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과 인천

 

[독립운동과 인천·(17)]백범일지 톺아보기·(上)

부친이 조달 탈옥과정 도구로 써전국 최고 기술 기록부족 아쉬워백범 김구(1876~1949)는 인천에서 두 번의 감옥살이를 했다. 김구는 을미사변 직후인 1896년 국모시해의 원수를 갚는다며 일본인을 처단한 이른바 '치하포 사건'으로 첫 번째 옥살이를 하면서 역사의 전면에 등장했다. 그는 1898년 인천감리서 감옥에서 탈출했다. 김구가 '백범일지'에 생생히 기록한 탈옥과정에서 스치듯 언급한 무기 겸 탈출도구가 있는데, 바로 '삼릉창'(三稜槍)이다. 수많은 사람이 '백범일지'를 읽으면서도 크게 주목하지 않았던 삼릉창. 옛 인천의 대장간 이야기 속으로 들어갈 수 있는 통로라 할 수 있다.인천 감옥에서 탈출하기로 마음먹은 김구는 부친에게 대장장이를 통해 한 자 길이(약 30㎝)의 삼릉창 하나를 만들어 몰래 넣어달라고 했다. 김구의 아버지는 삼릉창을 옷 속에 넣어 전달했다. 인천의 대장간에서 제작했을 게 틀림없다. 김구는 이 쇠창으로 벽돌을 들추고 땅을 파서 감옥 밖으로 빠져 나왔다. 인천에서 서울로 탈출하는 내내 삼릉창을 품에 지니고 만일의 사태에 대비했을 것이다. 이 삼릉창 하나에 목숨을 맡겼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김구의 아버지는 삼릉창을 인천의 어느 대장간에 맡겼을까. 인천은 근대문물이 한국에 전파되는 최일선이었다.세계 각국의 사람들이 모여 살던 인천 개항장의 대장간에서는 다국적 물품의 주문 제작도 가능했을 것으로 생각해 볼 수 있다. 인천의 대장간 기술력이 전국 최고 수준이었을 테지만, 현재 그 기록은 많이 남아있지 않다.양준호 인천대 교수가 '1936년 판 인천상공인명록'을 근거로 2009년 펴낸 '식민지 시기 인천의 기업 및 기업가'를 보면, 당시 인천에는 대장간 9곳이 있었다. 일본인 소유가 5곳이고 조선인 소유가 4곳이었는데, 조선인이 운영하던 대장간의 영업세액이 가장 높았다. 그만큼 조선인과 일본인 간 경쟁이 치열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신태범(1912~2001) 박사가 1983년 쓴 '인천 한 세기'에 따르면 일제강점기부터 해방 후까지 애관극장 아래 있던 최씨대장간은 도끼, 칼, 호미, 낫 등을 만드는 솜씨가 남달랐다고 한다.인천에서 만든 삼릉창이 어떠한 형태인지 알 수 있는 단서는 희박하다. 조선 후기 군사교범인 '융원필비(戎垣必備)'에 그림으로 소개됐지만, 중국 병법서를 그대로 베낀 중국식 창이다. 그 삼릉창을 백범도 알고, 대장장이도 알았다. '백범일지'에서 삼릉창의 쓰임을 확인할 수 있다는 점도 색다르다. 인천에서 만들어져 백범을 탈출시킨 그 삼릉창의 역사적 의미를 새롭게 조명할 필요성도 커진다. /박경호기자 pkhh@kyeongin.com

2019-06-19 박경호

[독립운동과 인천·(17)]백범일지 톺아보기·(上)

1896년 '국모 원수갚기' 목적 일본인 살해 체포돼 인천감리서로 이송·심문조선 관리·일본인 꾸짖으며 '유명세' 미결수 신분으로 '기약없는 감옥생활'강화도 재력가 김주경 구명운동 펼쳤으나 부패한 조정 손못써 '탈옥' 권유1898년 간수 눈 피해 쇠창으로 땅 파 빠져나와 용동·만수동등 거쳐 서울로일지에 첫 번째 옥살이관련 자세히 남겨… 기록 복원·콘텐츠화 작업 지적"인천은 의미심장한 역사지대라 할 수 있다."해방을 맞아 귀국한 그 이듬해 삼남지방 순시에 나선 71세의 백범 김구(1876~1949)는 가장 먼저 찾은 인천에 대해 '백범일지'에 이렇게 썼다. 김구는 인천에서 두 번이나 감옥살이를 하면서 독립운동가이자 민족주의자로 새롭게 탄생했다. 그를 진정한 의미의 '백범 김구'로 만든 인천은 '의미심장한 역사지대'임에 틀림없다. 김구는 '백범일지'에 인천 감옥살이와 탈옥과정, 그를 도운 인천 인물들을 소상히 기록했다. 몇 년 전부터 백범 탈출로 등 '백범일지' 속 인천 기록을 복원하는 노력이 일부 연구자들을 중심으로 이어지고 있는데 여전히 '디테일'은 부족하다. '백범일지'를 더 꼼꼼히 살피고 역사적 사실관계를 밝혀내는 작업이 더욱 활발하게 진행돼야 비로소 김구가 인천의 '콘텐츠'로 탄탄하게 자리매김할 수 있다.김구는 1896년 3월 황해도 안악군 치하포에서 국모의 원수를 갚는다며 일본인 쓰치다 조스케(土田讓亮)를 살해한 이른바 '치하포 사건'으로 인천에서 첫 번째 옥살이를 했다. 당시 그는 '김창수'라는 이름을 쓰는 21세 청년이었다. 김구는 '백범일지'에 쓰치다를 일본군 중위라고 썼다. 대한매일신보사가 1999년 발행한 '백범김구전집' 3권에 실린 치하포 사건 관련 당시 일본 측 보고서를 보면, 쓰치다의 신분을 '평민(상인)'이라고 언급했다. 이와 관련 '백범김구전집' 3권 해제를 쓴 도진순 창원대 사학과 교수는 "일본 측이 상인(양민)이 강도에 의해 살해된 것으로 사건을 마무리하려는 의도에서 쓰치다의 신분을 소상히 공표하지 않은 데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김구는 사건 현장에서 "국모보수(國母報讐)의 목적으로 왜인을 죽이노라"는 글을 쓰고, 마지막 줄에 '해주 백운방 텃골 김창수'라고 적었다.김구는 사건이 벌어진 지 세 달이 지난 6월 말 체포돼 해주부에서 심문을 받은 뒤 인천감리서로 이송됐다. 인천감리서는 1883년 개항 이후 설치돼 개항장과 외국인 관련 행정·사법·국제관계 업무를 맡았다. 애초 해주부에서 사건을 처리할 계획이었으나, 일본영사관이 외국인의 생명과 관계된 중대사건이라는 이유로 인천감리서에서 김구를 심문하도록 조선 정부에 강력하게 요구해 인천으로 옮기게 됐다. 김구는 '백범일지'에 현재 인천 중구 내동에 표지판 하나만 달랑 세워진 채 그 터만 남은 인천감리서의 모습을 남겼다. 다음은 '백범일지' 속 인천감리서와 감옥이다.'감옥은 내리(內里)에 있었는데, 내리 마루에 감리서가 있고, 왼편에는 경무청이 있고, 오른편에 순검청이 있었다. 감옥은 순검청 앞에 있고, 그 앞에는 노상을 통제하는 2층 문루가 있었다. 감옥 주위에는 담장을 높이 쌓아올렸고 담 안에는 평옥(平屋) 몇 칸이 있는데, 그 방들을 반으로 나누어서 한편에는 미결수와 강도·절도·살인 등 죄인을 수용하고, 나머지 반쪽에는 민사소송범과 경범위반 등 이른바 잡범을 수용하고 있었다.'김구는 불결한 감옥 안에서 장티푸스에 걸려 극심한 고통을 겪었다. 얼마나 아팠는지 자살을 시도할 정도였다. 그런 와중에 1896년 8월 31일 인천항재판소에서 첫 심문이 열렸다.일본정부 관계자도 배석해 심문을 지켜봤는데, 이 자리에서 김구가 조선인 관리와 일본인을 크게 꾸짖었다는 소식이 인천항에 퍼졌다. 2차, 3차 심문이 이어지면서 김구는 '전국구 스타'가 됐다. 김구의 어머니 곽낙원(1859~1939) 여사는 객주 박영문의 집에서 식모살이하며 아들 옥바라지를 하고 있었는데, 김구를 도와주겠다는 인천사람들이 점차 늘었다. 일본이 줄기차게 요구한 김구의 사형 판결이 연기됐다. 민심이 그를 단순한 살인범으로 판단하지 않았기 때문에 조정도 섣불리 판결할 수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특히 강화도의 재력가 김주경(김경득)이 가산을 탕진하면서까지 김구에 대한 구명운동을 펼쳤다. '백범일지'를 보면, 김주경은 "김창수를 살려내야 할 터인데, 지금 정부대관들은 모두 눈에 구리녹이 슬어서 돈밖에 보이는 것이 없으니, 불가불 금력을 사용치 아니하면 쉽게 방면치 못할 것 같다"고 말했다고 한다. 김주경은 고위 관료들을 만나 김구를 방면해 달라고 요청하거나 소송을 제기하는 등 7~8개월 동안 가진 돈을 몽땅 썼지만, 결국 김구를 빼내지는 못했다. 조선 말기 부패한 조정을 여실히 보여주는 장면이다. 당시 조정이 얼마나 썩었는지는 황현(1855∼1910)이 쓴 '매천야록(梅泉野錄)'에서도 드러난다. '매천야록'에는 영동현에 사는 이용직이 100만냥을 상납하고 경상감사로 임명됐는데, 부임하자마자 포졸을 풀어 지역 부호들을 잡아들이고 뇌물을 받았다는 내용이 나온다. 매관매직을 당연하게 여기던 시대였다는 게 '매천야록' 곳곳에서 확인된다.김구는 미결수 신분으로 감옥생활을 하면서 1년 넘게 독서에 열중했다. 이 기간 감리서 직원의 권유로 '세계역사·지지(世界歷史·地誌)', '태서신사(泰西新史)'등 중국에서 발간된 서적을 읽으며 새로운 문물을 접했다. "의리는 유학자들에게 배우고, 문화와 제도 일체는 세계 각국에서 채택해 적용하는 것이 국가의 복리가 되겠다"는 사상을 다듬어 갔다. 또 동료 수감자들을 가르치거나 소송을 위한 소장을 써주기도 했는데, 독립신문은 1898년 2월 15일자에 인천항 감옥 죄수 중 20세 김창수가 죄인들을 공부시키니 "옥이 아니요 인천 감리서 학교라고들 한다"고 보도했다.하지만 기약 없는 옥살이가 이어졌고, 자신을 도와주던 김주경마저 전 재산을 써도 방법이 없자 탈옥을 권유하는 시를 보냈다. 김구는 아버지가 소송 문서를 전부 강화도로 갖고 가서 명망 높은 양명학자인 이건창(1852~1898)에게 방책을 묻기도 했지만, 이건창은 탄식만 했다고 '백범일지'에 적었다.김구는 탈옥을 결심하고 계획을 세운다. 1898년 3월 김구는 아버지에게 대장장이를 통해 한 자(30㎝) 길이의 '삼릉창'(三稜槍) 하나를 만들어 새 옷 속에 싸 들여 달라고 부탁했다. 아버지는 그가 무슨 일을 꾸미는 줄 짐작하고 즉시 삼릉형(三稜形)으로 만든 쇠창 하나를 넣어줬다. 이 삼릉창은 무기이면서 벽돌을 들추고 땅속을 파는 중요한 도구였다. 김구가 삼릉창을 제작해 달라고 특정한 것으로 미루어 당시에도 생소한 무기는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삼릉창의 형태는 현재 전해지지 않는다. 1813년 훈련도감이 편찬한 군사교범인 '융원필비(戎垣必備)'에 삼릉창의 모습이 실려있긴 한데, 중국의 병법서 '무비지(武備志)'에 소개된 중국식 창을 그대로 옮긴 것일 뿐 실제 제작된 흔적은 남아있지 않다. 김구의 탈옥 도구로 쓰인 삼릉창을 고증하는 작업은 곧 한국 무기의 역사를 보완하는 셈이므로 꼭 필요하다.김구는 탈옥 당일 밤 당번인 간수를 불러 돈 150냥을 주고 죄수한테 한 턱을 낼 것이니 쌀, 고기, 술을 사 오라고 부탁했다. 또 간수에게 50전어치 아편을 사서 실컷 먹으라고 뇌물을 찔러 주기도 했다.그 간수는 아편쟁이였다고 한다. 죄수들은 술과 음식을 먹으며 노래를 불렀고, 간수는 자기 방에서 아편을 피우고 정신이 흐릿해 까무러져 있었다. 교역통로였던 인천항에서는 중국에서 건너온 아편 또한 어렵지 않게 구할 수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소설가 김탁환과 영화감독 이원태는 인천 개항장이 아편의 영향에서 벗어날 수 없었을 거라는 상상에서 출발한 소설 '아편전쟁'(2016)을 썼다. 당시 시대적 상황과 인천항의 국제적인 입지를 고려하면 충분히 해봄직 한 문학적 상상이다. '백범일지' 속 아편쟁이 간수를 통해 당시 인천항에 아편이 만연했다는 것이 입증된다. 소설 '아편전쟁'에서는 인천 청국조계에 아편굴인 '천락원(天樂園)'이 등장하는데, 아편을 단속해야 하는 감리서 순검까지 들락날락한다. 손님이 나날이 늘자 '지락원(地樂園)'이라는 아편굴이 하나 더 생긴다.김구는 혼란한 틈을 타 마루 속에 깔아놓은 벽돌을 창끝으로 들추고 땅속을 파서 감옥 밖으로 나왔다. 조덕근, 양봉근, 김백석 등 장기수 4명과 함께 탈옥했다. 감옥 담장을 넘어 "누구든지 내 갈 길을 방해하는 자가 있으면 결단을 내버릴 마음으로 쇠창을 손에 들고 정문인 삼문(三門)으로 바로 나갔다"고 김구는 당시를 회상했다. 옥에서 빠져나온 김구는 '용동 마루터기', '천주교당의 뾰죽집이 보이는 언덕', '화개동 마루터기' 등을 거쳐 서울로 탈출했다. 김구의 탈출 경로를 연구한 몇몇 학자는 김구가 감리서에서 나와 용동 마루터기, 화개동(현 신흥동) 마루터기를 지나 문학동, 만수동, 부평 등지를 거쳐 서울 양화진 나루에 도착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김구는 인천에서 시흥 가는 대로변에 서 있는 방석솔(가지가 옆으로 넓게 퍼져 자라는 소나무) 밑에 몸을 숨겨 한나절을 보냈다. 김구가 몸을 숨기다가 지나갔을 것으로 생각되는 길목에는 인천대공원이 있고, 인천대공원 백범광장에는 김구와 곽낙원 동상이 서 있다. '백범일지' 속 김구의 첫 번째 옥살이만으로도 재조명해야 할 인천 이야기가 아직 산더미처럼 쌓여있다. /박경호기자 pkhh@kyeongin.com 그래픽/성옥희기자 okie@kyeongin.com1946년 11월 강화도 김주경의 집을 찾은 김구. 김주경은 김구가 인천감리서에서 옥살이할 때 구명운동을 펼친 인물이다. 김구는 해방 후 귀국하자마자 김주경, 윤봉길, 이봉창의 유가족부터 수소문했다. 출처/'백범김구전집' 11권김구가 1896년 7월부터 1898년 3월 탈옥할 때까지 투옥됐던 인천감리서 전경. 현 인천 중구 자유공원 쪽에서 내려다 본 사진으로 추정된다. /인천시 역사자료관 제공조선 후기 훈련도감이 편찬한 군사교범 '융원필비'에 나온 삼릉창. 인천의 대장간에서 제작했을 가능성이 큰 김구의 중요한 탈옥도구였으나, 아직 그 실체가 드러나진 않았다. 출처/'조선의 무기와 갑옷'인천문화재단 한국근대문학관이 작년 입수한 김구의 '백범일지' 친필 서명본. /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

