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의 꽃

 

[시인의 꽃]꽃

너는 어디든 나는 빛나고 있다녹슨 자물쇠 무겁게 걸어둔너의 깊은 데서 등불을 켜는 사람너는 슬픔 속속들이 파묻힌숨긴 눈물까지를 환히 보고 있는나의 이 아픔가슴, 가슴의 샛길을 날며 노래하는 종지리퍼덕이는 날개의 깃털을 쓰다듬는 나의 이 기쁨하늘 채광 어리운 푸섶의 이슬같이너의 어디든 내 눈물은 반짝이고 있다. 유안진(1941~)쓸쓸한 가슴에서도 빛나는 사람이 있다. 슬픔을 눈물로 간직한 그 사람은 자신만이 간직한 애절한 그리움의 빛깔로서 깊은 곳에서 더 밝아진다. 당신에게 그런 사람이 있다면 어둠 속에서 꽃처럼 피어나는 한 줄기 빛으로 눈을 감고도 찾을 수 있는. 어디서나 발화되는 그 빛은 '녹슨 자물쇠 무겁게 걸어둔' 상태에서도 '등불을 켜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그에게 나는 숨길 수 없는 '슬픔 속속들이 파묻힌' 시간을 가지고, '숨긴 눈물까지를 환히 보고 있는' 지울 수 없는 흔적들이 켜켜이 쌓여 있다. 그렇다고 '나의 이 아픔'을 누군가가 알 수 없는 법. 때로는 '가슴, 가슴의 샛길을 날며 노래하는' 새가 되어, 그렇게 '퍼덕이는 날개의 깃털을 쓰다듬는 나의 이 기쁨'으로 날아와, '이슬같이' 반짝이다 눈물처럼 떨어지고 마는, 당신의 사랑은 시들지 않는 꽃이 되어 아픈 가슴만큼 빛나고 있다. /권성훈(문학평론가·경기대 교수)권성훈(문학평론가·경기대 교수)

2019-09-23 권성훈

[시인의 꽃]들꽃

이름을 가진 것이이름 없는 것이 되어이름 없어야 할 것이이름을 가진 것이 되어길가에 나와 앉았다.꼭 살아야 할 까닭도목숨에 딸린 애련 같은 거 하나 없이하늘을 바라보다가물들이다가바람에 살을 부비다가외롭다가잠시 이승에 댕겼다가 꺼진반딧불처럼고개를 떨군다.뉘엿뉘엿 지는 세월 속으로만.이근배(1940~)이름이 없다는 것은 하나의 이름에 묶여있지 않다는 말이다. 사물을 구분하기 위해 사용되는 이름은 한번 붙어진 이상 그 이름 밖으로 나가지 못하는 법. 야생에 핀 들꽃은 온실에서 자라는 꽃들이 가지지 못한 몸짓으로 피어나 누구에게도 속해 있지 않는 자유를 가졌다. 보통명사 들꽃은 고유한 이름이 없기에 고유한 정체성을 드러내는 것처럼 '이름을 가진 것이/'이름 없는 것이 되어/이름 없어야 할 것이/이름을 가진 것이 되어 길가에 나와'있지 않던가. 거기서 이름 없는 것들이 이름 있는 것들을 보면서 '꼭 살아야 할 까닭도 목숨에 딸린 애련 같은 거 하나 없이'도 살아야 할 이유를 말해준다. 이른바 이름 있는 당신을 향해 '하늘을 바라보다가/물들이다가/바람에 살을 부비다가/외롭다가' 그렇게 반짝 생을 마감하는 '반딧불처럼' 들꽃은 없는 이름으로, 있는 이름을 소리 없이 가르쳐 주며 '고개를 떨군다' 그리고 바람이 불 때 마다 자신을 흔들며 '뉘엿뉘엿 지는 세월 속으로만' 걸어가고 있지 않던가. /권성훈(문학평론가·경기대 교수)권성훈(문학평론가·경기대 교수)

