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인천)

[zoom in 송도]송도 바이오산업 성장 견인차 역할 '삼성바이오로직스'

5공구에 단일 최대 365일 가동 3공장 설립1·2공장까지 36만2천ℓ 독보적 생산력 자랑'첨단시설·기술력'에 수주 경쟁 우위 기대송도, 공항·항만 인접 연구소 밀집 여건 우수클러스터 구축에 '인력양성·인식개선' 필요인천 송도국제도시 5공구 첨단산업클러스터에 있는 바이오 기업 '삼성바이오로직스'. 이달 9일(현지시간)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린 'JP모건 헬스케어 콘퍼런스' 메인 트랙(Main Track) 그랜드볼룸에서 투자자들에게 새해 목표와 비전을 제시했다. JP모건 헬스케어 콘퍼런스는 세계 최대 바이오 마켓플레이스(Marketplace)다. 한국 기업 중 가장 큰 규모의 발표회장인 그랜드볼룸을 배정받은 건 삼성바이오로직스가 유일하다. 이는 삼성바이오로직스의 위상이 높아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삼성바이오로직스 김태한 사장은 콘퍼런스에서 "설립한 지 7년 만에 전 세계 CMO(위탁생산) 기업 중 세계 최대 생산 규모를 갖췄다"며 "경쟁사 대비 공장 건설과 가동에 필요한 기간을 40% 가까이 단축하며 CMO 비즈니스의 패러다임을 바꾸어왔다"고 했다. 또 "현재 총 생산 규모의 25%까지 확보한 3공장의 수주 물량을 연말까지 50% 이상으로 끌어올릴 것"이라고 했다. 2011년 4월 인천 송도에 설립한 삼성바이오로직스는 1공장(3만ℓ)과 2공장(15만2천ℓ)을 가동하고 있다. 지난해 10월 글로벌 제조승인 획득을 위한 cGMP(의약품 제조 및 품질관리 기준) 생산에 돌입한 3공장(18만ℓ)까지 합하면 36만2천ℓ의 생산 능력을 갖추게 된다. 경쟁 업체인 스위스 론자(26만ℓ), 독일 베링거인겔하임(24만ℓ)을 크게 뛰어넘는 세계 최대 생산력이다.지난 16일 삼성바이오로직스 3공장을 둘러봤다. 1공장이 국제 기준에 맞춰 건립됐다면, 2공장은 국제 기준에 삼성의 기술력이 더해졌다. 3공장은 삼성의 기술력과 1·2공장 운영 결과의 집합체다. 3공장은 365일 24시간 가동이 가능하다. 쉴 틈 없이 공장을 돌릴 수 있다는 얘기다.3공장 내부에는 깊이 6m, 너비 2.5m의 은빛 '바이오리액터홀'(1만5천ℓ)이 6개씩 2줄로 배치돼 있었다. 단일공장 세계 최대 규모다. 1ℓ에서 3~4g의 항체 원료를 추출하는데, 1g당 가격이 평균 1만 달러에 달한다. 3공장은 첨단 3D 설계로 건설됐다. 원료가 고이지 않도록 각 설비의 파이프가 약간 기울어져 있으며, 마이크로 용접 기술로 오염 가능성을 없앴다. 삼성바이오로직스 강석윤 커뮤니케이션파트 파트장은 "공장 내부에서 직원들이 모니터를 통해 바이오리액터홀의 상태를 수시로 점검한다"며 "바이오는 바이러스에 취약하기 때문에 우리 공장들은 청정무균시설을 갖추고 있다"고 했다. 또 "항체 원료 추출은 매우 어려운 작업인데, 삼성바이오의 실패율은 0%로 보면 된다"고 했다.삼성바이오로직스는 1공장 가동(2013년) 5년 만에 관련 평가 전 부문에서 가장 높은 등급을 받았다. 직원 수는 2011년 설립 당시 110명에서 2017년 3천명으로 증가했다. 직원들의 평균 나이는 28.9세다. 초대졸 이상이 95%를 차지하며, 100명 정도의 글로벌 전문가가 근무한다.삼성바이오로직스는 바이오의약품 시장이 계속해서 성장할 것으로 전망했다. 신약 개발로 위탁생산 물량이 증가하고, 중국 등 아시아를 중심으로 바이오의약품 수요가 크게 늘어날 것으로 보고 있다. 삼성바이오로직스는 최신식 첨단 공장과 기술력을 보유하고 있어 수주 경쟁에서 우위를 점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송도 11공구에 공장 부지 등을 추가로 확보하겠다는 계획도 갖고 있다.삼성바이오로직스의 공장 증설로 인천 송도는 단일도시 기준 세계 최대 규모의 바이오의약품 생산 도시가 됐다. 송도의 바이오의약품 생산 역량은 약 56만ℓ다. 송도는 공항·항만이 가깝다는 장점이 있으며, 셀트리온 등 바이오 관련 기업·연구소가 모여 있다. 국제학교가 있는 등 글로벌 전문가 정주 여건도 좋은 편이다.삼성바이오로직스는 '송도 바이오 클러스터' 구축의 선행 조건으로 인력 양성과 인식 개선을 꼽았다. 삼성바이오로직스 윤호열 상무는 "바이오는 사람 중심의 산업이다. 인력 양성이 가장 중요하다"며 "송도가 바이오 인력 양성의 중심이 돼야 한다"고 했다. 또 "삼성바이오로직스의 서비스 역량과 개발 속도는 세계적으로 앞서가고 있다"며 "과거보다 바이오 기업의 위상이 많이 달라졌지만, 아직은 국내에서 저평가되는 것 같아 안타깝다"고 했다. /목동훈기자 mok@kyeongin.com인천 송도 5공구에 위치한 삼성바이오로직스 전경과 로고. /삼성바이오로직스 제공삼성바이오로직스 3공장에서 직원들이 배양기를 확인하고 있는 모습. /삼성바이오로직스 제공

2019-01-20 목동훈

[한국 근대음악의 발상지 인천·(16)]오케스트라, 시립교향악단 창단까지

상륙작전 직후 최영섭 선생구국대 학생합창단서 지휘 '첫발'정훈관현악단·애협교향악단 등시향 모체가 된 단체로 보폭 넓혀전 편('작곡가 최영섭')에서 밝혔듯이 최영섭 선생은 1950년 9월 연합군의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하자 방공호에서의 생활을 끝내고서 포탄 맞은 인천 시내를 돌아봤다.그러다 우연한 기회에 지휘봉을 잡게 된다. (1월 11일자 9면 보도) 당시 선생은 상륙작전으로 인해 폐허가 된 지역 사회의 안위를 걱정하며 자신이 다니던 창영교회를 비롯해 여러 교회들을 찾았다고 한다.신흥동 쪽을 지나는데, 인근의 장로교회에서 합창소리가 들려서 가 봤더니 구국대 학생합창단이라는 완장을 두른 학생 40~50명이 찬송가를 4부 합창으로 부르고 있었다.지휘하던 젊은 사람이 최영섭 선생에게 다가와 누군데 유심히 지켜보는지 물었고, 선생은 작곡을 전공한 사람이며 화음이 잘 맞지 않는 합창소리가 들려서 들어와 봤다고 소개했다.자신보다 지휘에 대한 이해가 클 것으로 여긴 젊은 지휘자는 간곡히 최영섭 선생에게 지휘를 부탁했다.선생은 고사를 거듭하다가 수락하게 된다. 최영섭 선생과 합창단은 2개월 정도를 매일같이 연습했으며 이를 통해 제대로 된 합창단으로 변모한다.이후 전쟁으로 인해 몸과 마음 모두 어려워진 사람들을 위한 위문 공연을 펼치게 된다.지휘자로서 첫발을 내디딘 최영섭 선생은 오케스트라 지휘까지 보폭을 넓혀서 활동을 벌인다.결과적으로 지역 오케스트라 발전에 활력을 불어넣은 활동들이었다.전쟁 후 선생이 지휘한 육군정훈관현악단과 인천애호가협회교향악단은 1966년 창단하는 인천시립교향악단의 모체와도 같은 단체다.지역인재 토대 조례 승인 한달새1966년 시민관서 창단 연주회1·3대 상임지휘자 지낸 김중석"거쳐 간 모두가 시향의 역사"이에 앞서 인천관현악단이 있었다. 우리나라 최초의 오케스트라인 고려교향악단(서울시립교향악단의 모체)이 1945년 창단 이후 2년 후인 1947년 12월 13일 인천관현악단은 인천공회당에서 창단 연주회를 개최했다. 이후 인천영화극장과 애관극장 등에서 연주회를 이어갔다. 인천관현악단은 김기룡 단장과 박수득 악장을 중심으로 현악과 관악, 타악 주자 23명으로 구성된 인천 최초의 오케스트라였다. 한국전쟁의 발발로 오랜 기간 활동이 이어지진 못했지만, 전쟁 후 설립되는 지역 교향악단의 주춧돌 역할을 했다. 1953년 6월 21일 경기지구 육군정훈관현악단이 설립됐으며, 이 악단은 1956년 창립하는 '인천음악애호가협회'의 산하 교향악단으로 재발족했다. 인천애협교향악단은 박종성과 주원기, 최영섭을 비롯해 단원 30여명으로 구성됐다. 1957년 11월 인천시민관에서 열린 인천애협교향악단의 제4차 연주회의 지휘는 최영섭이 맡았으며, 당시 중학교 1학년이었던 백건우가 그리그 '피아노 협주곡 a단조'의 협연자로 나섰다. 인천애협교향악단은 1957년에도 신인음악회를 개최하는 등 지역 신진음악인들에게 기회의 장을 마련해 주기 위한 활동을 벌였다. 최영섭 선생은 1964년 동아방송 편곡지휘자로 스카우트되어서 서울로 거처를 옮길 때까지 애협교향악단을 이끌었다. 이때 인천에선 홍훈표, 김형석, 강춘기, 김중석, 손관수, 정흥일, 김광식이 7인 위원회를 구성해 인천 필하모닉 관현악단을 창단하면서 애협교향악단원들은 새 오케스트라로 편성됐다. 인천 필하모닉은 10여회의 연주회를 개최했으며, 단원들은 1966년 창단하는 인천시립교향악단으로 자리를 옮겨 활동을 이어가게 된다.'1970년대편 인천시사'에 따르면 인천시립교향악단의 창단 조례는 1966년 5월 4일 승인됐다. 인천시립교향악단의 초대 상임지휘자는 서울 음대 작곡과를 졸업하고 제물포고에서 음악교사로 있던 당시 26세의 김중석이었고 40여명의 단원들로 구성됐다. 창단 연주회는 그해 6월 1일 오후 7시30분 인천시민관에서 개최됐다. 창단 연주회가 열린 날은 제정된 지 2회째를 맞는 인천시민의 날이기도 했다. 서울, 부산, 대구에 이어 국내 4번째 시립교향악단이 창단하는 순간이었다.조례 승인 후 한 달도 지나지 않은 시기에 창단 연주회를 가질 수 있었던 것은 앞서 언급했듯이 지역에 오케스트라 활동 토대가 마련돼 있었기 때문이다. 창단 연주회의 레퍼토리는 첫 곡으로 '인천 시민행진곡'에 이어 모차르트 '피가로의 결혼 서곡'과 '피아노 협주곡 26번, 대관식', 슈베르트 '교향곡 8번, 미완성' 등으로 구성됐다.창단 공연에 이어 보름 후 KBS에 출연한 인천시립교향악단은 방송을 통해 전국에 창단 신고도 했다.인천시민관(인천공회당 자리에 1957년 재건축)에서 창단 연주회를 연 인천시립교향악단은 시민관의 시설이 노후화되면서 1974년 주안에 문을 여는 '인천시민회관'으로 활동 무대를 옮긴다. 1994년 현재의 인천문화예술회관이 개관하기 까지 시민회관은 시립교향악단의 활동 근거지였다.시민회관은 전문 공연장이 아닌 다목적 공간이었다. 때문에 제대로 된 음향시설을 갖추지 못했지만, 인천시립교향악단의 정기 연주회가 있을 때마다 1천300여석의 자리가 꽉 찰 정도로 인기가 높았다고 한다.인천시립교향악단의 1대와 3대 상임지휘자를 지낸 김중석은 시립교향악단 창단 50주년이었던 지난 2016년에 소장하고 있던 1965~1983년까지 시립교향악단의 연주회 관련 소책자와 사진 등 앨범 2개 분량의 자료를 시립교향악단에 전달했다. 그러면서 그는 역사성과 연주력 측면에서 국내 정상급 단체로 올라선 인천시립교향악단이 지나간 것들을 챙겨야 할 때라는 의견을 피력한 바 있다.김중석은 "그동안 시립교향악단을 거쳐간 지휘자들은 물론, 단원들과 협연한 솔리스트, 레퍼토리 등 모든 것이 시향의 역사이며, 이 같은 부분을 정리해 시민의 자긍심을 키워야 한다"고 말했다. /김영준기자 kyj@kyeongin.com/아이클릭아트인천시립교향악단 초대 상임지휘자 김중석에 대한 윤갑로 인천시장의 위촉장. /인천문화예술회관 제공인천시립교향악단 창단 연주회를 소개하는 소책자 표지. /인천문화예술회관 제공인천시립교향악단 창단 연주회를 소개하는 소책자 속지에 실린 모습(사진 왼쪽)과 인천시립교향악단 초기 연주 모습. /인천문화예술회관 제공

2019-01-17 김영준

[zoom in 송도]송도국제도시 '2019년 과제'

128만㎡ 복합개발 우선협상자 놓고 '소송전'아파트만 건설 '사실상 스톱' 정상화 시급16㎞ 물길사업 경제성 부족에 일부만 허용제고방안 마련 이달중 타당성 재조사 계획올해 해결해야 할 과제를 꼽자면 송도국제도시 '6·8공구 개발사업 정상화'와 '워터프런트 사업성 확보'일 것이다. 서울 접근성을 향상시킬 GTX(수도권광역철도) 건설사업도 예비타당성 관문을 통과해야 한다. 이번 '줌인송도'에서는 새해 주요 과제와 인천경제자유구역청에서 밝힌 업무 추진 방향에 대해 다루고자 한다.# 송도 6·8공구 개발 정상화송도 6·8공구 개발사업은 당초 151층짜리 인천타워를 짓고 그 주변 228만㎡를 개발하는 것으로 계획됐었다. 그런데 인천타워 건립이 무산되면서 2015년 1월 일부 지역에 아파트 단지를 조성하는 사업으로 축소됐다. 이것이 송도랜드마크시티(SLC) 개발사업이다. SLC 개발사업은 개발이익 초과분 환수 방법·시기를 놓고 사업 주체와 인천경제자유구역청 간 갈등이 있다. 개발이익 초과분을 단계별로 정산·분배하는 데는 합의했지만, 매몰비용(인천타워 설계비 등 약 860억 원) 인정 여부 등과 관련해선 접점을 찾지 못하고 있다. 이 때문에 잔여사업이 정상적으로 추진되지 못하고 있다.인천타워 건립 계획이 백지화되면서 새로 추진된 게 '6·8공구 중심부 128만㎡ 개발사업'이다. 이 사업은 일대를 상업·업무·주거 등 복합적으로 개발하는 것인데 소송전으로 비화됐다. '블루코어 컨소시엄'이 우선협상대상자 지위를 찾기 위해 법적 대응을 하고 있다. 인천경제청은 2017년 5월 공모를 통해 블루코어 컨소시엄을 우선협상대상자로 선정했으나, 그해 9월 초 협상 결렬을 이유로 우선협상대상자 지정을 취소했다. 블루코어 컨소시엄이 우선협상대상자 취소 처분을 취소해달라고 소송을 제기한 건 2017년 10월. 소송은 아직도 진행 중이다.SLC와 6·8공구 중심부 128만㎡ 개발사업이 사실상 중단되면서, 6공구 일부와 8공구에서 아파트 단지 건설사업만 진행되고 있는 상태다.8공구 말발굽 모양의 인천도시공사 소유 부지 R2블록(15만8천905.6㎡·일반상업용지)도 개발이 늦어지고 있다. 인천경제청이 원활한 개발을 위해 용적률과 건축 높이를 완화해 줬는데, 8공구 아파트 입주(예정)자 등 송도 주민들은 애초 용적률과 건축 높이를 적용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인구 과밀이 우려된다는 이유에서다.# 워터프런트 사업성 확보워터프런트 사업성 문제는 지난해 '뜨거운 감자'였다. 이 사업은 기존 수로와 호수를 연결하는 방식으로 'ㅁ'자 모양의 물길(길이 16㎞, 너비 40~300m) 및 친수 공간을 만드는 대형 프로젝트다. 2개 단계로 나눠 서측·북측·남측 수로를 만들고, 송도 11공구를 조성하면서 동측 수로를 내는 방식이다. 하지만 인천시 지방재정투자심사위원회는 경제성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1-1단계 구간 사업만 허용했다. 워터프런트 사업은 지난해 4월 완료된 한국지방행정연구원 타당성 조사에서 B/C(비용편익분석)값이 기준치인 1을 넘지 못했었다. 그러자 주민들이 나머지 구간 사업도 빨리 추진해야 한다며 반발하고 나섰다. 인천시와 인천경제청이 사업 추진 의지를 밝히면서 주민 반발은 어느 정도 수그러든 분위기다.인천경제청은 1-2단계 등 나머지 구간에 대한 경제성 제고 방안을 찾고 있다. 지난해 9월 인천경제청은 경제성 제고 방안을 마련해 올해 1월 중 한국지방행정연구원에 타당성 재조사를 의뢰할 계획이라고 밝힌 바 있다. 타당성 재조사에서도 사업성을 인정받지 못할 경우, 주민들의 반발이 다시 거세질 수 있다.서울 접근성 개선 'GTX-B' 예타 통과 추진글로벌캠퍼스내 대학·국제기구 추가 유치IT·BT 스타트업 벤처폴리스등 '주요 현안'# GTX-B 노선워터프런트와 함께 송도 주민들의 관심이 큰 사업은 GTX다. GTX로 서울 접근성이 대폭 개선될 것으로 기대하기 때문이다. GTX를 이용하면 송도에서 서울역까지 20분대에 갈 수 있다. GTX는 총 3개 노선인데, 송도에 해당하는 B노선(송도~부천~여의도~서울역~청량리~마석·80.1㎞)은 아직 예비타당성 조사를 통과하지 못했다. 인천시는 GTX-B노선 건설사업을 예비타당성 면제 대상으로 선정해달라고 정부에 건의도 했다.국토교통부는 지난해 12월 '인천 계양테크노밸리'(335만㎡) 등 3기 신도시 개발계획(2차 수도권 주택공급 계획 및 수도권 광역교통망 개선방안)을 발표하면서 GTX-B노선 예비타당성 조사를 올해 완료하겠다고 밝혔다. 특히 GTX-B노선은 3기 신도시에 포함된 '남양주 왕숙'(1천134만㎡)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다. 수도권 주택시장 안정을 위해선 3기 신도시가 성공해야 하기 때문에, 정부 입장에서도 GTX-B노선이 절실하게 된 것이다. 인천시가 계양테크노밸리 개발을 통해 정부 정책에 기여하게 된 점도 GTX-B 노선 예비타당성 조사 통과 또는 면제에 영향을 줄 것으로 보인다.# 인천경제청 새해 추진 방향인천경제청은 GTX-B노선이 예비타당성 조사를 통과할 수 있도록 행정 역량을 모아 나가기로 했다. 또 송도에 입주해 있는 GCF(녹색기후기금) 등 국제기구들과 협력하는 방안을 마련하고, 국제기구를 추가로 유치해 '국제기구 클러스터'를 조성하기로 했다. 인천글로벌캠퍼스(해외 명문대학 공동캠퍼스) 2단계 사업을 통해 글로벌 50위권 내 10개 대학도 추가로 유치한다. 미국 스탠퍼드대 부설 스마트시티연구소는 올 상반기 개원할 예정이다. 2020년에는 영국 케임브리지대 의학연구소, 2021년엔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국립음악원이 개교할 것으로 인천경제청은 보고 있다.인천경제청은 송도컨벤시아 2단계 시설과 '아트센터 인천'(클래식 전용 콘서트홀)을 통해 송도를 고품격 문화 도시로 만들겠다는 목표를 세웠다. 삼성바이오로직스와 셀트리온 등 글로벌 바이오 기업이 입주한 송도 4·5·7공구와 11공구를 연계해 '글로벌 바이오 허브'를 만들고, IT·BT·MICE 중심의 청년 창업·일자리 창출을 위한 '스타트업 벤처폴리스'를 조성하기로 했다.인천경제청 김진용 청장은 최근 신년사에서 "도시가 건설되기까지는 약 30년의 세월이 필요하다고 한다"며 "인천경제자유구역은 개청한 지 15년이 돼 그 반환점을 돌았다. 2019년은 미래를 향해 새롭게 시작하는 해가 될 것"이라고 했다. /목동훈기자 mok@kyeongin.com151층짜리 인천타워 건립 프로젝트가 무산되면서 6공구 일부와 8공구에 아파트 단지만 들어서고 있는 송도 6·8공구 모습. 송도랜드마크시티(SLC) 개발사업은 개발이익 환수 관련 협의 때문에 지연되고 있다. 송도 6·8공구 중심부 128만㎡를 개발하는 사업은 우선협상대상자 지위 관련 소송이 진행 중이다. /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송도에 있는 인천글로벌캠퍼스 전경. 인천경제자유구역청은 세계 50위권 내 10개 대학과 해외 우수 연구기관을 유치할 계획이다. /인천경제청 제공

