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근대음악의 발상지 인천

 

[한국 근대음악의 발상지 인천·(20·끝)에필로그]악기·무대 다 바뀌었지만 우리가 연주한 '우리 음악'

장구·거문고 등 중세까지 주체적으로 외국과 문물 교류했던 선조들개화기 들어 선진화 움직임에 일제 탄압… 전통 문화 설자리 빼앗겨인천 중심으로 시작된 근대음악 전파, 희미해진 기록·흔적 되짚어봐밀려드는 외래물결 자주적 수용 '해법' 100여년 역사속에도 고스란히 우리나라는 여러 번 외래음악을 수용했다. 고대에는 서역(西域) 음악을, 중세에는 중국 음악을, 19세기 후반 개항 이후에는 서양 음악과 접촉했다. 고대에는 불교가, 중세에는 유교가, 근대에는 기독교가 우리나라에 외래 음악을 전하는 데 큰 몫을 했다. '문화는 종교라는 배를 타고 이동한다'는 명제를 떠올리게 하는 대목이다.중세까지 우리의 음악 교류는 외래음악을 주체적으로 받아들여 새로운 음악을 창출한 경우로 볼 수 있다. 일례로 중앙아시아의 음악을 수용하면서 우리가 주체적으로 장구와 거문고를 창안했다. 인도 장단인 딸라(Tala)는 우리를 비롯해 중국과 인도네시아, 태국, 일본 등으로 유입되지만, 유독 우리나라에서 다양한 장단으로 분화했다. 우리 조상들은 외래음악을 수용하고 향악화하여 우리 것으로 만들고, 새로운 음악을 창조해냈다. 세종대왕은 '보태평'과 '정대업'이라는 궁중무용음악을 만들면서 외래음악인 고취악을 참조하기도 했다. 이 밖에도 백제의 기악(技樂)은 외래음악을 자주적으로 수용해 새롭게 창출한 경우로 볼 수 있다. 기악이란 가면을 쓰고 연행하는 것으로, 백제는 기악을 중국 오나라에서 들여와서 체화한 후 일본에 전한 바 있다.근대에는 우리 음악과 체계와 사상적 기반이 완전히 다른 서양의 음악이 전래하면서 수용자에게 가해지는 파급력과 충격은 더욱 컸을 것이다. 또한 '서양의 것을 학습해 빠르게 선진화하려는 시대 정신'까지 가세하며 주체(반성)적 인식 없이 서양 음악을 받아들여야 하는 상황도 일조했을 것이다. 더해서 우리 고유의 것을 탄압한 식민지시기의 일제로 인해 우리 음악은 설 자리를 잃는다. 고전주의와 낭만주의 시기를 거치면서 수학과 합리성이 극대화된 서양 음악을 맹목적으로 추종하는 현상이 나타난 연유로 볼 수 있다.개항 이후 서양 음악의 전래는 인천을 중심으로 이뤄졌다. 무수한 서양의 문물이 인천을 통해 들어오는데, 단연 종교와 음악은 각별한 위치를 점한다. 하지만 인천의 음악 역사가 정리된 사례는 지금까지 없었다. 남겨진 자료들 또한 많지 않았다. 지역에서 대중음악 분야에 대한 관심은 그보단 나은 형편이다.이 같은 인천의 가치와 함께 문제의식 속에서 '한국 근대음악의 발상지 인천'을 지난해 9월 마지막 주에 시작해 20회에 걸쳐 연재했다. 연재가 한창이던 지난 연말에 '그리운 금강산'을 작곡한 인천 음악인 최영섭(90) 선생 90세 축하 공연과 '장미헌정식'이 열려서 그 의미를 더했다. 공연장을 찾은 지역 인사들은 선생의 90세 축하와 건강을 기원하는 마음을 담아 장미 한 송이씩을 전달했다. 또한 작품을 정리하고 출판 작업을 진행하면서 경제적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 선생에게 후원금을 전달했다. '장미 헌정식'은 앞으로도 공로가 있는 선배와 원로를 기리고 모시는 인천의 아름다운 전통으로 자리매김할 것으로 기대된다.한반도에서 시간과 공간의 변화가 가장 급격했던 인천에 전래한 서양음악과 공존해야 했던 우리 전통음악과 관련한 사건, 작품, 인물, 장소 등을 들여다 본 '한국 근대음악의 발상지 인천'을 마무리 한다.회차마다 각각의 주제에 따라 기술됐지만, 1편의 프롤로그부터 마지막 에필로그까지 관통하는 주제는 '외래 문화(음악)의 자주(주체)적 수용'이었다. 이를 위해 우리가 할 일에 대한 고민을 계속해왔다. 에필로그에선 고민에 대한 답을 피력해야 될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고민의 결과, 해답은 역사 속에 있었다. 이미 우리 선조들이 행하였던 것들이다. 단지 근대에는 외세에 의한 특별한 상황으로 인해 인지를 못했거나, 인지했어도 실행에 옮기지 못했을 것으로 판단된다.외래 문화의 자주적 수용을 위해선 우선 우리 문화에 대한 냉정한 성찰이 있어야 한다. 자기 문화를 지나치게 비하해선 안되고 과대 포장하는 일도 없어야 한다. 이처럼 자신을 잘 알기 위해선 주위의 것과 비교해 볼 수 있어야 한다. 이를 통해 자신의 약점과 장점을 분명히 알 때 외래 문화를 자주적으로 수용할 수 있을 것이다. /김영준기자 kyj@kyeongin.com 그래픽/성옥희기자 okie@kyeongin.com/아이클릭아트

2019-02-21 김영준

[한국 근대음악의 발상지 인천·(19)]우리 음악의 비전

50여년동안 354차례 정기연주회 연 인천시향초창기 낭만주의 전반기 작품 주로 무대올려최근 20세기곡 초연… 지휘자·규모따라 변화경인일보는 인천시립교향악단 창단 50주년 기념일이었던 2016년 6월 1일에 맞춰 시향이 가장 많이 연주한 작품을 조사한 바 있다. 인천시향 50년의 행보를 짚어보려는 게 기사의 의도였다. 초청 연주회와 송·신년 음악회 등 특별 연주회는 배제했으며, 50년 동안 354차례 열린 정기연주회 메인 프로그램에 오른 작품들을 대상으로 했다. 1회 이상 정기연주회의 메인 프로그램에 오른 작품은 82개였으며, 그중 베토벤 '교향곡 3번, 영웅'과 차이콥스키 '교향곡 5번'이 12회로 가장 많았다. 베토벤 '교향곡 9번, 합창'과 차이콥스키 '교향곡 6번, 비창'이 11회였으며, 베토벤 '교향곡 5번, 운명'과 슈베르트 '교향곡 8번, 미완성', 브람스 '교향곡 4번', 드로브자크 '교향곡 8번'과 '9번, 신세계'가 10회로 뒤를 이었다. 창단 초기 규모가 크지 않았던 인천시향의 주 레퍼토리는 하이든과 모차르트, 베토벤의 초기 작품, 슈베르트와 멘델스존 등 낭만주의 전반부까지였다.2대 상임지휘자인 임원식(1919~2002)이 베를리오즈의 '환상 교향곡'을 처음으로 연주하면서 레퍼토리 확대를 꾀했다. 4대 지휘자인 금노상(66)이 부임하면서 4관 편성으로 거듭난 인천시향의 레퍼토리는 더욱 넓어졌다. 후기 낭만주의의 정점에 서 있는 말러와 R. 슈트라우스를 선보였으며, 20세기 작곡가들인 버르토크와 쇼스타코비치, 오르프의 작품 등을 인천시향이 초연했다.인천시향 50주년 기념 연주회로 열린 제354회 정기 연주회에선 정치용 당시 예술감독이 R. 슈트라우스 '영웅의 생애'를 인천시향 초연하기도 했다. 지난해 10월에 부임한 이병욱 인천시향 예술감독은 올해 교향악 축제에 인천시향과 말러 '교향곡 5번'으로 참여하는 등 그동안 자주 무대에 올려지지 않았던 작품들도 시민에게 선보일 예정이다.인천시향이 100주년을 맞았을 때, 50주년 이후부터 50년간의 메인 프로그램을 조사한다면 이 결과와는 매우 다른 형태를 보일 것으로 예상된다. 이처럼 인천시향의 역사에는 향유자를 포함한 지역 음악계와 시향의 당시 상황, 여건이 반영됐음을 알 수 있다.개항 이후 군대와 교회 등을 통해 우리나라에 도래한 서양음악은 이 같은 요소와 과정들이 생략될 수밖에 없었다.이 땅에서 서양음악은 곧 '음악'으로 자리 잡았다. 반면 이전 시기까지 우리 땅에서 음악으로 지칭된 요소들은 '국악' 혹은 '전통음악'으로 불리며 뒤로 물러섰다.정치, 경제와 마찬가지로 문화(음악) 분야에서도 '서양의 것을 학습해 선진화하려는 시대 정신'이 가미되면서 서양음악이 빠르게 음악의 자리를 차지했으며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300년 클래식역사, 국내 100년만에 급히 진행윤이상 세대에 이르러서야 주체적 인식 도모뮌헨올림픽 기념작 '심청' 등 유럽에도 큰 획바흐가 작곡한 '평균율 클라비어곡집' 이후로 잡더라도 300여년 동안 형성된 서양음악사가 우리 땅에선 100여년 동안 축약되어 나타난다. 이 기간에 조성적 화음으로만 이뤄진 기초적인 노래부터 컨템포러리(Contemporary) 음악까지 나타나는 것이다.서양음악의 유입 창구 기능을 한 인천에서 최영섭(90)을 제외하고 해방과 한국전쟁 전후해서 활동한 작곡가를 찾기 힘든 대목은 아쉽다. 윤이상(1917~1998)과 금수현(1919~1992), 이상근(1922~2000) 등이 이내 떠오르는 부산과 비교해도 그렇다. 어쩔 수 없이 우리나라 전반(윤이상)으로 범위를 넓혀 언급을 잇는다.서양음악 도입 세대의 우리 작곡가들은 주로 노래를 만들었다. 서양음악의 유입과 수용에 집중했을 이들에게 '한국적 음악'이 고려될 여지는 충분하지 않았을 것으로 여겨진다. 소위 '작가 정신'을 가진 작곡가의 작품이기보다는 새 문화의 접촉 이후 공감하고 즐겼던 음악인들의 산물이었기 때문이다. 가사에 대한 정서로 인해 한국적 애환이 묻어난다는 평가도 받지만, 엄밀히 말하면 반주 붙은 서양 노래의 틀에 민요적 가락과 장단을 도입한 정도였다. 즉, 도래한 서양음악에 대한 반성이나 한국의 고유 음악양식에 대한 추구 등이 없이 만들어진 노래들이라 할 수 있다. 이후 세대에 등장하는 작곡가 윤이상 등은 우리 음악계에 주체(반성)적 인식을 도모했다.윤이상은 1956년 프랑스로 유학을 떠가기 전 국내에서 가곡과 기악곡을 비롯한 다양한 작품을 남겼다. 1950년부터 부산사범학교 음악교사로 재직 때(휴전 후 활동 무대를 서울로 옮김) 동요 70여곡을 작곡했다. 당시 초등학교 1~6학년 음악책에 수록된 동요 100여곡 중 윤이상의 작품이 70%를 차지했다고 한다. 동요 다음으로 많은 윤이상의 곡은 교가이다. 해방 직후 부산으로 거주지를 옮기기 전 고향인 통영의 문화협회와 통영공립고등여학교, 통영공립여자중학교 등에 재직한 윤이상은 4년 동안 시인 유치환·김상옥과 함께 '교가 지어주기 운동'을 벌였다. 이를 통해 윤이상이 작곡한 교가는 9개에 이르며 학교마다 특색을 살려서 만들어졌다. 윤이상이 한국 생활기(작곡 전반부)에 발표한 가곡을 비롯한 작품들은 한국의 전통 음악 유산과 연결되어 있다고 평가받는다. 함께 활동했던 안기영, 김성태, 채동선, 김순남, 이건우 등과 영향을 주고받으며 서양과 우리 음악 사이에서 균형적 질서를 유지했을 것으로 여겨진다. 윤이상의 유럽 생활기(작곡 후반부)에도 이 기조는 이어진다. 1985년 독일의 튀빙겐대학교에서 명예박사 학위를 받으면서 윤이상이 직접 밝혔듯이, 그는 1970년대 초반까지 동아시아 전통을 서양음악의 언어로 개조하는 데 천착했다. 동아시아적이라는 표현에는 한국과 중국의 궁중 음악뿐만 아니라 신화적인 소재들과 도교, 불교의 영향을 받은 조형 예술의 모티브들이 포함된다.윤이상의 대표작 중 하나인 관현악곡 '예악'은 이 같은 사상적 기반에 당대 펜데레츠키와 리게티의 작품에서 드러나는 음향작곡(Klangkomposition)의 기법이 묻어난다. 이후 동베를린사건을 비롯한 정치·사회적으로 어려움을 겪은 윤이상은 이 경험들을 보다 명백한 음악 언어로 구사하기 위한 시도도 한다. 윤이상은 1972년 뮌헨올림픽 개막 축하작이었던 오페라 '심청'을 비롯해 광주 민주화운동을 소재로 한 교향시 '광주여 영원하라'와 '화염에 휩싸인 천사' 등 150여편의 작품을 남겼다.'서양 현대음악 기법을 통한 동아시아적 이미지의 표현'이라는 평가를 받으며 20세기 서양음악사에 거대한 획을 그은 윤이상은 큰 울림을 준다. /김영준기자 kyj@kyeongin.com/아이클릭아트인천시립교향악단 창단 50주년을 기념해 2016년 5월 18일 인천종합문화예술회관 대공연장에서 열린 제354회 정기연주회 모습. /인천문화예술회관 제공20세기 서양음악사에 큰 획을 그은 작곡가 윤이상. /윤이상평화재단 제공

2019-02-14 김영준

[한국 근대음악의 발상지 인천·(18)]연주회 공간

창극·영화 상영하던 '국내 첫 극장 협률사' 등 1920년대 연주회 선봬공회당·시민관 바통 이은 시민회관, 1980년대엔 민주화 항쟁 장소로문예회관을 비롯 송도·부평·청라 곳곳에 확산… 다채로운 무대 기대1743년에 창단한 독일의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 오케스트라(Leipzig Gewandhaus Orchester)는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관현악단이다. 당초 12명으로 시작된 이 단체는 개인의 저택을 순회하면서 연주활동을 이어갔다. 이들의 연주 소식에 주민들의 관심 또한 늘었고, 그만큼 단원과 청중도 증가하면서 더 큰 공간이 필요하게 됐다. 그로 인해 카페로 연주회 장소를 옮겼으며, 이도 부족하게 되자 1781년 직물업자들이 모여서 회의도 하고 그들이 만든 제품을 전시하고 보관하는 용도로 지은 건물인 게반트하우스(의복협회 회관)로 옮겼다. 이와 동시에 단체의 상주 공간이자 오케스트라의 명칭으로 확정됐다.1884년이 되어서야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 오케스트라를 위한 새 게반트하우스가 지어졌다. 뛰어난 합주력과 그에 상응하는 음향이 어우러지면서 이 오케스트라의 명성은 더욱 높아졌다. 이어서 지어지는 암스테르담 콘세르트허바우와 보스턴 심포니홀 또한 게반트하우스를 참조했다.게반트하우스는 제2차 세계대전 때 연합군의 폭격으로 파괴됐으며, 현재의 게반트하우스는 1977~1981년에 개축한 것이다.제물포를 통해 서양음악이 도래한 이후 인천에서도 연주회를 열 수 있는 공간에 대한 필요성이 대두된다. 20세기 초반 인천에서 연주회는 주로 교회와 극장 등에서 개최됐다.고일 선생이 쓴 '인천석금'(1955)에 따르면 인천 지역에 세워진 최초의 근대식 공연장은 정치국이 1894~1895년에 세운 것으로 추정되는 협률사(協律舍)이다. 협률사는 조선인이 만든 우리나라 최초의 극장이자 공연장으로 일컬어진다.1933년 발간된 '인천부사'에도 "부청 서쪽인 중정 1정목(현 관동)에 100석 규모의 화도(火道)를 갖춘 극장을 (일본)거류민의 위안을 위해 개설했는데 이후 명치 30년(1897년)에 산수정 2정목(현 송학동)으로 옮겨 극장 양식으로 신축해 '인천좌(仁川座)'라 불렀다"고 기록돼 있다.이처럼 해방 이전까지 인천에 있던 극장으로는 일본인의 자본으로 운영된 인천좌와 가부키좌(1906), 표관(1909) 등이 있었다. 협률사는 축항사에 이어 1914년 애관으로 이름을 바꾸고 현재에 이른다.언급한 극장들에선 주로 창극에서부터 연극, 영화 등이 관객과 만났다. 1920년대 들어서야 인천에서 서양음악을 소재로 한 음악회와 음악대회가 개최된다. 민경찬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가 쓴 논문 '서양음악의 수용과 인천'(인천근현대문화예술사연구에 수록·인천문화재단 刊)에 따르면, 1920년대 인천 내리교회 엡윗청년회 주최 음악대회가 열렸고, 일본 육군 4사단 군악대장이었던 일본인 다카사카가 신포동에 '영정악우회'를 설립해 신인들을 양성하기 시작했다. 또한, 바이올린과 피아노를 전공한 인천 출신 음악인 박흥성이 표관극장에 입사한 이후 10여년 동안 많은 무성영화의 음악을 편곡하고 연주했으며, 후진도 양성했다.연주 공간에 대한 필요성이 본격화 되는 가운데, 인천에서 그 역할은 1923년 홍예문 부근에 2층 규모의 붉은 벽돌 건물로 지어진 '인천공회당'이 떠맡는다. 500여명을 수용할 수 있었던 이 공간에선 현제명의 연주회를 비롯해 홍난파에게서 바이올린을 배운 박종성의 연주회, 원종철 독창회 등이 개최됐다.해방 후인 1947년에는 이곳에서 인천관현악단 창단 연주회가 개최됐다. (2018년 11월 23일자 9면 보도)인천공회당은 한국전쟁 때 함포를 맞고 소실된다. 휴전 이후인 1957년 그 자리에 1천여석 규모의 '인천시민관'이 들어섰다. 시민관에선 콘서트를 비롯해 연극, 쇼, 영화 상영, 웅변대회 등 다채로운 문화행사가 열렸다.1966년 6월 1일 이곳에선 인천시립교향악단의 창단 연주회가 개최됐으며 인천시향의 상주공간이 된다. 하지만 시민관이 개관한 지 10여년이 지나면서, 시설 노후화가 진행됐다. 때문에 1974년 주안에 문을 여는 '인천시민회관'이 본연의 임무를 넘겨받는다. 지하 1층, 지상 3층 규모의 시민회관은 1천388석, 2천명을 수용할 수 있는 당시로서는 상당히 큰 규모의 문화공간이었다. 공간의 크기 만큼이나 각종 문화예술 행사가 활발히 열렸다. 1980년대 시민회관 앞 사거리에선 5·3 인천 항쟁 등 군사 정권에 대항해 민주화를 요구하는 시민들의 집회 장소가 되기도 했다. 1998년 무직자를 위한 쉼터로 활용되기도 했으며, 1994년 남동구 구월동에 지어진 인천종합문화예술회관(현재 명칭은 인천문화예술회관)이 정착되면서 2000년 철거됐다. 현재 시민회관 자리엔 녹지 공간과 휴게 시설을 만들어 시민 공원으로 조성됐다.1980년대 초반에 고교 시절을 보낸 지역의 한 음악 애호가는 "음악 시간에 베토벤의 '운명 교향곡'에 대해 배우고 나서 인천시립교향악단이 이 작품을 연주한다고 해서 무작정 시민회관으로 갔던 기억이 난다"면서 "지금의 연주홀들과 비교했을 때 시민회관의 음향 시설이나 환경 등은 모든 면에서 떨어졌겠지만, 당시 실연으로는 처음 들었던 '운명 교향곡' 1악장의 셋잇단음에 의한 주제는 잊을 수 없다"고 회상했다.시민회관은 '옛 시민회관 쉼터 공원'으로 변모한 가운데 올해로 개관 25주년을 맞은 인천문화예술회관과 지난해 송도국제도시에 개관한 아트센터 인천으로 이어진다. 더해서 중극장 규모인 부평아트센터와 소극장 규모로 청라에 문을 연 엘림아트센터까지 다양한 콘서트 공간이 인천에 자리잡았다.인천에서 서양음악이 본격적으로 향유된지 100년이 되어 가는 가운데 좋은 연주 공간들을 기반으로 인천의 음악 문화가 더욱 다채롭게 싹을 틔우는 2019년이 될 것으로 기대된다. /김영준기자 kyj@kyeongin.com 그래픽/성옥희기자 okie@kyeongin.com1923년 인천공회당 모습. /인천 화도진도서관 제공1986년 5월 민주화 항쟁이 일어난 인천시민회관 앞 거리. /자유기고가 이재우씨 제공/아이클릭아트인천문화예술회관 전경. /인천문화예술회관 제공아트센터 인천 외관. /인천경제청 제공

