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토&스토리] '또다른 지구촌' 오산 대호중학교 전교생 493명 중 다문화학생 73명 전체 14.4%인근 지역 농장·공단 들어서면서 외국인 늘어외부 강사 학생 눈높이 맞춘 한국어 수업 진행'문화적 다양성 인식' 제도적 지원 대책도 시급"안녕하세요, 저의 이름은 파하드 입니다. 감사합니다."방글라데시에서 온 파하드는 서툴지만 한자 한자 또박또박 말했다. 올해 대호중학교에 입학한 파하드는 한국에 온 지 7개월 밖에 안된 다문화 학생이다. 또래 중학교 친구들 덕에 한국 문화에는 조금씩 적응하고 있지만, 언어의 장벽에 가로막힐 때가 많다. 파하드는 "감정을 친구들에게 이야기하고 싶지만, 마음처럼 되지 않아서 가끔은 외톨이가 되는 것 같다"며 속상해했다. 한국어에 미숙한 다문화 학생을 위해 대호중학교는 매년 한국어 교실을 진행하고 있다. 파하드는 친구들에게 한 걸음 더 다가서기 위해 스스로 한국어 교실을 신청했다. 아직 모든 게 낯설고 어색하지만, 파하드는 똘망똘망한 눈빛으로 한국어를 배우려는 의지는 누구보다 남달랐다.경기도교육청에 따르면 도내 31개 시·군 지역별 초·중·고 다문화 학생 수는 작년 기준 4만8천966명이다. 2022년도 대비 학생 수는 10.9% 증가했다. 올해 4월 기준 대호중학교 전교생 총 493명 중 다문화 학생은 73명으로 전체 인원의 14.4%를 차지한다. 이러한 대호중학교 다문화 학생 비율은 오산 관내 중학교 중에서 가장 많다.학교 관계자는 "화성·평택 등 인근 지역에 농장 및 공업단지가 들어서면서 다양한 외국인 노동자들이 정착하기 시작했다"며 "오산지역이 다문화인들이 많이 거주하는 곳으로 알려지면서 그 수도 점차 증가했다"고 설명했다. 대호중학교에는 중국, 일본, 우즈베키스탄, 방글라데시, 카자흐스탄 등 다양한 국적의 학생들이 모여있다. 다문화 학생들 중에는 어릴 적부터 한국에서 성장해 한국어에 능통한 학생도 있는 반면, 아직 한국어 및 한글 학습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학생들도 있다. 이러한 학생들을 위해 대호중학교는 화성오산교육지원청에서 한국어 교실 사업을 지원받고 있다. 한국어 자격증을 지닌 외부 강사를 채용해 학생들의 눈높이에 맞는 참여형 수업을 진행한다. 이를 통해 교과 과정에 대한 이해도를 증진하고, 의사소통의 활성화를 도모할 수 있게 됐다는 설명이다.최항규 대호중학교 교장은 "경기도 내 다문화 학생들이 증가하는 가운데 다문화 학생들과 일반 학생들이 문화적 다양성을 인식하고 함께 생활할 수 있도록 제도적인 지원이 시급하다"며 "한국어 교실 등 다양한 교육 프로그램이 확대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글·사진/최은성기자 ces7198@kyeongin.com대호중학교 다문화 학생들이 학교 운동장에서 손을 흔들고 있다.올해 한국어 교실을 신청한 다문화 학생들이 한글을 쓰고 있다.방글라데시 국적을 가진 3학년 파하드가 도서관에서 친구들과 책을 읽고 있다.알리나가 점심시간에 친구들과 급식을 받고 있다.카자흐스탄 국적을 가진 2학년 알리나가 한문 수업을 듣고 있다.파하드가 점심 시간에 친구들과 축구를 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다.
[우리가 세월호를 기억하는 방법] 세월호 이전 인천의 참사들 존재 이유 잘 모르거나… 접근 어려워"추모 통한 기억, 트라우마 해소 도움"세월호 참사(2014년 4월16일) 이전에도 인천에서는 많은 희생자가 발생한 참사들이 있었다. 인천 곳곳에서 위령탑 건립과 추모제 개최 등의 방식으로 참사의 기억을 시민들과 공유하고 있지만 한계도 있다.1999년 발생한 인천 중구 인현동 화재는 57명이 숨진 대형 참사로 기록됐다. 그해 10월 30일 인현동 한 상가건물에서 발생한 화재로 2층에 있던 10대 중·고교생 등 57명이 숨지고 80여 명이 다쳤다. 인천시교육청은 청소년들의 문화 공간을 마련한다는 취지로 2004년 참사 현장 인근에 학생교육문화회관을 세웠다. 당시 문화회관 뒤편에 추모비만 설치됐을 뿐 참사 내용을 기록한 안내판조차 없었다. 청소년 등 방문객들도 왜 이곳에 문화회관이 생겼는지 모를 수밖에 없었다. 20여 년이 지난 2023년에야 유가족들과 시민단체 요구로 참사 내용을 기록한 비석이 설치됐다.인현동 화재 참사 유족회 이재원 회장은 "문화회관 내부에 상설 추모 공간이 마련되길 원했지만, 흐지부지됐다"며 "올해가 참사 25주기인데 시민들이 참사에 대한 기억을 잊어버릴까 봐 걱정된다"고 토로했다.2010년 3월26일 서해 최북단 섬인 인천 옹진군 백령도 앞바다에선 천안함 침몰 사건이 있었다. 실종자 수색 작업에 참여했다가 4월2일 인천항으로 복귀하던 어선 98금양호가 외국 화물선과 충돌해 선원 9명이 숨졌다. 이들의 넋을 기리기 위한 위령탑은 이듬해 중구 역무선부두 한편에 마련됐다. 하지만 인천 시민조차 이를 잘 모른다. 최근엔 98금양호 희생자 위령탑으로 향하는 길목이 공사로 막혀 조문하기도 여의치 않다. 금양호 선장이었던 고(故) 김재후씨의 동생 김재흥씨는 "선원 유가족들이 따로 기일을 챙기는 것으로 알고 있지만, 유가족 간 교류는 거의 끊긴 상태"라며 "사고 당시엔 많은 관심을 받았지만, 잊히는 것은 한순간이었다"고 아쉬움을 드러냈다.2011년 7월 강원도 춘천에선 산사태로 이 지역에 봉사활동을 갔던 인하대 학생 10명이 안타깝게 목숨을 잃었다. 인하대와 유가족들은 참사 10주기인 2021년까지 매년 교내에서 추모제를 열었다. 이후엔 참사 날짜를 따서 '리멤버 0727' 사회봉사장학금을 조성했다.단국대 심리치료학과 임명호 교수는 "세월호 등 대규모 참사의 기억은 시민에게도 희생자들을 지켜주지 못했다는 죄책감과 트라우마로 남아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추모를 통해 참사의 기억을 반복적으로 꺼내는 것은 유가족뿐만 아니라 시민들이 트라우마를 해소하는 데 도움이 된다. 시민들이 쉽게 찾을 수 있는 곳에 추모 공간을 조성하는 것은 그래서 바람직하다"고 했다. /정운·백효은·정선아기자 100@kyeongin.com1999년 10월 30일 인천 중구 인현동 화재 참사 이후 화재 현장 인근에 인천학생교육문화회관과 위령비가 세워졌으며 지난해에야 유가족들의 요구로 참사 내용을 기록한 비석이 들어서는 등 추모 공간으로 확대 조성됐다. 2024.4.17 /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천안함 사건 실종자 수색 작업에 참여했다가 2010년 4월 2일 복귀 중 침몰한 어선 98금양호 희생자 9명을 기리는 위령탑이 인천 중구 역무선 부두 한편에 마련됐지만 최근에는 위령탑으로 향하는 길목이 공사로 막혀 접근이 어렵다. 2024.4.17 /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