2019-09-16 권성훈

[시인의 꽃]민들레 꽃씨

날아가 닿는 곳 어디든 거기가 너의 주소다조심 많은 봄이 어머니처럼 빗어준 단발머리를 하고푸른 강물을 건너는 들판의 막내둥이 꽃이여너의 생일은 순금의 오전너의 본적은 햇빛 많은 초록 풀밭이다달려가도 잡을 수 없던 어린 날의 희망열다섯 처음 써 본 연서 같은 꽃이여너의 영혼 앞에서 누가 짐짓 슬픔을 말할 수 있느냐고요함과 부드러움이 세상을 이기는 힘인 것을지향도 목표도 없이 떠나는 너는보오얀 몸빛, 버선 신은 한국 여인의 모시 적삼 같은 꽃이여너는 이 지상의 가장 깨끗한 영혼공중을 날아가도 몸이 음표인땅 위의 가장 아름다운 소녀들 이기철 (1943~)욕망에도 무게와 부피가 있던가. 채울수록 무거워지고 부피를 더해가는 짐처럼 욕망은 채울수록 들어차면서 늘어난다. 가중되는 무게와 커가는 부피를 통해 욕망은 욕구를 키우면서 자신마저 그 안에 전복시키고 만다. 그러면서 뿌리내리지 못하고 끝없이 부유하는 물질 앞에서 빈번히 무릎을 꿇으며 고유한 자신의 정체성마저 상실해 버린다. 반면 가벼움은 무거움으로 측정할 수 없는 무게를 가졌다. 채울수록 무거워지는 욕망을 '버림'으로 벼리는 것같이 가벼움은 무거움을 버리고 민들레 꽃씨처럼 날개 없는 날개를 달 수 있다. "고요함과 부드러움이 세상을 이기는 힘인 것을" 아는 민들레 꽃씨는 '날아가 닿는 곳 어디든 거기가 너의 주소'가 생기는 것처럼. 봄에 개화하여 '몸이 음표인' 꽃씨를 남기는 민들레의 꽃말이 '행복'인 것은, 비로소 '깨끗한 영혼'으로 가벼워져 얻게 된 '비움의 자유'를 이르는 말이다. /권성훈(문학평론가·경기대 교수)권성훈(문학평론가·경기대 교수)

2019-09-09 권성훈

[시인의 꽃]해바라기

구름을 넘는구나 / 빗방울을 뚫는구나따라 도는 / 꽃 / 읽는 해 가던 / 같이 가던 / 길을 / 앓아 / 동행이냐 장마에 / 꽃잎 더 / 노래지는 / 해바라기야함민복 (1962~)해가 움직이는 대로 고개를 움직인다는 해바라기는 8~9월에 개화하고, 꽃말은 숭배와 기다림이다. 하나만을 바라보고 그리워하다가 시들어 말라가는 해바라기는 하늘 먼 곳을 향해 묵묵히 자리를 지킨다. 그러나 배반과 변절로 얼룩져 있는 우리 사회를 보면 해바라기에게서 숭고미를 느끼게 된다. 해바라기의 절대적인 바라봄은 해를 가리고 있는 '구름' 너머로 비바람도 아랑곳하지 않고 '빗방울'을 맞으며 온 얼굴을 허공에 매달고 있다. 하늘에서 돌고 도는 태양은 자신을 '따라 도는 꽃'을 아는지 그렇게 해바라기를 저녁이 될 때까지 마주 보고. 비록 그 거리는 가 닿을 수 없을 정도로 멀리 있지만 그러한 해바라기의 마음을 하루 종일 와닿으며 읽고 있는 해. 해바라기와 해는 서로 '같이 가던 길을' 놓치지 않기 위해 서로 비추면서 가는, 말하자면 '동행'과도 같은 것. 당신도 이러한 동행 하나 있다면 어렵고 힘든 세상의 장마에 가려져 있더라도 '장마에 꽃잎 더 노래지'듯이 서로가 서로에게 노랗게 닳아 닮아갈 수 있으련만. /권성훈(문학평론가·경기대 교수)권성훈(문학평론가·경기대 교수)

