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성단

 

[참성단]플라스틱 바다

"인천 앞바다에 사이다가 둥둥, 고뿌(컵) 없으면 못 마십니다." 1960년대 코미디언 서영춘이 불러 히트시킨 음료 광고 '사이다 송'이다. 이 노래에 인천이 등장하는 것은 이곳이 사이다의 발원지였기 때문이다. 1905년 일본인 히라야마 마쓰다로는 인천 신흥동에 '인천 탄산제조소'라는 사이다 공장을 세웠다. 인기가 좋아 1929년엔 하루에 4천500상자를 생산했다고 한다. 60년대 어린시절을 보낸 이들 중엔 인천 바다가 아예 사이다 물이라고 믿은 사람도 많았다. 그랬던 인천 앞바다에는 이제 사이다 대신 페트병이 둥둥 떠다닌다.지난 3월 영국 멘체스터 대학 연구진은 경기·인천 해안이 전 세계에서 미세 플라스틱에 가장 오염된 지역 2위라는 충격적인 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3위는 낙동강 하구였다. 전 세계적으로 ㎡당 평균 미세플라스틱 개수가 1만~10만 개인 곳은 우리나라 두 곳과 영국 머지 강과 어웰 강, 미국 세인트로렌스 강뿐이다. 이뿐만이 아니다. 최근 한국해양과학기술원이 식품의약품안전처에 제출한 보고서에 따르면 국내 시판 중인 굴과 바지락 등 조개류 4종류에서 미세 플라스틱이 검출됐다.미세 플라스틱은 페트병의 마모로 생기는 지름 5㎜ 이하의 작은 입자들이다. 현재 전 세계 바다에는 이런 자연 분해되지 않는 미세 플라스틱 입자 51조 개가 떠다닌다고 한다. 이를 플랑크톤이, 또 그것을 물고기와 같은 상위 포식자가 섭취하고 마지막으로 우리의 식탁 위에 오른다. 전문가들은 매년 평균 800만t의 플라스틱이 바다로 흘러들어 가는 것으로 추산하고 있다. 이는 바다의 최상위 포식자인 참치의 연간 어획량과 맞먹는다.2050년이면 바다 속 물고기보다 플라스틱 수가 더 많아 '플라스틱 바다'가 된다고 한다. 60여 년 전 값싸고 내구성이 좋아 가히 '혁명'이라 했던 플라스틱이 지구의 종말을 앞당길 것이란 예측도 있다. 인천시는 인천 앞바다 폐기물 수거에 매년 80억원을 쏟아붓는다. 바다를 살리지 않으면 우리에겐 미래도 없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전 세계 플라스틱 사용량 1위 국가다. 오는 31일은 '바다의 날'. 경인일보 인천본사가 경각심을 높이기 위해 '해양 쓰레기'를 줄입시다'라는 기획시리즈를 시작했다. 바다를 살리는 길은 한가지 밖에 없다. 플라스틱 소비를 줄이는 것. 그것만이 우리가 살길이다. /이영재 논설실장

2018-05-15 이영재

[참성단]사제(師弟)가 직무관계?

공자의 제자 중에 학문과 덕행이 유별났던 10명의 제자가 있으니 십철(十哲)이다. 안연, 민자건, 염백우, 중궁, 재아, 자공, 염유, 자로, 자유, 자하 등이다. 십철 중에서도 공자는 자신의 학문과 덕행을 후세에 온전히 전달할 제자로 안연을 꼽으며 가장 아꼈다. 그 안연이 요절하자 "하늘이 나를 버린다"며 통곡했다. 시정잡배였던 자로는 공자의 교육과 추천을 통해 뛰어난 정치가로 환골탈태했다.유교적 이상국가를 실현하려던 유세정치에는 실패한 공자였지만 제자복 만큼은 차고 넘쳤고, 십철을 비롯한 제자들 덕분에 유교는 동양사상의 대표 사상이 됐다. 석가모니에게도 석가십성(釋迦十聖)이라는 열명의 훌륭한 제자들이 있어 불법이 세상에 퍼질 수 있었다. 예수의 열두제자가 전파한 기독교가 서구역사에 끼친 영향은 일설로 형언이 불가능하고.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의 한 장면. 입시사관학교 웰튼에 갓 부임한 영어교사 존 키팅은 책상위에 올라서 제자들을 굽어보며 말한다. "내가 왜 이 위에 섰는지 알고 있나? 사물을 또 다른 각도로 보려고 해서다. 무언가를 안다고 했을 때 그것을 다른 눈으로 봐야한다. 틀리고 바보같지만 시도를 해봐야 된다." 세상을 바라보는 다양한 시선을 일깨워주는 스승의 역할을 보여주는 명장면이다. 진학보다 인생을 가르친 죄로 학교에서 쫓겨나는 그를 향해, 제자들은 '마이 캡틴'이라 부르며 책상을 밟고 올라선다. 키팅은 교단을 잃고 제자를 얻었지만, 학교는 교사도 학생도 다 잃은 셈이다.오늘은 '스승의 날'이지만, 최근 며칠 사이 '김영란법(청탁금지법)' 논란으로 빛이 바랜 느낌이다. 선생님에게 카네이션 한송이 달아줄 수 없다는 법적 금제의 타당성을 따지다 보니, 자존심이 구차해진 선생님 1만여명은 아예 스승의 날을 폐지하자는 청원을 청와대에 올렸을 정도다. 국민권익위원회는 단호하다. 학부모와 교사, 학생과 교사는 성적, 수행평가 등 '직무연관성'이 있어 한송이 꽃 선물도 불가하단다.권익위의 김영란법 해석은 인성교육 대신 진학지도라는 직무만 남은 학교 현실을 국가 스스로 인정한 듯해 서글프다. 사제간의 인간적 소통을 통한 인성교육은 건강한 사회를 위해 국가가 장려해야 할 미풍양속이다. 김영란법이 공직자의 직무를 아무리 깨끗하게 관리해도 사람을 놓쳐서는 본말전도의 결과에 직면할 것이다. 최소한 사제간에 꽃 한송이 흘러다닐 정도의 숨통은 틔워줘야 마땅하다. /윤인수 논설위원

