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과 인천

 

[독립운동과 인천·(31)]강화 만세운동

1919년 3월18일 1만명 모여 시위기독교 주도… 이후에도 8건 기록일제강점기에도 강화도는 역시나 항쟁의 공간이었다. 인천의 독립운동을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게 바로 강화도의 만세 시위다. 1919년 3월 18일 읍내 장터에서 무려 1만 명의 시위대가 만세를 외쳤다.인천의 근현대사를 개항장 중심으로 풀어나가다 보면 자칫 강화도의 만세 시위의 위상과 중요성을 지나치곤 한다. 인천의 만세 운동 횟수를 헤아릴 때 강화도를 빼놓은 일부 자료들이 대표적인 예다. 대개 민족 사학자 박은식이 1920년 쓴 '한국독립운동지혈사'를 인용해 인천의 만세 운동이 8건 벌어졌다고 하는데 이는 개항장과 원인천인 문학산 일대에 한정된 오래 전의 인천이다. 강화도의 만세 시위는 기독교계에서 주도했는데 '강화중앙교회 100년사'에 나온 강화도의 만세 시위만 해도 3월 18일 이후 8건이나 된다. 이병헌이 1959년에 내놓은 '삼일운동비사'에는 강화에서 일어난 10건의 만세 시위를 정리했는데, 같은 날 여러 곳에서 동시다발로 일어난 봉화시위까지 더하면 그 횟수는 더 많을 것으로 보인다.강화도는 섬이라는 지역 특성상 거류 일본인이 적었기 때문에 일본인 조계지가 있었던 인천보다 활발한 만세 시위가 가능했다. 대몽항쟁, 임진왜란, 병인·신미양요 등 과거부터 외세의 침입에 대응했던 강화 주민만의 역사적 동질성도 이런 결집력을 가져다 주었을 것으로 보인다. 강화의 만세 시위는 인근 김포와 계양·부평에까지 영향을 미쳤다.강화도의 만세 시위는 대한제국 진위대 출신의 독립운동가 유봉진(1886~1956)이 이끌었다. 그는 '결사대장'을 자처하며 죽음을 불사하고 만세 시위의 최일선에 섰다. 강화는 인천 독립운동의 뒷부분에 끼워넣는 '부록'이 아니라 주인공이다. 조봉암, 유두희 등 강화 출신의 독립운동가와 이동휘 등 강화와 인연을 맺은 애국지사의 이야기, 구한말 의병운동까지 더하면 강화의 독립운동 이야기는 날을 새도 모자랄 정도다. /김민재기자 kmj@kyeongin.com

2019-10-16 김민재

[독립운동과 인천·(31)]결사대장 유봉진과 강화 만세운동

길직·잠두교회 신도들 중심 3월 18일 '거사' 이끌어백마 타고 등장… 군수·경찰서장에도 '만세' 다그쳐마니산으로 피신했지만 부모 볼모로 잡혀 결국 체포민족지도자 조봉암 선생 '독립열망' 불 지핀 계기로출소후 대대적 환영인파 보도 눈길… 교육자로 지내강화도는 역사적으로 외세의 침입에 유난히 시달렸던 곳이다. 고려 시기 몽골 침입에 맞서 항전하던 전시수도였으며 조선 말기 두 차례의 양요를 겪기도 했다. 그래서인지 강화도 주민들은 일본의 침략에도 분연히 맞서 싸웠다. 일제가 침략 야욕을 드러낸 구한말 시기부터 의병이 들고 일어섰다. 강화에서 벌어진 3월 18일의 만세 시위는 단일 사건으로는 서울에 이어 두 번째로 많은 43명이 체포된 사건으로 기록되고 있다.1919년 3월 18일 강화 읍내 시장에서 벌어진 만세 운동은 '결사대장' 유봉진(1886~1956)이 이끌었다. 강화 길직교회 신도였던 유봉진은 3월 1일 서울의 만세운동에 참여하고 강화로 돌아온 선두교회 출신의 황도문으로부터 시위 소식과 독립선언서를 입수하고, 강화 지역의 만세시위를 본격적으로 계획했다. 유봉진은 원래 대한제국 진위대 출신으로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하려고 그의 보호순사를 지원했다가 탈락해 칼을 벼르고 있던 중이었다. 1907년 군대 해산 시 해산군의 대일항전에 참여하기도 했다.유봉진은 3월 8일 길직교회 이진형 목사와 함께 비밀리에 시위 작전을 짰다. 기독교 신도들을 중심으로 각 마을마다 회합을 가졌고, 바다 건너 주문도까지 건너가 주민들에게 독립운동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그는 주문도 예수교회당 신도 120명 앞에서 "나는 그 운동을 위해 결사대원이 될 것이니 천명을 다하지 못할 것이며 언제 죽을지 모른다. 천국에서 만나자"고 외쳤다. '유봉진 독립결사대'라고 쓴 윗옷를 보이며 동참을 호소했다.유봉진과 신도들은 18일 읍내 장날을 거사일로 정하고 주민들에게 배포할 문서를 작성했다. "민족자결주의에 입각해 국권을 회복하고 독립해야 한다"는 내용이었다.당시 강화읍 장터는 지금의 관청리와 신문리 사이에 걸쳐 있었는데 사이로 냇물이 흐르고 돌다리가 놓여 있었다고 한다. 시위를 주도한 길직교회, 잠두교회 신도들은 오후 2시가 되자 돌다리 부근에 모여 일제히 만세를 외쳤다. 면 보자기나 종이에 그린 태극기와 '조선독립'이라는 글씨를 쓴 깃발을 흔들며 만세를 외쳤고, 상인들과 장을 보러 나온 주민들도 동참했다. 당시 일제 기록에 따르면 시위 참가자는 1만 명에 달했다. 일제시대 강화의 인구가 7만여 명이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엄청난 규모의 시위대였다.유봉진은 만세 함성이 터지자 백마를 타고 등장해 '결사대장'이라고 쓴 태극기를 어깨에 두르고 시위를 이끌었다. 이어 종루에 올라 종을 치며 군중들을 모았다. 당시 유봉진에 대한 1·2심 판결문을 보면 유봉진을 선두로 세운 군중들은 시장을 지나 강화군청과 공자묘(孔子廟)로 이동해 만세를 외쳤다. 유봉진은 강화군수 이봉종에게 "조선독립만세를 외쳐라. 만약 응하지 않으면 군청 안으로 침입해 파괴하겠다"고 했다.시위대는 공자묘 시위 때 경찰에 체포된 주민들을 구하러 경찰서 앞까지 몰려갔다. 유봉진은 "동지를 석방하라. 또한 시장에서 칼을 빼 든 순사보를 때려 죽일 것이니 인도하라"고 했다. 유봉진은 경찰서장에게도 만세를 외치라고 했는데 서장이 마지못해 '만세'를 부르니까 "만세만으로는 안 된다. '조선독립만세'라고 부르라"고 다그치기도 했다.사건 두 달 뒤인 1919년 5월 10일 당시 경기도 장관이 조선총독부 정무총감에게 보낸 '소요사태에 대한 도장관(道長官) 보고철'에는 유봉진을 강화에서 일어난 만세 시위의 '수모자(首謀者)'로 기록했다.일제는 강화 만세 시위를 주도한 사람들을 속속 검거에 나섰으나 유봉진은 일제의 검거를 피해 마니산으로 도망친 뒤였다. 그는 마니산에 있을 때 조선총독부에 조선을 반환하라는 내용의 편지를 보내고, 경찰에 만세를 다시 부르겠다고 했지만, 우편국이 이를 몰수했다. 이완용에 보낸 친일행위에 대한 경고장도 역시 전달되지는 않았다. 그는 수첩에 연락용 암호를 만들어 기재하는 등 대규모 만세 시위 재개를 노렸지만, 경찰이 부모를 볼모로 잡아 놓고 협박하던 상황이라 결국 산에서 내려와 체포됐다. 그는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2년형을 선고받았고, 복심법원(2심)에서 1년 6개월로 감형됐다.3월 18일 강화 만세운동 사건으로 모두 43명이 구속돼 재판에 넘겨졌는데 이 중 2명은 여자였다. 한 명은 만세운동 사실을 주민들에게 알리는 문건을 배포하는 역할을 맡았던 김유의였고, 다른 한 명이 바로 유봉진의 부인 조인애(1883~1961)였다. 조인애도 태극기를 운반하고 18일 시장에서 부녀자를 인솔해 시위에 앞장섰다가 체포돼 6개월 동안 옥고를 치렀다.유봉진이 마니산에 숨어지내는 사이 강화에는 만세 운동이 들불처럼 번졌다. 3월 19일 일제의 대규모 검거 작전에 반발하며 온수리 천도교, 기독교인 수백명이 만세시위를 벌였고, 20일에는 매일신보 기자인 조구원이 강화경찰서에 "조선독립운동자를 검거하지 말라. 만약 이에 응하지 않으면 참살하거나 방화하겠다"는 문서를 발송했다. 만세의 불길은 교동도까지 번져 21일부터 큰 시위가 벌어졌고, 4월 1일에는 강화 전 지역으로 확산돼 13개 지역에서 동시다발적으로 횃불 시위가 일어나기도 했다. 4월 9일에는 석모도에도 만세의 외침이 울려퍼졌고, 4월 13일에도 불은면 두운리에서 태극기가 휘날렸다.잠잠하던 만세운동은 1년 뒤에도 일어났는데 1920년 7월 15일(음력) 양사면 철산리에서 오용진 등이 집에서 태극기를 그리고 '대한독립 만세, 슬프다, 슬프도다'라는 글을 썼다. 이들은 면 사무소 게시판에 만세 운동을 벌이자는 글을 게시하며 대규모 시위를 벌이려고 했으나 결국 일제에 발각돼 징역 1년형을 선고 받았다.3월 18일 대규모 시위 이전에도 강화에서는 일본에 대항한 크고 작은 만세 시위가 있었다. 18일 장터의 만세 소식을 접한 학생들이 먼저 들고 일어서려다 교장과 직원들의 제지로 뜻을 이루지는 못했다. 1959년 발행한 이병헌의 '삼일운동비사'의 경기도편을 보면 3월 12일 오전 읍내 보통학교에서 3·4학년 생도 전부가 집합해 칠판에 태극기를 그리고 만세를 부르며 운동장으로 나가려 했다는 대목이 있고, 그 다음 날 같은 학교 여자반 100여 명이 학교 안에서 만세를 불렀다고 한다. 당시 경찰이 학생들을 연행하려고 하자 교장이 나서서 신변을 보호하고 책임을 지겠다며 사건을 무마하고 경찰을 돌려보냈다.유봉진이 이끈 강화의 만세운동은 강화 출신의 민족지도자 죽산 조봉암의 마음에 조국 독립에 대한 열망의 불을 지핀 계기가 됐다. 조봉암은 그가 1957년 '희망' 2·3·5월호에 쓴 자서전 '내가 걸어온 길'에서 강화 만세운동을 계기로 "일생을 일본제국주의와 싸운 애국투사가 됐다"고 밝혔다. 특히 유봉진에 대해서는 특별한 평가를 남겼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우리 강화에서의 만세운동은 유봉진씨의 영도 하에 치밀한 계획으로 방방곡곡 어느 작은 부락 하나도 빼지 않고 일어났었고 그것이 한 달 동안이나 계속됐었다. 그런데 유 선생의 지도방침은 철저한 평화적 시위였기 때문에 수천 명이 태형(볼기 맞은 형벌)을 당했을 뿐, 감옥살이를 한 사람은 비교적 많지 않았었다. 유 선생은 마니산 꼭대기에 숨어서 만세운동을 지휘했고, 왜놈에게 체포되어서도 '독립운동자 유봉진'이라고 종이에 크게 써서 가슴에 붙여주지 아니하면 말 한마디 대꾸도 안 했다."1920년 9월 만기 출소한 유봉진은 북도면 시도에서 사립 신창학교 교장으로 근무했고, 몇 해 뒤 강화군으로 돌아와 하도면 내리에 있는 폐교에 노산학원을 다시 개교해 2년 동안 근무하는 등 교육자로 지냈다. 1920년 9월 24일 동아일보 기사를 보면 그가 출소해 강화에 돌아왔을 때 환영 인파가 인산인해를 이뤘다고 한다. 그는 60살이던 1945년 뒤늦게 아들을 낳고 한국전쟁 뒤 자식 교육을 위해 서울로 이사 갔으나 1956년 생을 마감했다. 유봉진은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됐고, 그의 부인도 2년 뒤 대통령표창을 받았다. /김민재기자 kmj@kyeongin.com유봉진이 만세운동 시위를 계획했던 당시 강화 길직교회. /강화3·1운동기념사업회 제공유봉진 /인천인물100인 발췌유봉진의 강화 만세운동 행적이 기록된 '소요사태에 대한 도장관(道長官) 보고철'. /국사편찬위원회 제공유봉진이 몸 담고 있었던 대한제국 진위대 모습. 일러스트/성옥희기자 okie@kyeongin.com유봉진에 대한 검찰신문조서. /국사편찬위원회 제공강화군 독립운동기념비. 지난 1994년 강화읍 견자산 내에 세워졌으나 1996년 당시 만세운동 발상지인 강화읍 웃장터(前 은혜교회)로 이전. 이후 용흥궁 공원내로 재이전 건립. /강화군 제공

2019-10-16 김민재

[독립운동과 인천·(30)]인천항 우련통운 설립자 배인복

상하이 후원활동 제대로 조명안돼'묻힌 자금줄' 등 추가 연구 필요인천항의 하역업체 우련통운의 설립자 배인복(1911~1997)은 인천항만 업계를 이끈 기업인으로 유명하지만 그가 일제 강점기 조국의 독립을 위해 이바지했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많지 않다.인천에서 태어난 배인복은 1940년대 초반 일제의 징집을 피해 중국 상하이로 건너가 무역업을 했을 때 이역만리 타국에서 독립을 위해 싸우던 애국지사들의 재정적 버팀목이 돼주었다.상하이 한인 사회에서 이렇게 독립운동 후원을 했던 상인들을 '상인독립군'으로 불렀는데 배인복도 그 중 하나였다. 상하이 한인 사회의 대부격인 대표 상인독립군 김시문과 교류하면서 독립운동의 뒷바라지를 했다.아쉽게도 인천은 기업인으로서 평가에만 몰두한 나머지 일제 강점기 배인복에 대한 행적은 놓치고 말았다. 1940년대 상하이에서 어떤 독립운동가와 교류했고, 어떤 방식으로 얼마나 지원했는지도 현재로선 기록이나 증언조차 구하기 쉽지 않다. 일제의 수탈과 징집을 피해 상하이로 넘어간 인천의 이름 모를 상인들이 배인복처럼 상인독립군으로 활약했을 가능성도 있지만, 이 역시 제대로 된 조명을 받지는 못하는 상황이다.배인복은 코흘리개 꼬마 시절이었던 1919년 3·1 운동 때도 태극기를 흔들며 동네를 누볐고, 청소년기였던 1926년에 벌어진 6·10 만세 운동 때도 태극기를 흔들며 만세를 외쳤다. 이런 그가 외국에 가서도 서슬퍼런 일제의 감시를 피해 독립운동가들을 후원했다는 사실은 전혀 어색하지 않다.상인독립군을 연구한 김광재 국사편찬위원회 사료실장은 "당시 상하이 한인사회에서는 공공연하게 독립운동을 지원할 수 없었던 이유로 서로가 모르게 활동을 했을 수도 있어 배인복의 존재가 잘 알려지지 않았을 가능성이 있다"며 "지금으로서는 관련 자료가 없는 상황이라 추가적인 연구가 필요해 보인다"고 말했다. /김민재기자 kmj@kyeongin.com

