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인신춘문예

 

[경인일보 신춘문예 시상식]소설 황윤정 "날 채찍질하기 위해 써"… 詩 이명선 "시는 내 인생 전환점"

2018 경인일보 신춘문예 시상식이 10일 오후 경인일보 수원본사 대회의실에서 개최됐다.이날 시상식은 단편소설 부문 심사를 맡은 홍정선 평론가·이인성 소설가, 시 부문 심사를 맡은 김윤배 시인, 김화양 경인일보 대표이사 사장 및 임직원 5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진행됐다.단편소설 '린을 찾아가는 길'로 당선된 황윤정씨는 "당선작은 나를 채찍질하기 위해 쓰기 시작한 소설로, 새로운 스타일에 도전해 80대 화자와 미래 시점, 3인칭 시점 등을 시도했다"며 "이 소설을 쓰면서 평생 소설을 쓰고 싶다는 마음이 들면서 행복했다"고 소감을 밝혔다.또 시 '한순간 해변'으로 당선된 이명선씨는 "시는 내 인생의 전환점이었다. 시를 풀어가면서 나 자신에게 숨겨져있던 목소리를 드러내는 법을 배웠다"며 "앞으로도 좋은 시를 통해 내면의 목소리를 들려주는 시인이 되겠다"고 전했다.김화양 사장은 "문학은 시공을 초월하는 의미를 갖는다. 우리 사회 안에서 수많은 갈등이 증폭되는데 사회를 정화시키고 새로운 비전을 만들기 위해서 문학의 역할이 필요하다"며 "30여년간 한해도 빠지지 않고 신춘문예를 열어온 경인일보의 열정을 많이 사랑해주시고 배출된 문인을 애착해달라. 이번 당선자들도 작품활동에 매진해달라"고 당선자들을 격려했다. /김성주기자 ksj@kyeongin.com10일 오후 경인일보 대회의실에서 열린 '2018경인일보 신춘문예' 시상식에서 단편소설 '린을 찾아가는 길'로 당선된 황윤정씨(왼쪽)와 시 '한순간 해변'으로 당선된 이명선씨가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김종택기자 jongtaek@kyeongin.com

2018-01-11 김성주

[2018 경인일보 신춘문예 총평]1306편 투고 예비문인 '열정의 장'

2018 경인일보 신춘문예 당선작은 이명선의 시 '한순간 해변'과 황윤정의 단편소설 '린을 찾아가는 길'이다. 시 부문 심사위원들은 예·본심 원고를 거듭 살피고 고민한 끝에 '한순간 해변'을 선택했다. 김윤배 심사위원(시인)은 "자신의 시 세계를 잘 보여준 작품"이라며 "좋은 시인을 선발했다"고 평가했다. 소설 부문 심사위원들도 본심에 올라온 단편소설을 며칠간이나 면밀히 살펴 '린을 찾아가는 길'에 가장 높은 점수를 줬다. 이인성 심사위원(소설가)은 "관심을 끄는 작품이 여럿 있었지만 높은 완성도로 유독 눈에 띈 작품"이라며 "앞으로의 작품 활동에 기대가 크다"고 했다.이번 경인일보 신춘문예에는 시 1천158편에 소설 148편 등 총 1천306편이 접수됐다. 10대에서부터 70대 응모자에 이르기까지 남녀노소를 불문, 문학에 열정을 가진 예비 문인들의 높은 관심 속에서 진행됐다. 시 부문 본심에는 40, 50대의 응모자들의 작품 비중이 높았다. 오랜 기간 시를 대했던 흔적이 드러난 작품이 많아 대체로 완성도가 높았다. 다만 새로운 도전이 아쉬웠다는 평이다. 최근 이슈가 된 굵직한 사회 문제가 많았음에도 이를 다룬 시가 적었다는 점이 눈에 띄었다. 심사위원들은 사유의 대상이 사회에서 개인으로 좁아졌다는 것이 사회 문제에 큰 관심을 보이지 않는 현 세태를 보여주는 것은 아닌지 우려를 표했다.소설 부문에서도 현 세태가 읽혔다. 인터넷이나 스마트폰에서 짧고 빠르게 콘텐츠를 소비하는데 익숙한 세대의 모습이 서사적 구성력의 부족으로 드러나고 있었다. 심사위원들은 이런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현대의 고전에 대한 독서가 필요하다며 어떤 것에 감동을 받고 그 이유를 스스로 찾아내는 연습, 문학적 설득력을 찾아내는 연습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하지만 다양성의 측면에서는 특정한 경향이 없이 각자 여러 소재를 통해 이 시대의 풍경을 담은 작품이 많아 앞으로 한국문학에 대한 기대감을 높였다. /김성주기자 ksj@kyeongin.com

2018-01-01 김성주

2018 경인일보 신춘문예 2개 부문 당선작 발표

단편소설 : 황윤정 '린을 찾아가는 길'시 : 이명선 '한순간 해변'신진문학가들의 등용문으로 지난 1987년부터 그 역할을 해온 '경인일보 신춘문예'가 올해에도 대한민국 문단을 이끌어갈 신인을 발굴·선정했다. 경인일보는 각 부문별 심사위원들과 심사숙고 끝에 '2018 경인일보 신춘문예' 영광의 주인공으로 ▲단편소설 부문-'린을 찾아가는 길(황윤정)' ▲시 부문-'한순간 해변(이명선)'을 당선작으로 뽑았다.이번 당선작들은 경인일보 신춘문예에 문을 두드린 전국의 수많은 문청(文靑)들 작품에서도 단연 두각을 드러냈고, 그 결과 경인일보를 통해 등단의 길을 열게 됐다. 소설부문은 홍정선 평론가와 이인성 소설가가 본심 심사위원으로 참여해 148편의 단편소설 가운데 옥석을 가렸고, 시부문은 김명인·김윤배 시인이 심사위원으로 나서 1천158편의 시 가운데 작품을 엄선했다. 각 부문별 심사위원들은 올해 신춘문예 당선작이 높은 수준을 보여줬다고 입을 모았다.앞서 지난해 11월 첫 공고가 나간 이후 총 1천306편의 작품이 접수돼 어느 해보다 예비 문인들의 참여가 뜨거웠다. 시상식은 오는 10일(수) 오후 3시 경인일보 본사 3층 대회의실에서 부문별 심사위원, 당선자, 그 가족 등이 참석한 가운데 진행될 예정이다. /김성주기자 ksj@kyeongin.com

2018-01-01 김성주

[경인일보 신춘문예]'1989년 시 당선' 김인자 시인, 나는 자발적 아웃사이더… 문학의 깊은맛 알게해준 힘

시인 김인자(사진)에게 글 쓰는 일은 특별한 것이 아니다. 책상에 앉아 무언가를 끄적이는 것이 일상이었고, 가장 자연스러운 삶의 모습이다.김인자 시인은 1989년 제3회 경인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며 시인이 됐다. '등단'이라는 통과의례를 지나 시인이 됐다고 인정받았지만, 그는 늘 '자발적 아웃사이더였다'고 지난 시간을 회상했다. "89년도에 수원 경인일보 바로 근처에 살았고, 구독자이기도 해서 경인일보 신춘문예에 늘 관심이 있었어요. 하지만 난 사범대 출신이고 정식으로 문학을 배운 적이 없어 확신이 없었죠." 그저 지켜만 보다가, 시를 써야겠다고 마음을 굳히고 쓴 시가 바로 경인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겨울여행'이다. 첫 시도였는데 당선이 돼 기쁨보다는 얼떨떨했단다. "문학을 짝사랑하는 사람일 뿐이었는데, 당선작으로 뽑혔다는 게 믿기지 않았어요. 이후 시집, 산문집 등을 내고 여러 활동을 했지만, 늘 부족한 나에게 회의가 들었어요."슬럼프를 이겨내려고 그는 여행을 시작했다. 그렇게 시인이자 여행가로 김인자의 발걸음이 시작됐는데, 그는 지금까지 17권의 책을 썼다. 시인으로 두각을 드러냈지만, '사과나무가 있는 풍경' '대관령에 오시려거든' 등 전 세계 오지를 돌아다니며 쓴 에세이는 2년 연속 세종도서 문학나눔 우수도서로 선정되는 등 독자들의 꾸준한 사랑을 받고있다."시작이 그랬듯 지금도 나는 늘 아웃사이더에요. 혼자 헤쳐나가는 시간이 힘들었지만, 이제 와 돌아보니 문학의 깊은 맛을 보게 해 준 큰 힘이 된 것 같아요." 그는 신춘문예에 당선된 후배들에게 조언했다. "문학은 배워서 되는 것도 있지만 배우지 않아도 스스로 깨쳐나가는 길도 있어요. 무조건 주류를 쫓기보다 내 생각대로 멈추지 말고 자유로이 쓰세요." /공지영기자 jyg@kyeongin.com[경인일보 신춘문예]'1989년 시 당선' 김인자 시인

2018-01-01 공지영

[경인일보 신춘문예]'1988년 시조 당선' 홍승표 시인, 배우지 않아 자유로운 글… 자신만의 생각·개성 담길

"경인일보 신춘문예, 시조부문에 당선됐습니다" 누구나 마음 속에 간직한 꿈 하나쯤 있다. 홍승표(사진)경기관광공사 사장에게 '시인'은 그런 꿈이었다.그날, 경인일보로부터 온 전화 한 통은 꿈을 이룬 날이기도 했다. "고등학생 때 연세대학교 전국 남녀 문예콩쿨에서 시조로 장원을 했어요. 글 쓰는 일을 좋아했고, 공부도 해보고 싶었죠. 하지만 집안 형편이 어려워 도저히 대학갈 수 있는 상황이 못됐어요. 그러던 중 공무원 시험에 덜컥 합격했고 그 길로 공무원이 됐지만 글을 쓰는 일은 결코 멈추지 않았습니다."글 쓰는 재주 덕에 다행히(?) 공직 생활도 언론사에 보낼 보도자료를 쓰는 일부터 시작했다. "1986년에 처음 경인일보 신춘문예가 시작해 첫 해는 가벼운 마음으로 시조를 써냈는데 아깝게 최종 결심에서 떨어졌어요. 마침 다음해 대선이 한창인 때라 일이 비교적 한가해 틈틈이 시조 쓰기를 계속했죠." 신춘문예 당선작 '새벽, 숲길에서'를 완성해내기 위해 그는 동이 트기 전 광교산에 올라 시상을 떠올렸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공무원과 시인,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두 직업을 병행하면서도 그는 꾸준히 시를 썼다. 정식으로 글을 배운 적은 없지만, 글을 쓰는 일은 그의 일상이고 낙이었다. "저는 오히려 글을 배우지 않은 게 더 잘됐다고 생각합니다. 누군가에게 글을 배웠다면 그 풍을 따라가느라 여념이 없었을 거에요. 그런 것에서 자유롭다 보니 생각나는 대로 자유롭게 글을 쓰고 즐길 수 있었어요."그는 등단 때부터 지금까지 서정시를 고집했다. "경기도 광주 시골에서 태어난 촌놈이라 그럴지 몰라도, 자연에서 받는 대단한 영감을 바탕으로 서정시를 쭉 써왔어요. 나만의 생각, 나만의 개성이 담긴 글을 쓰도록 노력하세요. 인위적인 것은 오래가지 못합니다." 덧붙여 후배에게 당부했다. "신춘문예가 대표작이 돼선 안됩니다. 많이 쓰고 많이 노력해야 합니다." /공지영기자 jyg@kyeongin.com[경인일보 신춘문예]'1988년 시조 당선' 홍승표 시인

2018-01-01 공지영

[경인일보 신춘문예]'2001년 소설 당선' 나여경 소설가, 삶 자체가 창작의 원동력… 인생이 지속되는 한 '쓸것'

"아웅다웅 살고 있는 우리네 삶 자체가 창작의 힘, 신문은 소설가에게 좋은 소재거리를 제공하는 최상의 자료다."지난 2001년 단편소설 '금요일의 썸머타임'으로 소설가로서 첫 발을 내딛은 이후 왕성한 활동을 펼치고 있는 나여경(사진)작가. 소설집 '불온한 식탁'과 '포옹', 여행산문집 '기차가 걸린 풍경'으로 꾸준한 창작활동을 펼치는 것은 물론 제11회 부산작가상 수상에 이어 지난달에는 제10회 백신애 문학상 수상하며, 문단에서 강한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다.이외에도 작가와사회 편집장, 부산소설가협회 사무국장을 역임하고, 현재 요산기념사업회 사무국장과 한국소설가협회 중앙위원, 부산작가회의·부산소설가협회 이사를 맡아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다. 그는 "등단 소식을 듣고 이윤기·현길언 당시 심사위원께 감사 전화를 드렸을 때가 생생하다"며 "故 이윤기 선생님께서 해주신 말씀, '제발 펜을 놓지 말고 열심히 쓰세요' 이 한마디가 떠오른다"고 했다. 나 작가는 "글을 쓰다 보면 대부분은 마음에 차지 않는다. 언제나 마음 흡족한 글만 쓸 수 있으면 좋겠지만 글의 신이 아닌 이상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다"며 경인일보 신춘문예 후배들에게 "실망하지 않고 열심히 쓰는 것, 그것이 작가에게 주어진 의무"라며 축하의 말을 대신했다.신문에서 우연히 구스타프말러에 관한 기사를 보고 영감을 받아 당선작이자 처녀작 '금요일의 썸머타임'을 썼다는 그는 "삶 자체가 내 창작의 힘"이라며, "사람과 세상사에 대한 무관심 때문에 한동안 글을 쓰지 않았지만 인생사가 지속되는한 글을 멈추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더 나은 작품에 대한 목마름을 얘기하는 나여경 작가는 "아직도 쓰고 싶은 이야기 몇 가지가 내 안에 꿈틀대며 끓고 있다"며 앞으로 좋은 작품으로 독자들과 만날 것을 약속했다. /김성주기자 ksj@kyeongin.com[경인일보 신춘문예]'2001년 소설 당선' 나여경 소설가

