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6.25 유엔 참전국 정상들, 전쟁 승리 축하 메시지 통해 한반도 평화 응원

6·25 전쟁 유엔 참전국 정상들이 70년 전의 승리를 축하하는 메시지를 통해 한반도 평화를 응원했다.문재인 대통령이 참석한 가운데 25일 성남 서울공항에서 열린 6·25 전쟁 70주년 기념식에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등 22개 참전국 정상들이 보내온 영상메시지가 상영됐다.트럼프 대통령은 녹화 영상을 통해 "공산주의를 막아내기 위해 용감하게 싸운 모든 분께 감사와 경의를 표한다"며 "유엔 참전국을 비롯해 많은 도움을 준 분들께 우리가 합심해 이룬 성과는 실로 대단하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다, 여러분의 승리를 축하한다"고 밝혔다.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은 "양국의 우정은 프랑스군이 참전해 맺어진 혈맹"이라며 "어제처럼 오늘도, 미래에도 변함없이 여러분 곁에 머무르겠다"고 강조했다.프랑크 발터 슈타인마이어 독일 대통령은 "독일은 올해 통일 30주년을 기념하지만, 한국에게 분단은 아직 쓰디쓴 현실"이라며 "한국이 한반도 평화, 자유, 안정을 추구함에 있어 큰 성과를 거두길 기원한다"고 말했다.시릴 라마포사 남아프리카공화국 대통령은 "남아공은 한반도의 평화와 번영을 바라는 국제사회와 함께하며, 이를 위한 국제적, 지역적 노력을 항상 지지한다"고 말했다.자비에 베텔 룩셈부르크 총리는 "대한민국의 번영하는 경제와 활기찬 민주주의는 우리의 노력에 경의를 표하는 가장 큰 선물"이라며 한국말로 "같이 갑시다"를 외쳤다.카테리나 사켈라로풀루 그리스 대통령은 "그리스 파병군은 한국에 파병된 UN연합군 중 5번째로 큰 규모였다"며 "6·25전쟁은 한국과 그리스 간의 깊은 우정과 협력 관계를 더 견고히 했다. 그리스는 영구적인 평화와 번영을 위한 한반도 통일 노력의 건승을 기원한다"고 전했다.필리프 레오폴 루이 마리 벨기에 국왕은 "오늘 우리는 이 분쟁에 참가한 모든 장병과 희생자를 자랑스럽게 여긴다"며 "지난 70년 동안 많은 분야에서 그래왔듯이, 우리는 평화롭고 지속가능한 세계를 만들기 위해 계속 협력할 것"이라고 밝혔다./이성철기자 lee@kyeongin.com

2020-06-25 이성철

"70년전 이웃간 비극, 세대 잇는 갈등 풀어야"

과거사위 덕적·영흥도 보고서당시 해군작전중 '억울한 희생'민간인 최소한 41명 피살 확인서은미 작가 "사회적 치유 절실"한국전쟁 70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지역사회에서 꺼내기 힘든 전쟁의 상처들이 많다. 1950년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 전후로 인천 섬마을 곳곳에서 터진 민간인 희생사건이 그중 하나다.이웃 간에도 일어난 비극은 현재까지 세대를 잇는 갈등으로 남아있는데, 사회적인 치유가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나온다.정부의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가 2010년 상반기 '진실규명' 결정한 '서울·인천지역 군경에 의한 민간인 희생사건' 조사보고서를 보면, 1950년 8월 18일부터 9월 말까지 현 인천 옹진군 덕적도와 영흥도에서 비무장 민간인 최소 41명이 살해된 것이 확인됐다. 과거사위 조사 때 진술과 자료를 통해 추산된 희생자는 100~150명이다.인천상륙작전 전후로 우리 해군 측이 작전 수행의 길목인 덕적도와 영흥도를 정보수집의 근거지로 확보하는 과정에서 위험요소를 제거하고, 예상하지 못한 작전의 불확실성을 없앤다는 차원이었다. 당시 이들 섬에 적군인 인민군은 없었던 것으로 확인됐다. 민간인 희생 과정에는 같은 섬마을 사람이 가해자도 되고 피해자도 됐다.10년 전 과거사위가 '진실'이라고 규명한 사건이지만, 덕적도와 영흥도의 비극은 널리 알려지지 못했다. 당시 상륙장소 중 하나인 월미도 주민들의 포격 피해는 인천시가 조례로 제정해 지원하는 등 상대적으로 알려진 편이다.월미도 주민들은 터전을 잃고 뿔뿔이 흩어졌지만, 덕적도와 영흥도 주민들과 후손들은 아직 섬에 살고 있다.지자체 차원에서 덕적도·영흥도 민간인 희생사건을 꺼내기가 민감한 이유다.과거사위에서 활동한 신기철 금정굴인권평화재단 인권평화연구소장은 2018년 출판사를 통해 옹진군으로부터 군지(郡誌) 기획 중 현대사 부문을 의뢰받았다. 이후 3개월 동안 옹진군 섬지역 노인들을 만나 한국전쟁 당시 기억과 관련한 구술작업을 진행했다.신기철 소장의 구술작업에는 덕적도와 영흥도 등 민간인 희생사건 내용이 상당수 포함됐는데, 옹진군이 군지를 발행하지 않으면서 이달 중순 '한국전쟁, 전장의 기억과 목소리'라는 제목의 책으로 출간하기도 했다. 한국전쟁기 옹진군 민간인 희생사건을 조사보고서가 아닌 주민들의 증언을 통해 다룬 작업은 이 책이 거의 유일하다.인천문화재단도 지난해부터 한국전쟁 관련 구술·사진 등 자료를 수집해 아카이브화하는 사업을 진행 중이다. 올 하반기 관련 책을 펴내고, 학술회의를 개최할 계획이기도 하다. 인천문화재단 사업에서 옹진군 쪽 구술작업에 참여한 덕적도 출신 서은미 사진작가는 외삼촌이 인천상륙작전 직전 민간인 희생자다.서은미 작가는 "가해자와 피해자가 함께 사는 섬에서는 현재까지도 당사자와 후손들이 반목하고 있다"며 "2010년 과거사위원회가 정부에 권고했던 덕적도·영흥도 희생자들에 대한 위령사업 등을 지금이라도 공공차원에서 추진하는 사회적 치유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박경호기자 pkhh@kyeongin.com

