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참성단]기생충을 기다리며

기생충학자인 서민 박사의 위트 넘치는 칼럼이 너무 재미있어 그의 책을 읽어본 적이 있다. '기생충 열전'이란 책이다. 아니나다를까 몇 장 넘기기도 전에 낄낄거리고 말았다. 일반인을 위한 기생충 교양서가 몇 권 안 되는 것에 아쉬움을 느끼던 중 '기생충'이라는 책을 새로 발견하고 반가운 마음에 펼쳐보았는데, '충'이라는 이름을 가진 기생의 이야기였다는 대목에서다. 서 박사가 풀어놓는 기생충 이야기는 흥미롭다. 친절하게도(?) 온갖 기생충 사진을 배치하는 바람에 간혹 책장 넘기기가 두려워지는 점만 빼고는 예방을 위해서라도 한 번 읽어볼 만하다. 그는 기생충의 변호사라 해도 무방할 듯 싶다. 한 예로 세상에 뚱뚱한 사람은 있어도 뚱뚱한 기생충은 없다고 단언한다. 자기 분수를 지켜서 먹기 때문이란다. 또 기생충 박멸 이후 사람에게서 알레르기나 자가면역질환이 늘었다며, 이는 갑자기 상대가 없어진 면역계가 우리 몸을 공격한 결과라고 부연한다. 이쯤 되면 기생충과 '상생'을 하라는 것인지 가늠이 안 간다. 물론 기생충을 옹호(?)만 하는 것은 아니다. 각 기생충을 설명할 때마다 위험도를 비롯해 감염증상과 감염원 등을 별도로 소개하면서 경각심을 주는 것을 잊지 않는다. '이 기생충 같은 놈아'라는 욕이 적당한 욕인지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 부분은 일종의 블랙코미디다. 기생충이 자발적으로 일을 안 하려는 데 비해 집에서 놀기만 하는 사람은 일을 하고 싶어도 마땅한 일자리가 없는 탓에 백수가 된 거니, 기생충을 갖다 붙일 일이 아니라는 주장이다. 기생충이 '본의 아니게' 우리 사회의 아픈 부분을 상기시킨 셈이다.영화 '기생충'이 오늘 개봉한다. 줄거리를 보니 갖가지 기생충이 등장하는 '기생충 열전'과 달리 영화에서는 기생충의 왕이라는 회충 한 마리 '출연'하지 않는 것 같다. 기묘한 인연으로 얽힌 백수 가족과 부자 가족을 통해 현대 사회의 양극화 문제를 다루었다는 설명으로 미뤄 기생충은 봉 감독 특유의 은유일 것이다. 황금종려상 수상 소식을 접하면서 기생충 열전이 떠오른 것은 영화 줄거리와 책에서 엿본 블랙코미디적 요소 때문이 아닌가 싶다. 봉 감독은 기생충에 대해 '인간에 대한 예의와 존엄에 관한 영화'라고 했다. 그렇다면 영화는 '기생'을 넘어 '공생' 또는 '상생'에 대해 화두를 제시할 것으로 추측된다. 그래서 더 보고 싶다. /임성훈 논설위원

2019-05-29 임성훈

[발언대]새우깡에 맛 들인 갈매기

화성 전곡항이나 궁평항, 안산 탄도항, 시화호 조력발전소 등 사람이 많이 모여드는 바닷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이 있다. 그 언젠가부터 새우깡에 맛 들인 갈매기들이 사람들 주변 가까이 날며 경쟁하듯 '새우깡이 먹고 싶다'고 아우성이다.그런 갈매기를 보고 사람이 새우깡을 하늘 높이 던진다. 던진 새우깡을 앞다퉈 낚아채 먹는다. 그것을 보기 위해 남녀노소 너나없이 손에 새우깡 봉지를 들고 하나둘 던지기도, 팔을 뻗어 손바닥에 얹어 놓고 갈매기를 유인하기도 한다. 사람들은 갈매기들의 그런 모습을 보고 즐기기 위해 새우깡으로 유혹한다. 문제는 사람들이 던져주는 새우깡에 맛 들인 갈매기들의 생태적 변화다. 본시 그들이 먹고살기 위해 하던 먹이 사냥을 하려 하지 않고 사람들이 던져주는 새우깡을 얻어먹는 것에만 신경을 쓴다. 그러다 보면 사냥을 하여 먹고 사는 야성을 잃어버릴 수 있다.갈매기는 생존을 위해 새로운 먹잇감을 찾아야 한다. 그 점을 생각해 더 이상 갈매기에게 새우깡을 던져 주는 행동을 하지 말아야 한다. 갈매기들이 그동안 자연에서 먹잇감을 사냥하며 살아온 대로 살도록 놔둬야 한다. 새우깡 던져주면 갈매기가 날아와 받아먹는 그 모습을 감상하면서, 결과적으로는 갈매기를 죽이는 짓을 해서는 안된다.갈매기에게 무심코 새우깡을 던져주는 행위는 사소한 것 같지만 생태계를 파괴하는 행위다. 그 또한 인간의 욕심에서 생기는 행위로 자제해야 한다. 자연은 보전돼야 하고 파괴돼서는 안된다. 낙곡을 주워먹고 벌레를 잡아먹고 물고기를 잡아먹고 살던 그대로 갈매기를 보존해야 한다.생태계가 건강해야 인간 또한 건강하고 보다 행복한 삶을 이룰 수 있다. 두 번 다시 갈매기에게 새우깡을 던져주는 행동은 하지 말자./한정규 문학평론가한정규 문학평론가

2019-05-28 한정규

[경인칼럼]우국의 시절, 정치적 대타협의 촛불을 켜자

좌우 정치 사제들은 오늘도 격렬한 소탕전우여곡절 겪은 국민들이 나랏일 근심·염려전례없는 정파 전면전, 심각한 번아웃 증후군 지식인과 한마음으로 '기구' 결성할때 됐다이념의 제단에 영혼을 고박(固縛)당한 좌우 정치 사제들은 어제도 오늘도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전 영역에서 격렬한 소탕전을 벌인다. 내일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국민들은 자신의 의지로 그들의 진영에 가담했지만, 그들이 목을 매는 전쟁의 이유는 모호하다. 국민들은 최근 깨닫고 있다. 좌우 전쟁은 정의롭지도 않거니와 막대한 전쟁 후유증만 남겼다. 삶은 팍팍해졌고 나라의 기운은 시들어간다. 좌우 사령부의 지휘에 따르다 보니 개인과 국가가 위기에 처했다. 이제 민심은 한 줌도 안되는 좌우 정치사제들이 벌이는 전쟁을 의심하고 있다.대한민국은 지금 우국(憂國)의 시절을 관통하고 있다. 국민들이 나랏일을 근심하고 염려한다. 건국 이후 대한민국이 걸어온 산업화와 민주화 역정의 고비마다 수많은 우여곡절을 겪은 국민이다.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닌 정치세력의 대립을 대범하게 여겼던 국민이다. 수많은 위기에 단련돼 북한의 웬만한 도발에는 눈도 깜박이지 않던 국민이다. 그 국민들이 나라 걱정을 한다. 이렇게 가다가는 큰일 나겠다는 개별적 직감이 모여 위기감은 실체가 되어가고 있다.위기의 진앙은 정치다. 적폐청산. 방향은 옳았지만 방식은 의문을 낳았다. 제도와 관행에 집중돼야 할 청산의 방식이 사람과 정당 이념을 겨냥했다. 진보 진영과 사람에 의한 보수 진영과 사람의 청산으로 변질됐다. 그 결과 적폐청산은 원한만 쌓았다. 보복의 비례성과 대칭성을 강화했다. 진보에 당한 만큼 갚아주기 위해 집권해야 한다는 보수의 복수심은 무섭다. 아니라고? 나는 술자리에서 자주 목격했다. 철없는 소리가 틀림없고 철저하게 배격해야 마땅하다. 하지만 보수의 심연에 깔린 원한과 보복심리는 발화를 기다리는 또 다른 정치폭탄이다.진보 진영은 이를 잘 안다. 그래서 20년 100년 장기집권을 강조한다. 뻔뻔하다는 비판과 이기적이라는 비난을 받더라도 밟고 있는 페달을 멈출 수 없다. 문재인 정부 환경부 블랙리스트는 박근혜 문체부 블랙리스트와 다르다. 전 정권 국정원 댓글조작을 처벌한 사법은 정의고, 김경수 댓글조작 관여를 처벌한 1심 재판부는 불의다. 삼성은 유죄 증거가 나올 때까지 수십번이라도 압수수색을 해야 할 적폐 재벌이지만, 민노총은 폭력행위도 용인해야 할 정의로운 단체이다. 경제가 위기라는 언론과 여론을 향해 위기를 강조하는 것이 위기라고 답한다. 집권여당의 차기 총선 제갈량 양정철이 정보수장 서훈과 장시간 만났다 들켰다. 민망해 입 닫는 대신 준엄하게 언론을 꾸짖는다.이건 전쟁이다. 좌파 진보는 멈추는 순간 동력을 상실할 것을 우려해 페달을 쉼 없이 밟는다. 우파 보수는 흉중에 보복의 칼날을 숨긴 채 익숙하지도 잘하지도 못하는 장외투쟁을 벌인다. 전쟁 중에 발생하는 패륜적인 언행과 그에 따른 비난여론은 전쟁 수행 과정의 부수적인 피해로 치부한다.전례없는 좌우 정파의 전면전으로 대한민국은 심각한 번아웃 증후군에 시달리고 있다. 북한이 발사한 단거리 발사체는 요격이 불가능하다는데, 요격할 대책은 없고 발사체냐 탄도미사일이냐 정쟁만 있다. 미중 무역분쟁이 한국 경제의 가랑이를 찢어낼 판인데 우리 경제는 실용의 경쟁이 아니라 이념의 대립으로 신음하고 있다. 미국과는 대북외교 분야에서 신경전을 벌이고, 일본과는 총성 없는 외교전쟁 중이며, 중국의 대한민국 하대(下待)는 급기야 지명을 바꾸라는 수준에 이르렀다. 이런 마당에 외교관은 국가기밀(정상회담 통화내용)을 누설하고 정부와 외교부는 야당과 전면전을 벌이고 있다. 북한과 외세의 도전은 날카로운데 우리의 응전은 더디고 한가하다. 내부의 정치 투쟁으로 국가의 위기대응 능력과 국민의 응집력은 탈진됐다.좌우가 대치하고 전쟁하면 정치 보복의 악순환에 빠져 모두 패자가 돼 국가를 위협한다. 좌우가 협력하고 경쟁하면 정책 보정의 선순환을 통해 모두 승자가 돼 나라를 반석에 올릴 수 있다. 사회적 대타협이 아니라 좌우 정치적 대타협이 절실하다. 우국의 시절이다. 좌파와 우파의 상식적인 지식인들과 국민들이 우국충정의 한 마음으로 정치적 대타협 기구를 결성할 때가 됐다. 촛불을 다시 켜도 좋다./윤인수 논설위원윤인수 논설위원