2019-02-07 김영준

[한국 근대음악의 발상지 인천·(17)]합창

내리교회 성가대를 시작으로 市합창단·호산나 등 민간으로 전파음악계 거장 작곡가 최영섭·윤학원 감독 종교 활동하며 영향받아1970년대 '메시아 연합 연주' 단체들, 2016년 대축제로 다시 뭉쳐40~50대의 향수 불러일으킨 '…궤적'展, 역사적 관점으로 재조명전시회를 찾았던 음악에 관심 있는 40~50대 이상의 시민들은 전시회 자료들을 보며 "내가 몸담았던 합창단이다", "내가 이 곡을 불렀었지"라고 말하며 과거 속으로 빠져들었다고 한다.전시 기획을 총괄했던 이주영 인천문화재단 개항장플랫폼준비본부장은 "전시회 제목에 나와 있듯이 '궤적'의 의미에 맞춰서 역사적 흐름을 조망하게끔 구성해야 했는데, 자료 구하기가 상당히 어려웠다"면서 "인천 합창의 역사와 함께 인천 합창을 알리는 단초를 제공했던 전시회로 의미가 있었다"고 돌아봤다.전시회를 통해서 확인되는 인천 합창의 역사와 발전 과정은 그 자체로 '인천 문화'였다. 1885년 선교사 아펜젤러에 의해 설립된 인천 중구 내동의 내리교회는 우리나라 첫 개신교회다. 예배당에서 찬송가가 불리고, 이후 교세가 번창하면서 교회 안의 찬양이 민간으로 퍼져나가면서 '인천 합창 문화'가 구축됐다.내리교회 성가대는 1954년 우리나라 최초로 헨델의 오라토리오 '메시아' 전곡을 연주한 후 현재까지 전통을 이어가며, 지난 연말 제28회 메시아 대연주회를 개최했다.(1월 4일자 9면 보도) 또한, 창단 연도가 오래된 합창단들의 건재와 함께 전쟁 후 지역에서 지휘자로 활동했으며, '그리운 금강산'을 작곡한 최영섭(90), 국내 합창 음악의 거장으로 불리는 윤학원(81) 전 인천시립합창단 예술감독 등은 '인천 합창 문화'의 결실들이다.개신교 신자였던 최영섭과 윤학원은 교회를 통해 서양음악을 접했다. 최영섭은 내리교회 찬양대를 이끌며 '메시아'를 수차례 지휘했고, 윤학원 또한 변성기 이전까지 교회 성가대에서 노래를 부르는 등 자연스럽게 합창을 접한 후 음악인의 길을 걷게 된 것이다. 1952년 내리교회 성가대원이 주축이 돼 인천시합창단(지휘·최영섭)을 발족했으며, 1958년 호산나합창단이 창단한 이후 샤론합창단, 대한어머니회합창단, 인천남성합창단, 인천장로성가단, 인천YWCA합창단, 인천여성합창단, 로고스합창단, 한국부인회합창단 등이 창단돼 오늘날까지 활동을 이어가면서 '인천 합창 문화'를 발전시키고 있다. 호산나합창단은 1957년 인천 기독교 사회관 고등부 합창단으로 창단해 이듬해 호산나합창단으로 명칭을 바꿨다. 초대 지휘자는 권경호였으며, 단원은 고등학생들로 이뤄졌다. 2005년 호산나동문합창단이 창단해 명맥을 잇고 있다. 1966년에는 대한어머니회 합창단이, 2년 후에는 샤론합창단이 창단한다. 인천남성합창단과 인천장로성가단, 한국부인회 합창단은 1971년 창단하며 1974년 인천YWCA합창단, 1976년 로고스합창단, 1977년 인천여성합창단 창단으로 이어진다.이즈음에 내리교회를 중심으로 지역 교회들은 메시아연합연주회를 기획했다. '1970년대편 인천시사'에 따르면 1978년 11월 4일 인천시민회관에서 메이사연합연주회 창립기금 마련을 위한 내리교회성가대와 부평감리교회성가대, 인천시립교향악단의 연합연주회가 열렸다. 이를 통해 이듬해인 1979년 12월 22일 인천시민회관에서 내리교회와 중앙감리교회, 제3장로교회, 송현성결교회로 구성된 연합성가대와 인천시립교향악단의 '메시아'가 울려 퍼졌다.이 같은 역사적 자양분을 안고 있는 인천 합창이 최근 다시 하나로 뭉쳤다. 2015년 하반기에 인천시립합창단의 제7대 예술감독으로 부임한 김종현(59)은 지역 아마추어 합창의 저변확대와 활성화를 위해 2016년 제1회 인천합창대축제를 개최했다. 인천지역의 구립합창단과 부부· 실버·어린이 등 여러 형태의 합창단 27개 팀, 1천200여명이 출연했다. 지난해 9월 3일 동안 열린 제3회 축제 때도 27개 합창단이 참가했다. 대청도에서 물길을 헤쳐 달려온 메아리·동백 합창단도 참가해 의미를 더했다. 각 합창단들의 단독 공연 후 축제의 마지막은 모든 참가자들의 합동 공연으로 장식했다. 이처럼 '인천 합창 문화'는 만들어지고 있다.조우성 전 인천시립박물관장은 "교회 찬양대원들이 민간에서 활동하며 합창문화를 일군 것은 지역 문화 발전사의 중요한 대목으로 볼 수 있다"면서 "인천의 '합창문화'를 보면 진정한 의미의 지역 문화가 어떻게 형성되는가를 이해하게 된다"고 설명했다. /김영준기자 kyj@kyeongin.com지난해 인천문화재단 음악플랫폼 음악홀에서 열린 '인천 합창의 궤적'전. /인천문화재단 제공2018년 9월 인천문화예술회관에서 열린 인천합창대축제. /인천문화예술회관 제공/아이클릭아트/인천문화재단 제공

2019-01-24 김영준

[한국 근대음악의 발상지 인천·(16)]오케스트라, 시립교향악단 창단까지

상륙작전 직후 최영섭 선생구국대 학생합창단서 지휘 '첫발'정훈관현악단·애협교향악단 등시향 모체가 된 단체로 보폭 넓혀전 편('작곡가 최영섭')에서 밝혔듯이 최영섭 선생은 1950년 9월 연합군의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하자 방공호에서의 생활을 끝내고서 포탄 맞은 인천 시내를 돌아봤다.그러다 우연한 기회에 지휘봉을 잡게 된다. (1월 11일자 9면 보도) 당시 선생은 상륙작전으로 인해 폐허가 된 지역 사회의 안위를 걱정하며 자신이 다니던 창영교회를 비롯해 여러 교회들을 찾았다고 한다.신흥동 쪽을 지나는데, 인근의 장로교회에서 합창소리가 들려서 가 봤더니 구국대 학생합창단이라는 완장을 두른 학생 40~50명이 찬송가를 4부 합창으로 부르고 있었다.지휘하던 젊은 사람이 최영섭 선생에게 다가와 누군데 유심히 지켜보는지 물었고, 선생은 작곡을 전공한 사람이며 화음이 잘 맞지 않는 합창소리가 들려서 들어와 봤다고 소개했다.자신보다 지휘에 대한 이해가 클 것으로 여긴 젊은 지휘자는 간곡히 최영섭 선생에게 지휘를 부탁했다.선생은 고사를 거듭하다가 수락하게 된다. 최영섭 선생과 합창단은 2개월 정도를 매일같이 연습했으며 이를 통해 제대로 된 합창단으로 변모한다.이후 전쟁으로 인해 몸과 마음 모두 어려워진 사람들을 위한 위문 공연을 펼치게 된다.지휘자로서 첫발을 내디딘 최영섭 선생은 오케스트라 지휘까지 보폭을 넓혀서 활동을 벌인다.결과적으로 지역 오케스트라 발전에 활력을 불어넣은 활동들이었다.전쟁 후 선생이 지휘한 육군정훈관현악단과 인천애호가협회교향악단은 1966년 창단하는 인천시립교향악단의 모체와도 같은 단체다.지역인재 토대 조례 승인 한달새1966년 시민관서 창단 연주회1·3대 상임지휘자 지낸 김중석"거쳐 간 모두가 시향의 역사"이에 앞서 인천관현악단이 있었다. 우리나라 최초의 오케스트라인 고려교향악단(서울시립교향악단의 모체)이 1945년 창단 이후 2년 후인 1947년 12월 13일 인천관현악단은 인천공회당에서 창단 연주회를 개최했다. 이후 인천영화극장과 애관극장 등에서 연주회를 이어갔다. 인천관현악단은 김기룡 단장과 박수득 악장을 중심으로 현악과 관악, 타악 주자 23명으로 구성된 인천 최초의 오케스트라였다. 한국전쟁의 발발로 오랜 기간 활동이 이어지진 못했지만, 전쟁 후 설립되는 지역 교향악단의 주춧돌 역할을 했다. 1953년 6월 21일 경기지구 육군정훈관현악단이 설립됐으며, 이 악단은 1956년 창립하는 '인천음악애호가협회'의 산하 교향악단으로 재발족했다. 인천애협교향악단은 박종성과 주원기, 최영섭을 비롯해 단원 30여명으로 구성됐다. 1957년 11월 인천시민관에서 열린 인천애협교향악단의 제4차 연주회의 지휘는 최영섭이 맡았으며, 당시 중학교 1학년이었던 백건우가 그리그 '피아노 협주곡 a단조'의 협연자로 나섰다. 인천애협교향악단은 1957년에도 신인음악회를 개최하는 등 지역 신진음악인들에게 기회의 장을 마련해 주기 위한 활동을 벌였다. 최영섭 선생은 1964년 동아방송 편곡지휘자로 스카우트되어서 서울로 거처를 옮길 때까지 애협교향악단을 이끌었다. 이때 인천에선 홍훈표, 김형석, 강춘기, 김중석, 손관수, 정흥일, 김광식이 7인 위원회를 구성해 인천 필하모닉 관현악단을 창단하면서 애협교향악단원들은 새 오케스트라로 편성됐다. 인천 필하모닉은 10여회의 연주회를 개최했으며, 단원들은 1966년 창단하는 인천시립교향악단으로 자리를 옮겨 활동을 이어가게 된다.'1970년대편 인천시사'에 따르면 인천시립교향악단의 창단 조례는 1966년 5월 4일 승인됐다. 인천시립교향악단의 초대 상임지휘자는 서울 음대 작곡과를 졸업하고 제물포고에서 음악교사로 있던 당시 26세의 김중석이었고 40여명의 단원들로 구성됐다. 창단 연주회는 그해 6월 1일 오후 7시30분 인천시민관에서 개최됐다. 창단 연주회가 열린 날은 제정된 지 2회째를 맞는 인천시민의 날이기도 했다. 서울, 부산, 대구에 이어 국내 4번째 시립교향악단이 창단하는 순간이었다.조례 승인 후 한 달도 지나지 않은 시기에 창단 연주회를 가질 수 있었던 것은 앞서 언급했듯이 지역에 오케스트라 활동 토대가 마련돼 있었기 때문이다. 창단 연주회의 레퍼토리는 첫 곡으로 '인천 시민행진곡'에 이어 모차르트 '피가로의 결혼 서곡'과 '피아노 협주곡 26번, 대관식', 슈베르트 '교향곡 8번, 미완성' 등으로 구성됐다.창단 공연에 이어 보름 후 KBS에 출연한 인천시립교향악단은 방송을 통해 전국에 창단 신고도 했다.인천시민관(인천공회당 자리에 1957년 재건축)에서 창단 연주회를 연 인천시립교향악단은 시민관의 시설이 노후화되면서 1974년 주안에 문을 여는 '인천시민회관'으로 활동 무대를 옮긴다. 1994년 현재의 인천문화예술회관이 개관하기 까지 시민회관은 시립교향악단의 활동 근거지였다.시민회관은 전문 공연장이 아닌 다목적 공간이었다. 때문에 제대로 된 음향시설을 갖추지 못했지만, 인천시립교향악단의 정기 연주회가 있을 때마다 1천300여석의 자리가 꽉 찰 정도로 인기가 높았다고 한다.인천시립교향악단의 1대와 3대 상임지휘자를 지낸 김중석은 시립교향악단 창단 50주년이었던 지난 2016년에 소장하고 있던 1965~1983년까지 시립교향악단의 연주회 관련 소책자와 사진 등 앨범 2개 분량의 자료를 시립교향악단에 전달했다. 그러면서 그는 역사성과 연주력 측면에서 국내 정상급 단체로 올라선 인천시립교향악단이 지나간 것들을 챙겨야 할 때라는 의견을 피력한 바 있다.김중석은 "그동안 시립교향악단을 거쳐간 지휘자들은 물론, 단원들과 협연한 솔리스트, 레퍼토리 등 모든 것이 시향의 역사이며, 이 같은 부분을 정리해 시민의 자긍심을 키워야 한다"고 말했다. /김영준기자 kyj@kyeongin.com/아이클릭아트인천시립교향악단 초대 상임지휘자 김중석에 대한 윤갑로 인천시장의 위촉장. /인천문화예술회관 제공인천시립교향악단 창단 연주회를 소개하는 소책자 표지. /인천문화예술회관 제공인천시립교향악단 창단 연주회를 소개하는 소책자 속지에 실린 모습(사진 왼쪽)과 인천시립교향악단 초기 연주 모습. /인천문화예술회관 제공