2019-01-13 목동훈

[한국 근대음악의 발상지 인천·(15)]작곡가 최영섭

인천서 서울로 통학하며 음악 배워6·25 혼란속에도 시민·軍 위문펼쳐정전후엔 교향악단 지휘·교육 활동1961년 '그리운 금강산' 전국민 사랑지난해엔 90세 기념 공연·헌정식도"강화에 돌아가 사랑 보답하며 살것"지난해 마지막 달의 지역 음악계는 1929년 11월 28일 강화도에서 태어난 작곡가 최영섭 선생의 90세 생일을 기념한 연주회와 이벤트들로 채워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한국예술가곡보존회와 K클래식 운영위원회 주최로 12월 4일 서울 세종문화회관 체임버홀에서 열린 기념 음악회를 시작으로, 12일 인천 엘림아트센터에선 인천문화재단과 (사)아침을 여는 사람들이 콘서트 '작곡가 최영섭, 오마주 투 코리아(Homage to Korea)'를 개최했다.두 음악회 모두 대표작인 '그리운 금강산'을 비롯해 최영섭 선생의 작품들로 꾸며졌다. 70여년에 걸쳐 구축된 선생의 작품 세계를 조명한 것이다.새얼문화재단은 20일 인천문화예술회관 대공연장에서 개최한 '제35회 새얼 가곡과 아리아의 밤'의 메인을 '그리운 금강산'으로 장식했으며, '그리운 금강산' 연주 전에 "작품을 통해 고향 인천을 빛내고 시민의 자긍심을 고취"한 선생에 대해 지용택 새얼문화재단 이사장과 박남춘 인천시장은 각각 준비한 공로패를 증정했다.연주회 후엔 리셉션장으로 자리를 옮겨 최영섭 선생을 기리는 '장미 헌정식'을 개최했다. 지역 인사들은 선생의 90세 축하와 건강을 기원하는 마음을 담아 장미 한 송이씩을 전달했다. 또한, 작품을 정리하고 출판 작업을 진행하면서 경제적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 선생에게 후원금을 전달했다. 지용택 이사장은 공로가 있는 선배와 원로를 기리고 모시는 것이 인천의 아름다운 전통으로 자리매김하길 바라는 마음에서 '장미 헌정식'을 기획·추진한 바 있다. 해가 바뀌었지만, 훈훈한 여운은 이어지고 있다.기자가 최영섭 선생을 처음 뵌 건 2007년 8월이었다. '인천인물 100人' 경인일보 특별취재팀원으로서 선생을 인터뷰했다. 기사는 그해 8월 29일자 9면에 게재됐으며, 후일에 책으로도 출판됐다(도서출판 다인아트 刊). 이후 2009년 인천문화재단이 진행한 '인천문화예술 구술채록' 사업의 면담자로 최영섭 선생과 장시간에 걸쳐 이야기를 나눈 바 있다. 선생의 80년 인생을 상세히 들어본 귀한 기회였다. 지난 연말에 열린 연주회에서도 선생을 뵙고 근황을 여쭐 수 있었다.직접 한 인터뷰들을 기초해서 선생의 음악인생 위주로 기술한다.최영섭은 강화군 화도면의 바닷가 마을에서 태어났다. 일찌감치 오르간을 칠 수 있었던 가정 환경으로 인해 찬송가를 화음으로 연주하는 실력이 제법이었다. 길상초등학교 3학년 때 가족과 함께 인천으로 이사온 선생은 창영초교와 인천중학교를 다니면서 음악가로의 꿈을 키워나갔다.하지만, 독자였던 그가 전문적으로 음악을 공부한다고 했을 때, 주위에선 재능을 알면서도 사회 통념상 반대했다. 어머니(신수례·1908~2003, 1998년 정부로부터 '예술가의 장한 어머니상' 수상) 만이 "돈과 명예보다 본인이 하고 싶은 것을 해야 한다"며 최영섭을 응원했다. 어머니의 후원을 등에 업고 1945년 서울 경복중으로 전학해 인천에서 통학하며 이화여대 임동혁 교수에게 작곡 이론을 배운 최영섭은 1947년 작곡한 첫 작품인 '그리운 옛 봄'을 비롯한 가곡 10곡과 피아노 환상곡 '해변', 피아노 모음곡 '절름발이 인형의 슬픔' 등으로 고교 졸업 직전인 1949년 인천에서 작곡 발표회를 가졌다. 최영섭은 서울대 음대 작곡과에 입학해 김성태 교수 아래서 공부를 이어갔다. 하지만, 이듬해 한국전쟁이 발발하고 이 땅의 모든 게 멈춰 선다. 전쟁이 나고 4일 후인 6월 29일부터 최영섭은 인민군에 끌려가지 않기 위해 인천 주안의 농장 복판에 반공호를 파고 생활했다. 9월 15일 연합군의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할 때까지 3개월 가까이 야음을 틈타 전달되는 식량을 먹으며 땅속에 숨어서 지냈다.서울 수복 후 고향을 등졌던 지역 예술가들도 하나 둘 돌아왔다. 우연한 기회에 기독교 계열의 구국학생합창단을 지휘하게 되면서 지휘와도 연을 맺은 최영섭은 합창단과 함께 애관극장과 동인천역 인근의 인형극장 등에서 시민을 위한 위문 공연을 수차례 펼쳤다. 또한, 육군의 후원으로 창단한 인천정훈관현악단의 지휘자로도 활동했다.중공군의 참전으로 합창단과 함께 6개월 동안 부산으로 피란한 최영섭은 연주회와 작곡 활동을 병행했다. 당시 탄생한 작품이 가곡 '망향'이다. 자작시에 곡을 붙였다. 최영섭이 인천으로 돌아온 시기에 경기지구 육군정훈관현악단이 창단하고, 다시 지휘를 맡았다. 인천여중·고, 인천여상에서 교편을 잡기도 했으며, 내리교회 성가대와 인천애호가협회교향악단의 지휘도 했다.'그리운 금강산'은 1961년 한국전쟁 11주년 기념으로 KBS의 청탁을 받아 최영섭과 시인 한상억(1915~1992)이 공동 작업한 칸타타 '아름다운 내 강산' 중 한 곡이다. 강화 출신 두 예술가가 만든 이 칸타타는 '동해의 여명'과 '정선 아리랑 주제에 의한 환상곡'을 비롯해 산·강·바다를 각각의 주제로 한 3곡, 이렇게 모두 11곡으로 구성됐다. 이 중 '그리운 금강산'은 산에 해당하는 노래 중 한 곡으로 산뜻한 가락과 애끊는 호소력으로 맵시있게 짜여졌다. 최영섭은 당시 숭의동 집에서 이틀 밤을 꼬박 새우며 '그리운 금강산'을 완성했다. 곡을 쓰기 전 최영섭은 삼촌에게 일전에 가본 금강산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다. 삼촌의 이야기에 담긴 심상이 음악으로 잘 표출됐으며, 한상억 시인의 시구와도 어우러지며 모든 이들에게 사랑받고 있다.1965년 서울로 이사한 최영섭은 방송음악인이자 편곡지휘자, 또한 대학 강단에도 서며 바쁜 활동을 이어갔으며, 돈과 명예도 얻는다.50년 넘게 서울 생활을 이어가고 있는 최영섭은 인천에서 진정한 '나'를 만들 수 있었다고 돌아본다. 특히 한상억·조병화 시인과 만남은 자신의 작품에 자연의 심상이 깊숙이 자리하게 되는 요소로 작용했다는 것이다.최영섭은 700여 곡의 가곡과 칸타타를 작곡했고, 2017년 재수정을 거친 악보 7권을 완간해냈다. 교향곡, 실내악곡, 모음곡 등의 기악곡도 70여곡에 이른다. 지난 연말 그는 "기악곡들을 모두 수정해 출판하려면 앞으로 몇 년 더 걸릴 것 같다"면서 "기악곡을 모두 수정하고 출판사에 악보를 보내고 내 고향 강화도로 돌아가서 인천시민의 사랑에 보답하며 살아가겠다"고 말했다. /김영준기자 kyj@kyeongin.com최영섭 선생이 지난 10월 말 인천문화예술회관 야외광장의 '그리운 금강산' 노래비에 설치된 음악 청취 시스템을 시연하고 있다. 인천문화예술회관은 버튼을 누르면 노래가 나오는 시스템을 구비했다. 2000년 8월 15일 새얼문화재단이 세운 가로 6m40㎝, 세로 3m80㎝, 무게 30t의 이 노래비에는 악보와 가사, 곡의 의미가 새겨져 있다. 세계에서 가장 큰 노래비로도 알려져 있다. /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지난해 12월 20일 인천문화예술회관 대공연장에서 열린 '제35회 새얼 가곡과 아리아의 밤'에서 최영섭 선생이 인천시와 새얼문화재단으로부터 각각 공로패를 받았다. /경인일보DB/아이클릭아트

2019-01-10 김영준

[한국 근대음악의 발상지 인천·(14)]한국전쟁기와 그 이 후

내리교회 성가대, 1954년 '헨델 명곡' 국내 첫 완주혼란기 악보 필사 열정… 작년 28회째 무대 이어가인천상륙작전뒤 고향 돌아온 음악가들 '승리 염원'9·15수복 기념 '개선 대합창' 등 시대반영 연주회전후 최영섭 등 '애호가협' 중학생 백건우 협연도'제28회 메시아 대연주회'가 성탄절을 사흘 앞둔 지난달 22일 저녁 인천 내리교회 예루살렘 성전에서 개최됐다. 내리교회 메시아위원회가 주최·주관한 연주회에선 헨델(1685~1759·독일)이 280년 전에 작곡한 오라토리오 '메시아' 전곡을 선보였다. 김종현의 지휘 하에 150여명으로 구성된 내리교회 성가대와 오케스트라 단원들은 3시간 가까이 걸리는 이 대곡을 열정적으로 연주해내며, 성전을 메운 청중의 갈채를 이끌어냈다. 1885년에 설립된 우리나라 최초의 개신교회인 내리교회는 한국전쟁 후인 1954년 12월 22~23일 이틀에 걸쳐 우리나라 최초로 '메시아' 전곡을 연주한 것으로도 유명하다.내리교회 성가대는 한국전쟁 후에 처한 혼란기에 새로운 계획을 세운다. '메시아'를 번역해 전곡을 부르자는 것이었다. 당시 우리 사회 전체가 빈곤의 어려움 속에 처해 있었지만, 성가대원인 이선환에 의해 전곡 악보가 3권(총 1천200여권)으로 만들어졌다. 악보는 1954년 2월부터 8월까지 6개월에 걸쳐 등사 원지에 철필로 일일이 그려 등사기에 인쇄해 완성됐다. 악보의 완성 후 성가대원들의 노력으로 그해 성탄절을 앞두고 역사적인 연주회(지휘·김춘하)가 열렸다. 2년 후에 개최된 제3회 연주회에선 후에 '그리운 금강산'을 작곡하는 인천 출신 음악가 최영섭이 지휘하기도 했다.이후 매해 연주회를 여는 게 여의치 않아지면서 1986년까지 6차례 연주회를 개최했다. 그러나 1989년부터 2004년까지 해마다 이어졌고, 지난해 28회째 연주회를 선보인 것이다.인천에서 '메시아' 전곡이 초연되기 직전이었던 한국전쟁 시기에도 지역에선 음악회가 이어졌다. 국군과 연합군이 1951년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으로 인천을 탈환한 이후 예술가들은 고향으로 돌아왔다. 고향 땅을 다시 밟은 음악가들은 국군의 승리를 염원하는 음악회를 개최했다. 시대 상황을 반영한 음악회여서 눈길을 끈다.조우성 전 인천시립박물관장이 쓴 '6·25 전쟁 속에 꽃 핀 인천 문화예술'에 당시 개최된 연주회에 대해 설명한 구절이 있다. "음악인들은 해군 인천경비부 정훈실, 인천신보사, 대한신문사(전시판) 후원으로 '전시 합창의 밤'이란 부제가 붙은 '9·15수복 기념 대음악발표연주회'를 1951년 9월 22일 인천영화극장(仁川映畵劇場)에서 연다. 이날 레퍼토리는 최영섭 지휘의 합창 '우리는 국제연합이다(UN 제정)'를 필두로, 김병일의 피아노 독주 '헝가리 광시곡', 테너 백석두의 '라파로마', 장보원의 피아노 독주 '군대 포로네스', 합창단의 '병사의 합창', 박상만의 바이올린 독주 '추억', 합창단의 '해군인천경비부가', '개선 대합창' 등을 연주해 국군의 승리를 염원하고 있었다."1952년에는 인천시립합창단이 만들어진다. 합창단에 참여한 남녀 음악인들은 대부분 내리교회 성가대원들이었으며 40여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지휘는 최영섭이 맡았다. 특히 합창단은 창단 이후 시립박물관과 학교, 다방 등 장소를 가리지 않고 연주회를 펴면서 음악의 대중화에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후 지역에서 열린 연주회에 관한 기록으로는 1953년 1월에 열린 제22회 음악감상회, 4월에 열린 인천시립박물관 재개관 기념음악회 등이다.전쟁 후인 1956년에는 음악가와 애호가, 은퇴 음악인들에 의해 '인천음악애호가협회'가 창립한다. 협회 산하에 관현악단을 운영했고, 박종성과 주원기, 최영섭을 비롯해 단원은 50여명이었다. 1957년 11월 인천시민관에서 열린 제4차 연주회의 지휘는 최영섭이 맡았으며, 현재 세계적 거장의 반열에 오른, 당시 중학교 1학년이었던 백건우가 그리그 '피아노 협주곡'의 협연자로 나섰다. 인천애호가협회관현악단은 1957년에도 신인음악회를 개최하는 등 지역 신진음악인들에게 기회의 장을 마련해 주기 위한 활동을 이어갔다.한국음악 분야에선 1953년 인천정악원이 창립했다. 창립 2년 후인 1955년에 인천국악원으로 명칭을 바꿨다.이 글에서도 확인되듯이 1929년 강화도 태생으로 인천에서 음악 활동을 편 최영섭의 이름이 한국전쟁 전후해서 자주 등장한다. 앞선 '해방 이후, 지휘자 임원식'(2018년 12월 28일자 9면 보도)에서 밝혔듯이 최영섭은 고교 졸업 직전이던 1949년 작곡 발표회를 개최했다. 당시 최영섭은 피아노 모음곡과 10곡의 가곡을 선보였다. 이후 서울대 음대㎝에서 작곡을 공부했다. 피란 후 인천으로 돌아와서 인천여중·고교 음악교사로 부임한 최영섭은 교사로 활동하면서 구국대학생합창단과 해군경비부 합창단, 인천시립합창단의 지휘를 맡았으며, 인천애호가협회관현악단도 지휘했다.이렇듯 전쟁 때도 지역 예술인들의 예술에 대한 열망은 꺾이지 않았으며, 최영섭의 경우처럼 새롭게 떠오르는 음악가도 나타났다. 조우성 전 관장은 "인천의 문화예술인들은 전시(戰時)에도 음악 등의 예술로 전쟁의 참상을 고발하고, 사랑하는 가족과 집을 잃고 망연자실하는 시민들과 애환을 같이 했다"면서 "자료의 소실 등으로 한국전쟁 시기의 지역 예술사를 구체적으로 볼 수 없음은 아쉬운 대목"이라고 말했다. /김영준기자 kyj@kyeongin.com 그래픽/성옥희기자 okie@kyeongin.com/아이클릭아트지난달 22일 저녁 인천 내리교회 예루살렘 성전에서 개최된 '제28회 메시아 대연주회' 공연 현장. /내리교회 제공·경인일보DB1954년 12월 22~23일 우리나라 최초로 헨델의 오라토리오 '메시아' 전곡을 연주한 후 기념 촬영한 내리교회 찬양대 모습. /내리교회 제공·경인일보DB1954년 우리나라 최초의 '메시아' 전곡 연주회에 사용된 악보 전 3권. 6개월에 걸쳐 등사 원지에 철필로 일일이 그려 등사기에 인쇄했다. /내리교회 제공인천상륙작전 기념관 '자유수호의 탑' 조형물. /내리교회 제공·경인일보DB

