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성단

 

[참성단]류덕스

야구는 '투수놀음'이다. 야구 전문가들은 투수의 비중을 75%로 본다. 하지만 그 이상이다. 전설적인 야구 기자 레너드 코페트는 '야구란 무엇인가'에서 "훌륭한 투수는 훌륭한 타자를 막아내지만 훌륭한 타자가 훌륭한 투수를 마구 두들기는 일은 거의 없다"고 단언한다. 그러면서 1930년 필라델피아 필리스가 3할 타자 8명을 보유하고도 8위에 그친 것을 예로 들었다. 하긴 멀리 갈 것도 없다. LA다저스 투수 류현진은 5월 선발 등판한 6경기에서 5승, 방어율 0.59를 기록했다. 매 경기 단 1점도 주지 않으니 패할 리가 없다.90년대 메이저리그를 호령했던 랜디 존슨, 로저 클레멘스, 페드로 마르티네스는 모두 90마일 이상을 던지는 강속구 투수였다. 그렉 매덕스는 그 틈바구니에서 최고 구속 89마일 공으로 놀랄만한 대기록을 남겼다. 통산 355승, 완투 109회, 완봉 35회, 여기에 '투수의 꿈'인 사이영상을 4회 연속 수상했다. 제구력이 얼마나 좋았던지 눈을 감은 포수의 미트에 공을 넣은 적도 있었다. 이를 바탕으로 '스트라이크 같은 볼''볼 같은 스트라이크'를 던졌다.매덕스는 피칭을 예술로 승화시킨 '마운드 위의 예술가'였다. 그는 공은 팔로 던지는 게 아니라 손가락으로 던진다는 것, 공은 속도보다 움직임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터득한 투수였다. 그의 투심 패스트볼은 지금도 메이저리그 손꼽히는 마구(魔球)로 통한다."마치 왼손으로 던지는 그렉 매덕스가 마운드에 있는 것 같았다." 지난주 뉴욕 메츠의 미키 캘러웨이 감독이 류현진의 호투를 두고 던진 말이다. 언론들은 5월의 류현진을 '매덕스의 재림'이라며 찬사를 보냈다. 평생 매덕스를 따라다닌 '컨트롤의 마법사'를 류현진 이름 앞에, 그리고 류현진의 '류' 매덕스의 '덕스'를 합성해 '류덕스'라는 별명도 붙여 주었다.류현진이 메이저리그 NL '5월의 투수상'을 받았다. 한국인으로는 박찬호(1998년 7월)에 이어 2번째다. 이 여세를 몰아 아시아인 최초로 사이영상을 받으면 더 바랄 게 없지만, 혹사하는 것이 아닌지 걱정이다. 어깨 수술을 한 경험 때문이다. 우리는 20승보다 15승씩 10년 동안 던지는 류현진을 더 보고 싶다. 매덕스의 또 다른 위대한 기록은 23년간 부상자 명단에 딱 한 번 올랐다는 것이다. 그만큼 자기관리에 철저한 선수였다. 류현진도 이를 꼭 배워서 부상 없이 오랫동안 공을 던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이영재 논설실장

2019-06-04 이영재

[참성단]방탄소년단과 손흥민

지난 주 한국인은 유럽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방탄소년단(BTS)의 영국 웸블리 스타디움 공연에 환호했고 손흥민의 유럽축구연맹 챔피언스리그 결승전 패배에 탄식했다. 유럽은 세계 문명의 중심이라는 자존심이 중국 못지 않다. 그리스, 로마 신화를 공유하는 유럽의 문화적 정체성은 강력한 국가연합체인 유럽연합(EU) 출범으로 이어졌다. 그런 유럽에서 공연 예술인들에게 웸블리 스타디움 공연은 성공의 상징이고, 챔피언스 리그는 월드컵을 능가하는 축구축제로 전세계의 주목을 받는다.방탄소년단의 웸블리 스타디움 공연은 완벽한 성공이었다. 12만명의 관객이 두차례 공연을 매진시킨 것은 물론 유럽 소녀 팬들은 한국어 가사를 떼창하며 열광했다. 1964년 비틀즈의 '브리티시 인베이전'이 미국의 충격을 대변했다면, 방탄소년단이 주도하는 '케이팝 인베이전'은 세계를 강타한 문화적 충격이다. 서구 언론들은 '비틀즈의 재림'이라며 호들갑이지만, 방탄소년단의 성공스토리는 비틀즈를 넘어선 문화현상으로 미디어 학자들의 연구 대상으로 주목받을 듯하다.웸블리 스타디움은 축구 종가를 자부하는 영국 축구의 성지이자 국가 경기장이기도 하다. 1948·2012년 런던 올림픽과, 1966년 잉글랜드 월드컵의 주경기장이었고, 현재는 영국 축구협회가 관리하고 있다. 손흥민과 인연이 깊다. 소속팀 토트넘 홋스퍼는 홈구장을 리모델링 하는 동안 웸블리 스타디움을 홈구장으로 임대했고, 이적생 손흥민은 웸블리에서 스타로 성장했다. 방탄소년단 RM이 웸블리 공연에서 '손(SON)'이라는 로고가 적힌 모자를 쓰고 나와 손흥민과 토트넘의 챔피언스 리그 승리를 응원한 건 우연이 아니다. 아쉽게 토트넘은 패배했지만, 손흥민은 계속 성장 중이다.방탄소년단과 손흥민의 성공이 남다른 건 그들이 성공을 감당할 만한 인격을 갖춰서다. 인격은 말로 드러난다. 방탄소년단 RM은 공연 기자간담회에서 "팬들과 서로를 충전하고 돕고 있음을 느낀다"며 팬클럽 '아미'에 대해 경의를 표했다. 손흥민은 리버풀 전 패배 직후 인터뷰 요청에 "오늘은 안 했으면 좋겠어요. 말실수할까 봐서요"라고 정중히 사양했다고 한다. 팬클럽을 향해 진심어린 메시지를 전달하는 방탄소년단과 말을 아껴야 할 때를 아는 손흥민의 인격이 예사롭지 않다. 막말로 정치를 막장에 처박고 있는 한국 정치인들이 배워야 할 말의 품위이자 인격이다. /윤인수 논설위원