2020-06-25 박경호

[잊혀가는 경인지역 전투현장 그 곳·(2)전쟁의 중심에 선 격전지들]역사를 바꾼 전투, 주무대는 '경기·인천'

북한군 남진 10여일 늦춘 '죽미령''원통이 고개전투' 서울 수복 초석군포 '용문산 대첩'등 전세 큰영향한국전쟁이 시작된 전쟁 초기부터 경기·인천 지역은 주요 접전지로 크고 작은 전투가 벌어졌다. 북한군의 기습으로 서울과 수원이 연이어 함락된 이후에도 '인천상륙작전'과 북진, 중공군 개입에 따른 1·4 후퇴(1951년 중공군의 공세에 따라 정부가 수도 서울에서 철수한 사건) 당시와 재반격, 고지전, 휴전 협정까지 경인 지역은 한국 전쟁의 중심에 서 있었다.1950년 7월 4일 북한군이 수원을 점령할 당시, 미 제24사단의 선발대인 스미스 특수임무부대는 경부 국도 죽미령(현재의 오산)에 배치됐다. 스미스 특수임무부대는 속전속결로 부산까지 진격하려는 북한군과 5일 죽미령에서 만났다. 소련제 T-34 전차를 앞세운 북한군에 스미스 부대는 박격포와 기관포로 맞섰고 결국 개전한 지 6시간 15분 만에 퇴각했다. 비록 패하기는 했지만 죽미령 전투는 미군을 필두로 한 유엔군이 처음으로 북한군의 전력을 가늠해 볼 수 있었던 전투로, 북한군의 남진을 10여 일간 늦출 수 있었다는 평가를 받는다.낙동강까지 밀렸던 국군과 유엔군은 1950년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을 계기로 전환점을 맞는다. 서울 탈환을 위한 진격에 나선 미 해병 제1사단은 서울로 향하는 주요 길목이었던 부평 공략에 나섰다. 17일 북한군 전차 6대와 250명 규모의 보병 부대가 원통이 고개(인천 지하철 동수역과 부평삼거리역 일대)로 진입하자 반격에 나선 미 해병대와 국군은 전차 6대를 모두 파괴하고 보병 200명을 사살하는 전과를 거뒀다. 원통이 고개 전투는 '인천상륙작전' 이후 서울 수복 작전의 디딤돌이 됐다.서울 수복 뒤 북진을 거듭하던 국군과 유엔군은 1950년 10월 19일 중공군의 개입으로 위기를 맞는다. 유엔군과 국군은 1951년 1월 4일 서울을 뺏기고 7일에는 수원도 점령당했다. 이때 경기도 각 주요 지역에서의 승전보는 중공군을 북으로 몰아내는 계기를 만들게 된다. 대표적인 전투가 군포 모락산과 용문산 전투다. 1월 30일부터 2월 3일까지 군포 모락산에서 중공군과 국군의 치열한 백병전이 벌어졌다. 국군의 모락산 점령으로 유엔군과 국군은 1번 국도와 47번 국도를 통제할 수 있게 되면서 서울 재수복의 교두보를 마련하게 됐다.춘계 대공세에 실패한 중공군은 1951년 5월 18일 중부 전선의 요충지인 용문산에서 방어하고 있던 국군 6사단을 공격했다. 3개 사단으로 구성된 중공군은 5일 동안 공세를 펼쳤지만 용문산 점령에는 실패했다. 이 전투는 '용문산 대첩'으로도 불리는데 당시 6사단의 피해는 전사 107명, 부상 494명, 실종 33명으로 보고된 반면 중공군은 1만7천177명이 전사하고 2천318명이 포로로 잡혔다. 이 전투는 중공군은 대공세를 멈추고 휴전 협상에 나서게 하는 계기를 만든다. /이현준·이원근기자 lwg33@kyeongin.com한국전쟁 70주년을 맞은 25일 오후 오산시 죽미령평화공원에 유엔군초전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한국전쟁 당시인 1950년 7월 4일 북한군이 수원을 점령하자, 미 제24사단의 선발대인 스미스 특수임무부대가 오산에 배치되어 죽미령에서 북한군과 격전을 벌였다. 죽미령 전투는 미군을 필두로 한 유엔군이 북한군을 가장 처음 마주한 전투로 평가받는다. 비록 전투에서는 패배 했지만, 이를 계기로 세계 우방국들의 유엔군 참전이 줄을 잇게 되었다. /김금보기자 artomate@kyeongin.com한국전쟁 70주년을 맞은 25일 오후 오산시 유엔군초전기념관에서 관계자가 죽미령전투와 관련된 전시시설을 점검하고 있다. 한국전쟁 당시인 1950년 7월 4일 북한군이 수원을 점령하자, 미 제24사단의 선발대인 스미스 특수임무부대가 오산에 배치되어 죽미령에서 북한군과 격전을 벌였다. 죽미령 전투는 미군을 필두로 한 유엔군이 가장 처음 북한군을 마주한 전투로 평가받는다. 비록 전투에서는 패배 했지만, 이를 계기로 세계 우방국들의 유엔군 참전이 줄을 잇게 되었다. /김금보기자 artomate@kyeongin.com

