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인천)

[독립운동과 인천·(12)]女교육자이자 독립운동가, 김란사(下)

보훈처 평안남도 안주 기록달리 유족들 평양 출생 주장 논란 '이주 가능성''국제관계 능통' 조선 관리 하상기와 전처 죽은뒤 혼인 '첩·기생설' 사실아냐아내 적극 외조 경찰서장·감리등 역임 인천 총괄 이후 중국 망명 행적묘연김란사 생애 체계적 복원위해 함께 살펴봐야… 파리가던길 독살설도 '과제'김란사(金蘭史·1872~1919)가 여성교육의 선구자이자 독립운동가로 발돋움하는 데에는 남편 하상기(河相驥·1855~1920)의 적극적인 외조가 있었다. 하상기는 인천 개항장의 행정·사법·국제관계 업무를 총괄하는 인천감리를 수차례 지내면서 인천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한 고위 관료이다. 그렇지만 드러나지 않은 측면이 많은 수수께끼의 인물이기도 하다. 아직 뚜렷하게 밝혀지지 않은 김란사의 생애를 복원하기 위해선 하상기도 함께 연구돼야 한다.지금까지 진행된 바로는 김란사나 하상기와 관련한 연구 작업의 중심에 인천의 이원규 작가와 김창수 인천연구원 부원장 등이 있다. 잘 알려지지 않은 독립운동가들의 생애를 조명해 온 이원규 작가는 김란사와 하상기에 관한 각종 자료를 모으고 행적을 추적해 작품에 반영하거나 강연하고 있다. 이원규 작가가 지난해 쓴 '김경천 평전'(도서출판 선인)에는 1904년 10월 조선 황실유학생단이 일본으로 떠나기 전 방문한 인천감리서에서 황실 유학생 김영은(金英殷·1888~1942)과 그의 아버지 김정우(金鼎愚·1857~1908)가 인천감리 하상기를 만나는 장면이 나온다. 김란사에 대한 언급도 있다. 훗날 김경천(金擎天)이란 이름을 쓰게 되는 김영은은 '백마 탄 김 장군'의 전설을 낳은 독립군 지도자다. 철저한 고증 없이는 묘사하기 힘든 장면이다. 이원규 작가는 "김란사의 고향이 북한 쪽이기 때문에 남한에서는 관심을 갖고 연구한 사람이 드물다. 그나마 연고가 있는 인천에서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김란사와 하상기가 언제 결혼했는지를 정확히 알 수 있는 자료조차 아직 전해지지 않고 있다. 김란사의 친정 조카손자인 김용택씨가 공개한 하상기의 제적등본에는 딸이 1891년 12월 출생으로 기재돼 있어 혼인시기를 추정할 수 있을 뿐이다. 1891년 김란사의 나이는 19세이고, 하상기는 36세였다. 하상기는 전처가 있었기 때문에 김란사가 '하상기의 첩이었다'거나 '기생 출신'이라는 설이 오랫동안 나돌았다. 실제로 김란사가 기생 출신이라는 내용이 담긴 기사를 1990년대 보도했다가 현재는 해당 기사를 삭제한 언론사도 있다. 김용택씨는 "증조부(김란사의 아버지)는 서울에서 청나라 포목을 가져와 파는 무역업을 했다"며 "김란사 할머니는 아버지 일을 돕다가 하상기의 전처인 조씨 부인이 사망한 이후 인근에 살던 집안끼리 혼담이 오가서 혼인했다"고 말했다.일본이 한국의 주권을 장악하기 위해 1906~1910년 설치한 통감부의 '한국 관인의 경력 일반'이라는 문서를 보면, 하상기에 대해 '원래 기부(妓夫)로 학문과 지식이 없지만 종종 협잡에 종사하였다. 일찍이 기녀 하나를 얻어 함께 일본으로 건너가 망명자 유인운동을 행하였다'고 썼다. 이 문서로부터 김란사가 기생 출신이라는 설이 나왔는데, 일본이 자국과 반대 입장에 있는 조선 관리들에 대해 쓴 문건이기 때문에 신뢰도가 떨어진다는 연구자들의 분석이 많다. 일본은 해당 문건에 올린 관인 153명 대다수에 대해 비방하는 내용을 담았다.또 일본 통감부는 같은 문건에서 하상기가 '러시아와 일본 양국에 대해서도 임기응변의 운동을 행해 러시아 탐정이라는 혐의가 있다'고도 평가했는데, 그가 국제관계에 능통한 인물이었음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하상기가 사료에 등장하는 첫 기록은 '승정원일기' 1897년 7월 19일 기사로 그가 6품 벼슬에 올랐다는 내용이다. 1895년 봄 김란사와 함께 일본에 유학을 갔다가 먼저 돌아온 직후다. 하상기는 1897년 말 일본 요코하마를 거쳐 미국 샌프란시스코로 입국해 김란사의 미국 유학길에 동행했다가 혼자 돌아왔는데, 이듬해 초 인천항 경무관(경찰서장)을 맡게 된다. '고종실록'에 따르면 하상기는 1899년 7월 인천감리 겸 인천부윤으로 승진하고, 1902년 7월 경무청 경무국장으로 자리를 옮겼다가 한 달쯤 지나 또다시 인천감리로 부임했다. 이후 육군 보병 정위(대위), 일본공사관 1등 참서관과 주임관 등을 거쳐 1905년 10월 인천감리로 되돌아왔고, 1906년 3월 농상공부 공무국장으로 임명됐다. 7년에 걸쳐 여러 차례 인천감리를 지내면서 사실상 인천지역을 총괄했다. 러일전쟁을 비롯해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정세가 긴박하게 돌아가던 시기에 고종은 하상기를 국제도시인 인천을 맡을 적임자라고 판단했다. 이원규 작가는 "하상기가 일본 등지에서 첩보를 수집해 왔을 것"이라며 "경찰 간부, 인천감리 등을 지낸 것도 이와 관련이 있어 보인다"고 했다.하상기가 인천감리로 재직할 때 김란사는 미국 유학 중이었기 때문에 남편과 인천에 머물지는 않았을 것이다. 다만 김란사의 부친은 1911년 인천으로 이주해 평양, 경성, 인천 등 3개 도시를 아우르는 '평경인상회'를 운영하는 등 무역업에 종사했고, 이후 후손들 상당수도 인천에 정착했다고 한다. 김란사가 유학을 마치고 귀국해 1907년부터 이화학당에서 학생들을 가르칠 때는 서울에서 살았을 것으로 보인다. 당시 김란사는 여성교육에 힘쓰면서 황실 통역사 등으로 활동하며 고종에게 은장을 받는 등 황실과 깊은 관계를 맺고 있었다.김란사가 돌아온 이후 관직에서 물러난 하상기는 어디에 있었을까. 이때 그의 행적을 보여주는 공식적인 기록은 없지만, 언론인 김동성(金東成·1890~1969)이 경향신문 1967년 11월 8일자에 기고한 '나의 사우사 <13> 하란사 부인'에는 1908년께 하상기가 중국 상하이에 망명 중이었다는 내용이 나온다. 중국 유학 중 여름방학을 맞아 귀국하다가 상하이에서 김동성을 만난 하상기는 "집에서 아무도 모르게 중국으로 피신한 지 두 달이 되어 나의 생사를 우리 집에서 모르고 있으니 편지 한 장 전해주면 고맙겠소"라고 부탁했다. 김동성은 편지를 갖고 귀국해 서울 동대문 밖에 사는 하상기 집에 들렀고, 김란사가 반갑게 맞으며 극진하게 대접해 줬다고 회고했다. 하상기가 왜 상하이로 망명했는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이후에도 하상기의 행적은 묘연하다.김란사는 당시 여성들에게 '시대의 아이콘'이었다. 고종이 1919년 1월 21일 갑작스럽게 승하하면서 무산됐던 파리강화회의 한국 대표 파견 계획이 재추진되면서, 여성계에서는 김란사를 파리에 보내자는 움직임이 일었다. 독립운동가 황에스터(1892~1971)는 서울신문이 발행한 월간지 '신천지' 1946년 3월호에 쓴 '3·1운동과 여성의 활약'이라는 글에서 "나는 조선 안 여학생을 단합하여 운동을 일으키고 파리회의에 하란사씨를 파견할 기금 모집을 할 겸 귀국했다"며 "파리회의에 우리 대표를 보낸다 하니까 돈을 낸다 의류를 낸다 노리개 화장품을 내놓는다 야단이었다"고 했다. 황에스터는 일본 유학 중인 1919년 2월 귀국해 3·1운동 이후 평양에서 김란사를 파리로 파견할 비용을 모금했고, 같은 해 3월 19일 기금을 전하려다 서울에서 체포됐다.파리로 향하던 김란사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지금까지도 명확하게 풀리지 않은 의문이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기관지 '독립신문' 1920년 1월 22일자에 실린 애국부인회의 김란사 등 세 애국여사 추도회 기사에는 그가 1919년 봄 고종의 다섯째 아들 의친왕의 밀칙으로 파리강화회의에 출석하려고 중국 베이징에서 여행을 준비하던 중 유행성 감모(감기)에 걸려 세상을 떴다고 나온다. 이원규 작가가 발굴한 베이징 일본영사관의 김란사 사망 관련 보고서도 현지 중국신문을 인용해 유행성 감기가 사인이라고 했다. 하지만 세간에는 독살설도 퍼졌다. 미국 내 한인교포들이 발행한 '신한민보'는 1919년 4월 24일자 신문의 김란사 부고 기사에서 '그 사유는 도무지 알 수 없는 일인바'라고 보도했다. 김동성도 앞서 경향신문 글에서 '일본인 앞잡이에게 살해를 당했다고 하나 그 진상은 오리무중에 파묻혀 밝혀지지 않았다'고 썼다. 조선일보 기자였던 최은희(崔恩喜·1904∼1984)도 생전에 김란사에 대해 쓴 글을 통해 '장례에 참가했던 미국 성공회 책임자 베커에 의하면 시체가 시커먼 게 독약으로 인한 타살로 추측된다고 말했다'고 전했다. 또 최은희는 같은 글에서 장례를 치르기 위해 베이징에 온 하상기가 '베이징에 가는 도중 봉천에서 어떤 동지를 만나 속뜻을 이야기한 게 오히려 그녀가 위해를 입은 원인이 됐다'고 한탄했다는 소문이 파다했다고도 썼다. 3·1운동 전후로 일본의 탄압이 더욱 거세진 당시 상황을 고려하면, 김란사의 독살설은 뚜렷한 증거가 부족하다는 이유로 지나칠 수 없는 좀 더 검증이 필요한 역사과제다.출생지 또한 명확하지 않다. 국가보훈처 독립유공자공훈록은 '독립신문' 1920년 1월 22일자 기사를 근거로 김란사의 출생지를 평안남도 안주라고 기록하고 있으나, 유족들은 평양 출신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안주에서 태어나 평양으로 이주했을 가능성도 있다. 김란사가 미국 오하이오 웨슬리언대학에서 취득한 한국 여성 첫 '문학사'(Bachelor of Literature) 학위는 최근까지 쓰인 상당수 글에서 현재 통용하는 문학사(Bachelor of Arts)로 다르게 표기하고 있다. 인천시여성단체협의회가 2008년 펴낸 '역사 속의 인천 여성'에서 '하란사'로 소개된 김란사 이야기는 미국 유학 과정, 문학사 학위 취득 시기, 중국 망명 등 틀린 내용이 허다하다.김란사와 하상기 부부를 인천 개항장의 '도시서사자원'으로 활용하자고 제안한 김창수 인천연구원 부원장은 "선각자적 여성인 김란사와 인천감리 하상기 이야기는 교차구조로 극적 구성이 가능한 콘텐츠이지만, 아직 기초연구가 미비하다"며 "연구를 통한 체계적인 정리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박경호기자 pkhh@kyeongin.com미국 오하이오 웨슬리언대학 유학 당시 김란사. /이원규 작가·이화여대 이화역사관 제공주일공사관 1등 참서관 재직 당시로 추정되는 하상기. /이원규 작가·이화여대 이화역사관 제공'독립신문'에 실린 김란사 등 '삼 애국여사의 추도회' 기사. /이원규 작가·이화여대 이화역사관 제공고종이 1909년 해외 여성 유학생 환영회와 관련해 김란사에게 수여한 은장. /이원규 작가·이화여대 이화역사관 제공김란사가 중국 베이징에서 사망한 사실을 담은 주일본공사관 보고서. /이원규 작가·이화여대 이화역사관 제공김란사는 1916년 미국 뉴욕 사라토가에서 열린 세계감리교총회에 한국교회 평신도 대표로 파견되기도 했다. 세계감리교총회 한국 대표 파견 기념사진으로 앞줄 왼쪽에서 5번째 서양식 복장을 입은 여성이 김란사다. /이원규 작가 제공