2019-06-03 윤인수

[참성단]다뉴브 강의 눈물

'광막한 황야를 달리는 인생아 /너의 가는 곳 그 어데 있느냐 / 쓸쓸한 세상 험악한 고해에 /너는 무엇을 찾으러 가느냐/ 눈물로 된 이 세상에 나 죽으면 그만일까/ 행복 찾는 인생들아 너 찾는 것 허무'. 1926년 7월 윤심덕은 일본의 닛토 축음기 사장으로부터 음반 취입을 의뢰받았다. 녹음이 끝난 후 한 곡을 더 추가할 수 없겠냐는 윤심덕의 요청에 루마니아 작곡가 요시프 이바노비치의 '다뉴브 강의 잔물결'에 윤심덕이 우리말 가사를 붙인 '사의 찬미(死의 讚美)'가 더해졌다. 반주는 동생 윤성덕이 맡았다. 당시 윤심덕이 노래를 얼마나 애절하게 불렀던지 녹음실이 눈물바다가 되었다고 한다.그녀가 모든 노래를 일본어로 부르면서 이 노래만 우리말을 고집했는지 그 이유는 알 수 없다. 그녀의 연인 극작가 김우진과 현해탄에 투신하기 전 죽음을 결심하고 부른 노래여서 그랬는지, 가단조의 이 슬픈 왈츠곡 덕분에 레코드는 10만 장이 넘게 팔리는 대 히트를 쳤다. 우여곡절 끝에 부른 '사의 찬미'를 가요계에선 우리나라 대중가요의 효시로 꼽는다. 하지만 우리에게 이 강이 친숙한 건 '사의찬미'보다 요한 슈트라우스 2세의 왈츠곡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 탓이 크다. 빈 필 하모닉 신년 음악회에 앙코르곡으로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그 곡이다.다뉴브 강은 러시아를 관통하는 볼가 강에 이어 유럽에서 두 번째 긴 강으로 장장 2천858㎞다. 독일의 남서부 흑림(黑林), 즉 슈바츠발트 산지에서 발원해 오스트리아 체코 헝가리 유고 불가리아 루마니아 등 10개국을 거쳐 흑해로 흘러간다. 강 이름도 나라별로 제각각이다. 독일과 오스트리아는 도나우, 체코어로 두나이, 헝가리어로 두나, 불가리아어로 두나브지만 영어로는 다뉴브로 부른다.헝가리 부다페스트를 상징하는 아름답고 푸른 다뉴브 강이 한국인을 태운 유람선 허블레아니호의 침몰로 눈물과 탄식의 강으로 변했다. '아름답고 푸른 다뉴브 강'을 하루아침에 '눈물의 다뉴브 강'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은 여간해선 힘들다. 하지만 재앙은 이렇게 늘 예고 없이 찾아오기 마련이다. 다뉴브 강은 이제 우리에게 '슬픔의 강'이다. 사망· 실종자의 사연 하나하나가 가슴을 때린다. "너의 영혼은 희망을 찾을 거야"라고 한글로 썼다는 헝가리인의 추도 편지가 눈물을 적신다. '다뉴브 강의 기적'이 일어나길 간절히 바랄 뿐이다. /이영재 논설실장

2019-06-02 이영재

[참성단]반(反) 화웨이 전선

'파이브 아이스(Five Eyes·FVEY)'는 미국, 영국, 호주, 캐나다, 뉴질랜드 등 앵글로 색슨계 5개국이 참여하고 있는 정보 동맹체다. 1946년 미국이 소련에 대응하기 위해 형제국가 영국과 비밀 정보교류 협정을 맺고, 1956년에 호주와 뉴질랜드·캐나다가 가세하면서 '다섯 개의 눈'이 결성됐다. 말로만 떠돌던 이들의 존재가 노출된 건 2013년 6월 미국 국가안전보장국(NSA) 요원이던 에드워드 스노든이 NSA의 도·감청 기밀문서를 폭로하면서다.FVEY는 1960년에 개발된 '어셜론'이라는 프로그램을 통해 수십억 개의 전 세계 통신망을 감청해 취합된 정보를 자국 기관의 정보처럼 공유하고 있다. 국가 정상의 전화통화도 예외는 아니다. 오바마 대통령 시절, 독일 메르켈 총리의 전화를 감청하다 들통 나 외교문제까지 비화한 적도 있다. 최근 일본은 FVEY와 준동맹 관계로까지 발전하고 있다. 북한 선박이 다른 선박에 물건을 옮겨싣는 것이 적발된 것은 FVEY와 가까워지고 싶은 일본이 현장사진을 제공했기 때문이다.FVEY가 다시 뉴스의 중심에 선 것은 화웨이 고사작전에 그들이 배후에 있다는 것이 드러나면서다. 지난해 7월 월스트리트 저널은 FVEY 수장들이 모여 통신보안을 위한 화웨이 견제 필요성에 합의했다고 보도했다. 기사 보도 후 트럼프 정부는 '2019년 국방수권법(NDAA)'을 통과시키며 공공기관 등에서 중국 통신장비의 사용을 금지했다. 화웨이 등 중국 통신장비가 중국 스파이 노릇을 하고 있다는 게 이유다. 호주와 뉴질랜드도 지난해 말 5G 공급망서 화웨이를 배제하기로 했다. 통신장비 중 특히 5G 장비가 표적이 된 것은 데이터 전송속도가 빨라져 데이터가 유출될 경우 피해가 기하급수적으로 커질 수 있어서다.특히 4차 산업혁명 주도기술인 5G 시장을 이끄는 나라가 결국 미래산업은 물론 정보전쟁에서도 우위를 점할 가능성이 높은데, 화웨이의 5G 기술이 세계 최고수준으로 이번 기회에 싹을 자르겠다는 게 미국의 생각이다. 세계 기업들이 속속 미국 편에 서고 있다. 문제는 우리다. 미국은 우리 정부에 '반(反) 화웨이 전선'에 동참을, 중국은 삼성, SK하이닉스에 중단없는 제품 공급을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드 사태 때 어설프게 대응하다 당한 경제보복의 상처가 아직도 깊은 우리 정부로선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만 점점 깊어지고 있다. /이영재 논설실장

2019-05-30 이영재

[참성단]기생충을 기다리며

기생충학자인 서민 박사의 위트 넘치는 칼럼이 너무 재미있어 그의 책을 읽어본 적이 있다. '기생충 열전'이란 책이다. 아니나다를까 몇 장 넘기기도 전에 낄낄거리고 말았다. 일반인을 위한 기생충 교양서가 몇 권 안 되는 것에 아쉬움을 느끼던 중 '기생충'이라는 책을 새로 발견하고 반가운 마음에 펼쳐보았는데, '충'이라는 이름을 가진 기생의 이야기였다는 대목에서다. 서 박사가 풀어놓는 기생충 이야기는 흥미롭다. 친절하게도(?) 온갖 기생충 사진을 배치하는 바람에 간혹 책장 넘기기가 두려워지는 점만 빼고는 예방을 위해서라도 한 번 읽어볼 만하다. 그는 기생충의 변호사라 해도 무방할 듯 싶다. 한 예로 세상에 뚱뚱한 사람은 있어도 뚱뚱한 기생충은 없다고 단언한다. 자기 분수를 지켜서 먹기 때문이란다. 또 기생충 박멸 이후 사람에게서 알레르기나 자가면역질환이 늘었다며, 이는 갑자기 상대가 없어진 면역계가 우리 몸을 공격한 결과라고 부연한다. 이쯤 되면 기생충과 '상생'을 하라는 것인지 가늠이 안 간다. 물론 기생충을 옹호(?)만 하는 것은 아니다. 각 기생충을 설명할 때마다 위험도를 비롯해 감염증상과 감염원 등을 별도로 소개하면서 경각심을 주는 것을 잊지 않는다. '이 기생충 같은 놈아'라는 욕이 적당한 욕인지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 부분은 일종의 블랙코미디다. 기생충이 자발적으로 일을 안 하려는 데 비해 집에서 놀기만 하는 사람은 일을 하고 싶어도 마땅한 일자리가 없는 탓에 백수가 된 거니, 기생충을 갖다 붙일 일이 아니라는 주장이다. 기생충이 '본의 아니게' 우리 사회의 아픈 부분을 상기시킨 셈이다.영화 '기생충'이 오늘 개봉한다. 줄거리를 보니 갖가지 기생충이 등장하는 '기생충 열전'과 달리 영화에서는 기생충의 왕이라는 회충 한 마리 '출연'하지 않는 것 같다. 기묘한 인연으로 얽힌 백수 가족과 부자 가족을 통해 현대 사회의 양극화 문제를 다루었다는 설명으로 미뤄 기생충은 봉 감독 특유의 은유일 것이다. 황금종려상 수상 소식을 접하면서 기생충 열전이 떠오른 것은 영화 줄거리와 책에서 엿본 블랙코미디적 요소 때문이 아닌가 싶다. 봉 감독은 기생충에 대해 '인간에 대한 예의와 존엄에 관한 영화'라고 했다. 그렇다면 영화는 '기생'을 넘어 '공생' 또는 '상생'에 대해 화두를 제시할 것으로 추측된다. 그래서 더 보고 싶다. /임성훈 논설위원

