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성단

 

[참성단]대통령 휴가

조지 W 부시 전 미국 대통령은 자신의 고향 텍사스 '크로퍼드' 목장에서 매년 한 달간 여름휴가를 보냈다. 이라크 전쟁이 터졌을 때도 워싱턴으로 돌아가지 않고 이 별장에서 업무를 수행했다. 푸틴과 정상회담도 이곳에서 했다.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도 매년 겨울 휴가를 고향인 하와이에서 골프를 치며 보냈다. 일주일간 휴가비용은 대략 400만 달러, 우리 돈으로 45억 원에 이른다. 8년 재임 중 휴가비로만 1억 달러를 지출해 구설에 오르기도 했다. 휴가 중 숙박비는 본인 부담이지만 전용기 에어포스원 경비와 경호원 숙소 비용은 백악관 예산에서 지출됐다.외국 정상들은 휴가 중 큰일이 생겨도 일정을 취소하는 경우는 드물다. 1995년 보스니아 특사가 지뢰폭발 사고로 순직했을 때, 콜로라도에서 3주 휴가를 보내던 빌 클린턴 전 미 대통령은 장례식에 잠시 참석한 후 다시 휴가지로 돌아갔다. 2013년 5월 런던에서 2명의 모슬렘에게 영국군이 참수당하는 테러가 발생했지만, 데이비드 캐머런 전 영국 총리는 사건 3일 후 스페인 휴양지로 휴가를 떠났다. 대통령이 집무실을 비워도 무탈하게 돌아가는 시스템 때문이다.우리나라 대통령은 휴가를 쓰면서도 여론의 눈치를 봤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두 아들의 검찰 조사와 수해 등으로 2년간 휴가를 가지 못했다. 김영삼 전 대통령도 수해가 발생하자 휴가를 중단하고 복귀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아프가니스탄 한국인 피랍 사건 때문에 여름휴가를 취소했다. 박근혜 전 대통령도 세월호 참사와 메르스 사태로 휴가를 가지 못했다. 하지만 문재인 대통령은 달랐다. 취임한 지 보름도 안 돼 연차 휴가를 떠났다. 공교롭게 휴가 중 북한의 미사일 발사소식을 듣고도 휴가를 취소하지 않았다. '연차 휴가 사용 의무화'를 보여주려는 의도로 읽혔다. 북한이 ICBM을 발사했을 때도 출발을 하루 늦췄을 뿐, 휴가를 다녀왔다.그러던 문 대통령이 국내·외 현안으로 올 여름휴가를 취소했다. 그런데 휴가 취소를 발표한 날 제주도에서 주말 휴식을 즐겼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청와대는 "주말에 다녀온 개인일정"이라고 했으나 지역 언론 보도 후 하루가 지나 사실을 인정해 모양새가 나빠졌다. 휴가 반납의 취지도 반감됐다. 미리 공개하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대통령이 누려야 할 당연한 휴가에 이처럼 말이 많은 건 그만큼 세상이 어수선하고 국민들도 마음의 여유가 없어진 탓이다. /이영재 논설실장

2019-07-30 이영재

[참성단]'호날두 노쇼' 파문

축구 슈퍼스타 크리스티아누 호날두가 가뜩이나 심기가 불편한 한국인의 자존심을 제대로 저격했다. 지난 26일 이탈리아 명문 유벤투스와 K리그 올스타의 친선경기에서 호날두는 벤치만 지켰다. 한국 축구팬들은 팀 유벤투스보다 호날두의 경기장면을 보기 위해 6만5천여명이 경기장을 가득 메웠다. 그러나 45분을 뛰기로 계약했다던 호날두는 전광판에만 등장했다. 그의 땀방울까지 놓치지 않겠다며 거액을 지불한 특별석 관중들은 호날두의 뒤통수만 감상했을 뿐이다. 이번 친선 경기는 호날두의 광팬뿐 아니라 축구에 관심있는 한국인 모두의 관심을 받았다. 또 극심한 경기침체에 일본과의 무역전쟁, 중·러 군용기의 영공침범, 북한의 신형 미사일 발사로 스트레스를 받던 한국 사람들이 모처럼 집중해 즐길 만한 스포츠 이벤트였다. 기대가 컸던 만큼 배신감도 진했다. 과거 메시의 방한 경기에 실망한 이후 호날두를 '우리 형'으로 호칭했던 한국 팬이다. 이제 호날두를 '날강두'로 비하하며 적개심을 보인다. 호날두는 또한 몇 시간 만에 한국 광팬을 공중분해 시켰으니, 지금쯤 후회할 지도 모르겠다.유벤투스나 호날두가 간과한 점이 있다. 지금 한국은 매우 고단한 처지이고, 한국인은 매우 예민하다. 국제적인 팬클럽을 관리하는 명문 프로팀이라면 이 정도 사정은 감안할 수 있어야 했다. 호날두 또한 다르지 않다. 열악한 일정에도 불구하고 유벤투스와 호날두가 한국팬들을 위해 헌신하는 모습을 보였다면, 축구 팬은 물론 한국인들을 감동시켰을테고, 그들의 한국 시장은 넓어지고 단단해졌을 것이다. 지금이야 입장료 환불 요구에 그치지만, 호날두를 광고모델로 한 제품들로 불똥이 튈지 모를 일이다. 호날두는 공 대신 한국에서 날개를 달 수 있는 기회를 차버렸다.'호날두 노쇼' 후유증은 호날두가 자초한 일이다. 다만 이번 일로 우리 사회의 분노지수가 임계점에 달한 건 아닌가 해서 걱정이다. 분노가 꽉 찬 사회는 출구와 대상을 찾는다. 분노는 맹목적이다. 출구가 열리면 걷잡을 수 없이 솟구치고 대상이 되면 변명할 새 없이 매장된다. 일을 이 지경으로 만든 기획사나 프로축구연맹은 안보이고 호날두만 표적이 됐다. 전례없는 경제, 외교, 안보 위기가 심각하다. 분노는 배설일 뿐 대응이 아니다. 냉철한 국가 이성과 합리적인 국민 지성이 필요한 시간이다. /윤인수 논설위원

