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성단

 

[참성단]돌아온 반기문

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의 별명은 '기름 장어'다. 민감한 질문이나 난처한 상황을 매끄럽게 잘 피해간다고 해서 언론이 붙여줬다. 본인도 이 별명을 능숙한 외교관을 지칭하는 말이라고 여겨 싫어하지 않았다. 유엔 사무총장 취임 전 기자들에게 스스로 별명의 유래와 의미를 홍보했다. 미국의 한 방송 사회자가 질문마다 모호한 대답을 하는 그에게 "한국에서 당신을 왜 미끄러운 장어라 하는지 알겠다"고 했을 정도다. 하지만 지난 대선에서 반 전 총장이 대권 도전 움직임을 보이자 비판적인 언론으로부터 '기회주의자'로 집중 공격당하는 등 별명 때문에 혹독한 시련을 겪었다.하지만 반 전 총장 특유의 부지런함과 끈기는 당시 유엔 내에서도 유명했다. 재임 중 수단 다르푸르 사태에 적극적으로 개입해 '아프리카 연합 혼성 평화유지군 파견'이라는 공로를 세웠다. 특히 반 전 총장은 지구 온난화 문제를 국제적 관심사로 부각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그도 10년 재임 기간 기후변화 분야의 성과에 큰 자부심을 가졌다. 그의 노력의 결실은 2015년 12월 체결된 파리기후변화협약이다. 이 협약엔 무려 195개국이 동참했다. 그는 이 협약을 위해 전 세계를 직접 뛰어다니며 세계 각국 정상을 만나 기후변화에 대한 관심을 촉구했다. 반기문이 '미세먼지 해결사'로 돌아온다. 문재인 대통령이 제안한 '미세먼지 해결을 위한 범사회적 기구' 위원장직을 그가 수락했다. 그의 등장으로 대중국 외교력 및 국제사회 영향력으로 인해 미세먼지를 둘러싼 한·중 외교는 새 국면을 맞게 됐다. 하지만 중국의 오만한 태도로 인해 획기적인 돌파구가 마련될지는 여전히 미지수다. 그래도 유명무실하게 방치돼 온 국무총리실 미세먼지특별위원회보다는 외교 전문가로서, 중국 등 주변국과 미세먼지 문제를 협의하고 중재할 능력을 갖춘 반 전 총장의 능력이 더 돋보일 것으로 보는 견해가 지배적이다.반 전 총장은 UN사무총장 퇴임 후에도 기후변화에 대해 꾸준히 관심을 가져왔다. 지난해 3월 서울에 본부를 둔 국제기구인 글로벌녹색성장연구소(GGGI) 의장에 선출됐는가 하면, 빌 게이츠 마이크로소프트 창업자 등과 뜻을 모아 기후변화 글로벌위원회(GCA)를 출범시키기도 했다. 지금 우리에겐 암만큼 무서운 게 중국발 미세먼지다. 좋은 의미의 '기름 장어'답게, 미세먼지 척결을 위해 그의 외교적 능력이 발휘되길 기대해 본다. /이영재 논설실장

2019-03-19 이영재

[참성단]서울외신기자클럽 성명

토마스 제퍼슨은 "신문 없는 정부보다 정부 없는 신문을 선택하겠다"며 언론의 자유가 국가나 정부에 앞서는 가치임을 단언했다. 물론 언론의 자유가 없는 국가와 정부도 있다. 파시즘의 이탈리아, 나치즘의 독일, 공산주의 독재국가를 비롯한 모든 전체주의 국가나 정부가 그렇다. 하지만 국민의 자유를 박탈한 이런 국가나 정부는 혁명의 대상이지, 애국의 대상이 아니다.사우디아라비아 정부는 지난해 워싱턴포스트 칼럼니스트로서 왕정(王政)을 비판해 온 자말 카슈끄지를 터키 주재 총영사관저에서 살해했다. 터키 수사당국은 암살단이 그의 손가락을 자르고 참수하는 현장의 녹음을 확보했다. 왕실 편에 있다가 왕정을 반대하는 언론인으로 변신한 카슈끄지를 사우디 왕실은 배신자로 규정해 처단한 것이다. 워싱턴포스트는 '아랍이 가장 원하는 것은 표현의 자유'라는 그의 유고를 게재해 사우디 왕실에 항의했다.언제고 탄압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점 때문에 언론인, 언론사는 남다른 연대감을 갖는다. 국내 언론이 탄압받던 시절 수많은 외신들이 한국의 진실을 알렸다. 독일 공영방송 기자 위르겐 힌츠페터는 목숨 걸고 1980년 광주의 비극을 세계에 알렸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사형 판결을 받자 '기로에 선 한국'이라는 다큐멘터리를 제작해 항의했다. 당시 한국인들은 한국인만 모르는 한국의 진실을 외신을 통해 마주했다.서울외신기자클럽이 16일 더불어민주당을 향해 "언론 통제의 한 형태이고 언론 자유에 찬물을 끼얹는 것"이라는 성명을 발표했다. 지난 13일 민주당 이해식 대변인이 서면 브리핑에서 블룸버그 통신의 기자 실명을 밝히고 "미국 국적 통신사의 외피를 쓰고 국가원수를 모욕한 매국"이라고 비난한 데 대한 항의이다. 이 기자는 지난해 9월 문제의 '문재인 대통령 김정은 수석대변인' 기사를 작성한 장본인이다. 이 기자는 이 대변인의 지목으로 비난의 '표적'이 돼 신변의 위협마저 느끼는 상황이라고 한다.민주화의 주역을 자초하는 더불어민주당이다. 민주당의 DNA에 언론탄압은 없다고 자부해도 토를 달기 힘들다. 그런 민주당이 기자 실명을 밝히며 '매국' 딱지를 붙여 지지 진영의 한 복판에 세웠다는 사실이 놀랍다. 서울외신기자클럽도 문재인 정부의 집권여당을 향해 이런 성명을 발표하게 될 줄은 몰랐을 것이다. /윤인수 논설위원

2019-03-18 윤인수

[참성단]대사간과 민정수석

조선 시대 사간원(司諫院)은 왕이 내린 결정이 잘못되었을 때 이를 바로잡거나, 왕의 언행에 문제가 있으면 이를 비판하는 일을 했다. 사간원이 소신 있게 직언하고 왕이 이를 스스럼없이 받아들일 때, 왕은 '성군(聖君)'이란 소리를 들었다. 사간원의 수장 대사간(大司諫)은 비록 정3품 당상관이었지만, 소신과 배짱이 없으면 버티기 힘들었던 자리였다. 왕과 독대하는 자리도 많아 권력이 하늘을 찌르는 만큼 시샘하는 사람도 많았다.대사간은 지금으로 따지면 청와대 민정수석쯤 된다. 예나 지금이나 이들의 역할은 민심과 여론의 동향을 대통령에게 전달해 국정을 제대로 펼칠 수 있도록 하는 게 기본 업무다. 개각을 앞두고 문제가 있는 인사를 걸러내는 것도 민정수석의 주요 임무다. 인사 대상자들의 주변을 현미경 검증 하고 문제가 있으면 아무리 대통령이 후보자를 신뢰해도 "안된다"고 소신 있게 말해야 한다. 그만큼 업무량도 많았다. 노무현 대통령 시절 두 번 민정수석을 지낸 문재인 대통령은 저서 '운명'에서 "업무량이 늘 한계를 초과하는 느낌이었다. 무리하다 보니 민정수석 1년 만에 이를 열 개나 뽑아야 했다"고 적었다. 김영삼 대통령 시절 청와대의 인사검증은 거의 비선조직에 의존했다. 그래서 편지 풍파 인사가 많았다. 그나마 인사검증시스템이 제 자리를 잡은 건 참여정부 때였다. 인사수석이 인재를 추천하면 민정수석이 검증했다. 이후 인사추천위원회를 거친 최종 후보자 중 1명을 대통령이 낙점했다. 그런데도 청문회에서 낙마하는 '인사 참극'이 자주 일어났다. 그때마다 비난은 인사수석보다는 민정수석에게 쏟아졌다. 검증 실패를 더 크게 본 것이다.지난 3 ·8개각으로 임명된 7명의 장관후보자가 청문회도 하기 전에 자질논란에 휩싸였다. 해도 너무했다. 최정호(국토교통부)의 꼼수증여, 김연철(통일부)의 막말 발언, 박영선(중소 벤처기업부)의 아들 이중국적 논란, 조동호(과학기술 정보통신부)의 배우자 부동산, 박양우(문화체육관광부)의 자녀 억대 예금논란, 진영(행정안전부)의 후원금 부당공제 등 후보자 대부분이 문제가 있었다. 이는 민정수석실의 인사 검증이 부실했던 탓이다. 아무리 좋은 시스템과 엄격한 기준이 있어도 운영자의 판단이 잘못되면 참극이 발생하기 마련이다. 비난은 조국 민정수석에게 쏟아지고 있다. 2년의 재직 기간 내내 참으로 바람 잘 날 없는 민정수석이다. /이영재 논설실장

