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인천)

[인천경영포럼]박남춘 시장 "바이오산업 원부자재 국산화 인프라 확대"

헬스밸리·공정전문센터등 만들어인재양성·기업 기술개발체제 구축남동산단 2023년에 '스마트산단화''광범위한 효과' 지역화폐 지속 강조박남춘 인천시장이 올해 바이오산업의 원자재와 부자재를 국산화하기 위한 인프라 확충사업에 총력을 쏟겠다고 밝혔다.박남춘 인천시장은 9일 연수구 라마다송도호텔에서 열린 인천경영포럼 제416회 조찬강연회 연사로 나와 "인천은 바이오 생산도시 세계 1위로, FDA(미국 식품의약국)·EMA(유럽 의약품청)도 인천에 있는 삼성과 바이오로직스, 셀트리온을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이 됐다"며 "바이오헬스밸리를 조성해 많은 인천기업들이 참여할 수 있게 하겠다"고 말했다.박남춘 시장은 올해 시정 운영 방향 중 경제 활성화 정책으로 '지역 전략산업 유치·육성'을 꼽았다.바이오공정전문센터 건립을 추진해 2천500명의 인재를 양성하고, 2022년까지 송도에 바이오융합기술단지를 조성해 250곳의 관련기업을 입주시키겠다는 구상이다.박남춘 시장은 "바이오 관련 원부자재의 국산화 수준이 2%밖에 안 되고 98%를 외부에서 수입하고 있다"며 "바이오헬스밸리에 많은 기업들이 들어와 같이 기술을 개발하고 연구할 수 있는 체제를 갖춰 나가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2월에도 삼성바이오로직스, 셀트리온과 함께 행사를 계획하고 있다"고 덧붙였다.박남춘 시장은 남동산단 구조고도화를 위한 '스마트산단 조성사업'도 2023년까지 준공하겠다는 목표를 밝혔다.박 시장은 "남동산단에서 일하시는 분들이 밥 먹는 곳조차 변변한 장소가 없다고 한다"며 "민간 전문가, 공단, 남동구 관계자들과 함께 사업 추진단을 만들 예정이며 2022년까지 소재·부품·장비산업 실증화지원센터도 건립해 혁신적 경제 생태계를 조성하겠다"고 말했다.소상공인을 위한 인천형 지역화폐 '이음카드(e음카드)'는 임기 내 흔들림 없이 밀어붙이겠다고 했다.박남춘 시장은 "이음카드 예산으로 833억원 들어가는데 토목사업하는 것보다 훨씬 광범위한 효과를 내고 부가세도 774억원 이상 늘었다"며 "올해 발행액(충전액) 2조5천억원을 목표로 하고 있으며 누가 뭐래도 사업을 계속할 것"이라고 강조했다.박 시장은 화물주차장 건립, 중고차수출단지 이전 사업 등에 대해서도 "항만공사가 그림을 그리고 있지만, 주민 갈등이 많은 만큼 최선을 다해 풀어보겠다"며 "이해와 힘을 실어달라"고 주문했다. /윤설아기자 say@kyeongin.com박남춘 인천시장이 9일 오전 인천시 연수구 라마다송도호텔에서 열린 인천경영포럼 조찬강연회에서 '2020년도 인천시정 운영방향과 기업 지원 정책'을 발표하고 있다. /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

2020-01-09 윤설아

[줌인 ifez]송도·청라·영종 종합병원 건립 사업 어떻게 진행되나

연대, 협약따라 지연이자 年 15억~20억1공구 부지는 다른 용도 검토 목소리도청라, 3월 말까지 '사업자 제안서' 접수영종, 최적화 방안 마련 연구용역 추진송도·청라·영종국제도시 등 인천경제자유구역(IFEZ)에는 종합병원 부지가 있다. 송도 2곳(세브란스병원 포함), 청라 1곳, 영종 1곳이다. 종합병원 건립은 IFEZ 주민들의 숙원사업이다. 하지만 사업성 부족으로 장기간 지연되고 있다. IFEZ 인구가 증가하고 각종 개발 호재가 이어지면서 종합병원 건립 여건이 조금씩 개선되고 있다. 인천시 산하 인천경제자유구역청도 종합병원 건립 사업에 속도를 내고 있다. 송도·청라·영종에 계획한 종합병원 건립 사업이 올해 어떻게 진행되는지 알아봤다.■ 송도 세브란스병원 설계 시작송도 7공구 연세대 국제캠퍼스 부지에는 500~800병상 규모의 세브란스병원이 들어온다.인천시는 2006년 1월 연세대와 국제캠퍼스 조성에 관한 협약을 맺었다. 인천시는 송도 7공구와 11공구 땅을 2단계로 나눠 공급하고, 연세대는 캠퍼스·병원·교육연구시설을 조성하기로 했다. 협약 내용대로 연세대 국제캠퍼스는 2010년 3월 개교했다. 하지만 세브란스 병원은 '사업성 부족'과 '대학 내부 사정'으로 장기간 지연됐다. 인천시는 세브란스병원 건립사업이 더 늦어지는 것을 막기 위해 2018년 3월 연세대와 국제캠퍼스 2단계 사업에 관한 협약을 체결했다. 세브란스병원 건립이 약속보다 늦어지면 '지연 이자'를 내야 한다는 조항을 2단계 협약서에 넣었다. → 위치도 참조인천경제청에 따르면 연세대 측은 송도 세브란스병원 설계 업체를 선정하기 위한 절차를 밟고 있다. 올 상반기에는 설계 업체가 결정될 예정이며, 설계 기간은 1년6개월에서 2년으로 예상된다.인천경제청 관계자는 "올 하반기 2단계 사업과 관련한 토지 매매계약을 (연세대와) 체결하면, 세브란스병원 건립 지연 시 페널티가 적용된다"며 "지연 이자로 연간 15억~20억원을 내야 하기 때문에 연세대 측도 반드시 지키려고 노력할 것"이라고 말했다.송도 1공구에도 8만719㎡ 규모의 종합병원 부지가 있다. 이곳은 투자개방형 병원만 입주할 수 있었는데, 정부가 2018년 규제 혁신 차원에서 국내 종합병원 입주도 허용했다. 인천경제청이 민간사업자 유치를 위해 미국 뉴욕 프레스비테리안(NYP) 병원, 미국 존스홉킨스 병원 등과 협의를 벌였지만 성과를 내지 못했기 때문이다.정부가 국내 종합병원도 들어올 수 있는 길을 열어줬지만, 민간사업자를 유치하긴 어려울 것이란 우려가 나온다. 세브란스병원 건립사업이 추진되고 있는 데다, 종합병원이 2개나 필요할 만큼 송도 인구가 많지 않다는 점에서다. 지난해 11월 말 기준 송도 인구는 15만8천353명이며, 계획인구는 26만5천611명이다. 1공구 종합병원 부지를 다른 용도로 사용하는 방법을 검토해야 한다는 의견이 인천시의회에서 나오기도 했다.세브란스병원 건립이 지연되자, 민간 차원에서 '전문병원 복합단지' 조성사업을 추진했었다. 사업 대상지는 송도 4공구 인천도시철도 1호선 지식정보단지역 인근이다. 하지만 외국인투자법인 구성에 실패해 사업이 무산됐다고 한다. 이 부지는 지식정보산업단지로 지정돼 있기 때문에 준공 후 5년간 처분 목적의 분양이 제한된다는 문제도 있다.■ 청라 의료복합타운 사업자 선정'스타필드 청라' 부지 밑에 있는 투자2-2, 투자2-3, 투자2-4블록은 '청라의료복합타운' 조성 대상지다. 26만1천635㎡ 규모다. 500병상 이상 규모의 종합병원, 의료바이오 관련 산학연 시설과 업무시설, 상업시설 등이 들어서게 된다.인천경제청은 이곳에 종합병원을 유치하기 위해 차병원그룹과 양해각서를 체결하는 등 공을 들여왔다. 하지만 산업통상자원부 경제자유구역위원회가 지난해 4월 '수의계약이 아닌 공모로 사업자를 선정해야 한다'는 의견을 내놓으면서 청라의료복합타운 사업은 원점으로 돌아왔다. 차병원그룹과 수의계약을 체결할 경우, 특혜 시비가 일 수 있다는 지적이었다.인천경제청은 최근 청라의료복합타운 사업자 선정을 위한 공모 지침서를 인천시와 인천경제청 홈페이지에 게시했다. 인천경제청은 오는 9일 오전 10시30분 쉐라톤 서울 팔레스 호텔에서 사업설명회를 개최한다. 3월 말까지 사업 제안서를 접수한 후 4월께 우선협상대상자를 선정할 계획이다.인천경제청은 수요가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청라 인구는 10만7천665명으로, 계획인구(9만명)를 이미 넘었다. 하나금융그룹의 금융·디지털·글로벌 기능을 집적화한 '청라 하나드림타운' 조성사업이 차질 없이 진행되고 있는 데다, '스타필드 청라'도 올 하반기 착공을 앞두고 있기 때문이다. 인천경제청 관계자는 "사업 설명회 분위기를 봐야 알 수 있겠지만, (청라의료복합타운 조성) 여건이 나쁘지 않다"며 "주변에 종합병원이 없어서 사업성도 있을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청라의료복합타운 지원시설용지(25~30%)에는 오피스텔 건립이 가능하다고 한다.■ 영종 종합병원 최적화 방안 용역 추진영종 의료시설 부지(인천 중구 운남동 1606-3·4 10만5천139㎡)는 인천대교 진입부에 있다. 인천경제청, 중구청, LH, 인천국제공항공사, 시의회는 지난해 9월 '영종 종합병원 건립 공동 노력을 위한 협의체'를 구성했다. 영종국제도시 인구가 많은 편은 아니지만, 인천공항 종사자와 환승객 등을 고려하면 종합병원 건립이 시급하다는 게 이들 기관의 공통된 생각이다.인천경제청은 1억원을 들여 '영종 종합병원 최적화 방안 마련을 위한 연구용역'을 추진한다. 올 상반기에 착수할 예정으로, 용역 기간은 약 6개월이다. 인천경제청 관계자는 "어느 정도의 규모가 적정한 것인지 이번 용역에서 조사하게 된다"며 "영종도에 응급의료와 재난의료시스템을 구축하는 방안도 검토할 예정"이라고 설명했다. 영종 종합병원의 적정 모델을 개발하는 용역인 셈이다.인천경제청은 용역 결과를 토대로 관계 기관 및 주민 의견을 수렴한 후 사업자 공모 등을 추진할 계획이다. /목동훈기자 mok@kyeongin.com

2020-01-05 목동훈

[독립운동과 인천·(41·끝)에필로그]이어붙인 기억의 조각 '독립운동' 집대성 출발점 되길…

스치듯 지나가는 임정수립 100년 아로새기기 위해1년 동안 '인천과 독립운동' 하나로 묶는 데 집중항일투사들 '유배지' 기능에 초점 맞춰 시작강화 등 외딴섬까지 지역 3·1운동 범위 넓혀사진 없거나 수의 입은 모습이 대부분 안타까워소중한 자료 제공한 후손·독자들 관심에 감사'시간이 더 흐르기 전에 희미한 기억의 조각이라도 주워담아야 한다.'경인일보 특별취재팀이 '인천'과 '독립운동'을 하나로 묶는 작업을 올해 1년 동안 이어 온 이유이자 목표였다. 인천에는 생각보다 더 많고 다양한 애국지사들의 이야기가 묻혀 있었다. 하지만 그 흔적들은 생각보다도 더욱 희미해서 사라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기초적인 데이터조차 정리되지 못한 채 뿔뿔이 흩어져 있기도 했다.'3·1운동, 임시정부 수립 100년'을 맞은 2019년은 독립운동 재조명 열풍으로 대한민국이 들썩였지만, 그 열기는 3·1절을 거쳐 현충일이 지나면서 금세 식었다. 돌이켜 보면 인천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스치듯 지나쳐 가는 '100년'을 붙잡아 인천의 것으로 아로새기는 건 취재팀의 몫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1년을 끌고 오면서 잊힐 대로 잊힌 인천의 독립운동을 되살리려 애썼다.초반부에는 어느 누구도 이야기하지 않은 독립운동가들의 '유배지'로 기능했던 인천을 집중적으로 조명했다. 국사학자·국어학자·민속학자·교육자·언론인으로 활동한 독립운동가 계봉우(1880~1959)의 유해가 올해 4월 22일 카자흐스탄에서 60년 만에 고국으로 돌아왔다. 문재인 대통령은 현충일 추념사에서 계봉우 선생의 유해 송환을 언급하며 "우리의 보훈은 아픈 역사를 다시는 되풀이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앞서 취재팀은 계봉우가 북간도와 연해주 일대에서 독립운동을 하다가 1년 동안 인천 영종도의 어촌마을 예단포에서 유배생활을 했다는 점을 부각했다. 그는 영종도를 떠나면서 '봄날'에 빗댄 조국의 독립이 찾아오길 희망하는 시를 남겼다.강화에서 교육과 종교를 통해 독립운동을 펼친 강화진위대장 출신 임시정부 초대 국무총리 이동휘(1873~1935)가 대무의도에서 1년간 유배생활을 했다는 사실도 잘 알려지지 않았다.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항일단체 '성명회'를 조직한 오주혁(1876~1934)도 소무의도에서 귀양살이를 했다. 같은 시기 500여m 건너편 대무의도에는 이동휘가 유배 중이었다. 이동휘와 오주혁은 유배 이전부터 이미 교류가 있었고, 이후 활동에서도 접점이 있어 이들이 유배생활 중 어떤 식으로든 교류했을 것으로 연결지을 수 있었다. 러시아에서 항일투쟁을 하다가 강화 석모도로 유배된 이안득(1900~?)은 유배지 석모도의 3·1운동을 주도했다. 묻혀 있던 이안득의 석모도 3·1운동 역시 경인일보 연중기획을 통해 처음 소개됐다.인천의 3·1운동은 100년이나 지났는데도 '중·동구와 미추홀구 일부'로 한정된 통계로 축소된 채 통용됐다. 1만 명이 참가한 강화 만세운동, 부평·계양지역과 외딴 섬에서 일어난 만세운동까지 포함해서 인천지역 3·1운동의 범위를 확장시켰다. 신간회는 일제강점기 좌익과 우익이 합세해 독립운동사의 큰 줄기를 이루는 항일단체였다. 인천의 주요 인사들이 참여한 신간회 인천지회를 처음으로 다뤄 연구자들로부터 후속 연구의 길을 텄다는 평가를 받았다.인천의 대표적인 여성 독립운동가로 평가받아야 할 '유관순의 스승' 김란사(1872~1919)는 그 유명세에 비해 출생 연도조차 불확실했을 정도로 연구가 깊게 이뤄지지 못했다. 김란사의 후손으로부터 남편 하상기(1855~1920)의 제적등본(옛 호적등본)을 최초로 확보해 그가 태어난 해를 1872년으로 확정할 수 있었다. 김란사가 어떻게 세상을 떴는지는 추후 밝혀야 할 숙제로 남았다.인천 항만업계를 이끈 기업인 배인복(1911~1997)이 일제강점기 상하이에서 독립운동가와 교류하며 후원하는 '상인독립군'으로 활동한 행적을 인천은 놓치고 있었다. 한국 미학(美學)의 선구자라 불리는 우현 고유섭(1905~1944)이 14세 소년 시절 용동 만세운동을 이끌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던 이가 그동안 몇이나 됐을까.의사 출신 이민창, 육혈포로 자결한 정재홍(1867~1907), 인천고등학교 제39회 졸업생의 '비밀결사단', 부평 조병창에서 은밀하게 독립운동을 펼친 오순환(1921~1992)과 황장연(1923~2008), 노동운동가 김환옥(1914~?), 광주학생운동에 동참한 이두옥(1911~1950)과 신대성(1909~?), 인천 섬지역에서 독립운동 자금을 모집한 '인천사건'의 윤응념(1896~?) 등은 여전히 우리가 소홀히 대해 온 인천의 독립운동가들이다. 이들의 나머지 행적을 추적하는 후속연구가 앞으로의 과제다. 백범 김구(1876~1949)와 인천의 깊은 인연은 이미 널리 알려진 듯하지만, 전문가들 역시 인천과 백범을 연결짓는 폭과 깊이에 있어서는 부족했다. 시선을 조금 돌려서 들여다보니 백범의 생소한 인천 이야기들이 무궁무진하게 쏟아져 나왔다. 김구가 인천감리서 감옥을 탈출할 때 사용한 무기 겸 탈출도구인 '삼릉창'(三稜槍)에 처음으로 주목했다. 아버지 김순영이 옥중의 김구에게 몰래 넣어준 삼릉창은 그것을 제작했을 옛 인천의 대장간 이야기로 들어가는 통로가 된다. 인천에서 김구의 옥바라지를 한 '임시정부의 어머니' 곽낙원 여사의 동상이 있는 인천대공원, 김구의 탈옥을 도왔다고 주장한 감리서 순검(경찰) 이야기를 담은 대중일보 1946년 4월 17일자 기사에 다시금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인천의 독립운동은 다국적이었다. 강화 출신 김세원(1870~?)·윤원(1877~1920) 형제는 이역만리 멕시코로 이민을 떠나 고된 노동 속에서도 한인사회를 개척하며 독립자금을 모으고 학교를 세웠다. 미국 하와이에서 목회 활동을 하던 조광원(1897~1972) 신부는 미 해병대 종군신부로 태평양전쟁에 참전해 사이판전투에서 강제징집돼 포로가 돼버린 동포들을 구출해냈다.장봉도 태생 의열단원 이을규(1894~1972)·정규(1897~1984) 형제는 중국 각지를 넘나들며 종횡무진으로 활약하다 옥고를 치렀다. 인천이 낳은 거물 정치인 죽산 조봉암(1899~1959)은 러시아와 중국에서 사회주의를 기반으로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강화학파 유학자 이건승(1858~1924)은 1910년 한일 강제병합 직후 서간도로 망명해 해외 독립운동 근거지를 건설하는 데 여생을 바쳤다.생전의 사진 한 장조차도 남기지 못한 독립운동가들을 취재할 때는 그렇게도 서글플 수가 없었다. 자료를 뒤적이다 어렵게 건져낸 초상은 일제가 그들을 형무소에 가두거나 감시하기 위해 찍은 '감시대상 인물카드' 속의 것이 대부분이었다. 그래서인지 수의를 입은 사진이 유독 많았다. 독립운동가들이 목숨을 걸고 저항했던 일제가 남긴 그 자료를 통해서 후대에 기억돼야 한다니, 이 또한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후손을 찾지 못해 국가가 추서한 훈장조차 전달받지 못한 채 잊혀 가고 있는 인천 독립유공자들의 이름도 계속해서 되뇌어야 한다.경인일보 특별취재팀이 지난 1년간 기억의 조각들을 주워담고 이어붙인 결과물이 인천의 독립운동을 집대성하는 출발점이 됐으면 하는 바람으로 연중기획을 마친다. 어려운 발걸음으로 취재팀을 만나 소중한 자료를 선뜻 내준 독립운동가의 후손과 취재팀에 조언을 아끼지 않은 전문가들 그리고 많은 관심을 보내준 독자들께 감사드린다. /박경호기자 pkhh@kyeongin.com그래픽/성옥희기자 okie@kyeongin.com/아이클릭아트

