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향민이야기 꿈엔들 잊힐리야·11]황해도 연백 출신 고구한 할아버지 (下)

해성면 해남리 고향 동네는 100여명 모여살던 고씨 집성촌최대 곡창지대답게 부친도 맨손으로 논과 밭 수천평 일궈염전은 '염전로동자구'로 불려… 위성사진으로 봐도 장대평야서 많이 나온 '토탄'은 타 지역 연료난 해결에도 도움고구한(81) 할아버지는 지금도 고향 집 주소를 기억하고 있다. 황해도 연백군 해성면 해남리 한율동 269번지. 고향 동네에는 100여명이 살았는데, 고씨 집성촌이었다. 동네 남쪽으로는 드넓은 염전이 있었고 하천이 마을을 휘돌아 서해로 나갔다. 앞바다는 썰물 때면 드넓은 갯벌을 드러냈다. 갯벌에서 소라를 잡아 깬 뒤 그물에 달아 던지면 물고기가 몰려들었다. 할아버지의 부친은 대나무로 만든 대 끝에 그물을 붙여 얕은 바닷물 속을 밀고 다니는 '사도질'을 했는데, 금세 망둥이나 새우를 잡아냈다. '사도질'은 아마도 손잡이가 길고 국자처럼 생긴, 고기 잡는 그물인 '사둘'을 일컫는 것으로 보인다. 할아버지 고향 앞바다에서는 강화도 교동 등 인근에서도 배를 끌고 나와 물고기를 잡을 정도로 어장이 풍성했다."고기가 엄청나게 많아. 낚시질도 잘되고 투망도 잘되고, 미끼를 던지면 망둥이나 숭어 이런 것이 엄청나게 달려들었지. '모찌'라 부르는 숭어 새끼는 물들어올 때 '자자자착'하면서 뛰어다니고 지금 생각해도 참 좋아." 연백은 곡창지대로도 유명했다. 30년간 소래포구에서 쌀 장사를 한 할아버지는 자신 있게 연백쌀이 최고라고 말했다. 당시 신문기사에도 중요 곡창지대로 '연백평야'가 여러 번 등장한다.동아일보 1949년 4월28일자는 "해방 후 해마다 봄이 되어 파종기를 당하면 연 100만석을 산출하는 연백평야(延白平野)"라고 전한다. 동아일보는 1937년 9월12일자 '연백기자단(記者團) 설립'을 알리는 기사에서 "연백은 황해, 연해양수리조합의 몽리면적 2만여 정보(二萬餘町步)의 옥토가 연백평야에 가로 놓이고 미산지로서 전 조선적 곡창인 동시에 인구팽창과 아울러 급진적 발전 도정에 있는 신흥지대이다"고 소개하고 있다. 한국 전쟁 후 남한에서는 쌀값이 폭등했는데, 그 원인 중 하나로 남한 땅이었던 연백평야가 북한으로 넘어간 것을 꼽기도 했다.이북5도청 황해도에서 지난 1970년 발행한 '황해도지'를 보면 연안(延安)과 배천(白川)이 합쳐져 1914년 연백군이 됐다. 주위의 평야지대는 쌀의 품질이 좋아 임금에게 진상하기도 했다.고구한 할아버지 가족도 연백에서 농사를 지었는데, 주로 조와 밀을 많이 심었다. 조를 수확한 뒤에는 콩을 심는 이모작을 했다. 할아버지의 부친은 물려받은 것도 없이 남의 논에서 일을 시작해 3천여 평의 논과 2천여 평의 밭을 일궜다."그때는 장남한테만 재산을 줬어. 큰아버지는 재산을 받아서 머슴을 두고 일하고, 서당 선생도 하고 했는데, 밑에 4형제는 아무것도 못 받았어. 아버지는 남의 논에서 일하면서 번 것으로 땅을 사기 시작해서 논밭을 사고 집을 사고 이렇게 한 것을 보면 참 대단해. 장사를 하신 것도 아니고 온전히 노동으로만 땅을 사셨으니까."연백에서는 소금도 많이 생산됐다. 할아버지 고향 마을이 있는 연백 해성면(海城面) 일대가 염전이었다. 할아버지는 고향 마을에서 남쪽으로 내려가면 드넓은 염전과 염전에서 일하는 인부가 머무는 사택이 있었다고 기억했다. 이 염전은 지금은 '염전로동자구'로 불린다. 국가지식포털 '북한지역정보넷'은 황해남도 연안군 해남리를 "1958년 (황해남도 연안군 해남리의) 일부 지역을 분리하여 염전로동자구를 신설했다"고 소개한다.연백염전은 당시 국내 염전 가운데 가장 넓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동아일보는 1939년 11월1일자에서 1천670정보(町步) 면적의 연백염전 조성 공사가 시작됐다는 소식을 전하며 "조선 안에서 제일 큰 염전이 출현할 것"이라고 했다. 실제 완공했을 때는 그 규모가 약간 작아지기는 했는데 그 거대함은 지금 위성사진으로 봐도 장대하다. '작지만 큰 한국사, 소금'이라는 책에는 1943년 황해도 연백군에 완성된 천일염전 규모가 1천250정보라고 나와 있다.남한 땅에 속했던 연백염전이 한국전쟁 이후 북한에 귀속되면서 남한에서 천일염전 개간이 본격화됐다. 전국 소금 생산량의 상당 부분을 책임지던 연백염전을 전쟁통에 잃게 되면서 이를 대체할 염전을 개발할 필요성이 제기됐다. 1950년대 초 전라남도 신안과 무안 등에서 천일염전이 개발됐다. 일제강점기 관(官) 염전을 제외하고 서해안의 천일염전은 대부분 한국전쟁 이후부터 1950년대 중반까지 세워진 것이다. 한국전쟁 중 정부는 염전 확대, 소금 생산을 위해 '염증산5개년계획(1952~1956)'을 수립했다. 북에서 내려온 피란민은 염전을 개발하고 운영하는 노동력을 채웠다.고구한 할아버지도 피란을 나와 강화 석모도에서 염전 개간하는 일을 했다. 할아버지가 소래포구에 왔을 때 소래 일대에 조성된 소래염전 인부 대부분이 실향민 출신이었다고 할아버지는 말했다. 할아버지는 연백염전과 소래염전의 운영 방식이 같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다만 한 가지 차이점이라면 소래염전 바닥에는 '타일' 같은 것을 깔아 소금 결정이 맺히기 쉽게 했는데, 연백염전에는 특별히 깔린 것이 없었다. "소래에는 타이루 같은 거를 까는데 연안염전(연백염전)은 바닥이 좋았나봐 그냥 맨바닥이었어." 일제시기에는 염전의 바닥이 흙으로 된 '토판'이었는데, 한국전쟁 이후에는 옹기조각을 까는 '옹기판'과 '타일판'으로 10여 년 사이에 진화했다고 할 수 있다.그런데 할아버지 가족에게 일제강점기에 조성된 연백염전이 마냥 반가운 존재만은 아니었다. 고향 마을 사람들은 한 가족처럼 서로를 믿고 챙겼는데, 염전이 생긴 뒤에는 마을에 도둑이 들 정도로 동네 분위기가 흉흉해졌다."평안도나 전라도 지방에서 염전에 일하러 많이들 왔어. 이 사람들 오고 나서는 도둑만 생기는 거야. 집 앞에 땔감도 훔쳐가고, 동네에 있는 나무란 나무는 다 잘라다가 땠어. 기르는 닭 같은 것도 많이도 훔쳐갔어."당시 염전 인부는 노동의 대가로 쌀을 받기도 했지만, 연료 토탄(土炭)이 차지하는 비율이 높았다. 토탄은 석탄의 일종인데 탄이 묻힌 깊이가 석탄보다 깊지 않고, 묻힌 기간도 짧다. 당시 연백의 넓은 평야에서 토탄이 많이 났다. 당시 신문기사를 보면 연백에서 생산되는 토탄은 서울 등 다른 지역에도 공급돼 연료난 해결에 큰 도움을 줬다. 동아일보 1947년 11월28일자는 "금융조합연합회에서는 추위에 울고 있는 세궁민들을 위해서 연백군 일대에서 채취되는 약 600만 개의 토탄을 서울시로 운반하여 염가로 배급하는데 이리되면 각하(刻下) 핍박한 연료사정은 약간 완화될 것으로 기대된다"고 했다.황해도중앙도민회가 지난 2012년3월 1일 펴낸 '황해민보'에 실린 '내 고향 황해도' '연백군편'을 보면 연백평야에서는 1m 이하 지하층에서 토탄(연료)이 광범위하게 채굴돼 주민들의 연료로 쓰였고, 명산물로 다른 지역에 공급되기도 했다.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강화군협의회가 2008년 4월 펴낸 실향민 증언록 '격강천리라더니'에는 연백 출신 실향민 여럿이 토탄에 대해 이야기한 내용이 담겼다. 차세룡 할아버지는 "특산품으로 토탄이 산출되는 곳인데 땅을 한 5m 정도 파면 토탄이 나오는데 그것을 캐서 논두렁에 말려서 땔감으로 사용했다"고 회고했다.고구한 할아버지 고향에는 나지막한 산도 있었는데 '봉화산'이라 불렸다. 조선시대 봉화를 올렸던 산이다. 조선 중기 편찬된 지리지 '신증동국여지승람' '연안도호부편'을 보면 연안에는 5개 '봉수(烽燧)'가 있었다. 이 중 할아버지가 말하는 봉화산은 각산(角山) 봉수인 것으로 추정된다. 각산 봉수는 서쪽으로는 백석산(白石山), 동쪽으로는 배천군 봉재산(鳳在山)에 응했다고 기록돼 있다. 남쪽으로는 경기도 교동현 수정산(修井山)과 응한다. 이는 조선 후기 각읍에서 편찬한 읍지를 모아 책으로 엮은 전국 읍지 '여지도서'에 기록된 내용과 동일하다. 황해도지는 각산에 대해 "옛날 연안, 배천의 경계요 경기도 강화군의 교동도로 건너가는 요진이었다. 고려사 중에 보이는 사실로, 공민왕 7년(서기 1358) 3월에 왜(倭)가 각산성에 침구(侵寇)하여 와서 전선(戰船) 30척(隻)을 불태웠다는 각산성은 이곳을 말하는 것이다. 산상에 봉화대가 있었기 때문에 산명을 봉화산이라 하기도 하였으며 지금 봉화리의 지명도 여기서 연기(綠起)된 것이다"고 했다.할아버지가 회장을 맡고 있는 고향 동네 향우회 이름도 봉화산의 이름을 따 '봉화회'다. 회원 수가 100여 명으로 조그만 동네 향우회라고 믿기 힘들 정도로 회원 수가 많다. 매년 정월 초이튿날과 하지(夏至)에 2번 정기적으로 모인다. 1960년대 인천, 시흥 등에 사는 사람이 서로 연락이 되면서 모이기 시작했다. 1세대 실향민은 벌써 여럿이 세상을 떴고, 실향민 2세대가 그 빈자리를 채우고 있다. 향우회에서는 돈을 모아서 경기도 김포시 하성면에 있는 산 약 2만㎡(6천평)를 샀다. 하성면은 한강을 사이에 두고 북한과 마주한 지역이다."죽어서라도 한곳에서 고향 사람이 같이 있자고 해서 향우회에서 공동으로 산을 샀어. 거기에 우리 아버지, 어머니, 막내가 묻혀 있어."글/홍현기기자 hhk@kyeongin.com· 사진/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동아일보 1947년 11월 28일자에는 연백군에서 채취한 토탄 600만개를 서울시로 운반해 저렴한 가격에 '세궁민'에 배급한다는 내용의 기사가 실렸다.

2017-03-22 홍현기

[실향민이야기 꿈엔들 잊힐리야·10]황해도 연백 출신 고구한 할아버지 (中)

