여성과 시민의 권리선언'이다. 올랭프 드 구즈는 1789년의 판본에서 배제된 여성의 권리를 주장했다. 이를테면, "여성은 단두대에 오를 권리가 있다. 마찬가지로 여성은 법이 규정한 공공질서를 어지럽히지 않는 한, 연단에 오를 권리를 가져야 한다"는 주장은 1789년 '인간과 시민의 권리선언' 제10조와 정확하게 짝을 이룬다. "그 누구도 자신의 의견을 방해받지 않고 자유롭게 가질 수 있다"는 말이 빈말에 그친다고 외친 여성, 올랭프 드 구즈는 1793년 단두대에 오른다.셋째 판본은 1793년의 '인간과 시민의 권리선언'이다. 이 선언은 로베스피에르의 초안에 기초하고 있다. 그는 특히 재산권을 사회적 행복권의 측면에서 제한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를테면, "사회는 그 사회 구성원에게 일자리를 조달하거나, 노동에 적합하지 않은 사람이 생존할 수 있는 수단을 확보해주어, 구성원의 생계를 공급해야 할 의무가 있다"라고 제 10항에서 주장하고 있다. 당통이 처형된 지 3개월 후 로베스피에르는 단두대에 오른다.넷째 판본은 1795년의 '인간과 시민의 권리선언'이다. 로베스피에르가 단두대에 오른 지 일 년이 지나지 않아 만들어진 이 선언은 앞의 세 판본에 비해 권리를 축소하고 의무를 강화하고 있다. 이를테면, "소유권은 자신의 재산, 수입, 노동과 근면의 산물을 향유하고 처분하는 권리"이며, "좋은 아들, 좋은 아버지, 좋은 형제, 좋은 친구, 좋은 남편이 아니라면 누구도 좋은 시민이 아니다"라고 선언하고 있다. 좋은 여성은 어디에도 없다. 프랑스가 여성 참정권을 인정한 것은 1944년이다.그러므로 문제는 당통이냐 아니면 로베스피에르냐가 아니다. 문제는 당통과 로베스피에르 사이에서의 선택이 아니라 또 다른 목소리에 있는 것이 아닐까. 당통이나 로베스피에르가 아닌 수많은 목소리 가운데 사라지고 묻혔으나 여전히 남겨진 목소리 말이다. "이성을 잃은 오늘 우리를 죽이지만 이성을 되찾는 날 저들을 죽일 것이오"라며 당통과 함께 사라진 카미유 데물랭의 대사는 그래서 역설적이다. 이 말은 당통이나 로베스피에르에게 속하기보다는 올랭프 드 구즈에게 더 적합한 것이 아닐까. 연극 '당통의 죽음'을 그렇게 읽는다면 지나친 해석일까./권순대 경희대 객원교수권순대 경희대 객원교수

2019-10-13 권순대

[권순대의 '대사 한 줄로 읽는 연극']컵이네요

청소년이 사물로 바뀌는 '엑소더스'변신하는 이유·진단 없는 '절멸'한때 익숙하고 자명한 사실들낯선 시선으로 돌아보게 해현실세계 드리운 그늘 성찰 유도지난 8월 3일부터 17일까지 동양예술극장 2관에서 '엑소더스'(이시원 극작, 연출) 공연이 있었다. '엑소더스'는 2010년 서울신문 신춘문예 당선작인 '변신'을 재창작한 작품이다. 사람이 사물로 바뀌는 '변신'의 주요 모티프를 그대로 살리면서 에피소드를 추가하여 분량을 늘렸다. 이번 공연이 이전과 가장 달라진 점은 중장년층의 이야기에서 청소년의 이야기로 재창작한 것이다. 연극이 시작하면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하나의 상황이 제시된다. 청소년이 사물로 바뀐다는 설정이다. 중앙변신대책관리본부로부터 상자에 담긴 머그컵을 전해 받은 어머니가 말한다. "컵이네요." 며칠이 지나면 다시 사람으로 돌아오지만 왜 바뀌는지는 알 수 없다. 언제 다시 사람으로 돌아오는지도 밝혀지지 않는다. 중앙변신대책본부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바뀐 물건의 신원을 확인해 가족에게 전달해주는 것이 전부이다.청소년들은 스마트폰, 운동화, 스티커, 자전거, 피아노, 의자 따위의 물건으로 바뀐다. 그런데 바뀐 물건이 파손되면 사람으로 돌아오더라도 다치거나 생명을 잃을 수 있다. 돌멩이가 가장 안전해 보인다. 변신이 전국으로 확산된다. 국가재난상황으로 치닫지만 문제 해결의 실마리는 보이지 않는다. 급기야 폭탄으로 바뀌는 사례가 발생한다. 터진다. 그리고 집단으로 변신한다. 청소년들이. 연극 '엑소더스'는 절멸에 관한 이야기이다. 그럼에도 설명이 없다. 변신의 이유를 말하지 않고, 진단도 없다. 절멸을 말하지만 그 원인은 안중에도 없다는 투로 이야기한다. 마치 다 알면서 뭘 물어보냐는 것처럼, 진정 문제 해결을 바라기는 하냐는 것처럼 이야기한다. 그것은 실태를 진단하고 원인을 파악할 단계를 이미 넘어섰다는 선언이다. 절멸 앞에서 우리 사회에 보내는 최후의 신호가 아니라면 이 연극은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 "당신들은 지구를 위협하는 진짜 문제들보다 나와 시위에 가세하는 청소년들을 더 무서워하는군요." 지난 7월 프랑스 의회에서 그레타 툰베리가 한 말이다. 그는 2003년 이 별에 왔다. 이 별에 온 지 16년이 된 그가 보기에 지금 상태라면 지구사회는 지속불가능하다. '기후를 위한 학교 파업' 캠페인을 시작한 지 1년이 넘었다. 그와 함께 세계의 청소년이 '미래를 위한 금요일' 운동으로 기후재앙의 절박함을 외치고 있지만 지구사회가 바뀌고 있다는 소식은 여전히 잘 들리지 않는다. 그 목소리가 작아서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문제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 외침을 듣고도 듣지 못하는 데 있다. 현재의 삶의 방식을 지속가능한 미래를 위한 실천으로 전환하지 않기 때문이다.연극에서도 상황은 다르지 않다. 청소년의 변신이 사회 전체로 확산되자 비상토론회가 열린다. 각계각층을 대표해서 토론자가 모였다. 저마다 원인을 분석하고 대책을 이야기한다. 그럼에도 토론회는 토론은 토론일 뿐이라는 사실만을 증명하고 끝난다. 이 장면의 압권은 토론회를 마칠 무렵에 펼쳐진다. 토론회에 참석한 각계각층의 대표자가 진정으로 걱정하는 것이 따로 있다. 바로 자신들의 연금이다. 청소년이 모두 사라진 후 발생할 연금 고갈 사태를 걱정하고 있다. 진정 비상한 토론회가 아닐 수 없다.변신 이야기는 수없이 많다. 곰이나 백조에서부터 벌레까지 그 대상이 무엇이든지 변신 이야기의 공통점이 있다면 그것은 아마도 인간적인 것을 낯설게 만들기 위한 방편이 아닐까. 자연스럽고 친숙하게 느껴지는 삶의 방식으로부터 벗어나 지금의 삶의 방식을 넘어서기 위한 장치인 것이다. 그것은 마치 머나먼 타지에 갔다가 돌아오면 자신이 살던 곳이 낯설게 보이는 그러한 여행에 가깝다. 그렇지 않다면 여행을 떠나는 이유가 무엇이란 말인가.변신 이야기에는 우리가 한때 익숙하고 자명하다고 생각하고 있던 것을 낯선 시선으로 돌아보도록 하는 힘이 있다. 그 힘으로 지금의 세계에 드리운 그늘을 성찰하게 되는 것이다. 연극 '엑소더스'가 지금의 세계를 벗어나기 위한 탈출의 이야기를 하는 까닭도 다르지 않다./권순대 경희대 객원교수권순대 경희대 객원교수

