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인천의 황금어시장을 찾아서

 

[옛 인천의 황금어시장을 찾아서·28]에필로그-철쭉꽃이 피면 파시가 서고

[경인일보=글·사진/강제윤 (시인·'섬을 걷다' 저자)]# 파시가 끝난 바다는 매립되고세종실록 지리지에 파시라는 이름이 등장할 정도로 파시(波市)의 역사는 길다."토산은 … 조기인데 군의 서쪽 파시평(波市坪)에서 난다. 봄, 여름 사이에 여러 곳의 어선이 모두 이곳에 모여 그물로 잡는데 관청에서 그 세금을 받아서 국용에 이바지한다."(세종실록지리지 나주목 영광군 편)나그네는 '파시' 연재를 마무리하며 이 땅에서 파시가 처음으로 시작됐던 영광 법성포를 찾았다. 파시가 사라진 지 오래지만 연평도와는 달리 법성포는 아직도 조기의 음덕으로 살아가는 땅이다. 법성포 앞바다는 매립 공사의 기계음으로 소란스럽다. 조기잡이 배들이 들어와 정박하던 호수같이 아늑한 바다는 간 곳이 없다. 원형을 잃은 바다, 몇 척의 소형 어선만 묶여 있는 포구는 쓸쓸하고 적막하다. 바다를 매립해 만든 땅에는 대규모 굴비단지가 들어설 예정이다. 옛날 연평도로 올라오던 조기떼는 칠산 어장을 지났다. 이 무렵 부안의 위도와 함께 법성포에도 파시가 섰다. 들고나는 조기 배들과 운반선들, 조기를 사고파는 사람들로 포구는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밤새 장작불을 피워 말리던 덕장굴비의 탄생지이기도 한 법성포. 법성포 파시는 해마다 3월 초부터 4월 말까지 이어졌다. 법성포 파시는 철쭉꽃이 필 때 절정을 이루었다. 그때 칠산어장의 조기들은 대부분 법성포로 실려와 굴비로 만들어졌다. 생조기는 며칠간 소금에 절여진 뒤 덕장에서 말라갔다. 긴 소나무들을 엮어서 위는 좁고 아래는 넓은 건조대를 만들어 세운 것이 덕장이다. 덕장 한가운데에 구덩이를 파고 숯불을 피웠다. 인부들은 조기를 도둑맞지 않기 위해 밤새 덕장을 지켰다. 낮에는 햇빛과 해풍에 마르고 밤에는 숯불의 열기에 말라갔다. 짧게는 1주일, 길게는 2~3개월이 걸리는 지난한 작업. 햇빛과 바람과 밤이슬까지 맞으며 조기는 굴비로 거듭 났고 조기와는 전혀 다른 차원의 맛을 가지게 됐다.지금 법성포에 적을 두고 드나드는 조기잡이 유자망 어선은 4~5척에 불과하다. 40여 년 전 연평도 앞바다에서 조기가 사라진 뒤 칠산 어장에서도 조기가 자취를 감추었고 법성포 파시는 끝났다. 칠산 바다에서는 조기떼가 사라졌어도 법성포는 여전히 한국 굴비산업의 메카다. 법성포에 400여 개, 영광읍내에 200여 개 등 모두 600여 개나 되는 점포에서 여전히 '영광 굴비'가 가공되어 전국으로 팔려 나간다. 하지만 요즈음 옛날 방식으로 덕장에서 굴비를 만드는 집은 더 이상 없다. 주문을 받아 바짝 마른 굴비를 만들기도 하지만 80% 이상은 염장하여 세척한 뒤 한두 시간 정도 물기만 빼고 바로 급랭을 시킨 것들이다. 실상 굴비라기보다는 반건조 조기다.# 굴비가 아니라 '엮거리'일 뿐진양상회 사장 김은만(71) 노인은 평생 조기와 함께 살았다. 직접 조기잡이를 한 적은 없지만 조기 철이면 운반선을 끌고 어장으로 가서 조기들을 사다가 장사를 했다. 칠산어장에서 조기가 사라진 뒤에는 추자도, 가거도까지 조기를 사러 다녔다. 칠산 바다에서 작은 풍선들이 조기잡이를 하던 시절에는 운반선이 역할을 단단히 했다. 조기를 너무 많이 실으면 침몰할 염려가 있고 오래 두면 상할 수밖에 없었다. 바람이 불어주지 않으면 느린 목선으로 노 저어서 포구까지 갈수도 없는 노릇이고, 배에서 팔 수밖에 없었다. 바다 한가운데 시장, 그야말로 진짜 파시였다. 노인은 그 조기들을 모아서 법성포로 싣고 와 위판을 하거나 굴비장사들에게 팔았다. 그 당시는 한 상자에 50마리씩 들어가는 큰 조기들만 잡혔다. 지금은 150마리 이상이 대부분이다. 노인도 자신의 덕장에다 굴비를 말리기도 했었다."가마니를 펴서 조기를 한 벌 깔고 소금을 뿌리고 그 위에 가마니를 덮고 다시 조기를 깔고 소금 지르고. 그렇게 3일 염장을 했어. 그걸 한번 씻은 뒤 걸대에 걸어서 말렸어. 그렇게 두세 달 말렸어. 밤에는 이슬을 맞추고. 그러면 노란 물이 빠지면서 염기가 빠져 나오고 말랐지. 걸대에 걸어 말리는 풍경이 장관이었지."법성포 조기파시는 철쭉꽃이 필 무렵에 성황을 이루었다. 이 무렵에 잡힌 조기는 오사리라 했고 오사리로 만든 굴비는 오가재비라 해서 최상품으로 쳤다. 오가재비를 통보리 독에 넣어두고 먹었다. 노인이 보기에 지금 굴비라고 나가는 것들은 굴비가 아니라 '엮거리'다."적어도 길이가 30㎝ 이상은 돼야지. 지금처럼 작은 조기들을 엮어 대충 물기만 뺀 것들은 굴비가 아니야."큰 것과 작은 것, 덕장에 제대로 말린 것과 반 건조 조기는 맛 자체가 다르니 부르는 이름도 다 다르다. 그러나 지금은 굴비도 아닌 것을 굴비란 이름으로 팔아먹으니 그저 낯부끄럽기만 하다. 법성포에도 진짜 전통 굴비는 많지 않다. 김 사장의 탄식은 멈추지 않는다. 그것은 스스로에 대한 자책이기도 하다."지금은 굴비가 아니여. 엮거리 장사하는 폭이여. 조상님들 간판 팔아먹는 것뿐이여." # 연재를 마치며지난 일 년 나그네는 사라진 '파시'를 찾아 시간의 바다를 항해했다.처음에는 연평도와 덕적도, 굴업도, 소래 등 인천지역 파시의 흔적만을 찾아갈 생각이었다. 하지만 발길은 제주 바다의 추자도와 영광의 법성포, 안마도,송이도, 신안의 흑산도, 가거도, 비금도, 임자도 타리, 재원도, 보령의 녹도, 진도의 조도, 완도의 청산도 등 과거 한때 파시가 열리던 여러 지역으로까지이어졌다. 회유하는 물고기를 쫓아가던 해상의 임시 시장, 파시. 과거에는 어장 철이면 이 나라의 바다 곳곳에 파시가 열렸다.하지만 그 많던 파시는 이제 흔적도 없다. 대부분의 파시는 40~50년 전에 이미 끝나버렸다. 한철 잠깐 열렸다가 사라지곤 하던 파시의 속성상유물이나 기록도 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 또한 선주와 선원, 상인 등 파시의 주역들 대부분은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남아있는 기록은 많지 않고몇 되지 않는 파시 경험자들은 늙어 기억이 희미했다. 늦었지만 그분들이 살아계실 때 찾아가 만날 수 있었던 것은 다행이었다.증언을 해주신 노인들께 감사드린다.

2009-10-06 경인일보

[옛 인천의 황금어시장을 찾아서·27]소래포구 대동굿은 사라지고 교회에서 출어예배

[경인일보=글·사진/강제윤 (시인·'섬을 걷다' 저자)]# 축제마당의 호객꾼이 된 슬픈 토착 신들소래포구에도 오랫동안 풍어굿이 있었다. 하지만 과학기술의 발달은 소래포구에서 풍어굿을 사라지게 만들었다. 과학기술의 위력 앞에서는 어업의 신인 임경업 장군이나 용왕도 기를 펼 수 없었다. 사람들은 더 이상 이들을 찾지 않을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어느 순간 다시 토착신들이 화려하게 귀환했다. 신들을 부른 것은 풍랑의 위협이 아니었다. 관광산업. 섬이나 어촌으로 관광객들이 몰려오면서 토착 신들도 새롭게 부활하고 있다. 소래포구 축제에 풍어굿이 포함되면서 소래의 신들도 돌아왔다. 그러나 그들은 풍어굿의 제물을 받아먹는 신이지만 이제 더 이상 어업의 신이 아니다. 관광의 신이다. 풍랑을 잠재우거나 풍어의 능력을 상실한 신들. 축제 마당의 배우가 된 신들. 포구의 신들은 축제 때만 잠깐 관광객을 부르는 호객꾼으로 전락했다. # 안음전 만신, 선주 집 며느리에서 무교의 사제로오랜 세월 소래포구 풍어굿을 주관했던 사람은 안음전(81) 만신이다. 만신은 황해도 연백에서 시집살이를 하던 중 22살에 첫 신 내림을 경험했다. 한국전쟁 때 피란 내려와 소래에 정착한 새댁은 노량진의 우주옥 선생을 신어미로 모시고 내림굿을 한 뒤 만신이 됐다. 만신은 신당에 연평바다 임경업 장군을 주신으로 삼고 일월성신, 단군님, 옥황상제님, 만성수, 아미타부처님, 관음보살님 등의 신을 함께 모셨다.만신 집안에서 배를 부리면서 만신은 정초가 되면 뱃고사를 올렸다. 그것을 보고 동네 사람들이 하나 둘 뱃고사를 부탁해 왔다. 그 후로 마을 대동굿도 모시게 됐다. 나중에는 선착장 한 가운데서 굿을 했다. 만신 집안의 배에서 굿을 할 때는 앉은굿을 했지만 대동굿을 하면서는 선굿을 했다. 일어나서 하는 큰 굿판을 벌이게 된 것이다. 작두도 타고 공수도 내렸다. 소래의 산만이 아니라 천하명산의 신령님네를 다 불러서 축원을 드렸다. 징, 상장구, 북, 피리 등 5명의 재비와 신딸들을 데리고 굿을 했다. 황해도 굿은 본디 24 거리 굿이지만 모든 거리를 다하지는 못했다. 그래도 인시(새벽 4~6시)에 시작된 굿은 밤 8시가 돼서야 끝났다. 만신은 대동굿이 끝난 뒤에도 신당으로 돌아와 징, 장구를 치면서 사흘 동안 치성을 더 드려야 했다. 그래야 온전한 대동굿이 완성됐다. 그 후 만신은 전국 각지로 안 불려 다닌 곳이 없었다. 극장 무대에도 섰다. 사람들은 황해도 굿을 제일 좋아했다. 연희적 성격이 강해 타령도 하고 만신들도 신명을 다해서 굿을 했기 때문이다. 만신은 54년 동안이나 굿을 하며 살았다. 안음전 만신이 주관하던 풍어굿은 사라지고 이제 가을의 소래포구 축제 때면 김금화 만신이 와서 풍어굿을 주관한다. # "기독교의 하나님이나 옥황상제님이나 다 같은 하느님"소래에서 대동굿이 사라진 것은 1995년 무렵이다. 2004년, 안음전 만신이 은퇴하기 전에 이미 소래의 대동굿은 사라졌다. 포구에서 대동굿이 사라진 것은 교회의 영향이 크다. 하지만 풍어굿이 아주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교회가 풍어굿을 흡수했다. 주관자가 무당에서 목사로 바뀌었을 뿐 풍어굿은 계속된다. 요즈음에도 해마다 출어 전에 소래포구 어민들은 논현 감리교회에서 출어 예배를 드린다. 또 어촌계 공판장에서도 출어 예배를 드린다. 소래포구 350여명의 선주 중에 기독교 신자가 150명으로 가장 많고 무속신앙은 50명 남짓, 나머지는 무신론자들이다. 토착 신앙을 대신해 소래포구의 주도적인 신앙이 된 기독교의 출어 예배는 지역의 큰 행사가 됐다. 어선들은 그해 첫 출어 때나 설, 대보름이면 깃발을 달고 출항한다. 무속신앙이 있는 선주들은 뱃머리에 임경업 장군기를 달고 배 가운데는 오색기를 단다. 배 후미에는 위 상(上)자가 새겨진 깃발을 단다. 하지만 기독교인들은 임장군기나 오색기를 달지 않는다. 그래도 상기 비슷한 것을 다는데 깃 폭에는 상(上)자 대신 십자가를 그려 넣는다.소래에는 배를 타는데도 금기 같은 것이 많지 않았다. 여성들과 관련된 금기가 많은 타 지역과는 달리 소래에서는 1970년대부터 여자들도 함께 배를 타고 조업에 나갔다. 전국 각지에서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들어 형성된 어촌이기에 다들 관습의 제약에서 자유로웠던 까닭이다. 팔순의 안음전 만신은 여전히 정신이 맑다. 포구를 점령한 외래 종교에 대해서도 관용적이다. 타종교에 배타적이지 않은 토착종교의 포용력을 보여준다. 만신은 모든 신앙은 본질적으로 다 하느님을 믿는 것이라며 종교 간의 화해와 상생을 촉구한다. 그것은 종교인들 만이 아니라 이 시대를 살아가는 모든 이들에게 전하는 메시지이기도 하다."하느님 안 믿는 신앙은 없어요. 부르는 이름만 다르지 다 똑같아요. 기독교의 하나님이나 옥황상제님이나 같은 분이에요. 다 같은 하느님을 믿는 거예요. 서로 한 집안 같이 의지해 가면서 지내야 해요."

2009-09-29 경인일보

[옛 인천의 황금어시장을 찾아서·26]월동대비 살오른 가을 꽃게도 일품

[경인일보=글·사진/강제윤 (시인·'섬을 걷다' 저자)]새우나 주꾸미와 함께 소래를 포구답게 하는 대표어족은 꽃게다. 인천을 비롯 수도권 사람들은 싱싱하고 값싼 꽃게를 사러 소래포구를 찾는다. 꽃게는 알배기 봄 꽃게를 일미로 치지만 산란을 끝내고 월동에 대비해 살을 찌우기 시작한 가을 꽃게도 일품이다. 덕적도 인근 어장에서 조업을 마친 꽃게 배가 들어오는 시간이면 소래포구는 발 디딜 틈 없이 북적인다.# 또 하나의 소래 명물 꽃게수심 20~40m의 바다 속에 사는 꽃게는 야행성이다. 밤이 되면 활동을 시작해 조개나 가재, 새우 등을 잡아먹고 산다. 15℃ 이상 되는 바다 속에서 산란한다. 10℃ 이하로 떨어지면 동면에 든다. 그래서 과거에는 꽃게를 동면시켜 일본으로 수출하기도 했다. 오랫동안 덕적도 인근은 최대의 꽃게 어장이었다. 지금도 소래의 어선들은 덕적도 근해로 꽃게잡이를 나간다. 1980년대 덕적도 도우(濤 ) 포구 앞바다는 꽃게잡이 선단의 전진기지였다. 어선들이 꽃게를 잡아오면 모선에서는 꽃게를 포장했다. 최상품 꽃게는 모두 일본으로 수출됐다. 산 꽃게를 수출하기 위해서는 꽃게를 '마취'시켜야 했다. 얼음물 탱크에 산 꽃게를 넣고 15~20분 정도 지나면 꽃게들의 몸이 마비되어 발을 웅크리고 몸이 굳어졌다. 톱밥을 깐 상자에 동면에 든 꽃게를 쌓고 다시 톱밥을 뿌리고 꽃게를 쌓았다. 상자는 테이프로 봉인했다. 비행기를 통해 일본으로 운송된 꽃게는 포장을 뜯으면 다시 살아났다. 이동 중에 온도가 올라가 동면에서 깨어났던 것이다.# "산 꽃게보다 냉장 꽃게가 더 맛있어요"옛날 양반가 중,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이나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 등의 가문에서는 꽃게를 먹지 않았다고 한다. 정도를 가지 않고 옆으로 걷는 걸음걸이나 속 창자가 없는 게의 생리를 금기시한 때문이었다. 제사상에 올리지 않는 것도 같은 이유였다. 오늘날 그런 이유로 꽃게를 먹지 않는 사람은 더 이상 없다. 없어서 못 먹는다. 만만치 않은 가격 때문에 서민들은 쉽게 먹기 어려운 귀물. 하지만 꽃게 철, 소래포구에서는 아주 싼 값에 황해바다에서 방금 올라온 꽃게를 구입할 수 있다. 꽃게는 수족관에 들어가 있는 산 꽃게보다 냉장 꽃게가 더 맛있다고 한다. 그물에서 떼어낸 꽃게를 배에서 바로 얼음에 재어 오기 때문이다. 물론 갓 잡아온 것은 당연히 산 꽃게가 맛있다."죽은 게가 더 맛있어요. 산 게는 수족관에 들어가서 며칠씩 있으니 진이 다 빠져버려요. 배에서 바로 얼음에 재어 오는 것들이 물건이 좋아요."소래선주상인조합 정광철(58) 회장의 말이다. 운반과정에서 시달리고 수족관 속에 갇혀 있느라 진이 빠진 활어 회보다 산지에서 바로 피를 빼고 냉장해서 유통되는 선어회가 더욱 신선하고 맛있는 것과 같은 이치다. 하지만 속을지 모른다는 불안감 때문에 사람들은 여전히 활어나 산 꽃게만을 선호한다.꽃게 중에서도 최고의 맛은 6월의 암게다. 암게는 어두운 갈색이고 수게는 초록빛을 띤 회색에 가까운 갈색이다. 하지만 꽃게는 삶으면 붉은 빛으로 변한다. 아스타산틴 때문이다. 꽃게, 새우, 가재 등의 갑각류나 어패류는 적외선으로부터 몸을 지키기 위해 아스타산틴이라는 색소를 지니고 있다. 단백질과 결합한 아스타산틴 색소는 청록색을 띠지만 분리되면 붉은색으로 변한다. 보통 70℃ 이상이면 아스타산틴 색소와 단백질이 분리된다. 아스타산틴은 항산화 능력도 뛰어나다. 비타민 E보다 550~1천배 이상 되는 항산화력을 가지고 있다. # 바닷모래 채취로 산란장 줄어들어봄부터 늦가을까지 꽃게 철은 길다. 깊은 바다 속에서 겨울을 난 꽃게는 3~4월이면 산란장을 찾아 낮은 바다로 이동하기 시작한다. 들물 때 주로 잡힌다. 이 무렵에는 수게가 살이 많다. 산란 직전인 5~6월이면 꽃게는 아주 얕은 물까지 나온다. 이때는 암게들도 장이 가득 차고 살도 푸지게 오른다. 꽃게는 수온에 민감해서 봄 바닷물이 따뜻하지 않으면 어획량이 눈에 띄게 줄어든다. 민물이 내려오는 육지나 섬 주위의 모래밭이 꽃게의 산란장이다. 뭍에서 흘러내려오는 영양이 풍부하기 때문이다.산란철인 7월 15일~8월 31일 사이는 금어기다. 산란이 끝난 꽃게들은 8~9월이면 뱀이 허물을 벗듯 두꺼운 껍질을 벗어던진다. 탈피(脫皮). 꽃게가 옷을 갈아입는 것은 몸이 크기 위해서다. 허물을 벗은 꽃게는 몸이 훌쩍 자란다. 하지만 딱딱한 껍질을 벗었으나 아직 새 껍질이 야물지 않은 꽃게들은 흐물흐물 물렁하다. 그래서 이 때 잡히는 '물렁게'는 제값을 받지 못한다. 산란을 끝내고 연안에서 영양분을 공급받은 꽃게들은 늦가을이면 다시 깊은 바다로 돌아갈 준비를 한다. 가을 꽃게가 수면으로 뜨는 봄 꽃게와 달리 가라앉으려는 성향이 있는 것은 그 때문이다. 살이 오른 꽃게는 11월말이면 연안에서 자취를 감춘다. 월동을 위해 깊은 바다 속으로 숨어든 것이다. 더러 꽃게 풍년인 해도 있지만 황해바다에서 꽃게는 점차 줄어드는 추세다. 계속되는 바닷모래 채취로 산란장이 사라지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꽃게와 물고기들의 집을 헐어다 사람의 집을 짓는다. 바다 생태계의 파괴가 계속되는 한 언젠가는 소래포구에서도 꽃게를 만날 수 없을지 모른다. 아파트 벽 속에는 얼마나 많은 물고기 알들이 화석처럼 굳어져 있는 것일까. 오늘 소래포구를 포위한 저 대규모 아파트 단지는 사람의 집인 동시에 물고기들의 무덤이다.