[우리가 세월호를 기억하는 방법] 세월호 참사가 가져온 변화들 인천항 연안여객터미널은 세월호가 출발한 곳이다. 수많은 희생자를 낳은 세월호 참사는 인천이라는 도시에도 적잖은 변화를 일으켰다.10년 전인 2014년 4월16일 세월호 참사가 발생한 직후 인천~제주 카페리(여객과 자동차를 실어 운반하는 배) 뱃길은 끊겼다. 10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정상화되지 못하고 있다. 세월호 참사 7년여 만인 2021년 이 항로에 선사 '하이덱스스토리지'가 카페리를 투입해 운항을 시작했으나, 초기부터 선박 이상 등 차질을 빚었다. 선사는 휴항과 재개를 반복했고 결국 항로 운영을 포기했다.인천은 섬이 많은 해양도시다. 특히 세월호 참사를 계기로 승객 안전 등 선박 관리 체계가 대폭 개선됐다. 세월호 참사 이전과 달리 여객선에 탑승하는 모든 사람은 신분증을 제시해야 한다. 세월호 참사 당일 탑승객 명단과 실제로 배에 탄 사람이 일치하지 않는 등 국내 승선 관리의 허점이 드러났다. 이 때문에 정부는 구조 활동 초기에 큰 혼선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이와 함께 세월호 참사의 한 원인으로 지목된 '선박 기울어짐'을 방지하기 위해 화물 고박 점검 등도 더욱 철저해졌다.해양경찰청은 세월호 탑승객을 제대로 구조하지 못한 책임을 지고 박근혜 정부 당시 해체됐다가 문재인 정부 때 부활했다. 해경은 그동안 수색·구조 등 현장 대응 역량을 강화하는 데 주력했다.세월호 참사 이후 '안전'에 대한 지역사회의 관심도 커졌다. 2021년 인천엔 '인천국민안전체험관'이 들어섰다. 인천시가 건립한 이 체험관은 선박과 항공기 사고, 화재 등 각종 재난재해 상황을 체험하고 적절한 대응법을 배울 수 있는 다양한 시설을 갖췄다. 개관 첫해인 2021년 6천888명이던 방문객은 지난해 11만4천82명으로 많이 늘었다. 누적 방문객은 21만명을 넘어섰다. /정운·백효은기자 jw33@kyeongin.com
박지영 승무원·이광욱 잠수사 등 봉안 중앙엔 세월호 모형·사고전 CCTV 영상제자들과 찾은 교사 "잘 몰랐던 학생들도일반인 희생자 사연 들으며 더 관심 가져""이맘때면 떠난 어머니 더 그리워져…""며칠 있다 온다던 아들…" 유족들 아픔계속된 '사회적 참사' 위로·연대 구심점"추모공간, 안전위협 인지 시각적 의지"세월호 참사가 발생한 지 2년 만인 2016년 4월16일 인천 부평구 승화원(인천가족공원)에 '세월호 일반인 희생자 추모관'이 문을 열었다. 정부가 수많은 희생자를 낳은 세월호 참사를 잊지 않겠다고 약속하며 설립한 첫 추모 공간이다.■ 일반인 희생자들을 기리다세월호 일반인 희생자 추모관에는 세월호 탑승객과 선원 등 43명, 사고 직후 이들을 구하려다 목숨을 잃은 민간 잠수사 2명 등 일반인 희생자 45명 중 44명의 봉안함이 안치돼 있다. 일반인 희생자 중에는 여행을 떠난 가족, 환갑을 맞이한 동창생, 출장길에 오른 직장인 등 세월호에서 영문도 모른 채 죽음을 맞이한 안타까운 사연이 많다. 경기 안산 단원고등학교 학생·교사들을 구조하려다 탈출하지 못하고 끝내 숨진 승무원 박지영씨 등 의인이 안치된 곳이기도 하다.추모관은 세월호 참사 관련 자료와 희생자 유품 등이 전시된 추모실, 일반인 희생자들의 봉안함이 있는 안치실로 나뉘어 있다. 추모실에서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건 중앙에 있는 세월호 선체 모형이다. 세월호 도면을 토대로 원래 크기의 68분의1로 줄인 모형 내부엔 방문객들이 추모하는 마음을 담아 넣어둔 노란 리본이 가득하다. 벽면에 붙은 16개 CC(폐쇄회로)TV 화면은 세월호가 인천항을 떠날 때부터 침몰 7분 전까지의 모습을 보여준다. 자전거 전국 일주 마지막 여행지로 제주도를 정했던 동호회원의 자전거 헬멧, 제주도로 출장을 가던 직장인의 사원증, 가방에 넣고 꺼내 읽던 책 등 일반인 희생자들의 유품도 전시돼 있다.세월호 참사 2주기에 맞춰 2016년 개관한 추모관에는 희생자들을 기리기 위한 이들의 발길이 꾸준히 이어지고 있다. 개관 이듬해인 2017년 1만7천여 명에서 2018년과 2019년에는 2만2천여 명으로 방문객이 늘었다. 코로나19가 확산한 2020년부턴 방문객이 1만명대 밑으로 떨어졌지만 지난해 다시 2만여 명을 회복했다.세월호 참사 10주기를 맞은 지난 16일 일반인 희생자 추모식에서 만난 최우연(62·경기 화성)씨는 "인천에서 살다가 화성으로 이사했지만 매년 추모관을 방문해 세월호 참사를 잊지 않으려고 노력한다"며 "많은 시민이 추모관을 찾으려면 전시품이 많아지고, 문화 축제 등 다양한 행사도 필요할 거 같다"고 말했다. "매년 4월이 되면 학생들에게 세월호 참사에 대해 가르칩니다. 교실에서 관련 영상을 보여주는 것보다 학생들이 직접 추모관을 찾아가 보고 느끼는 게 좋을 것 같아 견학을 권유했습니다." 지난 12일 인천구산중학교 역사문화체험동아리 제자들과 함께 추모관을 찾은 김웅호(50) 교사는 "학생들은 10년 전 세월호 참사에 대해 잘 모르거나 '세월호 참사' 하면 단원고 학생만 떠올리는 경우가 많았다"며 "학생들이 추모관에서 일반인 희생자 사연을 들으면서 세월호 참사에 대해 더 관심을 가지게 됐다"고 말했다.■ 추모문화제 등 위로와 치유의 과정추모관은 세월호 참사 희생자들의 넋을 기리거나 유가족을 위로하고 안전의 중요성을 체험하는 다양한 행사를 열고 있다. 추모관 앞에 노란 바람개비를 설치한 '노랑드레 언덕 설치 행사', '안전 문화 포스터 그리기 대회' 등을 꼽을 수 있다. 또 세월호 참사 8주기인 2022년부턴 시민들과 함께하는 추모문화제를 열어 각종 음악 공연, 글쓰기 대회 등을 개최하고 있다.세월호 일반인 희생자 고(故) 신경순씨의 아들 김영주(49)씨는 "매년 이맘때면 세월호 참사로 세상을 떠난 어머니가 더욱 그립다"며 "4월16일을 앞둔 주말에는 슬픈 마음을 달래고 시민들과 함께하고자 추모문화제를 준비하고 있다"고 했다.지난 13일 인천시청 앞 인천애뜰(광장)에서 열린 세월호 참사 10주기 추모문화제에서 만난 이지연(58·서울 강서구)씨는 "추모문화제에 참석하는 길에 일반인 희생자 추모관도 알게 돼 방문하고 왔다"며 "희생자를 잊지 않고 추모하는 분위기가 앞으로도 이어졌으면 하는 바람"이라고 했다.추모관은 생존자 등 상대적으로 주목받지 못한 세월호 참사 피해자들을 조명하기 위한 활동도 펼치고 있다. 지난 2월에는 제주도에 사는 세월호 생존자들이 마음의 상처를 극복하고자 그려낸 그림 전시회를 열기도 했다. 지난해엔 세월호 참사로 실종된 이들을 수색한 민간 잠수사들의 이야기를 담은 영화 '로그북' 상영회를 열었다."아들한테 '나 어디 좀 갔다 올게'라고 전화가 왔어요. 밥해 놓을 테니 집에 들르라고 하곤 부랴부랴 식사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다시 전화가 오더라구요. 시간이 없다고, 며칠만 있다 올 거니까 걱정 말라고…." 세월호 실종자들을 구조하기 위해 차디찬 바다에 뛰어들었다가 숨진 잠수사 고(故) 이광욱씨의 어머니 장순자(86·경기 남양주)씨는 "10년 전 일이 아직도 선명하다"며 이렇게 당시를 떠올렸다. 그는 "진도 팽목항으로 사람들을 구하러 갔었단 건 나중에 알았다"며 "10년이 지나도 변한 건 없다. 죽은 아들을 생각하면 불쌍하고 가슴이 아프다"고 했다.■ 추모, 그 너머를 보다세월호 참사 이후에도 청주 오송 지하차도 참사, 10·29 이태원 참사 등 이른바 '사회적 참사'가 계속되고 있다. 그래서 추모 공간은 희생자들의 넋을 기리는 기능을 넘어 유가족과 생존자, 참사를 지켜본 시민들에 대한 위로와 치유, 그리고 사회적 참사를 막기 위한 연대 활동 등을 지원하는 구심점이 되고 있다. 