2020-06-25 이현준·이원근

[잊혀가는 경인지역 전투현장 그 곳·(1)가장 치열했던 전장 '수원']미군 오폭 휘말린 장안문… 2층 중층 누각 완전소실

'북한군 엄폐' 판단 성문 공격해서남안문 등 문화유산 크게 훼손가옥도 2천여호 파괴 피해 심각피난민까지 몰려 농촌으로 분산■ 한국전쟁 당시 파괴됐던 문화유산 수원 '화성(華城)'1950년대 수원에서 유행처럼 퍼진 말이 있었다."남문은 남아있고, 서문은 서 있는데, 북문은 부서지고, 동문은 도망갔네."한국과 미국, 북한과 중국군이 수원을 가장 치열한 전쟁터로 삼으면서 도시가 파괴된 것을 비유한 말이다.특히 수원을 상징하는 화성의 피해가 컸다. 화성 성벽의 곳곳이 총탄을 맞아 부서졌다.그 중에서도 가장 가슴 아픈 것은 수원 화성을 지키는 사대문의 하나인 장안문이 파괴된 것이다. 장안문은 미군의 폭격에 의해 2층 중층 누각이 완전히 소실됐다. 전쟁에서 성곽은 중요한 엄폐도구로 여겨진다. 북한군이 점령했다가 미군의 공격을 받아 철수하는 과정에서 미군은 북한군이 장안문에 엄폐해 있다고 판단, 오인 폭격을 했다. 이때 장안문과 함께 창룡문도 누각이 모두 파괴돼 성문의 반쪽만 남았다. 이밖에도 수원화성은 서남암문의 홍예와 여장이 부서지고 동북노대가 무너지는 고통을 겪었다.■ 고향이 파괴된 수원사람, 고향을 잃은 피난민한국전쟁의 전략적 요충지 역할을 담당했던 수원은 인명피해도 컸다. 1951년 9월 1일 통계에 따르면 수원시 인명피해는 사망자만 480명, 납치자가 40명, 부상자는 55명이다. 행방불명돼 소식을 알 수 없는 이도 289명에 달했다. 재산 피해도 상당했다. 전쟁 전 6천671호였던 가옥이 1천37호가 전소됐고 1천184호가 반소돼 가옥 피해액만 2천182억2천190만환이다. 경인지역에선 인천 다음으로 피해가 컸다.수원역을 끼고 있는 수원은 수많은 피난민들이 모여들었다. 1953년 1월 수원에는 7만명 이상의 피난민이 집결돼 있었고 1일 평균 30명 이상 북한에서 피난민이 이주하고 있었다. 방화수류정을 중심으로 피난민들이 움막을 짓고 피난민촌을 만들며 살았다. 이들 피난민은 이후 세류동, 연무동 등으로 퍼지며 피난민촌은 확대됐다.밀려드는 피난민에 구호품도 부족현상을 겪었다. 이 때문에 경기도는 피난민을 정착시키기 위해 수원 농촌지역으로 이들을 분산 배치하기도 했다.또 전쟁으로 부모를 잃은 전쟁고아들이 많아 1952년 유엔군으로 참전한 터키군이 수원시 서둔동에 '앙카라학원'이란 고아원을 세워 운영하기도 했다. 전쟁이 끝난 후엔 터키 잔류부대가 1966년까지 고아원을 운영했고 이들이 본국으로 돌아간 이후엔 한국인에게 양도됐다고 전해진다. /공지영기자 jyg@kyeongin.com1950년 6월 28일 수원비행장에서 미군 C-54 수송기가 북한군 전투기의 기총소사로 불타고 있다(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이 소장하고 있는 한국전쟁 당시 수원 모습 중 일부로 수원시가 24일 공개한 사진이다). /수원시 제공장안문의 2층 중층 누각이 소실된 모습(수원 출신 곽재용 영화감독이 수십년간 수원의 옛모습을 모아 시에 기증한 사진들 중 일부 ). /수원시 제공수원시내에 방치된 탱크들(수원 출신 곽재용 영화감독이 수십년간 수원의 옛모습을 모아 시에 기증한 사진들 중 일부 ). /수원시 제공

2020-06-24 공지영

[잊혀가는 경인지역 전투현장 그 곳·(1)가장 치열했던 전장 '수원']뺏기고 되찾길 네 번 '포성 끊이지 않은 수원'