2019-01-03 김영준

[zoom in 송도]송도국제도시 '2018년 성과'

포스코-게일 갈등 '3년 스톱' 국제업무단지9월 새 홍콩 투자자와 손잡고 개발 정상화컨벤시아 임대료 국비 지원… 일대 '특구화'개관·기부채납 '지연' 아트센터 11월 문열어'철거 위기' 한옥마을 계약변경등 현안 해결日·獨·佛등 외국인직접투자 작년比 32%↑올해에도 인천 송도국제도시와 관련해 많은 일이 있었다. 송도국제업무단지 개발사업이 정상화됐고, 콘서트홀 '아트센터 인천'이 개관했다. 인천지역 마이스(MICE) 산업 핵심 인프라인 송도컨벤시아 2단계 사업이 완료됐다. 이외에도 많은 현안이 해결됐으며, 투자 유치 활동도 활발했다. 이번 '줌인송도'에는 2018년 성과를 정리해 본다.# 송도국제업무단지 개발 정상화송도국제업무단지 개발사업은 3년 넘게 중단됐었다. 송도국제업무단지 사업은 민간사업시행자인 NSIC(송도국제도시개발유한회사)가 송도 1·3공구 일원 5.77㎢를 개발하는 24조4천억원 규모의 대형 프로젝트다. 센트럴공원과 골프클럽을 조성하는 등 순조롭게 진행되던 사업은 NSIC 주주사인 포스코건설과 게일인터내셔널 간 갈등으로 2015년 7월 멈춰 섰다. 정상화를 위한 협의가 있었지만, 합의에 실패했다. 인천경제자유구역청이 지난해 10월부터 중재에 나서면서 사업이 정상화될 조짐을 보였다. 하지만 '아트센터 인천' 준공에 대해서만 합의가 이뤄졌을 뿐 사업을 정상화하지는 못했다. 교착상태에 빠진 송도국제업무단지 개발사업은 올해 9월 포스코건설이 게일과 결별하고 홍콩에 본사를 둔 투자자와 손을 잡으면서 정상화됐다. 사업 중단 기간(2015년 7월~2018년 6월) 발생한 손실액은 약 4천530억 원. 포스코건설과 새 파트너는 송도국제업무단지 사업 재개를 준비하고 있다.# '아트센터 인천' 개관송도국제업무단지 개발사업이 정상화되면서 '아트센터 인천' 개관 및 기부채납이 급물살을 탔다. 국내 최고 수준의 음향시설·무대를 갖춘 콘서트홀 '아트센터 인천'은 지하 2층, 지상 7층, 연면적 5만1천977㎡ 규모다. 콘서트홀(1천727석), 다목적홀(350석), 주차장(816면) 등으로 구성됐다.NSIC는 주거단지 개발이익금으로 '아트센터 인천'을 건립했다. 건립공사는 2016년 7월 끝났는데, NSIC 주주사 간 갈등으로 개관 및 기부채납이 지연됐다. 인천경제청은 중재 회의를 통해 지난해 12월 '아트센터 인천' 준공(사용승인)을 이끌어냈다. 하지만 게일 측이 공사비 실사 등을 이유로 계속해서 개관 및 기부채납을 미뤄왔다. 올해 9월 NSIC 주주사가 변경되면서 지난달 16일 문을 열었고, 지난 26일에는 기부채납 행사가 열렸다. 인천경제청이 지난달 16일과 17일 연 개관 공연은 티켓이 오픈 몇 분 만에 동나는 등 성공적으로 끝났다.'아트센터 인천'은 1단계와 2단계로 나뉜다. 이번에 개관한 콘서트홀이 1단계 사업이고, 오페라하우스(1천439석)와 뮤지엄(2만373㎡)을 건립하는 게 2단계 사업이다. 인천경제청은 1단계 사업 정산을 완료한 뒤, 2단계 사업 추진 여부를 결정할 방침이다.# 송도컨벤시아 2단계 준공·임대료 확보송도컨벤시아 1단계 시설 옆 부지 약 7만3천840㎡에 전시·회의시설, 판매시설, 다목적 야외광장을 만드는 2단계 사업이 올해 7월 준공됐다. 2단계 준공으로 송도컨벤시아는 2천 명 이상을 수용하는 대형 국제회의를 유치·개최할 수 있게 됐다. 적재하중·적설하중 강화, 하역장 설치 등을 통해 시설물 안전과 전시 효율성도 강화했다.송도컨벤시아는 국내 컨벤션 시설 가운데 전시 면적 기준으로 4위다. 인천공항과 인천항이 가까운 데다, 주변에 고급호텔과 대형 마트 등 편의시설이 밀집해 있다. 특히 송도컨벤시아 일대 298만 1천666㎡는 우리나라 첫 '국제회의 복합지구'로 지정됐다. 국제회의 복합지구는 국제회의 시설(컨벤션 등)과 집적시설(일정 규모 이상 숙박·판매시설·공연장 등)이 모여 있는 곳으로, 관광특구와 유사한 개념이다. 재정 지원, 용적률 완화, 교통유발금 감면 등의 혜택을 받을 수 있다. 인천시는 송도 국제회의 복합지구와 영종도 복합리조트를 연계해 글로벌 수준의 마이스 클러스터를 구축하겠다는 계획도 갖고 있다.송도컨벤시아 2단계 임대료와 관련해 국비를 확보한 것도 올해 주요 성과 중 하나다.2단계 사업은 BTL(Build Transfer Lease·임대형 민간투자사업)로 건립됐다. 민간사업자가 시설을 조성하고, 인천경제청이 20년간 임대료를 주는 구조다. 국회는 지난 7일 송도컨벤시아 임대료와 관련한 국비 지원액 988억 원(국가균형발전특별회계 지역지원계정)을 의결했다. 이에 따라 인천경제청은 내년부터 연간 49억여 원 등 20년 동안 송도컨벤시아 임대료를 정부로부터 받을 수 있게 됐다.# 한옥마을 등 각종 현안 해결송도 한옥마을(음식점)과 관련한 갈등이 해소됐다. 한옥마을은 운영자(임차인)가 '가짜 외국인투자법인'으로 드러나면서 철거 위기에 처했었다. 지난해 인천경제청이 토지 임대차 계약 해지를 통보하자, 운영자는 계약 해지 처분 취소 소송을 제기했다. 인천경제청은 법원의 조정 권고를 받아들여 올해 9월 한옥마을 운영자와 변경계약을 체결했다. 철거 시 막대한 사회적 손실이 발생할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한 조치다. 대신 임대료 부과 면적 확대, 국내 법인 기준으로 임대료 납부, 전통문화체험동 건립 등을 얻어냈다.송도세브란스병원 건립이 지연되는 문제도 해결됐다. 올해 3월 인천경제청은 연세대와 2단계 사업 협약을 맺으면서 송도세브란스병원 건립에 관한 내용을 구체화했다. 인천시와 연세대가 2006년 1월 체결한 협약에는 병원 건립 시한과 이를 지키지 못할 경우 페널티를 줄 수 있는 조항이 없었다. 이 때문에 병원 건립이 지연돼도 인천경제청이 할 수 있는 특별한 조치가 없었다. 연세대는 최근 포럼에서 2024년 개원을 목표로 송도세브란스병원 건립을 추진하고 있다고 밝혔다.송도24호 공원에 있는 '블루오션골프클럽'은 운영자가 올 4월 인천경제청의 지급보증 문제를 해결하면서 정상화됐다. 인천경제청은 송도 축구학교 정상화를 위해 새 운영자를 선정하는 등 관련 절차를 진행하고 있다.# 투자 유치 활동 활발올해 들어 4차 산업혁명과 관련한 외국 기업의 입주 또는 계약 체결이 활발했다. 판금 가공 분야 세계 1위 기업 일본 '아마다'는 올 10월 송도에 인천테크니컬센터를 오픈했다. 아마다는 70여 년의 역사를 보유한 전통과 기술력을 자랑하는 글로벌 기업이다. 한국 정밀판금 가공업의 수준을 세계 최고로 끌어 올리는 데 기여할 것으로 인천경제청은 기대하고 있다. 일본 공작기계 시장 점유율 1위 기업인 '오쿠마'는 올 8월 국내 고객 서비스 강화 및 인력 양성 거점인 CNC 공작기계 교육훈련센터를 개소했다.독일의 강소기업이자 스마트 팩토리(Smart Factory·생산 과정에 정보통신기술을 적용하는 지능형 생산공장)를 구현하는 '이구스'는 송도에 첨단 부품생산 및 R&D시설을 내년 말까지 건립하기로 하고 올 10월 인천경제청과 토지 매매계약을 체결했다. 같은 달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글로벌 제약 화학 생명과학기업 독일의 '머크'는 한국생명과학 운영본부 착공식을 했다.프랑스 기업 '생고뱅'은 송도에 바이오 플루이드 시스템(Fluid System) 제조시설 건립을 위한 토지 매매계약을 올 9월 체결했다. 세계 3대 첨단 금속가공시스템 제조기업 스위스의 '바이스트로닉'은 송도에 아시아 태평양 지역 최대 규모의 전시 교육센터를 설립하는 내용의 투자 계약을 인천경제청과 체결했다. 싱가포르에 본사를 둔 블록체인 기반 공유경제 기업 '블루웨일'은 인천경제자유구역이 블록체인 허브 도시로 도약하는 데 협력하기로 했다. 인천경제청에 따르면 올해(1월 1일~12월 5일) 외국인직접투자(FDI) 신고액은 13억 1천476만달러로, 지난해(9억9천155만달러)보다 32.6% 늘었다. 도착 금액은 지난해(2억5천115만달러)보다 314.9% 증가한 10억4천217만달러를 기록했다. /목동훈기자 mok@kyeongin.comNSIC(송도국제도시개발유한회사)가 개발하고 있는 송도국제업무단지 전경. 올 9월 NSIC 주주사 변경으로 3년 넘게 중단됐던 사업이 정상화됐다. /인천경제자유구역청 제공'아트센터 인천' 콘서트홀 내부. /인천경제자유구역청 제공지난 10월에 열린 독일 '머크'의 한국생명과학 운영본부 착공식. /인천경제자유구역청 제공

2018-12-30 목동훈

[한국 근대음악의 발상지 인천·(13)]해방이후, 지휘자 임원식

자주적인 민족주의 음악 '화두' 역동적 시기남한 단독정부 수립후 분리공간서 남북 갈려의주 출신 임원식 하얼빈·동경음악학교 거쳐1946년 첫 고려교향악단 초대 상임지휘자 활동美 줄리아드음대 유학후 KBS 교향악단 창단1984년부터 인천시향 7년간 이끌며 기량 높여국내 음악학자들은 우리 음악사에서 해방공간(1945~1948)은 직후의 분리공간(1948~1950)이나 직전의 식민공간 보다 역동적인 시기였다고 평가한다. 1905년 을사늑약 이후 일제 치하에선 일본과 서양의 음악언어를 익혀 지배권력을 형성한 식민주의자가 민족 공동체 구성원에게 식민지 언어로 의사소통하게 했다. 반면 해방공간에선 민족적 양심선언이라는 윤리성을 제기해야 했다. 체제분단이 굳어져 가는 냉전체계를 극복하고, 우리 음악에 대한 자주적 인식이 대두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식민지시대에 크게 훼손된 우리 음악언어를 자주적으로 정립하는 것은 해방공간 우리 음악계의 과제였다. 이처럼 당시 민족음악론은 윤리·정치적인 면과 함께 미(美)적인 측면에서도 힘을 갖고 있었다.하지만 1948년 8월 15일 남한에서 미국과 이승만의 단독정부가 수립되자 논의된 민족음악론은 힘을 잃기 시작했다. 남과 북은 각각 친미와 친소로 나눠 각자 사상에 부합하는 것만을 선택해야 하는 길에 놓였다. 때문에, 분리공간은 훼손된 민족 정신과 정서의 정화 작업을 요원하게 만든다. 더해서 뜨거운 가슴으로 치열한 행보를 편 민족음악론자들은 월북·잠적하거나 체포·구금(처형)당하게 되고, 민족주의 음악언어는 금기어가 된다. 대신 새로운 정부에 편승한 음악인과 단체가 전면에 나선다.그 시기에 인천 음악계의 움직임은 자세히 살펴지지 않는다. 지역에서 열린 음악회들이 신문 등 기록을 통해 전해진다. 1945년 10월 이재민 돕기 음악회가 개최되고, 이듬해엔 영화학교 개교기념 음악대회가 열렸다. 또한 각종 현상음악회(콩쿠르를 의미하는 것으로 보임)가 열리고, 서울관현악단과 이화여대 합창단의 인천공연도 개최됐다. 1949년 최영섭 작곡발표회와 1950년 인천시립교향악단의 모태인 인천교향악단의 연주회 등이 눈에 띈다.우리나라 1세대 음악학자 중 한 명인 노동은(1946~2016)은 1980년대 후반에 발표한 장편 논문 <해방과 분리 공간의 음악사 연구>에서 "1948년 8월 15일 서울시가 주최한 정부수립 경축 공연에 '서울교향악단'의 출연은 남한 체제의 건재함과 '고려'에 대한 '서울'의 승리, 창작가 보다 연주가의 우위성 등을 안겨다 주는 상징성을 가지고 있었다. '서울'의 승리는 1948년 11월 27일~12월 1일에 있었던 베토벤 '합창교향곡'(서울대 예대 합창단) 연주를 거쳐 1950년 2월 24일 서울특별시 문화상 수상 단체로 선정한 데서도 전면에 부각됐다"라고 분석했다. 서울교향악단의 전신인 고려교향악단은 광복 직후인 1945년 9월 계정식과 김생려, 현제명을 중심으로 창단한 우리나라 최초의 교향악단이었다. 창단 초기 지휘는 주로 계정식이 했다. 1946년 초 임원식(1919~2002)이 고려교향악단의 초대 상임지휘자가 됐다. 그는 당대 유일한 전문 지휘자였다. 임원식은 부임한 그해 6월 정기 연주회를 마지막으로 사임하고 미국 유학길에 오른다. 고려교향악단의 재정난이 심화하던 시기였다. 단독정부 수립 이후인 1948년 10월 정기연주회를 끝으로 악단은 해체하고, 단원들은 서울관현악단원들과 함께 서울교향악단으로 흡수된다. 앞서 인용한 논문에서 노동은은 해방공간의 우리 음악상황(고려교향악단)이 분리공간(서울교향악단)으로 바뀐 것을 서울의 교향악단을 예로 들어 설명한 것으로 볼 수 있다.후일 인천과도 깊은 인연을 맺는 임원식은 평북 의주에서 태어났으며, 1939년 하얼빈 제일음악학원을 졸업했다.1942년 피아노 전공으로 동경음악학교에 입학해 당시 유학 중이던 김원복, 전봉초, 윤기선 등과 교류했다. 이후 고려교향악단을 이끌다가 사임 후 미국 줄리아드 음대에서 지휘자 과정을 수료하고 1948년 돌아온다. 한국전쟁 후 임원식은 1956년 KBS 교향악단을 창단해 초대 상임 지휘자가 되었으며, 1969년 국립교향악단이 된 후에도 1971년까지 상임지휘자 직책을 유지했다. 1961년에는 국내 최초의 예술 전문 고등교육 기관인 서울예술고등학교를 설립해 초대 교장도 역임했다.1967년 '동백림사건'에 연루된 혐의로 윤이상이 서울에 압송돼 재판을 받자, 구명을 위한 서명 운동을 벌였고 재판정에서도 증인으로 출석해 무고함을 호소했다. 베를린 교향악단 연주회에 객원 지휘자로 초청받았을 때에도 윤이상의 '무악' 을 연주했다. 그로 인해 국내 보수 음악인들의 질타를 받기도 했다. 국립교향악단 상임지휘자에서 물러난 이후 이렇다 할 자리가 없었던 것도 보수 음악인들의 방해 때문이라는 견해도 있다. 그로 인해 1984년 지역 단체인 인천시립교향악단으로 오게 됐다는 것이다. 제2대 인천시립교향악단 상임지휘자에 오른 임원식은 1990년까지 7년 동안 재임하면서 악단의 기량과 음악성 향상에 이바지했다. 1992년에는 악단으로부터 명예 상임지휘자 직책을 받기도 했다.1980년대 학창 시절을 보내면서 임원식이 지휘하는 인천시립교향악단의 공연들을 관람했으며, 대학에서 성악을 공부한 후 현재 지역 문화계에서 활동하고 있는 한 인사는 "임원식 선생이 인천시립교향악단에 오시기 전까지 시민으로서 문화와 체육 분야에서 자부심을 가질 만한 요소들이 많지 않았다"면서 "시립교향악단의 경우 전국에서 최하위 수준이었는데, 선생이 오신 이후 '서양 음악을 받아들인 인천'의 수준을 보여줬던 것 같다. 또한 1989년엔 프로야구 태평양 돌핀스가 첫 포스트시즌에 진출(준플레이오프에서 삼성에 승리, 플레이오프에선 해태에 패배)하면서 시민들에게 힘을 주는 요인들이 있었다"고 당시를 떠올렸다. /김영준기자 kyj@kyeongin.com 그래픽/박성현기자 pssh0911@kyeongin.com/아이클릭아트인천시립교향악단 연주중인 임원식 지휘자. /인천문화예술회관 제공인천시립교향악단 제2대 상임지휘자 임원식. /인천문화예술회관 제공1987년 4월 홍콩서 개최된 인천시립교향악단의 공연을 소개한 전단지. /인천문화예술회관 제공

