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성단

 

[참성단]포토라인

고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은 1993년 선거법 위반 혐의로 검찰에 출석하다가 봉변을 당했다. 언론의 취재경쟁에 휩쓸려 기자의 카메라에 부딪혀 이마가 찢어진 것이다. 언론단체는 이런 난장판 취재를 막기위해 1994년 포토라인 운영 선포문을 만들었다. 이후 대중의 관심이 집중된 주요 사건 피의자들은 검찰과 경찰에 출석할 때마다 포토라인에 멈춰선 채 기자들의 질문에 답변하는 통과의례를 거친다. 사회적 성취와 명예, 도덕적 권위가 큰 공인일수록 포토라인에서 무너진 명예를 감당하기 힘들다. 고 노무현 대통령은 2009년 박연차 게이트로 검찰청 포토라인에 선 뒤 3주 뒤에 극단적인 선택을 했다. 노 전 대통령은 평검사들과 맞짱 토론을 벌일 정도로 검찰개혁 의지를 불태웠다. 검찰청 포토라인 통과의례 자체를 견딜 수 없었을 것이다. 최근엔 이재수 전 기무사령관이 영장심사를 받기 전 수갑을 찬 채 포토라인에 섰다가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포토라인의 법적 근거는 없다. 국민의 알권리를 대신하는 언론의 취재 편의를 검·경이 묵시적으로 양해한 관행이다. 하지만 포토라인이 무죄추정의 원칙에 반하고, 그 자체가 사회적 형벌이라는 비판도 있다. 양승태 전 대법원장이 검찰청 포토라인을 당당하게 무시하고 패싱한 것도 이 때문이다.더불어민주당과 정부가 포토라인 폐지를 포함해 피의사실 공표를 전면 제한하는 훈령 제정을 추진할 모양이다. 사실 당정이 검찰의 피의사실 공표 관행을 손보기로 마음 먹은지는 오래됐다. '논두렁 시계' 논란으로 노 전 대통령을 잃었다는 오래된 분노가 배경이다. 법무부가 마련한 초안에 따르면 검찰은 일체의 피의사실을 공개해선 안된다. 피의자 검찰 출석 공개와 소환날짜 공개도 안된다. 법무부 장관에게 수사 내용을 유포한 검사를 감찰할 권한을 준다고 한다. 이같은 사실이 알려지자 깜깜이 수사에 따른 부작용과 국민 알 권리 침해를 우려하는 반론도 만만치 않다. 무죄추정의 원칙 실현과 국민의 알 권리를 절충한 논의가 진행돼야 할 사안이다. 그리고 미안한 얘기지만 조국 법무부 장관 일가에 대한 검찰 수사 종료 이후에 거론해야 맞다. 수사 전 과정이 생중계된 전 정권 적폐청산 수사를 봐도 그렇고, 직전 장관도 조국 사태 때문에 유보한 사안 아닌가. 조 장관 일가의 검찰 수사와 검찰 출두를 앞두고 갑자기 '피의사실 공개 금지' 원칙을 강조하면, 그 원칙이 의심받는다. /윤인수 논설위원

2019-09-16 윤인수

[참성단]드론 테러

지난해 8월 5일 베네수엘라 수도 카라카스. 니콜라스 마두로 베네수엘라 대통령이 국가방위군 창설 81주년 기념식에서 연설을 하고 있었다. 이때 드론 두 대가 연단 상공으로 날아왔다. 한 대는 마두로 대통령이 연설하고 있던 연단 근처에서 경호부대에 의해 격추됐고, 다행히 다른 한 대는 인근 건물에 충돌해 폭발해 마두로는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드론에는 'C4'로 불리는 폭발물 1㎏이 실려 있었다. 드론이 전 세계 국가에 보편적인 무기 체계로 자리 잡은 지 오래다. 미국은 2004년부터 아프가니스탄·파키스탄·이라크·시리아·소말리아·예멘 등에 드론을 실전 배치해 폭격작전까지 수행하고 있다. 미국산 자폭드론 '스위치 블레이드'는 무게 2.7㎏, 길이 61㎝에 불과하지만 맨눈으로 식별할 수 없을뿐더러 적외선 추적센서를 장착하고 있어 한 치의 오차 없이 목표물을 타격한다. 공격 드론 MQ-9 '리퍼'는 정밀유도폭탄을 장착하고 15㎞ 상공을 시속 400㎞로 28시간 동안 비행이 가능하다. 중국 러시아가 앞다퉈 공격형 드론 개발에 열을 올리는 것도 이런 이유다.드론은 테러 세력들이 가장 선호하는 무기이기도 하다. 저렴한 가격은 물론이고 작은 드론에 살상용 무기를 탑재하면 치명적인 타격을 가할 수 있어서다. 실제 2016년 10월 이라크에서 IS는 온라인쇼핑몰 아마존에서 구매한 것으로 알려진 초소형 드론으로 이란인 2명을 살해해 충격을 주기도 했다. 국제 무기 밀매시장에서 중국과 러시아산 드론을 쉽게 구할 수 있는 것도 테러단체엔 호재다. 그래서 무기 전문가들 중 인류가 가장 두려워해야 할 'AI 로봇'으로 드론을 지목하는 이들이 많다.14일 새벽 예멘 후티 반군이 사우디 아라비아의 불법 침략에 대응해 아브카이크 탈황 석유 시설와 쿠라이스 유전을 공격해 불바다로 만들었다. 공격에는 드론 10대가 동원됐다. 스텔스 기능도 없는 반군의 드론이 느린 속도로 1천㎞의 사우디 영공을 가로질러 날아왔다는 것, 그리고 연간 700억 달러 군사비를 지출하면서도 작은 드론에 국가 중요시설이 속수무책으로 당했다는 것에 서방국가는 경악하고 있다. 이번 공격에 앞서 후티 반군이 "사우디와 UAE의 군사·산업시설 등 핵심 표적 300여 곳에 대한 자료를 축적했다" 고 이미 경고한바 있어 사우디의 수도 리야드는 물론 UAE의 원자력 발전소 타격 가능성에 중동 전체가 불안에 떨고 있다. /이영재 논설실장