2018-05-14 윤인수

[참성단]여·야 당 대표들의 막말

요즘 드라마 '나의 아저씨'를 재밌게 보고 있다. 경계 없는 인간적 연대(連帶)가 만들어 가는 소소한 이야기들이 마음에 와 닿는다. 상처받은 사람에게 던지는 말 한마디가 때론 얼마나 큰 위로가 되는지 드라마는 보여준다. 최근 방영분에 명문대학을 졸업하고 돌연 귀의(歸依)한 겸덕이 옛 여자가 찾아오자 반조(返照)를 위해 면벽 묵언(默言) 수행 하는 장면이 인상적이었다.반조는 몸(身)으로 입(口)으로 생각(意)으로 짓는 업(業)을 돌이켜 보는 불교 수행의 첫걸음이다. 이를 위해 면벽 묵언 수행만큼 좋은 게 없다. 달마대사가 묵언 정진의 면벽 좌선을 9년 하고 깨달음을 얻었다는 데서 '면벽구년(面壁九年)'이란 말도 나왔다. 하지 말아야 할 말을 하는 것은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은 마음 때문이라고 불교는 가르친다. 가벼운 입 놀림으로 인한 낭패의 사례로 늘 등장하는 게 콘드라티 릴레예프다. 그는 1825년 12월 14일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1세의 즉위 날 벌였던 '데카브리스트의 반란의 밤' 주동자였다. 사형 언도를 받고 동료들과 함께 사형대에 목이 매였으나 운이 좋았던지 줄이 끊어져 혼자만 살았다. 당시 러시아에서는 교수형 집행 과정에서 살아난 사람은 '하늘의 뜻'이라며 살려주는 게 관례였다. 하지만 그는 "러시아는 제대로 할 수 있는 게 하나도 없다. 밧줄 하나 제대로 못 만든다"고 조롱했다가 진짜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입을 다물었다면 살아남아 후에 더 큰 일을 도모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남북 정상회담과 관련해 홍준표 한국당 대표의 막말이 눈살을 찌푸리게 하더니, 이제 추미애 민주당 대표도 질세라 막말에 가세했다. '드루킹 특검'을 요구하며 단식 농성을 한 김성태 원내대표를 겨냥해 "깜도 안 되는 특검을 들어줬더니 도로 누웠다"며 "한국당은 빨간 옷을 입은 청개구리당"이라고 조롱했다. 이에 김 원내대표는 "뚫어진 입이라고 막하지 말라"고 받아쳤다. 설화(舌禍)로 그토록 고생 하고도 고쳐지지 않는 게 정치인들의 막말이다. 잊혀지는 것보다 막말이라도 해 존재를 과시하고 싶은 게 정치인들의 속성인 모양이다. 그러나 집권당과 제1야당 대표가 시정잡배같이 내뱉는 막말은 국민을 절망에 빠뜨린다. '부처님 오신날'을 맞아 국회의 벽 앞에 앉혀 놓고 면벽 묵언 수행이라도 시켜야 할 판이다. "이제 그 입 좀 다물라!"는 국민의 질타를 제발 귀담아 듣길 바란다. /이영재 논설실장

2018-05-13 이영재

[참성단]대통령 지지율

정치인들에게 지지율은 계륵(鷄肋)같은 존재다. 조사 방법에 의구심을 표하면서도 결과에 일희일비한다. 입으로는 "지지율은 바람불면 '훅' 날아가는 새털같은 것"이라고 하지만 속내는 그렇지 않다. 정치인들이란 늘 그렇다. 1981년 존 힝클리가 쏜 총에 맞고 병원에 실려가면서 "예전처럼 영화배우였다면 잘 피할 수 있었을 텐데…"라던 레이건 대통령은 절체절명의 순간에 던진 이 유머로 지지율이 83%까지 치솟았다. 이듬해 지지율이 30%대로 폭락하자 걱정하는 참모들에게 "다시 한번 총 맞으면 된다"며 유머로 넘겼지만 속은 매우 쓰렸을 것이다. 그는 배우가 아닌 정치인이기 때문이다.대통령에게 지지율은 민심의 거울이다. 지지율이 떨어지면 동력 상실로 국정을 제대로 수행할 수 없다. 취임하던 해 광우병 사태를 겪으며 지지율 직격탄을 맞았던 이명박 정부가 그런 경우다. 지지율 추락으로 국정은 만신창이가 됐다.과거나 지금이나 여론조사에서 적절한 표본 선정은 큰 난제다. 조사기법의 발전에도 불구하고 표본 선정의 오류는 여론 조사의 왜곡을 부른다. 정치의 무관심으로 인한 낮은 응답률도 조사의 신뢰성을 떨어뜨리는 또 다른 요인이다. 특정 지역과 계층, 세대 그리고 질문 내용과 시기, 방식까지 꼼꼼히 따져보면, 과연 여론조사로 민심을 완벽하게 들여다볼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이 드는 경우도 많다.지난 4일 한국갤럽이 조사한 문재인 대통령의 직무수행 지지율이 83%로 역대 대통령 취임 1년 지지율 최고를 나타냈다. 8·9일 이틀간 리얼미터가 실시한 조사에서도 76.1%의 높은 지지율을 기록했다. '남북관계 복원'으로 큰 점수를 받았다. 문 대통령은 1년 내내 70%대의 높은 지지율을 보여왔다. 적폐청산 등 주요 정책들을 강력하게 밀어붙일 수 있었던 것도 지지율에 힘입은 바 크다.문재인 정부는 연인원 1천600만명이 참가한 '촛불'이 탄생시킨 정부다. 그러니 여론에 더 신경을 쓸 수밖에 없다. 하지만 지지율에 너무 집착하면 '여론조사 정치'라는 함정에 빠진다. 반드시 챙겨야 할 중요한 과제를 잊어버리는 우를 범할 수도 있다. 여론조사는 '하나의 수치'로 참고 지표일 뿐, 정책의 절대적 결정 수단은 아니다. 여론조사 결과가 때론 왜곡을 낳을 수 있다는 것을 취임 1년을 맞은 문대통령은 꼭 기억하길 바란다. /이영재 논설실장

2018-05-10 이영재

[참성단]지방선거 유감

6·13지방선거 운동장의 기울기가 심각하다. 수평회복의 조짐은 안보인다. 현장기자들의 전언을 종합하면 여당인 기호1번 후보들은 넘치는데 기호2번 이하 야당은 출마후보 찾기조차 힘들다고 한다. 여당 쪽에 기운 판세가 워낙 뚜렷해서다. 그 탓인가. 여당은 공천후유증으로 몸살을 앓는 중이고 야당은 인물난에 기진맥진이다. 차기 지방자치를 걱정하는 소리도 높다. 여당 일각의 무리한 공천과 야당의 후보난으로 검증그물이 뚫리면서 부적격 인사들이 대거 지방정가로 유입될까봐 그렇다.여당이 압도하는 6·13지방선거 분위기는 아무래도 문재인 대통령의 후광과 더불어민주당의 프리미엄 덕이 크다. 문 대통령 국정지지율은 남북정상회담 이후 80%안팎이고, 여당인 민주당의 지지율도 보수야당의 두배 이상을 유지한지 오래다. 생활자치 이슈는 중앙의 정치지형과 거대담론에 가려졌다. 드루킹 고행중인 김경수 경남지사후보, 혜경궁김씨 논란의 이재명 경기도지사후보가 자유한국당 김태호, 남경필 후보를 전례없는 고공지지율로 압도하는 이유다.3선에 도전하는 전경숙 의왕시의원 예비후보가 경선을 통해 획득한 '1(정당기호)-가(후보기호)'번을 초선 도전에 나선 후배 여성후보에게 양보한 미담이 화제다. 한선거구에서 2~4명의 의원을 선출하는 기초의원선거는 모든 정당 후보들이 '가'번호를 두고 치열하게 경쟁한다. 정당기호에 집착하는 유권자 성향상 '가'번은 정당의 대표 후보라는 각인효과로 득표에 훨씬 유리하다. 각 정당의 '가'후보의 당선율이 '나'후보에 비해 월등한 건 통계로도 확인된다. 전 의원 미담의 이면엔 생활자치의 모세혈관인 기초의회마저 정당기호(공천)에 종속돼 중앙정치의 세포구조가 된 현실이 숨어있다.전북 장수군수 김창수 무소속 예비후보가 9일 "중앙정치 선거 결과인 국회의석 수에 따라 지방선거 후보의 기호를 정하는 것은 헌법상 보장된 지방자치제도에 반한다"며 제기한 헌법소원도 곱씹어볼 만한 의제다. 총인구 2만4천여명의 장수군과 같은 초미니 기초단체장 선거를 굳이 정당구조에 종속시킬 필요가 있나 의문이라서다. 최소한 기초의원 만큼은 정당공천제를 폐지하자는 주장이 많았다. 생활자치의 모세혈관인 기초의회마저 정쟁의 도구가 돼 공동체를 양분할 필요가 있느냐는 경험적 자성 때문이다. 문재인 정부가 지방자치 적폐 해소 차원에서 지방선거 정당공천제의 범위를 재설정해보길 권한다. 힘 있을 때 할 수 있는 일 아닌가. /윤인수 논설위원