2019-01-17 김영준

[한국 근대음악의 발상지 인천·(15)]작곡가 최영섭

인천서 서울로 통학하며 음악 배워6·25 혼란속에도 시민·軍 위문펼쳐정전후엔 교향악단 지휘·교육 활동1961년 '그리운 금강산' 전국민 사랑지난해엔 90세 기념 공연·헌정식도"강화에 돌아가 사랑 보답하며 살것"지난해 마지막 달의 지역 음악계는 1929년 11월 28일 강화도에서 태어난 작곡가 최영섭 선생의 90세 생일을 기념한 연주회와 이벤트들로 채워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한국예술가곡보존회와 K클래식 운영위원회 주최로 12월 4일 서울 세종문화회관 체임버홀에서 열린 기념 음악회를 시작으로, 12일 인천 엘림아트센터에선 인천문화재단과 (사)아침을 여는 사람들이 콘서트 '작곡가 최영섭, 오마주 투 코리아(Homage to Korea)'를 개최했다.두 음악회 모두 대표작인 '그리운 금강산'을 비롯해 최영섭 선생의 작품들로 꾸며졌다. 70여년에 걸쳐 구축된 선생의 작품 세계를 조명한 것이다.새얼문화재단은 20일 인천문화예술회관 대공연장에서 개최한 '제35회 새얼 가곡과 아리아의 밤'의 메인을 '그리운 금강산'으로 장식했으며, '그리운 금강산' 연주 전에 "작품을 통해 고향 인천을 빛내고 시민의 자긍심을 고취"한 선생에 대해 지용택 새얼문화재단 이사장과 박남춘 인천시장은 각각 준비한 공로패를 증정했다.연주회 후엔 리셉션장으로 자리를 옮겨 최영섭 선생을 기리는 '장미 헌정식'을 개최했다. 지역 인사들은 선생의 90세 축하와 건강을 기원하는 마음을 담아 장미 한 송이씩을 전달했다. 또한, 작품을 정리하고 출판 작업을 진행하면서 경제적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 선생에게 후원금을 전달했다. 지용택 이사장은 공로가 있는 선배와 원로를 기리고 모시는 것이 인천의 아름다운 전통으로 자리매김하길 바라는 마음에서 '장미 헌정식'을 기획·추진한 바 있다. 해가 바뀌었지만, 훈훈한 여운은 이어지고 있다.기자가 최영섭 선생을 처음 뵌 건 2007년 8월이었다. '인천인물 100人' 경인일보 특별취재팀원으로서 선생을 인터뷰했다. 기사는 그해 8월 29일자 9면에 게재됐으며, 후일에 책으로도 출판됐다(도서출판 다인아트 刊). 이후 2009년 인천문화재단이 진행한 '인천문화예술 구술채록' 사업의 면담자로 최영섭 선생과 장시간에 걸쳐 이야기를 나눈 바 있다. 선생의 80년 인생을 상세히 들어본 귀한 기회였다. 지난 연말에 열린 연주회에서도 선생을 뵙고 근황을 여쭐 수 있었다.직접 한 인터뷰들을 기초해서 선생의 음악인생 위주로 기술한다.최영섭은 강화군 화도면의 바닷가 마을에서 태어났다. 일찌감치 오르간을 칠 수 있었던 가정 환경으로 인해 찬송가를 화음으로 연주하는 실력이 제법이었다. 길상초등학교 3학년 때 가족과 함께 인천으로 이사온 선생은 창영초교와 인천중학교를 다니면서 음악가로의 꿈을 키워나갔다.하지만, 독자였던 그가 전문적으로 음악을 공부한다고 했을 때, 주위에선 재능을 알면서도 사회 통념상 반대했다. 어머니(신수례·1908~2003, 1998년 정부로부터 '예술가의 장한 어머니상' 수상) 만이 "돈과 명예보다 본인이 하고 싶은 것을 해야 한다"며 최영섭을 응원했다. 어머니의 후원을 등에 업고 1945년 서울 경복중으로 전학해 인천에서 통학하며 이화여대 임동혁 교수에게 작곡 이론을 배운 최영섭은 1947년 작곡한 첫 작품인 '그리운 옛 봄'을 비롯한 가곡 10곡과 피아노 환상곡 '해변', 피아노 모음곡 '절름발이 인형의 슬픔' 등으로 고교 졸업 직전인 1949년 인천에서 작곡 발표회를 가졌다. 최영섭은 서울대 음대 작곡과에 입학해 김성태 교수 아래서 공부를 이어갔다. 하지만, 이듬해 한국전쟁이 발발하고 이 땅의 모든 게 멈춰 선다. 전쟁이 나고 4일 후인 6월 29일부터 최영섭은 인민군에 끌려가지 않기 위해 인천 주안의 농장 복판에 반공호를 파고 생활했다. 9월 15일 연합군의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할 때까지 3개월 가까이 야음을 틈타 전달되는 식량을 먹으며 땅속에 숨어서 지냈다.서울 수복 후 고향을 등졌던 지역 예술가들도 하나 둘 돌아왔다. 우연한 기회에 기독교 계열의 구국학생합창단을 지휘하게 되면서 지휘와도 연을 맺은 최영섭은 합창단과 함께 애관극장과 동인천역 인근의 인형극장 등에서 시민을 위한 위문 공연을 수차례 펼쳤다. 또한, 육군의 후원으로 창단한 인천정훈관현악단의 지휘자로도 활동했다.중공군의 참전으로 합창단과 함께 6개월 동안 부산으로 피란한 최영섭은 연주회와 작곡 활동을 병행했다. 당시 탄생한 작품이 가곡 '망향'이다. 자작시에 곡을 붙였다. 최영섭이 인천으로 돌아온 시기에 경기지구 육군정훈관현악단이 창단하고, 다시 지휘를 맡았다. 인천여중·고, 인천여상에서 교편을 잡기도 했으며, 내리교회 성가대와 인천애호가협회교향악단의 지휘도 했다.'그리운 금강산'은 1961년 한국전쟁 11주년 기념으로 KBS의 청탁을 받아 최영섭과 시인 한상억(1915~1992)이 공동 작업한 칸타타 '아름다운 내 강산' 중 한 곡이다. 강화 출신 두 예술가가 만든 이 칸타타는 '동해의 여명'과 '정선 아리랑 주제에 의한 환상곡'을 비롯해 산·강·바다를 각각의 주제로 한 3곡, 이렇게 모두 11곡으로 구성됐다. 이 중 '그리운 금강산'은 산에 해당하는 노래 중 한 곡으로 산뜻한 가락과 애끊는 호소력으로 맵시있게 짜여졌다. 최영섭은 당시 숭의동 집에서 이틀 밤을 꼬박 새우며 '그리운 금강산'을 완성했다. 곡을 쓰기 전 최영섭은 삼촌에게 일전에 가본 금강산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다. 삼촌의 이야기에 담긴 심상이 음악으로 잘 표출됐으며, 한상억 시인의 시구와도 어우러지며 모든 이들에게 사랑받고 있다.1965년 서울로 이사한 최영섭은 방송음악인이자 편곡지휘자, 또한 대학 강단에도 서며 바쁜 활동을 이어갔으며, 돈과 명예도 얻는다.50년 넘게 서울 생활을 이어가고 있는 최영섭은 인천에서 진정한 '나'를 만들 수 있었다고 돌아본다. 특히 한상억·조병화 시인과 만남은 자신의 작품에 자연의 심상이 깊숙이 자리하게 되는 요소로 작용했다는 것이다.최영섭은 700여 곡의 가곡과 칸타타를 작곡했고, 2017년 재수정을 거친 악보 7권을 완간해냈다. 교향곡, 실내악곡, 모음곡 등의 기악곡도 70여곡에 이른다. 지난 연말 그는 "기악곡들을 모두 수정해 출판하려면 앞으로 몇 년 더 걸릴 것 같다"면서 "기악곡을 모두 수정하고 출판사에 악보를 보내고 내 고향 강화도로 돌아가서 인천시민의 사랑에 보답하며 살아가겠다"고 말했다. /김영준기자 kyj@kyeongin.com최영섭 선생이 지난 10월 말 인천문화예술회관 야외광장의 '그리운 금강산' 노래비에 설치된 음악 청취 시스템을 시연하고 있다. 인천문화예술회관은 버튼을 누르면 노래가 나오는 시스템을 구비했다. 2000년 8월 15일 새얼문화재단이 세운 가로 6m40㎝, 세로 3m80㎝, 무게 30t의 이 노래비에는 악보와 가사, 곡의 의미가 새겨져 있다. 세계에서 가장 큰 노래비로도 알려져 있다. /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지난해 12월 20일 인천문화예술회관 대공연장에서 열린 '제35회 새얼 가곡과 아리아의 밤'에서 최영섭 선생이 인천시와 새얼문화재단으로부터 각각 공로패를 받았다. /경인일보DB/아이클릭아트

2019-01-10 김영준

[한국 근대음악의 발상지 인천·(14)]한국전쟁기와 그 이 후

내리교회 성가대, 1954년 '헨델 명곡' 국내 첫 완주혼란기 악보 필사 열정… 작년 28회째 무대 이어가인천상륙작전뒤 고향 돌아온 음악가들 '승리 염원'9·15수복 기념 '개선 대합창' 등 시대반영 연주회전후 최영섭 등 '애호가협' 중학생 백건우 협연도'제28회 메시아 대연주회'가 성탄절을 사흘 앞둔 지난달 22일 저녁 인천 내리교회 예루살렘 성전에서 개최됐다. 내리교회 메시아위원회가 주최·주관한 연주회에선 헨델(1685~1759·독일)이 280년 전에 작곡한 오라토리오 '메시아' 전곡을 선보였다. 김종현의 지휘 하에 150여명으로 구성된 내리교회 성가대와 오케스트라 단원들은 3시간 가까이 걸리는 이 대곡을 열정적으로 연주해내며, 성전을 메운 청중의 갈채를 이끌어냈다. 1885년에 설립된 우리나라 최초의 개신교회인 내리교회는 한국전쟁 후인 1954년 12월 22~23일 이틀에 걸쳐 우리나라 최초로 '메시아' 전곡을 연주한 것으로도 유명하다.내리교회 성가대는 한국전쟁 후에 처한 혼란기에 새로운 계획을 세운다. '메시아'를 번역해 전곡을 부르자는 것이었다. 당시 우리 사회 전체가 빈곤의 어려움 속에 처해 있었지만, 성가대원인 이선환에 의해 전곡 악보가 3권(총 1천200여권)으로 만들어졌다. 악보는 1954년 2월부터 8월까지 6개월에 걸쳐 등사 원지에 철필로 일일이 그려 등사기에 인쇄해 완성됐다. 악보의 완성 후 성가대원들의 노력으로 그해 성탄절을 앞두고 역사적인 연주회(지휘·김춘하)가 열렸다. 2년 후에 개최된 제3회 연주회에선 후에 '그리운 금강산'을 작곡하는 인천 출신 음악가 최영섭이 지휘하기도 했다.이후 매해 연주회를 여는 게 여의치 않아지면서 1986년까지 6차례 연주회를 개최했다. 그러나 1989년부터 2004년까지 해마다 이어졌고, 지난해 28회째 연주회를 선보인 것이다.인천에서 '메시아' 전곡이 초연되기 직전이었던 한국전쟁 시기에도 지역에선 음악회가 이어졌다. 국군과 연합군이 1951년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으로 인천을 탈환한 이후 예술가들은 고향으로 돌아왔다. 고향 땅을 다시 밟은 음악가들은 국군의 승리를 염원하는 음악회를 개최했다. 시대 상황을 반영한 음악회여서 눈길을 끈다.조우성 전 인천시립박물관장이 쓴 '6·25 전쟁 속에 꽃 핀 인천 문화예술'에 당시 개최된 연주회에 대해 설명한 구절이 있다. "음악인들은 해군 인천경비부 정훈실, 인천신보사, 대한신문사(전시판) 후원으로 '전시 합창의 밤'이란 부제가 붙은 '9·15수복 기념 대음악발표연주회'를 1951년 9월 22일 인천영화극장(仁川映畵劇場)에서 연다. 이날 레퍼토리는 최영섭 지휘의 합창 '우리는 국제연합이다(UN 제정)'를 필두로, 김병일의 피아노 독주 '헝가리 광시곡', 테너 백석두의 '라파로마', 장보원의 피아노 독주 '군대 포로네스', 합창단의 '병사의 합창', 박상만의 바이올린 독주 '추억', 합창단의 '해군인천경비부가', '개선 대합창' 등을 연주해 국군의 승리를 염원하고 있었다."1952년에는 인천시립합창단이 만들어진다. 합창단에 참여한 남녀 음악인들은 대부분 내리교회 성가대원들이었으며 40여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지휘는 최영섭이 맡았다. 특히 합창단은 창단 이후 시립박물관과 학교, 다방 등 장소를 가리지 않고 연주회를 펴면서 음악의 대중화에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후 지역에서 열린 연주회에 관한 기록으로는 1953년 1월에 열린 제22회 음악감상회, 4월에 열린 인천시립박물관 재개관 기념음악회 등이다.전쟁 후인 1956년에는 음악가와 애호가, 은퇴 음악인들에 의해 '인천음악애호가협회'가 창립한다. 협회 산하에 관현악단을 운영했고, 박종성과 주원기, 최영섭을 비롯해 단원은 50여명이었다. 1957년 11월 인천시민관에서 열린 제4차 연주회의 지휘는 최영섭이 맡았으며, 현재 세계적 거장의 반열에 오른, 당시 중학교 1학년이었던 백건우가 그리그 '피아노 협주곡'의 협연자로 나섰다. 인천애호가협회관현악단은 1957년에도 신인음악회를 개최하는 등 지역 신진음악인들에게 기회의 장을 마련해 주기 위한 활동을 이어갔다.한국음악 분야에선 1953년 인천정악원이 창립했다. 창립 2년 후인 1955년에 인천국악원으로 명칭을 바꿨다.이 글에서도 확인되듯이 1929년 강화도 태생으로 인천에서 음악 활동을 편 최영섭의 이름이 한국전쟁 전후해서 자주 등장한다. 앞선 '해방 이후, 지휘자 임원식'(2018년 12월 28일자 9면 보도)에서 밝혔듯이 최영섭은 고교 졸업 직전이던 1949년 작곡 발표회를 개최했다. 당시 최영섭은 피아노 모음곡과 10곡의 가곡을 선보였다. 이후 서울대 음대㎝에서 작곡을 공부했다. 피란 후 인천으로 돌아와서 인천여중·고교 음악교사로 부임한 최영섭은 교사로 활동하면서 구국대학생합창단과 해군경비부 합창단, 인천시립합창단의 지휘를 맡았으며, 인천애호가협회관현악단도 지휘했다.이렇듯 전쟁 때도 지역 예술인들의 예술에 대한 열망은 꺾이지 않았으며, 최영섭의 경우처럼 새롭게 떠오르는 음악가도 나타났다. 조우성 전 관장은 "인천의 문화예술인들은 전시(戰時)에도 음악 등의 예술로 전쟁의 참상을 고발하고, 사랑하는 가족과 집을 잃고 망연자실하는 시민들과 애환을 같이 했다"면서 "자료의 소실 등으로 한국전쟁 시기의 지역 예술사를 구체적으로 볼 수 없음은 아쉬운 대목"이라고 말했다. /김영준기자 kyj@kyeongin.com 그래픽/성옥희기자 okie@kyeongin.com/아이클릭아트지난달 22일 저녁 인천 내리교회 예루살렘 성전에서 개최된 '제28회 메시아 대연주회' 공연 현장. /내리교회 제공·경인일보DB1954년 12월 22~23일 우리나라 최초로 헨델의 오라토리오 '메시아' 전곡을 연주한 후 기념 촬영한 내리교회 찬양대 모습. /내리교회 제공·경인일보DB1954년 우리나라 최초의 '메시아' 전곡 연주회에 사용된 악보 전 3권. 6개월에 걸쳐 등사 원지에 철필로 일일이 그려 등사기에 인쇄했다. /내리교회 제공인천상륙작전 기념관 '자유수호의 탑' 조형물. /내리교회 제공·경인일보DB

2019-01-03 김영준

[한국 근대음악의 발상지 인천·(13)]해방이후, 지휘자 임원식

자주적인 민족주의 음악 '화두' 역동적 시기남한 단독정부 수립후 분리공간서 남북 갈려의주 출신 임원식 하얼빈·동경음악학교 거쳐1946년 첫 고려교향악단 초대 상임지휘자 활동美 줄리아드음대 유학후 KBS 교향악단 창단1984년부터 인천시향 7년간 이끌며 기량 높여국내 음악학자들은 우리 음악사에서 해방공간(1945~1948)은 직후의 분리공간(1948~1950)이나 직전의 식민공간 보다 역동적인 시기였다고 평가한다. 1905년 을사늑약 이후 일제 치하에선 일본과 서양의 음악언어를 익혀 지배권력을 형성한 식민주의자가 민족 공동체 구성원에게 식민지 언어로 의사소통하게 했다. 반면 해방공간에선 민족적 양심선언이라는 윤리성을 제기해야 했다. 체제분단이 굳어져 가는 냉전체계를 극복하고, 우리 음악에 대한 자주적 인식이 대두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식민지시대에 크게 훼손된 우리 음악언어를 자주적으로 정립하는 것은 해방공간 우리 음악계의 과제였다. 이처럼 당시 민족음악론은 윤리·정치적인 면과 함께 미(美)적인 측면에서도 힘을 갖고 있었다.하지만 1948년 8월 15일 남한에서 미국과 이승만의 단독정부가 수립되자 논의된 민족음악론은 힘을 잃기 시작했다. 남과 북은 각각 친미와 친소로 나눠 각자 사상에 부합하는 것만을 선택해야 하는 길에 놓였다. 때문에, 분리공간은 훼손된 민족 정신과 정서의 정화 작업을 요원하게 만든다. 더해서 뜨거운 가슴으로 치열한 행보를 편 민족음악론자들은 월북·잠적하거나 체포·구금(처형)당하게 되고, 민족주의 음악언어는 금기어가 된다. 대신 새로운 정부에 편승한 음악인과 단체가 전면에 나선다.그 시기에 인천 음악계의 움직임은 자세히 살펴지지 않는다. 지역에서 열린 음악회들이 신문 등 기록을 통해 전해진다. 1945년 10월 이재민 돕기 음악회가 개최되고, 이듬해엔 영화학교 개교기념 음악대회가 열렸다. 또한 각종 현상음악회(콩쿠르를 의미하는 것으로 보임)가 열리고, 서울관현악단과 이화여대 합창단의 인천공연도 개최됐다. 1949년 최영섭 작곡발표회와 1950년 인천시립교향악단의 모태인 인천교향악단의 연주회 등이 눈에 띈다.우리나라 1세대 음악학자 중 한 명인 노동은(1946~2016)은 1980년대 후반에 발표한 장편 논문 <해방과 분리 공간의 음악사 연구>에서 "1948년 8월 15일 서울시가 주최한 정부수립 경축 공연에 '서울교향악단'의 출연은 남한 체제의 건재함과 '고려'에 대한 '서울'의 승리, 창작가 보다 연주가의 우위성 등을 안겨다 주는 상징성을 가지고 있었다. '서울'의 승리는 1948년 11월 27일~12월 1일에 있었던 베토벤 '합창교향곡'(서울대 예대 합창단) 연주를 거쳐 1950년 2월 24일 서울특별시 문화상 수상 단체로 선정한 데서도 전면에 부각됐다"라고 분석했다. 서울교향악단의 전신인 고려교향악단은 광복 직후인 1945년 9월 계정식과 김생려, 현제명을 중심으로 창단한 우리나라 최초의 교향악단이었다. 창단 초기 지휘는 주로 계정식이 했다. 1946년 초 임원식(1919~2002)이 고려교향악단의 초대 상임지휘자가 됐다. 그는 당대 유일한 전문 지휘자였다. 임원식은 부임한 그해 6월 정기 연주회를 마지막으로 사임하고 미국 유학길에 오른다. 고려교향악단의 재정난이 심화하던 시기였다. 단독정부 수립 이후인 1948년 10월 정기연주회를 끝으로 악단은 해체하고, 단원들은 서울관현악단원들과 함께 서울교향악단으로 흡수된다. 앞서 인용한 논문에서 노동은은 해방공간의 우리 음악상황(고려교향악단)이 분리공간(서울교향악단)으로 바뀐 것을 서울의 교향악단을 예로 들어 설명한 것으로 볼 수 있다.후일 인천과도 깊은 인연을 맺는 임원식은 평북 의주에서 태어났으며, 1939년 하얼빈 제일음악학원을 졸업했다.1942년 피아노 전공으로 동경음악학교에 입학해 당시 유학 중이던 김원복, 전봉초, 윤기선 등과 교류했다. 이후 고려교향악단을 이끌다가 사임 후 미국 줄리아드 음대에서 지휘자 과정을 수료하고 1948년 돌아온다. 한국전쟁 후 임원식은 1956년 KBS 교향악단을 창단해 초대 상임 지휘자가 되었으며, 1969년 국립교향악단이 된 후에도 1971년까지 상임지휘자 직책을 유지했다. 1961년에는 국내 최초의 예술 전문 고등교육 기관인 서울예술고등학교를 설립해 초대 교장도 역임했다.1967년 '동백림사건'에 연루된 혐의로 윤이상이 서울에 압송돼 재판을 받자, 구명을 위한 서명 운동을 벌였고 재판정에서도 증인으로 출석해 무고함을 호소했다. 베를린 교향악단 연주회에 객원 지휘자로 초청받았을 때에도 윤이상의 '무악' 을 연주했다. 그로 인해 국내 보수 음악인들의 질타를 받기도 했다. 국립교향악단 상임지휘자에서 물러난 이후 이렇다 할 자리가 없었던 것도 보수 음악인들의 방해 때문이라는 견해도 있다. 그로 인해 1984년 지역 단체인 인천시립교향악단으로 오게 됐다는 것이다. 제2대 인천시립교향악단 상임지휘자에 오른 임원식은 1990년까지 7년 동안 재임하면서 악단의 기량과 음악성 향상에 이바지했다. 1992년에는 악단으로부터 명예 상임지휘자 직책을 받기도 했다.1980년대 학창 시절을 보내면서 임원식이 지휘하는 인천시립교향악단의 공연들을 관람했으며, 대학에서 성악을 공부한 후 현재 지역 문화계에서 활동하고 있는 한 인사는 "임원식 선생이 인천시립교향악단에 오시기 전까지 시민으로서 문화와 체육 분야에서 자부심을 가질 만한 요소들이 많지 않았다"면서 "시립교향악단의 경우 전국에서 최하위 수준이었는데, 선생이 오신 이후 '서양 음악을 받아들인 인천'의 수준을 보여줬던 것 같다. 또한 1989년엔 프로야구 태평양 돌핀스가 첫 포스트시즌에 진출(준플레이오프에서 삼성에 승리, 플레이오프에선 해태에 패배)하면서 시민들에게 힘을 주는 요인들이 있었다"고 당시를 떠올렸다. /김영준기자 kyj@kyeongin.com 그래픽/박성현기자 pssh0911@kyeongin.com/아이클릭아트인천시립교향악단 연주중인 임원식 지휘자. /인천문화예술회관 제공인천시립교향악단 제2대 상임지휘자 임원식. /인천문화예술회관 제공1987년 4월 홍콩서 개최된 인천시립교향악단의 공연을 소개한 전단지. /인천문화예술회관 제공

