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의 얼굴·(16)]인천화교학교 손승종 교장

1930년대 할아버지부터 정착 5대째 이어학생들 사자·용춤 배워 시민과 가까워지길인천의 대표음식이라 하면 무엇이 떠오르시나요. 다들 짜장면을 생각하지 않으셨나요. 그렇습니다. 인천 하면 짜장면이지요. 그런 점에서 짜장면의 뿌리라고 할 수 있는 인천의 화교(華僑)들은 인천의 대표 얼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 화교의 역사는 인천에서 시작합니다. 1882년 임오군란 당시 제물포에 주둔한 청나라 군대를 따라온 40여명의 군역 상인들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들이 인천에 정착하면서 차이나타운이 형성되었습니다. 그들에게는 교육기관이 필수적이었습니다. 1902년 소학교가 설립되었습니다. 오늘날의 한국인천화교중산소학(이하 인천화교학교)의 모태입니다.손승종(60) 인천화교학교 교장도 이 학교 출신입니다. 인천화교학교는 유치원, 초등부·중등부·고등부가 있습니다. '중산'은 중화민국을 세운 쑨원(1866~1925)의 아호입니다. 대만의 교육과정을 따르고 있습니다. 대만과는 달리 한국어 수업시간이 있기는 합니다.손승종 교장의 할아버지가 1930년대 중국 산둥반도에서 한국으로 건너왔다고 합니다. 손 교장의 손자까지 5대째 인천에 살고 있습니다. 1960~70년대에는 학생이 1천200명을 넘었습니다. 지금은 400명도 채 되지 않습니다. 박정희 대통령 시절에 화교 배척이 이루어지면서 많은 이들이 떠났습니다.화교사회도 많이 변했습니다. 예전에는 집에서 중국어만 썼습니다. 그러니 한국말이 서툴 수밖에 없었지요. 영락없는 이방인이었지요. 그런데 요즘 학생들은 중국말이 서툽니다. 손승종 교장은 그게 걱정입니다. 화교학생들이 중국말에 서툰 것은 화교들의 한국화가 이루어졌기 때문입니다.손승종 교장은 학부모들에게 당부합니다. 집에서는 되도록 중국어를 쓰도록 해달라고요. 그러면서 하나 더 강조하는 게 있습니다. 화교사회와 인천과의 소통입니다. 학생들이 사자춤과 용춤을 제대로 배워, 이를 통해 인천 시민들에게 한 발짝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손승종 교장은 올해 10월 10일 쌍십절 기념일에 펼칠 춤공연이 인천과의 소통의 장이 되기를 희망합니다. 10월이 벌써 기다려집니다. 글/박경호기자 pkhh@kyeongin.com 사진/김용국기자 yong@kyeongin.com※'인천의 얼굴'을 찾습니다. (032)861-3200이메일 : say@kyeongin.com

2019-08-20 박경호

[인천의 얼굴·(15)]한전 배전운영부 이동균 과장

전선 점검·수리…시민들 위해 위험감수비 잦고 태풍 도사리는 여름철 '초비상'전기 없이는 아무 것도 못하는 시대입니다. 산소 같은 존재이지만 그 전기는 무서운 놈이기도 합니다. 매일 전기와 싸우는 한국전력공사 인천지역본부 배전운영부 이동균(48) 과장은 출근할 때마다 가족들한테 '조심하라'는 말을 듣습니다. 전봇대에 올라 끊어진 전선을 잇거나 점검하는 일이 엄청나게 위험하기 때문입니다. 전기는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살아 있습니다. 피복이 벗겨진 전선이 몸에 닿을 때가 있는데 망치로 세게 맞는 것 같은 충격을 받습니다. 그 전기와 마주한다는 것, 두려움 자체입니다.고 이가림 시인은 인천과 서울을 오가는 지하철을 움직이게 하는 전기를 빗대어 '2만5천 볼트의 사랑'이란 작품을 남겼습니다. 시인은 2만5천 볼트의 전류가 흐르는 지하철에는 그 2만5천 볼트만큼의 뜨거운 사랑과 고독이 넘실거린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이동균 과장에게는 '2만5천 볼트의 무서움'입니다. 이 과장의 그 무서움이 있기에 시민들은 '2만5천 볼트의 편리함'을 누리는 것이겠지요.일하는 데 가장 힘든 시기인 여름철입니다. 감전을 막기 위해 고무 소매와 고무장갑이 있기는 하지만 완전하지는 않습니다. 전기는 물을 만나면 악마로 변하지요. 비가 자주 오고 땀도 많이 나는 여름은 그래서 더욱 힘이 듭니다. 비 오는 날 전선을 만지게 되면 몸에 난 털이라는 털은 죄다 곤두설 정도입니다. 태풍이라도 오는 날이면 초비상이 걸립니다.요즘 새로 만들어지는 도시에서는 전봇대를 찾아보기가 어렵지요. 하지만 구도심에는 여전히 전봇대입니다. 차량이 들어가지 못하는 골목길에서는 꼼짝없이 전봇대에 매달려 작업을 해야 합니다. 두 배로 힘이 들지요. 이동균 과장은 강화 교동 출신입니다. 거기서 고등학교까지 나왔습니다. 곧바로 전기업체에 취직했습니다. 1995년 경력직으로 한전에 입사해 여태 일하고 있습니다. 글/공승배기자 ksb@kyeongin.com 사진/김용국기자 yong@kyeongin.com※'인천의 얼굴'을 찾습니다. (032)861-3200이메일 : say@kyeongin.com