2019-05-15 박경호

[독립운동과 인천·(12)]여성교육자 김란사(下)

감리 출신 사위 하상기 영향력 도움인천고와 인연등 복지·교육에 힘써김란사(金蘭史·1872~1919)와 인천의 인연은 인천감리를 지낸 남편 하상기(河相驥·1855~1920)에게서만 찾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평양과 서울에서 객주업을 했던 김란사 집안은 1911년 인천 중구 유동(율목동)으로 이주해 '평경인상회'를 운영했다고 한다. 평양~경성(서울)~인천을 잇는다는 의미인 평경인상회는 평양·서울·인천지역을 중심으로 해외에서 비단, 면직물을 떼다 판 무역회사였다. 인천이 평양과 서울의 중간지대이자 상권의 중심지 역할을 했다는 역사적 근거로도 볼 수 있다. 김란사의 친정 조카손자인 김용택씨는 "증조부의 사업을 조부가 이어받았고, 아버지가 평경인상회를 맡아서 해방 직전까지 운영했다"며 "이후에도 후손들이 인천에 정착해 살았다"고 말했다.김란사 집안은 사위인 하상기의 영향력에 도움을 받기 위해 사업거점을 서울에서 인천으로 옮긴 것으로 보인다. 하상기는 1899년부터 1906년까지 7년여에 걸쳐 여러 차례 인천감리를 지냈다. 인천감리는 당시 제물포 개항장이 중심인 인천의 행정과 국제관계는 물론 재판소 판사까지 겸임한 지역의 최고 관리였다. 특히나 하상기는 열강의 각축장인 개항장을 총괄하는 직책을 맡을 정도로 고종의 신임을 받았다.하상기는 인천에서 복지사업과 교육사업에도 힘썼다. 대한매일신보는 1906년 3월 8일자 신문에 '하씨미정'(河氏美政)이라는 제목으로, 인천감리 하상기가 인천항의 회사들과 협의해 민의소를 창설하고, 매달 60~70명의 가난한 병자를 무료로 치료해줬다고 보도했다. 황성신문은 1899년 10월 13일자에 '인천감리 하상기씨가 영종진에 소학교를 세워 인민을 교육하겠다고 학부에 청원했다더라'는 기사를 썼다. 하상기가 인천감리로서 외국어학교 교장을 겸임했다는 황성신문 1903년 6월 3일자 기사도 있다. 이 기사에 나오는 외국어학교는 현 인천고등학교의 전신인 관립한성외국어학교 인천지교(1895년 개교)다. 하상기가 인천고등학교와도 연결된다는 점이 눈길을 끈다. /박경호기자 pkhh@kyeongin.com

2019-05-15 박경호

[인천의 얼굴·(10)고려인 빵집 사장 이가인씨]우즈베크서도 한국말·온돌방 잊지 않았던 '한핏줄'

옛 소련지역으로 옮겨 살아온 '한인 3세'2004년 남편과 이주…연수구에 6천명 살아인천 연수구에 사는 우즈베키스탄 출신 고려인 3세 이가인(36) 씨입니다. 2004년 우즈베키스탄인 남편과 함께 한국에 왔습니다. 꼭 1년 전인 작년 5월 연수동 함박마을에 '아써르티'란 이름의 빵집을 차렸습니다. '아써르티'는 러시아어로 '종류별로 다 있다'는 뜻이라고 합니다. 이름대로 빵뿐만 아니라 한국에서는 구하기 어려운 우즈베키스탄과 러시아 식료품도 팝니다. 빵을 주식으로 해서 그런지 종류만 10가지가 넘습니다. 가게를 하기 전 집에서 만든 것을 나누어 먹은 주위 사람들이 '고향의 맛'이라면서 빵집을 권유했습니다. 장사가 잘 됩니다. 한국 사람들이 30% 정도를 차지합니다.옛 소련지역에 이주해 살던 한인과 그 후손을 고려인이라고 하지요. 고려인은 3세까지 동포로 인정받아 재외동포비자를 받아 한국으로 이주할 수 있습니다. 국내에는 고려인 7만여명이 살고 있습니다. 이들 중 연수구에만 약 6천명이 살고 있지요. 이가인씨의 원래 이름은 '제버 사비로사'입니다. 한국식 이름을 쓰는 게 여러모로 나을 것 같아 이주하면서 바꾸었습니다. 이주 이듬해 한국에서 태어난 딸은 이제 중학교 1학년이 되었습니다.이가인 씨의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는 한반도 동북쪽인 러시아 연해주에 살았었는데 1930년대 스탈린 정권의 이주정책으로 정반대쪽인 우즈베키스탄 호라즘 지역으로 강제로 옮겨야 했습니다. 이가인 씨의 어머니는 6남매 중 넷째였는데 우즈베키스탄인과 결혼했습니다. 어머니 형제들은 한국말로 대화를 했습니다. 또한 외할머니는 끝까지 온돌방을 고집했습니다. 어머니가 한국말을 쓰고, 외할머니가 한국식을 잊지 않으셨던 것처럼 이가인씨는 한국에서 계속 살 생각입니다.그런데 우리는 왜 러시아로 이주한 한인들은 고려인이라 하고, 중국으로 넘어간 사람들은 조선족이라고 할까요. 이가인씨를 보면서 문득 그런 생각이 듭니다. 글/박경호기자 pkhh@kyeongin.com 사진/김용국기자 yong@kyeongin.com※'인천의 얼굴'을 찾습니다. (032)861-3200이메일 : say@kyeongin.com사진/김용국기자 yong@kyeongin.com

2019-05-12 박경호

[zoom in 송도]인천 최대 반려견 놀이터 '송도 도그파크' 개장

달빛축제공원내 5500㎡ 규모 '무료' 전염병·유기방지 '동물등록'해야 입장대형견·중소형견 등 3개공간 안전확보견주 쉼터·물놀이 등 다양한 편의시설인천 송도국제도시에 반려견 놀이터 '도그 파크'(Dog Park)가 생겼다. 지난달 29일 문을 열었으니, 개장한 지 2주일 정도 됐다. 인천에서 가장 큰 반려견 놀이터라고 한다. 지난 10일 송도 도그 파크를 다녀왔다. 송도 도그 파크는 달빛축제공원(연수구 센트럴로 350)에 있다. 달빛축제공원은 매년 여름 인천 펜타포트 록 페스티벌(Incheon Pentaport Rock Festival)이 열리는 곳으로 유명하다. 지난달 21일 영국 출신 싱어송라이터 에드 시런의 내한 콘서트가 열리는 등 인천의 대표적인 야외 공연 장소다. 하지만 대중교통으로 가기는 좀 불편하다. 인천도시철도 1호선 국제업무지구역에서 내리면 되는데, 20~30분 걸어야 한다. 공원 정문 옆에 주차장이 있으니 자가용을 이용해도 된다.공원 정문으로 들어가면 왼편에 5천500㎡ 규모의 도그 파크가 있다. 무료다. 인천경제자유구역청이 조성했으며, 인천시설공단이 운영을 맡고 있다.도그 파크 입구에 뼈다귀 모양의 귀여운 조형물이 있다. 도그 파크에 들어가면 입장 절차를 거쳐야 한다. 이곳은 동물등록을 한 반려견만 입장할 수 있다. 관리인이 반려견의 내·외장 인식 칩에 리더기를 갖다 대 등록 여부를 확인한다. 이는 전염병과 반려견 유기를 방지하기 위한 조치다. 인식 칩 또는 인식 표가 없는 반려견의 경우, 보호자는 동물등록증을 소지해야 한다.반려견이 놀이터에 들어가기 전까지는 반드시 목줄을 채워야 한다. 도그 파크를 이용하는 다른 반려견과 보호자가 놀랄 수 있기 때문이다. 12세 이하 어린이는 보호자와 함께 출입해야 한다. 동물보호법 시행규칙에 명시된 맹견류 또는 질병이 있는 반려견은 등록번호가 있어도 입장할 수 없다. 관리인이 위험해 보인다고 판단한 반려견은 입마개를 착용한 후 입장해야 한다. 놀이터에는 음식물을 가지고 들어갈 수 없다. 도그 파크는 ▲대형견 ▲중소형견 ▲대형견+중소형견 등 3개 공간으로 구성돼 있다. 반려견 간 마찰을 예방하고자 몸높이 40㎝를 기준으로 대형견과 중소형견 이용 공간을 나눴다.각 공간에는 다양한 시설이 있다. 뫼비우스슬로프, 터널, 음수대, 오르락내리락 및 물놀이(분수) 시설 등이 있다. 물놀이 시설은 오전 11시부터 오후 6시까지 매 정시부터 50분간 가동된다.놀이터별로 격리실이 있다. 격리실은 보호자가 화장실을 갈 때 반려견을 넣어 두는 공간이다. 보호자 화장실은 공원 입구에 있다. 도그 파크에서 멀지 않다. 놀이터 안에는 보호자가 휴식을 취할 수 있는 벤치가 마련돼 있다. 벤치 위에 그늘막이 설치돼 있지만, 햇빛을 막을 만큼은 충분하지 않다. 여름철 햇빛이 강할 때는 챙이 넓은 모자나 양산을 가지고 오는 것이 좋다. 도그 파크에서 만난 안희연(34·남동구 구월동)씨는 "인천대공원을 이용하다가 처음으로 송도 도그 파크에 왔다"며 "인조단지와 음수대, 물놀이 시설이 있어 좋은 것 같다"고 말했다. 반려견끼리 싸우는 사고가 발생하면 퇴장 조치를 받을 수 있다. 사고의 책임은 피해를 준 반려견의 보호자에게 있다.도그 파크는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 운영된다. 오후 5시 이후에는 입장할 수 없다. 매주 월요일은 시설 점검·보수, 토양 소독을 위해 휴장한다. 명절 연휴 기간과 폭우·폭염·한파·폭설·미세먼지 등 기후 여건이 나쁠 때도 문을 열지 않는다. 도그 파크 개장 후 일주일간 600명 이상의 보호자와 반려견이 방문했다고 한다. 주말에는 이용객이 많기 때문에 줄을 서 대기할 수 있다. 도그 파크가 동시에 수용할 수 있는 인원은 50명이다. 도그 파크에는 교육 공간이 있다. 인천시설공단은 한 달에 한 번 정도 외부 강사를 초청해 반려견 관련 강연을 시행하겠다는 계획이 있다. 도그 파크에 왔다가 달빛축제공원에서 반려견과 놀다 가는 시민이 많은데, 공원 이용객들이 놀라지 않도록 목줄을 채워야 한다. /목동훈기자 mok@kyeongin.com지난달 29일 개장한 송도 도그 파크 중소형견 놀이터 모습. 달빛축제공원에 있는 송도 도그 파크는 인천에서 가장 큰 반려견 놀이터로, 인천경제자유구역청이 조성했다. /목동훈기자 mok@kyeongin.com반려견 보호자를 위한 벤치.반려견 물놀이(분수) 시설.흙먼지 털이기./아이클릭아트

2019-05-12 목동훈

[독립운동과 인천·(12)]여성교육자 김란사(上)

