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성단

 

[참성단]이세돌이 이겼지만…

'미국이 외교관계를 갖지 않는 세계 4개국 가운데 가장 북쪽에 있는 나라는?' 2011년 IBM이 개발한 인공지능(AI) '왓슨'(Watson)이 미국의 유명 퀴즈 프로그램에 참가해 인간과 대결했을 때 나왔던 문제 중 하나다. 정답은 '북한'이다. 왓슨은 이 퀴즈대결에서 인간 챔피언을 누르고 우승해 상금으로 10억원을 챙겼다. 지금 돌이켜보면 '당연한' 결과일지 모르지만, 당시로서는 충격이 상당했다. 자연어 형태로 제시된 문제의 내용을 이해한 후 가장 논리적으로 부합하는 정답을 찾아내는 능력, 즉 인간만이 가능하다고 믿었던 능력을 보여줬기 때문이다. 왓슨은 이후 의료계에 진출해 '인공지능의사'로 활약 중이다. 최근엔 AI 앵커나 면접관까지 등장하는 등 인공지능은 많은 분야에서 활용되며 4차산업의 핵심 기술로 꼽히고 있다.이처럼 인공지능이 많은 분야에서 성과를 거두고 있지만 인공지능을 '인류의 위협'으로 여기는 전문가들 또한 적지 않다. 이 위협을 전문가들은 '기술적 특이점'이란 개념으로 설명한다. 인공지능이 자신보다 똑똑한 인공지능을 만드는 순간이 기술적 특이점이다. 기술적 특이점이 반복되면 지능이 무한하게 높은 존재가 출현할 게 뻔하다. 미래학자 '레이 커즈와일'은 기술적 특이점이 도래하는 시기를 2045년께로 예상하기도 했다. 우주물리학자인 '스티븐 호킹'은 "완전한 인공지능을 개발할 수 있으면 그것은 인류의 종말을 의미한다"고 했고, 테슬라모터스의 CEO '엘론 머스크'는 "인공지능을 신중하게 취급할 필요가 있다. 결과적으로 악마를 호출하기 때문이다"라고 했다. 영화 '터미네이터'에서의 디스토피아적 세계관을 떠올리게 하는 대목이다.이세돌 9단이 2016년 구글의 '알파고'와 세기의 대국을 펼친 이후 처음으로 18일 토종 바둑 인공지능인 '한돌'과 대결을 벌여 승리했다. 그런데 납득이 가지 않는 부분이 있다. 군대 내무반에서 바둑을 배운 '병장바둑'의 눈으로 봐도 인공지능이 기본 정석인 '장문'에 대처하지 못했다는 점은 이해가 안 간다. 인공지능이 장문을 몰랐다면 기술력 부족일 터이고, 실수를 한 것이라면 인공지능이 가야 할 길이 아직 멀다는 것을 방증한다. 심각한 것은 미래사회, 인공지능시스템이 모든 분야에 구축됐을 때 인공지능의 착각이나 오류가 초래할 위험은 상상을 초월할 것이라는 점이다. 이세돌의 승리에 선뜻 박수가 쳐지지 않는 이유다. /임성훈 논설위원

2019-12-18 임성훈

[참성단]공명지조(共命之鳥)

교수신문이 올해 한국의 사회상을 압축하는 사자성어로 '공명지조'를 꼽았다. '공명지조'는 불교경전에 자주 등장하는 '한 몸에 두 개의 머리'를 가진 새다. 몸통이 하나인 것도 모르고 머리 하나가 없어지면 자기만 살 것 같이 생각하지만, 실상은 '공동운명체'다. 교수신문은 '공명지조'를 통해 갈등과 대립 속에 자신의 주장만을 내세우고 남의 얘기에는 귀를 막는 우리 사회에 만연된 진영논리를 지적하고 싶었을 것이다.2001년부터 발표하기 시작했다는 교수신문의 사자성어를 훑어보면 탄식이 나온다. 시간이 흘러도 한걸음도 앞으로 나가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맴돌고 있는 한심한 우리의 모습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가령 학력위조, 논문표절, 정치인과 기업인의 비도덕적 행위가 절정을 이뤘던 2007년 사자성어는 '자기를 속이고 남을 속인다'는 자기기인(自欺欺人) 이었다. 비뚤어진 욕망에서 비롯돼 스스로 언행에 정직하지 못한 세태를 꼬집은 것이지만, 지금도 우리 사회에는 이런 비도덕적 행위가 만연해 있다.어디 이뿐인가. 물과 불처럼 어울리지 못하며 끝없는 정쟁과 이념갈등 등 비생산적이고 소모적인 양극화 현상을 풍자했던 2005년의 상화하택(上火下澤), 옳고 그름에 관계없이 같은 무리의 사람들은 함께 하고 다른 무리의 사람들을 무조건 배격한다는 반대를 위한 반대를 뜻하는 2004년의 당동벌이(黨同伐異)는 놀랍게도 지금과 판박이다.우리 사회는 늘 이념대립, 계층갈등, 불평등 심화, 후진적 정치로 몸살을 앓았다. 특히 조국 사태로 갈등과 대립은 더욱더 깊어졌다. 좌초하는 배에서 자기만 살려고 하면 모두가 망한다. 이럴 때는 비록 진영은 달라도 공멸을 막기 위해 머리를 맞대야 한다. 하지만 정반대다. 한국 민주주의의 위기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심각한 작금의 상황을 생각하면 올해가 '공명지조'였다는데 공감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물론 어느 시대건 대립과 반목이 있게 마련이다. 그걸 부인할 수는 없다. 다만 그것이 주기적으로 반복된다면 우리 사회는 확실히 병든 사회다. 이를 알면서도 마치 파국을 향해 걸어가는 형국이다. 또 한 해가 저물어 가고 있다. 부디 내년 이맘때쯤에는 우리 사회가 서로의 의견을 경청하고 진정으로 화목해 부드러운 기운이 넘쳐 흐르는 '화기애애(和氣靄靄)'와 같은 따뜻한 사자성어가 나왔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다. /이영재 논설실장

2019-12-17 이영재

[참성단]블랙 아이스 시국(時局)

