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성단

 

[참성단]넷플릭스 없는 칸 영화제

올해 세계 영화계의 최대 사건은 단연, 알폰소 쿠아론 감독의 넷플릭스 영화 '로마'가 91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감독상을 받은 것이다. 스페인어로 제작됐는데도 아카데미 주요 10개 부문에 노미네이트 됐고 감독상, 촬영상, 외국어영화상 등 3개 부문을 수상했다. 비영어권의 영화가 작품상을 받은 것도 그렇지만, 무엇보다 극장 상영작이 아닌 OTT(유료 온라인 동영상 서비스) 영화가 최고의 영화제에서 감독상을 거머쥔 것은 변화의 시작을 의미한다.진즉 변화를 눈치챈 베니스영화제도 지난해 넷플릭스 영화 6편을 받아들여 '로마'에게 최고 영예인 황금사자상을 안겼다. 또 이선·조엘 코언 형제 감독의 넷플릭스 영화 '카우보이의 노래'는 각본상을 받았다. 폴 그린그래스 감독의 '7월 22일'도 큰 호평을 받았다. 넷플릭스 덕분에 베니스영화제의 내용은 풍성해졌고, 경쟁자인 칸영화제를 압도했다는 평가를 들었다.반면 칸영화제는 지난해 넷플릭스 영화의 출품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프랑스 극장업계의 반발 탓이 컸다. 칸은 넷플릭스에 초청장을 받으려면 제작 영화의 온·오프라인 동시 공개 전략을 포기하고 극장 개봉을 먼저 할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넷플릭스는 출품 거부로 맞서면서 칸영화제 참가가 무산됐다. 칸영화제는 올해도 넷플릭스 영화를 초청하지 않았다. 넷플릭스의 불참으로 72회를 맞은 칸영화제의 권위는 크게 떨어졌다. 넷플릭스 없는 칸영화제는 '불빛 없는 항구' '속없는 찐빵'이 된 것이다.이를 만회하려는 듯 이번 칸영화제는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을 비롯해 짐 자무시, 켄 로치 등 대가들의 신작을 경쟁부문에 초청하고 리어나도 디캐프리오, 브래드 피트 등 할리우드 스타 모시기에 유난히 공을 들였다. 그런데도 시대를 역행한다는 비판에 자유롭지 못하다. 영화의 다양성 확보에 실패했다는 소리도 들린다. 넷플릭스의 부재가 그만큼 컸다. 넷플릭스는 앞으로 영화가 어느 방향으로 가는지를 가늠하는 척도다. 이미 세계 영화계는 아마존, 월트디즈니, 애플까지 OTT 사업에 뛰어들면서 스트리밍 영화의 전쟁터가 되고 있다. 칸이 언제까지 넷플릭스를 거부할지 지켜볼 일이다. "전통적 배급 방식 바깥에서 영화를 투자, 제작하는 회사가 존재한다는 사실은 영화계를 더욱 역동적으로 만들 수 있기에 중요하다"는 조엘 코언 감독의 말을 이제 칸도 곱씹어 볼 때가 됐다. /이영재 논설실장

2019-05-23 이영재

[참성단]착한 금연정책

휠체어를 비롯 갖가지 의료장비를 끌고 환자들이 하나 둘 건물 밖 흡연구역에 모이더니 주머니에서 주섬주섬 담배를 꺼내 불을 붙인다. 병원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이다. 비흡연자의 눈에는 볼썽사나운 풍경이리라. 하지만 어찌하랴. 이들에게 흡연구역은 답답한 병실을 벗어나 한 모금 담배 연기에 잠시나마 근심 걱정 날려버릴 수 있는 유일한 안식처가 아닌가. 기회비용 측면에서 볼 때 이 순간만큼은 담배가 '건강 회복의 염원'보다 상위가치인 듯싶다. 환자의 흡연은 곧 담배의 수요가 웬만해서는 줄지 않는다는 것을 방증하는 사례이기도 하다.흡연에 대한 사회의 시선이 곱지 않은 것과 맞물려 흡연자들 또한 일종의 피해의식을 느낄 수밖에 없다. 흡연자들의 피해의식을 부추기는 요인 중 가장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잊을만하면 내놓는 정부의 금연정책이다. 금연정책에서는 흡연자가 '사회악' 취급을 받기 일쑤다. 올해에도 어김없이 정부의 금연정책이 나왔다. 보건복지부는 2025년까지 모든 건물의 실내흡연실을 폐쇄하고 담뱃값에 부착된 경고그림과 문구의 면적을 현행 50%에서 75%까지 확대하는 내용 등을 담은 금연종합대책을 내놓았다.그런데 종전의 금연정책과 다른 부분이 있다. 일단 '담뱃값 인상'을 전제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정부가 그동안 담뱃값을 인상하면서 내 건 모토는 흡연율 저하를 통한 국민 건강 증진이다. 그러나 그간의 담뱃값 인상사례에서 보듯이 담뱃값은 흡연율에 크게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가격은 수요와 공급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앞서 병원 흡연구역 사례에서 보듯 담뱃값 인상은 흡연자 자체를 줄이는 데 역부족이다. 그렇다고 담배회사 수를 줄이는 것도 아니다. 수요공급곡선을 변형시키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효과를 거두기 어려운 것이다. 이러한 경제학적 원리를 무시하다 보니 정부가 내세운 '국민건강'은 낯간지러운 수식어가 될 수밖에 없었다. 심지어 흡연자들 사이에서는 건강 운운하는 게 담뱃값을 인상하려는 '수작'쯤으로 인식된 게 사실이다. 더 나아가 담뱃값 인상이 아니라 세금 인상이라는 분석이 힘을 얻기도 했다. 그래서 이번 정책은 '착한 금연정책'이라고 본다. 흡연자가 병·의원 금연치료에 나설 경우, 건강보험 혜택을 주는 방안도 '돈만 밝히던' 기존의 금연정책과 차별화되는 부분이다. 그러고 보니 금연정책이 성공하기를 바라는 건 이번이 처음이다. /임성훈 논설위원