조카손자 김용택씨 경인일보 통해남편 하상기씨의 '제적등본' 공개"본관마저 잘못 알려져 바로잡고자"유관순 열사의 이화학당 스승이자 여성 독립운동가인 김란사가 재조명되고 있다. 인천과 깊은 관련이 있는 그는 한국의 첫 여성 '문학사' 학위자, 첫 여성 대학교수, 고종의 통역사, 파리국제강화회의 밀사 등 여성교육과 독립운동에 커다란 발자취를 남겼다.하지만 출생 연도, 사망일과 사망장소, 집안, 본관 등 기본적인 인물정보조차 각종 기록이나 글마다 제각각일 정도로 김란사 연구가 깊이 있게 이뤄지지 않았다. 이런 가운데 김란사의 조카손자인 김용택(71)씨가 김란사의 남편 하상기(1855~1920)의 제적등본(옛 호적등본)을 지난해 확보하고, 8일 경인일보를 통해 처음으로 공개했다.인천감리 등을 지낸 관료였던 하상기의 제적등본에 나타난 아내(妻) 김란사는 1872년(개국 481년) 9월 1일생이다. 기존에는 '1875년', '1868년', '1872년' 등 세 가지 추측이 혼용됐다. 김란사는 1919년 중국 베이징에서 숨을 거뒀는데, 사망일은 당시 언론보도나 보고서에 따라 '4월 10일', '3월 10일', '3월 11일', '3월 상순' 등으로 여러 가지로 써 왔다. 등본에서는 사망일을 3월 10일 오전 11시로 명확히 기재했고, 사망장소는 베이징 '부영병원'이라고 밝히고 있다.본관은 상당수 기록에서 밝힌 '김해 김씨'가 아닌 '전주 김씨'였다. 하상기와 김란사 사이에는 딸 하나가 있었다. 일부 구술에 의해 이름은 자옥(子玉)이고, 이화학당에 재학 중 18세(또는 19세)에 사망했다는 내용이 널리 알려져 있다. 하지만 제적등본에는 딸의 이름은 원옥(媛玉)으로 24세에 세상을 떴다고 기록돼 있다. 제적등본이 공문서인 만큼 현재로선 가장 객관적인 기록이라 할 수 있다.김란사애국지사기념사업회 회장인 김용택씨는 하상기의 직계가족은 아니지만, 국가보훈처와 행정안전부 등의 협조로 지난해 7월 제적등본을 발급받을 수 있었다. 김용택씨는 "심지어 조상의 본관마저 틀리는 글들이 여럿 있어 이를 바로잡고자 제적등본을 요청해 받았다"며 "앞으로 김란사 할머니에 대한 객관적인 정보들이 쓰이길 바란다"고 했다. /박경호기자 pkhh@kyeongin.com김란사의 후손을 통해 처음으로 공개되는 남편 하상기의 제적등본. /김용택씨 제공

2019-05-08 박경호

[독립운동과 인천·(12)]女교육자이자 독립운동가, 김란사(上)

조선말 개항장 감리지낸 남편따라 인천과 인연'뜨거운 학구열' 기혼녀임에도 이화학당 입학독립운동가 서재필 연설에 '감동' 미국行웨슬리언대서 한국 여성 최초 '문학사' 학위귀국후 고종 통역役·이화학당서 첫 여성교수 임명김란사(金蘭史·1872~1919)는 시대를 앞선 여성 교육자이자 독립운동가다. 미국 유학길에 올라 한국 여성으로는 처음으로 '문학사'(Bachelor of Literature) 학위를 취득했고, 최초의 여성 대학교수가 된 그의 행보는 당시 여성들이 가지 않은 길이었다. 이후 수많은 여성 독립운동가가 역사 전면에 등장할 수 있도록 길을 터주기도 했다. 김란사의 남편 하상기(河相驥·1855~1920)는 조선 말기 인천 개항장의 사법·행정과 국제업무를 총괄한 인천감리를 여러 차례 지낸 고위 관료였다. 하상기는 김란사가 국내외에서 활발히 활동할 수 있도록 물심양면으로 도왔다. 여기에서 김란사와 인천의 인연이 시작되었다. 올해는 김란사 서거 100년이 되는 해이지만, 정작 그의 생애는 여전히 빈 칸 투성이다. 김란사와 관련해 근래에 쓰인 글들마저 출생연도, 유학 과정, 사망 경위 등이 제각각이다. 이름조차도 수년 전까지 남편의 성씨를 따랐던 '하란사'로 불렸다. 정부는 1995년 김란사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할 때 '하란사'로 표기했던 성명을 지난해 2월에서야 본래 이름으로 정정했다. 김란사의 생애를 제대로 복원하기 위한 연구가 절실하다.김란사는 이화학당에 입학할 때부터 일생을 관통한 신념이 어디에 있었는지를 헤아릴 수 있는 일화를 남겼다.이화학당 교장을 지낸 선교사 룰루 프라이(Lulu E. Frey·1863~1921)는 교사로 재직할 당시 김란사의 입학 신청을 한 차례 거절했다. 기혼 여성을 받지 않는 게 이화학당의 원칙이었기 때문이다. 김란사가 밤중에 이화학당을 직접 찾았지만, 프라이는 재차 입학이 어렵다고 했다. 그러자 김란사는 하인이 들고 있던 등불을 훅하고 불어 끄더니 "우리나라는 저 등불같이 매우 어둡다"며 어머니들이 배워 자식을 가르칠 수 있어야 한다고 강하게 주장했다. 결국 이화학당은 교육비용을 자부담한다는 조건으로 김란사의 입학을 허락했다. 프라이는 이 같은 내용을 1895~1896년 미국으로 보낸 이화학당 운영보고서에 담았다.김란사가 이화학당에 입학한 시기는 정확히 기록되지 않았다. 다만 김란사와 하상기가 함께 1895년 봄 일본 도쿄에 있는 경응의숙(게이오의숙·慶應義塾)으로 유학을 갔다는 내용의 조선정부 문건들을 고려하면, 이화학당은 1894년쯤 들어갔을 것으로 연구자들은 추정하고 있다. 조선정부는 자비로 일본 유학 중인 김란사를 장학생(관비 유학생)으로 포함해주기도 했다. 다시 고국으로 돌아온 김란사는 미국 유학파 독립운동가인 서재필(徐載弼·1864~1951)의 정동교회 연설에 감화돼 미국 유학을 결심했다고 한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기관지인 '독립신문' 1920년 1월 22일자에 실린 '세 애국여사의 추도회' 기사에 이 같은 내용이 언급된다. 김란사는 1897년 말 일본 요코하마를 거쳐 미국 샌프란시스코로 입국해 미국 유학생활을 시작했다. 남편도 동행했다가 곧 귀국했다. 이때부터 미국식으로 남편 성을 따라서 '하란사'라는 이름을 썼다. 유학 초기에는 워싱턴 D.C에 있는 하워드대학 예비과정 또는 '디커너스 트레이팅 스쿨'이라는 예비학교에서 수강한 것으로 보인다. 이후 1900년 오하이오 웨슬리언대학에 입학해 1906년 '문학사' 학위를 받고 졸업했다.김란사의 조카손자인 김용택 '김란사 애국지사 기념사업회' 회장이 제공한 웨슬리언대학 학적부를 보면, 김란사는 3년간의 예비과정을 마치고 본과에 입학했다. 본과 1학년 때는 과학 전공을, 2~3학년 때는 문학 전공을 이수했다. 이름은 'Hahr, Nansa Kim Mrs.'라고 본래 성씨와 남편 성씨를 함께 썼다. 직업은 주부(Housewife)와 교사(Teacher)라고 표기돼 있고, 주소는 서울 이화학당으로 돼 있다. 이화여대가 1966년 웨슬리언대학에 김란사의 학적을 문의한 적이 있는데, 웨슬리언대학의 답장에는 "당시에 전공과목이 따로 없었을 때였으나, 그(김란사)는 영문성경을 집중적으로 연구했다"고 나온다. 김란사는 유학시절 웨슬리언대학 기숙사인 모네트홀에서 지냈다. 이화여대 이화역사관이 소장한 사진 속 김란사의 기숙사 방에 걸린 태극기가 눈에 띈다.긴 유학생활을 마친 김란사의 귀국에 국민적인 관심이 쏠렸다. '대한매일신보'는 1906년 8월 18일자 신문에서 '전 농상국장 하상기 씨 부인이 미국 화성돈에 가서 유학한 지 10년에 고등학교 졸업하고 환국하여 동문 외본제에 주재한대 성 내외 사부가에서 여자교육을 부탁하는 이가 다다(多多)하다더라'는 내용의 기사를 보도했다. 고종의 후비인 엄황귀비(1854~1911)는 진명여학교, 숙명여학교, 한성고등여학교 등 여성교육기관을 설립하는 과정에서 김란사의 자문을 받았다. 김란사는 고종의 통역을 맡으며 황실과 친분을 쌓기도 했다. 1909년 5월 경희궁에서는 '여성 해외유학생 환영회'도 열렸다. 김란사, 한국 최초의 여의사 박에스더(1877~1910), 일본 유학생 윤정원(尹貞媛·1883~?) 등 해외 유학파 여성 3명의 귀국을 환영하기 위해 부인단체를 중심으로 마련한 행사다. 궁궐에서 개최한 만큼 황실과도 교감을 가진 행사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부인단체 대표들이 연설을 하고, 주인공 3명이 답사를 한 뒤 여학생들이 노래를 불렀다고 한다. 유학생잡지 '대한흥학보' 제3호(1909년 5월 20일 발행)는 환영회에 700~800명의 인파가 몰렸다고 전했다. 같은 해 고종은 세 여성에게 직접 은장을 수여하기도 했다.의친왕 파리강화회의 파송 '밀사'로 가던중중국서 급사… 1995년에야 건국훈장 추서 서거 100년 불구 사망 경위·행적등 연구 미흡김란사는 1907년부터 이화학당 교사 겸 기숙사 사감으로 일했고, 이어 총교사(교감)로 승격했다. 조선일보의 첫 여성 기자인 최은희(崔恩喜·1904∼1984)가 생전에 쓴 여성 열전을 묶은 책 '여성을 넘어 아낙의 너울을 벗고'(2003)의 '하란사'편에서는 기숙사 사감인 김란사가 호랑이 어머니라는 별명을 들을 만큼 엄격하고, 욕설을 잘하기로 유명했다고 썼다. 1910년 9월 이화학당에 대학과를 개설하면서 김란사는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교수로 임명됐다.교수 재직 시절에는 개화파 인사인 윤치호(尹致昊·1866∼1945)와 선교잡지인 'The Korea Mission Field'를 통해 여성교육 논쟁을 벌이기도 했다. 윤치호가 해당 잡지에 신(新)학교 학생들은 대체로 집안 살림하는 법을 모른다는 취지의 글을 먼저 기고했고, 김란사가 '그 학교들의 목적과 방향은 슬기로운 어머니, 충실한 아내 및 개화된 가정주부가 될 수 있는 신여성을 배출하는 것이지 요리사나 간호원, 침모를 배출하는 것이 아니'라고 반박하는 글을 실었다.선교활동에도 적극적이었던 김란사는 1916년 미국 뉴욕에서 열린 세계 감리교 총회에 한국교회 평신도 대표로 선정돼 다시 미국을 찾았다. 이후 2년여간 미국 전역을 순회하면서 한인 동포를 대상으로 정동제일교회에 파이프오르간을 설치하기 위한 모금활동을 펼쳤다. 도산 안창호(安昌浩·1878~1938)는 교민들에게 김란사의 모금활동을 돕자는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재미동포들의 모금으로 1918년 설치한 정동제일교회 파이프오르간은 한국에서는 처음이었고, 동양에서는 두 번째였다. 한국전쟁 때 폭격으로 소실됐다가 2003년 복원됐다.고종은 1919년 6월 프랑스 파리에서 열리는 파리강화회의에 다섯째 아들인 의친왕(1877~1955)을 파송할 계획을 추진했다. 1차 세계대전의 전후 처리를 논의하는 회의에서 한일 강제병합의 부당함과 한국의 독립을 국제사회에 호소하기 위해서였다. 미국 오하이오에서 유학한 의친왕과 교류가 있는 김란사도 밀사로 파견될 예정이었다. 김란사의 파리강화회의 비밀 파송과 관련한 공식적인 문건은 아직 발굴되지 않았다. 신문기사와 해방 이후 관련 인사들의 자서전 등을 통한 후일담만 남아 있을 뿐이다. 파리로 향하던 김란사는 1919년 3월 10일 중국 베이징의 한 병원에서 갑작스럽게 숨을 거뒀다. 유행성 독감이라는 기록도 있고, 분사(憤死)했다거나 독살당했다는 설도 당시 떠돌았다. 김란사의 독립운동 행적이나 사망과 관련해 미진한 연구는 앞으로의 과제로 남아 있다. /박경호기자 pkhh@kyeongin.com미국 오하이오 웨슬리언대학 기숙사 '모네트홀'에 앉아 있는 김란사. 벽면에는 태극기가 걸려 있다. /이화여대 이화역사관 제공미국 오하이오 웨슬리언대학이 1966년 이화여대에 보낸 김란사의 학적 확인 답장. /이화여대 이화역사관 제공미국 오하이오 웨슬리언대학의 김란사 학적부. /김용택 '김란사 애국지사기념사업회' 회장 제공정부는 1995년 8월15일 김란사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하면서 남편의 성을 따른 '하란사'(사진 오른쪽)로 성명을 표기했다. 김용택씨 등 후손들의 요청으로 지난해 2월 훈장증 성명을 본래의 이름인 '김란사'로 정정했다. /김용택 '김란사 애국지사기념사업회' 회장 제공일본 도쿄 경응의숙에서 유학한 조선 관비유학단이 1896년 친목회보에 실은 단체사진. 사진 속 하얀 한복을 입은 여성이 김란사다. 김란사 바로 왼쪽이 남편 하상기다. /이원규 작가 제공, 그래픽/성옥희기자 okie@kyeongin.com/아이클릭아트