원주민에 밀린 피란민 1960년대 황량한 소래포구 정착 '실향민촌'이라 봐도 무방시흥 등 곡창지대서 나룻배 대신 철길위 자전거로 품질 좋은 쌀 실어다가 되팔아외상으로 가져가는 탓에 큰 돈 못벌어 "밀린 외상값은 받고 떠난다" 오기로 버텨고구한(81) 할아버지가 노렴나루라 불리던 지금의 소래포구에 정착한 1960년대 중반 이 일대에는 10여 명이 사는 판잣집이 전부였다. 그야말로 사람의 인적이라고는 찾기 어려운 한적하기 그지없는 갯가일 뿐이었다. 그런 소래포구가 매년 수백만 명이 찾는 수도권 최대 관광지 중 한 곳으로 성장한 배경에는 고구한 할아버지와 같은 실향민이 있었다. 실향민들이 노렴나루에 자리를 잡고 어업을 시작하면서 시끌벅적한 소래포구는 태동했다. 인천시립박물관에서 펴낸 '인천연안의 어업과 염업'이란 책에는 "1963년 당시 실향민 6가구 17명이 전마선, 범선(무동력선) 등으로 연안에서 새우잡이를 시작했다"고 당시 노렴나루의 풍경을 그리고 있다. 시흥시사편찬위원회가 발간한 '시흥시사'도 "소래어촌은 이북에서 내려온 월남민들의 해안정착촌으로 번창하기 시작했다"고 기술했다. 소래포구는 '실향민촌'이라고 불러야 할 정도로 실향민과 깊은 관련이 있다. 지금도 소래포구 어시장에서는 '황해도 옹진상회', '연백상회', '개성상회' 등의 간판을 볼 수 있다.인천 중구, 동구 등지의 해안가에 터를 잡았던 피란민들은 1960년대에 들어서면서 그곳의 원주민에 밀려 황량한 소래포구에 정착할 수밖에 없었다. 실향민의 아픔을 소설로 풀어낸 이원규의 단편 '포구의 황혼'(1987년)의 배경도 소래포구다. 이원규는 소설을 쓸 당시 소래포구의 70~80%가 실향민이었다고 했다. 작가 이원규는 경인일보와의 통화에서 "아마도 화수부두, 만석부두 등 기존의 포구가 포화상태가 되면서 포구가 좁아지고 충돌 우려가 있으니까 월남하신 분들이 본토박이를 피해 나오게 된 것"이라고 했다.고구한 할아버지도 새로운 시장을 개척한다는 심정으로 소래포구에 왔다. 지금의 소래포구 성당 인근에 가게를 냈다. 교통환경이 열악한 소래포구에서 쌀장사를 하면 경쟁자가 없을 것이라 생각했다. 곡창지대가 있는 군자 등 시흥 서북부지역에서 소래 등 인천으로 오려면 월곶과 노렴(소래포구 일대 옛 지명)을 잇는 노렴나루에서 나룻배를 타야 했다. 나룻배에는 많은 짐을 싣지 못했고 운반 시간도 오래 걸렸다. 인하대박물관에서 펴낸 '인천장도포대지'에 수록된 '노렴마을과 소래포구의 민속생활문화'에 따르면, 군자면 사람들이 곡물 등을 짊어지고 노렴나루를 통해 인천 시내로 나가 다른 물자를 바꿔 오곤 했다. 인천 쪽 사람들이 노렴나루를 건너 시흥 방면으로 가는 일은 드물었다."소래포구라고 아무것도 없었어. 전부가 무허가 판잣집이었어. 배도 그렇게 많지 않았고, 고기를 잡아도 팔 데가 없어서 서로 사가라고 내놓고 했지. 지금 있는 어시장이고 뭐고 아무것도 없었어. 시흥 쪽으로 가려면 배를 타야 했는데 위험해서 짐을 싣기가 어려웠지."고구한 할아버지와 같은 피란민들이 정착하고 번창하기 시작하면서는 갯골 건너 큰 포구인 경기도 시흥 포리(현 포동게이트볼장 자리) 쪽이 쇠락했다. 포리는 현 시흥시 수암산에서 시작되는 보통천과 뱀내가 합쳐져 흐르는 물줄기 끝자락의 포구다.일제강점기 수인선 소래철교 건설로 선박 통행이 불편해진 점도 포리 포구 쇠퇴의 원인으로 꼽을 수 있다. 소설가 이원규는 "소래가 일어나면서 시흥 포동(포리) 포구에 있던 사람들도 따라 나온 것 같다"고 했다. '시흥시사'에서도 '배를 타고 인천이나 시흥으로 월남한 정착민들이 소래포구를 부흥시켜 나갔다'고 해 이를 뒷받침한다.고구한 할아버지는 소래포구의 열악한 환경을 오히려 기회로 삼았다. 수인선 협궤열차마저 위태롭게 건너다니는 소래철교(소래포구~시흥) 철로에 자전거 두 바퀴를 올려 놓고 쌀을 실어 날랐다. 달월, 장곶, 거머리, 매화리 등 시흥 일대 정미소에서 쌀을 사 소래포구에서 되팔았다. 소래철교는 높이가 10m에 달하고, 다리 밑으로는 물살이 거세 담이 크지 않으면 맨몸으로도 건너기 어려웠다. 그런 철교를 이용해 할아버지는 자전거에 쌀 두 가마를 실어 날랐다. 철교 통행 자체가 금지된 때였고, 어떠한 안전장치도 없었다. '노렴마을과 소래포구의 민속생활문화'에 따르면 6·25전쟁 중에는 주민들이 소래철교 위에 널판을 깔아 사람들이 밑으로 떨어질 걱정 없이 철교를 건너다닐 수 있게 했지만, 전쟁이 끝난 후에는 철교 통행을 금지했고 널판도 철거했다. 할아버지는 매일같이 자전거를 끌고 외줄 타기를 하듯이 철길을 건넜다."그때는 다리에 초소가 있는데 경찰 2명이 나와서 위험하다고 철길로 다니지 못하게 했어. 나는 파출소랑 쌀 거래도 하고 자주 건너다니고 해서 막지를 않았어. 철길을 웬만한 사람은 어지러워서 못 건너. 나는 딴 길이 없으니까 어쩔 수 없이 철길 위에 바퀴를 올려놓고 건너오는 거지. 남들은 기운 좋고 재주 좋다고 그러지만 나는 그냥 간이 콩알만 한 거지. 그래도 한두 번 건너다보니까 계속 건넌 거야. 나는 짐을 실어도 빨리 건넜다고. 저기 소래 역전에 기차가 와서 '뿍뿍'해도 그동안에 건널 수 있었어. 지금 생각해보면 거기를 내가 어떻게 건넜나 싶어."소래철교를 건너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었다. 얼마나 아찔한 일었던지 윤후명은 장편 '협궤열차'에서 소래철교를 건너다 한 해에 한두 명은 목숨을 잃었다 했다.'소래에서 남쪽으로의 유일한 통로인 이 협궤철도의 철교는 그토록 위험함에도 불구하고 통로가 될 수 있다는 데는 틀림이 없다. 그래서 한 해에 어김없이 한둘은 이승의 집보다도 저승의 집을 택할 수 있었다. 드높이 걸려 있는 철교는 물론 단선인 데다 폭이 좁아서 웬만큼 담찬 사람이라도 오줌을 질금거리며 건너가야 한다. 협궤철도의 철교만큼 가냘픈 다리는 시골 시냇가에 걸쳐놓은 나무 징검다리를 제외하고는 없다. 그러나 시골의 나무 징검다리에서 미끄러지면 발을 깨끗하게 하는 이점이 있을지도 모르지만, 협궤철도의 철교에서 미끄러지면 전혀 다른 결과를 빚는다.'이렇게 이승과 저승의 경계를 건너 어렵사리 고구한 할아버지가 가져온 쌀은 인기가 좋았다. 품질이 좋은 쌀을 가져와 신문에 나온 곡물 시세를 기준으로 저렴하게 팔았다. 할아버지 가게는 '소래 쌀집'으로 통하며 인천의 반대편 동구 송림동까지 쌀을 공급하기도 했다. 인천 시내 부자들이 돈을 더 주고라도 사겠다고 소래 쌀집을 찾았다.하지만 많은 돈을 벌지는 못했다. 외상으로 쌀을 가져가고는 갚지 않는 것이 부지기수였다. 1만원어치 쌀을 준 뒤 매일 돈을 받는 '만원일수'를 하기도 했는데 그것도 밀렸다. 어민들이 물고기를 잡아도 소래포구를 찾는 사람이 없어 팔 길이 막막하던 때였다. 70년대 중반 소래포구가 '새우 파시(波市)'로 자리 잡고, 80년대 소래포구 어시장이 북적거려도 외상값은 줄지가 않았다. "돈을 벌어도 저금해서 이자를 받으려고 했어. 외상하면 이자가 없는데 저금하면 이자를 받는다는 생각이었던 거지."고구한 할아버지는 돈을 갚지 않는 소래포구 사람들이 싫어져서 다른 곳으로 떠날까 하다가도 '밀린 외상값은 받고 간다'는 오기로 버티다 보니 세월이 갔다고 했다."90년대에 들어오면서 슈퍼마켓이나 마트에서도 포대로 쌀을 팔기 시작해 쌀장사로는 도저히 버틸 수가 없어서 쌀집을 그만뒀지. 소래포구에 와 1~2년 해보자고 시작한 쌀장사가 30년이 됐어. 외상도 안 갚고 사람들도 정이 안 간다고 다른 데로 떠야겠다고 했던 것이 지금까지 살고 있어. 인천 쌀장사, 부천 쌀장사, 서울 쌀장사, 안양 쌀장사 전부 다 트럭을 가지고 돈도 수없이 들이면서 장사를 했는데, 나는 달랑 자전거 하나로 하면서도 인심을 안 잃었기 때문에 언제나 사람들이 우리 가게를 찾았지."글/홍현기기자 hhk@kyeongin.com· 사진/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고구한 할아버지가 쌀 두 가마를 실은 자전거를 끌고 소래철교를 건넜을 당시의 모습을 그래픽으로 표현했다. 현 소래철교 위에서 자전거를 끄는 할아버지의 모습을 촬영한 뒤 배경으로 옛 소래철교를 그려 넣었다. 그래픽/박성현기자 pssh0911@kyeongin.com1990년대 초 소래포구의 모습. /경인일보 DB소래포구 어시장에 있는 가게 간판에서도 실향민의 흔적을 엿볼 수 있다.

2017-03-16 홍현기

[실향민이야기 꿈엔들 잊힐리야·9]황해도 연백 출신 고구한 할아버지 (上)

7남매 중 장남 1·4후퇴때 교동으로 '피란'배 타고 고향땅 오가며 숨겨놓은 쌀 옮겨기관 통제 속 일부는 염전 소금 나르기도지뢰밭·인민군 총격 속에도 목숨 건 사투집도 준다는 정부 정책에 강화 본도 이주실상은 교동 인구 분산위한 당국 거짓말제대로 못 먹은 누이동생은 병으로 잃어소래포구서 쌀 장사… '쌀과의 질긴 인연'황해도 연백 출신 고구한(81) 할아버지는 인천 소래포구에서 30년 가까이 쌀장사를 했다. 경기도 시흥시 일대 정미소를 돌며 구한 쌀을 자전거로 소래포구에 가져와 팔았다. 자전거에 쌀 두 말을 싣고 그야말로 '산 넘고 바다 건너' 하루 100리(里) 이상을 다녔다. '남들이 잘 때 자고, 놀 때 놀면 안 된다'는 생활신조로 일했다. 할아버지는 산수(傘壽)를 넘긴 지금도 바쁘게 산다. 자전거 가게를 운영하면서 소래포구 어시장 경비 일도 하고 있다. 소래경로당 회장, 고향 동네 향우회 '봉화회' 회장도 맡고 있다.고구한 할아버지는 7남매의 장남이었다. 1951년 1·4후퇴 때 남동생과 함께 강화 교동으로 피란을 나왔다. 젊은 남자는 인민군에 징집될 수 있다고 해 남자 형제들부터 먼저 고향을 떠났다. 부모님과 누나, 동생은 다시 연백이 수복될 것으로 보고 고향 땅에 남았다가 상황이 호전되지 않자 몇 개월 뒤 교동으로 건너왔다.피란 때 가장 귀한 재산은 쌀이었다. 할아버지는 쌀 3말을 짊어지고 교동으로 넘어 왔다. 피란살이가 길어지면서 먹을 것이 떨어지자 고향 땅 집안 곳곳에 숨겨놓은 쌀이 생각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공산치하였다. 목숨을 이어줄 그 쌀을 가져 오기 위해서는 실제 목숨을 걸어야 했다. 고구한 할아버지의 조모는 논에 있는 짚가리와 집안 곳곳에 쌀을 숨겨 놓았다. 조모는 피란을 나갔다가 잠시 후면 다시 고향 땅에 올 수 있을 것으로 보고 쌀을 감췄다. 그러나 전쟁은 쉽사리 끝나지 않았다.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강화군협의회가 2008년 4월 펴낸 실향민 증언록 '격강천리라더니'에도 연백 출신 피란민이 전쟁 와중에 공산 치하에 들어간 고향 땅을 오간 사례가 나온다. 1·4후퇴 당시 20세였을 황해도 연백군 원전면 출신 조순희 할머니는 "삶에 있어서 배고픔은 마지막이지요. 그때마다 다시 뗏목 타고 가서 쌀도 가지고 왔었지요. 목숨 건 일이었어요"라고 증언했다. 당시 숨겨 놓은 쌀이 없는 피란민은 연백염전에 쌓여 있는 소금을 가져왔다. 온종일 배에 소금을 실어 나르면 '기관'이라는 곳에서 나와 쌀 5되 정도를 살 수 있는 돈을 줬다. 목숨 값 치고는 너무나 가벼웠다.피란을 나온 사람이 전선(戰線)을 뚫고 다시 고향 땅을 오가는 길은 위험천만이었다. 인민군이 습격하기도 했고, 나루 곳곳은 지뢰지대였다. 처음에는 고구한 할아버지의 부친이 혼자 쌀을 가지러 떠났다. 다른 가족이 위험한 상황에 노출되는 것을 원치 않아 당신이 해결하려고 했던 것이다. 그렇게 연백으로 떠난 부친은 한동안 교동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교동으로 배가 들어올 때마다 고구한 할아버지가 나루로 나갔는데, 부친은 배에 없었다. 부친과 비슷한 때에 넘어 간 사람들이 지뢰를 밟아 몰살당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그래도 할아버지는 배를 탔다. 아버지도 찾고 쌀도 가져오기 위해서였다. 기적이 일어났다. 고향 집 근처에서 성치 않은 몸으로 숨어 지내던 부친을 찾았다. 아버지는 쌀을 가지러 가다 발을 헛디뎌 다리를 다쳤고, 교동으로 돌아가기 어려운 상황이 되자 먹을 것도 마실 것도 없이 그저 숨어 있을 수밖에 없었다. 할아버지는 부친이 가져오려고 했던 쌀 한 말과 함께 교동으로 돌아왔다. 그 뒤로도 가족들의 목숨 연장을 위해 쌀을 가지러 수차례 고향 땅을 다시 밟았다. 그때마다 공산군의 감시가 삼엄해 할아버지는 이승과 저승을 오가야 했다."교동에 있으면 먹고살 게 없어. 정부 기관인지 모르겠는데, 그때는 곡식을 가져오라며 북쪽으로 출항 허가를 해주는 기관이 있었어. 쌀이든 소금이든 가져오라고 했어. 쌀을 가지러 가다 지뢰가 터져 죽는 사람이 많았어. 그러면 중도에서 멈추고 돌아왔다가 또 다시 가는 거지. 배가 인민군의 습격을 받기도 했어. 습격할 때는 공식 같은 게 있었어. '딱꿍총'이라고 당겨서 쏘면 '딱꿍' 하는 소리가 나는 총을 쏘고 나서 둥그런 따발총을 '뚜루루' 쏘는 거지. 2번은 죽을 뻔했어."이때 할아버지의 나이는 지금의 중학교 3학년에 해당하는 16세였다. 지금 같으면 부모에게 반찬 투정을 할 나이에 목숨을 내놓고 바다를 건넌 것이다. 쌀을 가지러 가지 않으면 교동에 남아 굶어 죽으니 어쩔 수 없었다. 고은 시인이 역사 인물 5천600명을 담은 연작시 '만인보'에서 표현한 것처럼 피란민의 배고픔은 죽음보다도 무서웠다.배고픔이 극에 달하면 사람도 괴물로 변할 수 있음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역사 곳곳에서 확인할 수 있다. 특히 전쟁과 배고픔이 겹치고는 하는데 그때는 상상 이상이다. 1845년부터 5년에 걸쳐 되풀이된 감자역병으로 발생한 '아일랜드 대기근'을 다룬 '검은 감자'라는 책에 따르면, 배고픈 사람들은 콜레라에 걸려 죽은 돼지도 먹었다. 사람이 길섶에 쓰러져 죽거나 관도 없이 그냥 땅에 묻히면 걸신들린 개가 그 시체를 뜯어먹었다. 그런 개는 다시 굶주린 사람에게 잡아먹히면서 전염병이 퍼져나가는 악순환이 계속됐다. 사람이 사람을 잡아먹기도 한다. 300만 명이 굶어 죽었다는 중국 허난의 대기근을 다룬 '1942 대기근'이라는 책에는 친딸까지 잡아먹은 부부의 이야기가 나온다. 당시 허난에서는 남편에게 잡아먹힐 것이 무서워 어두운 밤을 틈타 도망가다가 길에서 굶어 죽은 아내의 사례도 있다. 멀리 갈 것도 없이 우리나라 임진왜란 때도 배고픔에 시달리다 인육을 먹었다는 얘기가 1594년 당시를 기록한 조선왕조실록에 실려 있다. '어떤 사람들은 산 사람을 도살하여 내장과 골수까지 먹는다고 합니다'('선조실록' 27년 1월 27일자). '죽은 사람의 살점만 먹을 뿐 아니라 살아 있는 사람도 서로 잡아먹는데 포도군이 적어서 제대로 금지하지를 못합니다'('선조실록' 27년 3월 20일자).이토록 처참한 아비규환의 전쟁 통 배고픔을 벗어나기 위해 어린 나이의 고구한 할아버지는 도망 나온 그 고향 땅으로 다시 돌아가야 했다. 인민군의 기관총 세례와 지뢰밭을 피해가며 어렵사리 가져온 쌀로 가족들은 하루 1끼를 먹었다. 밥은 돌을 올려놓은 냄비에다 끓였다. 밥이 잘 되는 날도 있었지만 죽이 되는 경우도 많았다. 찬밥 더운밥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 그리고 온종일 고향 땅을 쳐다보는 게 일이었다.전쟁이 더 길어지자 할아버지 일가족은 당국의 얘기를 듣고 강화 본도로 옮겼다. 거기서는 쌀이 떨어져 밀가루를 만들고 남은 말분(末粉)을 먹었고, 보릿겨, 쌀겨로 버텨냈다. 교동에 있을 때 정부 쪽 인사가 나와 강화 본도로 이주하면 배급도 하고, 집도 준다며 이주 신청을 하라고 했는데, 막상 가서 보니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당시 연백 출신 피란민이 교동에 몰리자 인구를 분산하기 위해 이 같은 이주정책을 편 것으로 보인다. 2003년 발간된 '신편 강화사'는 한국전쟁 때 강화로 온 피란민 수가 3만 명에 달한다고 했다.고구한 할아버지의 부친은 어선을 타는 등 닥치는 대로 일했지만 그 일터에서는 일한 사람 혼자만 먹을 수 있는 밥을 줬다. 이때 제대로 먹지 못한 탓인지 할아버지의 누이동생은 이름 모를 병에 걸려 목숨을 잃었다. 할아버지는 강화 석모도에서 3년 동안 염전을 개간하는 막노동을 하면서 끼니를 때웠다.할아버지의 인생에서는 쌀이 중요 포인트로 남아 있다. 어려서는 쌀을 구하기 위해 목숨을 걸었고, 밥을 얻기 위해 막노동을 했으며 그리고 1960년대 이후에는 소래포구에 자리를 잡고서 쌀 장사를 했다. 그때도 갯골 수로 몇 길 낭떠러지 높이 위에 아스라이 가로 놓인 철교 위를 목숨을 내놓고 쌀을 실어 날랐다. 지금 생각하면 그렇게 살아온 날이 그저 까마득할 뿐이다.할아버지는 1958년 중매를 통해 황해도 평산 출신인 아내를 만났고, 나이 스물 되던 1960년 결혼을 했다. 그 이듬해인 1961년 군대에 갔고, 3년 동안 복무했다. 실제로는 1936년생인 할아버지는 1939년으로 주민등록이 돼 있어 군대에 늦게 갔다고 했다. 남동생 둘과 함께 삼 형제가 군에 동시에 입대했다. 소래포구에 온 것은 1964년도다. 이때 지금은 수협 지점장을 하는 큰딸이 태어났다. 할아버지는 슬하에 2남 1녀를 두고 있다.글/홍현기기자 hhk@kyeongin.com·사진/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고구한 할아버지 등 피란민이 황해도 연백에서 배를 타고 강화 교동으로 쌀을 옮기면서 위와 같은 경로를 이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일러스트/박성현기자 pssh0911@kyeongin.com인천 남동구 논현동에 있는 소래경로당에서 만난 고구한 할아버지가 피란 당시 기억을 이야기하고 있다.

