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인천)

[이슈&스토리]반쪽 지원에 그친 8년… '평화의 섬' 걸맞은 인프라 구축돼야

22일(매년 3월 넷째 금요일)은 서해수호의 날이다.제2연평해전과 천안함 피격, 연평도 포격 등에 맞서다 나라를 위해 목숨 바친 호국 영웅들을 추모하기 위해 제정한 법정기념일이다.서해에서 벌어진 남북 교전은 비단 군인들의 이야기만은 아니다. 서해5도 주민들은 연평도 포격 당시 피난 행렬 속에서 느낀 불안과 공포를 여전히 잊지 못하고 있다.이러한 서해5도 주민들의 정주 환경을 개선하기 위해 2011년 처음 마련된 '서해5도 종합발전계획'이 오는 2020년 종료를 앞두고 있다.서해5도 지원 특별법에 따라 만들어진 이 계획은 그동안 접경지역이라는 이유로 소외됐던 서해5도 지역에 대한 종합적인 발전 계획을 수립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컸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작 정부 예산은 충분히 뒷받침되지 못해 '반쪽짜리' 계획에 그쳤다는 지적도 뒤따랐다.8년이 지난 지금, 연평도 포격의 상흔으로 얼룩진 2011년과 달리 한반도에 평화의 바람이 불고 있다.자연스레 '제2차 서해5도 종합발전계획(2021~2030)' 수립에도 관심이 쏠리고 있다.남북 관계가 개선된 만큼 대북 사업, 관광 사업 활성화를 위한 인프라 지원이 주민들의 실질적인 소득 증대로 이어질 수 있는 청사진 수립이 절실하다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北위협 속 정주환경 개선위해 2011년 특별법 제정 9천억대 구상국비 지원율 53% '실망' 노후주택 개량 올해는 30여가구만 수혜 옹진군·의회 노력등으로 정부 2차 계획 수립 용역발주 추진 '다행'민간 자본 관광육성 지지부진… 소득 증대 등 현실적 사업 필요서해5도 종합발전계획이 처음 마련된 건 남북 관계가 냉랭했던 2011년이었다. 정부는 2010년 11월 발생한 '연평도 포격 사건' 이후 주민생활 안정대책 차원에서 이듬해 서해5도 지원 특별법을 제정하고 서해5도 종합발전계획을 수립했다. '풍요로운 평화의 고장, 서해5도'라는 비전을 세우고 주민을 위한 쾌적하고 수준 높은 정주환경 조성과 동시에 북한의 도발로부터 대비하기 위한 대피시설 확충 사업을 동시에 담았다. 또한 섬 지역 관광 활성화를 위해 경쟁력 있는 특화 산업과 관광 산업 육성과 관련한 사업도 포함했다. 사업비는 2011년부터 2020년까지 국·시비, 민간 자본 등 9천109억원이다. 서해5도 도로 개설, 항만시설 정비, 관광 기반 구축, 대피소 확충, 해상 교통망 개선 등을 위한 것이다. 이중 지난해까지 예산 3천128억원이 투입됐다. 그러나 국비는 계획된 4천599억원에서 2천434억원이 지원되는 것에 그쳤다. 서해5도 종합발전계획 시행이 8년이 지났는데도 국비 지원율이 53%로 미흡한 수준이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주민들에게 호응을 받고 있는 노후주택 개량사업의 경우 신청을 원하는 군민이 200가구를 넘지만, 올해 수혜를 받는 가구가 30여 가구에 불과하다. 이러한 문제는 서해5도 종합발전계획 종료 시점이 다가오자 수면 위에 올랐다. 게다가 지난해 말 옹진군이 서해5도 여건변화에 따라 서해5도 관련 사업 계획을 변경해 달라고 요청한 것이 기획재정부에서 받아들여지지 않으면서 옹진군과 옹진군의회가 반발하고 나섰다.옹진군의회는 지난해 12월 열린 제207회 제2차 정례회에서 '제2차 서해5도 종합발전계획 연장 마련 촉구 결의안'을 채택하기도 했다.당시 홍남곤 옹진군의회 의원은 "우리 군이 행안부에 최저생계비 증가율, 물가 상승률 등 현실적 여건을 고려해 서해5도에 대해 대폭 지원할 수 있도록 지속 건의했는데 여러 여건상 받아들여지지 않았다"며 "과거처럼 북한의 위협이 늘 도사리는 여건이 아니라 4·27 판문점 선언 이후 서해5도가 평화의 섬으로 주목받으며 서해평화수역 조성이 가시권에 들어오는 만큼 서해5도의 지역 특성과 주민생활 안전대책을 반영한 종합발전계획을 지속 시행해야 한다"고 주장했다.이들은 서해5도 종합발전계획 용역 조속 수립을 촉구하며 용역 수행 기관의 일방적 청사진 수립이 아닌, 옹진군민의 의견이 반영된 실질적이고 장기적인 종합발전대책 지원을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평화와 안보가 공존하는 서해5도의 특성을 살린 사업을 추진하되 그 사업이 주민들의 실질적인 소득을 증대시킬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다행히 최근 행정안전부는 '제2차 서해5도 종합발전계획' 수립을 위해 내년께 용역 발주를 계획하고 있어 서해5도 주민을 위한 지원은 지속할 수 있을 전망이다. 옹진군과 주민들은 이번 계획에는 옹진군 주민들이 피부에 와 닿을 수 있는 사업이 제시돼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또한 기존에 담긴 계획 중 실현이 불가능하거나 현실에 맞지 않는 사업에 대한 정리도 필요하다.현재 2020년 종료를 앞둔 서해5도 종합발전계획에 담긴 사업 78건 중 현재 완료됐거나 진행 중인 사업은 52건이다. 특히 민간 자본을 투입해 조성하는 사업은 대부분 진행되지 않고 있다. 대표적인 것이 '평화관광육성 및 세계적 평화거점 조성'이라는 목적으로 백령도 남포리 일원에 국제회담장, 숙박시설, 출입국관리시설, 크루즈항, 골프장 등을 조성하는 사업이다. 남포리에 평화공원을 세우고 각종 편의시설에 민간 자본을 일부 투입할 구상이었다. 옹진군은 2021년부터 2030년까지 10년의 청사진이 담길 제2차 서해5도 종합발전계획에는 이러한 사업을 축소·정리하고 주민들이 꼭 원하는 사업이 담기길 기대하고 있다.옹진군 관계자는 "1차는 대피소 마련, 정주 생활금 지원, 노후주택 개량 사업, 교육비 등에 그쳤고 아예 진행되지 못한 사업도 있었다"며 "이제는 남북 평화 분위기 변화에 따라 전쟁이 발생하지 않도록 하는 영구적인 평화 관련 사업과 관광 활성화 사업, 주민들이 실질적으로 피부로 느낄 수 있는 주민 소득 증대사업, 인프라 구축, 개발 사업 등에 초점을 맞추는 계획이 담길 수 있길 바란다"고 말했다. /윤설아기자 say@kyeongin.com그래픽/박성현기자 pssh0911@kyeongin.com/아이클릭아트인천 옹진군 연평도 전경. /옹진군 제공인천 옹진군 연평도에 설치된 현대식 대피시설. 비상진료소 등을 갖추고 있다. /옹진군 제공인천 옹진군 소연평도 전경. 이곳에는 서해5도 종합발전계획에 따라 노후 주택 개량 사업이 진행됐다. /옹진군 제공남북관계 경색 국면 당시 포사격 훈련에 따라 백령도 대피소로 피난한 주민들. /옹진군 제공

2019-03-21 윤설아

[독립운동과 인천·(5)석모도와 이안득]러시아 이민자 2세, '억류된 고국'서 다시 든 '독립횃불'

하바롭스크서 출생 '세미요노프軍' 반혁명군 활동하다 군법관부에 체포반일사상 고취·불온이유 '거주제한처분' 19살에 강화 석모리 일대 유배3·1운동 소식 접한뒤 감시에도 4월 7일 아이들 이끌고 만세외쳐 '징역형'곳곳서 주민들 동참행렬 '영향'… 이후 귀향 또는 월북 가능성 자료미미강화 석모도는 100년 전 3·1 운동과 관련해 우리가 잘 알지 못하는 특이한 이력을 갖고 있다. 석모도에서 유배형을 받고 거주 제한 상태에 있던 독립운동가가 만세운동을 이끌었다는 점이다. 그는 1900년 러시아 하바롭스크에서 이민자 2세로 태어난 이안득(李安得)이다. 러시아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그는 일제에 적발돼 19살의 어린 나이에 고향에서 1천㎞나 떨어진 강화군 석모도로 유배를 왔다. 이듬해 우리나라에서는 3·1 운동이 일어났고, 이안득은 유배지의 마을에서도 아이들을 이끌고 뒷산에 올라 횃불을 피우고 '조선독립만세'를 외치다 일본 경찰에 붙잡혀 옥고를 치렀다.국사편찬위원회의 한국사데이터베이스가 제공하는 일제 감시대상 인물카드에 따르면 이안득은 1900년 12월 러시아 하바롭스크에서 태어났다. 1800년대 중반 함경도와 평안도의 가난한 농민들은 농사지을 땅을 찾아 두만강을 넘어 연해주 지역으로 이주하기 시작했다. 이 때문에 하바롭스크와 블라디보스토크, 크라스키노 등 연해주 지역 주요 도시에는 한인 집단 거주지가 형성됐다. '신편 강화사' 등 이안득을 기록한 역사서에서는 그의 본적을 함경남도 완산부로 표기하고 있는 데 그의 부모가 함경도 지역에서 농사를 짓다가 러시아로 거주지를 옮겨갔기 때문인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일제의 이안득에 대한 조사서류에도 그의 주소지는 '함경남도 완산부 이하 불명'이라고 적혀 있다. 일제는 이 이유에 대해 '본적이 불분명한 사람은 시베리아에서 태어나거나 십수 년 전에 국외로 떠난 사람이다'라고 명기했다.러시아에서 태어난 청년이 이역만리 강화도 석모도에 거주하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국사편찬위원회가 일본 외무성 외교사료관에서 찾아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 올려 놓은 이안득에 대한 '거주제한처분의 건'을 경인일보가 전문 번역가에게 의뢰해 해석한 그의 유배 사유는 이렇다."이들은 러시아 '세미요노프'군(軍)에 따라 지도관인 육군 대위 이광열(귀화 조선인)의 명령을 받아 각 부하에 속하는 조선인 군부에 대해 반일사상을 고취시키다 세미요노프 군법 관부에 체포됐다. 이 대위를 제외한 나머지 9명은 하얼빈(哈爾濱) 주재 제국 총영사에 인도되나 모두 품행 불량으로 친일 조선인을 적대시하고 평상시 동포를 능학(凌虐·업신여기고 학대함) 및 협박했으며 종종 일본군 기밀을 찾아내 적대 국민에게 누설했다. 이에 대정7년(1918년) 8월 19일 3년간 중국 재류 금지를 명했으며, 조선 내에서도 치안을 방해할 우려가 있어 보안법 제5조에 따라 거주 제한을 명한다."세미요노프군은 러시아볼셰비키 혁명에 반대하는 '반혁명군(백위군)' 중 하나로 바이칼호 동쪽 지역(동시베리아)인 자바이칼주를 중심으로 활동한 부대다. 당시 혁명 정부는 제1차대전 종전을 위해 독일과 단독 강화에 나섰고 연합군에서 탈퇴했다. 연합군은 이러한 조치에 반발해 반혁명군 지원에 나섰다. 특히 일본은 1918년 8월 시베리아 전쟁을 일으키는 등 반혁명군에 무기나 자금을 제공한 연합군 국가 중 하나였다.반혁명군은 제정 러시아에 근무하던 군인이 주축이 된 부대다. 러시아에 살던 조선인 젊은 청년들은 일제와 전쟁을 벌이기 위한 군사 기술을 배우기 위해 반혁명군에 들어가는 일이 많았다고 한다. 이안득도 이러한 이유로 반혁명군에 가담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안득을 이끌었던 이광열은 육군 대위라는 계급을 고려하면 볼셰비키 혁명 이전부터 이곳에서 근무했을 가능성이 높다.만주와 러시아 지역 항일운동사 연구자인 반병률 한국외대 사학과 교수는 "1918년 8월부터 일제가 시베리아 전쟁을 일으키지만, 같은 해 초부터 반혁명군 지원을 위해 블라디보스토크에 대대급 부대를 상륙시키는 등 전쟁을 위한 준비에 나섰다"며 "제정 러시아군부터 근무하던 반혁명군 조선인 장교들은 일본이 지휘부를 지원한다는 사실을 알고, 전투 참가를 거부하거나 조선인 병사들과 탈영을 모의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설명했다.이광열과 뜻을 함께한 조선인은 이안득을 포함해 9명이었다. 군법 관부에 체포된 이광열은 대위라는 계급 때문에 세미요노프군 지휘부가 총살 등의 방식으로 처리했을 것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설명이다. 이안득 등 9명은 일본 영사관에 넘겨져 조선의 각 섬으로 흩어져 유배를 떠나게 된다. 당시 조선총독부 보안법 5조에는 "내부대신은 정치에 관하여 불온한 동작을 행할 우려가 있다고 인정되는 자에게 그 거주장소로부터 퇴거를 명하거나 1년 이내의 기간 동안 특정한 지역에의 출입금지를 명할 수 있다"고 규정지었다. 재판을 통해서가 아닌 단순 행정처분 형태로 유배가 결정된 것이다. 반 교수는 "191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일본의 법률이 현대식으로 완비되지 않았기 때문에 태형이나 유배 등 조선시대 형벌을 그대로 적용하는 일이 많았다"고 했다. 1918년 9월 이안득과 이범우, 김창석은 인천 석모도와 영흥도, 백령도로 각각 유배됐고, 변원정과 황운삼, 문용운 등은 전라도 지도, 가좌도, 초도로 떠날 수밖에 없었다. 강진제는 경상도 욕지도로, 전학만은 평안도 신미도, 민윤식은 충정도 안면도로 옮겨졌다.이안득은 강화군 삼산면 석모리 390-1번지 인근에 살았다. 이곳은 당시 석모도 주민 중 절반 정도가 살았던 지역이라고 한다. 이듬해 이안득은 3·1 운동 소식을 접하게 된다. 이안득은 서울에서 3·1 운동이 일어난 지 한 달이 조금 지난 4월 7일 밤 마을 아이들을 이끌고, 마을 뒷산(현 석모도 삼봉산으로 추정)에 올라 횃불을 들고 '조선 독립만세'를 외쳤다. 당시 삼산면장으로 근무하던 김동헌(金東憲)은 이날 시위에 대해 '성인이 3~4명뿐이었고, 나머지는 어린 학생들이었다는 보고를 들었다'고 상부에 진술했다.그로부터 100년이 흐른 2019년 3월 16일. 이안득이 살았던 석모리 390-1번지 일대를 찾았다. 그가 거주했던 흔적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가 살았던 곳으로 추정되는 집터에는 단층 양옥집이 들어서 있었고, 바로 옆에는 내가성당 석모공소가 30년 전부터 자리 잡고 있었다고 한다. 이날 석모리에서 만난 김정섭(88)씨는 "이 근처에서 평생을 살았지만, 유배된 사람이 있었다는 이야기는 들어보지 못했다"고 말했다. 거주지 옆에는 당시 이안득이 만세 운동을 벌였을 것으로 추정되는 삼봉산이 있었다.까맣게 지워졌지만 이안득은 당시 석모도 지역의 많은 사람에게 영향을 준 것으로 보인다. 국사편찬위원회의 3·1 운동 데이터베이스에 따르면 4월 8일 밤 삼산면 석포리 교회당 앞에서 70~80명이 만세를 불렀다. 9일과 10일에도 성공회 교회당 뒤의 산꼭대기(현 석모도 해명산 추정)에서 마을 사람 20여명과 함께 횃불을 피우고 3·1 운동을 했다. 1906년 건립된 석포리 성공회 교회당은 당시에도 지역 주민들이 모이는 광장 역할을 했다고 한다.이안득은 1919년 8월 석모리 시위를 주도한 혐의로 징역 1년 형을 선고받았다. 조선총독부 서류를 살펴보면 징역형 이후 자신의 고향인 하바롭스크로 돌아간 것으로 보인다. 1922년 조선총독부 경무국이 외무대신에게 보낸 동향정보 서류에 이안득의 이름이 등장하는데, 하바롭스크의 공산당 단체로 들어가 활동했다고 적혀 있다. 남달우 인하대학교 사학과 초빙교수는 "1920년대부터 러시아와 중국에서 독립운동 활동을 하는 사람에게 사회주의 사상이 퍼져나갔다"며 "하바롭스크는 임시정부 초대 국무총리를 지낸 이동휘가 한국사회당을 조직한 지역이기 때문에 영향을 더 받은 것 같다"고 했다.이후 이안득의 이름이 나오는 공식 문서는 없다. 하바롭스크가 연해주 지역 조선인들의 중앙아시아 강제 이주 출발지였던 점을 고려하면 중앙아시아 지역으로 이동했을 수도 있고, 다른 사람들과 함께 북한으로 갔을 가능성도 있다. 이안득에 대한 추가적인 연구가 절실하다.반병률 교수는 "당시 서류를 살펴보면 러시아 반혁명군에 활동하다 조선으로 유배 온 조선인들이 많았던 것으로 추정된다"며 "이들에 대한 연구가 더 진행돼야 할 것으로 생각한다"고 말했다. /김주엽기자 kjy86@kyeongin.com이안득의 수형자 기록카드. /국사편찬위원회 제공이안득의 거주제한처분 서류 원문. /국사편찬위원회 제공한인들이 집단 이주해 거주했던 1918년 당시 하바롭스크 전경. /국사편찬위원회 제공독립운동가 이안득이 유배되었을 때 살았던 강화 석모도 동네. 뒤에 보이는 산은 이안득이 마을 아이들을 이끌고 만세 운동을 벌였을 것으로 추정되는 삼봉산이다. /김용국기자 yong@kyeongin.com