이태원 참사로 세상을 떠난 고(故) 유영주씨의 아버지 유형우(55·서울 중구)씨는 "국가가 추모 공간을 마련한다는 건 사회적 책임을 인정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며 "추모 공간은 피해자와 유가족들이 모여 서로를 위로하고 추모식, 기자회견 등을 준비하며 결집할 수 있는 공간"이라고 했다.추모 공간은 오랜 세월이 지나도 당시 참사를 잊지 않도록 환기하는 역할도 한다. 세월호 참사 10주기 인천위원회에서 활동한 사회적협동조합 인천자바르떼 이경옥 대표는 "세월호 참사를 추모하는 공간이 있다는 건 우리가 안전이 위협받는 상황을 예민하게 인지하고 세월호의 기억을 이어가겠다는 의지를 시각적으로 보여준다"고 말했다. /정선아기자 sun@kyeongin.com인천에서 유일한 사회적 참사 추모관인 '세월호 일반인 희생자 추모관'은 개관 8년동안 매년 1만여 명의 시민들이 찾는 공간으로, 세월호 참사뿐만 아니라 다른 참사에 대한 기록·기억을 공유해가고 있다. 2024.4.17 /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
[우리가 세월호를 기억하는 방법·(4)] 참사 후 10년, 인천의 추모 공간 부평 승화원서 일반인 희생자 기려10周 맞아 기능 확대 필요성 제기시민공동체 유대감 형성 기여 강조인천 부평구 승화원(인천가족공원)에 조성된 세월호 일반인 희생자 추모관(이하 추모관)은 사회적 참사를 다룬 인천지역의 유일한 '추모관'이다. 세월호 참사 10주기를 맞아 추모관의 기능을 확대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2016년 문을 연 추모관은 지난해 2만여 명이 방문하는 등 많은 사람이 찾고 있지만 다양한 교육·행사를 진행하기엔 협소하다. 전시 내용이 바뀌지 않는다는 점도 개선해야 할 과제로 꼽힌다. 추모관에서 일하는 서미랑씨는 "공간이 좁아 학생들이나 단체객이 다 함께 모여 이야기를 나누거나 교육을 진행할 공간이 없다"고 했다. 이어 "안전교육을 실시하거나 시민들이 활용할 수 있는 공간이 확보된다면, 더욱 다양한 활동이 가능해질 것"이라고 했다. 매년 추모관을 찾는다는 최우연(62·경기 화성)씨는 "내부 전시품이나 조형물이 달라지지 않는다는 점은 아쉽다"며 "개관 이후 추가로 드러난 사실이 있음에도 담아내지 못하고 있다"고 했다.인천에선 중구 인현동 화재(1999년), 금양호 침몰(2010년) 등 세월호 이전에도 여러 참사가 발생했지만 추모관이 조성되지 않았다. 인천 연수구에 인천상륙작전기념관이 있지만 국가 간 전쟁과 관련돼 있다는 점에서 추모관과 성격이 다르다. '추모'라는 공통의 목적을 가지고 있는 위령탑 등도 규모와 시설 측면에서 추모관과 기능을 달리한다.이러한 점에서 세월호 일반인 희생자 추모관을 '연대의 장'으로 확대 활용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다. 그런 움직임은 시작됐다. 추모관은 지난 2022년 '5·18, 4·16 삼행시 백일장'을 열었다. 이 행사는 세월호 참사와 1980년 5월18일에 있었던 광주민주화운동을 잊지 말자는 취지에서 기획됐다. 추모관은 세월호와 다른 참사에 대한 기록·기억을 공유하고 알리는 방안을 고민하고 있다. 추모관 전태호 관장은 "세월호 시민행진, 추모문화제 등 세월호 관련 행사에 10·29 이태원 참사, 가습기 살균제 참사, 인현동 화재 등 사회적 참사 피해자들이 동참하는 등 연대를 이어가고 있다"고 했다. 이어 "추모관이 협소해 다른 사회적 참사 추모 공간을 마련하거나 관련 프로그램을 진행하긴 어렵지만, 공간이 확대되면 다른 참사들과 연대해 다양한 행사·프로그램을 추진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전문가들은 참사와 관련한 추모 공간이 사회적으로 긍정적 기능을 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경희대 사회학과 김종영 교수는 "추모 공간은 인류가 기억해야 할 참사에 사회적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라며 "시민 공동체가 유대감을 형성하고, 안전한 사회로 가자는 메시지를 지속적으로 줄 수 있다"고 했다. → 관련기사 (살아남은 자의 슬픔을 치유하다 '인천 일반인 희생자 추모관' [우리가 세월호를 기억하는 방법·(4)]) /백효은·정선아기자 100@kyeongin.com인천에서 유일한 사회적 참사 추모관인 '세월호 일반인 희생자 추모관'은 개관 8년동안 매년 1만여 명의 시민들이 찾는 공간으로, 세월호 참사뿐만 아니라 다른 참사에 대한 기록·기억을 공유해가고 있다. 2024.4.17 /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
시장 한파에도 年900억 매출… "미래 먹거리 준비한 결과" 2004년 사업 확장… 당시 매출 10배 차이 남동산단 하이텍 공장 인수주 소비재 아니던 의료·항공우주 장비로 영역 확대… 앞서간 행보경험에서 우러나온 과감한 판단력… 직원 발전에도 아낌없이 투자국내에 '1인 기업'이라는 개념이 생소했던 1997년 봄, 20대 중반의 한 여성이 서울 구로디지털단지에 과감하게 PCB(인쇄회로기판) 설계 기업을 창업했다. 창업자금으로 모은 돈은 1천만원 남짓. 그마저도 사무실 임대료를 빼면 수중에 남은 돈은 거의 없었다.삼성전자와 LG전자 등 대기업들이 시장을 잡고 있던 PCB 설계 분야에서 계란으로 바위를 치듯 도전장을 낸 이 1인 기업은, 27년이 지난 지금 350명의 임직원을 둔 인천의 대표적인 강소기업으로 자리매김했다. 지난해 글로벌 반도체 시장 한파에도 900억원이 넘는 매출을 올린 (주)이오에스 이야기다.■ '낮에는 영업, 밤에는 설계' 매진한 사업 초창기이오에스는 지난달 4일 열린 '제58회 납세자의 날' 시상식에서 동탑산업훈장을 받았다. 산업훈장 가운데 금탑과 은탑에 이어 3번째 등급에 해당하는 동탑산업훈장을 중소기업이 받는 경우는 흔치 않다. 이오에스 김미경 대표는 "대기업이나 중견기업이 주로 받는 영예로운 훈장을 받게 돼 영광"이라며 "이오에스 창립 20주년을 맞은 올해 수훈하게 돼 더욱 뜻깊다"고 했다.김 대표는 1997년 이오에스아이라는 1인 기업을 창업했다. 대학을 졸업하고 3년 동안 컴퓨터지원설계(CAD) 관련 기업에서 일하다가 PCB 설계 사업에 뛰어들었다. 국민소득이 1만달러를 돌파하면서 전자제품 시장이 급성장하던 시절, PCB 산업 역시 하루가 다르게 성장하고 있었다. 김 대표는 "낮에는 PCB 설계도 납품을 위한 영업을, 밤에는 설계 작업에 매달리는 일상의 연속이었다"며 "집에서 잠을 자는 건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바쁘게 일했다"고 했다.■ 설계부터 제조까지 원스톱으로… '이오에스'의 탄생성실성에 꼼꼼함이 더해지면서 김 대표가 제작한 PCB 설계도는 업계에서 입소문을 타고 퍼졌다. 하지만 그는 설계도 납품에만 만족하지 않았다. 직접 PCB를 제작하는 제조업까지 사업을 확장해야 경쟁력을 키울 수 있다고 판단했다.기회는 가까운 곳에서 찾아왔다. 김 대표의 남편인 정채호 이오에스 공동 대표이사가 당시 재직 중이던 인천 남동산업단지의 PCB 제조기업 하이텍의 공장 건물이 매물로 나오자, 두 사람은 과감하게 이 공장을 인수하고 기업을 확장하기로 했다. 