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인천)

[zoom in 송도]민주당 연수구을 지역위 '마리나 복합리조트 개발 세미나'

계류시설 위주 개발로 국내인프라 열악워터프런트 연계 수로 선박 운항등 적합이재훈 박사, 관광·산업등 복합형 제안해수부 관할인 항만 배후부지 '10공구'"2차 계획에 반영" 인천시 설득 숙제로인천 송도국제도시 10공구에 마리나 복합리조트를 조성해야 한다는 의견이 제기돼 실현 여부에 관심이 쏠린다. 인천경제자유구역청의 송도 워터프런트 조성사업과 연계해 마리나 관련 산업을 육성해야 한다는 것인데, 이를 위해선 풀어야 할 과제도 적지 않다.더불어민주당 연수구을지역위원회(위원장·정일영)는 최근 송도국제도시 인천글로벌캠퍼스 세미나실에서 '인천송도마리나 복합리조트 개발 세미나'를 열었다. 이 세미나에선 송도 10공구가 마리나 복합리조트의 최적지라는 의견이 나왔다. 송도 10공구에 마리나 복합리조트 조성을 추진하려는 움직임은 예전부터 있었지만, 이를 주제로 세미나가 열린 건 이번이 처음이다. 민간에서 검토해온 송도 10공구 마리나 복합리조트 조성계획이 수면 위로 떠오른 셈이다. 송도 10공구가 마리나 복합리조트 조성 대상지로 논의되는 이유와 과제를 정리했다.■ 송도 10공구는 마리나 최적지한국교통연구원 이재훈 박사는 세미나 기조 발제에서 "송도 10공구는 수도권에 위치해 마리나 수요가 충분하고 접근성도 우수하다"고 강조했다. → 지도 참조이재훈 박사 발표 내용에 따르면 국내 레저용 선박(요트·보트 등)은 2007년 3천944척에서 2017년 약 2만5천척으로 연평균 20.3% 증가했다. 2017년 한 해 동안 수상레저 조정 면허를 취득한 사람은 2만1천596명으로, 2007년 이후 연평균 10% 늘고 있다.레저용 선박과 면허 취득자의 수도권 비중은 각각 20.7%, 32.1%라고 한다. 하지만 국내 마리나 인프라는 열악하다. 마리나 대부분이 계류시설 위주로 개발되고 있으며, 급유와 수리 등 서비스 시설이 부족하다. 중국의 마리나는 적게는 600척에서 많게는 1천466척까지 수용하는데, 국내 마리나의 규모는 300척 수준에 그친다.이 박사는 "우리나라 마리나는 접근성이 나쁘다. 도심형 마리나가 부족하다"면서 "마리나가 주차장(계류시설) 역할만 해서는 경제적 효과가 없다"고 했다. 외국은 마리나 계류시설 주변에 산업단지, 리조트, 쇼핑시설, 인력 양성 기관을 조성해 경제적 효과를 극대화한다는 게 이 박사의 설명이다.이 박사는 송도 10공구를 마리나 복합리조트 조성의 최적지로 봤다. 서울과 경기 지역에서 철도와 도로 등 교통수단을 이용해 접근하기 편리하고, 항만과 공항이 있기 때문에 지경학적으로 좋은 위치에 있다는 것이다.특히, 송도 남측 수로는 길이와 너비가 선박 운항에 적합하며, 파도가 거의 없어 안전하다는 장점이 있다.■ 송도에 복합형 마리나 개발 필요이재훈 박사는 송도 워터프런트와 연계한 복합 기능의 마리나 조성을 제안했다.계류시설 주변에 숙박시설과 상업시설을 조성해 레저·관광·휴양·쇼핑·산업·연구 기능을 갖춘 복합형 마리나로 개발해야 한다는 것이다.송도 워터프런트 조성사업은 기존 호수와 수로를 연결해 'ㅁ'자 형태의 물길(길이 16㎞, 너비 40~300m)과 그 주변에 친수 공간을 만드는 대형 프로젝트로, 송도 10공구 앞 수로가 2단계 사업(송도 남측 수로) 구간이다. 향후 송도 워터프런트 조성사업과 GTX-B 노선 건설사업이 완료되면, 마리나 복합리조트 수요와 경제적 효과가 더욱 커질 것으로 이 박사는 내다봤다.이 박사는 "인천은 도심과 항만이 공존하는 지역"이라면서 "워터프런트, 산업체와 연계해 마리나 복합리조트의 가치를 높이고, 관련 산업을 인천의 신성장 동력으로 만들 필요가 있다"고 했다.그는 송도 10공구 마리나 복합리조트 개발사업에 6천788억원이 들 것으로 추산했으며, 예상 B/C(비용편익)값이 기준치(1.0)보다 높아 사업 타당성이 있을 것으로 전망했다.■ 풀어야 할 과제는송도 10공구 마리나 복합리조트 개발을 위해선 사업계획이 해양수산부의 '제2차 마리나항만 기본계획'에 반영돼야 한다. 또한, 항만 배후 부지인 송도 10공구는 해수부 땅이다. 사업 추진을 위해선 인천시 주요 정책 사업에 포함돼야 하는 데다, 해수부 등 관계기관을 설득해야 하는 것이다. 인천시가 송도 10공구 마리나 복합리조트 개발계획을 마리나항만 기본계획에 반영해달라고 해수부에 신청해야 한다.제2순환고속도로 구간인 '인천~안산 고속도로'(타당성 조사 중) 건설계획을 수정해야 하는 문제도 있다.선박이 송도 10공구 마리나와 송도 남측 수로를 안전하고 자유롭게 통항하기 위해선 인천~안산 고속도로 일부 구간을 교량으로 설치하는 등 고속도로 높이 및 선형을 변경해야 한다. 이는 사업비 증가로 이어지기 때문에 국토교통부와 기획재정부에서 반대할 수 있다.'마리나항만 기본계획 반영'과 '인천~안산 고속도로 설계 변경'이 이뤄져도 민간투자사업 적격성 조사 등의 절차를 거쳐야 하기 때문에 사업이 본격화하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릴 것으로 보인다. /목동훈기자 mok@kyeongin.com

2019-11-17 목동훈

[인천경영포럼]김정호 "4차산업혁명 키워드는 초연결·초지능"

인공지능 통해 빅데이터 활용금융비용 절감에 경쟁력 강화김정호 KAIST 전기전자공학부 석좌교수는 14일 "인간이 태어날 때부터 죽을 때까지 모든 순간이 데이터이며, 이를 잘 활용하는 기업이 도약할 것"이라고 강조했다.김 교수는 이날 라마다 송도호텔에서 열린 인천경영포럼 제413회 조찬강연회에 강사로 나와 "4차 산업혁명은 '초연결'과 '초지능'이라는 단어로 요약할 수 있다"면서 "모든 사물과 기계, 인간을 연결해서 데이터로 만드는 것이 초연결이며, 데이터를 인공지능으로 판단·예측하는 '초지능'을 활용하면 강한 경쟁력을 가지게 된다"고 설명했다.그는 "유튜브, 구글, 페이스북, 자율주행차 등은 모두 데이터를 수집하는 도구"라며 "많은 데이터를 가지고 있는 것이 경쟁력으로 이어지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구글이 자율주행차를 만들려는 이유는 자동차를 판매해서 돈을 벌겠다는 것이 아니라, 자율주행차를 통해 얻는 데이터를 활용하겠다는 의미"라고 덧붙였다.'빅데이터'를 활용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이 인공지능이다. 미국 유통기업 아마존은 어떤 제품이 언제, 어디서 팔릴지를 예측해 인근 물류창고에 물건을 갖다 놓는다. 이러한 시스템은 재고를 줄이고, 이는 금융 비용 절감과 경쟁력 강화로 이어진다. 이러한 것을 가능케 하는 것이 빅데이터와 인공지능이라는 게 김 교수 설명이다. 인공지능은 빠르게 발전하고 있으며 점차 사회 전 영역을 변화시킬 것이라고 했다.그는 "인공지능은 자신의 판단이 틀렸을 때 스스로 다시 학습해 오류를 줄이는 단계까지 와 있다"며 "이는 인간의 경제·생활·노동 등 많은 부분을 변화시킬 것"이라고 했다. 또 "창작의 영역에도 인공지능이 침투하고 있다"며 "음악과 미술 등 모든 예술은 과거의 작품을 모방하는 데에서 출발한다고 볼 수 있다. 인공지능은 과거의 작품을 학습하면서 새로운 작품을 만드는 영역까지 도달했다"고 했다.김 교수는 "생산라인에 인공지능을 활용해 생산성을 높이거나, 빅데이터와 인공지능 관련 제품·부품을 만드는 것이 기업 성장을 위해 필요하게 될 것"이라며 "미래에는 인간이 할 일이 많이 줄어들 것"이라고 했다. /정운기자 jw33@kyeongin.com김정호 KAIST 석좌교수는 14일 인천경영포럼 강연에서 "4차 산업혁명의 핵심은 인공지능과 빅데이터"라고 했다. /인천경영포럼 제공

2019-11-14 정운

[독립운동과 인천·(35)]송암 유경근

보신각 인근 강화 출신 주인이 운영임정 관계자 접촉장소 등 기록 눈길일제강점기 강화도 사람이 서울 종로에 차린 조선여관이 '독립운동 아지트'였다는 기록들이 있어 주목된다. 특히 조선여관은 강화 출신 독립운동가들의 활동 거점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강화도 출신 유경근(1877~1957)은 1919년 3·1운동 직후 고종의 다섯째 아들인 의친왕을 적통으로 내세운 해외 망명정부와 제2차 독립만세시위를 추진했던 '대동단'의 주역이었다.상하이 임시정부의 국내 연통제 조직 총책 역할도 한 독립운동가다. 유경근이 활동거점으로 삼으면서 비밀리에 여러 독립운동가를 접촉한 장소는 서울 종로 관철동 보신각 근처에 있었던 조선여관이다. 유경근은 조선여관에서 이동휘가 이끄는 독립군 지원자를 모집하고, 임시정부의 국내 연통제 조직을 꾸렸다.1919년 이른바 '대동단 사건'으로 경찰에 붙잡혀 재판에 넘겨진 유경근의 심문조서를 보면, 판사는 유경근에게 조선여관이 독립운동 획책소가 아니냐고 물었다. 유경근은 "여관 주인이 강화도 사람이라 강화 사람들은 그 여관에서 묵으므로 그곳에 가면 고향의 사정을 알 수 있어 자주 갔다"고 했다. 유경근이 체포된 이후 연통제 조직을 맡았던 강화 출신 윤종석(1896~1927)의 심문조서에도 판사가 조선여관은 경성에서의 조선독립운동본부가 돼 있었다고 언급한다. 윤종석은 "그러한 사실은 모른다"고 답했다.조선여관은 상하이 임시정부와 국내 독립운동가들을 잇는 장소이기도 했다. 임시정부 특파원인 명제세(1885~?)가 제2차 독립 만세 시위를 유경근과 논의하라는 지시를 받고, 중국 톈진에서 국내로 입국해 찾아온 곳도 조선여관이다. 유경근이 독립운동을 논의할 안전한 장소로 조선여관을 택한 것은 여관 주인과 '동향'이라는 연결고리가 있기 때문으로 보인다.관철동 조선여관에서 1920년 9월께 일제 앞잡이 처단 등을 목표로 무장봉기를 일으키는 '무장계획단' 조직이 논의됐다는 기록도 당시 판결문에 나왔다. 동아일보 1923년 6월 10일자에는 평남경찰서 경찰이 의열단원을 잡기 위해 경성에 들어와 관철동 조선여관을 포위하고, 투숙 중이던 의열단원 1명을 체포했다는 기사가 실렸다. 앞서 1923년 1월 의열단원인 김상옥(1890~1923)이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투척하고, 시내에서 총격전을 벌이기도 했다. 이처럼 일제의 감시가 삼엄한 시기 의열단원이 종로 한복판에 있던 조선여관에 머물렀다는 사실이 눈길을 끈다. /박경호기자 pkhh@kyeongin.com

