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나들목' 인천공항 이야기·(2)]네 개의 섬 영종

본래 영종·삼목·신불·용유도로 나뉘어 이어진 섬과 섬… 구읍뱃터 모여 육지로신불도, 영종도 남서쪽 500m 거리 위치실향민·원주민마을 분리 130여가구 살아인천국제공항이 있는 영종도는 원래 영종도, 삼목도, 신불도, 용유도 등 네 개의 섬이었다. 공항 건설을 위해 바다를 매립, 이들 네 개의 섬을 하나로 만들었다. 옛날 네 섬 주민들은 물고기를 잡거나 농사를 지었다. 작은 섬 마을이 하루 1천여 대의 비행기가 뜨고 내리는 '하늘도시'로 변했다. 뽕나무 밭이 변해 푸른 바다가 된다는 의미인 '상전벽해(桑田碧海)'는 영종도와 딱 들어맞는다. 오랫동안 이곳에서 살았던 주민들은 그 옛날 섬마을의 모습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그들의 이야기를 좇아가 보자.영종도가 신공항 건설 장소로 결정된 것은 1990년이다. 육지를 가기 위해서는 배를 타야 했지만 섬과 섬은 모두 이어져 있었다. 영종도와 삼목도는 도로로 연결돼 있었고, 영종도와 신불도는 둑길로 이어져 있었다. 도로라고 해야 좁디좁았지만 사람들이 다니기에는 불편함이 없었다. 거리가 많이 떨어진 용유도와 삼목도도 도로로 연결돼 있었는데 징검다리가 도로 역할을 하던 시절도 있었다. 이들 섬 주민들이 육지로 가기 위해 배를 타는 곳은 영종도 구읍뱃터 한 곳이었다.1968년생 이정국 씨는 영종 운남리 출신이다. 태어난 곳은 하늘도시로 편입돼 현재는 흔적조차 남아 있지 않다. 지난 17일 만난 그는 영종중학교 인근 공원이 자신의 집이 있던 곳이라고 설명했다. 건설 관련 일을 하는 그는 인천공항과 하늘도시 건설 과정에도 참여했다. 영종도가 바뀌는 모습을 현장에서 지켜본 셈이다. 삼목도와 연결된 도로의 영종도 지역 초입 마을을 '진등'이라고 불렀다. 바다가 메워지는 바람에 마을은 자취도 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주민들이 살던 초가집은 다 없어졌지만, 그 연륙도로와 연결된 작은 길은 아직 남아있다. 이정국 씨는 옛 섬의 자취가 남아 있는 곳이라며 스카이72 골프장 인근 신라면세점 물류창고 건물로 안내했다. 이 앞을 지나는 인천국제공항고속도로 너머 보이는 작은 길이 삼목도와 연결 도로로 이어지던 곳이라고 했다. 이정국 씨는 "신라면세점 물류창고 쪽으로 쭉 다리가 있었고, 삼목도에 다다르면 양쪽으로 염전이 펼쳐져 있었다"고 했다. 다리에서 진등 쪽으로 조금만 걸으면 마을이 있었으나, 지금은 없어졌다고 설명했다. 이 지역은 모두 하늘도시 3·5공구로 편입됐다.신불도는 영종도에서 남서쪽으로 500m 정도 떨어져 있었다. 신불도와 연결돼 있는 영종 지역은 '벌미'라고 했다. 벌미와 신불도 사이는 염전이었고, 둑길로 이어져 있었다. 신불도와 연결된 길이 난 곳은 현재 BMW 드라이빙센터 뒤편이다. 도로 표지판에서는 옛 지명의 흔적을 엿볼 수 있다.1962년생인 이광만 씨가 태어난 곳은 신불도다. 지난달 30일 만난 이광만 씨는 자신이 태어난 집이 있던 위치를 현재 BMW드라이빙센터 건너라고 설명했다. 신불도는 130여 가구가 살던 작은 섬마을이었다. 90년대 초반 공항 건설로 인해 이주가 시작되기 전 신불도 주민들은 염전 종사자가 10여 가구, 나머지는 대부분 농업과 어업에 종사했다. 주로 벼농사를 지었으며, 고구마와 감자도 심었다. 