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성단

 

[참성단]수요집회

"일본군대 위안부로 강제로 끌려갔던 김학순입니다. 신문에 나고 뉴스에 나오는 걸 보고 내가 결심을 단단하게 했어요. (일본이) 도대체 왜 거짓말을 하는지 모르겠단 말이오. 그래서 내가 나오게 되었소.…나올 때 좀 무서웠어요. 죽어도 한이 없어요. 하고 싶은 말은 꼭 하고야 말 거요. " 1991년 8월 14일 김학순 할머니는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현 정의기억연대) 사무실에서 기자회견을 하고 위안부 피해 사실을 공개했다. 김 할머니의 증언은 다른 위안부 피해자들의 연쇄증언으로 이어졌고, 전 세계에 일본 정부의 반인권적 범죄행위를 알리는 계기가 됐다. 그리고 이듬해 1월 8일 수요일, 일본 대사관 앞에서 일본 정부의 공식 사과와 배상 등을 요구하는 첫 집회가 열렸다. 이 집회는 '수요집회'라는 이름으로 지난 6일까지 1천438회 열렸다. 수요집회의 정식명칭은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정기 수요시위'다. 할머니들은 학생, 시민과 함께 비가 오면 비를 맞고, 눈이 오면 눈을 맞으면서 한 번도 빠짐 없이 수요집회를 열었다. 지금도 수요 집회가 열리는 날, 일본대사관은 스무 개가 넘는 창문의 모든 커튼을 내린다.2011년 12월 1천회를 맞은 수요집회 때 일본대사관 앞에 한복을 입은 '평화의 소녀상'이 세워졌다. 소녀상에는 이제 할머니가 된 피해자들의 가슴 속에 여전히 꿈 많은 소녀가 있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설치된 다음 날, 누군가 소녀상에 목도리를 감싸주면서 국민의 심금을 울리기도 했다. 이후 소녀상은 전국 아니 전 세계 곳곳에 세워지면서 평화와 인권, '반일(反日)'의 상징으로 자리를 잡았다.지난 7일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이며 수요집회의 상징인 이용수(92) 할머니가 "수요집회는 증오와 상처만 가르친다. 수요집회를 없애야 한다"는 충격발언을 했다. "30년간 속을 만큼 속았고 이용당할 만큼 당했다"는 말도 이어졌다. 정의기억연대 등 위안부 관련 단체와 이번에 국회의원에 당선된 윤미향 전 정의기억연대 이사장을 강도 높게 비판하기도 했다. 파문은 일파만파다. 시민단체에선 "터질 것이 터졌다"는 반응이다. 하루빨리 정부가 나서 원인을 규명하고 사태를 해결해야 한다. 흐지부지 넘길 일도 아니다. 방관하면 사태는 더 커질 것이다. 30년간 이어진 수요집회의 신화가 무너질까 벌써 두렵다. /이영재 주필

2020-05-10 이영재

[참성단]연금복권

복권의 역사는 오래됐다. 고대 이집트 시대에는 도시재건, 전쟁비용 등을 충당하기 위해 복권이 판매됐고, 로마 초대황제 아우구스투스는 재산이나 노예를 나누어 주기 위해 복표를 사용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지금처럼 당첨 시 현금을 지급하는 복권은 1530년 이탈리아의 피렌체지방에서 발행한 '피렌체복권'이 시작이다.우리나라에선 1947년 14회 런던올림픽 경비마련을 위한 올림픽 후원권을 복권의 효시로 친다. 액면가 100원에 1등 100만원으로 모두 140만장이 발행됐다. 인기가 폭발적이었다. 이후 재해 대책자금, 전쟁 후 산업 부흥 및 사회복지자금, 박람회 기금 마련 등 특수 목적을 위해 일시적인 복권발행이 이뤄졌다. 첫 정기 복권은 1969년 9월에 나온 '주택복권'으로 2006년 4월까지 판매됐다. 복권의 규모가 폭증한 것은 1990년 즉석식 복권에 이어 2002년 로또 복권이 등장하면서다. 역대 로또 복권 최고 당첨금은 407억원으로, 2003년 4월 춘천의 당첨자가 세금을 제외하고 318억원을 받아 부러움을 샀다.복권을 흔히 '희망 세금' '빈자의 세금'이라고 한다. 서민에게 헛된 희망만 키울 뿐, 당첨이 어려워 돌려받지 못하는 세금과 같기 때문이다. 로또 복권 1등에 당첨될 확률은 814만5천60분의 1이다. 80㎏ 쌀 세 가마니 분량에 검은 쌀을 한 개 넣고 그것을 집을 확률과 맞먹는다. 골프에서 150야드 파 3홀 기준으로 홀인원 확률은 일반인은 1만2천500분의 1, 프로선수 2천500분의 1인 걸 감안한다면 사실상 당첨이 불가능한 것이나 다름없다. 그래도 복권 구매자의 60%가 월평균 소득 400만원 가구인 것을 보면 복권은 '서민의 꿈'이 분명하다.지난달 30일 출시한 '연금복권 720+'가 매진이 될 정도로 큰 인기를 끌고 있다고 한다. 당첨액을 기존 월 500만원에서 700만원으로 40% 상향한 게 인기 요인이 됐다. 정부는 새 복권을 발매하면서 '로또에 쏠린 시장 균형발전'을 내세웠다. 사행심을 조장하는 복권에 '균형발전'을 갖다 붙이니 쓴웃음이 나온다. 지금처럼 삶이 고단하고 팍팍할수록 서민의 발걸음은 복권방으로 향한다. 연금복권 당첨액을 높여 서민을 유혹하는 정부의 꼼수에도 불구하고 서민들에겐 인생역전에 복권만한 것도 없다. 이는 서민들이 오늘도 복권방 앞에 줄을 서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영재 주필

2020-05-07 이영재

[참성단]아듀! 드라이브 스루

테러의 종류는 다양하다. 그 중 질병이나 사망을 일으키는 바이러스나 독소, 유해 물질을 고의로 방출하는 생물테러는 불특정 다수의 목숨을 겨냥하는 만큼 최악질 테러가 아닐 수 없다. 생물테러가 벌어질 경우, 가장 신속하고 효율적으로 테러 피해자들에게 해독제 등 약품을 나눠줄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2년 전 그 방법을 연구한 의사들이 있다. 엄중식 가천대 길병원 감염내과 교수, 김진용 인천의료원 감염내과 과장, 이재갑 한림대 강남성심병원 감염내과 교수 등이다.이들은 2018년 생물테러시의 약품 배분과 관련한 질병관리본부의 연구과제를 수행하면서 대규모 환자가 발생했을 경우의 해독제 지급 방식을 고안해냈다. 당시 연구책임자는 엄중식 교수였다. 김진용 과장은 연구 결과를 '드라이브 스루'에 접목시키는 아이디어를 제공했다. 대구 상황에 심각성을 느낀 이재갑 교수가 밤늦게 "대규모로 환자를 선별할 수 있는 게 필요하다"는 글을 단톡방에 올리자 김진용 과장은 다음날 새벽 3시까지 직접 그림까지 그려 5장의 드라이브 스루 제안서를 만들었다.이렇게 해서 국내에 도입된 '드라이브 스루' 선별진료소는 코로나19 확산을 막는 데 효자 노릇을 톡톡히 했다. 병원이나 보건소에서 검체검사에 1명당 최대 1시간 이상 걸리던 것이 드라이브 스루 진료소에서는 10분 안에 끝났다. 이런 효율성 때문에 전국 곳곳에 드라이브 스루 진료소가 설치되더니 외신의 찬사가 이어졌다. 영국 BBC는 "한국이 기발한 아이디어를 빠르게 적용했다"고 했고 미국 블룸버그 통신은 "세계에서 가장 혁신적인 국가로 다시 한번 입증됐다"며 한국을 추켜세웠다. 처음에 드라이브 스루에 냉소적 반응을 보이던 일본도 결국 한국을 따라 할 수 밖에 없었다.인천시가 6일부터 선학체육관 주차장에서 운영해오던 드라이브 스루 진료소 운영을 잠정 중단했다. 검사 수요가 급격히 감소한 데 따른 조치다. 개인적으로 드라이브 스루의 '원조?'는 명절 때 꽉 막힌 고속도로에 어김없이 나타나는 뻥튀기 판매상들이 아닌가 싶다. 길이 뚫리면 판매상은 사라진다. 드라이브 스루 진료소도 다시 등장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이는 코로나19가 재확산되지 않았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동안 고생한 의료진이 다시 매연과 무더위 속에서 구슬땀 흘리는 일이 없기를 바랄 뿐이다. /임성훈 논설위원