2019-09-02 권성훈

[시인의 꽃]연꽃 밭에서

진흙 밭에 빠진 날, 힘들고 지친 날 눈도 흐리고, 귀도 막혀서 그만 자리에 눕고 싶은 날 연꽃 보러 가자, 연꽃 밭의 연꽃들이 진흙 속에서 밀어 올린 꽃 보러 가자, 흐린 세상에 퍼지는 연꽃 향기 만나러 가자, 연꽃 밭으로 가자, 연꽃 보러 가자 어두운 세상 밝혀 올리는 연꽃 되러 가자. 연 잎 위를 구르는 이슬 만나러 가자, 세상 진심만 쌓고 쌓아 이슬 되러 가자, 이슬 되러 가자, 눈도 흐리고, 귀도 막혀서 자리에 눕고만 싶은 날 이건청(1942~)한편의 시가 마음을 움직인다는 것은, 감각과 지각의 차원을 넘어 행동하는데 있다. 인지심리학에서 말하는 인지, 감정, 의지와 같이 느끼고 자각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행위를 보였을 때 비로소 완성되는 것. 우리의 감정을 쉽게 자극하는 시일수록 정서에 와 닿는 속도가 빠르게 작동하는데, 오래 남고 많이 회자되는 시들의 공통점도 이 서정성을 바탕으로 한다. 일생 속에서 경험하게 되는 '진흙 밭에 빠진 날, 힘들고 지친 날 눈도 흐리고, 귀도 막혀서 그만 자리에 눕고 싶은 날'은 감각으로 이루어지며, '연꽃 보러 가자, 연꽃 밭의 연꽃들이 진흙 속에서 밀어 올린 꽃 보러 가자, 흐린 세상에 퍼지는 연꽃 향기 만나러 가자, 연꽃 밭으로 가자, 연꽃 보러 가자'는 지각으로 생겨나는 것. 이와 다르게 '어두운 세상 밝혀 올리는 연꽃 되러 가자. 세상 진심만 쌓고 쌓아 이슬 되러 가자, 이슬 되러 가자'는 목적을 향한 실천적인 것이 되는 것으로써 그러한 의지를 보이는 것이다. '눈도 흐리고, 귀도 막혀서 자리에 눕고만 싶은 날'을 살고 있는 당신도 한편의 시를 통해 마음을 움직일 수 있다면. /권성훈(문학평론가·경기대 교수)권성훈(문학평론가·경기대 교수)

2019-08-12 권성훈

[시인의 꽃]들꽃

젊은 날엔 저 멀리 푸른 하늘이가슴 설레도록 좋았으나지금은 내 사는 곳 흙의 향기가온몸 가득히 황홀케 한다.그때 그 눈부신 햇살 아래선보이지 않던 들꽃이여.흙냄새 아련하게 그리워짐은내 육신 흙 되는 날 가까운 탓.들꽃 애틋하게 사랑스럼은내 영혼 이슬 되기 가까운 탓.오세영(1942~)늙음은 젊음이 모방할 수 없는 기록과, 젊음으로 형언할 수 없는 흔적들이 주름져있다. 그 밑줄 안에는 젊은 날에 저 멀리 바라본 '푸른 하늘'이 들어 있고, 푸른 하늘 속에는 '가슴 설레도록' 좋았던 '청년의 이상'이 새겨져 있다. 그러한 꿈같은 시간들을 지나온 '지금은' 다른 곳이 아닌 가까운 곳에서 삶의 의미를 발견하려고 한다. 어디서나 볼 수 있는 들꽃에서 아름다움을 찾아내듯 '내 사는 곳 흙의 향기'를 '온몸 가득히' 맡을 수 있는 지혜로운 황홀감이 바로 그것이다. 반면 혈기로 채워진 '그때 그 눈부신 햇살 아래선 보이지 않던 들꽃'처럼 늙음이란 '내 육신 흙 되는 날 가까운'데를 더듬는 성찰이자, 젊은 날의 자기반성이 되는 것이다. '들꽃'이 애틋하게 사랑스러운 것은, 인생이란 그렇게 세상이란 들판에 잠시 이슬처럼 맺혔다 가는 것과 다르지 않기 때문에. /권성훈(문학평론가·경기대 교수)권성훈(문학평론가·경기대 교수)

