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과 인천·(41·끝)에필로그]이어붙인 기억의 조각 '독립운동' 집대성 출발점 되길…

스치듯 지나가는 임정수립 100년 아로새기기 위해1년 동안 '인천과 독립운동' 하나로 묶는 데 집중항일투사들 '유배지' 기능에 초점 맞춰 시작강화 등 외딴섬까지 지역 3·1운동 범위 넓혀사진 없거나 수의 입은 모습이 대부분 안타까워소중한 자료 제공한 후손·독자들 관심에 감사'시간이 더 흐르기 전에 희미한 기억의 조각이라도 주워담아야 한다.'경인일보 특별취재팀이 '인천'과 '독립운동'을 하나로 묶는 작업을 올해 1년 동안 이어 온 이유이자 목표였다. 인천에는 생각보다 더 많고 다양한 애국지사들의 이야기가 묻혀 있었다. 하지만 그 흔적들은 생각보다도 더욱 희미해서 사라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기초적인 데이터조차 정리되지 못한 채 뿔뿔이 흩어져 있기도 했다.'3·1운동, 임시정부 수립 100년'을 맞은 2019년은 독립운동 재조명 열풍으로 대한민국이 들썩였지만, 그 열기는 3·1절을 거쳐 현충일이 지나면서 금세 식었다. 돌이켜 보면 인천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스치듯 지나쳐 가는 '100년'을 붙잡아 인천의 것으로 아로새기는 건 취재팀의 몫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1년을 끌고 오면서 잊힐 대로 잊힌 인천의 독립운동을 되살리려 애썼다.초반부에는 어느 누구도 이야기하지 않은 독립운동가들의 '유배지'로 기능했던 인천을 집중적으로 조명했다. 국사학자·국어학자·민속학자·교육자·언론인으로 활동한 독립운동가 계봉우(1880~1959)의 유해가 올해 4월 22일 카자흐스탄에서 60년 만에 고국으로 돌아왔다. 문재인 대통령은 현충일 추념사에서 계봉우 선생의 유해 송환을 언급하며 "우리의 보훈은 아픈 역사를 다시는 되풀이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앞서 취재팀은 계봉우가 북간도와 연해주 일대에서 독립운동을 하다가 1년 동안 인천 영종도의 어촌마을 예단포에서 유배생활을 했다는 점을 부각했다. 그는 영종도를 떠나면서 '봄날'에 빗댄 조국의 독립이 찾아오길 희망하는 시를 남겼다.강화에서 교육과 종교를 통해 독립운동을 펼친 강화진위대장 출신 임시정부 초대 국무총리 이동휘(1873~1935)가 대무의도에서 1년간 유배생활을 했다는 사실도 잘 알려지지 않았다.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항일단체 '성명회'를 조직한 오주혁(1876~1934)도 소무의도에서 귀양살이를 했다. 같은 시기 500여m 건너편 대무의도에는 이동휘가 유배 중이었다. 이동휘와 오주혁은 유배 이전부터 이미 교류가 있었고, 이후 활동에서도 접점이 있어 이들이 유배생활 중 어떤 식으로든 교류했을 것으로 연결지을 수 있었다. 러시아에서 항일투쟁을 하다가 강화 석모도로 유배된 이안득(1900~?)은 유배지 석모도의 3·1운동을 주도했다. 묻혀 있던 이안득의 석모도 3·1운동 역시 경인일보 연중기획을 통해 처음 소개됐다.인천의 3·1운동은 100년이나 지났는데도 '중·동구와 미추홀구 일부'로 한정된 통계로 축소된 채 통용됐다. 1만 명이 참가한 강화 만세운동, 부평·계양지역과 외딴 섬에서 일어난 만세운동까지 포함해서 인천지역 3·1운동의 범위를 확장시켰다. 신간회는 일제강점기 좌익과 우익이 합세해 독립운동사의 큰 줄기를 이루는 항일단체였다. 인천의 주요 인사들이 참여한 신간회 인천지회를 처음으로 다뤄 연구자들로부터 후속 연구의 길을 텄다는 평가를 받았다.인천의 대표적인 여성 독립운동가로 평가받아야 할 '유관순의 스승' 김란사(1872~1919)는 그 유명세에 비해 출생 연도조차 불확실했을 정도로 연구가 깊게 이뤄지지 못했다. 김란사의 후손으로부터 남편 하상기(1855~1920)의 제적등본(옛 호적등본)을 최초로 확보해 그가 태어난 해를 1872년으로 확정할 수 있었다. 김란사가 어떻게 세상을 떴는지는 추후 밝혀야 할 숙제로 남았다.인천 항만업계를 이끈 기업인 배인복(1911~1997)이 일제강점기 상하이에서 독립운동가와 교류하며 후원하는 '상인독립군'으로 활동한 행적을 인천은 놓치고 있었다. 한국 미학(美學)의 선구자라 불리는 우현 고유섭(1905~1944)이 14세 소년 시절 용동 만세운동을 이끌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던 이가 그동안 몇이나 됐을까.의사 출신 이민창, 육혈포로 자결한 정재홍(1867~1907), 인천고등학교 제39회 졸업생의 '비밀결사단', 부평 조병창에서 은밀하게 독립운동을 펼친 오순환(1921~1992)과 황장연(1923~2008), 노동운동가 김환옥(1914~?), 광주학생운동에 동참한 이두옥(1911~1950)과 신대성(1909~?), 인천 섬지역에서 독립운동 자금을 모집한 '인천사건'의 윤응념(1896~?) 등은 여전히 우리가 소홀히 대해 온 인천의 독립운동가들이다. 이들의 나머지 행적을 추적하는 후속연구가 앞으로의 과제다. 백범 김구(1876~1949)와 인천의 깊은 인연은 이미 널리 알려진 듯하지만, 전문가들 역시 인천과 백범을 연결짓는 폭과 깊이에 있어서는 부족했다. 시선을 조금 돌려서 들여다보니 백범의 생소한 인천 이야기들이 무궁무진하게 쏟아져 나왔다. 김구가 인천감리서 감옥을 탈출할 때 사용한 무기 겸 탈출도구인 '삼릉창'(三稜槍)에 처음으로 주목했다. 아버지 김순영이 옥중의 김구에게 몰래 넣어준 삼릉창은 그것을 제작했을 옛 인천의 대장간 이야기로 들어가는 통로가 된다. 인천에서 김구의 옥바라지를 한 '임시정부의 어머니' 곽낙원 여사의 동상이 있는 인천대공원, 김구의 탈옥을 도왔다고 주장한 감리서 순검(경찰) 이야기를 담은 대중일보 1946년 4월 17일자 기사에 다시금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인천의 독립운동은 다국적이었다. 강화 출신 김세원(1870~?)·윤원(1877~1920) 형제는 이역만리 멕시코로 이민을 떠나 고된 노동 속에서도 한인사회를 개척하며 독립자금을 모으고 학교를 세웠다. 미국 하와이에서 목회 활동을 하던 조광원(1897~1972) 신부는 미 해병대 종군신부로 태평양전쟁에 참전해 사이판전투에서 강제징집돼 포로가 돼버린 동포들을 구출해냈다.장봉도 태생 의열단원 이을규(1894~1972)·정규(1897~1984) 형제는 중국 각지를 넘나들며 종횡무진으로 활약하다 옥고를 치렀다. 인천이 낳은 거물 정치인 죽산 조봉암(1899~1959)은 러시아와 중국에서 사회주의를 기반으로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강화학파 유학자 이건승(1858~1924)은 1910년 한일 강제병합 직후 서간도로 망명해 해외 독립운동 근거지를 건설하는 데 여생을 바쳤다.생전의 사진 한 장조차도 남기지 못한 독립운동가들을 취재할 때는 그렇게도 서글플 수가 없었다. 자료를 뒤적이다 어렵게 건져낸 초상은 일제가 그들을 형무소에 가두거나 감시하기 위해 찍은 '감시대상 인물카드' 속의 것이 대부분이었다. 그래서인지 수의를 입은 사진이 유독 많았다. 독립운동가들이 목숨을 걸고 저항했던 일제가 남긴 그 자료를 통해서 후대에 기억돼야 한다니, 이 또한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후손을 찾지 못해 국가가 추서한 훈장조차 전달받지 못한 채 잊혀 가고 있는 인천 독립유공자들의 이름도 계속해서 되뇌어야 한다.경인일보 특별취재팀이 지난 1년간 기억의 조각들을 주워담고 이어붙인 결과물이 인천의 독립운동을 집대성하는 출발점이 됐으면 하는 바람으로 연중기획을 마친다. 어려운 발걸음으로 취재팀을 만나 소중한 자료를 선뜻 내준 독립운동가의 후손과 취재팀에 조언을 아끼지 않은 전문가들 그리고 많은 관심을 보내준 독자들께 감사드린다. /박경호기자 pkhh@kyeongin.com그래픽/성옥희기자 okie@kyeongin.com/아이클릭아트

2019-12-25 박경호

[독립운동과 인천·(40)]후손 찾는 독립운동가들

독립유공자 훈·포장 전달 못한 인천 출신 인물 21명 달해강화 본적 지홍윤·김덕순·서영백·정도향·이재향 '의병투쟁'권태철·정홍문·장연실·최공섭·황준실 만세시위 적극 가담이건영·장라득·방한조·김윤원은 미국·쿠바등 해외서 활동감옥서 숨진 유갑순… 여성운동가 유점선·최덕임·장상림도인천 본적 정기인·황칠성·유완무도 잊지 않도록 재조명해야"독립운동을 하면 3대가 망한다"는 말이 있다. 상당수 독립운동가들이 해방 직후부터 최근까지도 제대로 대우받지 못했다. 세상을 뜬 지 한참이 지나서야 그 행적이 재조명된 경우도 많다. 항일투쟁에 몸 바치다 너무 이른 나이에 절명해 후손을 보지 못했거나 어려운 삶을 살다 후손마저 뿔뿔이 흩어져 찾지 못하는 독립유공자들의 훈장과 포장이 국가보훈처에 6천여 개나 쌓여있다.국가보훈처는 정부가 독립유공자에게 추서한 훈장을 유공자 본인 또는 직계 후손에게 전달한다. 직계 후손이 없을 때는 적정한 방계 후손에게 전하고 있다. 후손들이 독립운동가의 추모사업을 주도하거나, 집안에서 전해지는 자료를 보관하다 추가로 독립운동 행적을 발굴하는 경우가 많다. 그 후손들이 없으면 보훈처가 보관한다.정부가 독립유공자로 추서한 1만5천여 명 가운데 훈장과 포장을 후손에게조차 전달하지 못한 인물은 올 12월 기준으로 5천984명에 달한다. 북한이 본적인 경우가 가장 많고, 본적이 명확하지 않거나 해외에서 활동해 후손 추적이 어려운 경우도 상당수다. 이들은 후손이 없으니 세월이 흐르면서 자연스레 잊힐 수밖에 없는 처지다. 후손을 찾지 못한 인천 출신 독립운동가들을 꾸준히 기억하고 재조명해야 하는 게 인천의 책무일 터이다.국가보훈처에 따르면, 현재까지 인천을 본적으로 둔 독립유공자 가운데 후손을 찾지 못한 인물은 21명이다. 국가보훈처는 독립유공자 본적을 '인천'과 '강화'로 분류하고 있는데, 강화사람이 17명으로 가장 많다. 인천 본적은 4명이다. 일제강점기 인천의 행정구역이 광역시가 된 현재의 인천 행정구역보다 훨씬 작았고, 본적이 확인되지 않은 인물도 상당수이기 때문에 국가보훈처 자료가 인천 모두를 포괄한다고 볼 수는 없다. 본적이 인천은 아니지만, 인천을 기반으로 활동한 독립운동가 중 후손을 찾지 못한 인물도 더 있을 게 분명하다.강화에서는 일본이 국권 침탈을 본격화하던 조선 말기 격렬한 '의병투쟁'과 1919년 3월 1만 명이 참여한 대규모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후손을 찾지 못하고 있는 강화지역 독립유공자 17명 중 의병투쟁과 만세운동에 각각 5명이 투신했다.강화진위분견대 장교였던 지홍윤(1865~1909)은 1907년 8월 9일 일본의 군대 해산에 반발한 진위대 봉기를 주도하며 강화성에서 일본군에 맞서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이후 지홍윤은 주력부대를 이끌고 황해도 해주로 탈출해 그 지역 의병부대와 연합전선을 구축하려다가 일본 밀정의 고발로 체포돼 순국한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40대 중반이었던 지홍윤이 충분히 가족을 꾸렸을 것으로 추측해볼 수는 있으나, 1991년 애국장 서훈을 받은 지 30년 가까이 후손은 나타나지 않고 있다. 김덕순은 1908년 6월부터 강화 교동을 중심으로 의병을 꾸려 일본 선원과 밀정을 처단하다가 붙잡혀 교수형으로 순국했다.서영백(1878~?)은 1908년 초 40여 명 규모의 김태의 의병부대에 합류해 총기와 군도로 무장하고 강화 일대에서 군자금을 모으다가 붙잡혔다. 그는 내란죄로 기소됐으나, 재판 과정에서 강도죄로 바뀌어 교수형을 선고받았다. 다만, 서영백의 판결문에는 '법무대신 고영희(高永喜)' 명의로 일본인 재판장에게 "서영백을 특별히 본 형에서 한 등급을 감한다"는 임금의 뜻이 있다는 훈령을 내린 후 종신형으로 감형받은 내용이 있다. 정도향(1867~1908)은 1908년 9월부터 강화도의 장사들을 모았다는 이능권(1864~1909)의 의병부대 '대동창의진'(大東倡義陳)에 가담했다. 정도향은 의병부대에서 관헌의 동정을 살피고, 부대원들에게 편의를 제공하는 활동을 하다가 같은 해 12월 20일 일본 경찰에 의해 참살당했다. 이재향(1875~?)은 강화 석모도 출신인데, 1908년 충북 청원군 일대에서 유현서(1882~1909) 의병부대원으로 활약하다가 체포된 기록이 있다.후손을 찾지 못한 강화지역 만세운동 유공자들은 대부분 1919년 3월 18일 '결사대장' 유봉진(1886~1956)이 이끈 대규모 강화 읍내 시장 시위에 참가했다. 권태철(1897~?)은 강화 만세시위 때 신문리 시장에서 큰 종이로 만든 태극기를 들고 선두에 서서 독립만세를 불렀다. 강화경찰서 순사 김덕찬이 태극기를 빼앗으려 하자 권태철은 오른손으로 기를 붙잡고, 왼손으로 김덕찬의 따귀를 쳤다. 체포된 권태철은 징역 10개월을 선고받았다.정홍문(1888~1928)은 유봉진과 함께 강화경찰서 앞에서 3시간 동안 "앞서 유치한 사람을 석방하고, 시장에서 칼을 뽑았던 김 순사를 쳐서 죽일 터이니 인도하라"고 외쳤다. 그는 징역 6개월을 선고받았다. 장연실(1868~?)과 최공섭(1902~?)도 이날 강화 만세시위에 적극적으로 가담했다가 체포돼 처벌받았다. 황준실(1902~?)은 1년 뒤인 1920년 양사면 철산리에서 오용진 등과 다시 대규모 만세시위를 벌이려다 발각돼 징역 1년형을 받았다.해외에서 독립운동을 펼친 강화사람들도 눈길을 끈다. 끝내 고국 땅을 밟지 못한 이들의 후손은 찾을 길이 더욱 막막하다.강화 길상면 선두리가 본적인 이건영(1886~1939)은 1910년부터 1930년까지 미주지역 한국인단체인 대한인국민회 샌프란시스코지방회원·회장, 로스앤젤레스지방회 경찰원·대의원·총무, 뉴욕지방회 총무 등을 지냈다. 대한인국민회가 발행한 '신한민보'를 보면, 이건영은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육십원 잡화상점'이라는 가게를 운영하면서 여러 차례 독립금과 국민의무금 등 독립운동자금을 지원했다. '신한민보' 1939년 12월 7일자 신문에는 그해 12월 1일 이건영이 뉴욕에서 별세했다는 부고가 실렸다.강화 길상면 온수리가 본적일 것으로 추정되는 장라득(1879~?)도 1908년부터 미국 오클랜드 등지에서 대한인국민회 지방회 회원 등으로 활동하며 해방이 될 때까지 여러 번 독립운동자금을 지원한 공로가 인정돼 2017년 대통령 표창이 수여됐다. 1910년대 멕시코에서 활동하다가 1920년대 쿠바로 건너간 방한조(1886~?)는 강화 선원면 창동이 본적이다. 해방 때까지 쿠바 한인단체 임원을 역임하면서 꾸준히 독립운동자금을 지원했는데, 2018년에서야 건국포장에 추서됐다. 멕시코에서 한인 이민자 자녀들을 위해 학교를 설립한 김윤원(1877~1920)도 강화 출신 독립유공자다.서울 경신학교 학생이던 강화 화도면 출신 유갑순(1892~1921)은 1920년 5월 서울에서 상하이 임시정부 교통국 경성 담당 이원직(?~1945)에게 임정이 발행한 공보와 독립신문을 받고, 이를 배포하기 위한 자금과 동지를 모으다가 체포됐다. 유갑순은 주변 사람들에게 임시정부 총감부 명의 특파원증을 보이며 "우리들 청년이 묵시할 시대가 아니다. 서로 함께 조선 독립을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하자"고 설명했다는 기록이 판결문에 나온다. 징역 5년을 선고받은 유갑순은 1921년 6월 27일 옥중에서 숨을 거뒀다.1919년 3월 5일 서울 남대문역 앞에서 만세운동을 하다가 체포돼 징역 6개월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은 여성 유점선(1901~?)도 강화 출신이다. 1930년 1월 16일 서울 경성여자상업학교 3학년 재학 중에 광주학생운동 영향을 받아 만세운동과 동맹휴교에 참여하다 구류 20일 처분을 받은 최덕임(1912~?)도 강화 출신 여성이다. 같은 시기 서울 근화여학교 2학년에 다니면서 만세운동과 동맹휴교에 동참한 여성 장상림(1913~?)은 인천 화평동이 본적으로 나온다. 최덕임과 장상림은 지난해 대통령 표창을 받았다.인천 출신 정기인(1888~?)은 1907년 11월부터 1909년 11월까지 경기도 용인, 광주 등지에서 의병활동을 하다 체포돼 징역 7년을 선고받았다. 역시 인천 출신인 황칠성(1894~?)은 1919년 3월 28일 경기도 수원 송산면 사강리(현 화성시)에서 만세운동에 참여하면서 일본인 순사를 처단하다 붙잡혀 징역 7년형을 받았다. 인천에서 감옥살이를 하던 백범 김구를 구출할 계획을 세웠고, 훗날 백범을 만나 김창수였던 이름을 김구(金龜)라고 고쳐주기도 한 민족운동가 인천의 유완무(1861~1909) 역시 서훈을 전달받을 후손이 없는 상황이다. 유완무는 북간도와 연해주 일대에서 독립운동 근거지를 개척하기 위한 활동을 하다가 그곳에서 최후를 맞았다. /박경호기자 pkhh@kyeongin.com일러스트/성옥희기자 okie@kyeongin.com/아이클릭아트1920년 강화 양사면에서 대규모 독립만세시위를 벌이려다 발각돼 옥고를 치른 황준실 지사. /국사편찬위원회 제공미국에서 활동한 강화 출신 이건영 지사가 샌프란시스코에서 잡화상점을 운영한다는 '신한민보' 1919년 3월 22일자 기사. 출처/공훈전자사료관쿠바 하바나에서 대한인국민회 하바나지방회 총무를 맡고 있는 강화 출신 방한조 지사가 광복군후원금을 걷는 데 쉬지 않고 있다는 내용의 '신한민보' 1941년 5월 8일자 기사.상하이 임시정부 공보물을 배포하고, 독립운동자금을 모금하다가 붙잡혀 옥중에서 숨을 거둔 유갑순 지사. /국사편찬위원회 제공