그렇게 PCB 설계부터 제조, 부품 조립까지 모든 공정을 아우르는 원스톱 PCB 전문기업 이오에스가 2004년 탄생했다.이오에스 설립 당시 회사의 매출 규모는 10억원을 웃도는 수준이었다. 반면 하이텍의 연 매출액은 130억원에 달했는데, 매출 규모가 10배나 큰 기업을 인수하는 것은 상당한 위험을 감수하는 일이기도 했다. 그럼에도 김 대표가 이러한 결정을 내린 건 이미 레드오션이 된 PCB 시장에서 차별화된 길을 걷기 위함이었다. 김 대표는 "2000년대 들어서면서 국내 PCB 업체는 4천개에 달했고 그만큼 경쟁도 치열했다"며 "시장에서 요구하는 PCB의 트렌드는 빠르게 변화하고 있었는데, 이를 따라가려면 대량 생산이 아닌 다품종 소량 특수보드 생산 분야의 투자를 확대해야겠다는 결론을 내렸다"고 했다.2000년대 중반만 해도 PCB가 쓰이는 분야는 주로 자동차 엔진과 전장, 컴퓨터와 TV 등 소비재가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이오에스는 이 시기부터 의료장비와 안전·보안장비, 한 발 더 나가 항공우주와 군사·방위 산업 분야까지 영역을 확대했다. 항공우주와 군사·방위 기술 분야는 2005년 당시 국내에서 생산되는 PCB가 전무한 상황이었는데, 이오에스는 고부가가치 PCB 시장을 선점하기 위한 행보에 나섰다.김 대표는 "당시 국내에는 PCB의 품질 기준이 정립되지 않았고, PCB 기술을 가진 중소기업들이 항공우주 분야의 생산 납기를 맞추기도 어려웠다"며 "미국과 유럽, 일본 등의 PCB 품질 기준을 표준 삼아 이오에스 만의 특화 기술을 갖추는 데 집중했다"고 했다.■ 인공위성·방위산업 등 국산화 사업 기여…'금탑산업훈장이 다음 목표'이오에스의 이후 행보는 거침이 없었다. 2010년부터 민간상업용 위성 등에 자사 부품을 납품하기 시작했고, 이 경험을 바탕으로 2018년 한국항공우주연구원이 주도한 '위성PCB 제작 국산화 사업'에도 참여했다. 그동안 국내에서 쏘아 올린 위성은 부품 대부분을 수입에 의존해왔으나, 이오에스가 제작한 PCB 제품이 활용되면서 국산화에 크게 기여한 것이다.방위산업에서도 이오에스의 성장세는 크게 두드러졌다. 레이더와 미사일, 드론 등에 쓰이는 PCB 역시 이오에스의 제품인데, 지난해 미국 등으로 수출이 30% 가까이 늘면서 효자 노릇을 했다. 경기 침체로 반도체 시장이 위축돼 국내 PCB 업계도 타격을 받았지만, 오래전부터 사업 다각화를 준비해온 김 대표의 안목이 성과로 이어진 것이다.김 대표는 "경쟁이 치열한 시장에서 살아남으려면 변화하는 흐름을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창업 시절부터 체험해왔다"며 "미래 먹거리 산업에 대한 연구개발과 투자를 끊임없이 하려는 이유도 경험에서 나온 판단"이라고 했다.기술뿐 아니라 사람에 대한 투자도 중요하다는 게 김 대표의 지론이다. 이오에스는 지난해 고용노동부로부터 청년친화강소기업 인증을 받았는데, 전체 임직원의 40%가 청년(37세 이하)이고 평균 근속연수도 8년 5개월로 제조업 분야에서 상위권에 올랐다는 점이 높은 평가를 받았다. 신규입사자를 대상으로 경력형성장려금 제도를 운영해 직원들이 안정적으로 경력을 쌓도록 지원하는 등 개개인의 발전에 대해서도 적극적으로 투자하고 있다.김 대표는 "언제가 될진 모르겠지만 금탑산업훈장도 수훈할 수 있도록 기업을 성장시키는 게 목표"라며 "창립 20년을 맞아 다시 시작한다는 마음으로 끊임없이 고민하고 변화하는 기업을 만들겠다"고 포부를 밝혔다.글/한달수기자 dal@kyeongin.com, 사진/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김미경 대표이사는?▲1973년 경남 진해 출생▲중앙대학교 경영학과 졸업▲1인기업 이오에스아이 설립(1997년)▲이오에스(주) 설립(2004년)▲이오에스(주) 대표이사(2004.2 ~ 현재)▲한국 국제표준(IPC)교육센터 솔더링기술그룹 활동(2020 ~ 현재)▲한국산업단지 경영자연합회 이사 활동(2024.1 ~현재)김미경 (주)이오에스 대표는 "기업이 성장하려면 목표를 정해두고 모든 준비가 끝난 상태로 시장에 나서야 한다"며 "PCB 시장은 오래전부터 경쟁이 치열한 레드오션이고, 제품을 만드는 고객사의 요구에 따라 변화가 빠른 분야다. 처음 창업했을 때부터 지금까지 매년 연구·개발에 투자를 아끼지 않는 이유도 이 때문"이라고 했다.
추억의 화랑유원지… 추모의 화랑유원지… 시민과 함께 쉴 곳은 어디… 세월은 기억의 바다를 건너는중 상이군경이 일군 땅, 도심내 휴식처로1998년부터 공원화, 각종 시설 들어서오토캠핑·바비큐 파티 등 저마다 추억세월호 비극후… 정부합동분향소 설치4년간 73만여명 조문… 공간 성격 변화일부 시민 "유원지 뺏겼다" 불편 호소'생명안전공원' 조성 결정에 갈등 고조"일상속에서 안전한 세상 함께 꿈꾸길"설치 반대 이웃 설득 이어가는 유가족"우리 장례문화 달라지는 계기 될수도"60대 중반의 형철(가명)씨는 1983년 안산에 정착했다. 막 조성되기 시작한 반월시화국가산업단지에 일자리가 많다는 소식을 듣고 군 제대 후 무작정 안산으로 왔다. 공장일은 고됐다. 주 6일 근무는 기본이었고 철야근무도 종종 있었다. 그런 형철씨에게 유일한 낙은 쉬는 날, 화랑유원지에 놀러가는 것이다. 일주일의 피로를 풀 수 있는 공간이었다. 회색빛 공장만 가득한 이 도시에서 유일하게 놀거리와 볼거리를 주는 곳. 일주일에 딱 한번 쉬는 그 하루, 가족과 함께 화랑유원지에 돗자리를 깔고 앉아 집에서 싸온 음식을 먹거나 화랑호에서 낚시를 하며 휴일을 보냈다. 형철씨의 고된 청춘을 위로하는 시간이었다.■ 안산을 닮은, 시민의 휴식처 화랑유원지도심 한복판에 유원지가 있는 도시는 안산이 유일무이하다. 화랑유원지가 처음부터 유원지는 아니었다. 1956년 6·25 참전 상이군경 20여명이 안산시로 이주해 땅을 조성한 게 시작이었다. 당시엔 '화랑농장', '화랑저수지', '화랑낚시터'로 불렸다. 하지만 1986년 반월국가산단 배후도시 안산이 시로 승격되면서 화랑유원지로 불리게 됐다.지금의 공원 형태로 조성되기 시작한 건 1998년이다. 1980~90년대부터 타지에서 이주해 온 사람들이 늘어나자 안산시 차원에서도 시민들이 맘껏 쉬고, 체육활동을 하고, 바비큐 파티를 할 규모를 가진 공원이 필요했다. 당시만 해도 안산이 대체로 논밭이거나 황무지였고, 고잔신도시는 개발 중인 단계였다. 비교적 많은 사람들이 찾아 휴식을 취하고 있어, 조성된 곳이 화랑유원지였다. 안산시도 이런 필요를 느꼈고 화랑유원지를 조성하기로 했다. 이때부터 인라인스케이트장, 족구장, 농구장, 게이트볼장 등 다양한 체육시설과 문화시설 등이 꾸려졌다. 경기도미술관 등 대형 문화시설들도 조성돼있다. 국가산단을 품고 있는 안산은 대한민국 산업화의 기수였던 만큼 그 역사를 잘 보여주는 산업역사박물관도 있다. 아시아웨이는 외국인노동자와 이주가정이 많은 도시를 상징하는 조형물이다. 그래서 규모도 상당하다. 면적만 63만2천107㎡에 달하는데, 축구장 88개 크기다.화랑유원지는 안산의 과거와 현재를 모두 품고 있는 공간이다. 세대를 불문하고 안산 시민들에겐 '어머니의 품'같은 공간이다.안산에서 나고 자란 토박이 김동현(28)씨는 어릴 때부터 화랑유원지를 찾았다. 초등학교 저학년엔 봄 소풍을, 6학년 땐 졸업사진을 찍으러 왔다. 