2019-11-13 박경호

[독립운동과 인천·(35)]송암 유경근

독립군 지원자 모집해 만주로 보내는 일 맡아밀정 때문에 붙잡힌 '대동단 사건' 징역 3년형만세시위로 검거 등 공훈록 내용 사실과 차이병보석 중 신한촌 망명… 러시아에서도 활동강화에 학교 설립 등 교육운동가로도 알려져송암(松菴) 유경근(劉景根·1877~1957)은 1919년 3·1운동 직후 고종의 다섯째 아들인 의친왕의 해외 망명을 추진하고, '제2차 독립 만세 시위'까지 계획했던 비밀조직인 대동단(大同團)의 주역이었다.또 고향 강화도에서 민족교육운동을 펼친 교육자다. 정부는 그 공훈을 기려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유경근이 대동단은 물론 상하이 임시정부와도 긴밀하게 연결돼 국내외 항일투쟁을 매우 은밀하고 치밀하게 준비한 핵심 역할을 했다고 추정할 수 있는 당시 자료가 많다. 하지만 국가보훈처가 '독립유공자 공훈록'에 기록한 유경근의 행적은 사실관계가 다르거나 그 시점이 맞지 않는다.최근 유경근을 재조명한 몇몇 기록이 '독립유공자 공훈록'을 바탕으로 쓰이다 보니 그의 정확한 행적을 드러내지 못하고 틀린 부분도 있다.일제강점기 공문서와 신문기사 등을 근거로 유경근의 행적을 다시 정리할 수밖에 없는데 그 한계는 명확하다.공문서는 유경근이 이른바 '대동단 사건'으로 체포됐을 당시 여러 관계 인물의 신문조서, 공판기록, 판결문 등 일제의 시각을 반영한 기록이 대부분이기 때문이다.'독립유공자 공훈록'은 1919년 3월 18일 유경근이 강화군 읍내에서 독립선언서를 등사하고, 태극기를 제작해 독립만세를 고창했다고 썼다. 이때 주모자를 색출하자 서울로 피신했다가 붙잡혔으나, 일신상 문제로 보석됐다고 기록했다. 유경근이 강화 3·1 만세시위를 적극적으로 지원한 것은 사실로 보이지만, 강화 만세시위 때문에 체포됐거나 피신하기 위해 서울로 갔다고 한 내용은 신뢰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다.유경근은 1919년 7월 21일 전후로 일본 경찰에 체포됐다. 그는 1920년 2월 17일 서대문감옥 병감(病監)에서 판사의 심문을 받았다. 당시 44세였는데, 류마티스로 발로 설 수 없고 전신이 아프다는 사유로 법정에 가지 못했다. 직업은 광업이고, 주소는 경성부 공평동 153번지라고 답했다. 당시 6년 전부터 서울에 살고 있었고, 1919년 3월 1일 만세시위 때는 강화에 있다가 3월 말께 경성으로 돌아왔다. 대동단 산하 11개 지단 가운데 군인단 총대장을 맡고 있던 유경근은 만세시위가 아닌 독립군 지원자를 만주로 보내다 발각돼 체포됐다. 건강이 좋지 않아 1920년 2월 심문 이후 어느 시점에 주변인의 도움으로 보석금을 내고 병보석으로 풀려났다.유경근은 체포되기 전까지 서울 종로 관철동에 있는 조선여관을 중심으로 활동했다. 여러 신문조서를 보면, 조선여관은 강화 출신이 운영했기 때문에 강화 사람들이 많이 드나들었다. 유경근은 조선여관에서 강화 출신 조종환(1890~1937) 등 몇몇 인사와 접촉해 만주와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등지로 보낼 독립군 지원자를 모집했다. 유경근은 강화에서 함께 교육운동을 펼친 이동휘(1873~1935)와 각별했는데, 이동휘는 1919년 4월부터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독립군을 조직·훈련하고 있었다. 이동휘는 그해 9월 상해 임시정부 초대 국무총리에 선출됐다.유경근은 조종환 등의 소개로 노준, 현완순, 조규상, 고경진, 위계후 등 8명을 독립군 지원자로 모집했다. 1919년 7월 초순 독립군 지원자들을 차례로 신의주로 보냈는데, 양복을 입히고 여비까지 줬다. 독립군 지원자들을 보낼 때 유경근은 한글의 자음을 아라비아 숫자로 하고, 모음을 한자의 숫자로 하는 방식(예컨대 '7五'는 '소')의 암호까지 사용할 정도로 조직적이고 은밀하게 진행했다. 그러나 독립군 지원자 가운데 영광경찰서 '밀정'인 조규상이 잠입해 있어 유경근은 곧 붙잡혔다. 일제는 유경근이 상하이 임시정부에 참여한 이동휘의 지령을 받아 독립군 지원자들을 보내려 했다고 봤다. 이후 유경근의 행적으로 미루어 보아 당시에도 이동휘와는 밀접하게 연결돼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유경근은 대동단의 '제2차 독립 만세 시위' 계획과 관련해 해외 임시정부를 국내로 연결하는 연통제 조직의 총책이기도 했다. 중국 톈진에서 비밀조직인 불변단(不變團)은 임시정부 외곽단체였다. 불변단은 군자금을 모으고, 국내에서 첩보활동을 하는 '특파원' 역할을 했다. 불변단 단장을 지낸 명제세(1885~?)는 임시정부로부터 유경근을 만나 '제2차 독립 만세 시위'를 논의하라는 지시를 받고 1919년 9월 톈진에서 서울로 향했다. 관철동 조선여관에 도착한 명제세는 유경근을 만나지는 못했다. 유경근이 체포된 이후였기 때문이다.대신 명제세는 조선여관에서 세브란스연합의학전문학교(현 연세대 의대) 2학년에 재학 중인 윤종석(1896~1927)을 만나 국내 비밀단체들과 접촉했다. 강화 출신인 윤종석은 당시 유경근의 서울 연통제 임무를 이어받았고, 건강이 좋지 않은 유경근의 보석을 위해 주요 인사들을 만나 모금활동을 하기도 했다. 1919년 10월은 '제2차 독립 만세 시위' 계획으로 국내외 독립운동조직들이 급박하게 움직이던 시기다. 애초 거사일은 그해 10월 31일이었다. 윤종석은 상하이나 만주에서 입국한 인사가 민강(1884∼?)의 집으로 와서 "가용 청심환을 달라"는 암호를 말하면, 동지인지 확인한 후 기밀문서를 받거나 다른 인사들과 연결해주는 역할을 했다. 하지만 그해 11월 의친왕의 해외 망명을 시도하던 대동단 간부 전원이 경찰에 발각돼 체포되면서 윤종석도 경찰에 붙잡혔다.'독립유공자 공훈록'에는 이런 대목이 있다.'1920년 8월 만주광복군총영으로부터 미국 의원단의 내한을 계기로 조선인의 독립의지를 알려주기 위해 일제기관 등의 파괴용 폭탄과 육혈포 등 결사대장 김영철이 가지고 와서 유경근의 집에 보관케 한 사실이 일경에게 탐지되어 붙잡혔다. 그리하여 고등법원에서 징역 3년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1920년 8월에 있었던 일인데, 이 사건으로 인해 유경근이 고등법원에서 징역 3년형을 선고받지는 않았다. 유경근은 앞선 '대동단 사건'으로 1920년 12월 7일 경성지방법원 1심에서 징역 3년형을 선고받았다. 경성복심법원 항소를 거쳐 1921년 5월 고등법원이 상고를 기각하면서 징역 3년이 확정됐다. 각 사건이 일어난 시점이 겹쳐 착오가 생긴 것으로 보인다.다만, 광복군총영 결사대장 김영철(1892~1969)이 유경근의 집에 폭탄과 총기를 숨겼을 때 유경근은 병보석으로 출옥한 시기였다. 김두섭의 종로경찰서 심문조서와 동아일보 1920년 8월 24일자 신문기사 등을 보면, 유경근은 사건 당일 지방에 내려가 있었고 증손인 유용갑이 집에 있었다. 당시 일본 경찰이 작성한 가택 수색조서를 보면, 경찰은 8월 22일 새벽 유경근의 집에 들이닥쳐 공석(空石)에 싸여 있는 폭탄 3개, 권총 3자루, 탄환 167발을 압수했다. 집을 비웠던 유경근은 이 사건으로 경찰 조사를 받지는 않았지만, 광복군 무기를 숨겨주는 일을 집주인이 몰랐을 리가 없었을 것이다.보석 중이던 유경근이 고등법원 확정판결을 받기 전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으로 망명한 기록도 있다. 동아일보는 1922년 3월 5일자 신문에서 '대동단 사건'에 관계된 유경근이 보석 중 도주해 종적을 감췄기 때문에 '결석 판결'로 징역 3년에 처했는데,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에서 일본 헌병에게 붙잡혀 3월 3일 청진항으로 들어왔다고 보도했다. 유경근이 신한촌으로 언제 갔는지, 어떠한 활동을 했는지에 관한 자료는 찾기 어렵지만, 그의 활동무대가 러시아까지 뻗쳐 있었다는 사실을 말해주는 기사다. 유경근의 손자 유부열(74)씨는 교직에 있다가 2008년 퇴직한 이후 줄곧 할아버지의 일생을 연구하고 있다. 유부열씨는 "할아버지가 신한촌으로 망명해 군관학교를 설립하려다 10개월 만에 체포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독립유공자 공훈록'은 유경근이 옥고를 치른 이후 행적이라는 듯 마지막 부분에 '그 후 강화군에서 광명학교를 설립하고 청소년 교육에 힘썼다고 한다'고 밝혔지만, 이 역시 시점이 틀린 내용이다. 유경근은 대동단 활동 이전인 1905년 강화에 있던 자신의 집에 광창(光昌)학교를 설립했다. 광창학교는 보창학교를 설립한 이동휘의 영향으로 1906년 7월 보창지교(普昌支校)로 이름을 바꿨고, 1909년 광명(光明)학교로 개편했다. 유경근이 세운 학교는 1913년 문을 닫았는데, 그 이유는 알려지지 않았다.유경근은 이동휘가 1933년 신한촌에서 세상을 떴다는 소식을 접하고 1935년 2월 추도회를 주도했지만, 강화경찰서가 허가하지 않아 무산됐다고 동아일보가 1935년 2월 26일자에 보도했다. 유경근은 강화에 머물면서 일제의 삼엄한 감시 속에 활동이 어려워졌지만, 교육운동에는 손을 놓지 않았다. 동아일보 1935년 3월 5일자 기사를 보면, 강화군 부내면에서 "7만 군민의 일대 숙제"라며 '강화중등학교 설치 간담회'가 열렸는데, 유경근이 좌장을 맡았다.유경근은 끝까지 창씨개명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집이나 학교의 문을 조선총독부가 있는 동쪽과 일본 땅이 있는 남쪽으로 내지 않았을 정도로 항일정신이 투철했다. 집안에는 일본식 물건이 하나도 없었다고 한다. 직업으로 삼은 금광사업은 갈수록 어려워진 것으로 보인다. 1939년 3월 광세 체납으로 압류돼 경매 매물로 나온 인천지역 9개 금광 가운데 '강화 유경근 씨 소유의 길상면 금광'이 포함됐다. 손자 유부열씨는 "독립유공자 공적을 올릴 당시에는 자료가 적어서 지금 보면 틀린 내용이 많다"며 "할아버지는 출옥 이후 가세가 기울어져 가는 와중에도 강화에서 교육운동에 앞장섰다"고 말했다. /박경호기자 pkhh@kyeongin.com그래픽/성옥희기자 okie@kyeongin.com/아이클릭아트보석 중 탈주한 유경근을 러시아 해삼위(블라디보스토크)에서 체포했다는 내용의 동아일보 1922년 3월 5일자 기사. /국사편찬위원회 제공인천 강화군 월곶리에 있는 유경근 묘소. /경인일보DB

2019-11-13 박경호

[zoom in 송도]취임 넉달 지난 이원재 인천경제자유구역청장

공항 등 완벽 물류시설·글로벌캠 인재 확보송도 투모로우시티 스타트업 앵커시설 운영인천테크노파크와 협업 창업 지원환경 조성이원재 인천경제자유구역청장이 취임한 지 100일이 넘었다. 올해 7월10일 취임했으니, 100일하고도 20일 더 지났다. 그동안 이 청장은 송도·청라·영종 주요 현장을 둘러보는 등 업무를 파악하고, 스위스와 영국 등 해외에 직접 나가 투자유치 활동을 벌였다. 그는 "인천경제자유구역(IFEZ) 개발사업이 규모와 중요성 면에서 의미가 크다는 것을 느꼈다"며 "송도·청라·영종은 앞으로도 발전 가능성이 매우 크다"고 말했다. 이 청장을 만나 송도 등 IFEZ 개발·운영 방향과 현안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IFEZ가 가진 매력과 장점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지"IFEZ는 중국과 일본 등 동북아 경제권의 중심에 위치해 세계 167개 도시를 항공편으로 3시간 이내에 갈 수 있다. 글로벌 비즈니스 중심도시로서 가장 적합한 입지 여건을 갖춘 것이다. 개항 18년 만에 국제여객 기준 '글로벌 톱(TOP) 5'로 도약한 인천공항과 매년 급성장하는 인천항 등 완벽한 물류 여건도 큰 장점이다. 특히, IFEZ는 수도권의 우수한 대학은 물론 인천글로벌캠퍼스(해외 명문대 공동캠퍼스) 입주 대학에서 배출하는 고급 인력을 확보할 수 있다. 다양한 정주 지원 프로그램과 첨단 스마트시티 운영을 통해 내국인과 외국인 모두가 수준 높은 정주 여건에서 생활할 수 있다."-경제자유구역 개발 방향이 '개발·투자유치'에서 '혁신성장'으로 바뀌었다"그렇다. 내년 하반기부터 단계적으로 문을 여는 '스타트업·벤처폴리스, 품(POOM)'은 혁신성장의 모범 사례가 될 것이다. 이 사업은 연구를 기반으로 창업을 활성화하는 프로젝트다. 송도는 연구소와 기업, 스마트시티 관련 인프라가 있기 때문에 창업하기 좋은 여건을 가지고 있다. 송도에 있는 복합건축물 '투모로우시티'를 인천 지역 특화산업 중심의 스타트업 지원을 위한 개방형 앵커시설로 조성·운영할 계획이다. 리모델링을 통해 스타트업과 민관 지원기관의 활동 공간을 조성하고, 인천테크노파크와의 협업을 통해 이들의 창업을 지원해 나갈 예정이다. 스타트업이 활동할 수 있는 유리한 환경을 조성하느냐가 성공의 열쇠다. 이러한 환경을 만드는 데 집중하고 있다."연대 국제캠·아트센터 2단계 조기추진 계획청라 국제업무단지 우선대상자 내년께 선정글로벌시민협의회 소통강화 '지역균형 발전'-송도 세브란스병원과 연세대 국제캠퍼스 2단계 사업은 어떻게 추진되고 있는가"지난해 3월 연세대와 국제캠퍼스 2단계 협약 및 세브란스병원 건립·사이언스 파크(YSP) 조성계획에 합의했다. 토지 매매계약에 앞서 토지 공급예약을 연내 체결할 예정이다. 아울러 송도국제화복합단지 개발·실시계획 변경을 차질 없이 추진해 내년 하반기에는 2단계 사업이 성공적으로 추진되도록 노력하겠다. 세브란스병원도 조속히 건립될 수 있도록 행정력을 집중할 계획이다. 세브란스병원과 연세대 국제캠퍼스 2단계 사업은 협약 내용대로 추진한다는 게 우리의 기본입장이다."-'아트센터 인천' 콘서트홀이 개관 1주년을 맞는다. 2단계(오페라하우스·뮤지엄) 사업은 언제 추진하는지"아트센터 2단계 사업비가 2천억원을 좀 넘는 것 같다. 재원 조달 방안에 대한 검토가 선행되어야 한다. 2단계까지 이뤄져야 문화예술 콤플렉스가 완성된다는 생각으로, 조속히 재원 조달 방안을 만들 계획이다. 기본적으로 2단계 사업을 빨리 추진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청라 현안에 대해 말씀해달라"청라가 경제자유구역으로 지정된 지 약 16년이 지났다. 많은 여건의 변화가 있었다. 그 변화에 걸맞은 개발 방향과 투자유치 계획을 수립하기 위해 LH와 함께 용역을 진행하고 있다. 개발 콘셉트와 계획을 현실에 맞게 조정하는 도시계획 변경도 추진 중이다. 이를 토대로 내년 상반기에는 청라국제업무단지 개발을 위한 우선협상대상자를 선정할 예정이다. 청라 시티타워는 이달 기공식이 끝나면 변경된 디자인에 대한 실시설계와 행정 절차를 이행한 후 내년 하반기에는 건립을 본격화할 계획이다."-영종 지역 복합리조트 개발사업 진행 상황은"영종에서 추진 중인 복합리조트 사업은 경제적 파급효과가 커 IFEZ 지역경제 활성화, 청년 일자리 창출, MICE산업과의 시너지 등에 크게 기여할 것으로 예상한다. 파라다이스시티는 2017년 4월 오픈 이후 2년간 약 250만명이 방문했다. 앞으로 더 많은 국내외 관광객을 유인하는 관광 명소로 자리매김할 것이다. 미단시티에 추진 중인 시저스코리아 복합리조트는 2017년 9월 착공해 2021년 개장을 목표로 공사가 원활히 진행되고 있다. 인천공항 제2여객터미널 북서쪽 국제공항업무지구(IBC)-Ⅲ에 위치한 인스파이어 복합리조트 1단계 사업은 2022년 개장을 목표로 지난 5월 착공했다. 2단계 사업인 실내외 테마파크는 2021년 착공 예정이다. 영종과 청라를 잇는 제3연륙교 실시설계 용역은 약 60%의 공정률을 보이고 있으며, 내년 하반기 착공할 계획이다."-주민 소통 및 관계기관 협력 강화 방안은"'글로벌시민협의회' 운영으로 소통을 강화하려고 한다. 이 협의회는 주민과 의사소통을 할 수 있는 창구다. 이것을 통해서 주요 현안에 대해 주민과 긴밀하게 협력할 방침이다. 이달 중 출범할 예정이며, 송도·청라·영종 등 지구별로도 협의회를 운영할 예정이다. LH(청라·영종), 인천항만공사(송도 일부), 인천국제공항공사(영종 공항산업·복합리조트) 등 관계기관과의 협력이 중요하다. 사업 구상, 투자유치, 도시계획 부문에서 긴밀하게 협력해야 IFEZ 개발이 시너지를 낼 수 있다. 앞으로 더욱 협업 체계를 강화할 것이다."-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씀은"IFEZ가 4차 산업혁명 시대의 중추적 역할을 할 수 있도록 산업 생태계를 조성하는 데 집중할 계획이다. 산학연이 협력해 동반 성장하는 산업 생태계를 만들어 나가겠다. IFEZ가 살기 좋은 도시가 되도록 정주 환경과 생활 기반을 개선하고 불편함을 없애는 데 노력하겠다. IFEZ가 지역 균형 발전에 기여하도록 구도심과의 사업 연계 방안도 적극적으로 모색하겠다." /목동훈기자 mok@kyeongin.com이원재 인천경제자유구역청장이 인천경제자유구역(IFEZ) 개발·운영 방향과 현안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인천경제청 제공