2017-03-08 홍현기

[실향민이야기 꿈엔들 잊힐리야·8]황해도 벽성군 출신 김완수 할아버지 (下)

벽성군 해방이후 '두동강' 동강면은 남쪽 편입 후 1·4후퇴때 北으로삼면이 바다 '해산물' 풍부… 서울 마포까지 가서 '바지락젓' 팔기도해방직전 먼저 떠난 부친은 목수 "이웃들이 '나막신 장사네'로 불러"日 '게다' 모양도 있었지만 조선 중기 들어 발 감싸는 굽 달린 형태로화재로 사진 등 다 타 '노래'로만 추억… 민요 '서도소리' 정확히 기억작년 전국노래자랑 옹진군편서 '눈물 젖은 두만강'으로 인기상 받아김완수 할아버지의 고향 황해도 벽성군은 1945년 해방 이후 38선으로 남북이 분리되면서 두 동강이 났다. 할아버지가 살던 동강면(洞江面)은 남쪽으로 편입돼 경기도 옹진군 소속이 됐다가 1950년 한국전쟁 직후 북한 치하에 들어갔다가 그해 9월 수복됐으나 이듬해 1·4후퇴 때 다시 북한 땅으로 넘어간 뒤 여전히 미수복 지역으로 남아있다.동강면은 휴전 이후 북한의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황해남도 강령군 동강리가 됐다. 동강면은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여 없는 해산물이 없었다. 주민들은 바다에 나가 조기나 우럭 등을 많이 잡았고, 갯벌에서는 바지락과 굴을 캤다.특히, 동강면 바지락젓은 서울 사람들이 일부러 찾아 먹을 정도로 유명했는데, 상인들은 한강 하구를 따라 서울 마포까지 가서 바지락젓을 팔았다고 한다. 지금은 황해남도 청단군 소속이 됐지만, 당시만 해도 벽성군이었던 용매도(龍媒島)의 새우젓과 밴댕이젓도 유명했다.어머니가 해주는 고슬고슬한 가마솥 밥에 젓갈 하나 딱 얹어 먹으면 세상 부러울 것이 없었다. 김완수 할아버지는 지금도 새우젓 한 가지로 소주 한 병을 거뜬히 해치운다. 짜지 않고 시원하게 담근 아삭한 북한식 김치는지금은 맛볼 수 없는 아련한 추억의 맛으로만 남아 여간 아쉬운 게 아니다.1937년생인 김완수 할아버지는 태어나기 1년 전인 1936년 개교한 동강공립국민학교를 다녔다. 1995년에 나온 '옹진군민회지'에 따르면 동강면에는 중고등학교가 없어 국민학교를 졸업하면 멀리 해주로 가야 했는데, 1947년 동강국민학교 부설 고등공민학교가 생기면서 할아버지는 동강에서 중학교를 다닐 수 있었다. 할아버지는 부설 고등공민학교를 '보습소'라고 기억했다. 새끼줄과 헝겊을 엮어 만든 축구공으로 동네 친구들과 학교 운동장에서 공놀이를 하는 게 유일한 놀거리였다.아버지는 목수였다. 아버지는 1945년 6월 해방을 불과 2달여 앞두고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아버지와 관련한 추억은 많지 않지만, 아버지가 동네에서 알아주는 목수였다는 것은 기억한다."아버지는 집도 짓고, 책상도 만들었는데 특히 나막신을 만드는 데 일가견이 있어서 이웃 어른들은 우리 집을 '나막신 장사네'라고 불렀어."비가 오거나 날이 궂을 때 신는 나막신은 1910년대 폐타이어 등을 재생해서 만든 고무신이 등장하면서 점차 사라졌지만, 일제강점기 말에 재등장했다. 1938년 4월 6일자 '동아일보'에는 전쟁물자 조달로 인한 원료난으로 인천의 고무공장이 휴업을 한다는 기사가 실렸다. 이 때문에 황해도와 충청도 등지로 보내지던 고무신 공급이 중단됐고, 사라졌던 나막신이 재등장했다. 여름에는 짚신을 신으면 됐지만, 겨울나기 신으로는 나막신이 필수였다. 목수였던 아버지는 뜻하지 않은 '나막신 특수'를 누렸다. 아버지의 나막신은 '배(船)' 모양이었다. 버선처럼 앞 코가 뾰족하게 튀어나온 모습으로 바닥에는 굽이 앞 뒤로 2개 있는 방식이었다. 김 할아버지의 아버지가 일평생 만든 나막신은 누가 언제부터 신기 시작했을까.우리나라 서민들이 주로 신던 전통 신은 풀로 만든 짚신이다. 송나라 사신 서긍(1091~1153)의 고려견문록이라 할 수 있는 '고려도경(高麗圖經)'은 당시 고려 사람들이 신던 짚신을 소개하면서 "앞쪽이 낮고 뒤쪽이 높아 모양이 기이하나 전국에서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모두 신는다"고 전할 뿐 나막신에 대한 특별한 언급은 하지 않았다. 다만, 나막신은 출토 유물을 통해 삼국시대와 그 이전에도 존재했다는 추측만 가능하다.조선 중기 학자 김장생(金長生·1548~1631)의 문집인 '사계전서(沙溪全書)'에서는 남자 아이가 성인식 때 신는 그림이 그려진 나막신 '채극'을 소개하면서 중국 진(晉)나라 왕 문공(文公·BC 697~ 628) 때 나막신이 처음 만들어졌다고 설명하고 있다. 19세기 학자 이규경(李圭景·1788∼1863)이 쓴 백과사전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의 '목극변증설'편에서도 진 문공이 언급된다. 진 문공은 왕 위에 오른 뒤 자신의 망명 생활을 돕던 개자추(介子推)를 등용하지 않았는데, 개자추는 이에 실망해 산으로 숨었다. 뒤늦게 후회한 문공이 개자추를 산 밖으로 나오게 하려고 불을 질렀는데, 개자추는 나오지 않고 나무를 껴안고 죽었다. 문공은 그 나무를 깎아 신발을 만들어 발아래(足下) 두고 그리워할 때마다 머리 숙여 신을 봤다고 한다.우리나라 고대에는 지금 일본 나막신 '게다(げだ)'처럼 평평한 신에 발가락을 끼우는 끈을 달아 만든 모양도 있었다. 하지만 조선 중기에 들어 이런 모습이 점차 사라지고 김완수 할아버지의 아버지가 만든 것처럼 발을 감싸는 방식에 굽이 달린 모양으로 변화했다. 추사 김정희(1786~1856)의 제주도 유배 시절 모습이 그려진 '완당선생해천일립상(阮堂先生海天一笠像)'에서 김정희가 신고 있는 나막신이 딱 그 모양이다. 조선 말기 풍속화가 기산(箕山) 김준근(金俊根)이 그린 나막신 만드는 풍경으로 할아버지의 아버지가 작업하던 모습을 짐작할 수 있다. 나막신의 변천사는 학계에서도 관심이어서 시대별 나막신을 주제로 한 학위 논문과 각종 연구 논문들이 여럿 나올 정도다.나막신은 청빈한 삶을 상징하기도 했다. 옛 남산골 선비들은 마른 날에도 나막신을 신고 달그락 달그락 소리를 내며 걸었다고 해 '딸깍발이'라고 불리기도 했다.나막신은 양쪽 모두 같은 크기로 발에 크지도 작지도 않게 만들어야 하는 정교한 작업이다. 김완수 할아버지는 아버지가 겨우내 방 한 칸을 작업실로 삼아 1주일에 10켤레 정도의 나막신을 만들었다고 기억했다. 김완수 할아버지가 한 치의 오차도 허용하지 않는 치과 기공술을 배울 수 있었던 것도 아버지의 손기술을 물려받았기 때문일 터이다. 김완수 할아버지는 어린 시절 돌아가신 아버지가 고향만큼이나 그립다.할아버지가 고향에서 가지고 내려온 국민학교 졸업장과 가족 사진이며 족보 등은 영흥도에서 염전을 할 때 집에 불이 나는 바람에 모두 타버렸다. 피란살이 든든한 버팀이 됐던 솥도 버리지 않고 있었는데 어느 날 고물상이 그만 가져가 버렸다. 그래서 고향을 추억할 수 있는 물건은 하나도 남지 않았다. 김완수 할아버지가 고향을 추억할 수 있는 유일한 매개는 바로 '노래'다. 어린 시절 고향 어르신들이 젓가락 장단에 맞춰 불렀던 민요 가락을 아직도 잊지 않고 있다. 김완수 할아버지가 즐겨 부른다는 '해주아리랑', '자진난봉가', '양산도', '개성난봉가' 등을 서도소리라고 한다. 서도소리는 평안도와 황해도 지방에서 불리는 민요로 1969년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됐다. 1996년 한국서도소리보존회 회원 한기섭 씨가 펴낸 '전통서도소리전집'은 서도소리를 '애환에 찬 한 맺힌 푸념조의 애절한 가락이면서도 기질과 조화된 꿋꿋하고 씩씩한 기상이 우러나오는 음조(音調)'라고 설명하고 있다.취재 중 김완수 할아버지가 즐겨 부른다는 몽금포타령을 한 곡조 뽑았다. "장산곶 마루에 북소리 나드니 금일도 상봉에 임 만나 보겠네. 에헤요 에헤요 에헤야 임 만나 보겠네…." 지난 2월 28일 서도소리보존회 인천시지회 정은희 회장을 만나 미리 녹음한 김완수 할아버지의 노래를 들려줬다. 정 회장은 "가사도 정확하고 특히 음정과 박자도 흔들림이 없어 정식으로 배운 티가 난다"며 "서도민요는 뱃일을 하러 간 신랑을 그리워하는 노래가 많아 애절함이 특징인데, 맛을 잘 살리신 것 같다"고 평가했다.할아버지는 지금도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노래로 푼다. 2016년 6월 11일 녹화해 7월 10일 방영한 KBS 전국노래자랑 옹진군편에 출연한 김완수 할아버지는 '눈물 젖은 두만강'을 불러 인기상을 받았다. 이때 받은 인기상 메달이 할아버지의 방에 애지중지 모셔져 있다. 살아생전 한 번 고향 땅을 밟아나 봤으면 좋으련만. 두고 온 사람, 두고 온 집이 어떻게 됐는지 소식이라도 들었으면 좋으련만. 김완수 할아버지는 지금도 통일이 될 그 날을 고대한다."가고 싶고, 보고 싶고, 옛날 사람들 살았는지 만나보고 싶어. 늙은이는 죽었을끼고, 우리 또래는 어떻게 사는지 궁금해. 통일 좀 됐으면 하는 게 한이지 뭐. 원은 그것밖에 없어. 통일돼서 평양사람이 대전도 가고 부산도 가고, 부산사람이 평양도 가고. 그렇게 왔다 갔다 하면 얼마나 좋겠어. 통일되면 중국도 열차 타고 가면 되는데 남북 분단이 웬수지…."글/김민재기자 kmj@kyeongin.com조선 말기 풍속화가 기산 김준근이 그린 나막신 만드는 장면. 1882~1897년 한국의 세관 관리 등으로 재임한 독일인 묄렌도르프 소장. 출처/민속원 발간 '기산 한국의 옛그림 풍경과 민속'청빈한 삶 상징 '나막신' 신은 추사 김정희 모습…추사 김정희의 제자인 허유(許維)가 김정희의 제주도 유배시절 모습을 그린 그림. 삿갓을 쓰고 나막신을 신은 모습이 유배 생활의 처연함을 보여준다. 출처/아모레 퍼시픽 미술관 소장2016년 6월 11일 녹화한 KBS전국노래자랑 옹진군편에서 눈물젖은 두만강을 부른 김완수 할아버지가 진행자 송해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옹진군 제공

2017-03-01 김민재

[실향민이야기 꿈엔들 잊힐리야·7]황해도 벽성군 출신 김완수 할아버지 (中)