2019-12-25 박경호

[zoom in 송도]'송도 바이오클러스터 연구용역' 최종보고회

벤처기업 'R&D 집적시설' 건립의료기기·디지털 헬스케어 유치연관산업과 융합 시너지 극대화기관협의 거쳐 기본안 확정키로인천 송도국제도시 바이오 클러스터를 송도 11공구까지 확장하는 내용의 연구용역이 마무리 단계에 있다. 인천경제자유구역청은 이번 연구용역을 통해 송도 11공구 산업 영역을 정했다. 또 토지 공급 방법과 바이오 클러스터 활성화를 위한 주요 사업을 검토했다.인천경제청은 지난 20일 송도 G타워 투자상담실에서 '송도 바이오 클러스터 활성화 방안 연구용역' 최종 보고회를 개최했다. 이번 연구용역은 셀트리온과 삼성바이오로직스 등 글로벌 기업·연구소가 있는 4·5공구 바이오 클러스터를 11공구까지 확대하기 위한 것이다. 인천경제청은 국내 바이오·헬스케어 기업 설문 조사, 전문가 자문, 문헌 조사 등을 통해 11공구 바이오 클러스터 입주 수요를 분석하고 기업 유치 방안을 마련했다.인천경제청은 11공구 바이오 클러스터 산업 영역을 '바이오의약', '의료기기', '디지털 헬스케어'로 정했다. 바이오 기업만 유치해선 경쟁력을 갖기가 쉽지 않다는 판단에서다. 바이오의약과 연관성을 가진 의료기기와 디지털 헬스케어 기업까지 유치하면, 시너지 효과가 극대화할 것으로 봤다. 산업 영역을 바이오의약에 국한하지 말고 연관 산업과의 융합을 유도해야 한다는 전문가 자문도 있었다. 인천경제청은 11공구 바이오 클러스터 토지 공급 방안도 이번 연구용역에서 검토했다.인천경제청은 지난 9월27일부터 10월31일까지 국내 바이오·헬스케어 기업 등을 대상으로 수요 조사를 진행했다. 국내 기업의 78.8%는 확장 또는 이전 의향이 있었다. 토지 규모는 '3천305㎡ 미만'이 37.3%로 가장 많았다. 국내 기업 대부분은 아직 규모가 작으며 성장 과정에 있는 것으로 인천경제청은 분석했다. 조사 대상 중에는 '3천305㎡ 이상' 등 넓은 토지를 희망하는 기업도 있었다.인천경제청은 기업의 성장 단계를 고려해 다양한 면적의 토지를 공급하기로 했다. 수요에 맞게 토지를 분할해 공급하겠다는 것이다. 인천경제청은 성장 초기 단계에 있는 기업들을 집적화할 수 있는 '고밀도 공간' 조성 방안도 계속해서 연구하기로 했다.이번 연구용역에선 인천경제청의 기업 지원 역할을 강화해야 한다는 의견이 나왔다. 세부 사업으론 ▲자금·인력이 부족한 바이오벤처를 위한 연구개발 특화 집적시설 건립 ▲원·부자재 국산화 ▲디지털 헬스케어 분야 시범 사업 등을 위한 공동 연구개발(R&D) 프로그램 운영 ▲입주 기업 중심의 협력 모델 구축을 위한 오픈 이노베이션 네트워킹 운영 등이 제시됐다. 기업 설문 조사에서도 "연구·실험을 지원하는 시설이 필요하다", "기업 간 연계·협력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는 의견이 많았다. 입주 기업들이 인프라(지원시설)를 공유하고 기술 교류 등 협력을 강화해야 바이오 클러스터가 제 기능을 할 수 있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인천경제청은 최종 보고회에서 나온 의견을 반영해 연내 연구용역을 완료할 계획이다. 또 연구용역 결과를 토대로 관계 기관과 협의를 벌여 송도 바이오 클러스터 활성화 기본계획을 확정할 방침이다.이원재 인천경제청장은 "송도 바이오 클러스터 확대 조성의 핵심 가치는 '혁신'과 '동반성장'"이라며 "선도 기업, 대학, 병원, 벤처 등 클러스터 주체들의 혁신적 교류와 협력이 실현되는 완성형 생태계로 발전시키기 위해 인천경제청의 역량을 집중하겠다"고 말했다. /목동훈기자 mok@kyeongin.com 그래픽/박성현기자 pssh0911@kyeongin.com/아이클릭아트인천경제자유구역청은 지난 20일 송도 G타워에서 '송도 바이오 클러스터 활성화 방안 연구용역' 최종 보고회를 열고 기업 유치 및 토지 공급 방안과 주요 사업에 대해 논의했다. /인천경제청 제공

2019-12-22 목동훈

[독립운동과 인천·(40)]후손 찾는 독립운동가들

독립유공자 훈·포장 전달 못한 인천 출신 인물 21명 달해강화 본적 지홍윤·김덕순·서영백·정도향·이재향 '의병투쟁'권태철·정홍문·장연실·최공섭·황준실 만세시위 적극 가담이건영·장라득·방한조·김윤원은 미국·쿠바등 해외서 활동감옥서 숨진 유갑순… 여성운동가 유점선·최덕임·장상림도인천 본적 정기인·황칠성·유완무도 잊지 않도록 재조명해야"독립운동을 하면 3대가 망한다"는 말이 있다. 상당수 독립운동가들이 해방 직후부터 최근까지도 제대로 대우받지 못했다. 세상을 뜬 지 한참이 지나서야 그 행적이 재조명된 경우도 많다. 항일투쟁에 몸 바치다 너무 이른 나이에 절명해 후손을 보지 못했거나 어려운 삶을 살다 후손마저 뿔뿔이 흩어져 찾지 못하는 독립유공자들의 훈장과 포장이 국가보훈처에 6천여 개나 쌓여있다.국가보훈처는 정부가 독립유공자에게 추서한 훈장을 유공자 본인 또는 직계 후손에게 전달한다. 직계 후손이 없을 때는 적정한 방계 후손에게 전하고 있다. 후손들이 독립운동가의 추모사업을 주도하거나, 집안에서 전해지는 자료를 보관하다 추가로 독립운동 행적을 발굴하는 경우가 많다. 그 후손들이 없으면 보훈처가 보관한다.정부가 독립유공자로 추서한 1만5천여 명 가운데 훈장과 포장을 후손에게조차 전달하지 못한 인물은 올 12월 기준으로 5천984명에 달한다. 북한이 본적인 경우가 가장 많고, 본적이 명확하지 않거나 해외에서 활동해 후손 추적이 어려운 경우도 상당수다. 이들은 후손이 없으니 세월이 흐르면서 자연스레 잊힐 수밖에 없는 처지다. 후손을 찾지 못한 인천 출신 독립운동가들을 꾸준히 기억하고 재조명해야 하는 게 인천의 책무일 터이다.국가보훈처에 따르면, 현재까지 인천을 본적으로 둔 독립유공자 가운데 후손을 찾지 못한 인물은 21명이다. 국가보훈처는 독립유공자 본적을 '인천'과 '강화'로 분류하고 있는데, 강화사람이 17명으로 가장 많다. 인천 본적은 4명이다. 일제강점기 인천의 행정구역이 광역시가 된 현재의 인천 행정구역보다 훨씬 작았고, 본적이 확인되지 않은 인물도 상당수이기 때문에 국가보훈처 자료가 인천 모두를 포괄한다고 볼 수는 없다. 본적이 인천은 아니지만, 인천을 기반으로 활동한 독립운동가 중 후손을 찾지 못한 인물도 더 있을 게 분명하다.강화에서는 일본이 국권 침탈을 본격화하던 조선 말기 격렬한 '의병투쟁'과 1919년 3월 1만 명이 참여한 대규모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후손을 찾지 못하고 있는 강화지역 독립유공자 17명 중 의병투쟁과 만세운동에 각각 5명이 투신했다.강화진위분견대 장교였던 지홍윤(1865~1909)은 1907년 8월 9일 일본의 군대 해산에 반발한 진위대 봉기를 주도하며 강화성에서 일본군에 맞서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이후 지홍윤은 주력부대를 이끌고 황해도 해주로 탈출해 그 지역 의병부대와 연합전선을 구축하려다가 일본 밀정의 고발로 체포돼 순국한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40대 중반이었던 지홍윤이 충분히 가족을 꾸렸을 것으로 추측해볼 수는 있으나, 1991년 애국장 서훈을 받은 지 30년 가까이 후손은 나타나지 않고 있다. 김덕순은 1908년 6월부터 강화 교동을 중심으로 의병을 꾸려 일본 선원과 밀정을 처단하다가 붙잡혀 교수형으로 순국했다.서영백(1878~?)은 1908년 초 40여 명 규모의 김태의 의병부대에 합류해 총기와 군도로 무장하고 강화 일대에서 군자금을 모으다가 붙잡혔다. 그는 내란죄로 기소됐으나, 재판 과정에서 강도죄로 바뀌어 교수형을 선고받았다. 다만, 서영백의 판결문에는 '법무대신 고영희(高永喜)' 명의로 일본인 재판장에게 "서영백을 특별히 본 형에서 한 등급을 감한다"는 임금의 뜻이 있다는 훈령을 내린 후 종신형으로 감형받은 내용이 있다. 정도향(1867~1908)은 1908년 9월부터 강화도의 장사들을 모았다는 이능권(1864~1909)의 의병부대 '대동창의진'(大東倡義陳)에 가담했다. 정도향은 의병부대에서 관헌의 동정을 살피고, 부대원들에게 편의를 제공하는 활동을 하다가 같은 해 12월 20일 일본 경찰에 의해 참살당했다. 이재향(1875~?)은 강화 석모도 출신인데, 1908년 충북 청원군 일대에서 유현서(1882~1909) 의병부대원으로 활약하다가 체포된 기록이 있다.후손을 찾지 못한 강화지역 만세운동 유공자들은 대부분 1919년 3월 18일 '결사대장' 유봉진(1886~1956)이 이끈 대규모 강화 읍내 시장 시위에 참가했다. 권태철(1897~?)은 강화 만세시위 때 신문리 시장에서 큰 종이로 만든 태극기를 들고 선두에 서서 독립만세를 불렀다. 강화경찰서 순사 김덕찬이 태극기를 빼앗으려 하자 권태철은 오른손으로 기를 붙잡고, 왼손으로 김덕찬의 따귀를 쳤다. 체포된 권태철은 징역 10개월을 선고받았다.정홍문(1888~1928)은 유봉진과 함께 강화경찰서 앞에서 3시간 동안 "앞서 유치한 사람을 석방하고, 시장에서 칼을 뽑았던 김 순사를 쳐서 죽일 터이니 인도하라"고 외쳤다. 그는 징역 6개월을 선고받았다. 장연실(1868~?)과 최공섭(1902~?)도 이날 강화 만세시위에 적극적으로 가담했다가 체포돼 처벌받았다. 황준실(1902~?)은 1년 뒤인 1920년 양사면 철산리에서 오용진 등과 다시 대규모 만세시위를 벌이려다 발각돼 징역 1년형을 받았다.해외에서 독립운동을 펼친 강화사람들도 눈길을 끈다. 끝내 고국 땅을 밟지 못한 이들의 후손은 찾을 길이 더욱 막막하다.강화 길상면 선두리가 본적인 이건영(1886~1939)은 1910년부터 1930년까지 미주지역 한국인단체인 대한인국민회 샌프란시스코지방회원·회장, 로스앤젤레스지방회 경찰원·대의원·총무, 뉴욕지방회 총무 등을 지냈다. 대한인국민회가 발행한 '신한민보'를 보면, 이건영은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육십원 잡화상점'이라는 가게를 운영하면서 여러 차례 독립금과 국민의무금 등 독립운동자금을 지원했다. '신한민보' 1939년 12월 7일자 신문에는 그해 12월 1일 이건영이 뉴욕에서 별세했다는 부고가 실렸다.강화 길상면 온수리가 본적일 것으로 추정되는 장라득(1879~?)도 1908년부터 미국 오클랜드 등지에서 대한인국민회 지방회 회원 등으로 활동하며 해방이 될 때까지 여러 번 독립운동자금을 지원한 공로가 인정돼 2017년 대통령 표창이 수여됐다. 1910년대 멕시코에서 활동하다가 1920년대 쿠바로 건너간 방한조(1886~?)는 강화 선원면 창동이 본적이다. 해방 때까지 쿠바 한인단체 임원을 역임하면서 꾸준히 독립운동자금을 지원했는데, 2018년에서야 건국포장에 추서됐다. 멕시코에서 한인 이민자 자녀들을 위해 학교를 설립한 김윤원(1877~1920)도 강화 출신 독립유공자다.서울 경신학교 학생이던 강화 화도면 출신 유갑순(1892~1921)은 1920년 5월 서울에서 상하이 임시정부 교통국 경성 담당 이원직(?~1945)에게 임정이 발행한 공보와 독립신문을 받고, 이를 배포하기 위한 자금과 동지를 모으다가 체포됐다. 유갑순은 주변 사람들에게 임시정부 총감부 명의 특파원증을 보이며 "우리들 청년이 묵시할 시대가 아니다. 서로 함께 조선 독립을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하자"고 설명했다는 기록이 판결문에 나온다. 징역 5년을 선고받은 유갑순은 1921년 6월 27일 옥중에서 숨을 거뒀다.1919년 3월 5일 서울 남대문역 앞에서 만세운동을 하다가 체포돼 징역 6개월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은 여성 유점선(1901~?)도 강화 출신이다. 1930년 1월 16일 서울 경성여자상업학교 3학년 재학 중에 광주학생운동 영향을 받아 만세운동과 동맹휴교에 참여하다 구류 20일 처분을 받은 최덕임(1912~?)도 강화 출신 여성이다. 같은 시기 서울 근화여학교 2학년에 다니면서 만세운동과 동맹휴교에 동참한 여성 장상림(1913~?)은 인천 화평동이 본적으로 나온다. 최덕임과 장상림은 지난해 대통령 표창을 받았다.인천 출신 정기인(1888~?)은 1907년 11월부터 1909년 11월까지 경기도 용인, 광주 등지에서 의병활동을 하다 체포돼 징역 7년을 선고받았다. 역시 인천 출신인 황칠성(1894~?)은 1919년 3월 28일 경기도 수원 송산면 사강리(현 화성시)에서 만세운동에 참여하면서 일본인 순사를 처단하다 붙잡혀 징역 7년형을 받았다. 인천에서 감옥살이를 하던 백범 김구를 구출할 계획을 세웠고, 훗날 백범을 만나 김창수였던 이름을 김구(金龜)라고 고쳐주기도 한 민족운동가 인천의 유완무(1861~1909) 역시 서훈을 전달받을 후손이 없는 상황이다. 유완무는 북간도와 연해주 일대에서 독립운동 근거지를 개척하기 위한 활동을 하다가 그곳에서 최후를 맞았다. /박경호기자 pkhh@kyeongin.com일러스트/성옥희기자 okie@kyeongin.com/아이클릭아트1920년 강화 양사면에서 대규모 독립만세시위를 벌이려다 발각돼 옥고를 치른 황준실 지사. /국사편찬위원회 제공미국에서 활동한 강화 출신 이건영 지사가 샌프란시스코에서 잡화상점을 운영한다는 '신한민보' 1919년 3월 22일자 기사. 출처/공훈전자사료관쿠바 하바나에서 대한인국민회 하바나지방회 총무를 맡고 있는 강화 출신 방한조 지사가 광복군후원금을 걷는 데 쉬지 않고 있다는 내용의 '신한민보' 1941년 5월 8일자 기사.상하이 임시정부 공보물을 배포하고, 독립운동자금을 모금하다가 붙잡혀 옥중에서 숨을 거둔 유갑순 지사. /국사편찬위원회 제공