2018-12-27 김영준

[한국 근대음악의 발상지 인천·(12)]엡윗청년회와 이우구락부

'엡윗청년회' 인천 내리교회서 최초 결성을사늑약 항의시위 해산…1916년 재조직이후 국악연구단체 '이우구락부' 멤버로인천광역시는 2015년 '한국 최초, 인천 최고 100선'(인천역사문화총서 74)을 간행했다.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책에는 인천의 역사·문화 속에서 한국 최초이자 인천 최고(最古)의 사실들이 담겼다. 간행 이후 시는 해당 건물이나 장소에서 자체 개발한 상징 아이콘 현판식을 진행했다. 지난해 6월 시는 인천 중구의 내리교회에서 현판식을 개최했다. 1885년 설립된 우리나라 최초의 개신교회인 내리교회를 세상에 다시 한 번 알린 자리였다. 더불어 '엡윗(Epworth)청년회'에 대한 현판식도 함께 열렸다. 엡윗청년회는 1888년 미국 시카고에서 창설한 감리교회 청년단체이다. 감리교회 창시자인 존 웨슬리(1703~1791)의 출생지가 엡윗이었다. 국내에서 엡윗청년회는 1897년 중앙 조직을 갖췄다. 이후 지역 교회로 전파되는데, 가장 먼저 엡윗청년회가 생긴 곳이 인천 내리교회였다.내리교회 엡윗청년회는 인천 청년운동의 출발점이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을사늑약 이후 조약에 항의하는 무력시위를 벌인 게 빌미가 돼 엡윗청년회는 1906년 해산한다. 1916년 재조직 후 이전 회원에 신규 회원들까지 가세하면서 사회, 경제, 문화 등 다 방면에서 활동했다.동아일보 1921년 10월 29일자에 '인천엡윗음악강연'이라는 제목의 기사는 인천남자엡윗청년회 음악부가 주최한 내리예배당 강연회를 예고하고 있다. 기사 상에는 회원과 함께 일반 시민의 참여도 독려하고 있다. 1920년 2월 우리나라 최초의 지역 문예지 '개척(開拓)'을 펴내기도 했던 인천 엡윗청년회의 활동은 고전 국악 연구단체 '이우구락부(以友俱樂部)'와도 맥이 닿아있다. 이우구락부는 우리 음악 연구와 공연을 통해 민족혼을 고취 시키려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신문 기사와 각종 기록에 따르면 이우구락부는 일제가 문화정책을 실시하자 국악을 통한 민족 문화의 전통을 모색하면서 각종 음악회와 토론회, 웅변대회 등을 열거나 참여했다. 이를 통해 애국계몽활동을 전개하고자 했던 것이다.인천교대 기전문화연구소의 <기전문화연구 4집>에 수록된 노영택의 논문 '일제하 인천의 청소년운동에 관한 연구'에 따르면, 이우구락부의 간부는 하상훈, 서병훈, 최선향, 이범진 등이었다. 감리교 선교사에 의해 설립된 영화초등학교 초기 졸업생인 하상훈은 내리교회 앱윗청년회 회장이었다. 기타 간부들 역시 내리교회의 신자들이었다고 한다. 때문에 논문에선 이우구락부를 내리교회 계열의 청년들로 구성된 단체로 정의한다.또한, 이우구락부는 동아일보 인천지국 안에 본거지를 두었다. 동아일보 초대 인천지국장이 하상훈, 부지국장이 서병훈이었으며, 총무는 최선향, 경제부 기자는 이범진이었다. 이처럼 동아일보와 연관이 깊은 인물들이 이우구락부에 참여했다.<인천시사>에 이우구락부에 대해 기록한 대목이 있다. "이 단체의 창립 연대는 정확히 알 수 없고, 처음에 인천부 내리에 임시 본부가 있다가 후에는 용강정에 회관이 있었다. 이 단체 역시 전체적인 임원 명단은 알 수 없으나 1923년 4월 27일 제7회 정기총회에서 개선된 임원은 부장 하상훈, 총무 서병훈, 학습과장 고주연, 도서과장 박충의, 운동과장 라시극, 식산과장 전두영, 평의원 윤육 외 9인 등이다. 1924년 직제를 간부제로 변경하여 임원을 개선한 뒤에도 역시 하상훈이 간사장이 되고 서무 서병훈, 학습 최선경, 도서 이범진이었다."<인천석금>에서 저자 고일 선생은 자신의 견해를 더해서 이우구락부를 소개하고 있다. "인천의 음악 운동을 살펴보면, 초기 고전 국악 연구 단체로 동아일보 인천지부 건물에 있던 이우구락부가 있었다. 일제 치하에서 죽림칠현 격으로 세상을 등지고 살았던 것은 고상한 음악 동지가 필요한 데서 나온 성싶다. 구락부 명칭은 '이문회우(以文會友)'라는 말에서 따온 것 같다. 주요한 부원으로는 최선경, 송균, 서병훈 씨와 동아일보 사원들이었다. 이들 7인은 일주일에 한 번씩 회식을 하면서 정담을 나누기도 했다." '청년회' 회장 하상훈 등 사회 다방면 활동동아일보 사원 다수, 음악동지로 정기모임국악·양악 어우러진 공연 후원 대성황도<인천시사>에서 보듯이 이우구락부의 창단과 해산 시기에 대한 정확한 기록은 없다. 이우구락부 관련 기사는 1920년부터 1927년에 걸쳐 동아일보에서 검색된다. 기사에선 이우구락부가 당시 인천에서 개최한 각종 음악회와 관련된 내용을 볼 수 있다. 음악회 기사에 표출된 출연자 항목에 이우구락부로 표기된 것을 봤을 때 회원 각자가 연주 활동을 한 전문 음악인들로 보이진 않는다. 이 글에서 소개된 이우구락부에 가담한 인물들을 소개한 후대 기록에서 악기를 잘 다뤘다고 표현한 부분도 있지만, 예술인이라기 보다는 주로 언론인 혹은 사회활동가로 규정하고 있다. 때문에 음악애호가들도 다수 포함되어 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각종 공연을 적극 주최하고 후원한 부분도 확인할 수 있다.동아일보 1920년 8월 24일자에 '인천의 음악대회' 기사가 있다. 인천부 가무기좌에서 열린 음악회는 우리음악과 서양음악이 어우러졌으며, 대성황을 이뤘다고 밝히고 있다. 또한, 음악회는 한용단과 이우구락부가 후원했다고 표기돼 있다.지역 문화계 원로 중 한 명인 김윤식 시인은 "개항 이후 새로운 사회 풍조와 더불어 신문물이 도입되는 와중에 우리 국악을 애호하고 보전하기 위해 처음으로 단체를 결성하고 활동했다는 것은 대단히 선구적이고 동시에 우리 인천 문화사에 있어서 상당히 의미 있는 부분"이라고 의의를 설명했다. /김영준기자 kyj@kyeongin.com그래픽/박성현기자 pssh0911@kyeongin.com/아이클릭아트1901년 준공된 내리교회. /인천시 제공현재 인천 내리교회 모습. /김영준기자 kyj@kyeongin.com인천 엡윗청년회가 1920년 2월 펴낸 우리나라 최초의 지역 문예지 '개척(開拓)'의 표지. /인천문화재단 제공하상훈 /인천문화재단 제공

2018-12-20 김영준

[한국 근대음악의 발상지 인천·(11)]기생조합 권번(券番)

조선시대 국가서 궁중의식 음악·춤 등 집중훈련갑오개혁후 관기 사라지고… 일제하 '권번'으로공창제 등 이미지 왜곡 불구 일부 '아이돌' 부상중구 용동권번 출신 장일타홍·이화자 등 유명세1930년대 민요·가요 레코드 녹음… 재조명 필요 인천 기생은 인천기생조합에서 어린 시절부터 기생 공부를 했다. 조합은 권번(券番)이라 했다. 권번에서는 노래와 춤을 가르쳤는데, 평양의 기생학교만은 못 했어도 선생을 앉히고 가르쳤다. 지금 용동권번 자리에는 미용사기술전수학교가 들어섰다. 기생조합 시대에 걸출한 포주 최성인이 조합장이 되었었고, 최후의 권번 대표는 낙원 주인이었다. 인천 기생은 수준이 서울보다 낮고, 개성보다는 높았다. 개성은 갑, 을 2종이었으나, 인천에는 을종이 없었다. 그 옛날의 관기보다는 신세대에 속했고, 카페나 바 종사자보다는 틀이 잡힌 예술가였다. 유행 가수로 진출하여 전국적으로 유명했던 이화자는 인천 기생으로 '어머님 전상서'를 레코드에 취입했으며, 같은 레코드 가수 장일타홍도 용동권번 출신이었다. -고일 著 <인천석금> 중에서조선의 기생((妓生)은 악(樂)·가(歌)·무(舞)·시(詩)·서(書)·화(畵)에 능통한 종합예술인이었다. 그들은 당대 우리 문화예술의 수준을 대변하는 예술가였으며 자유인들이었다.이들은 궁중의식에서 음악과 춤을 담당했던 관청인 장악원에 소속돼 오늘날 '예술 영재교육'과도 같은 집중 훈련을 받았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예술은 물론, 산술과 해외 문화까지 두루 섭렵했다.하지만 1894년 갑오개혁 당시 나라에서 관리하는 관기 제도가 사라졌으며, 일제는 기생을 춤과 노래를 공연하는 '기생'과 성매매를 하는 '창기'로 구분 지었다. 또한 기생에게 자체적으로 조합을 설립하라는 규정을 만들었으며, 1915년 기생조합은 일본식 표현인 '권번'으로 명칭이 바뀌었다.이때까지만 해도 기생은 독립 자금을 몰래 마련해 전달하고, 지역 학교 신축을 위한 기금 마련 행사에 참여해 쾌척하는 등 신여성으로서의 이미지도 안고 있었다. 하지만, 조합이 생기면서 이들의 공연 무대는 요릿집으로 한정됐으며, 일제가 만든 공창제도가 더해지며 기생의 이미지는 철저히 왜곡되기 시작했다. 이전까지 자부심을 지녔던 기생들은 신분을 숨기고 더더욱 음지로 들어가는 상황이 발생했다. 그와 반대 급부로 공연 예술에 능통했던 기생들은 라디오와 잡지, 영화가 보급되면서 '대중 스타'로 급부상하기도 했다.100년 전 기생의 삶을 떠올리며 인천 중구의 용동권번 자리를 찾았다. 현재 권번의 흔적은 1929년에 만들어진 돌계단과 그 곳에 새겨진 '용동권번(龍洞券番)' 뿐이다. 비교적 선명하게 음각된 이 글자는 2011년 동사무소에서 계단 보수 공사를 하면서 이 돌계단을 시멘트로 덮어버리는 일이 있었다. 하지만, 지역 문화계의 요구에 시멘트를 벗겨냈다. 현재 보행 안전 때문인지, 골목길 전체는 붉은색 바닥으로 마감되어 있다. 철판이 덧대어진 위에서 5번째 계단에 새겨진 '龍洞券番'을 볼 수 있는데, 철판이 빛을 가려서 자세히 들여다 봐야 확인할 수 있다.1920년대로 다시 돌아가 보자. 고 신태범 박사가 쓴 '개항 후의 인천 풍경'에는 인천의 권번에 관한 구절이 있다."목로주점과 방술집도 늘어났지만 격이 높은 유흥업소가 등장했다. (미두장의 번창으로) 돈을 벌었다고 마시고, 잃었다고 마시는 것이 술이고, 술에는 으레 여자가 따르게 마련이다. 씀씀이가 크고 돈 출입이 잦은 미두꾼이 늘면서 요릿집과 기생 권번이 생긴 것이다. 일월관, 용금루, 조선각 등이 문을 열고 소성권번이 출현했다."용동권번은 인천의 옛 이름을 따 소성권번으로도 불렀다고 한다. 1930년대 들어 우리나라엔 유행가와 댄스 바람이 일기 시작했고, 앞서 언급했듯이 기생이 대중 스타로 부상한다. 용동권번 출신 기생에 관한 기록도 확인할 수 있다. 1935년 8월 1일 발간된 잡지 <삼천리>에 게재된 '삼천리 기밀실'이라는 가십 기사에 인천권번의 장일타홍이 서울 콜럼비아 레코드회사 소속 유행가수로 나와 있다. 현재까지 장일타홍의 출생 연대나 가계, 결혼 등 개인 신상에 대해선 정확히 알려진 바가 없으나, 장일타홍의 노래는 확인된다. 1934~1935년 콜롬비아에서 20곡을 녹음했다. 주로 경기잡가를 비롯한 민요곡이며 가요도 몇 곡 있다.용동권번 출신으로 이화자도 장일타홍과 거의 비슷한 시기에 활동한 것으로 알려진 가수다. 1938년 8월 1일 발간된 잡지 <삼천리>에서 이서구는 '유행가수 금석 회상'이란 글을 통해 "이화자의 신민요는 선우일선에 비하야 선이 굵다. 그 대신 깊은 맛이 있다. 이 점에 이화자의 새로 개척할 길이 있지나 않을까 한다"고 평가했다. 신인급인 이화자에 대해 좋은 평가를 내린 것이다.가수가 되기 이전이었을 1934년 8월 12일자 <조선중앙일보>는 인천지국발로 '인천권번 기생들도 의연금 모집 활동, 홍등 하에서 웃음 파는 그들의 이 가상한 독행!'이라는 기사에서 이화자를 거명하기도 했다. 이화자는 1935년 혹은 1936년 신민요 스타일의 가요 '초립동'으로 데뷔했다고 한다. 1940년까지 해마다 곡을 발표하고 인기를 얻었다. 하지만, 아편에 손을 댄 이후 나락의 길을 걸은 이화자는 1950년에 이른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지역 문화계 원로인 김윤식 시인은 "기생을 달리 이르는 말인 '해어화(解語花·말을 알아듣는 꽃)'에서 알 수 있듯이 한 송이 꽃으로서 웃음을 팔았지만, 그들은 인천인으로서 분명 우리 음악사를 장식한 인물"이라고 말했다.역사학자인 강덕우 인천개항장연구소 대표는 "용동권번과 그 곳에 몸 담았던 인물들로 새로운 스토리텔링이 시급하다"고 말했다. /김영준기자 kyj@kyeongin.com 그래픽/성옥희기자 okie@kyeongin.com/아이클릭아트용동권번 기생들의 모습. /'골목, 살아(사라)지다' 발췌현재 용동권번 계단 모습. (위에서 네번째 철갑을 두른 계단)용동권번 기생들의 공연 모습. /'골목, 살아(사라)지다'(인천광역시 刊) 발췌

