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인천)

[zoom in 송도]인천경제구역 아트시티 조성사업

국제도시 정주 환경·국내외 투자 유치 활성화자문위 예산 29억… 우수 미술작품 공모 제작센트럴파크 일대에 설치 문화·소통의 장소로인천 송도국제도시에 우수한 공공미술 작품을 설치하는 사업이 추진된다. 인천경제자유구역청은 이 같은 내용의 '인천경제자유구역(IFEZ) 아트시티 조성사업'을 본격적으로 추진한다고 8일 밝혔다. IFEZ 아트시티 조성사업은 국제문화도시 정주 환경 조성과 투자 유치 활성화를 위한 것이다. 도시의 예술적 가치를 높일 수 있는 공공미술 작품이 필요하다는 취지로 계획됐다.IFEZ 아트시티 조성사업은 일정 규모 이상의 건축물에 설치하는 미술 작품과는 차원이 다르다. 관련 법에 따라 연면적 1만㎡ 이상 건축물은 건축비의 약 1%를 미술 작품 설치에 사용해야 한다.인천경제청 관계자는 "송도컨벤시아와 아파트 단지 등 일정 규모 이상의 건축물에 설치된 미술 작품은 '건축물 미술작품 제도'에 따른 것"이라면서 "이번 사업은 IFEZ의 문화적 감수성과 예술적 창의성을 나타내며 IFEZ만의 특별함을 경험할 수 있는 우수한 공공미술 작품을 설치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사업 대상지는 송도 센트럴파크 일원으로, 주된 장소는 '아트센터 인천' 인근이다.인천경제청은 시민과 관광객이 많이 방문하는 공원 부지에 우수 공공미술 작품을 설치할 계획이다. 총사업비는 29억4천만원이다. 인천경제청은 지난 6~7월 IFEZ 아트시티 조성사업 실행계획을 수립하고 자문위원회를 구성·운영했다. 지난달에는 우수 공공미술 작품 공모 계획을 세웠다. 현재 우수 공공미술 작품 공모 및 계약을 위한 행정 절차를 진행하고 있다. 연내 업체 선정·계약이 이뤄지고, 내년부터는 제작·설치 작업이 추진된다. 내년 11월 사업을 완료하겠다는 것이 인천경제청 계획이다.인천경제청은 우수 공공미술 작품을 공모할 때 장르, 규모, 작품 수 등을 제한하지 않을 방침이다.이는 작가와 기획자의 자유롭고 창의적인 활동과 전문성을 보장하기 위한 것이다. 인천경제청 관계자는 "작가와 기획자가 전체 공간을 이해하고 주위 환경과 어우러지는 작품을 설치하는 방향으로 추진할 계획"이라고 말했다.인천경제청은 시민들이 친근하고 편안하게 감상할 수 있는 밝고 경쾌한 이미지의 작품을 선정할 계획이다. 또 일방적인 감상보다는 체험 등 관람자의 능동적인 참여와 상호작용이 가능하면서 실용적 기능을 갖춘 작품을 희망하고 있다. 단순히 미술 작품만 설치하고 끝내는 것이 아니라, 그 공간을 시민 문화 활동과 소통의 장소로 활용하겠다는 취지다.인천경제청은 명성 있는 유명 작가의 참여로 예술성과 화제성을 확보하겠다는 계획도 가지고 있다.송도 등 IFEZ가 명실상부한 국제도시가 되기 위해선 문화적 수준을 높여야 한다는 게 전문가들 의견이다. 이를 위해 인천경제청은 IFEZ 아트시티 조성사업, 세계 대표 축제 발굴·개발사업, 아트센터 인천 1단계(콘서트홀)에 이어 2단계(오페라하우스·뮤지엄) 건립사업 등을 추진 중이다. /목동훈기자 mok@kyeongin.com그래픽/박성현기자 pssh0911@kyeongin.com/아이클릭아트

2019-09-08 목동훈

[인천경영포럼]장기표 원장 "트럼프, 사실상 북핵 용인"

"미국 비핵화 전략은 쇼에 불과"北 끌어들여 中 고립·압박정책북미 '한국 패싱현상' 심화 우려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북한의 핵무기 보유를 사실상 용인했으며 이에 따라 앞으로 북한은 중국이 아닌 미국을 선택, 공조 관계를 이어갈 수 있다는 주장이 제기됐다.우리나라 대표 재야 정치인으로 평가받는 장기표 신문명정책연구원 원장(전 전태일재단 이사장·사진)은 5일 오전 라마다 송도호텔에서 열린 인천경영포럼 제409회 조찬강연회 연사로 나와 이같이 주장하며 북한과 미국의 '한국 패싱' 현상이 더 심화 될 것이라고 밝혔다. 장기표 원장은 "북한은 김정은 정권 체제 유지를 위해 절대 핵을 포기할 수 없다"며 "미국도 이를 잘 알고 있으며, 비핵화가 아니라 사실상 핵 보유를 용인해주며 북한을 미국 쪽으로 끌어들여 중국을 고립·압박하는 정책을 펼칠 가능성이 크다"며 강조했다. 그는 "미국은 북한이 ICBM(대륙간탄도미사일)과 SLBM(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만 사용하지 않는 조건으로 핵무기 보유를 용인하는 것이 중국 견제에 도움이 될 것이란 판단을 내린 것으로 안다"며 "미국 측 입장에서 보면 북이 핵을 가지고 있어야 B-52 전략폭격기, F35 스텔스기 등 전략 자산 남한 배치에 명분이 생긴다"고 말했다.이어 "결국 미국은 북한이 아니라 중국 고립을 위해서라도 전략 자산을 남한 내에 배치해야 한다"고 말한 뒤 "미국이 취하고 있는 비핵화 전략은 쇼에 불과하다"고 주장했다.장기표 원장은 "실질적으로 북한의 핵무기 보유를 용납하지 않는 것은 중국"이라며 "중국은 미국을 통해 북한의 비핵화를 이루려 하지만 현재로선 뜻대로 되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고 했다.장 원장은 "현재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줄타기 하고 있는 북한이 미국 쪽에 줄을 서게 될 경우 중국은 북한 내 친중 세력을 이용해 쿠데타를 일으켜 김정은 정권을 붕괴시키는 전략을 사용할 수도 있다"고 주장했다.한편 이날 공교롭게도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백악관에서 진행된 브리핑 도중 북한과 이란에 대해 "엄청난 잠재력을 가졌다"며 "우리는 정권 교체를 원하지 않으며 그들은 잠재력을 이용하길 바랄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한 게 전해져 관심을 끌기도 했다. /김명호기자 boq79@kyeongin.com/인천경영포럼 제공

2019-09-05 김명호

[독립운동과 인천·(26)]황어장터 만세운동

특정집단만 주도한 게 아닌 점 의미지역내 '심혁성' 신임 두터웠을 듯인천 계양구 '황어장터 만세운동'은 인천 내륙에서 일어난 가장 큰 규모의 독립운동이다. 조선총독부가 일본 정부에 보고한 문서에 '황어장터 만세운동에 600여 명이 참석했다'고 기록한 점을 고려하면, 실제로는 1천명이 넘었을 것이라는 게 연구자들의 설명이다.황어장터 만세운동을 이끈 사람은 당시 31세에 불과했던 심혁성(1888~1958)이다. 인천시 계양구 오류동(당시 경기도 부천군 오류리) 출신 천도교도였던 심혁성은 1919년 3월 24일 그 일대에서는 가장 큰 시장인 황어장에서 주민들과 함께 '조선독립만세'를 외쳤다. 심혁성은 3시간 만에 일본 경찰에 붙잡혔지만, 마을 주민들은 그의 석방을 위해 경찰과 맞서 싸웠다. 이 과정에서 한 명이 일본 경찰의 칼에 맞아 숨지는 안타까운 사고도 있었다. 마을 주민들은 친일파의 집과 계양면사무소를 파괴하는 등 만세 운동을 계속해 나갔다.황어장터 만세운동이 주목받는 또 다른 이유는 대규모 독립운동을 특정 집단에서만 주도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황어장터 만세운동 재판 기록을 보면 당시 체포된 40여 명의 인원 중 상당수는 기독교인이었다. 황어장터 만세운동에 대해 연구한 수원대학교 사학과 박환 교수는 "당시 독립운동에 나선 사람들에게 종교는 독립운동의 밑바탕이자 원동력이었다"며 "천도교와 기독교를 초월해 독립운동을 이끈 심혁성은 지역 내에서 많은 사람의 신임을 받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른 심혁성은 전 재산을 팔아 빈민들에게 나눠 주고 독립운동을 계속했다. 한평생 일본에 항거한 그는 1958년 숨을 거둘 때 후손들에게 '독립운동을 했다는 이유로 국가로부터 혜택을 받지 마라'고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박환 교수는 "심혁성이 주도한 황어장터 만세운동은 인천 북부지역뿐만 아니라 문학과 남동 등 인천 다른 지역 만세운동의 견인차 구실을 했다"며 "그의 만세운동을 역사에 기록해야 할 이유다"고 평가했다. /김주엽기자 kjy86@kyeongin.com