2019-03-20 김주엽

[독립운동과 인천·(5)석모도와 이안득]러시아서 항일운동 적발… 강화 유배지 "만세" 앞장

인천 강화군 석모도에서 일어난 3·1 운동을 러시아에서 독립운동을 하다가 이곳으로 유배된 이민 2세대가 이끌었다. 그것도 '항일 혐의'로 유배 중인 상태에서 만세운동을 벌였다.1919년 4월 7일 강화군 석모도의 첫 3·1 운동은 이안득(李安得)이라는 19세 청년의 주도로 이뤄졌다. 이안득에 대한 1919년 재판 기록에 따르면 그는 러시아에서 독립운동을 하다가 적발돼 거주제한 처분을 받고 그 7개월 전 석모도로 유배됐다.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가 제공하는 '일제 감시대상 인물카드'를 보면, 이안득은 1900년 12월 러시아 하바롭스크에서 태어났다. 1918년 6월 러시아 반혁명군(軍)에 참여해 반일 운동을 벌이다 지휘부에 붙잡혀 일제에 넘겨졌으며, 1918년 9월 강화도 석모도로 유배됐다. 그는 고향에서 이역만리 떨어진 섬에 유배를 와 감시대상인 신분으로 마을 주민 수십 명과 함께 당산에 올라 횃불을 피우고 독립 만세를 외쳤다.하지만 독립운동과 관련한 그의 기록은 불명확하다. 2016년 발간한 '신편 강화사'에서는 그에 대해 '함경남도 원산 출신으로 러시아 시베리아에서 항일운동을 하다가 거주제한 처분을 받았다'고 출신지가 다르게 기록돼 있다. 같은 해 인천시가 펴낸 '인천시사'에는 '이안득의 주도로 삼산면 석모리에서 십수명이 산정에 올라 봉화를 피우고 독립만세운동을 불렀다'고 적혀 있을 뿐이다.국사편찬위원회가 일본 외무성 외교사료관에서 찾아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 올려놓은 자료에는 그의 이름이 '이안덕(李安德)'이라고 명시돼 있다.100년이나 흘렀지만 그의 이름이나 행적 등에 대해 아직 명확히 밝혀진 부분이 없는 셈이다.만주와 러시아 지역 항일운동사 연구자인 반병률 한국외대 사학과 교수는 "1918년 8월 일본이 시베리아 전쟁을 일으키기 전에 러시아에서 반일운동을 진행하다 붙잡혀 유배를 온 사람이 있다는 것은 학계에서 주목한 적이 없다"며 "관계기관 등에서 그에 대한 연구를 진행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김주엽기자 kjy86@kyeongin.com

2019-03-20 김주엽

[독립운동과 인천·(4)인천의 3·1운동]달라진 행정구역따른 관련기록·연구 '부실'

인천시는 100년이나 지났건만 3·1운동과 관련한 정확한 데이터조차 마련해 놓지 못하고 있다. 인천지역 3·1운동 역사를 재정립할 필요성이 있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1919년 당시 '인천'과 지금의 행정구역이 크게 달라졌기 때문이다.인천시는 올해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다양한 행사를 진행한다. 인천시, 군·구, 관계기관에서 28건의 3·1운동 기념행사가 올해 펼쳐진다.하지만 인천시는 인천에서 몇 건의 만세운동이 벌어졌고, 몇 명이나 참여했는지 제대로 된 통계조차 확보해 놓지 못했다. 인천시 관계자는 "올해 여러 사업을 추진하고 있지만, 3·1운동과 관련한 역사 기록은 아직 파악하지 못했다"고 했다.인천시가 1973년 발행한 '인천시사'에는 3·1운동 때 인천에서 만세운동이 8번 열렸고, 9천명이 집회에 참가했으며, 15명이 투옥됐다고 적혀 있다. 이 통계는 임시정부 2대 대통령 박은식이 1920년 쓴 '한국독립운동지혈사'(韓國獨立運動之血史)를 인용한 것이다. 1920년 당시 인천의 행정구역은 '인천광역시'가 아닌 '인천부'였다. 이후 인천시가 발간한 '인천시사'에서는 인천지역 만세운동 건수가 다뤄지지 않았다. 인천시가 가장 최근 펴낸 2013년 '인천시사'는 인천창영초등학교를 시작으로 인천에서 벌어진 주요 만세운동만 소개하고 있다.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1919년 당시 인천부는 지금의 중구, 동구, 미추홀구 일부 지역이었다. 미추홀구 문학동과 계양·부평·남동·영종·용유·옹진군은 부천군이었다. 강화군은 별도의 행정구역이었다. 지금의 10개 군·구 행정구역을 기준으로 하면 인천지역 3·1운동은 8차례보다 훨씬 많은데도 여전히 인천부를 기준으로 한 통계가 통용되고 있다.인천개항장연구소 강덕우 소장은 "황어장터 만세운동, 용유도 관청리 만세운동 등 인천 북부지역과 강화, 옹진 등의 지역에서 이뤄진 3·1운동에 대해 개별적으로는 알려져 있지만 정확히 몇 건이 벌어졌는지는 정리되지 않았다"며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기존의 연구에서 한 발짝 더 들어갈 수 있는 통계 재정립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김주엽기자 kjy86@kyeongin.com

2019-03-13 김주엽

[독립운동과 인천·(4)인천의 3·1운동]동맹휴학이 당긴 '만세불꽃' 시민속으로 번지다

인천에서 처음 3·1운동이 시작된 곳은 어디일까? 인천에서는 얼마나 많은 만세운동이 벌어졌을까? 3·1운동 100년이 지났지만 아직까지도 인천에서의 3·1운동 관련 통계조차 제대로 정립돼 있지 않다.이병헌이 1959년 쓴 '삼일운동비사(三一運動秘史)'에서는 '3월 6일 인천공립보통학교(현 인천창영초등학교교) 3~4학년 학생들이 선생이 없는 사이에 학교를 뛰쳐 나와서 인천공립상업학교(현 인천고등학교) 생도들과 합류해 시내 중심에서 시위했다'고 밝히고 있다. 초등학교 학생들과 고등학교 학생들이 연대해 만세행진을 벌였다는 얘기다.1919년 3월 6일. 인천공립보통학교(현 인천창영초등학교)에 재학 중인 학생들은 동맹 휴학을 시작했다. 서울에서 펼쳐진 3·1운동 소식을 접한 이 학교 3, 4학년 학생들이 만세 운동의 하나로 동맹 휴학을 결정한 것이다. 당시 동맹 휴학은 학생들이 일제에 항거하는 가장 적극적인 형태의 항일 투쟁이었다.6일 인천공립보통학교 3·4학년과 공립상업학교 학생들 연대 시위 '시발점'기독교인 중심 만국공원 집회·상인들 가게 문 닫는 철시운동 급속도로 퍼져강화 1만명의 함성·계양 황어장터·석모도 4월 운동… 북부권·섬에서도 '활발'현재 관련통계 중구·동구·미추홀구 일부만 반영 '미흡' 市 전면 재조사 필요조선총독부가 발행한 '1918년 통계연보'에 따르면 4년제로 운영되는 당시 보통학교 1~4학년 학생의 평균 나이는 만 11~15세였다. 만 20세가 넘어 학교에 다니는 것도 특별한 일은 아니었다고 한다. 인천공립보통학교의 동맹 휴학을 주도했던 김명진·이만용·박철준·손창신 등도 당시 만 16~19세였다.학생들이 동맹 휴학에 돌입하자 학교 교직원들은 이 사실을 경찰에 알렸다. 김명진과 이만용은 교직원들의 행동에 반발했고, 동맹 휴학 시작 이틀 뒤인 8일 오후 9시 학교 건물 2층에 몰래 들어가 미리 준비한 절단용 가위로 전화선을 끊어 경찰서와 연결된 통신을 차단했다.인천공립보통학교 학생들의 동맹 휴학은 열흘 가까이 계속됐다. 경찰이 학부형 회의를 소집해 25명을 처벌하겠다는 강경책을 발표했지만, 학생 405명 가운데 85명이 다음 날 결석할 정도로 항일 의지를 굽히지 않았다.이를 시작으로 인천에서 3·1운동은 급속도로 번져 나갔다. 학생들이 적극적으로 만세운동에 나서자 차츰 일반 시민들도 동조했다. 3월 9일 오후 5시 30분께에는 기독교인과 청년 학생 300여명이 만국공원(현 자유공원)에 모여 만세를 불렀다.오후 8시 30분께에는 50여명의 시민들이 경인가도(현 경인로) 부근에서 만세 운동을 진행하다 경찰과 충돌하기도 했다. 또 3월 31일에는 상인들이 가게의 문을 닫는 철시운동을 벌이기도 했다.인천시가 1973년 발행한 '인천시사'는 3·1운동 때 인천에서 만세운동이 8번 열렸고, 9천명이 집회에 참가했으며, 15명이 투옥됐다고 적었다. 이는 박은식이 1920년 발간한 '한국독립운동지혈사(韓國獨立運動之血史)'에 따른 것이다.그러나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1919년 당시 인천부는 지금의 중구·동구와 미추홀구 일부 지역으로 축소된 상태였다. 인천도호부청사가 있는 미추홀구 문학동 일대도 계양·부평지역과 함께 부천군이 됐고, 강화군도 있었다. 옹진군은 부천군에 속한 지역이었다. 지금 강화 옹진을 포함한 인천 전역을 놓고 보면 당시 인천부는 극히 작은 구역이다.계양과 부평 등 인천 북부지역뿐만 아니라 강화·옹진 등 섬지역, 문학동과 서창동 등 당시 인천이 아니었던 곳에서도 3·1운동은 활발히 벌어졌다. 강화보통학교(현 강화초등학교) 3학년과 4학년 학생 100여명은 3월 12일과 13일 이틀 동안 칠판에 태극기를 그리고, 운동장에서 만세 운동을 했다.당시 연희전문학교(현 연세대학교) 2학년 학생이었던 황도문은 자신의 고향인 강화에 독립선언서를 가져와 유봉진에 전달했고, 이를 지역 주민에게 배포하면서 강화 지역의 3·1운동은 들불처럼 번졌다. 3월 18일에는 강화군 부내면(현 강화읍 관청리) 읍내 장터에서 1만명이 참여한 만세 운동이 있었고, 27일에는 면사무소를 습격하기도 했다.강화 지역의 3·1운동 열기는 김포를 거쳐 계양과 부평 등 인천 북부지역에도 영향을 끼쳤다. 1919년 3월 27일 자 조선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보는 '소요사건의 후보·경기도 부평'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통해 당시 계양과 부평 지역의 상황을 설명했다."인천 시내는 물론이요 부근 일대는 관헌의 취체(일본어로 단속)가 엄중하기 때문에 비교적 평온한 모양을 가지고 있는데 일전 강화도의 소요가 도화선이 돼 그 다음에 접근된 김포도 일어났고 다시 그 동네와 인천 경찰서 관내의 경계선 되는 부천군도 불온의 형세가 있음으로 인천경찰서에서는 만일을 경비키 위해 하뢰 순사부장 외 순사 2명을 부평주재소에 임시 응원으로 파견하였더라."매일신보에서 말한 불온의 형세는 계양구 장기동에서 있었던 황어장터 만세운동이다.황어장터는 당시 계양구 지역에서 가장 큰 시장이었다. 조선총독부가 1924년 발간한 '조선의 시장'에서는 '경기도 부천군에는 2곳의 시장이 있는데 한 곳은 소사리에 있고, 나머지는 장기리에 있다. 이들 시장에는 1곳 당 평균 이용인구가 1천~2천명에 달한다'고 표현했다. 1천명이 넘는 주민이 이용하는 시장이기 때문에 만세 운동 장소로 적합했던 것이다.당시 재판기록에 따르면 계양면 오류리에 거주하던 천도교인 심혁성은 3월 24일 오후 2시께 황어장터에 모인 600여명의 군중을 이끌고 만세운동을 주도했다. 이 같은 혐의로 경찰에 붙잡힌 심혁성을 구하기 위해 300여명의 주민이 심혁성이 있던 면사무소를 습격했고, 이 과정에서 일본 경찰이 휘두른 칼에 맞아 이은선이 숨지기도 했다. 황어장터 만세운동 사건으로 40여명이 체포됐고, 심혁성은 징역 8월을 선고 받았다.3월 27일에는 문학면 관교리(현 미추홀구 문학동·관교동 일대)에서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만세운동에 참여했던 이상태 등의 재판기록을 보면 이들은 이날 밤 마을 주민 15명과 함께 마을 뒷산에서 횃불을 올리고 동네를 행진하며 '조선독립만세'를 외치다 경찰에 붙잡혔다. 이상태는 재판에서 "할 수 있다면 원래의 한국이 좋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독립할 수 있다는 생각으로 만세를 불렀다"고 진술했다.인천 내륙뿐만 아니라 섬 지역에서도 만세 운동이 벌어졌다. 3월 28일 용유면 관청리 광장에는 독립을 염원하는 150명의 만세 운동이 있었다. 당시 서울 배재학당에 다니던 조명원은 23일 독립선언서를 품고 용유도에 귀향했다. 조명원은 조종서, 문무현, 최봉학 등과 함께 '혈성단(血成團)'을 조직하고, 격문을 만들어 28일 관청리 관장에 모여 만세 운동을 벌일 것을 주민들에게 권유했다. 28일 시작된 시위는 용유도 내 여러 지역을 돌아다니며 이틀 동안 이어졌다.덕적도에서는 4월 9일 학교운동회를 맞은 명덕학교 학생 50명과 학부형 30여명이 참여해 만세운동을 벌였다. 명덕학교 교사였던 임용우 선생은 징역 1년 6개월 형을 선고받고 투옥 중 고문을 이기지 못하고 순국했다. 명덕학교 독립운동의 영향으로 인근에 있는 문갑도와 울도에서도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강화도와 석모도에서도 만세운동은 거세게 일었다. 석모도는 특히 4월에도 펼쳐졌다.1956년 발간된 '경기도지'에 실린 박은식의 '한국독립운동지혈사' 통계를 보면, 부평에서 만세운동이 6번 있었고 950명이 집회에 참가했다. 투옥자도 98명으로 인천보다 많았다. 강화에서도 2번의 만세운동이 있었고, 400명이 참가했다고 나온다.현재 널리 알려진 인천의 만세운동 통계는 '중·동구와 미추홀구 일부'만 범위로 할 뿐이다. 부평·계양지역이나 강화, 옹진, 영종·용유 등지의 만세운동도 반영할 수 있는 재조사가 필요하다는 주장이 나온다.인천연구원 김창수 부원장은 "행정구역 변화가 많았고, 과거보다 사료가 더 많아졌다"며 "인천시 등 지자체가 나서 전면적인 재조사를 진행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고 말했다. /김주엽기자 kjy86@kyeongin.com인천 계양구 장기동에 있는 황어장터 만세운동 기념비. /인천 계양구 제공 그래픽/성옥희기자 okie@kyeongin.com인천 중구 용유동에 있는 3·1 만세 운동 기념비. 당시 용유도 주민 150여 명이 이곳에서 3·1운동을 벌였다. /인천 중구 제공계양구 장기동에서 열렸던 황어장터 만세운동을 주도한 심혁성 지사. /인천보훈지청 제공

