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가칼럼

 

[사자성어로 읽는 고전]환과고독: 홀아비·과부·고아·독거노인 외롭고 의지할 곳 없는 네 부류

전국시기 맹자는 공자를 계승하여 인의를 강조한 사상가이다. 유학은 정치사상과 관련하여 본래 민주주의는 아니지만 민본사상을 가지고 있다. 백성이 근본이고 근간임을 주장하면서도 그들을 다스리는 현명한 지도자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보는 입장이다. 그렇기 때문에 백성을 다스리는 지도자를 바라보는 관점이 이른바 갓난아이를 돌보는 부모에 비견된다. 부모가 자식을 사랑으로 공평하게 대하듯이 임금도 백성에 대해 그리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부모가 잘난 자식보다는 부족한 자식에 대해 애를 끓이며 걱정하고 보호하듯이 하기 때문에 그런 부류에 해당하는 백성을 적시하였다. 맹자에 보면 늙어서 아내가 없는 이(老而無妻)를 홀아비(鰥)라 하고, 늙어서 남편이 없는 이(老而無夫)를 과부(寡)라 하고, 늙어서 자식이 없는 이(老而無子)를 독거노인(獨)이라 하고, 어린데 부모가 없는 이(幼而無父)를 고아(孤)라 한다. 이 네 부류는 궁박한 지경에 처해있는 백성으로 호소할 데가 없는 이들로 임금이 보살펴야 할 대상으로 적시하고 있다. 전통가족 구조에 있어서는 가족 간의 상부상조가 기본적으로 전제된다. 그렇기 때문에 가족의 구성원 가운데 어느 하나가 부족하면 그 자체가 상부상조나 의지처가 없어져 살아가기 힘들게 된다. 이런 처지에 속한 사람들을 일차적으로 나라에서 돌봐야 한다는 것이 맹자의 주장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전통적인 가족구조가 해체되어감에 따라 구조적 차원에서만 보자면 개념을 다시 정의해야 할 판이다. 우리나라만 해도 일인가족이 급증하고 자식은 낳지 않으면서 반대로 이혼율은 증가 추세에 있기 때문에 늙어서 자식 없는 경우는 말할 것 없고 남편이나 아내가 없는 경우도 주위를 둘러보면 일상적이다. 다만 환과의 경우도 살다가 짝을 잃어버려 힘들어지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이다. 게다가 어린데 부모가 없는 경우나 늙어서 자식이 없는 이도 힘들고 외로우니 시대의 변화를 감안해보더라도 국가가 복지차원에서 보장해 주어야 하는 대상이다. 특히 환과고독 가운데 고독(孤獨)은 현대에도 여전히 고독하다. /철산(哲山) 최정준 (동방문화대학원대학교 미래예측학과 교수)

2019-04-24 철산 최정준

[주종익의 '스타트업']스타트업 3P

사업 구상하고 결심한후 실천주변 생태계·강한 의지로 추진좋은 팀원·혁신적 기술력 필요제품 완성판은 '없으면 불편한'핸드폰처럼 필수품 만드는 것프랑스의 실존철학자 사르트르식으로 말하면 스타트업은 P(push)와 P(pull) 사이의 P(product market fit(PMF): 제품과 고객의 궁합)이다. 그는 "인생은 B(birth: 탄생)와 D(death: 죽음) 사이의 C(choice: 선택)이다"라고 했다. 어찌 스타트업만 그렇겠는가? Push & Pull은 사업도 그렇고 연애도 그렇고 어쩌면 삶의 성공 법칙 같은 것이다. 오죽하면 지금의 초등학교를 국민학교라고 부르던 시절의 국민학교 졸업식 노래 3절에는 "앞에서 끌어주고(졸업생) 뒤에서 밀며(재학생)" 우리나라를 짊어지겠다고 노래했겠는가? PMF는 목표요 결과이니 잠시 잊고 스타트업의 시동부터 1차 성공까지 한 7단계 정도로 3P 중 2p의 작동 과정을 생각해보자. 1단계는 스타트업을 꿈꾸는 단계다. 욕망이 밀어주고 의지가 끌어주는 단계다. 욕망도 없고 의지도 미약한 사람이 그냥 등 떠밀려서 스타트업을 하니까 한두 번 실패를 하면 포기한다. 욕망은 회사와 내가 존재하는 이유이다. 다른 말로 하면 비전(Vision)이고 미션(mission)이다. 지금 우리는 대부분 1단계부터 잘못되고 있다. 2단계는 Mind Set(결단)과 행동의 단계다. 결단이 밀어주고 행동이 끌어주는 단계다. 많은 생각과 고민을 한 끝에 마지막으로 중대한 결단을 하고 이 결단을 한 치의 오차도 없이 행동으로 실천하는 단계다. 결단과 결심은 다르다. 사생결단은 있어도 사생결심은 없다. 결단의 과정을 거치지 않고 마치 짜장면 먹을까(취직할까) 짬뽕 먹을까(스타트업)를 정하는 결심 정도로 스타트업을 시작하는 기업가가 아마도 90% 이상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이 두 단계는 겉으로 드러난 상태가 아니다. 그냥 거칠게 말하면 무의식의 단계다. 겉으로 드러난 의식의 단계보다 9배 정도 중요하다. 우리 행동의 의식과 무의식의 비율은 1대 9 정도 된다. 마치 빙산과도 같다. 빙산의 겉으로 드러난 부분은 10%에 불과하다. 물속에 잠겨있는 90%가 없으면 보이는 10%는 존재하지 않는다. 기업가 정신이 여기에 속한다.3단계는 이해당사자들이 밀어주고 스타트업의 창업가가 끌어당기는 단계다. 주변의 모든 사람과 생태계가 밀어주고 창업가는 강한 의지로 끄는 단계를 말한다. 어렵고 부정적인 견해들은 창업가의 강력히 끄는 힘으로 이겨 내야 한다. 초기 스타트업은 아무런 미래가 보이지 않지만 주변 생태계와 도와주는 사람들의 성원 하에 창업가가 주도적으로 끌고 가야 한다. 4단계는 팀이 밀고 창업가 즉 사장이 당기는 단계다. 이 단계부터 실질적인 스타트업 업무가 시작되는 단계다. 좋은 팀원들이 일과 능력과 노력으로 밀고 사장은 리더십과 통찰력과 강단으로 잡아끄는 단계다.5단계는 낮은 단계 제품이(기술) 밀고 선도적 열정 혁신고객이 끄는 단계다. 낮은 단계란 아직 완전한 제품은 아니지만 무엇을 하려고 하는지를 알 수 있는 단계다. 이 단계의 중요한 점은 차별화 혁신기술(Technology)이 밀어야 한다. 선도 열정 혁신고객은 많은 기술적 지식과 경험이 있어서 기대하던 제품이라면 조금 결함이 있어도 먼저 찾아오거나 줄을 서서라도 원하는 제품을 소유하려는 사람이다. 그러나 이런 고객을 발견하는 일이 어렵고 힘든 일이다. 6단계는 높은 단계의 제품으로 밀고 제품을 사랑하는(love) 사람들과 선도 구매자들이 이끄는 단계다. 고객의 욕구를 충분히 반영한 제품으로 선도고객을 흡수하여 이들의 흡인력으로 급속성장을 준비한다. 7단계는 필수품(Must Have)이 밀고 대다수의 주 고객이 시장에서 끌어당기는 단계이다. 제품의 완성판은 필수품을 만드는 것이다. 고객이 이것 없으면 불편해서 못사는 물건을 만드는 것이다. 핸드폰 같은 물건이 필수품이다. 대다수의 고객이 끌어당겨 주니 성공할 수밖에 없다.이렇게 7단계까지 올 수 있는 스타트업은 성공한 기업이다. 7단계까지 한 번에 오는 스타트업은 5%를 넘지 않는다. 실패할 때마다 다시 일어날 수 있는 힘은 1, 2단계의 무의식의 단계임을 이해했으면 한다. 위성 발사 카운트다운을 하듯 지금 내가 몇 단계에 와있는지 점검을 해보라./주종익 서울창조경제혁신센터 대표멘토·에버스핀 감사주종익 서울창조경제혁신센터 대표멘토·에버스핀 감사