2019-10-09 김민재

[독립운동과 인천·(30)]상인독립군 배인복

보성전문학교 졸업… 인천서 석유업 '첫발'일본 유학시절 징집 피해 상하이로 넘어가당시 한인사회 상업계 대부 김시문과 교류묘비에 지사들 후원 아끼지 않은 내용 기록배재고보때 '만세' 가담해 퇴학 당하기도해방후 청구양행… 우련통운 지금까지 이어일제 강점기 해외 독립운동의 중심지였던 중국 상하이.어떤 이는 총과 포로 무장해 일제에 맞서 싸웠고, 어떤 이는 말과 글로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이역만리 타국에서 독립운동을 펼치려면 재정적 뒷받침 없이는 불가능한 일.상하이에 진출한 우리 상인들은 일제의 감시를 피해 그들을 후원했다.그래서 상하이의 상인들은 총대를 메지 않았고 펜대를 들지 않았지만, 독립군이라고 불리기 충분한 자격이 있다.이들을 '상인독립군'이라고 부르는 이유다.상인독립군은 조국의 독립을 위해 총을 든 이들의 총알이 됐고, 펜을 든 이들의 잉크가 돼주었다.이름 없는 상인들의 활약까지 우리 독립운동사에 하나하나 기록됐으면 좋으련만해외 상인들의 독립운동 이야기는 이렇다 할 주목을 받진 못했다.상하이 상인독립군 중에는 인천 출신의 무역상도 있었다.인천항 하역업체 우련통운 설립자 배인복(1911~1997)이 바로 그 주인공이다.인천은 그를 성공한 기업인으로 평가하고 있을 뿐 독립운동과 연결지으려는 시도는 하지 않았다.충남 태안에 있는 배인복의 묘지에는 그가 자식들에 남긴 글이 새겨진 묘비가 있다. 인하대학교 최원식 명예교수가 배인복의 1인칭 시점으로 쓴 글이다. 배인복 일대기의 요약판이라 할 수 있는 이 묘비문에서 주목할 부분은 그가 1941년 상하이로 건너가 사업을 할 당시 독립지사들과 교류하면서 재정적 후원을 아끼지 않았다는 대목이다."자식들 보거라"라는 짧고 담백한 말로 시작하는 이 묘비문과 배인복의 남은 가족에 따르면 1911년 3월 15일 인천 율목동에서 태어난 배인복은 1934년 보성전문학교(지금의 고려대) 상과를 졸업하고 인천 신포동에서 석유업을 시작했다.사세를 확장하던 배인복은 1930년대 말 일본의 중국 침략으로 석유 공급이 중단되면서 사업을 접었다. 당시 미국이 일본에 중국 철수를 요구했으나 일본이 이를 거부하자 미일 통상조약을 파기하고, 석유·철강 등 지하자원의 수출을 전부 중단했기 때문이다. 그는 1940년 일본 유학길에 올라 일본대학 사회과에 입학했다가 이듬해 태평양 전쟁을 일으킨 일본의 학병 징집을 피해 중국 상하이로 피신했다. 상하이에서 사업을 재개한 그는 어떤 일을 했는지는 정확히 알려지지는 않았다. 다만, '흑인시'로 유명한 그의 동생 배인철(1920~1947)도 몇 해 뒤 상하이로 뒤따라 왔는데 여기서 '무역업'을 하던 형 배인복의 도움을 받았다는 내용이 여러 글에서 확인되고 있다. 배인철 연구자인 윤영천 인하대 교수가 2007년 계간지 황해문화(55호)에 쓴 글을 보면 "일제 징용령을 피해 중국 상하이로 간 그(배인철)는 거기서 무역업에 종사하던 백씨(伯氏) 배인복씨 곁에 머물면서 3개월 남짓 상하이 영미조계 내의 쎈죤스(st. Jones) 대학에 다녔다"는 내용이 나온다.손과지(孫科志) 상하이 복단대학교 역사학 교수가 쓴 '상해한인사회사(1910~1945)' 등 상하이 한인사회 연구서를 보면 상하이의 한인 숫자는 1930년대 중반까지 1천500여명을 유지하다가 1937년 중일전쟁이후 크게 증가했다. 배인복이 이주하기 직전인 1940년 10월에는 7천800여명에 달했다. 일제의 대륙 침략 전쟁으로 한국이 일본의 병참기지로 전락하자 실업자들이 생계를 위해 이주하기도 했고, 배인복처럼 징집을 피해 도망쳐 온 이도 있었다고 한다.이 무렵 한인 자영업자는 400명 가량이었다. 자영업자들은 제과·식품·무역·잡화·철공·인쇄 등 다양한 업종을 운영했는데 고수익자로 분류됐다. 가난한 독립운동가들에 도움의 손길이 가능했던 배경이기도 하다. 상하이 한인사회는 1940년 임시정부의 충칭 이전으로 일본색이 짙어져 갔다. 친일적 단체인 상해거류조선인회 회비 납부자가 1939년 643명에서 1940년 1천700명으로 늘어난 점이 이를 뒷받침한다. 그러나 이런 분위기 속에서도 독립운동가에 대한 지원을 끊지 않은 상인들이 다수 존재했다.당시 상하이 한인사회 상업계의 대부라고 할 수 있는 김시문(1892~1978)도 이런 상인독립군 중 하나였다. 그런데 김시문과 관련된 기록에서 바로 '배인복'이라는 이름 석자가 등장한다. 개풍군 출신으로 1916년 상하이로 이주한 김시문은 프랑스 조계 하비로(霞飛路)에서 김문공사(金文公司)라는 잡화점을 운영해 많은 돈을 벌었는데 독립운동가와 임시정부가 어려움에 처했을 때마다 물질적 지원을 아끼지 않았던 '상인독립군'이었다. 임시정부 기관지 독립신문을 인수해 잠시 경영하기도 했고, 그의 가게는 독립운동가와 임정 요인, 상인들의 사랑방과도 같았다.김시문은 해방 이후 어지러운 국내 정세를 살피느라 귀국하지 않고 1949년 9월 큰아들 김희원만 홀로 귀국시켰다. 김시문은 아들에게 1947년 먼저 귀국한 배인복을 만나라고 했다. 1949년 12월 아들 김희원은 배인복을 찾아갔지만 만나지는 못했다. 1949년 12월 30일 김희원이 아버지에 쓴 편지에는 "배인복 선생은 비록 뵙지 못했지만 그의 사무실에 메모를 남겼으며…"라는 대목이 있다.1949년 12월이면 배인복이 귀국해 고향 인천에서 '청구양행'이라는 무역회사를 차려 운영했을 당시다. 그는 중국 상하이와 인천의 육상 운송 사업에 뛰어들었다. 김시문이 아들을 통해 남긴 메모가 어떤 내용인지는 알려지지 않고 있다. 다만 김시문은 홀로 귀국해 경제적으로 궁핍한 아들을 위해 상하이에서 교류를 했던 사업가들에 도움을 청하라고 했는데 배인복 역시 이런 경우였을 가능성이 높다. 상하이 한인 사회에서 두터운 친밀 관계를 갖지 않았다면 가능하지 않은 상황이다. 상인독립군의 대부였던 김시문과 교류했던 배인복 스스로도 독립지사의 재정적 후원을 아끼지 않았다고 밝혔기 때문에 둘의 관계는 단순한 친밀감을 넘어 독립운동과 관련한 끈끈한 동지애가 있었을 것이란 추측이 나온다.김시문 연구자이자 '어느 상인독립군 이야기'의 저자 김광재 국사편찬위원회 사료조사실장은 "편지 외에 배인복에 대한 기록은 찾지 못했지만, 1940년대 상하이에서 무역업을 했다면 당연히 김시문의 김문공사를 찾아가 어떤 식으로든 교류했을 것"이라며 "당시 김시문을 비롯한 상인들은 일제의 감시를 피해 몰래 독립운동가들을 지원했기 때문에 어떤 명단이 있는 조직을 갖추거나 기록을 남겨 두지는 않았을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김광재 실장은 또 "당시에는 독립운동가와 상인이 명확히 구분됐다기 보다는 상인을 하다가 독립운동에 뛰어들 수도 있었고, 독립운동을 하다가 돈이 필요해 상업에 종사했던 사람도 있었다"며 "사실 앞에서 총을 들고 뛰어든 독립운동가들을 후원했던 상인들도 독립운동가라고 해도 부족함이 없다"고 했다.배인복이 상하이에서 벌인 독립운동가 후원은 그의 국내 행적을 살펴보면 오히려 자연스러운 일이었을 지도 모른다. 배인복과 한국 고고미술사학의 개척자인 우현 고유섭의 태극기 일화가 이를 증명한다. 그 이야기도 묘비문에 새겨져 있다. 1918년 인천공립보통학교(지금의 창영초)에 입학한 꼬마 배인복은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네살 위의 형 고유섭과 함께 집 담장에 태극기를 꽂아놓고 만세를 불렀다가 혼이 났다고 한다. 배인복도 1988년 고유섭 특집 기사를 게재한 잡지 '월간공예'와의 인터뷰에서 "우현 선생이 태극기를 직접 그려서 우리들에게 나누어 주고 초가집 지붕 위에 올라가 태극기를 꽂았습니다. 우리들은 모두 모여서 만세를 부른 후 동네를 돌다가 체포되었지만, 7~8세의 어린 아이들은 훈방으로 금방 풀려났지만, 우현 선생은 유치장에 있다가 사흘째 되던 날 큰아버지가 찾아가 겨우 나올 수 있었습니다"라고 말했다.그가 서울 배재고보를 다니던 시절 1926년 6·10 만세운동에 가담했다가 퇴학을 당한 사실도 있다. 6·10 만세운동은 1926년 6월 10일 순종의 장례식을 기해 전국적으로 일어난 학생 중심의 만세시위였다. "조선 민중아! 우리의 철천지원수는 자본제국주의의 일본이다. 2천만 동포야! 죽음을 각오하고 싸우자! 만세, 만세, 조선독립만세!" 라는 격문이 살포됐고, 이 사건으로 일본 경찰에게 붙잡힌 학생수는 서울에서 210여 명, 전국적으로는 1천여 명이나 됐다. 1930년 4월 5일자 동아일보는 당시 학생운동으로 퇴학당한 학생 이름을 실었는데 전체 497명 중 배재고보 11명의 명단에 배인복의 이름이 등장한다.배인복이 상하이에서 누구와 어떻게 교류했는지는 한 번도 연구된 적이 없다. 배인복의 여동생인 배경숙(90) 전 인하대 법대 교수가 큰 오빠의 옛 이야기를 비교적 상세히 알고 있지만, 고령이라 인터뷰가 이뤄지지 못했다. 그의 다른 가족들도 상하이 상인독립군 시절의 이야기는 알지 못하고 있다.그가 해방 후 세웠던 청구양행은 이후 무역에서 하역업으로 사업을 확장했고, 1958년 우련통운으로 재출발해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다. 기업인 배인복은 1950년대 말 대한해운공사 인천지점 하역권을 유치해 급속히 성장했다. 배인복은 1976년 동생에게 사업을 물려주고 은퇴했다가 1997년 11월 11일 중구 송학동 자택에서 눈을 감았다. /김민재기자 kmj@kyeongin.com그래픽/성옥희기자 okie@kyeongin.com/아이클릭아트배인복. /배준영씨 제공배인복이 상하이에서 무역업을 하던 시절 교류했던 상인독립군 김시문의 '김문공사' 1950년대 중반 전경. 처음 지어진 1910년대와 달라진 것이 거의 없다고 한다. 상하이의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여기를 드나들었다. /어느상인독립군이야기 발췌

2019-10-09 김민재

[독립운동과 인천·(29)]잊히고 묻힌 의사 출신 이민창

1929년 인천 정착해 병원 운영하다 1941년 '합병 30년후 독립 약속 지켜라' 투쟁엘리트 인생 버리고 감옥서도 항거 해방전 출소 거부 1년6월 형기 받고 4년 살아이후 모습 드러내지 않고 '두문불출' 가난한 자들에 인술 펼치고 과학공부 매진'開國(개국) 495년 5월 11일'1941년, 인천에서 병원을 하면서 독립만세를 외치다가 서대문형무소에 갇힌 이민창(李敏昌)은 신상 카드 나이를 기록하는 곳에 이렇게 적었다.일제에 강제로 병합된 지 30년이나 더 흐른 때임에도 이민창은 여전히 자신의 생일을 조선이 개국한 1392년부터 따졌다.일제에 나라를 빼앗긴 것을 인정하지 않았다는 얘기다.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이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변절하던 시기에 대단한 기개가 아닐 수 없다.그 이민창의 드라마 같은 항일운동 이야기를 접할 수 있는 자료는 1955년 고일 선생이 펴낸 '인천석금'이 유일하다시피 하다.'인술(仁術)에 여생 바치는 노투사 '이민창' 씨'란 제목의 글은"1941년 일제의 황혼시절이다. 융희(隆熙) 4년 경술한일합병(庚戌韓日合倂)의 국치(國恥)의 시간이 30주년이 지난 그해에 서슬이 시퍼런 독오른 일제 면전에서 단독육탄으로 항쟁하던 투사가 깊은 밤중에 총소리 같은 뉴~스를 던졌으니" 이렇게 시작한다. '인천석금' 속으로 좀 더 들어가 보자.1941년, 이민창은 '너희들이 합병 후 30년이 지나면 독립을 준다고 했으니 이제는 우리나라를 돌려보내라'는 내용의 벽보를 붙이고 전단을 뿌렸다. 조선 총독과 일본 내각 대신들에게도 서한을 발송했다. 이민창은 의사였다. 지금도 그렇지만 일제강점기 의사 역시 누구나 부러워하는 존재였다. 그는 활짝 열려 있는 탄탄대로의 인생을 버리고 일제에 항거하고 나섰다. 그는 거리로 나가 대한독립만세를 부르짖으며 자주독립의 필연성을 국제정세에 맞추어 연설했다. 청중들은 다들 "미쳤다" "큰일 나겠다"고 말하며 꽁무니를 뺐다. 이민창은 곧바로 체포되었다. 인천경찰서 고등계 형사 권오연이 담당했다. 그는 이민창을 고문했다. 그래도 이민창은 굽히지 않고 목청을 돋워 취조하는 형사를 나무랐다. "아무리 일제의 주구 노릇을 하는 네놈이지만 한국인의 피를 받았다면 내 주장이 그래 그르냐? 옳으냐?" 그렇게 꾸짖음을 받았던 권오연은 해방 후 '노죄수의 굳고 곧고 깨끗하고 거룩했던 그 기개 용기 명석 준엄에는 고개가 수그러졌다'고 고백했다.이민창은 서울 서대문형무소로 이송되어 가면서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독립문에 이르자 대한독립만세를 외치고 독립문의 유래를 연설했다. 지나던 행인들은 목례로 답했다. 1년 6개월 형을 선고받았다. 감옥에서도 항거했다. 옥중에서 조회 때마다 불러야 했던 기미가요를 거부했고, 황국신민선서도 일축했다. 이 일로 형기가 더 늘어 청주형무소로 이감되었다. 1945년 새해 만기 출소일이 되었다. 찾아온 부인에게 이민창은 말했다. 나는 독립이 되기 전에는 나가지 않고 감옥에서 죽을 테니, 어서 돌아가오. 집에 돌아간다고 해도 일경들이 가족들을 못살게 굴 게 분명하니 오히려 감옥에 있는 것이 가족들에게도 좋을 것이오. 그렇게 만기를 더 넘겼고, 해방이 되어서야 출옥했다.이민창은 일본인과 섞이기를 싫어했다. 투옥되기 전의 일이다. 큰딸이 영신학원에서 교편을 잡고 있다가 일본인이 새로 설립한 송현심상소학교로 옮겼다. 그 얘기를 나중에 들은 이민창은 일본인 교장을 찾아가 말했다. "내 딸은 당신 학교에 보낼 수 없으니 내가 도로 데리고 가겠소." 사립학교일지라도 일본인이 교장인 곳에서는 딸을 근무하게 할 수 없다는 거였다. 큰딸은 다시 영신학원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이민창은 '가장 뛰어난 의사는 나라를 고치고, 그 다음이 사람을 구한다'는 말을 실천하기 위해 약관의 나이에 한성병원부속학교에 입학하여 강제병합 이전에 졸업, 서울에서 개업했다. 이화학당 출신을 부인으로 맞아 잘 살았으나 1916년쯤에 일제의 학정에 분개한 나머지 블라디보스토크로 망명했다. 하지만 고국을 잊지 못해 몇 년 뒤 다시 양강도 경흥과 황해도 재령에서 공의(公醫) 생활을 했다. 인천에는 1929년쯤에 정착했다. 이중설병원 자리에서 먼저 병원도 운영했다. 그렇게 인천에서 10년 정도 병원을 하다가 '약속한 30년이 지났으니 나라를 내놓으라'고, 독립만세를 외치면서 일제에 맞서 혼자서 분연히 떨쳐 일어섰다.이민창은 일제 말기 4년이나 옥살이를 하고 해방과 함께 출옥한 이력을 드러내지 않았다. 독립이 되기 전에는 차라리 감옥에서 죽겠다고 할 정도로 그렇게도 바라던 해방이 되었건만 이민창은 초가집에 은거하며 두문불출했다. 웬 혁명가가 그리 많고, 애국자가 쏟아지고 정치인이 범람하는 거냐는 이유였다. 정당인도, 지도자의 타이틀도 마다했다. 그저 집 안에서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인술(仁術)을 펼치고, 과학을 공부하는 데 시간을 쏟았다. 인천 시내의 어떤 의사는 피란민 환자가 숨을 거두었는데 약값을 내지 않았다면서 사망진단서를 발급하지 않았다. 이에 격분한 이민창은 앞장서서 사망진단서를 끊어주었다. 그는 또 환자들의 형편에 맞게 치료비와 약값을 받았다. 비용을 지불할 여유가 되면 받고 그렇지 못하면 받지 않고 치료를 해 주었다.고일 선생이 그려낸 노투사 이민창의 인생 스토리가 마치 한 편의 영화를 보는 듯하다. 아니, 영화로 만들어져도 손색이 없겠다 싶다. 그런데 어찌 된 영문인지 이민창과 관련해서 '인천석금'을 넘어서는 것을 아직 본 적이 없다. '인천석금' 이후 60년이 지나도록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은 이유가 무엇인지 그게 더 궁금해진다.고일 선생의 기록은 정확하다. 약전 형식으로 정리할 만큼 여러 차례 인터뷰를 통하여 그의 인생 이야기를 충분히 들었던 듯하다. 1941년에 독립만세를 부르고 벽보를 붙였다는 이유로 체포돼 고문을 당하고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다고 했는데,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일제감시대상 인물카드에서 확인할 수 있는 서대문형무소 담벼락을 배경으로 찍은 이민창의 사진은 1941년(소화 16년) 7월 14일로 되어 있다. 또 경성지방법원에서 최초 언도받은 형기도 1년 6월이었다. 죄명은 치안유지법위반이었고, 언도일은 1942년 2월 26일이었다. 7개월 넘게 미결수 신분으로 고초를 당했다. 그는 1943년 8월 26일에 만기출소해야 했으나 감옥생활을 더 했다. 일제에 머리를 숙이지 않고 규정을 따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청주형무소로 이감되어 옥고를 더 치렀다. 그는 또 1945년, 해가 바뀌면서 청주형무소에서 출옥해야 했지만 그러지 않았다. 수감자가 나가지 않겠다고 하면 가능한 일이었는지 모르겠는데, 해방이 되고 나서야 그는 집으로 돌아왔다. 그게 가능한 일일까. 요즘 교정 시스템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한다. 아무리 수감자가 나가지 않겠다고 버틴다 하더라도 더 있을 수는 없다는 거다. 기한을 넘겨서 교도소에 머물게 되면 그 시간만큼 교정 당국에서 수감자를 감금하는 죄를 짓게 된다는 얘기다.이민창이 인물카드에 쓴 '개국 495년'으로 따지면 그는 1886년에 태어났다. 이 인물카드의 본적지는 '경기도 인천부(仁川府) 화정(花町) 165'로 되어 있다. 당시 화정은 지금의 중구 신흥동 지역이다. 하지만, 이민창과 대단히 가깝게 지냈던 것으로 보이는 고일 선생은 이민창이 서울 태생이라고 했다. 이민창이 인천에 이주한 뒤 본적지를 바꾼 것인지도 확인해야 할 일이다.이민창은 직업란에는 '의사(醫師)'라고 적었다. 강제병합 이전에 한성병원부속학교를 나와 서울에서 개업했다고 했으니 1910년쯤부터는 의사생활을 했다는 얘기다. 그리고 블라디보스토크에 망명했다가 귀국해 북한 지역에서 공의생활을 했으며, 인천에는 1929년쯤에 정착했다고 했다. 그때부터 인천에서도 의사생활을 했을 터이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이상한 점이 있다. 1942년 인천에서 '신외과'를 개원한 신태범 박사는 '인천 한 세기'를 쓰면서 어쩐 일인지 대선배 의사인 이민창에 대한 이야기를 언급하지 않았다. 물론 1942년이면 이민창은 이미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어 있을 때이기는 하다. 그래도 신태범 박사가 책을 낸 1983년까지 인천에서 생활하던 여러 의사들의 이야기는 하면서 아주 특이한 이력을 가진 의사이자 독립운동가인 이민창을 외면하고 있다는 게 언뜻 납득하기 어렵다. 이민창은 해방이 되고 청주형무소에서 풀려나 집으로 돌아왔으나 그는 곧바로, 너나없이 독립운동을 했다고 떠들어대는 세태에 신물을 느꼈던지 병원을 이중설 씨에게 넘겨주었던 듯하다. 이민창이 병원을 하던 자리에 새로 연 게 이중설병원이다. 이중설병원은 중구 내동 94번지에 있었고, 진료 과목은 내과와 소아과였다. 1946년에 개원했다. 이민창이 이중설에게 병원을 넘겨주었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지금은 그 병원 자리를 정확하게 확인할 길이 없다. 그동안 여러 차례 지번이 변경되는 바람에 '내동 94번지'를 한 곳으로 특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이민창은 병원을 넘기고 동구 화평동 오두막 초가에서 은거하면서 인술을 펼치고 과학 이론을 탐구하는 일에 몰두했다고 한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을 잘 파악하고 있을 정도였다고 한다."국가와 민족을 위하다가 희생된 인물이 쓸쓸한 생활을 하지 않도록 신령의 가호를 빌어마지 않는다."고일 선생이 이민창 이야기를 끝내면서 쓴 말이다. 3·1운동,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이라는 올해 여기저기서 들려온 얘기이기도 하다. 자신을 내던져 독립운동을 펼친 이들이 해방된 조국에서 생활고에 시달리며 쓸쓸한 노후를 보내는 비뚤어진 세태에 안타까워 한 고일 선생의 충심이 읽힌다. 그 60여 년이 흘렀건만 여전히 그들의 후손 역시 여유롭지 못한 생활을 하고 있다는 지적이 올 한 해 끊이지 않았다. 우리 사회는 아직도 갈 길이 멀다. /정진오기자 schild@kyeongin.com그래픽/박성현기자 pssh0911@kyeongin.com/아이클릭아트1955년 고일 선생이 쓴 '인천석금' 표지(1979년 재판)와 '인천석금'속에 실린 이민창 이야기. /'인천석금' 촬영이민창의 인물 카드에 적힌 내용. 출처/한국사데이터베이스 일제감시인물 카드