2019-03-13 김주엽

[zoom in 송도]삼성바이오에피스, 5공구에 R&D센터 건립사업 본격화

1800억원 투입 내년말 완공 예정통합 연구시설 구축 경쟁력 강화56만ℓ생산량 단일도시 '세계1위'11공구에 '첨단클러스터' 추진도삼성바이오에피스가 인천 송도국제도시(경제자유구역) R&D센터 건립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삼성바이오에피스는 송도 R&D센터 건립사업 본격화와 관련한 '비유동자산 취득 결정'을 최근 공시했다.삼성바이오에피스는 송도 5공구 첨단산업클러스터 내 부지 약 4만3천㎡에 12층짜리 R&D센터를 건립하고 있다. 전체 투자 비용은 약 1천800억원이다. R&D센터는 1천300여명의 임직원을 수용할 수 있는 규모이며 완공 예정일은 2020년 12월31일이다. 삼성바이오에피스는 통합 연구시설 구축을 통해 연구개발 경쟁력을 강화할 계획이다. 송도 R&D센터는 삼성바이오에피스가 글로벌 바이오제약 기업으로 나아가기 위한 전초기지 구실을 할 전망이다. → 위치도 참조현재 삼성바이오에피스 사업장은 인천 송도와 경기도 수원으로 이원화돼 있다. 송도 R&D센터가 완공되면, 수원 사업장에서 일하고 있는 400여명의 임직원이 송도지역에서 근무할 예정이다.삼성바이오에피스 관계자는 "송도 R&D센터가 지역 전문 인력 양성, 글로벌 수준의 연구개발 시설 확충 등 송도 바이오 클러스터 조성사업에도 긍정적으로 기여할 것으로 보인다"고 기대했다. 삼성바이오로직스, 삼성바이오에피스, 셀트리온 등이 입주한 송도의 바이오의약품 생산 용량은 56만ℓ로, 단일도시 기준 세계 1위다. 인천경제자유구역청은 이들 글로벌 바이오 기업이 있는 송도 5공구 첨단산업클러스터와 연계해 송도 11공구 일부(약 100만㎡)를 첨단바이오클러스터로 조성하는 사업도 추진 중이다.삼성바이오에피스는 2012년 2월 삼성바이오로직스와 미국 바이오젠이 합작해 설립한 바이오제약 전문 기업이다. 창립 이후 바이오시밀러(바이오의약품 복제약) 개발 및 상업화에 주력해 왔으며, 2019년 3월 현재 블록버스터급 바이오의약품 4종의 판매 허가를 획득해 미국·유럽·한국 등에서 판매하고 있다.삼성바이오에피스는 지난해 유럽 시장에서 약 6천억원의 매출을 달성하는 등 글로벌 바이오시밀러 업계를 선도하고 있다. 제품별로는 '베네팔리'(성분명 에타너셉트)가 4억8천520만달러(약 5천342억원)로 2017년 대비 31% 증가했고, '플릭사비'(성분명 인플릭시맙)는 2017년보다 380% 증가한 4천320만달러(약 476억원)의 매출을 기록했다.'임랄디'(성분명 아달리무맙)는 지난해 10월 출시한 지 70여일 만에 1천670만달러(약 184억원)의 매출을 올렸다.삼성바이오에피스는 이러한 연구개발 역량을 신약 개발 분야로 확대하고자 아시아 최대 제약회사인 일본 다케다 제약과 급성 췌장염 후보물질에 대한 공동 개발에 착수, 현재 임상 1상을 진행 중이다.삼성바이오에피스는 지역사회와 상생하기 위한 '나눔 활동'도 활발하게 벌이고 있다. 삼성바이오에피스는 인천사회복지공동모금회와 함께 지역의 소외된 이웃을 위한 기부 활동을 꾸준히 전개하고 있다. 지난달 28일에는 창립 7주년을 기념해 임직원 전원이 봉사 활동을 했다. 사업장 인근에서 환경 정화 활동을 펼치고, 생활 형편이 어려운 초등학교 입학생들에게 문구류 선물 키트(kit)를 만들어줬다.삼성바이오에피스 관계자는 "최근 사회공헌 전담 조직을 신설했다"며 "앞으로도 업체의 특성을 살린 미래 세대 교육활동과 소외된 이웃을 위한 다양한 나눔 활동을 펼칠 계획"이라고 했다. /목동훈기자 mok@kyeongin.com인천 송도국제도시 5공구 첨단산업클러스터 삼성바이오에피스 R&D센터 건설 현장. 본관동, 복지동 등 건축물 4개가 들어선다. 현재 기초공사가 진행되고 있다. /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삼성바이오에피스 인천 송도국제도시 R&D센터 조감도. /삼성바이오에피스 제공

2019-03-10 목동훈

[독립운동과 인천·(3)계봉우와 예단포]어민들과 견뎌낸 시린 유배 '독립 봄날' 꿈꾸다

계몽운동 펼치다 북간도 '망명' 저술·기고등 항일운동으로 추방·압송돼1916년 영종도 귀양·日 허락안해 교사 못하고 주민 도움으로 1년간 생계떠나며 '희망의 詩' 남겨 유배기간 독립계획 구상 추정 '행적 발굴' 필요만세운동후 카자흐스탄 강제 이주… '독립선언서 초안 기여' 연구 절실"일년이 꿈같이 지났으니(一年如夢過) 내가 곧 꿈속의 사람이로다(我是夢中人) 꿈을 깨어 배를 타고 가니(夢罷乘船去) 앞길에 온갖 일이 봄이로다 (前程萬事春)"독립운동가 북우 계봉우(1880~1959)는 1916년 12월부터 1년 동안 유배생활을 했던 인천 영종도 예단포를 떠나면서 이 같은 시를 남겼다. 추운 겨울 배를 타고 영종도를 떠나면서 조국의 독립이라는 '봄날'이 머지않아 찾아올 것이라 기대했다. 계봉우가 1940년부터 집필해 1944년 펴낸 자서전의 제목 '꿈속의 꿈'은 그가 영종도를 떠나면서 남긴 시의 한 구절에서 따왔다. 그가 영종도에 머물던 1년은 추운 겨울을 피해 잠만 잤던 시기가 아니라 독립에 대한 꿈을 꾸며 앞으로 나아갔던 중요한 지점이기도 하다. 인천이 계봉우를 기억하고 그의 행적을 발굴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계봉우는 한국과 러시아, 중국, 카자흐스탄을 넘나들며 독립운동을 했던 역사학자이자 한글학자다. 대한제국 시기에는 고향 함경도 함흥을 중심으로 계몽운동에 앞장섰고, 스무 살의 나이에 북간도와 연해주로 망명해 독립운동에 헌신했다. 영종도 유배형을 받기 직전 그는 중국의 한반도 접경지에서 활발하게 항일 운동을 했다.계봉우의 영종도 유배는 1916년 11월 일본의 괴뢰국가로 세워진 만주국에서의 추방으로부터 시작됐다. 일본은 당시 제국주의 통치 범위에 있는 국가의 영사관을 통해 조선인을 해당 국가에서 추방할 수 있는 권한을 행사했다. 추방권은 만주 지역에서 활동하던 독립운동가들의 올가미가 됐다.국가보훈처가 일본 외무성 외교사료관에서 찾은 계봉우의 '재류금지 명령 집행 보고의 건'을 보면 일제는 계봉우가 중국 연길에서 배일(排日) 기관잡지 '대진(大震)'의 기자로 활동하면서 '안중근 전설'을 기고했고, 배일연설을 하는 등 과격한 언동을 했다는 이유로 만주 재류를 금지했다.조선인들이 연길에 설립한 학교에서 역사, 지리, 한문을 가르치면서 역사교과서 '최신 동국사·最新東國史'를 편찬하고, 왜적의 침입과 한일강제병합의 굴욕 등을 기술해 학생들에게 적개심을 불러오는 데 뜻을 기울였다는 것도 추방 이유였다.만주에서 쫓겨난 계봉우는 회령으로 압송됐다가 서울 남산 아래 일본 경무총감부 유치장으로 이송됐다. 계봉우는 경찰에 체포될 때 압수된 안중근전 초고와 관련한 조사도 받았다. 그는 안중근전 발간을 위해 1916년 7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하루를 머문 사실에 대해 집중적인 추궁을 받았다. "안중근 전기를 지었으니 안중근 같은 놈이 아니겠느냐"는 취조였다.1916년 12월 총감부는 계봉우를 1년간의 영종도 유배형에 처했다. 계봉우는 그의 자서전에서 치안법 제5조를 근거로 영종도에 유배를 갔다고 기록했는데 정확히는 '보안법' 제5조가 맞다.보안법 제5조는 "내부대신은 정치에 관하여 불온한 동작을 행할 우려가 있다고 인정되는 자에게 그 거주장소로부터 퇴거를 명하거나 1년 이내의 기간 동안 특정한 지역에의 출입금지를 명할 수 있다"고 했다. 이는 판결을 통해 받는 형벌이 아니라 지금으로 치면 일종의 행정처분이다. 일본은 한국의 식민지화를 진행하면서 항일운동을 제압하기 위해 1907년 7월 24일 집회결사를 금지하는 '보안법'을 강제로 제정해 대한제국으로 하여금 반포하게 했다.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최우석 연구원은 "보안법을 통해 일본은 사법권을 비롯해 한국의 모든 것을 장악했고, 보안법 5조를 통해 항일 운동을 할 우려가 있다고 의심이 되는 독립운동가들을 유배 보내기 위해 활용했던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계봉우가 서울에서 예단포로 온 경로와 그가 예단포에서 머문 1년 동안 어떻게 지냈는지는 구체적으로 밝혀지지 않았다. 계봉우의 자서전을 통해 예단포 주민들의 도움으로 그가 힘든 유배 생활을 버텼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을 뿐이다.계봉우는 자서전에서 "그렇게 금고를 당한 사람은 자기의 힘으로 먹게 되는데, 그곳에서는 어업을 위주로 하여 나에게는 거기에 소용되는 기능이 없었다. 나를 독선생으로 청하여 자기의 자제를 교육하려는 사람도 있었으나 경무총감이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허락하지 않는 이유는 어디에 있었는가? 그놈의 글은 아이들에게 좋지 못한 영향을 준다는 그것이었다. 그래서 내가 먹은 일년 밥값 오십삼원은 마침내 그곳의 부형들이 분담하게 되었으니, 그것은 나에 대한 동정의 표현이었다"고 회상했다.영종도의 북쪽 끝에 위치한 예단포는 당시 번창했던 어촌 마을이다. 예단포라는 지명은 강화 천도시기인 고려 고종 때 영종도에서 왕이 있는 강화로 예단으로 보낼 물건을 싣고 왕래했던 곳이라고 해 지어졌다고 한다. 인천대 인천학연구소가 발간한 '인천 섬 지역의 어업문화'에 따르면 예단포는 196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200여 가구가 어업으로 풍족하게 생활해 "쌀밥을 먹으려면 예단포로 시집을 가라"는 말이 있을 정도. 하지만 1960년대 말부터 조기잡이가 쇠퇴하고, 어선들이 인천 화수부두로 정박지를 옮기면서 자연스럽게 쇠퇴했다. 지금은 주변이 영종도 미단시티 사업부지에 편입돼 옛 모습이 대부분 사라졌고, 포구에는 횟집들이 들어서 있다. 17척의 등록 어선이 낙지와 우럭 따위를 잡고 있다.예단포 토박이인 김윤조(66) 운북어촌계장은 "우리 아버지 세대들이 어업을 했던 왜정 때만 해도 예단포는 손꼽히는 포구였고, 배가 200척이 넘었다고 한다"며 "농사도 짓고 물고기도 잡는 풍성한 마을이었는데 지금은 고기도 잘 안 잡히고 점점 위축되고 있다"고 했다. 김 어촌계장은 예단포가 독립운동가의 유배지였다는 얘기를 들어보지는 못했다고 했다. 이곳 출신으로 가장 유명한 사람은 조진만(1903~1979) 3·4대 대법원장이라고 했다.인천에 있는 동안 계봉우가 누구와 교류했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훗날 3·1운동을 기획하고 주도했던 애국지사와의 긴밀한 교류가 끊이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유배 기간 선생으로 모셔 가르침을 구하려 했던 집안이 있었을 정도로 그의 명성은 인천 섬 지역에서도 자자했다. 그는 인천에서 조국 독립을 위해 앞으로 해야 할 일들과 계획을 구상했을 것이다. 1916년 12월 동짓날 예단포에 온 계봉우는 꼭 1년 뒤인 1917년 12월 동짓날에 고향 영흥으로 떠났다. 그는 영흥에서 3년 동안 거주제한 조치를 당한다. 거주제한 조치를 당하면 주거지 반경 5㎞ 밖을 출입할 때 반드시 일본 경찰에 알려야 했고, 방문지마다 파출소에 통보를 해야 했다. 일거수일투족이 감시당하는 상황이었다. 계봉우는 그런 상황에서도 위험을 무릅쓰고 1919년 3·1 운동 기획에 관여했다.계봉우는 1919년 2월 27일 평양신학교 입학 수속을 핑계로 영흥을 떠나 서울로 왔다. 그는 3월 1일 만세운동이 일어날 것이란 사실을 미리 알고 있었다. 민족대표 48인 중 한 명인 강기덕은 계봉우가 서울에 왔을 때 독립선언문 초안을 잡아달라고 부탁하기도 했다.계봉우는 "나는 그날 밤에 제2회 운동의 지휘적 책임을 부담한 강기덕의 요청에 의하여 세브란스 병원의 어떤 비밀실에 가서 선언서를 초 잡은 일이 있었다. 그 후에 그것이 채용되었는지 나는 알 길이 전혀 없었고 또는 알려고도 아니하였다"고 했다.계봉우는 고종의 장례가 있던 3월 3일까지 서울에 머무르며 만세행렬에 동참하기도 했다. 계봉우는 당시 만세 행렬을 "머리에는 방갓을 쓰고 한 어깨에는 보침을 멘 상인 한 분이 뛰어와서 대한독립이란 말에 어찌나 기뻤던지 춤추는 것을 보았다. 그때의 조선 예절로 본다면 상인으로서는 도저히 그럴 수 없는 일인데, 그러나 그는 껑정-껑정 뛰면서 춤을 춘다. 그것을 누가 실례라고 할까? 그 춤이야말로 민족 전체의 의사를 대표한 것이었다"고 회상했다.계봉우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와 독립유공자 추서는 1990년대 이르러서야 이뤄졌다. 그는 1937년 강제 이주한 카자흐스탄에서 1959년 생을 마감할 때까지 살았기 때문에 국내에 일찍이 소개되지 않았다. 그가 임시정부에 있을 때 신문에 투고한 글도 본명이 아닌 필명으로 게재됐기 때문이기도 했다. 1990년 한·러 수교가 맺어진 뒤에야 그의 저술과 독립운동 활약상이 국내에 소개됐다. 인천에서 유배 생활을 한 인연은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인하대 윤병석(89) 명예교수가 1990년대부터 계봉우 행적 발굴과 저술목록 정리에 힘썼고, 그 결실이 인천 역사학계를 중심으로 맺어지고 있다. 계봉우에 대한 공식 연보에서 일부 바로잡아야 할 부분이 있다. 현재 국가보훈처가 제공하는 '독립유공자공훈록'에는 "인천에서 3년간 옥고를 치른 뒤 출옥해 고향 영흥으로 귀향했다"고 나와 있는데, 계봉우 자서전과 학계의 연구자료를 보면 계봉우는 인천 영종도 예단포에서 1년 동안 유배생활을 했고, 고향 영흥에서 3년의 거주 제한 조치를 당했다는 설명이 옳다. 학계에서는 계봉우에 대한 폭넓은 후속 연구가 이어져야 한다는 목소리를 내고 있다. 최남선과 손병희, 한용운 등 기존에 알려진 독립선언문 작성의 주역 외에 계봉우가 어떤 역할을 했는지에 대한 연구도 필요하다. 만주와 러시아 지역 항일운동사 연구자인 반병률 한국외대 사학과 교수는 "계봉우가 3·1 운동 때 독립선언서 작성에 어떻게 기여했는지에 대해 밝혀진 바가 없어 연구가 필요하다"며 "자서전 외에는 관련 문헌이 남아 있지 않고, 강기덕의 증언에도 그런 내용이 없어 자서전에 나온 초안의 정체가 드러날 경우엔 획기적인 발견이 될 것이다"고 말했다. /김민재기자 kmj@kyeongin.com그래픽/박성현기자 pssh0911@kyeongin.com계봉우 자서전에서 영종도 유배와 관련된 이야기가 나오는 부분. /국가보훈처·독립기념관 제공카자흐스탄으로 강제 이주를 한 이후의 계봉우. /국가보훈처·독립기념관 제공계봉우의 장례식 모습. /국가보훈처·독립기념관 제공카자흐스탄에 있는 계봉우 묘의 흉상. /국가보훈처·독립기념관 제공독립운동가 계봉우는 1916년 12월 총감부로부터 1년간 영종도 유배형에 처해졌었다. 그가 머물렀던 인천시 중구 예단포 현재 전경. /김용국기자 yong@kyeongin.com