2019-03-17 이영재

[참성단]대체육(代替肉)

육류 소비를 줄여야겠다는 생각이 든 건 갑자기 늘어난 몸무게가 아니라 한승태의 '고기로 태어나서'(시대의 창 刊)를 읽고 나서다. 새삼 독서의 위대함까지 깨우쳐 준 이 책의 저자는 닭, 돼지, 개 농장에서 노동하면서 동물이 식용고기가 되는 과정을 세밀하게 적고 있다. 그 묘사가 너무 생생해 전율이 일어날 정도다. 영화 '옥자'를 보았을 때처럼 이 책을 읽으면 적어도 2주 정도는 고기를 먹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종말 시리즈로 유명한 제러미 리프킨은 '육식의 종말'에서 "수백만 명의 인간들이 곡식이 부족해 기아에 시달리고 있는 와중에도 선진국에선 육류, 특히 쇠고기의 과잉섭취로 인해 '풍요의 질병' 즉, 심장 발작, 암, 당뇨병 등에 걸려 죽고 있다"며 육류 소비를 줄여야 한다고 역설했다. 그래서인지 최근 채식주의자들이 증가하는 추세다. 아울러 전통적인 축산업이 환경파괴 논란을 낳고 있으며, 밀집 사육시설과 도축과정에서의 잔인함 등 동물복지를 문제 삼는 소비자도 늘어나고 있다. 이런 이유로 채식주의를 선언해버리는 이들도 꽤 많다.전 세계 육류 생산을 좌지우지하는 연 매출 55조원의 다국적 기업 '타이슨 푸즈'가 지난해 5월 구멍가게 수준의 '퓨처미트 테크놀로지'에 대규모 투자를 한다고 발표했다. 퓨처미트는 '실험실 고기'로 불리는 '배양 고기' 원천기술을 보유한 이스라엘 회사다. 이 밖에도 타이슨 푸즈는 '비욘드 미트' 지분도 5% 인수했다. 이 회사 역시 식물에서 추출한 단백질을 효모, 섬유질 등과 배양해 고기의 풍미, 육즙, 식감을 구현한 식물성 고기를 만드는 회사다. 아쉬울 게 하나도 없는 공룡 기업이 이런 대체육 제조회사에 관심을 두는 이유는 무엇일까. 타이슨 푸즈의 발 빠른 움직임에서 우리는 '축산업의 종말'을 읽는다.지금 미 실리콘밸리는 스타트업부터 글로벌 식품 기업까지 대체 식량 개발에 한창이다. 고기의 맛과 식감을 그대로 재현해 낸 대체육이 세계 식품업계 최대 화두로 떠오른 것이다. 100% 식물성 단백질이면서도 고기와 유사한 맛과 식감을 낸다는 비욘드 미트의 '인조고기'가 다음 달부터 국내에 시판된다는 소식이다. 바야흐로 대체육 시대가 열린 셈이다. 채식주의자에겐 반가운 소식이지만, 육류 소비량이 아시아 최대 수준이고 여전히 '씹는 맛'을 즐기는 우리에게 비싼 대체육이 성공할지 지켜볼 일이다. /이영재 논설실장

2019-03-14 이영재

[참성단]'닥터-카' 달리다

"자네 아버지는 한국 사람처럼 살았고 한국 사람처럼 죽었네."교통사고로 아버지를 잃은 벽안(碧眼)의 청년이 아버지의 지인에게서 들었던 말이다. 응급구조시스템이 제대로 갖추어지지 않은 한국에선 길에서 허무하게 죽는 사람이 많다는 뜻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교통사고를 당한 후 택시로 병원에 이송됐는데 의사의 권유로 더 큰 병원으로 이동하던 중 택시 안에서 숨졌다. 이후 청년은 전 세계 각국을 돌다가 선진화한 미국 텍사스의 응급구조시스템에 큰 감명을 받게 된다. 다시 한국으로 돌아온 그는 15인승 승합차부터 사들였다. 이어 목수, 철공 기술자와 함께 집 뒷마당에서 승합차를 구급차로 개조하는 일에 매달렸다. 대한민국 1호 구급차는 이렇게 탄생했다. 이때가 1993년이다. 사실 이전에도 구급차는 있었다. 1972년 전북 전주소방서를 시작으로 1973년 부산 동래소방서 등 일부 소방서에서 구급차를 운영했고 1982년 3월 서울소방본부에서 구급대를 창설하면서 119구급 서비스 시대가 열렸다. 더 거슬러 올라가면 1938년 경성교통안전협회의 의뢰로 경성모터스주식회사가 제작한 구급차가 운행되기도 했다. 당시 백미 240가마를 살 수 있는 '거금'이 투입된 이 구급차는 중상자 2명이나 경상자 4명을 동시에 이송할 수 있었다.하지만 이들 구급차는 단지 환자를 이송하는 운송수단에 불과했다. 차 안에 의학 설비를 갖춰 응급처치가 가능토록 한 전문 앰뷸런스는 청년이 제작한 구급차가 최초다. 그 청년이 이제는 60대로 접어든 인요한 세브란스병원 국제진료센터 소장이다. 1895년 외조부가 선교를 위해 제물포 땅을 처음 밟은 것을 시작으로 4대째 한국에서 살고 있다. 그가 뚱땅거리며 만든 구급차는 소중한 생명을 살리며 구급차의 개념을 바꾸어놓았다. 그리고 26년이 지난 지금, 우리나라 응급구조시스템에서 볼 수 없었던 신개념의 구급차가 또 한번 선을 보였다. 가천대길병원이 지난 12일 전국에서 처음으로 운영에 들어간 '닥터-카'다. 전문의와 간호사 등 전문 의료진이 응급구조사와 함께 탑승한다는 것이 응급구조사만 타는 기존의 구급차와 다른 점이다. 중증환자를 골든타임 내에 치료할 수 있는 전문 장비도 갖춘 터라 '달리는 응급실'이라 할 수 있다. 진작 '닥터-카'가 길 위를 달렸더라면 인요한 소장 아버지의 지인은 이렇게 말하지 않았을까? "자네 아버지가 한국에서 살아서 그나마 다행이네." /임성훈 논설위원