2020-05-06 임성훈

[참성단]프로야구 무관중 개막

2015년 4월 30일 미국프로야구 메이저리그 볼티모어 오리올스와 시카고 화이트삭스와의 경기가 무관중으로 치러졌다. 150년 메이저리그 역사상 최초의 무관중 경기였다. 당시 볼티모어지역의 대규모 폭동 사태로 흑인 소년이 사망한 사건이 원인이었다. 경기 도중 폭동사태 우려로 내려진 부득이한 조치였던 것. 당시 무관중으로 경기를 치른 메이저리그 선수들은 팬의 중요성을 새삼 깨달았다고 한다. 팬이 없다면 프로 스포츠가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을 증명해준 경기였다.프로 스포츠에 관객이 없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다. 보통 '무관중 경기'는 물의를 빚은 구단에 내려지는 최후의 조치다. 국내 프로 스포츠 첫 무관중 경기는 2007년 축구 K3 리그인 서울 유나이티드가 받았다. 당시 서울은 대구의 한국 파워트레인과의 홈경기 중 응원단과 선수들 간의 폭력사태로 대한축구협회로부터 '무관중 경기'라는 중징계가 내려졌다. 국제경기에서도 가끔 무관중경기가 치러진다. 지난해 9월 평양에서 열린 북한과의 월드컵 예선전이 그런 경우다. 북한은 2005년 이란과의 월드컵 예선 홈경기에서 심판 판정 항의와 오물 투척, 상대 선수단 위협 등으로 제3국 내 무관중 경기라는 징계를 받기도 했다.어제 프로야구 개막전이 무관중 경기로 치러졌다. 코로나19로 인한 부득이한 조치였다. 5개 구장에서 열렸는데 그 어디에도 팬들의 함성이 없었다. 홈런과 안타가 터져도, 절묘한 수비가 펼쳐져도 관중석에선 함성이 들리지 않았다. 홈런을 치고 들어오는 선수의 '언택트 세리모니'는 마치 무언극의 배우를 보는 것처럼 묘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TV 중계 역시 스포츠 캐스터들이 아무리 분위기를 띄우려고 해도 흥이 나지 않았다.하지만 코로나19를 잘 극복하고 있는 탓에 무관중이라도 경기가 펼쳐진 게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우리의 일상이 사실상 중단된 상태에서 비록 무관중이지만, 선수들이 그라운드에서 뛰는 것을 보니 비로소 우리가 살아 있다는 느낌이 든다. 모레부터는 K리그 프로축구도 무관중으로 경기가 열린다. 이 모두 국민이 솔선수범해서 코로나19를 슬기롭게 대처했기에 가능했다. 미국의 스포츠 채널 ESPN이 우리의 프로야구를 매일 한 게임씩 중계할 정도로 지금 전 세계가 코로나19를 이겨내고 무관중 경기라도 하는 우리를 부러운 눈으로 쳐다보고 있다. /이영재 주필

2020-05-05 이영재

[참성단]5월에…

5월은 '눈으로 듣는 음악' '귀로 듣는 그림'의 계절이다. '계절의 여왕'이라는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니다. 그래서 아름다운 5월을 노래한 시가 많다. 당장 괴테의 '5월의 노래'가 떠오른다. '해는 빛나고 들은 웃는다/나뭇가지마다 꽃은 피어나고/떨기 속에서는 새의 지저귐/넘쳐 터지는 가슴의 기쁨/대지여, 태양이여/행복이여 환희여/사랑이여 사랑이여/저 산과 산에 걸린 아침 구름과 같은/금빛 아름다움/그 기막힌 은혜는 신선한 들에 꽃 위에 넘친다.'햇빛에 반짝이는 신록의 잎사귀들은 보기만 해도 가슴이 벅차다. 살아있는 것들이 뿜어내는 고귀한 생명력. 눈이 부신다. 피천득은 5월을 '금방 찬물로 세수를 한 스물한 살 청신한 얼굴'이라고 했다. 우리도 눈매가 한없이 푸르던 그런 시절이 있었다. 하지만 그때는 몰랐다. 5월이 오면 윌리엄 워즈워스의 '무지개'가 떠오르는 것도 그래서다. '하늘의 무지개를 볼 때마다/내 가슴은 뛰노니,/나 어린 시절에 그러했고/다 자란 오늘에도 매한가지,/쉰 예순에도 그렇지 못하다면/차라리 죽음이 나으리라./어린이는 어른의 아버지/바라기는 나의 하루하루가/자연의 경건함으로 이어지기를.'지금은 무지개를 보기가 밤하늘의 별을 보기만큼 어렵지만, 그때는 무지개가 별만큼이나 흔했다. 그래서 소중한지도 몰랐다. '어린이는 어른의 아버지'라는 시구를 읊조리며 "이게 말이 되느냐"며 친구들과 얼마나 킥킥거리며 웃었는지 모른다. 하지만 세상을 살아보니 그 말은 하나도 틀린 말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이런 5월을 맞이할지는 몰랐다. 원래 5월은 도약하는 달이다. 5월을 '가정의 달'로 정한 것도 가정의 화목을 바탕으로 큰 꿈을 성취하라는 뜻이었다. 그런데 지금 5월은 어떤가. 가슴은 메마름으로 석고처럼 굳어있고, 마치 한 마리 부패한 생선처럼 희망도 행복도 변질해 가고 있다. 그래서 언제부턴가 5월은 슬픈 달이 돼버렸다. 모두 마음의 여유가 없어진 탓이다. 아서 밀러의 희곡 '세일즈맨의 죽음'에 이런 대사가 나온다."푸른 빛을 볼 수 있는 한 뼘의 정원이라도 갖고 싶다". 지금 우리에게 절실한 것은 그런 '한 뼘의 정원'이다. 위정자도, 부자도, 빈자도, 어린이도, 어버이도, 스승과 학생도 가슴속에 푸른빛이 와 닿는 '한 뼘의 정원'을 가져야 한다. 그래서 이제라도 잃어버린 5월을 되찾아야 한다. /이영재 주필