2019-05-29 임성훈

[참성단]액상형 전자담배

"담배와 나는 한 몸"이라고 말했던 공초(空超) 오상순(吳相淳) 말고도 처칠과 임어당(林語堂)의 '담배 예찬'은 너무도 유명하다. 처칠은 노벨문학상 수상작인 '2차대전 회고록'을 쓰면서 한 번도 시가를 입에서 뗀 적이 없고, 임어당은 저서 '생활의 발견'에서 "파이프 담배를 즐겨 피우는 사람은 절대 자기 아내와 다투지 않는다"고 썼다. 지금의 상식과는 엄청나게 괴리된 얘기다. 우리나라에 담배가 처음 들어온 것은 17세기 초로 이수광의 지봉유설(芝峯類說) '식물편'에 담배에 관한 이야기가 나온다. "남령초(南靈草)라고도 부르는 이것은 왜국에서 들어왔고 이것을 빨면 담과 하습(下濕)을 제거하여 술을 깨게 한다. 그러나 독이 있으므로 경솔하게 사용하면 안 된다"며 친절하게 경고까지 적었다. 1492년 콜럼버스가 120명의 대원과 함께 서인도제도의 동쪽 끝에 있는 작은 섬 '히스파니올라'에 상륙해 원주민들에게 담배 선물을 받은 지 2세기도 채 안 돼 담배가 조선에 들어왔다. '독이 있다'는데도 불구하고 우리 조상들은 왜 담배를 좋아했을까. 마땅히 즐길만한 것도 없었던 그때 , 시간을 죽이는데 담배만 한 것이 없었을 것이고 더러는 연주(煙酒) 연차(煙茶) 영초(靈草) 망우초(忘憂草) 사상초(思想草)니 하는 온갖 이름을 붙여 담배 피우는 것을 '멋'으로 생각했다.청소년들이 '멋'으로 피울지도 모르는 미국산 액상형 전자담배 '쥴'이 지난 24일부터 국내 판매를 시작했다. 상상도 못한 날렵한 디자인으로 '전자담배 업계의 애플'로 불리는 담배다. 2015년 미국에서 출시되었을 때 '청소년들의 흡연 호기심을 자극해 전자담배 입문을 조장한다'는 논란을 일으킨 그 담배다. 쥴 때문에 '전자담배를 피우다'라는 뜻의 '쥴링(Juuling)'이라는 신조어도 생겼다.'쥴'은 냄새도 없고 담뱃재도 나오지 않는다. 과일 맛이 나 청소년들 사이에 급속히 확산할 우려가 크다. 편의점에선 액상형 전자담배가 없어 못 팔 정도로 인기라고 한다. 형태가 USB(이동식 저장장치) 같아 소지품 검사를 해도 적발하기 어렵다. 수입허가를 내줄 때는 언제고 뒤늦게 보건당국이 편의점 등을 상대로 전자담배 청소년 판매에 대한 집중 단속에 나선다니 실소를 금할 수 없다. 한술 더 떠 KT&G도 대항마인 '릴 베이퍼'를 출시한다니 청소년 흡연율이 급격히 증가하는 것은 아닌지 걱정이다. /이영재 논설실장

2019-05-28 이영재

[참성단]'게임중독' 논란

세계보건기구(WHO)가 게임중독을 질병으로 분류한 새 국제질병표준분류기준(ICD)을 확정하면서 게임강국인 한국이 벌집을 쑤셔놓은 형국이다. WHO는 게임 통제 능력이 손상되고 다른 일상생활보다 게임을 중요하게 여기면서도 게임을 12개월 이상 지속하면 게임중독이라고 기준을 세웠다. 이 기준에 포함되는 사람은 이제부터 게임중독이라는 질병에 걸린 중환자라는 얘기다.하지만 게임중독을 질병으로 볼 과학적 근거에 대한 찬·반 진영의 대립은 이제부터 시작이고 한동안 이어질 전망이다. 보건복지부는 WHO의 결정을 수용한다며 절차를 밟겠다는데, 문화체육관광부는 WHO에 이의를 제기하겠다며 반대하고 있다. 보건복지부는 자녀들의 게임중독을 우려하는 학부모와 의료계를, 문체부는 게임업계를 대변하니 정부의 입장 조율이 주목거리다.게임중독은 질병이 아니라는 게임업체와 국내외 과학자들의 주장은 설득력이 있다. 게임은 알코올, 마약, 담배와 같은 금단증상도 없고 영구적이지 않다는 논리다. 영화와 같이 수많은 게임이 출시됐다 퇴출되는 문화 기호품이라는 얘기다. 세계를 주름잡는 프로게이머나, 학교에서 1년내내 게임을 하는 한 특성화고교의 E-스포츠학과 학생들마저 게임중독 판정을 받을 수 있다는 항변은 과장이지만 업계가 체감하는 위기감을 보여준다. 게임업계에선 '게임중독' 대신 '게임 과몰입'이라는 표현을 쓴다.그런데 끼니를 거른 채 학교 수업을 팽개치고, 아이템을 사기위해 부모지갑에 손을 대면서까지 게임에 열중하는 자녀들의 '게임중독 증세'를 매일 체감하는 학부모들에게 게임업체의 반발은 헛소리일 뿐이다.문제는 정부다. 이미 지난해부터 WHO의 결정이 예고됐음에도 불구하고 1년이 지난 지금 보건복지부와 문체부가 딴소리를 내니, 대책 마련에 손 놓고 있었다는 자백이다. 자녀의 '게임중독' 증상을 체감하는 학부모와 '게임 과몰입'을 게임중독으로 침소봉대하면 게임산업이 망한다는 게임업계 사이에서 솔로몬의 지혜를 발휘할 수 있을지 지켜볼 일이다. 가뜩이나 경직된 노동시장과 주력산업의 퇴조로 경제위기설이 회자되는 험악한 시절이다. 노조 결사의 자유를 압박하는 ILO에 이어, 한국의 차세대 유력업종인 게임산업에 고삐를 채우고 나선 WHO에 이르기까지 국제기구마저 딴지를 걸고 나서나 싶은 낭패감은 시절 탓인가? /윤인수 논설위원

2019-05-27 윤인수

[참성단]'봉준호 영화'

