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성단

 

[참성단]글쓰기의 괴로움

'탁'하고 치니 '억'하고 쓰러졌다. 경찰이 변명이라고 내놓은 이 한 줄의 문장에는 독재의 교만이, 사건을 은폐하려는 권력의 교활함이, 한 청년의 죽음이 묻어난다. 1987년 1월 14일 남영동 치안본부 대공분실 509호 조사실에서 청년 박종철은 극심한 공포 속에서 고문을 받다가 사망했다. 처음에 정부와 경찰은 은폐를 시도했다. 하지만 처음 사체를 본 의사, 사체 보존명령을 내린 검사, 국과수 부검의, 그리고 기자의 노력으로 사건 전모가 만천하에 드러났다. 그나마 정의가 살아 있어 가능했다.만일 그때 모두 박종철의 죽음을 외면했다면, 사건의 진상 파악은 물론이고 민주화도 매우 더디게 찾아왔을 것이다. 경찰은 처음엔 관련자가 2명이라고 사건을 축소했었다. 하지만 언론이 5명이 가담한 것을 밝혀내면서 국민의 분노가 폭발했다. 독재의 두려움으로 떨던 국민들이 마침내 민주주의를 향한 열망을 터트린 것이다. 그리고 6월 29일 대통령 직접선거와 국민의 기본권 보장, 구금된 민주화 인사들의 석방을 내용으로 하는 6·29 선언이 발표됐다. 감옥에 갔던 양심수들이 사회에 속속 복귀했다. 이들 중 상당수가 현재 권력의 요직을 독차지하고 있다.요즘 그들이 주류를 이루는 우리 국회를 보면 과연 우리나라가 민주주의 국가인가 라는 의구심이 든다. 절차와 토론이 철저히 무시된다. 감사원장을 공격하는 집권당 의원들을 보면 무섭기까지 하다. 군사독재 정권도 이 정도는 아니었다. 이뿐만이 아니다. 조금이라도 불리한 일이면 침묵으로 일관하는 청와대. 울산시장 선거개입 의혹 등 여권 인사들이 연루된 사건들에 대한 검찰 수사는 4 ·15 총선 석 달이 지났는데도 감감무소식이다. 윤미향 사태도 마찬가지다. 검찰은 수사할 기미조차 없다. 언론도 이를 지적하지 않는다. 글쓰기가 점점 어려워지고 있다. 이는 글로 독자들을 설득하기가 점점 어렵다는 뜻도 된다. 그러니 글 쓰는 이들이 괴로울 수밖에 없다. 이유야 많겠지만, 민주주의가 무너져 내리고 있는 것도 한 원인이다. 만일 지금 '박종철 사건'과 유사한 일이 일어나면 어떻게 될까. 양심 있는 의사, 소신 있는 검사, 열정을 가진 기자가 과연 있을까. 이럴 때일수록 정의가 살아 있어야 한다. 언로(言路)가 열려야 한다. "진중권이 언론보다 낫다"는 말이 나온다면 이 역시 슬픈 일이다./이영재 주필

2020-07-30 이영재

[참성단]'부적합 (unfit) 한 인물'

한번 뱉은 말은 평생 뒤를 따라다닌다. 10년 전, 20년 전 무심코 내뱉은 말이 버튼 하나로 재생되는 세상이다. 아무리 변명을 해도 통하질 않는다. 그래서 말할 때는 열 번을 생각해야 한다. 어른들이 자식에게 늘 좋은 말만 하라는 것도 그런 이유다. '좋은 말은 덕으로 오고 나쁜 말은 화로 온다'는 것을 그분들은 이미 경험으로 터득했다.말은 칼이다. 잘못 뱉은 말은 상대방을 여지없이 베고 만다. 그 아픔은 당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른다. 그래서 말은 많이 할수록 위험하다. '교묘한 말은 덕을 어지럽힌다(巧言亂德)'고 공자는 말했다. 노자는 '아는 자는 말하지 않고, 말하는 자는 알지 못한다(知者弗言, 言者弗知)'고 말했다. 한마디 거짓말을 주워담기 위해 열 마디의 말을 보태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는 경우를 우리는 너무도 많이 보았다. 요즘 정치권에서 아무 말이나 마구 쏟아내는 경우가 부쩍 늘었다. 그중 추미애 법무부 장관의 말이 압권이다. 장삼이사가 모이면 추 장관의 말을 두고 쑥덕거린다. 질문하는 국회의원에게 "소설 쓰시네"라는 말을 아무렇지 않게 말하는 그 두둑한 배짱이 어디서 나오는지 국민은 궁금하다. 수없이 많은 설화(舌禍)를 일으켜도 청와대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는 것도 이채롭다. 오죽하면 부동산정책의 실패를 추 장관이 말로 가리는데 청와대가 막을 이유가 없다는 말까지 나온다.19대 대선 당시 문재인 후보 캠프에서 공익제보지원위원회 공동위원장을 맡았던 신평 변호사가 자신의 SNS에 추미애 법무부 장관을 "우리 사회에서 대표적으로 (자리에) unfit(부적합)한 인물"이라고 평가했다. 신 변호사는 추 장관의 안하무인격이며 편향된 태도, 저급한 용어 사용 등을 이유로 들면서 "공정한 국가 사법질서의 한 축을 이끌어 나가야 할 법무부 장관으로서 그는 도저히 적합하다 할 수 없다"고 지적했다. 추 장관에 대한 평가야 신 변호사의 개인적 견해니 논외로 쳐도, 우리 주변, 특히 21대 국회의원 중 '부적합 인물'들이 너무 많다. 우리가 이들에게 고귀한 '공인의 품격'까지 기대하는 것은 물론 아니다. 하지만 다선이건 초선이건, 알량한 권력을 손에 쥐기만 하면 말을 막한다. 말의 무서움을 모른다. 자신이 그 자리에 '적합한 인물'인지 지금 당장 거울을 보라. 초라한 자신의 모습이 보일 것이다. /이영재 주필

2020-07-29 이영재

[참성단]소설이 된 정치

그제 국회 법사위가 추미애 법무부 장관의 발언으로 발칵 뒤집어졌다. 미래통합당 윤한홍 의원이 고기영 법무부 차관에게 "올해 1월 서울동부지검장으로 와서 4월에 법무부 차관으로 자리를 옮긴 것이 추 장관 아들 수사와 관련 있는 것 아니냐"고 질문하자, 추 장관이 "소설을 쓰시네"라며 끼어들어서다. 아들의 휴가 미복귀 의혹을 상기시키는 질문에 불쾌해진 추 장관이 질문 자체를 '소설'로 폄하하고 조롱하며 맞받아친 것이다.'소설 쓰고 앉아 있네(혹은 자빠졌네)'라는 표현은 일상에서 흔하게 접하는 관용적 표현이다. 아무 생각 없이 허무맹랑한 소리를 지어낸다는 비난의 의미를 담고 있다. 하지만 목숨 걸고 소설을 쓰는 작가들 입장에선 그야말로 허무맹랑한 표현이다. 황석영에게 소설은 최소한 "엉덩이로 쓰는" 중노동이다. 김연수는 권위있는 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된 뒤 가진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죽을 고비를 넘길 만큼 고통스러운 소설 쓰기를 계속하라고 등을 떼민다"며 "큰일 났다"고 했다.소설이 허구라 해서 소설 쓰기를 거짓말하기 쯤으로 폄하하는 관용적 태도도 소설의 본질과는 거리가 멀다. 소설의 이야기는 허구이지만 등장인물, 사건, 배경의 개연성으로 현실적인 보편성을 갖는다. 소설은 허구이되 현실에서 볼 수 없는 진실로 독자를 안내한다. 문학의 효용이다. 자신의 영혼과 육체를 팔아 한 편의 소설을 창작하는 작가들에게 '소설 쓰고 앉아 있네'라는 표현은 모욕적이다.추 장관은 법리에 따라 사실을 밝히는 국가 법무를 총괄하는 장관이다. 윤 의원의 질문이 불쾌해도 소설이냐 아니냐는 시비를 일으킬 일이 아니다. 검찰 수사 중인 아들의 의혹이 법리에 따라 사실대로 밝혀질 것이라는 입장을 밝히면 그만이다.그런데 정작 법무부와 검찰을 중심으로 소설 논란의 대상이 된 사건들로, 추 장관의 "소설 쓰시네" 발언은 계속 회자될 듯싶다. 지금 시중에선 채널A 전 기자와 한동훈 검사장의 '검언유착'사건과, KBS의 오보파동으로 초래된 '권언유착'의혹 중에 '무엇이 소설이냐'를 놓고 설왕설래가 한창이다. 검언유착은 녹취록 공개로 개연성이 흐려졌고, 권언유착은 KBS의 사과로 반대가 됐다. 두 사건과 의혹 중 어느 것이 소설로 판명되느냐에 따라 정국은 요동칠 것이다. 독자인 국민의 관심이 집중돼 결말을 미루기도 어렵다. 소설 속에서나 가능한 정치를 경험하는 시절이다. /윤인수 논설실장