2019-03-06 김민재

[독립운동과 인천·(3)계봉우와 예단포]독립선언서 초안 작성 '계봉우' 재조명해야

유배생활 등으로 자서전에만 기록'만세운동 역사'서 행적 복원 지적1919년 3월 5일 서울 남대문역 일대에서 학생들이 이끈 '제2차 만세운동' 때 배포된 독립선언서를 인천에서 유배 생활을 했던 북우 계봉우(1880~1959)가 작성한 사실이 3·1 운동 100주년을 맞아 새로이 주목받고 있다.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하다 인천 영종도 예단포 유배형 뒤 1919년 3월 만세 시위를 주도한 계봉우에 대한 재조명과 위상 재정립이 요구되고 있다.1880년 함경도 영흥에서 태어난 계봉우는 대한제국 시기 국내에서 계몽운동을 펼치다가 북간도와 연해주로 망명해 독립운동에 뛰어들었다. 계봉우는 1916년 독립운동 행적이 드러나 만주에서 국내로 강제 송환됐다가 영종도 예단포에서 1년 동안 유배 생활을 했다.유배형을 마친 뒤 고향 영흥으로 돌아간 그는 또다시 처한 3년의 거주 제한 조치 탓에 만세 운동에 드러내놓고 나서지는 못했지만, 민족대표 48인 중 한 사람이었던 강기덕의 요청을 받아 3월 5일 제2차 만세운동의 독립선언서 초안 작성에 참여했다. 이 사실은 계봉우의 자서전 '꿈속의 꿈'에 나온다.제2차 만세운동은 당시 보성전문학교 학생이던 강기덕이 서울 남대문역(서울역 광장)에서 주도한 대규모 학생 시위다. 3·1운동 당시 33명의 대표는 파고다공원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할 예정이었으나 일부 종교계에서는 학생들이 다수 군집한 곳에서 자칫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는 우려를 보여 장소가 식당 태화관으로 변경됐다. 그러자 학생들은 독자적인 시위를 열기로 하고 대규모 군중을 모을 수 있는 남대문에서 만세 시위를 하기로 했다. 한국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가 펴낸 '한국독립운동의 역사'는 3월 5일 제2차 만세운동에 학생 1만명이 참여했다고 전하고 있다.강기덕은 대중에게 배포할 독립선언서 초안을 계봉우에게 부탁했다. 마침 고종의 장례식(3월 3일)을 보러 서울에 온 계봉우는 당시 세브란스 병원의 한 비밀 방에서 선언서의 초안을 잡았다고 회고하고 있다. 다만 계봉우는 고종 장례를 마치자마자 서울을 떠나는 바람에 그가 작성한 대로 독립선언서가 만들어져 3월 5일 배포됐는지는 확인하지 못했다. 그의 자서전에도 독립선언서의 내용은 나오지 않는다.제2차 만세운동은 3·1운동이 전국에 들불처럼 번질 수 있도록 한 기폭제 역할을 한 중요한 역사적 사건이었다. 그만큼 당시 뿌려진 독립선언서 내용도 큰 가치가 있다. 강기덕은 남대문역에서 만세를 외치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돼 보안법·출판법 위반, 소요죄 등으로 유죄 판결을 받아 징역 2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그는 그러나 재판을 받으면서 독립선언서 작성자 계봉우에 대해 일절 언급을 하지 않았고, 당시 배포됐던 독립선언서의 실체도 정확히 확인되지 않고 있다. 이 때문에 3월 만세운동의 역사에서 계봉우가 빠져 있었다. 3·1운동 100년을 맞이한 지금, 제2차 만세시위 당시 계봉우의 행적을 복원하고, 그를 3월 만세 운동 역사의 중심에 놓아야 한다. /김민재기자 kmj@kyeongin.com

2019-03-06 김민재

[zoom in 송도]송도 E5블록 건축물 설계안 갈등

"특색있는 건물 경관이 도시경쟁력"온라인커뮤니티 올댓송도 시민청원美 게일사에서 주주사 교체한 NSIC디자인 수정 공사지연 불가피 '난색'인천 송도국제업무단지 E5블록에 짓는 건축물(주상복합) 경관을 놓고 주민단체와 사업시행자 간 갈등이 있다.송도 지역 온라인 커뮤니티 '올댓송도'는 회오리 모양의 설계안으로 건립해달라고 인천시와 인천경제자유구역청에 요구하고 있다. 하지만 송도국제업무단지 사업시행자인 NSIC(송도국제도시개발유한회사)는 바람개비 형태의 현 설계안도 경관이 뛰어나며, 설계 변경 시 시간이 많이 소요돼 전체 사업에 차질이 생길 수 있다는 입장이다. → 위치도 참조올댓송도는 인천시 온라인 시민청원 게시판에 '송도 경관의 정점 센트럴파크 E5블록 회오리 건물을 부활시켜 주세요'라고 올렸고, 이 글은 답변 충족 요건인 3천명의 공감을 얻은 상태다. 인천시는 답변을 준비하고 있다.■ 주민단체, '회오리 건물 부활' 요구올댓송도는 특색 있는 건축물 등 도시 경관이 송도의 경쟁력이라고 주장한다. E5블록 건축물을 회오리 형태로 지어달라고 요구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회오리 형태의 설계안은 NSIC 주주사였던 미국 게일인터내셔널(이하 게일)의 그림이다. 게일은 회오리가 회전하는 모양을 본떠 E5블록에 건립할 지하 2층, 지상 40층짜리 건물 2개를 설계했다.지난해 8월 게일은 보도자료를 통해 "E5블록 건축물은 국내 최초로 회오리가 회전하는 모양으로 설계했다"며 "송도국제도시라는 명성에 걸맞게 센트럴파크 주변 경관을 한층 업그레이드시킬 것으로 예상한다"고 기대했었다. 현재 게일은 NSIC 주주사가 아니다. 송도국제업무단지 개발사업은 NSIC 주주사였던 게일과 포스코건설 간 갈등으로 2015년 7월부터 중단됐었다. 중단 상태가 장기화하자, 포스코건설은 지난해 9월 게일과 결별하고 홍콩에 본사를 둔 새로운 투자자와 손을 잡았다.올댓송도는 NSIC 주주사가 변경됐어도 게일의 설계안대로 건축물을 건립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올댓송도는 시민청원에서 "적어도 미국 디벨로퍼(게일)는 성냥갑 아파트를 짓는 수준은 아니라는 것"이라며 "(게일은) 최소한 건물을 아름답게 지어 도시 경관을 만들어 갈 줄 아는 스탠더드를 갖고 있다"고 했다. 또 "현재 포스코건설은 송도국제업무단지를 개발해야 하는 디벨로퍼"라면서 "포스코건설이 신뢰를 회복하기 위한 방법은 E5블록에 회오리 건물을 부활시켜 주는 일"이라고 했다.■ NSIC, 물리적으로 설계 변경 어려워지난해 9월 주주사를 교체한 NSIC는 사업 정상화 측면에서 설계 변경이 어렵다는 입장이다. E5블록은 금융기관과의 대출 약정에 따라 2022년 12월 말까지 준공해야 한다. 공사 기간(최소 40개월)을 고려하면 늦어도 올해 3/4분기에는 공사 및 분양을 시작해야 한다.올댓송도가 요구하는 회오리 모양으로 설계 변경을 추진할 경우, 준공 시한 안에 공사를 마칠 수 없게 된다. 준공 의무를 지키지 못하면 대출 원리금 수천억 원을 상환해야 하고, 그럴 경우 송도국제업무단지 개발사업 전체가 또다시 중단될 수 있다는 게 NSIC의 설명이다.NSIC는 바람개비 모양의 설계안이 사업계획 승인을 받은 '원안'이라는 점도 강조한다. 실제로 회오리 모양의 건축물은 송도국제업무단지 D24블록 설계안이다.NSIC 관계자는 "회오리 건물은 원안이 아니다. 바람개비 건물이 2015년 사업계획 승인을 받은 원안"이라며 "적법 절차에 따라 사업을 계획대로 진행할 수 있도록 기업(우리) 입장도 이해해 주시길 바란다"고 했다.E5블록 설계 원안은 바람의 흐름을 형상화한 바람개비 형태의 건축물이다. 이 관계자는 "바람개비 건물도 여느 설계안 못지않은 독특함을 가지고 있다"며 "송도 경관에 기여할 것으로 자신한다"고 했다.■ 인천경제청은 고민 중인천경제청은 송도·청라·영종 등 인천경제자유구역에 들어서는 건축물의 외관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한다. 특색 있는 건물 하나하나가 도시 경관을 아름답게 하는 요소이기 때문이다.인천경제청은 경관위원회 운영을 통해 건축물 디자인을 심의하고 보완·수정을 요구하고 있다. 경관 심의는 건축 사업의 첫 관문이기도 하다. 경관위원회를 통과하지 못하면 건축 심의 등 다음 절차를 밟지 못한다.하지만 경관 개선은 사업비 증가로 이어지는 경우가 대부분이어서 사업자 입장에선 불만이기도 하다. 외관이 복잡해지면 내부 공간 활용성이 낮아지고, 사업비 증가는 분양가 상승을 초래한다는 게 사업자들의 주장이다.E5블록은 특별한 경우다. 올댓송도 요구에 공감하지만, NSIC 사정도 이해가 된다는 점에서다. 인천경제청은 E5블록 설계 원안(바람개비 형태)을 보완하는 방향으로 경관을 개선하는 대신, 송도국제업무단지 내 다른 블록에 회오리 모양보다 더 멋진 건축물이 들어설 수 있도록 NSIC에 요구할 방침인 것으로 알려졌다. /목동훈기자 mok@kyeongin.com

2019-03-03 목동훈

[송도국제도시 브리핑]단독·공동주택 신재생에너지 설치보조금 지원

■인천 국제프리미엄 펫쇼 ■단독·공동주택 신재생에너지 설치보조금 지원인천경제자유구역청은 지속가능한 친환경에너지 도시 조성을 위해 송도국제도시 등 인천경제자유구역 단독·공동주택을 대상으로 신재생에너지 설치 보조금을 지원한다.인천경제청은 신재생에너지 설치에 대한 주민 요구를 반영해 지난해보다 보조금 규모를 25% 늘렸다. 또 주민들이 가장 선호하는 태양광 발전설비와 관련해 시비 증액을 통해 주민 부담을 완화했다.인천경제청 관계자는 "(연수구와의 협업을 통해) 고층 아파트와 빌딩이 많은 송도의 도시환경 특성에 맞춰 공동주택을 태양광 발전설비 보조금 지원 대상으로 지정했다"면서 "국비 공모 사업에 적극 참여해 상가주택 등 고층 건물의 태양광 보급사업도 적극 추진할 계획"이라고 했다.보조금 신청 방법 등 자세한 내용은 인천시 홈페이지(www.incheon.go.kr)를 참고하거나 인천경제청 환경녹지과(032-453-7242)로 문의하면 된다.■송도컨벤시아, 27일 '국제 화학·바이오장비展'(주)메쎄이상과 인천관광공사는 국내 화학장비 산업의 경쟁력을 강화하고 수요 기반 확대를 위해 오는 27~29일 송도컨벤시아에서 '제1회 국제화학·바이오장비 & 분석기기전(CHEMLAB KOREA)'을 개최한다.이번 전시회에서는 이화학, 바이오, 환경·안전 분야에 관련된 장비, 설비 전 품목을 만나볼 수 있다. 세부 품목으로는 화학생산설비, 실험장비, 측정·분석장비를 비롯해 시약·소모품, 데이터 시스템, 제약 패키징, 실험실 및 생산 안전 장비, 수질·대기 관리에 적용되는 장비 등이 전시될 예정이다.전문 세미나와 약 30개 세션 참가기업들의 우수한 제품과 기술력을 발표하는 자리도 마련된다.전시 사무국 관계자는 "장비 시장은 글로벌 주요 국가들이 미래 성장 동력으로 육성 중인 고부가가치 산업"이라며 "이번 행사가 산업 현황과 최신 기술 동향을 한눈에 파악하는 데 도움이 되길 바란다"고 했다.자세한 사항은 홈페이지(www.chemlabkorea.com)에서 확인하거나 전화(02-6121-6378)로 문의하면 된다. /목동훈기자 mok@kyeongin.com1일부터 3일까지 인천 송도컨벤시아에서 열린 '2019 인천 국제 프리미엄 펫쇼'. (사)한국애견협회가 주최하고 인천시와 농림축산식품부가 후원한 행사다. 2016년 10월 '인천 국제 펫케어'로 시작해 올해로 네 번째를 맞은 이번 행사에서는 다양한 전시·교육·체험 프로그램이 진행됐다. /더윤컴퍼니 제공