2019-04-21 주종익

[사자성어로 읽는 고전]종즉유시: 마치면 곧 시작함이 있다

여기저기 환하게 울긋불긋 피어 있는 꽃에 마음이 설렌다. 한편으로는 생기를 느끼고 한편으로는 무상함을 느껴서일까? 지금은 생기를 전해주는 저 꽃들도 곧 순간의 영화를 뒤로하고 저버리겠지. 그러나 꽃은 저버려도 내년 봄이 되면 또 찾아올 거라는 기약이 있다. 꽃이 피고 지며 영락을 반복하는 현상에서 고인들은 영원을 기약하는 방법을 찾아냈다. 꽃이 피어있는 채로 영원을 기약하는 것이 아니라 영락을 반복하듯이 생멸을 반복하면서 영원을 기약하는 것이다.주역의 항괘는 항구함을 유지하는 도리에 대해서 이야기해 주고 있는데 그곳에서 '사시도 변화를 통해 오래도록 유지한다'고 하였다. 여기에서 변화란 다름 아닌 반복적인 변화이다. 꽃도 그렇고 사계절도 그렇듯이 반복적인 변화야말로 항구함을 유지하는 비결이다. 모든 생명체가 이런 항구함을 유지할 수 있는 것도 반복적으로 변화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생명체의 특징이 대사와 복제로 나타난다고 볼 수 있다. 대사의 핵심은 외부와의 에너지 교류이고 복제란 자신의 형태를 존속하고자 하는 현상으로 나타난다. 그래서 개나리꽃은 내년에도 올해 본 모습을 유지한 채 피었다 질 것이다. 사람도 생명체 가운데 하나라는 면에서 보면 마찬가지이다. 이런 면에서 보면 죽고 사는 생사는 20만년 전에 출현한 인류가 계속해서 이어지는 원리라고 할 수 있다. 피었다 곧 질 꽃을 보고 주역의 '마치면 곧 다시 시작한다'는 구절이 떠올랐다. /철산(哲山) 최정준 (동방문화대학원대학교 미래예측학과 교수)

2019-04-17 철산 최정준

[시인의 꽃]눈꽃

슬픔 슬픔너의 슬픔차마 슬픔이라 말 않겠네. //예까지 밀려 떠돌며가까스로 피어 오른 뜻. //밤새도록 울며 쌓여기어이 황홀한 모습 드러냈고, //밤 풍경밤 사연한 올 한 올 짜내어서 //바람 불면 무너진다슬픔으로 쌓은 공 //놓칠세라꼬옥꼬옥끼리끼리 얼싸안네.조태일(1941~1999)슬픔에도 꽃이 있는가. 슬픔이 피워내는 꽃이 있다면 밤새 잠 못 이룬 '애환의 얼굴'을 닮았으리. 그 꽃은 한 사람이 흘린 눈물이 아닌 여러 사람들의 슬픔이 '삶의 현장'에서 흘린 피눈물 같은 것. 너무 아파서 그것을 '차마 슬픔이라 말'하지 못할 정도로, 침묵만이 가득한 세계의 언어가 피운 꽃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침묵의 언어는 '밤새도록 울며 쌓여' 하얗게 그 실체를 황홀하게 드러내는 '눈꽃'과 같이 '밤 풍경' 속에서 '밤 사연'을 '한 올 한 올 짜내어서' 가지 끝에 걸어둔 것. 이 꽃은 '슬픔으로 쌓은 눈물'이라서 바람 불면 무너지는 약하고 약한 한계를 가졌다. 그렇지만 힘없는 것들은 '끼리끼리' 있는 힘을 다해 서로 '놓칠세라 꼬옥꼬옥' 부둥켜안고 있는 것, 슬픔에도 피는 꽃이 있다면 그것은 이와 같은 것이니, 아픔이 다 녹을 때까지 감싸 안고 가리라. /권성훈(문학평론가·경기대 교수)권성훈(문학평론가·경기대 교수)

2019-04-15 권성훈

[고재경의 '노래로 본 사자성어']반박귀진(返璞歸眞)

'진실된 나로 되돌아감' 의미제자리 지킬 때 '참' 밖으로 나타나초조함은 건강·생명 위협하기도세월호 등 기본 지키지 못한 결과가식 버리고 본연 위치로 돌아가야반박귀진(返璞歸眞)은 뒤돌아 다시 한 번 처음을 향해 천천히 나아간다는 뜻이다. 노장사상의 기본 개념인 반박귀진은 돌이켜 되돌려서 진실된 나로 되돌아감을 의미한다. 진실된 나란 원래 위치인 진리일 뿐만 아니라 각자에게 주어진 제자리이다.시인과 촌장이 부른 '풍경'(작사·작곡 하덕규)의 노랫말은 반박귀진의 전형적 본보기를 보여준다. 화자는 다음의 노랫말이 전부인 짧은 가사를 통해 모든 사람들에게 이렇게 읊조린다: '세상 풍경 중에서 제일 아름다운 풍경/모든 것들이 제자리로 돌아가는 풍경/세상 풍경 중에서 제일 아름다운 풍경/모든 것들이 제자리로 돌아오는 풍경'. '풍경'이란 단어를 들으면 산과 바다 등 자연의 경치 또는 어떤 정경이나 상황을 먼저 떠올리게 된다. 세상에서 제일 아름다운 풍경은 스위스 알프스지대 만년설 명산이 아니다. 우리나라 설악산의 아름다운 자태도 아니다. 그것은 화자가 분명히 말하듯이 다름 아닌 '모든 것들이 제자리로' 돌아가고 '제자리로 돌아오는 풍경'이다. 세상에서 이처럼 반박귀진을 간단명료하게 설명한 적절한 예가 어디에 있을까 싶다. 원래 있던 제자리로 돌아가고 돌아오는 풍경은 참된 나 곧 진리의 모습이다. 제자리를 지킬 때 참이 밖으로 나타난다. 제자리에 있는 궤도를 탈선하면 늘 위기가 따른다. 어떠한 처지에 놓여있다 해도 자신의 분수를 망각한 채 기고만장하면 안 된다. 그러면 허세와 거짓과 위선이 개입된다. 이 같은 과도한 욕망의 불꽃은 마음을 애태우며 불안하게 만든다. 초조함은 마음과 몸의 질병을 낳게 되어 현대인의 건강과 생명을 위협하기도 한다. 자신에게 맡겨진 일에 충실하고 안분지족(安分知足)할 때 반박귀진은 발현된다. 불평불만 등 의식적인 부정적 생각이 자아 내면에 팽배하면 자신을 바로 볼 수 없다. 또한 자신의 본래 자리를 벗어난 월권과 남용은 집단 구성원 사이에 불화와 암투를 초래한다.말로(Malo)가 부른 '제자리로'(작사 이주엽·작곡 말로) 노랫말에도 반박귀진의 상징적 예가 녹아 있다. 각계각층의 많은 사람들이 '먼 길을' 떠나간다. 순진무구한 '아이들'이 한낮을 떠돌고 있다. 어느덧 해가 서산에 뉘엿뉘엿 기운다. 이제 그들은 자신들의 삶의 터전인 '비었던 집'으로 각자 다시 돌아온다. 어둠이 짙게 깔리자 '도란도란' 달빛은 교교히 빛나고 있다. 별은 '물끄러미' '안식의 밤을' 지내는 이들을 은은히 비춘다. 창가에 따뜻한 '그리운 불빛이' 흘러들어온다: '길 잃은 아이 이제 제자리로/떠났던 사람 다시 제자리로/불빛 환한 밤 모두 제자리로/아픔 없는 밤 모두 제자리로'. 세상의 뼈저린 '아픔'이 없는 평온한 밤이 제자리로 돌아온 모습은 너무나 아늑하다. 심지어 아름답고 고귀하고 신성하기까지 하다. 어린아이와 어른 모두 가장 원시적인 천진(天眞) 속으로 되돌아감은 반박귀진 자체의 형상이다. 제자리로 복귀함은 원래 자신이 소유하고 있던 본연의 자신을 올바로 보는 것이다. 자신을 바로 보지 못하면 각자 서있는 위치에서 이탈하게 된다. 그 결과 반박귀진의 근본인 소박과 순박의 정신을 상실하게 된다. 기본 위치로 돌아가고 돌아올 때 반박귀진의 진리 실현이 가능하다고 화자는 세상을 향해 부드럽게 그러나 강력하게 외친다. 이렇게 할 때 불투명한 혼돈의 시대를 극복하는 '어여쁜 안식'과 '고요한 평화의 밤'이 우리 곁에 따뜻하게 찾아온다: '깨우지 마라/저 어여쁜 안식의 밤을/흔들지 마라/고요한 평화의 밤을'.수년 전 발생한 세월호 참사와 신종 감염병 메르스(중동호흡기증후군) 공포 확산 사건도 반박귀진의 기본을 준수하지 못해 나타난 고질적 병폐의 결과이다. 또한 어느 한 대형 대학병원에서 발생한 신생아 네 명의 사망 사건도 감염관리 부실 등 기본을 지키지 못해 나타난 현상이 아닐까 싶다. 진실된 나로 제자리에 돌아가고 제자리로 돌아오지 않으면 검은 바다에 진실의 배가 가라앉는다. 지금은 너 나 할 것 없이 모든 가식적 태도를 버리고 각자 주어진 본연의 위치로 되돌아갈 때이다. 이것이 바로 반박귀진의 요체이다./고재경 배화여대 명예교수고재경 배화여대 명예교수