2019-08-25 권순대

[권순대의 '대사 한 줄로 읽는 연극']난 그걸 만들 줄 모릅니다

후안 마요르가의 '비평가'에등장하는 스카르파와 볼로디아둘 사이 '인정욕망' 둘러싼 갈등연극은 끝났지만 관객들은 궁금왜 중심인물은 스카르파가 아닐까연극이 끝난 이후가 궁금한 작품이 있다.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 왕'이나 입센의 '인형의 집'이 그러한 작품이다. 자신의 눈을 찌르고 테베를 떠난 오이디푸스는 어찌 되었을까. 스스로 인형의 집을 나선 노라는 어떻게 되었을까. 이러한 종류의 궁금함은 작품의 완결성에 대한 의문이 아니라 작품의 텍스트를 풍성하게 하는 읽기에 가깝다.후안 마요르가의 '비평가'(6월 27일~7월 7일, 대학로예술극장 소극장)는 연극이 끝난 이후가 궁금한 작품 목록에 추가할 만하다. '비평가'에는 두 인물이 등장한다. 한 인물은 극작가인 스카르파, 다른 한 인물은 비평가인 볼로디아. 연극은 비평가인 볼로디아가 자신의 집을 급히 떠나고, 극작가인 스카르파가 신문사에 공연평을 전한 후 끝난다. 스카르파는 작품을 계속 쓸 것으로 짐작할 수 있지만, "난 이 장면을 수없이 봤어요. 난 그걸 만들 줄 모릅니다"라는 마지막 말을 남긴 볼로디아는 이후의 삶이 궁금하다.후안 마요르가가 2012년에 발표한 '비평가'는 2017년 국내에서 초연한 이후 지금까지 매년 무대에 오르고 있는 작품이다. 한국에서 '비평가' 외에 '다윈의 거북이', '맨 끝줄 소년'이 이미 공연될 정도로 그의 희곡은 인기가 많다. 후안 마요르가의 작품이 갖고 있는 매력 중의 하나는 관객에게 상상력을 자극하는 독특한 방식에 있다. 그는 "관객의 상상은 무대에 존재하는 게 아니라 관객의 머리 안에 존재한다"라고 말한다.이를테면, '다윈의 거북이'에서 해리엇은 교수에게 "전 다윈의 거북이예요"라고 소개한다. 연극이 시작하자마자 펼쳐지는 이 장면은 관객에게 연극의 세계로 들어오도록 초대장을 내미는 순간이다. 지금부터 극적 사건을 함께 하겠냐고 말을 거는 것이다. 이 말 걸기에 관객이 호응해야만 연극은 시작할 수 있다. 그 불가능한 이야기에 함께 하겠다는 계약서에 서명을 해야만 연극은 시작할 수 있다. '비평가'에도 관객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장치가 여럿 있다. 그중에서도 압권은 10년이나 이어지는 두 인물 사이의 갈등을 압축하는 과정이다. 어떤 갈등이라야 10년이나 지속할 수 있을까. 대체 그 갈등을 지속할 수 있는 힘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극작가인 스카르파는 10년 전 볼로디아의 혹평을 접한 후 그로부터 인정을 받기 위해 작품을 쓴다. 때로는 좌절하고 때로는 그 좌절이 창작의 원천이 되는 시간을 견디면서 쓰고 또 쓴다. 마치 볼로디아가 유일한 관객인 것처럼. 드디어 10년이 지난 오늘 공연에서 스카르파는 15분이나 이어지는 관객의 기립 박수를 받는다. 그럼에도 스카르파는 볼로디아의 평이 궁금하다. 볼로디아가 신문사에 보낼 연극평을 미처 쓰기도 전에 찾아온다. 둘 사이의 인정 욕망을 둘러싼 연극이 비로소 시작한다. 인정 욕망을 둘러싼 갈등의 드라마가 펼쳐지는 내내 스카르파는 난타당한다. 그러나 극중극 형식으로 펼쳐지는 권투 이야기에서처럼, 스카르파는 쓰러지기 바로 직전에 카운터펀치를 날린다. "만약 그녀가 문을 열어주길 바란다면, 당신은 적당한 단어들을 찾아야 할 겁니다." 볼로디아가 마지막 대사를 남기고 집을 나선다. "난 이 장면을 수없이 봤어요. 난 그걸 만들 줄 모릅니다." 연극은 그렇게 끝난다.연극은 끝났지만 관객은 묻지 않을 수 없다. 왜 제목이 비평가일까. 중심인물은 스카르파가 아니란 말인가. 발터 벤야민의 말처럼 비평이 입장을 취하는 것이 아직 가능했던 세계에 터전을 두고 있다면, 볼로디아는 이후에도 비평을 계속할 수 있을까. 스카르파의 말에서 볼로디아가 힌트를 얻을 수 있다면 그렇게 할 수도 있지 않을까. "현재의 흐름에서 벗어나, 감히 고독이나 조롱거리와 마주하세요. 그리고 저항하기 위한 눈을 준비하세요."이러한 궁금함은 이 연극을 풍요롭게 한다. 후안 마요르가는 "예술은 관객을 놀라게 하고 위험스러운 상황에 놓이게 해야" 하며, "관객들이 가지고 있는 확신을 강화시켜 주어서는 안 된다"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권순대 경희대 객원교수권순대 경희대 객원교수