2019-03-03 목동훈

[독립운동과 인천·(2)우현 고유섭의 태극기와 용동 만세운동]14살 소년이 쏘아올린 '아이들의 함성'

중구 출생… 보통학교 갓 졸업한 이후 구하기 힘든 태극기 직접 그려 제작1919년 3월 7~8살 동네 꼬마들에 나눠주고 지붕에 꽂거나 흔들며 용동 누벼경찰서 끌려간 아이들 훈방반면 '시위 주동' 이유 유치장서 사흘만에 풀려나지인·가족 입으로만 전해져… '한국 美學 선구자'뒤 만세운동 이야기 기려야대한독립 만세의 피맺힌 함성이 전국을 뒤덮었던 1919년 3월 초 인천 용동 117번지. 이제 갓 보통학교(지금의 초등학교)를 졸업한 14살의 소년이 방에 앉아 하얀 천과 붓, 물감을 펼쳐놓고 한참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붓을 들어 직사각형 모양의 천 한가운데 원을 그려 넣고 그 안을 붉은색과 파란색이 소용돌이치듯 서로 휘감고 있는 태극 무늬로 채웠다. 이어 검은색 물감으로 천의 네 귀퉁이에 건(乾)·감(坎)·곤(坤)·이(離) 4괘를 그렸다. 소년은 그렇게 여러 장을 더 그린 뒤 길고 곧은 나뭇가지에 매달았다. 1910년 대한제국의 멸망과 함께 국기의 지위를 상실한 태극기. 소년은 구하려고 해도 구하기 힘든 태극기를 직접 만들어 마을에서 가장 잘 올려다 보이는 초가집 지붕 위에 꽂았다. 그리고 평소 자신을 따르던 동네 꼬마들에게 나눠주었다. 고유섭과 동네 꼬마들은 대한독립 만세를 외치며 마을을 크게 한 바퀴 돌았다. 코흘리개 아이들은 그날의 태극기와 만세가 어떤 의미인지나 알고 소년을 뒤쫓았을까. 두 바퀴째 마을을 도는데 경찰들이 막아섰다. 아이들은 졸지에 경찰서로 끌려갔다.꼬맹이들은 훈방으로 바로 풀려났지만 만세 시위를 주동한 소년은 경찰서에 갇혔다. 1919년 3월 인천 용동에서 만세 시위를 이끌었던 14살의 소년. 바로 한국 미학(美學)의 선구자라 불리는 우현 고유섭(1905~1944)이다.우리나라 미술사 연구의 초석을 다진 고유섭이 1919년 만세운동에 앞장섰다는 사실은 많이 알려지지 않았다. 그를 기억하는 지인과 가족의 입으로만 전해져 이어질 뿐이다. 1905년 지금의 인천 중구 동인천길병원 터에서 태어난 고유섭은 1914년 인천공립보통학교(現창영초)에 입학해 1918년 졸업했다. 1918~1919년 그는 어떤 이유에서인지 상급학교인 고등보통학교로 진학하지 않고 그냥 집에 머물러 있었다.디자인 전문잡지 '월간공예'는 1988년 6월 특집호로 '미술사학의 거장 고유섭'을 조명했는데 한국 미술문화유산에 끼친 영향력 외에 별도의 지면을 할애해 그의 독립운동 이야기를 다뤘다. 고유섭의 태극기 제작과 만세운동은 이 잡지에 실린 우련통운 창업자 배인복(1911~1997)의 인터뷰를 통해 본격적으로 세상에 알려지게 된다."우현 선생이 태극기를 직접 그려서 우리들에게 나누어 주고 초가집 지붕 위에 올라가 태극기를 꽂았습니다. 우리들은 모두 모여서 만세를 부른 후 동네를 돌다가 체포되었지요. 7~8세의 어린 아이들은 훈방으로 금방 풀려났지만 우현 선생은 유치장에 있다가 사흘째 되던 날 큰아버지가 찾아가 겨우 나올 수 있었습니다."인천의 대표 항만물류회사 우련통운의 창립자 배인복은 신포동에서 배다리로 이어지는 골목, 싸리재에서 나고 자랐다고 한다. 싸리재 아랫마을이 고유섭이 태어난 용동 큰우물 일대다. 그의 조카인 배준영 인천경제연구원 이사장(전 인천항물류협회장)을 통해 당시 이야기를 간접적으로나마 확인할 수가 있다. 배준영 이사장은 "큰아버지(배인복)께 듣지는 못했지만, 어머니가 '시숙님(배인복)이 9살 때 고유섭 선생이 만들어 나눠준 태극기를 하루 종일 흔들고 돌아다녔다는 얘기를 하신 적이 있다'는 말씀을 했다"며 "우리 집안이 예전부터 용동·경동(싸리재) 일대에 살았기 때문에 고유섭과 이웃인 것은 확실하다"고 했다.인천의 3·1 운동 역사에는 기록되지 않은 고유섭의 만세 일화가 특별한 이유는 바로 어린아이들과 함께했다는 점이다. 지금으로 치면 초등학교도 입학하지 않은 예닐곱 살의 어린아이들은 독립운동의 역사에서 크게 조명받지 못하고 있다. 만세시위에 가담했더라도 나이가 어릴 경우 대개 훈방되었기 때문에 이들은 수형자 기록카드나 판결문을 통해 확인할 수가 없다. 인천보통학교의 동맹휴업도 고학년이 중심이 됐는데 학생 연령대가 최고 25세에 이르렀다는 '인천부사'의 기록을 보면 만세 시위를 주도했던 학생들은 청년에 가까웠다.국가보훈처는 만세운동 당시 어린아이에 대한 기록은 공훈 사료나 통계로 정확하게 나온 것이 없다고 밝히고 있다.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고유섭과 아이들의 만세 운동 이야기를 재조명하는 이유이기도 하다.고유섭이 만세 운동을 이끌었던 날짜를 특정하기는 어렵지만, 그의 모교인 인천보통학교가 1919년 3월 6일 동맹휴업을 시작하고 인천 만세 시위의 도화선에 불을 당겼다. 고유섭도 그 시기 동네 아이들과 만세 운동을 벌였다. 당시 인천의 만세 운동을 이끌었던 리더들과 서로 교감이 있었을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고유섭이 이끈 만세 행렬은 어디를 어떻게 돌아다녔을까. 1933년 발간된 '인천부사(仁川府史)'를 보면 어렴풋이나마 그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만세운동이 있던 1919년 인천은 오늘날의 중·동구와 미추홀구 일부에 국한된 작은 마을이었다. 1932년 12월 말 기준 당시 고유섭이 살던 인천 용리(용동)의 조선인 인구는 1천724명이었고, 집은 268채(368세대)였다. 1919년 인천의 조선인이 2만1천여명에서 1932년 5만5천명으로 2배 이상 늘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아마 만세운동 당시 용동의 인구는 1천명도 안 되는 적은 수였을 게 확실하다. 수백명의 용동 주민들은 태극기를 들고 마을을 도는 고유섭과 아이들을 응원하고, 만세의 함성을 외쳤을 터이다.우현이 만들어 썼다는 태극기는 현재 남아있지 않다. 1883년 고종은 왕명으로 '태극·4괘 도안'의 태극기를 제정·공포했으나 국기 제작 방법을 구체적으로 명시하지 않아 4괘의 위치나 태극무늬가 제각각인 다양한 형태의 국기가 사용돼 왔다. 1942년 임시정부가 국기제작법을 일치시키기 위해 국기 통일양식을 제정해 공포했고, 해방 이후 1949년에서야 오늘날의 국기제작법이 만들어졌다. 미적 감각이 남달랐던 고유섭은 태극기도 제법 그럴 듯하게 그렸을 게 분명하다. 아이들에게 나눠줄 많은 태극기를 만드느라 바삐 그렸겠지만 우리의 민족혼을 담아내기 위해 애썼을 터이다. 고사리손마다 쥐어진 태극기의 행렬은 지금의 동인천역에서 참외전로를 따라 배다리까지 간 뒤 싸리재를 거쳐 우현로를 돌아 다시 동인천역으로 돌아왔을 수도 있다. 범위를 더 넓혀보면 동인천 삼치골목에서 자유공원까지 이어졌을 수 있다.고유섭이 붙잡혀 갇혔을 인천경찰서는 1884년 지어진 서양식 2층 건물인 일본영사관 부지 안에 있었다. 영사관은 1906년 통감부의 설치와 함께 인천 이사청이 됐고, 1910년 이후부터 인천부청으로 사용되고 있었다. 당시 인천영사관의 도면을 보면 경찰서 건물 옆에는 작은 감옥이 따로 있었다. 지금의 경찰서 유치장과 같은 곳으로 고유섭은 이곳에 구류됐던 것으로 추정된다. 국가기록원이 보관하고 있는 당시 경찰범처벌규칙(조선총독부령 제40호)을 보면 총독부는 항일 투쟁을 조직화하는 조선인을 강력히 처벌했다. 여기에는 87가지 처벌 조항이 나오는데 이 중 제20조 '불온한 연설을 하거나 불온한 문서, 도서, 시가의 게시·반포·낭독 또는 방음(放吟)을 하는 자'는 구류 또는 벌금에 처하도록 했다. 아마도 고유섭은 바로 이 제20조로 옭아매 경찰이 체포해 구금했을 것이다.고유섭은 감옥에 갇혔다가 3일 만에 풀려났는데, 그의 부인 이점옥 여사의 회고에 따르면, 큰아버지의 도움으로 나올 수 있었다고 한다. 배인복이 '월간 공예'에서 밝힌 인터뷰와 같은 내용이다. 2006년 인천문화재단이 펴낸 '아무도 가지 않을 길'에서 이점옥 여사는 "유치장에 들어가 있는 동안 사흘 만에 큰아버지의 첩이 데리고 들어온 아들 흥섭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이 형사들과 잘 알아서 풀려나왔다 한다"고 했다. "고유섭의 수감 동료가 담배를 들여왔다"는 이점옥 여사의 증언을 보면 당시엔 소위 '빽'만 있으면 충분히 가능했던 일로 짐작된다.고유섭은 만세운동이 있던 이듬해인 1920년 서울에 있는 보성고등보통학교에 입학했다. 인천에서 서울로 기차를 타고 통학하는 '경인기차통학생친목회'에서 진보적 문인이었던 고일, 정노풍, 진종혁 등과 함께 문화운동을 펼쳤다. 고일은 '인천석금'에서 친목회를 통해 민족해방정신을 내포한 문학운동을 전개했다고 회고했다.고유섭은 1927년 경성제국대학에 입학해 미학과 미술사를 전공했다. 졸업 후 경성제대 미학연구실 조교로 일하다 1933년 개성부립박물관장으로 취임했다. 그는 1930년부터 10년 동안 '진단학보'를 비롯한 학회지와 신문, 잡지에 150편의 논문을 발표했다. '송도고적'을 비롯한 그의 저서는 '우현 고유섭 전집'을 통해 만나볼 수 있다. 해방을 1년 앞둔 1944년 그는 간경화로 사망했다. 그의 유해는 개성 수철동 묘지에 묻혔다.고유섭의 고향 인천과 전국 각지에서는 그동안 그의 뜻과 업적을 기리는 다양한 기념사업이 진행되었지만 3·1운동 관련 내용은 빠져 있었다. 1974년 30주기 추모비가 당시 인천자유공원 내 시립박물관에 세워졌고, 1980년 한국미술사학회는 '우현미술상'을 제정했다. 1992년 새얼문화재단이 그의 동상을 제작해 인천시립박물관(옥련동)에 세웠다. 용동 큰우물 옆 그의 생가터에는 기념비가 세워졌고, 동인천역에서 답동사거리를 잇는 길은 '우현로'라 불리고 있다. 늦었지만 이제라도 인천이 나서서 우현의 3·1운동 이야기를 본격적으로 검토하고 기릴 수 있기를 바란다. /김민재기자 kmj@kyeongin.com인천경찰서가 있던 옛 인천영사관 건물 전경. /인천부사 발췌1935년경 고유섭이 아내 이점옥(왼쪽), 장녀 병숙양과 찍은 사진. /열화당의 '우현 고유섭 전집' 발췌1949년 오늘날의 국기제작법이 만들어지기 전에 사용되었던 태극기들. 왼쪽부터 김구 서명문 태극기, 한국광복군 서명문 태극기, 대한독립만세 글귀가 담긴 태극기, 독립운동가 남상락이 1919년 4월 4일 독립만세 운동에 사용하기 위하여 부인과 같이 손바느질로 만든 태극기. /문화재청 제공고유섭이 1919년 3월 만세운동을 했던 인천 용동 일대. 동인천길병원이 고유섭 생가가 있던 자리다. /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

2019-02-27 김민재

[zoom in 송도]송도3공구 '대표도서관' 건립… 지역 랜드마크·문화공간으로

연수구, 상반기에 부지매입 완료하반기 중투심·타당성 조사 신청사업비 308억… 2022년 12월 준공인천 송도국제도시 3공구 도서관 건립사업이 올해 시작된다.연수구는 '송도국제도시 연수구 대표도서관 건립계획안'을 수립했다고 24일 밝혔다.연수구는 송도 3공구 도서관 부지(F23-3블록·송도동 115-2)를 송도국제업무지구 사업시행자인 NSIC(송도국제도시개발유한회사)로부터 매입한 뒤 중앙투자심사 준비 등 행정 절차에 들어갈 계획이다.송도 도서관은 지하 1층, 지상 4층, 연면적 9천㎡ 내외로 건립된다. 2022년 12월 준공 예정이며, 예상 사업비는 308억2천100만원이다.송도 주민들은 도서관 건립을 요구해왔다. 송도국제어린이도서관은 다양한 연령층이 이용하기에 어려움이 있고, 송도해돋이도서관은 연면적이 1천490㎡에 불과하다. → 표 참조연수구는 "송도 인구는 늘어나고 있는데, 도서관 건립 사업은 늦어지고 있다"며 "송도 지역 장서 수는 한국도서관 기준(1명당 2권) 대비 약 50% 수준으로, 신규 도서관 건립이 필요하다"고 했다.또 "도서관이 건립되면, 주민들의 독서 욕구 충족과 독서문화 활성화에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했다.연수구는 송도 도서관을 지역의 랜드마크 및 대표 건축물로 건립할 계획이다.단순한 공공시설이 아닌 지역을 상징하는 독특하고 개성 있는 건축물로 짓겠다는 것이다.또한 책만 읽는 도서관이 아닌 다양한 문화 활동을 향유하는 복합문화공간으로 조성할 방침이다.연수구는 올 상반기 부지 매입을 완료하고, 하반기에는 국비 확보를 위해 중앙투자심사 및 공공도서관 건립 타당성 조사를 신청할 예정이다. 또 인천시와 협의해 시비를 확보할 계획이다.연수구는 도서관 건립 재원을 국비 40%(123억2천900만원), 시비와 구비 각각 30%(92억4천600만원씩)로 계획하고 있다.연수구 관계자는 "계획대로 행정 절차가 진행되면 내년에는 기본·실시설계가 이뤄질 것"이라며 "내후년 공사를 시작해 2022년 12월에는 개관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한편 송도 도서관은 NSIC가 건립해 매각하기로 했던 시설이다. NSIC 사정으로 도서관 건립사업이 지연되자, 연수구가 땅을 매입해 직접 짓기로 사업 방식을 변경했다. /목동훈기자 mok@kyeongin.com