2018-12-27 김영준

[바다가 들려주는 인천이야기·49(끝)]남과 북을 잇는 뱃길의 시작 인천항

'서울-평양 인접' 입지·수도관문 역할 비슷… 분단 전에도 교류 활발구호물자 운송 등 남북 오가던 유일한 정기항로, 2011년이후 올스톱北 해외연결된 항로 없어… 경협 재개땐 황해 물동량 환적 선점기회남북이 그동안 얼어붙은 관계를 청산하고 평화의 기지개를 켜는 화해 분위기를 만들어가는 가운데 인천항의 가치가 새롭게 주목받고 있다. 인천에서는 남북 교류의 중심으로서 인천항의 역할을 재정립하고 평화의 시대를 대비하기 위해 인천항이 준비해야 할 것들을 찾는 세미나 또는 포럼이 앞다퉈 열리고 있다. 남북 경제협력의 핵심 거점 항만 구실을 할 인천항의 가치와 중요성이 떠오르고 있는 것이다.# 인천항의 닮은꼴 남포항인천항이 남한의 수도 서울의 관문이라면, 남포항은 북한의 수도 평양의 관문이다. 인천항과 남포항은 수도권의 관문 역할을 하고 있다는 점에서 무척 닮았다.남북이 본격적으로 경협에 나선다면 수도를 배후에 둔 인천항과 남포항의 역할도 자연스레 중요해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인천항이 남북 해상 교류의 가장 중요한 거점이라는 이야기가 나오는 이유다.인천항은 서울 경계와의 거리가 불과 20여㎞에 지나지 않을 정도로 가깝다. 고속도로와 철도 등 교통 인프라도 잘 갖춰져 있다. 남포시 또한 평양의 위성도시로, 도로·철도 등의 인프라가 잘 갖춰져 있다.남포항은 평양시에서 남서쪽으로 약 45㎞ 떨어진 대동강 하류의 서해안에 위치한다. 평양화력발전소·남포화력발전소와 인접해 있어 전력 공급도 원활한 항만이다. 그래서 북한 제1의 항구로 불리는 남포항은 남북 경협의 가장 중요한 항만으로 꼽힌다. 두 항만은 서해의 조수 간만의 차이를 극복하기 위해 갑문을 운영한다는 공통점도 있다. → 표참조서로 닮은 두 항만은 분단 이전에 교류가 활발했다.일본인 저널리스트 가세 와사부로(加瀨和三郞)가 1908년 편찬한 '인천개항 25년사'를 보면, 인천항과 남포항의 관계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는 대목이 나온다.'국내 무역 중 당시 인천과 관계가 가장 깊은 곳은 진남포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중략) 진남포에서 수입하는 것은 대개 인천항이 중개하였던 것으로 보아 당시 인천항이 진남포의 중개소 위치에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즉 진남포에서 일본으로 수출하는 곡류와 일본 혹은 청국에서 수입하는 각종 화물은 모두 인천항을 거쳤다'.지금 방식으로 말하면 인천항은 남포항에서 중국 또는 일본으로 건너가거나 중국·일본에서 수입하는 화물이 모이는 환적항 또는 허브항 역할을 한 것이었다.# 인천항, 북으로 가는 바다 관문남북이 교류해야 할 때마다 인천항은 북으로 통하는 중요한 관문 역할을 했다.대표적인 사례가 1984년 남한에 큰 수해가 발생해 북한이 인도적 차원에서 남한을 지원했을 때 북이 보낸 구호물자 일부가 인천항을 통해 들어온 것이다. 1984년 8월 31일부터 나흘 동안 수도권에 집중호우가 내려 서울·경기 등에서 9만3천800여 명의 이재민이 발생했다. 최악의 홍수가 발생하자 북한은 방송을 통해 수재민 지원을 제의했다. 쌀, 옷감, 시멘트, 의약품 등을 구호물자로 보내겠다고 북은 제안했다. 남측은 북의 제안을 수락했고, 그해 9월 29일부터 10월 4일까지 판문점·인천항·북평항을 통해 북에서 보낸 구호물자가 도착했다. 그때 인천항으로는 시멘트를 실은 북한 배가 들어왔다. 북한이 남한에 인도적 차원에서 구호물자를 지원한 것은 그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이후 우리 정부나 민간단체가 인도적 차원에서 구호물자를 북으로 보내야 할 때 인천항에서 배가 떴다.2010년 이른바 5·24 조치 이전까지 인천항~남포항 바닷길은 사실상 남북을 오가는 유일한 정기항로였다.한반도 분단 이후 인천항과 남포항을 오가는 항로가 개설된 것은 1998년 8월 24일이다. (주)한성선박은 홍콩에서 3천t급 세미 컨테이너선 '소나'호를 빌려 월 3회 정기운항했다. 인천항~남포항 항로 정기화물선 운항은 남북 당국의 해운사 선정에 대한 입장 차로 2001년 1월 4일 중단되기 전까지 이어졌다. 당시 북측은 후발 주자인 남측의 람세스물류(주)를 제외한 다른 해운회사 소속 선박의 남포항 입항을 거부했고, 남측은 람세스물류가 운항 질서를 어지럽히고 물류비를 상대적으로 높게 책정한다는 이유로 운항 허가를 내주지 않았다. 실질적으로 운항하지는 않았지만, 이 무렵 인천항~남포항 항로 내항 화물 운송사업을 신청한 업체가 7~8곳이 될 정도로 경쟁이 심했다.인천항~남포항 정기화물선 운항이 재개된 것은 2001년 4월 22일이다. 국양해운이 용선한 러시아 선적 '미누신스크'호(2천360t급)가 남포항을 향해 인천항에서 출발하면서다. 이후 통일부가 정책을 바꿔 남북 해상 항로를 운항하는 선사는 사업 승인에 앞서 운항 합의서 등 북한과 합의한 증빙 서류를 제출할 것을 의무화함에 따라 과당경쟁은 사라졌다. 통일부에서 제시한 조건을 맞춘 국양해운은 2002년 2월 '트레이드포춘'호(4천500t급)를 신규 투입해 주 1회 정기운항을 시작한다.# 트레이드포춘호와 인천항국양해운이 2002년 인천항~남포항 항로에 투입한 트레이드포춘호는 매주 한 차례 남과 북을 오가며 남북 경제협력의 중추적인 역할을 했다. 2002년부터 2011년까지 남북을 오가며 컨테이너 6만3천552TEU(1TEU는 20피트짜리 컨테이너 1대분)와 벌크화물 15만2천96t을 운송했다. 당시 인천항에서 남포로 가는 배에는 섬유류, 화학, 전자·전기제품 등이 실렸고, 북에서는 농수산물, 광물자원, 바닷모래 등을 주로 싣고 돌아왔다. 쌀과 밀가루, 분유, 의류 등 민간단체들의 대북 지원 물품도 대부분 트레이드포춘호를 통해 북에 전달됐다.국양해운은 인천항~남포항 항로 서비스 개시 이후 적자를 기록해오다 2006년 첫 흑자를 냈다. 2007년에는 이 항로에 추가 선박을 투입하기도 했다. 우리 정부가 2010년 천안함 사건에 대응해 남북 교역을 중단하는 5·24 조치를 발표한 이후, 트레이드포춘호는 물동량이 급격히 줄었고 결국 2011년 10월 운항을 멈췄다. 2012년 폐선됐다.인천항만업계 관계자들은 최근 화해 분위기 속에 남북 경협이 재개된다면 인천항이 다시 중요한 역할을 할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러면서 그때를 미리 준비해야 한다고 조언한다.국양해운에서 트레이드포춘호 운항 업무를 담당했던 최준호 장금상선 부장은 "남포항 등 북한의 항만은 해외로 연결된 항로가 없어 인천항이 북한 황해권 항만의 해외 물동량을 처리하는 환적항 역할을 할 가능성이 높다"며 "인천항이 기회를 잡을 수 있도록 준비해야 한다"고 말했다.글/김성호기자 ksh96@kyeongin.com그래픽/박성현기자 pssh0911@kyeongin.com/아이클릭아트2005년 4월 23일 경인일보사가 주관하고 인천시와 인천적십자사가 공동 후원으로 마련한 북한 어린이 돕기 물품이 선적된 트레이드포춘호. /경인일보DB2005년 4월24일 인천항 내항처럼 갑문을 이용해 선박이 오가는 남포시 서해갑문의 전경. 제방길이가 8㎞에 이른다고 전해진다. /경인일보DB인천항 갑문을 중심으로 본 인천항 내항 전경. /인천항만공사 제공

2018-12-26 김성호

[한국 근대음악의 발상지 인천·(12)]엡윗청년회와 이우구락부

'엡윗청년회' 인천 내리교회서 최초 결성을사늑약 항의시위 해산…1916년 재조직이후 국악연구단체 '이우구락부' 멤버로인천광역시는 2015년 '한국 최초, 인천 최고 100선'(인천역사문화총서 74)을 간행했다.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책에는 인천의 역사·문화 속에서 한국 최초이자 인천 최고(最古)의 사실들이 담겼다. 간행 이후 시는 해당 건물이나 장소에서 자체 개발한 상징 아이콘 현판식을 진행했다. 지난해 6월 시는 인천 중구의 내리교회에서 현판식을 개최했다. 1885년 설립된 우리나라 최초의 개신교회인 내리교회를 세상에 다시 한 번 알린 자리였다. 더불어 '엡윗(Epworth)청년회'에 대한 현판식도 함께 열렸다. 엡윗청년회는 1888년 미국 시카고에서 창설한 감리교회 청년단체이다. 감리교회 창시자인 존 웨슬리(1703~1791)의 출생지가 엡윗이었다. 국내에서 엡윗청년회는 1897년 중앙 조직을 갖췄다. 이후 지역 교회로 전파되는데, 가장 먼저 엡윗청년회가 생긴 곳이 인천 내리교회였다.내리교회 엡윗청년회는 인천 청년운동의 출발점이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을사늑약 이후 조약에 항의하는 무력시위를 벌인 게 빌미가 돼 엡윗청년회는 1906년 해산한다. 1916년 재조직 후 이전 회원에 신규 회원들까지 가세하면서 사회, 경제, 문화 등 다 방면에서 활동했다.동아일보 1921년 10월 29일자에 '인천엡윗음악강연'이라는 제목의 기사는 인천남자엡윗청년회 음악부가 주최한 내리예배당 강연회를 예고하고 있다. 기사 상에는 회원과 함께 일반 시민의 참여도 독려하고 있다. 1920년 2월 우리나라 최초의 지역 문예지 '개척(開拓)'을 펴내기도 했던 인천 엡윗청년회의 활동은 고전 국악 연구단체 '이우구락부(以友俱樂部)'와도 맥이 닿아있다. 이우구락부는 우리 음악 연구와 공연을 통해 민족혼을 고취 시키려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신문 기사와 각종 기록에 따르면 이우구락부는 일제가 문화정책을 실시하자 국악을 통한 민족 문화의 전통을 모색하면서 각종 음악회와 토론회, 웅변대회 등을 열거나 참여했다. 이를 통해 애국계몽활동을 전개하고자 했던 것이다.인천교대 기전문화연구소의 <기전문화연구 4집>에 수록된 노영택의 논문 '일제하 인천의 청소년운동에 관한 연구'에 따르면, 이우구락부의 간부는 하상훈, 서병훈, 최선향, 이범진 등이었다. 감리교 선교사에 의해 설립된 영화초등학교 초기 졸업생인 하상훈은 내리교회 앱윗청년회 회장이었다. 기타 간부들 역시 내리교회의 신자들이었다고 한다. 때문에 논문에선 이우구락부를 내리교회 계열의 청년들로 구성된 단체로 정의한다.또한, 이우구락부는 동아일보 인천지국 안에 본거지를 두었다. 동아일보 초대 인천지국장이 하상훈, 부지국장이 서병훈이었으며, 총무는 최선향, 경제부 기자는 이범진이었다. 이처럼 동아일보와 연관이 깊은 인물들이 이우구락부에 참여했다.<인천시사>에 이우구락부에 대해 기록한 대목이 있다. "이 단체의 창립 연대는 정확히 알 수 없고, 처음에 인천부 내리에 임시 본부가 있다가 후에는 용강정에 회관이 있었다. 이 단체 역시 전체적인 임원 명단은 알 수 없으나 1923년 4월 27일 제7회 정기총회에서 개선된 임원은 부장 하상훈, 총무 서병훈, 학습과장 고주연, 도서과장 박충의, 운동과장 라시극, 식산과장 전두영, 평의원 윤육 외 9인 등이다. 1924년 직제를 간부제로 변경하여 임원을 개선한 뒤에도 역시 하상훈이 간사장이 되고 서무 서병훈, 학습 최선경, 도서 이범진이었다."<인천석금>에서 저자 고일 선생은 자신의 견해를 더해서 이우구락부를 소개하고 있다. "인천의 음악 운동을 살펴보면, 초기 고전 국악 연구 단체로 동아일보 인천지부 건물에 있던 이우구락부가 있었다. 일제 치하에서 죽림칠현 격으로 세상을 등지고 살았던 것은 고상한 음악 동지가 필요한 데서 나온 성싶다. 구락부 명칭은 '이문회우(以文會友)'라는 말에서 따온 것 같다. 주요한 부원으로는 최선경, 송균, 서병훈 씨와 동아일보 사원들이었다. 이들 7인은 일주일에 한 번씩 회식을 하면서 정담을 나누기도 했다." '청년회' 회장 하상훈 등 사회 다방면 활동동아일보 사원 다수, 음악동지로 정기모임국악·양악 어우러진 공연 후원 대성황도<인천시사>에서 보듯이 이우구락부의 창단과 해산 시기에 대한 정확한 기록은 없다. 이우구락부 관련 기사는 1920년부터 1927년에 걸쳐 동아일보에서 검색된다. 기사에선 이우구락부가 당시 인천에서 개최한 각종 음악회와 관련된 내용을 볼 수 있다. 음악회 기사에 표출된 출연자 항목에 이우구락부로 표기된 것을 봤을 때 회원 각자가 연주 활동을 한 전문 음악인들로 보이진 않는다. 이 글에서 소개된 이우구락부에 가담한 인물들을 소개한 후대 기록에서 악기를 잘 다뤘다고 표현한 부분도 있지만, 예술인이라기 보다는 주로 언론인 혹은 사회활동가로 규정하고 있다. 때문에 음악애호가들도 다수 포함되어 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각종 공연을 적극 주최하고 후원한 부분도 확인할 수 있다.동아일보 1920년 8월 24일자에 '인천의 음악대회' 기사가 있다. 인천부 가무기좌에서 열린 음악회는 우리음악과 서양음악이 어우러졌으며, 대성황을 이뤘다고 밝히고 있다. 또한, 음악회는 한용단과 이우구락부가 후원했다고 표기돼 있다.지역 문화계 원로 중 한 명인 김윤식 시인은 "개항 이후 새로운 사회 풍조와 더불어 신문물이 도입되는 와중에 우리 국악을 애호하고 보전하기 위해 처음으로 단체를 결성하고 활동했다는 것은 대단히 선구적이고 동시에 우리 인천 문화사에 있어서 상당히 의미 있는 부분"이라고 의의를 설명했다. /김영준기자 kyj@kyeongin.com그래픽/박성현기자 pssh0911@kyeongin.com/아이클릭아트1901년 준공된 내리교회. /인천시 제공현재 인천 내리교회 모습. /김영준기자 kyj@kyeongin.com인천 엡윗청년회가 1920년 2월 펴낸 우리나라 최초의 지역 문예지 '개척(開拓)'의 표지. /인천문화재단 제공하상훈 /인천문화재단 제공