2009-09-22 경인일보

[옛 인천의 황금어시장을 찾아서·25]포구 삼키는 신도시…

[경인일보=글·사진/강제윤 (시인·'섬을 걷다' 저자)]# 아파트 단지 건축으로 소래포구 정취 사라져갈 위기광성횟집 이원섭(70) 사장은 황해도 장연군 해안면 순계리 출신이다. 장산곶이나 몽금포가 지척이었다. 그도 1·4후퇴 때 남으로 내려와 전국 각지를 전전하다 인천 송월동에 정착했다. 그 무렵 아버지는 황해도 고향사람을 연줄로 소래에 들어가 살고 있었다. 그는 직장을 다니며 사업도 벌여 보았으나 여의치 않자 1970년 무렵 아버지를 찾아 소래로 옮겨왔다. 아버지로부터 광성호라는 작은 발동선을 물려받았다. 그가 이주해 왔을 때는 소래포구에 30가구 남짓 살고 있었다. 석탄을 때는 협궤열차가 연기를 뿜으며 마을 앞으로 지나다녔다. 포구는 황해도, 평안도 사람 등 피란 나온 이북 사람들의 새로운 터전이 돼 주었다. 이 사장은 새 광성호로 11년간 조업을 했다. 그러다 배를 팔고 다시 인천으로 나가 백석동에서 양돈업에 손을 댔지만 실패하고 결국 소래로 돌아왔다. 그때가 1980년이었다. 지금 자리에서 횟집을 시작했다. 그 사이 건물도 새로 짓고 3번 정도 개축을 해서 오늘에 이르렀다. 하지만 그가 운영하는 광성횟집도 곧 헐리게 된다. 소래포구 해안가에 대형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면서 그의 집터에 도로가 날 예정이다. 보상이야 받았지만 그래도 아쉬움이 크다. 어시장 옆으로 큰 도로가 나게 되면 소래포구가 어촌의 정취를 잃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어촌의 모습이 살아있고 어선들이 드나드니 사람들이 소래로 찾아오지 그런 것들이 사라진다면 굳이 누가 소래까지 올지 우려스럽단다. 그는 개발만이 능사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소래 앞바다에 물고기가 버글버글 했었어"포구로 들어가는 입구 도로변에 천막을 치고 바지락이랑 굴을 까는 사람들이 있다. 노부부와 딸은 상점에서 주문을 받아 작업한다. 어패류는 소래 갯벌에서 나는 것이 없다. 굴은 남쪽에서 올라오고 바지락은 영흥도 쪽 섬들에서 온다. 조부영(83) 노인의 가족도 피란민이었다. 전쟁 전 노인은 황해도 옹진의 '무도'란 섬에 살았다. 열여덟 살 때부터 고깃배를 탔다. 그의 고향이 연평도 바로 근처였으니 조기잡이에도 이력이 났다. 노인은 25세에 가족을 이끌고 피란을 나와 처음에는 덕적도에서 남의 배를 타며 18년을 살았다. 노인 가족도 통일이 되면 고향으로 돌아갈 꿈을 꾸며 고향 가까운 덕적도에 자리 잡았던 것이다. 하지만 통일은 점점 멀어 보였다. 그래서 1960년대 말 소래로 이주했다. 소래에서만 25년 남짓 배를 부리고 살았다. "피란민들이 여기 와서 오두막을 짓고 살았어. 이 동네가 다 '뻘바탕'이라 길바닥이 모두 뻘거덕 뻘거덕 했지."장명식씨가 어촌계장을 맡고 결성 건어물 장영수 사장이 서기를 할 때 비로소 포구에서 소래역 사거리까지 신작로가 났다. 신작로가 깔리자 포구까지 '구루마'도 다니기 편해졌다. 잡아온 생선은 대부분 곡식과 바꿔 먹었다. "바다에 쫓아다니며 그냥 그냥 사느라고 세월이 어찌 가는 줄도 몰랐다." 포구에는 처음 피란민들이 정착했고 후에는 "전라도서 객지 나와 돌아댕기던 애들이 여와 살아보니 밥은 먹을 것 같거든, 그래 연줄 연줄로 해서 올라오고." 그렇게 포구에 정착민들이 늘어났다."그때는 팔아먹는 것도 몰랐어. 이고 다니면서 곡식하고 바꾸고. 가을 김장 때는 인천에서들 새우젓 사러 오고. 피란 와서 해먹을 건 없고 고기 잡아서 곡식하고 바꿔 유지하고 살았어. 말도 못하게 고생했어. 죽지 않으니 사는 거여. 그때 산 사람들은 불쌍했어. 우리네들이 와서 오륙년 있으니 사람들이 오기 시작하고, 팔기도 하고."당시에는 소래포구 바로 앞바다에만 가도 물고기들이 버글버글 했었다."이 앞에만 나가도 고기가 많았어. 민애, 농애, 광애, 아주 좋은 반찬 잡아 와도 시세가 없었어. 시방은 민애같은 것 볼래도 볼 수가 없어." # 바지락 까는 '서해안 갯가 노래' 기능 보유자사람들은 젊어서 소래로 와 다들 소래에서 늙었다. 그 사이 낡은 건물들은 철거되고 주변에 신도시가 생겼다. 노인도 새우와 꽃게를 주로 잡았었다. 그 시절에는 봉디 새우와 대하도 많이 잡혔다. 그물 한 틀에서 봉디 새우를 40박스까지 잡은 적도 있었다.'서해안 갯가 노래' 기능 보유자이기도 한 노인은 60살에 뱃일을 그만 둔 뒤 여기저기 불려 다니며 공연을 하고 살았다. 연평바다에서 고기잡이하며 배웠던 노래가 세월이 흐르면서 문화재가 된 것이다. '노 젓는 소리' '쟁기 소리' '고기 퍼 싣는 소리' 등의 노동요. 힘든 노동을 이기고 기운을 북돋기 위한 노래들이었다. 노인은 "시방은 심이 들어서 못하고 제자들이 다하고 제자들이나 가르치고" 산다. 노인이 배를 부릴 때는 아내도 같이 배를 탔다. 노인이 뱃노래 공연을 다닐 때 아내는 어시장에서 바지락 장사를 했다. "그때는 여기 뻘에도 같이 올라 배에도 대녔고, 할마이 고생 많이 했어요. 늙어서 잘해 줘야 할텐디 잘 할 힘도 없고."노인은 팔순의 아내가 여전히 바지락을 까고 굴을 깨는 노동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 안타깝다. 자신이 공연하고 돌아다니느라 한참 포구가 클 때 장사에 집중하지 못했던 것이 후회스럽기도 하다. 그때 돈을 벌어 놓지 못해 늙어서까지 아내를 고생 시키는 것이 미안한지 말씀을 하시던 노인의 눈가가 먹먹해 진다.

2009-09-15 경인일보

[옛 인천의 황금어시장을 찾아서·24]목숨 걸고 새우를 잡던 시절

[경인일보=글·사진/강제윤 (시인·'섬을 걷다' 저자)]# 배 새로 짓고 일주 만에 비용 다 뽑아옛 소래역에서 포구로 들어가는 입구에는 건어물 상점이 몇 곳 있다. 그 중 한 집인 결성건어물 장영수 사장은 소래포구의 산증인 중 한 사람이다. 그는 황해도 옹진에서 온 피란민이다. 월남전에 참전했다가 돌아온 1969년부터 소래에서 배를 탔다. 장 사장은 아버지의 작은 목선을 물려받았다. 지금은 육지가 된 오이도 앞 바다에 나가 새우와 꽃게, 농어, 숭어, 망둥이, 주꾸미 등을 잡았다. 장 사장은 소래포구에서 최초로 기계배를 직접 건조한 세 명 중 한 사람이다. 그때가 1970년대 초였다. 장순호, 임사열씨가 함께 배를 건조했다. 그때도 동력선이 몇 척 있었지만 외부에서 들여온 배들이었다.목재는 일본에서 수입된 삼나무를 세 사람이 공동으로 사왔고 한 척 당 배 목수 2명씩이 붙어서 한 달 만에 배를 지었다. 엔진도 국산을 썼다. 장 사장의 배는 3.19t, 다른 두 사람의 배는 5t짜리였다. 장 사장은 결성 장씨인 자신의 본을 따 결성호라 이름 붙였다. 장 사장이 새로 건조한 배로 다시 시작한 조업의 결과는 대박이었다. 쌀 한 가마니에 6천원하던 시절, 배를 새로 짓는데 146만원이 들었다. 그런데 그 비용을 1주일 만에 다 뽑았다. 송도 앞바다에 숭어 그물을 쳤는데 거기서 1주일 동안 매일같이 만선이었다. 하루에 보통 열 서너 박스씩 건져 올렸다. 날이 추워지면 숭어들은 월동을 위해 갯벌을 떠나 더 깊은 바다로 이동을 시작한다. 그때는 바다에 막 살얼음이 끼기 시작한 12월 24일, 25일 무렵이었다."갯고랑에 살얼음질 때 숭어는 반쯤 동면 상태로 떠내려가요. 거기에 그물을 뒤집어 씌웠으니. 그저 쓸어 담은 셈이었지요."그 무렵부터 소래포구의 어선들도 규모가 커지고 노를 젓던 전마선들도 동력선으로 대체되기 시작했다. 오이도 앞바다 정도까지만 가던 배들이 차츰 팔미도, 초치도, 덕적도, 문갑도, 선갑도, 굴업도, 연평도까지 어장을 넓혀 나갔다. 당시 45마력의 배로 덕적도까지 5시간이 걸렸다. 850마력 엔진을 단 지금 배들은 2시간이면 충분하다. 소래포구가 번성하면서 장 사장의 배도 세 척으로 늘어났다."그물 걷느라 손톱도 갈라지고 허리 병신이 됐어요." 지금 소래포구에서 새우잡이는 보통 3월부터 시작돼 12월이면 끝이 난다. 하지만 1985년 금어기가 생기기 전까지는 내내 조업을 했었다. 소래포구의 배들은 오젓은 잡지만 살이 통통하고 맛이 가장 뛰어난 육젓은 거의 잡지 못했다. 육젓은 신안 앞바다에서 주로 잡혔다.새우잡이 그물은 낭장망을 썼다. 그물이 긴 주머니처럼 생겼다해서 낭장망이다. 보통 물발이 세지는 3물 때부터 새우가 들기 시작한다. 그 후 1주일 남짓 새우가 많이 나고 다시 잡히는 양이 점차 줄어든다. 새우가 나지 않는 조금 물때에는 어장 주변의 섬에 들어가 그물 손질을 했다. 그물이 보름 남짓 바다 속에 잠겨있다 보면 파래 등의 해초가 자라서 그물코를 막는다. 그래서 그물을 햇볕에 말린 뒤 해초를 털어내고 찢어진 곳은 보수해야 했다. 실제 어로는 한 달에 보름 정도. 많이 잡힐 때는 당일 소래포구로 귀항했지만 양이 적을 때는 포구로 돌아오지 않았다. 기름 값을 아끼기 위해서였다. 그때 잡히는 새우는 배에서 바로 젓갈을 담았다. 잡은 새우를 한 배에 30드럼씩 싣고 항해를 하면 갑판이 수면에 잠길 정도로 찰랑찰랑 위태로웠다.그물에 든 새우를 건져 올리는 작업은 보통 1시간에서 1시간30분 정도면 끝난다. 그물은 바다 속에 떨어뜨린 닻에 고정시킨다. 배를 정박시키는 닻은 행닻이라는 이름으로 부른다. 지금은 닻 하나의 무게가 800㎏이나 되는 쇠닻을 쓰지만 1970년대 초까지만 해도 참나무로 닻을 만들어 썼다. 하지만 참나무 닻은 '소'라는 벌레가 갉아먹어 오래 쓰지 못하는 단점이 있었다.# 오염과 개발로 멸종돼 가는 어류들금어기가 없던 때, 장영수 사장은 어느 해 8월 15일 쯤 안산의 육도 근해까지 가서 새우를 잡았다. 새우잡이를 마치고 귀항하던 장 사장은 총에 맞을 뻔 했다. 영흥도에 해군 검문소가 있었다. 물건이 적을 때는 문제가 없지만 물건이 많을 때는 촌각을 다투며 소래포구로 실어가야 했다. 장 사장은 배에서 바로 젓을 담지 않고 생물로 운반했다. 그러니 무더운 여름이라 쉽게 상할 수 있었다. 한번은 검문에 불응하고 가려는데 검문소를 지키던 군인 하나가 실탄으로 위협사격을 했다. 운이 나빴다면 총을 맞았을 것이다. 목숨 걸고 새우잡이를 하던 시절 이야기다.바다 오염과 간척으로 갯벌이 사라지면서 함께 사라져버린 새우와 조개들도 많다. 예전에는 푸른빛이 도는 '봉디 새우'도 많이 잡혔다. 중하 정도 크기의 봉디 새우는 중국 음식점 등에서 많이 썼다. 봉디 새우를 삶아서 말린 뒤 양파 망 같은 데 넣고 방망이로 두드리면 껍데기는 벗겨지고 알맹이만 남았다. 그 달고 고소한 새우는 인천공항이 들어선 뒤 인천 앞바다에서는 더 이상 잡히지 않게 됐다. 소래 갯벌에는 또 재첩보다 조금 큰 싸죽 조개가 쫙 깔려 있었다. 칼국수라도 해먹고 싶으면 갯벌에 나가 그냥 주어다 끓여 먹으면 그 시원한 맛이 최고였지만 이제 싸죽 조개도 멸종되고 없다.만수동, 간석동, 신천리 등에서 내려오는 오폐수와 한국화약에서 나온 독극물로 소래갯벌은 서서히 죽어갔고 갯벌의 생물들도 멸종돼 갔다. 한국화약에서 농약을 몰래 방류해 망둥어와 전어들 시체가 갯벌을 뒤덮은 적도 있었다. 장마가 끝나면 덕적도 앞바다까지 쓰레기장으로 변했다. 냉장고, TV, 돼지, 호박, 맥주병, 콜라병 등 안 떠다니는 것이 없었다. 쓰레기를 밟고 다녀도 될 정도로 바다는 온통 쓰레기 밭이었다. 그물에는 물고기 대신 쓰레기만 들었다. 그물에 걸린 캔맥주를 건져 마시기도 할 정도였다.

