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성단

 

[참성단]책 읽는 부평

1998년 미국 시애틀 공공도서관의 사서인 낸시 펄(Nancy Pearl)은 다소 엉뚱한(?) 상상을 했다. "만약 시애틀의 모든 사람이 같은 책을 읽는다면?(If All of Seattle Read the Same Book)" 한 도시의 시민들이 같은 책을 읽고 다양한 독서 프로그램에 참여하는 '한 도시 한 책 읽기 운동'(One City One Book)은 이처럼 한 사서의 상상에서 출발했다.이 운동을 본격적으로 지구촌에 알린 소설은 하퍼 리(Harper Lee)의 '앵무새 죽이기'다. 2011년 시카고 시민들이 이 책을 함께 읽는다는 소식이 외신을 통해 전파를 타면서 세계 각국의 문화계를 자극한 것이다. 이어 '한 도시 한 책 읽기 운동'을 벤치마킹하는 사례가 잇따르더니 이제는 대표적인 독서운동 모델로 자리매김했다. 더불어 낸시 펄의 상상을 담은 'If All of Seattle Read the Same Book'이란 문장은 독서운동을 상징하는 슬로건으로 각 도시 이름에 맞게 응용되고 있다.이 운동이 우리나라에 상륙한 것은 2003년이다. 한국도서관협회가 주관한 '한 도시 한 책 읽기 운동'의 시범도시로 충남 서산시가 선정돼 황선미 동화작가의 '마당을 나온 암탉'을 시민들이 돌려 읽은 게 최초다. 인천에서는 부평구가 첫 테이프를 끊었다. 부평구와 부평구문화재단은 2012년 '만약에 53만 명의 부평구민이 같은 책을 읽는다면?'이란 타이틀을 내걸고 '책 읽는 부평' 사업을 시작했다. 첫해의 대표도서는 인문학 도서인 '거북이는 왜 달리기 경주를 했을까?'(김육훈 외)였다. 이어 지난해 '평화, 당연하지 않은 이야기'(정주진)에 이르기까지 모두 7권의 대표도서가 선정됐다. 매년 대표도서를 선정하고 독서프로그램을 운영하는 과정에는 주민들이 직접 참여한다.물론 모든 부평구민이 그해의 대표도서를 읽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책 읽는 부평' 사업이 독서와 토론문화 형성에 이바지하고 있다는 평가는 분명하다. 다만 예산 문제로 올해 독후감 공모전 등 일부 사업의 추진이 어려워졌다는 소식엔 아쉬움이 남는다. '2019년 책 읽는 부평 대표도서 선포식'이 내일(29일) 부평구청에서 열린다. 이 자리에서 선포될 또 한 권의 책이 다시 한 번 책 읽는 문화를 확산시키는 마중물이 되기를 기대해 본다. /임성훈 논설위원

2019-03-27 임성훈

[참성단]슈퍼 주총 데이

기업들이 한날 한시에 정기 주주총회를 개최하는 것이 이젠 관행이 됐다. 특정일에 주주총회가 몰리는 날을 뜻하는 '슈퍼주총데이(super 株總day)'라는 용어까지 나왔으니 말이다. 지난 2016년 3월 25일엔 무려 818개 기업이 주주총회를 열어 사상 최대라는 기록을 세웠다. '슈퍼주총데이'로 주주의 권리가 침해된다는 비난이 비등하자 일부 개선되긴 했지만, 여전히 한날 한시에 주총이 몰려 있다. 12월 결산 코스피·코스닥 상장법인 2천67개사 중 오늘 328개사가, 29일에는 537개사가 정기 주총을 개최한다. 이렇게 주총을 여는 것은 소액주주의 참여를 막기 위해서다. 한 날에 열리니 여러 기업의 주식을 가진 개미투자가들도 기업 한 곳만 정해서 참석할 수밖에 없다. 20여년 전만 해도 주총은 축제일 같았다. 기업마다 주총을 찾은 소액 투자가들에게 우산, 필기구 등 비록 작지만 정성이 가득 담긴 선물을 주었다. 그러나 이제 그런 풍경은 찾아보기 어렵다. 지난해 박용진 민주당의원은 기업들의 이런 속 보이는 행위를 막기 위해 '슈퍼 주총 데이 방지법'을 발의하기도 했다. 분산해서 주총을 하면 주주들의 권리를 더 많이 보장해줄 수 있지 않나 하는 취지에서다. 미세먼지가 극성을 부린 지난 20일 삼성전자 정기 주주총회에서는 소액주주 수천 명이 몰리며 입장이 지연되는 등 혼란을 겪었다. 주총장에 들어서려는 대기 줄이 인근 도로까지 이어지는 등 진풍경도 연출했다. 주주들의 눈높이에 맞춘 소액주주 친화 정책으로 '전자투표제' 도입을 주장하는 말이 그래서 나왔다. 전자투표제는 회사가 전자투표시스템에 주주명부, 주주총회 의안 등을 등록하면 주주가 온라인을 통해 의결권을 행사하는 제도다. 이미 올해 SK하이닉스, 포스코, 신세계 등 주요 대기업이 전자투표제를 도입하는 등 재계의 시선도 긍정적으로 변하고 있다. 이에 일각에선 세계최대 기업인 삼성전자가 이 제도를 도입하지 않는 것에 대해 의아하다는 의견이 많다. 물론 전자투표제 도입에 따른 부담감도 없지 않다. 대면 없이 온라인상에서 하는 회사 현안에 대한 질의와 토론에는 한계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주총은 주식회사의 주주들이 모여 회사의 중요한 사안을 정하는 최고 의사 결정기구인 만큼 최대한 많은 주주의 참석이 보장되어야 한다. 4차 산업혁명시대에 들어선 지금, '슈퍼 주총데이'라는 용어마저 구시대의 잔재인 것 같아 씁쓸하다. /이영재 논설실장

2019-03-26 이영재

[참성단]안중근과 동양평화론

"내가 죽은 뒤에 나의 뼈를 하얼빈 공원 곁에 묻어 두었다가 우리 국권이 회복되거든 고국으로 반장(返葬)해다오." 안중근 의사가 남긴 유언이다. 안 의사는 1910년 3월 26일 오전 10시 수감 중이던 뤼순(旅順)감옥에서 일제의 사형집행으로 순국했다. 1909년 10월 26일 일제의 거물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처단한 하얼빈 의거를 일으킨 지 5개월 만이다.안 의사는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함으로써 일제의 대한제국 국권 침탈의 불법성을 국제사회에 알렸다. 당시 하얼빈은 러시아 조차지(租借地)로 아시아에서 패권을 다투던 일본, 러시아, 영국이 이 사건을 주목했다. 한국과 청나라에 대한 식민 침략을 아시아의 연대로 선전해 온 일본 입장에선 큰 낭패였다.이토 사살 이후 안 의사의 항일투쟁은 재판정으로 이어졌다. "이토 공작(伊藤 公爵)을 적대시"한 이유를 묻는 재판부를 향해 안 의사는 이토의 죄목 15개를 나열했다. 명성황후 시해와 을사늑약 강제 등 대한제국의 국권 침탈 죄목을 빠짐없이 나열했다. 또한 안 의사는 이토를 동양평화 교란범으로 지목했다. 일제는 러일전쟁(1904∼1905년)의 명분으로 동양평화유지를 내세웠지만, 한국의 국권침탈로 거짓임이 드러났다고 밝혔다.안 의사는 유작인 '동양평화론'에서 일본을 "용과 호랑이의 위세로서 어찌 뱀이나 고양이 같은 행동을 하느냐"고 말했다. 동양의 강대국 일본이 서세동점(西勢東漸)의 환란을 이용해 대한제국과 청나라를 점거한 악행에 대한 통렬한 비판이다. "동양 평화를 위한 의전(義戰)을 하르빈에서 개전하고 담판하는 자리를 여순으로 정했다"고 밝혔다. 이토 히로부미 처단을 동양평화를 빌미로 한·중 두 나라의 국권을 침탈하는 일본의 위선적인 정략에 대한 정의로운 전쟁으로 규정한 것이다. 이토와 같은 일제의 정략가들로 인해 독립국가 사이의 연대와 협력을 통한 동양평화가 깨진 사유를 밝힌 역사적 안목은 지금 봐도 예사롭지 않다.사형집행이 당겨지는 바람에 동양평화론은 미완에 그쳤다. 한·일 양국이 안 의사의 동양평화론을 완성하는 역사를 써왔다면 관계가 지금 같지는 않을 것이다. 최소한 안 의사의 유해 발굴에 일본 정부가 조건없이 협조한다면 새로운 한·일관계의 시작이 될 수도 있다. 효창공원 가묘가 기어이 주인을 찾기를 바란다. /윤인수 논설위원