2019-11-10 목동훈

[독립운동과 인천·(34)]철시투쟁

18세 글로 보기엔 매우 '논리정연'항일조직 지원 추정… 재조명 필요1919년 3·1운동이 전국으로 확산할 때 인천에서는 시내 중심가 상점들이 항일의 뜻을 표출하는 차원에서 가게 문을 닫는 '철시(撤市)' 투쟁이 활발했다.각종 자료와 신문 보도를 종합하면, 인천지역 철시는 1919년 3월 말부터 4월 초까지 이어지면서 상당수 상점이 동참한 것으로 보인다. 인천에서는 당시 잡화상이었던 18세 김삼수(金三壽·1901~?)와 객줏집 사환이었던 15세 임갑득(林甲得·1904~?)이 철시투쟁에 가장 앞장섰다. 지금으로 따지면 각각 고등학교 3학년과 중학교 3학년일 나이였다. 10대 소년 2명은 문을 닫지 않은 상점들에 철시하라는 경고문을 뿌리다가 일본 경찰에 붙잡혀 옥살이를 했다.1심과 2심에서 실형을 선고받은 김삼수가 3심(상고심) 재판부에 제출한 200자 원고지 약 10매 분량의 '상고 이유서'가 아직 남아있다. 그 내용이 잡화상이 직업인 소년이 썼다고 하기엔 매우 논리정연해 눈길을 끈다. 김삼수는 상고 이유서에서 "지금 시대는 타인을 노예로 하는 자도 없고, 타인으로 하여금 노예가 되게 하는 자도 없다"며 우드로 윌슨(Woodrow Wilson·1856~1924) 미국 대통령이 주창한 '민족자결주의'를 강조했다. 평범한 상인의 철시투쟁까지도 견고한 논리의 항일민족의식이 밑바탕에 깔렸다는 의미다.물론 상고 이유서 내용을 고려하면, 김삼수가 직접 쓰지 않고 누군가의 조력을 받았을 개연성이 크다. 김삼수와 임갑득을 지원한 항일운동조직이 있었고, 인천지역 철시투쟁도 조직적으로 전개됐다는 추정도 해볼 수 있다. 하지만 인천 철시투쟁은 단편적인 기록으로만 남아있을 뿐이다. 만세시위와 함께 일반 민중이 대거 참여했던 항일운동인 만큼 구체적인 재조명 작업이 필요하다. 김삼수의 상고 이유서 등 판결문은 국가기록원이 운영하는 '독립운동 판결문' 홈페이지에서 확인할 수 있다. /박경호기자 pkhh@kyeongin.com

2019-11-06 박경호

[독립운동과 인천·(34)]철시투쟁

1919년 학생 동맹휴업 이어 3월30일부터 실행18세 잡화상 김삼수·15세 객주집 사환 임갑득폐점 안한 가게에 독촉 경고문 배포하다 '체포'인천물산 객주조합원·권업소원·포목상조합 등1926년 4월 순종 승하때도 철시… 봉도식 진행생계 걸고 日에 대항한 '이름없는 독립운동가'인천은 일제에 국권을 강탈당하기 이전부터 일본의 한반도 침략과 수탈의 관문이었다. 당시 인천부는 일본이 '조선 안의 작은 일본'을 목표로 만든 철저한 계획도시였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날 무렵 인천부 인구 2만211명 가운데 44.4%인 8천973명이 일본인일 정도로 다른 도시보다 일본의 영향력이 막강했다.인천 시내 중심에서는 3·1 만세시위가 활발하게 일어나기 어려운 여건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19년 3월 6일부터 인천 학생들이 동맹 휴학에 돌입하며 시내에서 만세운동을 전개하기 시작했고, 곧 인근 지역까지 들불처럼 번졌다.3·1운동 때 인천지역 상인들은 가게를 닫아버리는 '철시(撤市)' 투쟁으로 항일시위에 동참했다. '작은 일본'이라 불린 도시에서 장사하는 상인들이 생계를 접고 항일의 뜻을 표시하기가 여간 어려운 결정이 아니었을 것이다. 이병헌이 1959년 쓴 '삼일운동비사'와 한국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가 2009년 발간한 '한국독립운동의 역사'를 보면, 인천 시내 조선인 상점들은 만세운동이 이어지던 1919년 3월 30일부터 철시투쟁에 나섰다. 당시 인천은 내리(현 중구청 일대)부터 지금의 동구까지 시내 중심가를 이루며 상점이 모여 있었다.인천에서 철시투쟁과 관련해 처벌받은 김삼수(金三壽·1901~?)와 임갑득(林甲得·1904~?)의 상고심 판결문에는 3월 27일부터 인천 시내의 상점들이 문을 닫았다는 내용이 나온다. 3월 27일은 조선인 가게들에 3·1운동 때 맞춰 창간된 '조선독립신문'과 함께 "철시하라"는 격문이 배포된 날이다. 인천부협의회 등 친일기관이 개점하라고 협박했지만, 3월 30일부터 조선인 상점 대부분이 철시투쟁에 참여한 것으로 보인다. 일본 경찰이 출동해 상점 문을 열도록 협박하면 눈가림으로 문을 열다가도 경찰이 돌아서면 이내 다시 문을 닫으며 항쟁을 이어갔다.조선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보'는 1919년 4월 1일자 신문에서 "인천 시내는 그동안 평온한 듯하더니 다시 불온한 모양으로 변하며 수일 전에는 조선인 상점이 얼마만 철시한 것을 보겠더니 삼십일부터는 모두 철시를 했다"고 보도했다. '매일신보'는 이 기사에서 가게들이 휴업한 시내를 "길거리에 행인도 없다"며 "음습하여 쓸쓸하기가 한량 없다더라"고 부정적으로 보도했는데, 철시투쟁이 효과적이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삼일운동비사'에서도 인천지역 철시와 관련해 "시가지는 인적이 고요했고, 해변의 파도 소리만 시가지를 울렸다"고 그 분위기를 전했다.김삼수와 임갑득은 4월 1일 오전 11시께 아직 폐점하지 않은 우각리 이복현(李福鉉) 등의 점포 17곳에 철시하라는 경고문을 뿌렸다. 하지만 우각리 일대에서 상점이 문을 열자 김삼수와 임갑득은 4월 2일 또다시 "인천에 있는 상업가가 폐점하지 않으면 인천시가는 초토화할 것"이라는 내용의 경고문을 작성해 상점들에 배포했다. 이들은 4월 3일에도 "속히 폐점하지 않으면 최후의 수단을 취할 것"이라고 쓴 '최후통첩문'을 내리에 있는 점포에 투입하려다 일본 경찰에 체포됐다.김삼수와 임갑득의 1심 판결문을 보면 죄명은 '보안법 위반'과 '강요미수'이다. 김삼수는 당시 18세에 직업은 잡화상이었고, 임갑득은 15세에 직업은 객주집 사환이었다. 상점에서 일하는 평범한 10대들이 철시투쟁에 가장 앞장선 것이다. 사법경찰관 측 증인으로 조사받은 주명서(朱明瑞)는 "1919년 3월 30~31일 폐점했으나, 경찰관의 간곡한 설득으로 개점했는데, 다음날 오후 8~9시 무렵 김삼수와 임갑득이 쓴 경고문을 받았다"며 "다소 무서웠지만 폐점할 정도는 아니었다"고 진술했다.김삼수와 임갑득은 1심에서 각각 징역 10개월을 선고받았다. 임갑득은 항소심에서 징역 6개월로 감형됐고, 김삼수는 상고심을 거쳐 1심과 마찬가지인 징역 10개월이 확정됐다. 이들은 항소, 상고 과정에서 앞선 판결에 불복하는 이유를 "조선민족으로서 정의·인도에 기초하는 의사발동이며 범죄가 아니다"라고 했다.김삼수는 상고심을 진행하면서 경성고등법원에 200자 원고지 10매 분량의 상고 이유서를 별도로 제출했다. 상고 이유를 살펴보면, 단순히 10대 소년들이 의협심에 불타 감정적으로 철시투쟁을 독려했던 것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다음은 김삼수가 법정에 낸 상고이유서의 내용 일부다.'이번 조선민족의 행위는 세계의 대세에 따라 정의와 인도에 기초하여 의사를 발동한 것임은 다시 말할 필요가 없는 바이다. 누천(累千)여 년 이래 역사상 또는 민족상에서 보아도 일·선의 합병은 불가사의라고 말해야 한다. 왜냐하면 10년 전 일·선 합병은 당시 야심 발발(潑潑)한 일본정치가가 외람(猥濫)하는 수단으로써 금력(金力) 의해 취한 바이다. 동서고금을 불문하고 금력(金力) 또는 무력으로써 인심을 복종시킨 적이 있음을 듣고, 게다가 일·선 합방 이후 대일본제국으로부터 조선에 대한 정책이 어떠했는지가 순전한 만종(蠻種)으로서 보인 것이며, 이러한 압제적 통치 아래에서는 영적 능력이 불구(不具)한 야만족이라고 해도 불평을 품는다.'또 상고이유서의 다음 내용을 보면, 3·1운동의 사상적 기반 중 하나였던 우드로 윌슨(Woodrow Wilson·1856~1924) 미국 대통령의 '민족자결주의'가 잡화상인 김삼수처럼 일반 민중에게도 널리 퍼져 있었다는 점도 가늠케 한다.'눈을 들어 세계를 보라. 누가 사람의 노예가 될 자가 있겠는가. 쓸데없이 빙자하는 것이 아니라고 해도 이번 미국 대통령 윌슨 씨가 성명한 민족자결주의에 따라 부흥한 국가가 많이 있는데, 대일본제국에서는 반드시 영국의 인도에 대한, 미국의 필리핀에 대한 것을 빙자하더라도 스스로 생각해도 일본의 조선에 대한 정책이 얼마나 압제적인지 얼마나 속박적인지 이로써 영국령 인도, 미국령 필리핀과 비교할 것이 되겠는가. 언론·출판·집합의 자유는 존중히 여겨야 할 것임은 물론 인류의 공권까지 박탈당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또 윌쓴 씨가 성명한 민족자결은 동양에 있는 우리들과는 하등 관계가 없다고 말하지만, 이는 제한적인 것이 아니다. 지원(至遠) 지대(至大)한 것이다.'조한성 민족문제연구소 선임연구원은 2019년 쓴 '만세열전'에서 "민족자결주의는 해당 제국주의 국가에서 국내적인 수준으로 제한됐던 민주주의를 국제적인 수준으로 확대하는 효과도 낳았다"며 "윌슨의 생각은 일정한 경로를 거쳐 조선인들에게 전해졌다. 이것이 3·1운동이 일어나게 된 첫 번째 이유였다"고 설명했다. 김삼수는 상고이유서에서 "우리의 행위를 일본 법률에 준해 징역 10개월에 처단했는데, 참으로 웃을 수 없지 않은가"라며 "당당하게 정의·인도를 위해 행동한 우리들은 정의와 인도에 위배하는 대일본제국 사법권 내의 절제를 받을 필요가 없다"고 상고 신청 이유를 밝혔다. 하지만 재판부는 "자기가 사실로 말하는 바를 진술하고, 자기의 의견에 의해 피고의 소위는 죄가 되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것밖에는 되지 않으니 상고 이유 없다"며 상고를 기각했고, 김삼수는 징역 10개월 확정 판결을 받았다.김삼수의 직업이 잡화상이었던 점에 비춰보면, 상고이유서 내용이 너무나 논리 정연하다. 노련한 변호인이 작성했을 법한 내용들이다. 일반 민중들이 쓸 수 있는 용어들도 아니다.이들의 뒤를 받쳐주던 항일운동 조직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김삼수와 임갑득 같은 평범한 민중들이 어느 조직에 들어가 항일민족의식을 깨우치는 공부를 했고, 이를 실행에 옮겼다고 보는 게 타당할 듯하다.이후 김삼수와 임갑득에 관한 기록은 찾아볼 수 없다. 다만, 동아일보 1922년 4월 2일자 신문을 보면, 민족운동을 펼쳤던 기독교 소년운동단체인 인천 '엡윗청년회'(의법청년회) 주최 토론회가 열렸다는 내용의 기사에서 '김삼수(金三壽)'라는 이름이 등장하는데, 같은 인물인지는 확인하기 어렵다.인천지역 상인들의 철시는 1926년 4월 25일 조선의 마지막 임금인 순종이 승하했을 때 또다시 일어났다. 동아일보 1926년 5월 3일자 기사에는 그해 4월 30일부터 인천물산 객주조합원, 인천미상조합원과 권업소원, 인천포목상조합이 잇따라 가게 문을 닫고 순종의 봉도식을 진행했다.인천지역 상인들의 철시투쟁은 소극적인 항일운동이 아니었다. 자신이 운영하는 상점의 문을 스스로 닫는 것은 생계가 걸린 문제였고, 상인들은 생계를 걸고 일본에 대항한 이름 없는 독립운동가들이었다. 김삼수처럼 평범한 민중도 뚜렷한 민족의식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박경호기자 pkhh@kyeongin.com그래픽/박성현기자 pssh0911@kyeongin.com/아이클릭아트일제감시대상 인물 카드 속 김삼수(왼쪽)와 임갑득. 두 사람이 일본 경찰에 체포됐을 당시 나이는 김삼수가 18세, 임갑득이 15세였다. 출처/국사편찬위원회동아일보 1926년 5월 3일자 신문에 실린 '인천시민 봉도식' 사진. 순종이 승하한 후 인천지역 상인들이 철시한 후 봉도식을 가졌다는 내용의 기사다. 출처/네이버 뉴스라이브러리인천지역 철시 풍경을 다룬 조선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보'의 1919년 4월 1일자 기사. 출처/국립중앙도서관김삼수·임갑득의 상고심 판결문 원본 첫 장. 출처/국사편찬위원회

2019-11-06 박경호

[zoom in 송도]사업중복 지연 우려되는 송도 '인천신항 지하차도'