2019-03-13 임성훈

[참성단]백건우의 지방 연주회

피아노의 귀재 '안톤 루빈시테인'은 앵글로 색슨의 콧대 높은 자존심을 이렇게 표현했다. "영국인이 대문자로 쓰는 유일한 글자는 나(I)이다. 이것은 그들의 민족성을 가장 뚜렷하게 이야기해주는 것으로 생각한다." 유대계 러시아 출신인 그가 왜 이런 말을 했는지는 모른다. 연주여행을 하면서 영국인들이 지나치게 '아이'를 내세우는 게 싫어서 그랬는지, 영국인들의 그 '자만'이 부러워서였는지 알 수 없지만 아마 쓰라린 역사를 떠올리며 선조와 민족을 생각하지 않았나 싶다.스비아토슬라프 리히테르는 1960년대 서구로부터 가장 열렬한 환호와 칭송을 받은 대 피아니스트였다. 끊임없는 귀화 요구에 흔들리지 않았던 그는 낳아주고 키워준 소비에트를 끝까지 버리지 않았다. 71세였던 1986년 그는 자동차 한 대에 몸을 싣고 당시 레닌 그라드에서 블라디보스토크까지 대륙을 횡단하며 작은 도시와 시골 마을을 찾아 순회연주회를 열었다. 시골성당의 낡고 조율이 되지 않은 피아노도 그의 감동적인 연주를 막지 못했다. 이런 '마을연주회'가 100회를 넘었다. 언제는 스무 명 앞에서도 연주했다. 자신들을 찾아준 고마움과 그의 음악에 감동한 마을사람들은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우리의 피아니스트 백건우도 25년째 지방을 찾아가 연주회를 열고 있다. 거기에는 섬도 포함되어 있다. 2011년 9월 연평도에서 시작한 첫 섬 연주회는 관객들이 둘러앉거나 일어선 채 자유분방하게 대가의 공연을 관람해 신선함을 주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정말 마음에 드는 악기 등 조건이 갖춰진 곳은 거의 없었다. 그래도 음악은 청중에게 잘 전달됐다. 섬마을을 찾아 자연으로 돌아가 그 속에서 한국적인 속살을 찾고 싶었다."백건우가 지방 순회 연주회를 시작한다. 이젠 사통팔달 길이 뚫려 지방이라 하면 그곳 분들이 화를 낼지도 모르지만, 수원 인천을 제외하곤 거장을 쉽게 만나지 못하는 곳이라 이번 '백건우 & 쇼팽' 연주회에 거는 기대가 크다. 16일 군포, 17일 여주, 19일 과천, 20일 광명, 30일 수원, 4월 13일 인천, 20일 안산으로 이어진다. 강행군이다. 백건우는 리히테르처럼 자신에게 큰 보상이 돌아오지 않아도 끝까지 궁극을 추구하는 장인 정신의 소유자다. 헌신을 통해 사람들을 정서적으로 한 단계 끌어올리는 이 '연주의 구도자'를 보노라면 머리가 저절로 숙여진다. /이영재 논설실장

2019-03-12 이영재

[참성단]베네수엘라

우고 차베스와 니콜라스 마두로로 이어진 베네수엘라 좌파정권의 20년 사회주의 경제실험이 비극의 정점을 향해 치닫고 있다. 차베스는 1999년 집권해 신자유주의 경제를 배격하는 사회주의 경제정책을 펼친다. 석유산업을 재국유화해 거머쥔 오일머니로 빈민층에게 무상교육, 무상의료, 저가주택을 제공했다. 이른바 볼리바르 혁명이다.차베스는 미국의 신자유주의에 대항하는 좌파 선봉장을 자임했다. 국장(國章)에 그려진 백마가 오른쪽을 향한다고 왼쪽으로 틀어버렸을 정도였으니, 전세계 반미 사회주의 세력들의 추종은 당연했다. 국내에서도 진보성향 정당과 매체들이 차베스와 베네수엘라에 주목하고 열광했다. 하지만 오일머니에 전적으로 의존하던 사회주의 경제실험은 국제유가가 폭락하면서 파국에 직면했다.파국의 피해는 온전히 베네수엘라 국민의 몫이 됐다. 오일머니가 마르자 마구 찍어낸 화폐로 극단적인 인플레이션이 발생했다. 지난해 0.8볼리바르였던 커피값이 최근에 2천800볼리바르로 3천500배가 올랐다. 80만%라는 인플레이션으로 수공예품 재료로 전락한 화폐는 종이 값에도 못미친다. 극심한 경제난을 피해 전체인구의 10%인 300만명 이상이 국외로 탈출해 구걸과 매춘으로 낯선 나라의 거리를 헤맨다. 콜럼비아 등 베네수엘라 접경국가들은 국경을 봉쇄하고 나섰다.급기야 최근엔 대정전 사태로 나라 전체가 암흑에 잠겼다. 세계 최대의 원유 매장 국가가 수력발전에 의존하다 발전소가 고장나자 블랙아웃에 휩싸였으니 이만한 미스터리가 없다. 한때 남미 최고의 부국이자 최대의 위스키 소비국이던 베네수엘라가 대정전으로 중환자들이 죽어나가고, 시민들은 냉장고에 아껴둔 비상식품을 꺼내먹는 지경에 처했다.나라는 거덜났는데 대통령은 두명이나 된다. 차베스의 뒤를 이은 좌파의 마두로 대통령에 대해 스스로 대통령을 선언한 우파정당 연합의 과이도 국회의장이 극단적으로 대립하고 있다. 좌파와 우파를 지원하는 외세의 간섭은 노골화되고 좌파 기득권세력과 우파 정권교체세력으로 민심도 갈라졌다.대정전은 연극의 암전과 같다. 대정전의 암흑 속에서 베네수엘라의 파국의 무대가 어떻게 전환될지 궁금하다. 분명한 건 베네수엘라가 세계 경제사에 전례없는 반면교사로 기록될 것이란 점이다. /윤인수 논설위원

2019-03-11 윤인수

[참성단]야구에서 '1'의 의미

선동열의 손은 손목에서 중지까지의 길이가 18㎝다. 손가락만 따지면 중지가 7.7㎝로 한국 성인 남자의 평균치다. 하지만 한화 이글스 에이스 정민철의 23㎝에 비하면 무려 5㎝나 짧다. 최전성기 시절에도 포크볼을 던지지 못한 것은 짧은 손가락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그는 KBO 통산 146승 40패 132세이브 평균자책점 1.20을 기록했다. 이런 위력 투구로 선수시절 내내 검지와 중지 사이를 째서 손가락 길이를 늘렸다는 소문에 시달려야 했다.야구에서 '1'의 의미는 매우 크다. 선동열의 손가락 길이가 실제 1㎝만 길었다면 한국야구의 역사가 바뀌었을지도 모른다. 야구장 외야 펜스까지의 거리가 1m 길거나 짧다면 홈런에 큰 영향을 미친다. 그렇다면 야구공이 1㎜ 크거나, 작다면 야구 경기의 흐름도 바뀔까. 아마 그럴 것 같다. 2018년 프로야구는 뚜렷한 타고투저(打高投低) 현상을 보였다. 정규리그 702경기에서 터진 홈런은 1천756개로 프로야구 사상 최다였다. 40홈런 타자도 5명이 나왔다. 이유가 있었다. 공의 반발계수(공이 튀는 정도)가 원인이었다. 반발계수가 0.01 높아지면 평균 비거리는 2m 정도 늘어난다. 공 때문에 지난 시즌 게임마다 예기치 않은 홈런이 쏟아져 나와 재미보다는, 수준 이하라는 비난이 쏟아졌다. 야구의 묘미라는 '팽팽한 투수전'도 사라졌다.여론에 못 이긴 KBO가 올 시즌부터 공인구 둘레를 1㎜ 크게, 무게도 1g 정도 늘렸다. 특히 실밥 폭도 1㎜ 커졌다. 이 때문에 반발계수가 0.4034∼0.4234로 0.01 낮아졌다. 체인지업 커브 슬라이더 등 변화구를 던지는 투수들에겐 희소식이다. 실밥이 커 '채는 맛'이 생겼기 때문이다. 반면 검지와 중지 사이에 공을 끼어 던지는 포크볼 투수는 불리해졌다. 공이 커져 '꽉 죄는 맛'이 없어져서다. 직구 위주의 투수도 불리하다. 스프링캠프에서 투수들이 고작 1㎜ 1g 바뀐 공에 적응하느라 고생했다고 한다. 미세한 변화에도 투수들은 그만큼 민감하다. 야구는 그런 경기다.내일부터 프로야구 시범경기가 시작된다. 예전보다 시즌이 1주일 이상 앞당겨졌다. 겨우내 야구를 기다린 열성 팬은 "반갑다! 야구야"를 외치지만, 초미세먼지라는 복병도 만났다. 투수는 1㎜ 커지고 1g 무거워진 공과, 타자는 0.01 낮아진 반발계수와 그리고 관중은 초미세먼지와 신경전을 벌여야 할 2019시즌이다. /이영재 논설실장