지난 14일 상주-영천고속도로 상·하행선에서 최악의 블랙 아이스(Black Ice) 교통사고가 발생했다. 고속도로 교량 인근 상·하행 차선에서 차례로 블랙 아이스에 미끄러진 차량 50여대의 연쇄추돌로 7명이 숨지고 32명이 다쳤다. 블랙 아이스 교통사고로는 2011년 12월 24일 발생한 논산천안고속도로 104중 추돌사고가 규모는 컸지만 사망자가 없었던 점을 감안하면, 이번 사고는 최악의 블랙 아이스 참사다.블랙 아이스는 눈, 비, 습기가 도로 면에 얼음막으로 코팅된 현상이다. 투명한 얼음막으로 인해 육안으로는 정상적인 도로와 구별이 힘들다. 산기슭 그늘, 교량 상부, 터널 진출입로 등 도로 구조와 지형에 따라 영상의 기온에도 형성되기 때문에, 육안으로 확인 가능한 두터운 빙판길이나 눈길 보다 훨씬 위험하다. 눈길보다 6배나 더 미끄럽고 제동거리는 최대 9배까지 길어져 블랙 아이스에서 미끄러지면 속수무책이다. '도로 위 암살자'라는 무시무시한 별칭은 허언이 아니다.차량의 안전 장치가 작동불능에 빠지고 운전자의 의지가 무력해지는 도로 위 블랙 아이스 현상에서 위태로운 현 시국을 연상하면 무리일까. 지금 대한민국이 도처에 잠복된 블랙 아이스 위를 질주하는 자동차와 같다는 걱정을 지울 수 없는 시국이다.문재인 대통령이 운전대를 잡은 한반도 평화 외교는 북·미간의 날 선 신경전으로 위태롭다. 북한과 미국이 동시에 문 대통령의 평화의지를 무시한다. 그런데 대통령은 북을 향한 애정과 인내의 가속페달에서 발을 내려놓을 기미가 없다. 최저임금, 주5일 근무제 과속으로 소득주도성장 경제는 비틀거린다. 더불어민주당은 패스트 트랙에 태운 선거법, 공수처법 때문에 골머리를 앓는다. 누더기 선거법은 통과되든 안되든 과속의 후유증이 심각할 것이다. 청와대 민정수석실은 초보 권력의 맹목적 질주로 망가졌다. 오만한 정권과 무능한 야당이 곳곳에 깔아 놓은 블랙 아이스 위에서 안보, 외교, 경제, 정치가 한꺼번에 추돌한다면, 상상만으로 끔찍하다.대한민국 운전대를 잡은 대통령과 정부·여당이 블랙 아이스 방어운전 태세로 전환하길 바란다. 속도를 확 늦추고 도로상황을 예의주시하며 앞 뒤 차량과의 안전거리를 확보해야 한다. 그래야 만일의 사태에도 안전하게 나라와 국민을 지킬 수 있다. /윤인수 논설위원

2019-12-16 윤인수

[참성단]구자경 회장과 기술입국

이병철, 정주영,구인회 등으로 대표되는 우리나라 재계 1세대가 '산업보국(産業報國)'으로 한국 경제의 기초를 세웠다면, 이건희 정몽구 구자경으로 대표되는 재계 2세대는 '기술입국(技術立國)'으로 우리 경제 성장을 견인했다. 이병철 삼성 창업자는 생전 "국가가 살아야 기업도 산다"는 '산업보국'을 늘 가슴속에 간직했다. 물자 생산과 고용 창출, 납세로 어떻게든 국가에 도움이 되자는 것이었다. 구인회 LG 창업자 기업이념도 '산업을 일으켜 나라에 보답한다'였다. 현대의 정주영 회장도 "임자 해봤어?"라는 명언을 남기며 위기 때마다 조선, 자동차 등 신사업을 통해 수출 한국을 창조했다.이제 한강의 기적을 이끈 재계 1세대는 거의 세상을 떠났다. 구인회 LG 창업 회장(1969년), 이병철 삼성 창업 회장(1987년), 최종현 SK 창업 회장(1998년)은 2000년 전 별세했다. 현대그룹 창업주 정주영 회장은 2001년, 대한항공 창업주인 조중훈 한진 회장은 2002년 그리고 며칠 전엔 대우그룹 김우중 회장이 타계했다.이들의 유지를 받든 재계 2세대는 선친의 기업에 기술을 입혀 더 강하게 키웠다는 특징이 있다. 삼성 이건희, LG 구자경, 현대 정몽구 회장이 그런 경우다. 특히 LG 구자경 명예회장은 1995년 스스로 회장의 자리에서 물러날 때까지 '기술입국'과 '인화'를 최고의 경영가치로 삼으며 그룹을 이끌었다. 이는 전자, 화학산업이 LG의 간판 글로벌기업이 되는 데 큰 역할을 담당했다. 국내 최초로 해외 생산공장 설립을 주도하고 외국기업과 합작 경영을 추진한 것도 구 명예회장이었다. 특히 금성사(현 LG전자)가 1982년 미국 앨라바마주 헌츠빌에 세운 컬러 TV 생산공장은 우리 기업의 첫 해외 생산기지다. 이는 LG가 글로벌기업으로 나가는 기초가 됐다. LG트윈스가 프로야구에 새바람을 일으킨 '자율야구'는 구 명예회장이 주창한 '자율과 책임경영'에서 비롯됐다.구자경 LG 명예회장이 14일 94세 일기로 별세했다. 이제 재계 2세대는 병상에 있는 삼성 이건희 회장과 현대 정몽구 회장만 남았다. 우리 정치인들이 입으로만 보국을 외치고 있을 때, 재계 2세대는 정치적 외풍과 재벌이라는 부정적 인식 속에서 우리 산업을 고도화하며 '수출입국'의 초석을 다졌다. 그 선두에 구 명예 회장이 있었다. 한국 산업화의 기틀을 만들어 준 구 명예회장의 명복을 빈다. /이영재 논설실장

2019-12-15 이영재

[참성단]용인 한국 민속촌

유럽 도시의 구시가지는 민속마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옛 모습을 잘 보존하고 있다. 그래서인지 독일 로텐부르크, 영국 체스터, 에스토니아 탈린에 가면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돌아간 느낌을 받는다. 풍경도 그렇지만 놀라운 건 그런 도시마다 사람들로 가득 차 있다는 사실이다. 특히 어린이와 학생들이 많다. 이웃 일본도 마찬가지다. 민속마을이 잘 조성된 것은 물론이고, 그곳 역시 아이들로 북적댄다. 어린이들은 그곳에서 민족문화에 대한 자긍심을 느끼고 미래의 방향을 찾는다.안동에 가면 들르는 곳이 하회마을이다. 하회마을은 낙안읍성마을, 아산 외암민속마을과 함께 옛 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국내 몇 안 되는 마을 중 하나다. 낙동강 줄기가 마을을 휘감아 흐르고, 산들이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어 아름답기 그지없다. 이곳은 연꽃이 물 위에서 피어난 듯한 지형이라 해서 '연화부수형'으로 불린다. 양진당 등 고택이 운치를 더하고, 골목골목 투박한 토담과 포장되지 않은 언덕길은 조선시대로 돌아간 느낌마저 든다.보릿고개를 넘기고 이제 막 밥걱정을 하지 않아도 될만한 1974년, 경부고속도로 신갈IC에서 멀지 않은 용인 기흥 보라리에 한국민속촌이 문을 열었다. 조성 당시 막대한 국비가 지원됐다. 민속촌을 통해 우리 조상이 살던 터전과 생활 모습의 변화를 보여줌으로써 우리 전통문화를 알리는 교육적인 목적이 컸다. 볼거리가 없던 시절이라서 그런지 개장되자 관람객들로 인산인해를 이뤘다. 학생들은 누구나 한 번쯤 소풍장소로 이곳을 찾았다. '촬영협조: 한국민속촌'이란 문구가 익숙할 만큼 드라마, 영화 등 모든 시대극은 이곳에서 찍었다. 민속촌은 에버랜드와 함께 용인을 대표하는 관광지로 부상했다. 지난해에만 130여만명이 민속촌을 찾았다.한국민속촌이 용인을 떠난다는 보도가 나왔다. 65만9천여㎡ 부지의 반을 용인시에 기부하고 나머지 부지 개발에 따른 사업성 검토가 상당히 진행되고 있다는 소식이다. 이미 아파트 숲에 둘러싸인 민속촌은 주말이면 방문 차량으로 도로가 몸살을 앓는 등 각종 민원이 끊이질 않았다. 45년 전 만 해도 깡촌 가운데 있던 민속촌이 급속한 도시화로 인해 제 기능을 상실했다는 사실은 새삼스러운 게 아니다. 우리나라에선 돈이 되는 개발 앞에서 자연과 민속문화는 무릎을 꿇는다. 민속촌은 떠나는 게 아니라 쫓겨나는 것이다. 그래서 아쉽다. /이영재 논설실장