2019-07-29 윤인수

[참성단]뜨거운 지구

지구가 뜨겁다. 알래스카 앵커리지 등 주요 도시에서 10일 이상 30도가 넘는 폭염이 지속되는가 하면 영하권 안팎이어야 할 캐나다 북극지방도 기온이 영상 21도를 기록하고 있다. 그린란드 역시 이상기온으로 인한 해빙현상으로 하루에 20억t의 빙하가 녹아내리는 중이다. 이 때문에 태양광 반사량이 많이 줄어들어 바다표범 등 야생동물이 열사병으로 죽음을 맞고 있다는 우울한 소식도 들린다.유럽도 뜨겁긴 마찬가지다. 지난 25일 프랑스 파리의 낮 최고기온은 섭씨 42.6도로 1873년 기상관측을 시작한 이래 최고 기온을 경신했다. 인근 스페인, 벨기에, 독일은 물론 폴란드, 체코 등도 이미 사상 최고기온을 기록하는 등 유럽 대륙 전반이 몸살을 앓고 있다. 지구 온난화로 북극 빙하가 급격하게 감소하면서 해수면 수온이 크게 올라간 게 원인이다. 나무 나이테와 호수 침전물, 산호, 빙하 등 약 700개의 척도를 활용해 지난 2000년간의 기후변화를 분석한 스위스 베른대학 지리학연구소는 이같이 지구 기온이 지구 전체에 걸쳐 급격히 상승한 사례는 이번이 처음이란 연구결과를 발표했다.최근 국내에 출간된 과학전문 저널리스트 피터 브래넌의 '대멸종연대기'(흐름 출판)에 따르면 지구는 5억년 사이에 5번의 대멸종을 맞았는데, 2억5천만년 전인 고생대 말 '페름기'에 지구온난화로 가장 많은 96%가 멸종했다. 동물의 대멸종은 운석충돌 같은 외계의 충격보다는 지구 내부의 원인, 즉 지질활동에 따른 기후와 해양의 변화로 빚어진 지구의 온난화 때문으로 특히 이산화탄소의 증가가 대량살상의 주범이라는 것이다. 그는 인류의 환경 파괴로 지금처럼 이산화탄소가 증가한다면 100년 안에 동물 70%가 멸종할지 모른다고 경고를 하고 있다.문제는 뜨거운 지구가 일시적 현상이 아니라 앞으로도 꾸준히 지속된다는 점이다. 특히 화석연료 사용과 소 같은 가축이 끊임없이 내뿜는 이산화탄소를 줄이지 못하면 지구는 점점 더 뜨거워질 것이다. 전 지구적 차원의 공동대응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이유다. 그럼에도 지구 평균기온 상승 폭을 낮은 수준으로 유지하자며 채택된 2015년 파리기후변화협약에 최강대국 미국이 2017년 탈퇴했다. 그러자 중국도 적극성이 떨어졌다. 중국과 미국은 전 세계 이산화탄소 배출량 1, 2위 국이다. 이들 국가의 경솔함으로 지구가 이런 재앙을 맞는지도 모른다. /이영재 논설실장

2019-07-28 이영재

[참성단]피의사실 공표

2009년 10월 대검찰청에서는 '빨대논란'이 일었다. 빨대는 취재원을 가리키는 은어. 노무현 전 대통령이 박연차 전 태광실업 회장으로부터 회갑 선물로 1억원이 넘는 명품 시계를 받았다는 언론 보도가 발단이었다. 당시 홍만표 대검 수사기획관은 "나쁜 '빨대'를 색출하겠다"고 노발대발 했지만, 노 전 대통령 측은 "망신주기 위한 목적으로 흘린 나쁜 검찰"이라고 반박했다. 검찰 내에서조차 "노 전 대통령을 망신주기 위해 정보를 흘린 것"이란 말이 돌았다. 결과적으로 노 대통령을 투신 사망케 한 이 사건은 검찰의 피의사실 공표의 대표적인 사례로 꼽힌다. 피의사실 공표가 검찰이 수시로 써먹는 고약한 '수사 기법'이 된 지는 이미 오래다. 피의자가 혐의를 완강히 부인하면 언론에 내용을 슬쩍 흘려 보도케 함으로써 피의자를 압박한다. 망신을 당한 피의자는 심경에 큰 변화를 일으킨다. 정치적 사건인 경우 압박감을 견디지 못한 피의자는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경우도 있다. 분명한 건 우리 형법 제126조에는 피의사실을 공표하면 3년 이하의 징역 또는 5년 이하의 자격정지에 처한다는 점이다. 피의사실 공표는 검찰의 의도적 흘리기와 언론의 취재가 부합한 결과다. 선진국에서는 이를 허용하지 않는 것은 물론, 중대범죄 행위로 간주하고 있다. 피의사실이 공표되면 재판도 받기 전에 유죄가 되고, 재판은 이를 추인하는 절차로 전락할 수 있기 때문이다. 트럼프 대통령의 러시아 스캔들을 2년 가까이 수사하고도 피의사실이 언론에 일절 공개되지 않은 뮬러 특검이 이를 말해준다. 언론의 집요한 취재에도 불구하고 뮬러 특검은 단 한 건의 수사자료도 흘리지 않았다.피의사실공표를 두고 검경이 정면으로 충돌할 태세다. 대검찰청 산하 검찰수사심의위원회가 울산 경찰관의 피의사실 공표사건을 계속 수사해야 한다는 결정을 내린 다음 날, 김성태 자유한국당 의원이 자녀 부정채용 청탁 혐의로 자신을 수사한 검찰 관계자들을 피의사실 공표 혐의로 고소한 사건에 대해 경찰이 수사에 착수했다. 검찰은 경찰을, 경찰은 검찰을 서로 수사하는 웃지 못할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어차피 승자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번 일을 그냥 흘려보내지 말고 명확한 기준을 세워 '피의사실공표죄'를 적용함으로써 피의자 권리와 국민의 알 권리 등을 제대로 보장하는 기회로 삼아야 한다. 더는 피의자 인권이 아무렇게나 팽개쳐지면 안 된다. /이영재 논설실장

2019-07-25 이영재

[참성단]친일파 명문장

"소요 당시 본인의 두 차례에 걸친 경고에는 단지 조선독립이라는 말이 허망한 것이니 망동하여 생명을 사상(死傷)하는 화에 빠지지 말고 급히 구하라는 뜻으로만 말하였거니와, 이번에 여러분이 지난 잘못을 후회하는 때가 오니 본인이 다시 한마디를 더하는 것은, 독립이라는 주장이 허망함을 여러분이 확실히 깨닫는 것이 우리 조선 민족의 장래 행복을 설계하는 것임을 말하려는 것이다." 이완용은 3·1운동이 확산되자 조선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보'에 3회에 걸쳐 '경고문'을 실었다. 앞의 글은 3차 경고문의 일부분으로 문장 첫머리의 '소요'는 3·1운동을 말한다. 매일신보에 친일파들이 기고한 글을 엮은 '친일파 명문장 67선'에는 이완용의 글 외에도 일제를 찬양하거나 황국신민이 될 것을 독려하는, 더 나아가 일제의 전쟁에서 목숨을 바칠 것을 종용하는 글이 다수 등장한다. 지금 읽어보면 역겹기 그지 없지만 당시 힘없는 민초들로서는 이들 지식인의 수려한 문구에 일부 혹했을 터이다.그런데 요즘 이완용의 '경고문'에서 묘한 기시감을 느낀다. 경고문에서 몇 단어만 바꿔보았다. '소요'를 '불매운동'으로, '독립'을 '원자재 국산화'로 대치하는 식이다. 불매운동 반대론에도 합리적 이유가 없지 않은 만큼 과도한 비약일 수 있겠으나 다양한 사고에서 본질을 들여다보자는 취지로 감히 다시 써본다. "'불매운동'이 일어날 당시 본인의 두 차례에 걸친 경고에는 단지 '원자재 국산화'가 허망한 것이니 망동하여 국가 경제를 망치는 화에 빠지지 말고 급히 구하라는 뜻으로만 말하였거니와, 이번에 여러분이 지난 잘못을 후회하는 때가 오니 본인이 다시 한마디를 더하는 것은, '원자재 국산화'가 허망함을 여러분이 확실히 깨닫는 것이 우리 대한민국의 장래 행복을 설계하는 것임을 말하려는 것이다." 조선의 마지막 총독인 '아베 노부유키'(우연이겠지만 '아베 신조' 일본 총리의 성과 똑같다)는 조선을 떠나면서 이렇게 말했다. "일본은 조선인에게 총과 대포보다 무서운 것(식민교육)을 심어놓았다." 그는 어느 나라에나 존재하는 정치적 대립을 '당쟁'으로 깎아내리고, 조선을 그저 이씨(李氏)들만의 나라인 양 '이씨조선'으로 폄하하는 등 조선 백성들에게 열등감과 패배주의를 심는 데 주력했다. 그 교육의 연장선에 있어서일까? 이완용의 경고문과 비슷한 글을 요즘 적잖이 보고 있다. / 임성훈 논설위원

