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과 인천

 

[독립운동과 인천·(24)]장봉도 할아버지 송두용

옥고도 치러… 2010년 유공자 인정해방이후 남북통일 염원 밝히기도인천 장봉도에서 가난한 학생들을 위한 교육사업에 헌신했던 기독교 신앙인 송두용(1904~1986) 선생. 무교회주의(無敎會主義)라는 다소 생소한 신념을 가진 독실한 기독교 신자이자 빈민구제 활동가로 잘 알려진 그는 독립운동 행적과 사상과 관련해서는 크게 주목받지 못한 편이다.송두용은 뜻을 함께한 신앙인들과 함께 만든 기독교 잡지 '성서조선'을 통해 민족의식을 일깨우려 했다. "매서운 추위에도 살아남는 개구리는 있다"는 내용의 성서조선 158호(1942년 3월)의 권두언은 칼끝과 총부리로 우리 민족을 겨누고 말살하려 했던 일제에 일침을 가했다. 이 사건으로 송두용은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송두용은 이 사건에 대해 "일본 경찰은 우리가 독립운동을 하였다고 모조리 검거했다. 그러나 우리에게 정치성은 전혀 없고 다만 기독자로서 양심생활을 한 것뿐"이라고 했다. 그는 스스로 정치적 행동과 거리가 먼 신앙 그 자체를 위한 활동(신앙만의 신앙)이었다고 밝혔지만, 순수한 신앙심이 결국 민족의 해방과 평화에 대한 갈망을 불러왔다. 정부는 2010년 그를 독립유공자로 인정했다. 송두용은 해방 이후에도 신앙과 관련한 활발한 저술활동을 통해 많은 글을 남겼다. 3·1 운동 정신은 거창한 행사가 아닌 실력 양성으로 일본을 극복하는 것이라고 했다.그토록 염원하던 해방 이후 송두용은 남북을 비롯한 전 세계의 평화를 원했다. 평화를 바탕으로 남북통일을 이뤄야 한다는 그의 바람은 오늘날에도 유효하다. 송두용은 해방 22주년을 맞았던 1967년 8월 "이제는 각각 남의 나라처럼 또는 피차 독립국가인 양 당연한 것 같이 생각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우리의 힘으로는 어떻게 할 수 없다는 듯이 체념하고 있는지 모른다. 천만의 말이다. 어서 남북이 합쳐야 한다. 하루속히 통일 국가를 이뤄야 한다"고 했다. /김민재기자 kmj@kyeongin.com

2019-08-21 김민재

[독립운동과 인천·(23)]장봉도 할아버지 송두용과 성서조선사건

일본서 성경 중심 무교회주의 들여와 연구회 조직 '성서조선' 발행158호 弔蛙 통해 '한두 마리는 살아남듯' 말살정책 극복의지 표현해방 후 장봉도 푸른학원 이어받아 빈민구호·교육사업에도 힘써태평양전쟁 발발로 일제의 식민지 수탈이 극에 달했던 1940년대 초반 서울에서 발행된 한 기독교 잡지 첫 장에 의미심장한 내용의 권두언이 실렸다.권두언의 제목은 개구리의 죽음을 애도한다는 뜻의 '조와(弔蛙)'. 1942년 3월 무교회주의(無敎會主義) 기독교 신앙 잡지인 '성서조선(聖書朝鮮)' 158호에 겨울잠을 자다 얼어 죽은 개구리를 빗대 민족의 참담한 현실을 고발한 글이 실렸다.일본은 잡지 발행에 가담한 인물과 독자들을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체포했다. 이른바 성서조선사건이었다.이 사건의 중심에는 훗날 인천 장봉도에서 빈민구제 활동과 교육 사업에 헌신했던 독립운동가 송두용(1904~1986) 선생이 있었다.송두용은 1904년 7월 31일 충청남도 대덕군(지금의 대전시 대덕구)에서 부농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4살 때 아들이 없던 큰아버지에 입양됐다가 서울로 유학해 제동공립보통학교와 양정고등보통학교를 졸업했다.그는 18세 나이에 일본 유학길에 올랐으나 1923년 관동대지진 사건이 발생해 귀국했다. 그리고 21살 때 다시 일본 도쿄농업대학 예과로 진학했다. 그는 일본 유학생활에서 기독교를 접하고 인생이 바뀌었다. 당시 일본에서는 제도권 아래 있는 교회 제도를 비판하며 성서와 신앙만으로 구원에 이르러야 한다는 '무교회주의'가 태동하고 있었다. 이들은 교인 수를 늘리고 헌금 걷기에만 혈안이 돼 있는 기성 교단을 부정했다.송두용은 일본에서 무교회주의를 설파하던 우치무라 간조의 강연에 감명을 얻어 한국인 유학생인 김교신, 함석헌, 유석동, 양인성, 정상훈과 함께 '성서연구회'를 만들었다. 그리고 1927년 무교회주의 신앙을 기반으로 한 잡지 '성서조선'을 처음 발행했다. 송두용은 성서조선 6인방 중 가장 나이가 어린 23세였다.1930년 귀국한 송두용은 부천군 오류동(지금의 구로구)을 기반으로 성서집회를 열면서 신앙생활을 이어갔다. 송두용 등 6인방은 성서조선 발간과 함께 서울, 인천, 부천 등지를 다니며 강연을 하면서 민족의식을 고취했다. 이때부터 율목동의 인천모임을 만들어 무교회주의를 알리고 주변에 성서조선을 전달했다.김교신이 1927년 7월에 쓴 성서조선의 창간사는 "성서조선아, 너는 소위 기독 신자보다도 조선혼을 가진 조선 사람에게 가라, 시골로 가라, 산촌으로 가라, 거기에 나뭇군 한 사람을 위로함으로 너의 사명을 삼으라"는 내용이다.민족의식을 가진 기독교인들의 우상숭배를 거부하며 신사참배 거부 운동을 하는 등 종교 운동을 바탕으로 한 항일의식이 확산하자 일제는 기독교를 철저히 감시하기 시작했다. 결국 1942년 3월 송두용과 김교신 등이 성서조선 권두언에 실은 '조와'가 일제의 감시망에 잡혔다."봄비 쏟아지던 날 새벽이 바위틈의 빙괴(永塊)도 드디어 풀리는 날이 왔다. 오래간 만에 친구 와군(蛙君)들의 안부를 살피고자 담(潭) 속을 구부려 찾았더니 오호라 개구리의 시체 두 세 마리 담 꼬리에 부유하고 있지 않는가! 짐작컨대 지난 겨울의 비상한 혹한에 작은 담수(潭水)의 밑바닥까지 얼어서 이 참사가 생긴 모양이다. 예년에는 얼지 않았던 데까지 얼어붙은 까닭인 듯 동사한 개구리의 시체를 모아 매장하여 주고 보니 담저(潭底)에 아직 두어마리 기여다닌다. 아, 전멸은 면했나 보다!"이 글은 혹독한 추위가 와서 겨울잠을 자던 개구리가 죽어 나가더라도 한두 마리는 살아남듯이 일제가 아무리 민족말살정책을 펼치더라도 끝내 살아남는 한국인이 있다는 얘기를 은유적으로 표현했다.일제는 송두용과 김교신 등 6인방과 주요 독자 12명을 치안유지법 혐의로 체포하고 서대문 형무소에 가뒀다. 이 사건으로 송두용은 10개월 동안 옥고를 치렀고 결국 불기소 처분을 받았다. 성서조선도 '조와'가 실린 통권 158호를 끝으로 폐간됐다.송두용과 동시대에 무교회주의 활동을 했던 노평구는 당시 일제가 무력 투쟁이나 드러내놓고 하는 독립운동보다는 이 같은 종교·문화 운동을 더 두려워했다고 회상했다. 노평구는 송두용이 잡지에 쓴 글을 모아 총 6권 분량의 송두용신앙문집을 펴내기도 했다. 성서조선사건 당시 일본 경찰은 "너희 놈들은 우리가 지금까지 잡은 조선놈들 가운데서 가장 악질의 부류들이다. 결사니 조국이니 해가면서 팔딱팔딱 뛰어다니는 놈들은 오히려 좋다. 그러나 너희들은 종교의 허울을 쓰고 조선민족의 정신을 깊이 심어서 백년 후에라도 아니 오백년 후에라도 독립이 될 수 있게 할 터전을 마련해 두려는 고약한 놈들이다"는 반응을 보였다고 노평구는 밝혔다.송두용은 해방 이후에도 개인의 신앙생활과 함께 구호활동과 교육사업에도 힘썼다. 1930년 오류동에서 오류학원을 설립해 가난한 학생들을 위한 교육 사업을 펼쳤던 송두용은 1969년부터 장봉도에서 지인의 제안을 받아 '푸른학원'이라는 교육기관의 운영을 맡았다. 건강 문제로 요양차 장봉도에 들렀다가 1967년 푸른학원을 설립한 무교회 신앙인 노연태로부터 푸른학원을 맡아달라는 부탁을 받았기 때문이다. 이때부터 그는 '장봉도 할아버지'라는 별칭이 붙었다.당시 장봉도에는 초등학교밖에 없어 육지의 상급학교로 진학하지 못한 청소년들은 바다에 나가 굴이나 조개를 따거나 선주 밑에서 새우 선별작업을 하는 고된 일을 하면서 자랐다. 강화도와 영종도, 신·시·모도, 장봉도 일대에서 선교활동을 하던 노연태는 이들을 위해 학교를 세웠다. 송두용은 '정직'을 교훈으로 내세우고 학생들을 가르쳤다. 박정수 등 인천에서 함께 신앙 모임을 갖던 사람들도 푸른학원에서 교사 활동을 했다. 푸른학원은 1974년 정식으로 중등학교 인가를 받아 푸른고등공민학교라는 이름으로 다시 출발했다. 그러나 1980년대 들어 육지로의 진학률이 높아지면서 푸른학원의 문을 두드리는 학생들이 급격히 감소했다.송두용의 건강이 악화되고, 학생 수가 자연스럽게 줄면서 1982년 푸른학원은 결국 문을 닫고 만다. 인천섬연구총서 '장봉도'편을 보면 1982년 장봉도 초등학교 졸업생이 36명이었는데, 푸른학원으로 진학하겠다는 학생은 겨우 4명에 불과했다고 한다.10년 넘게 장봉도의 학생들을 위해 헌신했던 송두용은 1986년 4월 10일 서울 구로구 자택에서 눈을 감았다. 따르던 제자들과 무교회주의 신앙인들은 송두용의 추모집을 발간하고, 그가 쓴 글을 모아 문집을 내기도 했다.송두용은 무교회주의 종교인이면서 민족의식을 지닌 독립운동가였다. 2010년 송두용은 성서조선 사건으로 옥고를 치르고 대한민국의 독립을 위해 헌신했다는 사실이 인정돼 독립유공자 서훈(건국포장)을 받았다. 국가보훈처는 그를 '인천' 출신으로 분류하고 있다.송두용은 1958년 3월 잡지 '성서인생' 33호에 쓴 '진정한 3·1 정신'이라는 글을 통해 60년 뒤를 내다보기라도 하듯 현세대가 깊이 새겨들어야 할 말을 남겼다.그는 3·1 정신은 말이나 형식이 아니고 마음이며 산 생명이라고 했다. 독립운동 100주년을 맞은 올해 각종 기념식 행사에만 치중해 진정한 독립의 의미가 뒷전으로 밀려나는 것을 일찍이 우려했던 거다. 그는 "3·1 운동은 한 개인, 한 정당, 또는 한 단체를 위한 것이 아니다. 정치인도 근로대중도, 부호도 빈자도, 남녀노유의 구별 없이 도시와 촌락의 차이가 있을 리가 없다"고 했다.그는 특히 3·1 운동의 정신은 국민 개인이 실력을 양성해 각자 자기의 책임을 완수하는 것이라고 했다. 최근 일본 아베 정부의 무역보복 조치로 반일 감정이 확산하면서 정부와 국민들이 '극일(克日)'의지를 불태우는 현 시국에 딱 들어맞는 말이다.송두용은 "우리는 소련의 공산주의를 무서워하거나 일본의 침략정신을 겁낼 것이 없다. 일본을 이기고 소련을 물리치려면 오직 실력밖에 없는 것이다. 모든 허위와 외식을 버리고 허영과 기만을 떠나서 다만 진실 일로로 매진하는 수밖에 없다. 3·1 정신은 행사에 있는 것이 아니고 다만 실천궁행으로 사는 것이며 이룰 것이다"고 했다. /김민재기자 kmj@kyeongin.com그래픽/성옥희기자 okie@kyeongin.com/아이클릭아트성서조선 158호에 일제 저항정신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권두언 '조와(弔蛙)'를 실었다가 옥고를 치른 무교회주의 6인방. 뒷줄 왼쪽부터 양인성, 함석헌, 앞줄 왼쪽부터 유석동, 정상훈, 김교신, 송두용. /송두용신앙문집간행회 제공송두용 등 무교회주의 신앙인 6명이 발행한 잡지 '성서조선'.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제공1930년 오류학원을 설립할 당시의 송두용. /송두용신앙문집간행회 제공1958년 3월 송두용이 3·1정신에 대한 글을 썼던 잡지 성서인생. /송두용신앙문집간행회 제공