2019-06-19 박경호

[독립운동과 인천·(16)]덕적도 독립운동 이끈 이동응·차경창 목사

이동응 목사 서울 성경학원 재학중 3·1운동 참여 독립선언문 버선 속에 숨겨 귀향임용우 선생 도와 만세외쳐… 기독교계 '日기업 술·담배 절제운동'·학교 설립 활동덕적도 출신 차경창, 교사 재직중 만세운동 '옥고' 목사 전향 日 비판설교 감시당해성직자 신분 '한계' 전면에 나서지 못한채 독립사상 전파… 단편적인 자료만 남아인천 옹진군 덕적도 3·1 운동은 기독교 신자들이 주축이 돼 이끌었다. 이동응(李東應, 1881~1967) 목사와 차경창(車敬昌, 1901~?) 목사가 그 주인공이다. 덕적도는 기독교가 이른 시기부터 자리 잡은 지역 중 하나여서 섬 주민 중 기독교 신자의 비중이 높았기 때문에 이들이 중심이 돼 독립운동이 펼쳐졌다.개항 이후 우리나라에 들어온 선교사들은 육로보다 더 편리한 해상교통을 선호했다. 이 시기 인천의 섬들은 황해도와 경기도는 물론 충청도 등 한반도 서부권으로 나아가는 뱃길의 길목이었다. 다른 지역으로 가던 선교사들도 인천 앞바다 섬을 방문하는 경우가 많았고, 강화도 등 인천 지역 섬에는 기독교가 급속도로 퍼졌다.향토사학자 김광현이 쓴 '덕적도사'에 따르면 덕적도에 기독교가 처음 들어온 해는 1901년이다. '덕적도사'에서는 10년도 안 된 기간에 기독교가 매우 빠른 속도로 전파됐다고 설명하고 있다. 홍석창이 지은 '제물포지방 교회사 자료집 1885~1930'에서는 당시 덕적도 기독교 상황에 관해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덕적 구역은 남양에서 떨어져 있는 세 섬들로 구성돼 있는데, 몇 년 동안 덕적도가 그 섬들의 중심으로서 그 구역의 목사와 사업의 시작을 주도했다. 이 섬들 중 두 곳에 각각 세 개의 모임들이 있다. 한 해 동안 두 개의 교회가 건축됐다."전문가들은 덕적도에 기독교가 빠른 속도로 유입될 수 있었던 이유로 교회와 학교가 함께 설립된 것을 꼽는다. 인천섬연구총서 '덕적도' 집필에 참여한 인하대 프론티어학부대학 최인숙 강사는 "덕적도 지역은 예로부터 교육열이 유난히 높았다. 이곳 주민들에게 교육의 기회를 제공한 것은 교세 확장에 결정적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며 "마을에 교회를 세울 때마다 학교를 설립해 근대교육을 받게 만들고, 장학금을 지원하는 등 국내외 유학을 위한 발판을 마련해 줬기 때문에 기독교를 믿는 사람이 많았다"고 설명했다.이 시기 덕적도에 있던 명덕학교와 명신학교, 합일학교는 덕적도에서 일어난 3·1 운동의 토대가 됐다. 이 학교 출신들은 명덕학교 교사였던 임용우 선생을 도와 덕적도 3·1 운동을 주도했다. 3·1 운동 이후에도 인천과 전국 곳곳에서 독립 사상을 전파했다.합일학교에서 공부했던 이동응 목사는 덕적도 3·1 운동에 불씨를 지핀 인물이다. 향토사학자 이훈익의 저서 '인천지방향토사지'에 나온 기록을 살펴보면 이동응 목사는 1919년 서울 성경학원에 재학 중이었다. 서울에서 열린 3·1 운동에 참여한 그는 고향인 덕적도로 내려오면서 독립선언문 한 장을 버선 속에 숨겼다. 이동응은 그의 조카이자 임용우(1884~1919) 선생의 제자인 이재관(1897~1989)에게 서울에서 만세운동이 벌어졌다는 사실을 전하고, 밤을 새워 가며 선언문 100장을 만들었다고 한다. 때 마침 경기도 김포에서 만세운동을 했던 임용우 선생도 덕적도로 돌아왔고, 이들은 마을 사람들과 함께 태극기를 손에 들고 만세를 불렀다.당시 임용우 선생과 이재관 등 만세운동을 주도했던 5명은 일본 경찰에 붙잡혀 재판에 넘겨졌지만, 이동응 목사에 대한 재판 기록은 없다. 이 때문에 그가 실제 독립운동에 참여하지 않았다는 이야기도 나온다. 하지만 '인천지방향토사지' 등 여러 출판물에서 이동응 목사가 덕적도 3·1 운동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고 기술한 점을 고려하면 그가 덕적도에 처음으로 독립선언문을 가져온 것은 사실로 추정된다.3·1 운동 이후 이동응 목사는 본격적인 목회자의 길로 들어섰다. 1921년부터 7년 동안 장봉도 옹암감리교회 담임 목사로 근무한 그는 절제운동을 벌였다.절제운동은 조선물산장려운동의 하나로 추진됐다. 일본 기업이 대부분 이익을 가져가는 술이나 담배를 줄이자는 게 절제운동의 목표다.조선총독부는 1916년 주세령을 시행했다. 주세령은 각 가정에서 이뤄지던 자가주조를 금지하고, 주조업을 기업화·대형화시켜 안정적인 세액을 확보하고자 추진된 정책이다. 주세령이 시행된 이후 1920년 조선총독부의 전체 세입 중 7%가 주류에 의한 세금일 정도였다.기독교계에서는 절제운동을 적극적으로 진행했다. 1928년 1월 '기독신보'는 사설을 통해 '동포여, 죠션(조선) 안에서 술 담배로 소비되는 돈이 총합 10억1천989만3천824원(당시 330㎡ 기와집 1만여채 값)입니다. 동포여, 우리의 당면한 대 문제를 해결함이 오직 금쥬 단연함에 잇는 것이 아니겠습니까'라고 절제운동 참여를 독려하기도 했다.'장봉도 옹암감리교회 92년사'에 따르면 이동응 목사는 찬송 형태의 '금주가'를 만들어 어린아이들에게 부르게 했다고 한다. 아이들을 시작으로 어른들의 금주 활동도 추진하겠다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 그는 금주·단연 청년회도 조직했는데, 기독교계에서는 이러한 활동을 신선한 충격으로 받아들였다. 1925년 '기독신보'는 '경기도 부천군 용유면에서 금년(1925년) 1월에 이동응, 이용의 씨의 발기로 금주 단연 청년회를 조직하고 사무를 진행했는 바 불신자 청년의 금주단연은 더욱 가상한 일이라고 칭송이 높더라'고 이동응 목사의 활동을 소개했다.강화 석모도에서 전도사로 활동하던 이동응 목사는 학교 시설 개선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3·1 운동이 실패로 끝나자 당시 지식인들은 민중계몽운동에 힘쓰기 시작했다. 이들은 농촌지역에 학교를 설립해 주민들의 교육을 위해 노력했다. 이동응 목사가 목회활동을 하던 강화도 석모도에는 1908년 세워진 부흥여학교(초기 이름 합일여학교)가 있었다. 당시 기록을 보면 1920년 이동응 목사는 수천원의 기금을 모금해 10여 칸 되는 기와집 교사를 신축했다고 한다. '강화 기독교 100년사'에서는 부흥여학교 교사가 새로 만들어지면서 학생 전원이 30명에서 70명으로 늘었다고 설명했다. 같은 해 이동응 목사는 석모 지역 유지 김창진, '강도지'를 펴낸 박헌용과 함께 석모도에 있는 옛날식 서당을 하나로 통합해 '육영의숙'을 세웠다. 이곳의 학생은 100여명에 달했다.덕적도 출신 중 독립운동에 투신했던 이는 이동응 목사뿐만이 아니다. 임용우 선생에게 가르침을 받았던 차경창 목사도 독립운동사에서는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차경창 목사는 임용우 선생이 교사로 있던 명덕학교를 다녔으며, 합일학교 교사로 일하던 중 임용우 선생과 함께 3·1 운동을 벌였다.그의 재판 기록에는 "덕적면 진리 명덕학교 운동회에서 임용우, 이재관과 모의해 학생 수십명과 함께 만세를 부르는 등 치안을 방해했다"고 적혀 있다. 이 사건으로 서대문형무소에서 8개월간 옥고를 치른 차경창 목사는 그곳에서 목회자로 전향했다.차경창 목사는 인천 영흥도와 강원도 영월, 충청북도 제천, 강원도 원주 등지를 돌며 목회활동을 했다. 그는 교인들을 대상으로 일제를 비판하고 나라를 걱정하는 내용이 담긴 설교를 했다고 한다. 이 때문에 차경창 목사는 항상 일제의 감시 대상이었다. 차경창 목사의 큰아들인 차현회(91) 목사는 12일 경인일보와의 전화 인터뷰에서 "아버지가 설교할 때, 항상 일본 경찰은 예배당 시계 밑에서 감시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조선총독부가 이래서는 안 되고, 우리 국민들도 나라를 위해 정신 차리고 살아야 한다고 강조했다"며 "이러한 이유로 어린 시절 아버지는 항상 원주경찰서 유치장에서 조사를 받았다"고 회상했다. 이어 "항상 경찰서를 들락거렸지만, 아버지는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고 설교를 했다"며 "젊은 시절 독립운동을 했기 때문에 나라를 생각하는 마음이 누구보다 컸던 것 같다"고 덧붙였다.6·25 전쟁 당시 서울 수표교교회에서 재직하던 차경창 목사는 납북돼 행방불명됐다. 그와 서대문형무소에서 생활하던 사람 중 한 명이었던 남조선노동당 서울시 임시인민위원장 이승엽(1906~1953)이 그를 데려갔다는 게 차경창 목사 가족들의 설명이다.차현회 목사는 "이승엽 위원장이 발판이 필요했을 테고, 당시 유명한 교회 목사였던 아버지를 포섭했던 것 같다"며 "아버지는 고심 끝에 이승엽 위원장 비서를 따라갔는데, 그게 마지막 모습이었다"고 말했다.이동응 목사와 차경창 목사는 고향인 덕적도의 독립운동 불씨를 당겼다. 이들은 섬이나 농촌 지역 주민에게 민족 의식을 심어주는 마중물 역할을 했다. 하지만 이들에 대한 연구는 아직 단편적인 자료밖에는 남아있는 게 없는 실정이다.이성진 골목문화지킴이 대표는 "목회자라는 신분의 한계 때문에 전면에 나서서 적극적으로 독립운동에 참여하지는 못했지만, 여러 지역을 돌며 독립 사상을 전파했다"며 "덕적도와 인천의 독립운동 역사의 일부분을 차지한 이들을 재조명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김주엽기자 kjy86@kyeongin.com차경창 목사 존영이 전시된 한국기독교순교자 기념관. /한국기독교순교자 기념관 제공이동응 목사. /영종중앙교회 제공백아도에서 바로본 덕적도와 주변 섬의 모습. 인천에서 배로 1시간 남짓한 거리에 있는 덕적도는 아름다운 일몰을 볼 수 있는 해변과 소나무숲, 바다낚시 등으로 유명하다. /경인일보DB차경창 목사. /차경창 목사 가족 제공차경창 목사 판결문. /국사편찬위원회 제공

2019-06-12 김주엽

[독립운동과 인천·(15)]덕적도와 임용우

김포서 태어나 신학문 공부 교직생활하다 1912년 27살에 인천 도서지역 명덕학교 부임가정학습·마을 궂은일 '앞장' 어린 나이에 존경받아… 천도교 통해 서울 3·1운동 참여돌아와 제자들과 '만세운동' 준비 4월 9일 학교 운동회로 사람들 불러모아 "독립" 외쳐日경찰 혹독한 고문 35살에 사망 광복후 주민들 추모비 세워… '섬'탓 활동 아는이 적어1919년 3월, 인천 지역 또한 한반도 여느 곳과 마찬가지로 독립을 염원하는 만세 함성으로 가득했다. 인천 중구, 동구와 계양구 황어장터, 강화도 등 사람이 많이 모이는 곳에서는 대규모 만세 시위가 일어나며 조국의 독립을 바라는 민중들의 목소리가 커졌다.지금까지 인천시나 각 지자체 주도로 진행된 3·1운동 기념행사는 인천 동구 창영초등학교나 계양구 황어장터에서 열리고는 했다. 그런데 올해 처음으로 옹진군은 3·1운동 기념식을 덕적도에서 열었다. 1919년 덕적도에서 울렸던 만세 함성이 100년을 지나서야 빛을 보게 된 것이다.덕적도에 독립운동의 씨앗을 뿌린 사람은 명덕학교 교사였던 임용우 선생(1884~1919)이다. 그가 덕적도에 머물던 시간은 8년에 불과했지만, 그의 제자들은 덕적도와 강화도 등 인천 지역 섬을 돌며 독립이 왜 필요한지를 주민들에게 전파했다.하지만 그의 독립운동은 아직 잘 알려지지 않았다. 섬이라는 제한된 지역에서 독립운동을 벌였기 때문에 소규모로 이뤄진 데다, 접근이 쉬운 인천 시내 독립운동과 비교해 관련 연구가 제대로 진행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제라도 그의 행적에 대해 체계적인 조사가 이뤄져야 하는 이유다.국가보훈처 공훈록에 따르면 임용우 선생은 경기도 김포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 한학을 공부하던 그는 김포 통진에 있는 창신학교에서 4년여 동안 신학문을 공부했다고 한다. 졸업 후 모교에서 3년여 동안 교직 생활을 했던 임용우 선생은 1912년 27살 나이로 덕적도 명덕학교에 교사로 부임했다.1910년대 당시 덕적도 주민들의 경제 상황은 매우 어려웠을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서해 민어 파시의 중심지이기는 했으나, 어업권을 일본에 계속 빼앗기고 있었다. 어업을 주업으로 삼았던 덕적도 주민들에게는 큰 피해였다.일제는 우리나라에 식민어촌을 건설하고 일본의 어부들이 이주할 수 있도록 지원했다. 이를 위해 일제는 1907년 '한국수산지'를 발간해 일본 어민을 돕는 지침서로 사용했다. 1908년에는 어업법, 1911년에는 조선어업령을 시행하면서 모든 어민이 통감부와 조선총독부 면허를 받도록 했다. 일제는 당시 어업면허의 종류를 세분화 했다. 이 과정을 통해 만들어진 신식 어업은 일본 어민에게만 허가하는 등 우리 어민을 차별했다. '한국수산지'에 따르면 당시 덕적도 주변 해역에서 주로 잡히던 어종은 민어였다. 민어 조업에도 일본은 영향력을 확대해 갔다. 1923년 9월 동아일보 보도를 보면 그해 덕적도 인근에서 출어한 어선 528척 중 일본 어선은 90척에 달했다고 한다.경제적으로 어려운 덕적도 주민들이었지만, 교육에 대한 열정은 매우 컸다. 향토사학자 김광현이 1985년에 출판한 '덕적도사'에서는 1910년대 초기 덕적도에는 명덕학교, 명신학교, 합일학교 등 3개의 사립학교가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김광현은 "(덕적도는) 기독교의 영향을 받아 부녀자까지라도 한글 정도는 해독할 수 있게 됐고, 시대의 변천과 교육의 흐름에 따라 신학문에 유의한 인사들이 규합해 학교를 잇따라 설립했다"고 적었다.명덕학교에 부임한 임용우 선생은 밤이면 각 가정에 방문해 학생들의 가정학습을 지도했고, 학교에서는 학생들과 짚신을 만들어 팔아 학교 경영에 보탬을 줬다고 한다. 마을에 어려운 일이 생기면 누구보다 먼저 도왔기 때문에 어린 나이에도 마을 사람들은 그를 매우 존경했다고 한다. 덕적도가 고향인 송은호(86) 옹은 지난 5월 31일 경인일보와의 전화통화에서 "나는 나이가 어려 임용우 선생을 직접 뵌 적은 없지만, 삼촌이나 아버지가 평소에도 임용우 선생의 말을 인용해 나를 가르쳤다"며 "돌아가신 지 한참 지났을 시점이었으나, 마을 사람에게는 스승으로 남아 있었던 것 같다"고 당시를 회상했다.그가 명덕학교 교사로 일한 지 7년이 흐른 1919년 2월 임용우 선생은 천도교 측으로부터 한 통의 편지를 받게 된다. 서울에서 대규모 만세 운동을 진행할 예정이니 서울로 와 달라는 내용이었다. 서울로 가서 3·1운동에 참여한 그는 일제의 감시망을 피해 고향인 김포에 내려왔다.이곳에서 3·1운동을 계속했다. 그는 3월 29일 수백명의 주민들과 함께 김포 월곶면 사무소와 공립보통학교를 돌면서 만세를 불렀다. 당시 독립운동 재판기록을 살펴보면 임용우 선생과 함께 만세 시위를 주도한 조남윤, 최우석, 정인교, 윤종근, 민창식 등은 현장에서 붙잡혔다. 하지만 그는 일제의 감시망을 피해 덕적도로 숨어드는 데 성공했다.임용우 선생은 섬에 들어오자마자 명덕학교 제자들과 함께 만세운동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서울에서 독립선언문을 가져오는 데는 성공했으나, 섬이라는 특수한 환경 때문에 내륙 지방의 '장날'과 같은 많은 사람이 모이는 날을 잡기 어려워 날짜를 정하지 못했다. 임용우 선생은 학교 운동회를 개최해 주민들을 불러 모으자고 제안했고, 4월 9일을 거사일로 잡았다.9일 덕적도 주민들은 진리 해변에 모였다. 주민들은 우선 일제의 눈을 피하려고 줄다리기와 달리기, 씨름 등 체육 행사를 진행했다. 체육 행사가 마무리된 뒤, 임용우 선생은 독립 선언을 외쳤고 그를 따라 많은 주민도 독립 만세를 불렀다. 덕적도 출신으로 해방 후 감리교 통합운동을 주도했던 김광우 목사는 그의 자서전 '나의 목회 반세기'에서 "해변에서 운동회를 하던 중 동네 사람과 학생들이 손에 태극기를 들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치기 시작했다. 일본사람들은 꼼짝 못하고 있었다. 우리의 태도에 겁을 먹은 것이다"고 당시를 회상했다.조선총독부가 3·1운동 동향을 일본 정부에 보고한 문서에는 이날 독립운동에 대해 '학생 50여명, 학부형 30여명이 모여 종이로 태극기 10장을 만들어 독립 만세를 외쳤다'고 적었다. 하지만 당시 덕적도 명덕학교와 합일학교, 명신학교의 학생과 주민의 수를 고려하면 100~300여명이 만세 운동에 참여했을 것이라는 게 연구자들의 설명이다. 진리 해변에서 만세운동이 끝난 뒤에도 주민들은 국사봉 등 마을 뒷산과 주요 거리에서 봉화를 피우고 만세를 불렀다. 이날 독립운동에 참여했던 이인응은 자신이 운영하는 덕적도에 딸린 작은 섬 울도 사숙(私塾)에 돌아가 학생 2명과 함께 만세를 외쳤다.조선총독부가 작성한 문서를 살펴보면 임용우 선생은 만세 운동을 벌인 뒤, 4~5일 이내에 붙잡힌 것으로 추정된다. 임용우 선생의 제자였던 이정옥은 생전에 "덕적도 헌병 주재소에서 일본 경찰과 조선인 헌병보조원은 선생님(임용우)이 의식을 잃을 정도로 구타했다"고 진술했다. 임용우 선생은 인천경찰서로 옮겨진 뒤에도 가혹한 구타와 혹독한 고문을 당했다고 전해진다.1919년 5월 9일 임용우 선생은 그와 함께 독립운동을 벌였던 제자들과 1심 판결을 받았다. 주동자였던 그는 1년 6개월의 형을 받았고, 나머지 제자들에게는 6개월~1년 형이 선고됐다. 제자들은 곧바로 항고했으나, 임용우 선생은 이마저도 할 수 없었다. 심문 도중 들것에 실려 나갈 정도로 건강이 나빠진 그는 선고 이튿날 35살이라는 젊은 나이에 서대문형무소에서 눈을 감았다."순종황제 붕어하시고 3·1 운동이 궐기할 시에 본명 사립 명덕학교 선생 임용우씨가 주최로 합일학교 교사 이재관씨 차경창과 비밀 연락해 기미년 3월 10일(음력으로 추정)에 대 운동회를 개최하고 면민 전반이 대회합해 대한독립 만세를 외쳤다. 며칠 후에 주최자 3인은 일본 경찰관에게 납치돼 임 선생은 가혹한 고문에 절명케 돼 출옥 치사하니 아-슬프다. (중략) 한국은 해방이 돼 왜적은 그림자를 감추게 되니 애국의인이며, 애국열사의 선혈은 헛됨이 아니었다. 1948년 해방 직후 3월 1일에 임 선생의 영세불망기념비를 세우고 매년 3·1절에 추도식을 행하니 몸은 지하에 돌아갔으나 영은 천추에 살아있는 것이다."우리나라가 독립한 이후 3년이 되던 1948년 덕적도 주민들이 힘을 모아 덕적중고등학교 앞에 세운 비석에 임용우 선생을 추모하는 글이 남아 있다. 송은호 옹은 "비석이 세워질 때, 마을 어르신들이 '참 훌륭하신 분이 먼저 가셨다. 이제라도 위로를 할 수 있게 돼 다행이다'고 말씀하시며 눈물을 훔치던 모습이 기억난다"고 했다. 임용우 선생은 덕적도 사람들에게 영원한 스승으로 남아 있다. 그는 육지와 떨어진 작은 섬에서 독립운동에 불씨를 당겼다. 덕적도 주민들은 조국이 해방된 직후부터 그를 추모해 왔지만, 대부분 인천 시민들은 그에 대해 잘 모르고 있다. 3·1운동 100년을 맞는 올해부터라도 외딴 섬에서 임용우 선생이 펼친 독립운동을 재조명할 필요가 있다. /김주엽기자 kjy86@kyeongin.com/옹진군 제공, 그래픽/박성현기자 pssh0911@kyeongin.com1948년 3월1일 덕적도 주민들이 세운 임용우 선생 추모 기념비. /옹진군 제공지난 3월 1일 인천 옹진군 덕적도에서 3·1운동이 펼쳐진 지 100년만에 기념식이 열렸다. 장정민 옹진군수가 이날 기념식에서 '기미년독립선언 기념비' 앞에서 헌화하고 있다. 이 기념비는 1997년에 세워졌다. /옹진군 제공덕적도 국수봉 전경. /옹진군 제공임용우 선생 판결문. /옹진군 제공

