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가칼럼

 

[사자성어로 읽는 고전]상하무상: 오르고 내려 일정함이 없다

무상함은 허무함으로 다가오기도 하지만 삶을 깊숙이 통찰하게 해주는 느낌이다. 주역에서는 용(龍)이 위아래를 오르내리는 것이 일정함이 없다고 하였다. 저 아래 못 속에 잠겨있기도 하고 하늘에 올라 날아다니기도 하니 그런 말이 어울린다. 그리고 이렇게 위아래를 일정하게 지키지 않고 오르내리는 것은 나쁜 짓을 하려는 게 아니라고도 하였다. 그럼 무엇 하려고 오르내릴까? 용의 옛말은 미르이고 미르는 물을 뜻하니 수기(水氣)이다. 물이 하늘과 지하를 유행(流行)하는 이치를 설명한 것이 용의 상하무상이다. 아래에 있던 바다의 수증기가 저 위 하늘로 올라가야 구름도 되고 비가 된다. 저 위 하늘에 있는 구름이 물방울이 되어 이 아래로 내려야 이슬도 되고 서리도 되고 눈도 되고 비도 된다. 이런 것이 천지의 자연한 기상이다. 사람은 어떠한가? 사람도 아래에 있을 때는 실력을 기르고 준비를 착실하게 해서 그 실력을 써먹기 위해 위에 올라가야 한다. 위에 올라갔으면 자신이 지닌 실력으로 아래에 혜택을 주기 위해 자신의 것을 내려야 한다. 이것이 龍德을 체득한 군자와 대인의 기상이다. 그러니 군자도 상하무상(上下無常)이다. 이렇게 좋은 뜻을 지닌 상하무상인데 내려올 때 허무함을 느끼는 것은 위에 있으면서 아래로 자신을 내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권력의 뒤안길이 즐거워야만 진정한 군자의 풍모라 할 수 있는데 이 시대 그런 이가 몇이나 될까? 무상함을 허무함이 아닌 글자 그대로의 무상함으로 느낄 수 있는 이가 있을까? /철산(哲山) 최정준 (동방문화대학원대학교 미래예측학과 교수)

2017-11-14 철산 최정준

[고재경의 노래로 본 사자성어 세상]이가난진(以假亂眞)

이가난진(以假亂眞)은 가짜가 판을 쳐 진짜를 힘 못쓰게 만든다는 뜻이다. 즉 거짓이 진실을 뒤흔드는 현상을 말한다. 이가난진은 '악화가 양화를 몰아낸다'는 그레샴의 법칙을 연상시킨다. 가짜가 진실을 영원히 호도할 수 없다. 언젠가 대부분 가짜의 정체가 탄로 나고 진실이 승리한다.신신애가 부른 '세상은 요지경'(작사:조명암, 신신애 작곡:박시춘) 노랫말에서 이가난진의 예를 찾아볼 수 있다. 돌아가는 세태에 대한 화자의 첫마디는 '세상은 요지경 요지경 속'이다. 요지경 속 세상은 천태만상의 세태를 비유적으로 지칭할 때 주로 사용한다. 인용한 곡목 가사에서 요지경 세상은 과연 어떤 모습으로 비쳐지고 있을까. 화자는 '잘난 사람'과 '못난 사람'은 각자 '잘난 대로' 그리고 '못난 대로' 산다고 갈파한다. 더 나아가 '내 말 좀 들어라' 다그치며 '짜가'가 판치는 세상을 향해 질책 한다. '짜가'란 가짜를 일컫는 속어로서 거짓이라는 말과 동의어로 사용된다. 어떤 의미에서 화자는 '여기도 짜가 저기도 짜가'가 횡행하는 우리사회의 뒤틀린 흉측성을 정면으로 공박하고 있다. 갈수로 가짜와 진실을 명확히 구분하기 힘든 게 우리의 현실이다. 화자는 인간의 삶은 '칠팝십년'이고 인생은 '화살같이 속히 간다'고 강조한다. 그러면서 사람은 주어진 시간 안에서 가짜 일색인 요지경의 심각한 위험에 빠지지 않도록 '정신' 바짝 차려야 함을 역설한다. 이는 삶의 진실을 왜곡시키고 가짜가 만연하는 이가난진의 폐해를 유의해야 하는 당위성과도 맞닿아 있다.힙합 가수 빌 스택스가 부른 '가짜'(작사/작곡:빌 스택스) 노랫말은 가짜가 판치는 이가난진의 세상을 모멸적 시각에서 묘사한다. 화자는 진짜와 가짜를 판별하기 힘든 세상을 '가짜 인간형'으로 꽉 들어찬 세상으로 규정한다. 이러한 '가짜 인간형' 세상의 유혹은 달콤하기 마련이다. 팔랑귀 가진 사람은 귀가 솔깃하여 가짜에 속기 용이하다. 따라서 화자는 유혹에 넘어가지 않기 위해 질끈 '두 눈을 감자'라고 하소연 한다. 온라인이나 스마트폰 등 사이버를 이용해 모조품을 쉽게 구매할 수 있다. 특정 지역에는 마네킹처럼 성형미인으로 넘실거린다. 대한민국은 '성형공화국'이라고 비아냥 받기까지 한다. 화자가 오죽하면 '이태원 가면 깔린 이미테이션'이 넘치고 '강남가면 인간 마네킹'이 범람하고 있다고 조롱하겠는가. 더 나아가 우리 사회의 일부이긴 하지만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온갖 가짜 '명품' 브랜드로 치장한 인간 군상들을 힐난한다. 욕망이란 이름의 '가짜'와 '유혹' 덩어리들! 가식과 위선 그리고 '있는 척 예쁜 척 호들갑' 떠는 허세! 심지어 '말끔한 얼굴과 정장차림'의 대한민국 건장한 오빠가 '호빠'(여성 상대 유흥업소 호스트바 줄임말)로 출근하는 게 작금의 현실이다. 화자는 '내면 속의 아름다움'인 진실을 호도한 이러한 거짓 사회를 신랄히 책망한다. 진솔하지 못한 하루의 삶을 과대포장하고 그 일이 습성화 되면 거품이 인다. 속 빈 강정처럼 알맹이 진실이 사라지고 껍데기 거짓만이 부풀어 오른다. 가짜와 진짜의 전쟁터에서 참이 거짓에 의해 가려지고 있지 않은지 냉철히 살펴볼 때이다./고재경 배화여대 명예교수고재경 배화여대 명예교수

