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가칼럼

 

[시인의 꽃]밤은 영양이 풍부하다

무르익은/과실의 밀도密度와 같이/밤의 내부는 달도록 고요하다.//잠든 내 어린것들의 숨소리는/작은 벌레와 같이/이 고요 속에 파묻히고,//별들은 나와/자연自然의 구조에/질서 있게 못을 박는다.//한 시대 안에는 밤과 같이 해체解體나 분석分析에는차라리 무디고 어두운 시인들이 산다. 그리하여 토의의 시간이 끝나는 곳에서밤은 상상으로 저들의 나래를 이끌어 준다.//꽃들은 떨어져 열매 속에/그 화려한 자태를 감추듯……//그리하여 시간으로 하여금새벽을 향하여 이 풍성한 밤의 껍질을 서서히 탈피케 할 줄을 안다.김현승(1913~1975)봄에 떨어진 꽃들은 깊어져 가을에 열매를 수확한다. '달도록 고요한' 그 열매의 내부는 밤과 같이 무르익고 밤과 같이 어둡다. 이때 밤은 '과실'이며 동시에 '어둠'으로서 시의식을 통해 배태된 양가적 상징물이 된다. 그러기에 밤은 밤이면서 밤이 아니지만 둘 다 "자연自然의 구조에/질서 있게 못을 박는" 거스르지 못하는 자연의 이치로서 전적으로 그것을 바라볼 수 있는 시선에 달려있다. 이것은 구조학의 해체 또는 논리학의 분석으로 이해할 수 없는, 시인의 '무디고 어두운' 밤의 시간으로서 '상상으로 저들의 나래를 이끌어' 비로소 밤은 밤으로서 관통하며 밤을 초월할 수 있게 된다. 따라서 "꽃들은 떨어져 열매 속에" 보이지 않지만 숨겨진 "그 화려한 자태를" 감각할 수 있는 자만이, 이 가을 "풍성한 밤의 껍질을" 밤바다 벗기며 모든 사물이 비롯된 '새벽을 향하여' 근원에로 다가설 수 있는 것이다. /권성훈(문학평론가·경기대 교수)권성훈(문학평론가·경기대 교수)

2018-10-22 권성훈

[권순대의 '대사 한 줄로 읽는 연극']질문이 곧 답인데…

연극 '오이디푸스…' 관객 능동적 위치 전환배우가 의문 던지면 함께 공론장 참여 형식사회성숙도 힘 아닌 대화로 갈등 조정 직조지연·중지담론 경계 질문 그치면 진실 닫혀지난 10월 11일부터 14일까지 대학로 예술극장 소극장에서 극단 놀땅의 '오이디푸스-알려고 하는 자'(2016년 초연) 공연이 있었다. 오이디푸스는 소포클레스 이후 여러 이미지로 변주되어 온 인물이다. 스스로를 희생하여 역병에서 도시를 구하는 인물, 눈이 멀어 볼 수 없으나 통찰력을 지닌 인물, 왕을 죽이고 왕이 된 인물, 그리고 은폐된 진실을 조사하는 인물 등 시대와 작가에 따라 다양하다. 극단 놀땅의 오이디푸스는 그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질문하는 자로 조사하는 인물에 가깝다. 올해로 세 번째인 이번 공연은 우리 사회가 왜 오이디푸스를 다시 호명할 수밖에 없었는지에 대해 말하고 있다.연극이 시작하면 무대는 광장으로 바뀌고, 관객은 시민의 역할을 부여받는다. 아니다. 도시의 광장에 시민이 모이자 비로소 연극이 시작한다. 광장으로 바뀐 무대에서 관객은 처음에는 관찰자의 위치에 놓이게 되지만 연극이 진행되면서 참여자의 위치로 점차 옮겨가게 되며 종국에는 배심원의 자리에 앉게 된다. 무대의 배경은 세월호 이후 역병이 창궐한 도시이다. 눈이 먼 거지로 등장하는 오이디푸스가 의문을 던지면 관객은 배우와 함께 공론장을 만들게 된다. 우리 사회가 생명과 인간의 존엄성을 존중하는 사회로 전환하였는지 아니면 생명과 안전을 경시하는 사회에 여전히 머물러 있는지에 대해 관객이 답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으로 연극은 끝난다.샤츠슈나이더는 정치가 갖는 역동성의 기원이 갈등에 있다고 주장하며 갈등을 민주주의의 엔진으로 보았다. 그에 따르면 정치의 과정과 결과는 갈등을 구성하는 네 가지 차원(범위, 가시성, 강도, 방향)에 달려 있다. 그 중에서 갈등의 범위는 누가 그리고 얼마나 많은 사람이 갈등에 관여하는가의 문제이다. 관찰자의 위치에 있던 사람이 행위자로 참여하게 되면 힘의 균형에 변화가 생긴다. 기존 질서의 힘에 균열을 가해야 하는 약자는 다수가 개입하도록 해서 갈등의 범위를 확장하여야 한다. 연극 '오이디푸스-알려고 하는 자'가 관객을 수동적 위치에서 능동적 위치로 전환하는 형식을 가져온 까닭이 여기에 있다.질문이 사라진 사회는 얼마나 위태로운가. 질문하지 않는 사회는 겉으로 평온해 보일지 모른다. 그러나 질문이 없어 역동성이 사라진 사회는 죽은 사회이다. 문제의 심각성은 사라진 질문으로 인해 갈등마저 없는 것처럼 보이게 하는 데 있다. 극 중에서 오이디푸스가 아무리 "질문이 곧 답인데…"라고 외쳐도 시민이 나서지 않는다면 아무 소용이 없는 것처럼 말이다. 무대가 광장이나 교실로 바뀐다고 해서 달라질 것은 없다. 한 사회의 성숙한 정도는 그 사회가 갈등을 조정하는 과정에서 드러난다. 물리적 힘에 의한 해결이 아니라 대화를 통한 갈등의 조정 과정에서 그 사회의 빛과 그늘이 직조하는 무늬가 그려지기 때문이다.갈등의 사회화 과정에서 경계해야 하는 대표적인 두 목소리는 지연과 중지의 담론이다. 지연의 담론은 "당신에게 권리가 있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다"라고 말한다. 몫의 배분을 결정하는 현재의 조건을 아직은 바꿀 때가 아니라고 말하며 미래로 지연시킨다. 중지의 담론은 "당신은 할 만큼 했다. 그러므로 이제 그만하라"라고 말한다. 이미 충분히 노력했으니 이제 어쩔 수 없고 우리는 지쳤다고 말하며 현재에서 중지시킨다. 두 담론 모두 지금의 경계선을 유지하려는 목소리이다. 갈등의 범위를 확장하고 그 방향을 전환하려는 주장을 무력화하는 것이다. '오이디푸스-알려고 하는 자'는 주로 후자의 담론을 극장으로 가져와 관객과 함께 토론하는 연극이다.질문이 그치면 진실의 문은 닫히고 만다. 진실의 문을 여는 질문의 힘은 '오이디푸스-알려고 하는 자'의 초연이 있던 2016년 겨울에만 유효하지 않다. 광장에서 촛불과 외침이 잦아들었다고 해서 물어야 마땅한 질문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아직 우리 사회가 세월호 이후 생명안전사회의 건설로 전환하지 못했다면 더욱 그러하다./권순대 경희대 객원교수권순대 경희대 객원교수