2019-09-04 김주엽

[독립운동과 인천·(26)]황어장터 만세운동 주역 심혁성

만세함성 가득한 1919년 3월 손병희 지시받아천도교·기독교인 규합 24일 600명 태극기 들어경찰과 대치중 '이은선' 숨진 탓 저항감 치솟아문학동·남동·월미도 시위 등 지역 활동 '밑거름'출소후 재산 팔아 빈민 돕는 등 평생 이웃 챙겨전국에서 만세운동이 한창이던 1919년 3월 24일. 경기도 부천군 계양면 장기리(현 인천시 계양구 장기동)에선 당시 대표 우(牛)시장인 황어장이 열렸다.오후 2시가 되자 한 청년은 옷 속에 숨겨 둔 태극기를 펼쳐 들었고, 장터에 있던 다른 사람들도 태극기를 꺼내 들며 '조선 독립'을 외쳤다.인천 내륙지역에서 벌어진 가장 큰 독립운동인 '황어장터 만세운동'은 이렇게 시작되었다.황어장터 만세운동을 주도한 사람은 심혁성(1888~1958)이다. 어린 시절 한학을 배웠지만, 농사를 지으며 살던 심혁성은 3·1 운동이 들불처럼 번질 때 가만히 있지 않았다.마을 주민들을 이끌고 조선 독립을 외쳤다.심혁성은 1888년 계양면 오류리(현 계양구 오류동)에서 태어나 독립운동을 진행하기 전까지 이 지역에서만 살았던 것으로 전해진다.당시 그의 재판기록에 따르면 심혁성은 독실한 천도교도로 생활했다. 1910년대 천도교는 독립운동을 활발하게 펼쳤다.1894년 동학농민운동을 통해 일본에 처절하게 항거한 천도교는 국권이 침탈된 1910년 이후에도 독립운동을 주도해 나갔다.3·1 운동 당시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총대표는 천도교도였던 손병희(1861~1922)가 맡았으며,독립선언문도 천도교 교단이 운영하던 '보성사'에서 인쇄돼 전국으로 배포됐다.심혁성이 살던 계양·부평 지역에는 1900년대 초반 천도교가 전파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항일 천도교 기관지 '천도교회월보'는 1914년 4월 15일 발간한 기사를 통해 "'부천군' 교구는 설치한 지 십 년에 교호가 수십호에 지나지 못하고, 또한 모두가 빈한한 까닭에 교구실을 작만티(장만하지) 못함으로 일반교인이 근심하는 바이더라"라며 당시 이 지역 천도교 전파 상황을 소개하고 있다. 이를 토대로 한다면, 1914년이면 천도교 부천군 교구가 만들어진 지 10년 정도 지난 시점이었던 셈이다. 부평교구는 부평군 서면 신대리(현 계양구 서운동)에 강습소를 운영했는데, 심혁성도 이곳에서 천도교도로서의 활동을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1919년 3월 전국은 독립을 염원하는 만세 함성으로 가득했다. 인천에서는 6일 인천공립보통학교(현 인천창영초등학교) 학생들이 동맹 휴학에 돌입하면서 만세 운동에 참여했다. 8일에는 인천 시내에 독립선언서가 다수 배포됐고, 이튿날인 9일에는 만국공원(현 자유공원)에 모여 만세시위를 하다가 경찰에 의해 강제 해산되기도 했다. 3월 중순부터는 강화 지역 곳곳에서도 만세운동이 벌어졌다.이 시기 심혁성은 손병희의 지시를 받아 3·1 운동을 은밀히 준비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부천군 계양면 지역의 천도교·기독교인, 농민들에게 독립운동 사실을 알리고 이들을 규합해 나갔으며, 만세운동 장소로 황어장터를 정했다.매월 음력 5일에 열리던 황어장터는 부천군 지역의 가장 큰 시장 중 하나였다. 조선총독부가 1924년 발간한 '조선의 시장'에선 "경기도 부천군에는 2곳의 시장이 있는데 한 곳은 소사리에 있고, 나머지는 장기리에 있다. 이들 시장에는 1곳당 평균 이용인구가 1천~2천명에 달한다"고 설명할 정도로 규모가 큰 시장이었다. 당시 시장은 일본의 감시 속에서도 많은 사람이 자연스럽게 모일 수 있는 대표적인 장소였다. 이 때문에 시장을 중심으로 3·1 운동이 진행된 경우도 많았다. 경기도 화성에서는 '발안장'을 중심으로 3·1 운동이 벌어졌고, 평택에서는 '시강장터'가 만세운동의 장이 되었다.일본 경찰은 황어장터에서 만세운동이 진행될 수 있다는 것을 경계하고 있었다. 조선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는 1919년 3월 27일 자 신문에서 "강화도의 소요가 도화선이 돼 그다음에 접근된 김포도 일어났고, 다시 그 동네와 인천경찰서 관내의 경계선 되는 부천군도 불온의 형세가 있으므로 인천경찰서에서는 만일의 경비를 위해 순사부장과 순사 2명을 부내주재소(부평주재소)에 임시 응원을 파견했다더라"고 썼다. 심혁성의 재판 기록을 보면 당시 부내주재소에서 근무하던 순사 2명은 24일 아침부터 황어장터를 순찰하고 있었다.일본 경찰의 경비도 계양 지역 주민들의 독립 염원을 꺾지는 못했다. 오후 2시가 되자 심혁성을 비롯한 600여명의 군중은 품 안에 태극기를 꺼내 들고 '조선독립만세'를 외쳤다. 조선총독부가 일본 정부에 보고한 문서에선 "계양면 장기리에 장날을 맞아 구한국기(태극기)를 앞세우고 약 600명의 군중이 운동을 개시했다"고 황어장터 만세운동을 설명했다.일본 경찰이 이날 황어장터에 대한 감시를 강화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안타깝게도 심혁성은 만세 운동을 시작한 지 3시간 만인 오후 5시께 경찰에 붙잡혔다. 이를 본 주민 수백명은 '심혁성을 내놓아라'고 외치며 일본 순사들을 포위하고 주먹으로 경찰들을 때리는 등 거세게 저항했다. 이에 순사들은 칼을 빼 들고 군중을 향해 휘둘렀고, 대열의 선두에 섰던 이은선(1876~1919)이 칼에 맞아 숨지는 등 주민 여러 명이 크고 작은 부상을 당했다. 당시 인천경찰서에서 파견 나온 순사는 "면사무소에서 시장을 거쳐 약 3정(町·약 330m)의 지점에 이르렀을 때, 약 200명이 뒤따라오며 '붙잡아라, 붙잡아라'하고 저마다 입으로 큰소리를 지르고 우리 일행 6명을 포위해 심(심혁성)을 빼앗아 가려고 폭행을 시작해 약 10분이 지났을 즈음 심을 묶었던 포승을 끊고서 심을 둘러메고 약 8간(間·약 14m)을 탈거해 사방에서 돌을 던지므로 칼을 뽑지 않으면 심을 탈환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경찰관 일행이 위험 상태에 빠져 막을 길이 없기에 칼을 뽑아 방어했다"고 상부에 보고했다.이은선의 죽음을 본 주민들의 저항감은 더욱 불타올랐다. 이날 밤 주민들은 친일파로 지목된 면서기의 집을 부수고, 일제의 침략 말단기구였던 계양면 면사무소를 파괴했다. 또 주민들은 임학리와 용종리, 병방리, 박촌리의 민적부와 과세호수대장 등 면사무소 내 주요 서류를 불태웠다. 주민들은 심혁성을 포함한 만세운동 중심 인물이 대부분 구속됐음에도 이튿날인 25일 300여명이 면사무소 앞에 모여 힘차게 만세를 외쳤다.천도교와 기독교인이 합심해 이뤄낸 황어장터 만세운동은 27일 문학동 시위, 28일 남동 시위, 4월 1일 월미도 시위 등 인천지역에서 벌어진 다른 만세 운동의 밑거름이 됐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하지만 심혁성을 포함한 황어장터 만세운동 주동자 주민 40여명은 일본 경찰에 붙잡혀 모진 고문을 당했다. 심혁성은 1919년 10월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8월 형을 선고받아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1920년 출소한 심혁성은 논과 밭, 집을 팔아 생필품을 장만해 장터에서 빈민들에게 나눠주고, 전국을 떠돈 것으로 알려졌다. 1927년에는 함경도에서 중국 상하이(上海) 임시정부의 지시를 받아 활동했고, 1937년 이후에는 충남 공주와 강원도 영월 등지를 다니며 군자금을 모금하다 해방을 맞았다.해방 이후 인천으로 돌아온 심혁성은 1958년 12월 인천시 계양구 백석동에서 70세를 일기로 타계했다. 정부는 그의 공훈을 기려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고, 계양구는 2004년 황어장터가 있던 자리에 '황어장터 3·1만세운동 기념관'을 세웠다. 이곳에선 매년 3월 1일 심혁성과 주민들의 독립운동을 기억하는 행사가 열리고 있다.심혁성은 평생을 조선의 독립을 위해 힘써왔다. 일본의 삼엄한 감시 속에 피신생활을 하는 중에도 어려운 이웃을 먼저 생각했으며, 자신도 물론 경제적으로 풍요롭게 생활한 것은 아니었다고 한다. 심혁성의 손자 심현교(67) 씨는 3일 경인일보와의 전화 인터뷰에서 "우리 할아버지는 돌아가실 때에도 '독립운동을 했다는 이유로 국가로부터 혜택받지 마라'고 유언을 남길 정도로 매우 강직한 사람이었다"며 "해방 이후에도 어려운 사람을 보면 입고 있던 옷을 다 벗어주고 집에 올 정도로 어려운 사람을 외면하지 못했다"고 고인을 기억했다. 이어 "강직하고 어려운 사람을 돌보는 성격이 할아버지가 3·1 운동을 주도적으로 이끈 이유 중 하나였던 것 같다"고 덧붙였다. /김주엽기자 kjy86@kyeongin.com인천 계양구 장기동에 있는 '황어장터 3·1만세운동 기념관' 전경. 인천 계양구는 매년 3월 1일 이곳에서 3·1 운동 기념식을 개최하고 있다. /인천 계양구 제공심혁성의 일제감시대상 인물카드. /국사편찬위원회 제공'황어장터 3·1만세운동 기념관' 내부 전시실 모습. /인천 계양구 제공

2019-09-04 김주엽

[독립운동과 인천·(25)]이길용과 신낙균

동아일보 손기정 마라톤 우승 보도옥고 치른뒤 언론·사진계 복귀못해올림픽과 같은 국제스포츠대회에 참가하는 선수들은 유니폼에 조국의 국기를 달고 출전한다. 하지만 일제강점기 올림픽에 참석한 우리나라 선수들은 일본 국적으로 대회에 나서야 했던 탓에 가슴에 태극기를 달지 못했다. 1936년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에서 우승한 손기정(1912~2002)도 가슴에 일장기를 달고 뛰어야 했다. 이를 안타깝게 여겼던 동아일보 기자들은 손기정의 우승 사진을 신문에 게재하면서 일장기를 지워버렸다. 이른바 '동아일보 일장기 말소사건'이다.일장기 말소사건은 경성(서울)에 있던 동아일보에서 일어났지만 사건 주역들은 인천의 독립운동가들이다.일장기 말소사건을 주도한 체육기자 이길용(1899~?)은 인천영화학교(현 인천영화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동아일보에 입사했다. 이길용은 서울과 인천지사를 오가며 취재활동을 벌였고, 운동부(체육부)를 전담했다. 그는 일장기 말소사건 주모자로 지목받아 투옥돼 일본 경찰의 모진 고문을 받았고, 40일 뒤에 풀려났으나 언론계를 떠나야 했다.이길용과 함께 일장기 삭제를 주도했던 당시 동아일보 사진부 과장 신낙균(1899~1955)도 인천이 기억해야 할 독립운동가다. 인천상업고등학교(현 인천고등학교) 출신인 그는 일본에서 사진을 배우고 돌아와 언론계에 몸을 담았다. 신낙균은 이길용과 함께 일장기 삭제를 주도했다가 함께 옥고를 치렀다. 감옥에서 풀려난 뒤 언론계와 사진계로 돌아올 수 없었다.유니폼에 국기를 달고 국제스포츠대회에 참가한 선수는 그 나라의 국민을 대표한다는 상징성을 갖고 있다. 우리 민족이 힘들었던 시절 자긍심을 높이고,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일장기를 지워버린 이길용과 신낙균을 오랫동안 기억해야 하는 이유다. /김주엽기자 kjy86@kyeongin.com