2009-09-08 경인일보

[옛 인천의 황금어시장을 찾아서·23]"총각은 새우를 먹지 마라"

[경인일보=글·사진/강제윤 (시인·'섬을 걷다' 저자)]# '혼자서 여행하는 사람은 새우를 먹지 말라'한국에서 젓새우가 가장 많이 나는 곳은 임자도와 낙월도 등 신안의 바다다. 이 지역에서 전국 젓새우의 60% 이상이 산출된다. 중국산이 아닌 국산의 경우 소래나 광천 토굴젓 등 이름난 새우젓들도 대부분 여기서 난 젓새우를 사용한다. 대부분의 젓새우는 배에서 잡는 즉시 소금에 절여진다. 새우 양의 15~40%에 해당하는 소금을 넣고 절인 새우는 대개 유명한 새우젓 산지로 가서 숙성 과정을 거친 뒤 시장에 나온다. 더운 한여름에 잡히는 육젓은 김장철까지 오래 보관해야 하기 때문에 소금을 많이 넣지만 가을에 잡히는 추젓은 소금의 비율을 낮게 잡는다. 보통 굴이나 창고 등의 서늘한 곳에서 2~3개월 정도 발효시키면 새우젓이 탄생한다.임자도 전장포, 소래 포구, 강경, 광천, 마포 등이 예부터 새우젓 시장으로 유명했다. 젓새우는 잡히는 시기에 따라 이름도 다양하다. 음력 3~4월의 새우는 춘젓, 5월에 잡히는 것은 오젓 혹은 오사리젓이라고도 한다. 산란기인 6월에 잡히는 육젓이 최상품이다. 다른 새우보다 살이 통통해 값은 비싸지만 김장용으로 선호된다. 7~8월은 자젓, 9~10월은 추젓, 추젓은 주로 요리에 사용된다. 1~2월 한겨울의 새우는 동백하젓, 2~3월 깊은 바다에서 잡히는 가장 작은 새우로는 곤쟁이젓을 담는다. 그 밖에도 자하젓, 차젓, 풋젓, 동젓, 닷대기 젓 등 새우젓의 수는 많기도 하다. 민물새우로 만든 것은 토하젓이다. 새우 극상의 맛은 옛날 궁중 진상품으로 올리던 새우 알젓이다. 새우는 흔히 강장식품으로 알려져 있다. 그래서 '혼자서 여행하는 사람은 새우를 먹지 말라'거나 '총각은 새우를 먹지 말라'는 등의 식담이 생겨났다. 새우의 영양분은 머리에 가장 많다. 가재 등 다른 갑각류와 달리 새우만이 머리에 알을 싣고, 뇌와 정소, 간장 등에는 단백질이 풍부하다. 그래서 '머리가 붙어 있지 않은 새우는 먹지 말라'는 식담도 생겼을 것이다. 음식은 성질이나 영양이 한 쪽으로 치우치지 않은 평성음식이 몸에 이롭다. 음식 궁합을 중요시 한 것은 그 때문이다. 산성이 강한 새우는 아욱 등의 알칼리성 채소와 함께 먹는 것이 궁합에 맞다. 성질이 찬 음식인 보리밥에 더운 성질의 풋고추를 함께 먹는 것도 그런 이치다.# 새우 한 마리가 일 년에 알 180만개 낳아찬바람이 불기 시작하자 소래포구 생새우 값이 두 배로 훌쩍 뛰었다. 해마다 반복되는 현상이다. 김장철이 가까워질수록 생새우 값은 치솟는다. 싼값에 생새우를 사려고 왔던 관광객 일부는 입맛을 다시며 발길을 돌린다. 몰리는 인파에 비례해 가격은 등락을 거듭한다. 지난 일요일에는 한 말(3㎏)에 10만원까지 치솟았다 한다. 보통 10월 중순이면 한 말에 1만5천원씩 하던 생새우가 11월 들어서는 평균 4만원 선이다. 새우는 화석이 고생대 데본기 때부터 나타날 정도로 오래된 생물이다. 전 세계 바다에 2천500여종이 살고 있으며 한국의 바다에는 그중 100여종이 서식한다. 보리새우류, 생이류, 가재류가 모두 새우라 부르는 것들이다. 젓새우는 보리새우류에 속하는데 보리새우, 대하, 중하, 꽃새우 등이 이 부류다. 생이류에는 도화새우, 자주새우가 있고 가재류에는 닭새우, 가시발새우 등이 있다. 바다 새우는 해하(海鰕), 민물 새우는 이하(泥鰕)라 했다. 일본에서는 허리가 굽은 생김새 때문에 바다 노인(海老)이라 부르기도 한다. 새우는 번식력이 탁월하다. 암컷은 한 번에 보통 60만개 이상의 알을 낳고 1년에 3번까지 번식한다. 새우 한 마리가 일 년에 180만개의 알을 낳는 것이다. 생존율은 1.9% 이하지만 알의 수가 엄청난 까닭에 새우류가 그토록 번식한다. 새우들도 회유성 어족이다. 서해안에서 태어난 새우들은 그 작은 몸으로 동중국해까지 내려갔다가 이듬해 봄, 모해로 돌아와 산란한다. # 새우젓만큼이나 생새우도 많이 팔리는 소래포구 저물녘 소래포구, 사위는 이미 어둠에 잠기기 시작했다. 소래포구 어선들의 주요 어장은 덕적도 인근과 자월도 부근의 초치도 바다다. 뒤늦게 새우 배 한 척이 어장에서 포구로 들어온다. 제 3평안호. 선원들은 젓새우가 담긴 노란 플라스틱 박스들을 하역한다. 대기 중이던 인부들이 손수레에 옮겨 싣고 위판장으로 옮긴다. "신창호 것 주시오." "신흥호 것 주시오." 위탁받은 어선의 새우를 찾는 인부들의 호명소리가 이어진다. 평안호는 운반선이다. 뱃전에 그물이 없으니 어선이 아님을 눈치챌 수 있다. 운반선은 한번 출어하면 보름씩 들어오지 않고 붙박이로 조업하는 닻자망 어선들이 잡은 새우를 대신 운반해 준다. 보통 어획량의 1할 정도가 운반선의 몫이다. 비좁은 통로를 오가며 인부들은 연거푸 소리를 질러댄다. "비켜요 비켜."소래의 젓새우들은 젓갈용으로도 팔리지만 김장철이면 부둣가에서 생새우로 팔리는 양이 더 많다. 상인들이 소비자에게 생새우를 파는 단위는 말, 반말, 1㎏, 한 근 등 다양하다. 한 말은 상인들이 임의로 만든 단위다. 작은 플라스틱 통을 한 말로 친다. 통의 크기는 해마다 줄어들었다. 곡식을 담는 됫박이 대두에서 소두로 줄어든 것과 같다. 과거에는 5㎏이었지만 요즘 소래에서는 3㎏을 한 말로 친다. 한 근은 400g. 소비자들은 필요에 따라 근으로 사기도 하고 킬로그램이나 말로 사기도 한다. 김장철이면 사람들은 때깔이 좋은 흰새우나 육젓을 찾지만 "김치 담그는 데 비싼 새우나 비싼 오젓, 육젓 사다 넣을 필요없다"고 소래포구에서 수 십 년 새우젓 배를 부린 선주는 충고한다. 가을에는 육젓보다 빨간 새우나 잡젓이 살이 더 많고 맛이 있기 때문이란다.

2009-08-25 경인일보

[옛 인천의 황금어시장을 찾아서·22]피란민들이 소래포구 어업 발달 이끌어

# 소래 포구의 산증인, 어촌계[경인일보=]1935년 일제는 화약의 원료가 되는 천일염 반출을 위해 수인선 철도를 건설했다. 철도와 함께 소래포구의 역사도 시작됐다. 철도 건설 초기에는 건설 노동자들과 염전의 염부들을 실어 나르는 나룻배가 포구를 드나들었고 차츰 포구에 정착한 몇몇 주민들도 전마선(노를 젓는 작은 배)으로 어업 활동을 시작했다. 하지만 일제하에서 소래포구는 크게 번성하지 못했다. 소래포구 도약의 계기는 한국전쟁 피란민들의 정착이다. 어로 경험이 있는 피란민들이 소래의 어업을 주도했다. 1963년 2월, 어촌계원 23명이 모여 임민선씨를 초대 어촌계장으로 추대하고 소래 어촌계를 탄생시켰다. 1970년대 초에는 어선들의 어획물을 육상에 하역할 수 있는 공간인 '물양장'이 조성됐고, 소래포구가 유명세를 타기 시작한 1970년대 중반에는 어선 수도 150여척으로 급증했다. 1980년대들어 소래포구는 더 크게 번성했다. 1982년 인천항에 소형 어선의 출입이 금지되면서 인천의 어선들이 소래포구로 대거 몰려 온 것도 계기가 됐다. 그 해 어촌계원은 200명으로 늘어났다.포구의 번성과 함께 횟집들도 증가했다. 1983년 정부는 오랫동안 무허가로 운영되던 횟집들을 양성화시켰다. 이때 지역 주민 32명이 허가를 얻었다. 1983~86년 사이 소래포구는 최전성기를 누렸다. 1984년 11월 한 달 동안 소래포구를 다녀간 사람은 18만명이 넘었다. 그때는 관광버스가 하루 평균 100대씩 밀려들었다. 김장철이면 새우젓 산지로 신문, 잡지, 방송 등에 소개되고 드라마와 영화의 배경으로 빈번히 등장하면서 소래포구는 전국적 유명세를 탔다. 처음에는 새우젓과 생새우를 사려는 사람들이 주로 찾아왔지만 점차 소래에 가면 갓 잡아온 활어 회를 먹을 수 있다는 기대감이 사람들을 끌어 모았다. 수도권 인근에는 소래포구처럼 옛 정취를 간직한 포구가 남아있지 않은 것도 사람들을 몰리게 만든 이유였다. 소래 어촌계도 홍보에 적극적이었다. 1981년부터 새우를 사러 오는 사람들에게 소래 어촌계 전화번호가 새겨진 봉투를 팔았다.# 갯벌을 매립해 만든 물양장소래포구를 찾는 사람들 대부분은 물양장 판매대에 가득 쌓인 어물들을 한두 가지쯤 사 본 기억이 있을 것이다. 판매대의 면적이라 해 봐야 고작 3.3㎡ 남짓밖에 안 된다. 더러 두세 개의 매장을 터서 하나의 가게로 쓰는 집들도 있지만 대부분은 3.3㎡짜리 가게다. 하지만 이 작은 가게 하나에서 나오는 수익은 상상을 초월한다.소래포구 물양장은 1975년 대통령 특별 하사금(교부금)과 어민들의 울력으로 탄생했다. 공유수면인 갯벌을 매립해 3천300여㎡ 남짓의 땅을 만들었다. 하지만 매립지에 지번이 생긴 것은 1987년 한 차례 보강 축조 공사로 물양장 땅이 4천960여㎡로 늘어난 뒤였다. 그 전까지는 매립된 땅이었지만 문서상은 바다로 남아 있었다. 주민들이 만든 땅이었으나 땅은 끝내 주민들의 소유가 되지 못했다. 정부에서는 주민들에게 소유권을 줄 의사가 있었지만 주민들 사이에 의견 통일이 이루어지지 못했다. 어촌계 명의로 할지 개인 명의로 할지 결정하지 못하자 결국 땅은 수산청으로 넘어갔다가 다시 재경부의 소유가 됐다. 지금은 인천시 남동구가 재경부에서 위탁관리권을 넘겨받아 주민들에게 임대해 주고 있다. 계약은 1년 단위로 이루어지고 있지만 점유권이 인정되니 소유권이 있는 것이나 다름없다. 인천 남동구청 관계자에 따르면 2008년 기준 물양장 내의 좌판 수는 332개, 좌판 1개당 1년 임대료는 평균 127만원선이다.물양장 조성 초기 좌판은 어촌 계원들에게만 배분이 됐었다. 배분이 되고 남은 자리에는 타 지역에서 들어온 상인들이 물건을 받아다 팔기도 했다. 상인들에게도 좌판의 권리가 돌아가게 된 것은 1990년대 초 소래갯벌 한국 화약의 매립공사 반대 투쟁 후였다. 한동안 물양장 좌판 점유권을 두고 선주들과 상인들 간에 다툼이 있었다. 관광객이 늘어나고 시장의 이권이 커지면서 생긴 일이었다. 결국 싸움은 법정까지 갔고 상인들의 권리도 인정됐다. 그 일을 계기로 상인 번영회가 생겼다. 이후 소래포구 상인회, 젓갈 상인회 등이 생기면서 소래포구에는 어민과 상인 조직의 분화가 촉발됐다. 차츰 도로변의 횟집들도 '구도로 상가 번영회' '신도로 상가 번영회' 등으로 조직화됐다.# 새우, 꽃게, 주꾸미 등으로 소래산 체면 유지물양장은 1987년에 한 차례 보강 축조되었지만 1996년 주변 정비사업이 시작되기 전까지는 지붕이 없는 노천 시장이었다. 어한기에는 그물을 쌓아 놓는 장소로도 이용되곤 했다. 주변 정비사업으로 시장에 지붕이 생기고 준공식이 이루어진 것은 1997년 1월 29일이었다.처음에는 소래 배들이 당일 조업해 온 수산물을 직거래했다. 당일 잡아온 물건을 직판한다는 소문을 타면서 포구를 찾는 관광객들이 더 많아졌다. 소래포구 물양장의 매출액이 이미 소래 어촌계의 어획고를 넘어선 지 오래다. 이제 소래포구는 더 이상 선주들이 아니라 시장 상인들에 의해 좌우된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상인들은 밀려드는 손님들을 놓치지 않기 위해 공급이 불안정한 선주들의 배에만 기대지 않고 안정적인 거래처를 확보해 두고 장사한다. 그래서 소래포구 어물전 수산물의 대부분은 소래포구가 아니라 외부에서 유입된 것이다. 취재 중 만난 선주들의 상인들에 대한 불만도 그것이었다. 꽃게나 새우, 주꾸미처럼 소래에서 많이 나오는 수산물은 상인들도 선주들로부터 매입하여 판매하지만 광어나 우럭, 도미같은 어류들은 공급이 안정적인 양식산을 선호한다. 물론 2008년 봄처럼 광어가 풍년일 때는 좌판에도 자연산이 올라온다. 그러나 자연산이 사철 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물양장의 수족관은 대체로 양식산으로 채워진다. 글·사진/강제윤 (시인·'섬을 걷다' 저자)

2009-08-11 경인일보

신종플루 감염 태국인 도시축전 관람

[경인일보=목동훈·김명래기자]'인천세계도시축전' 관람객들이 신종플루 감염 위험에 노출돼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신종플루 보균자가 도시축전을 관람한 것으로 뒤늦게 밝혀져 대책 마련이 시급하다.10일 인천시와 질병관리본부 등에 따르면 인천에서 열린 '제12회 걸스카우트 국제야영대회'에 참석한 태국인 2명이 신종플루에 감염된 것으로 지난 8~9일 확인됐다. 이들은 지난 7일 도시축전을 관람한 것으로 드러나 2차 감염의 우려가 있다.태국인 K대원은 지난 8일 오후 2시께 발열증세를 보였다. 한국걸스카우트연맹은 K대원과 텐트를 함께 사용한 대원 3명 등 총 4명에 대한 역학조사를 보건당국에 의뢰했다.K대원은 이날 오후 9시30분께 신종플루 확진환자로 밝혀졌다. K대원과 역학조사를 함께 의뢰했던 대원 3명 중 1명은 다음날(9일) 신종플루 확진환자로 판명됐다.K대원 등 걸스카우트 대원들은 지난 7일 도시축전을 관람했다. 7일에는 이명박 대통령을 비롯 국내외 인사 등 5만여명이 도시축전 주행사장을 찾았다. K대원 등 태국인 2명은 신종플루 잠복기 상태에서 도시축전을 관람한 것으로 추측된다.질병관리본부 관계자는 "신종플루 전염기는 증상 발생 하루 전 날부터 소멸 때까지다"며 "이때 다른 사람에게 (신종플루를) 옮길 수 있다"고 했다. 7일 도시축전 행사장에서 이들 태국인과 접촉한 관람객들은 신종플루에 감염될 가능성이 있다는 얘기다.도시축전 주행사장에는 '신종플루 상황실'이 마련돼 있다. 그러나 10일 오후 4시 확인한 결과, 상황실 직원들은 신종플루 확진환자 발생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시 보건정책과 관계자는 "걸스카우트 신종플루 확진환자 문제는 아동청소년과에서 담당하고 있다. 우리는 노코멘트다"고 했다. 보건정책과는 인천지역 신종플루 확진환자 수도 공개하지 않았다. 이 관계자는 "암암리에 16개 시·도가 환자 수를 공개하지 않는 것으로 됐다"며 "지역경제와 행사에 나쁜 영향을 줄 수 있기 때문에 (비공개를) 이해해 달라"고 했다.