2019-07-07 권순대

[권순대의 '대사 한 줄로 읽는 연극']낡은 시대의 끝에 새로운 시대가 찾아온다

브레히트 '갈릴레이의 생애' 공연은'이미 아닌… 아직 아닌 힘들' 갈등'체제의 법' 보존·신설놓고 파워게임극작가들이 자주 다루는 이유는현시대 메시지 전할 수 있기 때문지난 4월 5일부터 28일까지 명동예술극장에서 브레히트의 '갈릴레이의 생애' 공연이 있었다. '갈릴레이의 생애'는 "낡은 시대의 끝에 새로운 시대가 찾아온다"는 대사에서 알 수 있듯이, 이미 아닌 힘들과 아직 아닌 힘들 사이의 갈등을 다루고 있는 연극이다.이미 아닌 힘들은 비록 낡은 시대의 불합리성을 드러내고 있을지라도 여전히 그 체제의 법을 보존하려는 막강한 힘을 행사하게 된다. 반면 아직 아닌 힘들은 비록 시대의 합리성을 간직하고 있을지라도 미처 새로운 체제의 법을 제정하려는 강력한 힘을 행사하기 어려울 수 있다. 극작가들이 두 힘들 사이의 갈등을 자주 다루는 까닭은 이러한 갈등이 그 자체로 풍요로운 이야기를 담고 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이 속한 시대에 대해 적극적으로 메시지를 전할 수 있기 때문이다. 브레히트의 '갈릴레이의 생애'도 예외가 아니다.브레히트는 서사극을 창안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는 관객이 연극을 통해 사회에 대한 새로운 통찰을 획득함으로써 사회가 변화하길 원했다. 이를 위해 그는 서사극의 여러 장치를 활용했다. 제4의 벽(연극의 사실적 재현을 위한 가상의 벽으로, 관객은 이를 통해 무대를 마치 현실의 한 장면처럼 받아들게 된다)을 허물기 위해 무대장치와 노래를 활용하거나 배우와 등장인물을 분리하는 연기양식을 도입했다. 이제 무대는 무대일 뿐이며, 현실을 통찰하기 위한 교실이 된다.브레히트가 갈릴레이를 통해 말하고 싶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신발보다 나라를 더 많이 갈아 신었다고 할 정도로 일생 동안 망명 생활을 해야 했던 그는 '갈릴레이의 생애'를 통해 1930년대의 독일과 유럽 사회를 비판하고자 했다. 문명의 시대가 저물어가고 야만의 시대가 다가오고 있는 상황에서 지식인의 사회적 역할에 주목했다. 이러한 그의 의지는 '갈릴레이의 생애' 덴마크판본(1938~39) 이후에도 미국판본(1945)과 베를릴판본(1954~56)을 생산할 정도로 개작 작업을 반복한 것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이미 익숙해진 세계에서 우리는 사회의 제도나 문화를 자명한 것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그러므로 자명성은 한 사회의 제도나 문화가 갖고 있는 그늘을 가리기 쉽다. 이는 갈릴레이가 어린 안드레아에게 태양이 지구를 중심으로 도는 것이 아니라 지구가 태양을 중심으로 도는 것이라는 사실을 설명할 때, "눈을 뜨고 있는 건 보는 것이 아니다"라고 강조한 대사와 닿아 있다. 익숙한 자명성의 눈으로는 비록 눈을 뜨고 보더라도 그 현상의 진실을 모두 보는 것이 아닐 수 있기 때문이다.명동예술극장의 이번 공연이 브레히트의 갈릴레이를 통해 말하고 싶은 것은 무엇일까. 우리 시대에 브레히트의 갈릴레이를 다시 호명하는 까닭은 어디에 있을까. 그것은 아마도 우리 시대의 반지성주의의 흐름과 무관하지 않은 듯하다. 무대 위의 갈릴레이가 우리에게 시사하는 것은 이성의 시대를 열기 위한 지난한 과정에서 지성이란 한 개인에 의해서가 아니라 사회의 공적 형태에 의해 발현한다는 점일지도 모른다."반지성주의자들에게는 시간이 흐르지 않는다"라며 반지성의 무시간성을 비판한 우치다 다쓰루에 따르면, 사회성과 공공성은 찬동자의 많고 적음에 의해 측량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과거와 미래를 향해 시간적으로 열려 있는지 아닌지에 따라 결정된다. 지성은 개인의 산물이 아니고 집단적인 현상이기에 그러하다. 갈릴레이가 지구를 중심으로 태양이 도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망원경으로 관찰하게 하면서까지 신학자들에게 증명하려 해도 그들이 귀 기울이지 않을 때, "근거를 제시해서 움직이지 않는 것은 시체들뿐"이라는 대사로 받아칠 수밖에 없었던 까닭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브레히트는 관객이 극장에 들어서자마자 모자와 함께 그들의 두뇌를 벗어버리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그는 극장이 교실로 바뀌길 원했다. 그러나 관객이 더 이상 극장을 찾지 않는 시대라면 대체 연극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어쩌면 모자와 함께 두뇌를 벗어버리는 태도를 바꿔야 하는 곳은 극장이 아니라 사회일지 모른다./권순대 경희대 객원교수권순대 경희대 객원교수

2019-05-19 권순대

[권순대의 '대사 한 줄로 읽는 연극']기억해야만 했다, 이 이름들을

제주 4·3사건 다룬 '잃어버린 마을'30년전 사건에 묶인 '동혁의 삶'오태석의 '자전거' 윤정목도 유사현기영 '순이삼촌'·이산하 '한라산'…역사의 과정 아직도 못다한 말 많아마을이 사라졌다. 한 마을이 불타 사라졌다. 1949년 1월 제주 곤을동 마을이 토벌대가 지른 불로 사라졌다. 돌담과 집터만 남기고 이 땅에서 사라졌다. 연극 '잃어버린 마을'(부제: 동혁이네 포차, 충무아트센터 중극장 블랙, 2월 22일~4월 7일)은 4·3사건 동안 사라진 마을 중 하나인 곤을동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연극 '잃어버린 마을'은 두 축의 시간이 흐른다. 하나는 극 중 현재인 1979년의 시간이다. 다른 하나는 극 중 과거인 4·3사건이 일어난 시간이다. 두 축의 시간대가 교차하며 연극은 진행된다. 2019년의 관객은 동혁이 고향을 떠나지 못하는 사연을 발견하는 과정에서 4·3사건을 만나게 된다. 관객을 그 진실로 안내하는 출입문은 동혁과 아들 재구와의 갈등이다. 관객이 그 문을 열고 들어서게 되면 잃어버린 마을을 목도하게 된다.동혁의 삶은 30년 전 사건에 묶여 있다. 그는 마을에서 혼자 살아남았다. 후한 값을 치르겠다는 제안에도 땅을 팔지 않는 까닭은 그가 고향에 남은 마지막 사람이라서가 아니다. 나중에서야 밝혀지지만 그는 살고 싶어 서북청년단에 협력했다. 그가 불을 지른 것은 아니다. 그가 도착했을 때는 이미 마을이 사라지고 난 뒤였다. 그렇게 살아남았던 것이다. 그 후 30년 동안 그의 시간은 멈춰있다. 주변에서 "30년 지켰으면 됐다"라거나 "네가 붙들고 있는 게 뭔지 안다"라는 말로 이제 그만할 때도 되었다고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용서를 빌어야 할 사람이 없는 그 자리에서.연극 '잃어버린 마을'에 대한 평가는 다양할 수 있다. 피해자가 아닌 인물을 중심인물로 다룬다는 점에 대해 여러 의견이 있을 수 있다. 부정적 인물을 매력적으로 만드는 것이 얼마나 힘겨운 것인지를 보여주는 목록에 올릴 수도 있겠다. 그럼에도 동혁과 같은 인물이 연극사에서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니다. 지금까지 4·3사건을 다룬 연극이 극히 적다는 점, 제주도가 아닌 서울에서 공연한다는 점, 그리고 무엇보다 4·3사건에 대한 역사적 평가가 진행형이라는 점에서 동혁과 같은 인물을 형상화하는 것은 어쩌면 더 많은 사람들에게 말을 걸기 위한 시도인지도 모른다.연극 '자전거'(오태석, 1983)에도 유사한 인물이 나온다. '자전거'의 윤정목은 제삿날이 되면 사금파리로 자신의 얼굴을 긁는다. 한국전쟁 당시 등기소 방화사건이 있었고, 그 사건으로 많은 사람들이 죽는다. 그래서 제삿날이 같은 집이 마을에 허다하다. 윤정목이 30년이 지나도록 사금파리로 얼굴을 긁는 것은 어쩌면 용서를 구하는 일일 것이다. '잃어버린 마을'의 동혁이 "기억해야만 했다, 이 이름들을"이라고 읊조리는 까닭도 거기에 있을 것이다.4·3사건을 다룬 문학 작품의 목록은 아직 앙상하다. 그러나 1978에 발표한 현기영의 소설 '순이 삼촌'과 1987년에 발표한 이산하의 장편서사시 '한라산'은 큰 족적을 남겼다. 현기영은 "고모부님, 고모분 당시 삼십만 도민 중에 진짜 빨갱이 얼마나 된다고 생각햄수꽈?"라고 물었다. 이산하는 "오늘도 잠들지 않는 남도 한라산/ 그 아름다운 제주도의 신혼여행지들은 모두/ 우리가 묵념해야 할 학살의 장소"라고 노래했다. 저자 후기에서 그는 4·3을 "인간이 얼마만큼 인간일 수 있으며, 동시에 인간이 얼마만큼 인간이기를 포기할 수 있는지를 처절하게 보여준 사건"이라고 말했다.평화의 섬 제주로 가는 항해가 여전히 지난하다는 것을 연극 '잃어버린 마을'은 보여주고 있다. 4·3사건을 말할 수조차 없던 시절에서 우리는 과연 얼마나 멀리 나아갔는가를 묻고 있다. 4·3사건은 아직 숫자로 남아 있다. 숫자로 기록되는 사건을 넘어 그 이름을 얻는 역사의 과정에서 보면 이 연극이 조금은 다르게 보일지도 모르겠다. 그것은 아직도 다하지 못한 말이 남았기 때문이다. 말하지 못한 말, 말하는 동안 목구멍으로 눌린 말, 말한 후에도 혀끝에 달라붙어 있는 말, 그 모든 웅크린 말들이 온전히 날아오를 때 비로소 변방은 변방이 아닌 게 된다./권순대 경희대 객원교수권순대 경희대 객원교수

