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나들목' 인천공항 이야기·(20)]공역 (Air space)

영토·영해위 무한대 공간 주권영역1952년 주한미군 방공 목적 첫 도입정부 사고발생시 수색·구조 책임져'인천 FIR' 북한과 맞닿아 면적 협소43만㎢ 불과… 일본영공의 20분의 1안보상 '비행금지구역' 많아 더 혼잡비행기 수직 간격 좁힌 RVSM 운영북한항로 열리면 서쪽공역 여유 확보2010년 5·24조치후 서해상 통과 막혀판문점선언에 부활 논의… 다시 경색국가나 도시 간 영토, 바다의 경계가 나뉘어 있듯 하늘에도 국가별로 관리하는 '공역(空域·Air space)'이 있다. 국제민간항공기구(ICAO)에서 통용되는 우리나라 공역의 이름은 다름 아닌 '인천'이다. 2001년 인천국제공항이 인천 영종도에 개항한 이후 국가 공역을 관리하는 항공교통관제소가 바로 인천에 자리 잡았기 때문이다. 인천은 대한민국의 수많은 도시 중 하나이지만, 하늘에서는 인천이 곧 한국이나 다름없다.공역은 비행기의 활동을 위한 공간으로 비행의 안전과 질서를 위해 적절한 통제가 이뤄지는 곳이다. 국가 입장에서는 주권 보호와 군사적 방위를 위한 중요한 공간이기도 하다. 우리나라 영토는 헌법에 따라 '한반도와 그 부속 도서'이고, 영해는 관련법에 의해 영토 경계로부터 12해리(22.224㎞)로 정해져 있다. 우리나라 주권이 미치는 공역(영공)은 영토와 영해의 상공이다. 국제민간항공기구는 이런 국제법과 국내법상 주권 공역의 개념 외에도 나라별로 비행기의 안전 운항을 통제할 수 있도록 공역을 권역별로 나눴다. 이를 '비행정보구역(FIR·Flight Information Region'이라고 하는데 우리나라가 담당하는 공역의 이름은 인천 비행정보구역 즉 인천 FIR이다. 민간 협약을 따르기는 하나 사실상 주권의 영역으로 보고 있다. 우리 정부는 인천 FIR을 지나는 모든 항공기의 안전 운항을 위한 정보 제공과 항공기 사고 발생 시 수색·구조에 대한 책임을 진다.국토교통부에 따르면 인천 FIR의 면적은 43만㎢이고, 수직 범위는 지표와 수면 위로부터 무한대다. 동남쪽으로는 후쿠오카 FIR, 서쪽으로는 상하이 FIR, 북쪽으로는 평양 FIR과 맞닿아 있다. 우리나라 공역은 주한 미 공군이 1952년 방공 목적으로 관제 업무를 하면서 개념이 도입됐고, 1955년 도쿄 FIR 일부에 포함돼 관리돼 왔다. 해방 이후에도 하늘의 주권에서만큼은 완전한 독립을 가져오지 못했던 셈이다. 1958년 우리 공군이 주한 미 공군으로부터 항로 관제 업무를 인수했고, 국제민간항공기구에 대구 FIR 신설을 신청했다. 당시 항공교통관제소가 대구에 있었기 때문에 대구라는 이름으로 신청했다. 1963년 국제민간항공기구 이사회 승인으로 우리나라에도 FIR이 발효됐고, 2002년 항공교통관제소 이전에 따라 '인천 FIR'로 명칭이 변경됐다.인천 FIR은 북쪽으로 북한과 경계를 하고 있고, 인접 국가보다 면적이 좁기 때문에 늘 혼잡을 빚고 있다. 일본의 FIR은 930만㎢로 우리의 20배다. 우리나라는 대만(41만㎢), 홍콩(37만㎢)과 비슷한 수준이다. 인천공항의 급격한 성장으로 하늘길은 포화에 이르렀고, 코로나19 사태가 터지기 전까지만 해도 인천공항과 김포공항의 항공 교통량이 최대 수용 능력을 벗어나는 상황까지 빚어졌다. 2016년과 2017년 개최된 국제민간항공기구 회의에서 우리 공역의 안전도가 기준에 미치지 못한다는 지적이 나오기도 했다. 특히 중국 방향 항로는 비행 고도를 이탈하는 사례까지 발생해 안전에 큰 위협이 우려된다는 결과가 나왔다.국토부 제3차 항공정책기본계획(2020~2024)을 보면 항공 교통량은 매년 5% 이상 꾸준히 증가해 2011년 대비 2018년 1.6배 늘었다. 하늘길에서 병목 현상마저 빚어지는 실정이다.우리나라 공역이 큰 혼잡을 빚는 이유는 남북 대치 상황이라는 군사·안보적 이유가 가장 크다. 우리 공역 관리 주체는 국토부이지만, 실상은 국토부·국방부로 이원화돼 있다. 공역에는 군사훈련구역과 안보상 이유로 설정된 비행금지·제한구역이 있는데, 이곳은 민간 항공기가 이용할 수 없다.국토부는 인천공항 주변의 민간 항공기 공역을 확대해야 한다는 서울지방항공청 건의에 따라 올해 7월부터 국방부와 본격적으로 협의한다. 국토부는 인천공항 서쪽에 있는 공군 훈련구역(군공역)을 30% 축소해 민간 항공기가 이용할 수 있게 해달라고 국방부에 건의했다. 이곳은 인천공항에서 이륙한 비행기가 중국·유럽 등지로 가는 항로와 겹치는 공역이다. 군공역이 30% 축소되면 시간당 수용량이 70대에서 80대로 늘어날 것으로 국토부는 보고 있다. 훈련구역 조정의 경우, 고위급 정책 협의에선 큰 틀에서 합의가 이뤄졌지만 실무 협의는 장기화할 전망이다. 국토부 항공교통과 관계자는 "현재 국방부가 개별 부대 의견을 접수하는 과정인 것으로 알고 있다. 큰 틀에선 합의했더라도 각론으로 들어가면 (해당 공역을) 실제 사용하고 있는 부대들의 의견이 다를 수 있다"며 "국방부와 본격적인 협의에 나설 예정으로 단기간에 결과를 이끌어 내긴 어려울 것 같다"고 말했다.군사구역과 얽혀있는 우리나라 민간 항공기 공역 확대의 또 다른 해법은 '항로의 수직 분리'와 '남북 관계 개선'이다. 차선을 넓혀야 하는 도로와 달리 하늘길은 비행기의 고도를 조절해 하나의 길에 여러 대가 다닐 수 있다. 인천공항을 드나드는 비행기가 평양 FIR을 이용할 수 있다면 인천 FIR 통행량을 분산할 수 있다.우리나라는 2005년부터 일본과 함께 수직분리축소공역(RVSM·Reduced Vertical Separation Minimum)을 운영하고 있다. 비행기의 수직 간격을 2천피트(609m)에서 1천피트(304m)로 좁혀 비행기가 많이 다닐 수 있도록 하는 방식이다. 국토부는 수직분리축소공역을 전 공역으로 확대하는 방안을 추진 중이다. 하지만 이런 방식은 고도가 높은 곳에만 적용할 수 있고, 공항과 가까운 낮은 고도에서는 무한정으로 사용하기 어렵다. 국토부 관계자는 "수직 분리의 확대는 고속도로의 차선을 늘리는 효과와 마찬가지"라며 "공역은 면적이 좁더라도 수직으로 항로를 분리해 사용할 수 있는 특징이 있다. 하지만 먼 곳은 수직 분리가 가능해도 인천공항과 가까운 지역은 수직 분리가 위험하다"고 설명했다.인천 FIR 포화의 다른 해법은 남북 관계에 있다. 남북 직항로 개설 등으로 우회 항로를 직선화하고 닫혀 있는 북쪽 항로를 열면, 포화 상태인 인천공항 서쪽 공역에 여유를 줄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예측할 수 없는 남북 관계 탓에 당장의 효과를 기대하긴 어렵다.1994년 북한이 영공 개방 의사를 밝히면서 2년 후 대구 FIR~평양 FIR 통과 항로가 개설됐다. 2000년 김대중 대통령이 북한을 방문했을 때 서해 직항로를 이용할 수 있었던 것도 북한이 하늘을 열어줬기 때문이다. 다만 영토 위는 지나지 않고 서해상을 통과하는 'ㄷ' 자 항로였다. 하지만 우리 정부가 2008년 7월 금강산 관광객 피살사건과 2010년 3월 천안함 사건에 대한 대응 조치로 2010년 5월 24일부터 대한민국 민간 항공기의 평양 FIR 통과를 제한하면서 이 항로는 막히게 됐다. 여기에 유엔의 대북 제재 조치까지 더해져 항로 부활은 더욱 어려워진 상황이다. 공역을 통과하려면 이용료를 내야 하는데, 이는 제재 대상에 해당한다. 2018년 판문점 선언 이후 남북 관계가 개선되면서 다시 항로 부활 얘기가 오갔지만, 최근 다시 경색 국면에 돌입해 기약할 수 없게 됐다. 국토부는 제3차 항공정책기본계획에서 국가 공역 체계 개선을 위해 남북한 직항로를 개설하겠다고 했지만, 명확한 시점은 제시하지 못했다.인천공항 주변 공역 확대는 공항의 '슬롯(Slot·항공기 운항시각)' 확대와도 무관하지 않다. 슬롯은 시간당 뜨고 내릴 수 있는 비행기 대수를 의미하는데, 현재 인천공항의 슬롯은 71회다. 인천공항이 2023년 제4활주로 개장을 준비하고 있기 때문에 이를 위해서라도 공역 조정이 필요하다는 게 국토부 설명이다.국토부 관계자는 "인천공항은 공역·슬롯 확대에 대비해 CIQ(세관·출입국관리·검역) 인력을 6개월 안에 투입할 수 있도록 준비하고 있다"며 "하늘에서는 공역을 확대할 수 있도록 관계 기관과의 협의 등 장기적으로 만반의 준비를 다할 것"이라고 했다.글/김민재기자 kmj@kyeongin.com그래픽/박성현기자 pssh0911@kyeongin.com/아이클릭아트

2020-07-01 김민재

['대한민국 나들목' 인천공항 이야기·(19)]슬롯(항공기 운항시각)

인천공항 '시간당 70회' 국내 최다활주로·세관·검역 등 종합적 판단남북관계·軍공역 '추가 확보' 관건승객많은 시간, 항공사간 쟁탈전대형업체들, 자회사와 교환 논란국토부, 양도금지·교환 인허가로코로나불황속 '80% 이상 소화' 룰슬롯 회수 두려워 '무승객' 운항도정부, 긴급회의 열고 '유예' 조치출퇴근 시간 고속도로 진출입로나 요금소에 길게 늘어선 차량 행렬처럼 수백 대의 비행기가 한꺼번에 공항에 줄지어 대기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이륙하려는 비행기가 활주로에 먼저 진입하려고 끼어들기 경쟁을 하면서 병목 현상이 생길 것이고, 착륙하려는 비행기는 하늘 위를 떠다니며 서로 착륙 기회를 노리느라 곡예비행을 펼칠 것이다. 공항 여객터미널은 출입국 승객 관리와 통관·검역 절차에 마비된다. 공항 주변도 승객을 실어나르는 차량으로 엄청난 혼잡이 빚어질 게 뻔하다. 하늘에서 이런 '교통지옥'이 벌어지지 않기 위해 공항마다 특정 시간대별로 뜨고 내릴 수 있는 비행기의 총 대수가 정해져 있다. 이를 '슬롯(slot)'이라고 한다.국토교통부가 관련 규정에서 정한 공식 명칭은 '항공기 운항시각'이다. 하지만 업계에서는 슬롯이라는 용어를 더 많이 사용한다. 슬롯은 원래 컴퓨터나 기계장치에 메인보드, 메모리카드 등을 끼워 넣을 수 있는 좁고 긴 칸을 말하는데 비행기의 운항 스케줄을 끼워 넣는다는 의미에서 슬롯이란 용어가 쓰이고 있다. 공항은 혼잡을 방지하기 위해 항공사마다 슬롯을 배분해 비행기 이착륙 일정을 조정한다. 슬롯이 많다는 것은 그만큼 공항의 수용 능력이 크다는 얘기다.국내에서는 혼잡도가 높은 3종 공항으로 분류된 인천과 김포, 제주공항이 항공사에 슬롯을 배정하는데 인천공항의 슬롯이 시간당 70회로 가장 많다. 김포공항이 41회, 제주공항은 35회다. 공항은 아무리 많은 비행기를 유치하려고 해도 슬롯 한도를 초과할 수 없다. 항공사가 승객이 선호하는 시간대에 비행기를 배치하려 해도 슬롯을 확보하지 못하면 불가능하다. 그래서 슬롯은 항공업계에서 보이지 않은 재산이나 마찬가지다.비행기와 공항이 처음 생겼을 때는 여객·화물 수요가 지금처럼 많지 않아 슬롯 배분이 필요하지 않았다. 그래서 선착순이라는 나름의 공평한 방식으로 공항을 이용하면 됐다. 슬롯의 개념이 처음 생긴 곳은 미국이다. 한국교통연구원에 따르면 1969년 항공 수요가 급격히 증가하자 시카고 오헤어 국제공항, 로드 레이건 워싱턴 내셔널 공항, 뉴욕 라과디아 공항, 존 F. 케네디 국제공항, 뉴아크 리버티 국제공항 등 5개 공항이 혼잡 시간의 비행기 이착륙 횟수를 제한하는 슬롯을 적용했다. 비행기 혼잡으로 지연 운항이 크게 늘어 승객이 큰 불편을 겪었기 때문이다. 이후 유럽 주요 공항에도 슬롯이 도입됐고, 지금은 세계 공항 대부분이 국제항공운송협회(IATA) 규칙을 준용해 관련 제도를 운용하고 있다.우리나라는 1978년 국제선 항공 수요가 늘어나면서 슬롯 조정 업무가 필요해졌다. 당시 유일한 국적 항공사였던 대한항공이 관련 업무를 담당했다. 그러다 후발 주자로 나선 아시아나항공이 대한항공의 독자 운영에 대해 공정성 문제를 제기했고, 1998년부터 아시아나항공도 슬롯 조정 업무에 참여했다.정부는 슬롯 배분을 민간 항공사에 사실상 위탁했다가 인천국제공항이 개항한 2001년부터 체계적인 틀을 잡아가기 시작했다. '항공기 운항시각 조정업무 세부운영지침'(서울지방항공청 훈령)을 만들어 정부와 공항, 항공사로 구성된 '스케줄조정협의회'가 업무를 직접 주관하게 했다. 그래도 여전히 대한항공과 아시아나항공 등 양대 항공사가 참여해 슬롯의 기득권을 확보했다. 항공 시장에 새로 진입한 저비용항공사(LCC)는 슬롯을 확보해야 비행기를 운항할 수 있었는데, 황금 시간대를 대형 항공사들이 차지하고 있어 논란이 되기도 했다. LCC도 스케줄조정협의회에 참여했지만, 대형 항공사들의 '슬롯 기득권'이 보장됐기 때문이었다. 그러다 대형 항공사와 자회사 간 슬롯 교환 문제가 불거졌다. 대형 항공사들이 확보하고 있던 '황금 시간' 슬롯을 LCC인 자회사에 넘겨주고, 자회사의 비인기 시간대 슬롯을 받은 것이다. 슬롯의 황금 시간대는 오전 8~9시와 오후 6~9시다. 이른 새벽이나 심야 시간은 승객을 많이 확보하기 어려워 항공사들이 선호하지 않는다. 인천공항의 2016년 동계 정기항공편의 경우 당시 슬롯은 63회였는데 황금 시간대인 오후 6~7시에 74건이 신청돼 11건은 탈락하는 일이 빚어지기도 했다.이제 막 업계에 진출한 LCC가 이런 황금 시간대 슬롯을 확보하기는 하늘의 별 따기와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대형 항공사들은 자회사와 편법으로 슬롯을 교환했다. 모기업을 등에 업은 일부 LCC는 손쉽게 승객을 확보했고, 이를 바탕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대형 항공사들은 자회사가 갖고 있는 슬롯을 바꾼 뒤 실제로는 비행기를 띄우지 않아 대기업의 계열사 일감 몰아주기와 다름없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확보한 슬롯의 80% 이상을 활용하면 슬롯 회수 등의 페널티를 받지 않기 때문이다.슬롯 양도, 교환, 매매와 관련한 문제는 해외에서도 있었다. 슬롯은 무형의 자산이지만, 일종의 '권리금' 성격의 웃돈으로 거래되거나 심지어 공항이 포화에 이르자 슬롯을 경매해야 한다는 얘기까지 나온 것이다. 택시를 몰기 위해 택시 면허권자에게 수천만원을 주고 면허를 사야 하는 것과 비슷하다. 슬롯과 택시 면허 모두 총량이 정해져 있다.국내에서도 이런 문제가 생기자 국토교통부는 2018년 12월 관련 지침을 개정해 스케줄조정협의회에서 민간 항공사를 뺐다. 또 슬롯 양도를 금지하고, 사전 교환 인허가 제도를 도입했다. 민간 항공사를 슬롯 배정 업무에서 제외해 공정성을 높이고, 법적으로 규정된 서울지방항공청이 그 업무를 담당하도록 한 것이다.슬롯 배정은 코로나19 사태가 터진 올해 항공업계의 주요 이슈 중 하나였다. 관련 지침상 배분받은 슬롯의 80% 이상을 소화하지 못할 경우에는 슬롯을 회수하게끔 돼 있는데 항공 수요 감소로 비행기를 띄우지 못한 항공사들이 페널티를 받을 처지에 놓였기 때문이었다. 한번 잃은 슬롯은 다시 확보하기 어렵기 때문에 특히 LCC를 중심으로 이런 위기감이 팽배했다. 실제 국내외 항공사들은 승객이 없는 텅 빈 비행기를 운항하기도 했는데, 이는 슬롯을 확보하기 위한 고육지책이었다. 비행기 연료를 버리면서까지 잃지 않고 싶은 것이 바로 슬롯인 셈이다.항공업계가 코로나19 영향으로 영업에 직격탄을 맞은 데 이어 슬롯이 회수될 것이라는 불안감이 팽배해지자 정부는 이와 관련한 긴급 대책 회의를 열어 슬롯 회수 조치를 유예하기로 했다. 2016년 관련 지침에 '감염병으로 인한 운항 중단은 슬롯 회수를 예외로 한다'는 내용이 추가됐기 때문이다. 메르스 사태가 발생한 이후 만들어진 규정이다.인천공항이 동북아 허브공항의 위치를 공고히 다지기 위해서는 슬롯의 추가 확보가 급선무 과제다. 비행기가 운항하려면 도착 공항과 출발 공항에서 모두 슬롯을 확보해야 한다. 슬롯은 활주로와 관제 시스템, 여객터미널 등 물리적 인프라와 관련 인력을 얼마나 갖추고 있느냐에 따라 추가 배정이 좌우된다. 인천공항의 현재 슬롯은 시간당 70회인데 도착은 39회, 출발은 40회를 넘어선 안 된다. 이는 인천공항의 활주로, 주기장, 세관·출입국관리·검역(CIQ), 관제 등 분야별 수송 능력을 근거로 산출됐다. 인천공항의 시간당 CIQ 소화 능력은 도착 인원이 7천285~7천785명, 출발 인원이 9천600명이다. 인천공항은 2008년 2단계 사업이 마무리되면서 당초 43회였던 슬롯이 63회로 확대됐다. 또 제2여객터미널이 개장한 이후 2019년 70회로 늘어났다. 현재 인천공항의 물리적 인프라는 시간당 슬롯이 90회까지 가능하도록 설계됐지만, CIQ 인력 확보 문제로 70회를 넘어서기 어려운 상황이다. → 그래프 참조인천공항의 슬롯 추가 확보 문제는 군(軍) 공역과도 무관하지 않다. 인천공항의 공역은 군 훈련구역이 축소돼야 확보가 가능한데 남북 관계와 한중 외교 문제 등과 결부돼 민간 항공업계의 입장만 내세우기란 쉽지 않은 상황이다.제주공항의 경우 슬롯이 35회에 CIQ 수용 능력(국제선)이 도착 1천351명, 출발 1천230명이다. 김포공항 슬롯은 41회인데 심야 시간(오후 11시~오전 6시)에는 운항이 제한되기 때문에 배정된 슬롯이 없다. 인천공항도 심야 시간 슬롯은 52회로 제한된다.슬롯은 비행기의 이착륙 방향별로도 배정돼 있다. 한 방향으로만 비행기가 쏠리는 혼잡을 방지하기 위해서다. 중국 베이징·유럽 방향으로는 시간당 총 20회가 가능한데 15분당 6회를 넘으면 안 된다. 동남아와 중국 상하이 방향은 시간당 25회(15분당 7회), 미주(하와이 포함)·일본 방향과 대양주(괌·사이판 포함) 방향은 시간당 30회(15분당 8회)다.글/김민재기자 kmj@kyeongin.com코로나19 사태의 여파로 인천공항 항공 여객수가 급감하면서 항공기들은 취항할 곳이 없어졌다. 인천공항 주기장에 줄지어 서 있는 항공기들. /경인일보DB