2019-05-22 임성훈

[참성단]부시의 노무현 초상화

아돌프 히틀러의 어릴 적 꿈은 화가였다. 그림을 꽤 잘 그렸다. 두 번의 미대입시에 떨어지고 좌절 끝에 정치인이 됐지만, 그림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 2차 대전을 일으킨 후에 각국의 수많은 미술품을 약탈했다. 그 그림들을 모아 베를린에 세계 최대의 미술관을 짓고 싶어 했다. 전쟁 중에도 틈틈이 그림을 그렸다. 고전주의식 화풍을 고집한 그는 2천여 점의 그림을 그렸는데 전쟁 중 소실되고 현재 700점이 남아 있다.윈스턴 처칠은 40세가 넘어 그림을 그렸다. 그가 그림 그리기를 시작한 것은 '반복성 우울증'에서 벗어나기 위해서였다. 그림이 하나의 치료법이었던 셈이다. 그러던 그가 "내가 천국에 가면 처음 100만 년은 그림을 그릴 것"이라고 할 정도로 그림에 푹 빠져 500점의 유화를 남겼다. 그 그림 중에는 정부(情婦)로 알려진 도리스 캐슬로시의 초상화도 포함돼 있다. 피카소가 "처칠이 그림만 그렸다면 정치인 처칠보다 화가 처칠로 더 명성을 날렸을 것"이라며 높이 평가할 만큼 말년에 그의 그림솜씨는 수준급이었다. 우리의 경우 그림 그린 정치인 중 고 김종필 전 국무총리가 첫째로 꼽힌다. 김 전 총리는 42세 때 그림에 입문해 전국 각지를 돌아다니며 '일요 화가회' 회원들과 그림을 그렸다. 그는 생전 그리는 즐거움을 "마치 갓 태어난 아이로 돌아간 듯 순백의 마음"이라고 말하곤 했다. 그림을 그리다 보면 어느새 마음이 정화되는 것이 느껴지고, 온갖 번잡한 생각에서 완전히 벗어나게 하는 '정신적 위안'이 된다는 것이다. 정치인들이 그림 그리는 것에 대해서는 생전 300개의 유화작품을 남긴 아이젠하워 전 대통령의 "정치를 하면서 받는 극도의 스트레스를 해소하기 위해 그림을 그린다"는 말에 그대로 함축되어 있다.아마추어 화가로 알려진 조지 W 부시 전 대통령이 23일 봉하마을에서 열리는 노무현 전 대통령 10주기 추도식에 참석해 노무현 초상화를 전달할 예정이라고 한다. 미국의 대표적인 토크쇼 제이 레노 쇼에 출연해 "내 안에 렘브란트가 있다"는 조크를 날렸던 부시는 재임 중 만난 각국 정상이나 지인 등의 초상화나 자화상, 풍경화 등을 그려오고 있다. 전 세계 진보 좌파에게 '전쟁광'이라는 소리까지 들었던 부시에게 그림 재주가 있다는 것도 놀랍지만, 재임 시절 관계가 껄끄럽던 그가 노 전 대통령의 추도식에 직접 찾아온다는 사실이 왠지 신선하게 다가온다. /이영재 논설실장

2019-05-21 이영재

[참성단]연평도 등대

연평도는 원래 북한 황해도 해주군에 속했던 섬이다. 1945년 미·소 군정이 한반도를 38선으로 분할하면서 경기도 옹진군으로 편입됐다. 실향민들의 증언에 따르면 38선과 상관없이 황해도와 연평도 뱃길은 열려 있었고 왕래도 비교적 자유로웠다고 한다. 6·25전쟁 중에는 황해도를 비롯한 북한의 서해안 피난민들이 연평도를 징검다리 삼아 인천 등 남한 서해안으로 퍼져 나갔다. 현재도 주민 70% 이상이 황해도 출신의 실향민과 그 후손들이다.연평도는 제 1·2연평해전과 연평도 포격전으로 세계의 주목을 받는다. 북한은 1999년과 2002년 한·일 월드컵 기간 중에 서해 북방한계선(NLL)을 넘어와 대한민국 해군함정에 발포했다. 1차 해전은 우리 해군이 완승했지만, 북한의 보복을 작정하고 벌인 2차 해전 때는 윤영하 소령 등 해군 6명이 전사하고 1척의 함정을 잃었다. 2010년 북한은 선전포고 없이 연평도에 포격 도발을 감행했다. 시커먼 포연에 휩싸인 연평도의 모습에 전국민이 경악했다. 해병대원 2명과 민간인 2명이 희생됐고, 주민 1천여명이 피난한 전쟁이었다. 평화로운 꽃게어장 연평도는 세계가 주목하는 화약고가 됐다. 국방부가 우리의 승리로 기록한 세차례의 교전은 남북이 교전 당사자임을 상기시키기에 충분했다.지난 17일 저녁, 연평도 등대가 불을 밝혔다. 1960년 설치된 등대다. 조기를 따라 연평어장에 모여든 어선들을 수호하다 1974년 대간첩 작전을 이유로 소등한 지 45년 만이다. 연평도 등대 재가동은 서해5도 어장 확대와 야간 조업시간 확대에 따른 어로활동 보호 차원에서 결정된 것으로 알려졌다. 일각에서 연평도 등대가 유사시 적 공격의 표적이 될 것으로 우려하자, 북쪽으로는 등대 불빛을 차단하고 원격 소등도 가능하게 조치했다고 한다.연평도 등대는 앞으로 남북관계 예보기능으로 주목받을 가능성이 높다. 남북관계가 무탈하면 등대가 켜질 것이고, 군사적 긴장이 고조되면 꺼질 테니 그렇다. 아무쪼록 연평도 등대가 서해 밤바다에서 분쟁의 먹구름을 몰아내는 평화의 빛으로 밝게 빛나기를, 결코 꺼질 일이 없기를 기원할 뿐이다./윤인수 논설위원

2019-05-20 윤인수

[참성단]주정도 교양이다

청록파 시인 중 한 명인 조지훈 시인은 수필 '주도유단(酒道有段)'에서 '사람의 주정을 보고 그 사람의 인품과 직업은 물론 그 사람의 주력(酒歷)과 주력(酒力)을 당장 알아낼 수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주도(酒道)를 18단계로 나누었다. 이 분류법은 시대가 바뀐 지금에도 많은 공감을 이끌어낸다. 물론 주당들에게 국한된 얘기다.일단 '술을 아주 못 먹진 않으나 안 먹는 사람'(不酒)이 가장 하위 레벨인 9급이다. 이어 외주(畏酒), 민주(憫酒), 은주(隱酒), 상주(商酒), 색주(色酒), 수주(睡酒), 반주(飯酒)를 거쳐 1급 '술의 진경(眞境)을 배우는 사람'을 뜻하는 학주(學酒)에 이르러서야 처음으로 '주졸'(酒卒)이란 별칭을 얻게 된다. 시인에 따르면 2급 이하 그룹은 술의 진경 ·진미를 모르거나 목적을 위하여 술을 마시는 사람들이다.다음은 고수의 술세계다. 애주(愛酒), 즉 '술의 취미를 맛보는 사람'이 초단이다. 비로소 술꾼으로 인정받는 '주도'(酒徒)라는 칭호가 붙는다. 다음으로 '술의 진미에 반한 사람'(2단), '술의 진경을 체득한 사람'(3단), '주도를 수련하는 사람'(4단), '주도 삼매에 든 사람'(5단), '술을 아끼고 인정을 아끼는 사람'(6단), '마셔도 그만 안 마셔도 그만, 술과 더불어 유유자적하는 사람'(7단) 순으로 서열이 정해진다. 단이 높을수록 주선(酒仙), 주현(酒賢), 주성(酒聖) 등 고상한(?) 칭호가 주어진다. 8단은 '술을 보고 즐거워하되 이미 마실 수는 없는 사람'인데 술 때문에 건강을 잃어 한잔도 입에 댈 수 없는 사람을 칭하는듯하다. 애주가에게는 최악의 상황일진데 '주종'(酒宗)이라는 칭호만큼은 남부럽지 않을 듯싶다. 마지막 9단에게 부여된 칭호는 열반주(涅槃酒)다. '술로 말미암아 다른 술 세상으로 떠나게 된 사람'이다. 해탈을 통해 최고의 경지에 올랐을지는 몰라도 저승에서 술잔을 기울여야 한다. 한때 이 분류법을 외우려 한 적이 있다. 자가진단(?)에 도움이 될듯해 암기를 시도하다가 이게 무슨 짓인가 싶어 때려치웠지만 지금도 술을 마시면 가끔 기억을 더듬어 주도유단의 함의를 찾아보곤 한다.취객이 경찰의 뺨을 때리는 등 난동을 부린 동영상이 나돌며 세상이 시끄럽다. 현장에 출동한 여경에게까지 불똥이 튀고 있다. 그 취객은 주도유단의 어느 단계일까. 조지훈 시인은 '주정도 교양'이라고 했다. /임성훈 논설위원