2018-05-09 윤인수

[참성단]신발 디저트

문화인류학의 거두 레비 스트로스는 어릴적부터 고전 음악을 곁에 두고 살만큼 음악애호가였다. 특히 바그너의 오페라를 즐겼다. '슬픈 열대'와 함께 기념비적 저작으로 꼽히는 '신화학(전 4권)' 시리즈 제1권 '날 것과 익힌 것'에서 그는 음식 문화를 음악과 비교했다. 오페라나 연극이 공연되기 전에 막이 내려진 채 오케스트라가 연주하는 서곡(overture)은 풀코스 요리의 수프·채소와 같은 전채요리에 해당하고 교향곡은 스테이크와 같은 메인 요리, 앙코르 곡은 커피나 과일 같은 디저트에 비유했다. 그는 음악이나 음식이나 사람이 재료를 다루는 능력, 비법 그리고 문화에 따라 그 맛과 멋이 다르다고 주장했다. 실제 남아메리카 밀림 속에 사는 부족들이 살아있는 엄지 크기의 애벌레를 맛있게 먹으며 자신에게 권했을 때, 그들의 문화라고 생각하니 먹을 만했다고 술회했다. 국가 정상들 간의 만남에서 만찬장 식탁에 오르는 음식과 술이 언론에 필요 이상으로 세세하게 소개되곤 한다. 영국의 가디언지가 이번 판문점 만찬에 나온 냉면을 두고 "평화의 상징은 이제 비둘기가 아니라 평양냉면"이라고 전 세계에 타전했듯이 만찬장에서 정상들이 나누는 말과 행동 못지않게 그들이 어떤 음식, 어떤 술을 먹고 마시는가는 세인들의 관심사다. 국제회의나 정상들의 만찬장에 오르는 음식들은 대체로 주최 국가의 음식문화를 대표하는 경우가 많다. 음식을 만든 조리사가 누군지도 관심의 대상이다. 건배용 술의 종류와 상표, 생산연도를 식단에 자세하게 표기하는 것은 이제 국제적 관례다. 보통 정상들 만찬의 경우 6~7코스가 기본이다. 아페리티프 와인에서 시작해 입맛을 돋우는 오르되브르-수프-생선요리-육류요리-샐러드-치즈와 디저트로 이어진다. 일본 아베 총리 부부와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 부부의 만찬에서 검은 신발에 담긴 초콜릿이 디저트로 나왔다고 해서 외교 결례 논란이 일고 있다. 우리도 그렇지만 동양권에서 신발을 밥상에 올리는 것은 큰 결례다. 용기로 사용한 신사화는 세계적인 예술가 톰 딕슨의 작품이고, 요리사는 그 유명한 세게브 모셰였다. 이스라엘 언론은 이례적으로 "이는 유대인에게 돼지 모양의 접시에 초콜릿을 담아 대접한 격"이라고 자국을 비판했다. 하지만 이스라엘 문화를 인정해서인지, 싫은소리 하지않는 일본인의 성격때문인지, 정작 일본정부와 언론은 아무런 말이 없다. /이영재 논설실장

2018-05-08 이영재

[참성단]2018 어버이날 유감

유교의 나라 조선에서 유독 간행이 잦았던 불경이 '불설대보부모은중경(佛說大報父母恩重經)'인데 간략하게 부모은중경으로 일컫는다. 부모의 은혜를 강조한 경전 내용이 효를 근본으로 하는 유교와 상충하지 않았던 덕이다. 경에 따르면 어머니는 3말8되의 응혈(凝血)을 흘려 자식을 낳아, 8섬4말의 혈유(血乳)를 먹여 기른다 했다. 그러니 자식이 아버지는 왼쪽 어깨에, 어머니는 오른쪽 어깨에 업고서 수미산을 백천번 돌더라도 그 은혜 다 갚기는 어렵다. 효경(孝經)은 공자와 제자 증삼의 문답 중 효도에 관한 것을 간추린 효 실천서로, 효에 기반한 충을 통치사상으로 떠받든 조선의 경국교과서였다.가부장제를 바탕으로 한 전제정치의 사상적 도구로서 효경의 효의 용도는 시대착오적이다. 자녀인 인민이 어머니인 당과 아버지인 수령에 효성과 충성으로 받드는 거대한 가정이라는 북한의 사회주의 대가정론이 대표적이다. 통치규범으로서 효는 너무 낡아 수용하기 힘든 세상이 됐다. 반면 부모은중경이 강조한 효의 의미는 인간적 규범으로 여전히 유효하다. 낳아주고 길러 준 부모를 향한 본능적 도리로서 '효'는 시대를 초월한 아름다운 가치이다.그런데 인간적 규범으로서의 효마저 흔들리는 패륜범죄가 급증하고 있다니 큰일이다. 7일 보건복지부에 따르면 2016년 한해, 사법기관은 1만2천9건의 노인학대 신고를 받아 이중 4천280건을 학대로 판정했다. 전년 보다 12.1% 늘어난 수치란다. 가해자 10명 중 4명이 아들이고, 직계가족을 비롯한 친척과 친족이 전체 가해자의 75.5%에 달한다. 경찰청이 홍철호 국회의원에 보낸 자료는 더 심각하다. 살인을 제외하고 부모를 해치는 패륜범죄가 2012년 956건에서 5년만인 2017년엔 1천962건으로 배가 늘었다니 말이다. 최근 4년간 해마다 47~60명의 부모가 자녀에 의해 목숨을 잃었다.패륜범죄의 상당수가 부모와 독립하지 못한 자녀간의 경제적 갈등 탓이라는 전문가의 분석이 옳다면, 전례없는 취업난 속에 패륜범도 계속 늘어날 가능성이 높다. 문재인 대통령은 내년에 어버이날을 공휴일로 지정하려는 모양이고, 공휴일 지정을 압도적으로 지지하는 여론조사 결과도 나왔다. 그러나 청년들에게 일자리를 찾아주어 경제적으로 독립시켜 주는 일이, 이 시대 어버이를 위해 정부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복지 아닐까 싶다. /윤인수 논설위원