2020-06-24 김민재

['대한민국 나들목' 인천공항 이야기·(18)]등화시설

16만 시간 넘게 무중단 운영 기록'등화' 항공기 안전한 이착륙 필수1951년 간격·색·위치 '국제 규정'인천공항, 세계 최초 'FTGs' 도입계류장까지 녹색등 따라 이동 안내지상서 '유도로 오진입' 77% 감소등화관제시스템 첫 '4.5레벨' 달성5단계 목표… 각국 잇단 벤치마킹인천국제공항은 365일, 24시간 쉬지 않는다. 인천공항은 2001년 3월 29일 개항한 이후 20년이 다 되도록 한 번도 쉰 적이 없다. 인천공항의 무중단 운영기록은 6월 17일 기준 16만7천 시간을 넘었다. 유럽에서는 항행안전시스템의 문제로 항공기 이·착륙이 일시 중단되기도 했고, 일본 간사이공항은 침수로 공항이 멈춰 서기도 했다.인천공항이 무중단 기록을 이어갈 수 있었던 데에는 항공기의 안전한 운항을 도와주는 항행안전시설의 역할이 크다. 그 중 '항공등화시설'은 대표적이다. 항공등화시설은 항공기가 등장한 초기부터 항공기 운항과 공항의 안전을 최일선에서 도와왔다. 그 방식도 무척 다양하다.'항공등화'는 빛, 색채, 모양을 이용해 항공기의 항행을 돕기 위한 시설이다. 주로 '빛'을 활용한다. 항공기가 야간에도 활주로에 무사히 착륙하고, 이륙할 때 활주로 이탈 없이 안정적으로 상공으로 날아오를 수 있는 것은 다양한 빛을 내는 램프가 항공기의 경로를 안내해주기 때문이다.하루 1천여 대의 항공기가 뜨고 내리는 인천공항에는 얼마나 많은 램프가 있을까. 김포공항과 제주공항에는 각각 5천~6천 개의 등화시설이 설치돼 있다. 인천공항은 그 5배 정도인 3만여 개의 등이 있다. 그 종류도 28가지에 이른다. 항공기가 착륙할 때는 다양한 등화시설을 포함해 수많은 항행안전시설이 그 역할을 한다. 항공기가 바퀴를 내리고 활주로에 다가설 때는 비행기가 앞쪽으로 살짝 숙이게 되어 있다. 가장 안정적인 항공기와 지면 사이 각도는 3도라고 한다. 이 각도를 벗어나 착륙하면 조종사와 승객의 안전에 문제가 생길 수 있다. 조종사들은 착륙할 때 '계기착륙장치'를 활용한다. 이 장치는 공항에서 전파를 발사해 얻는 데이터를 토대로 항공기와 활주로까지의 거리 등을 계기판에 표시해준다. 계기착륙장치 중에서는 '활공각도계'도 포함돼 있다. 항공기와 활주로 사이 각도를 알려주는 것이다. 이러한 장치는 전파를 활용한다. 이 때문에 조종사들이 체감하기 어려울 수 있다. 인천공항에는 조종사 기준으로 활주로 좌측에 4개의 조명이 가로로 나란히 설치돼 있다. 항공기 착륙 각도가 3도면 붉은색과 하얀색 등이 두 개씩 점등된다. 3도보다 높으면 하얀색 등이 하나 더 켜지고, 붉은색 등은 줄어든다. 3도보다 낮으면 그 반대로 점등된다.이 '진입각 지시등'(Precision Approach Path Indicator)은 조종사가 항공기 하강 각도를 실감할 수 있게 해준다.착륙할 때 쓰이는 등화시설은 이 외에도 다양하다. 활주로가 시작점 900m 앞에서부터 30m 간격으로 '활주로 진입등'이 설치돼 있다. 활주로에 들어서면 활주로 중심(Centerline), 활주로 양 끝 부분(edge). 활주로 내 바퀴가 닿는 부분(touchdown zone), 활주로 시작 지점(Threshold)과 마치는 지점(End) 등에 각각 모양이 다른 형태와 여러 색깔로 불을 밝힌다.각각의 등화시설은 용도에 따라 간격과 색상 등이 정해져 있다. 활주로 중심선에 있는 조명은 노란색 한 줄로 설치되며 간격은 25m다. 바퀴가 닿는 부분의 등화시설은 활주로 중심선 양옆에 3개씩 설치된다. 활주로가 시작하는 등화시설은 녹색이며, 끝나는 지점은 붉은색이다.항공기가 착륙 후 활주로 구간을 벗어나면 유도로를 지나 계류장으로 향한다. 인천공항 관제탑은 항공기 조종사에게 가는 길을 알려준다. 올해 초까지는 관제사가 유도로 명칭과 좌·우회전하는 지점 등을 일일이 설명해야 했다. "A유도로로 가다가 B지점에서 좌회전" 이런 식이었다. 조종사들은 이 때문에 공항의 형태를 숙지해야 했고, 많은 공항을 다니는 조종사들은 다른 공항과 헷갈려 관제지시를 오인하는 바람에 잘못된 유도로로 진입하는 일이 잦았다. 이러한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 인천공항은 올해 4월부터 새로운 시스템 'Follow The Greens(이하 FTGs)'를 도입해 운영하고 있다. 세계 최초다. FTGs는 항공기가 착륙해 계류장까지 경로를 '녹색 조명'으로 안내하는 방식이다. 항공기가 가는 경로에 자동으로 녹색 등을 점등한다. 관제사는 "Follow The Greens"라는 명령으로 항공기 경로를 알려주면 된다.FTGs 도입으로 유도로 오진입은 크게 줄었다. 지난해 시험운영 전 월평균 8.8건이던 유도로 오진입은 시험운영기간 월평균 1.75건으로 77% 감소했다. 서울지방항공청 김세은 관제사는 "항공기의 안전한 지상 이동을 위해 유도로 중심선 등을 통해 관제를 지시하는 FTGs 도입으로 유도로 오진입이 크게 줄었다"며 "관제사와 조종사 모두에게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고 했다. 인천공항공사는 2년여에 걸친 시스템 개선을 통해 등화관제시스템(A-SMGCS) 수준을 세계 최초로 국제레벨 4.5 수준으로 개선했다. 인천공항공사는 만점이라고 할 수 있는 '5단계'까지 향상시킨다는 계획이다. 인천공항공사 항공등화팀 최형석 차장은 "인천공항의 등화관제시스템은 세계 최고 수준"이라며 "이를 벤치마킹하기 위해 미국과 유럽, 아시아 등 각국 공항 관계자들의 방문이 잇따르고 있다"고 했다. 인천공항에 설치된 등은 3만여 개. 활주로와 유도로뿐 아니라 계류장 등 공항 곳곳에 설치돼 있다. 항·포구의 위치를 알려주는 등대와 같은 역할을 하는 '비행장 등대(Aerodrome beacon)'도 있다. 인천공항 개항 이후에도 공항 내 차량이 이동할 때 안전성을 확보하기 위해 일부 등화시설이 추가되기도 했다.인천공항공사는 매일 오후 11시부터 다음 날 오전 4시까지 등 교체 작업을 한다. 하루 평균 100여 개의 전구가 파손되거나 수명을 다해 그 기능을 잃는다. 인천공항에 설치된 등화시설 중 대다수는 바닥에 박혀 있는 형태다. 눈과 비에 노출돼 있을 뿐 아니라 자동차나 항공기의 무게도 견뎌내야 한다. 내구성 기준을 충족한 제품을 사용하더라도 파손은 일어날 수밖에 없다. 인천공항은 '개별 항공등화 제어시스템'을 운영하고 있다. 하나하나의 등화시설이 정상적으로 작동하는지 통제실에서 확인할 수 있는 시스템이다. 소규모 공항은 인력이 점검하며 작동 여부를 확인할 수 있지만, 인천공항과 같은 대형 공항은 일일이 확인하는 것은 어렵다. 이 때문에 개별 등화시설을 제어·통제할 수 있는 시스템을 구축했다. 시스템을 통해 드러난 비정상 등화시설을 매일 교체하는 것이다. 인천공항 등화시설은 대부분 할로겐 램프를 사용하고 있다. LED 조명이 전력 소모량이 적긴 하지만 시스템의 안정적인 운영이 우선이기 때문이다. 인천공항공사 최형석 차장은 "LED 램프를 사용하면 시스템의 혼선이 일어날 수 있다"며 "개별제어시스템이 없는 김포공항 등은 LED를 사용하고 있다. 우리는 개별제어시스템을 통해 3만여 개 전구 중 상시 99.7% 이상이 정상 작동되도록 하고 있다"고 했다. 항공등화시설은 공항의 핵심이다. 또한 가장 다양하게 쓰이는 안전시설이다. 공항에 등화시설이 처음 등장한 것은 1920년대로 추정된다. 항공기가 이륙할 때 비춰주는 역할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미국의 항공전문 사이트 'Airport Technology.com'은 "공항 조명 시스템은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으며, 1920년대 후반에 최초로 설치됐다"고 설명하고 있다. 함께 게재한 사진을 보면 1920년대 생산된 것으로 보이는 항공기 앞 경로를 조명시설이 비추고 있다. 국제민간항공기구(ICAO)는 1951년부터 항공등화시설에 국제규정을 만들었다. 항공교통 증가와 신규 항공등화시설 등의 역할을 정의하기 위한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는 1930년대부터 항공기 안전을 위해 등화시설을 설치했다. 동아일보는 1938년 1월 12일자에서 "항공로의 안전을 기하기 위해 광주급해주(光州及海州)에 불시착륙장을 설치하고 종관항공로(縱貫航空路)에 연(沿)해 이십일개소의 야간항공표지를 설치하기로 되었다"고 보도했다. 1930년대부터 단순한 형태의 등화시설과 항행안전시설이 운영됐으나, 6·25 전쟁 때 대다수가 파괴되었다. 1950년대 중반 이후 우리나라 항행안전시설이 본격적으로 운영됐다. 한국항공협회는 "6·25 전만 하더라도 남한은 비행장 8개소, 항공통신소 7개소, 항공나침소 7개소, 항공표지소 및 항공등대시설이 16개소가 있었으나 전쟁을 겪으면서 항공기와 통신기기는 모두 파괴되고 건물 시설 70%, 활주로 30%가 파괴됐다"며 "현대적인 시설을 갖추게 된 것은 1955년 시작된 ICA(미 국제협력청) 기술원조자금과 기술고문단 파견에 의해서였다"고 설명하고 있다. 초기 항공등화는 항공기가 이동하는 길을 비춰주기 위한 것이었다. 등화시설은 다양화·고도화되었고, 항공기의 안전 운항을 지원하기 위해 다양한 항행안전시설이 탄생했다. 전파, 통신, 빛 등을 활용한 안전장비 시설이 운영되고 있다. 레이더, 저시정안내시스템, 비상통신시스템 등은 현대 항공 안전을 위한 필수 요소가 됐다.글/정운기자 jw33@kyeongin.com인천공항 활주로에 설치된 등화시설. 각각의 등화시설의 간격과 색, 위치 등은 국제 규정을 따른다. /인천국제공항공사 제공인천국제공항 제1터미널 뒤로 보이는 레이더 관재시설. /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인천국제공항공사는 인천공항에 있는 3만여 개 등화시설을 제어할 수 있는 시스템을 갖추고 있다. 등화시설을 제어하는 A-SMGCS 콘트롤 센터. /인천국제공항공사 제공초기 등화시설은 1920년대 등장했다. 항공기가 가야할 길을 비춰주는 것으로 시작됐다. 출처/AirportTechnology.com

2020-06-17 정운

['대한민국 나들목' 인천공항 이야기·(17)]관제탑

초기 비행 이착륙 조종사 육안 의지항공기 충돌 예방 '지상통제' 필요성세계 최초 관제사 미국인 '아키 리그'깃발 두개 이용 'GO'·'HOLD' 전달국내 한국전쟁 시기 도입 '제주 흔적'인천 3개 운용… 사람 이동까지 통제'안전 책임' 관제사 전국에 600여명인천공항은 세계에서도 가장 복잡하면서 규모가 큰 공항 중 한 곳이다. 지난해 1년 동안 뜨고 내린 항공기는 40만4천104대로, 하루평균 1천100대가 넘는다. 그 많은 비행기들이 그냥 이착륙하는 게 아니다. 항공기를 일사불란하게 지휘·통제하며 안전하면서도 제시간에 운항할 수 있도록 역할을 하는 곳이 '관제탑'이다. 관제탑의 승인이 없다면 항공기는 이·착륙뿐 아니라 활주로 내 이동도 불가능하다."에어재팬 8535. 팔로 더 그린(follow the greens)."지난달 28일 오후 2시25분께 인천국제공항 인천관제탑. 서울지방항공청 소속 김세은 관제사가 일본 나리타에서 온 에어재팬화물항공 소속 항공기에 활주로 이동 경로를 안내했다. 항공 교통관제, 즉 관제업무를 수행하는 인천관제탑은 100.4m높이다. 관제사들의 공간은 가장 높은 21층이다. 관제공간 외벽은 유리로 돼 있어 인천공항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다. 항공기는 운항 전부터 끝날 때까지 관제사의 통제를 받는다. 이륙할 때를 기준으로 인천관제탑은 항공기가 유도로에 진입해서 활주로를 거쳐 이륙 직후까지 컨트롤한다. 활주로 마지막 부분부터 0.5마일(800m) 이상 멀어지거나 이륙 후 500피트(152m) 이상 고도가 올라가면 인천관제탑은 서울접근관제소로 항공기 주파수를 이양한다. 착륙할 때는 활주로 10마일(16㎞) 이전부터 착륙해 게이트로 이동할 때까지다. 이날 김세은 관제사는 동측 지상 관제석에 앉았는데 관제석 앞 모니터에 다양한 정보가 떴다. 레이더 화면에는 인천공항 인근의 항공기 운항 상황이 드러났다. 또 다른 모니터에는 인천공항 내 활주로와 유도로에 있는 항공기 위치와 이동정보를 보여줬다. 인천관제탑은 인천공항 중앙에 있다. 관제탑 기준으로 동측 좌석에서 1·2활주로를, 서측 좌석에서는 3활주로를 관제한다. 각 좌석마다 관제 구역과 역할이 정해져 있다. 김세은 관제사가 앉은 지상 관제석에서는 유도로와 활주로 등 항공기의 지상 이동을 통제·지휘한다. 동측이나 서측에 각각 지상 관제석, 국지 관제석이 따로 있다. 지상관제는 활주로를, 국지관제는 뜨고 내리는 과정을 통제한다. 허가 중계 관제석, 감독석, 항공교통 흐름석 등도 있다. 인천공항 관제탑은 관제사 피로도 등을 감안해 1시간 단위로 근무 좌석을 교체한다. 관제 업무는 그만큼 높은 집중력을 요구한다. 이날 오후 2시35분께 영종도 왕산해수욕장 인근에서 소방헬기가 이륙했다. 긴급 환자를 이송하기 위한 것이다. 연평도 주민이 전기톱으로 작업하다 크게 다쳤기 때문이다. 인천소방본부는 인천공항 관제탑에 이 같은 내용을 통보했다.김세은 관제사는 "환자 이송 등 긴급 비행에 대한 정보가 들어오면 다른 항공기의 이동을 중단시키고, 긴급 항공기를 먼저 이동하게 한다"며 "도로에서 119 소방차 등 응급차량이 먼저 통행할 수 있게 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고 했다. 관제탑에서는 항공기뿐 아니라 사람들의 움직임도 통제한다. 이날도 예정된 지역에서 잔디정리작업이 이뤄지는지 근무자에게 확인했다. 김 관제사는 "이 지역에 있는 모든 인원은 관제탑과 통신할 수 있는 장비를 착용하고 있어야 한다"고 설명했다.인천공항에 인천관제탑 외에도 2개의 관제탑이 더 있다. 인천국제공항공사가 운영하는 제1, 제2 계류장 관제소다. 1계류장 관제소는 2008년 4월부터 운영을 시작했으며 제1여객터미널 인근 계류장, 제방빙장(겨울철 항공기 얼음을 제거하는 장소), 화물항공기 계류장 등을 관할한다. 2계류장 관제소는 제2여객터미널 인근을 담당하고 있으며 2017년 11월부터 운영을 시작했다. 인천공항은 규모가 크고 오가는 항공기가 많아 공간을 이원화해 관제 업무를 수행하고 있다.국내 공항 중에서 계류장 지역과 활주로·유도로 구역을 이원화해 관제 업무를 하는 곳은 인천공항이 유일하다. 김포국제공항과 제주국제공항은 1곳의 관제탑에서 모든 업무를 수행하고 있다.인천공항공사 김은별 계류장 관제팀장은 "계류장 지역은 항공기뿐만 아니라 차량과 장비 등도 이동하는 공간"이라며 "항공기와 장비가 가장 안전하게 이동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고 했다.김세은 관제사는 지난 2015년부터 인천관제탑에서 근무를 시작했다. 그는 관제업무가 '안전'을 위해 가장 중요한 업무라고 했다. 그는 "한 번은 착륙하는 항공기의 고도가 너무 낮아 기장님에게 해당 내용을 알린 적이 있다"며 "다행히 항공기가 고도를 높였고 무사히 착륙할 수 있었다"고 했다. 그는 또 "당시에 관제를 소홀히 했다면 사고로도 이어질 수 있는 상황이었다"며 "착륙 후 기장님이 '고도가 낮다는 것을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알려줘 고맙다'고 인사를 하기도 했다. 그때 관제사로서 안전을 책임지는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고 했다. 항공기 운항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게 관제다. 지금과 비슷한 형태의 관제업무가 진행된 지는 100년이 채 되지 않았다. 세계 최초의 관제사는 미국인 아키 리그(Archie William League·1907~1986)다. 미국 연방항공국(FAA)에 따르면 그는 1929년 처음으로 항공교통 관제 서비스를 제공했다. 그는 지금과 달리 'HOLD'를 의미하는 붉은 깃발과 'GO'를 의미하는 체커깃발로 의사를 전달했다. 그가 근무한 '관제탑'은 작은 파라솔과 테이블이 전부였다. 미국 연방항공국은 관제 업무 시작 이유를 '항공기 충돌 예방'이라고 분명히 하고 있다. 초기 항공기는 조종사의 육안에 매달릴 수밖에 없었다. 기장은 항공기 구조상 뒤와 옆을 볼 수 없었다. 주위에 어떤 비행기가 있는지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는 것이 사고를 막을 수 있는 길이었다. 항공 교통관제는 그렇게 시작되었다.국내 최초 공항인 여의도 비행장은 1916년에 조성됐다. 비행장이라고는 하지만 항공기가 뜨고 내릴 수 있는 활주로와 격납고만을 갖추고 있을 뿐이었다. 항공기 안전은 온전히 기장과 정비사의 능력에 의존했다.안창남(1901~1930)은 한반도 상공을 비행했던 최초의 조선인 비행사였다. 그를 다룬 책 '안창남 : 서른 해의 불꽃 같은 삶'을 보면, 조선 최초의 비행장은 1911년 5월 문을 연 일본의 첫 비행장인 도코로자와비행장보다 5년 늦은 1916년 3월 여의도에 조성됐다. 그 무렵엔 비행기에 무선장치가 달려 있지 않아서 비행장이라 해도 관제시설 없이 활주로와 간단한 격납시설만 갖추었다.안창남은 오로지 자신의 조종기술로 비행을 했다. 크고 작은 사고도 있었다. 안창남은 실습생 시설인 1920년 '개벽'에 기고한 글에서 "비행할 때 중요한 것은 오로지 온몸의 정력을 써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작은 부주의로 생명을 버리는 큰 실책을 합니다"라고 썼다.국내에서 관제 업무가 처음 시작된 것은 한국전쟁 때로 추정된다. 한국전쟁 때 이용한 제주도 모슬포 비행장의 관제탑 흔적이 지금도 남아 있다. 한국전쟁 당시 울산비행장 등의 사진을 보면 관제업무를 수행하는 장소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때도 항공기를 쉽게 식별할 수 있도록 높은 구조물을 설치했다. 현재와 비슷한 형태의 관제탑이 조성된 것은 한국전쟁 이후 만들어진 김포공항이 처음이다. 1962년 개장한 김포공항 관제탑은 높은 건축물 꼭대기에 사방을 볼 수 있는 공간을 마련했다. 지금 형태와 비슷하다.관제업무가 한국전쟁 때 시작됐지만, 국내 최초의 공식 항공교통관제사가 탄생한 것은 1960년대다. 1962년 12월 31일 고(故) 김두방 관제사를 비롯해 23명에게 항공교통관제사 자격증을 발부했다. 항공기가 늘어나고, 국내 항공교통량이 증가하면서 관제사의 역할도 점차 커졌다. 현재는 600여명의 관제사가 전국 공항에서 관제 업무를 수행하고 있다.글/정운기자 jw33@kyeongin.com, 사진/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인천관제탑은 인천공항 중앙에 100.4m높이로 설치됐다. 인천관제탑 관제사는 항공기 출발·도착 직후까지 인천공항에서의 움직임을 통제한다. 지난 5일 인천관제탑에서 김세은 관제사가 항공기에 관제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 /서울지방항공청 제공인천공항 주 관제탑.세계 최초 관제사인 아키 리그. 그는 멈춤(hold)을 의미하는 붉은 깃발과 이동(go)을 뜻하는 체커기로 항공기를 통제했다. 출처/미국연방항공국 홈페이지1950년대 공군 제주기지에 설치된 관제탑. /공군 제공

2020-06-10 정운

['대한민국 나들목' 인천공항 이야기·(16)]국경과 공항 (下)

인천국제공항은 '국제화 시대'의 상징이라 할 수 있다. 기존 김포공항은 1958년 국제공항으로 지정돼 조금씩 증축해 나가며 확장했지만, 서울올림픽과 해외여행 자유화 이후 급증하는 항공수요를 감당하기엔 너무 비좁았다. 인천공항은 애초 수도권의 늘어나는 항공수요를 처리하기 위한 목적으로 1989년 구상됐다. 하지만 냉전체제가 무너지면서 국가와 국가 간 사람·물자 이동이 활발해지자 '허브'(Hub)라는 개념을 도입하기로 계획이 급선회했다.허브공항은 주변 소규모 공항들로부터 중소형 항공기로 여객과 화물을 집결시키고, 다시 대형 항공기로 갈아타 전 세계로 뻗어 나가게 하는 개념이다. 한국, 중국, 일본, 러시아, 대만, 홍콩 등을 포괄하는 동북아시아는 인구·생산수단·무역·자본 등이 연계된 거대한 경제권역으로 묶이면서 물류가 중심이 되는 허브공항을 필요로 했다. 특히 한국에서는 1980년대부터 항공운송이 필수인 반도체 등 고부가가치산업이 꽃을 피우기 시작했다. 우리나라 국경은 인천공항 개항 이후 개방성을 앞세웠다. 국제화 시대 속에서 치열해진 세계 경제전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인천공항을 무기 삼아 국경을 더욱 활짝 열어야 했다.# 입양아·파독 노동자들 1958년부터 10년간 아동 6677명 해외로인천 복지시설 양육 미군 혼혈도 상당수1962년 광부 8천·간호사 1만여명 서독行국경의 의미는 각 시대에 따라 달라진다.한국전쟁 이후 해외 출국이 자유롭지 않던 시절 가장 먼저 공항을 통해 국경을 넘은 한국인은 다름 아닌 전쟁으로 부모를 잃은 아이들이었다. 1955년 미국인 해리 홀트(Harry Holt·1905~1964) 부부가 전쟁고아 등 아동 12명을 입양한 것을 시작으로, 1958년부터 10년 동안 한국 아동 6천677명이 미국, 스웨덴 등 해외로 입양됐다. 입양된 아동 중에는 주한미군 장병과 한국인 여성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아들도 상당수 포함됐다. 미국은 주한미군과 한국 여성 사이의 혼혈아 문제를 해결하려고 1956년 특별이민법을 제정하기도 했다. 입양 형식으로 혼혈아동들을 미국으로 받아들였다.1960년대부터 인천 덕적도, 동구와 부평구 등지에서 아동복지시설을 운영하면서 혼혈아동을 포함한 고아들을 보살피고 해외 입양을 주선한 서재송(91) 할아버지가 2018년 펴낸 구술록 '옆에서 함께한 90년 서재송'(정리 윤진현)을 보면, 혼혈아동의 출국이 얼마나 까다로웠는지 알 수 있다. 서재송 할아버지의 얘기를 들어보자."정식으로 결혼해서 태어난 아이들은 미국시민권을 받아요. 그러니 따지고 보면 아버지가 미국으로 가면서 데리고 가야 하는 건데 버리고 가니까 얘들은 그때부터 불법체류자가 되는 거예요. (중략) 불법체류자가 되어서 미국으로 보내려면 벌금을 내야 해요. 그런데 애들보고 내라고 할 수 없잖아요."# 미국 이민·중동 건설 붐1960~70년대 매년 2만명씩 미국 정착'나성에 가면' '김포가도' 시대상 노래1980년대 하루 1천명 사막 공사장으로혼혈아동 다음 순서는 파독 노동자들이었다. 법무부 인천공항출입국·외국인청이 2015년 펴낸 '대한민국 출입국심사 60년사'를 보면, 1962년 광부 8천여명과 간호사 1만여명이 김포공항을 통해 서독으로 이주했다. 3년 계약의 기술연수생으로 파견됐는데, 계약기간이 끝난 이후에도 서독에 정착한 한국인이 많았다. 애초 서독은 일본에서 단기노동자들을 받아들였는데, 1960년대 일본의 경제성장으로 일본인들의 인건비가 비싸지자 한국 사람들을 쓰기 시작한 것이다. 광부와 간호사들을 파독한 지 2년이 지나 박정희 대통령이 서독을 국빈 방문했다.1960~1970년대 미국이 이민정책을 확대하면서 매년 우리 국민 2만여명이 미국으로 떠났다. 이 시기 문주란의 '공항의 이별'(1972년), 남진의 '김포가도'(1974년), 조용필의 '돌아와요 부산항에'(1976년), 권성희의 '나성(LA)에 가면'(1978년) 등 해외이주를 주제로 한 대중가요가 인기를 끌기도 했다. 1965년 한일청구권협정으로 해방 이후 끊긴 한국과 일본 간 국경이 다시 열렸다. 한일 양국은 1967년 5월 항공협정을 체결해 항공편을 띄우기 시작했고, 일본인 관광객과 재일교포 입국자가 크게 늘었다. 일본인이 국내 외국인 관광시장의 주류로 떠오르자 일본어 교습 열풍이 불었다.1970년대 말부터 1980년대까지 '중동 건설 붐'이 일었다. 40년 동안 공항만 출입하면서 취재한 이황 한국일보 기자가 2012년 쓴 '공항 르포르타주'를 보면, 1980년대에는 하루에 1천명 가까운 사람이 중동으로 출국했다. 검게 그을린 얼굴로 중동에서 돌아온 노동자들은 거의 예외 없이 목에 카메라를 걸고, 일제 카세트를 들고 있었다고 한다. 1989년 해외여행 자유화 조치 이후 공항은 여행뿐 아니라 돈을 벌기 위해 해외를 드나드는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뤘다.# 엄격했던 조선시대 국경인삼 유출 통제… 금지품 적발 사형도300여명 '연행단' 외교·무역 공식통로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국경을 넘는 대부분의 이유는 '먹고 살기 위해서'다. 조선시대에는 함부로 국경을 넘었다가는 목을 베어 매다는 효시(梟示)형을 당하기도 했다. 나라가 허가한 공식적인 월경(越境)은 고위 관료를 포함한 외교사절을 중국 황실에 파견하는 사행(使行)이었다. 이때도 현재와 마찬가지로 무역을 통해 한몫 단단히 챙기려는 상인들이 사행단에 참여하려고 몰려들었다. 청나라의 수도 연경(燕京·베이징)으로 가는 사행을 연행(燕行)이라고도 불렀다. 조선은 삼전도의 치욕이 있던 1637년부터 청일전쟁이 발발한 1894년까지 1년에 2번꼴로 총 500여 차례나 연행단을 파견했다. 보통 300명 내외 규모 연행단을 꾸렸다. 외교도 외교지만 한중무역의 공식 통로로 활용됐다.1780년(정조 4년) 건륭제의 칠순잔치를 축하하기 위해 파견된 사행에 따라나선 실학자 연암 박지원(1737~1805)이 남긴 청나라 견문록 '열하일기'(熱河日記·이가원 역)는 의주에서 압록강을 건너 국경을 넘는 장면에서 시작한다."방금 사람과 말이 사열하는데, 사람은 성명·거주·연령 또는 수염이나 흉터 같은 것이 있나 없나, 키가 작은가 큰가를 적고, 말은 그 털빛을 적는다. (중략) 구종들은 웃옷을 풀어헤치기도 하고 바짓가랑이도 내리 훑어보며 비장이나 역관은 행장을 끌러 본다."박지원이 동참한 사행단은 관료, 비장, 역관 등 관원이 30명이었다. 나라에서는 사행단의 관원들에게 최상품 인삼을 몇 근씩 지급했는데, 이를 '팔포'(八包)라 불렀다. 중국에서 인삼을 팔 수 있도록 허용하는 일종의 '보너스' 성격이다. '열하일기'에서는 인삼 대신 은을 받았다고 썼다. 이 팔포의 권리, 즉 무역활동을 할 수 있는 권리를 송도(개성)나 평양의 상인들이 사들여 사행길에 동참했다. 사행단이 국경을 넘기 전 깃대 3개를 세워 문으로 삼고, 금지 물품을 검사했다. 첫 번째 문에서 걸리면 곤장을 맞고, 두 번째 문에서 적발되면 귀양을 보냈다. 마지막 문에서 금지 물품이 적발되면 목을 벨만큼 통관절차가 까다로웠다. 일련의 과정이 꼭 인천국제공항에서 펼쳐지는 출입국심사 절차처럼 까다로웠다. 조선이 국경을 엄격하게 통제한 것은 가장 중요한 무역상품인 인삼의 유출을 막기 위해서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인삼은 공식적으로 팔포 무역을 통해서만 중국 등 다른 나라로 유통됐다. 황석영의 대하소설 '장길산'에서는 의적 장길산의 후원자인 개성상인 박대근이 상단을 이끌고 따라나선 사행길에서 청나라 상인에게 인삼 가격을 흥정하면서 무역을 하는 장면이 무척 자세히 묘사된다. '열하일기'를 비롯한 각종 사료와 문헌을 치열하게 취재한 흔적이 박대근의 인삼무역 장면에서 묻어난다. 조선인이 압록강을 건너 인삼을 캐는 문제는 조선과 중국 간 국경분쟁으로 비화하기도 했다.2020년 6월 현재는 코로나19가 인천공항을 빼면 이야기할 수 없는 '국제 무역 시대'에 손상을 입히고 있고, 미국과 중국 간 갈등도 격화하고 있다. 조선시대처럼 폐쇄적이고 제한적으로 국경이 운영될 수 있다는 가능성이 허무맹랑한 얘기만도 아닌 불확실성의 시대로 진입하고 있다. 불확실성에 대비하기 위해선 국경의 의미가 변화한 과정을 되짚고 주목할 필요가 있다.글/박경호기자 pkhh@kyeongin.com1956년 4월 혼혈아동 12명이 입양을 위해 미국행 비행기에 타고 있다. /국가기록원 제공1963년 열린 서독 파견 광부 결단식. /국가기록원 제공1966년 서독행 비행기에 오르고 있는 파독 간호사들. /국가기록원 제공1624년 명나라에 파견된 한음 이덕형(1561~1613) 일행의 사행길을 담은 그림.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2020-06-03 박경호