2019-09-15 이영재

[참성단]2019 추석 민심

추석의 맛이 전 같지 않다. 밍밍하다. 도무지 흥이 나지 않는다. 'R(경기침체)의 공포'니, 'D(디플레이션)의 공포'니 하는 암울한 경제 탓이다. 날씨도 무시할 수 없다. 너무 덥다. 추석인데 낮 기온이 26도 전후다. 지난 추석엔 낮 기온이 30도에 육박했었다. 반바지를 입어도 되는 추석. 낯설다. 기후 온난화가 우리의 추석 명절 한 부분을 망치고 있다. 그래도 추석인데, 선선한 가을바람 정도는 불어줘야 한다. 그 바람을 맞아 너울거리는 황금 들판에서 추수가 시작되고, 넉넉한 인심이 영그는 것이다. 그런데 날씨가 받쳐 주지 않는다.귀성객이 줄었다는데도 올 추석 3천만 명의 '민족대이동'이 예상된다. 모처럼 가족 친지들이 모였으니 집집마다 웃음꽃이 피어날 것이다. 아무리 '혼족'이 대세여도 '혼심'보다 함께 모여 속마음을 털어놓을 때 공동체 의식은 확인되고 민심은 빛을 발한다. 하지만 이도 '옛말'이다. '왔소. 갔소'에 무엇보다 서로 마음을 굳게 닫고 있다. 형제지간에도 웬만해선 속마음을 열지 않는다. 대화 단절, 소통 부재다. 슬프다.그러다 보니 민심을 헤아리기가 점점 어려워졌다. 오랜 기간 신문 밥을 먹었지만 요즘 같아서는 무엇이 민심인지 꼭 짚어 말할 수가 없다. 그나마 민심을 알 수 있는 게 여론조사인데, 이번 조국사태 동안 하루가 멀다고 쏟아진 여론 조사는 오히려 조사기관의 불신을 불러왔다. 하루 사이에 여론이 5%씩 널뛰기를 하는가 하면, 여론 조사기관에 따라 10~15% 차이가 나자 국민이 돌아섰다. 신뢰가 무너졌기 때문이다.정치인들이 선거에 패한 후 꼭 하는 말이 있다. "민심을 너무 몰랐다." 선거 전엔 이해할 수 없는 여론조사 결과를 두고 "이것이 민심"이라고 우기던 그들이다. 평소엔 민심이란 것에 별 신경 안 쓰다가 큰코다치고 난 후 비로소 민심을 받드는 양 수선을 떤다. 그리고 금방 잊어버린다. 정치인들은 늘 그렇다.한 달여 간 진행된 조국의 법무부 장관 임명을 놓고 우리 사회는 처참하게 망가졌다. 성한 곳이 없다. 모두 어디 하나쯤은 부러졌다. 갈라진 진영에서 서로 쏟아낸 증오와 멸시가 스치고 지나간 자리엔 깊고 넓은 상처가 생겼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아라'라는 말이 무색하다. 정말이지 이런 추석은 난생 처음이다. 그러니 추석이 끝난 후 민심이 어디로 튈지 너도, 나도 아무도 모른다. /이영재 논설실장

2019-09-10 이영재

[참성단]검사 '윤석열'

1992년 시작된 이탈리아의 부정부패 척결 작업인 마니 풀리테(mani pulite 깨끗한 손)는 '사정(査正) 혁명'의 기념비적인 사례로 회자된다. 이탈리아 정계와 재계의 검은 커넥션을 겨냥한 전대미문의 수사를 통해 6천여명의 정재계 권력자들이 수사를 받았고, 2천993명이 부패혐의로 체포됐다. 두 전직 총리는 타국으로 망명하거나 비리혐의가 드러나 법대에 섰고, 현직 총리마저 비리혐의로 사임했다. 정신병원엔 노이로제 증상을 호소하는 정치인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마니 풀리테를 주도한 안토니오 피에트로 검사는 이탈리아 통일의 기초를 세운 주세페 가리발디 이후 최고의 영웅이라는 칭송을 받았다. 사정 혁명의 결과는 놀라웠다. 비례대표제를 소선거구제로 바꾸는 정치개혁이 이루어지고, ㎞당 800억리라였던 지하철 공사 비용은 마니 풀리테 이후 440억리라로 떨어졌다. 하지만 권력의 반격도 필사적이었다. 마니 풀리테 검사들을 향해 "세상 무서운 줄 모르는 애송이들이 나라를 말아먹고 있다"고 여론전을 벌이고, 여자관계 등 사생활을 캐내 도덕성에 상처를 입혔다. 반격은 주효했다. 검사들은 반발해 사표를 던졌다. 살아있는 권력이 결국 마니 풀리테 검사들을 이긴 것이다. 그 결과 지금껏 이탈리아는 유럽 최악의 부패국가라는 수렁에 빠져있다.윤석열 검찰총장의 한국 검찰이 살아있는 권력을 향해 칼을 빼들었다. 정권의 핵심인물인 조국과 그 일가를 향한 전격적인 수사에 검찰역량을 집중하고 있다. 윤석열은 국민적 지지를 받는 보기 드문 검사다. 국가정보원 여론조작 사건으로 박근혜 정권에 치명타를 가하고, 당시 법무장관 황교안이 부당한 수사 지휘를 했다고 폭로했다.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특검에서는 수사팀장으로, 문재인 정권에서는 중앙지검장으로 전 정권의 국정농단 사건의 수사를 지휘하고 마무리했다. "사람에 충성하지 않는다"는 소신에 반해 대통령은 그를 검찰총장에 임명했다.그런 윤석열을 향해 여권 전체가 '정치 검찰' 낙인 찍기에 나섰다. 급기야 대통령은 9일 조국을 법무부장관에 임명했다. 윤석열의 검찰은 직속 장관의 부인을 기소하고, 장관 가족펀드 관계자의 구속영장을 신청한 셈이 됐다. 이제 후보자가 아닌 장관을 지켜야 하는 살아있는 권력의 반격과 견제는 더 심해질 것이다. 윤석열의 어깨에 대한민국 검찰의 운명이 걸렸다. 꼿꼿이 진실의 문을 열어젖혀야 한다. 마니 풀리테 검사들처럼 사표를 던지면 안된다. /윤인수 논설위원

2019-09-09 윤인수

[참성단]다이지의 돌고래

바다는 온통 핏빛이었다. 여기저기서 울음소리가 들렸다. 일렬로 늘어선 배들이 날카로운 금속성 소음을 내면서 달려들자 만(灣) 끝까지 쫓겨 더는 도망치지 못한 돌고래들은 그물에 걸려 울부짖었다. 어부들은 우선 수족관용으로 판매할 새끼 돌고래를 골라낸 후, 쇠 작살로 내리찍고 갈고리를 휘둘렀다. 꼬리를 잡고 칼로 찌르는 어부도 있었다. 이 장면을 지켜본 관객은 숨을 멈췄다. 눈 뜨고 볼 수 없을 정도로 참혹해서다. 2009년 제82회 아카데미 영화상 다큐멘터리 부문 수상작 루이 시호요스 감독의 '더 코브 (The Cove) : 슬픈 돌고래의 진실'의 한 장면이다. 영화는 일본의 와카야마 현 작은 어촌 다이지(太地)에서 실제 일어나고 있는 돌고래 사냥을 다뤘다. 다이지에선 매년 9월부터 6개월간 돌고래 포획과 학살이 벌어진다. 카메라는 돌고래들을 해안가로 몰아넣고 무자비로 도살하는 이른바, '몰아잡기(drive hunt)' 방식의 사냥법을 카메라에 그대로 담았다. 제작팀은 지역주민의 온갖 방해에도 불구하고, 현장을 600여 시간에 담아 그중 90분으로 정리해 공개했다. 영화가 부른 파장은 컸다. 매년 100여 개국에서 다이지의 돌고래 포획에 대한 반대 시위가 벌어지고 있다.국제포경위원회(IWC)는 1986년부터 포경을 금지했다. 하지만 일본은 이에 아랑곳없이 고래를 잡는다. 국제사회와 동물보호단체의 거센 비난이 쏟아지자 1988년 상업 포경 중단을 선언했으나 연구에 필요하다는 명목으로 매년 수백 마리의 고래를 잡아왔다. 그러다 지난 6월 IWC에서 공식 탈퇴하고 본격적으로 상업적 포경을 재개했다. 영해와 배타적 경제수역 안에서만 고래를 잡는다며 국제적으로 문제가 없다는 논리를 펴면서 말이다.여론을 비웃듯, 지난 1일부터 다이지에선 어김없이 돌고래 사냥이 시작됐다. 국제 여론 악화와 수요 감소 등으로 점차 포획 수는 감소하는 추세지만, 올해도 최소 1천여 마리의 돌고래들이 포획되거나 죽음을 맞을 것으로 보인다. 포획과 살육이 중단되지 않는 건 아직도 다이지 돌고래를 수입하려는 국가들이 여전히 존재하기 때문이다. 지금도 우리나라는 중국, 러시아와 함께 다이지로부터 돌고래를 가장 많이 수입하는 국가 중 하나다. 영화 코브의 감독 시호요스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고래가 사라지면 지구가 멸망한다." /이영재 논설실장