본격적인 수험생이 되기 전인 고등학교 2학년 겨울엔, 화랑유원지 내 단원각에서 신년 타종행사를 보며 '대학에 잘 붙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지금도 동현씨에게 화랑유원지는 종종 찾는 유희의 공간이다. 유원지 내 오토캠핑장을 찾아 친구들과 바비큐 파티를 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낸다. 동현씨에게 화랑유원지는 가장 흔한 추억이다.형철씨와 동현씨의 추억만이 아니다. 안산시민이라면 누구나 화랑유원지에 대한 소중한 추억 하나쯤은 있다. 엄마, 아빠 손을 잡고 오토캠핑장에 바비큐 파티를 하러 간 추억, 학창 시절 졸업사진을 찍으러 반 친구들과 소풍간 추억, 연인과 함께 흐드러진 화랑호 벚꽃 길을 함께 걷던 추억, 경기도미술관 전시를 보러 간 추억, 시민들과 함께 단원각에서 연말 타종행사에 참여한 추억. 화랑유원지는 그런 안산시민의 삶을 토닥이며 세월을 보내왔다. 안산시민들은 그래서 화랑유원지를 떠올리면 따뜻한 추억들이 생각난다. 2014년 4월이 오기 전까지는.■ 추모와 애도의 공간이 된 화랑유원지2014년 4월 16일 이후 화랑유원지도 변했다. 안산 아이들의 비극적인 죽음은 화랑유원지를 변하게 했다. 세월호 참사 이후 세상의 모든 눈은 안산으로 쏠렸고 그 중에서도 정부합동분향소가 있는 안산 화랑유원지에 집중됐다. 전국적인 추모 분위기가 형성되면서 안산으로 조문객이 몰렸다. 올림픽기념관에 설치된 임시 합동분향소는 인파를 감당하기 역부족이었다. 고심 끝에 정부는 같은 달 29일 규모가 큰 화랑유원지 제2주차장에 공식 합동분향소를 열었다. 전 국민에게 화랑유원지가 대표적인 세월호 참사 추모 공간으로 인식된 건 이때부터다.화랑유원지 합동분향소는 2018년 5월 3일 철거될 때까지 1천463일동안 운영됐다. 개소 이후 화랑유원지 합동분향소를 찾은 조문객은 73만8천446명에 달한다. 분향소가 들어서고 화랑유원지에는 세월호 참사와 관련된 각종 행사들이 열렸다. 매년 4월16일 열리는 기억식을 비롯해 세월호참사 행사가 열릴 때마다 안산시민보다 외지인이 더 많이 찾았다. 참사를 추모하는 노란 리본과 나비 형상의 조형물도 설치됐다.세월호참사를 기점으로, 안산시민들에게 화랑유원지는 마음 편히 오는 공간이 되지 못했다. 가장 사랑하는 공간이 점점 낯설어졌다. 공원을 산책하고 아이들과 놀다가도 '웃어도 될까' 주춤하게 됐다고도 했다. 그래서 일부 주민들은 "화랑유원지를 뺏겼다"고 생각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2019년 2월 4·16생명안전공원 부지가 화랑유원지로 결정되자 일부 시민들 사이에서 노골적으로 분노의 감정이 드러내기 시작했다. "봉안시설이 들어서면 납골당이 될 것", "사람 사는 곳에 납골당이 웬 말이냐", "화랑유원지까지 내줄 순 없다" 등의 반대의 이유였다.화랑유원지 내에 4·16생명안전공원을 착공하기로 결정했을 땐 반발이 더욱 커졌다. 실제 올 하반기 본격적으로 공사에 들어갈 예정이지만, 아직도 기억식과 같이 주요 행사가 있을 때마다 반대 집회가 열린다.16일 세월호 10주기 기억식이 열리는 현장에도 어김없이 반대집회가 열렸다. 화랑유원지 4·16생명안전공원 건립 반대 시위를 진행한 김대현 화랑지킴이 시민행동 공동대표는 "추모 공원 자체를 반대하는 게 아니다. 어디든 지으라는 거다. 근데 안산시민의 편의시설인 화랑유원지는 아니지 않나"라며 "사람들 사는 곳에 봉안시설이 들어선다는 건 아직 우리 정서상 맞지 않다. 시민들이 아직은 공원 건립 진행 과정을 잘 몰라서 그렇지 실제 착공되기 시작하면 갈등이 터질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참사도 안산의 역사, 화랑유원지가 품어야조은정 학생 엄마 정화씨에게도 화랑유원지는 아이와의 행복했던 추억이 담긴 소중한 공간이다. 은정이가 뛰어놀았고 많이 웃었으며 좋아했던 공간이다. 정화씨는 그래서 꼭 화랑유원지에 4·16생명안전공원이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은정이도, 정화씨에게도 화랑유원지는 과거이고 현재다. 어머니의 품처럼 안아주는 곳이다. 은정이 친구들이, 가족들이, 그리고 세월호참사를 추모하고 애도하는 사람들이 자주 오가길 바라서다. 죄책감을 가지라는 것도 아니고, 괴롭길 바라지도 않는다. 오히려 반대다. 일상 속에서 아이들을 기억하고 그 죽음을 되새기면서 안전한 세상을 함께 고민하며 때론 마음의 쉼을 얻길 바란다. 그래야 희생자들의 죽음이 헛되지 않는다.유가족들도 시민들의 마음을 잘 알고 있다. 서운하고 속상하지만, 이해도 하고 있다. 안산이라는 울타리에서 함께 살던 이웃이기에 화랑유원지가 어떤 의미인지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오랜 시간 묵묵히 반대를 견뎌내 왔고, 지금도 마찬가지다. 시민들을 만나 설득하는 일도 계속 이어오고 있다.정부자 4·16 세월호참사가족협의회 추모사업부서장은 "4·16생명안전공원은 우리 장례문화를 달라지게 하는 계기가 될 수 있다"고 말했다. 우리는 지금까지 산 자와 죽은 자가 분리돼 살았다. 그래서 일상 속에 죽음이 들어오는 것에 강한 거부감을 느낀다. '산 사람은 살아야지'라며 추모를 그만두길 종용하는 것도 그러한 관습에서 비롯된다. 하지만 멀리는 독일, 미국, 가깝게는 일본에서도 죽음을 경외시하지 않는다. 특히 대형 참사와 같이 기억해야 할 죽음에 대해서는 일상 속 추모를 선호한다. 그래서 접근성이 좋은, 도심 한가운데 추모공간을 만든다. 정 추모사업부서장은 "접근성이 좋은 화랑유원지에 모두가 와서 편히 산책하고 쉬고 안전에 대해 배울 수 있는 공간으로 만들 계획이다. 우리 아이들 추억이 깃든 공간에서 청소년과 청년들이 꿈을 찾아갈 수 있는 공간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4·16생명안전공원은 칙칙한 공업 도시, 범죄 도시로 비쳐지는 안산의 이미지도 바꿀 수 있다. 도심 한복판에 생명과 안전, 희망을 말하는 공원이 조성되는 것"이라고 부연했다.안산 일동에 20년째 거주하는 정은철(49) 협동조합 마실 이사장도 같은 생각이다. "세월호도 안산 역사의 일부예요. 화랑유원지에 4·16생명안전공원이 설립되면 안산이 세월호를 품게 되는 것이고, 산재 사고가 많이 발생하는 안산의 이미지도 바뀔 수 있습니다."공업도시, 계획도시, 이주민의 도시 안산은 2014년 4월16일 세월호의 도시가 됐다. 부인하고 싶어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일어나선 안 될 일이었고 되돌릴 수 있다면 천번이고 되돌리고 싶지만 그럴 수 없는 일이다. 세월호참사는 안산의 과거이고 현재다. 안산의 역사다. /공지영·김동한·목은수기자 dong@kyeongin.com화랑유원지 해바라가 꽃밭과 넝쿨터널에서 일상을 즐긴 시민들. /경인일보DB화랑유원지 해바라가 꽃밭과 넝쿨터널에서 일상을 즐긴 시민들. /경인일보DB지난 2009년 화랑유원지 야외공연장에서 열린 '안산 愛 페스티벌'에서 시민들이 공연을 보며 가을밤의 정취를 만끽하고 있다. /경인일보DB4·16 생명안전공원이 조성될 예정인 화랑유원지 안산산업역사박물관 옆 부지에 공원 조성과 관련한 조형물이 설치돼 있다. /이지훈기자 jhlee@kyeongin.com노란 리본이 내걸린 화랑유원지 호수 산책길에서 시민들이 산책하고 있다. /이지훈기자 jhlee@kyeongin.com16일 안산시청 앞에서 화랑유원지에 4·16생명안전공원을 건립하는 것을 반대하는 시위가 열리는 모습. 2024.4.16 /김동한기자 dong@kyeongin.com올해 하반기 착공될 4·16생명안전공원 조감도. /안산시 제공