2019-07-09 공승배

[인천의 얼굴·(14)]오늘 백범 서거 70주기 어머니 곽낙원 여사 동상 '짚신 발'

인천 거처 옮겨 옥바라지 애쓴 모습 담아월북 조각가 작품 '복식연구' 중요 자료오늘은 얼굴이 아니라 발입니다. 짚신을 신고 있네요. 백범 김구 선생의 모친 곽낙원(1859~1939) 여사의 동상입니다.발등 너머로는 아들의 형상도 보입니다. 인천대공원에 가시면 보실 수 있습니다. 1949년 6월 26일 백범은 안두희의 흉탄에 그만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곽낙원 여사 동상은 그 두 달 뒤 완성되었습니다. 머리를 땋아 위로 얹은 것이며 치마저고리, 가냘프고 왜소한 얼굴과 몸매 그리고 짚신을 신은 발과 동냥 바가지를 오른손으로 들고 있는 모양까지. 어머니가 인천에서 고생하던 그대로의 모습으로 만들고자 애를 썼던 아들은 끝내 온전한 어머니 동상을 보지 못하고 눈을 감았습니다.어머니는 아들이 인천 감옥에 갇히자 황해도 해주의 집을 폐하고 남편과 함께 거처를 인천으로 옮겼습니다. 안 해 본 일 없이 닥치는 대로 허드렛일을 했습니다. 인천 사람들이 서로 나서 백범의 방면을 위해 노력하고 파옥까지 시도한 데에는 곽낙원 여사의 애처로운 옥바라지가 어느 정도는 역할을 했을 게 틀림없습니다.인천의 이 곽낙원 여사의 동상은 많은 점에서 특별합니다. 19세기 후반 우리 아낙네들이 입은 옷차림이며 머리 스타일, 신발 등 당시 복식 연구에 살아 있는 자료입니다.특히 동상을 만든 이도 남북이 공동으로 연구해야 할 인물입니다. 동상 발뒤꿈치 아랫부분에는 완성한 시기와 함께 작가의 성을 나타내는 사인이 있습니다. 한자로 '朴'이라고 쓰고 동그라미를 그렸습니다. 작가는 경기중학교 미술교사 등을 지낸 박승구(1919~1995)입니다. 백범이 없는 세상에서 살기가 버거웠던지 그는 6·25 와중에 월북했습니다. 인천 출신의 월북 조각가 조규봉(1917~1997) 등과 합작해 '중국인민지원군 우의탑'을 완성하기도 했습니다.곽낙원 여사의 동상은 백범을 백범으로 만든 인천의 근현대사를 증언합니다. 그리고 백범이 그렇게도 꿈꾸었지만 끝내 이루지 못한 남북이 하나 되는 길, 그 길을 어떻게 찾아야 하는지를 묻습니다. 글/정진오기자 schild@kyeongin.com 사진/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인천의 얼굴'을 찾습니다. (032)861-3200이메일 : say@kyeongin.com

2019-06-25 정진오

[인천의 얼굴·(13)]삼창주철공업 이상만 공무부장

車·기차 부품등 제작 35년 넘은 '최고참''경쟁력'불구 열악한 환경탓 기피 아쉬워뿌리산업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나무의 뿌리처럼 겉으로 드러나지는 않으면서 제조업의 근간을 이루는 분야를 말합니다. 쇳물을 다루는 주물(鑄物)이 여기에 속합니다. 위험하고, 힘이 드는 일입니다. 이상만(64)씨는 35년 넘게 주물회사를 다니고 있습니다. 요즘 젊은 사람들은 금방 떠납니다. 힘이 드는 것도 그렇지만 주물의 특성상 작업 환경이 열악한 것을 견디지 못하는 겁니다. 인천 서구 경서동의 삼창주철공업. 1987년에 주물공장들이 이곳에 몰려들었습니다. 주물공단이라고 합니다. 서울 구로에 있던 회사도 이때 옮겨 왔습니다. 1984년에 입사한 이상만씨는 이 회사 최고참입니다.인천은 뿌리산업의 집합처이기도 합니다. 주물 같은 뿌리산업이 꼭 필요한 존재인데 사람들은 겉으로 보이는 것만 따집니다. 자꾸 밀어내려고 합니다. 공장이 집값을 떨어뜨린다고 여기는 것이지요.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는 일자리이기도 한데 사람들은 왜 몰아내려고 하는지 모르겠습니다.인천은 현재도 역시나 노동자의 도시입니다. 이상만씨가 그것을 증언합니다. 강원도에서 태어났는데 울산 현대중공업에서도 일했고, 영광의 원자력발전소에서도 일했습니다. 돈을 벌기 위해 안 다닌 곳이 없습니다. 서울 구로의 삼창주철과 연이 닿았습니다. 회사가 인천으로 이사하면서 이 땅에 뿌리를 내린 것이지요.젊은 사람들이 기피하는 업종이지만 주물 같은 뿌리산업의 경쟁력은 아직은 괜찮습니다. 우리가 11개를 만들어 1개의 불량을 내고 10개를 납품한다면, 중국은 100개를 만들어야 10개를 납품하는 정도입니다. 불량률이 엄청나지요. 아직 기술력 차이가 큽니다. 하지만 배우려는 젊은이가 없는데 미래가 있겠습니까. 회사에 90명 정도 일하는데 외국인 노동자가 10여 명이나 됩니다. 앞으로는 이들 외국인들이 우리의 뿌리를 이룬다는 얘깁니다. 뿌리 없는 나무가 있을 수 있습니까. 기본을 외면하는 사회, 걱정입니다. 글/정운기자 jw33@kyeongin.com, 사진/김용국기자 yong@kyeongin.com※'인천의 얼굴'을 찾습니다. (032)861-3200이메일 : say@kyeongin.com