2019-03-10 이영재

[참성단]회전문 인사

'관직을 얻으려고 갖은 방법으로 노력하는 것'을 '엽관(獵官)'이라고 한다. 사냥 렵(獵)에 벼슬 관(官). 거칠게 직역하면 '관직을 사냥하는 것'으로 썩 유쾌하진 않다. 하지만 엽관에 제도가 붙어 '엽관 제도'가 되면 '권력자나 정당이 관직을 독점하는 정치적 관행'이 된다. 미국 7대 대통령 앤드류 잭슨은 마시 상원의원의 '전리품은 승리자에게 속한다'는 말을 듣고 이를 제도화 시켰다. 우리가 귀아프게 듣고 보았던 '회전문 인사'나 '낙하산 인사' '보은 인사'가 이 제도의 산물이다.주중대사에 장하성 전 청와대 정책실장이 내정되자 '회전문 인사'라는 비판이 제기되고 있다. 장 전 실장은 문재인 정부의 경제정책에 흠집을 내고 물러났다. 불과 얼마 전 고대 졸업식장에서 "나는 무지개를 쫓는 이상주의자"라고 말해 구설에 오르기도 했다. 그런데 4강 대사 중 하나인 주중대사에 임명되면서 청와대 인재풀에 의구심마저 제기되고 있다. 회전문 인사는 이번만이 아니다. 임종석 전 비서실장은 퇴임 한 달 만에 UAE 외교 특별보좌관에, 소득주도 성장정책의 실패로 물러난 홍장표 전 경제수석은 소득 주도성장 특별위원회 위원장으로 돌아왔다. 탁현민 전 청와대 의전 담당 행정관도 대통령 행사기획 자문위원에 다시 임용됐다.문재인 대통령이 가장 존경하는 인물로는 고 신영복 성공회대 교수가 꼽힌다. 신 교수는 생전에 '70%의 자리론'을 강조했다. "나는 그 '자리'가 그 '사람'보다 크면 사람이 상하게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나는 평소 '70%의 자리'를 강조합니다." 신 교수는 70 정도의 능력이 있는 사람이 100의 능력을 요구받는 자리에 앉을 경우, 그 부족한 30을 거짓이나 위선으로 채우거나 아첨과 함량 미달의 불량품으로 채우게 된다고 우려했다. 능력과 자질이 부족하면서도 높은 자리를 가고 싶어하는 세태를 꾸짖은 것이다.오늘중 개각이 있을 예정이다. 역량이 출중해 그 자리에 반드시 필요한 인물이라면 회전문이 아니라 회전목마 인사라 해도 탓할 이유가 없다. 그러나 몇몇 인사의 면면을 보면 업무에 탁월한 식견을 갖췄거나 뛰어난 공적이 있다고 보기 어렵다. 검증된 인사를 주요 대사와 부처 장관으로 채우겠다는 문 대통령 의중을 모르는 바 아니지만, 낯부끄러운 '회전문 인사' '돌려막기 인사'는 이제 그만할 때도 됐다. 신 교수의 '70% 자리론'을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이영재 논설실장

2019-03-07 이영재

[참성단]미세먼지 소행성

"잠든 봄은 흑백으로 오고/깨어있는 봄은 총천연색으로 오리라."'봄의 예언'(강효수)이란 시의 한 구절이다. 이 시의 표현대로라면 대한민국의 봄은 잠들어 있다. 국토가 온통 잿빛이라 총천연색하고 거리가 멀기 때문이다. 이러다가 경칩(驚蟄)에 잠이 깬 개구리가 숨이 막혀 다시 땅굴로 들어가지 않을까 싶다. '나 왕년에 올챙이 적엔 이 정도까지는 아니었는데…'하면서. '미세먼지 가득한 소행성'이라는 제목으로 경인일보에 게재된 인천 송도의 모습(사진)은 이처럼 미세먼지에 갇힌 대한민국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듯하다. 사정이 이런데도 국내 미세먼지에 큰 책임이 있는 중국에 대한 정부의 대응이 영 마뜩잖다.비유를 하나 들어본다. 한 아파트에 층간소음으로 악명높은 집이 있다. 그런데 아파트 부녀회장이 그 집만 빼고 아이가 있는 집을 일일이 돌아다니며 소음을 내지 말 것을 당부한다. 중국에 대해 말 한마디 못하면서 자국민에게 차량 2부제나 독려하는 정부가 그 모양새다. '중국'을 적시하지 않고 '국외 미세먼지'라는 표현을 쓰는 것도 마찬가지다. 좀 거칠게 표현하면 살인사건 현장에 투입된 경찰이 마피아 보스의 총구에서 모락모락 연기가 나는 것은 애써 외면한 채 바닥에서 증거를 찾는 척하는 것과 비슷하다. 미세먼지의 가장 큰 주범으로는 중국 동안지역에서 발생하는 산업스모그가 꼽힌다. 이 스모그가 편서풍을 타고 한반도로 넘어오는 것이다. '스모그'를 얘기하니 그 악명높았던 '런던 스모그 사건'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1952년 12월 석탄 연소로 배출된 연기가 대기로 확산하지 못하고 지면에 정체하면서 1만2천여 명이 목숨을 잃은 환경 참사가 런던스모그 사건이다. 물론 67년 전의 런던과는 상황이 많이 다르기에 단순한 비교는 무의미할지 모른다. 그러나 '대기가 정체된 상황에서 국외에서 초미세먼지가 지속해서 유입됐고, 국내 발생 오염물질이 퍼지지 못하고 국내에 머물면서 고농도 현상이 이어졌다'는 서울시보건환경연구원의 분석에서 뭔가 교집합의 빗금이 엿보인다. 정부는 이제라도 중국이라는 문패가 달린 집의 초인종을 거세게 눌러야 한다. 이어 주인이 문을 열면 "댁에서 나는 소리 때문에 못 살겠어요!"라며 거세게 항의해야 한다. 국민의 건강과 생명을 지키는 것은 외교 보다 중요한 정부의 최우선 과제이기 때문이다. 이 대목에서 다시 '봄의 예언'의 한 구절을 인용해본다. "침묵하는 봄은 기어 오고/행동하는 봄은 뛰어 오리라." /임성훈 논설위원

2019-03-06 임성훈

[참성단]개구리도 놀랄 경칩(驚蟄)