2019-04-14 고재경

[사자성어로 읽는 고전]돌여래여: 갑자기 찾아온다

서경에 실려 있는 고대 정치의 아홉 가지 범주인 홍범구주에서 가장 기본이 되는 첫 번째가 오행인데 그 오행 가운데 첫 번째가 물이고 그 다음이 불이다. 왜 정치를 하는 범주에 물이니 불이니 하는 물질들이 들어갔을까? 흔히 정치를 생각하면 시민 권력 투표 의회 행정 사법 등의 제도를 떠올리기 쉽다. 그러나 정치의 가장 기본이 백성임을 생각해보면 정말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는 자명하다. 두말할 것 없이 사람들의 삶, 민생이다. 우리는 물이 없이 살 수 없고 불이 없이도 살 수 없다. 물과 불이 없이는 인간이 도저히 살 수가 없으니 중요시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정치범주에 물과 불이 기본으로 들어간 것은 이런 이유뿐만이 아니다. 물과 불은 우리의 생명줄도 되지만 우리의 재산과 목숨을 빼앗아가기도 한다. 전하는 기록에 고대 우임금이 홍수를 당해 큰 피해를 입게 되자 물에 대해서 전격적으로 인식을 달리하여 관찰하였다고 한다. 그 결과 물뿐 아니라 불과 나무와 흙 등 이른바 오행에 관한 연구를 토대로 정치의 도리를 깨달아 후세에 전한 것이 홍범구주라 한다. 이 기록에 불에 관한 내용도 등장하는데 불은 기본적으로 위로 타오르는 성질인 염상(炎上)이라고 기록되어있다. 주역에서는 불은 이괘(離卦)에 해당한다. 불은 어디엔가 붙으려는 성질을 지니고 있다고 하였다. 그런데 불이 붙어 타오르는 다양한 모습 가운데 돌연히 찾아온다는 돌여래여(突如來如)라는 표현도 있다.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는 방식이 갑작스럽게 이루어지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과학문명이 초고도로 발전한 시대라지만 물과 불이 인류에 주는 파괴력은 여전하기 때문에 늘 긴장을 늦추지 않고 조심하며 체계적으로 예방하는 것만이 수마나 화마를 줄이는 상책일 것이다. /철산(哲山) 최정준 (동방문화대학원대학교 미래예측학과 교수)

2019-04-10 철산 최정준

[시인의 꽃]산에 언덕에

그리운 그의 얼굴 다시 찾을 수 없어도화사한 그의 꽃산에 언덕에 피어날지어이.그리운 그의 노래 다시 들을 수 없어도맑은 그 숨결들에 숲 속에 살아갈지어이.쓸쓸한 마음으로 들길 더듬는 행인아.눈길 비었거든 바람 담을지네.바람 비었거든 인정 담을지네.그리운 그의 모습 다시 찾을 수 없어도울고 간 그의 영혼들에 언덕에 피어날지어이.신동엽(1930~1969)사랑하는 사람이 불현듯 사라질 때 혹은 그런 사람의 곁에서 떠나올 때가 있다. 그럴 때 우리는 그리움으로 가득 찬 그 사람의 텅 빈 빈자리를 응시하게 된다. 오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하늘만큼 커져만 가는, 기다림의 숱한 방황의 날들은 빈자리를 채우려고 한다. 그러면서 그 사람과 함께 한 시간을 더듬으며 나쁜 기억보다는, 좋은 기억만이 생각의 꽃을 피운다. 이 꽃은 '그리운 그의 얼굴 다시 찾을 수 없어도' 시시때때로 동시다발적으로 '화사한 그의 꽃'으로 현현된다. 길을 가다가, 산과 언덕을 오르다가 피어나는 꽃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그 사람이 되는 것. 이를테면 아름다웠던 기억이 상징화된 꽃으로 되살아나는 것인 바, 사람은 가고 지나간 시간만이 꽃으로 치환된 것. 이 꽃은 당신이 사랑했던 그 사람의 '맑은 숨결'로서 '바람'과 '인정'을 담아서 거기에 잎사귀를 내민다. 보아라, '쓸쓸한 마음'에 흔들리는 꽃이 있다면 그것은 '울다 간 그의 영혼'이 바람 되어 당신을 찾아온 것일지니. /권성훈(문학평론가·경기대 교수)권성훈(문학평론가·경기대 교수)