2009-08-10 목동훈·김명래

[옛 인천의 황금어시장을 찾아서·21]소래포구, 저무는 부둣가에 파시가 서면…

#어시장 풍경들[경인일보=]포구 시장 골목, 간장 게장을 파는 여자는 같은 자리에서 30년 동안이나 노점을 했다. 꽃게 철에는 주로 간장 게장을 담가 팔면서 낙지젓과 생굴 무침도 함께 판다. 꽃게가 나지 않는 철에는 말린 생선 장사로 생업을 이어간다. "이 시장에서는 한 가지만 고집해서는 장사가 안 된다." 지금도 시장은 발 디딜 틈 없이 북적이는데 여자는 옛날에 오히려 장사가 더 잘 됐다고 회상한다. "그때는 많이 사다가 냉동 해놓고 먹으니까 장사가 잘 됐어요. 지금은 다들 외식을 많이 하니까 장사가 잘 안돼요. 반찬거리도 잘 안사가고. 지금이야 김장철이라 새우 사러온 사람이 많지만 이 때 뿐이에요. 횟집도 옛날 보다 안돼요. 구경만 하고 가는 사람들이 더 많아요."여자는 게장은 그날 담근 것을 판다. 그래야 집에 가면 맞춤하게 익은 게장을 먹을 수 있다. 여기서 익은 것 사가면 "쩔어서 물이 안 좋다." 간장 게장 암 꽃게는 5~6마리 한통에 2만원. 시내의 게장 정식 집에서는 저런 꽃게 한 마리 올려놓고 2만원도 받고 3만원도 받는다. 충북 양념집 앞에서부터 물양장 좌판 골목이 시작된다. 과거에는 젓갈전, 생선전, 조개전, 활어전들의 구분이 있었지만 지금은 그 구분이 무의미해졌다. 마른 생선 좌판 옆에 조개좌판이 있고, 그 옆에 활어집도 있다. 좌판의 주인들이 바뀌면서 자꾸 더 잘 되는 품목으로 바꾸다보니 그렇게 됐다. 그래도 여전한 것은 중간의 젓갈 좌판과 바닷가 쪽으로 난 활어난전 정도다. 그쪽이 그래도 손님도 안정적이고 꾸준한 까닭이다. 시장 들머리에 대하를 파는 왕새우 좌판이 있다. 대하는 두 종류다. 태국산은 1kg에 1만5천원. 사우디산은 1kg에 1만8천원이다. 상인은 사우디아라비아산이 더 맛있다고 권한다. 보기에도 때깔이 좋아 보인다. 사막의 나라에서 웬 해산물인가 싶지만 시장에는 의외로 사우디 산 수산물들이 많다. 대하는 대부분이 냉동이다. 수입산 냉동새우를 해동해 판다. 왕새우 좌판 주인여자는 "소래는 전부 외국산 대하"라고 단언한다. 국산은 가격도 비싸고 물량도 많지 않기 때문이란다. 생선들은 자연산보다 양식이 더 많다. 놀래미는 무조건 자연산으로 알고들 있지만 놀래미도 양식이 있다고 여자는 귀띔한다. 자연산이 나지 않는 겨울에는 중국산 양식 놀래미가 들어온다는 것이다. 양식 물고기들은 아무리 큰 것도 2㎏을 넘지 않는다. 사료 값 때문에 더 키우면 양식업자들이 수지가 맞지 않고 너무 큰 것은 손님들이 잘 찾지도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3~4㎏씩 되는 광어, 우럭 대물들은 자연산이라고 보면 무방하다. #회칼을 잡은 비범한 '여 검객'바다 전망을 확보한 물양장 앞줄 생선 좌판들은 즉석 회를 떠서 판매한다. 관광객들은 돗자리를 깔고 앉아 전어와, 광어, 우럭 회를 먹고 홍합 국물에 소주를 마신다. 작정하고 도시락을 싸온 나들이객들도 눈에 띈다. "비켜요 비켜." 활어 좌판대 앞을 가득 메운 인파를 뚫고 여자 하나가 대물 농어 한 마리를 보듬고 뛰어온다. 상하기 전에 어서 빨리 횟감으로 팔아 넘겨야겠다는 집념이 보인다. 여자는 소래 수산 좌판 앞에서 길을 멈춘다. 소래수산 주인여자에게 농어를 건네며 횟감으로 쓸만 한지 봐달라고 부탁한다. 족히 10㎏은 될 듯한 대어다. 주인 여자는 그다지 물이 좋아 보이지 않는 농어의 몸체를 살핀 뒤 아가미를 들춰보더니 이내 고개를 가로젓는다. "아가미가 하야면 날로 못 먹어. 어떤 생선이든 아가미가 빨개야 날 것으로 먹을 수 있어." 농어 주인 여자는 가져올 때의 득의양양하던 표정은 간 곳 없고 힘이 쭉 빠져서 돌아간다. 농어가 이제는 100kg도 더 나가는 것처럼 무겁게 느껴질 것이다.회를 뜨는 숙수마다 각자 나름대로의 비법이 있지만 소래 수산 주인여자는 참으로 노련하다. 단칼에 활어의 숨통을 끊는 솜씨가 평범한 칼잡이의 그것이 아니다. 검객이 적의 숨통을 끊듯이 단칼이다. 여자가 우럭 회를 뜬다. 퍼덕거리는 우럭의 머리를 칼등으로 때려 기절시킨 뒤 단숨에 멱을 따니 우럭의 목이 댕강 잘리고 힘줄에서 피가 솟구친다. 그것을 흐르는 물에 씻으니 피가 쫙 빠져나간다. 생선회는 피를 빼는 것이 관건이다. 피를 잘 빼야 비린 맛이 없다. 여자는 비범한 검객이다. 여자는 이곳에서만 20년째 활어장사를 해왔다. 20년 칼잡이. 지나던 남자 손님이 물으니 여자는 작은 우럭 두 마리가 1만5천원이라 한다. 남자는 작은 것 한 마리 더 달라고 한다. 여자는 단칼에 거절한다. 칼 솜씨처럼 장사 또한 담백하다."안 사도 괜찮아요. 한 마리 더 주고 팔 거면 안 파는 게 낫지." 말없이 사라졌던 남자는 잠시 후에 다시 돌아온다. 더 싸게 파는 집이 없었던 모양이다. "지금은 손님들이 너무 약아 갖고. 약은 정도가 아니에요." 손님들이 값을 더 잘 알아버리니까 힘들단다. "좋은 물건 갖다 손님들한테 싸게 줄라고 하면 더 싸게 먹어 버릴라하니." 초입에서는 양식 우럭이 1㎏에 2만원이었다. 이 집은 1만5천원이니 많이 싼 편이다. 여자는 이제 약은 손님들 상대로 약은 짓을 할 수 없으니 그저 박리다매를 지향한다고 강조한다. 칼 솜씨가 좋으니 가능한 일일 것이다.올해(2008년) 소래포구의 젓새우는 예년에 비해 나오는 물량이 많지 않다. 추젓은 한 드럼에 도매가로 40만원에 거래된다. 포구를 찾는 관광객들 대부분은 김장에 쓸 정도의 소량만을 구입해 간다. 11월 어느 날, 소래 포구의 오후, 아직은 한창 밀물 때. 김장철이 다가오면서 포구는 입추의 여지가 없다. 비좁은 물양장 통로를 걷는다기보다 떠밀려 다니는 사람들. 그 어디에도 송곳 꽂을 틈 하나 없다. 많은 사람들이 김장용 새우젓 가게 앞에서 걸음을 멈춘다. 사람들 사이를 빠져 나가는 일은 전쟁에 가깝다. 새우젓배가 들어오는 수협 공판장 앞 부둣가도 혼잡하기는 시장통과 진배없다. 덕적도 근해에서 갓 잡혀온 젓 새우들이 부둣가로 쏟아져 내린다. #소래포구에 새우잡이 배가 들어오면 소래포구 부녀 회원들이 배에서 막 내린 젓새우를 받아 좌판을 벌인다. 젓새우는 '말통'이라 부르는 플라스틱 통에 담아서 판다. 순식간에 포구에는 새우 파시가 선다. 아직은 새우값이 싼 편이다. 1말에 1만원에서 1만5천원 정도. 본격적인 김장철이 시작되면 새우값도 덩달아 뛴다. 그때는 가격이 지금의 배 이상이다. 김장철이 다가오자 부지런한 사람들은 새우가 조금이라도 쌀 때 사다가 냉동해 두려고 소래포구를 찾았다. 가을부터 봄까지 소래포구의 또 하나의 명물은 꽃게다. 올해는 꽃게가 풍년이다. 꽃게는 작년(2007년)에 비해 30% 이상 더 많이 잡히고 있다. 암꽃게가 1㎏에 1만5천원, 수꽃게는 1만2천원. 꽃게는 활꽃게, 냉동 꽃게로도 팔리고, 간장게장과 무침으로도 팔려 나간다. 조업 나갔던 꽃게 배들이 들어오면 포구 시장안의 좌판은 물론 부둣가 바닥에도 꽃게 난전이 벌어진다. 새우 파시 한쪽에 꽃게 파시가 서는 것이다. 글·사진/강제윤 (시인·'섬을 걷다' 저자)

2009-08-04 경인일보

[옛 인천의 황금어시장을 찾아서·20]도시의 섬, 추억을 파는 소래 포구

# 꼬마기차"색소폰 소리보다 더 깊은 폐부에서 울려오는 듯한 경적 소리, 잘가락 잘가락 밟히는 바퀴 소리, 그리고 갓 출가하여 여대생 티가 가시지 않은 채 팔뚝에 연비자국이 아직 아물지 않은 수해 스님을 태워 보내기 위해 어느 날 새벽 별을 보며 배웅 나갔던 여섯시 반의 이른 새벽 열차…."윤후명의 소설 '협궤열차' 속에서 그려지는 열차의 모습은 애잔하다. 1970년대 말쯤이었다. 송도역에서 협궤열차를 타고 소래에 처음 가 본 것이. 열차는 장난감 열차 같았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 작은 열차를 '꼬마기차'라 불렀다. 그때는 송도에서 수원까지 46.9㎞의 노선만 살아 있었다. 송도에서 출발한 기차는 남동, 소래, 달월, 군자, 원곡, 고잔, 일리, 사리, 야목, 어천을 거쳐 종착역인 수원역에 도착했다. 협궤 열차가 사라지기 전, 인천에 살았던 사람 중 꼬마 기차에 대한 추억 하나쯤 없는 사람은 드물 것이다. 수인선 철도는 일반 철길 폭의 절반 밖에 안 되는 폭 72.6㎝의 협궤 철로였다. 마주 앉은 승객의 무릎이 맞닿을 정도로 객차 안은 좁았다. 협궤열차는 문학과 방송, 영화 등의 무대로 활용되면서 유명세를 탔고 덩달아 소래포구의 명성을 높이는데도 크게 기여했다. 바람이 제법 거세다. 이제 더 이상 기차가 다니지 않는 소래철교에는 난간이 설치되었고 사람들은 자유롭게 건너다닌다. 철로가 있던 자리에는 포장마차와 식당과 난전이 들어섰다. 거기서 사람들은 한 잔에 천 원짜리 막걸리 한 사발을 마시고, 전어 구이를 먹고, 호떡과 국화빵, 마른 새우와 멸치를 사간다. 생굴무침과 바지락을 팔러 나온 행상들, 텃밭에서 기른 호박과 시금치, 고추, 알타리무를 들고 나온 할머니들도 있다. 철로에서 마시는 막걸리 맛은 각별하지만 나는 여전히 협궤열차가 사라진 것이 못내 아쉽다. 소래포구는 협궤열차 때문에 생긴 포구였다. 소래포구가 생기기 전에는 대부분의 배들이 시흥시 포동의 새우개포구로 드나들었다. 1907년 일제는 주안에 시험용 염전을 만든 것을 시작으로 바닷물을 끓여서 만드는 전통 자염(煮鹽) 생산지였던 주안, 남동, 소래, 군자 등지에 대규모 천일염전 단지를 만들었다. 1935년, 일제는 그곳에서 생산된 천일염을 인천항으로 반출하기 위해 수인선 철도를 깔았다. 거기서 나온 수익은 조선총독부의 자금줄이 됐다. 해방 후에도 호황을 누리던 염전은 1980년대 중국산 소금의 유입으로 값이 폭락하면서 폐염전이 됐다. 수인선 철도는 천일염뿐만 아니라 쌀과 광물자원까지 반출하기 위해 일제가 만든 경동철도선의 일부였다. 일제하에서 수탈의 길이었던 수인선이 해방 후에는 철로 변 주민과 학생들의 고마운 발이 돼 주었다. 하지만 1980년대 이후 자동차도로의 확장에 따라 철도 이용객 수가 급감했다. 협궤열차는 만성적인 적자에 시달리다 몇 번의 노선 단축 끝에 1995년 12월 31일 운행을 영원히 정지했다.# 포구로 가는 길협궤열차가 멈추면서 소래역도 사라졌다. 소래역이 있던 자리는 버스 종점이다. 21번, 27번, 32번, 38번, 754번 버스들이 인천과 소래 사이를 왕래한다. 종점에 도착한 시내버스는 잠깐의 휴식 뒤 다시 왔던 곳으로 돌아간다. 버스종점 주변에는 상가가 많지 않다. 2008년 가을, 종점 슈퍼도 문을 닫았다. 버드나무 아래서는 할머니 한 분이 끝물 고추를 따가지고 나와 관광객들에게 판매중이다. 종점 근처에서 오랜 세월 살아온 원주민이지만 할머니는 소래포구가 번성한 덕을 크게 보지 못했다. 농사만 지어온 탓이다. 소래포구의 오래된 옛집들 일부는 주변의 새로 생긴 고층 아파트 단지 사이에 섬처럼 떠 있다.할머니는 연거푸 "고추 사가세요. 고추 사가세요" 사정하지만 시든 고추를 사주는 사람은 거의 없다. 어떤 노인 한 분이 천원어치 한 바구니 갈아준다. 할머니는 그 노인이 고맙다. "아저씨, 맛있게 잡숫고 건강하소." 팔순의 할머니는 자꾸 고맙다는 말을 되풀이 한다. "고맙수다. 고맙수다." 같은 돈이지만 돈이 흔한 포구의 어시장이나 횟집들과 돈의 가치가 이렇듯 다르다. 소래포구 안길의 시작은 원주민 공인중개사 앞부터다. 길 휴게실은 문을 닫은 지 오래고 그 옆 왕대포집에서는 막걸리 한 사발에 천 원씩이다. 왕대포집 앞 은행나무 아래 할머니 한 분이 굴을 까고 있다. 노인은 보리와 검은콩, 생강 따위도 놓고 팔지만 손님은 드물다. 오른쪽 빈 터에서는 소래포구 회 센터 공사가 한창이다.소래버스 종점에서 소래포구로 들어가는 길목은 온통 기계음으로 요란하다. 아직도 신축 중인 공사장이 사방에 널렸다. 이미 아파트단지와 대형 건물들이 들어선 거리는 더 이상 시골 동네가 아니다. 소래에서 옛 모습을 간직한 곳은 포구 부둣가와 물양장(物揚場)뿐이다. 건너 월곶에도 신도시가 들어섰다. 포구 또한 신도시 속의 섬이 되고 말았다. 사람들은 소래에, 마지막 남은 섬에 닿고 싶어 밀물처럼 몰려든다. 만조가 되었던 사람의 물결은 밤이 깊어서야 썰물처럼 빠져 나간다.본격적인 어시장 상권의 시작은 충청도 횟집부터다. 생선구이와 새우튀김, 오징어 튀김, 잔술로 파는 막걸리와 돼지 껍데기 등이 횟집 앞 좌판에 나와 있다. 지나가는 관광객들을 유인하기 위한 먹거리들. 수족관 앞에는 조개구이용 조개들이 접시 가득 담겨서 관광객들을 유혹한다. 건어물 상점 좌판에는 한치와 쥐포, 멸치, 홍합, 문어포, 오징어채, 건새우, 돌김, 북어포 등이 나와 있지만 소래산 건어물은 새우뿐이다. 옹진횟집, 칡즙가게, 옷가게, 그 옆은 결성 건어물이다. 결성 건어물 한편에는 마른 생선을 파는 노부부가 있다. 상가 건물 중간 중간에는 굴과 바지락, 꼬막을 파는 노점이 있고 간장게장과 굴 무침을 파는 좌판이 손님을 부른다. 대복횟집, 소래바다횟집, 중앙횟집, 호남횟집, 광성회센터 등이 이어진다. 이들은 큰 도로변에 대형 횟집들이 들어서기 전에 생긴 소래포구 1세대 횟집들이다. 어물뿐만 아니라 쑥개떡과 감자떡을 파는 수레에도 손님이 기웃거리고 찐빵 가게에서는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른다. 글·사진/강제윤 (시인·'섬을 걷다' 저자)

2009-07-28 강제윤

[옛 인천의 황금어시장을 찾아서·19]해일보다 무서웠던 파시의 종말…

# 1923년 굴업도 해일로 200여척의 어선 조난'어기 중 굴업도 전면 선박 파괴 200여척'. 동아일보 1923년 8월 16일자 기사의 제목이다. 기사는 해일과 폭풍으로 130호의 가옥이 파괴되고 굴업도 항에 대피했던 100척과 항 밖에 있던 100척 등 모두 200여척의 민어잡이 어선이 조난당했다고 보도한다. 바다는 잠잠했고 해일의 조짐은 어디에도 없었다. 8월 12일 아침부터 내리기 시작한 비가 전조라면 전조였을까. 하루 밤낮을 꼬박 비가 쏟아지더니 8월 13일 아침, 바다는 갑자기 폭풍에 휩싸였다. 100여척의 어선들은 거센 바람과 파도를 피해 굴업도 내항으로 피난했고 나머지 어선들은 항 밖에 닻을 내리고 폭풍이 지나가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거센 바람은 그치지 않았고 곧이어 무서운 해일이 밀어닥쳤다. 아비귀환. 내항 외항 할 것 없이 굴업도는 아수라 지옥으로 변했다. 당시 민어잡이 어선 한 척에는 보통 5~6명씩 승선했으니 해일은 200여척의 배에 승선한 1천200여 선원들을 삼켜버렸다. 파시촌을 형성했던 조선 가옥 120호와 일본사람 상점 6호, 중국사람 상점 2호도 '바람에 날려 자취도 없이 사라졌다'. 취재를 위해 굴업도를 방문했던 동아일보 기자는 "인가는 바람에 날리고 어선은 파도에 잠겼고 사람은 용왕의 밥이 되었다"고 당시의 참상을 기록했다. 후일 일제의 피해 상황 집계에 따르면 굴업도에서만 사망 실종자가 120명이다. 그러나 실제 피해는 그보다 더 컸을 것이다. 사고 후 굴업도 이재민들에게는 사망자 가족 10원, 기타 3원씩의 보상금이 지급됐다.1923년 8월의 해일 사고를 지금 굴업도 주민들은 '기미년(1919년) 윤칠월' 태풍으로 기억하고 있다. 주민들은 모두가 기미년 태풍 때 '장수리 파시촌'이 큰 피해를 입었다고 증언했다. 하지만 이는 1923년이라는 다수의 당시 신문 보도 기록들과는 어긋난다. 아마도 잘못 전해진 집단 기억이 아닐까 싶다. 해일 이후 일제는 굴업도의 어업 근거지를 덕적도 북리로 옮기게 했다. 그러나 해일 사고 뒤에도 한동안 굴업도에서는 민어 파시가 계속 됐다. 이는 주민들의 증언이나 당시 신문기사가 일치한다. 1925년 6월 25일자 동아일보 기사는 굴업도 파시 기사를 전한다. "3개월 동안 어부와 음식점, 웃음을 파는 매소부 등을 합하면 3천여 명에 달한다. 금년에도 사람이 많아서 인천경찰서에서 순사 2명을 파견했다." 1927년에도 어부 500~600명과 상인 500여명 등 모두 1천여명이 파시를 형성했다. 그 이후 더 이상 굴업도 파시에 대한 기사는 보이지 않는다. 아마도 덕적도 북리의 축항공사가 진척되자 굴업도 민어 파시는 규모가 작아지면서 자연스럽게 종말을 고했을 것이다.파시가 소멸되자 굴업도는 다시 한미한 어촌으로 돌아갔다. 한동안 굴업도는 소를 기르는 목장이 됐다. 집집마다 2~3마리씩 소를 방목해 키웠다. 이기윤씨 일가가 기르던 방목 소가 가장 많아 한때 97마리까지 됐다. 1950년대에도 방목 소가 20마리 정도 있었다. 1959년 굴업도를 방문했던 '국립 박물관 서해도서 조사단'은 굴업도가 덕적면에서 가장 빈곤한 섬이었다고 기록했다. 그때는 모두 15가구가 살고 있었다. 원주민이 6가구, 피란민이 9가구였고 소형 어선이 두 척 있을 뿐이었다. 피란민들은 일정한 생업 없는 구호대상자들이었고 주민들도 어업 노동자로 품을 팔아 연명했다. # 햇배에서 뒷통질로 민어낚시1950~1960년대에도 굴업도 어장에서는 민어가 많이 잡혔다. 조기잡이 유자망 어선 선주를 하다 후일 덕적면장을 지낸 굴업도 작은 마을 출신의 이장용(77)씨는 아버지, 할아버지까지 3대가 어업에 종사했다. 일제 때 굴업도에는 이씨의 아버지 이학천씨와 김동률, 이재희씨 세 사람이 각기 한 척씩의 민어잡이 배를 운영했었다. 이씨에 따르면 한국전쟁 이후에도 연평도 조기파시가 끝나면 민어잡이 낙배 수백 척이 굴업도로 몰려들었다. 충남지역에서 온 낙배는 반드시 '낙지배'를 끌고 와서 굴업도 목금이 선착장 부근에 정박시켰다. 낙지배는 배처럼 생긴 작은 수조였다. 충남 배들은 낙지배 가득 낙지를 싣고 와서 살려 둔 채 민어의 미끼로 썼다. 낙지는 출어 전에 산 채로 자르거나 살짝 데쳐서 쓰기도 했다. 민어는 6월부터 초가을까지 잡혔다. 어부들은 울대라는 대나무 꼬챙이를 바다에 대고 소리를 들어 민어 떼가 있는 곳을 찾아냈다. 굴업도의 민어 어장은 굴업도 북동쪽 청골과 굴업도 개머리 앞 바다, 덕물산 앞의 동뿌리 어장, 굴업도와문갑도 사이의 굴업골, 백아도와 굴업도 사이의 민어탄 등이 주요 어장이었다. 똥섬 앞의 준치여에서도 민어가 많이 잡혔다. 굴업도 사람들은 낙배와는 다른 '햇배'라는 소형어선으로 민어를 잡았다. '햇배'는 '뒷통질'로 민어를 잡는다 해서 뒷통배라고도 했다. 굴업도 배들은 주로 개머리 앞 바다에서 뒷통질을 많이 했다. 작은 돛단배로 하룻밤에 일이백 마리씩의 민어도 쉽게 잡았다. 어떤 때는 동뿌리에서 선미도까지 옮겨가며 주낙을 놓기도 했다. 굴업도에서는 조기도 낚시로 잡았다. 민어는 소금에 절여 말려 두었다가 충청도 태안, 서산 등지로 팔러 다녔다. 민어 알을 기름 발라 말린 민어 알포도 유명했다. 이화용(77) 노인은 굴업도 큰마을이 고향이다. "굴업도는 정거장이었어. 충남이나 전라도, 인천 산지사방 배들이 몰려와 여기서 다 잡아갔지." 지금 굴업도 선적의 어선은 꽃게잡이 배 한 척 뿐이다. "굴업도는 뱃석이 안 좋아 백아도로 배를 대러 갔어." 바람이 불어도 배를 안전하게 정박시킬 수 있는 곳이 '뱃석'이다. 노인은 굴업도 역사의 산증인이다. 굴업도는 1년에 한 번씩 당제사를 모셨는데 제주가 정해져 있었다. 굴업도에 처음 이주해온 벗개의 장씨 할머니가 처음 제사를 모시기 시작했는데 후일 타지로 이사 가고 나서는 가장 연장자인 이 노인의 어머니가 물려받아 해마다 제사를 모셨다. 노인도 돛을 두 개 단 5t짜리 햇배로 오랜 세월 민어잡이를 했다. 노인이 민어잡이를 하던 1960년대에 굴업도에는 햇배가 네댓 척 뿐이었다. 노인과 이장용, 문갑성, 최영복씨 등이 선주였다. 나일론 그물이 생기고 기관 배들이 몰려들면서 민어어장은 고갈되어 갔다. 글·사진/강제윤 (시인·'섬을 걷다' 저자)