2018-05-07 윤인수

[참성단]힘내라! 동네서점

'동네서점에서만 파는 책'이란 게 있다. 제법 책을 읽었다고 자부하는 독자도 온라인 서점만 이용했다면 생소하게 들릴 것이다. 이 책은 대형서점이나 온라인서점에서는 판매하지 않는다. 구매하고 싶다면 동네서점을 찾아가야 한다. 출판사 문학동네가 최근 '2010~2017 젊은 작가상 수상작품집 동네서점 베스트 컬렉션'을 출간했는데 제법 인기가 높다. 책도 책이지만, 숨 막히기 일보 직전인 동네서점을 살려야 한다는 출판사의 기획 의도가 신선하다.발상도 기발하다. 문학동네가 매년 출간하는 '젊은 작가상 수상작품집' 중에서 동네서점 주인들이 추천한 작품 가운데 가장 많은 표를 얻은 7편을 한데 묶었다. 마케팅도 눈에 띈다. 궁금증 유발을 위해 비닐 포장을 뜯지 않으면 내용을 알 수 없게 제작했다. 물론 가격도 저렴하다. 민음사가 지난해 선보인 '쏜살문고 × 동네서점 에디션'도 오직 동네 서점을 위한 기획 상품이다. 이 책은 동네서점 '51페이지'라는 곳에서 출간을 제의했다. 입으로는 동네 서점을 살려야 한다면서도 온라인서점과 대형서점 중심으로 마케팅에 전념하던 대형 출판사의 뼈아픈 자성(自省)도 한 몫 했다. 막상 출간되자 출판사도 놀랄 정도로 반응이 뜨거웠다. 김승옥의 '무진기행'과 다자이 오사무의 '인간 실격' 이 출간되자 초판 2천부가 순식간에 동나 한 달 새 3쇄 4천부를 찍었다. 디자인도 첫 눈에 반할 만큼 깔끔하고 예쁘다.지역을 대표하는 서점들이 줄줄이 문을 닫는데 반해, 새로 문을 여는 작은 동네 서점도 크게 늘고 있다고 한다. 이들의 특징은 대형서점과의 철저한 차별성이다. 일부 서점은 고유한 취향을 자랑하고 '소확행'(작지만 확실한 행복)을 추구하는 젊은층 사이에서 '힙한'(최신 유행에 밝은) 공간으로 인기를 끌고 있는 중이다. 주말에는 북 콘서트, 독서토론, 시낭송회를 여는데 열기도 뜨겁고 수준도 꽤 높다. 경기도가 최근 '힘내라! 경기 동네서점'이란 주제를 내걸고 공모한 '2018년 경기도 지역 서점' 169곳을 발표했다. 선정된 서점엔 시설개선, 홍보, 경영 컨설팅이 지원된다. 그러나 동네 특색에 맞는 맞춤형 지원이 오히려 더 절실해 보인다. 동네서점은 지역 문화의 모세혈관이다. 혈관이 막히면 지역 문화는 죽는다. 그래서 동네서점은 꼭 살려야 한다.힘내라! 동네서점 /이영재 논설실장

2018-05-03 이영재

[참성단]노벨평화상과 트럼프

매해 알프레드 노벨이 사망한 12월10일 열리는 노벨상 수상식엔 전세계의 이목이 쏠린다. 물리학, 화학, 생리학·의학, 문학, 평화, 경제학 6개 부문의 수상자는 각 분야에서 이룬 탁월한 업적으로 더할 나위 없는 명예를 인정받는다. 다만 다른 부문 수상자들의 업적이 객관적 성과와 합리적 평가가 가능한 반면, 평화상은 객관적 지표로 계량하기 힘든 '평화'의 가치 때문에 자주 구설에 올랐다.냉전시대 미국의 모든 전쟁에 관여한 헨리 키신저가 베트남평화협정으로 수상하자 논란이 일었다. 동반수상자였던 베트남의 레득토는 수상을 거부했다. 최근엔 3인의 여성 노벨평화상 수상자들이 1991년 수상자인 미얀마 실권자 아웅산 수지를 향해 "로힝야족 인종청소를 외면하지 말라"고 경고했다. 2000년 수상자인 김대중 전 대통령때는 '로비설'로 시끄러웠는데, 노벨위원회는 "로비는 있었다. 기이한 건 정치적 반대자 등으로부터 상을 주면 안된다는 로비가 있었다"고 일축했다. 평화에 대한 인식의 충돌과 정치적 고려와 입장 차이가 빚은 불협화음이다.요즘 미국 트럼프 대통령의 노벨평화상 수상 가능성을 놓고 뉴스 퍼레이드가 펼쳐지고 있다. 발단은 2000년 수상자 김대중 전 대통령의 부인 이희호 여사가 지난 30일 문재인 대통령에게 "노벨평화상을 받으시라"고 보낸 축전이었다. 이에 문 대통령은 "노벨상은 트럼프 대통령이 받아야 하고, 우린 평화만 가져오면 된다"는 의미심장한 수사로 트럼프를 추켜세웠다. 미국 폭스뉴스가 이를 보도하자 트럼프는 "문 대통령이 그렇게 발언한 데 대해 매우 관대하다고 생각했다. 감사하게 생각한다"고 화답하고, 딸 이방카는 해당 기사에 '좋아요'를 눌렀단다.트럼프의 노벨평화상 가능성과 관련, 기대와 우려가 교차하고 있다. 곧 성사될 북미회담의 낙관적 결과의 징조라는 해석과 평화상에 집착한 트럼프가 북핵폐기 의제를 미봉할 수 있다는 우려다. 북·미 정상회담의 핵심의제는 북한핵폐기의 수준과 속도다. 트럼프는 북핵폐기 담판에서 대한민국의 이익을 대리하는 셈이다. 성공보수는 결과에 따라 결정된다. 미리 노벨상을 가불해 주는 분위기는 북핵폐기를 의뢰한 우리의 절박한 처지를 흐릴 수 있다. 북미회담에서 북한핵 완전 폐기를 확정한다면, 노르웨이 노벨위원회 홈페이지는 트럼프를 노벨평화상 후보로 추천하는 대한민국 국민의 청원으로 다운될 것이다. 선후가 이래야 맞다. /윤인수 논설위원

2018-05-02 윤인수

[참성단]'삐라'의 추억

놀거리가 없던 어린 시절, 그나마 유일한 소일거리는 인근 산으로 칡 캐러 가는 거였다. 그때만 해도 산에 칡이 제법 많았다. 칡을 찾다가 뱀과 마주쳐 등골이 오싹했던 기억이 새롭다. 그런데 뱀보다 더 무서운 게 있었다. 북한에서 날아온 '삐라'였다. 삐라를 발견하면 모두 얼굴이 굳어졌고, 주변에 무장 공비가 있는지 좌우를 살펴보았다. 호기심에 삐라를 주머니에 넣고 돌아올 때 얼마나 가슴이 뛰었는지 모른다. 역사의 격동기를 살았던 50, 60대에게 이런 '삐라의 추억' 하나쯤은 있을 것이다.총 한 방 쏘지 않고 적을 교란시키는 데 삐라만큼 효과적인 것도 없다. 삐라는 적군의 마음을 헤집고 들어가 마침내 적진을 붕괴시킨다. 그래서 삐라를 '벌거벗은 심리전의 첨병' '종이 폭탄'이라고 부른다. 삐라는 영어의 bill에서 나왔다. 일본인들은 이를 '삐라'로 읽었고 그대로 우리에게 건너왔다. 전쟁사에선 2차대전 말 연합군이 항복을 앞둔 무솔리니에게 215만장을 뿌린 것을 삐라의 원조로 삼는다. 그러나 절정은 6·25전쟁때 였다. 38선을 가운데 두고 지루한 진지전(陣地戰)을 펼치자 삐라는 상대를 교란시키는데 더할 나위 없이 유용한 수단이었다. 이 당시 유엔군은 25억장, 북한군은 3억장의 삐라를 뿌렸다고 한다.전쟁이 끝난 후에도 남북이 서로 삐라를 보냈다. 연 270일 북에서 남으로 바람이 불어 북에 절대적으로 유리했지만, 경제력이 뒤바뀌면서 북한의 조잡한 인쇄의 삐라는 오히려 역효과를 불렀다. 그러다 노무현 정부는 2004년 6월 12일 남북 군사 회담에서 삐라 살포를 포함한 심리전을 중단키로 합의해 주었다. 하지만 탈북단체가 계속 삐라를 보내면서 북한은 큰 타격을 입었다. 북한은 시간만 나면 삐라 살포 중단을 요구해 왔다. 통일부가 대북확성기 철거에 이어 대북 관련 단체에 삐라 살포 중단을 요구했다. 살포 과정에서 지역 주민들과 마찰이 빚어질 경우, 신변안전 차원에서 경찰력을 동원할 수 있다는 입장도 밝혔다. 하지만 관련 단체들은 강행할 태세다. 평화가 온다면 삐라 살포는 당연히 중단해야 한다. 그러나 삐라에서 열세를 보인 북한은 대신 사이버 공간에서 절대 우위를 보이며 우리를 교란시키고 있다. 우리가 삐라 살포를 중단하면 북한도 사이버 공격을 중단해야 한다. 이번에 우린 그걸 요구했어야 했다. /이영재 논설실장