2019-08-21 김민재

[독립운동과 인천·(23)]용동 출신 박남칠

내리교회 교인 父영향 日 억압속 '엡윗청년회' 소년운동 주도 야학등 열며 애국심 고취YMCA 중등부에서 '사회주의' 눈 떠… 조봉암과 '운명적 만남' 평생 후원자·동지관계미곡상 경영하며 인천·강화지역 좌익 독립활동가 '구심점 역할' 청년운동도 지속 펼쳐해방후 여운형 '건국준비위' 참여 한국전쟁때 보도연맹 학살사건에 '희생' 재평가 필요일제강점기와 해방공간, 인천의 대표적인 좌익 활동가로 올해 서거 60주기를 맞은 죽산 조봉암 선생을 꼽는 데 누구나 주저하지 않는다. 그런데 조봉암의 든든한 후원자이자 동지이며 기독교 사회주의자로서 인천의 근현대 좌익 활동을 이끌었던 박남칠(1902~1950)을 기억하는 이는 많지 않다. 박남칠은 드러내놓고 독립운동을 벌이지는 않았지만, 일제의 억압 속에서도 인천 내리교회를 중심으로 청년운동과 소년운동을 주도한 인물이다. 청년들의 문화·체육 활동과 강연회 개최로 애국심을 고취하는 데 힘썼고, 한편으로는 사업가로서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가들의 버팀목이 되어주었다. 또 인천·강화지역 사회주의 활동가들의 연결고리이자 구심적 역할을 하기도 했다.박남칠 연구는 교사 출신의 인천 향토사학자 이성진 인천골목지킴이 대표의 성과가 유일하다. 이 대표는 인천의 근현대 인물 가운데 제대로 된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는 박남칠에 주목하고, 그의 생애와 사상 전반에 대해 연구해 왔다. 현재 알려진 박남칠의 행적은 대부분 이 대표가 1차 사료를 수집해 정리한 자료를 기반으로 하고 있다.박남칠은 과거 반공 이데올로기 속에 제대로 된 평가를 받지 못한 채 수십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인천 근현대사의 '엑스트라'로만 남아 있다. 올해 독립운동 100년을 맞아 후학들이 재조명해야 할 산더미처럼 쌓인 인천의 인물 가운데 박남칠이 빠져선 안된다.박남칠은 1902년 5월 20일 인천 용동에서 미곡상을 하는 박삼홍과 허매란 사이에서 태어났다. 박남칠은 성장 과정에서 아버지 박삼홍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박삼홍은 1890년대 미곡상으로 부를 쌓았고, 한국인 최초의 목사인 김기범을 통해 기독교를 받아들였다.내리교회 교인이었던 박삼홍은 인천 소년운동의 효시이기도 한 '엡윗청년회'의 초기 멤버였다. 엡윗청년회는 1889년 미국 감리교 내 청년단체로 감리교 창시자인 요한 웨슬리의 고향 엡윗(Epworth)에서 이름을 따왔다. 엡윗청년회는 선교사들의 해외 파견지에도 조직됐는데 1897년 인천 내리교회에서 우리나라 최초의 엡윗청년회가 만들어졌고, 서울·강화 등지로 퍼져나갔다. 조봉암도 강화 잠두교회의 엡윗청년회 출신으로 훗날 박남칠과 인연을 맺는다.박삼홍은 내리교회 엡윗청년회 회장을 지내면서 계몽운동을 이끌었고, 이는 애국·민족 운동으로 확대됐다. 결국 1905년 11월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자 진남포 지방 총무였던 김구 등 전국 엡윗선교회 임원들이 구국기도회를 개최하고 상소운동을 벌인 일은 유명하다. 이 일로, 이듬해 6월 일본은 감리교 내 친일성향의 선교사를 회유해 엡윗선교회를 해산하도록 했다. 인천 내리교회 엡윗선교회도 창립 9년 만에 해체됐지만, 박삼홍은 1908년 재조직을 감행해 기독교 청년운동의 맥을 이었다. 기독교 신앙과 포교가 바탕이었지만, 문맹퇴치사업과 연극 공연, 강연회 개최 등으로 민족 의식을 배양하는 게 주된 임무였다. 육영사업에도 앞장서 내리교회가 세운 영화학교에 많은 돈을 기부했고, 다른 학교에서 체육행사가 열리면 기꺼이 후원금을 보탰다.박남칠은 이런 아버지 곁에서 소년운동과 청년운동의 중요성을 자연스럽게 배우면서 자랐다. 그는 1918년 인천공립보통학교(창영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 기독교청년회관에 있는 YMCA 중등부 과정에 진학했다. 이때 교장이 월남 이상재 선생이었다. 박남칠은 여기서 기독교 사회주의 사상에 눈을 뜨게 됐고, 세 살 위인 죽산 조봉암과 운명적인 만남을 갖게 됐다.소설가 이원규가 쓴 죽산 조봉암 평전에도 둘의 만남이 소설처럼 그려지고 있다."동급생 중에 그를 친형처럼 정겹게 따르는 청년이 있었다. 인천 출신의 박남칠이었다. 조봉암은 그가 신흥우 선생의 수업시간에 맨 앞에 앉아 기독교 사회주의에 대해 열심히 질문을 던지는 것을 보고 괜찮은 녀석이라고 여겨온 터였다."1920년 5월 죽산이 의친왕 망명을 시도한 대동단 사건에 휘말려 경찰에 끌려가 고문을 당하고 난 뒤 몸을 추스른 곳도 박남칠의 셋방이었다.박남칠은 공부를 마치고 인천으로 돌아와 아버지 밑에서 미곡상 경영을 도왔다. 미곡상에서 정미업으로 사업을 확장했다. 아버지는 사업이 번성할수록 상도덕을 지키라고 박남칠에게 늘 당부했다. 당시 곡식의 중량을 속여 파는 일이 잦았기 때문이다.기독교와 사회주의는 물과 기름처럼 섞이기 어려워 서로 반감을 갖고 있지만, 유독 인천은 사정이 달랐다. 1920년대 내리교회 담임 목사는 독립운동가 김진호 목사와 민족대표 33인 중 하나였던 신홍식 목사였다. 방법은 달랐으나 조국의 독립을 위한 목표는 같았던 이들은 서로의 존재를 인정하고 연대했다. 이런 분위기의 중심에 박남칠이 있었다. 내리교회 엡윗청년회는 일제의 압력 속에서도 꿋꿋이 활동을 이어갔다. 엡윗청년회 출신의 하상훈, 서병훈, 이범진, 이길용 등이 동아일보 인천지국을 이끌었고, 이들은 일장기 말소사건의 주역이 됐다. 야학과 웅변대회, 토론회를 열어 애국 계몽운동을 전개했고, 기독교의 구원은 개인이 아닌 사회를 의미한다고 설파하며 기독교를 식민지 민족의식 배양의 거름으로 삼았다. 사회참여를 고민하는 청년에게 기독교가 하나의 진입 경로 역할을 한 셈이다.서울 YMCA에서 조봉암과 연을 맺은 박남칠은 조봉암이 조직한 신흥청년동맹 전국 순회 시국강연의 인천 행사를 담당했다. 당시 조봉암은 공산당의 심장인 모스크바에서 활동하다 국내 사회주의 세력과의 결합을 도모하고 있었다.조봉암이 1924년 4월 19일 인천 산수정 공회당(지금의 송학동 인성여고 부근)에서 연 신흥청년동맹의 인천 강연은 성공적으로 끝났다. 당시 동아일보는 조봉암 일행의 인천 강연 예고 기사를 실으며 분위기를 띄웠다. 조봉암은 이 자리에서 "대중을 본위로 삼는 민중운동이 조선인의 유일한 살길이며 따라서 이러한 신사상을 널리 판매하겠다"고 해 호응을 얻었다.박남칠은 이날 조봉암에 김용구와 이보운, 이승엽, 유두희, 권평근 등 인천의 청년 지도자들을 소개했다. 장차 사회주의 운동을 이끌어갈 이들의 만남에 박남칠이 주선자로 나선 것이다.박남칠을 얘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게 내리교회 소년척후대 활동이다. 내리교회 엡윗청년단이 주도해 만든 단체로 오늘날의 보이스카우트와 비슷한 소년단체다. 신태범(1912~2001) 박사는 '인천 한세기'에서 "내리 소년척후대는 교회대였으므로 지도자도 넉넉했고 후속 대원도 꾸준해서 착실한 성장과 발전을 거듭했다. 여러 차례 큰비만 오면 침수 소동이 나는 화수동 일대의 구원활동을 했고, 어린이날 행사에 협조해 가면서 훈련을 게을리하지 않았다"고 설명했다.박남칠은 소년척후대 지도자로서 주말마다 정기집회를 갖고, 어린 대원들에게는 한국 역사를 가르치며 민족의식을 높였다. 평일에도 활발한 봉사활동을 펼치면서 생활 속 애국을 실천하도록 했다. 이런 왕성한 활동으로 많은 시민들의 지지를 얻자 일본 경찰은 소년척후대의 야영이나 집회를 감시할 정도였다. 전국 각지 소년척후대 출신들이 항일운동에 뛰어들었기 때문에 일제는 이를 불온 단체로 여겨 행사마다 입회했다고 한다.1940년대 들어 교회가 일제에 순응하고, 미곡상에 대한 일제의 감시가 심해지면서 박남칠도 고비를 맞게 된다. 그는 아버지의 가르침 아래 쌀 정량을 지키는 도덕적인 사업가로 알려져 신망이 두터운 터였다. 그는 정미소 이름도 '남이 잘 되는 것을 바란다'는 뜻의 '송무백열(松茂柏悅)'에서 따와 송무정미소로 지었다. 이는 소나무가 무성한 것을 보고 측백나무가 기뻐한다는 뜻인데, 손님이 잘 되는 것을 가게 주인이 기뻐한다는 의미로 읽을 수 있다.박남칠은 상공인들의 권익을 대변하기 위해 1935~1940년 인천상공회의소 평의원으로 참여하기도 했는데 훗날 일본의 어용단체에 참여했다는 부정적 인식이 꼬리표처럼 달렸다.그러나 1938년 9월 27일 동아일보 기사는 그를 "공익심이 많은 실업가로 일반의 신망이 두텁다. 사회적으로 많은 활동을 아끼지 않고 더욱이 육영사업과 소년지도에 부단히 노력하는 사회적 유지"라고 소개했다. 친일 부역자라면 얻기 힘든 평가이다.미곡상조합장을 맡기도 했던 박남칠은 이 무렵 감옥에서 출옥해 생계가 곤란했던 조봉암이 인천비강업조합장을 맡을 수 있도록 했다. 또 항일운동을 하다가 일본 경찰에 붙잡혀 전향을 하고 돌아온 인천 출신 사회주의 활동가 이승엽을 미곡상조합 사무장으로 취직시켰다. 이뿐 아니라 형편이 어려운 동지들이 경제적으로 자리를 잡을 수 있도록 하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식민지 수탈 시기 성공한 사업가로서 독립운동자들의 경제적인 버팀목이 되어준 셈이다.그는 해방 이후에도 사회주의 노선을 유지해 여운형이 주도한 '건국준비위원회'에 참여했다가 한국전쟁 발발 후 보도연맹 학살 사건 희생자가 됐다. 조국 해방으로 건국 준비에 여념이 없던 그가 좌우 이념 대립의 희생양이 된 거였다.2010년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는 한국전쟁 전후 인천에서 벌어진 민간인학살사건 피해자 62명 중 박남칠이 포함됐다고 밝혔다. 좌익 사상가를 공산당 부역자라는 이유로 무차별 학살한 사건에 희생된 것이다. 박남칠은 1950년 6월 30일 무렵 집에 숨어 있다가 발각돼 살해됐고, 소월미도에 수장됐다고 알려졌다. 과거사위는 "박남칠이 인천시청에서 열린 군중집회에 참석하지 않았지만, 당시 보도연맹원 단속을 피해 숨어 있다가 어린 조카가 경찰에게 뒷방에 있다는 사실을 알려줘 연행된 후 살해됐다"고 밝혔다. /김민재기자 kmj@kyeongin.com/아이클릭아트내리교회 소년척후대. 사진 가운데가 박남칠. /인천시 역사자료관내리교회 집총고적대. /인천시 역사자료관엡윗청년회 여자야학부. /인천시 역사자료관

2019-08-14 김민재

[독립운동과 인천·(22)]강화 출신 죽산 조봉암·(下)

'두차례 검토' 친일흔적 이유 보류근거로 삼았던 기사도 사실과 달라죽산 조봉암(1899~1959)은 독립운동가이자 해방 후 대한민국의 초석을 닦은 정치가이다. 제헌 국회의원과 초대 농림부 장관을 지내고, 제2대 국회의원과 국회 부의장을 거쳐 두 번의 대통령 선거에 나서기까지 그의 정치적 기반은 늘 인천이었다.인천시는 조봉암 60주기 다음날인 지난 1일 인천시청 본관에 독립운동 관련 죽산의 어록과 태극문양을 조합한 대형 현수막을 걸어 그를 기렸다. 문재인 대통령은 3년째 꼬박 죽산의 추도식에 화환을 보내고 있다. 1959년 국가로부터 '사법 살인'을 당한 조봉암이 2011년 대법원 재심을 통해 복권된 지 8년이 지났다. 하지만 국가가 죽산의 명예를 회복하는 최종적인 단계라 할 수 있는 서훈은 아직 소식이 없다.국가보훈처는 2011년과 2015년 각각 조봉암의 서훈을 검토했는데, 친일 흔적이 있다는 이유로 보류했다. 국가보훈처가 지난해 서훈을 재검토하기 위해 '조봉암 평전'을 쓴 이원규 작가를 찾아 증언을 수집하기도 했지만, 이후 검토작업이 지지부진한 상황이다.국가보훈처가 내세우는 죽산의 친일 흔적은 조선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보' 1941년 12월 23일자 신문에 실린 '국방성금 150원 헌납' 기사다. 이 기사에 나오는 조봉암의 주소가 틀렸다는 게 일본 공문서 등을 통해서 입증되고 있다. 현재 화폐가치로 환산하면 수천만원에 달하는 '국방성금 150원'을 당시 죽산이 낼 형편이 되지 않았다는 여러 사람의 증언도 있다.죽산이 1945년 1월 '예비구금령'으로 용산 헌병사령부에 체포됐다가 8월 15일 해방을 맞아 풀려난 그 날, 인천 도원동 자택 주변에는 1천여명의 환영 인파가 몰렸다. 인천사람들이 일제에 항거한 정치지도자로 가장 먼저 죽산을 떠올렸기 때문일 것이다.2011년 대법원 재심에서 간첩죄 무죄를 선고받기까지는 죽산의 서훈 문제는 공론화조차 할 수 없었다. 죽산 연구자들은 조봉암의 일제강점기 공산당 활동 경력이 복권된 이후에도 국가유공자 추서에 발목을 잡고 있는 게 아닌지 의심하고 있다. 죽산에게 사회주의는 항일운동을 위한 방편이었다. 이원규 작가는 "죽산의 서훈은 어쩌다 소외된 것이 아닌 국가가 회복해야 할 양심"이라며 "반드시 그의 업적에 걸맞은 훈격으로 추서해야 한다"고 말했다. /박경호기자 pkhh@kyeongin.com

2019-08-07 박경호

[독립운동과 인천·(22)]강화 출신 죽산 조봉암·(下)

1921년 일본 유학중 공산주의자 교류 '제국주의 반대' 독립운동 최선의 방편으로 선택조선공산당 창단 참여 코민테른 연락책 활동 中서 독립당 조직하다 체포 '6년 옥살이'인천 정착후 또 '구속' 감옥서 해방맞아… 전향 선포 제헌 국회의원·농림부 장관등 역임신뢰성 논란 '친일흔적' 보도에 서훈 보류 "불확실한 기사 1건보다 커다란 업적 주목을"죽산 조봉암(1899~1959)은 해방될 때까지 사회주의자로서 항일운동을 전개했다. 동지였던 박헌영(1900~1955 추정) 중심의 조선공산당과 갈라서면서 해방 이후 사상적 전향을 선포하고 정치가의 길로 나섰다. 죽산이 제헌 국회의원과 초대 농림부 장관을 지내면서 대한민국의 초석을 닦았다는 평가는 뚜렷하다. 그는 평화통일론의 선구자이기도 했다.조봉암은 1921년 7월 일본 유학을 떠나 김찬(1894~?)을 비롯한 공산주의자들과 교류했다. 조봉암은 이들과 엿장수를 하면서 어렵게 학비를 벌었고, 세이소쿠영어학교를 거쳐 주오대학 전문부 정치경제과에 입학했다. 이 시기 그는 사회주의 서적을 탐독하며 사상적으로 성장했다.1년 만에 유학생활을 정리하고 귀국한 조봉암은 본격적으로 사회주의운동에 나섰다. 사회주의자들 사이에서 논객으로 급부상하면서 1922년 11월 소련 베르흐네우딘스크에서 열린 한인 공산주의자 연합대회 국내대표로 참가했다. 그해 12월 공산주의 국제연합인 '코민테른'의 호출을 받아 조선인 공산당원 대표단으로 모스크바를 방문했다. 모스크바동방노력자공산대학에 입학해 공부하기도 했다.이후 조봉암은 김찬, 박헌영, 김단야(1901∼1938), 임원근(1900∼1963) 등 청년 사회주의자들과 함께 조선공산당 창당에 참여했다. 인천을 비롯해 전국을 순회하며 강연했고, 조선일보에서 기자생활도 했다. 1920년대 중반까지 조봉암은 중국 상하이와 러시아를 누비며 코민테른과 조선공산당 간 연락책으로 활동했다. 1920년대 후반부터는 상하이를 기반으로 한국유일독립당 조직운동에 뛰어들고, 현지 한인들의 사회주의계열 단체를 결성해 이끌었다.조봉암은 항일투쟁을 위한 최선의 방편으로 공산주의를 택했다. 당시 서구 주요 국가들이 일본의 조선 침탈을 묵인하는 국제 정세에서 조선인들의 정당 조직활동이나 빨치산(partisan) 투쟁에 금전적인 지원을 한 것은 국제공산당이 유일했다. 민족주의계열과 더불어 사회주의계열이 독립운동의 주요 흐름을 차지하게 된 원인이었다. 조봉암은 1957년 월간지 '희망' 2·3·5월호에 연재한 자서전 격인 '내가 걸어온 길'에서 일본 유학시절 사회주의에 심취하게 된 이유에 대해 이렇게 적었다."볼셰비키들은 국내에서 혁명을 성공했을 뿐만 아니라 모든 제국주의를 반대했고 특히 일본 제국주의의 한국침략을 반대하고 한국 독립을 적극적으로 원조한다는 것이며, 그 실증으로는 벌써 수십만 달러의 독립 원조자금을 상해 임시정부를 통해서 국내에 보냈다는 것이다. 우리 동지들은 그때야 비로소 소비에트 혁명의 내막을 약간 알게 되었고 따라서 우리나라가 일본과 싸워서 이기자면 우리 자신이 굳은 조직을 가져야 되겠고, 러시아와 협력하고 러시아의 지원을 받아야 되겠다고 작정했다."조봉암은 1932년 9월 중국 상하이 프랑스조계에서 체포돼 인천항을 통해 입국해 신의주경찰서로 압송됐다. 동아일보는 1932년 10월 1일자 신문에서 '제1차 공산당 간부 조봉암 작일 피체'라는 제목의 기사로 죽산의 체포 소식을 다루면서 "조봉암은 제1차 조선공산당 사건 때 외국으로 망명해 지금까지 있던 사람인데, 조선에 있을 때는 신흥청년동맹과 화요회 등에서 중요 간부로 활동하였다"고 설명했다. '내가 걸어온 길'에도 당시 상황이 언급됐다."벤치에 앉아서 담배를 피우고 있으려니까 나이 삼십 남짓해 보이는 중국복 입은 청년이 내 앞으로 다가서며 중국어로 담뱃불을 빌려달라고 하기에 나는 아무 말 없이 담뱃불을 내어 주었더니 그 자는 담뱃불을 붙이는 체하면서 내 손을 슬금슬금 훔쳐본다. 좀 기분이 나빴지만 그냥 무심히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그러자 난데없이 일본말로 '고꼬다요'(여기야)하는 소리가 들려서 정신이 번쩍 들어서 사면을 둘러보니 벌써 일본 놈 서넛이 내 앞에 서 있었고 전후좌우에 양복 입고, 사진기를 어깨에 둘러멘 놈들이 내 편을 향해서 모여들고 있지 않은가. (중략) 벌써 수십 명 왜놈 가운데 둘러싸여 있었고 불란서 형사 한 명이 내 손목을 잡고 있었다."치안유지법 위반 등 혐의로 기소된 조봉암은 1933년 12월 신의주지방법원으로부터 징역 7년을 선고받고, 신의주형무소에 수감됐다. 감옥에서 6년을 보내고 1939년 7월 출소했다. 일본 황태자 탄생에 따른 은사(恩赦)조치로 1년이 감형됐다.조봉암은 출소 이후 인천에 정착했다. 강화 출신 김이옥(1905~1933) 여사와 상하이에서 함께 살 때 낳은 어린 딸이 인천에 있는 먼 친척에게 맡겨져 있었다. 앞서 김이옥 모녀는 1933년 5월 귀국해 강화 친정에서 지냈는데, 그해 10월 김이옥은 지병이 악화해 세상을 떴다. 당시 인천 금곡동과 창영동 쪽에는 창녕 조씨 집안이 많이 살았다고 한다. 또 조봉암이 서울에서 YMCA 중학부에 다닐 때 그를 따랐던 박남칠(1902~1950)이 인천 미곡상조합 조합장으로 지역 상공업계의 거물로 성장해 있었다. 미곡상과 객주업을 한 김용규 등 '강화구락부' 출신 지역 유지들도 조봉암에게 우호적이었다. 이들은 인천상공회의소 간부이자 지역 시민운동을 주도하는 인물들이었다.죽산의 후원자들은 인천 소화정(부평구 부평동)에 집을 얻어줬고, 생계를 꾸릴 수 있도록 인천비강업조합을 설립해 넘겨줬다. 비강업은 정미소에서 벼를 찧을 때 나오는 왕겨를 모아 사료나 연료로 공급하는 업종이다. 사무실은 현재의 신포시장 건어물거리 쪽에 있었는데, 인천경찰서 고등계 형사가 상주하다시피 조봉암을 감시했다고 한다. 당시에도 일본은 조봉암에게 전향하라고 끊임없이 회유하고 있었다. 1942년에는 현 중구 도원동에 있는 부영(府營)주택으로 이사했다. 인천부(仁川府)가 1940년 직접 지어 분양한 도원동 부영주택은 지금까지도 일부가 남아있다.일제의 감시가 심했던 인천 시절 죽산은 박남칠, 김용규, 유두희(1901~1945), 권평근(1900~1945), 이승엽(1905~1953) 등 좌익계열 인사들의 사상적인 지주로서 합법적인 사회운동에 집중했던 것으로 보인다. 죽산은 1945년 1월 '사상범 예비구금령'으로 구속돼 또다시 용산 헌병사령부에 갇혔다. '외국과 통신했다'는 이유였다. 그해 8월 15일 죽산은 헌병사령부 감옥에서 해방을 맞이했다.국가보훈처는 조봉암이 해방 전 인천에 살던 시기에 친일의 흔적이 있다며 죽산에 대한 서훈을 보류하고 있다. 논란이 되고 있는 친일의 흔적이란 조선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에 실린 1940년 신년광고 1건과 1941년 연말의 기사 1건이다. 매일신보 1940년 1월 5일자 신문에는 '흥아신춘'(興亞新春)이라는 신년광고에 '인천부 본정 내외미곡직수입 성관사 조봉암 방원영'이라는 문구가 실렸다. 매일신보 1941년 12월 23일자 기사에서는 '인천부 서경정에 사는 조봉암씨는 해군부대의 혁혁한 전과를 듣고 감격하여 지난 20일 휼병금으로 금150원을 인천서를 통하여 수속하였고'라는 내용을 보도했다.하지만 '조봉암 평전'을 쓴 이원규 작가는 해당 광고와 기사를 신뢰하기 어렵다고 분석했다. 1933~1934년 인천상공회의소 편람에는 매일신보 신년광고에 등장한 '성관사'라는 업체가 없고, 동업자로 이름을 올린 방원영에 대한 기록도 찾을 수 없다. 죽산의 서훈과 관련한 결정적인 논란은 국방헌금 150원이다. 우선 조봉암은 서경정(현 중구 내동)에 산 적이 없고, 기사가 보도될 당시에는 부평에 살고 있었다. 이원규 작가는 일본자료 등을 바탕으로 당시 150원을 지금 돈으로 환산하면 3천만~4천만원의 가치였을 것으로 보고 있다. 조봉암이 비강업조합을 맡고 있었지만, 국방헌금을 150원이나 낼 형편은 되지 않았다. 숭의동에 살았던 조봉암의 처남 김영순씨는 이원규 작가와의 인터뷰에서 "150원은 커녕 10원도 내기 어려운 형편"이었다고 회고했다. 죽산이 1952년 7월께 그의 죽마고우이자 독립유공자이기도 한 조광원(1897~1972) 신부를 만난 자리에서도 "비강업조합장 자리가 감옥살이보다 힘들었다"며 "걸핏하면 헌금 내라고 시달렸는데, 주변에서 알아서 해줬다"고 말했다는 증언도 있다.무엇보다도 죽산이 친일을 했다면 1945년 1월 예비구금령으로 체포돼 8월 15일까지 갇혀 있을 이유가 없었다는 게 연구자들 시각이다. 죽산이 헌병사령부로 끌려갈 때 부인 김조이(1904~ ?) 여사는 "전쟁에 불리해지니까 말 안 듣는 사람들을 끌어다 죽이려는 것"이라고 말했다고 처남 김영순씨가 증언했다. 죽산이 풀려난 8월 15일 도원동 부영주택으로 올라가는 언덕이 1천명 이상의 환영 인파로 덮였다고 한다. 조봉암이 친일이었다면 환영이 아닌 민중의 지탄을 받았을 것이다. 죽산은 자신의 집을 찾아온 청년들을 주축으로 인천보안대를 결성하고, 여운형과 함께 건국준비위원회 인천지부를 조직했다.더군다나 해방 이후 박헌영 등이 조봉암을 축출하려고 맹공을 퍼부을 때도 매일신보의 국방헌금 기사는 언급조차 하지 않았다. 이원규 작가는 "죽산이 국방헌금을 냈다면 일본의 선전 도구가 되어 신문에 크게 실리고 강연회에 불려다녔을 것"이라며 "불확실성이 가득한 1건의 기사 내용보다는 죽산이 남긴 커다란 업적에 더 주목해야 한다"고 말했다. /박경호기자 pkhh@kyeongin.com2017년 7월 31일 서울 망우리공원 죽산 묘역에서 열린 조봉암의 58주기 추도식장에 처음으로 '대통령 화환'이 왔다. 이후 문재인 대통령은 올해 60주기 추도식까지 3년째 화환을 보내고 있다.중국 상하이에서 사회주의 운동을 펼치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된 조봉암을 다룬 동아일보 1933년 2월 25일자 신문기사. 기사 속 사진은 조사를 받을 당시 조봉암. 출처/네이버 뉴스라이브러리죽산 조봉암 선생의 생전 법정에서의 모습. 이른바 '진보당 사건'으로 이승만 정권으로부터 '사법 살인'을 당한 죽산에 대해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2011년 재심에서 무죄를 선고했다. /경인일보DB조선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보' 1941년 12월 23일자 신문에는 조봉암이 국방성금 150원을 냈다는 기사가 실렸다. 친일 흔적으로 보기엔 신뢰성이 떨어진다는 게 연구자들 시각이다. 출처/국립중앙도서관조봉암 가족이 1942년부터 해방 이후인 1948년까지 살았던 인천 중구 도원동 부영주택. 현재 대부분 헐리고 일부만 남았다. /경인일보DB