2019-06-05 김주엽

[독립운동과 인천·(14)]강화 출신 '유두희'

노동투쟁 등 활약에 비해 기록없어인천 강화 출신의 사회주의 독립운동가 유두희(劉斗熙·1901~1945)는 고향에서조차 지워진 인물이다. 1920~40년대 인천에서 청소년단체와 노동단체 결성을 주도했고, 일제의 공산당 탄압으로 체포돼 옥살이를 했다. 그리던 조국의 해방을 맞았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세상을 뜨고 말았다.사회주의 독립운동가들은 이승만 정권과 군사 정권의 '레드콤플렉스' 속에서 오랜 기간 제대로 조명을 받지 못했다. 같은 한국인 자본가와 지주도 투쟁의 대상으로 보는 급진적 사상 때문에 민족주의 기반의 독립운동의 역사에서 늘 외면을 당해왔다.일제강점기 중후반 인천의 사회단체와 노동운동 때마다 빠지지 않고 유두희의 이름이 등장하지만, 그의 연보조차 제대로 확인할 길이 없다.강화 출신으로 인천을 근거지로 활동했다는 기록을 과거 신문에서 확인할 수 있을 뿐 그가 어떤 경로를 통해 신사상(사회주의)을 흡수하고 단체를 조직할 수 있었는지 정확히 연구한 자료가 없다. 내리교회 존스 목사가 설립한 우리나라 최초의 서구식 초등교육기관인 영화학교 출신으로 알려졌으나 학적부를 통해 확인한 사실은 아니다. 대중강연에 나설 만큼의 지식인이었음은 분명하나 강의와 연설 내용이 전해지지 않는 부분도 못내 아쉽다. 어찌 이렇게 독립운동가 한 명의 흔적이 철저히 묻힐 수가 있었는지 놀라울 정도다.2008년 진실과 화해를 위한 과거사 위원회는 유두희의 항일 활동을 '진실'로 규명했다. 인천소년회 창립, 신간회 인천지회 조직, 4차 공산당 사건이 모두 항일 운동으로 인정받았다. 그러나 아직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지는 못했다. 인천 지역 사회의 관심과 학계의 추가 연구가 필요한 이유다. /김민재기자 kmj@kyeongin.com

2019-05-29 김민재

[독립운동과 인천·(14)]사회주의 독립운동가 유두희

1901년 강화 출생… 1920년대 日 문화식민지배 시기소년회등 이끌며 계몽활동·항일정신 전파인천노동총연맹·조선공산당 간부 역임도1920~40년대 인천에서 청소년·노동단체를 이끌며 일제에 저항했던 독립운동가 유두희(劉斗熙·1901~1945). 공산당 경력과 사회주의 사상을 바탕으로 한 그의 활동 이력 탓에 그의 항일정신은 아직도 후세에 널리 알려지지 않고 있다. 2008년 '진실과 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원회)'는 유두희의 항일독립 활동을 진실로 규명했다. 그러나 이후 10년이 지나도록 진실화해위원회의 규명 결정문을 뛰어넘는 추가 연구와 재평가는 미진하다. 기대했던 독립유공자 서훈도 이뤄지지 않았다. 1901년 12월 24일 강화에서 태어난 유두희는 1920년대 초반 인천 지역에서 소년·청년 운동을 주도했고, 1927년에는 신간회 인천지회 설립을 이끌었다. 제4차 공산당사건에 휘말려 옥고를 치르고 해방 100일을 맞기도 전인 1945년 11월 11일 고문 후유증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는 지독한 가난과 병마와 싸우며 생애 마지막을 보냈다고 한다.민족·사회주의 항일단체 '신간회' 인천지회 설립 주도제국주의 맞선 계급투쟁 4차 공산당사건으로 고초 해방 맞은 해 고문 후유증 지독한 가난속 숨져1919년 3·1 운동 이후 일본은 무단 통치에서 문화 통치로 식민지배 노선을 변경했고, 1920년대부터 사회단체가 활발하게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언론사와 문화·체육·노동단체가 생겼고, 민족주의로 무장했던 항일운동에 사회주의가 한 자리를 차지하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이다. 러시아 혁명 이후 중국과 러시아 망명지에서 공산주의 사상을 흡수한 독립운동가들과 일본의 유학생들이 한반도에 이를 전파했다. 노동자와 농민의 계급투쟁은 일제의 수탈에 대응할 방편이기도 했다. 이런 시대 흐름은 인천도 예외는 아니었다.진실화해위원회 결정문에 따르면 1920년대 인천에는 55개의 청년단체와 25개의 소년단체가 활동하고 있었다. 일반적으로 계몽적, 교육적 성격을 보이고 있었다.유두희가 주축이 돼 1924년 7월 5일 인천 영화학교 강당에서 창립한 인천소년회도 그 80개의 청소년 단체 중 하나였다. 소년회는 겉으로는 가극과 동화구연 행사 모습을 띠었지만, 어린 학생과 청년들에게 항일정신을 전파하는 데 주력했다.인천소년회는 1925년 11월 8일 제물포청년회와 공동으로 전인천소년축구대회를 개최하기도 했는데 이 역시 운동경기를 통해 민족의식을 높이기 위해서였다.유두희는 인천소년회 외에도 인천청년연맹 간부로 활동하면서 사회주의 대중 강연에 자주 나섰다. 1926년 1월 15일 독일의 사회주의 사상가 로자 룩셈부르그 사망 7주기를 맞아 기념 강연회를 열 계획이었으나 경찰의 개입으로 무산됐다.그는 노동운동에도 적극적으로 가담해 인천노동총연맹과 인천청년노동조합의 간부로 활동하면서 노동자의 이익 보호를 위한 활동을 전개했다. 1924년 4월에 설립된 인천노동총연맹은 노동자 쟁의를 탄압하기 위해 만들어진 친일 폭력조직 '상애회'와 투쟁을 선포했고, 유두희는 이승엽과 함께 재일본노동자총연맹과 연대하기 위한 일본 특파원으로 선발됐다.그의 크고 작은 활약은 당시 신문 기사를 통해 엿볼 수 있다. 1926년 6월 23일 동아일보는 인천의 한 정미소에서 직원 100여명이 일본인 감독관의 구타를 견디지 못해 파업에 돌입한 사건에서 유두희가 불량 감독관의 퇴직을 두고 벌인 정미소 측과의 교섭에 대표로 나섰다고 보도했다.유두희는 신간회 인천지회 설립의 주역이었다. 신간회는 1927년 2월 민족주의자와 사회주의자가 결합해 만든 항일운동단체다. 유두희는 조선공산당 간부로서 신간회 인천지회 설립에 깊숙이 가담했다. 국사편찬위원회가 펴낸 한민족독립운동사는 신간회 인천지회가 시국강연과 계몽활동을 활발하게 했다고 설명하고 있다.유두희는 조선공산당과 고려공산청년회의 지역 간부로서 활동하다 1928년 7월 27일 일제의 제4차 조선공산당 검거사건으로 경찰에 붙잡혔다. 1925년 4월 18일 조직된 조선공산당은 일제에 의해 와해 됐다가 2차, 3차, 4차에 걸친 재건을 시도했지만 결국 대대적인 검거 작전에 의해 제대로 꽃을 피우지 못했다. 일제는 공산주의 계급투쟁이 결국 자본을 바탕으로 둔 제국주의 침략과 수탈에 정면으로 맞서는 위협이라고 인식해 이들을 탄압했다. 구속을 하고도 재판을 질질 끌어 일부러 구금기간을 늘렸고, 유두희는 4차 공산당사건으로 치안유지법위반죄를 적용받아 징역 4년형이 선고됐으나 실제 감옥에 갇혀있던 기간은 5년이 넘었다.당시 연해주 한인 공산당 기관지 '선봉'은 유두희 등 4차 공산당사건의 국내 재판 소식을 전하면서 "공산주의자들을 잡아다가 공판 없이 2~3년을 가둬두고 육형의 고문으로 거의 생명을 빼앗고는 소위 치안유지법이란 악법의 죄를 씌워 공판에 끌어내오는 일본 제국주의자의 발악을 보라"고 비판하기도 했다.유두희의 판결문은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연구자들은 국기기록원의 서고 어디 한 구석에 자리하고 있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을 뿐 그와 함께 재판을 받았던 동지들의 판결문으로 유두희의 행적을 짐작할 뿐이다. 당시 4차 공산당사건으로 같이 재판을 받은 이광, 조기승, 박경호 등의 판결문을 보면 일제는 "일본 제국주의의 지배를 배제하고 조선의 독립을 기도함으로서 사유재산제도를 부인하고 프롤레탈리아나 독재 사회를 세우고, 이를 통해 공산 사회의 실현을 원하고 그 목적을 달성하기를 혈망하거나 조선을 일본제국의 기반에서 이탈시키고자 하였다"고 이들의 혐의를 적시했다.유두희는 1933년 8월 20일 출옥했지만, 그가 사망한 1945년까지의 행적은 구체적으로 드러나지 않았다. 1934년 인천에서 양복점을 운영하며 독서모임(적색독서회)을 결성했다가 경찰에 붙잡혔다는 신문 기사 한 줄로 그가 인천에서 꾸준히 단체 결성에 나섰다는 것을 짐작할 뿐이다. 인천의 향토사가 신태범 박사(1912~2001)는 저서 '인천 한 세기'에서 "노동공제회 인천지부가 인천노동총동맹으로 개편되어 용동에 간판을 걸고 유두희가 해방 때까지 유지해왔으나 눈에 띌 만한 활동은 없었다"고 했다.유두희는 해방되던 해 11월 11일 생활고를 겪다가 고문 후유증으로 요절하고 만다. 대중일보는 '오호 동무여 왜 먼저 갔느냐'라는 제목의 기사로 그의 부고를 타전하면서 "옥중생활에 득병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출감 후 계속 활동 중 소위 대동아전쟁 이래 기막히는 탄압아래 기아와 고질로 극도의 생활난과 악전고투하다가 1945년 11월 11일 사망. 인천부 화방정 자택에서 동지장으로 장례를 치루었다"고 했다.2008년 진실화해위서 '독립활동 진실 규명' 불구 사회주의 노선탓 재평가 미진… 유공자 서훈 못받아사망 이듬해인 1946년 5월 1일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 인천지부 등 60개 단체가 참여한 메이데이기념식에서 그는 항일 활동을 인정받아 표창을 받았지만, 반공 이데올로기 속에서 제대로 된 역사적 평가는 받지 못했다. 신간회 인천지회 등에서 함께 활동했던 권평근은 2005년 독립유공자 서훈을 받았음에도 유두희는 깜깜 무소식이다. 수면 아래 잠자던 유두희의 항일운동 행적을 진실이라는 뭍으로 끌어올린 진실화해위원회는 2007년 유두희의 자녀들과 면담해 행적을 복원하려 했으나 큰 수확을 거두지는 못했다. 당시 80세가 넘은 장남 대관 씨는 아버지 유두희가 숨질 무렵 고등학생 나이였다. 찢어지게 가난했던 청소년기의 고통스러웠던 기억과 소위 빨갱이의 자식이라는 낙인 때문이었는지 아버지에 대한 추억이 그리 많지는 않았다고 한다.10여 년 전 진실화해위원회에서 유두희의 항일운동 진실을 규명했던 윤명숙 위안부문제연구센터 조사팀장은 "유두희의 아들은 1940년대 일제 군수공장에 강제 징용됐던 분이고 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많지 않았다"며 "진실 결정문을 유가족에게 전달해 주고 서훈 신청 여부를 확인해 봤지만 아직 신청이 들어오지는 않은 것으로 확인했다"고 말했다.진실화해위원회의 규명 작업은 2006년 당시 영화여자정보고등학교 교사이자 향토사 연구자인 이성진 골목문화지킴이 대표의 신청으로 이뤄졌다. 유두희의 말년 행적이 '눈에 띌 만한 행동이 아니었다'고 한 신태범 박사의 '인천 한 세기'를 읽고 재평가가 필요하다고 판단해서였다. 이성진 골목문화지킴이 대표는 "좌익 활동가였던 유두희 선생이 평가절하 당하고 있었다고 생각해 진실화해위원회에 진실 규명을 신청했었다"며 "진실로 결정이 나긴 했지만 학계의 추가 연구가 필요한 상황"이라고 말했다. /김민재기자 kmj@kyeongin.com 그래픽/성옥희기자 okie@kyeongin.com/아이클릭아트유두희와 유두희의 일제감시대상인물카드들. /국사편찬위원회 제공유두희의 부고 기사가 실린 1945년 11월 14일자 대중일보 지면. /미추홀도서관 원문DB4차 공산당사건으로 재판을 받는 유두희의 소식을 전하면서 일제의 사회주의 탄압을 비판한 러시아 연해주 한인 신문 '선봉'의 1930년 7월 16일자 지면. /독립기념관 제공

2019-05-29 김민재

[독립운동과 인천·(13)]윤응념과 인천사건

모금·밀항돕는 역할… 재조명 필요임시정부의 밀명을 받고 인천 섬 지역에서 독립운동 자금을 모집한 '인천사건'으로 옥고를 치른 인천의 독립운동가 윤응념(1896~?)은 여전히 반쪽 평가에 그치고 있다. 판결문과 각종 신문기사, 일제의 동향 보고를 통해 그의 국내외 독립운동 행적이 비교적 구체적으로 밝혀졌으나 독립유공자 명단에서 그를 찾아볼 수 없다. 그가 가족조차 모르게 중국으로 떠난 뒤 어떻게 살았고 언제 생을 마감했는지 등은 아직도 드러나지 않고 있다.황해도 재령 출신의 윤응념은 중국 유학 중이던 1920년 가을 상해 임시정부에 합류해 군자금 모집과 독립운동가의 밀항 루트 개발이라는 중요한 임무를 맡았다.그는 1922년 4월 중국 상인으로 가장해 인천으로 들어와 장봉도, 시도, 영종도, 대부도 등지를 다니며 지역 부호를 상대로 독립자금을 모집했다. 일제는 그가 협박으로 돈을 빼앗았다고 보고 강도죄를 적용해 징역 12년이라는 중형을 선고했다. 윤응념은 1924년 병보석으로 풀려나 서울 집에서 치료를 받다 이듬해 홀연히 자취를 감췄다. 아내와 세 아이에게는 재판소에 간다고 했지만 실제로는 중국으로 탈출했다.그의 탈출은 신문에 대서특필되고 일제는 추적에 나섰지만 찾지 못했다. 그리고 우리나라 독립운동사에서 그의 이름은 더 이상 나오지 않았다.전문가들은 당시 징역 12년형을 받을 정도의 인물이었다면 단순히 중국으로 탈출하는 데에서 활동을 끝내지 않았을 것이라고 보고 있다. 일제가 12년 동안이나 감옥에 가둬두고 싶을 정도의 요주의 인물이라면 그만큼 투쟁심도 강하고 애국심도 강했을 거라는 해석이다. 그는 임시정부의 밀명을 받고 활동할 때 가명을 사용하기도 했다. 다른 이름으로 활동했을 가능성도 있다.그는 지금까지 밝혀진 독립운동 활동만으로도 독립유공자의 자격이 충분하지만 문제는 훈격이다. 같이 활동을 했던 동지들은 애족장 또는 애국장을 받았는데, 그가 중국으로 넘어간 뒤 어떤 활동을 했느냐에 따라 훈격이 달라질 수 있다. 윤응념에 대한 재조명과 추가 행적 발굴이 요구되는 이유다. /김민재기자 kmj@kyeongin.com