2019-03-24 권순대

[권순대의 '대사 한 줄로 읽는 연극']그 애는 작아도 너무 작아

1987~1991년 서울의 백골단2017년 시리아 알레포의 구조대원두곳의 장소 설정한 연극 '더 헬멧'두 사건으로 관객 울림 못 준다면그 거리는 결코 좁혀지지 않는다흥미로운 상황을 발견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주는 연극이 있다. 상황은 연극의 이야기를 여는 문이다. 언제, 어떤 장소에서, 어떤 인물이 그 문을 여는가에 따라 이야기가 결정된다. 이 문은 연극의 이야기 안에 있다. 그 문을 여는 방식에 변화를 준 연극이 바로 '더 헬멧'(세종문화회관 S씨어터, 1월 8일~2월 27일)이다.'더 헬멧'은 두 개의 장소와 네 개의 방을 설정하여 관객에게 선택하게 한다. 두 개의 장소는 각각 서울과 알레포이다. 서울과 알레포는 다시 빅 룸과 스몰 룸으로 나뉜다. 경우의 수는 넷(더블 캐스팅의 경우까지 더하면 배로 늘어난다.) 이다. 이런 식이다. 관객은 서울의 빅 룸 혹은 스몰 룸 중에서, 알레포의 빅 룸 혹은 스몰 룸 중에서 선택을 해야 한다. 어떤 장소와 방을 선택하는지에 따라 관극할 연극이 결정된다. 이제 연극 안으로 들어가 보자. 서울. 1987년~1991년 어느 서점의 지하실. 대학생과 백골단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알레포. 2017년 시리아 알레포의 어느 건물. 테러리스트와 화이트 헬멧 구조대원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그런데 왜 서울과 알레포일까. 유사성을 발견하는 것이 어렵지는 않다. 제목이 강렬하게 보여주는 것처럼 백골단의 헬멧과 구조대원의 헬멧이 쉽게 겹친다. 폭력으로 인해 사라진 일상의 삶이 가져온 잔혹함을 발견하는 것도 어렵지 않다. 그럼에도 왜 서울과 알레포일까를 여전히 묻는다면 그것은 아마도 우리 현실에서 시리아가 너무 멀리 있다고 느껴지기 때문일 것이다.그렇다. 거리의 문제가 핵심이다. 어떤 사건이든 그 사건이 누군가의 문제로 다가가기 위해서는 사건이 일어난 지점과 그 사건을 전달받는 지점 사이의 거리가 좁혀져야 한다. 이 거리는 단지 물리적인 거리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사건의 수신자가 그 사건에 반응하여 자신의 문제로 느끼고,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실천으로 나아가기 위한 전환가능성의 거리이다. 사건 앞에서 공감과 연대할 수 있는 역량이 거리를 좁히는 힘이다. 매몰된 건물 잔해에서 식어버린 아이를 보며, "이 애는 작아도 너무 작아"라고 말하는 시리아 알레포의 구조대원의 대사가 관객에게 울림을 주지 못한다면 그 거리는 결코 좁혀지지 않는다.1987년부터 1991년 사이를 다루는 서울 이야기도 마찬가지이다. 시위 현장에서 마주한 상대를 향해 "안 미워할 수 있을까."라고 말하는 상황을 헤아리지 못한다면 오히려 시리아 알레포보다 더 멀게 느껴질 수 있다. 백골단인 그는 어제까지 대학생이었다. 대학으로 돌아가야 하는 그가 마주한 전투조는 불과 얼마 전까지 함께 수업을 듣던 동료였다. 그들이 서로에게 "안 미워할 수 있을까"라고 말해야 하는 상황은 얼마나 끔찍한가. 서울 이야기에서 서점 지하실을 공간으로 설정한 것은 무척 흥미로운 부분이다. 요즘도 그러하지만 서점이 책만 파는 곳은 아니지 않는가. 당시 서점이 어떤 곳이었는지를 헤아리는 정도에 따라 관객은 서울 이야기의 시간적 거리를 저마다 갖게 된다.이제 연극 밖으로 나와 보자. 여기 한 장의 사진이 있다. 2009년 10월 17일, 몰디브 기리푸쉬섬 앞바다 해저 6m. 대통령과 각료들이 온실가스 배출규제 촉구 결의안에 서명하는 장면의 사진. 이 뉴스는 세계에 전해지며 곧바로 이슈가 되었다. 하지만 10년 가까이 지난 오늘까지 몰디브가 처한 상황에 긍정적인 변화가 생겼다는 뉴스는 전해지지 않고 있다. 뉴스는 금세 묻혔다. 해저 회의 퍼포먼스는 뉴스로 소비되고 정말 퍼포먼스로 그쳤다. 세계의 시민들이 공감과 연대의 장으로 나아가게 하는 그 거리를 좁히지 못했다. 대체 어떻게 말을 걸어야 그 거리를 좁힐 수 있을까.사물이 놓인 지점이 달라지고 그 연결하는 고리가 바뀌면 세계를 구성하는 방식에 변화가 생길까. 세계를 바라보는 위치에 변화가 생기면 우리의 삶과 세계가 움직이게 될까. 연극 '더 헬멧'은 그것을 궁금하게 하는 공연이다. 어떤 방을 선택할지는 여러분이 결정해야 한다./권순대 경희대 객원교수권순대 경희대 객원교수