2018-05-01 이영재

[참성단]일자리 없는 근로자의 날

오늘은 근로자의 날이다. 노동단체는 노동절로 부른다. 1889년 5월 1일 미국 시카고 노동자 8만여명을 비롯해 미 전역에서 수십만명의 노동자들이 하루 8시간 노동 보장을 요구하며 시위를 벌였다. 며칠 뒤 강제진압에 나선 경찰과 이에 맞선 노동자들의 유혈 충돌이 벌어진 헤이마켓 사건으로 비화된다. 그해 7월 세계 각국 노동운동 지도자들이 모여 결성한 제2인터내셔날 창립대회에서 5월 1일을 국제 노동자 기념일로 결정하니 소위 메이데이다. 우리는 해방후 잠시 노동절로 기념하다, 1963년 법률로 근로자의 날을 확정해 지금에 이른다.최근 무산됐지만 문재인 대통령이 발의했던 개헌안이 '근로'라는 용어를 '노동'으로 일괄 수정해 주목을 받았다. 부지런히 일하는 사람이라는 '근로자'가 노사의 대등한 관계를 표현하기에 부적절하다는 노동계의 여론을 수용했다. 근로자는 사용자의 이익에 부합한 단어로, 박정희 시절의 용어라는 심리적 저항이 깔려있다. 반면에 노동을 몸 쓰는 일로 인식해 근로를 단어에 호감을 보이는 여론도 상당하다. 언어가 의식을 규정하니, '근로'와 '노동'의 대치 결과가 주목된다.국제적인 기념일이지만 프롤레타리아 노동계급을 중시하는 사회주의 국가들이 노동절을 더욱 각별하게 기념한다. 냉전시대 소련은 적군의 화려한 열병식으로 이날을 기념했고, 북한에서도 '국제 로동절'은 7대명절에 포함된다. 중국은 올해 노동절 연휴(4월29일~5월1일)에만 1억4천900만명의 유커(遊客)가 중국 각지를 여행할 것으로 전망했는데, 여행수익이 880억 위안(14조8천869억원)이라니 대단하다.아쉬운 건 '근로자의 날'을 만끽하기엔 근로 대기자가 넘쳐나는 우리 현실이다. 올해 들어 지난 3월 실업률이 4.5%로 17년 만에 최고다. 125만명이 실업자다. 청년실업률은 더욱 심각해 2017년 10%에 달한다. 보조지표인 체감청년실업률은 23%로 2000년 이후 최악이었다. 여기에 베이비붐 세대의 메아리인 에코붐 세대가 취업시장에 쏟아져 나오니 설상가상이다. 조선과 자동차 등 3차산업현장의 일자리가 줄고, 패스트푸드점 등 서비스업 현장은 사람을 키오스크로 대체하고 있다. 근로자건 노동자건 최고의 권리는 일할 권리 아닌가. 근로자의 날에 근로자, 노동자가 되기를 간절히 원하는 청년들이 눈에 밟힌다. /윤인수 논설위원

2018-04-30 윤인수

[참성단]표준시의 정치학

1884년 10월 25개국의 외교관 41명이 워싱턴에서 국제 자오선회의를 갖고 '하루의 길이'와 '하루의 시작'을 정했다. 그러기 위해선 표준시가 필요했다. 영국 그리니치 천문대가 기준으로 정해졌다. 지구의 북극점과 남극점을 연결하는 자오선을 동경과 서경으로 나눌 때 그 출발점이 되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그리니치 동쪽에 있는 서울은 동경 135도를 표준시로 쓴다. 영토가 넓은 나라들은 여러 개의 표준시를 사용한다. 미국은 동부, 중부, 산악지대, 태평양 등 4개의 표준시가 있다. 우리 만큼 표준시가 많이 바뀐 나라도 없다. 모두 불행한 역사의 산물이다. 우리는 1908년 4월 1일부터 동경 127.5도 기준의 표준시를 사용하며 서양식 시간대를 처음 도입했다. 경술국치 이후 일본은 1912년 1월 1일 우리의 표준시를 일본 표준시인 동경 135도 기준으로 정했다. 해방후 이승만 정부는 1954년 3월 21일 표준시를 동경 127.5도로 바꿨다. 그러나 군사정부가 들어서면서 1961년 8월 10일부터 다시 동경 135도를 표준시로 쓰고 있다.북한은 지난 2015년 8월 5일 광복 70주년을 맞아 표준시를 이전보다 30분 늦은 '평양시'(127.5도)로 바꾼다고 발표했다. '일제 잔재 청산'이 그 이유였다. 그후 부터 30분 '시차신경전'이 있었다. 2015년 8월 북한의 목함지뢰 도발에 대응해 우리 군이 확성기방송을 시작하자 북한은 준전시 상태를 선포했다. 분위기가 험악해졌다. 군사적 충돌을 막기 위해 남북 고위급 접촉이 열렸고 8월25일 낮 12시를 기해 방송 중단과 준전시 상태를 해제키로 합의를 봤다. 우리 군은 낮 12시에 확성기를 껐지만 북한은 12시 30분에 준전시 상태를 풀었다. 당시 협상 역시 자정을 조금 넘겨 타결되는 바람에 같은 합의를 두고 우리는 '8·25 합의', 북한은 '8·24 합의'로 불렀다.북한이 평양 표준시를 서울 표준시에 맞추겠다고 밝혔다. 판문점회담에서 김정은이 문재인 대통령에게 "평화의 집 대기실에 시계가 2개 걸려 있었다. 하나는 서울 시간, 다른 하나는 평양 시간을 가리키고 있었는데 이를 보니 매우 가슴이 아팠다"며 "시간부터 먼저 통일하자"고 제안했다는 것이다. '평양시간'은 3년 만에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됐다. 이제야 남북이 같은 시간대에 살게 됐다. /이영재 논설실장