2019-08-05 권성훈

[시인의 꽃]꽃

네 그림자를 밟는거리쯤에서오래 너를 바라보고 싶다팔을 들어내 속닢께 손이 닿는그 거리쯤에오래오래 서 있으면거리도 없이너는 내 마음에 와 닿아아직 터지지 않는 꽃망울 하나무량하게 피어올라나는 네 앞에서발이 붙었다.신달자(1943~)우리의 일상에서 바라만 봐도 좋은 것이 있다. 누구의 소유도 아니지만 아무나 소유할 수 있는 그런 것. 들녘에 피어난 꽃처럼 탐욕 없이 마주할 때, 한아름 마음속 주인이 된다. 욕망을 제거하고 세계를 바라보면 세계로부터 해방되면서 자유로워지는 것같이, '순수'하게 산다는 것은 '더' 가지는 것에서 '다' 가질 수 있는 방법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꽃을 꺾는 순간 꽃은 이미 꽃이 아니면서 꽃이 된다. 전자의 꽃은 모든 이들을 위한 것이 되지만 후자의 꽃은 어느 특정한 이를 위한 것일 뿐. 그것은 경계 없는 것의 경계를 스스로 만들면서 갈등을 초래하는 원인이 되는 것. 당신에게 어쩔 줄 모르는 사랑이 있다면 사랑하는 크기만큼 성긴 '그림자를 밟는 거리쯤에서 바라보라' 또한 사랑하는 깊이만큼 '팔을 들어 손이 닿는 그 거리쯤에 있어라' 그리하면 '오래오래' 가 닿은 사랑은 '거리도 없이' 와 닿아 '터지지 않는 꽃망울 하나'로 '무량하게 피어올라' 갈지니. /권성훈(문학평론가·경기대 교수)권성훈(문학평론가·경기대 교수)

2019-07-29 권성훈

[시인의 꽃]그 꽃의 기도

오늘 아침 마악 피어났어요 / 내가 일어선 땅은 아주 조그만 땅 /당신이 버리시고 버리신 땅 //나에게 지평선을 주세요 / 나에게 산들바람을 주세요 /나에게 눈 감은 별을 주세요 //그믐 속 같은 지평선을 / 그믐 속 같은 산들바람을 /그믐 속 같은 별을 //내가 피어 있을 만큼만 / 내가 일어서 있을 만큼만 / 내가 눈 열어 부실 만큼만 //내가 꿈꿀 만큼만강은교(1945~)꽃씨를 사랑에 비유하면 사랑을 피우기 위한 요소들이 있다. 그것은 사랑이 뿌리내릴 수 있는 토양과 꽃필 수 있는 햇빛 그리고 필요적으로 관심이라는 물이 있어야 하는 것. 말하자면 사랑을 둘러싼 조건들인데, 이러한 것들이 충족되지 않는 이상 사랑은 피지도 못한 채 시들어 버리는 것. 사랑의 힘은 약하지만 '내가 일어선 땅은 아주 조그만 땅'일지라도 끊임없는 시선과 열정으로 한번 피어난 사랑은 힘을 가지게 되며, 사랑의 힘은 모든 것들을 변화시키게 한다. 하지만 '당신이 버리시고 버리신 땅'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인 것처럼 지금이라도 사랑이 움틀 만큼만 그에게 '지평선'과 '산들바람'과 '별'을 보게 하라. 그러면 '그믐 속'에서도 사랑은 피어나 일어날 것이며, 눈먼 밤하늘에서도 눈이 부실 정도로 서로를 열어 줄 것이니. /권성훈(문학평론가·경기대 교수)권성훈(문학평론가·경기대 교수)

2019-07-08 권성훈

[시인의 꽃]할미꽃

이른 봄 양지 밭에 나물캐던 울 어머니곱다시 다듬어도 검은 머리 희시더니이제는 한 줌의 흙으로 돌아가 서러움도 잠드시고이 봄 다 가도록 기다림에 지친 삶을삼삼이 눈 감으면 떠오르는 임의 양자(樣子)그 모정 잊었던 날의 아, 허리 굽은 꽃이여하늘 아래 손을 모아 씨앗처럼 받은 가난긴 긴 날 배고픈들 그게 무슨 죄입니까적막산 돌아온 봄을 고개 숙는 할미꽃조오현(1932~2018)4월과 5월에 개화하는 할미꽃은 꽃대가 굽어서가 아니라 꽃이 지고 나서 열매에 가득 달린 흰털이 하얗게 센 할머니 머리와 비슷하여 생겨 난 말. 슬픔과 추억이라는, 꽃말을 간직한 할미꽃은 그렇게 꽃을 피우던 젊은 날을 지나 추억만 하얗게 매달고 있다. 그것도 들판의 '봄 양지 밭에'서 오지 않을 사람을 오래 기다려 온 듯이 '검은 머리'가 '희어'지도록 그 자리를 지키고 있던 사람. 기억하는가. 바로 당신 때문에 잠 못 이루던 그 사랑. '이제는 한 줌의 흙으로 돌아가' 버렸지만 '기다림에 지친 삶'에서 언제든지 '삼삼이 눈 감으면 떠오르는 임'으로서 '허리 굽은 꽃'이 되어 당신에게 오고, 당신은 '펼 수 없는 그리움'으로 피어난다. 돌아가 돌아오지 않는 당신의 그리움은 미안한 마음에서 제다 '슬픔의 죄'가 되어 '긴 긴 날 배고픈' 추억으로 허기를 달래면서 오늘도 적막한 너머의 고개를 넘어간다. /권성훈(문학평론가·경기대 교수)권성훈(문학평론가·경기대 교수)

