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가 들려주는 인천이야기

 

[바다가 들려주는 인천이야기·49(끝)]남과 북을 잇는 뱃길의 시작 인천항

'서울-평양 인접' 입지·수도관문 역할 비슷… 분단 전에도 교류 활발구호물자 운송 등 남북 오가던 유일한 정기항로, 2011년이후 올스톱北 해외연결된 항로 없어… 경협 재개땐 황해 물동량 환적 선점기회남북이 그동안 얼어붙은 관계를 청산하고 평화의 기지개를 켜는 화해 분위기를 만들어가는 가운데 인천항의 가치가 새롭게 주목받고 있다. 인천에서는 남북 교류의 중심으로서 인천항의 역할을 재정립하고 평화의 시대를 대비하기 위해 인천항이 준비해야 할 것들을 찾는 세미나 또는 포럼이 앞다퉈 열리고 있다. 남북 경제협력의 핵심 거점 항만 구실을 할 인천항의 가치와 중요성이 떠오르고 있는 것이다.# 인천항의 닮은꼴 남포항인천항이 남한의 수도 서울의 관문이라면, 남포항은 북한의 수도 평양의 관문이다. 인천항과 남포항은 수도권의 관문 역할을 하고 있다는 점에서 무척 닮았다.남북이 본격적으로 경협에 나선다면 수도를 배후에 둔 인천항과 남포항의 역할도 자연스레 중요해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인천항이 남북 해상 교류의 가장 중요한 거점이라는 이야기가 나오는 이유다.인천항은 서울 경계와의 거리가 불과 20여㎞에 지나지 않을 정도로 가깝다. 고속도로와 철도 등 교통 인프라도 잘 갖춰져 있다. 남포시 또한 평양의 위성도시로, 도로·철도 등의 인프라가 잘 갖춰져 있다.남포항은 평양시에서 남서쪽으로 약 45㎞ 떨어진 대동강 하류의 서해안에 위치한다. 평양화력발전소·남포화력발전소와 인접해 있어 전력 공급도 원활한 항만이다. 그래서 북한 제1의 항구로 불리는 남포항은 남북 경협의 가장 중요한 항만으로 꼽힌다. 두 항만은 서해의 조수 간만의 차이를 극복하기 위해 갑문을 운영한다는 공통점도 있다. → 표참조서로 닮은 두 항만은 분단 이전에 교류가 활발했다.일본인 저널리스트 가세 와사부로(加瀨和三郞)가 1908년 편찬한 '인천개항 25년사'를 보면, 인천항과 남포항의 관계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는 대목이 나온다.'국내 무역 중 당시 인천과 관계가 가장 깊은 곳은 진남포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중략) 진남포에서 수입하는 것은 대개 인천항이 중개하였던 것으로 보아 당시 인천항이 진남포의 중개소 위치에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즉 진남포에서 일본으로 수출하는 곡류와 일본 혹은 청국에서 수입하는 각종 화물은 모두 인천항을 거쳤다'.지금 방식으로 말하면 인천항은 남포항에서 중국 또는 일본으로 건너가거나 중국·일본에서 수입하는 화물이 모이는 환적항 또는 허브항 역할을 한 것이었다.# 인천항, 북으로 가는 바다 관문남북이 교류해야 할 때마다 인천항은 북으로 통하는 중요한 관문 역할을 했다.대표적인 사례가 1984년 남한에 큰 수해가 발생해 북한이 인도적 차원에서 남한을 지원했을 때 북이 보낸 구호물자 일부가 인천항을 통해 들어온 것이다. 1984년 8월 31일부터 나흘 동안 수도권에 집중호우가 내려 서울·경기 등에서 9만3천800여 명의 이재민이 발생했다. 최악의 홍수가 발생하자 북한은 방송을 통해 수재민 지원을 제의했다. 쌀, 옷감, 시멘트, 의약품 등을 구호물자로 보내겠다고 북은 제안했다. 남측은 북의 제안을 수락했고, 그해 9월 29일부터 10월 4일까지 판문점·인천항·북평항을 통해 북에서 보낸 구호물자가 도착했다. 그때 인천항으로는 시멘트를 실은 북한 배가 들어왔다. 북한이 남한에 인도적 차원에서 구호물자를 지원한 것은 그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이후 우리 정부나 민간단체가 인도적 차원에서 구호물자를 북으로 보내야 할 때 인천항에서 배가 떴다.2010년 이른바 5·24 조치 이전까지 인천항~남포항 바닷길은 사실상 남북을 오가는 유일한 정기항로였다.한반도 분단 이후 인천항과 남포항을 오가는 항로가 개설된 것은 1998년 8월 24일이다. (주)한성선박은 홍콩에서 3천t급 세미 컨테이너선 '소나'호를 빌려 월 3회 정기운항했다. 인천항~남포항 항로 정기화물선 운항은 남북 당국의 해운사 선정에 대한 입장 차로 2001년 1월 4일 중단되기 전까지 이어졌다. 당시 북측은 후발 주자인 남측의 람세스물류(주)를 제외한 다른 해운회사 소속 선박의 남포항 입항을 거부했고, 남측은 람세스물류가 운항 질서를 어지럽히고 물류비를 상대적으로 높게 책정한다는 이유로 운항 허가를 내주지 않았다. 실질적으로 운항하지는 않았지만, 이 무렵 인천항~남포항 항로 내항 화물 운송사업을 신청한 업체가 7~8곳이 될 정도로 경쟁이 심했다.인천항~남포항 정기화물선 운항이 재개된 것은 2001년 4월 22일이다. 국양해운이 용선한 러시아 선적 '미누신스크'호(2천360t급)가 남포항을 향해 인천항에서 출발하면서다. 이후 통일부가 정책을 바꿔 남북 해상 항로를 운항하는 선사는 사업 승인에 앞서 운항 합의서 등 북한과 합의한 증빙 서류를 제출할 것을 의무화함에 따라 과당경쟁은 사라졌다. 통일부에서 제시한 조건을 맞춘 국양해운은 2002년 2월 '트레이드포춘'호(4천500t급)를 신규 투입해 주 1회 정기운항을 시작한다.# 트레이드포춘호와 인천항국양해운이 2002년 인천항~남포항 항로에 투입한 트레이드포춘호는 매주 한 차례 남과 북을 오가며 남북 경제협력의 중추적인 역할을 했다. 2002년부터 2011년까지 남북을 오가며 컨테이너 6만3천552TEU(1TEU는 20피트짜리 컨테이너 1대분)와 벌크화물 15만2천96t을 운송했다. 당시 인천항에서 남포로 가는 배에는 섬유류, 화학, 전자·전기제품 등이 실렸고, 북에서는 농수산물, 광물자원, 바닷모래 등을 주로 싣고 돌아왔다. 쌀과 밀가루, 분유, 의류 등 민간단체들의 대북 지원 물품도 대부분 트레이드포춘호를 통해 북에 전달됐다.국양해운은 인천항~남포항 항로 서비스 개시 이후 적자를 기록해오다 2006년 첫 흑자를 냈다. 2007년에는 이 항로에 추가 선박을 투입하기도 했다. 우리 정부가 2010년 천안함 사건에 대응해 남북 교역을 중단하는 5·24 조치를 발표한 이후, 트레이드포춘호는 물동량이 급격히 줄었고 결국 2011년 10월 운항을 멈췄다. 2012년 폐선됐다.인천항만업계 관계자들은 최근 화해 분위기 속에 남북 경협이 재개된다면 인천항이 다시 중요한 역할을 할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러면서 그때를 미리 준비해야 한다고 조언한다.국양해운에서 트레이드포춘호 운항 업무를 담당했던 최준호 장금상선 부장은 "남포항 등 북한의 항만은 해외로 연결된 항로가 없어 인천항이 북한 황해권 항만의 해외 물동량을 처리하는 환적항 역할을 할 가능성이 높다"며 "인천항이 기회를 잡을 수 있도록 준비해야 한다"고 말했다.글/김성호기자 ksh96@kyeongin.com그래픽/박성현기자 pssh0911@kyeongin.com/아이클릭아트2005년 4월 23일 경인일보사가 주관하고 인천시와 인천적십자사가 공동 후원으로 마련한 북한 어린이 돕기 물품이 선적된 트레이드포춘호. /경인일보DB2005년 4월24일 인천항 내항처럼 갑문을 이용해 선박이 오가는 남포시 서해갑문의 전경. 제방길이가 8㎞에 이른다고 전해진다. /경인일보DB인천항 갑문을 중심으로 본 인천항 내항 전경. /인천항만공사 제공

2018-12-26 김성호

[바다가 들려주는 인천이야기·48]인천항 운영기관(하)-인천항만공사

내년 4월 수도권 1호 크루즈전용터미널 개장 중~일~러 항로운영신국제여객터미널·골든하버 프로젝트 순항 '해양명소' 자리매김'300만TEU 돌파' 인천항 하역 능력 넘어서… 신항 컨 부두 개발남항 배후에 車물류클러스터 조성 중고차 판매·재생센터 등 구축2025년 인천 송도국제도시 9공구에 있는 인천항 크루즈 전용 터미널에는 세계 최대 크기의 크루즈 '심포니 오브 더 시즈'호(22만5천t급)에서 내린 9천여 명의 승객으로 북적거린다. 크루즈에서 하선한 승객들 가운데 일부는 인근에 조성된 상업·업무·레저 복합단지 '골든하버' 리조트로 향했다. 크루즈 전용 터미널 인근에 있는 인천항 신국제여객터미널도 한중카페리에서 내린 중국인 관광객들로 가득했다.신규 개장한 인천 신항 컨테이너 부두 1-2단계 구역에는 컨테이너가 쌓여 있다. 인천항은 2025년 400만TEU의 컨테이너를 처리했다. 남항에 있는 자동차 물류클러스터에서는 쉴 새 없이 차량이 수출되고 있다. 이는 인천항만공사가 목표하는 2025년의 인천항 모습이다.인천항은 지난해 사상 처음으로 연간 컨테이너 물동량 300만TEU(1TEU는 20피트짜리 컨테이너 1대분)를 돌파했다. 1974년 인천 내항 4부두에 우리나라 최초의 컨테이너 부두가 문을 연 지 43년 만에 이룬 성과다. 300만TEU를 달성한 인천항은 '해양관광의 메카'로 도약할 준비에 나서고 있다.우선 내년 4월 송도 9공구에 수도권 최초의 크루즈 전용 터미널이 문을 연다. 인천항 크루즈 전용 터미널은 현재 세계에서 가장 큰 22만5천t급 크루즈를 수용할 수 있는 규모를 자랑한다. → 위치도 참조5천~6천명의 관광객이 탈 수 있는 초대형 크루즈가 인천항에 기항하게 되는 것이다. 국내 크루즈 전용부두는 부산 북항(22만t급), 서귀포 강정항(15만t급), 제주항(15만t급), 속초항(10만t급) 등지에 있는데 인천항이 가장 크다.인천항 크루즈 전용 터미널이 문을 열면 국내 해양관광 시장에 일대 지각변동이 생길 것으로 예상된다.내년 4월과 10월에는 크루즈 전용 터미널 개장을 기념해 롯데관광개발과 이탈리아 선사 코스타크루즈가 인천을 모항(母港)으로 하는 크루즈선을 운항한다. 모항은 크루즈선이 중간에 잠시 들렀다 가는 곳이 아니라 출발지로서 승객들이 타는 항구를 말한다. 11만4천t급 '코스타세리나'호는 내년 4월 인천∼상하이∼후쿠오카∼부산을 운항하고, 10월에는 인천에서 출발해 상하이∼일본 후쿠오카∼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를 거쳐 속초에 입항할 예정이다. 이를 포함해 내년 총 22척의 크루즈가 입항해 5만500여명의 여객이 인천항 크루즈 전용 터미널을 이용할 전망이다. 이는 올해 인천항 임시 크루즈 부두와 내항에 총 10척(여객 수 2만6천120명)이 입항한 것보다 두 배가량 늘어난 수치다. 지난 18일 열린 인천항 크루즈 전용 터미널 준공식에서 남봉현 인천항만공사 사장은 "크루즈터미널은 인천이 동북아 해양관광 거점으로 도약하는 초석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크루즈 전용 터미널 인근에 자리 잡은 신국제여객터미널은 내년 12월 개장한다. 인천항과 중국을 정기적으로 오가는 10개 항로 한중카페리의 새 둥지가 될 신국제여객터미널은 지상 5층, 전체 넓이 6만7천㎡ 규모로 축구장 9개 넓이보다 크다. 현재 인천항 제1국제여객터미널(2만5천587㎡)과 제2국제여객터미널(1만1천256㎡)을 합친 면적의 1.8배에 이른다.인천과 중국을 오가는 카페리 여객 수는 2016년 92만391명에 달했다가 '사드 갈등'이 불거진 지난해에는 60만359명으로 34.8% 줄었다. 올해 들어서는 11월까지 71만9천261명의 여객 수를 기록하며 회복세를 보이고 있다. 인천항만공사 조주선 항만시설팀장은 "신국제여객터미널이 인천의 랜드마크로 자리 잡을 수 있도록 준공까지 최선을 다하겠다"고 했다.인천항 신국제여객터미널 배후단지를 개발하는 '골든하버' 프로젝트도 내년부터 진행된다. 신국제여객터미널 배후단지에 호텔, 쇼핑몰, 컨벤션, 콘도, 럭셔리 리조트 등을 유치하는 사업이다. 골든하버는 삼면으로 바다 조망이 가능하다. 친수 공간이 부족한 인천시민은 물론 국내외 관광객들이 해양관광문화의 매력을 만끽할 수 있는 명소가 될 것으로 기대를 모으고 있다.인천 신항 1-2단계 컨테이너 부두 개발사업도 본격적으로 추진될 예정이다. 한국해양수산개발원(KMI)에 따르면 2025년 인천항 컨테이너 물동량은 363만TEU에 달하지만, 하역 능력은 286만TEU에 불과할 것으로 예상된다. 77만4천TEU의 컨테이너를 처리할 수 있는 하역 시설이 부족한 셈이다. 하역 시설이 부족하면 컨테이너 화물 처리 속도가 늦어져 선박과 트레일러 등 화물 운송 장비 대기시간이 길어진다. 남북 경협이 활발히 이뤄지면, 컨테이너 물동량이 최대 120만TEU까지 추가로 늘어날 것으로 예상돼 시설 확충이 필요한 상황이다.해양수산부는 인천 신항 1-2단계 컨테이너 부두 개발사업을 내년 초 발표되는 신항만기본계획에 반영했다. 신항만기본계획은 인천 신항을 포함해 전국 10개 항만 건설 방향을 담은 중장기 계획으로, 2040년까지 인천 신항 선광신컨테이너터미널 옆에 4천TEU급 선박 접안이 가능한 선석 4개를 추가로 건설하는 내용이 담길 것으로 예상된다.인천항만공사는 인천항 자동차 수출 물량 유치를 위해 자동차 물류클러스터 조성 계획도 세웠다. 인천항은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중고차 수출항이다. 지난해 인천항을 통해 수출한 중고차는 25만2천 대로, 전국 수출 물량 28만6천 대의 88.1%를 차지했다. 올해(1~9월) 인천항 중고차 수출 물동량은 20만4천 대를 기록하며 전국 수출량(23만1천 대)의 88.3%에 달한다. 인천시와 인천항만공사는 2025년까지 인천 남항 배후단지(중구 항동 7가 82의 7 일원 39만6천㎡)에 자동차 물류클러스터를 만들 예정이다. 여기에는 중고차 판매·경매장, 검사장, 정비장, 자원재생센터, 주차장 등이 들어선다.남봉현 사장은 "인천항을 동북아 물류 허브로 도약시킬 뿐만 아니라 그동안 소홀했던 해양 관광 부분도 균형 있게 발전시킬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며 "이 과정에서 인천 지역사회 등 관계기관과 꾸준히 소통하겠다"고 밝혔다.글/김주엽기자 kjy86@kyeongin.com18일 제막식을 연 인천항 크루즈 전용 터미널의 모습. 국내 최대 규모의 인천항 크루즈터미널은 현재 세계에서 가장 큰 22만5천t급 크루즈가 정박할 수 있는 430m 길이의 부두를 갖췄다. /인천항만공사 제공인천항 신국제여객터미널 공사 현장 모습. /인천항만공사 제공/아이클릭아트인천 남항 자동차 물류클러스터 조감도. /인천항만공사 제공동북아 지형을 형상화한 용을 테마로 바다와 물에 관련된 수룡 또는 해룡을 디자한 인천항만공사 캐릭터. /인천항만공사 제공

2018-12-19 김주엽

[바다가 들려주는 인천이야기·47]인천항 운영기관(상)-인천항만공사

개항 이래 국가가 주도해온 항만 개발·운영1990년대 후반 국제경쟁 위해 도입논의 불구정부 예산 탓·투포트 정치적 논리 밀려 방치시민들, 서명 운동등 펼쳐 2005년 출범 이뤄인천항을 관리하는 기관은 어디일까? 인천항이 개항한 1883년부터 일제강점기까지 항만시설을 구축하는 업무는 관세 사무행정을 맡았던 인천해관(세관의 중국식 이름, 1907년 세관으로 개정)이 담당했다. 해방 이후에는 미 군정청 교통국 인천부가 업무를 맡았다. 정부가 수립된 1948년 교통부 인천해사국이 인천항 업무를 수행한 이후에는 기관의 명칭만 바뀌었을 뿐, 인천항의 개발과 관리·운영 업무는 모두 정부에 의해 이뤄졌다.인천항 관리권은 2005년 7월 기업에 이관됐다. 1997년 부두운영사 제도 도입으로 민간 하역사들이 정부로부터 부두 시설을 임차해 운영한 적은 있지만, 인천항 전체 운영 권한이 민간 전문가들로 구성된 기업에 넘어간 건 개항 이후 처음이다. '인천항만공사'가 그 주인공이다.항만공사는 정부나 지방자치단체 등 관(官)이 주도하던 항만 개발과 운영을 담당한다. 정부는 급변하는 국제물류환경과 갈수록 치열해지는 동북아시아 국가들의 중심 항만(Hub-Port) 경쟁에서 뒤지지 않기 위해 1999년 3월 국무회의를 통해 항만공사제도를 도입하기로 하고, 재정자립도가 높았던 인천항과 부산항을 대상으로 삼았다. 특히, 인천항의 경우 기존의 정부 관리 체제로는 무서운 기세로 성장하고 있는 북중국 항만들과의 경쟁이 버거울 수밖에 없다는 주장도 있었다.하지만 정부 내에서도 항만공사 설립을 놓고 의견이 엇갈렸다. 해양수산부는 항만공사의 안정적인 운영을 위해선 4천억원의 정부 예산 지원이 필요하다고 추산하고, 정부가 일정부분 예산을 보조해야 한다는 의견을 내놨다.반면, 기획예산처(현 기획재정부)는 항만공사에 예산 지원은 어렵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산업자원부(현 산업통상자원부)도 물류비 상승 등을 이유로 부정적인 견해를 갖고 있었다.인천시민들은 인천항 발전을 위해선 항만공사제도를 조기에 도입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나섰다. 시민들은 부산항과 여수·광양항을 중심으로 하는 '투 포트 정책' 등 정치적 논리에 밀리면서 20여 년 동안 답보 상태에 빠져 수도권 지역 물동량의 15%밖에 처리하지 못하는 인천항의 현실을 지적했다. 시민들은 항만공사 조기 설립을 위한 100만인 서명운동 등 범시민적인 운동을 펼치며 항만공사 설립을 요구했다. 인천경제정의실천연합은 2001년 7월 논평을 통해 "국가 발전을 위해선 낙후된 인천항의 개발이 시급하다. 그러기 위해선 인천항이 자율권을 갖고 발전할 수 있도록 항만공사제도를 하루빨리 도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우여곡절 끝에 2003년 4월 항만공사법이 국회를 통과하면서 인천항만공사 설립이 확정됐다. 인천시와 정부 관계자들로 구성된 '인천항만공사설립위원회'는 2005년 7월 인천항만공사 출범에 합의했다. 인천시 공무원 출신으로 '인천항만공사 설립추진기획단'에서 근무했던 인천항만공사 신용주 홍보팀장은 "인천항만공사 설립에 필요한 기초 자료를 수집하느라 설립추진기획단 10명은 휴일도 없이 일했다"며 "그래도 당시에는 새로운 조직이 만들어진다는 설렘으로 힘든 줄 몰랐다"고 당시를 회상했다.수익 필요한 '기업' 형태… 마케팅 적극 펼쳐물동량 크게늘어 작년 '컨 300만 TEU' 돌파신항등 인프라 예산 투자 '선순환 구조' 갖춰인천항만공사 설립은 물동량 증가와 인프라 확충 등 인천항 발전의 계기가 됐다.인천항 물동량은 빠르게 늘어났다. 1974년 인천 내항 4부두에 국내 최초의 컨테이너 전용 부두가 만들어진 이후 연간 컨테이너 물동량 100만TEU(1TEU는 20피트짜리 컨테이너 1대분)를 달성하는 데 30년이 넘는 시간이 걸렸다.그런데 2013년 200만TEU를 돌파하며 물동량 증가 속도가 빨라졌고, 지난해에는 부산항에 이어 국내 두 번째로 300만TEU를 넘어섰다. 2005년 인천항만공사 출범 당시 114만9천TEU였던 물동량이 지난해 304만TEU로 2.6배 증가한 것이다. 출범 당시 29개였던 정기 컨테이너 항로도 49개까지 늘었다. 여수·광양항에 이어 국내 3위였던 연간 컨테이너 물동량 규모는 지난 2015년을 기점으로 여수·광양항을 완전히 따돌렸다. 해수부에서 근무하다 인천항만공사로 자리를 옮긴 김영국 여객터미널사업팀장은 "해수부에서 인천항을 관리하던 당시에는 안정적인 운영에 방점을 뒀다.인천항만공사는 공기업이라도 수익을 발생시켜야 하는 기업이기 때문에 물동량 창출을 위해 적극적으로 마케팅을 벌였다"며 "전 세계 컨테이너 물동량이 늘어난 부분도 있지만, 증가속도를 고려하면 마케팅 효과가 크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물동량이 늘면서 인천항의 인프라를 갖추는 공사 속도도 빨라졌다. 2012년 벌크 물동량을 처리하는 북항이 문을 열었고, 2016년에는 송도국제도시에 신항이 개장했다. 항만 활성화에 필수적인 시설이 들어서는 배후단지 면적도 2005년 47만8천㎡에서 152만6천㎡로 3배 넘게 확장됐다. 조주선 인천항만공사 항만시설팀장은 "해수부에 속해 있을 때보다 예산을 탄력적으로 운영할 수 있었기 때문에 인프라 구축에 적극적으로 나설 수 있었다"며 "시설 투자를 바탕으로 새로운 수익을 창출하는 선순환 구조가 이뤄지고 있다"고 했다.2005년 7월 인천항만공사 창립 기념식에 참석한 이해찬 당시 국무총리는 "인천은 항공과 해운이 결합한 강점이 있는 곳이다. 이제 역사적인 인천항만공사의 출범으로 인천항이 동북아의 물류 중심 항만으로 발전할 것을 기대한다"고 했다. 인천항만공사와 함께 인천항은 성장하고 있다. 내년 4월에는 송도 9공구에 국내 최대 규모의 크루즈 전용 터미널이 문을 열 예정이며, 2020년에는 신국제여객터미널도 개장한다. 2025년에는 연간 컨테이너 물동량 500만TEU를 달성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김영국 여객터미널사업팀장은 "인천항만공사가 설립된 이후 신규 물동량을 창출하면서 인천 지역 경제에 큰 도움을 줬다고 생각한다"며 "인천시민들과 함께 인천항이 계속 발전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말했다.글/김주엽기자 kjy86@kyeongin.com/아이클릭아트2005년 7월 인천항만공사 청사에서 진행된 현판식 모습. /인천항만공사 제공인천항만공사가 입주해 있는 정석빌딩과 현판. /인천항만공사 제공인천 송도국제도시에 위치한 인천 신항 전경. 인천항은 신항 개장 이후 연간 컨테이너 물동량 300만TEU를 돌파했다. /인천항만공사 제공인천항 신국제여객터미널 조감도. /인천항만공사 제공인천항만공사 캐릭터. /인천항만공사 제공