경제청, 신항 잇는 4.11㎞구간 용역 진행매연·소음해결… 물류비 절감효과 기대"신설 예정 인천신항선 노선·기능 겹쳐"해수부, 수천억 예산 부담 '미온적 태도'11일 열리는 고위정책협의회서 논의예정인천 신항 진입도로 지하화(지하차도 건설) 사업이 '인천신항선' 계획으로 지연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이들 도로와 철도의 노선·기능이 중복된다는 이유로 해양수산부가 지하차도 건설에 미온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인천경제자유구역청은 인천 신항 진입도로 지하화 사업을 위한 용역을 진행하고 있다. 이 사업은 남동국가산업단지에서 송도국제도시 11공구를 거쳐 신항까지 이어지는 '인천신항대로' 일부 구간에 대형 화물차 전용 지하차도를 건설하는 내용이다. → 위치도 참조■ 송도 11공구 화물차 매연·소음 민원 발생 불가피인천 신항과 항만 배후단지는 송도 남단에 있다. 이 때문에 신항을 오가는 대형 화물차 상당수가 송도 11공구 쪽 도로를 이용하고 있다. 공유수면 매립이 진행 중인 송도 11공구에는 바이오 기업 등이 입주하는 첨단산업클러스터가 조성될 예정이다. 또 대로(大路) 주변으로 아파트가 들어서 약 5만명(송도 11공구 계획인구)을 수용하게 된다. 대형 화물차가 송도 11공구 대로를 계속해서 이용할 경우, 매연과 소음 등 환경 민원 발생이 불가피한 상황이다. 인천경제청이 신항 지하차도 건설을 추진하는 이유다. 송도 11공구 대로 기존 지상 구간은 승용차가 다니고, 대형 화물차는 지하차도로 통행해야 환경 민원을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이다. 지상 구간은 교차로가 많기 때문에, 대형 화물차가 지하차도를 이용하면 물류비용도 절감될 것으로 인천경제청은 기대하고 있다.인천경제청에 따르면 하루 평균 신항을 오가는 차량은 약 6만8천대이며, 신항 개발이 완료되면 약 11만대까지 증가할 것으로 추정됐다. 또 현재 신항 통행 차량의 약 70%는 송도 11공구 쪽 대로를 이용해 시내로 이동하는 것으로 분석됐다.일각에서는 인천~안산 고속도로(예비타당성 조사 중)가 개통하면 송도 11공구 대형 화물차 통행량이 감소할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하지만 인천~안산 고속도로는 통행료를 징수하기 때문에 송도 11공구 쪽 도로를 이용하는 대형 화물차가 많이 감소하진 않을 것으로 인천경제청은 예상하고 있다.송도 11공구 신항 진입 지하차도는 길이 4.11㎞로 계획돼 있는데, 용역 및 관계기관 협의 결과에 따라 변동될 수 있다. 인천경제청은 용역 결과를 토대로 지하화 구간, 사업 시행 주체, 사업비 분담 비율 등을 정한다는 방침이다. 대형 화물차와 승용차 교통량에 따라 인천시와 해수부가 사업비를 분담해야 한다는 게 인천시의 생각이다. 용역은 이르면 올 연말 완료될 예정이다.■ 해수부, 지하차도 건설에 미온적문제는 해양수산부가 지하차도 건설에 미온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다는 점이다. 인천경제청은 지난 8월 해수부를 방문해 지하차도 건설사업을 '제4차 전국항만기본계획(2021~2030)'에 반영해달라고 요청했는데, 해수부는 "(반영 여부를) 검토하겠지만, 인천신항선과 (기능이) 중복될 수 있다"는 의견을 내놓았다고 한다.인천신항선은 신항에서 송도 11공구를 관통해 월곶으로 연결되는 화물 운송 노선(12.5㎞)으로, 송도 11공구 지하차도와 노선·기능이 중복된다. 인천신항선은 '제3차 국가철도망구축계획(2016~2025)'에 반영돼 있다.향후 신항 물동량이 많이 늘어나면, 철도와 지하차도 둘 다 필요할 수 있다. 하지만 신항 물동량과 각 사업에 수천억원의 예산이 드는 점을 고려하면 지금은 둘 중 1개 사업만 추진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인천경제청, "지하차도 우선 추진해야"인천경제청은 지하차도 건설사업을 우선적으로 추진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지하차도 건설 사업비(노선 길이에 따라 2천억~4천억원 추산)가 인천신항선(약 5천400억원)보다 상대적으로 적게 드는 데다, 인천신항선은 지상에 건설될 예정이라 민원 발생이 우려된다는 게 그 이유다. 인천신항선은 사업성 부족 탓에 추진 시기도 불투명하다고 한다. 인천경제청 관계자는 "신항 화물 운송 수단으로 도로와 철도 중 무엇이 적합한지 해수부가 판단해야 한다"면서 "신항과 송도 첨단클러스터·주거시설이 상생하려면 지하차도 건설을 우선 추진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했다. 또 "화물열차가 송도 11공구 지상을 관통해 운행한다는 것은 문제가 있다"며 "장래에 인천신항선이 필요하다면, 송도 11공구를 통과하지 않는 방향으로 노선을 변경해야 한다"고 했다.송도 11공구 지하차도 건설 문제는 오는 11일 열리는 '인천 해양수산발전 고위정책협의회'에서 논의될 예정이다. 이 협의회는 인천시 행정부시장, 인천지방해양수산청장, 인천항만공사 사장 등이 참석해 인천항 관련 현안을 논의하는 모임이다. 이날 회의에서 인천시는 송도 11공구 지하차도 건설계획이 제4차 전국항만기본계획에 반영될 수 있도록 협조해 줄 것을 인천해수청에 요청할 예정이다. /목동훈기자 mok@kyeongin.com

2019-11-03 목동훈

[독립운동과 인천·(33)]노동운동 김환옥

러시아 혁명 목격 사회주의 전향좌익활동 이력 탓 연구활동 부실1930년대 활동하던 독립운동가 가운데는 노동자들과 연대해 조선의 변혁을 꿈꾼 인물들이 있었다. 이 시기 러시아에서 평등을 이상으로 삼은 사회주의 혁명이 성공한 것을 목격해 사회주의로 전향한 사람들이 그들이다. 이들은 다양한 단체를 조직해 열악한 환경 속에서 일할 수밖에 없었던 노동자들 사이로 뛰어들었다.김환옥(1914~?)은 인천 지역 공장지대에서 활동하던 사회주의 독립운동가다.광주학생독립운동에 참여한 혐의로 학교에서 퇴학당한 김환옥은 당시 최대 공장 지대였던 인천 동구 일대의 노동자들을 대상으로 교육을 진행했다. 김환옥은 인천철공소에서 근무하며 노동자들의 권리를 되찾아주기 위한 독서회를 꾸렸다. 그는 글을 읽지 못하는 노동자들에게 한글을 가르치고, 이를 통해 노동자들이 권리를 되찾기를 바랐다. 만국공원(현 자유공원)과 인천 축항, 월미도 등에서 이뤄진 교육은 수십 차례에 걸쳐 진행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김환옥은 노동자들의 환경 개선을 위한 노력을 벌이다가 일본 경찰에 붙잡혔다. 이른바 인천 공장 지대의 '적색노조사건'에 연루된 것이다. 당시 언론 보도에 실린 그의 재판 기록을 보면 김환옥은 단순히 임금 인상과 노동시간 단축 등을 요구했을 뿐이었지만, 일제는 그에게 징역 1년 6개월을 선고했다. 김환옥은 노동자들을 일깨움으로써 일제강점기 조선의 변혁을 꿈꿨다. 그는 1930년대 어려움을 겪던 노동자들의 권익을 노동자 스스로 찾아야 한다고 외친 독립운동가였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인천 지역에서 그에 대한 연구는 매우 부실하다. 그의 활동 대부분이 노동운동이었고, 좌익 활동에 참여한 이력 때문으로 보인다. 일본 경찰의 삼엄한 경비 속에서도 조선의 노동자를 위해 활동한 김환옥을 우리가 다시 주목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김주엽기자 kjy86@kyeongin.com

2019-10-30 김주엽

[독립운동과 인천·(33)]노동운동으로 독립 실현하려 했던 김환옥

일본 대기업 기계·자동화에 조선인 공장들 줄줄이 폐업사회주의 운동가들 동양방적 등 열악한 환경 파고 들어광주학생운동 동참으로 퇴학 당한 후 인천철공소 취직김근배와 독서회 꾸려 문맹률 높은 근로자들 교육 앞장적색노조 연루 '옥살이' 미군정시절에도 좌익으로 체포"한 끼 식사를 못 해 풀죽을 끓여 먹는 사람이 조선 땅에 한둘이 아니고 고무신 하나가 없어 거친 흙 땅을 맨발로 다니는 아이들이 지천인데…"2007년 방영된 드라마 '경성스캔들' 대사 중 일부다. 1930년대를 배경으로 한 이 드라마의 주인공인 독립운동가 나여경은 당시 조선의 현실을 이렇게 표현했다.1930년대 나라 잃은 조선인 노동자들은 온갖 신산을 다 겪어야 했다. 1929년 10월 29일 미국 뉴욕주식거래소의 주가가 대폭락한 '블랙먼데이'를 기점으로 시작된 '세계 대공황'의 여파가 이역만리 떨어진 조선인 노동자들에게도 영향을 끼쳤기 때문이다.대공황 이후 일제는 '산업 합리화' 조치를 시행하게 된다. 이에 따라 일본인이 소유한 대기업들은 거대 독점자본을 바탕으로 한 기계화·자동화를 통해 이윤을 극대화하고자 했다. 대기업의 생산 공정 기계화, 자동화로 생산량이 늘어나면서 조선인이 운영하던 중소규모의 공장들은 문을 닫게 됐고, 조선인들의 실업률은 급격히 높아졌다. 1930년 조선총독부 조사 결과를 살펴보면 조사에 참여한 조선인 17만명의 12.5%에 해당하는 2만여명이 실업 상태인 것으로 나타났다.실업률이 높아져 일할 사람은 많다 보니, 노동자들의 임금도 낮은 수준으로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통계청이 일제강점기 자료를 분석한 결과에 따르면 1925년 93전이었던 보통 인부의 일당은 1933년 70전으로 24%나 줄었다. 1930년대 80㎏ 쌀 한 가마니의 가격이 22원 정도인 점을 고려하면 하루 종일 일해도 쌀 2.5㎏ 정도 밖에 살 수 없는 돈이었던 셈이다. 일본 내에도 노동자들을 위한 법률이 제대로 갖춰져 있지 않은 시기였기 때문에 조선인 노동자들은 더 열악한 상황에서 적은 임금을 받으며 일할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1930년대 대형공장이 들어서기 시작한 인천의 사정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동양방적이나 인천 지역 정미소에서 일하던 조선인 근로자들은 휴일도 없는 열악한 환경 속에서 일할 수밖에 없었다. 국내에서 활동하던 사회주의 독립운동가들은 조선인 노동자들의 열악한 삶 속으로 파고 들었다.김환옥(1914~?)은 당시 인천에서 활동하던 사회주의 독립운동가 중 한 명이었다.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일제감시대상 인물카드에는 김환옥의 직업은 직공(職工)이라고 적혀 있다. 학창시절 일제에 항거하다 학교를 떠난 김환옥은 노동자로 일하며 그들에게 노동정신을 가르쳤다.김환옥은 이른바 '적색 노조 사건'에 연루돼 옥고를 치렀지만, 인천에서 그를 기억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김환옥의 활동 대부분이 노조 활동에 집중돼 있는 데다, 해방 이후에는 좌익 사범으로 경찰에 붙잡히기도 했고 말년에 대한 기록이 전혀 없어서 그의 삶과 죽음이 제대로 연구되지 못하다 보니 그에 대한 평가가 뒤로 밀려 오늘에 이르고 있다.일제감시대상 인물카드에 따르면 김환옥은 1914년 경기도 부천군 다주면 용정리(현 인천시 미추홀구 용현동)에서 태어났다. 이 일대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것으로 추정되는 그는 1927년 인천공립상업학교(현 인천고등학교)에 입학했다. 인천상업학교 입학 후 김환옥은 독립운동의 길에 본격적으로 들어서게 된다.김환옥이 3학년이던 1929년 '광주학생독립운동'이 일어났다. 인천상업학교는 인천 지역에선 유일하게 광주학생독립운동에 참여한 학교다. 일본 경찰 내부 자료에 따르면 김환옥은 그의 동기생인 이두옥(1911~1950), 신대성(1909~?) 등과 함께 학생들의 동맹 휴학을 주도했다. 경찰에 붙잡히게 된 그는 모진 고문을 당하고 학교에서는 쫓겨났다.학교에서 퇴학당한 뒤 김환옥은 인천철공소에 취직해 본격적인 노동 운동을 시작했다. 인천철공소는 1904년 인천 내항 1부두와 갑문 사이에 있던 '사도'라는 섬 주변을 매립해 만들어진 조선소로 추정된다.1930년대 인천은 사회주의 독립운동가의 활동이 두드러진 지역이다. 이 시기 사회주의 독립운동의 대부로 일컬어지는 이재유(1905~1944), 그와 함께 경성트로이카를 이룬 김삼룡(?~1950)의 지시를 받은 독립운동가들이 만석동 일대 공장지대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당시 인천 노동자들의 환경이 매우 열악했기 때문이다. 인천 노동자들이 처한 암울한 상황은 강경애의 소설 '인간문제'의 등장인물 간난이가 주인공 선비에게 말한 대사를 통해 잘 나타난다."선비야! 그런 것을 몰라서는 안 된다. 저 봐 지금 야근까지 시키면서 우리들에게 안남미 밥 먹이고, 저금이니 저축이니 그럴듯한 수작으로 우리들을 속여서 돈 한 푼 우리 손에 쥐어 보지 못하게 하고 죽도록 우리들을 일만 시키자는 것이란다. 여공의 장래를 잘 지도하기 위하야 외출을 불허한다는 둥 일용품을 저가로 배급한다는 둥, 전혀 자기들의 이익을 표준으로 내세운 규칙이란다."'인간문제'에서 간난이와 선비가 있는 방적공장은 1934년 문을 연 인천 만석동의 '동양방적'을 모델로 한 것으로 전해진다. 일본 공장주들은 조선인 노동자들의 일당을 착취했다. 산업합리화로 대량 생산이 가능한 기계가 들어왔지만, 노동자들의 임금은 낮아졌고, 오히려 근무시간만 길어지게 됐다.김환옥은 열악한 노동자들의 삶을 개선하기 위해 사회주의 독립운동가 중 하나인 김근배와 노동자를 교육하는 독서회를 꾸렸다. 김환옥이 활동하던 시점에 조선인 노동자들의 문맹률은 상당히 높은 편이었다. 1930년 조선총독부 조사 결과를 보면 노동자들의 주된 연령층인 15~39세 노동자들의 문맹률은 65%를 넘어선 수준이었다. 김환옥은 문맹자들이 많은 노동자들에게 한글을 가르치고, 이를 통해 노동자들의 권리를 찾게 만들기 위한 교육을 진행했다. 국내 노동운동사를 연구한 한국학중앙연구원 김경일 교수가 쓴 '이재유, 나의시대, 나의혁명'에 따르면 김환옥은 만국공원(현 자유공원), 인천축항, 월미도 등지에서 노동자들에게 기꾸쿠다 가츠오의 '사회는 어떻게 되는가'를 교재로 수십 차례에 걸쳐 교육을 진행했다.독서회를 운영하던 그는 1935년 경찰에 붙잡혔다. 이른바 '적색 노조 사건'에 연루된 것이다. 1935년 4월 경기도 경찰부장이 조선총독부에 보고한 '인천 적색(赤色)그룹 사건 검거에 관한 건'이란 보고 문서에선 '이재유 그룹의 사건을 수사하던 중 그룹에 속해 있던 이인행이 인천 활동가와 접촉했다는 진술을 했고, 이 진술을 토대로 별개의 비밀결사가 존재하고 있다는 단서를 찾았다'고 적었다.김환옥은 동양방적과 인천철공소 등에서 열악한 환경과 부당한 대우 속에서 일하던 노동자들을 주도해 쟁의 행위를 일으켰다는 혐의로 징역 1년 6개월을 선고받았다.징역을 마치고 출옥한 그는 지하 운동에 주력했던 것으로 보인다. 해방 이후에는 공산주의자들이 조직한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에 속해 노동운동을 펼치다 1947년 2월 불법 노조설립과 시위 혐의로 미군정 경찰에 체포됐다. 안타깝게도 출옥 이후 김환옥에 대한 기록은 찾아볼 수 없다.김환옥은 노동 운동을 바탕으로 사회의 변혁을 꿈꾼 인물이다. 일부에서는 김환옥을 포함한 1930년대 활동하던 사회주의계열 독립운동가들이 조선 내에 공산당 세력 확장을 위해 노동자들을 포섭했다는 주장을 펴기도 한다. 조선의 독립이 그들의 주된 목적이 아니라는 것이다.하지만 사회주의 독립운동의 대부인 이재유의 글을 보면 그들은 조선의 독립을 우선시했다. 이재유는 조선공산당재건 경성준비그룹의 기관지인 '적기' 창간선언에서 '일본제국주의의 모든 비밀에 대한 정치적 폭로와 항의 투쟁을 일으킬 것'이라고 밝히며 목표를 분명히 했다. 또 '군사적 경찰적 파쇼적 일본제국주의 조선통치권력의 근본적 전복. /조선의 독립/ 노동자 농민의 소비에트 정부 수립'이라는 강령을 구체적으로 제시했다. 이재유와 김환옥이 직접적인 관계를 맺었다는 기록은 없으나, 김환옥에게 사상적으로 큰 영향을 준 김삼룡과 권영태가 이재유와 교감을 나누고 있던 점을 고려하면 김환옥도 조선의 독립을 목표로 힘써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이성진 골목문화지킴이 대표는 "1919년 3·1운동 이후 조선의 많은 독립운동가들은 러시아 볼셰비키 혁명(1918)을 모델로 한 사회 변혁을 꿈꿨다. 이로 인해 많은 조선의 청년들은 사회주의로 전향했다"고 설명했다. 이성진 대표는 또 "김환옥은 노동 운동을 통해 일본 제국의 붕괴를 바랐고, 조선의 독립을 이뤄낼 수 있다고 믿었던 인물"이라며 "인천 출신의 독립운동가에 대한 연구가 절실한 상황"이라고 말했다. /김주엽기자 kjy86@kyeongin.com/아이클릭아트김환옥1936년 3월 김환옥의 재판 결과를 보도한 동아일보 기사.인천 동양방적 등 노동투쟁을 보도한 조선중앙일보 기사.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제공김환옥의 일제감시대상 인물카드. 직업란에 직공(職工)이라고 적혀 있는 것이 눈에 띈다.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제공