수도 역할 대신한 '전략적 요충지' 맥아더 찾아 인천상륙작전 구상도6월이 되면 우리의 마음 한 편에 자리한 서늘함이 고개를 든다. 70년이 지나도 변함이 없다. 1950년 6월 25일 새벽 동이 트고, 아슬아슬하게 이어져 온 한반도의 평화가 총성과 함께 깨지면서부터다. 일제로부터 해방된지 채 5년이 지나지 않았고, 나라다운 나라를 만들겠다며 기대에 부풀어 있을 때였다. 모든 것이 무너졌다. 경인일보는 한국전쟁 70주년을 맞아 '잊혀가는 경인지역 전투 현장 그 곳' 시리즈를 통해 전쟁의 상흔을 기록한다. → 편집자 주전쟁이 시작된 다음날인 26일, 의정부가 북한군에 점령됐다. 서둘러 정부와 국회는 '수원'으로 이동했다. 수도 서울이 무너지면 수원은 서울의 역할을 대신해야 했다. 미국 행정부의 결정에 따라 27일 미극동군사령부가 수원에 전방지휘소 겸 주한연락단(ADCOM)을 설치했다. 전방지휘소는 '수원농업시험장'에 차려졌다. 28일 서울이 북한군에 점령된 후 이승만 대통령은 대전으로 피난을 갔고 육군본부와 주한미군사고문단(KMAG)까지 수원농업시험장으로 본부를 이전했다.수원농업시험장은 한국전쟁 초반, 한미 양군의 전략적 요충지였다. 이 곳에서 한미 양군은 방어작전을 주도했다. 미극동군사령부 사령관이었던 맥아더 장군이 전쟁상황을 시찰하기 위해 29일 수원비행장에 도착하자, 대전으로 피난갔던 이승만 대통령도 수원에 올라왔다. 이때 '인천상륙작전' 등 여러 작전들이 구상됐다. 하지만 방어전략은 오래가지 못했다. 30일 수원 상공을 선회하던 미군 정찰기가 한국군 병력을 적으로 오인해 전방지휘소에 "적의 행군종대가 수원 동쪽에서 서진해 현재 수원으로 접근 중"이라는 잘못된 보고를 하면서 전방지휘소 등 한미 양군의 핵심기지가 수원에서 철수, 대전으로 옮겨갔다. 7월 4일, 북한군은 수원을 점령했다. 수원을 잃자 전세는 완전히 기울었다.이승만 대통령은 맥아더 장군에게 한국군의 작전권을 이양했다.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을 통해 다시 전세가 역전된 후 22일 수원을 수복했다. 특히 일제 때 태평양전쟁의 전초기지로 지어진 수원비행장은 한국전쟁에서 유엔군 수송과 보급기지로 역할을 수행했다.중공군의 개입으로 1·4 후퇴가 발생했고, 1951년 1월 7일 수원은 또 다시 중공군에 점령당했다. 미 제8군사령관 리지웨이는 1월 15일 '울프하운드'와 25일 '선더볼트' 작전을 통해 평택과 오산, 여주 등 수원 인근 지역의 통제선을 조금씩 점령해갔다. 마침내 1월 27일 수원 칠보산을 공격해 수원을 재탈환했다.수원은 4번에 걸쳐 한미 양군과 북한군의 점령과 탈환이 반복됐고 그만큼 치열하게 공방을 벌였다. 수도의 역할을 대신하는 전략적 요충지였기에 감당해야 했던 아픔이다. 이로 인해 수원은 한국전쟁 기간 중 도시의 상당 부분이 심하게 파괴됐고 인명피해는 물론, 넘쳐나는 피난민들로 가슴 아픈 시간을 보내야 했다. /공지영기자 jyg@kyeongin.com1950년 6월 28일 수원비행장에서 미군 C-54 수송기가 북한군 전투기의 기총소사로 불타고 있다(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이 소장하고 있는 한국전쟁 당시 수원 모습 중 일부로 수원시가 24일 공개한 사진이다). /수원시 제공

2020-06-24 공지영

"軍공항 이전 발의 안돼" 화성 민간단체들 팔걷었다

지지부진한 수원 군 공항 이전 사업에 불씨를 되살려 줄 법안이 국회에서 발의되자 화성시가 강력 반발(6월17일자 8면 보도)중인 가운데, 민간단체들도 이에 대한 반대 성명서를 발표하는 등 행동에 나서고 있다.전투비행장 화성이전반대 범시민대책위원회(이하 범대위)와 화성시 주민자치회·통리장단협의회·새마을회·남부수협어촌계협의회 등 시민단체들은 24일 오전 11시 모두누림센터 세미나실에서 군공항 이전 및 지원에 관한 특별법 개정안(이하 개정안) 철회를 촉구하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홍진선 범대위 상임위원장은 개정안에 대해 "이전 부지 지자체의 입장은 외면한 채, 국방부가 일방적으로 법정 기한에 따라 군공항 이전을 밀어 붙이도록 만든 개악 법안"이라며 "이를 저지하기 위해 광주군공항 예비이전후보지로 거론되고 있는 무안군 등 우리와 같은 입장에 놓인 전국 지자체와 연대하겠다"고 입장을 밝혔다. 양일모 화성시 통리장단협의회장도 "(개정안이)국가와 이전 부지 지자체의 입장은 배제하고, 종전 부지 지자체의 재정적 의무를 국가와 이전 부지 지자체에 떠넘기는 내용까지 담고 있는 이기주의적인 성격의 법안"이라고 규탄했다. 이번영 화성시 주민자치회장 역시 "2018년 특별법 개정안이 발의되었을 때도 생업까지 제쳐두고 거리에 나와 싸웠는데, 또다시 우리에게 희생을 강요하려는 법 개악 시도에 대해 우려와 분노를 금할 길이 없다"라고 비난했다.지역 어민들도 생존권에 대한 위협이라며 큰 걱정을 하고 있다. 최병천 어촌계협의회장은 "수원군공항 화성 이전이 강행될 경우 세계가 인정하는 생태 보고이자 미래 세대를 위한 유산인 화성습지의 환경 피해는 불가피하며, 이에 따라 어민들의 생존권도 위협받게 된다"라며 우려를 표했다.한편 이용빈(민·광주광산갑) 국회의원 등 15명은 지난 8일 제21대 국회 1호 법안으로 '군 공항의 이전 및 지원에 관한 특별법 일부개정안'을 발의한 바 있다. 이 법안은 국방부가 이전 예정지 주민 반대를 이유로 절차를 이행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을 해소하고자 예비이전후보지 선정기한과 절차를 규정하고, 국가가 직접 이전 주변지역에 대한 지원사업을 지원할 수 있는 근거를 담았다. 이 때문에 화성시 반대로 사실상 무산된 수원 군 공항 이전이, 개정안을 통해 지역민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다시 추진 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오고 있는 상태다. 화성/김태성기자 mrkim@kyeongin.com전투비행장 화성이전반대 범시민대책위 등 화성지역 시민단체들이 관련법 개정안 발의에 대해 철회를 촉구하고 있다. /범대위 제공