2019-04-08 권성훈

[김나인의 '생활관상']인당 부위 새겨진 현침문, 선과 악의 결과물

중심 통과땐 파산·이별등 큰 우환크면서 현침문 생기면욕심 지나쳐 많은 사람에게 상처웃음속 가시 닮았다는것 같아인간 속일수 있어도 하늘은 못 속여인당 부위에 새겨진 현침문은 하늘이 응징하는 날카로운 가시와 같은 것이라 말할 수 있다. 인당은 평평하고 밝으며 윤기가 흐르면 공명을 이룸에 한치의 의심할 바가 없다. 인당의 형상이 길(吉)하고 흠결이 없으면 인덕이 많아 형제·동기 간은 물론 친구·지인에 이르기까지 우호적인 세력이 많아지고 세상을 주도하는 중심에 서게 된다. 반면 인당이 좁고 울퉁불퉁하며 불그레한 좀살이 돋아나고 검은 반점이나 사마귀가 박혀있고 기색마저 어두우면 하는 일마다 막히고 장애물이 도처에 도사리고 있어 한 발짝도 앞으로 나가기가 힘들다. 현재의 운이 어떤지 알고 싶다면 인당 부위를 먼저 관찰하는 것이 좋다. 인당은 시험·학업·공명·문서운뿐 아니라, 성격·재물·배우자·자손 등의 운을 알 수 있는 매우 중요한 부위다. 인당에 흠결이 없고 눈썹이 가지런하고 정갈하면 천운이 동행하는 모습이니, 하는 일마다 성공을 거두며 운이 닿는 28세부터 크게 발복하여 공명 가도를 달려나가는 주인공이 된다. 인당이 너무 넓으면 시원시원해 보이나 치밀성이 부족하고 꼼꼼하지 못하여 잦은 실수를 많이 하게 된다. 인당이 너무 좁으면 치밀하고 계산적이며 꼼꼼한 일면은 있으나 사람됨이 옹졸하고 인색하며 화를 잘 내고 따지기를 좋아하며 소심한 일면이 많다. 인당에서 가장 꺼리는 것은 바늘이 서있는 듯한 형상인 현침문이 돋는 것인데, 현침문이 인당의 중심을 관통하면 그릇이 두 동강으로 갈라지는 것과 같으니 파산·이별·사고 등 큰 우환을 만나게 된다. 얼굴을 찡그리면 자연히 인당에 주름이 생기게 되는데, 작은 주름들은 그렇다 치더라도 현침문은 인상을 찡그리는 것만으로 생겨나는 것은 아니다. 관상학에서는 그 사람이 행한 선과 악의 과보에 따라 인과의 표상으로 생겨나는 것이라 말하고 있다. 어려서부터 현침문이 돋는 것은 전생의 과보이고, 후에 현침문이 생겨나는 것은 현생의 과보의 결과물이라 보고 있다. 욕심이 지나쳐 탐욕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고 원망을 듣게 되면 하늘이 내리는 징벌의 표상이라 말하는 관상가도 있는데, 틀린 말은 아니다. 이런 경우 갑자기 인생이 암흑기로 접어들어 건강에 장애가 생기거나 집안에 우환이 겹쳐 집안의 기둥이 뿌리째 흔들려 쇠락하기도 한다. 또 부모·형제 대립 쟁투로 처자를 극하고 생사 이별하게 되며, 재물파손에 심하면 파산의 지경에까지 이르게 되고 감당하기 힘든 재앙을 만나기도 한다. 또한 인당에 사람인(人), 여덟팔(八)자(字) 문양의 세로주름이 생겨나기도 하는데, 이런 경우에는 스트레스로 얼굴을 자주 찡그리거나 마음에 근심이 가득하면 자연히 인당 부위에 주름이 자리하게 된다. 이런 사람은 고집이 세며 배우자·형제운도 좋지 않으며, 잦은 실패로 고단하고 힘겨운 삶을 살아가는 사람이다. 나이가 들면 주름도 생기기 마련이고 특히 인당 부위에 자리하는 주름은 피해갈 수 없는 흔적이지만, 열심히 살아가는 사람들의 주름은 욕심과 탐욕으로 채워진 사람들의 주름과는 문양은 비슷하다 하더라도 그 기색을 달리한다. 이는 눈동자를 보면 알 수 있는바, 그 사람이 어떤 길을 걸어왔는지를 가름할 수 있는 중요한 인생의 이력이며 과보의 표상임을 하늘이 대신하여 일러주고 있는 것이다. 기억을 더듬어 살아온 길을 되돌아보면 눈빛이 어떤 모습으로 비치는지 스스로 자각하게 되는 것이다. 인상은 사람이 마음속에 품고 있는 생각이나 감정·기분 등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기 때문에 남을 해하고 속이려는 좋지 않은 생각을 품으면 말로 드러내지 않아도 사람의 인상에 그에 상응하는 상이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남을 돕고 배려하는 선(善)한 생각을 하게 되면 마음이 정한 이치에 따라 선한 상이 생겨나는 것이다. 따라서 말로는 숨기고 감추고 속일 수는 있어도 상은 속일 수가 없는 것이니, 상을 보면 그 사람의 마음가짐의 상태를 알 수 있는 것이다. 같은 선행이라도 자신의 이익을 위한 위장된 행동을 하는 일이라면 웃음 뒤에 가시가 숨겨져 있는 것이니, 면상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 표상이 그대로 나타난다. 따라서 현침문의 형상은 웃음 속에 가시를 닮았다 하는 것이니, 인간을 속이고 법을 속일 수는 있어도 하늘은 절대로 속일 수 없는 일이다. 양심은 곧 하늘이기 때문이다./김나인 한국역리연구소 소장김나인 한국역리연구소 소장

2019-04-07 김나인

[사자성어로 읽는 고전]무방무체: 일정한 방위도 없고 몸체도 없다

개개인이 지니고 있는 몸은 여러모로 시공간적 용량에 한계가 있다. 키가 아무리 커도 하늘까지는 닿지 못하고 식성이 아무리 좋아봤자 바다의 물을 다 마시진 못한다. 사람뿐 아니라 여타의 생명체도 마찬가지이다. 그렇게 드넓은 이 지구도 정해진 시한이 있으니 마찬가지이다. 어찌 보면 한량없다는 우주의 몸체도 성주괴공(成住壞空)의 윤회를 반복하면서 생멸을 한다 하니 마찬가지이다. 작은 개인이든 큰 우주든 간에 일체가 일음일양의 무상한 변화를 겪으니 이것을 주역에서 '일체는 고정된 몸체가 없고 작용하는 고정된 방위도 없다'고 정의하였다. 그러나 이렇게 어찌 보면 무상하고 허망하기도 한 이 표현을 한번 굴려서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바닷물에 포말(泡沫)이 일면 포말의 몸체는 바다 전체에 비교해보면 극소의 몸체라 할 수 있다. 또 포말이 일어났다 사라지는 작용을 보면 늘 일어나기만 하는 것도 아니고 늘 사라지기만 하는 것도 아닌 찰나의 무상성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바다 전체를 생각해볼 때 그런 현상은 동일한 몸체가 빚어내는 작용이다. 포말의 몸체에 국한하여 그 생멸의 작용을 생각해본다면 이보다 더 왜소하고 허무할 수가 없을 것이지만 바다 전체가 내 몸이라고 생각해본다면 포말의 기멸상은 그저 당연한 변화작용일 뿐이다. 우리는 바다와 같은 본래의 몸체는 꿈에도 보지 못하고 늘 기멸하는 포말 같은 몸체에만 집착하여 아상을 구축하며 살기 때문에 이런 진실을 보기 어렵다. 주역에서는 그래서 역(易)은 고정된 몸체도 없을 뿐 아니라 그 작용 또한 고정된 방위가 없다고 하였다. 양으로 나타나면 남자의 몸이고 음으로 작용하면 밤일 뿐 남녀 주야의 상은 고착된 것이 없다. /철산(哲山) 최정준 (동방문화대학원대학교 미래예측학과 교수)

2019-04-03 철산 최정준

[조성면의 '고서산책']천 년 전의 인생노래, 우마르 하이얌의 '루바이야트'