2019-08-28 김주엽

[독립운동과 인천·(25)]일장기 말소사건의 주역 이길용과 신낙균

1936년 동아일보 손기정 우승 특집기사 게재… 이길용·신낙균 주도 편집국 전체 동참인천서 자란 이길용 배재학당 졸업후 일본서 반일 격문 옮기다 서대문형무소 '수감'민족대표 33인 중 한 사람인 송진우 만나 체육기자 입문… 6·25때 납북돼 행적 묘연인천상고 출신 신낙균 3·1운동 계기 사진 인연… 국내 사진전문가 최초 현충원 안장제11회 베를린 올림픽이 끝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1936년 8월 25일.동아일보 2면에는 베를린올림픽 마라톤 금메달리스트인 손기정 선수가 시상대에 오른 사진이 실렸다.다들 신문을 보고 깜짝 놀랐다. 손기정 선수 유니폼 가슴 부근 국적을 알리는 국기가 있어야 할 자리에 어렴풋한 회색빛 먹 자국만 보였기 때문이다.조선총독부는 동아일보가 고의로 일장기를 지운 것으로 보고 신문 발행에 가담한 주요 인물들을 체포했다.이른바 '동아일보 일장기 말소사건'이었다. 이 사건의 중심에는 인천의 독립운동가이자 언론인이었던 이길용(1899~?)과 신낙균(1899~1955)이 있다.이길용은 1899년 경상남도 마산(현 경남 창원시)에서 태어났다.한국체육기자연맹이 1993년 발간한 '일장기 말소의거 기자 이길용'에 따르면 마산 지역 상인이었던 그의 부친은 자식 교육을 위해 인천 동구 창영동으로 이사했다고 한다.인천영화학교(현 인천영화초등학교)를 졸업한 이길용은 서울에 있는 배재학당(현 배재중·고등학교)에 입학했다.이 시기 이길용은 경인선을 타고 서울로 통학하면서 이후 인천 지역 주요 인사로 성장한 이들과 친분을 쌓은 것으로 알려졌다.이러한 활동은 그가 이후 인천을 연고로 한 배재학당 출신들의 모임인 '인배회'와문화사업을 목적으로 만들어진 '제물포 청년회'에서 활동하는 데 초석이 됐다. 1916년 배재학당을 졸업한 이후 일본에 잠시 유학한 이길용은 1918년 남만주철도주식회사 경성관리국에 입사했다. 이곳에서 철도 수송업무를 담당하던 그는 중국 상하이(上海) 임시정부에서 인쇄된 반일(反日) 격문을 열차를 통해 옮기다 일본 경찰에 적발돼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됐다.서대문형무소에서 이길용은 그의 일생에서 매우 큰 영향을 미친 송진우(1887~1945)와 만났다. 이길용은 출옥 후인 1921년 당시 동아일보 사장인 송진우의 권유를 받아 신문사에 입사해 체육기자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했다.그가 체육기자의 길로 들어선 1920년대는 3·1 만세 운동 이후 일제의 문화정책이 펼쳐지던 시기다. 당시 지식인들은 스포츠가 민족을 단결하고, 세계에 우리나라의 이름을 알릴 수 있는 수단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배재학당 시절부터 여러 스포츠를 접한 이길용에게 체육은 또 다른 형태의 민족 운동이었다. 그는 1927년 '조선운동기자단'을 조직하고, 1930년부터 새 체육용어 보급 사업에도 힘쓰기 시작했다.베를린올림픽이 열린 1936년. 당시 동아일보에는 독립운동 활동을 하던 사람들이 다수 포진하고 있었다. 사장인 송진우는 3·1 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참여했던 인물이고, 사회부장이었던 소설가 현진건(1900~1943)은 시인 이육사와 함께 글로써 일제에 저항한 문인이다.인천의 독립운동가인 신낙균도 사진부 과장으로 근무하고 있었다. 인천상업고등학교(현 인천고등학교) 출신인 신낙균은 우리나라 1세대 포토저널리스트다. 그가 사진의 길로 접어들게 된 것은 3·1 운동이 결정적 계기가 됐다.1919년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자신의 고향인 경기도 안성에 머물던 신낙균은 친구들과 함께 3·1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만세운동을 주도한 혐의로 일본 경찰에 쫓기게 된 그는 몰래 안성을 빠져나와 서울 매부의 집으로 피신해 8개월 동안 숨어 살았다. 이곳에서 신낙균은 아마추어 사진가였던 매부 정욱진에게 사진을 처음 접했다. 일본 유학길에 오른 신낙균은 1927년 우리나라 사람으로서는 처음으로 당시 일본의 유일한 사진전문 교육기관인 '동경사진전문학교'를 졸업했다. 신낙균은 평소 후배 사진가 교육 과정에서 "사진은 단순히 기념이나 오락이 아니다. 사진의 앵글에 따라 국가의 안위가 바뀔 수도 있다"는 말을 즐겨 사용했을 정도로 굳은 신념을 지닌 사람이었다.1930년대 동아일보는 조선총독부의 관찰 대상이었다. 사장 송진우의 주도로 식민통치에 저항하기 위해 일으킨 농촌계몽운동의 하나인 문맹 퇴치 운동 '브나로드 운동'을 진행했고, 신사참배 거부를 옹호하며 종교의 자유를 지지했기 때문이다.베를린올림픽 마지막 날인 1936년 8월 10일. 이날 열린 마라톤에서 손기정 선수가 1등으로 들어왔고, 동아일보는 보름이 지난 8월 25일 자 2면에 손기정 우승 특집 기사를 게재하면서 일장기를 고의로 지웠다.당시 언론이 일본 대표로 참여한 조선인의 유니폼에서 일장기를 지운 것은 이때가 처음은 아니었다. 이길용도 자필 수기를 통해 "일제강점기 때 신문의 일장기 사진 말소는 항다반(恒茶飯·차를 마시는 일처럼 흔한 일)으로 부지기수였다"고 회고하기도 했다.이길용은 이보다 4년 전인 1932년 LA 올림픽에 일본 대표로 마라톤에 참가한 김은배(6위)와 권태하(9위)의 사진 속 일장기를 지운 바 있다. 당시에는 다행히 조선총독부가 이를 눈치채지 못하고 조용히 넘어갔다고 한다. 손기정이 우승한 3일 뒤인 8월 13일 자에는 '조선중앙일보' 4면과 동아일보 지방판 2면에 일장기가 없는 사진이 실렸다. 1936년 조선총독부 경무국이 발간한 '조선출판경찰개요'에 '손기정의 가슴에 새겨있는 일장기 마크는 물론, 손 선수 자체의 용모조차 잘 판명되지 않은 까닭에 당국으로서는 졸렬한 인쇄 기술에 의한 것으로 판단했다'고 밝힌 점을 고려하면, 당시 조선총독부는 인쇄 오류로 일장기가 지워진 것으로 간주한 것으로 보인다.하지만 8월 25일 자 신문은 조선총독부 감시망에 걸렸다. 사진 속 손기정의 얼굴 등이 너무 선명하게 나와 고의로 일장기만 지운 것으로 판단했기 때문이다. 대한체육기자연맹이 발간한 '일장기 말소 사건 의거 기자 이길용'에 따르면 일장기 말소 사실은 일본군 사령부가 신문 발행일인 24일 오후 4시 신문 배송 중지를 명령했으나, 이미 발송이 끝난 상태였다.당시 수사를 담당했던 경기도 경찰부장은 경성지방법원 검사정에 일장기 말소 사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이길용은 조사부원 이상범에게 '손기정 선수의 사진을 24일 자 석간에 실으려 하는 흉부의 일장기를 흐릿하게 해 달라'고 부탁했다. 이상범은 이를 승낙하고 원화에 착색한 뒤, 사진부 과장 신낙균의 책상 위에 갖다 놓았다. 그런 후에 사회부 기자 장용서가 24일 오후 2시 반경 사진부실에 와서 사진부 과장 신낙균과 사진부원 서형호에게 '이상범이 지우기는 했으나 아직도 흔적이 남아 있다'고 해 동판에 현출된 사진 중 일장기 부분에 청산가리 농액을 사용해 말소한 뒤 인쇄 부로 넘겨 다음 날 석간에 게재한 것이다."일장기 말소 과정에 동아일보 편집국 전체가 참여한 셈이다. 게다가 이길용이 처음 일장기가 있는 사진 수정을 부탁했던 사람은 월북화가이자 당시 동아일보 삽화가였던 정현웅(1911~1976)이었다고 한다. 그의 유족들의 증언으로는 이날 오전 신문에 들어갈 손기정 사진 수정 작업을 시작한 정현웅은 점심을 먹고 일장기를 지우고 마무리할 생각이었는데, 사무실에 늦게 들어오는 바람에 옆자리에 있던 이상범이 대신 일장기를 지웠다. 이 이야기는 정현웅 평전인 '시대와 예술의 경계인 정현웅'에 잘 나와 있다.이길용 본인도 1948년 발간한 '신문기자 수첩'이라는 책에서 "세상이 알기는 백림(베를린) 올림픽 마라톤의 일장기 말살사건이 이길용의 짓으로 꾸며진 것만 알고 있다. 그러나 사내의 사시(社是)라고 할까. 전통이라고 할까. 방침이 일장기를 되도록은 아니 실었다. 우리는 도무지 싣지 않을 속셈이었던 것이다. 이것은 (총독부에서 일본 본토를 가리킬 때 쓰도록 강요한) 내지(內地)라는 글을 쓰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였다"고 밝혔다.일장기를 지운 대가는 혹독했다. 동아일보는 8월 29일부터 무기정간 처분이 내려져 발행이 중단됐고, 8명의 기자가 경기도 감찰부에 체포됐다. 사건의 주모자로 지목된 이길용과 신낙균 등 5명은 40일에 걸쳐 극심한 고문을 당했다. 이들은 '언론기관에 일절 참여하지 않을 것'이라는 서약서에 강제로 서명한 뒤에야 석방됐다.감옥에서 풀려난 이길용은 이후에도 창씨개명을 거부하고, 반일 발언을 했다는 이유로 광복 전까지 4차례나 투옥되는 고초를 겪었다. 신낙균도 이 사건으로 언론계뿐만 아니라 사진계에서도 추방당했다.해방 이후 이길용은 우리나라 체육 역사를 정리한 백서 발간 작업을 진행했다. 하지만 6·25 전쟁 당시 납북돼 이후 행적은 확인되지 않는다. 신낙균은 수원북중학교에서 물리교사로 일하다가 1955년 숨을 거두었다.2017년 8월 25일 서울시 중구 손기정로 손기정기념관에 이길용 흉상이 손기정 선수의 동상과 나란히 놓였다. 이날은 1936년 이길용이 손기정 선수 가슴의 일장기를 지운 사진이 동아일보에 실린 날이다. 같은 해 4월에는 신낙균의 묘소가 국내 사진 전문가 중 처음으로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됐다.손기정의 올림픽 금메달은 식민지 조선인들에게는 하나의 희망이 되는 사건이었다. 이길용과 신낙균은 일장기가 삭제된 손기정의 사진과 함께 금메달 소식을 전했다. 이는 민족의 자존심을 회복시키고 자긍심을 높이는 계기가 됐다.이길용의 셋째 아들인 이태영(78) 대한체육회 고문은 지난 23일 경인일보와의 통화에서 "납북 당시에는 내가 10살 정도에 불과했기 때문에 정확한 모습이 기억나지는 않지만, 성격이 대쪽같고 강인했던 것만큼은 기억이 난다"며 "이런 성격이 일장기 말소 사건에 주도적으로 참여하게 된 이유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김주엽기자 kjy86@kyeongin.com일장기가 지워진 채 발행된 1936년 8월 25일 자 동아일보 2면(사진 왼쪽)과 원본 사진. /손기정기념재단 제공(왼쪽부터)이길용·신낙균경기도 경찰부장이 경성지방법원 검사정에 보고한 일장기 말소사건 조직도.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제공2017년 손기정 기념관에 설치된 이길용 흉상. /손기정기념재단 제공

2019-08-28 김주엽

[인천경영포럼]윤상현 의원 "문재인대통령이 아베에 비공개 특사 보내야"

한일관계 개선 외교적 해법 제시"그래도 안되면 국제재판소 가야"자유한국당 소속 윤상현 국회 외교통일위원장(인천 미추홀구을)은 "문재인 대통령이 아베 총리실에 비공개 특사를 보내 무역 보복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말했다.윤상현 위원장은 22일 인천 연수구 라마다송도호텔에서 열린 인천경영포럼 408회 조찬강연회에서 한일관계 개선 해법을 이같이 제시했다. 윤상현 위원장은 "이 문제를 끝낼 타임 테이블을 만들어서 양측이 허심탄회하게 얘기를 하면 12월 31일까지 풀릴 수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윤 위원장은 문재인 대통령과 아베 총리의 관계를 "마주 달려오는 기차"로 비유한 뒤 "감정적 대응을 하지 말고 외교적으로 해결해야 한다"고 했다.윤 위원장은 "일본은 수출 규제가 아닌 '수출 관리'라고 하지만 누가 보더라도 강제 징용자의 청구권을 인정한 작년 말 대법원 판결에 대한 보복 조치"라며 "결국 정치·역사 문제가 경제보복으로 가게 됐는데 정말 졸렬하기 짝이 없다"고 현 상황을 진단했다.그러면서 "일본의 요구는 과거 박정희 정권과의 한일협정으로 강제 징용 배상 문제가 해결됐는데 지금의 대법원 판결로 다른 입장이 나왔으니 이를 해소해달라는 것"이라며 "그런데 우리 정부는 일본이 요구하는 외교적 협의와 중재위원회 구성, 제3국을 통한 중재위원회 구성에 대해 모두 답하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윤상현 위원장은 "대법원 판결이 한일협정과 불일치하게 나왔다면 외교적 노력을 해야 하지만 정부가 이를 방치했다"며 "대통령이 8·15 광복절 경축사에서 일본이 대화와 협력의 길로 나온다면 기꺼이 손을 잡겠다고 했는데 이미 일본은 작년 말 대법원 판결이 나온 이후부터 대화를 계속 요구해왔다"고 말했다. 윤 위원장은 "양국은 현재 진행하는 모든 조치를 올스톱하고, 대화를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윤상현 위원장은 이 문제가 풀리지 않고 양국의 무역 전쟁이 벌어지면 국제사법재판소(ICJ)로 가는 것도 한 방법이 될 수 있다고 했다. 윤 위원장은 "국제법의 조류가 개인의 청구권은 인정하는 추세"라며 "일부 승소, 일부 패소 판결을 이뤄낼 수 있고 완전히 지지는 않기 때문에 외교적 해법이 안 되면 ICJ라도 가야한다"고 했다. /김민재기자 kmj@kyeongin.com윤상현 국회 외교통일위원장이 22일 라마다송도호텔에서 열린 인천경영포럼 조찬간담회 강연자로 나와 한일관계 전망에 대해 강연하고 있다. /인천경영포럼 제공

2019-08-22 김민재

[독립운동과 인천·(24)]장봉도 할아버지 송두용

옥고도 치러… 2010년 유공자 인정해방이후 남북통일 염원 밝히기도인천 장봉도에서 가난한 학생들을 위한 교육사업에 헌신했던 기독교 신앙인 송두용(1904~1986) 선생. 무교회주의(無敎會主義)라는 다소 생소한 신념을 가진 독실한 기독교 신자이자 빈민구제 활동가로 잘 알려진 그는 독립운동 행적과 사상과 관련해서는 크게 주목받지 못한 편이다.송두용은 뜻을 함께한 신앙인들과 함께 만든 기독교 잡지 '성서조선'을 통해 민족의식을 일깨우려 했다. "매서운 추위에도 살아남는 개구리는 있다"는 내용의 성서조선 158호(1942년 3월)의 권두언은 칼끝과 총부리로 우리 민족을 겨누고 말살하려 했던 일제에 일침을 가했다. 이 사건으로 송두용은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송두용은 이 사건에 대해 "일본 경찰은 우리가 독립운동을 하였다고 모조리 검거했다. 그러나 우리에게 정치성은 전혀 없고 다만 기독자로서 양심생활을 한 것뿐"이라고 했다. 그는 스스로 정치적 행동과 거리가 먼 신앙 그 자체를 위한 활동(신앙만의 신앙)이었다고 밝혔지만, 순수한 신앙심이 결국 민족의 해방과 평화에 대한 갈망을 불러왔다. 정부는 2010년 그를 독립유공자로 인정했다. 송두용은 해방 이후에도 신앙과 관련한 활발한 저술활동을 통해 많은 글을 남겼다. 3·1 운동 정신은 거창한 행사가 아닌 실력 양성으로 일본을 극복하는 것이라고 했다.그토록 염원하던 해방 이후 송두용은 남북을 비롯한 전 세계의 평화를 원했다. 평화를 바탕으로 남북통일을 이뤄야 한다는 그의 바람은 오늘날에도 유효하다. 송두용은 해방 22주년을 맞았던 1967년 8월 "이제는 각각 남의 나라처럼 또는 피차 독립국가인 양 당연한 것 같이 생각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우리의 힘으로는 어떻게 할 수 없다는 듯이 체념하고 있는지 모른다. 천만의 말이다. 어서 남북이 합쳐야 한다. 하루속히 통일 국가를 이뤄야 한다"고 했다. /김민재기자 kmj@kyeongin.com