2018-12-12 김주엽

[바다가 들려주는 인천이야기·46]하역원과 포맨

선박에 원료·제품 싣거나 내리는 역할 출항에 맞춰 신속하게 처리 정밀성 필요컨테이너·크레인 도입으로 맞은 '위기'내항TOC통합 등 변화 겪으며 활로 찾아최근 찾은 인천항 내항 부두. 한국지엠의 신차들이 부둣가 찬바람을 뚫고 파나마 선적(船籍)의 '메디터레이니언 하이웨이(MEDITERRANEAN HIGHWAY)'호로 줄지어 오르고 있었다. 작업자들은 차량 전후 30㎝, 차량 좌우 10㎝의 빽빽한 간격으로 차를 손상 없이 실어야 한다. 그만큼 전문성이 필요하다. 시간당 60~80대 정도를 실을 수 있는데, 배가 출항하는 시간에 맞춰야 한다. 작업 속도도 매우 중요하다. 정확한 수량을 파악하는 일 역시 이들의 몫이다. 배에서 먼저 내릴 차량을 가장 나중에 싣는 등 선적(船積) 순서도 신경 써야 한다. 이 배의 경우 총 15개 층으로 돼 있는데, 선적 순서가 뒤바뀌면 목적지에서 차량을 내리는 시간이 더 걸린다.차량을 직접 운전해 선내에 싣는 '드라이버', 실린 차를 정밀하게 주차하는 '키커', 키커가 정확한 위치에 차를 댈 수 있도록 돕는 '신호수' 등 하역원과 이들을 총괄 지휘·감독하는 '포맨' 간 호흡이 잘 맞아야 한다.이들은 배의 크기에 따라 십 수명씩 조를 이뤄 움직인다. 이번 선적 작업엔 80여 명의 인력이 6개 조로 구성돼 투입됐다. "하역원들을 오케스트라의 연주자라고 하면, 포맨은 지휘자"라는 말이 있다고 한다. 이들이 한 몸처럼 일사불란하게 움직여야 문제없이 작업을 마칠 수 있다는 의미다. 작업 현장에서 만난 포맨 송한섭(60) 감독은 "제품 손상 없이 계획된 물량을 무사히 소화할 수 있도록 항상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했다.지난 40여 년간 하역원과 포맨 등 하역업계에서 일한 그는 "조금만 일하겠다는 생각으로 들어왔는데, 결혼하고 자식 낳고 살다 보니 벌써 40년이 됐다"며 "여름엔 덥고, 겨울엔 추운 일이지만, 가족적인 분위기 속에서 열심히 하고 있다"고 했다. 포맨 송한섭 감독을 비롯한 하역원들의 이번 작업은 밤늦게까지 이어졌다.하역원은 부두에 있는 선박에 원료 등 각종 제품을 싣거나 내리는 일을 하는 사람들을 통칭한다. 항운노조가 하는 일 가운데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이기도 하다.삼국시대부터 고려와 조선시대까지 납세는 양곡 같은 물건으로 이뤄지는 경우가 많았다. 이런 양곡은 주로 배로 운송됐는데, 이때 양곡을 배에 싣거나 내리는 일을 했던 '조군(漕軍)'이라는 하역 인부가 오늘날 하역원의 시초격으로 평가된다. 임금을 목적으로 노동을 제공해 생계를 유지한다는 점에서 지금과 비슷한 측면이 많다.1883년 인천항 개항 후 물동량이 증가하면서 하역원을 포함한 부두노동자들이 늘어났다. 항만설비의 확충으로 하역기업들이 생겨나기 시작했고, 부두노동자들도 하역산업의 전문 노동자로 변모하기 시작했다. 일제강점기 노동력 착취와 한국전쟁의 어려움을 거친 하역업계는 1960년대로 접어들면서 경제적인 상태가 개선되기 시작했다. 인천항의 물동량 증가가 주된 요인이었다. 관련 통계에 따르면 1962년 130만8천828t을 기록했던 인천항의 화물하역실적은 1972년 949만5천105t으로 7배 이상 늘어났다. 이듬해(1973년)엔 1천509만2천830t으로 더욱 늘었다. 경제개발 추진에 따른 생산 규모 대량화와 유통 물량 팽창이 원자재와 생산품의 수출입 확대로 이어졌다. 이후 항만에 모습을 드러낸 '기계'는 하역원들을 위축시키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 지게차와 크레인이 대량 도입돼 무거운 화물을 내리는 일에 투입(1966년)됐고, 고철 작업 등을 하는 마그넷(자석)도 사용되기 시작(1968년)했다. 인천항 양곡 전용부두엔 진공 흡입식 사일로(silo)가 설치(1974년)되기도 했다. 수송과 하역에 혁명적인 변화를 불러온 '컨테이너'는 1970년대 초반 인천항에 모습을 나타냈다. 대한통운이 1970년 3월부터 인천항에 컨테이너선을 월 2회 정기 취항하기로 하는 등 컨테이너 운송을 본격화했다. 당시 인천항엔 1천여 명의 항만 노무자들이 있었다고 한다. 이들이 포함된 노동조합은 진정서를 내고 대량실업 방지 대책 마련 등을 요구하기도 했다. 1980·1990년대 산업화에 힘입어 인천항은 수도권 최대 항만으로 성장했고 하역원을 비롯한 하역업계는 항운노조 상용화 개편(2007년), 내항 TOC(부두운영사) 통합(2018년) 등 변화를 거치며 인천항에서 생존할 수 있었다.인천항 내항에서 만난 경력 25년의 포맨 김종현(60) 감독은 "불철주야 주어진 작업을 성실히 하고 있지만, 컨테이너가 아닌 물동량 규모가 줄어들고 있어 걱정"이라고 했다. 그의 말 속에선 위기감을 느낄 수 있었다. 인천항 내항의 지난해 기준 벌크(비컨테이너) 물동량은 2천353만3천t을 기록했다. 10년 전인 2007년 4천250만t에 비해 절반 가깝게 줄어든 것이다. 수년째 내리막이다. 벌크 화물이 진보된 컨테이너로 흡수되는 경우가 많아지면서 이런 상황이 나타나고 있다. 평택항, 군산항 등 인접 항만과의 벌크 물동량 유치 경쟁도 심화되고 있다. 내항을 포함한 인천항 전체 벌크 물동량은 최근 몇 년째 1억1천여t 수준에서 정체돼 있다. 지난해 300만TEU(1TEU는 20피트짜리 컨테이너 1대분)를 돌파하는 등 매년 증가세를 보이는 인천항 컨테이너 물동량과 대비된다.김종현 감독은 "펄프 같은 경우 대부분 인천에서 처리돼 지방으로 갔는데, 지금은 대부분 평택이나 군산항으로 빠졌고, 벌크로 들어오던 납이나 알루미늄괴(塊), 원목 등은 요새 컨테이너로도 많이 들어와 내항 물동량이 줄어드는 상황"이라고 했다. 이어 "인천항 하역과 관계되는 일을 하면서 먹고 사는 사람들이 아직도 몇천 명은 될 것"이라며 "(관계 기관들은) 인천항의 (비컨테이너) 물동량 확보를 위해 더욱 노력해야 한다"고 했다. 송한섭 감독은 "우리 손을 거친 제품들이 북중미든, 동남아든 해외 여러 나라에 대한민국을 알린다는 자부심으로 지금껏 일해왔다"며 "더욱 안전에 신경 쓰고 '하역만큼은 인천항이 최고'라는 소리를 들을 수 있도록 더욱 노력할 것"이라고 했다.글/이현준기자 uplhj@kyeongin.com 사진/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인천항 내항 부두에서 하역원들이 한국지엠의 신차를 메디터레이니언 하이웨이호에 선적하고 있다. 사진/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메디터레이니언 하이웨이호로 줄지어 오르고 있는 한국지엠 신차들.메디터레이니언 하이웨이호에 선적되는 차량마다 바코드를 찍어 확인하는 모습.

2018-12-05 이현준

[바다가 들려주는 인천이야기·45]줄잡이와 라싱

수천~10만t넘는 선박 부두에 설치된 'ㄱ'자 모양 비트와 연결하는 '줄잡이'과거엔 항만 공간 효율적으로 활용하기 위해 50~100m 접안 위치 옮기기도라싱 작업자들, 컨테이너·화물 등 선적 하면서 철제기구·로프 이용해 고정파손 예방·평형 유지 '출항전 필수 업무'… 급하더라도 가장 꼼꼼하게 진행대한민국을 흔히 '통상 국가'라고 부른다. 우리나라는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여 있는 지리적 환경을 가지고 있고, 지하자원이 부족하다. 이런 점 때문에 교역의 중요성을 강조한 말이 바로 '통상 국가'다. 통상을 위해 필수적인 것이 항만과 선박이다. 우리나라 교역의 98%가 바다를 통해 이뤄진다.항운노조는 바다를 통한 교역에 있어 한 축을 담당한다. 선박이 항만에 접·이안하는 것을 돕고, 짐을 내리고 싣는 모든 과정에서 역할을 한다.지난 20일 오전 11시 인천항 내항. 인천과 중국 칭다오를 오가는 카페리선 골든브릿지5호가 입항을 위해 안벽 가까이 다가오자 등에 'Line Handling'이라고 쓰인 옷을 입은 항운노조원들이 배를 맞을 준비를 했다. '줄잡이' 또는 '강취방'이라고 불리는 이들은 선박이 부두에서 이탈하지 않도록 선박에서 제공하는 줄을 부두에 설치된 'ㄱ'자 모양 구조물인 '비트'에 고정하는 역할을 맡는다. 보통 한 척의 배는 앞뒤로 각각 4~6줄을 연결한다. 적게는 수천 t에서 10만t 이상의 무게인 선박을 고정하는 역할을 맡고 있기 때문에 줄의 너비는 10㎝ 이상으로 두껍다.작업은 선박에서 육지 부분으로 내린 줄을 끌어올리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줄은 비트에 연결하는 굵은 줄, 이와 연결된 '오소리 줄'이라고 불리는 얇은 줄로 구성된다. 선박에서 줄을 육지로 던지면 줄잡이들이 얇은 줄을 잡으면서 작업이 시작된다. 이때 비트에 묶어야 하는 줄은 바다에 빠져 있다. 줄잡이들은 먼저 얇은 줄을 끌어당긴 뒤, 비트에 연결하는 굵은 줄이 나타나면 비트에 연결한다. 줄 자체가 무거운 데다 바닷물을 머금고 있기 때문에 두 명이 힘을 합쳐 줄을 끌어당긴다. 줄을 비트에 건 뒤에는 선박에서 장비를 활용해 줄을 잡아당긴다. 느슨했던 줄은 팽팽해진다. 이러한 작업을 배 앞 뒤에서 각각 4차례 진행한 뒤에야 접안 작업이 마무리된다.줄잡이 업무는 카페리선뿐만 아니라 작은 어선부터 유조선이나 크루즈 등 대형 선박에서도 같은 방식으로 진행된다. 다만 선박의 규모에 따라서 줄의 두께와 비트에 연결하는 줄의 개수 등이 달라질 뿐이다.인천항에서 20여 년간 줄잡이 업무를 한 이성환(59) 소장도 이날 작업을 했다. 이 소장은 "밖에서 보기에는 쉬워 보일 수 있지만, 위험하고 힘들기도 한 작업"이라며 "선박에 타고 있는 선원들과 호흡이 맞지 않으면 줄의 무게 때문에 다치는 일도 발생한다"고 말했다.인천 신항과 남항이 조성되기 이전에는 인천항에 들어오는 선박 대부분이 인천항 내항으로 입항했다. 입항하려는 선박은 많았지만, 부두 공간이 충분하지 않았기 때문에 최대한 많은 선박을 접안하기 위해서 효율적으로 공간을 이용했다. 이 과정에서 줄잡이들이 선박을 옮기는 역할을 하기도 했다. 접안돼 있는 선박의 위치를 50~100m 옮기는 데 줄을 이용한 것이다. 고정돼 있던 줄을 해체한 다음 이 줄을 길게 늘어뜨린 뒤 이동하고자 하는 곳에 있는 비트에 고정한다. 그런 후 선박에서 줄을 잡아당기는 방식으로 배를 움직이게 하는 것이다.이 소장은 "과거에는 워낙 내항으로 들어오려는 배가 많았기 때문에 배 위치를 조정해서 더 많은 선박을 접안했다"며 "하지만 신항과 남항 등 항만이 잇따라 조성되면서 지금은 그러한 작업을 하지 않는다"고 말했다.이어 "다른 작업들은 많이 기계화가 이뤄졌지만, 줄잡이 작업은 앞으로도 기계로 하기 어려울 것"이라며 "우리 업무가 단순해 보이지만, 선박들이 안전하게 접안해야 선원과 승객이 안전하게 승·하선할 수 있다.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점에서 자부심이 있다"고 말했다.항운노조가 맡은 작업 중 또 다른 하나는 라싱(lashing)이다. '고박'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선적된 화물을 고정하지 않으면, 배가 운항하는 과정에서 화물이 움직이게 된다. 이는 화물이 파손될 수 있을 뿐 아니라 선박의 평형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이 때문에 선박 출항 준비에 있어서 필수 작업 중 하나가 바로 라싱이다.지난 26일 오전 10시 인천컨테이너터미널에 있는 'BOX ENDURANCE'호에선 컨테이너 선적 작업과 함께 이를 고정하는 라싱이 이뤄지고 있었다. 컨테이너 라싱은 철제 기구를 이용해 컨테이너와 선박을 'X'자 모양으로 연결하는 방식이다. 이날 선박에 실린 컨테이너는 361TEU이며, 모든 컨테이너에 대해 라싱 작업이 진행됐다.라싱 작업을 진행한 조성덕(56) 씨는 "컨테이너 선박은 정시성이 중요하기 때문에 작업 시간이 빠듯한 경우가 많다"며 "밤낮, 날씨를 가리지 않고 (라싱 작업이) 진행되기 때문에 힘든 부분이 있다"고 했다. 이어 "라싱은 선박 안전에 있어 가장 중요한 측면이기 때문에 급하더라도 가장 안전하고 확실하게 작업을 진행한다"고 강조했다.이날 라싱 작업에 투입된 항운노조원은 30명. 컨테이너 선적과 라싱 작업이 함께 이뤄지면서 평소보다 긴 2시간가량 소요됐다. 일반적으로는 1시간에서 1시간 30분 정도가 소요된다. 컨테이너를 'X'자 모양으로 라싱하는 것처럼 화물에 따라 작업 방식이 다르다. 자동차의 경우 4개 바퀴를 이용해 줄(벨트 형태)로 선박과 자동차를 연결하는 방식으로 고정한다.화물 선적에 이어 라싱 작업이 완료되면, 줄잡이가 선박과 부두를 연결하는 줄을 풀어 준다. 이날 컨테이너 선적과 라싱을 마친 'BOX ENDURANCE'호도 줄잡이들이 비트에 연결된 줄을 풀자 출항했다.인천항 등 전국 항만에서 기계화가 진행되고 있다. 그중에서도 인천 신항과 같은 컨테이너 항만은 자동화·기계화가 빠르게 이뤄지고 있다. 지난해 5월 문을 연 중국 칭다오항은 '자동화'된 항만이라는 점을 앞세우고 있다. 이곳에서는 사람이 하던 컨테이너 고정 작업을 로봇이 대신하고 있다.조성덕 씨는 "이 일을 시작한 지 20년이 넘었다. 처음에만 해도 수작업이 많았지만, 점차 기계로 대신하는 것을 경험하고 있다. 앞으로 인천항도 자동화 항만이 될 수 있을 것"이라며 "그 부분은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지금 내가 하는 일이 선박 안전을 위한 일이고, 현재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기 때문"이라고 했다.글/정운기자 jw33@kyeongin.com 사진/김용국기자 yong@kyeongin.com사진/김용국기자 yong@kyeongin.com줄잡이는 선박을 부두에 고정하는 역할을 한다. 지난 20일 오전 인천항 내항에서 인천항운노조원들이 카페리선 골든브릿지5호와 부두를 연결하는 작업을 하고 있는 모습. 사진/김용국기자 yong@kyeongin.com지난 26일 인천컨테이너터미널에 접안한 'BOX ENDURANCE'에 선적된 컨테이너를 선박과 연결하는 '라싱' 작업을 하고 있는 인천항운노조원들. 라싱 작업은 화물의 파손을 막고 선박의 운항 안전성을 위해서 반드시 필요하며, 컨테이너 선 뿐 아니라 다른 화물을 실은 선박도 라싱작업이 이뤄져야 출항할 수 있다. 사진/김용국기자 yong@kyeongin.com