2020-05-03 이영재

[참성단]19세 소형준

2006년 4월 12일 잠실구장. 인천 동산고를 갓 졸업한 한화의 신인 류현진은 LG전에 등판해 7.1이닝 3안타 10삼진 무실점으로 깔끔한 데뷔 선발승을 기록한다. 그의 나이 19세. 야구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한 LG 팬들은 소년티를 벗어나지 못한 류현진의 역투에 놀란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래서 이날의 '충격의 패배'를 기억하는 LG 팬들이 의외로 많다. 류현진은 그해 201.2이닝을 던져 204개의 탈삼진과 18승으로 다승 탈삼진 평균자책점 1위를 기록하며 정규시즌 MVP와 신인왕을 거머쥐었다. 이런 '슈퍼 루키'의 탄생은 구단은 물론, 팬들에겐 엄청난 축복이 아닐 수 없다.수원 kt 위즈 팬들은 14년 전 류현진으로 인해 한화 팬들이 맛봤던 기쁨을 어쩌면 올해 똑같이 느낄 수 있을지 모른다. 수원 유신고를 졸업한 19세 소형준 때문이다. 189㎝ 92㎏의 듬직한 체구. 100m 떨어진 곳에서 그를 본다면 류현진인지 소형준인지 분간하기 어렵다. 다른 점이 있다면 류현진은 좌완, 소형준은 우완이라는 것. 신인 투수가 데뷔 첫해 선발 자리를 차지한다는 것은 여간 어려운 게 아니다. 그러나 kt 5선발을 꿰어찬 소형준은 류현진이 그랬듯, 올해 KBO 신인 선수 중 유일하게 선발로 개막전을 치르는 선수가 됐다.코로나19로 모든 스포츠 경기가 중단되면서 우리는 그의 역투를 못 볼뻔했다. 다행히 사태가 진정되면서 시범 경기가 시작됐고, 지난 22일 한화전에 등판한 19세 소형준은 눈부신 역투를 펼치면서 6.1이닝 1실점으로 승리투수가 됐다. 그날 한화 선수들이 친 안타는 고작 5개. 비록 시범경기지만 한화 선수들은 최고 150㎞ 강속구에 투심패스트볼과 커브, 간간이 던지는 슬라이더와 체인지업까지 다양한 구종을 구사하는 19세 루키에게 꼼짝없이 당했다. 2015년 프랜차이즈 스타 투수 박세웅을 롯데로 보내야 했던 kt 위즈 팬들의 아픔을 19세 소형준은 깨끗이 치유해 줄 수 있을까. 그럴 가능성이 높다. 그동안 많은 슈퍼 루키의 출현이 있었다. 그러나 막상 시즌이 시작되면 어디 한두 군데 이상이 생겨 중도 하차하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2001년생 소형준은 다르다. 구질도 그렇지만, 특히 그의 강철 '멘탈'은 마치 국보투수 선동열의 재림을 보는 듯해서다. 19세 소형준으로 수원 kt 위즈 팬들의 마음은 벌써 가을 야구에 성큼 다가가 있다. /이영재 주필

2020-04-30 이영재

[참성단]평양의 사재기

1994년 3월 19일 판문점에서 열린 남북회담에서 북한의 박영수 협상대표가 "여기서 서울은 멀지 않다. 전쟁이 일어나면 불바다가 되고 말 것"이라고 폭언을 하고 회담장에서 뛰쳐나가 큰 파문을 일으켰다. 이른바 '서울 불바다론'. 그의 말이 언론에 보도되면서 사재기하려는 사람들로 가게마다 북새통을 이뤘다. 그 해 6월에는 북한이 IAEA(국제원자력기구) 탈퇴를 선언하자 또 한 번 사재기 바람이 불었다.이처럼 북한이 의도적으로 군사적 긴장감을 불러일으킬 때마다 사재기 바람이 불고 금융시장은 요동쳤다. 북핵과 분단국가라는 지정학적 요인 때문에 '코리아 디스카운트'란 용어가 그래서 생겼다. 하지만 그 후 남북관계에 긴장감이 일어도 사재기 현상은 일어나지 않았다. 1999년 6월 15일 제1연평해전, 2002년 6월 29일 제2연평해전이 터져도, 2010년 11월 23일 연평도가 포격을 당해도 극히 일부를 제외하곤 사재기는 찾아볼 수가 없었다. 심지어 2011년 12월 19일 김정일 사망소식에도 대형마트, 편의점, 슈퍼 등 유통 시장은 평소 때와 다름없었다. 수없이 반복된 '학습효과' 탓이다.'김정은 신변 이상설'이 장기화하면서 최근 평양에서 생필품 사재기 바람이 불고 있다는 워싱턴포스트의 보도가 나왔다. 기사를 작성한 애나 파이필드는 자타가 공인하는 북한 전문기자다. 서방 언론인들 가운데 북한 정보에 가장 정통한다는 평을 듣는다. 십여 차례 이상의 북한 현지취재를 통해 북한정권의 향방을 꾸준히 추적했다. 김정은 평전 '마지막 계승자'(프리뷰 간)의 저자이기도 하다.기사에 따르면 평양 엘리트들 사이에서 뒤숭숭한 분위기가 연출되고 과일과 채소, 쌀, 술 심지어 전자제품까지 사재기 현상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북한은 그의 기사를 '가짜뉴스'로 규정하고 발끈했다. 북한과 우호적인 러시아의 타스 통신 역시 "평양 시민들은 평소와 다름없이 일상생활을 하고 있다"는 평양 통신원 기사를 내보냈다. 하지만 기사 중 관심을 끄는 건 '과거에도 북한 지도자의 사망설이 있었지만, 이번 루머는 상황이 달라 보인다'는 대목이다. 현재 워싱턴포스트 베이징 지국장으로 중국 고위층과 밀접한 인맥을 형성하고 있어 기사의 신빙성을 더하고 있다. 어찌 됐건, 남한에서는 사라진 사재기가 평양에 등장했다니 묘한 기분마저 든다. /이영재 주필

2020-04-28 이영재

[참성단]31번 확진자 미스터리

국내 코로나19 사태는 31번 확진자 발생 전후로 완전히 양상이 달라졌다. 1월 20일 첫 확진자 발생 이후 2월 16일 30번 확진자 발생할 때까지 코로나19는 폐쇄국가 중국에 국한된 감염병이란 인식이 강했다. 의사협회 등 전문가 집단이 중국에 대한 국경봉쇄를 강조해도, 정부가 바이러스 발생지 후베이성만 봉쇄한 것도 미미한 확진자 발생빈도에서 비롯된 자신감이었을 것이다. 방역에 대한 자신감 때문이었다.정세균 총리는 2월 13일 신촌 일대 상가를 마스크 없이 돌면서 상점 주인들에게 "그동안 돈 많이 벌어 놓은 걸로 버텨야지", "손님이 적으시니 편하시겠다"고 농담을 건넸다 비난을 샀다. 부적절한 농담이었지만, 코로나 조기 종식에 대한 자신감은 그만큼 컸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2월 18일 대구 첫 확진자인 31번 확진자가 발생했고, 신천지교회가 등장했고, 세상이 완전히 변했다.신천지교회 교인 1만여명을 전수조사하자 1주일만에 확진자가 1천명 대에 진입했고, 2주 뒤엔 5천명을 돌파했다. 방역매뉴얼이 없는 상태에서 경증환자가 음압병실에 입원하고, 중증환자가 입원대기 중 집에서 사망하는 사태가 발생하면서 대구는 한국의 우한이 됐다. 세계 각국이 한국에 국경을 닫았고, 중국의 각 성(省)들도 마찬가지였다. 마스크 대란에 정부는 우왕좌왕했다. 소상공인은 가게 문을 닫고, 경제는 마비됐다. 전 국민에게 재난지원금을 지원하는 전대미문의 위기는 이제 시작일 뿐이다.31번 확진자는 코로나 대재앙의 소용돌이 한 복판에 서 있었다. 대구 신천지교회 집단감염의 슈퍼전파자로 의심받았다. 병원의 검진 권고에도 불구하고 교회 등 다중집합시설을 방문한 데다 동선을 숨긴 행위는 도마에 올랐다. 본인은 보건소에서 검진을 거부당했다고 항변했지만 반향은 적었다. 그녀가 입원 67일만인 지난 24일 완치판정을 받고 퇴원했다. 하지만 그녀의 감염경로는 여전히 미스터리다. 신천지교회 내부가 의심되지만 추측에 머문다.다만 당국이 국경 검역이 느슨했던 시기에 코로나19가 은밀하게 확산된 건 분명해 보인다. 이탈리아, 스페인 등 유럽과 미국 등 국경봉쇄가 느슨했던 국가들의 팬데믹 참상은 목불인견이다. 31번 확진자도 소홀했던 초기방역의 피해자일지 모른다. 나라도 못 막은 역병이다. 그녀의 책임을 계속 따져야 할지 의문이다. /윤인수 논설실장