2019-07-24 임성훈

[참성단]SNS 여론전

지난 11일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은 보수 블로거 200여 명을 백악관으로 초청해 '소셜미디어 총회'를 가졌다. 명색이 소셜미디어 총회인데도 트위터 페이스북 구글 등 소셜미디어 관련 기업은 초청받지 못했다. 대신 총회는 이들 기업에 대한 성토장이 됐다. 트럼프는 이 자리에서 "내년 대선에서 당선되지 못한다면 몇몇 회사는 문 닫을 줄 알라"며 으름장을 놓기도 했다. 캘리포니아에 본사를 둔 이들 기업의 창업자와 대표이사가 민주당 지지자라는 것은 이미 알려진 사실이다. '트위터 중독자' 트럼프가 이들 기업을 혐오하면서도 선뜻 소셜네트워크 서비스(SNS)를 중단하지 못하는 것은 자신 같은 '아웃사이더'가 대통령이 되기까지 SNS를 통한 '여론전'이 큰 몫을 했음을 잘 알고 있어서다. 지금 미국은 진보와 보수가 사사건건 대립하고 있다. 이런 정치의 극단화 배경에 SNS가 있다. 진즉 이를 간파했던 오바마 전 대통령이 퇴임 인터뷰에서 "그릇된 정보와 음모론이 여과 없이 확산하는 SNS 때문에 유권자가 양극화됐다"고 지적했을 정도다. SNS로 공유되는 당파적 발언이나 가짜 뉴스의 위력을 발판으로 트럼프는 마침내 대통령이 됐다.최근 11일간 43건의 글을 SNS에 올려 '폭풍 페북'논란을 일으켰던 조국 청와대 민정수석이 SNS의 대일 '여론전'을 당분간 접는다고 한다. 하지만 이를 곧이 믿을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조 수석은 18대 대선을 앞두고 "'묵언안거(默言安居)'에 들어간다"고 한 적이 있다. 2년 전엔 '대통령 민정수석비서관 수락사'라는 글을 올리면서 "강단으로 복귀할 때까지 SNS를 중단하겠다"고 선언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를 지키지 못했다. 지난해 7월 SNS를 재개한 후 10월엔 '양승태 사법 농단' 사건과 관련해 현직 고등법원 부장판사를 공개 비판해 사법부 독립 침해논란을 불렀다.조 수석의 SNS에 대한 관심은 트럼프와 비교될 만큼 각별하다. 그렇다고 비난할 수는 없지만, 청와대 민정수석의 지위로 하는 SNS로 국론이 분열된다면 얘기는 달라진다. 지금 우리 사회는 진보 보수가 사사건건 극명하게 대립하고 있다. 정부 관계자 말 한마디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다. 더욱이 조 수석은 곧 있을 개각에서 법무부 장관 물망에 오르고 있다. 그렇다면 '진보=애국' '보수=매국'을 암시하는 듯한 SNS는 더는 곤란하다. 조 수석이 이번 약속은 지킬지 두고 볼 일이다. /이영재 논설실장

2019-07-23 이영재

[참성단]훈민정음 해례본 상주본

방탄소년단을 비롯한 한류스타들의 활약으로 세계 주요 도시마다 한글을 새긴 티셔츠를 입은 현지인들을 쉽게 만날 수 있다. 샤넬의 수석디자이너였던 칼 라거펠트는 생전에 "한글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글자"라고 극찬했다. 거장의 안목대로 유럽 패션계는 최근 한글의 조형미를 패션 아이템으로 주목하고 있다. 한글이 없었다면 한류열풍은 죄다 한자로 알려졌을 테고, 한류가 아닌 중국몽의 지류 쯤으로 전락했을지 모를 일이니 모골이 송연하다.언어와 문자는 민족에게 공동체의 동질성과 문화의 정체성을 부여한다. 한마디로 민족의 혼과 얼이 말과 글, 모국어에 담겨있다. 한민족은 반만년 같은 말을 썼지만 문자를 빌려쓰는 바람에 중국 문화에 종속됐다. 한민족이 문자독립으로 동질성과 정체성을 비로소 완성할 수 있었던 건 전적으로 세종대왕의 한글창제 덕분이다.한국인의 얼과 혼이 담긴 한글, 훈민정음이 최근 볼썽사나운 논란에 휩싸였다. 훈민정음 해례본 상주본을 불법적으로 점유한 채 국가기관인 법원과 문화재청을 농락중인 개인 소장자 때문이다. 지난 15일 "상주본은 국가 소유"라는 대법원 판결이 났지만, 소장자인 배익기씨가 1천억원을 요구하며 국가반환을 거부하고 있다. 배씨의 몽니는 해괴망측하기 짝이 없다.1천억원의 근거는 재판과정에서 상주본의 가치가 1조원이라는 감정가에서 비롯된 모양이다. 배씨는 10% 가격에 넘겨주면 싼 거 아니냐는 식인데 말이 안된다. 1조원 감정가는 가격을 매길 수 없는 무가지보(無價之寶)라는 평가로 해석해야 이성적이다. 괘씸한 건 국가소유 보물을 빼돌리고 천문학적 흥정을 벌이는 심보다. 문화재청은 배씨의 몽니로 나라의 보물을 찾지 못할까봐 법적 대응도 자제한 채 그를 설득하느라 진땀을 흘리고 있다.훈민정음 해례본은 간송 전형필이 일제와 6·25전쟁 중에도 지켜낸 '안동본'과 문제의 '상주본' 두권 뿐이다. "나랏말싸미 듕귁에달아···"를 담고 있는 훈민정음 언해본에 앞서 세종 당대에 발간된 한글창제의 원리를 담은 국보 중의 국보다. 이를 갖고 나라와 국민을 희롱하다니 가당치 않다. 배씨에게 국민성금을 거둬주고 박물관 관장을 시켜주겠다는 상주시의 제안은 코미디다. 배씨에 대한 국가의 대응이 추상 같아야 한다. 마침 한글창제 과정을 담은 사극 영화 '나랏말싸미'가 내일 개봉한다니 배씨의 몽니가 새삼 여론의 주목을 받게 됐다. / 윤인수 논설위원