2019-03-25 윤인수

[참성단]황혼 이혼, 황혼 결혼

조선시대 때부터 결혼 60주년이 되면 회혼례를 성대하게 치렀다. 평균수명이 50세가 채 안 됐기 때문에 회혼례의 가치는 그만큼 컸다. 하지만 100세 시대를 맞은 지금 회혼례를 보기가 더 어려워졌다. 늘어나는 황혼 이혼 때문이다. 황혼 이혼은 20년 이상 함께 산 부부가 이혼하는 경우를 말한다. 황혼 이혼이 급증한 이유는 기대수명이 높아지고 여성들의 사회적 지위가 높아져 남은 삶을 인간답게 살고 싶다는 여성이 많이 늘어나서다. 국민의 인식이 개방적으로 바뀌었고, 고령층의 체력이 과거보다 향상되고 건강해지면서 정신적 여유를 찾으려는 욕구가 커진 점도 한몫 했다. 남자가 퇴직으로 경제력을 상실한 이후, 오랜 세월 쌓인 불만이 폭발한 여성이 이혼 서류를 내미는 경우가 더 많다.졸혼(卒婚)이란 말이 유행한 적이 있었다. '결혼생활로 인한 스트레스에서 졸업했다'는 졸혼은 "유명 연예인 OOO도 했다더라"라는 말까지 돌면서 황혼기 부부들이 들썩였다. "이혼하지 않고 따로 살면서 자유롭게 각자의 삶을 즐기고 있다"며 무용담처럼, 아무 일도 아닌 듯이 말하고 다니는 사람도 늘어났다. 졸혼은 당장 이혼을 피하는 미봉책에 불과하다는 우려에도 불구하고, '눈곱만치의 애정도 없이 사실은 그동안 자식들 때문에 살았다'는 '커밍아웃' 부부도 눈에 띄게 늘어났다.이를 반영하듯 지난해 '황혼이혼' 건수가 15년 만에 가장 큰 폭으로 증가해 전체 이혼의 3분의 1가량을 차지한 것으로 나타났다. 황혼 이혼의 급증은 황혼 결혼도 그만큼 늘어나고 있음을 의미한다. 지난해 60세가 넘어 황혼 결혼한 남성은 6천126명, 여성은 3천604명으로 집계됐다. 이런 통계를 처음 집계한 1990년과 비교하면 남성은 3.9배, 여성은 9.1배나 늘어난 수치다. 75세 이상 결혼도 남성은 같은 기간 128명에서 660명으로 5.1배, 여성은 9명서 264명으로 29.3배나 많아졌다. 결혼생활은 여섯 가지 이유로 유지된다는 말이 있다. 한 가지는 사랑, 나머지 다섯은 신뢰라는 것이다. 1975년 9월호부터 월간지 샘터에 소설 '가족'을 34년 동안 연재했던 고 최인호는 눈감을 때까지 "가족이야말로 가장 성스러운 공동체"라는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하지만 '가족'의 해체 속도가 점점 빨라지고, 황혼 이혼과 황혼 결혼이 동시에 증가하는 작금의 세태를 최인호가 봤다면 뭐라 할지 최근 이 책을 다시 읽으며 문득, 궁금해졌다. /이영재 논설실장

2019-03-24 이영재

[참성단]서해 수호의 날

'명예훈장(Medal of Honor)'은 미국에서 가장 등급이 높은 훈장이다. 오바마 전 미 대통령은 재임 당시 '자유훈장'과 함께 '명예훈장' 시상식을 가장 자랑스러워 했다. 그래서인지 검증작업도 매우 까다롭다. 맥 라이언 주연의 영화 '커리지 언더 파이어'는 걸프전 복무 중 사망한 여자 조종사에게 사상 최초로 여군 명예훈장을 추서하기 위한 조사단의 검증 과정을 그렸다.'명예훈장'은 1862년 남북전쟁에서 처음 수여된 이래 지금까지 3천400여 명의 군인에게만 수여됐다. 이 중에는 1871년 '신미양요'에 참여한 미군 15명과 한국전쟁 참전용사 146명도 포함돼 있다. 훈장은 백악관에서 대통령에게 직접 받으며 이 과정은 미 전역에 생중계된다. 훈장 수훈자는 대통령부터 장군, 의원들로부터 거수경례를 받는다. 이들 자녀에겐 조건만 되면 추천이나 입학 정원에 상관없이 미국 사관학교 입학이 주어지는 등 14가지의 큰 혜택을 준다. 미국은 이런 예우를 해줌으로써 국민 간 결속을 다진다. 이는 미 국민의 군인에 대한 사랑이 확실하게 몸에 밴 이유이기도 하다.우리의 군인 예우는 미국과 많이 다르다. 지난해 7월 17일 포항에서 상륙기동헬기 마린온이 이륙 도중 추락해 5명의 해병대원이 목숨을 잃는 사고가 발생했다. 사고 현장은 형체를 알 수 없는 잔해와 시신 등 눈 뜨고 볼 수 없을 정도로 참혹했다. 하지만 정부의 사고 처리는 어이가 없었다. 사고 현장을 즉시 공개하지도 않았다. 청와대 대변인은 "수리온의 성능은 세계 최고 수준"이란 뜬금없는 발표로 국민을 어리둥절케 했다. 대통령의 애도 역시 사고 3일 후에야 나왔다. "유족들이 의전 등이 흡족하지 못해 짜증이 난 것 같다"는 국방부 장관의 실언에 유족은 큰 상처를 받기도 했다.오늘은 4회 '서해수호의 날'이다. 2016년 천안함 폭침, 연평도 포격 도발과 제2연평해전 희생 장병을 기리기 위해 국가기념일로 지정됐다. 행사는 천안함이 폭침(2010년 3월 26일)된 3월 넷째 주 금요일 대전 국립현충원에서 치러진다. 1회엔 박근혜 대통령이 2회엔 황교안 대통령 권한 대행이 참석했다. 문재인 정부가 들어선 지난해 3회 행사엔 이낙연 총리만 참석했다. 오늘 문재인 대통령의 참석이 기대됐지만 불참한다고 해서 유가족이 크게 실망했다고 한다. 뜻깊은 호국행사에 대통령이 참석한다면 국민의 감동도 컸을 텐데, 아쉽다. /이영재 논설실장