2019-12-18 박경호

[독립운동과 인천·(39)]조병창에서 독립운동 벌인 오순환과 황장연

캠프마켓 부지 옛 일제 병참기지감시속 두 노동자의 용감한 활동인천 부평에 있던 '일본육군인천조병창(이하 조병창)'은 일제의 핵심 병참기지였다. 일제는 조병창을 본격적으로 운영한 1941년부터 매년 엄청난 양의 군수물자를 생산했다. 일제는 생산량을 맞추기 위해 조선인 노동자를 대규모로 동원했다. 전쟁 말기에는 초등학교를 갓 졸업한 어린 학생까지 강제 동원했다.한반도 최대 규모의 군수공장인 조병창에선 소총과 포탄, 탄환뿐만 아니라 선박과 무전기까지 만들었는데, 조선인 노동자들에게 같은 공정만 반복하게 했다. 자신이 무엇을 만드는지도 모르게 했다. 인천대학교 이상의 교수가 2017년 7~8월 조병창 노동자 12명의 구술을 채록한 자료를 보면 한 노동자는 부품검사를 하고 이상이 없으면 탄창에 쇠도장을 찍는 업무만 했다. 다른 노동자는 칼이 제대로 만들어졌는지 판단하는 단순한 일만 했다. 조선인 노동자들이 무기 제조 종합기술을 습득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한 방편이었다.일제의 엄중한 감시 속에서도 조선인 노동자들은 조병창에 들어가 무기를 밀반출하거나 무기 제조법을 빼내려고 했다. 독립운동가 오순환(1921~1992)과 황장연(1923~2008)이 대표적이다.오순환은 조병창에 위장취업해 무기 제조법을 배우려고 했다. 그는 조병창에서 배운 기술로 무기를 만들어 조선 총독이나 일제 고관을 처단하고자 했다. 오순환의 계획은 안타깝게도 조병창 내에서 적발돼 실패로 돌아갔으나, 독립운동가들이 암시장에서 총기를 구매했던 점을 고려하면 매우 획기적인 시도였다.황장연은 조병창에서 만든 무기를 빼돌리려 했다. 황장연은 동료 30여 명을 모아 '고려재건당(高麗再建黨)'을 조직했다. 또 임시정부 요원과 접선해 권총 3정과 실탄 50발을 전달하려고 했다.조병창 침투 독립운동은 제대로 조명되지 못했다. 조병창은 해방 이후 미군부지로 징발당했다. '애스컴씨티'와 '캠프마켓'이다. 캠프마켓 부지반환을 앞둔 지금, 조병창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를 우리가 다시 주목할 필요가 있다. /김주엽기자 kjy86@kyeongin.com

2019-12-11 김주엽

[독립운동과 인천·(39)]조병창에서 독립운동 벌인 오순환과 황장연

부평에 위치 매월 소총 4천정·탄환 70만발 등 생산학생까지 강제동원… 헌병·경찰 삼엄한 경비 '통제'오순환, 총독 암살 위해 창천체육회·조기회 만들어제조법 배우려 '위장취업'… 이듬해 발각 고문 당해황장연은 감시 심한 내부서 '고려재건당' 조직 눈길권총·실탄 등 임정요원에 전달하려다 붙잡혀 '옥고'일제는 1930년대 후반 인천 부평을 중국에 진출하려는 일본의 대규모 병참기지로 쓰기 위한 작업에 돌입했다. 중일전쟁 당시 한반도에서 필요한 군수물자를 조달하는 것이 편리하다고 판단한 일본은 1941년 부평에 대규모 군수 공장의 문을 열었다. 지금은 '캠프마켓'이라는 이름으로 인천 부평 한복판에 자리 잡고 있는 '일본육군인천조병창(이하 조병창)'이다.당시 조병창은 한반도에서 가장 규모가 큰 무기 제조 공장이었다. 이 때문에 조병창에 들어가 무기를 밀반출하거나 무기 제조법을 빼내기 위한 독립운동가들의 조직적인 움직임이 있었다. 독립운동가 오순환(1921~1992)과 황장연(1923~2008)이 대표적이다. 군수 공장이었던 탓에 조병창의 경비는 매우 삼엄했지만, 오순환과 황장연은 그 속에서도 조국의 독립에 보탬이 되기 위해 노력했다.연구자들은 조병창 내에서 독립운동을 한 인물들이 더 많았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하지만 해방 후 조병창 부지는 미군이 사용해 왔기 때문에 관련 자료를 확보하기 어려웠다. 캠프마켓 부지 반환을 앞둔 만큼 이제라도 깊이 있는 연구가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공장들도 많았지만, 창고도 많았어요. 공장에서 만든 물건들을 쌓아 두던 곳이죠. 안에 기차가 다녀서 가끔 물건들을 싣고 가기도 했어요."조병창 내 병원에서 3년간 일했던 지영례(91) 할머니는 조병창에 대해 이같이 설명하고 있다. 인천대학교 이상의 교수가 2017년 7~8월 채록한 조병창 노동자 12명의 구술과 관련 자료를 보면 조병창은 3개의 공장으로 구성돼 있었다. 조병창에서 일했던 노동자들은 규모를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컸다고 증언하고 있다.일본 육군은 서울과 인천의 중간에 있는 데다, 인천항에서 멀지 않고, 경인선을 이용해 곧바로 물자를 운송할 수 있는 부평 지역을 조병창의 부지로 선택했다. 또 부평에는 일본군 제20사단이 담당하던 부평연습장이 있어서 대규모 부지를 확보하는 데 수월했던 점도 작용했을 것으로 연구자들은 보고 있다.조병창에서는 매달 소총 4천정과 총검 2만개, 소총 탄환 70만발, 포탄 3만발, 군도(軍刀) 2만개, 차량 200량을 생산했다. 1944년부터 광복 때까지는 총 250여척의 선박과 200여개의 무전기를 제작했다는 기록도 남아 있다. 심지어 당시 일본 육군이 비밀리에 잠수함을 만들던 인천 동구 만석동 조선기계제작소에 관련 부품을 공급했다.조병창이 본격적인 운영을 시작한 1941년부터 문을 닫을 때까지 4년여 동안 조병창의 총생산액은 1억1천330만엔에 달했다. 1940년 우리나라의 쌀 한 가마니(80㎏)의 가격이 22엔이었던 점을 고려하면, 4년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 1조300억원에 달하는 제품을 만들어 낸 셈이다. 초기 조병창에서는 공개적인 모집을 통해 조선인 노동자들을 모았다. 공개 채용 형태로 조병창에 입사한 노동자들은 월급을 제대로 받지 못했다고 한다. 이상의 교수 채록에 따르면 당시 조병창에서 근무했던 노동자들은 "집으로 돈을 부치기는커녕 오히려 집에서 (돈을) 보내줘야만 할 정도로 열악했다"고 증언하고 있다.태평양 전쟁이 한창이던 1944년 조선총독부는 '국민징용령'을 시행했다. 이때부터 조병창에선 학교에 다니던 학생들까지 강제로 동원해 부족한 노동력을 채웠다. 조선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보에서는 1944년 5월 "결전비상조치요강에 기초한 제1회 학도동원이 시행돼 '경성공업(현 서울대학교 공과대학)', '인천중학(현 제물포고등학교)', '인천상업(현 인천고등학교)', '인천공업(현 인천기계공업고등학교)', '인천고여(현 인천여자고등학교)', '소화고여(현 박문여자고등학교)' 남녀생도 360명이 인천육군조병창에 입창했다"고 보도했다. 일본 육군은 조병창에 강제로 끌려간 학생들에게는 월급도 주지 않았다.조병창은 전쟁에 필요한 물자를 공수하는 공장이기 때문에 일본 육군 헌병대와 경찰의 엄중한 감시 속에서 운영됐다. 조병창에서 일한 노동자들이 "조병창에 들어가면 굴뚝에 들어간 것처럼 어딘지 알 수 없었다"고 말할 정도였다. 대부분 노동자는 자신의 숙소와 작업장의 한정된 지역에서만 통행할 수 있었다. 노동자 가운데 조금이라도 의심스러운 행동을 하는 사람은 체포되거나 밖으로 추방됐다.노동자들을 상대로 한 철저한 통제가 계속됐다. 그러나 이곳에서도 독립운동은 계속 진행됐다. 오순환은 독립운동을 하고자 스스로 조병창에 들어간 인물이다. 독립운동가 김승학이 1970년 발간한 '한국독립사'에서는 오순환을 1921년에 태어난 독립운동가로 소개하고 있다. 서울 창천감리교회 청년회에 속해 있던 그는 회원 21명을 모아 항일 결사 단체인 '창천체육회(滄川體育會)'와 '조기회(朝起會)'를 조직했다.창천체육회와 조기회는 독립운동의 방법으로 조선총독과 일제 고관 암살을 실행에 옮기기로 했다. 이를 위해 그는 1941년 10월 함께 활동하던 김군회(1918~1963), 정은태(1921~1996) 등과 함께 조병창에 위장 취업했다. 조병창은 국내에서 가장 규모가 큰 군수공장이었기 때문에 일본군의 무기 제조 기술을 배우기 위함이었던 것이었다. 당시 독립운동가들은 암시장을 통해 구매한 총기를 사용했다고 한다. 이런 점에서 보면, 오순환은 매우 획기적인 시도를 한 셈이다.안타깝게도 오순환의 계획은 이듬해 경찰에 발각됐고, 함께 잠입한 회원들과 붙잡혀 혹독한 고문을 당했다. 오순환이 조병창에서 배운 기술로 실제 무기를 만들었는지는 밝혀지지 않고 있다. 오순환은 1944년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2년형을 선고받아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됐다. 그의 큰아들인 오세대(73)씨는 9일 경인일보와의 전화 인터뷰에서 "아버지는 해방 후 철공소를 운영할 정도로 손재주가 좋은 사람이었다"며 "조병창에서 몇 달만 일하면 충분히 무기 제조 기술을 배울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 것 같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아버지는 매우 강직했고, 불의를 보면 참지 못했다"며 "고문 후유증으로 평생을 허리통증에 시달렸지만, 항상 독립운동에 참여했다는 것을 매우 자랑스럽게 여기셨다"고 덧붙였다.조병창에서 독립운동을 했던 사람은 오순환뿐만이 아니다. 황장연은 조병창에서 제작된 무기를 빼돌려 임시정부에 전달하려 했던 인물이다.국가보훈처의 독립유공자 공훈록에서는 그가 1923년 경기도 파주에서 태어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황장연이 조병창에 언제 들어갔는지에 대해선 관련 기록이 남아 있지 않아 확인되지 않고 있으나, 그가 조선군법회의에서 재판을 받은 점을 보면 강제로 동원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1943년 5월 황장연은 조병창에서 함께 일하던 30여명의 동료들과 '고려재건당(高麗再建黨)'이라는 비밀 조직을 만들었다. 당시 한반도 내에 어느 곳보다 철저한 감시가 이뤄지는 조병창에서 그가 독립운동을 위한 단체를 만들었다는 점이 놀랍기만 하다. 1944년 9월 황장연은 임시정부 요원이던 신교선과 접선해 권총 3정, 실탄 50발을 전달하려고 시도했다. 하지만 조병창을 관리하던 일본 육군에게 발각됐고, 그는 이듬해 2월 조선군법회의에서 징역 1년형을 선고받아 옥고를 치렀다.오순환과 황장연 이외에도 조병창에서 독립운동을 벌인 인물이 더 많았을 것으로 보이는 자료도 있다. 재미교민단체가 발행한 '국민보'는 1945년 8월 15일 자 신문에 "군수공장 공인 100여명이 폭력단을 만들어 적의 기관을 파괴할 폭탄과 화약을 감추어 두었다가 붙잡혔다"고 보도하기도 했다. 조병창에 강제 동원됐던 보성전문학교(현 고려대학교) 학생은 숙소 내 화장실에 '조선 독립만세'라고 적은 종이를 붙이기도 했고, 작업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않았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일부는 '일본의 전쟁을 유리하게 만드는 무기를 만들지 말자'며 쟁의행위를 일으키기도 했다.아쉽게도 조병창에서 활동했던 독립운동가들에 대해서는 제대로 알려지지 않고 있다. 일본 패망 직후에는 조병창을 관리하는 일본인들이 관련 문서를 파쇄하고 본국에 돌아간 데다, 미군이 오랜 기간 그 터를 차지하고 있어서 조사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은 탓이라는 게 연구자들의 설명이다. 인천연구원 김창수 부원장은 "오순환과 황장연은 일제가 가장 엄격하게 통제하던 조병창에서 독립운동을 벌였다"며 "이들뿐만 아니라 조병창 내에서 활동했던 더 많은 독립운동가의 행적을 밝혀내기 위한 연구가 절실한 시점"이라고 했다. /김주엽기자 kjy86@kyeongin.com일러스트/박성현기자 pssh0911@kyeongin.com미군(軍) 노릅 파이어(Norb-Faye)가 촬영한 1948년 부평 일대의 전경. 하얀색 바탕으로 표기된 부분이 당시 건물이고, 검은 테두리 친 표기가 현재 시설이다. /김현석 인천민속학회 이사 제공

2019-12-11 김주엽

[독립운동과 인천·(38)]용유도의 3·28만세운동

나수영 前면장 십시일반 기념비 건립보존회 만들어 후손들에 알리기 노력"삼월 찬 바람에 몸을 던져 산과 바다에 울리도록 외친 만세 소리 / 이제 비바람 지나간 하늘에 영겁으로 뻗는 웃음 되어 조국의 미래에 꺼지지 않는 불을 밝히리."인천 용유도 마시안해변 인근에는 3·1독립만세운동 기념비가 있다. 인천 영종·용유도 지역의 유일한 3·1 운동인 '3·28 만세운동'을 기리기 위한 것이다. 서울 배재학당을 다니던 조명원(1900~1968)은 3·1운동 소식을 섬마을에 전했고, 조종서(1898~?)·최봉학(1897~1955)·문무현(1899~1970) 등과 함께 '혈성단(血誠團)'을 만들어 마을 사람들과 만세운동에 나섰다.나수영(91) 전 용유면장은 그 독립운동을 기리기 위해 기념비를 세웠다. 그는 면장으로 일하던 1982년 '용유면 삼일독립만세기념 공적비 건립 추진위원회'를 만들어 기념비 제작을 추진했다. 그는 "우리 세대는 어린 시절 어른들을 통해 용유도에서 만세운동을 했다는 사실을 들었지만, 기록을 남기지 않으면 후손들은 독립운동 사실을 전혀 알지 못할 것 같았다"며 "당시 용유도에 살던 주민들이 십시일반 돈을 보탰고, 부족한 돈은 주민 스스로 땅을 팔아서라도 채웠다. 사비를 털어서라도 역사적 사실을 꼭 기념하고 싶었기 때문이다"고 말했다.나 전 면장의 노력으로 만세 함성이 울린 지 63년 만인 1983년 3월 28일 기념비 제막식이 열렸다. 이곳에서는 매년 3월 1일 선조들의 만세운동을 기리기 위한 행사가 열린다. 용유도 주민들은 만세운동을 후대에 계속 알리기 위해 '용유 3·1 독립만세 기념비 보존회'를 만들어 기념비를 관리하고 있다. 인천 중구청도 2017년 추모공원 기념비를 보강했다. 서병구 보존회 회장은 "우리 지역에도 이러한 훌륭한 사람들이 있었다는 사실을 여러 곳에 전하고 싶은 심정으로 기념비를 관리하고 있다"며 "일제의 압제에도 굴하지 않고 독립운동을 벌인 우리 지역의 훌륭한 역사를 후손에게 전달하기 위해 노력하겠다"고 했다. /김주엽기자 kjy86@kyeongin.com지난 3일 오후 인천시 중구 용유동 행정복지센터에서 서병구 3·1운동기념비보존위원회장(왼쪽)과 나수영 전 용유면장이 용유 3·1 만세운동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있다. /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