2019-07-22 윤인수

[참성단]여성 제임스 본드

"그저 눈만 뜨고 있을 뿐, 한 번도 깨어있는 느낌이 들어 본 적이 없어." (델마) "이제야 진정한 나 자신을 되찾았어." (루이스) 이런 대화가 스스럼없이 오가는 영화. 지금 같으면 아무것도 아닌데, 영화가 제작된 1991년을 상기하면 사정이 조금 다르다. 리들리 스콧의 '델마와 루이스'는 껌 씹듯 폭력을 행사하는 근육질 남자 배우들이 판을 치던 할리우드 영화의 고정관념을 과감하게 깨고 여성의 존재를 부각한 기념비적인 작품으로 꼽힌다.그동안 영화에서 여성은 그저 성적 대상, 지켜줘야 할 보호대상에 불과했다. 하지만 '델마와 루이스'는 달랐다. 남성의 폭압을 거부하는 여성이 사건의 중심에 서 있다. 감독은 그들의 대화 하나하나에 의미심장한 메시지를 담았다. 메시지가 하도 강렬해 진정한 페미니즘 영화의 서막을 알렸다고 평가받는다. 그랜드 캐니언 계곡으로 질주하는 엔딩신은 영화사에 길이 남는 장면으로 꼽힌다. 특히 그들의 마지막 대사. "우리 잡히지 말자! 계속 가는 거야! 가자! 밟아!" 여성을 이렇게 강렬한 캐릭터로 묘사한 영화는 그동안 없었다.델마와 루이스를 범죄자로 만든 건 남성들의 악행이 원인이며, 남성들이 선한 존재라면 그녀들이 죄를 지을 일도 없었을 것이라고 영화는 항변한다. 이 영화 이후 미국 사회에서 여성 억압에 대한 논의가 활발히 전개됐다. 영화도 크게 변했다. 레니 할린의 '롱 키스 굿 나잇'에 이어 리들리 스콧은 '지 아이 제인'에서 해병대 전사 데미 무어를 등장시킨다. 여성이 점점 강해지는 것이다. 이제 '여성 히어로'가 등장하는 영화는 셀 수 없이 많다.마침내 남성 배우 전유물이던 007 제임스 본드 역이 여성에게 넘어갔다. 25번째 007시리즈 '본드 25'(가제)에 흑인 여성 배우 샤나 린치가 낙점됐다는 소식이다. '역대 가장 매력적인 제임스 본드'로 불리던 6대 제임스 본드 다니엘 크레이그는 퇴진하고, 여성 본드가 007 살인면허를 부여받는다. 외신은 '팝콘을 쏟을 만한 깜짝 뉴스'라고 전하고 있다. 백인이 주름잡던 배역에 흑인이, 그것도 여성이 남성의 아성이던 007역을 가져갔으니 그럴 만도 하다. 낯설고 어색해도 어쩔 수 없다. 세상이 바뀐 것이다. 여성 본드의 등장이 인종 및 성차별을 바로잡는 취지라지만, 하늘나라에서 원작자 이언 플레밍은 이를 어떻게 받아들일지 그게 궁금하다. /이영재 논설실장

2019-07-21 이영재

[참성단]신흥 야구 명문 수원 유신고

수원 유신고가 청룡기 전국야구대회 우승을 차지했다. 경사라는 말로는 모자람이 있다. 쾌거다. 유신고는 이달 초 황금사자기에서도 우승했었다. 두 대회 연속 우승이다. 이런 패기라면 남은 대통령 배와 봉황기 배까지 전국대회 4관왕 위업 달성을 하지 말란 법도 없다. 전력이 역대 최고라서 더 그렇다. 야구는 '투수 놀음'이다. 유신고에는 선발진, 계투진, 마무리의 조화가 완벽한 막강 투수진이 존재한다. 이번 대회에서 최우수선수상을 받은 좌완 허동윤은 5경기 21이닝을 던지면서 평균자책점 '0'을 기록하는 인상적인 투구를 했다. 제2의 류현진이라 해도 전혀 손색이 없다. 선수층도 두텁다. 여기에 극성맞은 동문의 후원까지, 여건도 좋다.그동안 야구 하면 '인천야구'였다. 인천은 한국 야구의 본산이다. 50·60년대 동산고와 인천고를 앞세워 고교야구를 평정한 '야구의 도시'였다. 70년대 들어 서울과 경북 부산 광주지역 고교 야구팀이 창단되면서 침체기를 맞기는 했지만, 여전히 강하다. 이제 그 명성을 수원 유신고가 이을 태세다.유신고의 전국대회 우승 의미는 크다. 그동안 수원은 야구의 불모지나 다름없었다. 70년대 남창, 신풍, 세류 초등학교를 중심으로 야구부가 운영되긴 했지만, '미완의 대기'는 모두 인천이나 서울로 빠져나갔다. 이들을 받아 줄 중·고등학교 야구팀이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던 중 1984년 유신고가 야구부를 창설했다. 초창기엔 선수 부족 등으로 뚜렷한 성적을 내지 못했다. 2005년 봉황대기 전국고교야구선수권대회에서 한 번 우승한 적이 있지만, 그 분위기를 계속 이어가지 못했다. 그러다 이번에 기적을 만들었다. 무엇보다 열심히 뛴 선수들의 덕이지만, 이들을 제대로 키워 낸 이성열 감독, 무한한 지원을 아끼지 않은 동문의 힘도 컸다.유신고 야구는 올해 창단 35년을 맞는다. 연륜만 따지면 어디에 내놔도 손색없다. SK 와이번스의 최정·최항 형제, kt wiz의 유한준·김민, 두산 베어스의 정수빈 등 걸출한 스타 선수도 배출했다. 유신고의 전국대회 우승을 발판으로 수원, 나아가 경기 야구의 부흥을 기대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수원을 연고지로 하는 프로야구 kt wiz도 이에 한몫할 것이다. 열렬한 야구팬으로서 너무도 들어보고 싶었던 말이 있었다. '신흥 야구 명문 수원 유신고' 말이다. 이제 광주일고, 경남고, 군산상고가 하나도 부럽지 않다. /이영재 논설실장

2019-07-18 이영재

[참성단]80대 로커의 도전정신

일렉트릭 기타(일렉기타)가 처음 선보였을 때 음악계에서는 일렉기타를 악기 범주에 포함시키는 게 타당한지를 놓고 설왕설래 말이 많았다고 한다. 고전 현악기는 물론 어쿠스틱 기타에 필수적인 울림통이 없는 '요상한' 악기였기 때문이다. 금속현의 진동을 전기신호로 바꿔 소리를 증폭시키는 방식이 당시로서는 적잖이 낯설었던 듯싶다. 하지만 이제 일렉기타는 현대 대중음악에서 빼놓을 수 없는 악기의 강자로 자리 잡고 있다.일렉기타의 매력은 디지털 기기를 활용한 다양한 음색과 갖가지 특수 주법을 꼽을 수 있다. 실제로 밴딩, 팜뮤트, 라이트핸드 등 일렉기타의 주법은 이름만 외우기도 벅찰 정도로 종류가 다양하다. 클래식 기타의 하모닉스 주법을 응용한 피킹하모닉스 주법처럼 일렉기타에 특화된 주법들도 속속 개발되고 있다. 이들 주법은 대부분 기타에 '미친'(?) 사람들이 개발했을 터이다. 밤낮으로 기타를 끼고 살면서 이리 쳐보고 저리 뜯어보다가 "어! 이런 소리도 나네?" 하면서 영감을 얻어 새로운 주법으로 발전시켰지 않았나 싶다.우리나라에도 이처럼 기타에 미친 사람이 있다. 한국 록음악의 대부 신중현이다. 그는 일렉기타의 매력을 대중에게 알린 최초의 뮤지션이라 할 수 있다. 그의 히트곡 '미인'의 도입부에 등장하는 기타 리프(Riff, 짧은 선율적 악구)는 한번 들으면 잊혀지지 않을 정도로 인상적이다.그가 며칠 전 81세의 나이로 새 앨범을 발표했다. 지난 2009년 펜더사에서 특제 기타를 헌정받은 것에 대한 '헌정 기타 기념 앨범'이다. 그가 펜더기타를 헌정받은 것은 에릭 클랩튼, 제프 백 등에 이어 세계에서 여섯번째다. 무엇보다 눈길을 끄는 것은 2006년 은퇴 공연 이후 연주활동을 접었던 그가 펜더의 헌정을 계기로 새로운 주법을 개발했다는 점이다. 이른바 '삼삼(33) 주법'으로, 왼손의 검지와 중지, 새끼손가락 등 세 손가락을 주로 사용하는 주법이라고 한다. 기타 실력으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그의 아들 신대철도 "33주법을 하기 위해서는 기타를 처음부터 다시 배워야 한다"며 포기했을 정도라고 하니 상당히 파격적인 주법인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실제로 그는 이 주법을 완성시키기 위해 손 마디마디에 각인된 기존의 주법을 과감히 버렸다고 한다. 이번 앨범도 이 주법으로 녹음했다. 80대 로커의 도전정신이 새 앨범에 어떻게 녹아있을지 사뭇 궁금하다. /임성훈 논설위원