2019-03-21 이영재

[참성단]안 들리는 능력

"이 세상에는 귀가 들리는 사람이 있고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는데, 그건 못 듣는 게 아니라 안 들리는 능력이 있는 거야. 모두가 가지고 있는 능력이 없는 게 아니라, 특별히 안 들리는 능력이 더 있는 거니까 신비한 일이지. 너는 축복받은 거야." 청각 장애인인 10대 소녀는 인공와우 수술을 앞두고 언젠가 엄마가 했던 말을 떠올린다. 정은 작가의 '산책을 듣는 시간'이란 소설 중 한 대목이다.안 들리는 게 능력이고 축복이라고? 뜬금 없는 소리 같다. 그런데 소설을 읽다 보면 일면 고개가 끄덕여진다. 인공와우 수술을 받고 나서 소녀가 자신의 목소리로 처음 내뱉은 말은 욕이었다. 구화(口話)를 배운 뒤 비밀 욕 수첩을 만들고, 소설책에서 생전 처음 보는 욕들을 수첩에 옮겨 적었다가 옥상에 혼자 있을 때 꺼내어 소리 나게 읽어보며 발음이 자연스럽게 되도록 연습한 결과였다. 소녀에게 소리가 들린다는 것은 처음에는 정말 욕이 절로 나오는 상황이었다. 소녀의 표현대로라면 '이래서는 살아갈 수 없겠다 싶을 정도'로 세상은 시끄러웠다. 소리가 온 몸을 때리는 것 같았다. 방향감각도 이상해져서 종종 땅이 뒤흔들리는 것 같았다.소녀는 말보다 오히려 수화(手語)에서 더 행복감을 느꼈던 듯 싶다. 구화를 배우고 인공와우 수술을 받기 전, 수화가 유일한 의사소통수단이었던 소녀의 독백이다. "나는 손안에 투명한 새 한 마리를 기르는 느낌으로 수화를 하며 걸어 다닌다. 새를 쓰다듬듯이." 수화를 어쩌면 이렇게 멋지게 표현할 수 있을까. 참으로 아름다운 문체다. 소설을 읽으면서 장애인에 대한 관념이 얼마나 편협한 것이었는지 자기반성에 빠졌던 기억이 새롭다. 그런데 청각 장애인도 아니면서 '안 들리는 능력'을 갖추기 위해 애쓴 이들이 있다. 자전거 경음기나 응원용 나팔로 청각을 일시 마비시킨 뒤 장애진단서를 받는 수법으로 병역 면제를 받거나 시도한 철없는 젊은이들이다. 안 들리는 능력을 갖추기 위해 그들이 기울인 노력을 생각하면 안쓰럽기까지 하다. 차 안에서 나팔을 귀에 대고 1~2시간 동안 인상 찌푸리며 고막을 혹사했다지 않은가. 이 같은 기상천외한 수법을 전수해주는 대가로 최고 5천만원 까지 오갔다니 귀가 아니라 가슴이 먹먹할 뿐이다. 내막이 밝혀진 이상, 이제 그들에게 안 들리는 능력은 축복이 아니라 주홍글씨일 듯 싶다. '병역기피'라는 낙인이 찍힌…. /임성훈 논설위원

2019-03-20 임성훈

[참성단]돌아온 반기문

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의 별명은 '기름 장어'다. 민감한 질문이나 난처한 상황을 매끄럽게 잘 피해간다고 해서 언론이 붙여줬다. 본인도 이 별명을 능숙한 외교관을 지칭하는 말이라고 여겨 싫어하지 않았다. 유엔 사무총장 취임 전 기자들에게 스스로 별명의 유래와 의미를 홍보했다. 미국의 한 방송 사회자가 질문마다 모호한 대답을 하는 그에게 "한국에서 당신을 왜 미끄러운 장어라 하는지 알겠다"고 했을 정도다. 하지만 지난 대선에서 반 전 총장이 대권 도전 움직임을 보이자 비판적인 언론으로부터 '기회주의자'로 집중 공격당하는 등 별명 때문에 혹독한 시련을 겪었다.하지만 반 전 총장 특유의 부지런함과 끈기는 당시 유엔 내에서도 유명했다. 재임 중 수단 다르푸르 사태에 적극적으로 개입해 '아프리카 연합 혼성 평화유지군 파견'이라는 공로를 세웠다. 특히 반 전 총장은 지구 온난화 문제를 국제적 관심사로 부각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그도 10년 재임 기간 기후변화 분야의 성과에 큰 자부심을 가졌다. 그의 노력의 결실은 2015년 12월 체결된 파리기후변화협약이다. 이 협약엔 무려 195개국이 동참했다. 그는 이 협약을 위해 전 세계를 직접 뛰어다니며 세계 각국 정상을 만나 기후변화에 대한 관심을 촉구했다. 반기문이 '미세먼지 해결사'로 돌아온다. 문재인 대통령이 제안한 '미세먼지 해결을 위한 범사회적 기구' 위원장직을 그가 수락했다. 그의 등장으로 대중국 외교력 및 국제사회 영향력으로 인해 미세먼지를 둘러싼 한·중 외교는 새 국면을 맞게 됐다. 하지만 중국의 오만한 태도로 인해 획기적인 돌파구가 마련될지는 여전히 미지수다. 그래도 유명무실하게 방치돼 온 국무총리실 미세먼지특별위원회보다는 외교 전문가로서, 중국 등 주변국과 미세먼지 문제를 협의하고 중재할 능력을 갖춘 반 전 총장의 능력이 더 돋보일 것으로 보는 견해가 지배적이다.반 전 총장은 UN사무총장 퇴임 후에도 기후변화에 대해 꾸준히 관심을 가져왔다. 지난해 3월 서울에 본부를 둔 국제기구인 글로벌녹색성장연구소(GGGI) 의장에 선출됐는가 하면, 빌 게이츠 마이크로소프트 창업자 등과 뜻을 모아 기후변화 글로벌위원회(GCA)를 출범시키기도 했다. 지금 우리에겐 암만큼 무서운 게 중국발 미세먼지다. 좋은 의미의 '기름 장어'답게, 미세먼지 척결을 위해 그의 외교적 능력이 발휘되길 기대해 본다. /이영재 논설실장

2019-03-19 이영재

[참성단]서울외신기자클럽 성명

토마스 제퍼슨은 "신문 없는 정부보다 정부 없는 신문을 선택하겠다"며 언론의 자유가 국가나 정부에 앞서는 가치임을 단언했다. 물론 언론의 자유가 없는 국가와 정부도 있다. 파시즘의 이탈리아, 나치즘의 독일, 공산주의 독재국가를 비롯한 모든 전체주의 국가나 정부가 그렇다. 하지만 국민의 자유를 박탈한 이런 국가나 정부는 혁명의 대상이지, 애국의 대상이 아니다.사우디아라비아 정부는 지난해 워싱턴포스트 칼럼니스트로서 왕정(王政)을 비판해 온 자말 카슈끄지를 터키 주재 총영사관저에서 살해했다. 터키 수사당국은 암살단이 그의 손가락을 자르고 참수하는 현장의 녹음을 확보했다. 왕실 편에 있다가 왕정을 반대하는 언론인으로 변신한 카슈끄지를 사우디 왕실은 배신자로 규정해 처단한 것이다. 워싱턴포스트는 '아랍이 가장 원하는 것은 표현의 자유'라는 그의 유고를 게재해 사우디 왕실에 항의했다.언제고 탄압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점 때문에 언론인, 언론사는 남다른 연대감을 갖는다. 국내 언론이 탄압받던 시절 수많은 외신들이 한국의 진실을 알렸다. 독일 공영방송 기자 위르겐 힌츠페터는 목숨 걸고 1980년 광주의 비극을 세계에 알렸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사형 판결을 받자 '기로에 선 한국'이라는 다큐멘터리를 제작해 항의했다. 당시 한국인들은 한국인만 모르는 한국의 진실을 외신을 통해 마주했다.서울외신기자클럽이 16일 더불어민주당을 향해 "언론 통제의 한 형태이고 언론 자유에 찬물을 끼얹는 것"이라는 성명을 발표했다. 지난 13일 민주당 이해식 대변인이 서면 브리핑에서 블룸버그 통신의 기자 실명을 밝히고 "미국 국적 통신사의 외피를 쓰고 국가원수를 모욕한 매국"이라고 비난한 데 대한 항의이다. 이 기자는 지난해 9월 문제의 '문재인 대통령 김정은 수석대변인' 기사를 작성한 장본인이다. 이 기자는 이 대변인의 지목으로 비난의 '표적'이 돼 신변의 위협마저 느끼는 상황이라고 한다.민주화의 주역을 자초하는 더불어민주당이다. 민주당의 DNA에 언론탄압은 없다고 자부해도 토를 달기 힘들다. 그런 민주당이 기자 실명을 밝히며 '매국' 딱지를 붙여 지지 진영의 한 복판에 세웠다는 사실이 놀랍다. 서울외신기자클럽도 문재인 정부의 집권여당을 향해 이런 성명을 발표하게 될 줄은 몰랐을 것이다. /윤인수 논설위원