2020-07-28 윤인수

[참성단]스파이 전쟁

007 제임스 본드 영향이 컸다. '스파이(spy)' 하면 낭만이 풍긴다. 잘생긴 얼굴에 세련된 매너. 여기에 풍부한 인문학적 상상력으로 좌중을 압도하며 아낌없이 돈을 뿌리는 여유까지. 하지만 꼭 그런 것만은 아니다. 스파이는 그저 평범한 사람이었다. 냉전시대 미국 CIA와 소련 KGB 스파이의 주된 활동은 군사·외교에 관한 정보수집이었다. 소련 붕괴 후 중국이 강자로 떠오르자 산업경쟁력이 중요해졌다. 첨단 기술 보호가 국가 안보의 중요한 요소로 부상했기 때문이다.현대의 산업사회에서 정보가 중요한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말 그대로 정보를 빼내기 위해 '총성 없는 전쟁'을 벌인다. 첨단 기술 정보 자체가 엄청난 자산이기 때문이다. 국가나 기업은 상대 국가와 경쟁 회사의 정보를 캐내기 위해 온갖 수단을 동원한다. 수많은 산업 스파이들이 세계 각국에서 암약하고 있다. 전 세계적으로 기업 기밀 도난으로 입는 손실은 천문학적이라 계산조차 하기 힘들다. 세계 최고인 우리의 반도체 기술 역시 스파이의 주요 타깃이다.트럼프 미 대통령은 후보 시절부터 중국을 군사경제의 적으로 간주해 왔다. 집권 후엔 "중국은 우리의 일자리를 빼앗고, 기술을 빼내기 위해 온갖 스파이 짓을 하는 적"이라며 '시노포비아 (sinophobia·중국공포증)'를 확산시켰다. 본인이 직접 미·중 무역전쟁을 주도하고 중국 통신장비업체 화웨이에 대해 규제를 강화해 양국 간의 갈등을 고조시켰다. 물론 트럼프의 이런 행동에 중국정부와 화웨이가 빌미를 제공한 측면이 있다.트럼프 대통령이 최근 휴스턴 중국 총영사관을 폐쇄하는 강경조치를 취했다. 휴스턴에는 미 항공우주국 우주센터(NASA)와 바이오 등 첨단 연구소들이 집중돼 산업스파이가 가장 많이 암약했던 곳이다. 미국은 휴스턴 총영사관을 중국 공산당의 거대한 스파이 센터로 의심해 왔다. 그렇다고 미국과 중국이 역사적인 수교를 한 1979년 개설된 최초의 주미 총영사관을 하루아침에 폐쇄한 건 충격이다.하지만 중국도 곧바로 청두 미 영사관을 폐쇄했다. 분위기가 영 꺼림직하다. 폼페이오 미 국무장관이 며칠 전 연설에서 중국을 '중국 공산당'으로 표현하고 '세계 패권 장악에 나선 새로운 전체주의 독재 국가'라고 말한 것도 그렇다. 분위기가 스파이 전쟁으로 끝날 문제가 아니다. 어찌 됐건 고래 싸움에 새우등이 터지는 것이 아닌지 예의 주시할 때다. /이영재 주필

2020-07-27 이영재

[참성단]'천박한 도시 서울'

태어나서 처음으로 남산타워에 갔다. 밤이었다. 눈앞에 펼쳐진 야경은 황홀함 그 자체였다. 여러 나라 여러 도시의 야경을 보았지만 이런 야경은 처음이었다. 불꽃놀이에서 채 타오르지 못한 불꽃이 바닥에 그대로 떨어져 있는 듯했다. 외국인들이 서울의 야경을 왜 으뜸으로 치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서울의 야경을 보고 있자니 대한민국의 국력이 어느 정도인지 서울에 살지 않는 나 역시 자랑스러웠다.물론 낮의 서울은 다를 것이다. 그 곳이 어디든 도시는 늘 비정하고 차가운 곳이다. 그래서 문학과 영화, 음악의 단골 소재로 사용된다. 찰스 디킨스는 소설 '두 도시 이야기'에서 런던과 파리를 그렸다. 마틴 스코세이지 감독과 오우삼 감독은 뉴욕과 홍콩의 이면을 영화 속에 담았다. 잿빛 하늘, 메마른 공기, 번잡한 거리, 냉담한 이웃 등 도대체 정을 느끼기가 어려운 게 도시다. 그렇다고 도시가 무조건 나쁘기만 한 곳은 아니다. 각종 편의시설로 인해 도시민들은 온갖 특권을 누린다. 이런 점 때문에 많은 이들이 정신없고 끔찍한 삶에 넌더리를 내면서도 대도시로 모여들고 이런 것들에 익숙한 나머지 도시를 떠나지 못한다.서울도 그런 곳이다. 조용필이 1988년 서울올림픽 개최를 기념해 만든 노래 '서울 서울 서울'은 우리의 서울을 이렇게 노래한다. '해 질 무렵 거리에 나가 차를 마시면/내 가슴에 아름다운 냇물이 흐르네/이별이란 헤어짐이 아니었구나/추억 속에서 다시 만나는 그대/(중략)/서울 서울 서울 아름다운 이 거리/서울 서울 서울 그리움이 남는 곳/서울 서울 서울 사랑으로 남으리 워 워 워 Never forget oh my lover Seoul'.이해찬 민주당 대표가 서울을 '천박한 도시'에 비유했다가 곤욕을 치르고 있다. 총선을 앞두고 부산을 "초라한 도시"라고 해 논란을 일으킨 지 몇 달이 지나지도 않았다. 파문이 커지자 "서울의 집값 문제 및 재산 가치로만 평가되는 현실에 대해 안타까움을 표현한 것"이라고 급진화에 나섰다. 그러나 정말 그런 뜻이었다면 이 대표의 눈에 세계에서 가장 비싼 도시 뉴욕은 천박함을 넘어 쓰레기 도시로 보일 것이다. 이번 발언은 누가 들어도 4·15 총선에서 50개 의석수 중 무려 41개를 안겨준 서울 시민을 모욕한 것이다. 수도 이전을 위해 무심코 던진 말일 테지만, 이로인해 국론이 또다시 분열될까 눈앞이 아득하다. /이영재 주필