2018-11-28 정운

[바다가 들려주는 인천이야기·44]인천항운노조

개항기 인천항으로 몰려든 부두 노동자들별다른 장비는 커녕 일자리 불안정 시달려항운노조 시초 '모군청' 조합해 취업 주선인천항운노동조합은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노동조합'에 그치지 않는다. 130여 년 인천항의 역사를 함께한 주역이자, 지금의 인천항을 있게 한 역군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변변한 장비 하나 없던 시절 부두 노동자들은 맨몸으로 항을 드나드는 짐을 날랐다. 일제강점기엔 항일 운동에 참여했고, 산업화 시대에는 인천지역 경제 성장을 이끌었다. 2000년 이후에는 기계화, 상용화(항만 인력 공급 체제 개편), 내항 통합 등의 고비를 극복하며 인천항 격동의 시기마다 온몸으로 맞섰다.우리나라에 부두 노동자가 처음 나타난 건 '개항기'다. 농촌에서 땅 한 평 없어 빌어먹기도 어려웠던 사람들이 '인천 드림'을 위해 제물포로 몰려들면서다. 이들은 처음에 어민, 소농민 등 일시적인 노동에 종사했다. 항만 물동량이 많아지면서 상시적 노동이 필요하게 되자 이들은 부두 노동자가 됐다. 처음에는 화주가 직접 고용하는 방식이었다. 부두 노동자 특성상 일정하지 않은 작업 시간과 작업량으로 안정적인 노동 공급이 어려워지자 한국인 하역원은 중구 내동에 '모군청(募軍廳)'이라는 하역조합을 꾸려 노동자의 취업을 주선했다. 이 하역조합이 항운노조의 시초다. 조합은 개항 이후부터 2007년까지 정부의 관리하에 독점적 노무공급체제를 인정받으며 성장했다.인천 부두 노동자의 노동쟁의는 일제강점기인 1923년부터 본격화했다. 일제의 침탈이 심해지면서 부두 노동자들은 임금 인상과 처우 개선을 요구했다. 당시 노동자들은 일본의 군수 물자와 수탈 물자를 하역했다. 강경애(1907~1943) 소설 '인간문제'를 보면 당시 인천항 부두 노동자들의 육체노동은 '고통'에 가까웠다."짐이 와르르하고 부두에 쏟아졌다. 짐에서 떨어지는 먼지며 바람결에 불어오는 먼지가 수천 명의 노동자들이 몸부림치는 바람에 가라앉지를 못하고 공중에 뿌옇게 떠돌았다. 사람을 달달 볶아 죽이고야 말려는 듯한 지독한 볕은 신철의 피부를 벗기는 듯했다."일제 수탈시기 파업으로 반제국주의 투쟁산업화 접어들면서 고용대책 등 관철시켜내항 TOC 통합·경쟁 심화로 줄어든 입지정부·정치권 접촉하며 시설투자 활로모색시대흐름 맞춰 성장 "인천항의 주인" 자부부두 노동자들은 살기 위한 몸부림으로 1926년부터 1936년까지 수차례에 거쳐 파업을 벌였다. 일제의 탄압으로 쟁의는 오래가지 못했지만, 이들은 민족적 차별에 대항하고 일제의 제국주의 정책에 반대하는 목소리를 냈다.부두 노동자들은 광복 이후 미 군정, 한국전쟁, 4·19혁명 등의 역사적 혼란기에서도 하역 작업을 계속하며 노동조합을 정비해 나갔다. 1945년 10월 부두노동자들이 '인천자유노동조합'을 창설했을 당시 조합에 가입한 노동자는 6천여 명에 달했다. 운송 사업을 중심으로 한 '인천부두노동조합'이 따로 설립되기도 했다. 이들 노조는 분열과 통합을 되풀이하며 세를 키워 나가다가 항만과 운수 분야 노동자들을 통합한 인천항운노조를 1981년 8월 설립했다. 1998년 경인항운노조로 명칭을 바꿨다가 2004년 인천항운노조로 다시 개칭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산업화 시대에 접어들면서 항운노조는 '기계'와의 투쟁을 시작했다. 1966년 인천항에 지게차와 크레인이 대량 도입되면서 중량화물 하역 작업이 기계화됐다. 1968년에는 마그넷(자석) 사용으로 고철, 철제류 작업도 기계화됐다. 항만 하역의 기계화는 노동조합의 존속을 위협했다.1978년 부두 노동자로 처음 조합에 들어온 이해우(69) 인천항운노조 위원장은 "당시 맨몸으로 일할 때는 어떤 물건이든 어깨에 지고 메는 게 전부였다. 석탄도 실제로 삽으로 떠서 포대에 담았다. 만석부두에 가면 속옷만 입고 막걸리와 원당(설탕)을 먹으며 일하는 사람이 태반이었는데 모두 부두 노동자들이었다"고 했다. 이어 "모든 게 기계화가 되면서 몸은 편해졌지만, 이후에는 실직의 두려움에 직면해야 했다"고 했다. 노조는 '근로자에 대한 대책 없는 기계화'를 반대하고 나섰다.대표적인 사건은 1974년 사료 도매업체 대한싸이로주식회사가 인천항에 양곡 전용부두와 진공 흡입식 하역기 2기를 완공한 것이었다. 1995년 인천항운노조가 발간한 '인천항변천사'를 보면, 당시 인천항의 양곡 하역량은 20~30%를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조합원들의 대량 실직은 불 보듯 뻔했다. 인천지부는 '대한싸이로에서 필요한 노무직은 조합원으로 둘 것', '작업 단계에서 감축한 분야는 보상할 것' 등의 대책을 강력하게 요구해 모두 관철했다.오광민 인천항운노조 쟁의부장은 "기계화로 사람들이 설 자리가 없어졌지만 이때까지만 해도 기계로 인해 손상되는 노동의 대가를 노조의 강력한 요구로 보상받아 실제로 잘리거나 임금이 감소하는 일은 많지 않았다"며 "그럼에도 컨테이너 도입 등 기계화의 큰 흐름을 이길 수는 없었다"고 말했다.노조는 1988년 인항고등학교를 설립하는 등 후학 양성에도 앞장섰다. 당시 노조 간부들이 "부두 노동자의 못 배운 한(恨)을 풀어보자"며 이 같은 결정을 내렸다고 한다. 전국 항운노조 중 학교를 설립한 곳은 인천이 처음이다. 이는 지금까지도 이어져 노조위원장이 인항학원 재단의 이사장을 겸하고 있다. 조합원 자녀들에 대한 복리 후생도 아끼지 않았다. 일찍이 고등학생과 대학생 자녀의 학비를 지원했다. 1978년부터 최근까지 1만여 명의 학생에게 장학금을 지급하기도 했다.2007년에는 '항운노조 상용화 개편'이라는 큰 고비를 맞는다. 상용화 개편이란 기존 조합 소속 일용직 인력을 하역 회사별로 상시 고용하도록 항만 인력 공급 체제를 바꾸는 것을 말한다. 노조 채용 비리 재발 방지, 항만 환경 개선 등을 위해 정부는 2000년대 초반부터 상용화 개편을 추진해왔다. 지난 100여 년간 부두 노동자를 공급해왔던 항운노조의 독점 고용권이 모두 깨지는 순간이었다.당시 신문 기사를 보면, 하역 노동자 1천700여 명 중 48%가 희망퇴직을 신청해 노조가 철회 기간을 두기도 했다. 정부가 희망퇴직 시 생계지원금을 최대 1억7천만원까지 줬기 때문이다. 2천800여 명에 달했던 전체 조합원 수는 1천 명 초반대로 추락했다. 노조는 "인천항이 뼈를 깎는 노력을 해야 한다"며 한발 양보해 합의를 이뤘다.최근 인천항을 두고 노조에서는 "이보다 더 나쁠 수 없다"는 말까지 나온다. 내항 TOC(부두운영사) 통합으로 부두 노동자 수가 대폭 줄어들게 될 처지인 데다, 물동량 유지·확대를 위해 평택항 및 부산항과도 경쟁을 벌여야 하기 때문이다.이에 항운노조는 '항만 배후단지 조성을 위한 정부 지원', '부두 임대료 인하 촉구' 등 인천항의 경쟁력을 갖추기 위해 정부와 기업 관계자, 국회의원 등을 만나며 발 빠르게 움직이고 있다.이해우 위원장은 "인천항이 수도권이기 때문에 다른 항보다 비용이 비쌀 수밖에 없다. 인천항만공사는 시설에 대한 투자를 아끼지 말아야 한다. 경쟁력을 갖출 수 있는 항으로 조성해야 한다"고 했다.그는 "인천항운노조는 인천항의 주인"이라고 당당히 말했다. 이어 "격동의 인천항 역사와 궤를 함께하며 인천항운노조는 다른 지역 노조보다 더 빨리 시대의 흐름에 발맞춰 변화하며 성장했다"면서 "앞으로도 조합원들이 주인 의식을 갖고 일할 수 있게 하는 것이 노조의 목표"라고 했다.글/윤설아기자 say@kyeongin.com 사진/김용국기자 yong@kyeongin.com인천항운노조는 지역 내 조합원들의 후생복지시설 마련을 위해 정부에 복지회관 건립을 건의, 2006년 '근로자의집'을 개관했다. 신협, 체력단련실, 인천항운노조 사무실, 휴게실 등의 시설을 갖췄다.1903년 제물포항 건어물 하역장에서 건어물을 나르고 있는 부두노동자들. /인천항운노조 제공1930년대 인천항에서 부두노동자들이 미곡 수출품을 나르고 있는 모습. /인천항운노조 제공1933년 가마니를 수송하던 우마차. /인천항운노조 제공1960년대 인천항에 하역된 밀가루 포대를 소형차에 싣고 있는 모습. /인천항운노조 제공1970년대 부두 내 적재한 화물을 나르고 있는 모습. /인천항운노조 제공

2018-11-21 윤설아

[바다가 들려주는 인천이야기·43]인천 강화도 새우젓

국내 젓새우 70~80% 잡히는 강화도… 배에서 바로 염장해 뛰어난 품질 '전국 입소문'매년 김장철마다 북새통 이루는 외포항 수산시장, 저렴하고 맛 좋은 '추젓' 인기 높아 현대식 냉동 창고 갖춘 경인북부수협 경매장, 지역 모든 제품 거쳐가는 '유통 중심지'김장에 빠질 수 없는 젓갈의 원재료가 되는 젓새우는 인천의 바다가 선물하는 중요한 수산자원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특히 인천 강화도 인근 바다는 젓새우 황금어장으로 불린다. 강화에서 생산하는 새우젓 또한 많은 사람으로부터 명품 대접을 받는다.때문에 해마다 가을이 되면 강화의 포구는 새우잡이 어선으로 들썩이고 전국 각지에서 새우젓을 사러 온 손님들로 북새통을 이룬다.지난 6일 찾아간 강화군 외포리에 있는 외포항 젓갈 수산시장은 김장철을 맞아 새우젓 등 젓갈을 사러 온 손님과 관광객으로 북적였다.현재 외포항 젓갈 수산시장에는 18개 젓갈 판매 매장이 성업 중이다. 새우젓을 주력으로 밴댕이, 멸치 등 어림잡아 20여 종류가 넘는 젓갈을 판매하고 있다.이날 시장에서 만난 조경숙(50)씨는 서울 강남 수서에서 이곳까지 찾아왔다고 한다. 조씨는 추젓 12㎏을 샀다. 김장 100포기를 하려면 10㎏ 정도 필요하다고 한다. 그는 "강화 새우젓이 명품이라기에 올해는 강화 새우젓으로 김장을 담아보려고 멀리까지 찾아왔다"며 "김장 맛이 좋으면 앞으로 계속 강화 새우젓을 쓸 생각"이라고 했다. 그는 10여 년 동안 충남 논산 강경에서 젓갈을 구매해 김장을 했다고 한다.새우젓은 가을에 담근 것을 '추젓'이라고 부른다. 5월에 잡은 새우로 담근 젓을 '오젓', 6월에 담근 젓을 '육젓'이라고 하고, 겨울에 담근 젓을 '동백하젓'이라 부른다.김장철에는 가격이 저렴하고 맛도 좋은 추젓이 인기다. 오젓과 육젓은 추젓보다 가격이 비싸다. 이날 추젓이 1㎏에 2만원, 오젓은 2만5천원, 육젓은 4만원 선에서 판매됐다.잡히는 시기에 따라 새우 크기도 다른데, 추젓은 길이가 1~2㎝, 오젓은 2~3㎝, 육젓은 3㎝ 이상 된다.짠맛의 세기를 결정하는 염도 또한 시기별로 다르다. 가장 더울 때 잡히는 육젓은 부패 방지를 위해 소금이 많이 들어가야 해 짠맛이 강하다. 오젓이 중간 맛, 추젓이 가장 덜 짜다.이곳 상인들은 강화 새우젓이 다른 어떤 지역의 새우젓보다도 품질이 우수하다고 자랑했다.중국산 등을 속여 팔다가 적발돼 홍역을 치르기도 한 다른 지역과 달리, 오직 국산만을 고집하며 믿을 수 있는 새우젓이란 이미지를 지켜 가려고 노력하기 때문이란다.정찬요(54) 강화새우젓축제사무국장은 "우리나라 젓새우의 70~80%가 강화에서 잡히는데, 산지에서 잡아 배에서 바로 염장하는 강화 새우젓은 전국 어디보다 경쟁력이 있다"며 "국내에 유통되는 새우젓의 70~80%는 외국산으로 보면 되는데, 강화에서 사는 새우젓은 원산지를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젓갈 상점 곳곳에는 새우젓이 가득 담긴 드럼통이 보였다. 매장 한 곳에 진열된 물건만 수천만 원어치가 된다고 한다. 새우젓 국물이 닿지 않아 노랗게 색이 변한 부분을 '윗밥'이라고 부른다. 이 윗밥을 걷어내고 판매하는데 먹어도 상관은 없다. 따로 가져가는 곳이 있다고 한다.강화 새우젓이 명품 소리를 듣게 된 것은 강화의 자연환경과 큰 연관성이 있다. 강화도는 한강이 임진강, 예성강과 만나는 곳이다. 조석 간만의 차가 심하고 물살의 변동이 심해 갯벌도 발달해 있다. 민물과 짠물이 만나는 합류 지역이라 어종도 풍부해 큰 새우 어장이 형성될 수 있었다. 지금은 사라지고 없지만 석모도에 염전이 있던 시절에는 품질 좋은 소금이 생산되면서 뛰어난 새우젓이 생산됐다고 전해진다.젓새우는 조업 방법이 크게 두 가지다.'닻배'라고 부르는 배를 이용하는 연안자망 어업 방식과 '꽁지배'를 이용한 안강망 어업 방식이다.자망 어업은 새우가 그물코에 꽂히게 해 잡는 방식이다. 안강망 어업은 조석 간만의 차가 큰 지점에 자루그물을 투하해 닻으로 고정 부설한다. 그러면 새우가 조류에 의해서 자루그물 속으로 들어가 잡힌다.강화도 어민들은 젓새우에 집중하고 있지만 1900년대 초까지만 해도 다른 어종도 많이 났다고 전해진다. 과거에는 조기, 밴댕이, 민어, 병어 등을 잡는 데 주력했다. 지금은 홍어, 까나리, 농어, 숭어 등이 대표적이라고 한다. 강화부지(1783년)에는 민어, 숭어, 석수어, 새우, 가리맛조개, 굴 등이 당시 강화의 수산물로 기록돼 있다.어민들이 생산한 새우젓은 창고로 옮겨 보관 숙성된다.수산시장에서 300여m 떨어진 곳에는 경인북부수협이 운영하는 새우젓 보관창고 겸 경매장이 있는데, 이곳이 새우젓 유통의 중심 역할을 한다. 강화도에서 생산되는 새우젓이 모두 이곳을 거친다고 한다. 인천시와 강화군 등이 50억 원의 예산을 지원해 2011년 완공한 수산물 처리·저장시설이다. 저온 냉장창고, 냉동창고, 급속 냉동창고 등을 갖추고 있다.옛날에는 새우젓을 토굴에 보관했는데, 지금은 현대식 냉장·냉동창고 등 체계적인 방법으로 보관하고 있다. 지금은 판매를 위해 물건이 빠져나가 창고가 비어 있지만, 10월 초가 되면 창고들이 모두 새우젓으로 가득 찬다.김용순(54) 경인북부수협 판매사업소장은 "옛날에는 토굴에 새우젓을 보관하다가 이곳에 보관시설을 설치하고 장소를 옮겼다"며 "최신식 시설에서 새우젓을 잘 숙성시켜 강화 새우젓의 상품 가치를 높이는 데 큰 역할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글/김성호기자 ksh96@kyeongin.com 사진/김용국기자 yong@kyeongin.com /아이클릭아트강화 새우젓은 인천의 명품 수산물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특히 가을에 수확한 젓새우로 만든 '추젓'은 김장에 빠질 수 없는 재료로 많은 이들로부터 사랑을 받는다. 지난 9일 경인북부수협이 운영하는 수산물 처리·저장 시설에 보관 중인 새우젓이 숙성 중이다. 사진/김용국기자 yong@kyeongin.com외포항 젓갈 수산시장에는 판매장 18곳이 운영 중이다. 사진/김용국기자 yong@kyeongin.com/아이클릭아트김장철을 맞아 시장에서 젓갈을 고르는 손님들. 사진/김용국기자 yong@kyeongin.com낡은 시설을 고쳐 지난 2009년 새롭게 조성된 외포항 젓갈 수산시장 전경. 사진/김용국기자 yong@kyeongin.com

2018-11-14 김성호

[바다가 들려주는 인천이야기·42]인천항 관문 '갑문' (하)

1910년대 미곡 수출 중심으로 떠오른 인천日, 곡물 반출위해 축항… 죄수등 강제동원처참했던 공사현장 '백범일지'에도 기록돼지금으로부터 100년 전인 1918년 10월 26일. 일본우선주식회사 깃발을 단 기선 한 척이 인천 앞바다에 있는 사도(沙島)를 지나 바다 위 거대한 철문 앞에 멈췄다. 두 개의 갑문을 지난 배는 400m가 넘는 거대한 길이의 부두에 정박했다. 8년여 동안 진행한 인천항 축항(갑문 건설) 공사를 마무리하고 준공식에 앞서 가진 시험 운항이었다. 이튿날 오전 10시 30분께 2대 조선총독을 지낸 하세가와 요시미치(長谷川好道) 등 700명의 관계자가 참석한 가운데 인천항 축항 공사 준공식이 개최됐다. 수심이 얕고 9~10m에 달하는 조수 간만의 차 때문에 24시간 선박 접안이 어려웠던 인천항에 4천500t급 기선 세 척이 항상 정박할 수 있는 항만시설이 만들어진 것이다.조선총독부는 물자를 원활하게 수탈하기 위해 1911년 현재 인천항 제1부두 근처에서 갑문 건설사업을 시작한다. 1933년 발간한 인천부사에 따르면 1911년부터 1918년까지 진행한 공사에는 391만 4천455엔이 사용됐다. 1918년 당시 일본 내 쌀 한 섬(150㎏) 가격이 10엔이었던 점을 고려하면 일본 돈으로 300억 엔, 우리나라 돈으로 3천억 원이 넘는 예산이 사용된 셈이다.조선총독부가 막대한 예산을 투입한 이유는 인천항이 우리나라 미곡 수출의 중심지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인천항은 1910년대부터 군산, 부산 등을 제치고 국내에서 가장 많은 쌀과 콩을 수출하는 항구 도시가 됐다고 한다. 1910년대 인천에서 투기의 일종인 '미두(米豆)'가 가장 성행한 것도 인천으로 쌀이 모였기 때문이다. 미두는 일정한 날짜를 정해 놓고 그 기간 내에 쌀을 사거나 팔아 시세 차익을 얻는 방식이다.일본이 우리나라 곡물을 자국으로 반출하기 위해 진행한 축항 공사에는 조선인이 동원됐다. 특히, 인천 내동에 있던 경성감옥 인천 분감에 수감된 조선인 죄수들이 대거 끌려갔다. 그 가운데 백범 김구(1876~1949)도 있었다. 김구는 1911년 '안악 사건'(1910년 11월 안명근 군자금 모금 사건)으로 서울에서 옥살이를 한다. 1914년 39세 때 인천 감옥으로 이감돼 축항 공사 현장에서 강제 노역을 했다.그는 백범일지에 '아침저녁 쇠사슬로 허리를 매고 축항 공사장으로 출역을 간다. 흙 지게를 등에 지고 10여 장의 높은 사다리를 밟고 오르내린다. 불과 반일 만에 어깨가 붓고 등창이 나고 발이 부어서 운신을 못 하게 된다. 너무 힘들어 바다에 빠져 죽고 싶었으나 그러면 같이 쇠사슬을 맨 죄수들도 함께 바다에 떨어지므로 할 수 없이 참고 일했다'고 참담한 심정을 기록했다. 인천항 내항 1부두 동쪽과 남쪽 시설은 콘크리트로 덧씌운 탓에 옛 축항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지만, 북쪽 석축은 100년 전 모습 그대로다. 석축 위로 정박한 배를 묶어 두는 계선주(繫船柱) 역시 당시 모습대로 열을 지어 서 있다. 1930년대 인천 지역에 군수공장이 늘어나면서 일본은 인천항을 확장할 계획(제2선거 건설)을 세웠다. 인천항만공사가 2008년 발간한 '인천항사'에 따르면 당시 제2선거를 계획했던 지역은 지금의 인천 북항 일대로 추정된다. 인천도시역사관 배성수 관장은 "조선기계제작소(현 두산인프라코어), 조선목재, 동양방적(현 동일방직) 등 군수 물자 보급을 위한 공장들이 세워지면서 인천항 물동량이 많이 늘어났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조선총독부의 제2선거 건설 계획은 태평양 전쟁이 확대되면서 공사 비용을 확보하지 못해 백지화됐다.경제개발로 화물 급증 1974년 새 갑문 준공한계 넘는 선박 드나들며 산업화 견인 역할역사적 명암 공존 '100년사 기념' 가치 충분일본이 시작하지 못한 공사는 1960년대 우리 정부에 의해 추진됐다.경제개발 5개년 계획에 따라 1965년 서울 구로와 인천 부평·주안에 한국수출산업공업단지가 차례로 조성되면서 인천항의 화물이 급격히 증가하기 시작했다. 1960년 46만 6천259t이었던 인천항 물동량은 1969년 279만 8천t으로 600%나 올랐다. 인천연구원 김창수 도시경영센터장은 "당시에는 육로 운송 인프라가 제대로 갖춰져 있지 않아 부산 등 다른 지역까지 화물을 운반할 여건이 충분하지 않았다"며 "구로, 부평, 주안 등 공장에서 필요한 원자재 가운데 대부분이 인천항으로 수입될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1974년 현재의 갑문이 만들어지면서 인천항은 컨테이너 하역 전용 부두인 4부두를 포함해 2부두와 3부두 등 5만t급 이상 대형 선박들을 동시에 접안해 하역할 수 있는 기능을 갖춘다. 항만 인프라가 만들어지면서 인천항 물동량도 급증했는데, 1979년에는 2천 400만t의 물동량을 처리했다.1980년대 들어서면서 인천항 물동량이 3천만t에 육박하기 시작했다. 당시 갑문은 항상 배들로 가득했다는 게 당시 근무자들의 설명이다. 1978년부터 인천항 갑문에서 근무한 김익봉 인천항만공사 갑문운영팀장은 "인천항 갑문에 하루 50척의 선박이 드나들 수 있는데, 58척의 선박이 통항한 적도 있었다"며 "인천 앞바다와 내항 안에는 갑문을 이용하려고 대기하는 선박이 항상 보였다"고 회상했다. 이어 "입출항 선박이 너무 많아 갑문을 거의 온종일 열어 놓다 보니 내항의 물이 계속 줄어들어 수심이 낮아지는 현상까지 벌어졌다"며 "내항이 일정 수위를 계속 유지할 수 있도록 외항의 물을 내항으로 공급하는 공사도 실시했다"고 덧붙였다.지난달 27일은 인천항 갑문이 처음 만들어진 지 100년째 되는 날이었다. 그러나 인천 지역에서는 별도의 행사 없이 이를 조용히 지나쳤다. 현재 남아있는 갑문이 100년 전 만들어진 것도 아닌 데다, 일제 수탈의 역사를 굳이 기념할 필요가 없다는 이유에서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우리나라 산업화의 상징이었던 인천항 갑문의 축조일은 역사적으로 기념할 가치가 충분하다고 지적한다.김창수 센터장은 "인천항 갑문은 100년 전 조선인의 피땀으로 만들어졌고, 우리나라 경제 발전의 견인차 구실을 한 시설"이라며 "명암이 함께 공존하는 시설이기 때문에 갑문의 의미를 다시 되돌아보는 일은 인천시 등 관계 기관이 반드시 추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글/김주엽기자 kjy86@kyeongin.com1918년 완공된 인천항 갑문에 선박이 입항하는 모습. 초창기 갑문은 현재 운영되는 '슬라이딩 게이트(미닫이)' 방식이 아닌 '마이터 게이트(여닫이)' 형태로 제작됐다.1911년 인천항 축항공사에 동원된 인천 내동 경성감옥 인천 분감 조선인 죄수들 모습. /인천항운노동조합 제공1918년 10월 27일 열린 인천항 축항공사 준공식 모습./인천항만공사 제공현재의 갑문이 지어지기 전인 1966년 인천항 전경.1974년 인천항 갑문타워 준공식에 참석한 박정희 대통령 모습. /인천항만공사 제공