2019-05-19 임성훈

[참성단]인천 공무원 집단 성매매

지난해 초 서지현 검사가 불을 붙인 미투운동의 열기는 대단했다. 미투운동의 열기는 성폭력 사건에 비교적 관대했던 법원의 판결도 확 바꾸어 놓았다. 2018년 4월 대법원은 학생을 성희롱한 대학교수의 해임취소소송 최종심에서 하급심의 원고 승소 판결을 뒤집고 패소 판결을 확정했다. 이때 등장한 용어가 '성(性)인지 감수성'이다. 1995년 베이징 유엔 여성대회에서 사용돼 국제적으로 통용된 '성인지 감수성'은 일상생활 속에서 성차별적 요소를 감지해 내는 민감성을 의미한다.당시 대법원은 성인지 감수성을 성범죄 관련사건을 심리할 때 피해자가 처한 상황의 맥락과 눈높이에서 사건을 바라보고 이해해야 한다고 해석했다. 수행 여비서의 미투운동에 걸려 재판에 회부된 안희정 전 충남지사는 1심에서 무죄를 받았지만, "성범죄 사건을 심리할 때는 성차별, 양성평등 등 '성인지 감수성'을 잊지 말아야 한다"는 2심 재판부에 의해 징역형을 선고받고 법정 구속됐다.물론 성인지 감수성을 성범죄 판결에 반영하는 법원의 추세에 반발하는 원칙론도 만만치 않다. '성범죄 피해자의 진술을 존중해야 한다'는 감성적 논리는 무죄추정의 원칙과 증거법 원칙에 반한다는 것이다. 거짓 피해자에 의한 무고한 가해자가 나올 수 있다는 반박은 타당하다. 하지만 대법원 판결로 우리 사회가 성인지 감수성을 새롭게 인식하는 계기가 마련된 것만은 확실하다. 사회 각 분야에서 성폭력에 관대했던 의식과 관행이 무너지고, 정부와 시민사회단체는 성차별을 없애기 위한 정책과 제안을 쏟아내고 있다.최근 인천 미추홀구 공무원 4명과 인천도시공사 직원 7명이 회식후 집단 성매매를 한 사실이 드러났다. 성을 상품으로 거래하는 성매매는 성인지 감수성 지표 중 최악이다. 성인지 감수성을 정책으로 실현해야 할 공무원, 지방공기업 직원들이 집단 성매매를 했다니 충격적이다. 더군다나 장자연 사건, 김학의 사건을 비롯해 버닝썬 사태 등 과거와 현재의 성추문 사건으로 시끄럽고 대통령까지 나서 철저한 조사를 당부한 마당에 이런 짓을 벌였으니, 세상과 담 쌓은 공직사회의 이면이 너무 추악하다.이들이 자기 돈으로 이런 짓을 벌일 리 없다. 수백만원의 회식비와 성매매 비용에 어떤 비밀이 숨어있을까 궁금하다. /윤인수 논설위원

2019-05-16 윤인수

[참성단]깃대 종(種)

'농부아사 침궐종자'(農夫餓死 枕厥種子), '농부는 굶어 죽어도, 씨앗은 베고 죽는다'는 뜻이다. 농부에게 씨앗은 그만큼 목숨보다 소중한 존재다. 종자(種子)인 씨앗이 없다면 농사를 지을 수 없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농부의 존재가치가 사라진다. 배가 고파 죽을지언정 씨앗을 먹지 않는 이유다. '농심'(農心) 중의 농심이다.농사와 분야는 다르지만 '농부아사 침궐종자'란 말을 목숨 걸고 실천한 사람들이 옛 소련에 있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소련의 레닌그라드(현 '상트페테르부르크')가 독일군에게 900일 동안 포위된 적이 있다. 이 기간, 도시에 있던 소련 사람 150만명 중 70만명이 굶주림과 질병으로 죽었다. 그런데 이 도시에는 씨앗과 열매 표본 등을 쌓아둔 곡식 창고 같은 곳이 딱 한 곳 있었다. 바로 '바빌로프 연구소'다. 이 연구소에는 바빌로프 박사가 전 세계 150여 개국을 돌며 모은 수십만 종류의 씨앗이 있었다. 그러나 연구원들은 단 한 톨의 씨앗에도 손을 대지 않았다. 씨앗을 먹었더라면 목숨은 부지할 수 있었을 텐데 연구원들은 자신보다 '씨앗이 사는 길'을 택했다. 그 결과 9명의 연구원이 굶어 죽었다. 이 연구소에는 밀, 콩, 팥, 녹두, 동부, 호박 등 우리나라의 작물 표본도 보존돼 있다. 바빌로프 박사가 1929년 부산에서 신의주까지 이동하면서 수집한 것이라고 한다.눈여겨봐야 할 점은 바빌로프 연구소에 보관된 지구촌 곳곳의 토종 작물 씨앗 가운데 90% 이상은 원래 그 씨앗이 자라던 나라나 지역에서 찾아볼 수 없다는 사실이다. 100년 남짓한 기간에 벌어진 일이다. 인류의 각고의 노력 없이 생물종다양성 유지는 요원하다는 것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대목이다. 지난 2015년 문을 연 '스발바르 국제종자저장고'는 이같은 교훈의 결과물이다.인천시가 국립생물자원관과 함께 인천 지역을 대표하는 '깃대종(flagship species)'을 선정키로 했다는 소식이다. 깃대종은 유엔환경계획(UNEP)이 제시한 개념으로, 특정 지역의 생태계를 대표할 수 있는 중요 동·식물을 뜻한다. 시는 깃대종이 선정되면 중점관리에 나설 계획이다. 인천 깃대종의 식물분야 후보군은 끈끈이주걱, 붉노랑상사화, 이삭귀개, 통발, 노랑붓꽃, 대청부채, 매화마름 등 7종이다. 저마다 이름도 참 예쁘다. 어느 식물이 깃대종으로 선정되든 생물종다양성 회복의 깃발을 높이 올리길 기대해 본다. /임성훈 논설위원