2009-07-21 경인일보

[옛 인천의 황금어시장을 찾아서·18]
"굴업도 앞바다가 인천항구 같았어"

# 개머리, 폭풍의 언덕굴업도 개머리 해안, 드넓은 초지는 오래 전 섬의 목장이었다. 소떼를 방목하던 목초지가 지금은 방목 염소와 사슴들의 터전이다. 초원의 길을 따라 개머리 끝 절벽으로 간다. 인기척에 놀랐는지 풀숲 속에 숨어 있던 사슴의 무리 쏜살같이 달아난다. 굴업도 이장 집에서 키우던 사슴 한 쌍이 울타리를 탈출한 뒤 스스로 번식해서 지금은 대가족을 이루었다. 마른 억새가 무성한 목초지 가운데 아기 염소 한 마리 처참하게 죽어 있다. 맹금류의 먹잇감이 된 아기염소. 황조롱이 한 마리 상공을 선회하다 사라진다. 필시 저 황조롱이의 짓이다. 섬은 매와 황조롱이, 검독수리, 말똥가리 등 멸종위기종 맹금류의 서식처다.사나운 날짐승의 한 끼 식량으로 바쳐진 어린 들짐승. 생(生)은 저토록 처참하고 잔혹하다. 생은 누구의 편도 아니다. 여리고 어린 생명이라 해서 봐주는 법이 없다. 한 목숨 죽어야 한 목숨 이어지는 생애의 벌판. 우리는 모두 남의 목숨으로 연명하는 생의 도축자들. 목숨이 주식인 생이여. 나는 육을 먹으나 내 몸을 이루는 것은 고기가 아니다. 내 몸은 영혼들의 집합소. 내 몸에 쌓인 영과 혼들. 헤아릴 수 없는 목숨들이 쌓여 한 목숨 이루었다. 굴업도 개머리 해안, 폭풍의 언덕에서 나는 내가 아니다. 어디에도 나는 없다. 나 아닌 것들이 모여 내가 되는 생이여. 목숨이여!# 인천 앞바다 대표적 민어어장, 굴업도굴업도(掘業島)는 응회암으로 형성된 섬이다. 화산 폭발 후 그 재가 날아와 쌓이고 쌓여서 만들어졌다. 1983년 국립중앙박물관 조사단의 패총 발견으로 굴업도에도 선사시대부터 사람이 살았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삼국시대, 고려시대에도 굴업도에는 사람이 살았을 것이다. 하지만 굴업도 역시 여말 선초의 공도정책으로 섬은 수백년 동안 비어 있었다. 그러다 본격적으로 굴업도에 사람이 정착해 살기 시작한 것은 19세기 중반부터다. 당시 굴업도에 처음 들어간 이들은 덕적도의 벗개(서포리) 사람들이었다. 오래 전부터 벗개 사람들은 어기에는 굴업도에 들어가 농막을 치고 어로활동을 하다 어기가 끝나면 철수하곤 했었다. 그러던 중 1890년경 장수성이란 벗개 사람이 처음 이주해 살기 시작했다. 벗개 사람들이 살기 전에도 굴업도에 들어온 충청도 사람들이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해적들의 노략질을 견디지 못하고 다시 섬을 떠났다. 1864년(고종1년) 덕적진 첨사가 굴업도에 왜구들이 쳐들어와 노략질을 한 사건을 보고한 문서에 그 기록이 남아 있다. 보고서는 당시 굴업도에 6가구가 살고 있었다고 기록한다. 그때 섬주민들은 쌀과 비단, 삼베, 광목, 식기, 유리 항아리, 솜옷, 솥뚜껑까지 강탈당했다. 8·15 해방 때까지도 굴업도에는 6가구가 살고 있었고 1952년에는 피란민의 유입으로 23가구까지 살았지만 지금(2009년1월 5일 현재)은 10여 가구만 산다.굴업도 어장은 연평도, 백령도, 팔미도, 남양만, 대청도, 초치도, 만도리 어장 등과 함께 인천 바다의 대표적인 어장이다. 덕적군도의 어업 근거지도 본래 굴업도였다. 1920년 전후 민어어장이 발견되면서 전국 각지에서 어선들이 몰려들었고 굴업도에는 파시가 형성돼 여러 해 동안 사람들로 들썩거렸다. 외지 상인들이 들어와 선구점과 술집을 열었다. 여름철 민어파시 때면 사건사고 처리를 위해 인천에서 순사가 파견되기도 했다. 박명숙(81) 노인은 13살 때 충청도 태안에서 이사와 굴업도에서만 죽 살았다. 어렸을 때 어른들에게서 민어파시 이야기를 들었다."그때는 작사라 했어. 목금이 너머가 술집이 꽉 찼었어. 화류계라 했었대. 색시들이 많았대. 목금이 마을이나 물 닿는 장수리 위에도 술집들이 아주 꽉 찼었대."그때는 큰 마을 섬과 목금이 마을을 연결해 주는 모래톱인 장수리가 지금보다 높아 만조 때도 물이 넘나들지 못했다. 그래서 파시 때면 그 장수리 위에 천막을 치고 술을 팔았다. 파시 때는 낙배라 부르던 민어 중선배들이 많이 들어왔다. 낙배는 돛이 세 개였고 노를 양쪽으로 세 개씩 모두 여섯 개 걸치고 다니며 연승 낚시로 민어를 잡는 배였다. 목금이 마을과 장수리, 작은 마을까지 임시 가옥이 들어섰고 색싯집도 문을 열었다. 비좁은 땅에 어부들까지 몇천 명이 바글거렸다.# 선박 300척, 상인 500명 북적이던 굴업도 파시노인은 굴업도로 이사 온 1920년대 말까지도 술집이 많았다고 기억한다. 해일로 사고가 난 뒤에도 여전히 파시가 이어졌다는 말이다. 그때는 "목금이 너머 바다에 민어잡이 배들이 까맣게 떴었어. 인천 항구 같았지". 어선들이 들어오면 마을 여자들은 김치를 가지고 나갔고 어선에서는 대야 가득 민어를 담아줬다. 주민들은 또 참외 같은 과일도 심어서 뱃사람들에게 팔았다. 파시 때 가장 많은 집은 술집과 요릿집이었다. 장사꾼들은 대부분 외지인이었다. 굴업도 주민 중에는 덕적도에서 건너와 살던 할머니 한 사람만 막걸리와 소주를 팔았다. 막걸리는 직접 담그고 소주는 덕적도에서 탄자(옹기)술을 사다가 팔았다. 크고 작은 사건이 끊이지 않았다. 어느 해에는 색주가에서 술을 마시던 선원이 작부를 살해하기도 했다. 그 선원이 밤중에 도망을 가서 피 묻은 옷을 빨았던 웅덩이 부근 바위를 굴업도 사람들은 살인바위라 불렀다.1923년 8월 15일자 동아일보는 당시 굴업도 민어파시 소식을 전하는 기사를 내보냈다."작년부터 어장이 생김에 따라 사람들이 모여들어 제법 시가를 이루었다. 여름이면 사람들이 모여들어 영락하던 무인도에 수백 명의 번창한 어촌을 이룬다. 금년에도 인천서에서 주재소를 설치하고 의사도 출장하였다." 당시 파시에는 조선인만이 아니라 일본, 중국 상인까지 있었다고 기사는 전한다. 1923년 파시에는 충청도 서산, 보령, 전라도, 제주 등지에서 온 선박 300여 척과 선원, 상인 등 2천여 명이 몰려들었다. 음식점, 색주가, 선구점 등만 130여 호에 500여 명이 종사했다. 이 때는 인천과 굴업도를 임시 왕래하는 발동선도 출항했다. 하지만 바로 다음날 동아일보는 굴업도에 일어난 참극을 전하고 있다. 번성하던 파시가 갑자기 밀어닥친 해일로 초토화된 것이다. 글·사진/강제윤 (시인·'섬을 걷다' 저자)

2009-07-14 경인일보

[옛 인천의 황금어시장을 찾아서·17]1936년 8월 '민어의 어기로 덕적도 대혼잡'

# "인천 근해의 어장 중 '넘버원' 덕적도"덕적군도는 일제 초부터 굴업도 민어어장과 울도 새우어장의 발견으로 호황을 누리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굴업도가 덕적군도의 어업 전진기지였다. 하지만 1923년 대해일로 굴업도에 피항 중이던 100여 척의 어선이 파선되고 많은 인명피해가 나자 일제는 어업전진기지를 덕적도 북리로 옮기게 했다. 1925년경부터 북리항에는 전국 각지에서 몰려든 중선(中船) 배들로 북적거렸다. 연평도 조기잡이가 끝나는 6월말부터 8월 초순까지 북리 어장과 굴업도, 각흘도 어장 등에서 민어잡이가 이어졌고 북리에는 민어파시가 섰다. 1935년 8월11일자 '조선중앙일보'는 '성어기에 덕적도로 데뷔하는 수호진'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통해 "경찰과 우편, 무전, 의료진 등이 8월 10일 일제히 덕적도로 들어갔다"는 소식을 전했다. 이들이 덕적도에 진입한 것은 인천 근해의 어장중 '넘버원'인 덕적도 수천 종업원의 편리를 도모코자 였다. 북리 민어파시에 몰려든 수천 명의 사람들을 통제하기 위해 경찰이 들어가고 임시 우체국이 서고 의료진이 파견되었던 것이다. 1936년 8월 8일 '조선중앙일보'도 '민어의 어기로 덕적도 대혼잡'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내보내 북리 민어파시 소식을 전하고 있다. "각처로부터 덕적도를 바라고 몰려드는 어상, 선원, 색주가 등이 수천 명에 달하므로 인천서에서는 임시주재소를 설치했다." 북리 민어파시는 1930년대 말까지 계속됐다.해방 후에도 한동안 덕적도의 어업은 번창했으나 한국전쟁과 함께 일시 쇠퇴했다. 하지만 휴전 후 배를 가지고 나온 피란민들이 덕적도에 눌러 살면서 덕적도 어업의 성장을 주도했다. 파시 때만은 못했으나 휴전과 함께 연평, 덕적 어장의 조업이 재개되자 북리 항에도 수백 척의 외지 어선들이 다시 찾아 들었다. 1968년 연평도에 어로제한선이 설치되고 연평도에 있던 서해 어로지도본부가 덕적도 북리로 이전해 왔다. 조업 허가와 안전조업에 대한 지도를 받아야 했던 어선들은 북리로 몰렸다. 이 때 잠깐 북리는 파시같은 성황을 누렸다. 선창가에는 옹진수협에서 '깡'을 열고 임시 위판을 했다. 인천에서 온 상회 주인들이 물건을 사갔다. 선구점도 덩달아 바빠졌다. 막걸리 집도 문을 열고 드럼통에 소주를 넣어두고 파는 집도 생겼다. 하지만 일제시대 열렸던 파시가 부활된 것은 아니었다. 외지에서 들어온 상인들은 거의 없었고 대부분 북리 사람들이 장사를 했다. # 수백t급 일본 무역선이 민어를 실어가다1960년대 북리에는 노천극장까지 있었다. 북리에는 조선소와 철공소도 2곳씩 있었다. 작은 쑥개 초입의 철공소 건물 하나는 지금도 남아서 어구 보관 창고로 쓰이고 있다. 폐교가 된 명신국민학교 아랫녘이 배터(조선소)였다. 지금의 해경파출소 자리에는 어업 지도소가 있었고 뒷산에는 무선국도 있었다.민어철에는 북리 주민들뿐만 아니라 외지 선원들까지 몰려드니 무엇보다 부족한 것은 화장실이었다. 그래서 다들 해가 지기를 기다렸다가 바닷가로 나가 볼일을 봤다. 눈만 감으면 거기가 화장실이었다. 사람들이 모여서 똥을 누던 바위를 똥바위라 했다. 그래서 다른 마을 사람들은 그런 북리를 쑥개가 아니라 똥개라고 놀리기도 했다. 지금 해안은 매립되었고 똥바위는 일부만 남아 있다. 북리에서는 민어나 조기를 능동 자갈밭이나 땔감 나무 위에 널어서 말렸다. 여름 민어철에 사용할 얼음 창고도 있었다. 겨울에 논에서 얼음을 잘라다 땅을 파고 움막을 지어 보관 했다. 어한기인 겨울 동안 동네 사람들은 얼음 자르기로 일당벌이를 했다.일제 때부터 민어는 일본의 상선이 얼음에 재워 일본으로 싣고 갔는데 1960~1970년대 덕적도의 민어도 대부분 일본으로 수출됐다. 일본 무역선은 선미도 앞에 떠 있다가 민어를 수집해 사갔다. 민어는 계량 단위가 '층'이었다. 가마니에 넣어서 무게를 달았는데 한 층이 100근(60㎏). 큰 것은 두 마리면 한 층이 넘었으니 민어 한 마리가 어린애만큼이나 컸다는 이야기다. 많이 잡힐 때는 중선(中船) 배 한 척이 한번 출어에 70~80층, 무려 4~5t을 잡았다. 덕적도 민어 중 일부는 인천의 상고선들이 실어갔다. 인천 평남 상회의 상고선이 특히 북리의 민어를 많이 사갔다. 바람이 불어 배가 못 뜨면 어민들은 민어를 염장해서 말린 뒤 팔았다. 낚시로 잡던 굴업도와 달리 덕적도에서는 민어를 유자망과 비슷한 민어 투망으로 잡았다. 투망배가 걸그물을 던지면 민어들은 그물코에 꽂혔다.# 민어의 씨가 마르자 북리도 몰락의 길로덕적군도의 대표적인 민어 어장은 굴업도의 굴업골, 백아도의 뺄골, 선미도의 사사골(새새골) 등이었다. 가장 큰 민어는 사사골에서 잡혔다. 사사골 어장 민어는 마리 수는 적은데 크기가 커서 '발치기'라 했다. 굴업골은 중간 크기가 잡혔고 뺄골은 씨알이 가장 작아서 '통방맹이'라 했다. 잡히는 숫자는 뺄골이 많았다. 장봉도 쪽에서는 사람만큼이나 큰 민어가 잡혔다. 큰 민어일수록 얕은 물로 다녔다. 그래서 장봉도와 교동도 사이 어장인 큰골 민어 잡이를 최고로 쳤다. 큰골은 얕은 바다지만 물살이 엄청 거셌다. 그러나 대량으로 잡아들인 민어는 결국 "일본 무역선만 배를 불렸다." 수백t급 일본 무역선이 민어를 무더기로 실어갔지만 많이 잡힐수록 가격은 떨어졌다. 민어잡이도 오래 가지 못했다. 덕적도 민어도 연평도 조기의 뒤를 따랐다. 그 크고 많던 민어들이 어느 순간 거짓말처럼 사라져 버렸다."삼천포, 통영, 여수 등지에서 온 유자망(투망) 배들이 그물로 씨를 말려 버렸어. 산란기고 뭐고 없이. 그렇게 몇 년 긁으니까 씨가 마르더라고."대형 선단들이 싹쓸이 조업을 한 결과였다. 조기와 민어가 자취를 감추자 전국에서 몰려들던 어선들의 발길도 끊겼다. 1970년대 들어서는 덕적도 어선들도 동지나해로 진출했다. 근해 어장이 고갈되자 먼 바다로 어족을 찾아 나선 것이다. 뱃길이 멀어지면서 어선의 규모가 커졌다. 한번 출어하면 1천상자씩 잡아왔다. 어선이 커지고 속력이 빨라지자 중간 기항지로서 북리항의 기능이 사라져 갔다. 동지나해 조업에서 돌아온 덕적도 배들도 화수동 어판장으로 직항했다. 덕적도 어장이 고갈되자 1970년대 말부터 1980년대 초반 사이 북리 선주들 대부분이 인천으로 이주해 갔다. 선원 가족들도 선주와 함께 떠났다. 북리는 일시에 쇠락의 길로 접어들었다. 글·사진/강제윤 (시인·'섬을 걷다' 저자)