['대한민국 나들목' 인천공항 이야기·(15)]국경과 공항 (上)

대기업·상장사 직원 한정 복수·상용여권일반인, 신원조회뒤 단수·방문용만 발급1983년부터 50세 이상·예치금땐 연간 1회# 1989년 '해외여행 자유화' 이전삼면이 바다인 데다 분단국가인 대한민국을 드나드는 사람 대다수는 인천국제공항을 통해야 한다. 인천국제공항은 국경이 아니면서도 사실상 '대한민국 국경'으로 기능한다. 그러면 왜 인천공항을 사실상의 국경이라 칭할 수 있을까. 다음 2개의 통계를 보면 그 이유가 명확해진다. 2019년 4월 한 달간 우리나라 공항과 항만을 통해 출국·입국한 사람은 총 779만1천648명이다. 이 가운데 69.5%인 542만1천669명이 인천국제공항을 거쳤다. 인천공항 출입국자는 이 기간 2위인 김해공항(87만4천31명)과 3위인 김포공항(38만953명)을 합한 수보다 4배 이상 많고, 같은 기간 인천항(13만4천292명)과 부산항(22만7천31명) 출입국자보다 15배나 많다.코로나19 팬데믹(세계 대유행)이 지구촌을 뒤덮은 현재 상황은 더욱 특수하다. 올해 4월 한국 출입국자는 19만3천322명으로 지난해 4월의 불과 2.4% 수준으로 쪼그라들었는데, 인천공항 출입국자는 16만75명으로 전체의 82.8%를 차지했다. 이 기간 김해공항 출입국자는 250명, 김포공항 77명, 제주공항 536명, 대구공항 0명, 무안공항 0명, 청주공항 0명, 양양공항 0명이다. 전 세계 국경이 사실상 봉쇄된 지금의 시대는 인천공항을 거의 유일한 우리나라의 출입국 관문으로 만들어 버렸다.법적으로 '출국'과 '입국'의 기준은 출입국심사다. 출국심사를 통과한 후 여전히 인천공항 내 면세점을 쇼핑하더라도 이미 국경을 넘어 출국한 것으로 본다. 마찬가지로 해외에서 인천공항에 도착해 한국 땅을 밟았어도 입국심사를 마치지 않았다면 아직 입국하지 않은 게 된다.지난 21일 오전 10시 30분. 인천국제공항 제2여객터미널 출입국심사장은 항공편이 급감한 탓에 텅 비어 있었다. 코로나19 사태 이전, 하루 평균 1천여 대의 항공기가 뜨고 내리던 평상시라면 공항에서 가장 붐비는 공간이다. 하지만 이날 하루 인천공항에서 출발한 여객기는 29대, 인천공항으로 들어온 여객기는 28대에 불과했다. 출입국자는 4천256명뿐이었다. 현재 외국인 입국자는 휴대전화에 자가격리 애플리케이션을 설치한 뒤 국내 거주지를 확인해야만 정상적인 입국절차를 밟을 수 있다. 10명 안팎의 외국인이 출입국심사대가 아닌 별도의 테이블에 앉아 거주지 확인 절차를 진행하고 있었다. 휑한 인천공항 출입국심사장은 전 세계적인 국경 봉쇄를 실감케 했다.인천공항 출입국관리는 법무부 출입국·외국인정책본부 산하 인천공항출입국·외국인청이 담당한다. 전국의 출입국·외국인정책본부 소속 공무원 2천500여 명 가운데 900여 명이 인천공항출입국·외국인청에서 근무한다. 인천공항 출입국심사관만 600명 규모다. 최근 인천공항 출입국자가 크게 줄었다고 하더라도 출입국 관련 업무까지 줄어들지는 않았다. 인천공항 출국·입국 시스템은 출입국심사장에서만 작동하는 게 아니다. 오히려 코로나19 사태 속에서 더욱 긴박하게 하루가 돌아간다. → 그래프 참조인천공항출입국·외국인청 정보분석과는 '통합국경관리시스템'을 통해 다른 국가에서 인천공항행 여객기를 타려는 승객의 탑승권 발권단계부터 입국자 정보를 분석하는 '탑승자사전확인시스템(I-precheking)'을 운영 중이다. 각 항공사로부터 승객 정보를 전송받아 국제테러범, 형사범 전력자, 분실 여권 소지자 등을 골라내 해당 국가 공항에서부터 인천공항행 여객기 탑승을 막는 방식이다. 지금은 중국이나 일본 등 코로나19 확산지역에서 출발하거나 경유한 승객의 한국행을 미리 차단하는 데 이 시스템을 활용하고 있다.이날 인천공항 제2여객터미널 내 인천공항출입국·외국인청 정보분석과 사무실에서 만난 한 분석관은 통합국경관리시스템 상황판을 가리키며 "타국 공항의 탑승객 정보가 정보분석과로 전송돼 우범자 등 탑승 거부 결과를 항공사로 다시 통보하는 데 1분이 채 걸리지 않는다"며 "현재는 평소의 10%도 되지 않는 정보를 분석하고 있지만, 시기가 시기인 만큼 더욱 긴장을 늦추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출입국자 70% 이용 사실상의 '국경' 역할해외서 탑승전 정보분석… 형사범 등 막아코로나 이후… 확산지역 승객 차단 활용# 첨단 출입국시스템의 인천공항인천공항 출입국시스템은 국제적으로도 첨단을 달리고 있다. 탑승객이 항공기로 날아오는 동안에도 '사전승객정보분석시스템(APIS)'을 통해 세밀하게 분석해 출입국심사관에게 관련 정보를 전달한다. 입국심사 때 출입국·외국인청이 취득한 외국인의 지문과 얼굴 등 생체정보를 축적해 계속 활용하는 '자동출입국심사시스템(SES)'을 도입하기도 했다. 이 같은 시스템 개선·간소화는 한국인은 물론 외국인도 심사관을 거치지 않는 자동출입국심사를 가능하게 했다.인천공항이 국제공항협의회(ACI)의 세계 공항서비스평가(ASQ)에서 12년 연속으로 1등을 유지한 주요 요인 중 하나가 출입국심사 대기시간이 다른 해외 공항보다 짧다는 평가였다. 황정운 인천공항출입국·외국인청 계장은 "과거처럼 여권이나 사증(비자)을 위조·변조해 출입국을 시도하는 것들이 많이 적발되자 최근에는 아예 신분을 세탁해 출입국심사를 통과하려는 경향이 대부분"이라며 "출입국시스템 첨단화는 절차 간소화를 위해서라기보다는 보이지 않는 국경을 계속해서 촘촘하게 짜려는 목적이 더 크다고 봐야 한다"고 말했다.우리나라에서 누구나 자유롭고 간편하게 공항을 통해 국경 바깥으로 나갈 수 있게 된 지는 30년밖에 안 됐다. 1989년 1월 1일 '해외여행 자유화' 조치 이전까지 정부는 국민의 출입국을 일일이 통제했다. 해외여행 자유화 전에는 대기업이나 상장회사의 영업부장 이상 직위인 사람만 복수·상용 여권이 발급됐다. 또한 해외에 4촌 이내 가족이 있는 경우에 한해 철저한 신원조회를 거쳐 일회용인 단수·방문 여권을 발급받았다. 정부는 1983년부터 50세 이상 국민에 한해 1년 동안 200만원을 예치하는 조건으로 연 1회씩 해외여행을 허용했다. 남북 분단과 냉전 상황이 이처럼 국경의 벽을 엄격하게 높인 이유였다.이 시기 여권을 받으려면 해외여행자교육과 보안교육을 필수로 이수해 '교육필증'을 신청서에 첨부해야 했다. 공무원의 해외출장은 총무처(현 행정안전부)의 심사위원회 심사를 거쳐 출장명령이 내려져야 가능했다. 출국자는 1차 출국심사 후 항공사에서 탑승권을 받을 수 있었고 보안검색, 세관신고 등을 거쳐 2차 출국심사까지 마쳐야 비행기에 오를 수 있었다.1980년대 이전에는 중앙정보부가 이른바 '시국사범' 등에 대한 출입국 규제를 수시로 요청했다고 한다. 출입국 규제자로 명부에 한 번 이름을 올리면 빠지는 경우가 거의 없었기 때문에 출입국심사관들의 '규제자 명부'는 나날이 두꺼워졌다. 명부가 전산화되지 않은 때라 심사관이 직접 명부를 펼치면서 한 명씩 확인했다고 한다.1965년 이후 일본인 관광객이 늘어나면서 한때 외국인 출입국심사 절차가 간소화하기도 했다. 그러나 1974년 8·15 광복절 기념식에서 재일교포 문세광(당시 22세)이 박정희 대통령 암살을 시도하고, 영부인 육영수 여사가 총탄을 맞고 사망한 사건이 터지면서 외국인 출입국심사가 다시 강화됐다.당시 문세광은 다른 일본인 명의의 여권을 발급받고, 주오사카 한국 총영사관으로부터 관광 목적의 사증을 받아 입국했다. 여권 자체는 위조·변조하지 않았으나, 다른 사람으로 가장해 입국한 것이다. 봉형 금속탐지기와 X-Ray 등이 이 사건을 계기로 공항에 도입됐다. 사건의 여파로 1973년 202만6천90명이던 출입국자는 1974년 188만333명으로 급감했다.2001년 인천국제공항 개항 때 우리나라 전체 출입국자 2천264만명 가운데 인천공항 출입국자는 77.6%인 1천759만명이었다. 지난해 인천공항 출입국자는 6천679만명으로 20년 사이 우리나라 인구에 맞먹는 4천920만명이나 늘어났다. 환승객은 출입국자로 포함하지 않는데 지난해 인천공항 국제선 전체 이용객은 7천75만명이다. 여전히 국내 출입국자의 70% 이상이 인천공항을 거친다. 국경이 열리거나 닫히는 정도는 시대에 따라 변하기 마련이다. 인천공항의 국경 모습도 '포스트 코로나'에서는 다시금 큰 변화를 맞을 수밖에 없다.글/박경호기자 pkhh@kyeongin.com, 사진/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법무부 인천공항출입국·외국인청 정보분석관들이 지난 21일 인천국제공항 제2여객터미널 내 정보분석과 사무실에 있는 '통합국경관리시스템' 상황판을 보면서 한국 입국 예정자들의 정보를 살피고 있다.2018년 인천공항 제2여객터미널 개장전 시험운영 모습.지난 21일 오전 찾은 인천국제공항 제2여객터미널 출국심사장. 아무도 이용하지 않아 텅 비어 있다.그래픽/성옥희기자 okie@kyeongin.com/아이클릭아트1957년 서울 여의도공항에서 대한국민항공사(KNA·현 대한항공)의 서울~홍콩 간 국제노선 여객기의 탑승 수속을 밟고 있는 승객들. /국가기록원 제공애플 창립자인 스티브 잡스(1955~2011)가 1983년 11월 방한했을 당시 입국신고서. 당시 28세 청년이던 스티브 잡스는 삼성전자 초청으로 한국을 찾아 74세인 이병철(1910~1987) 삼성그룹 회장을 만났다. 출처/대한민국 출입국심사 60년사

2020-05-27 박경호

['대한민국 나들목' 인천공항 이야기·(14)]항공운송의 시초 '특송'

미국에서 만들어진 '미제'를 신봉하던 시절이 있었다. 지금이야 미제가 지천으로 널려 있으니 신기할 것도 없지만 그때는 미제를 구하기도 어려웠다. 항공기와 정보통신 기술이 발달하면서 이역만리 미국에서 만들어진 제품이라도 누구나 인터넷 클릭만으로 1주일 안에 받아볼 수 있다. 비행기가 없었다면 우리는 여전히 미제를 갖고 있음을 자랑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빠른 시간 안에 물건을 배달함'. 특송(特送)의 사전적 정의다. 세관은 특송을 DHL이나 페덱스(FedEx)와 같은 특송 물류업체를 통해 운송되는 '특급탁송물품'으로 정의한다. 특송업체를 통한다는 점에서 일반 수입화물과 구분된다. 동북아시아를 넘어 글로벌 허브공항을 꿈꾸는 인천국제공항은 특송의 중심에 있다.우리나라에 특송 화물이 들어올 수 있는 곳은 인천국제공항과 인천항, 김포국제공항, 평택항 등 네 곳뿐이다. 전국 각지에서 주문하는 특송 물품은 반드시 이 4곳 중 한 곳을 거쳐야 한다. 인천공항의 비중은 이 중에서도 단연 으뜸이다. 전체의 약 80%나 차지한다. 특송화물의 수요가 수도권에 집중돼 있고, 국제 항공 노선이 가장 활성화한 게 인천국제공항이기 때문이다. /공승배기자 ksb@kyeongin.com

2020-05-20 공승배

['대한민국 나들목' 인천공항 이야기·(14)]항공운송의 시초 '특송'

# 더 빠르게… 인간의 본능조선초 '특송사' 대마도와 정보교환항공기술 발달하며 우편수송 '혁명'안창남 유명해진 계기도 '우편비행'국내도 1929년 여객보다 먼저 시작인천본부세관(이하 인천세관)에 따르면 2019년 인천국제공항을 통해 반입된 특송 화물은 약 4천450만 건(수입신고 기준)에 이른다. 지난해 우리나라 전체 수입 특송 물량의 약 79.5%를 차지한다. 인천항이 17.5%로 그 뒤를 이었고, 평택항이 2.7%, 김포공항이 0.3%였다. 인천국제공항과 인천항의 수입 특송 물량만 합쳐도 우리나라 전체의 약 97%를 차지한다. 부산 시민이 인터넷을 통해 직접 해외 물품을 구매하더라도 인천을 통해야 물건을 받을 수 있다는 의미다. 해외 직구와 같은 전자상거래가 보편화한 시대에서 인천은 특송의 핵심이다.최근 특송은 대부분 전자상거래로 발생한다. 지난해 인천국제공항 전체 수입 특송 화물 중 약 78%가 전자상거래로 인한 것일 정도로 그 비중도 커지고 있다. 최근 10년간 전자상거래도 눈에 띄게 늘었다. 지난 2010년 약 316만 건이었던 인천공항 전자상거래 특송 화물은 지난해 약 3천490만 건으로 9년 만에 10배 이상 급증했다. 이 때문에 미국과 중국에서 1년 중 가장 큰 폭의 세일이 진행되는 '블랙 프라이데이'나 '광군절'이면 인천세관 특송통관국 직원들도 덩달아 바빠진다.지난달 29일 오후 1시께 찾은 인천국제공항 인천세관 특송물류센터. 연면적 약 3만5천㎡, 지상 4층 규모의 센터 1층에서는 작업자들이 항공 화물 컨테이너에서 특송 화물을 빼 컨베이어 벨트로 옮기고 있었다. 항공 화물은 ULD(Unit Load Device)라고 불리는 가로·세로 3m, 높이 2.5m 크기 전용 컨테이너로 운송된다. 얼핏 봐도 300개 이상의 짐이 실린 컨테이너 내부는 황토색의 골판지 택배 박스가 대부분이었고, 의류로 추정되는 흰색 포장지와 TV 등도 눈에 띄었다. 12개 라인을 통해 입고된 물품은 X-ray 판독기, 바코드 인식기를 지나 1층과 3층에 마련된 업체별 구역으로 옮겨졌다. 인천세관에 등록된 공항 특송 업체는 모두 195개다. 세관은 수입물품 선별검사시스템(C/S·Cargo Selectivity system) 등을 통해 수입 신고가 잘못되거나 마약 등 반입 금지 물품으로 추정되는 물품을 검사한다.같은 시각 3층에선 인천세관 특송통관국 소속 장현주(42·여) 행정관이 물품 검사에 나섰다. 통관 과정에서 300만원대 'C'사 명품 가방의 가격이 약 100만원으로 신고된 것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100만원대와 300만원대의 가방은 개별소비세 등을 합쳐 적어도 20만원 이상의 세금 차이가 있다. 원산지를 속여 들여올 수도 있어 확인은 필수다. 장현주 행정관은 택배 상자를 개봉한 후 하얀색 포장 천에서 가방을 꺼내 안팎을 샅샅이 살폈다. 장 행정관은 이 가방의 수입 신고가 잘못된 것을 적발하고 30여만원의 관세를 부과했다. 장현주 행정관은 "가격을 잘못 신고하는 경우는 대부분 세금을 적게 내기 위해 고의로 이뤄진다. 이제는 제품만 봐도 대략적인 가격대를 알 수 있다"며 "과거에는 주로 의류 등이 반입됐는데 최근에는 식료품이나 가구, 가전제품 등 그 종류가 정말 다양해졌다. 우리가 눈을 떴을 때 보이는 대부분이 특송으로 들어온다고 보면 된다"고 말했다. 특송센터에 입고된 물품은 통관 절차가 끝나면 배송 업체를 통해 전국 각지로 배송된다. 인천세관 특송통관국이 공항에서 하루 처리하는 화물은 12만건이 넘는다.인천국제공항은 왜 특송의 핵심이 됐을까. 항공기는 빠른 배송을 요구하는 특송에 최적화한 수단이다. 예를 들어 미국 LA항에서 컨테이너 화물선을 이용해 인천항으로 물품을 수입할 경우 이동에만 통상 18일이 걸린다. 반면 항공기의 경우 LA국제공항에서 인천국제공항까지 직항으로 11시간이면 도착할 수 있다. LA항에서 출발한 화물선이 인천항에 닿기까지 항공기는 같은 거리를 30여 번이나 왕복할 수 있는 셈이다. DHL이나 페덱스, UPS 등 세계적인 특송 업체들이 인천국제공항에 별도의 물류센터를 마련한 점만 봐도 중요성을 알 수 있다.물건을 빨리 옮기려는 건 인간의 본능인지도 모른다. 그 시작은 소식을 빠르게 전하는 것에서 비롯됐다. 삼국 시대부터 활용된 봉수제도는 지방에서 발생한 시급한 군사 사안을 수도까지 빠르게 전달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조선 시대에는 특송에 대한 개념이 생겨났다. 조선 초기 1443년(세종 25년) 조선과 대마도주가 무역에 관해 맺은 '계해약조'에 '특송사(特送使)'가 등장한다. 특송사는 규정된 사선(使船) 이외에 대마도주가 특별히 보고하거나 교섭할 일이 있을 때 조선에 파견하던 사절이다. 주로 조선 왕의 사망이나 즉위 때 파견돼 축하나 조문을 하는 등 외교적인 임무를 담당했다. '특별한'에 방점이 찍혀 있긴 하지만, 중요 소식을 빠르게 전달했다는 점에서 지금의 특송과 유사한 면이 있다. 비행기가 본격적으로 민간 생활에 쓰이면서 소식은 더 빨리, 더 멀리 전달됐다. 우편을 통해서다. 항공 기술이 민간수송 분야에 본격적으로 적용된 제1차 세계대전 후 각국은 가장 먼저 우편 수송에 나섰다. 독일이 1919년 4월, 정기여객노선을 개설한 지 2달 만에 항공우편 수송을 시작했고 일본도 1920년대 우편 비행에 나섰다. 1925년 4월 21일 동아일보는 '일본 최초의 정기우편비행은 동경~대판(오사카), 대판~복강(후쿠오카) 2개 항로로 개시됐다', '대판~복강을 비상하는 항공기에는 봉서(封書) 122통, 엽서 331통 외 승객 1명이 탔다'고 보도했다. 최초로 한반도 상공을 난 조선인 비행사 안창남(1901~1930)이 자신의 이름을 본격적으로 알린 '제5회 현상우편비행대회' 때도 그의 항공기에는 300여 통의 우편물이 실려 있었다. 우리나라에서는 1929년, 최초의 공항인 여의도 비행장이 경성 비행장으로 이름을 바꾼 뒤 여객 수송보다 우편 수송을 먼저 시작했다.# 전자상거래 주역 인천공항온라인 발달 '소식 → 물건' 축이동특송건수, 9년새 10배 이상 급성장"국가간의 온라인 거래 더욱 활성화""수도권 입지 '홈 베이스' 역할 부각"좀 극단적이기는 하지만 비행기가 항공 우편 때문에 탄생했다는 시각도 있다. 동아일보는 1936년 3월 1일 '비행긔는 웨 생겻나'라는 제목의 기사를 통해 "오늘 아침 경성 우체통에 넣은 편지가 그날로 동경(일본 도쿄)이나 대련(중국 다롄)에 배달된다는 것은 옛날 같으면 귀신의 장난으로 봤을 일"이라며 "비행기가 세상에 나온 까닭은 전쟁이나 손님, 짐 운반이 아니라 속히 보내고 싶은 편지를 빨리 전해 주려는 목적"이라고 보도했다. 항공기를 운용하게 된 각국이 앞다퉈 우편 수송에 나선 점을 볼 때 이 같은 주장도 터무니없어 보이진 않는다. 인천국제공항에는 인천세관 산하에 '인천공항국제우편세관'도 있다. 국제우편도 세관의 감시 대상이라는 뜻이다. 최근에는 국제우편이나 특송화물도 마약 등 각종 밀반입 행위의 주요 루트가 되고 있다. 관세청에 따르면 마약 탐지견이 지난 2018년 전국 세관에서 적발한 마약은 모두 263건인데, 이 중 95%(250건)가 인천국제공항 국제우편에서 발견됐다.소식을 빠르게 전하는 데서 시작된 특송은 인터넷과 항공 기술이 발달하면서 물건 배송 중심으로 옮겨갔다. 지난해 인천공항 수입 특송 물품 중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한 건 건강기능식품 등의 식료품(약 54%)이었다. 화장품(12%), 가전제품(5.6%), 의류(4.1%)가 그 뒤를 이었다. 전자상거래 활성화로 대부분 실생활에 밀접한 제품들이 특송으로 옮겨지고 있다. 특히 급속도로 성장하고 있는 전자상거래 시장은 특송에 새로운 변화를 불러일으킬 것으로 예상된다. 미국 '아마존'이나 중국 '알리바바' 등 거대 디지털 기반 유통 플랫폼이 글로벌 서비스를 제공하기 시작했고, 앞으로 국가 간 전자상거래는 폭발적으로 증가할 것이라는 게 중론이다. 최근 부산시가 전자상거래 물류센터 도입 연구에 나서는 등 특송 물류센터 유치에 열을 올리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관세청도 확대되고 있는 전자상거래 시장에 대비하고 있다. 통관의 신속성과 부정확한 수입 신고에 따른 적정 관세 부과 사이에 균형을 잡기 위해 고심하고 있다. 지난해 관세청에서 실시한 '주요 관세당국 전자상거래 개편동향 연구'를 보면 전자상거래 수·출입 과정 전체를 파악할 수 있는 디지털 플랫폼 고도화, 통관 정보 시스템과의 연계 등이 대안으로 제시되기도 했다. 전문가들은 국제 특송의 핵심인 인천국제공항의 위상이 앞으로 더욱 높아질 것으로 전망한다. 항공물류 전문가인 박용화 인하대 아태물류학부 교수는 "특송 화물의 주요 수요지가 수도권에 집중돼 있고, 이를 취급하는 항공사들이 대부분 인천공항 노선을 운영하기 때문에 인천공항은 특송 화물의 중심이 될 수밖에 없다"며 "앞으로 국가 간 온라인 거래가 더욱 활성화할 것은 자명한 사실로, 이러한 환경 변화 속에서 국제 주요 항공사들의 '홈 베이스'인 인천공항의 역할은 더욱 중요해질 것"이라고 말했다. 글/공승배기자 ksb@kyeongin.com, 사진/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인천국제공항을 통해 해외에서 반입되는 특송 화물은 인천본부세관 특송통관국을 거쳐야 한다. 지난달 29일 오후 인천국제공항 인천본부세관 특송물류센터에서 인천세관 관계자들이 수입 신고된 특송 물품을 검사하고 있다. /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아이클릭아트1936년 3월 1일자 동아일보에 실린 '비행긔는 웨 생겻나'라는 제목의 기사. 이 기사에서 동아일보는 '비행기가 세상에 나온 까닭은 항공우편 때문'이라고 보도했다. 출처/동아디지털아카이브그래픽/성옥희기자 okie@kyeongin.com/아이클릭아트