2020-07-26 이영재

[참성단]수돗물 포비아

수돗물은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발명품으로 꼽힌다. BC 312년 로마의 재무관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가 설계한 '아피아 수로' 이후, 인류의 평균 수명은 30년이 연장됐다. 그는 주변의 샘물과 호수의 물을 관을 통해 끌어와 공동 목욕탕과 분수대에 공급했다. 로마시민이 얼마나 흡족해 했을지 눈에 선하다. 수도가 없었다면 고대 로마제국의 영광도 없었을 것이다. 로마 황제들은 도로만큼이나 상수도 설치에도 심혈을 기울였다. 로마시대 수도관의 총 길이는 578㎞에 이르렀다고 한다. 이때문에 150만명이 살고 있던 로마에 물이 넘쳤다.가정에서 수도가 사용된 건 1613년 영국 런던에 민간기업 '뉴리버 수도회사'에 의해서다. 비록 일부 지역이었지만 수도관을 깔고 템스 강의 물을 끌어다 급수를 시작했다. 위생상태는 그리 신통치 않아서 1848년 콜레라가 두 차례 발생, 2만5천명이 목숨을 잃으며 '수돗물 포비아(공포증)'가 확산했다. 이때 존 스노가 전염병의 주요 원인이 수인성 병원균이란 걸 밝히면서 전 세계 도시에는 상하수도 시스템 설치가 본격화됐다. 최초 고도정수처리공정은 1907년 프랑스에서 처음 시작됐다.국내 최초의 정수장은 1908년 서울 성동구 왕십리에 세워진 뚝섬 정수장이다. 미국인 콜브란과 보스트윅이 고종으로부터 상수도 사업권을 따내 건설했다. 인천에 상수도가 보급된 건 1910년 12월 1일이었다. 노량진에서 넘어온 물은 송현배수지로 합류됐고 이곳에서 인천 전역으로 퍼져 나갔다. 1883년 개항 전만 해도 전동, 용동, 화수동, 송림동 등엔 큰 우물이 있어 지역 주민들의 식수 확보에 어려움은 없었지만, 개항 후 인구가 증가하고 신포동 일대에 일본, 중국, 영국 조계지가 조성되며 상수도의 필요성이 높아졌다.인천 서구 한 빌라 수돗물에서 깔따구 유충이 발견된 이후 파문이 전국으로 확산하고 있다. 서구는 지난해 붉은 수돗물 파동으로 곤욕을 치른 곳이라 인천 시민이 받은 충격은 컸다. 물만 보면 공포를 호소한다. 1년 만에 수돗물 파동이 재발할 거라고는 인천시도 상상을 못 했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인천시의 대응은 한심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치수는 지도자의 최고 덕목으로 꼽힌다. 물을 다스리지 못하는 지도자는 자격이 없다. 물을 지키는 일이 갈수록 어려워진다는 걸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이번 인천시 조치는 실망 그 자체다. /이영재 주필

2020-07-23 이영재

[참성단]지렁이와 유충

1978년 미국에서 햄버거에 얽힌 황당한 '괴담'이 나돈 적이 있다. 맥도날드의 햄버거 패티가 쇠고기가 아닌 지렁이 고기로 만들어졌다는 소문이 급속도로 퍼진 것이다. 이로 인해 이 회사의 햄버거 판매량은 순식간에 30%나 떨어졌다. 사실 이 소문은 터무니없기 그지 없었다. 무엇보다 이 회사가 햄버거 패티에 쇠고기 대신 지렁이를 넣을 이유가 없었다. 당시 쇠고기는 1파운드에 약 1달러였고, 지렁이는 5~8달러였다. 지렁이가 보양식으로 인기를 끌었다면 모를까 쇠고기보다 훨씬 비싼데다가 대량 공급받기도 어려운 지렁이를 갈아 햄버거 패티를 만들 리 없었던 것이다.그런데도 소문이 사그라들지 않자 회사는 사실관계를 알리기 위해 총력전을 펼쳤다. TV, 신문 광고를 통해 '우리 회사는 쇠고기만 쓴다'고 대대적으로 홍보했다. 매장들도 앞다퉈 '우리 매장 햄버거에는 지렁이 고기가 들어있지 않습니다'라고 써붙였다. 하지만 바닥을 향하던 매출 그래프는 반등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이유는 따로 있었다. 맥도날드가 햄버거에 지렁이가 없다고 강변할 수록 오히려 소비자들은 '지렁이가 든 햄버거'를 떠올리며 거부감을 느끼는 것이었다. 햄버거 괴담과 현재 전국으로 확산하고 있는 수돗물 유충 사태는 약간 비슷한 구석이 있다. 정부가 유충이 인체에 무해하다고 밝혔지만 생수와 정수기 필터 등의 수요가 급증하는 것에서 보듯 시민들의 불안감은 가라앉지 않고 있다. "유충을 먹었을 때 많은 양이 아니라면 몸 속에서 소화가 되기 때문에 해가 되지는 않는다"는 전문가의 진단은 오히려 혐오감을 부추기는 모양새다.'햄버거에 지렁이가 없다'는 사실을 알리는 '정공법식' 마케팅이 매출 회복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걸 깨달은 맥도날드는 '지렁이'란 단어는 입밖으로도 내지 않는 대신 감자튀김과 밀크셰이크에 마케팅을 집중함으로써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소비자의 관심을 다른 쪽으로 돌려 햄버거와 지렁이의 연결고리를 끊는 전략을 택한 것이다. 하지만 우리 정부나 자치단체가 맥도날드식 전략을 택해서는 안된다. 햄버거는 안 사먹으면 그만이지만 물은 없어서는 안될 삶의 일부다. 유충이 무해하다고 하지만, 시각적·정서적 혐오감으로 정신건강을 해친다면 이 또한 인체에 유해 한 것 아닌가. 당연히 정부가 취해야 할 전략은 원인을 철저히 규명해 국민에게 알리고 설비와 시스템을 개선하는 정공법이다. /임성훈 논설위원

2020-07-22 임성훈

[참성단]레임덕

그래도 여기까지 왔으면 많이 온 것인지도 모른다. 대부분 임기 반환점을 도는 3년 차 초입에 꺾였다. 레임덕 말이다. 김대중 정부는 정현준, 이용호, 진승현 게이트가 터졌다. 노무현 정부는 행담도 개발의혹, 부동산값 폭등으로 곤욕을 치렀다. 이명박 정부는 대통령의 형이 포함된 '영포라인'과 민간인 사찰이, 박근혜 정부는 성완종 리스트와 비선 실세 파동으로 결정타를 맞았다. 모두 3년 차에 일어난 일들이다.노무현 대통령은 2007년 4월 개헌 발의 국회연설문에 "임기 3년이 지나면 당정관계 레임덕이 옵니다."라는 문구를 직접 써넣었다. 심지어 '임기 3년 차의 저주'라는 표현도 썼다. 인기 하락으로 힘든 시간을 보냈던 노 대통령의 고뇌가 절절하게 묻어난다. 레임덕이 오면 인사는 실패하고 정책은 꼬이며 여권은 분열하기 시작한다. 불안한 대통령의 표정을 읽은 각료들에게 대통령의 말발이 먹히지 않는다. 모든 것이 내리막길이다. 레임덕은 이렇게 무서운 것이다.노 대통령에 비하면 문재인 대통령은 그래도 행복한 편이다. 3년 차가 지났는데도 지난 4월 총선 후 지지율은 70%를 넘어섰다. 지지율만큼 문 대통령의 파워도 꺾일줄 몰랐다. 문 대통령의 말 한마디에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민주당은 '여의도 출장소'라는 말을 들어야 했다. 그런데 이번 그린벨트 해제를 두고 미묘한 징후가 감지된다. 17일 김상조 청와대 정책실장의 "(그린벨트 문제와 관련해) 당정이 입장을 정리했다"는 발표에도 추미애 법무부 장관, 정세균 국무총리, 이재명 경기지사, 이낙연 전 총리, 김부겸 전 의원은 공개적으로 반대 입장을 내놓았다. 당정이 입장 정리를 했다면 사실상 문 대통령의 재가가 난 셈이다. 그런데 20일 문 대통령이 "미래세대를 위해 그린벨트를 보존한다"고 발표했다. 문 대통령이 한 발 뒤로 물러선 것이다. 3개월 전이었다면 생각도 못 할 광경이다.레임덕은 대통령이 정책의 일관성 없이 뒤뚱거리는 오리처럼 흔들린다는 의미다. 국정 장악력이 떨어졌다는 뜻이기도 하다. 부동산 대책에 문 대통령의 말이 먹히지 않는다. 힘의 추가 이낙연 이재명 김부겸 등 차기 권력주자들에게 살짝 넘어간 느낌이다. 이제 여권의 차기 주자들은 문 대통령과 본격적인 '거리 두기'에 나설 것이다. 공교롭게 대통령의 지지율도 하락세다. 사실상 권력투쟁이지만, 레임덕이 오면 피해를 보는 건 결국 국민이다. /이영재 주필