2019-10-30 김주엽

[독립운동과 인천·(32)]日 강점기 3대 독립운동인 '광주학생운동' 동참 이두옥·신대성

인천공립상업학교 상급생에 속해 '광주 지지' 동맹휴학·강당 시위당시 주동자 대부분 훗날 좌익으로 전향… 지역서도 주목받지 못해개인 활동하다 조선공산당 공작위 함께 만들어… 구속 신세 되풀이남로당 소속 이두옥은 고향인 제주 4·3사건 가담 총살 당해 생 마감1929년 11월 일어난 '광주학생독립운동'은 1919년 '3·1 운동', 1926년 '6·10 만세운동'과 함께 일제강점기 3대 독립운동으로 불린다. 앞선 두 독립운동이 고종·순종 황제의 붕어(崩御)를 계기로 민중이 들고 일어선 독립운동이었다면 광주학생독립운동은 조선과 일본인 학생들의 다툼이 억눌렸던 불만을 폭발시킨 사건이다.광주학생독립운동의 시작은 사소했지만, 그게 촉매제가 되어 들불처럼 번져나간 독립 열망의 의지는 전국을 뜨겁게 달궜다. 전국 학생들은 자신들의 학교에서 동맹 휴학을 벌이거나 강당에 모여 시위를 벌이며 광주학생독립운동에 참여했다. 광주광역시교육청이 조선총독부 공식 기록을 토대로 연구한 자료에 따르면 전국 194개교에서 5만4천여명의 학생이 독립운동에 참가한 것으로 확인됐다.인천에도 광주의 학생들에게 힘을 보탠 학생들이 있었다. 이두옥(1911~1950), 신대성(1909~?) 등 1930년 당시 인천공립상업학교(현 인천고등학교)에 다니던 학생들이 그 주인공이다. 이두옥과 신대성을 포함한 시위를 주도했던 16명은 인천경찰서에 붙잡혔고, 이 가운데 12명은 학교를 떠나야만 했다. 하지만 이들의 활동은 인천에서 크게 주목받지 못하고 있다. 이두옥·신대성 등 당시 시위를 주도한 학생들 대부분이 훗날 좌익으로 전향한 것이 가장 큰 이유라는 게 연구자들의 설명이다. 광주학생독립운동에 참여한 인천 지역 학생들을 재조명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1930년 1월 17일. 학교 행사를 위해 강당에 모인 전교생 앞에서 인천상업학교 상급생 학생들은 크게 외쳤다."지금 광주학생 사건으로 서울을 중심으로 학생들이 봉기하고 있는데, 민족적인 면에서 가만히 있을 수가 없으니 다 같이 일어나자."앞서 이들은 1929년 12월 13일 광주 학생들을 지지하기 위해 한 차례 동맹휴학을 벌이기도 했다.이 일이 있기 약 2개월 전 광주학생독립운동은 시작됐다. 1929년 10월 30일 나주역에서 광주중학교 일본인 학생이 광주여자고등보통학교(현 전남여자고등학교) 학생들을 밀치고 지나갔고, 이를 목격한 광주고등보통학교(현 광주제일고등학교) 학생들이 일본 학생들에게 항의하면서 충돌이 벌어졌다. 그런데 이들의 싸움을 말리기 위해 출동한 경찰이 일본인 학생의 의견만 받아들여 조선인 학생들의 불만이 커졌다.이후 메이지유신 기념일인 11월 3일 신사 참배 이후 현 광주 충장로 일대에서 조선인과 일본인 학생들 간의 큰 싸움이 또 한 번 발생했고, 조선인 학생들이 학교에 항의하면서 대규모 시위로 발전하게 됐다.광주의 소식이 전해지자 억눌렸던 조선인 학생들이 폭발하기 시작했다. 1920년대 중반 이후 조선인 학생들의 불만은 계속 쌓여가고 있던 터였다. 조선총독부 경무국이 발행한 자료를 보면 1924년 14차례에 불과했던 조선 학생들의 동맹 휴학은 이듬해 48건으로 급증했고, 광주학생독립운동이 있던 1929년과 1930년에는 각각 79건과 107건에 달했다. 1920년대 중반부터 학교에 다니는 일본인 학생들이 늘어나자 학생들 간의 다툼도 늘어났다. 그러나 일본인 교직원은 조선 학생들을 차별적으로 대우했고 이에 항의하는 일도 많아졌다. 또 이 시기부터 본격적으로 진행된 식민지 노예 교육도 동맹휴학을 벌이게 된 또 다른 이유라고 전문가들은 설명하고 있다.인천상업학교 상급생들은 더 많은 학생의 참여를 독려하기 위해 전교생이 모인 앞에서 연단에 올랐다. 당시 인천상업학교 1학년생이었던 노형근은 '인고백년사'에서 "그날은 학생들이 정렬해 있었고 선생님들이 들어오시기 전에 상급생이 강당에 있는 탁구대를 들어서 출입구를 막아버리는 것이었어요. 한 상급생이 연단에 올라 웅변을 했습니다. 선생님들이 왔습니다. 상급생들은 문을 막은 채 항의 항언을 했습니다. (중략) 어느새 경찰서에 연락이 돼서 왜경들이 밀려들기 시작했고, 끝내 상급생 십여 명이 연행되는 뼈아픈 광경을 봐야 했습니다"라고 회상했다. 이두옥과 신대성은 경찰에 연행된 16명의 상급생에 포함돼 있었다. 이들에게 광주학생독립운동에 대해 알려준 이는 인천상업학교 출신 차재정(1902~1963)이다.차재정은 장재성(1908~1950)과 함께 광주학생독립운동을 전국에 알린 인물로 평가받는다. 광주학생독립운동 당시 신간회 경성지회 간사였던 그는 7종의 격문을 만들어 전국 학생들에게 배포했다. 차재정은 격문에서 '검속된 광주 조선 학생 동지를 즉시 탈환하라/식민지 노예교육에 대항하라/살인적 폭도인 일본이민군을 구축하라/신간회와 청총(靑總)에 민족적 환기로 호소하라'고 주장하며 학생들의 참여를 이끌어냈다. 당시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경찰에 붙잡힌 그는 1935년 한 차례 더 경찰에 구속된 이후 친일로 전향했다. 차재정은 민족문제연구소가 발간한 '친일인명사전'에도 등재돼 있다.이두옥과 신대성은 광주학생독립운동에 참여한 혐의로 고문을 받은 뒤 풀려나게 된다. 별도의 재판기록이 남아있지 않은 점을 고려하면 징역형을 받지는 않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모진 고문을 받았지만, 이들의 독립운동은 멈추지 않았다.이두옥은 3·1절 11주년 기념 격문을 제작하기도 했다. 이는 6·25때 남조선노동당 서울시당위원장을 지낸 이승엽(1905~1954)과 함께 했다.1930년 3월 1일 이두옥은 현재의 중구와 동구 일대에 '3·1운동 11주년 기념을 맞아 전조선 민중에게 격함'이란 제목의 유인물을 뿌렸다. 유인물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3·1운동도 11년을 경과했다. 그러나 지금 도리어 일본제국주의의 압박과 착취는 그 정도를 더하고 있어 2천만 생령의 고통과 비애는 극에 달해 있다. 보라! 저 놈들의 은행, 회사, 상점과 수리조합 및 농장의 발전? 확장을! 그리고 우리 도시, 농촌의 파멸, 실업자와 빈민굴의 증가, 소작농민의 빈곤격화를! 피땀을 흘리며 노동하는 자는 조선의 노농 군중이고 영화와 향락을 누리는 자는 일본의 자본가와 지주가 아닌가! 그들은 이러한 착취와 야만적 압박의 지위를 지키기 위해 거대한 군과 경찰을 배치하여 감옥을 확장하며 악법과 가혹한 형벌로 우리 전위 투사를 도살하고 해방운동을 말살하고 있지 않은가? 그러나 죽음에 당면한 조선 민중을 위한 운동과 죽음을 무릅쓴 투쟁은 창검과 철창으로 근절할 수 없다."1929년 시작된 '세계대공황'의 여파는 조선인들의 삶도 어렵게 만들었다. 쌀값이 폭락해 농촌의 삶은 궁핍해졌고, 도시 노동자들은 임금삭감과 실업으로 생활고에 시달릴 수밖에 없었다. 이승엽이 불러주고 이두옥이 인쇄한 것으로 알려진 이 격문은 어려운 노동자들의 항거를 이끌어내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이두옥과 이승엽은 이 격문을 서울로 옮겨 전국으로 배포할 계획을 세웠다. 인천에서 격문이 제작된 사실을 숨기기 위해서다. 안타깝게도 당시 서울로 격문을 가져가던 김점권이 경찰에 적발되면서 이들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고, 이두옥은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다.옥살이를 거친 이후 이두옥은 함께 광주학생독립운동을 주도했던 신대성을 만났다. 이들은 함께 조선공산당 공작위원회를 조직했으나, 경찰에 또 한 번 구속되게 된다. 경기도경찰국이 압수한 이들의 비밀 문건에는 '혁명적 학생운동 방침', '반제투쟁동맹 조직테제', '반전 캠페인' 등 조선총독부에 항거하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이 일을 계기로 이두옥과 신대성은 1934년 징역 3년형을 받아 서대문형무소에 또 한 번 갇히게 되었다.출옥 이후 지하 운동에 전념하던 이들에게도 해방의 순간이 찾아왔다. 신대성은 이승엽과 함께 남조선노동당에서 활동했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그는 1949년 서울 마포구 남로당책임자로 우익청년단에 잠입한 혐의로 구속됐는데, 이것이 신대성의 마지막 기록이다. 남로당 인천시당과 전남도당에서 활동하던 이두옥은 자신의 고향에서 일어난 제주 4·3사건에 참여했다가 주동자로 붙잡혀 총살당해 생을 마감했다.이두옥과 신대성은 나라를 빼앗긴 1910년을 전후해 태어났다. 그들은 학창시절부터 나라를 독립시키려고 치열하게 싸웠지만, 좌익 활동을 했던 이력 때문에 그들의 주 활동무대였던 인천에서조차 철저하게 잊히고 묻힌 독립운동가가 됐다.김원봉, 조봉암 등 잘 알려지지 않은 독립운동가들의 활동상을 오랫동안 추적해 온 이원규 작가는 "이두옥과 신대성은 그 누구보다 치열하게 독립운동을 벌였지만, 인천 지역에서는 한 번도 그들을 주목한 적이 없다"며 "이들은 북한에서도 조명받지 못하는 인물이다. 이들이 학창시절을 보냈던 인천에서 이들을 기억해야 하는 이유 중 하나다"고 했다. /김주엽기자 kjy86@kyeongin.com일러스트/성옥희기자 okie@kyeongin.com/아이클릭아트경기도경찰국이 보관하고 있던 이두옥과 신대성에 대한 비밀 문서.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제공

2019-10-23 김주엽

[독립운동과 인천·(32)]'광주학생운동' 동참 이두옥·신대성

한국전쟁 이전에 행적 끊어진 탓北에도 기록없어… 연구활동 필요지금으로부터 90년 전인 1929년 11월 3일 전라도 땅 광주에서는 대규모 학생운동이 일어났다. 일제강점기 3대 독립운동 중 하나로 꼽히는 '광주학생독립운동'이다. 정부는 이 독립운동을 기리기 위해 11월 3일을 '학생독립운동기념일'로 정하고 매년 광주에서 기념식을 열고 있다.광주학생독립운동은 전국에서 5만5천여명의 학생이 참여했다. 인천공립상업학교(현 인천고등학교) 학생들도 광주학생독립운동에 참여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 하지만 '광주'라는 이름에 담긴 상징성 때문에 이들의 독립운동은 조명받지 못했다.1930년 인천공립상업학교를 다닌 이두옥(1911~1950), 신대성(1909~?) 등 16명의 학생은 동맹 휴학을 벌이고, 전교생에게 '광주 학생들과 함께 독립운동을 벌이자'고 참여를 독려했다. 이 사건으로 이두옥과 신대성은 학교를 떠나야 했지만, 독립운동 의지는 꺾이지 않았다. 이두옥은 3·1운동 11주년을 맞아 항일운동 정신을 고취하는 내용이 담긴 격문을 배포했다. 이후 신대성과 함께 조선공산당 재건을 준비하다 한 차례 더 옥살이했다.안타깝게도 인천지역에서는 이들의 독립운동 행적이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다. 이두옥과 신대성이 해방 이후 남조선노동당에 가입한 영향으로 '빨갱이' 올가미가 씌워졌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이두옥은 제주 4·3 사건에 연루돼 총살을 당했다. 신대성은 우익단체에 몰래 잠입한 혐의로 구속된 이후로는 관련 기록을 찾을 수 없다.이두옥과 신대성은 좌익 활동을 벌였지만, 한국전쟁 이전에 행적이 끊겼기 때문에 북한에도 관련 기록이 없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들은 남과 북 모두에게서 외면당했다. 이들의 독립운동 근거지였던 인천에서라도 이두옥과 신대성에 대한 연구가 이뤄져야 하는 이유다. /김주엽기자 kjy86@kyeongin.com