2018-10-21 권순대

[사자성어로 읽는 고전]상기자부: 재물과 권력을 잃는다

인생이 나그네란 말이 있다. 나그네란 주인과 달리 여기저기 떠돌아다니는 존재이다. 그렇게 떠돌아다니기 때문에 한 곳에 영원히 상주하질 못한다. 먼 길을 떠나 여기저기 돌아다녀야 하는 여행자의 숙명을 지닌 나그네는 임시적으로 머물 여관과 같은 곳이 있어야 한다. 먼 길을 돌아다니려면 여행경비가 필요한데 옛사람들은 노자(路資)라고 불렀다. 자부(資斧)에서 자(資)는 본래 노자를 뜻하는데 이 노자가 재물의 뜻으로 통용되었다. 또 나그네에게는 초행길이 익숙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 신변에 위협을 가할 요소들이 산재해있다. 그래서 옛날 나그네 길에 자기 몸을 보호하는 차원에서 도끼를 지니고 다녔는데 도끼는 육체의 힘을 강력하게 연장하는 효과를 지니기에 권력의 뜻으로 통용되었다. 나그네의 자부(資斧)가 인생 나그네들에게 재물과 권력의 의미인 것이니 사람들의 경제적·정치적 권력을 상징한다. 개인이든 국가든 때로 이런 힘을 얻을 수도 있고 잃을 수도 있는데 주역에서는 그런 힘을 잃는 이유에 대해 이야기해준다. 권력을 잃는 이유에 대해서 그 자체에서 답을 제시하고 있다. 권력의 권(權)은 저울질의 뜻으로 시세의 무게를 잘 달아보면서 쓰는 것이다. 시세의 무게를 달아보기 위해서는 저울을 가감도 해보고 위치도 좌우로 변경해보면서 때에 적절한 저울질을 해야 하는데 그것을 못하면 권(權)을 잃은 것이고 힘만 억지로 지탱하려는 꼴이 된다. 때와 장소가 달라지면 그 방법을 달리해야 그 자부를 잃지 않지 만약 획일적 방법만 고집한다면 잃어버리기 쉽다. 특히 지금처럼 가속도가 붙은 시대에서 국가나 기업의 경제와 정치력을 상실하지 않기 위해서도 그럴 것이다. /철산(哲山) 최정준 (동방문화대학원대학교 미래예측학과 교수)

2018-10-17 철산 최정준

[사자성어로 읽는 고전]수출서물: 여러 인물에서 하늘이 출현한다

하늘은 생명활동이 가능하도록 시간도 베풀어주고 공간도 만들어준다. 그러기에 공자도 하늘은 아무 말 없이 세월을 운행하며 모든 생명을 생육시킨다고 찬탄하면서 자신도 하늘처럼 살고 싶다고 하였다. 주역에서 하늘은 인체의 머리로 비유된다. 형상의 차원에서 볼 때 머리는 인체의 꼭대기에 있으면서 둥근데 하늘도 위에 있으면서 둥글게 인식되어왔다. 그 성격의 차원에서 볼 때 머리에는 우리의 생각을 통솔하는 뇌가 있는데 하늘은 땅과 대비될 때 형이상적으로 규정된다. 그래서 하늘 천자의 옛 글자를 보면 사람의 형상에서 머리를 부각시켜놓았다. 우리나라에는 사람이 곧 하늘이라는 생각이 오래전부터 내려왔는데 일맥상통한다고 볼 수 있다. 문제는 사람 속에 내재되었다고 여겨지는 하늘을 어떻게 인식하고 어떻게 발현시켜 써먹을지에 관한 것이다. 내 속에 있는 하늘만이 진짜라고 우기면서 싸워오고 지금도 싸우는 것이 인간 종교전쟁의 역사임을 돌이켜보면 하늘은 생각하기도 싫은 이름이다. 주역에서는 하늘은 한사람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고 평범한 여러 사람들인 서물(庶物)에 내재되어있으니 평범한 여러 사람들에게서 출현해야만 세계에 평화가 온다고 하였다. 어느 한 사람의 구세주가 나타난다 해서 이 세상에 평화는 오지 않는다. 게다가 겉으로만 평화를 말하고 속으로는 싸움을 그치지 않으면서 하늘을 전파하는 행태로는 이 세상에 평화는커녕 재앙만을 재촉할 것이다. 공자는 하늘은 모든 사람 속에 있고 다양하고 평범한 여러 사람 속에서 하늘이 출현할 때만이(首出庶物) 온 세상에 진정한 평화가 올 것이라고(萬國咸寧) 하였다. /철산(哲山) 최정준 (동방문화대학원대학교 미래예측학과 교수)

2018-10-10 철산 최정준

[사자성어로 읽는 고전]각종기류: 각기 그 부류를 따른다

끼리끼리 모인다는 말처럼 사람들의 모임은 관찰해보면 그 모임에 소속된 사람들끼리 무언가 서로 비슷한 점이 있다. 정치판을 보면 선명하게 드러난다. 여당과 야당의 행태를 보면 대체로 일정한 사안에 대해 서로 대립각을 세우는데 끼리끼리 모여들었기 때문이다. 동양의 고전에서는 사람들이 끼리끼리 모여서 생각을 공유하고 비슷한 행위를 하는 원형을 자연계에서 찾는다. 동물도 물에 모여 사는 물고기들은 비늘이 있고 하늘을 날아다니는 새들은 날개가 있다. 이런 도리를 "솔개는 하늘을 날아다니고(鳶飛戾天) 물고기는 연못에서 헤엄치며 뛰고 있구나(魚躍于淵)!"하고 시로 읊조린다. 중용에서는 이런 도리는 모두 상하의 천지에 근본을 둔 것이라고 보았다. 주역에서는 끼리끼리 모여들고 따르며 감응하는 도리를 여러 가지 차원에서 구분해서 표현하였다. 사람이나 새나 물고기는 눈에 보이는 것들이지만 귀에 들리는 소리를 통해서도 이런 도리는 드러난다. 겨울철 동지(冬至)가 되면 음악에서 황종(黃鐘)이라는 율관이 상응하여 동지의 음률을 낸다. 이것이 해당부류의 소리가 감응하는 동성상응(同聲相應)이란 것이다.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의 근저에는 기(氣)의 운동이 있으니 기(氣)의 운동이 상호 감응하는 성질을 지니고 있기에 보고 듣는 현상계의 상호감응도 가능하다. 해당 부류가 기의 차원에서 상호 추구하는 것을 동기상구(同氣相求)라 한다. 본질적인 기(氣)가 다르면 드러나는 소리나 색이 다르고 다른 부류끼리 모여서 활동하니 자연 당파(黨派)가 생긴다. 그러니 당파끼리 매일 앙앙대며 싸우는 것은 당연한 일이며 이런 건 지나온 역사가 증명한다. /철산(哲山) 최정준 (동방문화대학원대학교 미래예측학과 교수)