2019-12-18 박경호

[독립운동과 인천·(39)]조병창에서 독립운동 벌인 오순환과 황장연

캠프마켓 부지 옛 일제 병참기지감시속 두 노동자의 용감한 활동인천 부평에 있던 '일본육군인천조병창(이하 조병창)'은 일제의 핵심 병참기지였다. 일제는 조병창을 본격적으로 운영한 1941년부터 매년 엄청난 양의 군수물자를 생산했다. 일제는 생산량을 맞추기 위해 조선인 노동자를 대규모로 동원했다. 전쟁 말기에는 초등학교를 갓 졸업한 어린 학생까지 강제 동원했다.한반도 최대 규모의 군수공장인 조병창에선 소총과 포탄, 탄환뿐만 아니라 선박과 무전기까지 만들었는데, 조선인 노동자들에게 같은 공정만 반복하게 했다. 자신이 무엇을 만드는지도 모르게 했다. 인천대학교 이상의 교수가 2017년 7~8월 조병창 노동자 12명의 구술을 채록한 자료를 보면 한 노동자는 부품검사를 하고 이상이 없으면 탄창에 쇠도장을 찍는 업무만 했다. 다른 노동자는 칼이 제대로 만들어졌는지 판단하는 단순한 일만 했다. 조선인 노동자들이 무기 제조 종합기술을 습득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한 방편이었다.일제의 엄중한 감시 속에서도 조선인 노동자들은 조병창에 들어가 무기를 밀반출하거나 무기 제조법을 빼내려고 했다. 독립운동가 오순환(1921~1992)과 황장연(1923~2008)이 대표적이다.오순환은 조병창에 위장취업해 무기 제조법을 배우려고 했다. 그는 조병창에서 배운 기술로 무기를 만들어 조선 총독이나 일제 고관을 처단하고자 했다. 오순환의 계획은 안타깝게도 조병창 내에서 적발돼 실패로 돌아갔으나, 독립운동가들이 암시장에서 총기를 구매했던 점을 고려하면 매우 획기적인 시도였다.황장연은 조병창에서 만든 무기를 빼돌리려 했다. 황장연은 동료 30여 명을 모아 '고려재건당(高麗再建黨)'을 조직했다. 또 임시정부 요원과 접선해 권총 3정과 실탄 50발을 전달하려고 했다.조병창 침투 독립운동은 제대로 조명되지 못했다. 조병창은 해방 이후 미군부지로 징발당했다. '애스컴씨티'와 '캠프마켓'이다. 캠프마켓 부지반환을 앞둔 지금, 조병창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를 우리가 다시 주목할 필요가 있다. /김주엽기자 kjy86@kyeongin.com

2019-12-11 김주엽

[독립운동과 인천·(39)]조병창에서 독립운동 벌인 오순환과 황장연

부평에 위치 매월 소총 4천정·탄환 70만발 등 생산학생까지 강제동원… 헌병·경찰 삼엄한 경비 '통제'오순환, 총독 암살 위해 창천체육회·조기회 만들어제조법 배우려 '위장취업'… 이듬해 발각 고문 당해황장연은 감시 심한 내부서 '고려재건당' 조직 눈길권총·실탄 등 임정요원에 전달하려다 붙잡혀 '옥고'일제는 1930년대 후반 인천 부평을 중국에 진출하려는 일본의 대규모 병참기지로 쓰기 위한 작업에 돌입했다. 중일전쟁 당시 한반도에서 필요한 군수물자를 조달하는 것이 편리하다고 판단한 일본은 1941년 부평에 대규모 군수 공장의 문을 열었다. 지금은 '캠프마켓'이라는 이름으로 인천 부평 한복판에 자리 잡고 있는 '일본육군인천조병창(이하 조병창)'이다.당시 조병창은 한반도에서 가장 규모가 큰 무기 제조 공장이었다. 이 때문에 조병창에 들어가 무기를 밀반출하거나 무기 제조법을 빼내기 위한 독립운동가들의 조직적인 움직임이 있었다. 독립운동가 오순환(1921~1992)과 황장연(1923~2008)이 대표적이다. 군수 공장이었던 탓에 조병창의 경비는 매우 삼엄했지만, 오순환과 황장연은 그 속에서도 조국의 독립에 보탬이 되기 위해 노력했다.연구자들은 조병창 내에서 독립운동을 한 인물들이 더 많았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하지만 해방 후 조병창 부지는 미군이 사용해 왔기 때문에 관련 자료를 확보하기 어려웠다. 캠프마켓 부지 반환을 앞둔 만큼 이제라도 깊이 있는 연구가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공장들도 많았지만, 창고도 많았어요. 공장에서 만든 물건들을 쌓아 두던 곳이죠. 안에 기차가 다녀서 가끔 물건들을 싣고 가기도 했어요."조병창 내 병원에서 3년간 일했던 지영례(91) 할머니는 조병창에 대해 이같이 설명하고 있다. 인천대학교 이상의 교수가 2017년 7~8월 채록한 조병창 노동자 12명의 구술과 관련 자료를 보면 조병창은 3개의 공장으로 구성돼 있었다. 조병창에서 일했던 노동자들은 규모를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컸다고 증언하고 있다.일본 육군은 서울과 인천의 중간에 있는 데다, 인천항에서 멀지 않고, 경인선을 이용해 곧바로 물자를 운송할 수 있는 부평 지역을 조병창의 부지로 선택했다. 또 부평에는 일본군 제20사단이 담당하던 부평연습장이 있어서 대규모 부지를 확보하는 데 수월했던 점도 작용했을 것으로 연구자들은 보고 있다.조병창에서는 매달 소총 4천정과 총검 2만개, 소총 탄환 70만발, 포탄 3만발, 군도(軍刀) 2만개, 차량 200량을 생산했다. 1944년부터 광복 때까지는 총 250여척의 선박과 200여개의 무전기를 제작했다는 기록도 남아 있다. 심지어 당시 일본 육군이 비밀리에 잠수함을 만들던 인천 동구 만석동 조선기계제작소에 관련 부품을 공급했다.조병창이 본격적인 운영을 시작한 1941년부터 문을 닫을 때까지 4년여 동안 조병창의 총생산액은 1억1천330만엔에 달했다. 1940년 우리나라의 쌀 한 가마니(80㎏)의 가격이 22엔이었던 점을 고려하면, 4년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 1조300억원에 달하는 제품을 만들어 낸 셈이다. 초기 조병창에서는 공개적인 모집을 통해 조선인 노동자들을 모았다. 공개 채용 형태로 조병창에 입사한 노동자들은 월급을 제대로 받지 못했다고 한다. 이상의 교수 채록에 따르면 당시 조병창에서 근무했던 노동자들은 "집으로 돈을 부치기는커녕 오히려 집에서 (돈을) 보내줘야만 할 정도로 열악했다"고 증언하고 있다.태평양 전쟁이 한창이던 1944년 조선총독부는 '국민징용령'을 시행했다. 이때부터 조병창에선 학교에 다니던 학생들까지 강제로 동원해 부족한 노동력을 채웠다. 조선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보에서는 1944년 5월 "결전비상조치요강에 기초한 제1회 학도동원이 시행돼 '경성공업(현 서울대학교 공과대학)', '인천중학(현 제물포고등학교)', '인천상업(현 인천고등학교)', '인천공업(현 인천기계공업고등학교)', '인천고여(현 인천여자고등학교)', '소화고여(현 박문여자고등학교)' 남녀생도 360명이 인천육군조병창에 입창했다"고 보도했다. 일본 육군은 조병창에 강제로 끌려간 학생들에게는 월급도 주지 않았다.조병창은 전쟁에 필요한 물자를 공수하는 공장이기 때문에 일본 육군 헌병대와 경찰의 엄중한 감시 속에서 운영됐다. 조병창에서 일한 노동자들이 "조병창에 들어가면 굴뚝에 들어간 것처럼 어딘지 알 수 없었다"고 말할 정도였다. 대부분 노동자는 자신의 숙소와 작업장의 한정된 지역에서만 통행할 수 있었다. 노동자 가운데 조금이라도 의심스러운 행동을 하는 사람은 체포되거나 밖으로 추방됐다.노동자들을 상대로 한 철저한 통제가 계속됐다. 그러나 이곳에서도 독립운동은 계속 진행됐다. 오순환은 독립운동을 하고자 스스로 조병창에 들어간 인물이다. 독립운동가 김승학이 1970년 발간한 '한국독립사'에서는 오순환을 1921년에 태어난 독립운동가로 소개하고 있다. 서울 창천감리교회 청년회에 속해 있던 그는 회원 21명을 모아 항일 결사 단체인 '창천체육회(滄川體育會)'와 '조기회(朝起會)'를 조직했다.창천체육회와 조기회는 독립운동의 방법으로 조선총독과 일제 고관 암살을 실행에 옮기기로 했다. 이를 위해 그는 1941년 10월 함께 활동하던 김군회(1918~1963), 정은태(1921~1996) 등과 함께 조병창에 위장 취업했다. 조병창은 국내에서 가장 규모가 큰 군수공장이었기 때문에 일본군의 무기 제조 기술을 배우기 위함이었던 것이었다. 당시 독립운동가들은 암시장을 통해 구매한 총기를 사용했다고 한다. 이런 점에서 보면, 오순환은 매우 획기적인 시도를 한 셈이다.안타깝게도 오순환의 계획은 이듬해 경찰에 발각됐고, 함께 잠입한 회원들과 붙잡혀 혹독한 고문을 당했다. 오순환이 조병창에서 배운 기술로 실제 무기를 만들었는지는 밝혀지지 않고 있다. 오순환은 1944년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2년형을 선고받아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됐다. 그의 큰아들인 오세대(73)씨는 9일 경인일보와의 전화 인터뷰에서 "아버지는 해방 후 철공소를 운영할 정도로 손재주가 좋은 사람이었다"며 "조병창에서 몇 달만 일하면 충분히 무기 제조 기술을 배울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 것 같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아버지는 매우 강직했고, 불의를 보면 참지 못했다"며 "고문 후유증으로 평생을 허리통증에 시달렸지만, 항상 독립운동에 참여했다는 것을 매우 자랑스럽게 여기셨다"고 덧붙였다.조병창에서 독립운동을 했던 사람은 오순환뿐만이 아니다. 황장연은 조병창에서 제작된 무기를 빼돌려 임시정부에 전달하려 했던 인물이다.국가보훈처의 독립유공자 공훈록에서는 그가 1923년 경기도 파주에서 태어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황장연이 조병창에 언제 들어갔는지에 대해선 관련 기록이 남아 있지 않아 확인되지 않고 있으나, 그가 조선군법회의에서 재판을 받은 점을 보면 강제로 동원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1943년 5월 황장연은 조병창에서 함께 일하던 30여명의 동료들과 '고려재건당(高麗再建黨)'이라는 비밀 조직을 만들었다. 당시 한반도 내에 어느 곳보다 철저한 감시가 이뤄지는 조병창에서 그가 독립운동을 위한 단체를 만들었다는 점이 놀랍기만 하다. 1944년 9월 황장연은 임시정부 요원이던 신교선과 접선해 권총 3정, 실탄 50발을 전달하려고 시도했다. 하지만 조병창을 관리하던 일본 육군에게 발각됐고, 그는 이듬해 2월 조선군법회의에서 징역 1년형을 선고받아 옥고를 치렀다.오순환과 황장연 이외에도 조병창에서 독립운동을 벌인 인물이 더 많았을 것으로 보이는 자료도 있다. 재미교민단체가 발행한 '국민보'는 1945년 8월 15일 자 신문에 "군수공장 공인 100여명이 폭력단을 만들어 적의 기관을 파괴할 폭탄과 화약을 감추어 두었다가 붙잡혔다"고 보도하기도 했다. 조병창에 강제 동원됐던 보성전문학교(현 고려대학교) 학생은 숙소 내 화장실에 '조선 독립만세'라고 적은 종이를 붙이기도 했고, 작업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않았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일부는 '일본의 전쟁을 유리하게 만드는 무기를 만들지 말자'며 쟁의행위를 일으키기도 했다.아쉽게도 조병창에서 활동했던 독립운동가들에 대해서는 제대로 알려지지 않고 있다. 일본 패망 직후에는 조병창을 관리하는 일본인들이 관련 문서를 파쇄하고 본국에 돌아간 데다, 미군이 오랜 기간 그 터를 차지하고 있어서 조사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은 탓이라는 게 연구자들의 설명이다. 인천연구원 김창수 부원장은 "오순환과 황장연은 일제가 가장 엄격하게 통제하던 조병창에서 독립운동을 벌였다"며 "이들뿐만 아니라 조병창 내에서 활동했던 더 많은 독립운동가의 행적을 밝혀내기 위한 연구가 절실한 시점"이라고 했다. /김주엽기자 kjy86@kyeongin.com일러스트/박성현기자 pssh0911@kyeongin.com미군(軍) 노릅 파이어(Norb-Faye)가 촬영한 1948년 부평 일대의 전경. 하얀색 바탕으로 표기된 부분이 당시 건물이고, 검은 테두리 친 표기가 현재 시설이다. /김현석 인천민속학회 이사 제공

2019-12-11 김주엽

[독립운동과 인천·(38)]용유도의 3·28만세운동

나수영 前면장 십시일반 기념비 건립보존회 만들어 후손들에 알리기 노력"삼월 찬 바람에 몸을 던져 산과 바다에 울리도록 외친 만세 소리 / 이제 비바람 지나간 하늘에 영겁으로 뻗는 웃음 되어 조국의 미래에 꺼지지 않는 불을 밝히리."인천 용유도 마시안해변 인근에는 3·1독립만세운동 기념비가 있다. 인천 영종·용유도 지역의 유일한 3·1 운동인 '3·28 만세운동'을 기리기 위한 것이다. 서울 배재학당을 다니던 조명원(1900~1968)은 3·1운동 소식을 섬마을에 전했고, 조종서(1898~?)·최봉학(1897~1955)·문무현(1899~1970) 등과 함께 '혈성단(血誠團)'을 만들어 마을 사람들과 만세운동에 나섰다.나수영(91) 전 용유면장은 그 독립운동을 기리기 위해 기념비를 세웠다. 그는 면장으로 일하던 1982년 '용유면 삼일독립만세기념 공적비 건립 추진위원회'를 만들어 기념비 제작을 추진했다. 그는 "우리 세대는 어린 시절 어른들을 통해 용유도에서 만세운동을 했다는 사실을 들었지만, 기록을 남기지 않으면 후손들은 독립운동 사실을 전혀 알지 못할 것 같았다"며 "당시 용유도에 살던 주민들이 십시일반 돈을 보탰고, 부족한 돈은 주민 스스로 땅을 팔아서라도 채웠다. 사비를 털어서라도 역사적 사실을 꼭 기념하고 싶었기 때문이다"고 말했다.나 전 면장의 노력으로 만세 함성이 울린 지 63년 만인 1983년 3월 28일 기념비 제막식이 열렸다. 이곳에서는 매년 3월 1일 선조들의 만세운동을 기리기 위한 행사가 열린다. 용유도 주민들은 만세운동을 후대에 계속 알리기 위해 '용유 3·1 독립만세 기념비 보존회'를 만들어 기념비를 관리하고 있다. 인천 중구청도 2017년 추모공원 기념비를 보강했다. 서병구 보존회 회장은 "우리 지역에도 이러한 훌륭한 사람들이 있었다는 사실을 여러 곳에 전하고 싶은 심정으로 기념비를 관리하고 있다"며 "일제의 압제에도 굴하지 않고 독립운동을 벌인 우리 지역의 훌륭한 역사를 후손에게 전달하기 위해 노력하겠다"고 했다. /김주엽기자 kjy86@kyeongin.com지난 3일 오후 인천시 중구 용유동 행정복지센터에서 서병구 3·1운동기념비보존위원회장(왼쪽)과 나수영 전 용유면장이 용유 3·1 만세운동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있다. /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