2019-06-04 정운

[인천의 얼굴·(12)]인천사할린동포복지회관 '반장' 강정순 할머니

방직공장 다니며 징용 한국인과 결혼지금 생활 '행복' 보상금 일부 기부도우리 할머니 할아버지들은 당신들의 삶을 이야기하면서 소설 몇 권이 나올 거라고들 하십니다. 그만큼 격동의 시대를 살았고 그 삶은 고달팠습니다. 아무리 잘 만든 드라마라도 어찌 이들의 아픈 인생을 제대로 그려낼 수 있을까요.1999년 3월 생겨난 인천사할린동포복지회관이 연수구에 있습니다. 전국에 하나뿐인 시설입니다. 여기 사는 1932년생 강정순 할머니. 전남 순천에서 태어난 할머니는 열한 살이 되던 1942년 일본 최북단 사할린으로 이주했습니다. 부모님과 오빠, 남동생 둘, 온 가족이 떠났습니다. 일제가 사할린 탄광에서 일하면 먹고 살 수 있다고 꾀어낸 것이었지요. 아버지와 오빠가 탄광에서 일했습니다. 안전시설도 없어 무너지기 일쑤였지요. 참 많이도 죽어 나갔습니다. 사할린에 혼자된 부인들이 많았던 이유입니다. 6개월이나 지났을까요. 일제는 아버지와 오빠를 일본 남쪽 끝 규슈의 탄광으로 옮겼습니다. 생이별이었고, 그게 마지막이 되었습니다.태평양전쟁이 끝날 때 사할린은 옛 소련 땅이 되었습니다. 할머니는 거기서 15년 넘게 방직공장에 다녔습니다. 그 덕분에 아직도 러시아 돈으로 연금을 받기는 합니다. 스물이 되었을 때 역시 사할린에 징용돼 온 한국인 남자와 결혼해서 애들도 낳았습니다. 그 아이들은 러시아 사람들하고 결혼해 카자흐스탄 등지에 살고 있습니다. 그렇게도 착했던 남편은 사할린에서 세상을 떴습니다.20년이 된 사할린동포복지회관에는 82명의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생활하고 있습니다. 평균 연령 85세. 1주일에 5명이 세상을 떠날 때도 있습니다. 359명이 거쳐 갔습니다. 강정순 할머니는 2006년 이곳에 왔습니다. 지금은 복지관 입소자들을 대표하는 반장을 맡고 있습니다. 1991년 '사할린 동포 고국 방문행사'가 있었을 때 49년 만에 고향 땅을 밟았습니다. 그때 아버지와 오빠 이야기를 들었지요. 해방이 되자, 아버지와 오빠는 규슈에서 사할린 가는 배를 타려고 했다네요. 그런데 사할린이 불바다가 되어 모두 죽었다는 얘기가 나돌았답니다. 그 둘은 부산으로 오게 되었고요. 고향 방문 행사 때 아버지 산소에도 가봤습니다. 여든여덟 할머니는 지금 여기 복지관 생활이 그렇게 행복할 수가 없다고 합니다. 그 행복감이 더 어려운 이웃에게 눈을 돌리게 했나 봅니다. 4년 전 남편 앞으로 강제징용 보상금이 나왔는데 아무렇지도 않게 그 일부를 적십자사에 기부했거든요. 연수구 사할린동포복지회관은 일 년 내내 돌려보아도 질리지 않을, 세상 어디에도 없는 드라마 세트장입니다. 글/박경호기자 pkhh@kyeongin.com 사진/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인천의 얼굴'을 찾습니다. (032)861-3200 이메일 : say@kyeongin.com