2019-07-17 임성훈

[참성단]고령자 운전제한

미래학자 애덤 한프트는 고령 운전자에 의한 교통사고를 '드라이빙 미스 데이지 증후군'으로 불렀다. 영화 '드라이빙 미스 데이지'에서 주인공인 71세의 데이지가 부주의로 차 사고를 낸 것에 착안한 것이다. 그는 2000년 초반 고령 운전자의 교통사고가 미래에 심각한 사회문제가 될 것으로 예견했다. 그의 말대로 우리나라 교통사고 사망자 다섯 명 가운데 한 명은 고령 운전에서 비롯될 만큼 심각한 사회문제로 대두하고 있다. 고령 운전자 문제는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갈수록 사고 빈도가 잦아지고, 한번 사고가 나면 대량의 사상자가 발생한다는 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그래서 미국에선 운전할 수 없음에도 운전대를 잡는 노인들을 가리켜 '살인자 할아버지'라고 부른다. 우리나라에서 80세 이상 운전자에 의한 사망자가 매년 100명 이상 발생한다고 한다. 심지어 90세 이상 노인이 운전하는 차 사고도 종종 발생하고 있다. 그래서 올해부터 75세 이상 고령 운전자의 면허 갱신 주기를 5년에서 3년으로 요건을 강화했다. 이미 일본은 70세 이상 모든 운전자의 면허 갱신 주기를 5년에서 3년으로 단축했고, 뉴질랜드는 80세가 되면 면허를 자동으로 말소시킨다. 민갑룡 경찰청장은 그제 "운전능력 평가에서 떨어진 노인은 고속도로 운전을 제한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라고 밝혔다. 운전능력 평가 절차 등을 거쳐 고속도로 운전을 제한하거나 첨단안전장치 장착을 의무화하는 등 '조건부 면허 제도'를 고려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제도는 이미 미국·호주·뉴질랜드 등에서 시행 중이다. 미국의 경우 고령 운전자에게는 야간운전금지, 고속도로 운전 제한, 운전 가능 장소 제한 등을 실시하고 있다. 호주와 뉴질랜드도 운전 가능 장소를 제한해 고령 운전자의 교통사고를 예방하고 있다. 우리나라는 올해 노인 인구 비중이 15%를 넘기면서 이미 '고령사회'로 진입했다. 지난해 65세 이상 노인의 면허소지자 비율도 9.4%로 점점 늘어나고 있다. 이와 비례해 고령자 운전사고도 꾸준히 증가하는 추세다. 하지만 여전히 택시나 택배 기사처럼 생업을 위해 고령임에도 운전대를 잡는 분들도 꽤 많다. 나이 먹는 것도 서러운데 운전에 제한까지 둘 경우 이를 선뜻 받아들일지 의문이다. 노인의 인권을 침해하지 않는 선에서 충분한 논의와 면밀한 준비가 필요하다. /이영재 논설실장

2019-07-16 이영재

[참성단]'직장내 괴롭힘 금지법'

서구의 직장문화는 수평적이고 개인주의적이다. 냉정한 고용계약이 바탕에 있다. 미국 회사의 고용 계약서에는 '당신은 임의로 고용된 근로자이며 이는 회사가 당신을 언제든지 이유 없이 해고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무시무시한 문구가 있다. 취업 리얼리티쇼를 진행했던 트럼프는 "You're Fired(넌 해고야)"라고 소리쳤지만, 실제로는 회사가 직원을 자르는데 큰 소리칠 이유가 없다. 출입증을 정지하고 컴퓨터 로그인을 막거나, 조용히 불러 통보하면 그걸로 끝이다. 사정이 이러니 직원들도 독립적이고 자율적인 태도로 회사와 상사를 대한다.반면에 유교적 전통이 유장한 우리나라 직장문화는 이와 사뭇 달랐다. 고용계약서는 존재하지만 한번 직장은 평생직장이라는 의식이 강했다. 회사도 직원들을 가족으로 여기며 범죄적 해사행위가 아니면 고용을 유지했다. 집안마다 가풍이 다르듯 회사마다 고유한 사풍으로 직원들을 통제하는 폐쇄적 구조는 직급에 따른 수직적 상명하복 직장문화를 만들어냈다. 상사의 지시가 부당해도, 폭언은 물론 폭행을 당해도 조직을 위해 참고 넘기는 걸 미덕으로 여겼다.하지만 세상이 달라졌다. 평생직장 개념이 깨지는 중이고 고용의 형태도 다양해졌다. 노동조합의 권력은 정부와 정당만큼 강력하고, 무엇보다 신세대 직장인들의 근로의식은 유교문화와 거리가 멀다. 직원들에게 막말하고 부당한 지시를 남발하는 상사들은 직원들의 요시찰 대상이 된다.이런 시대적 추세에도 여전히 직장 갑질을 일삼는 사람이 많은 모양이다. 오늘부터 '직장내 괴롭힘 금지법', 즉 개정 근로기준법이 시행됐다. ▲사용자나 근로자가 직장에서 우월적 지위나 관계를 이용해 ▲업무상의 적정 범위를 넘어 ▲다른 근로자에게 신체적·정신적·정서적 고통을 주거나 근무환경을 악화시키는 행위는 금지된다. 가해자 대신 사용자가 처벌받는다. 직장내 괴롭힘이 없도록 직원들 교육을 똑바로 시키라는 뜻이다.폭력적인 직장문화를 바꾸고 이를 법으로 강제하는 일은 필요한 조치다. 하지만 그보다 중요한 건 직원을 존중하는 자발적 환경변화일 것이다. 귀하게 얻은 인재를 직장내 괴롭힘으로 잃을 바보 같은 기업은 없다. 천지에 청년 실업자가 널려있고 이들을 값싸게 고용하는 현실이 직장내 폭력의 근본적 원인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윤인수 논설위원