2019-08-07 박경호

[독립운동과 인천·(22)]강화 출신 죽산 조봉암·(上)

박남춘 시장·송영길 의원 등 추모식 참석… "서훈 문제 조속히 해결"독립운동가이자 한국 정치계의 거목, 죽산 조봉암(1899~1959) 선생의 60주기 추모식이 31일 오전 11시 서울 중랑구 망우리 공원묘역에서 죽산조봉암선생기념사업회와 죽산조봉암선생유족회 주최로 엄수됐다. 이날 추모식에 참석한 주요 정치권 인사들은 하루빨리 죽산 조봉암 선생의 서훈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목소리를 높였다.이날 죽산의 60주기 추모식에는 어김없이 인천사람들이 대거 참석했다. 추모식에는 곽정근 죽산조봉암선생기념사업회 회장과 유족, 박남춘 인천시장, 송영길·박찬대 국회의원, 지용택 새얼문화재단 이사장, 차준택 부평구청장, 김교흥 전 국회 사무총장, 홍미영 전 부평구청장, 이부영 몽양여운형선생기념사업회 회장, 조성혜·조선희 인천시의원, 조동암 전 인천시 정무부시장, 이영재 경인일보 인천본사 사장 등이 참석했다.문재인 대통령은 3년째 추모식에 화환을 보내 죽산의 뜻을 기렸다. 문희상 20대 국회 후반기 의장, 정세균 20대 국회 전반기 의장, 더불어민주당 이해찬 대표, 바른미래당 손학규 대표, 민주평화당 정동영 대표, 정의당 심상정 대표, 윤관석 더불어민주당 인천시당위원장, 이정미 국회의원 등 정치권 인사들이 보낸 화환도 묘소 주변을 빼곡하게 둘렀다.인천시는 올해부터 죽산의 추모식 행사비용 후원을 재개했다. 그동안에는 새얼문화재단이 행사비용을 보태왔다. 인천시는 추모식에 앞서 죽산 묘역을 재정비하고 주변 경관을 개선했다. 새얼문화재단을 중심으로 조봉암 선생 석상 건립사업도 본격화할 예정이다. 박남춘 인천시장은 이날 추도사에서 "무엇보다 선생의 독립유공훈장 추서가 빠른 시일 내에 이뤄질 수 있도록 관련 기관, 단체와 함께 노력하겠다"며 "선생의 명예를 회복하고, 후손들에게 올바른 역사를 알릴 수 있도록 각별히 신경쓰겠다"고 말했다. 송영길 의원도 "주최 측이 매번 추도사를 요청하는 것은 죽산 선생의 서훈 문제를 빨리 해결하라는 요청이라고 이해하고 있다"며 조봉암 선생의 독립유공자 추서에 적극적으로 나서겠다고 강조했다. /박경호기자 pkhh@kyeongin.com한국 정치의 거목 죽산 조봉암 선생의 60주기 추모식이 열린 31일 오전 서울시 중랑구 망우리 공원묘역에서 박남춘 인천시장과 더불어민주당 송영길 국회의원이 헌화를 하고 있다. /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

2019-07-31 박경호

[독립운동과 인천·(22)]강화 출신 죽산 조봉암·(上)

10살부터 잠두교회 다니며 계몽운동 접해… 대서소 보조원으로 일하던 1919년 3월'의병활약' 유봉진등 기독교인들 주도 강화 읍내서 펼쳐진 1만여명 '만세운동' 동참시위 공모·소식지 배포로 체포 6개월뒤 무죄로 풀려나… 옥고때 '민족의식' 강해져자서전격 연재 글 "감옥에서 비로소 많은 것을 배웠고 애국심 불타게 됐다" 밝혀1919년 3월 인천 강화에서도 "대한 독립 만세"를 외치는 민중의 목소리가 섬을 가득 메웠다. 강화 읍내에서만 하루 동안 1만여명이 모인 강화 만세운동은 전국적으로 따져도 대규모 시위였다. 강화에서 나고 자란 죽산 조봉암(1899~1959)도 만세시위에 동참했다. 당시 평범한 대서소(代書所) 보조원이었던 21세 청년 조봉암은 강화 만세운동으로 인해 투옥돼 고초를 겪었다. 청년 시절 강화에서의 경험이 죽산을 독립운동가의 길로 이끌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올해는 조봉암이 강화에서 태어난 지 120년이 되는 해다. 꼭 60년 전인 1959년 7월 31일 이승만 정권으로부터 '사법 살인'을 당한 조봉암은 2011년 복권될 때까지 50년 넘게 출생지조차 잊혀 있었다. 현재까지도 그의 출생지는 확정적으로 밝혀지지 않았다. 2013년 '조봉암 평전'을 쓴 이원규 작가는 죽산의 출생지로 창녕 조씨 집성촌이었던 강화군 선원면 금월리 남산대 또는 금월리 가지마을 촌락이 가장 신뢰할 만한 추정이라고 했다.조봉암이 9살 되던 해인 1907년 8월 강화에서는 대한제국 군대 해산에 반발한 강화진위대 군인들을 중심으로 일본군에 맞서는 의병이 봉기했다. 죽산이 강화 의병운동을 언급한 기록은 없지만, 잠시나마 강화성까지 점령했던 의병의 인상이 어린 시절 강하게 남았을 수밖에 없다. 4년제 강화공립보통학교와 2년제 농업보습학교를 마친 조봉암은 강화군청에서 허드렛일이나 심부름을 하는 사환으로 일하기 시작했다. 집안 형편이 어려워 학업을 이어가지 못했다고 한다. 1916년 18세에 강화군청 보조직원인 고원(雇員)이 되어 토지조사사업 통계작업에 투입되기도 했다. 당시 조봉암은 주산(珠算)이 빠르기로 유명했다.10살부터 다닌 신문리 잠두교회(현 강화중앙교회)는 조봉암의 일생에서 첫 전환점을 가져왔다고 할 수 있다. 강화진위대장 출신 이동휘(1873~1935)는 1905년 진위대장 사직 후 잠두교회 교인이 되면서 강화도에 보창학교를 설립하는 등 종교를 통한 애국계몽운동을 펼쳤다. 이러한 분위기 속 잠두교회 신도들은 민족의식이 투철했다. 조봉암은 군청 일을 그만두고 잠두교회 엡윗청년회(감리교 청년봉사단체) 일을 열심히 도왔다. 조봉암의 장녀 조호정(91) 여사를 낳은 김이옥(1905~1933)도 잠두교회를 같이 다니며 인연을 맺었다.1918년 봄, 조봉암은 관청리 대서소 보조업자로 취직했다. 1년 후인 1919년 3월 1일 서울 탑골공원에서 발발한 만세운동이 전국으로 확산하기 시작했다. 강화 만세운동은 기독교인들이 주도했다. 그 중심에는 길직교회 권사 유봉진(1886~1956)이 있었다. 그는 15세부터 18세까지 강화진위대에서 군인으로 근무했다고 한다. 군대 해산 당시에는 의병운동에 참여해 갑곶에서 일본군과 전투를 벌였다.연희전문학교 2학년에 재학 중이던 강화 출신 황도문(1897~1950)은 3·1운동에 참여한 직후인 3월 5일 귀향해 유봉진에게 서울의 시위소식과 함께 독립선언서를 전달했다. 유봉진은 황도문, 염성오(1877~1947), 유희철(1893~1942) 등과 시위계획을 논의했다. 독립유공자공훈록을 보면, 3월 9일 길직리 교회당에서 길직교회와 잠두교회 지도자급 인사들이 회합했고, 이 자리에서 조종환(1890~1937)은 서울의 만세시위 상황을 연설하며 "강화도에서만 있을 것이 아니다"라고 주민들에게 시위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이들은 3월 18일 강화 읍내 장날을 거사일로 정하고 독립선언서와 '강화군민에게'라는 문서를 곳곳에 배포했다.3월 18일 오후 2시께 강화 읍내 장터에서 유봉진을 비롯한 만세시위 기획자들이 태극기를 흔들며 "조선 독립 만세"를 외치기 시작했다. 이들은 주민들에게 태극기를 나눠줬고, 만세시위에 합세한 군중이 순식간에 불어나 장터를 순찰 중이던 순사조차 막지 못했다. 유봉진은 '결사대장'이라고 쓴 태극기를 어깨에 두르고, 길상면 온수리에서 백마를 타고 읍내 장터에 나타났다고 한다. 그는 장터에 있는 종루에 올라 종을 치며 시위대의 용기를 북돋웠다. 강화경찰서는 순사보 8명을 파견했으나, 만세시위를 진압하지 못했다. 오히려 군중은 순사들에게 "같이 독립 만세를 부르자"고 요구했다. 유봉진은 강화군수 이봉종에게 독립 만세를 부르라고 종용했고, 강화군수도 결국 만세를 외쳤다고 한다. 이날 강화 주민들은 밤 11시가 돼서야 해산했다. 국사편찬위원회의 '삼일운동 데이터베이스'에 따르면, 이날 강화 만세시위에 참여한 주민은 1만명에서 시작해 최대 2만명에 달했다는 일본 군경 보고자료들이 있다.이후에도 강화 만세운동은 부내면 월곶리, 송해면, 양사면, 선원면, 삼산면 등 강화도 본도뿐 아니라 교동도, 석모도 등지로 들불처럼 번지며 한 달 가까이 이어졌다. 특히 1919년 4월 7일 석모도 만세운동은 러시아에서 독립운동을 하다가 적발돼 석모도로 유배된 이민 2세대 이안득(1900~?)이 주도했다는 점이 눈길을 끈다.유봉진은 만세시위 직후 고려산에 숨어있다가 북도면 장봉도를 거쳐 마니산에 은신했는데, 일본 경찰이 부모를 핍박하자 온수리로 내려와 체포됐다. 그는 1920년 3월 경성복심법원에서 소위 소요 및 출판법·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1년 6개월을 선고받았다. 강화 만세시위로 체포돼 재판에 넘겨진 사람은 45명이다. 이 가운데 38명이 정부로부터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았다.조봉암은 1957년 월간지 '희망' 2·3·5월호에 연재한 자서전 격인 '내가 걸어온 길'에서 유봉진의 '애기패'를 자처하며 존경심을 드러냈다. 다음은 조봉암이 유봉진에 관해 쓴 '내가 걸어온 길'의 일부 내용이다."우리 강화에서의 만세운동은 유봉진씨의 영도 하에 치밀한 계획으로 방방곡곡 어느 작은 부락 하나도 빼지 않고 일어났었고 그것이 한 달 동안이나 계속됐었다. 그런데 유 선생의 지도방침은 철저한 평화적 시위였기 때문에 수천 명이 태형을 당했을 뿐, 감옥살이를 한 사람은 비교적 많지 않았었다. 유 선생은 마니산 꼭대기에 숨어서 만세운동을 지휘했고, 왜놈에게 체포되어서도 '독립운동자 유봉진'이라고 종이에 크게 써서 가슴에 붙여주지 아니하면 말 한마디 대꾸도 안 했다. 유 선생은 5년 징역살이를 했고 우리 애기패들은 1년 살았다."강화 만세운동 전후로 조봉암은 보통학교 동창인 조구원(1897~1928), 고제몽, 오영섭, 구연준, 김한영, 김영희, 주창일 등 청년층 지도자들과 비밀결사를 조직해 지하활동을 펼치다가 경찰에 체포됐다. 기독교계에서는 이를 '예수교도 8인조 사건'이라 부른다. 당시 기독교학교 교사이던 조구원이 주도한 것으로 알려졌다.이 사건의 1919년 9월 경성지방법원 판결문을 보면, 조봉암과 동지 7명은 보안법과 출판법 위반 혐의로 기소됐다. 조구원은 1919년 3월 20일 강화경찰서 경부(경감) 이해용 앞으로 "조선독립운동에 찬동하는 운동자를 검거하지 말라. 만약 이에 응하지 않을 때는 목을 베어 죽이거나 방화할 것이다"라고 적은 문서를 보낸 혐의를 받았다. 고제몽은 잡화상 유진식에게 "조선독립운동에 동참하고, 그 기운을 왕성하게 하기 위해 점포를 폐쇄하라"는 문서를 보냈고, 오영섭은 강화경찰서의 일본인 순사부장(紀喜義安)에게 "조선독립운동자를 검거할 때는 각오해야 할 것"이라는 문서를 보내 경고했다. 조구원과 고제몽은 태형 90대, 오영섭은 태형 60대를 선고받았다. 조봉암을 비롯한 나머지 5명은 3월 20일께 조선독립운동을 공모한 후 전국 3·1운동 소식지인 '자유민보' 등 십수 종의 불온문서를 작성해 강화 읍내에 배포한 혐의로 기소됐는데, 혐의를 입증할 증거가 충분하지 않다는 이유로 무죄를 선고받았다. 강화 청년들이 섬 곳곳으로 퍼뜨린 독립선언서와 자유민보 등은 만세시위의 불씨를 살리는 데에 일조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사건으로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은 사람은 비밀결사 8명 가운데 조구원이 유일하다. 1919년 4월 중순에 구속된 조봉암은 9월 30일까지 6개월 가까이 서울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조봉암은 서대문형무소에서 시시때때로 고문을 당했지만, 민족의식은 더욱 강해졌다. 그는 '내가 걸어온 길'에서 "옥중에서는 가끔 만세소동이 있었다"며 "나도 그 사건에 가끔 걸려들어서 매여달리기도 하고 두들겨 맞기도 했었다. 하루는 또, 고함을 치고 만세를 부르고 문짝을 발길로 차고 날뛰다가 또 붙잡혀 나갔다. 나는 붙잡혀 나가면서도 기를 쓰고 만세를 불렀다"고 회상했다.또 죽산은 "진심으로 말하면, 3·1운동이 터지고 내가 잡혀서 감옥으로 갈 때까지는 국가와 민족이 어떻다는 데 대해서는 아무 생각도 없었고, 단순히 일본 놈이 우리 조선사람을 천대하고 멸시하는 데 대한 불만과 불평이 있었던 청년일 따름이었다"며 "그러나 감옥에 들어가서부터 비로소 많은 것을 배웠고 많은 것을 알았다. 세상에 대한 눈이 떠졌고 애국심이 불타게 됐다. 나를 붙잡아서 감옥으로 보내준 일본 놈은 나로 하여금 일생을 통해서 일본제국주의와 싸운 애국투사가 되게 한 공로자였다"고 '내가 걸어온 길'에 썼다. 강화 만세운동의 경험이 청년 조봉암을 죽산 조봉암으로 진보하게 만든 셈이다.조봉암은 출옥한 직후인 1920년 1월, 22세의 나이로 경성 YMCA 중학부에 입학했다. 같은 해 5월 의친왕 망명을 추진한 '대동단사건'으로 평양경찰서로 연행돼 2주일 동안 조사를 받았다. 이듬해 7월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 그곳에서 사회주의와 아나키즘(무정부주의) 이론을 접했다. 이후 조봉암은 해방이 될 때까지 사회주의자로서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박경호기자 pkhh@kyeongin.com 그래픽/성옥희기자 okie@kyeongin.com/아이클릭아트청년 시절 죽산 조봉암 모습. /죽산조봉암선생기념사업회 제공유봉진의 생전 모습. 유족은 1950년대에 촬영한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경인일보DB조봉암이 보안법, 출판법 위반 혐의로 구속됐다가 무죄를 선고받은 1919년 9월 30일 경성지방법원 판결문. /국가기록원 제공인천 강화군 강화읍 용흥공원 내에 있는 강화 3·1독립운동 기념비. /강화군 제공