2001년 말께, 경인일보 편집국에 더벅머리 청년(?) 두 명이 들어왔다. 그중 한 명이 자신은 '플란다스의 개'를 만든 "감독 봉준호"라고 했다. 또 한 명은 훗날 '해무'를 감독한 심성보. 데뷔작이 흥행하지 못했지만, 평단의 찬사 때문이었는지 봉 감독은 자신감에 충만 돼 있었다. 이들이 경인일보를 찾은 건 '화성 연쇄 살인사건' 때문이었다. 화성 사건을 다룬 경인일보의 기사가 가장 풍성해 영화를 만들기 위해선 당시 기사와 사진 자료 등의 협조가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역대 한국영화 100편을 뽑을 때 늘 최상위에 올라있는 '살인의 추억'은 그렇게 탄생했다. 525만 명을 동원한 이 영화로 봉준호는 한국영화를 이끌 차세대 감독으로 우뚝 섰다.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이 제72회 칸국제영화제에서 경쟁부문 최고상인 황금종려상을 받았다. 한국 영화 사상 첫 황금종려상이다. 특히 올해는 한국영화 100주년이 되는 해여서 수상의 의미는 더 크다. 보통 세계 3대 영화제로는 칸, 베를린, 베니스 영화제를 꼽는다. 2012년 김기덕 감독이 '피에타'로 베니스영화제에서 황금사자상을 받은 이후 7년 만의 쾌거다. 영화제 대상 수상을 올림픽 금메달과 비교할 수는 없다. 하지만 영화의 본고장에서 한국 감독이 해외 거장 감독들의 영화보다 더 높은 점수를 받은 대상이라 경사가 아닐 수 없다.봉 감독이 추구했던 영화의 세계는 '불합리한 계급사회'에 대한 비판이다. 대학 시절 만든 단편영화 '지리멸렬'에서부터 봉 감독은 교수 법조인 언론인 등 지도층의 위선과 허위를 들추며 한국사회의 불평등을 통렬하게 비판했다. 국제적 명성을 얻은 후 만든 '설국열차'의 열차 안 세상은 절대 평등하지 않은 부조리한 세상이다. 패배자들로 가득한 꼬리 칸의 젊은 지도자가 폭동을 일으켜, 고위층들이 모여 있는 가장 위 칸으로 돌진하는 것은 불평등으로 가득 찬 현대사회에 대한 상징과 은유의 표현이다. '기생충' 역시, 가난한 가족과 부자 가족의 이야기를 통해 '빈부격차' 문제를 블랙코미디 방식으로 개성 있게 풀어냈다는 평가를 받았다. 12세 때 감독을 꿈꾸었던 봉준호는 단 7편의 장편 영화로 '봉준호 영화'라는 나름의 장르영화 계보를 만들며 세계적 감독이 됐다. 이제 봉준호를 선두로 박찬욱, 홍상수, 이창동, 김기덕, 나홍진 감독 등이 어우러져 한국영화는 바야흐로 '풍요의 시대'를 맞게 됐다. /이영재 논설실장

2019-05-26 이영재

[참성단]넷플릭스 없는 칸 영화제

올해 세계 영화계의 최대 사건은 단연, 알폰소 쿠아론 감독의 넷플릭스 영화 '로마'가 91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감독상을 받은 것이다. 스페인어로 제작됐는데도 아카데미 주요 10개 부문에 노미네이트 됐고 감독상, 촬영상, 외국어영화상 등 3개 부문을 수상했다. 비영어권의 영화가 작품상을 받은 것도 그렇지만, 무엇보다 극장 상영작이 아닌 OTT(유료 온라인 동영상 서비스) 영화가 최고의 영화제에서 감독상을 거머쥔 것은 변화의 시작을 의미한다.진즉 변화를 눈치챈 베니스영화제도 지난해 넷플릭스 영화 6편을 받아들여 '로마'에게 최고 영예인 황금사자상을 안겼다. 또 이선·조엘 코언 형제 감독의 넷플릭스 영화 '카우보이의 노래'는 각본상을 받았다. 폴 그린그래스 감독의 '7월 22일'도 큰 호평을 받았다. 넷플릭스 덕분에 베니스영화제의 내용은 풍성해졌고, 경쟁자인 칸영화제를 압도했다는 평가를 들었다.반면 칸영화제는 지난해 넷플릭스 영화의 출품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프랑스 극장업계의 반발 탓이 컸다. 칸은 넷플릭스에 초청장을 받으려면 제작 영화의 온·오프라인 동시 공개 전략을 포기하고 극장 개봉을 먼저 할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넷플릭스는 출품 거부로 맞서면서 칸영화제 참가가 무산됐다. 칸영화제는 올해도 넷플릭스 영화를 초청하지 않았다. 넷플릭스의 불참으로 72회를 맞은 칸영화제의 권위는 크게 떨어졌다. 넷플릭스 없는 칸영화제는 '불빛 없는 항구' '속없는 찐빵'이 된 것이다.이를 만회하려는 듯 이번 칸영화제는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을 비롯해 짐 자무시, 켄 로치 등 대가들의 신작을 경쟁부문에 초청하고 리어나도 디캐프리오, 브래드 피트 등 할리우드 스타 모시기에 유난히 공을 들였다. 그런데도 시대를 역행한다는 비판에 자유롭지 못하다. 영화의 다양성 확보에 실패했다는 소리도 들린다. 넷플릭스의 부재가 그만큼 컸다. 넷플릭스는 앞으로 영화가 어느 방향으로 가는지를 가늠하는 척도다. 이미 세계 영화계는 아마존, 월트디즈니, 애플까지 OTT 사업에 뛰어들면서 스트리밍 영화의 전쟁터가 되고 있다. 칸이 언제까지 넷플릭스를 거부할지 지켜볼 일이다. "전통적 배급 방식 바깥에서 영화를 투자, 제작하는 회사가 존재한다는 사실은 영화계를 더욱 역동적으로 만들 수 있기에 중요하다"는 조엘 코언 감독의 말을 이제 칸도 곱씹어 볼 때가 됐다. /이영재 논설실장

2019-05-23 이영재

[참성단]착한 금연정책

휠체어를 비롯 갖가지 의료장비를 끌고 환자들이 하나 둘 건물 밖 흡연구역에 모이더니 주머니에서 주섬주섬 담배를 꺼내 불을 붙인다. 병원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이다. 비흡연자의 눈에는 볼썽사나운 풍경이리라. 하지만 어찌하랴. 이들에게 흡연구역은 답답한 병실을 벗어나 한 모금 담배 연기에 잠시나마 근심 걱정 날려버릴 수 있는 유일한 안식처가 아닌가. 기회비용 측면에서 볼 때 이 순간만큼은 담배가 '건강 회복의 염원'보다 상위가치인 듯싶다. 환자의 흡연은 곧 담배의 수요가 웬만해서는 줄지 않는다는 것을 방증하는 사례이기도 하다.흡연에 대한 사회의 시선이 곱지 않은 것과 맞물려 흡연자들 또한 일종의 피해의식을 느낄 수밖에 없다. 흡연자들의 피해의식을 부추기는 요인 중 가장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잊을만하면 내놓는 정부의 금연정책이다. 금연정책에서는 흡연자가 '사회악' 취급을 받기 일쑤다. 올해에도 어김없이 정부의 금연정책이 나왔다. 보건복지부는 2025년까지 모든 건물의 실내흡연실을 폐쇄하고 담뱃값에 부착된 경고그림과 문구의 면적을 현행 50%에서 75%까지 확대하는 내용 등을 담은 금연종합대책을 내놓았다.그런데 종전의 금연정책과 다른 부분이 있다. 일단 '담뱃값 인상'을 전제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정부가 그동안 담뱃값을 인상하면서 내 건 모토는 흡연율 저하를 통한 국민 건강 증진이다. 그러나 그간의 담뱃값 인상사례에서 보듯이 담뱃값은 흡연율에 크게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가격은 수요와 공급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앞서 병원 흡연구역 사례에서 보듯 담뱃값 인상은 흡연자 자체를 줄이는 데 역부족이다. 그렇다고 담배회사 수를 줄이는 것도 아니다. 수요공급곡선을 변형시키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효과를 거두기 어려운 것이다. 이러한 경제학적 원리를 무시하다 보니 정부가 내세운 '국민건강'은 낯간지러운 수식어가 될 수밖에 없었다. 심지어 흡연자들 사이에서는 건강 운운하는 게 담뱃값을 인상하려는 '수작'쯤으로 인식된 게 사실이다. 더 나아가 담뱃값 인상이 아니라 세금 인상이라는 분석이 힘을 얻기도 했다. 그래서 이번 정책은 '착한 금연정책'이라고 본다. 흡연자가 병·의원 금연치료에 나설 경우, 건강보험 혜택을 주는 방안도 '돈만 밝히던' 기존의 금연정책과 차별화되는 부분이다. 그러고 보니 금연정책이 성공하기를 바라는 건 이번이 처음이다. /임성훈 논설위원