2020-05-20 공승배

['대한민국 나들목' 인천공항 이야기·(13)]공항과 세관

세관, 반입물품 세금부과… 경제발전 기여마약·총기 등 금지 품목 감시도 주요 업무최초 공항세관, 1929년 경성비행장에 설치인천공항, 관세청 인력 5천중 1200명 근무'세금 세(稅)','빗장 관(關)'. 세관이라는 명칭에서 알 수 있듯이 세관의 기본 임무는 국내로 반입되는 물품에 관세를 부과하는 일에서 시작된다. 관세법도 그 목적을 '관세의 부과, 수출입 물품의 통관을 적정하게 하고 관세 수입을 확보해 국민 경제 발전에 이바지한다'고 명시한다. 세관의 역할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관세 국경의 수호자로 공항이나 항만을 통해 우리나라로 반입되는 모든 물품을 감시한다. 마약, 불법 무기, 불량 먹거리 등이 국내로 들어오는 것을 막아야 한다. 세관이 무기 반입을 막지 못한다면 정부가 각종 테러로부터 국민을 지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를지도 모른다. 세관의 임무는 국민의 안전, 치안문제와 직결돼 더욱 중요시된다.바다에서 시작한 세관의 역사는 인천국제공항이 개항하면서 본격적으로 하늘길로 확대됐다. 현재 관세청 인력 구성을 봐도 인천국제공항의 중요성을 엿볼 수 있다. 관세청에는 전체 약 5천명이 근무하고 있는데, 이중 1천200여명이 인천국제공항에 몰려 있다. 단일 기관으로 가장 큰 규모다. 500여명이 있는 인천항보다 2배 이상 많다. 개항 초기 인천국제공항에는 870여명의 세관 직원이 근무했는데 특송·화물 물동량, 여객 수요량이 계속해서 증가하면서 인력도 늘어났다. 우리나라 제일의 인천국제공항은 인천본부세관(이하 인천세관)이 지키고 있다. 지난 8일 오후 4시 30분께 찾은 인천국제공항 입국장.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 사태로 전 세계가 난리 통인 가운데 승객 230여명이 탑승한 도하발 카타르항공 QR858 여객기가 도착했다. X-ray 검사를 마친 250여개의 여행용 캐리어가 짐 찾는 곳으로 나오자 인천세관 마약 탐지견인 블랙 래브라도 리트리버 '로드'가 모습을 나타냈다. 목줄을 착용한 로드는 '파트너'인 김직수(39) 탐지조사요원의 신호에 맞춰 컨베이어 벨트 위에 있는 여행용 캐리어의 냄새를 맡기 시작했다. 로드가 다른 곳을 바라보며 집중력이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자 김직수 요원은 손으로 캐리어를 두드려 다시 집중을 유도했다.로드는 짐을 기다리는 승객들의 휴대가방에도 코를 가져다 댔다. 김 요원은 이용객이 놀라지 않도록 "그대로 계시면 됩니다"라고 안내했다. 로드는 주로 벨트 한쪽 면을 수차례 왕복하며 돌아가는 모든 짐의 냄새를 맡았다. 마약 점검은 30분간 이어졌다. 2018년 7월부터 로드와 호흡을 맞추고 있는 김직수 요원은 "매일 수하물에 마약을 숨긴 뒤 찾게 하는 훈련을 통해 후각을 유지하고, 마약을 찾아내면 놀이나 간식 등을 줘 필사적으로 찾아내게끔 훈련한다"며 "요원과 탐지견은 호흡이 상당히 중요해 한 번 파트너가 되면 탐지견의 임무가 끝날 때까지 '동반자'가 된다"고 말했다.인천국제공항을 통한 마약 밀반입은 인천세관의 주요 단속 대상이다. 공항에 대한 마약 단속은 1980년대 말부터 본격화했다. 필로폰과 대마초 등의 마약이 국내에 퍼지면서 노태우 정부가 '마약과의 전쟁'을 선포한 게 계기가 됐다. 이전까지는 항만을 통한 밀반입이 주를 이뤘지만 1989년 전 연령에 대한 해외여행이 자유화하면서 공항은 밀반입을 노리는 자들의 새로운 표적이 됐다. 로드와 같은 마약 탐지견이 생긴 것도 이때다. 사람보다 후각이 1만 배 이상 뛰어나 마약을 찾는 데 제격인 마약 탐지견은 1989년 김포국제공항에 처음 배치됐다. 이듬해 세관에는 지금의 마약조사과와 같은 마약 전담 부서도 신설됐다. 현재 전국 현장에 투입된 마약 탐지견 42마리 중 23마리가 인천국제공항에 있다. 마약 탐지견은 지난해 전국 세관에서 모두 156건의 마약류를 적발했다.마약 밀반입은 인천국제공항 개항 초기부터 극성을 부렸다. 2002년에는 인천국제공항을 통해 시가 3억원 상당의 대마초 30㎏을 밀반입하려던 남아공 국적 남성이 가방을 버리고 달아났다가 붙잡히는 일도 있었다. 당시 경인일보 보도를 보면 이 남성은 자신의 가방이 세관의 정밀검사 대상으로 정해지자 분실물은 항공사에서 보관한다는 점을 악용해 입국장에 가방을 두고 인근 호텔로 도주했지만 세관의 눈을 피하지는 못했다.연간 7천만명에 달하는 국제선 이용객이 우리나라로 들고 오는 짐과 화물 역시 세관의 감시대상이다. 세관을 피하려는 꼼수가 갈수록 교묘해지는 탓에 이들을 적발하기 위한 세관의 수법도 다양해지고 있다.7천만명 달하는 국제선 '마약 탐지견' 활용1950년 김포공항 '금불상 반출 미수' 시끌코로나 사태에 '마스크 불법 반출' 단속도세관의 수하물 검사는 비행기에서 짐이 내려질 때부터 이뤄진다. 모든 기탁 수하물은 계류장 세관 벨트로 옮겨져 인천본부세관 공항감시과의 X-ray 검사를 받는다. 수하물에 숨겨진 금괴나 불법무기 등은 대부분 이 과정에서 걸러진다. 세관은 X-ray를 통해 검사 대상 물품에는 노란색 실(검색 표시)을, 총기류 등 안보 위해 물품이 의심되는 수하물에는 빨간색 실을 붙이는 등 4가지 색으로 구분해 의심 수하물을 걸러낸다.인천세관은 또 입국장에 사복 감시원을 투입해 거동이 수상한 사람을 감시하기도 한다. 항공사로부터 도착 승객 명단을 사전에 입수한 뒤 축적된 내부 데이터를 활용해 우범 여행자를 분석하는 것도 밀반입을 막기 위한 방법 중 하나다. 승객이 비행기에서 내려 공항을 나설 때까지 끈질기게 세관의 감시가 이뤄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이렇게 인천공항에서 적발된 마약류는 2002년 111건에서 지난해 628건(14만7천여g)으로 늘었다. 실탄류도 2002년 434발에서 지난해 4천173발로, 도검류도 75개에서 408개로 증가했다. 적발 건수가 늘었다는 건 그만큼 반입 시도도 늘었다는 의미다. 인천세관이 공항에서 경계를 늦출 수 없는 이유다.공항에 세관이 처음 생긴 건 언제일까. 우리나라 최초의 공항인 여의도비행장에도 세관이 있었다. 1916년 건설된 여의도비행장은 1929년 4월 경성비행장으로 이름을 바꾸고 항공기를 통한 우편수송을 정식으로 취급했다. 일본은 같은 해 9월 여객수송도 본격화하고 당시 인천세관 산하에 우리나라 최초의 공항 세관 격인 '경성비행장세관출장소'를 설치했다. 과거 기록을 살펴보면 일본은 항공 수송 증가에 대비해 세관 설치를 준비한 것으로 보인다. 1927년 11월 27일자 동아일보에는 '관문지요처에 세관비행장 설치'라는 제목의 기사가 실렸다. 동아일보는 '소화 4년(1929년)부터는 대규모의 항공수송도 개시하게 되야 수송품의 취체(取締)를 필요로 할 경성여의도비행장은 항공 수송품의 검사지로서 시행규칙도 근근발포(近近發布)될 터이다'라고 보도했다.1950년 김포공항에서는 한 무역상이 국보와 유사한 높이 11㎝ 짜리 금불상을 일본으로 반출하려다 적발돼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1950년 3월 1일, 무역상 박씨가 '외무부 비서실장' 명의로 된 서류 봉투에 금불상을 넣어 주일대표부 비서관에서 보내는 척 일본으로 빼돌리려다 김포공항 세관 검색대에서 걸린 것이다. 이 불상은 압수 후 국가에 귀속됐고, 현재는 '신수 200번 금동보살입상(사진)'이라는 이름으로 국립부여박물관에 전시돼 있다. 국보 제293호인 부여 규암리 금동관음보살입상과 형태가 유사해 같은 시기인 7세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당시 동아일보와 경향신문 등의 언론은 외무부와 박씨와의 연관 관계 등을 파헤치기 위해 이 사건을 비중 있게 보도했다. 1950년 3월 10일자 경향신문에는 '탁송원인은 무엇?'이라는 제목의 기사가 보도됐다. 경향신문은 이 기사에서 "무역상과 탁송을 맡긴 이는 어떠한 관계가 있으며, 무엇 때문에 외무부 비서실장 명의를 썼는가에 대해서는 의아가 도저히 풀리지 않는다"며 "비서실장은 언급을 피하고 있어 석연치 못한 바가 있다"고 보도했다. 당시 이승만 대통령까지 나서 밀수자를 엄벌에 처하고 적발 세관원은 표창하겠다고 밝히기도 했다. 하지만 무역상과 외무부의 관계는 밝혀지지 않았다.우리나라 공항역사와 그 시작을 같이 한 세관은 갈수록 그 역할이 커지고 있다. 2001년 개항한 인천국제공항은 지난해 국제 여객 기 준 세계 5위, 국제 항공 화물 물동량 세계 3위의 공항으로 발돋움했다. 공항을 통한 여객, 화물 물동량이 증가할수록 관세를 부과하고 밀반입 물품을 막아야 하는 세관의 역할이 중요해지는 것은 당연할 터.최근에는 과세물품을 자진 신고하는 국민이 늘고 있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공항을 통해 해외를 다녀온 사람이라면 누구나 적어내야 하는 세관 신고서가 바로 자진 신고다. 해외나 국내 면세점에서 600달러를 초과하는 물품을 구매하면 세관에 신고해야 한다. 세관은 2015년부터 자진신고를 하면 관세의 30%(15만원 한도)를 감면해 주지만, 신고하지 않았다가 적발되는 경우 납부금액 40%의 가산세를 더 내도록 하고 있다. 인천본부세관에 따르면 인천국제공항 휴대품 자진신고 건수는 지난 2015년 9만4천여건에서 2018년 20만7천여건으로 배 이상 증가했다. 반면 과세 물품을 신고하지 않았다가 적발돼 가산세를 부과한 경우는 2015년 6천600여건에서 2018년 2천200여건으로 줄어들었다.인천세관 관계자는 "코로나19 사태로 사회 안전이 더욱 중요시되고 있는 만큼 마스크 불법 해외 반출을 막고, 수·출입 기업 지원에도 24시간 총력을 다하고 있다"고 말했다.글/공승배기자 ksb@kyeongin.com, 사진/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그래픽/성옥희기자 okie@kyeongin.com/아이클릭아트인천본부세관 소속 마약탐지견인 '로드'가 지난 8일 오후 인천국제공항 짐 찾는 곳에서 마약 탐지 활동을 벌이고 있다. /인천본부세관 제공2005년 인천국제공항 내 X-ray 판독실 모습. /인천본부세관 제공인천공항 입국장 세관 검사대 모습.1930년대 경성비행장 격납고 및 부속건물. 이곳 합동 청사에 우리나라 최초 공항 세관 격인 경성비행장세관출장소가 설치됐다. /서울본부세관 제공신수 200번 금동보살입상.

2020-05-13 공승배

['대한민국 나들목' 인천공항 이야기·(12)]항로

# 대한민국 '항로 역사'1929년 첫 항로 대구~서울~평양~신의주1971년 국내 항공사 첫 미주 노선권 확보'인천' 153도시 취항… 2030년 300곳 목표'5·24조치'후 北 영공통과 막혀 우회해야공항 활주로를 박차고 떠오른 비행기는 그때부터 이름 그대로 비행(飛行)을 한다. 도착 공항의 활주로 품에 무사히 안기기 전까지 비행기는 보이지 않는 하늘길을 따라 날아야 한다. 도로가 필요한 자동차, 철길이 있어야 하는 기차와 달리 비행기는 하늘을 자유롭게 떠다니기만 하면 된다고 흔히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비행기도 국제 협약과 나라별 국내법에 따라 반드시 정해진 길로만 다녀야 한다. 특히 남북 대치 상태에 있는 우리나라의 경우는 군사적 이유에서 더더욱 그렇다. 한국항공협회 항공역사에 따르면 우리나라 최초의 정기 항로는 1929년 4월 1일 일본이 도쿄와 중국 다롄 간 항로를 만들면서 중간 기착지로 둔 대구~서울~평양~신의주 노선이다. 그해 6월 21일 서울~울산 단독 노선이 개설되기도 했으나 우리나라 사람에 의해 최초로 개설한 정기 항로는 1936년 10월 신용욱이 설립한 조선항공사업사의 서울~이리 노선이다.대한항공이 본격적으로 민영항공시대를 열었던 1960년대 후반 우리나라의 국제 정기 항로는 일본 노선 3개와 방콕, 홍콩 등 아시아 항로가 전부였다. 태평양을 횡단하는 미주 항로는 1949년 맺은 한미항공협정에 따라 미국 항공사들이 독점했고, 유럽 노선도 없었다.1969년 한진이 대한항공공사를 인수해 설립한 대한항공은 미국 진출을 위해 정부에 한미항공협정의 개정을 건의했고, 미국이 우리 정부의 협상 요구를 받아들이면서 항로 개설의 물꼬가 텄다. 1971년 3월 26일 호놀룰루를 거쳐 로스앤젤레스로 가는 노선권을 우리 정부가 확보했다. 이듬해 4월 19일 대한항공은 서울~도쿄~호놀룰루~로스앤젤레스 정기 항로를 개설했다. 이어 1979년 뉴욕 노선을 취항했고, 미국 전역으로 항로를 개척해 나갔다. 대한항공은 동시에 유럽 항로 개설에도 적극 나서 1973년 프랑스 파리를 시작으로 스위스 취리히(1977년), 네덜란드 암스테르담(1978년), 독일 프랑크푸르트(1980년)를 취항했다. 대한항공 50년사를 보면 7개 도시에 불과했던 국제선 취항지는 10년여 만인 1979년 15개국 20개 도시로 늘어났다.# 1983년 9월 1일 '격추'미·소대립기, KE007편 소련영공 침범사할린 상공서 미사일 269명 전원 사망관성항법장치 오작동 '경로 이탈' 추정美, 군용기술 공개… 오늘날 널리 활용미주 항로는 미국과 소련이 극렬히 대립하던 냉전 시기에 탄생했다. 서울에서 미국이나 유럽을 가려면 러시아 영공을 지나는 게 최단 거리 노선이었는데 당시 소련이 영공 통과를 허용하지 않으면서 알래스카 앵커리지를 경유하는 우회 항로를 이용해야 했다.이런 상황에서 뉴욕발 대한항공 여객기가 한국으로 돌아오는 도중 사할린 상공에서 소련 전투기의 공격에 격추당하는 비극적 참사가 발생했다. 항로를 이탈해 소련 영공을 지나갔기 때문이었다. 이른바 KAL기 격추 사건이다.승객과 승무원 269명을 태우고 1983년 8월 31일 뉴욕 존 F. 케네디 국제공항을 출발한 대한항공 KE007편은 다음날 오전 6시 서울에 도착할 예정이었다. 앵커리지에 기착했다가 서울을 향해 비행하던 KE007편은 9월 1일 새벽 3시 26분 교신이 끊겼고, 관제 레이더에서 사라졌다.항로는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지도상에 미리 찍어둔 점과 점을 서로 연결한 길이다. 비행기는 이 점을 지나가며 목적지까지 이동한다. 이런 하늘 위의 무수히 많은 점을 '웨이포인트(Waypoint)'라고 하는데 1947년 설립된 국제민간항공기구(ICAO)가 정한 위도와 경도로 이뤄진 특정 좌표다. 비행기는 관제사와 의무적으로 웨이포인트를 통해 항공기 위치 정보를 교신한다.KE007편은 알래스카에서 출발해 소련의 캄차카 반도 남쪽 해상에 있는 웨이포인트를 따라 비행해야 했다. 그런데 어떤 이유에선지 정상 항로에서 북쪽으로 100마일(160㎞)이나 떨어진 캄차카 반도 부근의 소련 영공을 통과해버렸다. 사할린 상공까지 뒤따라온 소련 전투기가 쏜 미사일 2방에 민항기는 산산조각 나 바다로 추락했다. 탑승자 269명이 전원 사망한 참담한 사건이었다.당시 비행기는 관성항법장치(INS)로 위치를 파악해 이동하는 자동항법기술을 사용했는데 이 기술은 가속도와 관성이라는 물리법칙을 이용해 위치를 0.01초 마다 계산하는 방식이었다. 관성항법장치의 오작동으로 항로를 이탈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으나 비무장 민항기 격추와 관련한 진실은 아직 밝혀지지 않고 있다.전 세계를 충격에 빠트린 격추 사건을 계기로 당시 미국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은 군사용으로 개발해 활용하던 GPS(위성항법장치)를 민간에 개방하기로 했다. GPS는 위성과 수신기로 좌표를 구하는 방식이다. 냉전의 희생양이 된 우리 국적기는 GPS의 민간 도입을 불러왔고, 지금은 내비게이션과 스마트폰에 없어서는 안 될 기술이 됐다. 관성항법장치는 오차 누적으로 항로를 이탈할 우려가 있지만, GPS는 전파교란에 취약하기 때문에 비행기에서는 두 기술이 모두 활용되고 있다. 1988년 서울 올림픽 이후로 미·소 갈등이 해빙기에 접어들면서 1989년 소련 영공 통과가 허용됐고, 1995년부터는 중국과 몽골의 영공도 개방됐다. 그런데 냉전이 종식되고 한참이 지나고도 아직 막혀있는 하늘길이 있다. 바로 남과 북의 항로다.남북은 2007년 10·4 선언으로 백두산 관광에 합의하고, 서울(김포공항)과 백두산(삼지연공항)의 직항로 개설을 추진하기로 했으나 보수 정권으로 바뀌면서 아직도 중단돼 있는 상태다. 2018년 4·27 판문점 선언을 계기로 남북이 다시 화해 분위기에 접어들었고, 그해 11월 북한이 먼저 항공실무회담을 열어 영공 통과 등 신규 항로 개설에 대한 논의를 제안하기도 했다. 그동안 남북 정기 직항로만 없었을 뿐 남한의 비행기가 내륙을 제외한 북측 해상의 영공을 통과하는 무착륙 비행은 가능했었는데 2010년 천안함 사건 이후 단행된 5·24 조치로 이 길마저도 가로막혔다. 이 때문에 미국으로 가는 비행기가 일본으로 돌아가야 해 시간과 연료를 허비하고 있다. 영공을 통과하려면 해당 국가에 통과료를 내야 하는데 일본의 무역보복으로 한일 갈등이 첨예했던 지난해 우리 국적기가 일본에 지불하는 영공통과료가 과다하다는 지적이 제기되기도 했다. 지난해 10월 국정감사에서 더불어민주당 윤호중 의원이 국토교통부로부터 제출받은 자료에 따르면 2015년부터 2019년 6월까지 대한항공 등 9개 국적 항공사가 일본에 지급한 영공통과료는 2천126억원이었다. 반대로 일본 항공사가 우리나라에 낸 통과료는 82억2천만원에 불과했다.남북은 서해와 동해에 항로를 개설하는 내용을 구체적으로 협의했는데 급변하는 남북 분위기 탓에 열매를 맺지는 못했다. 북한에 지불해야 하는 영공통과료가 유엔의 대북 제재를 위반한다는 우려도 있었다. 남북 직항로는 남북 대화나 스포츠 이벤트, 문화공연 등 단발성 교류 사업과 이벤트 때마다 깜짝 등장했다. 일반적으로 남한에서 평양을 가려면 일단 중국을 들렀다가 북한 고려항공으로 갈아타야 한다. 2000년 개항한 인천국제공항의 첫 평양 직항로 주인공은 1973년 북한과 외교관계를 수립한 스웨덴의 총리였다. 2000년 5월 3일 당시 방북 중이던 스웨덴 페르손 총리 일행을 태운 특별기가 평양 순안공항을 출발해 서해항로를 거쳐 인천공항에 들어왔다. 2001년에는 평양에서 열리는 민족통일대축전에 참가하는 소설가 황석영 등 방북단 394명이 인천공항에서 아시아나항공을 타고 순안공항을 향한 적이 있었다.2005년 당시 안상수 인천시장이 아시아육상선수권대회의 북측 선수단·응원단 참가를 논의하기 위해 인천공항에서 고려항공을 타고 평양을 찾기도 했다. 2014년 인천아시안게임 북한 선수단도 인천공항으로 입국했고, 2018년 2월 평창올림픽을 앞두고 특사 자격으로 남한을 찾은 김여정 북한 노동당 제1부부장도 마찬가지였다. 인천시는 남북 평화시대를 대비해 인천공항을 대북 교류 거점공항으로 활용할 수 있는 방안을 찾고 있다.인천국제공항은 지난해 기준 153개 도시를 취항하고 있다. 아시아가 106개로 가장 많고, 유럽 25개, 북미 15개 순이다. 인천국제공항공사는 2030년까지 비아시아권 도시 100개를 포함해 총 300개 취항도시를 목표로 항공 네트워크를 확대하겠다는 구상이다. 하지만 올해는 예기치 않게 불어닥친 코로나19 여파로 하늘길이 굳게 닫혀 있는 상태다.전 세계 국가의 국내선 중 승객을 가장 많이 실어나르는 항로는 다름 아닌 한국의 김포~제주노선이다. 국제 항공운송정보 사이트인 OAG(Official Airline Guide)가 지난달 23일 발간한 '가장 바쁜 경로 2020(Busiest routes 2020)' 보고서를 보면 지난해 김포~제주 노선은 좌석수 기준으로 1천742만6천873명이 이용했다. 이는 하루 평균 4만8천명에 달한다. 2위는 삿포로~도쿄(1천249만명), 3위는 후쿠오카~도쿄(1천140만명) 노선이다. 국제선 1위는 홍콩~타이페이 노선으로 796만명이다.가장 경쟁이 치열한 국제노선 10개 가운데 인천공항이 포함된 노선은 5개나 된다. 홍콩~인천, 다낭~인천, 인천~타이페이, 인천~오사카, 인천~도쿄(나리타)는 8~9개 국내외 항공사가 정기 항로를 개설해 운항하고 있다. 이 가운데 인천~도쿄의 운항 횟수는 연 1만4천828회나 된다.세계에서 가장 긴 국제 항로는 미국 오하이오주 뉴어크와 싱가포르를 잇는 노선으로 8천277마일(1만3천320㎞)이다. 가장 짧은 국제항로는 콩고공화국 브리자빌~콩고민주공화국 킨샤사 노선으로 겨우 13마일(20.9㎞)에 불과하다.글/김민재기자 kmj@kyeongin.com1979년 3월 29일 대한항공 뉴욕 여객노선 취항식. /대한항공 제공1972년 4월 19일 김포국제공항 격납고에서 대한민국 역사상 최초 태평양 상공의 여객기 취항을 기념하며 촬영한 사진. /대한항공 제공1983년 9월 1일 사할린 상공에서 소련에 의해 격추돼 추락한 뉴욕발 대한항공 여객기. /KTV국민방송 대한뉴스 화면 캡처