한국인의 보양식에 대한 집착은 참 유별나다. 몸에 좋다면 물불을 가리지 않고 덤벼든다. 내 몸이 좋아진다면 남이야 뭐라 하든 말든 일단 잡아서 먹고 본다. 한때 까마귀가 정력에 좋다고 하니까 마리당 무려 30만원에 거래된 적도 있었다. 개구리는 이들의 늘 1차 표적이다.2006년 출간된 박지성 선수의 자전에세이 '멈추지 않는 도전'에 수원공고 시절 자신의 작은 키를 걱정한 아버지가 보양식으로 해 준 '개구리 즙'을 먹고 큰 효과를 봤다는 내용이 언론에 소개된 적이 있다. 보도 후 실제 전국적으로 개구리 수요가 급증하면서 전국적으로 산개구리 싹쓸이 현상마저 일어났었다. 청주지역 환경단체들이 2012년 경칩을 맞아 박 선수에게 개구리 보호활동에 동참해 달라고 요청했다. 박 선수가 개구리 보호에 나서면 개구리가 보양식이라는 그릇된 인식을 바로잡을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던 모양이다.야생 개구리 포획은 2005년 야생동식물보호법으로 엄격하게 금지돼 있다. 그런데도 줄지 않는다. 정력 부족으로 기가 약하거나 폐가 허약한 사람에게 좋다고 적시한 '동의보감' 탓도 무시할 수 없다. 얼마 전 어느 연예인이 TV에 나와 실제 효과를 봤다고 개구리 즙에 대해 장황하게 설명하는 걸 보고 깜짝 놀란 적이 있다. 터무니 없었던 '박지성 효과'가 생각 나서다.개구리 즙이 건강에 좋다는 소문으로 산개구리들이 여전히 수난을 겪고 있다고 한다. 자연산 개구리 1㎏에 10만원을 호가한다는 말도 들린다. 인터넷에서 개구리 즙 판매광고를 찾는 게 어렵지 않다. 판매업자들은 양식 개구리라고 하지만, 전문가들은 겨울잠에서 일찍 깨어나 산란하러 이동하는 산개구리들을 대량으로 포획하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의심하고 있다. 식용개구리 사육이 생각보다 쉽지 않은 탓이다. 환경 전문가들은 100년 후엔 개구리가 지구 상에서 사라질지 모른다고 우려하고 있다. 실제 개구리뿐만이 아니라 모든 양서류가 아주 빠른 속도로 감소하고 있다.오늘은 '경칩(驚蟄)'이다. 24절기 중 세 번째로, 땅속에서 동면하던 벌레가 봄기운에 놀라 나온다는 날이다. 움츠려 지냈던 겨울이 끝나고 새로운 생명력이 소생하는 절기라는 뜻으로도 읽힌다. 봄기운에 놀라 땅 위로 뛰쳐나온 개구리가 지독한 미세먼지에 '경악'하고, 인간의 학살에 또 한 번 놀라 벌벌 떠는 '경칩'이 되지 않을까 걱정이다. /이영재 논설실장

2019-03-05 이영재

[참성단]'버닝썬'과 '경찰의 자존심'

"야, 우리가 돈이 없지 가오가 없어?" 2015년 개봉한 류승완 감독의 영화 '베테랑'에서 형사 서도철(황정민 분)이 재벌 수사를 방해하는 동료 형사를 향해 거칠게 내뱉은 대사다. 한 언론사의 2018년 설문조사 결과 경찰은 최고의 영화와 명대사로 베테랑과 서도철의 대사를 꼽았다. 영화나 드라마에서 경찰은 대개 무능하고 비리에 찌든 모습으로 소비된다. 공권력을 향한 사회적 불신이 반영된 결과지만, 진짜 경찰들에겐 불편한 일이다. 베테랑의 서도철은 주눅 든 경찰들의 '가오(자존심)'를 세워준 것이다. 작명(作名) 탓인가, 클럽 '버닝썬(Burning Sun)'이 활활 타오르고 있다. 대중들은 현실판 '베테랑'으로 버닝썬 사건의 전개에 집중하고 있다. 관객들에게 재벌2세 조태오(유아인 분)가 마약, 성범죄 등 온갖 퇴폐적 일탈 행위를 벌인 베테랑의 '강남 클럽'은 감독의 상상력이 가미된 영화의 미장센에 불과했다. 하지만 버닝썬 사건으로 미장센은 현실이 됐다. '물게(외모가 출중한 여성손님)', '골뱅이(만취한 여성)', '물뽕(마약)' 등 클럽 버닝썬의 은어들은 화려한 조명의 그늘에 숨어있던 마약, 성범죄의 진한 흔적들이다.버닝썬의 불길은 경찰로 번졌다. 버닝썬의 무법적 운영의 배경에 경찰과의 유착 의혹이 있다는 의심은 이제 사실로 굳어가고 있다. 112 신고내역을 들여다 보니 버닝썬은 작년 2월 개장 이후 마약·성추행·납치감금·폭행 등 112건의 사건이 강남경찰서 역삼지구대에 신고됐다. 하지만 버닝썬은 아무일 없는 듯 영업했다. 역삼지구대는 오히려 사건의 발단이 된 버닝썬 폭행 피해 청년에게 부당한 공권력을 행사했다는 의심을 받고 있다.경찰은 4일 마약 투약 및 유통 혐의로 버닝썬 대표 등 10여명을 입건하고, 경찰 유착의혹도 수사중이라고 밝혔다. 하지만 대중의 반응은 싸늘하다. 불똥이 검경 수사권조정과 자치경찰제로 튀었다. 이런 경찰에게 수사권과 지방치안을 맡길 수 없다는 주장이 명분을 얻고 있다.영화 '베테랑'은 서도철의 수사를 방해했던 동료 경찰이 어떻게 됐는지 생략했다. 하지만 실화 '버닝썬'에선 비리 의혹 동료에 대한 경찰 수사가 초미의 관심사다. 경찰이 칼날 같은 수사로 '가오'를 세울 수 있을지, '버닝썬'의 결말에 전국민이 주목하고 있다. /윤인수 논설위원