'음풍농주' 자유분방한 삶 예찬 詩'하이얌 시편' 저항감 없는 이유는 인생무상 읊조리며 풍류 즐겼던두목 같은 만당시에 익숙했기 때문가끔 허무주의·무상철학 느껴볼만지갑 속의 돈을 헤아리면서도 밤하늘의 별을 동경하는 게 우리 인생이다. 세상에서 살아가자니 돈 버는데 몰두할 수밖에 없겠으나 돈만으로 채워지지 않는 것이 인생이기에 더 힘들다. 돈을 벌지 않을 수도, 돈만 벌며 살 수도 없을 때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럴 때는 시 쓰고 술 마시는 음풍농주(吟風弄酒)가 제격이라 주장하는 천 년 전 페르시아의 시집이 있다. 한국에서 오머 하이얌, 오마르 하이얌, 또는 우마르 하이얌으로 읽히거나 적는 우마르 하이얌(Omar Khayyam, 1048~1123)의 4행 시집 '루바이야트'가 그것이다. '루바이야트(RUBAIYAT)'는 4행시를 뜻하는 페르시아어 '루바이'의 복수형이다. 대단히 금욕적이고 엄격할 것 같은 이슬람 사회에서 일천 년 전에 술과 인생무상과 자유분방한 삶을 예찬하는 시집이 나왔다는 것이 놀랍다. '루바이야트'는 1859년 영국 시인 에드워드 피츠제럴드(1809~1883)가 영역하여 비로소 서구 세계에도 알려졌다. 한국에서는 '한국 T. S. 엘리엇 학회장'을 역임한 김병옥 교수가 1973년 민음사에서 펴낸 초판본이 최초다. 이후 이상옥(1975), 김주영(1995), 권소향(2012) 등 다양한 번역본이 나왔으나 크기가 한 뼘도 안 되나 사막의 모래 빛깔로 장정한 1973년 김병옥 본에 왠지 더 애착이 간다. '루바이야트'를 남긴 우마르 하이얌은 시인이자 수학자이며 천문학자였다. 그의 생부가 천막을 만드는 일에 종사하였기에 '천막을 만든다'는 뜻의 하이얌이 성(姓)이 됐다. 세금을 부과하기 위해 직업을 성으로 삼는(혹은 부여하는) 언어관습은 세계적 현상이다. 가령 빵 굽는다는 뜻의 베이커(Baker), 방앗간 주인 밀러(Miller), 대장장이 스미스(Smith) 등이 그렇다. 이름은 그렇다 쳐도 개성적이고 도발적인 언어로 인생무상과 허무를 찬미하는 하이얌의 노래를 그대로 받아들여도 좋은 것인가.허무와 무상을 백안시하는 태도는 세월의 불가역성 앞에서 인생무상이라는 삶의 진실과 대면하기 싫은 회피심리 때문이거나 또는 이 같은 허무적멸 사상이 개인의 인생과 공동체 사회에 심각한 악영향을 끼칠 수 있을지 모른다는 윤리적 공리가 판단의 최종심급으로 작동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우리네 삶이란 고작해야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 같은 존재라는 '야고보'의 말씀이나 모든 게 "꿈, 환영, 물거품, 그림자와 같다"는 '금강경'의 일구는 쇼펜하우어적 염세주의를 찬미하려는 게 아니라 삶과 삼라만상의 본질이 이러하니 부질없는 욕망과 괴로움으로부터 벗어나라는 종교적 부정의 변증법이다. 하이얌의 시편들이 우리에게 저항감 없이 쉽게 읽히는 까닭은 두목(803~852)이나 두보(712~770) 같은 만당시(晩唐詩)에 익숙해져 있어서 그럴 것이다. 인생무상을 읊조리며 평생 풍류남아로 살았던 두목은 기생들 사이에서도 인기가 높아 항상 기생들이 던져준 귤이 수레 가득 채워질 정도라 귤만거(橘滿車)란 별명으로 불렸다. 장편 대하소설을 써내려가도 모자랄 파란곡절 많은 인생사를, 말과 글이 짧은 우리를 대신하여 촌철살인 같은 짧은 시편들에 잘 녹여 내는 두목의 공감주술력이 대단했음을 알 수 있다. 페르시아의 두목, 이슬람의 두보라 할 하이얌도 이에 못지않은 절창을 쏟아냈다. "어떤 이는 이 세상이 즐겁다 하고/ 어떤 이는 저 세상이 복되다 하나/ 나는 오늘만 있을 뿐 내일은 부질없다/ 먼 북소리는 듣기만 좋을 뿐"이라는 12번 루바이라든지 "아귀다툼의 인간사 속에서/ 우리는 얼마나 애태워 왔나/ 모두가 쓰고도 슬픈 열매인 것을/ 차라리 한 잔 술만 못한 것을"이라 한 39번 루바이는 무상철학의 극치인데, 오히려 그의 이 허무주의가 삶에 지친 우리에게 큰 위로가 된다. 모든 것을 경제적 가치로만 따지는 물신주의와 가파른 경쟁으로 귀중한 인생의 시간을 허비하는 생활에서 벗어나 가끔은 이러한 허무주의와 무상의 철학을 보감으로 삼아 음풍농주하며 음풍농서(吟風弄書)하는 시적 삶을 누려볼 일이다./조성면 문학평론가·수원문화재단 전통교육팀장조성면 문학평론가·수원문화재단 전통교육팀장

2019-03-31 조성면

[사자성어로 읽는 고전]혹읍혹가 : 울기도 하다가 노래도 부른다

사람 관계에서 믿음만큼 중요한 덕목이 또 있을까? 서로를 믿는다는 것은 상대적인 것이기 때문에 믿음과 관련해서는 대부분 상호신뢰나 상호불신의 양상을 보인다. 간혹 나는 상대를 믿지만 상대가 나를 불신하는 경우도 있지만 믿으면 서로 믿고 불신하면 서로 불신한다는 뜻이다. 주역에 믿음에 관한 이야기가 꽤 등장하는데 대표적인 것으로 중부(中孚)라는 괘가 있다. 괘상이 말하고자 하는 도리는 비움과 실질이다. 가장 기본적으로 마음을 비우는 것이 필요하다고 하였다. 나를 비운다는 것은 상호소통을 통한 신뢰를 구축함에 있어 욕심을 내세우지 말라는 뜻이다. 내가 욕심을 부리는 만큼 상대도 욕심을 부리게 되니 그러면 신뢰의 기반이 없어지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서로 비움의 문제가 어느 정도 전제되어야만 그 다음 실질적인 부분을 논할 수 있다고 하였다. 믿음에는 실질이 뒤따라야 한다는 뜻이다. 인간이 하늘을 걸어 올라갈 수 있다고 믿어본들 허황된 믿음일 뿐 실질이 따르지 않는다.상호 신뢰관계에 있어 먼저 서로의 마음을 비우고 실질을 추구하라는 당부이다. 이것이 정반대로 전개되면 상호 욕심을 꽉 채운 채 헛된 일만 따라오게 되니 욕심을 부릴 땐 이루어질 것 같아 웃으며 노래하지만 허사로 돌아가니 눈물을 흘리며 울게 된다. 신뢰에 관해 마치 미친 사람의 모양처럼 갈피를 못 잡는 모습을 혹읍혹가(或泣或歌)라 표현하였다. 복잡하면서 속도감 있는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겪기 쉬운 일상이니 지나친 욕심을 내려놓고 허황된 믿음도 버려야 할 것이다. /철산(哲山) 최정준 (동방문화대학원대학교 미래예측학과 교수)

2019-03-27 철산 최정준

[시인의 꽃]국화 옆에서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봄부터 소쩍새는그렇게 울었나 보다.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천둥은 먹구름 속에서또 그렇게 울었나 보다.그립고 아쉬움에 가슴 조이던머언 먼 젊음의 뒤안길에서인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내 누님같이 생긴 꽃이여.노오란 네 꽃잎이 피려고간밤엔 무서리가 저리 내리고내게는 잠도 오지 않았나 보다.서정주(1915~2000)세상에 까닭 없이 태어난 사람이 없듯이 그냥 피는 꽃도 없으리라. 결과에는 원인이 있고, 이 원인의 근원에는 인연이 있는 법. 만약 지금 당신이 꽃이라고 표상되는, 스펙트럼을 피어 올리고 있다면 그것은 분명 물리적인 관계에서 온 물질인 것. 봄에 마주하게 되는 '한 송이 국화꽃'은 '천둥'을 이기고, '먹구름'을 지나 존재의 형상을 영롱하게 보이지 않던가. 죽음의 입구에서 삶의 출구로 도전장을 내민 '노오란 네 꽃잎'에서 존재에 대한 비의와 경이로움에 감탄할 수밖에 없다. 그 배후는 '그립고 아쉬움에 가슴 조이던' 시절과 아픔을 건너온 '머언 먼 젊음의 뒤안길에서' 오는 것인 바, 그리움과 아쉬움이 깊을수록 젊음의 뒤안길은 그만큼 고통스러웠을 것이며, 그것의 출구는 기쁨과 환희로 배가 되지 않던가. 당신이 살고 있는 어두운 세상에 '무서리가 저리 내리고 잠도 오지' 않는 이유도 지금―여기 있으니, 꽃을 피우고 싶다면 진실로 자신을 세계에 내 던져야 하지 않겠는가. /권성훈(문학평론가·경기대 교수)권성훈(문학평론가·경기대 교수)