2020-05-06 김민재

['대한민국 나들목' 인천공항 이야기·(11)]활주로

이·착륙 '마의 11분' 안전 핵심항공기 하중 지탱 포장두께 1m 넘어표면은 매끄럽되…또 미끄러우면 안돼눈·비 등 악천후에도 마찰계수 0.4 이상 유지작은 노면 이물질도 사고 가능성차량 운행자들 'FOD' 의무 수거해야음파·엽총 활용 '버드 스트라이크' 예방백령도 '사곶해변' 세계적 희귀 천연 활주로활주로(滑走路)는 비행기에 있어서 어머니의 품과 같은 존재다. 비행기가 그 품을 떠나는 순간이 운항과정에서 가장 위험하다. 그 품에 살포시 안겼을 때 승객들은 드디어 안도하게 된다. 활주로를 뜨고 내리는 게 말처럼 그리 쉬운 것은 아니다. 활주로는 한자 말 그대로 미끄러져 달리는 길을 말한다. 좋은 이륙과 훌륭한 착륙은 이 미끄러짐에 있다. 미끄러지듯 날아오르고, 미끄러지듯 내려앉아야 한다. 비행장에서 가장 중요한 시설을 꼽으라면 단연 활주로다.활주로는 이 세상 어떤 도로보다도 단단하다. 500t이 넘는 항공기가 시속 200㎞ 안팎의 속도로 지상으로 내려올 때 받는 하중을 견뎌야 한다. 이 때문에 일반도로의 두께는 15~30㎝이지만 활주로는 몇 배 더 두껍다. 인천공항 활주로의 포장두께는 105㎝에 이른다. 하중을 견디는 것 외에도 안전을 위해 고려해야 할 요소가 많다. 우선 활주로 표면이 매끄러워야 한다. 그렇다고 너무 미끄러워도 안 된다. 매끄러우면서도 미끄러우면 안 된다니, 참으로 어려운 과제가 아닐 수 없다. 공항 운영기관들은 항공기의 이·착륙에 적합한 마찰력이 유지될 수 있도록 끊임없이 신경을 쓴다. 인천공항은 지난달 모두 7차례에 걸쳐 마찰력 정기측정을 진행했다. 전문적인 용어를 쓰자면, 마찰력은 0~1μ(마찰계수)로 표현되며, 1에 가까울수록 마찰력이 커 제동하기에 좋고 0에 가까울수록 미끄러워 제동거리가 길어진다. 인천공항의 이번 측정에서는 평균 0.78μ를 기록했다. 지극히 정상 수준이다. 마찰력이 0.6 이하로 떨어지면 유지보수 계획을 수립해야 한다. 또 비가 오거나 눈이 왔을 때에도 마찰력을 측정하는 데 0.4 이상을 유지하도록 한다. 0.26 이하가 되면 항공기 이·착륙이 불가능한 것으로 보고 있다.활주로에는 항공기 이·착륙 과정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물건이 있어서는 안 된다. FOD(Foreign Object Debris)는 활주로 있는, 제거해야 하는 모든 것을 일컫는다. FOD를 제거하는 것은 공항 안전에 중요한 요소다. 인천국제공항에는 3개의 활주로가 있다. 제1·2활주로의 길이는 3천750m, 제3활주로는 4천m다. 항공기는 이·착륙할 시기가 가장 중요하면서도 위험한 때다. 이륙할 때 3분, 착륙할 때 8분을 '마의 11분(critical eleven minutes)'이라고 부르기도 한다.항공기가 활주로에서 주행하는 거리는 이륙할 때가 더 길고, 활주로가 받는 하중은 착륙할 때가 더 크다. 항공기는 뜨기 위해 양력을 받아야 하는 데 충분한 속도가 필요하고, 착륙할 때는 속도를 줄인다. 대형 항공기인 A380은 이륙할 때 3천m, 착륙할 때 2천100m가 필요하다. 활주로는 이륙할 때 필요한 길이와 착륙할 때 받는 하중을 모두 만족하도록 설계해야 한다. 항공기가 이륙하기 전이나 착륙한 뒤에 이동하는 도로를 유도로(taxiway)라고 한다.인천공항에서도 활주로나 유도로 FOD 제거작업이 수시로 이뤄진다. 활주로 외에도 계류장 등 항공기와 가까운 곳에서 운행하는 차량과 장비가 1만여대에 이른다. 차량에서 떨어진 나사나 볼트, 장비 등이 바닥에 있으면 항공기가 이동하는 과정에 문제가 생길 수 있다. 또한 아무리 작은 것들이라고 해도 항공기가 이·착륙할 때 바퀴와 부딪쳐 튕겨 나가게 되면 주변의 장비나 인명 피해로 이어질 수 있다. 이 때문에 인천공항 계류장 등을 오갈 수 있도록 허가받은 차량의 운전자는 FOD를 발견하면 의무적으로 수거해야 한다.인천공항에서 가장 많이 발견되는 FOD는 무엇일까. '타이어 찌꺼기'라고 한다. 항공기가 착륙할 때 타이어 바퀴가 고속으로 회전하면서 생긴 마찰열로 인해 타이어 일부가 녹아 활주로에 달라붙는 것을 타이어 찌꺼기라고 한다. 인천공항공사는 고압의 물을 뿌리는 방식으로 바닥에 붙은 타이어 찌꺼기를 정기적으로 제거한다. 인천공항공사 유덕기 운항안전팀장은 "지금은 고무제거를 위해서 첨단장비를 활용하지만 오래전에는 활주로를 관리하는 직원들이 일일이 손으로 활주로에 달라붙은 고무를 제거하기도 했다"고 이야기했다. 인천공항은 다행히 FOD로 인한 항공기 사고는 한 차례도 발생하지 않았다.인천공항을 운영하는 인천공항공사는 항공기 안전을 위해 FOD 수거 외에도 여러 가지 일을 수행한다. 이·착륙시설에 대한 점검을 하루 4차례 진행하고, 계류장 등을 순찰하며 과속을 하거나, 장비 사용 후 이를 방치하는 등의 규정 위반자를 적발해 낸다. 유덕기 팀장은 "활주로와 유도로, 계류장 등 접근이 제한된 공간인 '에어사이드'에서 공항 운영기관은 안전관리부터 사건·사고 등에 대한 조사까지 진행한다"며 "공항 안전을 총괄하고 있기 때문에 무거운 책임감을 갖고 일한다"고 했다. 항공기 운항에 영향을 주는 또 하나의 대표적인 요소는 '새'다. 사람이나 육상동물은 지상에서 통제가 가능하지만, 하늘을 나는 새는 막기가 쉽지 않다. 공항에 새들이 날아다니고, 그 새들이 항공기에 부딪히거나 엔진으로 빨려들어가면 큰 사고로 이어질 수 있다. 새로 인한 항공기 사고, 버드 스트라이크다. 이들 새가 각 공항 당국의 골칫덩이 중 하나다.인천공항도 연간 10건 안팎의 버드 스트라이크가 발생한다. 운항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 적도 한 차례 있는데, 2014년 3월 필리핀항공 여객기가 이륙 후 조류 충돌로 인해 엔진이 손상됐고, 다시 인천공항으로 회항해야 했다. 외국에서도 조류 충돌로 인한 항공기 운항 장애가 잇따르고 있다.인천공항공사는 다양한 방식으로 조류를 퇴치하기 위해 힘쓴다. 조류들이 싫어하는 음파를 내보내는 '음파퇴치기'를 도입했고, 엽총으로 공항으로 들어오는 조류를 내보내기도 한다.활주로가 처음부터 지금과 같은 모습은 아니었다. 세계 최초의 항공기는 윌버 라이트(Wilbur Wright·1867~1912)와 오빌 라이트(Orville Wright·1871~1948) 형제가 만들었다. '라이트 형제'는 1903년 12월 17일 조종이 가능한 비행기를 제작해 세계 최초로 동력 비행에 성공했다. 이때 항공기를 띄웠던 곳은 평평한 모래바닥이었다. 이곳이 최초의 활주로인 셈이다. 이때까지만 해도 활주로는 항공기가 나아가는 데 장애물이 없는 평평한 곳일 뿐이었다.하지만 모래바닥은 항공기를 이륙시키기에 좋은 조건이 아니다. 항공기의 무게를 못 이기고 모래에 바퀴가 빠질 수 있기 때문이다. 더빠르고, 더 무거운 항공기 개발이 이뤄지면서 뜨고 내리는 전용장소인 '공항'이 생겨났다. 그 공항에서 활주로는 핵심시설이 되었다. 1916년 건설된 여의도비행장은 우리나라 최초의 공항이다. 주로 군사용으로 사용됐으며, 활주로와 격납고로만 이뤄졌다. 이때 활주로 길이는 지금보다 훨씬 짧았다. 한국항공협회에 따르면 1930년대 각 비행장의 활주로는 500~750m였다. 대구비행장이 500m였고, 여의도에 있는 '경성비행장'이 750m로 가장 길었다. 활주로의 길이는 항공기의 크기·무게에 비례한다. 항공기가 무거울수록 이륙하기 위해서는 더 빠르게 긴 거리를 내달려야 하고, 착륙할 때도 제동할 때까지 더 많은 공간이 필요하다. 일제강점기 운항했던 항공기는 탑승인원이 10명이 채 되지 않았고, 무게는 10t 안팎에 불과했다. 폭과 길이도 현재 여객기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했다.주로 포장된 도로에서 항공기가 뜨고 내리지만, 평평하고 단단한 모래바닥이 활주로 역할을 수행하기도 했다. 인천 옹진군 백령도 사곶해변은 세계에서도 그 유례를 찾기 힘든 천연활주로다. 석영 성분의 모래가 두껍게 쌓여 이뤄진 사곶해변은 썰물 때가 되면 길이 2㎞, 폭 200m의 평평한 모래 바닥을 드러낸다. 길게 펼쳐진 이 해변은 한국전쟁 때 UN군이 활주로로 이용했다. '옹진군지'는 "콘크리트 바닥처럼 단단하여 자동차의 통행은 물론이고 천연비행장으로 쓰였다"고 기록하고 있다.한국전쟁 참전용사인 '바넷 월리스 로버트(Barnet Wallis Robert)'가 직접 찍어 옹진군에 제공한 사진은 사곶해변에 착륙한 항공기의 모습을 선명하게 보여준다. 2000년대 들어 이곳은 활주로로 쓰이진 않았다고 한다. 다만 헬기 이·착륙 장소로는 활용되기도 한다.전 세계 모든 공항에 활주로가 있고, 이 활주로에는 모두 이름이 있다. 활주로 이름은 활주로의 위치를 드러내기 위해서 지어지는 데 이름만으로도 그 기능을 알 수 있다. 공항 활주로 양 끝에 표시된 숫자와 알파벳이 활주로 이름이다. 이름을 짓는 기준은 방위각이다. 전체가 360도인 방위각 중 끝자리를 떼어낸 것이 활주로의 이름이다. 활주로 각도가 150도라면 15라고 표기되며, 그 정반대는 180도가 더해지기 때문에 33이 되는 식이다. 활주로 이름은 조종사에게 중요하다. 항공기 조종 방향을 결정하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전 세계 공항의 활주로 이름은 같은 방식으로 만들어진다.글/정운기자 jw33@kyeongin.com인천공항 활주로 마찰력을 측정하는 모습. /인천공항공사 제공/인천공항공사 제공/인천공항공사 제공인천공항 활주로 전경. 인천공항은 모두 3개의 활주로가 있다. 1·2활주로의 길이는 3천750m, 3활주로는 4천m다. /인천공항공사 제공/인천공항공사 제공한국전쟁 참전군인인 '바넷 월리스 로버트(Barnet Wallis Robert)'가 1950년도에 촬영한 사곶해변에 항공기가 착륙해 있는 모습. 로버트 가족은 이 사진을 2003년에 옹진군에 기증했다. /옹진군 제공

2020-04-22 정운

['대한민국 나들목' 인천공항 이야기·(10)]인간, 하늘을 날다·(下)

첫 비행사 여성 권기옥·남성은 이윤호1922년 안창남 '금강호' 고국방문 비행일본서 우수한 성적 면허 '스타덤' 올라같은해 인천서 운행… 소감 수기로 남겨'한반도에서 처음으로 하늘을 난 이는 누구일까?'그리 간단히 답할 수 있는 질문이 아니다. 한반도 상공의 첫 비행은 우리나라 사람이 아니었고, 우리나라 사람으로 처음 비행기를 조종한 인물과 처음으로 한반도 상공을 비행한 우리나라 조종사도 다르다. 한반도라는 '장소'에 방점을 두느냐, 한반도 사람이라는 '인물'에 방점을 두느냐에 따라 '최초 비행'의 주인공은 달라진다.1903년 12월 17일 라이트 형제가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동력비행기를 타고 하늘을 나는 데 성공했다. 그 후 두달이 채 지나지 않은 1904년 2월 8일 인천 앞바다에서는 러일전쟁의 신호탄이 된 제물포해전이 발발했다. 비행기가 등장한 1900년대 초 한반도는 세계열강의 먹잇감이 돼 있었고, 곧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했다. 비행이라는 당대 최첨단 기술을 자력으로 도입할 길이 원천적으로 봉쇄돼 있었다. 그럼에도 '항공 여명기'라 불리는 20세기 초 한반도 상공에도 비행기는 떴다. 조선인에게는 쉽사리 비행이 허락되진 않았다. 그래서 일제에 협력하면서 당국의 허락을 얻어 비행하거나 일본을 벗어나 저항하기 위해 비행하거나,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했다. 이 때문에 해방 이후 여느 분야가 그랬듯 우리나라 항공산업과 공군은 항일·친일이 뒤섞여 있었다.여러 자료를 종합해 보면, 일본 최초의 민간인 비행사 나라하라 산지(奈良原三次·1877~1944)와 그의 제자가 처음으로 한반도 땅에서 비행기로 날았다. 나라하라 산지는 1913년 4월 3일부터 3일간 서울 용산연병장에서 시험비행했다. 그가 제작한 50마력짜리 '나라하라식' 비행기를 탔다. 당시 조선인 6만명이 몰렸다고 한다.1950년 4월 공군본부가 발간한 월간 '공군' 창간호를 보면, 1914년 일본군의 중국 칭다오 공격 때도 일본 비행기가 수차례 한반도를 오갔다. 1917년 9월에는 미국인 곡예비행사 아서 스미스(Arthur Roy Smith·1890~1926)가 조선을 찾아 서울, 평양 등지에서 곡예비행쇼를 선보였는데, 이 비행쇼에 매료된 여러 젊은 조선인이 훗날 우리나라의 초창기 비행사로 성장했다. 드디어 '처음으로' 한반도 상공을 난 조선인 비행사는 독립운동가 안창남(1901~1930)이다. 서울 출생인 안창남은 1919년 도일(渡日)해 도쿄 오구리비행학교에 입학했고, 졸업 이후 비행학교 교관으로 활동했다. 1921년 5월 일본 제국비행협회 첫 민간 비행사 시험에 응시한 안창남은 3등 비행사 시험에 합격해 일본의 민간 비행면허번호 '2번'을 달았다.이듬해 11월 안창남은 지금으로 따지면 '택배 빨리 보내기 대회'인 도쿄~오사카 간 현상우편비행대회에 참가해 악조건을 이겨내고 좋은 성적을 거두며 일본에서도 그 능력을 인정받았다. 이후 조선에서 일약 '스타덤'에 올랐고, 동아일보 주최로 안창남의 '고국 방문 비행'이 성사됐다.1922년 12월 금의환향한 안창남은 같은 달 10일과 13일 여의도비행장에서 '금강호'를 이끌고 역사적인 고국 방문 비행행사를 열었다. 사이토 마코토(齋藤實·1858~1936) 조선 총독도 행사에 참석했다. 금강호는 당시 보통 비행기의 반밖에 되지 않는 작은 비행기였다고 하는데, 부품을 해체한 뒤 도쿄에서 인천항을 통해 배로 싣고 들여와 다시 조립했다. 한겨레 길윤형 기자가 2019년 쓴 '안창남 서른 해의 불꽃같은 삶'을 보면, 안창남은 5만 군중이 운집한 여의도비행장에서 1천m 고도에 도달해 서울 시내를 돈 뒤 '거꾸로 내리박히다 다시 두어 번 가로 재주넘는 묘기' 등 특수비행을 선보였다.여의도 비행이 끝난 13일 안창남의 다음 행선지는 인천이었다. 안창남은 처음으로 인천 상공을 비행한 조선인이 되었다. 하늘에서 내려다본 당시 인천은 어땠을까. 안창남은 1923년 1월 1일 발간된 잡지 '개벽' 제31호에 기고한 수기 '공중에서 본 경성과 인천'에서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인천에서는 200m의 저공비행을 하였으므로 시가 길거리에 모여 서서 쳐다보고 손뼉을 치는 모양까지 자세히 보였습니다. 그리고 비행기가 온 것을 알고 공설운동장에 이르는 세 갈래 신작로로 달음박질하면서 모여드는 것까지 보여서 나는 그것을 보고 반갑고 기꺼운 미소를 금치 못하였습니다.'옛 인천기상대를 지나 인천공설운동장 상공을 지난 안창남은 분명 인천 앞바다에 떠있는 영종도와 주변 섬들을 보았을 터다. 그 섬들이 훗날 인천국제공항으로 '상전벽해'가 될 줄을 안창남은 상상이나 했을까. 일제가 가장 일본다운 도시로 만들고 싶어했던 인천이 안창남의 서울 다음 행선지로 낙점된 것은 선전 효과를 고려하면 우연이 아니었을 것이다. 1923년 9월 도쿄에서 관동대지진 직후 학살될 뻔한 안창남은 이듬해 중국으로 넘어가 독립운동에 투신했는데 1930년 4월 산시성 타이위안에서 비행기 사고로 짧은 생을 마감했다.안창남이 조선인 최초의 비행사는 아니었다. 항공역사를 연구하는 이윤식 작가가 2012년 펴낸 '항공독립운동과 임도현 비행사'를 보면, 재미교포 이윤호(Lee George)가 1918년 3월께 미 육군항공대에 입대해 비행훈련을 받고 있다는 신한민보 기사가 있고, 1919년 1월 2일자 신한민보는 이윤호가 조종사로 제1차 세계대전 중 유럽 전선에 참전했다고 보도했다. 1920년대 조선인 비행사 중에는 일본에서 비행학교를 나온 장덕창(1903∼1972)과 신용욱(1901∼1961), 중국에서 훈련받은 군 비행사 서왈보(1886~1928), 중화민국 공군 장교로 활동한 최용덕(1898~1969) 등이 있다.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비행사는 독립운동가 권기옥(1901~1988)이다.항일운동 최용덕 등 7인 공군창설 주역김정렬·박범집은 '일제육사 장교' 출신1948년 첫 민간 항공사 '대한국민공사'도산·국영화… 조중훈 인수 '대한항공'1920년대 우리나라 비행장은 용산연병장, 여의도비행장, 평양육군비행장이 있었다. 1930년대에 울산비행장, 대구비행장, 청진비행장, 광주비행장, 신의주비행장, 함흥비행장, 나리·오산·해주·강릉불시착장 등이 추가됐다. 김포국제공항의 전신인 김포비행장은 1942년 개장했다. 인천 부평에 있던 군수기지인 일본 육군 조병창에도 헬기 전용 비행장이 있었다. 모두 일본의 군사적 목적으로 조성됐다.조선과 일본 간 정기항공편도 있었다. 월간 '공군' 창간호를 보면, 1927년 6월 조선총독부 체신국이 항공법을 시행하고 1929년 9월부터 한일 간 1주일에 3회씩 여객수송을 시작했다. '항공독립운동과 임도현 비행사'에서 소개한 해방 전 민간항로는 '도쿄~진해~하이난다오', '도쿄~울산~대구~경성~평양~신의주', '도쿄~울산~경성~함흥~톈진' 등이다. 일본 국적 항공사인 일본항공이 이들 노선을 운영했다.조선인으로는 앞서 언급한 신용욱이 운영한 조선항공사업사가 1936년 '경성~이리~광주' 정기항로를 개척했다. 1941년 태평양전쟁이 시작되자, 조선총독부는 조선항공사업사의 '경성~중국 하이난다오' 간 국제노선을 전쟁에 징용된 조선인 수송을 전담하도록 했다.일본 본토가 미군 폭격의 사정권에 들어오자, 1944년 10월 신용욱 주도로 군수업체인 조선항공공업주식회사가 설립됐다. 이 시기 기업가 박흥식(1903~1994)이 주도한 또 다른 군수업체 조선비행기공업주식회사도 창립했다. 그러나 해방 직후 이들 회사는 문을 닫았다. 신용욱은 1948년 10월 최초의 민간 항공사인 '대한국민공사'를 설립해 항공사업을 이어갔다. 1962년 경영악화로 도산한 대한국민공사는 국영기업인 '대한항공공사'로 바뀌었고, 1969년 박정희 대통령이 조중훈 한진그룹 회장을 청와대로 불러 대한항공공사를 맡아달라고 요청했다고 한다. 대한항공은 그렇게 태어났다.해방 후 공군 창설은 일본군 장교 출신과 항일운동가 출신인 '7인의 간부'가 주도했다. 항일운동가 출신은 최용덕과 이영무(1905?~?)다. 국무총리까지 오른 김정렬(1917~1992), 박범집(1917~1950) 등은 일본육군사관학교 출신 항공부대 장교였고, 장덕창 등은 민간 비행학교 출신 베테랑 조종사였다.태평양전쟁 때 일본 항공 전대 소속으로 참전한 김정렬은 1993년 출간된 회고록 '항공의 경종'에서 일본 육사 출신, 소년비행학교 출신, 일본 학사장교 출신, 지원병 출신, 중국군 출신, 일본 항공대 군무원 출신, 일본 민간 항공사 출신, 국내 항공분야 종사자 출신이 대한민국 공군 창설 작업에 참여했다고 했다. 김정렬은 해방 직후 비행사 90여명, 3년 이상 경력의 정비사 300여명 등 항공분야에 약 500명이 있었다고 회고했다. 초기 공군은 육군 산하 항공기지부대로 있다가 1949년 10월 1일 육군으로부터 독립했다. 당시 연락기 20대에 병력 1천600명 규모였다.항공 여명기의 '전설'로 남은 안창남은 애석하게도 해방 후 항공산업과 공군을 일으켜 세울 때 아무런 영향도 줄 수 없었다. 그러나 공군은 월간 '공군' 창간호에서 "오늘날 독립된 대한을 보지 못한 채 또는 독립된 우리 공중을 날아보지 못하고 불행히도 비행기 사고로서 이역의 이슬이 되신 선배 또는 일본의 전쟁으로 전사한 동포"로 안창남 등을 부르며 대한민국 공군과 항공계 발전의 '수호신'으로 삼았다.글/박경호기자 pkhh@kyeongin.com일러스트/성옥희기자 okie@kyeongin.com동아일보 1922년 12월 11일자 신문에 실린 안창남 '고국 방문 비행' 행사 화보. 이 행사는 동아일보사가 주최했다. 출처/동아디지털아카이브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비행사 권기옥(왼쪽에서 두번째). 1935년 중국 공군에 복무할 당시 사진으로 알려졌다. 출처/월간 '공군' 2014년 6월호우리나라 첫 여성 비행사인 권기옥의 중국 국민혁명군 총사령부 동로항공사령부 비행사 위임장. 권기옥은 중국 공군에서 10여년 동안 복무하면서 독립운동에 참여했다. 출처/국가기록원'고국 방문 비행' 당시 비행기 '금강호'에 오른 안창남 사진. 조선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보' 1922년 12월 11일자 신문에 실렸다. 출처/대한민국 신문 아카이브

2020-04-15 박경호

['대한민국 나들목' 인천공항 이야기·(9)]인간, 하늘을 날다·(上)