2018-04-29 이영재

[참성단]협상의 전략

우리는 매일 협상하며 산다. 물건을 사고 파는 것도 따지고 보면 일종의 협상이다. 그래서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협상술은 큰 관심거리였다. 유대인들이 돈보다 지혜를 중시했던 것은 오랜 방랑을 통해 재산은 빼앗길 수 있어도 지혜는 빼앗아 갈 수 없다는 진리를 터득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협상에도 능하다. '상대방 정보를 많이 입수하고, 협상하기 좋은 분위기를 만들어라. 반드시 명심할 것은 서두르는 협상은 반드시 실패한다는 것이다'(유대인의 협상술/작은 씨앗 간)는 유대인들의 몸에 밴 협상 철학이다.외교에서 협상술은 절대적이다. 우리에게 익숙한 협상술 중 하나가 '벼랑 끝 전술( Brinkmanship )'이다. 북한이 핵을 앞세워 자주 쓰던 수법이다. 막다른 상황에서 초강수를 띄워 위기에서 탈출하는 전술이다. 상대방을 겁먹게 만들어 원하는 것을 얻어내는 것으로 '공갈 전술'이라고도 한다. '니블링(nibbling)'이라는 것도 있다. 협상의 마지막 단계에 작은 것 하나를 더 양보받아내는 기술이다. 좀 치사하긴 하지만 큰 물건을 사면서 싼 물건이나 작은 물건 하나를 덤으로 요구하는 경우다. 하지만 상대방이 더 노련한 협상가일 경우 곤란한 일이 발생하곤 한다. 그쪽에서 '카운터 니블링'으로 맞대응하는 경우가 종종 있기 때문이다. "하나 더 줄테니 하나 더 사가라"는 식이다. 주도권을 잡기 위해 '벼랑 끝 전술'이 이용된다면 '살라미(Salami) 전술'은 협상 과정에서 의제를 자신에게 유리하게 끌고 가기 위한 전술이다. 얇게 썰어 먹는 이탈리아 드라이 소시지에서 따온 말로, 하나의 과제를 두고 이를 부분별로 쟁점화하면서 문제를 하나씩 해결해 나가는 협상 전술이다. 목적을 단숨에 관철시키는 것이 아니라 단계별로 그 대가를 받아냄으로써 이익을 극대화하는 게 특징이다. 상대방은 속이 터지는 협상이지만 승률은 매우 높다. 오늘 판문점에서 남북 정상이 만난다. 어렵게 만든 자린데 사진이나 찍고, 만찬이나 하려는 것은 아닐 것이다. 우리의 목적은 분명하다. 비핵화다. 협상이라면 닳고 닳은 북한이 어떤 전략을 들고 나올 것인가. 길고 긴 여정이 시작됐다. /이영재 논설실장

2018-04-26 이영재

[참성단]남북정상회담 만찬메뉴

만주족 왕조인 청나라의 강희제는 만한전석에 민족화합의 메시지를 담았다. 만주족의 식탁과 한족의 식탁을 합쳤다. 만주족과 한족의 요리를 한 식탁에 모아 하루 두번씩 사흘에 걸쳐 나누어 먹여 한 식구(食口)의 연대를 확인토록 한 것이다. 춘추시대 노나라는 왕의 배식 실패로 공자를 잃었다. 조국인 노나라를 등질 구실이 마땅치 않았던 공자에게 제사고기 분배를 깜박했고, 공자는 시원하게 사직서를 던지고 봇짐을 꾸렸다. 조조는 자신의 개국대업을 반대하는 순욱에게 빈 찬합을 보냈다. 텅빈 도시락의 의미를 모를리 없는 순욱은 자결한다.권력자의 식탁과 음식에 정치적 메시지가 담기기는 예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다. 지난해 말 문재인 대통령과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청와대 정상만찬 때 올랐던 독도새우를 놓고 일본이 시비를 걸었다. 독도가 한일간의 갈등 현안인 걸 뻔히 알면서 독도새우가 웬말이냐는 요지의 시비였다. 우리 입장에선 택도 없는 투정이지만, 일본은 한국의 의도적 영토선언 메뉴로 여긴 것이다.곧 이어 열린 한중정상회담에서는 문 대통령이 혼밥외교라는 비난에 곤욕을 치렀다. 대통령이 혼밥을 먹을 정도로 중국의 홀대를 받았다는 여론이었다. 청와대는 오바마의 베트남 혼밥에 견주어 대통령의 베이징 혼밥을 변명했지만, 사드배치에 대한 중국의 보복성 의전은 분명했다. 그러다 자기도 모르게 남북, 북미정상회담이 결정되자 중국의 태도가 확 달라졌다. 정의용 특사를 극진히 모시더니, 북중정상회담 만찬에는 김정은 노동당위원장에게 2억원 짜리 명품 마오타이를 대접했다. 지금 베이징에서 한중정상회담이 다시 열리면 정상만찬은 확 달라질게 분명하다.청와대가 4·27 남북정상회담 만찬 메뉴를 공개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의 고향바다에서 잡은 민어, 노무현 전 대통령의 고향 봉하마을 쌀, 정주영 전 현대그룹회장의 서산농장 한우, 문 대통령의 고향생선 달고기를 재료로 한 음식을 올린단다. 남북대화와 교류의 남측 주역들을 자연스럽게 연상시키는 메뉴가 하나씩 식탁에 오를 때 마다 대화가 이어지도록 애쓴 흔적이 보인다. 다만 윤이상의 고향 통영문어까지 올린다는데, 정상만찬에 담을 대북 메시지에 신경쓰느라 우리 내부의 미묘한 정서를 소홀히 하지 않았나 싶다. /윤인수 논설위원

2018-04-25 윤인수

[참성단]로스쿨 서열화

말이 '소년등과(少年登科)'지 조선시대에 20세 이전 대과 통과는 불가능했다. 세조 3년 16세에 급제한 남이(南怡)는 무과라 가능했다. '신동'이었던 율곡 이이는 13세에 생원시에 합격했으나 대과는 29세에, 퇴계 이황도 31세에 등과했다. 이유가 있었다. 대과를 통과하려면 진사나 생원이 되기 위한 소과에 먼저 합격해야 한다. 소과에 통과해야 성균관 입학 자격이, 성균관에 300일 이상 출석해야 대과 응시자격이 주어졌다. 소과 시험엔 1만명이 넘는 유생들이 응시해 200여명이 합격하고 대과 통과 인원은 불과 33명이었다.옛날로 치면 과거 급제와 같은 게 사법시험이었다. 개인 능력으로 사시만 통과하면 개천에서도 용이 될 수 있었다. 말 그대로 신분 상승 사다리였다. 대학 주변에 고시촌이 생겨나고, 용이 되기 위해 나이를 잊고 매진하는 '고시 낭인(浪人)'이란 말이 그래서 생겼다. 이런 폐단을 없애기 위해 2009년 로스쿨이 도입됐다. 지난해엔 아예 사법시험을 없애 버렸다. '고려 광종 이래 1천년 넘게 순전히 시험만으로 인재를 등용하던 전통의 종말'이란 말이 그래서 나왔다.베일에 가려진 전국 25개 로스쿨의 '제 1∼7회 변호사 시험 합격률'이 22일 공개됐다. 대한변협이 낸 정보공개 소송이 승소하면서 '판도라의 상자'가 열린 것이다. 결과는 충격적이다. 서울대가 78.65%의 최고 합격률을 보인 반면 원광대는 24.63%에 그쳐 합격률이 3배가 넘는 극심한 편차를 보였다. 정원 50명에 불과한 수원 아주대는 지방대임에도 누적 합격률 91.9%를 기록해 4위, 올해 치러진 7회 시험도 68.12%로 4위에 올랐다. 교수진이 변호사시험 합격에 초점을 맞춰 학생들을 일대일 개별 지도한 덕이다.합격률 공개로 로스쿨이 '변호사 시험학원'으로 변질될 수 있다는 우려의 목소리가 크다. 과도한 경쟁도 불을 보듯 뻔하게 됐다. 그래서 '사시부활론'의 목소리가 다시 쏟아져 나온다. '사시 낭인'이 '변시 낭인'으로 명칭만 바뀌었다는 얘기도 들린다. 경쟁률 공개가 옳았는지 의문이지만, 이제 로스쿨 통·폐합을 포함한 구조개혁을 논의할 시점이 된 거 같다. 근시안적인 해결책은 안 하니만 못하다. 멀리 보아야 한다. /이영재 논설실장