2019-12-04 김주엽

[독립운동과 인천·(38)]용유도의 3·28만세운동

'혈성단' 조명원·조종서·최봉학·문무현 앞장이기복·유웅렬·이난의 '태극기' 제작 힘보태일본인에 땅 빼앗긴 주민들 불만 극에 달해1919년 3월 28일 관청리 일대 150여명 집결주도자들 복역후에도 고문 후유증 등 '고통'1991년 용유中 학생들, 후손 인터뷰 책 발간'아름다운 내 고장…' 중요 연구자료로 꼽혀1919년 3월의 독립운동은 인천의 작은 섬 용유도에까지 번졌다. 용유도 만세운동은 3월 28일에 일어났다. 서울에서 공부하던 조명원(1900~1968)이 3·1 만세 운동 소식을 섬으로 가져왔고, 조종서(1898~?)·최봉학(1897~1955)·문무현(1899~1970) 등이 함께 마을 사람들을 이끌고 만세를 외쳤다. 용유도 사람들은 이를 3·28 만세운동이라 부른다.용유도는 지금은 인천국제공항이 자리 잡은 곳이다. 인천대교와 영종대교 등 연륙교로 연결돼 있어 언제든 드나들 수 있어 육지나 다름 없는 지역이다. 하지만 100년 전만 하더라도 용유도는 인천항에서 20㎞ 떨어진 외딴 섬이었다. 1919년 용유도에서 작은 돛단배를 타고 인근 영종도로 간 뒤, 이곳에서 또 배를 갈아타야만 인천에 나갈 수 있었다. 늦게나마 만세운동 소식을 접한 용유도 주민들도 조국의 독립을 위해 힘을 모았다."조선 운동을 거할 것이니 28일 관청리 광장에 모이라."1919년 3월 27일 밤. 용유도의 7개 마을에는 이러한 내용이 담긴 격문 80여 통이 배포됐다. 이 격문을 제작한 사람은 조명원과 조종서, 최봉학, 문무현 등 당시 용유면 남북리에 거주하던 젊은 청년들이었다.서울 배재학당에 다니던 조명원은 서울에서 열린 3·1 운동에 참여한 이후 같은 달 23일 독립선언서를 가슴에 품고 고향 용유도로 돌아왔다. 남북리 대지주의 손자였던 그는 어린 시절 개인 교사에게 한학을 배우다가 서울로 유학한 것으로 전해진다. 조명원은 5촌 조카 조종서와 최봉학, 문무현과 '혈성단(血誠團)'이라는 비밀 독립운동단체를 만들고, 용유도에서도 만세 운동을 벌이자고 결의했다. 혈성단이 만들어진 곳은 지금 주소로 인천 중구 남북동 868의 '조병수 가옥'이다. 이곳은 조선 말기인 1890년 지어진 옛집으로, 1997년 인천시 문화재자료 제16호로 지정되기도 했다. 현재 이 집에 거주하는 조병수 씨는 조명원과 6촌 관계다.이들은 만세운동 거사 일을 5일 뒤인 28일로, 거사 장소는 당시 용유중학교가 있던 관청리 일대로 정했다. 혈성단이 이곳을 만세 운동 장소로 선정한 이유는 용유도에서 가장 넓은 들판이 있던 지역이었기 때문이다. 혈성단은 격문과 태극기를 만들어 한글을 읽을 줄 아는 주민들에게 집중적으로 배포했다. 용유면 선임서기로 근무하던 이기복(1889~?)도 거사 소식을 접하고 을왕리에 있는 유웅렬(1896~1939)의 집에서 태극기를 제작했다. 조선총독부 기관에 근무하고 있었지만, 독립을 향한 열망까지 꺾이지는 않았던 거였다. 을왕리에 거주하던 이난의(1884~1957)도 만세 운동에 참가하기 위해 태극기를 제작해 마을 주민에게 나눠줬다.28일이 되자 용유도 주민들은 관청리 광장에 모였다. 조선총독부가 3·1 운동 동향을 일본 정부에 보고한 문서에 따르면 당시 관청리 광장에는 150여 명의 용유도 주민들이 집결했다. 1894년 발행한 '영종진 사례책'에 용유도에 248호가 거주한다고 기록돼 있는 점을 고려하면 1910년대 용유도의 인구는 1천명~1천500명 안팎이 될 것으로 추정된다. 전체 인구의 10분의 1 정도가 만세 운동에 참여한 것으로 볼 수 있다.많은 수의 용유도 주민이 독립운동에 참여한 이유는 이들이 일본인에게 큰 피해를 당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조선총독부는 1912년 '토지조사령'을 공포했다. 지세 부담을 공정하게 하고, 근대적 토지소유권을 확립한다는 명목이었다. 하지만 실제 목적은 식민통치에 필요한 조선총독부 재정을 안정적으로 확보하기 위한 조치였다. 당시 토지 조사 사업은 조선 총독이 정한 기간 안에 토지 소유권자가 직접 신고해 소유지로 인정받는 '신고주의' 방식으로 진행됐다. 구비 서류나 절차가 매우 까다로운 데다, 신고기간도 매우 짧아 많은 조선인이 토지를 빼앗기는 일이 발생했다. 조선총독부는 미신고 토지를 총독부 소유로 전환했고, 이를 일본인에게 헐값에 넘겨줬다.용유도의 사정도 마찬가지였다. 용유도에는 조선 시대부터 나라에서 운영하던 목장과 염전이 많았다. 1910년대만 하더라도 특정 토지 소유자가 없는 땅이 많았다. 토지 조사가 마무리된 이후 이러한 토지는 모두 조선총독부 소유로 편입됐다. 조선총독부는 이를 일본인에게 판매했다. 조선총독부 관련 서류를 살펴보면 1919년 총독부는 일본인 오구라 류스케에 용유도 토지를 양도한 것으로 나온다. 그는 1926년 용유도에 있는 임야 95만여㎡를 혼자 소유했다. 자신의 땅을 일본인에게 빼앗긴 용유도 주민들의 불만은 극에 달한 상황이었다.용유도 주민들은 대형 태극기를 대나무 죽창에 매달아 관청리 광장 중앙에 꽂았다. 이날 만세운동에 참여했던 주민들은 "대나무 장대에 있는 대형 태극기는 장정 두 사람이 들기에도 힘들 만큼 컸다"고 당시를 회상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주민 150여 명은 독립선언식을 거행하며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대형 태극기를 앞세운 혈성단원이 '대한독립만세'를 선창했고, 주민들은 태극기를 흔들며 용유도 전 지역을 돌아다녔다. 당시 만세운동에는 용유면 면장이었던 정우용도 참여했다고 한다. 이날 시작된 용유도 만세 운동은 이후 이틀이나 계속됐다.용유도의 만세 운동은 뱃길로 십분 정도 떨어져 있던 무의도에도 영향을 끼쳤다. 당시 무의도는 인천항 축항 공사에 필요한 석재를 조달하기 위한 채석장이 있었는데, 이곳 주민과 인부들은 인천이 바라다보이는 곳에서 만세를 불렀다. 어찌 된 영문인지 채석장 감독이었던 일본인 마쓰다 미야타로오도 주민들과 함께 만세를 외쳤다고 전한다.조선총독부가 3·1 운동 동향을 파악한 문서에 따르면 혈성단 단원을 포함한 만세운동 주요 참가자들은 모두 일본 경찰에 붙잡혔다. 이들은 인천경찰서로 옮겨진 뒤 가혹한 구타와 혹독한 고문을 당했다. 당시 재판기록을 보면 만세 운동을 주도한 조명원은 징역 1년 6월을 선고받았고, 조종서와 최봉학, 문무현 등 나머지 혈성단원은 징역 1년형을 받았다. 을왕리에서 독립운동에 참가했던 유웅렬도 태형 90대의 판결을 받는 등 이날 만세운동으로 처벌받은 용유도 주민은 11명이나 됐다. 용유면 서기로 일하던 이기복은 체포되지는 않았지만, 직업을 잃어야만 했다.조명원 등 혈성단원은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한 이후 큰 어려움을 겪었다. 조명원은 고문 후유증으로 거동이 불편한 데다, 일제의 감시로 평생 제대로 된 직업을 갖지 못하다가 세상을 떠났다. 조종서는 일본 경찰의 감시를 피해 강화도로 이주했지만, 6·25 전쟁 당시 숨진 것으로 전해진다. 최봉학과 문무현, 유웅렬 등도 고문 후유증으로 고생했다고 한다."을왕 해수욕장이 있고 해당화 해송 숲이 해변을 덮고 있는 곳이 내 고장 용유도입니다. 이런 아름다운 내 고장에 일본 제국주의의 군화가 '용유의 얼'을 앗으려 했습니다. 1919년 3월 28일 우리 선조들은 분연히 일어섰습니다."1991년 용유중학교에 다니던 향토조사반 학생 8명은 이들의 독립운동을 기리기 위해 '아름다운 내 고장 용유도'라는 책을 냈다. 당시 학생들은 용유도에 거주하던 만세운동 참가자 후손들을 인터뷰해 이 책을 만들었다고 한다. 이는 현재 남아 있는 3·28 독립운동에 관한 가장 중요한 기록이라는 게 연구자들의 설명이다.이들의 독립운동을 기념하기 위한 지난해 기획 전시를 진행한 바 있는 영종역사관 김연희 학예사는 "영종·용유도 지역의 유일한 독립운동이지만, 관련 사료가 매우 부족한 상황"이라며 "용유도의 만세 운동은 외부의 지원 없이 섬 주민들 스스로 실행했다는 데 큰 의의가 있다. 지금이라도 관련 연구가 더 이뤄져야 할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김주엽기자 kjy86@kyeongin.com영종 용유 만세운동 기념비일제감시대상 인물카드 사진. 왼쪽부터 조명원, 조종서, 최봉학, 문무현 지사. 출처/국사편찬위원회조명원 등 혈성단원들이 독립운동을 계획했던 조병수 가옥. /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용유도 주민들이 만세 운동을 벌인 관청리 광장의 현재 모습. /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용유도 3·28 독립운동 당시 이난의가 사용한 태극기. 가로 40cm, 세로 60cm이며 천이 닳아 주위가 헤졌다. 우측에는 대한독립만세가 쓰여 있고 괘의 좌우가 바뀌어 그려져 있다. 1989년 국가보훈처에 기증했다. /국가보훈처 제공용유중학교 학생들이 만든 '아름다운 내 고장 용유도' 표지.

2019-12-04 김주엽

[독립운동과 인천·(37)]정재홍의 육혈포

1907년 박영효 귀국 환영회 자리서암살용 권총으로 사회에 경종 울려'육혈포(六穴砲)'는 탄환을 넣는 구멍이 여섯 개 있는 권총이다. 보통 탄창이 회전식으로 된 연발 권총 리볼버(revolver)를 육혈포라 불렀는데 국립국어원은 그 어원이 확실치 않다고 밝히고 있다.대한제국 말기와 일제강점기 육혈포를 비롯한 각종 권총은 애국지사의 무기였다. 안중근이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할 때 사용했던 무기도 권총이었다. 안중근이 사용했던 권총은 벨기에산 브라우닝 M1900으로 리볼버가 아니라 손잡이에 탄창을 끼워 넣는 자동권총이었다. 안중근은 자동권총 외에도 스미스&웨슨의 38구경 리볼버(육혈포)도 마련했지만, 암살에는 사용하지 않았다고 한다. 육혈포는 소지가 간편해 품에 숨기기 쉽다는 장점이 있어 일제 관료에 대한 암살에 쓰였고, 친일파를 협박하는 데 쓰이기도 했다. 일제는 독립운동 자금 모집을 위해 육혈포로 부호들을 겨눈 애국지사들을 강도죄로 엮기도 했다.이처럼 육혈포는 주로 적을 겨누는 데 쓰였지만, 자신을 겨누는 데 사용한 독립운동가가 인천에 있었다. 계몽운동가로서 인천에 학교를 설립해 인재 육성으로 나라의 독립 기반을 마련하는 데 힘썼던 정재홍(1867~1907)이다.조선 말기 근대 문물을 도입해야 한다고 주장한 개화파들이 을사늑약 이후 자연스럽게 친일의 옷으로 갈아입으려던 시기 대한자강회 인천지회장이었던 정재홍은 그들의 앞에서 육혈포로 자결했다. 갑신정변 실패로 일본에 망명했다가 친일파로 변절해 1907년 귀국한 개화파 박영효의 귀국 환영회 자리에서였다. 계몽과 개화를 내세워 친일을 정당화한 이들에 대한 일종의 '선전포고'였다. 정재홍은 변절자를 쏘고 자결할지와 자결만으로 사회에 경종을 울릴지를 번민하다 자결을 택했다. 저격은 복수와 또 다른 적(敵)을 만들고 국가의 행복에 도움이 안 된다는 판단이었다.그의 육혈포가 정확히 어떤 총이었는지 어디서 구해서 어떻게 처분됐는지는 밝혀지지 않았다. 육혈포의 총구만큼이나 뜨거웠던 독립을 향한 그의 열정만이 식지 않고 인천 지역에 전해질 뿐이다. /김민재기자 kmj@kyeongin.com