2019-10-23 김주엽

[zoom in 송도]취임 한달 지난 인천글로벌캠퍼스운영재단 백기훈 대표이사

국제도시 이점 활용 다양한 동아리 활동유학보다 비용 저렴 동일학위 취득 장점학문 경계넘어 학과와 융합 경쟁력 창출"인천글로벌캠퍼스(IGC)가 인재를 배출하면, 인천 송도는 세계적인 산학 협업의 결실을 꽃피우게 될 것으로 예상합니다."인천글로벌캠퍼스운영재단 백기훈 대표이사는 "인천경제자유구역은 국제기구와 글로벌 기업, 바이오 클러스터 등 산학 협력의 자원이 풍부한 입지적 조건을 갖추고 있다"며 이같이 강조했다. 또 "미국 실리콘 밸리가 성공한 핵심 원인은 스탠퍼드대와 같은 훌륭한 대학에서 인재를 공급한 점이라고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그는 지난달 11일 인천글로벌캠퍼스운영재단 대표로 취임했다. 그동안 캠퍼스 곳곳을 둘러보고 입주 대학 관계자들과 만나 활성화 방안을 논의하는 등 업무를 파악했다. 백 대표는 "IGC의 조속한 안착과 발전을 위해 제가 가진 경험과 지식을 최대한 가동해 보겠다"며 "많은 협조를 부탁한다"고 말했다.-인천글로벌캠퍼스의 장점을 소개한다면."IGC 학생들은 국내의 네트워크를 유지하면서 실제로 유학을 떠나는 것보다 훨씬 저렴한 비용으로 외국 대학의 교육을 받고 동일한 학위를 취득한다. 또 국제도시 이점을 활용해 학교에서 제공되는 인턴십, 다양한 동아리 활동 등을 경험할 수 있다. IGC는 뉴욕주립대 스토니브룩과 FIT, 조지메이슨대, 겐트대, 유타대의 다양한 학과가 조화와 융합을 이루면서 하나의 종합대학 형태를 띠고 있다. 학문의 경계를 넘어 서로 융합함으로써 새로운 경쟁력을 만들어 나가고 있다. 10개 대학 중 5개 대학이 운영되고 있는 1단계 사업이 성공적으로 안착하면서 국내외에서 벤치마킹하기 위한 방문과 문의가 끊이지 않고 있다."5개大 학생 모여 내달 6일 '뮤직 페스티벌'대학간 교차수업등 폭넓은 네트워크 강화외국기업·국제기구 참여 취업박람회 특화-개선이 필요한 사안도 있을 것 같다."이제 7년째 접어드는 초기 단계이기 때문에 아직은 학생 수가 총정원의 65% 정도다. 그동안 전략적인 홍보, 내부 만족도 향상 등 노력의 결과로 2012년 첫해 50여 명에 불과했던 학생 수가 2019년 가을학기 기준 약 2천800명으로 급증했다. 2020년까지 충원율 80% 달성이 예상된다. 2~3년 후에는 대학들의 재정 자립도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운영재단은 입주 대학들과 국내외 공동 입학설명회 개최, 공동 홍보 추진 등 학생 모집 지원 활동을 적극적으로 펼치고 있다. 관련 법상 IGC 입주 대학은 산업교육기관에 포함돼 있지 않다. 이 때문에 국내 대학과 달리 산학 협력 활동을 하는 데 어려움이 있다. 평생교육 프로그램도 운영하지 못하고 있어 지역사회와의 소통이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이러한 법적인 제한에서 자유롭게 되는 것이 앞으로 대학들의 자립, 지역사회 공헌 확대, IGC의 안정적인 운영에 필수적인 요소가 될 것이다."-올해 IGC에서 이뤄지는 행사나 구상 중인 사업은."지난달 28일 IGC 첫 취업박람회가 열렸다. 외국계 기업과 국제기구, 우리 캠퍼스의 많은 학생이 참여했다. 내년에도 외국계 기업과 국제기구 참여로 취업박람회를 특화하고, IGC만의 취업 컨설팅 요소를 가미해 차별화된 취업박람회를 개최할 예정이다. 다음 달 6일에는 연례 최대 축제인 뮤직페스티벌이 열린다. 5개 대학이 한 캠퍼스에 모여 있는 만큼 학생들의 끼와 재능도 대단하다. 한국 학생과 외국 학생이 어울리는 진정한 글로벌 축제이자 지역 주민들과 함께하는 이벤트가 될 것이다. 12월7일에는 공동 입학설명회가 열리는데, 매년 행사에 참여하는 학생과 학부모 수가 증가하고 있다. 각 대학의 특징을 살린 자율적인 축제나 행사도 있지만, 대학들이 공동으로 행사를 여는 것은 IGC만 가능한 일이다. 대학 간 교차 수업도 가능해 IGC 동문이라는 더 폭넓은 네트워크를 갖게 되는 셈이다. 더 나아가 인천 지역사회 및 대학과도 상생하면서 유대를 강화하는 이벤트를 구상하고 진행할 예정이다."-앞으로 중점적으로 추진할 업무가 있다면."운영재단이 더욱 혁신하고 신뢰받는 공공기관으로 도약하도록 노력하고자 한다. 이를 위해 기본에 충실한 조직 문화를 만들어 임직원이 맡은 바 업무에 전문성과 책임감을 가지고 최선을 다하는 환경을 조성하겠다. 창의성과 역동성이 넘치는 캠퍼스를 만들겠다. 지성과 젊음이 충만하고 조화와 상생이 넘치는 캠퍼스를 만들 수 있도록 우리 스스로 공부하고 젊어져야 한다. 국제적 안목과 경쟁력을 염두에 두고 업무를 추진할 것이다. 계획과 정책을 수립·추진할 때 IGC가 장차 동북아 최고의 글로벌 교육허브가 될 수 있도록 국제적인 수준이나 경쟁력을 감안해 포석을 놓고 명성을 쌓아 나갈 것이다."-끝으로 하고 싶은 말씀은."IGC 학생들의 구성 분포를 보면 외국 학생이 약 10%, 복귀 유학생이 30%, 나머지 60%는 한국에서 유학의 꿈을 안고 온 학생들이다. 이들은 비싼 유학비를 들이지 않고도 외국 대학의 동일한 커리큘럼으로 공부하고 동일한 학위를 받을 수 있는 IGC 대학을 선택했다. 또한 IGC 대학들은 국내 대학들과 경쟁 구도에 있는 것이 아니다. IGC는 세계 지식·경제·산업·문화 등 각 분야를 이끌어 갈 차세대 글로벌 인재 양성에 기여할 것이다. IGC를 중심으로 송도를 최고의 글로벌 교육허브로 만들기 위해 관계 기관과도 잘 협력해 나갈 계획이다. 여러분의 많은 성원을 부탁한다." /목동훈기자 mok@kyeongin.com인천글로벌캠퍼스운영재단 백기훈 대표는 "인천글로벌캠퍼스의 조속한 안착과 발전을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고 밝혔다. /목동훈기자 mok@kyeongin.com

2019-10-20 목동훈

[독립운동과 인천·(31)]강화 만세운동

1919년 3월18일 1만명 모여 시위기독교 주도… 이후에도 8건 기록일제강점기에도 강화도는 역시나 항쟁의 공간이었다. 인천의 독립운동을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게 바로 강화도의 만세 시위다. 1919년 3월 18일 읍내 장터에서 무려 1만 명의 시위대가 만세를 외쳤다.인천의 근현대사를 개항장 중심으로 풀어나가다 보면 자칫 강화도의 만세 시위의 위상과 중요성을 지나치곤 한다. 인천의 만세 운동 횟수를 헤아릴 때 강화도를 빼놓은 일부 자료들이 대표적인 예다. 대개 민족 사학자 박은식이 1920년 쓴 '한국독립운동지혈사'를 인용해 인천의 만세 운동이 8건 벌어졌다고 하는데 이는 개항장과 원인천인 문학산 일대에 한정된 오래 전의 인천이다. 강화도의 만세 시위는 기독교계에서 주도했는데 '강화중앙교회 100년사'에 나온 강화도의 만세 시위만 해도 3월 18일 이후 8건이나 된다. 이병헌이 1959년에 내놓은 '삼일운동비사'에는 강화에서 일어난 10건의 만세 시위를 정리했는데, 같은 날 여러 곳에서 동시다발로 일어난 봉화시위까지 더하면 그 횟수는 더 많을 것으로 보인다.강화도는 섬이라는 지역 특성상 거류 일본인이 적었기 때문에 일본인 조계지가 있었던 인천보다 활발한 만세 시위가 가능했다. 대몽항쟁, 임진왜란, 병인·신미양요 등 과거부터 외세의 침입에 대응했던 강화 주민만의 역사적 동질성도 이런 결집력을 가져다 주었을 것으로 보인다. 강화의 만세 시위는 인근 김포와 계양·부평에까지 영향을 미쳤다.강화도의 만세 시위는 대한제국 진위대 출신의 독립운동가 유봉진(1886~1956)이 이끌었다. 그는 '결사대장'을 자처하며 죽음을 불사하고 만세 시위의 최일선에 섰다. 강화는 인천 독립운동의 뒷부분에 끼워넣는 '부록'이 아니라 주인공이다. 조봉암, 유두희 등 강화 출신의 독립운동가와 이동휘 등 강화와 인연을 맺은 애국지사의 이야기, 구한말 의병운동까지 더하면 강화의 독립운동 이야기는 날을 새도 모자랄 정도다. /김민재기자 kmj@kyeongin.com

2019-10-16 김민재

[독립운동과 인천·(31)]결사대장 유봉진과 강화 만세운동

길직·잠두교회 신도들 중심 3월 18일 '거사' 이끌어백마 타고 등장… 군수·경찰서장에도 '만세' 다그쳐마니산으로 피신했지만 부모 볼모로 잡혀 결국 체포민족지도자 조봉암 선생 '독립열망' 불 지핀 계기로출소후 대대적 환영인파 보도 눈길… 교육자로 지내강화도는 역사적으로 외세의 침입에 유난히 시달렸던 곳이다. 고려 시기 몽골 침입에 맞서 항전하던 전시수도였으며 조선 말기 두 차례의 양요를 겪기도 했다. 그래서인지 강화도 주민들은 일본의 침략에도 분연히 맞서 싸웠다. 일제가 침략 야욕을 드러낸 구한말 시기부터 의병이 들고 일어섰다. 강화에서 벌어진 3월 18일의 만세 시위는 단일 사건으로는 서울에 이어 두 번째로 많은 43명이 체포된 사건으로 기록되고 있다.1919년 3월 18일 강화 읍내 시장에서 벌어진 만세 운동은 '결사대장' 유봉진(1886~1956)이 이끌었다. 강화 길직교회 신도였던 유봉진은 3월 1일 서울의 만세운동에 참여하고 강화로 돌아온 선두교회 출신의 황도문으로부터 시위 소식과 독립선언서를 입수하고, 강화 지역의 만세시위를 본격적으로 계획했다. 유봉진은 원래 대한제국 진위대 출신으로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하려고 그의 보호순사를 지원했다가 탈락해 칼을 벼르고 있던 중이었다. 1907년 군대 해산 시 해산군의 대일항전에 참여하기도 했다.유봉진은 3월 8일 길직교회 이진형 목사와 함께 비밀리에 시위 작전을 짰다. 기독교 신도들을 중심으로 각 마을마다 회합을 가졌고, 바다 건너 주문도까지 건너가 주민들에게 독립운동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그는 주문도 예수교회당 신도 120명 앞에서 "나는 그 운동을 위해 결사대원이 될 것이니 천명을 다하지 못할 것이며 언제 죽을지 모른다. 천국에서 만나자"고 외쳤다. '유봉진 독립결사대'라고 쓴 윗옷를 보이며 동참을 호소했다.유봉진과 신도들은 18일 읍내 장날을 거사일로 정하고 주민들에게 배포할 문서를 작성했다. "민족자결주의에 입각해 국권을 회복하고 독립해야 한다"는 내용이었다.당시 강화읍 장터는 지금의 관청리와 신문리 사이에 걸쳐 있었는데 사이로 냇물이 흐르고 돌다리가 놓여 있었다고 한다. 시위를 주도한 길직교회, 잠두교회 신도들은 오후 2시가 되자 돌다리 부근에 모여 일제히 만세를 외쳤다. 면 보자기나 종이에 그린 태극기와 '조선독립'이라는 글씨를 쓴 깃발을 흔들며 만세를 외쳤고, 상인들과 장을 보러 나온 주민들도 동참했다. 당시 일제 기록에 따르면 시위 참가자는 1만 명에 달했다. 일제시대 강화의 인구가 7만여 명이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엄청난 규모의 시위대였다.유봉진은 만세 함성이 터지자 백마를 타고 등장해 '결사대장'이라고 쓴 태극기를 어깨에 두르고 시위를 이끌었다. 이어 종루에 올라 종을 치며 군중들을 모았다. 당시 유봉진에 대한 1·2심 판결문을 보면 유봉진을 선두로 세운 군중들은 시장을 지나 강화군청과 공자묘(孔子廟)로 이동해 만세를 외쳤다. 유봉진은 강화군수 이봉종에게 "조선독립만세를 외쳐라. 만약 응하지 않으면 군청 안으로 침입해 파괴하겠다"고 했다.시위대는 공자묘 시위 때 경찰에 체포된 주민들을 구하러 경찰서 앞까지 몰려갔다. 유봉진은 "동지를 석방하라. 또한 시장에서 칼을 빼 든 순사보를 때려 죽일 것이니 인도하라"고 했다. 유봉진은 경찰서장에게도 만세를 외치라고 했는데 서장이 마지못해 '만세'를 부르니까 "만세만으로는 안 된다. '조선독립만세'라고 부르라"고 다그치기도 했다.사건 두 달 뒤인 1919년 5월 10일 당시 경기도 장관이 조선총독부 정무총감에게 보낸 '소요사태에 대한 도장관(道長官) 보고철'에는 유봉진을 강화에서 일어난 만세 시위의 '수모자(首謀者)'로 기록했다.일제는 강화 만세 시위를 주도한 사람들을 속속 검거에 나섰으나 유봉진은 일제의 검거를 피해 마니산으로 도망친 뒤였다. 그는 마니산에 있을 때 조선총독부에 조선을 반환하라는 내용의 편지를 보내고, 경찰에 만세를 다시 부르겠다고 했지만, 우편국이 이를 몰수했다. 이완용에 보낸 친일행위에 대한 경고장도 역시 전달되지는 않았다. 그는 수첩에 연락용 암호를 만들어 기재하는 등 대규모 만세 시위 재개를 노렸지만, 경찰이 부모를 볼모로 잡아 놓고 협박하던 상황이라 결국 산에서 내려와 체포됐다. 그는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2년형을 선고받았고, 복심법원(2심)에서 1년 6개월로 감형됐다.3월 18일 강화 만세운동 사건으로 모두 43명이 구속돼 재판에 넘겨졌는데 이 중 2명은 여자였다. 한 명은 만세운동 사실을 주민들에게 알리는 문건을 배포하는 역할을 맡았던 김유의였고, 다른 한 명이 바로 유봉진의 부인 조인애(1883~1961)였다. 조인애도 태극기를 운반하고 18일 시장에서 부녀자를 인솔해 시위에 앞장섰다가 체포돼 6개월 동안 옥고를 치렀다.유봉진이 마니산에 숨어지내는 사이 강화에는 만세 운동이 들불처럼 번졌다. 3월 19일 일제의 대규모 검거 작전에 반발하며 온수리 천도교, 기독교인 수백명이 만세시위를 벌였고, 20일에는 매일신보 기자인 조구원이 강화경찰서에 "조선독립운동자를 검거하지 말라. 만약 이에 응하지 않으면 참살하거나 방화하겠다"는 문서를 발송했다. 만세의 불길은 교동도까지 번져 21일부터 큰 시위가 벌어졌고, 4월 1일에는 강화 전 지역으로 확산돼 13개 지역에서 동시다발적으로 횃불 시위가 일어나기도 했다. 4월 9일에는 석모도에도 만세의 외침이 울려퍼졌고, 4월 13일에도 불은면 두운리에서 태극기가 휘날렸다.잠잠하던 만세운동은 1년 뒤에도 일어났는데 1920년 7월 15일(음력) 양사면 철산리에서 오용진 등이 집에서 태극기를 그리고 '대한독립 만세, 슬프다, 슬프도다'라는 글을 썼다. 이들은 면 사무소 게시판에 만세 운동을 벌이자는 글을 게시하며 대규모 시위를 벌이려고 했으나 결국 일제에 발각돼 징역 1년형을 선고 받았다.3월 18일 대규모 시위 이전에도 강화에서는 일본에 대항한 크고 작은 만세 시위가 있었다. 18일 장터의 만세 소식을 접한 학생들이 먼저 들고 일어서려다 교장과 직원들의 제지로 뜻을 이루지는 못했다. 1959년 발행한 이병헌의 '삼일운동비사'의 경기도편을 보면 3월 12일 오전 읍내 보통학교에서 3·4학년 생도 전부가 집합해 칠판에 태극기를 그리고 만세를 부르며 운동장으로 나가려 했다는 대목이 있고, 그 다음 날 같은 학교 여자반 100여 명이 학교 안에서 만세를 불렀다고 한다. 당시 경찰이 학생들을 연행하려고 하자 교장이 나서서 신변을 보호하고 책임을 지겠다며 사건을 무마하고 경찰을 돌려보냈다.유봉진이 이끈 강화의 만세운동은 강화 출신의 민족지도자 죽산 조봉암의 마음에 조국 독립에 대한 열망의 불을 지핀 계기가 됐다. 조봉암은 그가 1957년 '희망' 2·3·5월호에 쓴 자서전 '내가 걸어온 길'에서 강화 만세운동을 계기로 "일생을 일본제국주의와 싸운 애국투사가 됐다"고 밝혔다. 특히 유봉진에 대해서는 특별한 평가를 남겼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우리 강화에서의 만세운동은 유봉진씨의 영도 하에 치밀한 계획으로 방방곡곡 어느 작은 부락 하나도 빼지 않고 일어났었고 그것이 한 달 동안이나 계속됐었다. 그런데 유 선생의 지도방침은 철저한 평화적 시위였기 때문에 수천 명이 태형(볼기 맞은 형벌)을 당했을 뿐, 감옥살이를 한 사람은 비교적 많지 않았었다. 유 선생은 마니산 꼭대기에 숨어서 만세운동을 지휘했고, 왜놈에게 체포되어서도 '독립운동자 유봉진'이라고 종이에 크게 써서 가슴에 붙여주지 아니하면 말 한마디 대꾸도 안 했다."1920년 9월 만기 출소한 유봉진은 북도면 시도에서 사립 신창학교 교장으로 근무했고, 몇 해 뒤 강화군으로 돌아와 하도면 내리에 있는 폐교에 노산학원을 다시 개교해 2년 동안 근무하는 등 교육자로 지냈다. 1920년 9월 24일 동아일보 기사를 보면 그가 출소해 강화에 돌아왔을 때 환영 인파가 인산인해를 이뤘다고 한다. 그는 60살이던 1945년 뒤늦게 아들을 낳고 한국전쟁 뒤 자식 교육을 위해 서울로 이사 갔으나 1956년 생을 마감했다. 유봉진은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됐고, 그의 부인도 2년 뒤 대통령표창을 받았다. /김민재기자 kmj@kyeongin.com유봉진이 만세운동 시위를 계획했던 당시 강화 길직교회. /강화3·1운동기념사업회 제공유봉진 /인천인물100인 발췌유봉진의 강화 만세운동 행적이 기록된 '소요사태에 대한 도장관(道長官) 보고철'. /국사편찬위원회 제공유봉진이 몸 담고 있었던 대한제국 진위대 모습. 일러스트/성옥희기자 okie@kyeongin.com유봉진에 대한 검찰신문조서. /국사편찬위원회 제공강화군 독립운동기념비. 지난 1994년 강화읍 견자산 내에 세워졌으나 1996년 당시 만세운동 발상지인 강화읍 웃장터(前 은혜교회)로 이전. 이후 용흥궁 공원내로 재이전 건립. /강화군 제공