2018-10-03 철산 최정준

[시인의 꽃]꽃들, 바람을 가지고 논다

꽃들, 줄기에 꼼짝 못하게 매달렸어도바람들을 잘도 가지고 논다.//아빠꽃 엄마꽃 형꽃 누나꽃 따라/아기꽃 동생꽃 쌍둥이꽃바람들을 잘도 가지고 논다.//바다에서 파도를 일으키며 놀던 바람도산속에서 바윗덩이를 토닥이며 놀던 바람도공중에서 날짐승을 날게 하던 바람도//꽃들 앞에선 오금을 쓰지 못한다./꽃들 앞에선 그 형체까지를 잃는다.//팔다리 몸통 줄기에 붙들렸어도그 자태만으로 바람의 팔다리를 묶으며그 향기만으로 바람의 형체를 지우며//잘도 가지고 논다.잘도 달래며 논다.조태일(1941~1999)오래 기억되는 시일수록 사람들을 놀라게 한다. 이런 시는 기존의 상식을 깨뜨리고 고정된 의미를 변화시켜 새롭게 만든다. 우리가 아는 한, '바람'은 불어오는 것이며, 바람을 맞이하는 사물의 움직임을 통해 그것의 방향과 세기를 감지한다. 그런데 이미 구축된 바람에 관한 인식을 "꽃들, 줄기에 꼼짝 못하게 매달렸어도/바람들을 잘도 가지고 논다."라고 함으로써 우리는 바람을 낯설게 보게 되는 것. 이제 바람이 주체가 아니라, 꽃이 주체가 되는바, 바람이 꽃을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꽃이 바람을 움직이는 것이 된다. 그렇다면 '바다' '산속' '공중'을 가지고 놀던 거대한 바람이라는 존재는 '꽃들 앞에선 오금을 쓰지'못하고 '그 형체까지를 잃어버리는 것' 시는 바로 이러한 역발상을 통해 사람들의 '팔다리 몸통 줄기에' 붙어 있는 고착된 생각을 해체하는 것이다. 따라서 시는 기호의 "그 자태만으로" 의미의 "그 향기만으로" 언어가 시작된 이래 변함없이 우리를 "잘도 가지고 논다./잘도 달래며 논다."라고 할 수 있다. /권성훈(문학평론가·경기대 교수)권성훈(문학평론가·경기대 교수)

2018-10-01 권성훈

[주종익의 '스타트업']1조달러 스타트업

애플은 스타트업 DNA를언제나 유지하길 바라겠지만스타트업에서는 닮지 않았으면… 처한 환경 다른 비밀주의 경영얼마나 갈 수 있을지 궁금하다1조 달러라면 세계 최대의 초대형 기업인데 신생초기 기업인 스타트업이라니? 나는 애플을 이렇게 정의한다. 애플에는 스타트업 DNA가 아직도 살아있기 때문이다. 1조 달러라면 엄청나게 큰돈이다. 우리나라 2017년도 국민 총생산액이 약 1조5천억 달러 정도이니 우리나라의 GDP의 70%에 달하는 금액이다. 애플은 2018년 8월 2일 최초로 시가총액 1조 달러를 달성했다. 최근(9월 4일)에 아마존도 한때 1조 달러를 돌파하였으니 애플과 아마존의 주식을 팔면 우리나라 증권시장에 등록된 모든 회사를 다 사고도 남는 금액(2017년 우리나라 증시 시가총액은 1조7천억 달러 정도임)이다. 12만3천명(2017년 Annual Report)의 거대한 기업이 어떻게 스타트업과 같이 민첩하고 일에 대한 독기가 빠지지 않았을까? 통상 배부르고 등 따시면 게을러지고 놀고 싶고 폼도 잡고 싶고 거드름도 피우고 위험은 피하려고 할 텐데 아직도 혁신과 도전과 오기가 여전하다. 애플의 기업문화가 그렇다애플은 최고 최상의 상품을 골동품 만들듯이 예술적이고 모두가 갖고 싶지만 아무나 가질 수 없는 명품주의를 고수하는 회사이다. 스타트업 성공의 요인 중에 가장 중시하는 것이 바로 남과 다른 차별화된 제품을 만드는 것이다. 스티브 잡스가 애플 제품을 개발한 천재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개발을 직접 한 것은 없다. 스티브 잡스의 천재성은 제품 개발에 있지 않다. 그의 천재성은 좋은 사람을 끌어오고 아이디어를 훔쳐다가 남들이 생각 못 한 부족한 부분을 집어넣어 전혀 새로운 창의적인 제품을 만드는데 인문학적인 통찰력과 디자인 우선 전략을 수립해서 불도저처럼 밀고 나가는 능력에 있다.애플은 경영학 교과서를 따르지 않는다. 권한이양이나 자율경영 보텀업(Bottom up·하부의견수렴) 정보공유 등등 경영기본 원칙을 따르지 않는다. 스타트업도 경영학이 상당기간 필요가 없다. 그러나 스타트업은 고객의 요구를 철저히 따르도록 하지만 스티브 잡스는 고객은 무지하기 때문에 물어볼 필요 없다는 주의다. 애플에게만 맞는 말이다. 왜냐하면 이 세상에 없는 것을 만드니 고객이 그 물건을 알 리가 없다.애플 직원은 자기일 이외는 알려고 할 필요가 없다. 직원도 들어가지 못하는 비밀 장소가 칸막이처럼 쳐져 있다. 세상에 없는 최고의 것을 만들려면 비밀주의는 어쩔 수 없다. 경영학 교과서에 있는 대로 민주적이고 차별 없는 자율적인 조직으로는 안될 것이다. 그 대신 최고의 대우를 해주고 정해진 목표와 일정은 칼같이 맞춰야 한다. 애플에 친구가 있어도 자유스럽게 못 만난다. 만일 기밀이나 내부이야기를 잘못하면 모가지가 잘린다. 톱 다운(Top Down·시키는 대로 하기)은 똑똑한 경영자가 깃발을 들고 나만 따라오면 된다고 생각하는 능력 있는 사람들이 하는 경영이다. 미국의 유수한 기업은 모두 회장이 직접 스타트업을 시작해서 키워낸 사람들이라 실무자보다 더한 마이크로 경영을 할 수 있다. 그러나 한국의 회장은 막강한 권한은 있지만 해본 경험이 없으니 참모진의 의견을 자기 것 화하는 사람들이다. 한국과 미국은 회장의 질이 다르다. 삼성이 2016년 3월 스타트업 삼성을 선언했다. 왜 하고많은 단어 중에 스타트업을 택했을까? 삼성은 애플과 같은 스타트업 DNA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독기가 빠졌다고 회장은 느꼈다는 뜻이고 애플을 본 것이다. 그러나 애플은 다니고 싶은 회사는 절대 아니다. 태릉 선수촌과 같은 회사이다. 다녀야만 하는 회사이다.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따고 싶으면 태릉선수촌에 들어가지 않고는 죽어도 딸 수가 없다. 아침 4시에 일어나서 불암산을 수도 없이 오르내려야 하고 자동차 타이어를 허리에 매고 운동장을 돌지 않으면 금메달은 생각도 말아야 한다. 땀을 3t이던 4t이던 흘려야 가능한 것이다. 애플은 그런 계륵 같은 곳이다. 삼키기는 싫고 뱉어내자니 아깝고.애플은 스타트업 DNA를 언제까지나 유지하기를 바라겠지만 스타트업은 애플을 닮으려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처한 환경이 다르다. 애플은 애플 하나로 족하다. 또 하나의 애플은 없다. 애플의 명품 비밀주의 경영이 얼마가 갈수 있을지 궁금하다./주종익 서울창조경제혁신센터 대표멘토·외대 외래교수주종익 서울창조경제혁신센터 대표멘토·외대 외래교수