2018-01-01 김성주

[경인일보 신춘문예]文靑(문학청년)들이 뜨겁게 펼친… '서른두장' 꿈의 페이지

눈을 떴다. 파란색을 약간 섞어 바른 핸디코트 벽 위에 걸린 시계로 눈이 간다. 시계의 시침과 분침은 부끄러움 없이 투명 유리 안에서 몸을 섞고 있다. 커튼 밑 부분을 잡고 젖혀본다. 벌어진 틈만큼 직사각형의 네모난 햇빛이 열 두 평 오피스텔 안으로 흘러 들어온다. 깊은 숨을 쉰다. 초등학생처럼 색색의 옷을 입은 행거에 걸린 옷걸이들이 보인다. 어젯밤 벗어놓은 흰색 원피스가 허리를 꺾은 모습 그대로 그 위에 가로질러 누워있다. 원피스를 내려 기다란 타원형의 전신거울로 다가가 몸에 대어본다. 거울 속의 여자가 웃고 있다. 브이자로 파인 목과 민 소매, 샤넬라인의 원피스는 빛을 받아 한층 하얗다. 어제는 금요일이었다. 나는 금요일마다 나이트 클럽에 간다. 하얀 원피스를 입고서. 창가에 놓인 허브는 오늘도 싱싱하다. 허브, 읊조려 본다. 윗입술과 아랫입술이 닿을 듯 말 듯 바람이 인다. 외로움의 냄새를 잡아먹는 향이라고 주문을 걸며 사다놓은 허브가 바람에 무게를 실으며 하느작거린다. 몸을 일으켜 싱싱한 허브잎사귀를 똑, 똑 소리나게 딴다. 파인애플민트향의 허브가 물 속에서 둥글게 원을 그리며 녹색 향을 뱉기 시작한다. 투명한 유리잔에 담긴 초록빛 허브 차를 한 모금 마신다. 따뜻한 기운이 온몸으로 퍼진다. 남은 허브잎사귀를 욕조에 떨어뜨리고 더운물을 받는다. 수증기가 올라오는 욕조에 소금가7루를 솔솔 뿌려 넣는다. 거실바닥에 신문을 길게 펼친다. 하루를 시작하면서 하는 일 중의 하나가 신문보기다. 손님과의 자연스러운 대화를 위해서 스포츠란까지 꼼꼼히 읽는다. 신문 귀퉁이 박스란에 구스타프 말러의 이야기가 실려있다. 어릴 때의 반복되는 정신적 외상은 뇌의 발달에 영향을 주어 성격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물론이고 어떤 '증상'을 만들기도 한다. 이런 외상을 극복하기 위한 무의식적인 수단중의 하나가 '반복 강박'이다. 두려움의 대상과 관련되는 행위를 반복적으로 체험함으로써 이를 극복하려는 집착 행동이 반복 강박이다. 구스타프 말러는 작곡가다. 십사 형제의 둘째로 태어나 아홉 명의 형제가 반복적으로 죽는 충격적인 어린 시절의 경험을 가지고 있다. 어린 시절에 간직된 마음의 상처는 끊임없이 무언가를 반복하며 극복하려는 집착행동으로 나타나는데 어떤 행위, 그것은 작곡이었다. 나는 구스타프 말러의 기사가 실린 신문을 들고 가위를 찾는다. 가위는 어디에 있는지 보이질 않는다. 캇터칼로 신문의 박스 기사를 오린 뒤 수첩 속에 끼워 넣는다. 신문을 펼쳐 놓은 채 욕실로 들어간다. 욕조에 몸을 누인다. 감은 눈꺼풀 위로 찬 물방울이 떨어져 순간 움찔한다. 바다 속 깊은 곳에 둥실 떠있는 느낌이다. 따뜻한 물 속에서 하릴없이 흘러 다닌다. 저 어디쯤, 사랑하는 이를 죽이지 못하고 물방울이 된 인어가 살고, 아버지를 위해 바다에 몸을 던진 효녀 심청이가 살고 있는 용궁이 있지 않을까. 발목에 물컹, 무언가가 닿는다. 온몸에 은빛 가루를 덮어쓴 갈치다. 내 키보다 더 큰 갈치가 몸을 일자로 세우고 물결을 가르며 내게 다가온다. 소리를 지르고 싶지만 입술을 달싹일 수 없다. 갈치에 몸이 감긴 나는 깊숙이 깊숙이 가라앉는다. 숨 쉴 수 없어 손사래를 치다 머리가 어딘가에 쿵하고 부딪힌다. 물의 온기에 깜빡 잠이 들었던가. 머리를 흔들자 물방울이 사방으로 튄다. 물살을 떨치며 욕조에서 일어선다. 은색가루 대신 배와 허벅지에 허브잎사귀가 붙어있다. 샤워기에서 쏟아지는 차가운 물로 몸을 헹구고 물기를 닦는다. 샤워코롱을 온몸에 스프레이 한다. 창문을 활짝 연다. 태양은 여전히 작열하고 있다.담요를 뒤집어쓴다. 하나, 두울, 세엣… 육십을 세고 담요를 벗는다. 하나, 두울, 세엣… 육십을 세고 다시 담요를 뒤집어쓴다. 처음에는 여기저기 퍼렇게 멍이 들던 풍욕이 이제는 익숙해졌는지 몸이 바람을 잘 받아들인다. 혈관을 타고 흐르는 오래 묵은 비린내를 큰 숨을 쉬며 내보낸다. 암환자나 깊은 병을 앓는 이들이 몸 속 독소를 제거하기 위해 하는 민간요법인 풍욕. 엄마는 지금도 풍욕을 하고 있을까? 아버지가 잠든 밤 마루에 서서 담요를 뒤집어쓰고 풍욕을 할 때의 엄마는 평화로워 보였다. 엄마가 어떻게 아버지와 결혼을 했는지 모르겠다. 아버지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여자다. 그리고 생선을 팔고 있기에는 너무 예뻤다. 철이 들면서 엄마에게 나는 늘 말했다. 엄마처럼 살지 않을 거야. 손톱청소 도구와 매니큐어가 든 바구니를 들고 와 신문 위에 놓는다. 손톱의 반달모양 위로 약간씩 비집고 나온 살점을 깨끗하게 민다. 손톱 주위의 지저분한 살점은 손톱깎이로 잘라내고 줄칼로 긴 손톱을 맵시있게 다듬는다. <2001년 소설부문 당선작-나여경, 금요일의 썸머타임 일부>저 숲의 적막속에서 한 生의 불씨를 당겨/純銀의 매듭을 풀고 알몸으로 깨인 넋이/이제 막 피를 吐하며 둥지트는 이 새벽.//외곬 달아나다 못다챙긴 깃털들이/觸手의 귀 곧추잡고 비늘터는 어둠 저 끝/오늘도 한기둥 나무로 서서 다시묻는 내 안부여.//빛으로 서는 餘白 둘레 둘레 잎 모우고/부채살 이우는 가지 무지개빛 새살이 돋아/그 맥박 거친 숨소리 결 고르는 쪽 빛 하늘.//태고의 허물벗고 다시 서는 오늘앞에 /이제 막 깨어난 눈빛 새筍돋는 풀꽃 바다/숲은 숲, 바다는 바다 아~꺼지지 않는 생명이여. <1988년 시조부문 당선작-홍승표의 詩새벽, 숲길에서><1> 가을 내내 나를 옭아 맨/비밀한 느낌 어디가고/북간도 어디쯤에 있을 나/찾아낼 일이다/그대 영혼 사이 오만하게 스치는/칼바람 볼 일이다/창자에 낀 어둠, 쌓이는 먼지/방금 가슴을 밟고 지나는/포크레인의 흉악한 음성 들을 일이다/후지필름 통안에서 질식사한 개미 한 마리/뚜껑 사이 바스라진/더듬이의 슬픔 볼 일리다/다급한 외침에도/구원은 느린동작으로 오고 있음을/똑똑히 알 일이다/자유는 무한이 될수 없음을 안/서른 넷의 물적증거 소멸할 일이다 <2> 옥상위엔 순백의 자유가 펄럭인다/그리움은 대로를 직진하고/물구나무 선 거리가 나를 압도한다/바닥은 언제나 머리 위에 있고/빙벽엔 발가벗은 내가 부동으로 서 있다/무섭다, 곡기끊긴 사랑과 결박당한 눈물/꿈은 역마살이 끼었는가/뿌리까지 얼게하는 카랑한 냉기/가슴엔 빙산 갈라지는 소리/통사정해도 되돌릴수 없는 시간 쌓이고/오물까지도 저리게 하는 바람/새벽은 내게 간통녀 되기를 강요하고/새들은 날개를 잃었다/회색의 풍선 하나가/지하로 곤두박질한다/모두가 수혈을 기다리는 사람 뿐/우체부는 발길을 끊고/전화는 수리 중/밤은 그뭄 밤,/누군가의 흐느낌 소리 들어야하는 밤도/이미 쉼표는 아니다. <1989년 시부문 당선작 김인자의 詩겨울여행>[경인일보 신춘문예]文靑(문학청년)들이 뜨겁게 펼친… '서른두장' 꿈의 페이지

2018-01-01 경인일보

경인일보 신춘문예 32년의 발자취 …

시·시조·소설·동화신인 71명 배출지역·나이 뛰어넘어 '공정한 심사'최연소 이승혁·최고령 김진기 '화제'안은순 등 문단 중견작가 자리매김지난 1986년 경인일보 신춘문예의 첫 공고가 나간 이래 경인일보 신춘문예는 올해(2018 신춘문예)로 32번째를 맞았다. 30여년간 총 71명의 문인이 경인일보를 통해 문단에 데뷔했으며, 많은 당선자들이 꾸준히 창작활동을 펼치며 한국문단에 활력을 불어넣고 있다.초창기(1986~1991년) 경인일보 신춘문예는 소설과 시, 시조 등 3개 부문에서 공모를 진행해 신인작가들의 등용문 역할을 했다. 그러다 1993년 시조를 대신해 동화부문을 신설하고, 1995년까지 3년간 당선작을 뽑아 문인을 배출했다. 1994년에는 당선자 23명의 작품 126편을 모아 사화집((詞華集) '우리시대는 文學的이다'(경인신춘문학회)를 펴냈다.지난 30여년간 경인일보 신춘문예는 남녀노소, 지역을 가리지 않고 공정한 심사를 통해 문학청년의 등용문으로서 입지를 공고히 해왔다. 지난 2010년 시 부문에 당선된 김진기씨는 당시 73세라는 응모 나이로 그해 '전국 신춘문예 최고령 당선자'라는 타이틀을 얻고 여러 매체에 소개되기도 했다. 김씨는 2012년 시집 '차우차우'를 발표해 다시 한번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최연소 당선자는 2012년 당시 인천 강화고등학교 3학년에 재학 중이던 이승혁씨로 시 '우물이 있던 자리'로 시인으로서 첫발을 내디뎠다. 당시 심사를 맡은 민용태 시인은 '어린 나이 답지 않은 성숙한 시적 감수성을 지녔다. 황지우 시인의 초기작을 보는 듯하다'며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1989년 등단한 김인자 시인은 시뿐 아니라 여행에세이 등으로 활동 반경을 넓혀 독자들과 공감하고 있다. 최근에는 경인일보에 '천사의 다른 이름을 찾아서…세상의 아이들'을 연재하며 잔잔한 감동을 전해 독자들과의 소통을 이어갔다. 지난 2001년 단편소설 '금요일의 썸머타임'으로 당선된 나여경 작가는 창작집 '불온한 식탁'과 '포옹', 여행 산문집 '기차가 걸린 풍경' 등을 출간하며 소설가로서 입지를 굳히고 있으며, 1992년 소설부문 당선자인 안은순 작가는 등단 20년만인 2012년 첫 소설을 발표하며 식지 않는 문학에 대한 열정을 보여줬다. 한국문단에 중견작가로 자리매김한 김현영·홍명진·심은섭 작가도 경인일보가 배출한 대표적인 작가다. /김성주기자 ksj@kyeongin.com경인일보 신춘문예 32년의 발자취…