2019-12-12 이영재

[참성단]대우맨

기업이나 상품 등 어떤 조사대상의 이미지를 사람으로 표현하는 것을 '의인화 기법'이라고 한다. 조사대상에서 떠오르는 성별, 연령, 옷차림 등에 관한 이미지를 취합해 하나의 인물형으로 도출해 내는 기법을 말한다. 가령 와인 강사들이 떫은 맛, 신맛, 단맛 등 각기 다른 맛의 와인을 소개하면서 '마초형'에서 '청순가련형'에 이르기까지 개성이 뚜렷한 연예인들의 이미지를 활용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 또한 일종의 의인화기법이라 할 수 있다.2003년 한 채용정보업체가 이 기법을 통해 당시 국내 6대 그룹에 대한 이미지를 조사한 적이 있다. 조사 결과, '삼성맨'하면 떠오르는 이미지에 대해 많은 이들이 '30대 초반으로 큰 키에 지적이고 세련된 전문직 남성'이 연상된다고 응답했다. '현대맨'에 대해서는 '40대 초반의 뚱뚱한 체형으로 투박하고 유행에 둔감한 생산직 남성'의 이미지를 떠올렸다. 물론 16년 전의 조사 결과인 만큼, '유효기간'이 지났다고 볼 수 있지만 당시로서는 많은 직장인들의 공감을 이끌어냈다. 그렇다면 '대우맨'의 이미지는 어떨까? 대우그룹은 해체된 지 몇 년 지난 터라, 당시 조사대상에는 포함되지 않았다.하지만 '대우맨'의 이미지는 어떤 형태로든 분명 존재했을 시기였다. 개인적으로는 '대우맨' 하면, '나이답지 않게 의리를 중히 여기는 중년남성'의 이미지가 떠오른다. '의~리!'라는 말을 유행시킨 한 영화배우보다는 좀 더 묵직한 캐릭터다. 이러한 이미지가 각인된 것은 지난 2014년 경인일보와 인천경영포럼이 주최한 조찬강연회에서다. 이 강연회의 강사가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이었는데, 인상적인 것은 김 전 회장과 한솥밥을 먹던 많은 이들이 행사장을 찾아 김 전 회장을 보필(?)하는 모습이었다. 그룹이 해체된 지 15년의 세월이 지났지만 '대우맨'들에게 그는 여전히 '회장님'인 듯했다. 공교롭게도 그날 강연 제목은 '사람을 키워야 미래가 있다'였다. 행사장의 대우맨들은 김 전 회장이 '키운' 사람들이었다.김 전 회장이 타계하면서 전국의 '대우맨'들이 빈소에 총집결했다고 한다. 대우맨들은 지금도 해마다 창립기념일인 3월22일에 한 자리에 모여 기념행사를 열고 있다. 기업의 이미지를 형성하는 한 축은 기업 고유의 문화일 것이다. '대우맨'에게 '의리'는 과거에 그들이 자부심으로 일구었던 기업문화가 아닌가 싶다. /임성훈 논설위원

2019-12-11 임성훈

[참성단]'비운의 총수' 김우중

김우중이 자본금 500만원으로 대우그룹의 모태인 대우 실업을 창업한 건 1967년, 그의 나이 31세였다. 봉제품을 생산해 동남아 미국 등지에 수출하면서 무섭게 외형을 불려 나갔다. 그의 '세계경영'은 이렇게 시작됐다. 이를 토대로 30년 만에 대우건설 대우증권 대우조선 등 24개의 계열사를 거느리며 재계 2, 3위의 '성공 신화'의 주인공이 됐다. 1998년 해외 법인은 396개에 육박했다. 파죽지세로 세계를 정벌하는 칭기즈칸과 닮았다고 해서 붙여진 별명이 '킴기스칸'이었다. 사람들은 이를 두고 '대우신화'라고 했고, 샐러리맨들에겐 우상이었다."아무도 가지 않은 곳에 가라. 아무도 하지 않은 일을 하라"며 일갈했던 그의 저서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는 당대의 최고의 베스트셀러였다. 집마다 서가에는 이 책이 꽂혔고, 이와 함께 '탱크주의'를 표방하는 대우전자의 TV, 냉장고, 세탁기가 주류를 이뤘다. 샐러리맨들은 첫 자동차로 대우 '르망'을 선택했다. 이랬던 대우그룹의 신화는 1999년 7월 유동성 위기로 그룹이 몰락하면서 막을 내린다. 그의 나이 63세였다. 그룹이 망하자 한때 '팽창 경영의 모델'이라는 칭송이 자자했던 그의 세계 전략은 '문어발 경영'으로 평가절하됐다.대우의 몰락에는 당시 김대중 정부의 오판과 음모가 있었다는 지적은 지금도 끊이질 않는다. 그의 수출 드라이브가 성공하고, 외환위기라는 파도 앞에 허망하게 무너지지 않았더라면 재계의 모습은 지금과 크게 달라졌을지 모른다. 그렇다고 해서 방만한 경영의 일차적 책임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 당시 대우그룹의 분식회계는 충격이었다. 41조 원의 분식회계와 9조 원 부당 대출, 수출대금 20조 원 해외 밀반출 사건이 터지면서 그는 해외 도피생활에 들어갔다.'비운의 총수'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이 별세했다. 향년 83세. 김우중에 대한 평가는 '돌진형 리더십의 화신'에서 '희대의 사기꾼'까지 극과 극을 오간다. 그의 공과에 대해서는 앞으로도 오랜 기간 논쟁이 지속할 것이다. 그럼에도 김우중 이름 석 자를 기억하며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그의 기업가 정신이다. 맨주먹으로 세계를 호령했던 도전과 패기, 세계 경영은 당시 한국 경제에 이정표를 제시했다. 당시 청년실업의 해법을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며 해외에서 찾았던 그의 도전정신은 우리에게 영원히 신화로 남을 것이다./이영재 논설실장

2019-12-10 이영재

[참성단]화장실안의 마사회 비정규직

비정규직 문제는 문재인 정부 들어 가장 논쟁적인 화두다. 대통령은 2017년 5월 취임하자 마자 인천공항공사로 달려가 '공공부문 비정규직 제로 시대'를 열겠다고 선언했고, 7월엔 '공공부문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 가이드라인'을 발표했다. 대통령이 비정규직 제로 약속을 공공부문에 한정한 건 민간부문까지 강제할 수 없어서다. 전국민 비정규직 제로는 공산주의 국가에서나 가능하기 때문이다.아무튼 정부는 공공기관 비정규직을 없애는데 총력을 기울였다. 부채비율이 8천764%인 한국국제협력단이 비정규직을 정규직으로 전환한 실적으로 공공기관 경영평가에서 모범 공공기관으로 선정될 정도였다. 그 결과 인천공항은 1만명의 비정규직이 '계약 갱신' 공포에서 벗어났고, 지난 한해 339개 공공기관에서 늘어난 임직원이 3만6천명이나 됐다.하지만 예상되는 부작용도 만만치 않다. 가장 큰 문제는 경영진단 결과 구조조정이 당연한 부실 공공기관들 마저 정규직 대폭 확대로, 구조조정 자체가 불가능해졌다. 인건비 보조 등 국민 세금으로 부실 공기업의 불필요한 조직을 운영한다면 자유시장경제 원리에 어긋난다. 역차별도 문제다. 구의역 사망사고 청년이나 김용균씨 처럼 같은 공공부문 비정규직이라도 파견직 근로자는 여전히 열악한 근로환경을 감내하고 있다. 민간부문에서는 정규직이 줄고 비정규직이 대폭 확대됐다.그러나 자유시장경제 논리로 정부의 일방적인 공공부문 정규직 제로 정책을 비판해도 비정규직의 열악한 처우가 드러나면 할 말이 없어진다. 어제 경인일보가 보도한 마사회 미화원의 비인간적인 휴게실 실태는 분노를 유발한다. 미화원들은 화장실에 마련된 휴게실에서 고객들이 용변 보는 소리를 들으며 쉰다고 한다. 한 미화원은 '나는 청소용품'이라고 했단다. 그나마 계단 밑에 가설한 휴게실은 양반이라니, 이들이 느꼈을 인간적 비애와 모멸감의 크기를 짐작하기 어렵다.마사회 정규직의 평균 연봉은 9천209만원으로 준시장형 공기업 중 최고다. 이들은 미화원들을 화장실과 계단 밑에 숨겨두고 최고 임금을 향유하고 있었다. 공기업들이 인간적 수준에서 비정규직의 처우를 관리했다면 비정규직의 저항도, 정부의 일방적인 비정규직 제로 정책도 막을 수 있지 않았을까. 인격을 상실한 경영 또한 자유시장경제의 적이다. /윤인수 논설위원