2019-05-28 윤인수

[수요광장]차별을 조장하는 정부의 '균형' 감각

정부, 논란 제기된 다문화정책 논의국민여론 공식언급 혐오 강화시켜발표의 일방적 피해자는 또 이주민선입견 교정·불평등구조 개선 먼저인종차별·철폐사이 중립 존재 못해지난 4월 12일 정부부처 관계자가 참여한 국적 통합제도개선 실무분과위원회가 개최되었고, 국민역차별 논란이 제기된 일부 다문화정책을 논의했다고 한다. 이와 관련해 정부는 보도 자료를 통해 "다문화가족 전체가 정부 지원을 받아야 할 소외계층으로 낙인되어 부정적으로 인식될 수 있고, 국민들도 상대적으로 역차별을 느껴, 장기적으로는 국민과 이민자가 원활한 사회통합을 저해하는 갈등이 커질 우려가 있으므로 개선방안 마련이 시급하다"고 말했다. 그동안 시민사회단체들은 정부의 잘못된 정책이 다문화가족은 물론 이주민 전체를 차별하고 분리를 강화시킨다는 지적을 꾸준하게 해왔다. 정부의 이번 발표는 일면, 그동안 이어져왔던 비판을 뒤늦게나마 수용하고 이를 교정하려는 바람직한 시도로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정부의 소위 '균형' 잡힌 다문화가족 지원 정책 필요성 논의는 매우 부적절하며, 그 의도를 의심할 수밖에 없다.지금까지 이주민들을 낙인찍고 부정적으로 인식하게 만들어 이주민과 한국인 사이에 있어서는 안 될 갈등을 조장해온 것은 이번 보도 자료에서도 밝혔듯 정부의 잘못된 정책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에 대한 적절한 사과나 언급 없이, 그동안 다문화가족에게 너무 과한 지원을 해서 역차별 논쟁까지 있다고만 밝히는 것은, 바로 이런 잘못된 정책을 요구한 적도 없는 다문화가족에게 또 한 번 모든 비난을 전가하는 것이다.또한 법무부가 국민들이 역차별로 느낀다며 제시한 사례도 이해하기 어렵다. 정부는 청와대에 올라온 청원 글을 그 근거로 제시했다. "저는 한국에 살고 있는 일본인입니다. 한국의 외국인정책 여러 부문에 문제점 고쳐주세요."('18.8.14. 종료, 참여 인원 75,051명)를 제외하면, "자국민 역차별금지법을 만들어주세요", "정부와 인권위는 국민역차별법 폐지하라", "국민 역차별 혜택 폐지해 주세요" 등은 사실, 그 동의가 수백에 불과했다. 이런 청원 글이 정부의 주장대로 전반적인 여론을 대변하는 것이라면, 반대로 혐오 차별 세력을 제발 규제하고 처벌해서, 함께 공존할 수 있도록 힘써달라는 그동안의 요구에는 왜 이런 대규모의 대책 회의를 한 적이 없었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역차별 이런 단어가 언급된 사례만을 나열하며 역차별 논쟁이 마치 국민들의 전반적 여론이라고 공식적으로 언급 하는 것이야 말로 정부가 혐오차별 세력에 동조하여 차별과 혐오를 더욱 강화시키는 것이다.결국 정부에서 말하는 소위 '균형'이라는 것이, 이주민과 난민을 혐오하는 일부 극우적 혐오 세력과 이주민 인권 사이에서의 '균형'을 말하는 것은 아닌지 걱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동안 정부는 다문화가족이라는 행정편의적인 용어 사용으로 구분과 배제의 씨앗을 심어왔다. 저출산 고령화 사회의 대책으로 결혼이주민과 이주노동자를 상정하고 정책의 대상으로만 존재하게 만들어 왔다. 그리고 이제, 극우적 혐오세력의 발호가 이어지자 기다렸다는 듯, '균형'이라는 마치 양극단을 중재하고 달래는 듯한 인상의 단어를 새롭게 꺼내들었다. 이주민을 그동안 너무나 많은 혜택을 염치없이 받아온 당사자로 지목하고, 혐오차별 세력의 주장은 매우 근거 있는 국민의 목소리로 둔갑시킨 것이다. 결과적으로 이번 발표의 일방적인 피해자는 또다시 이주민이다. 더욱이 극단적인 혐오와 차별을 부추긴다는 점에서 일부 혐오차별 세력을 제외한 모든 국민이 피해자일 수밖에 없다.진정한 균형 잡힌 정책이 되려면, 첫째, 그동안 정부의 잘못된 정책으로 인해 혜택을 많이 받아 간다는 비아냥거림을 들으며 차별과 혐오의 대상이 되어 왔던 이주민에 대한 잘못된 편견과 선입견을 교정하는 정책이 선행되어야 하며, 둘째, 이로 인해 발생한 현재의 불평등한 구조를 어떻게 개선할 것인가에 대한 정책이 나와야 한다. 그리고 세 번째, 혐오차별세력을 규제 처벌하고 이를 넘어 다양성 증진을 통해 사회 전체 구성원 모두에게 도움이 되는 정책이 종합적으로 함께 논의되어야만 한다. '균형'은 사회 구성원 간에 어떤 기계적 지점을 일컫는 단어가 아니다. 인종차별 조장과 철폐 사이에 중립이나 균형이라는 말은 존재할 수 없다./이완 아시아인권문화연대 활동가이완 아시아인권문화연대 활동가

2019-05-28 이완

[참성단]액상형 전자담배

"담배와 나는 한 몸"이라고 말했던 공초(空超) 오상순(吳相淳) 말고도 처칠과 임어당(林語堂)의 '담배 예찬'은 너무도 유명하다. 처칠은 노벨문학상 수상작인 '2차대전 회고록'을 쓰면서 한 번도 시가를 입에서 뗀 적이 없고, 임어당은 저서 '생활의 발견'에서 "파이프 담배를 즐겨 피우는 사람은 절대 자기 아내와 다투지 않는다"고 썼다. 지금의 상식과는 엄청나게 괴리된 얘기다. 우리나라에 담배가 처음 들어온 것은 17세기 초로 이수광의 지봉유설(芝峯類說) '식물편'에 담배에 관한 이야기가 나온다. "남령초(南靈草)라고도 부르는 이것은 왜국에서 들어왔고 이것을 빨면 담과 하습(下濕)을 제거하여 술을 깨게 한다. 그러나 독이 있으므로 경솔하게 사용하면 안 된다"며 친절하게 경고까지 적었다. 1492년 콜럼버스가 120명의 대원과 함께 서인도제도의 동쪽 끝에 있는 작은 섬 '히스파니올라'에 상륙해 원주민들에게 담배 선물을 받은 지 2세기도 채 안 돼 담배가 조선에 들어왔다. '독이 있다'는데도 불구하고 우리 조상들은 왜 담배를 좋아했을까. 마땅히 즐길만한 것도 없었던 그때 , 시간을 죽이는데 담배만 한 것이 없었을 것이고 더러는 연주(煙酒) 연차(煙茶) 영초(靈草) 망우초(忘憂草) 사상초(思想草)니 하는 온갖 이름을 붙여 담배 피우는 것을 '멋'으로 생각했다.청소년들이 '멋'으로 피울지도 모르는 미국산 액상형 전자담배 '쥴'이 지난 24일부터 국내 판매를 시작했다. 상상도 못한 날렵한 디자인으로 '전자담배 업계의 애플'로 불리는 담배다. 2015년 미국에서 출시되었을 때 '청소년들의 흡연 호기심을 자극해 전자담배 입문을 조장한다'는 논란을 일으킨 그 담배다. 쥴 때문에 '전자담배를 피우다'라는 뜻의 '쥴링(Juuling)'이라는 신조어도 생겼다.'쥴'은 냄새도 없고 담뱃재도 나오지 않는다. 과일 맛이 나 청소년들 사이에 급속히 확산할 우려가 크다. 편의점에선 액상형 전자담배가 없어 못 팔 정도로 인기라고 한다. 형태가 USB(이동식 저장장치) 같아 소지품 검사를 해도 적발하기 어렵다. 수입허가를 내줄 때는 언제고 뒤늦게 보건당국이 편의점 등을 상대로 전자담배 청소년 판매에 대한 집중 단속에 나선다니 실소를 금할 수 없다. 한술 더 떠 KT&G도 대항마인 '릴 베이퍼'를 출시한다니 청소년 흡연율이 급격히 증가하는 것은 아닌지 걱정이다. /이영재 논설실장