2018-09-30 주종익

[사자성어로 읽는 고전]명야유성: 천명이지만 본성이 있다

한 일 없이 가을밤에 보름달만 쳐다본 것이 벌써 몇 해인가? 생각이 심각해지니 오늘은 인간의 본질적 주제인 천명과 본성에 대해 소개해본다. 성명(性命)은 동양철학의 핵심주제이며 인간의 본질에 관한 화두이다. 성(性)은 성리(性理)적 의미인데 누구나 지니고 있는 궁극적으로는 동일한 존재로 파악된다. 이에 비해 명(命)은 기수(氣數)적 의미인데 사람마다 다 다르게 타고난 이질적 존재로 파악된다. 성(性)이 일체를 수용하는 자유에 가깝다면 명(命)은 일정한 절도가 있는 구속에 가깝다. 본성은 사람이 얻고자 노력하면 얻어질 수 있는 것이지만 명은 얻고자 노력한다고 해서 얻어지는 종류가 아니다. 그래서 맹자는 천명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정의하였다. "하려고 하지 않았는데도 그리 되는 것이 천(天)이고(莫之爲而爲者天也) 이르려 하지 않았는데도 그곳에 이르는 것이 명(命)이다(莫之致而至者命也)." 결국 천명이란 나의 본성과 관계없이 유행하는 비교적 현실적 기수(氣數)의 세계로 드러난다. 공자가 "죽고 사는 것은 명에 달려있고 부귀는 하늘에 달려있다."고 하면서 천명(天命)을 언급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그렇다면 천명에만 매어서 살 것인가? 맹자는 천명은 따르되 더 중요한 것은 본성을 되찾는 것인데 사람들은 거꾸로 한다고 생각했다. 구해도 얻지 못할 명(命)은 욕심을 내어 구하려 들고 배워서 깨달아 알 수 있는 성(性)은 포기해버린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성인(聖人)들이 천도를 깨닫는 일이 물론 천명(天命)에 가까운 부분이 있지만 궁극적으로는 누구나 지닌 본성(本性)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인의 일을 천명으로만 돌려 포기하지 말고 힘써 공부하라는 뜻이다. 몽고인들의 시력이 우리나라 사람들보다 월등하게 타고난 것이 천명인데 본성이라 여겨 나의 시력도 그리되길 바라고 성인의 깨달음은 우리도 지니고 있는 본성에 근거한 것인데 천명으로 여겨 멀리한다는 뜻이다. 성인의 출세도 천명이긴 하나 본질적으로는 우리와 똑같은 본성이 있음에 근거한 것임을 늘 잊지 말고 공부하라는 뜻이다. /철산(哲山) 최정준 (동방문화대학원대학교 미래예측학과 교수)

2018-09-26 철산 최정준

[사자성어로 읽는 고전]일폭십한: 하루는 햇볕을 쪼이고 열흘은 춥게 한다

추석을 앞두고 올해 농사는 망쳤다는 말을 듣는다. 날씨가 따라주지 않은 탓에 그렇다. 곡식은 싹도 중요하지만 그 싹을 잘 길러야 풍성한 곡식을 수확할 수 있다. 하루 동안은 햇볕이 나다가 열흘 동안 날씨가 쌀쌀해져 따스한 온기가 없으면 곡식이 제대로 생육할 수 없어 결국 죽기 쉽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이다. 날씨가 그 지역의 일정한 기후를 따라 일정하게 변화해야만 곡식이 제대로 발육된다. 곡식의 발육에 어느 정도 예측 가능한 기후의 일정함이나 항상성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말해준다. 맹자는 싹이 아무리 좋아도 일정함이나 항상성이 유지되지 않으면 망치는 것을 사람에게 적용하였다. 그 싹이란 바로 실마리 혹은 단서라고 부르는 것인데 맹자는 이를 사단(四端)이라는 인간이 지닌 마음의 싹으로 말했다. 이른바 싹수가 있는 지도자라도 지속적으로 그 싹수를 성장시킬 수 있는 조건이 마련되지 않으면 그 싹수는 잘 유지되어 자라나기 힘들다. 맹자는 한 나라를 다스리는 책임자의 경우도 마찬가지로 보았다. 한 나라를 다스리는 책임자의 싹수가 아무리 훌륭해도 아래나 주위의 참모들이 선량하지 않거나 선량하더라도 그 말을 지속적으로 받아들여 활용하지 않는다면 그 싹수는 쓸모가 없다. 자신의 충언을 듣고 실행하다가 열흘은 자신을 멀리하여 그 말을 듣지 않는 임금을 맹자는 이렇게 일폭십한의 비유를 들어 비판했다. 임금만을 지목해 말한 것이 아니다. 공자는 사람의 마음은 잘 잡으면 보존되지만 놓아버리면 없어져 버리니 그 들고남이 정한 때가 없으며 그 방향도 알 수 없다고 하였다. 우리도 하루는 자기의 마음을 잘 잡고 있다가 열흘을 놓아버리면 그것이 바로 일폭십한이다. /철산(哲山) 최정준 (동방문화대학원대학교 미래예측학과 교수)

2018-09-19 철산 최정준

[시인의 꽃]꽃나무

벌판 한복판에 꽃나무 하나가 있소. 근처에는 꽃나무가 하나도 없소. 꽃나무는 제가 생각하는 꽃나무를 열심으로 생각하는 것처럼 열심으로 꽃을 피워가지고 섰소. 꽃나무는 제가 생각하는 꽃나무에게 갈수없소. 나는 막 달아났소 한 꽃나무를 위하여 그러는 것처럼 나는 참 그런 이상스러운 흉내를 내었소.이상(1910~1937)사회 전체나 모든 인류를 특정할 때, 거시적으로 쓰이는 용어가 세계다. 세계는 너무나 크고 방대해서 그 깊이와 넓이의 정도를 감지하지 못하여 추상적으로 생겨난 테제라고 할 수 있다. 이 영역을 수사적으로 말할 때 '벌판'이라고 한다면, 누구나 세상이라는 '벌판한복판'에 사는 것이며, 언젠가 비, 바람 속에서 소멸될지 모르는 연약한 '꽃나무하나'에 불과한 것이다. 이 고독한 근원에의 삶을 대신 살아줄 수 없듯이, 자신을 닮은 꽃나무(사람)가 많더라도 당신을 대리할 수 있는 "꽃나무가하나도없소"라고 성찰하게 된다. 벌판 한 복판에 버려진 인생은 스스로 짊어질 수밖에 없는, 가시밭길 속에 피어난 '꽃나무 십자가'인바, 자신을 위하여 '열심으로 생각'하고 '열심으로 꽃을 피워가지고' 산다. 그러나 나라는 '꽃나무'가 타자라는 '꽃나무'에게 다가가면 갈수록 그 '꽃나무는' 당신이 '생각하는 꽃나무'가 아니기에 멀어지는 것은 당연하다. 우리가 사는 살벌한 벌판 중심에 자신이 있다는 생각은, 달리 말하자면 자신을 제외한 모든 '중심축'이 세계라는 점에서 이제 "이상스러운 흉내" 보다는 당신의 빛깔과 향기에 맞는 고유한 꽃을 피우시길. /권성훈(문학평론가·경기대 교수)