참사후 10년… 아픔의 안산 안산에서 400㎞ 떨어진 먼 바다은사님·선배 하루아침 잃은 참담함4월 벚꽃 보는 일조차 죄책감 느껴안산 단원고등학교에서 자동차로 '400㎞'를 달려야 갈 수 있는 바다. 그 먼 바다에서 안산의 아이들이 죽었다. 생때같은 안산의 아이들이 침몰하는 배 안에서 죽어가는 모습을 안산 시민들은 뜬 눈으로 지켜만 봐야 했다. 가슴이 타들어가도록 아파서 눈물만 났다. 참사는 모두의 아픔이다. 세월호 참사는, 단원고 희생학생들은, 지난 10년 안산 시민들의 제일 아픈 손가락이었다.■ 애도의 시간"세월호 침몰" 대학교에서 한창 수업을 받던 지원(30·가명)씨에게 짧은 문자가 왔다. 친구가 보낸 메시지였다. 지원씨는 그해 초 단원고를 졸업하고 이제 막 대학에 입학한 새내기였다. 친구는 지원씨가 단원고 졸업생인 것을 기억했다. 지원씨는 서둘러 뉴스를 검색했다. '전원구조'라는 뉴스를 보고 안심했다. 큰일은 없겠지 싶었다. 점심시간 즈음부터 분위기가 이상해졌다. 전원구조가 '오보'라는 소식이 들리면서다. 친구들에게 연락이 오기 시작했다. 남윤철 선생님이 세월호에 탑승했다는 것이다. 남 선생님은 지원씨가 2학년 때 담임 선생님이었다. 반장이었던 지원씨를 늘 믿어주며 잘할 수 있다고 용기를 북돋아 준 은사다. 곧장 단원고로 달려갔다. 학교 강당에서 밤을 새며 구조되기만을 기다렸다. 끝내 선생님은 돌아오지 못했다. "엄마, 배가 침몰한다는데 단원고 같아" 그 날 정진(57)씨는 교회에서 수요예배를 드리는 중이었다. 아들이 보낸 메시지에 이게 도대체 무슨 말인가 싶었지만 곧장 전날 아들과 나눈 대화가 떠올랐다. 당시 아들은 중학생이었다. 전날 저녁을 먹으며 아들은 "엄마 형들이 배타고 수학여행 간대"라고 말했다. 정진씨는 대수롭지 않게 "왜? 비행기 놔두고 배를 타"라고 답했던 기억이다. 제주도가 고향이었던 정진씨는 배가 무서워 비행기를 타고 오갔었다. 큰일은 아니겠지 싶었는데 함께 예배를 드리던 단원고 부모들이 황급히 자리를 뜨기 시작했다. 그제야 '큰일이 벌어졌구나' 싶었다.안산시민들은 2014년 4월 16일 세월호 참사가 일어난, 그날의 일상을 비교적 또렷이 기억하고 있었다. 단원고 앞을 지나는데 잔뜩 서 있던 관광버스에 부모들이 올라타던 모습을 보고 무심코 지나쳤는데, 그 '무심코 지나침'이 죄책감으로 남은 이들도 있었다. 세월호 참사로 탑승자 304명(실종자 5명 포함)이 사망했다. 사망자 중에는 단원고등학교 학생 250명과 교사 11명이 포함돼 있었다.안산은 이 날을 기점으로 변했다. 변할 수밖에 없었다. 국가산업단지, 공장이 즐비한 산업도시에서 세월호 도시로, 그렇게 세월호를 안고 10년을 살았다.선생님의 부고를 들은 지원씨는 곧장 장례식장에 갔다. 지원씨 말고도 단원고를 졸업한 학생들 여러명이 장례식장을 찾아왔다. 선생님 장례식을 치르는 그 옆으로 단원고 교복을 입은 후배들의 영정이 줄줄이 장례를 치르고 있었다. 누가 먼저랄 것이 없었다. 이날부터 장례식장을 찾아온 수많은 단원고 졸업생들은 얼굴도 모르는 후배들의 장례를 도왔다. 지원씨도 친구들과 팀을 짜서 교대로 장례식장을 지켰다. 10년이 흘렀지만 지원씨에게 그날의 기억은 흑백이다. 미안하고 또 미안했다.정진씨는 이날 이후 종일 뉴스만 봤다. 보면서 계속 울었다. 이유를 알 수 없지만 감정이 격해져서 고1 아들과 괜히 싸우기도 했다. 안산 시민 대다수가 그랬다. 단원고 희생자 250명 중 학교 인근 동네인 고잔동, 와동, 선부동에서만 204명이 희생됐다. 한 집 건너 한 집의 아이들이 사고가 났다. 이 지역 주민들은 "괜히 내 탓인 것 같아 아이들에게 미안해 하늘을 못봤"고 "혹시 유가족에게 실수할까 집 밖으로 나오지 못했"다. 거리에 활짝 핀 벚꽃을 바라보는 일조차 미안하게 느껴졌다. 단원고 인근 동네서만 희생자 204명고잔동 등 '한집 건너 한집' 비극심리상담 중 일반주민도 69% 차지4월 20일 정부는 안산을 특별재난지역으로 선포했다. 일단 안산에 심리상담 지원을 시작했다. 세월호참사 심리지원센터인 '온마음센터'가 정식으로 세워지기 직전인 4월30일까지 안산시민 6천263명이 심리상담을 받았다.안산시보건소가 집계한 당시의 심리상담 통계를 살펴보면 병원 및 장례식장에서 4천여건이 넘고, 시민상담소에서 2천여건, 이동상담버스에서도 400여건에 달했다. 안산시정신건강복지센터 관계자는 "당시 일반시민들이 느끼는 심리 증상은 우울감과 무기력감을 가장 많이 호소했다. 일상생활이 잘 안되고 계속 눈물만 난다는 사람들이 많았다"며 "이때는 오히려 유가족보다 시민들이 상담을 요청하는 건수가 훨씬 많았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분향소·장례식장 달려간 시민들 함께 눈물 흘리며 봉사활동 참여 슬퍼만 하고 있을 순 없었다. 지역 주민들은 분향소로, 장례식장으로 달려갔다. 형·동생을 찾으러 멀리 간 엄마아빠를 대신해 안산에 남은 아이들의 엄마아빠가 되기도 했다. 당시 임향미(53)씨는 대한적십자회 안산시 고잔1동 봉사회 총무였다. 향미씨는 참사 당일에 단원고 강당을 찾은 이후, 6개월간 매일 오후 5시부터 11시까지 조문객을 위해 급식봉사를 했다. 이 기간 중에 향미씨가 쉰 날은 5~6일 뿐이다. 매일 아이들을 추모하기 위해 찾는 조문객을 위해 정성껏 밥을 지었지만 차마 분향소 안으로는 잘 들어가지 못했다. 노래소리만 들어도 눈물이 차올랐기 때문이다. 봉사를 마치는 마지막 날 그는 겨우 다른 봉사자들과 함께 영정 속 아이들의 얼굴을 처음 봤다.고령임에도 진도까지 내려가 봉사활동을 했던 70대 와동 주민도 만났다. 그가 다니는 교회에 유독 세월호 유가족들이 많아 애달픈 마음이 컸다. 유가족을 만나면 서로 끌어안고 말없이 함께 눈물을 흘렸고 그 모습이 계속 마음에 남아 유가족을 도왔다. 고잔동 상인회 등 인근 지역 상인들도 한마음이었다. 합동분향소에서 보름 넘게 질서유지를 도왔고 조문객을 안내하기도 했다. 안산시민 모두가 저마다의 힘을 보태며 아픔을 함께 위로하던 때였다. → 3면에 계속("우리도 살아야지" 속절없이 흐른 세월 [우리가 세월호를 기억하는 방법·(2)])/공지영·김동한·목은수기자 dong@kyeongin.com세월호 참사 10주기를 앞두고 고즈넉한 안산시내 밤거리에 추모의 분위기가 흐르고 있다. /이지훈기자 jhlee@kyeongin.com세월호 10주기를 앞두고 안산시 단원구청 부근에 세워진 노란색 리본 조형물이 어두운 밤거리를 밝히고 있다. 2024.4.15 /이지훈기자 jhlee@kyeongin.com지난 2022년 세월호 유가족들로 구성된 4·16가족봉사단이 5월 어린이날을 맞아 안산시 와동공원에서 선물나눔을 진행하는 모습. /4·16가족봉사단 제공지난달 31일 세월호 참사 10주기를 맞아 꾸려진 '4160인 시민합창단'이 안산시 단원구청에서 전체 연습을 진행하는 모습. 2024.3.31 /목은수기자 wood@kyeongin.cim