2019-10-16 김민재

[독립운동과 인천·(30)]인천항 우련통운 설립자 배인복

상하이 후원활동 제대로 조명안돼'묻힌 자금줄' 등 추가 연구 필요인천항의 하역업체 우련통운의 설립자 배인복(1911~1997)은 인천항만 업계를 이끈 기업인으로 유명하지만 그가 일제 강점기 조국의 독립을 위해 이바지했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많지 않다.인천에서 태어난 배인복은 1940년대 초반 일제의 징집을 피해 중국 상하이로 건너가 무역업을 했을 때 이역만리 타국에서 독립을 위해 싸우던 애국지사들의 재정적 버팀목이 돼주었다.상하이 한인 사회에서 이렇게 독립운동 후원을 했던 상인들을 '상인독립군'으로 불렀는데 배인복도 그 중 하나였다. 상하이 한인 사회의 대부격인 대표 상인독립군 김시문과 교류하면서 독립운동의 뒷바라지를 했다.아쉽게도 인천은 기업인으로서 평가에만 몰두한 나머지 일제 강점기 배인복에 대한 행적은 놓치고 말았다. 1940년대 상하이에서 어떤 독립운동가와 교류했고, 어떤 방식으로 얼마나 지원했는지도 현재로선 기록이나 증언조차 구하기 쉽지 않다. 일제의 수탈과 징집을 피해 상하이로 넘어간 인천의 이름 모를 상인들이 배인복처럼 상인독립군으로 활약했을 가능성도 있지만, 이 역시 제대로 된 조명을 받지는 못하는 상황이다.배인복은 코흘리개 꼬마 시절이었던 1919년 3·1 운동 때도 태극기를 흔들며 동네를 누볐고, 청소년기였던 1926년에 벌어진 6·10 만세 운동 때도 태극기를 흔들며 만세를 외쳤다. 이런 그가 외국에 가서도 서슬퍼런 일제의 감시를 피해 독립운동가들을 후원했다는 사실은 전혀 어색하지 않다.상인독립군을 연구한 김광재 국사편찬위원회 사료실장은 "당시 상하이 한인사회에서는 공공연하게 독립운동을 지원할 수 없었던 이유로 서로가 모르게 활동을 했을 수도 있어 배인복의 존재가 잘 알려지지 않았을 가능성이 있다"며 "지금으로서는 관련 자료가 없는 상황이라 추가적인 연구가 필요해 보인다"고 말했다. /김민재기자 kmj@kyeongin.com

2019-10-09 김민재

[독립운동과 인천·(30)]상인독립군 배인복

보성전문학교 졸업… 인천서 석유업 '첫발'일본 유학시절 징집 피해 상하이로 넘어가당시 한인사회 상업계 대부 김시문과 교류묘비에 지사들 후원 아끼지 않은 내용 기록배재고보때 '만세' 가담해 퇴학 당하기도해방후 청구양행… 우련통운 지금까지 이어일제 강점기 해외 독립운동의 중심지였던 중국 상하이.어떤 이는 총과 포로 무장해 일제에 맞서 싸웠고, 어떤 이는 말과 글로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이역만리 타국에서 독립운동을 펼치려면 재정적 뒷받침 없이는 불가능한 일.상하이에 진출한 우리 상인들은 일제의 감시를 피해 그들을 후원했다.그래서 상하이의 상인들은 총대를 메지 않았고 펜대를 들지 않았지만, 독립군이라고 불리기 충분한 자격이 있다.이들을 '상인독립군'이라고 부르는 이유다.상인독립군은 조국의 독립을 위해 총을 든 이들의 총알이 됐고, 펜을 든 이들의 잉크가 돼주었다.이름 없는 상인들의 활약까지 우리 독립운동사에 하나하나 기록됐으면 좋으련만해외 상인들의 독립운동 이야기는 이렇다 할 주목을 받진 못했다.상하이 상인독립군 중에는 인천 출신의 무역상도 있었다.인천항 하역업체 우련통운 설립자 배인복(1911~1997)이 바로 그 주인공이다.인천은 그를 성공한 기업인으로 평가하고 있을 뿐 독립운동과 연결지으려는 시도는 하지 않았다.충남 태안에 있는 배인복의 묘지에는 그가 자식들에 남긴 글이 새겨진 묘비가 있다. 인하대학교 최원식 명예교수가 배인복의 1인칭 시점으로 쓴 글이다. 배인복 일대기의 요약판이라 할 수 있는 이 묘비문에서 주목할 부분은 그가 1941년 상하이로 건너가 사업을 할 당시 독립지사들과 교류하면서 재정적 후원을 아끼지 않았다는 대목이다."자식들 보거라"라는 짧고 담백한 말로 시작하는 이 묘비문과 배인복의 남은 가족에 따르면 1911년 3월 15일 인천 율목동에서 태어난 배인복은 1934년 보성전문학교(지금의 고려대) 상과를 졸업하고 인천 신포동에서 석유업을 시작했다.사세를 확장하던 배인복은 1930년대 말 일본의 중국 침략으로 석유 공급이 중단되면서 사업을 접었다. 당시 미국이 일본에 중국 철수를 요구했으나 일본이 이를 거부하자 미일 통상조약을 파기하고, 석유·철강 등 지하자원의 수출을 전부 중단했기 때문이다. 그는 1940년 일본 유학길에 올라 일본대학 사회과에 입학했다가 이듬해 태평양 전쟁을 일으킨 일본의 학병 징집을 피해 중국 상하이로 피신했다. 상하이에서 사업을 재개한 그는 어떤 일을 했는지는 정확히 알려지지는 않았다. 다만, '흑인시'로 유명한 그의 동생 배인철(1920~1947)도 몇 해 뒤 상하이로 뒤따라 왔는데 여기서 '무역업'을 하던 형 배인복의 도움을 받았다는 내용이 여러 글에서 확인되고 있다. 배인철 연구자인 윤영천 인하대 교수가 2007년 계간지 황해문화(55호)에 쓴 글을 보면 "일제 징용령을 피해 중국 상하이로 간 그(배인철)는 거기서 무역업에 종사하던 백씨(伯氏) 배인복씨 곁에 머물면서 3개월 남짓 상하이 영미조계 내의 쎈죤스(st. Jones) 대학에 다녔다"는 내용이 나온다.손과지(孫科志) 상하이 복단대학교 역사학 교수가 쓴 '상해한인사회사(1910~1945)' 등 상하이 한인사회 연구서를 보면 상하이의 한인 숫자는 1930년대 중반까지 1천500여명을 유지하다가 1937년 중일전쟁이후 크게 증가했다. 배인복이 이주하기 직전인 1940년 10월에는 7천800여명에 달했다. 일제의 대륙 침략 전쟁으로 한국이 일본의 병참기지로 전락하자 실업자들이 생계를 위해 이주하기도 했고, 배인복처럼 징집을 피해 도망쳐 온 이도 있었다고 한다.이 무렵 한인 자영업자는 400명 가량이었다. 자영업자들은 제과·식품·무역·잡화·철공·인쇄 등 다양한 업종을 운영했는데 고수익자로 분류됐다. 가난한 독립운동가들에 도움의 손길이 가능했던 배경이기도 하다. 상하이 한인사회는 1940년 임시정부의 충칭 이전으로 일본색이 짙어져 갔다. 친일적 단체인 상해거류조선인회 회비 납부자가 1939년 643명에서 1940년 1천700명으로 늘어난 점이 이를 뒷받침한다. 그러나 이런 분위기 속에서도 독립운동가에 대한 지원을 끊지 않은 상인들이 다수 존재했다.당시 상하이 한인사회 상업계의 대부라고 할 수 있는 김시문(1892~1978)도 이런 상인독립군 중 하나였다. 그런데 김시문과 관련된 기록에서 바로 '배인복'이라는 이름 석자가 등장한다. 개풍군 출신으로 1916년 상하이로 이주한 김시문은 프랑스 조계 하비로(霞飛路)에서 김문공사(金文公司)라는 잡화점을 운영해 많은 돈을 벌었는데 독립운동가와 임시정부가 어려움에 처했을 때마다 물질적 지원을 아끼지 않았던 '상인독립군'이었다. 임시정부 기관지 독립신문을 인수해 잠시 경영하기도 했고, 그의 가게는 독립운동가와 임정 요인, 상인들의 사랑방과도 같았다.김시문은 해방 이후 어지러운 국내 정세를 살피느라 귀국하지 않고 1949년 9월 큰아들 김희원만 홀로 귀국시켰다. 김시문은 아들에게 1947년 먼저 귀국한 배인복을 만나라고 했다. 1949년 12월 아들 김희원은 배인복을 찾아갔지만 만나지는 못했다. 1949년 12월 30일 김희원이 아버지에 쓴 편지에는 "배인복 선생은 비록 뵙지 못했지만 그의 사무실에 메모를 남겼으며…"라는 대목이 있다.1949년 12월이면 배인복이 귀국해 고향 인천에서 '청구양행'이라는 무역회사를 차려 운영했을 당시다. 그는 중국 상하이와 인천의 육상 운송 사업에 뛰어들었다. 김시문이 아들을 통해 남긴 메모가 어떤 내용인지는 알려지지 않고 있다. 다만 김시문은 홀로 귀국해 경제적으로 궁핍한 아들을 위해 상하이에서 교류를 했던 사업가들에 도움을 청하라고 했는데 배인복 역시 이런 경우였을 가능성이 높다. 상하이 한인 사회에서 두터운 친밀 관계를 갖지 않았다면 가능하지 않은 상황이다. 상인독립군의 대부였던 김시문과 교류했던 배인복 스스로도 독립지사의 재정적 후원을 아끼지 않았다고 밝혔기 때문에 둘의 관계는 단순한 친밀감을 넘어 독립운동과 관련한 끈끈한 동지애가 있었을 것이란 추측이 나온다.김시문 연구자이자 '어느 상인독립군 이야기'의 저자 김광재 국사편찬위원회 사료조사실장은 "편지 외에 배인복에 대한 기록은 찾지 못했지만, 1940년대 상하이에서 무역업을 했다면 당연히 김시문의 김문공사를 찾아가 어떤 식으로든 교류했을 것"이라며 "당시 김시문을 비롯한 상인들은 일제의 감시를 피해 몰래 독립운동가들을 지원했기 때문에 어떤 명단이 있는 조직을 갖추거나 기록을 남겨 두지는 않았을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김광재 실장은 또 "당시에는 독립운동가와 상인이 명확히 구분됐다기 보다는 상인을 하다가 독립운동에 뛰어들 수도 있었고, 독립운동을 하다가 돈이 필요해 상업에 종사했던 사람도 있었다"며 "사실 앞에서 총을 들고 뛰어든 독립운동가들을 후원했던 상인들도 독립운동가라고 해도 부족함이 없다"고 했다.배인복이 상하이에서 벌인 독립운동가 후원은 그의 국내 행적을 살펴보면 오히려 자연스러운 일이었을 지도 모른다. 배인복과 한국 고고미술사학의 개척자인 우현 고유섭의 태극기 일화가 이를 증명한다. 그 이야기도 묘비문에 새겨져 있다. 1918년 인천공립보통학교(지금의 창영초)에 입학한 꼬마 배인복은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네살 위의 형 고유섭과 함께 집 담장에 태극기를 꽂아놓고 만세를 불렀다가 혼이 났다고 한다. 배인복도 1988년 고유섭 특집 기사를 게재한 잡지 '월간공예'와의 인터뷰에서 "우현 선생이 태극기를 직접 그려서 우리들에게 나누어 주고 초가집 지붕 위에 올라가 태극기를 꽂았습니다. 우리들은 모두 모여서 만세를 부른 후 동네를 돌다가 체포되었지만, 7~8세의 어린 아이들은 훈방으로 금방 풀려났지만, 우현 선생은 유치장에 있다가 사흘째 되던 날 큰아버지가 찾아가 겨우 나올 수 있었습니다"라고 말했다.그가 서울 배재고보를 다니던 시절 1926년 6·10 만세운동에 가담했다가 퇴학을 당한 사실도 있다. 6·10 만세운동은 1926년 6월 10일 순종의 장례식을 기해 전국적으로 일어난 학생 중심의 만세시위였다. "조선 민중아! 우리의 철천지원수는 자본제국주의의 일본이다. 2천만 동포야! 죽음을 각오하고 싸우자! 만세, 만세, 조선독립만세!" 라는 격문이 살포됐고, 이 사건으로 일본 경찰에게 붙잡힌 학생수는 서울에서 210여 명, 전국적으로는 1천여 명이나 됐다. 1930년 4월 5일자 동아일보는 당시 학생운동으로 퇴학당한 학생 이름을 실었는데 전체 497명 중 배재고보 11명의 명단에 배인복의 이름이 등장한다.배인복이 상하이에서 누구와 어떻게 교류했는지는 한 번도 연구된 적이 없다. 배인복의 여동생인 배경숙(90) 전 인하대 법대 교수가 큰 오빠의 옛 이야기를 비교적 상세히 알고 있지만, 고령이라 인터뷰가 이뤄지지 못했다. 그의 다른 가족들도 상하이 상인독립군 시절의 이야기는 알지 못하고 있다.그가 해방 후 세웠던 청구양행은 이후 무역에서 하역업으로 사업을 확장했고, 1958년 우련통운으로 재출발해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다. 기업인 배인복은 1950년대 말 대한해운공사 인천지점 하역권을 유치해 급속히 성장했다. 배인복은 1976년 동생에게 사업을 물려주고 은퇴했다가 1997년 11월 11일 중구 송학동 자택에서 눈을 감았다. /김민재기자 kmj@kyeongin.com그래픽/성옥희기자 okie@kyeongin.com/아이클릭아트배인복. /배준영씨 제공배인복이 상하이에서 무역업을 하던 시절 교류했던 상인독립군 김시문의 '김문공사' 1950년대 중반 전경. 처음 지어진 1910년대와 달라진 것이 거의 없다고 한다. 상하이의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여기를 드나들었다. /어느상인독립군이야기 발췌