2018-09-17 권성훈

[고재경의 '노래로 본 사자성어']여측이심(如측二心)

열렬히 사랑했던 이의 이별통보원망과 배신감에 괴로운 연인소설 지킬박사와 하이드처럼자신속에 제2의 자아와 싸우며속 다른 두얼굴 감추고 사는지도여측이심(如측二心)은 뒷간에 갈 적과 나올 적 마음이 각각 다르다는 뜻이다. 물에 빠진 사람을 구해줬더니 오히려 보따리 내놓으라는 어처구니없는 상황과도 일맥상통하는 사자성어이다. 겉과 속이 전혀 다른 여측이심의 행태는 반드시 불행을 부른다.태진아가 부른 '바보'(작사 조성현, 작곡 박성훈) 노랫말에는 여측이심의 예가 뚜렷이 나타난다. 곡명 '바보'의 가사 도입부는 다음과 같이 시작한다. '마음 주고 정을 준게 바보였구나/사랑을 한 내가 바보였구나/거짓말인가 정말인가요/날 두고 가신다는 그 말이'. 화자는 속 다르고 겉 다른 연인의 배신에 뒤통수 맞은 듯 뼈에 사무쳐 있다. 그는 오직 '마음'과 '정'과 '사랑'만을 연인에게 헌신해왔다. 그러나 이제 연인에 대한 전폭적인 신뢰와 사랑이 위기에 봉착하자 깊은 상실감에 빠진다. 이런 와중에 어느 날 그는 연인으로부터 헤어지자는 가슴 쓰라린 말을 듣는다. 이별 통보를 처음 접했을 때 긴가민가하지만 곧이어 극심한 모욕감에 마음의 상처를 입는다. '처음엔 왜 몰랐을까 이렇게 끝나는 것을/속 다르고 겉 다른 당신'. 이렇게 화자는 연인의 여측이심 변심에 분통을 터뜨리며 비분강개한다. 어찌 보면 그에게 연인은 로마신화에 나오는 일그러진 두 얼굴을 지닌 야누스형 인물로 다가왔는지도 모른다. 또한 꽤 오래전 방영된 미국 TV 드라마 '두 얼굴의 사나이'의 등장인물인 분노의 화신인 괴물 '헐크' 이미지로 인식하고 있을 수 있다. 즉 화자는 자신의 연인이 너무나 달콤한 말로 치장한 이중적 인물임을 뒤늦게 알게 된다. 이에 따른 심적 충격은 이루 말할 수 없다. 하지만 그는 선택의 여지없이 헤어짐의 냉혹한 현실을 그대로 수용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기왕에 가실려거든 내 눈 속에 남아있는 눈물도' 전부 회수해가라고 '바보'처럼 체념하며 자신의 연인을 포기한다. 인순이가 부른 '잠깐'(작사·작곡 나훈아) 노랫말에도 여측이심의 예가 선명히 드러난다. 가사에 등장하는 화자는 사랑했던 자신의 연인과 이별의 문턱에 서 있다. 그러나 왜 헤어져야 하는지 정작 그 이유를 전혀 알 길이 없다. 다만 그 연인이 '도망치듯 달아나듯' 돌아서서 떠나려 한다고 생각할 뿐이다. 따라서 화자의 현재 심경은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복잡다단하다. 그는 하도 어이가 없어서 연인에게 자신을 떠나려는 '이유라도' 꼭 알고 싶다며 되묻는다. '잠깐 묻고 싶은 말이 있어요/왜 가는지 왜 가는지 떠나가는 이유라도 들어 봅시다'. 화자와 연인 사이의 사랑은 처음에는 영원히 지속 가능할 것처럼 미친 듯이 사랑했음에 틀림없다. 그러나 이제 화자는 이별여행을 준비할 수밖에 없어 심적인 허탈함과 혼돈은 말로 형용할 수가 없다.화자는 자신의 진심 어린 사랑을 '농담처럼 장난'으로 생각한 연인에 대해 몹시 불편한 심기를 드러낸다. 그는 연인에게 자신의 전부를 바치며 열렬한 애정을 쏟아 부었다. 하지만 지금은 우두커니 별리의 정거장에 멈춰 서 있다. 그리고 변소 갈 때와 나올 때가 너무나 다른 연인에 대한 원망과 배신감을 토로한다. 그러나 오랜 생각 끝에 푸념을 늘어놓으며 헤어짐의 현실을 받아들인다.'잠깐 그럴 수가 있나요/가더라도 가더라도 마지막 술잔이나 비우고 가소'.화자는 이제 겉과 속이 완전히 상반된 여측이심의 화신인 연인의 달달한 사랑 고백에 기만당했던 자신의 아둔함에 후회막급이다. 아울러 자신의 처지를 원통해하고 한숨을 쉬며 탄식한다. '사랑한단 그 말을/믿은 내가 바보지 믿은 내가 바보야/믿은 내가 어리석지'.스코틀랜드 작가 로버트 스티븐슨의 고딕 소설 '지킬박사와 하이드'는 인간의 여측이심의 이중성을 신랄히 고발한다. 선의 상징 지킬 박사의 자아 안에 악의 화신 하이드라는 별개의 인격체가 충돌한다. 이 같은 정체감 장애는 지킬 박사의 자살로 막을 내린다. 현대인도 자신의 자아 안에 내재하는 비뚤어진 제2의 자아에게 쫓기고 있을 수 있다. 어찌 보면 지킬 박사처럼 겉과 속이 다른 두 얼굴을 감추고 사는 지도 모른다./고재경 배화여대 명예교수고재경 배화여대 명예교수