2019-12-04 김주엽

[독립운동과 인천·(38)]용유도의 3·28만세운동

'혈성단' 조명원·조종서·최봉학·문무현 앞장이기복·유웅렬·이난의 '태극기' 제작 힘보태일본인에 땅 빼앗긴 주민들 불만 극에 달해1919년 3월 28일 관청리 일대 150여명 집결주도자들 복역후에도 고문 후유증 등 '고통'1991년 용유中 학생들, 후손 인터뷰 책 발간'아름다운 내 고장…' 중요 연구자료로 꼽혀1919년 3월의 독립운동은 인천의 작은 섬 용유도에까지 번졌다. 용유도 만세운동은 3월 28일에 일어났다. 서울에서 공부하던 조명원(1900~1968)이 3·1 만세 운동 소식을 섬으로 가져왔고, 조종서(1898~?)·최봉학(1897~1955)·문무현(1899~1970) 등이 함께 마을 사람들을 이끌고 만세를 외쳤다. 용유도 사람들은 이를 3·28 만세운동이라 부른다.용유도는 지금은 인천국제공항이 자리 잡은 곳이다. 인천대교와 영종대교 등 연륙교로 연결돼 있어 언제든 드나들 수 있어 육지나 다름 없는 지역이다. 하지만 100년 전만 하더라도 용유도는 인천항에서 20㎞ 떨어진 외딴 섬이었다. 1919년 용유도에서 작은 돛단배를 타고 인근 영종도로 간 뒤, 이곳에서 또 배를 갈아타야만 인천에 나갈 수 있었다. 늦게나마 만세운동 소식을 접한 용유도 주민들도 조국의 독립을 위해 힘을 모았다."조선 운동을 거할 것이니 28일 관청리 광장에 모이라."1919년 3월 27일 밤. 용유도의 7개 마을에는 이러한 내용이 담긴 격문 80여 통이 배포됐다. 이 격문을 제작한 사람은 조명원과 조종서, 최봉학, 문무현 등 당시 용유면 남북리에 거주하던 젊은 청년들이었다.서울 배재학당에 다니던 조명원은 서울에서 열린 3·1 운동에 참여한 이후 같은 달 23일 독립선언서를 가슴에 품고 고향 용유도로 돌아왔다. 남북리 대지주의 손자였던 그는 어린 시절 개인 교사에게 한학을 배우다가 서울로 유학한 것으로 전해진다. 조명원은 5촌 조카 조종서와 최봉학, 문무현과 '혈성단(血誠團)'이라는 비밀 독립운동단체를 만들고, 용유도에서도 만세 운동을 벌이자고 결의했다. 혈성단이 만들어진 곳은 지금 주소로 인천 중구 남북동 868의 '조병수 가옥'이다. 이곳은 조선 말기인 1890년 지어진 옛집으로, 1997년 인천시 문화재자료 제16호로 지정되기도 했다. 현재 이 집에 거주하는 조병수 씨는 조명원과 6촌 관계다.이들은 만세운동 거사 일을 5일 뒤인 28일로, 거사 장소는 당시 용유중학교가 있던 관청리 일대로 정했다. 혈성단이 이곳을 만세 운동 장소로 선정한 이유는 용유도에서 가장 넓은 들판이 있던 지역이었기 때문이다. 혈성단은 격문과 태극기를 만들어 한글을 읽을 줄 아는 주민들에게 집중적으로 배포했다. 용유면 선임서기로 근무하던 이기복(1889~?)도 거사 소식을 접하고 을왕리에 있는 유웅렬(1896~1939)의 집에서 태극기를 제작했다. 조선총독부 기관에 근무하고 있었지만, 독립을 향한 열망까지 꺾이지는 않았던 거였다. 을왕리에 거주하던 이난의(1884~1957)도 만세 운동에 참가하기 위해 태극기를 제작해 마을 주민에게 나눠줬다.28일이 되자 용유도 주민들은 관청리 광장에 모였다. 조선총독부가 3·1 운동 동향을 일본 정부에 보고한 문서에 따르면 당시 관청리 광장에는 150여 명의 용유도 주민들이 집결했다. 1894년 발행한 '영종진 사례책'에 용유도에 248호가 거주한다고 기록돼 있는 점을 고려하면 1910년대 용유도의 인구는 1천명~1천500명 안팎이 될 것으로 추정된다. 전체 인구의 10분의 1 정도가 만세 운동에 참여한 것으로 볼 수 있다.많은 수의 용유도 주민이 독립운동에 참여한 이유는 이들이 일본인에게 큰 피해를 당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조선총독부는 1912년 '토지조사령'을 공포했다. 지세 부담을 공정하게 하고, 근대적 토지소유권을 확립한다는 명목이었다. 하지만 실제 목적은 식민통치에 필요한 조선총독부 재정을 안정적으로 확보하기 위한 조치였다. 당시 토지 조사 사업은 조선 총독이 정한 기간 안에 토지 소유권자가 직접 신고해 소유지로 인정받는 '신고주의' 방식으로 진행됐다. 구비 서류나 절차가 매우 까다로운 데다, 신고기간도 매우 짧아 많은 조선인이 토지를 빼앗기는 일이 발생했다. 조선총독부는 미신고 토지를 총독부 소유로 전환했고, 이를 일본인에게 헐값에 넘겨줬다.용유도의 사정도 마찬가지였다. 용유도에는 조선 시대부터 나라에서 운영하던 목장과 염전이 많았다. 1910년대만 하더라도 특정 토지 소유자가 없는 땅이 많았다. 토지 조사가 마무리된 이후 이러한 토지는 모두 조선총독부 소유로 편입됐다. 조선총독부는 이를 일본인에게 판매했다. 조선총독부 관련 서류를 살펴보면 1919년 총독부는 일본인 오구라 류스케에 용유도 토지를 양도한 것으로 나온다. 그는 1926년 용유도에 있는 임야 95만여㎡를 혼자 소유했다. 자신의 땅을 일본인에게 빼앗긴 용유도 주민들의 불만은 극에 달한 상황이었다.용유도 주민들은 대형 태극기를 대나무 죽창에 매달아 관청리 광장 중앙에 꽂았다. 이날 만세운동에 참여했던 주민들은 "대나무 장대에 있는 대형 태극기는 장정 두 사람이 들기에도 힘들 만큼 컸다"고 당시를 회상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주민 150여 명은 독립선언식을 거행하며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대형 태극기를 앞세운 혈성단원이 '대한독립만세'를 선창했고, 주민들은 태극기를 흔들며 용유도 전 지역을 돌아다녔다. 당시 만세운동에는 용유면 면장이었던 정우용도 참여했다고 한다. 이날 시작된 용유도 만세 운동은 이후 이틀이나 계속됐다.용유도의 만세 운동은 뱃길로 십분 정도 떨어져 있던 무의도에도 영향을 끼쳤다. 당시 무의도는 인천항 축항 공사에 필요한 석재를 조달하기 위한 채석장이 있었는데, 이곳 주민과 인부들은 인천이 바라다보이는 곳에서 만세를 불렀다. 어찌 된 영문인지 채석장 감독이었던 일본인 마쓰다 미야타로오도 주민들과 함께 만세를 외쳤다고 전한다.조선총독부가 3·1 운동 동향을 파악한 문서에 따르면 혈성단 단원을 포함한 만세운동 주요 참가자들은 모두 일본 경찰에 붙잡혔다. 이들은 인천경찰서로 옮겨진 뒤 가혹한 구타와 혹독한 고문을 당했다. 당시 재판기록을 보면 만세 운동을 주도한 조명원은 징역 1년 6월을 선고받았고, 조종서와 최봉학, 문무현 등 나머지 혈성단원은 징역 1년형을 받았다. 을왕리에서 독립운동에 참가했던 유웅렬도 태형 90대의 판결을 받는 등 이날 만세운동으로 처벌받은 용유도 주민은 11명이나 됐다. 용유면 서기로 일하던 이기복은 체포되지는 않았지만, 직업을 잃어야만 했다.조명원 등 혈성단원은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한 이후 큰 어려움을 겪었다. 조명원은 고문 후유증으로 거동이 불편한 데다, 일제의 감시로 평생 제대로 된 직업을 갖지 못하다가 세상을 떠났다. 조종서는 일본 경찰의 감시를 피해 강화도로 이주했지만, 6·25 전쟁 당시 숨진 것으로 전해진다. 최봉학과 문무현, 유웅렬 등도 고문 후유증으로 고생했다고 한다."을왕 해수욕장이 있고 해당화 해송 숲이 해변을 덮고 있는 곳이 내 고장 용유도입니다. 이런 아름다운 내 고장에 일본 제국주의의 군화가 '용유의 얼'을 앗으려 했습니다. 1919년 3월 28일 우리 선조들은 분연히 일어섰습니다."1991년 용유중학교에 다니던 향토조사반 학생 8명은 이들의 독립운동을 기리기 위해 '아름다운 내 고장 용유도'라는 책을 냈다. 당시 학생들은 용유도에 거주하던 만세운동 참가자 후손들을 인터뷰해 이 책을 만들었다고 한다. 이는 현재 남아 있는 3·28 독립운동에 관한 가장 중요한 기록이라는 게 연구자들의 설명이다.이들의 독립운동을 기념하기 위한 지난해 기획 전시를 진행한 바 있는 영종역사관 김연희 학예사는 "영종·용유도 지역의 유일한 독립운동이지만, 관련 사료가 매우 부족한 상황"이라며 "용유도의 만세 운동은 외부의 지원 없이 섬 주민들 스스로 실행했다는 데 큰 의의가 있다. 지금이라도 관련 연구가 더 이뤄져야 할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김주엽기자 kjy86@kyeongin.com영종 용유 만세운동 기념비일제감시대상 인물카드 사진. 왼쪽부터 조명원, 조종서, 최봉학, 문무현 지사. 출처/국사편찬위원회조명원 등 혈성단원들이 독립운동을 계획했던 조병수 가옥. /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용유도 주민들이 만세 운동을 벌인 관청리 광장의 현재 모습. /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용유도 3·28 독립운동 당시 이난의가 사용한 태극기. 가로 40cm, 세로 60cm이며 천이 닳아 주위가 헤졌다. 우측에는 대한독립만세가 쓰여 있고 괘의 좌우가 바뀌어 그려져 있다. 1989년 국가보훈처에 기증했다. /국가보훈처 제공용유중학교 학생들이 만든 '아름다운 내 고장 용유도' 표지.

2019-12-04 김주엽

[독립운동과 인천·(37)]정재홍의 육혈포

1907년 박영효 귀국 환영회 자리서암살용 권총으로 사회에 경종 울려'육혈포(六穴砲)'는 탄환을 넣는 구멍이 여섯 개 있는 권총이다. 보통 탄창이 회전식으로 된 연발 권총 리볼버(revolver)를 육혈포라 불렀는데 국립국어원은 그 어원이 확실치 않다고 밝히고 있다.대한제국 말기와 일제강점기 육혈포를 비롯한 각종 권총은 애국지사의 무기였다. 안중근이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할 때 사용했던 무기도 권총이었다. 안중근이 사용했던 권총은 벨기에산 브라우닝 M1900으로 리볼버가 아니라 손잡이에 탄창을 끼워 넣는 자동권총이었다. 안중근은 자동권총 외에도 스미스&웨슨의 38구경 리볼버(육혈포)도 마련했지만, 암살에는 사용하지 않았다고 한다. 육혈포는 소지가 간편해 품에 숨기기 쉽다는 장점이 있어 일제 관료에 대한 암살에 쓰였고, 친일파를 협박하는 데 쓰이기도 했다. 일제는 독립운동 자금 모집을 위해 육혈포로 부호들을 겨눈 애국지사들을 강도죄로 엮기도 했다.이처럼 육혈포는 주로 적을 겨누는 데 쓰였지만, 자신을 겨누는 데 사용한 독립운동가가 인천에 있었다. 계몽운동가로서 인천에 학교를 설립해 인재 육성으로 나라의 독립 기반을 마련하는 데 힘썼던 정재홍(1867~1907)이다.조선 말기 근대 문물을 도입해야 한다고 주장한 개화파들이 을사늑약 이후 자연스럽게 친일의 옷으로 갈아입으려던 시기 대한자강회 인천지회장이었던 정재홍은 그들의 앞에서 육혈포로 자결했다. 갑신정변 실패로 일본에 망명했다가 친일파로 변절해 1907년 귀국한 개화파 박영효의 귀국 환영회 자리에서였다. 계몽과 개화를 내세워 친일을 정당화한 이들에 대한 일종의 '선전포고'였다. 정재홍은 변절자를 쏘고 자결할지와 자결만으로 사회에 경종을 울릴지를 번민하다 자결을 택했다. 저격은 복수와 또 다른 적(敵)을 만들고 국가의 행복에 도움이 안 된다는 판단이었다.그의 육혈포가 정확히 어떤 총이었는지 어디서 구해서 어떻게 처분됐는지는 밝혀지지 않았다. 육혈포의 총구만큼이나 뜨거웠던 독립을 향한 그의 열정만이 식지 않고 인천 지역에 전해질 뿐이다. /김민재기자 kmj@kyeongin.com