2019-05-08 박경호

[인천의 얼굴·(9)필리핀 출신 결혼이주여성 이소혜씨]결혼 2년만에 갑작스럽게 '사별'… 남편 대신 또한명의 엄마를 얻어

얼마전 필리핀 모친마저 떠나 더 각별해연수원로모임 어버이날 효부상 희소식시어머니와 며느리. 우리에게는 마치 지금의 여야 관계처럼 불화와 갈등의 대명사로 다가옵니다. 그만큼 둘 사이는 불편한 관계란 얘기일 겁니다. 왼쪽 이순덕(81) 할머니와 오른쪽 이소혜(33)씨는 정말이지 친정엄마와 딸 같은 고부간(姑婦間)입니다. 이소혜씨는 2008년 필리핀에서 온 결혼 이주여성입니다. 원래 이름은 알디자(Aldiza)였는데 2015년 귀화하면서 시어머니 성을 따라서 이씨로 정했습니다. 결혼 2년 만에 남편이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났습니다. 큰딸이 7개월이었고, 막내아들이 뱃속에 있을 때였습니다. 누구 하나 아는 사람 없이 왔으니 하늘이 무너지는 듯했죠. 고향 생각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때 든든한 기둥이 되어 주신 게 시어머니였습니다. 시어머니에게도 남편은 하나뿐인 아들이었지요. 말 그대로 동병상련이었습니다. 딸이 되기로 했습니다. 소혜씨는 시어머니를 엄마라 부르고, 시어머니는 며느리를 알디자라고 필리핀 이름을 불러줍니다.필리핀 친정에는 1년에 한 차례씩은 다녀왔는데 몇 년 전부터 시어머니의 거동이 불편해지면서 가지 못합니다. 시어머니 혼자서는 산책을 나가기조차 쉽지가 않기 때문입니다. 친정 가족들이 보고 싶지만 꾹 참고 SNS로 달랩니다. 2년 전에는 필리핀에 계신 친정엄마가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그 뒤로는 더욱 시어머니가 친정엄마 같습니다. 엄마와 딸도 자주 다투듯이 이 둘 사이에도 말다툼이 있습니다. 음식 간을 맞추는 것이 싸움이 되고는 합니다. 필리핀에서 먹듯이 간을 하면 시어머니는 짜다고 타박을 하거든요. 여덟 살, 일곱 살 아이들이 하고 싶은 대로 놔두었으면 좋겠는데 시어머니는 일찍 자라고 성화지요. 목소리를 높여가며 싸우다가도 한나절이면 풀고, 언제 그랬냐는 듯 수다를 떱니다.효부(孝婦)라는 말이 오히려 불편해진 요즘 세상입니다. 이 딸 같은 며느리에게 인천연수원로모임이라는 단체에서 올해 어버이날에 맞추어 효부상을 준다고 합니다. 인천에 사는 외국인이 10만4천여명인데, 결혼해 이민을 오거나 귀화한 사람은 2만1천여명입니다. 글/윤설아기자 say@kyeongin.com※'인천의 얼굴'을 찾습니다. (032)861-3200이메일 : say@kyeongin.com사진/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

2019-05-06 윤설아

[독립운동과 인천·(11)]'이을규·정규' 형제

세살터울로 장봉도서 태어나 둘 다 인천고 졸업… 은행 그만두고 나란히 독립운동 길 나서형 이을규 대동단 '의친왕 망명사건' 주도로 옥고, 동생 정규 일본서 2·8독립선언대회 동참1921년 함께 중국행 '아나키스트' 왕성한 활동중 혁명고취 논문으로 동생 '징역 3년형' 고초해방후 각각 이승만정권 감찰위원·성균관대 총장지내… 형만 '유공자 서훈' 재조명 목소리한 배에서 나고 자란 형제이면서 같은 학교를 졸업한 동문인 독립운동가가 얼마나 있을까. 인천 장봉도에서 태어난 이을규(1894~1972)·이정규(1897~1984) 형제는 일본이 우리나라를 집어삼킬 무렵 인천고등학교(옛 인천공립상업학교)를 함께 다녔고, 졸업 후 독립운동 동지가 됐다.이을규는 고종의 다섯째 아들인 의친왕 망명 사건을 주도했던 대동단의 핵심 인물이었고, 이정규는 우당 이회영과 함께 독립운동계 아나키즘 사상을 정립한 사람으로 평가받고 있다. 또 두 형제는 의열단원으로 활동하면서 죽음과 옥살이를 두려워하지 않고 치열하게 독립운동 전선에 나섰다.이을규는 의친왕의 바로 옆에서 고비마다 큰 역할을 해냈던 중요한 인물로 1990년 독립유공자 애족장 서훈을 받았지만, 이정규는 생전에 본인의 뜻에 따라 독립유공자 서훈 신청을 하지 않아 공훈기록조차 만들어지지 않았다. 인천의 독립운동가로서 이들의 생애와 독립운동 궤적에 대한 깊이 있는 연구가 요구되고 있다.이을규·정규 형제는 각각 1894년과 1897년 인천 장봉도에서 태어났다. 정부 공식 문서라고 할 수 있는 국가보훈처 '독립유공자 공훈록'과 백과사전에 이을규를 소개하는 글에는 충남 논산이 본적으로 돼 있으나, 이을규·정규 형제는 생전에 인천 장봉도 출신임을 분명히 밝혀왔다.일제의 강제 병합이 있던 해인 1910년 이을규가 먼저 인천고에 입학했고 이듬해 동생 이정규가 입학했다. 현재 졸업기수로 따지면 13회, 14회다.식민통치가 본격적으로 이뤄진 1910년대 초반 학교는 교장과 교사들이 일본인으로 채워지기 시작했고, 교사는 제복을 입고 수업에 들어왔다. 인천고도 마찬가지였다. 이을규·정규 형제는 조선인 학생에 대한 차별과 강압적인 교육에 대한 반발심이 커졌다고 한다.이들 형제는 학업에는 성실히 참여했다. 형 이을규는 수석 졸업생이었다. 지금의 도덕 교과목인 수신(修身)과 이과(理科) 분야 성적이 특히 우수한 것으로 알려졌다. 동생 이정규도 중상위권 성적을 유지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두 형제는 장봉도 출신인데 인천에서 운수업을 하던 큰 형을 따라 나왔다. 이들의 고등학교 학적부를 보면 이을규는 사숙에서 한문을 배웠고, 이정규는 인천 우각리(현 동구 금창동)에 있던 인명의숙을 졸업하고, 인천고에 진학했다. 우수한 성적으로 학교를 졸업한 형제는 은행에 취직했지만, 일본인들의 민족 차별에 반발해 둘 다 사직했다. 그리고 나란히 독립운동의 길로 들어선다. 이을규는 직장을 그만두고 전협·최익환 등이 결성한 대동단에 가입해 1919년 11월 '의친왕 망명사건'에 참여한다.대동단은 고종의 다섯 번째 아들인 의친왕을 상하이 임시정부에 망명시킨 뒤, 조선의 독립을 고취하는 내용의 포고문을 중국과 우리나라에 배포할 계획이었다. 대동단을 소개하는 '대동단실기'를 집필한 건국대학교 정치학과 신복룡 명예교수는 "대동단은 조선 왕조 왕실이 (한일) 합병에 동의하지 않았다는 것을 의친왕의 입을 통해 세계에 알릴 목적으로 망명을 추진했다"고 설명했다.이을규는 의친왕을 중국 안둥현(安東, 현 단둥(丹東))까지 호위하는 역할을 맡았다. 중국까지 일본 경찰에 들키지 않고 의친왕의 탈출을 책임져야 하는 막중한 임무였다. 고비 때마다 이을규의 기지로 위기를 넘길 수 있었다. 평양으로 가는 기차에서 의친왕은 이을규의 낡은 외투를 입고 신분을 위장해 3등 칸에 탔다고 한다. 일본 경찰 검문에 걸린 절체절명의 순간도 있었지만, 이을규가 백부(伯父)라고 대신 대답해 모면하기도 했다. 우여곡절 끝에 의친왕과 이을규는 중국 안둥현에 도착했으나, 의친왕 망명 소식을 접한 일본 경찰에 의해 붙잡히게 된다. 이 사건으로 그는 징역 2년 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렀다.동생 이정규는 일본으로 넘어가 독립운동을 도모했다. 게이오대학 경제학과에 입학한 그는 조선유학생학우회 일원으로 2·8독립선언대회에 참가했다.이을규는 감옥에서 출소한 1921년 겨울 방학을 맞아 일본에서 귀국한 동생 이정규와 함께 중국으로 떠났다. 이때부터 형제는 함께 독립운동을 벌였다.베이징 대학에 진학한 이정규는 러시아의 시인 에르셍코와 교류하며 아나키즘 사상가로 성장하게 된다.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한 우당 이회영을 아나키즘 사상가로 인도한 이가 바로 이정규다. 그는 아나키즘을 조국의 독립운동에 어떻게 적용할 것인가를 두고 깊은 고민을 했다. 이정규는 훗날 저술한 '우당 이회영 약전'에서 당시를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이회영 선생이 무정부주의에 대한 이야기를 물어서 오랜 시간 동안 문답을 하게 됐다. 이것이 선생으로서는 무정부주의 사상의 내용을 들어보는 첫 번째 기회였다. 이때는 마침 선생이 사상적인 진로 모색을 하던 때였으므로 이정규와의 대화는 선생에게 큰 충동을 줬다."이정규의 영향으로 형 이을규도 아나키스트가 됐다. 형제는 1924년 4월 우당 이회영, 화암 정현섭, 구파 백정기 등과 함께 '재중국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을 조직했다. 이 단체는 외세에 의존하는 타협론과 소련에 기대는 공산주의 세력을 함께 비판하며, 독립운동세력의 통합과 직접 행동노선을 주장했다. 상하이로 가서 약산 김원봉을 만나 의열단에 가입한 것도 이 시기다. 일본 첩보단이 작성한 의열단원 명부에 이들 형제는 열 손가락 안에 드는 중심 간부로 올라 있다.아나키스트 사상가로서 이정규의 활동은 이후 더욱 활발해졌다. 난징에서는 대만·베트남·필리핀 등 7개국 항일지사들과 '동방무정부주의자대회'를 열고 기관지 '동방'을 발행했고, 재중국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 기관지 '탈환'을 간행했다. 그러던 중 탈환에 기고한 논문이 결국 일본의 감시망에 걸렸다. 이정규는 탈환에 '탈환에 제일성', '혁명원리의 탈환'이라는 제목의 두 편의 논문을 가명으로 기고했는데, 일본은 이 글이 조선의 혁명 정신을 고취하는 것으로 해석했다. 이정규는 징역 3년 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만주 하이린을 근거지로 했던 이을규도 고초를 겪긴 마찬가지였다. 그는 이회영의 지시를 받고 김좌진 장군의 신민부와 연합하는 활동에 전념했는데, 일본과 공산주의자들의 방해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이을규·정규 형제와 함께 독립운동을 벌였던 화암 정현섭은 '혁명가들의 항일 회상'이라는 책에서 "그 무렵 만주에서는 이른바 사상 문제로 우리끼리 더 많이 죽였어요. 공산당이라고 잡아 온 젊은이를 죽이려는 것을 내가 뜯어말린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지요. 그러니까 만주에 있을 때 왜놈보다도 우리 동포인 공산주의자가 무서워 잘 때도 신을 신고 옷을 입었습니다."고 1920년대 말 만주의 상황을 설명했다.혼란한 시대 속에서 김좌진 장군은 공산주의자에게 암살됐고, 일본이 대대적인 검거 작전을 펼치면서 이을규는 국내로 압송돼 5년이나 투옥하게 된다.해방된 조국에서 아나키스트 형제가 설 자리는 없었다. 그들은 농민 스스로 자치 능력을 기르기 위해 농촌자치연맹과 노동자자치연맹을 각 지역에 조직했지만, 뜻을 이루지는 못했다.이을규는 1953년 이승만정권에서 초대 감찰위원을 지냈고, 1963년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아 대통령 표창을 받았고 1972년 서울 동대문구 자택에서 숨을 거뒀다. 그가 생애 말년에 번역했던 러시아 무정부주의자 크로포트킨의 저서 '현대과학과 아나키즘'은 사망 이듬해인 1973년에야 출간됐다. 이정규는 1963~1966년 성균관대 총장을 지냈고, 전 재산을 출연해 아나키즘 연구 단체 (사)국민문화연구소를 만들었다. 1984년 사망한 그는 생전에 독립유공자 신청을 하지 않았다.인천 출신인 이원규 작가는 "삼형제 중 두 명이 목숨을 내놓은 채 독립운동에 헌신했고, 국내 아나키스트 사상 발전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하지만 인천 지역에서는 이들에 대해 제대로 조명하지 못했다"며 "인천시 등이 나서서 이제라도 활발하게 연구를 진행해 우리 고장의 독립운동가를 널리 알려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주엽기자 kjy86@kyeongin.com이을규(왼쪽)와 이정규. 그래픽/성옥희기자 okie@kyeongin.com /아이클릭아트왼쪽부터 재중국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 기관지 '탈환'에 기고한 논문으로 징역 3년 형을 선고받은 이정규의 판결문 원본, 이을규·이정규가 이름이 담긴 의열단원 관헌문서, '의친왕 망명 사건'으로 징역 2년 형을 받은 이을규 판결문 원본. /인천고 제공