2017-11-12 고재경

[사자성어로 읽는 고전]시이불견: 보아도 보이지 않음

사서 가운데 하나인 대학에 이런 말이 있다. "마음에 없으면 보아도 보이지 않고 들어도 들리지 않고 먹어도 그 맛을 알지 못한다." 중용이란 책에도 "사람들이 마시고 먹지 않는 이가 없지만 그 맛을 아는 이가 드물다." 또 주역이란 책에도 사람들은 "도(道)에 대해 어진 사람은 그것을 보고 어질다 하고, 지혜로운 자는 그것을 보고 지혜롭다 한다. 그마저도 모르는 이들은 날마다 그것을 쓰면서도 알지 못하고 있다." 이상은 사람의 지각(知覺)에 관한 것이다. 사람의 지각은 마음이 있어서 가능한 일이고 그 마음을 써야만 대상을 인지할 수 있으며, 마음을 쓴다 해서 모두 도(道)를 온전히 알아차리는 것은 아니라는 뜻으로 요약된다. 보아도 보이지 않는다는 말은 이런 뜻을 함축하고 있는데 그 대상에 하나를 더 추가한다면 바로 귀신(鬼神)이다. 공자는 빠짐없이 모든 사물의 근간이 됨에도 불구하고 보아도 보이지 않는 존재가 귀신이라고 하였다. 결국 인간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마음에 근거한 시력인 심안(心眼)의 한계를 지니고 있는 셈이다. 그렇기 때문에 누구의 눈에는 보이고 누구의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보이는 이도 일정한 한계가 정해져있는 셈이다. 그래서 금강경에 육안(肉眼)이 있고 천안(天眼)이 있고 혜안(慧眼)이 있고 법안(法眼)이 있고 불안(佛眼)이 있다고 하여 오안(五眼)을 말하였다. /철산(哲山) 최정준 (동방문화대학원대학교 미래예측학과 교수)

2017-11-07 철산 최정준

[조성미의 나무이야기]살아 천년 죽어 천년, 영원을 상징하는 주목

화사하고 눈부신 절정의 아름다움을 선사했던 봄여름의 초록 잎과 오색찬란한 꽃들의 향연이 지나가고 가을 들어 붉디붉은 단풍과 황금빛 은행잎으로 수놓았던 화려한 축제도 이제 어느덧 막바지에 이르렀다. 제법 쌀쌀해진 날씨에 스산한 바람이 불기 시작하면서 내년 달력도 시중에 선을 보였다. 우리나라 사계절의 아름다움을 촬영한 사진들을 수록한 달력에 자주 나오는 곳이 태백산과 소백산, 덕유산 정상부근에 살고 있는 주목이다. 떠오르는 태양을 배경삼아 흰 눈이 쌓인 산위에 굳건히 서서 웅장하고 담대한 자태를 자랑하고 있어 유난히 돋보인다. 주목은 주목과에 속하는 늘 푸른 큰키나무이다. 우리나라를 비롯해 중국 동북부와 시베리아, 일본 등의 고산지대에 분포하지만 수형이 아름다워 워낙 조경수로 많이 심어왔기에 요즘은 어디서든 쉽게 볼 수 있는 나무이다. 추위에 강하고 그늘진 곳에서도 잘 자란다. 높이 17~20m, 직경 1m까지 자라며, 나무모양은 가지가 사방으로 퍼져있어 보기 좋고 안정감이 있는 원뿔형이다. 어렸을 때는 자라는 속도가 매우 느리지만 약 10년 이상 되면 자라는 속도가 좀 빨라지는 편이다. 주목은 살아 천년, 죽어 천년을 존재한다고 할 만큼 나무 중에서 수명이 길고 우리나라 최고령 나무도 정선 두위봉에 있는 1,400살 주목이다. 줄기와 큰 가지는 붉은 색이며, 줄기는 세로로 얇은 띠 모양으로 벗겨진다. 잎은 다른 나무 아래에서도 부족한 햇빛을 놓치지 않고 흡수하기 위해 엽록소를 많이 함유하고 있어 짙은 녹색을 띠고 있다. 잎의 길이는 2㎝ 정도로 나선형태로 달리는데 옆으로 뻗은 가지에서는 깃털모양을 보인다. 잎 끝이 뾰족하고 뒷면에는 연한 황색의 줄이 있다. 4월에 피는 연황색 꽃은 화려한 꽃잎이 없어 눈에 잘 띄지 않으며, 암꽃과 수꽃이 서로 다른 나무에서 핀다. 주목의 열매는 10월에 빨갛게 달리는데 소나무 등 다른 침엽수는 솔방울 형태로 열리는데 비해 앵두처럼 동그랗게 달려 눈길을 끈다. 특히 진한 녹색의 잎을 배경으로 달린 붉은 열매는 주목이 조경수로서 많은 사랑을 받는 이유이기도 하다. 주목의 씨는 붉은 가종피에 둘러싸여 있는데, 가운데가 비어 있어 안에 씨가 보인다. 붉은 과육은 물이 많고 단맛이 나기 때문에 먹기도 하지만 독성이 있어 배탈이 나기 때문에 많이 먹으면 안 된다. 주목과 비슷한 나무로는 중부 이북과 울릉도에서 자라는 회솔나무와 원줄기가 옆으로 누워 기며 자라며 가지에서 뿌리가 발달하는 설악눈주목, 구주주목 등이 있다. 구주주목은 유럽과 북미가 원산지인데 서구에서는 정원에 심어 다듬어가면서 기른다. 대표적인 곳이 프랑스 베르사이유 궁전으로 삼각형, 원뿔 등 다양한 모양으로 전정해 가꿈으로써 정원을 더욱 특색 있고 아름답게 꾸미고 있다.주목은 나무껍질도 붉은 색을 띠고 나무 목질부도 유달리 붉어서 붉을 '朱'자를 써서 '朱木'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주목의 목재는 최고급 가구재로 아주 귀하게 이용했다. 오래된 주목으로 만든 바둑판은 최고로 쳤으며, 주목지팡이는 가볍고 잘 휘어지지 않으며 지팡이의 붉은 빛이 무병장수하게 해준다고 믿어 우리 선조들은 노인들에게 선물하는 것을 가장 큰 효도의 하나로 여겼다. 특히 주목은 향기가 있고 재질이 좋아 목관으로 많이 사용했는데 경주 금관총 등 고분에서 주목으로 만든 관이 출토되었고 서양에서도 관으로 쓴 예가 여럿 있다./조성미 산림조합중앙회 서울인천경기 본부장조성미 산림조합중앙회 서울인천경기 본부장