2019-11-27 김민재

[독립운동과 인천·(37)]정재홍의 육혈포

대한자강회 활동·인명의숙 설립 등 인천 근대교육운동 앞장 불구1천명 앞에서 목숨 끊어… 사이비 선각자 겨냥 '순교자 길' 택한듯의연금 모집·추모 잇따르고 그가 뿌린 '씨앗' 사립학교 개교 줄이어2000년대 중반 일생 복원 시작… 흩어진 조각 맞추기 과제로 남아대한제국 말기 근대교육운동은 우리 힘을 스스로 기르자는 '자강론(自强論)'이 바탕이었다. 그러나 일부 사이비 지식인들은 계몽을 앞세워 친일의 길에 들어섰다. 인천의 독립운동가이자 교육자였던 정재홍(鄭在洪·1867~1907)은 이에 분개한 나머지 망국의 길목에서 친일로 변절한 개화파 박영효 앞에서 육혈포(권총)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을사늑약 이후 사실상 일본으로 주권이 넘어간 때 자신의 목숨을 바쳐 친일세력을 향해 경고한 거였다. 그는 인천 근대교육운동의 선각자인 동시에 의열투쟁의 선봉에 선 독립지사로 기억되고 있다.서울에서 태어난 정재홍이 언제, 어떤 연유로 인천에 왔는지는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다. 아마 일자리를 얻기 위해 인천에 자리를 잡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는 1903년 말부터 인천에서 운송업과 중계무역을 주로 하는 해운업체 대한유성태호회사(大韓裕盛泰號會社)의 사무장과 총무과장으로 일했다.정재홍은 단순한 회사원이 아니었다. 1907년 1월 인천항의 유지들은 대한자강회 인천지회를 설립했는데, 정재홍이 지회장으로서 이를 주도하며 발기인 대회에서 지회 설립 취지를 낭독했다. 대한자강회는 국민 교육으로 국력을 길러 독립의 기초를 마련하자는 취지로 1906년 서울에서 설립된 계몽단체다. 대중 강연과 교육기관 설립, 국채보상운동 등을 이끌었다. 당시 경기도에서 지회가 설립된 곳은 인천, 강화, 남양 3곳뿐이었다. 대한자강회 인천지회에 소속된 인천항 유지들은 대구에서 국채보상운동이 시작되자 의연금 모금을 주도하기도 했다.정재홍은 인재를 길러내야 독립국으로 나아갈 수 있다고 믿었다. 그래서 1907년 5월 지금의 경인전철 도원역 부근 우각동에 인명의숙(仁明義塾)이라는 사립 교육기관을 설립했다. 당시 인천항의 사업가들이 학교설립을 위한 기금을 마련하는 데 큰 도움을 줬다. 정재홍은 학교 운영뿐 아니라 학생들이 상급학교에 진학할 수 있도록 지원했고, 외국 유학을 돕기도 했다. 인명의숙은 1912년 인천 최초의 공립보통학교인 창영초등학교에 병합됐다.대한자강회를 중심으로 계몽과 근대교육에 앞장섰던 정재홍은 1905년 을사늑약 이후 사실상 식민지로 전락하게 된 조국의 운명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특히 어쭙잖게 지식인을 자처하면서 친일의 경계에 선 주변의 동지들을 보며 큰 결단을 내렸다.당시 일본은 을사늑약을 계기로 친일 관료와 지식인, 단체를 포섭하는 데 힘을 쏟았다. 관비 유학생 양성과 정치 망명자의 사면으로 한국 침략의 기반을 닦았다. 대표적인 예가 급진적 개화파 박영효의 사면(1861~1939)이었다. 명문가 출신 박영효는 일찍이 개화사상에 눈을 떠 근대 문물의 수용을 주장했지만, 갑신정변(1884년)의 실패로 일본 망명길에 올랐다. 그는 1907년 을사오적 박제순의 도움으로 사면을 받아 귀국해 이완용 내각의 대신으로 일했다. 우국지사가 친일파로 변절한 순간이었다.정재홍은 1907년 6월 30일 서울 북서 농상소(農桑所)에서 열린 박영효의 귀국환영회를 거사 일로 잡았다. 개화파의 상징과도 같았던 박영효의 귀국행사는 국민교육회, 대한자강회 등 자강단체 임원들이 준비했다. 계몽을 가장한 친일이 독버섯처럼 퍼져 나가는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대한자강회 인천지회장이었던 정재홍은 육혈포를 품에 숨긴 채 박영효의 귀국환영회에 참석했다. 그리고 환영회가 무르익을 무렵 연단에 올라 1천여명의 군중과 박영효 앞에서 자신의 복부를 향해 육혈포를 쏘았다. 정재홍은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그날 오후 8시 숨을 거두고 말았다.그의 품에서 발견된 유서에는 "저 대일본 보호 한국 국민 정재홍은 뜻이 있어 나라를 근심하는 우리 동포 모인 데 한 말씀 경고문을 삼가 드리노라. 나라 위하여 마땅히 죽을 때에 죽으면 그 효력이 천 배나 만 배까지에도 미치나 그러나 죽기 싫고 살기 좋은 인정이라 남으로 하여금 죽어 나의 살 명화를 도우려 하면 그 어찌 되리오 하나니 이곳에서 죽어 우리 동포 제군으로 하여금 몸을 버려 나라에 도움이 될 경우에 생각게 하심이로다"라 쓰여 있었다.정재홍의 자결은 그가 스스로 목숨을 끊음으로 사이비 선각자에 경고를 던졌다는 해석에 가장 무게가 실린다. 그가 유서에 쓴 것처럼 당시 사람들은 일본을 '보호국'으로만 여겼고 침략 야욕을 심각하게 인지하지 못했다. 그래서 일종의 경고 메시지를 던지기 위해 자결을 택했던 거다.이 사건은 '박영효 살해미수', 더 나아가 조선 통감이었던 '이토 히로부미 살해미수'였다는 확대 해석까지 나오는 등 의견이 분분한 상황이다.황현이 1864년부터 1910년까지의 사건을 시간 순서대로 쓴 '매천야록(梅泉野錄)'에는 "교원 정재홍의 자살"이라는 제목으로 이 사건이 나와 있다. 황현은 이를 "어떤 사람들은 그가 박영효를 살해하려고 하였으나 그와 적수가 되지 않음으로 자살하였다고 하였다. 정재홍은 본래 강개한 뜻을 가지고 시국에 분개하여 교육에 열성을 다하였고, 현재에도 학교의 임무를 띠고 있었다. 그는 '지사(志士)'라고 한다"고 기록했다.또 송상도가 대한제국 말기부터 광복까지 애국지사들의 사적을 기록한 책 '기려수필(騎驢隨筆)'에는 정재홍이 앞서 1907년 5월 일본에 갔던 이토가 조선에 돌아온다는 소식을 듣고 그를 살해하기 위해 환영회를 열어 초청한 뒤 쏴 죽이기로 결심했다는 내용이 나온다. 이밖에 박영효 환영회 때 이토가 참석하면 총으로 쏘려 했으나 신변에 위협을 느낀 이토가 참석하지 않아 분통함을 이기지 못하고 자결했다는 얘기도 '대한계년사(大韓季年史)'에 나온다. 한국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가 펴낸 '한국 독립운동의 역사'도 이를 근거로 정재홍이 이토를 살해하려다 미수에 그쳤다고 썼다. 국가보훈처의 정재홍 공훈록도 이토 미수를 공훈으로 기록했다.당시 정재홍의 품에서는 유서와 함께 '팔변가(八變歌)'라는 시가 나왔는데 "남을 죽이고 나만 살면 천리(天理)에 어긋난다. 죽이고 나도 죽자"는 구절이 나온다. 그러나 마지막에 "한 사람 나만 죽어 전국(全國)이 느끼고 깨달으면 이 몸에 영화(榮華)되고, 나라에 행복일세"라는 구절로 끝맺는다. 그가 이토 또는 박영효를 암살하려는 생각을 가졌으나 스스로 목숨을 끊는 자기 희생이라는 '순교자'의 길을 선택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이토 저격과 관련한 객관적인 기록은 남아 있지 않아 단지 야사(野史)일 뿐 정사(正史)로 보기에는 어렵다는 게 일반적인 평가다.정재홍의 죽음은 사회적으로 큰 파급효과를 불러왔다. 인천의 유지들은 그를 애국지사로 칭송하며 곧바로 의연금 모집에 나섰다. 황성신문과 대한매일신보가 이를 대대적으로 광고했고, 전국 각지 인사들이 추모에 동참했다. 저격의 대상자로 볼 수 있는 박영효조차 조의금 50환을 냈다. 서울 정동교회에서 열린 장례식에는 이동휘를 비롯해 윤치오, 김동완, 석진형 등 당대를 대표하는 계몽자강론자들이 참석했다.인천에서는 그의 죽음이 철시 운동과 일본인 가옥 방화 사건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이런 무력 행위보다는 그가 씨앗을 뿌린 교육사업이 점차 확장됐다는 점이 더 큰 의미를 지닌다고 할 수 있다. 인천의 사립학교 설립은 정재홍 사후 1년인 1908년 최전성기를 맞아 그해 명신학원, 흥인의숙, 명덕학원 등 7개의 사립학교가 개교했다.정재홍이 우리나라 독립운동사와 인천의 교육사에 남긴 발자국은 뚜렷하지만 아쉽게도 그의 생애 전반에 대한 연구는 미진한 상황이다. 그 흔한 사진 한 장 남아 있지 않다. 정재홍에 대한 기록이 생애 말년인 1906~1907년에 집중돼 있어 출생지와 학적 등 성장배경을 알기 어렵다. 단편적인 기록을 통해 그가 일찍이 아버지를 여의고 서울에서 홀어머니를 모시고 살았다는 것과 그의 장례가 정동교회에서 치러졌고, 인천에서 근대교육기관을 설립했다는 사실로 미루어 기독교인으로서 근대교육을 받았다고 추정할 뿐이다.물론 그에 대한 연구성과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독립유공자 서훈(애국장)을 계기로 인천의 인물로 주목을 받기 시작했던 2000년대 중반 무렵부터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김형묵 연구위원이 그의 일생을 복원하는 데 주력하고 있다. 김 연구위원은 중국 상하이에서 활동한 아나키스트 독립운동가 정해리(1895~1945)가 그의 첫째 아들인 정종화와 동일인임을 밝혀냈고, 민족 대표 33인 중 한 명인 최성모가 정재홍의 처남이라는 것도 확인했다. 인천의 유명한 연극인 정종원이 그의 둘째 아들이라는 것은 오래전부터 알려진 사실이다. 정재홍 일가의 흩어진 독립운동사 조각을 맞추는 것이 후대에 남겨진 과제다.김형묵 연구위원은 "인천에서 태어나지는 않았지만, 인천에서 계몽운동을 했고, 그가 설립한 인명학교가 창영초와 통합돼 나중에 인천 만세운동의 주축이 됐다는 점에서 인천에서는 큰 의미가 있는 인물"이라고 했다. 김 연구위원은 또 "한국 독립운동사를 연구하는 관점에서 본다면 그의 자결은 당시 대한자강회 등 계몽단체의 사회운동이 친일로 연결될지 모르는 때에 경종을 울린 의열투쟁이었다는 의미가 있다"며 "우리 독립운동사에 커다란 획을 그었다고 평가한다"고 했다. /김민재기자 kmj@kyeongin.com그래픽/성옥희기자 okie@kyeongin.com정재홍이 자결하기 전에 쓴 어머니 전상서. /독립기념관 제공1907년 7월 2일자 대한매일신보에 실린 정재홍 자결 기사.1907년 대한자강회월보에 실린 정재홍 약전. /독립기념관 제공

2019-11-27 김민재

[독립운동과 인천·(36)]권평근과 방향전환사건

무차별 폭력 전국서 400건 발생이후 피습 자제·위문금 이어져항구도시 인천은 예나 지금이나 외국인이 모여드는 국제도시였다. 특히 인천 개항장 차이나타운의 화교는 인천 역사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그런데 일제 강점기, 1931년 7월 3일 인천시민들이 차이나타운의 중국인들을 향해 무차별 폭력을 가한 불행한 사건이 있었다. 중국 동북지방의 동포 200명이 중국 농민과 충돌하고 박해를 당했다는 소식이 인천에 전해지면서 애꿎은 화교들에게 분풀이를 했던 거다. 이는 일본의 간계에 속은 중국 주재 조선일보 기자의 오보 때문에 빚어진 일이었으나 결과는 참혹했다. 인천에서 시작된 화교에 대한 보복은 전국으로 퍼져나가 400건의 폭력 사건이 발생했다. 인천에서만 200명의 피의자가 검거됐고, 화교들은 인천을 떠나 중국으로 도망쳤다. 이 일은 아직도 인천 화교사회에 잔인한 기억으로 남아있다.이때 인천의 애국지사이자 노동 운동가였던 권평근(1900~1945)은 중국인과 한국인을 상대로 이간계를 펼친 일제로 분노의 방향을 전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권평근은 이른바 '방향전환사건'을 계획해 중국이 아닌 일본 제국주의를 타도하는 데 민중이 힘을 모아야 한다고 했다. 일제에 침략당한 중국인과 한국인이 서로 싸울 게 아니라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당당하게 주권 회복을 위한 노력을 해야 한다고 애국 동지들을 설득했다.권평근의 방향전환사건은 비록 사전에 발각돼 실패하고 말았지만, 당시 인천 지역에 깊은 인상을 남겼다. 투쟁의 대상이 일제임을 명확히 재인식하게 한 사건으로 평가된다. 이후 각계의 중국인 피습 자제 요청이 이어졌고, 인천 객주조합과 미상조합, 포목상조합, 신용조합 등이 중국에 사과했다. 일본인이 중심이었던 인천상공회의소조차 중국에 위문금을 전달했다. 시민들도 기부금을 모집해 성의를 표했다.애석하게도 권평근은 해방 직후, 1945년 9월 8일 인천항에서 미군 환영행사 도중 질서유지를 명분으로 일본 경찰이 쏜 총에 맞아 숨을 거뒀다. 일제를 완전히 밀어내지 못했던 반쪽짜리 해방공간에서 그는 투쟁의 열매를 맛볼 새도 없이 생을 마감했다. /김민재기자 kmj@kyeongin.com

2019-11-20 김민재

[독립운동과 인천·(36)]권평근과 방향전환사건

만주 만보산 한·중 농민 갈등, 무력충돌로 부풀려 보도중국침략 구실 '오보'가 인천發 화교습격 비극 초래…음모 알아차린 권평근 배일연설 계획 도중 체포돼 옥고1919년 강화서 독립운동 가담… 죽산 조봉암과도 교류해방직후 미군 입항때 동원된 日경찰 총탄에 맞아 숨져1931년 7월 멀리 중국에서 날아온 '오보(誤報)' 하나가 인천의 차이나타운을 쑥대밭으로 만들었다. 중국 동북지방 창춘(長春) 만보산(萬寶山)의 동포가 중국인으로부터 박해를 받아 200명이 다쳤고, 병력까지 출동한 일촉즉발의 상황이라는 기사를 긴급 타전한 1931년 7월 2일 조선일보의 호외는 화교가 많았던 개항도시 인천 시민들의 감정을 자극했다. 기사는 한·중 농민 사이 발생한 작은 충돌이 일본의 흉계에 의해 부풀려져 전달된 완벽한 오보였지만, 이를 알 길이 없던 시민들은 인천의 화교들에게 분풀이를 했고 사상자까지 발생했다. 오늘날까지 인천 화교 사회의 큰 상처로 남아 있는 '만보산 사건'이다.결국 만보산 사건은 일제의 계략에 의해 꾸며진 일이라는 게 드러났고, 화교로 향했던 분노의 화살은 일본으로 방향을 틀었다. 일본인 습격과 항일투쟁이 비밀리에 계획됐고, 이는 반중(反中)이 반일(反日)로 바뀐 '방향전환사건'이라 불렸다. 인천 방향전환사건을 이끌었던 인물은 독립운동가 권평근(1900~1945)이다. 강화 출신의 그는 인천 노동계를 대표하며 일생을 독립운동에 헌신했다.방향전환사건의 계기가 됐던 만보산 사건은 일제가 만주 침략의 구실을 만들기 위해 꾸며낸 일이었다. 일제는 한국인을 대륙 진출의 첨병으로 활용했다. 만주지방의 농장으로 이주시켜 한국인 보호 명목으로 경찰과 군대를 중국에 주둔시키고 내정에 개입하려 했고, 중국인들은 이런 이주 한국인을 일본의 앞잡이라고 생각했다. 만보산 농장 지역에는 1931년 4월 한국인 200여 명이 이주했는데 수로 공사를 하는 과정에서 계약 착오로 중국 지주의 땅을 침범해 충돌이 빚어졌다. 그해 7월 1~2일 중국인이 한국인이 파냈던 수로를 다시 흙으로 되묻어 복구하자 한·중 농민 사이 대립이 일어났다. 일본 경찰이 중국인을 쫓아내 인명 피해는 없었지만, 일제는 이 사건과 관련한 거짓 정보를 중국 주재 김이삼 조선일보 창춘지국장에게 흘렸다. 한·중 농민 사이 무력 충돌이 빚어져 상황이 위급하게 전개되고 있다는 얘기를 했다.김이삼은 일본 영사관 측을 통해 얻은 공식 정보라 현장 확인을 하지 않고 의심 없이 이 소식을 본사에 전했다. 조선일보는 중국 동북지방의 한인들이 생명의 위협을 받고 있다는 호외를 제작했다. 당시 호외는 만보산에서 동포 200여 명이 중국인 800여 명과 충돌해 부상을 입었고, 창춘의 일본 주둔군이 출동준비를 하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또 일본과 중국의 관헌이 1시간여 교전을 벌였고 중국 기마대 600여 명이 출동하는 등 급박한 상황이라고 했다. 조선일보는 7월 3일 첫 호외를 발행하고 이튿날 2차례나 호외를 내는 등 사태를 심각하게 보도했다. 동포들의 안위가 걱정되는 상황이라고 전했다. 동아일보도 이를 받아 중국 농민의 폭거로 우리 농민이 포위됐고, 군대까지 출동할 수 있는 상황이라며 자극적으로 보도했다.조선일보의 오보는 인천 지역사회에 엄청난 파급력을 미쳤다. 인천 화교에 대한 집단 보복으로 이어진 것이다. 1883년 개항한 인천은 당시에도 '국제도시'였다. 중국 상인들이 인천에 물밀듯 들어와 자리를 잡았고, 인천에는 중국인 거류지가 따로 형성됐다. 바로 지금의 중구 북성동 일대 차이나타운이다. 1933년 일본 측이 펴낸 인천부사(仁川府史)에 따르면 인천의 화교는 1897년 1천331명이었다가 1931년 2천427명으로 크게 늘었다.인천의 화교들은 상인만 있는 게 아니었다. 중국의 노동자들이 인천항을 통해 전국으로 유입됐다. 1928년 4월 6일 동아일보는 "격증하는 중국 노동자 하루 1천여 명 입항"이라는 기사를 보도하기도 했다. 인천에서 태어난 짜장면이 바로 인천항에서 중국인 노동자들이 먹던 면 요리에서 유래된 음식이다.일자리를 나눠 가져야 하는 인천시민은 가뜩이나 중국인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을 때라 만보산 사건은 화교 습격이라는 비극을 낳았다. 7월 3일 인천에서 처음으로 한국인 5명이 중국인 식당과 이발소, 호떡집을 공격해 유리창을 깨는 사건이 발생했다. 격앙된 군중들은 중국인 거주지로 몰려들어 집에 돌을 던지고 집기를 부수기도 했다. 이 사건으로 중국인 2명이 숨지고 4명이 다쳤으며 건물 68채가 파괴됐다. 사태는 전국으로 확산돼 서울, 평양 등지에서도 중국인 습격사건이 발생했다. 평양에서는 무려 94명의 중국인이 숨졌다.그런데 일제의 낌새가 수상했다. 일제는 중국인을 위협하면 발포하겠다고 으름장을 놓고도 폭동을 내심 모르는 척 했다. 결국 이 사태가 일본의 음모로 꾸며진 일이라는 사실이 오래지 않아 드러났고, 일본에 대한 저항심으로 발전했다. 타깃이 중국인에서 일본인으로 바뀐 '방향전환'이 일어난 것이다.인천 노동운동계의 핵심 인물이었던 권평근은 만보산 사건의 방향전환을 독립운동으로 승화하려고 했다.권평근은 7월 4일 뜻을 함께하는 애국지사들과 회합을 하고 다음날 인천공회당에서 열리는 신간회 인천지회, 인천청년동맹, 인천노동조합 주최의 시국에 관한 연설회를 이용해 배일 연설을 하기로 했다. 만보산 사건의 원인이 중국이 아닌 일본에 있다는 연설을 하고, '조선독립만세'를 외치며 군중을 이끌고 시내에서 시위를 벌이자는 계획이었다. 하지만 일본 경찰에 기밀이 새어 나가 배일연설과 만세시위 계획은 미완에 그쳤고 권평근 등 가담자 6명이 체포됐다. 권평근은 그해 10월 경성지방법원에서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징역 3년을 선고받아 옥고를 치렀다.일본은 방향전환사건을 심각하게 받아들였다. 1931년 9월 22일자 동아일보 기사를 보면 경성지방법원은 권평근에 대한 재판의 일반방청을 허용하지 않고, 비밀리에 개정했다. 당시 언론에는 인천에서 일어난 대(對)중국 폭동의 방향을 일본으로 전환하고, 공산당 재건을 위한 음모를 꾸민 일로 보도됐다.권평근의 독립운동은 방향전환사건이 처음은 아니었다. 1900년 1월 26일 강화군 양도면 능내리 118번지에서 태어난 권평근은 강화의 합일공립학교를 졸업하고 상경했다. 그는 배재학당에서 1년여 공부하다 중퇴하고 고향으로 돌아와 1919년 강화에서 대규모로 벌어진 3·1 운동에 가담했다. 1921년 강화 조산교회의 청년단체인 조산엡윗청년회에 참여했고, 이 무렵 같은 강화 출신의 죽산 조봉암과 교류했다. 박남칠, 유두희, 이승엽 등 청년 지도자들과 함께 사회운동과 대중 연설에 적극 참여했다. 중국으로 건너가 1926년 11월 광둥성 중산대학에 입학했다. 권평근은 이후 상하이에서 민족해방운동의 이념으로서 사회주의를 받아들였다고 한다. 당시 조선총독부가 작성한 해외 반일조선인명부에 그의 이름이 등장하는데 일제는 그를 '배일사상이 농후한 요주의 인물'로 평가했다.1927년 말 상하이에서 인천으로 돌아온 권평근은 본격적으로 노동운동에 뛰어들었다. 1930년 5월 조선우선회사에서 일하면서 '메이데이 예비검속'으로 체포됐다. 그는 1931년 4월 30일에도 '전 조선 무산대중에 격함'이라는 제목으로 격문을 작성해 독립운동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권평근은 또 1931년 6·10 만세운동 6주년을 맞아 "모든 조선 민중은 단결해 자유와 주권획득을 위해 일본 제국주의와 싸워야 한다"고 했다. 방향전환사건은 그로부터 약 1달 뒤에 일어났다.출소 이후로도 인천노동조합을 이끌던 권평근은 해방 한 달도 되지 않은 1945년 9월 8일 비극적인 죽음을 맞았다. 하지 중장이 이끄는 미 24사단 주력부대가 인천항에 첫발을 내디딘 날이었다. 당시 인천항에서는 건국준비위원회 산하 보안대와 노동조합이 군중을 이끌고 부두로 환영 행진을 했는데 보안대원으로 활동하던 권평근과 이석우가 일본 경찰이 쏜 총에 맞아 숨진 것이다. 미국이 치안유지 명목으로 일본 경찰을 동원했고, 행진을 가로막는 일본 경찰과 실랑이를 벌어다 빚어진 참사였다. 해방된 조국에서 일본의 총탄에 희생된 어처구니없는 비극이 인천에서 벌어졌다. 당시 조봉암은 오랫동안 연을 맺은 고향 후배 권평근의 주검 앞에서 주먹으로 가슴을 치며 애통해 했다고 한다. 자력으로 얻은 독립이 아니었기에 더 서글픈 일이었다.브루스커밍스는 '한국전쟁의 기원'을 쓰면서 1945년 9월 12일 뉴욕타임즈 인터뷰 기사를 인용해 당시 상황을 전했다. 하지 중장은 기자들에게 "한인과 일인 사이에 약간의 사고가 있었다. 그중에는 부두에서 우리를 환영하려는 일단의 한인에 대한 일본인들의 발포가 있었다. 나는 민간인들이 상륙작전에 방해가 될 것이므로 부두에 접근하지 말도록 명령한 바 있다"고 했다. 하지 중장은 '점령군'의 자세로 인천항에 왔던 것이다. 뉴욕타임즈는 사설을 통해 "우리는 일제의 식민정책을 시행한 쓰레기들에게는 부드럽게 대하고 우리가 해방시킨 민중들에게는 강경하게 대해야 하는가…."라며 미군을 비판했다.1945년 9월 12일 매일신보 기사에 따르면 건준 인천지부가 미군을 통해 일본 관헌에 대해 엄중히 항의했으나 유야무야 끝나고 말았다. 권평근의 장례는 9월 10일 오전 10시 건준 인천지부에서 시민장으로 치러졌다. 박남칠이 장례위원장을 맡았고 시가 행렬 이후 권평근은 주안정(朱安町) 공동묘지에 묻혔다.권평근은 좌익 노동운동 경력 때문에 독립운동 공로까지 인정받지 못하다가 60주기였던 2005년 뒤늦게 독립유공자(건국훈장 애족장)로 서훈을 받았다. /김민재기자 kmj@kyeongin.com일러스트/박성현기자 pssh0911@kyeongin.com인천 방향전환사건을 이끌었던 독립운동가 권평근. /국가보훈처 제공방향전환사건으로 체포된 권평근에 대해 법원이 징역 3년을 선고했다는 동아일보 1931년 10월 27일자 기사. /네이버 뉴스라이브러리 캡처1945년 9월 8일 인천항에 처음 당도한 미군들. /경인일보DB1934년 7월 5일 인천경찰서가 제작한 권평근 등 인천 노동운동 활동가들의 동향 보고. /국사편찬위원회