2018-09-16 고재경

[사자성어로 읽는 고전]수불승화: 물이 불을 이기지 못한다

역사를 살펴보면 사람들이 지닌 도덕적 가치의 우위와 현실적 능력의 우위는 일치하지 않는다. 도덕적 명분과 현실적 능력 사이에서 갈등하기도 하고 갈등하지 않기도 한다. 맹자는 인간은 누구나 양심이 있기 때문에 선악을 구분하고 실천할 수 있는 도덕적 능력을 지니고 있다고 하였다. 이른바 양지양능(良知良能)의 이론이다. 그러나 이건 간단한 이야기가 아니다. 특히 서로가 목숨을 놓고 싸우는 전쟁에서는 이기는 것이 상책이기 때문에 선악은 저 아래 묻히기 마련이다. 중국의 전국시대는 어찌 보면 약육강식의 전쟁의 시절이었는데 맹자는 이런 환경 속에서도 끝까지 도덕적 판단과 실천을 잃지 말아야 함을 강조하였다. 세상에서 도덕적으로 정당함이 부당함을 이기지 못하는 상황은 비일비재인데 일관성 있게 도덕적 주장을 하려니 도덕과 힘을 대비시켰다. 그래서 『맹자』를 읽다 보면 그런 대비를 자주 보게 된다. 그중 하나의 대비가 물과 불로 나타났다. 물로 불을 끄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원리이다. 그런데 이 당연한 원리가 통하지 않을 때가 있다. 그런 일을 당했을 때 사람들은 '물이 불을 이기지 못한다'고 푸념한다. 다시 말해 양심적인 사람이 비양심적인 사람을 이기지 못한다고 푸념한 것이다. 우리가 현실에서 자주 푸념하는 말이기도 하다. 그러나 맹자는 다음과 같이 변명한다. "어짊이 어질지 못함을 이기는 것은 마치 물이 불을 이기는 것과 같다. 그러나 지금 사람들은 한 잔의 물을 가지고는 한 수레 가득한 나무에 붙은 불을 끄려 하다가 꺼지지 않으면 물이 불을 이기지 못한다고 푸념한다." 맹자에 의하면 여전히 물이 불을 이기는 성질은 변함이 없다. 다만 그 당연한 성질을 사람들이 현실에 구현하지 못해 벌어지는 것뿐이다. 하지만 맹자 말을 뒤집어보면 인간들이 대체로 양심을 회복하는 힘이 강해지지 못하면 불이 물을 이기는 현상은 계속될 것이다. /철산(哲山) 최정준 (동방문화대학원대학교 미래예측학과 교수)

2018-09-12 철산 최정준

[시인의 꽃]꽃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그는 다만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그는 나에게로 와서꽃이 되었다.//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준 것처럼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그에게로 가서 나도그의 꽃이 되고 싶다.//우리들은 모두무엇이 되고 싶다.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다.김춘수(1922~2004)'누가 나의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서로의 관계맺음을 표상하는 것처럼 이름이 잦아드는 것은, 그 만큼 관계맺음에서 멀어진다는 것. 안다는 것은 기억한다는 것인바, 기억 속에 당신의 이름을 꺼내어 호명함으로써 '내가' 여기 '그에게' 살아 있음을 승인받는 행위와 다르지 않다. 사실상 이름은 그 자체만으로 존재한다는 것을 알리는 행위로서 자아는 타자의 생각 속에 이름과 함께 존재하는 것이다. 마치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아무것도 아니며 길가에 지나는 사람들같이 '하나의 몸짓에' 불과한 것같이.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비로소 '그는 나에게로 와서' 유의미한 그 무엇인가 된다. 당신은 이름 속에 들어있고, 이름은 당신이라는 기억으로 타자에게 전치되는 것이기에, 당신의 그 이름은 누군가에게 당신이 가진 '빛깔과 향기'로서 살아있다. 그렇지만 꽃과 같이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아름다운 빛깔과 향기를 피어 올려야 하는가. /권성훈(문학평론가·경기대 교수)권성훈(문학평론가·경기대 교수)

2018-09-10 권성훈

[김나인의 '생활관상']억만금을 주고도 강제로 꾸미거나 살 수 없는 것이 눈빛이다

선(善)과 악(惡)으로 갈리는 업보얼굴 모습 변화시킬 수 있지만 눈의 형상·눈빛은 바꿀 수 없어하늘영역의 가치 기준이기 때문에관상학에서도 가장 중요하게 여겨눈이 어둡고 흐릿하며 술에 취한 듯 초점이 흩어지고 눈동자가 불명하거나 흰자위에 붉은 줄이 생기면 기혈작용이 막혀있다는 징후이니 마음에 근심을 안고 사는 사람이며, 현재의 운이 불길하다 말할 수 있다. 평소와는 달리 눈이 갑자기 튀어나온 듯 보이며, 눈동자가 간질간질하고 무겁고 아픈 증상이 생기면 해와 달이 구름 속에 갇혀 정기를 잃어버린 것과 같으니 신변에 불리한 일이 생긴다 보는 것이다.아무리 얼굴이 맑고 풍륭해도 눈빛이 흐릿하고 초점이 흩어지고 어두우면 잘 되어가던 일도 갑자기 막혀 고전하게 되며 심하면 갑작스러운 사고나 질병 등으로 생명에까지 위태로운 일이 발생 되는 것이다. 중병으로 죽어가던 사람도 눈빛이 밝아지고 은은한 광채가 발하면 그때부터 회복되기 시작하여 건강을 되찾게 되나, 이와 반대로 안신이 꺼져가는 불빛처럼 흐릿하고 탁해지면, 쇠락의 길로 접어든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이니 부귀영화도 물거품처럼 흩어져 사라지게 되는 것이다. 눈은 크기와 상관없이 광채가 나고 초점은 분명하며 맑고 선명해야 정신기(精神氣)의 상태가 온전하고 기혈작용이 정상적으로 작용하고 있다고 보는 것이다. 마음의 바탕에 담긴 정신의 상태에 따라 운의 흐름이 눈에 그대로 투영되는 것이니, 그래서 눈은 마음의 거울이고, 마음을 담은 그릇이라 말하는 것이다.이목구비가 뚜렷하고 건강해 보여도 얼굴에 담겨있는 기색의 형상은 무시할 수 없는 것이다. 마음에 따라 상(相)은 변하고 바뀌게 된다. 좋은 생각, 배려와 관심 그리고 작은 성의와 정성이 그 사람의 명운을 좋게 만드는 경우가 흔한 것이 사실이다. 자신의 이익이 아닌 타인을 위하는 마음으로부터의 출발, 그것이 양심이며 양심이란, 내가 행하여 싫은 것은 남에게도 보여주거나 강제해서는 안 되는 일이다. 배고픈 사람이 더 배고픈 사람에게 빵을 나누어 함께 먹는 일, 그것이 선업이고 양심 있는 삶이다. 우리는 세상을 살면서 본의 아니게 남에게 피해와 상처를 남기는 일이 너무도 많다. 무심코 던진 사소한 말 한마디가 상대방을 살릴 수도 죽일 수도 있고, 작은 배려가 죽어가는 사람의 생명을 살리기도 한다. 살아가면서 사람이 행하는 모든 행동은, 그것이 비록 미미하고 사소하여 남의 눈에 띄지 않는 일이라 해도 모두가 선(善)이든 악(惡)이든 업(業)을 남기는 일이며, 훗날 과보가 되어 자신에게 되돌아 오는 것이니, 이 업보에 따라 인간의 삶에 영향을 주어 명운의 틀을 완전히 바꿀 수도 있다는 것은 결코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선업과 악업은 남몰래 숨어 행한다 하여 언제까지나 감출 수만은 없는 일이며, 드러내놓고 행한다 하여 모두가 칭송받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자신의 이해가 아닌, 갓 태어난 어린아이에게 젖을 물리는 어머니의 마음처럼, 생명의 소중함 외에 그 어떤 가치도 부여하지 않는 마음, 그것이 진정한 배려요 선업이라 할 수 있다. 선을 행하는 마음에 사람이든 동물이든 가릴 것은 없다. 이런 실천을 행하는 사람의 마음의 바탕에서 돋아나는 눈빛은 그래서 맑고 밝고 선명하며 은은한 광채를 발하는 것이다. 이런 눈빛을 가진 사람에게 어찌 자손에게 이로움이 없다 말하며, 그 집안이 흥함을 의심하겠는가. 때가 되면 반드시 발하는 것이 과보이니, 훌륭한 부모를 둔 것도,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고생을 하며 살아온 것도, 형제 덕이 있고 좋은 친구를 만나는 일도, 좋지 않는 친구를 곁에 두어 쇠락의 길을 동행하는 것도 모두가 전생의 과보일진대, 누군들 부잣집에서 태어나 고생 없이 편안하게 살고 싶은 욕망하나 없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사람은 누구라도 부모를 직접 선택하고, 자신의 얼굴을 직접 만들고, 세상에 태어나는 날을 직접 가리어 세상에 나오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을 것이니 이것이 숙명이요, 과보에 따른 현생에서의 출발선이 되는 것이다. 그것이 인간 의지와 맞물려 운명이라는 틀에서의 또 다른 업보를 만들게 되는 것이고, 이 업보가 선(善)과 악(惡)이라는 어떤 결과물로 나타나는바, 얼굴 모습은 다르게 꾸미고 바꾸고 변화시킬 수 있지만, 눈의 형상과 눈빛의 기색만은 그 어떤 것으로도 꾸미거나 바꿀 수는 없는 것이다. 이는 인간 의지를 넘어서는 하늘의 영역에서의 가치기준에 기준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관상학에서도 눈의 형상을 가장 중요하게 보고 있는 것이다./김나인 한국역리연구소 소장김나인 한국역리연구소 소장