경찰과 술 마시며 무면허 보철치료 단속 피해사람들 의식 수준 높아져 돌팔이 점점 안찾아1970년 영흥도 염전 사들여 소금 만들기 시작분단 후 정부 장려정책에 민영 염전 우후죽순대부도서는 옹기조각 까는 '옹기판' 아직 사용발전소 들어서 염전과 함께 모친 묘소도 잃어황해도 벽성군 출신 실향민 김완수 할아버지는 1950년대 후반부터 본격적으로 무면허 보철치료를 전문으로 내세우고 손님을 끌어모았다. 의사에게 배운 것이 아니라서 신경 치료 등 전문적인 일은 못했지만, 이를 때우거나 금 씌우는 일은 제법 잘했다. 수십 년이 지난 지금에서야 속 시원히 터놓고 말할 수 있는 얘깃거리지만 당시 보건당국과 경찰의 감시가 삼엄한 가운데서도 길을 뚫었다.김완수 할아버지는 단속을 피하려고 마을마다 있는 파출소 경찰부터 매수했다. '말이 통할 것 같은' 경찰에게 접근해 술을 사주면서 자신을 소개했다. "조용히 있다가 떠날 테니 모른 척 눈감아 달라"는 청탁과 함께였다. 당연히 '경찰 사모님'은 무료로 시술했다."그럭저럭 일을 하다가 만석동 파출소장이랑 친해졌는데, 그때 파출소장이 '소개장'이란 것을 써주면 덕적도에 가서 거기 순경에게 보여줬어. 일단 술집으로 데려가서는 미안한데 몇 명만 치료하다 가겠다고 하면 처음에는 거절했지. 근데 안 되는 게 어딨어. 담뱃값 호주머니 찔러주고 술 한잔 사주면 다 해결됐지."일단 경찰을 내 편으로 만들면 손님 끌어모으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이가 아픈 사람을 수소문해 찾아가 공짜로 고쳐주면 그이가 다른 환자를 알아서 집으로 데려왔다. 할아버지는 이 하나당 쌀 한 말 값을 받았다. 일반 치과 진료비의 3분의 1 수준이었다.당시 싸게 박아 넣을 수 있는 의치를 '산뿌라치'라고 불렀다. 정확히 '산프라치나'인데 니켈과 크롬을 섞은 합금으로 가격이 싸 백금 대신 많이 사용됐다. 1959년 신문 기사를 보면 돌팔이 의사에게 '산뿌라치' 하나 박는데 1천환 정도 했다고 한다. 그때 단위가 가장 큰 지폐가 이승만 대통령 초상이 그려진 1천환이었는데 쌀 1가마(80㎏)가 1만1천600환 정도 했고, 신문 1개월 구독료는 500~600환 정도였다. 지금 신문구독료가 1만원대이니 요즘으로 치면 2만원대면 이 하나를 박는 셈이었다. 남몰래 '야매'(やみ)로 하는 것이니 그렇게 싸게 받을 수밖에 없었다."순금 한 냥에 구리 서 푼을 섞어서 18K 금을 만들어야 돼. 순금은 너무 물러. 그리고 롤러로 밀어서 얇은 편철을 만든 다음에 이빨을 앞뒤로 찍어서 오려 붙이는 거야. 종이짝 반보다 얇은 차이가 나도 이가 아파서 못 씌워."할아버지는 당시 의료당국 모르게 의료상에서 마취제를 구입해 사용했다. 김완수 할아버지가 쓴 마취제는 프로카인(Procaine)이었다. 노보카인(Novocain)이라고도 한다. 지금은 치과에서 국소마취제로 리도카인(Lidocaine)을 사용한다고 한다. 게다가 일반인이 마취제를 구입하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프로카인 주사기는 쇠로 된 주사기로 해야지 유리 주사기는 터진다고. 그걸 두세 번 찔러서 마취시키고, 마취가 되면 '드라이버'처럼 생긴 걸로 잇몸을 쭉쭉 밀고 그러면 이빨이 빠지거든…."치과가 흔치 않던 시절 시골 마을에서는 일반 의사가 치과 의사 역할을 대신했다. 평안북도 산주군 출신으로 미국으로 건너간 경제학 박사 최기일(1922~)의 자서전 '자존심을 지킨 한 조선인의 회상'에는 그의 유년기 시절 이를 뽑은 이야기가 나온다.'그는 노보카인도 사용하지 않고 집게로 그냥 내 아픈 이를 뽑아냈다. 그가 작업을 하는 동안 나는 썩은 이가 호두처럼 쪼개지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그는 의사라기보다는 목수였다.'오늘날 불법 의료행위는 많이 줄었지만, 여전히 암암리에 존재한다. 가천대길병원 치과보철과 배정윤 교수는 "지금도 간혹 '야매 치료'를 받고 부작용으로 치과를 찾아오시는 어르신들이 있다"며 "야매 보철치료는 처음에는 이에 맞는 것 같아도 잇몸과 뼈에 무리가 가는 경우가 많아 절대 하면 안 되는 시술"이라고 설명했다.김완수 할아버지는 인천에서 떠돌이 치과의사 생활을 하면서도 어머니가 있는 충남 서산을 근거지로 뒀다. 1959년 서산에서 지인의 소개로 지금의 부인을 만나 6남매를 뒀다. 결혼 후 의치를 만드는 작업은 집에서 했는데, 정교한 작업이라 아이들은 방에 얼씬도 못하게 했다. 젊은 시절이야 돈 모으는 재미에 이 마을 저 마을 다니며 떠돌이 의사생활을 하는 것이 버틸 만했다.하지만, 단속이 점점 심해지고 사람들의 의식 수준도 높아져 돌팔이 의사를 찾는 손님은 점점 줄었다. 부양해야 할 가족이 생기면서 한 군데 정착할 곳이 필요했다. 할아버지는 1970년 무면허 치과를 하면서 번 돈으로 영흥도 염전 3정보(9천평)를 평당 200원씩 180만원에 샀다. 1950년대 생긴 염전은 소금장려정책을 펼친 정부의 전폭적인 지원으로 만들어져 조성 원가가 그리 비싸지 않았다. 게다가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고 방치된 염전이라 할아버지는 헐값에 구입할 수 있었다. 한국은행 통계를 보면 1970년 금 1돈이 약 2천800원이었으니 금 640돈 값을 주고 염전을 산 셈이다. 돌팔이 치과의사 생활을 청산한 할아버지는 그 후 20년 넘도록 소금 만드는 염부(鹽夫)의 삶을 살았다.김완수 할아버지의 인생에서 염전은 뗄 수 없는 관계다. 소수압도와 연평도를 거쳐 도착한 당진에서 염전 만드는 일에 동원됐고, 떠돌이 생활을 청산하게 해 준 일도 염전이었다. 할아버지의 염전은 옹진군 영흥면 외2리에 있었다. 지금의 영흥화력발전소 근처다.영흥도에 처음 천일염전이 생기기 시작한 것은 1950년대라고 한다. 1950년대 분단 이후 정부의 소금생산 장려정책에 따라 서해안을 따라 민영 천일염전이 우후죽순 생겨났다. 인천의 대표적인 염전인 주안·소래·남동 염전은 모두 관영으로 운영됐지만, 당시 부천군이었던 대부도, 영종도, 영흥도 등 도서지역을 중심으로 민영 염전이 들어섰다. 염전을 운영하는 민간업체가 조직한 인천염업조합의 가입자 숫자는 1949년 1곳에서 1956년 67곳으로 늘었다. 옹진군청이 관리하고 있는 폐염전 현황을 보면 영흥면에서 가장 오래된 염전은 1954년 3월 1일자로 신고된 염전이다. 할아버지는 영흥도에 '고씨네' 염전이 제일 유명했다고 기억했는데, 옹진군 폐염전 현황 속의 가장 오래된 염전의 주인이 바로 고씨였다.천일염전 이전의 영흥도 염전 역사는 아주 길다. '옹진군향리지'(1996)는 '영흥도는 선재도 서쪽 7리 거리에 있으며 길이가 25리이고 넓이가 10리이다. 염부가 5호 있다'는 세종실록지리지 남양도호부 도서조(島嶼條) 기록을 인용해 500여 년 전부터 영흥도에서 소금을 만들었다고 소개하고 있다. 당시는 지금처럼 햇볕으로 바닷물을 건조시켜 소금 결정을 얻어내는 천일염이 아니라 가마에 짠물과 소금기 머금은 개흙을 끓여 소금을 얻는 자염(煮鹽)식이었다. 소금 굽는 터를 '염벗'이라고 했는데, 영흥면 내리에 염벗이 있었다고 전해진다.인천의 연안 섬 지역 사람들이 소금 굽는 풍경은 당대의 문장가들에 의해 많이 그려졌다. 조선 후기 학자 이해조(1660~1711)는 그의 형 이희조가 1696년 인천부사로 부임하자 영종도 일대를 유람하며 '백운사조발(白雲寺早發·백운사에서 새벽에 출발하면서)'이라는 시를 남겼는데, 여기에 "어부의 집에는 가을날 배를 고치고 소금 굽는 집에는 저녁에 연기가 난다(漁家秋理舶 鹽戶晩生煙)"는 구절이 있다.할아버지의 염전은 우여곡절이 많았다. 처음에는 둑이 무너져 바닷물이 흘러들어 한 해 소금농사를 망치기도 했다. 비가 오면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몰라 소금창고의 소금이 다 녹아버린 일도 있었다. 김완수 할아버지가 처음 염전을 넘겨받았을 때는 바닥이 지금의 타일식이나 장판식이 아닌 흙으로 된 토판이었다. 토판은 소금에 갯벌이 섞여 검은색을 띄었다. 타일이 도입되기 전에는 깨진 옹기조각을 바닥에 까는 '옹기판'을 사용하기도 했는데, 영흥도 바로 옆에 있는 대부도 동주염전은 지금도 옹기판에서 소금 생산 과정을 거친다. 할아버지는 1년에 60㎏짜리 1천500가마를 생산해 인천에 있는 소금 도매상에게 팔았다. 할아버지는 소금값을 얘기할 때 꼭 쌀값을 기준으로 했다. 평소에는 소금 1가마에 쌀 반가마 값을 받았지만, 소금 수요가 급증하는 김장철에는 소금 1가마에 쌀 1가마 값을 받았다고 한다. 임진왜란 시기 선비 오희문의 피란일기 '쇄미록'에도 '소금 13두를 팔았더니 쌀 12두6되이다'는 얘기가 나온다. 소금 값과 쌀값의 연동 관계는 아주 오래전부터 있던 일이다.김완수 할아버지는 외리 염전이 1990년 후반 화력발전소 부지로 편입되자 내리로 이사왔다. 다른 염전들도 1997~98년 무렵 다 문을 닫았다. 할아버지는 지금 내리 해안도로에서 맏딸이 운영하는 칼국수 집에 머물며 여생을 보내고 있다. 날이 좋으면 멀리 인천대교와 팔미도까지 보이는 전망 좋은 동네다.할아버지는 외리에 발전소가 생기면서 염전만 잃은 것은 아니다. 아들 하나만 믿고 고향을 떠나온 어머니의 묘소도 함께 잃었다. 어머니를 다른 곳으로 모시려고도 했지만, 유골을 화장해 곱게 갈아 바다에 뿌렸다. 생전에는 가시질 못했지만, 바닷길을 통해서라도 아버지가 묻힌 고향 땅 벽성군에 닿길 바라는 마음에서였다. 박완서 소설 '엄마의 말뚝'에 나온 것처럼 실향민들이 유골을 바다에 뿌리는 것이야말로 '분단의 괴물을 홀로 거역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었으리라.글/김민재기자 kmj@kyeongin.com·사진/임순석·조재현기자 sseok@kyeongin.com인천 옹진군 영흥도와 다리로 연결된 안산시 대부도의 동주염전. 영흥도 염전은 지금 모두 사라지고 없지만 대부도에서는 여전히 옹기판으로 바닥을 만든 염전이 있다.1999년 인천 옹진군 영흥면 염전의 모습. 영흥지역의 염전은 1990년대 후반 발전소 건설과 함께 대부분 사라졌고, 지금은 염전터만 남아있다. /옹진군 제공실향민 김완수 할아버지가 맏딸이 운영하는 영흥도 칼국수식당 앞 해안도로에서 한국전쟁 이후 고향을 떠나 인천에 정착해 살게 된 이야기를 하고 있다.

2017-02-22 김민재

[실향민이야기 꿈엔들 잊힐리야·6]황해남도 벽성군 출신 김완수 할아버지 (上)

1·4후퇴 무렵 소수압도로 피란언 땅을 파 볏짚 지붕 올려 생활인민군 정보 캐는 민간 유격대 입대이후 연평도로 다시 충남 당진으로1953년 홀로 인천 만석동 올라와경비원·양키골목 장사 경험도분단이 이리도 오래갈 줄 알았다면 그 고생을 하면서 떠돌이 삶을 살지 않았을 텐데. 황해도 벽성군 동강면(지금의 북한 황해남도 강령군 동강리)에서 1937년 소띠해에 태어난 실향민 김완수(81) 할아버지는 1970년 인천 옹진군 영흥도에 자리 잡기까지 십여 년 '무면허 치과 시술 업자', 속칭 '돌팔이 치과의사'로 산 것을 빼놓을 수가 없다.할아버지는 "지금 생각하면 말도 안 되는 삶"이라고 했다. 김완수 할아버지는 1951년 1·4후퇴 무렵 홀어머니와 누나, 조카들과 함께 동강면에서 가장 가까운 섬인 소수압도로 피란했다. 피란민의 삶은 그야말로 처참했다.옹진학도유격부대전우회가 1992년 펴낸 '학도유격부대전사'에 따르면 피란민들은 식구대로 이불 보따리를 이고 지고 내려왔지만, 머물 곳이 없었다. 외양간은 고급 주거지였고, 폐선(廢船)이라도 구하면 그야말로 감지덕지였다. 할아버지 가족은 이마저도 구하지 못해 언 땅을 파고 나무와 볏짚으로 지붕을 만들어 생활했다. 작은 섬을 피란민이 차지하자 기존 원주민과의 마찰도 잦았다."마을에 먹을 물이 부족하게 되자 주민들이 우물을 자물쇠로 잠가서 못쓰게 막아버린 거야. 그래서 구덩이를 파서 물을 구하는데 쪼끔씩 졸졸 나오는 거를 사람들이 줄을 서서 순서대로 받아갔지. 그렇게 애를 쓰면서 한 해 겨울을 났어."할아버지는 밥이라도 얻어먹을 요량으로 1951년 2월 12일 소수압도에 편성된 미8군 사령부 휘하 유격부대 '동키12연대'에 입대해 인민군 정보를 캐오는 임무를 맡았다. 1966년 해병대 사령관을 지낸 강기천 전 국회의원의 회고록 '나의 인생 여로(旅路)'(1996)를 보면 미8군 사령부는 서해지역 섬에서 자생한 민간인 유격대를 지원해 유엔군의 전력을 강화하기로 하고 1951년 2월 백령도에 레오파드 유격대 본부를 세운다. 그리고 그 밑에 지역별로 14개의 동키부대를 편성했다. 동키부대는 그때 미군들이 유격대에 보급해준 'AN/GRC-9' 무전기 모양이 당나귀(Donkey)같이 생겼다고 해서 지어진 이름이다. 할아버지는 이후 동키부대 복무 경력으로 병역을 인정받았다고 한다.김완수 할아버지는 가족들과 함께 연평도로 다시 피란해 지금의 임경업 장군 사당인 '충민사' 부근에서 역시 움막을 짓고 살았다. '옹진군민회지'(1995)는 1951년 말 대·소수압도를 북한군에게 빼앗겨 연평도에 많은 피란민이 몰렸다고 전한다. 당국은 연평도에 6만~7만명의 난민을 수용하기가 벅차자 1952년 초 수송선으로 목포, 군산 등지의 피란민 수용소로 보냈다. 할아버지는 목포로 가는 배를 배정받자 너무 멀리 가면 다시 고향에 돌아가기 힘들 것 같아 조기잡이 배를 빌려 가족들과 충남 당진군 우강면 부리포로 갔다. 할아버지는 단기와 서기를 헷갈릴 정도로 날짜와 연도를 꼭 집어 기억하지는 못했지만 연평도에서 충남으로 내려간 날은 음력 3월 24일이라고 정확히 기억했다. 그때만 해도 머지않아 다시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이라 믿었다.당진으로 내려간 할아버지는 염전 개발 사업에 투입됐다. 물자 부족으로 소금 증산 5개년 계획이 세워진 때였다. 1952년 3월 16일자 경향신문에는 "서해안 옹진방면 10만 피란민의 생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충남 당진에 있는 194정보 염전 개발에 피란민을 동원하기로 했다"는 기사가 실렸다. 할아버지는 서산과 당진에서 염전 개발을 위해 방조제를 쌓는 일을 했다.할아버지는 염전 일에 싫증을 느껴 어머니와 누나 가족을 남겨두고 실향민들이 많이 모여 산다는 인천 만석동으로 무작정 올라왔다. 할아버지는 인천에 자리 잡은 해를 1953년 무렵으로 기억했다. 월미도에서 휴전(1953년 7월 27일)을 맞았다고 했다.김완수 할아버지의 나이는 실제와 호적의 것이 크게 다르다. 그가 인천으로 떠난 사이 나이가 뒤바뀌고 말았다. 실제로는 1937년 정축년(丁丑年) 소띠해에 태어났는데 서산에 남은 어머니가 새 호적에 1929년생으로 올렸다. 나중에 어머니에게 들어 보니 휴전협정 후 정부에서 피란민의 가호적을 만들라는 지시가 내려오자 면 서기인지 이장인지가 와서는 본인 확인도 없이 아무렇게나 적으라고 해서 그렇게 됐다는 것이었다. 난데없이 여덟 살이나 더 먹게 되었다.인천에 온 그는 고향 친구 아버지의 소개로 만석동 목재부두에서 목재 수입업체인 '동아실업주식회사'의 경비원으로 취업했지만, 인력 감축 등을 이후로 몇 해 뒤 회사를 나와야 했다. 외국인 선원들이 대주는 커피와 통조림, 옷가지 등을 동인천 중앙시장 양키골목에서 팔아 용돈 벌이를 하기도 했다.치료차 찾아간 치과서 인생 새국면보철 만드는 기공사 기술 배워덕적도 등 주민 치료 해주며 떠돌아치과 흔치않던 시절 불법의료행위지금은 '남부끄러운 일'로 회상"통일이 이토록 안될 줄 알았다면떠돌이로 살지 않았을텐데…" 낯선 타향 땅에서 너무 이를 악물고 살았던 걸까. 20대 젊은 나이에 치통이 너무 심해졌다. 없이 살던 시절 참다 참다 결국 인천 시내의 한 치과병원을 찾아간 것이 그의 인생행로를 바꿨다. 며칠 치과를 들락날락하다 보니 병원 한 구석에서 보철을 만들고 있는 치과기공사에 눈길이 갔다. 손재주만 있으면 그리 어려워 보이지 않을 것 같아 무작정 기술을 가르쳐 달라고 졸랐다. 무급을 조건으로 치과기공사 밑에서 '시다' 노릇을 하며 1년간 일을 배웠다."치과에서 한 1년 쓸고 닦고 일하다가 독립해서 나가게 됐지. 병원이 별로 없으니까 어디 병원 소속으로 들어갈 수는 없고 인천이며 부평이며, 덕적도, 대부도, 영흥도를 다니면서 마을 주민을 상대로 보철 치료를 해주는 일을 했어. 돌팔이지 뭐…."그는 치과 기술을 배운 곳을 동인천 중앙시장 근처 '경인치과'로 기억했다. 1959년 발간된 '경기사전'에는 인천의 치과의사회 회원 명단이 나오는데, 할아버지가 기억한 '경인치과'가 '경기사전' 속 19개의 명단 중에 정확히 있었다. 인천 동구 화평동 529, 자리도 틀리지 않았다. 설립연도는 단기 4280년(서기 1957년), 원장 이름은 하명수(河明洙)였다. 할아버지는 치과에 간 연도를 정확하게 기억하지는 못했지만, '경기사전' 기록으로 최소한 1957년 이후였던 것만은 확실해졌다.김완수 할아버지가 돌팔이 치과의사로 나설 수 있었던 것은 당시 의료서비스 사정을 살펴보면 짐짓 이해가 간다. 지금이야 강화·옹진을 제외하고 인천에만 치과병원이 800여 곳, 치과의사가 1천100여 명에 달하지만 그때는 변변한 치과를 찾아보기 힘들었다.서울대병원 역사문화센터가 지은 '사진과 함께 보는 한국 근현대 의료문화사'는 1893년 일본인 치과의사 노다 오지(野田應治)가 인천과 서울에 치과를 개업하면서 우리나라 근대 치과의료가 시작됐다고 전한다. 일본 유학파 출신 함석태가 한국인 최초의 치과병원인 '한성치과'를 서울에 개업한 해는 1914년이었다. 인천 최초의 치과의사인 임영균(1903~1969)이 인천에 '임치과'를 설립한 것은 1927년이다.당시에는 치과와 비슷한 '잇방'이라는 것도 있었다. 일본에서 건너온 일본 입치사(入齒士)들이 줄줄이 차리기 시작했는데, 잇방은 당시 우리 말로 '이 해 박는 집'이었다. 입치사들은 의사라기보다는 기술자에 가까웠다. 1965년에 들어서야 치과기공사에게 자격을 주는 의료보조원법이 제정됐다.전쟁을 겪은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싼값에 이를 치료해주는 '야매' 치과 선생이 더 반가웠다. 그래서 치과의사 조수로 일하던 사람, 할아버지처럼 치과기공을 어깨너머로라도 배운 사람, 군대에서 치과 기술을 배운 사람들이 버젓이 의사행세를 하며 불법 의료행위를 했다. 할아버지는 1960년대 인천, 부평 지역에서 떠돌이 치과의사를 하는 사람이 19명이었다고 기억했다. 할아버지는 이들과 비밀 조합을 만들어서 가격 담합도 했다. 누군가 싸게 받거나 비싸게 받으면 그 나름의 '상도덕'을 깨는 일이었다.황해도 신천 출신으로 분단상황에 놓인 실향민들의 이야기를 많이 쓴 김태순의 단편소설 '독가촌 풍경'(1977)을 보면 당시 돌팔이 치과의사의 수법을 엿볼 수 있다. 주인공 허명두는 휴전 이후 군대에서 치과 병동의 조수로 일한 것을 경험 삼아 시골에 돌팔이 치과병원을 차렸다. 허명두는 환자가 오면 "여긴 가정집이지 이빨이 안 좋다면 저 아랫마을 치과병원엘 가보시우"라는 식으로 슬쩍 떠보며 딴전을 피웠다. 이리되면 오히려 사정하는 쪽은 환자였다. 허명두는 일부러 부어오른 신경을 건드리고 망치로 억세게 두들겨 대기도 하고, 무엇보다도 환자들이 가장 질색하는 엔진을 '들들대며' 입 아구 속에 처넣어 사정없이 아픈 이빨을 갈아댔다. 물론 할아버지가 소설 속 허명두처럼 그랬다는 것은 아니다. 할아버지는 당시 무면허 치과 시술을 회상하면서 '남부끄러운 일'이라고 했다. 지금은 누가 하라고 떠밀어도 못하겠지만 '힘든 시절 돈 욕심에 뛰어든 일'이었다. "생전에 통일이 되지 않을 것을 진즉부터 알았다면 돈푼이나 갖고 내려와서 어디라도 정착해서 잘 살았을 건데…. 사람 가서 못 사는 곳 없다고 하듯이 빈손으로 살아도 살만하더라고. 우리네 생활이 그랬어…."글/김민재기자 kmj@kyeongin.com·사진/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황해도 벽성군 출신의 김완수 할아버지가 1951년 1·4후퇴 무렵부터 시작한 피란생활에서 속칭 '돌팔이 치과의사'로 영흥도에 자리 잡기까지의 삶을 회고하고 있다.