2019-09-08 이영재

[참성단]백남준 재평가

천재였다. 우리만 몰랐다. 1984년 1월 1일 정오. 금시초문의 '위성 프로젝트'를 통해 전 세계를 하나로 묶으며, 비디오 아티스트라는 생소한 이름으로 우리 앞에 나타난 한국인이 있었다. 백남준. 그의 '굿모닝 미스터 오웰'은 파리의 퐁피두 센터, 뉴욕 공영방송 WNET 스튜디오를 연결해 전 세계로 생방송 돼 2천500만명이 시청했다. 그는 이 자리에서 조지 오웰의 '1984'에 등장하는 '빅 브러더'가 TV를 지식과 권력을 집중화시키는 통제 수단으로 사용한 것을 두고 "절반만 맞았다"고 반박했다. 그로부터 27년 후인 2011년 5월 홍콩 크리스티 경매장. 백남준과 중국 추상미술의 1세대 자오우지, 한국과 중국 현대 미술을 대표하는 두 거장의 작품이 나란히 경매에 올랐다. 두 작가는 50년대 각자 독일과 프랑스에서 작품 활동을 시작하며 세계 미술계에 한국과 중국을 알린 이 분야의 개척자다. 이날 자오우지의 유화 '2.11.59'는 57억 원에, 백남준의 설치작품 'TV는 키치다'는 5억8천만 원에 팔렸다. 자오우지는 생존작가, 백남준은 사후 작가였는데도 무려 10배 차이가 났다. 백남준은 미술사에 남긴 업적과 작품성보다 시장에서 현저하게 저평가됐다는 게 전문가들의 공통된 견해다. 이른바 '백남준 디스카운트'. 이유는 많다. 우선 작품들이 80·90년대 주로 제작돼 자칫 고장이 날 경우 단종된 TV 모니터나 부품, 수리 전문가를 찾기도 힘들다. 뇌졸중으로 쓰러진 이후에도 상당수 작품이 제작됐는데 어떤 작품이 누구에게 판매됐는지 작품관리가 명확하지 않은 것도 걸림돌이다. 그렇다고 해서 지금보다 56년 전인 1963년 3월 독일 서부의 소도시 부퍼탈에서 누구보다 먼저 TV의 소통방식을 신랄히 비판하는 기념비적인 전시회를 했던 비디오아트 창시자에 대한 대우치고는 너무도 인색한 게 사실이다.백남준의 예술이 재평가되고 있다는 소식이 들린다. 세계적인 런던 테이트 모던 갤러리에서 10월 17일부터 작품 80여 점을 선보이는 런던 최초의 백남준 회고전이 열린다. 여기서 끝이 아니다. 암스테르담·시카고 등 5개 도시에서 순회 전시회가 계속된다. 인터넷과 소셜미디어 세대를 미리 예견했던 과학·예술·문화 융합의 선구자 백남준. 모국에서의 관심은 여전히 미지근하지만, 문화 선진국을 중심으로 백남준이 재평가되고 있다니 여간 반가운 게 아니다. /이영재 논설실장

2019-09-05 이영재

[참성단]사이다송의 재해석

인천시가 인천 앞바다에 대형 사이다병을 띄우기로 했다는 소식이다. 월미바다열차 개통을 앞두고 바다에 사이다 조형물을 설치해 관광자원화 한다는 것이다. 재밌는 발상이다. 발상의 진원지는 코미디언 고(故) 서영춘씨의 '사이다송'이다. 한국 랩의 원조격인 곡으로, 노래의 가사 '인천 앞바다에 사이다가 떴어도 고뿌(컵의 일본어 발음) 없이는 못마십니다'에서 착안했다고 한다. 아마도 바다위에 떠있는 5m짜리 사이다병을 본다면 입에서 사이다송이 절로 나올 것 같다.그런데 이 대목에서, 한가지 궁금증이 발동한다. 컵이 없다고 사이다를 마실 수 없다니…. 그냥 병을 입에 대고 마시면 그만이지 않은가. 지금이야 냉장고에서 병을 꺼내 입대고 마시다 들키면 식구들에게 한 소리 듣는다 쳐도, 사이다송이 유행하던 1960년대에 지금처럼 위생관념이 철저했을 리 없다. 소풍날 김밥에 사이다 한병이면 부러울 것 없던 50대 이상이면 다 아는 사실이다. 친구들끼리 사이다병 돌려 마셔도 전혀 께름칙하지 않던 시절 아닌가. 오히려 컵 대신에 '병따개가 없으면 못 마신다'는 표현이 더 적절하지 않은가 싶다. 당시에는 손으로 돌려따는 스크루캡도 발명되지 않았을 테니 말이다. 그래서 내친김에 가사를 재해석해본다. 원래 가사는 '인천 앞바다가 사이다라 해도'인데 '속사포랩'의 어감을 살리느라 '인천 앞바다에 사이다가 떴어도'로 바뀐 게 아닌가 하는 추론을 해보는 것이다. 그러면 사이다를 마시는데 왜 컵이 필수적인지 이해가 간다. 바닷물이 사이다라 공짜인데, 손으로 떠 마시면 손이 끈적거려 불쾌할 것이고 입으로 마시려고 머리를 들이대다가는 바다에 빠질 수도 있으니 컵으로 떠먹을 수밖에 없는 상황 아닌가. 조금 더 '오버'해보면 '아무리 기회가 많다 해도 준비(컵)가 돼 있지 않으면 성취할 수 없다'는 교훈적(?) 메시지를 읽을 수도 있다. 그러고 보니 바로 앞의 가사와도 연결이 된다. '산에 가야 범을 잡고, 강에 가야 고기 잡지'라는 가사 또한 '어떤 일을 이루려면, 그 일을 일단 시작해야 한다'는 뜻 아니겠는가. 억지로 짜맞춘 것 치고는 제법 그럴듯하다고 감히 자평해본다.어쨌든 인천 앞바다에 새로운 볼거리가 생기는 것은 환영할 만한 일이다. 대신 해상안전대책은 확실해야 할 것 같다. 수십, 수백t급 배가 사이다병에 부딪혀 좌초되는 불상사는 일어나지 않아야 할 것 아닌가. /임성훈 논설위원