2018-11-07 김주엽

[바다가 들려주는 인천이야기·41]인천항 관문 '갑문' (상)

"NGB 인천대교 통과. 10시 20분에 갑문 도착합니다."지난달 19일 오전 10시 10분께 인천항 갑문 관제탑에서 무전이 울렸다. 인천항에 들어오는 선박에 탑승한 도선사가 보낸 것이다. 'NGB'라고 지칭된 이 선박은 인천항과 중국 웨이하이(威海)를 오가는 3만 1천t급 대형 카페리선 '뉴골드브릿지7호'. 인천 내항에 있는 제2여객터미널에 입항하려면 반드시 갑문을 통과해야 하기 때문에 갑문 관제탑에 필요한 정보를 제공한 것이다.10시 20분께 뉴골든브릿지7호가 갑문 앞에 모습을 나타냈다. 갑문 주변에는 경고음이 울렸고, 1천50t에 달하는 외측 갑문이 천천히 열렸다. 배가 갑거(수로)에 완전히 진입하자 외측 갑문이 닫혔고, 배에서 내린 4개의 줄을 줄잡이들이 고정하기 시작했다. 인천항만공사 갑문운영팀 강석현 차장은 "내항과 외항의 수면 높이를 맞춰야 한다. 수로에 물을 채우는 과정에서 배가 흔들려 갑벽에 부딪힐 수 있기 때문에 배를 고정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배가 고정되면 수로에 물이 들어온다. 이날 10시 20분께 외항의 수위는 4.7m. 내항의 해수면 높이는 최소 7m로 유지되기 때문에 수로에서 내항과 외항의 수위를 맞춰야 한다. 강 차장은 "내항의 수위가 높은 경우에는 내항 쪽에서 (수로로) 물을 보내고, (배가 수로에 들어온 후) 외항의 수위가 높으면 바다 쪽 외항으로 물을 흘려보낸다"고 했다.1883년 개항한 인천항은 세계에서 세 번째로 큰 9~10m의 조수 간만의 차를 극복해야 했다. 썰물 때 갯벌이 훤히 드러날 정도여서 큰 배는 물론 작은 배도 인천항에 접안하기 어려웠다. 이 때문에 선박이 인천 앞바다에 정박해 있으면 작은 배가 다가가 사람과 짐을 날랐다.김탁환과 이원태가 쓴 소설 '아편전쟁'에서도 이 같은 초창기 인천항의 모습이 묘사된다.'인천은 수심이 얕고 아직 부두가 만들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외국 상선이 곧바로 바닷가에 닿지 못한다오. 바닥이 평평한 짐배가 나가서 상선에 붙소. 승객과 상품을 짐배에 옮겨 싣는 게요.'인천항을 통한 물동량이 늘어나면서 일본은 만조와 간조를 가리지 않고 언제나 선박이 입항할 수 있는 시설을 원했다. 이에 1911년 항만 설비 확장 공사를 시작했고, 1918년 10월 27일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적 갑문이 인천항에 설치됐다.1962년 시작된 경제개발 5개년 계획에 따라 당시 7~8%대의 경제성장률을 기록했는데, 인천항의 화물 증가 추세는 이보다 3배가 넘었다고 한다. 경인 공업지역의 원자재와 소비재 물동량이 급격히 늘었기 때문이다.하지만 당시 갑문 안쪽의 인천항 시설은 4천500t급 3선석에 불과해 수도권 지역 물동량을 감당하기 어려웠다. 정부는 1964년 인천항 갑문 제2선거 공사에 착수했고, 1974년 현재의 인천항 갑문이 설치됐다. 100년 전 축조한 갑문은 바닷속에 가라앉았다. 현재는 인천 내항 1부두 주변에서 일부 흔적을 확인할 수 있다. 인천항 갑문은 최대 길이 306m, 너비 32m를 가진 선박이 이용할 수 있는 5만t급과 길이 215m, 너비 19m 선박이 이동하는 1만t급 등 총 2개 수로로 운영되고 있다.갑문 축조와 내항 확장으로 안정적인 하역 환경이 조성되면서 인천항의 수출도 증가하기 시작했다. '인천항사'에 따르면 인천항의 수출액은 1973년 3억 1천791만 3천 달러에서 갑문 완성 이듬해인 1975년 5억 9천941만 8천 달러로 급증했다. 1978년에는 사상 처음으로 10억 달러를 돌파했다.2004년 인천 남항이 개항하기 전까지 인천 내항은 몰려드는 배를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해양수산부가 1999년 펴낸 '수도권 항만 기능정립·재정비계획'을 보면, 수도권 화물의 인천항 폭주로 인천항의 체선·체화 현상이 가장 심했던 때는 1990년이다. 그해 체선율은 48.2%였다. 체선율은 선박이 부두에 접안하지 못하고 12시간 이상 대기한 선박의 비율을 말한다. 100대 중 48대가 12시간 이상 기다렸다가 인천항에 들어올 수 있었던 셈이다. 인천항의 체선율은 전국 항만 중 가장 높았다. 당시 평균 체선 시간은 70시간 정도로 길게는 일주일 이상을 바다에서 대기해야 갑문을 통해 인천항에 들어올 수 있었다.인천 남항에 이어 북항, 신항까지 문을 열면서 내항을 찾는 선박은 줄어들고 있다. 인천항만공사에 따르면 인천항 갑문을 입출항하는 선박은 2005년 1만 3천140척을 정점으로 계속 감소하고 있다. 벌크화물 하역항인 북항이 개항한 2010년 8천395척, 컨테이너 전용부두인 내항 4부두가 가동을 멈춘 지난해에는 5천 52척만이 갑문을 이용했다. 2005년에 비해 60% 이상 입출항 선박이 줄어든 셈이다. 지난해 물동량도 내항 하역량이 가장 많았던 2004년(4천529만t)의 절반 수준에 불과한 2천353만 3천730t으로 떨어졌다. 하역 장비의 발달로 수심과 관계없이 선박에서 짐을 싣고 내릴 수 있다 보니, 30분 이상 걸리는 갑문을 출입하기 꺼리는 것이다.하지만 갑문 속에 있는 내항은 아직 항만으로서 가치가 충분하다는 게 갑문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설명이다. 1978년부터 갑문에서 근무한 인천항만공사 김익봉 갑문운영팀장은 "갑문은 24시간 해수면 높이가 일정하고, 물이 잔잔하기 때문에 정밀기계나 자동차 하역에 적합한 항구"라며 "인천항 발전을 이끌어온 항구라는 자부심을 품고 일하고 있다"고 말했다. 글/김주엽기자 kjy86@kyeongin.com 그래픽/성옥희기자 okie@kyeongin.com/아이클릭아트인천항 갑문으로 3만1천t급 대형 카페리선 뉴골드브릿지 7호가 들어오고 있다. 인천항은 세계에서 세 번째로 큰 9~10m의 조수 간만 차이가 있어 갑문 운영이 필수적이다. 사진/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인천항 갑문 관제탑 모습. 사진/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인천항 갑문 관제실. 이곳에서 인천 내항과 외항의 수면 높이를 조절한다. 사진/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

2018-10-31 김주엽

[바다가 들려주는 인천이야기·40]연평도 꽃게잡이

조기 인기에 밀려 그냥 버리던 찬밥1960년대 들어서 '대표수산물' 등극장비 열악했지만 작은배 가득 채워中불법조업 등 남획탓 어획량 급감'어민들 주 수입원' 자원 보호 시급국내 유명 포털사이트에서 '꽃게'를 검색하면 관련 검색어에 인천 옹진군 '연평도'가 나온다. 연평도를 검색하면 '연평도 꽃게'가 관련 검색어로 뜬다.서해안에서 주로 잡히는 꽃게는 인천의 대표적인 수산물이다. 특히 인천 앞바다 서해 5도 중 한 곳인 연평도는 꽃게 산지로 유명하다. 인천 소래포구 어시장이나 인천종합어시장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모습은 꽃게가 한가득 담겨 있는 통과 그 앞에 적혀 있는 '연평도산'이라는 팻말이다.꽃게는 봄철과 가을철에 잡힌다. 봄철에는 알이 가득 배 있는 암꽃게가 주로 잡히며 암꽃게는 주로 게장을 담가 먹는다. 한정식에서 빠지지 않는 간장게장은 암꽃게로 만든다. 가을철에는 찜이나 탕으로 해먹는 숫꽃게가 살이 많고 맛도 좋다. 여름철은 꽃게 산란을 위해 금어기로 지정돼 있다. 가을철 꽃게잡이는 8월 말부터 11월 말까지 이뤄진다. 수온이 내려가면 꽃게가 자취를 감추기 때문에 어민들은 어획 활동을 하지 않는다.지난 11일 새벽 5시 40분 연평도 당섬선착장. 해가 뜨기 직전이라 어둠이 가시지 않았지만, 꽃게잡이 어선들이 켜 놓은 조명들이 선착장 주변을 환히 비추고 있었다. 전날 풍랑주의보로 출항하지 못한 어선들이 만선을 기대하며 출항 준비에 한창이었다. 9.8t급 자망 어선인 '정복호'도 출항 준비를 마쳤다. 6시가 조금 지나자 20여 척의 어선이 일제히 바다를 향해 키를 돌렸다. 정복호는 연평도 남서쪽 해역으로 향했다.정복호 유호봉(60) 선장은 1990년대 초부터 연평도에서 꽃게잡이를 했다. 중간에 강원도나 전라도 앞바다에서 일을 하긴 했지만, 대부분 연평도에서 꽃게잡이 어선을 탔다. 자망 어선은 선원 6명과 선장 1명이 한 조로 일한다. 너비 5m 길이 500m의 직사각형 모양의 그물을 바다에 수직으로 펼쳐놓은 뒤 며칠 있다가 걷어 올리는 방식으로 조업한다. 그물과 연결된 굵은 밧줄을 끌어올리는 것은 선박에 설치된 장비를 이용하지만, 그물과 밧줄을 끊어내고 그 자리에 새로운 그물을 연결해 바다로 던져 넣는 작업은 선원들이 역할을 나눠 진행했다. 흔들리는 배 위에서 작업이 진행되기 때문에 선원 간 호흡이 어긋나면 밧줄이 선원들을 덮치는 위험한 상황이 올 수 있다. 이 때문인지 작업 과정에서 선장은 선원들에게 고함을 지르며 지시하기도 했다. 유호봉 선장은 "바다 위에서는 항상 긴장해야 한다. 작업 과정에서 말을 험하게 하는 이유도 안전이 최우선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이날 오전 6시 50분. 40분 이상을 내달려 도착한 바다에서 첫 그물을 끌어올렸다. 꽃게는 그물에 듬성듬성 매달려 있었다. 그물을 20~30분간 끌어올렸으나 그물 한가득 꽃게가 매달린 모습은 볼 수 없었다. 선원들은 한목소리로 "꽃게잡이가 예년만 못하다"고 했다. 점점 꽃게 어획량이 줄어들고 있다는 것이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중국어선의 불법 조업이 꽃게잡이 어획에 악영향을 미쳤다. 그때보다 중국어선이 많이 줄었지만 꽃게 어획량은 여전히 늘어나지 않고 있다고 했다.유호봉 선장은 2008년 4월 중국어선을 직접 나포한 경험이 있다고 했다. 우리 어선 30여 척이 연평도 앞바다까지 내려와 있는 중국어선을 직접 나포한 것이다. 어선 4척이 한 조가 돼 중국어선을 쫓았다. 직접 중국어선에 올라가 선원들을 붙잡고 해양경찰에 인계했다. 그는 "당시 중국어선이 한 번 지나간 자리는 고기 씨가 마를 정도로 심했다"고 했다. 그러면서 "우리나라에서도 자원 보호를 위한 조치를 더 강하게 취해야 한다"며 "이곳에서 살게 될 후손들을 위해서도 지금보다는 더 자원을 보호하는 방향으로 제도가 개선돼야 한다"고 했다.꽃게가 인천의 대표 수산물이 된 건 오래되지 않았다. 인천에서 꽃게를 잡기 시작한 것은 불과 50여 년 전이라는 게 연평도 어민들 이야기다. 이전까지만 해도 연평도의 대표 어종은 '조기'였다. '조기 파시'라고 불릴 정도로 전국의 어선들이 봄철이면 연평도로 몰려들었다. 한때 1천여 척이 넘기도 했다. 이때에는 꽃게가 그물에 걸려 올라와도 모두 버렸다고 한다. 어민들은 조기로 큰돈을 벌어들였고, 이 때문에 술집과 기생집 등도 연평도에 넘쳐났다.경향신문은 1962년 5월 14일자 기사에서 "조기잡이의 '골든타임'을 바로 눈앞에 두고 연평도를 중심으로 한 어장 일대는 어선 1천200여 척과 어민 1만여 명이 숨가쁜 준비 태세 속에서 조기잡이 '붐'을 이루며 북적이고 있다"고 보도했다.연평도 주민 강유선(75·여)씨는 "꽃게잡이를 시작한 것은 60년대 중반 이후로 기억한다"며 "연평도에서 조기를 잡기 힘들자 어민들이 2년 정도는 흑산도 등 남해로 내려가 조기잡이를 하기도 했다. 이들이 연평도로 다시 올라와 꽃게잡이를 시작한 것이 60년대 중후반 정도"라고 말했다.강씨는 당시 잡았던 꽃게를 노량진 수산시장에 가져다가 팔았다고 한다. 배를 10시간가량 타고 인천항에 도착한 뒤 경인전철을 타고 노량진으로 향했다. 노량진 수산시장으로 가는 도중에 상한 꽃게는 중간에 버리기도 했다고 한다. 강씨는 "조기잡이 때에는 중국과 일본 상인들이 연평도에 와서 조기를 샀다. 무역이 이뤄진 것"이라며 "하지만 꽃게잡이를 시작했을 때에는 판로가 없어 노량진으로 올라갈 수밖에 없었다. 당시에는 인천에 어시장이 활성화되지 않았을 때"라고 했다.1960년대만 하더라도 어선의 규모는 작았다. 어획 방식은 자망 방식으로 지금과 비슷하지만, 장비가 열악해 그물을 끌어올리는 것은 모두 선원들의 몫이었다. 이 때문에 그물의 크기도 100m 정도로 짧았고, 걷어 올릴 수 있는 그물의 수도 적었다.연평도에서 30년 넘게 배를 탄 노영철(68)씨는 "예전에는 꽃게가 그물에 한가득 걸리는 날이 많았다"며 "처음에는 참나무로 된 닻을 만들어 조업을 하기도 했는데, 배가 작았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말했다. 차재득(78)씨는 "점점 꽃게 먹이가 줄어들고 있는 것을 느낀다. 단적으로 예전보다 바다에 수초가 줄었다"면서 "꽃게의 먹이가 되는 작은 물고기도 줄어들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는 남획이 불러온 결과"라고 강조했다.서해수산연구소에 따르면 인천 해역 꽃게 어획량은 1990년 처음 해당 통계를 집계한 이래 2009년 1만 4천675t을 기록했으나 점차 줄어 2015년 1만t, 2017년 5천723t 등 계속 감소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꽃게 어획량이 줄어들고 있지만, 그래도 연평도 어민들의 주 수입원은 꽃게다. 당섬선착장 인근과 마을 곳곳에서는 주민들이 모여 꽃게 따는 작업을 하고 있었다. 그물과 꽃게를 분리하는 작업을 하는 것이다. 1척의 배에서 잡아온 꽃게를 그물에서 떼어내는 데 10명 이상이 필요하다고 한다.글·사진/정운기자 jw33@kyeongin.com 그래픽/성옥희기자 okie@kyeongin.com/아이클릭아트지난 11일 정복호 선원들이 연평도 인근 해역에서 꽃게 잡이를 하고 있는 모습. 연평도 인근 해역은 국내 대표 꽃게 산지로 이름이 나 있으며 꽃게는 연평도 어민들의 주 수입원이기도 하다. /경인일보DB정복호 유호봉 선장. /경인일보DB연평도 당섬선착장 인근에서 꽃게를 분류하는 모습. /경인일보DB1950년대 연평도의 모습. 조기잡이를 위해 전국에서 어선들이 몰려들었다. 당시에는 꽃게가 그물에 걸려 올라와도 버렸다고 한다. /강유선씨 제공연평도 앞 바다에서 잡아 올린 꽃게를 그물과 분리하는 모습. 분리 작업은 선원들이 아닌 연평도 주민들이 맡아서 한다. /경인일보DB소래포구 어시장에서 꽃게를 판매하는 모습. /경인일보DB