2019-02-24 목동훈

[한국 근대음악의 발상지 인천·(20·끝)에필로그]악기·무대 다 바뀌었지만 우리가 연주한 '우리 음악'

장구·거문고 등 중세까지 주체적으로 외국과 문물 교류했던 선조들개화기 들어 선진화 움직임에 일제 탄압… 전통 문화 설자리 빼앗겨인천 중심으로 시작된 근대음악 전파, 희미해진 기록·흔적 되짚어봐밀려드는 외래물결 자주적 수용 '해법' 100여년 역사속에도 고스란히 우리나라는 여러 번 외래음악을 수용했다. 고대에는 서역(西域) 음악을, 중세에는 중국 음악을, 19세기 후반 개항 이후에는 서양 음악과 접촉했다. 고대에는 불교가, 중세에는 유교가, 근대에는 기독교가 우리나라에 외래 음악을 전하는 데 큰 몫을 했다. '문화는 종교라는 배를 타고 이동한다'는 명제를 떠올리게 하는 대목이다.중세까지 우리의 음악 교류는 외래음악을 주체적으로 받아들여 새로운 음악을 창출한 경우로 볼 수 있다. 일례로 중앙아시아의 음악을 수용하면서 우리가 주체적으로 장구와 거문고를 창안했다. 인도 장단인 딸라(Tala)는 우리를 비롯해 중국과 인도네시아, 태국, 일본 등으로 유입되지만, 유독 우리나라에서 다양한 장단으로 분화했다. 우리 조상들은 외래음악을 수용하고 향악화하여 우리 것으로 만들고, 새로운 음악을 창조해냈다. 세종대왕은 '보태평'과 '정대업'이라는 궁중무용음악을 만들면서 외래음악인 고취악을 참조하기도 했다. 이 밖에도 백제의 기악(技樂)은 외래음악을 자주적으로 수용해 새롭게 창출한 경우로 볼 수 있다. 기악이란 가면을 쓰고 연행하는 것으로, 백제는 기악을 중국 오나라에서 들여와서 체화한 후 일본에 전한 바 있다.근대에는 우리 음악과 체계와 사상적 기반이 완전히 다른 서양의 음악이 전래하면서 수용자에게 가해지는 파급력과 충격은 더욱 컸을 것이다. 또한 '서양의 것을 학습해 빠르게 선진화하려는 시대 정신'까지 가세하며 주체(반성)적 인식 없이 서양 음악을 받아들여야 하는 상황도 일조했을 것이다. 더해서 우리 고유의 것을 탄압한 식민지시기의 일제로 인해 우리 음악은 설 자리를 잃는다. 고전주의와 낭만주의 시기를 거치면서 수학과 합리성이 극대화된 서양 음악을 맹목적으로 추종하는 현상이 나타난 연유로 볼 수 있다.개항 이후 서양 음악의 전래는 인천을 중심으로 이뤄졌다. 무수한 서양의 문물이 인천을 통해 들어오는데, 단연 종교와 음악은 각별한 위치를 점한다. 하지만 인천의 음악 역사가 정리된 사례는 지금까지 없었다. 남겨진 자료들 또한 많지 않았다. 지역에서 대중음악 분야에 대한 관심은 그보단 나은 형편이다.이 같은 인천의 가치와 함께 문제의식 속에서 '한국 근대음악의 발상지 인천'을 지난해 9월 마지막 주에 시작해 20회에 걸쳐 연재했다. 연재가 한창이던 지난 연말에 '그리운 금강산'을 작곡한 인천 음악인 최영섭(90) 선생 90세 축하 공연과 '장미헌정식'이 열려서 그 의미를 더했다. 공연장을 찾은 지역 인사들은 선생의 90세 축하와 건강을 기원하는 마음을 담아 장미 한 송이씩을 전달했다. 또한 작품을 정리하고 출판 작업을 진행하면서 경제적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 선생에게 후원금을 전달했다. '장미 헌정식'은 앞으로도 공로가 있는 선배와 원로를 기리고 모시는 인천의 아름다운 전통으로 자리매김할 것으로 기대된다.한반도에서 시간과 공간의 변화가 가장 급격했던 인천에 전래한 서양음악과 공존해야 했던 우리 전통음악과 관련한 사건, 작품, 인물, 장소 등을 들여다 본 '한국 근대음악의 발상지 인천'을 마무리 한다.회차마다 각각의 주제에 따라 기술됐지만, 1편의 프롤로그부터 마지막 에필로그까지 관통하는 주제는 '외래 문화(음악)의 자주(주체)적 수용'이었다. 이를 위해 우리가 할 일에 대한 고민을 계속해왔다. 에필로그에선 고민에 대한 답을 피력해야 될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고민의 결과, 해답은 역사 속에 있었다. 이미 우리 선조들이 행하였던 것들이다. 단지 근대에는 외세에 의한 특별한 상황으로 인해 인지를 못했거나, 인지했어도 실행에 옮기지 못했을 것으로 판단된다.외래 문화의 자주적 수용을 위해선 우선 우리 문화에 대한 냉정한 성찰이 있어야 한다. 자기 문화를 지나치게 비하해선 안되고 과대 포장하는 일도 없어야 한다. 이처럼 자신을 잘 알기 위해선 주위의 것과 비교해 볼 수 있어야 한다. 이를 통해 자신의 약점과 장점을 분명히 알 때 외래 문화를 자주적으로 수용할 수 있을 것이다. /김영준기자 kyj@kyeongin.com 그래픽/성옥희기자 okie@kyeongin.com/아이클릭아트

2019-02-21 김영준

[독립운동과 인천·(1)프롤로그]일제에 맞선 이들의 유배지 '인천 섬마을'

이동휘·계봉우, 무의·영종 생활 등기초데이터 부족… 고민해 볼 시점인천이 독립운동가들의 유배지였다는 사실을 얼마나 많은 사람이 알고 있을까. 3·1운동의 물결이 한반도를 뒤덮은 뒤 100년, 그 힘으로 임시정부가 들어선 지도 100년이 되었다. 영종도와 무의도 같은 인천의 섬들이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들의 유배지로 기능했다는 점이 왠지 낯설게 다가온다. 이게 바로 '3·1운동, 임시정부 100년'의 현주소이기도 하다. 100년이 지났건만 우리는 기초 데이터조차 모아놓지 못했다. 이미 많은 것들이 흩어지고 묻혀버렸다. 경인일보가 2019년 연중기획으로 '독립운동과 인천'을 진행하기로 한 것은 '100년'을 말하는 지금 이 시점에서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지 고민하자는 차원이다.백범 김구는 '백범일지'에서 안악사건(105인 사건)을 설명하면서 '이동휘·이승훈·박도병·최종호·정문원·김병옥 등 19인은 무의도·제주도·고금도·울릉도 등으로 1년 유배가 결정되었다'고 사건 결과를 썼다. 인천과 독립운동을 이야기할 때 빠지지 않는 이동휘(1873~1935)가 무의도에서 유배생활을 했다. 이동휘의 무의도 유배 사실은 무의도 주민들도 잘 알지 못하고 있다. 전문가들만 아는 정도인데 어떤 향토지에서는 이동휘가 무의도에서 은거했다고 쓰고 있을 정도로 일반적이지 않다. 유배와 은거는 완전히 다른 말이다.독립운동과 유배 이야기를 할 때 중요한 인물이 또 있다. 계봉우(1880~1959)이다. 국사학자, 국어학자, 민속학자, 교육자, 언론인 등으로 활동한 애국지사이다. 그가 영종도 예단포에서 유배생활을 했다. 계봉우는 1911년 1월 이동휘와 함께 간도로 이주해 교편을 잡았다. 그 뒤 연해주로 옮겨 '권업신문' 기자와 대한광복군정부의 비서로 활동하기도 했다. 1916년 11월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국내로 구인됐으며, 영종도에서 유배생활을 했다. 1917년 12월 석방된 뒤 고향인 함경도 영흥에서 거주제한 조치를 당했다. 계봉우는 특히 1919년 초 3·1운동을 준비하던 인물들과 긴밀히 접촉하면서 도움을 줬다고 한다. 계봉우 역시 예단포에서의 유배 사실이 제대로 드러나 있지 않다.이제라도 이동휘와 계봉우의 인천 유배 생활이 어떠했는지 다시 살피는 작업이 뒤따라야 한다. 계봉우 또한 인천과 관련 있는 독립운동가로 평가해야 함은 물론이다. /정진오기자 schild@kyeongin.com

2019-02-20 정진오

[독립운동과 인천·(1)프롤로그]묻혀버린 '100년전의 외침', 다시 듣다

가장 日스러운 도시 만들려던 일제… 인천 3·1운동 평가 '미미'독립운동가 유배지인 영종·무의도 '함성' 용동 '아이들의 만세'인천고 항일단체 고초사·전국 13도 대표자회의 연 만국공원등지역에 퍼져 있는 수많은 관련 인물·사건들 흔적 찾아 '재조명'2019년이 시작되자마자 다들 3·1운동과 임시정부 100주년이라면서 야단이었다. 3·1절이 가까워지면서는 더욱 그렇다. 인천 역시 마찬가지다. 그러면 우리는 3·1운동, 더 나아가 독립운동에 대하여 얼마나 알고 있을까. 100년이나 되었건만 기초적인 연구성과조차 미미한 게 현실이다. 인천에서는 3·1 만세운동의 불길이 유난히 약했던 것으로 치부하는 경향이 짙다. 일제가 가장 일본다운 도시로 만들고자 했던 인천이기에 그럴 수도 있겠다 싶기는 하다. 구체적인 기록이 남아 있지 않은 경우가 많다. 시간이 더 흐르기 전에 희미한 기억의 조각이라도 주워담아야 한다. 경인일보가 2019년 연중기획으로 '독립운동과 인천'을 진행하려는 이유이다.영종도나 무의도 같은 인천의 섬들이 독립운동가들의 유배지였다는 사실은 인천에서조차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이들 섬은 독립운동가들의 유배지였지만 3·1 만세의 함성이 울려 퍼지기도 했던 곳이다. 또한 열 살 미만의 어린아이들까지 태극기를 들고 독립만세를 부르며 동네를 몇 바퀴씩 돌아다녔다는 이야기도 묻혀버렸다. 인천 중구 용동을 중심으로 한 아이들의 만세운동도 제법 거창했던 모양이다. 그 중심에 우현 고유섭(1905~1944)이 있었다. 그 일단을 최원식 인하대 명예교수가 그의 책 '황해에 부는 바람'에서 밝히고 있다. 최원식 교수는 '월간공예' 1988년 6월호에 실린 시인 배인철의 큰형 배인복의 인터뷰를 토대로, 용동에서 아이들 만세운동이 있었음을 전하고 있다."우현선생이 태극기를 직접 그려서 우리들에게 나누어 주고 초가집 지붕 위에 올라가 태극기를 꽂았습니다.우리들은 모여서 만세를 부른 후 동네를 돌다가 체포되었지요. 7~8세의 어린아이들은 훈방으로 금방 풀려났지만 우현선생은 유치장에 있다가 사흘째 되던 날 큰아버지가 찾아가 겨우 나올 수 있었습니다."1919년 3월, 아홉 살이던 배인복의 만세운동 얘기다. 인천공립보통학교(현 창영초등학교)를 졸업한 고유섭은 당시 열다섯 살이었다. 열다섯 고유섭이 동네 꼬마들에게 태극기를 그려주었고, 앞장서서 아이들과 함께 동네를 돌아다니면서 만세를 불렀으며 경찰에 체포되어 유치장에 갇히기도 했다는 거다. 초가지붕 꼭대기에 태극기를 꽂기도 했다니 보통 열의가 아니었다. 인천문화재단이 2006년에 펴낸 책 '한국미학의 선구자 우현 고유섭-아무도 가지 않은 길'에 보면, 고유섭의 부인 이점옥 여사도 똑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다.인천고등학교(옛 인천공립상업학교) 졸업생들은 학창시절 조직한 항일단체를 계속 이어가다가 해방을 얼마 남기지 않고 발각되어 여러 명이 고문을 받아 옥사하는 등 큰 고초를 겪기도 했다. 이른바 '인상 출신 불령분자들의 비밀결사 사건'이었다. 1941년 졸업생(인상 27회)들이었다. 24명이 붙잡혔다. 조선인 동기생이 47명이었는데 그중 절반이 넘는 수가 비밀결사 대원이었던 거였다. 체포된 24명 중 4명이 고문으로 옥사하고, 11명은 출옥한 뒤 고문 후유증으로 천수를 누리지 못하고 세상을 떴다. 학교 다닐 때부터 조직한 항일단체 구성원들이 졸업 후에도 계속해서 독립운동을 하다가 희생을 당한 사례가 대한민국 고등학교 역사에 또 있을까 싶다.인천 만국공원(현 자유공원)에서는 3·1운동 시작 1개월 뒤인 1919년 4월 2일, 한성임시정부의 시작을 알리는 전국 13도 대표자회의가 열리기도 했다. 3·1 만세운동이 전국으로 들불처럼 번져 타오르고 있을 때였다. 일제의 감시와 탄압이 최고조에 달했을 때이기도 했다. 그만큼 전국 대표자들이 공공장소에서 회동하기가 어려웠다. 삼엄한 감시망을 뚫고 만국공원에서 회합하기로 한 것만으로도 인천은 우리 독립운동사에서 역사적인 공간이다.유관순 열사의 이화학당 스승이자 항일 운동과 여성 인권 향상을 위해 애쓴 여성 독립운동가 김란사도 빼놓을 수가 없다. 김란사는 인천 감리서(조선 말기 개항장 행정과 대외관계의 사무를 관장하던 관서) 별감이자 독립운동가였던 하상기의 아내였다. 1872년 평양에서 출생한 김란사는 1893년 하상기와 결혼하며 인천과 인연을 맺었다. 결혼했으면서도 미혼 여성만이 학교에 다니는 것으로 유명했던 이화학당에 입학한 여장부이기도 했다. 그는 이화학당을 졸업한 후 일본 유학길에 올랐다가 1900년 미국 오하이오주 웨슬리언대학 문과에 입학해 우리나라 여성으로는 처음으로 '문학사' 학위를 받았다. 귀국한 김란사는 이화학당 교사로 여성교육에 힘쓰는 한편 성경학교 설립, 부인 계몽교육, 독립운동 등 사회활동에도 앞장섰다. 이때 유관순을 가르쳤다. 교회에서는 배움의 기회를 놓친 여성들을 위해 영어와 성경도 가르쳤다. 김란사는 조선의 위기 상황에서 여성도 배워야 하며, 여성의 의식이 깨어 있어야 나라를 구할 수 있다는 신념을 갖고 있었다.고종의 통역사이기도 했던 김란사는 1919년 파리국제강화회의 한국대표로 비밀 파송 중 중국 베이징에서 갑작스럽게 숨을 거뒀다. 일제 밀정에 의한 독살설도 있지만, 급성 전염병에 걸려 타계했다는 기록도 보인다. 김란사와 관련한 좀 더 깊이 있는 연구가 필요하다.이밖에도 수많은 독립운동 관련한 인물과 사건들이 인천에 퍼져 있지만 '인천'과 '독립운동'을 하나로 묶은 연구 성과는 눈에 띄지 않는다. 3·1운동, 임시정부 100년을 맞이한 올해 그 작업이 폭넓게 시작되었으면 하는 바람으로 연중기획의 첫발을 뗀다. /정진오기자 schild@kyeongin.com인천의 3·1운동 및 독립운동과 연관된 사람들. 왼쪽부터 조봉암, 이동휘, 고유섭, 유봉진, 이길용, 심혁성, 박세림, 유경근, 유두희와 인천상고 27회 학생들인 정태윤, 김형설, 송재필, 김려수, 고윤희, 기재연. 배경은 인천대교와 3·1 독립선언서. /경인일보DB·인천고등학교 제공, 그래픽/성옥희기자 okie@kyeongin.com/아이클릭아트조선 영조 때 만들어진 여지도서 영종진도. 영종도 예단포와 무의도는 일제시대 독립운동가의 유배지이기도 했다. /'영종용유지' 발췌