2020-04-27 윤인수

[참성단]얼빠진 軍

군기 빠진 오합지졸 군대를 '당나라 군대'라고 한다. 왜 이런 말이 나왔는지 그 연원은 확실치 않다. 당이 어떤 나라인가. 태종 이세민의 나라다. 건국 초기만 해도 중국 왕조 가운데 가장 강성했던 국가였다. 동쪽으로는 요동을 서쪽으론 중앙아시아를 아우르는 대제국을 건설했다. 고구려의 아들 고선지 장군이 파미르 고원을 넘어 서역까지 동서 비단길을 연 것도, 나침반, 제지술 등 화려한 문물을 서방에 전한 것도 당이었다. 그런데 '당나라 군대'라니.대부분 왕조가 그렇듯, 당나라도 후기로 가면서 군역 제도의 결함과 그에 따른 지휘관의 비리와 지도층의 부패로 군이 오합지졸이 된 것은 분명하다. 8세기 전후 양귀비와 염문을 뿌린 당 현종 때부터 전력이 급속히 약화하면서 중반에 이르자 토번(티베트)과 돌궐(위구르) 등의 침략에 당은 하루도 편한 날이 없었다. 토번의 공격에 수도 장안을 내준 적도 있었다. '자치통감'에 당나라군이 전쟁에 나갔다 하면 '연전연패'했다는 기록도 있다. 특히 '안사의 난'을 전후해 당 왕조가 부패와 무능으로 급속히 쇠락하면서 당군은 오합지졸이 됐다. '당나라 군대'라는 말이 이때 나왔다는 말이 있다.요즘 우리 군의 기강이 도를 넘었다고 지적하는 소리가 높다. 군기 문란에 기강해이까지 마치 "당나라 군대 같다"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린다. 경기도의 한 육군 부대에서 병사가 야전삽으로 여군 중대장을 폭행하는가 하면, 충청도의 육군 부대에서 남성 부사관들이 상관인 남성 장교를 성추행했다는 의혹이 제기돼 군사 경찰이 수사에 착수했다. 육군 전방부대에서는 카카오톡 단체 방에서 암구호를 공유한 사병들이 적발되기도 했다. 군 시설에 민간인이 무단침입한 것도 한 두건이 아니다. 최근엔 대령이 최고등급 보안구역에 마이크를 설치해 3개월간 엿듣다 적발된 어처구니 없는 일도 있었다.오죽하면 점잖기로 소문난 정경두 국방장관이 "불합리한 부대 지휘에 의한 장병 인권침해, 상관 모욕, 디지털 성범죄 및 성추행, 사이버 도박 등이 발생하고 있다"며 장관 지휘 서신을 내렸을 정도다. 이러니 우리 역시 '당나라 군대'를 들먹이지 않을 수 없다. 모두 휴대전화를 전면 허용하고, 급여를 올려주는 등 장병 복지에만 신경 쓰는 사이 군기가 흐트러졌다는 지적이 나왔다. 김정은 유고설이 나오는 마당에 우리의 얼빠진 군, 해도 해도 정말 너무 한 거 아닌가. /이영재 주필

2020-04-26 이영재

[참성단]2인자 김여정

2018년 2월 9일. 김여정 노동당 제1부부장이 김영남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 등 북한 고위급 인사들과 함께 비행기 편으로 인천국제공항에 도착해 평창 동계올림픽 개막식에 참석했다. 이 자리에서 김여정은 문재인 대통령과 악수를 하면서 고개와 허리를 숙이지 않았다. 턱 끝을 살짝 들어 올린 채 미소를 유지하는 표정을 2박 3일간의 방한 기간 내내 선보였다. 전문가들은 김여정이 의식적으로 자신이 한 조직의 우두머리임을 행동으로 나타내는 '알파 전략'을 쓴다고 지적했다. 오랜 시간 훈련됐거나 당당함을 표출하려는 의도된 전략이라는 것이다.다음날 청와대를 방문한 김여정은 방명록에 '평양과 서울이 우리 겨레의 마음속에서 더 가까워지고 통일 번영의 미래가 앞당겨지기를 기대합니다.'는 글을 남겼는데, 가로 선의 기울기가 오른쪽으로 갈수록 가파르게 올라가는 독특한 문체가 화제가 됐다. 김일성 김정일 김정은 3대의 글씨체 모두 오른쪽 위 방향으로 기울어진 게 특징으로 그녀 역시 이 글씨체를 사용하면서 '백두혈통'임을 과시하는 듯했다. 특히 초성으로 쓰인 자음이 유독 컸는데 전문가들은 이를 "평범한 사람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남들 위에 서 있다는 심리의 표출"이라고 평가했다. 이처럼 김여정은 고전적인 머리 모양에 수수한 옷차림의 짧은 방한 기간 중이었지만 우리 국민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김여정이 우리의 관심을 다시 끌게 된 건 지난 3월 3일 '청와대의 저능한 사고방식에 경악을 표한다'는 담화문이었다. 전날 단거리 발사체 발사에 강한 유감을 표명한 청와대에 대해 내놓은 담화문은 김여정 명의로 나온 것으로 그 내용이 충격이었다. "겁을 먹은 개가 더 요란하게 짖는다" "청와대의 행태가 세 살 난 아이들과 크게 달라 보이지 않는다"는 등 불쾌한 감정을 여과 없이 거칠게 드러내 우리를 놀라게 했다.김정은 위원장의 신변 이상설이 12일째 계속되는 가운데 김여정이 북한 2인자의 자리를 굳혔다는 보도가 잇따르고 있다. 하지만 북한은 세계에서 최고로 고립된 폐쇄 국가다. 코로나19가 전 세계를 강타해도 확진자가 '0명'이라고 대외적으로 선전하는 나라다. 지금 북한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김여정을 "애송이에 불과하다"고 하는 태구민 미래통합당 당선자도 있다. 자칫 외신보도만을 믿다가 낭패를 당하기 일쑤다. 북한 상황은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다. /이영재 주필