2018-01-01 김성주

[2018 경인일보 신춘문예 소설부문 당선작]린을 찾아가는 길

돌풍의 시작은 '2041년에 다녀왔어요'라는 제목의 글 '과거 속의 후회! 미련! 아쉬움! 잠시나마 날려버리세요!'아이엠 트립의 광고문구가 입에 텁텁하게 남아 맴돌았다필립은 요즘 '아이엠 트립(IM Trip)'에 푹 빠졌다. 아이엠 트립은 일종의 환각제였다. 영어 단어 이매지너리(imaginary)의 앞 글자 두 개를 따서 붙여진 이름인 만큼 말 그대로 '상상의 여행'을 가능하게 만드는 약이었다. 아이엠 트립이 처음으로 시판된 건 이천 오십 칠년이었는데 사실 그 당시만 해도 광고를 본 대중들의 반응은 별로 좋지 않았다. 광고 문구는 대략 이랬다. '당신을 잠들지 못하게 하는 과거 속의 후회! 미련! 아쉬움! 잠시나마 날려버리세요!' 약을 복용하는 방법은 간단했다. 잠들기 전 캡슐 형태의 아이엠 트립을 하나 먹는다. 그리고 돌아가고 싶은 과거의 장면을 집중하여 떠올린다. 그러면 잠이 드는 동시에 그 과거로 돌아갈 수 있었다. (당연히 실제로 돌아가는 건 아니었다. 타임 워프 개발은 수십 년 전과 마찬가지로 여전히 미진했다.) 아이엠 트립이 선사하는 상상 속의 과거는 굉장히 현실 같았다. 보통의 꿈처럼 맥락 없이 끊어지지도 않았고 무엇보다 생생한 감각을 느낄 수 있다는 점이 매력적이었다. 냄새, 맛, 촉감까지도. 그렇게 선연하게 재생되는 과거의 어느 날을 예전과는 다른 방식으로 한번 살아보는 것. 그게 바로 아이엠 트립의 목적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의학적으로 인체에 해롭지 않다고 결론이 났다 할지라도, 그리고 국가가 허락하는 수준이라 할지라도 환각 작용이 주된 효능이었기에 아이엠 트립은 출시되자마자 많은 비난을 받았다. 특히 아이를 가진 부모들의 반발이 거셌다. 그렇지 않아도 몇 년 전 몇 가지 마약이 합법화된 뒤로 아이들도 쉽게 그것을 구할 수 있게 되어 환각으로 인한 교내 사건사고들이 잇따라 발생하고 있던 차였다. 수많은 사람들이 USNS(United Space Network Service)를 이용하여 종로 근처의 아이엠 트립 본사 앞에서 판매 중지를 요구하는 시위를 열었다. SNS를 쓰던 스마트 세대 이후 등장한 스페이스 세대는 시간을 넘나들지는 못하지만 공간을 넘나드는 데에 성공한 첫 세대였다. 그들은 국가 분쟁을 막기 위해 제한된 지역만 아니라면 어디든지 USNS를 통해 마음대로 체크인하곤 했다. 당연히 시위는 매일 열릴 수 있었다. 날마다 전국에서 모여든 사람들이 '마약 합법화라는 이슈에 편승해 시민들을 홀려 돈을 버는 기업'이라며 회사 측을 비난했다. 연이은 시위에 결국 회장이 직접 기자회견을 열어 그런 기회주의적인 마인드로 제품을 출시한 게 아니며 그저 스페이스 세대가 아직 이루지 못한 '시간에 대한 통제'를 조금이나마 이루려는 시도였다고 밝혔다. 회장이 무언가 더 말하려고 했을 때 기자회견은 아쉽게도 바로 끝났다. 누군가 그곳의 위치를 USNS에 슬쩍 흘려서 항의하는 사람들이 쉴 새 없이 들이닥쳤던 것이다. 그러나 짧은 입장 표명에도 불구하고 성과가 없지는 않았다. 드디어 일각에서 아이엠 트립을 구매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난 거였다. 그 움직임은 대중의 뜻에 반하는 것이었기에 처음에는 매우 조심스러웠다. 사람들은 분명 합법인데도 밀거래라도 하듯 아는 이를 통해서만 약을 건네받곤 했고 그마저도 겁이 났는지 USNS에 비밀 채팅방을 만들어 거래하는 장면을 들키지 않을 만한 장소를 찾으려 애썼다. 심지어 김진오라는 스물한 살의 청년이 아이엠 트립을 구매한 사실을 들켜 직장을 잃었다는 이야기가 뉴스에 소개되면서 아이엠 트립과 관련한 커뮤니티는 갈수록 음지로 숨어들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런 사회적 분위기는 놀랍게도 한순간에 극적으로 바뀌었다. 실제로 아이엠 트립을 먹었다고 밝힌 사람들의 생생한 후기가 여러 차례 포터넷(Post-Internet)을 휩쓴 탓이었다. 돌풍의 시작은 한 사이트에 올라온 '2041년에 다녀왔어요.'라는 제목의 글이었다. 글쓴이는 말했다. 아이엠 트립으로 어머니가 죽은 해로 돌아가 그때 당시 지키지 못했던 임종을 지킬 수 있었다고, 자신은 아이엠 트립을 먹은 걸 후회하지 않으며 필요하다면 다시 복용할 거라고. 드라마에나 자주 나올 법한 스토리였다. 달리 말하자면 드라마에 자주 등장할 만큼 언제든 쉽게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일 스토리이기도 했다. 무엇보다 '어머니의 임종'은 식상하지만 시대를 막론하고 눈물을 자아내는 소재였으므로. 그 글은 포터넷 유저들을 완전히 사로잡았다. 많은 이들이 글쓴이가 태그해둔 어머니의 묘지에 체크인하여 꽃과 함께 뒤늦은 조의를 표했고 동시에 아이엠 트립을 향한 관심을 드러냈다. 점점 포터넷 내 대부분의 사이트에서 'oooo년에 다녀왔어요.'라는 제목이 베스트 순위로 자리 잡기 시작했다. 물론 모든 후기들은 진위 여부를 두고 언제나 시끄러웠다. 실제로 과거에 돌아가는 게 아닌, 오롯이 사용자의 상상에 기반을 둔 그 경험 속에서 눈에 보이는 증거를 남기기란 불가능했다. 따라서 상상의 경험을 진짜로 겪은 거라고 한들 증명할 방법이 없었으며 거짓으로 꾸며낸 거라고 한들 가려낼 방법도 없었다. 그저 각자의 생각에 맡긴 채 믿거나 믿지 않거나 그럴 수밖에. 어쨌든 믿는 사람들보다 믿지 않는 사람들이 많다고 할지라도 끊임없이 후기는 올라왔고 어느덧 아이엠 트립은 확실하게 화제의 중심에 놓였다. 회사 측이 발표한 판매량만 봐도 갈수록 엄청난 인기를 끌고 있었으며 더 이상 유저들은 숨어서 아이엠 트립을 사지 않았다. 이제는 오픈된 장소로 당당하게 체크인하여 약을 주고받았다. 그리고 뒤늦게나마 직장에서 잘렸었던 청년, 김진오가 누군가의 지적으로 다시 주목받았다. 사람들은 '김진오를 다시 직장으로!'라는 구호를 내세운 집회를 열어 부당 해고의 철회 및 개인 선택의 자유를 주장했다. 필립이 그 집회에 간 건 순전히 우연이었다. 좀 더 명확히 말하자면 우연보다는 실수에 가까웠다. 여든이 갓 넘은 필립은 (아무리 지금이 여든 정도로는 어디 가서 노인 취급도 못 받는다는 이야기가 우스갯소리로 나오는 시대이긴 하지만) 워낙 스마트 세대로 살아온 세월이 길어 요즘 젊은이들이 많이 쓰는 USNS에 익숙하지 않았다. 그래서 종종 체크인 장소를 잘못 입력하곤 했다. 단순히 예전처럼 글자로 주소를 입력하는 거라면 큰 어려움이 없을 터였지만 USNS는 3D 화면을 눈앞에 띄워놓고 그 속에 걸어 들어가 양손으로 거리를 확대, 축소하여 최종 목적지를 터치해야 했기에 나이가 있는 사람들은 조금 서툴 수밖에 없었다. 버벅대며 겨우 성공하거나, 자식에게 부탁하거나, 그냥 포기하거나. 세 가지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필립은 그 중 첫 번째, 혼자서 어떻게든 물고 늘어져 힘들게라도 성공하는 타입이었다. 다른 노인들처럼 도움을 구할 자식도 없거니와 만약 자식이 있었다 해도 딱히 필립 쪽에서 먼저 손을 내밀어 도와달라고 부탁할 일은 없을 거였다. 필립은 그런 사람이었다. 그렇다고 본인의 부족한 깜냥을 쉽게 인정하고 포기할 사람도 아니어서 항상 조금 버벅대더라도 끝까지 붙잡고 늘어졌다. 그렇게 하면 (아주 가끔 실패할 때도 있었지만) 대체적으로는 가까스로 해내곤 했다.하지만 그날은 영 아침부터 정신이 없었다. 필립이 교장 직을 맡고 있는, 시에서 가장 큰 펫스쿨(pet-school)의 입학식이 열리는 날이었다. 이천 십년대 후반만 해도 다섯 가구 당 한 집 정도만 반려동물과 같이 살았었는데 어느 순간 반려동물과 함께 사는 가구의 수가 그렇지 않은 가구 수의 두 배를 넘어섰다. 자연스럽게 펫 시장 역시 엄청난 속도로 성장할 수밖에 없었고 그 안에서도 가장 두드러진 변화를 보인 것이 바로 펫스쿨이었다. 과거에는 반려동물을 펫스쿨에 보내는 게 유난 떠는 일이라며 손가락질까지 받곤 했으나 이제 펫스쿨은 엄연히 국가 차원에서 의무화한 일종의 공식적인 교육 제도였다. 이천 사십년 대 후반, 동물의 언어를 번역할 수 있는 기계가 발명되고 난 뒤 수많은 동물들의 이야기가 그 기계를 통해 번역되며 곳곳에서 인간 사회의 성찰을 촉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성난 대중의 반응에 정계는 여야를 가릴 것 없이 동물권 보장을 시대의 과제로 삼을 수밖에 없었고 곧 여러 제도를 개편하기에 이르렀다. 이에 따르면 ① 모든 반려동물은 가까운 펫스쿨에서 최소 일 년 간 교육을 받아야 하며 그 이상은 재량에 맡긴다. ② 입학 시기는 반려동물의 종에 따라 조금씩 차이가 존재한다. ③ 교육 및 훈련은 동물권을 박탈하지 않는 선에서 이루어지며 특히 인간을 따르기 위한 훈련은 세부 교칙에 의해 어느 정도 제한된다. ④ 보호자도 보호자로서 필요한 과정을 밟아야 반려동물이 정식으로 졸업할 수 있다. 이렇게 체계적으로 운영되기 시작한 펫스쿨에서는 반려동물들을 직접 가르칠 펫티처 뿐만 아니라 시스템을 전반적으로 관리할 사람들도 필요했다. 그래서 은퇴한 선생님들을 여러 요직에 앉히기 위해 데려갔는데 필립도 그런 케이스였던 셈이다. 사실 처음에 필립은 교장 직을 단호하게 거절했었다. 펫스쿨 의무화라는 시대적 흐름에 좀처럼 적응하지 못해서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더 이상 교직 생활을 하고 싶지 않았다. 사람 학교든 동물 학교든 마찬가지였다. 거의 오십 년을 꼬박 학교에 매달려 있다가 퇴직한지 겨우 몇 달째였다.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푹 쉬고만 싶었다. 게다가 이렇게 지쳐버린 데에는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 필립이 은퇴하던 해에 학교 폭력으로 학생 한 명이 옥상에서 뛰어내린 거였다. 그때 교감이었던 필립이 소식을 들은 건 오후 다섯 시 무렵이었다. 필립은 하얗게 센 머리를 몇 번 쓸어 넘기다가 신경질적으로 책상을 몇 번 두드렸다. 그러다가 느닷없이 벌떡 일어나 침통한 표정을 짓고 있던 다른 선생님들 앞에서 소리쳤다. "왜 하필이면!" 그 짧은 비명과도 같은 외침 뒤에 생략된 말은 뻔했다. 왜 하필이면 올해인 것인가! 왜 하필이면 내가 교감으로 재직 중일 때 이런 일이 발생한 것인가! 필립은 오십 년의 교직 생활을 별 탈 없이 마무리 지을 수 있길 바라고 또 바랐다. 그래서 최대한 빠르게 그리고 조용하게 사건을 덮었다.그런 상황을 겪고 난 뒤였으니 필립이 펫스쿨 교장 직을 거부한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수순이었다. 하지만 두 번째로 청을 받았을 때 놀랍게도 필립은 조금 망설였고 세 번째에는 결국 마음을 바꿨다. 제안을 받아들이기로 한 것이었다. 주변 사람들은 모두 의아하다고 여겼다. 그러나 사실 필립 본인에게 그 변심은 갑작스러운 변덕이라고 할 수 없었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지만 필립은 몇 달째 악몽에 시달리고 있었다. 형식적으로 찾아간 학생의 장례식에서 학생의 영정 사진을 본 뒤로 계속 그랬다. 대부분의 학생들의 얼굴과 이름을 제대로 모른 채 학교를 이끌어가던 필립이었건만 영정 사진 속의 얼굴은 신기하게도 자신이 아는 얼굴이었다. 언젠가 교감실의 청소를 맡았던 학생 중 하나였다. 그렇다고 해서 딱히 특별한 기억이 있는 건 아니었다. 그저 아는 얼굴이라 잠시 기이한 기분이 들었을 뿐 별다른 생각은 들지 않았다. '왜 하필이면.' 다시 한 번 속으로 되뇐 그 문장 뒤에 생략된 말은 여전히 예전과 같았다. 분명 그랬었다. 그런데 장례식장에 다녀오고 나서 필립은 매일매일 잠을 설치기 시작했다. 피곤한 상황에서도 도무지 깊게 잠들 수가 없었다. 매번 악몽을 꾸었으나 꿈이라는 게 으레 그렇듯 일어나면 무슨 내용이었는지 전혀 기억나지 않았다. 피로만 쌓여갈 뿐이었다. 정확한 원인을 파악해서 해결하면 제일 좋을 터였지만, 아무래도 시기를 미루어 짐작해보았을 때 가장 타당한 원인은 장례식일 수밖에 없는데 필립은 그게 영 이해가 되지 않았다. 솔직히 말하자면 이해하고 싶지 않았다. 좋지 않은 사건은 맞지만 이미 여차여차 수습된 사건이기도 하기에 계속해서 꿈자리가 사나워 고생하는 게 억울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가면 갈수록 상태는 더 심해졌고 심지어 밤새도록 한숨도 못 자고 뜬눈으로 보내는 날도 더러 생겼다. 필립은 마침내 불면증의 유일하고도 유력한 원인을 인정하기로 했다. 그 사건이 자꾸만 마음에 걸린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로 한 거였다. 펫스쿨 교장 직을 수락하기로 한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루어진 마음의 변화였다. 비록 사람 학교에서의 역할은 끝났지만 이렇게 다시 학교라는 공간에 불려가는 데에는 이유가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형용할 수 없는 부채 의식을 어떻게든 조금이라도 덜고 싶었다.그렇게 펫스쿨의 교장이 된 필립은 학교에 몹시 전념했다. 단순히 집과 교장실만 왔다 갔다 하는 게 아니라 이제는 모든 학교 행사에 적극 참여하며 학생들과 직접 소통하려고 애썼다. 펫스쿨이라고 해도 막상 겪고 보니 이전의 사람 학교들과 엄청나게 다르지는 않았다. 그냥 동물일 뿐, 얌전한 학생도 있었고 활발한 학생도 있었으며 말을 잘 듣지 않는 학생도 있었다. 당연히 극성스러운 학부모들도 있었다. 일에 열정적으로 빠지자 필립이 악몽을 꾸는 빈도는 다행히 낮아졌다. 아주 가끔 다시 잠을 설치는 경우가 생기곤 했지만 그럴 때마다 다음 날에 학생들과 더 많이 지내면 당분간은 괜찮았다. 이런 생활을 하고 있던 필립에게 펫스쿨의 가장 큰 행사 중 하나인 입학식은 매우 중요할 수밖에 없었다. 굳이 교장인 자신이 직접 그럴 필요는 없는데도 필립은 새로운 학생들을 맞이하고 각각을 배정된 반으로 안내하여 반장 선거를 할 수 있도록 도왔다.그러다가 일이 터졌다. 신입생 중 하나가 탈출을 꾀했다. 다들 정신없는 틈을 타서 학교를 빠져나간 거였다. 펫스쿨 공식 계정으로 USNS에 긴급 공지 글이 올라갔다. '이름: 사라, 나이/학년: 6개월(1학년), 종: 강아지(슈나우저/사진 첨부). 오전 10시 경 보호자의 손을 벗어남. 호기심이 많은 성격이라 그리 멀리는 못 나갔을 거라 추정. 많은 제보 바람.' 글이 올라가자마자 학교 근처에 사는 사람들의 제보가 쏟아졌다. 그리고 선생님들은 그 제보 속에 찍힌 곳으로 곧바로 체크인하여 주변을 샅샅이 뒤지기 시작했다. 다 살펴봤으면 그 다음 장소로 체크인하고 그런 식이었다. 필립도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서둘러 자신의 USNS를 켜 성큼성큼 3D 화면 속으로 걸어 들어가 제보된 장소 중 하나를 과감하게 터치했다. 평소에는 수십 번 망설임 끝에 이루어졌을 모든 움직임들이 너무나도 순식간에 벌어졌다. 그리고 그만큼이나 순식간에 필립은 '김진오를 다시 직장으로!' '아이엠 트립을 복용할 자유를!' 하고 외치며 행진하는 사람들 사이로 체크인하게 되었다.필립은 아이엠 트립에 대해 잘 몰랐다. 그냥 그런 비슷한 이름 때문에 세상이 조금 시끄럽다고, 그 정도로만 알고 있었다. 얼떨결에 집회 현장에 들어가게 되었을 때도 그 집회가 어떤 집회인지 관심 없었다. 원하던 장소가 아닌 곳에 체크인 됐다는 사실도 눈치 채지 못한 채 이런 곳에 학생이 숨어든다면 찾기 힘들겠구나 하는 걱정만 들었다. 그저 사라의 이름을 외치며 사람들을 헤치고 앞으로 나아갈 뿐이었다. 그런데 필립의 눈에 누군가가 들고 있던 아이엠 트립이 들어왔다. 정확히는 아이엠 트립의 포장에 쓰여 있는 광고 문구가 필립의 시선을 끌었다. '당신을 잠들지 못하게 하는 과거 속의 후회! 미련! 아쉬움! 잠시나마 날려버리세요!' 필립은 다리가 무언가에 붙잡히기라도 한 것처럼 그 자리에 우뚝 멈춰 섰다. 그리고 중얼거렸다. 후회, 미련, 아쉬움……. 장례식에서 본 학생의 영정 사진이 머릿속을 스쳤다. 필립은 아이엠 트립을 들고 있는 사람의 팔을 붙잡아 조금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이보시오. 이게 대체 무슨 약이오?" 사실 모르는 사람에게 질문을 한다는 것 자체가 필립에게는 낯설기 짝이 없는 행위였다. 그러나 이번엔 어쩐지 치솟는 궁금증을 이겨내기 어려웠다. 다행히 아이엠 트립의 대단히 열성적인 유저였던 그는 필립의 질문에 흥분을 숨기지 못하는 표정을 지으며 기다렸다는 듯이 약에 대한 설명을 늘어놓았다. 포터넷을 휩쓸었던 후기들부터 본인이 직접 겪은 경험들까지 이야기하며 필립에게 아이엠 트립으로 상상의 시간 여행을 꼭 하기를 거듭 권했다. 그러고는 목적지를 터치할 필요 없이 바로 내재된 체크인 장소로 이동할 수 있도록 하는 USNS용 체크인 칩 하나를 선심 쓰듯 건네주었는데, 그러면서 이곳에 가 자신의 이름을 대면 싸게 구입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필립은 자신의 오른손에 놓인 칩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칩을 완전히 감싸며 주먹을 한번 힘 있게 쥐었다가 다시 서서히 폈다. 솔직히 쉽게 믿을 만한 이야기가 아니었다. 심지어 필립은 평소에 이런 종류의 이야기를 누구보다 믿지 않는 편이었다. 아무래도 칩을 다시 돌려주는 게 좋을 거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나는 됐소.' 하고 운을 떼려는 순간 필립의 초점이 칩이 아닌 칩을 감싸고 있던 자신의 손에 맞춰졌다. 평생 매끄러웠던 적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비참하게 쪼그라든 볼품없는 손이었다. 조금 전에 중얼거렸던 아이엠 트립의 광고 문구가 텁텁한 입 속에 남아 미련하게 맴돌았다. 필립은 재차 주먹을 쥐었다. 그는 굳게 쥔 필립의 주먹을 바라보며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웃었다. "즐거운 여행하시길." 필립은 그가 자리를 뜨고 나서도 사라를 찾았다는 펫스쿨 계정의 공지가 올라와 알람이 울릴 때까지 한참 동안 집회 현장을 서성거렸다.삼일 뒤, 필립은 결국 USNS에 칩을 꽂고 거래처로 이동했다. '체크인하시겠습니까. YES/NO'라는 문구 앞에서 한동안 망설였지만 막상 YES를 눌러 아이엠 트립을 사고파는 사람들을 마주하게 되자 구매는 생각보다 쉬웠다. 물론 약을 샀다고 해서 바로 복용한 건 아니었다.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며 또다시 삼일이 지나고 나서야 필립은 드디어 처음으로 아이엠 트립에 도전하기로 했다. 어렵게 내린 결정이었다. 침대에 앉아 캡슐 형태의 아이엠 트립을 내려다보며 자신이 일종의 환각제에 의존해야한다는 점이 꺼림칙해 다시 한 번 갈등했지만 마침내 아주 천천히 캡슐 하나를 삼켰다. 필립은 침대에 누워 이불을 덮고 눈을 감았다. 그러고 나서 자신이 돌아가고 싶은 과거의 장면을 떠올렸다. 처음 학생의 자살 소식을 전해 듣던 바로 그때를. 최대한 집중해서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그 당시 따사로운 햇볕이 교감실을 내리쬐고 있었고 필립은 의자에 몸을 맡긴 채 졸고 있었다. 그러다 갑작스럽게 노크도 없이 문이 열렸고 당황한 표정의 몇몇 교사들이 들이닥쳤다. 깜짝 놀란 필립이 한 마디 하려는데 어쩐지 교사들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한 명은 심지어 울고 있었다. "교감 선생님, 큰일 났어요. 학생 한 명이……." 현실은 몇시간일 터인데 상상의 과거는 며칠씩 흘렀다 "린, 금방 가마" 필립의 쭈그러든 손이 YES에 닿았다"뉴스 못보셨어요? 사실은, 어제 김진오가 자살했어요"필립은 그 말을 듣는 순간 불현듯 깨달았다. 자신이 과거로 돌아왔음을. 아이엠 트립이 선사하는 상상 속의 과거로 들어왔음을. 자각은 어렵지 않았다. 전해들은 대로 모든 감각이 실제처럼 생생하게 느껴졌다. 등 뒤로 느껴지는 햇볕의 따스함과, 깜짝 놀라며 잠에서 깬 자신의 심장 소리, 손에 배인 땀, 선명하게 보이는 교사들의 표정, 더없이 뚜렷하게 들리는 울음소리까지. 이보다 현실적일 순 없었다. 필립은 양손을 비벼 땀을 없애며 아이엠 트립은 상상의 여행이 아닌 타임 워프를 가능하게 만드는 약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잠시 했다. (물론 그럴 리는 없었다. 신뢰도 높은 모든 후기들이 '다시 현실로 돌아왔을 때 실제로 바뀐 과거는 없었음'을 알리고 있었다.이는 아이엠 트립 회사 측에서 공식 발표한 주의사항과도 똑같았다.) 그저 얼떨떨해하던 필립이 정신을 차린 것은 탁자 위 공간에 설치해둔 3D 시계를 보았을 때였다. 시계는 오후 다섯 시를 막 넘기고 있었다. 필립이 익히 알고 있는 순간이었다. 필립은 실제로 과거의 당시에 오후 다섯 시를 막 넘기던 시계를 보며 오십 년의 교직 생활을 떠올렸었다. 그리고 소리쳤었다. 왜 하필이면!더 이상 망설일 시간은 없었다. 필립은 의자를 박차고 일어났다. 상상의 여행이든 타임 워프든 상관없었다. 어쨌든 자신은 과거로 왔다. 그것도 밤마다 좀 더 괜찮은 과거를 살지 못했음을 부끄러워하고 후회한 뒤에 돌아온 과거였다. 수없이 상상했던, 좀 더 나은 과거를 만들어볼 기회가 온 셈이었다. 필립은 돌아온 과거 속에서 이번에는 왜 하필이면! 이라는 말을 뱉지 않았다. 대신 철저하게 조사에 응하여 학교 폭력을 일삼은 가해자들을 제대로 가려내기를, 언론에 많이 노출되는 것도 마다하지 않기를 지시했다.