2018-10-24 정운

[바다가 들려주는 인천이야기·39]인천항 향토하역사-우련통운

73년간 인천항과 함께 자라온 인천의 향토 하역사이자 종합물류기업인 우련통운은 '인천우체국 사서함 1호'를 여전히 사용하고 있다. 우편사서함이란 우체국에서 개인이 직접 우편물을 찾아갈 수 있는 전용 수취함이다. 우체국에 가야 볼 수 있다. 인천항 인근에 있는 우련통운(주)는 인천우체국에서 사서함을 운영한다는 소식을 접하고 가장 먼저 신청해 사서함 1호의 주인이 됐다. 우련통운은 1923년 신축한 인천우체국이 2003년 중구에서 연수구로 이전하고 나서도 사서함 1호를 계속 사용 중이다. 인천우체국에는 1978년부터 사용한 것으로 기록돼 있지만, 우련통운의 전신인 청구양행이 1945년 설립된 것을 고려하면 그 이전부터 사용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사서함 이용 초기에는 관공서 공문, 세금계산서 등 각종 서류와 공문이 하루 100통 이상 도착해 총무과 전담 직원이 매일 우체국을 방문해 우편물을 찾아왔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은 간단한 서류 정도만 받을 뿐이다. 우련통운 윤기림 대표이사는 "지금 같은 디지털 시대에 아날로그 우편사서함을 왜 유지하는지 의아해 하겠지만, 당시 최첨단 우편서비스를 가장 먼저 채택했다는 상징이 크다"며 "우련통운은 인천의 향토 기업으로서 항상 도전하고 새로운 시대에 발맞춰가고자 노력하는 회사"라고 설명했다.1945년 무역회사로 첫발 디딘 '우체국사서함 1호'세계적선사 대리점·육상운송 진출하며 기틀 닦아TOC 도입으로 내항 2부두 맡아 사료 중심 급성장최근 잇단 위기, 소금 제조 등 사업다각화로 극복■ 인천~중국 간 무역업에서 시작우련통운은 1945년 항만하역사업을 시작으로 현재는 화물운송, 보관, 제3자물류 등 인천항에서 일어나는 모든 사업을 도맡았다. 지금은 내항통합으로 항만 하역기능이 위축됐지만, 인천 내항 2부두의 운영사이기도 했다. 운송사업 분야에서는 우련육운, 우련TLS(주)를, 물류사업 분야에서는 우련국제물류(주), 우련평택물류(주), 인천콜드프라자(주), 제조업 솔트원(주) 등의 계열사를 두고 있다. → 연혁 참조우련통운의 모태 기업인 '청구양행'은 인천항 인근의 작은 무역 회사로 시작했다. 우리나라가 일제로부터 해방됐던 1945년 설립된 회사로, 인천과 중국 상하이(上海) 간 육상 운송에 주력했다. 당시 인천항은 긴급 구호품과 산업물품을 조달하는 국가 제1의 수입항이었다. 수도권을 배후에 두고 있는 인천항 인근에는 크고 작은 무역 회사가 생겨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인천항의 인프라는 열악했다. 항만 시설이 한국전쟁으로 많이 파괴되면서 국가 재건에 필요한 원자재 수입은 부산항에 쏠리기 시작했다. 청구양행은 수출·수입 물량이 없는 상황에서 무역업만 하기에는 한계가 있다고 판단, 하역업에 뛰어들었다. 1958년 '우련통운'은 그렇게 탄생했다.야심 차게 하역업을 시작했지만, 군소 하역업체가 난립하기 시작하면서 경쟁은 점점 심해졌다. 게다가 1950년대 후반 외부 원조가 줄면서 물동량도 감소하자 하역업체들의 경영 상황은 더욱 나빠졌다. 우련통운은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적극적인 영업 활동을 시작했다. 1958년 American President Line과 Lykes Brothers Steamship Co. Line 등 당시 세계적인 선사들의 총대리점을 맡았다. 1959년에는 당시 국내 최대 해운사였던 대한해운공사 인천지점의 하역권을 유치했다. 우련통운은 격동기의 어렵던 시절을 극복하고 본격적인 성장기에 올랐다.■ 다양한 사업 확장으로 제2의 전성기우련통운이 안정적인 성장의 기틀을 잡게 된 것은 배인복 회장이 작고한 후 1976년 동생인 배인흥 현 회장이 대표이사로 취임하면서다. 당시 우련통운은 전문 하역회사로서의 역량은 충분했으나 추가적인 부가 서비스를 제공하지 못했기 때문에 정체 상태에 놓여 있었다. 최신 운송 서비스를 원하는 화주들이 많았는데, 배인흥 대표는 이를 반영해 '우련육운'이라는 합자회사를 설립(1978년)했다. 육상 운송 사업에 진출한 것이다. 1999년 부두운영회사제(TOC)가 도입되면서 인천 내항 2부두 운영 주체가 된 것은 우련통운이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게 된 큰 계기가 됐다. 2002년에는 중국 랴오닝성(遼寧省) 남부에 있는 항구 도시 '잉커우(營口)시' 항무국(항만청)과 협력해 카페리 선사인 범영훼리를 설립해 선박 운송, 컨테이너 하역업에도 진출했다. 우련통운은 주 하역 물동량 가운데 사료부원료가 50%, 잡화와 철강 등 나머지가 50%였을 정도로 산물 하역에 강점이 있었다. 우련통운은 2003년 국내 최대 사료부원료 전용 보관 창고(1만3천630㎡)를 완공하기도 했다. 인천항만물류협회와 금융감독원 자료에 따르면 우련통운은 2006년 물동량 677만t에 매출액 359억원을 달성하는 등 비약적으로 성장했다. 이러한 동력으로 인천북항다목적부두(주), (주)INTC에 지분 참여를 하고, 평택항 부두 시설 건설에 참여하는 등 점차 사세를 넓혔다. 매일경제 1969년 4월 26일자 '인명피해 월 1건꼴 하역장비 모두 낡아'라는 제하의 기사를 보면 당시 인천지방해운국에 등록된 하역회사는 우련통운, 선광공사 등 16개 회사에 달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향토 하역사들이 계속 무너졌지만, 우련통운은 지역 사회에서 고용을 창출하고 이익 일부를 재환원하면서 꾸준히 사업을 이끌어 나갔다. ■ 인천 내항 통합 위기를 또 다른 기회로우련통운은 2003년 평택항에 진출하는 한편 인천에서도 꾸준히 장비 임대, 물류 대행, 운송 등 물류 전반에 걸쳐 사업을 확대했다. 2011년에는 저온 화물을 보관할 수 있는 창고인 콜드프라자까지 인수했다.70여 년 인천항 터줏대감으로 계속해 성장할 것만 같았던 우련통운은 인천 내항 통합으로 최근 위기를 맞았다. 전용부두였던 내항 2부두가 통합되면서 연간 물동량과 매출액이 절반 가까이 줄었다는 게 회사 측의 설명이다. 2013년에 진출한 경인항 컨테이너터미널 조업도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우련통운은 이러한 위기를 '사람 우선 경영'으로 극복하고 있다. 그간 하역 사업이 위축되면서 위기를 맞기도 했지만 지난 70년간 인위적인 구조조정을 진행한 적이 없다고 한다. 우련통운 유성재 상무는 "우련통운에게 사람은 100년 장수기업을 향해가는 기반"이라며 "'인화단결'이라는 사훈을 중심으로 노사 간 상생을 중시해 임직원과 지역사회에 보답하는 기업 운영 원칙을 유지하려고 하고, 실제로 올해 고용을 늘리면서 사업 다각화를 함께 추진하고 있다"고 말했다.우련통운은 현재 카페리 컨테이너 하역을 중심으로 평택항 하역, 물류·운송업, 소금 제조업(솔트원) 등 사업을 다각화하고 있다. 내년 하반기 개장 예정인 신국제여객터미널의 카페리 하역 작업 현대화사업도 진행 중이다.우련통운 윤기림 대표이사는 "인천항은 우련통운과 임직원에게는 삶의 터전이며 지금까지 존재할 수 있었던 소중한 공간"이라고 말했다. 또 "신항만의 신속한 추가 개발, 항만 배후부지 개발에 대한 재정 투입 등으로 경쟁력을 높이고, 우련통운을 포함한 향토기업들이 인천항 발전에 크게 이바지할 수 있는 역할을 부여받았으면 한다"며 "인천항은 무엇보다 남북 화해 정국에 따라 남북경협의 최대 수혜지가 될 자격을 갖추고 있는 만큼 관계기관과 항만업계 주도의 발 빠른 준비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글/윤설아기자 say@kyeongin.com 그래픽/박성현기자 pssh0911@kyeongin.com/아이클릭아트1980년대 우련통운 하역작업장에서 직원들이 화물을 옮기고 있는 모습. /우련통운 제공우련통운이 오랜 기간 운영해왔던 인천 내항 2부두 전경. /우련통운 제공

2018-10-17 윤설아

[바다가 들려주는 인천이야기·38]인천항 향토하역사-영진공사

초기 미군 물자 위주에서 일반분야로 사업 넓혀1972년 사채동결 위기, 바레인 진출하면서 극복한중수교 이후 부두 직접 조성하며 교역에 대비 인천항과 함께 성장한 (주)영진공사가 어느덧 환갑을 앞두게 됐다. 1961년 인천의 향토 하역사로 출발한 영진공사는 대한민국 관문항인 인천항을 중심으로 성장하면서 인천경제의 한 축을 담당했다.영진공사는 화물 하역부터 운송과 보관에 이르기까지 물류 종합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인천항 최초로 인천 남항에 민간투자 부두를 만들어 체선·체화 방지에 이바지하고, 비교적 최근에 개장한 인천 북항 철재부두 주(主)하역사로 선정돼 세계적 수준의 고객 중심 물류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중동의 관문인 바레인에 진출해 공항·항만 운용 능력을 인정받은 영진공사는 '1등 서비스가 아니면 시작하지 않겠다'는 기업 철학으로 21세기 물류산업을 대표하는 글로벌 종합 물류기업으로 변모하고 있다. 영진공사 이강신 회장은 "열린 시각으로 시대적 변화에 주목하면서 과감한 도전과 의지로 고객과 함께하는 종합물류기업으로 성장했다. 아낌없는 성원에 감사하고 있다"며 "고객 중심의 21세기 글로벌 물류기업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미군 부대 군수물자 하역으로 출발2016년 12월 이기상 전 영진공사 회장이 타계하자 항만업계를 비롯한 지역사회 각계 인사들의 추모 발길이 이어졌다. 그는 인천항발전협의회 초대 회장, 인천항만공사 초대 항만위원장, 인천항만물류협회 회장 등을 맡으면서 인천항 발전에 이바지했다. 인천시의회 초대 의장, 대한적십자사 인천지사 회장, 인천시 야구협회 회장, 인천시 체육회 부회장 등 인천 정계와 사회단체, 체육계에서도 활발한 활동을 했다. "항만은 물론 인천의 큰 어른이었다"는 평가가 있었다. 그는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의 대학 동기(연세대 56학번)이기도 하다.영진공사 초대 회장이자 창업주인 그의 형(兄) 고(故) 이기성 전 회장 역시 인천경제를 상징하는 인물 중 한 명이다. 1985년부터 1993년까지 인천상공회의소 회장을 내리 세 번 연임하고, 인천항만하역협회 인천지역회장을 지내는 등 활발한 상공 활동으로 인천경제사에 한 획을 그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현재 영진공사를 이끌고 있는 그의 아들 이강신 회장도 2015년부터 인천상공회의소 회장을 맡고 있다.영진공사는 1961년 4월 15일 문을 열었다. 고(故) 이기성, 이기상 등 형제가 창업의 중심에 있었다. 당시 수도권 지역 주한미군의 군수물자가 대부분 인천항을 통해 반입되던 상황에서, 미군부대 측 가까운 인사 소개로 하역업체 문을 열게 됐다. 인천기계공고 교사였던 이기성 전 회장이 가족 중에 가장 똑똑해 대표이사를 맡았다고 한다. 본사 위치에 관한 정확한 기록은 찾기 어렵지만, 1966년 한 신문에 실렸던 영진공사 광고를 보면 본사 주소가 인천시 사동 7번지(현재 신포사거리 인근)로 돼 있다. 서울 중구 무교동 25번지 원창빌딩 608호에 서울사무소가 있었다는 기록도 있다. 현재 영진공사 본사는 인천 중구 신흥사거리 인근에 있다. 창업 초기 주로 미군 군수물자를 하역하던 영진공사는 이후 일반하역 분야까지 진출하면서 사세를 확장했다. → 연혁 참조저온창고 신축·북항 철재부두 주 하역사 선정도철도활용 운송등 업역확장 '종합물류기업' 도약전·현직 회장, 경제·체육·사회단체 활동도 앞장 # 바레인 진출 이후 탄탄대로영진공사는 1972년 정부의 '사채 동결 조치'로 경영이 크게 어려워졌다고 한다. 영진공사 김구환 전무이사는 "그때 당시 고리대금 업자가 연간 40~50%의 이자를 받고 사채를 빌려줬는데, 정부의 사채 동결 조치로 최대 16% 정도의 이자밖에 받지 못하게 됐다"며 "때문에 사채를 주려는 업자들이 크게 줄면서 돈을 빌릴 곳이 없게 돼 월급도 제대로 못 줄 정도로 자금난에 빠진 적이 있었다"고 했다.이런 어려운 상황에서 영진공사는 1977년 바레인에 진출하게 된다. 바레인 진출은 회사 경영에 있어 중요한 전환점이 됐다. 영진공사는 중동 진출 붐이 일던 1970년대 중반 주한 미군 계약관 출신의 한 인사를 영입했다. 그는 중동 진출 모색을 위해 찾은 바레인 공항에서 항만 운영사를 모집한다는 신문 공고를 우연히 접했다. 영진공사는 이를 계기로 입찰에 참여해 바레인 항만의 화물 하역 사업권을 따낼 수 있었다. 당시 영진공사는 바레인에 첨단 항만하역시스템을 구축하는 일을 했다. 영진공사는 이를 바탕으로 같은 해 바레인 공항의 지상조업 계약도 맺었다. 영진공사는 걸프전 때도 차질 없이 하역업을 유지하는 등 바레인 정부와 신뢰를 쌓으며 30년 넘게 항만 하역을 지속했다. 바레인 공항 지상조업의 경우엔 현재까지도 담당하고 있다. 바레인 진출과 인천항 하역 물량을 기반으로 성장해온 영진공사는 1980년대 '인천의 삼성'이라고 불릴 정도로 커졌다. 컨테이너 수리업, 해사 채취업, 건설업 등으로 사업 영역을 넓혔고, 평택항 등에도 진출했다. IMF 때 문을 닫긴 했지만, 한때 상호신용금고도 운영했다.# 종합물류기업으로 성장 다짐영진공사는 1992년 우리나라가 중국과 수교하자 대(對)중국 교역 증가에 대비했다. 1995년 컨테이너 보세장치장을 개설하고, 이듬해에는 인천 남항에 5천t 선박이 접안할 수 있는 물양장을 축조했다. 당시 하역사가 물양장 등 부두를 직접 조성하는 건 드문 일이었다. 영진공사는 1999년 인천 내항 8부두 운영주식회사를 설립했다. 2004년 인천 남항 물양장을 1만t급 이상의 선박 접안이 가능한 부두로 확장하고, 2005년 저온창고를 신축하는 등 계속해서 사업을 확장했다. 평택항 등 진출 범위도 넓혀 나갔다.영진공사는 아시아횡단철도의 북방철도 루트인 중국 횡단철도(TCR)와 몽골리아 횡단철도(TMGR), 시베리안 횡단철도(TSR) 등을 통한 수송서비스와 3자 물류 서비스, 국제복합 물류서비스 등을 제공하는 (주)영진 GLS를 비롯해 영진탱크터미날(주), (주)영진운수, 한중물류(주), 청도중한국제물류유한공사, (주)영진시포트 등을 계열사로 두고 있다.최근 인천 내항 부두운영사(TOC) 통합으로 하역 기능이 축소되긴 했지만, 영진공사는 물류 관련 업역을 넓혀가면서 대한민국을 넘어 세계를 대표하는 종합물류기업으로의 성장을 다짐하고 있다. 김승회 영진공사 대표이사는 "50여 년의 전통과 전문성으로 고객이 감동하고 만족하는 종합 물류 서비스를 제공하겠다"며 "21세기 물류산업을 선도하는 종합물류기업으로 도약하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기울일 것"이라고 했다. 글/이현준기자 uplhj@kyeongin.com 그래픽/박성현기자 pssh0911@kyeongin.com창업주 故 이기성 회장. /영진공사 제공1996년 남항민자부두 준공 기념식. /영진공사 제공바레인 공항 조업. /영진공사 제공고철 하역 작업. /영진공사 제공해사채취 작업. /영진공사 제공

2018-10-10 이현준

[바다가 들려주는 인천이야기·37]인천항 향토하역사-선광

조선·광복서딴 사명… 창고에서 보관·운송 업무로 첫발1980년대 중동 건설 붐때 해외 하역 작업 통해 급속 성장발전소·교량 자재 등 운송 도맡아·양곡 사일로 현대화도2005년에 컨 진출… 2015년엔 야드 자동화 컨터미널 개장1883년 개항한 인천항이 지난해 304만 8천TEU의 컨테이너 물동량을 처리하며 전 세계 40위권 항만으로 성장한 데에는 지역을 기반으로 활동한 향토 하역사들의 노력을 빼놓을 수 없다.특히 향토하역사 가운데 가장 큰 역할을 하는 선광(鮮光)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선광은 인천항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인천 신항에서 선광신컨테이너터미널(SNCT)을 운영하며 인천항 컨테이너 물동량의 3분의 1 가까이 처리하고 있다. 인천항의 성장을 견인하고 있다는 평가다. SNCT는 지난해 82만TEU에 달하는 물동량을 처리했다. 이런 선광도 1948년 창업 초기에는 작은 창고에 불과했다. → 연혁 참조#선광의 태동선광은 인천 신항을 중심으로 한 컨테이너 하역사업과 평택·군산 등 지역에서의 항만 하역사업, 중량물 운송, 보관 물류, 사일로 사업 등을 활발히 하고 있다. 선광문화재단 등을 통한 사회공헌사업도 충실히 진행하고 있다. 선광은 해방 이후 인천항의 세관 창고를 기반으로 보관과 운송 사업을 시작하면서 태동했다. 70년 전인 1948년 4월이다. 창업주인 고(故) 심명구 전 회장은 선광공사라는 이름으로 인천에서 세관 창고를 임대받아 물건을 보관하고, 내주는 일을 시작했다. 심명구 전 회장의 형제는 모두 5명으로, 형님 고(故) 심봉구 씨와 세관장을 역임한 첫째 동생 고(故) 심영구 씨, 서울대 경영대학장을 역임한 고(故) 심병구 씨, 지역에서 4선 국회의원을 지낸 심정구 명예회장(87) 등이다.선광이라는 사명은 '조선'과 '광복' 두 단어에서 각각 선(鮮)과 광(光)을 가져와 정했다. 당시는 국민들 사이에 대한민국(大韓民國)이라는 국호보다는 조선(朝鮮)이라는 이름이 더 익숙한 시기였다. 창립 당시 사무실은 현재의 신포동 주민센터 인근의 작은 공간이었다. 당시 세관으로부터 임대를 받은 현재 중부경찰서 인근 창고는 선광의 모체가 됐다. 선광은 사세가 확장하면서 사업 영역을 통관 사업까지 넓혀 개인 회사에서 1961년에 법인 사업자로 전환했다. 현재 선광문화재단과 인근의 건물을 사무실로 쓰다가 1985년 양곡 사일로를 건설하며 현재의 중구 항동7가 자리로 이전했다.선광은 현재 고(故) 심명구 회장의 장남인 심장식 씨가 회장직을, 차남인 심충식 씨가 부회장을 맡아 이끌고 있다. 특히 심장식 회장은 IMF 외환위기 때 경인리스와 국민리스 등을 인수, 투자금융 전문 업체인 화인파트너스를 운영하면서 금융 분야까지 사업 영역을 다양화하는 등 회사 발전에 기여했다는 평가다. #도약과 성장선광은 1980년대 초반 리비아 진출을 선광의 도약기로 보고 있다. 중동 국가들이 오일달러를 이용해 대규모 토목 및 건설공사를 진행해 대한민국에 중동 건설 붐이 일던 시기였다. 선광은 리비아 브레가항, 미스라타항, 벵가지항만 등에 하역노무자와 관리직 등 450여 명 규모의 국내 직원을 보내 해외항만 하역 작업에 나섰다. 이후 약 10여 년간 건설 기자재 등 하역작업을 통해 연간 2천만 달러의 외화를 획득하는 등 선광은 급속하게 성장했다. 중량물 운송사업 진출도 비슷한 시기에 이뤄졌다. 경제 발전을 최우선시하던 3·4공화국 시절 현대화와 산업화가 진행되면서 발전소, 교량 건설자재 등 대형 설비를 수입해 설치하려는 국내 수요가 많았다. 선광은 이런 수요를 흡수하고자 했다. 한강 철교 자재와 인천화력발전소 시설 등도 선광이 운송했다.1970년대에 인천항 제2선거 부두시설 건설공사가 한창이었다. 2선거 이전까지 항만 시설이 부족해 외항에서 하역이 이뤄지는 경우가 많았다. 하역을 위해선 부선이 필요했는데, 내항이 갖춰지면서 부선이 활용되는 경우가 줄어들었다. 선광은 이들 부선을 이용해 해사 채취 사업을 시작했다. 선광은 인천항에 양곡 전용부두가 생기고 양곡 수입이 급증하자 1985년 내항과 컨베이어 벨트로 연결하는 사일로를 건설해 운영했다. 재래식으로 이뤄지던 양곡 하역은 이 사일로 건설로 대폭 현대화됐다. 이 사일로는 선광이 일반 화물 하역 사업에 국한하지 않고 새로운 사업에 진출해 안정적인 이익을 올리는 탄탄한 기반이자 선광을 대표하는 상징이 됐다. 1996년 해양수산부 출범 이후 1997년 부산항과 동시에 인천항에 부두운영회사제(TOC)가 도입되며 선광은 내항의 자동차 전용부두인 5부두 운영을 시작한다.IMF 외환위기 후 많은 기업이 안정적이고 소극적인 경영 전략을 펼 때 선광은 오히려 적극적인 투자를 했다. 인천항의 고질적 체선 해소를 위해 산업원자재 종합 처리 항만으로 건설된 인천 북항에 다목적부두를 건설 투자해 운영했다.인천을 기반으로 성장한 선광은 군산과 평택 등 국내 다른 항만으로도 사업 영역을 확장했다. 선광은 인천항에서 축적한 경험을 바탕으로 군산항에 양곡 하역 및 보관을 위한 인프라를 구축해 2005년 군산항 6부두에 양곡 터미널을 개장했다. 이 양곡 터미널의 일시 보관 능력은 50만t 규모로 국내 최대 수준이라고 한다. 선광은 평택항에도 진출했다. 2010년 서부두에서 한일시멘트의 슬래그 하역작업을 시작했고, 2018년엔 현대글로비스와 비즈니스 파트너로서 자동차 전용부두를 개장해 인천항에 이어 평택항에서도 전문적인 자동차 하역서비스를 제공하기 시작했다. #선광의 미래컨테이너 분야로 사업 영역을 확대하기로 한 것도 중요한 결정이었다. 전 세계적인 컨테이너 물동량 증가와 일반화물의 컨테이너화에 따라 컨테이너터미널의 중요성은 높아졌다. 우선 2005년 인천 내항과 인접한 남항에 선광인천컨테이너터미널(SICT)을 개장해 컨테이너 터미널 사업에 진출했다.SICT 개장 후 채 10년이 지나지 않아서 중국 등 주 교역 상대국과의 급격한 교역량 증가와 선박 대형화로 컨테이너 항만시설의 대형화와 현대화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지역 선두 하역 기업으로서의 자부심과 책임감을 갖고 있던 선광은 인천 신항 운영자 참여를 결심하고 인천항 최초로 야드 자동화가 실현되는 컨테이너터미널을 계획했다. 선광은 2010년 우선협상대상자 선정 이후 약 3천억 원의 대규모 사업비를 투입해 2015년 6월 마침내 선광신컨테이너터미널(SNCT)을 개장했다. SNCT는 인천을 찾는 국내외 주요 인사들이 발전된 인천항의 현재와 미래를 확인하기 위해 반드시 거치는 장소가 됐다.글로벌 기업들과 무한경쟁해온 물류기업 선광은 그동안 동북아 물류 허브가 되기 위해 유수의 항만들과 경쟁해 온 인천항과 함께 성장해왔다. 심정구 명예회장은 "선광은 인천에 터를 잡고 인천항과 함께 70년 동안 꾸준히 성장하며 인천에 많은 신세를 졌다"며 "앞으로도 인천의 성장에 보탬이 되고 인천시민의 사랑을 꾸준히 받을 수 있도록 성실히 역할을 해 나아가겠다"고 말했다.글/김성호기자 ksh96@kyeongin.com1969년 2월10일 인천화력발전소 1호기 트랜스포머 부선 운송작업.1985년 준공 당시 사일로.1948년 작은 창고로 시작한 향토 하역사 선광은 70년이 지난 현재 인천항 컨테이너 물동량의 3분의 1 가까이를 처리하고 있는 하역사이자 종합 물류기업으로 성장했다. 사진은 선광이 인천 신항에서 운영하고 있는 선광신컨테이너터미널(SNCT) 전경. /선광 제공