2018-12-20 김영준

[바다가 들려주는 인천이야기·48]인천항 운영기관(하)-인천항만공사

내년 4월 수도권 1호 크루즈전용터미널 개장 중~일~러 항로운영신국제여객터미널·골든하버 프로젝트 순항 '해양명소' 자리매김'300만TEU 돌파' 인천항 하역 능력 넘어서… 신항 컨 부두 개발남항 배후에 車물류클러스터 조성 중고차 판매·재생센터 등 구축2025년 인천 송도국제도시 9공구에 있는 인천항 크루즈 전용 터미널에는 세계 최대 크기의 크루즈 '심포니 오브 더 시즈'호(22만5천t급)에서 내린 9천여 명의 승객으로 북적거린다. 크루즈에서 하선한 승객들 가운데 일부는 인근에 조성된 상업·업무·레저 복합단지 '골든하버' 리조트로 향했다. 크루즈 전용 터미널 인근에 있는 인천항 신국제여객터미널도 한중카페리에서 내린 중국인 관광객들로 가득했다.신규 개장한 인천 신항 컨테이너 부두 1-2단계 구역에는 컨테이너가 쌓여 있다. 인천항은 2025년 400만TEU의 컨테이너를 처리했다. 남항에 있는 자동차 물류클러스터에서는 쉴 새 없이 차량이 수출되고 있다. 이는 인천항만공사가 목표하는 2025년의 인천항 모습이다.인천항은 지난해 사상 처음으로 연간 컨테이너 물동량 300만TEU(1TEU는 20피트짜리 컨테이너 1대분)를 돌파했다. 1974년 인천 내항 4부두에 우리나라 최초의 컨테이너 부두가 문을 연 지 43년 만에 이룬 성과다. 300만TEU를 달성한 인천항은 '해양관광의 메카'로 도약할 준비에 나서고 있다.우선 내년 4월 송도 9공구에 수도권 최초의 크루즈 전용 터미널이 문을 연다. 인천항 크루즈 전용 터미널은 현재 세계에서 가장 큰 22만5천t급 크루즈를 수용할 수 있는 규모를 자랑한다. → 위치도 참조5천~6천명의 관광객이 탈 수 있는 초대형 크루즈가 인천항에 기항하게 되는 것이다. 국내 크루즈 전용부두는 부산 북항(22만t급), 서귀포 강정항(15만t급), 제주항(15만t급), 속초항(10만t급) 등지에 있는데 인천항이 가장 크다.인천항 크루즈 전용 터미널이 문을 열면 국내 해양관광 시장에 일대 지각변동이 생길 것으로 예상된다.내년 4월과 10월에는 크루즈 전용 터미널 개장을 기념해 롯데관광개발과 이탈리아 선사 코스타크루즈가 인천을 모항(母港)으로 하는 크루즈선을 운항한다. 모항은 크루즈선이 중간에 잠시 들렀다 가는 곳이 아니라 출발지로서 승객들이 타는 항구를 말한다. 11만4천t급 '코스타세리나'호는 내년 4월 인천∼상하이∼후쿠오카∼부산을 운항하고, 10월에는 인천에서 출발해 상하이∼일본 후쿠오카∼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를 거쳐 속초에 입항할 예정이다. 이를 포함해 내년 총 22척의 크루즈가 입항해 5만500여명의 여객이 인천항 크루즈 전용 터미널을 이용할 전망이다. 이는 올해 인천항 임시 크루즈 부두와 내항에 총 10척(여객 수 2만6천120명)이 입항한 것보다 두 배가량 늘어난 수치다. 지난 18일 열린 인천항 크루즈 전용 터미널 준공식에서 남봉현 인천항만공사 사장은 "크루즈터미널은 인천이 동북아 해양관광 거점으로 도약하는 초석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크루즈 전용 터미널 인근에 자리 잡은 신국제여객터미널은 내년 12월 개장한다. 인천항과 중국을 정기적으로 오가는 10개 항로 한중카페리의 새 둥지가 될 신국제여객터미널은 지상 5층, 전체 넓이 6만7천㎡ 규모로 축구장 9개 넓이보다 크다. 현재 인천항 제1국제여객터미널(2만5천587㎡)과 제2국제여객터미널(1만1천256㎡)을 합친 면적의 1.8배에 이른다.인천과 중국을 오가는 카페리 여객 수는 2016년 92만391명에 달했다가 '사드 갈등'이 불거진 지난해에는 60만359명으로 34.8% 줄었다. 올해 들어서는 11월까지 71만9천261명의 여객 수를 기록하며 회복세를 보이고 있다. 인천항만공사 조주선 항만시설팀장은 "신국제여객터미널이 인천의 랜드마크로 자리 잡을 수 있도록 준공까지 최선을 다하겠다"고 했다.인천항 신국제여객터미널 배후단지를 개발하는 '골든하버' 프로젝트도 내년부터 진행된다. 신국제여객터미널 배후단지에 호텔, 쇼핑몰, 컨벤션, 콘도, 럭셔리 리조트 등을 유치하는 사업이다. 골든하버는 삼면으로 바다 조망이 가능하다. 친수 공간이 부족한 인천시민은 물론 국내외 관광객들이 해양관광문화의 매력을 만끽할 수 있는 명소가 될 것으로 기대를 모으고 있다.인천 신항 1-2단계 컨테이너 부두 개발사업도 본격적으로 추진될 예정이다. 한국해양수산개발원(KMI)에 따르면 2025년 인천항 컨테이너 물동량은 363만TEU에 달하지만, 하역 능력은 286만TEU에 불과할 것으로 예상된다. 77만4천TEU의 컨테이너를 처리할 수 있는 하역 시설이 부족한 셈이다. 하역 시설이 부족하면 컨테이너 화물 처리 속도가 늦어져 선박과 트레일러 등 화물 운송 장비 대기시간이 길어진다. 남북 경협이 활발히 이뤄지면, 컨테이너 물동량이 최대 120만TEU까지 추가로 늘어날 것으로 예상돼 시설 확충이 필요한 상황이다.해양수산부는 인천 신항 1-2단계 컨테이너 부두 개발사업을 내년 초 발표되는 신항만기본계획에 반영했다. 신항만기본계획은 인천 신항을 포함해 전국 10개 항만 건설 방향을 담은 중장기 계획으로, 2040년까지 인천 신항 선광신컨테이너터미널 옆에 4천TEU급 선박 접안이 가능한 선석 4개를 추가로 건설하는 내용이 담길 것으로 예상된다.인천항만공사는 인천항 자동차 수출 물량 유치를 위해 자동차 물류클러스터 조성 계획도 세웠다. 인천항은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중고차 수출항이다. 지난해 인천항을 통해 수출한 중고차는 25만2천 대로, 전국 수출 물량 28만6천 대의 88.1%를 차지했다. 올해(1~9월) 인천항 중고차 수출 물동량은 20만4천 대를 기록하며 전국 수출량(23만1천 대)의 88.3%에 달한다. 인천시와 인천항만공사는 2025년까지 인천 남항 배후단지(중구 항동 7가 82의 7 일원 39만6천㎡)에 자동차 물류클러스터를 만들 예정이다. 여기에는 중고차 판매·경매장, 검사장, 정비장, 자원재생센터, 주차장 등이 들어선다.남봉현 사장은 "인천항을 동북아 물류 허브로 도약시킬 뿐만 아니라 그동안 소홀했던 해양 관광 부분도 균형 있게 발전시킬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며 "이 과정에서 인천 지역사회 등 관계기관과 꾸준히 소통하겠다"고 밝혔다.글/김주엽기자 kjy86@kyeongin.com18일 제막식을 연 인천항 크루즈 전용 터미널의 모습. 국내 최대 규모의 인천항 크루즈터미널은 현재 세계에서 가장 큰 22만5천t급 크루즈가 정박할 수 있는 430m 길이의 부두를 갖췄다. /인천항만공사 제공인천항 신국제여객터미널 공사 현장 모습. /인천항만공사 제공/아이클릭아트인천 남항 자동차 물류클러스터 조감도. /인천항만공사 제공동북아 지형을 형상화한 용을 테마로 바다와 물에 관련된 수룡 또는 해룡을 디자한 인천항만공사 캐릭터. /인천항만공사 제공

2018-12-19 김주엽

[zoom in 송도]임대료 걱정 던 송도컨벤시아 '안정궤도'

임대형민간투자 2단계사업 年123억 '부담' 40% 20년간 988억 정부예산 반영·국비확보박남춘 시장 안상수·박찬대 의원 '지원사격'인천시 산하 인천경제자유구역청과 인천지역 정치권이 송도컨벤시아 임대료와 관련한 국비를 확보하는 데 성공했다. 국비 확보로 송도컨벤시아를 안정적으로 운영할 수 있게 됐다.인천경제청에 따르면 최근 국회 본회의에서 송도컨벤시아 임대료와 관련한 국비 지원액 988억 원(국가균형발전특별회계 지역지원계정)이 의결됐다. 이에 따라 인천경제청은 내년부터 연간 49억여원 등 20년에 걸쳐 송도컨벤시아 임대료를 정부로부터 받을 수 있게 됐다.송도컨벤시아 2단계 건립사업은 1단계 시설 옆 부지 약 7만3천840㎡에 전시·회의·판매시설 등을 조성하는 것으로, 올해 7월 준공됐다. 송도컨벤시아는 2단계 사업으로 전시시설에 900개 이상 부스를 설치하고, 2천명 이상 규모의 대형 국제회의를 유치·개최할 수 있게 됐다.문제는 임대료였다. 송도컨벤시아 2단계 사업은 BTL(Build Transfer Lease·임대형 민간투자사업) 방식으로 건립됐다. 인천경제청은 재정사업으로 2단계 사업을 추진하려 했는데, 국회에서 BTL 사업으로 승인했었다. 그래서 민간사업자 '더송도컨벤시아(주)'가 시설을 조성하고, 인천경제청이 20년간 임대료를 주는 조건으로 추진됐다. 인천경제청이 더송도컨벤시아(주)에 줘야 하는 연간 임대료는 123억원(시비 60%, 국비 40%). 이번에 국비를 확보하지 못했다면, 20년간 매년 이 금액을 인천시가 모두 부담해야 했다.인천경제청은 국회와 해당 중앙 부처를 찾아가 국비 지원의 필요성을 설명하고 협조를 요청해왔다. 특히 경제자유구역 활성화를 위한 기반시설이고, 투자 유치 및 일자리 창출 등 국가 경쟁력 강화에 기여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그 과정에서 박남춘 인천시장과 안상수·박찬대 의원 등 인천지역 국회의원들의 도움이 컸다. 김진용 인천경제청장은 "많은 분의 노력으로 송도컨벤시아 임대료 국비 지원이 확정됐다"며 "송도컨벤시아를 안정적으로 운영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했다.인천은 송도컨벤시아 2단계 준공, 인천공항 제2여객터미널 개장 등으로 세계 최고 수준의 마이스(MICE) 인프라를 갖추게 됐다. 2022년까지 세계 10대 마이스 도시로 진입하겠다는 게 인천시 목표다. 이를 위해 인천시는 국내 첫 '국제회의 복합지구'로 지정된 송도컨벤시아 일원(298만1천666㎡)과 복합리조트 개발사업이 진행 중인 영종국제도시를 연계해 인천형 마이스 벨트를 구축할 계획이다.한편, 인천시는 내년도 국비 예산(국가직접·보조사업)으로 3조815억원을 확보했다. 송도 관련 사업으로는 송도컨벤시아 임대료 지원을 비롯해 ▲인천 신항 건설 351억원 ▲국립세계문자박물관 건립 134억원 ▲인천도시철도 1호선 송도 연장 300억원 등이 내년도 정부 예산에 반영됐다. /목동훈기자 mok@kyeongin.com송도컨벤시아 '2018년 찾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주요 고객 초청행사 인천경제자유구역청과 인천관광공사는 최근 송도컨벤시아에서 '송도컨벤시아 고객의 날' 행사를 개최했다. 이번 행사에는 올해 송도컨벤시아를 이용한 관계기관, 학회·협회, 전시·컨벤션·이벤트 주최사, 호텔 등 주요 고객 120여 명이 초청됐다. 인천경제청은 사업 소개·강연·공연 등을 진행하고, 인천경제자유구역 발전 및 송도컨벤시아 운영 활성화에 기여한 우수 고객 6개사에 감사패를 줬다. 2008년 개관한 송도컨벤시아는 물류산업전시회, 해양안전대전, 세계한상대회, 아태도시 정상회의, G20 재무차관회의, OECD 세계포럼 등 다양한 국제행사를 개최했다. 올해 7월 2단계 시설이 준공됐으며, 8월에는 송도컨벤시아 일대가 국내 첫 '국제회의 복합지구'로 지정됐다. /인천관광공사 제공

2018-12-16 목동훈

[한국 근대음악의 발상지 인천·(11)]기생조합 권번(券番)

조선시대 국가서 궁중의식 음악·춤 등 집중훈련갑오개혁후 관기 사라지고… 일제하 '권번'으로공창제 등 이미지 왜곡 불구 일부 '아이돌' 부상중구 용동권번 출신 장일타홍·이화자 등 유명세1930년대 민요·가요 레코드 녹음… 재조명 필요 인천 기생은 인천기생조합에서 어린 시절부터 기생 공부를 했다. 조합은 권번(券番)이라 했다. 권번에서는 노래와 춤을 가르쳤는데, 평양의 기생학교만은 못 했어도 선생을 앉히고 가르쳤다. 지금 용동권번 자리에는 미용사기술전수학교가 들어섰다. 기생조합 시대에 걸출한 포주 최성인이 조합장이 되었었고, 최후의 권번 대표는 낙원 주인이었다. 인천 기생은 수준이 서울보다 낮고, 개성보다는 높았다. 개성은 갑, 을 2종이었으나, 인천에는 을종이 없었다. 그 옛날의 관기보다는 신세대에 속했고, 카페나 바 종사자보다는 틀이 잡힌 예술가였다. 유행 가수로 진출하여 전국적으로 유명했던 이화자는 인천 기생으로 '어머님 전상서'를 레코드에 취입했으며, 같은 레코드 가수 장일타홍도 용동권번 출신이었다. -고일 著 <인천석금> 중에서조선의 기생((妓生)은 악(樂)·가(歌)·무(舞)·시(詩)·서(書)·화(畵)에 능통한 종합예술인이었다. 그들은 당대 우리 문화예술의 수준을 대변하는 예술가였으며 자유인들이었다.이들은 궁중의식에서 음악과 춤을 담당했던 관청인 장악원에 소속돼 오늘날 '예술 영재교육'과도 같은 집중 훈련을 받았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예술은 물론, 산술과 해외 문화까지 두루 섭렵했다.하지만 1894년 갑오개혁 당시 나라에서 관리하는 관기 제도가 사라졌으며, 일제는 기생을 춤과 노래를 공연하는 '기생'과 성매매를 하는 '창기'로 구분 지었다. 또한 기생에게 자체적으로 조합을 설립하라는 규정을 만들었으며, 1915년 기생조합은 일본식 표현인 '권번'으로 명칭이 바뀌었다.이때까지만 해도 기생은 독립 자금을 몰래 마련해 전달하고, 지역 학교 신축을 위한 기금 마련 행사에 참여해 쾌척하는 등 신여성으로서의 이미지도 안고 있었다. 하지만, 조합이 생기면서 이들의 공연 무대는 요릿집으로 한정됐으며, 일제가 만든 공창제도가 더해지며 기생의 이미지는 철저히 왜곡되기 시작했다. 이전까지 자부심을 지녔던 기생들은 신분을 숨기고 더더욱 음지로 들어가는 상황이 발생했다. 그와 반대 급부로 공연 예술에 능통했던 기생들은 라디오와 잡지, 영화가 보급되면서 '대중 스타'로 급부상하기도 했다.100년 전 기생의 삶을 떠올리며 인천 중구의 용동권번 자리를 찾았다. 현재 권번의 흔적은 1929년에 만들어진 돌계단과 그 곳에 새겨진 '용동권번(龍洞券番)' 뿐이다. 비교적 선명하게 음각된 이 글자는 2011년 동사무소에서 계단 보수 공사를 하면서 이 돌계단을 시멘트로 덮어버리는 일이 있었다. 하지만, 지역 문화계의 요구에 시멘트를 벗겨냈다. 현재 보행 안전 때문인지, 골목길 전체는 붉은색 바닥으로 마감되어 있다. 철판이 덧대어진 위에서 5번째 계단에 새겨진 '龍洞券番'을 볼 수 있는데, 철판이 빛을 가려서 자세히 들여다 봐야 확인할 수 있다.1920년대로 다시 돌아가 보자. 고 신태범 박사가 쓴 '개항 후의 인천 풍경'에는 인천의 권번에 관한 구절이 있다."목로주점과 방술집도 늘어났지만 격이 높은 유흥업소가 등장했다. (미두장의 번창으로) 돈을 벌었다고 마시고, 잃었다고 마시는 것이 술이고, 술에는 으레 여자가 따르게 마련이다. 씀씀이가 크고 돈 출입이 잦은 미두꾼이 늘면서 요릿집과 기생 권번이 생긴 것이다. 일월관, 용금루, 조선각 등이 문을 열고 소성권번이 출현했다."용동권번은 인천의 옛 이름을 따 소성권번으로도 불렀다고 한다. 1930년대 들어 우리나라엔 유행가와 댄스 바람이 일기 시작했고, 앞서 언급했듯이 기생이 대중 스타로 부상한다. 용동권번 출신 기생에 관한 기록도 확인할 수 있다. 1935년 8월 1일 발간된 잡지 <삼천리>에 게재된 '삼천리 기밀실'이라는 가십 기사에 인천권번의 장일타홍이 서울 콜럼비아 레코드회사 소속 유행가수로 나와 있다. 현재까지 장일타홍의 출생 연대나 가계, 결혼 등 개인 신상에 대해선 정확히 알려진 바가 없으나, 장일타홍의 노래는 확인된다. 1934~1935년 콜롬비아에서 20곡을 녹음했다. 주로 경기잡가를 비롯한 민요곡이며 가요도 몇 곡 있다.용동권번 출신으로 이화자도 장일타홍과 거의 비슷한 시기에 활동한 것으로 알려진 가수다. 1938년 8월 1일 발간된 잡지 <삼천리>에서 이서구는 '유행가수 금석 회상'이란 글을 통해 "이화자의 신민요는 선우일선에 비하야 선이 굵다. 그 대신 깊은 맛이 있다. 이 점에 이화자의 새로 개척할 길이 있지나 않을까 한다"고 평가했다. 신인급인 이화자에 대해 좋은 평가를 내린 것이다.가수가 되기 이전이었을 1934년 8월 12일자 <조선중앙일보>는 인천지국발로 '인천권번 기생들도 의연금 모집 활동, 홍등 하에서 웃음 파는 그들의 이 가상한 독행!'이라는 기사에서 이화자를 거명하기도 했다. 이화자는 1935년 혹은 1936년 신민요 스타일의 가요 '초립동'으로 데뷔했다고 한다. 1940년까지 해마다 곡을 발표하고 인기를 얻었다. 하지만, 아편에 손을 댄 이후 나락의 길을 걸은 이화자는 1950년에 이른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지역 문화계 원로인 김윤식 시인은 "기생을 달리 이르는 말인 '해어화(解語花·말을 알아듣는 꽃)'에서 알 수 있듯이 한 송이 꽃으로서 웃음을 팔았지만, 그들은 인천인으로서 분명 우리 음악사를 장식한 인물"이라고 말했다.역사학자인 강덕우 인천개항장연구소 대표는 "용동권번과 그 곳에 몸 담았던 인물들로 새로운 스토리텔링이 시급하다"고 말했다. /김영준기자 kyj@kyeongin.com 그래픽/성옥희기자 okie@kyeongin.com/아이클릭아트용동권번 기생들의 모습. /'골목, 살아(사라)지다' 발췌현재 용동권번 계단 모습. (위에서 네번째 철갑을 두른 계단)용동권번 기생들의 공연 모습. /'골목, 살아(사라)지다'(인천광역시 刊) 발췌