2019-01-27 권순대

[권순대의 '대사 한 줄로 읽는 연극']거기가 고향같네

해방 55년 만에 귀환한 동포들극단적 선택 이유 관객에 물어일제가 남긴 상흔 여전히 진행중우리 모두 그들에게 빚지고 있어등장인물 세 명, 그들의 다른 이름지난 11월 9일부터 12월 9일까지 대학로 소극장 공유에서 지공연협동조합의 '고향마을' 공연이 있었다. 지공연은 조합원 모두가 공동제작자로 참여하는 공연예술인 협동조합이다. 열악한 연극 제작 환경에서 지속가능한 공연 제작 생태계를 만들기 위해 2017년에 창립한 지공연협동조합이 두 번째 정기공연으로 '고향마을'을 무대에 올린 것이다.연극 '고향마을'은 사할린에서 영주귀국한 세 명의 할머니에 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연극의 시간은 한일월드컵이 열린 2002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연극의 공간은 경기도 안산에 있는 한 아파트다. 그곳에서 세 명의 할머니가 국회의원을 납치하여 경찰과 대치하고 있는 상황에서 연극은 시작한다. 연극 '고향마을'은 그토록 갈망하던 고국으로 돌아와 이제 막 정착한 할머니들이 왜 그러한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는지에 관해 말하고 있다. 연극은 사할린 동포는 누구인지 관객이 스스로에게 묻지 않을 수 없게 만들며 끝난다.연극 '고향마을'의 제목은 경기도 안산에 있는 임대아파트 단지 이름인 고향마을에서 가져왔다. 2000년 고향마을에는 총 489세대 967명이 입주하게 된다. 입주민은 모두 영주귀국한 사할린 동포이다. 해방이 된 지 55년 만의 귀환이다. 사할린 동포는 안산 고향마을을 포함하여 지금까지 4천300여 명 정도가 영주귀국하였다. 하지만 영주귀국의 조건이 1945년 8월 15일 이전 사할린 이주 또는 사할린 출생자 등으로 제한되어 있어 이들 중에는 사할린에 있는 가족과 다시 이산의 아픔을 겪게 된 경우도 있다. 연극 '고향마을'은 그들 중에서 세 명의 할머니를 호명하여 일제가 남긴 상흔이 여전히 진행형이라는 것을 말하고 있다.연극 '고향마을'의 인물인 할머니들의 귀국은 미완의 귀향이다. 세 명의 할머니는 안산에 살면서도 정작 고향 땅을 찾지는 않고 있다. 고국에 돌아왔으나 고향 땅은 낯설기만 하다. 평생을 살았던 삶의 시간은 고향 땅이 아니라 사할린에 있기 때문이다. 아마도 세 명의 할머니는 사할린에서 음력을 적어 넣은 달력을 직접 만들었을지도 모른다."초복 4일 전에 배차(배추) 심고, 중복 때 무 심어요. 그러면 그거 가지고 김장하요.", "물 빠지면 바다에 나가서 조개나 새우 같은 거 많이 잡았어. 미역도 건지고. 그러려면 음력으로 언제 물이 나가고 들어오는지 알아야 했지."(최상구, '사할린', 2015)라는 대목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사할린의 시간은 고국에서 사용하던 음력으로 기록되고 있었다. 사할린에서의 삶의 시간으로부터 다시 단절된 세 명의 할머니가 정작 고국에서 "거기가 고향 같네."라고 말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최상구의 '사할린'에는 사할린 동포의 삶이 생생하게 기록되어 있다. 그중에서도 안명복의 증언은 강제동원으로 인한 이산의 가장 잔혹한 사례이다.그의 아버지는 1939년에 사할린으로 강제동원을 갔다. 어머니와 4남매는 이듬해인 1940년 6월에 사할린으로 가서 가족이 함께 살게 된다. 하지만 아버지가 1944년 9월에 다시 일본으로 강제동원을 당하면서 이산의 아픔을 또 겪게 된다. 당시 13세의 안명복은 해방 이후에도 아버지를 만나지 못한다. 일제에 의해 1944년에 시행된 이중동원은 사할린 북서부 지역에 위치한 14개의 탄광에서 조선인 광부 3천여 명을 일본 본토로 다시 동원해 간 사건을 말한다. 안명복의 아버지를 포함하여 그들은 배제된 사람들 중에서도 배제된 사람들이다.우리 모두는 그들에게 빚지고 있다. 지금까지 영주귀국한 4천300여 명의 동포와 여전히 사할린에 살고 있는 한인들에게, 뿐만 아니라 유즈노사할린스크 공동묘지, 고르노자보드스크 공동묘지, 우글레고르스크 인근의 사라진 공동묘지 터에 묻힌 한인들에게, 그리고 그 기나긴 세월이 지나도록 국가에 의해 단 한 번도 셈해지지 않고 사라진 사할린의 무연고 한인들에게 빚지고 있는 것이다. 연극 '고향마을'의 인물인 세 명의 할머니, 한미옥, 김순영 그리고 조인숙은 그들의 다른 이름이다./권순대 경희대 객원교수권순대 경희대 객원교수

2018-12-09 권순대

[권순대의 '대사 한 줄로 읽는 연극']질문이 곧 답인데…

연극 '오이디푸스…' 관객 능동적 위치 전환배우가 의문 던지면 함께 공론장 참여 형식사회성숙도 힘 아닌 대화로 갈등 조정 직조지연·중지담론 경계 질문 그치면 진실 닫혀지난 10월 11일부터 14일까지 대학로 예술극장 소극장에서 극단 놀땅의 '오이디푸스-알려고 하는 자'(2016년 초연) 공연이 있었다. 오이디푸스는 소포클레스 이후 여러 이미지로 변주되어 온 인물이다. 스스로를 희생하여 역병에서 도시를 구하는 인물, 눈이 멀어 볼 수 없으나 통찰력을 지닌 인물, 왕을 죽이고 왕이 된 인물, 그리고 은폐된 진실을 조사하는 인물 등 시대와 작가에 따라 다양하다. 극단 놀땅의 오이디푸스는 그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질문하는 자로 조사하는 인물에 가깝다. 올해로 세 번째인 이번 공연은 우리 사회가 왜 오이디푸스를 다시 호명할 수밖에 없었는지에 대해 말하고 있다.연극이 시작하면 무대는 광장으로 바뀌고, 관객은 시민의 역할을 부여받는다. 아니다. 도시의 광장에 시민이 모이자 비로소 연극이 시작한다. 광장으로 바뀐 무대에서 관객은 처음에는 관찰자의 위치에 놓이게 되지만 연극이 진행되면서 참여자의 위치로 점차 옮겨가게 되며 종국에는 배심원의 자리에 앉게 된다. 무대의 배경은 세월호 이후 역병이 창궐한 도시이다. 눈이 먼 거지로 등장하는 오이디푸스가 의문을 던지면 관객은 배우와 함께 공론장을 만들게 된다. 우리 사회가 생명과 인간의 존엄성을 존중하는 사회로 전환하였는지 아니면 생명과 안전을 경시하는 사회에 여전히 머물러 있는지에 대해 관객이 답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으로 연극은 끝난다.샤츠슈나이더는 정치가 갖는 역동성의 기원이 갈등에 있다고 주장하며 갈등을 민주주의의 엔진으로 보았다. 그에 따르면 정치의 과정과 결과는 갈등을 구성하는 네 가지 차원(범위, 가시성, 강도, 방향)에 달려 있다. 그 중에서 갈등의 범위는 누가 그리고 얼마나 많은 사람이 갈등에 관여하는가의 문제이다. 관찰자의 위치에 있던 사람이 행위자로 참여하게 되면 힘의 균형에 변화가 생긴다. 기존 질서의 힘에 균열을 가해야 하는 약자는 다수가 개입하도록 해서 갈등의 범위를 확장하여야 한다. 연극 '오이디푸스-알려고 하는 자'가 관객을 수동적 위치에서 능동적 위치로 전환하는 형식을 가져온 까닭이 여기에 있다.질문이 사라진 사회는 얼마나 위태로운가. 질문하지 않는 사회는 겉으로 평온해 보일지 모른다. 그러나 질문이 없어 역동성이 사라진 사회는 죽은 사회이다. 문제의 심각성은 사라진 질문으로 인해 갈등마저 없는 것처럼 보이게 하는 데 있다. 극 중에서 오이디푸스가 아무리 "질문이 곧 답인데…"라고 외쳐도 시민이 나서지 않는다면 아무 소용이 없는 것처럼 말이다. 무대가 광장이나 교실로 바뀐다고 해서 달라질 것은 없다. 한 사회의 성숙한 정도는 그 사회가 갈등을 조정하는 과정에서 드러난다. 물리적 힘에 의한 해결이 아니라 대화를 통한 갈등의 조정 과정에서 그 사회의 빛과 그늘이 직조하는 무늬가 그려지기 때문이다.갈등의 사회화 과정에서 경계해야 하는 대표적인 두 목소리는 지연과 중지의 담론이다. 지연의 담론은 "당신에게 권리가 있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다"라고 말한다. 몫의 배분을 결정하는 현재의 조건을 아직은 바꿀 때가 아니라고 말하며 미래로 지연시킨다. 중지의 담론은 "당신은 할 만큼 했다. 그러므로 이제 그만하라"라고 말한다. 이미 충분히 노력했으니 이제 어쩔 수 없고 우리는 지쳤다고 말하며 현재에서 중지시킨다. 두 담론 모두 지금의 경계선을 유지하려는 목소리이다. 갈등의 범위를 확장하고 그 방향을 전환하려는 주장을 무력화하는 것이다. '오이디푸스-알려고 하는 자'는 주로 후자의 담론을 극장으로 가져와 관객과 함께 토론하는 연극이다.질문이 그치면 진실의 문은 닫히고 만다. 진실의 문을 여는 질문의 힘은 '오이디푸스-알려고 하는 자'의 초연이 있던 2016년 겨울에만 유효하지 않다. 광장에서 촛불과 외침이 잦아들었다고 해서 물어야 마땅한 질문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아직 우리 사회가 세월호 이후 생명안전사회의 건설로 전환하지 못했다면 더욱 그러하다./권순대 경희대 객원교수권순대 경희대 객원교수