2019-09-04 임성훈

[참성단]세계 1위 고령 국가

장수(長壽)는 인류의 오랜 꿈이었다. 불로초에 목을 맨 진시황을 거론하지 않더라도 평균수명을 늘리기 위한 인간의 노력은 눈물겨울 정도다. 70년대 유행했던 TV 프로그램 중 '장수만세'가 있다. 고령자가 많은 유럽 선진국의 부자 나라를 부러워하면서 만든 프로였고, 일요일이면 온 가족이 모여 앉아 볼 정도로 인기도 좋았다. 그때만 해도 장수는 전 연령층이 공감하는 절대적 가치였다. 장수할아버지를 포함한 3대가 함께 TV에 출연해 보여주는 화목한 모습은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하지만 요즘은 고령자를 보는 눈이 반드시 곱지만은 않은 듯하다. 한때 '99세까지 팔팔하게 살고 2~3일간 앓다가 4일 만에 죽자'는 인기 건배사 '구구팔팔이삼사'가 술자리에서 사라진 지도 오래다. 고령화 사회가 주는 부작용이 생각보다 커서다. 물론 지금도 생명공학의 꿈은 여전히 '장수'에 맞춰져 있다. 그 결과 과학적으로는 120살, 아니 150살까지의 생명연장이 가능하다고 한다. 하지만 이는 일부 사람들의 꿈일 뿐, 상황은 변하고 있다. 개인적으로 아니 국가적으로도 노후 준비에 대한 뚜렷한 대비책이 없는 상황에서 '장수는 곧 재앙'이라는 인식이 사회 전반에 퍼져 나가고 있어서다.통계청이 2일 발표한 '세계와 한국의 인구현황 및 전망'에 따르면 우리나라가 2045년부터 일본을 제치고 세계 1위 고령 국가가 될 것이란 전망이 나왔다. 그때 가면 전체 인구에서 65세 이상 고령 인구가 차지하는 비율이 37.0%로 전 세계 201개국 중 가장 높아진다고 한다. 세계 1위라면 자다가도 일어나 춤을 추는 민족이 장수국가 세계 1위가 된다는데 왜 이렇게 불안한가. 아마도 '급격한'이라는 단어에서 오는 두려움 때문일 것이다. 고령화가 서서히 다가오면 대처할 수 있는 시간적 여유라도 가질 수 있지만 이미 고령화 사회에 진입한 일본보다 고령화가 더 빨리 진행되고 있으니 걱정은 클 수밖에 없다.오복 중에 으뜸이던 장수가 축복이 아니라 부담이 되는 시대다. 이미 우리 사회가 고령화에 진입해 여러 걸음을 떼었다고 보는 전문가들도 꽤 많다. 하지만 노후대책은 국가적으로나 개인적으로나 다른 선진국에 비해 매우 열악한 편이다. 치매 등을 앓는 노부모나 배우자를 장기간 간호하다 지친 가족이 결국 살인자가 돼버리는, 고령화 사회에 주로 나타나는 범죄를 지켜보는 심정은 그래서 곤혹스럽고 혼란스럽다. /이영재 논설실장

2019-09-03 이영재

[참성단]실시간 검색어

1927년 8월 1일 중국 장시성 난창(南昌)에서 마오쩌둥의 공산당이 폭동을 일으키자 장제스의 국민당이 진압에 나섰다. 이 전쟁은 국민당과 공산당 사이에 첫 전투로 기록된다. 전력의 열세로 패한 마오쩌둥은 이렇게 말했다. "모든 권력은 '총구'로부터 나온다." 그러면서 "적을 무찌르려면 여론을 한데 모아야 하며 이를 위해 언론이 당의 나팔수 역할을 해야 한다"고도 말했다. 이 말은 그의 어록 중에서 가장 유명한 말이 되었다. 그러나 마오쩌둥이 다시 태어나 지금의 인터넷 세상을 보았다면 당시 했던 말을 이렇게 수정할지도 모른다. "모든 권력은 '인터넷 검색창'에서 나온다. '실시간 검색어'를 장악하라."요즘 주요 포털 사이트에서 조국 법무부 장관 후보자를 두고 벌이는 지지자와 반대자 사이의 '실시간 급상승 검색어(실검)'를 보면 총만 안 들었지 사실상 전쟁에 가깝다. 그래서 모든 언론마다 이를 두고 '실검 전쟁'이라 부르고 있다. 일주일 전만 해도 '조국 힘내세요' '조국 사퇴하세요'가 포털 실검 상위 순위에 오르더니 이제는 '가짜뉴스 아웃' '한국언론 사망' '보고싶다 청문회' '법대로 조국 임명' 등의 사실상 정치적 '구호'가 실검 순위를 온통 도배질하고 있다. 인터넷 공간이 어떻게 이 지경까지 됐는지 한숨이 나온다.국내 양대 포털사이트 네이버와 카카오의 하루 국내 이용자는 3천만명, 뉴스 소비는 2억건이 넘는다. 돈벌이가 되는데 그냥 둘 포털 회사가 아니다. 접속하면 뉴스부터 뜨게 만들고, 실시간 검색 순위에 오른 뉴스를 찾아보는 이용자의 심리를 이용해 눈에 잘 띄는 곳에 실검 순위를 배치하는 것도 따지고 보면 일종의 상술이다. 그러다 보니 이용자들은 검색순위 조작의 유혹을 받는다. 실제 일부 기업들은 실검 순위를 버젓이 상업적 목적으로 이용하곤 한다. 포털은 알고도 이를 묵인한다.공룡 포털이 여론을 좌지우지해 그 폐해가 도를 한참 넘었다는 것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조국 논란은 특정 세력이 순식간에 인터넷 여론을 왜곡·조작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이 논란을 보면서 벌써 내년 총선이 우려되는 것도 그런 이유다. 특정 정파를 위한 조작행위가 횡행해 실검 상위 순위에 온통 정치적 구호나 정치인 이름으로 채워지는 게 아닌지 심히 걱정이다. 이번 기회에 실시간 급상승 검색어 서비스를 포털에서 아예 지워버리면 어떨까. /이영재 논설실장

2019-09-02 이영재

[참성단]대통령의 화법

불편한 몸에도 미국 초유의 4연속 대통령으로, 대공황을 극복하고 2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끈 루스벨트가 좌절과 실의에 빠진 국민을 달래 국론을 하나로 모으고 난국을 이겨낸 데는 그의 뛰어난 화술 덕이 컸다. 그래서 주일마다 라디오 전파를 타고 미 전역으로 퍼져나갔던 그의 노변정담(爐邊情談)을 국정을 이끌어 간 원동력으로 보는 전문가들이 많다. 친구끼리 또는 가족끼리 때로는 할아버지가 손자들을 모아놓고 옛날 이야기를 하듯 솔직하고도 다정하게 던진 한마디는 국민들의 피부에 닿아 공감대를 형성시키는 매개체가 되었다. 노변정담을 청취한 미국 국민들은 자신들은 혼자가 아니며, 이런 대통령이라면 함께 어떤 위기가 닥쳐도 극복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었다.루스벨트와는 정 반대의 방법으로 국가를 경영하고 국민을 이끌어 나간 대통령도 있다. 프랑스의 상징 드골 대통령. 그는 화법을 떠나 기자회견 자체를 싫어했다. 1961년 프랑스를 방문했던 미국의 젊은 대통령 존 F. 케네디에게 '기자회견 무용론'을 설파했을 정도다. "기자회견을 하지 마세요. 신비로움과 위신이 사라지게 됩니다." 드골은 이 말을 자신의 회고록에도 적었는데 기자회견을 너무 자주 하면 가려져야 할 부분까지 노출되어 지도력에 흠이 간다는 것이다.43세의 젊은 나이에 적절한 어휘를 골라, 가장 감동적인 메시지를 기자회견을 통해 국민에게 전하는 것을 너무도 좋아했던 케네디가 드골의 말에 어떤 반응을 보였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다만 미국에 돌아간 케네디는 여전히 대국민 메시지를 위한 기자회견을 즐겼다. 반대로 "권위는 위신 없이 성립될 수 없고, 위신은 세속과의 격리 없이는 성립할 수 없다"고 단언했던 드골은 1969년 국민투표에서 패하며 정계 은퇴를 선언했다.조국 법무부 장관 후보자를 둘러싼 논란으로 국론이 분열되고 있는 와중에 그동안 침묵으로 일관하던 문재인 대통령이 모처럼 입을 열었다. 어제 동남아 3개국 순방길에 오르면서다. 문 대통령은 공항에서 측근들에게 "조 후보자 가족을 둘러싼 논란이 있는데 대입 제도 전반을 재검토해 달라"고 지시했다. 조 후보자에 대해선 일언반구 없이, 뜬금없게도 대입제도 문제를 언급한 건 문 대통령의 전형적인 화법이다. 이 발언만으로는 대통령의 의중을 도무지 알 도리가 없다. 이 탓에 언론에는 구구한 억측이 난무하고, 이를 보고 듣는 국민은 또 답답해지기 시작했다. /이영재 논설실장