2019-05-01 김주엽

[독립운동과 인천·(11)]이을규·정규

1910년 나라의 명이 다하자 많은 사람은 독립운동에 뛰어들었다. 온 집안이 독립운동에 나선 경우도 많았다. 전 재산을 팔아 만주에 신흥무관학교를 세운 우당 이회영 일가와 서대문 형무소 1호 사형수로 기록돼 있는 의병장 허위 가문 등이 대표적이다.인천에도 독립운동에 나선 형제들이 있다. 이을규(1894~1972)·정규(1897~1984) 형제다.인천 장봉도에서 태어난 이들은 일본이 우리나라를 강제 병합한 1910년대 인천공립상업학교(현 인천고등학교)를 다녔고, 졸업 후에는 독립운동을 했다.이을규는 고종의 다섯째 아들인 의친왕 망명 사건에 참여했다. 그는 경성에서 중국 안둥현(현 단둥시)까지 의친왕의 망명 여정을 최측근에서 호위했다. 당시 최고의 아나키즘 사상가로 평가받았던 이정규는 형 이을규, 우당 이회영과 함께 아나키스트 단체를 조직했다.형제는 의열단으로 활동하는 등 독립운동 최전선에서 일본과 맞서 싸웠다. 이러한 공로를 인정받아 이을규는 1990년 독립유공자 애족장 서훈을 받았고, 이정규는 생전 본인의 뜻에 따라 독립유공자 서훈을 신청하지 않았다.하지만 인천 지역에서는 이들의 독립운동 행적이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다.인천시는 '인천시사'에 나온 인천 지역 인물 409명을 홈페이지에서 간략하게 소개하고 있는데, 이을규·정규 형제에 관한 내용은 빠져 있다. 국가보훈처 공훈록에 이을규의 본적이 충남 논산으로 돼 있기 때문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을규·정규 형제는 생전에 인천 장봉도 출신임을 분명히 밝혀 왔다. 인천에서 이들 형제의 행적을 연구하고 위상을 재정립할 필요성이 나오는 이유다.약산 김원봉 서훈에 따른 논쟁이 불거지면서 아나키스트 독립운동가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는 만큼 이을규·정규 형제에 대한 연구를 본격적으로 시작할 시기다. /김주엽기자 kjy86@kyeongin.com

2019-05-01 김주엽

[인천의 얼굴·(8)서해5도특별경비단 3005함 김종인 함장]中어선과 거친 파도 맞서 '바다 지키는 사투'

한번 출동에 꼬박 7박8일간 불법조업 단속해경 준비 아들 뿌듯… '따뜻한 시선' 바라목숨을 걸고 서해를 지키는 우리 해경의 서해5도특별경비단 김종인(54) 함장입니다. 서해 NLL 해역에서 중국 어선의 불법 조업이 좀처럼 수그러들지 않고 더욱 극성을 부리자 해경은 2017년 4월 서해5도특별경비단을 창설했습니다. 우리 어선이 중국 어선을 직접 나포한 사건이 계기가 되었습니다. 창설 2년을 맞았습니다. 한 번 출동하면 꼬박 7박8일을 배 위에서 지내며 중국 어선과도, 파도와도 싸워야 합니다. 중국 어선들은 파도가 심하게 칠 때 더 많이 들어옵니다. 해경이 힘들어한다는 것을 그들이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바다를 지키는 일, 파도가 높다고 게을리 할 수가 있겠습니까. 칼을 막을 수 있는 방검부력조끼를 입고, 헬멧을 쓰고, K-5 권총을 차고, 6연발 고무탄 총을 메고, 방패를 듭니다. 장비 무게만 5㎏이 넘습니다. 잠긴 문을 열기 위해서는 '빠루'라고 불리는 노루발 장구와 그라인더를 전담하는 인력도 있습니다. 김종인 함장의 3천t급 배에는 40명이 근무합니다.불법 어업을 일삼는 중국의 어부들이 목숨을 걸기에 우리도 목숨을 내걸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진압할 수가 없습니다. 이성을 잃고 무지막지하게 덤비는 중국 어부들에게 목숨을 잃거나 크게 다친 동료들도 많습니다. 김종인 함장은 지금까지 30여 척의 중국 어선을 나포했습니다. 위급상황에 처한 우리 어선이나 낚싯배를 구조한 것은 25척 정도 됩니다. 8일을 나가 있다가 돌아와서 집에서 쉬는 것은 고작 3일입니다. 4일은 출동 준비를 하는 시간입니다. 그렇게 1주일씩 번갈아 바다에 나갑니다. 그런 아빠가 무엇이 좋은지, 대학에 다니는 큰아들이 해경 시험 준비를 합니다. 속으로 뿌듯하지요.김종인 함장은 우리 국민들이 해경을 대하는 태도가 육지 경찰에 비해 좋지 않다는 점을 잘 압니다. 바다라는 특수한 상황에서 늘 목숨을 내놓고 일하는 해경을 따뜻한 시선으로 봐 주셨으면 하는 게 김종인 함장의 최대의 바람입니다. 글/김주엽기자 kjy86@kyeongin.com 사진/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인천의 얼굴'을 찾습니다. (032)861-3200이메일 : say@kyeongin.com

2019-04-28 김주엽

[독립운동과 인천·(10)]인천고 제39회 졸업생들

인천지역에서 독립운동으로 가장 유명한 학교는 인천의 3·1 운동 발상지로 알려진 인천창영초등학교(옛 인천공립보통학교)다. 하지만 당시 인천고등학교(옛 인천공립상업학교) 학생들도 독립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인천고 39회 졸업생은 재학 중 비밀결사조직을 만들었고, 졸업 후에도 활동을 계속했다. 비밀결사조직에는 39회 조선인 졸업생 47명 중 절반이 넘는 24명이 참여했다. 그러나 이 같은 사실을 기억하는 이는 많지 않다. 이 때문에 이들의 행적을 재조명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이들 중 4~5명이 먼저 '오륜조(五倫組)'라는 이름의 친목단체를 만들었다. 이 소규모 모임이 일본인 야마모토 마사나리 교장이 그동안 묵인해오던 조선인 학생들만의 졸업앨범 제작을 반대한 것을 계기로 비밀결사조직으로 발전했다. 야마모토 교장은 졸업 앨범 비용을 국방헌금으로 내라고 윽박질렀다. 하지만 이들은 여기에 굴하지 않고 동구 송림동의 한 사진관에 졸업 앨범 인쇄를 맡겼다고 한다. 당시 중구 인현동에는 훗날 대중일보 창간에 참여했던 이종윤이 운영하는 '선영사'가 있었다. 도심 지역에 조선인 출판사가 있었는데 굳이 송림동의 사진관을 이용한 것이 수수께끼처럼 궁금하다. 이들이 졸업을 앞두고 있던 1940년은 '전시동원체제'가 본격화한 시점이다. 중일전쟁을 일으킨 일제는 전쟁 수행을 위해 국가 총동원법(1938년)을 제정해 자원 수탈을 강행했다.졸업 후에도 학병 거부 운동을 벌이던 이들은 1943년 일본 경찰에 결의문이 적발되면서 모두 구속됐다. 경찰의 모진 고문에 정태윤, 가재연, 고윤희, 김여수 등은 대전형무소에서 숨을 거뒀다. 하지만 국가보훈처 공훈록도 체포 인원과 순국 인원을 혼동할 정도로 이 사건이 제대로 조명돼 있지 않다. 이들의 행적을 연구하고 위상을 재정립할 필요성이 나오는 이유다.'마지막 무관생도들', '김원봉 평전' 등의 책을 쓴 인천고 출신 이원규 작가는 "동기생 중 절반 이상이 독립운동에 참여했다는 것 자체가 중요한 일인데, 제대로 된 평가를 받지 못해 아쉽게 생각한다"고 했다. /김주엽기자 kjy86@kyeongin.com

2019-04-24 김주엽

[독립운동과 인천·(10)]인천고등학교 제39회 졸업생의 '비밀결사단'