2020-04-23 이영재

[참성단]강남 스타일

싸이의 강남스타일에 이어 또 한번 강남이 뜨고(?) 있다. 서울 강남갑 선거구에서 탈북자 출신의 태구민(태영호) 미래통합당 후보가 당선되면서부터다. 4·15 총선 다음날인 16일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 올라온 한 청원이 강남을 다시 주목받게 한 도화선이 됐다. '서울 강남구 재건축지역에 탈북자 새터민 아파트 의무비율로 법제화해 주세요'란 제목의 청원이다. 청원인은 "냉전시대의 수구적 이데올로기의 장벽을 넘어 태구민씨를 선택해 준 강남구민들의 높은 정치의식과 시대정신에 경의를 표한다"며 이같이 요구한 뒤 "강남구민들의 높은 정치의식을 기반으로 생각해볼 때 분명 반대는 적을 것으로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강남 주민에 대한 경외감이 한없이 묻어나는 글이다. 하지만 액면 그대로 읽혀지지가 않는다. 오히려 태 후보를 국회로 보낸 것을 조롱하는 듯한 뉘앙스가 강하다. 청원인의 의도가 그렇다면 청원 의제는 기막힌 패러독스가 아닐 수 없다.사실 국내에서 부동산 시세가 가장 높은 지역에 새터민 아파트를 의무화하라는 제안을 지역 부동산 자산가들이 어떻게 받아들일지는 안 봐도 뻔하다. 청원인이 이러한 사실을 모를 리 없을 터인데 이런 제안을 하는 것은 강남 유권자들에게 보내는 일종의 야유가 아닌가 싶다.태 후보는 종합부동산세법 개정을 1호 공약으로 내세웠다. 종부세 부과 주택의 가격 기준을 현행 공시가격 9억원에서 12억원으로 높이겠다고 약속했다. 민주당 후보도 부동산규제완화를 약속했지만 여권의 부동산 정책을 못마땅해 하는 유권자들의 표심을 극복하지 못했다는 게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북한 프레임이나 사상, 이방인에 대한 인식 등 선거에 어떤 형태로든 영향을 미치리라 예상했던 요소들이 '부동산'이란 현실 앞에서는 힘을 쓰지 못한 셈이다. 청원 이후에 강남지역 아파트 브랜드를 북한식으로 희화화한 패러디가 유행하고 있는 것도 새터민 아파트 청원과 맥을 같이하지 않을까 싶다. '푸르디요', '인민이 편한 세상', '내래미안', '간나이파크' 등이다. 해당 청원은 22일 현재 13만명 이상의 동의를 얻으면서 우리 사회에 복잡 미묘한 화두를 던졌다. 싸이는 말춤을 추면서 이렇게 외친다. "나는 사나이/ 근육보다 사상이 울퉁불퉁한 사나이/ 그런 사나이". 사상이 울퉁불퉁하다는 게 무슨 의미인지 곱씹어보는 요즘이다. /임성훈 논설위원

2020-04-22 임성훈

[참성단]올드보이의 퇴장

"…김영삼 후보의 대통령 당선을 진심으로 축하하는 바입니다. 저는 김영삼 총재가 앞으로 이 나라의 대통령으로서 정치 경제 사회 모든 분야에서 성공하여 국가의 민주적 발전과 조국의 통일에 큰 기여 있기를 바라마지 않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이 말을 덧붙였다. "이제 저는 저에 대한 모든 평가를 역사에 맡기고 조용한 시민 생활로 돌아가겠습니다." 정치인이기 이전에 한 인간인 후광(後廣) 김대중의 목소리는 그렇게 떨리고 있었다. 1992년 12월 19일의 일이다.후광이 통곡과 비감을 가슴속으로 깊게 삼키면서 이런 귀거래사를 읊조리며 정계 은퇴선언을 할 때, 많은 국민은 진심으로 동정과 사랑이 담긴 박수를 그에게 보냈다. 이에 화답하듯 후광은 '한국 현대 정치사'를 쓰겠노라고 말했다. 평생 정치적 라이벌이던 두 사람 중 한 명은 대통령이 되었고, 한 명은 정계 은퇴를 발표했으니 많은 이들은 이구동성으로 "이제 양김(兩金) 시대는 끝났다"고 말했다. 그러나 2년 7개월 후 후광은 다시 정계로 복귀했다.흐르는 세월은 어쩔 수 없는 모양이다. 한 시대를 풍미하던 여야의 '올드보이' 정치인 상당수가 여의도를 떠나는 처지가 됐으니 말이다. 민생당의 손학규 상임선대위원장, '정치 9단'으로 불리던 박지원(4선) 의원, 20대 국회 최다선(8선)인 우리공화당 서청원 의원, 천정배(6선) 등이 21대 총선에 줄줄이 낙선하며 국회 재입성에 실패했다. 여기에 일찌감치 총선 불출마를 선언한 문희상(6선) 국회의장과 더불어민주당 이해찬(7선) 대표, 미래 통합당의 김무성(6선) 의원 등도 정계를 떠날 것이 확실시 된다.정동영 민생당 의원이 20일 자신의 페이스북에 "이제 자연인으로 돌아간다"며 정계 은퇴 의사를 밝혔다. 이미 손학규 위원장은 선거 다음날 "참담한 결과에 송구스럽기 그지없다. 모두 민심을 헤아리지 못한 저의 불찰"이라며 "선거 결과에 대한 모든 책임을 지고 물러난다"고 밝혔다. 셰익스피어의 리차드 3세에 이런 대사가 나온다. "이제 우리의 불만스런 겨울은 이 '요크'의 태양 덕분에 빛나는 여름이 되었다." 올드보이의 대거 퇴진이 '지겨운 겨울이 가고 영광스런 요크의 여름이 오듯' 한국 정치에 새 바람이 불지, 아니면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돌아올지 그것은 아무도 모른다. 그 무대가 '아니면 말고'가 다반사인 정치판이라 더 그렇다. /이영재 주필

2020-04-21 이영재

[참성단]당선사례(當選謝禮)

선거는 승자와 패자를 가른다. 필연이다. 개표가 끝난 아침, 교체된 현수막에 희비가 갈린다.당선자는 자신을 뽑아준 유권자들에 한없는 감사의 뜻을 표한다. 당선사례다. 현수막은 기본이고, 거리인사를 하거나 차량을 타고 지역구를 돌기도 한다. 트위터와 페이스북 등 SNS를 활용해 감사인사를 한다. 대체로 고맙다는 말과 함께 초심을 지켜 지역과 나라를 위해 바른 의정활동을 하겠다는 다짐을 한다.오래전에는 막걸리에 고무신을 돌리기도 했다는데, 전설이 됐다. 이제는 마음으로만 감사해야 한다. 자칫 당선이 무효가 되고 전과자 신세가 될 수 있다. 유권자도 마찬가지다. 당선자와 측근, 유권자를 향한 선관위의 눈매가 매섭다.낙선자들도 유권자들을 향해 감사의 인사를 한다. 낙선사례(落選謝禮)다. 역시 현수막과 SNS가 소통 창구다. "성원해 주셨지만 부족했다"거나 "열심히 해서 다음에 선택을 받겠다"는 게 주 내용이다.때론 당선자는 보이지 않는데 낙선자가 거리에 나와 눈길을 끈다. 용인 지역에 출마했던 한 야당 후보는 지난 18일 팻말을 들고 지하철역 앞에서 2시간 넘도록 인사를 했다. '송구합니다. 성원 감사합니다'란 푯말을 든 그에게 "안타깝다, 다음에 꼭 승리하라"고 격려하는 시민들이 여럿이었다고 한다. 비록 '정치적 행위'일지 모르나 남들과는 다른 용기와 결기에 공감을 나타낸 것이다.당선사례든 낙선사례든 황당함과 무례함은 사라졌다. 하지만 여의도의 입은 여전히 거칠다.여권의 한 당선자는 검찰을 향한 날 선 발언으로 주목받고 있다. 검찰과의 관계를 보면 당연하다는 반응도 있지만 벌써 오만한 것 아니냐는 비판이 나온다.참패한 야당은 비대위 구성과 전당대회 개최를 두고 시끄럽다. 팔다리가 잘리는 중상을 입고서도 당내 권력다툼에 자성과 책임은 뒷전이라는 비판이 나온다. 야당 공천을 받지 못한 영남권 당선자는 벌써 대권을 들먹이며 '내가 당의 주인'이라고 당을 압박한다. 국민은 안중에도 없다는 불손한 태도가 아닐 수 없다.2년 뒤 20대 대통령 선거와 제8대 지방 동시선거가 치러진다. 다시 2년 뒤 총선이다. 세상은 변화하고 민심은 달라지기 마련이다. 당락이 바뀌고 여·야의 처지가 달라질 수 있다. 선거는 끝났어도 끝난 게 아니다. 다시 시작이다. /홍정표 논설위원