2019-05-28 이영재

[기고]평택 진위, 그 시간을 걸어보다

가벼운 등산하기에 좋은 무봉산장엄한 만기사·명당 위치 진위향교삼봉기념관 이어지는 문화유산들손잡고 가족 여행하기 안성맞춤5월 가기 전 서로간 사랑 느껴보길가정의 달 5월의 끝자락이다. 따사로운 햇살은 여전히 감사하다. 모든 만물이 생동의 기운을 한껏 내어보는 시절이다. 여기저기 아카시아 꽃향기와 철쭉의 화려함을 충분히 느끼기에 현실은 시간을 내어주지 않는다. 잠시나마 시간을 내 동네 근처에 있는 산에 올라본다. 평택시에 소재한 무봉산이다. 평택(平澤)이 진위와 현덕 등을 제외하면 100m가 안 되는 저평한 곳이다 보니 무봉산은 평택에서 가장 높은 산(208m)이다. 무봉산은 산책과 가벼운 등산이 가능한, 남녀노소 불문하고 가볍게 유산소 운동을 할 수 있는 지형을 가진다. 가볍게 등산하기 좋은 코스라 그런지 어린아이들도 드물게 보인다. 아이들도 이 시간에 등산을 하다니, 필자도 열심히 등산을 해야겠다는 마음이 든다. 흙길을 오랜만에 밟아보니 기분도 좋고 자연을 벗 삼아 보니 행복한 마음이 절로 솟아난다. 이른 시간인지라 숲은 한적했고 길 옆의 아름드리나무는 길 안내를 자처한다. 나무 사이로 쏟아지는 아침 햇살은 눈이 부시고 상쾌한 공기는 신선함을 선사한다. 나의 상념은 자연의 절대지존 앞에서 작고 미미함이거늘….내려오는 길, 무봉산 자락에 자리한 만기사에 들러본다. 만기사는 고려 태조 25년인 942년 남대사(南大師)가 창건한 절이다. 세조가 인근을 지나다가 이 절에 들러 물을 마셨는데, 물맛이 상당히 좋아 샘 이름을 감로천(甘露泉)이라고 명명한 것을 설화는 전해준다. 임금이 마신 물이라고 해서 그런지 마을 사람들은 이 우물을 어정(御井)이라고 불러왔다. 현재의 절은 19세기 후반에 인근에서 옮겨온 것이다. 만기사는 고려 태조 이후 조선 세조 때 왕명으로 중수하였으나 1972년 주지인 혜송(慧松)이 대웅전과 삼성각·요사채를 세웠다. 1979년 실화로 요사채가 전소하자 원경스님이 이듬해 더욱 크게 확장하여 새로운 사찰로 지어져 장엄하게 오늘에 이른다. 만기사 대웅전 안에 있는 철조여래좌상은 1972년 7월 22일 보물 제567호로 지정되었다. 전형적인 고려 시대 철불좌상으로 크게 주목받고 있는 철조여래좌상의 오른팔과 양손은 본디 따로 주조되어 경내 별도 장소에 보관되어있으며 지금의 팔과 손은 새로 만들어 맞춘 것이다. 상투 모양의 육계가 명확한 나발의 머리칼, 부드러우면서 온화한 얼굴, 오른손을 풀어서 무릎 위에 올려놓고 두 번째 손가락으로 땅을 가리키는 항마촉지인의 수인은 모든 악을 굴복시키는 장중한 분위기를 연출한다. 세상 만물에서 깨달음을 구해주시며 베푸는 자비와 평안의 기쁨을 전해주시는 부처님의 미소. 명상 사이사이를 채워주는 처마 끝 풍경 소리를 뒤로하고 인근 봉남리에 자리한 진위향교로 걸음을 옮긴다.경기도 문화재 자료 제40호로 지정된 진위향교는 조선 초기의 향교다. 현유(賢儒)의 위패를 봉안, 배향하고 지방민을 교화하기 위해 창건했다고 전해진다. 배산임수의 명당에 자리한 진위향교는 가파른 자연석 계단 우측에 명륜당이, 그 좌·우측에 각각 동재·서재가 자리한다. 대성전은 중국과 우리나라 유학자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곳으로 정면 3칸, 측면 3칸의 단층 맞배집이다. 대성전은 그리 큰 건물은 아니지만 18세기 건축기법을 잘 보여준다는 점에서 문화재적 가치가 높다는 평가다. 공자(孔子)·맹자(孟子)를 비롯한 선현의 위패를 봉안하여 매년 2월, 8월에 석전의식을 행하고 있다. 진위향교 정면방향으로 4km 거리에는 삼봉기념관이 있다. 삼봉기념관의 유물 중 최고는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32호로 지정된 '삼봉집목판'이다. 이 목판은 조선왕조의 건국이념을 '경제문감', '조선경국전', '불씨잡변' 등을 통해 정치, 경제, 철학 사상을 총체적으로 다루고 있을 뿐만 아니라 글자 새김이 세밀하여 인쇄의 역사문화에 소중한 자료로 그 가치가 더욱 높다.내 고장 진위면은 문화유산이 많아 가족 여행하기에 안성맞춤이다. 어린이날, 어버이날, 근로자의 날, 부처님 오신 날이 함께 있는 푸르름 가득한 5월, 가정의 달이다. 5월이 가기 전에 사랑하는 가족과 서로 손잡아 주며 무봉산 산책도 해보고 부처님의 미소도 느껴보며, 조선의 설계자 정도전의 사상도 알아가면서 서로 간 사랑을 느껴보면 어떨까 한다./양경석 경기도의원(더불어민주당·평택1)양경석 경기도의원(더불어민주당·평택1)

2019-05-28 양경석

[방민호 칼럼]'부끄러움을 가르칩니다'

박경리~최인훈 사이 세대 박완서첫 소설 '나목' 욕망·양심 드라마단편 '…가르칩니다' 병적 감수성윤리적 양심의 뿌리, 늘 의식하는'부끄러움'의 능력에 무릎을 탁 쳐작가 박완서 선생은 1931년에 경기도 개풍군, 지금은 갈 수 없는 휴전선 위쪽에서 나서 2011년 불과 몇 년 전에 담낭암으로 유명을 달리한 작가다.나는 먼저 선생의 세대적 위치를 가늠해 본다. 박경리 선생은 1926년생 그의 성장기 전체는 일제 강점기에 걸쳐졌다. 태평양 전쟁과 이후 육이오 한국전쟁을 통하여 문학의 문제를 생명의 문제로 초점화할 수 있었다. 최인훈은 1936년생이고, 함경북도 회령에서 태어나 원산에서 중·고등학교를 다니던 중 사회주의 체제 교육을 접했다. 1·4후퇴를 얼마 앞두고 원산철수로 부산에 내려온 선생은 평생을 사회주의와 자본주의적 자유주의, 이 두 20세기 사상이 내건 숙제들과 싸우는데 바쳤다.박완서 선생은 이 둘 사이에 끼인 세대의 작가였다. 그녀는 일제 말기에 숙명여고에 들어가 해방 후에 숙명여고로 졸업했으니 1950년 5월이었다. 곧이어 육이오를 맞는 바람에 대학 입학과 더불어 수학은 좌절되고 6·28 서울 함락부터 9·28 수복에 이르는 3개월여를 인민군 치하에서 보낸다. 다시 1·4 후퇴 이후의 정적 감도는 서울에 남은 끝에 전쟁의 죽음과 폐허, 모순과 불합리를 겪을 만큼 겪은 사람으로 남게 된다.이 선생의 첫 작품은 젊었을 때 미군 PX 초상화부에서 일하면서 알게 된 박수근의 그림을 모델로 삼은 장편소설 '나목'이다. 선생은 여기서 선생 자신을 썩 빼어 닮은 여성 주인공 이경과 박수근을 모델로 그린 화가 옥희도의 사랑을, 그리고 대학을 두 해 다니다 군대에 갔다 온 전공 '황태수'와 미군 '죠오' 사이에서의 방황과 선택을 그렸다.이경은 여기서 자신의 잘못된 제안으로 행랑채에 숨어 있던 두 오빠의 죽음을 목도해야 했다. 그럼에도 젊고 살아 있기 때문에 사랑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갈망하는 여성이었다. 이 이경은 자연으로 돌아가는 박경리의 '생명'의 여인도 아니요, 좌우익 선택 문제에 귀착하는 최인훈의 '이념'의 청년도 아니다. 전쟁이라는 사회적 부조리, 불합리 속에서 온갖 고통을 떠안은 채 죄책감에 시달리며 그러면서도 한 삶을 살아내고자 하는 세속적 여성의 욕망과 양심의 드라마가 바로 '나목' 그것이다.이 '나목'은 어째서 선생이 이 육이오를 겪은 1950~1953년으로부터 근 이십 년이나 동떨어진 1970년에야 '여성동아' 현상 공모라는 독특한 형식을 통하여 빛을 볼 수 있었던 것일까? 선생은 그보다 훨씬 더 '문학적으로', 더 일찍 모습을 드러낼 수도 있었던 것이 아닐까? 스무 해 동안 선생의 침묵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이었을까?민음사 판 새로운 '나목'에 단편소설 '부끄러움을 가르칩니다'가 함께 붙어있어 다시 한 번 눈길이 갔다. 여기에는 세 번이나 결혼하면서 농사꾼 부자, 가난한 전임강사에 이어 일본 무역상을 자처하는 사업가에게 시집을 간 한 결벽증적 여인이 등장한다. 이 소설은 꽤나 풍자적이어서 이야기 전개에 재미가 있는데, 그 한가운데에는 이 여성 특유의 독특한 '부끄러움'이 자리 잡고 있다. 그녀는 세 번 결혼한 것쯤이야 하등 부끄러울 것 없지만 돈 많다고 떠벌리는 것, 겉으로는 고상한 척하면서도 속으로는 물욕과 명예욕에 허덕이며 사는 것, 육체를 팔아서라도 먹고는 살 수 있어야 한다는 식의 물질주의, 육체주의를 지독히도 혐오한다.그런 그녀가 작중에서 하는 말이 있다. "……혹시 내가 쓴 작문을 잘 됐다고 선생님이 아이들 앞에서 읽어주기라도 하면, 저 구절은 어디서 표절한 것, 저 느낌은 어디서 훔쳐온 것 하고 한 구절 한 구절이 읽을 때마다 나를 찌르는 것 같아 안절부절 못했다. / 분명히 내 내부에는 유독 부끄러움에 과민한 병적인 감수성이 있어서 나는 늘 그 부분을 까진 피부를 보호하듯 조심조심 보호해야 했다."이 작중 여성 인물의 자기 인식에 관한 대목을 읽으며 나는 속으로 무릎을 탁, 쳤다. 바로 이 '부끄러움'의 능력. 정말 자기 것이 무엇인지, 자신이 무엇을 했는지 생각하고 아는 능력이야말로 박완서 선생을 오늘 우리 문학사에 남은 존재로 만들어 준 근본이었다는 사실이다. 작가로서 박완서는 무엇보다 윤리적 양심을 느끼는 사람이었다. 생명처럼 근본적이지도 이념처럼 숭고하지도 않되 자신의 양심의 뿌리를 늘 의식하고 써나간 작가였다./방민호 문학평론가·서울대 국문과 교수방민호 문학평론가·서울대 국문과 교수