2009-07-07 강제윤

[옛 인천의 황금어시장을 찾아서·16]민어떼가 몰려오면 덕적 바다가 온통 뻘겠다

# 덕적도 어업의 중심 북리덕적도에는 배가 드나드는 포구가 여러 곳이다. 도우, 서포리, 진리, 북리 등. 이들 포구 중에서도 황해가 황금어장이었을 때 덕적도 어업의 중심은 단연 북리였다. 북리 포구는 작은 쑥개에 있다. 북리 마을의 서북쪽에 덕적도 주산인 국수봉이 있다. 국수봉 아래 작은 쑥개와 큰 쑥개 사이 바다는 U자형의 만을 이루고 있어 배들이 피항하기 좋다. 수심이 깊지 않고 조수간만의 차가 크다는 단점이 있지만 만조시에는 수백 척의 어선이 정박할 수 있다.작은 쑥개, 폐가가 된 옛 선주 집 마당으로 들어선다. 문짝은 떨어져 나가고 쓰다 버린 가구들이 나뒹구는 빈집은 쓸쓸하다. ㄷ자 한옥은 선주 가족이 살던 본채였을 것이다. 북리 선주 집을 상징하는 2층집은 문간채 옆에 서 있다. 2층집은 덕적도 북리에만 있는 부의 상징이었다. 2층은 전체가 하나의 넓은 방이다. 사방에 유리창을 달았고 각 방향마다 두 개씩의 창문을 넣어 어느 방향이나 전망이 탁 트였다. 선주는 이곳 마루에 앉아 북리 항으로 들어오는 자신의 배를 기다렸다. 만선의 북소리가 울리면 마질주(맞이술)를 준비하도록 지시하고 잔치를 서둘렀다. 먼지에 찌든 마루 한 쪽에는 엉킨 그물이 겹겹이 쌓여 있다. 면사(綿絲) 그물. 연평도에서도 보지 못한 면사 그물이 덕적도에 남아 있다. 손으로 한 땀 한 땀 짜서 만든 그물, 저 그물은 이미 문화재다. 경기만 연안의 섬들 어디에도 없고 오직 덕적도 북리에만 있는 이런 형태의 2층 선주 집 역시 어업문화재로서 가치가 크다. 이 집의 주인은 북리 선주 소창모씨였다. 한창 때는 4~5척의 어선을 소유한 큰 선주였다. 그는 어업 활동으로 번 자본을 투자해 인천에서 극장까지 운영했었다.북리 마을 구석구석에는 과거 영화롭던 시절의 흔적이 남았다. 작은 섬 마을에 다닥다닥 붙여 지은 집과 골목길이 남아 있다는 것은 과거의 번영을 나타낸다. 작은 포구에 하나의 해상 도시가 세워졌다가 사라져 버렸다. 폐허는 상처가 아니라 영화롭던 시대의 기록이다. 파시 때 외지에서 온 선원들을 먹이고 재우던 여관들도 모두 문을 닫았고 주점들은 폐업한 지 오래다. 유정여관은 나무 간판이라도 남았으나 다방과 색주가는 흔적도 없다. 펄펄 끓던 공중목욕탕의 물도 식은 지 오래다. # 복달임에 민어탕은 일품, 도미찜은 이품, 보신탕은 하품민어(民魚)는 농어목 민어과 민어속의 난류성 어류다. 민어는 갯벌 바다에서 산다. 낮에는 깊은 바다 속에 있다가 밤이면 수면으로 이동하는 습성이 있다. 새우류를 특히 좋아한다. 새우어장으로도 유명했던 덕적 바다에 민어가 많았던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지금이야 워낙 귀한 고급 어종이 됐지만 민어는 이름처럼 옛날에는 백성들이 즐겨 먹던 물고기다. 민어 중에서도 여름에 잡히는 것이 가장 기름지고 맛있다. 민어는 지역이나 그 크기에 따라 이름도 제각각이었다. 전남지방에서는 가장 큰 민어를 개우치라 했고, 법성포에서는 30㎝ 내외를 홍치, 완도에서는 작은 것을 불퉁거리라 불렀다. 서울이나 인천에서는 두 뼘 미만의 것을 보굴치, 세 뼘 내외는 어스레기, 네 뼘 이상만을 민어라 했다. '자산어보'에도 민어의 특징이 상세하게 그려져 있다."큰 놈은 길이가 4~5척에 달한다. 몸은 약간 둥글고 빛깔은 황백색이며 등은 청흑색이다. 비늘과 입이 크고 맛은 담담하면서도 달아서 날 것으로 먹으나 익혀 먹으나 다 좋고 말린 것은 더욱 몸에 좋다. 부레는 아교를 만든다." 민어는 제사상이나 잔칫상에 가장 많이 오르는 물고기였다. 회나 탕, 구이뿐만 아니라 포, 알포, 알젓으로도 명성이 높았다. 자산어보의 기록처럼 지방이 적고 단백질 함량이 많아서 맛이 담백하다. 서울, 경기 지방에서는 복날 민어탕으로 복달임을 했던 전통이 있었다. 복달임에 민어탕은 일품, 도미찜은 이품, 보신탕은 하품으로 쳤다. 민어는 쓸개를 빼고는 버릴 것이 하나도 없다. 민어는 머리 살과 껍질의 맛이 특히 뛰어난데 껍질은 데치거나 날로 먹기도 한다. 민어 껍질의 뛰어난 맛은 "민어 껍질에 밥 싸먹다 논밭 다 팔았다"는 식담을 만들기도 했다.옛날 민어 부레는 부레풀을 만드는 재료로 썼다. 지금 남아 있는 고가구들 대부분은 접착제로 민어풀을 사용했다. 부레는 속에 소를 채워 순대로 만들어 먹기도 했다. 또 부레는 생으로 먹거나 약재로도 이용됐다. 아이들의 발육과 노인, 환자에게 특히 효과가 크다고 한다. 참조기와는 달리 민어는 알이 찬 암컷보다 수컷을 더 귀하게 친다. 알 밴 암컷은 알이 워낙 커서 살이 적고 살 속의 기름기가 빠져 맛이 없다. 민어는 활어보다 선어가 맛이 뛰어나다. 대부분 잡히는대로 피를 빼서 얼음에 저장한 뒤 선어로 먹는다. 얼리면 민어 특유의 맛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대체로 어류의 맛은 아미노산의 양에 따라 결정된다. 어류는 사후 일정한 시간이 지나 강직도가 떨어졌을 때 아미노산의 양이 가장 많다. 이때가 가장 맛이 좋다. 활어는 바로 잡으면 사후 강직 탓에 맛이 덜하다.민어는 조기처럼 군단으로 몰려다녔다. 민어떼가 몰려들면 "뻘건 민어의 등이 물에 비쳐서 덕적 바다가 온통 뻘겠다" "민어는 개구리처럼 우는데 톱을 갖춰서 (떼로 함께)왁왁왁 울어대니 귀가 아프고 민어 소리 때문에 시끄러워서 낮에는 잠을 잘 수 없을 정도"였다. 민어의 울음은 산란철에 암수가 서로를 부르는 소리다. 어부들에게 민어는 성질이 순한 물고기로 알려져 있다. 다른 물고기들은 그물을 걷어 올리면 도망치려고 발버둥을 치고 튀어 오르는데 민어는 체념한 듯 가만히 있다. 그래서 어부들은 그런 민어가 '순하다'고 표현한다. 하지만 그것은 민어의 성질이 순해서가 아니다. 다른 어류에 비해 부레가 큰 까닭에 그물에 걸리면 수압 때문에 부레로 바람이 들어가 다시 바다 속으로 들어가지 못한다. 민어가 그물에 많이 걸리면 그물이 떠오르는 것도 그 때문이다. 부레에 바람이 차서 못 움직이는 것을 민어가 성질이 온순하다고 한 것이다. 바늘로 가스를 빼 주면 재빠르게 도망쳐 버린다.글·사진/강제윤 (시인·'섬을 걷다' 저자)

2009-06-23 경인일보

[옛 인천의 황금어시장을 찾아서·15]'쟁기주며' 바다밭을 갈던 덕적도 어민들

# 일제의 식민지되면서 덕적도 어선도 나가세기 배로일제시대 초기 덕적도에서도 전래의 어선인 봉선(蓬船)이 사라지고 일본식 어선인 나가세기 배가 등장했다. 일본 나가사키(長崎) 어민들이 만들어 사용하던 안강망 어선을 덕적도에서는 일중선(日中船), 혹은 나가세기 배, 안강망 배라 했다. 덕적도에서 처음으로 나가세기 배를 도입한 사람은 북리의 문태순이었다. 덕적도 사람들도 초기에는 나가사키에 직접 가서 배를 지어 오기도 했지만 차츰 일본인 도목수 밑에 들어가 목수 일을 배워 온 조선 목수들에 의해 나가세기 배가 보급됐다. 1930년대에는 대부분의 덕적도 어선들이 나가세기 배로 바뀌었다. 풍선(風船)이었던 덕적도의 나가세기 배들은 한국전쟁 이후 차츰 기계배로 바뀌어 갔다. 김춘광, 송재순, 장경업, 최봉도 등이 덕적도의 기계화 1세대 선주들이었다.나가세기 배의 선체에는 여러 칸의 선실이 있었다. 코칸은 배의 맨 앞머리에 있는 창고다. 선미에는 뒷마칸이 있었다. 그물 등속의 어구를 넣는 창고다. 뒷마칸 앞쪽에는 방장이 있었다. 선원들이 숙소로 쓰는 방이었는데 서드리칸이라고도 했다. 어획한 조기는 중간의 사이다칸에 적재했다. 사이다칸이란 이름은 처음 나가사키에서 들어온 일본 어선들이 이 칸에 사이다를 넣고 온 데서 비롯됐다는 설이 있다. 연평도처럼 덕적도에서도 그물을 바다에 설치하는 것을 '쟁기준다' 했고, 조업에 필요한 선구를 총칭해 '트쟁기'라 했다. 어업 또한 먹거리를 마련한다는 의미에서 농사일의 연장으로 본 것이다. 농민들이 논밭을 갈 때 어민들은 바다를 쟁기질하며 삶을 이어갔다.오랜 세월 북리에서 배 목수와 선주를 지냈던 강명선(68)씨를 만났다. 예부터 '집 목수는 배를 못 짓지만 배 목수는 집을 짓는다'는 말이 있다. 배 목수의 기술이 그만큼 고급이라는 뜻이다. 강씨는 20대 후반부터 선주가 되어 한때는 안강망 어선 4척으로 조기와 민어, 갈치 등을 잡았지만 하나씩 팔아먹다가 망했다. 강씨는 11살까지 황해도 옹진군 봉구면 평양리 육도에서 살았다. 1·4후퇴 때 부모님을 따라 충청도 원산도까지 피란갔다가 덕적도로 와서 정착한 피란민이다. 덕적도 북리에 정착한 강씨는 19세 때부터 배 목수 일을 시작했다. 6·25 직후 북리에는 2곳의 조선소가 있었다. 그 중 한 곳을 강씨의 고모부가 운영했다. 고모부는 일제 때 조선소와 기계공장이었던 해주 신선 중공업의 소장을 지낸 최귀현씨였다. 이북에 가족을 두고 온 최씨는 피란지인 북리에서 강씨의 고모와 재혼을 했다. 최씨는 일본인 배 목수들보다도 배 짓는 기술이 월등히 뛰어났다. 강씨는 그런 고모부의 수제자가 되어 배 짓는 일을 배웠다. 목재는 일본에서 삼나무(스기나무)를 수입해 썼다. 강씨는 "삼나무가 배의 재료로는 최고의 목재였다"고 회고한다. 쉽게 썩지 않고 질기고 견고하면서도 잘 부러지지 않았다. 무엇보다 가벼워서 부력이 뛰어났다. 쌀 한 가마니가 2만원할 때 배 목수는 하루 일당 3천원씩을 받았다. 나가세기 배 한 척을 짓는 데는 목수 8~9명이 보통 한 달 반에서 두 달쯤 일했다. # 어선 진수식 날은 기생 불러다 잔치까지배가 완성되고 진수식을 하는 날이면 인천에서 기생까지 불러다 잔치를 열었다. 선주가 배 목수들을 위해 크게 한턱 내는 것이 관례였다. 진수식 날은 온갖 화려한 깃발로 배를 치장했다. 고깃기(선주기), 서낭기, 장군기, 오색기, 상(上)기 등을 매달았다. 강씨는 배 목수일로 돈을 벌어 선주가 됐다. 그는 선주가 된 후에도 배 짓는 일을 병행했다. 하지만 뱃일로 버는 돈은 다시 배에 들어갔다. 배의 숫자를 늘리고 t수를 늘리고 어구를 장만하느라 번 돈을 다 투자했다. 그러다 어느 순간 어족의 씨가 마르면서 어획고가 급감했다. 위기에 처할 때마다 배를 한 척씩 팔아먹었지만 끝내는 아주 망하고 말았다. 그런 선주가 한둘이 아니었다.선주는 선원뿐만 아니라 선원 가족들에게도 절대적인 존재였다. 선주는 배임자, 선주 부인은 뱃집 아줌마라 불렀다. 선주가 선원들을 부리는 것처럼 선주 부인은 선원 가족들을 부렸다. 아버지 말은 안 들어도 선주 말은 듣는다 했다. 북리에서는 이씨네(이재규 이기섭), 소씨네(소창모), 박씨네(박순복) 등이 가장 큰 선주 집안이었다. 큰 선주들은 다들 인천에 사무실을 두고 있었다. 선박의 주소지는 덕적도였지만 생선을 판매하는 곳은 인천 화수동 부두였다. 연평도 선주들은 하인천 부두로 갔지만 덕적도 북리 선주들은 화수동 부두로 갔다. 북리 선주들은 1950년대에 벌써 자가용을 두고 부릴 정도로 자산가였다. 북리에만 안강망 배가 100척이 넘었다.덕적도의 선주와 선원들도 어획물을 짓 나누기로 분배했다. 일제 때부터 한국전쟁 전까지는 선원의 임금이 대체로 월급제였지만 한국전쟁 후에는 어획량에 따라 일정한 비율로 배분하는 제도로 바뀌었다. 중선 배는 3 대 7제였다. 배임자가 7할, 선원들이 3할. 그 3할을 선원 8명이 다시 짓 나누기로 분배했다. 소선은 보통 5 대 5제였다. 선원들은 경력에 따라 수익이 달랐다. 초짜들은 한짓재비(외지재비)라 해서 몫이 가장 적었고 1년 이상 경험자는 짓반재비, 선장은 두짓재비였으며 경험 많은 선원은 특별대우했다. 선상 생활은 군대보다 규율이 더 엄격했다. 작은 실수가 큰 사고로 이어질 수 있었고 한 사람의 실수로 많은 사람의 목숨이 좌우됐기 때문이다. 그래서 '뱃놈은 아이, 아저씨가 없다'는 속담까지 생겼다.# 덕적도, 타리도와 함께 대표적 민어파시의 고장예부터 이름난 민어 어장은 신안의 태이도(타리도)와 재원도, 인천의 덕적도, 평안도 신도 바다였다. 신안에서는 타리 파시나 재원도 파시가 흥성했다면 인천에서는 덕적면의 굴업도와 북리가 민어파시로 이름 높았다. 여름철 덕적도 근해는 민어의 산란장이었다. 정문기 박사는 '어류 박물지'에서 "전라도는 태이도가, 경기도에서는 덕적도가 예부터 유명한 민어 산지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일제시대에는 일본 수산협회 소속의 상고선들이 한국 민어어장의 민어들을 냉장해서 일본으로 실어 갔다. 상인들은 조업하는 어선들을 따라 이동하며 흑산도, 법성포, 위도, 연평도 등에 조기파시를 열었다. 조기파시가 끝나면 이들 중 일부는 타리 민어파시를 찾아갔고 또 일부는 굴업도나 덕적도 북리로 흘러들어 민어파시를 형성했다.글·사진/강제윤 (시인·'섬을 걷다' 저자)