2019-03-25 권성훈

[권순대의 '대사 한 줄로 읽는 연극']기억해야만 했다, 이 이름들을

제주 4·3사건 다룬 '잃어버린 마을'30년전 사건에 묶인 '동혁의 삶'오태석의 '자전거' 윤정목도 유사현기영 '순이삼촌'·이산하 '한라산'…역사의 과정 아직도 못다한 말 많아마을이 사라졌다. 한 마을이 불타 사라졌다. 1949년 1월 제주 곤을동 마을이 토벌대가 지른 불로 사라졌다. 돌담과 집터만 남기고 이 땅에서 사라졌다. 연극 '잃어버린 마을'(부제: 동혁이네 포차, 충무아트센터 중극장 블랙, 2월 22일~4월 7일)은 4·3사건 동안 사라진 마을 중 하나인 곤을동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연극 '잃어버린 마을'은 두 축의 시간이 흐른다. 하나는 극 중 현재인 1979년의 시간이다. 다른 하나는 극 중 과거인 4·3사건이 일어난 시간이다. 두 축의 시간대가 교차하며 연극은 진행된다. 2019년의 관객은 동혁이 고향을 떠나지 못하는 사연을 발견하는 과정에서 4·3사건을 만나게 된다. 관객을 그 진실로 안내하는 출입문은 동혁과 아들 재구와의 갈등이다. 관객이 그 문을 열고 들어서게 되면 잃어버린 마을을 목도하게 된다.동혁의 삶은 30년 전 사건에 묶여 있다. 그는 마을에서 혼자 살아남았다. 후한 값을 치르겠다는 제안에도 땅을 팔지 않는 까닭은 그가 고향에 남은 마지막 사람이라서가 아니다. 나중에서야 밝혀지지만 그는 살고 싶어 서북청년단에 협력했다. 그가 불을 지른 것은 아니다. 그가 도착했을 때는 이미 마을이 사라지고 난 뒤였다. 그렇게 살아남았던 것이다. 그 후 30년 동안 그의 시간은 멈춰있다. 주변에서 "30년 지켰으면 됐다"라거나 "네가 붙들고 있는 게 뭔지 안다"라는 말로 이제 그만할 때도 되었다고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용서를 빌어야 할 사람이 없는 그 자리에서.연극 '잃어버린 마을'에 대한 평가는 다양할 수 있다. 피해자가 아닌 인물을 중심인물로 다룬다는 점에 대해 여러 의견이 있을 수 있다. 부정적 인물을 매력적으로 만드는 것이 얼마나 힘겨운 것인지를 보여주는 목록에 올릴 수도 있겠다. 그럼에도 동혁과 같은 인물이 연극사에서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니다. 지금까지 4·3사건을 다룬 연극이 극히 적다는 점, 제주도가 아닌 서울에서 공연한다는 점, 그리고 무엇보다 4·3사건에 대한 역사적 평가가 진행형이라는 점에서 동혁과 같은 인물을 형상화하는 것은 어쩌면 더 많은 사람들에게 말을 걸기 위한 시도인지도 모른다.연극 '자전거'(오태석, 1983)에도 유사한 인물이 나온다. '자전거'의 윤정목은 제삿날이 되면 사금파리로 자신의 얼굴을 긁는다. 한국전쟁 당시 등기소 방화사건이 있었고, 그 사건으로 많은 사람들이 죽는다. 그래서 제삿날이 같은 집이 마을에 허다하다. 윤정목이 30년이 지나도록 사금파리로 얼굴을 긁는 것은 어쩌면 용서를 구하는 일일 것이다. '잃어버린 마을'의 동혁이 "기억해야만 했다, 이 이름들을"이라고 읊조리는 까닭도 거기에 있을 것이다.4·3사건을 다룬 문학 작품의 목록은 아직 앙상하다. 그러나 1978에 발표한 현기영의 소설 '순이 삼촌'과 1987년에 발표한 이산하의 장편서사시 '한라산'은 큰 족적을 남겼다. 현기영은 "고모부님, 고모분 당시 삼십만 도민 중에 진짜 빨갱이 얼마나 된다고 생각햄수꽈?"라고 물었다. 이산하는 "오늘도 잠들지 않는 남도 한라산/ 그 아름다운 제주도의 신혼여행지들은 모두/ 우리가 묵념해야 할 학살의 장소"라고 노래했다. 저자 후기에서 그는 4·3을 "인간이 얼마만큼 인간일 수 있으며, 동시에 인간이 얼마만큼 인간이기를 포기할 수 있는지를 처절하게 보여준 사건"이라고 말했다.평화의 섬 제주로 가는 항해가 여전히 지난하다는 것을 연극 '잃어버린 마을'은 보여주고 있다. 4·3사건을 말할 수조차 없던 시절에서 우리는 과연 얼마나 멀리 나아갔는가를 묻고 있다. 4·3사건은 아직 숫자로 남아 있다. 숫자로 기록되는 사건을 넘어 그 이름을 얻는 역사의 과정에서 보면 이 연극이 조금은 다르게 보일지도 모르겠다. 그것은 아직도 다하지 못한 말이 남았기 때문이다. 말하지 못한 말, 말하는 동안 목구멍으로 눌린 말, 말한 후에도 혀끝에 달라붙어 있는 말, 그 모든 웅크린 말들이 온전히 날아오를 때 비로소 변방은 변방이 아닌 게 된다./권순대 경희대 객원교수권순대 경희대 객원교수

2019-03-24 권순대

[사자성어로 읽는 고전]집지실도: 집착하면 법도를 잃는다

내가 사물을 인식할 때 이미 나에게 익숙해진 방식으로 경험된 인식을 가지고 한다. 그리고 경험된 인식은 반드시 언어를 수반한다.멍하니 사물을 보는 것이 아니라 모양과 개념을 가지고 바라본다는 뜻이다. 이른바 명상(名相)을 초월해서 인식한다는 것은 일상의 인간 삶에서는 불가능하다. 무엇인가를 보고 듣는다는 것은 바로 무엇에 대한 모양과 개념을 업그레이드해서 재확인하는 과정이다. 어릴 때 개에게 물려본 경험이 있는 아이들은 성인이 될 때까지도 개를 보면 무섭다고 인식한다. 그러므로 한 번 주입된 인식은 잘 바뀌지 않는다. 바뀌기보다는 오히려 공고해진다. 예부터 내려오는 말에 첫인상이 중요하다는 것도 이런 이치이다.그런데 이전에 갖고 있었던 어떤 모양이나 개념에 익숙해지는 경향은 자칫 집착으로 이어질 수도 있다. 사물에 대해 판단할 때 사물도 변화하고 나도 변화한다는 변화의 가능성을 도외시할 수 있다는 뜻이다. 그렇게 되면 역의 이치를 벗어나게 된다. 뿐만 아니라 자신에게 손해를 끼치기도 한다. 예를 들어 어떤 회사의 주식에 투자할 때 그 회사에 대한 처음의 정보나 경제적 개념에 집착하게 되면 그 이후의 회사 흐름에 둔탁해질 수 있다. 회사는 조직이기 때문에 흥망성쇠를 겪으며 변화한다. 변화하고 있는 실제를 보지 못하면 그 자체가 투자자에게 손해로 다가온다. 나에게 인식된 어느 한 상태를 고정시켜 너무 집착하면 중도를 잃고 그렇게 되면 손해로 이어질 수 있다. /철산(哲山) 최정준 (동방문화대학원대학교 미래예측학과 교수)