2019-03-18 윤인수

[참성단]대사간과 민정수석

조선 시대 사간원(司諫院)은 왕이 내린 결정이 잘못되었을 때 이를 바로잡거나, 왕의 언행에 문제가 있으면 이를 비판하는 일을 했다. 사간원이 소신 있게 직언하고 왕이 이를 스스럼없이 받아들일 때, 왕은 '성군(聖君)'이란 소리를 들었다. 사간원의 수장 대사간(大司諫)은 비록 정3품 당상관이었지만, 소신과 배짱이 없으면 버티기 힘들었던 자리였다. 왕과 독대하는 자리도 많아 권력이 하늘을 찌르는 만큼 시샘하는 사람도 많았다.대사간은 지금으로 따지면 청와대 민정수석쯤 된다. 예나 지금이나 이들의 역할은 민심과 여론의 동향을 대통령에게 전달해 국정을 제대로 펼칠 수 있도록 하는 게 기본 업무다. 개각을 앞두고 문제가 있는 인사를 걸러내는 것도 민정수석의 주요 임무다. 인사 대상자들의 주변을 현미경 검증 하고 문제가 있으면 아무리 대통령이 후보자를 신뢰해도 "안된다"고 소신 있게 말해야 한다. 그만큼 업무량도 많았다. 노무현 대통령 시절 두 번 민정수석을 지낸 문재인 대통령은 저서 '운명'에서 "업무량이 늘 한계를 초과하는 느낌이었다. 무리하다 보니 민정수석 1년 만에 이를 열 개나 뽑아야 했다"고 적었다. 김영삼 대통령 시절 청와대의 인사검증은 거의 비선조직에 의존했다. 그래서 편지 풍파 인사가 많았다. 그나마 인사검증시스템이 제 자리를 잡은 건 참여정부 때였다. 인사수석이 인재를 추천하면 민정수석이 검증했다. 이후 인사추천위원회를 거친 최종 후보자 중 1명을 대통령이 낙점했다. 그런데도 청문회에서 낙마하는 '인사 참극'이 자주 일어났다. 그때마다 비난은 인사수석보다는 민정수석에게 쏟아졌다. 검증 실패를 더 크게 본 것이다.지난 3 ·8개각으로 임명된 7명의 장관후보자가 청문회도 하기 전에 자질논란에 휩싸였다. 해도 너무했다. 최정호(국토교통부)의 꼼수증여, 김연철(통일부)의 막말 발언, 박영선(중소 벤처기업부)의 아들 이중국적 논란, 조동호(과학기술 정보통신부)의 배우자 부동산, 박양우(문화체육관광부)의 자녀 억대 예금논란, 진영(행정안전부)의 후원금 부당공제 등 후보자 대부분이 문제가 있었다. 이는 민정수석실의 인사 검증이 부실했던 탓이다. 아무리 좋은 시스템과 엄격한 기준이 있어도 운영자의 판단이 잘못되면 참극이 발생하기 마련이다. 비난은 조국 민정수석에게 쏟아지고 있다. 2년의 재직 기간 내내 참으로 바람 잘 날 없는 민정수석이다. /이영재 논설실장

2019-03-17 이영재

[참성단]대체육(代替肉)

육류 소비를 줄여야겠다는 생각이 든 건 갑자기 늘어난 몸무게가 아니라 한승태의 '고기로 태어나서'(시대의 창 刊)를 읽고 나서다. 새삼 독서의 위대함까지 깨우쳐 준 이 책의 저자는 닭, 돼지, 개 농장에서 노동하면서 동물이 식용고기가 되는 과정을 세밀하게 적고 있다. 그 묘사가 너무 생생해 전율이 일어날 정도다. 영화 '옥자'를 보았을 때처럼 이 책을 읽으면 적어도 2주 정도는 고기를 먹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종말 시리즈로 유명한 제러미 리프킨은 '육식의 종말'에서 "수백만 명의 인간들이 곡식이 부족해 기아에 시달리고 있는 와중에도 선진국에선 육류, 특히 쇠고기의 과잉섭취로 인해 '풍요의 질병' 즉, 심장 발작, 암, 당뇨병 등에 걸려 죽고 있다"며 육류 소비를 줄여야 한다고 역설했다. 그래서인지 최근 채식주의자들이 증가하는 추세다. 아울러 전통적인 축산업이 환경파괴 논란을 낳고 있으며, 밀집 사육시설과 도축과정에서의 잔인함 등 동물복지를 문제 삼는 소비자도 늘어나고 있다. 이런 이유로 채식주의를 선언해버리는 이들도 꽤 많다.전 세계 육류 생산을 좌지우지하는 연 매출 55조원의 다국적 기업 '타이슨 푸즈'가 지난해 5월 구멍가게 수준의 '퓨처미트 테크놀로지'에 대규모 투자를 한다고 발표했다. 퓨처미트는 '실험실 고기'로 불리는 '배양 고기' 원천기술을 보유한 이스라엘 회사다. 이 밖에도 타이슨 푸즈는 '비욘드 미트' 지분도 5% 인수했다. 이 회사 역시 식물에서 추출한 단백질을 효모, 섬유질 등과 배양해 고기의 풍미, 육즙, 식감을 구현한 식물성 고기를 만드는 회사다. 아쉬울 게 하나도 없는 공룡 기업이 이런 대체육 제조회사에 관심을 두는 이유는 무엇일까. 타이슨 푸즈의 발 빠른 움직임에서 우리는 '축산업의 종말'을 읽는다.지금 미 실리콘밸리는 스타트업부터 글로벌 식품 기업까지 대체 식량 개발에 한창이다. 고기의 맛과 식감을 그대로 재현해 낸 대체육이 세계 식품업계 최대 화두로 떠오른 것이다. 100% 식물성 단백질이면서도 고기와 유사한 맛과 식감을 낸다는 비욘드 미트의 '인조고기'가 다음 달부터 국내에 시판된다는 소식이다. 바야흐로 대체육 시대가 열린 셈이다. 채식주의자에겐 반가운 소식이지만, 육류 소비량이 아시아 최대 수준이고 여전히 '씹는 맛'을 즐기는 우리에게 비싼 대체육이 성공할지 지켜볼 일이다. /이영재 논설실장