2019-10-02 정진오

[독립운동과 인천·(28)]신간회 인천지회

사회·민족주의 협동… 1927년 12월 5일 지회 창립지역 인사 곽상훈·하상훈·권충일·이승엽 등 참여식민지 정책 비판 강연… 원산 총파업 뭍밑지원도유두희 등 노동운동… 간부들 청년단체활동 주도합법행동 제약·계열 갈등 심화 1931년 해소 결의1927~1931년 활동한 신간회(新幹會)는 비록 존속 기간은 짧았지만, 일제강점기를 통틀어 가장 강력했던 합법적 사회단체였다.신간회는 사회주의계열과 민족주의계열이 힘을 모은 항일 민족협동전선이었다. 신간회의 지방 지회조직은 한때 150여 개까지 확산했고, 회원 수는 4만여 명에 달했다.국사편찬위원회가 펴낸 '신편 한국사'는 "양 세력의 협조와 협동 경험은 해방 이후 남북 분단이 계속되는 현재에도 귀중한 역사적 경험으로 역할할 수 있을 것" 이라며 "민족주의세력과 사회주의세력이 만나 최대의 협동을 이뤘으나, 이후 양 세력 분열의 원형을 보여주는 신간회에 대한 검토는 남북이 분단된 지금의 현실에서도 여전히 유효하다"고 평가했다.인천에서도 1927년 12월 신간회 인천지회가 창립하면서 좌익 진영과 우익 진영 인사들이 합세해 항일 사회운동을 펼쳤다. 인천지역 민족주의 진영에서는 곽상훈(郭尙勳·1896~1980), 하상훈(河相勳·1891~1964), 서병훈(徐丙薰·1888∼1949), 이범진(李汎鎭), 양제박(梁濟博) 등이 신간회 인천지회를 주도했다. 당시 사회주의 진영에서는 유두희(劉斗熙·1901~1945), 고일(高逸·1903∼1975), 권충일(權忠一·1905 또는 1907~1950), 권평근(權平根·1900~1945), 이보운(李寶云) 등이 신간회 인천지회의 주축이었다. 해방 후 북한 초대 사법상을 지낸 거물급 공산주의자 이승엽(李承燁·1905~1954)도 신간회 인천지회 간부로 참여했다.동아일보 1927년 12월 8일자 신문을 보면, 신간회 인천지회 창립대회는 그해 12월 5일 오후 8시 내리(內里)의 인천금융조합에서 개최됐다. 입회 회원 67명 가운데 36명이 참석했다. 창립대회 준비위원 곽상훈이 개회를 선언했고, 신간회 중앙본부에서 파견한 독립운동가 이관용(李灌鎔·1894~1933)이 개회사를 했다. 이날 신간회 인천지회 회장은 하상훈이 선출됐고, 총무간사는 곽상훈과 유두희 등이 맡았다. 지회 사무실은 율목동 인천무도관(仁川武道館)으로 정했다.왜 신간회 인천지회 사무실을 인천무도관에 뒀을까. 인천 향토사학자들은 인천무도관 사범 유창호(柳昌浩)가 신간회 인천지회 간사로 참여했고, 한용단을 이끌었던 곽상훈 등 지역 스포츠계 인사들이 인천지회 핵심으로 활동했기 때문으로 보고 있다. 유도, 검도, 권투 등을 지도한 인천무도관은 지역 청년들이 몰려 신간회 참여를 독려하기 유리했고, 당시 스포츠는 민족의식을 키우는 활동으로 여겨지기도 했다.신간회 중앙본부가 1927년 1월 창립할 당시 확정한 강령은 ▲우리는 정치적·경제적 각성을 촉진한다 ▲우리는 단결을 견고히 한다 ▲우리는 기회주의를 일체 부인한다 등이다. 전국 각 지역에서는 강연운동이 활발했다. 강연은 신간회가 민족운동의 당면과제로 삼았던 '농민 교양', '경작권 확보', '조선인 본위의 교육 확보', '언론·집회·결사·출판의 자유 획득 운동', '협동조합 운동 지지·지도' 등이 주요 내용이었다. 일제 식민지 정책을 비판하면서 사회 각 분야 민족운동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했다.인천지회는 전국에서 시국강연회와 계몽강연회를 가장 활발하게 개최한 지회 중 하나로 꼽혔다. 하지만 인천지회의 구체적인 활동은 관련 문서나 언론 보도 등에서는 찾아보기 어렵다. 현재까지도 신간회 인천지회 관련 연구 성과가 드문 이유이기도 하다. 다만, 신간회 인천지회가 조직되기 전까지 인천지역에서 비슷한 역할을 했던 단체인 신정회(新正會) 관련 보도에서 신간회 활동의 단서를 찾을 수 있다. 동아일보 1927년 6월 9일자 신문을 보면, '계급과 파벌을 타파한 전 인천적 집적단체'를 표방한 신정회는 1927년 6월 6일 창립총회를 열고 출범했다. 위원장은 하상훈이었고, 곽상훈, 고일 등 이후 신간회 인천지회 설립을 주도하게 되는 좌우 인사들이 대거 참여했다.'신정회 강연 성황'이라는 제목의 1927년 7월 13일자 동아일보 기사에는 신정회가 홍예문 인근에 있던 인천공회당(仁川公會堂)에서 강연회를 개최한 내용이 실렸다. 청중 600여 명이 모인 가운데 열린 강연회에서는 김준연(金俊淵·1895~1971)이 연사로 나서 '사회운동과 민족운동의 관계'를 주제로 강연했다. 김준연은 동아일보 주필을 지내다 1936년 일장기 말소사건 때 사임한 독립운동가다.신정회는 같은 해 10월 9일 인천공설운동장(웃터골경기장)에서 '인천시민 대운동회'를 주최했는데, 동아일보는 1927년 10월 11일자 신문에서 시민 6만 명이 운집했다고 썼다. 이때 종목 중 하나였던 월미도 일주 마라톤에만 150명이 참가했다고 한다. 또 신정회는 1927년 9월 중국 선원들이 덕적군도에 있는 악험도(惡險島·현 선미도)를 습격했다는 소식을 접하고, 진상조사를 위해 신정회 위원인 서병훈을 파견하기도 했다. 신정회의 후신 격인 신간회 인천지회도 이 같은 성격의 활동을 계속했을 것으로 보인다.신간회 인천지회는 1920년대 최대 규모 노동운동인 '원산 총파업'을 물밑에서 지원했다. 1929년 1월 13일부터 4월 6일까지 일어난 원산 총파업은 원산노동연합회 산하 54개 노동조합 조합원 2천200여 명이 참가했다. 1928년 9월 함경남도 덕원군의 라이징선(Rising Sun) 석유회사에서 일본인 감독이 한국인 유조공을 구타한 사건이 있었는데, 노동자 120명이 감독 파면과 처우 개선 등을 요구하며 파업한 것이 총파업의 발단이었다.일본인 사업주들이 중심인 원산상공회의소는 파업을 무력화하기 위해 인천에서 노동자 200여 명을 데려와 취업시켰고 어용노조도 조직했다. 인천에서 극우단체인 일본국수회(日本國粹會) 회원들이 원산으로 파견돼 노동자들을 위협하기도 했다. 인천에서 온 노동자들은 원산의 상황을 깨닫고 파업에 동참하기도 했다. 신간회 인천지회는 원산으로 향하는 인천 노동자들을 막기 위해 적극적으로 연설활동을 했다. 1929년 1월 25일 곽상훈, 권충일 등 4명이 거리에서 연설하다가 경찰에 붙잡혀 20여 일 동안 인천경찰서에 구류됐다. 유두희, 권평근 등은 인천지역 노동운동에 적극적으로 가담했다. 신간회 인천지회 간부들은 여러 청년단체 활동도 주도했다.신간회 인천지회 관련 자료를 모아온 향토사학자 이성진 골목문화지킴이 대표는 인천지회를 통해 좌익과 우익 인사들이 결집할 수 있었던 요인을 지연과 학연으로 봤다. 이성진 대표는 "신간회 인천지회 주요 인사들은 '인천 출신', '강화 출신', '영화학교(영화초등학교) 출신', '인천공립보통학교(창영초등학교) 출신'으로 서로 얽히고 묶였다"며 "이념이 다를지라도 한데 뭉쳐 활동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라고 분석했다.일제는 그 영향력이 점점 커진 신간회를 탄압하기 시작했다. 인천경찰서도 1930년 2월 12일 예정됐던 신간회 인천지회 정기대회를 금지했다. 2년 전까지도 인천지회는 같은 시기 문제없이 정기대회를 개최했었다. 신간회는 1931년 5월 16일 창립 4년 4개월 만에 해소(解消)됐다. 합법적 단체로 적극적인 항일운동에 제약이 많고, 좌우 계열 간 갈등도 심해졌기 때문에 지회별 해소가 이어졌다. 인천지회는 1931년 2월 10일 해소를 결의했다. 해소진행위원은 권충일, 유창호, 곽상훈이었다. 앞서 유두희는 1928년 7월 일제의 제4차 조선공산당 검거사건으로 징역 4년을 선고받고 옥에 갇혔다.이균영 동덕여대 사학과 교수가 1993년 쓴 '신간회 연구'에 실린 인천지회의 해소안 성명서를 보면, "주체성이 확대된 노동계급의식의 앙양으로 그 조직체의 결함과 오류를 인식하게 됐다"는 내용이 중심이다. 신간회 인천지회의 해산을 주도한 것은 화요회계열 조선공산당 재건운동세력이었다. 그러나 이균영 교수는 인천지회에서는 민족주의계열인 곽상훈이 적극적인 해소론자로 구성하는 해소진행위원에 포함됐다는 점에서 타 지회처럼 우익 진영이 신간회 해산에 반대했다는 설은 적용되지 않는다고 분석했다.신간회 인천지회의 주역들은 해산 이후 각자 속한 노선에서 활동하며 갈라섰다. 전향한 뒤 일제에 협력한 몇몇 인사도 있었다. 노동운동과 사회운동을 꾸준히 전개한 권평근은 해방 직후인 1945년 9월 8일 인천항에 입항하는 미군 환영 인파 속에 있다가 치안 유지를 내세우며 일본 경찰이 쏜 총에 맞아 비극적으로 생을 마감했다. 곽상훈, 하상훈, 양제박 등은 해방 이후 정치판에 뛰어들었다. 서병훈의 아들인 서정익(徐廷翼·1910∼1973)은 인천 동양방적의 유일한 한국인 기사였는데, 해방 이후에도 동양방적공사 이사장을 지내다가 1955년 인수해 동일방직을 설립했다. /박경호기자 pkhh@kyeongin.com일러스트/박성현기자 pssh0911@kyeongin.com/아이클릭아트1927년 12월 5일 신간회 인천지회 창립대회를 개최한 인천금융조합 건물. /인천시 역사자료관 제공인천의 첫 공립학교인 인천공립보통학교(현 창영초교). 신간회 인천지회 회원 중에는 이 학교 출신이 많았다. /인천시 역사자료관 제공'신정회 강연 성황'이라는 제목의 1927년 7월 13일자 동아일보 기사. /네이버 뉴스라이브러리 제공

2019-09-25 박경호

[독립운동과 인천·(27)]삼연 곽상훈

17세때 동래서 이주… '경인기차통학생' 친목회 초대회장고유섭·조진만 등도 배출한 '문예부' 중심 문화활동 전개3·1운동 확산때 고향 만세시위 주도하다 체포돼 수감생활인천 최초 야구단 '한용단' 지역봉사 '소년군' 단장맡기도민족연합전선 신간회서 '계몽' 앞장… 해방후 정치인 행보삼연(三然) 곽상훈(郭尙勳·1896~1980)은 조봉암, 장면, 이승엽과 더불어 인천이 낳은 거물 정치인이다. 제헌국회부터 5번의 국회의원을 지내고, 국회의장, 대통령 권한대행까지 맡았던 곽상훈은 우익 진영을 대표했다.곽상훈은 1919년 3월 경성고등공업학교 재학 중 고향인 부산 동래에서 만세운동을 주도하다 옥고를 치렀다. 일제강점기 때 인천을 기반으로 학생운동, 소년운동, 신간회 등 합법적으로 국민을 결집하고 실력을 기르자는 방향의 항일운동을 택했다. 그는 다양한 사회활동을 하면서도 친일로 흐르지 않았기 때문에 해방 후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검찰관으로 임명될 수 있었다. 야당 소속 정치인으로 굵직한 행보를 이어갔지만, 만년에는 5·16 군사 쿠데타와 박정희 정권을 적극적으로 지지해 비판받은 점은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곽상훈의 행적이다.곽상훈이 1972년 월간지 '세대'에 연재한 '삼연회고록'을 보면, 경성고등공업학교로 진학하기 위해 17세 때 동래에서 인천으로 이주했다. 그는 인천에 사는 큰형 집에서 경인선을 타고 서울 경성고공으로 통학했다. 곽상훈은 회고록에서 "경인통학생으로서 아침저녁 불편한 점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 무렵부터 인천은 나의 제2 고향이 되어 주었다"고 했다. 인천에서 서울에 있는 학교로 통학하는 학생들은 경인철도를 탔다. 인천에서 초등학교를 졸업한 학생들이 다닐 상급학교가 부족해 서울로 진학하는 경우도 상당수였다. 신태범 박사의 '인천 한 세기'에는 경인선 기차 통학이 1915년 무렵부터 시작됐고, 통학생 수는 한국 학생이 200명, 일본 학생이 100명 정도였다고 나온다.서울로 통학하는 인천 학생들은 '경인기차통학생 친목회'를 결성해 교류했고, 초대 회장은 곽상훈이 맡았다. 곽상훈은 학생들 사이에서 야구, 축구, 농구 등 운동을 잘하는 '만능 스포츠맨'으로 이름을 알렸다고 한다. 조선인을 무시하는 일본 학생을 "야구방망이로 늘씬하게 두들겨 주었다"는 일화도 남기는 등 경인통학생들 사이에서 선망의 대상이었던 게 친목회 초대 회장을 맡은 이유로 보인다. 교육기회를 얻은 학생들이 모인 경인기차통학생 친목회는 특히 문예부를 중심으로 문화운동을 활발하게 전개했다. 한국 미학(美學)의 선구자라 불리는 우현 고유섭(1905~1944), 대법원장을 지낸 조진만(1903~1979), 일장기 말소사건의 주역 이길용(1899~?), 흑인시를 개척한 시인 배인철(1920~1947) 등이 경인기차통학생 친목회 문예부 출신이다.최원식 인하대 명예교수는 2005년 펴낸 인천론집 '황해에 부는 바람'에서 "경인선은 일제의 군사적 목적 아래 계획됐지만, 뜻밖에도 인천의 문화 역량을 한층 북돋았으니, 그 첨병 노릇을 맡아 한 것이 바로 경인기차통학생들이었다"며 "일제의 침략 루트로 건설된 경인선을 오히려 민족해방운동의 탁월한 공간으로 탈환했다"고 평가했다.곽상훈은 1919년 3·1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하자 경인통학생을 대표해 각처의 학생들을 동원했고, 인천공립상업학교(현 인천고등학교)의 동원 책임까지 지기도 했다고 회고했다. 그는 인천상고 학생들과 만세시위를 하고 3월 10일께 고향인 동래로 내려갔다. 독립선언서 내용을 창호지에 베끼고, 노끈을 꼬아 숨겨서 가져갔다고 한다. 동래읍 장날 독립선언서를 배포하고, 만세시위를 주도하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돼 미결수로 8개월 동안 수감생활을 하다가 풀려났다. 이 일로 곽상훈은 경성고공에서 퇴학당했다.곽상훈은 1920년 경인기차통학생 친목회 소속 16~17세 학생을 중심으로 인천의 첫 야구단인 '한용단'(漢勇團)을 만들고, 자신은 단장을 맡았다. 한용단의 홈구장은 현재 제물포고등학교 자리인 '웃터골경기장'(인천공설운동장)이었다. '인천 한 세기'를 보면, 한용단은 인천미두취인소가 주축인 '미신'(米信), 일본철도사무소의 '기관고'(機關庫) 등 일본인 팀과도 맞붙었다. 언론인 고일이 1955년 쓴 '인천석금'에서는 "야구대회가 있다고 소문만 나면 시민 팬들은 만사를 제쳐놓고 구름같이 모여들었다. 엿장수도 오고 지게꾼도 대섰다. 할머니도 '스트라익' 하고 할아버지도 '호무랑'(홈런의 일본어 발음) 소리를 외쳤다"고 당시 한용단의 한일 야구전 분위기를 전했다.인천시민들의 민족의식을 높였던 한용단은 1924년 해체됐다. 미신 팀과의 결승전에서 일본인 심판의 오심으로 우승을 놓쳤다며 흥분한 곽상훈 단장과 일본인 검도사범 기요다(淸田)가 몸싸움을 벌였는데, 이때 함께 분노한 한국인 관중들이 본부석으로 몰려가 일본인들과 충돌한 사건이 빌미가 됐다. 최원식 교수는 '황해에 부는 바람'에서 한용단을 가리켜 "운동경기의 외피를 쓰고 출현한 민족적 단결체"라고 했다.1923년 9월 관동대지진 직후 일본 내 조선인들이 대대적으로 학살당했다. 곽상훈은 이듬해 9월 상해청년동맹회 주도로 열린 '제2회 관동진재 참사자 추도회'에 동경진재동포학살조사위원으로 참여해 한국인 희생자 명단을 입수하고, 학살사건 조사보고서를 작성했다. 도쿄 현지 조사에도 나섰다. 곽상훈은 1925년 3월 초까지 상하이에서 청년 독립운동가 모임인 상해청년동맹회에서 활동하다가 귀국했다. 애초 그가 의열단에 참여하기 위해 상하이로 건너갔을 것이라는 시각도 있다.인천으로 돌아온 곽상훈은 인천 소년군(보이스카우트) 단장을 맡으며 지역사회 활동을 재개했다. 1925년 7월 '송현리 갈밧 매축(매립)공사'로 인해 민가 30가구가 침수됐을 때 곽상훈 단장이 소년군을 인솔해 비를 맞으며 물을 빼는 공사를 돕고 철야 경계를 섰다고 동아일보 1925년 7월 15일자 신문에 보도됐다. 같은 해 8월 인천 소년군은 이른바 '을축년 대홍수' 희생자들의 추도식을 월미도에서 진행하기도 했다. 을축년인 1925년 7~9월 4차례에 걸친 집중호우로 한강, 금강, 낙동강, 대동강 등이 범람해 경성과 인천을 포함한 전국 곳곳에서 홍수 피해가 있었다. 홍수로 인한 사망자만 647명에 달했고, 2만3천호가 넘는 가옥이 유실·붕괴했다고 조선총독부는 집계했다.노영택 대구가톨릭대 사학과 명예교수는 1979년 펴낸 '일제하 민중교육 운동사'에서 인천 소년군과 관련, "이들은 비록 소년들이었다 하지만, 단장 곽상훈의 지도 아래에 민족 문화운동의 한 분야로 소년운동을 전개했으니 일제에 대한 저항의식이 그 기반이 되고 있다"며 "이 운동은 조직을 통해 합법적 방법으로 전개됐고, 시민들의 열렬한 성원을 받았다"고 했다. 곽상훈이 가장 공들인 활동은 민족주의 진영과 사회주의 진영이 손을 잡은 민족연합전선 조직인 신간회였다. 그는 1927년 12월 신간회 인천지회 창립대회에서 총무간사를 맡았다. 하상훈(1891~1964) 등 우익 인사와 유두희(1901~1945), 권평근(1900~1945) 등 좌익 인사가 곽상훈과 함께 신간회 인천지회 주축이었다. 신간회는 강연활동이나 계몽운동 등 합법적인 방식으로 민족운동을 진행한 당시 국내 최대 좌우합작 단체였다. 곽상훈은 1929년 6월 신간회 중앙검사위원에 뽑혔고, 같은 해 10월에는 인천지회 회장으로 선출됐다. 이 시기 일본의 감시대상자 명단에도 이름을 올렸다. 신간회는 1931년 5월 해산했는데, 곽상훈은 신간회 해산에 지속해서 반대하며 좌익과 우익의 공조를 주장했다.사회활동가로 신문 보도에 꾸준히 등장했던 곽상훈의 이름은 신간회 해산 이후부터는 찾기 어렵다. 곽상훈의 행적을 언론 등을 통해 다시 확인할 수 있게 된 것은 해방 이후 정치판에 뛰어들면서부터다. 제헌 국회의원에 당선된 곽상훈은 1948년 반민족행위처벌법 제정으로 항일투쟁 경력을 인정받아 반민특위 검찰관에 임명됐다. 1949년 백엽문화사가 출간한 '반민자 죄상기'에는 독립운동가들을 고문하기로 악명 높았던 일제강점기 고등계 경찰인 김태석(1882~?)의 재판 장면이 나온다. 검찰관 곽상훈이 김태석을 재판에 넘겼다.김태석은 재판에서 독립운동가 강우규(1855~1920)를 체포해 고문한 사실을 계속 부인하고, 체포한 게 아니라 강우규가 자수했다고 잡아뗐다. 당시 격분한 곽상훈은 재판장과 방청객들에게 "이때까지의 피고인 진술내용을 검토하여 보면 참으로 성현의 말과도 같고, 가장 애국자 같이 보인다"며 "이렇기 때문에 본 재판을 가장 공정하게 진척시키려면 먼저 피고인의 머리를 정신분석하여 정신이상 유무를 먼저 알아야 할 것"이라고 소리친다. 곽상훈은 김태석에 대해 고등경찰 때 애국지사를 체포한 혐의와 경남 참여관 겸 산업부장을 역임할 때 조선 청년들을 출병시킨 혐의로 사형을 구형했다. 하지만 김태석에게는 무기징역과 50만원 재산 몰수형이 선고됐고, 1950년 한국전쟁 직전 석방된 것으로 알려졌다. /박경호기자 pkhh@kyeongin.com/아이클릭아트1899년 경인선 개통 당시 열차로 모여든 군중 모습. 경인선은 서울로 통학하는 인천 학생들의 교통수단이었다. /인천시사 제공1928년 한용단 모습. 1924년부터 한용단이라는 이름을 쓸 수 없게 되면서 고려야구단이라는 이름을 썼다. /인천야구 한 세기 제공삼연 곽상훈 선생. /경인일보DB1924년 일본 외무성이 작성한 '불령단관계잡건' 문서. 곽상훈이 상해청년회에서 관동대지진 조선인 희생자 조사 활동을 한 것과 관련한 보고 문건이다. /국사편찬위원회 제공1930년 11월 일본 경찰이 작성한 감시대상 인물카드로 가장 위에 있는 인물이 곽상훈이다. 나머지 3명은 신간회 회원이다. /국사편찬위원회 제공부산 동래고등학교(옛 동래고보) 교정에 있는 곽상훈 흉상. 곽상훈은 동래고보를 졸업한 뒤 서울 경성고공으로 진학했다. /동래고 제공