2019-08-21 김민재

[독립운동과 인천·(23)]장봉도 할아버지 송두용과 성서조선사건

일본서 성경 중심 무교회주의 들여와 연구회 조직 '성서조선' 발행158호 弔蛙 통해 '한두 마리는 살아남듯' 말살정책 극복의지 표현해방 후 장봉도 푸른학원 이어받아 빈민구호·교육사업에도 힘써태평양전쟁 발발로 일제의 식민지 수탈이 극에 달했던 1940년대 초반 서울에서 발행된 한 기독교 잡지 첫 장에 의미심장한 내용의 권두언이 실렸다.권두언의 제목은 개구리의 죽음을 애도한다는 뜻의 '조와(弔蛙)'. 1942년 3월 무교회주의(無敎會主義) 기독교 신앙 잡지인 '성서조선(聖書朝鮮)' 158호에 겨울잠을 자다 얼어 죽은 개구리를 빗대 민족의 참담한 현실을 고발한 글이 실렸다.일본은 잡지 발행에 가담한 인물과 독자들을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체포했다. 이른바 성서조선사건이었다.이 사건의 중심에는 훗날 인천 장봉도에서 빈민구제 활동과 교육 사업에 헌신했던 독립운동가 송두용(1904~1986) 선생이 있었다.송두용은 1904년 7월 31일 충청남도 대덕군(지금의 대전시 대덕구)에서 부농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4살 때 아들이 없던 큰아버지에 입양됐다가 서울로 유학해 제동공립보통학교와 양정고등보통학교를 졸업했다.그는 18세 나이에 일본 유학길에 올랐으나 1923년 관동대지진 사건이 발생해 귀국했다. 그리고 21살 때 다시 일본 도쿄농업대학 예과로 진학했다. 그는 일본 유학생활에서 기독교를 접하고 인생이 바뀌었다. 당시 일본에서는 제도권 아래 있는 교회 제도를 비판하며 성서와 신앙만으로 구원에 이르러야 한다는 '무교회주의'가 태동하고 있었다. 이들은 교인 수를 늘리고 헌금 걷기에만 혈안이 돼 있는 기성 교단을 부정했다.송두용은 일본에서 무교회주의를 설파하던 우치무라 간조의 강연에 감명을 얻어 한국인 유학생인 김교신, 함석헌, 유석동, 양인성, 정상훈과 함께 '성서연구회'를 만들었다. 그리고 1927년 무교회주의 신앙을 기반으로 한 잡지 '성서조선'을 처음 발행했다. 송두용은 성서조선 6인방 중 가장 나이가 어린 23세였다.1930년 귀국한 송두용은 부천군 오류동(지금의 구로구)을 기반으로 성서집회를 열면서 신앙생활을 이어갔다. 송두용 등 6인방은 성서조선 발간과 함께 서울, 인천, 부천 등지를 다니며 강연을 하면서 민족의식을 고취했다. 이때부터 율목동의 인천모임을 만들어 무교회주의를 알리고 주변에 성서조선을 전달했다.김교신이 1927년 7월에 쓴 성서조선의 창간사는 "성서조선아, 너는 소위 기독 신자보다도 조선혼을 가진 조선 사람에게 가라, 시골로 가라, 산촌으로 가라, 거기에 나뭇군 한 사람을 위로함으로 너의 사명을 삼으라"는 내용이다.민족의식을 가진 기독교인들의 우상숭배를 거부하며 신사참배 거부 운동을 하는 등 종교 운동을 바탕으로 한 항일의식이 확산하자 일제는 기독교를 철저히 감시하기 시작했다. 결국 1942년 3월 송두용과 김교신 등이 성서조선 권두언에 실은 '조와'가 일제의 감시망에 잡혔다."봄비 쏟아지던 날 새벽이 바위틈의 빙괴(永塊)도 드디어 풀리는 날이 왔다. 오래간 만에 친구 와군(蛙君)들의 안부를 살피고자 담(潭) 속을 구부려 찾았더니 오호라 개구리의 시체 두 세 마리 담 꼬리에 부유하고 있지 않는가! 짐작컨대 지난 겨울의 비상한 혹한에 작은 담수(潭水)의 밑바닥까지 얼어서 이 참사가 생긴 모양이다. 예년에는 얼지 않았던 데까지 얼어붙은 까닭인 듯 동사한 개구리의 시체를 모아 매장하여 주고 보니 담저(潭底)에 아직 두어마리 기여다닌다. 아, 전멸은 면했나 보다!"이 글은 혹독한 추위가 와서 겨울잠을 자던 개구리가 죽어 나가더라도 한두 마리는 살아남듯이 일제가 아무리 민족말살정책을 펼치더라도 끝내 살아남는 한국인이 있다는 얘기를 은유적으로 표현했다.일제는 송두용과 김교신 등 6인방과 주요 독자 12명을 치안유지법 혐의로 체포하고 서대문 형무소에 가뒀다. 이 사건으로 송두용은 10개월 동안 옥고를 치렀고 결국 불기소 처분을 받았다. 성서조선도 '조와'가 실린 통권 158호를 끝으로 폐간됐다.송두용과 동시대에 무교회주의 활동을 했던 노평구는 당시 일제가 무력 투쟁이나 드러내놓고 하는 독립운동보다는 이 같은 종교·문화 운동을 더 두려워했다고 회상했다. 노평구는 송두용이 잡지에 쓴 글을 모아 총 6권 분량의 송두용신앙문집을 펴내기도 했다. 성서조선사건 당시 일본 경찰은 "너희 놈들은 우리가 지금까지 잡은 조선놈들 가운데서 가장 악질의 부류들이다. 결사니 조국이니 해가면서 팔딱팔딱 뛰어다니는 놈들은 오히려 좋다. 그러나 너희들은 종교의 허울을 쓰고 조선민족의 정신을 깊이 심어서 백년 후에라도 아니 오백년 후에라도 독립이 될 수 있게 할 터전을 마련해 두려는 고약한 놈들이다"는 반응을 보였다고 노평구는 밝혔다.송두용은 해방 이후에도 개인의 신앙생활과 함께 구호활동과 교육사업에도 힘썼다. 1930년 오류동에서 오류학원을 설립해 가난한 학생들을 위한 교육 사업을 펼쳤던 송두용은 1969년부터 장봉도에서 지인의 제안을 받아 '푸른학원'이라는 교육기관의 운영을 맡았다. 건강 문제로 요양차 장봉도에 들렀다가 1967년 푸른학원을 설립한 무교회 신앙인 노연태로부터 푸른학원을 맡아달라는 부탁을 받았기 때문이다. 이때부터 그는 '장봉도 할아버지'라는 별칭이 붙었다.당시 장봉도에는 초등학교밖에 없어 육지의 상급학교로 진학하지 못한 청소년들은 바다에 나가 굴이나 조개를 따거나 선주 밑에서 새우 선별작업을 하는 고된 일을 하면서 자랐다. 강화도와 영종도, 신·시·모도, 장봉도 일대에서 선교활동을 하던 노연태는 이들을 위해 학교를 세웠다. 송두용은 '정직'을 교훈으로 내세우고 학생들을 가르쳤다. 박정수 등 인천에서 함께 신앙 모임을 갖던 사람들도 푸른학원에서 교사 활동을 했다. 푸른학원은 1974년 정식으로 중등학교 인가를 받아 푸른고등공민학교라는 이름으로 다시 출발했다. 그러나 1980년대 들어 육지로의 진학률이 높아지면서 푸른학원의 문을 두드리는 학생들이 급격히 감소했다.송두용의 건강이 악화되고, 학생 수가 자연스럽게 줄면서 1982년 푸른학원은 결국 문을 닫고 만다. 인천섬연구총서 '장봉도'편을 보면 1982년 장봉도 초등학교 졸업생이 36명이었는데, 푸른학원으로 진학하겠다는 학생은 겨우 4명에 불과했다고 한다.10년 넘게 장봉도의 학생들을 위해 헌신했던 송두용은 1986년 4월 10일 서울 구로구 자택에서 눈을 감았다. 따르던 제자들과 무교회주의 신앙인들은 송두용의 추모집을 발간하고, 그가 쓴 글을 모아 문집을 내기도 했다.송두용은 무교회주의 종교인이면서 민족의식을 지닌 독립운동가였다. 2010년 송두용은 성서조선 사건으로 옥고를 치르고 대한민국의 독립을 위해 헌신했다는 사실이 인정돼 독립유공자 서훈(건국포장)을 받았다. 국가보훈처는 그를 '인천' 출신으로 분류하고 있다.송두용은 1958년 3월 잡지 '성서인생' 33호에 쓴 '진정한 3·1 정신'이라는 글을 통해 60년 뒤를 내다보기라도 하듯 현세대가 깊이 새겨들어야 할 말을 남겼다.그는 3·1 정신은 말이나 형식이 아니고 마음이며 산 생명이라고 했다. 독립운동 100주년을 맞은 올해 각종 기념식 행사에만 치중해 진정한 독립의 의미가 뒷전으로 밀려나는 것을 일찍이 우려했던 거다. 그는 "3·1 운동은 한 개인, 한 정당, 또는 한 단체를 위한 것이 아니다. 정치인도 근로대중도, 부호도 빈자도, 남녀노유의 구별 없이 도시와 촌락의 차이가 있을 리가 없다"고 했다.그는 특히 3·1 운동의 정신은 국민 개인이 실력을 양성해 각자 자기의 책임을 완수하는 것이라고 했다. 최근 일본 아베 정부의 무역보복 조치로 반일 감정이 확산하면서 정부와 국민들이 '극일(克日)'의지를 불태우는 현 시국에 딱 들어맞는 말이다.송두용은 "우리는 소련의 공산주의를 무서워하거나 일본의 침략정신을 겁낼 것이 없다. 일본을 이기고 소련을 물리치려면 오직 실력밖에 없는 것이다. 모든 허위와 외식을 버리고 허영과 기만을 떠나서 다만 진실 일로로 매진하는 수밖에 없다. 3·1 정신은 행사에 있는 것이 아니고 다만 실천궁행으로 사는 것이며 이룰 것이다"고 했다. /김민재기자 kmj@kyeongin.com그래픽/성옥희기자 okie@kyeongin.com/아이클릭아트성서조선 158호에 일제 저항정신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권두언 '조와(弔蛙)'를 실었다가 옥고를 치른 무교회주의 6인방. 뒷줄 왼쪽부터 양인성, 함석헌, 앞줄 왼쪽부터 유석동, 정상훈, 김교신, 송두용. /송두용신앙문집간행회 제공송두용 등 무교회주의 신앙인 6명이 발행한 잡지 '성서조선'.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제공1930년 오류학원을 설립할 당시의 송두용. /송두용신앙문집간행회 제공1958년 3월 송두용이 3·1정신에 대한 글을 썼던 잡지 성서인생. /송두용신앙문집간행회 제공

2019-08-21 김민재

[인천의 얼굴·(16)]인천화교학교 손승종 교장

1930년대 할아버지부터 정착 5대째 이어학생들 사자·용춤 배워 시민과 가까워지길인천의 대표음식이라 하면 무엇이 떠오르시나요. 다들 짜장면을 생각하지 않으셨나요. 그렇습니다. 인천 하면 짜장면이지요. 그런 점에서 짜장면의 뿌리라고 할 수 있는 인천의 화교(華僑)들은 인천의 대표 얼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 화교의 역사는 인천에서 시작합니다. 1882년 임오군란 당시 제물포에 주둔한 청나라 군대를 따라온 40여명의 군역 상인들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들이 인천에 정착하면서 차이나타운이 형성되었습니다. 그들에게는 교육기관이 필수적이었습니다. 1902년 소학교가 설립되었습니다. 오늘날의 한국인천화교중산소학(이하 인천화교학교)의 모태입니다.손승종(60) 인천화교학교 교장도 이 학교 출신입니다. 인천화교학교는 유치원, 초등부·중등부·고등부가 있습니다. '중산'은 중화민국을 세운 쑨원(1866~1925)의 아호입니다. 대만의 교육과정을 따르고 있습니다. 대만과는 달리 한국어 수업시간이 있기는 합니다.손승종 교장의 할아버지가 1930년대 중국 산둥반도에서 한국으로 건너왔다고 합니다. 손 교장의 손자까지 5대째 인천에 살고 있습니다. 1960~70년대에는 학생이 1천200명을 넘었습니다. 지금은 400명도 채 되지 않습니다. 박정희 대통령 시절에 화교 배척이 이루어지면서 많은 이들이 떠났습니다.화교사회도 많이 변했습니다. 예전에는 집에서 중국어만 썼습니다. 그러니 한국말이 서툴 수밖에 없었지요. 영락없는 이방인이었지요. 그런데 요즘 학생들은 중국말이 서툽니다. 손승종 교장은 그게 걱정입니다. 화교학생들이 중국말에 서툰 것은 화교들의 한국화가 이루어졌기 때문입니다.손승종 교장은 학부모들에게 당부합니다. 집에서는 되도록 중국어를 쓰도록 해달라고요. 그러면서 하나 더 강조하는 게 있습니다. 화교사회와 인천과의 소통입니다. 학생들이 사자춤과 용춤을 제대로 배워, 이를 통해 인천 시민들에게 한 발짝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손승종 교장은 올해 10월 10일 쌍십절 기념일에 펼칠 춤공연이 인천과의 소통의 장이 되기를 희망합니다. 10월이 벌써 기다려집니다. 글/박경호기자 pkhh@kyeongin.com 사진/김용국기자 yong@kyeongin.com※'인천의 얼굴'을 찾습니다. (032)861-3200이메일 : say@kyeongin.com