2019-07-31 박경호

[독립운동과 인천·(21)]김세원·윤원 형제

1902~1905년 사이 떠난 8500여명중멕시코서 조국 되찾기 앞장서 의미인천은 우리나라에서 공식 이민이 시작된 지역이다.1902년부터 1905년까지 65차례에 걸쳐 8천500여명의 한국인이 인천항에서 배를 타고 해외로 이주했다.65차례 이민 가운데 딱 한 번 멕시코로 이민을 간 사람들이 있다. 첫 멕시코 이민자 1천33명은 1905년 4월4일 멕시코로 가는 배에 몸을 싣고 인천항을 떠났다. 이들 중에는 인천 강화 출신 김세원(1870~?)·윤원(1877~1920) 형제가 있었다.하지만 이들의 이민은 사실상 사기계약이었다. 멕시코 농장주들은 약속했던 임대주택과 임금을 주지 않았고, 한국인들은 새벽 4시부터 어두울 때까지 쏟아지는 땡볕아래서 에네켄 잎을 자르고 섬유질을 벗겨냈다. 하루 일감을 마무리하지 않으면 채찍질도 가해졌다.계약 만료로 노예와 같은 생활이 끝난 1909년 이들은 조국으로 돌아가고 싶었지만, 당시 대한제국은 일본의 손아귀에 있었다. 이들은 돌아갈 나라를 되찾기 위해 해외 이주 한인 독립운동단체인 '대한인국민회'에 가입했다. 독립 자금을 모으고 학교를 세웠다. 김세원·윤원 형제도 대한인국민회 임원으로 활동하며 한인사회를 이끌어 나갔다. 이들의 독립운동은 1920년대 쿠바로 이주한 이후에도 계속됐다.이들의 독립운동 행적에 대해선 추가적인 연구가 절실한 상황이다. 대한인국민회가 발행한 '신한민보'를 통해 단편적인 사실만 전달될 뿐이다. 멕시코로 떠난 서울·경기지역 201명의 행방이 묘연하다. 이들 중 인천지역 독립운동가가 더 있을 것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설명이다.한국이민사박물관 신은미 관장은 "멕시코·쿠바 등 중남미 지역 독립운동 특별전시회를 열기 위해 사료 발굴을 진행하고 있으나, 많이 부족한 실정"이라며 "체계적인 연구가 추가로 이뤄져야 한다"고 말했다. /김주엽기자 kjy86@kyeongin.com

2019-07-24 김주엽

[독립운동과 인천·(21)]김세원·윤원 형제

일제 침략 가속화에 한국인 노동자들 '해외로' 강화 출신 형제도 1905년 멕시코行고임금 커녕 처참한 노예생활… 고생끝 '자유몸'불구 나라 뺏겨 돌아갈 곳 없어져 김윤원 '대한인국민회 메리다지방회' 초대 총무 활동 독립자금 모금·한글학교 세워형 세원 1921년 쿠바로 이주 임시정부 지원 이어가… 정부 공로 인정 표창등 수여 일본의 침략이 가속화되던 1900년대 초반. 한국인들은 먹고 살길을 찾기 위해 미국 하와이와 멕시코 등으로 떠났다. 1902년 12월 22일 한국인 노동자를 실은 배가 인천 제물포항을 떠난 이후 3년여 동안 65차례에 걸쳐 8천500여명에 달하는 한국인이 미국 하와이와 멕시코 등지로 이주했다.낯선 땅에 터를 잡은 이들은 하루종일 고된 노동에 시달려야만 했다. 힘든 시간을 보내면서도 나라를 생각하는 마음을 잃지 않았다. 이들은 나라의 독립을 위한 자금을 보내고, 후손들이 나라를 잊지 않도록 교육에도 힘썼다.초기 해외 이주민 대부분이 하와이로 향했기 때문에 멕시코 이민자들의 독립운동사는 그리 주목받지 못했다. 그러나 멕시코 이민자들도 하와이 이민자 못지않게 활발한 독립운동을 전개했다.인천 강화 출신인 김세원(1870~?)·윤원(1877~1920) 형제가 바로 멕시코 이민자 독립운동의 중심에 서 있었다.그러나 이들의 고향인 인천에서 김세원·윤원 형제는 사실상 잊힌 존재다. 인천의 독립운동가로서 이들의 생애와 독립운동 궤적에 대한 깊이 있는 연구가 요구되고 있다.'북미 멕시코국은 미합중국과 이웃한 문명 부강국이니 수토(水土)가 아주 좋고 기후도 따뜻하며 나쁜 병질이 없다는 것은 세계가 다 아는 바다. 그 나라에는 부자가 많고 가난한 사람이 적어 노동자를 구하기 극히 어려워 근년에 일(日)·청(靑) 양국인이 단신 혹은 가족과 함께 건너가 이득을 본 자가 많으니 한국인도 그곳에 가면 반드시 큰 이득을 볼 것이다. 한국과 멕시코는 통상조약을 체결하지 않았으나 최혜국으로 대우할 것이다.'1904년 12월 24일 황성신문에 게재된 광고 내용이다. 당시 광고를 실은 회사는 일본에 본사를 둔 대륙식민회사 한국지부다. 영국계 멕시코인 존 마이어스(John G. Mayers)는 '에네켄(henequen)' 농장이 노동자를 구하지 못해 어려움을 겪자 조선인의 멕시코 이민을 추진했다. 에네켄은 밀가루 포대를 묶는 끈과 선박용 밧줄의 재료로 사용됐다. 19세기 말부터 에네켄에 대한 수요가 급증했지만, 당시 멕시코 노동 계층이었던 마야인의 생산성으로는 소비자들의 요구를 맞추기 어려웠다. 이에 에네켄 농장주들은 조선인을 노동자로 채용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대륙식민회사는 손쉽게 목표 인원을 모을 수 있었다. 당시 대륙식민회사는 노동자들에게 하루에 최대 3원을 지급한다고 광고했다. 당시 한국인 근로자 하루 임금이 85전임을 고려하면 3배가 넘는 금액인 셈이다. 이들은 대륙식민회사에 한 가족당 4파운드(독신자 1파운드)를 내고 멕시코행 배에 올랐다. 당시의 금 30g의 가격은 4파운드였는데, 한국인 노동자들은 현재 1천126파운드(약 165만원)에 달하는 거금을 지불하고 멕시코로 이주했다.1905년 4월 4일 영국 선적의 '샌 일포드(S.S.Ilford)'호는 인천항을 떠나 멕시코로 출발했다. 당시 인천주재 일본영사였던 가토 모토시가 일본 외무성에 보낸 보고서에 따르면 이 배에는 1천33명의 조선인이 타고 있었다. 이 중에는 김세원·윤원 형제도 있었다.이들은 일본 요코하마를 거친 38일간의 항해 끝에 멕시코 남부 살리나크루즈 항구에 도착했다. 이곳에서 하루를 머문 그들은 멕시코 유카탄주로 기차를 타고 이동해 그곳에서 에네켄 농장에 보내졌다. 1906년에 멕시코 유카탄주 대농장의 주인이었던 라파엘 페온이 유카탄주 지사에 보낸 보고서를 보면, 당시 유카탄주의 16개 구역 가운데 14개 구역에는 모두 32개의 농장이 분포했다.멕시코에서의 생활은 이들이 꿈꾸던 것과 달랐다. 사실상 노예 신분으로 멕시코로 이주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멕시코 에네켄 농장은 채무노예제도 형태로 운영됐다. 형식적으로는 자유고용계약이지만, 실제로 대농장주에게 채무가 있는 노예 형태로 일하게 되는 것이다. 이에 따라 채무를 다 갚기 전에는 거주 이전에 자유가 없고, 농장주 간 매매도 이뤄졌다. 참고 견디며 일했지만, 임금을 주지 않는 것은 물론 임대주택과 식량도 직접 돈을 주고 구매해야 했다. 대부분 노동자는 일할수록 빚만 늘어나는 나락에 빠졌다. 황성신문은 1905년 7월 29일 자 사설을 통해 당시 한인들의 처참한 생활상을 다음과 같이 소개했다."멕시코 원주민인 마야족의 노예 등급은 5∼6등급, 한인 노예는 7등급으로 가장 낮은 값이다. 조각난 떨어진 옷을 걸치고 다 떨어진 짚신을 신었다. 아이를 팔에 안고 등에 업고 길가를 배회하는 한국 여인들의 처량한 모습은 가축같이 보이는데 눈물 없이는 볼 수 없는 실정이다. 농장에서 일을 제대로 하지 못하면 무릎을 꿇리고 구타해서 살가죽이 벗겨지고 피가 낭자한 농노들의 그 비참한 모습을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도다. 통탄, 통탄이라."이 신문은 7등급 노예로 전락한 한인들의 참상을 보도하고, 이틀 후 고종의 이민정책을 비판하는 사설도 게재했다. 당시 고종은 눈물을 흘리며 송환 계획을 세웠지만, 일본의 방해 때문에 수포로 돌아갔다고 한다. 이 기사로 더는 멕시코에 노동자를 보내지 않았고, 110년 전 사기극은 그렇게 단 한 차례로 막을 내렸다. 4년의 계약 기간이 끝나고 자유의 몸이 됐지만, 이들은 돌아갈 곳이 없었다. 1905년 8월 을사늑약으로 대한제국이 외교권을 빼앗기면서 나라가 사라졌기 때문이다. 이민자들은 가족이 있는 자신의 조국으로 돌아가기 위해 독립운동을 시작했다. 1909년 8월 멕시코 이주민들은 당시 한인들의 중심지였던 유카탄주 메리다시에서 '대한인국민회 메리다지방회'를 설립한다.대한인국민회는 헤이그 특사였던 이상설이 미국에 사는 한인 동포단체의 통합을 요청하면서 만들어진 '협성협회'를 기반으로 하고 있다. 멕시코 이민자들 가운데 김윤원 등 일부는 4년의 계약 기간이 끝나기 전 남은 채무를 모두 지급해 풀려났다. 이들은 미국 샌프란시스코에 있던 대한인국민회 총회와 교류하면서 메리다지방회 창립을 준비했고, 모든 이민자의 계약이 끝나자 메리다지방회를 만들었다. 당시 대한인국민회가 발행하던 신한민보에서는 초기 회원은 314명이었다고 한다.김윤원은 메리다지방회의 초대 총무·재무로 선출되면서 독립을 위한 활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한다. 1917년 메리다지방회는 미주지역 독립운동의 대부인 안창호가 멕시코를 방문하자 미화 2만4천달러를 모금해 전달했다.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김도형 책임연구위원은 "1910년 멕시코 혁명이 일어나면서 당시 (멕시코) 국내 정세는 매우 혼란스러웠다. 이에 따라 한국인 노동자들은 일자리를 잃는 등 경제적으로 매우 어려운 상황에 부닥쳤음에도 나라의 독립을 위한 자금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고 설명했다.멕시코 이주민들은 자신의 고생을 대물림하지 않겠다는 마음으로 후손에게 모국어와 스페인어를 가르치고, 독립정신과 정체성을 확립하기 위해 한글학교를 세웠다. 멕시코 오학기나로 이주한 김윤원은 현지 한국인들과 함께 '일신학교(日新學敎)'를 설립한다. 일신학교는 70~80명의 아이들이 공부하는 소학교와 20명의 청년이 배우는 야학교로 구성됐다.한인 지역 사회에서 활발하게 활동하던 김윤원은 1920년 맹장염으로 숨을 거둔다. 그가 타계하자 신한민보에서는 그의 유족을 돕기 위한 모금 운동을 벌였다. 김윤원이 멕시코 한인사회에 끼친 영향이 크다는 것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김윤원의 형인 김세원은 1921년 경제적 어려움을 해결하고자 쿠바로 이주했다. 1차 세계대전이 끝나면서 설탕값이 폭등하게 되고, 사탕수수 재배가 기간 산업이었던 쿠바 노동자들의 임금도 상승했기 때문이다. 그와 함께 쿠바로 넘어간 멕시코 이민자는 300여명에 달한다. 그는 1923년 쿠바 카르데나스 지방에서 강흥식, 허영보 등과 함께 대한인국민회 카르데나스 지방회를 설립한다.쿠바에는 모두 3개의 대한인국민회가 조직돼 중국 상하이(上海)에 있는 임시정부에 독립자금을 보냈다. 쿠바 이민자 임천택이 1954년 발간한 '쿠바이민사'에 따르면 이들이 1938년부터 1945년까지 8년 동안 임시정부에 보낸 성금은 1천489원 70전에 달한다. 1930년대 쌀 1㎏ 가격이 25전임을 고려하면 큰 금액은 아니었지만, 임금 노동자가 대부분이었던 이민자들은 모든 것을 아껴가면서 조선의 독립을 위한 자금을 보낸 것이다. 임시정부 주석이었던 김구는 백범일지에 '하와이와 멕시코, 쿠바 등지의 교포에서 편지로 금전적 도움을 얻어 이봉창 의거 계획을 세울 수 있었다'고 적었다. 해외 이주민이 보낸 독립자금이 큰 힘이 된 것이다.김세원과 김윤원은 해외에서 독립운동자금을 지원한 공로를 인정받아 2015년과 2016년 각각 건국포장과 대통령표창을 받았다. 하지만 이들이 한인회에서 활동한 기록만 남아 있을 뿐, 구체적인 자료는 전혀 없는 상황이다. 한국이민사박물관 신은미 관장은 "김세원·윤원 형제가 이민 2세들을 위한 학교를 세우고, 한인회에서 독립운동자금을 보낸 것을 고려하면 더 다양한 활동을 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우리나라와 교류가 없던 기간이 길어서 사실상 자료 발굴이 어려운 상황"이라며 "관련 연구를 진행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나설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김주엽기자 kjy86@kyeongin.com그래픽/성옥희기자 okie@kyeongin.com/아이클릭아트김윤원 지사. /크리스천해럴드 제공대한일보에 실린 멕시코 이주민 모집 광고. /한국이민사박물관 제공쿠바 이주 한인노동자들의 모습. /한국이민사박물관 제공김세원이 활동하던 쿠바 대한인국민회 카르데나스지방회 회관 모습. 현재 한인 후손들이 거주하고 있다. /독립기념관 제공

2019-07-24 김주엽

[독립운동과 인천·(20)]조광원 신부

美국방성 신문에도 활약상 소개사이판 참전 해병 "그는 구세주"대법원의 강제노역 배상 판결에 대한 보복으로 해석되는 일본 정부의 수출규제 조치로 한일 양국은 물론 세계가 시끄럽다.일본 정부가 공개한 통계를 토대로 우리 정부가 추산한 태평양전쟁 강제동원 인원은 782만여명에 달한다. 이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를 제외한 것이어서 실제로는 더 많았을 것이라는 게 일반적인 해석이다. 이들 대부분은 태평양전쟁에 일본군과 노동자로 강제동원돼 이름도 모르는 섬에서 죽어갔다.전쟁의 한복판에 뛰어들어 강제로 끌려간 조선인 노동자를 구해낸 인천의 독립운동가가 있다. 인천 강화 출신 조광원(1897~1972) 신부다.미국 하와이에서 목회 활동을 하던 그는 1944년 미 해병대 종군 신부로 태평양전쟁에 참전해 전투현장에서 수많은 조선인을 구출했다.조광원 신부의 영웅 같은 활약상은 당시 미 국방성이 발행한 '스타스 앤드 스트라이프스(Stars And Stripes)' 신문에도 소개됐다. 당시 신문은 '길버트와 마셜 제도의 선두에서 수천 명의 조선인이 전사하는 중에, 사이판에서는 조광원 신부에 의해 여러 명의 포로가 구출됐다'고 보도했다. 사이판 전투에서 조광원 신부와 53일간 생활한 미 해병대의 한 병사는 그를 '구세주'라고 불렀다고 한다.조광원 신부에 대해 연구한 대한성공회 석광훈 신부는 "조광원 신부가 해병대로 태평양전쟁에 참여한 것은 조국의 해방은 물론 조선인을 구해야 한다는 종교인으로서의 그의 사명 때문이었다"며 "조광원 신부에 대한 체계적이고 폭넓은 연구가 지금 시점에서 필요한 이유"라고 말했다. /김주엽기자 kjy86@kyeongin.com