어민들은 꽃게, 새우, 숭어 등을 잡았다. 절반 정도는 집에서 먹었고, 나머지는 판매했다. 활어를 보관할 설비가 없었기 때문에 주로 말려서 먹거나 팔았다고 한다. 꽃게는 일본으로 수출하기도 했다. 삼목도, 영종·용유 사이 주민왕래 고리1988년 다리 개통전까지 징검다리 건너용유女, 영종男과 결혼땐 "시집 잘갔다"간조때 드러났던 '장군바위' 아직 그대로삼목도 주민들도 신불도와 마찬가지로 주로 농업과 어업에 종사했다. 이들 섬엔 한국전쟁 당시 황해도 등지에서 내려온 실향민이 많이 정착했다.이광만 씨는 "신불도는 작은 섬이지만 실향민이 모여 사는 곳과 원주민 마을이 분리돼 있었다"며 "실향민들이 사는 동네를 '바깥 동네', 원주민 마을을 '안 동네'라고 불렀다"고 했다. 이광만 씨 부친도 황해도에서 넘어온 실향민이고 '바깥 동네'에 살았다.지역 주민들이 주축이 돼 지난 2008년 발간한 '영종용유지'는 "전쟁 직후 영종도에는 생계를 이어갈 수 있는 공사장이 여러 곳에 있어 전쟁 난민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고 기록했다.신불도는 인천국제공항고속도로 '신불IC'라는 이름으로 그 자취를 안내한다. 신불도에 있던 산을 서풀산이라고 했다. 신불도의 옛 이름인 '서풀'을 따서 그렇게 불렀다. 인천공항 건설하면서 골프장이 들어섰는데 서풀산을 깎아낸 흙과 돌을 골프장을 짓는 데 썼다. 지금도 그 산은 있는데 그 높이가 절반 정도로 낮아졌다. 이광만 씨는 "서풀산에는 다른 산보다 바위와 돌이 많았다"고 기억했다. 용유도는 남쪽에 있는 무의도와 가깝지만 삼목도를 고리로 영종도와 이어져 있었다.1935년생인 김홍일 씨는 1960~1970년대 모습이 훤히 떠오른다. 과거 영종도의 유일한 사진관이었던 '영종사진관'을 운영했던 그는 영종 지역 곳곳의 모습을 사진으로 남겼다. 김홍일 씨는 "예전에는 용유도와 삼목도는 징검다리로 건너다니느라 여간 불편한 게 아니었는데, 1980년대에 다리가 만들어지면서 편하게 다닐 수 있었다"고 했다. 징검다리는 물이 빠진 간조 때에만 사용할 수 있었다고 한다. 육지와는 왕래가 적다 보니 영종도 주민끼리 결혼하는 일이 많았다. 용유도 주민과 영종도 주민이 만나 결혼하는 일도 잦았다. 영종도가 용유도보다 컸다. 그래선지 용유도 여성이 영종도 남성과 결혼하면 "시집 잘 갔다"라는 이야기를 들었다.영종도(삼목도)와 용유도를 잇는 긴 다리는 1988년 개통됐다. 지금 인천공항 제1여객터미널과 제2여객터미널 사이에 있는 관제탑 부근이다. 다리는 자취를 감췄으나 다리와 연결되는 도로는 일부 흔적이 남아 있다. 관제탑 방향으로 다리가 있었다. 지난 3일 1948년생 허재봉 씨와 함께 현장을 찾았다. 허재봉 씨는 "과거에는 이 일대가 전부 바다였다"며 "이 일대에서 굴 양식이 이뤄지기도 했다"고 말했다. 허재봉 씨는 "80년대만 해도 용유도 주민들이 육지에 나가 소를 팔기 위해 십여 마리씩 끌고 영종도에 온 뒤 우리 집에서 자고 가기도 했다"며 "용유도 주민들은 뭍으로 나가기 위해서 영종도를 거칠 수밖에 없었고, 농수산물을 팔기 위해 갖고 나가는 이들이 우리 집에서 많이 묵었다"고 말했다. 지금은 용유도와 영종도 사이가 바다였다는 얘기를 상상하기조차 쉽지가 않다. 하지만 그 바다에 있던 장군바위는 남아 있다. '호텔 오라'에서 공항서로를 넘으면 도로보다 지대가 낮은 부지가 나온다. 그 한가운데 7~8m 높이의 장군바위가 서 있다. 