2018-04-24 이영재

[참성단]조양호 회장의 '완행 사과'

아무래도 대한항공 조양호 회장 일가의 시련이 쉽사리 진정되긴 힘들어 보인다. 조 회장이 '물벼락 갑질' 파문에 대해 22일 대국민사과문을 발표했지만, 게도 구럭도 다 놓친 형국은 그대로다. 장녀 조현아의 '땅콩'에 이어 차녀 조현민의 '물컵'이 일으킨 나비효과로 가문과 그룹경영이 위기에 처한 현실이 어이없고 기막혀서였을까, 조 회장의 한참 늦은 사과를 이해하기 힘들다. 폭주하는 분노의 속도에 비해 터무니없이 느렸던 완행 사과는 미스터리다.대한항공은 내년이면 창업 50주년을 맞는 국적항공기업이자 재벌그룹으로 소비자의 평판이 기업 경영에 미치는 영향을 모를리 없다. 당연히 조현민의 악다구니가 담긴 육성이 공개되자마자 대한항공은 위기관리 시스템을 작동시켜야 했다. 특히 일반 임직원이 아닌 오너 일가가 저지른 오너리스크 아닌가. 조 회장과 당사자인 조현민이 즉시 진정한 사과와 재발방지를 위한 대책을 발표하며 저두평신(低頭平身), 납작 엎드렸어야 옳았다. 조 회장 일가가 망설이면 임원들이 종용해야 맞았다. 완행 사과의 이유가 조 회장 일가의 눈치만 살핀 임원들의 침묵이었다면, 대한항공은 정말 위기다.두 자매의 '땅콩'과 '물컵'에서 비롯된 나비효과가 조 회장 가문과 대한항공을 넘어 사회전체로 확산되면서 전례없는 현상이 속출하고 있다. 대한항공 직원 수백명이 '단톡방'을 개설해 회장 일가의 비리를 수집해 경찰에 넘기고 있다. 골리앗의 갑질에 다윗들이 조직적인 저항에 나선 셈인데, 재벌기업들이 새로운 경영리스크 사례로 주목해야 할 대목이다.사실 '갑'들이 너무 높은데 있어 몰랐던 모양인데, '을'들이 만능에 가까운 스마트폰으로 모든 콘텐츠를 순식간에 유통시키고 공유하는 네트워크로 무장한지 오래다. 산업화 시대의 갑질을 부리다가는 정보통신 시대의 을들에게 판판이 깨질 수 밖에 없다. 조 회장은 몰라도 딸들은 이러한 세상의 변화를 충분히 알만한 연배인데 연달아 사고를 쳤으니 안타까운 일이다. 평창올림픽 성화봉송을 함께 한 조 회장과 삼남매의 환한 미소가 기억난다. 그 미소로 사람과 세상을 대했다면 없었을 시련이다. 조 회장의 완행 사과는 정말 늦었다. /윤인수 논설위원

2018-04-23 윤인수

[참성단]천상병 예술제

1987년 12월 3일. 기자는 그날 의정부 장암동 수락산 아래 있었다. 허름한 슬레이트집에 사는 그를 인터뷰하기 위해서다. 그때 기사 한 토막. '집에 들어서니 한약 냄새가 코를 찔렀다. 방문을 여니 한평 남짓한 방에 시인이 누워 있었다. 배는 임신부처럼 불룩했다. 간이 안좋은 모양이었다. 밥상 겸 책상에 예쁜 어린애 사진이 있어 누구냐고 했더니 잡지책에 하도 예쁜 아이 사진이 있어 오려서 액자에 끼워 두었다며 웃었다. 그때 함께 사는 장모가 한약을 방안으로 들이밀었고, 그는 얼굴을 찡그리며 한입에 들이마셨다. 그리고 사탕 하나를 입에 넣었다. 시인 천상병은 지금 몹시 아프다.' 기사에는 쓰지 않았지만, 취재를 끝내고 나오는데 시인은 "돈 좀 줘! "라며 손을 내밀었다. 익히 들었던 행동이라 그리 놀라지 않았다. 주머니에서 만원 오천원 천원을 꺼내 내밀었더니 천원 한장을 달랑 집으면서 "이거면 돼"라고 말했다. 그때 그 표정이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 벌써 30년 전 일이다.1967년 동백림사건에 연루된 천상병은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3개월, 교도소에서 3개월 치욕스러운 심문을 받은 후 풀려났다. 후유증으로 정신병원에 갈 만큼 극심한 고통을 겪었고, 아이도 낳을 수 없게 되었다. 문단에 너무도 잘 알려진 시인의 일화 한 토막. '그가 죽고 난 뒤 몇 백만원인가 하는 조의금이 들어왔다. 시인의 가족으로는 처음 만져보는 큰 돈이었다. 시인의 장모는 그걸 사람들 손이 타지 않는 곳에 감춘다고 한 것이 하필이면 아궁이 속이었다. 그걸 모르고 시인의 아내는 아궁이에 불을 지폈다.' 시인이 하늘로 돌아가던 1993년 4월 28일, 의정부시립병원 영안실 밖으로는 추적추적 봄비가 꽤 내렸다고 한다.천상병 시인을 기리는 예술제가 의정부시에서 성대하게 열리고 있다. 올해는 시인이 소풍을 떠난 지 25년이 되는 해이기도 하다. 우리의 버려야 할 버릇 중 하나가 생전에 홀대하다 죽은 후 부산을 떠는 것이다. 그래도 이런 자리를 만들어 주니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예술가들에게는 없는 게 많다. 부(富), 명예, 지위다. 있는 건 자존심뿐. 천상병도 생전에 그랬던 시인이다. /이영재 논설실장

2018-04-22 이영재

[참성단]강화도 '갱징이 풀'