그리고 교무 회의를 열어 은퇴하기까지 얼마 남지 않았지만 남은 교직 생활 동안 학교 폭력을 없애기 위해 학생들 곁에서 최선을 다하겠으며 다른 선생님들도 성실히 돕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과거의 시간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현실에서 잠든 시간은 고작해야 몇 시간일 터인데 상상 속의 과거는 며칠씩 흘러갔다. 그 며칠 동안 필립은 죽은 학생의 억울함을 밝히기 위해 이리저리 발로 뛰었다. 펫스쿨의 교장이 된 뒤 학교에 전념했듯이, 그렇게 애썼다. 그리고 이번에도 학생의 장례식장에 가서 영정 사진을 마주했다. 필립의 입술이 떨렸다. 그 떨림은 상상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생생했다. 필립은 매일 속으로 되뇌고 또 되뇌었던 말을 드디어 떨리는 목소리로 내뱉었다."미안하네. 정말 미안했네."필립은 눈을 떴다. 동시에 필립의 눈에 고여 있던 눈물이 뺨을 타고 흘렀다. 눈물을 미처 닦을 생각도 하지 못하고 주변을 둘러보자 어느새 장례식장이 아닌 자신의 방이었다. 현실로 돌아온 거였다. 현실인데도 오히려 조금 전까지 머물렀던 상상 속의 과거보다 더 현실감이 없는 거 같았다. 필립은 한참이나 멍하니 침대에 누워 있었다. 그렇게 가만히 누워 자신이 새로 만든 과거의 순간들을 잊어버리지 않도록 계속 상기시켰다. 기껏 바꾼 과거가 상상에 불과하다니 아무래도 약간의 아쉬움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 과거 속에서 조금 더 머물고 싶었다. 그래도 어쨌든 아쉬움보다는 후련함이 더 컸다. 마음이 한결 가벼웠다. '그렇게 말하지 말 걸.' 했던 말을 하지 않고 넘어갔기에. '그렇게 할 걸.' 했던 행동들을 할 수 있었기에. 그리고 무엇보다 전하고 싶었던 말을 전할 수 있었기에. 필립은 눈물로 베개가 축축해진 것을 느끼며 그만 소리 내어 웃어버렸다. 필립이 아이엠 트립에 푹 빠진 건 그때부터였다. 하루에 적어도 하나씩은 먹었다. 그리고 자신의 기억 속에 찝찝하거나 만족스럽지 못한 채로 남아 있던 사건을 다시 찾아갔다. 매일 다양한 시대를 넘나들었다. 어쩔 땐 천구백팔십 년대의 어린 시절로 돌아가 부모님께 버릇없이 굴었던 날을 다시 살아보기도 했고, 어쩔 땐 처음으로 민주적 절차를 거쳐 대통령을 탄핵했던 이천십 년대 후반의 어느 날로 돌아가 촛불을 들고 거리에 나가보기도 했다. 또 어쩔 땐 이천삼십 년대 초반에 있었던 세계 여성 혁명의 날에 직접 참여하여 여성들을 비롯한 유색 인종, LGBT 등 사회적 약자들과 함께 행진하기도 했으며, 어쩔 땐 이천사십 년대 초반에 머물며 그때 당시에는 진짜로 성공할 줄 몰랐던 USNS에 과감하게 투자해보기도 했다.새로 만들어보고 싶은 과거의 순간은 생각하면 할수록 많이 떠올랐다. 필립의 다이어리는 돌아가고 싶은 언젠가의 날들에 대한 기록으로 가득 찼다. 어쩌면 모든 날들을 다시 살고 싶은 것일지도 몰랐다. 게다가 가끔은 상상 속의 과거가 끝나는 아쉬움이 너무 커서 현실로 돌아오자마자 연속해서 아이엠 트립을 먹을 때도 있었는데 그럴 때면 어느 쪽이 진짜 현실인지 잘 구별이 되지 않았다. 필립은 그 모호해진 경계가 마음에 들어 더욱 자주 상상의 여행을 떠나곤 했다. 그리고 필립은 어느 순간 자신의 성격이 조금씩 변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예전에는 다른 사람들에게 무언가를 부탁하지도 않았었고 자신의 잘못을 굳이 인정하고 싶지도 않았었다. 하지만 이제는 그럴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필립뿐만 아니라 아이엠 트립을 복용하는 사람들 모두가 겪게 되는 자연스러운 변화였다.과거로 돌아간다는 것 자체가 자신이 했던 말과 행동을 후회하여 바꾸겠다는 의지였으므로 자주 과거로 돌아가면 돌아갈수록, 상상과 현실과의 경계를 모호하게 느끼면 느낄수록 성격은 바뀌는 게 당연했다. 문제는 그렇게 성격이 바뀌었는데도 불구하고 이를 초래한 '새로운 과거'는 아무리 새로워봤자 결국 '상상'에 불과하다는 사실이었다. 다시 말해서 과거 속 후회와 미련과 아쉬움은 아무리 노력해도 여전히 현실로 존재할 수밖에 없고 스스로 내적 변화가 있든 없든 자신이 만들어낸 그 '진짜' 삶의 흔적을 언제까지나 떠안고 갈 수밖에 없다는 거였다.필립이 이를 인지하는 데에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는데, 처음 교직 생활을 시작한 이천 육년으로 돌아갔던 경험이 결정적인 계기였다. 초보 선생 특유의 서투름과 어설픔으로 저질렀던 여러 가지 자질구레한 실수들을 만회해보고자 필립은 그날도 어김없이 아이엠 트립을 하나 먹고 누웠다. 그리고 가장 만회하고 싶은 기억의 장면을 집중하여 떠올려 당시로 돌아갔다. 몇 번을 겪어도 현실처럼 생생한 감각에 기분이 좋았다. 특히 이렇게 젊은 시절로 돌아가면 젊음을 다시 한 번 누리는 느낌이라 더 좋았다. 그런데 얼추 원하던 대로 상상 속 과거의 일부를 완성했을 때였다. 갑작스럽게도 필립은 예상하지 못한 변수를 맞닥뜨리고 말았다. 바로 '그녀'를 만나게 된 것이었다. 그녀는 당시 같은 학교에 근무했던 동료 선생으로 필립이 짝사랑하던 여자였다. 필립은 여태껏 아이엠 트립을 먹고 과거로 돌아갔을 때 새로운 과거를 만들어내는 것과 관련이 없는 다른 주변 환경에 한 번도 신경 쓴 적이 없었다. 그러나 그녀를 보았을 때, 필립은 교실에 있었고 그녀는 운동장에 있어 둘 사이의 거리가 매우 멀었는데도 필립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그녀에게로 향했다. 거의 습관처럼.실제로 과거에도 필립은 멀리서 그녀를 몰래 지켜보곤 했었다. 고백할 생각은 없었다. 워낙 혼자 지내는 걸 좋아하는 성격이라 애초에 좋아한다는 감정을 인정하기까지도 상당히 오랜 시간이 걸렸고 인정하고 나서도 고백했을 때 생길 수 있는 여러 가지 경우의 수를 감당하기가 싫었다. 그래서 그냥 짝사랑으로 만족하기로 했다. 딱히 가까워지려는 노력도 하지 않았다. 가까워지면 더 좋아하게 될 터였는데 예전의 필립에게 그런 감정의 변화는 그리 달가운 게 아니었기 때문이다. 문제는 그녀가 너무 빨리 전근을 가버렸다는 점이었다. 같은 학교에서 일한지 일 년 만에 필립은 그녀를 영영 볼 수 없게 됐다.연락을 주고받는 사이가 아니었으니 근무지가 멀어지면 그대로 끝일 수밖에 없었다. 필립은 비로소 조금 후회했다. 자신이 감당하기 싫어 포기한 경우의 수는 어쩌면 자신의 소심함에 대한 변명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그런 생각이 들었다한들 필립에게는 뒤늦게라도 연락처를 알아내 친해질 그런 용기마저 없었다. 후회되어도 그냥 넘어가기로 했다. 어차피 감정이란 건 식기 마련이었고 시간이 지나면 언젠가는 닳아 없어질 거였다.하지만 상상 속의 과거에서 필립이 우연히 그녀를 다시 보게 되었을 때 필립은 그 감정이 닳아 없어지지 않았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세월이 흘러 예전처럼 감정의 형태가 견고하지는 않았으나 분명 그것은 자신의 마음 깊숙한 곳에 여전히 특유의 흔적으로 남아 있었다. 그 흔적은 후회이자 미련이자 아쉬움이었고 또한 그리움이었다.필립은 그녀와의 관계를 새롭게 만들어보고 싶었다. 새로운 과거를 상상해보고 싶었다. 그리고 웬만하면 그 새로운 과거 속에서 오래도록 그녀와 함께하고 싶었다. 그래서 그때부터 필립은 혼자만의 계획을 세웠다. 아이엠 트립을 이용하여 만들어내는 개별적인 상상의 과거들을 하나의 상상으로 연결시키려는 계획이었다. 그러나 이를 위해서는 중요한 가설 하나를 입증해야 했다. '상상 속에서 바뀐 과거도 자신의 의식 혹은 무의식 아래 저장된 일종의 실제 기억이므로, 아이엠 트립을 통해 실제 과거가 아닌 가짜 과거로도 다시 돌아갈 수 있다!' 필립은 제일 먼저 그녀가 전근 가던 날로 돌아갔다. 당시에는 그녀가 동료들의 배웅을 받으며 차를 타고 가는 모습을 멀리서 바라보기만 했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그럴 필요도 없었고 그럴 여유도 없었다. 필립은 마치 펫스쿨 입학식 때 학교를 빠져나갔던 사라를 찾으러 갈 때처럼 성큼성큼 그녀에게 다가갔다. 그녀 앞에 서자 정말 현실인 것처럼 그녀의 향수 냄새가 났다. 필립은 어쩔 수 없이 조금은 달아오른 얼굴로, 하지만 과감하고 당당하게 연락처를 물어보았다. 그녀는 담당하던 학년도 다르고 평소에는 친하지도 않았던 필립의 갑작스러운 요청에 꽤 당황하는 거 같았다.필립의 얼굴에서 느껴지는 화끈거림도 그녀의 표정에 묻어나는 당황스러움도 무척이나 생생했다. 필립의 '진짜' 기억에 충분히 각인될 만큼. 다행히 그녀는 당황하는 기색을 곧 거두고 미소를 지으며 필립의 핸드폰에 자신의 번호를 입력한 뒤 통화 버튼을 눌렀다. 몇 초 뒤 그녀의 코트 주머니에서 진동 소리가 났다. 필립은 핸드폰을 다시 건네받고 그녀를 향해 중얼거리듯 말했다. "늘 이렇게 하고 싶었습니다." 그녀는 웃으며 대답했다. "이제부터 하면 되죠." 필립은 드디어 가설을 입증해보기로 했다. 아이엠 트립을 먹고 자리에 누웠을 때 그녀와 연락을 이어가던 상상 속의 어느 날을 집중해서 떠올리고 또 떠올렸던 것이다. 그리고 놀랍게도 그리고 다행스럽게도 그 가설은 옳았다.아무리 환상이라고 한들 선연한 인상을 지닌 채 의식 속에 각인된 일종의 경험이었기에 필립은 상상 속에서 그녀와 연락을 지속할 수 있었다. 다시 말해 모든 필립의 개별적 상상이 필립의 의도 아래에서 하나로 연결되기 시작했던 셈이다.새로 만들어내기 시작한 거대한 과거 속에서 필립은 실제로 젊었던 필립보다 용감했고 배려심이 있었으며 또한 대범하고 너그러웠다. 물론 종종 원래 필립의 성격이 튀어나오기도 했다. 한번은 그녀가 필립의 얼굴을 어루만지며 말했다. "당신은 내가 생각했던 거랑 참 다른 사람인 거 같아." 그 순간 필립은 깜짝 놀라 자신도 모르게 그녀의 눈을 피해 시선을 내리깔고 말았다. 젊어진 자신의 손이 보였다. 분명 삼십 대의 피부로 돌아왔는데도 왠지 쭈그러든 노인의 피부를 보는 것 같았다. 필립은 천천히 마음을 진정시키고 주먹을 쥐었다. 그리고 다시 고개를 들어 그녀를 바라보며 대답했다. "내 마음은 항상 이랬어." 어쨌든 그렇게 좀 더 괜찮은 성격으로 거듭난 필립은 그녀와 순탄한 연애 시절을 보냈고 결국 결혼까지 하게 되었다. 게다가 예쁜 딸도 얻었다. 필립은 자신의 품 안에서 잠든 딸의 고른 숨소리에 더할 나위 없이 벅차올랐다. 단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감정이었다. 필립은 천천히 딸의 호흡을 따라했다. 딸이 숨을 들이쉬면 필립도 숨을 들이쉬었다. 딸이 숨을 내쉬면 필립도 숨을 내쉬었다. 그렇게 한참을 함께 호흡한 뒤 필립은 딸이 깨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뺨을 어루만졌다. 따뜻하고 보드라웠다. 필립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그때 필립에게 다가온 그녀가 필립의 뺨에 입을 맞췄다. 필립은 그녀의 가슴에 기대어 잔뜩 목이 멘 채 중얼거렸다. "린. 린이라는 이름이 좋겠어." 언젠가 딸이 있다면 지어주고 싶다고 생각했던 이름이었다. 이제 필립은 그 어느 때보다도 아이엠 트립에 완전히 빠졌다. 현실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매일매일 상상 속의 과거에서 그녀와 린과 함께 지냈다. 심지어 과거의 시간이 흘러가는 방식은 현실과 같지 않아서 하룻밤을 누워서도 여러 계절을 보낼 수 있었다. 필립은 그렇게 상상 속에서 몇 번이나 봄을, 여름을, 가을을, 겨울을 보냈다. 점점 필립에게 현실과 상상의 구분은 무의미했다.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현실로 돌아온 필립은 약이 다 떨어졌다는 것을 발견했다. 미리 많이 사뒀다고 여겼는데 언제 다 먹었는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미처 정리를 못해 지저분한 책상 위를 서둘러 헤집었지만 아무리 찾아도 남은 약은 없었다. 필립은 발을 구르며 소리쳤다."왜 하필이면!" 애가 탔다. 상상 속의 과거에서 필립과 그녀는 막 린의 유치원 학예발표회에 함께 가려던 참이었다. 얼른 약을 먹고 다시 돌아가야만 했다. 그녀와 린이 자신을 기다리는 모습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필립은 옷도 갈아입지 않고 떨리는 손으로 USNS를 켰다. 읽지 않은 메시지가 가득 쌓여 있었다.몸이 좋지 않다는 핑계로 며칠 째 결근 중이었기에 대부분 펫스쿨 측에서 온 메시지였다. 아무렇지도 않게 모든 메시지를 무시한 뒤 필립은 아이엠 트립 거래처가 내재된 체크인 칩을 USNS에 꽂았다. 곧 자주 가서 익숙한 배경이 3D 화면 속에 펼쳐졌고 '체크인하시겠습니까. YES/NO'라는 문구가 떴다. 필립은 망설이지 않고 화면 안으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가 YES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리고 터치하기 직전, 린이 나중에 자라서 자신에게 최신 기계에 대해 가르쳐주는 모습을 상상했다.분명 다급했는데도 절로 웃음이 났다. 이제 더 이상 필립은 뭐든 혼자 물고 늘어지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린, 금방 가마." 필립의 쭈그러든 손가락이 YES에 닿았다.거래처는 평소와 조금 다른 분위기였다. 다들 이리저리 바쁘게 뛰어다니거나 무리지어 수군거리고 있었다. 모든 사람들의 표정이 심각했고 자연히 전체적인 분위기도 아주 가라앉아 있었다. 무슨 일인지 궁금했다. 그러나 필립에게는 아이엠 트립을 당장 사는 게 더 중요했기에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곧바로 엘리베이터를 타고 VIP라는 글자가 새겨진 삼 층으로 올라갔다. 언젠가부터 필립은 아이엠 트립의 VIP고객이 되었다. 항상 조금 더 할인된 가격으로 그리고 조금 더 적은 대기 시간으로 약을 사는 게 가능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었다. 어쩐 일인지 조용해야 할 VIP 전용 층도 아래층과 마찬가지로 상당히 소란스러웠다.과연 무슨 일이 생긴 게 틀림없었다. 필립은 그나마 덜 바빠 보이는 직원에게 다가갔다. 직원은 미간을 한껏 찌푸린 채 포터넷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무슨 일이 생겼소?" 필립의 물음에 직원은 질문의 의도를 이해하지 못했는지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이내 오히려 본인이 더 어리둥절한 표정을 한 채 되물었다. "아, 혹시 뉴스 못 보셨어요?" 필립이 머리를 긁적이자 직원은 설명하기가 조금 난감하다는 듯이 살짝 웃으며 좌우를 살폈다. 그러곤 곧바로 웃음기가 싹 가신 얼굴로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그게 사실은, 어제 김진오가 자살했어요." 필립은 김진오, 하고 두어 번 중얼거렸다. 분명 들어본 이름이었다. 그리고 들어본 적 있다고 생각하자마자 필립의 머릿속에 익숙한 구호 하나가 스쳐 지나갔다. '김진오를 다시 직장으로!' 그랬다. 이제는 아이엠 트립의 상징적인 인물이 된 김진오, 그가 죽은 거였다. 그래서 아이엠 트립 측에서도 비상이 걸릴 수밖에 없었다. 필립은 곧바로 관련된 뉴스를 찾아보았다. 그제야 어리둥절했던 직원의 태도를 이해할 수 있었다. 포터넷은 온통 그 사건으로 도배되어 떠들썩했다. '아이엠 트립 후유증? 김진오 자살의 세 가지 의문점.' '환각제 유통 이대로 괜찮은가.' '아이엠 트립 측, 확실한 증거 없어. 루머 법적 대응할 것.' '반대세력 오늘 저녁부터 다시 집회 열 듯.' 종합해보면 직장으로 다시 복귀한 김진오는 회사 생활을 하면서 계속 아이엠 트립을 복용해왔고 최근 보름 동안 무단결근을 했으며 어제 집에서 자살한 채 발견됐다는 것이었다. 한쪽에서는 아이엠 트립 때문이라고 주장했고 다른 한쪽에서는 김진오가 보인 일련의 행동에 뚜렷한 인과성이 없으므로 결정적인 원인은 알 수 없다고 반박했다. 필립은 포터넷 상단에 뜬 '김진오의 마지막 영상'이라는 제목을 눌렀다. 누군가와의 영상 통화 기록처럼 보였다. 김진오의 얼굴은 알려진 바와 다르게 굉장히 초췌했다.다크서클도 짙고 수염도 깎지 않았다. 그런 얼굴을 거칠게 매만지며 김진오는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이 돈 노 후 아이 엠 애니 모어(I don't know who I am any more). "평소처럼 처방받으시는 거죠?" 필립은 직원의 말에 고개를 들어 주위를 둘러보았다. 회사 곳곳에는 '진실은 밝혀진다.'라는 문구가 적힌, 아이엠 트립의 결백을 믿어달라고 호소하는 포스터가 붙여져 있었다. 그러나 회사 측 입장과는 별개로 이런 사건이 생기면 매출은 떨어질 수밖에 없어서 확실히 보통 때보다 손님 수가 훨씬 적었다. 그나마 VIP층은 변화가 적은 편에 속했다. 필립은 조금 전 지나왔던 아래층을 떠올렸다. 부산스럽게 움직이던 사람들 대부분이 직원 유니폼을 입고 있었다. 수많은 손님으로 발 디딜 틈도 없었던 예전과는 사뭇 다른 풍경이긴 했다. 필립은 문득, 언제부터 주먹을 쥐고 있었는지 모를 자신의 양 손을 내려다보았다. 평생 부드러웠던 적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거칠고 초라한 노인의 손이었다. 필립은 천천히 주먹을 폈다. 그때였다. 엘리베이터가 열리는 소리와 함께 난데없이 누군가의 절규가 삼 층을 가득 메웠다. 필립을 비롯한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그쪽으로 쏠렸다. 속옷만 입은 한 젊은 여자가 울부짖었다."빨리! 빨리 달란 말이야! 지금 당장 가야해……." 여자의 머리는 자다 일어난 것처럼 형편없이 헝클어져 있었고 얼굴은 눈물범벅이었다. 여자는 자신의 상태가 어떻든 신경도 쓰지 않는 거 같았다. 그저 비틀대며 빨리! 만을 외쳤고 호흡곤란으로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는 듯 했다. 지켜보던 사람들이 어딘가 아슬아슬하다고 느낄 무렵 여자는 결국 그대로 쓰러지고 말았다. 여러 명이 재빨리 여자에게 달려갔다.그 모습을 바라보던 필립은 자신의 호흡까지 가빠지는 것을 느꼈다. 밭은 숨을 거듭 내뱉었고 그러다 불현듯 자신의 눈에서 눈물이 흐르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아, 필립은 흐느끼며 하얗게 센 머리카락을 부여잡았다. 사실 필립도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끊임없이 노력한다고 한들 앞으로도 오후 다섯 시만 되면 죄책감에 휩싸이리라는 것을. 학생의 죽음보다 자신의 은퇴를 더 걱정했던 과거의 흔적은 결코 사라지지 않으리라는 것을. 또한 이 세상에 자신을 기다리는 가족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다시 상상 속으로 들어가지 않는 이상 그들을 만나기란 불가능하다는 것을.있는 힘껏 애를 써 봐도 그녀와 린의 존재는 끝끝내 환상에 불과하리라는 것을. 새로 만들어낸 과거는 아무리 생생하고 뚜렷해도 결국 '만약에'라는 가정 속에서만 성립하는 신기루일 수밖에 없었다. 없어지지 않고 남을 수 있는 건 '진짜' 삶의 흔적뿐이었다. 이제껏 쌓아올렸던 여러 추억이, 그리고 새롭게 바랐던 미래가 필립의 마음속에서 모래성처럼 속절없이 무너졌다. 필립은 괜찮은지 묻는 직원에게 오늘은 이만 가봐야겠다고 말하기 위해 가까스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막 운을 떼려던 차에 누군가가 외쳤다. 이봐요, 호흡하세요! 하나 할 때 들이쉬고 둘 할 때 내뱉으세요! 하나! 둘! 하나! 둘! 다시 필립의 눈길이 여자 쪽을 향했다. 여자를 둘러싸고 있는 사람들 중 몇 명이 하나! 둘! 하나! 둘! 하며 똑같은 박자로 호흡을 유도하고 있었다.필립은 어느새 자신도 모르게 그 박자에 맞춰 천천히 숨을 쉬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하나, 둘, 하나, 둘. 그렇게 한참을 들이쉬었다가 내쉬었다가를 반복했다. 그러면서 필립은 자연스럽게 자신의 품 안에서 잠들었던 린의 고른 숨소리를, 린의 호흡을 따라하던 순간을 떠올렸다. 덧없이 무너진 기억 어딘가에 각인된 더없이 벅차올랐던 그 시간을. 필립은 어쩐지 텁텁한 입 안을 마른 침으로 축이고 또 축였다. 그리고 중얼거렸다. "역시 딱 한 번만이라도 더 볼 수 있다면." 김진오에 관한 뉴스는 계속해서 실시간으로 쏟아지고 있었고 여자는 여전히 깨어나지 못하고 있었으며 아이엠 트립에 반대하는 세력들이 예고한 집회 시간은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침내 필립은 손을 내밀었다. 직원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미소를 지으며 약을 건넸다. 감사합니다, 즐거운 여행하시길. 필립은 속으로 직원의 말을 되뇌었다. 즐거운 여행하시길. 그러곤 약 봉투를 든 손에 천천히 힘을 주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었다. 어쩐지 제대로 주먹이 쥐어지지 않았다. 필립은 왠지 모를 아득함을 느끼며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끝내 오므라들지 못한 주먹이 애처롭게 떨리고 있었다. <끝>