바다에 있던 이 바위는 간조 때만 온전한 모습을 드러냈다고 한다. 허재봉 씨는 "예전부터 내려오는 이야기가 서려 있어서 저 바위는 없애지 못한 것으로 알고 있다"고 했다. 그 모습이 마치 군사를 지휘하고 있는 듯이 보여 자연도와 삼목도에 침입한 왜구들이 겁에 질려 침입하지 못했다는 얘기가 대표적이다. '영종용유지'는 "공민왕 원년과 29년, 30년에 왜구들이 자연도와 덕적도 등에 출몰해 노략질을 일삼았으나 그때도 용유도만은 왜구의 피해를 입지 않았다고 한다"고 장군바위 설화를 전한다.글/정운기자 jw33@kyeongin.com·사진/김용국·조재현기자 yong@kyeongin.com영종도 구읍뱃터 전경. 현재의 영종도는 삼목도, 신불도, 용유도, 영종도 네 개의 섬으로 나뉘어 있었다. 각 섬 주민들은 육지로 드나들기 위해서는 영종의 구읍뱃터를 이용했다. 현재도 사진 뒤편에 보이는 월미도를 오가는 여객선이 운항한다. 자료사진/김홍일씨 제공구읍뱃터에 정박해 있는 어선 '건진호'. 1980년대 영종도 어민들은 이 배를 타고 고기를 잡았다. 주민들은 이 배를 이용해 섬과 섬 사이를 오가고, 물건을 나르기도 했다. 이 배의 진수식 때에는 마을 주민들이 모여 고사를 지냈다고 한다. 자료사진/김홍일씨 제공영종도가 네 개의 섬으로 나뉘어 있을 때의 모습과 인천공항 건설 완료뒤 매립으로 바뀌게 된 섬의 해안선(주홍색 선).구읍뱃터의 옛 모습. 영종대교와 인천대교가 건설되기 전 구읍뱃터에서 타는 여객선은 영종도 주민들이 육지로 나갈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었다. 과거 구읍뱃터에서 여객선을 타기 위해 기다리는 주민들의 모습. 자료사진/김홍일씨 제공영종도와 삼목도를 잇던 도로가 있던 자리. 이 길을 따라 쭉 가면 삼목도가 나왔다고 한다. 저 멀리 보이는 롯데면세점 물류창고 자리가 삼목도가 있던 곳이다. 영종도 주민 이정국 씨가 길을 설명하고 있다.장군바위는 그 형상이 사람의 얼굴을 닮았다고 해서 이름이 붙여졌다. 과거 용유도 앞 바다에 있었으나, 용유도와 영종도 사이 바다가 매립되면서 장군바위가 서 있는 곳도 육지가 됐다.

2020-02-19 정운

['대한민국 나들목' 인천공항 이야기·(1)프롤로그]'내년 개항20년' 한국의 관문, 과거·현재·미래 들여다본다

인천 영종도가 공항 부지로 결정된 지 30년이 지났다. 인천국제공항이 개항한 지는 내년이면 꼭 20년이 된다. 그 사이 인천공항은 세계 최고의 공항으로 비상했다. 지난해 인천공항은 연간 40만 회의 운항기록을 세웠다. 오고 간 여객은 7천만 명을 넘어섰다. 개항 이후 최대 실적이었다. 국제여객 7천만 명 기록은 세계 5위 규모에 해당한다. 국제화물 운송 규모는 276만t이다. 이는 세계 3위 수준이다. 인천공항에서는 하루 평균 1천100편가량의 국제선이 뜨고 내린다. 말 그대로 대한민국의 나들목이다. 인천공항에서 일하는 상주 직원만 7만8천여 명이다. 경제효과는 가히 천문학적이다. 지난 2018년 제2터미널을 개장한 인천공항의 생산유발 효과는 10년 뒤면 130조원을 돌파할 것으로 전문가들은 내다보고 있다. 경인일보는 올해 창간 75주년을 맞아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인천공항에 얽힌 수많은 이야기를 풀어내고자 한다. 올 1년 동안, 인천공항이 들어서기 전 섬마을 풍경에서부터 공항 조성 과정, 그리고 공항 운영과 관련한 다양한 이야기를 찾아 연중기획으로 싣는다. 