2019-07-17 김주엽

[독립운동과 인천-인터뷰]일본 교토 성공회성당 마쓰야마 겐사쿠 부제

"당시 조선의 성공회는 사실상 독립운동을 방관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조광원 신부는 독립운동의 중요성을 설파하고, 최일선에서 조국의 독립을 위해 싸운 사람이었습니다."일본 교토 성공회성당 마쓰야마 겐사쿠(松山 建作) 부제는 지난 16일 경인일보와의 전화 인터뷰에서 조광원 신부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그는 2015년 '미국성공회의 한인교회와 조광원-하와이파송과 항일독립운동'이라는 논문을 발표했다. 이 논문을 계기로 대한성공회에서 조광원 신부를 재조명하는 사업이 진행됐고, 2017년에는 온수리 성공회성당에 기념비도 세워지게 됐다. 마쓰야마 부제는 "2009년 1년 동안 연세대학교 대학원에서 교환학생으로 수업을 받으면서 항일독립운동과 관련된 강의를 들었다"며 "해외에 이주한 한인들이 독립운동에 대해 공부하다가 성공회 사제가 독립운동에 참여했다는 사실을 알게 됐고 연구를 시작했다"고 말했다.마쓰야마 부제는 "개신교는 원래 반민족주의를 기초로 하는 만민주의를 기반으로 하지만, 지역과 시기에 따라서는 국가와 민족의 아이덴티디가 강하게 드러난다"며 "당시 조광원 신부는 식민지 지배 아래 있던 조선인 종교인으로서 당연히 해야 할 활동으로 독립운동을 생각했다"고 설명했다.해방 후 일본 고베에서 목회 활동을 이어간 조광원 신부는 일본인에게도 존경받는 성직자였다는 게 마쓰야마 부제의 설명이다. 그는 "해방 직후였기 때문에 일본인들 사이에선 조선인을 무시하는 풍조가 팽배했지만, 그는 진정성 있는 모습으로 신도들에게 다가가 이를 극복해 냈다"며 "고베 지역의 나이 많은 신자 중에선 조광원 신부 때문에 성공회로 개종했다는 사람이 아직 남아 있을 정도"라고 했다.마쓰야마 부제는 "조광원 신부는 한국과 일본 성공회 사회에서 모두 존경받는 지도자"라며 "그를 기념하기 위한 다양한 사업이 이뤄져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김주엽기자 kjy86@kyeongin.com

2019-07-17 김주엽

[독립운동과 인천·(20)]조광원 신부

1897년 강화도 출생 어릴적부터 성공회 다녀고교 졸업하던 해 3·1운동 준비중 발각돼 피신적극적 전도활동 1923년 신자중 최초 하와이 파견2년여 노력끝 호놀룰루에 '조선인 성당' 건립 '조 신부가 탄 보트가 차란카노이(사이판)에 상륙했을 때, 일본군 대포와 박격포탄이 바로 그의 등 뒤 물속에서 터지고 있었다. (중략) 포격이 멈추기도 전인데 신부는 비전투원 포로수용소로 날아갔다. 거기서 일본군에 강제징집된 한국인 병사들을 만났다. 조 신부는 위험을 무릅쓰고 다가갔다. "미국 사람을 겁내지 마시오." 그는 자기 모국어로 말했다'.태평양전쟁이 막바지에 다다른 1944년 9월. 미 해병대가 치른 '사이판 전투'에 소위로 참전한 종군기자 짐 루카스(Jim Lukas)가 미 국방성에서 발행하는 '스타스앤드스트라이프스(Stars And Stripes)' 신문에 실은 '노아 신부가 사이판의 해변을 강타'라는 제목의 기사 중 일부분이다.이 기사의 주인공은 조광원(1897~1972) 신부다. 그는 인천의 독립운동가다. 인천 강화도에서 태어난 그는 고등학교 졸업을 앞두고 동기들과 함께 3·1 운동을 준비했고, 졸업 후 미국 하와이로 건너가 조국의 독립을 위한 자금을 모았다. 태평양전쟁에는 미 해병대 종군신부로 참전해 능통한 일본어로 대일 선전공작 활동을 벌였고, 강제 징집돼 전선에 투입된 조선인 동포를 구하는 데 힘썼다.1897년 강화도 온수리에서 태어난 조광원 신부는 어린 시절부터 성공회 신자로 자랐다. 성공회는 같은 개신교 계통의 장로회·감리교보다 5년 정도 늦은 1890년대 초반부터 우리나라에 본격적으로 유입됐다. 이 때문에 장로회나 감리교가 아직 전도 활동을 제대로 시작하지 않았던 강화도를 중심으로 선교 활동을 벌였다는 게 성공회 연구자들의 설명이다.강화공립보통학교(현 강화초등학교)를 졸업한 뒤, 그는 인천공립상업학교(현 인천고등학교)로 진학했다. 조광원 신부가 고등학교를 졸업하던 1919년에 3·1 운동이 일어났다. 졸업을 앞둔 조광원 신부와 동기들도 3·1 운동을 준비했다. 이들은 독립선언서를 만들어 거리에 배포하고, 내리교회와 내동 성공회성당의 종을 울리는 것을 신호로 거리행진을 벌일 계획이었다. 안타깝게도 이들의 거사는 사전에 발각됐다. 조광원 신부 생전에 출간한 '인고 77년사'를 통해 그는 "기가 막히고 원통한 일이었습니다. 일본 형사들의 추격을 받자 우리는 즉시 각자 해산, 피신하게 된 것이죠. 그 즉시 나는 강화로 피신하게 됐습니다. 원통한 일이었습니다. 미처 피신하지 못하고 이때 체포당한 동지들, 같은 반 학우들은 학생으로 2개월 형을 받기도 했습니다"라고 당시의 심경을 전했다.졸업 후 일본계 은행에 취직한 조광원 신부는 국내 성공회의 차세대 리더로 주목받았다. 1921년 그는 성공회 전도를 위해 만들어진 '전도장려부' 기초위원 3명 중 1명으로 선임됐다. 성공회 평신도로서 적극적으로 활동하던 조광원 신부의 모습은 당시 대한성공회 주교인 트롤로프(M.N.Trollpe·1862~1930)의 눈에 띄었고, 그는 조선에서 세례를 받은 성공회 신자 중 처음으로 1923년 12월 하와이에 파견되었다.일본 교토 성공회성당 마쓰야마 겐사쿠(松山 建作) 부제가 쓴 '미국 성공회의 조선인 교회와 조광원 -하와이로의 월경과 항일 독립운동'에 따르면 조광원 신부가 하와이에 도착할 당시 이곳 성공회 신자들은 조선인 신도만을 위한 성당 설립을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1923년 하와이에는 80여 명의 조선인 교인이 있었지만, 다른 성공회성당에 더부살이하는 처지였다고 한다. 조광원 신부의 2년여의 노력 끝에 호놀룰루에 '성 루가 성당'을 지었고, 하와이 조선인 성공회 신도들은 처음으로 자신들의 성당을 소유할 수 있게 됐고, 우리말로 예배를 드릴 수 있었다.대조선독립단 가입해 자금 모금·전달 일제만행 알려태평양전쟁 터지자 1944년 美 해병대 입대전장 누비며 '강제 징집' 한국인 포로 구출 '활약'1999년 애족장 추서… 온수리 성당에 기념비 세워조광원 신부는 조국의 독립을 돕고자 박용만(1881~1928)이 설립한 대조선독립단에도 가입했다. 박용만은 이승만, 안창호와 함께 미주 3대 독립운동가로 알려진 인물로 무장 투쟁을 통해 독립을 쟁취해야 한다는 주장을 펼쳤다. 조광원 신부는 대조선독립단 하와이총지부 위원으로 활동하며 박용만이 독립운동기지 건설을 위해 중국 베이징(北京)에 세운 '대본농간공사'에 자금을 보내는 역할을 했다. 조광원 신부 등 하와이 교민이 모은 독립자금은 중국 본토와 만주 등지의 독립군 훈련 비용으로 사용됐다. 조광원 신부의 독립운동자금 모금 활동은 1945년 해방될 때까지 계속됐다. 이와 함께 '태평양시사'와 '국민보'를 간행해 일제의 만행을 우리 동포에게 알리고 독립 정신을 고취하기 위해 노력했다.1941년 진주만 공습으로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자 그는 이전보다 더 적극적으로 독립운동에 참여했다. 조광원 신부는 '한인자위단(韓人自衛團)'을 조직해 일본인 첩자를 색출해 당시 미국 국방성 지부가 있는 LA로 보냈다. 조광원 신부는 당시 함께 활동하던 독립운동가들에게 이 일을 '작은 복수'라고 표현했다고 한다. 1944년 조광원 신부는 미 해병대에 입대했다. 입대하기 전 그는 국민보에 다음과 같이 적었다.'일본이 우리들의 토지 조선을 훔친 지 무려 40년이다. 몸을 던져 피를 흘려보면 그 피에 의해 되찾은 땅의 권리는 영원할 것이다. 죽자. 피를 흘리자. 피의 가치에 권리가 있고, 사상이 있으며, 독립이 있다'.조광원 신부는 전선 최일선에서 일본군의 포탄이 쏟아지는 속에서도 부상자들을 의료소로 데려갔다. 또 포로수용소에 있는 강제로 끌려온 조선인들을 구출했다. 당시 신문 기사에서는 '조 신부는 자신이 무서워하는 것을 잊고 "미국인을 무서워하지 마십시오. 우리는 여러분에게 의식을 공급하고, 의료로서 구조할 수 있습니다"라고 외쳤다. "미국 사람들은 우리에게 잔혹한 벌을 준다고 들었다"고 조선인이 물으니 조 신부는 "아닙니다. 미국인들은 나의 친구이며, 따라서 여러분에게 해를 끼치지 않습니다. 학대를 받는 사람들을 해방시키기 위해 왔습니다"라고 설명했다'고 밝히고 있다.일본 정부가 공개한 통계를 토대로 우리 정부가 추산한 태평양전쟁 강제동원 인원은 782만7천355명에 달한다. 이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를 제외한 것이다. 실제로는 더 많았을 것이라는 게 일반적인 해석이다. 조광원 신부가 태평양전쟁에서 구한 조선인들은 이처럼 강제로 징집된 사람이었다. 하와이 독립운동가 중 한 명인 이원순(1890~1993) 전 전국경제인연합회 고문은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조광원 신부는) 일본의 패색이 짙어진 1944년 사이판 섬 공략에 참전, 탄우 속을 헤치고 징용당한 동포들을 구출해 미국까지 후송했다. 당시 미 해병대 신문은 장문의 기사를 게재했는데, 길버트나 마셜제도 전투에서는 수천명의 한국인들이 일본군과 함께 죽어갔으나 사이판에서는 조 신부의 활약으로 많은 한국인이 구출됐다고 설명했다"고 조광원 신부의 활동에 대해 평가했다. 정부는 1999년 조광원 신부에게 독립운동 공적을 인정해 대한민국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2017년에는 조광원 신부가 해방 이후 관할사제로 시무했던 강화 온수리 성공회성당에 그를 기념하는 비석도 세워졌다. 조광원 신부는 해외에서도 우리나라 독립을 위해 애썼다. 목회 생활을 하는 도중 힘들게 번 돈을 독립을 위한 자금으로 보냈고, 전쟁터를 누비며 조선인 구출에 나섰다. 조광원 신부를 연구한 대한성공회 석광훈 신부는 "종교는 나라와 민족을 위해 활동해야 한다. 조광원 신부는 이러한 종교의 목적에 가장 부합해 살다간 분이라고 생각한다"며 "이는 조광원 신부에 대해 우리가 기억해야 하는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다"고 말했다. /김주엽기자 kjy86@kyeongin.com 그래픽/성옥희기자 okie@kyeongin.com조광원 신부가 미국 하와이 '성 루가 성당' 앞에서 신도들과 기념 사진을 찍고 있다. /조광원 신부 유족 제공조광원 신부가 유년시절 다녔던 강화 온수리 성공회성당. /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강화 온수리 성공회 성당에 있는 조광원 신부 기념비. /대한성공회 제공

2019-07-17 김주엽

[독립운동과 인천·(19)]한성임시정부와 홍진

고향 아닌데도 인천에 묻히길 원해시립박물관 기념전 등 재조명 활발"靑年 同胞(청년 동포)여 病(병)든 나라 고치는 病院(병원)의 일꾼이 되자."인천에서 태동한 한성 임시정부의 산파 역할을 했던 홍진(洪震·1877~1946)의 묘비명 중 일부다. 1931년 그가 중국 길림성에서 독립운동을 할 당시에 했던 말을 묘비에 새겨 넣었다. 그는 독립운동을 고통받는 대한민국을 치료하는 것과 동일시했다.구한말 검사와 변호사를 지낸 법조인 출신 홍진은 1919년 4월 2일 인천 만국공원(자유공원)에서 열린 13도 대표자 비밀 회합을 주도하며 한성 임시정부 수립의 기틀을 닦았다. 홍진은 인천에서 태어난 것은 아니었지만, 한성 임시정부 수립의 중요한 절차를 인천에서 진행했고, 1946년 9월 사망 후에는 인천 땅에 묻히길 원했다. 인천 관교동·문학동 일대에 집안의 선영(先塋)이 있었기 때문인데 그가 인천을 특별히 여길 수밖에 없었던 이유이기도 했다.아쉬운 점은 1946년 9월 13일 홍진이 묻힌 곳이 인천 어딘지가 정확히 남아 있지 않다는 거다. 홍진의 무덤은 1984년 12월 5일 인천 문학동에서 서울 동작구 국립묘지 애국지사 묘역으로 이장했고, 1994년 10월 6일 같은 국립묘지 내 임시정부 요인 묘역으로 한 차례 더 옮겨졌다.인천시립박물관이 유족으로부터 홍진의 묘비를 기증받아 그를 기리고는 있지만, 원래 어디에 있었는지 표시라도 남겨 놨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그의 묘비는 사망 두달 뒤에 건립됐다. 묘비에는 대한민국 28년 11월 9일에 건립됐다고 쓰여있는데 대한민국 28년은 임시정부 수립 해인 1919년을 대한민국 원년으로 삼아 계산한 햇수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년이 되는 올해 홍진이 인천에 남긴 발자국을 뒤쫓는 작업이 인천 지역사회에서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 학계에서 홍진을 주제로 토론이 이뤄지고 있고, 인천시립박물관은 홍진 기념 전시회를 열고 있다. 홍진은 인천의 인물로 평가받아야 마땅한 독립운동가라는 점을 인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김민재기자 kmj@kyeongin.com