2019-05-22 임성훈

[참성단]부시의 노무현 초상화

아돌프 히틀러의 어릴 적 꿈은 화가였다. 그림을 꽤 잘 그렸다. 두 번의 미대입시에 떨어지고 좌절 끝에 정치인이 됐지만, 그림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 2차 대전을 일으킨 후에 각국의 수많은 미술품을 약탈했다. 그 그림들을 모아 베를린에 세계 최대의 미술관을 짓고 싶어 했다. 전쟁 중에도 틈틈이 그림을 그렸다. 고전주의식 화풍을 고집한 그는 2천여 점의 그림을 그렸는데 전쟁 중 소실되고 현재 700점이 남아 있다.윈스턴 처칠은 40세가 넘어 그림을 그렸다. 그가 그림 그리기를 시작한 것은 '반복성 우울증'에서 벗어나기 위해서였다. 그림이 하나의 치료법이었던 셈이다. 그러던 그가 "내가 천국에 가면 처음 100만 년은 그림을 그릴 것"이라고 할 정도로 그림에 푹 빠져 500점의 유화를 남겼다. 그 그림 중에는 정부(情婦)로 알려진 도리스 캐슬로시의 초상화도 포함돼 있다. 피카소가 "처칠이 그림만 그렸다면 정치인 처칠보다 화가 처칠로 더 명성을 날렸을 것"이라며 높이 평가할 만큼 말년에 그의 그림솜씨는 수준급이었다. 우리의 경우 그림 그린 정치인 중 고 김종필 전 국무총리가 첫째로 꼽힌다. 김 전 총리는 42세 때 그림에 입문해 전국 각지를 돌아다니며 '일요 화가회' 회원들과 그림을 그렸다. 그는 생전 그리는 즐거움을 "마치 갓 태어난 아이로 돌아간 듯 순백의 마음"이라고 말하곤 했다. 그림을 그리다 보면 어느새 마음이 정화되는 것이 느껴지고, 온갖 번잡한 생각에서 완전히 벗어나게 하는 '정신적 위안'이 된다는 것이다. 정치인들이 그림 그리는 것에 대해서는 생전 300개의 유화작품을 남긴 아이젠하워 전 대통령의 "정치를 하면서 받는 극도의 스트레스를 해소하기 위해 그림을 그린다"는 말에 그대로 함축되어 있다.아마추어 화가로 알려진 조지 W 부시 전 대통령이 23일 봉하마을에서 열리는 노무현 전 대통령 10주기 추도식에 참석해 노무현 초상화를 전달할 예정이라고 한다. 미국의 대표적인 토크쇼 제이 레노 쇼에 출연해 "내 안에 렘브란트가 있다"는 조크를 날렸던 부시는 재임 중 만난 각국 정상이나 지인 등의 초상화나 자화상, 풍경화 등을 그려오고 있다. 전 세계 진보 좌파에게 '전쟁광'이라는 소리까지 들었던 부시에게 그림 재주가 있다는 것도 놀랍지만, 재임 시절 관계가 껄끄럽던 그가 노 전 대통령의 추도식에 직접 찾아온다는 사실이 왠지 신선하게 다가온다. /이영재 논설실장

2019-05-21 이영재

[참성단]연평도 등대

연평도는 원래 북한 황해도 해주군에 속했던 섬이다. 1945년 미·소 군정이 한반도를 38선으로 분할하면서 경기도 옹진군으로 편입됐다. 실향민들의 증언에 따르면 38선과 상관없이 황해도와 연평도 뱃길은 열려 있었고 왕래도 비교적 자유로웠다고 한다. 6·25전쟁 중에는 황해도를 비롯한 북한의 서해안 피난민들이 연평도를 징검다리 삼아 인천 등 남한 서해안으로 퍼져 나갔다. 현재도 주민 70% 이상이 황해도 출신의 실향민과 그 후손들이다.연평도는 제 1·2연평해전과 연평도 포격전으로 세계의 주목을 받는다. 북한은 1999년과 2002년 한·일 월드컵 기간 중에 서해 북방한계선(NLL)을 넘어와 대한민국 해군함정에 발포했다. 1차 해전은 우리 해군이 완승했지만, 북한의 보복을 작정하고 벌인 2차 해전 때는 윤영하 소령 등 해군 6명이 전사하고 1척의 함정을 잃었다. 2010년 북한은 선전포고 없이 연평도에 포격 도발을 감행했다. 시커먼 포연에 휩싸인 연평도의 모습에 전국민이 경악했다. 해병대원 2명과 민간인 2명이 희생됐고, 주민 1천여명이 피난한 전쟁이었다. 평화로운 꽃게어장 연평도는 세계가 주목하는 화약고가 됐다. 국방부가 우리의 승리로 기록한 세차례의 교전은 남북이 교전 당사자임을 상기시키기에 충분했다.지난 17일 저녁, 연평도 등대가 불을 밝혔다. 1960년 설치된 등대다. 조기를 따라 연평어장에 모여든 어선들을 수호하다 1974년 대간첩 작전을 이유로 소등한 지 45년 만이다. 연평도 등대 재가동은 서해5도 어장 확대와 야간 조업시간 확대에 따른 어로활동 보호 차원에서 결정된 것으로 알려졌다. 일각에서 연평도 등대가 유사시 적 공격의 표적이 될 것으로 우려하자, 북쪽으로는 등대 불빛을 차단하고 원격 소등도 가능하게 조치했다고 한다.연평도 등대는 앞으로 남북관계 예보기능으로 주목받을 가능성이 높다. 남북관계가 무탈하면 등대가 켜질 것이고, 군사적 긴장이 고조되면 꺼질 테니 그렇다. 아무쪼록 연평도 등대가 서해 밤바다에서 분쟁의 먹구름을 몰아내는 평화의 빛으로 밝게 빛나기를, 결코 꺼질 일이 없기를 기원할 뿐이다./윤인수 논설위원