2019-05-27 박경호

[인천의 얼굴·(11)]가천대 길병원 조진성 응급실장

전국 첫 운행 2011년부터 자리 지켜와"기피 부서지만 진짜 의료서비스 소명"사람을 살리는 일보다 더 소중한 일이 또 있을까요. 인천의 가장 큰 특성은 바다와 섬입니다. 뱃일은 거센 파도만큼이나 거칩니다. 목숨을 내걸어야 할 정돕니다. 촌각을 다투는 환자가 많게 마련입니다. 아무리 빠른 배를 타더라도 기회를 놓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하늘을 나는 응급실, 닥터헬기가 있어 인천 앞바다의 섬 주민들은 안도합니다.2011년, 전국 최초로 인천 하늘에 닥터헬기가 떴습니다. 조진성(43) 가천대 길병원 응급실장은 그때부터 지금까지 닥터헬기를 떠나지 않고 있습니다. 작은 헬기에 탄다는 것은 바이킹 탈 때보다도 더 무서운 일입니다. 고소공포증이 있는 의사들은 엄두도 내지 못하지요. 닥터헬기는 당직의사 10명이 돌아가면서 탑니다. 헬기는 웬만한 응급실이 갖추고 있는 장비들을 싣고 있습니다.2012년, 100번째 닥터헬기 이륙 때가 생각이 납니다. 네 살 여자아이가 강화도에서 물놀이 사고를 당했습니다. 20분만에 도착한 학교 운동장에는 아이가 의식을 잃고 사색이 되어 있었습니다. 심폐소생술을 여러 차례 해야 했습니다. 10여 분이 지나서야 심장이 뛰었습니다. 헬기에 태워 이송하는 내내 '꼭 살아야 한다'고 되뇌었습니다. 그 아이는 다행히 1주일 가까이 지나서 건강하게 퇴원했습니다. 벌써 초등학생이 되었겠네요. 이처럼 닥터헬기가 아니면 살릴 수 없는 경우가 많습니다. 충남 일부 지역까지, 사고를 당한 참으로 많은 사람들이 닥터헬기를 타고 살아났습니다.닥터헬기는 사람을 살리는 필요 장비인데 어떤 이들은 그 소리가 싫다고 귀를 막습니다. 헬기가 오르내리는 계류장을 군부대로 옮겼는데도 병원 근처 주민들은 이따금 소음 민원을 제기합니다. 내 가족이 사고를 당해 닥터헬기를 타야 할 경우에도 그 소리가 시끄러울까요. 닥터헬기 프로펠러 소음은 생명을 살리는 빛의 소리입니다. 어릴 때 동의보감을 읽고 의사의 꿈을 키웠다는 조진성 응급실장은 응급의학과는 의사들이 기피하는 부서이지만 진짜 의료 서비스를 한다는 생각에 참아냅니다. 헬기 소리를 '오늘도 누군가 살아난다'며 기쁘게 여겨주세요. 그게 힘이 됩니다. 글/윤설아기자 say@kyeongin.com 사진/김용국기자 yong@kyeongin.com※'인천의 얼굴'을 찾습니다. (032)861-3200이메일 : say@kyeongin.com사진/김용국기자 yong@kyeongin.com

2019-05-21 윤설아

[인천의 얼굴·(10)]고려인 빵집 사장 이가인씨

옛 소련지역으로 옮겨 살아온 '한인 3세'2004년 남편과 이주…연수구에 6천명 살아인천 연수구에 사는 우즈베키스탄 출신 고려인 3세 이가인(36) 씨입니다. 2004년 우즈베키스탄인 남편과 함께 한국에 왔습니다. 꼭 1년 전인 작년 5월 연수동 함박마을에 '아써르티'란 이름의 빵집을 차렸습니다. '아써르티'는 러시아어로 '종류별로 다 있다'는 뜻이라고 합니다. 이름대로 빵뿐만 아니라 한국에서는 구하기 어려운 우즈베키스탄과 러시아 식료품도 팝니다. 빵을 주식으로 해서 그런지 종류만 10가지가 넘습니다. 가게를 하기 전 집에서 만든 것을 나누어 먹은 주위 사람들이 '고향의 맛'이라면서 빵집을 권유했습니다. 장사가 잘 됩니다. 한국 사람들이 30% 정도를 차지합니다.옛 소련지역에 이주해 살던 한인과 그 후손을 고려인이라고 하지요. 고려인은 3세까지 동포로 인정받아 재외동포비자를 받아 한국으로 이주할 수 있습니다. 국내에는 고려인 7만여명이 살고 있습니다. 이들 중 연수구에만 약 6천명이 살고 있지요. 이가인씨의 원래 이름은 '제버 사비로사'입니다. 한국식 이름을 쓰는 게 여러모로 나을 것 같아 이주하면서 바꾸었습니다. 이주 이듬해 한국에서 태어난 딸은 이제 중학교 1학년이 되었습니다.이가인 씨의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는 한반도 동북쪽인 러시아 연해주에 살았었는데 1930년대 스탈린 정권의 이주정책으로 정반대쪽인 우즈베키스탄 호라즘 지역으로 강제로 옮겨야 했습니다. 이가인 씨의 어머니는 6남매 중 넷째였는데 우즈베키스탄인과 결혼했습니다. 어머니 형제들은 한국말로 대화를 했습니다. 또한 외할머니는 끝까지 온돌방을 고집했습니다. 어머니가 한국말을 쓰고, 외할머니가 한국식을 잊지 않으셨던 것처럼 이가인씨는 한국에서 계속 살 생각입니다.그런데 우리는 왜 러시아로 이주한 한인들은 고려인이라 하고, 중국으로 넘어간 사람들은 조선족이라고 할까요. 이가인씨를 보면서 문득 그런 생각이 듭니다. 글/박경호기자 pkhh@kyeongin.com 사진/김용국기자 yong@kyeongin.com※'인천의 얼굴'을 찾습니다. (032)861-3200이메일 : say@kyeongin.com사진/김용국기자 yong@kyeongin.com