2020-06-24 김태성

안양 최대 숙원 '박달스마트밸리' 탄력

'탄약시설 지하화' 국방부 통보받아市, 지역주민에 진행 보고회 열어최대호 시장 "첫 걸음이 시작된 것"국방부가 박달동의 대규모 탄약시설을 지하화하기로 최종 결정함에 따라 서안양 친환경 융합스마트밸리(이하 박달스마트밸리) 조성이 탄력을 받고 있다. 안양시는 23일 만안구청 강당에서 지역주민 3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박달스마트밸리' 진행에 관한 보고회를 열었다. 박달스마트밸리 조성사업은 박달동 일원에 대규모로 분포된 군사시설을 지하화해 활용이 가능해진 지상 부지에 4차 산업단지 및 주거단지를 조성하는 사업이다. 문재인 대통령 국정운영 5개년 계획에 포함된 것은 물론, 이재명 경기도지사와 최대호 안양시장의 공약사업일 정도로 지역 최대 숙원사업이다. 시는 박달스마트밸리 사업 추진을 위해 지난 2018년 10월4일 탄약시설 지하화 이전 협의요청 및 건의서를 국방부에 제출, 30여 차례 협의를 벌이는 등 지속적인 노력 끝에 지난 15일 국방부로부터 '기부대양여 이전협의'를 통보받았다고 설명했다. 시는 국방부에 현재 안전을 고려해 박달동 280만㎡ 부지에 세 군데로 흩어져 있는 탄약시설을 인근 산자락 지하에 터널을 뚫어 옮길 것을 제안했다. 탄약관리 부대 운영시설을 이 산 A구역 92만㎡에 조성하고, 나머지 190만㎡ 국방부 부지와 일부 사유지 등 218만㎡를 스마트밸리로 조성한다는 계획이다. 이에 국방부는 안양시가 지하에 탄약고를 조성해 주면 국방부 부지 190만㎡를 양여하는 내부 방침을 정했다. 박달동 탄약시설 지하화와 양여부지 조성에 총 1조3천억원이 소요될 것으로 추정되지만 4차 산업 유입으로 인한 경제적 파급효과는 약 7조9천억원에 이를 것으로 전망된다. 또 직접 고용되는 5천명을 포함해 약 4만2천명이 새 일자리를 얻을 것으로 보인다. 시는 앞으로 국방부와 주고 받을 것을 정확히 계산해 합의각서를 쓰는 협상이 남아 있지만 스마트밸리 조성의 첫 단추를 끼웠다고 의미를 부여했다. 최대호 안양시장은 "이번 국방부로부터의 기부대양여 이전 협의 통보는 박달스마트밸리 사업을 위한 첫걸음이 시작된 것을 의미하는 것"이라며 "반드시 박달동 일원을 첨단산업 복합단지 등으로 조성해 지역 경제를 활성화하고 안양을 스마트도시로 자리매김토록 하겠다"고 말했다. 안양/이석철·권순정기자 sj@kyeongin.com23일 안양 만안구청 강당에서 지역주민 대상 3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열린 '박달스마트밸리' 진행에 관한 보고회에서 최대호 안양시장이 추진 상황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안양시 제공안양 박달스마트밸리 위치도. /안양시 제공안양 박달스마트밸리 조성 개발구상(안) /안양시 제공

2020-06-23 이석철·권순정

총이 없어 죽창으로 훈련… '국민방위군' 생존자 첫 증언

이북출신으로 월남하다 대구서 입소공처럼 던져 준 주먹밥 주워 먹기도"터질 수밖에 없는 사건" 심경 밝혀'국민방위군'(6월 15·16·17·18일자 보도) 기획보도 이후 이 사건 생존자의 첫 증언이 나왔다. 경인일보 제4·5대(1967~1971) 편집국장을 역임한 이창식(1930~) 전 국장의 구술을 토대로 대구와 부산 지역 국민방위군 사건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1930년 평양에서 태어난 이 전 국장은 중공군 개입으로 전황이 불리해진 1950년 12월 8일 혈혈단신으로 월남했다. 이 전 국장은 서울 아현동, 인천 지역에 머물다 전선이 남하함에 따라 대구까지 내려가게 된다.이북 출신에 연고가 없던 그는 당시 대구 시내에서 모집 중이던 국민방위군에 지원하게 됐다. 이 전 국장은 "대구 거리에 나가보니 제2국민병이라고 해서 나이 든 사람을 붙들어 가더라구. 그때 국민방위군 개념이 뭐인고 하니 제2국민병으로 해서 국군으로 가면 전장으로 가야 하고 국민방위군은 '지게부대'라고 해서 후방 지원하는 군대라고 해서 되도록이면 안전한 쪽으로 가려고 국민방위군에 들어간 거지"라고 증언했다.당시 대구에는 국민방위군 사령부와 제27교육대가 위치했다. 이 전 국장은 모 초등학교 강당에 마련된 교육대에 입소했는데, 환경이 열악하기 그지없었다. 그는 "1월이니 엄청 추운데 방한 장치도 없고 가마니 두겹을 바닥에 죽 깔아 놓았더라고. 그러면서 밥을 주는데 500~600명 사람들 앞으로 지나가면서 주먹밥을 야구공 던지듯이 하나씩 던지는거라. 캐치하면 먹을 수 있지만, 데구루루 구르면 떡에 고물 묻듯이 볏집 가루가 묻어버려요. 그걸 안 먹을 수 없어서 주워 먹었지. 두 사람 당 모포 1장을 주는데 난방시설이 없는데지만 몇 백 명이 되니까 겨우 체온을 유지했지"라고 말했다.부산 동래로 이동한 뒤에도 참혹함은 이어졌다. "남쪽이라 그런지 대나무가 많았는데 총이 없으니까 훈련을 한답시고 죽창 그걸로 '찔러' 하는 게 다였어. 조선시대도 아니고 목총을 만들어 훈련을 할 정도였으니까. 지금 생각하면 이 사건은 터져야 마땅하고 터질 수밖에 없는 사건이었지"라며 70년 전 과거를 회상하는 그의 말 속에 당시의 답답함이 묻어나왔다. /김태성·신지영기자 sjy@kyeongin.com이창식(91) 전 경인일보 편집국장이 한국전쟁 당시 자신의 사진(액자 왼쪽·당시 21세)을 보여주며 국민방위군 사건의 진상을 설명하고 있다. /김금보기자 artomate@kyeongin.com