2019-05-20 윤인수

[참성단]주정도 교양이다

청록파 시인 중 한 명인 조지훈 시인은 수필 '주도유단(酒道有段)'에서 '사람의 주정을 보고 그 사람의 인품과 직업은 물론 그 사람의 주력(酒歷)과 주력(酒力)을 당장 알아낼 수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주도(酒道)를 18단계로 나누었다. 이 분류법은 시대가 바뀐 지금에도 많은 공감을 이끌어낸다. 물론 주당들에게 국한된 얘기다.일단 '술을 아주 못 먹진 않으나 안 먹는 사람'(不酒)이 가장 하위 레벨인 9급이다. 이어 외주(畏酒), 민주(憫酒), 은주(隱酒), 상주(商酒), 색주(色酒), 수주(睡酒), 반주(飯酒)를 거쳐 1급 '술의 진경(眞境)을 배우는 사람'을 뜻하는 학주(學酒)에 이르러서야 처음으로 '주졸'(酒卒)이란 별칭을 얻게 된다. 시인에 따르면 2급 이하 그룹은 술의 진경 ·진미를 모르거나 목적을 위하여 술을 마시는 사람들이다.다음은 고수의 술세계다. 애주(愛酒), 즉 '술의 취미를 맛보는 사람'이 초단이다. 비로소 술꾼으로 인정받는 '주도'(酒徒)라는 칭호가 붙는다. 다음으로 '술의 진미에 반한 사람'(2단), '술의 진경을 체득한 사람'(3단), '주도를 수련하는 사람'(4단), '주도 삼매에 든 사람'(5단), '술을 아끼고 인정을 아끼는 사람'(6단), '마셔도 그만 안 마셔도 그만, 술과 더불어 유유자적하는 사람'(7단) 순으로 서열이 정해진다. 단이 높을수록 주선(酒仙), 주현(酒賢), 주성(酒聖) 등 고상한(?) 칭호가 주어진다. 8단은 '술을 보고 즐거워하되 이미 마실 수는 없는 사람'인데 술 때문에 건강을 잃어 한잔도 입에 댈 수 없는 사람을 칭하는듯하다. 애주가에게는 최악의 상황일진데 '주종'(酒宗)이라는 칭호만큼은 남부럽지 않을 듯싶다. 마지막 9단에게 부여된 칭호는 열반주(涅槃酒)다. '술로 말미암아 다른 술 세상으로 떠나게 된 사람'이다. 해탈을 통해 최고의 경지에 올랐을지는 몰라도 저승에서 술잔을 기울여야 한다. 한때 이 분류법을 외우려 한 적이 있다. 자가진단(?)에 도움이 될듯해 암기를 시도하다가 이게 무슨 짓인가 싶어 때려치웠지만 지금도 술을 마시면 가끔 기억을 더듬어 주도유단의 함의를 찾아보곤 한다.취객이 경찰의 뺨을 때리는 등 난동을 부린 동영상이 나돌며 세상이 시끄럽다. 현장에 출동한 여경에게까지 불똥이 튀고 있다. 그 취객은 주도유단의 어느 단계일까. 조지훈 시인은 '주정도 교양'이라고 했다. /임성훈 논설위원

2019-05-19 임성훈

[참성단]인천 공무원 집단 성매매

지난해 초 서지현 검사가 불을 붙인 미투운동의 열기는 대단했다. 미투운동의 열기는 성폭력 사건에 비교적 관대했던 법원의 판결도 확 바꾸어 놓았다. 2018년 4월 대법원은 학생을 성희롱한 대학교수의 해임취소소송 최종심에서 하급심의 원고 승소 판결을 뒤집고 패소 판결을 확정했다. 이때 등장한 용어가 '성(性)인지 감수성'이다. 1995년 베이징 유엔 여성대회에서 사용돼 국제적으로 통용된 '성인지 감수성'은 일상생활 속에서 성차별적 요소를 감지해 내는 민감성을 의미한다.당시 대법원은 성인지 감수성을 성범죄 관련사건을 심리할 때 피해자가 처한 상황의 맥락과 눈높이에서 사건을 바라보고 이해해야 한다고 해석했다. 수행 여비서의 미투운동에 걸려 재판에 회부된 안희정 전 충남지사는 1심에서 무죄를 받았지만, "성범죄 사건을 심리할 때는 성차별, 양성평등 등 '성인지 감수성'을 잊지 말아야 한다"는 2심 재판부에 의해 징역형을 선고받고 법정 구속됐다.물론 성인지 감수성을 성범죄 판결에 반영하는 법원의 추세에 반발하는 원칙론도 만만치 않다. '성범죄 피해자의 진술을 존중해야 한다'는 감성적 논리는 무죄추정의 원칙과 증거법 원칙에 반한다는 것이다. 거짓 피해자에 의한 무고한 가해자가 나올 수 있다는 반박은 타당하다. 하지만 대법원 판결로 우리 사회가 성인지 감수성을 새롭게 인식하는 계기가 마련된 것만은 확실하다. 사회 각 분야에서 성폭력에 관대했던 의식과 관행이 무너지고, 정부와 시민사회단체는 성차별을 없애기 위한 정책과 제안을 쏟아내고 있다.최근 인천 미추홀구 공무원 4명과 인천도시공사 직원 7명이 회식후 집단 성매매를 한 사실이 드러났다. 성을 상품으로 거래하는 성매매는 성인지 감수성 지표 중 최악이다. 성인지 감수성을 정책으로 실현해야 할 공무원, 지방공기업 직원들이 집단 성매매를 했다니 충격적이다. 더군다나 장자연 사건, 김학의 사건을 비롯해 버닝썬 사태 등 과거와 현재의 성추문 사건으로 시끄럽고 대통령까지 나서 철저한 조사를 당부한 마당에 이런 짓을 벌였으니, 세상과 담 쌓은 공직사회의 이면이 너무 추악하다.이들이 자기 돈으로 이런 짓을 벌일 리 없다. 수백만원의 회식비와 성매매 비용에 어떤 비밀이 숨어있을까 궁금하다. /윤인수 논설위원

2019-05-16 윤인수

[참성단]깃대 종(種)

'농부아사 침궐종자'(農夫餓死 枕厥種子), '농부는 굶어 죽어도, 씨앗은 베고 죽는다'는 뜻이다. 농부에게 씨앗은 그만큼 목숨보다 소중한 존재다. 종자(種子)인 씨앗이 없다면 농사를 지을 수 없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농부의 존재가치가 사라진다. 배가 고파 죽을지언정 씨앗을 먹지 않는 이유다. '농심'(農心) 중의 농심이다.농사와 분야는 다르지만 '농부아사 침궐종자'란 말을 목숨 걸고 실천한 사람들이 옛 소련에 있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소련의 레닌그라드(현 '상트페테르부르크')가 독일군에게 900일 동안 포위된 적이 있다. 이 기간, 도시에 있던 소련 사람 150만명 중 70만명이 굶주림과 질병으로 죽었다. 그런데 이 도시에는 씨앗과 열매 표본 등을 쌓아둔 곡식 창고 같은 곳이 딱 한 곳 있었다. 바로 '바빌로프 연구소'다. 이 연구소에는 바빌로프 박사가 전 세계 150여 개국을 돌며 모은 수십만 종류의 씨앗이 있었다. 그러나 연구원들은 단 한 톨의 씨앗에도 손을 대지 않았다. 씨앗을 먹었더라면 목숨은 부지할 수 있었을 텐데 연구원들은 자신보다 '씨앗이 사는 길'을 택했다. 그 결과 9명의 연구원이 굶어 죽었다. 이 연구소에는 밀, 콩, 팥, 녹두, 동부, 호박 등 우리나라의 작물 표본도 보존돼 있다. 바빌로프 박사가 1929년 부산에서 신의주까지 이동하면서 수집한 것이라고 한다.눈여겨봐야 할 점은 바빌로프 연구소에 보관된 지구촌 곳곳의 토종 작물 씨앗 가운데 90% 이상은 원래 그 씨앗이 자라던 나라나 지역에서 찾아볼 수 없다는 사실이다. 100년 남짓한 기간에 벌어진 일이다. 인류의 각고의 노력 없이 생물종다양성 유지는 요원하다는 것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대목이다. 지난 2015년 문을 연 '스발바르 국제종자저장고'는 이같은 교훈의 결과물이다.인천시가 국립생물자원관과 함께 인천 지역을 대표하는 '깃대종(flagship species)'을 선정키로 했다는 소식이다. 깃대종은 유엔환경계획(UNEP)이 제시한 개념으로, 특정 지역의 생태계를 대표할 수 있는 중요 동·식물을 뜻한다. 시는 깃대종이 선정되면 중점관리에 나설 계획이다. 인천 깃대종의 식물분야 후보군은 끈끈이주걱, 붉노랑상사화, 이삭귀개, 통발, 노랑붓꽃, 대청부채, 매화마름 등 7종이다. 저마다 이름도 참 예쁘다. 어느 식물이 깃대종으로 선정되든 생물종다양성 회복의 깃발을 높이 올리길 기대해 본다. /임성훈 논설위원