2019-05-15 임성훈

[참성단]스승의 길

아벨 선생님은 말했다. "한 국민이 노예로 전락해도 자기 나라말만 잘 간직하고 있으면 그것은 자신이 갇힌 감옥의 열쇠를 자신이 쥐고 있는 것과 같다." 종이 울렸다. 프랑스어로 하는 마지막 수업이 끝난 것이다. 아벨 선생님은 "여러분! 나는, 나는…하고 말하며 칠판에 온 힘을 다해 이렇게 썼다. '프랑스 만세!'. '알퐁스 도데'의 '마지막 수업'에 나오는 이야기다. 세상이 많이 변했다 해도, 지금 교직에 있는 선생님 중 이 글을 읽은 분이 있다면 아벨처럼 한번쯤 용기 있는 교사, 진실을 가르치는 교사가 돼보리라 다짐한 적이 있을 것이다. 존 키팅 선생님은 말했다. "지금 이 순간을 붙잡아라. 그리고 즐겨라. 너희만의 특별한 삶을 살아라." 명문 사립 고등학교 영어 교사 키팅 선생님의 이 말에 공부만이 인생의 전부로 알았던 학생들은 큰 충격을 받는다. 선생님을 다룬 영화를 말할 때 빠질 수 없는 '죽은 시인의 사회'의 한 장면이다. 이 영화를 본 선생님이 있다면, 키팅처럼 입시의 멍에를 훌훌 집어 던지고, 참교육을 가르치는 교사가 되고 싶은 욕망이 불끈 솟아오름을 느낀 적이 있을 것이다.두 작품에 등장하는 선생님들은 어떻게 보면 불행한 분일 수도 있다. 명성도 권세도 부귀영화도 없는 생애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의 평범한 삶 속에서 숙연하고 따듯한 인간의 정과 스승의 참모습을 발견한다. 이러한 스승은 우리 주변에 얼마든지 발견할 수 있다. 스승다운 스승이 없다고 하지만 우리는 그런 스승을 찾으려고 하지 않았을 뿐, 지금도 어디에선가 묵묵히 '스승의 길'을 걸으며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을 것이다."나는 내 법전을 팔아 버리기로 했다. 왜냐하면, 법률보다 한층 더 중요한 일에 투신할 생각이기 때문이다." 미국 공립학교의 아버지로 불리는 호러스 만(Horace Mann)이 친구에게 보낸 편지의 한 토막이다. 매사추세츠 상원의원이던 그는 알량한 정치보다 미래의 동량을 키우는 교육이 더 중요하다고 믿은 사람이다. 공자도 그랬다. 왕도정치의 이상을 실현하려고 꾀하다가 실망하고 3천여 명의 제자를 가르치는 것으로 희망을 찾았다. 오늘날 스승들은 과연 어떤 대접을 받고 있는가. 육신을 낳고 키운 건 부모지만, 정신을 낳고 키운 건 스승이다. 오늘은 스승의 날. 스스로를 내세우지 않으며 '스승의 길'을 걷고 계신 선생님께 경의를 표한다. /이영재 논설실장

2019-05-14 이영재

[참성단]유시민과 심재철의 기억

2016년 3월 이천 부악문원에서 작가 이문열을 만났을 때 그는 '변경'의 후속작으로 80년대를 정리하는 작품을 집필 중이었다. 작업의 진척을 묻는 질문에 대뜸 "골치 아프다"고 푸념했다. "뜸을 너무 오래 들였고 나는 늙어버렸다"며 "그러는 동안 역사가 왜곡된 인식으로 굳어지고 주장과 선동이 역사가 되어간다는 느낌"이라 했다. 대가의 푸념이 낯설어 "전 시대를 정리해 현 시대의 독자에게 전달하는 일은 늘 고민스럽지 않은가"라고 다시 물었다. 답변에서 고민의 핵심이 나왔다."기억에는 개인적 기억과 그것이 공유되는 사회적 기억, 후세에 기록될 역사적 기억이 있다"며 "그런데 기억은 변경되고 조작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새 작품을 준비하는 10년 동안 내 주변의 사회적 기억을 확인해왔는데 굉장한 왜곡과 조작이 있었다"고 토로했다. 예를 들어 "술에 취해 경찰과 치고 받은 젊은 취객이 장년이 되자 전두환 욕을 했다가 경찰에게 맞는 민주화 투사로 변신하는 식"이라는 것이다. 이런 사례가 무수하니 "그 시대의 사회적 기억을 어떻게 복원하고 해석하느냐가 심각한 고민"이라는 얘기였다.유시민 노무현재단이사장과 심재철 자유한국당 의원이 소환한 80년 '서울의 봄'은 서로 다른 기억으로 처연하다. 신군부의 권력장악 시도에 학생운동권이 맞섰던 현장에서 유시민과 심재철은 동지였다. 서슬퍼런 합수부 조사실에 끌려간 이후 40년 세월이 지나는 동안 사회적 기억은 심재철을 변절한 가해자로, 유시민을 피해자로 규정해왔다. 유시민이 당당한 피해자로 그 시절을 방송에서 유쾌하게 회고하자, 심재철은 당시의 진술서를 공개하며 유시민의 기억은 틀렸다고 지적했다.일제 식민시대 이후 100여년 근현대사를 거치면서 우리 사회는 가해의 기억과 피해의 기억으로 분열됐다. 그러나 식민시대, 동란시대, 산업화·민주화 시대의 대혼란을 거치면서 억울하게 가해의 기억에 갇히거나 반대로 피해의 기억에 무임승차한 사람들이 무수할 것이다. 그래서 맥락을 살피지 않고 가해와 피해를 일도양단식으로 구분하는 역사인식은 위험하다. 심재철의 때늦은 반발은 자신을 변절자로 규정한 피해자들의 기억이 역사적으로 확정될까 두려워했기 때문 아닐까 싶다.이문열은 "한 시대는 같은 가락의 반복이 아니라 화성(和聲)으로 이루어진 것인데 자꾸 단음으로 만들려 한다"며 "이런 것들이 계속 걸리니까 글 쓰기가 어렵다"고 토로했다. /윤인수 논설위원

2019-05-13 윤인수

[참성단]일산 신도시의 비애(悲哀)

1기 신도시 일산은 1991년 가을에 입주를 시작했다. 처음부터 부실공사 파문 등 말이 많았다. 노태우 대통령의 200만 가구 건설공약으로 분당· 평촌 등에서 1기 신도시가 동시에 조성되다 보니 자재가 부족한 게 원인이었다. 불량 철근과 중국산 저질 시멘트, 여기에 바닷모래 사용이 큰 파문을 일으켰다. 골재 부족으로 강모래가 바닥이 나자 바닷모래를 가져다가 사용했는데 염분기를 제대로 씻어내지 않고 사용한 게 문제였다. 일산을 비롯해 1기 신도시 아파트는 '소금 아파트'라는 논란에서 자유로울 수가 없었다. 집값 때문에 일산주민은 말도 못하고 속만 부글부글 끓었다.지난해 12월 일산 백석역 온수관 파열사고는 일산 주민들에게 '늙은 도시'에 살고 있다는 설움을 주었다. 30년이 넘은 일산 신도시는 사람으로 치면 60세를 넘어선 나이다. 시설물도 세월이 흐르면 사람처럼 늙는다. 도시 이곳저곳에 묻혀있는 파이프라인은 동맥경화로 몸살을 앓고 있다. 교량이나 하수관, 도로 등 시설물들이 노후화되기 전에 대대적인 교체 작업이 필요하다. 하지만 투입될 비용이 천문학적이다. 일산 백석역 사고는 그나마 1기 신도시에 대한 국민의 관심을 불러 일으켰다는 게 작은 위안이었지만, 일산주민의 속은 검게 타들어갔다.정부가 고양 창릉을 3기 신도시 신규 택지 후보지로 추가 지정해 발표한 후, 일산 신도시 주민들이 크게 뿔났다. 2기 신도시 운정지구에 미분양 아파트가 넘쳐나면서 일산 집값마저 하락세를 보이는 상황에서 서울 접근성이 뛰어난 신도시가 들어설 경우, 일산의 경쟁력이 크게 떨어질 거란 우려 때문이다. 일산 신도시 주민들은 건설된 지 수십 년이 지났지만, 교통은 말할 것도 없고 각종 인프라가 철저하게 소외되고 있다고 하소연이다. 특히 같은 1기 신도시인 분당을 생각하면 일산신도시 주민들은 여전히 시골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며 분통을 터뜨린다. 지하철 노선의 경쟁력은 여전히 떨어지고 통일로와 자유로는 차를 몰고 나오기엔 끔찍한 '교통지옥'이 된 지 이미 오래다. 분당이 벤처 붐을 일으킨 판교를 끼고 승승장구한다는 소식이 터질 때마다 '베드타운',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일산주민들의 비애는 점점 깊어가고 있다.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 "3기 신도시 지정은 일산 신도시에 사망 선고나 다름없다"는 글이 올라 오는 등 일산신도시 주민은 지금 큰 슬픔에 빠졌다. /이영재 논설실장