2019-08-20 박경호

[독립운동과 인천·(23)]용동 출신 박남칠

내리교회 교인 父영향 日 억압속 '엡윗청년회' 소년운동 주도 야학등 열며 애국심 고취YMCA 중등부에서 '사회주의' 눈 떠… 조봉암과 '운명적 만남' 평생 후원자·동지관계미곡상 경영하며 인천·강화지역 좌익 독립활동가 '구심점 역할' 청년운동도 지속 펼쳐해방후 여운형 '건국준비위' 참여 한국전쟁때 보도연맹 학살사건에 '희생' 재평가 필요일제강점기와 해방공간, 인천의 대표적인 좌익 활동가로 올해 서거 60주기를 맞은 죽산 조봉암 선생을 꼽는 데 누구나 주저하지 않는다. 그런데 조봉암의 든든한 후원자이자 동지이며 기독교 사회주의자로서 인천의 근현대 좌익 활동을 이끌었던 박남칠(1902~1950)을 기억하는 이는 많지 않다. 박남칠은 드러내놓고 독립운동을 벌이지는 않았지만, 일제의 억압 속에서도 인천 내리교회를 중심으로 청년운동과 소년운동을 주도한 인물이다. 청년들의 문화·체육 활동과 강연회 개최로 애국심을 고취하는 데 힘썼고, 한편으로는 사업가로서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가들의 버팀목이 되어주었다. 또 인천·강화지역 사회주의 활동가들의 연결고리이자 구심적 역할을 하기도 했다.박남칠 연구는 교사 출신의 인천 향토사학자 이성진 인천골목지킴이 대표의 성과가 유일하다. 이 대표는 인천의 근현대 인물 가운데 제대로 된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는 박남칠에 주목하고, 그의 생애와 사상 전반에 대해 연구해 왔다. 현재 알려진 박남칠의 행적은 대부분 이 대표가 1차 사료를 수집해 정리한 자료를 기반으로 하고 있다.박남칠은 과거 반공 이데올로기 속에 제대로 된 평가를 받지 못한 채 수십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인천 근현대사의 '엑스트라'로만 남아 있다. 올해 독립운동 100년을 맞아 후학들이 재조명해야 할 산더미처럼 쌓인 인천의 인물 가운데 박남칠이 빠져선 안된다.박남칠은 1902년 5월 20일 인천 용동에서 미곡상을 하는 박삼홍과 허매란 사이에서 태어났다. 박남칠은 성장 과정에서 아버지 박삼홍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박삼홍은 1890년대 미곡상으로 부를 쌓았고, 한국인 최초의 목사인 김기범을 통해 기독교를 받아들였다.내리교회 교인이었던 박삼홍은 인천 소년운동의 효시이기도 한 '엡윗청년회'의 초기 멤버였다. 엡윗청년회는 1889년 미국 감리교 내 청년단체로 감리교 창시자인 요한 웨슬리의 고향 엡윗(Epworth)에서 이름을 따왔다. 엡윗청년회는 선교사들의 해외 파견지에도 조직됐는데 1897년 인천 내리교회에서 우리나라 최초의 엡윗청년회가 만들어졌고, 서울·강화 등지로 퍼져나갔다. 조봉암도 강화 잠두교회의 엡윗청년회 출신으로 훗날 박남칠과 인연을 맺는다.박삼홍은 내리교회 엡윗청년회 회장을 지내면서 계몽운동을 이끌었고, 이는 애국·민족 운동으로 확대됐다. 결국 1905년 11월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자 진남포 지방 총무였던 김구 등 전국 엡윗선교회 임원들이 구국기도회를 개최하고 상소운동을 벌인 일은 유명하다. 이 일로, 이듬해 6월 일본은 감리교 내 친일성향의 선교사를 회유해 엡윗선교회를 해산하도록 했다. 인천 내리교회 엡윗선교회도 창립 9년 만에 해체됐지만, 박삼홍은 1908년 재조직을 감행해 기독교 청년운동의 맥을 이었다. 기독교 신앙과 포교가 바탕이었지만, 문맹퇴치사업과 연극 공연, 강연회 개최 등으로 민족 의식을 배양하는 게 주된 임무였다. 육영사업에도 앞장서 내리교회가 세운 영화학교에 많은 돈을 기부했고, 다른 학교에서 체육행사가 열리면 기꺼이 후원금을 보탰다.박남칠은 이런 아버지 곁에서 소년운동과 청년운동의 중요성을 자연스럽게 배우면서 자랐다. 그는 1918년 인천공립보통학교(창영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 기독교청년회관에 있는 YMCA 중등부 과정에 진학했다. 이때 교장이 월남 이상재 선생이었다. 박남칠은 여기서 기독교 사회주의 사상에 눈을 뜨게 됐고, 세 살 위인 죽산 조봉암과 운명적인 만남을 갖게 됐다.소설가 이원규가 쓴 죽산 조봉암 평전에도 둘의 만남이 소설처럼 그려지고 있다."동급생 중에 그를 친형처럼 정겹게 따르는 청년이 있었다. 인천 출신의 박남칠이었다. 조봉암은 그가 신흥우 선생의 수업시간에 맨 앞에 앉아 기독교 사회주의에 대해 열심히 질문을 던지는 것을 보고 괜찮은 녀석이라고 여겨온 터였다."1920년 5월 죽산이 의친왕 망명을 시도한 대동단 사건에 휘말려 경찰에 끌려가 고문을 당하고 난 뒤 몸을 추스른 곳도 박남칠의 셋방이었다.박남칠은 공부를 마치고 인천으로 돌아와 아버지 밑에서 미곡상 경영을 도왔다. 미곡상에서 정미업으로 사업을 확장했다. 아버지는 사업이 번성할수록 상도덕을 지키라고 박남칠에게 늘 당부했다. 당시 곡식의 중량을 속여 파는 일이 잦았기 때문이다.기독교와 사회주의는 물과 기름처럼 섞이기 어려워 서로 반감을 갖고 있지만, 유독 인천은 사정이 달랐다. 1920년대 내리교회 담임 목사는 독립운동가 김진호 목사와 민족대표 33인 중 하나였던 신홍식 목사였다. 방법은 달랐으나 조국의 독립을 위한 목표는 같았던 이들은 서로의 존재를 인정하고 연대했다. 이런 분위기의 중심에 박남칠이 있었다. 내리교회 엡윗청년회는 일제의 압력 속에서도 꿋꿋이 활동을 이어갔다. 엡윗청년회 출신의 하상훈, 서병훈, 이범진, 이길용 등이 동아일보 인천지국을 이끌었고, 이들은 일장기 말소사건의 주역이 됐다. 야학과 웅변대회, 토론회를 열어 애국 계몽운동을 전개했고, 기독교의 구원은 개인이 아닌 사회를 의미한다고 설파하며 기독교를 식민지 민족의식 배양의 거름으로 삼았다. 사회참여를 고민하는 청년에게 기독교가 하나의 진입 경로 역할을 한 셈이다.서울 YMCA에서 조봉암과 연을 맺은 박남칠은 조봉암이 조직한 신흥청년동맹 전국 순회 시국강연의 인천 행사를 담당했다. 당시 조봉암은 공산당의 심장인 모스크바에서 활동하다 국내 사회주의 세력과의 결합을 도모하고 있었다.조봉암이 1924년 4월 19일 인천 산수정 공회당(지금의 송학동 인성여고 부근)에서 연 신흥청년동맹의 인천 강연은 성공적으로 끝났다. 당시 동아일보는 조봉암 일행의 인천 강연 예고 기사를 실으며 분위기를 띄웠다. 조봉암은 이 자리에서 "대중을 본위로 삼는 민중운동이 조선인의 유일한 살길이며 따라서 이러한 신사상을 널리 판매하겠다"고 해 호응을 얻었다.박남칠은 이날 조봉암에 김용구와 이보운, 이승엽, 유두희, 권평근 등 인천의 청년 지도자들을 소개했다. 장차 사회주의 운동을 이끌어갈 이들의 만남에 박남칠이 주선자로 나선 것이다.박남칠을 얘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게 내리교회 소년척후대 활동이다. 내리교회 엡윗청년단이 주도해 만든 단체로 오늘날의 보이스카우트와 비슷한 소년단체다. 신태범(1912~2001) 박사는 '인천 한세기'에서 "내리 소년척후대는 교회대였으므로 지도자도 넉넉했고 후속 대원도 꾸준해서 착실한 성장과 발전을 거듭했다. 여러 차례 큰비만 오면 침수 소동이 나는 화수동 일대의 구원활동을 했고, 어린이날 행사에 협조해 가면서 훈련을 게을리하지 않았다"고 설명했다.박남칠은 소년척후대 지도자로서 주말마다 정기집회를 갖고, 어린 대원들에게는 한국 역사를 가르치며 민족의식을 높였다. 평일에도 활발한 봉사활동을 펼치면서 생활 속 애국을 실천하도록 했다. 이런 왕성한 활동으로 많은 시민들의 지지를 얻자 일본 경찰은 소년척후대의 야영이나 집회를 감시할 정도였다. 전국 각지 소년척후대 출신들이 항일운동에 뛰어들었기 때문에 일제는 이를 불온 단체로 여겨 행사마다 입회했다고 한다.1940년대 들어 교회가 일제에 순응하고, 미곡상에 대한 일제의 감시가 심해지면서 박남칠도 고비를 맞게 된다. 그는 아버지의 가르침 아래 쌀 정량을 지키는 도덕적인 사업가로 알려져 신망이 두터운 터였다. 그는 정미소 이름도 '남이 잘 되는 것을 바란다'는 뜻의 '송무백열(松茂柏悅)'에서 따와 송무정미소로 지었다. 이는 소나무가 무성한 것을 보고 측백나무가 기뻐한다는 뜻인데, 손님이 잘 되는 것을 가게 주인이 기뻐한다는 의미로 읽을 수 있다.박남칠은 상공인들의 권익을 대변하기 위해 1935~1940년 인천상공회의소 평의원으로 참여하기도 했는데 훗날 일본의 어용단체에 참여했다는 부정적 인식이 꼬리표처럼 달렸다.그러나 1938년 9월 27일 동아일보 기사는 그를 "공익심이 많은 실업가로 일반의 신망이 두텁다. 사회적으로 많은 활동을 아끼지 않고 더욱이 육영사업과 소년지도에 부단히 노력하는 사회적 유지"라고 소개했다. 친일 부역자라면 얻기 힘든 평가이다.미곡상조합장을 맡기도 했던 박남칠은 이 무렵 감옥에서 출옥해 생계가 곤란했던 조봉암이 인천비강업조합장을 맡을 수 있도록 했다. 또 항일운동을 하다가 일본 경찰에 붙잡혀 전향을 하고 돌아온 인천 출신 사회주의 활동가 이승엽을 미곡상조합 사무장으로 취직시켰다. 이뿐 아니라 형편이 어려운 동지들이 경제적으로 자리를 잡을 수 있도록 하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식민지 수탈 시기 성공한 사업가로서 독립운동자들의 경제적인 버팀목이 되어준 셈이다.그는 해방 이후에도 사회주의 노선을 유지해 여운형이 주도한 '건국준비위원회'에 참여했다가 한국전쟁 발발 후 보도연맹 학살 사건 희생자가 됐다. 조국 해방으로 건국 준비에 여념이 없던 그가 좌우 이념 대립의 희생양이 된 거였다.2010년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는 한국전쟁 전후 인천에서 벌어진 민간인학살사건 피해자 62명 중 박남칠이 포함됐다고 밝혔다. 좌익 사상가를 공산당 부역자라는 이유로 무차별 학살한 사건에 희생된 것이다. 박남칠은 1950년 6월 30일 무렵 집에 숨어 있다가 발각돼 살해됐고, 소월미도에 수장됐다고 알려졌다. 과거사위는 "박남칠이 인천시청에서 열린 군중집회에 참석하지 않았지만, 당시 보도연맹원 단속을 피해 숨어 있다가 어린 조카가 경찰에게 뒷방에 있다는 사실을 알려줘 연행된 후 살해됐다"고 밝혔다. /김민재기자 kmj@kyeongin.com/아이클릭아트내리교회 소년척후대. 사진 가운데가 박남칠. /인천시 역사자료관내리교회 집총고적대. /인천시 역사자료관엡윗청년회 여자야학부. /인천시 역사자료관