2019-03-04 윤인수

[참성단]시인 기형도 30주기

86년 초 공적이지도 그렇다고 사적이지도 않은 자리에서 그를 처음 보았다. 함께 자리했던 내 친구이자 그의 초등학교 동창은 "저 머리 긴 애 있지. 기형도야. 너도 알지? 그 '안개'라는 시"라며 안개처럼 내 귀에 속삭였다. 기형도는 별로 말이 없었다. 그리고 시간이 한참 지난 1989년 3월, 신문지상에서 우울한 모습의 그를 다시 보았다. 종로의 한 허름한 극장. 숨이 막히는 어두운 공간에서 기형도는 잠 자듯 쓰러졌으며, 새벽 극장을 청소하는 아줌마가 이미 사늘하게 식어버린 그의 시신을 발견했고, 그의 나이가 이제 겨우 스물아홉이라는 그날의 부고만큼 슬픈 기사를 본 적이 없었다.3·1절 날 광명에 있는 '기형도 문학관'에 다녀왔다. 안양에서 광명 방향으로 안양천을 지나는데 천변 위를 올라탄 거대한 도로와 천변을 따라 이어지는 아파트 단지만 보일 뿐, 기형도의 시 '안개'에서 묘사됐던 그 슬픈 천변 풍경은 어디에도 없었다. 생전 단 한 권의 시집도 없이 유고시집 한 권만 남긴 시인치고 문학관은 알차게 꾸며져 있었다. 기형도가 중앙일보에 첫 출근하던 날 입었다는 빛바랜 양복이 특히 인상적이었다.오는 7일은 기형도 30주기 되는 날이다. 그를 기리는 행사들이 그의 고향 광명을 중심으로 펼쳐지고 있다. 그제는 그가 잠들어 있는 천주교 안성 추모공원에서 '기형도 30주기 추모제'가 열렸다. 내일 광명시민회관에서는 '정거장에서의 충고'라는 이름으로 30주기 추모 콘서트가 열린다. 매년 그랬듯 가수 장사익이 찾아와 '엄마의 걱정'을 부를 것이다. 7일에는 그의 모교 연세대학교에서 '신화에서 역사로-기형도 시의 새로운 이해'라는 학술 심포지엄도 열린다.시간이 흐르면 기억도, 첫 사랑도 모두 희미해지기 마련이다. 하지만 기형도의 열기는 식지 않고 점점 더 뜨거워지고 있다. 기형도라는 나무의 뿌리는 더욱더 견고하고 잎사귀는 이제 하늘을 가릴 만큼 풍성하다. 지칠 법도 한데 유고시집 '잎 속의 검은 입'은 스테디셀러 반열에 오른 지 오래다. 검은색은 줄기차게 내리쬐는 빛을 견디지 못해 퇴색하면서 마침내 하얀 백지가 된다. 하지만 기형도는 한 올의 흐트러짐이 없이 그 검은 빛을 30년 동안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마침내 그의 고향 광명에 아름다운 문학관이 생겨서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사람들이 꾸역꾸역 찾아오는 것을, 나는 '기적'이라고 믿는다. /이영재 논설실장

2019-03-03 이영재

[참성단]제암리 찾은 일본인 사죄단

'영문을 모르고 예배당에 모인 군중은 불안과 공포에 떨었다. …문을 밖과 안으로 잠그고 못까지 박은 후 석유를 뿌리고 불을 질렀다. 불길이 예배당을 휩싸자 그 안에 있던 사람들은 뛰어 나오려고 아비규환 생지옥을 연상케 하였다. 다행히 뛰어 나오는 사람이 있으면 밖에서 대기하던 군인이 총으로 쏘아 죽였다'. 단어 몇 개만 지우면 마치 유대인 학살의 한 장면을 보는 듯하다.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가 1972년 출간한 '독립운동사-3·1 운동사'는 100년 전 발생한 '제암리 학살사건'을 이렇게 적고 있다.제암리 학살 사건은 3·1운동과 관련된 일제의 만행 중 가장 잔인했던 일로 꼽힌다. 아리타 도시오 중위가 이끄는 일본 제78연대 소속 군인들은 1919년 4월 15일 '대한 독립 만세'를 외쳤던 제암리 주민들을 교회에 모아 놓고 불을 질러 23명을 학살했다. 이들은 인근 화수리에서도 만행을 저질렀다. 이 천인공노할 사건은 영국계 캐나다인 선교사 프랭크 스코필드와 AP통신 조선 특파원이었던 앨버트 테일러 기자에 의해 전 세계에 알려졌다. 이는 스코필드 박사가 외국인으로는 유일하게 서울 현충원 애국지사 묘역에 안장된 이유이기도 하다.제암리 학살 사건은 일본의 일부 지식인들에게도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일본 영문학자 사이토 다케시는 '어떤 살육 사건'이란 시를 통해 '돌연히 울린 총성 한 발, 두 발/ 순식간에 교회당은 시체의 사당/ 그것도 모자라 불을 들고 덮치는 자가 있었다'며 제암리 학살을 고발했다. 지식인의 자성의 소리가 높아지고 여론이 악화하자 아리타는 군법회의에 넘겨졌다. 하지만 여론을 무마하기 위한 형식적인 절차에 불과했다. 아리타는 무죄를 선고받았다.그제 일본 기독교인 17명이 제암리 교회를 찾았다. 자신들의 선조가 저지른 학살사건을 사죄하기 위해서다. 이들은 "일본의 과거 침탈을 깊이 사죄합니다. '이젠 됐어요'라고 말씀하실 때까지 계속 사죄하겠습니다"는 플래카드를 들고 교회 바닥에 엎드려 참회의 눈물을 흘렸다. 방문단 대표 오야마 레이지 목사는 "주여, 우리 일본인들을 용서해 주십시오"라고 말했다. 민간인의 이런 행동과는 상반되게 일본 정부는 사과와 반성은커녕 이미 이뤄진 과거의 사과조차 부인하고 있다. 3·1 운동과 제암리 학살사건 100주년을 맞아 지금 귀를 열고 일본인 사죄단의 목소리를 경청해야 하는 것은 바로 아베 총리일지도 모른다. /이영재 논설실장

2019-02-28 이영재

[참성단]카바티나

베트남에서 2차 북미정상회담이 열린다는 소식을 접하고 맨 처음 떠오른 영화가 있다. 베트남 전쟁이 배경인 '디어 헌터'(The Deer Hunter)다. 전쟁의 참혹함을 잘 보여주는 반전영화의 수작이다. 특히 영화제목처럼 사슴사냥을 즐기던 평범한 젊은이들이 참전 후 포로로 잡혀 목숨을 담보로 러시안 룰렛 게임을 하는 장면이 압권이다. 포탄이 떨어지고 총격전이 오가는 여느 전쟁신 보다 신랄하게 전쟁의 잔인한 실상을 보여준다. 그래서인지 개봉한지 40년이 지났지만 그 장면은 아직도 머릿속에 트라우마처럼 남아 있다. 어쩌다 영화를 다시 볼 때면 테이블 위에서 권총이 빙글빙글 돌아가는 컷에서부터 음울한 감정의 소용돌이에 빠져든다.이 영화가 기억에 남는 것은 이 장면 때문만은 아니다. 영화의 마지막을 적시는 기타 소리 또한 명장면 못지 않은 여운을 남긴다. 바로 영국의 작곡가 '스탠리 마이어스'가 만든 '카바티나'(Cavatina)로 호주의 기타리스트 '존 윌리엄스'가 연주했다.악보만 보면 4분의 3박자 단순한 아르페지오 반주에 멜로디만 얹은듯해 쉬워 보이는데 제대로 연주하기가 꽤 까다로운 곡이다. 기타 강사인 한 지인은 카바티나에 도전했다가 슬럼프에 빠져 수개월 동안 소리를 내지 않고 운지와 탄현 연습만 했다고 털어놓기도 했다. 이 때문인지 대가들의 흠 없는 연주를 듣다 보면 이 곡이 왜 클래식기타 3대 명곡 중 하나로 불리는지 이해가 간다.보는 내내 긴장과 인내를 감수해야 하는 이 영화는 어쩌면 카바티나가 흘러나오는 엔딩크레딧을 위해 달려왔는지 모른다. 영화와 별도로 곡 자체만을 볼 때 카바티나는 전쟁영화 OST로는 미스매칭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애잔하고 담담하게 흐른다.그런데 등장인물들의 행복했던 시절을 보여주면서 자막이 올라가는 영화 막바지에 이 곡의 진가가 나타난다. 등장인물들의 해맑은 표정과 '슬픈 기타 소리'라는 이 기막힌 조합은 '왜 평화가 필요한지'를 저절로 느끼게 해준다. 미국의 시각에서 본 반전영화라는 평가마저 희석시키는 명분이지 않을까 싶다. 베트남 전쟁이 끝난지 44년이 지난 지금 베트남 하노이는 평화를 이야기하는 '핫 플레이스'가 됐다. 그동안 핵단추 운운하며 지구촌 관객들에게 긴장과 인내를 요구했던 두 정상이 베트남에서 반전영화 보다 더한 평화의 메시지를 전해주기를 기대해 본다. /임성훈 논설위원