2019-09-01 이영재

[참성단]8년 만의 현대차 무파업

정부가 공식적인 경기지표를 들이대며 아무리 불황이 아니라고 강조해도, 대중들은 집단적인 체감 지수를 통해 불황을 실감한다. 여성들이 감각적으로 반응하고 공감하는 패션분야는 비공식 불황지수의 보고다. 화장품 브랜드인 에스티 로더가 발표한 '립스틱 지수'와, 경쟁사인 로레알이 밀고 있는 '파운데이션 지수'가 대표적이다. 불황일 때는 저렴하고 화장효과가 즉각적인 기초화장품이 잘 팔린다는 것이다. 불황 때 여성들의 치마길이가 짧아진다는 '스커트 지수'는 실제 호황 때 치마길이가 짧아진다는 연구결과로 신뢰도가 확 떨어졌다. 이를 '헴라인(치맛단) 지수'가 대체했다. 비싼 실크 스타킹을 드러낼 만큼 치마길이가 짧아지면 호황이고, 스타킹 살 돈이 없어 치마가 길어지면 불황이라는 것이다.2008년 금융위기 시절 미국에서는 비공식 경기지표가 다수 등장했다. '불법 입국자 국경 체포지수'는 미국 국경을 넘다가 체포된 멕시코 불법 입국자의 증감을 미국 경기의 선행지표로 봤다. 체포 인원이 감소하면 경기가 안좋은 징조라는 것이다. 미국 체류 히스패닉의 본국 송금액이 줄어들면 불황이라는 '이민자 본국 송금지수'나, 불황 때는 라떼 판매가 줄고 레귤러 커피 판매가 늘어난다는 '스타벅스 라떼 지수'도 있다.한국의 대표적인 비공식 불황지수는 익히 알려진대로 '포터 지수'다. 1톤 트럭 포터의 판매량이 경기향방과 자영업자 추이를 보여주는 실물 지표로 활용된지 오래다. 판매량 증가는 불황의 증거다. 포터가 올해 현대자동차의 베스트셀러라니 걱정이다.그 포터를 만드는 현대자동차 노사가 엊그제 분규 없이 임금단체협상에 합의했다. 대표적인 강성노조인 현대차 노조가 8년만에 파업을 안한다는 소식을 언론이 대서특필하고, 울산시와 시의회는 "감사하고 환영한다"고 환호했다. 우리 사회와 경제에 미치는 현대차 노조의 영향력을 새삼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이다. 노조는 무파업 결단 이유에 대해 "한반도 정세와 경제 상황, 자동차산업 전반을 심사숙고했다"며 "한일군사정보보호협정 폐기와 화이트 리스트 배제 등도 잠정합의에 이르게 한 요소였다"고 밝혔다.현대차 노조의 무파업 결단을 존중하고 환영한다. 하지만 한국 최강 노조마저도 현재의 경제상황을 우려해 파업을 접었다는 소식의 이면에 심각한 경제불황의 그림자가 어른거려 개운치 않다. '포터 지수'에 이어 '노조파업 지수'도 비공식 불황지수에 포함될 수도 있겠다 싶다. /윤인수 논설위원

2019-08-29 윤인수

[참성단]저어새의 하소연

'카타울라쿠스 무티쿠스'라는 종의 개미가 물난리에 대처하는 방식은 흥미롭다. 이들은 속이 빈 대나무 줄기 안에서 사는데, 비가 많이 와 물이 차면 물을 잔뜩 마신 뒤 집에서 몇㎝ 떨어진 곳에 오줌을 싸는 식으로 물을 퍼 나른다. 차라리 도망을 가는 게 나을 듯한데, 폭음과 배설로 몸을 혹사하다 죽는 일이 다반사다. '꼬리치레'라는 새는 근처에 뱀이 나타나면 날개춤을 추며 뱀 주변을 맴도는 무모한 행동을 한다. 다윈의 적자생존의 법칙에 반하는 다양한 연구 결과를 풀어놓은 '다윈, 당신 실수한 거야'란 책에는 이처럼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행동을 하는 동물들이 등장한다.이 책에 실릴 정도는 아니지만 인천에서도 10여 년 전 고정관념을 뛰어넘는 새가 등장한 적이 있다. 바로 천연기념물 제205-1호이자 멸종위기 1급 보호조류인 저어새다. 저어새가 주목받은 이유는 새의 입장에서 거들떠 보지도 않을 것 같은 장소에 둥지를 틀었기 때문이다. 도시, 그것도 공단 내 유수지의 인공섬에서 알을 낳고 새끼를 키우기 시작한 것이다. 인근에 먹이가 풍부한 갯벌이 있고 사람들의 손길이 닿지 않는 점 등 저어새에게 매력적인 요인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공장지대를 거친 빗물이 유입돼 수질이 나쁠 뿐 아니라, 바닥은 조금만 파도 악취가 날 정도이며 인근 도로의 소음과 먼지 또한 상당한 곳을 보금자리로 삼은 것에 대해 많은 사람이 의아해 했다.어쨌든 '저어새네트워크'를 비롯한 인천시민들은 "오죽했으면 이 더러운 곳에 들어와 살까"하고 안쓰러워 하며 이들을 보살폈고 이에 힘입어 저어새는 지금까지 인공섬을 번식지로 삼고 있다. 이처럼 인천과 각별한 인연을 맺은 저어새가 얼마 전 경인일보를 통해 하소연을 털어놓았다. 저어새 1인칭 시점으로 구성한 기획기사였다.듣고 보니 저어새의 불안감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재작년만 하더라도 인공섬에서 새끼 233마리가 살아남았는데 작년에는 46마리, 올해에는 15마리만 살아남았다는 것이다. 한 동물이 헤엄을 치고 건너와 알을 깨 먹기 때문이라는데, 저어새는 유력한 용의자로 너구리를 지목했다. 그렇다고 너구리를 욕할 수 만은 없는 법. 너구리 또한 소중한 생명으로, 배고픈 너구리는 있어도 나쁜 너구리는 없기 때문이다. 전 세계적으로 4천여마리밖에 남지 않은 저어새도 살리고 너구리도 보호하기 위해 지혜를 모아야 할 때다. /임성훈 논설위원