2018-01-01 경인일보

[2018 경인일보 신춘문예 시부문 당선 소감]이명선, "홀로 서기를 마무리하며"

며칠째 계속되던 한파주의보가 해제되었습니다. 당분간 한랭전선은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전선이 사라진 것은 아닐 것입니다. 그래서 안도합니다. 사라지지 않았는데 보이지 않을 때 저는 안도합니다. 베란다 밖으로 보이는 하늘을 올겨울 들어 처음 올려다봅니다. 시립니다. 시린데 온몸으로 퍼지지 않습니다. 지금 제가 뜨겁기 때문입니다. 눈이라도 펑펑 내린다면 더 시린 하늘을 찾아서 밖으로 나가려는 충동이 일 것입니다. 듣고 있던 노래의 볼륨을 더 줄입니다. 아예 들리지 않는다면 좋겠습니다. 오늘은 제 얘기를 하고 싶습니다. 혼자 생활하는 것이 편했습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를 걷다 보면 물 위거나 구름 위였습니다. 빠지거나 떨어질 수 있는 불편에 대한 직감으로 자주 붉거나 창백했습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낀다는 것이 평범이라는 걸 알지만 타고나길 그렇게 타고났나 봅니다. 그래서 늘 혼자 지냈습니다. 외출할 때마다 자주 모자를 썼습니다. 모자를 푹 눌러쓰면 타인의 시선뿐만 아니라 제가 보고자 하는 것들에서 가려질 것 같았습니다. 어떤 욕망도 제 것이 될 것 같지 않았습니다. 사라지지 않았는데 보이지 않을 때 저는 안도합니다. 저의 하루는 단순했습니다. 온종일 음악을 들으며 혼자 중얼거리는 것이 유일한 일이었습니다. 중얼거리다 보면 모든 중얼거림은 저에게로 다시 되돌아오곤 하였습니다. 되돌아오는 중얼거림을 언제부턴가 받아 적었습니다. 혼자 지내는 일치곤 매력적인 일이었습니다. 당선 소식을 받았습니다. 순간 혼자 중얼거릴 수가 없었습니다. 무작정 누군가에게 말을 걸어보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누군가는 여전히 없었습니다. 이제 사람과 사람 사이를 걸어가야겠습니다. 그 길을 내주신 경인일보사와 저의 중얼거림을 받아주신 심사위원님께 큰절 올립니다. 저에게 최초로 시를 보여주고 시의 길을 내준 이돈형 시인과 시의 날개를 펼치게 한 김지명 시인께 거듭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쓰겠습니다. 이 말이면 될 것 같습니다. 늘 애틋하게 지켜봐 주는 이종영, 이영선, 이영예, 김병찬 그리고 끝끝내 사랑인 재인이에게도 깊은 마음 전합니다. 하늘에서 지켜보고 계실 엄마, 아버지 곧 사진 가지고 찾아뵙겠습니다.2018 경인일보 신춘문예 시부분 당선자 이명선.

2018-01-01 경인일보

[2018 경인일보 신춘문예 소설부문 심사평]홍정선 평론가·이인성 소설가, "정체성·존재에 대한 묵직한 성찰"

"SF적인 요소를 넣어 재밌으면서도 삶에 대한 근원적 문제에 접근하는 작품"'2018 경인일보 신춘문예' 소설부문 심사위원들은 당선작 '린을 찾아가는 길'에 대해 등단작품이라고 보기에 이미 상당한 수준이라는 호평을 내놓으며, 이견 없이 당선작으로 선정했다.심사위원들은 총 148편의 응모작 가운데 본심에 오른 18편의 소설을 두고 별다른 의견차 없이 이중 5편을 다시 추렸다. 최종 심사에는 '린을 찾아가는 길' 외에도 '매일 빌리는 남자' '세신' '호랑나비와 춤을' 등 실험적 도전부터 정통 소설문법에 충실한 작품까지 다양한 경향의 작품들이 올라왔다.먼저 '세신'은 화자를 관(棺)에 두고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독특한 관점으로 풀었다는 점에서 주목을 받았지만, 지나치게 추상적으로 흘렀다는 아쉬움을 남겼다. '호랑나비와 춤을'의 경우는 밑바닥 삶의 씁쓸한 풍경을 객관적 시선으로 담담하게 잘 그려냈다는 점에서, '매일 빌리는 남자'는 표절이 표절이 아니라 일종의 패러디나 오마주로 받아들여지는 아이러닉한 상황을 풍자하는 데 일정한 성공을 거두었다는 점에서 평가를 받았다. 그러나 이야기의 전개나 서술 방식이 너무 평면적이라는 한계가 지적되었다.심사위원들은 쓴소리도 아끼지 않았다. 이민자의 삶이나 청년실업, 동성애 등 여러 세태를 반영하는 소설들이 다수 투고됐지만 문학적으로 설득력을 갖춘 작품은 많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새로운 문학적 실험이나 활기, 자신의 문학적 세계를 집요하게 추구하는 의지 등을 작품 속에서 발견할 수 없었다고 했다. 예외적으로 '린을 찾아가는 길'에 대해 기억을 자기 정체성의 문제와 연결해 인간에 대한 존재론적 성찰을 유발시키려는 주제의식부터 만만치 않았다는 평가를 내렸다. 꿈속으로 여행을 하면서 행복한 기억을 만들려 하지만 그것이 결국 가짜라는 반전을 통해 현실성을 되찾아가는 과정이 흥미롭게 전개되고, 밀도 있는 구성과 세련된 문장으로 시종일관 독자를 사로잡는다고 호평했다. 마지막으로 심사위원들은 소설가를 꿈꾸는 예비 작가들에게 고전에 대한 독서를 권했다. 많은 작품을 읽는 과정을 거치면서 자기만의 길을 찾아가는 준비가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김성주기자 ksj@kyeongin.com이인성 소설가(왼쪽)와 홍정선 평론가(오른쪽)가 2018경인일보 신춘문예 소설부문 당선작을 선정하기 위해 논의를 하고 있다. /김성주기자ksj@kyeongin.com

2018-01-01 김성주

[2018 경인일보 신춘문예 시부문 심사평]김명인·김윤배 시인, "절제·인내로 묘사한 인류의 비극"

"비극적 상황을 절제와 인내로 직시한 작품"이명선 당선자의 '한순간 해변'은 지난 2015년 9월 시리아 난민 아이의 죽음을 소재로 인류의 비극을 그린 작품이다. 심사위원들은 이 작품이 인류가 저지르고 있는 비극을 그리면서도 인내와 절제가 미덕인 시 세계를 펼쳤다고 평가했다.총 1천158편이 접수된 '2018 경인일보 신춘문예' 시 부문에서 본심 심사위원들은 18편의 시를 골라 평가했다. 이 가운데 4편이 당선작 후보에 오르며, 심사위원의 매서운 심사대에 올랐다.'한순간 해변'과 '익투스' '수수께끼 나라의 첫 인사법' '미역국을 삼킨다는 것', 등이 당선 경쟁을 벌였다. 우선 '미역국을 삼킨다는 것'은 의미가 함축되도록 말을 활용하는 솜씨가 두드러진 작품이라는 평을 받으며 심사위원을 사로잡았다. 시상을 단단하게 다뤄본 느낌을 준다는 평가를 받았지만 심사위원들은 섬세하게 형상화하는 작업이 아쉬웠다고 평했다.종교적인 느낌이 강한 '익투스'는 시를 조여내는 실력, 한 편의 작품을 완성시키려는 의지가 읽히는 작품으로 잘 조정된 시적 발화를 보여줬다는 평을 이끌어냈다. '수수께끼 나라의 첫 인사법'은 시문이 유려하고 상상력이 돋보인 작품으로 마지막까지 당선작과 자웅을 겨뤘다.본심 심사위원들은 '한순간 해변'의 이명선 당선자가 당선작 외에도 응모한 시가 고루 상당한 실력을 보여줬다는 점에서 높은 점수를 줬다. 좋은 시인을 발굴했다고 입을 모았다.반면 심사위원들은 응모자들이 실험적인 작품쓰기에 주저한 것에 대해선 아쉬움을 표했다. 현실 세계에서 벌어지는 일들에 대한 시에서 사유의 날카로움이 드러나지만, 대체로 서정적인 작품이 많았다고 지적했다. 심사위원들은 가족과 개인으로 세상을 보는 눈이 좁아진 것이 각박한 현실 속을 살아가는 이들의 생존법을 반영한 것 아닌가 하는 우려를 표했다.마지막으로 시인을 꿈꾸는 응모자들에게 시를 통해 가보지 않은 낯선 곳에 가려는 노력을 당부했다. /김성주기자 ksj@kyeongin.com김명인 시인(왼쪽)과 김윤배 시인(오른쪽)이 2018경인일보 신춘문예 시부문 당선작을 선정하기 위해 논의를 하고 있다. /임열수기자 pplys@kyeongin.com

2018-01-01 김성주

[2018 경인일보 신춘문예 접수 완료]국내·외서 모여든 1306편 작품… 남녀노소 마침표 없는 문학열정

시 부문 1158편 ·소설 부문 148편 어머니·나이듦·풍경등 소재 많아'2018 경인일보 신춘문예'에 시 1천158편, 단편소설 148편 등 총 1천306편이 접수됐다.지난 1987년 시작된 경인일보 신춘문예는 경기·인천지역에서 유일하게 진행되고 있으며, 지난달 1일부터 한달여간 공모를 받아 지난 2일까지 2개 부문의 접수를 완료했다.이번 신춘문예는 등단을 꿈꾸는 예비 문인은 물론 기성 문인들도 문을 두드렸으나 기성 문인들은 심사대상에서 제외됐다. 응모자들은 10대에서 70대까지 남녀노소를 불문한, 문학에 열정을 지닌 참가자들이 전국에서 지원했다. 해외 응모자들도 줄을 이었는데 중국, 미국은 물론 저 멀리 탄자니아에서도 원고를 보내왔다. 직업군도 다양해 학생, 군인, 목사, 대학교수, 경비원을 비롯 교도소에 수감된 재소자도 예비 문인으로 이름을 올렸다. 시의 경우, 총 287명이 응모했으며 최연소 16세~ 최고령 72세였다. 특히 올해는 50대인 1960년대생 응모자의 비중이 높았다. '어머니'나 '나이듦' '꽃이나 풍경'을 소재로 한 작품들이 많았고, '세월호'를 주제로 한 작품도 여럿 눈에 띄어 세월호 침몰 사고가 여전히 우리 국민들에게 가슴 아픈 일로 남아있음을 보여줬다.단편소설은 총 144명이 원고를 보내왔으며, 이 역시 60년대생들의 참가가 돋보였다.신춘문예 당선자는 1·2차 심사를 거쳐 선정하며, 당선자와 당선작은 내년 1월 2일자 지면에 발표된다. 단편소설은 상패와 상금 500만원, 시는 상패와 상금 300만원이 수여된다. /김성주기자 ksj@kyeongin.com