2020-04-20 홍정표

[참성단]'렘데시비르'

아스피린은 독일 제약회사 바이엘 소속 화학자 펠릭스 호프만이 만들었다. 그는 심한 관절염으로 고통을 겪는 부친을 위해 신약개발에 나섰다가 우연히 아세틸살리실산이 심혈관 질환과 통증 예방에 효과가 있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연구 끝에 1897년 세계최초의 합성의약품인 아스피린이 개발됐다. 후세 사람들은 개발자 호프만은 몰라도 제약사 바이엘을 기억한다. 아스피린은 지금도 매년 1조 알이 팔린다.이처럼 신약은 개발자의 생각과는 달리 다른 효과로 대박이 나는 경우가 종종 있다. 미국 화이자가 개발한 비아그라가 그런 경우다. 비아그라 주성분인 '실데나필'은 원래 고혈압과 협심증 환자에게 효과가 뛰어났다. 화이자는 '실데나필'과 유사한 성분의 '페녹시벤자민'이 발기부전에 효과가 있는 것을 알고 임상시험 끝에 비아그라를 개발했다. 이 때문에 화이자의 주가는 천정부지로 뛰었다.신약개발 과정은 험난하다. 수많은 시행착오를 겪는다. 약품을 만들어낸 후 동물실험에 뚜렷한 효과가 있어도 사람에게 부작용이 생기는 경우도 부지기수다. 평균 개발기간은 10년을 훌쩍 넘는다. 성공 확률은 0.0001%. 절차는 까다롭고 윤리기준이 엄격해 비록 약효가 입증돼도 '국제신약허가규정'을 위반하면 신약 승인을 받을 수가 없다. 승인을 받는다 해도 상업화에 실패해 '없던 일'이 되는 경우도 허다하다. 신약은 자본과 기술의 결정체로 초기비용도 만만치 않다. 그러다 보니 미국 영국 스위스 등 의약 선진국의 독무대일 수밖에 없다.지난주 전 세계 주식시장이 급등한 건 '길리어드 사이언스'사의 '렘데시비르'가 코로나19 치료제로 효과가 있다는 소식 때문이었다. 원래 '렘데시비르'는 에볼라 바이러스 치료 약물이었다. 2009년 리보핵산(RNA) 복제를 억제하는 3상 시험 중 경쟁사인 머크사와 존슨앤드존슨사의 약물에 비해 효능이 떨어진다는 이유로 전격 폐기됐다.그런데 코로나19 중증 환자 상당수가 '렘데시비르' 치료 이후 열과 호흡기 증상이 뚜렷이 완화됐다는 소식에 '인류의 희망'으로 떠올랐다. 하지만 '렘데시비르'로 인해 증상이 나아진 것인지, 부작용에 따른 일시적 효과인지는 더 지켜봐야 한다. 코로나19가 종식되려면 반드시 치료제가 개발되어야 한다. 굴지의 제약사들이 심혈을 기울이는 것도 그래서다. 하루빨리 치료제가 개발돼 인류가 코로나19 공포에서 벗어나길 기대해 본다. /이영재 주필

2020-04-19 이영재

[참성단]슬픈 지도(地圖)

선거는 끝났다. 21대 총선이 막을 내렸다. 선거 다음 날 아침, 늘 오가는 거리 한쪽에 아직도 힘없이 걸려있는 낙선자의 플래카드에도 봄의 햇살이 어김없이 쏟아지고 있다. 진정한 구경꾼이라면 이럴 때 승자에겐 박수를, 패자에겐 위로를 보낼 줄도 알아야 한다. 그런데 그게 쉽지가 않다. 그럴 기분도 아니다. 마음이 답답하다. 이번 총선에서도 어김없이 영남과 호남을 극명하게 갈라놓은 총선 지도를 또다시 지켜봐야 했기 때문이다.4·15 총선을 방금 끝낸 우리는 동서(東西)로 확연하게 갈라진, 붉은색과 푸른색이 칠해져서 오히려 처연하리만치 슬픈 총선 지도를 본다. 더불어민주당은 수도권과 호남 등 서쪽 지역을 석권했고, 미래통합당은 영남과 강원 등 동쪽 지역을 차지했다. 색은 더 선명해졌고 경계는 더 두터워졌다. 이 지도가 절대 유쾌하지 않은 것은 3김시대를 거치면서 지역주의 폐해를 처절하게 경험해본 우리로서는 다시는 이런 지도가 그려져선 안 된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지역주의는 한국 정치의 고질적인 병폐다. 이 뿌리의 근원이 어디라고 단정적으로 말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그것이 순수한 '애향심'의 차원이 아닌, 아주 오래전부터 권력독점, 권력 과점 지향주의자에 의해 조장된 것만은 분명하다. 물론 권력으로부터 소외되었거나 좋지 않은 편견으로 불이익을 당할 경우, 이에 대해 반발과 반감이 생기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 그렇다고 이를 막아야 할 정치지도자들이 지역주의를 이용해 이런 선거지도가 그려지는 것을 용인하는 것은 결코 좋은 모습이 아니다.이제 우리도 바뀔 때가 됐다. 동서가 극명하게 갈라놓은 이런 총선 지도 그리기도 이젠 중단되어야 한다. 스스로 생각해 보라. 그동안 투표에 임하면서 지연, 학연이라는 비이성적인 사슬에 묶여 소중한 한 표를 행사하지 않았는지, 인물보다 '지역주의'의 볼모가 되어 나 스스로 이리 휘둘리고 저리 휘둘리지 않았는지, 이렇게 던진 내 소중한 한 표가 '포스트 코로나' 시대에 맞는 새로운 정치 패러다임 창출에 도움이 되는지 깊이 생각해 봐야 한다. 우리는 언제까지 구시대의 유물인 지역주의를 끌어안고 살아갈 것인가. 선거 치를 때마다 이런 슬픈 지도가 그려지는 것을 우리는 진정 부끄러워해야 한다. 세상이 변했다. 이제 지긋지긋한 지역주의의 사슬을 스스로 먼저 끊어내야 한다. /이영재 주필