2019-09-18 박경호

[독립운동과 인천·(26)]황어장터 만세운동

특정집단만 주도한 게 아닌 점 의미지역내 '심혁성' 신임 두터웠을 듯인천 계양구 '황어장터 만세운동'은 인천 내륙에서 일어난 가장 큰 규모의 독립운동이다. 조선총독부가 일본 정부에 보고한 문서에 '황어장터 만세운동에 600여 명이 참석했다'고 기록한 점을 고려하면, 실제로는 1천명이 넘었을 것이라는 게 연구자들의 설명이다.황어장터 만세운동을 이끈 사람은 당시 31세에 불과했던 심혁성(1888~1958)이다. 인천시 계양구 오류동(당시 경기도 부천군 오류리) 출신 천도교도였던 심혁성은 1919년 3월 24일 그 일대에서는 가장 큰 시장인 황어장에서 주민들과 함께 '조선독립만세'를 외쳤다. 심혁성은 3시간 만에 일본 경찰에 붙잡혔지만, 마을 주민들은 그의 석방을 위해 경찰과 맞서 싸웠다. 이 과정에서 한 명이 일본 경찰의 칼에 맞아 숨지는 안타까운 사고도 있었다. 마을 주민들은 친일파의 집과 계양면사무소를 파괴하는 등 만세 운동을 계속해 나갔다.황어장터 만세운동이 주목받는 또 다른 이유는 대규모 독립운동을 특정 집단에서만 주도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황어장터 만세운동 재판 기록을 보면 당시 체포된 40여 명의 인원 중 상당수는 기독교인이었다. 황어장터 만세운동에 대해 연구한 수원대학교 사학과 박환 교수는 "당시 독립운동에 나선 사람들에게 종교는 독립운동의 밑바탕이자 원동력이었다"며 "천도교와 기독교를 초월해 독립운동을 이끈 심혁성은 지역 내에서 많은 사람의 신임을 받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른 심혁성은 전 재산을 팔아 빈민들에게 나눠 주고 독립운동을 계속했다. 한평생 일본에 항거한 그는 1958년 숨을 거둘 때 후손들에게 '독립운동을 했다는 이유로 국가로부터 혜택을 받지 마라'고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박환 교수는 "심혁성이 주도한 황어장터 만세운동은 인천 북부지역뿐만 아니라 문학과 남동 등 인천 다른 지역 만세운동의 견인차 구실을 했다"며 "그의 만세운동을 역사에 기록해야 할 이유다"고 평가했다. /김주엽기자 kjy86@kyeongin.com

2019-09-04 김주엽

[독립운동과 인천·(26)]황어장터 만세운동 주역 심혁성

만세함성 가득한 1919년 3월 손병희 지시받아천도교·기독교인 규합 24일 600명 태극기 들어경찰과 대치중 '이은선' 숨진 탓 저항감 치솟아문학동·남동·월미도 시위 등 지역 활동 '밑거름'출소후 재산 팔아 빈민 돕는 등 평생 이웃 챙겨전국에서 만세운동이 한창이던 1919년 3월 24일. 경기도 부천군 계양면 장기리(현 인천시 계양구 장기동)에선 당시 대표 우(牛)시장인 황어장이 열렸다.오후 2시가 되자 한 청년은 옷 속에 숨겨 둔 태극기를 펼쳐 들었고, 장터에 있던 다른 사람들도 태극기를 꺼내 들며 '조선 독립'을 외쳤다.인천 내륙지역에서 벌어진 가장 큰 독립운동인 '황어장터 만세운동'은 이렇게 시작되었다.황어장터 만세운동을 주도한 사람은 심혁성(1888~1958)이다. 어린 시절 한학을 배웠지만, 농사를 지으며 살던 심혁성은 3·1 운동이 들불처럼 번질 때 가만히 있지 않았다.마을 주민들을 이끌고 조선 독립을 외쳤다.심혁성은 1888년 계양면 오류리(현 계양구 오류동)에서 태어나 독립운동을 진행하기 전까지 이 지역에서만 살았던 것으로 전해진다.당시 그의 재판기록에 따르면 심혁성은 독실한 천도교도로 생활했다. 1910년대 천도교는 독립운동을 활발하게 펼쳤다.1894년 동학농민운동을 통해 일본에 처절하게 항거한 천도교는 국권이 침탈된 1910년 이후에도 독립운동을 주도해 나갔다.3·1 운동 당시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총대표는 천도교도였던 손병희(1861~1922)가 맡았으며,독립선언문도 천도교 교단이 운영하던 '보성사'에서 인쇄돼 전국으로 배포됐다.심혁성이 살던 계양·부평 지역에는 1900년대 초반 천도교가 전파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항일 천도교 기관지 '천도교회월보'는 1914년 4월 15일 발간한 기사를 통해 "'부천군' 교구는 설치한 지 십 년에 교호가 수십호에 지나지 못하고, 또한 모두가 빈한한 까닭에 교구실을 작만티(장만하지) 못함으로 일반교인이 근심하는 바이더라"라며 당시 이 지역 천도교 전파 상황을 소개하고 있다. 이를 토대로 한다면, 1914년이면 천도교 부천군 교구가 만들어진 지 10년 정도 지난 시점이었던 셈이다. 부평교구는 부평군 서면 신대리(현 계양구 서운동)에 강습소를 운영했는데, 심혁성도 이곳에서 천도교도로서의 활동을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1919년 3월 전국은 독립을 염원하는 만세 함성으로 가득했다. 인천에서는 6일 인천공립보통학교(현 인천창영초등학교) 학생들이 동맹 휴학에 돌입하면서 만세 운동에 참여했다. 8일에는 인천 시내에 독립선언서가 다수 배포됐고, 이튿날인 9일에는 만국공원(현 자유공원)에 모여 만세시위를 하다가 경찰에 의해 강제 해산되기도 했다. 3월 중순부터는 강화 지역 곳곳에서도 만세운동이 벌어졌다.이 시기 심혁성은 손병희의 지시를 받아 3·1 운동을 은밀히 준비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부천군 계양면 지역의 천도교·기독교인, 농민들에게 독립운동 사실을 알리고 이들을 규합해 나갔으며, 만세운동 장소로 황어장터를 정했다.매월 음력 5일에 열리던 황어장터는 부천군 지역의 가장 큰 시장 중 하나였다. 조선총독부가 1924년 발간한 '조선의 시장'에선 "경기도 부천군에는 2곳의 시장이 있는데 한 곳은 소사리에 있고, 나머지는 장기리에 있다. 이들 시장에는 1곳당 평균 이용인구가 1천~2천명에 달한다"고 설명할 정도로 규모가 큰 시장이었다. 당시 시장은 일본의 감시 속에서도 많은 사람이 자연스럽게 모일 수 있는 대표적인 장소였다. 이 때문에 시장을 중심으로 3·1 운동이 진행된 경우도 많았다. 경기도 화성에서는 '발안장'을 중심으로 3·1 운동이 벌어졌고, 평택에서는 '시강장터'가 만세운동의 장이 되었다.일본 경찰은 황어장터에서 만세운동이 진행될 수 있다는 것을 경계하고 있었다. 조선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는 1919년 3월 27일 자 신문에서 "강화도의 소요가 도화선이 돼 그다음에 접근된 김포도 일어났고, 다시 그 동네와 인천경찰서 관내의 경계선 되는 부천군도 불온의 형세가 있으므로 인천경찰서에서는 만일의 경비를 위해 순사부장과 순사 2명을 부내주재소(부평주재소)에 임시 응원을 파견했다더라"고 썼다. 심혁성의 재판 기록을 보면 당시 부내주재소에서 근무하던 순사 2명은 24일 아침부터 황어장터를 순찰하고 있었다.일본 경찰의 경비도 계양 지역 주민들의 독립 염원을 꺾지는 못했다. 오후 2시가 되자 심혁성을 비롯한 600여명의 군중은 품 안에 태극기를 꺼내 들고 '조선독립만세'를 외쳤다. 조선총독부가 일본 정부에 보고한 문서에선 "계양면 장기리에 장날을 맞아 구한국기(태극기)를 앞세우고 약 600명의 군중이 운동을 개시했다"고 황어장터 만세운동을 설명했다.일본 경찰이 이날 황어장터에 대한 감시를 강화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안타깝게도 심혁성은 만세 운동을 시작한 지 3시간 만인 오후 5시께 경찰에 붙잡혔다. 이를 본 주민 수백명은 '심혁성을 내놓아라'고 외치며 일본 순사들을 포위하고 주먹으로 경찰들을 때리는 등 거세게 저항했다. 이에 순사들은 칼을 빼 들고 군중을 향해 휘둘렀고, 대열의 선두에 섰던 이은선(1876~1919)이 칼에 맞아 숨지는 등 주민 여러 명이 크고 작은 부상을 당했다. 당시 인천경찰서에서 파견 나온 순사는 "면사무소에서 시장을 거쳐 약 3정(町·약 330m)의 지점에 이르렀을 때, 약 200명이 뒤따라오며 '붙잡아라, 붙잡아라'하고 저마다 입으로 큰소리를 지르고 우리 일행 6명을 포위해 심(심혁성)을 빼앗아 가려고 폭행을 시작해 약 10분이 지났을 즈음 심을 묶었던 포승을 끊고서 심을 둘러메고 약 8간(間·약 14m)을 탈거해 사방에서 돌을 던지므로 칼을 뽑지 않으면 심을 탈환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경찰관 일행이 위험 상태에 빠져 막을 길이 없기에 칼을 뽑아 방어했다"고 상부에 보고했다.이은선의 죽음을 본 주민들의 저항감은 더욱 불타올랐다. 이날 밤 주민들은 친일파로 지목된 면서기의 집을 부수고, 일제의 침략 말단기구였던 계양면 면사무소를 파괴했다. 또 주민들은 임학리와 용종리, 병방리, 박촌리의 민적부와 과세호수대장 등 면사무소 내 주요 서류를 불태웠다. 주민들은 심혁성을 포함한 만세운동 중심 인물이 대부분 구속됐음에도 이튿날인 25일 300여명이 면사무소 앞에 모여 힘차게 만세를 외쳤다.천도교와 기독교인이 합심해 이뤄낸 황어장터 만세운동은 27일 문학동 시위, 28일 남동 시위, 4월 1일 월미도 시위 등 인천지역에서 벌어진 다른 만세 운동의 밑거름이 됐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하지만 심혁성을 포함한 황어장터 만세운동 주동자 주민 40여명은 일본 경찰에 붙잡혀 모진 고문을 당했다. 심혁성은 1919년 10월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8월 형을 선고받아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1920년 출소한 심혁성은 논과 밭, 집을 팔아 생필품을 장만해 장터에서 빈민들에게 나눠주고, 전국을 떠돈 것으로 알려졌다. 1927년에는 함경도에서 중국 상하이(上海) 임시정부의 지시를 받아 활동했고, 1937년 이후에는 충남 공주와 강원도 영월 등지를 다니며 군자금을 모금하다 해방을 맞았다.해방 이후 인천으로 돌아온 심혁성은 1958년 12월 인천시 계양구 백석동에서 70세를 일기로 타계했다. 정부는 그의 공훈을 기려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고, 계양구는 2004년 황어장터가 있던 자리에 '황어장터 3·1만세운동 기념관'을 세웠다. 이곳에선 매년 3월 1일 심혁성과 주민들의 독립운동을 기억하는 행사가 열리고 있다.심혁성은 평생을 조선의 독립을 위해 힘써왔다. 일본의 삼엄한 감시 속에 피신생활을 하는 중에도 어려운 이웃을 먼저 생각했으며, 자신도 물론 경제적으로 풍요롭게 생활한 것은 아니었다고 한다. 심혁성의 손자 심현교(67) 씨는 3일 경인일보와의 전화 인터뷰에서 "우리 할아버지는 돌아가실 때에도 '독립운동을 했다는 이유로 국가로부터 혜택받지 마라'고 유언을 남길 정도로 매우 강직한 사람이었다"며 "해방 이후에도 어려운 사람을 보면 입고 있던 옷을 다 벗어주고 집에 올 정도로 어려운 사람을 외면하지 못했다"고 고인을 기억했다. 이어 "강직하고 어려운 사람을 돌보는 성격이 할아버지가 3·1 운동을 주도적으로 이끈 이유 중 하나였던 것 같다"고 덧붙였다. /김주엽기자 kjy86@kyeongin.com인천 계양구 장기동에 있는 '황어장터 3·1만세운동 기념관' 전경. 인천 계양구는 매년 3월 1일 이곳에서 3·1 운동 기념식을 개최하고 있다. /인천 계양구 제공심혁성의 일제감시대상 인물카드. /국사편찬위원회 제공'황어장터 3·1만세운동 기념관' 내부 전시실 모습. /인천 계양구 제공

2019-09-04 김주엽

[독립운동과 인천·(25)]이길용과 신낙균

동아일보 손기정 마라톤 우승 보도옥고 치른뒤 언론·사진계 복귀못해올림픽과 같은 국제스포츠대회에 참가하는 선수들은 유니폼에 조국의 국기를 달고 출전한다. 하지만 일제강점기 올림픽에 참석한 우리나라 선수들은 일본 국적으로 대회에 나서야 했던 탓에 가슴에 태극기를 달지 못했다. 1936년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에서 우승한 손기정(1912~2002)도 가슴에 일장기를 달고 뛰어야 했다. 이를 안타깝게 여겼던 동아일보 기자들은 손기정의 우승 사진을 신문에 게재하면서 일장기를 지워버렸다. 이른바 '동아일보 일장기 말소사건'이다.일장기 말소사건은 경성(서울)에 있던 동아일보에서 일어났지만 사건 주역들은 인천의 독립운동가들이다.일장기 말소사건을 주도한 체육기자 이길용(1899~?)은 인천영화학교(현 인천영화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동아일보에 입사했다. 이길용은 서울과 인천지사를 오가며 취재활동을 벌였고, 운동부(체육부)를 전담했다. 그는 일장기 말소사건 주모자로 지목받아 투옥돼 일본 경찰의 모진 고문을 받았고, 40일 뒤에 풀려났으나 언론계를 떠나야 했다.이길용과 함께 일장기 삭제를 주도했던 당시 동아일보 사진부 과장 신낙균(1899~1955)도 인천이 기억해야 할 독립운동가다. 인천상업고등학교(현 인천고등학교) 출신인 그는 일본에서 사진을 배우고 돌아와 언론계에 몸을 담았다. 신낙균은 이길용과 함께 일장기 삭제를 주도했다가 함께 옥고를 치렀다. 감옥에서 풀려난 뒤 언론계와 사진계로 돌아올 수 없었다.유니폼에 국기를 달고 국제스포츠대회에 참가한 선수는 그 나라의 국민을 대표한다는 상징성을 갖고 있다. 우리 민족이 힘들었던 시절 자긍심을 높이고,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일장기를 지워버린 이길용과 신낙균을 오랫동안 기억해야 하는 이유다. /김주엽기자 kjy86@kyeongin.com