2017-11-05 조성미

[사자성어로 읽는 고전]애오상공: 사랑과 미움을 지니고 서로에게 파고든다

사람끼리 서로 느끼고 다가가고 파고드는 일련의 과정은 그에 상응하는 결과를 초래한다. 주역에서는 그 결과를 길함과 흉함, 곤란함과 후회, 이로움과 해로움으로 요약한다. 이 중에 가장 적극적이며 종국적인, 서로에게 파고드는 과정의 결과가 길함과 흉함이다. 사랑하는 마음으로 파고드는 것과 미워하는 마음으로 파고드는 두 가지의 양상에 따라 길흉을 초래한다. 사랑으로 파고들면 길하고 미움으로 파고들면 흉하다. 이런 양상을 한마디로 정리한 예가 주역 가인괘(家人卦)에 있는데 서로 사랑하는 것이 가정과 나라를 잘 유지하고 다스리는 비법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인간세상에서 절대적인 사랑이나 미움은 찾아보기 힘들다. 다만 서로 사랑으로 파고들면 길하고 서로 미움으로 파고들면 흉할 뿐이다. 그런데 사랑과 미움은 이런 일차원적인 공식에 그치지 않는다. 사랑과 미움도 변천(變遷)을 하기 때문에 사랑이 미움으로 바뀌면 흉해지고 미움이 사랑으로 바뀌면 길해진다. 또 사랑으로 파고들어서 흉한 경우도 있고 미움으로 파고들어서 길한 경우도 있다. 그래서 공자는 오직 어진 자라야만이 제대로 사람을 사랑할 수도 있고 미워할 수도 있다고 하였다. 거꾸로 내가 사랑해서는 안 될 것을 탐내고 당연히 미워할 이유가 없는 대상을 증오하게 되면 흉하다. /철산(哲山) 최정준 (동방문화대학원대학교 미래예측학과 교수)

2017-10-31 철산 최정준

[시인의 연인]별

나의 별은 내가 볼 수 없구나/ 항시 나의 뒤편에서/ 나의 길을 비춰 주는 그대여,//고개 돌려 그를 보려 하여도/ 끝내 이를 수 없는 깊이/ 일생 동안 깨어 등을 밝혀도/ 하늘 구석구석 헤쳐 보아도/ 나는 바라볼 수가 없구나/ 우리가 삼천 번 더 눈떠 보아도/ 잠시, 희미한 그림자에 싸여/ 그을린 등피 아래 고개를 묻는 사이/ 이 세상 가장 먼 거리를 질러가는 빛이여/ 어느새 아침은 닿고,//진실로 나의 별은 나의 눈으로/ 볼 수가 없구나김완하(1958~)당신은 도구와 타인의 시선이 아닌 자신의 두 눈으로 민낯을 한 번이라도 마주한 적이 있는가. 이 가운데 보는 것만이 아는 것이라는 명제는, 아는 것만큼 보인다는 것을 절대적 가치로 인식 되어왔다. 시선에 들어오는 것만이 참이라는 사실로 믿는, 우리는 욕망 앞에서 나머지 진실은 스스로 폐기해야 했다. 수많은 별들 중에서 '나의 별'이라는 실제를 찾을 수 없기에 '나의 뒤편에서 나의 길을 비춰 주는' 그대라는 별도 바라볼 수 없다. 거짓이라는 '희미한 그림자에 싸여' 그것이 참인 줄만 알고 '일생 동안 깨어 어두운 등을 밝혀주는' 실상을 망각한 채. '진실로 나의 별을 나의 눈으로' 조우할 수 없는 것은 '그을린 등피'를 수많은 '욕망 아래'묻으며 왔기에. /권성훈 (문학평론가·경기대 교수)권성훈 (문학평론가·경기대 교수)