2019-02-27 임성훈

[참성단]하노이

1969년 9월 지팡이 하나, 옷 두 벌, 책 몇 권을 유품으로 남기고 떠난 호찌민의 유언은 이랬다. "내가 죽으면 웅장한 장례식으로 인민의 돈과 시간을 낭비하지 마라. 무덤에는 비석도 동상도 세우지 마라. 소박하고 넓고 튼튼하고 통풍되는 집을 세워 방문객들이 쉬어가게 하라. 방문객이 추모의 뜻으로 한두 그루 나무를 심게 하라." 하지만 당시 권력자 레주언은 호찌민의 유언을 무시했다. 하노이 바딘광장에 영묘(靈廟)를 조성하고 그의 시신을 미라로 만들어 영구보존했다. 권력의 심장부 하노이에 호찌민을 두고 그의 영향력을 정치에 이용하고 싶었기 때문이다.월남전이 한참이던 1972년 7월, 미국 유명배우 헨리 폰다의 딸인 배우 제인 폰다가 하노이를 방문했다. 반전 운동가 제인은 월맹군 병사들에게 둘러싸인 채 북베트남 대공포에 앉아 사진을 찍었다. 북베트남은 "이게 웬 떡이냐"라면서 이 사진을 반전(反戰) 홍보용으로 대대적으로 이용했다. 하지만 사진을 본 미국은 벌집을 쑤셔 놓은 듯 시끄러웠다. 이적행위라는 비난도 일었다. 미국 언론은 그녀에게 '하노이 제인'이라는 별명을 붙여줬다. 훗날 제인은 "참전 군인에게 상처를 주었다"며 자신의 경솔한 행동에 대해 반성했다.제인이 하노이를 방문하던 그해, 미군은 12월 18일부터 11일 동안 하노이에 훗날 역사가들이 '크리스마스 대 폭격'으로 기록한 대대적인 공습을 감행했다. 이에 견디지 못한 북베트남은 협상장에 나와 미국과 1973년 1월 27일 파리협정을 체결했다. 협정에 따라 미군은 철수했지만, 1975년 4월 30일 남베트남은 패망했다. 훗날 티우 대통령은 이렇게 말했다. "키신저는 우리도 모르게 공산주의자들과 협상했다. 미국은 국내 문제 해결을 위해 베트남을 버리려고 한 것이다. 이것은 현실정치에서 일어나는 실수가 아니라, 미국이 고의적으로 옳지 못한 정책을 선택한 결과였다." 티우는 남베트남이 '버리는 패'였다는 걸 전혀 모르고 있었다.하노이는 1958년과 1964년 김일성이 호찌민과 두 번 회담한 곳이기도 하다. 이런 역사의 현장에서 오늘 내일 이틀간 북·미 정상회담이 열린다. 회담 성공을 기원하는 50만 개의 꽃과 나무, 4천개의 꽃바구니로 지금 하노이가 꽃의 도시로 변했다고 한다. 회담 후 '하노이 선언'이 발표될 것이다. 그저 그랬던 '센토사 선언'보다 우리가 더 납득할 수 있는 비핵화가 담긴 선언이 나오길 바랄 뿐이다. /이영재 논설실장

2019-02-26 이영재

[참성단]국무(國巫) 김금화

1982년 한미수교 100주년을 기념해 한국 정부가 미국에 파견한 문화사절단엔 만신(萬神·큰 무당) 김금화도 포함됐다. 공연 첫날 무대에 오르려는 김금화의 옷차림을 보고 주미 영사관 사람들이 "나라 망신 시킬 일 있느냐. 무슨 굿이냐. 당장 데리고 나가라"고 난리를 쳤다. 그녀를 데리고 간 고(故) 조자용 에밀레박물관장이 아랑곳 않고 그녀를 무대로 떠밀었다. 신명나게 굿거리를 펼치고 죽기살기로 작두를 탔다. 이번엔 미국 관객들이 춤추고 난리가 났다. 나라 만신, '국무(國巫) 김금화'가 탄생한 순간이었다.이후 김금화는 독일, 프랑스, 러시아 등 유럽에 대동굿과 진혼제를 선보였고, 2005년 교황 요한 바오로2세가 선종 직후엔 로마대학 앞에서 굿판을 벌이기도 했다. 백남준, 김대중 전 대통령 진혼제와 세월호 희생자 추모위령제도 주재했다. 2007년 사도세자 서거 245주년을 맞아 화성행궁 앞에서 펼친 진혼제에서는 사도세자와 접신해 "목말라. 목말라"라고 울부짖어 관객들의 마음을 찢어놓기도 했다. 김금화는 오방색의 마술사 내고 박생광의 무녀도 시리즈의 모델이기도 했다. 2004년 용인 이영미술관에서 열린 박생광 탄생 100주년 특별전에서 진혼굿을 벌인 뒤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미국 공연 후 1985년 '서해안 배연신 굿 및 대동굿'으로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됐지만, 그 이전의 세월은 그녀의 말(경인일보 2005년 10월 25일) 처럼 "무당이라는 사실 하나만으로 험난했던 인생"이었다. 11살부터 무병을 앓다 14살에 시집에서 도망치고, 17살에 만신이던 외할머니 김천일에게 내림굿을 받아 19살부터 마을 대동굿을 주재했다. 무속을 미신으로 경멸하던 시류 때문에 동란 때는 좌익과 우익의 위협을 받았다. 1·4후퇴 때 고향인 황해도 연백을 떠나 인천 만석동에 자리잡았지만 새마을운동 시절의 사회적 멸시도 만만치 않았다.서해 어민들의 풍어를 빌어주고, 지역사회의 대동평안을 기원하고, 국태민안을 염원하던 국무이자, 굿을 자랑스러운 문화유산으로 확장시킨 예인 김금화가 지난 23일 세상 옷을 벗어던지고 영면에 들었다. 이제 혼이나마 황해도 연백 고향 하늘을 날고 있으려나. 마침 미북회담이 곧 열린다. 한반도 운명에 볕이 들도록 나라 만신 김금화의 천상 굿판을 청하면 무리일까. /윤인수 논설위원