2017-12-06 김성주

경인일보 신춘문예 '소설-최은·시-성영희' 수상

'2017 경인일보 신춘문예' 시상식이 9일 오후 경인일보 수원 본사 대회의실에서 열렸다. 이날 시상식에는 단편소설 부문 심사를 맡은 방민호 평론가, 김별아 소설가, 시 부문 심사를 맡은 신달자 시인, 유성호 평론가와 송광석 경인일보 대표이사 사장 및 임직원 등 100여 명이 참석했다.신달자 시인은 축사를 통해 "문학을 하려는 사람들에게 신춘문예처럼 화려한 등단은 없겠지만 지속적인 격려와 응원을 받을 수는 없어 오히려 등단 후의 길이 외로워지기도 한다"며 "그러나 그 외로움은 오히려 글을 쓰기 위한 자산이 될 수 있으니 오늘의 큰 기쁨을 내면에 간직하고 정진하기 바란다"고 당선자들을 격려했다.단편소설 '켄의 세계'로 당선된 최은씨는 "재능이란 선척적이기보다 발견되고 선택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며 "저를 뽑아주신 분들이 후회하시지 않도록 증명해 보이겠다"는 소감을 남겼다.시 '미역귀'로 당선된 성영희씨는 "여기까지 오는 오랜 시간동안 힘이 돼 준 많은 분들에게 감사하다"며 "더 좋은 글로 보답하겠다"고 말했다.송광석 사장은 "훌륭한 작품을 보내주시는 많은 독자 여러분들, 심사위원분들께 모두 감사하다"며 "당선자 분들이 오늘을 시작으로 꿈을 널리 펼치시길 바란다"고 전했다. /민정주기자 zuk@kyeongin.com9일 오후 경인일보 대회의실에서 열린 '2017 경인일보 신춘문예' 시상식에서 단편소설 '켄의 세계'로 당선된 최은(왼쪽)씨와 시 '미역귀'로 당선된 성영희씨가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임열수기자 pplys@kyeongin.com

2017-01-09 민정주

[2017 경인일보 신춘문예]소설부문 당선작/최은 '켄의 세계'