2017-10-29 권성훈

[고영직의 여시아독(如是我讀)]자존심과 자존감의 차이

자존심과 자존감의 차이는 무엇인가. 가난하고 소외된 백인 하층민의 빈곤문화를 당사자의 눈으로 냉정히 성찰하는 J.D.밴스의 회고록 '힐빌리의 노래'를 덮으며 드는 생각이다. '힐빌리의 노래'는 가난이 가난을 낳고, 가난이 대물림되는 미국 애팔래치아 산맥 인근 쇠락한 공업지대인 오하이오 미들타운에서 성장한 저자가 사회적 고립과 학습된 무기력이라는 빈곤문화를 형성해온 비관적 무리에서 벗어나 어떻게 계층이동의 사다리를 밟으며 아메리칸 드림을 이루었는지를 회고하는 책이다. 오해는 마시라. 이 책은 결코 상투적인 아메리칸 드림 신화를 회고하는 책과는 거리가 멀다. 저조한 사회적 신분 상승에서부터 빈곤과 이혼, 마약 중독과 십대 임신에 이르기까지 오만 가지 불행의 중심지인 미국의 '힐빌리 문화'를 내부자의 눈으로 신랄히 성찰하며 더 나은 삶을 향한 희망의 필요성을 역설하는 역작이다. 힐빌리 문화는 레드넥, 화이트 트레이시라는 모욕적인 이름으로도 유명한데, 이들의 문화는 지독히 의리를 중시하고 외부인을 난폭하게 다루는 것으로 악명이 높다. 다시 말해 법보다 주먹이 더 가깝고, 복지 여왕을 비난하며, 가난이 가풍(家風)이 되어버린 가난한 백인들의 빈곤문화를 의미한다. 지난 미 대선에서 가난한 백인 남성들이 민주당의 포퓰리즘 정책을 혐오하며, 왜 트럼프를 대통령으로 선출했는지 이해할 수 있는 책으로도 유명하다. J.D.밴스는 1984년생 스코틀랜드계 아일랜드인 출신의 후손이다. 그는 힐빌리 문화권에서는 '세상에 믿을 놈 없다'는 것을 신봉하는 마음의 습관을 형성하게 된다고 말한다. 기회를 가로막는 장애물들은 집과 학교 주위에 널려 있고, 노력 부족을 능력 부족으로 착각하는 문화 또한 완고하다. 그런 환경에 둘러싸인 저자가 자신의 학창 시절을 회상하며 '덫에 걸린 기분'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전혀 어색하지 않다. 쉽게 말해 이들은 자존심이 센 척하지만, 자존감이 그리 높지는 않았던 것이다. 저자는 십대 시절을 회상하며, 자신은 완전히 다른 세상으로 옮겨간 '문화적 이주자'라고 비유한다. 자신이 문화적 이주자가 된 데에는 자신을 이해하는 사람들에게 터놓고 이야기하는 것이 중요하고, 타인과 대화하는 법을 배워야 하며, 낙관을 배웠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해병대에 입대하고, 오하이오주립대를 다니고, 예일대 로스쿨에서 법을 공부하며, 저자는 그런 환경에 노출되는 경험을 통해 배웠다고 말한다. 그리고 가난이 가난을 낳으며, 가난이 대물림되며 형성되는 빈곤문화를 극복하는 방안으로 사회적 자본(social capital)의 필요성을 강조한다. 정치학자 로버트 D. 퍼트넘이 '나홀로 볼링'에서 역설한 사회적 자본이란 개인들 사이의 연계와 사회적 네트워크 형성 그리고 호혜성과 신뢰의 규범을 의미한다. 러스트 벨트(rust belt) 지역 고유의 자신을 비하하는 '골창 문화'를 바꾸려는 교육의 힘을 역설하는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다. '힐빌리의 문화'는 힐빌리의 한국적 버전인 '태극기 부대' 시위에 참여하는 우리나라 가난한 노인들의 빈곤문화를 돌아보게 한다는 점에서 퍽 유의미하다. 또 가난한 사람들은 왜 보수정당을 지지하는가에 대한 사회문화 보고서로서도 의미가 없지 않다. 책을 보며 십대 시절의 암담했던 고립의 나날들이 연상되어서인지 책을 꼼꼼히 탐독했다. 계층이동의 사다리를 어떻게 놓아야 하고, 사회통합을 위한 좋은 정책은 무엇인지 고민하게 한다. '힐빌리의 노래'를 보며 자존심과 자존감의 차이를 이해하는 것이 퍽 중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결국, 나 자신의 노래를 부를 수 있고, 또 기꺼이 부를 줄 아는 건강한 마음생태학이 중요하다. 교육과 문화의 힘을 바탕으로 한 좋은 정책이 좋은 정치라는 점을 인식하고 실천해야 할 때이다./고영직 문학평론가고영직 문학평론가