2020-06-18 김태성·신지영

[잊힌 군인들 '국민방위군'·(4·끝) 박환 수원대 사학과 교수 인터뷰]"인권탄압으로 민간인 희생… '민주적 군대' 계기 삼아야"

한국전쟁중 '3대 사건' 꼽히지만좌우익 이념대립 없어 주목 안돼역사적 조명 통해 교과서 실려야"국민방위군은 좌우익이 대립하지 않고 벌어진 비극이어서 역설적이게도 주목받지 못했습니다."수원대학교 사학과 박환 교수는 지난 2005년 지역 교육사를 연구하는 과정에서 고 유정수(1925~2010)씨를 만났다. 일제강점기부터 해방 후까지 화성 일대에서 교사로 재직한 유씨의 경험은 향토사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됐다. 15년 전 인터뷰에서 유씨가 지나가듯 털어놓은 이야기가 있다. 바로 국민방위군 경험이었다."저도 처음에는 그걸(국민방위군) 잘 몰랐어요. 2010년 (유씨가) 작고하신 뒤에 다시 집을 찾아가서 향토사를 연구할 자료를 촬영해 왔는데 노트가 하나 있었습니다. 일기처럼 돼 있고 바로 국민방위군 경험을 쓴 노트였어요."이전까지 한국전쟁 중 국민방위군 체험을 담은 기록은 인천의 심재갑씨가 남긴 일기 정도 밖에 없었다. 심씨는 인천에서 배를 타고 제주도로 이동한 것이어서 내륙을 통해 교육대로 간 경험을 서술한 기록은 유씨의 진중일기가 유일한 것으로 보인다.2006년부터 2010년까지 이 사건을 조사한 진실화해위원회는 유씨 일기에 등장하는 청도교육대(제22교육대)에 대해선 조사하지 않았다. 국민방위군 청도교육대 기록은 오로지 유씨의 일기밖에 남지 않은 것이다. 거창양민학살사건, 국민보도연맹사건과 더불어 한국전쟁 중 벌어진 3대 사건으로 꼽히는 국민방위군 사건은 이처럼 제대로 된 사료가 남지 않았다는 이유로 역사적 조명을 받지 못했다.박 교수는 "사료도 없고, 거창양민사건이나 보도연맹사건은 좌우익의 대립으로 발생한 사건인데 비해 국민방위군은 이념을 불문하고 모두가 겪은 사건이기 때문에 오히려 주목을 받지 못했죠. 좌우익 갈등과 대립은 민주정부가 들어서며 실태조사, 공식사과, 역사 바로 세우기가 계속 진행돼 왔지만 국민방위군은 최대 비극 중 하나임에도 불구하고 정부 차원의 사과나 군(국방부)의 사과나 이런 부분이 없고 연구도 되지 않고 교과서에 실리지도 않았어요"라고 강조했다.그는 "(사료나 조사가 없어)정부는 피해를 축소할 수밖에 없고, 희생자는 피해를 과장할 수밖에 없는 상황 속에 국민방위군 사건은 묻히게 됐습니다. 경인일보 보도에서 나타나듯 그 당시 대표적 지식인의 하나인 초등학교 교사가 미시적으로 한국전쟁을 서술한 부분은 전쟁 속에서 인권을 다시 바라볼 수 있게 해줍니다. 이념과 상관없이, 민간인이 희생당한 가장 큰 비극인 인권탄압사건으로 국민방위군 사건을 바라봐야 합니다"라고 설명했다.지금 우리가 국민방위군 사건을 다시 조명해야 하는 이유에 대해선 "이 사건은 교과서에 실려서 앞으로 군이 민주적인 군대가 되고, 인권을 지키는 군대로 거듭날 수 있는 계기로 삼아야 합니다"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김태성·신지영기자 sjy@kyeongin.com박환 수원대 사학과 교수가 17일 국민방위군 사건 재조명 필요성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김금보기자 artomate@kyeongin.com