2019-07-15 윤인수

[참성단]사라지는 주유소

세계 최초의 주유소에 대한 의견은 분분하나 지붕이 있고 넓은 주차시설과 급유기를 갖춘 현대식 주유소는 1907년 스탠다드 오일사가 워싱턴주 시애틀에 세운 게 최초라는 데는 이견이 없다. 우리나라 최초의 주유소는 서울역 앞에 세운 '역전주유소'로 알려졌지만, 이것저것 함께 취급하는 석유상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펌프식 주유기를 갖춘 최초 주유소로는 1910년대 후반 자동차 판매상 테일러가 서울 조선호텔 건너편에 세운 게 처음이라고 한다.6·25전쟁 후에도 주유소가 없어 장거리 여행 때 차에 기름통을 싣고 다녔다. 본격적으로 주유소가 들어선 건 경부고속도로가 개통하면서부터였다. 한국 최초 현대식 주유소는 1969년 한국석유공사가 홍대 인근에 설립한 '청기와 주유소'다. 그 후 자동차가 보급되고 주유소가 떼돈을 버는 사업으로 소문나면서 전국적으로 우후죽순으로 늘어났다. 주유소 사업을 발판으로 성공한 사업가들이 많았다. 미군 부대에서 흘러나오는 석유를 몰래 들여와 팔고, 더러는 가짜 휘발유를 팔아 폭리를 취하기도 했다. '주유소 사장님' 소리를 들으면 그 동네에서 영락없는 알부자요 유지였다. 주유소는 부의 상징이었다.'대를 이어 먹고 산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호황을 누렸던 주유소가 요즘에는 '황금 알 못 낳는' 사양산업이라고 경인일보가 보도했다. 주유소는 1991년 거리제한이 완화된 뒤 3천382곳이 2010년 1만3천3곳으로 4배 가까이 급증했다. 특히 2011년 알뜰주유소까지 도입되면서 주유소 간 피 말리는 생존경쟁을 벌여야 했다. 무료 세차는 기본이고 휴지·생수 같은 물품공세를 편 것도 이때다. 과당경쟁과 친환경 차의 증가 등으로 수익성이 크게 악화하면서 전국적으로 매년 150여 개 주유소가 운영을 중단하거나 문을 닫고 있다고 한다.폐업 비용이 부담스러워 임시휴업 중인 주유소도 전국적으로 600여 개에 달한다. 주유소만으로는 유지할 수 없어 전기차 충전부터 택배, 편의점까지 첨단·편의·공간 활용 등의 키워드를 담은 주유소도 속속 등장하고 있다. 주유소는 이제 더는 기름만 넣는 곳이 아니다. 여관은 호텔·모텔에 밀려 사라지고, 동네 극장은 멀티플렉스와 텔레비전에 밀려 전성시대를 일찍 마감했다. 이제 주유소도 우체통과 공중전화처럼 찾는 이 없는 신세가 될 날이 머지않아 보인다. 격세지감이 아닐 수 없다. /이영재 논설실장

2019-07-14 이영재

[참성단]살찐 고양이 법

역사학자 로버트 단턴의 '고양이 대학살'(문학과지성사 간)은 1730년대 파리 생 세브랭가의 한 인쇄소에서 일어난 고양이 무더기 학살사건이 프랑스 대혁명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를 다루고 있다. 인쇄소 주인이 키우는 고양이들보다 못한 대우를 받는 견습공들은 고양이로 상징되는 주인을 재판하고 자백을 받아 사형시키는 극을 만들어 법과 사회 질서에 분노를 공유했고 결국 집단적 저항으로 이어져 프랑스 대혁명으로 이어졌다는 것이다. 여기서 고양이는 탐욕에 찬 부르주아를 일컫는다.미국에선 부자들을 '살찐 고양이'라고 부른다. 그렇다고 모든 부자를 지칭하는 것은 아니다. 욕심 많은 기업인이나 은행가 등 부정적 의미의 배부른 자본가들이다. 우리도 그렇지만 어느 나라건 '부자=욕심'이란 공식이 각인되어 있는 듯하다. 부자가 존경받기란 그만큼 어려운 세상임은 분명하다. '살찐 고양이'는 1928년 프랭크 켄트의 저서 '정치적 형태'에 논의된 후, 2008년 세계 금융위기 당시 미 금융회사 경영진들의 도덕적 해이가 부각 되면서 다시 주목받았다. 직원들은 구조조정과 임금 삭감에 내몰려 있는데 정작 경영실패 책임을 져야 할 경영진은 거액의 연봉과 퇴직금을 챙겨갔기 때문이다. 이때 제기된 것이 '살찐 고양이 법'이다. 경영진들이 받아가는 연봉이 근로자와 그들이 한 일에 비해 적정한지, 만일 그렇지 않다면 이들의 연봉을 규제하자는 것이다. 개인이 벌어들이는 연 소득에 상한선을 정하고, 이 상한선을 최저임금에 연동시키는 '최고임금제' 같은 것이다. 우리의 경우도 지난 2016년 정의당 심상정 의원이 민간 대기업 임직원들은 최저임금의 최고 30배, 공공기관 임직원은 10배, 국회의원과 고위공직자는 5배가 넘는 임금을 받을 수 없도록 하는 '최고임금법'을 대표 발의했지만, 어찌 된 일인지 흐지부지되고 말았다.경기도가 이를 도입할 모양이다. 산하 공공기관 임원의 연봉을 최저임금의 7배인 1억4천만 원 이내로 제한하는 조례안이 16일 도의회 본회의에서 의결을 앞두고 있다. 부산 서울 제주 광주 등 요즘 '살찐 고양이 법'이 지자체에 유행처럼 번지고 있다. 취지는 이해할 것 같은데 문제는 실효성이다. 근대민법의 3대 원칙 중 하나인 '계약자유의 원칙'이 무력화되는 것은 차치하고라도 그 연봉에 유능한 인재를 구하는 게 그리 만만치가 않다. 유행을 뒤쫓다 후에 낭패를 당하는 걸 우리는 종종 본다. /이영재 논설실장

2019-07-11 이영재

[참성단]평화학

베트남 출신 이주여성이 남편으로부터 무차별 폭행당하는 동영상이 공분을 자아내고 있다. 개인적으로는 이주여성이 폭행을 당하는 내내 '엄마'를 부르며 울부짖던 두 살 아기가 자꾸 눈에 밟힌다. 주먹과 발길질을 피해 얼굴을 감싸고 웅크린 엄마를 조막손으로 보듬는 듯한 모습을 보는 것은 차라리 고문이었다. 폭행이 멈춘 뒤 엄마 품에 안긴 아기에게 엄마 품은 과연 평화로웠을까?'평화'의 반대가 무엇인지 묻는다면 아마도 많은 이들이 '전쟁'을 꼽을 듯싶다. 그러나 국내 평화학 박사 1호인 정주진 박사의 설명을 접하다 보면 생각이 조금 달라진다. 그는 저서 '평화, 당연하지 않은 이야기'에서 평화의 반대는 '폭력'이라고 정의한다. 이어 폭력의 유형을, 가정폭력이나 학교폭력처럼 폭력이 사람에게 직접 가해져 바로 피해가 발생하는 '직접적인 폭력'과 사회의 구조를 통해 가해지는 '간접적인 폭력', 문화를 통해 이뤄지는 '문화적 폭력'으로 구분한다. 전쟁은 직접적 폭력이 가장 많이 발생하는 폭력의 한 종류다. 가장 위험한 폭력이기에 평화의 반대말 하면 전쟁부터 떠올리는 것 같다.그렇다면 베트남 출신 이주여성은 단지 '직접적 폭력'의 희생자일까? 평화학에서 말하는 간접적 폭력은 사회 구조가 약자에게 불리하게 돌아가는 상황에서 발생하는 폭력을 말한다. 재산이 없거나 급료가 낮은 사람이 신용도 때문에 은행 대신 대부업체에서 돈을 빌려야 하는 것도 일종의 간접적 폭력으로 설명한다. 유색인종, 여자, 어린이, 장애인, 외국인 등을 무시하고 차별하는 것은 문화적 폭력이다.평화학적 관점에서 본다면 이주 여성이라는 사회적 약자 신분에 물리적 폭행까지 당한 피해여성은 직접적 폭력은 물론이고 간접적인 폭력, 문화적 폭력의 희생자이기도 하다. 몸을 추스를 경황조차 없는 엄마의 품으로 뛰어든 아기야말로 이런 복합적인 폭력문화가 낳은 최대의 희생자다. 폭력은 워낙 파괴적이기에 아기는 엄마 품이 평화를 담보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고작 두 살배기의 경험으로 잘 알고 있었으리라.정 박사는 평화학에 대해 '평화를 이루는 평화적인 방법을 연구하고 실천하는 학문'으로 요약한다. 큰 전쟁을 치렀음에도 우리나라에는 아직 이 학과가 없다. 국가 차원의 안보적 불확실성이 가시지 않았고 사회적 불평등과 차별, 갑질로 많은 이들이 고통받는 지금이야말로 평화를 '배워야' 할 시기가 아닌가 싶다. /임성훈 논설위원