참사후 10년… 갈등의 안산 1년 지나도록 도시 전체가 추모·애도일상 제지·취재 쇄도… 일부 지쳐가 ■ 사그라드는 추모참사 이후 1년쯤 지나자 사회는 참사의 슬픔을 잊어갔다. 전국에서 줄을 잇던 조문객도 많이 줄어들었고 점점 잊혀갔다. 안산 시민들만 일상에서 세월호를 잊지 못하고 있었다.안산은 도시 전체가 여전히 추모와 애도 분위기가 이어졌다. 상가에선 음악도 틀지 못했다. 안산시에서 자중해달라는 요청도 있었고, 무엇보다 "아이들이 죽었는데 노래가 나오냐"는 시선이 두려웠다. 1년 내내 언론의 취재가 이어지면서 단원고 인근 빌라들을 시시때때로 찍어갔다. "안산이 아파트도 없는 동네인 것처럼, 일부러 건물에 금 간 부분만 찍어서 전국에 내보내는게 상처였다"고 토로했다. 동사무소, 문화체육센터 등 공공에서 하던 주민프로그램도 모두 취소됐다. 봄이 되면 더 그랬다. 거의 매일 기자들과 외부 사람들이 오가니 오히려 주민들은 외출을 꺼렸다. 이때를 두고 주민들은 "마을에 웃음이 없고 암울했으며 특히 4월엔 밝은 옷도 입지 못했다"고 말했다. 미안하고 마음 아파서 여전히 추모와 애도가 이어졌지만 또 다른 한편에선 갈등의 불씨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화랑유원지 '4·16 생명안전공원' 건립반대하는 지역주민… 서운한 유가족계속된 집회·현수막… 상권 위축시켜피해보상금 관련 유언비언 등 난무서로에게 상처뿐인 일련의 사건·사고 참사 진상규명, 특별법 제정, 선체 인양, 희생자 유해 수습 등 참사를 둘러싼 무엇하나 속시원하게 해결되지 않은 채 정부와 갈등을 겪는 장면들이 길게 이어지고, 확인되지 않은 소문들이 온라인을 통해 동네에 떠돌면서 시민들의 마음도 복잡해졌다. 안산에 산다고 하면 세월호 얘기부터 꺼내는 것에 피로감을 느끼기 시작했고, 안산에서 하는 모든 행사에 세월호가 서두에 나오는 것에 소외감을 느꼈다. 추모집회가 1년 넘게 이어지면서 일부 시민들의 생계에도 영향을 끼쳤다. 특히 고잔동·호수동·중앙동 일대 상인들은 시간이 흐를수록 근심이 쌓여갔다. 참사 당시 생업을 잠시 놓고 자원봉사까지 하던 이들이었다. 해가 지나고 봄이 왔지만, 안산에선 크게 웃고 떠들거나 건배를 외치며 잔을 부딪칠 수 있는 분위기가 아니었다. 줄어가는 약속과 회식에 매출은 반토막 났고, 한두 군데 문을 닫는 점포들도 생겨났다는 게 상인들의 공통된 기억이다. 평소보다 매출이 배로 뛰는 안산시 최대 축제 '2014 안산국제거리극축제'가 취소됐을 때도 상인들은 아무 말 없이 받아들여야 했다.결국 세월호 가족협의회와 상인회가 직접 충돌하는 상황까지 발생했다. 계속되는 집회에 상가 주변에 부착된 현수막과 노란 리본이 상권 분위기를 위축시키니 집회 장소를 옮겨달라는 게 상인들의 주장이었다. 당시 상황을 기억하는 안산 도리섬상인회 관계자는 "참사 이후 인근 안산문화광장에서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시위가 열렸고 6~7개월 지난 시점에 상인회에서 세월호가족협의회와 대책회의를 하는 등 직접 나섰다"며 "'산 사람은 살아야 할 것 아닌가', '상인들은 뭔 죄냐'라는 얘기들이 오갔다"라고 말했다.유가족을 둘러싼 유언비어들도 안산시민들을 괴롭게 했다. 2015년 희생자 가족에게 지급되는 피해보상금을 두고 안산지역 안팎에서 유언비어가 난무했다. 희망제작소가 2020년 발간한 '세월호 참사 피해지역 재난극복 공동체 회복 모델 구축 연구 최종보고서'를 보면, 당시 "OOO는 보상금 받아 차 샀다", "XXX는 이사 갔다"는 식의 각종 유언비어가 안산 전역에 퍼진 것으로 나타났다.단원고 희생학생이 많은 와동의 한 주민은 "'희생자 가족들이 지금 건물 사서 슈퍼하고 있다', '사치스럽게 살고 있다', '자식 팔아서 연금 등 혜택 누린다', '겸손하지 않다'는 등의 얘기가 동네에서 심심찮게 들려왔다"며 "참사 직후 합동분향소에 가서 밥을 짓는 봉사를 하며 도왔는데, 이런 얘기가 들리니까 나중엔 내가 왜 바보짓을 했을까 싶더라"고 털어놨다.■ 불붙은 민민 갈등세월호 참사 직후 경험했던 안산 공동체의 힘은 점점 와해돼 갔다. 어떤 부분에선 '분노'로까지 변질되기 시작했다. 2016년 단원고 기억교실 이전 사태에서 희생자 가족과 시민 간 갈등이 촉발됐다. 당시 단원고 희생학생들이 실제 수업받던 교실을 기억교실(2학년 교실 10개·교무실 1개)로 보존해 왔는데, 원래대로라면 희생학생들이 졸업했어야 할 2016년 이후에도 교실이 보존되면서 갈등이 촉발됐다. 2016학년도 신입생 300여명이 사용할 교실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사실 이 문제는 2015년부터 줄곧 제기돼 왔지만 존치와 이전 사이에서 합의점을 찾지 못했고 결국 2016학년도 신입생들이 음악실 등 특별교실을 리모델링한 임시교실에서 수업을 받아야 했다. 재학생 학부모들은 "임시 교사를 마련하거나 전교생을 전학시켜달라"는 최후통첩까지 보내며 갈등이 격화됐다. 당시 정진씨 아들은 단원고에 입학한 1학년 신입생이었는데, "몇달동안 시끄러웠고 신입생 오리엔테이션도 하지 못했다. 그러니 공부할 수 있는 학업 분위기도 아니었다"며 "그래도 희생자 엄마들 아픔이 너무 크니까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이는 학부모들도 있었다"고 기억했다.사태가 장기화되자 안산시와 경기도교육청뿐만 아니라 종교계까지 중재에 나섰다. 한 학기가 끝나고 여름방학을 맞은 2016년 7월 한국종교인평화회의(KCRP) 중재로 기억교실을 이전하기로 결정했다. 다음 달인 8월 20일 기억교실은 구 안산교육지원청(현 4·16민주시민교육원) 별관 1~2층으로 이전했다. 현재 기억교실은 4·16민주시민교육원 맞은편에 위치한 단원고4·16기억교실에 위치해 있다.중재에 나섰던 김은호 안산 희망교회 목사는 "유가족과 재학생 부모들이 터놓고 이야기 하자는 취지로 소통 기구를 만들었지만, 합의가 불가능했다"며 "결국 유가족들이 지역사회와 함께 가야 한다는 것을 수용하면서 갈등이 풀렸지만, 이 부분은 여전히 유가족에겐 상처로 남아있다"고 했다.이러한 분위기 속에 치러진 2016년 20대 국회의원 선거는 이변을 낳았다. 단원고가 있고 희생 학생이 가장 많았던 고잔1동(81명)이 포함된 단원을과, 그다음 순이었던 와동(69명)과 선부3동(54명)이 포함된 단원갑에서 보수인 새누리당 후보들이 당선된 것이다. 갈등 깊어지자 곳곳 공동체 회복 활동고잔동 '마을해설사 프로그램' 운영 진보세가 강한 안산에서, 더구나 당시 총선은 더불어민주당이 123석을 차지해 원내 1당이 됐던 점을 감안하면 이변이었다. 오해와 갈등이 뒤섞여 정치적 도구로 전락한 세월호 참사, 그리고 이를 바라보는 안산 시민들의 복잡한 마음이 선거에 반영됐다고 해석하는 목소리가 많았다.갈등은 2018년 4·16생명안전공원 부지 선정 추진을 두고 강하게 폭발했다. 4·16생명안전공원은 '4·16세월호참사 피해구제 및 지원 등을 위한 특별법'에 따라 건립되기로 정해져 있다. 안산시는 2016년 7월 '4·16세월호참사 안산시 추모사업 협의회'를 구성해 본격적인 사업 추진에 나섰고, 부지 후보지로는 정부합동분향소가 있던 화랑유원지가 지목됐다. 하지만 부지 후보지인 화랑유원지에 대해 지역 내 반대 여론이 들끓었다. "모든 시민이 이용하는 유원지를 납골당으로 만들려고 한다", "도심 한복판에 납골당이 들어서면 시 전체 분위기가 침체할 것", "집값을 떨어뜨릴 것" 등이 주된 근거였다.