2017-02-15 김민재

[실향민이야기 꿈엔들 잊힐리야·5]북청 물장수는 왜 유명한가?

북청 물장수는 김동환(1901~?)의 시 '북청 물장수'(1924년 발표)가 요즘 중학교, 고등학교 교과서에 실리면서 시대를 건너 오래도록 전해져 온다. 우리나라에서 물장수는 대략 1800년대 전후로 서울에서 시작되었으며 상수도가 보급되기 전까지 2천여명이 활동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대부분이 북청 출신이었다.물장수는 약 30ℓ짜리 물지게를 지고, 한 사람당 10~20호를 상대로 물 배달을 했다. 북청 물장수들은 끈끈한 조직력을 바탕으로 서울의 물장사 상권을 장악했다. 북청 출신이 아니면 물장수를 할 수 없을 정도였다고 한다. 이후 경성수상조합 등 공인된 조직을 결성해 아예 물장사에 대한 독점권을 행사했다. 하지만 1920년대 이후 서울지역 상수도 보급 확대와 일본 총독부의 조합 해산 등으로 점차 사라졌다. 외국인에게도 물장수는 구경거리였다. 1880년대에 내한한 선교사 호머 헐버트(Homer B. Hulbert·1863~1949)는 그의 유명 저작 '대한제국멸망사'(1905)에서 물장수를 조선에서 가장 눈에 잘 뜨이는 직업이라고 소개하고 있다.한국의 대표적인 여성작가 박완서(1931~2011)는 일제 강점기를 배경으로 한 자전적 소설 '엄마의 말뚝'(1980)에 물장수를 해서 아들을 둘씩이나 전문학교에 보낸 김 씨 할아버지를 등장시켰다. 동아일보 1934년 3월 29일자는 북청 출신 이구영 씨가 물장사하면서 공부시킨 외아들 이재옥 군이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현 경기고등학교)를 거쳐 경성제국대학교(현 서울대학교)에 합격한 사연을 그해의 '입학시험 미담'으로 보도했다./박경호기자 pkhh@kyeongin.com북청 물장수. 출처/'대한제국멸망사'(1999, 집문당)

2017-02-08 박경호

[실향민이야기 꿈엔들 잊힐리야·5]함경남도 북청군 출신 김윤철 할아버지 (2)

삼면이 산간벽지 남쪽으로 펼쳐진 동해신북청면 양가리서 대대로 논농사 지어농한기엔 부업으로 말린 명태껍질 벗겨혹한 견디기 위한 아궁이 깊은 가옥형태일제강점기 초반까지 호랑이·표범 등장대보름즈음 '북청사자놀음' 펼쳐지기도오랑캐 침범 끊이지 않은 탓 단결력 좋고자녀 학비 위해 물장수 활동 교육열 높아김윤철(85) 할아버지가 태어난 함경남도 북청군은 한반도 산간벽지의 대명사로 꼽히는 '삼수갑산(三水甲山)'의 양강도 갑산에서 남쪽으로 168리(약 66㎞) 떨어져 있다. 해발 1천m가 훌쩍 넘는 고산지대가 북·동·서 방향으로 3면을 둘러싼다. 북쪽 후치령(해발 1천335m)에서 발원하는 남대천(南大川)이 중앙부를 가로지르는데, 남대천 주변으로는 산지가 대부분인 함경도에서 보기 드문 평야가 드넓게 펼쳐져 있다. 남쪽으로는 동해를 끼고 있다. 이 때문에 북청사람들은 동해를 남해라고 부르기도 한다. 북청군 신북청면 양가리에서 대대로 살아온 할아버지 집안은 북청평야에서 논농사를 지었다. 북청평야의 젖줄인 남대천은 10대 초반 할아버지에게 놀이터나 마찬가지였다. "남대천 양옆으로는 죄다 논밭이었어요. 여름이면 남대천에서 친구들과 목욕하거나 천렵하면서 놀았는데, 팔뚝을 강물에 담그고 가만히 한 20~30분 있으면 칠성장어가 달라붙어 살을 빠는 거예요. 팔을 쓱 꺼내면 한두 마리는 건졌죠. 논도랑에서 잡은 세추내(미꾸라지의 함경도 방언)를 고추장 풀어서 콩비지처럼 푹 끓여 먹는 세추내장도 맛이 기가 막힌데, 요즘 추어탕집은 그 맛을 못 내더라고."북청은 빠르면 10월부터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눈이 무르팍까지 쌓이는 건 예삿일이고, 많이 내리는 날엔 당시 고등학교 1학년이던 할아버지의 허리춤까지도 쌓였다. 북청군지편찬위원회가 1994년 발간한 '북청군지'에 따르면, 1927년 북청군의 평균 최저 기온은 12월 영하 8.2℃, 1월 영하 11.5℃, 2월 영하 8.6℃, 3월까지도 영하 4℃를 기록했다. 할아버지가 살던 집은 외양간을 마주 보고 부엌과 마루가 결합한 형태의 정지방(정주간)이 있고, 그 옆으로 큰방과 작은방, 창고방이 '밭 전(田)자'로 붙어있는 '일(一)자형' 초가집이었다. 온돌은 정지방·큰방·작은방이 하나로 연결돼 있어 불을 멀리 보내기 위해 아궁이가 깊었다. 할아버지는 "한국전쟁에서 한국군이 북청까지 올라왔을 때 인민군이 숨어 지냈을 정도로 아궁이가 깊었다"고 표현했다. 혹한을 견디기 위한 전형적인 함경도식 가옥형태다.할아버지 고향에서는 겨울이면 집집마다 울타리에 명태를 걸어서 말린 '통태'(내장을 제거하지 않고 통째로 말린 명태)를 먹었다. 북청군 신포읍(1960년 신포시로 승격)과 인근 마양도는 해방 전까지 전국 명태 어획량의 85%를 차지하는 국내 최대 명태 산지였다. 농번기가 지나면 명태껍질을 벗기는 작업을 부업으로 삼았는데, 20마리를 벗기면 1마리씩 얻을 수 있었다고 한다. 동네 친구들과 화투 노름의 하나인 속칭 '섰다'를 하면서 따낸 통태를 화로에 구워 먹으며 기나긴 겨울의 심심함을 달랬다.화투가 없어서 하얀 천 쪼가리에 계란 흰자를 발라 광택을 내고, 각각의 패를 상징하는 간단한 그림을 그려서 만들었다. "통태가 얼었다 녹았다 하면서 부풀어 오르는데, 손으로 꽉 쥐었을 때 딱딱하지 않고 살짝 물컹한 느낌이 들면 잘 된 거예요. 그걸 구워다 먹고 입안이 깔깔하면 무를 한 입 베어 물면 그렇게 시원할 수가 없어요."함경도 출신 실향민들은 1960년대 고향과 기후가 비슷한 강원도 인제군 용대리에 명태 덕장을 세웠고, 현재는 전국의 황태 대부분이 이곳에서 생산된다. 겨울에는 무명 솜바지를 입으면 최고로 잘 입는 것이라고 했다. 개털로 만든 남바위(방한모)는 필수품이었는데, 함남지방의 명물인 풍산개의 털로 만든 게 인기가 많았다. 산짐승도 먹을 것이 떨어지는 겨울은 참새잡이를 하기에 제격이었다. 가끔 굶주린 노루가 산에서 집까지 내려오기도 하는데, 절대로 잡지 않고 오히려 잘 먹여서 돌려보내는 게 마을 풍습이었다. 반면 멧돼지가 민가로 내려올 경우엔 보양식 삼아 잡아먹었다.일제강점기 초기 만해도 북청에는 호랑이와 표범 같은 맹수가 살았다. 1917년 말 한국 호랑이 사냥에 나섰던 야마모토 다다사부로(山本唯三郞, 1873~1927)의 '정호기(征虎記)'란 책을 (사)한국범보전기금에서 발굴해 2014년 새로 발간한 것을 보면, 북청에서는 당시 야음을 틈타 표범과 호랑이가 마을에 나타나 습격하고는 했다. 실제로 야마모토 일행이 미끼로 내놓은 돼지가 잡혀먹히기도 했으며, 북청평야에 우뚝 솟은 동덕산(750m)의 정상 부근 바위굴은 피비린내가 진동하는 호랑이굴이었다.정월대보름 즈음에는 북청읍내나 도청(都廳·마을회관을 일컫는 함경도식 표현) 마당에서 '북청사자놀음'을 구경했다. 사람들이 큰 원형을 이루면서 둘러앉으면, 그중 몇 사람이 한복판으로 들어가 북 장단과 노래에 맞춰 춤판을 벌이는 '돈돌라리'는 북청사람들이 가장 즐기는 민속놀이였다.할아버지는 일제강점기가 끝날 때쯤 유행했던 '이 강산 서산에/ 해가 떨어진다/ 얼씨구나 잘한다/ 재미가 쓰러진다'라는 내용의 돈돌라리 노래 가사를 특히 좋아했다. 노랫말 중 '해가 떨어진다'는 표현은 일장기의 해가 지면서 일본이 망하고, 나라를 되찾는다는 의미였을 터이다.북청은 '북청 물장수'로 상징되는데 이는 단결력과 교육열 등 특유의 지역색이 짙은 걸로 이어진다. 북청 물장수들은 조선 말엽부터 일제강점기까지 서울에서 조직적으로 활동하면서 식수 영업권을 독점했다. 그 북청 물장수들 뒤에는 반드시 '서울 유학생'이 있었다고 한다. 자기 자식은 물론이고 이웃 자녀의 학비마저 보태주는 경우도 있었다고 '북청군지'는 설명하고 있다. 4남1녀 중 넷째인 김윤철 할아버지의 큰형은 일제강점기 일본 도쿄에 있는 와세다대학교에서 건축을 전공한 수재였다고 한다. 당시 신북청면에서만 와세다대학교 합격생을 7명이나 배출했다고 한다. 백범 김구(1876∼1949)도 '백범일지'에서 스무 살 청년이던 1895년 청나라 여행길에 들른 북청을 '문화향(文華鄕)'이라 부르며 교육열을 높게 평가했다. 동향끼리 똘똘 뭉치는 북청사람의 기질은 예로부터 오랑캐의 침범이 끊이질 않던 지정학적 위치와 관련이 깊은 듯하다. 살아남기 위해선 마을 사람 간 단결이 중요했을 터다. 조선 후기 실학자 이익(1681~1763)이 쓴 '성호사설'은 북청이 기원전 6∼5세기 만주 북동부에 거주한 것으로 알려진 숙신(肅愼)족에게 여러 번 함락됐다고 전하며, 조선 중기에 나온 관찬 지리지 '신증동국여지승람( 新增東國輿地勝覽)'도 오랫동안 여진(女眞)족에게 점거돼 오다가 고려 예종(재위 1105~ 1122) 2년에 이르러 몰아냈다고 밝히고 있다. 고려 말에는 왜구의 침범도 잦았다. 북청이 오죽 벽지로 소문났으면, '오성대감' 백사 이항복(1556~1618)이 광해군의 인목대비 폐모에 반대하다가 북청으로 유배를 떠날 때 돌아오지 못할 것을 걱정하는 시를 지었다. 이항복은 1년도 지나지 않아 유배지 북청에서 세상을 뜨고 말았다. 이익은 '성호사설'에서 이항복의 시를 소개하며 "시를 욀 적마다 눈물을 흘리게 한다"고 했다.서울에 살던 북청사람들은 1947년 북청군민회를 창립했는데, 북청군민회관은 현재 서울 강남에서도 땅값이 가장 비싸다는 청담동에 있다. '강남 부동산 개발 1세대'라 불리는 북청 출신 김형목(1928~2003) 전 학교법인 해청학원 이사장이 자신이 소유한 토지와 비용을 기증해 1974년 건립했다. 군 단위 이북5도 단체에서 자체 회관을 마련한 것은 북청군민회가 처음이었다.글/박경호기자 pkhh@kyeongin.com·사진/임순석기자 sseok@kyeongin.com북청 출신 실향민 김윤철 할아버지가 피란을 떠나기 전 고향의 풍경과 어린시절 추억을 이야기하고 있다.함경남도 북청군 위치일러스트/박성현기자 pssh0911@kyeongin.com1917년 겨울의 북청평야. 출처/'정호기(征虎記)'(2014, 에이도스)

2017-02-08 박경호

[실향민이야기 꿈엔들 잊힐리야·4]함경남도 북청군 출신 김윤철 할아버지 (1)