2018-12-13 김영준

[한국 근대음악의 발상지 인천·(10)]김영의 박사

영화학당 거쳐 서울 진학… 고교 졸업 무렵 두각이화여자전문학교서 연마하다 조교직도 겸해1930년대 美음대서 공부하며 안익태와 무대올라 국내 복귀 후엔 예술위원 등 다양한 활동 펼쳐다소 쌀쌀한 바람이 불던 초겨울 한낮에 서울 서대문구의 이화여자대학교를 찾았다. 정문을 통과해 우측으로 가다가 오른편 중앙도서관 옆에 있는 음악관 1층 현관문을 열고 실내로 들어섰다. 곧이어 김영의 기념연주홀(통상적으로 김영의홀로 칭함)을 만날 수 있었다.홀로 들어가는 문 옆 벽에 설치된 동판을 찬찬히 읽었다. 동판에 적힌 내용은 다음과 같다.김영의 박사는 1929년 이화여자전문학교 음악과를 졸업하신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음악예술계와 음악교육계의 지도자로써 활약하셨고 특히 이화여자대학교 음악대학에 봉직하시면서 학교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하셨기에 이를 기념하여 이 대연주실을 김영의 기념연주홀 이라 이름한다. 1981.8홀에 들어서니 나열된 객석과 그 너머에 펼쳐진 무대를 볼 수 있었다. 이내 무대 뒤 벽면에 설치된 파이프 오르간이 눈에 들어왔다. 점심시간 즈음이어선지 학생 두 명이 파이프 오르간을 치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악보를 보고 건반을 누르며 의견을 나누는 모습이 진지했다.우리 음악계의 미래인 학생들의 무한한 발전을 마음속으로 기원하며 돌아섰다. 김영의홀에 가기 전 출입문이 잠겼거나, 조명이 꺼져 있어서 홀의 전모를 보지 못할 것에 대한 우려가 있었다. 불 밝힌 홀을 여유롭게 둘러보고 가슴에 담은 후 나서는 발걸음이 가벼웠다.이화여대에 따르면 음악관은 지하 2층, 지상 6층 규모로 1981년에 완공됐다. 이 건물에는 김영의홀로 명명된 500여석의 대연주실, 국악연주실, 음악도서관, 관현악연습실, 시청각실 등 음악교육에 필요한 현대적 시설이 갖춰져 있으며, 음악대학이 전용하고 있다.인천 출신으로 영화학당(현 영화초등학교)을 졸업했으며, 미국 줄리아드 음대에서 유학한 우리나라 첫 피아니스트 김영의(1908~1986)의 흔적을 더듬었던 시간이었다.김영의의 대학 시절 이후의 활동들은 대체로 알려져 있으나, 인천에서 삶이나 흔적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하지만, 어린 시절 서양 선교사들을 통해 접한 음악과 스포츠 등이 20세기 중반 우리나라 최고의 피아니스트로 자리매김하는 데 중요한 기반이 됐을 것이다.김영의는 1920년 3월 영화학당 졸업 후 서울 이화학당을 거쳐 이화여자고등보통학교를 1924년 3월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다. 고교 졸업 즈음부터 뛰어난 피아노 솜씨를 선보였다고 한다.<영화 백년사>의 '멋쟁이 음악가 김영의 학장' 편에 고교 졸업 시기의 연주자로서 김영의에 대해 묘사된 대목이 있다. "그 당시 천부적 재질을 가진 김영의는 특히 음악에 뛰어난 솜씨로 피아노 건반위에서 손가락들이 번개같이 불꽃 튀기는 연주로 듣는 이들로 하여금 신비경으로 이끄는 무아지경으로 몰아넣어 황홀케 하여 서울 장안의 총인기를 끌기도 하였다."이 같은 음악적 재능을 더욱 연마하기 위해 1925년 3월 이화여자전문학교 음악과에 입학해 음악이론과 피아노를 전공하고 1929년 3월 졸업했다. 그해 이화여자고등보통학교 음악 강사로 부임해 2년간 있다가 1931년 3월 이화여자전문학교 음악과 조교로 자리를 옮겼다.언론인 홍종인(1903∼1998)은 '반도 악단의 만평'이라는 글을 통해 여러 음악인들을 하나하나 평가했다. 이 글은 1931년 6월 발간된 잡지 <동광>에 실렸다. "김영의 양 이전(梨專) 음악과를 나온 지 3년 퍽 실력 있다고 한다. 독주보다는 반주하는 것을 많이 보았다. 그만하면 퍽 능숙한 줄만은 믿으나 스테이지에서 좀 더 감격하여 보이는 듯한 침착미가 적어 보인다. 기량이 좋은 까닭인지." 아마도 홍종인은 충실한 전달자로서의 연주가 아닌 연주자 본인의 감정이 과하게 이입된 연주였음을 지적하는 듯하다. 글 말미 기량 자체는 인정하고 있다.이어서 <동아일보> 1935년 6월 20일자에 '김영의 양 송별 독주회'가 21일 오후 8시 이화여자전문학교 강당에서 열린다는 단신 기사가 게재됐다. 이 연주회는 이화여자전문학교 음악관 강당의 개관 기념 연주회이기도 했다. 그해 지어진 음악관은 당시로선 호화스러운 조명으로 장식된 무대를 갖췄다. 김영의는 강당 개관 기념과 자신의 고별을 겸한 연주회를 펼쳤으며, 청중으로부터 박수갈채를 받았다고 한다.연주회 후 도미한 김영의는 1939년 줄리아드 음대를 졸업했다. 미국에 있는 동안 각종 음악회에도 열심히 참관했으며, 연주회도 가졌다. 1937년 뉴욕인터내셔널하우스에서 한인들의 모임이 있었을 때 안익태가 첼로 독주를, 김영의가 피아노 독주를 했다는 기록도 있다.귀국 후 다시 이화여자전문학교에서 교편을 잡았으며, 1945년 해방 직후 37세의 나이에 대학 음악과장과 예림원장(예술대학장)을 겸직했다. 1944년 경성음악연구원 창설에 참여하고, 1949년 문교부 내 설치된 예술위원회의 음악위원으로 선임 되는 등 연주와 교육 외에도 활발한 활동을 벌였다. 한국전쟁 발발 후 부산 피난기였던 1951년 국방장관 신성모와 결혼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그해 12월 문교부 요청에 따라 단과대 명칭이 바뀌면서 예림원장에서 예술대학장이 되었다. 1958년 미국 퍼시픽대에서 1년간 연구 후 귀국해 복직했으며, 1973년 정년퇴직했다. 퇴직 후에도 1977년 이화학당 재단이사장으로 있었으며, 1986년 11월 26일 타계했다.인천지역 문화계 원로 중 한 명인 김윤식 시인은 "우리나라 교육계의 초기 지도자로서, 음악계의 주춧돌로서, 그의 공로는 적다고 할 수 없다"면서 "그가 비록 고향 인천에 아무런 족적을 남기지 않았다 하더라고 그의 모든 '한국적 업적'이 고스란히 우리 인천의 자랑거리가 될 수 있다"고 의미를 설명했다. /김영준기자 kyj@kyeongin.com김영의홀 출입구쪽 벽면에 장식된 동판. /이화여대 제공이화여자대학교 음악관 1층에 자리한 김영의홀에서 열린 연주회 모습. /이화여대 제공이화여자대학교 음악관 전경. /이화여대 제공김영의 박사 /이화박물관 제공

2018-12-06 김영준

[한국 근대음악의 발상지 인천·(9)]교가(校歌)

국내 첫 서구식 교육기관, 1892년 영화학당순수 민간학교 첫 설립은 1903년 제녕학교각각 영화초교·창영초교로 현재까지 명맥대학수학능력시험이 이달 중순 전국 고사장에서 일제히 치러졌다. 해마다 그렇듯 이른 시간부터 수험장 마다 배치된 각 학교 후배들은 열띤 응원전을 펼치며 선배들의 '수능 대박'을 기원했다. 후배들은 수험생들을 위해 저마다 각종 구호와 힘찬 노래들로 응원전을 준비했다.(11월 15일 인터넷 보도) 이른 아침 시간에 모인 후배들이 목청껏 부르는 각 학교의 교가(校歌)들은 각별한 의미로 다가왔다. 마치 '학교의 모든 기를 모아서 응원을 보내니 힘을 내서 시험 잘 치르고, 학교의 이름도 널리 알려달라'는 바람이 담긴 듯한 모습이었다. 이렇듯 학교의 정신을 반영한 교가는 학생들로 하여금 애교심과 단결심을 갖게 한다. 또한, 학교의 교육관도 담고 있다. 교가는 학교의 의례나 체육대회, 축제 등 각종 행사에서 부르는 노래이다. 때문에, 졸업 후 성인이 되어서도 학교를 떠올리며 교가를 읖조리게 된다. 이처럼 학창 시절 부르는 횟수가 많은 교가는 학생들의 음악적, 심성적 측면에 미치는 영향이 크다. 수업 외 학교생활에서 부르는 교가의 교육적 영향력이 결코 무시될 수 없음을 알려주는 대목이다.1. 황해바다 푸른물결 소리 들으며 우뜩솟은 문학산봉 바라 보라 보면서 배움의 길 닦고 닦는 대한의 딸들 이룩하세 주의 뜻을 우리의 땅에2. 샛별보다 슬기로운 우리 눈동자 뿌리깊은 백향나무 기상을 삼고 한데뭉쳐 진리찻는 영화 학도야 삼천리에 새벽종을 등불이 되세3. 푸른 마음 높은 뜻을 길벗을 삼아 빛내리라 영화학당 힘을 합하여 거룩하다 주의 이름 길이 받들어 우리겨레 이강산에 빛을 삼으리영화학당 교가 (1913년), <영화 백년사(1892~1992)> 발췌개항지 인천은 신교육 발상지이기도 하다. 우리나라 최초의 서구식 초등 교육 기관인 영화학당(현 영화초등학교)이 1892년에 문을 열었다.(11월 16일자 9면 보도) 인천 관학의 효시인 관립인천외국어학교(현 인천고등학교)는 고종의 칙령에 따라 1895년 개교했다. '간추린 인천사'(인천학연구소 刊)에 따르면 인천외국어학교 초기 수업 연한은 3년 과정의 영어과와 일어과가 있었다.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자 영어과를 폐지하고 1909년 학교명마저 관립인천일어학교로 개정했다. 해방 후인 1949년 인천공립상업학교에 이어 1951년 인천고등학교로 교명 변경 후 현재에 이르고 있다.송도고 교가, 초기의 음악적 원형태 유지1906년 개성서 윤치호가 설립 첫 가사 써'천년고도' 등 표현 인천 이전前 작사 추정인천에서 종교 계통이거나 관학이 아닌 순수한 민간 학교로서 처음 문을 연 곳은 제녕학교였다. 1903년 6월 인천의 유지 서상빈이 신학문을 가르치기 위해 제녕학교를 설립했다. 러일 전쟁 후 침몰한 바랴크호의 인양을 맡아 거금을 쥔 김정곤이 도움을 줬다. 인천시가 펴낸 인천역사문화총서 74 '한국 최초 인천 최고 100장면'에 제녕학교에 대한 기록이 상세히 나와 있다. 서상빈은 우리나라 최초의 상인단체이자 상공회의소의 전신인 인천신상협회를 설립해 실질적인 사장 역할을 했다. 이처럼 제녕학교 설립에는 인천신상협회와 지역 유지들이 힘을 모았다. 제녕학교는 학생 수가 120명에 달할 정도로 발전했다. 그러나, 1906년 이후 학교 운영 경비를 전부 제공했던 인항전운회사 재정이 넉넉하지 못해 교비를 마련하기 어려운 지경에 봉착했으며, 1907년 인천공립보통학교(현 창영초등학교)에 통합돼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인천공립보통학교가 현재 명칭인 '창영'을 갖게 된 건 1936년 인천창영공립보통학교로 바뀌면서다. 창영초교 구 교사는 인천광역시 유형문화재 16호로 지정돼 있다. 학교들은 교표와 함께 교목, 교화, 교가 등 저마다의 상징을 갖는다. 100년 이상의 역사를 자랑하는 지역 학교들 중 개교 당시나 초기 교가의 원형을 확인할 수 있는 학교는 찾기 힘든 가운데, 송도고등학교의 경우 음악적 측면에서만 그 원형을 유지하고 있다. 1906년 개성에서 설립된 송도고 교가의 첫 가사는 학교 설립자인 윤치호(1865~1945)가 썼다. '애국가'의 작사가로 언급되는 그는 교회 '찬미가'도 다수 쓴 것으로 알려져 있다. '송도학원 90년사'(송도중·고등학교동창회 刊) 등에 따르면, 교가의 곡은 미국 남북전쟁 당시 군가로 사용됐던 노래다. 1857년 작곡된 이 곡은 코넬대학교와 에모리대학교, 밴더빌트대학교 등 미국 다수의 학교에서 교가로 사용되고 있다. 에모리대학교에서 유학한 윤치호가 미국 교가 문화를 우리에 접목한 것으로 유추할 수 있다. 당시 우리나라에선 스코틀랜드 민요인 '밀밭에서'와 '올드랭사인'에 각각 가사를 붙인 '경부철도가'와 '애국가' 등 서양음악 선율에 가사를 붙여 부르는 일명 '노래 가사 바꿔 부르기'가 유행할 때였다. 현재 송도고 교가 가사의 원형은 이상춘이 쓴 것으로, 1절 가사에서 개성을 나타내는 문구 '산수 좋고 역사 깊은/천년고도에'가 있는 것으로 볼 때 송도고가 인천으로 이전(1952년)하기 전에 쓴 것으로 보인다.해방·한국전쟁후 교가제정 관행 현재까지대부분 일률적 구성… 특색있는 작품 기대영화초등학교의 경우 1913년 3월 교가가 제정됐다. '영화 백년사(1892~1992)'(이성삼 박사 집필·영화학원 刊)에 3절로 이뤄진 당시 교사 가사 전문이 기록돼 있다. 하지만, 작곡자와 작사가의 이름은 알려지지 않았다. 교가 가사에는 '황해바다'와 '문학산봉' 등 공간적 배경이 나오며, '주의 뜻', '주의 이름' 등의 노랫말을 통해 신앙에 입각한 근면함과 성실성을 강조하고 있다. 현재 불리는 영화초등학교 교가는 1953년(이은상 작사·김용환 작곡)에 만들어졌다.이 밖에 역사를 지닌 지역 학교들의 현재 교가는 작사·작곡가의 이름 등을 유추해볼 때 해방 후부터 1950~1960년대 만들어진 곡들로 판단된다. 이전 곡들은 한자 용어가 많고, 전래 과정의 서양음악을 활용하다 보니 구조가 단순해서 이에 맞춰 가사가 짧을 수밖에 없었다. 또한, 일제시대와 해방 후 시기에 우리 학제가 바뀌면서 교명이 변경된 경우도 있고, 교육 내용도 수정됐기 때문으로 보인다. 우리나라 교가 대부분은 서양의 7음 음계를 바탕으로 만들어졌으며, 남녀 학교 구분 없이 박자(4분의4박자)도 행진곡풍으로 일률적이다. 해방 후와 한국전쟁 후에 이뤄진 교가 제정 관행이 그대로 이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앞으로는 학교의 이미지와 특성을 반영한 개성 넘친 다양한 교가가 나타나길 기대해 본다. /김영준기자 kyj@kyeongin.com제녕학교 설립을 주도한 인천신상협회의 장정(章程). /인천시 제공주민들의 성금으로 1907년 세워진 인천 최초의 공립보통학교가 지금의 창영초등학교이다. 인천 지역 교육사에 이정표를 세운 곳이며, 한국 근대사를 대표 할 수 있는 건축물이다. /경인일보DB

2018-11-29 김영준

[한국 근대음악의 발상지 인천·(8)]인천공회당

인천 송도국제도시 센트럴파크 인근의 인천도시역사관이 1년 전 내부 리모델링 후 현재의 모습으로 문을 열었다. 인천도시역사관은 2009년 인천세계도시축전 당시 '인천도시계획관'으로 개관했으며, 얼마 후 관명을 변경해 '컴팩스마트시티'로 운영되다가 2014년 인천시립박물관에 인수됐다. 2017년 12월 인천의 도시 역사와 발전과정을 담는 공간으로 거듭난다는 의미에서 현재의 이름을 달고 시민을 맞이하고 있다. 인천시티투어 버스의 출발지에 면해 있는 인천도시역사관은 전체적인 전시 구성을 크게 1층 근대 도시관, 2층 현대 도시관, 3층 도시 생활관으로 설정했다. 1883년 제물포 개항 이후 1945년 광복까지 인천의 도시 성격과 공간이 어떻게 변화되어 왔는지를 볼 수 있는 1층 전시관 한 쪽에선 20세기 초반의 인천 중심가를 만날 수 있다. 전시관에선 모형으로 제작된 당시 건물들 볼 수 있는데, 3개월 여에 걸쳐 붉은 벽돌 모형을 세심하게 구현했다는 '인천공회당(仁川公會堂)'이 단연 눈길을 끌었다. 모형 앞에 설치된 안내문에 '인천공회당'에 대한 설명이 이같이 되어 있다. 1914년 부제(府制) 실시와 함께 각국의 조계가 폐지됨에 따라 인천에 살고 있던 인천일본거류민단은 해체수순을 밟게 되었다. 현재 중구청 인근에 있던 거류민단 사무소는 공회당으로 용도를 바꾸었고, 일본인들을 위한 문화시설, 집회장소로 이용되었다. 1923년 인천공회당은 홍예문 부근에 신축된 2층 붉은 벽돌 건물로 이전했다. 이 건물은 두 가지 용도로 사용되었는데, 남쪽 중앙의 현관에는 인천공회당이라는 간판을 걸었고 홍예문 길에 면한 건물 좌측으로 또 다른 문을 내어 인천상공회의소의 입구로 사용하였다. 그 후 인천공회당에서 개항 50주년 기념 축하회, 인천주류품평회, 인천시민대회 등이 개최되었다. 광복 후 한국전쟁으로 건물 일부가 소실되었고, 1957년 그 자리에 시민관이 들어섰다. 건물 개보수 후 지금은 인성여고에서 다목적관으로 사용하고 있다. 1923년, 홍예문 부근 2층 붉은벽돌 건물 신축 6·25때 일부 소실, 現 인성여고 다목적관 사용 영화상영·무도회 등 요즘 '문화예술회관' 역할 현재 홍예문에서 인천항 쪽으로 100m 정도 내려오면 왼편에 인성여고 다목적관을 볼 수 있는데 그 자리(인천 중구 송학동3가)가 인천공회당이 있던 곳이었다. 1899년 경인선 철도가 개통하면서 제물포역(현 인천역)과 축현역(현 동인천역)이 개설됐다. 강화도 조약 이후 인천에서 조계지를 중심으로 세력을 확장하던 일본은 1905년 을사늑약 이후 본격적으로 영역을 넓혀 간다. 그 창구가 1908년 건립된 아치형 터널인 홍예문이었다. 홍예문은 조계지에서 축현역과 만석동으로 오가는 가장 짧은 통로가 됐다. 홍예문의 처음 이름은 혈문(穴門)이었다. 때문에 그 길을 '혈문통'이라고 불렀다. 유동 인구가 많았던 혈문통에 인천공회당과 상공회의소 신축 건물이 자리했음은 어렵지 않게 유추할 수 있다. 당시 건물 남측에는 인천경찰서가 있었다. 인천공회당 신축 전 개항장 조계지 의회격인 신동공사가 있었다고 한다. 그 자리에 500여명을 수용할 수 있는 붉은 벽돌로 이뤄진 2층 규모의 인천공회당이 신축 이전한 것이다. 인천공회당에선 영화상영과 연주회, 무도회를 비롯해 어린이날 행사에 이르기까지 다채로운 문화 이벤트들이 열렸다. 요즘으로 따지면 문화예술회관 혹은 시민회관의 역할을 한 셈이다. 1926년 6월 18일자 동아일보에선 인천 영화학교가 인천공회당에서 운동장 확장비용을 보충하기 위해 교육 강연과 음악회를 열기로 했다는 내용이 실렸다. 같은 신문 1927년 4월 7일자와 1933년 11월 21일자에는 각각 인천고려체육회 주최 음악무도회 개최와 현제명 독주 및 4중창단 연주 소식을 게재했다. 또한, 각종 근대음악사 자료에는 홍난파에게서 바이올린을 배운 박종성이 인천공회당과 내리교회 등에서 여러 차례 연주회를 개최했다는 내용이 있으며, 일본에서 바이올린을 배우고 만주에서 성악을 전공한 원종철이 1940년 인천공회당에서 독창회를 갖고 1년 후에는 독주회를 개최했다고 한다. 인천공회당이 보다 각별한 장소로 기억되는 이유는 해방 후인 1947년에 열린 인천관현악단 창단 연주회 때문이다. 우리나라 최초의 오케스트라인 고려교향악단(서울시립교향악단의 모체)의 1945년 창립 이전 우리나라에는 소규모 관현악과 관악 협주 활동이 있었다. 이 같은 상황에서 인천관현악단은 고려교향악단과 불과 2년 터울을 두고 창단한 것이다. 서양음악의 관문 역할을 한 인천의 선진성을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 해방후 1947년 인천관현악단 창단연주회 열어 1974년까지 시민관… '아트센터 인천' 이어져 인천관현악단은 김기룡 단장과 박수득 악장을 중심으로 현악과 관악, 타악 주자 23명으로 구성된 인천 최초의 오케스트라였다. 한국전쟁 발발로 오랜 기간 활동이 이어지진 못했지만, 1966년 창단하는 인천시립교향악단의 모태로서의 의미를 띤다. 한국전쟁은 인천공회당도 역사 속의 장소로 바꿔놨다. 휴전 이후 1957년 그 자리에 1천여석 규모의 '인천시민관'이 들어선 것이다. 시민관에선 콘서트를 비롯해 연극, 쇼, 영화 상영, 웅변대회 등 다채로운 문화행사가 열렸다. 시민관이 개관한 지 10여년이 지나면서, 시설 노후화가 진행됐다. 때문에 1974년 주안에 문을 여는 '인천시민회관'에 본연의 임무를 넘기고 학교 시설로 바뀌게 된다. 시민회관은 문화예술회관과 올해 개관한 아트센터 인천으로 이어진다. 인천도시역사관에서 만난 배성수 관장은 "관련 사료의 부재로 인해 인천공회당의 내부 공간이 어떻게 나뉘었는지 알 수 없어서 아쉽다"면서 "자료 사진에서 볼 수 있듯이 2층 창문이 1층 창문에 비해 현격히 큰 걸로 봤을 때, 1층이 사무 공간이고 2층이 강당 형태의 공간이 아니었을까 유추해 볼 따름"이라고 말했다. /김영준기자 kyj@kyeongin.com 일러스트/박성현기자 pssh0911@kyeongin.com인천공회당 모습(1923년). /인천 화도진도서관 제공인천공회당에서 열린 공연을 다룬 옛 동아일보 기사. / 인천 합창의 궤적 전 도록 발췌인천도시역사관에 전시된 인천공회당 모형.인천공회당에서 열린 공연을 다룬 옛 동아일보 기사. / 인천 합창의 궤적 전 도록 발췌