2019-05-12 박경호

[인천의 얼굴·(9)]필리핀 출신 결혼이주여성 이소혜씨

얼마전 필리핀 모친마저 떠나 더 각별해연수원로모임 어버이날 효부상 희소식시어머니와 며느리. 우리에게는 마치 지금의 여야 관계처럼 불화와 갈등의 대명사로 다가옵니다. 그만큼 둘 사이는 불편한 관계란 얘기일 겁니다. 왼쪽 이순덕(81) 할머니와 오른쪽 이소혜(33)씨는 정말이지 친정엄마와 딸 같은 고부간(姑婦間)입니다. 이소혜씨는 2008년 필리핀에서 온 결혼 이주여성입니다. 원래 이름은 알디자(Aldiza)였는데 2015년 귀화하면서 시어머니 성을 따라서 이씨로 정했습니다. 결혼 2년 만에 남편이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났습니다. 큰딸이 7개월이었고, 막내아들이 뱃속에 있을 때였습니다. 누구 하나 아는 사람 없이 왔으니 하늘이 무너지는 듯했죠. 고향 생각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때 든든한 기둥이 되어 주신 게 시어머니였습니다. 시어머니에게도 남편은 하나뿐인 아들이었지요. 말 그대로 동병상련이었습니다. 딸이 되기로 했습니다. 소혜씨는 시어머니를 엄마라 부르고, 시어머니는 며느리를 알디자라고 필리핀 이름을 불러줍니다.필리핀 친정에는 1년에 한 차례씩은 다녀왔는데 몇 년 전부터 시어머니의 거동이 불편해지면서 가지 못합니다. 시어머니 혼자서는 산책을 나가기조차 쉽지가 않기 때문입니다. 친정 가족들이 보고 싶지만 꾹 참고 SNS로 달랩니다. 2년 전에는 필리핀에 계신 친정엄마가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그 뒤로는 더욱 시어머니가 친정엄마 같습니다. 엄마와 딸도 자주 다투듯이 이 둘 사이에도 말다툼이 있습니다. 음식 간을 맞추는 것이 싸움이 되고는 합니다. 필리핀에서 먹듯이 간을 하면 시어머니는 짜다고 타박을 하거든요. 여덟 살, 일곱 살 아이들이 하고 싶은 대로 놔두었으면 좋겠는데 시어머니는 일찍 자라고 성화지요. 목소리를 높여가며 싸우다가도 한나절이면 풀고, 언제 그랬냐는 듯 수다를 떱니다.효부(孝婦)라는 말이 오히려 불편해진 요즘 세상입니다. 이 딸 같은 며느리에게 인천연수원로모임이라는 단체에서 올해 어버이날에 맞추어 효부상을 준다고 합니다. 인천에 사는 외국인이 10만4천여명인데, 결혼해 이민을 오거나 귀화한 사람은 2만1천여명입니다. 글/윤설아기자 say@kyeongin.com※'인천의 얼굴'을 찾습니다. (032)861-3200이메일 : say@kyeongin.com사진/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

2019-05-06 윤설아

[인천의 얼굴·(8)]서해5도특별경비단 3005함 김종인 함장

한번 출동에 꼬박 7박8일간 불법조업 단속해경 준비 아들 뿌듯… '따뜻한 시선' 바라목숨을 걸고 서해를 지키는 우리 해경의 서해5도특별경비단 김종인(54) 함장입니다. 서해 NLL 해역에서 중국 어선의 불법 조업이 좀처럼 수그러들지 않고 더욱 극성을 부리자 해경은 2017년 4월 서해5도특별경비단을 창설했습니다. 우리 어선이 중국 어선을 직접 나포한 사건이 계기가 되었습니다. 창설 2년을 맞았습니다. 한 번 출동하면 꼬박 7박8일을 배 위에서 지내며 중국 어선과도, 파도와도 싸워야 합니다. 중국 어선들은 파도가 심하게 칠 때 더 많이 들어옵니다. 해경이 힘들어한다는 것을 그들이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바다를 지키는 일, 파도가 높다고 게을리 할 수가 있겠습니까. 칼을 막을 수 있는 방검부력조끼를 입고, 헬멧을 쓰고, K-5 권총을 차고, 6연발 고무탄 총을 메고, 방패를 듭니다. 장비 무게만 5㎏이 넘습니다. 잠긴 문을 열기 위해서는 '빠루'라고 불리는 노루발 장구와 그라인더를 전담하는 인력도 있습니다. 김종인 함장의 3천t급 배에는 40명이 근무합니다.불법 어업을 일삼는 중국의 어부들이 목숨을 걸기에 우리도 목숨을 내걸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진압할 수가 없습니다. 이성을 잃고 무지막지하게 덤비는 중국 어부들에게 목숨을 잃거나 크게 다친 동료들도 많습니다. 김종인 함장은 지금까지 30여 척의 중국 어선을 나포했습니다. 위급상황에 처한 우리 어선이나 낚싯배를 구조한 것은 25척 정도 됩니다. 8일을 나가 있다가 돌아와서 집에서 쉬는 것은 고작 3일입니다. 4일은 출동 준비를 하는 시간입니다. 그렇게 1주일씩 번갈아 바다에 나갑니다. 그런 아빠가 무엇이 좋은지, 대학에 다니는 큰아들이 해경 시험 준비를 합니다. 속으로 뿌듯하지요.김종인 함장은 우리 국민들이 해경을 대하는 태도가 육지 경찰에 비해 좋지 않다는 점을 잘 압니다. 바다라는 특수한 상황에서 늘 목숨을 내놓고 일하는 해경을 따뜻한 시선으로 봐 주셨으면 하는 게 김종인 함장의 최대의 바람입니다. 글/김주엽기자 kjy86@kyeongin.com 사진/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인천의 얼굴'을 찾습니다. (032)861-3200이메일 : say@kyeongin.com