2019-12-09 윤인수

[참성단]정치 실종

정치는 인간의 전유물인가. 답은 '아니오'다. 동물도 정치를 한다. 음모도 꾸민다. 네덜란드 출신의 세계적 동물 행동학자 프란스 드 발의 기념비적 저작 '침팬지 폴리틱스'(바다 출판사 刊)는 침팬지의 정치 행위가 어느 정도인지 실감 나게 보여준다. 가령 침팬지 두 마리가 서로 싸우면 반드시 제3의 침팬지가 나타나 그중 한 마리와 공동전선을 구축한다. 싸우는 숫자가 많을 경우에는 더 큰 연합이 이뤄진다. 인간의 눈엔 침팬지들이 그저 맹목적으로 싸움에 가담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절대 계산 없이 행동하지 않는다는 것이 드 발의 연구결과다.개미는 인간 외에 노예를 부리는 유일한 동물이다. 개미 박사 최재천 교수의 '개미 제국의 발견'(사이언스 북스 刊)에 따르면 개미는 제국을 건설하는 과정에서 적의 적은 우리 편이라는 합종연횡의 정치 전략을 다양하게 구사한다. 특히 남아메리카에서 서식하는 아즈텍 개미는 인간 뺨칠 정도의 정치술을 구사한다. 종족을 초월해 붉은 여왕과 검은 여왕이 함께 알을 낳고 애벌레를 키우는 새로운 왕국을 건설한다. 하지만 왕국이 완성되고 나면 패권을 둘러싸고 여왕개미들 사이에 치열한 투쟁이 시작된다. 이 과정에서 날카로운 이빨에 허리가 잘려나가는 여왕이 속출한다.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여왕개미가 식량을 모두 차지한다. 승자 독식이다.20대 국회의 모습이 실망, 그 자체다. 지금까지 이런 무능한 국회를 본 적이 없다. 대립만 할 줄 알지 정치가 없다. 모든 면에서 최악이다. 경제난에 불안한 안보, 여기에 청와대를 둘러싼 잇따른 잡음으로 국민의 좌절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여기에 북한은 느닷없이 동창리 고체연료 실험으로 한반도를 다시 긴장으로 몰아넣고 있다. 이러니 5천만 국민이 승선한 '대한민국호'가 정상적인 운항을 하지 못한 채 우왕좌왕 한다. 서로를 탓하며 삿대질에 여념 없는 여·야 정치권 탓이다. 침팬지와 개미는 종족 번식과 생존을 위해 정치를 한다고 한다. 그러면 우리 정치인들의 정치 행위의 목적은 무엇인가. 권력투쟁에 빠진 한국당, 청와대 눈치만 보는 집권 여당, 한 석 더 얻기 위해 발버둥 치는 제2, 3야당에 대한 국민의 실망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이런 정치 실종에 국민들은 환멸을 느낀다. 그러니 국민에게 손가락질받는 것은 너무 당연하다. 우리 정치인들은 침팬지와 개미보다 못한 정치를 하고 있다는 사실에 부끄러워해야 한다. /이영재 논설실장

2019-12-08 이영재

[참성단]이혼 위자료

지난 10월 미국 경제주간지 포브스가 발표한 '2019 미국 400대 부호'에 제프 베조스 아마존 최고경영자(CEO)의 전 부인인 맥킨지 베조스가 순 자산 총 361억 달러 (43조5천730억원)로 15번째 부호에 이름을 올렸다. '세계에서 가장 비싼 이혼'으로 불린 제프 베조스와의 이혼 위자료로 그의 아마존 주식 지분 25%를 받은 덕분이었다. 1993년 결혼한 맥킨지는 이듬해 제프가 아마존을 창업하자 도서 주문과 배송, 회계 등을 맡아 밤낮으로 일했다. 이혼 당시 주변에서 "제프가 가진 주식의 절반을 달라고 해도 할 말이 없었을 것"이라는 말이 나온 것도 그래서다.맥킨지가 받은 위자료는 인류 역사상 이혼 소송을 통해 배우자가 받은 최대액수다. 이전에는 2014년 러시아 부자 리볼로 블레프가 전 재산의 40%인 45억 달러(약 4조6천억원)가 최고였다. 그다음이 1999년 예술품 거래상인 알렉 와일든스타인이 이혼하면서 내놓은 25억 달러(약 2조9천억원), 다음은 언론재벌 루퍼트 머독의 17억 달러(약 1조7천억원)였다.국내에도 세기의 이혼이라 불리는 사건이 있었다. 2014년 2월부터 시작된 이부진 호텔신라 사장과 전남편 임우재 전 삼성전기 고문의 이혼 소송. 임 고문은 2조5천억원으로 추정되는 이 사장 재산의 절반을 이혼 위자료로 내놓으라고 요구했다. 하지만 법원은 1심에선 86억1천300만원, 2심에선 141억1천300만원을 재산분할금으로 지급하라고 판결했다. 통상 법원에서 재산분할 비율을 판단할 때는 혼인 기간·재산 형성의 기여도 등을 따지는데 이들이 오래전부터 별거를 해왔다는 점과 이 사장의 재산형성에 임 고문이 큰 역할을 하지 못했다는 점이 고려됐다.노소영 아트센터 나비 관장이 이혼과 함께 위자료 3억원과 SK그룹 최태원 회장이 보유한 SK(주) 주식 42.3%에 대한 재산분할을 청구하는 소장을 서울가정법원에 제출했다. 최 회장이 "혼외 자식이 있다"고 고백한 지 4년 만이다. 최 회장은 9월 말 기준으로 SK 주식 1천297만 주를 보유하고 있다. 노 관장의 청구를 법원이 받아들이면 548만 여주의 소유권이 넘어오게 된다. 대략 1조4천억원 규모다. 서민들에겐 꿈 같은 얘기다. 그래서일까. 찬바람은 불어오고 서민의 등은 더욱더 시리다. /이영재 논설실장