2018-11-22 김영준

[한국 근대음악의 발상지 인천·(7)]선교와 음악(下)

여성대상 선교 위해 제물포 찾은 마거릿벵겔126년전 국내 첫 서구식 학교 '영화학당' 세워탄압 당하던 우리 음악 대신 찬송가 등 교육이를 시작으로 애국가·계몽가요까지 가르쳐졸업생 김영의, 국내 최고 피아니스트로 성장개항 이후 교회와 학교가 설립되면서 초기에는 이 두 곳이 음악 활동의 중심지였다. 인천 역시 교회와 학교가 음악 활동의 중심지였는데, 다른 도시와 차이점이 있다면 외국 군함의 입항과 함께 항구에서 울려 퍼지는 군악대의 연주 소리를 자주 들을 수 있었다는 점이다.우선 '교회'는 서양음악의 보급 및 활동의 중심지로서의 역할을 하였고, '선교사'는 서양음악 전달자 및 음악교사로서의 역할을 하였으며, 찬송가의 반주 악기인 '풍금'은 서양의 평균율이라는 음감각과 화음감이라는 음감을 심어주었고, 교회에서 찬송가를 익힌 신자들은 후에 서양음악 애호가와 청중으로 발전을 하게 된다.-<인천근현대문화예술사연구>(인천문화재단 刊)에 수록된 민경찬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의 '서양음악의 수용과 인천' 중에서1892년 당시 24세였던 미북감리교회 여선교사 마거릿 벵겔(Magaret J. Bengel)은 제물포(인천) 여성 선교를 위해 담당 선교사로 파견됐다. 제1대 전도부인(한국 개신교 초기의 유급 여성 사역자)으로 황해도 곡산 출신의 미망인 백헬렌도 파견돼 벵겔과 함께 본격적인 여성 선교를 시작했다. 그러나 병인양요와 신미양요 등 두 차례 서양의 침략을 겪은 인천 사람들은 미국에서 온 전도사들이 전파하는 종교에 대한 거부감과 두려움을 갖고 있었다. 이에 백헬렌은 가정에서 필요한 물건을 싸게 팔면서 여인들의 인심을 얻는 방식으로 전도를 시작했다.그러나 당시 우리나라 여성 대부분은 글자를 몰랐다. 이에 벵겔은 전도부인 강세실리아에게 한글과 찬미가를 가르치도록 했다. 벵겔은 어머니를 따라 교회에 온 아이들이 어깨너머로 배운 한글을 엄마보다 더 빨리 깨우치고, 찬미가도 잘 부르는 모습을 보게 된다. 그로 인해, 아이들만을 위한 교육 선교를 구상했고, 우리나라 최초의 서구식 초등학교인 인천 영화학당이 126년 전 문을 열었다.영화학당의 개교는 우리나라 어린이들을 위한 근대식 교육기관의 출발을 의미하며, 최초로 음악 교육을 실시한 곳이라는 의미도 지닌다.미션스쿨인 배재학당(1885년)과 이화학당, 경신학교(1886년) 설립에 이어 6년 후 인천 영화학당이 개교한 것이다.<영화 백년사(1892~1992)>(이성삼 박사 집필·영화학원 刊)에 따르면, 1890년 한국에 온 벵겔은 이화학당의 메리 스크랜튼(Mary F. Scranton) 여사의 총애를 받아 1891년부터 이화학당에서 음악을 가르쳤다. 성악과 오르간을 가르쳤는데, 주로 성악을 가르쳤다고 한다.이처럼 음악적 소양이 풍부했던 벵겔이 1892년 영화학당 설립 후 어린이들을 대상으로 음악 교육을 했을 것임은 어렵지 않게 유추할 수 있다.<영화 백년사>에는 아펜젤러가 쓴 '대한그리스도인회보' 1900년 7월 18일자를 인용해 그해 6월 23일 개최된 영화학당 방학식 모습을 묘사한 구절이 있다. 이 글은 당시 방학식이 폐회 찬미를 부르면서 마무리 되었음을 알려준다."(전략) … 이와 같이 모든 학도들은 이 말을 기억하여 두 달 동안 쉬일 때에도 정성으로 예배를 드리고 미귀의 유혹에 빠지지 말고, 오직 지극히 보배로운 진주를 사랑하며 잘 지니고 있기를 구주님의 이름으로 바라노라 하시고 폐회 찬미를 부르고 방학식을 마쳤다."우리 교회사와 근대 음악사 관련 자료에도 기독교 계열의 사립학교는 '창가'라는 이름으로 찬송가 교육을 했음을 알 수 있다. 예배를 드리기 위한 목적으로 풍금 반주로 찬송가를 가르쳤는데, 이를 시작으로 점차 나라를 사랑하자는 내용의 '애국가'를 비롯해 자주독립의 정신과 자유민권 사상을 고취시키는 '계몽가요', 학업에 열중하고 실력을 배양해 나라를 구하자는 내용의 '교육창가' 등을 가르쳤다.1910년 8월 을사늑약 이후 일제는 우리 생활 속 자유를 완전히 박탈했다. 언론과 집회, 결사의 자유를 앗아간 것이다.1917년 3대 헤스(M. I. Hess) 교장은 부설 영화유치원을 설립했다. 1914년 이화유치원에 이어 우리나라 두 번째 유치원이었다.<영화 백년사>에 실린 유치원 보육과목과정을 보면 1년 차 어린이들은 16시수로, 2년 차는 18시수(이상 1주일 단위)로 짜여졌다. 이 중 창가는 1·2년 차 각각 3시수로, 여타 과목에 비해 가장 많은 시수를 배정 받았다.당시 영화유치원에서 창가 과목을 통해 어떤 교육을 했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일본의 식민지 통치자들은 의도적으로 우리 음악을 탄압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찬송가와 함께 일제가 허용한 서구 음악을 교육했을 것으로 추측된다.영화유치원과 영화학당이 서울 지역 선교사들이 지은 학교들과 활발하게 교류한 부분도 들여다 볼 필요가 있다.앞서 언급했듯이 벵겔은 이화학당에서 음악을 가르치다가 인천에 와서 영화학당을 설립했다. 이후에도 서울의 배재학당과 이화학당, 경신학교 등과 활발한 소통을 했고, 영화학당 출신들이 이곳으로 많이 진학했다.인천 출신으로, 우리나라 첫 미국 줄리어드 음대에서 유학한 피아니스트 김영의(1908~1986)는 영화학당 출신이다. 김영의는 영화학당 졸업 후 서울 이화학당, 이화여자고등보통학교, 이화여자전문학교 음악과를 졸업했다.어린시절 서양 선교사들을 통해 접한 음악과 스포츠 등이 20세기 중반 우리나라 최고의 피아니스트로 자리매김하는 데 중요한 기반이 됐을 것이다.화창한 오후에 인천 동구 창영동의 영화초등학교를 찾았다. 언제나처럼 1910년 3월에 준공한 영화초교 본관동(인천광역시 유형문화재 제39호)에 눈길이 갔다. 100년이 넘은 지금까지도 그대로 남아있는 이 건물은 학생들의 예배와 체육 활동을 위한 강당으로 사용됐다. 현재 남아있는 건물은 1930년대 말 건물 출입구 돌출 부분을 증축한 것이다. 이 과정에서 건물 내부 구조는 'ㅁ자' 형 평면 형태로 설계됐다. 요즘 대부분 학교가 획일적인 일자형 구조로 지어진 점을 감안하면 신선한 시도였다.하상교 영화초교 교장은 "우리나라 교회와 교육 등 중요한 의미를 갖는 옛 본관 건물을 박물관 형태로 조성하는 방안을 추진 중"이라며 "순례객들도 많이 찾는 만큼, 인천시와 협의를 통해 진행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김영준기자 kyj@kyeongin.com 그래픽/성옥희기자 okie@kyeongin.com/아이클릭아트영화학당 설립 당시 교직원들(왼쪽부터 강세실리아, 마거릿 벵겔, 백헬렌). /인천영화초등학교 제공·경인일보DB1911년에 세워진 영화초등학교 본관의 옛 모습. /인천영화초등학교 제공·경인일보DB1930년대 말 건물 출입구 돌출 부분을 증축한 본관 건물 . /인천영화초등학교 제공·경인일보DB

2018-11-15 김영준

[한국 근대음악의 발상지 인천·(6)]선교와 음악(上)

1885년 아펜젤러, 인천에 내리교회 세워"초기 양악 개신교 선교와 때를 같이 해"오늘날 찬송가 통한 전파 통설로 굳어져인천 영화초등학교 학생들로 구성된 '영화 윈드 오케스트라'가 지난 1일 저녁 인천 남동소래아트홀 대공연장에서 창단 연주회를 했다. 명칭(윈드)에서 알 수 있듯이 관악 주자 30여명으로 구성된 영화 윈드 오케스트라는 2017년 11월 설립 이후 올해 학교 졸업식과 입학식을 시작으로 5월 동구청 주최 어린이날 기념행사 축하 공연을 비롯해 내리교회 행사 등에서 연주회를 했다. 지난 8월에 열린 제16회 춘천관악경연대회에선 은상을 획득했다.지난 1일 연주회는 영화 윈드 오케스트라의 이름을 내걸고 연 첫 번째 무대였다. 영화 윈드 오케스트라의 창단 연주회에는 역시 영화초교 학생들로 구성된 영화 엘피스(헬라어로 소망을 의미) 합창단이 참여해 의미를 더했다. 영화 엘피스 합창단은 지난해 열린 제2회 인천시 어린이 합창대회에서 우수상을, 올해 인천 소방동요대회에서 최우수상을 받은 바 있다.오케스트라와 합창단이 함께 꾸미는 제임스 스웨어린젠의 '아이거(Eiger)'와 골드먼의 '치리오 행진곡'으로 시작한 연주회는 금관5중주 무대와 영화 엘피스 합창단의 공연, 졸업생 임재인의 가야금 독주로 이어졌다. 후반부는 쇼스타코비치 '재즈 모음곡 2번 중 왈츠'와 영화 '미션' OST 중 '가브리엘의 오보에', 김광진의 '마법의 성', 최완규 편곡의 '코리안 사운드 셀렉션'까지 연주를 마무리하며 관객들의 박수갈채를 받았다.앙코르곡으로 '마징가 Z 주제곡'을 연주하며 더 큰 호응을 이끌어냈다. 영화초교는 1892년 미국인 선교사에 의해 개교한 우리나라 최초의 초등학교이다. 126년 전통의 영화초교 학생 오케스트라 창단 연주회는 그 자체로 흥미로운 자리였다.100년 앞서 천주교 박해때 '순교자들 성가'"군악대 창설후 양악 퍼져" 능동적 시각도일제의 국악 탄압… 감수성 변화 앞당겨"서양음악은 언제 어떻게 우리나라에 들어 왔을까"의 물음에는 3가지 정도의 답변이 존재한다.그중 개신교의 찬송가 전파로부터 한국의 양악이 시작되었다고 보는 설은 비교적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다. 이유선은 1985년에 쓴 '한국 양악 100년사'에서 "우리나라 초기 형태의 서양음악(찬송가 등)은 개신교의 선교와 거의 때를 같이 했다. 따라서 한국에 있어서 서양음악의 시작은 개신교의 선교를 기점으로 보는 1880년대 초부터 보는 것이 마땅하다"고 했다.1885년 4월 5일 부활절 아침에 인천(제물포) 해변에 배 한 척이 닿는다. 아펜젤러 목사 부부와 언더우드 목사가 우리나라 선교를 위해 파견된 것이다. 인천학연구소에서 발간한 '간추린 인천사'(1999년)에는 당시 인천에 도착한 선교사들이 뱃머리에서 "우리는 부활절에 이곳(제물포)에 도착하였습니다. / 부활하시던 날 죽음의 권세를 이기신 주님이시어/ 이 백성을 속박의 사슬에서 풀어주시고/그들을 당신의 자녀로 삼으사/ 빛과 자유를 주옵소서"라며 기도했다고 적었다. 당시 국내는 갑신정변으로 인한 어수선한 시국이어서 외국인 부녀자의 입경(入京)이 허락되지 않았다고 한다. 때문에, 언더우드만 서울로 향하고 아펜젤러 부부는 일본으로 돌아갔다. 그 해 6월 21일 다시 인천에 온 아펜젤러는 한 달 정도 머무르며 예배를 보았는데, 이때 국내 첫 감리교회인 내리교회가 세워진다.우리나라 개신교의 역사는 일반적으로 선교사의 입국을 시작점으로 본다. 선교사들이 들어오기 이전 만주에서 세례 받은 교인들이 있기는 했으나, 시기적으로 크게 앞선 것도 아니었고 수적으로도 약소했다고 우리 교회사와 근대음악사 연구서들은 전한다.1911년 평양에서 목사의 아들로 태어난 이유선은 미국 유학 후 귀국해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2005년 타계 때까지 '한국 양악 100년사'를 비롯해 서양(기독교)음악 관련 연구와 저서를 다수 남겼다. 이유선은 아펜젤러 목사 부부와 언더우드 목사 등이 인천에 온 1885년을 기점으로써 100년 후인 1985년에 '한국 양악 100년사'를 출간했다. 개신교의 시작을 기점으로 한 '한국 양악 100년설'이 통설로 굳혀지는 순간이다.천주교의 전례를 시점으로 보게 되면 그보다 100년이 늘어난다. 천주교에 관심을 가진 조선 사람들은 베이징에서 유입된 서적을 통해 복음의 내용을 알게 되었다. 이후 1784년 이승훈이 베이징에서 영세를 받고 돌아오면서 최초의 교회와 함께 조선교구가 설립됐다. 자생적인 교회의 모습을 지니고 있다가 1836년 모방 신부, 1837년 앵베르 주교와 샤스탱 신부의 입국 등 프랑스 성직자에 의해 탄압 속에서도 교세를 키워나갔다. 1866년 병인박해 때 외국인 신부였던 순교자들이 형장으로 압송될 때 성가와 성영(聖詠)을 부른 기록도 있다. 이때의 성가는 당시 프랑스 신부였던 이들이 그레고리오 성가를 교육받았기 때문에 찬송가와 시편(Psalm)의 낭독이었을 것으로 추측한다.서양 선교사에 의한 수동적 전래가 아닌 한국인 스스로 행한 능동적 측면을 부각해 바라본 견해는 국악학자 장사훈(1916~1991)에 의해 제기됐다. 그는 "미국의 선교사들이 한국에 들어와 찬송가와 창가를 가르쳤으나 당시의 사회실정은 지금과 달리 그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좀처럼 인식을 얻지 못했다"면서 "1900년대 우리 군악대 창설로 말미암아 비로소 한국에 양악이 들어와 퍼지게 되었다"고 했다. 이후 한국음악학 1세대 중 한 명인 송방송(76)도 '대한제국 국가'를 작곡한 프란츠 에케르트의 도착 이후 우리 땅에 양악이 뿌리를 내리기 시작했다는 견해를 더한다.1910년 8월 을사늑약 이후 일본의 식민지 통치자들은 의도적으로 우리 음악을 탄압했다. 여기에 더해 서구의 찬송가 또한 우리나라 사람들의 음악적 감수성을 크게 바꿔놓는다. 우리 음악을 듣고 즐기던 감수성이 서양식 노래를 듣고 즐기는 감수성으로 바뀌어 버린 것이다. 해방 이후 미군 주둔과 우리나라의 선진화 추구도 결국 서양에서 관습화된 음악이 이 땅에서 위세를 떨치는 데 이바지했다. 서양음악이 본래 음악이며, 우리 고유의 전통 음악은 국악이라는 통념으로 자리하게 된다. 오늘의 음악 상황에 대한 주체(반성)적 인식은 '우리 음악의 비전'이다. '서양 현대음악 기법을 통한 동아시아적 이미지의 표현'이라는 평가를 받으며 20세기 서양음악사에 거대한 획을 그은 작곡가 윤이상(1917~1995)은 큰 울림을 준다. /김영준기자 kyj@kyeongin.com1901년께 초창기 내리교회 모습. 1892년부터 1903년까지 내리교회 담임목사를 지낸 존스(G.H.Jones) 목사는 영화보통학교와 영화여자학교를 세우는 등 인천에 근대식 교육의 씨앗을 뿌렸다. 오른쪽은 1885년 4월 5일 부활절에 제물포를 통해 조선에 입국한 한국 최초의 감리교 선교사인 아펜젤러((H. G. Appenzeller) 목사. /내리교회 제공영화 윈드 오케스트라 창단 연주회에서 영화 엘피스 합창단과 합동 공연 모습. /영화초교 제공영화 윈드 오케스트라 창단 연주회에서 영화 엘피스 합창단과 합동 공연 모습. /영화초교 제공