2019-11-27 김민재

[독립운동과 인천·(37)]정재홍의 육혈포

대한자강회 활동·인명의숙 설립 등 인천 근대교육운동 앞장 불구1천명 앞에서 목숨 끊어… 사이비 선각자 겨냥 '순교자 길' 택한듯의연금 모집·추모 잇따르고 그가 뿌린 '씨앗' 사립학교 개교 줄이어2000년대 중반 일생 복원 시작… 흩어진 조각 맞추기 과제로 남아대한제국 말기 근대교육운동은 우리 힘을 스스로 기르자는 '자강론(自强論)'이 바탕이었다. 그러나 일부 사이비 지식인들은 계몽을 앞세워 친일의 길에 들어섰다. 인천의 독립운동가이자 교육자였던 정재홍(鄭在洪·1867~1907)은 이에 분개한 나머지 망국의 길목에서 친일로 변절한 개화파 박영효 앞에서 육혈포(권총)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을사늑약 이후 사실상 일본으로 주권이 넘어간 때 자신의 목숨을 바쳐 친일세력을 향해 경고한 거였다. 그는 인천 근대교육운동의 선각자인 동시에 의열투쟁의 선봉에 선 독립지사로 기억되고 있다.서울에서 태어난 정재홍이 언제, 어떤 연유로 인천에 왔는지는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다. 아마 일자리를 얻기 위해 인천에 자리를 잡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는 1903년 말부터 인천에서 운송업과 중계무역을 주로 하는 해운업체 대한유성태호회사(大韓裕盛泰號會社)의 사무장과 총무과장으로 일했다.정재홍은 단순한 회사원이 아니었다. 1907년 1월 인천항의 유지들은 대한자강회 인천지회를 설립했는데, 정재홍이 지회장으로서 이를 주도하며 발기인 대회에서 지회 설립 취지를 낭독했다. 대한자강회는 국민 교육으로 국력을 길러 독립의 기초를 마련하자는 취지로 1906년 서울에서 설립된 계몽단체다. 대중 강연과 교육기관 설립, 국채보상운동 등을 이끌었다. 당시 경기도에서 지회가 설립된 곳은 인천, 강화, 남양 3곳뿐이었다. 대한자강회 인천지회에 소속된 인천항 유지들은 대구에서 국채보상운동이 시작되자 의연금 모금을 주도하기도 했다.정재홍은 인재를 길러내야 독립국으로 나아갈 수 있다고 믿었다. 그래서 1907년 5월 지금의 경인전철 도원역 부근 우각동에 인명의숙(仁明義塾)이라는 사립 교육기관을 설립했다. 당시 인천항의 사업가들이 학교설립을 위한 기금을 마련하는 데 큰 도움을 줬다. 정재홍은 학교 운영뿐 아니라 학생들이 상급학교에 진학할 수 있도록 지원했고, 외국 유학을 돕기도 했다. 인명의숙은 1912년 인천 최초의 공립보통학교인 창영초등학교에 병합됐다.대한자강회를 중심으로 계몽과 근대교육에 앞장섰던 정재홍은 1905년 을사늑약 이후 사실상 식민지로 전락하게 된 조국의 운명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특히 어쭙잖게 지식인을 자처하면서 친일의 경계에 선 주변의 동지들을 보며 큰 결단을 내렸다.당시 일본은 을사늑약을 계기로 친일 관료와 지식인, 단체를 포섭하는 데 힘을 쏟았다. 관비 유학생 양성과 정치 망명자의 사면으로 한국 침략의 기반을 닦았다. 대표적인 예가 급진적 개화파 박영효의 사면(1861~1939)이었다. 명문가 출신 박영효는 일찍이 개화사상에 눈을 떠 근대 문물의 수용을 주장했지만, 갑신정변(1884년)의 실패로 일본 망명길에 올랐다. 그는 1907년 을사오적 박제순의 도움으로 사면을 받아 귀국해 이완용 내각의 대신으로 일했다. 우국지사가 친일파로 변절한 순간이었다.정재홍은 1907년 6월 30일 서울 북서 농상소(農桑所)에서 열린 박영효의 귀국환영회를 거사 일로 잡았다. 개화파의 상징과도 같았던 박영효의 귀국행사는 국민교육회, 대한자강회 등 자강단체 임원들이 준비했다. 계몽을 가장한 친일이 독버섯처럼 퍼져 나가는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대한자강회 인천지회장이었던 정재홍은 육혈포를 품에 숨긴 채 박영효의 귀국환영회에 참석했다. 그리고 환영회가 무르익을 무렵 연단에 올라 1천여명의 군중과 박영효 앞에서 자신의 복부를 향해 육혈포를 쏘았다. 정재홍은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그날 오후 8시 숨을 거두고 말았다.그의 품에서 발견된 유서에는 "저 대일본 보호 한국 국민 정재홍은 뜻이 있어 나라를 근심하는 우리 동포 모인 데 한 말씀 경고문을 삼가 드리노라. 나라 위하여 마땅히 죽을 때에 죽으면 그 효력이 천 배나 만 배까지에도 미치나 그러나 죽기 싫고 살기 좋은 인정이라 남으로 하여금 죽어 나의 살 명화를 도우려 하면 그 어찌 되리오 하나니 이곳에서 죽어 우리 동포 제군으로 하여금 몸을 버려 나라에 도움이 될 경우에 생각게 하심이로다"라 쓰여 있었다.정재홍의 자결은 그가 스스로 목숨을 끊음으로 사이비 선각자에 경고를 던졌다는 해석에 가장 무게가 실린다. 그가 유서에 쓴 것처럼 당시 사람들은 일본을 '보호국'으로만 여겼고 침략 야욕을 심각하게 인지하지 못했다. 그래서 일종의 경고 메시지를 던지기 위해 자결을 택했던 거다.이 사건은 '박영효 살해미수', 더 나아가 조선 통감이었던 '이토 히로부미 살해미수'였다는 확대 해석까지 나오는 등 의견이 분분한 상황이다.황현이 1864년부터 1910년까지의 사건을 시간 순서대로 쓴 '매천야록(梅泉野錄)'에는 "교원 정재홍의 자살"이라는 제목으로 이 사건이 나와 있다. 황현은 이를 "어떤 사람들은 그가 박영효를 살해하려고 하였으나 그와 적수가 되지 않음으로 자살하였다고 하였다. 정재홍은 본래 강개한 뜻을 가지고 시국에 분개하여 교육에 열성을 다하였고, 현재에도 학교의 임무를 띠고 있었다. 그는 '지사(志士)'라고 한다"고 기록했다.또 송상도가 대한제국 말기부터 광복까지 애국지사들의 사적을 기록한 책 '기려수필(騎驢隨筆)'에는 정재홍이 앞서 1907년 5월 일본에 갔던 이토가 조선에 돌아온다는 소식을 듣고 그를 살해하기 위해 환영회를 열어 초청한 뒤 쏴 죽이기로 결심했다는 내용이 나온다. 이밖에 박영효 환영회 때 이토가 참석하면 총으로 쏘려 했으나 신변에 위협을 느낀 이토가 참석하지 않아 분통함을 이기지 못하고 자결했다는 얘기도 '대한계년사(大韓季年史)'에 나온다. 한국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가 펴낸 '한국 독립운동의 역사'도 이를 근거로 정재홍이 이토를 살해하려다 미수에 그쳤다고 썼다. 국가보훈처의 정재홍 공훈록도 이토 미수를 공훈으로 기록했다.당시 정재홍의 품에서는 유서와 함께 '팔변가(八變歌)'라는 시가 나왔는데 "남을 죽이고 나만 살면 천리(天理)에 어긋난다. 죽이고 나도 죽자"는 구절이 나온다. 그러나 마지막에 "한 사람 나만 죽어 전국(全國)이 느끼고 깨달으면 이 몸에 영화(榮華)되고, 나라에 행복일세"라는 구절로 끝맺는다. 그가 이토 또는 박영효를 암살하려는 생각을 가졌으나 스스로 목숨을 끊는 자기 희생이라는 '순교자'의 길을 선택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이토 저격과 관련한 객관적인 기록은 남아 있지 않아 단지 야사(野史)일 뿐 정사(正史)로 보기에는 어렵다는 게 일반적인 평가다.정재홍의 죽음은 사회적으로 큰 파급효과를 불러왔다. 인천의 유지들은 그를 애국지사로 칭송하며 곧바로 의연금 모집에 나섰다. 황성신문과 대한매일신보가 이를 대대적으로 광고했고, 전국 각지 인사들이 추모에 동참했다. 저격의 대상자로 볼 수 있는 박영효조차 조의금 50환을 냈다. 서울 정동교회에서 열린 장례식에는 이동휘를 비롯해 윤치오, 김동완, 석진형 등 당대를 대표하는 계몽자강론자들이 참석했다.인천에서는 그의 죽음이 철시 운동과 일본인 가옥 방화 사건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이런 무력 행위보다는 그가 씨앗을 뿌린 교육사업이 점차 확장됐다는 점이 더 큰 의미를 지닌다고 할 수 있다. 인천의 사립학교 설립은 정재홍 사후 1년인 1908년 최전성기를 맞아 그해 명신학원, 흥인의숙, 명덕학원 등 7개의 사립학교가 개교했다.정재홍이 우리나라 독립운동사와 인천의 교육사에 남긴 발자국은 뚜렷하지만 아쉽게도 그의 생애 전반에 대한 연구는 미진한 상황이다. 그 흔한 사진 한 장 남아 있지 않다. 정재홍에 대한 기록이 생애 말년인 1906~1907년에 집중돼 있어 출생지와 학적 등 성장배경을 알기 어렵다. 단편적인 기록을 통해 그가 일찍이 아버지를 여의고 서울에서 홀어머니를 모시고 살았다는 것과 그의 장례가 정동교회에서 치러졌고, 인천에서 근대교육기관을 설립했다는 사실로 미루어 기독교인으로서 근대교육을 받았다고 추정할 뿐이다.물론 그에 대한 연구성과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독립유공자 서훈(애국장)을 계기로 인천의 인물로 주목을 받기 시작했던 2000년대 중반 무렵부터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김형묵 연구위원이 그의 일생을 복원하는 데 주력하고 있다. 김 연구위원은 중국 상하이에서 활동한 아나키스트 독립운동가 정해리(1895~1945)가 그의 첫째 아들인 정종화와 동일인임을 밝혀냈고, 민족 대표 33인 중 한 명인 최성모가 정재홍의 처남이라는 것도 확인했다. 인천의 유명한 연극인 정종원이 그의 둘째 아들이라는 것은 오래전부터 알려진 사실이다. 정재홍 일가의 흩어진 독립운동사 조각을 맞추는 것이 후대에 남겨진 과제다.김형묵 연구위원은 "인천에서 태어나지는 않았지만, 인천에서 계몽운동을 했고, 그가 설립한 인명학교가 창영초와 통합돼 나중에 인천 만세운동의 주축이 됐다는 점에서 인천에서는 큰 의미가 있는 인물"이라고 했다. 김 연구위원은 또 "한국 독립운동사를 연구하는 관점에서 본다면 그의 자결은 당시 대한자강회 등 계몽단체의 사회운동이 친일로 연결될지 모르는 때에 경종을 울린 의열투쟁이었다는 의미가 있다"며 "우리 독립운동사에 커다란 획을 그었다고 평가한다"고 했다. /김민재기자 kmj@kyeongin.com그래픽/성옥희기자 okie@kyeongin.com정재홍이 자결하기 전에 쓴 어머니 전상서. /독립기념관 제공1907년 7월 2일자 대한매일신보에 실린 정재홍 자결 기사.1907년 대한자강회월보에 실린 정재홍 약전. /독립기념관 제공

2019-11-27 김민재

[독립운동과 인천·(36)]권평근과 방향전환사건

무차별 폭력 전국서 400건 발생이후 피습 자제·위문금 이어져항구도시 인천은 예나 지금이나 외국인이 모여드는 국제도시였다. 특히 인천 개항장 차이나타운의 화교는 인천 역사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그런데 일제 강점기, 1931년 7월 3일 인천시민들이 차이나타운의 중국인들을 향해 무차별 폭력을 가한 불행한 사건이 있었다. 중국 동북지방의 동포 200명이 중국 농민과 충돌하고 박해를 당했다는 소식이 인천에 전해지면서 애꿎은 화교들에게 분풀이를 했던 거다. 이는 일본의 간계에 속은 중국 주재 조선일보 기자의 오보 때문에 빚어진 일이었으나 결과는 참혹했다. 인천에서 시작된 화교에 대한 보복은 전국으로 퍼져나가 400건의 폭력 사건이 발생했다. 인천에서만 200명의 피의자가 검거됐고, 화교들은 인천을 떠나 중국으로 도망쳤다. 이 일은 아직도 인천 화교사회에 잔인한 기억으로 남아있다.이때 인천의 애국지사이자 노동 운동가였던 권평근(1900~1945)은 중국인과 한국인을 상대로 이간계를 펼친 일제로 분노의 방향을 전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권평근은 이른바 '방향전환사건'을 계획해 중국이 아닌 일본 제국주의를 타도하는 데 민중이 힘을 모아야 한다고 했다. 일제에 침략당한 중국인과 한국인이 서로 싸울 게 아니라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당당하게 주권 회복을 위한 노력을 해야 한다고 애국 동지들을 설득했다.권평근의 방향전환사건은 비록 사전에 발각돼 실패하고 말았지만, 당시 인천 지역에 깊은 인상을 남겼다. 투쟁의 대상이 일제임을 명확히 재인식하게 한 사건으로 평가된다. 이후 각계의 중국인 피습 자제 요청이 이어졌고, 인천 객주조합과 미상조합, 포목상조합, 신용조합 등이 중국에 사과했다. 일본인이 중심이었던 인천상공회의소조차 중국에 위문금을 전달했다. 시민들도 기부금을 모집해 성의를 표했다.애석하게도 권평근은 해방 직후, 1945년 9월 8일 인천항에서 미군 환영행사 도중 질서유지를 명분으로 일본 경찰이 쏜 총에 맞아 숨을 거뒀다. 일제를 완전히 밀어내지 못했던 반쪽짜리 해방공간에서 그는 투쟁의 열매를 맛볼 새도 없이 생을 마감했다. /김민재기자 kmj@kyeongin.com

2019-11-20 김민재

[독립운동과 인천·(36)]권평근과 방향전환사건

만주 만보산 한·중 농민 갈등, 무력충돌로 부풀려 보도중국침략 구실 '오보'가 인천發 화교습격 비극 초래…음모 알아차린 권평근 배일연설 계획 도중 체포돼 옥고1919년 강화서 독립운동 가담… 죽산 조봉암과도 교류해방직후 미군 입항때 동원된 日경찰 총탄에 맞아 숨져1931년 7월 멀리 중국에서 날아온 '오보(誤報)' 하나가 인천의 차이나타운을 쑥대밭으로 만들었다. 중국 동북지방 창춘(長春) 만보산(萬寶山)의 동포가 중국인으로부터 박해를 받아 200명이 다쳤고, 병력까지 출동한 일촉즉발의 상황이라는 기사를 긴급 타전한 1931년 7월 2일 조선일보의 호외는 화교가 많았던 개항도시 인천 시민들의 감정을 자극했다. 기사는 한·중 농민 사이 발생한 작은 충돌이 일본의 흉계에 의해 부풀려져 전달된 완벽한 오보였지만, 이를 알 길이 없던 시민들은 인천의 화교들에게 분풀이를 했고 사상자까지 발생했다. 오늘날까지 인천 화교 사회의 큰 상처로 남아 있는 '만보산 사건'이다.결국 만보산 사건은 일제의 계략에 의해 꾸며진 일이라는 게 드러났고, 화교로 향했던 분노의 화살은 일본으로 방향을 틀었다. 일본인 습격과 항일투쟁이 비밀리에 계획됐고, 이는 반중(反中)이 반일(反日)로 바뀐 '방향전환사건'이라 불렸다. 인천 방향전환사건을 이끌었던 인물은 독립운동가 권평근(1900~1945)이다. 강화 출신의 그는 인천 노동계를 대표하며 일생을 독립운동에 헌신했다.방향전환사건의 계기가 됐던 만보산 사건은 일제가 만주 침략의 구실을 만들기 위해 꾸며낸 일이었다. 일제는 한국인을 대륙 진출의 첨병으로 활용했다. 만주지방의 농장으로 이주시켜 한국인 보호 명목으로 경찰과 군대를 중국에 주둔시키고 내정에 개입하려 했고, 중국인들은 이런 이주 한국인을 일본의 앞잡이라고 생각했다. 만보산 농장 지역에는 1931년 4월 한국인 200여 명이 이주했는데 수로 공사를 하는 과정에서 계약 착오로 중국 지주의 땅을 침범해 충돌이 빚어졌다. 그해 7월 1~2일 중국인이 한국인이 파냈던 수로를 다시 흙으로 되묻어 복구하자 한·중 농민 사이 대립이 일어났다. 일본 경찰이 중국인을 쫓아내 인명 피해는 없었지만, 일제는 이 사건과 관련한 거짓 정보를 중국 주재 김이삼 조선일보 창춘지국장에게 흘렸다. 한·중 농민 사이 무력 충돌이 빚어져 상황이 위급하게 전개되고 있다는 얘기를 했다.김이삼은 일본 영사관 측을 통해 얻은 공식 정보라 현장 확인을 하지 않고 의심 없이 이 소식을 본사에 전했다. 조선일보는 중국 동북지방의 한인들이 생명의 위협을 받고 있다는 호외를 제작했다. 당시 호외는 만보산에서 동포 200여 명이 중국인 800여 명과 충돌해 부상을 입었고, 창춘의 일본 주둔군이 출동준비를 하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또 일본과 중국의 관헌이 1시간여 교전을 벌였고 중국 기마대 600여 명이 출동하는 등 급박한 상황이라고 했다. 조선일보는 7월 3일 첫 호외를 발행하고 이튿날 2차례나 호외를 내는 등 사태를 심각하게 보도했다. 동포들의 안위가 걱정되는 상황이라고 전했다. 동아일보도 이를 받아 중국 농민의 폭거로 우리 농민이 포위됐고, 군대까지 출동할 수 있는 상황이라며 자극적으로 보도했다.조선일보의 오보는 인천 지역사회에 엄청난 파급력을 미쳤다. 인천 화교에 대한 집단 보복으로 이어진 것이다. 1883년 개항한 인천은 당시에도 '국제도시'였다. 중국 상인들이 인천에 물밀듯 들어와 자리를 잡았고, 인천에는 중국인 거류지가 따로 형성됐다. 바로 지금의 중구 북성동 일대 차이나타운이다. 1933년 일본 측이 펴낸 인천부사(仁川府史)에 따르면 인천의 화교는 1897년 1천331명이었다가 1931년 2천427명으로 크게 늘었다.인천의 화교들은 상인만 있는 게 아니었다. 중국의 노동자들이 인천항을 통해 전국으로 유입됐다. 1928년 4월 6일 동아일보는 "격증하는 중국 노동자 하루 1천여 명 입항"이라는 기사를 보도하기도 했다. 인천에서 태어난 짜장면이 바로 인천항에서 중국인 노동자들이 먹던 면 요리에서 유래된 음식이다.일자리를 나눠 가져야 하는 인천시민은 가뜩이나 중국인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을 때라 만보산 사건은 화교 습격이라는 비극을 낳았다. 7월 3일 인천에서 처음으로 한국인 5명이 중국인 식당과 이발소, 호떡집을 공격해 유리창을 깨는 사건이 발생했다. 격앙된 군중들은 중국인 거주지로 몰려들어 집에 돌을 던지고 집기를 부수기도 했다. 이 사건으로 중국인 2명이 숨지고 4명이 다쳤으며 건물 68채가 파괴됐다. 사태는 전국으로 확산돼 서울, 평양 등지에서도 중국인 습격사건이 발생했다. 평양에서는 무려 94명의 중국인이 숨졌다.그런데 일제의 낌새가 수상했다. 일제는 중국인을 위협하면 발포하겠다고 으름장을 놓고도 폭동을 내심 모르는 척 했다. 결국 이 사태가 일본의 음모로 꾸며진 일이라는 사실이 오래지 않아 드러났고, 일본에 대한 저항심으로 발전했다. 타깃이 중국인에서 일본인으로 바뀐 '방향전환'이 일어난 것이다.인천 노동운동계의 핵심 인물이었던 권평근은 만보산 사건의 방향전환을 독립운동으로 승화하려고 했다.권평근은 7월 4일 뜻을 함께하는 애국지사들과 회합을 하고 다음날 인천공회당에서 열리는 신간회 인천지회, 인천청년동맹, 인천노동조합 주최의 시국에 관한 연설회를 이용해 배일 연설을 하기로 했다. 만보산 사건의 원인이 중국이 아닌 일본에 있다는 연설을 하고, '조선독립만세'를 외치며 군중을 이끌고 시내에서 시위를 벌이자는 계획이었다. 하지만 일본 경찰에 기밀이 새어 나가 배일연설과 만세시위 계획은 미완에 그쳤고 권평근 등 가담자 6명이 체포됐다. 권평근은 그해 10월 경성지방법원에서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징역 3년을 선고받아 옥고를 치렀다.일본은 방향전환사건을 심각하게 받아들였다. 1931년 9월 22일자 동아일보 기사를 보면 경성지방법원은 권평근에 대한 재판의 일반방청을 허용하지 않고, 비밀리에 개정했다. 당시 언론에는 인천에서 일어난 대(對)중국 폭동의 방향을 일본으로 전환하고, 공산당 재건을 위한 음모를 꾸민 일로 보도됐다.권평근의 독립운동은 방향전환사건이 처음은 아니었다. 1900년 1월 26일 강화군 양도면 능내리 118번지에서 태어난 권평근은 강화의 합일공립학교를 졸업하고 상경했다. 그는 배재학당에서 1년여 공부하다 중퇴하고 고향으로 돌아와 1919년 강화에서 대규모로 벌어진 3·1 운동에 가담했다. 1921년 강화 조산교회의 청년단체인 조산엡윗청년회에 참여했고, 이 무렵 같은 강화 출신의 죽산 조봉암과 교류했다. 박남칠, 유두희, 이승엽 등 청년 지도자들과 함께 사회운동과 대중 연설에 적극 참여했다. 중국으로 건너가 1926년 11월 광둥성 중산대학에 입학했다. 권평근은 이후 상하이에서 민족해방운동의 이념으로서 사회주의를 받아들였다고 한다. 당시 조선총독부가 작성한 해외 반일조선인명부에 그의 이름이 등장하는데 일제는 그를 '배일사상이 농후한 요주의 인물'로 평가했다.1927년 말 상하이에서 인천으로 돌아온 권평근은 본격적으로 노동운동에 뛰어들었다. 1930년 5월 조선우선회사에서 일하면서 '메이데이 예비검속'으로 체포됐다. 그는 1931년 4월 30일에도 '전 조선 무산대중에 격함'이라는 제목으로 격문을 작성해 독립운동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권평근은 또 1931년 6·10 만세운동 6주년을 맞아 "모든 조선 민중은 단결해 자유와 주권획득을 위해 일본 제국주의와 싸워야 한다"고 했다. 방향전환사건은 그로부터 약 1달 뒤에 일어났다.출소 이후로도 인천노동조합을 이끌던 권평근은 해방 한 달도 되지 않은 1945년 9월 8일 비극적인 죽음을 맞았다. 하지 중장이 이끄는 미 24사단 주력부대가 인천항에 첫발을 내디딘 날이었다. 당시 인천항에서는 건국준비위원회 산하 보안대와 노동조합이 군중을 이끌고 부두로 환영 행진을 했는데 보안대원으로 활동하던 권평근과 이석우가 일본 경찰이 쏜 총에 맞아 숨진 것이다. 미국이 치안유지 명목으로 일본 경찰을 동원했고, 행진을 가로막는 일본 경찰과 실랑이를 벌어다 빚어진 참사였다. 해방된 조국에서 일본의 총탄에 희생된 어처구니없는 비극이 인천에서 벌어졌다. 당시 조봉암은 오랫동안 연을 맺은 고향 후배 권평근의 주검 앞에서 주먹으로 가슴을 치며 애통해 했다고 한다. 자력으로 얻은 독립이 아니었기에 더 서글픈 일이었다.브루스커밍스는 '한국전쟁의 기원'을 쓰면서 1945년 9월 12일 뉴욕타임즈 인터뷰 기사를 인용해 당시 상황을 전했다. 하지 중장은 기자들에게 "한인과 일인 사이에 약간의 사고가 있었다. 그중에는 부두에서 우리를 환영하려는 일단의 한인에 대한 일본인들의 발포가 있었다. 나는 민간인들이 상륙작전에 방해가 될 것이므로 부두에 접근하지 말도록 명령한 바 있다"고 했다. 하지 중장은 '점령군'의 자세로 인천항에 왔던 것이다. 뉴욕타임즈는 사설을 통해 "우리는 일제의 식민정책을 시행한 쓰레기들에게는 부드럽게 대하고 우리가 해방시킨 민중들에게는 강경하게 대해야 하는가…."라며 미군을 비판했다.1945년 9월 12일 매일신보 기사에 따르면 건준 인천지부가 미군을 통해 일본 관헌에 대해 엄중히 항의했으나 유야무야 끝나고 말았다. 권평근의 장례는 9월 10일 오전 10시 건준 인천지부에서 시민장으로 치러졌다. 박남칠이 장례위원장을 맡았고 시가 행렬 이후 권평근은 주안정(朱安町) 공동묘지에 묻혔다.권평근은 좌익 노동운동 경력 때문에 독립운동 공로까지 인정받지 못하다가 60주기였던 2005년 뒤늦게 독립유공자(건국훈장 애족장)로 서훈을 받았다. /김민재기자 kmj@kyeongin.com일러스트/박성현기자 pssh0911@kyeongin.com인천 방향전환사건을 이끌었던 독립운동가 권평근. /국가보훈처 제공방향전환사건으로 체포된 권평근에 대해 법원이 징역 3년을 선고했다는 동아일보 1931년 10월 27일자 기사. /네이버 뉴스라이브러리 캡처1945년 9월 8일 인천항에 처음 당도한 미군들. /경인일보DB1934년 7월 5일 인천경찰서가 제작한 권평근 등 인천 노동운동 활동가들의 동향 보고. /국사편찬위원회