2019-05-12 이영재

[참성단]회색 코뿔소

2013년 1월 스위스 다보스포럼에서 세계정책연구소 대표 미셀 부커는 자신의 저서 '회색 코뿔소가 온다'로 일약 스타로 떠올랐다. 다보스에 모인 사람들은 그가 강조하는 '회색 코뿔소(Grey rhino)'에 주목했다. 코뿔소는 시력이 약해 멀리 볼 수가 없는 대신 후각이 발달해 이에 의존해 풀을 뜯어 먹고 산다. 초식동물답게 성격은 온순하지만, 누군가 자신을 위협한다고 생각하면 그쪽을 향해 앞 뒤를 가리지 않고 돌진하는 습성이 있다. 그래서 세렝게티에서 코뿔소가 눈에 띄면 일단은 경계해야 한다. 부커는 지속적인 위기 경고음이 울리는데도 이를 간과하다가 더 큰 위험에 빠지는 것을 '회색 코뿔소'라고 칭했다.'회색 코뿔소'와는 달리 예측하지 못한 상황에서 도저히 일어날 것 같지 않은 일이 일어나는 것을 '블랙스완(Black swan)'이라고 한다. 18세기 호주에서 발견된 '검은 백조'는 '백조는 하얀색'이라는 통념을 깨뜨렸다. 2007년 미국 서브 프라임 사태로 세계 금융 위기가 닥치자 레바논 출신의 월가 증권분석가 나심 탈레브는 저서 '블랙 스완'을 통해 위기를 경고하며 통계적 예측의 한계를 넘은 극단적 상황이 가져올 파국을 분석했다. '블랙 스완'이나 '회색 코뿔소'같은 말이 끊이질 않고 회자하는 것은 경제라는 것이 논리와 생각대로 움직이지 않기 때문이다. '블랙 스완'이 아무도 예측하지 못한 상황에서 터지는 데 반해, '회색 코뿔소'는 지표를 통해 어느 정도 위험을 감지할 수 있다는 차이가 있다. 위기를 알리는 각종 경제 지표를 무시하다가는 갑자기 우리에게 달려든 코뿔소에 희생되고 만다. 문재인 정부 2년을 맞아 우리 경제에 대해 '회색 코뿔소'를 경계해야 한다는 소리가 점점 커지고 있다. 올 1분기 성장률은 -0.3%로 2008년 4분기 이후 최저를 기록하고 여기에 최근의 환율 급등과 미·중 무역전쟁 격화, 중국 부동산 거품 붕괴 위기 등 대내외적으로 잇단 경고음을 내며 '회색 코뿔소'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지고 있다. 그런데도 문재인 정부는 소득주도성장과 친노조라는 경제정책을 바꾸지 않고 있다. 문 대통령은 오히려 "경제성장률이 2분기부터는 점차 회복돼 개선될 것"이라고 진단하고 있다. 이렇게 넋 놓고 바라보고 있다가 나라 안팎에서 어슬렁거리는 회색 코뿔소들이 갑자기 우리에게 들이닥치는 것은 아닌지 걱정이다. /이영재 논설실장

2019-05-09 이영재

[참성단]아테네학당의 계약학과

인류역사상 가장 학구적인(?) 그림은 '아테네 학당'이 아닐까 싶다. 라파엘로가 1510년 완성한 이 벽화는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를 비롯해 고대 그리스의 철인, 학자들이 학문과 진리를 추구하고 있는 모습을 담고 있다. 손가락으로 하늘을 가리키는 플라톤과 손으로 지상을 가리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모습에서는 서로 이데아와 현실에 대해 설파하는 소리까지 들리는 듯하다. 진중권은 저서 '미학 오디세이'에서 이들의 가상대화를 재치 있게 풀어내기도 했다. 아테네 학당은 학문의 전당으로서 대학의 참모습을 보여준다. 그래서 대학에는 '진리의 상아탑', '학문과 지성의 요람' 등 고상한 수식어가 붙는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대학은 아테네 학당의 모습과 점점 멀어지고 있다. 취업률 때문에 대학의 본질이 희석되고 있는 것이다. 취업 중심의 학과 개편 속에서 취업률이 낮은 인문학 분야의 학과는 존폐의 기로에 서기 일쑤다. 오죽하면 '문송합니다(문과라서 죄송합니다)'라는 말까지 나왔을까.대학가 취업지상주의의 결정판은 '계약학과'다. 계약학과는 산학협력 촉진 차원에서 특정 기업과 대학이 계약을 맺고 관련 업무에 필요한 학과를 개설하는 학위 과정을 말한다. 졸업 후 취업이 100% 보장되며 학과 운영 비용은 기업이 일정 부분 부담한다. 최근에는 연세대가 삼성전자의 계약학과로 '시스템반도체공학과'를 신설키로 하더니, 취업에서 자유로울듯한(?) 서울대마저 계약학과 운영을 검토 중이라는 소식이다.이러던 차에 인천에도 계약학과가 신설될 전망이어서 관심을 모으고 있다. 인천시는 영종도 일대에 들어서고 있는 대규모 복합리조트에 2만여명 규모의 맞춤형 일자리를 제공하기 위한 계약학과를 2020년까지 지역 대학에 설치할 계획이라고 한다. 극심한 취업난을 생각하면 일단 반가운 소식이 아닐 수 없다. 지역 대학이 지역 기업에 필요한 인력을 효율적이고 탄력적으로 공급한다는 측면에서도 환영할만한 일이다. 그래도 마음 한구석에 씁쓸함이 남는 것은 대학이 고유의 색감을 잃어가기 때문이리라. 자꾸만 퇴색되는 그림을 매일 보는 느낌이랄까.다시 그림 속으로 들어가 본다. 2019년의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런 대화를 할 듯싶다. "이번에 계약학과 취업률이 100%라면서? 어쩌다가 학당이 취업창구로 전락했는지, 쯧쯧…." 플라톤이 혀를 차자 아리스토텔레스가 말을 잇는다. "그게 현실입니다." /임성훈 논설위원