2019-12-05 이영재

[참성단]형사과장 황운하

요즘 보도를 통해 낯익은 이름을 자주 접한다. 김기현 전 울산시장에 대한 하명수사 의혹으로 논란의 중심에 서 있는 황운하 대전지방경찰청장이다. 그를 처음 본 것은 1996년 인천서부경찰서에서였다. 그는 이 경찰서의 형사과장이었다.당시 형사과에는 민간인 신분의 '형사 아닌 형사'가 한 명 있었다. 이명세 영화감독이었다. 이 감독은 영화 '형사수첩'(가제)의 시나리오를 쓰기 위해 강력반 형사들을 밀착 취재하던 중이었다. 강력반장이 "반원이 늘어 일손을 덜고 있다"고 말할 정도로 이 감독은 형사들과 한 몸으로 움직였다. 일과 후 형사들이 찾는 선술집은 물론, 위험하기 그지없는 범인 체포현장까지 찰거머리처럼 따라붙었다. 이처럼 '현장밀착형' 시나리오 작업을 거쳐서인지 훗날 영화가 개봉됐을 때 관객들은 스크린에 흘러넘치는 리얼리티에 박수를 보냈다. 이 감독은 형사들이 조폭처럼 쇠파이프를 들고 다니거나, 범인의 아지트를 급습하기 전, 긴장을 풀기 위해 단체로 노상방뇨하는 모습까지 필름에 담았다.당시 우연히 만난 자리에서 "영화감독 한 명이 강력반을 따라다니는데 안전에 신경이 쓰인다"며 '이명세 형사'의 존재를 알려준 이가 황운하 과장이다. 마땅한 기삿거리를 찾지 못하던 차에 뜻밖에 '일용할 양식'을 구했던 기억이 새롭다.더 강렬한 기억은 그가 파주의 집창촌을 쓸어버린(?) 사건이다. 수사과정에서 미성년자들이 대거 파주 용주골로 유입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한 그는 새벽 시간, 형사들을 총동원해 관할지역도 아닌 파주에서 윤락녀와 포주, 성매매자 등을 무더기로 잡아들였다. 이 일로 그는 '용기 있는 결단이었다'는 찬사와 '공권력을 남용했다'는 비난을 동시에 샀다. '참으로 거침없는 경찰'이라는 게 당시 사건으로 각인된 황운하의 이미지였다. 아니나 다를까? 그는 인천서부서를 떠나서도 각종 수사에서 거침없는 행보를 이어갔다. 수시로 검찰과 첨예하게 대립하기도 했다. 이 때문인지 이명세 감독의 영화가 애초의 '형사수첩' 대신 '인정사정 볼 것 없다'란 뜻밖의 제목으로 개봉되는 것을 보면서 맨 처음 떠오른 인물도 황운하였다. 사실 영화 속 박중훈의 실제 모델은 인천서부경찰서 강력반 박모 형사다.'풍운아', '정치경찰' 등 수많은 수식어를 달고 다니는 그가 곧 '검찰은 왜 고래고기를 돌려줬을까'란 책을 낸다고 한다. 또 얼마나 거침없는 내용이 담겨 있을지 사뭇 궁금하다. /임성훈 논설위원

2019-12-04 임성훈

[참성단]미시마 유키오

1970년 11월 25일. 일본 육상 자위대 동부지역 건물 옥상에서 일장기가 그려진 머리띠를 한 군복 입은 사내가 허공을 향해 주먹을 불끈 쥐며 일장 연설을 하고 있었다. "지금 일본 혼을 유지하는 것은 자위대뿐이다. 일본을 지킨다는 것은 피와 문화의 전통을 지키는 것이다. 너희는 사무라이다. 자신을 부정하는 헌법을 왜 지키고 있는 것인가. 나를 따르는 자는 없는가." 45세의 극우 소설가 미시마 유키오(三島由紀夫)다.'일왕을 보호하는 방패'라는 의미의 민병대 '방패회' 대원 4명과 함께 난입해 사령관을 인질로 잡고 1천여명의 자위대 대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그는 이렇게 '군국주의 부활'을 외쳤다. 하지만 자위대원들의 야유와 비난이 그에게 쏟아졌다. 그러자 미시마는 '셋푸쿠'라는 할복에 이어 옆에서 목을 쳐주는 전통적인 사무라이 의식으로 목숨을 끊었다. 실제로는 겁을 먹어 배를 찌른 상처는 겨우 10㎝였고 목을 베기로 한 자는 칼을 제대로 다루지 못해 세 번이나 내려쳤다고 한다.노벨문학상 수상자인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추천으로 1949년 동성연애자의 내밀한 풍경을 다룬 '가면의 고백'으로 등단한 미시마는 '일본적 미의식을 바탕으로 글을 쓴 전후 최고의 작가'라는 평을 들었다. 특히 그를 유명하게 한 건 56년 작 '금각사(金閣寺)'다. 전후 일본의 황폐함을 비극적인 아름다움으로 한 단계 끌어 올렸다는 평가를 받은 이 작품으로 국내에서도 많은 팬을 확보했다. 하지만 극단적인 정치성향의 '천황 주의자'로 바뀌면서 그를 애지중지한 가와바타 야스나리조차 그의 변신을 혼란스러워했다고 전해진다.미시마 유키오의 사위 도미타 고지가 신임 주한 일본대사로 3일 부임했다. 극우 작가의 가족이라서 극우 성향일 거라는 우려도 있지만, 실제로는 전임인 나카미네 야스마사 대사보다는 더 유연한 입장이란 평가가 나온다. 노무현 정부 시절인 2009년 주한 일본대사관 참사관과 공사로 근무한 경험도 있다. 또한 일본 북미국장을 지내는 등 대표적인 미국통이기도 해 한일관계를 미국의 시각으로도 이해할 것이란 전망도 나온다. 최근 들어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지소미아) 종료가 연기되고 한·일 간 수출 규제 관련 국장급 협의를 진행하기로 하는 등 한·일 관계가 조정 국면을 보이고 있다. 고지 대사의 부임으로 양국이 화해하고 관계가 더욱 성숙해지길 바랄 뿐이다. /이영재 논설실장

2019-12-03 이영재

[참성단]필리버스터

("그게 뭐요" "그만두시오" 하는 이 있음) "여러분들이 제 말을 들어주셔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은 다수의 의석으로 우리의 의사를 유린하고 우리는 소수로서 말이라도 입 벌려 놓고 하자는 것을 그 입마저 여러분이 봉쇄하려면 차라리 우리를 전부 몰아내고 여러분끼리만 총회 합만 같지 못할 것입니다." ("집어쳐요" 하는 이 있음) "내가 이 자리에서 쫓겨 나가는 한이 있다 하더라도 그렇게 내려가지 않을 것입니다." (장내 소연)1964년 4월 20일 제6대국회 제41회(임시회) 제19차 국회본회의. 이제 막 필리버스터에 들어간 재선 의원 김대중은 여당인 민주공화당 의원들의 야유에도 의연했다. 합법적 의사진행방해 행위, 필리버스터의 기능과 본질을 잘 보여준 명장면이다. 당시 야당인 자유민주당 중진 낭산 김준연은 한일협정 과정에서 박정희 정권이 1억3천만 달러를 받았다고 폭로했다. 집권여당인 공화당은 허위사실 유포 혐의로 낭산의 구속동의안을 발의했다. 이에 같은 야당인 민주당의 김대중이 5시간 19분의 필리버스터로 동의안 표결을 막아낸 것이다.필리버스터는 다수당의 의회 지배에 맞서는 최후의 수단이다. 1937년 작 할리우드 흑백영화 '스미스씨 워싱턴에 가다'는 어쩌다 상원의원이 된 제퍼슨 스미스가 정상배들이 장악한 워싱턴 정계를 23시간 16분의 필리버스터로 응징한다는 스토리다. 586세대 중 이 영화를 보고 정치를 꿈꾼 자도 있었을 듯싶다.우리 국회는 1973년 필리버스터를 폐기했다가 2012년 국회선진화법으로 다시 부활됐고, 2016년 테러방지법 처리를 막기위해 당시 야당이었던 민주당이 처음 행사했다. 당시 이종걸 의원은 12시간 30분이라는 필리버스터 신기록을 세웠다. 그랬던 민주당이 패스트트랙 법안 저지를 위해 자유한국당이 필리버스터를 선언하자 본회의 소집 거부로 원천봉쇄 중이다.'국회 회의록'이 남긴 김대중의 필리버스터 연설은 그 자체로 민주주의 교재로 손색없는 명문이다. 한국당 의원들이 김대중만한 필리버스터 연설을 남길 수 있을지 의문이다. 오히려 말 밑천이 달려 원색적인 정권비판만 되풀이하다가 역풍을 맞을 수도 있다. 하지만 한국당의 필리버스터는 그 자체로 보수 국민의 대의이고, 여당은 이를 경청할 필요가 있다. 어차피 필리버스터로는 법안처리를 막을 수도 없다. 군사정권의 허수아비 정당인 공화당도 김대중의 필리버스터를 들을 만큼 들어주었고, 그래서 명연설이 남았다. 민주당 의원들의 일독을 바란다. /윤인수 논설위원