2019-04-28 김주엽

[인천의 얼굴·(7)]남동소방서 김철수 주임

18년간 1200여건 출동 동료도 많이 잃어딸이 '아빠가 자랑스럽다'고 할때 뿌듯어디 하나 모난 곳이 없습니다. 둥글둥글, 참으로 순한 인상입니다. 이글거리는 화마(火魔)에 맞서는 강력한 전사 소방대원이라고는 누구도 생각 못할 얼굴입니다. 인천 남동소방서 김철수(48) 주임입니다. 18년여간 1천200여 건의 화재현장에 출동했습니다. 이렇게 죽는구나 하고 생각한 적도 많았습니다. 그동안 선후배 동료들도 많이 잃었습니다. 불의 결과는 잿더미입니다. 살아 있는 것이거나 평생을 일군 것이거나를 가리지 않고 한순간에 날려버립니다. 초토화란 말이 여기서 나왔습니다. 망연자실한 피해자들만 남은 현장에는 늘 슬픔뿐입니다.소방관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빠른 판단력과 결기입니다. 큰불인 '대불'이 될지, 작은 불인 '소불'로 끝날지를 순간적으로 결정해야 합니다. 특히 불길 속으로 뛰어들어야 할 때 머뭇거리면 안 됩니다. 그 결기는 소방관이라면 누구나 갖고 있을 겁니다.여러분! 내 목숨을 내놓고 저 사람의 목숨을 건져야 할 순간에 맞닥뜨린다면 망설이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나를 던져 남을 살리는 소방관은 그 자체로 언제나 우리의 영웅입니다.불은 나지 않게 하는 게 최선이지만 났다 하면 빨리 끄는 게 그다음입니다. 이달 초 온 나라를 공포에 몰아넣었던 강원도 산불도 그나마 초동 대처가 잘 되었기에 더 이상의 피해를 줄일 수 있었습니다. 그때 전국의 소방관들이 강원도 현장에 출동했습니다. 다들 정말 물불 가리지 않고 달려들었습니다. 불을 끄는 데 망설임이 있어서는 안됩니다. 자칫하다가는 걷잡을 수가 없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번 강원도 산불 진압 이후 많은 국민들이 소방관의 대우를 걱정해줍니다만 그게 지나쳐 불쌍한 존재로 여긴다면 오히려 사기를 꺾는 겁니다. 영웅을 불쌍한 존재로 보아서야 되겠습니까.김철수 주임은 하나뿐인 딸이 "소방관인 아빠가 자랑스럽다"고 할 때가 가장 뿌듯하다고 말합니다. 이제 우리도 소방관을 자랑스럽게 여기자고요. 글/윤설아기자 say@kyeongin.com※'인천의 얼굴'을 찾습니다. (032)861-3200이메일 : say@kyeongin.com사진/김용국기자 yong@kyeongin.com

2019-04-14 윤설아

[인천의 얼굴·(5)]동인천 양키시장 터줏대감 신현성 할아버지'

미군부대서 흘러나온 물건 팔던 곳교복·교련복 등 만들며 5남매 키워없는 게 없다던 동인천 양키시장을 볼 날도 얼마 남지 않았다고 합니다. 1930년대 생겨난 인천에서는 가장 오래된 종합시장이지요. 신현성(80) 할아버지는 몇 안 남은 양키시장 지킴이입니다. 50년이 넘었습니다. 양키시장은 그 이름처럼 미군 부대에서 흘러나온 온갖 것들을 팔았습니다. 인천과 미군, 참으로 질긴 인연을 갖고 있습니다. 신미양요 때부터 치면 미군의 인천상륙작전만 세 번이나 있었습니다. 1945년 해방 후 가장 먼저 찾은 곳이 인천이었습니다. 한반도에서 완전 철수했던 1년여를 제외하고는 줄곧 인천을 떠난 적이 없습니다. 우리네 삶에 얼마나 많은 영향을 끼쳤겠습니까. 그 산증인이 할아버지입니다. 저기 할아버지 뒤에 쌓인 실패 더미가 그 삶의 두께를 이야기합니다.할아버지는 군대 제대 후 작업복 만드는 가게에 취직해 어깨너머로 일을 배웠습니다. 그리고 양키시장에서 세를 얻어 양복점을 시작했습니다. 학생 교복·교련복, 근로자 작업복 등을 주로 만들었습니다. 찾는 사람이 정말 많았습니다. 새벽 5시에 문을 열어 통금 시간 직전인 밤 11시 50분에 닫았습니다. 한 달에 딱 한 번 쉬었습니다. 일이 밀려 가게에서 쪽잠을 자는 날도 부지기수였습니다. 3~4년 만에 3평짜리 점포를 샀습니다. 그렇게 5남매를 키웠습니다. 끊이지 않을 것 같던 손님, 이제는 언제 그랬냐는 듯 한산합니다. 세를 내는 것도 아니고 해서 문을 열고는 있는데 손님 한 명 구경하지 못하는 날이 대부분입니다. 오르막이 있으면 내리막을 만나는 법, 이게 인생인가 봅니다. 여기서 잠깐 생각해 볼 게 있습니다. 교련복! 이게 무엇인지 아는 분은 제법 나이가 드신 겁니다. 하하하! 글/김태양기자 ksun@kyeongin.com 사진/김용국기자 yong@kyeongin.com※'인천의 얼굴'을 찾습니다. 평범하지만 인천을 지탱하는 든든한 얼굴이라고 생각하시는 이가 있다면 문을 두드려 주세요. 굳이 얼굴이 아니어도 좋습니다. 인천을 상징하는 손이나 발, 어느 것이어도 됩니다. 모두가 '인천의 얼굴'이 될 수 있습니다.(032)861-3200 이메일 : say@kyeongin.com사진/김용국기자 yong@kyeongin.com