2017-10-29 고영직

[사자성어로 읽는 고전]원근상취: 멀고 가까운 곳에서 서로 취한다

유교전통에서는 지금처럼 나뭇가지가 옷을 벗어버리는 시기가 되면 초목이 자기의 뿌리로 돌아가는 시절이라 하여 조상에게 시제(時祭)를 지냈다. 같은 조상에서 나온 친족 간의 멀고 가까움을 숫자로 나타낸 것을 촌수라고 하는데, 부자간은 1촌이고 형제간은 2촌이고 부부간은 무촌이라고 하는 등의 숫자체계이다. 촌수는 혈연을 기준으로 삼았을 때의 멀고 가까움을 표시한다. 예전과 달리 혈연관계를 토대로 움직이는 사회가 아닌 현대에서는 전통적인 촌수가 낯설게 느껴진다. 그 대신 혈연 상으로는 아무 관계도 없는 사이가 더 친절하게 느껴진다.먼 친척이 이웃사촌보다 못하다는 말이 있는 것처럼 멀고 가까움이라는 원근(遠近)의 잣대가 상호간 호응과 도움의 성공여부로 직결되지 않는다. 멀리 있어도 호응과 도움이 잘 이루어질 수도 있고 가까이 있어도 그것이 잘 이루어지지 않을 수도 있다. 주역에서는 바로 가까운 지점에 있는 관계를 비(比)라 하고 멀리서 호응하는 관계를 응(應)이라 한다. 이 둘은 도움과 호응이다. 가장 비극적인 관계는 가까운 사이인데도 도움과 호응이 없는 경우인데, 지금이 그런 일들이 자주 벌어지는 시대이다. 그래서 부모형제 간에도 살벌한 기운이 오고 간다. 멀리 있든 가까이 있든 중요한 것은 상호간의 호응과 도움이다. 멀리 있어도 그것이 이루어지면 좋은 것이고 가까이 있어도 그것이 이루어지지 않으면(近而不相得) 좋지 않은 것이다. /철산(哲山) 최정준 (동방문화대학원대학교 미래예측학과 교수)

2017-10-24 철산 최정준

[손경년의 늘찬문화]숙의 민주주의와 희망의 '내일'

국민들의 뜨거운 관심거리였던 신고리 5·6호기 공사 재개 여부는 공론화위원회의 출범 3개월 동안 '국민 대표'로 선정된 471명의 시민참여단이 집중학습, 숙의과정, 종합토론회를 거쳐 '건설을 재개하되 장기적으로는 원전을 축소해야 한다'는 내용의 권고안을 정부에 전달함으로써 막을 내렸다. 무엇보다 이번 시민공론화 과정을 통해 눈여겨 볼 점은 관료와 전문가의 전유물로 여겨졌던 정책결정에서 '수동적 시민'이 아닌 '능동적 시민'으로서의 가능성을 보여주었다는 점일 것이다. 특히 공론화과정에 참여한 시민들은 서로 다른 주장과 정보, 학술적 근거 등을 학습, 토론하면서 찬성과 반대라는 결과에 초점을 두기보다 이해와 배려, 합의와 이후 발생할 상황에 대해 책임을 져야한다는 것을 배웠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물론 공론화를 통해 도출된 결정에 지나치게 의존할 경우, 민감한 사안에 대한 정치적 회피로 악용되거나 정치적 책임 소재에 대한 문제제기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는 점도 고려해야 할 것이다. 지난 2015년 12월, 파리에서 열린 유엔기후변화회의에 맞춰 다큐멘터리 '내일'이 개봉되었다. 우리나라에서는 2016년 12월에 최초로 개봉된 이래 지속적으로 상영되고 있다. '내일'은 프랑스 배우 멜라니 로랑이 국제환경보호단체 콜리브리스의 창립자 중 한명인 시릴로부터 '네이처'에 실린 논문 '지구 생물권의 상태변동연구'의 내용을 듣고 내 자식이 살아야 할 지구의 기후변화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 것인가를 고민, 농업문제부터 출발하고 있다. 대규모농업이 아닌 소규모농업의 생산성에 주목한 미국 디트로이트 사례와 '놀라운 먹거리 거리텃밭' 프로젝트를 통해 소통과 창의성이 무언지를 보여준 영국의 소도시 토드모던의 주민들과 제도적 방안을 마련하는 시장의 태도는 상당히 인상적이었다. 바람을 이용, 에너지 수입국에서 에너지 독립국을 만든 시민과 시민들의 뜻을 받들기 위해 일하는 의원들의 모습이 잘 드러난 덴마크 코펜하겐의 사례, 더 나아가 '누가 돈을 만드는가'라는 질문으로부터 지역화폐를 통해 이윤이 지역 내에서 순환하도록 함으로써 지역경제 살리기를 가능하게 한 영국 소도시 브리스톨, 스위스 바젤의 비르 은행의 사례는 지역의 중요성을 재확인해 주고 있다. 농업, 에너지, 화폐 등이 갖고 있는 문제를 해결할 동력은 민주주의이며, 부패한 정치인들로 인한 국가파산에 직면하였던 아이슬란드 시민들이 '아이슬란드 프라이팬 혁명'을 통해 대의적, 절차적 민주주의를 시민참여 민주주의 방식으로 이끌어냄으로써 새로운 민주주의의 미래를 보여준 사례도 주목할 만하다. 영화에서 미래의 민주주의를 위한 자율적이고 창의적인 시민은 교육으로부터 가능하다고 보고 경쟁이 아닌 인생을 준비하는 핀란드 교육방식에서 해법을 찾는다. '내일'은 지구촌에서의 혁신사례를 통해 '편리함이 거세된 미래에 대해 불편함과 음울함으로만 상상'하는 것이 아닌, 일상 속에서의 실천과 시민들의 적극적인 참여를 통한 삶의 변화를 마을에서, 지역에서 가능하다는 유쾌함을 제공한다.우리는 마을 만들기나 도시재생사업에서 주민참여의 중요성을 강조해 왔음에도 제대로 된 참여방식이었는지 여전히 갸우뚱해 한다. 그래서 숙의 민주주의 방식의 경험확대와 '미래'에서 보여주는 주민 스스로의 실천적 참여사례는 불안한 미래에 대해 긍정적이고 희망적인 실천욕구의 계기를 얻는데 도움이 된다./손경년 부천문화재단 대표이사손경년 부천문화재단 대표이사