2019-08-14 김민재

[zoom in 송도]5공구 글로벌파크 3·4지구… 이달중 개방

3지구, 책읽는 쉼터·야외 공연장피크닉광장·카페테리아 등 마련4지구엔 어린이들 전용 물놀이장축구·풋살장 등 다양한 체육시설인천 송도국제도시 5공구에 조성한 글로벌파크 3·4지구가 이달 중 인천시민에게 개방된다. 글로벌파크 3·4지구는 송도 에듀포레 푸르지오와 인천글로벌캠퍼스(해외 명문대 공동 캠퍼스) 인근에 있다. 면적은 10만8천775㎡다. 2017년 11월 착공한 지 1년 9개월 만에 완공됐다. 현재 개장을 앞두고 마무리 작업 및 시설 점검이 진행되고 있다. 글로벌파크 3·4지구는 주제가 있는 공원이다. 3지구는 '책 읽기 좋은 공원'이고, 4지구는 '운동을 즐길 수 있는 공원'이다. 3지구는 정적이고, 4지구는 동적인 분위기다. → 위치도 참조글로벌파크 3지구에는 '북카페'와 '독서마당' 등 책을 읽을 수 있는 공간이 많다. 인천경제자유구역청은 우드 데크를 설치하고 그 위에 벤치와 북카페를 만들었다. 많은 사람이 바닥에 걸터앉아 책을 읽을 수 있도록 우드 데크를 2단의 계단식으로 설치했다. 북카페는 햇볕이 쨍쨍 내리쬐거나 비가 내리는 날에도 책을 읽을 수 있으며 책장처럼 쓸 수 있는 선반도 있다. 작은 카페를 공원에 옮겨 놓은 것 같다.독서마당은 반원(半圓) 형태의 돌담으로 돼 있다. 돌담에 앉아 책을 볼 수 있게 설계한 것이다. 나무가 무성하게 우거지면 아늑한 느낌의 공간이 될 것으로 보인다. 3지구 중앙부에는 '물결마당'이 있다. 바다에 물결이 일어나는 것을 표현한 꽃밭이다. 인천이 '해양 도시'이고, 송도가 바다와 가까운 점을 고려해 이같이 설계했다고 한다.3지구에는 음악회 등 공연을 열 수 있는 '야외무대'가 있다. '피크닉광장'(잔디밭)과 '카페테리아'도 있다. 카페테리아는 건물 외관이 거의 완성된 상태로, 운영사업자가 선정되면 내부 인테리어 공사를 거쳐 문을 열 예정이다. 글로벌파크 4지구는 축구장, 풋살장, 농구장 등의 체육시설을 갖추고 있다. 축구장은 인조단지가 깔린 국제 규격 구장이다. 농구장은 풀 코트 1개와 하프 코트 2개로 구성됐다. 풀 코트 바닥은 눈부심이 적고 공이 잘 튀기는 조립식 매트로 돼 있으며, 반 코트는 탄성 우레탄 소재가 사용됐다. 축구장, 풋살장, 농구장에는 LED 조명탑이 설치돼 있어 저녁에도 이용할 수 있다. 구장 옆에는 음수대와 화장실이 있다.4지구에는 아이들이 좋아하는 '물놀이장'이 있다. 여름에는 물놀이장으로 이용하고 봄·가을·겨울에는 놀이터로 활용하는 시설이다.인천경제청 관계자는 "송도에 어린이 물놀이터가 없는 점을 고려해 물놀이장을 조성했다"며 "아이들이 물과 함께 마음껏 뛰어놀 수 있는 공간"이라고 설명했다.물놀이장에는 부모들을 위한 그늘막 쉼터가 마련돼 있다. 아이들이 물놀이장에 들어가기 전 발을 씻는 세족 시설, 물놀이 후 이용하는 샤워 시설도 갖추고 있다. 시공사 관계자는 "물놀이장은 목재를 사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반영구적으로 사용할 수 있다"며 "깨끗한 수질 관리를 위해 수로를 사용하지 않고 직접 물을 공급하는 방식을 채택했다"고 말했다.글로벌파크 3·4지구 보행로는 보도블록을 사용하지 않았다. 보도블록 방식은 유모차를 밀고 다니거나 롤러스케이트·킥보드 등을 타는 데 불편하기 때문이다. 보행로에 아스팔트를 포장한 후 보도블록 문양을 그렸다.인천경제청은 글로벌파크 3·4지구에 소나무 등 큰 나무 4천291그루를 심어 충분한 녹음이 확보될 수 있도록 했다.또 영산홍 등 작은 나무 3만3천46그루와 구절초 등 초화류 4만5천본을 식재했다.글로벌파크는 기존 미추홀공원, 누리공원(문화공원)과 연결돼 약 2.6㎞의 거대한 녹지 축을 형성한다. 인천경제청은 이들 공원을 연결하는 보행 녹도(3개) 건설사업을 내년 3월 준공 목표로 진행 중이다. /목동훈기자 mok@kyeongin.com송도 5공구 글로벌파크 3지구에 마련한 '북카페'·'독서마당'(사진 왼쪽부터)송도 5공구 글로벌파크 4지구에 조성된 어린이 물놀이장. /목동훈기자 mok@kyeongin.com

2019-08-11 목동훈

[독립운동과 인천·(22)]강화 출신 죽산 조봉암·(下)

'두차례 검토' 친일흔적 이유 보류근거로 삼았던 기사도 사실과 달라죽산 조봉암(1899~1959)은 독립운동가이자 해방 후 대한민국의 초석을 닦은 정치가이다. 제헌 국회의원과 초대 농림부 장관을 지내고, 제2대 국회의원과 국회 부의장을 거쳐 두 번의 대통령 선거에 나서기까지 그의 정치적 기반은 늘 인천이었다.인천시는 조봉암 60주기 다음날인 지난 1일 인천시청 본관에 독립운동 관련 죽산의 어록과 태극문양을 조합한 대형 현수막을 걸어 그를 기렸다. 문재인 대통령은 3년째 꼬박 죽산의 추도식에 화환을 보내고 있다. 1959년 국가로부터 '사법 살인'을 당한 조봉암이 2011년 대법원 재심을 통해 복권된 지 8년이 지났다. 하지만 국가가 죽산의 명예를 회복하는 최종적인 단계라 할 수 있는 서훈은 아직 소식이 없다.국가보훈처는 2011년과 2015년 각각 조봉암의 서훈을 검토했는데, 친일 흔적이 있다는 이유로 보류했다. 국가보훈처가 지난해 서훈을 재검토하기 위해 '조봉암 평전'을 쓴 이원규 작가를 찾아 증언을 수집하기도 했지만, 이후 검토작업이 지지부진한 상황이다.국가보훈처가 내세우는 죽산의 친일 흔적은 조선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보' 1941년 12월 23일자 신문에 실린 '국방성금 150원 헌납' 기사다. 이 기사에 나오는 조봉암의 주소가 틀렸다는 게 일본 공문서 등을 통해서 입증되고 있다. 현재 화폐가치로 환산하면 수천만원에 달하는 '국방성금 150원'을 당시 죽산이 낼 형편이 되지 않았다는 여러 사람의 증언도 있다.죽산이 1945년 1월 '예비구금령'으로 용산 헌병사령부에 체포됐다가 8월 15일 해방을 맞아 풀려난 그 날, 인천 도원동 자택 주변에는 1천여명의 환영 인파가 몰렸다. 인천사람들이 일제에 항거한 정치지도자로 가장 먼저 죽산을 떠올렸기 때문일 것이다.2011년 대법원 재심에서 간첩죄 무죄를 선고받기까지는 죽산의 서훈 문제는 공론화조차 할 수 없었다. 죽산 연구자들은 조봉암의 일제강점기 공산당 활동 경력이 복권된 이후에도 국가유공자 추서에 발목을 잡고 있는 게 아닌지 의심하고 있다. 죽산에게 사회주의는 항일운동을 위한 방편이었다. 이원규 작가는 "죽산의 서훈은 어쩌다 소외된 것이 아닌 국가가 회복해야 할 양심"이라며 "반드시 그의 업적에 걸맞은 훈격으로 추서해야 한다"고 말했다. /박경호기자 pkhh@kyeongin.com

2019-08-07 박경호

[독립운동과 인천·(22)]강화 출신 죽산 조봉암·(下)

1921년 일본 유학중 공산주의자 교류 '제국주의 반대' 독립운동 최선의 방편으로 선택조선공산당 창단 참여 코민테른 연락책 활동 中서 독립당 조직하다 체포 '6년 옥살이'인천 정착후 또 '구속' 감옥서 해방맞아… 전향 선포 제헌 국회의원·농림부 장관등 역임신뢰성 논란 '친일흔적' 보도에 서훈 보류 "불확실한 기사 1건보다 커다란 업적 주목을"죽산 조봉암(1899~1959)은 해방될 때까지 사회주의자로서 항일운동을 전개했다. 동지였던 박헌영(1900~1955 추정) 중심의 조선공산당과 갈라서면서 해방 이후 사상적 전향을 선포하고 정치가의 길로 나섰다. 죽산이 제헌 국회의원과 초대 농림부 장관을 지내면서 대한민국의 초석을 닦았다는 평가는 뚜렷하다. 그는 평화통일론의 선구자이기도 했다.조봉암은 1921년 7월 일본 유학을 떠나 김찬(1894~?)을 비롯한 공산주의자들과 교류했다. 조봉암은 이들과 엿장수를 하면서 어렵게 학비를 벌었고, 세이소쿠영어학교를 거쳐 주오대학 전문부 정치경제과에 입학했다. 이 시기 그는 사회주의 서적을 탐독하며 사상적으로 성장했다.1년 만에 유학생활을 정리하고 귀국한 조봉암은 본격적으로 사회주의운동에 나섰다. 사회주의자들 사이에서 논객으로 급부상하면서 1922년 11월 소련 베르흐네우딘스크에서 열린 한인 공산주의자 연합대회 국내대표로 참가했다. 그해 12월 공산주의 국제연합인 '코민테른'의 호출을 받아 조선인 공산당원 대표단으로 모스크바를 방문했다. 모스크바동방노력자공산대학에 입학해 공부하기도 했다.이후 조봉암은 김찬, 박헌영, 김단야(1901∼1938), 임원근(1900∼1963) 등 청년 사회주의자들과 함께 조선공산당 창당에 참여했다. 인천을 비롯해 전국을 순회하며 강연했고, 조선일보에서 기자생활도 했다. 1920년대 중반까지 조봉암은 중국 상하이와 러시아를 누비며 코민테른과 조선공산당 간 연락책으로 활동했다. 1920년대 후반부터는 상하이를 기반으로 한국유일독립당 조직운동에 뛰어들고, 현지 한인들의 사회주의계열 단체를 결성해 이끌었다.조봉암은 항일투쟁을 위한 최선의 방편으로 공산주의를 택했다. 당시 서구 주요 국가들이 일본의 조선 침탈을 묵인하는 국제 정세에서 조선인들의 정당 조직활동이나 빨치산(partisan) 투쟁에 금전적인 지원을 한 것은 국제공산당이 유일했다. 민족주의계열과 더불어 사회주의계열이 독립운동의 주요 흐름을 차지하게 된 원인이었다. 조봉암은 1957년 월간지 '희망' 2·3·5월호에 연재한 자서전 격인 '내가 걸어온 길'에서 일본 유학시절 사회주의에 심취하게 된 이유에 대해 이렇게 적었다."볼셰비키들은 국내에서 혁명을 성공했을 뿐만 아니라 모든 제국주의를 반대했고 특히 일본 제국주의의 한국침략을 반대하고 한국 독립을 적극적으로 원조한다는 것이며, 그 실증으로는 벌써 수십만 달러의 독립 원조자금을 상해 임시정부를 통해서 국내에 보냈다는 것이다. 우리 동지들은 그때야 비로소 소비에트 혁명의 내막을 약간 알게 되었고 따라서 우리나라가 일본과 싸워서 이기자면 우리 자신이 굳은 조직을 가져야 되겠고, 러시아와 협력하고 러시아의 지원을 받아야 되겠다고 작정했다."조봉암은 1932년 9월 중국 상하이 프랑스조계에서 체포돼 인천항을 통해 입국해 신의주경찰서로 압송됐다. 동아일보는 1932년 10월 1일자 신문에서 '제1차 공산당 간부 조봉암 작일 피체'라는 제목의 기사로 죽산의 체포 소식을 다루면서 "조봉암은 제1차 조선공산당 사건 때 외국으로 망명해 지금까지 있던 사람인데, 조선에 있을 때는 신흥청년동맹과 화요회 등에서 중요 간부로 활동하였다"고 설명했다. '내가 걸어온 길'에도 당시 상황이 언급됐다."벤치에 앉아서 담배를 피우고 있으려니까 나이 삼십 남짓해 보이는 중국복 입은 청년이 내 앞으로 다가서며 중국어로 담뱃불을 빌려달라고 하기에 나는 아무 말 없이 담뱃불을 내어 주었더니 그 자는 담뱃불을 붙이는 체하면서 내 손을 슬금슬금 훔쳐본다. 좀 기분이 나빴지만 그냥 무심히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그러자 난데없이 일본말로 '고꼬다요'(여기야)하는 소리가 들려서 정신이 번쩍 들어서 사면을 둘러보니 벌써 일본 놈 서넛이 내 앞에 서 있었고 전후좌우에 양복 입고, 사진기를 어깨에 둘러멘 놈들이 내 편을 향해서 모여들고 있지 않은가. (중략) 벌써 수십 명 왜놈 가운데 둘러싸여 있었고 불란서 형사 한 명이 내 손목을 잡고 있었다."치안유지법 위반 등 혐의로 기소된 조봉암은 1933년 12월 신의주지방법원으로부터 징역 7년을 선고받고, 신의주형무소에 수감됐다. 감옥에서 6년을 보내고 1939년 7월 출소했다. 일본 황태자 탄생에 따른 은사(恩赦)조치로 1년이 감형됐다.조봉암은 출소 이후 인천에 정착했다. 강화 출신 김이옥(1905~1933) 여사와 상하이에서 함께 살 때 낳은 어린 딸이 인천에 있는 먼 친척에게 맡겨져 있었다. 앞서 김이옥 모녀는 1933년 5월 귀국해 강화 친정에서 지냈는데, 그해 10월 김이옥은 지병이 악화해 세상을 떴다. 당시 인천 금곡동과 창영동 쪽에는 창녕 조씨 집안이 많이 살았다고 한다. 또 조봉암이 서울에서 YMCA 중학부에 다닐 때 그를 따랐던 박남칠(1902~1950)이 인천 미곡상조합 조합장으로 지역 상공업계의 거물로 성장해 있었다. 미곡상과 객주업을 한 김용규 등 '강화구락부' 출신 지역 유지들도 조봉암에게 우호적이었다. 이들은 인천상공회의소 간부이자 지역 시민운동을 주도하는 인물들이었다.죽산의 후원자들은 인천 소화정(부평구 부평동)에 집을 얻어줬고, 생계를 꾸릴 수 있도록 인천비강업조합을 설립해 넘겨줬다. 비강업은 정미소에서 벼를 찧을 때 나오는 왕겨를 모아 사료나 연료로 공급하는 업종이다. 사무실은 현재의 신포시장 건어물거리 쪽에 있었는데, 인천경찰서 고등계 형사가 상주하다시피 조봉암을 감시했다고 한다. 당시에도 일본은 조봉암에게 전향하라고 끊임없이 회유하고 있었다. 1942년에는 현 중구 도원동에 있는 부영(府營)주택으로 이사했다. 인천부(仁川府)가 1940년 직접 지어 분양한 도원동 부영주택은 지금까지도 일부가 남아있다.일제의 감시가 심했던 인천 시절 죽산은 박남칠, 김용규, 유두희(1901~1945), 권평근(1900~1945), 이승엽(1905~1953) 등 좌익계열 인사들의 사상적인 지주로서 합법적인 사회운동에 집중했던 것으로 보인다. 죽산은 1945년 1월 '사상범 예비구금령'으로 구속돼 또다시 용산 헌병사령부에 갇혔다. '외국과 통신했다'는 이유였다. 그해 8월 15일 죽산은 헌병사령부 감옥에서 해방을 맞이했다.국가보훈처는 조봉암이 해방 전 인천에 살던 시기에 친일의 흔적이 있다며 죽산에 대한 서훈을 보류하고 있다. 논란이 되고 있는 친일의 흔적이란 조선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에 실린 1940년 신년광고 1건과 1941년 연말의 기사 1건이다. 매일신보 1940년 1월 5일자 신문에는 '흥아신춘'(興亞新春)이라는 신년광고에 '인천부 본정 내외미곡직수입 성관사 조봉암 방원영'이라는 문구가 실렸다. 매일신보 1941년 12월 23일자 기사에서는 '인천부 서경정에 사는 조봉암씨는 해군부대의 혁혁한 전과를 듣고 감격하여 지난 20일 휼병금으로 금150원을 인천서를 통하여 수속하였고'라는 내용을 보도했다.하지만 '조봉암 평전'을 쓴 이원규 작가는 해당 광고와 기사를 신뢰하기 어렵다고 분석했다. 1933~1934년 인천상공회의소 편람에는 매일신보 신년광고에 등장한 '성관사'라는 업체가 없고, 동업자로 이름을 올린 방원영에 대한 기록도 찾을 수 없다. 죽산의 서훈과 관련한 결정적인 논란은 국방헌금 150원이다. 우선 조봉암은 서경정(현 중구 내동)에 산 적이 없고, 기사가 보도될 당시에는 부평에 살고 있었다. 이원규 작가는 일본자료 등을 바탕으로 당시 150원을 지금 돈으로 환산하면 3천만~4천만원의 가치였을 것으로 보고 있다. 조봉암이 비강업조합을 맡고 있었지만, 국방헌금을 150원이나 낼 형편은 되지 않았다. 숭의동에 살았던 조봉암의 처남 김영순씨는 이원규 작가와의 인터뷰에서 "150원은 커녕 10원도 내기 어려운 형편"이었다고 회고했다. 죽산이 1952년 7월께 그의 죽마고우이자 독립유공자이기도 한 조광원(1897~1972) 신부를 만난 자리에서도 "비강업조합장 자리가 감옥살이보다 힘들었다"며 "걸핏하면 헌금 내라고 시달렸는데, 주변에서 알아서 해줬다"고 말했다는 증언도 있다.무엇보다도 죽산이 친일을 했다면 1945년 1월 예비구금령으로 체포돼 8월 15일까지 갇혀 있을 이유가 없었다는 게 연구자들 시각이다. 죽산이 헌병사령부로 끌려갈 때 부인 김조이(1904~ ?) 여사는 "전쟁에 불리해지니까 말 안 듣는 사람들을 끌어다 죽이려는 것"이라고 말했다고 처남 김영순씨가 증언했다. 죽산이 풀려난 8월 15일 도원동 부영주택으로 올라가는 언덕이 1천명 이상의 환영 인파로 덮였다고 한다. 조봉암이 친일이었다면 환영이 아닌 민중의 지탄을 받았을 것이다. 죽산은 자신의 집을 찾아온 청년들을 주축으로 인천보안대를 결성하고, 여운형과 함께 건국준비위원회 인천지부를 조직했다.더군다나 해방 이후 박헌영 등이 조봉암을 축출하려고 맹공을 퍼부을 때도 매일신보의 국방헌금 기사는 언급조차 하지 않았다. 이원규 작가는 "죽산이 국방헌금을 냈다면 일본의 선전 도구가 되어 신문에 크게 실리고 강연회에 불려다녔을 것"이라며 "불확실성이 가득한 1건의 기사 내용보다는 죽산이 남긴 커다란 업적에 더 주목해야 한다"고 말했다. /박경호기자 pkhh@kyeongin.com2017년 7월 31일 서울 망우리공원 죽산 묘역에서 열린 조봉암의 58주기 추도식장에 처음으로 '대통령 화환'이 왔다. 이후 문재인 대통령은 올해 60주기 추도식까지 3년째 화환을 보내고 있다.중국 상하이에서 사회주의 운동을 펼치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된 조봉암을 다룬 동아일보 1933년 2월 25일자 신문기사. 기사 속 사진은 조사를 받을 당시 조봉암. 출처/네이버 뉴스라이브러리죽산 조봉암 선생의 생전 법정에서의 모습. 이른바 '진보당 사건'으로 이승만 정권으로부터 '사법 살인'을 당한 죽산에 대해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2011년 재심에서 무죄를 선고했다. /경인일보DB조선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보' 1941년 12월 23일자 신문에는 조봉암이 국방성금 150원을 냈다는 기사가 실렸다. 친일 흔적으로 보기엔 신뢰성이 떨어진다는 게 연구자들 시각이다. 출처/국립중앙도서관조봉암 가족이 1942년부터 해방 이후인 1948년까지 살았던 인천 중구 도원동 부영주택. 현재 대부분 헐리고 일부만 남았다. /경인일보DB