2019-04-01 김태양

[인천의 얼굴·(4)]인천항 선광 신컨테이너터미널 홍윤택 크레인 선임 기사

높이보다 바람·안개가 더 무서워대소변 고려 자극적 음식도 자제인천항은 인천의 상징입니다. 수많은 노동자들의 일터이기도 합니다. 가장 높은 곳에서 일하는 크레인 기사를 '항만 하역의 꽃'이라고 부릅니다. 홍윤택(51) 선임 기사는 17년째 인천항 컨테이너 터미널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선광 신컨테이너터미널에서 접안한 배에 컨테이너를 싣거나 내립니다. 대한민국 수출입의 최일선입니다. 45m 높이의 조종실에서 크레인을 조작하는 게 생각처럼 쉽지가 않습니다. 발밑이 아찔하지만 무서움을 느낄 새가 없습니다. 항만에는 늘 바람이 불고 안개가 끼기 마련인데, 그게 제일 무섭습니다. 바람이 불면 컨테이너가 흔들리기 때문에 제 위치에 내려 놓기가 어렵습니다. 안개는 컨테이너조차 보이지 않게 합니다. 인천항은 특히 조수간만의 차이가 크기로 유명하지요. 10m를 더 내려가거나 올라옵니다. 이런 것들이 크레인 기사들을 괴롭힙니다. 인천항 크레인 기사들은 그래서 더욱 정신을 집중해야 합니다. 3시간 이상 작업하는 게 금지되어 있는 이유입니다. 그만큼 힘이 듭니다. 대소변을 참는 것도 여간 어려운 게 아닙니다. 조종실을 오르내리는 엘리베이터가 생겨 편해졌지만 아직 화장실은 없습니다. 배탈이라도 나면 그야말로 큰일입니다. 근무 전날에는 자극적인 음식은 절대로 먹지 않습니다. 이제는 몸도 일에 생체리듬을 맞추나 봅니다. 쉬는 날에도 소변이 3시간마다 나옵니다. 일본에서 대학 다니는 딸이 부모님을 소개하는 수업 시간에 '우리 아빠는 대한민국의 수출입 현장에서 일하고 있다'고 자랑스럽게 발표했다는 말에 오늘도 고된 일과를 힘차게 시작합니다. 글/김주엽기자 kjy86@kyeongin.com 사진/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인천의 얼굴'을 찾습니다. 평범하지만 인천을 지탱하는 든든한 얼굴이라고 생각하시는 이가 있다면 문을 두드려 주세요. 굳이 얼굴이 아니어도 좋습니다. 인천을 상징하는 손이나 발, 어느 것이어도 됩니다. 모두가 '인천의 얼굴'이 될 수 있습니다.(032)861-3200 이메일 : say@kyeongin.com

2019-03-24 김주엽

[인천의 얼굴·(3)]인천공항 안내원 한세진씨와 로봇 '에어스타'

일하는 내내 서서 있어 다리 붓고험한 말 들어도 자부심으로 견뎌오늘 인천의 얼굴은 둘입니다. 누구냐고요? 인천국제공항 안내 데스크에서 일하는 한세진(37)씨와 공항 길 안내 로봇 '에어스타'입니다. 인천에서만 볼 수 있는 얼굴들입니다. 한세진 씨는 밤낮을 바꿔가며 하루 8시간씩 일합니다. 매일 수천 명씩 찾아옵니다. 일하는 내내 서 있어야 합니다. 고객에 대한 예의를 갖추기 위해 앉아 있을 수가 없습니다. 다리가 퉁퉁 붓고 피가 통하지 않아 괴롭지만 '내가 인천과 대한민국의 첫인상'이라는 생각에 꾹 참고 얼굴에 미소를 짓습니다. 그렇게 일한 지 벌써 14년쨉니다. 한세진 씨에게 얼굴을 바짝 들이민 에어스타는 2017년 태어났습니다. 아직 어립니다. 얼굴도 둥글고, 귀도 둥글고, 눈도 둥급니다. 얘한테는 길을 묻기보다는 사진찍기를 더 원합니다. 어느새 공항의 마스코트가 되어 버렸습니다.작년 인천공항 이용객이 6천만명을 넘어섰다고 합니다. 하루 20만명이 넘는 세계 5위 규모랍니다. 외국인이건 우리나라 사람들이건, 화장실을 찾거나, 어디에서 무엇을 사야 하는지 궁금하면 일단 안내 데스크부터 찾고 봅니다. 이들 중에는 반말하는 사람도 있고, 심지어 욕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한세진 씨는 얼굴을 찌푸리지 못합니다. '인천과 대한민국의 얼굴'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 모두, 공항에 가면 한세진 씨에게 사탕이라도 하나씩 쥐어주면 어떨까요. 늘 웃어줘서 고맙다고 하면서요. 에어스타를 만나면 그 둥그런 머리를 한번씩 쓰다듬어주자고요. 생각만 해도 절로 웃음이 납니다. 글/정운기자 jw33@kyeongin.com 사진/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인천의 얼굴'을 찾습니다. 평범하지만 인천을 지탱하는 든든한 얼굴이라고 생각하시는 이가 있다면 문을 두드려 주세요. 굳이 얼굴이 아니어도 좋습니다. 인천을 상징하는 손이나 발, 어느 것이어도 됩니다. 모두가 '인천의 얼굴'이 될 수 있습니다. (032)861-3200 이메일 : say@kyeongin.com