2020-06-17 김태성·신지영

화성시 軍공항 대응기조 '공격 전환' 주목

이달 종료 시의회 특위 '2년 연장'방어만 한 집행부 강경자세 주문市 '수원시 꼼수 규정' 대책 약속지지부진한 수원 군 공항 이전 사업에 불씨를 살려 줄 법안이 국회에서 발의되자 화성시가 강력 반발하며 대응책을 모색중(6월17일자 8면 보도)인 가운데, 이를 계기로 그동안 소극적 방어에 머물렀던 화성시의 대응 방식이 적극적 공격으로 돌아설지 귀추가 주목된다.'수원시의 꼼수'라며 여론전에서도 밀리지 않겠다는 화성시의 의지표명까지 나와, 양측의 갈등이 더욱 격해질 전망이다. 17일 화성시와 화성시의회 등에 따르면 우선 시의회는 이달 말로 활동기간이 종료되는 수원군공항이전반대특별위원회를 2년간 연장 운영키로 했다.지난 2017년 국방부가 화성화옹지구를 수원전투비행장 예비이전후보지로 선정한 이후 이에 대응하기 위해 설치된 특별위는 그동안 결정 철회를 위한 방안 등을 모색하며 활발한 활동을 벌여왔다.특위는 화성시로의 군공항 이전을 추진하는 움직임이 더욱 거세질 가능성이 있다는 판단에서다.특히 특위가 활동기간 연장을 의결하며 집행부에 강경 대응을 주문한 것이 향후 대응기조 변화를 예상케 하고 있다.그동안 수원시가 군공항 이전을 위해 민간공항 유치까지 거론하며 화성시로의 이전에 대한 여론전을 벌여왔지만, 화성시는 이에 대한 직접적인 대응에는 소극적이었다.이에 대한 주민 불만도 높았다. 화성 서부권의 한 주민은 "수원시는 시 차원에서 적극적으로 움직이며 군공항 이전 홍보를 하지만, 화성시는 상대적으로 주민들에게만 의존해 군공항 이전 부당성을 알려 오히려 의지가 약하다는 느낌을 받았다"고 말했다.이 때문에 화성시 군공항이전대응담당관실은 그동안 소극적 대응에 대한 특위의 지적이 이어지기도 했다.그러자 담당관실은 답변을 통해 "수원시의 왜곡적 정보를 바탕으로 찬성 여론몰이를 하는 홍보행위가 기승을 부리고 있다"며 이를 '꼼수'로 규정하고 대응책 마련을 약속하기도 했다.아울러 특위 내에서는 수원시가 이에 대한 행정기구를 '국'단위로 운영하는 만큼, 현재 '과' 단위인 화성시의 변화모색이 필요하다는 의견도 강하게 대두되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화성/김태성기자 mrkim@kyeongin.com

2020-06-17 김태성

한국전쟁 격랑에 휘말린 수원의 아픔

수원박물관이 한국전쟁 발발 초기 긴박한 전황이 펼쳐지며 전략적 요충지 역할을 했던 수원의 모습과 전쟁의 아픔을 생생히 보여주는 영상물을 발굴·고증해 기록영상물로 편집·공개한다.수원박물관은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NARA : National Archives and Records Administration)이 소장하고 있는 영상 중 수원과 관련한 주요 기록영상들을 발굴하고 고증해 오는 25일 한국전쟁 발발 70주년 기념일에 일반 시민들에게 공개할 예정이다.공개되는 영상은 한국전쟁 발발 70주년을 기념해 만들어진 5분47초 분량의 편집 영상물과 기록영상 등이다.우선 편집 영상물에는 맥아더 장군의 최초 한반도 착륙장소인 수원비행장과 이승만 대통령이 전시상황을 둘러보는 모습이 담겨있다.이어 기록영상에는 ▲1950년 6월 28~29일 한국전쟁 초기의 긴박한 상황 속 전략적 요충지로 활용된 수원 전경 ▲전세가 급변하면서 수원역에 국군과 경찰병력, 소년 정치사상범 등이 이동하는 모습 ▲인천상륙작전과 1·4후퇴 등이 이어지며 수원의 탈환과 재점령이 이어진 끝에 마침내 1951년 1월 28일 재탈환된 수원을 다시 찾은 맥아더 총사령관과 리지웨이 장군이 수원을 둘러보는 장면 등이 담겨있다. 이 밖에 북한군의 공격으로 불타는 미군 수송기의 장면과 피난 갔던 이승만 대통령이 수원비행장으로 돌아와 처치 준장을 만나고, 수원농업시험장에 차려진 임시지휘소로 향하는 모습, 미군 주력부대의 탱크가 수원화성의 장안문을 통과하는 장면 등이 영상에 담겼다.이동근 수원박물관 학예사는 "한국전쟁 70주년을 맞아 수원과 관련이 있는 영상자료를 발굴해 공개하게 됐다"며 "이 영상을 계기로 수원뿐만 아니라 모든 시민이 전쟁의 아픔을 다시 한번 되새길 수 있기를 기대한다"고 말했다. /김영래기자 yrk@kyeongin.com수원역 앞에서 대기 중인 정치사상범들(왼쪽)과 미군 탱크가 수원화성 장안문을 통과하고 있다. /수원시 제공