2019-03-14 이영재

[참성단]'닥터-카' 달리다

"자네 아버지는 한국 사람처럼 살았고 한국 사람처럼 죽었네."교통사고로 아버지를 잃은 벽안(碧眼)의 청년이 아버지의 지인에게서 들었던 말이다. 응급구조시스템이 제대로 갖추어지지 않은 한국에선 길에서 허무하게 죽는 사람이 많다는 뜻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교통사고를 당한 후 택시로 병원에 이송됐는데 의사의 권유로 더 큰 병원으로 이동하던 중 택시 안에서 숨졌다. 이후 청년은 전 세계 각국을 돌다가 선진화한 미국 텍사스의 응급구조시스템에 큰 감명을 받게 된다. 다시 한국으로 돌아온 그는 15인승 승합차부터 사들였다. 이어 목수, 철공 기술자와 함께 집 뒷마당에서 승합차를 구급차로 개조하는 일에 매달렸다. 대한민국 1호 구급차는 이렇게 탄생했다. 이때가 1993년이다. 사실 이전에도 구급차는 있었다. 1972년 전북 전주소방서를 시작으로 1973년 부산 동래소방서 등 일부 소방서에서 구급차를 운영했고 1982년 3월 서울소방본부에서 구급대를 창설하면서 119구급 서비스 시대가 열렸다. 더 거슬러 올라가면 1938년 경성교통안전협회의 의뢰로 경성모터스주식회사가 제작한 구급차가 운행되기도 했다. 당시 백미 240가마를 살 수 있는 '거금'이 투입된 이 구급차는 중상자 2명이나 경상자 4명을 동시에 이송할 수 있었다.하지만 이들 구급차는 단지 환자를 이송하는 운송수단에 불과했다. 차 안에 의학 설비를 갖춰 응급처치가 가능토록 한 전문 앰뷸런스는 청년이 제작한 구급차가 최초다. 그 청년이 이제는 60대로 접어든 인요한 세브란스병원 국제진료센터 소장이다. 1895년 외조부가 선교를 위해 제물포 땅을 처음 밟은 것을 시작으로 4대째 한국에서 살고 있다. 그가 뚱땅거리며 만든 구급차는 소중한 생명을 살리며 구급차의 개념을 바꾸어놓았다. 그리고 26년이 지난 지금, 우리나라 응급구조시스템에서 볼 수 없었던 신개념의 구급차가 또 한번 선을 보였다. 가천대길병원이 지난 12일 전국에서 처음으로 운영에 들어간 '닥터-카'다. 전문의와 간호사 등 전문 의료진이 응급구조사와 함께 탑승한다는 것이 응급구조사만 타는 기존의 구급차와 다른 점이다. 중증환자를 골든타임 내에 치료할 수 있는 전문 장비도 갖춘 터라 '달리는 응급실'이라 할 수 있다. 진작 '닥터-카'가 길 위를 달렸더라면 인요한 소장 아버지의 지인은 이렇게 말하지 않았을까? "자네 아버지가 한국에서 살아서 그나마 다행이네." /임성훈 논설위원

2019-03-13 임성훈

[참성단]백건우의 지방 연주회

피아노의 귀재 '안톤 루빈시테인'은 앵글로 색슨의 콧대 높은 자존심을 이렇게 표현했다. "영국인이 대문자로 쓰는 유일한 글자는 나(I)이다. 이것은 그들의 민족성을 가장 뚜렷하게 이야기해주는 것으로 생각한다." 유대계 러시아 출신인 그가 왜 이런 말을 했는지는 모른다. 연주여행을 하면서 영국인들이 지나치게 '아이'를 내세우는 게 싫어서 그랬는지, 영국인들의 그 '자만'이 부러워서였는지 알 수 없지만 아마 쓰라린 역사를 떠올리며 선조와 민족을 생각하지 않았나 싶다.스비아토슬라프 리히테르는 1960년대 서구로부터 가장 열렬한 환호와 칭송을 받은 대 피아니스트였다. 끊임없는 귀화 요구에 흔들리지 않았던 그는 낳아주고 키워준 소비에트를 끝까지 버리지 않았다. 71세였던 1986년 그는 자동차 한 대에 몸을 싣고 당시 레닌 그라드에서 블라디보스토크까지 대륙을 횡단하며 작은 도시와 시골 마을을 찾아 순회연주회를 열었다. 시골성당의 낡고 조율이 되지 않은 피아노도 그의 감동적인 연주를 막지 못했다. 이런 '마을연주회'가 100회를 넘었다. 언제는 스무 명 앞에서도 연주했다. 자신들을 찾아준 고마움과 그의 음악에 감동한 마을사람들은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우리의 피아니스트 백건우도 25년째 지방을 찾아가 연주회를 열고 있다. 거기에는 섬도 포함되어 있다. 2011년 9월 연평도에서 시작한 첫 섬 연주회는 관객들이 둘러앉거나 일어선 채 자유분방하게 대가의 공연을 관람해 신선함을 주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정말 마음에 드는 악기 등 조건이 갖춰진 곳은 거의 없었다. 그래도 음악은 청중에게 잘 전달됐다. 섬마을을 찾아 자연으로 돌아가 그 속에서 한국적인 속살을 찾고 싶었다."백건우가 지방 순회 연주회를 시작한다. 이젠 사통팔달 길이 뚫려 지방이라 하면 그곳 분들이 화를 낼지도 모르지만, 수원 인천을 제외하곤 거장을 쉽게 만나지 못하는 곳이라 이번 '백건우 & 쇼팽' 연주회에 거는 기대가 크다. 16일 군포, 17일 여주, 19일 과천, 20일 광명, 30일 수원, 4월 13일 인천, 20일 안산으로 이어진다. 강행군이다. 백건우는 리히테르처럼 자신에게 큰 보상이 돌아오지 않아도 끝까지 궁극을 추구하는 장인 정신의 소유자다. 헌신을 통해 사람들을 정서적으로 한 단계 끌어올리는 이 '연주의 구도자'를 보노라면 머리가 저절로 숙여진다. /이영재 논설실장

2019-03-12 이영재

[참성단]베네수엘라

우고 차베스와 니콜라스 마두로로 이어진 베네수엘라 좌파정권의 20년 사회주의 경제실험이 비극의 정점을 향해 치닫고 있다. 차베스는 1999년 집권해 신자유주의 경제를 배격하는 사회주의 경제정책을 펼친다. 석유산업을 재국유화해 거머쥔 오일머니로 빈민층에게 무상교육, 무상의료, 저가주택을 제공했다. 이른바 볼리바르 혁명이다.차베스는 미국의 신자유주의에 대항하는 좌파 선봉장을 자임했다. 국장(國章)에 그려진 백마가 오른쪽을 향한다고 왼쪽으로 틀어버렸을 정도였으니, 전세계 반미 사회주의 세력들의 추종은 당연했다. 국내에서도 진보성향 정당과 매체들이 차베스와 베네수엘라에 주목하고 열광했다. 하지만 오일머니에 전적으로 의존하던 사회주의 경제실험은 국제유가가 폭락하면서 파국에 직면했다.파국의 피해는 온전히 베네수엘라 국민의 몫이 됐다. 오일머니가 마르자 마구 찍어낸 화폐로 극단적인 인플레이션이 발생했다. 지난해 0.8볼리바르였던 커피값이 최근에 2천800볼리바르로 3천500배가 올랐다. 80만%라는 인플레이션으로 수공예품 재료로 전락한 화폐는 종이 값에도 못미친다. 극심한 경제난을 피해 전체인구의 10%인 300만명 이상이 국외로 탈출해 구걸과 매춘으로 낯선 나라의 거리를 헤맨다. 콜럼비아 등 베네수엘라 접경국가들은 국경을 봉쇄하고 나섰다.급기야 최근엔 대정전 사태로 나라 전체가 암흑에 잠겼다. 세계 최대의 원유 매장 국가가 수력발전에 의존하다 발전소가 고장나자 블랙아웃에 휩싸였으니 이만한 미스터리가 없다. 한때 남미 최고의 부국이자 최대의 위스키 소비국이던 베네수엘라가 대정전으로 중환자들이 죽어나가고, 시민들은 냉장고에 아껴둔 비상식품을 꺼내먹는 지경에 처했다.나라는 거덜났는데 대통령은 두명이나 된다. 차베스의 뒤를 이은 좌파의 마두로 대통령에 대해 스스로 대통령을 선언한 우파정당 연합의 과이도 국회의장이 극단적으로 대립하고 있다. 좌파와 우파를 지원하는 외세의 간섭은 노골화되고 좌파 기득권세력과 우파 정권교체세력으로 민심도 갈라졌다.대정전은 연극의 암전과 같다. 대정전의 암흑 속에서 베네수엘라의 파국의 무대가 어떻게 전환될지 궁금하다. 분명한 건 베네수엘라가 세계 경제사에 전례없는 반면교사로 기록될 것이란 점이다. /윤인수 논설위원