2019-02-20 정진오

[zoom in 송도]6·8공구 공원·녹지 조성 본격화

내달께 '랜드마크시티 1호 근린공원'바닷가 접한 '수변공원' 하반기 착공'달빛축제' 2단계사업 4월 준공예정경제청, 완충녹지 10곳도 연내 완공인천 랜드마크시티 1호 공원 등 송도국제도시 6·8공구 공원·녹지 조성 공사가 올해부터 본격적으로 추진된다.17일 인천경제자유구역청에 따르면 '랜드마크시티 1호 근린(체육)공원'과 '랜드마크시티 1호 수변공원' 조성 공사를 올해 시작한다.송도 8공구 아파트 단지를 기준으로 '랜드마크시티 1호 체육공원'(송도동 330-1번지 일원 18만9천230㎡)은 동쪽, '랜드마크시티 1호 수변공원'(송도동 308-2번지 일원 25만2천91㎡)은 바닷가와 접한 서쪽에 각각 조성된다. → 위치도 참조랜드마크시티 1호 체육공원은 인천대교 연수JC(분기점) 하부 및 주변에 조성된다. 이르면 올 3월 착공하며, 내년 10월 준공 예정이다. 달빛축제공원이 남쪽에 있고, 이들 공원 사이에 송도 워터프런트 1-2단계 구간 수로가 조성될 예정이다.인천경제청은 랜드마크시티 1호 체육공원에 운동시설, 휴식시설, 편익시설, 공원관리시설, 녹지 등을 설치할 계획이다. 인천경제청 관계자는 "송도LNG종합스포츠타운이 폐지될 예정이어서 야구장 등 대체 시설을 랜드마크시티 1호 체육공원에 조성할 계획"이라고 설명했다.랜드마크시티 1호 체육공원은 설계가 완료된 상태다. 야구장 1개, 축구장 1개, 풋살구장 2개, 다목적 구장 2개, 체력단련시설 등이 계획돼 있다.랜드마크시티 1호 수변공원은 송도 6·8공구 서쪽에 세로로 길게 조성된다. 인천경제청은 전체 면적 25만2천91㎡ 가운데 8공구 구간 7만7천573㎡를 우선 조성한다. 광장, 편익시설, 관리시설, 녹지 등이 조성될 예정이며, 올 하반기 착공을 앞두고 있다. 송도 8공구 아파트 입주예정자들은 조속한 공원 조성, 특화시설 및 광장·주차장 설치 등을 인천경제청에 요구하고 있다. 인천경제청 관계자는 "수변공원 조성사업과 관련해 지난달 주민간담회를 했다"며 "주민 의견을 사업에 반영할 수 있는지 검토하고, 정기적으로 소통할 계획"이라고 했다.송도 6·8공구는 지난해 하반기부터 입주가 진행되고 있으며, 올해에도 몇 개 아파트 단지가 입주를 시작한다. 이런 점을 고려해 인천경제청은 송도 6·8공구 도로변에 완충녹지를 조성하는 사업에도 속도를 내고 있다. 약 10개의 완충녹지 조성사업이 올해 완공을 목표로 추진된다는 게 인천경제청의 설명이다.한편, 송도 6·8공구와 인접한 달빛축제공원 2단계 사업은 오는 4월 준공될 예정이다. 미조성 공원 부지에 녹지를 조성하고, 반려동물 놀이터를 설치하는 것이 주요 내용이다. 이들 공원 외에 인천경제청은 송도 4공구 소리공원, 송도 5공구 글로벌파크 3·4지구, 첨단클러스터 1·2호 연결녹지, 국제화복합단지 6·7·8호 완충녹지를 올해 추진하거나 마무리한다. /목동훈기자 mok@kyeongin.com인천 송도 센트럴파크 전경. 송도국제업무지구 사업시행자인 NSIC(송도국제도시개발유한회사)가 조성해 인천경제자유구역청에 기부채납한 공원이다. 인천경제청은 송도 공원 4개소, 녹지 16개소 등 올해 43만3천822㎡ 규모의 공원·녹지 조성사업(계속사업 포함)을 추진한다. 올해 공원·녹지 조성에 투입하는 예산은 296억5천700만원이다. /인천경제청 제공

2019-02-17 목동훈

[한국 근대음악의 발상지 인천·(19)]우리 음악의 비전

50여년동안 354차례 정기연주회 연 인천시향초창기 낭만주의 전반기 작품 주로 무대올려최근 20세기곡 초연… 지휘자·규모따라 변화경인일보는 인천시립교향악단 창단 50주년 기념일이었던 2016년 6월 1일에 맞춰 시향이 가장 많이 연주한 작품을 조사한 바 있다. 인천시향 50년의 행보를 짚어보려는 게 기사의 의도였다. 초청 연주회와 송·신년 음악회 등 특별 연주회는 배제했으며, 50년 동안 354차례 열린 정기연주회 메인 프로그램에 오른 작품들을 대상으로 했다. 1회 이상 정기연주회의 메인 프로그램에 오른 작품은 82개였으며, 그중 베토벤 '교향곡 3번, 영웅'과 차이콥스키 '교향곡 5번'이 12회로 가장 많았다. 베토벤 '교향곡 9번, 합창'과 차이콥스키 '교향곡 6번, 비창'이 11회였으며, 베토벤 '교향곡 5번, 운명'과 슈베르트 '교향곡 8번, 미완성', 브람스 '교향곡 4번', 드로브자크 '교향곡 8번'과 '9번, 신세계'가 10회로 뒤를 이었다. 창단 초기 규모가 크지 않았던 인천시향의 주 레퍼토리는 하이든과 모차르트, 베토벤의 초기 작품, 슈베르트와 멘델스존 등 낭만주의 전반부까지였다.2대 상임지휘자인 임원식(1919~2002)이 베를리오즈의 '환상 교향곡'을 처음으로 연주하면서 레퍼토리 확대를 꾀했다. 4대 지휘자인 금노상(66)이 부임하면서 4관 편성으로 거듭난 인천시향의 레퍼토리는 더욱 넓어졌다. 후기 낭만주의의 정점에 서 있는 말러와 R. 슈트라우스를 선보였으며, 20세기 작곡가들인 버르토크와 쇼스타코비치, 오르프의 작품 등을 인천시향이 초연했다.인천시향 50주년 기념 연주회로 열린 제354회 정기 연주회에선 정치용 당시 예술감독이 R. 슈트라우스 '영웅의 생애'를 인천시향 초연하기도 했다. 지난해 10월에 부임한 이병욱 인천시향 예술감독은 올해 교향악 축제에 인천시향과 말러 '교향곡 5번'으로 참여하는 등 그동안 자주 무대에 올려지지 않았던 작품들도 시민에게 선보일 예정이다.인천시향이 100주년을 맞았을 때, 50주년 이후부터 50년간의 메인 프로그램을 조사한다면 이 결과와는 매우 다른 형태를 보일 것으로 예상된다. 이처럼 인천시향의 역사에는 향유자를 포함한 지역 음악계와 시향의 당시 상황, 여건이 반영됐음을 알 수 있다.개항 이후 군대와 교회 등을 통해 우리나라에 도래한 서양음악은 이 같은 요소와 과정들이 생략될 수밖에 없었다.이 땅에서 서양음악은 곧 '음악'으로 자리 잡았다. 반면 이전 시기까지 우리 땅에서 음악으로 지칭된 요소들은 '국악' 혹은 '전통음악'으로 불리며 뒤로 물러섰다.정치, 경제와 마찬가지로 문화(음악) 분야에서도 '서양의 것을 학습해 선진화하려는 시대 정신'이 가미되면서 서양음악이 빠르게 음악의 자리를 차지했으며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300년 클래식역사, 국내 100년만에 급히 진행윤이상 세대에 이르러서야 주체적 인식 도모뮌헨올림픽 기념작 '심청' 등 유럽에도 큰 획바흐가 작곡한 '평균율 클라비어곡집' 이후로 잡더라도 300여년 동안 형성된 서양음악사가 우리 땅에선 100여년 동안 축약되어 나타난다. 이 기간에 조성적 화음으로만 이뤄진 기초적인 노래부터 컨템포러리(Contemporary) 음악까지 나타나는 것이다.서양음악의 유입 창구 기능을 한 인천에서 최영섭(90)을 제외하고 해방과 한국전쟁 전후해서 활동한 작곡가를 찾기 힘든 대목은 아쉽다. 윤이상(1917~1998)과 금수현(1919~1992), 이상근(1922~2000) 등이 이내 떠오르는 부산과 비교해도 그렇다. 어쩔 수 없이 우리나라 전반(윤이상)으로 범위를 넓혀 언급을 잇는다.서양음악 도입 세대의 우리 작곡가들은 주로 노래를 만들었다. 서양음악의 유입과 수용에 집중했을 이들에게 '한국적 음악'이 고려될 여지는 충분하지 않았을 것으로 여겨진다. 소위 '작가 정신'을 가진 작곡가의 작품이기보다는 새 문화의 접촉 이후 공감하고 즐겼던 음악인들의 산물이었기 때문이다. 가사에 대한 정서로 인해 한국적 애환이 묻어난다는 평가도 받지만, 엄밀히 말하면 반주 붙은 서양 노래의 틀에 민요적 가락과 장단을 도입한 정도였다. 즉, 도래한 서양음악에 대한 반성이나 한국의 고유 음악양식에 대한 추구 등이 없이 만들어진 노래들이라 할 수 있다. 이후 세대에 등장하는 작곡가 윤이상 등은 우리 음악계에 주체(반성)적 인식을 도모했다.윤이상은 1956년 프랑스로 유학을 떠가기 전 국내에서 가곡과 기악곡을 비롯한 다양한 작품을 남겼다. 1950년부터 부산사범학교 음악교사로 재직 때(휴전 후 활동 무대를 서울로 옮김) 동요 70여곡을 작곡했다. 당시 초등학교 1~6학년 음악책에 수록된 동요 100여곡 중 윤이상의 작품이 70%를 차지했다고 한다. 동요 다음으로 많은 윤이상의 곡은 교가이다. 해방 직후 부산으로 거주지를 옮기기 전 고향인 통영의 문화협회와 통영공립고등여학교, 통영공립여자중학교 등에 재직한 윤이상은 4년 동안 시인 유치환·김상옥과 함께 '교가 지어주기 운동'을 벌였다. 이를 통해 윤이상이 작곡한 교가는 9개에 이르며 학교마다 특색을 살려서 만들어졌다. 윤이상이 한국 생활기(작곡 전반부)에 발표한 가곡을 비롯한 작품들은 한국의 전통 음악 유산과 연결되어 있다고 평가받는다. 함께 활동했던 안기영, 김성태, 채동선, 김순남, 이건우 등과 영향을 주고받으며 서양과 우리 음악 사이에서 균형적 질서를 유지했을 것으로 여겨진다. 윤이상의 유럽 생활기(작곡 후반부)에도 이 기조는 이어진다. 1985년 독일의 튀빙겐대학교에서 명예박사 학위를 받으면서 윤이상이 직접 밝혔듯이, 그는 1970년대 초반까지 동아시아 전통을 서양음악의 언어로 개조하는 데 천착했다. 동아시아적이라는 표현에는 한국과 중국의 궁중 음악뿐만 아니라 신화적인 소재들과 도교, 불교의 영향을 받은 조형 예술의 모티브들이 포함된다.윤이상의 대표작 중 하나인 관현악곡 '예악'은 이 같은 사상적 기반에 당대 펜데레츠키와 리게티의 작품에서 드러나는 음향작곡(Klangkomposition)의 기법이 묻어난다. 이후 동베를린사건을 비롯한 정치·사회적으로 어려움을 겪은 윤이상은 이 경험들을 보다 명백한 음악 언어로 구사하기 위한 시도도 한다. 윤이상은 1972년 뮌헨올림픽 개막 축하작이었던 오페라 '심청'을 비롯해 광주 민주화운동을 소재로 한 교향시 '광주여 영원하라'와 '화염에 휩싸인 천사' 등 150여편의 작품을 남겼다.'서양 현대음악 기법을 통한 동아시아적 이미지의 표현'이라는 평가를 받으며 20세기 서양음악사에 거대한 획을 그은 윤이상은 큰 울림을 준다. /김영준기자 kyj@kyeongin.com/아이클릭아트인천시립교향악단 창단 50주년을 기념해 2016년 5월 18일 인천종합문화예술회관 대공연장에서 열린 제354회 정기연주회 모습. /인천문화예술회관 제공20세기 서양음악사에 큰 획을 그은 작곡가 윤이상. /윤이상평화재단 제공