마젤란 3년걸린 '세계일주' 오늘날 48시간안에1903년 라이트 형제, 36m 비행후 '압도적 단축'1차 세계대전 기간 유럽 '군용기'로 폭발적 보급전쟁 통해 빠른 발전… B-29, 일본에 원폭 투하전투기 기술 도입… 민간항공 '점보기 시대'로7월 15일 조선은 처음으로 서양국가(미국)에 외교 사절단인 보빙사(報聘使)를 파견했다. 보빙사 일행은 인천 제물포항에서 배를 타고 일본 요코하마를 거쳐 미국 샌프란시스코로 입항했고, 열차로 갈아탄 끝에 인천을 떠난 지 두 달여 만인 9월 18일 뉴욕에 당도했다. 2020년 4월 현재 인천국제공항에서 뉴욕 JFK공항까지는 대한항공이 운항하는 초대형 여객기 A380(에어버스)을 타면 직항으로 14시간20분이 걸린다. 인천~뉴욕 간 직항로는 약 1만1천㎞다.두 달과 열네 시간, 137년 사이 세계를 이토록 좁힌 건 비행기다. 우리는 하루도 채 걸리지 않는 사이에 인천에서 뉴욕으로 이동하는 시대를 너무도 당연한 듯 여기는데, 코로나19 팬데믹(세계 대유행)으로 하늘길이 막힌 요즘은 '날지 못하는 인간'의 고립감이 어떠한지 뼈저리게 느끼게 된다. 세계적인 역사학자 유발 하라리(Yubal Harari)는 2015년 펴낸 '사피엔스'에서 지난 500년 동안의 과학혁명을 이렇게 설명한다.'16세기 이전에는 지구를 일주한 인간이 아무도 없었다. 상황은 1522년에 바뀌었다. 마젤란의 배가 7만2천㎞를 항해한 끝에 스페인으로 돌아온 것이다. 항해에는 3년이 걸렸으며, 탐험대의 거의 전원이 희생됐다. (중략) 1873년에 쥘 베른은 필리어스 포그라는 부유한 영국인 모험가가 세계를 80일 만에 일주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상상한 이야기를 썼다. 오늘날에는 중산층 정도의 수입이 있는 사람이라면 단 48시간 만에 쉽고 편안하게 지구를 일주할 수 있다.' 여기서 말하는 과학혁명의 핵심은 '시간의 단축'이다. 인류가 기원전 3천500년~3천년께 바퀴를 발명해낸 것도 작은 힘으로 빠른 시간에 물건을 나르거나 이동하기 위해서였다. 19세기 말 자동차 발명과 그 비슷한 시기 유럽에서 대중화된 자전거도 기원전에 등장한 바퀴로부터 이어진 과학혁명이다. 그리스 신화 속에서 태양 가까이 날아오르다 추락한 이카로스(Icaros)처럼 비행은 인간의 오랜 욕망이었다.비행기 발명가로 널리 알려진 윌버 라이트(Wilbur Wright·1867~1912)와 오빌 라이트(Orville Wright·1871~1948), 이른바 라이트 형제는 정확히 설명하면 역사상 처음으로 '유인 동력 비행기'를 날리는 데 성공한 인물들이다. 자전거포를 운영하기도 했던 라이트 형제의 초기 비행기는 대부분 부품을 자전거에서 동원했다고 한다. 라이트 형제의 첫 비행기는 최대 출력이 12마력인 엔진을 동체에 달아 2개의 프로펠러를 가동하게 하는 날개 폭 12m에 길이 6m 크기의 '플라이어'(Flyer)다. 1903년 12월 17일 오전 처음 성공한 비행에서 11㎞/h 속도로 12초 동안 36m를 날았다.라이트형제 이전에도 하늘을 나는 사람들은 있었다. 1783년 최초의 열기구와 수소기구가 하늘에 떴고, 그해 11월 프랑스 파리에서 처음으로 사람이 탄 열기구가 22m를 날아올라 비행했다.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까지는 공기보다 가벼운 기체를 이용해 떠오르는 비행선의 시대였다. 프랑스 파리에 살던 브라질인 아우베르투 산투스두몽(Alberto Santos-Dumont·1873~1932)이 비행선 개발자 겸 조종사로 유명했는데, 그가 1899년 길이 20m짜리 1인승 비행선으로 에펠탑 주위를 선회하는 게 파리에서 가장 큰 볼거리였다. 산투스두몽이 공중에서 주머니에 든 회중시계를 꺼내 시간을 보는 게 위험해서 당대 최고의 보석세공사 까르띠에(Cartier)가 고안해 전달한 시계가 바로 세계 최초의 '손목시계'다. 오늘날 명품 브랜드가 된 그 까르띠에도 결국은 하늘을 나는 데서 탄생했다. 라이트 형제를 필두로 한 동력 비행기가 상업성을 인정받은 때는 형제가 1908년 유럽으로 건너가 잇따라 시험 비행을 성공한 이후부터다. 비행기는 제1차 세계대전과 제2차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신기한 볼거리'에서 '전쟁의 주력'으로 실용화한다. 시험 비행으로 유럽을 순회한 라이트 형제의 목적도 결국은 군납품 계약이었다.'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의 발행인 폴 호프먼(Paul Hoffman)이 2003년 쓴 '광기의 날개'를 보면,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했을 때 독일·프랑스·영국·이탈리아·러시아·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 등 유럽국가들이 보유한 항공기는 약 700대에 불과했다. 전쟁 초기에는 비무장 정찰기로 썼다. 그러다 한 조종사가 상대편 비행기에 권총을 쏘기 시작했고, 곧 비행기에 기관총을 달았다. 1914년 8월 독일군 타우베(Taube) 단엽기가 파리의 한 기차역에 소형 폭탄 5개를 투하하면서 '공중 폭격'도 시작됐다. 이때 프랑스 여성 1명이 사망해 첫 폭격의 희생자로 기록에 남았다.제1차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인 1918년, 라이트 형제가 유럽에서 시험 비행한 지 10년 만에 이탈리아에서 220마력의 엔진에 최대 속도 220㎞/h까지 낼 수 있는 군용기가 등장했다. 이 기간 전쟁 참여국이 생산한 군용기는 약 18만대다. 제1차 세계대전이 성장시킨 항공기술은 곧바로 민간수송분야에 적용됐다. 1919년 2월 독일이 2인승 정찰기를 개조한 복엽기로 정기여객노선을 개설했고, 4월부터 항공우편 수송을 시작했다. 그해 8월 영국도 런던~파리 간 정기 여객기를 띄웠는데, 런던에서 출발한 여객기는 구름 위에 솟은 에펠탑을 보고 목적지를 식별했다.당시 비행사들은 육안으로 항공기를 몰아야 했다. 항공수송사업 경쟁은 위험을 무릅쓰고 야간비행까지 강행하게 했다. '어린왕자'(1943)로 유명한 프랑스 소설가 생텍쥐페리(Antoine de Saint-Exupery·1900~1944)도 비행사 출신이다. 생텍쥐페리가 1931년 발표한 자전적 소설 '야간비행'을 보면 조종사들이 밤에 운전하는 것을 얼마나 힘겨워 했는지 알 수 있다.'엄청난 바람에 맞서 왼쪽으로 몸을 기울인 그는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도 여전히 떠도는 저 희미한 불빛이 무엇인지 알아내려고 애썼다. 그러나 그것은 빛도 아니었다. 짙은 어둠 속에서 감지되는 아주 미세한 어둠의 농도 변화이거나 눈이 피곤해서 생긴 착시 현상이었다.'현재와 비슷한 모습의 근대적인 여객수송기는 1930년대 미국을 중심으로 탄생했다. 1933년 보잉사가 개발한 B-247(10석), 록히드사가 개발한 L-10(객석 10석)이 상용화됐고, 유나이티드항공사 등 여객기를 운항하는 항공사가 본격적으로 민간항공 노선을 운영했다. 여성들로 구성된 최초의 항공기 승무원도 이때 등장했다. 제2차 세계대전 직전까지 민간 여객기는 52석 규모까지 성능을 향상했다.항공기술은 1939년 제2차 세계대전을 계기로 다시금 전환점을 맞았다. 참전국은 일일이 그 이름을 나열하기 어려울 정도로 소형화·고속화한 다양한 기종의 전투기와 폭격기를 경쟁적으로 개발해 전장에 투입했고, 어마어마한 파괴력으로 위협을 가했다. 비행기 속도를 700㎞/h 이상으로 끌어올린 '제트엔진'과 '레이더'가 제2차 세계대전 때 도입됐다. 미국 보잉사는 '슈퍼 하늘의 요새'(Super fortress)라 불린 폭 43m, 길이 30m에 무게가 64t에 달하는 당시 초대형 폭격기인 B-29를 개발했다. 미군이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을 투하한 폭격기가 바로 B-29다.이 거대한 폭격기가 대형 민간 여객수송기의 뿌리다. 보잉사는 B-29 폭격기를 기본으로 설계한 여객기 377 스트라토크루저(Stratocruiser)를 1947년 7월 출시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한국전쟁, 베트남전, 걸프전 등을 거치면서 각국 신형 전투기들의 성능이 극대화 되었다. 특히 1990년대 걸프전쟁은 영미권 국가의 F-14, F-15, F-16, 스텔스 전투기 등 최신 군용기의 성능 시험장이 됐다. 전쟁이 비행기의 성능을 비약적으로 끌어올렸다. 민간 항공기는 그 뒤를 따라가는 구조가 반복됐다.1940년대 군용기에 도입된 제트엔진이 1950년대 들어서는 보잉의 B-707, 더글러스의 DC-8 등 민간 여객기에도 탑재됐다. 1960년대 말에는 제트엔진을 단 중·단거리 수송기가 전 세계에 보급되면서 기차여행보다 항공여행을 선택하는 사람이 늘었다. 현재 인천국제공항을 오가는 B-747(500여석), A380(650여석) 등 이른바 '점보기'는 여객기가 점점 대형화한 결과다. 수천년 동안 하늘을 날고자 했던 인류는 1903년 비로소 자신의 힘으로 비행하게 되었는데, 그 66년 뒤인 1969년 우주를 날아 달에 착륙했다. 인간이 욕망한 바는 결국 과학으로 실현되었고, 그 발전 속도는 인류조차 주체하기 힘들 정도로 빠르게 흐르고 있다. 특히 항공기술의 발전이 전쟁과 군비경쟁에서 비롯되었다는 점은 우리를 아프게 한다.글/박경호기자 pkhh@kyeongin.com역사상 처음으로 '유인 동력 비행기'를 날리는 데 성공한 인물들인 윌버(오른쪽), 오빌 라이트 형제. 이들이 1908~1909년 유럽을 순회하며 첫 유인 동력비행기 시험 비행을 선보이는 모습(사진 오른쪽).그래픽/성옥희기자 okie@kyeongin.com

2020-04-08 박경호

['대한민국 나들목' 인천공항 이야기·(8)]우여곡절 '인천공항' 이름표

1992년 신공항 명칭공모 '세종' 최다 득표서울·아리랑 등에도 밀려 '인천' 8위 불과1995년 '영종' 결정… 시민단체 반대 운동"변경" 60만명 요구 서명… 현재 이름으로인천국제공항이 지난달 29일 개항 19주년을 맞았다. 문을 연 지 19년, 인천국제공항은 대한민국의 관문이자 인천을 대표하는 상징이 되었다. 인천국제공항 이용객들은 그렇게 '인천'을 기억한다. 그래서 공항의 이름은 '이름'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니게 된다. 세계 각국의 공항 이름은 그 소재지 명칭이나 그 나라 역사적 인물의 이름을 따는 게 일반적이다. 대부분은 인천공항처럼 도시 이름을 붙이고 있다.인천국제공항에 '인천'이라는 이름표는 쉽게 단 게 아니다. 인천 입장에서 볼 때 참으로 우여곡절도 많았다. 인천국제공항 명칭 논의가 시작된 건 1992년부터다. 1990년 영종도 신공항 건설 계획이 확정된 뒤 당시 건설교통부(현 국토교통부)는 1992년 전 국민을 대상으로 신공항 명칭 공모를 실시했다. 공모 결과 586종, 1천644건의 이름이 모였다. 전 국민을 대상으로 했다고는 하지만 참여자가 너무 적었다. 1천644건 중 가장 많은 표를 받은 건 101표를 받은 '세종공항'이었다. 국제공항인 만큼 우리나라를 대표할 수 있는 인물인 세종대왕의 이름을 활용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2위는 70표를 얻은 '서울공항'이 차지했고, '아리랑공항', '새서울공항' 등이 뒤를 이었다. '인천공항'은 8위(30표)에 그쳤다. '영종공항'이 6위(54표)로 인천을 앞선 게 눈에 띈다.공모 결과가 발표되자 인천 지역이 들끓었다. 인천시의회가 신공항특별위원회를 꾸려 1992년 7월부터 신공항 명칭에 '인천'이 포함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인천 지명이 배제될 경우, 신공항 건설 저지 운동까지 펼치겠다고 했다. 국내 최대 공항이 건설되는 땅인 '인천'을 상징해야 한다는 이유였다. 결국 이듬해 정부는 공모 당선작 없이 ▲인천공항 ▲세종공항 ▲서울·영종공항 등 3편의 가작만을 발표했다.1995년 수도권신공항건설공단의 명칭 결정을 앞두고 경인일보는 신공항의 명칭으로 '인천국제공항'이 바람직하다는 내용의 기사를 1면에 실었다. 1995년 1월 23일자 신문을 보면, "'인천과학아카데미' 대학 등 학계에서도 인천의 국내외적인 인지도, 지역 이름을 따르는 공항 명칭의 통상적 기준, 영문 발음·표기상의 문제, 주민 여론·지역 정서 등을 고려해 인천국제공항으로 결정돼야 한다는 주장을 펴고 있다"며 "인천의 경우 6·25 전쟁 때 인천상륙작전의 성공 등으로 국내·외적 인지도가 높을 뿐만 아니라 영문 표기상으로도 양호하다"고 보도했다. 다른 후보인 세종은 외국인들에게 인지도가 낮은 데다 지역 대표성이 없고, 영종의 경우 발음 및 표기가 어렵다는 점을 들어 적절치 않다고 했다.하지만 수도권신공항건설공단은 1995년 1월 26일, 공항명칭 선정 심사위원회를 열고 신공항의 명칭을 '영종국제공항'으로 정했다. 영종이라는 이름이 건설 초기부터 널리 알려졌고, 지역성을 고려한 판단이라고 그 이유를 들었다. 결론이 내려졌음에도 인천 시민들은 '인천'이라는 명칭을 포기하지 않았다. 같은해 4월, 인천기독교연합회총회·인천YMCA 등 시민 단체들은 '인천국제공항 명칭제정추진위원회'를 구성해 '영종국제공항' 명칭 제정에 반대했다. 1995년 4월 19일자 경인일보에는 "시민 자존심 '영종' 용납 못해"라는 제목의 위원회 창립총회 개최 기사가 실렸다. 이날 창립총회에는 당시 심정구 국회의원 등을 비롯해 심상길 인천시의회 의장, 최기선 전 인천시장, 이종인 인천상의 부회장 등 500여 명의 각계 인사가 참여해 인천국제공항 명칭 제정을 촉구했다. 이때 최기선 전 시장은 1994년에 터진 '북구청 세무비리'와 관련해 도의적 책임을 지고 스스로 물러나 있던 상황이었다. 명칭 변경을 촉구하는 인천 시민 동의까지 받았는데, 이에 서명한 시민이 약 60만명에 달했다. 당시 인천시의 인구가 약 235만명(KOSIS 국가통계포털 기준)이었다는 점을 감안할 때, 시민 4명 중 1명이 '인천국제공항'을 위해 적극 나섰던 셈이다.신공항 명칭은 당시 초대 민선시장 선거를 앞둔 후보들에게도 최대 현안이었다. 초대 민선 인천시장 후보로 나선 최기선·신용석·강우혁 등 3명의 후보는 영종국제공항으로 정해진 이름을 '인천국제공항'으로 바꾸어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결국 건설교통부는 수도권신공항건설공단의 결정을 뒤집고 1996년 3월 21일 수도권 신공항의 명칭을 '인천국제공항'으로 확정, 발표했다. 건설교통부는 전 세계 공항의 90% 정도가 지역 명칭을 사용하고 있어 공항이 소재한 인천시의 이름을 채택했다고 설명했다. '영종국제공항'은 국제적 인지도가 낮고, 발음도 어려워 피했다고 덧붙였다.정부 발표로 신공항을 둘러싼 명칭 공방은 일단락되는 듯했지만, 논란은 끊이지 않았다. 일각에서는 '세종국제공항 명칭추진위원회'까지 꾸려 명칭 선정 이후에도 공항명 변경을 주장했고, 인천 지역 사회도 이에 대응하는 대책위를 구성해 인천국제공항의 명칭을 바꿀 수 없다고 맞섰다.결국 개항을 1년여 앞둔 2000년 건설교통부는 국제민간항공기구(ICAO) 등에 공항명칭을 '인천국제공항'으로 제출해 마무리 지었다. 현재 인천을 오가는 모든 항공권에는 인천국제공항의 국제항공운송협회(IATA) 공항코드인 'ICN'이 표기돼 있다. 인천 영문(INCHEON)의 알파벳 첫 글자인 I와 중간의 C, 마지막 N의 조합이다.2006년 한나라당 소속이었던 이계진 의원은 인천국제공항의 명칭을 '인천-세종국제공항'으로 바꿔야 한다며 인천국제공항공사법 개정을 추진하면서 다시 한 번 논란에 불을 지폈다. 인천의 90여개 시민단체는 '인천지역 경쟁력 강화를 위한 범시민협의회'를 구성해 이런 움직임에 맞섰고, 다시 한 번 '인천국제공항'을 지켜냈다.'서울 인천국제공항' 소재지 국제표기 논란 市 제외 요구에도 아시아나 안내방송 유지세계 4만여개 공항 대부분 '지역명칭' 사용"이름짓기도 서비스상품 브랜딩 과정 일부" 2011년부터는 인천국제공항을 둘러싸고 새로운 논란이 불거졌다. 정부가 발간하는 항공정보간행물(AIP), ICAO, IATA 등에 '서울'로 등록된 인천국제공항의 소재지를 인천으로 변경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된 것이다. 서울시가 강서구에 있는 김포공항의 이름을 서울공항으로 바꿔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건설교통부는 2000년, 공항 이용 승객이 많은 중심 도시의 이름을 소재지로 명시하는 것이 국제 관례라며 ICAO 등에 서울을 인천국제공항의 소재지로 등록한 바 있다. 소재지는 서울, 공항명은 인천국제공항인 '서울 인천국제공항'이 된 것이다. 인천시는 국내 항공사에도 '서울 인천국제공항'이라는 안내 방송에서 '서울'을 제외해 줄 것을 요구했다. 현재 대부분의 항공사가 이를 수용한 상황이다. 대한항공뿐 아니라 진에어, 티웨이항공 등 대부분 저비용항공사 역시 서울 인천국제공항이 아닌 인천국제공항으로 안내 방송을 하고 있다. 현재까지 '서울 인천국제공항'으로 안내 방송하는 국내 항공사는 아시아나항공이 유일하다. 인천시는 올해 아시아나항공에도 재차 안내방송 변경을 요구할 계획이다. 인천시 항공정책팀 권정은 주무관은 "인천은 인구 300만에 경제자유구역까지 형성돼 과거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해외 교류가 많아져 서울로 안내할 경우 인천을 찾는 외국인들의 혼란을 초래할 우려가 크다"며 "올해 하반기, 이 같은 혼란을 해소하기 위해 아시아나항공에 다시 한 번 서울이 아닌 인천국제공항으로 안내해 줄 것을 요청하고, 장기적으로 해외 항공사에도 요청할 계획"이라고 했다. 아시아나항공 관계자는 "도쿄 나리타공항이나 하네다공항처럼 IATA 등에 등록된 소재지와 공항명을 함께 안내하고 있는데, 인천국제공항도 이와 같은 경우"라며 "안내방송에 서울도 함께 방송하는 것은 오히려 고객에게 혼선을 주지 않기 위한 것"이라고 했다.세계 대부분 공항이 인천국제공항과 같이 지역 이름을 공항명으로 쓰고 있다. 우리나라의 경우, 17개 모든 공항의 이름이 지역명으로 돼 있다. 인천국제공항, 김포국제공항, 김해국제공항, 대구국제공항, 청주국제공항 등이다. 라이트 형제가 1909년 미국 메릴랜드 주에 건설해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공항으로 알려진 '칼리지 파크(College Park)' 공항도 지역명을 공항 이름으로 정했다. '칼리지 파크'는 메릴랜드 주 중부 지역 이름이다. 북한의 주요 국제공항인 '평양 순안국제공항'도 지명을 활용했다. 유명인의 이름을 딴 공항도 적지는 않다. 미국 뉴욕의 '존 F. 케네디' 국제공항, 이탈리아 로마의 '레오나르도 다빈치' 국제공항, 프랑스 파리의 '샤를 드골' 국제공항, 인도 뉴델리의 '인디라 간디' 국제공항 등이 대표적이다. 뉴욕의 '존 F. 케네디' 국제공항의 경우, 1948년 개항할 때는 뉴욕국제공항으로 지명을 공항 이름으로 정했지만, 존 F. 케네디 대통령 암살 사건 이후 케네디 대통령을 추모하기 위해 1963년 명칭을 변경했다. IATA 공항코드도 현재는 이름의 약자를 딴 'JFK'로 쓰고 있다. 영종도와 같이 섬에 건설돼 그 섬의 이름을 활용하는 경우도 있다. 홍콩의 국제 관문인 '홍콩 첵랍콕(Chek Lap Kok) 국제공항' 등이다. 첵랍콕은 홍콩의 서부 해역에 있는 섬으로, 1998년 개항과 동시에 섬 이름을 공항명으로 쓰고 있다.한국항공대 이상학 경영학부 교수는 "마케팅 측면에서 볼 때 공항의 이름을 짓는 건 전 세계인을 대상으로 하는 최고의 서비스 상품을 브랜딩하는 하나의 과정"이라며 "지역 입장에서는 당연히 공항 이름에 지역명을 넣고 싶어 하고, 공항 입장에서는 항공사나 승객 유치를 위해 세계적으로 잘 알려진 명칭을 쓰려고 열을 올리기 때문에 이름을 지을 때 조정의 역할이 반드시 필요한 이유"라고 말했다.한국항공협회에 따르면 전 세계에는 4만 개가 넘는 공항이 있다. ICAO가 공항코드를 부여한 공항이다. 한국항공협회가 2년 주기로 발간하는 항공연감의 주요 공항을 보면, 공항이 가장 많은 나라는 미국이다. 전 세계 7천300여개의 주요 공항 중 약 23%(1천700여곳)가 미국에 몰려 있다. 반대로, 공항이 없는 주권 국가도 있다. 가톨릭 교황국인 바티칸시국, 입헌군주제 국가인 유럽의 리히텐슈타인 등이다. 바티칸시국으로 가려면 이탈리아 로마의 '레오나르도 다빈치' 국제공항을 이용해야 한다.글/공승배기자 ksb@kyeongin.com2007년 1월 18일 오전 인천 송도라마다호텔에서 '인천국제공항 명칭변경 추진관련 대책 간담회'가 열렸다. '인천지역경쟁력강화를위한범시민협의회' 주최로 진행됐으며, 당시 안상수 인천시장, 박창규 시의회 의장, 김정치 인천상공회의소 회장, 지역 국회의원 및 기관단체 대표들이 참석했다. /경인일보DB경인일보 1995년 1월 23일자 1면에는 "영종도건설 신공형 명칭, '인천국제공항' 바람직"이라는 제목의 기사가 실렸다. 인천 지역사회에서는 인천의 국내외 인지도, 지역이름을 따르는 공항명칭의 통상적 기준 등을 고려해 인천국제공항이 타당하다고 주장했다.인천국제공항 전경. 활주로 인근에는 인천국제공항을 나타내는 'INCHEON'이 표시돼 있다. /인천국제공항공사 제공인천국제공항 제2여객터미널. /경인일보DB