2019-11-20 김민재

[zoom in 송도]민주당 연수구을 지역위 '마리나 복합리조트 개발 세미나'

계류시설 위주 개발로 국내인프라 열악워터프런트 연계 수로 선박 운항등 적합이재훈 박사, 관광·산업등 복합형 제안해수부 관할인 항만 배후부지 '10공구'"2차 계획에 반영" 인천시 설득 숙제로인천 송도국제도시 10공구에 마리나 복합리조트를 조성해야 한다는 의견이 제기돼 실현 여부에 관심이 쏠린다. 인천경제자유구역청의 송도 워터프런트 조성사업과 연계해 마리나 관련 산업을 육성해야 한다는 것인데, 이를 위해선 풀어야 할 과제도 적지 않다.더불어민주당 연수구을지역위원회(위원장·정일영)는 최근 송도국제도시 인천글로벌캠퍼스 세미나실에서 '인천송도마리나 복합리조트 개발 세미나'를 열었다. 이 세미나에선 송도 10공구가 마리나 복합리조트의 최적지라는 의견이 나왔다. 송도 10공구에 마리나 복합리조트 조성을 추진하려는 움직임은 예전부터 있었지만, 이를 주제로 세미나가 열린 건 이번이 처음이다. 민간에서 검토해온 송도 10공구 마리나 복합리조트 조성계획이 수면 위로 떠오른 셈이다. 송도 10공구가 마리나 복합리조트 조성 대상지로 논의되는 이유와 과제를 정리했다.■ 송도 10공구는 마리나 최적지한국교통연구원 이재훈 박사는 세미나 기조 발제에서 "송도 10공구는 수도권에 위치해 마리나 수요가 충분하고 접근성도 우수하다"고 강조했다. → 지도 참조이재훈 박사 발표 내용에 따르면 국내 레저용 선박(요트·보트 등)은 2007년 3천944척에서 2017년 약 2만5천척으로 연평균 20.3% 증가했다. 2017년 한 해 동안 수상레저 조정 면허를 취득한 사람은 2만1천596명으로, 2007년 이후 연평균 10% 늘고 있다.레저용 선박과 면허 취득자의 수도권 비중은 각각 20.7%, 32.1%라고 한다. 하지만 국내 마리나 인프라는 열악하다. 마리나 대부분이 계류시설 위주로 개발되고 있으며, 급유와 수리 등 서비스 시설이 부족하다. 중국의 마리나는 적게는 600척에서 많게는 1천466척까지 수용하는데, 국내 마리나의 규모는 300척 수준에 그친다.이 박사는 "우리나라 마리나는 접근성이 나쁘다. 도심형 마리나가 부족하다"면서 "마리나가 주차장(계류시설) 역할만 해서는 경제적 효과가 없다"고 했다. 외국은 마리나 계류시설 주변에 산업단지, 리조트, 쇼핑시설, 인력 양성 기관을 조성해 경제적 효과를 극대화한다는 게 이 박사의 설명이다.이 박사는 송도 10공구를 마리나 복합리조트 조성의 최적지로 봤다. 서울과 경기 지역에서 철도와 도로 등 교통수단을 이용해 접근하기 편리하고, 항만과 공항이 있기 때문에 지경학적으로 좋은 위치에 있다는 것이다.특히, 송도 남측 수로는 길이와 너비가 선박 운항에 적합하며, 파도가 거의 없어 안전하다는 장점이 있다.■ 송도에 복합형 마리나 개발 필요이재훈 박사는 송도 워터프런트와 연계한 복합 기능의 마리나 조성을 제안했다.계류시설 주변에 숙박시설과 상업시설을 조성해 레저·관광·휴양·쇼핑·산업·연구 기능을 갖춘 복합형 마리나로 개발해야 한다는 것이다.송도 워터프런트 조성사업은 기존 호수와 수로를 연결해 'ㅁ'자 형태의 물길(길이 16㎞, 너비 40~300m)과 그 주변에 친수 공간을 만드는 대형 프로젝트로, 송도 10공구 앞 수로가 2단계 사업(송도 남측 수로) 구간이다. 향후 송도 워터프런트 조성사업과 GTX-B 노선 건설사업이 완료되면, 마리나 복합리조트 수요와 경제적 효과가 더욱 커질 것으로 이 박사는 내다봤다.이 박사는 "인천은 도심과 항만이 공존하는 지역"이라면서 "워터프런트, 산업체와 연계해 마리나 복합리조트의 가치를 높이고, 관련 산업을 인천의 신성장 동력으로 만들 필요가 있다"고 했다.그는 송도 10공구 마리나 복합리조트 개발사업에 6천788억원이 들 것으로 추산했으며, 예상 B/C(비용편익)값이 기준치(1.0)보다 높아 사업 타당성이 있을 것으로 전망했다.■ 풀어야 할 과제는송도 10공구 마리나 복합리조트 개발을 위해선 사업계획이 해양수산부의 '제2차 마리나항만 기본계획'에 반영돼야 한다. 또한, 항만 배후 부지인 송도 10공구는 해수부 땅이다. 사업 추진을 위해선 인천시 주요 정책 사업에 포함돼야 하는 데다, 해수부 등 관계기관을 설득해야 하는 것이다. 인천시가 송도 10공구 마리나 복합리조트 개발계획을 마리나항만 기본계획에 반영해달라고 해수부에 신청해야 한다.제2순환고속도로 구간인 '인천~안산 고속도로'(타당성 조사 중) 건설계획을 수정해야 하는 문제도 있다.선박이 송도 10공구 마리나와 송도 남측 수로를 안전하고 자유롭게 통항하기 위해선 인천~안산 고속도로 일부 구간을 교량으로 설치하는 등 고속도로 높이 및 선형을 변경해야 한다. 이는 사업비 증가로 이어지기 때문에 국토교통부와 기획재정부에서 반대할 수 있다.'마리나항만 기본계획 반영'과 '인천~안산 고속도로 설계 변경'이 이뤄져도 민간투자사업 적격성 조사 등의 절차를 거쳐야 하기 때문에 사업이 본격화하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릴 것으로 보인다. /목동훈기자 mok@kyeongin.com

2019-11-17 목동훈

[인천경영포럼]김정호 "4차산업혁명 키워드는 초연결·초지능"

인공지능 통해 빅데이터 활용금융비용 절감에 경쟁력 강화김정호 KAIST 전기전자공학부 석좌교수는 14일 "인간이 태어날 때부터 죽을 때까지 모든 순간이 데이터이며, 이를 잘 활용하는 기업이 도약할 것"이라고 강조했다.김 교수는 이날 라마다 송도호텔에서 열린 인천경영포럼 제413회 조찬강연회에 강사로 나와 "4차 산업혁명은 '초연결'과 '초지능'이라는 단어로 요약할 수 있다"면서 "모든 사물과 기계, 인간을 연결해서 데이터로 만드는 것이 초연결이며, 데이터를 인공지능으로 판단·예측하는 '초지능'을 활용하면 강한 경쟁력을 가지게 된다"고 설명했다.그는 "유튜브, 구글, 페이스북, 자율주행차 등은 모두 데이터를 수집하는 도구"라며 "많은 데이터를 가지고 있는 것이 경쟁력으로 이어지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구글이 자율주행차를 만들려는 이유는 자동차를 판매해서 돈을 벌겠다는 것이 아니라, 자율주행차를 통해 얻는 데이터를 활용하겠다는 의미"라고 덧붙였다.'빅데이터'를 활용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이 인공지능이다. 미국 유통기업 아마존은 어떤 제품이 언제, 어디서 팔릴지를 예측해 인근 물류창고에 물건을 갖다 놓는다. 이러한 시스템은 재고를 줄이고, 이는 금융 비용 절감과 경쟁력 강화로 이어진다. 이러한 것을 가능케 하는 것이 빅데이터와 인공지능이라는 게 김 교수 설명이다. 인공지능은 빠르게 발전하고 있으며 점차 사회 전 영역을 변화시킬 것이라고 했다.그는 "인공지능은 자신의 판단이 틀렸을 때 스스로 다시 학습해 오류를 줄이는 단계까지 와 있다"며 "이는 인간의 경제·생활·노동 등 많은 부분을 변화시킬 것"이라고 했다. 또 "창작의 영역에도 인공지능이 침투하고 있다"며 "음악과 미술 등 모든 예술은 과거의 작품을 모방하는 데에서 출발한다고 볼 수 있다. 인공지능은 과거의 작품을 학습하면서 새로운 작품을 만드는 영역까지 도달했다"고 했다.김 교수는 "생산라인에 인공지능을 활용해 생산성을 높이거나, 빅데이터와 인공지능 관련 제품·부품을 만드는 것이 기업 성장을 위해 필요하게 될 것"이라며 "미래에는 인간이 할 일이 많이 줄어들 것"이라고 했다. /정운기자 jw33@kyeongin.com김정호 KAIST 석좌교수는 14일 인천경영포럼 강연에서 "4차 산업혁명의 핵심은 인공지능과 빅데이터"라고 했다. /인천경영포럼 제공

2019-11-14 정운

[독립운동과 인천·(35)]송암 유경근

보신각 인근 강화 출신 주인이 운영임정 관계자 접촉장소 등 기록 눈길일제강점기 강화도 사람이 서울 종로에 차린 조선여관이 '독립운동 아지트'였다는 기록들이 있어 주목된다. 특히 조선여관은 강화 출신 독립운동가들의 활동 거점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강화도 출신 유경근(1877~1957)은 1919년 3·1운동 직후 고종의 다섯째 아들인 의친왕을 적통으로 내세운 해외 망명정부와 제2차 독립만세시위를 추진했던 '대동단'의 주역이었다.상하이 임시정부의 국내 연통제 조직 총책 역할도 한 독립운동가다. 유경근이 활동거점으로 삼으면서 비밀리에 여러 독립운동가를 접촉한 장소는 서울 종로 관철동 보신각 근처에 있었던 조선여관이다. 유경근은 조선여관에서 이동휘가 이끄는 독립군 지원자를 모집하고, 임시정부의 국내 연통제 조직을 꾸렸다.1919년 이른바 '대동단 사건'으로 경찰에 붙잡혀 재판에 넘겨진 유경근의 심문조서를 보면, 판사는 유경근에게 조선여관이 독립운동 획책소가 아니냐고 물었다. 유경근은 "여관 주인이 강화도 사람이라 강화 사람들은 그 여관에서 묵으므로 그곳에 가면 고향의 사정을 알 수 있어 자주 갔다"고 했다. 유경근이 체포된 이후 연통제 조직을 맡았던 강화 출신 윤종석(1896~1927)의 심문조서에도 판사가 조선여관은 경성에서의 조선독립운동본부가 돼 있었다고 언급한다. 윤종석은 "그러한 사실은 모른다"고 답했다.조선여관은 상하이 임시정부와 국내 독립운동가들을 잇는 장소이기도 했다. 임시정부 특파원인 명제세(1885~?)가 제2차 독립 만세 시위를 유경근과 논의하라는 지시를 받고, 중국 톈진에서 국내로 입국해 찾아온 곳도 조선여관이다. 유경근이 독립운동을 논의할 안전한 장소로 조선여관을 택한 것은 여관 주인과 '동향'이라는 연결고리가 있기 때문으로 보인다.관철동 조선여관에서 1920년 9월께 일제 앞잡이 처단 등을 목표로 무장봉기를 일으키는 '무장계획단' 조직이 논의됐다는 기록도 당시 판결문에 나왔다. 동아일보 1923년 6월 10일자에는 평남경찰서 경찰이 의열단원을 잡기 위해 경성에 들어와 관철동 조선여관을 포위하고, 투숙 중이던 의열단원 1명을 체포했다는 기사가 실렸다. 앞서 1923년 1월 의열단원인 김상옥(1890~1923)이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투척하고, 시내에서 총격전을 벌이기도 했다. 이처럼 일제의 감시가 삼엄한 시기 의열단원이 종로 한복판에 있던 조선여관에 머물렀다는 사실이 눈길을 끈다. /박경호기자 pkhh@kyeongin.com