켄이 보따리장수처럼 초라한 진심을 늘어놓은 것을 후회하기도 전에여자들은 옷을 재빨리 꿰어 입고 그 방을 떠났다바비에겐 다른 공기가 있었다, 승려처럼 성냥탑 쌓기에 열중하는…켄은 바비의 몸에 자신의 진심이 담겨버린게 두려웠다연희가 진정 바라는 건 충실한 신하인지 증명해보라는 성의일 것이다하지만 성형이라니… 카페 유리창 건너 놈의 얼굴이 떠올랐다나보다 갸름했고, 피부가 희었고, 생각해보니 코도 더 얄쌍했다귀족적 아이덴티티까지 코히시브젤처럼 이식할 병원을 알아봐야겠다진한 커피는 꼭 사약 같다. 켄은 사극에서 머리를 산발한 죄인들이 들이키는 흰 사발을 떠올리며, 진갈색 액체를 머금었다. 윽, 재떨이 헹군 물 같군. 감각은 솔직하고 정직하다. 아직은 본능적으로 단 음료가 더 끌린다는 자각에서 켄은 거꾸로 자신의 나이를 상기한다. 달콤한 카페모카. 부드러운 카푸치노. 달달한 캐러멜 마끼아또. 상큼한 생과일주스. 커피 전문점에 파는 음료는 많고 많지만, 그게 그거다. 커피들의 이름은 외우긴커녕 틀리지 않고 발음하기도 힘들게 길지만, 어차피 모두 에스프레소 원액에 시럽을 넣거나, 휘핑을 얹거나, 캐러멜 드리즐을 뿌린 것들이다. 여자처럼. 켄은 여자의 머리가 길건 짧건, 치마건 바지건, 붉은 입술이건 맨 입술이건 기억하지 못하고 신경 쓰지도 않는다. 그리고 켄은 한 달 30일 중 29일은 아메리카노만 마신다. 때론 에스프레소 도피오 따위를 말할 때도 있다. 그건 그냥 그날의 날씨가 꿀꿀하기 때문인데, 같이 밤을 보낸 여자는 말한다. 켄, 넌 뭘 좀 아는구나. 켄이 대꾸 없이 입에 옅은 미소만 건 채 침묵하면, 여자들은 초조해하며 "출장 가서 특산물을 좀 샀어. 택배로 보내줄게." "쇼핑하던 차에 하나 고른 거야. 부담 갖지 마." 따위의 말들을 보따리장수처럼 너절하게 늘어놓는다. 켄에게 그들은 아무도 쳐다보지 않는 잡동사니들을 파는 지하철의 할머니들이다.그에게 진정한 오르가즘이란 한 달에 딱 하루, 설탕이나 시럽이 들어간 커피를 마실 때다. 물론 문자 그대로의 그걸 자주 느끼기는 한다. 하지만 단 커피 음료를 마실 때 그는 진짜 사정射精 할 때보다 전율한다. 달콤한 액체를 최대한 음미하려 천천히 들이킬 때, 그의 입천장과 목구멍과 위 내벽은 민감하게 반응한다. 역시 여자보다 낫다!남창은 회사원만큼 힘들다. 반복 업무와 서비스 정신을 두루 요한다. 그는 자신의 일을 사랑하지만 환멸을 느낀다, 여느 노동자처럼. 한 달에 한 번, 단 커피를 마시는 날은 보너스 지급일이라 생각한다. 또, 드물게 이런 여자들이 있다. 성기 뿌리에서부터 척추와 정수리 끝까지를 단숨에 타고 올라, 전체를 빨아들여 버리는 듯한. 그런 여자들은 대개 미인은 아니다. 오히려 외양만으론 작은 직장에 다니며 맞벌이를 할 법한, 평범한 주부 같은 여자들이다. 그런 여자와 잘 때만 켄은 여자란 존재에 대해 새삼 호기심이 되살아났다. 또 그녀들에겐 특별한 능력이 있었다. 그녀들의 빨판 같은 질이 판단력까지 빨아들여버리는지, 같이 잘 때면 켄은 입가에 흘러내리는 술을 그냥 놔두듯 나오는 대로 지껄이게 됐다. 이를테면 중학교 시절 땀내 나는 야구 유니폼을 입고 집으로 걸어올 때 금속 배트 끝이 아스팔트 표면에 퉁퉁 튕기는 진동에 대해. 「아낌없이 주는 나무」 첫 장에 아빠는 널 정말 사랑한다. 란 손글씨를, 어두워진 방에서 언제까지나 들여다보던 기억에 대해. 하지만 켄이 보따리장수처럼 초라한 진심을 늘어놓은 걸 후회하기도 전, 여자들은 옷을 재빨리 꿰어 입고 그 방을 떠났다. 진심이란 그런 것이었다. 진심은 그가 쓰는 초박형 콘돔 끝에 고인 정액이었다. 그런 날들 중 하루, 바비를 만났다. 바비는 서로 허리를 감고 비틀대며 괴성을 지르는 무리들과 떨어져, 혼자 앉아 고개를 숙이고 뭔가를 꼼지락거리고 있었다. 켄이 이쑤시개에 말라 비틀어진 오렌지를 꽂아 바비의 입가에 드밀자, 그녀는 고개를 돌렸다."근래 보기 드문 칙칙함이다."빗어 넘긴 머리가 보랏빛으로 물든 동료가 저만치 앉은 바비를 턱짓하곤 낄낄거렸다. 동료는 술인지 물인지에 가슴팍이 젖어 한쪽 젖꼭지가 훤히 드러나 있었다. 다른 동료가 단발머리 여자의 머리를 양손으로 잡고, 한쪽 젖꼭지가 훤히 드러난 동료의 가슴팍에 들이밀었다. 환호와 박수가 쏟아졌다. 분위기는 질주하듯 달아올라 작은 룸은 우주로 쏘아질 것 같았다. 그 난리통에도 바비는 혼자 고즈넉한 정원에 앉아 있었다. 켄은 느슨해진 눈꺼풀로 바비를 뜯어보았다. 추녀. 튀어나온 광대뼈, 빗자루 털 같은 생머리, 거친 피부, 모지게 찢어진 눈, 엄청나게 큰 코를 갖고 있었다. 신체의 곳곳에서 건어물 냄새가 날 것 같은 여자. 켄에게 그런 종류의 여자는 무생물과 다름없었다. 하지만 수행하는 승려처럼 성냥 탑 쌓기에만 열중하는 바비에겐 다른 공기가 있었다. 진동하는 공기 속에 성냥개비 탑은 위태롭지만 재주 있게 쌓여, 어느덧 양주잔 높이까지 올라와 있었다. 가라오케가 흐느적대는 발라드로 바뀌자 사람들은 해산물처럼 미끈거렸다. 켄은 문득 끈적한 물속에 잠긴 듯한 답답함을 느꼈다. 바비의 성냥 탑이 무너질까봐 켄은 가슴이 조여들었다. "계속 그러고 있을 거예요?" 수면 아래서 고개를 들듯 바비는 천천히 켄을 올려다봤다. "같이 나가죠."알코올에 들뜬 혀가 바람에 휘날렸다. 켄은 그날은 좀 쉬고 싶었다. 살갗이 양피지처럼 늘어진 여자의 팔에 자신은 움직이지 않고 가만 안겨 있고 싶었다. "바비씨.""왜 날 바비라 부르지?""음.""네가 아는 여자 중에 바비가 있니?""아니오, 있을 수도 있겠지만. 왜 바비냐면, 아름다워서." 나오는 대로 뱉고 픽 웃었지만 여자는 무표정했다. 바비는 켄 쪽으론 일별도 않고 탑 쌓기에만 열중했다."나가기보단, 들어가자.""어디로요?" "여기로." 바비의 검지는 우물 정 자로 쌓인 성냥 탑 속을 가리켰다. 개미들에게나 안락할 보금자리였으나, 떨리는 테이블 위에서도 의외로 굳건히 서 있었다. 성냥 탑 안을 들여다보고 있으려니 달뜬 열기와 교성들이 켄의 몸을 그대로 통과해갔다. 휘핑크림을 두텁게 쌓아올린 음료를 받아드는 여자들은 하나같이 날씬했다. 그녀들의 종아리와 허벅지, 엉덩이와 허리는 군더더기 없이 미끈했다. 하지만 켄은 그들을 사물처럼 그냥, 쳐다봤다.그 밤은 특이했다. 바비는 켄이 같이 잔 여자들 중 못생긴 걸로 세 손가락에 들었다. 켄은 그날 이상하게 허둥댔다. 그녀가 못생겨서는 아니었다. 그냥, 기분이 이상했다. 바비가 손을 그의 등에 얹었다. "애쓰지 마." 거칠고 메마른 손처럼 그 말엔 무게감이 있어, 켄은 움직임을 멈췄다. 바비 속에서 그는 말했다."중학교 때요." "응." "벤치 끝에 앉아, 혹시 감독이 내 이름을 크게 외쳐주지 않을까 기다리고 또 기다렸거든요? 해가 무섭도록 시뻘건 늦은 오후였어요. 난 엉덩이를 들썩대면서 2루 쪽을 보고 또 봤는데, 심장이 목구멍 밖으로 튀어나올 것 같았어요." "안타를 쳤니?" "아뇨, 결국 벤치만 지켰어요. 내 이름은 끝내 불리지 않았어요.""대부분이 그런 날이지.""견뎌야만 해요, 그럼?""난 그렇게 생각해." 순간 아, 짧게 소리 낸 켄이 작게 욕설을 내뱉었다. "미안해요. 이런 실수 안 하는데. 아씨, 어쩌지." 콘돔을 착용하는 걸 잊었다. 켄은 바비의 몸에 자신의 진심이 담겨버린 게 두려웠다. "괜찮아, 난 불임이거든." 바비가 말했다. "그 말을 믿니?"도착한 바비가 말했다. 자연광 속에서 그녀의 외적 추함은 더 빛을 발했다. 그들이 만난 강남역 근처 카페는 영어 학원 근방이라 젊고 날씬한 여대생들이 바글거렸다. 이 넓은 카페 어디에도 바비 같은 여자는 바비뿐인 게 켄은 좀 마음에 들었다. 어쨌든, 신선하니까."상관없어요. 낳고 싶음 낳아요. 근데 책임은 못 져요. 내 처지 알잖아." "너같이 예쁜 아들 낳아 혼자 기르는 것도 나쁘진 않겠네.""허튼 소리. 근데 오늘 왜 보자 했어요?""성냥 탑이 궁금하댔지." "내가요?"바비와 밤을 보낸 후에도 켄은 여자들에게 여러 번 몸을 묻었다. 그 밤들은 그 밤대로의 즐거움이 있었다. 성냥 탑 따위도 거의 잊었다. 하지만 켄은 바비의 손을 잡고 카페를 걸어 나갔다. 사람들이 그들을 흘끔거릴 때, 켄은 그들을 쳐다보지 않고도 시선들을 흡수했다. 그는 그들의 생각을 읽을 수 있었다. 사람들이 자신을 쳐다볼 땐 뿌듯하고도 불안했다. 내 날렵한 얼굴선과 큰 눈, 올라붙은 엉덩이와 날씬한 다리가 시선들을 언제까지 붙잡아 둘 수 있을까, 궁금하지만 누구도 알려주지 않는 답을 찾기 위해 켄은 가끔 제 방 전신거울 앞에서 고장 난 오르골처럼 돌고 또 돌았다. 바비에게서 느껴지는 선선한 공기, 그건 한 번도 그런 일을 해 본 적 없는 것 같은 사람의 초연함이었다. 켄은 그런 신선함을 맛본 적 없었다.그들은 외딴 절처럼 교교한 한낮의 모텔을 찾았다. 켄은 낡은 가죽 같은 바비의 피부를 만졌다. 하지만 바비의 속은 켄에게 달고 진득한 커피 같았다. "성냥 줄 수 있는지 인터폰으로 물어봐." 바비가 말했다. 켄은 팬티 바람으로 앉아 위태롭게 쌓인 탑의 좁게 얽힌 안을 골똘히 들여다봤다. 바비의 것과 달리 당장이라도 무너져 내릴 것 같았다. 초조함에, 켄은 손날을 공중에 휘둘렀다. 벤치를 지키는 동안 해는 지고, 누구도 이름을 불러주지 않는다. 떨어진 성냥들을 바비는 가만 보았다. 켄은 머리를 창턱에 기대고 눈을 감았다. "이거 계속 만들 작정이야?" 그는 눈을 감고 모텔 바닥을 아무렇게나 손가락질했다."응, 나는." 바비의 말이 먼 곳에서 울려오는 메아리 같았다.인터폰 속 남자가 대실 시간이 끝났다고 했다. 어지러운 머리로 눈을 뜨니, 침대 옆 원탁에는 한 치의 기울어짐도 없이 완벽한 성냥개비 탑이 쌓여있었다. 나갈 때 카운터 직원은 켄이 혼자 들어왔다고 했다.***눈뜨고 홀을 한 번 둘러봤을 때, 여자들과 눈이 마주쳤다. 그는 자신에게 꽂히는 여자들의 시선을 외면하고 무표정하게 머리를 매만졌다. 어디에도 연희보다 예쁜 여자는 없다. 연희는 최고의 작품이다. 정확한 비례와 조화로 이루어진 새로운 생명체. 날렵한 버선코, 각이라곤 없는 얼굴, 랩을 씌운 듯 매끈한 상앗빛 피부. 안구 빼곤 전부 빚어진, 자연미 따위는 완벽으로써 가볍게 물리치는 신인류. 원시 부족처럼 요란하게 떠들어대는 저 여자들에겐 구시대의 유산이 역력하다. 좋게 말해 동양적이라 칭하는, 모로 찢어진 눈과 둥글게 퍼진 콧잔등, 억세 보이는 사각턱과 누르께한 피부. 아름답지 않은데 노력까지 않는 건 시대정신에 어긋난다. 노력은 문명이고, 우수다. 그는 자신의 노력으로 이뤄낸 자산으로 검은 표범 같은 외제차나 삼천만원짜리 시계를 갖기 원하듯 연희도 그렇게 원했다. "그린티 프라푸치노."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그의 이태리제 물소가죽 로퍼가 카운터로 매끄럽게 걸어갔다. 칠천오백 원씩 삼십 번, 오케이. 수익은 투자를 훨씬 넘어설 거다. 돌아보니 연희는 몸 실루엣이 그대로 드러나는 원피스 아래 길고 흰 종아리를 까닥거리고 있었다. 저 다리에 로우 킥을 날려 부러뜨리고 싶다. 그 상상이 머리를 덮침과 동시에, 그는 음료를 내민 여자 바리스타에게 '당신의 눈동자에 건배'라는 영화 대사를 생각하며 미소를 보냈다. 그녀의 볼이 발개졌다. 돌아와 컵을 내밀자, 연희는 인상을 쓰며 손이 젖으니 종이 냅킨을 감아오라고 말했다. 그는 군말 없이 연희의 명령을 따랐다."집 옮기려고." "어디로? 설마 우리 집으로?" 그가 순간 갈라지는 목소리를 내자, 연희가 싸늘한 눈빛으로 그를 쳐다봤다. "뭔 소리야, 뉴욕에 있는 내 아파트." "아…. 그냥 갖고 있지, 왜." 그는 연희가 물비린내 풍기는 천장이 경사진 욕실, 라면 면발이 말라붙은 냄비가 담긴 싱크대를 보고 경악하는 모습을 떠올렸다. 그런 일은 절대로 일어나서는 안됐다."중동 쪽 이민자들이 바퀴벌레처럼 기어들어오잖아." 연희가 빨대를 쪽쪽 빨았다."근데 오빠, 허리 사이즈 몇이랬지?" "늘 이십팔이지, 왜." "뱃살 좀 붙은 것 같은데." "이틀에 한 번 헬스 나가. 이런 몸매 흔치 않은 거 알잖아." "내가 뭐라 했었지?" 둘은 동시에 말했다. "비만은 미개다.""뉴욕 가기 전에 오빠 허리 1인치 늘면 바로 차버릴 거야.""그래그래, 오늘도 운동 갈게."그는 핸드폰을 치켜들고 홈 버튼을 셔컥, 셔컥 눌렀다. 연희는 시선은 짐짓 먼 데 두고, 음료를 천천히 마셨다. 사진 속 연희는 내추럴하지만 자기 관리엔 충실하면서, 생활의 여유도 즐길 줄 아는 부티 나는 여자였다. 이것은 인스타그램에서 그녀의 추종자들이 보는 연희의 모습이었다. 그는 실제 연희는 그것과는 다르다는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뭔 상관, 그는 헤어라인 시술을 받은 연희의 완벽하게 동그란 이마를 물끄러미 보다, 그녀의 지시대로 사진들을 어플로 편집한 후 전송했다. 연희는 한국 유학생들이 많은 패션 학교에서 마지막 학기를 다니고 있었다. 그녀의 재능은 패션 디자인보단 외모와 집안이었다. 돈 있는 집안에서만 보낸다는 그 학교에도 연희처럼 둘을 겸비한 경우는 잘 없었다. 한편 그에게 여자의 호감을 사는 건 뱅크 오브 아메리카에 입사하는 것보다는 쉬운 일이었다. 어차피 확률은 50%, 되거나 안 되거나. 자연계에서는 절대로 낮지 않은 확률을 놓칠 이유는 없었다.그는 그녀의 교만과 결핍을 읽었다. 머릿결과 피부엔 한 달에 각각 백만 원 넘게 투자하면서 사람 없는 데선 담배를 갈급하게 빨아대는 것, 사람들의 가십을 심심풀이 땅콩으로 즐기는 것. 그는 비뚤어진 속내를 드러내 보이는 부잣집 딸이라 그녀를 노렸다. 흠결 하나 없는 비단 같은 여자는 그가 닿을 수 있는 계급이 아니었다. 연희가 계급적 자부심을 깔고 마음껏 욕설을 뱉을 때, 창남인 그는 일부러 더 품위 있게 굴었다. 마침내 연희는 불운 때문에 밑바닥 환경으로 추락했으나 인성만은 고결한 그에 대한 경계를 거두었다.갑자기 연희가 민첩한 동물처럼 척추를 세웠다. 시선을 따라가니, 유리창 밖 건널목에 한 남자가 서 있었다. 작은 두상과 해사한 얼굴, 긴 다리. 이 동네에 저런 애들 널렸지, 그는 심상히 고개를 돌렸지만 연희는 남자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싶어.""뭐?" "갖고 싶다고, 저런 애." "야, 쟤랑 나랑 다를 게 뭐야. 그리고 저런 말라비틀어진 어린 애는 힘도 못 쓴다.""너." 연희가 만난이래 처음으로 그에게 달콤한 미소를 보였다. "나랑 결혼하고 싶지?" 그는 연희의 완벽한 치열을 멍하니 바라보았다.집에 돌아온 그는 혜진이 냉장고에 차곡차곡 담아둔 유리 반찬통들을 꺼냈다. 호스트바를 찾는 유치원 선생을 사람들은 믿을 수 있을까. 하지만 세상에는 재미있고 고통스러운 일이 꽤 많다. 지방 국립대를 졸업한 그가 여자들에게 몸을 팔며 사는 사실처럼. 혜진은 그가 말하지 않아도 앞치마를 자주 둘렀다. 혜진은 사랑스럽고, 요리도 잘 한다. 하지만 남자가 사랑이란 낱말을 다섯 번만 발음하면 통장 비밀번호도 알려주는 혜진 같은 여자의 약함이 그는 싫었다. 이 세상의 지형도에서 약한 존재에 속하는 그는 연희의 강함을 원했다. 혜진이 만든 반찬을 집어먹으며, 그는 그녀가 식탁에 펼쳐놓고 간 잡지 기사에 시선을 던졌다.외모 가꾸기가 여성의 전유물이던 시대는 지났다. 남성들도 바야흐로 무한 외모 경쟁시대에 돌입했다. 은행원 A(30)씨는 지난해 '중대 결심'을 내렸다. "상사분이 소위 호감형인 동기와 제 실적을 비교한 게 계기였어요. 그 친구의 비주얼이 계약 성사에 많은 도움을 준다고 하더군요. 이젠 남자에게도 외모는 '스펙'임을 절감했죠." A씨는 휴가 동안 '대변신'을 감행했다. 코 시술과 눈매 교정술, 턱 보톡스, 수염 레이저 제모, 눈썹 왁싱을 받았다. "처음엔 독한 놈이라 수군대던 동료들이 지금은 사내 메신저로 수술 정보를 슬쩍 물어 와요. 제 입으로 말하긴 쑥스럽지만 요즘 고객님들에게 지점 최고 미남으로 통용되기도 하고, 실적도 올랐어요. 대만족입니다."그는 생각에 잠겼다. 연희가 바라는 건 자신의 재력으로도 충분히 가질 수 있는 물건이 아닌 것 같았다. 연희가 진정 원하는 건 성의일 것이다. 네가 충실한 내 신하인지 증명해 봐. 하지만 성형이라니. 그는 피부과에서 레이저를 한 번 받은 것 외에 시술도, 수술도 받은 적이 없었다. 하지만 카페 유리창 건너 놈의 얼굴이 떠올랐다. 얼굴이 자신보다 갸름했고, 피부가 희었고, 생각해보니 코도 더 얄쌍했다. 음.그는 핸드폰으로 기사 하단에 나온 병원 이름을 검색했다. 유명한 곳인 모양인지, 남자들의 아우성들 틈에 그 병원명이 간간이 끼어 있었다. "이마 가운데를 가로지르는 주름 때문에 고민이에요. 필러, 레스틸렌, 보톡스 중 뭐가 나아요?" "휴가 동안 쌍꺼풀 예약해 놨는데, 간단한 수술이라지만 여름이라 혹시 덧나지는 않을지…." " '도시락'입니다, 25년 동안 불려온 별명. 저도 이제 여친 사귀고 싶어요." 콤플렉스에 찬 놈들이 이렇게나 많은지는 몰랐네, 그는 코웃음쳤다."임동민님. 임동민님, 어디 계세요?" 푹신한 소파의 여자들 틈에 끼어 앉아 유리 테이블 위에 성냥개비로 탑을 쌓다가, 깜빡 잠이 들어버렸다. 곧 서른인 탓인지 이차를 나간 다음날엔 부쩍 피곤했다. 급하게 일어나다 무릎이 테이블 모서리를 쳐, 성냥들이 바닥에 산산이 흩어졌다. 스튜어디스의 것을 모방한 유니폼을 입은 여직원이 허둥대는 그를 빤히 보았다. 여직원이 인도하는 방에 들어선 그는 눈을 가늘게 떴다. 옷은 다르지만 방금 그 여직원과 거의 비슷하게 생긴 여자가 웃으며 앉아 있었다. "상담실장 박신영입니다. 차트가 잘못 들어온 줄 알았네요." 수완도 좋고, 아름다운 여자였다. 그는 유니폼 아래에서도 양감이 느껴지는 여자의 가슴을 안 보는 척 흘끗 보았다. "하긴 본바탕이 좋을수록 완벽해지고 싶은 게 사람 마음이죠. 원하시는 부위가 어디신지 짐작도 안 가지만요, 호호.""그럭저럭 만족은 하는데요. 좀 동안으로 이미지 변신을 해볼까 해서요.""그래요, 아주 갈아엎지 않으셔도 살짝만 터치해 주는 것만으로 확 달라지실 거예요. 워낙에 본판도 좋으시고, 저희 원장님이 또 동안 성형 쪽으로 전문이시잖아요.""이마에 보형물을 넣으면 어떨까 해요.""필러로 채우지 않으시구요? 보형물은 드물긴 하지만 물이 차고 두통이 오는 부작용으로 종종 빼시는 분들도 있어요." 이 병원은 양심이 있는 편이네, 그는 생각했다."필러는 계속 리터치 해야 된대서요. 휴가를 내기 힘든 직장이라." 사실 오늘 비번이라 성형외과에 상담을 올 수 있던 거였다. 낮에 잠을 충분히 자 두지 않으면 밤에 술을 마셔가며 춤추고 노래 부르기 힘들다. "여의도 증권가 같은 데서 일하시는 거예요? 이미지가 스마트하셔서." 박신영이 콧등을 찡그리며 웃을 때 노란 덧니가 드러났다. 그 작은 불완전성이 그의 마음을 끌었다. 그는 박신영이 자신과 같은 계급이라고 생각했다. 연희의 치아는 라미네이트로 덧씌운 대리석이었다."남자 분들은 아무래도 계속 병원을 방문하는 것보단 한번 크게 고생하시는 걸 택하는 편이죠. 근데 동민님, 혹시 가슴 확대엔 관심 없으세요?""네? 전 남잔데요." 박신영이 웃음을 터뜨렸다. "혹시 대기실 벽에 걸려 있던 코히시브 겔(cohesive gel)을 보셨나요?""여자들 가슴 수술에 쓰는 거잖아요." 그는 피부 밑에 든 그것을 만져본 적도 있었다. 촉감이 탱탱볼이나 젤 마우스 패드 같았다."맞아요. 하지만 남자분들의 대흉근 확대술에 사용되기도 하죠.""대흉근 확대술이요?""네, 코히시브 겔은 전 세계적으로 안전성이 널리 입증됐고, 실리콘보다 안전하면서 식염수보다 촉감이 훨씬 자연스럽죠. 팩 모양만 좀 달리 해서 남자분들 가슴 근육 보강용으로 작년 말 새로 출시됐어요. 미국과 브라질에서는 이미 대중화되는 단계구요, 저희 원장님이 한국엔 최초로 도입하셔서 요즘 강남을 중심으로 알음알음들 많이 찾아주시고 계세요.""별 게 다 있군." 무심히 말했지만 내심 강남에서 많이 온다는 말에 혹한 그의 앞에, 박신영이 책상에 놓여있던 클리어파일을 활짝 펼쳤다. 비포 사진들은 다 말라비틀어진 멸치인데 애프터 사진들의 가슴 근육들은 자신보다 우월해, 그는 이틀에 한 번씩 이를 악물며 바벨을 들어 올리는 자신의 노력이 허탈해졌다. "음, 이쪽도 안전이 보장된 건가요? 남자 가슴 확대술은 금시초문이라.""원리는 유방 확대술과 같은데 오히려 출산과 수유를 겪는 여성의 경우보다 훨씬 안정적이죠. 남성의 경우 보형물 생착도가 더욱 높고, 구축이 생길 위험은 낮고요.""여자분 눈으로 볼 때 제 가슴이 좀 빈약해 보이나요? 솔직히." 그는 박신영의 눈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동자에 건배, 를 속으로 읊으며. 상담실장은 여느 여자들처럼 눈을 살짝 내리깔았다. "솔직히 키에 비해 흉곽이 살짝 빈약하신 게 옥에 티라면 티겠죠. 지금도 너무 완벽하시지만요." 박신영은 문자로 말했다. 곧 학생과 직장인이 몰리는 방학 및 휴가 시즌은 성수기라 수술비가 10% 오르는데, 이번 주 내로 예약하면 오르기 전 비용으로 가능하다고. 그는 친절한 상담에 감사했으며, 이 번호가 실장님의 개인 핸드폰 번호냐고 답문을 보냈다. "연예계 진출하기엔 늦은 나이 아닌가?" 병아리 같은 신입 셋이 새된 오마담의 목소리를 듣고 흥미로운 시선들을 던졌다. "목소리 낮춰." 그는 오마담을 툭 쳤다."연희년 때문에? 열녀, 아 열부 났다." "투자지.""그런 여자들, 남자가 허수아비 같이 구는 건 또 별로일 듯해 할 걸. 나도 예전에 다 맞춰줬다가 돈만 쓰고 차였잖아.""딴 년 낚음 돼." 그는 거울 앞에서 간단한 메이크업을 마쳤다. 오마담이 애먼 보이들에게 소리를 질렀다. "야, 비주얼이 겸손하면 몸놀림이라도 훈훈해라. 선수 형님들이 누님들한테 혀 쓰는 모양으로 꼼꼼히 닦아." 보이들은 호스트가 되고 싶어 찾아왔지만 외모가 한끝 부족해 잡일을 하는 애들이다. 가게 복도를 걸으면, 두꺼운 카펫 때문에 늘 까마득한 지하로 빠져 들어가는 기분이다. 그는 방에서 가장 부유한 아줌마에게 열과 성을 다한 결과 2차를 성사시켰다. 아, 기 빨려. 모텔 입구에서 침을 탁 뱉은 그는 젖은 걸레가 된 기분이었다. 수술비와 일을 나가지 못하는 회복 기간에 들 생활비를 생각하면 허리가 부서지게 일해야 했다.사흘 뒤, 그는 명동의 한 호텔에서 박신영과 시간을 보낸 결과 추가 디스카운트를 얻어냈다."알겠어. 병원엔 내가 잘 말할게.""넌 이제껏 내가 본 여자 중 제일 예뻐. 진심이야." 박신영의 가슴이 감격해하는 척하는 그의 입술을 탄력 있게 튕겨냈다.호텔 문을 나서던 그는, 순간 이마 한가운데를 망치로 맞은 듯한 어찔함을 느끼며 발을 헛디뎠다."괜찮아? 수술 전엔 컨디션 조절 잘 해야 해.""아, 요 며칠 과로해서 그래. 증권 쪽이 워낙 야근이 많잖아." 박신영의 걱정스런 눈길을 뒤로 하고, 그는 택시 뒷좌석에 쓰러져 눈을 감았다. 수술 전까지 열심히 출근 찍어야 하는데 걱정이었다.그는 무남독녀인 연희의 부친이 조만간 국내 유수의 의류 업체를 인수할 예정이라고 들었다. 의류 쪽은 문외한이고 사업체를 물려 줄 아들이 없어, 연희를 외국 의상 학교에 유학을 보냈다고 했다. 그들은 경영 쪽으로 믿을 만한 남자 실무자가 필요했다. 그는 학교 때 나름 열심히 했던 경영학 전공 책들을 떠올리며, 연희에겐 스쿠버다이빙 자격증을 따러 세부에 간다고 말해둔 회복기 동안 부지런히 읽어 두어야겠다고 생각했다.의사, 간호사, 박신영이 관 속에 들어간 그를 내려다보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태연한 척했지만 심장이 거칠게 뛰었다. 수술포 아래로 박신영이 그의 손을 살며시 잡아주었다. "일전에 말씀드렸다시피 가능한 부작용은 근육 박리로 인한 과다출혈, 일시적이거나 영구적인 경련, 국소 감각 상실, 동의서에 사인하셨듯이 전신마취 과정에서의 심장마비입니다. 하지만 혈액검사와 심전도 테스트 결과 아무 문제없으신 걸로 나왔으니, 그냥 푹 주무셨다 일어나세요." 대답하기도 전 입에 마취 마스크가 씌워졌다. 코뚜레 걸린 소가 된 듯한 불쾌감을 느끼며 그는 의식을 잃었다.불덩이가 등 뒤에서 날아왔다. 진땀을 흘리며 돌아본 그의 입에 불덩이가 단숨에 흘러들어와, 목구멍으로 미끄러져 내려갔다. 용암 같은 뜨거움에 숨을 쉴 수 없었다. 그의 위장이 불탔다. 꺽꺽거리는 그의 뺨을 누군가 후려쳐, 눈물 맺힌 눈을 겨우 뜨니 앳된 간호사가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압박 붕대 때문인지 턱뼈가 부서질 것 같고, 졸아든 목구멍에선 피맛이 느껴졌다. 온몸이 절로 덜덜 떨리면서 심한 구역질이 일었다."마취 깨시면서 좀 춥고 역하실 거예요. 그래도 토하심 안 돼요. 힘들어도 참으세요.""무, 물…." "앞으로 다섯 시간은 물 드시면 안 돼요. 자고 일어나면 한결 나아질 거예요." 간호사는 물수건으로 그의 입술을 적셔주고, 높이 매달린 플라스틱 원통 같은 것을 체크한 뒤 화장실에 가고 싶으면 침대 옆의 벨을 누르라고 하곤 나갔다. 무통주사약이 얼른 다 들어오길 바라면서, 그는 온몸을 떨며 개처럼 끙끙 앓았다. 방광에 압박이 느껴져 손을 침대 밖으로 뻗던 그는 비명을 질렀다. 턱에서 따닥, 불꽃이 이는 듯했다. 절개한 입 속에 고인 피를 빼 내는 피통의 고무호스가 눌린 거였다. 그는 흉근 확대술, 사각턱 절제, 이마 보형물 삽입, 코 높임술을 한꺼번에 받았다. 어차피 고생할 것, 한 큐에 끝내기로 했다. 코히시브 겔과 U자형 고어텍스 보형물, 귓바퀴 뼈와 녹는 실이란 이물질들이 그의 몸속에서 원래 조직에 미끈하게 달라붙기 위해 끊임없이 주인을 고통스럽게 했다. 진통제를 계속 투여해도, 가슴과 앞턱이 반으로 쪼개지는 느낌이 주기적으로 덮쳐왔다. 살짝 열린 화장실 문 밖에 링겔대를 잡고 선 간호사를 세워둔 채, 5분에 걸쳐 소변을 보던 그의 머리에 가족이 떠올랐다. 벽돌을 쌓아올린 지게를 지고 달팽이관 같은 좁은 가건물을 오르던 아버지와, 늘 허리가 아프다면서 구부정히 숙인 자세로 마트 바닥을 대걸레로 미는 어머니가. 오랜 시간 소변을 참은 요도가 아파 그는 좀 울었다. 인간의 회복력은 대단해, 입원 첫날 밤새 신음하던 그는 마지막 날엔 집에 가고파 몸이 근질거렸다. 방탄조끼 같은 가슴 보호대 탓에 입원할 때 걸치고 온 점퍼가 붕 떴다. 버스에 얼굴을 정통으로 들이받힌 환자 같은 몰골이었지만, 헥사메딘으로 양치를 하고 터진 입꼬리에 글리세린을 바르니 개운했다. 전날 밤 조용히 그의 병실을 찾았던 박신영을 쳐다볼 겨를도 없이, 그는 피와 침과 소독약이 섞여 악취가 나는 붕대를 풀고, 여기저기 붙은 반창고를 재빠르게 떼어주는 간호사들의 손길에 정신없었다. "얼마쯤 지나야 사람 같을까요?""한 달은 느긋이 기다리세요." 병원의 서비스인 리무진 택시에 올라탄 그는, 백미러 속 자신을 보곤 야구모자를 깊이 눌러썼다. 차량 안 충전기에 핸드폰을 연결시킨 그는 쌓인 메시지들을 확인했다. 오마담이 카톡으로 사진 한 장을 보내왔었다.어제부터 출근한 애. 와꾸 상타침그는 입을 쩍 벌리다 통증에 억, 하며 입을 닫았다. 분명 연희와 카페에 있을 때 유리창 밖으로 본, 연희가 '갖고 싶다'고 한 그 남자애였다. 출국한 연희에게선 아무 연락이 없었다. 그는 역삼동의 좁은 오피스텔에 들어서자마자 가방을 던지고 침대에 누웠다. 왠지 모를 불안감이 출혈에 시달린 그의 의식에 아롱졌다. 그는 완벽한 신랑이었다. 결혼식은 좀 특이해, 연희는 거대한 성냥 탑 안에서 베일을 쓰고 기어 나왔다. 그녀의 어깨에 손을 얹고 다른 손으로 베일을 벗기자, 실리콘이 코끝을 뚫고 나온 박신영이 웃고 있었다. 그녀는 애교스런 누런 덧니를 보이며 웃으면서 그의 몸 곳곳을 손가락으로 찔렀다. "지금도 너무 완벽하신데, 옥에 티예요. 이마가, 코가, 턱이, 가슴이, 피부가, 모두가." 손사래를 치며 깨어난 그는 진통제를 털어 넣었다. 나란히 입국장에 선 몇몇 여자들이 그를 곁눈질했다. 그래, 마음껏들 봐. 아까 거울로 확인한 그의 모습은 자신이 봐도 아그리파 같았다. 그는 여자들을 외면하고, 코트 주머니 속을 더듬어 까르띠에 상자를 확인했다. 그건 단순한 반지가 아니었다. 그의 피와 땀과 눈물의 결정체이자, 새 삶을 열어줄 마법 열쇠였다. 최대한 자연스럽게 머리를 한번 흔들고, 꽃다발을 고쳐 쥐었다. 손에 밴 땀에 꽃을 싼 셀로판지가 바삭거렸다. 그때 카트를 밀고 나오는 연희를 보았다. 그는 손부터 번쩍 들었다. 아직 뻐근한 가슴 통증을 참으며 열심히 손을 흔드니, 연희도 마주 손을 흔들어 주었다. 황급히 걸어 나가는데, 환히 웃던 연희가 카트를 옆으로 꺾었다. 어디선가 불쑥 튀어나온 후리후리한 남자가 연희의 어깨를 다정히 감쌌다. 남자의 실루엣이 왠지 낯익은 것 같았다. 허겁지겁 그들을 쫓아간 그는 간신히 연희의 허리춤을 붙잡았다."어머, 뭐야?" 짝! 뺨에 얼얼한 통증이 일고, 눈앞이 순간 까맣게 닫혔다가 다시 열렸다. 그의 뇌리엔 황망함보다 턱뼈에서 박리된 근육이 아직 완전히 안 붙었을 텐데, 하는 생각이 가장 먼저 떠올랐다. 똑같은 선글라스 너머로, 연희와 키 큰 남자는 뺨을 감싸 쥔 그를 구제 불능의 치한처럼 쳐다봤다."동민씨?" 연희가 경악했다. "아는 사람?" 연희 옆의 남자가 무심히 물었다."너는?" 그는 입을 크게 벌렸다. 연희 옆에 선 남자는 분명 그때 그 카페 유리 밖에 있던 놈, 오마담이 반색하던 그의 직장 동료이기도 한 녀석이었다. 심장이 두근거리고, 머리가 지끈거렸다. 피부 밑 실리콘 보형물들이 열기를 내며 주인을 피날레로 몰고 갔다. 고통 없인 성취도 없다. 마지막에 와 모든 걸 망쳐버릴 수는 없었다. 그는 연희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까르띠에 상자를 내밀었다. "설마 지금 프러포즈하는 거? 대박이다.""넌 빠져." 그가 남자에게 일갈했다."근데 우리 주제를 알아야죠, 선배님." "동민씨, 결혼하면 일 나가기 힘들지 않겠어?"연희와 남자의 비아냥을 듣고, 그는 멍하니 고개를 들었다. 야, 니가 옆에 낀 이 자식도 똑같이 몸 파는 놈이야. 아직 붓기가 다 안 빠져 그렇지, 두 달만 지나면 이 새끼보다 내가 훨씬 나을 거라니까? 어차피 싸구려들이랑 놀 바엔 너한테 더 정성들이는 싸구려를 택해. 성의는 돈으로 살 수 없으니."얘는 못 오를 나무는 안 쳐다봐 좋아.""못 오를 나무?" 그는 무릎을 꿇은 채 연희를 올려다보았다. 표정 없는 연희의 얼굴은 정말 드높은 탑처럼 멀고 고고했다. "가게에서랑 연희씨한테 형 얘긴 대충 들었는데, 이렇게 실제로 보니 정말 인상적이다. 참고할게요, 그 자세는." "됐고, 가자, 내 마르티즈. 아, 동민씨. 호박즙 많이 먹어. 안 먹는 것보단 나을 거야." 연희와 남자가 거짓말처럼 멀어졌다. 쉽게 일어나지 못하는 그를 몇몇 사람들이 흘끗 보았다.그는 공항 출구로 걸어 나가며 셔츠 단추를 풀었다. 정말로, 심리적인 이유가 아니라 실제로 산소가 몸에 안 들어오는 듯했기 때문이다. 붓기가 가라앉으면 재수술 받을 병원을 알아봐야겠다, 생각했다. '바비'의 남자친구 '켄'처럼, 외모뿐 아니라 늘 구김 없는 미소를 짓는 귀족적인 아이덴티티까지 실리콘과 코히시브 젤처럼 이식해 주는 병원을. 휘청거리는 그의 앞을 추월한 사람들이 택시를 가로채 빠르게 달아났다. 붓기와 흉살을 낱낱이 드러내는 밝은 햇빛 속, 온몸이 붕 뜨듯 어지러웠다. 큰 수술 시 과다 출혈로 인한 후유증 중 하나, 일시적 빈혈일 거라 생각하며 그는 허공에 손을 휘저었다.일러스트/박성현기자 pssh0911@kyeongin.com일러스트/박성현기자 pssh0911@kyeongin.com