2020-07-21 이영재

[참성단]28년 만의 '택배 없는 날'

CJ대한통운 김해터미널 대리점에서 일하던 서모(47) 씨가 이달 초 숨졌다. 그는 지난달 하순 가슴 통증을 인지한 다음 날 병원에 갔다. 심혈관 시술을 받고 이후 의식을 회복했지만 끝내 심정지 판정을 받았다. 유가족과 회사 노조는 고인이 아침 7시부터 하루 12~17시간, 주 6일 근무했다고 주장했다. 최근 3개월간 월 6천700~7천600개 물량을 배달했다고 한다.택배연대노조는 최근 서울 중구 CJ대한통운 본사 앞에서 연이은 택배 노동자 사망에 책임을 지고 대책을 마련하라고 촉구했다. 노조에 따르면 코로나 19로 인해 작업 물량이 평균 30~40% 늘었다. 수많은 택배 노동자가 과도한 업무 때문에 고통받는다고 한다. 상반기에만 택배 노동자 3명이 숨졌다.이들은 일요일과 공휴일만 쉰다. 주당 78~90시간을 일한다. 근로기준법상 법정 노동 시간인 주 52시간을 훨씬 초과한다. 택배 노동자는 법적으로 노동자가 아니라 개인 사업자다. 노동자가 아니라 법정 근로시간을 초과해도 법적인 문제가 없다. 한국교통연구원에 따르면 2018년 택배 노동자들의 하루 평균 노동시간은 12.7시간, 월평균 근무일은 25.6일이었다.쿠팡 등 주요 택배사 노동자들이 8월 14일 공식적으로 하루를 쉰다. 한진이 1992년 택배사업을 한 후 처음으로 '택배 없는 날'이 지정된 것이다. 토요일인 광복절 대체 휴일이 지정되면 최대 4일까지 늘어난다. 노동계는 지난해부터 택배 노동자의 '쉴 권리'를 요구해 왔다.문재인 대통령은 SNS를 통해 환영했다. "기사님들이 휴식과 재충전의 시간을 가질 수 있도록 응원해주시길 바란다"며 "택배가 조금 늦어지더라도 함께 행복했으면 좋겠다"고 희망했다.택배 노동자는 K-코로나 방역의 숨은 주역이다. 밀려드는 배송 물량을 온몸으로 받아냈다. 여럿 앞에서 시민에게 봉변을 당해도 꿋꿋하게 일어섰다. 노조는 오히려 '휴일을 지지해준 국민께 감사하다'고 했다.이참에 근로기준법에 맞는 근무 환경이 조성돼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하지만 현실의 벽은 높다. 하루 쉬면 그만큼 물량이 쌓이는 것 아니냐는 걱정을 한다. 다음 날 새벽까지 일할 바에는 휴일이 없는 게 낫다는 푸념도 들린다. '택배 주문 없는 날'을 지정하자는 주장이 공감을 얻는 이유다. /홍정표 논설위원

2020-07-20 홍정표

[참성단]신발의 정치학

신발은 종종 정치적인 항의의 표시로 사용되곤 한다. 2008년 12월에 이라크에서 기자회견을 하던 부시 대통령에게 이집트 알바그다디야 TV 알 자이디 기자는 욕을 섞어가며 신고 있던 신발 한 짝을 부시에게 던졌다. 곧이어 "이건 과부들과 고아, 이라크에서 죽은 사람이 주는 것"이라며 나머지 한 짝도 던졌다. 미국의 이라크 침공에 대한 항의의 표시였다. 첫 번째 신발은 부시가 머리를 숙이는 바람에 빗나갔고 두 번째 신발은 옆에 있던 이라크 총리가 막으면서 소란은 진정됐다.2012년 2월 초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접경 에레즈 지역.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평화협상 재개를 독려하기 위해 가자지구를 방문하려던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이 탄 차량에도 흥분한 팔레스타인 시위대들이 신발을 던졌다. 반 총장이 그동안 이스라엘에 편향된 태도를 보인 것에 대한 항의의 표시였다.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는 긴급하게 시위대의 과격한 행동에 대해 반 총장에게 머리를 숙여 진심으로 사과했다.중동인들은 신발을 더럽고 부정한 것으로 생각한다. 그래서인지 신발 투척을 용서받지 못할 무례이자 명예훼손 행위로 여긴다. 신발을 던지는 건 상대방을 밑바닥만도 못한 대상으로 취급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2011년 이집트 혁명 당시, 분노한 군중이 무바라크 대통령에게 신발을 던지며 항의와 분노를 표출한 것도, 2009년 6월 오바마 대통령이 구두를 신은 채 책상 위에 발을 올려놓고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와 전화를 걸면서 구두 밑창을 보였다가 큰 곤욕을 치른 것도 그래서다. 지난 16일 정 모씨가 국회를 방문한 문재인 대통령에게 신발을 벗어 던졌다가 현행범으로 체포돼 구속영장까지 청구됐다. 정 씨는 경찰 조사에서 "문 대통령이 가짜 평화를 외치고 경제를 망가뜨리면서 반성도 없고 국민들을 치욕스럽게 만들어 (대통령도) 모멸감을 느끼라고 던졌다"고 말했다. 18일 서울 종로구 예금보험공사 앞에서 열린 정부의 부동산 규제에 대한 항의 집회에서는 500여 명이 신발을 하늘에 던지는 신발 투척 퍼포먼스를 가졌다. 정 씨의 구두 투척에 영장까지 청구하는 경찰과 문 대통령을 조롱한 것이다. 우리도 실내에서는 신발을 벗는 등 신발을 깨끗이 여기지 않는 것은 마찬가지다. 이제 각종 정치 집회에 신발이 자주 등장할지도 모른다. /이영재 주필