2019-11-20 김민재

[독립운동과 인천·(35)]송암 유경근

보신각 인근 강화 출신 주인이 운영임정 관계자 접촉장소 등 기록 눈길일제강점기 강화도 사람이 서울 종로에 차린 조선여관이 '독립운동 아지트'였다는 기록들이 있어 주목된다. 특히 조선여관은 강화 출신 독립운동가들의 활동 거점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강화도 출신 유경근(1877~1957)은 1919년 3·1운동 직후 고종의 다섯째 아들인 의친왕을 적통으로 내세운 해외 망명정부와 제2차 독립만세시위를 추진했던 '대동단'의 주역이었다.상하이 임시정부의 국내 연통제 조직 총책 역할도 한 독립운동가다. 유경근이 활동거점으로 삼으면서 비밀리에 여러 독립운동가를 접촉한 장소는 서울 종로 관철동 보신각 근처에 있었던 조선여관이다. 유경근은 조선여관에서 이동휘가 이끄는 독립군 지원자를 모집하고, 임시정부의 국내 연통제 조직을 꾸렸다.1919년 이른바 '대동단 사건'으로 경찰에 붙잡혀 재판에 넘겨진 유경근의 심문조서를 보면, 판사는 유경근에게 조선여관이 독립운동 획책소가 아니냐고 물었다. 유경근은 "여관 주인이 강화도 사람이라 강화 사람들은 그 여관에서 묵으므로 그곳에 가면 고향의 사정을 알 수 있어 자주 갔다"고 했다. 유경근이 체포된 이후 연통제 조직을 맡았던 강화 출신 윤종석(1896~1927)의 심문조서에도 판사가 조선여관은 경성에서의 조선독립운동본부가 돼 있었다고 언급한다. 윤종석은 "그러한 사실은 모른다"고 답했다.조선여관은 상하이 임시정부와 국내 독립운동가들을 잇는 장소이기도 했다. 임시정부 특파원인 명제세(1885~?)가 제2차 독립 만세 시위를 유경근과 논의하라는 지시를 받고, 중국 톈진에서 국내로 입국해 찾아온 곳도 조선여관이다. 유경근이 독립운동을 논의할 안전한 장소로 조선여관을 택한 것은 여관 주인과 '동향'이라는 연결고리가 있기 때문으로 보인다.관철동 조선여관에서 1920년 9월께 일제 앞잡이 처단 등을 목표로 무장봉기를 일으키는 '무장계획단' 조직이 논의됐다는 기록도 당시 판결문에 나왔다. 동아일보 1923년 6월 10일자에는 평남경찰서 경찰이 의열단원을 잡기 위해 경성에 들어와 관철동 조선여관을 포위하고, 투숙 중이던 의열단원 1명을 체포했다는 기사가 실렸다. 앞서 1923년 1월 의열단원인 김상옥(1890~1923)이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투척하고, 시내에서 총격전을 벌이기도 했다. 이처럼 일제의 감시가 삼엄한 시기 의열단원이 종로 한복판에 있던 조선여관에 머물렀다는 사실이 눈길을 끈다. /박경호기자 pkhh@kyeongin.com

2019-11-13 박경호

[독립운동과 인천·(35)]송암 유경근

독립군 지원자 모집해 만주로 보내는 일 맡아밀정 때문에 붙잡힌 '대동단 사건' 징역 3년형만세시위로 검거 등 공훈록 내용 사실과 차이병보석 중 신한촌 망명… 러시아에서도 활동강화에 학교 설립 등 교육운동가로도 알려져송암(松菴) 유경근(劉景根·1877~1957)은 1919년 3·1운동 직후 고종의 다섯째 아들인 의친왕의 해외 망명을 추진하고, '제2차 독립 만세 시위'까지 계획했던 비밀조직인 대동단(大同團)의 주역이었다.또 고향 강화도에서 민족교육운동을 펼친 교육자다. 정부는 그 공훈을 기려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유경근이 대동단은 물론 상하이 임시정부와도 긴밀하게 연결돼 국내외 항일투쟁을 매우 은밀하고 치밀하게 준비한 핵심 역할을 했다고 추정할 수 있는 당시 자료가 많다. 하지만 국가보훈처가 '독립유공자 공훈록'에 기록한 유경근의 행적은 사실관계가 다르거나 그 시점이 맞지 않는다.최근 유경근을 재조명한 몇몇 기록이 '독립유공자 공훈록'을 바탕으로 쓰이다 보니 그의 정확한 행적을 드러내지 못하고 틀린 부분도 있다.일제강점기 공문서와 신문기사 등을 근거로 유경근의 행적을 다시 정리할 수밖에 없는데 그 한계는 명확하다.공문서는 유경근이 이른바 '대동단 사건'으로 체포됐을 당시 여러 관계 인물의 신문조서, 공판기록, 판결문 등 일제의 시각을 반영한 기록이 대부분이기 때문이다.'독립유공자 공훈록'은 1919년 3월 18일 유경근이 강화군 읍내에서 독립선언서를 등사하고, 태극기를 제작해 독립만세를 고창했다고 썼다. 이때 주모자를 색출하자 서울로 피신했다가 붙잡혔으나, 일신상 문제로 보석됐다고 기록했다. 유경근이 강화 3·1 만세시위를 적극적으로 지원한 것은 사실로 보이지만, 강화 만세시위 때문에 체포됐거나 피신하기 위해 서울로 갔다고 한 내용은 신뢰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다.유경근은 1919년 7월 21일 전후로 일본 경찰에 체포됐다. 그는 1920년 2월 17일 서대문감옥 병감(病監)에서 판사의 심문을 받았다. 당시 44세였는데, 류마티스로 발로 설 수 없고 전신이 아프다는 사유로 법정에 가지 못했다. 직업은 광업이고, 주소는 경성부 공평동 153번지라고 답했다. 당시 6년 전부터 서울에 살고 있었고, 1919년 3월 1일 만세시위 때는 강화에 있다가 3월 말께 경성으로 돌아왔다. 대동단 산하 11개 지단 가운데 군인단 총대장을 맡고 있던 유경근은 만세시위가 아닌 독립군 지원자를 만주로 보내다 발각돼 체포됐다. 건강이 좋지 않아 1920년 2월 심문 이후 어느 시점에 주변인의 도움으로 보석금을 내고 병보석으로 풀려났다.유경근은 체포되기 전까지 서울 종로 관철동에 있는 조선여관을 중심으로 활동했다. 여러 신문조서를 보면, 조선여관은 강화 출신이 운영했기 때문에 강화 사람들이 많이 드나들었다. 유경근은 조선여관에서 강화 출신 조종환(1890~1937) 등 몇몇 인사와 접촉해 만주와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등지로 보낼 독립군 지원자를 모집했다. 유경근은 강화에서 함께 교육운동을 펼친 이동휘(1873~1935)와 각별했는데, 이동휘는 1919년 4월부터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독립군을 조직·훈련하고 있었다. 이동휘는 그해 9월 상해 임시정부 초대 국무총리에 선출됐다.유경근은 조종환 등의 소개로 노준, 현완순, 조규상, 고경진, 위계후 등 8명을 독립군 지원자로 모집했다. 1919년 7월 초순 독립군 지원자들을 차례로 신의주로 보냈는데, 양복을 입히고 여비까지 줬다. 독립군 지원자들을 보낼 때 유경근은 한글의 자음을 아라비아 숫자로 하고, 모음을 한자의 숫자로 하는 방식(예컨대 '7五'는 '소')의 암호까지 사용할 정도로 조직적이고 은밀하게 진행했다. 그러나 독립군 지원자 가운데 영광경찰서 '밀정'인 조규상이 잠입해 있어 유경근은 곧 붙잡혔다. 일제는 유경근이 상하이 임시정부에 참여한 이동휘의 지령을 받아 독립군 지원자들을 보내려 했다고 봤다. 이후 유경근의 행적으로 미루어 보아 당시에도 이동휘와는 밀접하게 연결돼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유경근은 대동단의 '제2차 독립 만세 시위' 계획과 관련해 해외 임시정부를 국내로 연결하는 연통제 조직의 총책이기도 했다. 중국 톈진에서 비밀조직인 불변단(不變團)은 임시정부 외곽단체였다. 불변단은 군자금을 모으고, 국내에서 첩보활동을 하는 '특파원' 역할을 했다. 불변단 단장을 지낸 명제세(1885~?)는 임시정부로부터 유경근을 만나 '제2차 독립 만세 시위'를 논의하라는 지시를 받고 1919년 9월 톈진에서 서울로 향했다. 관철동 조선여관에 도착한 명제세는 유경근을 만나지는 못했다. 유경근이 체포된 이후였기 때문이다.대신 명제세는 조선여관에서 세브란스연합의학전문학교(현 연세대 의대) 2학년에 재학 중인 윤종석(1896~1927)을 만나 국내 비밀단체들과 접촉했다. 강화 출신인 윤종석은 당시 유경근의 서울 연통제 임무를 이어받았고, 건강이 좋지 않은 유경근의 보석을 위해 주요 인사들을 만나 모금활동을 하기도 했다. 1919년 10월은 '제2차 독립 만세 시위' 계획으로 국내외 독립운동조직들이 급박하게 움직이던 시기다. 애초 거사일은 그해 10월 31일이었다. 윤종석은 상하이나 만주에서 입국한 인사가 민강(1884∼?)의 집으로 와서 "가용 청심환을 달라"는 암호를 말하면, 동지인지 확인한 후 기밀문서를 받거나 다른 인사들과 연결해주는 역할을 했다. 하지만 그해 11월 의친왕의 해외 망명을 시도하던 대동단 간부 전원이 경찰에 발각돼 체포되면서 윤종석도 경찰에 붙잡혔다.'독립유공자 공훈록'에는 이런 대목이 있다.'1920년 8월 만주광복군총영으로부터 미국 의원단의 내한을 계기로 조선인의 독립의지를 알려주기 위해 일제기관 등의 파괴용 폭탄과 육혈포 등 결사대장 김영철이 가지고 와서 유경근의 집에 보관케 한 사실이 일경에게 탐지되어 붙잡혔다. 그리하여 고등법원에서 징역 3년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1920년 8월에 있었던 일인데, 이 사건으로 인해 유경근이 고등법원에서 징역 3년형을 선고받지는 않았다. 유경근은 앞선 '대동단 사건'으로 1920년 12월 7일 경성지방법원 1심에서 징역 3년형을 선고받았다. 경성복심법원 항소를 거쳐 1921년 5월 고등법원이 상고를 기각하면서 징역 3년이 확정됐다. 각 사건이 일어난 시점이 겹쳐 착오가 생긴 것으로 보인다.다만, 광복군총영 결사대장 김영철(1892~1969)이 유경근의 집에 폭탄과 총기를 숨겼을 때 유경근은 병보석으로 출옥한 시기였다. 김두섭의 종로경찰서 심문조서와 동아일보 1920년 8월 24일자 신문기사 등을 보면, 유경근은 사건 당일 지방에 내려가 있었고 증손인 유용갑이 집에 있었다. 당시 일본 경찰이 작성한 가택 수색조서를 보면, 경찰은 8월 22일 새벽 유경근의 집에 들이닥쳐 공석(空石)에 싸여 있는 폭탄 3개, 권총 3자루, 탄환 167발을 압수했다. 집을 비웠던 유경근은 이 사건으로 경찰 조사를 받지는 않았지만, 광복군 무기를 숨겨주는 일을 집주인이 몰랐을 리가 없었을 것이다.보석 중이던 유경근이 고등법원 확정판결을 받기 전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으로 망명한 기록도 있다. 동아일보는 1922년 3월 5일자 신문에서 '대동단 사건'에 관계된 유경근이 보석 중 도주해 종적을 감췄기 때문에 '결석 판결'로 징역 3년에 처했는데,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에서 일본 헌병에게 붙잡혀 3월 3일 청진항으로 들어왔다고 보도했다. 유경근이 신한촌으로 언제 갔는지, 어떠한 활동을 했는지에 관한 자료는 찾기 어렵지만, 그의 활동무대가 러시아까지 뻗쳐 있었다는 사실을 말해주는 기사다. 유경근의 손자 유부열(74)씨는 교직에 있다가 2008년 퇴직한 이후 줄곧 할아버지의 일생을 연구하고 있다. 유부열씨는 "할아버지가 신한촌으로 망명해 군관학교를 설립하려다 10개월 만에 체포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독립유공자 공훈록'은 유경근이 옥고를 치른 이후 행적이라는 듯 마지막 부분에 '그 후 강화군에서 광명학교를 설립하고 청소년 교육에 힘썼다고 한다'고 밝혔지만, 이 역시 시점이 틀린 내용이다. 유경근은 대동단 활동 이전인 1905년 강화에 있던 자신의 집에 광창(光昌)학교를 설립했다. 광창학교는 보창학교를 설립한 이동휘의 영향으로 1906년 7월 보창지교(普昌支校)로 이름을 바꿨고, 1909년 광명(光明)학교로 개편했다. 유경근이 세운 학교는 1913년 문을 닫았는데, 그 이유는 알려지지 않았다.유경근은 이동휘가 1933년 신한촌에서 세상을 떴다는 소식을 접하고 1935년 2월 추도회를 주도했지만, 강화경찰서가 허가하지 않아 무산됐다고 동아일보가 1935년 2월 26일자에 보도했다. 유경근은 강화에 머물면서 일제의 삼엄한 감시 속에 활동이 어려워졌지만, 교육운동에는 손을 놓지 않았다. 동아일보 1935년 3월 5일자 기사를 보면, 강화군 부내면에서 "7만 군민의 일대 숙제"라며 '강화중등학교 설치 간담회'가 열렸는데, 유경근이 좌장을 맡았다.유경근은 끝까지 창씨개명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집이나 학교의 문을 조선총독부가 있는 동쪽과 일본 땅이 있는 남쪽으로 내지 않았을 정도로 항일정신이 투철했다. 집안에는 일본식 물건이 하나도 없었다고 한다. 직업으로 삼은 금광사업은 갈수록 어려워진 것으로 보인다. 1939년 3월 광세 체납으로 압류돼 경매 매물로 나온 인천지역 9개 금광 가운데 '강화 유경근 씨 소유의 길상면 금광'이 포함됐다. 손자 유부열씨는 "독립유공자 공적을 올릴 당시에는 자료가 적어서 지금 보면 틀린 내용이 많다"며 "할아버지는 출옥 이후 가세가 기울어져 가는 와중에도 강화에서 교육운동에 앞장섰다"고 말했다. /박경호기자 pkhh@kyeongin.com그래픽/성옥희기자 okie@kyeongin.com/아이클릭아트보석 중 탈주한 유경근을 러시아 해삼위(블라디보스토크)에서 체포했다는 내용의 동아일보 1922년 3월 5일자 기사. /국사편찬위원회 제공인천 강화군 월곶리에 있는 유경근 묘소. /경인일보DB