국내외 공항의 과거와 현재, 미래를 인문학적으로 담아낸다는 각오다. 매주 1회씩 찾아갈 이번 시리즈에 독자들의 응원을 당부한다. /정진오기자 schild@kyeongin.com대한민국 대표 공항인 인천국제공항 제 2여객터미널을 배경으로 대형 항공기들이 착륙을 하고 있다. 세계 최고의 공항으로 우뚝 선 인천국제공항은 내년이면 개항 20년을 맞는다. 경인일보는 올해 창간 75주년을 맞아 대한민국의 나들목인 인천공항에 얽힌 수많은 이야기를 풀어낼 예정이다 (사진은 영종도 북측방조제 인근에서 3분 간격으로 연달아 착륙하는 항공기를 다중노출로 촬영). /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

2020-02-12 정진오

['대한민국 나들목' 인천공항 이야기·(1)프롤로그]제비 대신 비행기 드나드는 '영종'… 세계를 잇는 공항은 운명이었다

고려시대 기록부터 '자연도'로 불려와제비 많고 해질녘 자줏빛 하늘서 유래이규보의 '계양망해지' 한대목 등장도대한민국 대표 공항, 인천국제공항은 태초부터 비행장의 기운을 타고난 자리에 터를 잡았다. 인천공항이 있는 영종도는 예로부터 자연도(紫燕島)라 불렸다. 자줏빛 제비의 섬이란 의미다. 겨울이 지나고 봄의 소식을 물고 오는 제비는 늘 반가움의 대상이다. 자연도란 이름은 고려시기에 비로소 등장한다. '고려사'나 '고려사절요'에는 주로 유배의 섬으로, 또한 왜적들이 약탈 대상으로 삼은 곳으로 기록되어 있다. 고려를 찾았던 중국 사신의 눈에 자연도는 그냥 지나칠 곳이 아니었다. 중국 송나라 때 문신 서긍(徐兢)은 1123년 바닷길 서해안 루트를 따라 개성을 방문한 뒤 중국으로 돌아가 '고려도경'이란 방대한 분량의 견문 보고서를 왕에게 올렸다. 여기에 자연도 이야기가 자세하다. 눈여겨볼 만한 대목도 많다. 고려시대부터 자연도는 외교적으로 무척 중요한 공간이었다. 고려 제일의 문장가 이규보(1168~1241)가 계양산에서 조망한 자연도 이야기는 그의 문집에 남아 아직도 전한다. 1219년 여름부터 1220년 여름까지 1년여 동안 계양부사로 있었던 이규보의 그때 시선은 꼭 800년이 흐른 지금 어떻게 바뀌었을까. 지난 5일 오후 3시 계양산에 올랐다. 인천국제공항을 품고 있는 영종도를 바라보기 위해서였다. 이번 겨울은 강추위 없이 지나간다는 얘기를 했는데 입춘이 지나자마자 살을 에는 듯한 추위가 한반도를 덮쳤다. 인천지역도 모처럼 영하 10℃ 아래로 떨어졌다. 시야를 가리는 중국발 미세먼지를 날려버릴 절호의 기회였다. 춥지만 파란 하늘을 볼 수 있는 날을 기다리던 차였다. 그렇게 오른 계양산. 영종도는 생각보다 가까웠다. 마침 비행기 한 대가 영종도 북쪽 하늘로 날아올랐다. 영흥도 쪽 하늘에서는 비행기 두 대가 잇따라 고도를 낮추며 영종도를 향해 다가서고 있었다. 인천공항이 어디인지를 비행기들은 그렇게 알려주고 있었다. 도심 속에 있을 때는 보이지 않던 것들이 추위를 무릅쓰고 오른 산에서는 보상이라도 해 주는 듯 훤히 펼쳐 보여주었다. 저 멀리 덕적군도에서부터 영흥도, 무의도, 영종도, 삼목도, 시도, 모도, 장봉도, 강화도 등 여러 섬들이 인천 앞바다를 화려하게 수놓고 있었다. 송도와 영종을 잇는 인천대교의 우뚝한 주탑 사이에 역사의 섬 팔미도가 자그맣게 살포시 내려앉아 있었다."