'지역 명문고' 일본인 교장의 조선학생 차별에 단체조직… 몰래 졸업앨범 만들기도1941년 졸업후에도 활동 동기생의 절반넘는 청년들이 '학생병 모집 반대' 운동나서일제에 발각돼 송재필등 24명 구속 '참사' 혹독한 고문에 정태윤·김여수등 잇단 순국풀려난 이들도 후유증 앓아 "명예회복 7명뿐" 자료 발굴통해 이제라도 '희생' 알려야인천고등학교(옛 인천공립상업고등학교) 1941년도 졸업생들은 일제강점기 독립운동 역사에서 획기적인 면모를 보여준다. 같은 학교 동기생 중 절반이 넘는 학생들이 참여해 비밀결사단체를 조직했으며 졸업 후에도 이어져 왔다. 조선인 졸업생이 47명이었는데 일제에 발각돼 붙잡힌 이들이 24명이나 되었다. 고문이 얼마나 혹독했던지 많은 수가 그 후유증으로 옥에서, 또는 출옥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그러나 이들의 비밀결사는 우리나라 독립운동사에는 잘 드러나 있지 않다. 인천고 비밀결사 대원들은 일본의 학생병 모집에 대항하는 활동을 주로 벌였다. 그런데 대구나 평양에서 있었던 학병거부운동 관련 연구는 많지만 인천고 졸업생들의 학병거부 운동에 대해서는 많이 다루지 않고 있다. 인천고 비밀결사 활동을 알고 있는 이들은 "한 학교 동기동창 중 절반이 넘는 수가 졸업생의 신분으로 독립운동에 참여하다 희생을 당한 사례가 대한민국 고등학교 역사에는 없었던 일"이라며 "이제라도 이들의 활동을 널리 알릴 필요가 있다"고 이야기한다.일제의 학정이 막바지로 치닫던 1943년 6월. 일본 메이지대학 법학부에 다니던 송재필은 여름 방학을 맞아 충북 영동을 찾았다가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경찰에 붙잡혔다. 송재필이 그의 고등학교 동창이던 안학순과 함께 일본의 강제 학병모집에 반대해야 한다는 내용이 담긴 결의문을 작성해 배포한 것이 적발된 것이다. 이른바 '인상 출신 불령분자들의 비밀 결사 사건'의 시작이다. 경찰의 수사는 1년 넘게 대대적으로 진행됐고, 여러 명이 고문을 받아 옥사하는 등 고초를 겪었다.송재필과 그의 동기생들이 비밀결사 단체를 만든 것은 일본인 야마모토 마사나리 교장의 조선인 차별 때문이었다. 교장의 행동에 불만이 있던 학생들은 졸업앨범 제작을 계기로 폭발하게 되었다.1940년 가을 졸업을 앞두고 있던 이들은 조선인 동기생들끼리 졸업앨범을 만들기로 했다. 이전에도 조선인 동기들끼리 졸업앨범을 만들었는데, 일본인 교사들도 이를 암묵적으로 용인해 왔다고 한다. 그런데 야마모토 교장은 이를 반대했다.비밀결사 대원으로 1941년 인천고 39회 졸업생이자 훗날 대한체육회 부회장을 역임한 이운성은 1974년 1월 발행된 인천고등학교 교지 '미추홀'에서 당시를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졸업반이 되자 학교에서 졸업 앨범을 만드는 것을 거부했어요. 그 앨범 대(앨범 비용)를 국방헌금으로 바치라는 거죠. 그러나 우리들은 한국 학생들의 교과 성적이 우수한데도 '수련'과 '교련' 차별을 받아 수석을 빼앗겼고, 매사 차별과 굴욕을 받아 부처산(현 재능대학교 일대)에서 한국 학생들만의 집회를 갖고 한국 학생이 나아가야 할 길 등 우국충정(憂國衷情)과 항일정신을 북돋았습니다. 또한, 앨범도 없이 헤어진다는 게 섭섭하고 서운해서 한국 학생들끼리만 앨범을 만들기로 하고 당시 송림동에 있는 한국인 경영 사진관에 부탁했습니다."이듬해 3월 졸업한 이들 동기생들은 몰래 졸업앨범을 만들었다는 동질감 때문인지 몰라도 자주 모임을 하며 활동을 계속해 왔다.1940년대 초 당시 조선의 20대 청년들의 가장 큰 화두는 학병거부운동이었다. 1937년 중일전쟁을 시작한 일제는 부족한 병력을 충원하기 위해 1938년 '조선육군특별지원병령'을 공포했다. 만 17세 이상으로 소학교 졸업 이상의 학력을 가진 자는 육군 특별지원병으로 지원할 수 있도록 하는 게 칙령의 골자였다. 이 시기부터 최소 18만4천명이 일본군에 입대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조선인 청년들은 학병 지원을 거부했다. 일부는 산악지대에 은신처를 마련해 동지를 규합하고 집단생활을 하면서 무장 투쟁을 전개했다. 일본군에 입대하느니 옥살이를 하겠다며, 술을 마시고 경찰서를 때려 부수는 일도 있었다.송재필이 학병 거부 운동을 독려하는 결의문을 배포한 것도 학병거부운동이 활발하게 벌어지던 시기였다. 그러던 중 그가 평소 친분이 있던 학생에게 전달한 결의문이 일제의 경찰에 적발됐고, 송재필과 동기생 24명이 경찰에 구속되는 참사로 이어졌다.감옥에 끌려간 이들은 모진 고문을 당했다고 한다. 당시 이들과 함께 붙잡힌 정구택(인천고 39회)은 2005년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악명 높은 이근안의 고문기술은 비교할 바 안 된다. 전기고문에 물고문은 기본이다. 거꾸로 매달아 놓고, 머리맡에 고추와 쑥을 섞어 태우면 호흡을 하지 못해 기절한다. 가죽회초리로 맞아 등이 부어올라 누울 수조차 없었다. 겨울에는 새벽 1~2시까지 고문이 이어지기도 했다. 억지로 자백을 받아냈다"고 증언했다. 고문을 견디다 못해 정태윤이 1944년 12월 가장 먼저 숨졌고, 이듬해 3월 가재연도 순국했다. 김여수, 고윤희 등도 그 뒤를 따랐다.대부분은 해방을 맞기 전 병보석으로 풀려났다. 일본 경찰의 고문이 그만큼 악독했다.송재필도 심각한 고문 후유증에 시달렸다. 그의 둘째 아들 송준호(66)씨는 "비나 눈이 오면 항상 몸이 좋지 않다고 누워만 있던 아버지의 모습이 생각난다"며 "내가 중학교 3학년에 다니던 1968년 고혈압으로 돌아가셨는데, 고문을 받았던 영향이 컸던 것 같다"고 했다.이들은 또 먼저 간 동기생들에 대한 죄책감을 안고 살았다. 송준호씨는 "아버지가 일본에서 대학에 다니셨기 때문에 해방 이후 인천에서 고위직을 맡아 달라는 청탁이 많았는데 '일언지하'에 거절했다는 말을 어머니에게 들었다. 아버지는 돌아가시는 날까지 모교(인천고)에서 교편을 잡았다"고 했다. 이어 "어머니에게는 '먼저 간 친구들에 대한 미안한 마음이 너무 크다'고 말했다고 한다. 죄책감 때문에 다른 일은 하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한다"고 덧붙였다.인천고 동문회에서는 인천고 39회 졸업생들이 만든 졸업앨범을 보관하고 있다. 졸업앨범 안에는 그들의 '사인록'이 있다. 여기에는 '인간본능은 무엇일까?', '선술집은 우리들의 파라다이스' 등 장난 섞인 글귀들이 적혀 있다. 20대 꿈 많던 청년이던 송재필과 그의 동기생들은 시대 상황에 따라 독립운동 현장에 뛰어들었다."여기 오랜 역사와 전통의 찬연한 빛이 머물고 이제는 미움도 싸움도 없는 대화가 맑은 바람과 더불어 지나가는 모교의 교정. 본교 39회 동창생 일동은 일제하의 재학시절부터 졸업 후에까지 민족적 자각으로 조직적인 항일애국운동을 전개하다가 마침내 일경(日警)에 24명이 체포, 투옥돼 4명이 옥사했고, 출감 후에도 일경의 혹독한 고문의 여독으로 11명이 원통하게 호국의 넋이 됐다."인천 미추홀구 인천고등학교 운동장 한쪽에는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을 하다 숨진 동문을 기리는 추모비가 서 있다. 가곡 '그리운 금강산'을 작사한 인천고 동문 한상억 시인이 쓴 비문이다.정구택(인천고 39회)은 2006년 3·1절 기념식에서 대통령 표창을 받은 뒤 인터뷰에서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인데, 고문당해 숨진 동지께 면목이 없습니다. 함께 운동했던 동지들의 얼굴이 떠오릅니다. 24명의 동지 가운데, 명예를 회복한 사람은 7명뿐입니다"라고 말했다.'마지막 무관생도들', '김원봉 평전' 등 항일투쟁과 관련한 책을 써 온 인천고 출신의 이원규 작가는 "당시 인천고는 지역 명문 학교였기 때문에 이들은 좋은 직장과 명문 학교에 다니던 학생이었다. 졸업생 중 절반 이상이 희생당했는데, 이들에 대한 연구가 아직 부족한 실정"이라며 "이제라도 이들에 대한 자료 발굴이 더 이뤄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주엽기자 kjy86@kyeongin.com인천고 39회 졸업생이 직접 만든 졸업앨범과 사인지들. 오른쪽 하단은 송재필 선생의 인천고 재학중 모습. /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송재필 선생 유족 제공 그래픽/박성현기자 pssh0911@kyeongin.com인천 강화군 온수리 성공회 성당에 있는 김여수 순국비. 강화군 온수리 출신인 김여수는 1945년 대전형무소에서 옥사했다. /김용국기자 yong@kyeongin.com인천 미추홀구 주안동 인천고등학교 운동장에 있는 인천고등학교 39회 졸업생을 기리는 추모비. 1985년 세워진 이 추모비는 가곡 '그리운 금강산'을 작사한 한상억(인천고등학교 45회 졸업생) 시인이 글을 남겼다. /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