2019-11-13 박경호

[독립운동과 인천·(34)]철시투쟁

18세 글로 보기엔 매우 '논리정연'항일조직 지원 추정… 재조명 필요1919년 3·1운동이 전국으로 확산할 때 인천에서는 시내 중심가 상점들이 항일의 뜻을 표출하는 차원에서 가게 문을 닫는 '철시(撤市)' 투쟁이 활발했다.각종 자료와 신문 보도를 종합하면, 인천지역 철시는 1919년 3월 말부터 4월 초까지 이어지면서 상당수 상점이 동참한 것으로 보인다. 인천에서는 당시 잡화상이었던 18세 김삼수(金三壽·1901~?)와 객줏집 사환이었던 15세 임갑득(林甲得·1904~?)이 철시투쟁에 가장 앞장섰다. 지금으로 따지면 각각 고등학교 3학년과 중학교 3학년일 나이였다. 10대 소년 2명은 문을 닫지 않은 상점들에 철시하라는 경고문을 뿌리다가 일본 경찰에 붙잡혀 옥살이를 했다.1심과 2심에서 실형을 선고받은 김삼수가 3심(상고심) 재판부에 제출한 200자 원고지 약 10매 분량의 '상고 이유서'가 아직 남아있다. 그 내용이 잡화상이 직업인 소년이 썼다고 하기엔 매우 논리정연해 눈길을 끈다. 김삼수는 상고 이유서에서 "지금 시대는 타인을 노예로 하는 자도 없고, 타인으로 하여금 노예가 되게 하는 자도 없다"며 우드로 윌슨(Woodrow Wilson·1856~1924) 미국 대통령이 주창한 '민족자결주의'를 강조했다. 평범한 상인의 철시투쟁까지도 견고한 논리의 항일민족의식이 밑바탕에 깔렸다는 의미다.물론 상고 이유서 내용을 고려하면, 김삼수가 직접 쓰지 않고 누군가의 조력을 받았을 개연성이 크다. 김삼수와 임갑득을 지원한 항일운동조직이 있었고, 인천지역 철시투쟁도 조직적으로 전개됐다는 추정도 해볼 수 있다. 하지만 인천 철시투쟁은 단편적인 기록으로만 남아있을 뿐이다. 만세시위와 함께 일반 민중이 대거 참여했던 항일운동인 만큼 구체적인 재조명 작업이 필요하다. 김삼수의 상고 이유서 등 판결문은 국가기록원이 운영하는 '독립운동 판결문' 홈페이지에서 확인할 수 있다. /박경호기자 pkhh@kyeongin.com

2019-11-06 박경호

[독립운동과 인천·(34)]철시투쟁

1919년 학생 동맹휴업 이어 3월30일부터 실행18세 잡화상 김삼수·15세 객주집 사환 임갑득폐점 안한 가게에 독촉 경고문 배포하다 '체포'인천물산 객주조합원·권업소원·포목상조합 등1926년 4월 순종 승하때도 철시… 봉도식 진행생계 걸고 日에 대항한 '이름없는 독립운동가'인천은 일제에 국권을 강탈당하기 이전부터 일본의 한반도 침략과 수탈의 관문이었다. 당시 인천부는 일본이 '조선 안의 작은 일본'을 목표로 만든 철저한 계획도시였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날 무렵 인천부 인구 2만211명 가운데 44.4%인 8천973명이 일본인일 정도로 다른 도시보다 일본의 영향력이 막강했다.인천 시내 중심에서는 3·1 만세시위가 활발하게 일어나기 어려운 여건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19년 3월 6일부터 인천 학생들이 동맹 휴학에 돌입하며 시내에서 만세운동을 전개하기 시작했고, 곧 인근 지역까지 들불처럼 번졌다.3·1운동 때 인천지역 상인들은 가게를 닫아버리는 '철시(撤市)' 투쟁으로 항일시위에 동참했다. '작은 일본'이라 불린 도시에서 장사하는 상인들이 생계를 접고 항일의 뜻을 표시하기가 여간 어려운 결정이 아니었을 것이다. 이병헌이 1959년 쓴 '삼일운동비사'와 한국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가 2009년 발간한 '한국독립운동의 역사'를 보면, 인천 시내 조선인 상점들은 만세운동이 이어지던 1919년 3월 30일부터 철시투쟁에 나섰다. 당시 인천은 내리(현 중구청 일대)부터 지금의 동구까지 시내 중심가를 이루며 상점이 모여 있었다.인천에서 철시투쟁과 관련해 처벌받은 김삼수(金三壽·1901~?)와 임갑득(林甲得·1904~?)의 상고심 판결문에는 3월 27일부터 인천 시내의 상점들이 문을 닫았다는 내용이 나온다. 3월 27일은 조선인 가게들에 3·1운동 때 맞춰 창간된 '조선독립신문'과 함께 "철시하라"는 격문이 배포된 날이다. 인천부협의회 등 친일기관이 개점하라고 협박했지만, 3월 30일부터 조선인 상점 대부분이 철시투쟁에 참여한 것으로 보인다. 일본 경찰이 출동해 상점 문을 열도록 협박하면 눈가림으로 문을 열다가도 경찰이 돌아서면 이내 다시 문을 닫으며 항쟁을 이어갔다.조선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보'는 1919년 4월 1일자 신문에서 "인천 시내는 그동안 평온한 듯하더니 다시 불온한 모양으로 변하며 수일 전에는 조선인 상점이 얼마만 철시한 것을 보겠더니 삼십일부터는 모두 철시를 했다"고 보도했다. '매일신보'는 이 기사에서 가게들이 휴업한 시내를 "길거리에 행인도 없다"며 "음습하여 쓸쓸하기가 한량 없다더라"고 부정적으로 보도했는데, 철시투쟁이 효과적이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삼일운동비사'에서도 인천지역 철시와 관련해 "시가지는 인적이 고요했고, 해변의 파도 소리만 시가지를 울렸다"고 그 분위기를 전했다.김삼수와 임갑득은 4월 1일 오전 11시께 아직 폐점하지 않은 우각리 이복현(李福鉉) 등의 점포 17곳에 철시하라는 경고문을 뿌렸다. 하지만 우각리 일대에서 상점이 문을 열자 김삼수와 임갑득은 4월 2일 또다시 "인천에 있는 상업가가 폐점하지 않으면 인천시가는 초토화할 것"이라는 내용의 경고문을 작성해 상점들에 배포했다. 이들은 4월 3일에도 "속히 폐점하지 않으면 최후의 수단을 취할 것"이라고 쓴 '최후통첩문'을 내리에 있는 점포에 투입하려다 일본 경찰에 체포됐다.김삼수와 임갑득의 1심 판결문을 보면 죄명은 '보안법 위반'과 '강요미수'이다. 김삼수는 당시 18세에 직업은 잡화상이었고, 임갑득은 15세에 직업은 객주집 사환이었다. 상점에서 일하는 평범한 10대들이 철시투쟁에 가장 앞장선 것이다. 사법경찰관 측 증인으로 조사받은 주명서(朱明瑞)는 "1919년 3월 30~31일 폐점했으나, 경찰관의 간곡한 설득으로 개점했는데, 다음날 오후 8~9시 무렵 김삼수와 임갑득이 쓴 경고문을 받았다"며 "다소 무서웠지만 폐점할 정도는 아니었다"고 진술했다.김삼수와 임갑득은 1심에서 각각 징역 10개월을 선고받았다. 임갑득은 항소심에서 징역 6개월로 감형됐고, 김삼수는 상고심을 거쳐 1심과 마찬가지인 징역 10개월이 확정됐다. 이들은 항소, 상고 과정에서 앞선 판결에 불복하는 이유를 "조선민족으로서 정의·인도에 기초하는 의사발동이며 범죄가 아니다"라고 했다.김삼수는 상고심을 진행하면서 경성고등법원에 200자 원고지 10매 분량의 상고 이유서를 별도로 제출했다. 상고 이유를 살펴보면, 단순히 10대 소년들이 의협심에 불타 감정적으로 철시투쟁을 독려했던 것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다음은 김삼수가 법정에 낸 상고이유서의 내용 일부다.'이번 조선민족의 행위는 세계의 대세에 따라 정의와 인도에 기초하여 의사를 발동한 것임은 다시 말할 필요가 없는 바이다. 누천(累千)여 년 이래 역사상 또는 민족상에서 보아도 일·선의 합병은 불가사의라고 말해야 한다. 왜냐하면 10년 전 일·선 합병은 당시 야심 발발(潑潑)한 일본정치가가 외람(猥濫)하는 수단으로써 금력(金力) 의해 취한 바이다. 동서고금을 불문하고 금력(金力) 또는 무력으로써 인심을 복종시킨 적이 있음을 듣고, 게다가 일·선 합방 이후 대일본제국으로부터 조선에 대한 정책이 어떠했는지가 순전한 만종(蠻種)으로서 보인 것이며, 이러한 압제적 통치 아래에서는 영적 능력이 불구(不具)한 야만족이라고 해도 불평을 품는다.'또 상고이유서의 다음 내용을 보면, 3·1운동의 사상적 기반 중 하나였던 우드로 윌슨(Woodrow Wilson·1856~1924) 미국 대통령의 '민족자결주의'가 잡화상인 김삼수처럼 일반 민중에게도 널리 퍼져 있었다는 점도 가늠케 한다.'눈을 들어 세계를 보라. 누가 사람의 노예가 될 자가 있겠는가. 쓸데없이 빙자하는 것이 아니라고 해도 이번 미국 대통령 윌슨 씨가 성명한 민족자결주의에 따라 부흥한 국가가 많이 있는데, 대일본제국에서는 반드시 영국의 인도에 대한, 미국의 필리핀에 대한 것을 빙자하더라도 스스로 생각해도 일본의 조선에 대한 정책이 얼마나 압제적인지 얼마나 속박적인지 이로써 영국령 인도, 미국령 필리핀과 비교할 것이 되겠는가. 언론·출판·집합의 자유는 존중히 여겨야 할 것임은 물론 인류의 공권까지 박탈당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또 윌쓴 씨가 성명한 민족자결은 동양에 있는 우리들과는 하등 관계가 없다고 말하지만, 이는 제한적인 것이 아니다. 지원(至遠) 지대(至大)한 것이다.'조한성 민족문제연구소 선임연구원은 2019년 쓴 '만세열전'에서 "민족자결주의는 해당 제국주의 국가에서 국내적인 수준으로 제한됐던 민주주의를 국제적인 수준으로 확대하는 효과도 낳았다"며 "윌슨의 생각은 일정한 경로를 거쳐 조선인들에게 전해졌다. 이것이 3·1운동이 일어나게 된 첫 번째 이유였다"고 설명했다. 김삼수는 상고이유서에서 "우리의 행위를 일본 법률에 준해 징역 10개월에 처단했는데, 참으로 웃을 수 없지 않은가"라며 "당당하게 정의·인도를 위해 행동한 우리들은 정의와 인도에 위배하는 대일본제국 사법권 내의 절제를 받을 필요가 없다"고 상고 신청 이유를 밝혔다. 하지만 재판부는 "자기가 사실로 말하는 바를 진술하고, 자기의 의견에 의해 피고의 소위는 죄가 되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것밖에는 되지 않으니 상고 이유 없다"며 상고를 기각했고, 김삼수는 징역 10개월 확정 판결을 받았다.김삼수의 직업이 잡화상이었던 점에 비춰보면, 상고이유서 내용이 너무나 논리 정연하다. 노련한 변호인이 작성했을 법한 내용들이다. 일반 민중들이 쓸 수 있는 용어들도 아니다.이들의 뒤를 받쳐주던 항일운동 조직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김삼수와 임갑득 같은 평범한 민중들이 어느 조직에 들어가 항일민족의식을 깨우치는 공부를 했고, 이를 실행에 옮겼다고 보는 게 타당할 듯하다.이후 김삼수와 임갑득에 관한 기록은 찾아볼 수 없다. 다만, 동아일보 1922년 4월 2일자 신문을 보면, 민족운동을 펼쳤던 기독교 소년운동단체인 인천 '엡윗청년회'(의법청년회) 주최 토론회가 열렸다는 내용의 기사에서 '김삼수(金三壽)'라는 이름이 등장하는데, 같은 인물인지는 확인하기 어렵다.인천지역 상인들의 철시는 1926년 4월 25일 조선의 마지막 임금인 순종이 승하했을 때 또다시 일어났다. 동아일보 1926년 5월 3일자 기사에는 그해 4월 30일부터 인천물산 객주조합원, 인천미상조합원과 권업소원, 인천포목상조합이 잇따라 가게 문을 닫고 순종의 봉도식을 진행했다.인천지역 상인들의 철시투쟁은 소극적인 항일운동이 아니었다. 자신이 운영하는 상점의 문을 스스로 닫는 것은 생계가 걸린 문제였고, 상인들은 생계를 걸고 일본에 대항한 이름 없는 독립운동가들이었다. 김삼수처럼 평범한 민중도 뚜렷한 민족의식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박경호기자 pkhh@kyeongin.com그래픽/박성현기자 pssh0911@kyeongin.com/아이클릭아트일제감시대상 인물 카드 속 김삼수(왼쪽)와 임갑득. 두 사람이 일본 경찰에 체포됐을 당시 나이는 김삼수가 18세, 임갑득이 15세였다. 출처/국사편찬위원회동아일보 1926년 5월 3일자 신문에 실린 '인천시민 봉도식' 사진. 순종이 승하한 후 인천지역 상인들이 철시한 후 봉도식을 가졌다는 내용의 기사다. 출처/네이버 뉴스라이브러리인천지역 철시 풍경을 다룬 조선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보'의 1919년 4월 1일자 기사. 출처/국립중앙도서관김삼수·임갑득의 상고심 판결문 원본 첫 장. 출처/국사편찬위원회

2019-11-06 박경호

[독립운동과 인천·(33)]노동운동 김환옥

러시아 혁명 목격 사회주의 전향좌익활동 이력 탓 연구활동 부실1930년대 활동하던 독립운동가 가운데는 노동자들과 연대해 조선의 변혁을 꿈꾼 인물들이 있었다. 이 시기 러시아에서 평등을 이상으로 삼은 사회주의 혁명이 성공한 것을 목격해 사회주의로 전향한 사람들이 그들이다. 이들은 다양한 단체를 조직해 열악한 환경 속에서 일할 수밖에 없었던 노동자들 사이로 뛰어들었다.김환옥(1914~?)은 인천 지역 공장지대에서 활동하던 사회주의 독립운동가다.광주학생독립운동에 참여한 혐의로 학교에서 퇴학당한 김환옥은 당시 최대 공장 지대였던 인천 동구 일대의 노동자들을 대상으로 교육을 진행했다. 김환옥은 인천철공소에서 근무하며 노동자들의 권리를 되찾아주기 위한 독서회를 꾸렸다. 그는 글을 읽지 못하는 노동자들에게 한글을 가르치고, 이를 통해 노동자들이 권리를 되찾기를 바랐다. 만국공원(현 자유공원)과 인천 축항, 월미도 등에서 이뤄진 교육은 수십 차례에 걸쳐 진행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김환옥은 노동자들의 환경 개선을 위한 노력을 벌이다가 일본 경찰에 붙잡혔다. 이른바 인천 공장 지대의 '적색노조사건'에 연루된 것이다. 당시 언론 보도에 실린 그의 재판 기록을 보면 김환옥은 단순히 임금 인상과 노동시간 단축 등을 요구했을 뿐이었지만, 일제는 그에게 징역 1년 6개월을 선고했다. 김환옥은 노동자들을 일깨움으로써 일제강점기 조선의 변혁을 꿈꿨다. 그는 1930년대 어려움을 겪던 노동자들의 권익을 노동자 스스로 찾아야 한다고 외친 독립운동가였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인천 지역에서 그에 대한 연구는 매우 부실하다. 그의 활동 대부분이 노동운동이었고, 좌익 활동에 참여한 이력 때문으로 보인다. 일본 경찰의 삼엄한 경비 속에서도 조선의 노동자를 위해 활동한 김환옥을 우리가 다시 주목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김주엽기자 kjy86@kyeongin.com