2009-06-16 정진오

[옛 인천의 황금어시장을 찾아서·14]섣달 그믐날 국수봉 산신령께 제사

# 덕적군도 최초의 어장 울도, 새우파시와 '울도어화'로 유명덕적군도(德積群島)에서 근대적 의미의 어업이 시작된 것은 1900년, 소야도의 조덕기씨 등이 울도 근해에서 새우어장을 발견하면서부터다. 1930년 12월5일에는 덕적면 어업조합이 설립됐고 덕적도의 어선들은 평북 의주 앞바다에서 영광이나 제주도까지 조업을 나갔다. 1939~1940년, 덕적도의 어선은 중선 140척, 소선 200척, 발동선 30여척 등 총 370여척이나 됐다. 한국전쟁 중인 1951년에는 중선이 68척, 소선 100척, 발동선 10여척 등 180여척이었다. 덕적군도의 어업이 번창하게 된 것도 중국의 칭다오, 다롄, 톈진, 상하이 등지로 울도 어장의 건하(마른새우)를 수출하면서부터다. 중국 상인들은 덕적도에 상주하며 건하를 수매해 중국에 되팔기도 했다. 음력 3월 중순, 어선들이 몰려들면 울도에는 새우파시가 섰다. 파시는 1930년대 말부터 1940년대 말까지 가장 크게 번성했다. 울도의 '작은 마을은 온통 술집 천지'였다. 야간 조업을 하는 새우잡이 어선들의 불빛이 장관이었다. 그래서 '울도어화'는 덕적 팔경의 하나로 꼽혔다. 하지만 1949년 중국이 공산화 되고 수출길이 막히자 울도 새우파시도 막을 내렸다. 그후 울도, 문갑도 등 덕적 근해에서 잡힌 새우는 젓새우로 팔려 나갔다. 중선배들이 울도 어장으로 새우잡이를 오면 덕적면 어업조합에서는 싣고 온 소금가마 숫자에 따라 어업세를 매겼다. 젓새우는 배에서 바로 소금에 절였기 때문에 소금의 양이 어획량의 척도였다. 새우는 경매를 하지 않고 대부분 상회를 통해서 거래됐다. 젓새우는 대부분 부평의 새우젓 토굴로 보내졌고 토굴 속에서 숙성된 뒤 김장용으로 팔려 나갔다.향토사학자 김광현은 '덕적도사'에서 과거 덕적군도의 주요 어장으로 덕적도, 선협도(선갑도), 수심도, 굴업도 등을 꼽고 있다. 주요 어족은 조기(석수어), 민어, 수조기, 도미, 가자미, 홍어, 새우(白蝦), 갈치(刀魚), 농어 등이었다. 조기는 수심도 이북에서 많이 났고 수조기는 영흥도 근해서 주로 잡혔다. 민어는 굴업도 어장이 단연 최고였다. 덕적군도 어민들의 어로활동은 3월 울도 어장의 새우잡이부터 시작돼 11월까지 조기, 민어, 육젓 새우, 추젓 새우잡이로 이어졌다. 12월부터 보름정도는 대청, 소청도 부근에서 홍어를 잡았다. 그 후부터 이듬해 2월까지는 휴어기였다. 이 때 선박을 수리하고 어구 등을 정비했다. 본래 덕적군도의 어업 근거지는 굴업도였다. 민어철 굴업도에는 전라, 충청, 황해도 등지에서 몰려온 수백 척의 어선들로 파시가 형성됐다. 하지만 1923년 굴업도에 해일이 덮쳐 많은 어부들이 사망한 뒤 굴업도 파시는 사양길에 접어들었고 덕적도 북리가 새로운 어업 근거지로 떠올랐다.# 능구렁이 울면 비가 오고, 머리 가려워도 비가 오고덕적도의 어로 풍습도 연평도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덕적도 어선들도 만선일 때는 선체를 광목으로 둘러싸고 봉죽을 세워 기세를 올리며 포구로 돌아왔다. 봉죽은 어획고를 표시하는 종이꽃이었다. 본래 긴 대나무에 한지를 붙여 꽃모양으로 만들었지만 덕적도에서는 값 비싼 한지 대신 볏짚을 둥글게 엮어서 장대 끝에 매달았다. 선주는 봉죽을 단 개수를 헤아려 자기 배의 수익을 알아챘다. 배가 들어오면 선주 집에서는 마질주(맞이 술)를 준비해서 선주부인이 직접 마중을 나가 선원들을 대접했다. 한국전쟁 이후 이북 피란민들이 유입되면서 덕적도에도 배치기 노래가 퍼졌고 풍어굿도 유행했다. 피란민 출신 선주가 운영하는 북리 배들이 굿을 많이 했다. 덕적도 선주민들은 '굿을 잘 안했다.' 정초가 되면 선주들은 돼지 잡고 떡을 쪄서 굿을 했다. 굿은 사흘에서 닷새까지 이어졌다. '굿을 하는 순간에는 모든 것이 이루어질 것처럼 환희로웠다. 마음이 편안해지고 몸은 하늘로 올라가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덕적도에도 무당이 있었지만 대체로 인천에서 모셔온 황해도 출신 큰 무당이 굿을 했다. 섬사람들은 정초부터 보름까지는 대부분 흥청거리며 놀았다.섣달 그믐날이면 주민들은 덕적도의 주산인 국수봉 산신령을 모시는 당집에서 마을 제사인 고사(당제)를 지냈다. 제주로 정해진 집을 '도가집'이라 했다. 제주가 되면 부부간의 잠자리도 금했다. 섣달 그믐날이면 또 선장과 화장도 바닷물에 목욕재계를 하고 배서낭께 바치는 뱃고사를 준비했다. 제물로는 시루떡과 생선, 삼색 과일, 나물 등이 올려졌다. 배서낭은 여서낭, 남서낭, 조상서낭, 애기씨서낭, 용서낭, 호랑이서낭, 뱀서낭, 쥐서낭 등 다양했다. 하지만 대부분의 덕적도 선주들은 애기씨서낭을 배의 수호신으로 모셨다. 애기씨서낭은 쥐나 귀뚜라미 울음같은 소리를 내서 위험을 알려준다고 믿었다. 처음 잡은 물고기를 판 돈은 애기씨 앞에 바치고 재복과 건강을 기원했다.덕적도 배들은 한 배에 애기씨서낭을 여럿 모시기도 했다. 이물에는 이물서낭, 고물에는 고물서낭, 어떤 배는 많게는 일곱 분의 서낭까지 모셨다. 그런 배의 선주는 뱃고사를 드릴 때면 일곱 서낭 모두에게 시루떡을 따로 쪄서 바쳤다. 섣달 그믐 뱃고사날이면 선주는 애기씨서낭을 '소당'했다. 소당은 불태운다는 뜻이다. 새해에는 다시 한지로 애기씨서낭을 접어서 선실에 모셨다. 그 정성이 대단했다. 조업이 잘 안될 때나 봄, 가을 두 번 출항일에 뱃고사를 지내기도 했다. 덕적도에도 어업과 관련된 금기가 많았다. 어느 지방이나 그랬듯이 여자들은 어선에 타지 못했다. 심지어 출어하는 날 아침에 여자를 만나면 '재수 없다'하여 출어를 포기하기도 했다. 애기를 낳은 집의 선원은 '부정 간다' 했다. 그래서 3일 동안은 배를 탈 수 없었다. 아이를 낳고 3일 전에 어선이 출어할 경우에는 복숭아나무 가지를 잘라서 들고 배를 탔다. 그러면 부정이 방지된다고 믿었다. 어민들에게 금기는 기독교의 십계명이나 불교의 계율과 다르지 않았다. 어로 활동에는 날씨가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래서 어부들은 자연의 징후를 보고 다음날 날씨를 짐작하는 지혜를 얻었다. 봄에 서남풍이 불면 반드시 비가 온다 했다. 안개 낀 날 멀리서 기계소리는 나지만 배모양이 보이지 않으면 반드시 비가 온다고 했다. 또 먼 산이 가깝게 보이면 비가 온다고 했다. 낙조 때 서쪽 바다가 붉게 물들면 비가 오고 능구렁이가 울어도 비가 오고 쌍무지개가 떠도 비가 온다고 했다. 머리가 가려워도 비가 온다 했다. 글·사진/강제윤 (시인·'섬을 걷다' 저자

2009-06-09 경인일보

[옛 인천의 황금어시장을 찾아서·13]神仙의 섬, 민어의 고장 덕적도

덕적도 서포1리 마을 민박집. 주인 노인이 만든 솔방울 베개를 베고 잔 때문이었을까. 밤새 솔바람 소리를 들었다.바람이 불고, 눈보라치고, 햇볕 따뜻한 봄이 오고, 비가 내리고, 밤과 낮이 수시로 교차했다.소나무에 새순이 돋고, 송화 가루가 날리는가 싶더니 해변은 사람들 소리로 떠들썩했다.물놀이 하는 사람들, 솔숲 그늘에 누워 낮잠을 자는 사람들, 고기 굽는 냄새, 조개 잡는 아이들, 찬바람이 불고 다시 해변은 텅 비어버렸다. 그렇게 세월이 갔다. 꿈이었다. 꿈을 꾼 것은 나그네였을까. 베개 속 솔방울들이었을까.나그네는 섬에 오면 어디보다 먼저 산으로 간다. 모든 섬은 산이다. 어제 산길을 따라 서포리까지 왔다.산에 올라서야 비로소 섬의 본 모습을 볼 수 있다. 섬에서 산으로 가면 덤으로 얻을 수 있는 즐거움 중 하나가 흙길을 걸을 수 있다는 것이다.나그네는 뭍에서 온 누구보다 먼저 섬의 속살에 안겨 볼 수 있다. 흙과 나무와 바람의 향기, 숲에서 한 번 걸러진 바다 내음도 한결 청량하다.대체로 섬들의 산은 높지 않아 가볍게 오를 수 있다. 산길을 오르며 푹신한 흙을 밟는다. 몸이 새털처럼 가벼워진다.공중의 구름을 걷는 느낌이 이러할까. 사람이 관절이 상하고 자주 무릎이 아픈 것은 걷지 않아서가 아니다.흙길을 걷지 않기 때문이다. 더 이상 사람이 걸을 수 있는 흙길이 남아 있지 않기 때문이다.# 삼국시대 당나라 침략군의 전진기지덕적도에도 선사시대부터 사람이 살았다. 삼국시대 초기에는 백제의 영토였으나 덕적도 또한 한강유역의 다른 땅처럼 신라와 고구려에 번갈아 점령당했던 경계의 땅이다. 고려 말부터 조선 초까지는 왜구들 때문에 섬은 사람이 거주하지 않는 공도(空島)가 되었다. 다시 사람이 살기 시작한 것은 임진왜란 이후부터다. 조선시대 내내 남양부와 인천 도호부에 속했던 덕적도는 일제 때에 부천군에 소속되었다가 1973년에는 경기도 옹진군이 되었고, 1995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옹진군이 인천시로 편입되면서 100여년 만에 다시 인천의 강역이 됐다.덕적도는 고대 황해 횡단 항로의 길목이기도 했다. 당나라가 백제를 침략할 때 덕적군도(群島)는 소정방이 이끄는 당나라 군대의 백제 침략 전진기지였다. 덕적도 바로 옆 소야도에는 당나라군의 진지로 추정되는 유적들이 남아 있다. 당나라군은 덕적도에 주둔했다가 기벌포로 상륙해 신라와 협공으로 백제를 멸망시켰다. 덕적도는 수려한 경관으로도 이름이 높았다."덕적도는 당나라 소정방이 백제를 정벌할 때 군사를 주둔시켰던 곳이다. 뒤에 있는 3개의 돌 봉우리는 하늘에 꽂힌 듯하다. 여러 산기슭이 빙 둘러쌌고 안쪽은 두 갈래진 항구로 되어 있는데 물이 얕아도 배를 댈 만하다. 나는 듯한 샘물이 높은 데서 쏟아져 내리고 평평한 냇물이 둘렸으며 층 바위와 반석이 굽이굽이 맑고 기이하다. 매년 봄과 여름이면 진달래와 철쭉꽃이 산에 가득 피어 골과 구렁 사이가 붉은 비단 같다. 바닷가는 모두 흰 모래밭이고 가끔 해당화가 모래를 뚫고 올라와 빨갛게 핀다. 비록 바다 가운데 있는 섬이라도 참으로 선경이다. 주민들은 모두 고기를 잡고 해초를 뜯어 부유한 자가 많다. 여러 섬에 장기 있는 샘이 많은데 덕적도와 군산도에는 없다."(이중환 '택리지')# 50년대 1만2천 인구가 지금은 1천200명으로 줄어과거 덕적도는 덕물도, 득물도 등 여러 이름으로 불렸다. 2009년 1월 5일 기준, 덕적면 전체 인구는 930가구 1천800명. 덕적면 소재지가 있는 덕적도에는 679가구 1천294명이 산다. 어가(35%)보다 농가(38%)가 약간 많다. 농어가 다수는 민박 등 관광업을 겸하고 있다. 기독교의 세가 지배적인 덕적면 관내 종교 시설은 교회가 5개, 성당이 2개지만 절은 전무하다. 의료시설도 열악하다. 덕적면 전체에 자동차는 552대, 선박은 67척이다.옛 자료에 따르면 1954년 덕적도의 인구는 2천244호 1만2천788명이었다. 한국전쟁 직후라 원주민보다 피란민이 약간 더 많았다. 원주민이 6천39명, 피란민이 6천749명이었다. 무속을 제외하면 당시에도 종교는 기독교가 대세였다. 기독교인은 500여명이나 됐지만 절은 선갑도에 하나뿐이었고 그 절에는 신도 없이 파계승 1명만 거주했다. 당시 덕적군도 전체에 라디오는 25대였고, 신문은 110부를 구독했다. 인천신문 50부. 연합신문 30부, 조선일보 30부. 신문은 대부분이 유지들과 관공서에서 구독했다. 당시 덕적도에도 미군부대가 주둔했다. 전쟁 직후에도 덕적도는 산림이 울창했다. 그래서 가진 것이 없는 피란민들은 도벌로 생계를 유지하는 경우가 많았다. 피란민의 집들은 해변에 다닥다닥 붙어있어서 '게딱지 집'이라 했다. 피란민들 정착 초창기에는 본동(선주민) 주민들과 피란민들이 서로 동네를 왕래하기 어려울 정도로 험악했다. "죽지 않을 만큼 때려 주고 맞기도 했다." 선주민과 피란민 간에 싸움이 일어나면 선주민들은 "피란민하고 사람하고 싸운다"고 말했다. 그만큼 피란민들에게 적대적이었다. 피해의식 때문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차츰 서로의 존재를 인정하게 되자 섬에는 다시 평화가 찾아왔다.한겨울에도 덕적도의 텃밭에는 배추가 시퍼렇게 자란다. 마늘도 그 푸른 줄기에 윤기가 흐른다. 고목의 동백나무도 꽃을 피운다. 이들 모두 남해의 섬과 바닷가 마을에서나 겨울을 난다고 알려져 있는 식물들이다. 같은 위도상의 육지 땅이라면 자연적인 생육이 가능하지 않을 것이다. 수원과 위도가 비슷한 덕적도에서 겨울에 이들 식물이 자라는 것은 쿠르시오 난류의 영향 때문이다. 인천 연안부두에서 덕적도까지는 쾌속선으로 한 시간의 뱃길이다. 지금은 한철 꽃게잡이를 제외하고는 여름철 피서지로 더 각광받는 섬이지만 과거 덕적도는 연평도와 함께 서해안의 대표적인 어업전진기지였다. 연평도 파시만큼은 아니었으나 덕적도에도 규모가 큰 파시가 섰다. 덕적도의 관문 도우선착장 입구에는 민어를 든 어부상이 있다. 덕적도가 민어의 고장이었음을 나타내는 증표다. 민어의 산란장이었던 덕적바다. 조기가 연평바다를 떠났듯이 민어 역시 지금은 덕적바다를 떠난 지 오래다. 그러므로 민어의 자취를 따라가는 여행 또한 필연적으로 시간 여행이다. 글·사진/강제윤 (시인·'섬을 걷다' 저자)

2009-06-02 정진오

[옛 인천의 황금어시장을 찾아서·12]연평도 조기시대의 종말

# 연예인들이 공연을 하고 개도 돈다발을 물고 일제 때 연평도에는 상주하는 경찰이 없었지만 조기 파시 때면 해주에서 경찰들이 임시로 파견 나왔다. 일본인 소장이 순사 3~4명을 데리고 들어왔다. 순사들만으로 인원이 부족해 파시기간 동안 임시직원을 썼다. 그들을 '대리 순사'라 했다. 순찰은 대체로 완장과 목검을 찬 대리 순사들의 몫이었다. 하루도 사고가 없는 날이 없었다. 섬에서 해결하기 어려운 큰 사고가 나면 해주로 무전을 쳤다. 경찰선이 바로 달려와 범인들을 싣고 갔다. 파시가 끝나면 순사들은 철수하고 다시 연평도는 구장(區長)을 비롯한 섬의 원로들과 주민들이 동규(洞規)에 의해 자치적으로 질서를 유지해 나갔다. 그것을 '동네방'이라 했다.파시 때면 카바레도 생기고 가설 신파극장이나 곡마단도 들어왔다. 더러 연예인들이 위문공연을 오기도 했다. 1960년대에는 파출소 앞 공터에 가설극장이 생기고 백남봉, 양훈, 양석천 같은 코미디언이나 장소팔, 고춘자 같은 만담가들이 공연을 했다. 배뱅이굿으로 유명한 이은관도 와서 공연을 했다.공연이 끝난 다음날 가설극장 터에 나가면 돈다발을 줍는 일도 흔했다. 선주나 선원들이 술에 취해 구경을 나왔다가 떨어뜨리고 간 것이었다. 파시 때는 개도 돈다발을 물고 다녔다는 말이 헛소리가 아니었다. 파시에 사람과 돈이 몰리니 간혹 폭력배들이 꼬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들은 얼마 버티지 못하고 연평도에서 쫓겨났다. 일제시대 어느 해던가 해주 시멘트회사의 오야붕이라는 폭력배가 부하들을 이끌고 연평도를 '접수'하러 왔다. 해주 깡패가 왔다기에 선원들과 마을 사람들이 구경을 갔다. 오야붕이란 자는 머리에 기름을 잔뜩 바르고 긴 앞 머리카락을 왼쪽으로 돌려서 붙였는데 무엇으로 붙였는지 바람이 불어도 머리카락이 떨어지지 않았다. 오야붕은 지팡이 손잡이에 쇳덩이를 덧댄 '등산마찌'를 무기 삼아 들고 왔다. 하지만 연평도에 모인 선원들이 모두가 힘깨나 쓴다는 거친 뱃사람들이었다. 선원들이 깡패들을 에워싸고 "야야, 너 해주에서나 깡패 노릇하지 연평 와서 깡패 노릇 하려고 하냐"고 엄포를 놓은 뒤 멱살을 틀어쥐니 바로 항복하고 이내 줄행랑을 쳤다.# 눈물의 연평도아침이면 갈 가마 아궁이에서 잠든 선원을 볼 수도 있었다. 밤에 술 취한 선원이 자기 배를 찾아가지 못하고 온기가 남아 있는 갈 가마 아궁이에서 자버렸던 것이다. 수만 명의 사람들이 몰리는 파시 때는 작은 섬에 모든 것이 부족했지만 그중에서도 화장실 부족이 가장 큰 문제였다. 공중화장실이 있었지만 수천, 수만명의 사람들을 다 수용할 수 없었다. 그래서 새벽이면 진풍경이 벌어졌다. 어둑한 해변에 작은 불빛들이 길게 늘어서서 깜빡거렸다. 수백 명의 사람들이 해변에 앉아 함께 대변을 보며 담배를 피우는 불빛이었다.연평도에서도 1930년대 큰 폭풍으로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 1934년 연평도에 큰 폭풍이 몰아쳤다. 6월 1일 아침부터 비가 오고 풍랑이 일자 어선들이 내항으로 피항해 들어왔다. 내항에 들어온 어선은 600여 척. 6월 2일 오후 4시경, 강력한 폭풍이 몰아쳤다. 600여 척의 어선들이 서로 부딪치면서 충돌해 323척이 파손되고 204명이 물에 빠져 죽었다. 후일 황해도 지사와 황해도 수산협회에서 조난자 위령비를 세웠다.사라호 태풍 때도 수많은 조기배들이 뒤집혔다. '눈물의 연평도'를 만든 태풍 사라는 1959년 9월 15일, 사이판 섬 해역에서 발생해 한반도에 막대한 피해를 입히고 동해로 빠져나가 소멸했다. 사망·실종 849명, 이재민이 무려 37만3천459명이나 됐다. 선박은 1만1천704척이나 파손됐으며 재산피해는 1천900억원에 달했다. # 어로저지선과 파시의 종말연평도 근해에서 조기가 가장 많이 잡히는 어장은 구월이 안골을 비롯한 해주 인근 바다였다. 해방 후에도 3·8선 이남인 대수압도 북쪽 해주만까지 남한의 조업구역이었다. 하지만 한국 전쟁 이후 휴전이 되면서부터 황금어장의 대부분이 북쪽의 영해가 됐다. 남쪽의 어선들은 연평도 북쪽 1.3㎞ 거리인 NLL 이남에서만 조업이 가능했다. 그러나 조기를 쫓는 배들은 황금어장을 눈앞에 두고 조기떼를 포기할 수 없었다. 월선 조업을 단속하는 남북 양측의 감시가 있었지만 감시를 피해 미력리도 등 북쪽 섬들 앞까지 숱하게 넘어다녔다. 그 과정에서 밤에 몰래 북쪽 바다로 넘어가 조업하던 남한 배들이 북한의 포격을 받고 침몰하는 사건들이 자주 발생했다. 1955년 5월에는 북한군이 월선 조업 중이던 남한 어선들에게 집중 포격을 하여 수십 명이 사망했다. 그 후에도 남한쪽 배들의 월선 조업은 중단되지 않았고 남북간에 잦은 마찰이 빚어졌다. 그러던 중 남한 정부는 1968년, 연평도 북쪽으로 어선들의 항해를 금지하는 어로저지선(어로한계선)을 만들었다. 어로저지선이 생기면서 어선들은 월선 조업을 할 수 없게 됐다. 어로저지선이 그어지던 무렵은 오랜 세월 남획의 결과, 칠산어장과 연평어장으로 회유하는 조기떼의 수가 급격히 줄어들던 시점이었다. 회귀하는 조기떼의 소멸과 황금어장인 연평 북쪽 바다의 조업제한으로 연평어장은 순식간에 쇠퇴했다. 그에 따라 연평도에 있던 서해 어로지도 본부도 덕적도 북리 항으로 옮겨갔다. 1969년까지도 더러 올라오던 조기떼는 1970년경부터는 아주 사라지고 말았다. 그렇게 조기 파시가 막을 내리고 마침내 연평도의 황금시대도 종말을 고했다.글·사진/강제윤 (시인·'섬을 걷다' 저자)