2019-03-11 윤인수

[참성단]야구에서 '1'의 의미

선동열의 손은 손목에서 중지까지의 길이가 18㎝다. 손가락만 따지면 중지가 7.7㎝로 한국 성인 남자의 평균치다. 하지만 한화 이글스 에이스 정민철의 23㎝에 비하면 무려 5㎝나 짧다. 최전성기 시절에도 포크볼을 던지지 못한 것은 짧은 손가락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그는 KBO 통산 146승 40패 132세이브 평균자책점 1.20을 기록했다. 이런 위력 투구로 선수시절 내내 검지와 중지 사이를 째서 손가락 길이를 늘렸다는 소문에 시달려야 했다.야구에서 '1'의 의미는 매우 크다. 선동열의 손가락 길이가 실제 1㎝만 길었다면 한국야구의 역사가 바뀌었을지도 모른다. 야구장 외야 펜스까지의 거리가 1m 길거나 짧다면 홈런에 큰 영향을 미친다. 그렇다면 야구공이 1㎜ 크거나, 작다면 야구 경기의 흐름도 바뀔까. 아마 그럴 것 같다. 2018년 프로야구는 뚜렷한 타고투저(打高投低) 현상을 보였다. 정규리그 702경기에서 터진 홈런은 1천756개로 프로야구 사상 최다였다. 40홈런 타자도 5명이 나왔다. 이유가 있었다. 공의 반발계수(공이 튀는 정도)가 원인이었다. 반발계수가 0.01 높아지면 평균 비거리는 2m 정도 늘어난다. 공 때문에 지난 시즌 게임마다 예기치 않은 홈런이 쏟아져 나와 재미보다는, 수준 이하라는 비난이 쏟아졌다. 야구의 묘미라는 '팽팽한 투수전'도 사라졌다.여론에 못 이긴 KBO가 올 시즌부터 공인구 둘레를 1㎜ 크게, 무게도 1g 정도 늘렸다. 특히 실밥 폭도 1㎜ 커졌다. 이 때문에 반발계수가 0.4034∼0.4234로 0.01 낮아졌다. 체인지업 커브 슬라이더 등 변화구를 던지는 투수들에겐 희소식이다. 실밥이 커 '채는 맛'이 생겼기 때문이다. 반면 검지와 중지 사이에 공을 끼어 던지는 포크볼 투수는 불리해졌다. 공이 커져 '꽉 죄는 맛'이 없어져서다. 직구 위주의 투수도 불리하다. 스프링캠프에서 투수들이 고작 1㎜ 1g 바뀐 공에 적응하느라 고생했다고 한다. 미세한 변화에도 투수들은 그만큼 민감하다. 야구는 그런 경기다.내일부터 프로야구 시범경기가 시작된다. 예전보다 시즌이 1주일 이상 앞당겨졌다. 겨우내 야구를 기다린 열성 팬은 "반갑다! 야구야"를 외치지만, 초미세먼지라는 복병도 만났다. 투수는 1㎜ 커지고 1g 무거워진 공과, 타자는 0.01 낮아진 반발계수와 그리고 관중은 초미세먼지와 신경전을 벌여야 할 2019시즌이다. /이영재 논설실장

2019-03-10 이영재

[참성단]회전문 인사

'관직을 얻으려고 갖은 방법으로 노력하는 것'을 '엽관(獵官)'이라고 한다. 사냥 렵(獵)에 벼슬 관(官). 거칠게 직역하면 '관직을 사냥하는 것'으로 썩 유쾌하진 않다. 하지만 엽관에 제도가 붙어 '엽관 제도'가 되면 '권력자나 정당이 관직을 독점하는 정치적 관행'이 된다. 미국 7대 대통령 앤드류 잭슨은 마시 상원의원의 '전리품은 승리자에게 속한다'는 말을 듣고 이를 제도화 시켰다. 우리가 귀아프게 듣고 보았던 '회전문 인사'나 '낙하산 인사' '보은 인사'가 이 제도의 산물이다.주중대사에 장하성 전 청와대 정책실장이 내정되자 '회전문 인사'라는 비판이 제기되고 있다. 장 전 실장은 문재인 정부의 경제정책에 흠집을 내고 물러났다. 불과 얼마 전 고대 졸업식장에서 "나는 무지개를 쫓는 이상주의자"라고 말해 구설에 오르기도 했다. 그런데 4강 대사 중 하나인 주중대사에 임명되면서 청와대 인재풀에 의구심마저 제기되고 있다. 회전문 인사는 이번만이 아니다. 임종석 전 비서실장은 퇴임 한 달 만에 UAE 외교 특별보좌관에, 소득주도 성장정책의 실패로 물러난 홍장표 전 경제수석은 소득 주도성장 특별위원회 위원장으로 돌아왔다. 탁현민 전 청와대 의전 담당 행정관도 대통령 행사기획 자문위원에 다시 임용됐다.문재인 대통령이 가장 존경하는 인물로는 고 신영복 성공회대 교수가 꼽힌다. 신 교수는 생전에 '70%의 자리론'을 강조했다. "나는 그 '자리'가 그 '사람'보다 크면 사람이 상하게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나는 평소 '70%의 자리'를 강조합니다." 신 교수는 70 정도의 능력이 있는 사람이 100의 능력을 요구받는 자리에 앉을 경우, 그 부족한 30을 거짓이나 위선으로 채우거나 아첨과 함량 미달의 불량품으로 채우게 된다고 우려했다. 능력과 자질이 부족하면서도 높은 자리를 가고 싶어하는 세태를 꾸짖은 것이다.오늘중 개각이 있을 예정이다. 역량이 출중해 그 자리에 반드시 필요한 인물이라면 회전문이 아니라 회전목마 인사라 해도 탓할 이유가 없다. 그러나 몇몇 인사의 면면을 보면 업무에 탁월한 식견을 갖췄거나 뛰어난 공적이 있다고 보기 어렵다. 검증된 인사를 주요 대사와 부처 장관으로 채우겠다는 문 대통령 의중을 모르는 바 아니지만, 낯부끄러운 '회전문 인사' '돌려막기 인사'는 이제 그만할 때도 됐다. 신 교수의 '70% 자리론'을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이영재 논설실장