2018-10-03 김성호

[바다가 들려주는 인천이야기·36]한국과 중국 바닷길 잇는 한중카페리(下)

웨이하이시, 항로개설후 인구20만→280만 성장'한러팡' 조성 쇼핑몰·식당·야시장 한국 판박이부산항에 밀려 어려움 겪던 수도권 관문 인천항'中 수출입 선점'통해 컨테이너 등 다변화 성공사드·금한령으로 찾아온 위기 '고급화'로 돌파 "웨이하이는 한국인들이 만든 도시입니다."중국 산둥(山東)성 웨이하이(威海)시에서 만난 위동항운 중국 측 관계자는 웨이하이에 대해 이같이 말했다. 이 관계자는 "인천과 웨이하이를 오가는 한중카페리가 만들어지기 이전에는 웨이하이에 고층 건물은 15층 규모의 '웨이하이 호텔' 하나밖에 없었다"며 "이마저도 한중카페리 개통으로 늘어나는 관광객을 수용하기 위해 지어진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한중카페리 개통 이후 한국 기업들의 진출이 이어지면서 대규모 아파트 단지가 조성되고, 유통가가 생겨나기 시작했다"며 "지금의 웨이하이 모습을 만든 것은 한국인들"이라고 강조했다.지난 16일 찾은 웨이하이 모습은 마치 우리나라의 한 도시를 보는 것 같았다. 인천~웨이하이 카페리가 내리는 '웨이하이 신국제여객터미널'에서 차로 30분 거리에 있는 위고광장에 도착하자 곳곳에 한국어로 된 간판이 눈에 띄었다. 광장 중심에는 롯데백화점이 자리 잡고 있었고, 주변에는 우리나라 유명 커피 브랜드나 외식 업체가 줄지어 있었다. 위고광장에 위치한 주중 인천(IFEZ·인천경제자유구역) 경제무역대표처 고경욱(51) 부대표는 "한중카페리가 개설된 이후 웨이하이는 중국 산둥성의 물류 전초기지 역할을 하고 있다"며 "웨이하이 시민들에게 한국은 지역경제를 활성화해준 고마운 나라라는 인식이 강하다"고 말했다.웨이하이시가 조성한 '한러팡(韓樂坊)'은 한국을 그대로 옮겨 놓은 모습이다. 쇼핑복합문화센터와 한인타운을 결합한 한러팡은 한국 화장품 판매장, 영화관, 한국식 야시장 등이 운영되고 있다. 한국상품전시교역센터라는 대형 쇼핑몰이 눈길을 끌었고, 골목마다 한국어로 쓴 간판이 넘쳐났다. 한러팡 입구에는 돌하르방과 장승 등이 놓여 있었고, 중국인들에게 큰 인기를 끌고 있는 '치맥' 가게가 곳곳에 있었다.심지어 국내 대형 중국 음식 프랜차이즈도 이곳에 진출해 있었다. 야시장이 운영되는 주말 밤이 되면 사람이 많아 길을 걸어가기 어려울 정도라고 한다. 한국상품전시교역센터에 들어서자 국내에서 생산한 과자와 생활용품, 화장품 등이 판매되는 가게가 줄지어 있었다. 이곳에서 화장품 판매장을 운영하는 왕리씨는 "사드 배치 등으로 한국에 대한 중국 내 감정이 나빠졌지만, 화장품 등 한국에서 생산된 물건에 대한 수요는 계속되고 있다"며 "일반 중국 제품보다 가격이 조금 높은 편이지만, 많은 중국인이 찾고 있다"고 했다.한국과 웨이하이는 매우 가까운 도시다. 웨이하이시에서 한국 공해까지 거리는 174㎞밖에 되지 않는다. 인천에서 강원도 춘천까지 정도의 거리로, 차를 타면 2시간이면 도착할 수 있다. 이 때문에 '산둥성에서 닭 우는 소리가 인천에서 들렸다'고 말할 정도였다.한중카페리가 개설되기 전인 1990년대 초만 해도 인구 20만 명의 어촌이었던 웨이하이는 인천과 뱃길이 열린 뒤 280만 명이 넘는 대도시로 급성장했다. 2015년에는 중국 내 쟁쟁한 도시들을 제치고 인천과 함께 한중 자유무역협정(FTA) 시범도시로 지정됐다.자그마한 어촌이었던 웨이하이는 한중카페리가 개설되고 대도시로 변신하기 시작했다는 게 전문가들의 설명이다. 한국과 뱃길이 열리고 눈부신 성장을 이룬 웨이하이에는 한때 한국 기업이 1천800개, 교민 수가 6만명에 달했다. 인천연구원 김수한 연구위원은 "웨이하이가 성장할 수 있는 물꼬를 튼 것은 한중카페리"라며 "산둥성 내에서도 작은 도시에 불과했던 웨이하이가 대(對) 한국 교류에 거점으로서의 위상을 얻었다"고 했다. 2008년 중국에서 신노동법이 발효된 이후 인건비 상승으로 노동집약형 업종은 인건비가 싼 베트남, 캄보디아, 미얀마 등지로 이전했다. 하지만 현재 700여 개 기업과 1만 8천여 명의 교민은 아직 웨이하이에서 살고 있다.한중카페리는 인천항 성장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수도권의 관문이지만, 부산에 밀려 항로 개설이 어려웠던 인천항이 대(對) 중국 수출입 중심 지역을 선점할 수 있었다고 전문가들은 설명한다. 청운대 이상용 교수(글로벌경영학과)는 "1990년 이전에는 사실상 인천항에는 정기 항로가 없었다"며 "이 때문에 수도권 지역 공단에서 생산한 화물을 철도나 화물차로 부산까지 운송해야 했는데, 시간이 오래 걸릴 뿐만 아니라 비용도 비쌌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이어 "한중카페리가 생기고 나서 항차 수도 늘었고, 항로가 다변화됐다"고 덧붙였다. 현재 인천항의 정기 컨테이너 항로는 49개며, 이 가운데 중국을 오가는 항로는 23개다.한중카페리는 현재 큰 위기를 맞고 있다. 지난해 3월 사드 한반도 배치에 따른 중국 정부의 금한령 이후 줄어든 여객 수는 예년 수준을 회복하지 못하고 있다. 항공 수송의 증가로 화물 수도 점차 감소하고 있다. 이 때문에 한중카페리 발전을 위한 새로운 활로를 찾아야 한다는 목소리가 업계 내부에서도 나온다. 유현재 위동해운 인천사무소장은 "신조선 건조 등 한중카페리를 고급화하는 것이 현재의 어려움을 타개하는 대책이라고 생각한다"며 "한국과 중국의 발전을 이끌었던 한중카페리가 새로운 도약을 할 수 있도록 다양한 방안을 찾고 있다"고 했다.글/김주엽기자 kjy86@@kyeongin.com 사진/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중국 산둥(山東)성 웨이하이(威海)에 조성된 대형쇼핑몰 '한국보세교역센터' 일대 모습. 상가 곳곳마다 한국어로 쓰인 간판과 한국 화장품 판매장 등을 손쉽게 발견할 수 있다. 사진/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사진/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아이클릭아트쇼핑복합문화센터와 한인타운을 결합한 '한러팡' 일대에는 인삼, 장승 등의 조형물들이 있어 흡사 민속촌에 온 듯한 착각을 할 정도이다. 사진/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사진/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웨이하이시 위고광장에 위치한 주중 인천관 내부 모습. 사진/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1990년 9월 인천∼웨이하이 카페리 항로 개설 당시 웨이하이 부두의 모습. /위동항운 제공

2018-09-26 김주엽

[바다가 들려주는 인천이야기·35]한국과 중국 바닷길 잇는 한중카페리(上)

한중수교 체결보다 빠른 1990년에 열린 인천~웨이하이 항로 저렴한 가격에 비자 발급 장점, 초기 표구하기 1개월씩 걸려관광객 수요 항공기에 빼앗기면서 보따리상 비율 크게 늘어호텔같은 시설·공간… 최근들어 한국인 단체이용객 증가세인천공항에서 중국 산둥성(山東省) 웨이하이(威海)까지는 비행기로 1시간 남짓 걸린다. 하지만 인천항에서 한중카페리를 타면 14시간이나 소요된다. 누가 바다에서 그렇게 긴 시간을 허비할까 싶지만, 지난해에만 13만 6천605명이 한중카페리를 이용해 인천과 웨이하이를 오갔다.15일 오후 6시께 인천 내항 1부두. 길이 196m, 너비 27m 크기의 대형 카페리선 '뉴골든브릿지7호'(3만 1천t급)에 올랐다. 이 배는 한중카페리 가운데 처음으로 우리나라 기업인 현대미포조선에서 건조한 신조선(新造船)이다. 그동안 한중 노선에 투입된 카페리들은 중국에서 건조됐거나 중고인 선박이 대부분이다. 한중카페리선사 위동항운의 새 카페리선 뉴골든브릿지7호는 기존에 운영하던 2만 6천t급 카페리선 '뉴골든브릿지2호'보다 길이가 10m가량 길고, 너비도 3m 정도 넓다. 컨테이너도 2호보다 30TEU(1TEU는 길이 20피트짜리 컨테이너 1개) 많은 325TEU를 실어 나를 수 있다.오후 7시가 되자 '두드루룽' 소리와 함께 선체 엔진이 돌았다. 갑판 위에 서자 상큼한 바람이 얼굴을 스쳤다. 배에 오른 승객들은 새로운 선박을 구석구석 살펴보고, 휴대폰으로 사진을 찍느라 여념이 없었다.선상에서 만난 위동항운 윤태정(56) 수석사무장은 1992년부터 한중카페리에서 근무한 베테랑이다. 그는 "1990년 인천과 웨이하이를 잇는 한중카페리가 처음 출항한 이후 승객 구성이 크게 3번 정도 바뀌었다"고 설명했다.한국과 중국의 서해 뱃길을 운항하는 한중카페리는 1990년 9월 15일 처음 운항했다. 한중 뱃길은 중국에 공산당 정부가 들어선 1949년 이후 완전히 단절된 상태였다. 당시 중국을 가려면 홍콩을 거쳐야 했다. 한중 수교(1992년)가 맺어지기 2년 전 최초의 여객 직항로인 '인천~웨이하이 카페리 항로'가 생겼다. 윤 사무장은 "비용도 싸고 비자를 미리 받지 않아도 돼 한국 관광객이 많이 몰렸다"며 "초창기에는 배표를 구하기 어려워 한 달씩 대기해야 할 정도였다"고 말했다. 한중카페리 한국인 승객은 중국 현지에서 비자를 발급받을 수 있다.중국과의 하늘길도 열리면서 카페리를 이용하는 관광객이 점차 줄어들자, 그 빈자리를 채운 승객이 '보따리상'이다. 초기에는 한국 보따리상이 많았는데, 지금은 중국 보따리상이 더 많다는 게 윤 사무장의 설명이다. 이날 인천항을 출항한 뉴골든브릿지7호도 전체 승객 624명 가운데 중국 보따리상이 199명에 달했다.배가 출항하자마자 중국 보따리상들은 객실이나 복도, 계단 아래 등에서 자신이 산 면세품의 포장을 뜯어 가방에 담기 시작했다. 중국 세관은 1인당 가방 한 개(50㎏) 분량에 대해서만 관세를 면제하기 때문이다. 이를 초과하면 반입품을 빼앗거나 일반 화물보다 더 비싼 금액의 세금을 부과한다는 게 중국 보따리상들 얘기다.배가 출항한 지 1시간밖에 되지 않았지만, 선박 쓰레기를 모으는 선미에는 면세품 쇼핑백과 포장지를 담은 1ℓ 크기의 비닐 봉투 60여 개가 쌓였다. 중국인 보따리상 류웬차오(45)씨는 "카페리는 한국에서 산 물건을 재포장할 공간이 넓은 데다 휴대할 수 있는 수하물 무게가 많다. 보따리상 대부분이 시간이 오래 걸려도 한중카페리를 이용한다"고 말했다.최근에는 한국 단체관광객도 상당히 늘었다고 한다. 이날 뉴골든브릿지7호에 탄 조순학(67)씨는 1997년부터 한중카페리를 타고 중국을 여행했다. 이날 그와 함께 배에 탄 친구 5명도 한중카페리로 중국을 여행하다 만났다고 한다. 조씨는 "젊은 사람들이야 빨리 목적지에 도착해야 하지만, 우리처럼 시간이 많은 사람은 서두를 필요가 없다. 배에서 편하게 있다가 오랜만에 만난 사람들과 맥주 한잔을 할 수 있는 여유를 가질 수 있는 게 카페리의 장점"이라고 말했다. 조씨를 만난 시간은 자정이 넘은 늦은 시간이었지만, 테이블에 둘러앉아 편의점에서 산 캔맥주를 마시는 사람들이 곳곳에 눈에 띄었다. 그는 "선박 여행이 비행기보다 월등한 점은 역시 발 뻗고 편히 쉴 수 있다는 것"이라며 "2인 객실은 화장실과 욕실이 있어 호텔과 별 차이가 없다. 따뜻한 물로 샤워한 후 침대에 누우면 약간의 흔들림에 저절로 깊은 잠에 빠진다"고 말했다.인천은 예나 지금이나 중국 교역의 중심 도시다.인천 연수구 옥련동 '능허대공원'. 이 공원에서 옥련사거리 방면으로 조금만 걸으면 인천시 기념물 제8호 '능허대 터'가 나온다. 378년 삼국시대 백제 근초고왕이 중국과 교역할 때 사신들이 출발한 '나루터'다. 백제 사신들은 인천~덕적도~중국 산둥반도에 이르는 '등주항로'라는 해상 루트를 다녔다. 한중카페리 최초 항로(인천~웨이하이)와 비슷한 경로를 1천600여 년 전에도 이용한 셈이다.1883년 개항 이후 인천항과 중국과의 해상 교역이 다시 시작된다. 당시 인천항의 첫 국제정기항로는 상하이를 오가는 배였다. 인천시가 1983년 발간한 '인천개항 100년사'에 따르면 1883년 초부터 청국 상하이초상국(上海招商局)의 '난성(南陞)'호가 매달 1~2차례 상하이~인천을 정기 운항했다. 이 배는 이듬해인 1884년 10월 운항을 중단했지만, 청국 상하이초상국은 1888년 3월 '광제(廣濟)'호를 상하이~인천 항로에 다시 투입했다.한중 뱃길은 1990년 웨이하이와 연결되면서 다시 열렸다. 이후 1992년 인천∼톈진(天津) 등 여러 한중카페리 항로가 추가로 개설됐다. 현재 인천항에서만 단둥, 옌타이, 다롄, 스다오, 잉커우, 칭다오, 롄윈강, 친황다오 등 10개 항로에서 카페리가 운항 중이다. 평택·군산에서 중국을 오가는 카페리 항로는 6개다."25년 전 웨이하이에서 인천으로 오는 '황금가교'(골든브릿지)호의 기적 소리를 시작으로, 한중 간 새로운 우정의 항해가 시작됐다." 2015년 11월 서울에서 열린 한·중·일 비즈니스 서밋 축사에서 리커창(李克强) 중국 총리가 연설한 내용 일부분이다. 이처럼 한중 간 인적·물적 왕래의 물꼬를 튼 위동항운 임직원들은 큰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윤 사무장은 "인천과 산둥반도를 오가는 카페리를 3천 번 정도 탔다. 지난 28년 동안 한중 양국이 큰 이익을 거두는 데 작은 힘이나마 보탰다는 긍지와 자부심을 느낀다"고 했다. 이어 "최근 항공기 운항이 늘면서 카페리가 어려움을 겪고 있지만, 차별화된 서비스를 제공해 한중 뱃길의 역사를 이어갈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글/김주엽기자 kjy86@@kyeongin.com 사진/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지난 15일 오후 인천항 제2국제여객터미널에서 승객들이 중국 산둥성(山東省) 웨이하이(威海)행 한중카페리 '뉴골든브릿지7호'에 승선하고 있다. 사진/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인천항 갑문 통과 중인 뉴골든브릿지7호. 사진/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아이클릭아트인천항제2국제여객터미널 출국장 보따리상. 사진/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뉴골든브릿지7호의 내부. 사진/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뉴골든브릿지7호 전경. 사진/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1990년 9월 한중 최초로 개설된 카페리 항로인 인천∼웨이하이 항로를 운항했던 골든브릿지호(사진)와 항로 개설 당시 인천에서 열린 기념행사. /위동항운 제공

2018-09-19 김주엽

[바다가 들려주는 인천이야기·34]바다 수호 첨병 해양경찰

왕산마리나 하늘바다파출소 낮에는 배·밤에는 간이사무실 대기낚시·레저 증가에 따른 고립·조난 등 5~7분내 출동 빠르게 대응부산서 해양경찰대로 첫발, 中어선 출몰·北접경 영향 인천 이전6 → 323척 외적성장 주력하다 '2014년 세월호 책임론' 해체 아픔이후 역량 강화 사업 전개… 연안구조선 보급 등 국민 보호 노력우리나라 바다 넓이는 44만3천㎢로, 남한 면적의 약 4.5배에 달한다. 이처럼 넓은 바다는 어족 자원의 보고이면서 다양한 경제활동이 이뤄지는 곳이다. 바다를 통한 교역과 이와 연관된 산업들은 비단 바다에서뿐 아니라 육지와 연결되면서 다양한 가치를 창출한다. 인천은 바다를 끼고 있는 해양도시다. 160여 개의 섬이 있고 수도권에 위치에 있어 바다를 기반으로 한 관광산업이 빠르게 성장하고 있다.긍정적인 측면과는 반대로 바다엔 위험도 도사리고 있다. 사고가 나면 수많은 생명을 한순간에 잃기도 하는 곳이 바다다. 이처럼 중요하면서도 위험한 바다에서의 안전을 확보하기 위해 생겨난 것이 '해양경찰'이다.9월 10일 오후 2시께 인천시 중구 왕산마리나. 이곳은 인천해양경찰서 하늘바다파출소가 운영하는 '연안구조정' 정박 장소다. 18t급 선박인 연안구조정은 다양한 역할을 한다. 인근 을왕리해수욕장과 왕산해수욕장 등에서 조난 신고 등이 들어오면 출동해 구조 업무를 수행한다. 무의도 같은 섬에서 야간 시간에 응급환자가 발생했을 때도 구조정이 출동해 환자를 이송한다. 최근 보트 등 해양레저기구를 이용하는 인구가 늘어나면서 해양경찰의 역할은 점차 커지고 있다.이날 연안구조정을 운항한 하늘바다파출소 배병진(43) 경위는 "순찰을 돌며 혹시나 있을 비상 상태에 대비한다"면서 "이 일대 바다는 낚시나 레저기구를 사용하는 인구가 많기 때문에 사고도 많이 발생한다. 특히 조수 간만의 차 때문에 고립되거나 먼바다로 휩쓸리는 상황도 종종 발생한다"고 말했다.하늘바다파출소는 2~3명이 주간에 연안구조정에서 생활한다. 빠른 출동을 위해서다. 야간에는 인근에 있는 왕산해수욕장에 간이사무실을 마련해 놓고 대기한다. 신고가 들어오면 바로 출동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준비다. 해양에서 사고가 발생하면 바다의 특성상 인명 피해로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 그만큼 해경의 출동 시간이 생명과 직결되는 경우가 많다. 이 때문에 해경에서는 파출소마다 신고 후 출동까지의 시간을 수치로 정한 '출동시간 목표관리제'를 시행하고 있다. 신고를 받은 시간부터 배의 시동을 걸고 닻줄을 풀어 출발하기까지의 시간을 정한 것이다. 각 출동 장소의 특성을 반영해 정해졌으며 하늘바다파출소의 경우 주간 5분, 야간 7분 안에 출동할 수 있도록 대비하고 있다.하늘바다파출소 김정용(52) 경위는 "바다는 매일 물때가 다르고 갑자기 안개가 끼거나 풍랑이 거세지는 등 날씨의 변화가 크다"며 "이러한 변화가 어민이나 낚시인 등 바다에 있는 분들에게는 큰 위험 요소가 될 수 있다. 인명 구조를 최우선 가치로 놓고 업무를 수행하고 있다"고 강조했다.해양경찰이 탄생한 것은 65년 전인 1953년이다. 해양경찰청의 전신인 '해양경찰대'가 이때 창설됐으며 내무부 치안국 소속이었다. 해양경찰대는 경비함정 6척에 정원 658명인 작은 조직으로 시작했다. 청사는 부산에 마련했다. 1960년대까지 해양경찰의 주 업무는 일본 어선이 우리 해역에 침범하는 것을 막는 것이었다고 한다. 2000년대 중국어선이 서해 우리 어장에서 불법 조업을 벌이는 것과 같이 당시에는 일본 어선의 불법 조업을 막는 것이 해경의 주된 역할이었다. 1964년에는 월평균 300척의 일본어선이 우리나라 해역을 침범해 연간 22만t의 수산물을 잡았다. 이 때문에 일본어선의 불법 조업을 성토하는 목소리가 컸다. 당시 부족했던 해양경찰의 경비함정을 마련하기 위해 자발적으로 모금 활동이 벌어지기도 했다. 해양경찰대가 부산에 설치된 것도 이 같은 이유 때문이었다.일본의 불법 조업이 점차 감소하면서 인천의 중요성은 점차 부각됐다. 수도권에 있고 서해 5도 등 북한과 가까운 접경지역이기 때문이다. 중국어선의 불법 조업도 날이 갈수록 기승을 부렸다. 2012년 정년퇴임한 인천해경 재향경우회 이병일(66) 회장은 1974년부터 40년 가까이 해양경찰에 몸담았다. 이병일 회장은 "해양경찰대가 부산에 설치된 것은 당시 성행했던 일본의 불법 조업을 막기 위한 측면이 컸다"며 "이후 점차 해경이 확대되고 인천 바다의 중요성이 커지면서 1979년 해경본부가 인천에 들어섰다"고 설명했다.해양경찰대는 1979년 인천 중구에 터를 잡았다. 이후 40년 가까이 인천에서 본부를 운영하면서 발전을 거듭했다. 해양경찰대는 1996년 독립 외청인 '해양경찰청'으로 그 위상이 강화됐고 장비와 인원도 보강됐다. 맨 처음 6척이었던 함정은 323척으로 50배 이상 늘어났으며, 인원도 1만1천여명으로 확충됐다.외형적으로 성장을 거듭했지만 20~30년 전만 해도 열악한 환경에서 근무했다고 한다. 특히 소형 경비함정에서 근무할 경우 한 번 근무에 길게는 1주일 이상을 바다에 있어야 하는데, 화장실이 없는 경비함정이 많았다는 게 당시 근무했던 직원들의 설명이다. 조병문(61) 인천해경 경우회 회원은 "1980년대만 해도 선박 내에 화장실이 없어서 갑판 위 깃대를 잡고 용변을 봐야만 할 정도로 시설이 열악했다"며 "쥐가 신발과 양말을 갉아 먹는 일도 비일비재했다"고 말했다. 박성국(62) 전 인천해경서장은 "기상 상황이 좋지 않으면 이틀로 예정했던 함정 생활이 1주일까지 길어지기도 한다"며 "간혹 식량이 떨어져서 섬 주민들에게 식량을 얻은 적도 있었다. 주민들이 반갑게 맞아주면서 먹을거리를 한가득 안겨줬다"고 말했다.외형적 성장에 치우친 나머지 해경에 필수인 수상구조 훈련이 미흡하다는 지적도 이어지고 있다. 2014년 4월 발생한 세월호 참사는 306명의 목숨을 앗아갔다. 이 사고 때 해경 책임론이 대두되면서 해양경찰청은 해체돼 외청 독립 이후 18년 만에 독립기관의 기능을 상실했다. 이후 2017년 해양경찰청은 다시 독립기관으로 환원됐지만, 세월호 참사의 영향은 이어지고 있다.인천에는 현재 중부지방해양경찰청, 인천해양경찰서, 서해5도 특별경비단 등이 운영되고 있다. 이 중 중부지방해양경찰청은 해경이 해체된 뒤 생겨난 중부지방해양경비안전본부가 이어진 것이다. 수도권이면서 북한과의 접경지역, 중국어선 출몰 해역이라는 인천의 중요성이 반영된 결과이면서도 세월호 참사로 인한 조직 구조를 이어가고 있는 것이다. 또한 인명 구조에 대한 중요성이 더욱 부각되면서 연안구조정 등의 장비가 지역마다 신규로 배치됐다. 하늘바다파출소의 연안구조정도 세월호 참사 이후 추진된 구조역량 강화사업 일환으로 2016년 배치됐다.이병일 인천해경 재향경우회장은 "우리나라는 바다가 없으면 살 수 없는 구조를 가지고 있다. 바다에서 해경의 중요성은 앞으로 더 커질 수밖에 없다"며 "바다를 지키고 바다로부터 국민을 지키는 해경으로서 그동안 부족했던 부분도 있었다. 앞으로 더욱 보완해야 하는 과제라고 생각한다. 그것이 해경뿐 아니라 나라가 발전하는 길"이라고 강조했다.글/정운기자 jw33@kyeongin.com 사진/김용국기자 yong@kyeongin.com인천 왕산해수욕장 일대에서 활동중인 인천해양경찰서 하늘바다파출소 대원들. 사진/김용국기자 yong@kyeongin.com인천시 중구 왕산마리나에 정박해있는 인천해양경찰서 하늘바다파출소 연안구조정. 사진/김용국기자 yong@kyeongin.com지난해 11월 서해5도특별경비단이 우리 해역에서 불법 조업 중인 중국어선을 단속하는 모습. /중부지방해양경찰청 제공1996년 해양경찰청이 독립 외청으로 승격하면서 진행된 현판식 모습. 이 청사는 해양경찰 본부가 인천으로 올라온 1979년부터 사용됐다. 현재는 서해5도특별경비단 청사로 활용하고 있다. /중부지방해양경찰청 제공지난 7일 인천해경이 인천 자월도 인근 해역 갯바위에 고립된 사람을 구조하는 모습. /인천해양경찰서 제공