2020-07-19 이영재

[참성단]히트상품 배정대

예전엔 야구 선수가 '잘하는지' '못하는지'를 선수의 인기로 평가한 적이 있었다. 하긴 야구를 잘하니 인기도 높았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그런 잣대로 선수를 평가하면 눈총을 받는다. 연봉 높고 인기 좋은 선수가 반드시 잘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요즘 프로야구는 OPS(출루율+장타율), BABIP(인플레이 타구 타율), wOBA(가중출루율) 등 각종 지표가 선수의 능력을 따지는 기준이 된다. 가령 WAR, '대체선수대비승리기여도'를 보자. 이는 평균적인 선수 대신 어느 특정 선수가 뛰었을 때 몇 승을 더 거뒀느냐를 통계학을 기반으로 한 수학공식으로 산출하는 지표다. 타자의 경우 공격, 주루, 수비 등이 반영된다. 전 같으면 호타준족, 잘 치고 잘 달리면 됐지만, 지금은 수비의 능력도 중요하다. 그래서 어깨가 튼튼해야 한다. 뜬 공을 잡아 홈에 던져 아웃카운트(보살)를 하는지 여부가 이 지표에 큰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요즘 kt wiz 팬들은 중견수 배정대를 보는 낙으로 산다. 이강철 감독도 그의 활약을 보면서 입을 다물지 못한다. 잘 치고, 잘 달리고, 잘 잡고, 잘 던져서다. 이 감독 스스로 "올해 kt의 히트상품은 배정대"라고 공언할 정도다. 그도 그럴 것이 15일 현재 타율은 3할 2푼 9리로 7위, 76안타로 6위, 도루 8개로 공동 9위, 보살 6개로 당당히 1위다. WAR도 3.03으로 전체 선수 중 5위다. 더 중요한 건 배정대의 연봉이 겨우 4천800만원이라는 점이다. 올해 10개 구단 평균 연봉 1억4천448만원, kt wiz의 평균 연봉 1억40만원에 비해서도 한참 못 미친다. 올 프로야구 최고 연봉자 롯데 이대호 25억원에 비하면 60분의 1 수준이다. "가성비 짱 "이란 말도 그래서 나왔다. 배정대는 타석에 서 있을 때보다 중견수 수비를 위해 필드에 서 있을 때가 더 아름답다. 시속 300㎞의 속도로 날아와 먹이를 낚아채는 제비처럼 '딱' 소리에 비호처럼 달려 다이빙캐치로 공을 잡아내는 수비 실력은 예술의 경지다. 어깨는 또 어떤가. 보살 1위 실력자답게 홈으로 던지는 공은 빨랫줄처럼 날아와 캐처의 미트에 꽂힌다. 그래서 웬만한 선수들은 중견수 플라이나 중견수 앞 안타에도 홈으로 들어올 엄두를 못 낸다. 특별지명으로 그를 놓아 준 LG트윈스가 왜 kt 전을 불편해하는지 kt 팬들은 모두 알고 있다. /이영재 주필

2020-07-16 이영재

[참성단]한국판 뉴딜

1933년 미국경제는 최악으로 치닫고 있었다. 실업률 25%, 국민총생산(GNP)은 반으로 줄고 국민총소득(GNI)도 20년대 초반 수준으로 떨어졌다. 그해 3월 취임한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은 전임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의 '스퀘어 딜(공평한 분배 정책)'과 윌슨 대통령의 '뉴 프리덤(신 자유 정책)'을 합성한 '뉴딜정책'을 내놨다. 이 안엔 모든 정책이 포함됐다. 막대한 자금을 푼 덕에 초반은 반짝 효과를 봤다. 실업자가 절반으로 줄고 성장률은 10%대를 달성했다. 하지만 1937, 1938년 재차 마이너스 성장의 불황에 빠졌다. 야심 차게 내놨던 '테네시 강 유역 개발' '산업부흥법' '농업조정법'이 실패했기 때문이다.루스벨트의 뉴딜로 대공황이 극복됐는지는 의견이 분분하다. 통화학파의 태두인 밀턴 프리드먼은 뉴딜이 미국의 고질병을 덧나게 했다고 혹평했다. 미국이 대공황을 극복할 수 있었던 것은 뉴딜보다 2차 세계대전으로 인한 '전쟁 특수'로 보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그렇다고 뉴딜을 폄하할 수는 없다. 여러 비판에도 불구하고 금본위제 폐지, 독점규제, 누진 소득세 도입, 특히 사회안전망 확대는 진보·보수학자를 떠나 뉴딜정책의 가장 큰 업적으로 꼽는다.문재인 대통령이 '한국판 뉴딜'을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2025년까지 총 160조원을 투입한다고 한다. 기존의 소득주도성장, 공정경제, 혁신성장 등 3대 정책에 '디지털 뉴딜'과 '그린 뉴딜', '사회안전망 확충' 등 새로운 3대 축을 더하겠다는 것이다. 하지만 문 대통령이 2022년 임기를 마치는 데 사업이 다음 정부까지 이어져야 하는 정책이어서 계속 추진될지는 의문이다.문 대통령의 뉴딜에 대한 집착은 대단하다. 후보 시절 때부터 "루스벨트는 공공 일자리를 만드는 뉴딜로 황금시대를 열었다"며 '한국형 일자리 뉴딜'을 수차례 제안했다. 하지만 정책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국민들과의 공감대가 형성돼야 한다. 루스벨트의 뉴딜정책이 결과적으로 성공했다는 평가를 받는 배경에는 취임 직후부터 30차례 진행한 라디오 연설 '노변정담'(爐邊情談)이 결정적 역할을 했다. 자신의 심정을 솔직하게 피력했다. 방송을 듣던 국민들은 자신들은 혼자가 아니며, 이런 대통령이라면 함께 어떤 위기가 닥쳐도 극복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졌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건 이거다. /이영재 주필

2020-07-15 이영재

[참성단]책 구매 인증 시위

이달 초 느닷없이 '김지은입니다'가 온라인 서점 알라딘 종합 인기도서 1위, 교보문고 일간 베스트 정치·사회 분야에 1위를 차지했다. 이 책은 안희정 전 충남 지사의 수행비서였던 김지은씨가 성폭력 피해를 세상에 알리고 대법원 최종 유죄 판결을 받아내기까지 장장 544일간의 행적을 기록한 것이다. 그런데 출간한 지 4개월이 지나서야 뒤늦게 베스트셀러에 올랐다. 누구도 예상 못 한 일이었다.이유가 있었다. 지난 5~6일 치러진 안 전 지사의 모친상에 문재인 대통령이 조화를 보내고 이낙연 등 유력 정치인들이 조문한 것에 대한 2030 여성들의 분노가 김 씨의 책 구매로 이어진 것이다. 일종의 시위였던 셈이다. 성폭력 가해자에게 살아 있는 '권력'이 거리낌 없이 조화를 보내거나 앞다퉈 상가에 집결하면서 피해자인 김씨가 심리적으로 크게 위축할지 모른다는 우려에 2030 여성들이 격려 차원에서 '행동'에 돌입한 것이다. 구매자의 대부분이 30대 여성(33.9%)과 20대 여성(24%)이었다. 이들은 트위터 등 SNS에 해시태그 '#김지은입니다'를 달고 책 구매를 인증하는 게시물을 올리며 책 구매를 독려했다. 최근 이런 구매 인증 시위가 또 일어났다. 이번에는 정세랑의 소설 '시선으로부터,'다. 이 책은 공교롭게도 성추행으로 고소당한 박원순 서울시장의 극단적 선택 이후 피해자를 향해 쏟아지는 2차 가해가 소설의 내용과 유사하다는 얘기가 퍼지며 온라인 서점 예스24 종합 순위 34위로 오르는 등 매출이 크게 늘었다. 이번 역시 박 시장을 성추행 혐의로 고소한 피해 여성과 연대(連帶)하려는 2030 여성들이 이 책으로 구매 인증시위를 펼치는 까닭이다. 이들은 성희롱을 당했던 기억을 공유하고, '#박원순_시장을_고발한_피해자와_연대합니다'라는 해시태그를 한 사람에게 책을 무료로 보내주기도 한다. 도서관에 이 책을 희망도서로 신청하는 경우도 꽤 있다.소설 속의 "어떤 자살은 가해였다. 아주 최종적인 가해였다"는 문장은 소셜미디어를 뜨겁게 달구며 2030 여성들을 한데로 묶는 상징으로 자리 잡았다. 이처럼 책 구매 인증시위에 대해서는 대부분이 호의적이다. 이제 '촛불'을 들어야만 저항한다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책을 구매해 읽으며 응원한다"는 책 구매 인증 시위가 바야흐로 신세대들의 새로운 저항 수단으로 자리를 잡은 느낌이다. /이영재 주필