2020-04-01 공승배

['대한민국 나들목' 인천공항 이야기·(7)]단절된 섬 이어준 대교

영종대교, 초기 인천공항 유일 접근로 역할인천대교, 2009년 개통후 인천도심 가까이제3연륙교, 청라 연결 5년뒤 완공목표 추진市, 신도~강화도~해주·개성 '평화도로' 구상공항물류 시너지… 국가도로망 반영 협의중'다리(橋)'는 바다와 강, 계곡을 건널 수 있도록 만든 구조물이다. 둘 사이의 관계를 이어주는 것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기도 하다. 그래서 처음 인연을 맺어주거나 끊어진 관계를 다시 연결해 주는 것을 '다리를 놓는다'고들 한다.영종도는 인천국제공항이 들어서기 전까지는 육지와 단절된 섬이었다. 지금이야 영종대교와 인천대교를 타고 아무 때나 섬과 육지를 오갈 수 있지만, 옛날엔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야 했다.영종도는 다리가 놓이면서 내륙 생활권과 밀접한 관계를 맺게 됐다. 제1연륙교인 영종대교는 인천국제공항고속도로를 통해 서울과 직접 연결됐고, 제2연륙교인 인천대교는 제2경인고속도로를 통해 인천·경기 남부권과 이어졌다. 그리고 앞으로 들어설 제3연륙교는 경인고속도로와 연결될 예정이다.영종도는 또 하나의 다리를 꿈꾸고 있다. 바로 남과 북을 잇는 서해평화도로다. 이는 구조물로서의 다리이기도 하지만, 끊어진 남북관계를 다시 연결해주는 의미를 갖기도 한다. 영종도와 인천 사이에 다리를 놓아준 게 인천공항이듯이 남북의 중매쟁이도 바로 공항이 될 것이다. 인천공항이 있기에 영종도를 중심으로 한 다리들은 남북간 인적·물적 교류의 핵심 인프라가 될 잠재력이 무궁무진하다. → 위치도 참조1990년 6월 인천 영종도가 수도권 신공항 입지로 확정되면서 다리 건설은 선택이 아닌 필수가 됐다. 섬을 육지와 연결하는 연륙교 계획과 함께 서울 도심에서 공항까지 45분 이내 도착을 목표로 한 고속도로 건설계획이 확정됐다. 2000년 11월 22일 개통한 영종대교는 인천공항 개항 초기 유일한 접근로였다. 우리나라 사회간접자본시설(SOC) 역사상 최초로 민자 사업으로 진행됐다. 영종대교는 공항과 경기도 고양을 연결하는 36.6㎞ 길이의 인천국제공항고속도로의 해상 구간이다. 인천 중구 운서동과 서구 경서동을 잇는 길이 4.42㎞의 다리를 49개의 교각이 떠받치고 있다. 상층엔 도로, 하층엔 철로(공항철도)가 놓여 흔하지 않은 복층 구조 다리라는 점이 특징이다. 11개 건설사의 출자로 설립된 민간사업시행자인 신공항하이웨이(주)가 총 사업비 1조7천342억원(육상구간 포함)을 투입해 건설했다.인천 송도국제도시와 공항을 연결하는 인천대교는 2009년 10월 16일 개통했다. 총 길이가 21.348㎞에 달하고 이 가운데 해상구간이 12.34㎞로 영종대교의 약 4배다. 사업비는 민자구간 1조5천201억원, 국가사업 구간 8천628억원을 합해 총 2조3천829억원에 이른다. 해상구간은 민자사업자인 인천대교(주)가 맡았고, 육상 연결도로는 한국도로공사가 시행했다.인천대교는 처음에는 해저터널로 계획됐지만, 막대한 비용과 오랜 공사 기간, 유지 관리 어려움이 걸림돌이 됐다. 1995년 11월 경인일보는 제2연륙교 해저터널의 타당성을 짚어보는 기획기사를 연재했는데 당시 기사를 보면 이런 이유 때문에 해저터널보다는 해상교량 방식이 더 낫다는 여론이 우세했다.초기 인천공항 접근 교통망은 서울 편의 위주로 짜였기 때문에 정작 인천시민들은 개항 효과를 누리지 못했다. 이런 상황에서 맞이한 인천대교의 개통은 인천 도심에서 공항으로의 이동을 더 수월하게 했다. 그저 '제2연륙교'로만 불리던 무명의 이 다리는 송도국제대교, 황해대교 등의 명칭이 거론됐으나 여러 공론화 과정을 거쳐 '인천대교'라는 이름을 얻어 인천을 상징하는 랜드마크로 자리하게 됐다.영종대교와 인천대교의 건설은 그야말로 바다에 길을 내는 험난한 토목 사업이었다. 한강에 다리를 놓는 사업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고도의 기술력과 장비, 인력, 예산이 필요했다. 두 다리는 당시 토목기술의 '끝판왕'격이었다.아주 오래 전, 다리는 냇가에 큰 돌덩이 등을 놓은 징검다리나 통나무 다리 등 원시적인 형태로 시작했고 아치 형태의 교량부터 기술이 적용되기 시작했다. 한국의 경우는 통일신라 경덕왕 10년(751) 축조된 불국사의 청운교·백운교가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다리로 꼽히는데 이는 석조 아치교다.다리는 하중을 어떻게 분산시키느냐가 가장 중요한 기술이다. 건너는 구간이 짧다면 널빤지 형태의 구조물만 얹으면 되지만 거리가 길면 휘어질 우려가 있어 중간중간 교각을 놓아야 한다. 교각 사이 폭은 가까울수록 안정적이나 이 경우 선박이 다닐 수 없고 물의 흐름을 방해하게 된다. 그래서 나온 기술이 바로 주탑과 케이블을 이용해 교각 사이를 크게 벌리는 현수교와 사장교 방식이다.영종도 북단에 위치한 영종대교는 대형 선박이 많이 운항하지는 않아 큰 문제가 없었지만, 인천대교는 사정이 달랐다. 인천항의 무역선과 여객선의 항로를 가로지르는 노선이어서 인천대교 하부를 선박이 안전하게 통과할 수 있도록 해야 할 숙제가 있었다. 하늘길을 열자고 바닷길을 막아서는 안 될 일이었다.인천대교는 일반적으로 30~50m인 교각 사이 폭을 800m까지 벌리기 위해 '사장교' 방식을 도입했다. 주탑에서 대각선으로 뻗어 나온 케이블의 수평력이 다리의 상판을 지탱해 휘어짐을 막는 방식이다. 인천대교의 가운데 뾰족하게 솟은 높이 225m '역 Y자' 형태의 두 개의 탑과 케이블은 장식용이 아니라 다리의 생명줄이나 다름없는 구조물이다.주탑 간격 300m의 영종대교는 '현수교' 방식으로 지어졌다. 현수교는 사장교처럼 주탑과 케이블로 구성됐지만, 케이블이 대각선인 사장교와 달리 수직으로 설치된 게 다른 점이다. 샌프란시스코의 '골든 게이트(금문교)'가 대표적인 현수교다.조수간만의 차가 심한 인천 앞바다의 특성상 두 대교의 건설은 바다와의 싸움이었다. 영종대교는 일부 해상구간에 차수막을 설치하고 물을 완전히 뺀 다음에 육상 구간처럼 공사했다. 그러나 인천대교는 물막이 작업 없이 해상에서 파일을 박고 육상에서 미리 만든 구조물을 얹는 방식으로 진행됐다. 3천t의 장비를 들어 올릴 수 있는 크레인이 달린 바지를 띄워 공사를 했는데 이는 당시 세계에서 처음 선보이는 방식이었다.인천대교 사업에 참여한 (주)유신 구조부 이경훈 부사장(토목구조기술사)은 "바지 같은 해상장비를 바다에 움직이지 않도록 고정해 놓고 그 위에 육상에서 사용하는 장비를 실어 기초공사를 해야 했는데 조수 간만의 차 때문에 어려움이 많았다"며 "인천대교는 당시에는 국내에 없던 설계방식이 도입됐고, 빠른 진행을 위한 최적화 공법이 적용됐다"고 말했다. (주)유신은 영종대교의 기본 설계를 맡았고, 인천대교의 설계·시공 감리를 했다.이 부사장은 또 "인천대교의 해저터널이 무산된 이유는 경제성과 공사 기간 문제도 있었지만, 깊이 40m 이하로 들어가기 위한 경사도가 잘 나오지 않아 물리적으로도 어려움이 있었다"고 설명했다.영종도에는 영종대교와 인천대교에 이은 제3연륙교 건설이 추진 중이다. 제3연륙교 사업은 영종과 청라를 연결하는 길이 4.6㎞의 교량 건설 사업이다. 청라와 영종 경제자유구역 사업을 맡은 LH가 제3연륙교 건설비 5천억원을 조성원가에 반영해 2005년부터 건설을 추진했으나 15년째 착공조차 못하고 있다. 제3연륙교 건설이 영종대교와 인천대교를 운영하는 민자 사업자에 손실을 끼칠 수 있어 손실 보상 문제 등이 해결되지 않은 이유가 컸다. 현재 실시설계 용역이 진행 중으로 2025년 하반기 개통이 목표다. 영종대교와 인천대교처럼 기존의 고속도로망과 직접 연결될 가능성이 있다.영종도에서는 3개의 연륙교 외에도 남북 평화시대를 대비한 대형 프로젝트가 최근 그 첫발을 내디뎠다. 바로 서해평화도로 1단계 사업인 영종~신도 간(3.8㎞) 다리 건설 사업이다. 서해평화도로는 영종도와 신도(옹진군 북도면), 강화도를 다리로 연결하고, 더 나아가 해주와 개성까지 이어지는 도로를 연결하는 사업이다. 인천시는 4월 1단계 구간 설계·시공을 위한 업체 선정에 착수해 올해 말에는 착공할 예정으로 2단계 구간인 신도~강화도 구간(11.1㎞)이 '제2차 국가 도로망 종합계획'에 반영될 수 있도록 국토교통부와 협의 중이다. 서해평화도로의 구상은 바로 인천공항이 있기 때문에 가능했다. 개성공단과 같은 북녘의 공간이 남쪽의 인천항과 인천공항 등의 뛰어난 물류 인프라를 활용할 수 있도록 하자는 거다.배용환 인천시 도로과장은 "국가 계획에 서해평화도로가 반영되면 인천에서 김포를 거치지 않고 영종도를 통해 강화도, 더 나아가 북한으로 곧장 이어지는 길이 만들어진다"며 "1단계 사업인 영종~신도 구간부터 차질없이 사업이 진행될 수 있도록 하겠다"고 말했다.글/김민재기자 kmj@kyeongin.com주탑 사이에 상판을 연결하기 전의 인천대교 공사 현장 모습. 총 길이 21.348㎞의 인천대교는 52개월 간의 공사 기간을 거쳐 2009년 10월 16일 개통했다. /인천대교(주) 제공영종대교의 낮. /신공항하이웨이(주) 제공영종대교의 밤. /신공항하이웨이(주) 제공제2연륙교(인천대교)의 해저터널 방식에 대한 문제점과 대안을 분석한 경인일보 1995년 11월 23일자 지면.

2020-03-25 김민재

['대한민국 나들목' 인천공항 이야기·(6)]바다위 공항

지반침하 우려 제기 속 성공적 건설일본 제치고 '벤치마킹' 사례로 꼽혀바다 위에 건설한 인천국제공항은 우리나라의 우수한 기술력을 세계로부터 인정받는 계기가 됐다. 바다를 메운 땅에 건설했지만 지반 침하 등의 문제가 전혀 나타나지 않으면서 세계적으로 벤치마킹의 대상이 되고 있다.반면 일본 간사이국제공항은 지반 침하로 '세계에서 손꼽히는 토목 실패 사례'라는 불명예를 안았다.인천공항 지반공사 설계를 맡았던 (주)유신 최인걸 인천지사장은 "간사이국제공항은 대표적인 토목공사 실패 사례로 평가된다. 일본인들이 가장 부끄러워하는 건축물의 하나일 뿐 아니라 세계 공항에서도 간사이공항처럼 문제가 불거진 공항은 거의 없다"고 했다. (주)유신은 인천공항 건설사업 설계와 감리 업무를 수행했으며, 당시 최 지사장은 기술본부장을 맡고 있었다.그는 세계 3대 인명사전인 '마르퀴스 후즈 후'와 영국케임브리지국제인명센터(IBC)에서 발행하는 '세계 100대 엔지니어'에 등재된 토목 전문가다. 최 지사장은 "인천공항 개항 이전부터 지반 침하 우려가 있었기 때문에 시료 채취와 분석 등에 있어서 심혈을 기울였다"고 했다.그는 2000년 일본에서 열린 '지반공학 국제심포지엄(ISLT·International Symposium Lowland Technology)'에서 인천공항 건설 과정에 대해 발표한 적이 있다. 이 행사에는 미국, 유럽, 동남아 등 각국에서 온 학자들이 참여했고, 인천공항을 완성한 한국 건설산업의 우수한 기술력에 찬사를 보냈다. 반면 행사에 참여한 일본 학자들은 예상보다 빨리 침하하는 간사이공항 때문에 고개를 들 수 없을 정도로 부끄러워했다고 한다. 당시 일본은 내진 설계 등 토목 부문 기술력에 강한 자부심을 갖고 있었지만, 간사이공항은 10m 넘게 침하했다.그는 "인천공항의 성공적인 건설이 대한민국에 대한 인식을 바꾸는 계기가 됐다"며 "대한민국의 토목 기술은 이제 어디에 내놓아도 뒤지지 않는 수준"이라고 말했다.한국건설산업연구원 최석인 연구위원은 "지반 침하 문제는 간사이공항을 대표적인 토목 실패 사례로 거론하는 주요 이유"라며 "우리 인천공항을 간사이공항과 견주었을 때 그 성과는 더욱 극명하다"고 했다. → 연중기획 12면 /정운기자 jw33@kyeongin.com

2020-03-18 정운

['대한민국 나들목' 인천공항 이야기·(6)]바다위 공항

#첨단공법 과시 영종도 대공사1992년부터 공항면적의 82% 매립 공사200만대 착륙 불구 예상침하 절반 안돼11m 내려간 '日 간사이공항 섬'과 대조'4개의 섬' 생활권 묶여… 인근섬도 변화"교통환경 나아졌지만 교류기회는 줄어"'인천국제공항, 일본을 부끄럽게 하다!'일본 오사카에 있는 간사이국제공항 지반은 건설 당시보다 11m 이상 내려앉았다. 간사이공항은 육지에서 5㎞ 떨어진 바다를 매립해 조성한 인공섬 위에 건설됐으며, 1994년 개항했다. 매립 공항이라는 점 때문에 침하는 설계 때부터 예상됐으나, 침하 속도와 규모가 생각보다 훨씬 크다. 예상대로라면 50년에 걸쳐 진행될 침하 폭이 조성 6년 만에 이뤄졌다. 속도는 더뎌졌으나 지금도 매년 침하가 이뤄지고 있다.인천국제공항도 바다를 메워 조성됐다. 간사이공항의 사례 때문에 인천공항도 부지 선정 때부터 개항 때까지 지반 침하 우려가 끊이지 않았다. 김포공항을 대체하고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신공항 부지로 인천 영종도가 선정된 것은 1990년 6월 14일이다. 설계를 거쳐 1992년 11월 1단계 부지조성공사가 시작됐다. 영종도와 용유도 사이 바다를 메우는 공사가 뼈대였다. 인천공항 전체 부지면적 5천619만8천600㎡ 중에서 해상면적은 82%에 해당하는 4천600만㎡에 달했다. 특히 활주로, 계류장, 관제탑 등 인천공항 주요 시설들은 모두 해상 부분에 위치하는 것으로 설계됐다.공항은 수백 명의 승객을 태운 항공기가 뜨고 내리는 만큼, 큰 하중을 이겨낼 수 있도록 견고해야 한다. 하지만 인천공항이 해상을 매립해 들어선다는 이유로 지반 침하 주장이 불거졌다. 특히 시민단체를 중심으로 환경파괴와 지반침하를 우려하는 목소리가 컸다. 일부 시민단체들은 2000년 1월, "공사가 시작된 92년부터 시민사회단체들은 '갯벌을 매립해 공항을 건설했을 때 과연 첨단공법을 동원한다고 해도 부등침하를 막기 어려울 것'이라고 경고했었다"며 "영종도 공항은 너무나 넓은 면적에 두터운 뻘층이 다양한 양상으로 깔려 있기 때문에 예측하지 못한 결과가 나타날 수밖에 없다"고 주장했다. 실제로는 어떨까. 인천공항은 개항 20년 가까이 지났지만, 일각의 우려처럼 지반 침하 등의 문제는 아직 나타나지 않고 있다. 인천국제공항공사는 1991년부터 2020년 2월까지 인천공항 활주로 누적 침하량은 0.042~2.9㎝에 불과하다고 설명했다. 이는 인천공항 토목 설계 회사가 예측한 침하 폭 7.5㎝의 절반에도 못 미치는 규모다. 20년이 흘렀지만, 걱정했던 것과는 달리 안전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으로 드러났다. 유도로와 계류장의 침하량도 미미한 수준에 그치고 있다. 항공기의 무게는 보통 승객과 화물까지 더하면 200~300t에 달한다. 그렇게 무거운 항공기가 시속 200㎞ 넘는 속도로 하강하다 굉음과 함께 활주로에 바퀴를 붙인다. 2001년 개항부터 인천공항 활주로에 내린 항공기는 총 200만대다. 이륙까지 포함한 운항횟수는 400만회를 넘었다.인천공항의 안전성은 침하가 급격히 이뤄지는 일본 간사이공항과 비교되고는 한다. 한국건설산업연구원 최석인 연구위원은 "간사이공항은 예상보다 빠른 속도로 지반이 침하하는 문제점을 가지고 있다"며 "개항 6년 만에 여객빌딩 주변 지반이 12m 침하되고, 다른 곳도 평균 11m 가라앉아 '부등침하'현상을 보이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또 "인천공항 건설 시에도 이러한 침하의 우려가 있었으나 침하와 관련한 아무런 문제도 나타나지 않았다"고 했다.설계업체인 (주)유신의 최인걸 인천지사장은 인천공항 설계와 감리를 맡아 1995년부터 2001년 인천공항 개항 때까지 기술본부장을 맡았고 그 현장에 있었다.최 지사장은 "인천공항은 침하를 막기 위해 지반조사 등을 정밀하게 진행했고, 각 지질의 성질 등을 파악해 지반 침하를 막기 위한 첨단 방법을 동원했다"며 "안전하면서도 세계적인 공항으로 자리 잡은 모습을 보면 지금도 보람을 느낀다"고 했다. 그는 인천공항 조성 경험을 일본에서 소개하기도 했다고 한다. 그는 2000년 일본 사가대학교에서 열린 지반공학 국제심포지엄에서 인천공항 사례를 발표했다. 그는 "일본인들이 인천공항의 건설 기술에 대해 감탄했다"며 "간사이공항 침하가 진행되고 있기 때문에 일본인 학자들이 부끄럽다는 말을 하기도 했다"고 했다.#1천년의 인천 해상매립 역사고려 강화도 천도후 식량확보 위해 메워김구, 젊은시절 일제 인천항 축조 동원도월미도·송도·남동·주안산단 등 '옛 바다'인천공항 입지 선정부터 안전성 우려가 제기된 만큼, 부지 조성 단계부터 남다른 관심을 기울여야 했다. 지반조사는 부지조성구간 전체를 대상으로 2천300개소에서 시추조사를 진행했고, 3만2천212회의 현장시험과 2만7천267회의 실내시험을 거쳤다. 연약지반을 강화하기 위해 강관파일 3만2천여 개를 박았다. 강관파일은 일렬로 세우면 1천682㎞에 달한다. 서울과 부산을 2차례 왕복할 수 있는 길이이다.인천공항 건설을 위해 메워야 하는 바다는 만조 시 평균 수심이 1~2m로 얕았다. 그 규모는 여의도 면적의 13배에 해당한다. 이 너른 바다를 메우기 위해 영종도와 용유도 사이에 총 길이 17.3㎞의 방조제를 쌓았다. 방조제로 막은 바다에 5m 두께로 1억8천만㎥ 토사를 부어 부지를 조성했다. 토사는 신불도와 삼목도의 산과 용유도 오성산을 깎아 마련했다. 이 때문에 100m를 넘던 이들 산의 높이는 절반 이하로 낮아졌다. 부족한 토사는 인근 바다에서 채취했다. 인천은 바다 매립과 관련해서는 1천년의 경험을 갖고 있는 특이한 이력의 도시이다. 그동안 꾸준히 바다를 메워 도시를 확장·발전해 왔다. 고려시대부터 바다를 메웠고, 그 땅은 농경지로, 공업단지로, 신도시로, 공항과 항만으로 활용되어 왔다.고려시대 강화도는 간척사업을 통해 농경지를 만들었다. 몽골의 침입으로 수도가 개성에서 강화도로 이전됐고, 강화에 급격한 늘어난 주민들의 식량과 군량미를 확보하기 위해 바다를 매립한 것이다. '고려사'에는 임금 고종이 몽골 침입 20여 년 뒤인 1256년 2월, 매립을 지시했다는 얘기가 실려 있다. "제포(梯浦)와 와포(瓦浦)에 둑을 쌓아 좌둔전(左屯田)으로 삼고, 이포(狸浦)와 초포(草浦)는 우둔전(右屯田)으로 삼도록 하라"는 내용이었다. 고종은 매립을 위한 인력 동원 방식과 자금 조달 방안도 구체적으로 적시했다. 바다를 매립해 생긴 땅은 농경지로 활용했다. 이후에도 매립은 이어졌다. 조선시대에는 강화 석모도와 송가도를 이어 매립지가 만들어졌다. 현재 인천 지도를 보면 매립지가 도시 전체에서 얼마나 큰 비중을 차지하는지 알 수 있다. 인천 중구 월미도는 소월미도와 합쳐졌다. 일제강점기 때 김구는 인천 앞바다를 매립해 만든 인천항 축조 공사에 동원됐다. 인천 경제의 한 축을 이루고 있는 남동국가산업단지, 주안국가산업단지도 과거엔 소금을 만드는 염전이었다. 세계 최대 규모의 쓰레기장인 수도권매립지, 각종 국제기구와 글로벌 기업들이 운영되고 있는 송도국제도시도 바다 위에 세워졌다. 인천의 주요 시설 다수가 매립지 위에 조성된 것이라 해도 지나치지 않다.인천공항 조성을 위한 바다 매립은 생활상의 변화를 가져왔다. 영종도와 용유도 등 각 섬에서 생활했던 주민들은 한 생활권으로 묶이게 됐다. 염전 등 바다와 관련된 직업이 대부분이었던 섬마을은 '공항 도시'로 바뀌었다. 이는 주변 지역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영종도 서북쪽에 위치한 장봉도와 신도, 시도, 모도 주민들의 생활 방식이 크게 바뀌었다. 인천공항 조성 공사가 시작되기 전 이들 섬 주민들은 뭍으로 가기 위해 탄 배는 연안여객터미널이 종착지였다. 육지에서 섬으로 들어올 때는 그 반대였다. 이 배는 세어도, 신도, 시도, 모도, 장봉도 등 여러 섬을 거쳤고 영종도와 용유도 사이 바다를 가로질렀다. 한 번 운행하는 데 2시간 30분 정도가 소요됐다. 영종도와 용유도가 매립되면서 이 뱃길을 이용할 수 없게 됐고, 연안부두보다 가까운 곳에 삼목선착장이 조성됐다. 삼목선착장은 매립으로 영종도와 합쳐지기 전 삼목도 자리다. 거리가 가까워진 만큼 배 타는 시간은 30분으로 줄었다. 배 운항횟수도 기존엔 하루 1차례에 불과했으나 16차례로 늘어났다. 교통 환경이 나아졌다고 할 수 있지만, 연안부두 등 기존에 배를 타기 위해 들렀던 지역과는 왕래가 줄어들었다.장봉도 주민 박광국 씨는 "이제는 장봉도 주민들이 연안부두를 갈 이유가 없어졌다. 생활 권역이 바뀌게 된 것"이라며 "과거엔 선착장에서 주민들과 기다리면서 시간을 보내기도 했지만, 지금은 차에 탄 채로 배에 오르기 때문에 주민들과 교류하는 풍경은 없어졌다"고 했다.인천공항 건설은 주민들 삶에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이와 함께 과거 삶의 모습을 새롭게 조명하는 계기도 됐다. 인천 삼목도와 신불도 등에서는 신석기 시대 유물이 출토됐다. 인천공항의 건설을 계기로 문화재 조사가 진행됐다. 1차 발굴조사는 1995년 9월부터 1996년 9월까지 진행됐다. 그 결과 삼목도에서 신석기 후기로 추정되는 유물이 출토되는 등 서해 연안 도서 지역의 선사 문화를 알 수 있는 계기를 마련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후 영종도 열병합발전소 예정지와 용유도 지역에서 진행된 2차 발굴조사에서도 빗살무늬 토기 등이 발견됐으며 현재까지 발굴된 유물만 모두 1만여 점에 이른다. 현재도 발굴 조사가 진행되고 있다.영종역사관 김연희 학예사는 "인천공항 건설을 계기로 진행된 유물 조사 결과 영종도는 국내 최대 신석기 유물이 출토됐다. 운서동 한 지점에서 유물이 58기 나왔고, 이는 지금까지 조사된 서울 암사동 유적(30기), 안산 신길 유적(24기), 시흥 능곡 유적(26기) 등과 비교해도 월등히 많다"며 "유적이 만들어진 시기도 전기 신석기 시대로서 한반도 신석기 시대 주거문화 연구를 위한 표준 유적으로 꼽히고 있다"고 설명했다./정운기자 jw33@kyeongin.com1993년부터 1999년까지 인천공항 부지를 항공촬영한 사진. 인천공항 매립이 진행되는 과정을 보여준다.인천공항 부지조성 공사 현장. /인천국제공항공사 제공인천공항 건설을 위해 방조제를 쌓고 바다를 막는 '물막이'공사를 진행하고 있다. /인천국제공항공사 제공