2018-09-12 정운

[바다가 들려주는 인천이야기·33]컨테이너와 컨테이너 수리업

직육면체 규격화된 컨… 선적·운반 기계화·화물보호에 탁월15년 수명 불구 충격·부식 탓 활동마친 설비 10대 중 3대 손상작업자들, 국제 기준에 맞춰 작은 틈·찌그러짐 꼼꼼하게 복구1970년대 리어카로 첫발뗀 인천업체, 남항·신항등 15곳 활동컨테이너. 우리가 수천 킬로미터나 떨어진 나라에서 원하는 화물을 비교적 저렴한 비용으로 안전하게 받아볼 수 있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는 도구다. 국제적으로 규격화된 컨테이너는 1950년대 미국에서 본격적으로 쓰이기 시작해 물류업계의 혁신을 가져왔다. 종류와 크기, 무게 등 천차만별인 화물을 배에 싣고 내리기 위해선 사람이 직접 들고 날라야 하는 경우가 많았다.이 과정은 많은 시간을 필요로 했고 비용 또한 컸다. 컨테이너는 이 과정의 기계화를 가능하게 했다. 사람이 싣고 내려야 했던 화물은 거대한 크레인이 대신 나르게 됐고, 부두 내에서 화물을 옮기는 일도 지게차와 트럭이 맡게 됐다. 컨테이너의 '규격화'도 물류 시간과 비용을 줄이는 데 크게 기여했다. 철강판으로 둘러싸인 직육면체로 투박해 보이는 컨테이너는 화물의 안전한 이동에 큰 도움이 됐다. 장거리 이동 과정에서 있을 수 있는 충격과 폭우 등 기상 상황으로부터 화물을 보호하는 데 효과적이었다. 세계적 석학 피터 드러커(Peter Ferdinand Drucker)는 이 컨테이너를 '세계 경제사를 바꾼 대혁신적 발명품'이라고 칭하기도 했다.물류에서 없어선 안 될 중요한 도구로 자리 잡게 된 컨테이너는 선적·하역 등 이동 과정에서 망가지는 경우가 많다. 빈 컨테이너의 무게는 2~3t에 달한다. 물건을 채우면 최대 30t까지 나간다. 컨테이너를 싣고 내리는 과정에서 외부 충격 등으로 찌그러지거나 찢기는 경우가 생길 수밖에 없다. 이렇게 손상된 컨테이너를 되살리는 이들이 있다. 바로 컨테이너 수리업체다. 컨테이너 수리업체의 수리공들은 손상된 컨테이너가 다시 제 모습을 찾을 수 있도록 하는 역할을 한다.8월 31일 인천 신항 선광컨테이너터미널 내에 있는 컨테이너 수리업체 '콘테이너 테크닉큐 서비스(주)'의 작업 현장은 분주했다. 곳곳이 찌그러지거나 파여 있는 컨테이너들이 산처럼 쌓여 수리를 기다리고 있었고, 대형 지게차는 이들 컨테이너를 수리할 수 있도록 작업장에 하나씩 펼쳐놨다. 작업장 한편에선 컨테이너 내부 바닥을 고치는 작업이 한창이었다. 수리공들은 앞서 수리가 필요한 부분에 검사원들이 분필로 적어놓은 일종의 '작업지시서'대로 작업하고 있었다. 컨테이너 내부 바닥은 21겹으로 된 70㎏ 정도의 무거운 합판을 사용하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소형 지게차들이 화물을 싣고 내리는 과정에서 깨지거나 부서진다. 보통은 새 바닥용 합판을 크기에 맞게 잘라서 부서진 합판을 뜯어내고 새로 까는데, 경우에 따라선 합판 전체를 교체해야 할 때도 있다. 뜨거운 여름철 컨테이너 내부 온도는 섭씨 50도에 달할 정도로, 잠시만 있어도 땀으로 바닥이 흥건하게 젖을 정도라고 한다. 찌그러진 부분은 4~5㎏짜리 대형 망치로 때려서 펴는 작업을 한다. 경우에 따라 유압으로 찌그러진 부분을 펴는 기계를 사용하기도 한다.밀폐된 공간으로 바다에 빠졌을 때 물에 뜨기도 하는 컨테이너의 수명은 보통 15년 정도다. 시간이 갈수록 부식이 진행돼 작은 망치로 치면 구멍이 뚫릴 정도로 약해진다. 수명 전이라도 컨테이너에 작은 구멍이 생기는 경우가 있는데, 이것 역시 놓치지 말아야 할 수리 대상이다. 컨테이너 내부에 물이 스며들면 컨테이너에 실린 화물이 손상될 수 있기 때문이다. 경력 10년의 이 회사 김형수(40) 과장은 "작은 구멍을 찾기 위해 컨테이너 안에서 문을 닫고 내부로 새어 들어오는 빛이 없는지를 확인하기도 한다"고 했다. 이어 "올여름은 무더위에 특히 힘들었던 것 같다"며 "망치 같은 단단하고 무거운 물건을 다루는 만큼, 한번 실수로 크게 다칠 수 있어 항상 안전에 신경 쓰고 있다"고 했다.컨테이너 수리는 싣고 온 화물을 비운 컨테이너가 다시 컨테이너 부두로 들어올 때 시작된다고 볼 수 있다. 별도의 자격을 갖춘 검사원이 컨테이너 내·외부를 꼼꼼히 살피며 수리가 필요한 컨테이너인지를 가린다. 평균 컨테이너 10대 중 3대 정도는 손상으로 분류된다고 한다. 손상 판단 여부는 국제 기준을 따른다. 수백 페이지에 달하는 '국제 컨테이너 임대사 협회'(IICL) 규정엔 손상 정도에 따라 수리가 필요한 경우가 구체적으로 제시돼 있다. 컨테이너를 소유하고 있는 선사별 수리 매뉴얼도 있다. 이들 매뉴얼은 컨테이너를 수리하는 중요한 기준이 된다.페인트칠, 용접, 내부 청소까지 마무리한 컨테이너들은 다시 새로운 화물을 실을 수 있도록 야적장으로 옮겨지게 된다.인천에는 컨테이너부두가 있는 남항과 신항을 중심으로 15개 컨테이너 수리업체가 활동하고 있다. 컨테이너를 소유하고 있는 선사와 계약을 맺고 수리업을 하는 경우도 있고, 선사가 직접 운영하기도 한다. 인천 최초의 컨테이너 수리업은 70년대 후반 산소용접기 등을 리어카에 싣고 다니며 타이어 구멍을 때워주던 이름 모를 인부였던 것으로 전해진다. 당시 인천항엔 컨테이너 관련 인프라가 부족했다. 전문 수리업체가 없는 상황에서 한 화물차 기사가 그에게 '컨테이너도 때우는 것이니 어차피 그 일이 그 일 아니겠느냐'며 제안한 게 시초였다는 것이다. 컨테이너 수리업 30여 년 경력의 이선연(51)씨는 "내항만 있을 때였는데, 인천항을 드나드는 컨테이너가 많지 않아 용접기만 있으면 컨테이너 수리를 할 수 있었던 것 같다"며 "인천 컨테이너 수리업의 시작은 그때라고 선배들로부터 들었다"고 했다. 이후 남항에 컨테이너터미널이 들어서면서 인천의 컨테이너 수리업이 본격화하기 시작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컨테이너는 단순 화물만 옮기던 것에서 각종 활어나 신선식품도 실을 수 있도록 점점 첨단화되고 있다. 포대에 담아 옮겨야 했던 곡물을 직접 빨아들여 저장하는 '사일로'(Silo) 시설이 생기고, 드럼통에 담아 옮기던 유류를 배에서 직접 빼낼 수 있도록 '돌핀 부두'가 만들어지듯 발전한 것이다. 컨테이너 수리업도 기술적으로 함께 발전했다.이선연씨는 "컨테이너 수리업은 컨테이너가 전 세계를 돌아다니는 한 계속 성장·발전할 것"이라며 "수리공들이 점점 고령화되고 있어 걱정인데, 많은 젊은이가 컨테이너 수리업에 관심을 가져줬으면 한다"고 했다. 글/이현준기자 uplhj@kyeongin.com사진/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 그래픽/성옥희기자 okie@kyeongin.com지난달 31일 오전 인천 송도 신항 선광컨테이너터미널 내에 있는 컨테이너 수리업체 '콘테이너 테크닉큐 서비스(주)'의 작업장에서 수리공들이 파손된 컨테이너 속에서 수리작업을 하고 있다.'콘테이너 테크닉큐 서비스(주)'의 관계자가 컨테이너 파손상황을 설명하고 있다.신항 선광컨테이너 터미널 입구에서 컨테이너 파손 유무를 육안으로 확인하는 모습.파손된 컨테이너 모습.하역작업도중 파손이 확인된 컨테이너가 수리작업장으로 옮겨지고 있다.

2018-09-05 이현준

[바다가 들려주는 인천이야기·32]인천의 '산업역군' 화물차

운전기사들 장거리·근거리·시내파 3부류로 나눠긴 시간 대기·길에서 쪽잠 등 근로조건 악명 높아지역 화물연대 120대 파업시 컨 처리량 66%로 '뚝'운송료 현실화·번호판 거래 명의신탁제 폐지 절실 영업용 화물차 3만대 불구 주차장 3700여면에 그쳐환황해권 물류 중심 도약 앞두고 인프라 확충 과제툭하면 도로 위 '애물단지' 취급을 받는 화물차가 인천에서 모두 사라지면 어떻게 될까. 우선 인천항으로 들어오는 배 안의 수입 화물들이 갈 곳을 잃고 적치돼 야적장부터 마비될 것이다. 인천의 철강, 제조, 목재, 자동차 업체는 물론 전국에 화물을 수입·수출하는 업체들은 영업을 중단할 수밖에 없다. 텅 빈 고속도로만큼 마트·시장은 텅텅 비고, 매대 위 물건의 가격은 천정부지로 오를지 모른다. 그야말로 '물류 쇼크'다. 화물차는 대한민국 물류 대동맥을 잇는 핏줄이나 다름없다. 24시간 잠들지 않는 화물차는 전국 방방곡곡을 돌며 필요한 화물을 필요한 곳에 나르고 있다. 2000년대 들어 화물차는 환경, 안전 문제가 중요한 가치로 떠오르며 애물단지 취급을 받지만, 대한민국 그리고 인천의 경제 성장에 빼놓을 수 없는 '산업 역군' 역할을 하고 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27일 오전 11시께 인천 중구의 한 컨테이너 화물자동차 휴게소. 28년 경력의 화물차 운전기사 박신환(51)씨가 컨테이너를 실은 25t급 대형 화물차를 주차한 뒤 잠시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박씨는 이날 아침 7시께 집에서 나와 8시께 송도 선광 컨테이너터미널에서 화물을 하나 실은 후 주차장에 정박하고, 10시께 다른 화물을 하나 더 싣고 오는 길이었다. 먼저 실은 화물은 이날 오후까지 경기도로, 다른 화물은 내일 아침 일찍 서울로 간다. 하역장에서 화물을 받기까지 걸리는 대기 시간이 최소 30분에서 최대 3~4시간에 달하다 보니 여유가 있을 때 화물을 미리 받아놓은 것이다. 박씨는 "갠트리 크레인(컨테이너를 옮기기 위한 항만용 기중기)이 꼿꼿이 서 있지 않고 배 위로 내려가 작업을 하고 있으면 그날은 '망했다'고 보면 된다. 기본 3시간 이상은 대기해야 한다는 뜻"이라며 "한진, ICT 등 그날 대기 시간에 따라 기사들이 화물 하나를 더 나를 수도 있고 덜 나를 수도 있어 항상 갠트리 크레인 위치를 예민하게 확인한다"고 말했다. 인천항을 오가는 화물차 운전기사들은 한 번 나가면 1주일씩 지방을 도는 '장거리파', 수도권 일대를 오가는 '근거리파', 인천 내 공장과 창고에서 화물을 실어나르는 '시내파'(창고발이)로 크게 나뉜다. 운송 회사에 속해 일감을 받아 일하는 기사도 있고, 개인이 애플리케이션 등으로 물건을 직접 잡아 운송하는 기사도 있다.작은 운송업체에 속해 있다는 박씨는 2년 전까지는 장거리를 왕복하다가 지금은 일이 없어 근거리 중심으로 하루에 1~3개의 화물을 나르고 있다. 그는 "1억4천만원대 차 할부금을 갚기 위해 장거리를 왕복할 땐 길에서 자며 1주일에 한 번 집에 가며 힘겹게 지낸 적도 있다"면서 "경유가 비싸 여름엔 창문에 방충망을 쳐놓고 모기와 사투를 하고 겨울엔 두꺼운 침낭과 이불에 의지해 차 안에서 먹고 자며 일했다"고 회상했다.화물차 기사들의 근로 조건은 열악하기로 '악명' 높다. 이로 인해 대규모 파업을 할 때면 인천항이 '휘청'할 때도 있었다. 인천항에 가장 큰 영향을 준 파업 중 하나가 2003년 8월이다. 당시 인천 지역 화물연대는 ▲운송료 인상과 단가 공개 ▲과속 강요 중단 ▲휴게소 마련 등 근로 여건 개선을 요구하며 약 1주일간 파업을 벌였다. 고작 차량 120여 대가 멈춘 것인데 하루 평균 컨테이너 처리량이 평소의 66% 선으로 줄었다. 당시 경인일보 보도를 보면 화물연대 파업으로 인천항 4부두의 컨테이너 반입량은 20%, 반출량은 40%가량 감소했다. 하역된 물품이 쌓이며 '야적장 대란'이 벌어지기도 했다. 이후 정부와 인천시는 화물차 휴게소 설치 등 기사들의 복리 증진에 부랴부랴 나섰지만, 현장에서는 여전히 불투명한 운송단가, 운송료 후려치기, 주차장·휴게소 부족 등으로 몸살을 앓고 있다. 특히 2004년 정부가 화물차량의 급증을 막고자 영업용 화물차를 '신고제'에서 '허가제'로 바꾸면서 기사들의 근로 여건은 더 나빠졌다. 한정된 영업용 번호판을 '사고파는' 관행이 생기면서 운수업체들이 화물차 운전자들에게 차량관리비 명목의 위·수탁료, 일명 '지입료'를 받으면서다. 금액은 최저 2천만원선에서 4천만원까지 달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인천의 한 화물차 운전기사는 "운수업체가 지입료를 다 받고는 강제로 번호판을 뺏고 돈을 요구하는 경우가 이 바닥에 비일비재하다"고 토로했다.화물차 운전기사의 악순환은 곧 인천항 경제의 악순환이었다. 물량이 많고 운송료도 높아 화물차 기사들이 경제적으로 풍요로웠던 1970~1990년대만 해도 인천항 인근 중구·동구 '먹자골목'이 화물차 기사들로 꽉꽉 들어찼지만, 이후 열악한 환경으로 기사들이 평택항 등 다른 지역으로 빠져나가거나 일을 관두면서 식당 거리는 쇠퇴의 길을 걸었다. 김근영 화물연대본부 인천지부장은 "화물차 값, 물가, 경유가 등 모든 제반 비용은 올랐지만, 운송료는 10년 전과 지금이 거의 다르지 않아 과적·과속에 내몰리고 있다"며 "장기적으로는 표준운임제를 통한 운송료 현실화가 필요하며, 번호판을 거래하는 악습을 끊을 수 있도록 명의신탁제를 폐지해야 한다"고 강조했다.현재 인천시에 등록된 영업용 화물차 대수는 3만3천여대. 인천연구원이 2010년 발간한 '인천항 화물자동차 통행특성' 보고서를 보면 인천시 화물차의 통행량은 1일 20만2천여 대로, 전국 발생량의 6.53%를 차지한다. 서울(12.36%)을 제외하면 두 번째로 높다. 화물차 도착지로는 인천→경기가 36.2%로 가장 높고 그다음 인천→서울이 16%로, 대부분 수도권 물류를 책임지고 있다. 인천항 특성상 전체 화물의 55.7%가 컨테이너 화물차다. 일반 화물차는 하루 평균 1.93회를, 컨테이너 화물차는 하루 평균 3.06회를 오가는 것으로 나타났다. 수도권 화물이 많아 다른 지역에 비해 단거리·단시간 운송이 많은 게 인천 화물차의 특징이다.화물차가 없던 시절 인천항의 물류는 '우마차'가 책임졌다. 사람이 직접 지게로 나르지 않는 한 우마차는 유일한 화물 운송 수단이었다. 인천~서울 교통편은 우마차를 이용한 12시간 거리의 육로와 인천~용산을 연결하는 뱃길이 전부였다. 1899년 우리나라 최초 철도인 경인철도가 개통하면서는 인천역~축현역~우각동역~부평역~소사역~오류역~노량진역 등 7개 역(33.2㎞ 구간)을 1시간 30분에 걸쳐 오전과 오후 하루 두 차례씩 왕복하며 사람과 화물을 실어 날랐다. 우마차는 1900년대까지 존재했다. 1940년 1월 12일자 동아일보 '세월 맞난(만난) 우마차'라는 제목의 기사를 보면 "우마차는 중공업 도시 건설로의 비약으로 중공업건설건축자재 운반의 좋은 세월을 만나 한 마차 하루 벌이가 7원 이상이라는 호황을 보고 있다"며 "한산한 정미 공업도 마차를 얻을 수 없어 크나큰 지장을 초래하고 있다"고 했다. 이후 소형 화물차가 도입됐지만 차량 대수 부족 등의 문제로 한동안 우마차는 꾸준히 시장의 운송을 책임졌다.그러나 정부는 1960년대 중반부터 우마차 통행이 교통 소통에 막대한 지장을 초래한다고 판단했다. 우마차를 통제하는 한편 화물차를 증차해 통행을 늘렸다. 그때부터 인천의 가장 큰 고민거리는 인천항과 한반도 각지를 연결할 교통망 구축이었다. 1969년 대한민국 최초 고속도로인 경인고속도로 개통은 인천항~서울 수송 체계의 변혁을 가져왔다. 경인고속도로가 개통됐던 1969년 30.8%에 불과했던 화물차 비율은 불과 4년만인 1973년 50%를 넘겼다. 도로는 왕복 6~8차선까지 확장을 거듭했고 산업은 빠르게 성장했다. 1996년 경기도 성남과 인천을 연결하는 제2경인고속도로와 2010년 경기도 시흥과 인천을 잇는 제3경인고속도로가 추가로 확충되며 인천의 수도권 물류 인프라는 날개를 달았다.화물차 모습 역시 계속해서 진화했다. 최초의 화물차는 1963년 일명 '삼륜 용달'로 불린 T-600이다. 500㎏ 정도의 짐을 실을 수 있었으며 좁은 골목에 제격이었다. 이후 1t 이상 적재가 가능한 T-1500이 생산되면서 화물차는 급격히 발달해, 지금은 약 20t까지 적재할 수 있다. 카고, 윙바디, 덤프 등 종류도 다양하다.서해안 물류 거점 도시를 넘어 통일 시대 '환황해권' 물류의 중심으로 도약할 인천은 이제 화물차와의 '공존'이 필요하다. 영업용 화물차가 3만여 대에 달하는데도 화물차 차고지(주차장)는 3천700여 면에 그치는 게 인천의 현실이다. 이마저도 서구·계양구 등 인천항과 먼 지역이거나, 승용차와 함께 쓰는 주차장의 경우 실제 활용 면은 턱없이 적다. 불법 주차와 교통 체증 등 화물차 민원은 갈수록 많아지지만, 정부와 항만 관련 기관의 인프라 확충이나 지자체의 도시계획 수준은 여전히 갈 길이 멀다. 인천시 화물자동차운송사업협회 박요화 전무는 "정부, 인천시, 인천항만공사 차원에서 화물차의 주차장 확보, 하역 효율화 등 물류 시스템의 선진화를 위해 지금보다 더 책임감 있게 노력해줘야 한다"며 "인천항 물동량 300TEU 시대에 화물차는 인천 경제의 원동력이자 대한민국 경제를 이끌고 있다는 인식 전환이 어느 때보다도 필요한 시점"이라고 말했다.글/윤설아기자 say@kyeongin.com 사진/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화물차들이 배에서 내리는 화물을 싣기 위해 인천 신항 선광컨테이너터미널 입구부터 줄을 지어 대기하고 있다. 사진/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화물차 운전기사 박신환씨가 중구 항동 화물차 휴게소에서 경기도의 한 공장으로 화물을 싣고 가기 위해 운전을 하고 있는 모습. 박씨는 "1억 4천만 원대 차 할부금을 갚기 위해 장거리를 왕복할 땐 길에서 자며 1주일에 한 번 집에 가는 등 힘겹게 지낸 적도 있다"고 옛 기억을 떠올렸다. 사진/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컨테이너 화물을 고정하고 있는 모습. 사진/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아이클릭아트