2019-07-10 김민재

[독립운동과 인천·(19)]한성임시정부와 홍진

서울출신 홍진, 의병사건 처리에 '회의' 검사 접고 '만세운동'임정수립 주도 헌법 결정등 '역사적 태동 장소'로 인천 선택 日 감시 피하려 '서울밖', 관교·문학동 선영있는 홍진과의 인연외국조계 밀집 국제적 상징성등 '만국공원 회의' 해석 '분분'올해 수립 100년을 맞은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크게 3개의 뿌리에서 출발했다. 중국 상해 임시정부와 노령(露領) 임정이라 불리는 러시아 연해주의 대한국민의회, 그리고 국내의 한성 임시정부다. 한성 임시정부의 출발점이 바로 인천이었다는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지 않다. 1919년 4월 2일 인천 만국공원(지금의 자유공원)의 13도 대표자 비밀 회합에서 한성 임시정부가 태동했고, 그 중심에는 독립운동가 홍진(洪震·1877~1946)이 있었다. 홍진은 조선 말기 1877년 8월 지금의 서울 서소문 명문가 집안에서 태어났다. 원래 이름은 홍면희(洪冕憙)였는데 중국으로 망명을 가면서 이름을 홍진(洪鎭)으로 바꿨다가 다시 '鎭(진압할 진)'을 '震(벼락 진)'으로 바꿨다.갑오개혁과 제국주의 침탈을 경험한 그는 근대 문물에 관심을 가졌고, 법관의 길을 택했다. 1903년 27세의 나이로 법관양성소에 입학해 1906년 충청북도 재판소 검사로 임명됐다. 그러나 일제의 침략에 항거하던 의병 사건을 처리하는 데 회의를 느껴 검사 생활을 청산하고, 1908년 평양에서 변호사 생활을 시작했다. 대한독립만세의 외침이 전국을 뒤덮은 1919년 3월 국내에서도 임시정부 수립의 움직임이 본격적으로 일었다. 홍진은 충청북도 청주군 연락책임자로 만세운동에 가담했고, 이규갑과 함께 국내 임시정부 수립을 주도했다. 이규갑은 충남 아산 출신의 독립운동가로 3·1 운동 당시 평양에서 전도사로 활동하면서 변호사 홍진과 연을 맺었다.홍진과 이규갑은 분산된 만세운동 단체를 하나로 합쳐 임시정부를 수립해 조직적으로 움직여야 한다는 데 뜻을 같이했다. 각 지역과 종교계, 학생 대표들을 끌어모아 '비밀독립운동본부'를 만들어 3월 17일 현직 검사 한성오의 서울 집에서 임시정부 수립을 준비했다. 여기서 정부 이름을 '한성 임시정부'라 짓고, 이승만을 집정관 총재, 이동휘를 국무총리 총재로 뽑았다. 이규갑은 그의 회고록 '한성임시정부 수립의 전말'에서 "한성정부를 해외 망명정부로 유지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우리가 임명한 각원들도 전부 그 당시 해외에서 활동하고 있는 애국지사들로 충당했다"고 설명했다.문제는 한성정부 수립을 언제, 어디서, 어떤 방식으로 선포하느냐였다. 홍진은 지역의 대표를 소집해 지금의 국회 개념인 13도 대표자 회의를 열어 한성정부 조직안을 통과시킬 계획을 세웠다. 이어 13도 대표자들이 주도하는 국민대회를 개최해 정부 수립을 공포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역사적인 거사를 치를 장소로 인천 만국공원을 택했다.13도 대표자 비밀 회합이 왜 인천에서 열리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여러 해석이 나온다. 당시 3·1 운동과 한성 임시정부 관련자의 재판기록(공판시말서)을 보면 당시 일제는 이들이 경찰의 눈에 띄지 않기 위해 서울을 벗어난 것으로 추정했다. 1919년 11월 26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진행된 공판에서 조선총독부 검사는 전남 영암 출신의 재력가이자 한성 임시정부 재무부 차장에 이름을 올렸던 한남수에게 "서울에서 집합하면 경찰의 눈에 띄므로 인천에서 집합한다는 말이 있었는가"라고 물었다. 또 "요릿집에서는 칸막이 너머로 들리니 만국공원에 모이는 것이 비밀이 보장되므로 각 대표자 등을 모아서 임시정부를 만들고 국민대회를 개최하는 상의를 하기로 했었는가"라고 묻기도 했다.회합을 주도한 홍진과 인천의 남다른 인연 때문에 인천에서 회합이 개최됐다는 해석도 설득력이 있다. 홍진은 조선 후기 명문 사대부 집안인 풍산 홍씨로 선영이 인천 관교동·문학동 일대에 있었다. 인천지역 학계에서는 지금의 미추홀구 백학초등학교에서 연경산 방향으로 올라가다 보면 나오는 체육공원과 제2경인고속도로 교각 부근으로 추정하고 있다. 홍진은 실제 1946년 숨을 거두기 전 인천 선영에 안장해달라는 유언을 남겼고, 인천 선영에 안치됐다가 1985년 동작 국립묘지로 이장됐다. 인천개항장연구소 강덕우 소장은 "회합의 장소로 서울이 아닌 인천을 택한 것은 일제의 감시를 피할 수 있는 곳이 필요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일제강점기 전까지 외국의 조계가 밀집했던 만국공원의 국제적 상징성을 고려한 결정으로도 여겨진다"고 했다. 또 "돌이켜보면 인천에 홍진의 선영(先塋)이 있었던 것도 한 요인으로 작용했을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상해 임정 소식에 中 넘어가 노령등과 3곳 통합 이끌어임시의정원 의장등 역임 1946년 사망… 1962년 독립장 추서1984년 국립묘지로 이장 묘비 인천시립박물관 옮겨져표지석 없어 선영내 무덤 정확한 위치 확인안돼 '아쉬움'4월 2일 만국공원 회합은 철저한 비밀 회합이었기 때문에 참석자들은 손가락을 흰 천이나 종이로 감싼 것을 표식으로 삼았다. 하지만 3·1 운동 직후 어느 때보다 감시가 삼엄했던 터라 20명 내외의 대표가 참석했을 뿐 많은 이가 참여하지는 못했다. 국사편찬위원회가 발간한 한민족독립운동사자료집을 보면 당시 천도교 대표 안상덕, 기독교 대표 박용희·장붕·이규갑·홍면희(홍진)·권혁채, 유림 대표 김규 등이 참석했고 지방대표는 참석하지 못했다. 하지만 이날 13도 대표자회의는 미리 마련한 임시정부 조직안과 헌법을 통과시켰고, 4월 23일 서울에서 국민대회를 열어 정부 수립을 선포한다는 방침을 세웠다. 파리강화회의에 나설 인물도 정했다. 13도 대표자 명의로 된 국민대회 취지서와 정부 요인 명단, 선포문 등을 인쇄해 종로 보신각을 중심으로 대규모 시위를 벌일 계획도 짰다.국민대회는 4월 23일 종로에서 계획대로 열렸지만 이를 주도한 홍진은 정작 참석하지 못했다. 홍진은 당시 해외 독립운동의 근거지인 상해에서도 임시정부 수립이 추진된다는 소식을 듣고 실체를 확인하기 위해 4월 중순 중국으로 넘어갔다. 덕분에 홍진은 일제가 한성 임시정부 가담자를 잡아들였을 때 체포를 피할 수 있었다. 당시 일본 검사가 한남수 등 가담자에게 홍진의 행적을 집요하게 추궁하고 관계를 캐물은 공판 기록은 홍진이 한성 임시정부에서 차지한 위상을 짐작케 했다. 성냥갑에 각료 명단을 숨겨 압록강을 건넜던 그 무렵 홍면희라는 이름을 버리고 '홍진'으로 개명했다. 홍진이 상해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4월 11일 임시정부가 수립된 뒤였다. 상해 임시정부 내부에서는 한성정부를 인정할지에 대한 격론이 벌어졌고, 홍진은 밀정으로 의심을 받기도 했다. 그럼에도 홍진은 임시정부의 통합을 위해 애썼다. 상해와 노령 임시정부가 서로 근거지를 어디로 둘 것인지를 두고 갈등을 빚을 때 한성 임시정부의 존재가 비로소 부각됐다. 상해 임시정부가 한성을 중심으로 통합하자고 제안했고, 노령 측이 이를 받아들이면서 3개의 임시정부가 하나가 된 것이다. 1919년 9월 6일 임시의정원(지금의 국회)에 제출된 통합안과 새 헌법이 통과해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출범했다.이후 홍진은 임시의정원에서 3번의 의장을 역임했고, 내부 갈등을 빚고 있던 상해와 노령 출신들의 좌우 합작을 위한 중재자 역할을 했다. 또 2021년 11월 극동 지역 군비 축소를 논의하는 워싱턴 태평양 회의에 참가하는 열강에 독립청원서를 발송하는 등 외교 활동에도 힘을 쏟았다. 또 1925년에는 4대 국무령으로 부임해 임시정부를 이끌기도 했다. 좌우 합작에 의한 민족유일당 건설을 주도하기도 했고, 해외 독립단체들과 한국독립당을 결성해 광복군 편성 추진에 기여했다.홍진은 1945년 12월 2일 임시정부 요인 2차 환국 때 귀국했다. 해방정국에서 그는 민족의 자주성 수호를 위해 반탁을 지지했고, 반탁운동 비상국민회의 의장으로 선출돼 건국 사업에 투신했다. 그러다 1946년 9월 9일 69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홍진의 영결식은 9월 13일 명동 천주교성당에서 열렸다. 이승만, 김구를 비롯한 당대 지도자들이 모두 참석했고 비가 내리는 가운데 1천여명의 군중이 모여 고인의 넋을 기렸다. 영결식이 끝난 뒤 그의 유언대로 시신은 인천 선영에 안치됐다. 대중일보와 동아일보 9월 14일자 신문은 홍진의 장례 소식을 이같이 보도했다. 정부는 1962년 홍진에게 독립장을 추서했다.홍진의 무덤에는 묘비가 함께 세워졌는데 1984년 동작구 국립묘지 애국지사 묘역으로 이장될 때 인천시립박물관 측이 유가족의 허락을 얻어 당시 중구 송학동에 있던 박물관 앞마당으로 옮겨왔다. 당시 박물관이 자유공원 인근에 있었기 때문에 만국공원 회합의 주인공인 홍진의 묘비를 놓기에는 가장 제격인 곳이었다. 하지만 박물관이 묘비를 이전하면서 무덤이 있던 자리에는 표지석을 남겨놓지 않아 지금으로선 홍진의 무덤이 어디에 있었는지를 정확히 확인할 길이 없다. 시립박물관은 1990년 옥련동으로 이전한 뒤 홍진의 묘비를 수장고에 보관해 오다 올해 3·1운동, 임시정부 100년을 맞아 일반에 공개했다. 그리고 박물관 2층 작은 전시실에서 '만오 홍진, 100년의 꿈을 쓰다'라는 주제의 홍진 특별전을 만국공원 회합이 있던 날인 4월 2일부터 10월 27일까지 연다. 인천시립박물관 이희인 유물관리부장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기반이 된 한성정부의 수립과 그 가운데 중추적 역할을 한 홍진의 업적을 재조명하고 그 뜻을 기리기 위해 전시를 열었다"며 "홍진의 묘비는 가끔 야외 전시를 하기도 했으나 보존 문제로 수장고에 보관하다가 100주년을 맞아 전시하게 됐다"고 말했다. 이어 "다만, 홍진의 무덤 위치를 정확히 확인하지는 못해 아쉬움이 남는다"고 했다. /김민재기자 kmj@kyeongin.com그래픽/성옥희기자 okie@kyeongin.com1942년 대한민국 제34회 의정원의원 일동 기념사진. 앞줄 왼쪽에서 4번째가 홍진이고 5번째가 백범 김구다. /국가보훈처 제공국민대회 취지서와 홍진의 국무령 취임을 보도한 독립신문 1926년 9월 3일자. /한시준 저 '의회정치의 기틀을 마련한 홍진' 발췌홍진의 영결식을 보도한 동아일보 9월 14일자와 대중일보 9월 14일자 신문. /네이버 뉴스라이브러리·미추홀도서관 제공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년을 맞아 인천시립박물관이 전시하고 있는 홍진의 묘비. /인천시 제공임시의정원 100주년을 맞아 지난 4월 10일 국회에 건립된 홍진의 흉상. /국회 제공

2019-07-10 김민재

[독립운동과 인천·(18)]백범 김구 부모와 인천

감리서 오가며 삼시세끼 '옥바라지'백범, 인천서 부모 '애틋함' 떠올려1896년 백범 김구가 21살의 나이로 인천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죽음을 기다리고 있을 때 그의 어머니 곽낙원 여사는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 인천항 주변 사람들은 마지막으로 김구의 얼굴을 보려고 감옥으로 '산(生) 조문'을 왔고, 동료 죄수들은 자기 부모상이라도 당한 듯 애통해 했다. 황해도 해주에서 아들의 옥바라지를 위해 인천으로 이사와 매일 같이 세끼 밥을 챙겨주던 곽 여사는 조금도 흐트러짐이 없었다.1911년 안악사건으로 서대문 형무소에 갇혀 징역 15년을 선고받은 때에도 마찬가지였다. 다른 면회객은 우느라 말도 못하는데 곽 여사는 태연하게 "나는 네가 경기 감사 한 것보다 더 기쁘게 생각한다"고 말했다고 한다.그런데 백범 김구는 해방 이후인 1946년 38선 이남 순회 첫 일정으로 찾은 인천에서 한 번도 보지 못했던 부모님의 '눈물'을 떠올렸다. 그는 곽 여사가 식모살이를 했던 물상객주 집에서 인천감리서로 이어진 길을 보면서 "면회차 부모님이 내왕하시던 길에는 눈물의 흔적이 남아 있는 듯하다"고 했다. 곽 여사가 밥이 담긴 바구니를 옆구리에 끼고 짚신 발로 하루에 꼬박 3번씩 오갔던 그 길이다.어머니는 아들이 흔들릴까봐 눈물을 흘리지 않았으나 김구는 백범일지에 "어머님이 나를 대하여서는 태연하셨으나 돌아서 나가실 때는 반드시 눈물에 발부리가 보이지 않았을 것"이라고 썼다.올해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인천에서는 백범 김구가 남긴 흔적을 찾는 작업이 한창이다. 백범이 해방 직후 인천에 왔을 때 아버지 김순영과 어머니 곽낙원 여사가 흘린 '눈물의 흔적'을 찾았다는 사실도 놓치지 말고 다시 찾아내야 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류창호 인하대 한국학연구소 연구원은 "지금 인천대공원 백범의 동상을 인천항 주변으로 이전해야 한다는 얘기가 나오지만 오히려 이전해야 할 것은 곽낙원 여사의 동상"이라며 "이 동상을 옥바라지 골목으로 옮겨 놓는다면 이야깃거리도 되고 의미도 더 있을 것이다"고 말했다. /김민재기자 kmj@kyeongin.com

2019-07-03 김민재

[독립운동과 인천·(18)]백범 김구 부모와 인천

아들 인천 감옥에 갇히자 모친 곽낙원 여사 황해도서 전 재산 팔고와 '옥바라지'父 김순영도 객주집 더부살이하며 '구명운동' 김구 탈옥위한 삼릉창 전달하기도자식대신 '옥고' 석방 이듬해 숨져… 곽 여사 가장으로서 독립운동 물심양면 지원中 망명생활중 사망 '임시정부의 어머니'라 불려… 공훈 기려 1992년 애국장 추서백범 김구와 인천을 이야기할 때 우리는 그의 부모를 빼놓아서는 안 된다. 어머니 곽낙원 여사는 김구가 치하포사건으로 인천에서 옥살이를 할 때 고향을 떠나 옥바라지를 하며 아들이 청년 김창수에서 김구로 다시 태어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아버지는 김구가 감옥에서 탈출한 후 1년간 대신 인천에서 감옥살이를 하며 고초를 겪어야 했다. '자식은 부모의 거울'이라고 한 말이 딱 백범의 부모에 어울리는 표현이라고 한다. 백범이 민족 지도자로 나아갈 수 있었던 데는 부모의 영향력이 적지 않았다는 게 일반적인 평가다. 특히 애국장이 추서된 곽낙원 여사의 경우는 단지 '백범의 어머니'가 아니라 한 명의 독립운동가로 평가해야 한다.김구의 부모는 김구와 관련한 주요 사건 때나 성장 배경을 이야기할 때 잠깐 잠깐 등장할 뿐 인천에서 온전한 스포트라이트를 받은 경우는 많지 않다. 비록 인천에 머문 기간이 짧고 황해도 출신이라고 하더라도 이들이 인천에 남긴 발자취는 뚜렷하다. 김구가 말한 '의미심장한 역사지대' 인천의 인물로도 손색이 없다.백범 김구는 1876년(고종 13년) 황해도 해주의 텃골이라는 마을에서 김순영과 곽낙원 사이 외아들로 태어났다. 백범일지에 나왔듯이 신라 마지막 왕 경순왕의 후손으로서 명망 높은 안동 김씨 집안이었지만 1651년 이 가문의 김자점이 역적으로 몰려 멸족의 위기에 놓이자 집안 전체가 황해도로 도망을 쳤다. 이때부터 평민 행색을 하고 농사를 짓고 살았다.김순영·곽낙원 부부와 인천의 인연은 아들 김구가 1896년 일본인 스치다를 살해한 치하포사건으로 인천감옥에 갇히면서다. 김구는 처음에 해주의 감옥에 갇혔다가 이후 인천감리서로 이감됐다. 김구는 백범일지에 "내가 인천으로 이감된 이유는 갑오경장 이후 외국인 관련 사건을 재판하는 특별재판소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했다.김구의 부모는 전 재산을 팔아 인천으로 동행해 옥바라지를 했다. 형편상 어머니 곽낙원 여사가 먼저 아들을 따랐다. 해주에서 나진포까지 걸어갔다가 배를 타고 강화를 거쳐 인천항으로 가는 고된 길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인천에 도착한 곽 여사는 아들의 밥 동냥을 할 궁리로 인천의 한 물상객주를 찾아가 그간의 사정을 얘기하며 밥 짓는 일과 옷 만드는 일을 거들 테니 아들에게 하루 세끼 밥 한 그릇씩 가져다줄 수 있게 해달라고 했다. 이때부터 곽 여사는 감옥에 갇힌 아들의 옥바라지에 나섰다. 그때의 감옥제도는 죄수들에게 먹을 것을 규칙적으로 배급하는 게 아니라 죄수들이 일을 해 짚신이라도 삼으면 간수가 길거리에 내다 팔아 얻은 곡식으로 죽을 쑤어먹는 식이었다. 세끼를 꼬박 챙겨 먹는 김구는 동료 죄수들의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지금 인천대공원 백범광장에 있는 곽낙원 여사의 동상은 바가지를 옆에 끼고 치마를 걷어 올린 채 짚신을 신고 있는 모습이다. 남의 집에 얹혀살면서 옥바라지를 했던 바로 그때의 모습이다. 김구가 생전에 직접 고증했고, 조각가 박승구가 빚어냈다.아버지 김순영도 가만히 앉아만 있지는 않았다. 인천으로 뒤따라와 객주의 집에 더부살이하며 옥바라지를 도왔다. 인천 감옥에 유교 경전 중 하나인 대학(大學)을 넣어 김구가 옥중에서라도 학문에 소홀함이 없도록 독려했다. 그러면서 부인과 함께 인천감리서에 아들의 석방을 위해 소장(訴狀)을 수차례 보냈다. 강화의 부호 김주경의 도움으로 서울과 인천을 오가며 법부대신 등을 상대로 탄원을 했지만 소용이 없었다.김구의 탈옥은 아버지의 도움이 없었다면 불가능했던 일이다. 김구는 1898년 탈옥을 결심하고 모서리가 3개인 '삼릉창'을 만들어달라고 아버지 김순영에게 부탁했다. 백범일지에서 김구는 "아버님도 무슨 일을 꾸미는 줄 짐작하시고 즉시 삼릉형으로 만든 쇠창 하나를 의복 속에 넣어주셨다"고 했다. 탈옥의 발각은 곧 죽음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지만, 아버지는 김구의 결연한 의지를 믿고 인천의 대장장이에게 삼릉창 제작을 맡겼을 게다. 훗날 자신에게 책임이 떨어질 것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결국 김순영은 아들 대신 인천의 감옥에서 1년 동안 대신 옥살이를 하기도 했다.김구는 어렸을 적부터 불의를 참지 못하는 아버지 김순영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김순영의 학식은 겨우 이름 석 자를 쓸 줄 아는 정도였지만, 기골이 준수하고 성격이 호방했다고 한다. 음주가 한량이 없어 취하면 양반을 만나는 대로 때려 여러 번 관아에 구속되기도 했다. 김구는 아버지에 대해 "마치 수호지에 나오는 영웅처럼 강한 자가 약한 자를 능멸하는 것을 보면 친하고 친하지 않음에 관계없이 참지 못하는 불같은 성격이셨다. 이로 인해 인근 상놈들은 다 아버님을 경외하고 양반들은 피하였다"고 했다. 김순영은 김구를 배움의 길로 인도하기 위해 직접 서당을 차리고 선생을 모셔오기도 했다. 김구가 과거에 낙방하고 동학에 심취했을 때 함께 동학의 길에 뛰어들기도 했다.김구의 부모는 아들이 인천 감옥을 탈출하자 고향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인천을 떠나 집에 도착하자마자 뒤따라온 인천 순검에 체포됐다. 부부는 인천 감옥에 갇혀 갖은 형벌을 당했다고 한다. 곽낙원 여사는 곧 석방됐고, 아버지 김순영이 아들 김구 대신 구속돼 1898년 3월부터 1년 동안 인천에서 옥살이를 했다. 김구는 당시에는 이런 사실을 몰랐다가 2년여 뒤 도피처에서 만난 스님을 통해 부모님이 감옥에서 갖은 형벌을 당했다는 소식을 듣게 됐다. 김순영은 인천 감옥에서 석방된 이듬해인 1900년 12월 9일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김구가 도피 생활을 마무리하고 고향으로 돌아온 터여서 다행히 임종을 지킬 수 있었다. 김순영은 열나흘 동안이나 아들의 무릎을 베고 있다가 눈을 감았다. 김구는 이때 왼쪽 허벅지 살 한조각을 베어내 불에 구워 아버지에게 약이라 속이고 먹이고, 흐르는 피를 마시게 했다.남편을 여읜 곽낙원 여사는 그때부터 가장으로서 아들 김구의 애국활동을 물심양면으로 지원했다. 1911년 7월 신민회 사건으로 김구가 다시 감옥에 갇혔을 때도 눈물 없이 의연한 태도를 보이며 아들을 응원했다. 김구는 1919년 3·1 운동 이후 중국으로 망명해 임시정부에 합류했다. 고향에 남았던 곽낙원 여사는 1922년 아들과 며느리, 손자가 있는 중국 상하이로 떠났다.곽낙원 여사가 인천과 다시 인연을 맺은 때는 아들에 부담 주기 싫다며 1925년 말 손자를 데리고 귀국하면서다. 그 전해 며느리 최준례가 갑작스런 죽음을 맞게 되자 선택한 일이었다. 며느리가 출산한 뒤 몸이 성치 않았을 때였는데 시어머니에게 부탁하기 어려워 2층에서 아래층으로 세숫물을 들고 내려가다가 실족했다가 후유증을 얻어 그만 죽고 말았다. 어린 손주를 키우던 곽 여사는 채소 가게 쓰레기통에서 버린 배추 껍데기를 주워다 소금에 절여 먹고, 항아리를 만들어 내다 팔기도 했다. 하지만 생활이 어려워지자 네 살 짜리 손주를 데리고 고국행을 택했다.동지들의 도움으로 인천항으로 갈 뱃삯은 마련했으나 도착해서가 문제였다. 곽 여사는 무작정 동아일보 인천지국에 찾아가 사정을 말했다. 인천지국은 상하이 특파원의 소식을 듣고 이미 사정을 알고 있었다며 고향에 갈 여비를 챙겨줬다. 실제 1925년 11월 6일자 동아일보는 "죽어도 고국강산, 기박한 생애에 남다른 뜻 가진 상해객창(上海客窓) 김구씨 모친"이라는 제목의 신문기사로 곽 여사가 며느리의 죽음과 생활고로 인해 고국행을 결심했으나 형편이 암담하다는 소식을 전하기도 했다.당시 동아일보 인천지국은 문화·체육활동을 통해 인천 청년들의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사업에 열중했다. 초대 지국장 하상훈은 내리교회 엡윗청년회의 회장을 맡기도 했고, 고전 국악 연구단체 이우구락부는 동아일보 인천지국을 근거지로 했다. 각종 음악회와 토론회, 웅변대회를 열어 애국계몽활동을 활발히 전개하고 있었다.고향으로 돌아온 곽 여사는 일제의 감시 속에서도 생활비를 모아 중국에 있는 김구에 송금하고 구국 기도회에 참석해 독립을 염원했다. 그러다 1934년 김구의 설득으로 다시 중국으로 갔다. 당시 나이 76세였다. 9년 만에 다시 만난 아들에게 "이제부터는 너라고 하지 않고 자네라고 하겠네"라고 했던 일화는 지금도 회자되고 있다. 또 아들과 청년회 동지들이 팔순 잔치 때 전달한 돈으로 권총을 사서 돌려주기도 했다. 그가 단지 백범 개인의 어머니가 아니라 '임시정부의 어머니'라고 불리고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곽 여사는 중국 중앙군관학교 낙양분교에서 군사훈련 중인 청년 20여 명의 병영생활을 돌보면서 김구와 고락을 같이하다가 병을 얻어, 1939년 4월 26일 중국 쓰촨성(四川省)에서 사망했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2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곽 여사는 중국에 안장됐다가 광복 후인 1948년 김구가 고국으로 모셨다. 백범 50주기를 맞은 1999년 대전현충원 애국지사 묘역으로 이장됐다. /김민재기자 kmj@kyeongin.com1948년 백범 김구가 어머니 곽낙원 여사의 입비 제막식에서 축사를 하는 모습. 출처/백범김구전집1934년 중국 난징(南京)에서 찍은 백범 김구 가족 사진. 왼쪽부터 맏아들 김인, 김구, 둘째아들 김신. 앉아있는 사람이 어머니 곽낙원여사다. /백범김구선생기념사업협회 제공1924년 김구의 아내 최준례의 묘비에서 찍은 사진. 중절모를 쓴 남성이 김구, 오른쪽이 어머니 곽낙원 여사다. 비문은 한글학자 김두봉 선생이 썼는데 숫자를 자음 순서대로 치환해 표기했다. '1'이 'ㄱ', '2'가 'ㄴ'인 방식으로 "4222해 3달 19날 남, 대한민국6해 1달 1날 죽음"으로 해석된다. /백범김구선생기념사업협회 제공1948년 김구의 둘째아들 김신이 할머니 곽낙원 여사와 어머니 최준례의 유해를 인천항으로 봉환하는 장면. 출처/백범김구전집1949년 백범 김구 서거 직후 완성된 곽낙원 여사의 동상. 사진 왼쪽부터 동상을 만든 조각가 박승구, 김구의 둘째 아들 김신과 그의 부인 임윤연, 백범의 측근 김덕은이다. 이 동상은 경교장에 있다가 1997년 인천대공원에 세운 백범 김구의 동상 옆으로 이전했다. /백범김구선생기념사업협회 제공