2019-10-09 김민재

[독립운동과 인천·(29)]잊히고 묻힌 의사 출신 이민창

1929년 인천 정착해 병원 운영하다 1941년 '합병 30년후 독립 약속 지켜라' 투쟁엘리트 인생 버리고 감옥서도 항거 해방전 출소 거부 1년6월 형기 받고 4년 살아이후 모습 드러내지 않고 '두문불출' 가난한 자들에 인술 펼치고 과학공부 매진'開國(개국) 495년 5월 11일'1941년, 인천에서 병원을 하면서 독립만세를 외치다가 서대문형무소에 갇힌 이민창(李敏昌)은 신상 카드 나이를 기록하는 곳에 이렇게 적었다.일제에 강제로 병합된 지 30년이나 더 흐른 때임에도 이민창은 여전히 자신의 생일을 조선이 개국한 1392년부터 따졌다.일제에 나라를 빼앗긴 것을 인정하지 않았다는 얘기다.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이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변절하던 시기에 대단한 기개가 아닐 수 없다.그 이민창의 드라마 같은 항일운동 이야기를 접할 수 있는 자료는 1955년 고일 선생이 펴낸 '인천석금'이 유일하다시피 하다.'인술(仁術)에 여생 바치는 노투사 '이민창' 씨'란 제목의 글은"1941년 일제의 황혼시절이다. 융희(隆熙) 4년 경술한일합병(庚戌韓日合倂)의 국치(國恥)의 시간이 30주년이 지난 그해에 서슬이 시퍼런 독오른 일제 면전에서 단독육탄으로 항쟁하던 투사가 깊은 밤중에 총소리 같은 뉴~스를 던졌으니" 이렇게 시작한다. '인천석금' 속으로 좀 더 들어가 보자.1941년, 이민창은 '너희들이 합병 후 30년이 지나면 독립을 준다고 했으니 이제는 우리나라를 돌려보내라'는 내용의 벽보를 붙이고 전단을 뿌렸다. 조선 총독과 일본 내각 대신들에게도 서한을 발송했다. 이민창은 의사였다. 지금도 그렇지만 일제강점기 의사 역시 누구나 부러워하는 존재였다. 그는 활짝 열려 있는 탄탄대로의 인생을 버리고 일제에 항거하고 나섰다. 그는 거리로 나가 대한독립만세를 부르짖으며 자주독립의 필연성을 국제정세에 맞추어 연설했다. 청중들은 다들 "미쳤다" "큰일 나겠다"고 말하며 꽁무니를 뺐다. 이민창은 곧바로 체포되었다. 인천경찰서 고등계 형사 권오연이 담당했다. 그는 이민창을 고문했다. 그래도 이민창은 굽히지 않고 목청을 돋워 취조하는 형사를 나무랐다. "아무리 일제의 주구 노릇을 하는 네놈이지만 한국인의 피를 받았다면 내 주장이 그래 그르냐? 옳으냐?" 그렇게 꾸짖음을 받았던 권오연은 해방 후 '노죄수의 굳고 곧고 깨끗하고 거룩했던 그 기개 용기 명석 준엄에는 고개가 수그러졌다'고 고백했다.이민창은 서울 서대문형무소로 이송되어 가면서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독립문에 이르자 대한독립만세를 외치고 독립문의 유래를 연설했다. 지나던 행인들은 목례로 답했다. 1년 6개월 형을 선고받았다. 감옥에서도 항거했다. 옥중에서 조회 때마다 불러야 했던 기미가요를 거부했고, 황국신민선서도 일축했다. 이 일로 형기가 더 늘어 청주형무소로 이감되었다. 1945년 새해 만기 출소일이 되었다. 찾아온 부인에게 이민창은 말했다. 나는 독립이 되기 전에는 나가지 않고 감옥에서 죽을 테니, 어서 돌아가오. 집에 돌아간다고 해도 일경들이 가족들을 못살게 굴 게 분명하니 오히려 감옥에 있는 것이 가족들에게도 좋을 것이오. 그렇게 만기를 더 넘겼고, 해방이 되어서야 출옥했다.이민창은 일본인과 섞이기를 싫어했다. 투옥되기 전의 일이다. 큰딸이 영신학원에서 교편을 잡고 있다가 일본인이 새로 설립한 송현심상소학교로 옮겼다. 그 얘기를 나중에 들은 이민창은 일본인 교장을 찾아가 말했다. "내 딸은 당신 학교에 보낼 수 없으니 내가 도로 데리고 가겠소." 사립학교일지라도 일본인이 교장인 곳에서는 딸을 근무하게 할 수 없다는 거였다. 큰딸은 다시 영신학원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이민창은 '가장 뛰어난 의사는 나라를 고치고, 그 다음이 사람을 구한다'는 말을 실천하기 위해 약관의 나이에 한성병원부속학교에 입학하여 강제병합 이전에 졸업, 서울에서 개업했다. 이화학당 출신을 부인으로 맞아 잘 살았으나 1916년쯤에 일제의 학정에 분개한 나머지 블라디보스토크로 망명했다. 하지만 고국을 잊지 못해 몇 년 뒤 다시 양강도 경흥과 황해도 재령에서 공의(公醫) 생활을 했다. 인천에는 1929년쯤에 정착했다. 이중설병원 자리에서 먼저 병원도 운영했다. 그렇게 인천에서 10년 정도 병원을 하다가 '약속한 30년이 지났으니 나라를 내놓으라'고, 독립만세를 외치면서 일제에 맞서 혼자서 분연히 떨쳐 일어섰다.이민창은 일제 말기 4년이나 옥살이를 하고 해방과 함께 출옥한 이력을 드러내지 않았다. 독립이 되기 전에는 차라리 감옥에서 죽겠다고 할 정도로 그렇게도 바라던 해방이 되었건만 이민창은 초가집에 은거하며 두문불출했다. 웬 혁명가가 그리 많고, 애국자가 쏟아지고 정치인이 범람하는 거냐는 이유였다. 정당인도, 지도자의 타이틀도 마다했다. 그저 집 안에서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인술(仁術)을 펼치고, 과학을 공부하는 데 시간을 쏟았다. 인천 시내의 어떤 의사는 피란민 환자가 숨을 거두었는데 약값을 내지 않았다면서 사망진단서를 발급하지 않았다. 이에 격분한 이민창은 앞장서서 사망진단서를 끊어주었다. 그는 또 환자들의 형편에 맞게 치료비와 약값을 받았다. 비용을 지불할 여유가 되면 받고 그렇지 못하면 받지 않고 치료를 해 주었다.고일 선생이 그려낸 노투사 이민창의 인생 스토리가 마치 한 편의 영화를 보는 듯하다. 아니, 영화로 만들어져도 손색이 없겠다 싶다. 그런데 어찌 된 영문인지 이민창과 관련해서 '인천석금'을 넘어서는 것을 아직 본 적이 없다. '인천석금' 이후 60년이 지나도록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은 이유가 무엇인지 그게 더 궁금해진다.고일 선생의 기록은 정확하다. 약전 형식으로 정리할 만큼 여러 차례 인터뷰를 통하여 그의 인생 이야기를 충분히 들었던 듯하다. 1941년에 독립만세를 부르고 벽보를 붙였다는 이유로 체포돼 고문을 당하고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다고 했는데,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일제감시대상 인물카드에서 확인할 수 있는 서대문형무소 담벼락을 배경으로 찍은 이민창의 사진은 1941년(소화 16년) 7월 14일로 되어 있다. 또 경성지방법원에서 최초 언도받은 형기도 1년 6월이었다. 죄명은 치안유지법위반이었고, 언도일은 1942년 2월 26일이었다. 7개월 넘게 미결수 신분으로 고초를 당했다. 그는 1943년 8월 26일에 만기출소해야 했으나 감옥생활을 더 했다. 일제에 머리를 숙이지 않고 규정을 따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청주형무소로 이감되어 옥고를 더 치렀다. 그는 또 1945년, 해가 바뀌면서 청주형무소에서 출옥해야 했지만 그러지 않았다. 수감자가 나가지 않겠다고 하면 가능한 일이었는지 모르겠는데, 해방이 되고 나서야 그는 집으로 돌아왔다. 그게 가능한 일일까. 요즘 교정 시스템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한다. 아무리 수감자가 나가지 않겠다고 버틴다 하더라도 더 있을 수는 없다는 거다. 기한을 넘겨서 교도소에 머물게 되면 그 시간만큼 교정 당국에서 수감자를 감금하는 죄를 짓게 된다는 얘기다.이민창이 인물카드에 쓴 '개국 495년'으로 따지면 그는 1886년에 태어났다. 이 인물카드의 본적지는 '경기도 인천부(仁川府) 화정(花町) 165'로 되어 있다. 당시 화정은 지금의 중구 신흥동 지역이다. 하지만, 이민창과 대단히 가깝게 지냈던 것으로 보이는 고일 선생은 이민창이 서울 태생이라고 했다. 이민창이 인천에 이주한 뒤 본적지를 바꾼 것인지도 확인해야 할 일이다.이민창은 직업란에는 '의사(醫師)'라고 적었다. 강제병합 이전에 한성병원부속학교를 나와 서울에서 개업했다고 했으니 1910년쯤부터는 의사생활을 했다는 얘기다. 그리고 블라디보스토크에 망명했다가 귀국해 북한 지역에서 공의생활을 했으며, 인천에는 1929년쯤에 정착했다고 했다. 그때부터 인천에서도 의사생활을 했을 터이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이상한 점이 있다. 1942년 인천에서 '신외과'를 개원한 신태범 박사는 '인천 한 세기'를 쓰면서 어쩐 일인지 대선배 의사인 이민창에 대한 이야기를 언급하지 않았다. 물론 1942년이면 이민창은 이미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어 있을 때이기는 하다. 그래도 신태범 박사가 책을 낸 1983년까지 인천에서 생활하던 여러 의사들의 이야기는 하면서 아주 특이한 이력을 가진 의사이자 독립운동가인 이민창을 외면하고 있다는 게 언뜻 납득하기 어렵다. 이민창은 해방이 되고 청주형무소에서 풀려나 집으로 돌아왔으나 그는 곧바로, 너나없이 독립운동을 했다고 떠들어대는 세태에 신물을 느꼈던지 병원을 이중설 씨에게 넘겨주었던 듯하다. 이민창이 병원을 하던 자리에 새로 연 게 이중설병원이다. 이중설병원은 중구 내동 94번지에 있었고, 진료 과목은 내과와 소아과였다. 1946년에 개원했다. 이민창이 이중설에게 병원을 넘겨주었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지금은 그 병원 자리를 정확하게 확인할 길이 없다. 그동안 여러 차례 지번이 변경되는 바람에 '내동 94번지'를 한 곳으로 특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이민창은 병원을 넘기고 동구 화평동 오두막 초가에서 은거하면서 인술을 펼치고 과학 이론을 탐구하는 일에 몰두했다고 한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을 잘 파악하고 있을 정도였다고 한다."국가와 민족을 위하다가 희생된 인물이 쓸쓸한 생활을 하지 않도록 신령의 가호를 빌어마지 않는다."고일 선생이 이민창 이야기를 끝내면서 쓴 말이다. 3·1운동,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이라는 올해 여기저기서 들려온 얘기이기도 하다. 자신을 내던져 독립운동을 펼친 이들이 해방된 조국에서 생활고에 시달리며 쓸쓸한 노후를 보내는 비뚤어진 세태에 안타까워 한 고일 선생의 충심이 읽힌다. 그 60여 년이 흘렀건만 여전히 그들의 후손 역시 여유롭지 못한 생활을 하고 있다는 지적이 올 한 해 끊이지 않았다. 우리 사회는 아직도 갈 길이 멀다. /정진오기자 schild@kyeongin.com그래픽/박성현기자 pssh0911@kyeongin.com/아이클릭아트1955년 고일 선생이 쓴 '인천석금' 표지(1979년 재판)와 '인천석금'속에 실린 이민창 이야기. /'인천석금' 촬영이민창의 인물 카드에 적힌 내용. 출처/한국사데이터베이스 일제감시인물 카드

2019-10-02 정진오

10회째 '송도국제마라톤' 사상 최대 1만5천여명 참가

올해로 10회째를 맞이한 '인천송도국제마라톤대회'가 사상 최대 규모인 1만5천여명이 참여한 가운데 29일 송도국제도시 일원에서 열렸다.이날 전국에서 모인 1만5천여명의 건각들은 인천대를 출발해 청명한 가을 날씨를 만끽하며 송도국제도시를 질주했다.경인일보와 한국실업육상연맹이 주최한 송도국제마라톤대회는 국내 엘리트 남자(하프), 마스터스(풀코스, 하프코스, 10㎞, 5㎞)로 나뉘어 진행됐다. 엘리트 하프코스 부문에서는 최민용(25·국군체육부대)이 1시간07분56초의 기록으로 결승점을 통과하며 우승을 차지했다.이날 대회에는 이용범 인천시의회 의장을 비롯해 더불어민주당 윤관석(인천시당위원장·남동을), 박찬대(연수갑) 국회의원, 자유한국당 안상수(인천시당위원장· 중구·동구·옹진군·강화군), 민경욱(연수을), 윤상현(미추홀구을) 국회의원, 정의당 이정미 국회의원, 양현주 인천지방법원장, 허인환 동구청장, 김정식 미추홀구청장, 이태훈 가천대 길병원 의료원장, 김양우 가천대 길병원장, 조동성 인천대 총장, 최미리 가천대 부총장, 박등배 인천육상연맹 회장, 이영재 경인일보 인천본사 사장 등이 참석했다. /김명호기자 boq79@kyeongin.com달리고 싶어지는 청명한 날씨-29일 오전 인천 송도국제도시 인천대학교에서 열린 '2019 인천송도국제마라톤대회'에 참가한 국내·외 마라톤 선수와 동호인 등 1만5천여명의 건각들이 힘차게 출발하고 있다. /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

2019-09-29 김명호

[2019 인천 송도국제마라톤]전문 마라토너·동호인·시민 '빌딩 숲 질주'

풀·10㎞등 4개 부문 '열띤 레이스'엘리트 하프 최민용 67분56초 '1위'2019 인천송도국제마라톤대회 참가자들은 29일 오전 9시 인천대 대운동장(송도캠퍼스)에 모여 풀(42.195㎞), 하프(21.0975㎞), 10㎞, 5㎞ 등 모두 4개 부문에서 레이스를 펼쳤다.빌딩 숲이 우거진 인천 송도국제도시에서 열리는 유일한 마라톤 축제의 현장을 찾은 국내 정상급 실력의 전문 마라토너들은 하프 코스에서 그동안 갈고닦은 기량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풀·하프·10㎞(이상 마스터스) 부문에선 전국의 마라톤 동호인들이 대거 참가해 성황을 이뤘다. 일반 시민들도 5㎞ 코스에서 청명한 가을 날씨를 만끽하며 송도국제도시 한복판을 걷고 뛰었다.올해 대회는 인천대 송도캠퍼스를 출발해 동북아트레이드타워, 잭니클라우스 골프클럽, 인천아트센터, LNG 생산기지, 연세대 송도캠퍼스, 삼성바이오로직스 등을 돌아오는 코스로 이뤄졌다.전문 마라토너들이 경합한 엘리트 하프 부문에서는 최민용(국군체육부대)이 1시간07분56초의 기록으로 가장 먼저 결승선을 통과했다. 이어 김종윤(청주시청, 1시간08분00초)과 강승길(제천시청, 1시간08분14초)이 각각 2·3위를 차지했다. → 표 참조마라톤 동호인들이 참가한 마스터스풀 코스에선 손수돈이 2시간43분24초09로 남자 부문 정상에 올랐다. 2위는 이재철(2시간48분04초46), 3위는 송재영(2시간51분34초11)이 기록했다. 여자 부문은 Mamiko SHIN(일본)이 3시간25분52초93으로 1위로 결승선을 지났다. 이어 오현희(3시간40분45초44)와 이하나(3시간41분19초18)가 뒤따라 들어왔다.마스터스 하프에선 양도훈이 1시간15분41초44를 기록하며 최준환(1시간16분56초25)과 김정모(1시간20분04초51)를 제치고 남자 부문 1위에 등극했다. 여자 부문은 윤선미가 1시간31분57초19로 우승했다. 홍서린(1시간35분45초58)·박미영(1시간36분34초14)이 그 뒤를 이었다. 10㎞ 코스는 안현욱(34분56초49)과 이소륜(42분45초98)이 남·여 각각 1위를 차지했다. /임승재기자 isj@kyeongin.com29일 인천송도국제마라톤대회에 참가한 엘리트 부문 참가 선수들이 전력을 다해 질주하고 있다. /김용국기자 yong@kyeongin.com

2019-09-29 임승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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