2018-10-21 권순대

[권순대의 '대사 한 줄로 읽는 연극']저기, 안에 있어요?

그가 살아 있는 동안에방문 두드린것은 월세 독촉하거나 욕정의 대상을 찾을 때였다그때의 '저기'는 그를 사람이 아닌 사물로 대하는 그저 소리였을 뿐지난 8월 14일부터 19일까지 연극실험실 혜화동 1번지에서 극단 나베의 '예술이 죽었다' 공연이 있었다. '예술이 죽었다'는 한 사람의 죽음에 관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나이는 28세. 직업은 소설가. 등단한 적은 없으나 신춘문예 심사평에 언급되었고 소설을 쓰고 있으니 소설가라 해도 되지 않을까. 비록 자신이 쓰고 싶은 소설이 아니라 먹고 살기 위해 잡지사가 요구하는 대로 써야 하지만 말이다. 그럼에도 벌이가 신통치 않아 월세는 밀렸고, 냉장고는 비어 있다. 지병이 악화되어 상태가 심각하나 치료는 엄두를 낼 수 없다. 그런 상황에서도 그는 쓴다. 쓰는 것 외에 달리 할 일이 없는 것처럼.연극은 그의 죽음으로 끝난다. 아니 주검이 발견되지 않은 채 끝난다. 사회에서 밀려나고 밀려나 홀로 고립된 죽음 뒤에 그의 몫으로 남겨진 것은 밀린 고지서 다발이다. 학자금 대출에서부터 신용카드까지 각종 고지서 다발만이 그가 죽음에 이르는 동안 벌인 사투의 시간을 말해주고 있다. 밀린 고지서의 두께는 그가 고립된 채 버틸 수 있었던 시간의 두께이다. 그 두께가 두꺼워지는 동안 그의 고립은 깊어 갔다. 짐작했겠지만, 이 연극은 연극이 아니다. 우리 사회의 이야기이다. "며칠째 아무것도 못 먹어서 남는 밥이랑 김치가 있으면 저희 집 문 좀 두들겨 주세요."라는 마지막 문장을 남긴 한 시나리오 작가의 죽음을 이제는 망각하지 않았는지 연극은 묻고 있다.문화체육관광부가 발표한 '2015 예술인 실태조사'에 따르면, 지난 1년간 예술 활동 수입의 중앙값은 300만원이며 평균값은 1천255만원이다. 조사 대상에 포함된 분야는 평균값이 높은 순으로 건축, 방송, 만화, 영화, 음악, 연극, 대중음악, 공예, 국악무용, 사진, 미술, 그리고 문학이다. 문학 분야의 중앙값은 10만원이며 평균값은 214만원이다. 연극분야의 중앙값은 500만원이며 평균값은 1천285만원이다. 연극분야의 경우 '연극인, 우리 스스로의 복지' 실태조사(2017년)에서 1천319만원으로 비슷한 결과가 나왔다. 다만 수입에서 연극공연 수입은 351만원이며, 연극공연 외 활동이 385만원, 연극외 예술 활동이 241만원, 예술과 무관한 활동이 393만원으로 조사되었다. 예술인 복지법이 시행되고 있는 지금의 통계들이다.언제까지 할 수 있을까? 이 문장은 물음이 아니다. 누군가에게 건네는 말이 아니라 스스로에게 던지는 문장이다. 단지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으로부터 오는 불안 정도만 담고 있다면 미지의 가능성을 창조할 힘이 그 속에 있으니 스스로의 재능을 갈고닦으라고 말해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문장은 생존의 위기 앞에서 '언제까지 꿈꿀 수 있을까'가 아니라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까'로 그만 탈바꿈하고 만다. 물론 이른바 예술을 하는 사람에게만 해당한다고 할 수는 없겠으나 '언제까지 할 수 있을까'라는 말이 자성의 문장이 아니라 탄식과 자조의 문장으로 전락하게 되는 배경에는 창작자의 능력과 무관한 사회적 요인이 자리하고 있다. 자기 좋아서 하는 일이며, 그래서 모든 책임이 스스로에게 있다고 말하는 사회는 얼마나 참혹한가. 적어도 '언제까지 할 수 있을까'라는 말이 그런 답으로 돌아와서는 안 되는 것이다.연극 '예술이 죽었다'의 그는 이야기를 만들다가 그만 이야기의 주인공이 되고 말았다. 그가 단칸방에 고립된 채 죽어가는 동안 "저기, 안에 있어요?"라며 그의 방문을 두드린 이웃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가 살아 있는 동안에 방문을 두드린 '저기'는 밀린 월세를 독촉하거나 욕정의 대상을 찾을 때였다. 그때의 '저기'는 그를 사람이 아니라 사물로 대하는 그저 소리였을 뿐이다. '저기'가 단지 소리에 그치지 않고 이웃에게 말을 거는 감탄사의 '저기'로 복원되어야 하는 것 아닌가. 죽는 것이 예술이 아니라 사람이기에. 연극 마지막 장면에서처럼 음식을 들고 찾아온 이웃의 말을 그가 끝내 듣지 못하는 비극을 만들지 않으려면 말이다./권순대 경희대 객원교수권순대 경희대 객원교수

2018-08-26 권순대

[권순대의 '대사 한 줄로 읽는 연극']"우리는 같이 있고 가치 있다"