2019-08-07 박경호

[현장에서]인천바로알기종주 동행

지난달 28일부터 지난 3일까지 6박 7일 일정으로 중·고교 학생 34명이 서해5도 백령도·대청도를 걷는 인천바로알기종주대회에 동행했다.19회째를 맞은 올해 인천바로알기종주는 내륙을 걷던 지난 코스와 달리 모든 일정을 서해5도에서 소화했다. 백령도에서 2박 3일 머물고, 대청도에서 3박 4일을 보냈다. 인천의 청소년들이 북한을 코앞에 둔 서해 최북단 섬을 찾아 남북 분단의 현실을 체감하고, 그 역사적 의미를 되새겼다.울산에서 태어나 20년을 산 기자에게도 서해5도는 TV 화면으로만 접했던 낯설고 먼 곳이었다. 한반도 남동쪽 끝자락인 동해안 울산에서 서해 최북단 백령도까지 직선거리는 493㎞에 달한다. 울산에서 인천까지 승용차로 4시간 30분이 걸리는데, 인천항에서 여객선을 타고 백령도까지가 딱 그 시간이 걸렸다. 인천에서조차 울산에서 인천만큼이나 멀고 먼 곳이 백령도라는 것을 섬에 발을 딛고서야 새삼 깨달았다. 인천에서 나고 자란 종주단원 대다수도 백령도와 대청도는 처음이라고 했다. 첫날 백령도 사곶해수욕장과 콩돌해안을 둘러본 학생들은 평소 봤던 인천 앞바다와 크게 다른 게 없다는 푸념 속에 하루 일정을 마무리했다. 기대가 컸던 모양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달라졌다. 손꼽아 기대했던 점박이물범을 보고, 대청도 농여해변에선 직접 물고기를 잡으며 내리쬐는 햇볕에 팔과 다리가 익어가는 것도 모른 채 시간을 보냈다. 학생들은 해안가를 걷는 내내 어렴풋이 무언가가 보일 때마다 "저기가 북한 맞나요?"라고 되물었다.마지막 날 밤에는 대청도 대청고등학교 숙영지 뒷산에 별을 보러 나섰다. 학생들은 "제주도, 강원도 속초 등 여러 곳에서 봤던 별 중에 쏟아지는 듯한 대청도 하늘의 별이 가장 밝았다"며 "접경지역에 있는 섬들은 군사요충지로 위험할 거라는 생각뿐이었는데, 사실 내가 사는 곳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점을 알았다"고 했다.종주단원들은 백령도와 대청도 100여㎞ 구간을 완주했다. 백령도에서는 사곶해변, 콩돌해안, 남포리와 두무진을 걸었다. 대청도에서는 동백나무 자생북한지, 서풍받이 등을 거쳤다. 저마다 새긴 의미가 남달랐다고 한다. 학생들은 다시 백령도와 대청도를 찾을 때 남북이 가로막혀 멀기만 한 외진 섬이 아닌 남북을 연결해 가까이 두고 갈 수 있는 섬이 되길 바랐다. /박현주 인천본사 사회부 기자 phj@kyeongin.com박현주 인천본사 사회부 기자

2019-08-05 박현주

[인천바로알기종주 19번째 발걸음]낙오자 한명없이 100㎞ 섬여정 완주… 대원들 값진 성장

잠자리·빨래 등 모든일은 스스로지친 친구들 서로 응원 우정 돈독"내고장 이렇게 아름다운 곳이…"자부심 한껏 느끼며 대장정 매듭제19회 인천바로알기종주대회가 지난 3일 오후 10시께 최종 목적지인 연안여객터미널 도착으로 6박7일간의 대장정을 마무리했다.사곶해수욕장과 콩돌해안은 물론, 남포리, 두무진 등 백령도 곳곳과 동백나무자생북한지, 모래울해변 등이 있는 대청도를 걸으며 100여㎞를 완주한 종주단원들에게 이번 종주는 저마다 새겼던 의미가 남다른 여정이었다. 이치훈(상정중3·15)군은 "새로운 친구들을 만날 기회가 없었는데 종주에서 많은 친구들을 사귀고 이야기를 나눠 좋았다"며 "또 새벽에 일어나 직접 이부자리를 정리하고, 빨래도 내 손으로 했는데, 앞으로는 집안일을 도맡아 했던 부모님을 많이 도와드려야겠다고 다짐했다"고 말했다. 이번 종주가 3번째인 심우혁(인천기계공고1·16)군은 "섬 종주는 처음이었는데 인천에 이렇게 아름다운 곳이 있는지 몰랐다"며 "모르는 친구들 밖에 없어서 낯설었지만 단원들이 지칠 때마다 서로 응원해주며 돈독해졌다"고 했다.종주 마지막날은 기상 상황이 좋지 못해 예정됐던 소청도 일정이 취소됐다. 하지만 삼각산 일대 등 미처 둘러보지 못한 대청도 구석구석을 살필 수 있었다. 숙소로 돌아온 학생들은 체육관에서 공놀이를 즐긴 뒤 다시 만날 날을 정하며 아쉬운 시간을 보냈다. 김지호(부평고1·16)군은 "제주도와 강원도, 속초 등 여러 곳에서 봤던 별들 중에 쏟아지는 듯한 대청도 별이 가장 밝았다"며 "대청도의 별 풍경은 이번 종주 중 가장 기억에 남을 추억"이라고 했다.앞선 6일차엔 국가지질공원으로 지정된 농여해변에서 나이테 바위를 볼 수 있는 시간이 마련됐다. 겹겹이 쌓인 지층이 나무를 잘랐을 때 보이는 테와 닮았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 단원들은 이곳에서 물놀이를 즐긴 뒤 직접 그물을 쳐 물고기를 잡았다. 저녁식사 후엔 조별 장기자랑이 진행됐다. 종주단원들은 종주 틈틈이 갈고 닦았던 실력을 뽐냈다. 귀여운 춤으로 1위를 차지한 3조의 단원 이원진(벤자민인성영재학교·17)군은 "처음에는 율동이 어려워 조원들이 힘들어하고 불만도 있었지만 서로 격려해주며 잘 마무리했다"며 "상금으로 친구들에게 맛있는 밥을 사겠다"고 소감을 말했다.1주일간 종주단원들을 이끈 이동열 인천바로알기종주단장은 "단원들이 인천에 있는 아름다운 섬들을 직접 걸으면서 우리지역에 대한 자부심을 느끼고, 공동체 생활 속에서 함께 하는 법을 배우는 시간이 됐으면 한다"며 "모두 건강하게 종주를 마쳐서 기쁘고 자랑스럽다"고 했다. 한편 인천바로알기종주단은 오는 31일 해단식을 갖고 올해 종주를 마무리할 계획이다. /박현주기자 phj@kyeongin.com종주 단원들이 지난 2일 대청도 농여해변 나이테바위 앞에서 설명을 듣고 있다. 단원들은 3일 오후 종주를 마쳤다./박현주기자 phj@kyeongin.com