처음 만일사(萬日寺)의 누대(樓臺) 위에 올라가 바라보니, 큰 배가 파도 가운데 떠 있는 것이 마치 오리가 헤엄치는 것과 같고, 작은 배는 사람이 물에 들어가서 머리를 조금 드러낸 것과 같으며, 돛대가 가는 것이 사람이 우뚝 솟은 모자를 쓰고 가는 것과 같고, 뭇 산과 여러 섬은 묘연하게 마주 대하여, 우뚝한 것, 벗어진 것, 추켜든 것, 엎드린 것, 등척이 나온 것, 상투처럼 솟은 것, 구멍처럼 가운데가 뚫린 것, 일산처럼 머리가 둥근 것 등등이 있다. 사승(寺僧)이 와서 바라보는 일을 돕다가 갑자기 손가락으로 섬을 가리켜 말하기를, "저것은 자연도(紫燕島)·고연도(高燕島)·기린도(麒麟島)입니다"하고, 산을 가리켜 말하기를, "저것은 경도(京都)의 곡령(鵠嶺), 저것은 승천부(昇天府)의 진산(鎭山)·용산(龍山), 인주(仁州)의 망산(望山), 통진(通津)의 망산입니다"하며, 역력히 잘 가르쳐 주었다."이규보의 작품을 모은 '동국이상국집'에 전하는 '계양망해지(桂陽望海志)'의 한 대목이다. 제목처럼, 계양산에 올라 바다를 보면서 느낀 감흥을 적었다. 지금은 만일사의 흔적조차 찾을 길이 없다. 드넓은 갯벌을 매립해 청라신도시를 건설하고 수도권쓰레기매립지를 조성한 탓에 바다가 좁아졌다. 큰 배도, 파도도 보이지 않는다. 돛대를 단 작은 배는 더더욱 볼 수가 없다. 스님이 가리켰다는 자연도에는 제비 대신 비행기가 드나든다. 고연도는 어떤 섬을 말하는지 알아낼 수가 없다. 다만, 기린도는 북한 땅인 황해도 옹진군 기린도를 일컫는 게 아닌가 싶다. 연평도보다도 멀리 있는 창린도 옆 기린도가 계양산에서 눈에 잡혔다는 게 믿기지 않는다. 그 시절에는 매의 눈처럼 멀리 볼 수 있다는 몽골인과 같은 놀라운 시력을 가져서 거기까지도 볼 수 있지 않았을까 하고 생각해 본다. 800년 세월을 지나는 동안 인간은 하늘도 탁하게 했지만 스스로의 눈도 참으로 많이 퇴화시켰다. 눈앞의 이익만 좇다가 다들 근시안이 되어 버렸다. 송나라 사신대접·군례의식 장소 활용당시 경원정·제물사 필수코스로 꼽혀이곡의 詩, 소금생산지로서 일면 묘사인천국제공항은 세계 각국 190여 개 도시와 연결되어 있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많은 외국인이 들락거리는 외교의 최일선 공간이기도 하다. 12세기에도 그랬다. 송나라 사신 서긍 일행은 개성 도착 직전인 1123년 6월 9일 영종도(자연도)에 들렀다. '고려도경' 속 '자연도' 항목을 보자."산에 의지하여 관사를 지었는데, 방(榜)에 '경원정(慶源亭)'이라고 하였다. 경원정 곁에는 막집(幕屋) 수십 간을 지었고 주민들의 초가집도 많다. 그 산의 동쪽 한 섬에 날아다니는 제비가 많기 때문에 그렇게 명명한 것이다."제비가 많기 때문에 섬의 이름에 제비를 넣었다는 얘기인데, 그러면 자줏빛은 어찌 나온 것일까. 그것은 아마도 해질녘 영종도의 하늘빛을 말함이리라. 영종도의 석양은 유난히 붉다 못해 자줏빛이다. 그때 나는 제비는 영락없는 자줏빛깔이다. 옛 사람들은 지명을 정하는 데 있어서 참으로 운치가 있었다. 자줏빛과 관련해 의미 있는 기록이 '고려도경'에 또 전한다. 고려 정부는 외국 사절들에게 자연도에서 군부대 사열 같은 군례(軍禮) 의식을 보여주었다. 서긍은 이 부대의 지휘자를 '육군 산원 기두(六軍 散員 旗頭)'라 칭했으며, 자연도에서 처음 보았다고 썼다. 군중(軍中)의 총령자(總領者)인 이 사람은 다리 모양의 뿔이 달린 모자를 쓰고 자주색 무늬의 비단옷을 입었다고 표현했다. 자줏빛 제비의 섬에서 자줏빛 군복을 입은 군대 인솔자라니. 자줏빛과 영종도의 관계가 새삼스럽다.