2019-12-02 윤인수

[참성단]백락일고(伯樂一顧)

개각이 초읽기에 들어갔다. 누가 총리로 발탁되고, 누가 장관으로 기용될까. 하지만 개각에 대한 시중의 관심이 전 같지가 않다. 그도 그럴 것이 문재인 정부 들어서 '청와대 비서실 때문에 내각의 존재가 없다'는 소리가 꾸준히 들렸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을 반영하듯, 장관 이름 석 자를 모르는 국민이 태반이다. 그래서일까. '그 얼굴이 그 얼굴'이라는 사람들도 있고, '준마(駿馬)는 있는데 백락(伯樂)이 없다'며 개각에 아예 기대하지 않는 사람들도 꽤 된다.여기서 '백락'이란 중국 주나라 때의 당대 제일의 '말 감정사' 손양을 말한다. 말을 보는 안목이 뛰어났던 그가 어떤 말이 됐건 한 번만 쓰다듬으면 그 말은 명마로 둔갑했다. 하루는 백락이 태행산에 오르다가 무거운 소금 마차가 다가오는 것을 봤다. 비록 마차를 끄는 비루먹은 말이었지만, 그의 눈엔 천하의 명마였다. 백락은 말에게 "분명히 천리마인데 어찌하여 소금 마차를 끄는가"라고 묻자 말은 '자신을 알아본다'며 크게 소리 내어 울었다고 한다. 그래서 나온 말이 '백락일고'다. 말을 감별하는 뛰어난 안목이 인재를 등용하는 능력으로 비유될 때 쓰인다.당나라의 문호 한유(韓愈)는 '잡설'이란 글에서 "천리를 달리는 명마라 해도 백락이 없으면 평생 조랑말 취급을 받으며 혹사당하거나 마구간에서 하찮은 말들처럼 그냥 죽어간다"고 말했다. 임명권자가 사람을 보는 눈을 가지고 있지 못하면, 아무리 인재라 해도 재능을 발휘하지 못하고 사라진다는 것이다. 흔히 "항우는 백락을 얻지 못해 패했고, 유방은 백락의 도움으로 천하를 얻었다"고 말한다. 항우에겐 인재를 식별하는 안목이 없었다. 인재를 자기편에 남아 있게 하는 방법도 몰랐다. 반면 유방에겐 '백락안'도 있었고, 인재를 포용하는 덕도 있었다.후임 총리에는 김진표 민주당 의원이, 법무부 장관에는 같은 당 추미애 의원이 사실상 확정적이라고 한다. 하지만 경제 부총리, 사회 부총리, 외교, 국방 등 주요 장관은 후임자 물색에 어려움을 겪는 것으로 알려졌다. 집권 후반기에 들어선 문 대통령이 백락안으로 제대로 된 인재를 뽑을지, 아니면 늘 하던 회전문 인사로 '그 나물에 그 밥'이 될지는 알 도리가 없다. 분명한 건, 정치 외교 국방이 흔들리고 있는 지금이야말로 '백락이 뽑은 준마'가 너무도 절실한 시점이라는 것이다. /이영재 논설실장

2019-12-01 이영재

[참성단]○○○ 게이트

남녀노소 불문하고 시대에 따라 어쩔 수 없이 알게 되는 단어들이 있다. 1997년 IMF(국제통화기금)의 구제금융을 받으면서 영어공부라고는 한 적이 없는 시골 노인들까지 '아이엠에프'를 입에 달고 다녔다. 한일관계가 악화하면서 국가 간에 군사 기밀을 공유하는 군사정보보호협정 '지소미아'라는 이 어려운 말을 아이나 어른이나 아무렇지 않게 사용한다. 특정 시점의 세태를 반영하는 이런 단어를 유행어라 해도 무리는 없을 것이다.'게이트'(gate)도 그런 경우다. 원래 사전적 의미는 '문, 입구, 출입구, 수문, 탑승구'이다. 그런데 1972년 6월 17일 재선을 간절히 원했던 리처드 닉슨 대통령이 비밀 공작반을 워싱턴의 민주당 전국위원회 본부에 보내 도청장치를 설치하려다 발각됐다. 그 본부가 있던 건물이 '워터게이트'(Watergate) 빌딩이었다. 그 후 언론은 '정부 또는 정치권력과 관련된 대형 비리 의혹사건이나 스캔들 또는 그러한 불법행위' 등을 말할 때 흔히 'OOO 게이트'로 불렀다. 그런데 이 '게이트(gate)'가 유독 우리나라에서 수명이 길다. 그만큼 우리 사회에 부정과 비리가 끊이지 않는 등 건전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문민정부 이후 김영삼 (김현철 게이트) 김대중(이용호 게이트) 노무현(최도술 게이트) 이명박(내곡동 게이트)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등 다섯 명의 대통령이 있었지만, 25년간 집권 후반기에 이르면 권력형 비리나 친인척 비리가 터졌다. 그때마다 등장한 게이트는 이제 보통 명사가 됐다.문재인 정부 집권기 반환점을 지나면서 조국, 유재수, 울산시장 선거 청와대 개입 의혹이 눈덩이처럼 번지고 있다. 이미 여러 명의 권력 실세 실명이 거론되고 있다. 야당의 입에서 '3종 친문 농단 게이트'라는 말까지 나오기 시작했다. 우리는 또 불행한 역사와 맞닥뜨린 걸까. 정권마다 터지는 게이트의 악순환의 고리를 끊자며 2014년 도입한 것이 '특별감찰관'제도다. '대통령의 배우자 및 4촌 이내 친족과 대통령 비서실의 수석비서관 이상의 공무원'의 비위를 감찰하는 것이 목적이다. 이 제도는 아이러니하게 당시 '친문 핵심'이던 전해철·박범계 의원이 입법 발의했다. 이 제도로 박근혜 정부가 무너졌다. 하지만 문재인 정권 들어서면서 지금까지 공석이다. 문 대통령이 이 자리에 누군가를 앉혔다면 지금 어떻게 됐을까. 이래저래 게이트의 수명이 또 연장되게 됐다. /이영재 논설실장