인민군 징집 피해 4형제 흥남부두로 1957년 미군 화물수송철도 현장 참여 기술 익혀 40년 넘게 인천 건설업 몸담아"기름 나르던 기차" 주인선 1994년 폐선 일부구간에 주인공원 조성 '흔적' 학교 신축 일 하며 초교 선생인 아내 만나함경남도 북청군 출신 김윤철(85) 할아버지는 40년 넘게 인천지역 건축업계에서 일했다. 전쟁통에 피란 나온 후 1957년 인천항 인근 미군부대와 부평미군부대를 잇는 주인선 철도 공사현장에서 막일을 하면서 인천과 인연을 맺었다.4남1녀 중 넷째인 할아버지는 1950년 12월 5일 고향인 북청군 신북청면 양가리 632를 떠나 100㎞ 정도 떨어진 흥남부두를 향해 걸었다. 어머니와 여동생을 남기고, 인민군 징집을 피하고자 4형제가 모두 집을 나섰다. 고급중학교(고등학교) 1학년에 재학 중이던 17살 때다."국군이 12월에 후퇴한다는 소문이 돌면서 인민군 가기 싫은 동네 남자들이 함께 흥남으로 내려갔어요. 영하 20도쯤 될 법한 추위에다가 1m 넘게 눈이 쌓여서 어머니와 동생은 도저히 같이 갈 수 없었어요. 식구들이 인민군한테 죄지은 것도 아니고, 그때는 다들 3개월이면 돌아올 수 있다고 생각했었죠."할아버지는 영화 '국제시장'의 배경으로 유명해진 흥남철수작전의 산증인이다. 압록강과 두만강 근처까지 진격했던 한국군과 유엔군은 중공군이 개입하면서부터 전세가 불리해지고 퇴로마저 차단당했다. 유엔군은 12월 15일부터 24일까지 흥남부두에서 철수작전을 단행했다. 이때 미군은 흥남부두에 몰린 피란민 30만명 가운데 약 9만명을 군 수송함(LST·Landing Ship Tank)에 태웠는데, 김윤철 할아버지도 가까스로 수송함에 오를 수 있었다. 피란민들은 문이 열린 미군 수송함으로 달려들었고, 이 과정에서 넘어진 아이나 어른이나 할 것 없이 인파에 밟혀 죽는 끔찍한 광경을 할아버지는 여러 번 목격했다. 선박에 달린 그물망을 타고 배 위로 오르려다 떨어지는 사람, 간신히 올랐어도 갑판을 가득 채운 인파에 밀려 또다시 바다 위로 떨어지는 사람도 봤다. 할아버지는 승선하는 피란민을 통제하던 미군 병사가 휘두른 방망이에 뒤통수를 얻어맞았다. 그 흉터는 아직도 남아있다. 김동리(1913~1995)가 쓴 단편소설 '흥남철수'(1955)에서 묘사한 당시 상황도 김윤철 할아버지 증언과 다르지 않다. '부두 위는 삽시간에 수라장이 되었다. 공포가 발사되고, 호각이 깨어지고 동아줄이 쳐지고 하여, 일단 혼란은 멎었으나, 그와 동시, 이번에는 또, 그 속에서 아이를 잃어버린 어머니, 쌀자루를 떨어뜨린 남편, 옷보퉁이가 바뀐 딸아이들의 울음소리와 서로 부르고, 찾고, 꾸짖는 소리로 부두가 떠내려가는 듯했다. 그들은 모두 이 배를 타지 못하면 그대로 죽는 것으로만 생각하는 듯했다.'할아버지는 거제도에 도착한 날짜를 12월 19일로 기억했다. 거제도 주민들이 나와서 피란민들에게 밥 한 덩어리씩을 나눠줬다. 그래도 허기가 달래지지 않아 고향을 떠날 때 어머니가 챙겨준 1천환으로 고구마 두 개를 사서 먹었다. 1천환은 북청에선 소 한 마리 값일 정도로 거금이었지만, 당장 배고픔에 화폐 가치 같은 것을 따질 겨를이 없었다는 게 할아버지 얘기다. 고구마 2개 값이라고 하기엔 너무나 비쌌다. 한국전쟁 중에는 도매물가가 16배 이상 폭등했다고 한국은행은 설명했다. 거제도에서는 한 초등학교 강당에 배치돼 산에서 나무를 하는 등 남의 집 품을 팔면서 1년 6개월을 머물렀다. 흥남부두에서 헤어진 형제들을 거제도에서 다시 만났지만, 먹고 살기 위해 뿔뿔이 흩어져야 했다. 할아버지도 부산에 있는 미군부대 식당에서 일했다. 휴전 뒤에는 서울의 전후 복구작업 현장에서 일했다. 김윤철 할아버지는 그의 나이 25살이던 1957년 가을 주인선 공사에 참여하기 위해 인천에 왔다. 주인선은 수인선 남인천역과 경인선 주안역 사이에 동서로 뻗은 총 3.8㎞ 길이의 미군용 화물수송철도다. 인천항과 인접한 남인천역 미군부대에서 주한미군 군수지원사령부인 부평미군부대(애스컴·ASCOM)를 연결했다. 국비와 미국 원조자금(ICA)을 투입해 1957년 9월 착공, 1959년 7월부터 운행을 시작했다. 할아버지는 공사 초기 선로측량 작업을 보조하다가 콘크리트를 배합해 배수관로를 만드는 일도 하고, 흙을 나르는 일도 했다. 소위 '막노동'을 하면서 어깨너머로 기술을 익혔다."그땐 기술이 없어서 측량사가 하라는 대로 뽈대(측량용 막대)를 잡고 서 있었어요. 주안역부터 히다찌(日立)까지 측량을 했는데, 선로 계획선 안에 들어온 주택에 대해선 미군이 나와서 직접 보상금을 치른 것이 특이했어요. 지금도 왜 그랬는지 영문을 모르겠어요. 미제 시멘트는 노깡(관로·どかん)이나 옹벽을 만들고도 엄청 남아서 너도나도 빼돌렸지요."여기서 '히다찌'는 일제강점기 전기·기계업체인 히타치(日立)제작소 인천공장이 있던 용현SK스카이뷰 아파트 일대를 부르는 옛 지명이다.인천항을 통해 들어오는 휘발유와 경유 등 유류는 주인선의 주요 수송물자 중 하나였다. 할아버지는 주인선을 가리켜 "기름 나르는 기차였다"며 "미군 파이프(송유관)에서 사람들이 기름을 빼서 쓰는 것을 일일이 감시하기 어려워서 기름 수송철도를 깔아버린 것"이라고 했다.인천 남구가 지난해 발간한 '도시마을생활사(용현동·학익동)'에 따르면, 인천항 쪽인 주인선 남인천역과 남인천신호소 부근에 미군부대인 캠프유마(Camp YUMA)와 캠프레노(Camp RENO)가 있었다. 이들 미군부대는 용현동 히타치제작소 인천공장 부지에 한국전쟁 때 설치된 미군 유류저장소(POL)를 관리했다. 인근 학익동에는 미군을 상대하는 성매매 집창촌인 일명 '끽동'이 생겨나기도 했다. 유류저장소 송유관은 철길을 따라 지상에 노출돼 있었다. 인근 주민들이 송유관 이음새가 터져서 새는 기름을 받아 쓰거나 고의로 이음새를 망가뜨려 기름을 빼돌리는 일이 잦았다고 한다. 경향신문 1961년 5월 30일자에는 한 일당이 조직적으로 용현동 송유관에서 휘발유 140드럼을 훔쳤다가 경찰에 붙잡혔다는 기사가 실렸다."인천 와서 사귄 황해도 출신 친구도 미군 기름 빼먹으면서 돈 많이 벌어 남동구에 식당을 크게 차렸지. 지금은 돌아갔고, 아들이 식당을 물려받아 계속 영업하고 있어요." 퍼주기만 한다고 생각한 당시 주한 미군의 한국인에 대한 인식은 그야말로 '인간 이하'였다. 미군들은 한국인을 상대로 한 범죄를 예사로 저질렀다. 경향신문 1957년 7월 11일자는 송유관에 올라앉아 있던 3살배기 아이가 미군이 쏜 총에 맞아 숨지는 사건이 있었다고 보도했다.주인선은 부평미군기지가 축소된 1985년부터는 화물수송철도로 운행하지 않았다. 다만, 1980년대 인천에서 논산 연무대로 가는 입영열차로 하루 두 차례씩 운행하다가 1994년 폐선됐다. 인천시는 제물포역 인근부터 남인천역 간 폐선로 1.4㎞ 구간에 주인공원을 조성해 주인선의 흔적을 남겼다. 용현동 미군 유류저장소는 1968년 대한석유공사가 인수했으며 1980년부터는 지금의 SK그룹인 선경이 소유했고, 최근에 용현·학익지구 도시개발사업으로 SK건설이 대단지 아파트를 건설했다. 끽동 자리에는 2000년대 초반 중학교와 2010년 53층짜리 초고층 아파트가 들어섰다.주인선 공사를 마친 김윤철 할아버지는 서울에서 건축일을 하던 첫째 형 김윤숙 씨와 재회했다. 할아버지와 큰 형을 비롯한 고향 사람 7명이 의기투합해 '청해건설'이라는 건설회사를 설립했다.인천지역 학교 교사 신축공사를 전문적으로 수주했다고 한다. 도화동 시절 동인천고등학교, 인천기계공고, 부평중학교는 물론 경기도지역 학교 건물까지 지었다. 회사는 1970년대까지 승승장구했다. 매일경제 1970년 6월 2일자에는 큰 형인 김윤숙 청해건설 대표가 대한건설업협회 경기지부 신임 지부장에 선임됐다고 보도했다. 인천이 포함된 경기지역 건설회사를 대표할 정도로 회사의 영향력이 컸다. 5년 전 사별한 아내는 경기도 하남 망월초등학교 공사에서 현장소장을 할 때 만났다. 망월초등학교에 근무하는 선생님이었다. 1960년 결혼식을 올렸고, 아들 하나, 딸 둘을 낳았다.1933년 계유년생인 김윤철 할아버지는 주민등록증에 1926년생으로 기재돼 있다. 무려 7살이나 많게 주민등록을 한 이유는 세 차례나 인터뷰를 가진 뒤에야 어렵사리 들을 수 있었다. 군대에 입대하지 않기 위해 20대 중반 경남도청에서 나이를 끌어올려 주민등록을 고쳤다고 했다. "한 번 생각해보세요. 비록 형제들이 같이 피란 내려왔지만, 각자 흩어져 혈혈단신이나 마찬가지인 청년의 생계에 대한 막막한 심정을…. 요즘은 돈 있고 백 있는 집 자식들만 군대를 빼잖아요. 늙은이가 인제야 고백한다고 누가 잡아가진 않겠지만, 평생 마음에 걸렸어요. 가진 것 하나 없어 절박했던 시절의 허물을 기자 양반도 이해해 주구려."글/박경호기자 pkhh@kyeongin.com· 사진/임순석기자 sseok@kyeongin.com김윤철 할아버지가 옛 주인선 과도교 구조물 앞에서 1950년대 말 주인선 공사현장에서 일하던 기억을 회고하고 있다. 경인전철 제물포역 인근에 있는 주인선 과도교는 1997년 철거됐고, 구조물 일부가 남아있다.1981년 9월 경인전철 제물포역 인근 주인선 과도교 공사현장 모습. 당시 제물포역 앞 도로를 4차선에서 6차선으로 확장하는 공사가 진행되면서 과도교도 늘어났다. /인천시립박물관 제공(왼쪽사진)1950년 12월 흥남철수작전때 미군 수송함(LST)를 타기 위해 흥남부두에 몰린 피란민. /(사)흥남철수기념사업회 제공주인선 폐선 구간 일부에 조성한 주인공원에서 당시 선로에 놓였던 침목을 가리키고 있는 김윤철 할아버지.

2017-02-01 박경호

[실향민이야기 꿈엔들 잊힐리야·3]황해도 순위도 출신 임경애 할머니(2)