2019-03-07 이영재

[참성단]미세먼지 소행성

"잠든 봄은 흑백으로 오고/깨어있는 봄은 총천연색으로 오리라."'봄의 예언'(강효수)이란 시의 한 구절이다. 이 시의 표현대로라면 대한민국의 봄은 잠들어 있다. 국토가 온통 잿빛이라 총천연색하고 거리가 멀기 때문이다. 이러다가 경칩(驚蟄)에 잠이 깬 개구리가 숨이 막혀 다시 땅굴로 들어가지 않을까 싶다. '나 왕년에 올챙이 적엔 이 정도까지는 아니었는데…'하면서. '미세먼지 가득한 소행성'이라는 제목으로 경인일보에 게재된 인천 송도의 모습(사진)은 이처럼 미세먼지에 갇힌 대한민국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듯하다. 사정이 이런데도 국내 미세먼지에 큰 책임이 있는 중국에 대한 정부의 대응이 영 마뜩잖다.비유를 하나 들어본다. 한 아파트에 층간소음으로 악명높은 집이 있다. 그런데 아파트 부녀회장이 그 집만 빼고 아이가 있는 집을 일일이 돌아다니며 소음을 내지 말 것을 당부한다. 중국에 대해 말 한마디 못하면서 자국민에게 차량 2부제나 독려하는 정부가 그 모양새다. '중국'을 적시하지 않고 '국외 미세먼지'라는 표현을 쓰는 것도 마찬가지다. 좀 거칠게 표현하면 살인사건 현장에 투입된 경찰이 마피아 보스의 총구에서 모락모락 연기가 나는 것은 애써 외면한 채 바닥에서 증거를 찾는 척하는 것과 비슷하다. 미세먼지의 가장 큰 주범으로는 중국 동안지역에서 발생하는 산업스모그가 꼽힌다. 이 스모그가 편서풍을 타고 한반도로 넘어오는 것이다. '스모그'를 얘기하니 그 악명높았던 '런던 스모그 사건'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1952년 12월 석탄 연소로 배출된 연기가 대기로 확산하지 못하고 지면에 정체하면서 1만2천여 명이 목숨을 잃은 환경 참사가 런던스모그 사건이다. 물론 67년 전의 런던과는 상황이 많이 다르기에 단순한 비교는 무의미할지 모른다. 그러나 '대기가 정체된 상황에서 국외에서 초미세먼지가 지속해서 유입됐고, 국내 발생 오염물질이 퍼지지 못하고 국내에 머물면서 고농도 현상이 이어졌다'는 서울시보건환경연구원의 분석에서 뭔가 교집합의 빗금이 엿보인다. 정부는 이제라도 중국이라는 문패가 달린 집의 초인종을 거세게 눌러야 한다. 이어 주인이 문을 열면 "댁에서 나는 소리 때문에 못 살겠어요!"라며 거세게 항의해야 한다. 국민의 건강과 생명을 지키는 것은 외교 보다 중요한 정부의 최우선 과제이기 때문이다. 이 대목에서 다시 '봄의 예언'의 한 구절을 인용해본다. "침묵하는 봄은 기어 오고/행동하는 봄은 뛰어 오리라." /임성훈 논설위원

2019-03-06 임성훈

[참성단]개구리도 놀랄 경칩(驚蟄)

한국인의 보양식에 대한 집착은 참 유별나다. 몸에 좋다면 물불을 가리지 않고 덤벼든다. 내 몸이 좋아진다면 남이야 뭐라 하든 말든 일단 잡아서 먹고 본다. 한때 까마귀가 정력에 좋다고 하니까 마리당 무려 30만원에 거래된 적도 있었다. 개구리는 이들의 늘 1차 표적이다.2006년 출간된 박지성 선수의 자전에세이 '멈추지 않는 도전'에 수원공고 시절 자신의 작은 키를 걱정한 아버지가 보양식으로 해 준 '개구리 즙'을 먹고 큰 효과를 봤다는 내용이 언론에 소개된 적이 있다. 보도 후 실제 전국적으로 개구리 수요가 급증하면서 전국적으로 산개구리 싹쓸이 현상마저 일어났었다. 청주지역 환경단체들이 2012년 경칩을 맞아 박 선수에게 개구리 보호활동에 동참해 달라고 요청했다. 박 선수가 개구리 보호에 나서면 개구리가 보양식이라는 그릇된 인식을 바로잡을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던 모양이다.야생 개구리 포획은 2005년 야생동식물보호법으로 엄격하게 금지돼 있다. 그런데도 줄지 않는다. 정력 부족으로 기가 약하거나 폐가 허약한 사람에게 좋다고 적시한 '동의보감' 탓도 무시할 수 없다. 얼마 전 어느 연예인이 TV에 나와 실제 효과를 봤다고 개구리 즙에 대해 장황하게 설명하는 걸 보고 깜짝 놀란 적이 있다. 터무니 없었던 '박지성 효과'가 생각 나서다.개구리 즙이 건강에 좋다는 소문으로 산개구리들이 여전히 수난을 겪고 있다고 한다. 자연산 개구리 1㎏에 10만원을 호가한다는 말도 들린다. 인터넷에서 개구리 즙 판매광고를 찾는 게 어렵지 않다. 판매업자들은 양식 개구리라고 하지만, 전문가들은 겨울잠에서 일찍 깨어나 산란하러 이동하는 산개구리들을 대량으로 포획하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의심하고 있다. 식용개구리 사육이 생각보다 쉽지 않은 탓이다. 환경 전문가들은 100년 후엔 개구리가 지구 상에서 사라질지 모른다고 우려하고 있다. 실제 개구리뿐만이 아니라 모든 양서류가 아주 빠른 속도로 감소하고 있다.오늘은 '경칩(驚蟄)'이다. 24절기 중 세 번째로, 땅속에서 동면하던 벌레가 봄기운에 놀라 나온다는 날이다. 움츠려 지냈던 겨울이 끝나고 새로운 생명력이 소생하는 절기라는 뜻으로도 읽힌다. 봄기운에 놀라 땅 위로 뛰쳐나온 개구리가 지독한 미세먼지에 '경악'하고, 인간의 학살에 또 한 번 놀라 벌벌 떠는 '경칩'이 되지 않을까 걱정이다. /이영재 논설실장

2019-03-05 이영재

[참성단]'버닝썬'과 '경찰의 자존심'

"야, 우리가 돈이 없지 가오가 없어?" 2015년 개봉한 류승완 감독의 영화 '베테랑'에서 형사 서도철(황정민 분)이 재벌 수사를 방해하는 동료 형사를 향해 거칠게 내뱉은 대사다. 한 언론사의 2018년 설문조사 결과 경찰은 최고의 영화와 명대사로 베테랑과 서도철의 대사를 꼽았다. 영화나 드라마에서 경찰은 대개 무능하고 비리에 찌든 모습으로 소비된다. 공권력을 향한 사회적 불신이 반영된 결과지만, 진짜 경찰들에겐 불편한 일이다. 베테랑의 서도철은 주눅 든 경찰들의 '가오(자존심)'를 세워준 것이다. 작명(作名) 탓인가, 클럽 '버닝썬(Burning Sun)'이 활활 타오르고 있다. 대중들은 현실판 '베테랑'으로 버닝썬 사건의 전개에 집중하고 있다. 관객들에게 재벌2세 조태오(유아인 분)가 마약, 성범죄 등 온갖 퇴폐적 일탈 행위를 벌인 베테랑의 '강남 클럽'은 감독의 상상력이 가미된 영화의 미장센에 불과했다. 하지만 버닝썬 사건으로 미장센은 현실이 됐다. '물게(외모가 출중한 여성손님)', '골뱅이(만취한 여성)', '물뽕(마약)' 등 클럽 버닝썬의 은어들은 화려한 조명의 그늘에 숨어있던 마약, 성범죄의 진한 흔적들이다.버닝썬의 불길은 경찰로 번졌다. 버닝썬의 무법적 운영의 배경에 경찰과의 유착 의혹이 있다는 의심은 이제 사실로 굳어가고 있다. 112 신고내역을 들여다 보니 버닝썬은 작년 2월 개장 이후 마약·성추행·납치감금·폭행 등 112건의 사건이 강남경찰서 역삼지구대에 신고됐다. 하지만 버닝썬은 아무일 없는 듯 영업했다. 역삼지구대는 오히려 사건의 발단이 된 버닝썬 폭행 피해 청년에게 부당한 공권력을 행사했다는 의심을 받고 있다.경찰은 4일 마약 투약 및 유통 혐의로 버닝썬 대표 등 10여명을 입건하고, 경찰 유착의혹도 수사중이라고 밝혔다. 하지만 대중의 반응은 싸늘하다. 불똥이 검경 수사권조정과 자치경찰제로 튀었다. 이런 경찰에게 수사권과 지방치안을 맡길 수 없다는 주장이 명분을 얻고 있다.영화 '베테랑'은 서도철의 수사를 방해했던 동료 경찰이 어떻게 됐는지 생략했다. 하지만 실화 '버닝썬'에선 비리 의혹 동료에 대한 경찰 수사가 초미의 관심사다. 경찰이 칼날 같은 수사로 '가오'를 세울 수 있을지, '버닝썬'의 결말에 전국민이 주목하고 있다. /윤인수 논설위원