2019-03-18 정운

[인천의 얼굴·(2)]만석동 '굴막' 김군자 할머니

전쟁때 피란 나와 시작된 굴까기크고 작은 상처속 58년째 이어와마디 잘린 손이 훈장입니다. 일흔여덟 김군자 할머니는 58년째 인천 동구의 굴막을 지켜왔습니다. 굴막은 굴을 까는 임시 작업장입니다. 우리는 그저 아연이 풍부한 겨울 음식으로만 알고 굴 먹기에 바쁘지만, 할머니에게는 평생의 목숨줄이었습니다. 평안도 진남포에서 태어난 할머니는 한국전쟁 때 온 가족이 피란을 나왔습니다. 충남 안면도에 자리를 잡았다가 인천으로 옮겼습니다. 뭐 특별한 기술이라고는 없는 할머니에게 선택지가 많지 않았습니다. 영종도며 팔미도 등지로 나가 갯벌을 뒤졌습니다. 여름에는 바지락, 겨울에는 굴을 캤습니다. 실향민 대다수가 그렇게 살았습니다. 겨울철 차디찬 바닷바람을 막아야 했습니다. 북성포구, 만석부두 여기저기에 굴막이 생겨났습니다. 장갑을 낀다고는 하지만 손 마디는 굵어지고, 크고 작은 상처도 끊이지 않았습니다. 가까운 바다에 나가 주꾸미를 잡기도 했습니다. 오른쪽 검지 한 마디를 그때 잃었습니다. 할머니는 그래도 굴 까는 일을 멈출 수가 없었습니다. 5남매를 키워야 했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구청에서 작업장을 따로 마련해 주었습니다. 힘이 닿는 데까지 굴 까기를 계속할 생각입니다. 굴막은 인천의 역사입니다. 글/김태양기자 ksun@kyeongin.com 사진/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인천의 얼굴'을 찾습니다. 평범하지만 인천을 지탱하는 든든한 얼굴이라고 생각하시는 이가 있다면 문을 두드려 주세요. 굳이 얼굴이 아니어도 좋습니다. 인천을 상징하는 손이나 발, 어느 것이어도 됩니다. 모두가 '인천의 얼굴'이 될 수 있습니다. (032)861-3200 이메일 : say@kyeongin.com

2019-03-10 김태양

[인천의 얼굴·(1)]'최고령' 이화례 할머니

1899년 출생 생사에 초탈한 모습7남매 두고 증손만 대략 44명쯤경인일보가 '인천의 얼굴'을 시작합니다. 그 첫 번째로 인천에서 제일 연세가 많으신 이화례 할머니를 선정했습니다. 1899년 음력 2월생이시랍니다. 주민등록상에는 양력 10월로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쇠는 나이로 121세입니다.인천의 유명 정치인 조봉암 선생과 동갑이십니다. 할머니는 그야말로 역사적인 순간들을 살아내셨습니다. 얼굴에 그 연륜이 묻어납니다. 내 인생뿐만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이 겪은 삶의 애환도 지켜보셨을 겁니다. 나이 든 사람은 자신의 얼굴에 책임을 져야 한다고 합니다. 100세를 훌쩍 넘겨서인지 할머니는 생사에 초탈한 모습입니다.7남매를 두셨답니다. 수발 드는 막내딸도 일흔둘입니다. 7남매에 딸린 자식만 22명입니다. 그 손자손녀들도 평균 2명씩은 낳았다니, 증손만 해도 대략 44명쯤 된답니다. 그 증손이 낳은 아이가 올해 두 살이라네요. 할머니의 건강비결은 적게 먹는 데 있다고 막내딸 안성자 씨가 귀띔했습니다.'소식(少食)이 장수의 비결'이란 말은 다들 알고 있지만 지키기가 쉽지 않습니다. 욕심을 내지 않는 게 오래 사는 지름길이란 얘기를 할머니는 얼굴로 말합니다. 자, 이제 우리도 할머니처럼 식탐을 줄이는 것으로 이 3월을 시작해 보시면 어떨까요. 글/윤설아기자 say@kyeongin.com 사진/김용국기자 yong@kyeongin.com※'인천의 얼굴'을 찾습니다. 평범하지만 인천을 구성하는 든든한 얼굴이라고 생각하시는 이가 있다면 문을 두드려 주세요. 굳이 얼굴이 아니어도 좋습니다. 인천을 상징하는 손이나 발, 어느 것이어도 됩니다. 인천에 사는 누구의 어느 것이라도 '인천의 얼굴'이 될 수 있습니다.(032)861-3200 이메일 : say@kyeongin.com

2019-03-03 윤설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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