칠면초(七面草)는 칠면조의 얼굴처럼 붉게 변한다고 해 붙여진 이름이다. 강화도 토박이 노인들은 칠면초를 '갱징이 풀'이라고 부른다. 꽃인지 풀인지 분간하기 어려운 이 풀은 밀물에 묻히면 마치 피가 흐르는 것 같다. 기자 초년병 때 만난 갑곶 노인들은 소나 말도 이 풀만은 먹지 않았다고 말했다. 왜 '갱징이 풀'이고, 소나 말이 그 풀을 먹으려 하지 않을까.이야기는 병자호란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1636년 12월 9일 청나라 대군이 조선으로 밀려들었다. 인조가 남한산성으로 피신하자, 월곶 성동 나루터에는 강화도로 들어가려는 피난민들로 가득 찼다. 그런데 강을 건너게 해 줄 배가 없었다. 며칠을 기다려도 배를 구할 수가 없었다. 어느 날 가마가 도착했다. 강화도 검찰사로 임명을 받은 영의정 김류의 아들 김경징의 어머니와 아내가 탄 가마다. 순간 기다렸다는 듯이 수십 척의 배가 나타나 발버둥을 치는 피난민들은 외면한 채 두 여인과 식솔, 50개나 되는 재물 궤짝만 싣고 강을 건너갔다.그리고 곧 오랑캐가 나루터에 들이닥쳤다. 후대는 그 모습을 "순식간에 거의 다 채고 밟히고 혹은 끌려가고 혹은 바다에 빠져 죽고 하는 바람에 휘날리는 낙엽과 같았으니 그 참혹함을 차마 말할 수가 없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들은 이 펄에서 죽어가면서, 또 바다에 빠져 허우적거리면서 "경징아! 경징아! "부르며 저주했다고 한다. 그때 흘린 원한의 피가 붉은 펄 꽃으로 피었다는 것이다. 그게 말과 소도 입에 대지 않는다는 '갱징이 풀'이다.우리나라에서 네 번째로 큰 섬, 해안선 길이 99㎞로 세계적인 갯벌과 천연기념물 205-1호 저어새가 서식하는 곳. 매화마름, 갱징이 풀 등 560여 종의 식물이 자라는 강화도를 소개한 '강화도의 나무와 풀' '강화도 지오그래피'(작가정신 刊) 두 권의 책이 동시 출간됐다. 강화도가 '2018년 올해의 관광도시'로 선정된 걸 아는 이는 그리 많지 않다. 그만큼 우리가 무심했고 늘 옆에 있어 그 소중함을 모른 탓이다. 따지고 보면 제주도보다 더 아름답고, 서러운 역사를 갖고 있는 곳이 강화도다. 책의 출간이 잊고 있던 강화도를 상기시킨다. 이번 주말엔 강화도에 다녀올 생각이다. /이영재 논설실장

2018-04-19 이영재

[참성단]혁명의 교훈

"너무도 험악한 정세와 너무도 강하고 엄청난 어둠 속이라 겁많은 사람일지라도 굳은 각오를 하게 되고, 또 아무리 대담한 사람일지라도 공포를 느낄 정도였다." 빅토르 위고는 '레미제라블'에서 올빼미의 시선을 빌려 1832년 6월혁명 전야의 파리를 이렇게 묘사했다. 혁명은 규범 대 규범의 충돌이고, 현재를 지키려는 세력과 전복하려는 세력의 격돌은 자비롭지 않다. 위고의 서사는 전환의 역사에서 희망과 절망의 극단을 오가는 군중의 심리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혁명의 동력은 악의적인 구체제의 전복을 희망하는 대중이다. 역사적 대중은 혁명이 혁명을 부르고 소멸하는 반복과 순환의 동력이다. 1789년 프랑스 대혁명은 나폴레옹의 쿠데타-왕정복고-1984년 2월혁명-1871년 파리코뮌에 이르는 1세기 동안 민중혁명과 왕정복귀 쿠데타를 거쳐 선거혁명으로 마무리됐다. 1917년 볼셰비키 혁명 이후 사회주의 혁명, 공산주의 혁명은 이제 '실패'라는 낙인이 찍혀 역사에서 폐기됐다. 2010년 말 중동과 북아프리카에서 튀니지, 이집트, 예멘, 리비아의 독재정권을 무너뜨린 연쇄 혁명 '아랍의 봄'은 내전과 종파간의 대립 등 혁명의 여진이 '아랍의 겨울'을 불렀다.오늘로 1960년 4·19혁명이 58주년을 맞았다. 해방공간을 꽉 채운 이념적 대립과 계층간의 이해(利害) 충돌로 극심한 정치혼란기의 대한민국은 4·19혁명을 통해 자유민주주의 국가의 정체성을 획득했다. 5·16 군사쿠데타로 인한 독재복고의 진통속에 혁명세대는 산업화세력과 민주화세력으로 나뉘었지만, 덕분에 대한민국은 산업화와 민주화를 동시에 이룬 모범국가로 성장했다. 하지만 4·19혁명, 두번의 쿠데타, 민주화항쟁으로 이어진 역사의 여진이 남긴 이념의 골이 너무 깊어 대한민국은 아프다.박근혜 전 대통령을 퇴진시킨 촛불시위는 모든 혁명은 모든 권력의 경종이라는 교훈을 일깨운 사건이다. 시대정신에서 홀로 이탈한 권력은 언제든 혁명적 상황에 직면한다. 촛불시위를 촛불혁명으로 격상시켜 혁명의 면류관을 쓴 문재인 정부라고 예외는 아니다. 박근혜를 끌어내린 시대정신에 부응하고 있는지 혁명의 교훈을 마주하길 바란다. 혁명주체의 독선을 용납하지 않았던 것이 혁명의 역사였다. /윤인수 논설위원

2018-04-18 윤인수

[참성단]별이 지다

노마 데스먼드는 텅 빈 저택에 유폐된 여왕처럼 살아간다. 이미 대중의 갈채도 환호도 모두 사라졌다. 화려했던 옛날은 그저 덧없이 허공에 흩어지는 연기 같은 것. 영화가 제작된 지 60여 년이 흘렀지만 데스먼드역을 맡은 글로리아 스완슨의 소름 돋는 연기, 특히 기자들 앞에서 포즈를 취하는 그 마지막 장면은 지금도 우리 기억에 남아있다. 빌리 와일더가 영화 '선셋 대로(Sunset Blvd.)'에서 보여주려고 했던 것은 천하를 호령한 대 스타라도 시간의 흐름을 거역할 수 없다는 것, 흘러간 물로 다시 물레방아를 돌릴 수 없다는 평범한 자연의 섭리였을 것이다. 할리우드까지 멀리 갈 것도 없다. 우리도 대 여배우를 갖고 있다. 최은희다.젊어서 과부가 된 어머니와 죽은 아버지의 친구간 애틋한 사랑을 다룬 주요섭의 소설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가 발표된 것은 1935년 일제 치하때였다. 과부의 사랑이 흉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자랑거리도 아닌 시절이었다. 주요섭은 당대 소설가 중 여성 심리를 묘사하는데 단연 일인자였다.그로부터 사반세기가 지난 1961년 이 작품은 동명으로 영화화됐다. 감독 신상옥, 어머니 역에 최은희, 촬영은 수원시 팔달구 남창동 24번 1 정준식의 집에서 진행됐다. 방화수류정 등 수원이 배경이었다. 영화는 큰 성공을 거뒀다. 원작도 좋았지만 그래도 흥행의 1등 공신은 당대 최고의 배우 최은희가 큰 역할을 했다. 신상옥·최은희 콤비의 필모그래피중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는 '성춘향'·'빨간 마후라'와 함께 언제나 맨 앞을 장식한다.최은희가 세상을 떠났다. 향년 92세. 1960년대를 전후로 엄앵란, 김지미와 함께 한국 영화 황금기의 스크린을 누빈 톱스타였다. 78년 신상옥 감독과 차례로 홍콩에서 납치돼 북한에 머물다 8년 만에 탈출하는 등 '삶 그 자체가 영화'였을 정도로 극적인 삶을 살았던 배우. 생전에 늘 "되돌아보면 내 삶은 기적의 연속이었다"고 말한 최은희는 1926년 경기도 광주에서 태어나 생전에 130여 편의 영화에 출연하고, 3편의 영화를 감독했다. 언제나 큰 별로 살았던 최은희. 그 별이 졌다. 고인의 명복을 빈다. /이영재 논설실장

2018-04-17 이영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