2018-09-09 김나인

[사자성어로 읽는 고전]경천지유: 하늘의 달라짐을 공경하라

좋은 일이 잘 보존되면 그 이상 좋을 게 없다. 그러나 세상에 영원히 보존되는 일이란 아무것도 없다. 그러므로 언젠가는 좋은 일이 점점 좋지 않게 변해간 '시경'에서는 그 주체를 천하의 정치를 들어 경천지유(敬天之 )를 읊었지만 정치뿐이 아니다. 개인도 그렇고 가정도 그렇고 기업도 그렇고 국가도 그렇고 세계도 그렇고 지구도 그렇고 태양계도 그렇고 우주도 그렇다. 이렇듯 좋은 것이 좋지 않게 변해갈 때는 그 달라지는 징표가 나타나기 마련이다. 미세한 단계로 나타나 보여주면 그것이 조짐이요 기미이고 현저하게 드러나면 이미 현실로 구현되어버린 것이다. 달라질 조짐이 보이면 두려워하고 공경하라는 뜻이다. 예로부터 후천(後天)이 되면 세계가 일가(一家)가 될 것이라는 예언이 있다. 선천은 봄여름에 해당하여 발산하는 시절이고 후천은 가을겨울에 해당하여 수렴하는 시절이다. 한곳으로 수렴하니 세계도 일가(一家)로 수렴한다는 것인데 세계일가라는 이 말은 흥하면 같이 흥하고 망하면 같이 망하게 되니 세계 온 나라가 운명공동체가 된다는 뜻이다. 다시 말해 개인이나 한 나라가 자기만 잘났다고 해서 자기만 잘살아지는 세계가 아니라는 뜻이다. 상대적으로 선천이 각자도생의 시절이었다면 후천은 공동운명의 시절이다. 이런 천도의 변화를 두려워하고 공경하지 않으면 모두 쫄딱 망한다는 뜻이다. 아직도 이런 변화를 공경하지 않고 그저 내 나라만 잘살면 된다는 강대국의 리더십은 그리 오래가지 못할 것이다. 인간만 잘살면 된다는 발상이 북극의 빙하를 녹여 다시 인간에게 돌아오는 지금의 두려운 변화를 보면 어렵지 않게 예측할 수 있는 일이다. 인간과 자연도 공동운명이 된 이 마당에 인간끼리의 공동 운로(運路)야 말할게 뭔가! /철산(哲山) 최정준 (동방문화대학원대학교 미래예측학과 교수)

2018-09-05 철산 최정준

[시인의 꽃]풀꽃과 더불어

아파트 베란다/난초가 죽고 난 화분에 잡초가 제풀에 돋아서/흰 고물 같은 꽃을 피웠다.//저 미미한 풀 한 포기가영원 속의 이 시간을 차지하여무한 속의 이 공간을 차지하여한 떨기 꽃을 피웠다는 사실이/생각하면 할수록/신기하기 그지없다.//하기사 나란 존재가 역시영원 속의 이 공간을 차지하며/무한 속의 이 공간을 차지하며저 풀꽃과 마주한다는 사실도/생각하면 생각할수록/오묘하기 그지없다.//곰곰 그 일들을 생각하다 나는/그만 나란 존재에서 벗어나그 풀꽃과 더불어//영원과 무한의 한 표현으로/영원과 무한의 한 부분으로영원과 무한의 한 사랑으로//이제 여기 존재한다.구상(1919~2004)존재하는 것들의 존재방식을 환원한다면 시―공간으로 파악할 수도 있다. '나'란 누군가 있었던 자리에 잠시 머물렀다 돌아가기에 '지금―여기'는 살아있음을 알리는 표상이 된다. '난초가 죽고 난 화분'에서 또 다른 '잡초가 제풀에 돋아'나듯이, "나란 존재가 역시" '영원 속의 이 시간'과 '무한 속의 이 공간'을 임차하고 '흰 고물 같은 꽃'을 피워 올리고 있는 것. 그러나 쓸모없이 보이는 '풀꽃'도 누군가에게는 기쁨과 희망으로서 쓸데 있게 다가가듯이, 자아를 찾는 것도 이처럼 유의미한 원리로 작동된다. 길가에 홀로 핀 풀꽃을 마주하고 생각이 생각 속으로 이어질 때 '그만 나란 존재에서 벗어나' 나는 사라지고 그 자리에 '풀꽃'만 남게 되는 것과 다르지 않다. '영원과 무한 사이'에서 살아있음을 증명할 '한 표현'이 있다면 '한 부분'을 인정하고 '한 사랑'을 전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쓸데없이 쓸모 있는 척하는, 당신도 '이제 여기' 진정으로 존재하게 되리니./권성훈(문학평론가·경기대 교수)권성훈(문학평론가·경기대 교수)