2019-05-22 김민재

[독립운동과 인천·(13)]윤응념과 인천사건

황해도 출신 3·1운동 계기 임시정부 참여 1920년 교통국 참사로 임명돼인천·섬 부호 상대 독립자금 수급役 사기꾼 많아 신분상징으로 권총 사용강도 몰려 12년형 선고… '김마리아 망명' 주역 독립운동가 밀입국 돕기도 병보석후 중국으로 탈출 '행방묘연' 유공자 서훈 못받아 추가 조사 필요일제강점기 초기 경기도경찰부는 인천과 주변 섬 지역의 부호들을 상대로 한 연쇄 강도사건이 발생했다고 발표했다. 권총으로 무장한 일당이 돈을 빼앗아 달아났다는 이 사건은 이른바 '인천사건'으로 불리며 "인천 부근 일대의 부호를 전율케 한 사건"이라는 내용으로 신문에 대서 특필됐다. 강도죄로 재판에 넘겨진 이들의 실체는 독립운동을 위한 군자금을 모집해 상해 임시정부로 전달하라는 밀명을 받고 활동한 임시정부 교통국 소속의 특파단이었다.인천사건을 이끌었던 인물은 모두 10명으로 총 책임자는 황해도 출신의 독립운동가 윤응념(1896~?). 그럼에도 윤응념은 인천사건의 다른 주역과 달리 독립유공자로 추서되지 못했다. 인천사건으로 옥살이를 하다가 병보석으로 잠시 풀려난 틈을 타 중국으로 도망간 뒤로 그의 행적은 전혀 알려지지 않았다. 그의 삶과 죽음이 제대로 연구되지 못하다 보니 그에 대한 평가도 뒤로 밀려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인천의 독립운동가라 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이지만, 학계의 관심과 깊이 있는 연구는 미진하다. 2007년 진실과 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 위원회가 윤응념의 항일 활동을 '진실'로 규명했지만, 아직 국가보훈처는 그를 발굴해 독립유공자로 인정하지 않고 있다.윤응념이 이끌었던 인천사건의 배후에는 상해 임시정부가 있었다. 임시정부는 국내 각 지방과 긴밀한 연락체계를 유지하기 위해 '연통제(聯通制)'라는 기구를 설치해 운영했다. 이는 독립운동 자금 모집의 중요한 수단이기도 했다. 연통제는 초기부터 일제의 탄압을 받았고, 1919년 7월 교통국이 설치돼 연통제를 계승했다. 윤응념은 1920년 10월 5일 바로 이 교통국의 참사로 임명돼 독립운동가들의 밀입국을 돕고, 문서(정보)를 주고받거나 독립자금의 원활한 수급을 담당하는 중책을 맡았다.1896년 황해도 재령에서 태어난 윤응념은 미국 선교사의 도움으로 10대 후반 중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중국 선천 등지에서 수학하던 그는 미국으로 다시 유학을 가려 했으나 1919년 3·1 운동이 일어나자 독립운동에 가담할 뜻을 갖고 상해 임시정부를 찾아갔다. 그는 당시 임시의정원 비서였던 김정목의 소개로 임시정부에 참여했다.윤응념은 교통국 참사로 임명된 직후 조선독립을 선전하기 위해 발행한 독립신문과 잡지 신한청년을 국내로 몰래 들여와 배포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고향인 황해도 일대를 중심으로 수천부의 독립신문을 배포하며 첫 임무에 성공했다.그에게 주어진 다른 임무는 바로 독립운동을 위한 군자금 모집이었다. 임시정부는 지금의 주민세와 같은 인구세 등을 걷어 국내 지방조직을 통해 자금을 공급받았으나 일제의 탄압으로 위축되자 임시정부 요원을 직접 보내 모집을 맡겼다. 윤응념은 1922년 4월 임시정부의 밀명을 받고 인천으로 들어왔다. 그는 동지들과 함께 인천 장봉도, 시도, 영종도, 대부도 등지를 다니며 지역 부호를 상대로 독립자금을 모집했다.이들은 즉석에서 돈으로 받기도 했고, 임시정부가 발행한 공채를 매도하는 방식으로 군자금을 모집하기도 했다. 국가기록원이 지난 4월 발간한 '판결문에 담긴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국내 활동'을 보면 독립공채의 이자는 연 100분의 5로 나라가 독립한 뒤 5년부터 30년 이내에 상환하는 방식이었다. 100원권, 500원권, 1천원권의 3종류였다. 이들은 자신의 신분을 알리기 위해 임시정부가 인증한 여러 문서를 보여줬지만, 군자금 모집을 가장한 사기 사건이 발생하기도 해 쉽지 않았다. 그래서 이들은 '권총'을 신변 보호의 수단이자 신분의 상징으로 사용했다. 윤응념이 권총을 보여주며 군자금을 모집한 일은 결국 '강도사건'이 됐다. 10명 중 1명은 도주했고 1923년 5월 경찰에 9명이 체포됐다. 이들이 훗날 자금 지원을 약속받은 금액을 빼고 실제 걷은 군자금은 561원이었다.당시 판결문을 보면 윤응념은 독립운동자금 모집에 대해서는 시인했으나 강도에 대해서는 "위협이나 공갈은 없었다. 피해자에게 물어봐도 알게 될 것"이라고 답했다. 그가 권총을 소지했다는 것만으로 강도사건으로 단정 짓기는 어렵다는 게 학계의 일반적인 견해다. 윤응념은 그러나 결국 징역 12년을 선고받고 감옥에 갇히는 신세가 된다. 다른 동지들도 징역 1년 6월~10년형을 선고받았다. 인천사건이 발생한 이후 여성독립운동가인 김마리아 망명 사건의 주역이 바로 윤응념이었다는 사실도 드러나게 됐다. 이는 일본 경찰이 윤응념을 취조하는 과정에서 밝혀졌다. 그는 독립운동 군자금 모집 외에도 국내와 중국을 연결하는 밀항 루트 확보를 담당했다. 이를 위해선 중개 역할을 하는 외국인 상선 확보가 가장 중요하다. 독립운동가들이 교통국이 확보한 선박에 타고 서해의 섬으로 몰래 이동해 있다가 외국 상선으로 갈아타는 게 가장 안전한 방법이었다. 일제가 1921년 8월 20일 작성한 보고서 '밀도항자 경로에 관한 건'을 보면 윤응념이 관여했던 항로는 평안남도 남포항에서 출발해 중국의 옌타이 등지를 거쳐 상하이를 왕래하는 코스였다. 중국 상인이나 기독교 선교사들이 밀항을 중개했다. 김마리아 탈출도 바로 이런 방식을 택해 이루어졌다.김마리아는 서울 정신여학교 교사로 일하면서 항일여성단체인 애국부인회를 조직해 독립운동을 하다가 1920년 체포돼 징역 3년을 선고받았다. 고문 후유증으로 병보석을 얻어 치료를 받던 중 상해 임시정부가 그녀의 탈출을 계획했다. 건강 회복은 곧 재수감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임시정부 교통국 참사인 윤응념이 상해 임시정부의 특명을 받았다. 1921년 4월 중국인으로 위장해 국내에 잠입한 그는 그해 6월 서울에 있는 김마리아를 인천으로 몰래 데려오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며칠 뒤 인천과 황해도 사이의 한 섬으로 건너간 뒤 중국 웨이하이로 가는 소금장사 배로 갈아타고 망명했다. 김마리아는 이후 미국으로 떠났다가 1932년 귀국해 기독교를 중심으로 한 애국운동을 벌였다.인천사건으로 징역 12년을 선고받은 윤응념은 1925년 5월 15일 수감 도중 폐병에 의한 병보석으로 풀려났다. 그리고 이듬해 10월 25일 가족에게는 재판소에 간다고 말하고 집을 나선 뒤 중국으로 탈출했다. 사흘 뒤 창춘에 도착했다는 편지를 집으로 보낸 이후 그의 행적은 그야말로 오리무중이다. 병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객사했을 가능성도 있고, 신분을 감추고 아예 다른 삶을 살았을 수도 있다. 해방 이후 고향인 황해도 재령으로 돌아갔을 것이란 추측도 있지만, 윤응념 연구자들은 아직 북한에서의 행적을 찾지 못하고 있다.1927년 1월 25일 동아일보에 실린 윤응념 관련 기사에서 부인 김항엽(당시 30세)은 "작년 9월 19일(음력) 나에게 재판소 호출이 있으니 가봐야겠다고 집을 나가서는 들어오지 않더니 그달 22일에 중국 창춘에서 편지를 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 후로 길림으로 간 모양인데 편지의 내용은 병만 나으면 또 조선으로 가겠다는 간단한 말이었는데 그 편지는 전부 경찰에서 압수하여갔지요. 그리고 요새 매일 형사가 와서 무엇을 조사하고 묻고 합니다"고 했다.진실·화해위원회는 윤응념 가족이 서울 통의동에 살았다는 기록을 토대로 서울 종로구청에 옛 제적등본과 호적등본을 요청해 가족을 수소문하려 했지만, 구청 측은 관련 기록이 없다고 답변했다.윤응념의 독립유공자 서훈은 아직도 이뤄지지 못하고 있다. 윤응념과 군자금 모집을 했다가 체포돼 함께 옥살이를 했던 이호승(1878~1939)은 2006년 애족장을 받았다.전문가들은 윤응념의 중국 탈출 이후 행적에 대한 추가 연구가 더 필요하다고 강조하고 있다. 독립유공자 서훈이 늦어지는 이유도 이와 무관치 않다는 해석이다.임시정부 연구자인 김희곤 안동대 사학과 교수(경상북도독립운동기념관장)는 "윤응념은 징역 12년 형이라는 아주 무거운 형을 받았을 정도로 투쟁심이 강한 독립운동가였는데 중국 탈출 이후에 대해서 알려진 바가 없다"며 "서훈에 대해서는 10여 년 전에 내부적으로 검토 대상에 오른 적이 있었는데 윤응념은 여기서 끝날 게 아니라 분명 더 많은 활동을 했을 것이라는 평가가 있었기 때문에 계속 미뤄진 것으로 알고 있다. 훈격을 어느 정도 수준으로 해야 할지 정하기 어려웠기 때문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김민재기자 kmj@kyeongin.com인천 군자금 모집사건의 결심공판 모습을 보도한 동아일보 1923년 9월 19일자 기사의 사진(선두에 선 사람이 윤응념이다). /국가보훈처·국사편찬위원회·동아일보 제공임시정부 요원들의 국내 진입 경로를 표시한 일제 보고서 '밀도항자의 경로에 관한 건'. 상하이→옌타이→웨이하이 등을 경유해 진남포 또는 황해도로 들어오는 경로다. /국가보훈처·국사편찬위원회·동아일보 제공(왼쪽 아래부터)임시정부가 군자금 모집 때 사용한 공채들과 1919년 조선독립군사령부가 발행한 군자금 납입 명령서·봉투. /독립기념관 제공윤응념 검거 기사가 실린 1923년 5월 20일자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 지면으로 윤응념을 '수괴'라고 표현했다. /국가보훈처·국사편찬위원회·동아일보 제공윤응념의 도움으로 망명에 성공한 대한민국애국부인회 회장 김마리아. /국가보훈처·국사편찬위원회·동아일보 제공윤응념의 군자금 모집 사건 판결문. /국가보훈처·국사편찬위원회·동아일보 제공

2019-05-22 김민재

[독립운동과 인천·(12)]女교육자이자 독립운동가, 김란사(下)

보훈처 평안남도 안주 기록달리 유족들 평양 출생 주장 논란 '이주 가능성''국제관계 능통' 조선 관리 하상기와 전처 죽은뒤 혼인 '첩·기생설' 사실아냐아내 적극 외조 경찰서장·감리등 역임 인천 총괄 이후 중국 망명 행적묘연김란사 생애 체계적 복원위해 함께 살펴봐야… 파리가던길 독살설도 '과제'김란사(金蘭史·1872~1919)가 여성교육의 선구자이자 독립운동가로 발돋움하는 데에는 남편 하상기(河相驥·1855~1920)의 적극적인 외조가 있었다. 하상기는 인천 개항장의 행정·사법·국제관계 업무를 총괄하는 인천감리를 수차례 지내면서 인천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한 고위 관료이다. 그렇지만 드러나지 않은 측면이 많은 수수께끼의 인물이기도 하다. 아직 뚜렷하게 밝혀지지 않은 김란사의 생애를 복원하기 위해선 하상기도 함께 연구돼야 한다.지금까지 진행된 바로는 김란사나 하상기와 관련한 연구 작업의 중심에 인천의 이원규 작가와 김창수 인천연구원 부원장 등이 있다. 잘 알려지지 않은 독립운동가들의 생애를 조명해 온 이원규 작가는 김란사와 하상기에 관한 각종 자료를 모으고 행적을 추적해 작품에 반영하거나 강연하고 있다. 이원규 작가가 지난해 쓴 '김경천 평전'(도서출판 선인)에는 1904년 10월 조선 황실유학생단이 일본으로 떠나기 전 방문한 인천감리서에서 황실 유학생 김영은(金英殷·1888~1942)과 그의 아버지 김정우(金鼎愚·1857~1908)가 인천감리 하상기를 만나는 장면이 나온다. 김란사에 대한 언급도 있다. 훗날 김경천(金擎天)이란 이름을 쓰게 되는 김영은은 '백마 탄 김 장군'의 전설을 낳은 독립군 지도자다. 철저한 고증 없이는 묘사하기 힘든 장면이다. 이원규 작가는 "김란사의 고향이 북한 쪽이기 때문에 남한에서는 관심을 갖고 연구한 사람이 드물다. 그나마 연고가 있는 인천에서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김란사와 하상기가 언제 결혼했는지를 정확히 알 수 있는 자료조차 아직 전해지지 않고 있다. 김란사의 친정 조카손자인 김용택씨가 공개한 하상기의 제적등본에는 딸이 1891년 12월 출생으로 기재돼 있어 혼인시기를 추정할 수 있을 뿐이다. 1891년 김란사의 나이는 19세이고, 하상기는 36세였다. 하상기는 전처가 있었기 때문에 김란사가 '하상기의 첩이었다'거나 '기생 출신'이라는 설이 오랫동안 나돌았다. 실제로 김란사가 기생 출신이라는 내용이 담긴 기사를 1990년대 보도했다가 현재는 해당 기사를 삭제한 언론사도 있다. 김용택씨는 "증조부(김란사의 아버지)는 서울에서 청나라 포목을 가져와 파는 무역업을 했다"며 "김란사 할머니는 아버지 일을 돕다가 하상기의 전처인 조씨 부인이 사망한 이후 인근에 살던 집안끼리 혼담이 오가서 혼인했다"고 말했다.일본이 한국의 주권을 장악하기 위해 1906~1910년 설치한 통감부의 '한국 관인의 경력 일반'이라는 문서를 보면, 하상기에 대해 '원래 기부(妓夫)로 학문과 지식이 없지만 종종 협잡에 종사하였다. 일찍이 기녀 하나를 얻어 함께 일본으로 건너가 망명자 유인운동을 행하였다'고 썼다. 이 문서로부터 김란사가 기생 출신이라는 설이 나왔는데, 일본이 자국과 반대 입장에 있는 조선 관리들에 대해 쓴 문건이기 때문에 신뢰도가 떨어진다는 연구자들의 분석이 많다. 일본은 해당 문건에 올린 관인 153명 대다수에 대해 비방하는 내용을 담았다.또 일본 통감부는 같은 문건에서 하상기가 '러시아와 일본 양국에 대해서도 임기응변의 운동을 행해 러시아 탐정이라는 혐의가 있다'고도 평가했는데, 그가 국제관계에 능통한 인물이었음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하상기가 사료에 등장하는 첫 기록은 '승정원일기' 1897년 7월 19일 기사로 그가 6품 벼슬에 올랐다는 내용이다. 1895년 봄 김란사와 함께 일본에 유학을 갔다가 먼저 돌아온 직후다. 하상기는 1897년 말 일본 요코하마를 거쳐 미국 샌프란시스코로 입국해 김란사의 미국 유학길에 동행했다가 혼자 돌아왔는데, 이듬해 초 인천항 경무관(경찰서장)을 맡게 된다. '고종실록'에 따르면 하상기는 1899년 7월 인천감리 겸 인천부윤으로 승진하고, 1902년 7월 경무청 경무국장으로 자리를 옮겼다가 한 달쯤 지나 또다시 인천감리로 부임했다. 이후 육군 보병 정위(대위), 일본공사관 1등 참서관과 주임관 등을 거쳐 1905년 10월 인천감리로 되돌아왔고, 1906년 3월 농상공부 공무국장으로 임명됐다. 7년에 걸쳐 여러 차례 인천감리를 지내면서 사실상 인천지역을 총괄했다. 러일전쟁을 비롯해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정세가 긴박하게 돌아가던 시기에 고종은 하상기를 국제도시인 인천을 맡을 적임자라고 판단했다. 이원규 작가는 "하상기가 일본 등지에서 첩보를 수집해 왔을 것"이라며 "경찰 간부, 인천감리 등을 지낸 것도 이와 관련이 있어 보인다"고 했다.하상기가 인천감리로 재직할 때 김란사는 미국 유학 중이었기 때문에 남편과 인천에 머물지는 않았을 것이다. 다만 김란사의 부친은 1911년 인천으로 이주해 평양, 경성, 인천 등 3개 도시를 아우르는 '평경인상회'를 운영하는 등 무역업에 종사했고, 이후 후손들 상당수도 인천에 정착했다고 한다. 김란사가 유학을 마치고 귀국해 1907년부터 이화학당에서 학생들을 가르칠 때는 서울에서 살았을 것으로 보인다. 당시 김란사는 여성교육에 힘쓰면서 황실 통역사 등으로 활동하며 고종에게 은장을 받는 등 황실과 깊은 관계를 맺고 있었다.김란사가 돌아온 이후 관직에서 물러난 하상기는 어디에 있었을까. 이때 그의 행적을 보여주는 공식적인 기록은 없지만, 언론인 김동성(金東成·1890~1969)이 경향신문 1967년 11월 8일자에 기고한 '나의 사우사 <13> 하란사 부인'에는 1908년께 하상기가 중국 상하이에 망명 중이었다는 내용이 나온다. 중국 유학 중 여름방학을 맞아 귀국하다가 상하이에서 김동성을 만난 하상기는 "집에서 아무도 모르게 중국으로 피신한 지 두 달이 되어 나의 생사를 우리 집에서 모르고 있으니 편지 한 장 전해주면 고맙겠소"라고 부탁했다. 김동성은 편지를 갖고 귀국해 서울 동대문 밖에 사는 하상기 집에 들렀고, 김란사가 반갑게 맞으며 극진하게 대접해 줬다고 회고했다. 하상기가 왜 상하이로 망명했는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이후에도 하상기의 행적은 묘연하다.김란사는 당시 여성들에게 '시대의 아이콘'이었다. 고종이 1919년 1월 21일 갑작스럽게 승하하면서 무산됐던 파리강화회의 한국 대표 파견 계획이 재추진되면서, 여성계에서는 김란사를 파리에 보내자는 움직임이 일었다. 독립운동가 황에스터(1892~1971)는 서울신문이 발행한 월간지 '신천지' 1946년 3월호에 쓴 '3·1운동과 여성의 활약'이라는 글에서 "나는 조선 안 여학생을 단합하여 운동을 일으키고 파리회의에 하란사씨를 파견할 기금 모집을 할 겸 귀국했다"며 "파리회의에 우리 대표를 보낸다 하니까 돈을 낸다 의류를 낸다 노리개 화장품을 내놓는다 야단이었다"고 했다. 황에스터는 일본 유학 중인 1919년 2월 귀국해 3·1운동 이후 평양에서 김란사를 파리로 파견할 비용을 모금했고, 같은 해 3월 19일 기금을 전하려다 서울에서 체포됐다.파리로 향하던 김란사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지금까지도 명확하게 풀리지 않은 의문이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기관지 '독립신문' 1920년 1월 22일자에 실린 애국부인회의 김란사 등 세 애국여사 추도회 기사에는 그가 1919년 봄 고종의 다섯째 아들 의친왕의 밀칙으로 파리강화회의에 출석하려고 중국 베이징에서 여행을 준비하던 중 유행성 감모(감기)에 걸려 세상을 떴다고 나온다. 이원규 작가가 발굴한 베이징 일본영사관의 김란사 사망 관련 보고서도 현지 중국신문을 인용해 유행성 감기가 사인이라고 했다. 하지만 세간에는 독살설도 퍼졌다. 미국 내 한인교포들이 발행한 '신한민보'는 1919년 4월 24일자 신문의 김란사 부고 기사에서 '그 사유는 도무지 알 수 없는 일인바'라고 보도했다. 김동성도 앞서 경향신문 글에서 '일본인 앞잡이에게 살해를 당했다고 하나 그 진상은 오리무중에 파묻혀 밝혀지지 않았다'고 썼다. 조선일보 기자였던 최은희(崔恩喜·1904∼1984)도 생전에 김란사에 대해 쓴 글을 통해 '장례에 참가했던 미국 성공회 책임자 베커에 의하면 시체가 시커먼 게 독약으로 인한 타살로 추측된다고 말했다'고 전했다. 또 최은희는 같은 글에서 장례를 치르기 위해 베이징에 온 하상기가 '베이징에 가는 도중 봉천에서 어떤 동지를 만나 속뜻을 이야기한 게 오히려 그녀가 위해를 입은 원인이 됐다'고 한탄했다는 소문이 파다했다고도 썼다. 3·1운동 전후로 일본의 탄압이 더욱 거세진 당시 상황을 고려하면, 김란사의 독살설은 뚜렷한 증거가 부족하다는 이유로 지나칠 수 없는 좀 더 검증이 필요한 역사과제다.출생지 또한 명확하지 않다. 국가보훈처 독립유공자공훈록은 '독립신문' 1920년 1월 22일자 기사를 근거로 김란사의 출생지를 평안남도 안주라고 기록하고 있으나, 유족들은 평양 출신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안주에서 태어나 평양으로 이주했을 가능성도 있다. 김란사가 미국 오하이오 웨슬리언대학에서 취득한 한국 여성 첫 '문학사'(Bachelor of Literature) 학위는 최근까지 쓰인 상당수 글에서 현재 통용하는 문학사(Bachelor of Arts)로 다르게 표기하고 있다. 인천시여성단체협의회가 2008년 펴낸 '역사 속의 인천 여성'에서 '하란사'로 소개된 김란사 이야기는 미국 유학 과정, 문학사 학위 취득 시기, 중국 망명 등 틀린 내용이 허다하다.김란사와 하상기 부부를 인천 개항장의 '도시서사자원'으로 활용하자고 제안한 김창수 인천연구원 부원장은 "선각자적 여성인 김란사와 인천감리 하상기 이야기는 교차구조로 극적 구성이 가능한 콘텐츠이지만, 아직 기초연구가 미비하다"며 "연구를 통한 체계적인 정리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박경호기자 pkhh@kyeongin.com미국 오하이오 웨슬리언대학 유학 당시 김란사. /이원규 작가·이화여대 이화역사관 제공주일공사관 1등 참서관 재직 당시로 추정되는 하상기. /이원규 작가·이화여대 이화역사관 제공'독립신문'에 실린 김란사 등 '삼 애국여사의 추도회' 기사. /이원규 작가·이화여대 이화역사관 제공고종이 1909년 해외 여성 유학생 환영회와 관련해 김란사에게 수여한 은장. /이원규 작가·이화여대 이화역사관 제공김란사가 중국 베이징에서 사망한 사실을 담은 주일본공사관 보고서. /이원규 작가·이화여대 이화역사관 제공김란사는 1916년 미국 뉴욕 사라토가에서 열린 세계감리교총회에 한국교회 평신도 대표로 파견되기도 했다. 세계감리교총회 한국 대표 파견 기념사진으로 앞줄 왼쪽에서 5번째 서양식 복장을 입은 여성이 김란사다. /이원규 작가 제공