2019-05-27 방민호

[참성단]'게임중독' 논란

세계보건기구(WHO)가 게임중독을 질병으로 분류한 새 국제질병표준분류기준(ICD)을 확정하면서 게임강국인 한국이 벌집을 쑤셔놓은 형국이다. WHO는 게임 통제 능력이 손상되고 다른 일상생활보다 게임을 중요하게 여기면서도 게임을 12개월 이상 지속하면 게임중독이라고 기준을 세웠다. 이 기준에 포함되는 사람은 이제부터 게임중독이라는 질병에 걸린 중환자라는 얘기다.하지만 게임중독을 질병으로 볼 과학적 근거에 대한 찬·반 진영의 대립은 이제부터 시작이고 한동안 이어질 전망이다. 보건복지부는 WHO의 결정을 수용한다며 절차를 밟겠다는데, 문화체육관광부는 WHO에 이의를 제기하겠다며 반대하고 있다. 보건복지부는 자녀들의 게임중독을 우려하는 학부모와 의료계를, 문체부는 게임업계를 대변하니 정부의 입장 조율이 주목거리다.게임중독은 질병이 아니라는 게임업체와 국내외 과학자들의 주장은 설득력이 있다. 게임은 알코올, 마약, 담배와 같은 금단증상도 없고 영구적이지 않다는 논리다. 영화와 같이 수많은 게임이 출시됐다 퇴출되는 문화 기호품이라는 얘기다. 세계를 주름잡는 프로게이머나, 학교에서 1년내내 게임을 하는 한 특성화고교의 E-스포츠학과 학생들마저 게임중독 판정을 받을 수 있다는 항변은 과장이지만 업계가 체감하는 위기감을 보여준다. 게임업계에선 '게임중독' 대신 '게임 과몰입'이라는 표현을 쓴다.그런데 끼니를 거른 채 학교 수업을 팽개치고, 아이템을 사기위해 부모지갑에 손을 대면서까지 게임에 열중하는 자녀들의 '게임중독 증세'를 매일 체감하는 학부모들에게 게임업체의 반발은 헛소리일 뿐이다.문제는 정부다. 이미 지난해부터 WHO의 결정이 예고됐음에도 불구하고 1년이 지난 지금 보건복지부와 문체부가 딴소리를 내니, 대책 마련에 손 놓고 있었다는 자백이다. 자녀의 '게임중독' 증상을 체감하는 학부모와 '게임 과몰입'을 게임중독으로 침소봉대하면 게임산업이 망한다는 게임업계 사이에서 솔로몬의 지혜를 발휘할 수 있을지 지켜볼 일이다. 가뜩이나 경직된 노동시장과 주력산업의 퇴조로 경제위기설이 회자되는 험악한 시절이다. 노조 결사의 자유를 압박하는 ILO에 이어, 한국의 차세대 유력업종인 게임산업에 고삐를 채우고 나선 WHO에 이르기까지 국제기구마저 딴지를 걸고 나서나 싶은 낭패감은 시절 탓인가? /윤인수 논설위원

2019-05-27 윤인수

[오늘의 창]윤후덕 의원, 3기 신도시·GTX 노선변경 '사면초가'

파주 운정신도시를 지역구로 두고 있는 더불어민주당 윤후덕(파주시 갑) 의원이 제3기 신도시 발표와 수도권광역철도(GTX)-A 기지창 노선 변경에 따른 주민 반발로 '사면초가(四面楚歌)'에 빠졌다. 운정 주민들은 "고양 창릉신도시는 2기 운정신도시를 죽이는 정책"이라며 정부·여당을 강하게 성토하고, GTX-A 기지창 노선이 지나는 교하 주민들은 "민간사업자의 이익에 주민 생명이 볼모로 잡혀있다"며 반발하고 있기 때문이다.운정신도시연합회는 지난 12일부터 일산신도시연합회, 검단신도시연합회와 매 주말 운정·일산·검단에서 '3기 신도시 즉각 철회'를 요구하는 집회를 열고, 교하 주민들은 주민대책위를 꾸려 매주 화요일 윤 의원 사무실 앞에서 "주민 안전은 무시한 채 비용 절감에만 초점을 맞춘 노선변경 철회하라"며 윤 의원의 역할을 요구하고 있다. 그러자 윤 의원은 최근 '입장문'을 내고 "(3기 신도시는) 사전에 어떤 통보도 받지 못했고 언론보도를 통해 알게 됐다"고 책임 회피성 입장을 밝히면서 "(지난 16일) 문재인 대통령이 주재한 2019 국가재정전략회의에 국회 예결위 민주당 간사 자격으로 참석, 김현미 장관과 김수현 청와대 정책실장에게 운정 주민들의 분노를 전했고, 지하철 3호선 예비타당성 면제 등 2기 신도시 생활인프라 대책의 신속 추진을 강력히 요구했다"며 '3기 신도시는 이제 어쩔 수 없지 않느냐'는 태도를 보이고 있다.그러나 운정 주민들은 윤 의원의 말을 '진실'이라고 믿지 않는다. 그동안 윤 의원이 운정신도시 현안을 두고 기재부, 국토부 등과의 긴밀한 관계를 밝혀왔듯 이번 정책 결정 과정에서도 어느 정도 가담(?)했을 것으로 의심하면서 내년 '총선'을 벼르고 있다. 다만 광역교통 등 운정신도시를 살리는 생활인프라 전반의 종합대책이 곧바로 시행될 경우 윤 의원의 '결백'은 입증된다. /이종태 지역사회부(파주) 부장 dolsaem@kyeongin.com이종태 지역사회부(파주) 부장