2019-08-04 박현주

[zoom in 송도]송도 6공구 공동주택용지 'A12블록' 개발방향

'A10' 예정가격 두배 5110억 낙찰인공호수·바다조망 입지 더 우수'A12 부지' 매각여부에 관심 쏠려온라인 커뮤니티·인근 입주민들"조망권 침해… 아파트 건립반대"경제청 "주민·의회 논의후 결정"인천 송도국제도시 6공구 공동주택용지 A10블록이 최근 낙찰가율 185.95%를 기록하면서 인근 A12블록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A12블록은 송도 워터프런트 1단계 구간인 인공호수와 접해 있는 공동주택용지로, 입지 여건이 좋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최근 인천시가 일반경쟁입찰 방식으로 공급한 공동주택용지 A10블록(10만2천444.6㎡)은 185.95%의 낙찰가율을 기록했다. 낙찰가율은 매각 예정가(최저 입찰가) 대비 낙찰가 비율을 말한다.A10블록은 매각 예정가(2천748억3천27만원)에 두 배 가까운 5천110억5천100만원에 낙찰됐다. 3.3㎡당 약 1천646만원이다.인천시 산하 인천경제자유구역청에 따르면 송도 공동주택용지와 주상복합용지 낙찰가는 3.3㎡당 1천만원 안팎이다.주상복합용지가 공동주택용지보다 비싸게 팔리는데, 1천600만원을 넘은 적은 없다고 한다. 이 때문에 일각에선 송도 땅값이 서울 등 인근 지역보다 상대적으로 저평가 돼 있다는 목소리도 나온다.A10블록이 예상보다 높은 가격에 낙찰되면서 A12블록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 위치도·표 참조A12블록은 인천시와 송도랜드마크시티유한회사(SLC)가 2015년 1월 체결한 사업계획조정 합의서에 포함된 땅이다. 사업계획조정 합의서에는 SLC가 송도 6공구 7개 필지 34만㎡를 개발하게 돼 있다. 그런데 7개 필지 면적을 합하면 40만㎡가 된다. 7개 중 1개 필지에 대한 개발권은 인천경제청에 넘겨야 하는 것이다.인천경제청과 SLC는 A12블록(5만3천904.5㎡) 개발권을 인천경제청에 넘기는 것으로 잠정 합의한 상태다.SLC는 A15블록(5만9천636㎡) 개발권을 주려고 했으나, 인천경제청이 A12블록을 요구했다. A12블록이 북쪽으로 상업용지와 접해 있는 데다, 워터프런트 구간인 인공호수 정면에 위치하기 때문이다. 인천경제청과 SLC는 사업계획조정 합의서 변경을 통해 A12블록 개발권 이양을 확정할 계획이다.인천경제청이 A12블록을 어떤 방향으로 개발할지는 아직 결정되지 않았다. '토지 매각을 통한 개발 재원 확보'와 '송도 워터프런트 연계 방안' 등 두 가지를 모두 고려해야 하기 때문에 논의해야 할 부분이 많다.현재 A12블록은 공동주택용지로, 662가구(1천760명)를 수용할 수 있다. 현 계획대로 매각하면, 개발 재원 확보에 큰 도움이 될 것으로 보인다. 바다·인공호수·골프장 조망이 가능한 데다, 초등·중학교가 매우 가깝다. 최근 높은 낙찰가율을 기록한 A10블록보다 입지 여건이 좋다는 평가도 있다.문제는 공동주택의 경우 일반 시민들의 접근이 제한적이라는 점이다.송도 워터프런트 구간인 인공호수와 연계해 공간의 개방성·공공성을 높여야 한다는 의견이 있는 것이다.예를 들면 아파트 층수를 높이는 대신 동(棟) 간 거리를 넓혀 인공호수 조망을 극대화하는 방안, 주상복합용지로 변경해 일부 공간을 시민들이 이용할 수 있도록 하는 방안이 있다.송도 온라인 커뮤니티 '올댓송도'는 A12블록에 송도 워터프런트 관련 시설을 조성해달라고 요구하고 있다.민간에 매각해 주거시설로 채우지 말고, 워터프런트 시설 공간으로 활용해야 한다는 것이다.A12블록 인근 아파트 입주민들도 인공호수 조망권 침해를 우려하며 아파트 건립에 반대하고 있다. 이에 대해 인천경제청 한 관계자는 "개발 재원 확보 측면도 고려해야 한다"며 "인천경제청 내부 논의와 인천시의 정책 결정이 필요하겠지만, 땅을 매각하지 말라는 요구는 수용하기 어려울 것 같다"고 말했다.인천경제청이 A12블록을 매각하기로 결정한다면, 설계 공모 방식이 적용될 것으로 보인다. 설계 공모 방식은 입찰 금액과 설계 등을 종합적으로 평가해 높은 점수를 받은 업체에 땅을 매각하는 것이다. 획일적인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는 것을 막을 수 있어 도시 경관 향상에 도움이 된다.인천경제청은 최근 설명자료를 통해 "송도 경관 향상을 위해 6·8공구 공동주택용지를 설계 공모 방식으로 매각하는 방안을 검토할 계획"이라면서 "매각 방식과 시점은 지역 특성과 여건, 장단점 등 여러 가지 상황을 고려해야 하는 만큼 면밀한 검토와 주민·시의회·전문가 의견 등을 수렴해 최종 결정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목동훈기자 mok@kyeongin.com

2019-08-04 목동훈

[인천바로알기종주 19번째 발걸음]동백나무 자생 최북단 대청리돌아… 단원들 모처럼 모래울해변 물놀이

광난두정자각·서풍받이 잇단 절경강행군 발 물집잡혀도 "완주" 결연인천바로알기종주대회 종주단원들은 새 숙소인 대청고등학교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5일차 일정을 시작하기 위해 새벽 6시부터 분주하게 짐을 꾸렸다.첫 목적지는 매바위 전망대였다. 이곳에 서면 수리봉이란 바위가 한눈에 들어오는데, 해안가를 향해 날개를 펼치고 누워있는 매의 형상을 하고 있다고 해서 매바위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단원들은 계속되는 종주에 발에 잡힌 물집과 습진 등으로 힘들어하면서도 구호를 외치며 전망대로 발걸음을 옮겼다. 전지성(송도고1·16)군은 "어제부터 다리에 땀띠가 나서 계속 치료를 받으며 걷고 있다"며 "그저께 마지막 코스 3㎞를 남겨두고 아파서 못 걸었는데 너무 아쉬웠다. 남은 일정은 꼭 끝까지 함께 할 것"이라고 했다. 전군은 이어 "걸으며 길가에 핀 꽃들과 풀숲에 있던 뱀과 염소도 봤는데 내가 사는 곳에선 쉽게 볼 수 없는 것들이라 조금 힘들긴 해도 즐거웠다"고 했다. 단원들은 매바위 전망대를 지나 대청리에 있는 동백나무 자생북한지에 도착했다. 이동열 인천바로알기종주단장은 "우리나라 동백나무 군락지 가운데 가장 북쪽에 있는 곳"이라며 "주로 따뜻한 남쪽 해안인 제주도나 거제도에서 자라는 나무"라고 설명했다.이번에 처음 동백나무를 본다는 학생들이 꽤 많았다. 단원들은 동백나무를 둘러본 뒤 인근 모래울해변에서 물놀이를 즐기고 점심을 먹었다. 문상규(만수고1·16)군은 "대청도 바다는 맑고 깨끗한 데다 사람들이 붐비지 않아 친구들과 여유롭게 시간을 보냈다"며 "모래사장도 워낙 부드러워 밟을 때마다 바스락거렸는데 나중에도 기억에 남을 것 같다"고 했다.단원들은 해변을 지나 광난두정자각과 서풍받이를 향해 발길을 옮겼다. 서해로 불어오는 바람을 막아준다는 뜻을 가진 서풍받이는 해안 절벽에 둘러싸여 있어서 볼거리가 많았다. 오후 6시께 일정을 마치고 숙영지에 도착한 학생들은 하루를 정리하며 내일 열릴 장기자랑 준비에 나섰다. /박현주기자 phj@kyeongin.com■ 2일(금) 일정 : 대청고~미아동해변~농여해변~옥죽동~옥죽동해변~대청6리~대청성당~대청고등학교인천바로알기종주 단원들이 대청도 모래울해변에서 물놀이를 하고 있다. /박현주기자 phj@kyeongin.com

2019-08-01 박현주

[독립운동과 인천·(22)]강화 출신 죽산 조봉암·(上)

박남춘 시장·송영길 의원 등 추모식 참석… "서훈 문제 조속히 해결"독립운동가이자 한국 정치계의 거목, 죽산 조봉암(1899~1959) 선생의 60주기 추모식이 31일 오전 11시 서울 중랑구 망우리 공원묘역에서 죽산조봉암선생기념사업회와 죽산조봉암선생유족회 주최로 엄수됐다. 이날 추모식에 참석한 주요 정치권 인사들은 하루빨리 죽산 조봉암 선생의 서훈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목소리를 높였다.이날 죽산의 60주기 추모식에는 어김없이 인천사람들이 대거 참석했다. 추모식에는 곽정근 죽산조봉암선생기념사업회 회장과 유족, 박남춘 인천시장, 송영길·박찬대 국회의원, 지용택 새얼문화재단 이사장, 차준택 부평구청장, 김교흥 전 국회 사무총장, 홍미영 전 부평구청장, 이부영 몽양여운형선생기념사업회 회장, 조성혜·조선희 인천시의원, 조동암 전 인천시 정무부시장, 이영재 경인일보 인천본사 사장 등이 참석했다.문재인 대통령은 3년째 추모식에 화환을 보내 죽산의 뜻을 기렸다. 문희상 20대 국회 후반기 의장, 정세균 20대 국회 전반기 의장, 더불어민주당 이해찬 대표, 바른미래당 손학규 대표, 민주평화당 정동영 대표, 정의당 심상정 대표, 윤관석 더불어민주당 인천시당위원장, 이정미 국회의원 등 정치권 인사들이 보낸 화환도 묘소 주변을 빼곡하게 둘렀다.인천시는 올해부터 죽산의 추모식 행사비용 후원을 재개했다. 그동안에는 새얼문화재단이 행사비용을 보태왔다. 인천시는 추모식에 앞서 죽산 묘역을 재정비하고 주변 경관을 개선했다. 새얼문화재단을 중심으로 조봉암 선생 석상 건립사업도 본격화할 예정이다. 박남춘 인천시장은 이날 추도사에서 "무엇보다 선생의 독립유공훈장 추서가 빠른 시일 내에 이뤄질 수 있도록 관련 기관, 단체와 함께 노력하겠다"며 "선생의 명예를 회복하고, 후손들에게 올바른 역사를 알릴 수 있도록 각별히 신경쓰겠다"고 말했다. 송영길 의원도 "주최 측이 매번 추도사를 요청하는 것은 죽산 선생의 서훈 문제를 빨리 해결하라는 요청이라고 이해하고 있다"며 조봉암 선생의 독립유공자 추서에 적극적으로 나서겠다고 강조했다. /박경호기자 pkhh@kyeongin.com한국 정치의 거목 죽산 조봉암 선생의 60주기 추모식이 열린 31일 오전 서울시 중랑구 망우리 공원묘역에서 박남춘 인천시장과 더불어민주당 송영길 국회의원이 헌화를 하고 있다. /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

2019-07-31 박경호

[인천바로알기종주 19번째 발걸음]빗속 뚫고 하나된 강행군 "우리모두 친구"

고된일정 노래부르며 서로 격려하늬해변 물범바위앞 도착 일행인천 마스코트 실물 보는 즐거움옥죽포 사구보며 국내최대 실감종주 4일째를 맞이한 단원들은 새벽 기상에도 피곤한 기색 없이 숙소를 정리하고 목적지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1시간을 걸어 사곶해변에 이르자 흩날리던 빗방울이 굵어졌다. 단원들은 각자 가져온 각양각색의 비옷을 입었다. 이번이 두번째 종주라는 백상훈(관교중3·14)군은 "2년전 참여했을 때 첫날 비가 내려서 신발이 다 젖었던 기억이 있다"며 "두번째 종주인만큼 이번에는 신발 방수커버도 챙기며 만반의 준비를 했다"고 했다.서먹해하던 학생들은 어느덧 힘든 종주를 함께 하는 친구가 됐다. 단원들은 노래를 부르며 서로를 격려했다. 하늬해변 철책선을 따라 걷던 단원들은 손꼽아 기다렸던 물범바위 앞에서 멈췄다. 백령도 북동쪽 해안에서 800m가량 떨어진 이 바위는 점박이물범들이 가장 선호하는 휴식처로 알려져있다. 점박이물범은 천연기념물 331호로 서해권역에서 활동하며 백령도에는 매년 200~400여마리가 찾아온다고 한다. 정유나(벤자민인성영재학교·18)양은 "인천시 마스코트도 점박이물범이라 인형을 살만큼 좋아하는데 볼 수 있는 기회가 생겨 정말 기쁘다"며 "점박이물범은 전세계에서 얼마 없는 희귀한 종으로 알고 있는데 백령도 앞바다에 오랫동안 머물다 갔으면 좋겠다"고 했다.용기포신항에서 배를 타고 30분 걸려 도착한 대청도는 새하얀 모래사장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전체 면적이 축구장 70배 크기인 66만㎡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하는 이곳 옥죽포 해안사구도 해변에서 날아온 모래가 수만년동안 쌓여 형성됐다. "모래 서말은 먹어야 시집을 갈 수 있다"는 대청도 주민들 말을 실감할 수 있는 곳이다. 단원들은 바람이 부는 해안사구에 새겨진 다양한 무늬를 찾으며 시간을 보낸 뒤 대진동해변을 지나 대청고등학교에서 하루를 마무리했다. 권택함(부평서중1·13)군은 "할아버지 댁이 대청도라 명절과 방학 때 자주 와서 잘 안다고 자부했는데 친구들과 구석구석 걸으며 몰랐던 곳도 많아서 놀랐다"며 "오랫동안 걷는 게 힘들 때도 많았지만 새로 사귄 친구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오늘 일정을 잘 마무리했다는 생각에 뿌듯함이 크다"고 했다. /박현주기자 phj@kyeongin.com■ 1일(목) 일정 : 대청고~서내동~러브브릿지~동백나무자생북한지~모래울해변~광난두정자~서풍받이~고주동~대청성당~대청고등학교제19회 인천바로알기종주대회 종주단원들이 '서해최북단백령도' 기념비 앞에서 사진촬영을 하고 있다. /박현주기자 phj@kyeongin.com

2019-07-31 박현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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