2019-05-08 임성훈

[참성단]5月과 장영희

5월이 오면 떠오르는 사람이 있다. 장영희(張英姬). 영문학자이자 번역가. 영문학자 장왕록(張旺祿)의 딸. 우리에게는 수필가로 더 기억되고 있다. 생후 1년에 찾아온 소아마비 장애와 세 차례의 암 수술을 받고도 긍정의 사고를 보석 같은 글로 풀어 놓으며 우리에게 희망을 준 '희망전도사'. 생전 자신이 '암 환자 장영희'로 비치는 것을 원하지 않았던 그는 "내 삶은 '천형(天刑)'은커녕 '천혜(天惠)'의 삶"이라고 말하곤 했다. 2001년 유방암, 2004년 척추암을 꿋꿋하게 이겨내고 강단에 서며 "신은 재기(再起)를 가르치기 위해 인간을 넘어뜨린다"고 말해 감동을 줬던 그다.장 교수하면 떠오르는 건 월간지 '샘터'다. 장 교수는 2000년부터 '새벽 창가에서'란 제목으로 57편의 글을 연재하며, 최인호의 '가족'과 함께 샘터의 지가를 올렸다. '지난 3년간 내가 살아온 나날은 어쩌면 기적인지도 모른다. 힘들어서, 아파서, 너무 짐이 무거워서 어떻게 살까 늘 노심초사했고 고통의 나날이 끝나지 않을 것 같았는데, 결국은 하루하루를 성실하게, 열심히 살며 잘 이겨냈다. 그리고 이제 그런 내공의 힘으로 더욱 아름다운 기적을 만들어갈 것이다. 내 옆을 지켜 주는 사랑하는 사람들, 그리고 다시 만난 독자들과 같은 배를 타고 삶의 그 많은 기쁨을 누리기 위하여…'('살아온 기적 살아갈 기적' 중에서).올해는 장영희 교수가 세상을 떠난 지 10주년이 되는 해다. 지난달 말 공교롭게도 장 교수의 대표 수필집 '살아온 기적 살아갈 기적'이 100쇄를 돌파했다. 이 책은 그가 세상을 떠나기 직전까지 작업한 책으로, 독자들로부터 꾸준한 사랑을 받았다. 살을 에는 암 투병 중에도 그림 작가 선정에서부터 제목, 책의 디자인까지 모두 장 교수의 손을 거쳐 완성됐다. 1쇄는 10년 전 오늘, 2009년 5월 8일 장 교수가 의식이 없는 상태에서 발간됐다. 그리고 다음날인 5월 9일 그는 56세로 세상을 떠났다.5월은 가정의 달. 가정이 흔들리고 있다는 징후가 여기저기서 감지되고 있다. 가정폭력과 가정불화로 인한 대화의 단절이 '가정의 틀'을 뒤흔든다. 가족이 해체되고, 가정이 붕괴하고 있다. 지난 5일 어린이날엔 생활고를 겪던 일가족이 차 안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삶에서 최고의 가치를 가진 단어들도 '생명'이라는 단어 앞에서는 군더더기에 불과하다'는 장 교수의 글이 떠오르는 5월이다. /이영재 논설실장

2019-05-07 이영재

[참성단]청와대의 '비대칭 관용'

북한이 지난 4일 원산에서 정체불명의 무기를 하늘로 쏘아올렸다. 합동참모본부는 처음엔 '단거리 미사일'이라고 발표했다가 곧 '단거리 발사체'로 정정했다. 정황상 미사일이 분명해 보이는데 6일 현재까지도 정부의 공식입장은 불상(不詳)의 발사체이다. 불상의 발사체가 미사일, 그것도 탄도미사일로 판정되면 유엔 안보리 결의와 지난해 남북이 합의한 9·19 군사분야 합의를 위반하는 중대한 도발행위가 되고 문재인 대통령의 중재자 외교가 위기에 봉착한다.정부가 북한의 돌발적인 도발을 '단거리 발사체' 수준에서 관리하는 이유는 대북협상을 위한 관용 때문일 것이다. 미국도 우리 측 입장에 동조하는 모양새다. 트럼프 대통령은 "김정은은 나와의 약속을 깨고 싶어하지 않는다"며 "(비핵화)합의는 이루어질 것"이라고 밝혔다. 마이크 폼페이오 국무장관은 북한의 발사체가 미국을 위협하는 대륙간탄도미사일이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며 "북한이 비핵화하도록 그들과 좋은 해결책을 협상할 모든 의사를 갖고 있다"고 미·북 협상 의지를 강조했다. 청와대의 관용이 미국을 설득한 모양새다.한편 조국 청와대 민정수석은 6일 검경 수사권 조정안에 문무일 검찰총장이 반대한데 대해 페이스북을 통해 "문무일 검찰총장의 우려 역시 경청되어야 한다"고 정중한 입장을 밝혔다. 지난번 패스트트랙 대치 정국 당시 페이스북에 국회선진화법 처벌조항을 게시하고 외국 록밴드의 노래 '좀비' 영상을 올린 것과는 대조적이다. 패스트트랙 법안 반대는 같지만 상대가 문재인 정부 초대 검찰총장과 자유한국당이라는 점만 다르다.오는 10일 문재인 정부 출범 2주년을 맞는다. 문 대통령이 북한에 보여준 인내심으로 야당과 기업의 주장과 제안에 귀 기울였다면 경제분야의 실패를 조금이라도 줄일 수 있지 않았나 생각해 본다. 조 수석이 문 총장에게 보여 준 '경청'의 아량을 야당에게도 보였다면 정국이 지금처럼 각박해졌을까 싶다. 문재인 정부의 북한과 내 편을 향한 관용이 우리 내부의 다른 편에게는 심각하게 비대칭적이다. 관용은 누구에게나 대칭적으로 적용되어야 의미를 갖는 가치 아닌가. /윤인수 논설위원

2019-05-06 윤인수

[참성단]수도권 순천만

우리 문학사에서 가장 뛰어난 단편 소설인 김승옥의 '무진기행(霧津紀行)'의 배경은 '순천만(順天灣)'이다. '무진'은 지도상에 존재하지 않는 상상의 공간이지만, 어느 정도 책을 읽었다면 그곳이 작가의 고향 '순천'이란 걸 금방 눈치챈다. '바람이 바다 쪽으로 방향을 바꾸어 불어가기 전에는 사람들의 힘으로써는 그것을 헤쳐 버릴 수가 없었다. 손으로 잡을 수 없으면서도 그것은 뚜렷이 존재했고 사람들을 둘러쌌고, 먼 곳에 있는 것으로부터 사람들을 떼어 놓았다'. 김승옥은 소설에서 무진(순천만)의 안개를 이렇게 묘사했다. 어느 새벽, 안개가 순천만의 갈대와 부딪히는 소리를 한 번이라도 들어본 사람이라면, 순천만을 다시 찾지 않고는 배길 수가 없다. 순천만은 그런 곳이다.김승옥의 또 다른 아름다운 소설 '누이를 이해하기 위하여'중 '갈대들이 들려준 이야기'는 '온 들에 황혼이 내리고 있었다. 들이 아스라하니 끝나는 곳에는 바다가 장식처럼 붙어 보였다'라는 구절로 시작한다. 처음 순천만을 방문했을 때 눈 앞에는 장관이 펼쳐졌다. 새, 갈대, 바다가 모두 장식인 그런 순천만이 부러웠다. 어디서 오는지 관광객들이 꾸역꾸역 몰려들었고, 여기저기서 새 울음소리가 들렸다. 그때, 이런 순천만이 갯벌의 보고인 우리 서해안 어디에 하나쯤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순천만은 떼어다가 우리 옆에 놓아두고 싶을 정도로 아름다운 곳이다.소원대로 수도권에도 순천만이 생길 모양이다. 인천 소래포구 갯벌을 시흥 갯골생태공원과 연계시켜 '수도권의 순천만'으로 조성한다고 인천시가 발표했다. 인천대공원에서 시작해 장수·운연천~소래습지생태공원(350만㎡ )~소래포구~시흥갯골생태공원(150만㎡ )~시흥 물왕저수지를 잇는 약 20㎞ 구간을 아우르는 수도권 최대 습지 공원을 만들겠다는 것이다. 듣기만 해도 가슴이 설렌다. 이곳에는 순천만보다 더 아름다운 노을도 있다. '수도권 순천만'의 성공은 지자체 간의 굳건하고 유기적인 관계에 달렸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습지에 조심스럽게 생명을 불어넣어 모든 게 다시 살아 꿈틀거릴 때까지, 무엇보다 우리의 기다리는 자세가 필요하다. 지금의 순천만이 있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서두른다고 우리 앞에 '순천만' 하나가 뚝 떨어지는 게 아니다. 성과를 내기 위한 조바심은 절대 금물이다. 인내심을 갖고 길게 멀리 보아야 한다. /이영재 논설실장