2019-07-10 임성훈

[참성단]친일 청산 프로젝트

히말라야 시다(Himalaya cedar). 우리나라에서는 개잎 갈나무, 설송나무라고 부른다. 히말라야가 원산지다. 이식이 쉽고 잘 자라며 공해에 강해 가로수 정원수로 인기가 높다. 파키스탄의 국가 나무이기도 하다. 레바논 국기에는 히말라야 시다 사촌격인 레바논 시다가 그려져 있다. 금송(金松), 아라우카리아와 함께 3대 조경수로 꼽힌다. 우리나라에는 일제 강점기에 들어왔다. 비록 외래종이지만 학생들이 나무처럼 하늘을 향해 바르고 씩씩하게 자라길 희망하는 마음에 교목으로 지정하는 학교도 있다. 나무가 그만큼 친숙하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아주 큰 나무는 줄기 지름 3m에 키가 60m에 이른다. 위풍당당하다.이 나무가 수난을 당한 적이 있다. 2005년 봄, 당시 문화재청장 유홍준이 전북대 박물관을 찾았다가 정원에 서 있던 30년 넘은 히말라야 시다를 본 게 화근이었다. 그는 히말라야 시다가 친일 잔재라며 베어 버리라고 지시했다. 당시 끗발 좋은 '스타 청장'의 말 한마디에 애꿎은 나무는 '친일'딱지가 붙은 채 '댕강' 잘리고 말았다. 그때 그 나무가 살아 있었다면, 지금도 하늘을 향해 건강하고 행복하게 무럭무럭 자라고 있을 것이다.경기도 교육청이 최근 학교 내 친일 청산 프로젝트에 나섰다가 구설에 올랐다. 도내 2천300여 초·중·고교 학생과 교사를 대상으로 '학교생활 속 일제 잔재 발굴 조사'를 실시하면서 그동안 일상적으로 사용하던 용어, 즉 화이팅(Fighting), 수학여행을 청산 대상 일제 잔재로 지목한 것이다. 경기 교육청은 2016년에도 동·서·남·북 등 방위명과 제일, 중앙 등의 서열화된 단어가 일제강점기의 잔재라고 보고 이를 청산하기 위해 '학교명을 부탁해'라는 프로젝트를 실시했다가 흐지부지 끝낸 적도 있다. 이에 호응한 학교는 고작 5개교에 불과했다. 이번 발굴조사는 친일 청산 프로젝트 시즌 2인 셈이다. 취지는 뭔지 알겠는데, 효과는 처음부터 미지수였다. 학교 현장에 아주 깊숙이 스며든 문화가 일제 잔재인지 학생은 물론이고 교사조차 모르는 경우가 태반이기 때문이다. 이런 식이라면 교육청, 교육감, 교장, 중학교, 고등학교, 체육, 축구, 야구, 칠판이란 용어도 모두 일제 잔재로 청산되어야 할 대상이다. 단발성 이벤트로 진행하는 친일청산 프로젝트는 이제 그만하자. 하면 할수록 머릿속은 혼란스럽고 마음은 점점 더 쓸쓸하고 허탈해진다. /이영재 논설실장

2019-07-09 이영재

[참성단]한·일 경제전쟁

"한 번 뛰어서 곧바로 대명국(大明國)에 들어가 우리나라(일본)의 풍속을 4백여주에 바꾸어 놓고…." 임진왜란 직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조선통신사를 통해 선조에게 전달한 국서의 내용이다. 그러면서 선조가 직접 자신을 알현할 것을 요구했다. 명을 칠테니 자발적으로 길을 내달라는 정명가도(征明假道)의 논리는 조명 동맹에 대한 명백한 선전포고였다. 임진왜란은 예고된 전쟁이었고, 조선은 당쟁으로 허송세월했다. 이런 나라 탓에 조선 백성들은 일본에 귀무덤, 코무덤을 남겨야 했다.외침에 이골난 한민족이지만, 일본에 대한 역사적 반감은 특별하다. 임진왜란과 일제식민지배로 두번이나 나라가 절단난 역사를 민족 전체가 공유하고 있다. 임란은 성웅 이순신과 동맹인 명의지원으로 그나마 국권을 지켜냈다. 하지만 이순신도 없고 동맹도 없었던 대한제국은 국권을 강탈당했다.일본이 우리를 향해 사실상 경제전쟁을 선포했다. 핵심 소재 수출제한으로 삼성 등 한국 반도체 기업을 정밀 타격했다. 일본이 소재, 부품, 장비 공급을 제한하면 한국 기업들은 공장을 세워야 한다. 일본의 의도는 명백하다. 한국 정부의 위안부 합의 백지화, 한국 법원의 강제징용 피해보상 결정에 대한 반격이다. 1965년 한일협정으로 일본의 가해역사는 종결됐음을 인정하라는 강요다.한국에서는 반사적으로 반일 감정이 일고 있다. 일본 상품 불매운동이 일어나고, 경기도교육청은 '수학여행'을 일제용어라며 청산하겠다고 한다. 감정적으로는 전적으로 공감하지만 과연 대응의 방식으로 옳은지는 확신하기 힘들다. 여당의 한 의원은 "일본의 경제침략에 맞서 의병을 일으켜야 할 일"이라고 했다는데, 나라는 어디가고 의병부터 찾는단 말인가. 일본의 경제전쟁 선포에 국력을 모으는 건 당연하다. 하지만 국가의 책무가 있다. 무능했던 선조도 일본의 동태를 살피기 위해 통신사를 파견했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아니라 정부의 통상전문가가 일본을 갔어야 했다.국제사회에서 국력의 뒷받침 없는 선린우호 관계는 사상누각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어제 "우리 기업에 피해가 발생하면 우리 정부도 대응하지 않을 수 없다"고 밝혔다. 정부의 대응이 우리 국력의 현실을 보여줄 것이다. /윤인수 논설위원

2019-07-08 윤인수

[참성단]달 착륙 50주년

기억난다. 1969년 7월 20일. 일요일이었다. 동네에 TV가 있는 집은 딱 한 곳이었는데, 그 집에 동네 사람들이 모두 모였다. 마음씨 좋은 집주인은 싫은 내색 없이 오히려 어른들에게 이날을 기념하자며 막걸리를 한 사발씩 따라 주었다. 우리는 모두 TV 앞에 모였다. 아폴로 11호의 달 착륙 실황중계를 보기 위해서다. 흑백 TV를 통해 달에서 껑충껑충 뛰던 사람이 닐 암스트롱이고, 그가 달을 밟으며 "인간에게는 작은 발걸음이지만, 인류에게는 위대한 도약"이라고 말했다는 것은 후에 알았다. 그때는 당장 달에 방아를 찧는 토끼가 살지 않는다는 사실이 더 충격이었다.우주 탐사의 역사는 미·소 체제 경쟁의 역사다. 1961년 구소련의 유리 가가린이 보스토크 1호를 타고 우주에서 108분 동안 지구를 한 바퀴 돌고 돌아왔다. 미국은 큰 충격에 빠졌다. 당시 케네디 대통령은 달 정복을 선언했다. 아폴로호는 그렇게 탄생했다. 그리고 미국이 달을 선점했다. 하지만 경쟁자가 없으면 기록은 늘 뒤처지게 마련이다. 경제 악화로 러시아는 우주에 투자할 여력을 잃었고, 미국도 재정 건전성 등을 이유로 항공우주국(NASA) 예산을 대폭 삭감했다. 우주는 점점 기억에서 사라졌다.우주경쟁에 다시 불을 붙인 건 미국의 사업가 데니스 티토였다. 그는 2001년 러시아에 2천만 달러를 내고 민간인 최초로 소유스 우주선을 탔다. 이후 18년간 총 7명의 민간인이 사비를 털어 우주로 나갔다. 이를 본 기업들이 가만히 있을 리 없다. 아마존 창업자 제프 베저스의 블루 오리진, 버진 에어라인 창업주 리처드 브랜슨의 버진 갤럭틱, 테슬라의 창업주 일론 머스크의 스페이스X가 우주 항공사업에 뛰어들었다. 오는 20일은 인류가 달에 첫발을 디딘 지 꼭 50년이 되는 날이다. NASA는 이를 기념해 지난달 '아르테미스'계획을 발표했다. 2020년 아르테미스 1호를 발사해 달 궤도 무인비행을 하고, 2022년 2호로 우주인을 싣고 달 궤도 비행을 한 뒤, 2024년 아르테미스 3호로 유인 달 착륙을 하며 최종적으로 달에 인간이 머물 기지를 만들겠다는 것이다. 그리스 신화 속 사냥과 달의 여신 아르테미스를 상징하듯, 첫 유인 달 탐사 우주인으로 여성을 보내기로 했다. 하지만 이들의 목표는 달이 아니다. 따로 있다. 화성에 가는 것이다. 50년 전 암스트롱의 발걸음은 화성을 향한 위대한 도약이 될 것이다. /이영재 논설실장