2019-07-03 김민재

[독립운동과 인천·(17)]백범일지 톺아보기·(下)

1946년 인천 방문때 대중일보 보도'일지'엔 없지만 새로운 자료 가치백범 김구(1876~1949)가 치하포사건으로 인천감리서에서 옥살이하다가 1898년 3월 탈옥할 때 감리서 순검(경찰)이 도왔다는 주장이 담긴 73년 전 신문 기사가 있다. 대중일보는 1946년 4월 17일자 2면에 '김구 주석 탈옥 삽화-사형수와 의협의 옥사(獄使)'라는 제목의 기사를 실었다. 김구가 같은 달 15~16일 인천 방문 일정을 마치고 떠난 다음 날 보도한 기사다. 인천 방문 당시 김구는 내리교회에서 인천시민들에게 두 번의 인천 옥살이에 대해 술회했다. 대중일보 기사는 감리서 경무청 순검이던 김정곤, 박고님이 김구의 탈옥을 도왔다고 한다고 전했다. 김구가 나라를 위해 일본인을 죽였으며, 그의 인격에도 위압됐다는 이유라고 한다. 다만 두 순검이 "의복을 장만했다"거나 "탈옥 후 은신할 곳을 준비했다"는 기사 내용은 1947년 12월 출간된 '백범일지'와는 상당히 다르다.대중일보 기사에 따르면, 김정곤은 부두 하역 노동자인 '영신조' 조장으로 인천 부두 노동계에서 크게 활약했다고 한다. 김정곤은 김구의 귀국을 알고 "자기 손으로 (탈)옥을 방조한 김창수가 즉 김구 선생인 것을 육감으로 간파했다"고 나온다. 투병 중이던 김정곤은 1946년 2월 딸을 통해 탈옥 사정을 쓴 편지를 '김창수 각하'라고 적은 봉투에 담아 김구 쪽에 전달했다.다음 달 김구의 비서실장 신현상(1905 ~ 1950)에게 받은 답장이 신문에도 실렸다. 답장에는 '주석께옵서는 풍상 수천(수십의 오식으로 보임) 년에 과거를 일일이 기억키 어려우나 귀 서한의 제반 정사의 말씀은 실로 과거를 회고한다'고 쓰였다. 김구를 만나길 고대했던 김정곤은 김구의 인천 방문 2주일 전인 4월 1일 숨을 거뒀다고 한다.전문가들은 이 한 꼭지의 기사만 가지고는 실제로 김구의 탈옥에 순검이 도움을 줬는지 확인하기 어렵다고 본다. '백범일지'에는 없는 내용이지만, 인천에 얽힌 백범 이야기를 새로이 확장해 볼 수 있는 자료로 보인다. 수많은 인천사람이 김구의 옥살이를 도왔다는 사실을 '백범일지'를 통해 확인할 수 있듯, 대중일보 기사에서도 1946년 당시 인천사람들이 백범과의 인연을 얼마나 각별하게 여겼는지 생각할 수 있다. /박경호기자 pkhh@kyeongin.com

2019-06-26 박경호

[독립운동과 인천·(17)]백범일지 톺아보기·(下)

20·30대 옥살이때 객주 박영문·안호연 강화 유지 김주경등 '큰 도움'1946년 4월 '38도선 이남지방 순시' 첫 일정 인천찾아 "감개무량" 밝혀기념사진 남긴 강화 '1928가옥' 홍익인간 친필휘호 걸려있는 합일초교어머니 동상등 곳곳에 김구 '유산'… 가치 더할 이야기 계속 발굴해야백범 김구(金九·1876~1949)는 인천에서 옥살이 하는 동안 자신을 도운 여러 인천사람들을 '백범일지'에 기록했다. 인천 시절을 쓴 문장마다 그 당시 만났던 이들에 대한 각별한 애정이 묻어난다. 객주 박영문과 안호연, 강화의 김주경처럼 김구의 인천 감옥살이를 도왔던 이들이나 민족운동가 유완무는 '백범일지'가 아니었다면 잊혀질 뻔한 인물이자 귀중한 이야기다.김구는 1946년 4월 '38도선 이남 지방 순시'의 첫 일정으로 이틀 동안 인천을 찾았다. 20대 초반과 30대 후반에 두 번이나 인천 감옥에 갇혔던 김구의 남다른 감회는 '백범일지'에서 "그 항구를 바라보니 나의 피와 땀이 젖은 듯하고, 면회차 부모님이 내왕하시던 길에는 눈물 흔적이 남아있는 듯 49년 전 옛날 기억도 새로워 감개무량하였다"는 구절로 드러난다.대중일보는 1946년 4월 15일자 톱기사를 포함해 3일에 걸쳐 김구의 인천 방문을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김구는 4월 14일 오전 인천 내리교회를 찾아 45분 동안 인천에서의 감옥생활을 술회했다. 투옥 당시는 이름을 달리 썼기 때문인지, 김구의 두 차례 인천 옥살이는 이때서야 널리 알려지게 된 것으로 보인다. 대중일보는 1946년 4월 17일자 기사에서 48년 전 청년 살인강도범 '김창수(金昌洙)'와 33년 전 총독 암살미수범 '김귀(金龜)'가 김구와 동일인이라는 것을 "김구 선생이 인천을 내방하였을 때 비로소 판명된 것"이라고 보도했다. '백범일지'는 인천 방문 이듬해인 1947년 12월 출간됐다.대중일보 4월 15일자 톱기사를 보면, 김구는 내리교회에서 인천 감옥살이를 이야기할 때 "여러 지사들은 나의 양친을 찾아보고 위로도 하고 원조도 하였었고, 또 당시 인천에는 박영근(박영문의 오자로 보임), 안호연이란 분의 집에 나의 자친께서 식모 노릇을 하여 가시면서 하루에 밥 두끼씩을 받아 옥중의 나를 살려오시느라 악전고투하셨던 것"이라며 자신을 도운 지역 인사들에게 고마움을 표현했다.개성 출신 인천항 물상객주 박영문은 개항기 조선인 상권수호활동에 앞장선 단체인 인천신상협회(仁川紳商協會)의 일원이었다. 김구의 어머니 곽낙원(1859~1939) 여사는 박영문의 집에서 동자꾼(식모)을 하면서 아들 옥바라지를 했다. 김구가 박영문을 은인으로 여기는 것으로 보아 어머니의 일자리 이외에도 여러모로 도왔다고 추정할 수 있다. 김구는 '백범일지'에서 또 다른 인천의 객주 안호연에게도 여러 차례 고마운 마음을 드러냈다. 다음은 김구가 1911년 '안악사건'(105인사건)으로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됐다가 1914년 인천 감옥으로 이감돼 쇠사슬을 매고 인천항 축항공사장에서 노역할 당시를 회고한 '백범일지' 내용이다.'감옥문 밖으로 축항공사장을 출입할 때 왼편 첫 집이 박영문의 물상객주 집이다. 17년 전에 부모 양위께서 그 집에 계실 때, 박씨가 후덕한 사람인데다 나를 사랑하여 물심양면으로 도와주고 (중략) 왼쪽 맞은편 집도 역시 물상객주 안호연의 집인데, 안씨 역시 나와 부모님께 극진한 정성을 다하던 노인으로, 그도 그 집에 그대로 살고 있었다. 나는 출입시 종종 마음으로 절하고 지냈다'.객주는 전국의 상품 집산지에서 물건을 맡아 팔거나 매매를 주선하고, 화물 보관·운송, 숙박업, 금융 서비스까지 제공한 중간상인이다. 김구가 첫 옥살이를 할 때 인천 개항장은 일본, 중국, 서구 열강의 각축장이었다. 인천항 객주들은 일본인 등 외국 상인으로부터 지역 상권을 보호하기 위해 1885년 인천객주상회(仁川客主商會)를 조직했고, 이후 인천신상협회로 전환했다. 이들은 일본제일은행이 인천과 부산을 중심으로 조선 정부의 허락 없이 일본 화폐를 유통하자 '수취 거부 운동'으로 저항하기도 했다.인천 객주들은 사상적으로 고종을 지지하고 보위하는 '근왕파'이거나 '친러시아파'였다. 국모의 원수를 갚는다며 일본인을 처단한 청년 김구 행동에 대해 객주들이 관심을 갖고 지지했을 가능성이 크다. 실제로 '백범일지'를 보면, 김구가 사형 집행을 간신히 피한 직후 감리서의 한 주사는 "오늘 전 항구의 객주 32명이 긴급회의를 하고 통지문 돌리는 것을 보았다"고 말하며 객주들이 김구를 살리기 위한 돈을 모금하려 했다고 전했다.백범은 유난히도 강화와 인연이 깊다. 강화 출신 김주경도 적극적으로 김구를 옥에서 빼내기 위한 구명운동을 펼쳤다. 김주경은 강화 관아에서 일하다가 병인양요 이후 대원군이 3천명 규모의 군대인 진무영을 설치했을 때 군수품 창고지기를 했다고 한다. 투전으로 수십만냥을 벌었다거나 자경단을 운영하며 비리를 저지른 사람이나 도적 등을 "혼내줬다"는 얘기가 '백범일지'에 나온다.'백범일지' 정도에서만 행적을 확인할 수 있는 김주경은 김구의 부모를 경제적으로 지원해주고, 조정에 김구의 방면을 탄원하는 소송을 제기하면서 재산마저 탕진했다. 조정의 관료들에게 어마어마한 뇌물을 받쳤던 듯하다. 하지만 백범이 풀려나는 것으로는 이어지지 않았다. 부패한 관료들이 뇌물만 받고 약속한 일을 처리하지 않았다고 봐야 하는 대목이다. 미결수 신분에서 도저히 석방될 방법이 없자 김구에게 탈옥을 권유하는 내용의 시를 보낸 것도 김주경이다. 김구는 1898년 3월 탈옥 이후 전국을 떠돌다가 고향 해주로 돌아왔다. 그리고는 1900년 2월 다시 김주경을 찾아 강화도로 떠났다. 하지만 김주경의 행방은 묘연했고, 동생 김진경을 만나 그의 집에서 3개월 동안 훈장을 하며 아이들을 가르쳤다. 강화에서 자신이 김창수임을 숨겼던 김구는 김진경으로부터 "유완무라는 사람이 김창수를 찾고 있다"는 얘기를 들었다. '백범일지'에 따르면 유완무는 인천 감옥의 김구를 구출하기 위해 '13명의 모험대'를 조직했다고 한다. '인천항 주요 지점마다 밤중에 석유를 한 통씩 지고 들어가 7, 8곳에 불을 지르고 감옥을 깨고 김창수를 구출하자는 계획'이었다. 김구가 먼저 탈옥했기 때문에 유완무의 계획은 실행되지 않았다.김구는 자신이 바로 그 김창수라는 사실을 김진경에게 밝히고 강화를 떠나 서울에서 유완무를 만났다. 유완무와 함께하는 몇몇 인물들을 거치며 일종의 '비밀결사'에 참여하게 됐다. 유완무는 이때 김창수라는 이름을 김구(金龜)라고 고쳐줬다. 다시 김구는 유완무의 제자인 주윤호가 사는 강화 장곶에 머물다가, 주윤호가 준 백동전 4천냥을 '온몸에 돌려 감고 서울로 왔다'가 고향으로 갔다. 김구는 학식이 아직 부족해 서울에서 유학하고, 김구의 부모에게 집과 논밭을 제공해 생활할 수 있게 지원한다는 게 유완무의 생각이었다. 그러나 1901년 초 김구의 부친상으로 흐지부지됐다. 부평부 시천리(현 서구 시천동) 명문가 출신 유완무는 많은 애국지사가 그랬듯 국운이 기울자 망명길에 올라 북간도와 연해주 등지에서 독립운동을 펼쳤다.김구가 해방을 맞아 귀국해 가장 먼저 수소문한 사람은 윤봉길, 이봉창, 김주경의 유가족이었다. 1946년 11월 인천에서 경비선을 타고 무의도를 거쳐 강화를 방문한 김구는 김주경 동생 김진경의 집을 찾아 친척들과 기념사진을 찍었다. 이어 강화 합일학교(현 합일초등학교) 운동장에서 열린 '김구 선생 환영대회'에서 강연을 했다. 김구의 비서였던 선우진(1922~2009)은 2009년 펴낸 회고록 '백범 선생과 함께한 나날들'에서 "백범 선생의 강화행은 김주경의 가족을 찾기 위해서였다"며 "합일학교 강연 도중 선생이 그곳에서 글을 가르칠 때 공부한 사람을 찾았더니 어떤 나이 든 노인이 자기가 그때 배웠노라고 했다"고 회상했다.현재 합일초등학교 교장실에는 당시 김구가 쓴 '弘益人間'(홍익인간)이란 휘호가 걸려있기도 하다. 1938년 총에 맞은 후유증으로 인한 수전증이 만드는 특유의 '떨림체'가 단번에 백범의 글씨임을 알아볼 수 있다. 김구가 강화지역 유지들과 사진을 찍은 이른바 '1928가옥'(황씨고택)도 강화읍에 남아 있다. 인천에서 옥바라지한 어머니 곽낙원 여사 동상은 전국에서 인천밖에 없다. 인천대공원에 있는 곽낙원 여사 동상은 김구가 어머니 모습을 닮도록 만들고자 직접 제작과정에 참여했으나, 서거 두 달 뒤에 완성됐다는 사실을 아는 인천시민은 그리 많지 않다. 김구와 관련해 인천에 남은 유산에 가치를 더하기 위해 입혀야 할 것은 역시 '사람 이야기'다. 사람 이야기를 계속 찾아야 김구와 인천의 인연이 더욱 풍성하고 깊어질 수 있다. /박경호기자 pkhh@kyeongin.com1946년 11월 강화도 방문 당시 1928가옥(황씨고택)에서 지역 유력 인사들과 찍은 기념사진. 김주경의 집은 황씨고택 주변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출처/'백범김구전집' 11권김구의 인천 무의도 연설 사진. 김구는 1949년 11월 강화에 방문하기 전 무의도에 들러 주민들에게 연설하고, 섬을 둘러봤다. 출처/'백범김구전집' 11권1914년 5월께 촬영한 것으로 추정되는 인천항 갑문 기초공사 현장. 김구가 서대문형무소에서 인천감옥으로 이감돼 축항공사에 동원된 시기의 사진이다. /인천시 역사자료관 제공해방 후 김구의 인천 방문 일정을 1면 톱기사로 보도한 대중일보 1946년 4월 15일자 신문(빨간색 선안). 대중일보는 이날부터 3일에 걸쳐 대대적으로 방문 일정을 보도했다. /경인일보DB인천 강화도 합일초등학교 교장실에 걸려있는 김구의 '弘益人間(홍익인간)' 휘호. 김구는 1947년 발표한 '나의 소원'에서 문화의 힘을 강조하고 평화 실현을 희망하면서 '홍익인간이라는 우리 국조(國祖) 단군의 이상이 이것이라고 믿는다'고 했다. /경인일보DB