안산시는 '25인 위원회' 등을 유치해 시민들의 이견을 봉합하려 했지만 막지 못했다. 2018년 6월 열린 지방선거가 발화점이 되기도 했다. 각 후보가 정당 기조에 따라 '4·16생명안전공원 조성' '화랑유원지 봉안시설 백지화' 등 공약을 반대로 내걸면서 정치 소재로 또 악용됐다.2019년 2월, 4·16생명안전공원이 화랑유원지에 조성되기로 결정났지만, 4·16생명안전공원 건립 반대 단체들의 시위도 계속됐다. 시위는 매주 월요일 오전에 열렸고, 텐트를 치고 장기간 단식 투쟁에 나서기도 했다. 여기에 더해 코로나19에 물가상승 등 경기악화로 공사가 지연되며 건립 자체가 늦어졌다. 결국 세월호 참사가 발생한 지 10년이 되는 올해, 하반기 착공에 들어가 2026년 하반기 준공 예정이다. ■ 여전히 남은 불씨와동은 고잔동 다음으로 세월호참사 피해가정이 많은 곳이다. 2018년 416재단이 조사한 '세월호참사 피해지역 주민의 정신건강과 공동체 결속력 현황조사'에서 와동은 25개동 중에서 안산시 지역사회 불신 등을 나타내는 '공동체 회복력' 부문에서 제일 높은 점수를 받아 공동체 회복력이 낮은 것으로 드러났다. 기자들이 직접 만난 와동 주민들 중엔 실제로 여전히 유가족 보상 문제 관련해 불신이 크고 억울해 하는 측면도 강했다. 안산 내 마을조직활동가들은 와동이 40~50대 허리인구가 없고 노인과 젊은 신혼부부가 많은 것, 불안정한 거주자인 세입자가 많은 점을 이유로 꼽았다. 약자와 약자가 서로 갈등하고 부딪히는 형상이라는 것이다.서로 상처를 주는 상황이 계속될수록 유가족들은 견디기가 어렵다. 조은정 학생 엄마 박정화(57)씨는 "안산의 아이들이 참사를 겪었으니 안산에서 위로를 받고 싶은데, 안산 밖을 나가야 위로를 받았다"며 "기억교실 등 세월호 관련 공간을 찾는 사람들도 안산 주민보다 다른 지역 사람들이 더 많은 것 같다"고 말했다.참사 이후 민관 모두 공동체 와해현상을 심각하게 보고 있다. 안산시는 2017년부터 '공동체회복 프로그램'을 시행했다. 세월호피해자지원법은 피해자, 유가족을 비롯해 안산시민의 심리안정과 공동체 회복을 국가의 책임으로 의무화했다. 2015년부터 2017년까지 프로그램 개발을 위한 연구용역이 이뤄졌고, 2017년부터 올해까지 3단계에 걸쳐 공동체 회복을 위한 프로그램이 운영 중이다. 유가족과 안산시민 사이의 접점을 늘려 마을공동체를 되살리는 게 프로그램의 주된 목표다.실제 안산지역 곳곳에서 마을공동체 회복 활동이 이뤄지고 있다. 대표적으로 고잔동에서는 '같이걷자'라는 이름의 '마을해설사 프로그램'이 운영 중이다. 고잔동 주민들이 직접 고잔동을 찾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마을의 역사와 세월호참사 거점 시설과 이슈를 소개한다. 세월호참사를 마을의 역사로 받아들이고 함께 기억하기 위함이다.프로그램을 주관하는 임남희 선부종합사회복지관 부장은 고잔동 주민들 모두 참사의 목격자이자 피해자로서 복합적인 감정을 느끼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참사 초기 단원고와 분향소를 찾아와 함께 울고 도움을 준 것도 주민들이고, 기억교실 이전을 주장하고 화랑유원지 부지에 생명안전공원 유치를 반대한 것도 주민들"이라며 "유가족이 진상규명을 위해 국회 등 전국으로 떠나 있는 동안 지역에 남아 유가족을 도왔던 사람들을 위한 공공의 돌봄이 부재했다. 그 틈새가 결국 지금의 갈등을 만든 단초"라고 말했다. /공지영·김동한·목은수기자 dong@kyeongin.com화랑유원지 야경. 안산시 단원구 화랑유원지에 건립될 예정인 4·16 생명안전공원을 두고 반대의 목소리가 나오기도 한다. 2024.4.15 /이지훈기자 jhlee@kyeongin.com세월호 참사 10주기를 앞둔 안산시내 전경. 2024.4.14 /이지훈기자 jhlee@kyeongin.com안산 화랑유원지 세월호 납골당 건립반대 시위. /경인일보DB'4·16생명안전공원 선포식' 기념식수 행사. /경인일보DB4·16 생명안전공원, 2024.4.14 /이지훈기자 jhlee@kyeongin.com
2021년부터 이웃에 희망동력 선물 'NGO 구조단'으로 60개국 구명 경험전국 집수리·배식·수해복구 구슬땀국내 넘어 태풍피해 베트남까지 방문"다시 태어나도 봉사의 길을 걷고 싶습니다."'행동하는 봉사'. 이 구호는 사회복지법인 911 나눔봉사회(평택시 안중읍 대반길 22) 곽요환(66) 회장의 평생 좌우명이다.곽 회장은 '실천하는 봉사', '따뜻한 배려'는 소년소녀 가장, 홀몸 노인 등 우리 이웃들에게 '그래도 내 삶이 외롭지만 않다'는 생각을 갖게 하는 '희망 동력'이라고 정의했다.그만큼 곽 회장과 나눔봉사회 100여명 회원들의 봉사와 배려는 열정적이다. 911 나눔 봉사회는 2021년 4월 설립됐다. 참봉사의 의미를 공유해온 회원들이 대거 참여했다. 경제적, 또는 외로움을 겪는 이웃들을 작접 찾아가 봉사하고 나눔을 실천하는 것으로 잘 알려진 911 나눔봉사회는 지역의 그늘진 곳을 밝게 비추는 역할에 충실해 왔다는 평가를 얻고 있다.그 중심에 곽 회장이 자리하고 있다. 그는 원래 국내외 재난·재해 구조 전문가로 잘 알려져 있다. 봉사회 설립 이전부터 'NGO 구조단'의 일환으로 각 재난 현장에서 인명을 구조해 왔다.그동안 필리핀, 튀르키예 등 60개 국가에서 발생한 지진, 쓰나미 등 재난재해현장에서 수백여명의 현지인들을 구조했고, 해당 국가의 훈장을 받을 만큼 그 공로를 인정받아왔다.하지만 마음 한 켠은 늘 허전했다. 구난 구조의 보람도 잠시, 봉사와 배려의 참된 의미는 자꾸 희미해졌다. 그래서 전국을 돌며 어려운 이웃 집수리, 밥퍼 봉사, 수해복구 봉사 등에 땀을 흘렸다.곽 회장은 "강원도 산불 복구 등 정말 안해본 일이 없을 만큼 몸을 쓰는 봉사는 다 해봤다. 힘들었지만, 그래도 조금은 봉사의 참 의미를 알게 된 소중한 시기였다"고 웃어 보였다.911 나눔봉사회는 국내를 넘어 외국에까지 봉사의 의미를 전하고 있다. 지난해 9월13~17일 태풍 피해를 입은 베트남 북부 라오까이주 사파, 라오짜이 마을을 방문해 나눔 봉사를 실천했다. 당시 베트남 오지 마을을 찾아 나눔봉사에 나섰던 곽 회장과 회원들은 일회성에 그칠 것이 아니라 매년 재난 재해로 신음하는 곳을 찾아 봉사하기로 다짐, 앞으로의 활동이 기대되고 있다.이와 관련, 911 나눔봉사회는 올해 상반기에도 지역복지센터의 추천을 받아 소년소녀가장 등에게 생활용품 등을 제공하고 이들이 건강하게 성장할 수 있도록 적극 지원하기로 했다.곽 회장은 "결국 봉사와 배려는 거창한 것이 아닌 우리가 매일 들이키는 공기와 같고, 누구나 할 수 있다"며 "다만 삐뚤어진 봉사가 아닌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참봉사여야 한다"고 말했다. 평택/김종호기자 kikjh@kyeongin.com지난해 9월 심각한 태풍 피해를 입은 베트남 북부 라오까이주 사파, 라오짜이 마을을 방문, 나눔 봉사를 실천한 911 나눔 봉사회 곽요환 회장이 현지 주민과 찍은 사진. /나눔 봉사회 제공지난해 9월 심각한 태풍 피해를 입은 베트남 북부 라오까이주 사파, 라오짜이 마을을 방문, 나눔 봉사를 실천한 911 나눔 봉사회 곽요환 회장과 회원들. /나눔 봉사회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