2019-05-27 이종태

[이영재 칼럼]책을 정리하며

창간~종간호 모은 월간지 '뿌리 깊은 나무'발행인 온기 그대로 과거로 되돌아간 느낌10년 넘은 책꽂이, 반은 책·반은 먼지란 말"지금 우리는 그런 먼지 속에서 살고 있다"책을 정리할 일이 생겼다. 문학청년의 패기는 모두 사라지고, 이사를 해도 이제 더는 책을 안고 한 걸음도 나갈 수 없다. 책을 빼면 먼지가 풀풀 날았다. 하얀 목장갑이 금세 까매졌다. 딱히 정해진 날까지 정리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 그나마 다행이었다. 책은 두 겹으로 꽂혀있다. 한 권을 빼면 그 뒤에 늙어서 더는 힘을 쓰지 못하는 병사처럼 빛바랜 책이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뿌리 깊은 나무'가 보였다. 70년 중·후반을 풍미했던 월간지다. 가슴속에 바람이 싸하게 지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책 정리고 뭐고 자리에 주저앉았다. 서슬 퍼렇던 시절, 수원 교동 헌책방을 돌아다니며 창간호부터 종간호까지 사서 모은 잡지다. 어렵사리 결호를 발견했을 때의 기쁨은 경험해 보지 않으면 모른다. 발품을 판 덕분에 단 한 권의 결호 없이 온전히 모았다. 권당 200원에서 500원 값을 치렀던 것으로 기억된다. 다른 어느 책보다 '뿌리 깊은 나무'에 애정이 넘치는 것도 그래서다. 창간호를 읽다 보니 이래저래 한 시간이 훌쩍 지났다.1976년 3월에 창간된 한글 전용 잡지 '뿌리 깊은 나무'에는 '문화'의 힘을 앞세워 긴급조치를 발동한 독재에 항거하는 발행인 한창기의 온기가 그대로 녹아있다. 쌀을 한 움큼 쥐고 있는 손을 표지 사진으로 사용한 창간호는 기존의 잡지와는 확연한 차이가 있었다. 43년 전 쓰인 한창기의 창간사는 이랬다. "우리가 '잘사는' 일은 헐벗음과 굶주림에서 뿐만이 아니라 억울함과 무서움에서도 벗어나는 일입니다. 안정을 지키면서 변화를 맞을 슬기를 주는 저력 - 그것은 곧 문화입니다." 잡지는 신군부가 들어선 1980년 8월 폐간될 때까지 모두 53권이 발행됐다.80년대 초 수원역 지하상가 입구에는 '니꼴라'라는 서점이 있었다. 군사정권으로부터 판매금지된 책들은 이곳에서 구했다. 그때 사서 본 책들이 둘째 줄에서 먼지를 꼬박 뒤집어쓴 채 숨을 죽이며 있었다. 김지하의 '타는 목마름으로', 신동엽의 '금강'을 비롯해 헝가리 공산당 인민위원이었던 게오르그 루카치의 저서들도 있었다. 당시에는 '불온서적'으로 낙인찍혀 소지하는 것만으로도 국가보안법에 저촉된 책들이다. 무엇에 홀렸던 것일까. 그때는 이런 책들을 밤새 탐독했다. 책 안에 '민주화로 가는 길'이 있는 줄 알았다. 다시 들춰보니 쓴웃음이 나왔다. 책마다 밑줄이 쳐있고, 뭐라고 썼는지 판독조차 하기 어려운 메모들이 지렁이처럼 꿈틀거리고 있었다. 80년대 우리는 '민주화의 열망'속에 그렇게 시간을 보냈다.책 속에 있으니 80년대로 다시 돌아간 느낌이었다. 낡은 책에서 매운 최루탄 냄새가 나는 것 같기도 했다. 최루탄 터지는 소리가, 그것을 피하려고 이리저리 달리는 친구들의 발소리가 들리는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거기까지다. 많은 사람이 그때의 기억을 지웠고, 이제 사람들은 책을 읽지 않는다. 한때는 집안에 김소월 윤동주 시집 한 권 정도는 갖고 있었다. 이제 그런 시대도 지났다. "요즘 무슨 책 읽어?"라고 묻는 시대가 아니다. 그런데도 아직 그 시대를 잊지 못하고 그때 생각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 '꼰대'라고 손가락질을 받는지도 모르고 '자신들이 곧 정의'라고 생각하는 그런 사람들 말이다.고민은 이 책들을 어떻게 할 것인지였다. 기증하려고 했지만, 도서관마다 난색을 보였다. 그러잖아도 있는 책들을 폐기해야 하는 처지라 더는 기증을 받지 못한다고 도서관 측은 완곡하게 거절했다. 그렇다고 분리수거를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고물상에 넘기는 방법도 있지만, 이미 그런 경험을 한 친구는 "그거 사람이 할 짓이 못되더라. 어렸을 적 어른들이 집에서 키운 백구를 정이 붙을 만하니 개장수에 넘겼잖아. 그때 그 백구의 슬픈 눈빛을 봤지? 꼭 그 기분이야 "라고 말했다. 물론 안다. 나도 그런 경험이 있었다. 다시 책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뽀얀 먼지가 방안 가득 피어올랐다. "10년이 넘으면 책꽂이도 반은 책이고 반은 먼지"라고 했던 친구의 말은 하나도 틀리지 않았다. 지금 우리는 먼지 속에서 살고 있다./이영재 논설실장이영재 논설실장

2019-05-27 이영재

[참성단]'봉준호 영화'

2001년 말께, 경인일보 편집국에 더벅머리 청년(?) 두 명이 들어왔다. 그중 한 명이 자신은 '플란다스의 개'를 만든 "감독 봉준호"라고 했다. 또 한 명은 훗날 '해무'를 감독한 심성보. 데뷔작이 흥행하지 못했지만, 평단의 찬사 때문이었는지 봉 감독은 자신감에 충만 돼 있었다. 이들이 경인일보를 찾은 건 '화성 연쇄 살인사건' 때문이었다. 화성 사건을 다룬 경인일보의 기사가 가장 풍성해 영화를 만들기 위해선 당시 기사와 사진 자료 등의 협조가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역대 한국영화 100편을 뽑을 때 늘 최상위에 올라있는 '살인의 추억'은 그렇게 탄생했다. 525만 명을 동원한 이 영화로 봉준호는 한국영화를 이끌 차세대 감독으로 우뚝 섰다.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이 제72회 칸국제영화제에서 경쟁부문 최고상인 황금종려상을 받았다. 한국 영화 사상 첫 황금종려상이다. 특히 올해는 한국영화 100주년이 되는 해여서 수상의 의미는 더 크다. 보통 세계 3대 영화제로는 칸, 베를린, 베니스 영화제를 꼽는다. 2012년 김기덕 감독이 '피에타'로 베니스영화제에서 황금사자상을 받은 이후 7년 만의 쾌거다. 영화제 대상 수상을 올림픽 금메달과 비교할 수는 없다. 하지만 영화의 본고장에서 한국 감독이 해외 거장 감독들의 영화보다 더 높은 점수를 받은 대상이라 경사가 아닐 수 없다.봉 감독이 추구했던 영화의 세계는 '불합리한 계급사회'에 대한 비판이다. 대학 시절 만든 단편영화 '지리멸렬'에서부터 봉 감독은 교수 법조인 언론인 등 지도층의 위선과 허위를 들추며 한국사회의 불평등을 통렬하게 비판했다. 국제적 명성을 얻은 후 만든 '설국열차'의 열차 안 세상은 절대 평등하지 않은 부조리한 세상이다. 패배자들로 가득한 꼬리 칸의 젊은 지도자가 폭동을 일으켜, 고위층들이 모여 있는 가장 위 칸으로 돌진하는 것은 불평등으로 가득 찬 현대사회에 대한 상징과 은유의 표현이다. '기생충' 역시, 가난한 가족과 부자 가족의 이야기를 통해 '빈부격차' 문제를 블랙코미디 방식으로 개성 있게 풀어냈다는 평가를 받았다. 12세 때 감독을 꿈꾸었던 봉준호는 단 7편의 장편 영화로 '봉준호 영화'라는 나름의 장르영화 계보를 만들며 세계적 감독이 됐다. 이제 봉준호를 선두로 박찬욱, 홍상수, 이창동, 김기덕, 나홍진 감독 등이 어우러져 한국영화는 바야흐로 '풍요의 시대'를 맞게 됐다. /이영재 논설실장