2019-08-28 김주엽

[독립운동과 인천·(25)]일장기 말소사건의 주역 이길용과 신낙균

1936년 동아일보 손기정 우승 특집기사 게재… 이길용·신낙균 주도 편집국 전체 동참인천서 자란 이길용 배재학당 졸업후 일본서 반일 격문 옮기다 서대문형무소 '수감'민족대표 33인 중 한 사람인 송진우 만나 체육기자 입문… 6·25때 납북돼 행적 묘연인천상고 출신 신낙균 3·1운동 계기 사진 인연… 국내 사진전문가 최초 현충원 안장제11회 베를린 올림픽이 끝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1936년 8월 25일.동아일보 2면에는 베를린올림픽 마라톤 금메달리스트인 손기정 선수가 시상대에 오른 사진이 실렸다.다들 신문을 보고 깜짝 놀랐다. 손기정 선수 유니폼 가슴 부근 국적을 알리는 국기가 있어야 할 자리에 어렴풋한 회색빛 먹 자국만 보였기 때문이다.조선총독부는 동아일보가 고의로 일장기를 지운 것으로 보고 신문 발행에 가담한 주요 인물들을 체포했다.이른바 '동아일보 일장기 말소사건'이었다. 이 사건의 중심에는 인천의 독립운동가이자 언론인이었던 이길용(1899~?)과 신낙균(1899~1955)이 있다.이길용은 1899년 경상남도 마산(현 경남 창원시)에서 태어났다.한국체육기자연맹이 1993년 발간한 '일장기 말소의거 기자 이길용'에 따르면 마산 지역 상인이었던 그의 부친은 자식 교육을 위해 인천 동구 창영동으로 이사했다고 한다.인천영화학교(현 인천영화초등학교)를 졸업한 이길용은 서울에 있는 배재학당(현 배재중·고등학교)에 입학했다.이 시기 이길용은 경인선을 타고 서울로 통학하면서 이후 인천 지역 주요 인사로 성장한 이들과 친분을 쌓은 것으로 알려졌다.이러한 활동은 그가 이후 인천을 연고로 한 배재학당 출신들의 모임인 '인배회'와문화사업을 목적으로 만들어진 '제물포 청년회'에서 활동하는 데 초석이 됐다. 1916년 배재학당을 졸업한 이후 일본에 잠시 유학한 이길용은 1918년 남만주철도주식회사 경성관리국에 입사했다. 이곳에서 철도 수송업무를 담당하던 그는 중국 상하이(上海) 임시정부에서 인쇄된 반일(反日) 격문을 열차를 통해 옮기다 일본 경찰에 적발돼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됐다.서대문형무소에서 이길용은 그의 일생에서 매우 큰 영향을 미친 송진우(1887~1945)와 만났다. 이길용은 출옥 후인 1921년 당시 동아일보 사장인 송진우의 권유를 받아 신문사에 입사해 체육기자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했다.그가 체육기자의 길로 들어선 1920년대는 3·1 만세 운동 이후 일제의 문화정책이 펼쳐지던 시기다. 당시 지식인들은 스포츠가 민족을 단결하고, 세계에 우리나라의 이름을 알릴 수 있는 수단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배재학당 시절부터 여러 스포츠를 접한 이길용에게 체육은 또 다른 형태의 민족 운동이었다. 그는 1927년 '조선운동기자단'을 조직하고, 1930년부터 새 체육용어 보급 사업에도 힘쓰기 시작했다.베를린올림픽이 열린 1936년. 당시 동아일보에는 독립운동 활동을 하던 사람들이 다수 포진하고 있었다. 사장인 송진우는 3·1 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참여했던 인물이고, 사회부장이었던 소설가 현진건(1900~1943)은 시인 이육사와 함께 글로써 일제에 저항한 문인이다.인천의 독립운동가인 신낙균도 사진부 과장으로 근무하고 있었다. 인천상업고등학교(현 인천고등학교) 출신인 신낙균은 우리나라 1세대 포토저널리스트다. 그가 사진의 길로 접어들게 된 것은 3·1 운동이 결정적 계기가 됐다.1919년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자신의 고향인 경기도 안성에 머물던 신낙균은 친구들과 함께 3·1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만세운동을 주도한 혐의로 일본 경찰에 쫓기게 된 그는 몰래 안성을 빠져나와 서울 매부의 집으로 피신해 8개월 동안 숨어 살았다. 이곳에서 신낙균은 아마추어 사진가였던 매부 정욱진에게 사진을 처음 접했다. 일본 유학길에 오른 신낙균은 1927년 우리나라 사람으로서는 처음으로 당시 일본의 유일한 사진전문 교육기관인 '동경사진전문학교'를 졸업했다. 신낙균은 평소 후배 사진가 교육 과정에서 "사진은 단순히 기념이나 오락이 아니다. 사진의 앵글에 따라 국가의 안위가 바뀔 수도 있다"는 말을 즐겨 사용했을 정도로 굳은 신념을 지닌 사람이었다.1930년대 동아일보는 조선총독부의 관찰 대상이었다. 사장 송진우의 주도로 식민통치에 저항하기 위해 일으킨 농촌계몽운동의 하나인 문맹 퇴치 운동 '브나로드 운동'을 진행했고, 신사참배 거부를 옹호하며 종교의 자유를 지지했기 때문이다.베를린올림픽 마지막 날인 1936년 8월 10일. 이날 열린 마라톤에서 손기정 선수가 1등으로 들어왔고, 동아일보는 보름이 지난 8월 25일 자 2면에 손기정 우승 특집 기사를 게재하면서 일장기를 고의로 지웠다.당시 언론이 일본 대표로 참여한 조선인의 유니폼에서 일장기를 지운 것은 이때가 처음은 아니었다. 이길용도 자필 수기를 통해 "일제강점기 때 신문의 일장기 사진 말소는 항다반(恒茶飯·차를 마시는 일처럼 흔한 일)으로 부지기수였다"고 회고하기도 했다.이길용은 이보다 4년 전인 1932년 LA 올림픽에 일본 대표로 마라톤에 참가한 김은배(6위)와 권태하(9위)의 사진 속 일장기를 지운 바 있다. 당시에는 다행히 조선총독부가 이를 눈치채지 못하고 조용히 넘어갔다고 한다. 손기정이 우승한 3일 뒤인 8월 13일 자에는 '조선중앙일보' 4면과 동아일보 지방판 2면에 일장기가 없는 사진이 실렸다. 1936년 조선총독부 경무국이 발간한 '조선출판경찰개요'에 '손기정의 가슴에 새겨있는 일장기 마크는 물론, 손 선수 자체의 용모조차 잘 판명되지 않은 까닭에 당국으로서는 졸렬한 인쇄 기술에 의한 것으로 판단했다'고 밝힌 점을 고려하면, 당시 조선총독부는 인쇄 오류로 일장기가 지워진 것으로 간주한 것으로 보인다.하지만 8월 25일 자 신문은 조선총독부 감시망에 걸렸다. 사진 속 손기정의 얼굴 등이 너무 선명하게 나와 고의로 일장기만 지운 것으로 판단했기 때문이다. 대한체육기자연맹이 발간한 '일장기 말소 사건 의거 기자 이길용'에 따르면 일장기 말소 사실은 일본군 사령부가 신문 발행일인 24일 오후 4시 신문 배송 중지를 명령했으나, 이미 발송이 끝난 상태였다.당시 수사를 담당했던 경기도 경찰부장은 경성지방법원 검사정에 일장기 말소 사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이길용은 조사부원 이상범에게 '손기정 선수의 사진을 24일 자 석간에 실으려 하는 흉부의 일장기를 흐릿하게 해 달라'고 부탁했다. 이상범은 이를 승낙하고 원화에 착색한 뒤, 사진부 과장 신낙균의 책상 위에 갖다 놓았다. 그런 후에 사회부 기자 장용서가 24일 오후 2시 반경 사진부실에 와서 사진부 과장 신낙균과 사진부원 서형호에게 '이상범이 지우기는 했으나 아직도 흔적이 남아 있다'고 해 동판에 현출된 사진 중 일장기 부분에 청산가리 농액을 사용해 말소한 뒤 인쇄 부로 넘겨 다음 날 석간에 게재한 것이다."일장기 말소 과정에 동아일보 편집국 전체가 참여한 셈이다. 게다가 이길용이 처음 일장기가 있는 사진 수정을 부탁했던 사람은 월북화가이자 당시 동아일보 삽화가였던 정현웅(1911~1976)이었다고 한다. 그의 유족들의 증언으로는 이날 오전 신문에 들어갈 손기정 사진 수정 작업을 시작한 정현웅은 점심을 먹고 일장기를 지우고 마무리할 생각이었는데, 사무실에 늦게 들어오는 바람에 옆자리에 있던 이상범이 대신 일장기를 지웠다. 이 이야기는 정현웅 평전인 '시대와 예술의 경계인 정현웅'에 잘 나와 있다.이길용 본인도 1948년 발간한 '신문기자 수첩'이라는 책에서 "세상이 알기는 백림(베를린) 올림픽 마라톤의 일장기 말살사건이 이길용의 짓으로 꾸며진 것만 알고 있다. 그러나 사내의 사시(社是)라고 할까. 전통이라고 할까. 방침이 일장기를 되도록은 아니 실었다. 우리는 도무지 싣지 않을 속셈이었던 것이다. 이것은 (총독부에서 일본 본토를 가리킬 때 쓰도록 강요한) 내지(內地)라는 글을 쓰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였다"고 밝혔다.일장기를 지운 대가는 혹독했다. 동아일보는 8월 29일부터 무기정간 처분이 내려져 발행이 중단됐고, 8명의 기자가 경기도 감찰부에 체포됐다. 사건의 주모자로 지목된 이길용과 신낙균 등 5명은 40일에 걸쳐 극심한 고문을 당했다. 이들은 '언론기관에 일절 참여하지 않을 것'이라는 서약서에 강제로 서명한 뒤에야 석방됐다.감옥에서 풀려난 이길용은 이후에도 창씨개명을 거부하고, 반일 발언을 했다는 이유로 광복 전까지 4차례나 투옥되는 고초를 겪었다. 신낙균도 이 사건으로 언론계뿐만 아니라 사진계에서도 추방당했다.해방 이후 이길용은 우리나라 체육 역사를 정리한 백서 발간 작업을 진행했다. 하지만 6·25 전쟁 당시 납북돼 이후 행적은 확인되지 않는다. 신낙균은 수원북중학교에서 물리교사로 일하다가 1955년 숨을 거두었다.2017년 8월 25일 서울시 중구 손기정로 손기정기념관에 이길용 흉상이 손기정 선수의 동상과 나란히 놓였다. 이날은 1936년 이길용이 손기정 선수 가슴의 일장기를 지운 사진이 동아일보에 실린 날이다. 같은 해 4월에는 신낙균의 묘소가 국내 사진 전문가 중 처음으로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됐다.손기정의 올림픽 금메달은 식민지 조선인들에게는 하나의 희망이 되는 사건이었다. 이길용과 신낙균은 일장기가 삭제된 손기정의 사진과 함께 금메달 소식을 전했다. 이는 민족의 자존심을 회복시키고 자긍심을 높이는 계기가 됐다.이길용의 셋째 아들인 이태영(78) 대한체육회 고문은 지난 23일 경인일보와의 통화에서 "납북 당시에는 내가 10살 정도에 불과했기 때문에 정확한 모습이 기억나지는 않지만, 성격이 대쪽같고 강인했던 것만큼은 기억이 난다"며 "이런 성격이 일장기 말소 사건에 주도적으로 참여하게 된 이유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김주엽기자 kjy86@kyeongin.com일장기가 지워진 채 발행된 1936년 8월 25일 자 동아일보 2면(사진 왼쪽)과 원본 사진. /손기정기념재단 제공(왼쪽부터)이길용·신낙균경기도 경찰부장이 경성지방법원 검사정에 보고한 일장기 말소사건 조직도.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제공2017년 손기정 기념관에 설치된 이길용 흉상. /손기정기념재단 제공

2019-08-28 김주엽

[독립운동과 인천·(24)]장봉도 할아버지 송두용

옥고도 치러… 2010년 유공자 인정해방이후 남북통일 염원 밝히기도인천 장봉도에서 가난한 학생들을 위한 교육사업에 헌신했던 기독교 신앙인 송두용(1904~1986) 선생. 무교회주의(無敎會主義)라는 다소 생소한 신념을 가진 독실한 기독교 신자이자 빈민구제 활동가로 잘 알려진 그는 독립운동 행적과 사상과 관련해서는 크게 주목받지 못한 편이다.송두용은 뜻을 함께한 신앙인들과 함께 만든 기독교 잡지 '성서조선'을 통해 민족의식을 일깨우려 했다. "매서운 추위에도 살아남는 개구리는 있다"는 내용의 성서조선 158호(1942년 3월)의 권두언은 칼끝과 총부리로 우리 민족을 겨누고 말살하려 했던 일제에 일침을 가했다. 이 사건으로 송두용은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송두용은 이 사건에 대해 "일본 경찰은 우리가 독립운동을 하였다고 모조리 검거했다. 그러나 우리에게 정치성은 전혀 없고 다만 기독자로서 양심생활을 한 것뿐"이라고 했다. 그는 스스로 정치적 행동과 거리가 먼 신앙 그 자체를 위한 활동(신앙만의 신앙)이었다고 밝혔지만, 순수한 신앙심이 결국 민족의 해방과 평화에 대한 갈망을 불러왔다. 정부는 2010년 그를 독립유공자로 인정했다. 송두용은 해방 이후에도 신앙과 관련한 활발한 저술활동을 통해 많은 글을 남겼다. 3·1 운동 정신은 거창한 행사가 아닌 실력 양성으로 일본을 극복하는 것이라고 했다.그토록 염원하던 해방 이후 송두용은 남북을 비롯한 전 세계의 평화를 원했다. 평화를 바탕으로 남북통일을 이뤄야 한다는 그의 바람은 오늘날에도 유효하다. 송두용은 해방 22주년을 맞았던 1967년 8월 "이제는 각각 남의 나라처럼 또는 피차 독립국가인 양 당연한 것 같이 생각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우리의 힘으로는 어떻게 할 수 없다는 듯이 체념하고 있는지 모른다. 천만의 말이다. 어서 남북이 합쳐야 한다. 하루속히 통일 국가를 이뤄야 한다"고 했다. /김민재기자 kmj@kyeongin.com

2019-08-21 김민재

[독립운동과 인천·(23)]장봉도 할아버지 송두용과 성서조선사건

일본서 성경 중심 무교회주의 들여와 연구회 조직 '성서조선' 발행158호 弔蛙 통해 '한두 마리는 살아남듯' 말살정책 극복의지 표현해방 후 장봉도 푸른학원 이어받아 빈민구호·교육사업에도 힘써태평양전쟁 발발로 일제의 식민지 수탈이 극에 달했던 1940년대 초반 서울에서 발행된 한 기독교 잡지 첫 장에 의미심장한 내용의 권두언이 실렸다.권두언의 제목은 개구리의 죽음을 애도한다는 뜻의 '조와(弔蛙)'. 1942년 3월 무교회주의(無敎會主義) 기독교 신앙 잡지인 '성서조선(聖書朝鮮)' 158호에 겨울잠을 자다 얼어 죽은 개구리를 빗대 민족의 참담한 현실을 고발한 글이 실렸다.일본은 잡지 발행에 가담한 인물과 독자들을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체포했다. 이른바 성서조선사건이었다.이 사건의 중심에는 훗날 인천 장봉도에서 빈민구제 활동과 교육 사업에 헌신했던 독립운동가 송두용(1904~1986) 선생이 있었다.송두용은 1904년 7월 31일 충청남도 대덕군(지금의 대전시 대덕구)에서 부농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4살 때 아들이 없던 큰아버지에 입양됐다가 서울로 유학해 제동공립보통학교와 양정고등보통학교를 졸업했다.그는 18세 나이에 일본 유학길에 올랐으나 1923년 관동대지진 사건이 발생해 귀국했다. 그리고 21살 때 다시 일본 도쿄농업대학 예과로 진학했다. 그는 일본 유학생활에서 기독교를 접하고 인생이 바뀌었다. 당시 일본에서는 제도권 아래 있는 교회 제도를 비판하며 성서와 신앙만으로 구원에 이르러야 한다는 '무교회주의'가 태동하고 있었다. 이들은 교인 수를 늘리고 헌금 걷기에만 혈안이 돼 있는 기성 교단을 부정했다.송두용은 일본에서 무교회주의를 설파하던 우치무라 간조의 강연에 감명을 얻어 한국인 유학생인 김교신, 함석헌, 유석동, 양인성, 정상훈과 함께 '성서연구회'를 만들었다. 그리고 1927년 무교회주의 신앙을 기반으로 한 잡지 '성서조선'을 처음 발행했다. 송두용은 성서조선 6인방 중 가장 나이가 어린 23세였다.1930년 귀국한 송두용은 부천군 오류동(지금의 구로구)을 기반으로 성서집회를 열면서 신앙생활을 이어갔다. 송두용 등 6인방은 성서조선 발간과 함께 서울, 인천, 부천 등지를 다니며 강연을 하면서 민족의식을 고취했다. 이때부터 율목동의 인천모임을 만들어 무교회주의를 알리고 주변에 성서조선을 전달했다.김교신이 1927년 7월에 쓴 성서조선의 창간사는 "성서조선아, 너는 소위 기독 신자보다도 조선혼을 가진 조선 사람에게 가라, 시골로 가라, 산촌으로 가라, 거기에 나뭇군 한 사람을 위로함으로 너의 사명을 삼으라"는 내용이다.민족의식을 가진 기독교인들의 우상숭배를 거부하며 신사참배 거부 운동을 하는 등 종교 운동을 바탕으로 한 항일의식이 확산하자 일제는 기독교를 철저히 감시하기 시작했다. 결국 1942년 3월 송두용과 김교신 등이 성서조선 권두언에 실은 '조와'가 일제의 감시망에 잡혔다."봄비 쏟아지던 날 새벽이 바위틈의 빙괴(永塊)도 드디어 풀리는 날이 왔다. 오래간 만에 친구 와군(蛙君)들의 안부를 살피고자 담(潭) 속을 구부려 찾았더니 오호라 개구리의 시체 두 세 마리 담 꼬리에 부유하고 있지 않는가! 짐작컨대 지난 겨울의 비상한 혹한에 작은 담수(潭水)의 밑바닥까지 얼어서 이 참사가 생긴 모양이다. 예년에는 얼지 않았던 데까지 얼어붙은 까닭인 듯 동사한 개구리의 시체를 모아 매장하여 주고 보니 담저(潭底)에 아직 두어마리 기여다닌다. 아, 전멸은 면했나 보다!"이 글은 혹독한 추위가 와서 겨울잠을 자던 개구리가 죽어 나가더라도 한두 마리는 살아남듯이 일제가 아무리 민족말살정책을 펼치더라도 끝내 살아남는 한국인이 있다는 얘기를 은유적으로 표현했다.일제는 송두용과 김교신 등 6인방과 주요 독자 12명을 치안유지법 혐의로 체포하고 서대문 형무소에 가뒀다. 이 사건으로 송두용은 10개월 동안 옥고를 치렀고 결국 불기소 처분을 받았다. 성서조선도 '조와'가 실린 통권 158호를 끝으로 폐간됐다.송두용과 동시대에 무교회주의 활동을 했던 노평구는 당시 일제가 무력 투쟁이나 드러내놓고 하는 독립운동보다는 이 같은 종교·문화 운동을 더 두려워했다고 회상했다. 노평구는 송두용이 잡지에 쓴 글을 모아 총 6권 분량의 송두용신앙문집을 펴내기도 했다. 성서조선사건 당시 일본 경찰은 "너희 놈들은 우리가 지금까지 잡은 조선놈들 가운데서 가장 악질의 부류들이다. 결사니 조국이니 해가면서 팔딱팔딱 뛰어다니는 놈들은 오히려 좋다. 그러나 너희들은 종교의 허울을 쓰고 조선민족의 정신을 깊이 심어서 백년 후에라도 아니 오백년 후에라도 독립이 될 수 있게 할 터전을 마련해 두려는 고약한 놈들이다"는 반응을 보였다고 노평구는 밝혔다.송두용은 해방 이후에도 개인의 신앙생활과 함께 구호활동과 교육사업에도 힘썼다. 1930년 오류동에서 오류학원을 설립해 가난한 학생들을 위한 교육 사업을 펼쳤던 송두용은 1969년부터 장봉도에서 지인의 제안을 받아 '푸른학원'이라는 교육기관의 운영을 맡았다. 건강 문제로 요양차 장봉도에 들렀다가 1967년 푸른학원을 설립한 무교회 신앙인 노연태로부터 푸른학원을 맡아달라는 부탁을 받았기 때문이다. 이때부터 그는 '장봉도 할아버지'라는 별칭이 붙었다.당시 장봉도에는 초등학교밖에 없어 육지의 상급학교로 진학하지 못한 청소년들은 바다에 나가 굴이나 조개를 따거나 선주 밑에서 새우 선별작업을 하는 고된 일을 하면서 자랐다. 강화도와 영종도, 신·시·모도, 장봉도 일대에서 선교활동을 하던 노연태는 이들을 위해 학교를 세웠다. 송두용은 '정직'을 교훈으로 내세우고 학생들을 가르쳤다. 박정수 등 인천에서 함께 신앙 모임을 갖던 사람들도 푸른학원에서 교사 활동을 했다. 푸른학원은 1974년 정식으로 중등학교 인가를 받아 푸른고등공민학교라는 이름으로 다시 출발했다. 그러나 1980년대 들어 육지로의 진학률이 높아지면서 푸른학원의 문을 두드리는 학생들이 급격히 감소했다.송두용의 건강이 악화되고, 학생 수가 자연스럽게 줄면서 1982년 푸른학원은 결국 문을 닫고 만다. 인천섬연구총서 '장봉도'편을 보면 1982년 장봉도 초등학교 졸업생이 36명이었는데, 푸른학원으로 진학하겠다는 학생은 겨우 4명에 불과했다고 한다.10년 넘게 장봉도의 학생들을 위해 헌신했던 송두용은 1986년 4월 10일 서울 구로구 자택에서 눈을 감았다. 따르던 제자들과 무교회주의 신앙인들은 송두용의 추모집을 발간하고, 그가 쓴 글을 모아 문집을 내기도 했다.송두용은 무교회주의 종교인이면서 민족의식을 지닌 독립운동가였다. 2010년 송두용은 성서조선 사건으로 옥고를 치르고 대한민국의 독립을 위해 헌신했다는 사실이 인정돼 독립유공자 서훈(건국포장)을 받았다. 국가보훈처는 그를 '인천' 출신으로 분류하고 있다.송두용은 1958년 3월 잡지 '성서인생' 33호에 쓴 '진정한 3·1 정신'이라는 글을 통해 60년 뒤를 내다보기라도 하듯 현세대가 깊이 새겨들어야 할 말을 남겼다.그는 3·1 정신은 말이나 형식이 아니고 마음이며 산 생명이라고 했다. 독립운동 100주년을 맞은 올해 각종 기념식 행사에만 치중해 진정한 독립의 의미가 뒷전으로 밀려나는 것을 일찍이 우려했던 거다. 그는 "3·1 운동은 한 개인, 한 정당, 또는 한 단체를 위한 것이 아니다. 정치인도 근로대중도, 부호도 빈자도, 남녀노유의 구별 없이 도시와 촌락의 차이가 있을 리가 없다"고 했다.그는 특히 3·1 운동의 정신은 국민 개인이 실력을 양성해 각자 자기의 책임을 완수하는 것이라고 했다. 최근 일본 아베 정부의 무역보복 조치로 반일 감정이 확산하면서 정부와 국민들이 '극일(克日)'의지를 불태우는 현 시국에 딱 들어맞는 말이다.송두용은 "우리는 소련의 공산주의를 무서워하거나 일본의 침략정신을 겁낼 것이 없다. 일본을 이기고 소련을 물리치려면 오직 실력밖에 없는 것이다. 모든 허위와 외식을 버리고 허영과 기만을 떠나서 다만 진실 일로로 매진하는 수밖에 없다. 3·1 정신은 행사에 있는 것이 아니고 다만 실천궁행으로 사는 것이며 이룰 것이다"고 했다. /김민재기자 kmj@kyeongin.com그래픽/성옥희기자 okie@kyeongin.com/아이클릭아트성서조선 158호에 일제 저항정신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권두언 '조와(弔蛙)'를 실었다가 옥고를 치른 무교회주의 6인방. 뒷줄 왼쪽부터 양인성, 함석헌, 앞줄 왼쪽부터 유석동, 정상훈, 김교신, 송두용. /송두용신앙문집간행회 제공송두용 등 무교회주의 신앙인 6명이 발행한 잡지 '성서조선'.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제공1930년 오류학원을 설립할 당시의 송두용. /송두용신앙문집간행회 제공1958년 3월 송두용이 3·1정신에 대한 글을 썼던 잡지 성서인생. /송두용신앙문집간행회 제공