2019-02-25 윤인수

[참성단]변화하는 아카데미 상

아카데미상을 왜 오스카(OSCAR)상이라고 부르는지 정확히 알려진 게 없다. 아카데미 상 트로피가 여배우 베티 데이비스 첫 남편 오스카 넬슨을 닮았기 때문이라는 설도 있고, 아카데미상을 주관하는 영화예술과학 아카데미(AMPAS)의 도서관 직원이던 마거릿 헤릭 여사의 삼촌 오스카를 닮았다는 데서 유래됐다는 설도 있지만, 근거는 희박하다. 그러나 1934년 6회 아카데미 상에서 캐서린 헵번의 여우주연상 수상 글을 쓴 칼럼니스트 시드니 스콜스키가 처음으로 '오스카'를 거론한 것은 분명하다.아카데미상은 '백조의 잔치'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백인 우월주의에 편향됐다는 지적이 끊이질 않았다. 이는 1929년 1회 수상식이 시작된 이래 수여한 2천900여 개의 오스카 트로피 중 흑인의 품에 안긴 건 고작 32번에 불과했다는 데서 여실히 증명된다. 놀랍게도 흑진주 할리 벨리가 '몬스터 볼'로 첫 흑인 여우주연상 수상자가 된 게 그리 멀지 않은 2002년이었다. 심지어 2015년 시상식에는 남녀 주·조연상 후보 20명이 모두 백인으로 채워져 SNS에는 '오스카는 너무 하얗다' (#Oscars So White)라는 해시태그로 물드는 수모를 겪기도 했다.하지만 이제 더 이상의 '하얀 오스카'는 없을 것 같다. 오늘 할리우드 돌비극장에서 열리는 제91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선 전혀 다른 모습이 연출될 게 분명해서다. 우선 그동안 영화업계와 큰 갈등을 빚어온 넷플릭스에게 문호가 개방된 것은 큰 변화다. 멕시코 감독 알폰소 쿠아론 감독이 자국 출신 배우들과 자국 언어로 촬영한 넷플릭스 영화 '로마'가 작품상· 감독상 등 10개 부문에 지명됐다. 흑인 히어로 영화 '블랙 팬서'가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 최초로 작품상 후보를 비롯 7개 부문에 오른 것도 놀랍다. 특히 이 영화는 출연진 90%가 흑인이다. 모두 아카데미가 시대적 변화에 대한 요구를 적극 수용한 결과다. 격세지감이 아닐 수 없다.이번 아카데미 상만큼 말이 많은 적도 없다. 우선 1989년 제61회 이후 30년 만에 처음으로 공식 사회자 없이 진행된다. 사회자로 낙점됐던 코미디언 케빈 하트가 과거 성 소수자 폄하 발언이 뒤늦게 밝혀지면서 자진 하차하자 아카데미는 "사회자 없는 시상식"을 선언했다. 상업성 때문에 비판을 받지만 아카데미상에 화제가 이렇게 풍성한 것은 명실상부한 세계 최대이자 최고의 영화제이기 때문이다. /이영재 논설실장

2019-02-24 이영재

[참성단]육체노동 가동연한

'가동연한(稼動年限)'은 교통사고·산업재해 등 사고로 사망 또는 장애를 입었을 때 손해배상액 산정의 기준이 된다. 통상 해당 직종의 정년을 가동연한으로 보는 게 일반적이다. 정년이 없으면 동종업계 종사자의 나이를 기준으로 삼는다. 가동연한은 법으로 정해져 있지 않아 대부분 판례에 따르는 경우가 많다. 이에 따르면 변호사와 법무사, 승려가 70세로 가동연한이 가장 길다. 의사와 한의사, 화가, 목사 등은 65세, 육체 노동자 등 대부분 업종은 60세를 정년으로 한다. 일반 술집 마담, 나이트클럽 웨이터, 잠수부 등은 50세, 프로야구 선수와 에어로빅 강사, 룸살롱 마담은 40세, 다방 여종업원과 골프장 캐디는 35세를 정년으로 본다.대법원이 노동자 가동연한을 60세가 아닌 65세로 봐야 한다고 판결했다. 1989년 가동연한을 55세에서 60세로 상향한 지 30년 만에 다시 한 번 대법원 판례가 바뀐 것이다. 대법원은 "1989년 전원합의 판결 이후 가동연한이 만 60세로 됐지만, 그동안 평균 수명이 늘었고 경제 규모도 4배 이상 커졌다"며 "제반 사정이 현저하게 바뀌었기 때문에 이제는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가동연한을 만 60세가 아닌 65세로 보는 게 합당하다"고 밝혔다.평균수명이 늘고 노인 취업인구가 증가하고 있는 지금, 육체노동을 주로 하는 직업의 가동연한을 늘린 것은 너무도 당연한 판결이다. 이번 가동연한 연장으로 우리 사회는 큰 변화가 올 것이다. 손해배상액 산정은 물론 보험, 연금과 법정 정년 등을 판단하는 데도 영향을 끼칠 것이 분명하다. 가동연한 상향에 따라 현행 정년 '만 60세 이상', 노인 '만 65세 이상'이라는 기준 변경 등 기존에 지속해서 제기돼 온 이슈에 대한 논의도 활발해질 것이다. 문제도 있다. 가동연한 상향으로 정년이 65세로, 노인기준이 70세로 늘어날 경우 '노인'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그간 누렸던 기득권을 모두 포기해야 한다. 물론 연금 수령 시기도 늦춰질 것이다. 하지만 우리나라 노인의 절반이 빈곤층이란 점이 큰 골칫거리다. 은퇴 후에도 생계를 위해 일자리를 찾아 헤매야 한다. 나이 들어서도 일할 수 있다는 건 행복이지만 그것도 건강이 전제되어야 한다. 아픈데 일해야만 하는 삶이 행복할 수는 없다. 평생을 일해야 한다고 생각하니 벌써 슬퍼진다. /이영재 논설실장

2019-02-21 이영재

[참성단]짝퉁 명사수

미국 서부개척시대, 텍사스의 한 마을에 혜성과 같이 등장한 총잡이가 일정한 거리를 두고 벽과 마주하고 섰다. 이어 총을 꺼내더니 벽을 향해 마구 총을 쏴댄다. 이내 벽은 온통 탄환 자국 투성이이다. 수백 발의 탄환을 소진하고 나서 총잡이는 벽을 살펴본다. 자신의 사격 실력이 형편없음을 느꼈는지 실망한 표정이 역력하다. 잠시 생각에 잠긴 총잡이는 곧바로 창고에서 페인트와 붓을 가져오더니 탄환 자국이 가장 많이 모여있는 곳에 과녁을 그린다. 그제서야 그의 입꼬리가 올라간다. 잠시 후 동료 총잡이들이 나타나 벽을 보며 감탄사를 연발한다. "명사수네!"통계학과 심리학에서 자주 쓰이는 용어인 '텍사스 명사수의 오류'를 약간 각색해 보았다. 텍사스 명사수의 오류는 '허위 상관관계'를 잘 설명해준다. 무수히 많은 차이점을 무시하고 몇몇 우연의 일치에 주목하는 '링컨과 케네디의 평행이론'도 '텍사스 명사수의 오류'다.대한민국에도 지만원이라는 희대의 명사수가 나타났다. 그는 5·18민주화운동이라는 숭고한 벽에 흠집을 내기 위해 총을 난사했다. 그런데 별 소득이 없었다. 기껏 찾아낸 게 '광수'라는 탄착군이다. 그는 탄착군 안에 있는 탄환 자국마다 '광수1호', '광수2호'식으로 번호를 매겼다. 600호까지 일련번호를 매긴 후에는 붉은색으로 과녁을 그렸다. 과녁에 '광주에 온 북한특수군'이라는 설명까지 덧붙이니 그럴싸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다른 사람들이 확인해보니 제대로 된 탄환 자국이 아니다. 단지 비슷하게 생겼을 뿐이다. '총알자국이 아니라 핏물, 눈물자국'이라며 울분을 토하는 이들도 나타났다. 급기야 허위 과녁임을 알리기 위한 토론회까지 열린단다. 결국 사격 실력을 인정받아 서부 활극의 주인공이 되고자 했던 '짝퉁 명사수'는 꿈을 접어야 할 처지에 놓였다. 그래도 그는 낙심하지 않는다. 그의 허접한 사격 실력을 모르는지, 아니면 알면서도 모른척하는지는 모르지만 3명의 든든한 동료가 있기 때문이다. 그것도 활동무대가 국회이니 보통 동료가 아니다. 그 중 한 명인 김진태 의원은 카우보이 모자를 쓰고 다니며 진한 동료애(?)를 과시중이다. 지만원씨의 우상이 '황야의 무법자'의 주인공 '클린트 이스트우드'라고 한다. 영화 속 주인공이 자기 신념과 소신에 따라 사는 영원한 자유인이기 때문이란다. 그래서 그렇게 총을 쏴대는 걸까? 실탄인지, BB탄인지 구분도 못하면서…. /임성훈 논설위원

2019-02-20 임성훈
1 2 3 4 5 6 7 8 9 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