2019-05-26 이영재

[월요논단]디지털플랫폼시대에서 살아남는 법

아날로그 라이프스타일 '독립서점'아늑하고 개성있는 공간으로 '변신'도서정가제 강화로 가격경쟁력 차단온라인 불공정경쟁 반드시 규제해야맞춤형 서비스등 적극적인 노력 필요공유서비스의 등장으로 택시산업이 심각한 위기에 직면해 있다. 5월 23일에는 지역언론, 지역언론시민단체, 지역언론학술단체 관계자들이 네이버 본사 앞에서 지역언론 차별을 중단하라고 시위를 벌였다. 디지털플랫폼을 기반으로 전통서비스산업과 지역미디어산업의 위기가 최고조에 달하고 있는 것 같다. 공유교통서비스나 뉴스매개서비스를 하고 있는 디지털플랫폼에 대한 공적 규제는 그것대로 필요하겠지만 뭔가 근본적인 대응도 필요할 것 같다. 디지털세계에 맞서는 아날로그 세계의 반격, 같은 것을 생각해 볼 수 있을까? 독립서점에서 지혜를 얻어 볼까 한다. 최근 서울에서 제주도까지 독립서점 여러 곳을 방문했다. 3월 어떤 일요일. 인적이 거의 없던 마을에 들렀을 때, 독립서점에 사람이 가장 많이 모여 있는 진풍경을 목격하기도 했다. 독서모임, 영화모임 등 사람들이 모이는 마을의 문화적 중심지 역할을 하고 있었다. 지역의 독립서점에서는 지역 도시재생 등 지역이슈나 지역문화관광에 관련된 자료들이 보기 좋게 배치된 것이 인상적이었다. 독립서점은 디지털플랫폼과 온라인 쇼핑에 대한 아날로그적 반격의 기점일까. 오프라인 서점은 음반판매점과 함께 소매유통산업에서 가장 먼저 디지털 테크놀로지의 공격을 받았다. 미국은 1995년 제프 베제스의 아마존, 우리나라에서는 1998년 WebFox부터 온라인서점서비스가 등장했다. 아마존은 상품의 다양성과 가격으로 대형서점 체인과 독립서점에 심대한 타격을 입혔다. 아마존은 이제 세계 최대의 쇼핑몰로 구글, 페이스북, 애플과 함께 플랫폼 제국을 형성했고 그중에서도 가장 위협적인 존재가 됐다.데이비스 색스의 말처럼 서점은 '쇠퇴', '죽음', '종말', '수명이 다한' 따위의 수식어와 함께 했다. 절망적인 예측에도 불구하고 오프라인 서점은 회생하기 시작했다. 미국의 독립서점은 미국서점연합 가입 서점을 기준으로 하면 2009년 1천650개에서 2014년 2천227개로 증가했고 독립서점 체인도 성장하고 있다. '퍼니 플랜'의 조사에 따르면 운영 중인 우리나라 독립서점도 2015년 97개에서 2018년 418개로 크게 늘어났다고 한다. 서점과 같은 오프라인 소매유통점에서 방문자들은 상품을 구매하기보다는 그 공간에 대한 느낌과 경험을 얻게 된다. 독립서점은 아날로그를 바람직한 라이프스타일로 제공하는 아늑하고 멋진 공간이다. 책을 잘 아는 친절한 판매원과 잘 고른 책이 있고 독서모임 등 이벤트를 진행하는 개성 있는 공간이다. 데이비스 색스에 따르면 독립서점은 아마존이 약점으로 여긴 물리적 공간, 판매원, 제한된 도서를 모두 자산으로 활용하고 있다. 독립서점은 온라인서점의 알고리즘으로 변환되지 않는 판매자와 고객과의 책 추천 대화로 형성되는 특별한 관계가 있다. 인터넷서점의 미리보기나 검색 기능을 찾을 수 없었던 책을 우연히 발견하는 기쁨도 있다. 이 글의 바탕이 된 데이비스 색스의 '아날로그의 반격'이란 책도 지역의 독립서점에서 우연히 구입한 것이다. 독립서점을 큐레이션 서점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서점의 콘셉트에 맞게 책을 선택하고 분류·배치하는 서비스를 한다. '아날로그의 반격'에서 도시는 서점과 같이 시민이 모일 공간을 제공하는 사업들의 집합체라고 한다. 독립서점 중 상당수가 독서모임의 지역 커뮤니티 활동을 하고 있다. 그래서 작은 서점들이 사라지면 도시의 정체성이 사라진다는 것이다. 오프라인 독립서점의 성장세는 출판시장의 주요 소비자인 40대와 50대의 옛것에 대한 향수 덕이라고 보기 어려울 정도이다. 성장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도서정가제 강화로 거대 온라인서점의 가격경쟁력을 차단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또 개성적인 독립서점은 개인화된 소비 트렌드에 잘 따라갔다. 서비스산업과 지역미디어산업을 위협하고 있는 디지털플랫폼을 거부할 수 없다. 독립서점의 사례에서 봤듯이 디지털플랫폼이나 온라인유통산업의 불공정한 시장경쟁에 대한 공적 규제는 반드시 필요하다. 또한 고객과의 실제적 관계와 공간 경험, 맞춤형 서비스 등 아날로그의 강점을 최대한 발휘하는 적극적인 노력도 필요하다./이용성 한서대 교수(언론학)이용성 한서대 교수(언론학)

2019-05-26 이용성

[조성면의 '고서산책']'정암집(靜菴集)'과 조광조의 개혁정신

사익 취한적 없고 외압 유혹 견제오로지 정의로운 사회 실현 혼신개혁은 철저한 도덕성으로 추진사람 해치는게 아니라 살려야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생각케 해올해는 정암 조광조(1482~1519) 선생이 서세(逝世)한 지 오백주년이 되는 해다. 그는 조선시대 선비들의 '인격적 기준'이었고, '개혁의 상징'이었다. 선생의 서세 오백주년을 맞이하여 모처럼 '정암집'을 꺼내 들었다. 조선시대 '정암집'은 세 차례에 걸쳐 간행됐다. 1681년 남원에서, 1685년 대구에서, 그리고 고종 29년째인 1892년에는 능주에서 학포 양팽손(1480~1545) 선생의 후손 양정환과 그의 아들 양회연의 주도로 중간됐다. 일제강점기인 1935년 석판본도 나왔으나 현재 널리 유통되는 판본은 1892년 임진본(壬辰本)이다. 임진본의 서지 상황은 이렇다. 총 5권 14권 4책에, 크기는 가로 29㎝×세로 19㎝, 10행 18자에 상하내향이엽화문어미(上下內向二葉花紋魚尾)가 있다. 옛날 고서들은 중앙 부분을 접어 제본하는데, 중앙의 접힌 부분인 판심(版心)에 물고기 꼬리 모양의 장식을 한 것이 바로 어미이다. '상하내향이엽화문어미'란 판심 위아래의 물고기 꼬리 장식이 판심의 중심부를 향해 있으며, 어미 속에 2개짜리 꽃잎 장식이 들어가 있다는 뜻이다. 필자가 소장한 임진본은 4권짜리로 편집된 것인데 공교롭게도 미수 허목(1595~1682)이 쓴 서문과 퇴계 이황(1501~1570)과 치재 홍인우(1515~1554)가 찬술(撰述)한 행장, 소재 노수신(1515~1590)이 지은 신도비명 등의 글이 빠져 있다. 단순한 낙질본인지 당색과 가풍에 따른 의도적 재편집본인지는 더 따져봐야겠다. 만일 후자라면 '정암집'이 당색의 영향을 받은 것이라 매우 흥미롭고, 또 많이 아쉽다. 요즘 우리 사회가 적폐청산과 개혁 드라이브로 인해 몸살을 앓고 있다. 적폐청산과 패스트트랙을 핑계로 당리당략을 챙기려는 극한대립과 막말정치를 지켜보면서 문득 한국사상사에서 영원한 개혁의 아이콘으로 통하는 정암이 떠올랐다. 정암이 사화의 광풍 속에서 유배지인 전남 화순 능주에서 사약을 받고 서세한 지 오백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그의 개혁정치에 대해서는 여전히 평가가 엇갈린다. 조선을 도덕적 이상국가로 만들기 위한 올곧은 실천으로 보는 견해가 주류를 이루는 가운데 조선의 적폐청산을 위한 그의 비타협적 개혁을, 현실을 고려하지 않은 성공하지 못한 사림정치로 보기도 한다. 조선시대 내내 정암 같은 개혁은 유례가 없었다. 그는 개혁정치를 통해 털끝만큼의 사익을 취한 적이 없었다. 또 현실정치에 몸을 담았던 4년 동안 어떠한 외압과 유혹에도 흔들리지 않고 오로지 정의로운 도덕적 이상사회 실현을 위해 혼신을 다했다. 그러나 끝내 현실정치의 벽을 넘지 못하고 기득권 세력의 탄핵을 받아 사사, 엽지화(葉之禍)를 입었다. 정암은 '소학'과 '근사록'을 연마하여 문리를 얻고 유교의 정수에 이르렀는데, 스승 한훤당 김굉필(1454~1504)처럼 '소학'을 매우 중시했다. 중종조는 조선의 유교화가 본격화한 시기이자 '소학'의 시대였다. 중종 13년(1518년) 국가에서 '소학'을 1천300부나 인쇄하여 대소 신료 ·종친·지방관아 등에 무료로 배포하였다는 기록에서 알 수 있듯 근대 이전에 책은 판매나 상거래 대상이 아니라 나눔과 공유의 대상이었다. 이렇듯 옛날 책은 대개 판매가 아니라 나눠주기 위해서 만들어졌던 것이다. 그건 그렇고 정암처럼 인품과 도덕성과 정당성을 갖춘 현인(賢人)의 개혁도 큰 참화를 입었거늘 나는 그대로인 채 남더러 바뀌라 하고 세상을 바꾸기란 더더욱 불가능하다. 개혁은 단숨에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철저한 도덕성과 사회적 동의의 바탕 위에서 점진적으로 꾸준하게 추진되어야 하며, 무엇보다 사람을 해치는 게 아니라 사람을 살리는 개혁이 되어야 한다. '정암집'은 개혁이 얼마나 무섭고 어려운 일인지 다시 숙고하게 하는 살아있는 고전이다./조성면 문학평론가·수원문화재단 전통교육팀장조성면 문학평론가·수원문화재단 전통교육팀장