2019-05-15 임성훈

[참성단]스승의 길

아벨 선생님은 말했다. "한 국민이 노예로 전락해도 자기 나라말만 잘 간직하고 있으면 그것은 자신이 갇힌 감옥의 열쇠를 자신이 쥐고 있는 것과 같다." 종이 울렸다. 프랑스어로 하는 마지막 수업이 끝난 것이다. 아벨 선생님은 "여러분! 나는, 나는…하고 말하며 칠판에 온 힘을 다해 이렇게 썼다. '프랑스 만세!'. '알퐁스 도데'의 '마지막 수업'에 나오는 이야기다. 세상이 많이 변했다 해도, 지금 교직에 있는 선생님 중 이 글을 읽은 분이 있다면 아벨처럼 한번쯤 용기 있는 교사, 진실을 가르치는 교사가 돼보리라 다짐한 적이 있을 것이다. 존 키팅 선생님은 말했다. "지금 이 순간을 붙잡아라. 그리고 즐겨라. 너희만의 특별한 삶을 살아라." 명문 사립 고등학교 영어 교사 키팅 선생님의 이 말에 공부만이 인생의 전부로 알았던 학생들은 큰 충격을 받는다. 선생님을 다룬 영화를 말할 때 빠질 수 없는 '죽은 시인의 사회'의 한 장면이다. 이 영화를 본 선생님이 있다면, 키팅처럼 입시의 멍에를 훌훌 집어 던지고, 참교육을 가르치는 교사가 되고 싶은 욕망이 불끈 솟아오름을 느낀 적이 있을 것이다.두 작품에 등장하는 선생님들은 어떻게 보면 불행한 분일 수도 있다. 명성도 권세도 부귀영화도 없는 생애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의 평범한 삶 속에서 숙연하고 따듯한 인간의 정과 스승의 참모습을 발견한다. 이러한 스승은 우리 주변에 얼마든지 발견할 수 있다. 스승다운 스승이 없다고 하지만 우리는 그런 스승을 찾으려고 하지 않았을 뿐, 지금도 어디에선가 묵묵히 '스승의 길'을 걸으며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을 것이다."나는 내 법전을 팔아 버리기로 했다. 왜냐하면, 법률보다 한층 더 중요한 일에 투신할 생각이기 때문이다." 미국 공립학교의 아버지로 불리는 호러스 만(Horace Mann)이 친구에게 보낸 편지의 한 토막이다. 매사추세츠 상원의원이던 그는 알량한 정치보다 미래의 동량을 키우는 교육이 더 중요하다고 믿은 사람이다. 공자도 그랬다. 왕도정치의 이상을 실현하려고 꾀하다가 실망하고 3천여 명의 제자를 가르치는 것으로 희망을 찾았다. 오늘날 스승들은 과연 어떤 대접을 받고 있는가. 육신을 낳고 키운 건 부모지만, 정신을 낳고 키운 건 스승이다. 오늘은 스승의 날. 스스로를 내세우지 않으며 '스승의 길'을 걷고 계신 선생님께 경의를 표한다. /이영재 논설실장

2019-05-14 이영재

[참성단]유시민과 심재철의 기억

2016년 3월 이천 부악문원에서 작가 이문열을 만났을 때 그는 '변경'의 후속작으로 80년대를 정리하는 작품을 집필 중이었다. 작업의 진척을 묻는 질문에 대뜸 "골치 아프다"고 푸념했다. "뜸을 너무 오래 들였고 나는 늙어버렸다"며 "그러는 동안 역사가 왜곡된 인식으로 굳어지고 주장과 선동이 역사가 되어간다는 느낌"이라 했다. 대가의 푸념이 낯설어 "전 시대를 정리해 현 시대의 독자에게 전달하는 일은 늘 고민스럽지 않은가"라고 다시 물었다. 답변에서 고민의 핵심이 나왔다."기억에는 개인적 기억과 그것이 공유되는 사회적 기억, 후세에 기록될 역사적 기억이 있다"며 "그런데 기억은 변경되고 조작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새 작품을 준비하는 10년 동안 내 주변의 사회적 기억을 확인해왔는데 굉장한 왜곡과 조작이 있었다"고 토로했다. 예를 들어 "술에 취해 경찰과 치고 받은 젊은 취객이 장년이 되자 전두환 욕을 했다가 경찰에게 맞는 민주화 투사로 변신하는 식"이라는 것이다. 이런 사례가 무수하니 "그 시대의 사회적 기억을 어떻게 복원하고 해석하느냐가 심각한 고민"이라는 얘기였다.유시민 노무현재단이사장과 심재철 자유한국당 의원이 소환한 80년 '서울의 봄'은 서로 다른 기억으로 처연하다. 신군부의 권력장악 시도에 학생운동권이 맞섰던 현장에서 유시민과 심재철은 동지였다. 서슬퍼런 합수부 조사실에 끌려간 이후 40년 세월이 지나는 동안 사회적 기억은 심재철을 변절한 가해자로, 유시민을 피해자로 규정해왔다. 유시민이 당당한 피해자로 그 시절을 방송에서 유쾌하게 회고하자, 심재철은 당시의 진술서를 공개하며 유시민의 기억은 틀렸다고 지적했다.일제 식민시대 이후 100여년 근현대사를 거치면서 우리 사회는 가해의 기억과 피해의 기억으로 분열됐다. 그러나 식민시대, 동란시대, 산업화·민주화 시대의 대혼란을 거치면서 억울하게 가해의 기억에 갇히거나 반대로 피해의 기억에 무임승차한 사람들이 무수할 것이다. 그래서 맥락을 살피지 않고 가해와 피해를 일도양단식으로 구분하는 역사인식은 위험하다. 심재철의 때늦은 반발은 자신을 변절자로 규정한 피해자들의 기억이 역사적으로 확정될까 두려워했기 때문 아닐까 싶다.이문열은 "한 시대는 같은 가락의 반복이 아니라 화성(和聲)으로 이루어진 것인데 자꾸 단음으로 만들려 한다"며 "이런 것들이 계속 걸리니까 글 쓰기가 어렵다"고 토로했다. /윤인수 논설위원

2019-05-13 윤인수

[참성단]일산 신도시의 비애(悲哀)