임경애 할머니(84)가 들려주는 피란 이전의 어릴 적 삶은 지금의 눈으로 보면 그야말로 딴 세상 이야기이다. 할머니가 태어난 황해도 옹진군 흥미면 순위도는 북한의 행정구역으로는 황해남도 강령군 순위리에 속한다. 기다랗게 뻗어 내린 작은 섬인데 가운데 허리 부분이 잘리다시피 움푹 파인 모양새가 특이하다. 섬은 강령반도의 끝자락인 등산곶을 서쪽에서 방파제처럼 막아주고 있다. 창린도와 기린도 너머는 그 유명한 옹진반도의 장산곶이다. 등산곶에서 장산곶으로 이어지는 해안은 연평도와 백령도로 연결되는 물길과 맞닿아 있는데 작가 황석영은 소설 '장길산'의 첫 페이지를 바로 이곳에서 시작한다. '황해도는 동으로 함경도와 강원에 인접해서 마식령 산맥의 산세에 닿고… 팔대 명산의 하나이며 태곳적 단군의 도읍지인 구월산은 그 줄기가 남서쪽으로 우회하여 추산을 따라 불타산에 이르고, 막바지로 그친 곳에 장산곶이라는 험한 해안 마루턱이 있으니 … 조기 떼가 연평을 경유해서 대청 소청 앞바다를 지나가는 철이 돌아왔다.' 타고난 이야기꾼 황석영이 장산곶매에 얽힌 전설을 풀어내는 장면이다. '장길산'의 문을 여는 장치로 장산곶과 해동청 보라매를 설정했다는 것은 이곳이 아마도 남북분단의 현실을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는 장소이자 통일 염원의 절절함이 넘쳐 흐르기 때문이었을 터이다.할머니는 열아홉 살 먹던 해인 1951년 첫 피란 때까지 순위도를 벗어나 본 적이 없다. 자동차라는 것도 피란길에 백령도에서 처음 봤다. 미군 차량이었다. 할머니의 집은 순위도에서도 섬의 가운데 허리 쪽인 널목이란 동네에 있었다. 할머니는 '널먹'이라고 불렀다.할머니는 계모 밑에서 컸다. 다섯 살에 엄마가 세상을 떠나고 그 이듬해에 아버지(임응태)는 새엄마를 얻었다. 계모의 학대는 가혹했다. 응석받이로 유치원에나 다닐 예닐곱 어린 여자아이가 감당하기에는 너무나도 심했다. 일곱 살부터 밥을 하라고 시켰다. 절구보다도 작은 애가 절구질까지 했다. 기막힌 노릇이다."일곱 살 애가 무슨 밥을 할 줄 알겠어. 솥에 손이 닿지 않을 정도로 작았지. 부뚜막에 올라 앉아 밥을 했어. 그런데 어떻게 하는지 알아야 하지. 어찌나 불쌍했는지 옆집 할마이가 와서는 물은 요렇게 손등에까지 와야 한다고 가르쳐 주어서 배웠어."계모가 얼마나 부려먹었던지 동네에서는 '임응태네 머슴'이라고 손가락질을 할 정도였다. 한량처럼 지낸 아버지는 집에 안 들어오는 날이 많았다. 계모는 아버지 없을 때만 그랬다. 일꾼을 사 밭일을 할 때는 일꾼들 밥까지 시켰다. 양이 많을 수밖에 없었다. 다 하고 보니 밥이 설익었다. 마침 옆집 할머니의 도움을 받아 위기를 모면했다. 그 할머니는 안 퍼진 밥을 그대로 두고는 솥뚜껑에 아궁이에서 불기가 그대로 남은 재를 수북이 얹었다. 얼마간 있다가 재를 털어내고 뚜껑을 여니 밥이 아주 잘 되어 있었다. 일하던 사람들은 속도 모르고 '어린애가 어쩜 이렇게 밥을 잘 했느냐'고 칭찬이 이만저만 아니었다.부엌에는 솥이 3개가 걸려 있었다. 큼지막한 밥솥과 물 솥이 양쪽에서 2개의 아궁이를 하나씩 차지했고, 그 사이에 작은 솥을 하나 더 걸었다. 국솥이었다. 이렇게 배운 할머니의 음식 솜씨는 정평이 나 있었다. 좀 커서는 한동네에 살던 큰아버지 댁 반찬까지 도맡아서 해줬다. 큰아버지 입맛에 꼭 맞았기 때문이다. 반찬거리야 별다른 게 있지는 않았다. 감자나 푸성귀가 전부였다. 동네에서 제법 잘 살았던 큰아버지 집에는 커다란 방이 있었다. 그 방에서 동네 아이들은 학교 수업처럼 '양학(洋學)'을 배웠다. 그러나 할머니만 다니지 못했다. 계모 때문이었다.■할머니가 기억하는 고향생활은?길게 뻗은 섬 허리부분 '널목'이란 동네1951년 피란전엔 자동차를 본적도 없어계모 밑서 일곱살부터 밥하며 고된세월친구들과 달리 본인만 '양학'도 못배워염전식 자염법으로 소금생산 이뤄져…농업이 주업이고 수산·광공업도 '성업'딸에게 무심했던 아버지는 뭘 만드는 솜씨 하나는 좋았다고 한다. 버선본을 만들어 놓으면 동네 사람들이 다 갔다가 쓸 정도였다고 한다. 그 당시만 해도 각자 집에서 옷을 지어 입었다고 한다. 할머니는 아버지가 그런 것만 잘했다고 기억한다.계모한테 맞기도 많이 맞았다. 팔뚝에는 아직까지 흉터가 남아 있었다. 한번은 죽을 뻔한 경우도 있었다. 때리는 걸 피해 방에서 뛰쳐나가 맨발로 도망치다가 뱀에 물리고 말았다. 시골에서 별달리 처치할 방도가 없었다. 온 몸이 퉁퉁 부어올랐다. 다들 죽는다고 했다. 그런 딸을 아버지가 살렸다."신도 신지 않고 도망 나가다가, 울타리 옆에 복숭아나무가 있었거든. 그 밑 돌 더미에 뱀이 도사리고 있었는데 거기를 밟은 거야. 그때 엄지발가락 쪽을 물린 거지. 말도 못하게 부었지. 아버지가 긴 못을 뾰족하게 해서는 불에 달궈서 잔뜩 부은 발이며 다리 여기저기를 쑥쑥 찔렀어. 말쑥대기 풀이라고 있는데 그걸 찧어서 덮어줬어. 얼마 있으니 독물이 줄줄 흘러내렸다. 그래서 살았어."집은 큰방, 윗방, 사랑방, 헛간이 있었다. 물론 초가집이었다. 소도 키웠는데 오빠 결혼시킬 때 팔았다.할머니는 고향에서 피란 나오던 배를 설명하면서 전혀 생각지 않았던 얘기를 했다. 끌배로 나왔는데 그 배는 소금 같은 짐을 싣던 배라는 거였다. 염전이 있었느냐고 물으니 순위도에서 소금을 구웠다고 했다. 일제는 1907년 인천 주안염전을 시작으로 하여 서해안 일대에서 천일염전을 대대적으로 조성하기 시작했는데 순위도에서는 한국전쟁 때까지도 우리의 전통 방식으로 소금 생산이 이뤄졌다는 얘기다."평평한 곳에 있는 개흙을 소로 끌어다가, 거기서 나온 짠물을 다시 커다란 솥에다 넣고 끓이는 거야. 나무도 말도 못하게 많았어. 그걸 일본 놈들이 들어와서는 다 가져갔어."■순위도 염전식 자염법해안가 갯벌을 갈아 염분이 달라붙은 흙 생성흙에 해수를 침투시켜 염도를 높인 후에 끓인다갯벌을 뒤집어 짠흙을 생성하는 채함 작업은 힘센 소가 필요바닷물을 끓여서 소금을 굽기 위해서는 엄청난 양의 나무가 필요쇠 솥에 끓일 때는 특히 소나무가 주로 들어갔다 -우리나라 제염업과 소금 민속(2008년, 민속원)할머니는 바로 염전식 자염법을 설명하고 있었다. '우리나라 제염업과 소금 민속'(2008년, 민속원)이란 책에서 설명하는 것과 똑같다. '염전식 자염법은 먼저 해안가의 갯벌을 갈아서 염분이 달라붙은 흙을 생성한다. 이후 흙에 해수를 침투시켜 염도를 높인 후에 끓이는 것이다. 갯벌을 뒤집어 짠흙을 생성하는 채함 작업은 힘센 소를 필요로 하며, 농기구의 발달에 의존하지 않을 수 없다.' 바닷물을 끓여서 소금을 굽기 위해서는 엄청난 양의 나무가 필요했다. 쇠 솥에 끓일 때는 특히 소나무가 주로 들어갔다. 조선 때부터 소금 생산이 많은 서해안에는 그에 따른 소나무 남벌을 막도록 하는 금송정책이 자주 있었다.'옹진군민회지 편찬위원회'가 1995년 북한 땅 옹진군의 옛 지리지(地理誌)를 되살려 펴낸 '옹진군민회지'는 할머니 동네인 예진리 널목과 등산리 등 연안에는 화염전(火鹽田)이 여러 곳 있어 소금을 생산했다고 밝히고 있다.할머니는 또 순위도의 모래가 질이 좋았는데 일제 때 마구 퍼갔다고 했다. '한국 근대사의 풍경'(2006년, 생각의 나무)이란 책에 따르면 일제는 유리산업의 원료로 쓰기 위해 구미포 등 황해도 해변의 질 좋은 모래 '세금사'를 연간 7만t 이상씩 퍼갔다. 나무는 철도 부설이나 광산 개발에 쓰였을 것이고, 모래는 유리를 제조하는 데 들어갔을 터이다. 우리의 모든 강토가 그랬듯이 할머니의 고향 역시 일제의 수탈에서 벗어나지 못했다.할머니는 소금과 수산물 얘기를 하면서 "창바위라는 데에는 조합이 있었다"고도 했는데 '옹진군민회지'에는 '창암리(蒼岩里)'에 '흥미 어업조합'이 있었다고 적시하고 있다. 할머니는 창암리를 창바위라고 불렀다.할머니가 기억하는 순위도의 수산물 중에는 해파리가 있다. "해파리가 유명했어, 흔했지. 순위도 해파리는 크고도 유리처럼 맑았어. 깨끗했지. 맛도 좋았어." 해파리 얘기는 '옹진군민회지'의 수산업 분야에도 나오지 않는다. '옹진군민회지'에 따르면 순위도 연안에서 잡히는 어패류는 가오리, 상어, 멸치, 숭어, 갈치, 돔, 문어, 오징어, 굴, 백합, 전복, 바지락, 해삼, 가시리(가사리), 우무가시리(우뭇가사리) 등이다. 해파리는 빠져 있다. 혹시 해파리를 가사리나 우뭇가사리 중의 하나로 불렀을 가능성이 있기는 하다. 정약전(1758~1816)의 '자산어보'에는 해파리를 해타(海타, 해팔어)라 했는데 우뭇가사리와 같다는 표현이 나온다. '전진할 때에는 무르녹을 듯이 나약하여 우산 같고 밖으로 처진 듯이 헤엄친다. 그 성질과 빛깔이 흡사 우뭇가사리와 같다. 우모초(牛毛草)를 쪄서 이루어진 기름이 엉기어 굳은 것을 우뭇가사리라 한다.' 할머니는 분명히 해파리라 칭하고 많이 났다고 했는데 '옹진군민회지'에서는 왜 빠졌는지 궁금할 뿐이다.할머니가 살던 순위도를 포함한 황해도 옹진군 흥미면은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신흥면(新興面)과 아미면(蛾嵋面)을 병합하여 생겨난 이름이다. 흥미면 인구는 1940년 기준으로 2천70호에 1만823명이었다. 산업은 농업이 주업이며 수산업과 광공업이 성업했고, 육지부 연안과 섬 주민 중에는 반농, 반어 형태가 많았다.국가무형문화재 제82-나호인 서해안풍어제의 본향이 바로 할머니의 고향 흥미면이라고 할 수 있다. 서해안풍어제인 배연신굿과 대동굿 기능보유자이면서 인간문화재인 김금화 만신이 할머니보다 3년 먼저 앞 동네에서 태어났다. '옹진군민회지'는 김금화 만신이 흥미면 괘암리 출신이라고 밝히고 있다.글/정진오기자 schild@kyeongin.com·사진/임순석기자 sseok@kyeongin.com황해도 순위도에서 태어나 두 번의 피란생활과 평생을 생선장수를 하며 살아온 임경애 할머니가 경인일보 정진오 기자에게 태어난 황해도 순위의 기억을 더듬으며 고향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임경애 할머니가 얘기한 대로 소금을 만들기 위해 소로 개흙을 끌어 모으는 광경을 묘사한 '한국수산지' 그림을 토대로 다시 그렸다. 일러스트/박성현기자 pssh0911@kyeongin.com황해도 옹진반도와 강령반도 일대가 자세히 드러난 지도. 붉은 선으로 표시된 섬이 순위도. 출전 /옹진군민회지

2017-01-25 정진오

[실향민이야기 꿈엔들 잊힐리야·2]해방 이전의 인천 어시장

관련 기록 '중구난방' 역사 바로잡기 절실인천은 바다의 고장이다. 당연히 고기잡이도, 어시장도 발달했다. 하지만 아쉽게도 그 인천 어시장과 관련해 속 시원히 설명해 주는 자료가 많지 않다. 인천지역 어시장의 연원은 인천종합어시장의 시작지점으로 거슬러 올라간다.일본인들이 1933년에 펴낸 '인천부사'와 의사이자 향토사가였던 신태범(1912~2001)이 쓴 '인천 한 세기'에서 인천 어시장의 태동 당시를 짐작할 수 있다. '인천부사'에 따르면 일본인들이 1887년 조선 정부의 허가를 받아 경기도 남양에서 강화에 이르는 인천 앞바다에서 어로 행위를 하기 시작했다. 일본 어선 15척이 참여했다. 이들은 어선 1척당 은(銀) 10원(圓)씩을 1년 수수료(면허세)로 냈다. 일본인들은 이렇게 잡은 물고기를 별도의 세금을 내지 않고 인천항에서 판매했다. 이게 인천 어시장의 시초라 할 수 있다.일본인들이 생선장사로 돈벌이를 시작하니 조선인이라고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을 터이다. 조선인으로는 정흥택(鄭興澤)이라는 사람이 수산물 거래에 처음으로 뛰어들었다. '인천 한 세기'에서는 '1890년대 초에 한양 청파인 정흥택 형제가 인천으로 내려와 어물객주를 차렸다. 선창가였던 현 신포슈퍼마키트 자리에 한옥으로 어물시장을 짓고 도매시장을 개설했다. 한국인의 취향에 맞는 생선은 행상인이 받아가고, 일인이 좋아하는 생선은 그 자리에서 소매를 했다. 이곳이 후일에 유명해진 인천의 생선전의 시초였던 것'이라고 썼다. 이 부분을 '인천부사'는 명치 28년인 1895년께로 밝혔다. '인천부사' 속 다른 부분에서는 명치 38년인 1905년께로 달리 적기도 했다.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을 전후해 이들 전쟁의 출발 지점이었던 인천지역에 생선이 없으면 밥상을 차리지 못하는 일본인들이 폭발적으로 늘면서 수산물 수요도 급증했다. 이런 상황에서 정흥택이 본격적으로 일본인들과의 수산물 판매 경쟁시대를 열었고, 일본인들 내부에서도 수산물 판매 다툼이 치열했다. 조그만 중구 개항장 일대에 어시장이 2곳으로 늘었다가 1907년 합쳐져 인천수산주식회사가 되었다.인천수산주식회사는 1908년 중구 해안가에 300평 규모로 어시장을 신축하는 등 사업 확장을 꾀했다. 그러나 그들 안에서 또 자중지란이 일어났다. 장사가 잘 되자 일본인 중에서 일부가 뛰쳐나가 또 다른 어시장을 인천에 만들었다. '인천부사'는 이를 배신이라고 표현했다.1940년대 접어들면서 인천 수산시장은 군량을 담당하는 병참기지처럼 되었고 생선도 통제물자가 되어 배급함으로써 한국 사람이 흔하게 먹던 조기와 청어, 고등어, 갈치를 구경하기 어려운 상태에서 해방을 맞았다고 '인천 한 세기'는 설명한다.이런 상황을 보여주듯 '대중일보' 10월 7일자 창간호에는 멸치배급관련 기사가 나온다. '인천부에서는 25만 부민들에게 오래 먹지 못하던 멸치를 배급시키고자 지난 5일에 인천식료잡화상조합의 수뇌자들을 경남 경북 등 각 생산지로 파견하여 그 집하에 전력을 기울여 인천에 멸치를 가져다가 각 가정에 고루 배급을 시키리라 한다'는 내용이다.인천을 대표하는 콘텐츠라고 할 수 있는 어시장과 관련해 인천시를 비롯한 공공기관에서는 그 인식이 너무 인색하다. 인천시는 1970년대 이후 10년 단위로 시사(市史)를 발간하다시피 했다. 그런데 이들 시사마다 어시장 관련 내용이 제각각이다. 아예 빼놓은 것도 있다. 도대체 종 잡을 수가 없다. 어시장의 핵심 지역을 끼고 있는 인천 중구청이 2010년에 펴낸 '중구사' 역시 마찬가지다.인천 어시장의 역사와 그에 얽힌 이야기는 멀리는 일제의 수탈 역사를 살피고 가까이는 인천의 시장 변천사에 다가갈 수 있는 중요한 위치에 있다. 이제라도 인천 어시장의 고갱이를 찾고, 그 역사를 바로 세워야 하겠다./정진오기자 schild@kyeongin.com일제시기 생선전이 들어 있던 인천 중구 개항장의 공설 제1시장 모습. 출처/'인천 한 세기'

2017-01-18 정진오

[실향민이야기 꿈엔들 잊힐리야·2]황해도 순위도 출신 임경애 할머니(1)