2019-08-21 김민재

[독립운동과 인천·(23)]용동 출신 박남칠

내리교회 교인 父영향 日 억압속 '엡윗청년회' 소년운동 주도 야학등 열며 애국심 고취YMCA 중등부에서 '사회주의' 눈 떠… 조봉암과 '운명적 만남' 평생 후원자·동지관계미곡상 경영하며 인천·강화지역 좌익 독립활동가 '구심점 역할' 청년운동도 지속 펼쳐해방후 여운형 '건국준비위' 참여 한국전쟁때 보도연맹 학살사건에 '희생' 재평가 필요일제강점기와 해방공간, 인천의 대표적인 좌익 활동가로 올해 서거 60주기를 맞은 죽산 조봉암 선생을 꼽는 데 누구나 주저하지 않는다. 그런데 조봉암의 든든한 후원자이자 동지이며 기독교 사회주의자로서 인천의 근현대 좌익 활동을 이끌었던 박남칠(1902~1950)을 기억하는 이는 많지 않다. 박남칠은 드러내놓고 독립운동을 벌이지는 않았지만, 일제의 억압 속에서도 인천 내리교회를 중심으로 청년운동과 소년운동을 주도한 인물이다. 청년들의 문화·체육 활동과 강연회 개최로 애국심을 고취하는 데 힘썼고, 한편으로는 사업가로서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가들의 버팀목이 되어주었다. 또 인천·강화지역 사회주의 활동가들의 연결고리이자 구심적 역할을 하기도 했다.박남칠 연구는 교사 출신의 인천 향토사학자 이성진 인천골목지킴이 대표의 성과가 유일하다. 이 대표는 인천의 근현대 인물 가운데 제대로 된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는 박남칠에 주목하고, 그의 생애와 사상 전반에 대해 연구해 왔다. 현재 알려진 박남칠의 행적은 대부분 이 대표가 1차 사료를 수집해 정리한 자료를 기반으로 하고 있다.박남칠은 과거 반공 이데올로기 속에 제대로 된 평가를 받지 못한 채 수십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인천 근현대사의 '엑스트라'로만 남아 있다. 올해 독립운동 100년을 맞아 후학들이 재조명해야 할 산더미처럼 쌓인 인천의 인물 가운데 박남칠이 빠져선 안된다.박남칠은 1902년 5월 20일 인천 용동에서 미곡상을 하는 박삼홍과 허매란 사이에서 태어났다. 박남칠은 성장 과정에서 아버지 박삼홍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박삼홍은 1890년대 미곡상으로 부를 쌓았고, 한국인 최초의 목사인 김기범을 통해 기독교를 받아들였다.내리교회 교인이었던 박삼홍은 인천 소년운동의 효시이기도 한 '엡윗청년회'의 초기 멤버였다. 엡윗청년회는 1889년 미국 감리교 내 청년단체로 감리교 창시자인 요한 웨슬리의 고향 엡윗(Epworth)에서 이름을 따왔다. 엡윗청년회는 선교사들의 해외 파견지에도 조직됐는데 1897년 인천 내리교회에서 우리나라 최초의 엡윗청년회가 만들어졌고, 서울·강화 등지로 퍼져나갔다. 조봉암도 강화 잠두교회의 엡윗청년회 출신으로 훗날 박남칠과 인연을 맺는다.박삼홍은 내리교회 엡윗청년회 회장을 지내면서 계몽운동을 이끌었고, 이는 애국·민족 운동으로 확대됐다. 결국 1905년 11월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자 진남포 지방 총무였던 김구 등 전국 엡윗선교회 임원들이 구국기도회를 개최하고 상소운동을 벌인 일은 유명하다. 이 일로, 이듬해 6월 일본은 감리교 내 친일성향의 선교사를 회유해 엡윗선교회를 해산하도록 했다. 인천 내리교회 엡윗선교회도 창립 9년 만에 해체됐지만, 박삼홍은 1908년 재조직을 감행해 기독교 청년운동의 맥을 이었다. 기독교 신앙과 포교가 바탕이었지만, 문맹퇴치사업과 연극 공연, 강연회 개최 등으로 민족 의식을 배양하는 게 주된 임무였다. 육영사업에도 앞장서 내리교회가 세운 영화학교에 많은 돈을 기부했고, 다른 학교에서 체육행사가 열리면 기꺼이 후원금을 보탰다.박남칠은 이런 아버지 곁에서 소년운동과 청년운동의 중요성을 자연스럽게 배우면서 자랐다. 그는 1918년 인천공립보통학교(창영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 기독교청년회관에 있는 YMCA 중등부 과정에 진학했다. 이때 교장이 월남 이상재 선생이었다. 박남칠은 여기서 기독교 사회주의 사상에 눈을 뜨게 됐고, 세 살 위인 죽산 조봉암과 운명적인 만남을 갖게 됐다.소설가 이원규가 쓴 죽산 조봉암 평전에도 둘의 만남이 소설처럼 그려지고 있다."동급생 중에 그를 친형처럼 정겹게 따르는 청년이 있었다. 인천 출신의 박남칠이었다. 조봉암은 그가 신흥우 선생의 수업시간에 맨 앞에 앉아 기독교 사회주의에 대해 열심히 질문을 던지는 것을 보고 괜찮은 녀석이라고 여겨온 터였다."1920년 5월 죽산이 의친왕 망명을 시도한 대동단 사건에 휘말려 경찰에 끌려가 고문을 당하고 난 뒤 몸을 추스른 곳도 박남칠의 셋방이었다.박남칠은 공부를 마치고 인천으로 돌아와 아버지 밑에서 미곡상 경영을 도왔다. 미곡상에서 정미업으로 사업을 확장했다. 아버지는 사업이 번성할수록 상도덕을 지키라고 박남칠에게 늘 당부했다. 당시 곡식의 중량을 속여 파는 일이 잦았기 때문이다.기독교와 사회주의는 물과 기름처럼 섞이기 어려워 서로 반감을 갖고 있지만, 유독 인천은 사정이 달랐다. 1920년대 내리교회 담임 목사는 독립운동가 김진호 목사와 민족대표 33인 중 하나였던 신홍식 목사였다. 방법은 달랐으나 조국의 독립을 위한 목표는 같았던 이들은 서로의 존재를 인정하고 연대했다. 이런 분위기의 중심에 박남칠이 있었다. 내리교회 엡윗청년회는 일제의 압력 속에서도 꿋꿋이 활동을 이어갔다. 엡윗청년회 출신의 하상훈, 서병훈, 이범진, 이길용 등이 동아일보 인천지국을 이끌었고, 이들은 일장기 말소사건의 주역이 됐다. 야학과 웅변대회, 토론회를 열어 애국 계몽운동을 전개했고, 기독교의 구원은 개인이 아닌 사회를 의미한다고 설파하며 기독교를 식민지 민족의식 배양의 거름으로 삼았다. 사회참여를 고민하는 청년에게 기독교가 하나의 진입 경로 역할을 한 셈이다.서울 YMCA에서 조봉암과 연을 맺은 박남칠은 조봉암이 조직한 신흥청년동맹 전국 순회 시국강연의 인천 행사를 담당했다. 당시 조봉암은 공산당의 심장인 모스크바에서 활동하다 국내 사회주의 세력과의 결합을 도모하고 있었다.조봉암이 1924년 4월 19일 인천 산수정 공회당(지금의 송학동 인성여고 부근)에서 연 신흥청년동맹의 인천 강연은 성공적으로 끝났다. 당시 동아일보는 조봉암 일행의 인천 강연 예고 기사를 실으며 분위기를 띄웠다. 조봉암은 이 자리에서 "대중을 본위로 삼는 민중운동이 조선인의 유일한 살길이며 따라서 이러한 신사상을 널리 판매하겠다"고 해 호응을 얻었다.박남칠은 이날 조봉암에 김용구와 이보운, 이승엽, 유두희, 권평근 등 인천의 청년 지도자들을 소개했다. 장차 사회주의 운동을 이끌어갈 이들의 만남에 박남칠이 주선자로 나선 것이다.박남칠을 얘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게 내리교회 소년척후대 활동이다. 내리교회 엡윗청년단이 주도해 만든 단체로 오늘날의 보이스카우트와 비슷한 소년단체다. 신태범(1912~2001) 박사는 '인천 한세기'에서 "내리 소년척후대는 교회대였으므로 지도자도 넉넉했고 후속 대원도 꾸준해서 착실한 성장과 발전을 거듭했다. 여러 차례 큰비만 오면 침수 소동이 나는 화수동 일대의 구원활동을 했고, 어린이날 행사에 협조해 가면서 훈련을 게을리하지 않았다"고 설명했다.박남칠은 소년척후대 지도자로서 주말마다 정기집회를 갖고, 어린 대원들에게는 한국 역사를 가르치며 민족의식을 높였다. 평일에도 활발한 봉사활동을 펼치면서 생활 속 애국을 실천하도록 했다. 이런 왕성한 활동으로 많은 시민들의 지지를 얻자 일본 경찰은 소년척후대의 야영이나 집회를 감시할 정도였다. 전국 각지 소년척후대 출신들이 항일운동에 뛰어들었기 때문에 일제는 이를 불온 단체로 여겨 행사마다 입회했다고 한다.1940년대 들어 교회가 일제에 순응하고, 미곡상에 대한 일제의 감시가 심해지면서 박남칠도 고비를 맞게 된다. 그는 아버지의 가르침 아래 쌀 정량을 지키는 도덕적인 사업가로 알려져 신망이 두터운 터였다. 그는 정미소 이름도 '남이 잘 되는 것을 바란다'는 뜻의 '송무백열(松茂柏悅)'에서 따와 송무정미소로 지었다. 이는 소나무가 무성한 것을 보고 측백나무가 기뻐한다는 뜻인데, 손님이 잘 되는 것을 가게 주인이 기뻐한다는 의미로 읽을 수 있다.박남칠은 상공인들의 권익을 대변하기 위해 1935~1940년 인천상공회의소 평의원으로 참여하기도 했는데 훗날 일본의 어용단체에 참여했다는 부정적 인식이 꼬리표처럼 달렸다.그러나 1938년 9월 27일 동아일보 기사는 그를 "공익심이 많은 실업가로 일반의 신망이 두텁다. 사회적으로 많은 활동을 아끼지 않고 더욱이 육영사업과 소년지도에 부단히 노력하는 사회적 유지"라고 소개했다. 친일 부역자라면 얻기 힘든 평가이다.미곡상조합장을 맡기도 했던 박남칠은 이 무렵 감옥에서 출옥해 생계가 곤란했던 조봉암이 인천비강업조합장을 맡을 수 있도록 했다. 또 항일운동을 하다가 일본 경찰에 붙잡혀 전향을 하고 돌아온 인천 출신 사회주의 활동가 이승엽을 미곡상조합 사무장으로 취직시켰다. 이뿐 아니라 형편이 어려운 동지들이 경제적으로 자리를 잡을 수 있도록 하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식민지 수탈 시기 성공한 사업가로서 독립운동자들의 경제적인 버팀목이 되어준 셈이다.그는 해방 이후에도 사회주의 노선을 유지해 여운형이 주도한 '건국준비위원회'에 참여했다가 한국전쟁 발발 후 보도연맹 학살 사건 희생자가 됐다. 조국 해방으로 건국 준비에 여념이 없던 그가 좌우 이념 대립의 희생양이 된 거였다.2010년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는 한국전쟁 전후 인천에서 벌어진 민간인학살사건 피해자 62명 중 박남칠이 포함됐다고 밝혔다. 좌익 사상가를 공산당 부역자라는 이유로 무차별 학살한 사건에 희생된 것이다. 박남칠은 1950년 6월 30일 무렵 집에 숨어 있다가 발각돼 살해됐고, 소월미도에 수장됐다고 알려졌다. 과거사위는 "박남칠이 인천시청에서 열린 군중집회에 참석하지 않았지만, 당시 보도연맹원 단속을 피해 숨어 있다가 어린 조카가 경찰에게 뒷방에 있다는 사실을 알려줘 연행된 후 살해됐다"고 밝혔다. /김민재기자 kmj@kyeongin.com/아이클릭아트내리교회 소년척후대. 사진 가운데가 박남칠. /인천시 역사자료관내리교회 집총고적대. /인천시 역사자료관엡윗청년회 여자야학부. /인천시 역사자료관

2019-08-14 김민재

[독립운동과 인천·(22)]강화 출신 죽산 조봉암·(下)

'두차례 검토' 친일흔적 이유 보류근거로 삼았던 기사도 사실과 달라죽산 조봉암(1899~1959)은 독립운동가이자 해방 후 대한민국의 초석을 닦은 정치가이다. 제헌 국회의원과 초대 농림부 장관을 지내고, 제2대 국회의원과 국회 부의장을 거쳐 두 번의 대통령 선거에 나서기까지 그의 정치적 기반은 늘 인천이었다.인천시는 조봉암 60주기 다음날인 지난 1일 인천시청 본관에 독립운동 관련 죽산의 어록과 태극문양을 조합한 대형 현수막을 걸어 그를 기렸다. 문재인 대통령은 3년째 꼬박 죽산의 추도식에 화환을 보내고 있다. 1959년 국가로부터 '사법 살인'을 당한 조봉암이 2011년 대법원 재심을 통해 복권된 지 8년이 지났다. 하지만 국가가 죽산의 명예를 회복하는 최종적인 단계라 할 수 있는 서훈은 아직 소식이 없다.국가보훈처는 2011년과 2015년 각각 조봉암의 서훈을 검토했는데, 친일 흔적이 있다는 이유로 보류했다. 국가보훈처가 지난해 서훈을 재검토하기 위해 '조봉암 평전'을 쓴 이원규 작가를 찾아 증언을 수집하기도 했지만, 이후 검토작업이 지지부진한 상황이다.국가보훈처가 내세우는 죽산의 친일 흔적은 조선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보' 1941년 12월 23일자 신문에 실린 '국방성금 150원 헌납' 기사다. 이 기사에 나오는 조봉암의 주소가 틀렸다는 게 일본 공문서 등을 통해서 입증되고 있다. 현재 화폐가치로 환산하면 수천만원에 달하는 '국방성금 150원'을 당시 죽산이 낼 형편이 되지 않았다는 여러 사람의 증언도 있다.죽산이 1945년 1월 '예비구금령'으로 용산 헌병사령부에 체포됐다가 8월 15일 해방을 맞아 풀려난 그 날, 인천 도원동 자택 주변에는 1천여명의 환영 인파가 몰렸다. 인천사람들이 일제에 항거한 정치지도자로 가장 먼저 죽산을 떠올렸기 때문일 것이다.2011년 대법원 재심에서 간첩죄 무죄를 선고받기까지는 죽산의 서훈 문제는 공론화조차 할 수 없었다. 죽산 연구자들은 조봉암의 일제강점기 공산당 활동 경력이 복권된 이후에도 국가유공자 추서에 발목을 잡고 있는 게 아닌지 의심하고 있다. 죽산에게 사회주의는 항일운동을 위한 방편이었다. 이원규 작가는 "죽산의 서훈은 어쩌다 소외된 것이 아닌 국가가 회복해야 할 양심"이라며 "반드시 그의 업적에 걸맞은 훈격으로 추서해야 한다"고 말했다. /박경호기자 pkhh@kyeongin.com

2019-08-07 박경호

[독립운동과 인천·(22)]강화 출신 죽산 조봉암·(下)