2019-08-28 임성훈

[참성단]조국(曺國) 수호에 나선 문학인들

장 폴 사르트르는 저서 '문학이란 무엇인가'에서 "작가의 기능은 아무도 이 세계를 모를 수 없게 만들고, 아무도 이 세계에 대해서 '나는 책임이 없다'고 말할 수 없도록 만드는데 있다(문학이란 무엇인가)"고 밝혔다. 소설을 쓰든 시를 짓든 문학인들은 동시대를 서사하고 동시대의 대중들을 시대의 주역으로 각성시킬 의무가 있다는 주장 정도로 해석해 본다.빅토르 위고의 '레미제라블'에서 주인공의 개과천선 스토리만 쏙 빼내 문고판 정도로 정리하면 한국판 '장발장'이 된다. 완역본이 나오기 전 한국 청소년들은 '레미제라블'을 '장발장'으로 읽었다. 하지만 책 두께로 인해 '벽돌'로 불리는 원본 '레미제라블'은 장발장이 머물렀던 프랑스 당대에 대한 서사가 핵심이다. 장발장이 은촛대를 훔쳤던 성당 내부의 묘사가 장황하고, 팡틴느를 불행에 빠트린 프랑스 중산층의 연애풍속이 지루하게 이어지고, 장발장과 자베르의 운명이 결정된 프랑스의 1832년 6월 봉기에 대한 서사는 난해하다. 완독 자체가 고역이다. 하지만 당대의 사람과 제도, 건축, 풍속, 정치, 역사에 대한 서술로 주인공들은 무한한 생명력을 발휘한다.동시대의 기록자 역할을 감당할 때 작가의 가장 큰 고통은 시대 전체에 대한 관찰과 통찰의 고단함일 것이다. 그런 점에서 지금 우리 시대를 살아가는 작가들의 고민과 고통이 클 것으로 짐작한다. 보수의 타락과 진보의 위선으로 삶의 정신적 기반은 모호해지고 인간 본성에 대한 회의는 짙어지고 있다. 촛불이 새로운 길을 열었던 것인지, 열 것인지 의심스럽다. 이 시대와 대중은 공화파와 왕정파가 격돌한 1832년 6월 봉기만큼이나 역동적이고, 그 현장 한 가운데 섰던 장발장과 같다.소설가 이외수는 "(이명박, 박근혜 시절) 당시에 비하면 조족지혈도 못 되는 사건에 송곳니를 드러내는 모습들"이라고 했다. 공지영은 "문프(문재인 대통령)가 조국이 적임자라고 하니 그를 지지한다"고도 했다. 시인 안도현은 "물어뜯기는 조국 보다 물어뜯으려고 덤비는 승냥이들이 더 안쓰럽다"고 한다. 이 시대를 고민하는 문학가들이 이들의 고민 없는 '조국(曺國)전쟁' 참전 선언을 어떻게 받아들일지 궁금하다. 장 폴 사르트르는 "작가는 어떠한 경우라도 전쟁을 긍정할 수는 없다"고 강조했다. "전쟁의 사회적 구조는 독재이고, 전쟁의 결과는 항상 위험하고, 전시의 문학은 세뇌 공작에 동원됨으로써 소외당한다"는 이유에서다. /윤인수 논설위원

2019-08-27 윤인수

[참성단]'코리아 디스카운트'

한국 기업의 가치가 외국기업의 가치에 비해 저평가된 현상을 코리아 디스카운트(Korea discount)라고 한다. 2000년대 초반 한국 증시가 종합주가지수 500~1천의 박스권에 갇힌 채 요지부동이었다. 한국 기업들의 가치가 홍콩·싱가포르 기업들의 절반이 안되고, 심지어 대만·태국·말레이시아 기업에 비해서도 30% 이상 낮게 평가받는 이상현상을 설명하는 용어로 국제금융시장에서 통용됐다.그 무렵 전문가 그룹이 꼽았던 코리아 디스카운트 요인은 북핵문제 등 지정학적 불안요인, 불투명한 기업 지배구조와 회계, 노동시장의 경직성 등이다. 북한은 걸핏하면 한반도 긴장을 조성하고, IMF 사태에서 보듯이 재벌 총수들은 무책임 경영과 회계부정으로 기업을 장악하고, 소수 정예 노동단체의 경영개입이 일상화 됐으니 한국기업을 제값 쳐주기 힘들다는 분석이었다.그 때로부터 10여년이 훌쩍 지난 지금 주가지수는 2천대 전후로 치솟고 삼성은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했다. 하지만 코리아 디스카운트 현상이 해소됐는지는 의문이다. 핵무장을 완료한 북한은 대한민국 대통령을 막말로 호령하며 연일 미사일을 쏴대고 있다. 회계부정과 편법 상속으로 검찰에 불려다니는 재벌 총수들의 오너 리스크는 여전하며, 만능 노조로 인한 노조 리스크는 고질이 됐다. 결정적으로 코리아 디스카운트를 악화시키는 새로운 요소가 등장했으니, 바로 정치 리스크다.보수와 진보가 교대로 집권하면서 복지 포퓰리즘 경쟁을 벌이는 바람에 나라 곳간이 비어간다. 집요한 집권의지로 서로를 말살하는 정치적 학살을 감행한다. 산업화 세력인 보수는 박근혜 국정농단 사태로 디스카운트 됐다. 이제는 조국 사태로 386 민주화 세력인 진보의 디스카운트가 진행 중이다. 앞으로 대한민국 연구 논문은 국제학회에서 코리아 디스카운트를 감수해야 할 판이다. 아무튼 땡처리 수준으로 디스카운트된 보수와 진보가 막장 정치를 펼치니 국격이 흔들린다. 국격이 흔들리니 북한은 물론이고 중국이 대놓고 대한민국을 무시하고, 러시아 군용기가 영공을 침범한다. 미국과 일본은 대한민국을 성가신 존재로 취급한다.지금처럼 정치, 경제, 외교, 안보 전 국정분야에서 코리아 디스카운트가 전면적으로 확산된 적이 있었나 싶다. 이러다 대한민국이 큰일날까 입술이 바짝바짝 마른다. 모두 정신 차려야 할 때다. / 윤인수 논설위원

2019-08-26 윤인수

[참성단]도척과 어부의 교훈

장자는 유가(儒家)의 허위의식을 통렬하게 비판한다. 만물은 본성을 유지하는 것만으로도 스스로의 도와 덕으로 공존할 수 있는 걸, 번거롭게 인의예악으로 질서를 세워 왜 쓸데없이 분란을 만드느냐는 비판이다. 장자 잡편에서 공자가 큰 도둑 도척과 무명의 어부에게 망신당하는 장면은 유가 비판의 결정판이다.공자가 잔인무도한 도척을 교화하겠다고 큰 소리쳤다. 공자는 도척에게 성인의 풍모를 가지고 도둑이라 불리니 애석하다며, 그가 마음만 고쳐 먹으면 존경받는 제후가 되도록 도와주겠다고 제안한다. 도척의 답변 요지가 이랬다. "너야말로 거짓말과 위선으로 세상의 군주들을 홀리며 부귀를 구하니 너 보다 큰 도둑이 없다. 세상 사람들이 너를 도둑이라 부르지 않고 나를 도둑이라 부르니 이해할 수 없다." 공자는 사색이 된 채 허둥지둥 물러났다.공자는 길에서 만난 어부가 현자임을 대번에 알아 본 뒤 "천하의 안정을 위해 각국을 돌면서 유세했지만 여기저기서 박대 받았는데 이유를 모르겠다"고 이유를 묻는다. 어부는 공자를 그림자를 떨쳐 버리려 죽을 때 까지 전력질주한 사람에 비유했다. "그늘에서 쉬면 될 걸 어지러운 발자국만 남겼다"고 애석해 하며, 명성과 업적은 다른 사람에게 주고 제 한 몸 돌보는 것이 좋을 거라 충고한다.유가의 비조인 공자가 큰 도둑과 평범한 어부에게 망신당하고 가르침을 받았다는 이야기는 실제가 아니라 지어낸 허구다. 또한 춘추 시대의 공자를 전국 시대의 장자가 도둑과 어부를 앞세워 비판했으니, 공자 자신이 반박할 수 없었던 점도 아쉽다. 다만 천하경영에 나선 치자(治者)의 처세를 경계하는 우화로는 효용이 높다.조국 법무부장관 후보자가 어제 "개혁주의자가 되기 위해 노력했지만 아이 문제에는 불철저하고 안이한 아버지였다"고 딸의 논문 제1저자 등재 의혹에 대해 사과했다. 하지만 "저와 제 가족이 고통스럽다고 해서 짊어진 짐을 내려놓을 수 없다"며 장관 후보 사퇴 의사가 없음을 분명히 했다. 그런데 조 후보가 세상을 전력질주 하면서 남긴 발자국이 너무 많다. 대중이 알던 조국과, 그의 그림자가 다르다. 그가 적폐로 몰았던 세상의 도척(?)들이 '너와 내가 다른 것이 무엇이냐'고 호되게 나무라는 듯 하고, 그에게 관심이 없던 서민들은 '이제 그늘에서 쉬라'고 말하는 듯 하다. 조국(曺國)을 지켜보는 국민의 마음이 고통스럽다. /윤인수 논설위원