2017-10-22 손경년

[사자성어로 읽는 고전]정위상감: 참과 거짓으로 서로를 느낀다

어떤 일이 진행되는 양태를 구분해볼 때 시작과 중간과 마침의 세 단계로 보는 것은 일반적이다. 사람이 태어나서 살다가 죽는 생애의 전 과정도 그렇고, 사람을 만나서 살다가 헤어지는 사람과의 교제도 그렇고, 학교에 입학해서 다니다가 졸업하는 학업도 그렇다. 그런데 이런 과정을 통틀어 평가할 때 좋은 경우도 있고 나쁜 경우도 있다. 주역에서는 그것을 길흉으로 평가한다. 좋으면 길하고 나쁘면 흉하다. 세 단계 가운데 시작 단계에 생각해봐야 할 것이 느낌이다. 여기에서의 느낌이란 감정이나 생각을 포함한 전반적인 감응을 말한다. 그런데 감응에도 진위가 있다고 보아 주역에서는 정위상감(情僞相感)이라고 하였다. 진정성이 있는 감응인지 허위로 느끼는 감응인지를 살펴보라는 뜻이다. 주역에서는 그 감응이 진정성 있는 감응이라면 이로움을 줄 것이고 피상적인 허위로서의 감응이라면 해로움을 줄 것이라고 판단하였다. 개인 간의 관계에 한정해 볼 때 상호간 진정성을 가지고 느끼는 감응이 제일 이롭고, 둘 다 허위로 느끼는 감응이 제일 해롭다. 사람간의 감응에 한정하지 않고 확장해보면 어떤 현실사태에 대한 감응도 마찬가지이다. 그 실정을 정확히 파악하는 것이 그 일에 대처하는 데 첫 단계로서 중요하다는 뜻이다. /철산(哲山) 최정준 (동방문화대학원대학교 미래예측학과 교수)

2017-10-17 철산 최정준

[주종익의 스타트업]스타트업 뭘 하지?

스타트업을 하겠다고 마음 먹은 사람들의 머리 속에 제일 먼저 떠오르는 생각은 이러한 의문이다. 첫째 누구랑 하지, 둘째 뭘 하지 (아이템), 셋째 그것을 어떻게 하면 되지다.시중에 나와있는 스타트업 관련 서적의 대부분은 '누구랑 하지'와 '뭘 하지'는 이미 결정된 것으로 생각하고 스타트업을 어떻게 하면 되는 것인가의 '어떻게'에 관한 책들이다. 여기 저기 찔끔찔끔 아이템 선정에 대한 얘기가 있을 뿐이다. 그렇다고 번뜩이는 아이디어 만으로 아이템을 선정하겠다는 생각은 위험하다.아이템을 정하는 방법은 논리적이고 체계적인 개념(Concept)에서 출발해야 한다. 그리고 혹독한 검증 과정을 거쳐야 된다. 이렇게 해도 실패한다.아이템 선정 작업을 검토해보자.고객과 기술 중 어디를 중심으로 아이템 선정 검토를 시작할 것인가를 먼저 결정한다. 보통은 고객을 중심으로 생각하는 것이 순서이지만 가지고 있는 기술이 있다든지 제품자체가 기술을 우선시하는 것일 때는 기술 중심의 검토를 먼저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고객 중심일 때는 시장(Market)을 먼저 정하고 고객을 정할 것인지 그 반대로 할 것인지를 생각한다. Market Size가 큰 것을 노릴 것인지, 시장 성장율이 좋은 것을 노릴 것인지, Niche market 인지, B2B 또는 B2C 등등을 생각한 다음에 고객을 Demographic(인류통계학)분류 즉 나이 성별 학력 지역 직업 수입 등등의 고객세분화를 하고 고객의 type별로도 생각해본다. 다음으로 기술을 중심으로 하드웨어인지 소프트웨어인지 플랫폼 인지를 생각해본다. 내가 가지고 있는 기술을 중심으로 할 것인지 새로운 기술이나 연구소등에서 트렌드를 입수한다든지 남의 기술을 공유할 것인지 등을 다각적으로 고려한다. 기술 중심의 아이템이 성공 확률이나 확장 형(Scalable) 비즈니스로 발전할 가능성이 높고 투자 받기가 용이하다.스타트업이 성공하려면 최소한 Market Pull(시장이 끌어당김)이나 Technology Push(기술 또는 제품이 밀어붙임)둘 중 하나는 반드시 획득하여야 한다. 물론 둘을 다 갖는다면 그것은 대박이다. Market Pull은 고객의 Pain Point(문제점)와 니드(Needs)를 파악하고 고객으로부터 출발하는 것이고 Technology Push는 고객에게 Pain Killer(진통제)를 제공하는 기술로부터의 출발이다. 다음으로 본인의 평소의 상상력이나 소설 영화 등의 영감에서 아이템을 생각해볼 수 있다. 상상력이 풍부한 사람, 호기심이 많은 사람이 스타트업에 가장 적합한 사람이다. 과거 현재 미래라는 시간 중심의 사고도 중요하다. 특히 현재의 트렌드나 미래의 트렌드와 라이프스타일의 변화를 예상하고 미리 새로운 시장을 창출한다면 테슬러의 엘론머스크 스타일의 영웅이 될 수도 있다. 트렌드를 주시하는 것은 아이템 구상의 꽃이다. 돈 흐름의 길목을 보는 것이다.마지막으로 가장 낮은 수준의 아이템 선정 방법이지만 때론 가장 강력한 위력을 발휘하는 시도 때도 없이 형이다. 번뜩이는 아이디어나 주변의 사소한 불편함에서 해결책을 찾아내어 아이템화 하려는 방법이다. 한국의 많은 스타트업들이 생각하는 것이다. 남의 아이디어에서 베껴오고 훔쳐오고 하는 카피캣(Copycat)도 이 부류다. 스티브잡스는 Creativity(창의력)는 Copy & Steal이라고 했다./주종익 서울창조경제혁신센터 대표멘토·외대 외래교수주종익 서울창조경제혁신센터 대표멘토·외대 외래교수