2020-03-18 정운

['대한민국 나들목' 인천공항 이야기·(5)]섬마을, 금싸라기 땅이 되다

1989년 노태우 대통령 "매립 공항 건설"교통부 부인에도 외지인 몰려들어 투기그해 1분기에만 땅값 70% 넘게 올라가개발정보 유출·대기업 소유 등 의혹도1990년 6월 인천국제공항 건설이 확정됐을 때 작은 섬마을이던 영종도·용유도·삼목도·신불도는 순식간에 금싸라기 땅으로 바뀌었다. 물론 그 몇 년 전부터 소문이 돌면서 이미 땅값은 요동치기 시작했다. 인천국제공항 건설사업을 계획한 일정과 예산에 맞춰 원활하게 진행하려는 '정부'와 조상 대대로 살아온 땅과 바다를 그냥 내어줄 수 없다는 '주민' 간 보상문제를 둘러싼 팽팽한 줄다리기가 10년 넘게 이어졌다. 이 과정에서 많은 이야기가 쏟아져 나왔다. '투기꾼들'까지 가세하면서 영종도에는 욕망이 들끓는 부동산 광풍이 휘몰아쳤다. 그 속에서도 마을 공동체를 지키려는 노력이 있었다.정부가 대형 국책사업을 추진할 때 가장 큰 사회적 관심거리이자 걸림돌은 보상문제이다. 오죽하면 왕이 통치하던 조선시대에도 철거 보상이 있었다. 서울역사편찬원이 '경복궁 영건일기'(19세기 말·일본 와세다대학 소장)를 토대로 지난해 12월 펴낸 '경복궁 중건 천일의 기록'을 보면, 1865년(고종 2년) 4월 한성부가 경복궁 주변 기와집 85칸, 초가집 592칸, 임시가옥 10칸 반에 한 칸당 각각 10냥, 5냥, 2냥씩 철거 보상금을 지급했다. 고위 관료들 사이에서 무상으로 몰수할지를 두고 토론이 있었으나, 결국 보상하는 쪽으로 결론이 났다.이때부터 이듬해까지 경복궁을 둘러싼 기와집 1천872칸, 초가집 2천553칸, 임시가옥 77칸 등 총 4천502칸에 달하는 민가가 보상금을 받고 철거됐다. 당시 경복궁 중건사업을 위해 전국에서 거둬들인 돈은 83만4천266냥이었는데, 이 가운데 4%인 3만3천833냥을 보상비로 썼다. 1865년 경복궁 공사에 참여한 담모군(일꾼)과 장인(기술자)은 역할에 따라 하루 품삯으로 2.5~4전을 받았다. 당시 화폐 단위로 10전은 1냥이다.인천국제공항 건설과 경복궁 중건은 당시 국가의 새로운 동력을 찾기 위한 최대 건설 프로젝트였다. 둘 다 그만큼 시급하고 절실했다. 이들 프로젝트 모두 사업대상지의 주민 협조가 필수 불가결한 과제였다.인천공항을 조성하기 위해서는 총 5천619만㎡ 부지가 필요했다. 대부분은 영종도와 용유도 사이 바다를 매립해 확보했고, 보상이 필요한 사유지는 944만5천㎡로 계획됐다. 영종·용유지역 일부에 삼목도와 신불도 전체를 포함하는 면적이다. 바다를 생계수단으로 삼는 주민들의 어업권 보상도 이뤄졌다.인천국제공항공사의 전신 격인 한국공항공단(현 한국공항공사)은 1991년부터 2001년 2월까지 10년 동안 단계적으로 토지 보상을 진행했다. 이 기간 총 보상금은 2천686억원인데, 워낙 장기간에 걸쳐 집행했기 때문에 물가와 부동산 가격 상승 등을 고려하면 액면 그대로 보상금 규모를 환산하기는 어렵다.한국공항공단이 공식적인 보상절차에 돌입하기 전부터 영종도·용유도·삼목도·신불도에는 부동산 투기 열풍이 불었다. 당시 상황을 들여다보면, 인천시 순시에 나선 노태우 대통령의 말 한마디가 도화선이 됐다. 노태우 대통령은 1989년 3월 8일 새해 연두방문 차원으로 인천시청을 찾아 "수도권 지역의 제2국제공항을 인천의 영종도나 인근 바다 매립지에 건설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1990년 6월 교통부의 확정 발표가 있기 무려 1년 3개월 전이다.교통부는 노 대통령이 언급한 지 이틀 만에 '영종도 공항설'을 부인했다. 그러나 대통령 발언 직후 하루 수백명의 외지인이 영종도로 몰려들어 땅을 사들였다. 속칭 '떴다방'(불법 임시 중개시설)이 성행하면서 '가짜 개발 구상도'까지 나돌았다고 한다. 1989년 6월 각종 언론보도를 종합하면, 그해 1분기 영종도와 용유도 땅값은 전년도 4분기보다 70.42%나 급등해 전국 최고 수준의 오름세를 보였다. 이때 서울 강남구 땅값이 전년도 4분기보다 30.97% 오른 것에 비하면 가히 폭발적이다. 1990년 8월 평화민주당 토지투기조사위원회는 영종도와 용유도 전체 토지 가운데 73%가 외지인 소유라고 주장하며 개발정보가 사전에 유출됐다는 의혹을 제기했다. 이 가운데 상당수가 대기업 소유라고 평민당은 주장했다.주민들 대책위 꾸려 공단과 협상 나서공유수면 매립 어업권도 단계적 보상어선사재기 횡행·"금액 적다" 소송도영종도 일대 섬 주민들도 1990년대 들어서 섬별, 마을별로 보상대책위원회를 꾸리고 한국공항공단과의 보상협의를 준비했다. 정부는 공시지가보다 다소 높은 보상금을 제시했지만, 주민들은 실거래 가격보다 터무니없이 낮다고 반발했다. 경인일보 1992년 1월 4일자 신문을 보면, 영종도 운서동 주민들은 "공항부지 중 외지인 소유 43필지 12만여평의 평당 보상가 4만~5만원은 주민들 사이에 형성된 임의시가 10만원 선의 절반에 못 미친다"며 "교통부가 현지 주민들은 제쳐 두고 현실감이 덜한 외지인을 대상으로 우선 보상협의에 나선 것은 계략"이라고 반발했다.삼목도 쪽 인천공항 기공식 부지도 주민 반발에 확보하지 못하고, 결국 1992년 9월 개최하려던 인천공항 기공식이 11월로 미뤄지기도 했다. 1996년 5월 인천국제공항 여객터미널 기공식에 주민대표로 참석한 강영복(85)씨는 김영삼 대통령 바로 옆에서 함께 발파버튼을 눌렀다. 강영복 씨는 "김영삼 대통령이 '보상 잘 받았습니까'라고 물었는데, 잘 못 받았다고 대답했다"며 "대답을 들은 대통령이 주민들을 더 챙기라고 지시했다"고 말했다.보상협의 과정은 어땠는지 1993년부터 2001년까지 삼목주민보상대책위원회 위원장을 맡았던 유건호(63) 중구농협 조합장에게 들어봤다. 그의 가족은 6대째 삼목도와 영종도에서 살고 있다. 유건호 조합장은 "주민보상대책위가 13번에 걸쳐 자체적으로 토지 감정평가를 받아서 한국공항공단과 협상을 벌였는데, 처음에는 평당 7만원 부르던 땅을 수십만원까지 올려 보상받았다"며 "땅만 갖고 따지는 게 아니라 농작물, 돼지나 소 같은 가축을 두고도 한바탕 씨름을 해야 했다"고 말했다.인천공항 보상이 전국적인 '롤모델'이 됐는지 전국의 국책사업 예정지 주민들이 유건호 조합장에게 '제대로 보상받는 법'을 강의해 달라고 요청했다. 무안국제공항 예정지 주민들을 대상으로 강연할 때는 그 지역 경찰서 정보과 소속 경찰관이 "여기서 이러시면 안 된다"고 압력을 넣을 정도였다고 한다.인천공항 건설로 섬 전체가 수용되기 전까지 삼목도에는 200여 가구가 살았다. 적게 보상받은 사람이 3천만원, 많게는 100억원 넘게 보상금을 받은 사람도 있었다. 삼목도 사람들은 마을 농악계도 활발하고, 자체 장학회도 운영할 정도로 끈끈했다고 한다. 유건호 조합장은 "대책위에 브로커가 끼려고도 했지만, 주민들이 워낙 단결이 좋아서 끝까지 스스로 협상했고 내부 분쟁도 적었다"며 "삼목애향회와 삼목장학회는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고 말했다.인천공항은 4개의 섬 일대 공유수면을 매립해 건설했기 때문에 어업에도 지장을 줄 수밖에 없었다. 정부는 1991년부터 어업 피해 조사용역을 진행하기 시작해 2000년까지 단계적으로 어업권 보상에 나섰다. 보상지역은 영종·용유뿐 아니라 옹진군 북도면 장봉도와 신·시·모도, 강화와 김포 일대까지였다. 바지락, 굴 등을 양식하는 '면허어업' 990억원, 어선과 어구를 이용하는 '허가어업' 197억원, 맨손으로 어패류를 채취하는 '신고어업' 127억원이 보상금으로 집행됐다. 인허가 절차 없이 어업활동을 했던 무면허·무허가·무신고 어업 관련해서도 보상대상으로 선정해 총 242억원을 보상했다. 일부 어민들은 보상금이 낮게 책정됐다며 인천공항공사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하기도 했다.노인 상대 '금전 요구' 협박전화 많아도박으로 돈 날리고 막노동판 전전도초기 공항직원과 주민 '미운정 고운정'어업권 보상을 노린 '어선 사재기'도 적지 않았다. 경인일보 1990년 8월 29일자 신문을 보면, 당시 중구청에 등록된 어선은 영종지역 어촌계 78척, 용유지역 어촌계 141척 등 모두 219척으로 연초보다 30척 늘어난 것으로 나타났다. 주민들은 빚을 내서라도 강화도나 경기도 화성 등지에서 폐선 직전의 어선을 1척당 500만~1천500만원씩 주고 사들였다. 물론 대부분은 조업활동을 하지 않고 정박시켜 놨다.영종·용유지역 어민들은 보상 대상이 아닌 일반인에게도 보상금이 무더기로 지급됐다고 인천수협 등에 진정서를 제출했다. 인천지검은 1993년 7월 어업 보상 대상자 선정 경위 등을 수사한 결과, 보상금 총 8억5천만원을 중간에서 가로채거나 무자격자에게 지급한 어촌계장 등 5명을 구속했다.보상받은 주민들이 마냥 행복한 삶을 살진 않았다. 노인들이 사는 집을 골라서 "손주가 어느 학교 다니는지 알고 있다"며 돈을 요구하는 정체불명의 협박전화가 많았다고 한다. 보상금으로 영종도 땅을 다시 사는 주민도 상당수였는데, "건축허가가 나면 땅값이 10배 이상 뛸 것"이라는 사기꾼의 말에 속아 쓸모없는 땅을 수십억원씩 주고 샀다가 빈털터리가 된 사람도 많았다. 50대 영종도 토박이 주민은 "2006년 12월에 2차 토지보상을 받고, 이듬해 설 명절에 안 싸운 집이 없을 정도로 가족·친척 간 갈등이 많았다"며 "보상받고 강원랜드에서 하루에 1억원씩 날리면서도 '잘 놀았다'고 떵떵거리던 주민이 지금은 막노동판을 전전하는 신세가 되기도 했다"고 말했다.보상협의 과정에서 정부와 주민 간 오해를 푸는 데는 강동석(82) 전 건설교통부 장관의 역할이 컸다고 주민들은 입을 모은다. 강동석 전 장관은 1994년 출범한 신공항건설공단 이사장으로 취임해 인천공항 건설공사를 주도했고, 1999년부터 2002년까지 초대 인천국제공항공사 사장을 지냈다. 강영복 씨는 "강동석 장관이 현장에서 직접 주민들의 목소리를 들어가면서 항상 공단 직원들에게 주민 입장에서 생각해 보라고 주문하곤 했다"며 "인천국제공항공사 초기 직원들은 현장에서 미운 정 고운 정 다 들어서인지 보상이 끝난 이후에도 무척 가깝게 지냈다"고 말했다.글/박경호기자 pkhh@kyeongin.com그래픽/박성현기자 pssh0911@kyeongin.com/아이클릭아트1994년 10월 27일 인천국제공항 건설현장 인근에서 영종·용유·삼목·신불 주민 700여명이 상여를 앞세워 보상 등 생존권을 보장하라고 정부에 요구하는 시위를 벌이고 있다. /경인일보DB인천국제공항 건설사업으로 섬 전체가 수용된 삼목도의 초대 보상대책위원장을 맡았던 강영복 씨(왼쪽에서 다섯 번째)가 1996년 5월에 열린 인천공항 여객터미널 기공식에 주민대표로 참석해 김영삼 대통령(왼쪽에서 네 번째) 바로 옆에 서서 발파버튼을 누르고 있다. 이 자리에서 김영삼 대통령은 강영복 씨에게 보상은 잘 받았느냐고 물었다고 한다. /국가기록원 제공

2020-03-11 박경호

['대한민국 나들목' 인천공항 이야기·(4)]인천국제공항 입지

#1960년대 '신공항론' 대두일제 '대륙침략' 기항지 여의도공항 건설1939년 김포에 '군용'… 해방후 관문 역할항공수요 급증… 대체지 낙점 20여년 걸려#처음부터 영종은 아니었다1989년 4차 타당성조사까지 이름 안올라소음피해·공사비 적고 서울 접근도 용이환경훼손 논란에도 시화지구 제치고 선정소금 굽던 섬마을 인천 영종도가 왜 공항 입지로 제격이었는지는 과거의 선정 과정을 살펴보지 않더라도 오늘날 인천국제공항의 성공을 보면 고개가 끄덕여진다. 인천이 아닌 곳에 공항이 들어선다는 게 상상이 안 될 정도다. 김포공항을 대체할 수도권 신공항의 영종도 유치는 한반도의 배꼽 자리에 위치해 수도권 관문도시 기능을 타고났던 인천의 숙명이기도 했다.우리나라 최초의 공항은 영종도와 마찬가지로 섬에 지어졌다. 일제는 1916년 서울 여의도를 군용지로 매수해 비행장을 건설했다. 당시 여의도는 모래가 쌓여 만들어진 한강의 사구(沙丘)로 도심과 단절돼 소나 키우던 작은 섬이었다. 용산과 노량진 등 당시 경인철도가 설치된 서울의 요충지와 인접해 있으면서 인적이 드문 여의도는 공항 입지로 제격이었다.1916년 6월 13일자 매일신보에는 "용산철교의 하류 한강중의 대사주(大砂洲) 여의도는 71만평의 대사원(大沙原)인데 사구상(沙丘上) 100여호의 농촌은 6월 말로 전부 퇴거케 하야 목하 과반수는 철퇴하얏는데 다수는 영등포 부근의 시흥군 관내에 이주하는 중이며 차지(此地)는 군용지로 심히 고가로 매수한 것이라더라"는 기사가 실렸다.초기 여의도공항은 간이 비행장에 가까웠다. 이후 일본에서 항공 관련 법령이 제정됐고, 1929년 노량진~여의도 사이 도로 개설 사업이 완료되면서 격납고와 대합실 등 제법 공항의 모습을 갖췄다. 1㎞ 길이의 노량진~여의도 간 도로는 지금으로 치면 영종대교와 인천대교처럼 도심과 공항을 연결해주는 기능을 했다.여의도공항은 좋게 말하면 동북아 '허브공항' 역할을 했지만, 이는 일제의 침략 거점을 의미하기도 했다. 중국 대륙을 침략하기 위한 중간 기항지 역할을 했던 거였다.해방 직후인 1945년 8월 18일 이런 굴곡진 역사를 가진 여의도공항에 장준하 등 임시정부 선발대가 C-47 미군 수송기를 타고 해방 조국에 첫발을 내디뎠다. 이어 그해 11월 23일 임시정부 주석 백범 김구 선생도 C-47로 여의도 땅을 밟았다. 지금의 여의도공원 자리다.여의도를 시작으로 평양과 대구, 신의주, 함흥, 청진, 울산 등 6개 지역에 간이 비행장이 설치됐고, 1939년 3개의 활주로를 갖춘 김포공항이 역시 군용으로 만들어졌다. 김포공항은 당시 행정구역상 경기도 김포군 양서면 방화리였는데 지금은 서울에 편입됐다. 1963년 영등포구에 편입돼 공항동이라는 이름을 얻었고, 1977년 신설된 강서구로 재배치됐다.김포공항 자리는 너른 평야였다. 도심과는 다소 떨어져 있었지만, 올림픽대로, 강변북로 등을 통해 서울 접근성이 획기적으로 개선됐다. 김포공항은 1958년 국제공항으로 지정돼 여의도공항의 기능을 흡수했고, 이때부터 인천국제공항이 개항한 2001년까지 대한민국 하늘길의 관문 역할을 해왔다.김포공항을 대체할 수도권 신공항 건설 필요성은 1960년대 후반부터 나오기 시작했다. 김포공항은 해방 후 미군에 의해 확장됐고, 한국전쟁으로 완전히 파괴됐다가 1951년 유엔군에 의해 길이 2천468m, 폭 45m의 활주로로 다시 태어났다. 1958년 국제공항으로 지정된 이후부터 우리나라 항공수요를 전담하다시피 한 김포공항은 1960년 후반부터 수요가 급증하고, 대형기가 취항함에 따라 수도권 신공항 건설이 정부 과제로 떠올랐다. 30년 전 인천 영종도가 수도권 신공항으로 결정되기까지는 많은 우여곡절이 있었다. 4차례에 걸친 타당성 조사와 경기도 남부권 간척지 시화1·2지구와 경쟁 끝에 1990년 6월 영종도가 낙점됐다.1969~1970년 실시된 1차 타당성 조사에서는 미국의 공항전문 업체가 김포공항 확장과 수원 이전 방안을 검토했다. 이때만 해도 해안에 공항을 짓는 것은 수도권 교통망이나 경제·기술 여건상 엄두도 못 낼 사업이었다. 그러나 수원은 도심권 소음 문제가 가장 큰 걸림돌이었고, 결국 김포공항 확장이 최종안으로 채택됐다. 정부는 1980년까지 청사 건립과 활주로 확장 등 1·2단계 확장 사업을 진행했다.수도권 신공항 후보지 2차 조사는 1979~1980년 한국과학기술연구소(KIST)가 맡았다. 1990년이면 김포공항이 한계에 다다를 것이란 예측 속에 반월공단 인근 해변인 군자 지역, 시화 간척지 일부와 육지를 포함하는 남양지역, 이천 평야지대, 수원 군(軍) 공항 등이 거론됐다. KIST는 군자 지역을 최적지로 건의했다. 그러나 국방부가 주요 공군 기지인 수원·오산의 군용기 항로와 겹쳐 충돌 위험이 크다며 반대해 결국 무산됐다. 대안이었던 이천도 당시 식량 자급을 중시하는 분위기 속에서 논밭 훼손을 우려하는 여론이 일었고, 상수원 오염 문제도 있었다. 결국 1988년 서울올림픽에 맞춰 김포공항 3단계 확장을 하는 것으로 최종 결론지어졌다.정부는 곧바로 3차 타당성 조사에 착수했다. 1982~1983년 국내외 업체로 구성된 컨소시엄이 신공항 후보지를 재조사했다. 조사대상은 수원, 이천, 오산, 평택, 아산, 천안, 청주 등으로 충청권까지 범위가 확대됐다. 조사 결과에서는 평택, 이천 지역이 우수하다고 나왔으나 정치권 입김이 작용해 서울과 124㎞나 떨어진 청주 군 공항이 선정됐다. 국토 균형개발과 수도권 인구 분산 논리였다. 청주공항은 대통령에까지 보고돼 추진됐으나 결국에는 김포공항을 대체할 수도권 신공항이 아닌 중부권 공항으로서 역할이 축소됐다.1988년 초 노태우 정부가 들어서면서 수도권 신공항 문제가 다시 불을 지폈다. 김포공항 주변 소음이 극에 달한 상황에서 추가 확장은 미봉책에 불과했다. 정부는 소음피해가 없고, 24시간 운영이 가능한 해안 또는 해상에 수도권 신공항을 짓기로 하고 후보지를 물색했다. 이때 처음 인천의 외딴 섬 영종도의 이름이 등장했다.1989년 정부는 신공항건설 추진위원회를 꾸리고, 신공항의 조건을 크게 6가지로 정했다. 조건은 ▲단계별 확장이 가능한 부지 ▲공항도시 개념 도입 ▲육해공 복합운송 기지화 ▲소음피해 해소 ▲24시간 운영 ▲아시아 최대 허브 기능 등이었다.4차 타당성 조사는 1989~1990년 국내외 공항 전문 용역사의 합작으로 진행됐다. 입지선정의 정책적 기준이 6가지였다면 기술·경제적 기준은 10가지였다. 공역과 장애물, 기상, 지형, 접근성, 환경, 토지이용, 확장, 지원시설 확보, 건설비 등이었다. 이런 기준에 따라 경기·충청권 22개 후보지에 대한 예비 조사를 했고, 이를 7개로 압축한 뒤 영종도와 시화1·2지구를 후보지로 결정했다. 두 지역은 해안을 끼고 있는 갯벌이라는 점에서 유사했고, 여러 조건이 비슷했으나 결국 영종도가 최종 낙점됐다.영종도는 시화지구에 비해 소음 피해가 적었고, 수심이 2m 더 낮아 공사비가 적게 들었다. 특히, 공역 부문에서 시화는 수원·오산 군 공항의 영향을 받았다. 서울 기준 접근성도 영종도는 50㎞, 시화는 70㎞ 거리였고, 영종도는 미개발지인 서울 북부와 김포를 관통하는 전용도로 개설이 쉬웠으나 시화는 영등포와 안산 신도시 등 기존 도심을 가르는 도로를 건설해야 했다. 영종도는 기존 김포공항과의 연계도 용이했고, 시화는 주변에 농공단지가 개발될 계획이라서 공장 매연이 안개처럼 시정을 악화할 우려가 있었다. 정부는 1990년 6월 14일 신공항건설 추진위원회 3차 회의에서 만장일치로 영종도를 후보지로 결정했다.반대 목소리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당시 환경단체와 입지 탈락지를 중심으로 반대 여론이 있었고, 대책위까지 구성돼 여론전을 펼쳤다. 이들은 "김포공항과 중복되고, 공항 규모가 지나치게 크며 매립공사와 연약지반 보강 등 건설비용이 너무 많이 든다"는 점에서 입지로서 최악이라고 평가했다. 철새 도래지와 갯벌 훼손 등 환경파괴 논란이 일었고, 경인 축 교통난을 이유로 '서울에서 영종도까지 3시간 이상 걸릴 것'이라는 부정적 전망이 나오기도 했다. 그러나 이런 우려는 인천공항 개항 이후 눈 녹듯 사라졌다.허희영 한국항공대 경영학과 교수는 "인천공항 입지 선정 당시만 해도 여러 우려가 제기됐지만, 20년째 들어선 지금에 와서는 모두 불식이 됐다"며 "영종도는 섬과 섬을 매립해 만든 넓은 땅을 활용한 활주로 확장 가능성이 풍부하고, 도심과 떨어져 24시간 운영할 수 있다"고 했다. 그는 또 "영종도는 '에어포트'뿐 아니라 레저, 쇼핑, 관광까지 가능한 '에어시티' 개념으로 성장했다"며 "만일 시화지구로 선정이 됐다면 공단 때문에 여러 제약이 있었을 것"이라고 평가했다.영종도는 역사적으로도 한반도의 대외 요충지였다. 조선의 인문지리학자 이중환(1690~1756)이 쓴 '택리지' 경기도 강화부 편에는 "우리 왕조에 들어서는 삼남의 조세를 실은 배들이 모두 손돌목을 지나서 서울로 올라오므로, 바닷길의 요충이라며 유수관을 두어 지키게 했다. 또 (강화도) 동남쪽 건너편에 있는 영종도에 방어영(防禦營)을 설치하고 첨사를 두어 지키게 했다"고 나와 있다.지종학 대한풍수지리학회 이사장은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한반도 입장에서 보면 남북통일을 가정했을 때 서해안 섬(영종도)이야말로 글로벌 전초기지 역할을 할 수 있는 곳"이라며 "지금은 접경지역이라 한강과 임진강이 만나는 강화도 한강하구(조강)를 다니지 못하지만, 통일이 되면 반드시 서해안 시대가 도래할 것으로 보고 있다"고 말했다. 글/김민재기자 kmj@kyeongin.com■인천국제공항 입지선정 일지▲1969~1970 제1차 수도권 신공항 타당성 조사 → 김포공항 1·2단계 확장▲1979~1980 제2차 타당성 조사 → 김포공항 3단계 확장▲1982~1983 제3차 타당성 조사 → 중부권공항(청주) 신설▲1987. 7 교통부 장관, 김포공항 소음피해 해결 근본 대책 수립 지시▲1987. 12 교통부, 해안지역 신공항 건설 건의▲1988. 2 노태우 정권 출범 후 수도권 신공항 건설 재논의▲1989~1990 제4차 타당성 조사 → 영종도, 시화1·2지구 최종 후보지 선정▲1990. 6 신공항 건설 입지로 영종도 확정신구 관문공항·후보지 위치도최초의 공항인 서울 여의도 비행장의 1930년대 전경. /서울역사편찬원 제공1990년 신공항 입지 선정을 위해 영종도에 설치한 기상관측소. /한국교통연구원 제공1992년 당시 노태우 대통령이 참석한 가운데 열린 영종도 신공항 기공식. /국가기록원 제공

2020-03-04 김민재

['대한민국 나들목' 인천공항 이야기·(3)]영종도 염전

소금생산 역사 체계적 조명 필요인천국제공항이 들어서기 전 염전은 영종도 경제의 한 축이었다. 영종도의 염전 역사는 고려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지금도 소금을 생산하는 염전이 있다. 소금 생산방식도 많이 바뀌었다. 고려시대부터 현대적 방식까지 염전의 역사를 꿰고 있는 곳이 바로 영종도다. 하지만 염전의 흔적은 자꾸 사라지고 있고, 옛일을 기억하는 이들도 하나둘 세상을 뜨고 있다. 한반도 소금 생산의 역사를 한데 보여줄 수 있는 영종도, 좀 더 체계적인 조사와 연구가 필요해 보인다.영종도에 있던 '건대염전'은 건국대학교가 조성했다. '건국대학교 70년사'에도 이러한 내용이 소개된다. 영종도 주민 이정국씨의 할아버지는 염전 축조 기술자였는데 건대염전 공사를 맡아 진행했다. 공사 이후에도 할아버지는 염전을 관리했고, 대를 이어 아들(부친)도 염전에서 일했다. 1980년대 염전 일부를 매입했다가 되팔았다. 이정국씨는 건대염전 축조와 관련해 교도소 수감자들이 공사에 동원됐다고 했다. 그는 "염전 공사 때 재소자들이 동원됐다는 이야기를 아버지로부터 들었다"며 "건국대가 어떻게 수감자를 공사에 동원했는지 알 순 없지만, 혼란했던 시기였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 같다"고 했다. 영종도 주민 김홍일씨도 "당시 죄수들이 염전 공사를 한다는 이야기가 동네에 퍼져 있었다"고 했다.주민들의 이야기가 사실이라면 수감자들이 민간 학교재단 염전 축조 공사에 동원된 것이다. 하지만 구체적인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 영종역사관 김연희 학예사는 "염전 축조와 관련해 수감자들이 참여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관련 기록을 찾아봤지만, 찾을 수 없었다"고 했다.영종도 염전에 대한 기록은 많지 않다. 영종도 염전 대부분이 1950~1960년대 조성됐고 20여 년 전에 폐쇄되면서 염전을 기억하는 주민 수도 줄어들고 있다. 지금이라도 주민들의 기억을 더듬고, 기록을 발굴하는 작업이 필요하다는 의견이 나온다. 영종도 주민 허재봉씨는 "염전을 기억하는 주민들이 매년 세상을 떠나고 있다. 더 늦기 전에 영종지역을 조명하는 작업이 체계적으로 진행돼야 한다"고 했다. /정운기자 jw33@kyeongin.com

2020-02-26 정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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