2019-05-26 조성면

[데스크 칼럼]그림 그리기의 미래가치

전쟁중에도 멈추지 않았던 창의력 결정체어느덧 22회째 맞이한 '바다그리기대회'온갖 불편 감수 아이들 데리고 온 부모들지금보다 더 나은 사회위한 '훌륭한 자산'1950~60년대를 살아낸 어른들은 요즘 젊은이들을 보면서 걱정하는 말을 쏟아내고는 한다. 고생하지 않고 오냐오냐하는 분위기 속에서 크다 보니 사회생활의 각박함을 견디지 못할 것이란 이야기가 많다. 그런 젊은이들이 대다수인 우리 사회도 경쟁력을 상실할 것이라는 비관적 전망을 내놓는 어른들도 있다. 그런데 지난 주말 있었던 경인일보 주최 바다 그리기 대회의 풍경을 보고서는 그 어른들의 걱정이 기우일 것이란 생각을 하게 되었다. 잘 그리고 못 그리고를 떠나 성의를 다한 그림 작품은 창의력의 결정체이다. 무엇을 그릴 것인지 구상을 하고, 어떠한 색깔을 칠할 것인지 고민하는 것 자체가 고도의 창의성을 요구한다. 보이거나 상상하는 대상을 사진처럼 보여줄 것인지, 특정한 어느 한 가지를 크게 부각해서 그릴지를 판단하는 것 역시 그 개인의 독창성을 드러내는 중심 요소이다. 그래서 그 많은 아이들이 그림 그리기 행사에 참가하는 것이 아닐까.어느덧 22회를 맞이한 이번 행사 역시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정말로 많은 어린이들이 그림 그리기에 열중했다. 미세먼지 경보와 뙤약볕도 그들의 그리기 열정을 막을 수는 없었다. 같이 온 부모들 역시 대단했다. 캠핑족들이 늘어나면서 텐트 없는 집이 없을 정도인데, 바다 그리기 행사장 역시 마찬가지였다. 금요일 저녁에 미리 텐트를 쳐놓은 부모들도 여럿 있었다. 아이들이 좋은 자리에서 그림을 그릴 수 있도록 그 부모는 하루 앞서 준비를 했던 거였다. 수많은 부모들은 아이들이 완성한 작품을 들고 행사장에 세워진 무대 위에 오르게 한 뒤 사진을 찍어주었다. 그 인증샷을 보면서 아이들은 자신의 작품에 대하여 다시 한 번 생각할 것이다. 어른이 되어서도 그 인증샷은 소중한 기억으로 남을 게 틀림없다. 그렇기에 어른들은 주차 전쟁을 치르는 고생을 하면서도 아이들을 행사장에 데리고 오는 것일 게다.창의력의 결정체인 그림 그리기는 6·25 전쟁 중에도 멈추지 않았다. 종군화가들뿐만이 아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 나가는 전쟁통에도 화가들은 재료 부족에 시달리면서도 그림을 그렸고, 전시회를 열었다. 빵 한 조각 살 돈이 없는 궁핍한 피란살이를 하던 어떤 화가는 상상 속의 캔버스에 상상 속의 작품을 그렸다. 인천미술협회가 결성된 것도 1952년이었다. 전국문화단체총연합 산하의 '대한미술협회 인천지부'는 그때 생겨났다. 김영건, 박응창, 윤기영, 최석재, 박흥만, 한흥길, 장선백, 유희강, 박세림, 장인식, 이경성 등이 참여했다. 전쟁 시기 최초의 미술 비평문을 탄생시킨 것도 인천 출신의 이경성이었다. 해방 직후 초대 인천시립박물관장을 지내기도 한 1세대 미술 평론가 이경성은 당시 젊은 화가 그룹 '후반기 동인'의 피란지 부산 다방에서 있었던 전시회를 일컬어 "내일의 새로운 미를 창조하고자 하는 고민과 자태를 직접 드러냈다"고 평가했다. 전쟁 이후 우리 사회가 빠르게 성장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어떠한 곤궁 속에서도 그림 그리기를 멈추지 않았던 많은 이들의 창작 의욕이 큰 역할을 했다고 믿는다.바다 그리기 행사장도 난리통이었다. 차를 댈 곳이 없어 주차 전쟁을 치렀고, 아이를 잃어버렸다고 뛰어다니는 엄마 아빠, 부모를 잃어버렸다며 울부짖는 아이들도 있었다. 집 나서면 고생이라고 말하면서도 부모들은 아이들을 데리고 왔다. 창의력을 발현시킬 흔치 않은 기회인 바다 그리기 행사를 빼먹지 않고 찾은 아이들은 미래의 우리 사회가 지금보다 더 나은 쪽으로 가는 데 훌륭한 자산이 될 것이다. 그 아이들을 위해 온갖 불편을 감수하고 행사장에 나온 부모들은 분명 우리의 미래를 새롭게 그려낼 바탕이라고 믿는다./정진오 인천본사 편집제작국장정진오 인천본사 편집제작국장

2019-05-26 정진오

[발언대]'보이스피싱' 이제는 전화를 끊어야 할 때!

보이스피싱은 지난 2006년 시작돼 현재 여전히 진행형인 범죄다. 수법 또한 교묘하게 진화했다.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보이스피싱 범의 어눌한 말투가 재미있어 코미디 소재로 사용된 적도 있었지만 10년이 훌쩍 지난 지금은 어떨까? 정확한 표준말을 구사할 뿐만 아니라 금융업무에 대한 이해와 숙지도가 전문가 못지않다. 또 해외전화 또한 변작하고 있으며, 대출회사를 사칭한 앱(app, 악성코드)을 설치하게 해 피해자의 전화를 통제하는 수법까지 진화했다. 최근에는 예전과 다르게 피해자의 연령대가 30~50대가 가장 많은 비율을 차지하고 있다. 이는 왕성한 경제활동으로 인해 자금이 가장 많이 필요한 연령대이기 때문으로 분석된다. 또한 신용이 좋지 않아 급전이 필요한 서민들이 피해를 보게 되는 경우가 많아 피해 상황은 이루 말할 수 없다. 경기남부경찰은 금년 한해 보이스피싱 근절을 위해 경찰 모든 부서의 역량을 결집하는 한편 금융기관 등 유관기관과 협업하여 적극 대응하고 있다. 또한 경찰서 지능범죄팀 내 전담반을 구성해 검거와 예방에 최선을 다하고 있다. 보이스피싱, 이것만 알면 예방할 수 있다. 첫째 전화·문자로 대출 권유를 받은 경우 대응하지 말고 금융회사에 반드시 확인. 둘째 대출처리비용 등을 이유로 선입금 요구 시 보이스피싱 의심. 셋째 저금리 대출을 위한 기존 대출금 상환 개인계좌 이용 시 100% 보이스피싱. 넷째 전화로 정부기관이라며 자금이체를 요구하면 100% 보이스피싱. 다섯째 출처 불명한 파일·이메일·문자는 실행하지 말고 즉시 삭제. 여섯째 보이스피싱 피해 발생 시 즉시 112신고 및 계좌 지급정지 요청. 그리고 보이스피싱에 사용하는 대포통장은 일반인 명의가 대부분이다. 기존 대출금을 상환하는 돈을, 정부기관에 보내는 돈을 일반인에게 보내라고? 한 번 더 의심하고 주의하자. 이것을 지킨다면 누구나 피해 예방이 가능하다. 발생한 사건을 해결하는 것은 경찰의 중요한 임무이다. 그러나 범죄의 예방은 경찰의 힘만으로는 어렵다. 국민들의 관심과 호응이 무척 중요하다. 보이스피싱 전화는 대응하지 말고 바로 끊어야 한다. 그것이 답이다./임중수 오산경찰서 지능범죄수사팀장임중수 오산경찰서 지능범죄수사팀장

2019-05-26 임중수

[기고]앙골모아의 부활과 극복

온나라 뒤덮은 '초미세먼지 공포'정부대책 공허속 국민은 무기력또다른 심각성은 '인구감소 문제'취업난에 결혼 포기 출산도 꺼려작금의 재앙 모두 힘모아 해결해야'앙골모아(Angolmois)'는 노스트라다무스의 '예언집'에 등장하는 말이다. "1999년 하늘에서 공포의 대왕이 내려오리라. 앙골모아의 대왕이 부활하리라"는 기록을 근거로 노스트라다무스를 연구하는 사람들은 인류의 멸망시기를 1999년이라고 주장했다. 이들이 점친 멸망의 원인은 핵미사일, 소행성 또는 혜성과의 충돌 등 해석도 분분했지만 인류는 이를 슬기롭게 극복했다. 그런데 지금 한국에서 '앙골모아'가 부활하고 있다. 요즘 우리나라의 하늘을 보면 또 다른 '공포의 대왕'이 도사리고 있는 듯 느껴진다. 바로 초미세먼지다. 모든 생명체는 호흡을 해야 생명을 유지할 수 있다. 숨을 쉰다는 것은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욕구이며, 숨이 막힌다는 것은 죽어간다는 말과 같다. 미세먼지가 무엇인가? 세계보건기구(WHO)는 미세먼지를 1군 발암물질로 분류하고 있다. 미세먼지보다 더 작은 초미세먼지는 폐포(肺胞)까지 침투하여 축적되며, 경우에 따라선 혈액을 따라 전신에 피해를 줄 가능성이 있다고 경고하는 물질이다. 더 한심한 건 '침묵의 살인자'인 미세먼지와 초미세먼지가 온 나라를 뒤덮어도 뾰족한 해법과 대책은 없다는 것이다. 정부 대책은 공허하고 국민은 무기력증에 빠졌다. 마스크 착용, 차량 2부제, 경유자동차 증가 억제, 노후 석탄화력발전소 가동 한 달간 정지, 미세먼지 다량배출 사업장의 조업시간 변경, 비상 저감조치 시행, 대형 미세먼지 타워, 인공강우 등은 국민들이 안심할 수 있는 현실적 대안이 되지 못하고 있다. 지난해 우리나라의 초미세먼지 농도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가운데 칠레에 이어 두 번째이며, 초미세먼지로 인한 심질환, 뇌졸중에 '급성하기도호흡기감염 및 만성폐쇄성폐질환'이라는 생소한 병 때문에 1만1천924명이나 조기에 사망했다고 한다. 파이낸셜타임스 등 일부 서구 언론들은 미세먼지에 대해 공기(air)와 종말(apocalypse)을 합쳐 '에어포칼립스(대기오염으로 인한 종말론)'라는 신조어를 만들기도 했다. 다음으로 느린 속도로 종말(?)을 예고하고 있는 저출산은 또 하나의 '앙골모아'이다. 출산율이 1.23명이던 2010년 삼성경제연구소의 '저출산 극복을 위한 긴급제언' 보고서에 따르면, 작금의 저출산 추세가 지속된다면 2100년에는 인구가 2천468만 명으로 줄어들고, 2500년에는 2010년 인구의 0.7%인 33만명으로 축소되어 한민족이 소멸하고 한국어도 사라진다고 전망했다. 그런데 2018년 출산율은 첫 0점대(0.98명)로 추락했다. 2006년부터 지난해까지 13년간 저출산 극복을 위해 국민세금 150조를 넘게 쏟아 붓고도, 출산·육아 불능사회가 된 것이다. 저출산은 한국이 지구상 첫 인구절멸국가가 될 수 있음을 예고하는 최대 위험요소이다. 자녀를 통해 종족을 유지하려는 것은 인간의 원초적 본능이다. 그런데 미래를 책임질 청년들이 취업난에 허덕이며 결혼을 포기하고, 결혼한 부부는 아이를 낳아 키우는 것에 대한 부담으로 출산을 꺼려 하고 있다. 우리의 젊은이들은 종족 유지의 인간적 본능마저 포기한 채 힘든 삶을 영위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 사회의 고용·근로환경·주거·양육·교육 시스템이 출산 친화적으로 구축되어야 한다.미세먼지, 저출산과 같은 '공포의 대왕 앙골모아'의 부활은 우리 스스로 불러들인 재앙이다. 정부와 국회, 기업, 국민 모두가 힘을 모아 극복해야 한다./정종민 성균관대 겸임교수·전 여주교육장정종민 성균관대 겸임교수·전 여주교육장