2019-05-15 박경호

[독립운동과 인천·(12)]여성교육자 김란사(下)

감리 출신 사위 하상기 영향력 도움인천고와 인연등 복지·교육에 힘써김란사(金蘭史·1872~1919)와 인천의 인연은 인천감리를 지낸 남편 하상기(河相驥·1855~1920)에게서만 찾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평양과 서울에서 객주업을 했던 김란사 집안은 1911년 인천 중구 유동(율목동)으로 이주해 '평경인상회'를 운영했다고 한다. 평양~경성(서울)~인천을 잇는다는 의미인 평경인상회는 평양·서울·인천지역을 중심으로 해외에서 비단, 면직물을 떼다 판 무역회사였다. 인천이 평양과 서울의 중간지대이자 상권의 중심지 역할을 했다는 역사적 근거로도 볼 수 있다. 김란사의 친정 조카손자인 김용택씨는 "증조부의 사업을 조부가 이어받았고, 아버지가 평경인상회를 맡아서 해방 직전까지 운영했다"며 "이후에도 후손들이 인천에 정착해 살았다"고 말했다.김란사 집안은 사위인 하상기의 영향력에 도움을 받기 위해 사업거점을 서울에서 인천으로 옮긴 것으로 보인다. 하상기는 1899년부터 1906년까지 7년여에 걸쳐 여러 차례 인천감리를 지냈다. 인천감리는 당시 제물포 개항장이 중심인 인천의 행정과 국제관계는 물론 재판소 판사까지 겸임한 지역의 최고 관리였다. 특히나 하상기는 열강의 각축장인 개항장을 총괄하는 직책을 맡을 정도로 고종의 신임을 받았다.하상기는 인천에서 복지사업과 교육사업에도 힘썼다. 대한매일신보는 1906년 3월 8일자 신문에 '하씨미정'(河氏美政)이라는 제목으로, 인천감리 하상기가 인천항의 회사들과 협의해 민의소를 창설하고, 매달 60~70명의 가난한 병자를 무료로 치료해줬다고 보도했다. 황성신문은 1899년 10월 13일자에 '인천감리 하상기씨가 영종진에 소학교를 세워 인민을 교육하겠다고 학부에 청원했다더라'는 기사를 썼다. 하상기가 인천감리로서 외국어학교 교장을 겸임했다는 황성신문 1903년 6월 3일자 기사도 있다. 이 기사에 나오는 외국어학교는 현 인천고등학교의 전신인 관립한성외국어학교 인천지교(1895년 개교)다. 하상기가 인천고등학교와도 연결된다는 점이 눈길을 끈다. /박경호기자 pkhh@kyeongin.com

2019-05-15 박경호

[독립운동과 인천·(12)]여성교육자 김란사(上)

조카손자 김용택씨 경인일보 통해남편 하상기씨의 '제적등본' 공개"본관마저 잘못 알려져 바로잡고자"유관순 열사의 이화학당 스승이자 여성 독립운동가인 김란사가 재조명되고 있다. 인천과 깊은 관련이 있는 그는 한국의 첫 여성 '문학사' 학위자, 첫 여성 대학교수, 고종의 통역사, 파리국제강화회의 밀사 등 여성교육과 독립운동에 커다란 발자취를 남겼다.하지만 출생 연도, 사망일과 사망장소, 집안, 본관 등 기본적인 인물정보조차 각종 기록이나 글마다 제각각일 정도로 김란사 연구가 깊이 있게 이뤄지지 않았다. 이런 가운데 김란사의 조카손자인 김용택(71)씨가 김란사의 남편 하상기(1855~1920)의 제적등본(옛 호적등본)을 지난해 확보하고, 8일 경인일보를 통해 처음으로 공개했다.인천감리 등을 지낸 관료였던 하상기의 제적등본에 나타난 아내(妻) 김란사는 1872년(개국 481년) 9월 1일생이다. 기존에는 '1875년', '1868년', '1872년' 등 세 가지 추측이 혼용됐다. 김란사는 1919년 중국 베이징에서 숨을 거뒀는데, 사망일은 당시 언론보도나 보고서에 따라 '4월 10일', '3월 10일', '3월 11일', '3월 상순' 등으로 여러 가지로 써 왔다. 등본에서는 사망일을 3월 10일 오전 11시로 명확히 기재했고, 사망장소는 베이징 '부영병원'이라고 밝히고 있다.본관은 상당수 기록에서 밝힌 '김해 김씨'가 아닌 '전주 김씨'였다. 하상기와 김란사 사이에는 딸 하나가 있었다. 일부 구술에 의해 이름은 자옥(子玉)이고, 이화학당에 재학 중 18세(또는 19세)에 사망했다는 내용이 널리 알려져 있다. 하지만 제적등본에는 딸의 이름은 원옥(媛玉)으로 24세에 세상을 떴다고 기록돼 있다. 제적등본이 공문서인 만큼 현재로선 가장 객관적인 기록이라 할 수 있다.김란사애국지사기념사업회 회장인 김용택씨는 하상기의 직계가족은 아니지만, 국가보훈처와 행정안전부 등의 협조로 지난해 7월 제적등본을 발급받을 수 있었다. 김용택씨는 "심지어 조상의 본관마저 틀리는 글들이 여럿 있어 이를 바로잡고자 제적등본을 요청해 받았다"며 "앞으로 김란사 할머니에 대한 객관적인 정보들이 쓰이길 바란다"고 했다. /박경호기자 pkhh@kyeongin.com김란사의 후손을 통해 처음으로 공개되는 남편 하상기의 제적등본. /김용택씨 제공

2019-05-08 박경호

[독립운동과 인천·(12)]女교육자이자 독립운동가, 김란사(上)

조선말 개항장 감리지낸 남편따라 인천과 인연'뜨거운 학구열' 기혼녀임에도 이화학당 입학독립운동가 서재필 연설에 '감동' 미국行웨슬리언대서 한국 여성 최초 '문학사' 학위귀국후 고종 통역役·이화학당서 첫 여성교수 임명김란사(金蘭史·1872~1919)는 시대를 앞선 여성 교육자이자 독립운동가다. 미국 유학길에 올라 한국 여성으로는 처음으로 '문학사'(Bachelor of Literature) 학위를 취득했고, 최초의 여성 대학교수가 된 그의 행보는 당시 여성들이 가지 않은 길이었다. 이후 수많은 여성 독립운동가가 역사 전면에 등장할 수 있도록 길을 터주기도 했다. 김란사의 남편 하상기(河相驥·1855~1920)는 조선 말기 인천 개항장의 사법·행정과 국제업무를 총괄한 인천감리를 여러 차례 지낸 고위 관료였다. 하상기는 김란사가 국내외에서 활발히 활동할 수 있도록 물심양면으로 도왔다. 여기에서 김란사와 인천의 인연이 시작되었다. 올해는 김란사 서거 100년이 되는 해이지만, 정작 그의 생애는 여전히 빈 칸 투성이다. 김란사와 관련해 근래에 쓰인 글들마저 출생연도, 유학 과정, 사망 경위 등이 제각각이다. 이름조차도 수년 전까지 남편의 성씨를 따랐던 '하란사'로 불렸다. 정부는 1995년 김란사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할 때 '하란사'로 표기했던 성명을 지난해 2월에서야 본래 이름으로 정정했다. 김란사의 생애를 제대로 복원하기 위한 연구가 절실하다.김란사는 이화학당에 입학할 때부터 일생을 관통한 신념이 어디에 있었는지를 헤아릴 수 있는 일화를 남겼다.이화학당 교장을 지낸 선교사 룰루 프라이(Lulu E. Frey·1863~1921)는 교사로 재직할 당시 김란사의 입학 신청을 한 차례 거절했다. 기혼 여성을 받지 않는 게 이화학당의 원칙이었기 때문이다. 김란사가 밤중에 이화학당을 직접 찾았지만, 프라이는 재차 입학이 어렵다고 했다. 그러자 김란사는 하인이 들고 있던 등불을 훅하고 불어 끄더니 "우리나라는 저 등불같이 매우 어둡다"며 어머니들이 배워 자식을 가르칠 수 있어야 한다고 강하게 주장했다. 결국 이화학당은 교육비용을 자부담한다는 조건으로 김란사의 입학을 허락했다. 프라이는 이 같은 내용을 1895~1896년 미국으로 보낸 이화학당 운영보고서에 담았다.김란사가 이화학당에 입학한 시기는 정확히 기록되지 않았다. 다만 김란사와 하상기가 함께 1895년 봄 일본 도쿄에 있는 경응의숙(게이오의숙·慶應義塾)으로 유학을 갔다는 내용의 조선정부 문건들을 고려하면, 이화학당은 1894년쯤 들어갔을 것으로 연구자들은 추정하고 있다. 조선정부는 자비로 일본 유학 중인 김란사를 장학생(관비 유학생)으로 포함해주기도 했다. 다시 고국으로 돌아온 김란사는 미국 유학파 독립운동가인 서재필(徐載弼·1864~1951)의 정동교회 연설에 감화돼 미국 유학을 결심했다고 한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기관지인 '독립신문' 1920년 1월 22일자에 실린 '세 애국여사의 추도회' 기사에 이 같은 내용이 언급된다. 김란사는 1897년 말 일본 요코하마를 거쳐 미국 샌프란시스코로 입국해 미국 유학생활을 시작했다. 남편도 동행했다가 곧 귀국했다. 이때부터 미국식으로 남편 성을 따라서 '하란사'라는 이름을 썼다. 유학 초기에는 워싱턴 D.C에 있는 하워드대학 예비과정 또는 '디커너스 트레이팅 스쿨'이라는 예비학교에서 수강한 것으로 보인다. 이후 1900년 오하이오 웨슬리언대학에 입학해 1906년 '문학사' 학위를 받고 졸업했다.김란사의 조카손자인 김용택 '김란사 애국지사 기념사업회' 회장이 제공한 웨슬리언대학 학적부를 보면, 김란사는 3년간의 예비과정을 마치고 본과에 입학했다. 본과 1학년 때는 과학 전공을, 2~3학년 때는 문학 전공을 이수했다. 이름은 'Hahr, Nansa Kim Mrs.'라고 본래 성씨와 남편 성씨를 함께 썼다. 직업은 주부(Housewife)와 교사(Teacher)라고 표기돼 있고, 주소는 서울 이화학당으로 돼 있다. 이화여대가 1966년 웨슬리언대학에 김란사의 학적을 문의한 적이 있는데, 웨슬리언대학의 답장에는 "당시에 전공과목이 따로 없었을 때였으나, 그(김란사)는 영문성경을 집중적으로 연구했다"고 나온다. 김란사는 유학시절 웨슬리언대학 기숙사인 모네트홀에서 지냈다. 이화여대 이화역사관이 소장한 사진 속 김란사의 기숙사 방에 걸린 태극기가 눈에 띈다.긴 유학생활을 마친 김란사의 귀국에 국민적인 관심이 쏠렸다. '대한매일신보'는 1906년 8월 18일자 신문에서 '전 농상국장 하상기 씨 부인이 미국 화성돈에 가서 유학한 지 10년에 고등학교 졸업하고 환국하여 동문 외본제에 주재한대 성 내외 사부가에서 여자교육을 부탁하는 이가 다다(多多)하다더라'는 내용의 기사를 보도했다. 고종의 후비인 엄황귀비(1854~1911)는 진명여학교, 숙명여학교, 한성고등여학교 등 여성교육기관을 설립하는 과정에서 김란사의 자문을 받았다. 김란사는 고종의 통역을 맡으며 황실과 친분을 쌓기도 했다. 1909년 5월 경희궁에서는 '여성 해외유학생 환영회'도 열렸다. 김란사, 한국 최초의 여의사 박에스더(1877~1910), 일본 유학생 윤정원(尹貞媛·1883~?) 등 해외 유학파 여성 3명의 귀국을 환영하기 위해 부인단체를 중심으로 마련한 행사다. 궁궐에서 개최한 만큼 황실과도 교감을 가진 행사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부인단체 대표들이 연설을 하고, 주인공 3명이 답사를 한 뒤 여학생들이 노래를 불렀다고 한다. 유학생잡지 '대한흥학보' 제3호(1909년 5월 20일 발행)는 환영회에 700~800명의 인파가 몰렸다고 전했다. 같은 해 고종은 세 여성에게 직접 은장을 수여하기도 했다.의친왕 파리강화회의 파송 '밀사'로 가던중중국서 급사… 1995년에야 건국훈장 추서 서거 100년 불구 사망 경위·행적등 연구 미흡김란사는 1907년부터 이화학당 교사 겸 기숙사 사감으로 일했고, 이어 총교사(교감)로 승격했다. 조선일보의 첫 여성 기자인 최은희(崔恩喜·1904∼1984)가 생전에 쓴 여성 열전을 묶은 책 '여성을 넘어 아낙의 너울을 벗고'(2003)의 '하란사'편에서는 기숙사 사감인 김란사가 호랑이 어머니라는 별명을 들을 만큼 엄격하고, 욕설을 잘하기로 유명했다고 썼다. 1910년 9월 이화학당에 대학과를 개설하면서 김란사는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교수로 임명됐다.교수 재직 시절에는 개화파 인사인 윤치호(尹致昊·1866∼1945)와 선교잡지인 'The Korea Mission Field'를 통해 여성교육 논쟁을 벌이기도 했다. 윤치호가 해당 잡지에 신(新)학교 학생들은 대체로 집안 살림하는 법을 모른다는 취지의 글을 먼저 기고했고, 김란사가 '그 학교들의 목적과 방향은 슬기로운 어머니, 충실한 아내 및 개화된 가정주부가 될 수 있는 신여성을 배출하는 것이지 요리사나 간호원, 침모를 배출하는 것이 아니'라고 반박하는 글을 실었다.선교활동에도 적극적이었던 김란사는 1916년 미국 뉴욕에서 열린 세계 감리교 총회에 한국교회 평신도 대표로 선정돼 다시 미국을 찾았다. 이후 2년여간 미국 전역을 순회하면서 한인 동포를 대상으로 정동제일교회에 파이프오르간을 설치하기 위한 모금활동을 펼쳤다. 도산 안창호(安昌浩·1878~1938)는 교민들에게 김란사의 모금활동을 돕자는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재미동포들의 모금으로 1918년 설치한 정동제일교회 파이프오르간은 한국에서는 처음이었고, 동양에서는 두 번째였다. 한국전쟁 때 폭격으로 소실됐다가 2003년 복원됐다.고종은 1919년 6월 프랑스 파리에서 열리는 파리강화회의에 다섯째 아들인 의친왕(1877~1955)을 파송할 계획을 추진했다. 1차 세계대전의 전후 처리를 논의하는 회의에서 한일 강제병합의 부당함과 한국의 독립을 국제사회에 호소하기 위해서였다. 미국 오하이오에서 유학한 의친왕과 교류가 있는 김란사도 밀사로 파견될 예정이었다. 김란사의 파리강화회의 비밀 파송과 관련한 공식적인 문건은 아직 발굴되지 않았다. 신문기사와 해방 이후 관련 인사들의 자서전 등을 통한 후일담만 남아 있을 뿐이다. 파리로 향하던 김란사는 1919년 3월 10일 중국 베이징의 한 병원에서 갑작스럽게 숨을 거뒀다. 유행성 독감이라는 기록도 있고, 분사(憤死)했다거나 독살당했다는 설도 당시 떠돌았다. 김란사의 독립운동 행적이나 사망과 관련해 미진한 연구는 앞으로의 과제로 남아 있다. /박경호기자 pkhh@kyeongin.com미국 오하이오 웨슬리언대학 기숙사 '모네트홀'에 앉아 있는 김란사. 벽면에는 태극기가 걸려 있다. /이화여대 이화역사관 제공미국 오하이오 웨슬리언대학이 1966년 이화여대에 보낸 김란사의 학적 확인 답장. /이화여대 이화역사관 제공미국 오하이오 웨슬리언대학의 김란사 학적부. /김용택 '김란사 애국지사기념사업회' 회장 제공정부는 1995년 8월15일 김란사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하면서 남편의 성을 따른 '하란사'(사진 오른쪽)로 성명을 표기했다. 김용택씨 등 후손들의 요청으로 지난해 2월 훈장증 성명을 본래의 이름인 '김란사'로 정정했다. /김용택 '김란사 애국지사기념사업회' 회장 제공일본 도쿄 경응의숙에서 유학한 조선 관비유학단이 1896년 친목회보에 실은 단체사진. 사진 속 하얀 한복을 입은 여성이 김란사다. 김란사 바로 왼쪽이 남편 하상기다. /이원규 작가 제공, 그래픽/성옥희기자 okie@kyeongin.com/아이클릭아트