2019-08-25 윤인수

[참성단]'꿈의 구장'과 야구박물관

1989년 개봉한 '꿈의 구장(Field of dreams)'은 옥수수밭에 야구장을 지으면서 펼쳐지는 판타지를 다룬 영화다. 영화의 모티브는 미 프로야구의 흑역사 '블랙삭스 스캔들'에서 따왔다. 시카고 화이트 삭스와 신시내티 레즈가 맞붙은 1919년 미 프로야구 월드시리즈. 승부는 막강한 전력의 삭스가 싱겁게 끝낼 것으로 모두 예상했지만, 결과는 반대였다. 다음 해 가서야 삭스 선수들이 고의적으로 패배했다는 것이 밝혀졌다. 팬들은 경악했다. 승부조작에 가담한 8명의 선수는 영구제명됐다.영화는 평범한 옥수수 농장주 레이 킨셀라 (케빈 코스트너)에게 매일 밤 들리는 환청으로 시작한다. '그것을 만들면 그들이 올 것이다'. 킨셀라는 옥수수밭을 갈아엎고 조명까지 갖춘 멋진 야구장을 만든다. 이웃의 반응은 조롱과 냉담. 그러던 어느 날, 옥수수밭 사이로 한명의 선수가 수줍게 걸어 나온다. 타이 캅과 늘 타격왕을 겨루던 '맨발의 조' 조 잭슨이다. 그렇게 한 명 또 한 명, 삭스에서 제명된 선수 8명이 옥수수 야구장을 찾아온다는 줄거리다. 마치 꿈에서나 있을 법한 얘기다. 한국에서 이 영화의 흥행은 저조했다. 우리의 정서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야구라면 자다가도 일어나는 미국에서는 달랐다. 흥행은 말할 것도 없고, 이 판타지 영화가 준 울림은 상상 이상이었다. 영화에서 옥수수 구장을 찾은 '맨발의 조'가 킨셀라에게 "여기가 천국인가요?"라고 묻는 대사가 나오자 극장마다 관객의 박수가 터져 나왔다고 한다. 눈물을 흘리는 관객도 많았다. '꿈의 구장'은 미국인의 로망이 됐다.영화 '꿈의 구장'이 현실이 된다. 내년 8월 14일 시카고 화이트삭스와 뉴욕 양키스의 메이저리그 정규시즌 경기가 실제로 미국 아이오와주의 다이어스 빌 농장에 조성되는 특별야구장에서 치러지기 때문이다. 이 농장은 실제 '꿈의 구장'이 촬영된 곳이기도 하다. 1910년부터 1990년까지 화이트삭스가 홈구장으로 사용했던 코미스키파크를 재현한 8천석 규모의 야구장 공사가 지난 14일 착공됐다."옥수수밭에서 펼쳐지는 야구가 얼마나 많은 사람을 화합하게 할지 기대된다"는 미 메이저리그 관계자의 말이 가슴을 때린다. 부럽다. 100년이 넘은 한국 야구의 역사, 37년 프로야구 역사에도 불구하고 야구박물관 하나 없는 우리의 현실을 생각하니 더욱더 부럽다. /이영재 논설실장

2019-08-22 이영재

[참성단]대마초 코미디

'누구든 중독된 자 있거든 내게 돌을 던져라'. 십수 년 전 발간된 '대마초는 죄가 없다'라는 책의 표지에 실린 문구다. 대마초의 합법화, 비범죄화를 주장하는 이 책은 발간 당시만 하더라도 제목만큼이나 파격적이었다. 지금은 어떨까?같은 마약류로 분류되지만 필로폰, 코카인 등에 비해 대마초에 대한 우리 사회 구성원, 특히 젊은 층의 인식은 상대적으로 관대한(?) 것 같다. 아마도 다른 마약류와 달리 중독현상과 금단현상이 없고, 미국 일부 주와 캐나다 등 여러 국가가 대마초를 합법화했기 때문이지 않나 싶다. 대마초 관련 보도가 나올 때마다 대마초의 합법화를 주장하는 댓글 또한 적지 않은 것이 이를 방증한다. 오프라인에서도 마찬가지로, 대마초를 피운 혐의로 다섯 차례 구속된 전력이 있는 한 여배우는 방송에 나와 "대마초가 마약이라는 근거를 달라"고 정부에 대놓고 요구하기도 했다.이러한 분위기에 편승해서인지 최근 미국에 사는 한국인 유튜버가 대마초를 피우는 모습을 여과 없이 방송해 논란이 일고 있다. 문제는 이 영상이 단순히 '과시용'이거나 네티즌들의 관심을 유도해 조회수를 늘리고, 수익을 올리려고 하는 영상이라는 점이다. 대마초에 대한 고찰은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다. "(미국에서는) 고등학생도 대마초 사서 필 수 있다"고 너스레를 떠는 장면에서는 저절로 눈살이 찌푸려진다. 아무리 대마초가 중독성이 없고, 합법화 논리에 설득력이 있다 해도 성장기의 청소년들이 환각작용을 일으키는 대마초를 피워서 좋을 일이 뭐가 있겠는가. 더 큰 문제는 이 유튜버가 한국사람이기는 하지만, 미국 국적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처벌을 할 수가 없다는 점이다.사실 이 유튜버 사례는 약과다. 대마초를 둘러싸고 벌어진 더 어처구니없는 일은 이미 1970년대에 있었다. 1975년, 신중현 등 당시 가요계를 주름잡던 뮤지션들이 대마초를 피운 혐의로 무더기로 구속됐다. 이른바 '대마초 파동'이다. 그런데 이때는 대마초가 불법이라는 법률 규정이 없었다. '대마관리법'이 실행에 들어간 게 1977년 1월부터이니 이전에 잡혀들어간 연예인들은 영문도 모르고 쇠고랑을 찬 셈이다. 혹자는 이를 두고 "유신체제의 극악무도함과 코미디 같은 면모를 드러낸 사건"이라고 평가하기도 했다. 수십 년 전에는 법이 없어도 잡아들일 수 있었는데, 지금은 법이 있어도 잡아들일 수 없는 이 블랙코미디 같은 상황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난감하다. /임성훈 논설위원