2018-12-13 김영준

[바다가 들려주는 인천이야기·47]인천항 운영기관(상)-인천항만공사

개항 이래 국가가 주도해온 항만 개발·운영1990년대 후반 국제경쟁 위해 도입논의 불구정부 예산 탓·투포트 정치적 논리 밀려 방치시민들, 서명 운동등 펼쳐 2005년 출범 이뤄인천항을 관리하는 기관은 어디일까? 인천항이 개항한 1883년부터 일제강점기까지 항만시설을 구축하는 업무는 관세 사무행정을 맡았던 인천해관(세관의 중국식 이름, 1907년 세관으로 개정)이 담당했다. 해방 이후에는 미 군정청 교통국 인천부가 업무를 맡았다. 정부가 수립된 1948년 교통부 인천해사국이 인천항 업무를 수행한 이후에는 기관의 명칭만 바뀌었을 뿐, 인천항의 개발과 관리·운영 업무는 모두 정부에 의해 이뤄졌다.인천항 관리권은 2005년 7월 기업에 이관됐다. 1997년 부두운영사 제도 도입으로 민간 하역사들이 정부로부터 부두 시설을 임차해 운영한 적은 있지만, 인천항 전체 운영 권한이 민간 전문가들로 구성된 기업에 넘어간 건 개항 이후 처음이다. '인천항만공사'가 그 주인공이다.항만공사는 정부나 지방자치단체 등 관(官)이 주도하던 항만 개발과 운영을 담당한다. 정부는 급변하는 국제물류환경과 갈수록 치열해지는 동북아시아 국가들의 중심 항만(Hub-Port) 경쟁에서 뒤지지 않기 위해 1999년 3월 국무회의를 통해 항만공사제도를 도입하기로 하고, 재정자립도가 높았던 인천항과 부산항을 대상으로 삼았다. 특히, 인천항의 경우 기존의 정부 관리 체제로는 무서운 기세로 성장하고 있는 북중국 항만들과의 경쟁이 버거울 수밖에 없다는 주장도 있었다.하지만 정부 내에서도 항만공사 설립을 놓고 의견이 엇갈렸다. 해양수산부는 항만공사의 안정적인 운영을 위해선 4천억원의 정부 예산 지원이 필요하다고 추산하고, 정부가 일정부분 예산을 보조해야 한다는 의견을 내놨다.반면, 기획예산처(현 기획재정부)는 항만공사에 예산 지원은 어렵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산업자원부(현 산업통상자원부)도 물류비 상승 등을 이유로 부정적인 견해를 갖고 있었다.인천시민들은 인천항 발전을 위해선 항만공사제도를 조기에 도입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나섰다. 시민들은 부산항과 여수·광양항을 중심으로 하는 '투 포트 정책' 등 정치적 논리에 밀리면서 20여 년 동안 답보 상태에 빠져 수도권 지역 물동량의 15%밖에 처리하지 못하는 인천항의 현실을 지적했다. 시민들은 항만공사 조기 설립을 위한 100만인 서명운동 등 범시민적인 운동을 펼치며 항만공사 설립을 요구했다. 인천경제정의실천연합은 2001년 7월 논평을 통해 "국가 발전을 위해선 낙후된 인천항의 개발이 시급하다. 그러기 위해선 인천항이 자율권을 갖고 발전할 수 있도록 항만공사제도를 하루빨리 도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우여곡절 끝에 2003년 4월 항만공사법이 국회를 통과하면서 인천항만공사 설립이 확정됐다. 인천시와 정부 관계자들로 구성된 '인천항만공사설립위원회'는 2005년 7월 인천항만공사 출범에 합의했다. 인천시 공무원 출신으로 '인천항만공사 설립추진기획단'에서 근무했던 인천항만공사 신용주 홍보팀장은 "인천항만공사 설립에 필요한 기초 자료를 수집하느라 설립추진기획단 10명은 휴일도 없이 일했다"며 "그래도 당시에는 새로운 조직이 만들어진다는 설렘으로 힘든 줄 몰랐다"고 당시를 회상했다.수익 필요한 '기업' 형태… 마케팅 적극 펼쳐물동량 크게늘어 작년 '컨 300만 TEU' 돌파신항등 인프라 예산 투자 '선순환 구조' 갖춰인천항만공사 설립은 물동량 증가와 인프라 확충 등 인천항 발전의 계기가 됐다.인천항 물동량은 빠르게 늘어났다. 1974년 인천 내항 4부두에 국내 최초의 컨테이너 전용 부두가 만들어진 이후 연간 컨테이너 물동량 100만TEU(1TEU는 20피트짜리 컨테이너 1대분)를 달성하는 데 30년이 넘는 시간이 걸렸다.그런데 2013년 200만TEU를 돌파하며 물동량 증가 속도가 빨라졌고, 지난해에는 부산항에 이어 국내 두 번째로 300만TEU를 넘어섰다. 2005년 인천항만공사 출범 당시 114만9천TEU였던 물동량이 지난해 304만TEU로 2.6배 증가한 것이다. 출범 당시 29개였던 정기 컨테이너 항로도 49개까지 늘었다. 여수·광양항에 이어 국내 3위였던 연간 컨테이너 물동량 규모는 지난 2015년을 기점으로 여수·광양항을 완전히 따돌렸다. 해수부에서 근무하다 인천항만공사로 자리를 옮긴 김영국 여객터미널사업팀장은 "해수부에서 인천항을 관리하던 당시에는 안정적인 운영에 방점을 뒀다.인천항만공사는 공기업이라도 수익을 발생시켜야 하는 기업이기 때문에 물동량 창출을 위해 적극적으로 마케팅을 벌였다"며 "전 세계 컨테이너 물동량이 늘어난 부분도 있지만, 증가속도를 고려하면 마케팅 효과가 크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물동량이 늘면서 인천항의 인프라를 갖추는 공사 속도도 빨라졌다. 2012년 벌크 물동량을 처리하는 북항이 문을 열었고, 2016년에는 송도국제도시에 신항이 개장했다. 항만 활성화에 필수적인 시설이 들어서는 배후단지 면적도 2005년 47만8천㎡에서 152만6천㎡로 3배 넘게 확장됐다. 조주선 인천항만공사 항만시설팀장은 "해수부에 속해 있을 때보다 예산을 탄력적으로 운영할 수 있었기 때문에 인프라 구축에 적극적으로 나설 수 있었다"며 "시설 투자를 바탕으로 새로운 수익을 창출하는 선순환 구조가 이뤄지고 있다"고 했다.2005년 7월 인천항만공사 창립 기념식에 참석한 이해찬 당시 국무총리는 "인천은 항공과 해운이 결합한 강점이 있는 곳이다. 이제 역사적인 인천항만공사의 출범으로 인천항이 동북아의 물류 중심 항만으로 발전할 것을 기대한다"고 했다. 인천항만공사와 함께 인천항은 성장하고 있다. 내년 4월에는 송도 9공구에 국내 최대 규모의 크루즈 전용 터미널이 문을 열 예정이며, 2020년에는 신국제여객터미널도 개장한다. 2025년에는 연간 컨테이너 물동량 500만TEU를 달성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김영국 여객터미널사업팀장은 "인천항만공사가 설립된 이후 신규 물동량을 창출하면서 인천 지역 경제에 큰 도움을 줬다고 생각한다"며 "인천시민들과 함께 인천항이 계속 발전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말했다.글/김주엽기자 kjy86@kyeongin.com/아이클릭아트2005년 7월 인천항만공사 청사에서 진행된 현판식 모습. /인천항만공사 제공인천항만공사가 입주해 있는 정석빌딩과 현판. /인천항만공사 제공인천 송도국제도시에 위치한 인천 신항 전경. 인천항은 신항 개장 이후 연간 컨테이너 물동량 300만TEU를 돌파했다. /인천항만공사 제공인천항 신국제여객터미널 조감도. /인천항만공사 제공인천항만공사 캐릭터. /인천항만공사 제공

2018-12-12 김주엽

[zoom in 송도]'인구 5만 돌파' 송도2동, 2·4동으로 나뉜다

내년 3·6~9공구 일대 '송도4동' 분동아라플라자에 임시청사 조성공사중6·8공구 아파트입주땐 주민 더 늘듯인천 연수구 송도2동이 내년 1월 '송도2동'과 '송도4동'으로 나누어진다. 송도1~3동에 이어 송도4동이 신설되는 것이다.9일 연수구에 따르면 송도국제도시는 현재 송도1동, 송도2동, 송도3동으로 돼 있다. 공구별로 보면, 송도 1·3공구(국제업무단지 등)와 6·8공구(송도랜드마크시티 등), 9공구(신국제여객터미널과 아암물류단지)가 송도2동에 해당한다. 이 중 송도 3공구와 6~9공구 일대가 내년 1월 신설되는 송도 4동에 포함될 예정이다.올 11월 말 기준 송도2동 인구는 5만4천823명으로, 송도1동(3만4천391명)과 송도3동(4만3천661명)보다 많다. 거주 외국인까지 합하면, 송도2동 인구는 5만 5천 명이 넘는다. 송도2동은 면적이 3㎢ 이상인 데다, 3개월 동안 5만명 이상의 인구수를 유지했기 때문에 분동(分洞) 대상이 된다. 송도2동 인구는 올해 1월 5만명을 돌파한 이후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 → 표·그래픽 참조연수구는 '송도2동 분동 준비단'(직원 3명)을 운영하고 있다. 또한 송도아라플라자(컨벤시아대로230번길 42) 일부 공간을 송도4동 임시청사로 정해 리모델링 공사를 진행하고 있다. 임시청사는 동장실, 민원실, 회의실 등으로 구성된다. 연수구 총무과 관계자는 "내부 리모델링 공사가 마무리 단계에 있다. 현재 냉난방 기구 설치, 책상 배치 등이 이뤄지고 있다"며 "내년 1월 문을 여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송도4동 임시청사에는 7명이 배치될 예정이라고 한다. 행정기구 설치 조례·시행규칙 개정 등 분동에 필요한 안건(자치법규 개정)은 이달 중 연수구의회를 통과할 예정이다.연수구가 분동을 추진하는 이유는 해당 지역 주민들에게 양질의 행정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서다. 집 근처에 행정복지센터(동사무소·주민센터)가 생기면 서류 발급이나 문화 프로그램 수강 등이 한결 수월해진다. 관(官) 입장에서도 통반장들과 함께 해당 지역을 관리·유지하는 등 행정 업무의 효율을 높일 수 있다.특히 송도4동 예정 지역은 송도6·8공구 아파트 입주가 시작되면서 인구가 많이 늘어날 예정이다. 올해 3천300가구가 넘는 아파트가 준공됐다. 2019~2020년에는 '힐스테이트 레이크 송도' 등 총 1만3천862가구 규모의 아파트단지가 조성될 것으로 연수구는 예상하고 있다.연수구는 분동 준비와 함께 송도4동 청사(행정복지센터) 신축도 추진하고 있다.연수구는 송도 3공구 인천예송초등학교와 송도29호공원 사이에 있는 땅(송도동 104의 2)에 송도4동 청사를 건립할 계획이다.송도4동 청사는 지하 2층, 지상 5층, 연면적 4천562㎡ 규모다. 민원실, 주민자치실, 작은도서관, 생활체육실, 대회의실 등을 갖추게 된다. 예상 사업비는 110억5천200만원이다. 연수구는 내년 3월 설계 공모를 시행하고 그해 12월까지 실시설계를 완료할 계획이다. 이후 건축 관련 절차를 거친 뒤 2020년 4월부터 2021년 11월까지 공사를 진행할 예정이다. 연수구 재무회계과 관계자는 "새 청사 설계비 등 5억6천900만원을 내년도 예산안에 반영했다"며 "준공 후 이사 및 시범운영 기간을 고려하면, 2022년 1월부터 새 청사에서 업무가 이뤄질 것으로 예상한다"고 말했다. /목동훈기자 mok@kyeongin.com

2018-12-09 목동훈

[한국 근대음악의 발상지 인천·(10)]김영의 박사

영화학당 거쳐 서울 진학… 고교 졸업 무렵 두각이화여자전문학교서 연마하다 조교직도 겸해1930년대 美음대서 공부하며 안익태와 무대올라 국내 복귀 후엔 예술위원 등 다양한 활동 펼쳐다소 쌀쌀한 바람이 불던 초겨울 한낮에 서울 서대문구의 이화여자대학교를 찾았다. 정문을 통과해 우측으로 가다가 오른편 중앙도서관 옆에 있는 음악관 1층 현관문을 열고 실내로 들어섰다. 곧이어 김영의 기념연주홀(통상적으로 김영의홀로 칭함)을 만날 수 있었다.홀로 들어가는 문 옆 벽에 설치된 동판을 찬찬히 읽었다. 동판에 적힌 내용은 다음과 같다.김영의 박사는 1929년 이화여자전문학교 음악과를 졸업하신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음악예술계와 음악교육계의 지도자로써 활약하셨고 특히 이화여자대학교 음악대학에 봉직하시면서 학교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하셨기에 이를 기념하여 이 대연주실을 김영의 기념연주홀 이라 이름한다. 1981.8홀에 들어서니 나열된 객석과 그 너머에 펼쳐진 무대를 볼 수 있었다. 이내 무대 뒤 벽면에 설치된 파이프 오르간이 눈에 들어왔다. 점심시간 즈음이어선지 학생 두 명이 파이프 오르간을 치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악보를 보고 건반을 누르며 의견을 나누는 모습이 진지했다.우리 음악계의 미래인 학생들의 무한한 발전을 마음속으로 기원하며 돌아섰다. 김영의홀에 가기 전 출입문이 잠겼거나, 조명이 꺼져 있어서 홀의 전모를 보지 못할 것에 대한 우려가 있었다. 불 밝힌 홀을 여유롭게 둘러보고 가슴에 담은 후 나서는 발걸음이 가벼웠다.이화여대에 따르면 음악관은 지하 2층, 지상 6층 규모로 1981년에 완공됐다. 이 건물에는 김영의홀로 명명된 500여석의 대연주실, 국악연주실, 음악도서관, 관현악연습실, 시청각실 등 음악교육에 필요한 현대적 시설이 갖춰져 있으며, 음악대학이 전용하고 있다.인천 출신으로 영화학당(현 영화초등학교)을 졸업했으며, 미국 줄리아드 음대에서 유학한 우리나라 첫 피아니스트 김영의(1908~1986)의 흔적을 더듬었던 시간이었다.김영의의 대학 시절 이후의 활동들은 대체로 알려져 있으나, 인천에서 삶이나 흔적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하지만, 어린 시절 서양 선교사들을 통해 접한 음악과 스포츠 등이 20세기 중반 우리나라 최고의 피아니스트로 자리매김하는 데 중요한 기반이 됐을 것이다.김영의는 1920년 3월 영화학당 졸업 후 서울 이화학당을 거쳐 이화여자고등보통학교를 1924년 3월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다. 고교 졸업 즈음부터 뛰어난 피아노 솜씨를 선보였다고 한다.<영화 백년사>의 '멋쟁이 음악가 김영의 학장' 편에 고교 졸업 시기의 연주자로서 김영의에 대해 묘사된 대목이 있다. "그 당시 천부적 재질을 가진 김영의는 특히 음악에 뛰어난 솜씨로 피아노 건반위에서 손가락들이 번개같이 불꽃 튀기는 연주로 듣는 이들로 하여금 신비경으로 이끄는 무아지경으로 몰아넣어 황홀케 하여 서울 장안의 총인기를 끌기도 하였다."이 같은 음악적 재능을 더욱 연마하기 위해 1925년 3월 이화여자전문학교 음악과에 입학해 음악이론과 피아노를 전공하고 1929년 3월 졸업했다. 그해 이화여자고등보통학교 음악 강사로 부임해 2년간 있다가 1931년 3월 이화여자전문학교 음악과 조교로 자리를 옮겼다.언론인 홍종인(1903∼1998)은 '반도 악단의 만평'이라는 글을 통해 여러 음악인들을 하나하나 평가했다. 이 글은 1931년 6월 발간된 잡지 <동광>에 실렸다. "김영의 양 이전(梨專) 음악과를 나온 지 3년 퍽 실력 있다고 한다. 독주보다는 반주하는 것을 많이 보았다. 그만하면 퍽 능숙한 줄만은 믿으나 스테이지에서 좀 더 감격하여 보이는 듯한 침착미가 적어 보인다. 기량이 좋은 까닭인지." 아마도 홍종인은 충실한 전달자로서의 연주가 아닌 연주자 본인의 감정이 과하게 이입된 연주였음을 지적하는 듯하다. 글 말미 기량 자체는 인정하고 있다.이어서 <동아일보> 1935년 6월 20일자에 '김영의 양 송별 독주회'가 21일 오후 8시 이화여자전문학교 강당에서 열린다는 단신 기사가 게재됐다. 이 연주회는 이화여자전문학교 음악관 강당의 개관 기념 연주회이기도 했다. 그해 지어진 음악관은 당시로선 호화스러운 조명으로 장식된 무대를 갖췄다. 김영의는 강당 개관 기념과 자신의 고별을 겸한 연주회를 펼쳤으며, 청중으로부터 박수갈채를 받았다고 한다.연주회 후 도미한 김영의는 1939년 줄리아드 음대를 졸업했다. 미국에 있는 동안 각종 음악회에도 열심히 참관했으며, 연주회도 가졌다. 1937년 뉴욕인터내셔널하우스에서 한인들의 모임이 있었을 때 안익태가 첼로 독주를, 김영의가 피아노 독주를 했다는 기록도 있다.귀국 후 다시 이화여자전문학교에서 교편을 잡았으며, 1945년 해방 직후 37세의 나이에 대학 음악과장과 예림원장(예술대학장)을 겸직했다. 1944년 경성음악연구원 창설에 참여하고, 1949년 문교부 내 설치된 예술위원회의 음악위원으로 선임 되는 등 연주와 교육 외에도 활발한 활동을 벌였다. 한국전쟁 발발 후 부산 피난기였던 1951년 국방장관 신성모와 결혼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그해 12월 문교부 요청에 따라 단과대 명칭이 바뀌면서 예림원장에서 예술대학장이 되었다. 1958년 미국 퍼시픽대에서 1년간 연구 후 귀국해 복직했으며, 1973년 정년퇴직했다. 퇴직 후에도 1977년 이화학당 재단이사장으로 있었으며, 1986년 11월 26일 타계했다.인천지역 문화계 원로 중 한 명인 김윤식 시인은 "우리나라 교육계의 초기 지도자로서, 음악계의 주춧돌로서, 그의 공로는 적다고 할 수 없다"면서 "그가 비록 고향 인천에 아무런 족적을 남기지 않았다 하더라고 그의 모든 '한국적 업적'이 고스란히 우리 인천의 자랑거리가 될 수 있다"고 의미를 설명했다. /김영준기자 kyj@kyeongin.com김영의홀 출입구쪽 벽면에 장식된 동판. /이화여대 제공이화여자대학교 음악관 1층에 자리한 김영의홀에서 열린 연주회 모습. /이화여대 제공이화여자대학교 음악관 전경. /이화여대 제공김영의 박사 /이화박물관 제공