2019-05-23 정종민

[풍경이 있는 에세이]'독재타도' 라는 거짓 프레임

외치는 자체가 '독재시대' 아닌 증거모순 알면서 다른 속임수 있기때문근거없는 정치공세라는 것 알지만소속집단 띄워줘야 한다고 믿는식위기의 순간 국가의 역할 궁금하다요즘 일부 정치인이 '독재타도'를 공공연히 떠벌리고 있다. 그들 대부분은 195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정권의 '진짜' 독재시대에 교육을 받았고 독재를 몸으로 경험하며 살아온 사람들이기에, 자신이 말하는 독재가 무엇인지 잘 알고 있다. 예를 들면 자유당 시절에는 '반공'이라는 이름으로 제주에서 수만 명을 죽였고, 유신시절에는 국회의원의 3분의 1을 대통령 마음대로 임명하고 종신집권을 꿈꿨으며, 군사정권에서는 광주 시민을 폭도로 몰아 죽이고 반정부 인사들을 잡아다 간첩으로 조작했다. 그때는 '독재'라는 말 자체가 금기어였다. 그 '진짜' 독재시기에는 감히 입도 뻥끗하지 못했던 사람들이 지금은 '독재타도'를 아무런 거리낌도 없이 공개석상에서 마이크로 떠들고 있다. 정권을 비판하는 수준을 넘어 국민을 모욕하는 수준에 이르렀지만, 누구도 제지하지 않는 것 같다. 그들이 '독재타도'를 외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이 시대가 독재가 아니라는 증거인 셈이다. 목소리 높여 외치는 그들 자신이 이런 모순을 모를 리 없다. 이 모순을 뻔히 알면서도 거짓 '독재타도'를 소리 높여 외치는 데에는 다른 속임수가 있기 때문이리라.누구나 독재가 나쁘다는 건 잘 안다. 과거 역사에서 독재는 '민주주의'의 적이며 인권을 유린한 악마였다. 그들이 노리는 것은 바로 이 악마적 이미지를 현재의 정권에 씌우려는 것이다. 독재정권의 후예라는 숙명적 신분을 세탁하고, 역으로 자신에게 덮여있던 가면을 벗어 자신의 적에게 뒤집어 씌울 수 있다면 그건 일거양득이 아닐 수 없다. 자기의 도덕적 결점을 희석하고 상대를 부도덕한 자로 몰려는 '프레임'을 설계한 듯하다. 이럴 때 진실이나 사실확인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 일단 우기고 나면 승리할 수 있다고 계산했을 것이다. 다음 선거에서 정권을 잡기 위해선 무조건 이겨야 하는 게임이라고 작정한 것 같다.독재의 반대는 '민주주의'일 것이다. 민주주의 기본정신은 자유, 평등, 박애 등이지만, 더 중요한 것은 책임과 의무이다. 즉 마음대로 할 수는 있지만 타인의 자유를 침해하지 않는 범위에서 가능하다. 민주주의가 무제한의 자유를 뜻하지 않는다. 그래서 권리와 의무가 조화를 이루도록 애써야 한다. 사람은 누구나 욕망을 갖고 자기만의 이익을 극대화 하고 싶어 하기에, 그 경계를 늘 염려해야 한다. 이런 노력이 없는 사회는 일부 돈과 권력을 가진 자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독재로 쉬 빠지게 된다. 민주와 독재 사이의 거리는 그리 멀지 않다.그런데 '독재타도 프레임'을 보며 나는 보다 더 깊이 고민해야 할 문제가 있다고 느낀다. 지금 신자유주의 시대에 들어서서 우리의 의식을 결정하는 기제가 매우 달라졌음을 깨닫는다. 자본주의 아래에서 중요하게 여겼던 노동 중심의 효율성은 이제 더 효력을 갖지 못한다. 지금은 각 개인이 무한선택권을 갖고 있다고 믿는다. 반면에 사회적 모순이나 부조리를 경계 밖으로 밀어내고 자신과는 관계없다고, 상관할 바가 아니므로 거기에 어떤 가치 판단도 내릴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이런 인식의 변화는 타자와 공동체를 해체하고, 내가 속한 집단의 이익만 추구하게 만든다. 자유의지가 있다고 믿으면서도 스스로를 '내 집단'에 가두는 '자기 구속'의 늪에 빠져버린 것이다. 예컨대, 누구나 세금을 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도 내가 다니는 교회만은 예외가 되길 바란다. 오랫동안 독재권력에 빌붙어왔다는 지적을 인정하지만, 그래도 내가 속한 검찰이 권력을 나눠주는 것에는 반대한다. 마찬가지로, '독재타도'가 분명히 근거 없는 정치공세라는 것을 뻔히 알지만, 내가 믿어온 보수세력을 위해 밀어줘야 한다고 믿는 식이다. 이 위기와 불안의 순간에 국가의 역할이 궁금하다. 마침 우크라이나 대선 소식이 들린다. 73%라는 압도적 지지로 코미디언 출신의 젊은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되었는데, 취임하자마자 썩은 국회를 해산하고 내각을 개편하겠다고 일갈했다. 먼 나라 이야기지만 내 속이 다 시원해지는 건 무슨 연유일까./정한용 시인정한용 시인

2019-05-23 정한용

[참성단]넷플릭스 없는 칸 영화제

올해 세계 영화계의 최대 사건은 단연, 알폰소 쿠아론 감독의 넷플릭스 영화 '로마'가 91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감독상을 받은 것이다. 스페인어로 제작됐는데도 아카데미 주요 10개 부문에 노미네이트 됐고 감독상, 촬영상, 외국어영화상 등 3개 부문을 수상했다. 비영어권의 영화가 작품상을 받은 것도 그렇지만, 무엇보다 극장 상영작이 아닌 OTT(유료 온라인 동영상 서비스) 영화가 최고의 영화제에서 감독상을 거머쥔 것은 변화의 시작을 의미한다.진즉 변화를 눈치챈 베니스영화제도 지난해 넷플릭스 영화 6편을 받아들여 '로마'에게 최고 영예인 황금사자상을 안겼다. 또 이선·조엘 코언 형제 감독의 넷플릭스 영화 '카우보이의 노래'는 각본상을 받았다. 폴 그린그래스 감독의 '7월 22일'도 큰 호평을 받았다. 넷플릭스 덕분에 베니스영화제의 내용은 풍성해졌고, 경쟁자인 칸영화제를 압도했다는 평가를 들었다.반면 칸영화제는 지난해 넷플릭스 영화의 출품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프랑스 극장업계의 반발 탓이 컸다. 칸은 넷플릭스에 초청장을 받으려면 제작 영화의 온·오프라인 동시 공개 전략을 포기하고 극장 개봉을 먼저 할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넷플릭스는 출품 거부로 맞서면서 칸영화제 참가가 무산됐다. 칸영화제는 올해도 넷플릭스 영화를 초청하지 않았다. 넷플릭스의 불참으로 72회를 맞은 칸영화제의 권위는 크게 떨어졌다. 넷플릭스 없는 칸영화제는 '불빛 없는 항구' '속없는 찐빵'이 된 것이다.이를 만회하려는 듯 이번 칸영화제는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을 비롯해 짐 자무시, 켄 로치 등 대가들의 신작을 경쟁부문에 초청하고 리어나도 디캐프리오, 브래드 피트 등 할리우드 스타 모시기에 유난히 공을 들였다. 그런데도 시대를 역행한다는 비판에 자유롭지 못하다. 영화의 다양성 확보에 실패했다는 소리도 들린다. 넷플릭스의 부재가 그만큼 컸다. 넷플릭스는 앞으로 영화가 어느 방향으로 가는지를 가늠하는 척도다. 이미 세계 영화계는 아마존, 월트디즈니, 애플까지 OTT 사업에 뛰어들면서 스트리밍 영화의 전쟁터가 되고 있다. 칸이 언제까지 넷플릭스를 거부할지 지켜볼 일이다. "전통적 배급 방식 바깥에서 영화를 투자, 제작하는 회사가 존재한다는 사실은 영화계를 더욱 역동적으로 만들 수 있기에 중요하다"는 조엘 코언 감독의 말을 이제 칸도 곱씹어 볼 때가 됐다. /이영재 논설실장

2019-05-23 이영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