2019-05-08 박경호

[독립운동과 인천·(11)]'이을규·정규' 형제

세살터울로 장봉도서 태어나 둘 다 인천고 졸업… 은행 그만두고 나란히 독립운동 길 나서형 이을규 대동단 '의친왕 망명사건' 주도로 옥고, 동생 정규 일본서 2·8독립선언대회 동참1921년 함께 중국행 '아나키스트' 왕성한 활동중 혁명고취 논문으로 동생 '징역 3년형' 고초해방후 각각 이승만정권 감찰위원·성균관대 총장지내… 형만 '유공자 서훈' 재조명 목소리한 배에서 나고 자란 형제이면서 같은 학교를 졸업한 동문인 독립운동가가 얼마나 있을까. 인천 장봉도에서 태어난 이을규(1894~1972)·이정규(1897~1984) 형제는 일본이 우리나라를 집어삼킬 무렵 인천고등학교(옛 인천공립상업학교)를 함께 다녔고, 졸업 후 독립운동 동지가 됐다.이을규는 고종의 다섯째 아들인 의친왕 망명 사건을 주도했던 대동단의 핵심 인물이었고, 이정규는 우당 이회영과 함께 독립운동계 아나키즘 사상을 정립한 사람으로 평가받고 있다. 또 두 형제는 의열단원으로 활동하면서 죽음과 옥살이를 두려워하지 않고 치열하게 독립운동 전선에 나섰다.이을규는 의친왕의 바로 옆에서 고비마다 큰 역할을 해냈던 중요한 인물로 1990년 독립유공자 애족장 서훈을 받았지만, 이정규는 생전에 본인의 뜻에 따라 독립유공자 서훈 신청을 하지 않아 공훈기록조차 만들어지지 않았다. 인천의 독립운동가로서 이들의 생애와 독립운동 궤적에 대한 깊이 있는 연구가 요구되고 있다.이을규·정규 형제는 각각 1894년과 1897년 인천 장봉도에서 태어났다. 정부 공식 문서라고 할 수 있는 국가보훈처 '독립유공자 공훈록'과 백과사전에 이을규를 소개하는 글에는 충남 논산이 본적으로 돼 있으나, 이을규·정규 형제는 생전에 인천 장봉도 출신임을 분명히 밝혀왔다.일제의 강제 병합이 있던 해인 1910년 이을규가 먼저 인천고에 입학했고 이듬해 동생 이정규가 입학했다. 현재 졸업기수로 따지면 13회, 14회다.식민통치가 본격적으로 이뤄진 1910년대 초반 학교는 교장과 교사들이 일본인으로 채워지기 시작했고, 교사는 제복을 입고 수업에 들어왔다. 인천고도 마찬가지였다. 이을규·정규 형제는 조선인 학생에 대한 차별과 강압적인 교육에 대한 반발심이 커졌다고 한다.이들 형제는 학업에는 성실히 참여했다. 형 이을규는 수석 졸업생이었다. 지금의 도덕 교과목인 수신(修身)과 이과(理科) 분야 성적이 특히 우수한 것으로 알려졌다. 동생 이정규도 중상위권 성적을 유지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두 형제는 장봉도 출신인데 인천에서 운수업을 하던 큰 형을 따라 나왔다. 이들의 고등학교 학적부를 보면 이을규는 사숙에서 한문을 배웠고, 이정규는 인천 우각리(현 동구 금창동)에 있던 인명의숙을 졸업하고, 인천고에 진학했다. 우수한 성적으로 학교를 졸업한 형제는 은행에 취직했지만, 일본인들의 민족 차별에 반발해 둘 다 사직했다. 그리고 나란히 독립운동의 길로 들어선다. 이을규는 직장을 그만두고 전협·최익환 등이 결성한 대동단에 가입해 1919년 11월 '의친왕 망명사건'에 참여한다.대동단은 고종의 다섯 번째 아들인 의친왕을 상하이 임시정부에 망명시킨 뒤, 조선의 독립을 고취하는 내용의 포고문을 중국과 우리나라에 배포할 계획이었다. 대동단을 소개하는 '대동단실기'를 집필한 건국대학교 정치학과 신복룡 명예교수는 "대동단은 조선 왕조 왕실이 (한일) 합병에 동의하지 않았다는 것을 의친왕의 입을 통해 세계에 알릴 목적으로 망명을 추진했다"고 설명했다.이을규는 의친왕을 중국 안둥현(安東, 현 단둥(丹東))까지 호위하는 역할을 맡았다. 중국까지 일본 경찰에 들키지 않고 의친왕의 탈출을 책임져야 하는 막중한 임무였다. 고비 때마다 이을규의 기지로 위기를 넘길 수 있었다. 평양으로 가는 기차에서 의친왕은 이을규의 낡은 외투를 입고 신분을 위장해 3등 칸에 탔다고 한다. 일본 경찰 검문에 걸린 절체절명의 순간도 있었지만, 이을규가 백부(伯父)라고 대신 대답해 모면하기도 했다. 우여곡절 끝에 의친왕과 이을규는 중국 안둥현에 도착했으나, 의친왕 망명 소식을 접한 일본 경찰에 의해 붙잡히게 된다. 이 사건으로 그는 징역 2년 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렀다.동생 이정규는 일본으로 넘어가 독립운동을 도모했다. 게이오대학 경제학과에 입학한 그는 조선유학생학우회 일원으로 2·8독립선언대회에 참가했다.이을규는 감옥에서 출소한 1921년 겨울 방학을 맞아 일본에서 귀국한 동생 이정규와 함께 중국으로 떠났다. 이때부터 형제는 함께 독립운동을 벌였다.베이징 대학에 진학한 이정규는 러시아의 시인 에르셍코와 교류하며 아나키즘 사상가로 성장하게 된다.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한 우당 이회영을 아나키즘 사상가로 인도한 이가 바로 이정규다. 그는 아나키즘을 조국의 독립운동에 어떻게 적용할 것인가를 두고 깊은 고민을 했다. 이정규는 훗날 저술한 '우당 이회영 약전'에서 당시를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이회영 선생이 무정부주의에 대한 이야기를 물어서 오랜 시간 동안 문답을 하게 됐다. 이것이 선생으로서는 무정부주의 사상의 내용을 들어보는 첫 번째 기회였다. 이때는 마침 선생이 사상적인 진로 모색을 하던 때였으므로 이정규와의 대화는 선생에게 큰 충동을 줬다."이정규의 영향으로 형 이을규도 아나키스트가 됐다. 형제는 1924년 4월 우당 이회영, 화암 정현섭, 구파 백정기 등과 함께 '재중국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을 조직했다. 이 단체는 외세에 의존하는 타협론과 소련에 기대는 공산주의 세력을 함께 비판하며, 독립운동세력의 통합과 직접 행동노선을 주장했다. 상하이로 가서 약산 김원봉을 만나 의열단에 가입한 것도 이 시기다. 일본 첩보단이 작성한 의열단원 명부에 이들 형제는 열 손가락 안에 드는 중심 간부로 올라 있다.아나키스트 사상가로서 이정규의 활동은 이후 더욱 활발해졌다. 난징에서는 대만·베트남·필리핀 등 7개국 항일지사들과 '동방무정부주의자대회'를 열고 기관지 '동방'을 발행했고, 재중국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 기관지 '탈환'을 간행했다. 그러던 중 탈환에 기고한 논문이 결국 일본의 감시망에 걸렸다. 이정규는 탈환에 '탈환에 제일성', '혁명원리의 탈환'이라는 제목의 두 편의 논문을 가명으로 기고했는데, 일본은 이 글이 조선의 혁명 정신을 고취하는 것으로 해석했다. 이정규는 징역 3년 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만주 하이린을 근거지로 했던 이을규도 고초를 겪긴 마찬가지였다. 그는 이회영의 지시를 받고 김좌진 장군의 신민부와 연합하는 활동에 전념했는데, 일본과 공산주의자들의 방해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이을규·정규 형제와 함께 독립운동을 벌였던 화암 정현섭은 '혁명가들의 항일 회상'이라는 책에서 "그 무렵 만주에서는 이른바 사상 문제로 우리끼리 더 많이 죽였어요. 공산당이라고 잡아 온 젊은이를 죽이려는 것을 내가 뜯어말린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지요. 그러니까 만주에 있을 때 왜놈보다도 우리 동포인 공산주의자가 무서워 잘 때도 신을 신고 옷을 입었습니다."고 1920년대 말 만주의 상황을 설명했다.혼란한 시대 속에서 김좌진 장군은 공산주의자에게 암살됐고, 일본이 대대적인 검거 작전을 펼치면서 이을규는 국내로 압송돼 5년이나 투옥하게 된다.해방된 조국에서 아나키스트 형제가 설 자리는 없었다. 그들은 농민 스스로 자치 능력을 기르기 위해 농촌자치연맹과 노동자자치연맹을 각 지역에 조직했지만, 뜻을 이루지는 못했다.이을규는 1953년 이승만정권에서 초대 감찰위원을 지냈고, 1963년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아 대통령 표창을 받았고 1972년 서울 동대문구 자택에서 숨을 거뒀다. 그가 생애 말년에 번역했던 러시아 무정부주의자 크로포트킨의 저서 '현대과학과 아나키즘'은 사망 이듬해인 1973년에야 출간됐다. 이정규는 1963~1966년 성균관대 총장을 지냈고, 전 재산을 출연해 아나키즘 연구 단체 (사)국민문화연구소를 만들었다. 1984년 사망한 그는 생전에 독립유공자 신청을 하지 않았다.인천 출신인 이원규 작가는 "삼형제 중 두 명이 목숨을 내놓은 채 독립운동에 헌신했고, 국내 아나키스트 사상 발전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하지만 인천 지역에서는 이들에 대해 제대로 조명하지 못했다"며 "인천시 등이 나서서 이제라도 활발하게 연구를 진행해 우리 고장의 독립운동가를 널리 알려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주엽기자 kjy86@kyeongin.com이을규(왼쪽)와 이정규. 그래픽/성옥희기자 okie@kyeongin.com /아이클릭아트왼쪽부터 재중국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 기관지 '탈환'에 기고한 논문으로 징역 3년 형을 선고받은 이정규의 판결문 원본, 이을규·이정규가 이름이 담긴 의열단원 관헌문서, '의친왕 망명 사건'으로 징역 2년 형을 받은 이을규 판결문 원본. /인천고 제공

2019-05-01 김주엽

[독립운동과 인천·(11)]이을규·정규

1910년 나라의 명이 다하자 많은 사람은 독립운동에 뛰어들었다. 온 집안이 독립운동에 나선 경우도 많았다. 전 재산을 팔아 만주에 신흥무관학교를 세운 우당 이회영 일가와 서대문 형무소 1호 사형수로 기록돼 있는 의병장 허위 가문 등이 대표적이다.인천에도 독립운동에 나선 형제들이 있다. 이을규(1894~1972)·정규(1897~1984) 형제다.인천 장봉도에서 태어난 이들은 일본이 우리나라를 강제 병합한 1910년대 인천공립상업학교(현 인천고등학교)를 다녔고, 졸업 후에는 독립운동을 했다.이을규는 고종의 다섯째 아들인 의친왕 망명 사건에 참여했다. 그는 경성에서 중국 안둥현(현 단둥시)까지 의친왕의 망명 여정을 최측근에서 호위했다. 당시 최고의 아나키즘 사상가로 평가받았던 이정규는 형 이을규, 우당 이회영과 함께 아나키스트 단체를 조직했다.형제는 의열단으로 활동하는 등 독립운동 최전선에서 일본과 맞서 싸웠다. 이러한 공로를 인정받아 이을규는 1990년 독립유공자 애족장 서훈을 받았고, 이정규는 생전 본인의 뜻에 따라 독립유공자 서훈을 신청하지 않았다.하지만 인천 지역에서는 이들의 독립운동 행적이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다.인천시는 '인천시사'에 나온 인천 지역 인물 409명을 홈페이지에서 간략하게 소개하고 있는데, 이을규·정규 형제에 관한 내용은 빠져 있다. 국가보훈처 공훈록에 이을규의 본적이 충남 논산으로 돼 있기 때문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을규·정규 형제는 생전에 인천 장봉도 출신임을 분명히 밝혀 왔다. 인천에서 이들 형제의 행적을 연구하고 위상을 재정립할 필요성이 나오는 이유다.약산 김원봉 서훈에 따른 논쟁이 불거지면서 아나키스트 독립운동가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는 만큼 이을규·정규 형제에 대한 연구를 본격적으로 시작할 시기다. /김주엽기자 kjy86@kyeongin.com

2019-05-01 김주엽

[독립운동과 인천·(10)]인천고 제39회 졸업생들

인천지역에서 독립운동으로 가장 유명한 학교는 인천의 3·1 운동 발상지로 알려진 인천창영초등학교(옛 인천공립보통학교)다. 하지만 당시 인천고등학교(옛 인천공립상업학교) 학생들도 독립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인천고 39회 졸업생은 재학 중 비밀결사조직을 만들었고, 졸업 후에도 활동을 계속했다. 비밀결사조직에는 39회 조선인 졸업생 47명 중 절반이 넘는 24명이 참여했다. 그러나 이 같은 사실을 기억하는 이는 많지 않다. 이 때문에 이들의 행적을 재조명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이들 중 4~5명이 먼저 '오륜조(五倫組)'라는 이름의 친목단체를 만들었다. 이 소규모 모임이 일본인 야마모토 마사나리 교장이 그동안 묵인해오던 조선인 학생들만의 졸업앨범 제작을 반대한 것을 계기로 비밀결사조직으로 발전했다. 야마모토 교장은 졸업 앨범 비용을 국방헌금으로 내라고 윽박질렀다. 하지만 이들은 여기에 굴하지 않고 동구 송림동의 한 사진관에 졸업 앨범 인쇄를 맡겼다고 한다. 당시 중구 인현동에는 훗날 대중일보 창간에 참여했던 이종윤이 운영하는 '선영사'가 있었다. 도심 지역에 조선인 출판사가 있었는데 굳이 송림동의 사진관을 이용한 것이 수수께끼처럼 궁금하다. 이들이 졸업을 앞두고 있던 1940년은 '전시동원체제'가 본격화한 시점이다. 중일전쟁을 일으킨 일제는 전쟁 수행을 위해 국가 총동원법(1938년)을 제정해 자원 수탈을 강행했다.졸업 후에도 학병 거부 운동을 벌이던 이들은 1943년 일본 경찰에 결의문이 적발되면서 모두 구속됐다. 경찰의 모진 고문에 정태윤, 가재연, 고윤희, 김여수 등은 대전형무소에서 숨을 거뒀다. 하지만 국가보훈처 공훈록도 체포 인원과 순국 인원을 혼동할 정도로 이 사건이 제대로 조명돼 있지 않다. 이들의 행적을 연구하고 위상을 재정립할 필요성이 나오는 이유다.'마지막 무관생도들', '김원봉 평전' 등의 책을 쓴 인천고 출신 이원규 작가는 "동기생 중 절반 이상이 독립운동에 참여했다는 것 자체가 중요한 일인데, 제대로 된 평가를 받지 못해 아쉽게 생각한다"고 했다. /김주엽기자 kjy86@kyeongin.com

2019-04-24 김주엽

[독립운동과 인천·(10)]인천고등학교 제39회 졸업생의 '비밀결사단'