2020-06-17 김영래

北 '개성 연락사무소' 폭파… 접경지 불안

김여정 '엄포' 사흘만에 실행 옮겨19개월만에 파괴… 남북 파국 우려NLL 등서 추가 군사행동 가능성북한이 16일 오후 개성 남북공동연락사무소를 폭파했다. 대북 전단 살포로 시작된 북한의 대남 강경 조치가 실행에 옮겨지면서 서해 북방한계선(NLL)을 끼고 있는 서해5도, 강화군 등 인천 접경 지역 주민들의 불안감도 한층 높아지고 있다.북한 중앙방송과 중앙 TV는 이날 오후 보도를 통해 "북남(남북)공동연락사무소가 6월 16일 완전 파괴됐다"면서 "14시 50분 요란한 폭음과 함께 북남공동연락사무소가 비참하게 파괴됐다"고 밝혔다. 통일부도 이 같은 북한의 조치를 확인했다고 발표했다.김여정 북한 노동당 제1부부장은 지난 13일 담화를 통해 "멀지 않아 쓸모없는 북남(남북)공동연락사무소가 형체도 없이 무너지는 비참한 광경을 보게 될 것"이라며 건물 폭파를 예고한 지 불과 사흘 만에 속전속결로 실행에 옮긴 것이다. 이로써 지난 2018년 4월 27일 남북 정상이 합의한 '판문점 선언'에 따라 9월 개성에 문을 연 연락사무소가 개소 19개월 만에 사라지게 됐다.북한이 남한을 '적'으로 규정한 뒤 본격적인 행동에 나선 것으로, 남북관계가 파국으로 치닫는 게 아니냐는 우려가 나온다. 대북 관계 전문가들은 북한이 향후 서해 북방한계선(NLL)이나 군사분계선(MDL) 상공에서 군사훈련을 벌이거나 미사일·방사포 등을 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고 입을 모았다. 9·19 군사합의 파기를 명시적으로 선언하지 않더라도, 합의에 연연하지 않는다는 메시지를 행동으로 보여줄 것이란 게 전문가들의 공통된 의견이다.이날 개성 공동연락사무소 폭파 소식이 확인되면서 청와대는 국가안전보장회의(NSC)를 긴급 소집했고 정경두 국방부 장관도 합참 전투통제실로 내려가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 대북 감시 및 대비 태세 강화를 지시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성철·김명호기자 boq79@kyeongin.com軍 감시장비에 찍힌 '폭발 순간' 북한이 개성공단 내 남북 공동연락사무소 청사를 폭파하는 순간이 공개됐다. 국방부는 16일 오후 우리 군의 감시장비로 포착한 영상을 공개했다. 사진은 북한이 공동연락사무소를 폭파한 뒤 화염이 일어나고 있는 모습으로 연락사무소는 물론 주변 건물의 모든 시설물이 피해를 보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국방부 제공북한이 지난 16일 오후 2시 50분경 남북공동연락사무소를 폭파했다고 조선중앙통신이 17일 보도했다. /연합뉴스

2020-06-16 이성철·김명호

[잊힌 군인들 '국민방위군'·(3) 공식사과 없이 묻힌 비극]죽어서도 버림받은 民兵 '국가는 말이 없다'

대다수가 '전사통지서' 도 못받아사망급여금 지급 신청 331명 그쳐진술의존 조사 '진실규명' 어려워"국가유공자로서 예우 등 조치를"진실화해위원회는 지난 2006년부터 2010년까지 국민방위군 사건을 조사했다. 2006년 2월 국민방위군 사건의 진실을 규명해 달라는 첫 청원이 접수됐고, 같은 해 11월까지 전국적으로 모두 14명이 진실규명을 요구했다.화성, 시흥, 양평, 김포, 금산, 제천, 단양, 원주, 서울 등 다양한 지역에서 진실규명 신청이 접수됐지만 60만명 이상이 징집됐던데 비해 피해구제신청은 저조했다. 이는 일반 병사와 달리 국민방위군은 정부나 군으로부터 전사·사망통지를 받지 못했고, 전후에 보훈대상자로 선정되는 과정 없이 사건 자체가 묻혔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1955년에 이르러 국민방위군 사망자에 대한 사망급여금 지급이 이뤄졌지만, 전국적으로 331명이 신청하는데 그쳤다. 사망급여금을 받기 위해선 전사통지서 등 공식적인 전사기록이 필요했는데, 절대 다수의 국민방위군에게 전사통지서가 발송되지 않았기 때문이다.진실화해위원회는 14명의 신청을 토대로 피해가 발생한 현지를 찾아가 조사를 벌였다. 다만, 이미 당시 한국전쟁이 발발한 지 60년이 지나 구체적인 피해를 확인하기는 어려웠다.실제로 진실화해위원회는 "이미 도시화가 크게 진전된 상황이어서 당시 상황을 기억하고 있는 참고인을 거의 만나지 못하였고, 혹시 있더라도 자세한 상황을 알지 못하였다", "유해가 암매장된 곳이라고 주장하는 곳은 현재 경작지로 바뀌어 예전의 모습을 찾을 수 없는 것을 확인하였다"(2010년 상반기 조사서)고 어려움을 설명했다.60년 만에 이뤄진 조사는 증거가 아니라 진술에 의존한 조사였다. 세월은 현장을 바꿔 놓았고, 기억에만 의존한 증언들은 실체를 확인할 수 없었다. 진실화해위원회도 "국민방위군과 관련한 기록이 워낙 희소하다"고 보고서를 통해 토로했다.그럼에도 진실화해위원회의 최종 결론은 국가의 사과가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진실화해위원회는 "국가는 1950년 11월부터 51년 8월경까지 국민방위군 소집·수용 등의 과정에서 발생된 국민방위군의 사망·실종 등 전반적인 실태에 대하여 조사할 필요가 있다. 조사 결과에 따라서 사망자·실종자 등과 그 가족에게 공식적 사과, 위령제 실시, 가족관계등록부 정정 및 전사 또는 순직자에 준하는 국가유공자로서 예우를 갖추는 등 화해를 위한 적절한 조치를 할 필요가 있다"고 권고했다.현재까지 공식 사과는 이뤄지지 않았다. /김태성·신지영기자 sjy@kyeongin.com

2020-06-16 김태성·신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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