2018-11-08 김영준

[한국 근대음악의 발상지 인천·(5)]애국가

강제개항속 나라사랑·응원 민심 담아 등장1896년 제물포 '전경택 애국가' 가장 빠른 시기 발표자주독립·부국강병·문명개화 내용… 10여종 이르러1902년 '대한제국 국가' 통합… 경술국치 이후 금지돼대부분 양악에 가사, 서구학습 선진화 시대정신 반영1882년 8월 20일 러시아 모스크바의 그리스도 구세주대성당에선 차이콥스키(1840~1893)의 '1812년 서곡'이 초연됐다. 성당의 완공을 앞둔 1880년 당시 러시아 황제는 1812년 러시아를 침공한 나폴레옹의 프랑스 군대 후퇴를 기념하는 기념식을 거행하기로 했다. 아울러 기념곡이 있어야 한다는 여론이 생기면서 추천을 받은 차이콥스키가 곡을 쓰기 시작해 한 달 여 만에 완성했다. 완공된 성당에서 열린 전승 기념행사에서 '1812년 서곡'이 초연된 것이다.매우 극적이며 악상의 전개가 절묘한 '1812년 서곡'은 내용상 전개로 봤을 때, 평화로운 가운데 서서히 전운의 분위기를 드리우는 1부, 러시아군의 출진과 프랑스군의 침공이 어우러지는 2부, 프랑스군과 러시아군이 벌이는 격렬한 전투 이후 러시아의 승리를 알리는 클라이맥스에 해당하는 3부로 구성됐다. 프랑스 혁명 때 작곡됐으며, 현재 프랑스 국가이기도 한 '라 마르세예즈'는 이 작품에서 프랑스군의 침공 때 단편적으로 드러난 이후 양국의 전투와 퇴각 때도 음악에 어우러진다. 반대로 러시아를 의미하는 민요들이 작품 요소요소에 나타나며, 곡의 클라이맥스에선 제정 러시아의 국가인 '신이시여 차르를 보호하소서'가 대포 소리와 함께 울려 퍼진다.양국 국가를 활용한 전개는 20분이 채 안 걸리는 작품 속에서 서사적 구조를 명확히 드러내며 이 작품을 표제음악의 걸작으로 올려놨다. 단, 프랑스에선 잘 연주되지 않는다. 국가(國歌)가 작품에서 활용된 예시를 들어봤다. 국가의 사전적 의미는 '나라를 대표·상징하는 노래로, 그 나라의 이상이나 영예를 나타내며 주로 식전(式典)에서 연주·제창한다'이다. 김연갑 한겨레아리랑연합회 이사가 쓴 '팔도 아리랑 기행 1'(집문당)에 따르면 1882년 5월 22일 인천(제물포)에서 조선과 미국의 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하는 과정에서 티콘데로가(Ticonderoga) 호의 함상 군악대가 조선의 국가 격으로 '아리랑'을 연주했다.우리 국가가 없던 상황에서 당대 민중이 즐겨 부른 '아리랑'을 미국 측이 조선을 대표·상징하는 노래로 여겼을 것으로 추측된다. 이후 정부 차원에서 국가를 비롯해 국기와 군기의 필요성을 절감했을 것이다. 정부에 앞서 독립협회가 애국가를 '국가'로 제정해 전국민에게 보급할 것을 제안했다. 1896년 4월 7일 '독립신문'을 창간한 독립협회는 신문을 통해 '애국가 부르기 운동'을 전개했다. 독립협회는 인천박문협회 등 지역의 자매단체들과 함께 전국적으로 애국가 부르기 운동을 확산시켰다. 그로 인해 민중에선 외세의 침략과 강제 개항 속에서 나라를 사랑하고 응원하는 마음이 담긴 '애국가'가 만들어졌다. 서양 국가들을 참작해 여러 단체와 개인이 가사를 썼고, 선교사들을 통해 전례된 외국 민요와 찬양가에 가사를 얹어서 국가의식이나 시가행진 때 불렀다. 우리 국민이 자발적으로 만들기 시작한 '애국가'는 황제에 대한 충성과 나라사랑, 자주독립, 부국강병, 문명개화 등과 같은 애국심을 담은 것이 주를 이룬다. 인천(제물포)의 전경택을 비롯해 나필균, 새문안교회, 배재학당 등에서 지어 부른 것 등 당시 제목을 '애국가'로 단 노래들은 10여 종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이들 중 '전경택의 애국가'가 가장 빠른 시기에 나왔다. '전경택의 애국가'는 '독립신문' 1896년 5월 19일자에 실렸다. 민경찬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는 '인천근현대문화예술사연구'(인천문화재단 刊)에 수록된 논문 '서양음악의 수용과 인천'에서 최초의 애국가가 인천에서 등장했다는 사실은 우연이 아니라고 말한다. 민 교수는 "외세에 대한 위협(군함의 화포와 군악대의 나팔 소리 등)을 가장 먼저 감지한 곳인 만큼 이에 대응해 애국계몽운동으로 나라를 구하려는 생각을 다른 지역에 비해 먼저 가지게 됐을 것"이라며 "인천은 '애국가'가 최초로 탄생한 각별한 의미를 지닌다"고 설명했다.1897년 10월 대한제국 선포 이후 국가 제정의 필요성은 더욱 대두됐다. 국가 제정의 중심에는 1901년 2월에 초대 군악교사로 독일에서 초빙해온 악대 지도자였던 프란츠 에케르트(1852~1916)가 있었다. 1902년 8월 15일 '대한제국 국가'가 공식 제정됐으며, 지금까지 나온 애국가의 통합을 알렸다. 하지만 1910년 8월 경술국치 이후 더 이상 부를 수 없는 금지곡이 되고 만다.1900년을 전후한 인천의 서양음악을 발굴, 연주회의 테마로 구성해 선보이고 있는 인천콘서트챔버는 지난 8월 12일 인천 송도 트라이볼에서 '인천근대양악열전 - 두 강이 만난 바다, 인천. 그 곳의 근대 음악이야기'를 개최했다. 인천콘서트챔버는 이승묵 대표의 진행과 지역 역사학자들인 강덕우·강옥엽 박사의 근대 인천에 대한 설명이 어우러진 이날 연주회에서 '대한제국 국가'와 '안창호 애국가', '올드랭사인 애국가'를 바리톤 박대우와 함께 연주했다. 각 곡의 가사와 선율을 비교할 수 있었던 자리였다. 가사를 통한 당시 시대상을 들여다 볼 수 있었고, 우리 땅에 들어와 당시 활용된 서양음악의 형태를 가늠해본 의미 있는 기회였다.그러면서 도출해낸 결론은 현재 부르고 있는 '애국가'를 비롯해 과거 우리 '(애)국가' 곡조는 가사만 떼어내면 그 자체가 '서양음악'이라는 것이다. 유구한 우리 민족의 정신과 문화형태를 드러낸 '애국가'는 분명 아니다. 우리 국가가 '서양음악 학습으로 선진화하려는 시대정신'에서 나온 결과물이라는 데 다다르자 씁쓸함이 엄습했다. /김영준기자 kyj@kyeongin.com인천콘서트챔버가 지난 8월12일 트라이볼에서 열린 콘서트에서 '올드랭사인 애국가'를 연주하고 있다. /인천콘서트챔버 제공1900년을 전후해서 개인과 단체 등 애국가의 가사를 쓰고 무궁화 그림을 그리는 등 애국 사상 고취가 심화됐다. 배화여고 학생들이 그린 '무궁화 삼천리'(1914년) /국립 백두대간수목원 제공대한제국 국가(1902년) /노동은 '한국음악론'(한국학술정보 刊) 발췌

2018-11-01 김영준

[한국 근대음악의 발상지 인천·(4)]철도와 음악

한양을 작별하는 기적소리는/연화봉(蓮花峰)을 진동하며 작별을 하고/한 바퀴 두 바퀴는/차례로 굴러/종남산(從南山)의 단색은 등에 멀렀네번화한 좌우시가 다투어비키고/굉굉(轟轟)한 바퀴소리는 땅을 가르는데/대지를 울리이는 기적일성은/장엄한 용산역을 부수우는구나경부선과 경원선을 서로 나누어/한마듸의 기적으로 고별을 하고/웅장한 남한강의 철교를 지나/ 철마요람(鐵馬搖籃) 노량진에 다랐도다살같이 나타나는 장엄한 기차/어언 듯 영등포 잠간거치여/부산행 급행을 멀리 보내고/오류동 정거장 지내였고나넓고넓은 소사벌을 갈라나가면/ 소사역과 부평역도 차례로 거쳐/산넘고 물건너/급히달(達)하니/속하다 주안역도 지내엿고나원산(遠山)을 우구려 가깝게 하고/근산(近山)에 뻗치여 멀게 하면서/우렁찬 기적을 울리는 철마(鐵馬)/어언 듯 제물포에 다다랐도다 <경인철도가(京仁鐵道歌) 전문> 1899년 모갈기관차 노량진-제물포 첫 운행빠른속도·굉음·육중한 외관 당대인들 매료최남선, 日 철도가 모방 '경부철도가' 작사이어 경인·호남·경의 등 노선마다 노래로여행중 느낀 문명이기에 놀라움·경의 표현인천콘서트챔버 '발굴·연주회' 뜨거운 호응인천콘서트챔버는 1900년을 전후한 인천의 서양음악을 발굴, 연주회의 테마로 구성해 선보이고 있다. 근대 역사 속 인천을 무대로 한 '원더풀 동인천' 시리즈는 사료 발굴 및 전문가들과 협업을 통해 무대에서 만나기 어려운 곡들을 해설과 함께 들려줘 청중의 호응을 이끌어내고 있다.지난 6월 16일 오후 인천아트플랫폼 C동 공연장에선 인천콘서트챔버의 '원더풀 동인천-두 강이 만난 바다, 인천. 그 곳의 근대 음악 이야기'가 펼쳐졌다.인천콘서트챔버 이승묵 대표의 친절한 진행에 연주와 지역의 역사학자들인 강덕우·강옥엽 박사의 근대 인천에 대한 설명이 어우러졌다.공연장을 가득 메운 시민들은 연주와 해설에 귀를 기울였고, 곡이 끝날 때마다 아낌없는 박수를 보냈다. 그 중 바리톤 박대우와 인천콘서트챔버가 연주한 '경부철도가'에 대한 반응은 매우 뜨거웠다. 연주 전 곡의 탄생과 시대 상황에 대한 설명이 있었으며, 7·5조의 쉬운 율격의 가사가 낯익은 멜로디에 실려서 청중에 전달됐기 때문일 것이다.지금까지 국내에 '철도와 문학'에 대한 연구와 기술이 많은 가운데, 비교적 미흡한 '철도와 음악'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었던 소중한 기회였다.서양음악에서 '철도와 음악'은 근대 프랑스 음악의 최선봉으로 평가받는 '프랑스 6인조(Les Six)' 중 한 명인 작곡가 오네게르(A. Honneger·1892~1955)를 떠올리게 만든다. 오네게르는 1923년에 기차의 기계적 소리를 불협화음으로 표현한 관현악곡 '퍼시픽 231'을 발표했다. '3개의 교향적 악장' 중의 제2곡에 해당하는 이 작품은 작곡가가 퍼시픽(Pacific)식 기관차에서 착상해서 쓴 작품이다.체코의 작곡가 드보르자크(A. Dvorak·1841~1904)는 '기차 마니아'의 원조격으로 불린다. 어린 시절 프라하 인근 철도 공사를 봐온 드보르자크는 9세 때 완공된 철길로 쏜살같이 지나가는 열차를 보았다고 한다. 기관차의 육중한 외관, 빠른 속도, 지축을 뒤흔드는 굉음 등은 어린 드보르자크에게 강렬한 음악적 경험으로 작용했을 것으로 보인다. 훗날 제자에게 반농담식으로 "기관차를 내가 발명할 수 있었다면, 내가 쓴 교향곡 전부를 포기해도 좋을 텐데"라고 했던 말은 유명하다.국내에서 기차는 지금부터 꼭 119년 전인 1899년 9월 18일 오전 9시 첫 선을 보였다. '화륜거(火輪車)'로 불린 육중한 모갈(Mogul·거물) 증기기관차가 희뿌연 증기를 내뿜으며 굉음과 함께 노량진을 떠나 제물포로 출발했다. 드디어 철도의 시대로 진입하는 순간이었다.1897년 착공했으며, 2년 만의 준공 이후 철도는 우리 사회에서 근대 문명과 진보의 상징이 됐다. 우정박물관의 자료에 따르면, 경인선 철도 개통 이전까지 인천우체사와 한성우체사의 우전인(郵傳人)은 매일 오전 9시에 우편낭을 메고 오류동까지 걸어갔다. 두 우전인은 오후 1시께 오류동에서 우편낭을 교환해서 돌아갔다. 하루 평균 9시간 이상이 걸린 행보였다. 이를 토대로 따져봤을 때 당시 경성까지 걸어서 가려면 인천에서 노량진까지 6~7시간, 배로 한강을 건너 다시 걸어서 남대문까지 도합 10시간은 족히 걸렸다. 하지만 철도가 놓이면서 인천에서 노량진까지 1시간30분으로 단축됐다. 노량진까지 이전의 4분의 1수준으로 단축됐으며, 경부선 개통 후엔 5분의 1 이상 수준으로 남대문까지 가까워진 것이다. 서울 사람들이 인천역에 내려 월미도 해변이나 만국공원, 인천항을 둘러보고 돌아온다 해도 한 나절이면 충분해졌다. 경인선에 이어 경부선(1905년), 경의선(1906년), 호남선과 경원선(1914년) 등이 개통한다.구한말의 대문장가이자 친일반민족행위자로 평가받는 육당 최남선(1890~1957)은 신문명인 철도를 알리기 위해 1908년 일본 노래 '철도가'를 모방한 '경부철도가'를 작사했다. 문학 갈래로는 창가가사이며, 노래는 스코틀랜드 민요 '밀밭에서'에 가사를 붙인 형태로 불렸다.'경부철도가'는 서울에서 출발해 부산까지의 역들과 풍경, 감회를 7·5조의 가락에 담은 장편 가사이다. 문명과 개화의 찬양에 급급한 나머지 일제가 철도를 부설한 의도에 대해선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경부철도가'에 이어 '경인철도가', '호남철도가', '경의철도가' 등 '철도 노래'들이 지어졌다. 가사의 길이와 내용은 다르지만, 대부분은 '경부철도가'처럼 기차의 위용과 속력, 기적 소리에 대한 묘사로 시작해 종착역에 이르기까지의 풍경을 묘사하고 있다.'경부철도가'를 모방한 것으로 보이는 '경인철도가'는 6연으로 구성된 작자 미상의 전통적 가사 형식의 노래이다. 시적 화자가 증기 기관차를 타고 경성에서 제물포까지 가면서 느끼는 감정을 표현했다. 근대적 문명의 이기인 철도에 대한 놀라움과 경의를 노래했다.(전문 참조)3연 1행의 '경부선과 경원선을 서로 나누어'를 통해 유추해 볼 때 1911년 10월 15일 이후에 가사가 쓰여졌음을 알 수 있다. 경원선은 1911년 10월 15일 용산~의정부 구간이 처음 개통된 후 1914년 8월 14일 세포~고산 구간을 마지막으로 전 구간이 개통했다.'경인철도가'에선 5연 마지막 행의 주안역과 6연 마지막 행의 제물포역(현 인천역)이 부각되고 있음을 잘 보여준다. 두 역은 당시부터 여러 요소들로 인해 중요한 역할을 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경부철도가'와 마찬가지로 '빠름'(문명·개화)을 찬양하고 있다. 진정한 예술이라면 '빠름'만을 찬양하진 않을 것이다. 건강한 삶과 어우러지는 속도를 통한 조화가 부재한 20세기 초반 우리 문화계의 일면을 드러내 주고 있다. /김영준기자 kyj@kyeongin.com최초의 기관차 모갈1호. 모갈1호는 철도개통시 사용된 첫 열차를 견인한 증기기관차다. 미국 브룩스사에서 4대가 제작된 후 반제품으로 운송해 1899년 인천에서 조립됐다.초기의 인천역사. 여객의 운송보다는 화물운송과 철도운영에 직접적으로 필요한 시설에 한정됐다. /격동 한세기 인천이야기(다인아트 刊)지난 6월 16일 오후 인천아트플랫폼 C동 공연장에서 열린 인천콘서트챔버의 '원더풀 동인천-두 강이 만난 바다, 인천. 그 곳의 근대 음악 이야기'에서 인천콘서트챔버의 반주에 맞춰 바리톤 박대우가 '경부철도가'를 부르고 있다. /인천콘서트챔버 제공

2018-10-25 김영준

[한국 근대음악의 발상지 인천·(3)]인천 아리랑(下)