2019-04-24 김주엽

[푸른인천글쓰기대회]이모저모

경인일보와 가천문화재단이 주최한 '제17회 푸른 인천 글쓰기 대회'가 20일 1만8천여명의 학생·학부모 등이 참석한 가운데 인천대공원 문화마당(옛 야외극장)에서 열렸다.참여자들은 녹색 도시 인천을 바라는 마음을 원고지에 꾹꾹 눌러 담으며 인천대공원에 완연히 찾아온 봄의 정취를 만끽했다.#수국·튤립… 인근 3만7천송이 꽃전시회 인기○…"인천대공원으로 봄꽃 보러 오세요."푸른 인천 글쓰기대회 행사장 인근에서 열린 '푸른 인천 꽃 전시회'도 관람객들에게 인기. 수국, 튤립, 가자니아 등 30종 3만7천여 송이가 전시된 '푸른 인천 꽃 전시회'는 다음 달 6일까지 인천대공원 꽃 전시관에서 열려. 초등학생 딸들과 함께 전시회를 찾은 김희연(41)씨는 두 딸의 모습을 사진에 담기 위해 연신 셔터를 눌러. 그는 "수많은 꽃을 보는 것만으로도 아이들에게 좋은 기억으로 남을 수 있을 것 같다"며 "예쁜 꽃들을 볼 수 있어 좋았다"고 소감. #올바른 손 세정법등 생활속 보건교육은 '덤'○…보건교사와 함께하는 '생활 속 보건 교육'이 행사장에서 성황리에 진행. 참가자들은 '올바른 손 세정 방법', '스마트폰 중독 방지 방법 '등을 직접 체험. '하임리히요법'(이물질로 인해 기도가 폐쇄됐을 때 시행하는 응급처치법)을 체험할 때는 학부모와 학생 모두 보건교사 설명에 집중. 초등학교 2학년 아들과 함께 행사장에 온 최윤정(39)씨는 "평소 심폐소생술이나 하임리히요법을 제대로 배워보고 싶었는데 유익한 시간이 됐다"고 전해.#"좋은 결과 있기를…" 전년도 수상자들 응원○…전년도 대상 수상자들이 대회장을 찾아 참가자를 응원. 지난 제16회 대회에서 대상을 차지한 김륜원(10·인천청라초4) 군은 "평소에는 글을 쓸 기회가 많지 않은데, 대회에선 자기 생각을 마음껏 글로 쓸 수 있다는 점이 좋다"며 "올해 참가 학생들도 자유롭게 자기 생각을 써서 모두 좋은 결과가 있으면 좋겠다"고 바람. 이번 대회에 초등학교 3학년 딸을 참가시켰다는 지난해 학부모 부문 대상자인 김경아(48·여)씨는 "자연과 봄을 만끽하면서 글을 쓸 수 있는 좋은 대회"라며 "모든 참가자들이 아이들의 시선으로, 어른들이 생각치 못하는 좋은 글을 썼으면 좋겠다"고 웃음.#차세대여성지도자聯 10년 넘은 자원봉사 '눈길'○… 자원봉사자들은 이번 대회의 성공적 개최·운영에 큰 역할. 차세대여성지도자연합회는 10년 넘게 푸른인천글쓰기대회 자원봉사자로 참여. 연합회원 25명은 원고지 배부, 접수 등 대회장 곳곳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 김성희 연합회장은 "대회에서 봉사를 할 때마다 아이들의 '감사하다'는 말 한 마디에 힘을 얻고 간다"며 "자연과 어우러져 아이들이 글을 쓰는 모습을 보면 참 대견하다. 앞으로도 계속해서 푸른인천글쓰기대회가 열리길 바란다"고 소감. #화재대피법부터 로봇댄스까지 '119 안전체험'도○…인천소방본부가 대회장 인근에 마련한 '119와 함께하는 안전체험장'이 아이들로부터 큰 호응. 대회장을 찾은 아이들은 진지하고 호기심 가득한 눈빛으로 구조대, 완강기를 이용한 화재대피법과 심폐소생술을 학습. 또 이런 아이들의 모습을 사진으로 남기려는 부모들로 가득. 심폐소생술을 익살스런 동작으로 표현한 'CPR 로봇댄스 공연'도 참가자들에게 인기. /김성호·김주엽·공승배기자 ksh96@kyeongin.com20일 인천시 남동구 인천대공원에서 열린 제17회 푸른인천글쓰기 대회 행사장이 참가자들의 텐트로 가득 메워졌다. /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진지한 꼬마작가-참가한 초등학생들이 진지하게 글을 써내려가고 있다. /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아빠는 고민중-참가자의 아버지가 주제에 대해 생각하고 있다. /김용국기자 yong@kyeongin.com市교육감·학부모 '반갑습니다'-도성훈 인천시교육감이 원고지를 배부하면서 학부모와 악수를 하고 있다. /조재현기자 yong@kyeongin.com'심폐소생술을 춤으로'-로봇댄스 인천소방본부의 '119와 함께하는 안전체험장' 부스에서 심폐소생술을 익살스런 동작으로 표현한 CPR 로봇댄스 공연이 펼쳐지고 있다. /김용국기자 yong@kyeongin.com

2019-04-21 김성호·김주엽·공승배

'푸른 인천 글쓰기대회' 1만8천명 참여 열기

우리 아이들에게 푸르고 맑은 인천을 물려주기 위해 시작된 '푸른 인천 글쓰기대회' 17회 행사가 지난 20일 인천대공원 문화마당(옛 야외극장) 일대에서 개최됐다.경인일보와 가천문화재단이 주최한 이날 행사에는 1만8천여명의 학생과 학부모 등이 참여해 봄꽃의 향연을 만끽하며 '푸른 인천'을 만들어 가겠다는 소망을 원고지에 꾹꾹 눌러 담았다.글쓰기 대회에 참석한 박남춘 인천시장은 "인천을 푸르게 가꾸는 일에 시민 모두가 관심을 가지고 참여해야 한다"며 "2003년부터 시작한 푸른 인천 글쓰기대회는 미세먼지를 줄이자는 시민 공감대 형성에도 큰 도움을 줬다"고 말했다. 도성훈 인천시 교육감도 "학생들이 글쓰기 대회를 통해 소통하고 공감하는 능력을 기를 수 있었으면 좋겠다"며 "푸른 인천을 만드는데 우리 학생들이 앞장서자"고 강조했다.이번 대회 시상식은 오는 6월 13일 인천문화예술회관 국제회의실에서 열릴 예정이며 수상자 명단은 5월 말 경인일보 지면과 홈페이지(www.kyeongin.com·우수상 이상 개별 연락)에 공개할 예정이다. /김명호기자 boq79@kyeongin.com경인일보와 가천문화재단이 주최한 '제17회 푸른 인천 글쓰기대회'가 지난 20일 인천시 남동구 인천대공원에서 1만8천여명의 학생과 학부모 등이 참여한 가운데 개최됐다. 개막식에서 내빈들과 자원봉사자들이 참가 학생들과 학부모들에게 원고지를 배부하고 있다. /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

2019-04-21 김명호

[화보]'제17회 푸른 인천 글쓰기 대회'