2019-06-03 권성훈

[시인의 꽃]장미를 위하여

단 한마디꽃 중의 꽃 장미라고 불렀을 때다른 어떤 말도 보태지 않고그 이름 불렀을 때그는 다소곳이 꽃잎 갈피갈피 감춘혼의 향기를말없이 우리에게 안겨준다한 다발의 장미 그 혼의 향기를가슴에 품고 돌아오는 길은길고 긴 역사의 산정이우러러 보인다홍윤숙(1925~2015)무엇을 위한다는 것은 그것에 대한 소중함을 기억하고 실천하겠다는 의지적 표명이다. 당신이 위하는 꽃이 있다면 여러 종의 꽃 중에서 그 꽃을 차별해 낸 것이며, 다른 꽃들과 분리시켜 당신만의 꽃으로 담고 있는 것. 그것은 꽃에 스며있는, 혹은 겹쳐있는 경험과 시간이 그 안에 머물면서 심화되어 나타난 것이다. 만약 '꽃 중의 꽃 장미'라고 했을 때, 그 장미는 이미 당신 가슴을 물들인 추억의 잎사귀를 가슴 속에 매달고 있는 것 같이. 여름과 맞닿아 있는 오월에 피는 장미는 오월의 슬픈 역사를 관통하며 피로 물든 시기에 피어난다.'장미를 위하는 것'은 표층적 장미가 아니라 심층적 장미를 말하는 것으로, 지나간 장미라는 '그 이름'은 누군가와 잊지 못할 '꽃잎 갈피갈피 감춘' 사연과 사라진 '혼의 향기'를 지닌다. 이른바 '한 다발의 장미'는 이별한 대상에 대한 '한 다발 가슴 깊이 품고'있는 사랑인바, 한때 당신이었을 그대로부터 진동하는 그리움에서 오는 것이다. /권성훈(문학평론가·경기대 교수)권성훈(문학평론가·경기대 교수)

2019-05-20 권성훈

[시인의 꽃]낙화

가야할 때가 언제인가를 / 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봄 한철 / 격정을 인내한 /나의 사랑은 지고 있다 //분분한 낙화... / 결별이 이룩하는 축복에 싸여 /지금은 가야 할 때. //무성한 녹음과 그리고 / 머지않아 열매 맺는 /가을을 향하여 / 나의 청춘은 꽃답게 죽는다. //헤어지자. / 섬세한 손길을 흔들며 /하롱하롱 꽃잎이 지는 어느 날 //나의 사랑, 나의 결별, / 샘터에 물 고이듯 성숙하는 /내 영혼의 슬픈 눈.이형기(1933~2005)영원한 것이 없다는 말은 영원한 것이 있었으면 하는 사람들의 염원에서 기원한다. 헤어짐의 아쉬움이 너무나도 컸기에 미련으로 남아 다른 누구를 만나게 되면, 경험칙상 벌써부터 헤어짐을 걱정하게 되는 것. 우리에게 만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면 '잘 헤어지는 법'이 아닌가. 그것은 소중한 사람일수록 그 사람과의 만남이 끝나더라도 그 기억 속에 영원히 남게 되는 것같이. 헤어짐의 아픔은 잠시이지만 만남의 즐거움은 영원한 시공간에 있는 것같이, 잘 헤어지는 법이야말로 영원한 것이 있다는 것의 역설로 교환된다. 가야 할 때를 알고 떨어지는 한 잎의 꽃처럼 그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나의 사랑'에게 그러하다면 '결별이 이룩하는 축복'이 되고, '무성한 녹음과 그리고 머지않아' '나의 사랑, 나의 결별'로 인하여 '내 영혼의 슬픈 눈'에 "영원의 열매"가 맺힐지니, 안녕. /권성훈(문학평론가·경기대 교수)권성훈(문학평론가·경기대 교수)

2019-05-13 권성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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