태초부터 비행장 기운 타고난 터일까오늘날 인천공항 들어선 '외교 최일선'옛모습 희미하지만 190여개 도시 연결고려시대에는 송나라를 비롯한 외국 사신들에게 음식 접대가 극진했던 모양이다. 음식은 10여 종이나 마련했고, 국수가 먼저 나왔고 해산물은 무척 진기했다고 서긍은 기록했다. 그릇은 금과 은을 많이 썼으며 청색 도기(고려자기로 보임)도 섞여 있었다고 했다. 나무로 만들어 옻칠을 한 쟁반이나 소반을 썼다고 한다. 사신 대우가 무척 융숭했다. 그 가운데서도 원칙이 있었다. 딱 3일 동안만 음식을 제공했으며, 풍랑이 일어 배가 떠나지 못하더라도 3일이 지난 뒤에는 음식을 더 이상 갖다 주는 일이 없었다. 고려의 외교 수칙이 세세한 부분까지 매우 엄격했음을 알 수 있다.당시 영종도에는 경원정과 함께 제물사(濟物寺)라는 절도 있었다. 제물사는 송나라 사신들이 꼭 방문해야 하는 필수 코스였다. 서긍 이전에 송나라 사신 중에 송밀(宋密)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고려를 방문했다가 자연도에서 사망했다고 한다. 제물사에서는 이 송밀의 제사를 모셨던 모양이다. 그 뒤로 고려에 온 송나라 사신들은 꼭 자연도 제물사에 들러 송밀의 무덤에 절을 올리고, 제사를 받드는 승려들에게 식사를 베풀고 감사의 뜻을 전했다고 한다. 자연도가 대중국 교류의 핵심 거점이었던 셈이다. 지금의 인천공항처럼.16세기 조선 중기의 인문지리서 '신증동국여지승람'은 자연도를 설명하면서, 고려 후기 문신 이곡(李穀, 1298~1351)의 시를 소개하고 있다."가다가 자연도를 지나며, 삿대를 치고 한 번 한가하게 읊조린다. 갯벌은 구불구불 전자(篆字) 같고 돛대는 종종 꽂아 비녀와 같도다. 소금 굽는 연기는 가까운 물가에 비꼈고, 바다 달은 먼 멧부리에 오른다. 내가 배 타고 노는 흥이 있어 다른 해에 다시 찾기를 약속한다."이곡의 시를 통해 나타난 자연도는 경원정과 제물사라는 외교적 공간 이외에도 국가 경제를 지탱하는 한 축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바로 소금 생산지였다는 점이다. 소금은 전시와 같은 비상상황에는 쌀값과 맞먹는 가치를 띤다. 이순신 장군도 임진왜란 시기 염전을 무척 귀하게 다루고 군부대 소금 배급에 공정을 기했다. 이곡의 시에 비춰보면 영종도에는 고려 시기에 대규모 염전이 있었다. 물론 당시에는 요즘 같은 천일염 시스템이 아니라 바닷물을 솥에 넣고 끓이는 자염(煮鹽) 방식이었다. 그걸 소금 굽는다고 했다. 땔나무가 엄청나게 들어갔다. 그리하여 자염 생산은 바닷가에 있으면서 산림이 울창한 곳에서 이루어졌다. 수도와 가깝고 나무가 많은 영종도가 소금 생산지로 제격이었던 모양이다. 지금 인천공항은 대한민국 최대의 경제적 가치를 뽐내는 공공재로 성장했다. 글/정진오기자 schild@kyeongin.com·사진/김용국기자 yong@kyeongin.com일러스트/박성현기자 pssh0911@kyeongin.com·아이클릭아트계양산에서 바라본 영종도가 손에 잡힐 듯 눈 앞에 펼쳐져 있다. 지난 5일 오른 계양산 정상에서 바라본 영종도는 인천국제공항을 품고 그 품에서 막 떠나 힘차게 이륙하는 여객기가 눈앞에 펼쳐졌다.

2020-02-12 정진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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