2018-08-29 윤설아

[바다가 들려주는 인천이야기·31]항만과 함께 성장해온 '선사'

외국과의 수출·입 물류 99% 차지하는 선박 직접 운용28개회사 132척, 中·美·아프리카 등 매주 54차례 누벼개항이후 외세가 장악… 국권회복까지 자산 모두 잃어1949년 대한해운공사 설립해 국적선 운항·경쟁력 쌓아작년 컨물동량 300만TEU 돌파·세계 40위권 도약 기여18일 오전 7시 50분 인천 신항 선광신컨테이너터미널(SNCT)에 1천740TEU(1TEU는 20피트짜리 컨테이너 1대분)급 컨테이너선 '흥아그린'호가 다가오고 있었다. 인천항에 정기 컨테이너 항로 서비스를 제공하는 28개 선사 가운데 하나인 흥아해운(인천영업소) 김진구(31) 계장은 이 모습을 긴장한 표정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김 계장은 "긴 항해를 마친 배가 안벽에 붙는 순간은 수십 년씩 부두에서 일한 이들도 긴장하는 때"라며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사고는 일어나지 않지만, 항상 부두에 나와 이상 유무를 확인해야 한다"고 말했다.김 계장의 주요 업무 중 하나는 입항 수속이다. 배가 부두에 오기 전에는 세관 승인이 정상적으로 완료됐는지 확인하고, 배가 도착한 뒤에는 배에 올라 선원 명부와 이들의 여권이 일치하는지 확인한다.오전 8시 접안이 완료되고 배와 부두(육지)를 연결하는 계단(갱웨이·Gang Way)이 설치됐다. 도선사가 내리고 질병관리본부 국립인천검역소 직원 2명이 배에 올랐다. 김 계장도 함께 배에 탔다. 컨테이너 고정 장치를 풀기 위해 부두에 대기 중이던 '라싱맨'(Lashing man) 16명이 달라붙어 컨테이너에 붙은 모든 고정 장치를 30여 분 만에 제거했다. 곧 크레인의 컨테이너 하역 작업이 시작됐다. 흥아그린호는 지난 14일 중국 세코우(蛇口)를 출항해 이날(18일) 인천항에 도착했다. 인천항에 컨테이너 300TEU를 내리고 400TEU를 실었다. 인천, 부산, 광양, 상하이, 마닐라, 호찌민, 홍콩, 세코우를 운항하는 이 배는 3주에 1차례씩 인천항을 이용한다.배가 항만을 이용하는 가장 중요한 손님이라는 데 이견은 없다. 선사는 이 배를 직접 운용하며 화물이나 승객을 운송한다. 항만의 가장 중요한 VIP 고객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현대의 항만 개념은 부두시설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물류업체나 제조기업이 입주한 항만 배후부지를 포함하는 것으로 확장됐다. 항만이 제공하는 서비스도 과거와 비교해 넓어졌지만 제한된 의미에서의 가장 중요한 고객은 선사다.인천항만공사에 따르면 현재 인천항에는 28개 선사가 정기 컨테이너 항로를 개설하고 활동 중이다. 이들 선사는 중국, 대만, 홍콩, 일본, 동남아시아, 중동, 아프리카, 미주, 호주 등과 인천항을 연결한다. 49개의 정기 컨테이너 항로 서비스를 운영 중인데, 132척의 배가 투입돼 매주 54.75차례 인천항을 이용한다.인천항이 304만8천TEU의 컨테이너 물동량을 처리하며 전 세계 40위권 항만에 올라선 건 최근의 일이다.우리나라 근대 해운은 1876년 강화도조약에 따른 개항기인 1880년부터 국권피탈이 일어난 1910년 사이에 성립됐다. 강화도조약에 의해 1876년 부산항을 시작으로 원산항(1880년), 인천항(1883년) 순으로 개항이 이어졌다. 인천항에서 근대 해운업의 형태를 갖춘 선사들이 활동한 것은 1883년 이후다.근대 기선을 도입한 조선의 국제해운 업무는 1883년 설립된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이라는 조직이 관장했고, 조직 설립 초기부터 정기적인 국제항로 개설에 주력했다. 영국, 청나라, 미국, 독일 등의 선박 기항을 유치하는 형태였다.인천시가 1983년 펴낸 '인천개항100년사'를 보면 기선을 이용한 인천항 최초의 국제정기항로는 1883년 청나라 국적 '난성'호가 월 1~2회로 상하이~인천을 운항한 것이다.이에 자극을 받은 일본은 그해 해군함정을 파견했으며, 미쓰비시기선회사가 고베~인천을 월 1회 정기 운항했다. 청국의 난성호가 운항을 중단하자 미쓰비시기선회사가 인천항의 수출입품을 독점했다. 그 후로 미쓰비시기선회사와 교토운수회사가 설립한 일본우선주식회사의 선박이 1893년까지 인천 운항을 독차지했다. 1893년 2월에는 오사카상선회사가 인천 항로를 개설했고, 11월에는 러시아 동청철도기선회사가 이 항로를 연장해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부산과 나가사키를 거쳐 인천에 가는 정기항로를 만들었다.인천도시역사관 배성수 관장은 "개항 이후 선사들에 의해 정기항로가 개설됐다는 것은 인천항이 무역항으로 인정받기 시작했다는 의미가 있다"면서 "하지만 인천의 국제 정기항로는 일본우선주식회사와 오사카상선회사 위주로 일본의 비중이 높았고 조선의 기선이나 범선도 대부분 일본인이 경영해 실제로 일본이 조선의 항해권을 장악했다는 한계가 있었다"고 설명했다.우리나라 근대 해운은 전운국, 이운사 등의 설립을 통해 도입되긴 했지만 발전하지 못하고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이 종료되고 국권을 회복할 때까지 암흑기에 머물렀다. 광복 이후 우리나라는 해운을 재건할 아무런 자산도 남아있지 않았다. 선박이나 선사를 운영할 만한 경험을 지닌 인사도 거의 없었다. 그러던 중 일본 강점기에 상선에서 근무한 한국인 해기사들이 중심이 돼 조선우선주식회사(조선총독부가 1912년 설립한 연안해운사)를 인수하려는 노력이 본격화했다.정부가 1949년 12월 설립한 국책회사 '대한해운공사'가 우리나라 해운을 이끈다. 반관반민의 대한해운공사는 민간기업의 외항 진출이 불가능했던 시기에 국제무역 화물을 국적선으로 수송할 수 있는 길을 열었다. 한국 해운의 국제적 공신력을 높이고 경쟁력을 강화하는 데 크게 이바지했다. 무엇보다도 백지 상태의 한국 해운에 경험을 쌓을 수 있는 중대한 토대를 제공했다.인천항에는 28개 선사가 49개 항로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오늘이 있기까지 선사와 인천항은 함께 성장했다. 배가 들어오며 항만이 확장·발전했고, 또 확장한 항만은 더 많은 배를 부르며 선사를 키워왔다. 현재 인천에서 대리점이나 영업소를 운영 중인 선사는 모두 11곳이다. 흥아해운, 천경해운, 고려해운, 동영해운, 동진상선, 두우해운, 범주해운, 장금상선, 태영상선, 한성라인, 현대상선 등이다.현재와 같은 정기 컨테이너 항로 서비스가 갖춰진 시기는 1974년 인천항 제2선거가 완공된 이후다. 이후 많은 선사가 항로를 개설하고 사라지기도 했다.남흥우(66) 전 한국선주협회 인천지구 위원장은 "외국과의 화물 운송에서 선박이 차지하는 비율이 99%에 이른다는 통계가 있다. 선사는 수출입 화물 운송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첨병 역할을 하며 인천항과 함께 성장했다"며 "이런 노력의 가치를 제대로 인정받아야 한다"고 말했다.글/김성호기자 ksh96@kyeongin.com 사진/김용국기자 yong@kyeongin.com 그래픽/박성현기자 pssh0911@kyeongin.com/아이클릭아트항만에 가장 중요한 고객 가운데 하나는 배를 운영하는 선사다. 인천항은 선사들과 함께 성장해왔다. 인천항에는 28개 선사가 49개의 정기 컨테이너 항로서비스를 개설하고 인천과 중국·대만·홍콩·미주·호주 등의 항만을 연결하고 있다. 사진은 지난 18일 오전 인천 신항 선광신컨테이너터미널(SNCT)에 도착한 흥아해운의 1천740TEU급 컨테이너선 '흥아그린'호의 모습. 사진/김용국기자 yong@kyeongin.com작업을 위해 배에 오르는 항운노조 조합원. 사진/김용국기자 yong@kyeongin.com고정장치를 풀고 있는 항운노조 조합원. 사진/김용국기자 yong@kyeongin.com계선주(繫船柱)에 홋줄을 걸어 배를 고정하는 모습. 사진/김용국기자 yong@kyeongin.com컨테이너 하역 장면. 사진/김용국기자 yong@kyeongin.com

2018-08-22 김성호

[바다가 들려주는 인천이야기·30]제2의 공장 '창고' (하)

개항이후 수출입 물품 관리 위해 건립CJ대한통운·한진등 인천에서 첫발 떼1893년 무역 총액 절반 이상 점하기도오랜 역사만큼 구조적 가치 갖춘 건물아트·상상플랫폼 '창작 공간 리모델링'구도심·지역 경제 활성화 시너지 기대창고 건물은 단순하다. 외벽과 지붕 이외의 시설은 최소화된다. 건물 내부 기둥이 없는 경우도 많다. 이 같은 건물의 특성은 창고 기능에 기인한다. 많은 물건을 최대한 효율적으로 적재하기 위한 공간이기 때문이다. 사람이 생활하는 공간이 아니기 때문에 창문이 없는 창고 건물도 많다. 각종 물품을 적재·이동하기 위한 선반과 각종 장비가 들어서 있어, 복잡하고 빽빽해 보일 수 있으나 구조적으로는 가장 단순한 건물이 바로 창고다.인천항 인근에 창고가 생겨난 건 1883년 개항 이후다. 이때부터 수출입 물품을 효율적으로 관리하기 위한 창고가 항만 인근에 속속 건립됐다. 개항기 인천은 국내 최대 항만이었다. 개항이 이뤄진 것은 부산, 원산에 이어 세 번째였으나 물동량은 전국에서 가장 많았다. 1907년 발간된 '인천개항 25년사'(저자 가세 와사부로, 역주 인천시 역사자료관)는 개항기 인천항의 지위를 잘 설명한다."1893년 무역 총액은 778만8천원인데 인천은 그중 5할1푼1리를 점하며 부산은 2할9푼9리, 원산은 1할9푼의 비율을 보인다." 이 책은 1893년부터 1907년까지 한국의 무역액을 항만별로 기록했는데, 인천항은 매해 가장 높은 비중을 차지했다.인천항을 통한 무역이 활발해지면서 자연스럽게 인천항 인근에 물류기업이 설립되고, 창고들이 운영됐다. 국내 최대 물류기업인 CJ대한통운의 모태가 되는 기업도 인천에서 시작됐으며, 한진그룹 역시 인천에서 첫발을 뗐다.CJ대한통운의 모태는 일제강점기 설립된 조선미곡창고주식회사(이하 조선미창)다. 이 회사는 일본이 조선의 쌀을 효율적으로 수탈하기 위해서 설립됐다. 일본 정부 주도로 서울에 설립됐으며, 인천에 가장 먼저 지점을 열었다. '대한통운 80년사'는 "회사가 당초 계획한 5개 수출항 가운데 가장 먼저 지점이 설치된 곳은 우리나라 최초의 개항장이자 당시 항만 사정이 개중 나은 인천이었다"고 했다. 인천지점은 1930년 11월 21일 문을 열었으며, 그해 12월 부산과 진남포지점이 영업을 시작했다.조선미창 인천지점 창고는 인천항 제2국제여객터미널 인근에 위치한 '이마트 동인천점' 자리에 있었다는 게 항만업계 설명이다. 유태식(국제창고 대표이사) 전 인천물류창고업협회장은 "조선미창 건물은 현재 동인천 이마트 건물이 지어지기 전까지 여러 번 이름을 바꾸어가며 활용됐지만, 지금은 그 흔적이 없어졌다"고 말했다.한진그룹 창업자 조중훈(1920~2002)의 자서전 '내가 걸어온 길'을 보면, 한진의 창업 과정과 함께 당시 인천항의 위상을 알 수 있다."해방 전에 운영하던 보링 공장을 일제의 기업정비령에 의해 정리할 때 받은 돈과 저축해둔 것을 합쳐 트럭 한 대를 장만한 나는 인천시 해안동에 한진상사의 간판을 내걸었다. 인천을 새로운 사업의 근거지로 삼은 것은 중국과의 교역을 겨냥해 무역업에 뛰어들려는 생각에서였다. (중략) 서쪽으로 중국과 상대하고 있는 지리적인 조건으로 대중국 무역 기지로서는 단연 수위를 차지하고 있었다."한진이 1950년대 지어 쓰던 창고 건물은 리모델링을 거쳐 지금도 사용되고 있다.인천항에는 오랜 시간을 거치면서 새로운 시설들이 들어섰고, 옛 창고 건물은 다양한 방법으로 활용되고 있다. 인천항 옛 창고는 개항과 맞물려 인천의 역사가 배어 있고, 건물 구조 특성상 문화·예술 공간으로 활용 가능성이 높다.인천아트플랫폼은 창고 건물을 문화·예술 창작 공간으로 활용한 대표적 사례다. 인천시는 구도심 재생사업 일환으로 2009년 9월 인천아트플랫폼을 개관했다. 대한통운이 이용하던 창고 건물 2개 등 옛 건물들을 리모델링해 문화·예술 공간으로 만든 것이다. 인천아트플랫폼 C동의 경우 대한통운 창고 건물의 외벽이 그대로 남아 있다. 이들 창고 공간에서는 매년 30차례 정도의 전시·공연이 진행되고 있으며, 관람객은 연간 10만 명 안팎이다. 인천아트플랫폼 오병석 과장은 "창고 건물은 내부 기둥이 없고, 천장이 높은 형태다. 내부를 자유롭게 활용할 수 있다는 점에서 전시회와 공연 같은 문화 관련 작업을 하기에 좋은 조건"이라며 "특히 C동은 연극 공연이 많이 이뤄지는데 관객들의 집중도가 높다"고 말했다.CJ대한통운 김봉호 전무는 "인천아트플랫폼으로 활용하고 있는 대한통운 창고는 건립 이후 항만 물류와 관련한 창고로 쓰였으며, 90년대 초에는 대한통운이 택배사업에 진출하면서 전국 최초 택배 물류센터로 활용했던 곳"이라며 "매우 의미 있는 공간이라고 할 수 있다"고 말했다.인천항 내항 8부두에 있는 아시아 최대 규모 곡물 창고도 변신을 준비하고 있다.8부두 곡물 창고는 면적 1만 2천150㎡, 길이 270m, 너비 45m다. 내부에 기둥이 없는 단일 공간으로는 아시아 최대 규모다. 이 창고는 인천항 제2선거 건립(1974년)과 연계해 1975년 정부 주도로 건립됐다. 인천항 주요 수입 품목이었던 양곡을 보관하기 위한 장소로 40년 가까이 활용됐다. 한 번에 5만t의 양곡을 적재할 수 있었으며, 2000년대 초만 해도 창고가 비어 있는 날이 거의 없었다. 하지만 인천 남항과 북항 등이 조성되면서 내항의 물동량이 줄었고 창고 활용도 역시 낮아졌다. 2015년 8부두 일부가 시민들에게 개방되면서 결국 창고 기능을 잃게 됐다.인천시는 이 창고를 다양한 문화콘텐츠의 생산·소비의 장으로 만들기 위한 사업을 추진 중이다. '상상플랫폼 조성사업'이다. 상상플랫폼은 3D홀로그램과 가상현실 등 첨단 문화시설과 함께 공연·전시회장 등 문화 공간으로 활용하는 프로젝트다. 엔터테인먼트, 공연, 전시, 창업 등 다양한 용도가 복합된 공간으로 활용하겠다는 것이 인천시의 구상이다. 인천시 관계자는 "이 창고가 가진 장소적 역사성을 살리면서 문화 콘텐츠 등을 새롭게 양성할 수 있는 새로운 공간으로 재탄생시킬 것"이라며 "상상플랫폼 조성사업은 구도심과 지역경제 활성화에도 기여할 것"이라고 말했다.1997년부터 이 창고를 운영한 (주)동부 김종식 전 인천지사장은 "이 창고는 아르헨티나와 브라질 등지에서 온 사료 부원료 등을 주로 보관하던 창고"라며 "내항에서 가장 큰 창고였다. 내항 1·8부두 재개발과 맞물려 활용 방안이 모색되고 있는데, (과거) 인천항 물류에 큰 역할을 했듯 (앞으로도) 지역사회에 더 크게 기여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고 말했다. 글/정운기자 jw33@kyeongin.com 사진/김용국기자 yong@kyeongin.com 그래픽/성옥희기자 okie@kyeongin.com/아이클릭아트인천아트플랫폼 C동. 1940년대 지어진 대한통운 물류창고를 리모델링했다. 이 창고는 인천항으로 수입된 화물을 보관하는 창고로 활용되다가 1990년대에는 택배 물류센터 기능을 했다. 이후 인천아트플랫폼으로 조성돼 다양한 공연 등이 열린다. 사진/김용국기자 yong@kyeongin.com인천항 내항 8부두 곡물 창고. 이 창고는 1975년 건립됐으며, 5만t의 양곡을 보관할 수 있다. 내부 기둥이 없는 단일 공간으로는 아시아 최대 규모를 자랑한다. 40년 가까이 물류 창고로 역할을 해왔으나, 지금은 비어 있다. 인천시는 이 창고를 문화·예술·창업 공간으로 활용하는 '상상플랫폼 조성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사진/김용국기자 yong@kyeongin.com내항 8부두 창고를 활용해 문화예술공간으로 조성하는 '상상플랫폼' 조감도. /인천시 제공인천항 물류 창고 등을 활용해 조성한 아트플랫폼. 창고라는 건물의 특성을 활용해 전시공연을 할수 있는 공간으로 꾸몄다. 아트플랫폼에서 진행된 전시, 공연 모습. /인천아트플랫폼 제공사진/김용국기자 yong@kyeongin.com

2018-08-15 정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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