2019-06-26 박경호

[독립운동과 인천·(17)]백범일지 톺아보기·(上)

부친이 조달 탈옥과정 도구로 써전국 최고 기술 기록부족 아쉬워백범 김구(1876~1949)는 인천에서 두 번의 감옥살이를 했다. 김구는 을미사변 직후인 1896년 국모시해의 원수를 갚는다며 일본인을 처단한 이른바 '치하포 사건'으로 첫 번째 옥살이를 하면서 역사의 전면에 등장했다. 그는 1898년 인천감리서 감옥에서 탈출했다. 김구가 '백범일지'에 생생히 기록한 탈옥과정에서 스치듯 언급한 무기 겸 탈출도구가 있는데, 바로 '삼릉창'(三稜槍)이다. 수많은 사람이 '백범일지'를 읽으면서도 크게 주목하지 않았던 삼릉창. 옛 인천의 대장간 이야기 속으로 들어갈 수 있는 통로라 할 수 있다.인천 감옥에서 탈출하기로 마음먹은 김구는 부친에게 대장장이를 통해 한 자 길이(약 30㎝)의 삼릉창 하나를 만들어 몰래 넣어달라고 했다. 김구의 아버지는 삼릉창을 옷 속에 넣어 전달했다. 인천의 대장간에서 제작했을 게 틀림없다. 김구는 이 쇠창으로 벽돌을 들추고 땅을 파서 감옥 밖으로 빠져 나왔다. 인천에서 서울로 탈출하는 내내 삼릉창을 품에 지니고 만일의 사태에 대비했을 것이다. 이 삼릉창 하나에 목숨을 맡겼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김구의 아버지는 삼릉창을 인천의 어느 대장간에 맡겼을까. 인천은 근대문물이 한국에 전파되는 최일선이었다.세계 각국의 사람들이 모여 살던 인천 개항장의 대장간에서는 다국적 물품의 주문 제작도 가능했을 것으로 생각해 볼 수 있다. 인천의 대장간 기술력이 전국 최고 수준이었을 테지만, 현재 그 기록은 많이 남아있지 않다.양준호 인천대 교수가 '1936년 판 인천상공인명록'을 근거로 2009년 펴낸 '식민지 시기 인천의 기업 및 기업가'를 보면, 당시 인천에는 대장간 9곳이 있었다. 일본인 소유가 5곳이고 조선인 소유가 4곳이었는데, 조선인이 운영하던 대장간의 영업세액이 가장 높았다. 그만큼 조선인과 일본인 간 경쟁이 치열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신태범(1912~2001) 박사가 1983년 쓴 '인천 한 세기'에 따르면 일제강점기부터 해방 후까지 애관극장 아래 있던 최씨대장간은 도끼, 칼, 호미, 낫 등을 만드는 솜씨가 남달랐다고 한다.인천에서 만든 삼릉창이 어떠한 형태인지 알 수 있는 단서는 희박하다. 조선 후기 군사교범인 '융원필비(戎垣必備)'에 그림으로 소개됐지만, 중국 병법서를 그대로 베낀 중국식 창이다. 그 삼릉창을 백범도 알고, 대장장이도 알았다. '백범일지'에서 삼릉창의 쓰임을 확인할 수 있다는 점도 색다르다. 인천에서 만들어져 백범을 탈출시킨 그 삼릉창의 역사적 의미를 새롭게 조명할 필요성도 커진다. /박경호기자 pkhh@kyeongin.com

2019-06-19 박경호

[독립운동과 인천·(17)]백범일지 톺아보기·(上)

1896년 '국모 원수갚기' 목적 일본인 살해 체포돼 인천감리서로 이송·심문조선 관리·일본인 꾸짖으며 '유명세' 미결수 신분으로 '기약없는 감옥생활'강화도 재력가 김주경 구명운동 펼쳤으나 부패한 조정 손못써 '탈옥' 권유1898년 간수 눈 피해 쇠창으로 땅 파 빠져나와 용동·만수동등 거쳐 서울로일지에 첫 번째 옥살이관련 자세히 남겨… 기록 복원·콘텐츠화 작업 지적"인천은 의미심장한 역사지대라 할 수 있다."해방을 맞아 귀국한 그 이듬해 삼남지방 순시에 나선 71세의 백범 김구(1876~1949)는 가장 먼저 찾은 인천에 대해 '백범일지'에 이렇게 썼다. 김구는 인천에서 두 번이나 감옥살이를 하면서 독립운동가이자 민족주의자로 새롭게 탄생했다. 그를 진정한 의미의 '백범 김구'로 만든 인천은 '의미심장한 역사지대'임에 틀림없다. 김구는 '백범일지'에 인천 감옥살이와 탈옥과정, 그를 도운 인천 인물들을 소상히 기록했다. 몇 년 전부터 백범 탈출로 등 '백범일지' 속 인천 기록을 복원하는 노력이 일부 연구자들을 중심으로 이어지고 있는데 여전히 '디테일'은 부족하다. '백범일지'를 더 꼼꼼히 살피고 역사적 사실관계를 밝혀내는 작업이 더욱 활발하게 진행돼야 비로소 김구가 인천의 '콘텐츠'로 탄탄하게 자리매김할 수 있다.김구는 1896년 3월 황해도 안악군 치하포에서 국모의 원수를 갚는다며 일본인 쓰치다 조스케(土田讓亮)를 살해한 이른바 '치하포 사건'으로 인천에서 첫 번째 옥살이를 했다. 당시 그는 '김창수'라는 이름을 쓰는 21세 청년이었다. 김구는 '백범일지'에 쓰치다를 일본군 중위라고 썼다. 대한매일신보사가 1999년 발행한 '백범김구전집' 3권에 실린 치하포 사건 관련 당시 일본 측 보고서를 보면, 쓰치다의 신분을 '평민(상인)'이라고 언급했다. 이와 관련 '백범김구전집' 3권 해제를 쓴 도진순 창원대 사학과 교수는 "일본 측이 상인(양민)이 강도에 의해 살해된 것으로 사건을 마무리하려는 의도에서 쓰치다의 신분을 소상히 공표하지 않은 데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김구는 사건 현장에서 "국모보수(國母報讐)의 목적으로 왜인을 죽이노라"는 글을 쓰고, 마지막 줄에 '해주 백운방 텃골 김창수'라고 적었다.김구는 사건이 벌어진 지 세 달이 지난 6월 말 체포돼 해주부에서 심문을 받은 뒤 인천감리서로 이송됐다. 인천감리서는 1883년 개항 이후 설치돼 개항장과 외국인 관련 행정·사법·국제관계 업무를 맡았다. 애초 해주부에서 사건을 처리할 계획이었으나, 일본영사관이 외국인의 생명과 관계된 중대사건이라는 이유로 인천감리서에서 김구를 심문하도록 조선 정부에 강력하게 요구해 인천으로 옮기게 됐다. 김구는 '백범일지'에 현재 인천 중구 내동에 표지판 하나만 달랑 세워진 채 그 터만 남은 인천감리서의 모습을 남겼다. 다음은 '백범일지' 속 인천감리서와 감옥이다.'감옥은 내리(內里)에 있었는데, 내리 마루에 감리서가 있고, 왼편에는 경무청이 있고, 오른편에 순검청이 있었다. 감옥은 순검청 앞에 있고, 그 앞에는 노상을 통제하는 2층 문루가 있었다. 감옥 주위에는 담장을 높이 쌓아올렸고 담 안에는 평옥(平屋) 몇 칸이 있는데, 그 방들을 반으로 나누어서 한편에는 미결수와 강도·절도·살인 등 죄인을 수용하고, 나머지 반쪽에는 민사소송범과 경범위반 등 이른바 잡범을 수용하고 있었다.'김구는 불결한 감옥 안에서 장티푸스에 걸려 극심한 고통을 겪었다. 얼마나 아팠는지 자살을 시도할 정도였다. 그런 와중에 1896년 8월 31일 인천항재판소에서 첫 심문이 열렸다.일본정부 관계자도 배석해 심문을 지켜봤는데, 이 자리에서 김구가 조선인 관리와 일본인을 크게 꾸짖었다는 소식이 인천항에 퍼졌다. 2차, 3차 심문이 이어지면서 김구는 '전국구 스타'가 됐다. 김구의 어머니 곽낙원(1859~1939) 여사는 객주 박영문의 집에서 식모살이하며 아들 옥바라지를 하고 있었는데, 김구를 도와주겠다는 인천사람들이 점차 늘었다. 일본이 줄기차게 요구한 김구의 사형 판결이 연기됐다. 민심이 그를 단순한 살인범으로 판단하지 않았기 때문에 조정도 섣불리 판결할 수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특히 강화도의 재력가 김주경(김경득)이 가산을 탕진하면서까지 김구에 대한 구명운동을 펼쳤다. '백범일지'를 보면, 김주경은 "김창수를 살려내야 할 터인데, 지금 정부대관들은 모두 눈에 구리녹이 슬어서 돈밖에 보이는 것이 없으니, 불가불 금력을 사용치 아니하면 쉽게 방면치 못할 것 같다"고 말했다고 한다. 김주경은 고위 관료들을 만나 김구를 방면해 달라고 요청하거나 소송을 제기하는 등 7~8개월 동안 가진 돈을 몽땅 썼지만, 결국 김구를 빼내지는 못했다. 조선 말기 부패한 조정을 여실히 보여주는 장면이다. 당시 조정이 얼마나 썩었는지는 황현(1855∼1910)이 쓴 '매천야록(梅泉野錄)'에서도 드러난다. '매천야록'에는 영동현에 사는 이용직이 100만냥을 상납하고 경상감사로 임명됐는데, 부임하자마자 포졸을 풀어 지역 부호들을 잡아들이고 뇌물을 받았다는 내용이 나온다. 매관매직을 당연하게 여기던 시대였다는 게 '매천야록' 곳곳에서 확인된다.김구는 미결수 신분으로 감옥생활을 하면서 1년 넘게 독서에 열중했다. 이 기간 감리서 직원의 권유로 '세계역사·지지(世界歷史·地誌)', '태서신사(泰西新史)'등 중국에서 발간된 서적을 읽으며 새로운 문물을 접했다. "의리는 유학자들에게 배우고, 문화와 제도 일체는 세계 각국에서 채택해 적용하는 것이 국가의 복리가 되겠다"는 사상을 다듬어 갔다. 또 동료 수감자들을 가르치거나 소송을 위한 소장을 써주기도 했는데, 독립신문은 1898년 2월 15일자에 인천항 감옥 죄수 중 20세 김창수가 죄인들을 공부시키니 "옥이 아니요 인천 감리서 학교라고들 한다"고 보도했다.하지만 기약 없는 옥살이가 이어졌고, 자신을 도와주던 김주경마저 전 재산을 써도 방법이 없자 탈옥을 권유하는 시를 보냈다. 김구는 아버지가 소송 문서를 전부 강화도로 갖고 가서 명망 높은 양명학자인 이건창(1852~1898)에게 방책을 묻기도 했지만, 이건창은 탄식만 했다고 '백범일지'에 적었다.김구는 탈옥을 결심하고 계획을 세운다. 1898년 3월 김구는 아버지에게 대장장이를 통해 한 자(30㎝) 길이의 '삼릉창'(三稜槍) 하나를 만들어 새 옷 속에 싸 들여 달라고 부탁했다. 아버지는 그가 무슨 일을 꾸미는 줄 짐작하고 즉시 삼릉형(三稜形)으로 만든 쇠창 하나를 넣어줬다. 이 삼릉창은 무기이면서 벽돌을 들추고 땅속을 파는 중요한 도구였다. 김구가 삼릉창을 제작해 달라고 특정한 것으로 미루어 당시에도 생소한 무기는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삼릉창의 형태는 현재 전해지지 않는다. 1813년 훈련도감이 편찬한 군사교범인 '융원필비(戎垣必備)'에 삼릉창의 모습이 실려있긴 한데, 중국의 병법서 '무비지(武備志)'에 소개된 중국식 창을 그대로 옮긴 것일 뿐 실제 제작된 흔적은 남아있지 않다. 김구의 탈옥 도구로 쓰인 삼릉창을 고증하는 작업은 곧 한국 무기의 역사를 보완하는 셈이므로 꼭 필요하다.김구는 탈옥 당일 밤 당번인 간수를 불러 돈 150냥을 주고 죄수한테 한 턱을 낼 것이니 쌀, 고기, 술을 사 오라고 부탁했다. 또 간수에게 50전어치 아편을 사서 실컷 먹으라고 뇌물을 찔러 주기도 했다.그 간수는 아편쟁이였다고 한다. 죄수들은 술과 음식을 먹으며 노래를 불렀고, 간수는 자기 방에서 아편을 피우고 정신이 흐릿해 까무러져 있었다. 교역통로였던 인천항에서는 중국에서 건너온 아편 또한 어렵지 않게 구할 수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소설가 김탁환과 영화감독 이원태는 인천 개항장이 아편의 영향에서 벗어날 수 없었을 거라는 상상에서 출발한 소설 '아편전쟁'(2016)을 썼다. 당시 시대적 상황과 인천항의 국제적인 입지를 고려하면 충분히 해봄직 한 문학적 상상이다. '백범일지' 속 아편쟁이 간수를 통해 당시 인천항에 아편이 만연했다는 것이 입증된다. 소설 '아편전쟁'에서는 인천 청국조계에 아편굴인 '천락원(天樂園)'이 등장하는데, 아편을 단속해야 하는 감리서 순검까지 들락날락한다. 손님이 나날이 늘자 '지락원(地樂園)'이라는 아편굴이 하나 더 생긴다.김구는 혼란한 틈을 타 마루 속에 깔아놓은 벽돌을 창끝으로 들추고 땅속을 파서 감옥 밖으로 나왔다. 조덕근, 양봉근, 김백석 등 장기수 4명과 함께 탈옥했다. 감옥 담장을 넘어 "누구든지 내 갈 길을 방해하는 자가 있으면 결단을 내버릴 마음으로 쇠창을 손에 들고 정문인 삼문(三門)으로 바로 나갔다"고 김구는 당시를 회상했다. 옥에서 빠져나온 김구는 '용동 마루터기', '천주교당의 뾰죽집이 보이는 언덕', '화개동 마루터기' 등을 거쳐 서울로 탈출했다. 김구의 탈출 경로를 연구한 몇몇 학자는 김구가 감리서에서 나와 용동 마루터기, 화개동(현 신흥동) 마루터기를 지나 문학동, 만수동, 부평 등지를 거쳐 서울 양화진 나루에 도착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김구는 인천에서 시흥 가는 대로변에 서 있는 방석솔(가지가 옆으로 넓게 퍼져 자라는 소나무) 밑에 몸을 숨겨 한나절을 보냈다. 김구가 몸을 숨기다가 지나갔을 것으로 생각되는 길목에는 인천대공원이 있고, 인천대공원 백범광장에는 김구와 곽낙원 동상이 서 있다. '백범일지' 속 김구의 첫 번째 옥살이만으로도 재조명해야 할 인천 이야기가 아직 산더미처럼 쌓여있다. /박경호기자 pkhh@kyeongin.com 그래픽/성옥희기자 okie@kyeongin.com1946년 11월 강화도 김주경의 집을 찾은 김구. 김주경은 김구가 인천감리서에서 옥살이할 때 구명운동을 펼친 인물이다. 김구는 해방 후 귀국하자마자 김주경, 윤봉길, 이봉창의 유가족부터 수소문했다. 출처/'백범김구전집' 11권김구가 1896년 7월부터 1898년 3월 탈옥할 때까지 투옥됐던 인천감리서 전경. 현 인천 중구 자유공원 쪽에서 내려다 본 사진으로 추정된다. /인천시 역사자료관 제공조선 후기 훈련도감이 편찬한 군사교범 '융원필비'에 나온 삼릉창. 인천의 대장간에서 제작했을 가능성이 큰 김구의 중요한 탈옥도구였으나, 아직 그 실체가 드러나진 않았다. 출처/'조선의 무기와 갑옷'인천문화재단 한국근대문학관이 작년 입수한 김구의 '백범일지' 친필 서명본. /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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