'지역 명문고' 일본인 교장의 조선학생 차별에 단체조직… 몰래 졸업앨범 만들기도1941년 졸업후에도 활동 동기생의 절반넘는 청년들이 '학생병 모집 반대' 운동나서일제에 발각돼 송재필등 24명 구속 '참사' 혹독한 고문에 정태윤·김여수등 잇단 순국풀려난 이들도 후유증 앓아 "명예회복 7명뿐" 자료 발굴통해 이제라도 '희생' 알려야인천고등학교(옛 인천공립상업고등학교) 1941년도 졸업생들은 일제강점기 독립운동 역사에서 획기적인 면모를 보여준다. 같은 학교 동기생 중 절반이 넘는 학생들이 참여해 비밀결사단체를 조직했으며 졸업 후에도 이어져 왔다. 조선인 졸업생이 47명이었는데 일제에 발각돼 붙잡힌 이들이 24명이나 되었다. 고문이 얼마나 혹독했던지 많은 수가 그 후유증으로 옥에서, 또는 출옥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그러나 이들의 비밀결사는 우리나라 독립운동사에는 잘 드러나 있지 않다. 인천고 비밀결사 대원들은 일본의 학생병 모집에 대항하는 활동을 주로 벌였다. 그런데 대구나 평양에서 있었던 학병거부운동 관련 연구는 많지만 인천고 졸업생들의 학병거부 운동에 대해서는 많이 다루지 않고 있다. 인천고 비밀결사 활동을 알고 있는 이들은 "한 학교 동기동창 중 절반이 넘는 수가 졸업생의 신분으로 독립운동에 참여하다 희생을 당한 사례가 대한민국 고등학교 역사에는 없었던 일"이라며 "이제라도 이들의 활동을 널리 알릴 필요가 있다"고 이야기한다.일제의 학정이 막바지로 치닫던 1943년 6월. 일본 메이지대학 법학부에 다니던 송재필은 여름 방학을 맞아 충북 영동을 찾았다가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경찰에 붙잡혔다. 송재필이 그의 고등학교 동창이던 안학순과 함께 일본의 강제 학병모집에 반대해야 한다는 내용이 담긴 결의문을 작성해 배포한 것이 적발된 것이다. 이른바 '인상 출신 불령분자들의 비밀 결사 사건'의 시작이다. 경찰의 수사는 1년 넘게 대대적으로 진행됐고, 여러 명이 고문을 받아 옥사하는 등 고초를 겪었다.송재필과 그의 동기생들이 비밀결사 단체를 만든 것은 일본인 야마모토 마사나리 교장의 조선인 차별 때문이었다. 교장의 행동에 불만이 있던 학생들은 졸업앨범 제작을 계기로 폭발하게 되었다.1940년 가을 졸업을 앞두고 있던 이들은 조선인 동기생들끼리 졸업앨범을 만들기로 했다. 이전에도 조선인 동기들끼리 졸업앨범을 만들었는데, 일본인 교사들도 이를 암묵적으로 용인해 왔다고 한다. 그런데 야마모토 교장은 이를 반대했다.비밀결사 대원으로 1941년 인천고 39회 졸업생이자 훗날 대한체육회 부회장을 역임한 이운성은 1974년 1월 발행된 인천고등학교 교지 '미추홀'에서 당시를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졸업반이 되자 학교에서 졸업 앨범을 만드는 것을 거부했어요. 그 앨범 대(앨범 비용)를 국방헌금으로 바치라는 거죠. 그러나 우리들은 한국 학생들의 교과 성적이 우수한데도 '수련'과 '교련' 차별을 받아 수석을 빼앗겼고, 매사 차별과 굴욕을 받아 부처산(현 재능대학교 일대)에서 한국 학생들만의 집회를 갖고 한국 학생이 나아가야 할 길 등 우국충정(憂國衷情)과 항일정신을 북돋았습니다. 또한, 앨범도 없이 헤어진다는 게 섭섭하고 서운해서 한국 학생들끼리만 앨범을 만들기로 하고 당시 송림동에 있는 한국인 경영 사진관에 부탁했습니다."이듬해 3월 졸업한 이들 동기생들은 몰래 졸업앨범을 만들었다는 동질감 때문인지 몰라도 자주 모임을 하며 활동을 계속해 왔다.1940년대 초 당시 조선의 20대 청년들의 가장 큰 화두는 학병거부운동이었다. 1937년 중일전쟁을 시작한 일제는 부족한 병력을 충원하기 위해 1938년 '조선육군특별지원병령'을 공포했다. 만 17세 이상으로 소학교 졸업 이상의 학력을 가진 자는 육군 특별지원병으로 지원할 수 있도록 하는 게 칙령의 골자였다. 이 시기부터 최소 18만4천명이 일본군에 입대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조선인 청년들은 학병 지원을 거부했다. 일부는 산악지대에 은신처를 마련해 동지를 규합하고 집단생활을 하면서 무장 투쟁을 전개했다. 일본군에 입대하느니 옥살이를 하겠다며, 술을 마시고 경찰서를 때려 부수는 일도 있었다.송재필이 학병 거부 운동을 독려하는 결의문을 배포한 것도 학병거부운동이 활발하게 벌어지던 시기였다. 그러던 중 그가 평소 친분이 있던 학생에게 전달한 결의문이 일제의 경찰에 적발됐고, 송재필과 동기생 24명이 경찰에 구속되는 참사로 이어졌다.감옥에 끌려간 이들은 모진 고문을 당했다고 한다. 당시 이들과 함께 붙잡힌 정구택(인천고 39회)은 2005년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악명 높은 이근안의 고문기술은 비교할 바 안 된다. 전기고문에 물고문은 기본이다. 거꾸로 매달아 놓고, 머리맡에 고추와 쑥을 섞어 태우면 호흡을 하지 못해 기절한다. 가죽회초리로 맞아 등이 부어올라 누울 수조차 없었다. 겨울에는 새벽 1~2시까지 고문이 이어지기도 했다. 억지로 자백을 받아냈다"고 증언했다. 고문을 견디다 못해 정태윤이 1944년 12월 가장 먼저 숨졌고, 이듬해 3월 가재연도 순국했다. 김여수, 고윤희 등도 그 뒤를 따랐다.대부분은 해방을 맞기 전 병보석으로 풀려났다. 일본 경찰의 고문이 그만큼 악독했다.송재필도 심각한 고문 후유증에 시달렸다. 그의 둘째 아들 송준호(66)씨는 "비나 눈이 오면 항상 몸이 좋지 않다고 누워만 있던 아버지의 모습이 생각난다"며 "내가 중학교 3학년에 다니던 1968년 고혈압으로 돌아가셨는데, 고문을 받았던 영향이 컸던 것 같다"고 했다.이들은 또 먼저 간 동기생들에 대한 죄책감을 안고 살았다. 송준호씨는 "아버지가 일본에서 대학에 다니셨기 때문에 해방 이후 인천에서 고위직을 맡아 달라는 청탁이 많았는데 '일언지하'에 거절했다는 말을 어머니에게 들었다. 아버지는 돌아가시는 날까지 모교(인천고)에서 교편을 잡았다"고 했다. 이어 "어머니에게는 '먼저 간 친구들에 대한 미안한 마음이 너무 크다'고 말했다고 한다. 죄책감 때문에 다른 일은 하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한다"고 덧붙였다.인천고 동문회에서는 인천고 39회 졸업생들이 만든 졸업앨범을 보관하고 있다. 졸업앨범 안에는 그들의 '사인록'이 있다. 여기에는 '인간본능은 무엇일까?', '선술집은 우리들의 파라다이스' 등 장난 섞인 글귀들이 적혀 있다. 20대 꿈 많던 청년이던 송재필과 그의 동기생들은 시대 상황에 따라 독립운동 현장에 뛰어들었다."여기 오랜 역사와 전통의 찬연한 빛이 머물고 이제는 미움도 싸움도 없는 대화가 맑은 바람과 더불어 지나가는 모교의 교정. 본교 39회 동창생 일동은 일제하의 재학시절부터 졸업 후에까지 민족적 자각으로 조직적인 항일애국운동을 전개하다가 마침내 일경(日警)에 24명이 체포, 투옥돼 4명이 옥사했고, 출감 후에도 일경의 혹독한 고문의 여독으로 11명이 원통하게 호국의 넋이 됐다."인천 미추홀구 인천고등학교 운동장 한쪽에는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을 하다 숨진 동문을 기리는 추모비가 서 있다. 가곡 '그리운 금강산'을 작사한 인천고 동문 한상억 시인이 쓴 비문이다.정구택(인천고 39회)은 2006년 3·1절 기념식에서 대통령 표창을 받은 뒤 인터뷰에서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인데, 고문당해 숨진 동지께 면목이 없습니다. 함께 운동했던 동지들의 얼굴이 떠오릅니다. 24명의 동지 가운데, 명예를 회복한 사람은 7명뿐입니다"라고 말했다.'마지막 무관생도들', '김원봉 평전' 등 항일투쟁과 관련한 책을 써 온 인천고 출신의 이원규 작가는 "당시 인천고는 지역 명문 학교였기 때문에 이들은 좋은 직장과 명문 학교에 다니던 학생이었다. 졸업생 중 절반 이상이 희생당했는데, 이들에 대한 연구가 아직 부족한 실정"이라며 "이제라도 이들에 대한 자료 발굴이 더 이뤄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주엽기자 kjy86@kyeongin.com인천고 39회 졸업생이 직접 만든 졸업앨범과 사인지들. 오른쪽 하단은 송재필 선생의 인천고 재학중 모습. /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송재필 선생 유족 제공 그래픽/박성현기자 pssh0911@kyeongin.com인천 강화군 온수리 성공회 성당에 있는 김여수 순국비. 강화군 온수리 출신인 김여수는 1945년 대전형무소에서 옥사했다. /김용국기자 yong@kyeongin.com인천 미추홀구 주안동 인천고등학교 운동장에 있는 인천고등학교 39회 졸업생을 기리는 추모비. 1985년 세워진 이 추모비는 가곡 '그리운 금강산'을 작사한 한상억(인천고등학교 45회 졸업생) 시인이 글을 남겼다. /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

2019-04-24 김주엽

[독립운동과 인천·(9)]'성명회 사건' 오주혁과 무의도 유배

을사늑약 반대 상소·계몽운동하다 러 블라디보스토크 망명 해외 독립단체 '성명회' 조직1910년 망국직전 '일제 만행 고발·독립의지 천명' 8624명 서명서 美·佛등 외국정부에 전달'주도 혐의' 일제에 붙잡혀 소무의도에 발묶여… 알려진 내용 없지만 이동휘와 교류 유추이후 대한국민의회등 활동 '사회주의' 색깔론 묻혀 2006년에 애국장 추서… 행적 연구 필요 "장차 어떠한 일이 일어나더라도 진정한 대한국민은 자신의 자유와 국가의 광복을 획득하기 위해 죽을 각오가 되어 있다."1910년 8월 한국이 일본에 강제로 빼앗긴다는 소식은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한인사회에도 전해졌다. 경술국치일 엿새 전인 그해 8월 23일 결성된 해외 독립단체 '성명회(聲明會)'는 일제에 끝까지 맞서 싸우겠다고 선언하고 26일 한인 지도자를 비롯한 8천624명의 서명을 받아 세계 각국 정부에 발송했다.성명회 선언서 사건으로 일본은 러시아에 주동자 체포와 인도를 요구했고, 성명회 블라디보스토크 회장 오주혁(1876~1934)은 이 사건으로 러시아에서 쫓겨나 인천 무의도에서 1년간 유배생활이라는 고초를 겪었다. 오주혁은 2006년에 이르러서야 독립유공자로 추서되는 등 뒤늦게 공적을 인정받았던 터라 그의 행적이나 일대기가 제대로 정리되지 않았다. 이 때문에 그가 소무의도로 유배를 갔다는 일본 기록만 있을 뿐 이곳에서 어떤 생활을 했는지에 대해서는 알려지지 않았다. 학계의 관심과 연구가 절실한 상황이다.함경남도 단천 출신의 오주혁은 1905년 유생들과 함께 을사늑약을 반대하는 상소 운동을 벌이며 일제에 대한 항거를 시작했다. '헤이그 밀사'로 유명한 이상설도 이때 상소 운동을 주도하며 고종에 같은 내용의 상소를 5번이나 올렸다.오주혁은 애국지사들의 상소를 반박하는 선언서를 낸 친일단체 일진회(一進會)를 "개와 말만도 못한 것"이라고 비난하며 "간사한 계교와 여우 같은 아첨으로써 우리 선량한 백성을 몰아다가 남의 보호 지도, 감리하는 밑에 돌아가고자 하느뇨"라고 일갈했다.오주혁은 1906년 함경도 지역 인사들이 국권 회복을 위해 서울에서 결성한 계몽운동단체 '한북학회'(漢北學會)에 참여했다. 황성신문 1907년 12월 19일자는 같은 단천 출신 이동휘 등과 함께 오주혁이 평의원으로 선출됐다는 내용을 싣고 있다. 한북학회는 학교를 설립해 신교육을 실시하는 등 애국계몽운동에 앞장섰다. 한북학회는 훗날 평안도·황해도 출신 지식인들이 조직한 서우학회(西友學會)와 통합해 서북학회(西北學會)로 개편됐다.오주혁은 이후 이상설 등과 함께 해외로 망명해 교육사업을 벌였다. 그리고 소무의도 귀양의 결정적인 계기가 됐던 성명회 선언 사건을 주도했다. 성명회는 망국을 앞두고 연해주 각처로 망명한 유인석·이상설 등이 만든 단체다. 오주혁은 성명회의 핵심 근거지인 블라디보스토크 지역 회장이라는 중역을 맡았다. 연해주의 한인들은 1910년 8월 23일 블라디보스토크의 개척리 한민학교에서 한인대회를 열어 성명회를 조직하였다. 개척리는 블라디보스토크 서쪽 외곽인 초기 한인마을 이름으로 1910년 전후 항일 망명가들의 독립운동기지였다. 이 개척리는 1911년 5월 전염병 유발을 이유로 러시아 당국이 강제 철거해 기병대 주둔지로 삼으면서 사라졌고, 인근에 신개척리가 만들어졌다.개척리에서 만들어진 성명회 설립 목적은 '대한의 국민이 된 사람은 대한의 광복을 죽기로 맹세하고 성취한다'는 것이었다. 성명회라는 이름은 "적(일본)의 죄상을 성토하고 우리의 원통함을 밝힌다"는 의미의 '성피지죄(聲彼之罪) 명아지원(明我之寃)'에서 땄다. 성명회는 이어 8월 26일 합병무효를 천명하는 선언서를 여러 언어로 작성해 미국과 프랑스 정부 등으로 보냈다. 지금의 청원서처럼 뒤에는 서명인 연명부를 첨부했는데 그 숫자가 8천624명에 달했다. 성명회는 선언서를 통해 "한국인의 과업이 아무리 어려운 것이라 할지라도 한국인의 자유에 도달할 때까지 손에 무기를 들고 일본과 투쟁할 것을 각오하고 있다"고 밝히며 해외 열강들이 일제의 만행을 비난하고 한국인을 지지해 달라고 요청했다. 미국 워싱턴의 국립문서보관소에는 100여 장에 달하는 '성명회 선언서' 한 질이 보관되어 있다. 100장이 넘는 이유는 선언서 뒤에 붙은 중국·러시아 한인들의 서명부가 그만큼이나 되기 때문이다. 이 문서는 한일강제병합에 대한 민족의 반대결의와 독립의지를 천명한 최초의 선언서로 한국독립운동사를 상징하는 귀중한 자료 가운데 하나다. 독립운동사 연구자들은 이 선언서가 광복 때까지 줄기차게 전개된 항일독립선언의 원류가 됐다고 평가하고 있다.오주혁은 성명회 사건을 주도했다가 1911년 일제에 붙잡혀 국내로 압송된 것으로 여겨진다. 일제가 해외 독립운동가의 동향을 기록한 '불령단관계잡건(不逞團關係雜件)'의 시베리아 3편을 보면 오주혁은 1911년 7월 15일부터 1년 동안 이 사건으로 경기도 인천부 소무의도에서 거주제한 조치를 당했다. 국가보훈처의 독립유공자 공훈록에는 그가 1912년 유배를 갔다고 나오는데 이 문서의 생산연도가 '메이지(明治) 44년 8월 5일'인 점을 보면 1912년이 아닌 1911년이 확실하다는 게 전문가의 의견이다.소무의도 유배생활이 그의 독립운동 생애에 있어 어떠한 영향을 끼쳤는지 직접 확인하기는 어렵지만 한 가지 주목할 점이 있다. 그가 무의도 유배 처분을 받기 한달 전 동향 출신 독립운동가 이동휘가 '105인 사건'에 휘말려 유배처분을 받고 이미 대무의도에 가 있었다는 사실이다. 강화에서 의병 활동과 교육사업을 이끌었고, 임시정부에서는 초대 국무총리를 지내는 등 독립운동 역사의 중요한 지분을 차지하는 이동휘는 앞서 한북학회에서 오주혁과 만나 교류를 해왔다. 둘은 또 나란히 해외로 망명해 각자의 단체에서 독립을 도모하던 차였다. 동아일보 1935년 2월 15일자 신문은 이동휘의 사망 소식을 전하면서 그의 생애를 정리했는데 기사에 "어떠한 사건으로 오주혁과 같이 황해도 백령도에 귀양을 가게 되었다"는 내용이 나온다. 이동휘가 무의도에서 유배를 했다는 사실은 이미 여러 자료를 통해 확인이 됐기 때문에 기사에 나온 백령도는 무의도의 오기로 보인다. 하지만 그리 길지 않은 부고 기사에서 오주혁과 함께 귀양살이를 했다는 사실이 언급된 것을 보면 둘의 관계가 단지 알고만 지낸 사이는 아니었다는 것을 짐작하게 한다.대무의도와 소무의도는 지금은 인도교로 연결돼 있는 사실상 하나의 섬이다. 두 섬의 거리가 500여m에 불과해 언제든지 왕래가 가능했던 곳이기도 하다. 둘은 당시만 해도 인천의 외딴섬이었던 무의도에서 훗날을 기약하며 해외 독립운동의 원대한 꿈을 나눴을 것으로 유추할 수 있다. 유배 이후의 오주혁에 대한 직접적인 기록과 연구자료는 그리 많지 않지만, 이동휘의 발자취를 따라가다 보면 주요 사건마다 그의 이름이 등장하는 점도 이를 뒷받침한다.러시아 한인사회 우두머리급 지도자였던 이동휘는 1914년 12월 30일 하바롭스크 이남 순회를 마치고 오주혁이 있는 블라디보스토크로 귀환했다. 이상설이 앞서 1월 19일 러시아 지역 항일단체 '권업회'를 탈퇴했다는 소식을 듣고 사후 대책을 모색하기 위해서였다. 충청도 출신의 '기호파' 이상설은 권업회를 주도했던 함경도 출신과 갈등을 빚어왔다. 권업회 기관지 권업신문 1914년 2월 8일자 기사에는 이상설 탈퇴 후 재정비된 권업회 간부 명단이 나오는데 오주혁이 교육부장으로 기재돼 있다. 권업회는 1911년부터 러시아가 대일 관계를 우려해 강제 해산한 1914년까지 교민의 단결과 기념일 행사를 명분으로 항일독립운동 의식을 전파했고, 회원수는 8천500여명에 달했다.오주혁은 1919년 2월 25일 전로한족회중앙총회가 확대·개편해 만든 대한국민의회에 참여한다. 이는 임시정부 성격을 띤 최초의 조직으로 이동휘가 선전부장으로 장정 모집과 군사훈련을 담당했고, 오주혁은 군자금 모집 역할을 맡았다. 이동휘는 이후 상해 임시정부에 합류했다.오주혁은 1920년에는 홍범도의 대한독립군과 대한국민군, 군무독군부가 연합해 결성한 대한북로독군부 제1군사령부 참모로 활동했다. 1922년에는 흑룡강성에 조직된 항일무장단체 혈성단 일원으로 일제에 항거했고, 1936년 고국의 독립을 맞이하지 못하고 타국에서 숨을 거두었다.오주혁은 러시아를 무대로 했던 독립활동가들이 그러하듯 사회주의 색깔론에 의해 외면당하다 2006년에서야 애국장이 추서됐다. 그의 후손들은 중국에 흩어져 있다. 2018년 독립유공자 후손의 특별귀화법에 따라 오주혁 외증손자의 부인 설순화(62·여) 씨가 특별 귀화했다.만주·러시아 지역 한인 독립운동사 연구자인 변병설 한국외대 교수는 "오주혁은 성명회 사건의 주역이었고 러시아와 중국 항일 단체에서 활동을 했지만 큰 주목을 받지 못해 제대로 된 평가와 연구가 이뤄지지 못하고 있다"며 "오주혁의 형제와 자식들도 독립운동을 위해 싸운 것으로 알려졌지만 오주혁만 뒤늦게 애국장을 받았을 뿐이라 아쉽다"고 했다. /김민재기자 kmj@kyeongin.com왼쪽부터 성명회 선언서 불어본, 주한 독일 영사가 본국으로 보낸 성명회 전문과 성명회 선언서에 첨부된 서명인 명부. 총 112장의 서명부 8천624명의 이름이 적혀있다. /국가보훈처 제공오주혁의 소무의도 유배 처분 내용이 담긴 일본 외무성 자료의 첫 장. '不逞團關係雜件-朝鮮人의 部-在西比利亞 3)이라는 제목의 문서는 메이지 44년(1911년) 8월 5일자로 기록돼있다.성명회 사건 등 해외 국권회복운동의 무대였던 블라디보스토크 개척리의 1910년대 전경. /민속원 제공오주혁의 소무의도 유배 처분 내용이 담긴 일본 외무성 자료. 왼쪽에서 두번째 줄에 '경기도 인천부 소무의도에 거주를 제한한다'는 내용이 선명하다. /국사편찬위원회 제공