2018-12-06 김영준

[바다가 들려주는 인천이야기·46]하역원과 포맨

선박에 원료·제품 싣거나 내리는 역할 출항에 맞춰 신속하게 처리 정밀성 필요컨테이너·크레인 도입으로 맞은 '위기'내항TOC통합 등 변화 겪으며 활로 찾아최근 찾은 인천항 내항 부두. 한국지엠의 신차들이 부둣가 찬바람을 뚫고 파나마 선적(船籍)의 '메디터레이니언 하이웨이(MEDITERRANEAN HIGHWAY)'호로 줄지어 오르고 있었다. 작업자들은 차량 전후 30㎝, 차량 좌우 10㎝의 빽빽한 간격으로 차를 손상 없이 실어야 한다. 그만큼 전문성이 필요하다. 시간당 60~80대 정도를 실을 수 있는데, 배가 출항하는 시간에 맞춰야 한다. 작업 속도도 매우 중요하다. 정확한 수량을 파악하는 일 역시 이들의 몫이다. 배에서 먼저 내릴 차량을 가장 나중에 싣는 등 선적(船積) 순서도 신경 써야 한다. 이 배의 경우 총 15개 층으로 돼 있는데, 선적 순서가 뒤바뀌면 목적지에서 차량을 내리는 시간이 더 걸린다.차량을 직접 운전해 선내에 싣는 '드라이버', 실린 차를 정밀하게 주차하는 '키커', 키커가 정확한 위치에 차를 댈 수 있도록 돕는 '신호수' 등 하역원과 이들을 총괄 지휘·감독하는 '포맨' 간 호흡이 잘 맞아야 한다.이들은 배의 크기에 따라 십 수명씩 조를 이뤄 움직인다. 이번 선적 작업엔 80여 명의 인력이 6개 조로 구성돼 투입됐다. "하역원들을 오케스트라의 연주자라고 하면, 포맨은 지휘자"라는 말이 있다고 한다. 이들이 한 몸처럼 일사불란하게 움직여야 문제없이 작업을 마칠 수 있다는 의미다. 작업 현장에서 만난 포맨 송한섭(60) 감독은 "제품 손상 없이 계획된 물량을 무사히 소화할 수 있도록 항상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했다.지난 40여 년간 하역원과 포맨 등 하역업계에서 일한 그는 "조금만 일하겠다는 생각으로 들어왔는데, 결혼하고 자식 낳고 살다 보니 벌써 40년이 됐다"며 "여름엔 덥고, 겨울엔 추운 일이지만, 가족적인 분위기 속에서 열심히 하고 있다"고 했다. 포맨 송한섭 감독을 비롯한 하역원들의 이번 작업은 밤늦게까지 이어졌다.하역원은 부두에 있는 선박에 원료 등 각종 제품을 싣거나 내리는 일을 하는 사람들을 통칭한다. 항운노조가 하는 일 가운데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이기도 하다.삼국시대부터 고려와 조선시대까지 납세는 양곡 같은 물건으로 이뤄지는 경우가 많았다. 이런 양곡은 주로 배로 운송됐는데, 이때 양곡을 배에 싣거나 내리는 일을 했던 '조군(漕軍)'이라는 하역 인부가 오늘날 하역원의 시초격으로 평가된다. 임금을 목적으로 노동을 제공해 생계를 유지한다는 점에서 지금과 비슷한 측면이 많다.1883년 인천항 개항 후 물동량이 증가하면서 하역원을 포함한 부두노동자들이 늘어났다. 항만설비의 확충으로 하역기업들이 생겨나기 시작했고, 부두노동자들도 하역산업의 전문 노동자로 변모하기 시작했다. 일제강점기 노동력 착취와 한국전쟁의 어려움을 거친 하역업계는 1960년대로 접어들면서 경제적인 상태가 개선되기 시작했다. 인천항의 물동량 증가가 주된 요인이었다. 관련 통계에 따르면 1962년 130만8천828t을 기록했던 인천항의 화물하역실적은 1972년 949만5천105t으로 7배 이상 늘어났다. 이듬해(1973년)엔 1천509만2천830t으로 더욱 늘었다. 경제개발 추진에 따른 생산 규모 대량화와 유통 물량 팽창이 원자재와 생산품의 수출입 확대로 이어졌다. 이후 항만에 모습을 드러낸 '기계'는 하역원들을 위축시키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 지게차와 크레인이 대량 도입돼 무거운 화물을 내리는 일에 투입(1966년)됐고, 고철 작업 등을 하는 마그넷(자석)도 사용되기 시작(1968년)했다. 인천항 양곡 전용부두엔 진공 흡입식 사일로(silo)가 설치(1974년)되기도 했다. 수송과 하역에 혁명적인 변화를 불러온 '컨테이너'는 1970년대 초반 인천항에 모습을 나타냈다. 대한통운이 1970년 3월부터 인천항에 컨테이너선을 월 2회 정기 취항하기로 하는 등 컨테이너 운송을 본격화했다. 당시 인천항엔 1천여 명의 항만 노무자들이 있었다고 한다. 이들이 포함된 노동조합은 진정서를 내고 대량실업 방지 대책 마련 등을 요구하기도 했다. 1980·1990년대 산업화에 힘입어 인천항은 수도권 최대 항만으로 성장했고 하역원을 비롯한 하역업계는 항운노조 상용화 개편(2007년), 내항 TOC(부두운영사) 통합(2018년) 등 변화를 거치며 인천항에서 생존할 수 있었다.인천항 내항에서 만난 경력 25년의 포맨 김종현(60) 감독은 "불철주야 주어진 작업을 성실히 하고 있지만, 컨테이너가 아닌 물동량 규모가 줄어들고 있어 걱정"이라고 했다. 그의 말 속에선 위기감을 느낄 수 있었다. 인천항 내항의 지난해 기준 벌크(비컨테이너) 물동량은 2천353만3천t을 기록했다. 10년 전인 2007년 4천250만t에 비해 절반 가깝게 줄어든 것이다. 수년째 내리막이다. 벌크 화물이 진보된 컨테이너로 흡수되는 경우가 많아지면서 이런 상황이 나타나고 있다. 평택항, 군산항 등 인접 항만과의 벌크 물동량 유치 경쟁도 심화되고 있다. 내항을 포함한 인천항 전체 벌크 물동량은 최근 몇 년째 1억1천여t 수준에서 정체돼 있다. 지난해 300만TEU(1TEU는 20피트짜리 컨테이너 1대분)를 돌파하는 등 매년 증가세를 보이는 인천항 컨테이너 물동량과 대비된다.김종현 감독은 "펄프 같은 경우 대부분 인천에서 처리돼 지방으로 갔는데, 지금은 대부분 평택이나 군산항으로 빠졌고, 벌크로 들어오던 납이나 알루미늄괴(塊), 원목 등은 요새 컨테이너로도 많이 들어와 내항 물동량이 줄어드는 상황"이라고 했다. 이어 "인천항 하역과 관계되는 일을 하면서 먹고 사는 사람들이 아직도 몇천 명은 될 것"이라며 "(관계 기관들은) 인천항의 (비컨테이너) 물동량 확보를 위해 더욱 노력해야 한다"고 했다. 송한섭 감독은 "우리 손을 거친 제품들이 북중미든, 동남아든 해외 여러 나라에 대한민국을 알린다는 자부심으로 지금껏 일해왔다"며 "더욱 안전에 신경 쓰고 '하역만큼은 인천항이 최고'라는 소리를 들을 수 있도록 더욱 노력할 것"이라고 했다.글/이현준기자 uplhj@kyeongin.com 사진/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인천항 내항 부두에서 하역원들이 한국지엠의 신차를 메디터레이니언 하이웨이호에 선적하고 있다. 사진/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메디터레이니언 하이웨이호로 줄지어 오르고 있는 한국지엠 신차들.메디터레이니언 하이웨이호에 선적되는 차량마다 바코드를 찍어 확인하는 모습.

2018-12-05 이현준

[zoom in 송도]송도 민간 임대·위탁시설 현황

경제청 소송 승소 신규 운영자 선정 축구장 점검후 내년 2월 '재가동'인천경제자유구역청이 송도국제도시 축구학교 등 민간사업자에 임대·위탁하는 방식으로 운영하는 시설들에 대해 정상화를 추진하고 있다.송도 내 대표적인 민간사업자 임대 및 위탁 운영 시설은 축구학교(옛 첼시FC 축구학교), 송도국제캠핑장(옛 호빗랜드), 골프연습장(송도블루오션 골프클럽)이다. 축구학교와 캠핑장은 새 운영자를 선정하기 위한 절차가 진행되고 있으며, 골프연습장은 이미 정상적으로 운영되고 있다. 애물단지로 전락했던 이들 시설의 정상화 진행 상황을 점검했다.'옛 호빗랜드' 정비·감정평가 완료제한경쟁방식 새 사업자 모집키로■ 축구학교 정상화 막바지 단계축구학교는 송도 4공구 인천도시철도 1호선 '지식정보단지역' 인근(인천타워대로25번길 31)에 있다. 인조단지 축구장(1만772㎡), 관리사무소(141㎡), 조명탑 4개로 이뤄졌다.축구학교는 특수목적법인 (주)엔에스씨가 2013년 인천경제청과의 협약에 따라 조성했다. 이 법인이 축구학교를 조성해 인천경제청에 기부채납하고 3년간 첼시FC의 축구 교육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방식이었다. 하지만 이 법인은 운영난을 겪으면서 인천경제청에 내야 할 사용료 약 3억 원을 체납했다. 축구장과 관리사무소를 만든 업체에 공사 대금을 주지 못하는 상황까지 됐고, 결국 2016년 7월 운영이 중단됐다. 인천경제청이 새 운영자 선정에 나서려고 했는데, 공사 대금을 받지 못한 업체가 유치점유권을 행사했다. 인천경제청은 지난해 3월 이 업체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해 올해 3월 승소했다.인천경제청은 최근 공개입찰 방식으로 새 운영자를 선정했다. 아직 정식 계약은 이뤄지지 않았다. 이 운영자는 내년 2월부터 축구학교를 운영할 계획이라고 한다. 내년 2월까지 축구장 내 첼시FC 마크 제거, 조명탑 보수 등 기존 시설을 정비하는 기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기존 시설 정비 공사는 인천경제청이 진행한다. 인천경제청 관계자는 "새 운영자의 축구학교 사용 기간은 5년"이라면서 "업체 대표가 축구계에 있었으며 지금도 다른 곳에서 축구학교를 운영하고 있는 것으로 안다"고 했다.자금재조달등 지급보증 문제 해결블루오션골프클럽 '영업 순항중'■ 캠핑장 새 운영자 검증 강화키로송도국제캠핑장은 송도24호 근린공원에 있다. 인천경제청이 2014년 39억원을 들여 조성한 뒤 민간사업자에 운영을 맡겼다. 운영 기간은 그해 8월부터 2017년 8월까지 3년간이며, 연 사용료는 4억2천만원이었다. 하지만 민간사업자가 경영난을 이유로 사용료를 제때 내지 못하자, 인천경제청은 민간 위탁 계약을 해지했다.민간사업자는 2016년 9월 민간 위탁 취소 처분이 부당하다며 소송을 제기했고, 인천경제청은 지난해 7월 소송에서 이겼다.인천경제청은 송도국제캠핑장 운영자를 선정하기 위해 시설 정비와 감정평가를 완료한 상태다. 이번에는 제대로 된 민간사업자를 선정하겠다는 게 인천경제청 계획이다. 인천경제청 관계자는 "운영자가 계약 기간 중간에 운영을 중단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는 생각"이라며 "신용 상태와 제안서 내용을 평가하는 제한경쟁 방식으로 새 운영자를 선정할 방침"이라고 했다.■ 골프연습장은 정상 운영 중송도24호 공원에 있는 '블루오션골프클럽'은 운영자가 올해 4월 인천경제청의 지급보증 문제를 해결하면서 정상화됐다.인천경제청은 2012년 12월 송도24호 공원 민자 골프연습장 사업시행자를 선정하고, 이듬해 7월 실시협약을 체결했다. 민간사업자가 골프연습장을 건립해 인천경제청에 기부채납하는 대신 일정 기간 운영권을 갖는 내용의 협약이었다. 민간사업자는 137억 원을 투자해 4만4천555㎡ 부지에 120타석 규모의 골프연습장을 건립하고 2014년 10월 영업을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인천경제청이 95억원의 지급보증을 섰다. 골프연습장은 경영난으로 정상 영업이 어려워지면서 2015년 12월 운영자가 한 차례 변경됐다. 인천경제청이 민간사업에 지급보증을 서는 것은 문제가 있다는 지적이 나왔고, 새 운영자는 부동산을 담보로 한 리파이낸싱(자금 재조달), 부동산 매각 등을 통해 올해 4월 인천경제청의 지급보증 문제를 해소했다. /목동훈기자 mok@kyeongin.com최근 새 운영자를 선정한 송도 축구학교 축구장. 정비 공사가 이뤄지기 전 모습이다. /김용국기자 yong@kyeongin.com

2018-12-02 목동훈

[한국 근대음악의 발상지 인천·(9)]교가(校歌)

국내 첫 서구식 교육기관, 1892년 영화학당순수 민간학교 첫 설립은 1903년 제녕학교각각 영화초교·창영초교로 현재까지 명맥대학수학능력시험이 이달 중순 전국 고사장에서 일제히 치러졌다. 해마다 그렇듯 이른 시간부터 수험장 마다 배치된 각 학교 후배들은 열띤 응원전을 펼치며 선배들의 '수능 대박'을 기원했다. 후배들은 수험생들을 위해 저마다 각종 구호와 힘찬 노래들로 응원전을 준비했다.(11월 15일 인터넷 보도) 이른 아침 시간에 모인 후배들이 목청껏 부르는 각 학교의 교가(校歌)들은 각별한 의미로 다가왔다. 마치 '학교의 모든 기를 모아서 응원을 보내니 힘을 내서 시험 잘 치르고, 학교의 이름도 널리 알려달라'는 바람이 담긴 듯한 모습이었다. 이렇듯 학교의 정신을 반영한 교가는 학생들로 하여금 애교심과 단결심을 갖게 한다. 또한, 학교의 교육관도 담고 있다. 교가는 학교의 의례나 체육대회, 축제 등 각종 행사에서 부르는 노래이다. 때문에, 졸업 후 성인이 되어서도 학교를 떠올리며 교가를 읖조리게 된다. 이처럼 학창 시절 부르는 횟수가 많은 교가는 학생들의 음악적, 심성적 측면에 미치는 영향이 크다. 수업 외 학교생활에서 부르는 교가의 교육적 영향력이 결코 무시될 수 없음을 알려주는 대목이다.1. 황해바다 푸른물결 소리 들으며 우뜩솟은 문학산봉 바라 보라 보면서 배움의 길 닦고 닦는 대한의 딸들 이룩하세 주의 뜻을 우리의 땅에2. 샛별보다 슬기로운 우리 눈동자 뿌리깊은 백향나무 기상을 삼고 한데뭉쳐 진리찻는 영화 학도야 삼천리에 새벽종을 등불이 되세3. 푸른 마음 높은 뜻을 길벗을 삼아 빛내리라 영화학당 힘을 합하여 거룩하다 주의 이름 길이 받들어 우리겨레 이강산에 빛을 삼으리영화학당 교가 (1913년), <영화 백년사(1892~1992)> 발췌개항지 인천은 신교육 발상지이기도 하다. 우리나라 최초의 서구식 초등 교육 기관인 영화학당(현 영화초등학교)이 1892년에 문을 열었다.(11월 16일자 9면 보도) 인천 관학의 효시인 관립인천외국어학교(현 인천고등학교)는 고종의 칙령에 따라 1895년 개교했다. '간추린 인천사'(인천학연구소 刊)에 따르면 인천외국어학교 초기 수업 연한은 3년 과정의 영어과와 일어과가 있었다.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자 영어과를 폐지하고 1909년 학교명마저 관립인천일어학교로 개정했다. 해방 후인 1949년 인천공립상업학교에 이어 1951년 인천고등학교로 교명 변경 후 현재에 이르고 있다.송도고 교가, 초기의 음악적 원형태 유지1906년 개성서 윤치호가 설립 첫 가사 써'천년고도' 등 표현 인천 이전前 작사 추정인천에서 종교 계통이거나 관학이 아닌 순수한 민간 학교로서 처음 문을 연 곳은 제녕학교였다. 1903년 6월 인천의 유지 서상빈이 신학문을 가르치기 위해 제녕학교를 설립했다. 러일 전쟁 후 침몰한 바랴크호의 인양을 맡아 거금을 쥔 김정곤이 도움을 줬다. 인천시가 펴낸 인천역사문화총서 74 '한국 최초 인천 최고 100장면'에 제녕학교에 대한 기록이 상세히 나와 있다. 서상빈은 우리나라 최초의 상인단체이자 상공회의소의 전신인 인천신상협회를 설립해 실질적인 사장 역할을 했다. 이처럼 제녕학교 설립에는 인천신상협회와 지역 유지들이 힘을 모았다. 제녕학교는 학생 수가 120명에 달할 정도로 발전했다. 그러나, 1906년 이후 학교 운영 경비를 전부 제공했던 인항전운회사 재정이 넉넉하지 못해 교비를 마련하기 어려운 지경에 봉착했으며, 1907년 인천공립보통학교(현 창영초등학교)에 통합돼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인천공립보통학교가 현재 명칭인 '창영'을 갖게 된 건 1936년 인천창영공립보통학교로 바뀌면서다. 창영초교 구 교사는 인천광역시 유형문화재 16호로 지정돼 있다. 학교들은 교표와 함께 교목, 교화, 교가 등 저마다의 상징을 갖는다. 100년 이상의 역사를 자랑하는 지역 학교들 중 개교 당시나 초기 교가의 원형을 확인할 수 있는 학교는 찾기 힘든 가운데, 송도고등학교의 경우 음악적 측면에서만 그 원형을 유지하고 있다. 1906년 개성에서 설립된 송도고 교가의 첫 가사는 학교 설립자인 윤치호(1865~1945)가 썼다. '애국가'의 작사가로 언급되는 그는 교회 '찬미가'도 다수 쓴 것으로 알려져 있다. '송도학원 90년사'(송도중·고등학교동창회 刊) 등에 따르면, 교가의 곡은 미국 남북전쟁 당시 군가로 사용됐던 노래다. 1857년 작곡된 이 곡은 코넬대학교와 에모리대학교, 밴더빌트대학교 등 미국 다수의 학교에서 교가로 사용되고 있다. 에모리대학교에서 유학한 윤치호가 미국 교가 문화를 우리에 접목한 것으로 유추할 수 있다. 당시 우리나라에선 스코틀랜드 민요인 '밀밭에서'와 '올드랭사인'에 각각 가사를 붙인 '경부철도가'와 '애국가' 등 서양음악 선율에 가사를 붙여 부르는 일명 '노래 가사 바꿔 부르기'가 유행할 때였다. 현재 송도고 교가 가사의 원형은 이상춘이 쓴 것으로, 1절 가사에서 개성을 나타내는 문구 '산수 좋고 역사 깊은/천년고도에'가 있는 것으로 볼 때 송도고가 인천으로 이전(1952년)하기 전에 쓴 것으로 보인다.해방·한국전쟁후 교가제정 관행 현재까지대부분 일률적 구성… 특색있는 작품 기대영화초등학교의 경우 1913년 3월 교가가 제정됐다. '영화 백년사(1892~1992)'(이성삼 박사 집필·영화학원 刊)에 3절로 이뤄진 당시 교사 가사 전문이 기록돼 있다. 하지만, 작곡자와 작사가의 이름은 알려지지 않았다. 교가 가사에는 '황해바다'와 '문학산봉' 등 공간적 배경이 나오며, '주의 뜻', '주의 이름' 등의 노랫말을 통해 신앙에 입각한 근면함과 성실성을 강조하고 있다. 현재 불리는 영화초등학교 교가는 1953년(이은상 작사·김용환 작곡)에 만들어졌다.이 밖에 역사를 지닌 지역 학교들의 현재 교가는 작사·작곡가의 이름 등을 유추해볼 때 해방 후부터 1950~1960년대 만들어진 곡들로 판단된다. 이전 곡들은 한자 용어가 많고, 전래 과정의 서양음악을 활용하다 보니 구조가 단순해서 이에 맞춰 가사가 짧을 수밖에 없었다. 또한, 일제시대와 해방 후 시기에 우리 학제가 바뀌면서 교명이 변경된 경우도 있고, 교육 내용도 수정됐기 때문으로 보인다. 우리나라 교가 대부분은 서양의 7음 음계를 바탕으로 만들어졌으며, 남녀 학교 구분 없이 박자(4분의4박자)도 행진곡풍으로 일률적이다. 해방 후와 한국전쟁 후에 이뤄진 교가 제정 관행이 그대로 이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앞으로는 학교의 이미지와 특성을 반영한 개성 넘친 다양한 교가가 나타나길 기대해 본다. /김영준기자 kyj@kyeongin.com제녕학교 설립을 주도한 인천신상협회의 장정(章程). /인천시 제공주민들의 성금으로 1907년 세워진 인천 최초의 공립보통학교가 지금의 창영초등학교이다. 인천 지역 교육사에 이정표를 세운 곳이며, 한국 근대사를 대표 할 수 있는 건축물이다. /경인일보DB