1921년 일본 유학중 공산주의자 교류 '제국주의 반대' 독립운동 최선의 방편으로 선택조선공산당 창단 참여 코민테른 연락책 활동 中서 독립당 조직하다 체포 '6년 옥살이'인천 정착후 또 '구속' 감옥서 해방맞아… 전향 선포 제헌 국회의원·농림부 장관등 역임신뢰성 논란 '친일흔적' 보도에 서훈 보류 "불확실한 기사 1건보다 커다란 업적 주목을"죽산 조봉암(1899~1959)은 해방될 때까지 사회주의자로서 항일운동을 전개했다. 동지였던 박헌영(1900~1955 추정) 중심의 조선공산당과 갈라서면서 해방 이후 사상적 전향을 선포하고 정치가의 길로 나섰다. 죽산이 제헌 국회의원과 초대 농림부 장관을 지내면서 대한민국의 초석을 닦았다는 평가는 뚜렷하다. 그는 평화통일론의 선구자이기도 했다.조봉암은 1921년 7월 일본 유학을 떠나 김찬(1894~?)을 비롯한 공산주의자들과 교류했다. 조봉암은 이들과 엿장수를 하면서 어렵게 학비를 벌었고, 세이소쿠영어학교를 거쳐 주오대학 전문부 정치경제과에 입학했다. 이 시기 그는 사회주의 서적을 탐독하며 사상적으로 성장했다.1년 만에 유학생활을 정리하고 귀국한 조봉암은 본격적으로 사회주의운동에 나섰다. 사회주의자들 사이에서 논객으로 급부상하면서 1922년 11월 소련 베르흐네우딘스크에서 열린 한인 공산주의자 연합대회 국내대표로 참가했다. 그해 12월 공산주의 국제연합인 '코민테른'의 호출을 받아 조선인 공산당원 대표단으로 모스크바를 방문했다. 모스크바동방노력자공산대학에 입학해 공부하기도 했다.이후 조봉암은 김찬, 박헌영, 김단야(1901∼1938), 임원근(1900∼1963) 등 청년 사회주의자들과 함께 조선공산당 창당에 참여했다. 인천을 비롯해 전국을 순회하며 강연했고, 조선일보에서 기자생활도 했다. 1920년대 중반까지 조봉암은 중국 상하이와 러시아를 누비며 코민테른과 조선공산당 간 연락책으로 활동했다. 1920년대 후반부터는 상하이를 기반으로 한국유일독립당 조직운동에 뛰어들고, 현지 한인들의 사회주의계열 단체를 결성해 이끌었다.조봉암은 항일투쟁을 위한 최선의 방편으로 공산주의를 택했다. 당시 서구 주요 국가들이 일본의 조선 침탈을 묵인하는 국제 정세에서 조선인들의 정당 조직활동이나 빨치산(partisan) 투쟁에 금전적인 지원을 한 것은 국제공산당이 유일했다. 민족주의계열과 더불어 사회주의계열이 독립운동의 주요 흐름을 차지하게 된 원인이었다. 조봉암은 1957년 월간지 '희망' 2·3·5월호에 연재한 자서전 격인 '내가 걸어온 길'에서 일본 유학시절 사회주의에 심취하게 된 이유에 대해 이렇게 적었다."볼셰비키들은 국내에서 혁명을 성공했을 뿐만 아니라 모든 제국주의를 반대했고 특히 일본 제국주의의 한국침략을 반대하고 한국 독립을 적극적으로 원조한다는 것이며, 그 실증으로는 벌써 수십만 달러의 독립 원조자금을 상해 임시정부를 통해서 국내에 보냈다는 것이다. 우리 동지들은 그때야 비로소 소비에트 혁명의 내막을 약간 알게 되었고 따라서 우리나라가 일본과 싸워서 이기자면 우리 자신이 굳은 조직을 가져야 되겠고, 러시아와 협력하고 러시아의 지원을 받아야 되겠다고 작정했다."조봉암은 1932년 9월 중국 상하이 프랑스조계에서 체포돼 인천항을 통해 입국해 신의주경찰서로 압송됐다. 동아일보는 1932년 10월 1일자 신문에서 '제1차 공산당 간부 조봉암 작일 피체'라는 제목의 기사로 죽산의 체포 소식을 다루면서 "조봉암은 제1차 조선공산당 사건 때 외국으로 망명해 지금까지 있던 사람인데, 조선에 있을 때는 신흥청년동맹과 화요회 등에서 중요 간부로 활동하였다"고 설명했다. '내가 걸어온 길'에도 당시 상황이 언급됐다."벤치에 앉아서 담배를 피우고 있으려니까 나이 삼십 남짓해 보이는 중국복 입은 청년이 내 앞으로 다가서며 중국어로 담뱃불을 빌려달라고 하기에 나는 아무 말 없이 담뱃불을 내어 주었더니 그 자는 담뱃불을 붙이는 체하면서 내 손을 슬금슬금 훔쳐본다. 좀 기분이 나빴지만 그냥 무심히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그러자 난데없이 일본말로 '고꼬다요'(여기야)하는 소리가 들려서 정신이 번쩍 들어서 사면을 둘러보니 벌써 일본 놈 서넛이 내 앞에 서 있었고 전후좌우에 양복 입고, 사진기를 어깨에 둘러멘 놈들이 내 편을 향해서 모여들고 있지 않은가. (중략) 벌써 수십 명 왜놈 가운데 둘러싸여 있었고 불란서 형사 한 명이 내 손목을 잡고 있었다."치안유지법 위반 등 혐의로 기소된 조봉암은 1933년 12월 신의주지방법원으로부터 징역 7년을 선고받고, 신의주형무소에 수감됐다. 감옥에서 6년을 보내고 1939년 7월 출소했다. 일본 황태자 탄생에 따른 은사(恩赦)조치로 1년이 감형됐다.조봉암은 출소 이후 인천에 정착했다. 강화 출신 김이옥(1905~1933) 여사와 상하이에서 함께 살 때 낳은 어린 딸이 인천에 있는 먼 친척에게 맡겨져 있었다. 앞서 김이옥 모녀는 1933년 5월 귀국해 강화 친정에서 지냈는데, 그해 10월 김이옥은 지병이 악화해 세상을 떴다. 당시 인천 금곡동과 창영동 쪽에는 창녕 조씨 집안이 많이 살았다고 한다. 또 조봉암이 서울에서 YMCA 중학부에 다닐 때 그를 따랐던 박남칠(1902~1950)이 인천 미곡상조합 조합장으로 지역 상공업계의 거물로 성장해 있었다. 미곡상과 객주업을 한 김용규 등 '강화구락부' 출신 지역 유지들도 조봉암에게 우호적이었다. 이들은 인천상공회의소 간부이자 지역 시민운동을 주도하는 인물들이었다.죽산의 후원자들은 인천 소화정(부평구 부평동)에 집을 얻어줬고, 생계를 꾸릴 수 있도록 인천비강업조합을 설립해 넘겨줬다. 비강업은 정미소에서 벼를 찧을 때 나오는 왕겨를 모아 사료나 연료로 공급하는 업종이다. 사무실은 현재의 신포시장 건어물거리 쪽에 있었는데, 인천경찰서 고등계 형사가 상주하다시피 조봉암을 감시했다고 한다. 당시에도 일본은 조봉암에게 전향하라고 끊임없이 회유하고 있었다. 1942년에는 현 중구 도원동에 있는 부영(府營)주택으로 이사했다. 인천부(仁川府)가 1940년 직접 지어 분양한 도원동 부영주택은 지금까지도 일부가 남아있다.일제의 감시가 심했던 인천 시절 죽산은 박남칠, 김용규, 유두희(1901~1945), 권평근(1900~1945), 이승엽(1905~1953) 등 좌익계열 인사들의 사상적인 지주로서 합법적인 사회운동에 집중했던 것으로 보인다. 죽산은 1945년 1월 '사상범 예비구금령'으로 구속돼 또다시 용산 헌병사령부에 갇혔다. '외국과 통신했다'는 이유였다. 그해 8월 15일 죽산은 헌병사령부 감옥에서 해방을 맞이했다.국가보훈처는 조봉암이 해방 전 인천에 살던 시기에 친일의 흔적이 있다며 죽산에 대한 서훈을 보류하고 있다. 논란이 되고 있는 친일의 흔적이란 조선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에 실린 1940년 신년광고 1건과 1941년 연말의 기사 1건이다. 매일신보 1940년 1월 5일자 신문에는 '흥아신춘'(興亞新春)이라는 신년광고에 '인천부 본정 내외미곡직수입 성관사 조봉암 방원영'이라는 문구가 실렸다. 매일신보 1941년 12월 23일자 기사에서는 '인천부 서경정에 사는 조봉암씨는 해군부대의 혁혁한 전과를 듣고 감격하여 지난 20일 휼병금으로 금150원을 인천서를 통하여 수속하였고'라는 내용을 보도했다.하지만 '조봉암 평전'을 쓴 이원규 작가는 해당 광고와 기사를 신뢰하기 어렵다고 분석했다. 1933~1934년 인천상공회의소 편람에는 매일신보 신년광고에 등장한 '성관사'라는 업체가 없고, 동업자로 이름을 올린 방원영에 대한 기록도 찾을 수 없다. 죽산의 서훈과 관련한 결정적인 논란은 국방헌금 150원이다. 우선 조봉암은 서경정(현 중구 내동)에 산 적이 없고, 기사가 보도될 당시에는 부평에 살고 있었다. 이원규 작가는 일본자료 등을 바탕으로 당시 150원을 지금 돈으로 환산하면 3천만~4천만원의 가치였을 것으로 보고 있다. 조봉암이 비강업조합을 맡고 있었지만, 국방헌금을 150원이나 낼 형편은 되지 않았다. 숭의동에 살았던 조봉암의 처남 김영순씨는 이원규 작가와의 인터뷰에서 "150원은 커녕 10원도 내기 어려운 형편"이었다고 회고했다. 죽산이 1952년 7월께 그의 죽마고우이자 독립유공자이기도 한 조광원(1897~1972) 신부를 만난 자리에서도 "비강업조합장 자리가 감옥살이보다 힘들었다"며 "걸핏하면 헌금 내라고 시달렸는데, 주변에서 알아서 해줬다"고 말했다는 증언도 있다.무엇보다도 죽산이 친일을 했다면 1945년 1월 예비구금령으로 체포돼 8월 15일까지 갇혀 있을 이유가 없었다는 게 연구자들 시각이다. 죽산이 헌병사령부로 끌려갈 때 부인 김조이(1904~ ?) 여사는 "전쟁에 불리해지니까 말 안 듣는 사람들을 끌어다 죽이려는 것"이라고 말했다고 처남 김영순씨가 증언했다. 죽산이 풀려난 8월 15일 도원동 부영주택으로 올라가는 언덕이 1천명 이상의 환영 인파로 덮였다고 한다. 조봉암이 친일이었다면 환영이 아닌 민중의 지탄을 받았을 것이다. 죽산은 자신의 집을 찾아온 청년들을 주축으로 인천보안대를 결성하고, 여운형과 함께 건국준비위원회 인천지부를 조직했다.더군다나 해방 이후 박헌영 등이 조봉암을 축출하려고 맹공을 퍼부을 때도 매일신보의 국방헌금 기사는 언급조차 하지 않았다. 이원규 작가는 "죽산이 국방헌금을 냈다면 일본의 선전 도구가 되어 신문에 크게 실리고 강연회에 불려다녔을 것"이라며 "불확실성이 가득한 1건의 기사 내용보다는 죽산이 남긴 커다란 업적에 더 주목해야 한다"고 말했다. /박경호기자 pkhh@kyeongin.com2017년 7월 31일 서울 망우리공원 죽산 묘역에서 열린 조봉암의 58주기 추도식장에 처음으로 '대통령 화환'이 왔다. 이후 문재인 대통령은 올해 60주기 추도식까지 3년째 화환을 보내고 있다.중국 상하이에서 사회주의 운동을 펼치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된 조봉암을 다룬 동아일보 1933년 2월 25일자 신문기사. 기사 속 사진은 조사를 받을 당시 조봉암. 출처/네이버 뉴스라이브러리죽산 조봉암 선생의 생전 법정에서의 모습. 이른바 '진보당 사건'으로 이승만 정권으로부터 '사법 살인'을 당한 죽산에 대해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2011년 재심에서 무죄를 선고했다. /경인일보DB조선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보' 1941년 12월 23일자 신문에는 조봉암이 국방성금 150원을 냈다는 기사가 실렸다. 친일 흔적으로 보기엔 신뢰성이 떨어진다는 게 연구자들 시각이다. 출처/국립중앙도서관조봉암 가족이 1942년부터 해방 이후인 1948년까지 살았던 인천 중구 도원동 부영주택. 현재 대부분 헐리고 일부만 남았다. /경인일보DB

2019-08-07 박경호

[독립운동과 인천·(22)]강화 출신 죽산 조봉암·(上)

박남춘 시장·송영길 의원 등 추모식 참석… "서훈 문제 조속히 해결"독립운동가이자 한국 정치계의 거목, 죽산 조봉암(1899~1959) 선생의 60주기 추모식이 31일 오전 11시 서울 중랑구 망우리 공원묘역에서 죽산조봉암선생기념사업회와 죽산조봉암선생유족회 주최로 엄수됐다. 이날 추모식에 참석한 주요 정치권 인사들은 하루빨리 죽산 조봉암 선생의 서훈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목소리를 높였다.이날 죽산의 60주기 추모식에는 어김없이 인천사람들이 대거 참석했다. 추모식에는 곽정근 죽산조봉암선생기념사업회 회장과 유족, 박남춘 인천시장, 송영길·박찬대 국회의원, 지용택 새얼문화재단 이사장, 차준택 부평구청장, 김교흥 전 국회 사무총장, 홍미영 전 부평구청장, 이부영 몽양여운형선생기념사업회 회장, 조성혜·조선희 인천시의원, 조동암 전 인천시 정무부시장, 이영재 경인일보 인천본사 사장 등이 참석했다.문재인 대통령은 3년째 추모식에 화환을 보내 죽산의 뜻을 기렸다. 문희상 20대 국회 후반기 의장, 정세균 20대 국회 전반기 의장, 더불어민주당 이해찬 대표, 바른미래당 손학규 대표, 민주평화당 정동영 대표, 정의당 심상정 대표, 윤관석 더불어민주당 인천시당위원장, 이정미 국회의원 등 정치권 인사들이 보낸 화환도 묘소 주변을 빼곡하게 둘렀다.인천시는 올해부터 죽산의 추모식 행사비용 후원을 재개했다. 그동안에는 새얼문화재단이 행사비용을 보태왔다. 인천시는 추모식에 앞서 죽산 묘역을 재정비하고 주변 경관을 개선했다. 새얼문화재단을 중심으로 조봉암 선생 석상 건립사업도 본격화할 예정이다. 박남춘 인천시장은 이날 추도사에서 "무엇보다 선생의 독립유공훈장 추서가 빠른 시일 내에 이뤄질 수 있도록 관련 기관, 단체와 함께 노력하겠다"며 "선생의 명예를 회복하고, 후손들에게 올바른 역사를 알릴 수 있도록 각별히 신경쓰겠다"고 말했다. 송영길 의원도 "주최 측이 매번 추도사를 요청하는 것은 죽산 선생의 서훈 문제를 빨리 해결하라는 요청이라고 이해하고 있다"며 조봉암 선생의 독립유공자 추서에 적극적으로 나서겠다고 강조했다. /박경호기자 pkhh@kyeongin.com한국 정치의 거목 죽산 조봉암 선생의 60주기 추모식이 열린 31일 오전 서울시 중랑구 망우리 공원묘역에서 박남춘 인천시장과 더불어민주당 송영길 국회의원이 헌화를 하고 있다. /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

2019-07-31 박경호

[독립운동과 인천·(22)]강화 출신 죽산 조봉암·(上)

10살부터 잠두교회 다니며 계몽운동 접해… 대서소 보조원으로 일하던 1919년 3월'의병활약' 유봉진등 기독교인들 주도 강화 읍내서 펼쳐진 1만여명 '만세운동' 동참시위 공모·소식지 배포로 체포 6개월뒤 무죄로 풀려나… 옥고때 '민족의식' 강해져자서전격 연재 글 "감옥에서 비로소 많은 것을 배웠고 애국심 불타게 됐다" 밝혀1919년 3월 인천 강화에서도 "대한 독립 만세"를 외치는 민중의 목소리가 섬을 가득 메웠다. 강화 읍내에서만 하루 동안 1만여명이 모인 강화 만세운동은 전국적으로 따져도 대규모 시위였다. 강화에서 나고 자란 죽산 조봉암(1899~1959)도 만세시위에 동참했다. 당시 평범한 대서소(代書所) 보조원이었던 21세 청년 조봉암은 강화 만세운동으로 인해 투옥돼 고초를 겪었다. 청년 시절 강화에서의 경험이 죽산을 독립운동가의 길로 이끌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올해는 조봉암이 강화에서 태어난 지 120년이 되는 해다. 꼭 60년 전인 1959년 7월 31일 이승만 정권으로부터 '사법 살인'을 당한 조봉암은 2011년 복권될 때까지 50년 넘게 출생지조차 잊혀 있었다. 현재까지도 그의 출생지는 확정적으로 밝혀지지 않았다. 2013년 '조봉암 평전'을 쓴 이원규 작가는 죽산의 출생지로 창녕 조씨 집성촌이었던 강화군 선원면 금월리 남산대 또는 금월리 가지마을 촌락이 가장 신뢰할 만한 추정이라고 했다.조봉암이 9살 되던 해인 1907년 8월 강화에서는 대한제국 군대 해산에 반발한 강화진위대 군인들을 중심으로 일본군에 맞서는 의병이 봉기했다. 죽산이 강화 의병운동을 언급한 기록은 없지만, 잠시나마 강화성까지 점령했던 의병의 인상이 어린 시절 강하게 남았을 수밖에 없다. 4년제 강화공립보통학교와 2년제 농업보습학교를 마친 조봉암은 강화군청에서 허드렛일이나 심부름을 하는 사환으로 일하기 시작했다. 집안 형편이 어려워 학업을 이어가지 못했다고 한다. 1916년 18세에 강화군청 보조직원인 고원(雇員)이 되어 토지조사사업 통계작업에 투입되기도 했다. 당시 조봉암은 주산(珠算)이 빠르기로 유명했다.10살부터 다닌 신문리 잠두교회(현 강화중앙교회)는 조봉암의 일생에서 첫 전환점을 가져왔다고 할 수 있다. 강화진위대장 출신 이동휘(1873~1935)는 1905년 진위대장 사직 후 잠두교회 교인이 되면서 강화도에 보창학교를 설립하는 등 종교를 통한 애국계몽운동을 펼쳤다. 이러한 분위기 속 잠두교회 신도들은 민족의식이 투철했다. 조봉암은 군청 일을 그만두고 잠두교회 엡윗청년회(감리교 청년봉사단체) 일을 열심히 도왔다. 조봉암의 장녀 조호정(91) 여사를 낳은 김이옥(1905~1933)도 잠두교회를 같이 다니며 인연을 맺었다.1918년 봄, 조봉암은 관청리 대서소 보조업자로 취직했다. 1년 후인 1919년 3월 1일 서울 탑골공원에서 발발한 만세운동이 전국으로 확산하기 시작했다. 강화 만세운동은 기독교인들이 주도했다. 그 중심에는 길직교회 권사 유봉진(1886~1956)이 있었다. 그는 15세부터 18세까지 강화진위대에서 군인으로 근무했다고 한다. 군대 해산 당시에는 의병운동에 참여해 갑곶에서 일본군과 전투를 벌였다.연희전문학교 2학년에 재학 중이던 강화 출신 황도문(1897~1950)은 3·1운동에 참여한 직후인 3월 5일 귀향해 유봉진에게 서울의 시위소식과 함께 독립선언서를 전달했다. 유봉진은 황도문, 염성오(1877~1947), 유희철(1893~1942) 등과 시위계획을 논의했다. 독립유공자공훈록을 보면, 3월 9일 길직리 교회당에서 길직교회와 잠두교회 지도자급 인사들이 회합했고, 이 자리에서 조종환(1890~1937)은 서울의 만세시위 상황을 연설하며 "강화도에서만 있을 것이 아니다"라고 주민들에게 시위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이들은 3월 18일 강화 읍내 장날을 거사일로 정하고 독립선언서와 '강화군민에게'라는 문서를 곳곳에 배포했다.3월 18일 오후 2시께 강화 읍내 장터에서 유봉진을 비롯한 만세시위 기획자들이 태극기를 흔들며 "조선 독립 만세"를 외치기 시작했다. 이들은 주민들에게 태극기를 나눠줬고, 만세시위에 합세한 군중이 순식간에 불어나 장터를 순찰 중이던 순사조차 막지 못했다. 유봉진은 '결사대장'이라고 쓴 태극기를 어깨에 두르고, 길상면 온수리에서 백마를 타고 읍내 장터에 나타났다고 한다. 그는 장터에 있는 종루에 올라 종을 치며 시위대의 용기를 북돋웠다. 강화경찰서는 순사보 8명을 파견했으나, 만세시위를 진압하지 못했다. 오히려 군중은 순사들에게 "같이 독립 만세를 부르자"고 요구했다. 유봉진은 강화군수 이봉종에게 독립 만세를 부르라고 종용했고, 강화군수도 결국 만세를 외쳤다고 한다. 이날 강화 주민들은 밤 11시가 돼서야 해산했다. 국사편찬위원회의 '삼일운동 데이터베이스'에 따르면, 이날 강화 만세시위에 참여한 주민은 1만명에서 시작해 최대 2만명에 달했다는 일본 군경 보고자료들이 있다.이후에도 강화 만세운동은 부내면 월곶리, 송해면, 양사면, 선원면, 삼산면 등 강화도 본도뿐 아니라 교동도, 석모도 등지로 들불처럼 번지며 한 달 가까이 이어졌다. 특히 1919년 4월 7일 석모도 만세운동은 러시아에서 독립운동을 하다가 적발돼 석모도로 유배된 이민 2세대 이안득(1900~?)이 주도했다는 점이 눈길을 끈다.유봉진은 만세시위 직후 고려산에 숨어있다가 북도면 장봉도를 거쳐 마니산에 은신했는데, 일본 경찰이 부모를 핍박하자 온수리로 내려와 체포됐다. 그는 1920년 3월 경성복심법원에서 소위 소요 및 출판법·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1년 6개월을 선고받았다. 강화 만세시위로 체포돼 재판에 넘겨진 사람은 45명이다. 이 가운데 38명이 정부로부터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았다.조봉암은 1957년 월간지 '희망' 2·3·5월호에 연재한 자서전 격인 '내가 걸어온 길'에서 유봉진의 '애기패'를 자처하며 존경심을 드러냈다. 다음은 조봉암이 유봉진에 관해 쓴 '내가 걸어온 길'의 일부 내용이다."우리 강화에서의 만세운동은 유봉진씨의 영도 하에 치밀한 계획으로 방방곡곡 어느 작은 부락 하나도 빼지 않고 일어났었고 그것이 한 달 동안이나 계속됐었다. 그런데 유 선생의 지도방침은 철저한 평화적 시위였기 때문에 수천 명이 태형을 당했을 뿐, 감옥살이를 한 사람은 비교적 많지 않았었다. 유 선생은 마니산 꼭대기에 숨어서 만세운동을 지휘했고, 왜놈에게 체포되어서도 '독립운동자 유봉진'이라고 종이에 크게 써서 가슴에 붙여주지 아니하면 말 한마디 대꾸도 안 했다. 유 선생은 5년 징역살이를 했고 우리 애기패들은 1년 살았다."강화 만세운동 전후로 조봉암은 보통학교 동창인 조구원(1897~1928), 고제몽, 오영섭, 구연준, 김한영, 김영희, 주창일 등 청년층 지도자들과 비밀결사를 조직해 지하활동을 펼치다가 경찰에 체포됐다. 기독교계에서는 이를 '예수교도 8인조 사건'이라 부른다. 당시 기독교학교 교사이던 조구원이 주도한 것으로 알려졌다.이 사건의 1919년 9월 경성지방법원 판결문을 보면, 조봉암과 동지 7명은 보안법과 출판법 위반 혐의로 기소됐다. 조구원은 1919년 3월 20일 강화경찰서 경부(경감) 이해용 앞으로 "조선독립운동에 찬동하는 운동자를 검거하지 말라. 만약 이에 응하지 않을 때는 목을 베어 죽이거나 방화할 것이다"라고 적은 문서를 보낸 혐의를 받았다. 고제몽은 잡화상 유진식에게 "조선독립운동에 동참하고, 그 기운을 왕성하게 하기 위해 점포를 폐쇄하라"는 문서를 보냈고, 오영섭은 강화경찰서의 일본인 순사부장(紀喜義安)에게 "조선독립운동자를 검거할 때는 각오해야 할 것"이라는 문서를 보내 경고했다. 조구원과 고제몽은 태형 90대, 오영섭은 태형 60대를 선고받았다. 조봉암을 비롯한 나머지 5명은 3월 20일께 조선독립운동을 공모한 후 전국 3·1운동 소식지인 '자유민보' 등 십수 종의 불온문서를 작성해 강화 읍내에 배포한 혐의로 기소됐는데, 혐의를 입증할 증거가 충분하지 않다는 이유로 무죄를 선고받았다. 강화 청년들이 섬 곳곳으로 퍼뜨린 독립선언서와 자유민보 등은 만세시위의 불씨를 살리는 데에 일조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사건으로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은 사람은 비밀결사 8명 가운데 조구원이 유일하다. 1919년 4월 중순에 구속된 조봉암은 9월 30일까지 6개월 가까이 서울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조봉암은 서대문형무소에서 시시때때로 고문을 당했지만, 민족의식은 더욱 강해졌다. 그는 '내가 걸어온 길'에서 "옥중에서는 가끔 만세소동이 있었다"며 "나도 그 사건에 가끔 걸려들어서 매여달리기도 하고 두들겨 맞기도 했었다. 하루는 또, 고함을 치고 만세를 부르고 문짝을 발길로 차고 날뛰다가 또 붙잡혀 나갔다. 나는 붙잡혀 나가면서도 기를 쓰고 만세를 불렀다"고 회상했다.또 죽산은 "진심으로 말하면, 3·1운동이 터지고 내가 잡혀서 감옥으로 갈 때까지는 국가와 민족이 어떻다는 데 대해서는 아무 생각도 없었고, 단순히 일본 놈이 우리 조선사람을 천대하고 멸시하는 데 대한 불만과 불평이 있었던 청년일 따름이었다"며 "그러나 감옥에 들어가서부터 비로소 많은 것을 배웠고 많은 것을 알았다. 세상에 대한 눈이 떠졌고 애국심이 불타게 됐다. 나를 붙잡아서 감옥으로 보내준 일본 놈은 나로 하여금 일생을 통해서 일본제국주의와 싸운 애국투사가 되게 한 공로자였다"고 '내가 걸어온 길'에 썼다. 강화 만세운동의 경험이 청년 조봉암을 죽산 조봉암으로 진보하게 만든 셈이다.조봉암은 출옥한 직후인 1920년 1월, 22세의 나이로 경성 YMCA 중학부에 입학했다. 같은 해 5월 의친왕 망명을 추진한 '대동단사건'으로 평양경찰서로 연행돼 2주일 동안 조사를 받았다. 이듬해 7월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 그곳에서 사회주의와 아나키즘(무정부주의) 이론을 접했다. 이후 조봉암은 해방이 될 때까지 사회주의자로서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박경호기자 pkhh@kyeongin.com 그래픽/성옥희기자 okie@kyeongin.com/아이클릭아트청년 시절 죽산 조봉암 모습. /죽산조봉암선생기념사업회 제공유봉진의 생전 모습. 유족은 1950년대에 촬영한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경인일보DB조봉암이 보안법, 출판법 위반 혐의로 구속됐다가 무죄를 선고받은 1919년 9월 30일 경성지방법원 판결문. /국가기록원 제공인천 강화군 강화읍 용흥공원 내에 있는 강화 3·1독립운동 기념비. /강화군 제공