2020-04-16 이영재

[참성단]선거와 말

선거는 '말'(言)의 잔치다. 후보는 말을 하고 유권자는 그 말을 귀담아 듣는 게 선거운동의 필수 전제조건이다. 그 말을 듣도록 분위기를 띄우는 건 로고송과 율동이다. 이번 4·15총선에서는 코로나19 사태로 인해 이러한 말의 전달과정이 많이 생략됐다. 로고송과 율동은커녕 확성기에서 흘러나오는 후보들의 결기 어린 목소리조차 거의 들을 수 없었다. 그래도 말은 넘쳐났다. TV부터 'SNS'에 이르기까지, 미디어란 이름의 '대체재'(?) 덕분이다.말을 뜻하는 한자어인 '言'은 고대 중국의 갑골문자다. 한자의 가장 오래된 형태를 보여주는 문자인 만큼 수많은 파생어를 낳았다. 그렇다면 '言'의 파생어 중 이번 4·15총선의 특징을 보여주는 글자나 단어는 무엇이 있을까.먼저 '저이'(저異)란 단어를 꼽을 수 있겠다. '나와 생각이나 입장이 다른 사람을 헐뜯고 욕함'이란 뜻이다. 진영논리에 얽매여 죽기살기식으로 여야가 첨예하게 대립한 이번 선거판과 딱 맞아 떨어진다. '사실이 아닌 일을 꾸며서 남을 해치는 말'을 뜻하는 '무'(誣)와 '거짓말로 속이고 위장하는 말'을 의미하는 '사'(詐)란 글자도 가짜뉴스 논란과 맞물려 예사롭지 않게 다가온 선거였다. '과'(誇· 허풍을 떨고 튀겨서 말함) 또는 '과공'(誇功·자신의 공로를 크게 떠벌림)은 지역 숙원사업이나 개발사업의 기여도 등을 둘러싸고 벌어진 후보들간의 마찰을 설명하는 듯하다. '사사'(詐詐·속임수를 써서 속임수를 속임)란 말에서는 자꾸 '위성정당'이 떠오른다. 그런가 하면 '미친 말을 마구 지껄임'이란 뜻의 '광'(광)이나 '헛된 말로 세상을 크게 속인다'는 뜻의 '광세'(광世)를 연상시키는 정당이 투표용지에 버젓이 이름을 올리기도 했다. 엿가락처럼 늘어난 48.1㎝의 투표용지가 말해주듯 비례대표 참여정당이 난립하면서 빚어진 결과다.그러고 보니 '민주주의의 꽃'이라는 선거가 말로 인해 오염되는 것 같아 안타깝다. 김훈 작가는 한 산문집에서 "말의 더러움, 말의 비열함, 말의 사특함은 인간의 역사와 함께 번창했다"고 했다. 선거 또한 인간 역사의 한 단면이니 예외가 아닌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 후보들이 내뱉은 말 중에 생산적인 공약이나 희망의 메시지가 없지는 않을 것이다. 선거는 끝났다. 말의 잔치도 끝났다. 이제 당선자들의 언행일치(言行一致)에 주목할 때다. /임성훈 논설위원

2020-04-15 임성훈

[참성단]'투표는 총알보다 강하다'

삶은 선택의 연속이다. 늘 하나를 골라야 한다. 그래서 고뇌한다. 그렇다고 늘 옳은 결정을 하는 것은 아니다. 실수를 더 많이 한다. 이데올로기로 고민했던 최인훈의 소설 '광장'의 이명준은 남도 북도 아닌 제3국을 택했다. 그러나 결과는 비참했다. 타고르호를 타고 동지나해를 지나던 그는 푸른 바다를 향해 몸을 던졌다. 이명준이 다른 선택을 했다면 그의 운명은 바뀌었을까.'한 번의 선택이 영원을 좌우한다'는 광고 카피는 선택의 갈림길에서 고민하는 인간의 '결정 장애'를 파고들어 성공했다. 하지만 인간이 선택 앞에서 주저주저하는 또 다른 이유가 있다. 잘못된 선택의 대가가 너무도 가혹하기 때문이다. 광기의 히틀러를 선택한 독일 민족과 포퓰리즘의 달콤함을 뿌리치지 못하고 차베스에게 표를 던진 베네수엘라 국민들이 그 후 받은 고통은 상상을 뛰어넘는다. 무엇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국가의 운명이 좌우되는 경우는 너무도 많다.사회인류학자 비키 쿤겔은 저서 '본능의 경제학'에서 '사람은 본래 이성적 사고와 달리 비합리적 행동을 일삼는다'고 주장한다. 인간은 미운 오리 새끼에게는 편안함을 느끼지만, 아름다운 백조에겐 위협감을 느끼며 똑똑하고 청렴하고 양심적인 사람보다 어눌하고 사람만 좋아 보이는 모자란 듯한 사람에게 후한 점수를 준다는 것이다. 무작정 내 편일 것 같고, 왠지 나를 더 필요로 할 듯한 쪽으로 마음이 기우는 게 인간의 본성이라는 것이다.이 때문에 인간은 숱한 선택의 오류를 저지른다. 투표는 더하다. 상대방의 입장을 이해하는 선한 후보보다, 가시 돋친 말을 날리는 거친 말싸움에 능한 후보에 본능적으로 더 끌린다. 스스로 돈을 벌어 한 번도 세금을 내본 적이 없는 후보의 달콤한 말에 기꺼이 후한 점수를 준다. 그래서 기득권 세력을 향한 거침없는 공격에 사이다 같은 시원함을 느끼며 잘못된 선택을 하는 경우가 많다.오늘은 21대 총선 투표일이다. 내 손으로 민주주의를 수행하는 날이다. 코로나19 사태로 사실상 '깜깜이'로 치르는 선거지만, 우리 국민들은 역사의 고비때마다 언제나 현명한 선택을 했다. 선심 공세를 뿌리치고 긴 안목을 가진 정치인을 고르는 것은 유권자의 의무이자 권리다. 링컨 대통령은 '투표는 총알보다 강하다'며 그 중요성을 함축적으로 표현했다. 이런 투표를 포기해선 안 된다. 당장 투표장으로 가자. /이영재 주필

2020-04-14 이영재

[참성단]'코로나 선거'

지구촌 전체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과 힘겨운 세계대전을 벌이고 있다. 자연스럽게 코로나19와의 전쟁을 지휘하는 각국 지도자들의 리더십도 주목받고 있다. 여론을 먹고 사는 정치인, 특히 각국 정상들은 자신의 정치생명이 코로나19 방역 결과에 달려 있으니 물불을 가릴 입장이 아니다.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코로나와의 전쟁에서도 좌충우돌식 리더십을 유감없이 발휘 중이다. 중국인 입국금지 이외에 별다른 조치 없이 버티다가 3월 들어 감염자와 사망자가 폭증하자, 트럼프의 입도 바빠졌다. 세계보건기구(WHO)의 중국 국경통제 반대의견이 잘못됐다며, 지원금을 끊겠다고 나섰다. 오바마 정부가 인플루엔자 팬데믹 대응에 실패했지만, 자신의 코로나19 대응은 완벽했다고 우겼다. 책임회피, 물타기 언행으로 그의 말이 신뢰를 잃는 동안 미국은 55만여명의 감염자와 2만2천여명의 사망자가 발생한 코로나19 최대 피해국이 됐다. 11월 대선에서 재선을 꿈꾸는 트럼프는 코로나 악재를 입으로 막고 있는 형국이다.곤경에 처하기는 아베 일본 총리도 마찬가지다. 도쿄올림픽을 의식해 코로나19 위기를 의식적으로 외면했지만, 이제는 도쿄 봉쇄론이 오갈 정도로 심각해졌다. 전문가들은 일본 정부가 코로나19 검체검사를 의도적으로 회피한 탓에, 현재 일본내 확진자 수는 실제 확진자의 극히 일부일 것으로 의심한다. 뒤늦게 5천만가구에 천마스크 2장을 준다는 아베를 조롱하는 영상 콘텐츠가 넘쳐났다. 올림픽은 연기됐고, 아베 지지율은 하락했다. 유럽에서는 이탈리아, 스페인의 대참사에 이어 프랑스, 영국, 독일도 심각한 상황이다. 특히 존슨 영국 총리는 본인이 확진판정을 받아 중환자실 치료를 받고 어제 퇴원했다. 프랑스와 영국은 지방선거를 연기했고, 폴란드는 대선을 우편투표로 진행할 계획이다.이 와중에 우리는 4·15 국회의원 총선거를 예정대로 치른다. 확진자 1만여명에 사망자 217명, 우리의 코로나 피해도 만만치 않다. 다행히 우수한 의료시스템과 신속한 검사, 국민의 협조로 극복중이다. 여권은 세계적 방역모범국가, 야권은 발생 초기 국경봉쇄 실패를 앞세워 코로나를 쟁점에 올렸다. 주요국가 중 첫 코로나 심판 선거인 셈이다. 코로나에 전전긍긍하는 세계 각국의 정상들도 한국의 총선 결과를 주목할 듯싶다. /윤인수 논설실장