2017-10-15 주종익

[사자성어로 읽는 고전]인도민정: 사람의 도는 정치에 빠르게 나타난다

지역마다 토양이 다르고 토질이 다르다. 땅에 내재되어있는 성분은 그 위에서 자라는 식물에게 영양을 주는데 아주 민첩하다. 다른 땅에서 잘 자라던 나무도 땅을 바꾸면 자라지 못하고, 그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수 백 년 된 나무가 자라는 땅은 그 속에 기운을 지니고 있다고 추측하기도 한다. 중용에서는 이를 지도민수(地道敏樹)라 하였다. 땅이 나무에게 그런 것처럼 사람은 정치에 민첩하다. 사람들이 품고 있는 생각은 곧바로 정치의 지형을 바꾸게 된다. 민주주의에 있어서 사람들의 생각이 정치에 반영되는 속도는 더욱 빠르다. 중용에서는 이를 인도민정(人道敏政)이라 하였다. 그러나 빠르다는 것이 꼭 좋은 것만은 아니다. 사람들이 품고 있는 생각이 올바른 지향을 잃고 방황하는 것이라면 조금 더 생각해볼 필요도 있기 때문이다. 거꾸로 생각해보면 그렇게 빠르게 반영되는 만큼 인도(人道)를 어떻게 만들어 가는가의 문제가 더욱 중요하다 할 수 있다. 중용에서는 인도(人道)를 바르게 만들어 가는가의 문제는 저마다의 수신(修身)에 달려있다고 하였다. 가정과 국가와 세계 속에서 나의 몸을 가누는 문제이다. /철산(哲山) 최정준 (동문서숙 대표)

2017-10-10 철산 최정준

[고재경의 노래로 본 사자성어 세상]일편단심(一片丹心)

일편단심(一片丹心)은 한 조각 붉은 마음의 뜻이다. 우리 나라꽃 무궁화의 꽃말이기도 하다. 일편단심은 내면에서 진심으로 우러나오는 변치 않는 마음을 비유적으로 표현할 때 사용한다. 송대관이 부른 '오기는 오는 건가요'(작사:조동산 작곡:조동산,김구하) 노랫말에는 일편단심의 가슴 적시는 애정이 오롯이 묻어난다. 곡명 '오기는 오는 건가요' 가사에 등장하는 민들레꽃은 '너'의 의인화된 표현이다. 주지하다시피 민들레 중심 뿌리는 아래로 곧게 내리 뻗는다. 따라서 민들레는 온갖 풍상에도 흔들리지 않고 한 가지 지조와 절개를 지키는 상징적 의미로 자주 인용된다. 화자인 '나'와 민들레 '너'는 예기치 못한 돌발 상황 때문에 서로 떨어져 지낸다. 즉 보고 싶어 그리워하는 일시적 이산 연인임이 틀림없다: '보고 싶다 안고 싶다 사랑아 내 사랑아'. 어느 날 '내 사랑' 민들레와 재회하기로 예정된 '나'는 그 날이 오기만을 손꼽아 기다린다. '진짜 오기는 오는겁니까'라고 반신반의하며 정인을 애타게 기다리는 마음은 단지 설렘을 넘어서 흥분의 감정으로 변한다. 더 나아가 일편단심 민들레 '여자'와 다시는 헤어지지 않고 영원히 함께 삶을 영위할 것을 다짐한다: '다시는 못 보낸다/죽어도 못 보낸다'. 죽어도 정인을 다시는 떠나 보낼 수 없다는 화자의 결연한 의지는 확고해 보인다. 이러한 일편단심 의지 표명 이면에는 신이 내린 '선물'이자 '예술'인 민들레 연인을 사랑하는 화자의 애틋한 마음이 녹아 있다. 또한 사랑의 세레나데를 연인에게 헌정하는 화자의 감미로운 목소리가 어디에선가 은은히 들려오는 듯하다.배일호가 부른 '사랑의 영수증'(작사:Unknown 작곡:박현진) 노랫말은 연인에 대한 애정 표식을 사랑의 영수증으로 비유한다. 또한 일편단심 사랑의 세기가 하늘 높이 찌를 듯 하고 땅 속 깊이 파고든다: '하늘만큼 땅만큼 사랑해/태산만큼 바다만큼 사랑해'. 사랑하는 연인에 대한 한 조각 붉은 마음이 어찌 이다지도 태산같이 높고 바다같이 깊을 수 있을지 탄성을 자아낸다. 대개 영수증은 금전거래 시 사용된다. 그러나 인용한 곡명 '사랑의 영수증' 노랫말에서는 영수증이 오직 일편단심 애정 표현의 은유로 사용되고 있다: '일편단심 당신만을/사랑한다 써줄거야'. 뜨거운 '가슴'과 '온 맘'으로 상대방을 사랑한다는 글자가 적혀있는 영수증을 주고받는 연인의 진짜 속마음은 어떨까: '세상사람 모두에게/당신을 사랑한다 할 거야'. 이렇게 사랑의 증표를 받아 쥔 연인의 로맨스는 과연 앞으로 어떻게 진행될까 궁금해진다. 그들에게는 상대방 연인의 달달한 꿀 미소와 심장을 쿵 쿵 뛰게 하는 '심쿵' 로맨스가 거침없이 전개될 것이다. 이러한 청순한 로맨스가 '사랑의 집'을 건축하며 '가슴으로' 사랑하며 살아가는 연인에게는 종교적 의미의 천국이나 해탈 보다 오히려 더 소중하게 다가올 듯하다. 일편단심의 대명사로 흔히 포은 정몽주를 꼽는다. 저무는 고려 왕조를 향한 정몽주의 일편단심과 연인을 향한 민들레꽃 일편단심은 사랑의 대상이 다르다. 그러나 애정의 대상이 무엇이든 임을 향한 붉은 마음의 높이와 깊이는 동일하지 않을까 싶다./고재경 배화여대 명예교수고재경 배화여대 명예교수