출구가 보이지 않는 시간이 갖는 절망의 무게가 얼마인지그 순간에 사로잡힌 청소년들그 시간 스스로만 버텨야 한다면 대체 사회란 무엇이란 말인가지난 6월 15일부터 7월 1일까지 백성희장민호극장에서 '죽고 싶지 않아' 공연이 있었다. '죽고 싶지 않아'는 2015년 안무가이자 연출가인 류장현과 8명의 청소년이 '자유를 위한 몸의 낙서'를 주제로 함께 작업한 워크숍에서 출발하여 2016년 국립극단 청소년극으로 초연한 작품이다. 이번 2018년 공연은 청소년 17명이 예술교육 활동, 워크숍, 그리고 오픈 리허설을 배우들과 함께 작업한 결과물이다. 팸플릿에 소개한 17명의 생생한 기록은 공연에서 본 배우의 에너지가 어디로부터 왔는지 짐작하게 한다.연극 '죽고 싶지 않아'는 좌절의 시간을 건너는 법에 관한 청소년의 보고서이다. 청소년에게 우리 시대의 교실은 무엇일까. 어느 초등학교 교문 위에 "6학년 목숨 걸고 공부하는 기간"이란 문구의 현수막을 거는 사회에서 말이다. 짧게는 3년, 길게는 6년의 기간도 모자라 초등학교에서부터 경쟁으로 내몰리는 사회에서 교실은 학생들에게 어떤 말을 전달하고 있을까. 승자독식의 경쟁을 부추기며 "견뎌라, 견뎌라, 대학에 가면 천국이 열리리라"라는 말이 유예하는 시간 동안 청소년들은 그 시간을 어떻게 건너고 있을까. 막상 대학에 가면 그 문장은 다음과 같이 바뀌는 사회에서 말이다. "견뎌라, 견뎌라, 취직을 하면 천국이 열리리라." 대학을 졸업한 이후에 또 어떤 다른 문장이 기다리고 있는지는 덮어두자.팸플릿에 소개한 어느 청소년이 전하는 말은 단지 오픈 리허설을 함께한 소감에 그치지 않고 우리 사회에서 청소년이 놓인 지점을 적확하게 짚고 있다. "바다에 있어야 할 물고기들이 땅에서 펄떡거리는 느낌", "심장이 멈춰서 죽는 게 아니고 내가 살아있음을 느끼지 못할 때의 죽음"이라는 그들의 말을 귀담아들어야 할 대상은 청소년들이 아니다. 오히려 그들의 말은 "너희에게도 권리가 있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다"라는 담론을 향해 있다. 그 담론이 유예하는 시간 동안 현재의 권리를 독차지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향해 있다. 연극 '죽고 싶지 않아'와 함께한 17명의 청소년은 "우리는 같이 있고 가치 있다"라고 동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에게 말을 걸고 있다. 일인칭 대명사인 '우리'를 청소년들로만 한정할 필요도 없고, 한정해서도 안 되는 까닭은 여기에 있다.연극 '죽고 싶지 않아'를 보는 동안 겹쳐 보이는 영화 한 편이 있었다. 8 마일(8 Mile, 2002년, 에미넴 주연). 영화 8 마일은 미국 자동차공업의 중심지였던 디트로이트가 1980년대 후반부터 쇠락한 이후의 디트로이트 8마일 로드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디트로이트 8마일 로드는 이 도로를 경계로 북쪽에는 백인이, 남쪽에는 흑인이 주로 거주하고 있어 분리의 선이기도 하다. 백인 래퍼(에미넴)가 8마일 로드 남쪽에서 흑인들과 랩 배틀을 펼쳐 래퍼로 성공한다는 이야기는 성장 플롯의 전형에 속한다. 그러므로 이 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에미넴이 랩 배틀을 펼치며 상대를 물리치는 절정의 장면이 아니다. 오히려 에미넴이 좌절의 시간을 건너는 정적이며 서정적인 장면들이다. 그 장면들 중 하나가 에미넴이 황폐한 디트로이트 도시를 버스를 타고 이동하는 장면이다. 창밖 풍경을 보던 에미넴이 주머니에서 종이를 꺼내 메모를 한다. 접혀 있던 종이를 두 번 펼친다. 바랬고 고깃고깃하다. 그런데 그 종이에는 이미 다른 메모로 빼꼭하다. 메모의 방향이 제각각이다. 빼곡한 종이의 여백에 또 다른 메모를 하는 짧은 순간은 얼마나 긴 시간을 말하고 있는가. 연극 '죽고 싶지 않아'에 참여한 청소년들의 메모와 목소리가 결코 짧거나 가늘지 않은 이유다.출구가 보이지 않는 시간의 지속이 갖는 절망의 무게가 얼마인지를 그 시간에 사로잡힌 청소년들만이 재야 한다면 대체 연극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그 지속의 시간을 청소년들 스스로만 버텨야 한다면 대체 사회란 무엇이란 말인가. 연극 '죽고 싶지 않아'는 청소년과 어른이 함께 봐야 하는 청소년극이다./권순대 경희대 객원교수권순대 경희대 객원교수

2018-07-08 권순대

[권순대의 '대사 한 줄로 읽는 연극']이제 나도 당신의 자리에 있어요

'처의 감각'을 보고 우리 사회가극장은 누구를 위해 있는가라는물음에 다시 답해야 할 때다둔감함 아닌 민감성 촉수를 지닌주인공인 여자의 감각으로극장은 누구를 위해 있는가. 이 물음에 매력적인 답을 제출한 건축가가 있다. 한스 샤로운(Hans Scharoun). 그는 당시까지 일반적이던 프로시니엄 극장이 아닌 원형 극장으로 음악당을 설계한다. 1963년의 일이다. 독일 시민의 세금으로 짓는다면 그 극장은 마땅히 시민의 것이어야 한다는 생각. 이 감각의 차이가 지금의 베를린 필하모닉 음악당을 만들었다. 카라얀이 지휘를 했던 바로 그곳이다.극장 건축에서 프로시니엄은 무대를 지탱하는 기둥을 뜻한다. 프로시니엄 무대는 프로시니엄을 기준으로 무대와 객석이 분리된다. 무대를 이상적으로 관극할 수 있는 자리는 객석 중앙에 위치하게 된다. 최고 권력자의 자리이다. 원근법의 원리에 따라 설계된 프로시니엄 극장은 객석의 위치에 따라 무대를 보는 시선에 차이가 발생한다. 반면 원형 극장은 무대와 오케스트라를 중앙에 둔다. 중앙에 위치한 무대를 객석이 원형으로 둘러싸고 있는 구조여서 사각이 발생하지 않는다. 한스 샤로운은 음악당에서 울려 퍼지는 소리가 시민 모두에게 골고루 전해지기를 바랐던 것이다. 한국에서도 비슷한 시기에 한 극장이 개관한다. 남산 중턱에 위치한 드라마센터. 1962년의 일이다. 원형 극장을 응용한 돌출무대로 설계된 드라마센터는 정부로부터 불하받은 땅에 록펠러재단의 기금을 주로 해서 세워지게 된다. 그러나 1년여 만에 재정난으로 운영이 중단된 후 학생들의 실습전용무대로 사용하게 된다. 2009년부터는 서울시와 서울문화재단이 매년 10억원의 임대료를 지불하고 운영하고 있다. 지금의 남산예술센터 드라마센터이다.지난 4월 12일 '처의 감각'(고연옥 작·김정 연출)을 남산예술센터에서 관람했다. 굳이 신화적 상상력을 작동하지 않더라도 우리 사회의 이야기로 충분히 치환할 수 있는 무대였다. 연극의 마지막 장면에 이르러 여자는 "이제 나도 당신의 자리에 있어요."라고 말한다. 그 자리는 "사랑할 수 없는 것을 사랑하다가 남김없이 빼앗기고 쫓겨나야 했던, 세상에서 제일 가난한 사람"이 선 곳이다. "세상에서 제일 약한 사람"이 된 여자는 그곳에서 다시 길을 찾는다. 이번 '처의 감각' 공연은 두 가지 단상을 남겼다. 하나는 도시의 삶이 주는 둔감함에 관한 것이다. 한때 곰의 아내였던 여자는 동굴을 떠나 도시에 와서 살게 되지만 그녀에게 도시의 문법은 버겁기만 하다. 여자는 도시에서 밀려난 자이다. 도시의 리듬이 요구하는 둔감함을 유지하지 못하는 여자의 감각은 말해지지 않는 말에 예민하고 전해지지 않는 냄새에 민감하다. 짐멜의 말처럼, 둔감함의 본질이 "사물의 차이에 대한 마비증세"라면 여자는 길들여지지 않은 날것의 감각을 지닌 것이다. '처의 감각'이 말하고 있는 것은 현대 사회가 상실한 사람과 사람, 사람과 사물 사이의 민감성과 그 회복이 아닐까. 다른 하나는 극장의 공공성에 관한 것이다. 공연을 관람한 날 남산예술센터에서는 '공공극장으로서의 드라마센터 정상화를 위한 공개토론회'가 마침 열렸다. 5월 14일에는 2차 공개토론회가 열렸다. 계약 만료 기간이 다가오는 남산예술센터 드라마센터를 공공극장으로 정상화하기 위한 토론의 자리였다. 드라마센터의 공공성은 그 설립 과정뿐만 아니라 극장의 구조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아마도 드라마센터를 통해 한국 연극의 "후진성을 극복하여" "연극을 세계적 수준까지 끌어올리고 싶어"했던 유치진의 바람도 그와 다르지 않았으리라. 우리 사회가 극장은 누구를 위해 있는가라는 물음에 다시 답해야 할 때이다. 둔감함이 아닌 민감성의 촉수를 지닌 '처의 감각'의 주인공인 여자의 감각으로./권순대 경희대 객원교수권순대 경희대 객원교수