2019-11-28 이영재

[참성단]정로환과 펜벤다졸

지사제인 '정로환'의 역사는 러일전쟁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러시아와 일본은 중국 선양에서 대규모 전투를 치렀는데 일본 병사들 사이에서 갑자기 설사병이 유행했다. 설사병을 이기지 못하고 죽어 나가는 병사들이 속출하자 일본은 본국에서 지사제를 공수해 병사들에게 먹였다. 그 약의 효능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러일전쟁은 일본의 승리로 막을 내렸다. 전쟁 후 이 약은 '러시아를 정벌한 약'이라는 의미를 담아 '정로환'(征露丸)이라는 이름으로 판매됐다. 1970년대 초 국내의 한 제약회사가 일본에서 제조법을 들여와 국내에서 약을 생산·판매하면서는 '정벌'을 뜻하는 '征'을 '바르다'는 뜻의 '正'으로 바꾸었다. '바른 이슬로 만든 약'이라고 해야 할까?그런데 20~30년 전 이 약이 설사와는 전혀 무관한, 엉뚱한(?) 용도로 쓰인 적이 있다. 무좀으로 고생하는 이들 사이에서 무좀 특효약으로 인기를 끈 것이다. 많은 무좀 환자들이 정로환을 으깨 식초에 풀어 넣고 수십 분간 발을 담그는 식으로 무좀을 치료했다. 이 민간요법이 얼마나 퍼졌던지, 약국에서 정로환을 찾으면 설사 치료 용도인지, 무좀 치료 용도인지를 묻는 약사가 있을 정도였다. 먹기 쉽게 코팅을 한 개량형 약보다 생약 냄새 풀풀 나는 원래 약이 식초에 으깨기 쉬워 무좀 치료에 적합했기 때문이었다.정로환의 주성분인 크레오소트(Creosote)는 살균력이 강해 장 속의 세균을 죽여 배탈, 설사를 멈추게 한다. 식초의 산을 이용해 화학적 화상을 일으켜 피부를 벗겨내고 크레오소트로 살균하는 방식이 무좀에 통했나 본데, 효과 좋은 무좀약이 널려 있는 현재의 관점에서는 '원시적'(?) 방법이 아닐 수 없다. 이처럼 약이 애초의 개발목적 외 용도로 사용되는 경우는 종종 있다. 해열·소염·진통제로 개발됐다가 심혈관 질환 예방약으로 널리 쓰이는 아스피린도 그중 하나다.최근 미국의 말기 암 환자가 개 구충제의 일종인 '펜벤다졸'을 먹고 암을 치료했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국내에서도 이 약을 찾는 암 환자들이 늘고 있다고 한다. 유튜브에는 이 약을 먹고 증세가 호전됐다는 증언도 잇따르고 있다. 반면 완치됐다고 판단할만한 사례가 국내에 아직 없고 부작용 우려도 크다는 게 의학계의 견해다. 지푸라기 하나라도 잡고 싶은 게 암환자들의 심정이다. 더 혼란이 오기 전에 보건당국이 하루빨리 검증에 나서 이 약의 허와 실을 밝혀야 할 것이다. /임성훈 논설위원

2019-11-27 임성훈

[참성단]신장 위구르 수용소

독재자가 있는 곳엔 수용소가 있다. 아우슈비츠. 폴란드명 오슈비엥침. 1940년 4월 27일 유대인 말살에 광분하던 힘러의 나치스 친위대가 첫 번째로 세운 강제수용소다. 처음엔 폴란드인, 독일인 그리고 소련군 포로들을 위한 수용시설이었지만, 이듬해 히틀러의 명령으로 막사, 교수대, 가스실, 소각장 등이 들어선 대량 학살 시설로 확대해 250만~400만명의 유대인이 살해됐다.굴라크(Gulag). 스탈린의 구소련에서 노동수용소를 담당하는 기관의 명칭이었지만, 반체제 인사를 가두는 정치범 수용소로 불렸다. 정치범의 약 절반 이상이 별도의 재판 없이 이곳으로 끌려왔다. 세간에 알려진 건 1973년 알렉산드르 솔제니친이 쓴 '수용소 군도'를 통해서였다. 시베리아의 극지에 있는 콜야마, 노릴스크, 보르쿠타 등 500여 개 수용소 집합체 아래 수천 개의 개별 수용소로 이뤄져 있다. 수용자들은 운하·댐·공장·광산 등의 건설에 강제 동원되었다.북한의 15호 관리소도 빼놓을 수 없다. 일명 요덕 정치범 수용소. '완전통제구역'과 '혁명화구역'으로 나뉜 이곳에는 주체사상을 어기는 정치범들과 기독교 신자, 남한 방송 청취자 등 15만 명 이상이 감금돼 인간 이하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 매년 수용인원의 5~10%가 기아와 고문으로 사망하고 있다. 최근 신장 위구르 강제수용소의 내부 비밀문건이 공개됐다. 그동안 중국 정부가 '직업훈련소'라고 줄기차게 주장해 온 곳이다. 국제탐사보도언론인협회(ICIJ)가 공개한 3건의 문건을 보면 중국 정부가 2017년까지 3년간 탈출할 수 없는 구금시설에 신장 위구르 전체인구 10%인 100만명을 수용해 '인간개조'의 만행을 저질러 온 것으로 드러났다. 소수민족 말살이 목적이다. 물론 중국은 수용소의 존재를 극구 부인하고 있다. 신장 위구르는 1949년 중국에 편입된 후에도 자신들을 '동투르키스탄'이라고 부르며 끊임없이 분리 독립을 요구해 왔다. 이때마다 중국정부의 무자비한 탄압이 따랐다. 수용자를 '학생'이라 부르며 이슬람 신앙과 위구르어 사용 포기를 강요하고 중국어와 사회주의 사상, 유교 문화를 주입하는 세뇌 교육을 실시했다. 반항하면 고문과 강간을 저질렀다. 실체가 드러난 이상 '21세기의 아우슈비츠'라 해도 중국정부는 할 말이 없게 됐다. 전 세계가 분노하고 있다. 신장 위구르 수용소는 인류의 수치다. /이영재 논설실장

2019-11-26 이영재

[참성단]여우의 지혜, 사자의 용기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GSOMIA·지소미아)을 둘러싼 양국 갈등이 봉합되는가 했더니, 일본 정부의 언론플레이로 다시 엉망이 되는 분위기다. 그런데 아베 총리가 "아무런 양보도 없었다" "퍼펙트 게임"이라며 외교적 승리 운운했다는 일본 언론의 보도에 청와대가 발끈했다. 익명의 고위관계자가 "양심을 갖고 한말이냐"고 아베를 직접 비난하고, 정의용 안보실장은 지소미아 협상의 전말을 공개하며 일본의 언론플레이를 맹렬히 비난했다.수출규제와 지소미아 파기로 장군 멍군을 부르며 대치했던 상황이고 보면, 문제 해결을 위한 상호존중은 당연하다. 그런데 아베는 대놓고 한국의 백기투항을 강조하니, 외교적 무례를 넘어 도발에 가깝다. 한국을 얼마나 만만하게 보면 이럴까 괘씸하기 짝이 없다.일본뿐 아니다. 주변 강대국의 한국 무시가 도를 넘고 있다. 2017년 문재인 대통령은 국빈으로 중국을 방문해 "중국몽이 전 인류의 꿈이 되기 바란다"며 "중국은 높은 산봉우리, 한국은 작은 나라"라고 중국을 예찬했다. 하지만 중국은 같은 수준의 한국 예찬론 대신 문 대통령이 '혼밥'을 먹게 했다. 중국은 이제 우리를 대놓고 하대한다. 영원한 동맹인 줄 알았던 트럼프는 한국에서 방위비를 쥐어짜기 위해 발가벗고 달려든다. 미군철수는 이제 공공연한 현안이 됐다.정말 아픈 건 문 대통령이 그렇게 애정을 쏟았던 북한 김정은 위원장의 막가파식 행보다. 김 위원장의 한·아세안 특별정상회의 참석을 요청한 문 대통령의 비밀 친서를 까발리고 불참을 공개 통보했다. "못오신다면 특사라도 방문하게 해달라는 간절한 청"까지 공개했다. 자신과 '공화국'을 위한 문 대통령의 노심초사를 생각하면 인간적, 정치적으로 이럴 수 없는 일이다.문 대통령은 야당 복은 있지만, 주변국 지도자 복은 없는 모양이다. 얌체 같은 아베, 거만한 시진핑, 난폭한 트럼프, 청년 독재자 김정은에 둘러싸인 문 대통령의 스트레스가 엄청날 듯하다. 대통령은 '나쁜 평화는 없다'는 신념에 따라 겸손한 인품과 인내로 이들을 대하지만, 이들이 대통령과 한국을 함부로 대하는 장면을 지켜보는 국민들의 스트레스 또한 상당하다.마키아벨리는 군주의 덕목으로 올가미를 피하는 여우의 지혜와 늑대를 주눅들게 할 사자의 용기를 강조했다. 주변 4강과 북한까지 우리에게 올가미를 채우고 늑대의 이빨을 드러내는 형세다. 대통령이 여우의 머리와 사자의 심장으로 무장하고 독해져야 할 때다. /윤인수 논설위원