2019-03-20 철산 최정준

[시인의 꽃]조화弔花

여기 호올로 핀 들꽃이 있어자욱-히 나리는 안개에잎사귀마다 초라한 등불을 달다아련히 번지는 노을 저쪽에소리도 없이 퍼붓는 어둠먼-종소리 꽃잎에 지다아 저무는 들가에 소복히 핀 꽃이는 떠나간 네 넋의 슬픈 모습이기에지나던 발길 절로 멈추어한 줄기 눈물 가슴을 적시다김광균(1914~1993)조화弔花는 고인에게 조의를 표하는 꽃으로서 삶의 한 가운데에서 죽음으로 가는 길목에 서 있다. 한번 가면 돌아오지 못하는 죽음의 초입에서 사계절 동안 하얀 옷을 입고 있는, 조화는 한 생명이 왔던 '순백의 시간'을 펼친다. 그리고 누구도 가로질러 갈 수 없는 죽음 앞에서 고개 숙여 애도하는 사람들을 맞이한다. 거기에서 인간은 세계라는 들판에서 '여기 호올로 핀 들꽃'처럼 내일이라는 미지의 '자욱-히 나리는 안개' 속에서 언제 꺼질 줄 모르는 '초라한 등불' 하나 달고 있는 생명체일 뿐이다. 이 순간도 '아련히 번지는 노을 저쪽에 소리 없이 퍼붓는 어둠'이 있다면, 그것은 '먼-종소리 꽃잎에' 지고 있는 누군가의 목숨인 것. "아 저무는 들가에 소복히 핀 꽃"을 보라. 그렇게 떠나간 이들의 '넋'이 슬프게 피어있지 아니한가. 이 봄날, 가슴에 묻은 사람들이 잊지 못해 하얀 그리움으로 당신을 찾아온 것이니. /권성훈(문학평론가·경기대 교수)권성훈(문학평론가·경기대 교수)

2019-03-18 권성훈

[조성미의 나무이야기]역사의 암흑기 시련을 함께 한 한반도 고유종 미선나무

3·1운동과 임정 수립 100주년우리나라에만 자생 고유식물미선나무, 관심 높아져 재조명학계에 처음 보고된 지 올해로 100년을 맞이했기 때문봄은 쉬이 오지 않는가 보다. 갑자기 찾아온 꽃샘추위로 인해 겨울의 그림자가 채 가시기도 전인 이른 봄 척박한 돌밭에서 단아한 흰색의 꽃을 피우는 미선나무는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더 큰 희망과 의지를 갖고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 온 우리 민족의 모습과 너무나 닮아있다. 올해 3·1운동과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아 우리나라에만 자생하는 고유식물인 미선나무에 대한 관심이 높아져 재조명되고 있는데, 미선나무도 학계에 처음 보고된 지 올해로 100년을 맞이했기 때문이다. 한 세기 동안 민족과 운명을 같이하며 역사의 암흑기를 이겨낸 한반도 특산식물 미선나무는 한국을 대표하는 나무이다.미선나무는 한국 식물학의 개척자인 정태현 박사에 의해 1917년 충북 진천 용정리에서 자생지가 발견되었고, 1919년 일본인 나카이 다케노신 박사에 의해 학계에 처음 보고되면서 한반도를 대표하는 특산식물로 전 세계에 알려졌다. 우리나라 나무 이름을 가장 많이 붙인 나카이 박사는 조선총독부의 지원 아래 한반도 전역의 식물에 대한 조사, 연구를 시행해 왔다. 미선나무와 개나리를 비롯한 327종의 학명에 '나카이'라는 이름이 들어가 있어 우리가 접하는 나무 이름에는 일제의 흔적이 지워지지 않고 아직도 남아 있다. 학계에 보고될 당시 미선나무는 일본 이름인 '부채나무'로 소개되었다. 미선(尾扇)이라는 이름은 대나무 줄기를 잘게 쪼개어 둥글게 펴고 실로 엮은 뒤 종이로 앞뒤를 바른 둥그스름한 모양의 부채로 미선나무 열매의 모양이 이 부채와 닮았다 해서 붙인 이름이다. 미선은 옛날이야기 속 왕이나 옥황상제 옆에서 시녀가 들고 있는 하트모양의 부채와 비슷하다고 생각하면 된다. 중국에서는 둥근 부채 같은 나무를 의미하는 '단선목(團扇木)'이라 부르며, 서양에서는 미선나무를 하얀 개나리를 뜻하는 '화이트 포르시시아(White Forsythia)'로 부른다.미선나무는 물푸레나뭇과의 낙엽이 지는 관목이다. 물푸레나뭇과에 속하지만 미선나무속에는 이 나무만 존재하는 1속 1종 식물로 그 어느 나라에도 없고 오직 우리나라에서만 자라는 아주 귀한 나무이다. 그 희귀성과 식물분류 및 분포학적인 가치가 높게 평가되어 전국의 자생지들은 천연기념물로 지정, 보호되고 있다. 충북 괴산과 영동, 전북 부안 변산반도 등 5곳에 있는 자생지는 모두 깊은 산속이 아니라 마을 가까운 산자락에 위치해 있다. 이 때문에 사람의 손을 쉽게 타서 수난을 당해 왔다. 특히 최초로 발견되어 천연기념물 14호로 지정되었던 진천의 자생지는 무단채취로 인해 훼손되어 1969년 천연기념물에서 해제되고 말았다. 미선나무는 볕이 잘 드는 산기슭에서 자란다. 다 자란 나무의 높이는 1∼1.5m 정도로 옆으로 가지를 많이 만들며 퍼진다. 가지는 끝이 아래로 처지며 자줏빛이 도는 반면 새로 난 어린 가지는 둥글지 않고 네모난 것이 특징이다. 3월에 피는 꽃은 그 어느 꽃과 견주어도 손색이 없을 만큼 화사하고 아름답다. 꽃 모양은 개나리를 닮았지만 꽃이 좀 작고 하얀색이며 개나리보다 더 일찍 개화한다. 줄기를 타고 수북하게 피어나는 꽃은 일정한 간격으로 층을 이루며 한 자리에 서너 개에서 십여 개의 꽃들이 모여 달린다. 미선나무 꽃은 향이 없는 개나리와는 달리 지나가는 사람의 발길을 붙잡을 만큼 매우 달콤하고 좋은 향기가 난다.꽃이 먼저 피고 난 후에 나오는 잎은 가지 양쪽에 마주 보며 달리는데 끝이 뾰족하고 밑부분은 둥글며 가장자리는 밋밋하다. 미선나무는 꽃도 아름답지만 꽃이 지고 난 뒤 맺히는 열매는 더욱 매력적이다. 9월쯤 익는 얇고 납작한 열매는 가운데 두 개의 종자가 들어있고 둘레 부분이 얇은 날개 역할을 해 바람을 타고 날아갈 수도 있게 만들어졌다. 미선나무는 꽃이나 꽃받침의 색, 열매의 모양에 따라 구분해 부르기도 한다. 분홍꽃이 달리면 분홍미선나무, 상아색 꽃이 피면 상아미선나무, 꽃받침의 빛깔이 푸른 것은 푸른미선나무, 열매 끝이 오목하지 않고 둥근 것은 둥근미선나무로 부른다. 최근에 각종 연구에서 미선나무 추출물이 미백과 주름 개선 효과가 있는 것으로 밝혀져 화장품과 비누, 탈모방지샴푸 등에 사용되고 있다./조성미 산림조합중앙회 홍보실장조성미 산림조합중앙회 홍보실장