2018-05-20 권순대

[권순대의 '대사 한 줄로 읽는 연극']"오늘 주택 할부금을 다 갚았어요."

냉장고·자동차 그리고 집"내 인생에 한 번이라도 좋으니내 것이었으면 좋겠네"라던 윌리는'자동차 할부 끝나니 폐차 직전'인삶의 사이클에서 못 벗어났다.올해 독일 하이델베르크 페스티벌에 한국이 주빈국으로 초청되었다. 오는 4월 27일부터 29일까지 무대에 올리게 된 연극 3편에는 극단 성북동비둘기의 '세일즈맨의 죽음'이 포함되었다. 아서 밀러의 '세일즈맨의 죽음'은 1949년 초연된 이후 지금까지 꾸준히 공연되는 작품이다. 성북동비둘기의 이번 공연에서 주인공 윌리 로먼은 런닝타임 내내 트레드밀 위에서 달린다고 한다. 트레드밀 위에서 쉼 없이 달려야 하는 윌리 로먼은 우리 사회의 보통사람과 닮아 있다. 아서 밀러의 '세일즈맨의 죽음'은 대공황 이후 20년이 지난 미국 사회의 이야기이고, 성북동비둘기의 '세일즈맨의 죽음'은 IMF 이후 20년이 지난 지금 여기의 이야기이다.윌리가 트레드밀 위에서 달려야 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지금 여기의 보통사람이 집을 사기 위해서 얼마나 달려야 하는지를 신한은행 '2018 보통사람 금융생활 보고서'가 잘 보여주고 있다. 보고서에 따르면 전세 거주자는 전국 평균 7.3년이 걸려야 집을 구입할 수 있다. 현재 거주 중인 전세 보증금에 생활비를 제외한 자금을 모두 모았을 때 이야기다. 서울에서는 20.7년이 걸리고 서울 강남에서는 26.5년이 걸린다. 웰세 거주자는 전국 평균 18.4년이 걸린다. 서울에서는 40.1년이 걸리고 서울 강남에서는 49.3년이 걸린다. 그런데 향후 집을 구입할 의향이 있다고 답한 사람은 54.1%에 이른다. 프랑스의 지리학자 발레리 줄레조가 '아파트 공화국'에서 "주택이 유행 상품처럼 취급되는 것은 놀라운 일"이라고 한국의 아파트 열풍에 대해 말한 지 10년이 지났으나 그 사이 정책과 제도, 그리고 주택에 대한 인식이 바뀌었다는 소식은 잘 들리지 않는다. 오히려 달려야 하는 시간이 더 늘어났을 뿐이다.'클라이맥스를 산다'라는 카피가 있었다. '아파트 공화국' 출간보다 조금 앞 선 시기의 한 아파트 광고였다. 메시지는 그럴 듯해 보인다. '이 아파트를 사세요. 인생의 클라이맥스를 살게 될 거예요'. 정도로 들린다. 인생 최고의 순간을 살게 된다는 메시지가 그럴듯하지 않은가. 그런데 이 광고가 어느 날 느닷없이 자취를 감춘다. 사달이 난 사연이 조금은 짐작된다. 클라이맥스는 연극에서 절정을 가리키는데 이게 문제였을 것이다. 한 편의 연극이 발단, 전개, 위기, 절정, 결말의 순서로 이루어진다고 할 때, 클라이맥스는 긴장도가 가장 높은 정점의 순간이다. 하지만 동시에 클라이맥스는 결말 바로 앞에 위치하여 '마지막 바로 직전'이라는 뜻도 포함하고 있다. 아무리 인생의 클라이맥스를 산다고 한들 그곳이 마지막 바로 직전이라면 누가 구입을 원하겠는가.윌리는 25년이 걸렸다. 대공황이 있기 전 30대 중반에 구입해서 이제 예순을 넘긴 나이에 이르렀다. 25년을 내리 달려 도착한 그곳에서 아내 린다가 말한다. "오늘 주택 할부금을 다 갚았어요"라고. 그러나 그는 아내의 말을 들을 수 없다. 린다가 말하는 오늘은 윌리의 장례식이 있는 날이다. 눈물조차 흐르지 않는다는 린다가 반복해서 말한 마지막 네 번의 단어는 '해방'(free)이다. 빚진 것이 없는 해방의 날을 그는 그렇게 맞이하였다. 이제 윌리는 더 달리지 않아도 된다. 윌리에게 꿈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미지의 세계로 모험을 떠나고 싶어도 했으나 그의 발목을 잡은 것은 늘 할부금이었다. 냉장고, 자동차, 그리고 집. "내 인생에 한 번이라도 좋으니 고장 나기 전에 내 것으로 가져 봤으면 좋겠네!"라던 윌리는 "자동차 할부가 끝나니 폐차 직전"인 삶의 사이클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가장 오래 달린 주택 할부금을 갚아야 하는 트레드밀 위에서 그는 마지막까지 내려오지 못했다. 그 위에 한 번 올라서게 되면 좀처럼 내려설 수 없게 된다. 트레드밀의 속도와 다른 삶의 속도를 상상할 수 없게 된다. 이렇게 우리 시대의 윌리는 지금도 트레드밀을 달리고 있다. 클라이맥스를 달리고 있다./권순대 경희대 객원교수권순대 경희대 객원교수

2018-04-01 권순대
1

경인일보 채널

  • 강원일보
  • 경남신문
  • 광주일보
  • 대전일보
  • 매일신문
  • 부산일보
  • 전북일보
  • 제주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