1기 신도시 일산은 1991년 가을에 입주를 시작했다. 처음부터 부실공사 파문 등 말이 많았다. 노태우 대통령의 200만 가구 건설공약으로 분당· 평촌 등에서 1기 신도시가 동시에 조성되다 보니 자재가 부족한 게 원인이었다. 불량 철근과 중국산 저질 시멘트, 여기에 바닷모래 사용이 큰 파문을 일으켰다. 골재 부족으로 강모래가 바닥이 나자 바닷모래를 가져다가 사용했는데 염분기를 제대로 씻어내지 않고 사용한 게 문제였다. 일산을 비롯해 1기 신도시 아파트는 '소금 아파트'라는 논란에서 자유로울 수가 없었다. 집값 때문에 일산주민은 말도 못하고 속만 부글부글 끓었다.지난해 12월 일산 백석역 온수관 파열사고는 일산 주민들에게 '늙은 도시'에 살고 있다는 설움을 주었다. 30년이 넘은 일산 신도시는 사람으로 치면 60세를 넘어선 나이다. 시설물도 세월이 흐르면 사람처럼 늙는다. 도시 이곳저곳에 묻혀있는 파이프라인은 동맥경화로 몸살을 앓고 있다. 교량이나 하수관, 도로 등 시설물들이 노후화되기 전에 대대적인 교체 작업이 필요하다. 하지만 투입될 비용이 천문학적이다. 일산 백석역 사고는 그나마 1기 신도시에 대한 국민의 관심을 불러 일으켰다는 게 작은 위안이었지만, 일산주민의 속은 검게 타들어갔다.정부가 고양 창릉을 3기 신도시 신규 택지 후보지로 추가 지정해 발표한 후, 일산 신도시 주민들이 크게 뿔났다. 2기 신도시 운정지구에 미분양 아파트가 넘쳐나면서 일산 집값마저 하락세를 보이는 상황에서 서울 접근성이 뛰어난 신도시가 들어설 경우, 일산의 경쟁력이 크게 떨어질 거란 우려 때문이다. 일산 신도시 주민들은 건설된 지 수십 년이 지났지만, 교통은 말할 것도 없고 각종 인프라가 철저하게 소외되고 있다고 하소연이다. 특히 같은 1기 신도시인 분당을 생각하면 일산신도시 주민들은 여전히 시골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며 분통을 터뜨린다. 지하철 노선의 경쟁력은 여전히 떨어지고 통일로와 자유로는 차를 몰고 나오기엔 끔찍한 '교통지옥'이 된 지 이미 오래다. 분당이 벤처 붐을 일으킨 판교를 끼고 승승장구한다는 소식이 터질 때마다 '베드타운',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일산주민들의 비애는 점점 깊어가고 있다.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 "3기 신도시 지정은 일산 신도시에 사망 선고나 다름없다"는 글이 올라 오는 등 일산신도시 주민은 지금 큰 슬픔에 빠졌다. /이영재 논설실장

2019-05-12 이영재

[참성단]회색 코뿔소

2013년 1월 스위스 다보스포럼에서 세계정책연구소 대표 미셀 부커는 자신의 저서 '회색 코뿔소가 온다'로 일약 스타로 떠올랐다. 다보스에 모인 사람들은 그가 강조하는 '회색 코뿔소(Grey rhino)'에 주목했다. 코뿔소는 시력이 약해 멀리 볼 수가 없는 대신 후각이 발달해 이에 의존해 풀을 뜯어 먹고 산다. 초식동물답게 성격은 온순하지만, 누군가 자신을 위협한다고 생각하면 그쪽을 향해 앞 뒤를 가리지 않고 돌진하는 습성이 있다. 그래서 세렝게티에서 코뿔소가 눈에 띄면 일단은 경계해야 한다. 부커는 지속적인 위기 경고음이 울리는데도 이를 간과하다가 더 큰 위험에 빠지는 것을 '회색 코뿔소'라고 칭했다.'회색 코뿔소'와는 달리 예측하지 못한 상황에서 도저히 일어날 것 같지 않은 일이 일어나는 것을 '블랙스완(Black swan)'이라고 한다. 18세기 호주에서 발견된 '검은 백조'는 '백조는 하얀색'이라는 통념을 깨뜨렸다. 2007년 미국 서브 프라임 사태로 세계 금융 위기가 닥치자 레바논 출신의 월가 증권분석가 나심 탈레브는 저서 '블랙 스완'을 통해 위기를 경고하며 통계적 예측의 한계를 넘은 극단적 상황이 가져올 파국을 분석했다. '블랙 스완'이나 '회색 코뿔소'같은 말이 끊이질 않고 회자하는 것은 경제라는 것이 논리와 생각대로 움직이지 않기 때문이다. '블랙 스완'이 아무도 예측하지 못한 상황에서 터지는 데 반해, '회색 코뿔소'는 지표를 통해 어느 정도 위험을 감지할 수 있다는 차이가 있다. 위기를 알리는 각종 경제 지표를 무시하다가는 갑자기 우리에게 달려든 코뿔소에 희생되고 만다. 문재인 정부 2년을 맞아 우리 경제에 대해 '회색 코뿔소'를 경계해야 한다는 소리가 점점 커지고 있다. 올 1분기 성장률은 -0.3%로 2008년 4분기 이후 최저를 기록하고 여기에 최근의 환율 급등과 미·중 무역전쟁 격화, 중국 부동산 거품 붕괴 위기 등 대내외적으로 잇단 경고음을 내며 '회색 코뿔소'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지고 있다. 그런데도 문재인 정부는 소득주도성장과 친노조라는 경제정책을 바꾸지 않고 있다. 문 대통령은 오히려 "경제성장률이 2분기부터는 점차 회복돼 개선될 것"이라고 진단하고 있다. 이렇게 넋 놓고 바라보고 있다가 나라 안팎에서 어슬렁거리는 회색 코뿔소들이 갑자기 우리에게 들이닥치는 것은 아닌지 걱정이다. /이영재 논설실장

2019-05-09 이영재

[참성단]아테네학당의 계약학과

인류역사상 가장 학구적인(?) 그림은 '아테네 학당'이 아닐까 싶다. 라파엘로가 1510년 완성한 이 벽화는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를 비롯해 고대 그리스의 철인, 학자들이 학문과 진리를 추구하고 있는 모습을 담고 있다. 손가락으로 하늘을 가리키는 플라톤과 손으로 지상을 가리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모습에서는 서로 이데아와 현실에 대해 설파하는 소리까지 들리는 듯하다. 진중권은 저서 '미학 오디세이'에서 이들의 가상대화를 재치 있게 풀어내기도 했다. 아테네 학당은 학문의 전당으로서 대학의 참모습을 보여준다. 그래서 대학에는 '진리의 상아탑', '학문과 지성의 요람' 등 고상한 수식어가 붙는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대학은 아테네 학당의 모습과 점점 멀어지고 있다. 취업률 때문에 대학의 본질이 희석되고 있는 것이다. 취업 중심의 학과 개편 속에서 취업률이 낮은 인문학 분야의 학과는 존폐의 기로에 서기 일쑤다. 오죽하면 '문송합니다(문과라서 죄송합니다)'라는 말까지 나왔을까.대학가 취업지상주의의 결정판은 '계약학과'다. 계약학과는 산학협력 촉진 차원에서 특정 기업과 대학이 계약을 맺고 관련 업무에 필요한 학과를 개설하는 학위 과정을 말한다. 졸업 후 취업이 100% 보장되며 학과 운영 비용은 기업이 일정 부분 부담한다. 최근에는 연세대가 삼성전자의 계약학과로 '시스템반도체공학과'를 신설키로 하더니, 취업에서 자유로울듯한(?) 서울대마저 계약학과 운영을 검토 중이라는 소식이다.이러던 차에 인천에도 계약학과가 신설될 전망이어서 관심을 모으고 있다. 인천시는 영종도 일대에 들어서고 있는 대규모 복합리조트에 2만여명 규모의 맞춤형 일자리를 제공하기 위한 계약학과를 2020년까지 지역 대학에 설치할 계획이라고 한다. 극심한 취업난을 생각하면 일단 반가운 소식이 아닐 수 없다. 지역 대학이 지역 기업에 필요한 인력을 효율적이고 탄력적으로 공급한다는 측면에서도 환영할만한 일이다. 그래도 마음 한구석에 씁쓸함이 남는 것은 대학이 고유의 색감을 잃어가기 때문이리라. 자꾸만 퇴색되는 그림을 매일 보는 느낌이랄까.다시 그림 속으로 들어가 본다. 2019년의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런 대화를 할 듯싶다. "이번에 계약학과 취업률이 100%라면서? 어쩌다가 학당이 취업창구로 전락했는지, 쯧쯧…." 플라톤이 혀를 차자 아리스토텔레스가 말을 잇는다. "그게 현실입니다." /임성훈 논설위원

2019-05-08 임성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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