2019-04-17 김민재

[독립운동과 인천·(9)]오주혁과 무의도 유배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항일 투쟁을 하다 인천 소무의도에서 유배생활을 한 독립운동가 오주혁(1876~1934)을 기억하는 이는 많지 않다. 러시아와 만주 지역에서 벌어진 항일운동에 거의 빠짐 없이 이름이 등장하나 그가 주인공으로서 주목된 적은 없다.함경남도 단천 출신의 오주혁은 블라디보스토크의 한인 마을에서 '성명회(聲明會)'라는 항일 조직을 이끌면서 일제의 강제합병이 부당함을 세계 각국에 호소했다. 이 때 만들어진 성명회 선언서에는 중국과 러시아 한인 8천624명이 서명해 뜻을 같이 했다.성명회 사건으로 러시아에서 쫓겨난 오주혁은 1911년 일제로부터 거주제한의 조치를 받고 인천의 외딴섬으로 귀양 보내졌다. 일제에 의해 강제로 묶인 몸이 됐지만, 그는 뜻을 굽히지 않았다.마침 러시아·만주 항일 운동가의 대부 이동휘가 한 달 먼저 대무의도로 유배를 왔고, 그와 긴밀하게 교류하면서 훗날 해외에서 무장투쟁을 벌일 수 있는 원대한 꿈을 품었다.2006년에서야 독립유공자로 추서된 오주혁은 간단한 연보조차 제대로 정리돼 있지 않다.정부의 공식 자료라고 할 수 있는 국가보훈처 공훈록조차 그가 소무의도에 유배됐던 해를 잘못 기록하고 있다. 인천에서라도 그의 행적을 연구하고 위상을 재정립할 필요성이 나오는 이유다. 독립유공자이면서도 그의 얼굴을 확인할 수 있는 사진조차 구하기 어렵다. 권업회와 대한국민의회, 혈성단 등 해외 항일단체에 참여한 화려한 이력에 비하면 너무나 초라한 연구 상황이다.해외 항일운동을 주로 연구한 변병설 한국외대 교수는 "성명회 사건 하나만으로도 오주혁은 중요한 인물인데 제대로 된 평가를 받지 못해 아쉽게 생각한다"며 "인천에서라도 그를 기억하고 조명해줬으면 하는 바람" 이라고 했다. /김민재기자 kmj@kyeongin.com

2019-04-17 김민재

[독립운동과 인천·(8)]독립운동 주역 이동휘, 지우개로 지운듯한 유배행적

사회주의 혁명가 굴레 속에 '외면'평화시대 맞아 남북공동연구 필요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초대 국무총리를 지내는 등 일생을 항일 독립운동에 바친 성재 이동휘(1873~1935)는 사회주의 혁명가라는 굴레에 갇혀 오랜 기간 제대로 된 평가를 받지 못했다.남북분단 상황은 최초의 한인 사회주의 조직을 세운 그의 존재를 애써 외면했고, 광복 50주년인 1995년 독립운동 유공자 추서가 되기 전까지만 해도 연대기조차 정리하지 못했다. 이승만과 대립하고 사회주의 노선을 걸었던 그를 조명하기엔 시대적 상황이 너무나 엄혹했다.1990년대 후반부터 이동휘에 대한 연구 기틀이 체계적으로 잡혔지만, 해외 망명의 결정적 계기가 되었을 인천 무의도 유배생활(1911~1912년)을 비롯한 그의 일부 행적이 지우개로 지운 것처럼 쏙 빠져 있는 점은 큰 아쉬움이 남는다. 무의도 유배는 이동휘가 국내 항일운동에 마침표를 찍고, 해외 항일운동을 시작하기 전까지의 중요한 연결고리이지만 학계에서는 아직까지도 크게 주목하지 않고 있다.이동휘에 대한 연구는 대개가 2차 사료를 근거로 하고 있다. 냉전시기 남북분단과 중국, 러시아와의 단절은 그의 주된 활동무대에서 연구할 수 있는 기회를 허락하지 않았다.오늘날 이동휘는 민족주의와 사회주의의 접점에 있다고 평가받고 있다. 그는 민족의 단결을 부르짖으며 임시정부 초대 국무총리를 지냈고, 한인사회당을 조직한 사회주의 혁명가이기도 했다. 임시정부를 부정하는 북한과 사회주의를 부정하는 남한 그 어디에도 속하지 못했던 이유이기도 하다.3·1운동과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은 올해는 무의도 유배생활 등 이동휘 일대기에서 사라진 퍼즐 조각을 하나씩 찾아내 맞춰야 할 적기라고 할 수 있다. 함경남도 출신이지만 인천의 독립운동가라 해도 누구도 부정하지 못할 그를 남북이 공동으로 재조명하는 학술연구도 평화의 시대를 맞아 새로이 요구되고 있다. /김민재기자 kmj@kyeongin.com

2019-04-10 김민재

[독립운동과 인천·(8)]임시정부 초대 국무총리 이동휘와 무의도 유배

함경도 출생 1903년 강화진위대장으로 인천과 인연 이후 계몽운동 펼쳐강화읍에 보창학교 세워 '훈맹정음' 창시 박두성 선생등 인재 다수 배출기독교 전도사로 간도 오가며 독립활동 1911년 '105인 사건'으로 귀양생활무의도 행적 구체 내용 확인안돼… 항일단체와 지속 교류 뒷날 도모 추정임시정부 초대 국무총리를 지낸 성재 이동휘(1873~1935)를 인천의 독립운동가로 평가하는 이유는 그가 해외로 망명하기 전 강화도에서 교육과 종교를 통한 독립운동을 펼친 이력 때문만은 아니다. 이동휘가 인천에 남긴 발자국은 강화도에만 국한돼 있지 않다. 한일강제병합 이후 이동휘는 인천 용유도에 딸린 섬 무의도에서 꼭 1년 동안 유배 생활을 했다. 그러나 이동휘와 관련한 각종 연구 서적이나 독립유공자 공적서를 보면 무의도 유배는 그의 위대한 여정에 잠깐 스쳐 지나가는 사건 정도로만 여겨지고 있다.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아 이동휘가 인천 무의도에 남긴 역사의 흔적을 이제라도 되찾아 복원해야 할 필요성이 제기되고 있다.함경남도 단천에서 태어난 무관 출신의 이동휘는 1903년 강화진위대장으로 임명되면서 인천과의 인연을 시작했다. 그는 강화 부윤과의 갈등으로 이듬해 스스로 군복을 벗은 뒤 기독교 신앙을 바탕으로 한 애국계몽운동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다. 이 무렵 "나라의 은혜에 보답하겠다"며 강화읍에 보창학교를 세웠고, 대중강연과 교육을 통해 민족의식을 일깨우려 노력했다. 1910년 한일강제병합으로 일제의 감시가 매서워지자 그는 기독교 전도사 직책을 갖고 북간도를 넘나들며 항일 독립운동을 모색했다.강화도와 함경도를 중심으로 애국 계몽운동을 펼치던 이동휘가 무의도로 유배를 가게 된 이유는 1911년 일본총독부가 민족해방운동을 탄압하기 위해 조작한 '105인 사건'에 휘말리면서다. 안명근이 국권 회복을 위한 무관학교를 설립하기 위해 모금을 하고 있었는데, 일제는 이를 데라우치 총독의 암살을 위한 군자금 모집으로 날조해 관련 인사들을 모조리 체포했다. 백범 김구도 이 사건에 연루돼 징역 15년이 선고됐고, 이동휘는 무혐의로 풀려나긴 했지만 섬으로 귀양을 보내는 '원도안치' 1년의 행정처분을 받아 무의도에서 유배 생활을 했다. 김구는 백범일지에서 "나는 이동휘와 상면이 없었는데 유치장의 명패를 보고서 역시 체포당한 줄 알았다"며 이 같은 사실을 기록했다.이동휘가 무의도에서 1년 동안 어떻게 지냈는지는 구체적으로 알려지지 않았지만 그를 따르던 항일단체와 끊임 없이 교류하며 뒷날을 도모했던 시기로 여겨진다. 또 기독교에 심취해 성경 공부에 매진했다고 한다.러시아지역 한인신문 '선봉(先鋒)'은 1935년 2월 15일자 신문에 이동휘의 부고 기사를 실으면서 '리동휘 동무의 일생'이라는 제목의 일대기를 썼는데 여기에 짧지만 중요한 대목이 등장한다. 그가 해외에 조직한 항일단체를 유배 생활 기간에도 이끌었음을 짐작하게 하는 내용이다."그는 삼년 안치의 처분을 받고 황해의 외로운 섬-무의도에서 삼년의 세월을 보내었다. 그러나 그가 간도에 있을 때 지도-조직한 철혈 광복단은 쉬지 않고 열렬히 활동하였다."기사에는 유배 기간이 3년이라고 나오지만 실제로는 1년이 맞다. 러시아 한인사회에서 이동휘의 국내 행적이 구전으로만 전해졌기 때문으로 보인다.여기서 등장하는 '철혈 광복단'은 이동휘가 105인 사건으로 일본 경찰에 체포되기 1~2개월 전 간도에서 기독교 전도 활동을 하면서 그를 따르는 항일 그룹 대표자를 소집해 조직한 비밀 항일운동 지도부다. 이동휘는 1911년 3월 한성 경무총감부로 압송됐다가 그해 6월 19일 무의도 유배 처분을 받게 됐다. 광복단 회원 명단과 구체적인 활동 내역은 자료 부족으로 학계에서도 정확히 파악하지 못하고 있지만, 훗날 이동휘가 조직한 사회주의 독립운동단체인 한인사회당과 대한국민회의, 북간도 국민회 등 해외 항일단체의 씨앗이 됐다. 이동휘는 무의도서 유배 생활을 하는 동안 자신이 조직한 광복단의 활동에 보이지 않는 영향력을 미쳤을 가능성이 높다. 실제 무의도 유배 생활은 그가 더는 국내에서 항일운동을 하기 어렵다고 판단해 해외 이주를 결심한 계기가 됐다. 1912년 6월 귀양 생활에서 풀려난 이동휘는 1년 뒤 기독교 전도사로 변장해 북간도로 탈출한다. 1919년 일제가 작성한 '재외배일조선유력자명부'에는 이동휘가 1913년 6월 4일 간도로 이주했다고 나와 있는데 이동휘가 안창호에 쓴 1913년 9월 22일자 편지를 보면 그보다 3~4개월 전에 망명했다고 나온다.상해 임시정부의 첫 번째 국무총리로 잘 알려졌지만, 그가 해외에서 펼친 사회주의 독립운동 이력 탓에 왜곡된 평가를 받기도 했고, 군사정권이 종식된 1990년대에 들어서야 제대로 된 조명을 받기 시작했다. 정부는 광복 50주년을 맞은 1995년에서야 그에게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다. 일부 기록은 구전 중심으로 서술되다 보니 무의도 유배 사건에 대한 기록도 제각각이다.대표적인 사례가 그의 유배 기간이다. 독립유공자의 공식 정보라고 할 수 있는 독립유공자 공훈록에는 이동휘가 1911년 105인 사건으로 함경도에서 체포돼 황해도 무의도에서 3년간 유배되었다고 나와 있다. 또 1912년 가을 외국인 선교사의 도움으로 유배지를 탈출하여 북간도로 망명했다고 설명하고 있다. 3년의 유배 처분을 받았으나 중간에 탈출했다는 내용으로 이는 사실과 다르다. 영종·용유지역 향토지도 독립투사 이동휘가 무의도 3년간 은신했다고 썼다.이는 이동휘 부고 기사에서 일대기를 쓴 신문 '선봉'과 이동휘의 아들이 남긴 여러 버전의 이동휘 전기 내용이 뒤섞인 것으로 보인다. 이동휘의 아들 이일영은 직접 집필한 전기를 1991년 공개했는데 "황해도 무의도 섬에서 정배사의하고 있던 이동휘 선생은 섬 중에 사는 어부들의 도움과 전우들의 활동 아래에서 예수교 전도사로 변장하고 1912년 무의도 섬에서 탈주하여 무사히 두만강을 건너갔습니다"라고 했다.그러나 재미 한인단체가 발행한 신한민보는 1912년 7월 29일자 기사로 이동휘가 1년 간의 유배 생활을 마쳤다는 소식을 전했다. 학계는 이동휘의 일대기 전체를 살펴봤을 때 "작년 6월 18일부터 인천부 대무의섬에 안치를 당하였던 대한교육가 이동휘씨는 1년 기한이 찼음으로 해방되어 그 고향 성진군으로 보내었는데 이씨는 섬에 있을 때에 성경 연구에 전심하였다고 한다"는 신한민보 기사 내용이 사실에 가깝다고 보고 있다.이동휘와 인천의 인연은 그의 유배 생활 종료로 끝났지만, 20여 년이 지난 1935년 2월 그의 죽음이 국내에 전해졌을 때 강화도 주민들은 추모 행사를 계획했을 정도로 이동휘가 인천에 남긴 공적은 뚜렷하다. 강화의 유지들은 이동휘 추모식을 준비했지만 강화경찰서가 허가하지 않아 불발됐다.이동휘가 강화에 설립한 보창학교는 우수한 인재를 다수 배출했다. '훈맹정음'의 창시자 송암 박두성 선생이 대표적이다. 1888년 교동에서 태어난 박두성은 1895년 되던 해 이동휘가 보창학교에서 신교육을 받았고, 이동휘의 주선으로 한성사범학교에 진학해 교육계에 몸담았다. 한일병합의 굴욕을 맞은 1910년 이동휘는 망명을 권유했으나 그는 남아서 후진 양성에 힘쓰기로 헀다. 이에 이동휘가 소나무의 절개를 지키라며 송암(松岩)이란 호를 지어주고 '남이 하지 않는 일에 평생을 바치라'고 당부했다고 한다. 그리고 우리나라 최초의 점자가 박두성에 의해 만들어졌다.이동휘는 교육가이자 웅변가이기도 했다. 이동휘는 1907년 군대 해산령이 내려지자 강화도 진위대원과 주민을 모아놓고 다음과 같은 연설을 했다."우리는 지금부터 배워야 하겠고 알아야 하겠다. 군함도 있어야 하겠고 대포도 있어야 하겠다. 독립군도 양성해야 하겠다. 그러므로 10리 사이에 1교씩을 설립하고 삼천리 강토에 3천교를 설립하여 3천만 동포의 애국정신을 배양하여야 하겠다. 이것은 오늘부터 또 내일부터 시작하여야 하겠다."이동휘는 망명 이후 만주와 블라디보스토크 등지에서 독립운동을 하다 상해 임시정부에 합류했다. 그러나 민주주의를 주창하는 대통령 이승만과 갈등을 빚었고, 독자적인 사회주의 노선을 걷는다. 그는 우리나라 최초의 사회주의 단체인 한인사회당을 조직했고, 러시아 공산당과 교류하며 독립을 꾀한다. 이동휘는 혁명적 방법으로 조국 광복을 이루려는 의지가 강했고, 무장을 통한 항일 투쟁 방식을 선호했다. 그는 시베리아에서 강한 눈보라를 만나 독감에 걸려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에서 치료를 받던 중 1933년 1월 31일 서거했다. /김민재기자 kmj@kyeongin.com그래픽/박성현기자 pssh0911@kyeongin.com1921년 1월 1일 대한민국 임시정부 및 임시의정원 신년축하식 사진. /독립기념관 제공이동휘(앞줄 왼쪽에서 두번째)가 중국 상하이에서 고려공산당 핵심 간부들과 함께 찍은 사진. /독립기념관 제공이승만 대통령의 상하이 도착 환영식. 꽃목걸이를 걸고 있는 이승만 대통령 왼쪽이 이동휘다. /독립기념관 제공1935년 2월 15일자 러시아 한인 소식지 '선봉'에 실린 이동휘의 부고 기사. /독립기념관 제공천안독립기념관에 조성된 이동휘 어록비. /국가보훈처 제공

2019-04-10 김민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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