2019-07-07 이영재

[참성단]인물시

미당 서정주의 작품 세계는 전 생애를 걸쳐 크게 변화했다. 첫 시집 '화사집(花蛇集)'에서 원시적인 생명력을, 두 번째 시집 '귀촉도(歸蜀途)'는 인간의 슬픔이 주조를 이룬다. '신라초(新羅抄)'에선 동양사상을, '질마재 신화(神話)'에서는 '이야기꾼'으로 변모한다. 그러던 그가 세계 여행의 체험과 자연에서 얻은 영감을 바탕으로 1992년 세계의 산 이름을 소재로 '산시(山詩)'를 선보였다. 산 만 가지고 풀어쓴 시로 "역시 미당!"이란 탄성이 나온다.미당이 산으로 시를 썼다면 인물로만 시를 쓴 시인도 있다. 시인 고은이다. 1980년 여름, 내란음모 및 계엄법 위반으로 종신형을 선고받고 육군교도소 특별감방과 대구교도소에 갇혀 있는 동안 역사와 시대를 관통하는 유·무명 인물들에 대한 시를 구상해 1986년부터 계간지 '세계의 문학'에 연재를 시작했다. 2010년까지 20여 년에 걸쳐 시집 30권에 총 4천1수를 수록하여 발간했다. 많은 사람에 대해 적은 기록이란 뜻의 '만인보(萬人譜)'다.한국사의 역사적인 인물들부터 어린시절 친구, 이웃들까지, 등장하는 인물이 무려 5천600여명에 이른다. 시적 완성도에 대해선 여전히 엇갈리지만 자유와 해방, 민주와 민족의식을 불교사상에 근거해 내밀하게 다뤘다는 평가에는 이의가 없다. 세계 최초로 사람만을 노래한 연작 시라는 점에서 노벨상 후보에 오를 때 '만인보'가 거론되는 것도 그런 이유다.역사 속 인물들을 시로 조명해 온 이오장 시인이 월간 '시' 7월호에 발표한 '인물시'가 큰 화제다. 정파를 가리지 않은 3행의 짧은 시. 촌철살인(寸鐵殺人)이다. 시인의 쓴소리에 33인 정치인의 모습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전·현직 대통령이라고 예외는 없다. "안개 강 하나 건너와 옷깃 터는가/자연은 돌고 돌아 제자리에 오는 것/그대가 받들어야 할 자연은 국민이다." ('문재인' 전문) "이 세상 모든 것은 공주가 갖는 것/공주의 모든 것은 부마가 갖는 것/부마 없는 공주는 국민이 부마." ('박근혜' 전문) 문학은 시대를 반영하는 산물이다. 압축된 언어에 은유와 풍자가 가미한 시의 경우는 특히 그렇다. 정치인들을 대상으로 '정치의 꼴'이라는 형태의 '정치 시' 실험을 하는 이 시인의 소망은 단 하나, "정치인이 초심으로 돌아가는 것". 우리의 바람도 그래서인지 짧은 시지만 그 울림은 크다. /이영재 논설실장

2019-07-04 이영재

[참성단]동창회에서

"전두환 아니었으면 우리 같은 촌놈들이 대학에나 갈 수 있었겠냐?"얼마 전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35년만에 처음으로 동창회에 참석했다. 5년 주기로 동창회가 열리는 만큼, 이번에 빠지면 환갑에나 고교 친구들을 볼 수 있다는 동창 친구의 말에 이끌린 것 같다. 역시 오랜만에 벗을 만나는 일은 즐거웠다. 수십 년 세월의 더께에 가려진 옛 얼굴의 흔적을 찾는 재미도 쏠쏠했다. 출렁거리는 배를 안고 닭싸움을 해도 부끄럽지 않은 시공간의 왜곡 현상까지 경험하고 나니 그동안 인적 네트워크의 후순위에 밀려 있던 동창회의 의미가 새롭게 다가왔다.저녁 뒤풀이 시간, 서로 소주잔을 기울이면서 살아온 이야기를 나누다 화제가 자녀교육 문제로 옮겨갔다. 다들 사교육 때문에 힘들었던 경험을 털어놓더니 결국 과거와 현재의 교육정책을 비교평가하는 장이 펼쳐졌다.서두에 쓴 친구의 말처럼 시골에서 부유하지 못한 학창시절을 보낸 50대 중반 세대들은 전두환 교육정책의 덕을 본 것이 맞다. 이른바 학력고사 세대들이다. 전두환 정부는 사교육을 전면금지하고, 대학별 고사를 폐지하는 대신 국가에서 출제하는 학력고사로 일원화시켰다. 특히 이날 모인 동창들은 고교 전학년 내신성적이 입시에 반영된 첫 수험생 세대다. 이같은 교육정책은 시골 고등학교에 상당한 변화를 가져왔다. 많은 학생들이 내신성적을 내기 위해 우수한 학생들이 몰리는 도시의 명문고 대신 가까운 고향 학교를 택했고 이는 시골 학교의 학업 수준과 면학 분위기의 향상으로 이어졌다. 그 결과, 질적·양적으로 전보다 월등히 높은 대학진학률을 기록했으니 교육의 형평성 측면에서 전두환 정부의 교육정책은 성공했다고 볼 수 있다.물론 전두환 정부의 교육정책에도 어두운 그림자가 있다. 암기 위주의 학력고사는 지금의 수능에 비해 수준이 떨어졌고 '눈치작전'이라는 기형적 입시 관행도 야기했다. 그럼에도 불구, 민주화 과정을 겪은 터라 전두환 정부에 호감을 갖기 힘든 586세대가 당시의 교육정책을 추억하는 것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그것은 아마도 그들의 학창시절에는 최소한 '개천에서 용 난다'는 말을 믿을 수 있었기 때문이리라. 사교육에 의존하지 않고는 좋은 대학에 가기 힘들고, 자사고나 특목고가 고교서열화를 부추기는 현재의 교육 현실 속에서 35년 전의 모교는 잠시나마 숨을 돌릴 수 있는 위안처가 아니었나 싶다. /임성훈 논설위원

2019-07-03 임성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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