2019-03-04 윤인수

[참성단]시인 기형도 30주기

86년 초 공적이지도 그렇다고 사적이지도 않은 자리에서 그를 처음 보았다. 함께 자리했던 내 친구이자 그의 초등학교 동창은 "저 머리 긴 애 있지. 기형도야. 너도 알지? 그 '안개'라는 시"라며 안개처럼 내 귀에 속삭였다. 기형도는 별로 말이 없었다. 그리고 시간이 한참 지난 1989년 3월, 신문지상에서 우울한 모습의 그를 다시 보았다. 종로의 한 허름한 극장. 숨이 막히는 어두운 공간에서 기형도는 잠 자듯 쓰러졌으며, 새벽 극장을 청소하는 아줌마가 이미 사늘하게 식어버린 그의 시신을 발견했고, 그의 나이가 이제 겨우 스물아홉이라는 그날의 부고만큼 슬픈 기사를 본 적이 없었다.3·1절 날 광명에 있는 '기형도 문학관'에 다녀왔다. 안양에서 광명 방향으로 안양천을 지나는데 천변 위를 올라탄 거대한 도로와 천변을 따라 이어지는 아파트 단지만 보일 뿐, 기형도의 시 '안개'에서 묘사됐던 그 슬픈 천변 풍경은 어디에도 없었다. 생전 단 한 권의 시집도 없이 유고시집 한 권만 남긴 시인치고 문학관은 알차게 꾸며져 있었다. 기형도가 중앙일보에 첫 출근하던 날 입었다는 빛바랜 양복이 특히 인상적이었다.오는 7일은 기형도 30주기 되는 날이다. 그를 기리는 행사들이 그의 고향 광명을 중심으로 펼쳐지고 있다. 그제는 그가 잠들어 있는 천주교 안성 추모공원에서 '기형도 30주기 추모제'가 열렸다. 내일 광명시민회관에서는 '정거장에서의 충고'라는 이름으로 30주기 추모 콘서트가 열린다. 매년 그랬듯 가수 장사익이 찾아와 '엄마의 걱정'을 부를 것이다. 7일에는 그의 모교 연세대학교에서 '신화에서 역사로-기형도 시의 새로운 이해'라는 학술 심포지엄도 열린다.시간이 흐르면 기억도, 첫 사랑도 모두 희미해지기 마련이다. 하지만 기형도의 열기는 식지 않고 점점 더 뜨거워지고 있다. 기형도라는 나무의 뿌리는 더욱더 견고하고 잎사귀는 이제 하늘을 가릴 만큼 풍성하다. 지칠 법도 한데 유고시집 '잎 속의 검은 입'은 스테디셀러 반열에 오른 지 오래다. 검은색은 줄기차게 내리쬐는 빛을 견디지 못해 퇴색하면서 마침내 하얀 백지가 된다. 하지만 기형도는 한 올의 흐트러짐이 없이 그 검은 빛을 30년 동안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마침내 그의 고향 광명에 아름다운 문학관이 생겨서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사람들이 꾸역꾸역 찾아오는 것을, 나는 '기적'이라고 믿는다. /이영재 논설실장

2019-03-03 이영재

[참성단]제암리 찾은 일본인 사죄단

'영문을 모르고 예배당에 모인 군중은 불안과 공포에 떨었다. …문을 밖과 안으로 잠그고 못까지 박은 후 석유를 뿌리고 불을 질렀다. 불길이 예배당을 휩싸자 그 안에 있던 사람들은 뛰어 나오려고 아비규환 생지옥을 연상케 하였다. 다행히 뛰어 나오는 사람이 있으면 밖에서 대기하던 군인이 총으로 쏘아 죽였다'. 단어 몇 개만 지우면 마치 유대인 학살의 한 장면을 보는 듯하다.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가 1972년 출간한 '독립운동사-3·1 운동사'는 100년 전 발생한 '제암리 학살사건'을 이렇게 적고 있다.제암리 학살 사건은 3·1운동과 관련된 일제의 만행 중 가장 잔인했던 일로 꼽힌다. 아리타 도시오 중위가 이끄는 일본 제78연대 소속 군인들은 1919년 4월 15일 '대한 독립 만세'를 외쳤던 제암리 주민들을 교회에 모아 놓고 불을 질러 23명을 학살했다. 이들은 인근 화수리에서도 만행을 저질렀다. 이 천인공노할 사건은 영국계 캐나다인 선교사 프랭크 스코필드와 AP통신 조선 특파원이었던 앨버트 테일러 기자에 의해 전 세계에 알려졌다. 이는 스코필드 박사가 외국인으로는 유일하게 서울 현충원 애국지사 묘역에 안장된 이유이기도 하다.제암리 학살 사건은 일본의 일부 지식인들에게도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일본 영문학자 사이토 다케시는 '어떤 살육 사건'이란 시를 통해 '돌연히 울린 총성 한 발, 두 발/ 순식간에 교회당은 시체의 사당/ 그것도 모자라 불을 들고 덮치는 자가 있었다'며 제암리 학살을 고발했다. 지식인의 자성의 소리가 높아지고 여론이 악화하자 아리타는 군법회의에 넘겨졌다. 하지만 여론을 무마하기 위한 형식적인 절차에 불과했다. 아리타는 무죄를 선고받았다.그제 일본 기독교인 17명이 제암리 교회를 찾았다. 자신들의 선조가 저지른 학살사건을 사죄하기 위해서다. 이들은 "일본의 과거 침탈을 깊이 사죄합니다. '이젠 됐어요'라고 말씀하실 때까지 계속 사죄하겠습니다"는 플래카드를 들고 교회 바닥에 엎드려 참회의 눈물을 흘렸다. 방문단 대표 오야마 레이지 목사는 "주여, 우리 일본인들을 용서해 주십시오"라고 말했다. 민간인의 이런 행동과는 상반되게 일본 정부는 사과와 반성은커녕 이미 이뤄진 과거의 사과조차 부인하고 있다. 3·1 운동과 제암리 학살사건 100주년을 맞아 지금 귀를 열고 일본인 사죄단의 목소리를 경청해야 하는 것은 바로 아베 총리일지도 모른다. /이영재 논설실장

2019-02-28 이영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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