2019-05-02 이영재

[참성단]희망의 랠리

'50대에 탁구를 시작하면 5부, 40대는 4부, 30대는 3부까지 갈 수 있다'.탁구 동호인들 사이에서 자주 회자 되는 말이다. 바둑에 급수가 있듯이 탁구에도 '부'라는 실력 분류 시스템이 있다. 보통 1~6부로 나뉘는데 6부가 가장 최하위 레벨(부)이다. 최상위인 1~2부에는 대부분 선수 출신들이 포진해 있다. 3~4부 정도의 실력이면 동네에서 고수로 통한다. 이들이 간혹 동네 탁구장에서 플레이를 하면 모두 선망의 눈으로 바라본다. 중국무술영화에서 무림고수가 객잔(客棧)에 홀연히 나타나 적들을 추풍낙엽처럼 쓰러뜨리는 모습을 떠올리면 된다.'50대에 시작하면 5부까지밖에 갈 수 없다'는 말은 늦게 입문할수록 실력 향상에 한계가 있다는 의미지만, 탁구에서 상위 레벨로 올라가기가 그만큼 어렵다는 것을 방증하기도 한다.동호회 교류전에서 각각 다른 레벨의 선수들이 맞붙을 경우에는 하위 레벨 선수에게 1~2점을 접어주는 식으로 시합을 진행한다. 그러나 이렇게 핸디캡을 적용한다 해도 하위 선수가 상위 선수를 이기는 일은 극히 드물다. 골프에서 하수가 고수에게 핸디를 듬뿍 받았다고 해서 고수의 돈을 따는 일이 거의 없는 것과 비슷하다.프로세계에서 대표적인 서열 구분법은 세계랭킹이다. 성적을 기반으로 다양한 산정방식을 적용하기 때문에 아마추어의 부 구분법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과학적이고 디테일하다. 프로에서도 하위 랭킹의 선수가 톱클래스의 선수를 이기는 것은 그야말로 기적에 가깝다. 그 기적 같은 일을 대한민국의 스무살짜리 탁구선수가 해냈다. 헝가리 부다페스트에서 열린 탁구 세계선수권 개인전에서 안재현은 세계 14위의 윙춘팅을 시작으로 다니엘 하베손(29위), 하리모토 도모카즈(4위)를 차례로 꺾더니 대표팀 선배인 장우진(10위)까지 이기고 동메달을 따냈다. 개인적으로는 아마추어 3~4부 선수가 1부 선수를 핸디 없이 이긴 것에 버금가지 않을까 생각한다. 최대 이변의 주인공 안재현이 이틀 전 인천공항을 통해 귀국했다. 부다페스트로 떠나기 전 그의 세계랭킹은 157위에 불과했다. 하지만 돌아올 때는 84계단 높은 73위 선수로 '신분'이 바뀌어 있었다.세계랭킹 1~3위를 독식하며 세계 탁구를 지배하는 중국과 중국을 쫓는 일본, 그리고 유럽의 저력에 밀려 고전하는 게 한국 탁구의 현주소다. 모처럼 한국탁구의 부활을 예고하는 희망의 랠리를 보았다. /임성훈 논설위원

2019-05-01 임성훈

[참성단]레이와 시대

세월은 막을 수 없는 법이다. 흐르는 강물처럼 말이다. 아키히토 (明仁) 시대가 어제 끝났다. 1989년 시작한 '헤이세이(平成)'가 막을 내렸다. 31년의 영욕(榮辱). 아키히토의 헤이세이도 이전 히로히토(裕仁) 쇼와(昭和) 만큼 격동의 시대였다. 장기 경제불황을 겪어야 했고 나고야 대지진과 후쿠오카 원전사고 등 큰 재난이 덮쳤다. 그때마다 아키히토는 특유의 친화력으로 일본 국민에게 다가갔다. 그의 시대가 끝났다. 오늘부터 일본은 나루히토(德仁)의 레이와(令和) 시대다. 그동안 일본의 연호는 중국 고전에서 빌렸다. 하지만 레이와는 처음으로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시가 모음집 '만엽집(萬葉集)'의 '매화(梅花)의 노래 32수(首)' 중에서 '初春令月 氣淑風和(초춘영월 기숙풍화·날씨가 맑고 바람이 부드럽게 부는 새 봄)'에서 골랐다. 레이와는 '사람들이 아름다운 마음을 서로 모아서 문화를 태어나게 하고 키우자'는 뜻도 있다. 외국 언론도 일본의 새 시대에 큰 관심을 보이고 있다. 영국 BBC방송은 '레이와'를 '질서와 조화', 미 월스트리트저널은 '상서로운 평화'를 의미한다고 보도했다. 폭스뉴스는 '평화를 추구한다'는 뜻으로 해석했다. 일본인들도 레이와 시대에 거는 기대가 큰 모양이다. 요미우리신문의 여론조사 결과 일본 국민의 58%가 '일본이 좋은 방향으로 나아갈 것'으로 생각하는 것으로 조사됐다. 나루히토 일왕의 즉위에 맞춰 5월 26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일본을 방문한다. 때를 맞춰 미 해군의 최신형 강습상륙함인 아메리카호와 스텔스 상륙함인 뉴올리언스호가 올 하반기 미 7함대 소속으로 주일미군 기지에 전진 배치된다. 미국과 군사적 밀월 관계에 들어간 것이다. 아베 정권 입장에선 '새 시대'라는 분위기를 빌미로 일본을 더욱 강력한 군사대국으로 만들려 하는 의도다.문제는 '멀고도 가까운 이웃'인 우리다. 한·일 관계는 역대 최악이다. 의도했건 의도하지 않았건 간에 레이와 시대를 맞아 우리가 먼저 손 한번 내미는 것은 어떨까. 정치는 타이밍이다. 외교관계도 마찬가지다. 새 일왕의 즉위는 경색된 관계를 개선하고 재정립하는데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기회다. 일본이 무서워서가 아니다. 파국으로 치닫는 건 양국 모두에게 절대 바람직하지 않아서다. 사이 나쁜 이웃에게 먼저 다가가 손을 내미는 것, 그건 굴욕이 아니라 '삶의 지혜'다. /이영재 논설실장