2020-07-14 이영재

[참성단]수난받는 존 웨인

80이 넘은 '올드팬'들은 존 웨인이나 게리 쿠퍼가 풍긴 물씬한 '사내 냄새'를 아직도 잊지 못한다. 평원을 질주하는 마차. 험산 준령을 넘나드는 말 탄 사나이. 그들의 등줄기를 타고 내리는 진한 땀방울. 백인 우월주의가 밑바닥에 짙게 깔렸었지만, 그걸 따질 겨를 없이 서부영화의 황금시대는 배우와 관객이 서로 뒤엉키며 그렇게 지나갔다.서부영화는 크게 두 종류로 나뉜다. 마을을 지키는 보안관과 떠돌이 총잡이와 시시껄렁한 악당들이 등장하는 서부영화. 이 영화의 주인공들은 선한 눈매를 갖고 있을뿐더러 대체로 말이 없다. 왜 그들이 정착하지 못하고 이곳저곳을 떠도는지는 그 누구도 알지 못한다. 다만 지독한 악당이 선량한 마을 사람과 힘없는 농장주를 못살게 굴 때 비로소 총을 잡는다. 총구에 불이 번쩍하면, 악당들은 속절없이 쓰러지고 만다. 권선징악은 물론, 악당은 지옥으로다. 무지렁이인 줄만 알았던 그는 가벼운 미소만 남긴 채 홀연히 떠난다. 홀로된 농장 여주인의 애틋한 눈빛도 외면한 채.인디언과 제7 기병대가 등장하는 서부영화는 상황이 좀 다르다. 총을 쏘고 괴성을 질러대며 달려드는 인디언들. 위기의 순간이면 트럼펫 소리와 함께 등장하는 기병대. 추풍낙엽처럼 쓰러지는 인디언들. 그때는 몰랐다. 미국의 역사를 뒤집으면 인디언 멸망사가 된다는 걸. 이런 부류의 영화에 단골로 등장하는 배우는 단연 존 웨인이었다. 195㎝에 몸무게 102㎏의 건장한 체격, 그야말로 '남성성의 상징'이었다. 서부극의 단역이나 조연에 불과했던 그가 스타 반열에 오른 건 불세출의 감독 존 포드를 만나면서였다. 1939년 '역마차'에 출연하면서 만인의 스타가 됐다.사후 40여년이 지나 기병대장 존 웨인이 수난을 당하고 있다. 생전의 인터뷰, "나는 흑인들이 교육을 받아 책임감을 가지게 될 때까지는 백인들이 여전히 우월하다고 믿는다. 무책임한 사람들에게 리더십과 판단력이 필요한 지위와 권위를 주다니, 그건 안될 말이다"는 빙산의 일각이다. 그는 지독한 인종차별주의자였다. 오렌지카운티 존 웨인 공항의 이름 변경과 동상 철거에 이어 명문 LA USC 영화 대학원 내에 있는 그의 동상마저 곧 철거된다고 한다. 조지 루카스가 졸업한 미국 최고의 영화학과에 있던 동상이라 상징하는 바는 크다. "그때는 그런 시대였어"라는 말이 통용되지 않는 세상이다. /이영재 주필

2020-07-13 이영재

[참성단]사라진 老兵

6·25 전쟁의 최대 격전지로는 1950년 8월1일부터 9월24일까지 55일간 경북 칠곡군 가산면 다부리와 학산리 일대에서 벌어진 다부동 전투를 꼽는다. 우리 군과 미군의 첫 연합작전이라 그 의미는 크다. 광복절을 부산에서 치르겠다는 김일성의 호언에 인민군의 공세는 격렬했고, 패배하면 전쟁은 끝난 거나 마찬가지여서 우리 군 역시 방어에 사활을 걸었다. 그날 우리가 졌다면 지금의 대한민국은 없었을 것이다. 그때 그 전투의 지휘관은 백선엽 1사단장이 있었다. 극도로 사기가 저하된 사병에게 백 사단장의 그 유명한 말 한마디, "내가 등을 돌리면 나를 쏘라"는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그가 고지로 뛰어오르자 병사의 사기가 높아졌다. 그의 그런 호기로움에 미군의 막강 화력까지 더해져 마침내 승기를 잡았다. 당시 전투가 얼마나 치열했던지 우리 군 2천300명, 미군 1천200명, 인민군 5천700명의 전사자가 발생했다.인천상륙작전으로 전세가 뒤집히자 백 장군의 1사단은 가장 먼저 평양에 입성하는 부대가 됐다. 백 장군은 1952년 32세로 최연소 육군참모총장이 됐고 이듬해 대한민국군 최초의 4성 장군에 올랐다. 정전 회담 때는 한국군 대표로 참가했다. 백 장군은 1959년 합참의장을 지낸 뒤 1960년 5월 31일 예편했다. 그 후 프랑스, 캐나다대사와 교통부 장관을 두루 거쳤지만, 일체의 정치 활동은 하지 않았다. 다부동 전투의 영웅이자 창군 원로인 백선엽 예비역 대장이 지난 10일 별세했다. 향년 100세.백 장군은 '한미동맹의 상징'이다. 우리보다 미군들로부터 더 극진한 대접을 받는다. 지난해 11월 99세 백수(白壽 )기념 잔치도 미 8군이 준비했다. 그날 백 장군 앞에서 무릎을 꿇어 예의를 다한 해리 해리스 주한미국대사의 모습은 우리에게 긴 여운을 남겼다. 부음을 접한 로버트 에이브럼스 주한미군 사령관은 "진심으로 그리워질 영웅이자 국가의 보물"이라는 성명을 발표했다.그러나 정작 우리 정부의 백 장군에 예우는 너무도 인색하다. 백 장군이 친일 전력이 있다는 일부 정치권의 극렬한 반대에 서울 현충원 대신 대전 현충원 장군 2 묘역에 안장된다. 더불어 민주당에선 백 장군의 죽음에 그 어떤 성명서도 내놓지 않았다. 국론은 또 반으로 갈라졌다. 그럼에도 죽지 않고 사라진 노병은 하늘에서도 우리 조국을 지켜줄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이영재 주필

2020-07-12 이영재

[참성단]버블(bubble)

아름다운 꽃이 그렇게 많은데 그들은 유독 터키에서 들어 온 '튤립'에 푹 빠졌다. 처음 본, 단아하고 명징한 꽃잎에 모두 넋을 잃었다. 빚어낸 조각인가 했는데 만져보니 살아있었다. 때는 1610년대 초반, 네덜란드에 '튤립 광풍'이 불었다. 노랑, 빨강 등 단색의 꽃잎보다 다채로운 색상이 어우러지거나 줄이 가 있는 변종에 더 값이 치러졌다. 꽃값은 순식간에 천정부지로 뛰었다.처음엔 튤립 구입은 귀족들의 호사한 취미였으나 시간이 흐르면서 시민, 농민 등으로 확산했다. 당시 네덜란드는 산업의 호황과 동인도회사로 유럽에서 가장 풍요로운 삶을 영위했다. 모두 주머니에 돈이 넘쳐났다. 누구나 튤립 한 송이 정도는 살 수 있었다. 여기까지는 좋았다. 그냥 꽃을 사고파는 정도였으니까. 소동은 이듬해 수확하는 튤립 뿌리 선물거래에서 발생했다. 현물시장에서 튤립 값이 급등하는 걸 체험한 사람들이 튤립 뿌리를 사려고 선물거래에 몰렸다. 조금 희귀하다 싶은 튤립 뿌리 하나가 '새 마차 한 대. 말 두필'과 교환됐다. "희귀종만 손에 쥘 수 있다면 가게를 넘기겠다"는 자영업자들도 부지기수였다. 누가 봐도 '버블(bubble)'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몰랐다. 꽃이 피기 전까지는 어떤 색깔의 꽃이 필지 알 수 없었는데도 너도나도 뿌리 사재기 하는데 여념이 없었다. 마치 마법에 걸린 것 같았다.튤립 광풍은 1637년 2월 한순간에 거품이 꺼졌다. 가격은 100분의 1로 폭락했다. 눈물과 탄식이 네덜란드를 뒤덮었다. 수없이 많은 이들이 파산했고 스스로 목숨을 끊은 이가 한둘이 아니었다. 이때부터 튤립 파동은 거대한 '버블경제'를 가리키는 용어가 됐다. 일확천금을 노리며 불나방처럼 뛰어드는 이들의 심리상태를 가리켜 경제학자 갤브레이스는 '도취적 열병'이라고 지칭했다. 주식시장이 뜨겁다. 특히 제약 바이오 등 일부 종목은 마치 2000년 초반 IT 광풍을 연상케 한다. 셀트리온, 삼성바이오로직스를 비롯해 최근 상장된 SK 바이오팜의 연속 상한가는 실적이 아닌 기대심리에 따른 것이다. 전대미문의 바이러스 확산에 따른 불안감과 신약 개발의 기대감이 맞물리며 거대한 버블을 형성한 느낌이다. 물론 시장에 풀린 막대한 자금도 한 몫 하고 있다. 곧 공매도가 풀리면 어떤 일이 일어날지 아무도 모른다. 튤립 파동을 잊어서는 안 된다. 지금은 조심 또 조심할 때다. /이영재 주필