2019-08-21 임성훈

[참성단]호르무즈

페르시아만 입구에는 호르무즈(Hormuz)라는 섬이 있다. 면적은 42㎢, 인구 3천여 명. 이란 땅이다. 구글 지도로 보면 황량한 모래섬이지만 페르시아만에서 인도양으로 빠져나가는데 위치해 해상 교역의 요충지로 더할 나위 없는 곳이다. 10세기 호르무즈 왕국은 이 섬을 근거지 삼아 페르시아만 무역을 통제하면서 번영을 구가했다. 1433년 해상무역로를 개척하기 위해 중동 서남아 동아프리카를 거쳐 이곳에 들른 명나라 항해 왕 정화(鄭和)는 호르무즈 왕으로부터 융숭한 대접에도 불구하고 이곳에서 병사했다.열강들이 호르무즈 섬을 호시탐탐 노리는 것은 인도와 무역을 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이곳을 통과해야 하는 지정학적 위치 때문이다. 호르무즈는 페르시아 해에서 인도양으로 가는 유일한 길목으로 폭이 54㎞에 불과한 호르무즈 해협은 중동 주요 산유국의 원유 수출 통로이기도 하다. 매일 약 2천250만 배럴의 석유가 이곳을 통과한다. 이는 세계 일일 석유 생산량의 24%에 해당한다. 세계는 1980년대 이란·이라크 전쟁 당시 일시적으로 유조선의 호르무즈 해협 통행이 막히면서 유가가 폭등했던 쓰라린 경험이 있다.호르무즈가 최근 다시 뜨거워졌다. 지난해 트럼프 미 대통령이 오바마 전 대통령의 치적이던 이란 핵 합의를 전격적으로 파기하고 대 이란 제재를 시행하면서 긴장감이 감돌고 있다. 호르무즈 인근 해역에서 유조선에 대한 공격이 잇따르는가 하면 최근엔 미국과 이란이 서로 상대편의 무인기를 격추하는 일도 벌어졌다. 이란은 미국·이스라엘 정보기관 공작설 등을 주장하면서 페르시아 만은 순식간에 일촉즉발 긴장 상태에 빠졌다.이런 상황에 미국이 호르무즈해협 호위 연합체 구성을 위해 우방국들에 파병 요청을 하자 우리의 고민도 덩달아 깊어지고 있다. 특히 미국은 우리와 일본을 꼭 짚어 참여를 요청해 걱정이 더 크다. 현재 참가를 결정한 나라는 영국과 이스라엘. 이미 독일은 불참을 선언했다. 한미동맹을 무시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서울 강남에 '테헤란로'가 있을 정도로 전통적으로 우호 관계를 맺어온 이란을 생각하면 쉽게 답하기도 어렵다. 국내에선 사드배치 때처럼 파병을 두고 의견이 찬반으로 갈라졌다. 언제나 두 개의 답안지를 두고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우리의 운명이 마치 호르무즈 해협이 처한 상황을 보는 것 같다. /이영재 논설실장

2019-08-20 이영재

[참성단]한반도 신 합종연횡

진시황이 중국 최초의 황제국을 세우기 전까지 대륙은 전국시대의 혼란을 겪었다. 진(秦)을 비롯한 연(燕), 조(趙), 한(韓), 위(魏), 제(齊), 초(楚) 등 전국 칠웅은 끊임없이 전쟁과 협상의 나날을 보냈다. 그러다 진이 약진하며 세력 균형이 깨지자 대륙의 혼란과 긴장이 극심해졌고, 이 틈새에서 오직 혀(舌)만 가진 가난뱅이 두 친구 소진과 장의가 기회를 얻었다.소진은 약세에 몰린 6국을 돌며 힘을 합해 진에 맞서자는 합종(合縱)책을 유세했다. 반면 장의는 6국동맹을 각개격파하는 연횡(連橫)책을 진 왕에게 건의했다. 이후 6국동맹과 진나라는 합종과 연횡에 근거한 외교·군사 대결을 전개한 끝에 진의 천하통일로 전국시대에 종지부를 찍었다. 그렇다고 장의의 연횡이 소진의 합종을 누른 것으로 판단하면 안된다. 세력의 형세나 동맹의 신뢰나 변화하는 국가이익에 따라 합종과 연횡은 얽히고 설키게 마련이다.최근 한반도에서 전통적인 합종연횡이 균열 조짐을 보이는 대신 신 합종연횡의 기미가 뚜렷하다. 냉전시대의 한반도는 미국이 중심인 한·미·일 동맹과 구소련이 중심인 북·중·소 동맹, 두 합종 세력의 대립이 팽팽했다. 미·소 양극이 세력 균형을 위해 구축한 동맹은 굳건했다. 그러나 소련 붕괴와 사회주의 국가의 연쇄적인 몰락 이후 미국이 주도하는 신자유주의 물결이 넘실댄 것도 잠시, 중국의 부상과 북한의 핵무장 이후 사정은 전혀 달라졌다.전통적인 합종연횡 구도라면 미국과 한국은 한·미·일 동맹의 합종으로 중국과 북한을 견제해야 맞다. 그런데 한·미·일 동맹의 합종연대에 이상기류가 발생했다. 트럼프의 '아메리카 퍼스트'로 미국이 동맹들에 성가신 요구가 많아졌다. 트럼프의 고양이 아베는 한국을 대놓고 무시한다. 한국의 문재인 대통령도 북한과의 평화협상에 외교를 집중하면서 미, 일 대하는 것이 예전 같지 않다. 한·미·일 합종의 대상인 중국과 북한이 이 틈을 타고 자유민주동맹에서 한국을 분리시키기 위해 연횡의 전략을 펼치는 중이다. 시진핑은 경제로, 북한은 핵무기와 미사일로 한국을 압박하고 있다.전통적인 합종은 흔들리고, 연횡의 주체가 되기엔 경제와 국방의 규모가 애매하다. 살벌한 국제관계에서 모호한 합종과 애매한 연횡은 여기저기서 치일 뿐이다. 한반도 신 합종연횡의 형세가 걱정스러운 이유다. / 윤인수 논설위원

2019-08-19 윤인수

[참성단]R의 공포

세계 경제가 흔들리고 있다. 지난 14일 오전 10시 미국 뉴욕 채권시장에서 미 채권의 '장단기 금리 역전 현상'이 일어났다. 비록 일시적이었지만 전 세계는 'R(recession·경기침체)의 공포'에 떨었다. 역사적으로 미 국채 3년물과 10년물의 수익률이 역전되면 평균 22개월 이내에 본격적인 경기침체가 시작되기 때문에 이 날의 공포는 더 컸다. 우리 역시 국고채 장단기 금리 격차가 11년 만에 가장 줄어들었다. 'R의 공포'가 오면 다음 단계는 'D(deflation)의 공포'다. 디플레이션은 주식이나 부동산 등 자산가치가 폭락하거나 통화량 축소로 인해 물가가 떨어지며 경기를 더욱 악화시키는 현상을 말한다. 디플레이션이 발생할 경우 예외없이 부동산, 주식 등의 자산 가격이 내려가고 생산과 소비가 위축되어 경기 침체는 장기화한다.우리 역시 물가 상승률이 7개월째 0%대에 그치면서 물가 하락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는데, 이를 디플레이션의 우려가 커졌다는 뜻으로 해석하는 전문가들이 꽤 많다. 디플레이션이 현실화되면 경제는 악순환의 수렁에 빠져든다. 물가가 떨어지면 기업의 매출이 줄고 생산과 성장률, 고용 등이 덩달아 감소한다. 여기에 소비자가 지갑을 굳게 닫으면서 경제는 불황의 늪으로 들어간다. 90년대 '일본의 잃어버린 20년'도 이런 과정을 거쳤다.'D의 공포'를 겪고 나면 그다음에는 'L(lay off·해고)의 공포'다. 미국과 중국의 무역 전쟁 장기화와 이에 따른 경기침체 우려로 이미 애플, 테슬라를 비롯한 첨단 기업부터 포드, GM 등 자동차 업체, 세계 최대의 전자제품 위탁 제조사인 대만 폭스콘까지 감원에 나서고 있다. 여기에 인공지능(AI) 확산에 따른 무인 자동화 추세가 일자리 감소를 더욱 가속화 하고 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수출로 먹고사는 우리의 걱정은 이만저만이 아니다. 미·중 무역전쟁에 일본의 경제 보복까지 겹쳤다. 수출 침체 장기화가 본격화할 것이란 우울한 진단이 나오며 'L자형'의 장기 침체까지 걱정해야 할 처지에 놓였다. 그런데 문재인 대통령은 "우리 경제의 기초 체력은 튼튼하다. 근거 없는 가짜 뉴스나 허위 정보, 과장된 전망으로 시장의 불안감을 키우고 있다"고 말한다. 전 세계가 R,D,L 등 이니셜 공포에 떠는 지금, 우리는 대통령의 경제에 대한 지나친 자신감이 더 '공포'로 다가오는 까닭은 무엇일까. /이영재 논설실장

2019-08-18 이영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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