2019-04-30 이영재

[참성단]'동물국회' 유감

국회가 패스트트랙(신속처리안건지정)을 둘러싼 여야 충돌로 '동물'수준으로 떨어졌다는 국민적 개탄이 자자하다. 선거법, 공수처법 등을 패스트트랙 안건으로 발의하겠다는 더불어민주당 중심 여야 4당과 기필코 저지하겠다는 제1야당 자유한국당의 국회의사당 폭력대치로 국회가 과거 '동물국회' 시절로 회귀했다는 것이다.하지만 지금 복원된 '동물국회'의 양상이 과거에 비해 심각한 이유는 '말' 때문이다. 양측의 말 폭탄이 몸싸움보다 심각한 후유증을 낳고 있다. 여야 지도부는 29일 하루에만도 거두어들이기 힘든 저주의 말들을 쏟아냈다. 민주당 이해찬 대표는 한국당을 '국회를 못 맡길 도둑놈'이라며 청산에 앞장설 것을 다짐했다. 홍영표 원내대표는 한국당의 저지투쟁을 '반개혁 정당의 난동'이라고 쏘아붙였다. 한국당의 독설도 만만치 않다. 황교안 대표는 패스트트랙 발의를 "의회 쿠데타"라고 했고, 나경원 원내대표는 "(대통령에게) 홍위병을 선사하는 공수처법"이라고 목청을 높였다.과거에도 여야가 국회 본회의장에서 격돌하고, 야당의 장외투쟁으로 정국이 경색됐던 적이 한두번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때도 협상을 위한 퇴로는 열어놓았다. 협상 주체에 대한 직접적인 도발은 자제했던 것이다. 여야 협상에 진전이 없으면 여당의 주인인 대통령과 제1야당 대표가 영수회담으로 돌파구를 열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재임 중에 한나라당 이회창 대표와 7번이나 만났다.동물국회 시절에도 언어의 금도는 있었다. 하지만 지금 여야 정치는 동물적 행태보다 패륜적 언행이 더 문제다. '난동을 부리는 도둑놈(자유한국당)'과 '정권의 홍위병을 세우는 의회 쿠데타 세력(더불어민주당)'이 타협을 위한 대화를 모색하기는 힘들다.지난 16일 문재인 대통령은 민주당 이 대표와 홍 원내대표에게 "여야정 협의체를 가동해 쟁점사안을 해결하는게 좋겠다"고 말했다. 민주당이 패스트트랙 발의를 결정하기 전에 대통령의 제안을 실행했으면 '동물국회'는 면했을지 모른다. 하지만 현재의 말 폭탄과 맞고발 대결로 대화 자체가 당분간 힘들게 됐다.분명한 건 여야의 '정치인격'으로는 패스트트랙으로 실현하려는 다당제 국회가 상대의 절멸을 원하는 정치동물들의 난장판으로 변할게 틀림없다는 점이다. /윤인수 논설위원

2019-04-29 윤인수

[참성단]어벤져스가 뭐길래

영화관이 1년에 73일 이상 한국영화를 반드시 상영해야 하는 '스크린 쿼터제'는 늘 영화계의 뜨거운 감자였다. 폐지론이 고개를 들 때마다 한국영화 붕괴를 우려한 영화인들이 길거리로 나서 삭발투쟁을 벌였다. 한국 최고의 감독 봉준호도 한때 스크린 쿼터 폐지를 반대하며 1인시위를 벌인 적이 있다. 그러면서 자신은 '괴물(1천300만)'과 '설국열차(935만)'로 스크린을 독점하는 아이러니를 연출했다.한국영화 발전에 스크린 쿼터제는 큰 도움이 됐다. '도둑들' '광해, 왕이 된 남자' 두 편의 영화에 무려 2천500만명의 관객을 부른 2012년 7~9월, 한국영화 좌석 점유율은 70.4%였다. 물론 이 때문에 아픔도 있었다. 매년 평균 100편의 한국 영화가 제작되지만, 흥행작을 제외하곤 대부분이 개봉관을 찾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때마다 등장한 게 '스크린 상한제'다. 우리나라처럼 특정 영화의 상영 점유율이 90%를 넘는 경우는 전 세계 어디에도 없다.지난 24일 개봉한 영화 '어벤져스: 엔드게임'이 전국 3천58개 스크린의 95.7%인 2천927개를 독점했다. 덕분에 개봉 첫날 134만873명의 관객을 동원해 오프닝 기록도 세웠다. 스크린 부족으로 1개 스크린에 4개 영화가 '시간 나눠먹기'를 벌였다. 이 때문에 스크린 독과점 논란이 다시 불거졌다. '군함도' '명량' '신과 함께' 등 천만 관객영화가 나올 때마다 논란이 없었던 건 아니지만, '팔이 안으로 굽는다'며 그때는 넘어갔었다.하지만 이번엔 예사롭지가 않다. 찬반논란이 뜨겁다. 박양우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이 지난 22일 "스크린 독과점을 막기 위한 스크린 상한제를 위한 관련 법을 개정하겠다"고 말한 후, "정부가 '어벤져스 규제'로 인기 영화 상영을 제한하려 한다"며 온라인을 뜨겁게 달구고 있어서다. 이미 국회에는 스크린 상한제를 제도화한 4개의 법안이 계류 중이다. 다만 너무 민감한 사안이라 마치 '고양이 목 방울 달기'와 같다. 프랑스 등 해외에서는 영화 한 편이 전체 스크린의 30%를 넘지 못하는 관련 법안이 시행되고 있다. 스크린 상한제를 적용하면 특정 영화의 독점을 막고 관객들은 다양한 영화들을 만날 기회가 늘어날 것이다. 하지만 영화인들의 속셈은 복잡하다. 한국영화가 타격을 받아 1천만 한국영화를 보기 힘들지도 모른다. 극장업계도 난색을 보이고 있다. 도대체 어벤져스가 뭐길래, 이래저래 영화판이 시끄러워지게 됐다. /이영재 논설실장

2019-04-28 이영재

[참성단]진보 대연합

1990년 2월 민정 민주 공화 3당이 합당해 '민주자유당(民主自由黨)'이 탄생했다. 두 글자로 줄이면 '民自', 한글로 쓰면 '민자', 그래서 밋밋하고 '개성 없음'을 꼬집는 '민짜'로 발음되기 쉬우므로 당명을 바꾸는 게 좋겠다는 의견도 꽤 많았다.당시 3당을 '보수 대연합'으로 불러야 할지, 아니면 '보수·중도합당'으로 불러야 하는지를 두고 의견도 분분했다. 정치학자들조차 뭐라 부를지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원래는 1당만으로 국회의 과반수를 확보하는 당이 없을 때, 내각책임제의 경우는 복수의 당이 합쳐서 정권을 만드는 경우를 '연립' 또는 '연합정권'이라고 부른다. 이 경우 제1당과 제2당이 합쳐서 정권을 탄생시키면 '대연립' 또는 '대연합', 제1당이 제3당과 합치면 '소연립' 또는 '소연합'이라고 부른다. 하지만 제2당인 평민당이 빠졌으니 '대연합'이라고 할 수도 없었다. 그래도 당시 언론은 3당 합당을 '보수 대연합'이라고 불러주었다. 진보성향의 강력한 제1야당인 평화 민주당이 빠졌지만, 보수와 중도가 모두 모였으니 '보수 대연합'이라고 해도 크게 어색하지 않다고 본 것이다.더불어민주당과 바른미래당, 민주평화당, 정의당 등 4당이 선거제도 개편 등 '패스트트랙(신속처리) 3개 안건'에 합의함으로써 정국은 1여 4야에서, 순식간에 4여 1야로 바뀐 느낌이다. 일부에선 90년 '보수 대연합'을 빗대어 '진보 대연합' '한지붕 네 가족당'이란 소리도 들린다. 이게 꼭 틀렸다고 볼 수 없는 것이 신속처리 절차에 돌입하면 최장 330일이 걸려 이 기간에 4개 당은 최대 쟁점 현안에서 협력이 불가피하기 때문이다.나라의 운명이 백척간두(百尺竿頭)라면 여·야 5당이 합쳐 1당이 된들 탓할 사람은 없다. 하지만 지금이 그런 상황도 아니다. 패스트트랙을 강행하려는 '진보 대연합'이 국민 다수로부터 공감대를 얻지 못하고 있는 것도 문제다. "밥값 못한다"며 국회의원의 수를 줄이자는 여론이 비등한 상황에서 연동형 비례대표제를 '밥그릇 싸움' 정도로 이해하는 국민도 꽤 된다. 특히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 설치법은 '고위 공직자의 권력형 비리 근절'이라는 애초 취지와는 달리, 국회의원과 대통령 친·인척, 장·차관이 대상에서 제외됨으로써 공분(公憤)은 하늘을 찌르고 있다. 도대체 누구를 위한 국회인지 생각하게 하는 요즈음이다. /이영재 논설실장

2019-04-25 이영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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