2020-07-09 이영재

[참성단]문제는 치마 보다 단추다

옷을 입는 사람의 입장에서 보통 남자 옷에는 단추가 오른쪽에, 여자 옷에는 왼쪽에 달려 있다. 남자 여자 불문하고 오른손잡이가 압도적으로 많은데 왜 단추의 위치는 다른 것일까. 사실 단추의 위치가 다른 이유를 알 수 있는 명확한 기록은 없다. 대신 패션 큐레이터 김홍기씨는 '옷장 속 인문학'이란 책을 통해 몇 가지 설을 제시한다. 우선 여성들의 모유 수유에서 유래했다는 설이다. 아기를 안은 모습을 떠올려 보면 쉽게 이해가 간다. 대부분의 엄마들은 아기를 안을 때 왼팔로 아기의 머리를 받치고 오른팔로는 아기를 감싸 안는다. 이런 자세에서는 왼쪽에 단추를 다는 것이 아기에게 젖을 주는 데 유리(?)하다. 이처럼 모성애가 느껴지는 첫 번째 설과 달리 두 번째 설은 다분히 남성적이다. 중세 기사들의 결투에서 기원을 찾기 때문이다. 기사들은 주로 칼을 왼쪽에 차고 다녔는데, 칼을 뽑기 위해서는 칼을 덮은 웃옷 단추부터 풀어야 했다. 오른손으로 칼을 뽑고 왼손으로는 단추를 재빨리 풀기 위해 단추를 오른쪽에 달았다는 설이다.두 가지 설 모두 고개가 끄덕여지지만 유력한 설은 따로 있다. 중세시대에는 남자를 자립적인 존재로 보고 스스로 옷을 입고 단추를 채울 수 있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오른손잡이가 대부분인 것을 감안해 단추를 오른쪽에 달았다. 반면 여자는 하녀의 도움을 받아 옷을 입었기 때문에 수동적이고 의존적인 존재로 보고 단추를 왼쪽에 달았다는 것이다. 남성우월주의에서 비롯된 '위치 선정'이라 할 수 있다. 경찰청이 여경을 상징하는 캐릭터인 '포순이'를 치마 대신 바지를 입은 모습으로 바꾸기로 했다. 기존의 포순이가 성별 고정관념과 성차별적 편견을 부추길 수 있다는 게 캐릭터 변경 이유인데 '지지'보다는 '비난'여론이 압도적이다. 인터넷에 "화장실 남녀 구분 표지판도 바꿔라" 등 조롱성 댓글이 잇따르더니 여경의 자질을 둘러싼 젠더 갈등으로까지 번지는 양상이다. 스코틀랜드의 킬트(Kilt)나 인도네시아 등 동남아국가의 사롱(sarong)처럼 남자들이 치마 형태의 옷을 입는 모습은 세계 곳곳에서 볼 수 있다. 치마를 바지로 바꾸는 것이 경찰청의 의도대로 성차별적 편견을 없애는 데 얼마나 기여할지 궁금하다. 차라리 경찰청이 "남성우월주의의 잔재인 단추의 위치를 여경 유니폼에서부터 바꾸겠다"고 선언했다면 어땠을까. /임성훈 논설위원

2020-07-08 임성훈

[참성단]슬픈 홍콩

그때 홍콩은 동경의 대상이었다. 화려한 야경과 물질적인 풍요, 영연방 국가로 그들이 누리고 있는 정치적 자유. 전쟁 직후인 1954년,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 '별들이 소곤대는 홍콩의 밤거리'로 시작되는 금사향의 노래 '홍콩 아가씨'의 유행도 이런 정서와 무관하지 않았다. 60, 70년대 홍콩 영화는 또 어떤가. 홍콩 영화를 보기 위해 꾸역꾸역 극장으로 몰려들었다. 왕유의 외팔이 시리즈와 쿵후 영화를 하도 많이 봐 제작사 '골든 하베스트'로고를 외울 정도였다.우리만이 아니다. 홍콩은 중국의 젊은이들에게도 선망의 대상이었다. 경제적 상황을 무시할 수 없겠지만, 중국에선 찾을 수 없는 '자유' '개방' '중립'이 홍콩에는 있었다. 많은 젊은이가 '홍콩 드림'을 꿈꾸며 모여들었다. '중국 청년 소군(리밍)도 그때 홍콩으로 들어와 맥도날드 가게 종업원 이요(장만옥)를 만난다. 모두 홍콩 드림의 주인공들이다. 사랑은 쉽게 이뤄지지 않고, 이별과 재회만 계속한다. 마침내 엇갈린 운명으로 각자의 길을 가는 두 사람…' 1997년 타임 지 선정 세계 10대 영화에 오른 첸커신( 陳可辛) 감독의 슬픈 영화 '첨밀밀(甛蜜蜜)'은 '홍콩 드림'이 그대로 녹아든 영화다. 하지만 영화에서 이들이 홍콩 반환을 앞두고 뉴욕으로 떠났듯, 별들의 도시 홍콩은 1997년 7월 1일 중국 반환 이후, 점점 과거의 명성을 잃기 시작했다. 시대적 상황에 따라 사회적 분위기가 변화무쌍했기 때문이다. 중국 정부는 국방과 외교를 제외한 행정·입법·사법의 자치권을 홍콩에 주며 '항인치항(港人治港: 홍콩인이 홍콩을 다스린다)'을 말했지만, 그럴수록 중국 정부를 믿을 수 없었다. 정치적 자유도, 경제적 풍요도 모두 잃을 거란 두려움이 홍콩인을 늘 따라다녔다. 홍콩인들은 하나둘 미국이나 캐나다 또는 본토로 넘어가기 시작했다.지난 7월 1일 보안법 시행으로 홍콩이 대 전환의 길을 맞고 있다. 많은 이들이 체포되고 체재 비판 서적들은 판매금지 됐다. 미국의 홍콩 특별지위 박탈까지 더해지면서 글로벌기업과 금융자본이 동요하는 등 1997년 홍콩 반환 당시 벌어진 '홍콩 탈출' 이른바 '헥시트(HK+exit)'가 재현될 조짐을 보인다. 이미 이민 상담과 해외 부동산 매입 문의가 급증하고 있다고 한다. 이제 홍콩의 밤에 더는 별들이 소곤 되지 않는다. '첨밀밀'처럼, 그저 슬픈 홍콩인들이 점점 늘어가고 있을 뿐이다. /이영재 주필

2020-07-07 이영재

[경인칼럼]광명·시흥 '눈물의 10년'