2019-07-31 박경호

[독립운동과 인천·(21)]김세원·윤원 형제

1902~1905년 사이 떠난 8500여명중멕시코서 조국 되찾기 앞장서 의미인천은 우리나라에서 공식 이민이 시작된 지역이다.1902년부터 1905년까지 65차례에 걸쳐 8천500여명의 한국인이 인천항에서 배를 타고 해외로 이주했다.65차례 이민 가운데 딱 한 번 멕시코로 이민을 간 사람들이 있다. 첫 멕시코 이민자 1천33명은 1905년 4월4일 멕시코로 가는 배에 몸을 싣고 인천항을 떠났다. 이들 중에는 인천 강화 출신 김세원(1870~?)·윤원(1877~1920) 형제가 있었다.하지만 이들의 이민은 사실상 사기계약이었다. 멕시코 농장주들은 약속했던 임대주택과 임금을 주지 않았고, 한국인들은 새벽 4시부터 어두울 때까지 쏟아지는 땡볕아래서 에네켄 잎을 자르고 섬유질을 벗겨냈다. 하루 일감을 마무리하지 않으면 채찍질도 가해졌다.계약 만료로 노예와 같은 생활이 끝난 1909년 이들은 조국으로 돌아가고 싶었지만, 당시 대한제국은 일본의 손아귀에 있었다. 이들은 돌아갈 나라를 되찾기 위해 해외 이주 한인 독립운동단체인 '대한인국민회'에 가입했다. 독립 자금을 모으고 학교를 세웠다. 김세원·윤원 형제도 대한인국민회 임원으로 활동하며 한인사회를 이끌어 나갔다. 이들의 독립운동은 1920년대 쿠바로 이주한 이후에도 계속됐다.이들의 독립운동 행적에 대해선 추가적인 연구가 절실한 상황이다. 대한인국민회가 발행한 '신한민보'를 통해 단편적인 사실만 전달될 뿐이다. 멕시코로 떠난 서울·경기지역 201명의 행방이 묘연하다. 이들 중 인천지역 독립운동가가 더 있을 것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설명이다.한국이민사박물관 신은미 관장은 "멕시코·쿠바 등 중남미 지역 독립운동 특별전시회를 열기 위해 사료 발굴을 진행하고 있으나, 많이 부족한 실정"이라며 "체계적인 연구가 추가로 이뤄져야 한다"고 말했다. /김주엽기자 kjy86@kyeongin.com

2019-07-24 김주엽

[독립운동과 인천·(21)]김세원·윤원 형제

일제 침략 가속화에 한국인 노동자들 '해외로' 강화 출신 형제도 1905년 멕시코行고임금 커녕 처참한 노예생활… 고생끝 '자유몸'불구 나라 뺏겨 돌아갈 곳 없어져 김윤원 '대한인국민회 메리다지방회' 초대 총무 활동 독립자금 모금·한글학교 세워형 세원 1921년 쿠바로 이주 임시정부 지원 이어가… 정부 공로 인정 표창등 수여 일본의 침략이 가속화되던 1900년대 초반. 한국인들은 먹고 살길을 찾기 위해 미국 하와이와 멕시코 등으로 떠났다. 1902년 12월 22일 한국인 노동자를 실은 배가 인천 제물포항을 떠난 이후 3년여 동안 65차례에 걸쳐 8천500여명에 달하는 한국인이 미국 하와이와 멕시코 등지로 이주했다.낯선 땅에 터를 잡은 이들은 하루종일 고된 노동에 시달려야만 했다. 힘든 시간을 보내면서도 나라를 생각하는 마음을 잃지 않았다. 이들은 나라의 독립을 위한 자금을 보내고, 후손들이 나라를 잊지 않도록 교육에도 힘썼다.초기 해외 이주민 대부분이 하와이로 향했기 때문에 멕시코 이민자들의 독립운동사는 그리 주목받지 못했다. 그러나 멕시코 이민자들도 하와이 이민자 못지않게 활발한 독립운동을 전개했다.인천 강화 출신인 김세원(1870~?)·윤원(1877~1920) 형제가 바로 멕시코 이민자 독립운동의 중심에 서 있었다.그러나 이들의 고향인 인천에서 김세원·윤원 형제는 사실상 잊힌 존재다. 인천의 독립운동가로서 이들의 생애와 독립운동 궤적에 대한 깊이 있는 연구가 요구되고 있다.'북미 멕시코국은 미합중국과 이웃한 문명 부강국이니 수토(水土)가 아주 좋고 기후도 따뜻하며 나쁜 병질이 없다는 것은 세계가 다 아는 바다. 그 나라에는 부자가 많고 가난한 사람이 적어 노동자를 구하기 극히 어려워 근년에 일(日)·청(靑) 양국인이 단신 혹은 가족과 함께 건너가 이득을 본 자가 많으니 한국인도 그곳에 가면 반드시 큰 이득을 볼 것이다. 한국과 멕시코는 통상조약을 체결하지 않았으나 최혜국으로 대우할 것이다.'1904년 12월 24일 황성신문에 게재된 광고 내용이다. 당시 광고를 실은 회사는 일본에 본사를 둔 대륙식민회사 한국지부다. 영국계 멕시코인 존 마이어스(John G. Mayers)는 '에네켄(henequen)' 농장이 노동자를 구하지 못해 어려움을 겪자 조선인의 멕시코 이민을 추진했다. 에네켄은 밀가루 포대를 묶는 끈과 선박용 밧줄의 재료로 사용됐다. 19세기 말부터 에네켄에 대한 수요가 급증했지만, 당시 멕시코 노동 계층이었던 마야인의 생산성으로는 소비자들의 요구를 맞추기 어려웠다. 이에 에네켄 농장주들은 조선인을 노동자로 채용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대륙식민회사는 손쉽게 목표 인원을 모을 수 있었다. 당시 대륙식민회사는 노동자들에게 하루에 최대 3원을 지급한다고 광고했다. 당시 한국인 근로자 하루 임금이 85전임을 고려하면 3배가 넘는 금액인 셈이다. 이들은 대륙식민회사에 한 가족당 4파운드(독신자 1파운드)를 내고 멕시코행 배에 올랐다. 당시의 금 30g의 가격은 4파운드였는데, 한국인 노동자들은 현재 1천126파운드(약 165만원)에 달하는 거금을 지불하고 멕시코로 이주했다.1905년 4월 4일 영국 선적의 '샌 일포드(S.S.Ilford)'호는 인천항을 떠나 멕시코로 출발했다. 당시 인천주재 일본영사였던 가토 모토시가 일본 외무성에 보낸 보고서에 따르면 이 배에는 1천33명의 조선인이 타고 있었다. 이 중에는 김세원·윤원 형제도 있었다.이들은 일본 요코하마를 거친 38일간의 항해 끝에 멕시코 남부 살리나크루즈 항구에 도착했다. 이곳에서 하루를 머문 그들은 멕시코 유카탄주로 기차를 타고 이동해 그곳에서 에네켄 농장에 보내졌다. 1906년에 멕시코 유카탄주 대농장의 주인이었던 라파엘 페온이 유카탄주 지사에 보낸 보고서를 보면, 당시 유카탄주의 16개 구역 가운데 14개 구역에는 모두 32개의 농장이 분포했다.멕시코에서의 생활은 이들이 꿈꾸던 것과 달랐다. 사실상 노예 신분으로 멕시코로 이주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멕시코 에네켄 농장은 채무노예제도 형태로 운영됐다. 형식적으로는 자유고용계약이지만, 실제로 대농장주에게 채무가 있는 노예 형태로 일하게 되는 것이다. 이에 따라 채무를 다 갚기 전에는 거주 이전에 자유가 없고, 농장주 간 매매도 이뤄졌다. 참고 견디며 일했지만, 임금을 주지 않는 것은 물론 임대주택과 식량도 직접 돈을 주고 구매해야 했다. 대부분 노동자는 일할수록 빚만 늘어나는 나락에 빠졌다. 황성신문은 1905년 7월 29일 자 사설을 통해 당시 한인들의 처참한 생활상을 다음과 같이 소개했다."멕시코 원주민인 마야족의 노예 등급은 5∼6등급, 한인 노예는 7등급으로 가장 낮은 값이다. 조각난 떨어진 옷을 걸치고 다 떨어진 짚신을 신었다. 아이를 팔에 안고 등에 업고 길가를 배회하는 한국 여인들의 처량한 모습은 가축같이 보이는데 눈물 없이는 볼 수 없는 실정이다. 농장에서 일을 제대로 하지 못하면 무릎을 꿇리고 구타해서 살가죽이 벗겨지고 피가 낭자한 농노들의 그 비참한 모습을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도다. 통탄, 통탄이라."이 신문은 7등급 노예로 전락한 한인들의 참상을 보도하고, 이틀 후 고종의 이민정책을 비판하는 사설도 게재했다. 당시 고종은 눈물을 흘리며 송환 계획을 세웠지만, 일본의 방해 때문에 수포로 돌아갔다고 한다. 이 기사로 더는 멕시코에 노동자를 보내지 않았고, 110년 전 사기극은 그렇게 단 한 차례로 막을 내렸다. 4년의 계약 기간이 끝나고 자유의 몸이 됐지만, 이들은 돌아갈 곳이 없었다. 1905년 8월 을사늑약으로 대한제국이 외교권을 빼앗기면서 나라가 사라졌기 때문이다. 이민자들은 가족이 있는 자신의 조국으로 돌아가기 위해 독립운동을 시작했다. 1909년 8월 멕시코 이주민들은 당시 한인들의 중심지였던 유카탄주 메리다시에서 '대한인국민회 메리다지방회'를 설립한다.대한인국민회는 헤이그 특사였던 이상설이 미국에 사는 한인 동포단체의 통합을 요청하면서 만들어진 '협성협회'를 기반으로 하고 있다. 멕시코 이민자들 가운데 김윤원 등 일부는 4년의 계약 기간이 끝나기 전 남은 채무를 모두 지급해 풀려났다. 이들은 미국 샌프란시스코에 있던 대한인국민회 총회와 교류하면서 메리다지방회 창립을 준비했고, 모든 이민자의 계약이 끝나자 메리다지방회를 만들었다. 당시 대한인국민회가 발행하던 신한민보에서는 초기 회원은 314명이었다고 한다.김윤원은 메리다지방회의 초대 총무·재무로 선출되면서 독립을 위한 활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한다. 1917년 메리다지방회는 미주지역 독립운동의 대부인 안창호가 멕시코를 방문하자 미화 2만4천달러를 모금해 전달했다.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김도형 책임연구위원은 "1910년 멕시코 혁명이 일어나면서 당시 (멕시코) 국내 정세는 매우 혼란스러웠다. 이에 따라 한국인 노동자들은 일자리를 잃는 등 경제적으로 매우 어려운 상황에 부닥쳤음에도 나라의 독립을 위한 자금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고 설명했다.멕시코 이주민들은 자신의 고생을 대물림하지 않겠다는 마음으로 후손에게 모국어와 스페인어를 가르치고, 독립정신과 정체성을 확립하기 위해 한글학교를 세웠다. 멕시코 오학기나로 이주한 김윤원은 현지 한국인들과 함께 '일신학교(日新學敎)'를 설립한다. 일신학교는 70~80명의 아이들이 공부하는 소학교와 20명의 청년이 배우는 야학교로 구성됐다.한인 지역 사회에서 활발하게 활동하던 김윤원은 1920년 맹장염으로 숨을 거둔다. 그가 타계하자 신한민보에서는 그의 유족을 돕기 위한 모금 운동을 벌였다. 김윤원이 멕시코 한인사회에 끼친 영향이 크다는 것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김윤원의 형인 김세원은 1921년 경제적 어려움을 해결하고자 쿠바로 이주했다. 1차 세계대전이 끝나면서 설탕값이 폭등하게 되고, 사탕수수 재배가 기간 산업이었던 쿠바 노동자들의 임금도 상승했기 때문이다. 그와 함께 쿠바로 넘어간 멕시코 이민자는 300여명에 달한다. 그는 1923년 쿠바 카르데나스 지방에서 강흥식, 허영보 등과 함께 대한인국민회 카르데나스 지방회를 설립한다.쿠바에는 모두 3개의 대한인국민회가 조직돼 중국 상하이(上海)에 있는 임시정부에 독립자금을 보냈다. 쿠바 이민자 임천택이 1954년 발간한 '쿠바이민사'에 따르면 이들이 1938년부터 1945년까지 8년 동안 임시정부에 보낸 성금은 1천489원 70전에 달한다. 1930년대 쌀 1㎏ 가격이 25전임을 고려하면 큰 금액은 아니었지만, 임금 노동자가 대부분이었던 이민자들은 모든 것을 아껴가면서 조선의 독립을 위한 자금을 보낸 것이다. 임시정부 주석이었던 김구는 백범일지에 '하와이와 멕시코, 쿠바 등지의 교포에서 편지로 금전적 도움을 얻어 이봉창 의거 계획을 세울 수 있었다'고 적었다. 해외 이주민이 보낸 독립자금이 큰 힘이 된 것이다.김세원과 김윤원은 해외에서 독립운동자금을 지원한 공로를 인정받아 2015년과 2016년 각각 건국포장과 대통령표창을 받았다. 하지만 이들이 한인회에서 활동한 기록만 남아 있을 뿐, 구체적인 자료는 전혀 없는 상황이다. 한국이민사박물관 신은미 관장은 "김세원·윤원 형제가 이민 2세들을 위한 학교를 세우고, 한인회에서 독립운동자금을 보낸 것을 고려하면 더 다양한 활동을 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우리나라와 교류가 없던 기간이 길어서 사실상 자료 발굴이 어려운 상황"이라며 "관련 연구를 진행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나설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김주엽기자 kjy86@kyeongin.com그래픽/성옥희기자 okie@kyeongin.com/아이클릭아트김윤원 지사. /크리스천해럴드 제공대한일보에 실린 멕시코 이주민 모집 광고. /한국이민사박물관 제공쿠바 이주 한인노동자들의 모습. /한국이민사박물관 제공김세원이 활동하던 쿠바 대한인국민회 카르데나스지방회 회관 모습. 현재 한인 후손들이 거주하고 있다. /독립기념관 제공

2019-07-24 김주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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