1·4후퇴 이어 휴전협정때 군 철수로 두번째 피난파라다이스호텔 자리 천막생활때 생선장수 시작서울까지 전철 타고 대야 들고 다니며 5남매 키워소매치기·아동유기 많았던 하인천 어물전서 분투이후 지역 최대 연안부두로 터전 옮겨 장사 이어와인천에서 60년 넘게 생선장사만 한 임경애(84) 할머니는 1934년 개띠 해에 황해도 옹진군 순위도에서 태어났다. 작년까지만 해도 연안부두 어시장에서 물건을 팔았다. 지난해에 갑자기 당뇨가 심해져 지금은 어시장 바로 앞에 있는 집에서 쉬고 있다.할머니는 피란살이를 두 번이나 할 정도로 곡절 많은 삶을 살았다. 첫 번째는 처녀 때 오빠와 함께 둘이서 순위도 근처 비압도를 거쳐 백령도에 잠시 머물다가 전라남도 고흥군 도양면에 배치됐다. 1·4 후퇴 때로 기억한다. 나환자촌인 소록도가 바로 앞이었다. 임 씨 집성촌이었다."커다란 기와집이었는데 임 씨 집이었어. 거기서 나는 밥을 해주고, 오빠는 일을 해주면서 밥을 얻어먹었지. 그러다 섬이 복구됐다고 해서 고향에 갈 배가 목포까지 왔어."겨울에 나와서 도양면 임 씨 집에서 모내기까지 해줬다. 순위도 고향에 돌아가서는 억지 결혼을 했다. 신랑이 나이도 아홉 살이나 많은 데다 서구적으로 생겨서 친구들이 '네 신랑은 양키'라고 놀려댔다. 결혼을 안 하겠다고 밥을 닷새나 굶었지만 소용없었다. 전선이 또다시 인민군에 밀리게 되자 두 번째 피란을 했다. 이번에는 친정에 시댁 식구들까지 다 나왔다. 부모는 백령도에 남았고, 시누이 등 여섯 명이 인천으로 넘어왔다. 그 피란민들은 지금의 파라다이스호텔 인천(옛 올림포스호텔) 자리에 친 대형 천막 8개에서 생활했다. 열아홉에 결혼해 첫째를 스물에 낳았다.여기서 잠시 당시 전황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전쟁이 터지면서 1차 피란을 나왔고, 수복된 뒤 고향에 돌아갔다가 1·4 후퇴 때 다시 피란을 한 것으로 여기는 게 보통의 생각이다. 하지만 임경애 할머니는 전쟁이 났을 때 바로 피란을 나올 수가 없었다. 순위도에서는 그때 군인이나 경찰들만 피란선을 탈 수가 있었다고 한다. 민간인은 거의 피란을 나오지 못했다. 1·4 후퇴 때 잠시 밀렸던 우리 국군과 유엔군은 1951년 2월 백령도에 상륙했다. 순위도 등 황해도 섬지역의 유격대를 지원하는 게 주 임무였다. 이런 작전으로 다시 순위도가 수복되었다. 이때 전라도에서 고향 땅 순위도로 돌아갔고 결혼을 했다. 우리군은 이후 북한군과 치열한 공방전을 벌였다. 우리군은 1953년 휴전협정 때 백령도와 연평도 이북 지역 섬에서 철수했다. 임경애 할머니의 두 번의 피란은 이때였던 것으로 보인다.파라다이스호텔 자리에서 천막생활을 할 때 체구가 건장했던 남편은 큰 배에서 물건을 내리는 일자리를 얻었다. 할머니도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천막생활을 하는 언덕 위에서 밑을 내려다보니 선창가에 생선장수들이 있었다. 자리 하나를 맡고서는 인천역 뒤에 있던 수산물공판장에서 물건을 떼어다가 팔았다. 꽃다운 스물의 나이에 맡게 된 비린내를 이렇게까지 팔십이 넘도록 맡으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실향민들은 1년 정도 천막생활을 하다가 쫓겨났다. 인천 남구 독쟁이고개로 가야했다. 그 사이 번 돈으로 하꼬방 집을 장만했다. 독쟁이고개에 도로가 뚫리면서는 신기촌 쪽으로 다시 나가야 했다. 1975년 하인천 어시장이 연안부두로 옮기고 나서는 그때 지은 연안부두 아파트에 들어왔다.임경애 할머니의 생선장수의 삶은 그야말로 분투기이다."부지런해야 돈을 벌어. 아이고! 하여튼 장사하면서는 잠을 제대로 자 본 적이 없으니까. 어시장은 일요일이고 명절이고 없어. 남들 놀 때 우리는 일 해야 돈을 벌지."아들 넷을 낳았고 딸을 하나 더 키웠다. 그런 자식 다섯을 파출소 한 번 들락거리지 않게 다들 잘 키워냈다. 어린애를 업고 생선 담은 커다란 고무 대야는 이고 서울까지 오갔다. 마포, 용산, 한남동 주택가를 돌았다. 혼자서는 들어 올릴 수 없을 정도로 무거웠다. 대야는 몇 겹이나 비닐을 씌워 깨끗하게 한 뒤 전철을 타야했다.한 번은 세 살배기를 업고서 "생선 사세요"를 외쳤다. 그날은 어쩐 일인지 만나는 사람마다 "안 사요"라고들 했다. 등에 업힌 애가 말을 배울 때다. "생선 사세요"를 하니 업힌 애가 "안 사요"라고 한다. 동네 사람들 하는 말을 따라 한 것이다. 아이를 업고 무거운 생선을 이고 동네를 헛걸음질 하느라 힘이 들어 죽겠는데 이를 알 턱이 없는 아이가 "안 사요"라고 따라 하니 화가 치밀었다. 내려놓고 볼기를 때렸다. 이를 본 동네 할아버지가 영문을 물었다. 사정을 말하니 집으로 불러 물건을 몽땅 사고 밥까지 먹여주었다. 서울 사람들은 할머니를 인천댁이라 불렀다.하인천 어시장은 장사도 많았고 찾는 사람들도 많았다. 돈과 사람이 몰리는 곳에는 소매치기도 뒤따르게 마련이다. "쓰리꾼(すり-, 소매치기)이 그렇게 많았어. 한 번은 내가 보고 있는데 손님으로 온 아주머니의 가방을 누가 쓰리하는 거야. 옆의 패거리는 나한테 소리를 지르면 죽인다고 눈짓을 하고. 꼼짝할 수가 있어야지. 하인천 어시장에는 그렇게 사람이 붐볐어."하인천 어물전에서는 아동 유기 사건도 자주 있었다. 그만큼 먹고살기가 어려웠다. 키우기 버거우면 사람이 많은 어시장에 애를 버리고 가고는 했다. 아마 장사하는 누군가 데려가면 밥은 굶지 않으려니 생각해서 그랬을 것이다. 할머니는 그 일을 아주 잘 알고 있다.연안부두 어시장은 일거에 인천 지역 최대 점포 수를 자랑하는 시장이 되었다. '인천상공회의소 90년사'에 실린 1957년 기준 시장 현황표를 보면 신포동 소재 어시장 점포 수는 7개다. 그 시절 하인천 어시장 상인들은 점포 통계에도 잡히지 않았다. '인천개항 100년사'에 나오는 1981년 기준 연안부두 인천종합어시장 점포 수는 568개이다. '인천시사 70년대 편'에도 그렇게 나온다. 하인천 어시장 상인 대부분이 연안부두로 이전했는데 그 어물전의 상인들이 그렇게나 많았다.임경애 할머니는 하인천 시절과 최근 연안부두 어시장의 변천사를 온몸으로 체험한 몇 안 되는 사람이다. 하인천 때부터 지금까지 연안부두 어시장에서 장사하는 이는 2명이 더 있을 뿐이다."여든일곱 된 할마이하고 여든넷 된 할마이하고 그렇게만 남은 모양이야. 옛날부터 같이 하던 사람은 이제 다 가고 없어."할머니가 보기에 옛날과 지금의 변화 중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인천 대표 생선인 조기의 크기에 있다. "예전에는 조기가 누렇고 이렇게 팔뚝까지 올만큼 컸어. 그런데 요새는 그 절반도 안 돼." 글/정진오기자 schild@kyeongin.com·사진/임순석기자 sseok@kyeongin.com황해도 순위도에서 태어난 임경애 할머니가 두 번의 피란생활과 평생을 해 온 생선장수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해방 이후 인천항 일대 전경.출처/'사진으로 본 인천개항 100년'1960년대 하인천 수협 위판장에서 수산물을 경매하는 모습. 출처/'사진으로 본 인천개항 100년'

2017-01-18 정진오

[실향민이야기 꿈엔들 잊힐리야]고향은 잃었지만 '기억' 마저 잃을 순 없다

강물은 이쪽과 저쪽을 잇는 연결의 공간이어야 한다. 하나 저기 저 강물은 남북 단절의 상징으로 남은 지 70년. 사람도 강도 이제 그 이름마저 잊었다. 조강(祖江). 한없이 낯설기만 하다. 한강과 임진강이 만나는 지점부터 교동을 지나 서해에 이르는 물길을 예로부터 조강이라 이름하였다. 조강은 한강 물도 흐르고 임진강 물도, 예성강 물도 보태졌다. 세 개의 강물이 하나 되어 흐르는 강, 조강. 문헌에서 찾을 수 있는 그 이름의 흔적은 동방의 시호(詩豪) 이규보(1168~1241)의 작품에 있다. 1219년, 지금으로 치면 인천광역시장 격인 계양부사로 부임하면서 바로 이 조강을 건넜다. 그 순간의 감흥을 작품에 풀어냈다. 조강부(祖江賦) 1편과 시편 2편이 남아 있다. 신임 계양부사 이규보는 고려의 수도 개성에서 남쪽으로 길을 잡아 조강을 거쳐 김포반도에 이르는 코스를 택했을 것이다. 이후 조강이란 이름은 해방 직후까지도 사람들의 입에서 떠나지 않았다.조강은 남북 분단 이후 시간이 흐르면서 자취를 감추었다. 현재 발행되는 거의 대부분의 지도에서는 조강이라는 표기를 찾아보기 어렵다. 그냥 한강으로만 돼 있는 경우가 허다하다. 아무런 표기를 하지 않은 것도 있다. 사람이 왕래하지 않게 되면서 그 이름을 부를 일이 없어졌고, 그러면서 자연스레 잊힌 존재가 되어 버렸다.실향민의 삶도 마찬가지다. 그 실향민들의 인생이며 기억은 둘로 정확하게 나뉜다. 북녘에 살 때와 한국전쟁 이후 남한 생활이 너무나 뚜렷하게 구분된다. 저쪽에서의 삶과 이쪽에서의 생활 모두 기록하지 않으면 잊힐 수밖에 없다. 그네들의 삶과 기억은 후세에 계속해서 전해져야 한다. 역사가 단절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경인일보가 2017년 연중기획으로 '실향민 이야기-꿈엔들 잊힐리야'를 준비하는 이유이다.이번에 새롭게 선보이는 '실향민 이야기'에서는 고향 생각에 잠을 설치는 실향민들의 그 기억을 담아낼 터이다. 죽기 전에 못 가면 죽어서라도 날아가겠다는 고향에 대한 그 간절한 그리움을 전하고자 한다. 그리고 맨손으로 시작해 일가를 이룬 성취과정을 추적할 셈이다. 이들의 이야기는 곧 우리 모두의 삶의 거울이 될 것임을 믿어 의심하지 않는다. /정진오기자 schild@kyeongin.com잠시 떠난다는 생각으로 남으로 내려온 실향민들은 고향을 지척에 두고도 가지 못하는, 간절함을 안은 채 삶을 이어가고 있다. 사진은 지난 8일 인천시 강화군 교동도의 화계산 정상에서 본 조강(祖江)과 북녘 땅. /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

2017-01-11 정진오

[실향민이야기 꿈엔들 잊힐리야·1]프롤로그

빈손으로 일가를 이룬 실향민 취재꿈틀대는 역사 한편의 기록으로…70년 가까운 세월 1세대 수는 줄고북한은 송두리째 변해 옛 모습 잃어더 늦기전에 이야기 복원하려 기획태어나서 어린 시절을 함께한 고향은 늘 밤하늘의 별처럼이나 많고도 빛나는 추억의 창고이다. 그래선지 그 고향을 노래한 정지용의 절창 '향수'는 국민 시의 지위를 놓치지 않고 있다. 나이가 들수록 고향 생각은 더욱 짙어가게 마련이다. 그런 고향을 마음속에서만 기억하고 되뇌어야 하는 이들이 있다. 이북 실향민이다. 전쟁 통에 잠깐 떠나는 것일 뿐 금방 다시 돌아오겠다면서 그렇게 길을 나선 것이 어느새 그만 70년이 다 되었다.경인일보가 2017년 연중기획으로 실향민 이야기를 풀어내기로 했다. 빈손으로 내려와 죽을힘을 다해 일하면서 생계를 이어야 했던 그들의 삶의 궤적과 그 실향민들이 그동안 하루도 잊지 못한 고향 이야기를 매주 목요일 한 차례씩 1, 2부로 나눠 엮어 나간다.실향민들의 낯선 남한 땅에서의 삶은 그야말로 처절한 분투기이다. 아무것도 갖지 못한 무의 상태에서 직업을 갖고 가정을 꾸리고 아이들을 키워냈다. 누구는 시장에서 장사도 하고 노동판을 전전하기도 했으며, 누구는 또 그럴듯한 사업가로 성장하기도 했다. 그렇게 그들은 우리 사회 발전의 동력이 되었다. 그 분투기는 우리 현대사의 단면이 된다. 그 점을 각각의 실향민 이야기 제1부에서 하게 될 것이다. 여러 분야에서 일가를 이뤄 온 그분들의 꿈틀대는 이야기를 한 편의 다큐멘터리로 남기겠다는 게 취재팀의 각오다.제2부는 고향 땅 이야기이다. 실향민 시인 김규동은 여든여섯 되던 2011년 2월에 펴낸 자전 에세이 '나는 시인이다'에서 "고향 집 우물가 느릅나무는 안녕한지 모르겠다"면서 "소원이 있다면 세상 떠나기 전 꿈속에서처럼 고향 땅 함경북도 종성에 한 번 다녀오고 싶다"고 했다. 시인은 그만 그해에 꿈에도 그리던 고향 땅을 끝내 밟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유명 영화감독 신상옥이 김규동 시인의 친구이다. 신상옥은 1970년대 후반 북으로 납치됐다. 북한에서 8년 정도 김정일의 지시에 따라 영화를 만들다가 탈출에 성공했다. 두 친구가 다시 만났을 때 김규동이 물었다. "고향에 갔으면 청진에서 그냥 살지, 왜 나왔냐?" 신상옥이 답했다. "고향 가보니 살던 옛집은 흔적도 없고 아무것도 안 보여. 그게 무슨 고향이냐." 이제 이렇게 실향민들의 고향은 송두리째 바뀌었을 가능성이 크다. 자칫하면 1950년대 이전의 북한 땅의 본디 모습은 영영 사라져 버릴지도 모른다. 실향민들의 그 기억 속에만 남아 있는 고향이라도 최선을 다해 복원하고자 한다. 그 지역의 아주 작은 지리지(地理誌)를 하나 만들고자 한다.지난 8일, 남북분단의 상황을 가장 현실감 있게 느끼게 하는 강화 교동을 찾았다. 취재차량은 민간인통제선을 지나며 까다로운 검문 절차를 거쳐서야 겨우 교동에 닿을 수 있었다.강너머 북한 땅이 가깝게 보이는 교동 지석리에는 '망향대'가 있다. 휴일이어선지 외지인들의 발길이 이어졌다. 천만 실향민의 염원을 담아 쌓았다는 망향대 바로 옆에는 조상들을 생각하며 세운 또 하나의 비가 있다. 앞면에는 '在以北父祖之壇(재이북부조지단)'이라 새겼다. 북녘에 있는 조상을 위한 제단이다. 광복 50주년을 기념해 황해도 연백국민학교 35회 졸업생들이 세웠다. 그 제단 위에는 며칠 지나지 않은 것으로 보이는 국화 2송이와 오래돼 말라비틀어진 꽃다발이 그대로 있었다. 망향대는 굳이 실향민이 아니더라도 교동에 왔다 하면 한번쯤 찾는 관광지가 되어 있었다.망향대 앞에서 만난 윤재명(58·경기도 고양시 행신동) 씨는 "교동에 처음으로 관광 왔다가 들렸는데 실향민은 아니지만 고향을 저렇게 가까운 지척에 두고도 가지 못하는 실향민들이 안타깝다"면서 "여기 와서 보니 분단을 실감하게 된다. 실향민들이 하루 빨리 왕래하는 날이 왔으면 좋겠다"고 했다.북녘 땅을 좀 더 넓게 멀리 보기 위해 교동에서 제일 높은 화개산 정산에 올랐다. 낮 12시 50분을 넘었는데 대남방송이 시작되었다. 우리 군은 곧바로 대북 음악방송을 틀었다. 남북의 방송이 서로 충돌하는 꼴불견 현장에 있자니 마음 한구석이 무너져 내렸다. 대남방송은 낮 밤을 가리지 않는다고 한다. 이 동네 주민들은 방송이 나오는 날이면 잠을 설치기 일쑤라고 한다. 남북 당국의 이러한 강대강 전략은 실향민들의 마음을 더욱 무겁게 만든다.교동에는 전쟁 직후 만들어져 아직도 당시 모습을 많이 간직하고 있어 도회지 사람들에게 유명해진 대룡시장이 있다. 2년여 전 찾았을 적 시장에는 잡화 가게에 앉아 있던 90대 중반의 할아버지 부부의 모습이 눈길을 끌었다. 연백에서 피란 내려온 부부 두 분이 다정스레 꼭 붙어 앉아 가게를 지키고 있었다. 그런데 이번에 다시 찾고 보니 그새 할아버지는 세상을 뜨고 할머니 혼자서 있었다.교동에는 원주민과 실향민들이 힘을 합쳐 1952년도에 세운 교동중앙교회가 있다. 숫자로는 실향민이 더 많았다. 교회 신도 중 이제 실향민 1세대는 한 명도 없다. 다들 돌아가시고 말았다.어디를 가나 실향민의 수가 자꾸만 줄고 있다. 경인일보가 실향민 이야기를 더 이상 늦출 수 없다고 판단한 이유이다. 독자들의 많은 기대와 격려를 바란다.글/정진오기자 schild@kyeongin.com·사진/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일러스트/박성현기자 pssh0911@kyeongin.com망향대 옆에 조상들을 생각하며 세운 '在以北父祖之壇(재이북부조지단)'이라고 새겨진 비.인천시 강화군 교동 지석리에 위치한 망향대는 북녘땅을 비교적 가깝게 볼 수 있어 교동을 방문한 관광객들도 한 번쯤 찾는 관광지가 되었다(왼쪽 사진). 망향대 인근에 위치한 몇몇 묘지는 북한을 바라보는 방향으로 자리 잡고 있다.

2017-01-11 정진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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