2019-03-17 조성미

[풍경이 있는 에세이]어느 긴 새벽에 대하여

우린 제마음 읽는법 배워본적 없다마흔 넘도록 선택할 땐 손끝 파르르내가 다섯살짜리 키우기 벅찬시대열여덟살 엄마가 갓난아이 키우는데'좋은시절 금방 온다' 헛된꿈도 못꿔집 근처에는 김밥집이 한 곳 있다. 내 손바닥 반만 한 길이로 말아주는 꼬마김밥집인데 메뉴가 수십 가지다. 햄치즈 김밥, 제육 김밥, 낙지 김밥, 게살 김밥 등등 고르는 데에도 머리통이 어지러울 지경이다. 한 줄에 천 원. 두 줄을 주문하면 내 속에 딱 맞았다. 그날 김밥집 문을 열고 들어갔을 때 한 손님이 막 나가던 길이었고 나는 김밥 진열대 앞에 서서 "아줌마, 불오뎅 김밥 두 줄 주세요." 그러면서 이천 원을 건넸다. 주인아줌마는 약간 골이 나 있었다. "아니, 지가 매운 걸 시켜놓고 맵다고 야단이면 어째?" 나는 좀 뜨끔했는데 생전 먹지도 않던 매운 음식이 당겨 마침 불오뎅 김밥을 주문한 참이었기 때문이었다. 아마도 막 나간 그 손님이 매운 걸 먹다 말고 투덜거린 모양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나는 그 조막만 한 김밥들을 절반도 먹지 못했다. 매워도 너무 매웠다. 주인아줌마 눈치가 보여 기를 쓰고 먹어보려 했지만 별 수 없었다. 슬그머니 반 넘어 남긴 접시를 두고 일어서는데 딱 걸렸다. "왜? 매워? 매워서 못 먹겠어?" 나는 얼른 고개를 흔들었다. "아뇨! 배가 불러서요!" 그러고 보니 며칠 전에도 그랬다. 늘 가던 콩나물국밥집이었는데 그날도 희한하게 매운 국물이 먹고 싶어서 처음으로 매운 콩나물국밥을 주문했다. 역시나 나는 반도 먹지 못했다. 내가 절절 매니 깍두기를 더 주러 다가왔던 아줌마가 혀를 끌끌 찼다. "그러게 왜 먹지도 못하면서 매운 걸 시킬까나? 그냥 먹던 대로 먹지." 분명 내 입맛이, 내 마음이 시키는 대로 한 것인데도 무언가를 주문하면서 실패를 거듭한다. 아기 내복이나 좀 살까 싶어 들어갔던 인터넷쇼핑몰에서 봄 원피스를 만원도 안 되는 가격에 팔기에 나는 열 벌도 넘게 샀다. 백화점에 가면 한 벌도 못 살 값이었다. 옷감이 좀 후지더라도, 디자인이 좀 촌스럽더라도 어차피 아이들은 쑥쑥 자라니 만원 값만 하면 된다 생각한 거였다. 하지만 막상 배송이 된 옷들을 쳐다보자니 한숨이 절로 났다. 정말 딱 만 원짜리들이었다. 이걸 입혀 어딜 데리고 나가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만 원 값만 하면 된다 해놓고는 이 무슨 변덕이람. 옷장 속에 개어 넣으면서 이 옷들을 정말 입히게나 될까, 싶었다. 매운 걸 시켜서 매운 음식이 나왔고, 만 원짜리 옷을 사서 만 원짜리 옷이 온 걸 나는 어쩌자고 후회하고 있는 걸까. 다 내가 고른 것인데.친구는 새벽녘 전화를 걸어왔다. 그녀의 울음은 쉽게 잦아들지 않았다. 여고 2학년 딸이 아기를 낳겠다고 결정했다는 것이었다. 딸의 마음은 확고하고 단단해서 더는 어쩌지 못하겠다 말하며 그녀는 펑펑 울었다. 알겠다고, 돕겠다고 말은 했다는데 아직 제 마음이 그걸 받아들이지 못하겠다 했다. 내 딸은 아직 다섯 살이라 나로서는 상상도 안 갈 일이었다. 친구의 딸이 마음을 이미 다졌다니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 아이를 응원하는 일뿐이었다. "꼭 전해줘. 이모가 응원한다고. 어려운 일 있으면 언제든 얘기하라고도 전해줘." 고작 엄마 친구가 응원하는 일이 그 아이의 인생에 무슨 도움이 될까. 하지만 다른 건 해줄 것이 없어서 나는 그 말만 바보처럼 되풀이했다. 친구가 말했다. "난 마흔도 넘었지만 내 선택을 온전히 믿지 않아. 아직도 내 선택을 내가 이해하지 못할 때가 많아. 그런데 그 앤 고작 열여덟 살이야. 그 앤 정말 제 선택을 믿고 있는 걸까? 이왕이면 그 애가 끝까지 제 선택을 스스로 믿었으면 좋겠어. 하지만…… 그럴 수 있을까?" 제 마음을 제대로 읽어내는 법, 우리는 그런 것을 배워본 적이 없다. 배워서 될 일이 아니겠지만. 친구의 말처럼 나 역시 마흔도 넘었지만 무언가를 선택할 때마다 손끝이 파르르 떨릴 때가 많다. 살아도, 살아도 익숙해지지가 않는다. 이렇게 나이를 먹고도 여태 무능한 나를 반성하느라 나는 친구의 전화에 집중하지 못했다. 마흔이 넘은 내가 다섯 살 아이를 키우기도 벅찬 시대인데, 갑자기 천지개벽해 열여덟 살짜리 엄마가 갓난아기를 키우기 좋은 시절이 금방 오리라는 헛된 꿈을 꾸지도 못했다. 새벽은 길었고 친구의 울음도 길었다. 무섭도록 긴 밤이었다./김서령 소설가김서령 소설가

2019-03-14 김서령

[사자성어로 읽는 고전]제출호진: 임금이 동방에서 출현한다

아직 아침저녁으로 남아있는 한기는 있지만 그렇게 추웠던 날이 가고 꽃이 피어나는 계절이 왔음을 실감한다. 봄의 상징인 꽃들이 피어나는 것을 보면서 마음도 하나 둘 열리는 느낌인데 제출호진(帝出乎震)이라는 구절이 떠오른다. 동양에서 지리를 볼 때 전통적으로 사용해온 나침반이 패철인데 지남철이기 때문에 '쇠'라고도 부른다. 이 지남철은 말 그대로 남향을 가리키는 쇠이다. 이 지남철을 가지고 방위를 보고 길흉을 따진다. 지남철에 정해진 방위의 원리는 주역이라는 고전에서 유래한다. 주역에서 유래한 방위를 보는 방법은 남방(南方)을 정면으로 향해 서있을 때를 기준으로 삼는다. 그랬을 때 동서남북 사방만 따지자면 남방이 앞의 이괘(離卦)이고 북방이 뒤의 감괘(坎卦)이다. 동방이 왼쪽의 진괘(震卦)이고 서방이 오른쪽의 태괘(兌卦)이다. 동서남북의 사방은 각자 지니고 있는 개성이 있으며 동시에 시간적 의미도 포함한다. 동방을 예로 들면 해가 떠오르는 방위이지만 시간으로 보면 하루 중 해가 떠오르는 아침에 해당하고 한 해로는 생명의 싹을 지표에 내는 봄에 해당한다. 예로부터 해는 임금의 상징이기 때문에 임금이 동방에서 출현한다는 말은 해가 동쪽에서 떠오른다는 뜻이다. 그래서 제출호진(帝出乎震)이라 하였으니 동방은 해가 떠오르는 곳이고 해가 떠오름에 따라 만물이 소생해 나오는 때라는 의미를 함축한 표현이다. 그런데 이 말을 한 때 우리나라에서 위대한 성군이 출현한다는 비사( 辭)로도 사용했었다. 예로부터 우리나라를 진단(震檀)이라 하는데 震은 중국의 낙양에서 볼 때 동쪽을 뜻하고, 檀은 우리나라의 시조인 단군을 뜻하는 말이다. 굳이 비사가 아니라 하더라도 봄을 맞아 누구에게나 잠재해있는 태양처럼 밝은 상제(上帝)의 마음과 힘이 출현하기를 바라본다. /철산(哲山) 최정준 (동방문화대학원대학교 미래예측학과 교수)

2019-03-13 철산 최정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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