2019-11-25 윤인수

[참성단]환기 블루

김환기 화백이 홍익대 미술대학장이자 한국미술협회 이사장이라는 안정된 미래를 훌훌 털어버리고 1963년 뉴욕으로 떠날 때, 그의 나이는 50이었다. 뉴욕생활은 만만치 않았다. 동양인이라는 멸시, 가난에 향수병까지 겹치면서 큰 고통을 겪었다. 하지만 이런 정서는 예술적 영감의 원천이며 새로운 미학 양식을 창조하는 밑거름이 됐다. 외로움이 절정을 맞던 1966년 그는 서울의 시인 김광섭에게 편지를 보낸다. "요새 제 그림은 청록색, 점밖에 없어요. 왼편에서 한 줄기 점의 파동이 가고, 또 그 아래, 또 그 아래, 그래서 온통 점만 존재하는 그림이야요. 붓을 들면 언제나 서러운 생각이 쏟아져 오는데, 왜 나는 이런 그림을 그리고 있는 것일까. 참 모르겠어요. 창밖에 빗소리가 커집니다." 김환기는 이 숱한 점을 찍으며 "못 견디게 그리워지는 시간, 조국이라는 게 고향이라는 게…눈을 감으면 환히 보이는 무지개보다 더 환해지는 우리 강산"이라고 되뇌었다.김환기는 우리 근현대사에 가장 큰 발자취를 남긴 화가다. 구상과 추상, 반추상의 세계를 넘나들면서 조선백자와 같은 문화유산과 우리 산천의 아름다움을 화폭에 담았고, 특히 뉴욕생활에서는 서예 붓으로 수묵화를 그리는 듯이 화폭 전체에 점을 찍는 전면점화를 선보였다. 김광섭의 시 '저녁에'에서 영감을 얻은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는 그리운 친구들을 떠올리면서 하나하나 점을 찍어 내려간 대표작이다. 이와 함께 1971년 별을 상징하는 푸른 점들로 캔버스를 가득 채운 '우주'(Universe 5-IV-71 #200) 역시 말년 뉴욕 시대를 대표하는 작품으로 꼽힌다. 김환기는 '우주'를 1971년 뉴욕 포인덱스터 갤러리에서 열린 첫 개인전 포스터에 사용할 만큼 애착을 가졌다.이 '우주'가 지난 23일 크리스티 홍콩 경매에서 약 153억4천930만원(구매자 수수료 포함)에 낙찰됐다. 이는 작가의 세계 최고 기록이자 한국 미술품 경매 최고가 기록이다. '우주'는 작가가 남긴 유일한 두 폭 그림이면서 작가의 모든 작품 중 가장 폭넓은 푸른 색조를 사용한, 가장 큰 그림이다. 푸른 빛은 '환기 블루'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김환기가 너무도 사랑했던, 김환기를 대표하는 색이다. 이제 화가는 떠나고 없지만, 거대한 크기의 면에 선을 그리고 푸른 점을 찍었던 그의 혼은 언제나 우리와 함께 있을 것이다. /이영재 논설실장

2019-11-24 이영재

[참성단]기적이 필요해

스포츠에는 자주 기적이 일어난다. 1962년 칠레월드컵. 소련은 콜롬비아전에서 후반 23분까지 4-1로 크게 앞섰다. 무조건 이기는 경기였다. 소련의 골키퍼가 축구계의 전설 레프 야신이었기 때문이다. 국가대표와 소속팀 통틀어 400경기에 출전해 270번 무실점 경기를 달성했고, 151번의 페널티 킥을 막아낸 철벽의 골키퍼. 하지만 경기는 이상하게 흘러갔다. 야신은 8분 만에 무려 3골을 헌납했다. 이 중에는 코너킥이 그대로 골문으로 빨려 들어간 것도 있었다. 월드컵 역사상 전무후무한 코너킥 실점이 야신에 의해 만들어졌다. 이후 칠레와의 8강전에도 1대2로 패한 소련은 탈락하고 말았다.성난 팬들은 야신의 집 앞에 몰려와 "물러가라"며 유리창에 돌을 던졌다. 그러나 월드컵의 부진이 경기 도중 뇌진탕 때문이었다는 것이 뒤늦게 밝혀졌다. 조국을 위해 고통을 참고 골문을 지켰다는 소식에 팬들은 고개를 숙였다. 그럼에도 야신이 선수생활의 위기를 맞았다는 소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마치 야신의 축구인생이 끝을 향해 치닫는 것 같았다. 하지만 이듬해 뇌진탕쯤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다는 듯, 야신은 기적처럼 부활했다. 소련 리그에서 27경기에서 6실점을 하며 최고의 축구선수상인 발롱도르상을 받은 유일한 골키퍼가 됐다.지금 생각해 보면 2002년 우리 태극전사의 월드컵 4강 진출도 기적에 가까웠다. 홈그라운드 이점도 있었지만, 우리 축구전사는 이탈리아, 포르투갈 등 세계 최강을 제물 삼아 월드컵 4강 신화를 만들었다. 당시 4강 기적의 주역이었던 프로축구 인천 유나이티드의 유상철 감독이 '췌장암 4기' 판정을 받고 투병 중이란 사실이 최근 밝혀졌다. 현역시절 골키퍼만 빼고 어느 자리에서도 뛸 수 있다는 멀티 플레이어 유상철. 2002년 6월 부산에서 열린 월드컵 D조 폴란드와의 경기에서 한국의 두 번째 골을 넣은 후 환하게 웃던 유상철을 기억하는 팬들은 큰 충격에 빠졌다."모두에게 기적을 선물했던 그가 이제 기적을 선물 받을 때다"라며 유감독에게 팬들의 응원이 이어지고 있다. 아인슈타인은 이런 말을 했다. "세상을 사는 방법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기적이 없다고 여기며 사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모든 것이 기적이라고 믿으며 사는 것이다." 지금은 유감독에게 야신같은 기적이 필요할 때고, 우리도 그 기적이 찾아올 것이라고 믿는다. /이영재 논설실장

2019-11-21 이영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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