2020-04-13 윤인수

[참성단]총선 풍경(風景)

우리는 지금 생전 경험해 보지 못한 선거를 치르고 있다. 전 같으면 '꿍짝꿍짝' 틀어대는 선거 로고송을 따라가면 그곳에선 어김없이 작은 유세가 열리곤 했다. 거기엔 아르바이트 학생들이 안무를 곁들이며 "기호 ○번!"을 외치곤 했는데, 지금은 로고송을 듣기가 어렵다. 코로나19로 온통 세상이 뒤집어진 판에 노래를 잘못 틀었다가 오히려 역풍을 맞을까 봐 후보자 간에 서로 눈치만 보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그래도 너무 조용하다.2000년 16대 총선의 승자는 단연 이정현의 "바꿔"였다. 스피커를 타고 흘러나오는 "바꿔 바꿔 모든 걸 다 바꿔"를 듣고 있으면 왠지 가슴속에 서늘한 무언가가 '훅'하고 지나가는 느낌이었다. 그때만 해도 가슴 속에 앙금 하나 정도는 가지고 있던 때라 누구에게나 뭐라도 바꿔야 한다는 열망들이 있었다. 그걸 '바꿔'가 충족시켰다. 트로트 가수 박상철의 '무조건'도 마찬가지다. '내가 필요할 땐 나를 불러줘/ 언제든지 달려갈게/ 낮에도 좋아 밤에도 좋아/ (중략) / 당신이 나를 불러준다면/ 무조건 달려갈거야'. 로고송을 위해 탄생했다 해도 손색이 없는 이 노래를 들으며 생각했다. '선거가 민주주의의 꽃이라면, 로고송은 선거운동의 꽃이다'. 하지만 로고송이 사라진 2020 총선. 소중한 무언가를 하나 잃어버린 느낌이다.사라진 건 로고송만이 아니다. 후보자도 사라졌다. 후보자 얼굴을 볼 수가 없다. 합동유세가 사라진 탓도 있고, 마스크를 쓴 탓인지 아무리 둘러봐도 후보자 그림자도 보이질 않는다. 후보자 간 TV 토론회도 언제 하는지 찾아보기가 '보물찾기'만큼 어렵다. 대신 '기호 ○번입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는 장문의 카톡 메시지와 시도 때도 없이 울리는 후보자의 음성메시지가 전부다. 코로나19로 유행이 된 '언택트(비대면)'가 2020 총선에서도 벌어지고 있다.그러다 보니 우리나라 선거의 고질병인 '깜깜이 선거'가 2020 총선에도 예외 없이 재현되고 있다. 이런 탓에 후보자나 정당의 정책 검증은 아예 꿈도 못 꾼다. 내 지역에 누가 출마하는지 얼굴도 이름도 모른 채, 우리는 투표장에 가야 한다. 나라의 운명을 짊어질 4·15 총선의 이같은 풍경은 따지고 보면 국가나 우리 국민 모두에게 불행이다. 정말 이래도 되는 건지, 등줄기가 서늘하다. 이런 선거, 난생처음이다. /이영재 주필

2020-04-12 이영재

[참성단]포퓰리즘 팬데믹

신호탄은 차베스가 쏘았다. 1999년 베네수엘라에 차베스 정권이 들어섰다. 오일 머니를 잔뜩 손에 쥔 차베스는 '무상 정책'과 '공짜복지'를 마구 쏟아내며 베네수엘라는 물론이고 남미 국가 국민들까지 열광시켰다. 차베스 포퓰리즘은 마치 감염병 팬데믹(대유행)처럼 주변 국가로 빠르게 번져 나갔다. 그리고 2004년 우루과이 대선에서 중도좌파 바스케스가 당선됐다. 뉴욕타임스 남미지국장 래리 로터는 잇단 사회주의 성향 좌파정권의 등장을 '분홍 물결' 즉 '핑크 타이드(Pink Tide)'라고 명명했다. 공산주의 물결 ,'레드 타이드(Red Tide)'에 빗댄 것이다.2014년까지 남미 12개국 중 무려 10개국에 좌파 정권이 들어섰다. 혁명가 볼리바르 후계자를 자처한 차베스는 세계 최대 석유매장량을 앞세워 이들과 손잡고 강력한 '좌파벨트'를 구축해 미국과 맞섰다. '볼리바르식 사회주의와 아르헨티나 페론식 포퓰리즘의 결합'이란 그럴싸한 말이 이때 만들어졌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차베스의 죽음과 석유, 구리 등 원자재 가격 하락으로 돈줄이 마르자 '핑크 타이드'는 서서히 퇴조하기 시작한 것이다.바이러스처럼 소리 없이 퍼져나갔던 선심성 복지정책으로 경제는 거덜 나고 재정은 파탄 났다. 식량도 바닥났다. 그러자 민심이 돌아섰다. 그렇다고 좌파정권이 무너졌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남녀노소, 직위 고하를 막론하고 '공짜'에 한번 맛을 들이면 빠져나오기가 어렵다. 이처럼 포퓰리즘의 중독성은 상상을 뛰어넘는다. 그래서 중남미에선 지금도 살만하면 좌파가 득세하고, 살기 힘들면 우파가 들어서기를 반복한다.이재명 지사가 도민 모두에게 긴급재난지원금 10만원을 지급한다고 발표한 이후 정부, 정치권, 지자체가 지원금 규모를 경쟁하듯 키우고 있다. 그 열기가 너무 뜨거워 마치 '포퓰리즘 팬데믹'을 연상시킨다. "돈이 없어 못 주겠다"며 마지막까지 버티던 남양주 조광한 시장의 행동이 경건하게 보일 정도다. 공돈을 주는데 싫다는 사람은 없다. 포퓰리즘은 인간의 그런 속성을 교묘히 파고든다. 무상급식, 반값등록금, 무상보육, 아동수당 등을 없애고 원점으로 돌아간다는 걸 상상할 수 없는 것도 그래서다. 모두 포퓰리즘 바이러스에 감염된 탓이다. 우리라고 포퓰리즘에 골병이 든 남미의 전철을 밟지 말라는 법이 없다. 세상에 '공짜'란 없으니까. /이영재 주필

2020-04-09 이영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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