현재 다양한 공연 '헐버트 선교사' 공로곳곳 아리랑 채보 서양식 5선악보 담아국권회복도 헌신… 타계후 양화진 안장2017년 12월 인천의 전통연희단 잔치마당은 인천 송도 트라이볼에서 3개 마당으로 구성된 '인천 아라리'를 선보였다. '인천 아라리'는 한국문화예술위원회가 주관하는 '2017 전통예술 지역 브랜드 상설공연 지원사업'에 선정된 공연물이다. 3개 마당 중 마지막 마당은 '인천 아리랑'으로 구성됐다. 공연에서 잔치마당은 해안가와 농지가 공존한 과거 인천의 고유한 소리와 이야기를 시대의 흐름에 따라 현대적인 느낌으로 재해석해 선보였다. 전통 북과 꽹과리, 장구 등의 악기에 신시사이저, 일렉트릭 기타 등이 가세했다. 세 번째 마당의 '인천 아리랑' 또한 전통 경기·서도소리 선율과 이를 모티브로 현대적 감각을 가미한 재즈, 록 버전 등 3가지 형태로 부르고 연주됐다. 국가무형문화재 제29호 서도소리 이수자인 유상호 명창의 무대에 이어 재즈 보컬리스트 박가아의 공연, 정유천 밴드의 록 버전 공연까지 '인천 아리랑'이 다양한 형태로 무대에서 울려 퍼진 것이다.구전으로 전해지며, 130여년 전 개항지 인천에서 불린 노래를 오늘날 공연을 통해 만날 수 있었던 것은 조선 말기와 일제 강점기 미국 감리교 선교사이자 교육자였던 호머 B. 헐버트(1863~1949) 박사의 공로다.헐버트 박사는 당시 곳곳의 '아리랑'을 채보했다. 이처럼 서양식 5선 악보에 표기된 최초의 아리랑은 그가 쓴 '코리아 보컬 뮤직(Korea vocal music)'에 담겼다. '코리아 보컬 뮤직'은 영문 잡지 <코리안 리포지터리(The Korean Repository)> 1896년 2월호에 수록됐다.헐버트 박사는 이 글에서 "한국인은 즉흥곡의 명수", "아리랑은 한국인에게 쌀과 같이 중요한 노래"라고 예찬하기도 했다.아리랑이 해외에 알려지고, 구전이 아닌 아리랑의 형태가 문서에 기록되면서 후대가 연구할 수 있는 단초가 마련된 것이다. 특히 당시 민요를 경시하는 풍조로 인해 아리랑의 가사를 기록한 조선 사람이 없었던 상황에서 이뤄진 것이어서 더욱 가치 있다.1886년 조선 땅을 처음으로 밟은 헐버트 박사는 육영공원 교사로 일했으며 명성황후 시해사건 직후인 1895년엔 고종의 경호를 담당하기도 했다. 이듬해 독립신문 발행에 관여하면서 아리랑 등 한국전통음악을 채보해 발표했다. 1905년 을사늑약 무효를 선언한 고종의 친서를 미국 대통령에게 전달하려다 실패했으며, 일본을 규탄하고 고종에게 헤이그 밀사 파견을 건의하는 등 한국의 국권 회복운동에 협력했다. 1949년 이승만 대통령의 초청을 받아 국빈으로 내한한 그는 노환으로 서울에서 타계, 고인의 뜻에 따라 양화진 외인묘지에 유해가 안장돼 있다. 헐버트 박사 타계 60주년이었던 2009년 전국의 대표 아리랑을 수록한 의미 있는 음반 '쌀의 노래 아리랑'(신나라)이 출시됐다. 헐버트 박사가 채보한 '아리랑'을 비롯해 '인천 아리랑'과 '문경 아리랑', '아르랑 타령' 등도 함께 실렸다. 음반에는 김연갑 한겨레아리랑연합회 상임이사의 해설과 김영임 명창이 부른 '아리랑'들이 담겼다. 음반의 타이틀은 앞서 언급한 헐버트 박사의 글 중 "아리랑은 한국인에게 쌀과 같이 중요한 노래"에서 따왔다.허경진 교수 발견 '홍석현의 조선어책'지역 반일감정 대변 '인천 아리랑' 수록황해도·전북김제 등 타지 차용 흔적도헐버트 박사의 글이 발표되기 2년 전의 자료를 발굴해 '인천 아리랑'의 존재를 알린 인천 출신 국문학자 허경진 교수(연세대 국문과)의 노력도 부각할 필요가 있다. 2000년 하버드대 한국연구소 방문학자로 머물던 허 교수는 한국 고서와 관련된 자료를 조사하다가 '인천 아리랑' 전문이 실린 <신찬 조선회화>(홍석현 저) 책자를 발견했다. 훗날 관립 한성고등학교 교장을 지내고 평택군수를 역임한 홍석현은 1894년 조선어 회화책을 펴냈다. 이 책은 같은 해 10월 3판이 출판될 정도로 일본에서 인기 있었다고 한다. 조선어 단어와 회화 등을 일본어로 소개하고 있는 이 책에는 '인천 아리랑'을 비롯해 인천과 관련한 이야기들이 많이 수록됐다. 허 교수는 당시 일본인들이 인천에 많이 살았으며, 서울로 가는 사람도 배에서 내려서 인천에서 며칠을 묵었기 때문에 인천에 대한 사전지식이 필요했던 것으로 여긴다. 책에는 인천을 찾아가는 이야기와 기차를 타고 가는 이야기, 기차 삯과 제물포 요릿집이 소개되며, '인천 아리랑'이 수록됐다. 허 교수는 관련 논문에서 <신찬 조선회화>에 '인천 아리랑'이 수록된 이유에 대해 "일본인들을 미워하는 인천 사람들의 민심을 미리 알려주고, 행동에 조심하도록 경고하는 의미가 있다. 일본인들을 위한 교과서에다 이 노래를 실은 홍석현이 당시 인천 사람들 사이에 퍼져 있던 반일 감정을 대변한 것이다. 그가 첫 연에 덧붙인 의역을 보면 그 의미가 더욱 분명해진다"고 설명했다.홍석현이 덧붙인 의역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인천의 산은 아름답고 / 제물포의 물은 맑아 / 가서 산에서 읊조려도 좋겠네 / 가서 물에서 헤엄치는 것도 좋겠네 / 하지만 그렇게 하지 마세요 / 일본인이 뽐내며 으스대고 다녀서 / 유쾌하게 사는 것이 이미 어려워"또한, 조선총독부가 1912년에 실시한 민요조사에 따르면 '인천 아리랑'의 가사는 여러 곳에서 차용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경기도의 '산타령'을 비롯해 황해도와 전북 김제에서 각각 채집된 '풍자요'와 '아리랑 타령'이 그것이다.개항지 제물포 부두에 몰려들었던 노동자들이 고향으로 돌아가 부르면서 전국으로 퍼진 것으로 볼 수 있는 대목이다. 통상적으로 알고 있는 '아리랑'은 1920년대 나운규의 영화 '아리랑'이 흥행하면서 알려지고 채록된 것들이다. 그에 앞서 인천 지역의 사회상을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는 '인천 아리랑'은 인천시민의 지속적 연구와 무대화를 통해 계승해 나가야 할 대상이다. /김영준기자 kyj@kyeongin.com 그래픽/성옥희기자 okie@kyeongin.com·아이클릭아트지난해 12월에 열린 전통연희단 잔치마당의 '인천 아라리' 중 전통 경기·서도소리로 불린 인천 아리랑, 재즈 버전의 인천 아리랑, 록 버전의 인천 아리랑.(사진 위부터) /잔치마당 제공Homer B. Hulbert(1863~1949)

2018-10-18 김영준

[한국 근대음악의 발상지 인천·(2)]인천 아리랑 (上)

지난해 10월 개봉한 영화 '대장 김창수'에는 청년시절의 백범 김구 선생이 인천 감옥소에서 수감생활을 할 때 다른 수감자들과 함께 철도 공사에 강제 동원돼 노역하는 장면이 나온다." 인천 제물포 살기 좋아도~, 왜인 위세로 못 살겠네~".수감자들이 곡괭이질을 하며 지친 몸을 달래고자 노래를 부르는데 그 노래가 바로 '인천 아리랑'이다. 노역 중 쉬는 시간에 중국인이 나눠준 자장면을 먹는 장면으로 이어진다. 영화를 연출한 이원태 감독은 영화 개봉 후 경인일보와 인터뷰에서 "'인천 아리랑'을 경인선 부설공사 장면에서 노동요로 쓰기 위해 고증에 공을 들였다"고 밝힌 바 있다.조미통상조약 당시 아리랑 애국가 역할예부터 한민족 하나로 이어주는 구심점영화가 세월에 묻혀 있던 '인천 아리랑'을 끄집어 낸 후 그해 12월 인천의 전통연희단 잔치마당은 인천 송도 트라이볼에서 공연 3개 마당으로 구성된 '인천 아라리'를 선보였다. '인천 아라리'는 한국문화예술위원회가 주관하는 '2017 전통예술 지역 브랜드 상설공연 지원사업'에 선정된 공연물이었다. 3개 마당 중 마지막 마당은 '인천 아리랑'으로 구성됐다. '인천 아리랑'이 무대에서 울려 퍼진 것이다.'아리랑'은 우리 민족 모두가 즐겨 부르는 또 하나의 국가이다. 한겨레아리랑연합회 이사로 있는 김연갑이 1994년에 쓴 <팔도 아리랑 기행 1>(집문당)에 따르면 1882년 5월 22일 인천(제물포)에서 조선과 미국의 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하는 과정에서 티콘데로가(Ticonderoga) 호의 함상 군악대가 두 나라의 국가 대신에 국가 격으로 '양키 두들(Yankee Doodle)'과 '아리랑'을 연주했다. 이미 선대로부터 전국적으로 불린 '아리랑'은 외국인들도 조선의 대표적인 민요로 인식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북한은 물론 해외 동포들과도 자연스럽게 하나로 만들어주며, 근래 들어선 남북 단일팀으로 참가하는 국제경기에서 '아리랑'이 국가 대신 연주되기도 한다.'인천 아리랑'은 진도아리랑, 밀양아리랑, 정선 아리랑 등에 비춰볼 때 잘 알려지지 않은 아리랑이다. 김연갑은 일본 국립국회도서관에서 <유우빈호우치신분> 1894년 5월 31일자 3면에 실린 '조선의 유행가'라는 제목의 기사를 발굴했다. 신문 기사에는 '인천 아리랑'의 가사와 해설이 담겼다. 노랫말과 함께 실린 해설에서 "산간벽지의 아이들이나 포구의 아이들까지도 입에 담고 있으며, 조선인이 일본의 위력에 압도당하는 것을 원망하고 군주의 폭정을 비난해서 부르는 것"으로 밝혔다.비교적 잘 알려지지 않은 '인천 아리랑'영화 '대장 김창수'속 한장면 노동요로인천 출신 국문학자 허경진(연세대 국문과) 교수도 '인천 아리랑' 전문이 실려있던 1894년 8월 27일 도쿄에서 간행된 <신찬 조선회화(新撰 朝鮮會話)>(홍석현 저)를 발굴한 바 있다. 허 교수는 2000년 하버드대학교 한국연구소 방문학자로 1년 동안 머물면서 한국 고서와 관련된 자료를 조사하던 중 발견했다.'인천 아리랑'은 조선의 다른 곳들과 달랐던 개항지 인천의 모습처럼 여타 지역의 아리랑과 다른 정서를 갖고 있다. 우리나라 전역에서 불리던 대부분의 아리랑은 사랑하는 님의 배반과 그를 원망하는 노래이다. 그 안에 설움과 한이 깃들어 있는 것이 기본적인 서사적 정서이다. 그러나 인천 아리랑은 다른 나라에 대한 언급이 직접 나온다는 것이 흥미롭다. 왜인들이 여기저기 할거해서 살기 어렵다고 직접 말하는가 하면 일본인이 뽐내고 으스대고 다녀서 힘들다고 한다.1883년 개항 이후 인천에는 전국 팔도에서 품을 팔러 온 노동자들로 붐볐다고 한다. 일본인에 대한 불만 가사 직접적 표출'사랑'소재 다른 지역 아리랑과 차별점낯선 객지에 품을 팔러 온 이들에게 타향살이 애환이 없을 리 만무하다. 고일 선생이 쓴 <인천석금>에 당시 사회상이 잘 드러나는 대목이 있다.'항도 인천은 부두 노동자와 정미직공, 목도꾼, 자유노동자인 지게꾼이 많기로 유명하고 곡물관계의 객주업자와 거간, 미두꾼과 절치기꾼이 섞여 살았던 곳이다. 관리도 별로 없었고 장사치도 그리 많지 않았다. 그래서 서울처럼 양반, 상놈의 구별이 없었고 굽실대고 쇤내를 올릴 때가 없는 곳이었다.'이처럼 돈을 벌기 위해 전국 각지에서 온 노동자들은 자신들이 어려서부터 흥얼거렸던 아리랑 가락에 당시 시대상이 담긴 가사를 붙였다. '인천 아리랑'이 여타 지역의 아리랑과 차별성을 드러내는 대목이다. 나아가 '한국 노동 운동의 시발점'으로서 인천의 역사를 뒷받침하는 것이기도 하다.조우성 전 인천시립박물관장은 자신이 쓴 <인천이야기 100장면>에서 "한국 아리랑 사(史)에 인천을 편입시킨 것과 그 어느 도시보다도 치안이 삼엄했던 지역에서 아리랑을 항일 민요로 불렀던 선대들의 꼿꼿한 풍모를 밝혀낸 것도 흐뭇한 일이 아닐 수 없다"고 '인천 아리랑'의 의의를 설명했다. /김영준기자 kyj@kyeongin.com그래픽/성옥희기자 okie@kyeongin.com인천 아리랑 전문. /허경진 '19세기 인천에서 불려졌던 <아리랑>의 근대적 성격' 발췌'2018 정선아리랑제' 행사 모습. /정선아리랑제조직위원회 제공지난 6~9일 정선읍 아라리공원 일원에서 열린 제43회 정선아리랑제. 특히 올해 축제에선 남한 아리랑과 함께 북한 서도아리랑을 통해 남북의 아리랑이 한자리에서 만날 수 있는 가능성도 확인했다. /정선아리랑제조직위원회 제공

2018-10-11 김영준

[한국 근대음악의 발상지 인천·(1)프롤로그]1883년 항구가 열리고… 파도처럼 밀려온 '양악'

제물포 개항후 첫 서양음악 수용·확산전통문화 대신 근대 신문물 체화 노력강점기~1960년대 시향 설립 역사조망인천의 지리·사회적 의미 들여다볼 것회화는 공간 속에서, 인위적인 공간 표상을 통해 작용한다. 음악 등 모든 역동적인(Energischen) 예술들은 연속적인 시간에서뿐 아니라 그를 통해, 즉 인위적인 음의 시간적 변화를 통해 작용한다. 시의 본질 역시 이러한 근본개념으로 파악할 수 있지 않을까? 왜냐하면 시는 임시적인 기호, '힘(Kraft)'이라 하자. 그렇다면 형이상학에서 공간·시간·힘이 세 개의 근본개념이듯, 또한 수리적인 학문들이 이들 개념 중 어느 하나로 환원되듯이 문예 및 예술이론에서도 마찬가지라고 하겠다. 말하자면 제작물을 제공하는 예술은 공간 속에서 작용하고, 에네르기를 통한 예술은 연속적인 시간에서 작용하며, 문예 혹은 오히려 유일한 문예인 시는 힘을 통해 작용한다. - 요한 고트프리트 헤르더'최초의 비판적인 작은 숲' 중에서헤르더(J G Herder·1744~1803)는 18세기 독일의 대표적 사상가이자 문학자, 신학자였다. 평생 음악에 심취했던 인물이기도 한데, 고대 독일 민요를 복원하는 데 관심을 기울이며 연구를 통해 의미 있는 <민요집>을 펴내기도 했다. '민요(Volkslied)'라는 용어를 만든 인물이기도 한 헤르더는 음악을 장식으로서가 아니라 오히려 모든 문화와 교육의 원천 중 하나로 보았다. 앞서 인용한 글에서처럼 그는 당대 지식인들의 식견을 훌쩍 뛰어넘는 음악에 대한 혜안을 보여줬다.헤르더의 사상은 후대 사상가와 작곡가들에 의해 확대 생산됐다. 그중 가치를 인정받은 작품들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 '클래식(Classic)'으로 인정받으며 생명력을 부여받게 된다.마찬가지로 우리 땅에선 우리(동양) 사상가들과 음악가들에 의한 음악이 고래로 이어져 왔다. 하지만, 1883년 제물포가 개항하면서 우리는 서양음악(이하 양악)을 받아들여야 했다. 당시 인천에 살고 있던 사람들은 이전에는 들어보지 못했던 큰 소리를 경험했다. 무시무시한 대포 소리와 우렁찬 나팔 소리였다. 일본은 우리나라에 군함을 끌고 와 인천 앞바다에서 대포를 쏘면서 무력시위를 했고, 이에 우리 선조들은 외세에 문호를 개방했다.근대화 시기 신문물의 도입부로서 역할을 했던 인천은 정치·경제적으로뿐만 아니라 문화적으로도 요지였다. 서구의 새로운 문물은 인천을 통해 수입되고 국내에 확산했다. 그에 따라 근대 시기 인천은 전통문화보다 새로운 문화를 수용하고 체화(體化)하는 데 더욱 치중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 같은 실례는 미술 분야에서 확인할 수 있다. 국내 신문과 각종 자료에 따르면 1920~1930년대 조선미술전람회에서 수상한 인천 출신 작가는 대다수가 서양화부에 쏠려 있다. 나아가 1920년대라는 이른 시기 인천에 이미 화단이 형성됐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인천이 동서양 문물의 최 접경지였음을 알려주는 대목이다.경인일보는 인천문화재단과 함께 '인천 근대 양악'을 주제로 기획 시리즈를 진행한다. 20회로 구성될 이번 기획에선 양악의 수용과 일제 치하, 해방, 전쟁 후, 1960년대 인천시립교향악단의 설립까지 인천 양악사(史)를 짚어볼 계획이다.기획 시리즈의 주제는 장소(인천)와 시기(근대), 대상(양악)을 지칭하는 세 단어로 구성됐다. 이번 기획에서 장소(인천)의 범위는 최대한 넓힐 예정이다. 일례로, 음악을 하는 행위는 연주와 감상으로 이뤄진다. 그 때문에 연주와 감상은 불가분의 관계다. 독일의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가 인천에서 공연했다면, 인천시민이 공연장을 찾아 감상했기 때문에 인천 음악으로 볼 수 있다. 하지만 인천이란 지리적인 의미와 사회적인 의미를 동시에 갖는 '인천에 사는 인천사람들'이 아닌 독일을 비롯해 전 세계인들로 구성된 베를린 필하모닉의 인천 연주를 인천 음악으로 규정하기엔 어려움이 있다. 이러한 부분들을 모두 포괄할 것이다. 따라서 근대 인천에서 일어난 양악과 관련한 사건과 작품, 인물, 장소 등 규정짓지 않고 들여다볼 계획이다.모든 도시가 흐르는 시간을 타고 변하지만, 한반도에서 인천만큼 시간과 공간의 변화가 급격하게 진행된 도시는 드물다. 근대 이후만 놓고 본다면, 개항과 함께 한적한 어촌에 외국인들이 모이기 시작했으며, 일제강점기에 항만이 건설되고 군사기지가 조성됐다. 철도가 놓였고, 최초의 천일 염전이 만들어졌다. 해방되어선 미군이 들어왔으며, 전쟁 후에는 휴전선이 그어지며 고향을 등진 실향민들이 먹고살기 위해 모여들었다. 급격히 변한 도시의 모습만큼 짧은 국내 양악사 속에서 다채롭게 피어난 음악과 관련 요소들을 다룰 이번 기획을 통해 인천을 새롭게 느끼는 경험을 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독자 여러분들의 많은 관심과 격려 부탁드린다. /김영준기자 kyj@kyeongin.com인천은 근대 이후 한반도에서 가장 급격히 변한 도시이다. 인천의 급변에는 바다가 큰 역할을 했다. 바닷길은 사람과 물품이 오가는 통로였다. 1883년 제물포 개항은 국제무역항의 기능을 더욱 강화시켰고, 신문물의 도입지로서 입지를 다졌다. 인천은 서양음악 수용의 창구 및 한국 근대음악 진원지의 하나로 역할을 하면서 선도적으로 한국 근현대 음악 문화를 개척해 나갔다. /경인일보DB

2018-09-27 김영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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