2018-11-29 김영준

[바다가 들려주는 인천이야기·45]줄잡이와 라싱

수천~10만t넘는 선박 부두에 설치된 'ㄱ'자 모양 비트와 연결하는 '줄잡이'과거엔 항만 공간 효율적으로 활용하기 위해 50~100m 접안 위치 옮기기도라싱 작업자들, 컨테이너·화물 등 선적 하면서 철제기구·로프 이용해 고정파손 예방·평형 유지 '출항전 필수 업무'… 급하더라도 가장 꼼꼼하게 진행대한민국을 흔히 '통상 국가'라고 부른다. 우리나라는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여 있는 지리적 환경을 가지고 있고, 지하자원이 부족하다. 이런 점 때문에 교역의 중요성을 강조한 말이 바로 '통상 국가'다. 통상을 위해 필수적인 것이 항만과 선박이다. 우리나라 교역의 98%가 바다를 통해 이뤄진다.항운노조는 바다를 통한 교역에 있어 한 축을 담당한다. 선박이 항만에 접·이안하는 것을 돕고, 짐을 내리고 싣는 모든 과정에서 역할을 한다.지난 20일 오전 11시 인천항 내항. 인천과 중국 칭다오를 오가는 카페리선 골든브릿지5호가 입항을 위해 안벽 가까이 다가오자 등에 'Line Handling'이라고 쓰인 옷을 입은 항운노조원들이 배를 맞을 준비를 했다. '줄잡이' 또는 '강취방'이라고 불리는 이들은 선박이 부두에서 이탈하지 않도록 선박에서 제공하는 줄을 부두에 설치된 'ㄱ'자 모양 구조물인 '비트'에 고정하는 역할을 맡는다. 보통 한 척의 배는 앞뒤로 각각 4~6줄을 연결한다. 적게는 수천 t에서 10만t 이상의 무게인 선박을 고정하는 역할을 맡고 있기 때문에 줄의 너비는 10㎝ 이상으로 두껍다.작업은 선박에서 육지 부분으로 내린 줄을 끌어올리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줄은 비트에 연결하는 굵은 줄, 이와 연결된 '오소리 줄'이라고 불리는 얇은 줄로 구성된다. 선박에서 줄을 육지로 던지면 줄잡이들이 얇은 줄을 잡으면서 작업이 시작된다. 이때 비트에 묶어야 하는 줄은 바다에 빠져 있다. 줄잡이들은 먼저 얇은 줄을 끌어당긴 뒤, 비트에 연결하는 굵은 줄이 나타나면 비트에 연결한다. 줄 자체가 무거운 데다 바닷물을 머금고 있기 때문에 두 명이 힘을 합쳐 줄을 끌어당긴다. 줄을 비트에 건 뒤에는 선박에서 장비를 활용해 줄을 잡아당긴다. 느슨했던 줄은 팽팽해진다. 이러한 작업을 배 앞 뒤에서 각각 4차례 진행한 뒤에야 접안 작업이 마무리된다.줄잡이 업무는 카페리선뿐만 아니라 작은 어선부터 유조선이나 크루즈 등 대형 선박에서도 같은 방식으로 진행된다. 다만 선박의 규모에 따라서 줄의 두께와 비트에 연결하는 줄의 개수 등이 달라질 뿐이다.인천항에서 20여 년간 줄잡이 업무를 한 이성환(59) 소장도 이날 작업을 했다. 이 소장은 "밖에서 보기에는 쉬워 보일 수 있지만, 위험하고 힘들기도 한 작업"이라며 "선박에 타고 있는 선원들과 호흡이 맞지 않으면 줄의 무게 때문에 다치는 일도 발생한다"고 말했다.인천 신항과 남항이 조성되기 이전에는 인천항에 들어오는 선박 대부분이 인천항 내항으로 입항했다. 입항하려는 선박은 많았지만, 부두 공간이 충분하지 않았기 때문에 최대한 많은 선박을 접안하기 위해서 효율적으로 공간을 이용했다. 이 과정에서 줄잡이들이 선박을 옮기는 역할을 하기도 했다. 접안돼 있는 선박의 위치를 50~100m 옮기는 데 줄을 이용한 것이다. 고정돼 있던 줄을 해체한 다음 이 줄을 길게 늘어뜨린 뒤 이동하고자 하는 곳에 있는 비트에 고정한다. 그런 후 선박에서 줄을 잡아당기는 방식으로 배를 움직이게 하는 것이다.이 소장은 "과거에는 워낙 내항으로 들어오려는 배가 많았기 때문에 배 위치를 조정해서 더 많은 선박을 접안했다"며 "하지만 신항과 남항 등 항만이 잇따라 조성되면서 지금은 그러한 작업을 하지 않는다"고 말했다.이어 "다른 작업들은 많이 기계화가 이뤄졌지만, 줄잡이 작업은 앞으로도 기계로 하기 어려울 것"이라며 "우리 업무가 단순해 보이지만, 선박들이 안전하게 접안해야 선원과 승객이 안전하게 승·하선할 수 있다.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점에서 자부심이 있다"고 말했다.항운노조가 맡은 작업 중 또 다른 하나는 라싱(lashing)이다. '고박'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선적된 화물을 고정하지 않으면, 배가 운항하는 과정에서 화물이 움직이게 된다. 이는 화물이 파손될 수 있을 뿐 아니라 선박의 평형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이 때문에 선박 출항 준비에 있어서 필수 작업 중 하나가 바로 라싱이다.지난 26일 오전 10시 인천컨테이너터미널에 있는 'BOX ENDURANCE'호에선 컨테이너 선적 작업과 함께 이를 고정하는 라싱이 이뤄지고 있었다. 컨테이너 라싱은 철제 기구를 이용해 컨테이너와 선박을 'X'자 모양으로 연결하는 방식이다. 이날 선박에 실린 컨테이너는 361TEU이며, 모든 컨테이너에 대해 라싱 작업이 진행됐다.라싱 작업을 진행한 조성덕(56) 씨는 "컨테이너 선박은 정시성이 중요하기 때문에 작업 시간이 빠듯한 경우가 많다"며 "밤낮, 날씨를 가리지 않고 (라싱 작업이) 진행되기 때문에 힘든 부분이 있다"고 했다. 이어 "라싱은 선박 안전에 있어 가장 중요한 측면이기 때문에 급하더라도 가장 안전하고 확실하게 작업을 진행한다"고 강조했다.이날 라싱 작업에 투입된 항운노조원은 30명. 컨테이너 선적과 라싱 작업이 함께 이뤄지면서 평소보다 긴 2시간가량 소요됐다. 일반적으로는 1시간에서 1시간 30분 정도가 소요된다. 컨테이너를 'X'자 모양으로 라싱하는 것처럼 화물에 따라 작업 방식이 다르다. 자동차의 경우 4개 바퀴를 이용해 줄(벨트 형태)로 선박과 자동차를 연결하는 방식으로 고정한다.화물 선적에 이어 라싱 작업이 완료되면, 줄잡이가 선박과 부두를 연결하는 줄을 풀어 준다. 이날 컨테이너 선적과 라싱을 마친 'BOX ENDURANCE'호도 줄잡이들이 비트에 연결된 줄을 풀자 출항했다.인천항 등 전국 항만에서 기계화가 진행되고 있다. 그중에서도 인천 신항과 같은 컨테이너 항만은 자동화·기계화가 빠르게 이뤄지고 있다. 지난해 5월 문을 연 중국 칭다오항은 '자동화'된 항만이라는 점을 앞세우고 있다. 이곳에서는 사람이 하던 컨테이너 고정 작업을 로봇이 대신하고 있다.조성덕 씨는 "이 일을 시작한 지 20년이 넘었다. 처음에만 해도 수작업이 많았지만, 점차 기계로 대신하는 것을 경험하고 있다. 앞으로 인천항도 자동화 항만이 될 수 있을 것"이라며 "그 부분은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지금 내가 하는 일이 선박 안전을 위한 일이고, 현재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기 때문"이라고 했다.글/정운기자 jw33@kyeongin.com 사진/김용국기자 yong@kyeongin.com사진/김용국기자 yong@kyeongin.com줄잡이는 선박을 부두에 고정하는 역할을 한다. 지난 20일 오전 인천항 내항에서 인천항운노조원들이 카페리선 골든브릿지5호와 부두를 연결하는 작업을 하고 있는 모습. 사진/김용국기자 yong@kyeongin.com지난 26일 인천컨테이너터미널에 접안한 'BOX ENDURANCE'에 선적된 컨테이너를 선박과 연결하는 '라싱' 작업을 하고 있는 인천항운노조원들. 라싱 작업은 화물의 파손을 막고 선박의 운항 안전성을 위해서 반드시 필요하며, 컨테이너 선 뿐 아니라 다른 화물을 실은 선박도 라싱작업이 이뤄져야 출항할 수 있다. 사진/김용국기자 yong@kyeongin.com

2018-11-28 정운

[한국 근대음악의 발상지 인천·(8)]인천공회당

인천 송도국제도시 센트럴파크 인근의 인천도시역사관이 1년 전 내부 리모델링 후 현재의 모습으로 문을 열었다. 인천도시역사관은 2009년 인천세계도시축전 당시 '인천도시계획관'으로 개관했으며, 얼마 후 관명을 변경해 '컴팩스마트시티'로 운영되다가 2014년 인천시립박물관에 인수됐다. 2017년 12월 인천의 도시 역사와 발전과정을 담는 공간으로 거듭난다는 의미에서 현재의 이름을 달고 시민을 맞이하고 있다. 인천시티투어 버스의 출발지에 면해 있는 인천도시역사관은 전체적인 전시 구성을 크게 1층 근대 도시관, 2층 현대 도시관, 3층 도시 생활관으로 설정했다. 1883년 제물포 개항 이후 1945년 광복까지 인천의 도시 성격과 공간이 어떻게 변화되어 왔는지를 볼 수 있는 1층 전시관 한 쪽에선 20세기 초반의 인천 중심가를 만날 수 있다. 전시관에선 모형으로 제작된 당시 건물들 볼 수 있는데, 3개월 여에 걸쳐 붉은 벽돌 모형을 세심하게 구현했다는 '인천공회당(仁川公會堂)'이 단연 눈길을 끌었다. 모형 앞에 설치된 안내문에 '인천공회당'에 대한 설명이 이같이 되어 있다. 1914년 부제(府制) 실시와 함께 각국의 조계가 폐지됨에 따라 인천에 살고 있던 인천일본거류민단은 해체수순을 밟게 되었다. 현재 중구청 인근에 있던 거류민단 사무소는 공회당으로 용도를 바꾸었고, 일본인들을 위한 문화시설, 집회장소로 이용되었다. 1923년 인천공회당은 홍예문 부근에 신축된 2층 붉은 벽돌 건물로 이전했다. 이 건물은 두 가지 용도로 사용되었는데, 남쪽 중앙의 현관에는 인천공회당이라는 간판을 걸었고 홍예문 길에 면한 건물 좌측으로 또 다른 문을 내어 인천상공회의소의 입구로 사용하였다. 그 후 인천공회당에서 개항 50주년 기념 축하회, 인천주류품평회, 인천시민대회 등이 개최되었다. 광복 후 한국전쟁으로 건물 일부가 소실되었고, 1957년 그 자리에 시민관이 들어섰다. 건물 개보수 후 지금은 인성여고에서 다목적관으로 사용하고 있다. 1923년, 홍예문 부근 2층 붉은벽돌 건물 신축 6·25때 일부 소실, 現 인성여고 다목적관 사용 영화상영·무도회 등 요즘 '문화예술회관' 역할 현재 홍예문에서 인천항 쪽으로 100m 정도 내려오면 왼편에 인성여고 다목적관을 볼 수 있는데 그 자리(인천 중구 송학동3가)가 인천공회당이 있던 곳이었다. 1899년 경인선 철도가 개통하면서 제물포역(현 인천역)과 축현역(현 동인천역)이 개설됐다. 강화도 조약 이후 인천에서 조계지를 중심으로 세력을 확장하던 일본은 1905년 을사늑약 이후 본격적으로 영역을 넓혀 간다. 그 창구가 1908년 건립된 아치형 터널인 홍예문이었다. 홍예문은 조계지에서 축현역과 만석동으로 오가는 가장 짧은 통로가 됐다. 홍예문의 처음 이름은 혈문(穴門)이었다. 때문에 그 길을 '혈문통'이라고 불렀다. 유동 인구가 많았던 혈문통에 인천공회당과 상공회의소 신축 건물이 자리했음은 어렵지 않게 유추할 수 있다. 당시 건물 남측에는 인천경찰서가 있었다. 인천공회당 신축 전 개항장 조계지 의회격인 신동공사가 있었다고 한다. 그 자리에 500여명을 수용할 수 있는 붉은 벽돌로 이뤄진 2층 규모의 인천공회당이 신축 이전한 것이다. 인천공회당에선 영화상영과 연주회, 무도회를 비롯해 어린이날 행사에 이르기까지 다채로운 문화 이벤트들이 열렸다. 요즘으로 따지면 문화예술회관 혹은 시민회관의 역할을 한 셈이다. 1926년 6월 18일자 동아일보에선 인천 영화학교가 인천공회당에서 운동장 확장비용을 보충하기 위해 교육 강연과 음악회를 열기로 했다는 내용이 실렸다. 같은 신문 1927년 4월 7일자와 1933년 11월 21일자에는 각각 인천고려체육회 주최 음악무도회 개최와 현제명 독주 및 4중창단 연주 소식을 게재했다. 또한, 각종 근대음악사 자료에는 홍난파에게서 바이올린을 배운 박종성이 인천공회당과 내리교회 등에서 여러 차례 연주회를 개최했다는 내용이 있으며, 일본에서 바이올린을 배우고 만주에서 성악을 전공한 원종철이 1940년 인천공회당에서 독창회를 갖고 1년 후에는 독주회를 개최했다고 한다. 인천공회당이 보다 각별한 장소로 기억되는 이유는 해방 후인 1947년에 열린 인천관현악단 창단 연주회 때문이다. 우리나라 최초의 오케스트라인 고려교향악단(서울시립교향악단의 모체)의 1945년 창립 이전 우리나라에는 소규모 관현악과 관악 협주 활동이 있었다. 이 같은 상황에서 인천관현악단은 고려교향악단과 불과 2년 터울을 두고 창단한 것이다. 서양음악의 관문 역할을 한 인천의 선진성을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 해방후 1947년 인천관현악단 창단연주회 열어 1974년까지 시민관… '아트센터 인천' 이어져 인천관현악단은 김기룡 단장과 박수득 악장을 중심으로 현악과 관악, 타악 주자 23명으로 구성된 인천 최초의 오케스트라였다. 한국전쟁 발발로 오랜 기간 활동이 이어지진 못했지만, 1966년 창단하는 인천시립교향악단의 모태로서의 의미를 띤다. 한국전쟁은 인천공회당도 역사 속의 장소로 바꿔놨다. 휴전 이후 1957년 그 자리에 1천여석 규모의 '인천시민관'이 들어선 것이다. 시민관에선 콘서트를 비롯해 연극, 쇼, 영화 상영, 웅변대회 등 다채로운 문화행사가 열렸다. 시민관이 개관한 지 10여년이 지나면서, 시설 노후화가 진행됐다. 때문에 1974년 주안에 문을 여는 '인천시민회관'에 본연의 임무를 넘기고 학교 시설로 바뀌게 된다. 시민회관은 문화예술회관과 올해 개관한 아트센터 인천으로 이어진다. 인천도시역사관에서 만난 배성수 관장은 "관련 사료의 부재로 인해 인천공회당의 내부 공간이 어떻게 나뉘었는지 알 수 없어서 아쉽다"면서 "자료 사진에서 볼 수 있듯이 2층 창문이 1층 창문에 비해 현격히 큰 걸로 봤을 때, 1층이 사무 공간이고 2층이 강당 형태의 공간이 아니었을까 유추해 볼 따름"이라고 말했다. /김영준기자 kyj@kyeongin.com 일러스트/박성현기자 pssh0911@kyeongin.com인천공회당 모습(1923년). /인천 화도진도서관 제공인천공회당에서 열린 공연을 다룬 옛 동아일보 기사. / 인천 합창의 궤적 전 도록 발췌인천도시역사관에 전시된 인천공회당 모형.인천공회당에서 열린 공연을 다룬 옛 동아일보 기사. / 인천 합창의 궤적 전 도록 발췌

2018-11-22 김영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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