2019-02-14 김영준

[zoom in 송도]R2블록 시민청원, 市 답변은

인천도시公, 2016년 용적률등 상향주민들 "막대한 시세 차익 위한 것"원안 복귀 요청 3000명 이상 '공감'주민 우려 아파트 건립은 없을 듯市, 용적률 조정 일정 수용 가능성'송도 R2블록 원안 복귀 청원합니다.'인천 송도국제도시 8공구 상업업무용지 R2블록을 원안대로 개발해달라는 인천시 온라인 시민청원이 지난달 31일 답변 기준인 3천명을 넘어섰다. 시민청원 창구에 접수된 송도 관련 청원 중 처음으로 답변 요건을 충족했다.인천시는 시민들의 시정 참여 기회를 확대하고 소통을 강화하고자 지난해 12월부터 온라인 시민청원 창구를 본격적으로 운영하고 있다. 청원이 30일간 3천명(인천시 인구의 0.1%) 이상의 시민 동의(공감)를 얻으면, 시장 등이 답변을 내놓는 방식이다. 시민청원 창구에는 250건에 가까운 청원이 올라왔으며, 이 중 청라국제도시 관련 2건에 대해선 답변이 이뤄졌다.인천시는 송도 R2블록 청원에 대한 답변을 준비하고 있다. 박남춘 인천시장은 지난 7일 자신의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아침회의부터 송도 R2블록 시민청원과 관련한 핵심 쟁점과 시민들께 설명할 내용을 꼼꼼히 점검했다"는 글을 올리기도 했다.송도 R2블록(약 15만8천㎡)은 8공구에 위치한 말발굽 모양의 인천도시공사 땅이다. 인천시가 2013년 12월 인천도시공사 부채 비율을 개선하기 위해 5천141억원 상당의 R2블록을 현물출자했다. 당시 인천도시공사는 "부채 비율 개선과 안전행정부(현 행정안전부) 공사채 승인 조건 해결 등 기존 대형 개발사업의 차질 없는 추진을 위해 현물출자가 진행됐다"고 설명했다. → 위치도 참조송도 R2블록은 2016년 용적률이 '500%'에서 '800%'로 상향 조정되고, 건축 높이가 '70m 이하'에서 '170m 이상' '130~150m' '130m 이하'로 세분화됐다. 이는 토지 가치와 사업성을 높이기 위한 조치로, 원활한 개발을 위한 것이었다.송도 8공구 아파트 입주예정자 등 송도 주민들은 R2블록의 용적률과 건축 높이를 애초대로 변경해달라고 요구하고 있다. 이 같은 요구는 이번 시민청원까지 이어졌다. 이들은 시민청원에서 "막대한 면적의 R2블록을 인천도시공사가 헐값에 가져갔다"며 "이후 막대한 시세 차익을 얻기 위해 용적률과 높이 제한을 대폭 풀었다"고 주장했다. 또 "조속히 R2블록 용적률, 높이 제한 등을 원안으로 복귀시켜 주시기 바란다"고 요구했다. 이들은 R2블록에 아파트와 오피스텔 등 주거시설 건립을 허용하는 것도 반대하고 있다. 8공구에 가뜩이나 아파트가 많은데, R2블록에도 주거시설을 건립하면 인구 과밀이 우려된다는 게 이들의 이야기다.송도 R2블록에 대한 시민청원이 조건을 충족하면서 인천시가 어떤 답변을 내놓을지 주목된다.우선, 송도 주민들이 우려하는 '아파트 건립'은 이뤄지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R2블록은 지구단위계획상 일반상업지역이기 때문에 아파트를 건립할 수 없다. 아파트 건립을 위해선 용도 변경 절차를 거쳐야 한다. 인천도시공사와 인천시도 아파트 건립에는 부정적이다.하지만 일정 규모의 오피스텔 건립은 불가피할 것으로 예상된다. 오피스텔 건립은 2016년 용적률 및 건축 높이 완화 이전에도 가능했다. 또한 사업 추진을 위해선 오피스텔 건립을 일정 부분 허용할 수밖에 없을 것으로 보인다. 15만8천㎡ 규모의 큰 땅을 상업·업무시설로만 채우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오피스텔 건립을 불허하면, 사업자 선정 또는 부지 매각이 어려워 개발사업이 상당 기간 지연되거나 어려울 수 있다. 이 때문에 사업 진행에 필요한 규모의 오피스텔만 허용할 가능성이 커 보인다.주민 요구 사항 중 하나인 용적률은 변화가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 원안(500%)대로 낮추는 것은 아니더라도 일정 부분 인천시가 수용할 가능성은 있다는 것이다. 다만 어떤 건물을 짓느냐에 따라 다르기 때문에 용적률을 일률적으로 적용하는 것보다는 용도·시설별로 용적률을 차등화해야 한다는 의견도 나온다.R2블록은 송도 6·8공구 개발사업의 핵심 구역이다. 그렇기 때문에 단순 용지 매각보다는, 민간사업자나 인천도시공사가 전체적인 그림을 그려 개발 또는 매각하는 방향으로 추진될 전망이다. 주변 지역과의 조화를 고려해야 한다는 점에서도 '큰 그림'이 필요하다. 용적률, 높이 제한, 오피스텔 공급 물량을 어느 수준으로 제한하느냐보다 6·8공구의 랜드마크가 될 수 있느냐가 더 중요하다는 얘기다. 그런 점에서 인천시는 구체적인 그림은 아니더라도, 전체적인 개발 방향을 이번 답변을 통해 설명할 필요가 있다.인천시가 송도 R2블록 시민청원에 대한 입장을 밝힌다고 해서 민원이 완전히 해결될 것으로 보이진 않는다. 지속적인 '소통' '설득 작업'과 함께, 송도 8공구 아파트 입주민의 생활 편의를 개선하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는 게 전문가들 지적이다. /목동훈기자 mok@kyeongin.com아파트 단지에 싸인 R2블록-지난달 12일 드론으로 촬영한 송도국제도시 8공구 R2블록 모습. 아파트 단지에 싸인 원형 땅이 R2블록이다. R2블록은 용적률, 건축 높이, 오피스텔·아파트 허용 여부가 쟁점이 되고 있다. /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송도국제도시 8공구 인천도시공사 소유 부지 R2블록에 대한 시민청원이 답변 조건인 3천명(공감 수)을 넘어 성립했다. /인천시 홈페이지 캡처

2019-02-10 목동훈

[한국 근대음악의 발상지 인천·(18)]연주회 공간

창극·영화 상영하던 '국내 첫 극장 협률사' 등 1920년대 연주회 선봬공회당·시민관 바통 이은 시민회관, 1980년대엔 민주화 항쟁 장소로문예회관을 비롯 송도·부평·청라 곳곳에 확산… 다채로운 무대 기대1743년에 창단한 독일의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 오케스트라(Leipzig Gewandhaus Orchester)는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관현악단이다. 당초 12명으로 시작된 이 단체는 개인의 저택을 순회하면서 연주활동을 이어갔다. 이들의 연주 소식에 주민들의 관심 또한 늘었고, 그만큼 단원과 청중도 증가하면서 더 큰 공간이 필요하게 됐다. 그로 인해 카페로 연주회 장소를 옮겼으며, 이도 부족하게 되자 1781년 직물업자들이 모여서 회의도 하고 그들이 만든 제품을 전시하고 보관하는 용도로 지은 건물인 게반트하우스(의복협회 회관)로 옮겼다. 이와 동시에 단체의 상주 공간이자 오케스트라의 명칭으로 확정됐다.1884년이 되어서야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 오케스트라를 위한 새 게반트하우스가 지어졌다. 뛰어난 합주력과 그에 상응하는 음향이 어우러지면서 이 오케스트라의 명성은 더욱 높아졌다. 이어서 지어지는 암스테르담 콘세르트허바우와 보스턴 심포니홀 또한 게반트하우스를 참조했다.게반트하우스는 제2차 세계대전 때 연합군의 폭격으로 파괴됐으며, 현재의 게반트하우스는 1977~1981년에 개축한 것이다.제물포를 통해 서양음악이 도래한 이후 인천에서도 연주회를 열 수 있는 공간에 대한 필요성이 대두된다. 20세기 초반 인천에서 연주회는 주로 교회와 극장 등에서 개최됐다.고일 선생이 쓴 '인천석금'(1955)에 따르면 인천 지역에 세워진 최초의 근대식 공연장은 정치국이 1894~1895년에 세운 것으로 추정되는 협률사(協律舍)이다. 협률사는 조선인이 만든 우리나라 최초의 극장이자 공연장으로 일컬어진다.1933년 발간된 '인천부사'에도 "부청 서쪽인 중정 1정목(현 관동)에 100석 규모의 화도(火道)를 갖춘 극장을 (일본)거류민의 위안을 위해 개설했는데 이후 명치 30년(1897년)에 산수정 2정목(현 송학동)으로 옮겨 극장 양식으로 신축해 '인천좌(仁川座)'라 불렀다"고 기록돼 있다.이처럼 해방 이전까지 인천에 있던 극장으로는 일본인의 자본으로 운영된 인천좌와 가부키좌(1906), 표관(1909) 등이 있었다. 협률사는 축항사에 이어 1914년 애관으로 이름을 바꾸고 현재에 이른다.언급한 극장들에선 주로 창극에서부터 연극, 영화 등이 관객과 만났다. 1920년대 들어서야 인천에서 서양음악을 소재로 한 음악회와 음악대회가 개최된다. 민경찬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가 쓴 논문 '서양음악의 수용과 인천'(인천근현대문화예술사연구에 수록·인천문화재단 刊)에 따르면, 1920년대 인천 내리교회 엡윗청년회 주최 음악대회가 열렸고, 일본 육군 4사단 군악대장이었던 일본인 다카사카가 신포동에 '영정악우회'를 설립해 신인들을 양성하기 시작했다. 또한, 바이올린과 피아노를 전공한 인천 출신 음악인 박흥성이 표관극장에 입사한 이후 10여년 동안 많은 무성영화의 음악을 편곡하고 연주했으며, 후진도 양성했다.연주 공간에 대한 필요성이 본격화 되는 가운데, 인천에서 그 역할은 1923년 홍예문 부근에 2층 규모의 붉은 벽돌 건물로 지어진 '인천공회당'이 떠맡는다. 500여명을 수용할 수 있었던 이 공간에선 현제명의 연주회를 비롯해 홍난파에게서 바이올린을 배운 박종성의 연주회, 원종철 독창회 등이 개최됐다.해방 후인 1947년에는 이곳에서 인천관현악단 창단 연주회가 개최됐다. (2018년 11월 23일자 9면 보도)인천공회당은 한국전쟁 때 함포를 맞고 소실된다. 휴전 이후인 1957년 그 자리에 1천여석 규모의 '인천시민관'이 들어섰다. 시민관에선 콘서트를 비롯해 연극, 쇼, 영화 상영, 웅변대회 등 다채로운 문화행사가 열렸다.1966년 6월 1일 이곳에선 인천시립교향악단의 창단 연주회가 개최됐으며 인천시향의 상주공간이 된다. 하지만 시민관이 개관한 지 10여년이 지나면서, 시설 노후화가 진행됐다. 때문에 1974년 주안에 문을 여는 '인천시민회관'이 본연의 임무를 넘겨받는다. 지하 1층, 지상 3층 규모의 시민회관은 1천388석, 2천명을 수용할 수 있는 당시로서는 상당히 큰 규모의 문화공간이었다. 공간의 크기 만큼이나 각종 문화예술 행사가 활발히 열렸다. 1980년대 시민회관 앞 사거리에선 5·3 인천 항쟁 등 군사 정권에 대항해 민주화를 요구하는 시민들의 집회 장소가 되기도 했다. 1998년 무직자를 위한 쉼터로 활용되기도 했으며, 1994년 남동구 구월동에 지어진 인천종합문화예술회관(현재 명칭은 인천문화예술회관)이 정착되면서 2000년 철거됐다. 현재 시민회관 자리엔 녹지 공간과 휴게 시설을 만들어 시민 공원으로 조성됐다.1980년대 초반에 고교 시절을 보낸 지역의 한 음악 애호가는 "음악 시간에 베토벤의 '운명 교향곡'에 대해 배우고 나서 인천시립교향악단이 이 작품을 연주한다고 해서 무작정 시민회관으로 갔던 기억이 난다"면서 "지금의 연주홀들과 비교했을 때 시민회관의 음향 시설이나 환경 등은 모든 면에서 떨어졌겠지만, 당시 실연으로는 처음 들었던 '운명 교향곡' 1악장의 셋잇단음에 의한 주제는 잊을 수 없다"고 회상했다.시민회관은 '옛 시민회관 쉼터 공원'으로 변모한 가운데 올해로 개관 25주년을 맞은 인천문화예술회관과 지난해 송도국제도시에 개관한 아트센터 인천으로 이어진다. 더해서 중극장 규모인 부평아트센터와 소극장 규모로 청라에 문을 연 엘림아트센터까지 다양한 콘서트 공간이 인천에 자리잡았다.인천에서 서양음악이 본격적으로 향유된지 100년이 되어 가는 가운데 좋은 연주 공간들을 기반으로 인천의 음악 문화가 더욱 다채롭게 싹을 틔우는 2019년이 될 것으로 기대된다. /김영준기자 kyj@kyeongin.com 그래픽/성옥희기자 okie@kyeongin.com1923년 인천공회당 모습. /인천 화도진도서관 제공1986년 5월 민주화 항쟁이 일어난 인천시민회관 앞 거리. /자유기고가 이재우씨 제공/아이클릭아트인천문화예술회관 전경. /인천문화예술회관 제공아트센터 인천 외관. /인천경제청 제공

2019-02-07 김영준

[zoom in 송도]송도국제도시 브리핑

■경제청,산업·학교용지 15만7천㎡ 매각 계획인천경제자유구역청은 올해 송도 토지 15만7천㎡를 매각할 계획이다.매각 물량은 송도 2·4·5·7공구 산업용지 10만9천㎡와 8공구 학교용지 4만8천㎡다. 금액으로는 900억원 상당이다. 인천경제청은 "토지 매각은 개발 재원을 안정적으로 확보하기 위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인천경제청은 지난해 말까지 송도 내 598개 필지를 총 9조361억원에 매각했다. 이들 필지 중 569개는 개발이 완료됐고, 29개는 조성 중이다. 인천경제청은 올해 토지 매각 계약금·분납금, 임대 수익 등으로 총 1천974억원의 수입이 발생할 것으로 전망했다.■오크우드 프리미어 인천 'Top Hotels 1위' 선정오크우드 프리미어 인천은 세계적인 여행 정보 사이트 트립어드바이저 '2019 트레블러스 초이스 탑 25'에서 Top Hotels 1위 호텔로 선정됐다고 밝혔다.트레블러스 초이스 어워드는 전 세계 여행객들의 리뷰와 의견을 바탕으로 한 가장 객관적인 여행업계 상이다. 오크우드 프리미어 인천은 베스트 서비스 부문에서도 1위를 했다. 오크우드 프리미어 인천은 수상 기념으로 2월 27일까지 타임세일 프로모션을 한다. 온라인 판매가 대비 최대 24% 할인된 금액으로 객실을 이용할 기회다. 심영철 총지배인은 "하늘과 바다가 맞닿은 장관, 초고층 객실에서의 색다른 경험, 섬세한 서비스가 고객님들의 높은 만족도로 이어졌음을 확인했다"며 "차별화된 시설과 진정성 있는 가족 같은 서비스로 고객님들께 보답하겠다"고 했다.■IFEZ 산업육성 플랫폼 운영 연구 착수보고회인천경제자유구역청은 최근 송도국제도시 G타워에서 'IFEZ(인천경제자유구역) 산업 육성 플랫폼 운영 연구사업 착수보고회'를 개최했다. → 사진이번 연구사업은 송도 등 IFEZ에 순환적 산업 생태계를 조성하고 기업 환경을 개선하기 위한 것으로 인천경제청은 올 연말까지 송도 등 IFEZ 산업 생태계를 진단하고, 산업 육성을 위한 구체적인 실행 방안을 모색하게 된다.구체적으로 ▲지구별 사업체 현황 및 산업 가치사슬 분석 ▲심층면접과 기업설문 등을 통한 산업정책 수요 조사 ▲중장기 정책 사업 로드맵 수립 ▲지구별 유치 가능한 산업 유형 및 기업군 조사 등을 진행한다.■글로벌캠퍼스 입주대학 2019년도 공동입학설명회인천글로벌캠퍼스(IGC)에 입주한 외국 대학들이 2019년도 학생 모집을 위한 공동 입학 설명회를 개시했다.이들 대학은 지난 11일 'IGC 전국 청소년 동아리 전시 대전' 참석자를 대상으로 입학 설명회를 했다. 15~16일에는 중국 학생들이 캠퍼스를 방문했으며, 24일과 25일에는 대전 대신고 1·2학년 학생들이 시설과 교육 프로그램을 체험했다. 인천글로벌캠퍼스운영재단은 7월 27일과 12월 7일 공동 입학 설명회를 여는 등 지속적으로 입학 설명회 및 캠퍼스 체험 행사를 진행할 예정이다. /목동훈기자 mok@kyeongin.com

2019-01-27 목동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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