2019-10-30 김주엽

[독립운동과 인천·(33)]노동운동으로 독립 실현하려 했던 김환옥

일본 대기업 기계·자동화에 조선인 공장들 줄줄이 폐업사회주의 운동가들 동양방적 등 열악한 환경 파고 들어광주학생운동 동참으로 퇴학 당한 후 인천철공소 취직김근배와 독서회 꾸려 문맹률 높은 근로자들 교육 앞장적색노조 연루 '옥살이' 미군정시절에도 좌익으로 체포"한 끼 식사를 못 해 풀죽을 끓여 먹는 사람이 조선 땅에 한둘이 아니고 고무신 하나가 없어 거친 흙 땅을 맨발로 다니는 아이들이 지천인데…"2007년 방영된 드라마 '경성스캔들' 대사 중 일부다. 1930년대를 배경으로 한 이 드라마의 주인공인 독립운동가 나여경은 당시 조선의 현실을 이렇게 표현했다.1930년대 나라 잃은 조선인 노동자들은 온갖 신산을 다 겪어야 했다. 1929년 10월 29일 미국 뉴욕주식거래소의 주가가 대폭락한 '블랙먼데이'를 기점으로 시작된 '세계 대공황'의 여파가 이역만리 떨어진 조선인 노동자들에게도 영향을 끼쳤기 때문이다.대공황 이후 일제는 '산업 합리화' 조치를 시행하게 된다. 이에 따라 일본인이 소유한 대기업들은 거대 독점자본을 바탕으로 한 기계화·자동화를 통해 이윤을 극대화하고자 했다. 대기업의 생산 공정 기계화, 자동화로 생산량이 늘어나면서 조선인이 운영하던 중소규모의 공장들은 문을 닫게 됐고, 조선인들의 실업률은 급격히 높아졌다. 1930년 조선총독부 조사 결과를 살펴보면 조사에 참여한 조선인 17만명의 12.5%에 해당하는 2만여명이 실업 상태인 것으로 나타났다.실업률이 높아져 일할 사람은 많다 보니, 노동자들의 임금도 낮은 수준으로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통계청이 일제강점기 자료를 분석한 결과에 따르면 1925년 93전이었던 보통 인부의 일당은 1933년 70전으로 24%나 줄었다. 1930년대 80㎏ 쌀 한 가마니의 가격이 22원 정도인 점을 고려하면 하루 종일 일해도 쌀 2.5㎏ 정도 밖에 살 수 없는 돈이었던 셈이다. 일본 내에도 노동자들을 위한 법률이 제대로 갖춰져 있지 않은 시기였기 때문에 조선인 노동자들은 더 열악한 상황에서 적은 임금을 받으며 일할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1930년대 대형공장이 들어서기 시작한 인천의 사정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동양방적이나 인천 지역 정미소에서 일하던 조선인 근로자들은 휴일도 없는 열악한 환경 속에서 일할 수밖에 없었다. 국내에서 활동하던 사회주의 독립운동가들은 조선인 노동자들의 열악한 삶 속으로 파고 들었다.김환옥(1914~?)은 당시 인천에서 활동하던 사회주의 독립운동가 중 한 명이었다.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일제감시대상 인물카드에는 김환옥의 직업은 직공(職工)이라고 적혀 있다. 학창시절 일제에 항거하다 학교를 떠난 김환옥은 노동자로 일하며 그들에게 노동정신을 가르쳤다.김환옥은 이른바 '적색 노조 사건'에 연루돼 옥고를 치렀지만, 인천에서 그를 기억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김환옥의 활동 대부분이 노조 활동에 집중돼 있는 데다, 해방 이후에는 좌익 사범으로 경찰에 붙잡히기도 했고 말년에 대한 기록이 전혀 없어서 그의 삶과 죽음이 제대로 연구되지 못하다 보니 그에 대한 평가가 뒤로 밀려 오늘에 이르고 있다.일제감시대상 인물카드에 따르면 김환옥은 1914년 경기도 부천군 다주면 용정리(현 인천시 미추홀구 용현동)에서 태어났다. 이 일대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것으로 추정되는 그는 1927년 인천공립상업학교(현 인천고등학교)에 입학했다. 인천상업학교 입학 후 김환옥은 독립운동의 길에 본격적으로 들어서게 된다.김환옥이 3학년이던 1929년 '광주학생독립운동'이 일어났다. 인천상업학교는 인천 지역에선 유일하게 광주학생독립운동에 참여한 학교다. 일본 경찰 내부 자료에 따르면 김환옥은 그의 동기생인 이두옥(1911~1950), 신대성(1909~?) 등과 함께 학생들의 동맹 휴학을 주도했다. 경찰에 붙잡히게 된 그는 모진 고문을 당하고 학교에서는 쫓겨났다.학교에서 퇴학당한 뒤 김환옥은 인천철공소에 취직해 본격적인 노동 운동을 시작했다. 인천철공소는 1904년 인천 내항 1부두와 갑문 사이에 있던 '사도'라는 섬 주변을 매립해 만들어진 조선소로 추정된다.1930년대 인천은 사회주의 독립운동가의 활동이 두드러진 지역이다. 이 시기 사회주의 독립운동의 대부로 일컬어지는 이재유(1905~1944), 그와 함께 경성트로이카를 이룬 김삼룡(?~1950)의 지시를 받은 독립운동가들이 만석동 일대 공장지대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당시 인천 노동자들의 환경이 매우 열악했기 때문이다. 인천 노동자들이 처한 암울한 상황은 강경애의 소설 '인간문제'의 등장인물 간난이가 주인공 선비에게 말한 대사를 통해 잘 나타난다."선비야! 그런 것을 몰라서는 안 된다. 저 봐 지금 야근까지 시키면서 우리들에게 안남미 밥 먹이고, 저금이니 저축이니 그럴듯한 수작으로 우리들을 속여서 돈 한 푼 우리 손에 쥐어 보지 못하게 하고 죽도록 우리들을 일만 시키자는 것이란다. 여공의 장래를 잘 지도하기 위하야 외출을 불허한다는 둥 일용품을 저가로 배급한다는 둥, 전혀 자기들의 이익을 표준으로 내세운 규칙이란다."'인간문제'에서 간난이와 선비가 있는 방적공장은 1934년 문을 연 인천 만석동의 '동양방적'을 모델로 한 것으로 전해진다. 일본 공장주들은 조선인 노동자들의 일당을 착취했다. 산업합리화로 대량 생산이 가능한 기계가 들어왔지만, 노동자들의 임금은 낮아졌고, 오히려 근무시간만 길어지게 됐다.김환옥은 열악한 노동자들의 삶을 개선하기 위해 사회주의 독립운동가 중 하나인 김근배와 노동자를 교육하는 독서회를 꾸렸다. 김환옥이 활동하던 시점에 조선인 노동자들의 문맹률은 상당히 높은 편이었다. 1930년 조선총독부 조사 결과를 보면 노동자들의 주된 연령층인 15~39세 노동자들의 문맹률은 65%를 넘어선 수준이었다. 김환옥은 문맹자들이 많은 노동자들에게 한글을 가르치고, 이를 통해 노동자들의 권리를 찾게 만들기 위한 교육을 진행했다. 국내 노동운동사를 연구한 한국학중앙연구원 김경일 교수가 쓴 '이재유, 나의시대, 나의혁명'에 따르면 김환옥은 만국공원(현 자유공원), 인천축항, 월미도 등지에서 노동자들에게 기꾸쿠다 가츠오의 '사회는 어떻게 되는가'를 교재로 수십 차례에 걸쳐 교육을 진행했다.독서회를 운영하던 그는 1935년 경찰에 붙잡혔다. 이른바 '적색 노조 사건'에 연루된 것이다. 1935년 4월 경기도 경찰부장이 조선총독부에 보고한 '인천 적색(赤色)그룹 사건 검거에 관한 건'이란 보고 문서에선 '이재유 그룹의 사건을 수사하던 중 그룹에 속해 있던 이인행이 인천 활동가와 접촉했다는 진술을 했고, 이 진술을 토대로 별개의 비밀결사가 존재하고 있다는 단서를 찾았다'고 적었다.김환옥은 동양방적과 인천철공소 등에서 열악한 환경과 부당한 대우 속에서 일하던 노동자들을 주도해 쟁의 행위를 일으켰다는 혐의로 징역 1년 6개월을 선고받았다.징역을 마치고 출옥한 그는 지하 운동에 주력했던 것으로 보인다. 해방 이후에는 공산주의자들이 조직한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에 속해 노동운동을 펼치다 1947년 2월 불법 노조설립과 시위 혐의로 미군정 경찰에 체포됐다. 안타깝게도 출옥 이후 김환옥에 대한 기록은 찾아볼 수 없다.김환옥은 노동 운동을 바탕으로 사회의 변혁을 꿈꾼 인물이다. 일부에서는 김환옥을 포함한 1930년대 활동하던 사회주의계열 독립운동가들이 조선 내에 공산당 세력 확장을 위해 노동자들을 포섭했다는 주장을 펴기도 한다. 조선의 독립이 그들의 주된 목적이 아니라는 것이다.하지만 사회주의 독립운동의 대부인 이재유의 글을 보면 그들은 조선의 독립을 우선시했다. 이재유는 조선공산당재건 경성준비그룹의 기관지인 '적기' 창간선언에서 '일본제국주의의 모든 비밀에 대한 정치적 폭로와 항의 투쟁을 일으킬 것'이라고 밝히며 목표를 분명히 했다. 또 '군사적 경찰적 파쇼적 일본제국주의 조선통치권력의 근본적 전복. /조선의 독립/ 노동자 농민의 소비에트 정부 수립'이라는 강령을 구체적으로 제시했다. 이재유와 김환옥이 직접적인 관계를 맺었다는 기록은 없으나, 김환옥에게 사상적으로 큰 영향을 준 김삼룡과 권영태가 이재유와 교감을 나누고 있던 점을 고려하면 김환옥도 조선의 독립을 목표로 힘써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이성진 골목문화지킴이 대표는 "1919년 3·1운동 이후 조선의 많은 독립운동가들은 러시아 볼셰비키 혁명(1918)을 모델로 한 사회 변혁을 꿈꿨다. 이로 인해 많은 조선의 청년들은 사회주의로 전향했다"고 설명했다. 이성진 대표는 또 "김환옥은 노동 운동을 통해 일본 제국의 붕괴를 바랐고, 조선의 독립을 이뤄낼 수 있다고 믿었던 인물"이라며 "인천 출신의 독립운동가에 대한 연구가 절실한 상황"이라고 말했다. /김주엽기자 kjy86@kyeongin.com/아이클릭아트김환옥1936년 3월 김환옥의 재판 결과를 보도한 동아일보 기사.인천 동양방적 등 노동투쟁을 보도한 조선중앙일보 기사.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제공김환옥의 일제감시대상 인물카드. 직업란에 직공(職工)이라고 적혀 있는 것이 눈에 띈다.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제공

2019-10-30 김주엽

[독립운동과 인천·(32)]日 강점기 3대 독립운동인 '광주학생운동' 동참 이두옥·신대성

인천공립상업학교 상급생에 속해 '광주 지지' 동맹휴학·강당 시위당시 주동자 대부분 훗날 좌익으로 전향… 지역서도 주목받지 못해개인 활동하다 조선공산당 공작위 함께 만들어… 구속 신세 되풀이남로당 소속 이두옥은 고향인 제주 4·3사건 가담 총살 당해 생 마감1929년 11월 일어난 '광주학생독립운동'은 1919년 '3·1 운동', 1926년 '6·10 만세운동'과 함께 일제강점기 3대 독립운동으로 불린다. 앞선 두 독립운동이 고종·순종 황제의 붕어(崩御)를 계기로 민중이 들고 일어선 독립운동이었다면 광주학생독립운동은 조선과 일본인 학생들의 다툼이 억눌렸던 불만을 폭발시킨 사건이다.광주학생독립운동의 시작은 사소했지만, 그게 촉매제가 되어 들불처럼 번져나간 독립 열망의 의지는 전국을 뜨겁게 달궜다. 전국 학생들은 자신들의 학교에서 동맹 휴학을 벌이거나 강당에 모여 시위를 벌이며 광주학생독립운동에 참여했다. 광주광역시교육청이 조선총독부 공식 기록을 토대로 연구한 자료에 따르면 전국 194개교에서 5만4천여명의 학생이 독립운동에 참가한 것으로 확인됐다.인천에도 광주의 학생들에게 힘을 보탠 학생들이 있었다. 이두옥(1911~1950), 신대성(1909~?) 등 1930년 당시 인천공립상업학교(현 인천고등학교)에 다니던 학생들이 그 주인공이다. 이두옥과 신대성을 포함한 시위를 주도했던 16명은 인천경찰서에 붙잡혔고, 이 가운데 12명은 학교를 떠나야만 했다. 하지만 이들의 활동은 인천에서 크게 주목받지 못하고 있다. 이두옥·신대성 등 당시 시위를 주도한 학생들 대부분이 훗날 좌익으로 전향한 것이 가장 큰 이유라는 게 연구자들의 설명이다. 광주학생독립운동에 참여한 인천 지역 학생들을 재조명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1930년 1월 17일. 학교 행사를 위해 강당에 모인 전교생 앞에서 인천상업학교 상급생 학생들은 크게 외쳤다."지금 광주학생 사건으로 서울을 중심으로 학생들이 봉기하고 있는데, 민족적인 면에서 가만히 있을 수가 없으니 다 같이 일어나자."앞서 이들은 1929년 12월 13일 광주 학생들을 지지하기 위해 한 차례 동맹휴학을 벌이기도 했다.이 일이 있기 약 2개월 전 광주학생독립운동은 시작됐다. 1929년 10월 30일 나주역에서 광주중학교 일본인 학생이 광주여자고등보통학교(현 전남여자고등학교) 학생들을 밀치고 지나갔고, 이를 목격한 광주고등보통학교(현 광주제일고등학교) 학생들이 일본 학생들에게 항의하면서 충돌이 벌어졌다. 그런데 이들의 싸움을 말리기 위해 출동한 경찰이 일본인 학생의 의견만 받아들여 조선인 학생들의 불만이 커졌다.이후 메이지유신 기념일인 11월 3일 신사 참배 이후 현 광주 충장로 일대에서 조선인과 일본인 학생들 간의 큰 싸움이 또 한 번 발생했고, 조선인 학생들이 학교에 항의하면서 대규모 시위로 발전하게 됐다.광주의 소식이 전해지자 억눌렸던 조선인 학생들이 폭발하기 시작했다. 1920년대 중반 이후 조선인 학생들의 불만은 계속 쌓여가고 있던 터였다. 조선총독부 경무국이 발행한 자료를 보면 1924년 14차례에 불과했던 조선 학생들의 동맹 휴학은 이듬해 48건으로 급증했고, 광주학생독립운동이 있던 1929년과 1930년에는 각각 79건과 107건에 달했다. 1920년대 중반부터 학교에 다니는 일본인 학생들이 늘어나자 학생들 간의 다툼도 늘어났다. 그러나 일본인 교직원은 조선 학생들을 차별적으로 대우했고 이에 항의하는 일도 많아졌다. 또 이 시기부터 본격적으로 진행된 식민지 노예 교육도 동맹휴학을 벌이게 된 또 다른 이유라고 전문가들은 설명하고 있다.인천상업학교 상급생들은 더 많은 학생의 참여를 독려하기 위해 전교생이 모인 앞에서 연단에 올랐다. 당시 인천상업학교 1학년생이었던 노형근은 '인고백년사'에서 "그날은 학생들이 정렬해 있었고 선생님들이 들어오시기 전에 상급생이 강당에 있는 탁구대를 들어서 출입구를 막아버리는 것이었어요. 한 상급생이 연단에 올라 웅변을 했습니다. 선생님들이 왔습니다. 상급생들은 문을 막은 채 항의 항언을 했습니다. (중략) 어느새 경찰서에 연락이 돼서 왜경들이 밀려들기 시작했고, 끝내 상급생 십여 명이 연행되는 뼈아픈 광경을 봐야 했습니다"라고 회상했다. 이두옥과 신대성은 경찰에 연행된 16명의 상급생에 포함돼 있었다. 이들에게 광주학생독립운동에 대해 알려준 이는 인천상업학교 출신 차재정(1902~1963)이다.차재정은 장재성(1908~1950)과 함께 광주학생독립운동을 전국에 알린 인물로 평가받는다. 광주학생독립운동 당시 신간회 경성지회 간사였던 그는 7종의 격문을 만들어 전국 학생들에게 배포했다. 차재정은 격문에서 '검속된 광주 조선 학생 동지를 즉시 탈환하라/식민지 노예교육에 대항하라/살인적 폭도인 일본이민군을 구축하라/신간회와 청총(靑總)에 민족적 환기로 호소하라'고 주장하며 학생들의 참여를 이끌어냈다. 당시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경찰에 붙잡힌 그는 1935년 한 차례 더 경찰에 구속된 이후 친일로 전향했다. 차재정은 민족문제연구소가 발간한 '친일인명사전'에도 등재돼 있다.이두옥과 신대성은 광주학생독립운동에 참여한 혐의로 고문을 받은 뒤 풀려나게 된다. 별도의 재판기록이 남아있지 않은 점을 고려하면 징역형을 받지는 않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모진 고문을 받았지만, 이들의 독립운동은 멈추지 않았다.이두옥은 3·1절 11주년 기념 격문을 제작하기도 했다. 이는 6·25때 남조선노동당 서울시당위원장을 지낸 이승엽(1905~1954)과 함께 했다.1930년 3월 1일 이두옥은 현재의 중구와 동구 일대에 '3·1운동 11주년 기념을 맞아 전조선 민중에게 격함'이란 제목의 유인물을 뿌렸다. 유인물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3·1운동도 11년을 경과했다. 그러나 지금 도리어 일본제국주의의 압박과 착취는 그 정도를 더하고 있어 2천만 생령의 고통과 비애는 극에 달해 있다. 보라! 저 놈들의 은행, 회사, 상점과 수리조합 및 농장의 발전? 확장을! 그리고 우리 도시, 농촌의 파멸, 실업자와 빈민굴의 증가, 소작농민의 빈곤격화를! 피땀을 흘리며 노동하는 자는 조선의 노농 군중이고 영화와 향락을 누리는 자는 일본의 자본가와 지주가 아닌가! 그들은 이러한 착취와 야만적 압박의 지위를 지키기 위해 거대한 군과 경찰을 배치하여 감옥을 확장하며 악법과 가혹한 형벌로 우리 전위 투사를 도살하고 해방운동을 말살하고 있지 않은가? 그러나 죽음에 당면한 조선 민중을 위한 운동과 죽음을 무릅쓴 투쟁은 창검과 철창으로 근절할 수 없다."1929년 시작된 '세계대공황'의 여파는 조선인들의 삶도 어렵게 만들었다. 쌀값이 폭락해 농촌의 삶은 궁핍해졌고, 도시 노동자들은 임금삭감과 실업으로 생활고에 시달릴 수밖에 없었다. 이승엽이 불러주고 이두옥이 인쇄한 것으로 알려진 이 격문은 어려운 노동자들의 항거를 이끌어내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이두옥과 이승엽은 이 격문을 서울로 옮겨 전국으로 배포할 계획을 세웠다. 인천에서 격문이 제작된 사실을 숨기기 위해서다. 안타깝게도 당시 서울로 격문을 가져가던 김점권이 경찰에 적발되면서 이들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고, 이두옥은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다.옥살이를 거친 이후 이두옥은 함께 광주학생독립운동을 주도했던 신대성을 만났다. 이들은 함께 조선공산당 공작위원회를 조직했으나, 경찰에 또 한 번 구속되게 된다. 경기도경찰국이 압수한 이들의 비밀 문건에는 '혁명적 학생운동 방침', '반제투쟁동맹 조직테제', '반전 캠페인' 등 조선총독부에 항거하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이 일을 계기로 이두옥과 신대성은 1934년 징역 3년형을 받아 서대문형무소에 또 한 번 갇히게 되었다.출옥 이후 지하 운동에 전념하던 이들에게도 해방의 순간이 찾아왔다. 신대성은 이승엽과 함께 남조선노동당에서 활동했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그는 1949년 서울 마포구 남로당책임자로 우익청년단에 잠입한 혐의로 구속됐는데, 이것이 신대성의 마지막 기록이다. 남로당 인천시당과 전남도당에서 활동하던 이두옥은 자신의 고향에서 일어난 제주 4·3사건에 참여했다가 주동자로 붙잡혀 총살당해 생을 마감했다.이두옥과 신대성은 나라를 빼앗긴 1910년을 전후해 태어났다. 그들은 학창시절부터 나라를 독립시키려고 치열하게 싸웠지만, 좌익 활동을 했던 이력 때문에 그들의 주 활동무대였던 인천에서조차 철저하게 잊히고 묻힌 독립운동가가 됐다.김원봉, 조봉암 등 잘 알려지지 않은 독립운동가들의 활동상을 오랫동안 추적해 온 이원규 작가는 "이두옥과 신대성은 그 누구보다 치열하게 독립운동을 벌였지만, 인천 지역에서는 한 번도 그들을 주목한 적이 없다"며 "이들은 북한에서도 조명받지 못하는 인물이다. 이들이 학창시절을 보냈던 인천에서 이들을 기억해야 하는 이유 중 하나다"고 했다. /김주엽기자 kjy86@kyeongin.com일러스트/성옥희기자 okie@kyeongin.com/아이클릭아트경기도경찰국이 보관하고 있던 이두옥과 신대성에 대한 비밀 문서.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제공