2017-01-01 경인일보

[2017 경인일보 신춘문예]시부문 당선소감/성영희

당선통보를 받는 순간 일생을 통틀어 가장 즐거운 귀를 경험했습니다. 수화기 반대쪽 귀를 다른 한 손으로 감싸며 이 순간이 제발 꿈으로 빠져 나가지 않길 간절히 바랐습니다. 깜깜하게 닫혀 있던 귀를 열고 그 안쪽에 싱싱한 해조류 한포기 착생하는 듯 짭조름한 눈물이 고였습니다. 돌에서도 꽃이 필수 있다는 것을 보여 준 미역귀, 바짝 마른 미역귀를 물에 담그면 양푼 가득 푸른 바다는 수돗물에서도 탱탱하게 부풀곤 했습니다. 그건 마지막 숨결들을 풀어 놓는 일, 마르기 전의 물살을 기억해내는 일이었습니다. 제 몸을 원래대로 부풀리는 일, 잊지 않겠습니다. 시란 세찬 물길 속에서 소용돌이로 붙어사는 미역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흔들릴수록 어지럽고 어지러울수록 세찬 파도가 더욱 그리운 돌미역 같은 것. 귀를 잃고 난청을 앓는 돌과 바짝 마르면서 웅크린 미역귀처럼 다시 파도를 간절하게 기다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동안 몇 차례의 최종심에서 탈락하면서 깜깜하게 닫혀가던 내 귀에 천 번은 더 흔들려야 비로소 한 줄기 물살로 피어나는 미역귀처럼, 귀를 열고 다시 겸허해지라는 파도의 전언이었던 것 같습니다. 지난주일은 뒤늦은 세례를 받은 날이었습니다. 길고 험한 파도를 지나 기도하는 삶을 선택한 저에게 찾아온 응답이 순은으로 아름답군요. 부족한 시를 끝까지 놓지 않고 격려해주신 심사위원 선생님들과 경인일보에 깊은 감사의 말씀을 올립니다. 또한 시 쓰는 딸을 누구보다 자랑스럽게 여기시며 마지막손을 꼭 쥐어주셨던 아버지와 홀로 남으신 어머니께 가장 먼저 이 영광을 드립니다. 시 쓴다고 아내로 엄마로 부족하기만 했던 저에게 묵묵히 응원의 힘을 실어준 남편과 딸 다영이와 아들 연욱에게 고맙고 감사한 마음 전하며 늘 든든한 방파제가 되어주신 문우님들과 이 기쁨을 함께 합니다.

2017-01-01 경인일보

[2017 경인일보 신춘문예]시 심사평/신달자 시인·유성호 평론가

바위·미역이 엮은 바다풍경 '우리모습'2017년도 경인일보 신춘문예에는 참으로 많은 분들이 응모해주셨다. 그 매체적 위상이 하루하루 높아져가는 경인일보에 수준 높은 작품들이 이렇게 많이 투고되고 있다는 것은 매우 소망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심사위원들은 본심에 부쳐진 작품들을 여러 차례 읽어가면서, 많은 작품이 만만찮은 안목과 역량을 보여주었다는 데 의견 일치를 보았다. 시단에서 주류를 형성한 시풍을 답습하거나 판박이에 가까운 관습적 언어를 보여주는 대신, 스스로의 경험적 구체성에 심의를 쏟은 것도 썩 긍정적으로 생각되었다. 이 모든 것이 한국 시의 좌표를 새롭게 개척해가려는 생성적 면모일 것이다. 심사위원들이 주목해서 읽은 분들을 가나다순으로 밝히면 강성애, 고은진주, 김기란, 김문숙, 나혜진, 성영희, 오세정, 이동우, 임상갑, 하예주 씨 등이었다. 오랜 토론과 숙의 끝에 심사위원들은 성영희 씨의 작품을 당선작으로 결정하게 되었다.당선작으로 결정된 성영희 씨의 '미역귀'는, 바위에 달라붙은 미역줄기의 외관과 생태와 속성을 활용하여 인생론적 깊이를 드러낸 수작이다. '귀'로 살아가는 미역은 비록 깜깜한 청력을 가졌을지라도 언제나 파도처럼 일어서는 '돌의 꽃'이다. 그런데 미역을 따고나면 바위는 난청을 앓게 되고, 그렇게 바위와 미역이 구성하는 바다 풍경이 잠에서 깬 귀를 열어 다시 햇살을 읽어내는 풍경은, 그 자체로 '쫑긋쫑긋' 삶의 이치를 듣게 되는 우리의 모습을 고스란히 은유해준다. 다른 출품작들도 균질적인 성취를 보여 크게 믿음이 갔다. 더욱 성숙한 시편들로 경인일보의 위상을 높여주기 바란다.당선작에 들지는 못했지만, 구체성과 심미성을 갖춘 언어를 통해 자신만의 미학적 성채를 구축한 사례를 많이 발견하였다는 점을 덧붙인다. 대상을 좀 더 일상 쪽으로 구체화하여 우리 주위에서 살아가고 있는 타자들을 애정 깊게 응시한 결실들도 많았다. 다음 기회에 더 풍성하고 빛나는 성과가 있을 것을 기대하면서, 이번 응모자 여러분의 힘찬 정진을 마음 깊이 당부 드린다.■심사위원신달자(시인, 대한민국예술원 회원)유성호(문학평론가, 한양대학교 교수)심사위원 신달자(왼쪽) 시인과 유성호 평론가가 출품작을 살펴보고 있다. /임열수기자 pplys@kyeongin.com

2017-01-01 경인일보

[2017 경인일보 신춘문예]소설부문 심사평/김별아 소설가·방민호 평론가

신인의 패기 '호스트바' 정면으로 다뤄"욕망과 교환의 세계를 묘파한 수작."현실이 소설보다 더 소설 같다. 심지어 일말의 개연성도 없이 지독히 작위적인 하급이다. 이런 마당에 기어이 쓰는, 쓸 수밖에 없는 소설이라니! 161편의 응모작 중 심사자들이 마지막에 논의한 작품은 4편이다. '시취의 기록'은 문장이나 표현은 안정적이나 소재들이 분산되어 명료한 주제를 이끌어내지 못했다. 불분명한 복선 등 혼란스러운 디테일을 정돈할 필요가 있다. '초대'는 안정된 문장에 소설적인 구조를 갖췄으나 결말 처리가 미흡하고 주제가 이야기를 앞서 끌고 나가는 문제점이 지적되었다. '포근하고 복슬복슬한'은 있고도 없는 '토끼'를 잡는 헛짓을 통해 대기업이라는 조직의 허상을 드러낸 우화다. 일단 잘 읽히고 세부적인 장면 묘사가 생생하다는 장점이 있지만 경영논리의 야만성을 드러내기에는 비유와 상징이 허술하고 철지난 것이라는 점이 아쉬웠다. '켄의 세계'는 이를테면 황석영의 1974년 작 '장사의 꿈'의 2016년 판으로, 근래에 뜻하지 않게 온 나라의 평범한 사람들까지 엿보게 된 '호스트바'와 '선수'의 세계를 정면으로 다루고 있다. 전망과 출구를 보여주기에는 한계가 있지만 욕망과 교환의 세계를 사실적으로 묘파했다는 점이 높은 평가를 받았다. 신인다운 패기와 신인답지 않은 성실성이 당선작으로 결정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세상은 중하고 급한 문제들로 가득 차 있고 많은 소설들이 세상보다 뒤처진 채 허덕거린다. 시대와 세태의 변화를 예리하게 감지하는 촉수를 곤두세우고 다만 반걸음이라도 세상을 앞서 나가려 애써야 마땅할 터이다. 당선자에게 축하를 보내며 당선자를 포함한 모든 쓰는 이들의 용맹정진을 빈다. ■심사위원 김별아(소설가)방민호(문학평론가, 서울대학교 교수)심사중인 김별아(왼쪽) 소설가와 방민호 평론가. /임열수기자 pplys@kyeongin.com

2017-01-01 경인일보
1 2 3 4 5 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