2017-10-01 고재경

[사자성어로 읽는 고전]잠용물용: 잠긴 용이니 쓰지 말라

용(龍)은 12지지 가운데 유일하게 현실에서 볼 수 없고 꿈이나 상상 속에서 볼 수 있는 동물이다. 새는 하늘에서 날아다닐 뿐 물속에서는 살 수 없고, 물고기는 물속에서만 살 수 있을 뿐 하늘을 날아다닐 수 없다. 그런데 지금까지 여러 문헌이나 작품에 등장하는 용은 물속에서 하늘까지 활동무대가 넓다. 주역에서는 용이 성장하는 과정을 여섯 단계로 구분하여 부르는데 맨 처음의 성장과정에 해당하는 어린 용이 잠용이다. 반면에 하늘에 날아올라 조화를 부리는 용을 비룡(飛龍)이라 한다. 비룡이 숭앙의 대상이 된 것은 비 때문이다. 용이 날면 구름이 일고 구름이 일면 비가 내린다는 것은 오래도록 전해온 이야기이다. 정치의 목적 중 처음이 먹고사는 문제인 식(食)이고 먹고사는 문제 중 가장 처음이 물(水)이기 때문에 물에 대한 갈망을 담아 비를 내리는 비룡을 찬탄해온 것이다. 잠용의 경우는 용은 용이지만 아직 날아올라 조화를 부릴 수 없는 단계이기 때문에 아직은 자신의 역량을 써먹을 수 없으니 더 성숙해져야 한다는 뜻이다. 그러나 잠용이라고 영영 잠용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당장의 시기가 써먹지 못하는 시절이라는 것일 뿐 때가 무르익으면 날아올라 조화를 부릴 수 있다. 시기가 도래하지 않아 미래를 준비하면서 참고 있어야 할 땐 참을 줄도 알아야 한다. /철산(哲山) 최정준 (동문서숙 대표)

2017-09-26 철산 최정준

[시인의 연인]시마(詩魔)

그 넓고 넓은 속이 유달리 으스름하고한낱 반딧불처럼 밝았다 꺼졌다 하여성급한 그의 모양을 찾아내기 어렵다//펴 든 책 도로 덮고 들은 붓 던져두고말없이 홀로 앉아 그 한낮을 다 보내고이 밤도 그를 끌리어 곤한 잠을 잊는다//기쁘나 슬프거나 가장 나를 따르노니이생의 영과 욕과 모든 것을 다 버려도오로지 그 하나만은 어이할 수 없고나이병기(1891~1968)인간에게 상상력은 무한한 에너지다. 상상 속에서는 이루지 못하는 것이 없으며, 불가능한 것도 가능하게 만들어 준다. 그렇지만 불가해 한, 상상이 구체화될수록 상상은 생각에서만 그치지 않고 현실화되기도 한다. 그 세계는 성급하게 찾는다고 해서 찾아지는 것도 아니며, 그 속은 너무 "넓고 넓은 속이 유달리 으스름"하기도 하고, "한낱 반딧불처럼 밝았다 꺼졌다"하기도 한다. 이것은 시인에게 창작의 과정이며 상상을 언어로 현현시키는 고뇌인 것으로써 흔히들 '영감'이라고 부른다. 시인에게 "말없이 홀로 앉아 그 한낮을 다 보내고" 있는 밤의 시간은 휴식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잠을 건너가는 '노동의 새벽'이 된다. 마찬가지로 '기쁘나 슬프거나 이생의 영과 욕과 모든 것을 다 버려도' "그 하나만은" 어찌할 수 없는 것. 당신이 오늘도 놓치지 않고 잡고 있는 자신이, 바로 한편의 시다. /권성훈 (문학평론가·경기대 교수)권성훈 (문학평론가·경기대 교수)

2017-09-24 권성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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