2018-09-03 권성훈

[조성면의 '고서산책']'삼국유사'의 역사

현재 우리가 보고 있는 '유사'는 보각국사 일연(1206~1289) 시대 고려본이 아니라 1512년 경주부윤 이계복이 펴낸정덕본 또는 중종임신본이다우리는 이야기들에 둘러싸여 산다. 일상적 대화에서 소설·역사·뉴스·영화·게임·드라마 등 찬찬히 돌아보면 우리의 삶은 온통 이야기들이다. 이야기 없는 삶은 상상하기 어렵다. 유발 하라리(1976~)도 호모 사피엔스가 세계 전역에 퍼져나가면서 지구의 주인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이야기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이야기를 가지지 못한 민족은 존속할 수 없다. 신화 · 전설 · 민담은 이야기의 조상이며, 민족적 정체성의 근간을 이룬다. '삼국유사'는 이야기의 보물창고요, 역사며, 민족문화의 밑바탕이다. 우리가 신화와 이야기에 관한 한 남부럽지 않은 민족이 될 수 있었던 것도 '삼국유사'(이하 '유사') 덕택이다. 단군신화와 가락국기에 김유신 · 만파식적 · 선덕여왕 등 '유사'는 가히 국민적 스토리들이요, 문학과 사상과 역사를 포괄하는 종합문화유산이라 할 수 있다. 이에 조동일 교수는 '삼국사기'를 정사로 중시하고 '유사'를 야사로 보는 관점의 위험성을 지적하면서 '유사'를 '대안사서'로 부르자는 제안을 하기도 했다. 현재 우리가 보고 있는 '유사'는 보각국사 일연(1206~1289) 시대의 고려본이 아니라 1512년 경주부윤이었던 이계복이 펴낸 정덕본(正德本) 또는 중종임신본(中宗壬申本)이다. 임신본보다 앞선 판본이 있기는 하지만 대개 연대를 확인할 수 없고 임신본보다 시기가 앞서면 관행상 고판본이라 통칭한다. '유사'의 완질본은 서울대 규장각, 고려대 도서관, 덴리대 도서관 소장본 등을 꼽을 수 있다. 덴리대 소장본은 순암 안정복(1721~1791)의 수택본으로 1916년 이마니시가 입수했고, 다시 이를 덴리대학이 소장하게 된 것이다. 그 밖의 낙질본 혹은 영본으로 육당 최남선(1890~1957)이 가지고 있던 고려대학 소장 광문회본과 연세대학이 소장한 파른 손보기(1922~2010)의 파른본 등을 꼽을 수 있다. 해방 후 '유사'의 최초 번역본은 1946년 사서연역회가 임신본을 저본으로 하여 고려문화사에서 펴낸 판본이다. 사서연역회는 김춘동 · 이가원 · 이민수 · 홍기문 등 당대 최고 지성들의 모임이었다. 사서연역회의 국역 이후, '유사'의 번역은 백가쟁명의 시대를 맞이하게 된다. 이종열(1954), 이병도(원문병역주 삼국유사, 1956), 이재호(1967), 이민수(1975), 권상로 역해본(1978), 성은구 역주본(1981) 등이 대표적이다. 북한에서 나온 '유사'의 번역본으로는 리상호 역주본(1960)이 있다. 이는 1999년 도서출판 까치에 의해 국내에서도 출판된 바 있다. 북한판 '유사' 번역본은 철저한 한글전용 원칙과 대중친화용 원칙을 지킨 것으로 유명하다. 단군신화의 풍백(風伯) · 우사(雨師) · 운사(雲師)를 각각 바람 맡은 어른 · 비 맡은 어른 · 구름 맡은 어른으로, 심지어 만파식적(萬波息笛) 같은 고유명사마저 '거센 물결 잠재우는 젓대'로 번역하는 등의 원칙을 고수하고 있는 것이 매우 흥미롭다. 한국의 문화원형인 '삼국유사'는 막상 독서용이나 참고자료로 이용하려 하면 지나치게 많거나 지나치게 없으며, 너무 알려져서 읽었다 착각하고 아예 안 읽는 '말로만 고전'으로 남아있는 게 아닌가 하여 매우 안타깝다. 몇 해 전 단골 고서점에 들렀다가 우연히 먼지를 뒤집어쓴 채 서가에 꽂혀있는 사서연역회의 '삼국유사'를 한참 망설이다 구입했다. 당연히 사야 할 책이었건만 주머니 사정이 허락하지 않아 고민하다 결국 골랐던 다른 책들을 포기하고 구입했던 기억이 난다. 꼭 사야 할 고서라면 망설임 없이 즉시 구입해야 한다. 삶도 책도 그 순간이 지나면 두 번 다시 오지 않을 일기일회(一期一會)가 아니던가./조성면 문학평론가·수원문화재단 전통교육 팀장조성면 문학평론가·수원문화재단 전통교육 팀장

2018-09-02 조성면

[사자성어로 읽는 고전]일도사민: 편안하게 해주기 위한 방법으로 백성을 부린다

요즈음 소득주도성장이라는 정부의 경제정책을 두고 의견이 대립되고 있다. 어떤 정책이 좋은지를 판단하는 기준은 무얼까? 경제적 전문지식을 가지고 판단하는 것 말고도 인문학적 관점에서 생각해볼 수도 있는 문제이다. 고전에 도(道)라는 글자가 자주 나온다. 道란 길이다. 이 길은 사람들이 오가며 통행하는 길이다. 사람은 오갈 때 길을 통하지 않을 수 없으므로 길은 당위(當爲)의 의미가 있다. 다시 말해 사람이 반드시 행해야 할 그 무엇을 도(道)라고 한다. 길은 서로 연결되어 통해있기 마련이므로 길이 있다면 어디든 목적한 곳에 다다를 수 있다. 그래서 道는 고전에서 목적을 성취하기 위한 '방법'이라는 뜻도 지니게 되었다. 목적이 정해지면 그에 맞는 방법이 따르기 마련이다. 일도(佚道)에서 일(佚)이 목적이라면 그것을 성취하기 위한 방법이 도(道)이니 일도(佚道)란 '편안하게 해주는 목적을 이루기 위한 방법'정도로 새길 수 있다. 사민(使民)은 말 그대로 백성을 사역하는 것이니 각종 부역과 세금을 의미한다.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세금을 올려서 부세(賦稅)하는 것이 바로 사민(使民)이다. 세금을 자꾸 올리면 백성들이 좋아할 리 없다. 그런데 맹자는 편안하게 해주는 목적을 이루기 위한 방법으로 세금을 올리면(佚道使民) 비록 힘들어도 원망하지 않는다(雖勞不怨)고 하였다. 그러므로 정부의 정책은 그 목적과 방법이 일도(佚道)가 되어야 하고 그렇게 되면 백성들이 자신들이 힘들어도 수긍을 한다고 보는 것이 맹자의 견해이다. 어떤 정책을 낼 때 곱씹어볼 필요가 있는 말이다. /철산(哲山) 최정준 (동방문화대학원대학교 미래예측학과 교수)

2018-08-29 철산 최정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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