MB정부때 지정한 매머드급 보금자리지구변죽만 울리다 지정 철회후 특별관리 번복주민만 골탕… 6·17 부동산 대책 낙제점속정부 추가대책엔 '새공공택지에 포함' 마땅'6·17 부동산 대책'은 낙제점을 받았다.서울과 수도권은 상승세가 여전하고, 전세는 매물을 감췄다. 국민들 마음은 탈탈 털렸다. '내 집 마련의 사다리를 걷어찼다'는 불만이 폭발했다. 30·40대도 등을 돌렸다. 여권의 든든한 지원군이 변심한 것이다. 민심을 이기는 정부는 없다. 청와대는 사과했고, 여당 대표가 두 차례 고개를 숙였다. 전문가들은 현 정부가 21차례나 대책을 내놨는데 약발은 없었다고 비판한다. 국토부는 단편 빼면 종편은 4번뿐이라고 부득부득 우긴다. 효과 검증이 실없는 차수 논쟁으로 번졌다.역대 정부의 '부동산 때려잡기'는 두 갈래다. 중과세와 규제 강화가 한 묶음인 수요 억제책과 공급 확대 방안이다. 조세와 규제는 상황에 따라 조였다 풀었다 해도 뒤탈은 별 게 아니다. 반면 공급의 변환은 후유증이 심각하다. 보상이 따르는 공공 개발은 덤이 분명하나, 바뀐 정부가 변죽을 울리거나 늘어지면 재앙(災殃)이 된다. 광명·시흥이 그렇다.이명박 정부는 2010년 광명시와 시흥시 일원 17.4㎢를 묶어 보금자리주택지구로 정했다. 함께 지정된 4개 지구와는 비교 불가한 매머드 체급이다. 분당신도시(19.6㎢) 버금가는 면적에 사업비가 23조9천억원(2010년 기준)이다. 국토부 행동대장인 LH(한국토지주택공사)가 시행자로 낙점됐다. 주민들은 들떴고, 지역은 요동쳤다. 장밋빛 전망이 나돌았고, 조용하던 마을이 북적였다.요란 법석은 오래가지 않았다. 스텝이 꼬였고, 나가야 할 진도는 제자리였다. 거래는 묶였고, 토지와 건물 보상은 기약이 없다. 정권이 바뀌면서 '보금자리가 애물단지 됐다'는 소문이 돌았다. 꿈은 악몽이 됐다. 불안과 불만이 폭발 지경이었다. 보상을 염두에 두고 돈을 끌어다 쓴 주민은 피눈물을 흘렸다. 정부는 4년이 지난 2014년 지구 지정을 철회했다. 재원이 부족하고 사업성이 나빠졌다고 발뺌했다. 수도권에 새 정부 신상인 기업형 임대주택(뉴스테이)이 유행할 즈음이었다. 전(前) 정부 상품을 용도폐기한 거다.지구 해제 뒤 광명·시흥지구는 2015년 특별관리지역으로 다시 묶였다. 10년이 지나면 효력을 잃게 되나, 그 사이 환지방식으로 도시개발사업이 가능하다. 이번에도 LH는 딴청이었다. '주민에 의한, 주민을 위한 개발'을 제시했다. '주민 스스로'는 역부족이다. 또 5년이 지났다. 주민들은 공동대책위를 만들었다. 14개 마을별로 각개 전투를 하거나 연합전선을 구축했다. 출발이 앞선 동네는 진척이 빠르다. 정비사업 계획안을 내놨다.광명시와 경기도, 국토부는 엇박자 행보다. 시는 개별 사업이 난개발을 초래한다며 난색이다. 주민들이 어깨동무해야 빨리 갈 수 있다고 설득한다. 도는 어정쩡하다. 결정권한이 없다며 선을 긋는다. 관리계획 변경 권한을 쥔 국토부 눈치를 본다. 중앙정부는 팔짱을 풀지 않는다. 지자체가 알아서 추진하라는 거다. 주민 주도로 개발사업이 가능하도록 약속했기에 끼어들 여지가 없다고 한다. 주민들만 죽을 맛이다.문재인 대통령은 '부동산은 국정의 최대 현안'이라고 했다. 관련 부처에는 보완책을 주문했다. 징벌적 조세와 공급 확대에 방점을 찍었다. 직접 챙기겠다는 의지를 밝혔다. 정부는 새 대책을 서두른다. 7월 중 국회 통과가 타임 라인이다. 다주택자·임대법인의 등록세와 보유세 양도세 중과 방안이 유력해 보인다. 재건축·재개발 활성화와 함께 수도권 4기 신도시가 거론된다.광명·시흥지구는 후보지로 최적의 조건을 갖췄다. 사통팔달 교통 인프라에 서울 구로와 마주해 접근성이 뛰어나다. 길 하나 건너면 서울이고 강남이다. 강남 대체재에 목마른 무주택자들을 유인할 수 있다. 고양 하남은 경쟁이 되지 않는다. 지역을 쪼개도 분당 절반의 주거물량이 확보된다. 지친 주민과 지역이 막아설 이유가 없을 것이다.정부의 22차 부동산 대책안이 조만간 공개된다. 새 공공택지는 광명·시흥이어야 마땅하다. 이만한 입지와 조건이 없다. 주민들의 '10년 눈물'을 그치게 할 처방이다. 일석이조다./홍정표 논설위원홍정표 논설위원

2020-07-07 홍정표

[참성단]명맥 끊긴 '부천 도당굿'

굿의 사전적 정의는 '민속 무속의 종교 제의'이다. 무당이 음식을 차려 놓고 노래를 하고 춤을 추며 귀신에게 인간의 길흉화복을 조절해 달라고 비는 의식이다. 주로 마을의 안녕과 풍년을 기원한다. 지역마다 명칭을 달리 부른다. 황해도는 내림굿, 전라도는 씻김굿, 제주도는 심방굿이라 한다.경기도에서는 '도당굿'이라 불린다. 도당(都堂)이란 당을 높여서 부르는 말로 으뜸이 되는 곳을 상징하기 때문에 마을에서 최고의 신격이 거처하는 곳이다. 마을의 평안과 안녕을 관장하는 으뜸의 신당이라는 의미다.열화당 출판사가 펴낸 '경기도 도당굿'이란 책에는 부천시 중동 장말(장 마을)의 '장말 도당굿'을 화보로 생생하게 전한다. 굿이 열린 때는 1982년 12월 8일과 9일이다. 먼저 윗당으로 신을 모시러 가기 전에 아랫당에서 몸을 떨면서 춤을 추고 있는 도당할아버지의 모습을 소개한다. 할아버지가 걸친 두루마기는 몇 세대를 이어 전해지면서 낡을 대로 낡았다. 이어 도당할아버지가 앞장서고 그 뒤를 잽이들이 악기를 연주하며 따라간다. 마을 사람들은 젯상과 음식을 들고 그 뒤를 따른다. 윗당에 도착해 젯상을 차리고 삼현육각을 올리며 절을 한다. 윗당은 커다란 바위와 당나무로 이뤄져 있다. 굿이 끝나면 동네 청년들은 마을의 동서남북 네 군데 세워진 장승과 우물을 돌며 돌돌이를 하러 간다. 말미에는 마을의 아낙네들이 당집 안으로 들어와 합장 재배하며 다음 굿할 때까지의 복을 빈다.도당굿 대표 주자인 부천의 '장말 도당굿'이 사라질 위기다. 1990년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됐고, 300년이 넘은 것으로 추정된다. 덕수 장씨들의 집성촌인 장말에서 이어진 마을 공동체 축제의 장이다. 중동 신도시가 들어선 이후 민원(民怨)이 됐다고 한다. 주민들은 혐오시설인 굿당 자리에 주차장을 만들어 달라고 조른다. 굿 보유자가 갑작스럽게 사망하면서 후계자도 마땅치 않다는 소식이다.수원의 '영동 거북산당 도당굿'과 '평동 벌말 도당굿'은 이름만 남았을 뿐이다. 도당굿을 하면 굶어 죽는다는 생각에 아무도 전승하려 하지 않는다고 한다. 생계가 되지 않으니 문화도 전통도 살아남지 못한다. 소중한 정신의 줏대가 편견과 개발에 밀려 사라져 간다. 한국인의 정체성도 덩달아 희미해진다. 마을의 안녕은 누가 빌어주나. /홍정표 논설위원

2020-07-06 홍정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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