2019-10-23 김주엽

[독립운동과 인천·(32)]'광주학생운동' 동참 이두옥·신대성

한국전쟁 이전에 행적 끊어진 탓北에도 기록없어… 연구활동 필요지금으로부터 90년 전인 1929년 11월 3일 전라도 땅 광주에서는 대규모 학생운동이 일어났다. 일제강점기 3대 독립운동 중 하나로 꼽히는 '광주학생독립운동'이다. 정부는 이 독립운동을 기리기 위해 11월 3일을 '학생독립운동기념일'로 정하고 매년 광주에서 기념식을 열고 있다.광주학생독립운동은 전국에서 5만5천여명의 학생이 참여했다. 인천공립상업학교(현 인천고등학교) 학생들도 광주학생독립운동에 참여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 하지만 '광주'라는 이름에 담긴 상징성 때문에 이들의 독립운동은 조명받지 못했다.1930년 인천공립상업학교를 다닌 이두옥(1911~1950), 신대성(1909~?) 등 16명의 학생은 동맹 휴학을 벌이고, 전교생에게 '광주 학생들과 함께 독립운동을 벌이자'고 참여를 독려했다. 이 사건으로 이두옥과 신대성은 학교를 떠나야 했지만, 독립운동 의지는 꺾이지 않았다. 이두옥은 3·1운동 11주년을 맞아 항일운동 정신을 고취하는 내용이 담긴 격문을 배포했다. 이후 신대성과 함께 조선공산당 재건을 준비하다 한 차례 더 옥살이했다.안타깝게도 인천지역에서는 이들의 독립운동 행적이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다. 이두옥과 신대성이 해방 이후 남조선노동당에 가입한 영향으로 '빨갱이' 올가미가 씌워졌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이두옥은 제주 4·3 사건에 연루돼 총살을 당했다. 신대성은 우익단체에 몰래 잠입한 혐의로 구속된 이후로는 관련 기록을 찾을 수 없다.이두옥과 신대성은 좌익 활동을 벌였지만, 한국전쟁 이전에 행적이 끊겼기 때문에 북한에도 관련 기록이 없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들은 남과 북 모두에게서 외면당했다. 이들의 독립운동 근거지였던 인천에서라도 이두옥과 신대성에 대한 연구가 이뤄져야 하는 이유다. /김주엽기자 kjy86@kyeongin.com

2019-10-23 김주엽

[독립운동과 인천·(31)]강화 만세운동

1919년 3월18일 1만명 모여 시위기독교 주도… 이후에도 8건 기록일제강점기에도 강화도는 역시나 항쟁의 공간이었다. 인천의 독립운동을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게 바로 강화도의 만세 시위다. 1919년 3월 18일 읍내 장터에서 무려 1만 명의 시위대가 만세를 외쳤다.인천의 근현대사를 개항장 중심으로 풀어나가다 보면 자칫 강화도의 만세 시위의 위상과 중요성을 지나치곤 한다. 인천의 만세 운동 횟수를 헤아릴 때 강화도를 빼놓은 일부 자료들이 대표적인 예다. 대개 민족 사학자 박은식이 1920년 쓴 '한국독립운동지혈사'를 인용해 인천의 만세 운동이 8건 벌어졌다고 하는데 이는 개항장과 원인천인 문학산 일대에 한정된 오래 전의 인천이다. 강화도의 만세 시위는 기독교계에서 주도했는데 '강화중앙교회 100년사'에 나온 강화도의 만세 시위만 해도 3월 18일 이후 8건이나 된다. 이병헌이 1959년에 내놓은 '삼일운동비사'에는 강화에서 일어난 10건의 만세 시위를 정리했는데, 같은 날 여러 곳에서 동시다발로 일어난 봉화시위까지 더하면 그 횟수는 더 많을 것으로 보인다.강화도는 섬이라는 지역 특성상 거류 일본인이 적었기 때문에 일본인 조계지가 있었던 인천보다 활발한 만세 시위가 가능했다. 대몽항쟁, 임진왜란, 병인·신미양요 등 과거부터 외세의 침입에 대응했던 강화 주민만의 역사적 동질성도 이런 결집력을 가져다 주었을 것으로 보인다. 강화의 만세 시위는 인근 김포와 계양·부평에까지 영향을 미쳤다.강화도의 만세 시위는 대한제국 진위대 출신의 독립운동가 유봉진(1886~1956)이 이끌었다. 그는 '결사대장'을 자처하며 죽음을 불사하고 만세 시위의 최일선에 섰다. 강화는 인천 독립운동의 뒷부분에 끼워넣는 '부록'이 아니라 주인공이다. 조봉암, 유두희 등 강화 출신의 독립운동가와 이동휘 등 강화와 인연을 맺은 애국지사의 이야기, 구한말 의병운동까지 더하면 강화의 독립운동 이야기는 날을 새도 모자랄 정도다. /김민재기자 kmj@kyeongin.com

2019-10-16 김민재

[독립운동과 인천·(31)]결사대장 유봉진과 강화 만세운동

길직·잠두교회 신도들 중심 3월 18일 '거사' 이끌어백마 타고 등장… 군수·경찰서장에도 '만세' 다그쳐마니산으로 피신했지만 부모 볼모로 잡혀 결국 체포민족지도자 조봉암 선생 '독립열망' 불 지핀 계기로출소후 대대적 환영인파 보도 눈길… 교육자로 지내강화도는 역사적으로 외세의 침입에 유난히 시달렸던 곳이다. 고려 시기 몽골 침입에 맞서 항전하던 전시수도였으며 조선 말기 두 차례의 양요를 겪기도 했다. 그래서인지 강화도 주민들은 일본의 침략에도 분연히 맞서 싸웠다. 일제가 침략 야욕을 드러낸 구한말 시기부터 의병이 들고 일어섰다. 강화에서 벌어진 3월 18일의 만세 시위는 단일 사건으로는 서울에 이어 두 번째로 많은 43명이 체포된 사건으로 기록되고 있다.1919년 3월 18일 강화 읍내 시장에서 벌어진 만세 운동은 '결사대장' 유봉진(1886~1956)이 이끌었다. 강화 길직교회 신도였던 유봉진은 3월 1일 서울의 만세운동에 참여하고 강화로 돌아온 선두교회 출신의 황도문으로부터 시위 소식과 독립선언서를 입수하고, 강화 지역의 만세시위를 본격적으로 계획했다. 유봉진은 원래 대한제국 진위대 출신으로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하려고 그의 보호순사를 지원했다가 탈락해 칼을 벼르고 있던 중이었다. 1907년 군대 해산 시 해산군의 대일항전에 참여하기도 했다.유봉진은 3월 8일 길직교회 이진형 목사와 함께 비밀리에 시위 작전을 짰다. 기독교 신도들을 중심으로 각 마을마다 회합을 가졌고, 바다 건너 주문도까지 건너가 주민들에게 독립운동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그는 주문도 예수교회당 신도 120명 앞에서 "나는 그 운동을 위해 결사대원이 될 것이니 천명을 다하지 못할 것이며 언제 죽을지 모른다. 천국에서 만나자"고 외쳤다. '유봉진 독립결사대'라고 쓴 윗옷를 보이며 동참을 호소했다.유봉진과 신도들은 18일 읍내 장날을 거사일로 정하고 주민들에게 배포할 문서를 작성했다. "민족자결주의에 입각해 국권을 회복하고 독립해야 한다"는 내용이었다.당시 강화읍 장터는 지금의 관청리와 신문리 사이에 걸쳐 있었는데 사이로 냇물이 흐르고 돌다리가 놓여 있었다고 한다. 시위를 주도한 길직교회, 잠두교회 신도들은 오후 2시가 되자 돌다리 부근에 모여 일제히 만세를 외쳤다. 면 보자기나 종이에 그린 태극기와 '조선독립'이라는 글씨를 쓴 깃발을 흔들며 만세를 외쳤고, 상인들과 장을 보러 나온 주민들도 동참했다. 당시 일제 기록에 따르면 시위 참가자는 1만 명에 달했다. 일제시대 강화의 인구가 7만여 명이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엄청난 규모의 시위대였다.유봉진은 만세 함성이 터지자 백마를 타고 등장해 '결사대장'이라고 쓴 태극기를 어깨에 두르고 시위를 이끌었다. 이어 종루에 올라 종을 치며 군중들을 모았다. 당시 유봉진에 대한 1·2심 판결문을 보면 유봉진을 선두로 세운 군중들은 시장을 지나 강화군청과 공자묘(孔子廟)로 이동해 만세를 외쳤다. 유봉진은 강화군수 이봉종에게 "조선독립만세를 외쳐라. 만약 응하지 않으면 군청 안으로 침입해 파괴하겠다"고 했다.시위대는 공자묘 시위 때 경찰에 체포된 주민들을 구하러 경찰서 앞까지 몰려갔다. 유봉진은 "동지를 석방하라. 또한 시장에서 칼을 빼 든 순사보를 때려 죽일 것이니 인도하라"고 했다. 유봉진은 경찰서장에게도 만세를 외치라고 했는데 서장이 마지못해 '만세'를 부르니까 "만세만으로는 안 된다. '조선독립만세'라고 부르라"고 다그치기도 했다.사건 두 달 뒤인 1919년 5월 10일 당시 경기도 장관이 조선총독부 정무총감에게 보낸 '소요사태에 대한 도장관(道長官) 보고철'에는 유봉진을 강화에서 일어난 만세 시위의 '수모자(首謀者)'로 기록했다.일제는 강화 만세 시위를 주도한 사람들을 속속 검거에 나섰으나 유봉진은 일제의 검거를 피해 마니산으로 도망친 뒤였다. 그는 마니산에 있을 때 조선총독부에 조선을 반환하라는 내용의 편지를 보내고, 경찰에 만세를 다시 부르겠다고 했지만, 우편국이 이를 몰수했다. 이완용에 보낸 친일행위에 대한 경고장도 역시 전달되지는 않았다. 그는 수첩에 연락용 암호를 만들어 기재하는 등 대규모 만세 시위 재개를 노렸지만, 경찰이 부모를 볼모로 잡아 놓고 협박하던 상황이라 결국 산에서 내려와 체포됐다. 그는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2년형을 선고받았고, 복심법원(2심)에서 1년 6개월로 감형됐다.3월 18일 강화 만세운동 사건으로 모두 43명이 구속돼 재판에 넘겨졌는데 이 중 2명은 여자였다. 한 명은 만세운동 사실을 주민들에게 알리는 문건을 배포하는 역할을 맡았던 김유의였고, 다른 한 명이 바로 유봉진의 부인 조인애(1883~1961)였다. 조인애도 태극기를 운반하고 18일 시장에서 부녀자를 인솔해 시위에 앞장섰다가 체포돼 6개월 동안 옥고를 치렀다.유봉진이 마니산에 숨어지내는 사이 강화에는 만세 운동이 들불처럼 번졌다. 3월 19일 일제의 대규모 검거 작전에 반발하며 온수리 천도교, 기독교인 수백명이 만세시위를 벌였고, 20일에는 매일신보 기자인 조구원이 강화경찰서에 "조선독립운동자를 검거하지 말라. 만약 이에 응하지 않으면 참살하거나 방화하겠다"는 문서를 발송했다. 만세의 불길은 교동도까지 번져 21일부터 큰 시위가 벌어졌고, 4월 1일에는 강화 전 지역으로 확산돼 13개 지역에서 동시다발적으로 횃불 시위가 일어나기도 했다. 4월 9일에는 석모도에도 만세의 외침이 울려퍼졌고, 4월 13일에도 불은면 두운리에서 태극기가 휘날렸다.잠잠하던 만세운동은 1년 뒤에도 일어났는데 1920년 7월 15일(음력) 양사면 철산리에서 오용진 등이 집에서 태극기를 그리고 '대한독립 만세, 슬프다, 슬프도다'라는 글을 썼다. 이들은 면 사무소 게시판에 만세 운동을 벌이자는 글을 게시하며 대규모 시위를 벌이려고 했으나 결국 일제에 발각돼 징역 1년형을 선고 받았다.3월 18일 대규모 시위 이전에도 강화에서는 일본에 대항한 크고 작은 만세 시위가 있었다. 18일 장터의 만세 소식을 접한 학생들이 먼저 들고 일어서려다 교장과 직원들의 제지로 뜻을 이루지는 못했다. 1959년 발행한 이병헌의 '삼일운동비사'의 경기도편을 보면 3월 12일 오전 읍내 보통학교에서 3·4학년 생도 전부가 집합해 칠판에 태극기를 그리고 만세를 부르며 운동장으로 나가려 했다는 대목이 있고, 그 다음 날 같은 학교 여자반 100여 명이 학교 안에서 만세를 불렀다고 한다. 당시 경찰이 학생들을 연행하려고 하자 교장이 나서서 신변을 보호하고 책임을 지겠다며 사건을 무마하고 경찰을 돌려보냈다.유봉진이 이끈 강화의 만세운동은 강화 출신의 민족지도자 죽산 조봉암의 마음에 조국 독립에 대한 열망의 불을 지핀 계기가 됐다. 조봉암은 그가 1957년 '희망' 2·3·5월호에 쓴 자서전 '내가 걸어온 길'에서 강화 만세운동을 계기로 "일생을 일본제국주의와 싸운 애국투사가 됐다"고 밝혔다. 특히 유봉진에 대해서는 특별한 평가를 남겼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우리 강화에서의 만세운동은 유봉진씨의 영도 하에 치밀한 계획으로 방방곡곡 어느 작은 부락 하나도 빼지 않고 일어났었고 그것이 한 달 동안이나 계속됐었다. 그런데 유 선생의 지도방침은 철저한 평화적 시위였기 때문에 수천 명이 태형(볼기 맞은 형벌)을 당했을 뿐, 감옥살이를 한 사람은 비교적 많지 않았었다. 유 선생은 마니산 꼭대기에 숨어서 만세운동을 지휘했고, 왜놈에게 체포되어서도 '독립운동자 유봉진'이라고 종이에 크게 써서 가슴에 붙여주지 아니하면 말 한마디 대꾸도 안 했다."1920년 9월 만기 출소한 유봉진은 북도면 시도에서 사립 신창학교 교장으로 근무했고, 몇 해 뒤 강화군으로 돌아와 하도면 내리에 있는 폐교에 노산학원을 다시 개교해 2년 동안 근무하는 등 교육자로 지냈다. 1920년 9월 24일 동아일보 기사를 보면 그가 출소해 강화에 돌아왔을 때 환영 인파가 인산인해를 이뤘다고 한다. 그는 60살이던 1945년 뒤늦게 아들을 낳고 한국전쟁 뒤 자식 교육을 위해 서울로 이사 갔으나 1956년 생을 마감했다. 유봉진은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됐고, 그의 부인도 2년 뒤 대통령표창을 받았다. /김민재기자 kmj@kyeongin.com유봉진이 만세운동 시위를 계획했던 당시 강화 길직교회. /강화3·1운동기념사업회 제공유봉진 /인천인물100인 발췌유봉진의 강화 만세운동 행적이 기록된 '소요사태에 대한 도장관(道長官) 보고철'. /국사편찬위원회 제공유봉진이 몸 담고 있었던 대한제국 진위대 모습. 일러스트/성옥희기자 okie@kyeongin.com유봉진에 대한 검찰신문조서. /국사편찬위원회 제공강화군 독립운동기념비. 지난 1994년 강화읍 견자산 내에 세워졌으나 1996년 당시 만세운동 발상지인 강화읍 웃장터(前 은혜교회)로 이전. 이후 용흥궁 공원내로 재이전 건립. /강화군 제공

2019-10-16 김민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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