2019-11-13 박경호

[독립운동과 인천·(35)]송암 유경근

독립군 지원자 모집해 만주로 보내는 일 맡아밀정 때문에 붙잡힌 '대동단 사건' 징역 3년형만세시위로 검거 등 공훈록 내용 사실과 차이병보석 중 신한촌 망명… 러시아에서도 활동강화에 학교 설립 등 교육운동가로도 알려져송암(松菴) 유경근(劉景根·1877~1957)은 1919년 3·1운동 직후 고종의 다섯째 아들인 의친왕의 해외 망명을 추진하고, '제2차 독립 만세 시위'까지 계획했던 비밀조직인 대동단(大同團)의 주역이었다.또 고향 강화도에서 민족교육운동을 펼친 교육자다. 정부는 그 공훈을 기려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유경근이 대동단은 물론 상하이 임시정부와도 긴밀하게 연결돼 국내외 항일투쟁을 매우 은밀하고 치밀하게 준비한 핵심 역할을 했다고 추정할 수 있는 당시 자료가 많다. 하지만 국가보훈처가 '독립유공자 공훈록'에 기록한 유경근의 행적은 사실관계가 다르거나 그 시점이 맞지 않는다.최근 유경근을 재조명한 몇몇 기록이 '독립유공자 공훈록'을 바탕으로 쓰이다 보니 그의 정확한 행적을 드러내지 못하고 틀린 부분도 있다.일제강점기 공문서와 신문기사 등을 근거로 유경근의 행적을 다시 정리할 수밖에 없는데 그 한계는 명확하다.공문서는 유경근이 이른바 '대동단 사건'으로 체포됐을 당시 여러 관계 인물의 신문조서, 공판기록, 판결문 등 일제의 시각을 반영한 기록이 대부분이기 때문이다.'독립유공자 공훈록'은 1919년 3월 18일 유경근이 강화군 읍내에서 독립선언서를 등사하고, 태극기를 제작해 독립만세를 고창했다고 썼다. 이때 주모자를 색출하자 서울로 피신했다가 붙잡혔으나, 일신상 문제로 보석됐다고 기록했다. 유경근이 강화 3·1 만세시위를 적극적으로 지원한 것은 사실로 보이지만, 강화 만세시위 때문에 체포됐거나 피신하기 위해 서울로 갔다고 한 내용은 신뢰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다.유경근은 1919년 7월 21일 전후로 일본 경찰에 체포됐다. 그는 1920년 2월 17일 서대문감옥 병감(病監)에서 판사의 심문을 받았다. 당시 44세였는데, 류마티스로 발로 설 수 없고 전신이 아프다는 사유로 법정에 가지 못했다. 직업은 광업이고, 주소는 경성부 공평동 153번지라고 답했다. 당시 6년 전부터 서울에 살고 있었고, 1919년 3월 1일 만세시위 때는 강화에 있다가 3월 말께 경성으로 돌아왔다. 대동단 산하 11개 지단 가운데 군인단 총대장을 맡고 있던 유경근은 만세시위가 아닌 독립군 지원자를 만주로 보내다 발각돼 체포됐다. 건강이 좋지 않아 1920년 2월 심문 이후 어느 시점에 주변인의 도움으로 보석금을 내고 병보석으로 풀려났다.유경근은 체포되기 전까지 서울 종로 관철동에 있는 조선여관을 중심으로 활동했다. 여러 신문조서를 보면, 조선여관은 강화 출신이 운영했기 때문에 강화 사람들이 많이 드나들었다. 유경근은 조선여관에서 강화 출신 조종환(1890~1937) 등 몇몇 인사와 접촉해 만주와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등지로 보낼 독립군 지원자를 모집했다. 유경근은 강화에서 함께 교육운동을 펼친 이동휘(1873~1935)와 각별했는데, 이동휘는 1919년 4월부터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독립군을 조직·훈련하고 있었다. 이동휘는 그해 9월 상해 임시정부 초대 국무총리에 선출됐다.유경근은 조종환 등의 소개로 노준, 현완순, 조규상, 고경진, 위계후 등 8명을 독립군 지원자로 모집했다. 1919년 7월 초순 독립군 지원자들을 차례로 신의주로 보냈는데, 양복을 입히고 여비까지 줬다. 독립군 지원자들을 보낼 때 유경근은 한글의 자음을 아라비아 숫자로 하고, 모음을 한자의 숫자로 하는 방식(예컨대 '7五'는 '소')의 암호까지 사용할 정도로 조직적이고 은밀하게 진행했다. 그러나 독립군 지원자 가운데 영광경찰서 '밀정'인 조규상이 잠입해 있어 유경근은 곧 붙잡혔다. 일제는 유경근이 상하이 임시정부에 참여한 이동휘의 지령을 받아 독립군 지원자들을 보내려 했다고 봤다. 이후 유경근의 행적으로 미루어 보아 당시에도 이동휘와는 밀접하게 연결돼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유경근은 대동단의 '제2차 독립 만세 시위' 계획과 관련해 해외 임시정부를 국내로 연결하는 연통제 조직의 총책이기도 했다. 중국 톈진에서 비밀조직인 불변단(不變團)은 임시정부 외곽단체였다. 불변단은 군자금을 모으고, 국내에서 첩보활동을 하는 '특파원' 역할을 했다. 불변단 단장을 지낸 명제세(1885~?)는 임시정부로부터 유경근을 만나 '제2차 독립 만세 시위'를 논의하라는 지시를 받고 1919년 9월 톈진에서 서울로 향했다. 관철동 조선여관에 도착한 명제세는 유경근을 만나지는 못했다. 유경근이 체포된 이후였기 때문이다.대신 명제세는 조선여관에서 세브란스연합의학전문학교(현 연세대 의대) 2학년에 재학 중인 윤종석(1896~1927)을 만나 국내 비밀단체들과 접촉했다. 강화 출신인 윤종석은 당시 유경근의 서울 연통제 임무를 이어받았고, 건강이 좋지 않은 유경근의 보석을 위해 주요 인사들을 만나 모금활동을 하기도 했다. 1919년 10월은 '제2차 독립 만세 시위' 계획으로 국내외 독립운동조직들이 급박하게 움직이던 시기다. 애초 거사일은 그해 10월 31일이었다. 윤종석은 상하이나 만주에서 입국한 인사가 민강(1884∼?)의 집으로 와서 "가용 청심환을 달라"는 암호를 말하면, 동지인지 확인한 후 기밀문서를 받거나 다른 인사들과 연결해주는 역할을 했다. 하지만 그해 11월 의친왕의 해외 망명을 시도하던 대동단 간부 전원이 경찰에 발각돼 체포되면서 윤종석도 경찰에 붙잡혔다.'독립유공자 공훈록'에는 이런 대목이 있다.'1920년 8월 만주광복군총영으로부터 미국 의원단의 내한을 계기로 조선인의 독립의지를 알려주기 위해 일제기관 등의 파괴용 폭탄과 육혈포 등 결사대장 김영철이 가지고 와서 유경근의 집에 보관케 한 사실이 일경에게 탐지되어 붙잡혔다. 그리하여 고등법원에서 징역 3년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1920년 8월에 있었던 일인데, 이 사건으로 인해 유경근이 고등법원에서 징역 3년형을 선고받지는 않았다. 유경근은 앞선 '대동단 사건'으로 1920년 12월 7일 경성지방법원 1심에서 징역 3년형을 선고받았다. 경성복심법원 항소를 거쳐 1921년 5월 고등법원이 상고를 기각하면서 징역 3년이 확정됐다. 각 사건이 일어난 시점이 겹쳐 착오가 생긴 것으로 보인다.다만, 광복군총영 결사대장 김영철(1892~1969)이 유경근의 집에 폭탄과 총기를 숨겼을 때 유경근은 병보석으로 출옥한 시기였다. 김두섭의 종로경찰서 심문조서와 동아일보 1920년 8월 24일자 신문기사 등을 보면, 유경근은 사건 당일 지방에 내려가 있었고 증손인 유용갑이 집에 있었다. 당시 일본 경찰이 작성한 가택 수색조서를 보면, 경찰은 8월 22일 새벽 유경근의 집에 들이닥쳐 공석(空石)에 싸여 있는 폭탄 3개, 권총 3자루, 탄환 167발을 압수했다. 집을 비웠던 유경근은 이 사건으로 경찰 조사를 받지는 않았지만, 광복군 무기를 숨겨주는 일을 집주인이 몰랐을 리가 없었을 것이다.보석 중이던 유경근이 고등법원 확정판결을 받기 전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으로 망명한 기록도 있다. 동아일보는 1922년 3월 5일자 신문에서 '대동단 사건'에 관계된 유경근이 보석 중 도주해 종적을 감췄기 때문에 '결석 판결'로 징역 3년에 처했는데,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에서 일본 헌병에게 붙잡혀 3월 3일 청진항으로 들어왔다고 보도했다. 유경근이 신한촌으로 언제 갔는지, 어떠한 활동을 했는지에 관한 자료는 찾기 어렵지만, 그의 활동무대가 러시아까지 뻗쳐 있었다는 사실을 말해주는 기사다. 유경근의 손자 유부열(74)씨는 교직에 있다가 2008년 퇴직한 이후 줄곧 할아버지의 일생을 연구하고 있다. 유부열씨는 "할아버지가 신한촌으로 망명해 군관학교를 설립하려다 10개월 만에 체포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독립유공자 공훈록'은 유경근이 옥고를 치른 이후 행적이라는 듯 마지막 부분에 '그 후 강화군에서 광명학교를 설립하고 청소년 교육에 힘썼다고 한다'고 밝혔지만, 이 역시 시점이 틀린 내용이다. 유경근은 대동단 활동 이전인 1905년 강화에 있던 자신의 집에 광창(光昌)학교를 설립했다. 광창학교는 보창학교를 설립한 이동휘의 영향으로 1906년 7월 보창지교(普昌支校)로 이름을 바꿨고, 1909년 광명(光明)학교로 개편했다. 유경근이 세운 학교는 1913년 문을 닫았는데, 그 이유는 알려지지 않았다.유경근은 이동휘가 1933년 신한촌에서 세상을 떴다는 소식을 접하고 1935년 2월 추도회를 주도했지만, 강화경찰서가 허가하지 않아 무산됐다고 동아일보가 1935년 2월 26일자에 보도했다. 유경근은 강화에 머물면서 일제의 삼엄한 감시 속에 활동이 어려워졌지만, 교육운동에는 손을 놓지 않았다. 동아일보 1935년 3월 5일자 기사를 보면, 강화군 부내면에서 "7만 군민의 일대 숙제"라며 '강화중등학교 설치 간담회'가 열렸는데, 유경근이 좌장을 맡았다.유경근은 끝까지 창씨개명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집이나 학교의 문을 조선총독부가 있는 동쪽과 일본 땅이 있는 남쪽으로 내지 않았을 정도로 항일정신이 투철했다. 집안에는 일본식 물건이 하나도 없었다고 한다. 직업으로 삼은 금광사업은 갈수록 어려워진 것으로 보인다. 1939년 3월 광세 체납으로 압류돼 경매 매물로 나온 인천지역 9개 금광 가운데 '강화 유경근 씨 소유의 길상면 금광'이 포함됐다. 손자 유부열씨는 "독립유공자 공적을 올릴 당시에는 자료가 적어서 지금 보면 틀린 내용이 많다"며 "할아버지는 출옥 이후 가세가 기울어져 가는 와중에도 강화에서 교육운동에 앞장섰다"고 말했다. /박경호기자 pkhh@kyeongin.com그래픽/성옥희기자 okie@kyeongin.com/아이클릭아트보석 중 탈주한 유경근을 러시아 해삼위(블라디보스토크)에서 체포했다는 내용의 동아일보 1922년 3월 5일자 기사. /국사편찬위원회 제공인천 강화군 월곶리에 있는 유경근 묘소. /경인일보DB

2019-11-13 박경호

[zoom in 송도]취임 넉달 지난 이원재 인천경제자유구역청장

공항 등 완벽 물류시설·글로벌캠 인재 확보송도 투모로우시티 스타트업 앵커시설 운영인천테크노파크와 협업 창업 지원환경 조성이원재 인천경제자유구역청장이 취임한 지 100일이 넘었다. 올해 7월10일 취임했으니, 100일하고도 20일 더 지났다. 그동안 이 청장은 송도·청라·영종 주요 현장을 둘러보는 등 업무를 파악하고, 스위스와 영국 등 해외에 직접 나가 투자유치 활동을 벌였다. 그는 "인천경제자유구역(IFEZ) 개발사업이 규모와 중요성 면에서 의미가 크다는 것을 느꼈다"며 "송도·청라·영종은 앞으로도 발전 가능성이 매우 크다"고 말했다. 이 청장을 만나 송도 등 IFEZ 개발·운영 방향과 현안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IFEZ가 가진 매력과 장점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지"IFEZ는 중국과 일본 등 동북아 경제권의 중심에 위치해 세계 167개 도시를 항공편으로 3시간 이내에 갈 수 있다. 글로벌 비즈니스 중심도시로서 가장 적합한 입지 여건을 갖춘 것이다. 개항 18년 만에 국제여객 기준 '글로벌 톱(TOP) 5'로 도약한 인천공항과 매년 급성장하는 인천항 등 완벽한 물류 여건도 큰 장점이다. 특히, IFEZ는 수도권의 우수한 대학은 물론 인천글로벌캠퍼스(해외 명문대 공동캠퍼스) 입주 대학에서 배출하는 고급 인력을 확보할 수 있다. 다양한 정주 지원 프로그램과 첨단 스마트시티 운영을 통해 내국인과 외국인 모두가 수준 높은 정주 여건에서 생활할 수 있다."-경제자유구역 개발 방향이 '개발·투자유치'에서 '혁신성장'으로 바뀌었다"그렇다. 내년 하반기부터 단계적으로 문을 여는 '스타트업·벤처폴리스, 품(POOM)'은 혁신성장의 모범 사례가 될 것이다. 이 사업은 연구를 기반으로 창업을 활성화하는 프로젝트다. 송도는 연구소와 기업, 스마트시티 관련 인프라가 있기 때문에 창업하기 좋은 여건을 가지고 있다. 송도에 있는 복합건축물 '투모로우시티'를 인천 지역 특화산업 중심의 스타트업 지원을 위한 개방형 앵커시설로 조성·운영할 계획이다. 리모델링을 통해 스타트업과 민관 지원기관의 활동 공간을 조성하고, 인천테크노파크와의 협업을 통해 이들의 창업을 지원해 나갈 예정이다. 스타트업이 활동할 수 있는 유리한 환경을 조성하느냐가 성공의 열쇠다. 이러한 환경을 만드는 데 집중하고 있다."연대 국제캠·아트센터 2단계 조기추진 계획청라 국제업무단지 우선대상자 내년께 선정글로벌시민협의회 소통강화 '지역균형 발전'-송도 세브란스병원과 연세대 국제캠퍼스 2단계 사업은 어떻게 추진되고 있는가"지난해 3월 연세대와 국제캠퍼스 2단계 협약 및 세브란스병원 건립·사이언스 파크(YSP) 조성계획에 합의했다. 토지 매매계약에 앞서 토지 공급예약을 연내 체결할 예정이다. 아울러 송도국제화복합단지 개발·실시계획 변경을 차질 없이 추진해 내년 하반기에는 2단계 사업이 성공적으로 추진되도록 노력하겠다. 세브란스병원도 조속히 건립될 수 있도록 행정력을 집중할 계획이다. 세브란스병원과 연세대 국제캠퍼스 2단계 사업은 협약 내용대로 추진한다는 게 우리의 기본입장이다."-'아트센터 인천' 콘서트홀이 개관 1주년을 맞는다. 2단계(오페라하우스·뮤지엄) 사업은 언제 추진하는지"아트센터 2단계 사업비가 2천억원을 좀 넘는 것 같다. 재원 조달 방안에 대한 검토가 선행되어야 한다. 2단계까지 이뤄져야 문화예술 콤플렉스가 완성된다는 생각으로, 조속히 재원 조달 방안을 만들 계획이다. 기본적으로 2단계 사업을 빨리 추진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청라 현안에 대해 말씀해달라"청라가 경제자유구역으로 지정된 지 약 16년이 지났다. 많은 여건의 변화가 있었다. 그 변화에 걸맞은 개발 방향과 투자유치 계획을 수립하기 위해 LH와 함께 용역을 진행하고 있다. 개발 콘셉트와 계획을 현실에 맞게 조정하는 도시계획 변경도 추진 중이다. 이를 토대로 내년 상반기에는 청라국제업무단지 개발을 위한 우선협상대상자를 선정할 예정이다. 청라 시티타워는 이달 기공식이 끝나면 변경된 디자인에 대한 실시설계와 행정 절차를 이행한 후 내년 하반기에는 건립을 본격화할 계획이다."-영종 지역 복합리조트 개발사업 진행 상황은"영종에서 추진 중인 복합리조트 사업은 경제적 파급효과가 커 IFEZ 지역경제 활성화, 청년 일자리 창출, MICE산업과의 시너지 등에 크게 기여할 것으로 예상한다. 파라다이스시티는 2017년 4월 오픈 이후 2년간 약 250만명이 방문했다. 앞으로 더 많은 국내외 관광객을 유인하는 관광 명소로 자리매김할 것이다. 미단시티에 추진 중인 시저스코리아 복합리조트는 2017년 9월 착공해 2021년 개장을 목표로 공사가 원활히 진행되고 있다. 인천공항 제2여객터미널 북서쪽 국제공항업무지구(IBC)-Ⅲ에 위치한 인스파이어 복합리조트 1단계 사업은 2022년 개장을 목표로 지난 5월 착공했다. 2단계 사업인 실내외 테마파크는 2021년 착공 예정이다. 영종과 청라를 잇는 제3연륙교 실시설계 용역은 약 60%의 공정률을 보이고 있으며, 내년 하반기 착공할 계획이다."-주민 소통 및 관계기관 협력 강화 방안은"'글로벌시민협의회' 운영으로 소통을 강화하려고 한다. 이 협의회는 주민과 의사소통을 할 수 있는 창구다. 이것을 통해서 주요 현안에 대해 주민과 긴밀하게 협력할 방침이다. 이달 중 출범할 예정이며, 송도·청라·영종 등 지구별로도 협의회를 운영할 예정이다. LH(청라·영종), 인천항만공사(송도 일부), 인천국제공항공사(영종 공항산업·복합리조트) 등 관계기관과의 협력이 중요하다. 사업 구상, 투자유치, 도시계획 부문에서 긴밀하게 협력해야 IFEZ 개발이 시너지를 낼 수 있다. 앞으로 더욱 협업 체계를 강화할 것이다."-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씀은"IFEZ가 4차 산업혁명 시대의 중추적 역할을 할 수 있도록 산업 생태계를 조성하는 데 집중할 계획이다. 산학연이 협력해 동반 성장하는 산업 생태계를 만들어 나가겠다. IFEZ가 살기 좋은 도시가 되도록 정주 환경과 생활 기반을 개선하고 불편함을 없애는 데 노력하겠다. IFEZ가 지역 균형 발전에 기여하도록 구도심과의 사업 연계 방안도 적극적으로 모색하겠다." /목동훈기자 mok@kyeongin.com이원재 인천경제자유구역청장이 인천경제자유구역(IFEZ) 개발·운영 방향과 현안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인천경제청 제공