2009-05-26 정진오

[옛 인천의 황금어시장을 찾아서·11]하인천 어시장

# 경인지역 최대 어시장 하인천 포구분단과 전쟁을 거치면서 연평도에서 개성, 평양, 해주 등 이북 지방으로의 교역은 차단됐다. 동시에 서울의 마포나루를 출발해 한강의 물길을 따라 연평도로 이어지던 뱃길도 끊기고 말았다. 그때부터 인천은 연평어장의 조기들이 뭍으로 들어가는 가장 중요한 통로가 됐다. 당시 인천의 포구는 화수, 만석, 화평 부두 등 여러 곳이었지만 그중에서 중심은 하인천 포구였다. 인천 어시장이 경인지역 수산물의 최대 공급처가 된 것이다.조기철이면 하인천 부두는 조기잡이 어선과 상고선 등이 드나들며 북새통을 이루었다. 안강망 배들은 사리 때 조업을 하고 조기가 들지 않는 조금 때는 직접 조기를 싣고 하인천으로 들어왔다. 부두로 들어오는 모든 어패류는 '강제 상장제'에 따라 수협 위판장의 경매를 거쳐야 거래가 가능했다. 수협 위판장은 지금의 하인천역 철길 건너편에 있었다. 하인천 위판장은 경기도 지부 수협이 관리했고 화수동 위판장은 인천시 수협이 관리했다. 하인천 부두 주변에는 어시장의 좌판들과 수 십 개의 대형 상회들이 성시를 이루었다. 경인상회, 부흥상회, 용유상회, 미자상회, 종호상회, 대남상회, 오씨상회 등은 조기를 비롯한 어류와 굴, 조개 등의 패류를 취급했다. 상회의 주요 고객은 서울과 인천, 경기 지방의 상인들이었다. 서울의 노량진 시장이나 인천의 여러 시장 상인들도 하인천에서 수산물을 사다가 팔았다. 하인천은 오랜 세월 인천의 중심 어시장이었다.# 1890년 인천 최초의 어물객주 생겨하인천 어시장의 역사는 1900년대 초부터 시작됐다. 개항 전 인천은 한적한 포구에 불과했다. 일본인들의 거주가 늘어나면서 인천에 최초로 어시장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일본인들은 1887년 남양에서 강화까지 인천 근해의 어로권을 획득했다. 15척의 어선으로 조업을 시작한 일본인들은 인천에서의 수산물 판매권도 얻었다. 1895년부터는 조업하는 일본 어선수가 30여척으로 늘어났다. 그 무렵 조선의 어선들도 인천항으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인천 최초의 어물 객주는 1890년, 한양의 청파동에 살다 인천으로 내려온 정흥택씨 형제였다. 정씨 형제는 어선들이 드나드는 신포동 부둣가에 어물전을 짓고 수산물 도매시장을 설립했다. 정흥택씨의 막내 동생 정세택과 장남 정태영이 어물전을 운영했다. 둘째 동생 정순택은 경인선 기차에 선어물을 실어 서울의 시장으로 보내는 중개상을 했다. 어물전의 주요 고객은 일본인 주부들과 조선인 음식점 주인들이었다. 조선인들 대부분은 생선 지게장수에게 한꺼번에 많은 양의 생선을 사서 염장하거나 말린 뒤 보관해 두고 먹었기 때문에 어물전을 잘 이용하지 않았다. 일본인들은 필요할 때마다 어물전으로 나와서 생선을 사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일본인 어시장도 생겼다. 1898년 5월, 이나다 가츠히코란 일인이 '조선인 어업자 양성'을 명목으로 청나라 거류지에 어시장을 개설했다. 1900년 초부터 인천 해안에 매립공사가 시작되자 신포동의 도매시장은 북성동 하인천부둣가로 옮겨갔다. 하지만 하인천으로 옮긴 도매시장은 1907년 일본인들이 세운 인천 수산주식회사에 흡수되고 말았다. 1930년대부터는 일본인들이 인천지역 어시장의 상권을 독점하기 시작했다. 1932년, 임겸 상점은 15t 규모의 어업용 제빙 공장을 설립해 어선들에게 얼음을 공급했다. 채미전(청과물 시장)에서 어물전인 인화상회를 경영하던 양인수씨의 아들 양성혁은 30년대 후반부터 조기를 일본에 대량으로 수출하기도 했다. 해방과 한국전쟁을 거친 뒤에도 오랜 세월 흥성하던 하인천 부두는 1975년 항동의 연안부두로 어시장이 옮겨가면서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인천 골목마다 조기 말리는 모습 장관하인천의 상회 주인들은 생조기만이 아니라 굴비로 말려서 팔기도 했다. 상회주인들은 인부들을 사서 큰 시멘트 간통에 염간 한 뒤 지금의 대우기계 마당 자리에다 열 마리씩 두릅으로 엮어서 말렸다. 당시에는 상인들뿐만 아니라 주민들도 조기를 대량으로 사다가 말려놓고 일 년 반찬을 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아이들은 과일 서리하듯 조기 서리를 하기도 했다. '인천 개항장 풍경'에서 인천 출신의 김윤식 시인은 당시의 추억담을 이렇게 이야기 한다."1960년 중반까지는 아무 길바닥에나 조기를 말리는 풍경이 흔했다. 특히 자유공원을 중심으로 중구 대부분 동네 골목길은 조기를 말리느라고 펴놓은 가마니가 지천으로 널려 있어서 여기저기 발길에 채일 정도였는데 웬만한 집조차도 보통 500 마리 쯤은 사서 널었다. 잿빛을 띤 은색 광택이 있고 배 쪽은 붉거나 황금색인데 수 백 마리가 시뻘건 알집을 밑으로 삐죽이 내밀고 누워 있는 광경은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학생이었던 우리들은 가끔 내동이나 송학동쪽 골목길에서 조기 서리를 했다. 이렇게 서리한 반쯤 마른 굴비는 학교 뒤 숲에 들어가서 원시인처럼 그냥 날로 찢어 입에 넣기도 했고, 어느 때는 친구네 셋방 연탄 화덕에 올려 인근에까지 참으로 화려한 냄새를 풍겨주기도 했다. 전기밥통이 없던 시절이니 밥은 당연히 찬밥이고 거기에 먹다 남은 굴비 토막을 뒤적여 대가리와 가시까지 쪽쪽 빨아 먹는 맛!" 조기는 어떤 방식으로 요리해도 풍미가 넘쳤다. 생물은 굽거나 탕으로 먹었다. 하지만 당시 사람들은 조기를 염간 해서 사나흘 꾸득꾸득 말려 먹거나 오랫동안 바짝 말려 굴비를 만들어 먹는 것을 즐겼다. 바짝 마른 굴비는 항아리에 넣어두고 반찬을 했다. 굴비는 쪄 먹기도 했다. 찜통에 찌는 것이 아니라 냄비에 물을 자박자박 붓고 끓이면 짭짤하고 뽀얀 국물이 우러나왔다. 그 맛 또한 기가 막혔다. 그래서 인천 출신의 신태범 박사 같은 이는 "산뜻한 단맛을 풍기는 조깃국은 일품이고, 굴비가 없이는 여름 살림을 못하는 줄 알았던 시절이 오랫동안 있어 왔다"고 회고한 바 있다. 글·사진/강제윤 (시인·'섬을 걷다' 저자)

2009-05-19 경인일보

[옛 인천의 황금어시장을 찾아서]연평도 어업조합

1. 소연평 꼭대기 실안개 돌고 우리 집 문턱엔 정든님 들고2. 돈 실러가세 돈 실러가세 연평 바다로 돈 실러가세3. 뱀자네 아주마이 인심이 좋아서 막뚱딸 길러서 화장이 줬다네4. 백년을 살자고 백년초를 심었더니 백년초가 아니라 이별초드라5. 바람아 강풍아 불지를 말아라 고기잡이 간 님 고생하네(후렴)니나 니나 깨노라라 아니 놀고 무엇할 소냐 /연평도 '니나나 타령'# 바람아 강풍아 불지를 말아라연평도 여자들은 뱃일 나간 남자들의 무사귀환과 풍어를 기다리며 물동이에 바가지를 엎어놓고 노래를 부르는 풍습이 있었다. 바가지 장단을 치며 즉석에서 매김 소리를 넣고 부르던 그 노래가 '니나나 타령'이다. 니나나 타령은 연평도의 아리랑이었다. 뱃사람의 아낙들은 언제 남편을 잃을지 모르는 불안을 노래를 통해 잊으려 했다. 정월 대보름이면 아이들은 달마중을 나갔다. 말린 풀을 자기 나이 수만큼 작은 단으로 묶어 들고 뒷동산에 올랐다. 1960년대까지 연평도의 집들은 대부분이 초가집이었다. 기와집은 드물었다. 살림살이가 다들 고만고만했다. 배를 부리는 연평도 사람 중에는 한 4~5년 조기잡이를 해서 돈을 벌면 뭍으로 이주하는 경우가 많았다. 주로 충청도 지방으로 나가 논을 사서 농사를 지었지만 더러 인천 등지에 상점을 여는 사람도 있었다. 연평도에는 조기만이 아니라 굴과 조개, 새우(白蝦)도 많이 났다. 1936년 8월에는 연평도에 몰려든 새우잡이 어선이 600여척에 달하기도 했다. 연평도 사람들은 굴을 깨거나 새우젓을 담가두었다가 연백에 나가 쌀이나 조 등의 곡식과 바꿔왔다. 한 번 굴 장사 갔다 오면 벼나 조가 몇 가마씩 쌓였다. 그것으로 일 년치 양식을 했다. 굴은 쩍이 하나도 없이 깨끗하게 씻은 뒤 볏짚으로 엮은 '굴 오재비'에 담아 가서 팔았다. 방수가 되는 굴 오재비에는 바닷물을 채워 굴의 신선도를 유지했다.# 물동이 이고 물장사하던 연평도 여자들조기잡이 배들이 들어오면 연평도의 여자들도 바빠졌다. 연평도에 정박한 배들은 물과 식량, 장작 등을 보급받았다. 여자들은 이때를 틈타 물을 팔기 위해 물동이를 이고 갯가에 늘어섰다. 동쪽의 된진몰 해안부터 서쪽의 소상개 해안까지 물동이를 인 여자들이 물을 이어 날랐다. 수천척의 배가 보통 열흘 넘게 마실 물을 저장해야 했으니 동네의 큰 우물이 자주 말랐다. 한 배당 3~5드럼(50~60동이)의 물이 필요했다. 물은 주로 초등학교 앞 큰 우물이나 천주교회 앞 우물에서 길어 날랐다. 물 값은 돈으로도 받고 생선으로도 받았다. 배에서는 조기 외에도 홍어, 민어, 도미 등의 잡어를 말려 놨다가 물과 바꿔 먹기도 했다. 파시 때면 주민들도 간통에 조기를 절이고 '갱변'에 굴비를 말리는 일을 하며 소득을 올렸다. 주민들은 대부분 글이나 숫자를 몰라 임금을 받을 때면 돌멩이를 쌓아가며 셈을 했다. 조기 임자에게 돈을 받아 돌멩이 숫자대로 나눠 가졌다. 파시 때면 아이들도 가만히 놀고만 있지 않았다. 용돈벌이에 조기를 이용했다. 외상으로 빵을 사서 배를 돌아다니며 선원들에게 팔았다. 선원들은 조기를 주고 빵을 사 줬다. 그것으로 용돈벌이가 충분했다.# 당구장, 빵집, 야바위꾼까지 몰려들던 파시일제시대에도 파시 때면 백조환과 녹두환 등 두 척의 연락선이 인천과 해주에서 연평도까지 매일 운항할 정도로 연평도에는 사람들의 출입이 빈번했다. 파시 때 연평어업조합 하루 출납고가 한국은행(조선은행)의 출납고보다 많다고 할 정도로 연평도는 돈이 넘치는 황금의 땅이었다. 조기가 그대로 현금이었다. "돈 실러가세, 돈 실러가세, 황금바다 연평 바다로 돈 실러가세" 하는 민요는 그러한 배경에서 나온 노래였다. 파시가 서면 수많은 상점이 새로 생겼지만 색시 집과 함께 가장 많은 소득을 올린 곳은 선구점이었다. 연평도의 선구점은 외지인뿐만 아니라 김동문, 박홍표씨 등 이재에 일찍 안목이 트인 연평사람들도 경영했다. 선구점에서는 어구는 물론 쌀과 장작 등 선상 생활에 필요한 거의 모든 물품을 팔았다. 사람들이 넘치는 파시 때는 모든 장사꾼이 바가지를 씌울 준비가 되어 있었다. 짧은 순간에 한몫을 잡아야 했으니 정상적인 상도덕이나 질서 따위는 찾아볼 수 없었다."무법이야 완전 무법이야, 무법 천지." 파시 때면 쌀을 사러 가도 제대로 무게를 달아 주지 않았다. 주인이 담아 주는 것이 한 가마고 한 말이었다. 무게를 달아 보자고 하면 "그럼 딴 데 가서 사"라며 배짱을 부렸다. 물건이 부족하니 속는 줄 알면서도 안 살 수가 없었다. 해상이나 지상이나 파시의 주인은 어부들이 아니었다. 장사꾼들이었다. 파시 때면 잡화점, 약국, 목욕탕, 이발소, 당구장, 옷가게, 고무신 가게, 빵집, 과일 가게 등 없는 것 없이 다 생겼다. 강변 자갈밭에는 엿장수와 호떡장수, 야바위꾼도 몰려들어 판을 벌였다. 연평도 땅이 온통 널어 말리는 조기 천지였으니 아이들은 조기를 슬쩍 주워다 엿이나 호떡으로 바꿔 먹기도 했다. 큰 조기 두 마리를 가져가야 호떡 한 개를 줄 정도로 조기 값이 쌌다.파시 때면 '뺑뺑이'라 부르는 야바위가 성행했다. 뺑뺑이는 번호 매긴 표적을 세우고 총으로 맞추면 건 돈의 두 배를 가져가는 도박이었다. 노점에서는 붕어빵이나 찐빵도 팔았다. 주민들도 엿이나 묵, 두부 등을 만들어 팔기도 했다. 연평도 주민 강순환씨가 하는 냉면집도 인기가 좋았다. 시장통에는 떡집, 국수집도 즐비했다. 해방 전까지는 연평도에도 일본 사람들이 여러 집 살았다. 배를 만드는 삼나무(스기목) 수입상을 하던 '하마다'라는 일인은 황해도 전역에 대한 삼나무 공급 허가권을 갖고 있었다. 그의 집은 '갱변' 쪽의 2층 목조주택이었는데 선주들은 그의 집 앞에서 어선을 지었다. 파시가 서면 하마다는 선구점도 크게 열었다. 일본에서 물품을 직접 가져다 팔았다. '이케다'는 파시 때 목욕탕을 했다. 장작불로 물을 끓여 목욕물을 댔다. 그는 연평도에 처음으로 포도원을 열고 포도를 재배하기도 했다. 글·사진/강제윤 (시인·'섬을 걷다' 저자)

2009-05-12 경인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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