2019-11-10 목동훈

[독립운동과 인천·(34)]철시투쟁

18세 글로 보기엔 매우 '논리정연'항일조직 지원 추정… 재조명 필요1919년 3·1운동이 전국으로 확산할 때 인천에서는 시내 중심가 상점들이 항일의 뜻을 표출하는 차원에서 가게 문을 닫는 '철시(撤市)' 투쟁이 활발했다.각종 자료와 신문 보도를 종합하면, 인천지역 철시는 1919년 3월 말부터 4월 초까지 이어지면서 상당수 상점이 동참한 것으로 보인다. 인천에서는 당시 잡화상이었던 18세 김삼수(金三壽·1901~?)와 객줏집 사환이었던 15세 임갑득(林甲得·1904~?)이 철시투쟁에 가장 앞장섰다. 지금으로 따지면 각각 고등학교 3학년과 중학교 3학년일 나이였다. 10대 소년 2명은 문을 닫지 않은 상점들에 철시하라는 경고문을 뿌리다가 일본 경찰에 붙잡혀 옥살이를 했다.1심과 2심에서 실형을 선고받은 김삼수가 3심(상고심) 재판부에 제출한 200자 원고지 약 10매 분량의 '상고 이유서'가 아직 남아있다. 그 내용이 잡화상이 직업인 소년이 썼다고 하기엔 매우 논리정연해 눈길을 끈다. 김삼수는 상고 이유서에서 "지금 시대는 타인을 노예로 하는 자도 없고, 타인으로 하여금 노예가 되게 하는 자도 없다"며 우드로 윌슨(Woodrow Wilson·1856~1924) 미국 대통령이 주창한 '민족자결주의'를 강조했다. 평범한 상인의 철시투쟁까지도 견고한 논리의 항일민족의식이 밑바탕에 깔렸다는 의미다.물론 상고 이유서 내용을 고려하면, 김삼수가 직접 쓰지 않고 누군가의 조력을 받았을 개연성이 크다. 김삼수와 임갑득을 지원한 항일운동조직이 있었고, 인천지역 철시투쟁도 조직적으로 전개됐다는 추정도 해볼 수 있다. 하지만 인천 철시투쟁은 단편적인 기록으로만 남아있을 뿐이다. 만세시위와 함께 일반 민중이 대거 참여했던 항일운동인 만큼 구체적인 재조명 작업이 필요하다. 김삼수의 상고 이유서 등 판결문은 국가기록원이 운영하는 '독립운동 판결문' 홈페이지에서 확인할 수 있다. /박경호기자 pkhh@kyeongin.com

2019-11-06 박경호

[독립운동과 인천·(34)]철시투쟁

1919년 학생 동맹휴업 이어 3월30일부터 실행18세 잡화상 김삼수·15세 객주집 사환 임갑득폐점 안한 가게에 독촉 경고문 배포하다 '체포'인천물산 객주조합원·권업소원·포목상조합 등1926년 4월 순종 승하때도 철시… 봉도식 진행생계 걸고 日에 대항한 '이름없는 독립운동가'인천은 일제에 국권을 강탈당하기 이전부터 일본의 한반도 침략과 수탈의 관문이었다. 당시 인천부는 일본이 '조선 안의 작은 일본'을 목표로 만든 철저한 계획도시였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날 무렵 인천부 인구 2만211명 가운데 44.4%인 8천973명이 일본인일 정도로 다른 도시보다 일본의 영향력이 막강했다.인천 시내 중심에서는 3·1 만세시위가 활발하게 일어나기 어려운 여건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19년 3월 6일부터 인천 학생들이 동맹 휴학에 돌입하며 시내에서 만세운동을 전개하기 시작했고, 곧 인근 지역까지 들불처럼 번졌다.3·1운동 때 인천지역 상인들은 가게를 닫아버리는 '철시(撤市)' 투쟁으로 항일시위에 동참했다. '작은 일본'이라 불린 도시에서 장사하는 상인들이 생계를 접고 항일의 뜻을 표시하기가 여간 어려운 결정이 아니었을 것이다. 이병헌이 1959년 쓴 '삼일운동비사'와 한국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가 2009년 발간한 '한국독립운동의 역사'를 보면, 인천 시내 조선인 상점들은 만세운동이 이어지던 1919년 3월 30일부터 철시투쟁에 나섰다. 당시 인천은 내리(현 중구청 일대)부터 지금의 동구까지 시내 중심가를 이루며 상점이 모여 있었다.인천에서 철시투쟁과 관련해 처벌받은 김삼수(金三壽·1901~?)와 임갑득(林甲得·1904~?)의 상고심 판결문에는 3월 27일부터 인천 시내의 상점들이 문을 닫았다는 내용이 나온다. 3월 27일은 조선인 가게들에 3·1운동 때 맞춰 창간된 '조선독립신문'과 함께 "철시하라"는 격문이 배포된 날이다. 인천부협의회 등 친일기관이 개점하라고 협박했지만, 3월 30일부터 조선인 상점 대부분이 철시투쟁에 참여한 것으로 보인다. 일본 경찰이 출동해 상점 문을 열도록 협박하면 눈가림으로 문을 열다가도 경찰이 돌아서면 이내 다시 문을 닫으며 항쟁을 이어갔다.조선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보'는 1919년 4월 1일자 신문에서 "인천 시내는 그동안 평온한 듯하더니 다시 불온한 모양으로 변하며 수일 전에는 조선인 상점이 얼마만 철시한 것을 보겠더니 삼십일부터는 모두 철시를 했다"고 보도했다. '매일신보'는 이 기사에서 가게들이 휴업한 시내를 "길거리에 행인도 없다"며 "음습하여 쓸쓸하기가 한량 없다더라"고 부정적으로 보도했는데, 철시투쟁이 효과적이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삼일운동비사'에서도 인천지역 철시와 관련해 "시가지는 인적이 고요했고, 해변의 파도 소리만 시가지를 울렸다"고 그 분위기를 전했다.김삼수와 임갑득은 4월 1일 오전 11시께 아직 폐점하지 않은 우각리 이복현(李福鉉) 등의 점포 17곳에 철시하라는 경고문을 뿌렸다. 하지만 우각리 일대에서 상점이 문을 열자 김삼수와 임갑득은 4월 2일 또다시 "인천에 있는 상업가가 폐점하지 않으면 인천시가는 초토화할 것"이라는 내용의 경고문을 작성해 상점들에 배포했다. 이들은 4월 3일에도 "속히 폐점하지 않으면 최후의 수단을 취할 것"이라고 쓴 '최후통첩문'을 내리에 있는 점포에 투입하려다 일본 경찰에 체포됐다.김삼수와 임갑득의 1심 판결문을 보면 죄명은 '보안법 위반'과 '강요미수'이다. 김삼수는 당시 18세에 직업은 잡화상이었고, 임갑득은 15세에 직업은 객주집 사환이었다. 상점에서 일하는 평범한 10대들이 철시투쟁에 가장 앞장선 것이다. 사법경찰관 측 증인으로 조사받은 주명서(朱明瑞)는 "1919년 3월 30~31일 폐점했으나, 경찰관의 간곡한 설득으로 개점했는데, 다음날 오후 8~9시 무렵 김삼수와 임갑득이 쓴 경고문을 받았다"며 "다소 무서웠지만 폐점할 정도는 아니었다"고 진술했다.김삼수와 임갑득은 1심에서 각각 징역 10개월을 선고받았다. 임갑득은 항소심에서 징역 6개월로 감형됐고, 김삼수는 상고심을 거쳐 1심과 마찬가지인 징역 10개월이 확정됐다. 이들은 항소, 상고 과정에서 앞선 판결에 불복하는 이유를 "조선민족으로서 정의·인도에 기초하는 의사발동이며 범죄가 아니다"라고 했다.김삼수는 상고심을 진행하면서 경성고등법원에 200자 원고지 10매 분량의 상고 이유서를 별도로 제출했다. 상고 이유를 살펴보면, 단순히 10대 소년들이 의협심에 불타 감정적으로 철시투쟁을 독려했던 것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다음은 김삼수가 법정에 낸 상고이유서의 내용 일부다.'이번 조선민족의 행위는 세계의 대세에 따라 정의와 인도에 기초하여 의사를 발동한 것임은 다시 말할 필요가 없는 바이다. 누천(累千)여 년 이래 역사상 또는 민족상에서 보아도 일·선의 합병은 불가사의라고 말해야 한다. 왜냐하면 10년 전 일·선 합병은 당시 야심 발발(潑潑)한 일본정치가가 외람(猥濫)하는 수단으로써 금력(金力) 의해 취한 바이다. 동서고금을 불문하고 금력(金力) 또는 무력으로써 인심을 복종시킨 적이 있음을 듣고, 게다가 일·선 합방 이후 대일본제국으로부터 조선에 대한 정책이 어떠했는지가 순전한 만종(蠻種)으로서 보인 것이며, 이러한 압제적 통치 아래에서는 영적 능력이 불구(不具)한 야만족이라고 해도 불평을 품는다.'또 상고이유서의 다음 내용을 보면, 3·1운동의 사상적 기반 중 하나였던 우드로 윌슨(Woodrow Wilson·1856~1924) 미국 대통령의 '민족자결주의'가 잡화상인 김삼수처럼 일반 민중에게도 널리 퍼져 있었다는 점도 가늠케 한다.'눈을 들어 세계를 보라. 누가 사람의 노예가 될 자가 있겠는가. 쓸데없이 빙자하는 것이 아니라고 해도 이번 미국 대통령 윌슨 씨가 성명한 민족자결주의에 따라 부흥한 국가가 많이 있는데, 대일본제국에서는 반드시 영국의 인도에 대한, 미국의 필리핀에 대한 것을 빙자하더라도 스스로 생각해도 일본의 조선에 대한 정책이 얼마나 압제적인지 얼마나 속박적인지 이로써 영국령 인도, 미국령 필리핀과 비교할 것이 되겠는가. 언론·출판·집합의 자유는 존중히 여겨야 할 것임은 물론 인류의 공권까지 박탈당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또 윌쓴 씨가 성명한 민족자결은 동양에 있는 우리들과는 하등 관계가 없다고 말하지만, 이는 제한적인 것이 아니다. 지원(至遠) 지대(至大)한 것이다.'조한성 민족문제연구소 선임연구원은 2019년 쓴 '만세열전'에서 "민족자결주의는 해당 제국주의 국가에서 국내적인 수준으로 제한됐던 민주주의를 국제적인 수준으로 확대하는 효과도 낳았다"며 "윌슨의 생각은 일정한 경로를 거쳐 조선인들에게 전해졌다. 이것이 3·1운동이 일어나게 된 첫 번째 이유였다"고 설명했다. 김삼수는 상고이유서에서 "우리의 행위를 일본 법률에 준해 징역 10개월에 처단했는데, 참으로 웃을 수 없지 않은가"라며 "당당하게 정의·인도를 위해 행동한 우리들은 정의와 인도에 위배하는 대일본제국 사법권 내의 절제를 받을 필요가 없다"고 상고 신청 이유를 밝혔다. 하지만 재판부는 "자기가 사실로 말하는 바를 진술하고, 자기의 의견에 의해 피고의 소위는 죄가 되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것밖에는 되지 않으니 상고 이유 없다"며 상고를 기각했고, 김삼수는 징역 10개월 확정 판결을 받았다.김삼수의 직업이 잡화상이었던 점에 비춰보면, 상고이유서 내용이 너무나 논리 정연하다. 노련한 변호인이 작성했을 법한 내용들이다. 일반 민중들이 쓸 수 있는 용어들도 아니다.이들의 뒤를 받쳐주던 항일운동 조직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김삼수와 임갑득 같은 평범한 민중들이 어느 조직에 들어가 항일민족의식을 깨우치는 공부를 했고, 이를 실행에 옮겼다고 보는 게 타당할 듯하다.이후 김삼수와 임갑득에 관한 기록은 찾아볼 수 없다. 다만, 동아일보 1922년 4월 2일자 신문을 보면, 민족운동을 펼쳤던 기독교 소년운동단체인 인천 '엡윗청년회'(의법청년회) 주최 토론회가 열렸다는 내용의 기사에서 '김삼수(金三壽)'라는 이름이 등장하는데, 같은 인물인지는 확인하기 어렵다.인천지역 상인들의 철시는 1926년 4월 25일 조선의 마지막 임금인 순종이 승하했을 때 또다시 일어났다. 동아일보 1926년 5월 3일자 기사에는 그해 4월 30일부터 인천물산 객주조합원, 인천미상조합원과 권업소원, 인천포목상조합이 잇따라 가게 문을 닫고 순종의 봉도식을 진행했다.인천지역 상인들의 철시투쟁은 소극적인 항일운동이 아니었다. 자신이 운영하는 상점의 문을 스스로 닫는 것은 생계가 걸린 문제였고, 상인들은 생계를 걸고 일본에 대항한 이름 없는 독립운동가들이었다. 김삼수처럼 평범한 민중도 뚜렷한 민족의식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박경호기자 pkhh@kyeongin.com그래픽/박성현기자 pssh0911@kyeongin.com/아이클릭아트일제감시대상 인물 카드 속 김삼수(왼쪽)와 임갑득. 두 사람이 일본 경찰에 체포됐을 당시 나이는 김삼수가 18세, 임갑득이 15세였다. 출처/국사편찬위원회동아일보 1926년 5월 3일자 신문에 실린 '인천시민 봉도식' 사진. 순종이 승하한 후 인천지역 상인들이 철시한 후 봉도식을 가졌다는 내용의 기사다. 출처/네이버 뉴스라이브러리인천지역 철시 풍경을 다룬 조선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보'의 1919년 4월 1일자 기사. 출처/국립중앙도서관김삼수·임갑득의 상고심 판결문 원본 첫 장. 출처/국사편찬위원회

2019-11-06 박경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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