경인일보와 가천문화재단이 주최한 '제17회 푸른 인천 글쓰기 대회'가 20일 1만8천여명의 학생·학부모 등이 참석한 가운데 인천대공원 문화마당(옛 야외극장)에서 열렸다. 참여자들은 녹색 도시 인천을 바라는 마음을 원고지에 꾹꾹 눌러 담으며 인천대공원에 완연히 찾아온 봄의 정취를 만끽했다. /경인일보경인일보와 가천문화재단이 주최한 '제17회 푸른 인천 글쓰기 대회'가 20일 1만8천여명의 학생·학부모 등이 참석한 가운데 인천대공원 문화마당(옛 야외극장)에서 열렸다. 참여자들은 녹색 도시 인천을 바라는 마음을 원고지에 꾹꾹 눌러 담으며 인천대공원에 완연히 찾아온 봄의 정취를 만끽했다. /경인일보경인일보와 가천문화재단이 주최한 '제17회 푸른 인천 글쓰기 대회'가 20일 1만8천여명의 학생·학부모 등이 참석한 가운데 인천대공원 문화마당(옛 야외극장)에서 열렸다. 참여자들은 녹색 도시 인천을 바라는 마음을 원고지에 꾹꾹 눌러 담으며 인천대공원에 완연히 찾아온 봄의 정취를 만끽했다. /경인일보경인일보와 가천문화재단이 주최한 '제17회 푸른 인천 글쓰기 대회'가 20일 1만8천여명의 학생·학부모 등이 참석한 가운데 인천대공원 문화마당(옛 야외극장)에서 열렸다. 참여자들은 녹색 도시 인천을 바라는 마음을 원고지에 꾹꾹 눌러 담으며 인천대공원에 완연히 찾아온 봄의 정취를 만끽했다. /경인일보경인일보와 가천문화재단이 주최한 '제17회 푸른 인천 글쓰기 대회'가 20일 1만8천여명의 학생·학부모 등이 참석한 가운데 인천대공원 문화마당(옛 야외극장)에서 열렸다. 참여자들은 녹색 도시 인천을 바라는 마음을 원고지에 꾹꾹 눌러 담으며 인천대공원에 완연히 찾아온 봄의 정취를 만끽했다. /경인일보경인일보와 가천문화재단이 주최한 '제17회 푸른 인천 글쓰기 대회'가 20일 1만8천여명의 학생·학부모 등이 참석한 가운데 인천대공원 문화마당(옛 야외극장)에서 열렸다. 참여자들은 녹색 도시 인천을 바라는 마음을 원고지에 꾹꾹 눌러 담으며 인천대공원에 완연히 찾아온 봄의 정취를 만끽했다. /경인일보경인일보와 가천문화재단이 주최한 '제17회 푸른 인천 글쓰기 대회'가 20일 1만8천여명의 학생·학부모 등이 참석한 가운데 인천대공원 문화마당(옛 야외극장)에서 열렸다. 참여자들은 녹색 도시 인천을 바라는 마음을 원고지에 꾹꾹 눌러 담으며 인천대공원에 완연히 찾아온 봄의 정취를 만끽했다. /경인일보경인일보와 가천문화재단이 주최한 '제17회 푸른 인천 글쓰기 대회'가 20일 1만8천여명의 학생·학부모 등이 참석한 가운데 인천대공원 문화마당(옛 야외극장)에서 열렸다. 참여자들은 녹색 도시 인천을 바라는 마음을 원고지에 꾹꾹 눌러 담으며 인천대공원에 완연히 찾아온 봄의 정취를 만끽했다. /경인일보경인일보와 가천문화재단이 주최한 '제17회 푸른 인천 글쓰기 대회'가 20일 1만8천여명의 학생·학부모 등이 참석한 가운데 인천대공원 문화마당(옛 야외극장)에서 열렸다. 참여자들은 녹색 도시 인천을 바라는 마음을 원고지에 꾹꾹 눌러 담으며 인천대공원에 완연히 찾아온 봄의 정취를 만끽했다. /경인일보경인일보와 가천문화재단이 주최한 '제17회 푸른 인천 글쓰기 대회'가 20일 1만8천여명의 학생·학부모 등이 참석한 가운데 인천대공원 문화마당(옛 야외극장)에서 열렸다. 참여자들은 녹색 도시 인천을 바라는 마음을 원고지에 꾹꾹 눌러 담으며 인천대공원에 완연히 찾아온 봄의 정취를 만끽했다. /경인일보경인일보와 가천문화재단이 주최한 '제17회 푸른 인천 글쓰기 대회'가 20일 1만8천여명의 학생·학부모 등이 참석한 가운데 인천대공원 문화마당(옛 야외극장)에서 열렸다. 참여자들은 녹색 도시 인천을 바라는 마음을 원고지에 꾹꾹 눌러 담으며 인천대공원에 완연히 찾아온 봄의 정취를 만끽했다. /경인일보경인일보와 가천문화재단이 주최한 '제17회 푸른 인천 글쓰기 대회'가 20일 1만8천여명의 학생·학부모 등이 참석한 가운데 인천대공원 문화마당(옛 야외극장)에서 열렸다. 참여자들은 녹색 도시 인천을 바라는 마음을 원고지에 꾹꾹 눌러 담으며 인천대공원에 완연히 찾아온 봄의 정취를 만끽했다. /경인일보경인일보와 가천문화재단이 주최한 '제17회 푸른 인천 글쓰기 대회'가 20일 1만8천여명의 학생·학부모 등이 참석한 가운데 인천대공원 문화마당(옛 야외극장)에서 열렸다. 참여자들은 녹색 도시 인천을 바라는 마음을 원고지에 꾹꾹 눌러 담으며 인천대공원에 완연히 찾아온 봄의 정취를 만끽했다. /경인일보경인일보와 가천문화재단이 주최한 '제17회 푸른 인천 글쓰기 대회'가 20일 1만8천여명의 학생·학부모 등이 참석한 가운데 인천대공원 문화마당(옛 야외극장)에서 열렸다. 참여자들은 녹색 도시 인천을 바라는 마음을 원고지에 꾹꾹 눌러 담으며 인천대공원에 완연히 찾아온 봄의 정취를 만끽했다. /경인일보경인일보와 가천문화재단이 주최한 '제17회 푸른 인천 글쓰기 대회'가 20일 1만8천여명의 학생·학부모 등이 참석한 가운데 인천대공원 문화마당(옛 야외극장)에서 열렸다. 참여자들은 녹색 도시 인천을 바라는 마음을 원고지에 꾹꾹 눌러 담으며 인천대공원에 완연히 찾아온 봄의 정취를 만끽했다. /경인일보경인일보와 가천문화재단이 주최한 '제17회 푸른 인천 글쓰기 대회'가 20일 1만8천여명의 학생·학부모 등이 참석한 가운데 인천대공원 문화마당(옛 야외극장)에서 열렸다. 참여자들은 녹색 도시 인천을 바라는 마음을 원고지에 꾹꾹 눌러 담으며 인천대공원에 완연히 찾아온 봄의 정취를 만끽했다. /경인일보경인일보와 가천문화재단이 주최한 '제17회 푸른 인천 글쓰기 대회'가 20일 1만8천여명의 학생·학부모 등이 참석한 가운데 인천대공원 문화마당(옛 야외극장)에서 열렸다. 참여자들은 녹색 도시 인천을 바라는 마음을 원고지에 꾹꾹 눌러 담으며 인천대공원에 완연히 찾아온 봄의 정취를 만끽했다. /경인일보경인일보와 가천문화재단이 주최한 '제17회 푸른 인천 글쓰기 대회'가 20일 1만8천여명의 학생·학부모 등이 참석한 가운데 인천대공원 문화마당(옛 야외극장)에서 열렸다. 참여자들은 녹색 도시 인천을 바라는 마음을 원고지에 꾹꾹 눌러 담으며 인천대공원에 완연히 찾아온 봄의 정취를 만끽했다. /경인일보경인일보와 가천문화재단이 주최한 '제17회 푸른 인천 글쓰기 대회'가 20일 1만8천여명의 학생·학부모 등이 참석한 가운데 인천대공원 문화마당(옛 야외극장)에서 열렸다. 참여자들은 녹색 도시 인천을 바라는 마음을 원고지에 꾹꾹 눌러 담으며 인천대공원에 완연히 찾아온 봄의 정취를 만끽했다. /경인일보경인일보와 가천문화재단이 주최한 '제17회 푸른 인천 글쓰기 대회'가 20일 1만8천여명의 학생·학부모 등이 참석한 가운데 인천대공원 문화마당(옛 야외극장)에서 열렸다. 참여자들은 녹색 도시 인천을 바라는 마음을 원고지에 꾹꾹 눌러 담으며 인천대공원에 완연히 찾아온 봄의 정취를 만끽했다. /경인일보경인일보와 가천문화재단이 주최한 '제17회 푸른 인천 글쓰기 대회'가 20일 1만8천여명의 학생·학부모 등이 참석한 가운데 인천대공원 문화마당(옛 야외극장)에서 열렸다. 참여자들은 녹색 도시 인천을 바라는 마음을 원고지에 꾹꾹 눌러 담으며 인천대공원에 완연히 찾아온 봄의 정취를 만끽했다. /경인일보경인일보와 가천문화재단이 주최한 '제17회 푸른 인천 글쓰기 대회'가 20일 1만8천여명의 학생·학부모 등이 참석한 가운데 인천대공원 문화마당(옛 야외극장)에서 열렸다. 참여자들은 녹색 도시 인천을 바라는 마음을 원고지에 꾹꾹 눌러 담으며 인천대공원에 완연히 찾아온 봄의 정취를 만끽했다. /경인일보경인일보와 가천문화재단이 주최한 '제17회 푸른 인천 글쓰기 대회'가 20일 1만8천여명의 학생·학부모 등이 참석한 가운데 인천대공원 문화마당(옛 야외극장)에서 열렸다. 참여자들은 녹색 도시 인천을 바라는 마음을 원고지에 꾹꾹 눌러 담으며 인천대공원에 완연히 찾아온 봄의 정취를 만끽했다. /경인일보경인일보와 가천문화재단이 주최한 '제17회 푸른 인천 글쓰기 대회'가 20일 1만8천여명의 학생·학부모 등이 참석한 가운데 인천대공원 문화마당(옛 야외극장)에서 열렸다. 참여자들은 녹색 도시 인천을 바라는 마음을 원고지에 꾹꾹 눌러 담으며 인천대공원에 완연히 찾아온 봄의 정취를 만끽했다. /경인일보경인일보와 가천문화재단이 주최한 '제17회 푸른 인천 글쓰기 대회'가 20일 1만8천여명의 학생·학부모 등이 참석한 가운데 인천대공원 문화마당(옛 야외극장)에서 열렸다. 참여자들은 녹색 도시 인천을 바라는 마음을 원고지에 꾹꾹 눌러 담으며 인천대공원에 완연히 찾아온 봄의 정취를 만끽했다. /경인일보경인일보와 가천문화재단이 주최한 '제17회 푸른 인천 글쓰기 대회'가 20일 1만8천여명의 학생·학부모 등이 참석한 가운데 인천대공원 문화마당(옛 야외극장)에서 열렸다. 참여자들은 녹색 도시 인천을 바라는 마음을 원고지에 꾹꾹 눌러 담으며 인천대공원에 완연히 찾아온 봄의 정취를 만끽했다. /경인일보경인일보와 가천문화재단이 주최한 '제17회 푸른 인천 글쓰기 대회'가 20일 1만8천여명의 학생·학부모 등이 참석한 가운데 인천대공원 문화마당(옛 야외극장)에서 열렸다. 참여자들은 녹색 도시 인천을 바라는 마음을 원고지에 꾹꾹 눌러 담으며 인천대공원에 완연히 찾아온 봄의 정취를 만끽했다. /경인일보경인일보와 가천문화재단이 주최한 '제17회 푸른 인천 글쓰기 대회'가 20일 1만8천여명의 학생·학부모 등이 참석한 가운데 인천대공원 문화마당(옛 야외극장)에서 열렸다. 참여자들은 녹색 도시 인천을 바라는 마음을 원고지에 꾹꾹 눌러 담으며 인천대공원에 완연히 찾아온 봄의 정취를 만끽했다. /경인일보경인일보와 가천문화재단이 주최한 '제17회 푸른 인천 글쓰기 대회'가 20일 1만8천여명의 학생·학부모 등이 참석한 가운데 인천대공원 문화마당(옛 야외극장)에서 열렸다. 참여자들은 녹색 도시 인천을 바라는 마음을 원고지에 꾹꾹 눌러 담으며 인천대공원에 완연히 찾아온 봄의 정취를 만끽했다. /경인일보경인일보와 가천문화재단이 주최한 '제17회 푸른 인천 글쓰기 대회'가 20일 1만8천여명의 학생·학부모 등이 참석한 가운데 인천대공원 문화마당(옛 야외극장)에서 열렸다. 참여자들은 녹색 도시 인천을 바라는 마음을 원고지에 꾹꾹 눌러 담으며 인천대공원에 완연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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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대공원에 완연히 찾아온 봄의 정취를 만끽했다. /경인일보경인일보와 가천문화재단이 주최한 '제17회 푸른 인천 글쓰기 대회'가 20일 1만8천여명의 학생·학부모 등이 참석한 가운데 인천대공원 문화마당(옛 야외극장)에서 열렸다. 참여자들은 녹색 도시 인천을 바라는 마음을 원고지에 꾹꾹 눌러 담으며 인천대공원에 완연히 찾아온 봄의 정취를 만끽했다. /경인일보경인일보와 가천문화재단이 주최한 '제17회 푸른 인천 글쓰기 대회'가 20일 1만8천여명의 학생·학부모 등이 참석한 가운데 인천대공원 문화마당(옛 야외극장)에서 열렸다. 참여자들은 녹색 도시 인천을 바라는 마음을 원고지에 꾹꾹 눌러 담으며 인천대공원에 완연히 찾아온 봄의 정취를 만끽했다. /경인일보경인일보와 가천문화재단이 주최한 '제17회 푸른 인천 글쓰기 대회'가 20일 1만8천여명의 학생·학부모 등이 참석한 가운데 인천대공원 문화마당(옛 야외극장)에서 열렸다. 참여자들은 녹색 도시 인천을 바라는 마음을 원고지에 꾹꾹 눌러 담으며 인천대공원에 완연히 찾아온 봄의 정취를 만끽했다. /경인일보경인일보와 가천문화재단이 주최한 '제17회 푸른 인천 글쓰기 대회'가 20일 1만8천여명의 학생·학부모 등이 참석한 가운데 인천대공원 문화마당(옛 야외극장)에서 열렸다. 참여자들은 녹색 도시 인천을 바라는 마음을 원고지에 꾹꾹 눌러 담으며 인천대공원에 완연히 찾아온 봄의 정취를 만끽했다. /경인일보경인일보와 가천문화재단이 주최한 '제17회 푸른 인천 글쓰기 대회'가 20일 1만8천여명의 학생·학부모 등이 참석한 가운데 인천대공원 문화마당(옛 야외극장)에서 열렸다. 참여자들은 녹색 도시 인천을 바라는 마음을 원고지에 꾹꾹 눌러 담으며 인천대공원에 완연히 찾아온 봄의 정취를 만끽했다. /경인일보경인일보와 가천문화재단이 주최한 '제17회 푸른 인천 글쓰기 대회'가 20일 1만8천여명의 학생·학부모 등이 참석한 가운데 인천대공원 문화마당(옛 야외극장)에서 열렸다. 참여자들은 녹색 도시 인천을 바라는 마음을 원고지에 꾹꾹 눌러 담으며 인천대공원에 완연히 찾아온 봄의 정취를 만끽했다. /경인일보경인일보와 가천문화재단이 주최한 '제17회 푸른 인천 글쓰기 대회'가 20일 1만8천여명의 학생·학부모 등이 참석한 가운데 인천대공원 문화마당(옛 야외극장)에서 열렸다. 참여자들은 녹색 도시 인천을 바라는 마음을 원고지에 꾹꾹 눌러 담으며 인천대공원에 완연히 찾아온 봄의 정취를 만끽했다. /경인일보경인일보와 가천문화재단이 주최한 '제17회 푸른 인천 글쓰기 대회'가 20일 1만8천여명의 학생·학부모 등이 참석한 가운데 인천대공원 문화마당(옛 야외극장)에서 열렸다. 참여자들은 녹색 도시 인천을 바라는 마음을 원고지에 꾹꾹 눌러 담으며 인천대공원에 완연히 찾아온 봄의 정취를 만끽했다. /경인일보경인일보와 가천문화재단이 주최한 '제17회 푸른 인천 글쓰기 대회'가 20일 1만8천여명의 학생·학부모 등이 참석한 가운데 인천대공원 문화마당(옛 야외극장)에서 열렸다. 참여자들은 녹색 도시 인천을 바라는 마음을 원고지에 꾹꾹 눌러 담으며 인천대공원에 완연히 찾아온 봄의 정취를 만끽했다. /경인일보경인일보와 가천문화재단이 주최한 '제17회 푸른 인천 글쓰기 대회'가 20일 1만8천여명의 학생·학부모 등이 참석한 가운데 인천대공원 문화마당(옛 야외극장)에서 열렸다. 참여자들은 녹색 도시 인천을 바라는 마음을 원고지에 꾹꾹 눌러 담으며 인천대공원에 완연히 찾아온 봄의 정취를 만끽했다. /경인일보경인일보와 가천문화재단이 주최한 '제17회 푸른 인천 글쓰기 대회'가 20일 1만8천여명의 학생·학부모 등이 참석한 가운데 인천대공원 문화마당(옛 야외극장)에서 열렸다. 참여자들은 녹색 도시 인천을 바라는 마음을 원고지에 꾹꾹 눌러 담으며 인천대공원에 완연히 찾아온 봄의 정취를 만끽했다. /경인일보경인일보와 가천문화재단이 주최한 '제17회 푸른 인천 글쓰기 대회'가 20일 1만8천여명의 학생·학부모 등이 참석한 가운데 인천대공원 문화마당(옛 야외극장)에서 열렸다. 참여자들은 녹색 도시 인천을 바라는 마음을 원고지에 꾹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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꾹꾹 눌러 담으며 인천대공원에 완연히 찾아온 봄의 정취를 만끽했다. /경인일보경인일보와 가천문화재단이 주최한 '제17회 푸른 인천 글쓰기 대회'가 20일 1만8천여명의 학생·학부모 등이 참석한 가운데 인천대공원 문화마당(옛 야외극장)에서 열렸다. 참여자들은 녹색 도시 인천을 바라는 마음을 원고지에 꾹꾹 눌러 담으며 인천대공원에 완연히 찾아온 봄의 정취를 만끽했다. /경인일보경인일보와 가천문화재단이 주최한 '제17회 푸른 인천 글쓰기 대회'가 20일 1만8천여명의 학생·학부모 등이 참석한 가운데 인천대공원 문화마당(옛 야외극장)에서 열렸다. 참여자들은 녹색 도시 인천을 바라는 마음을 원고지에 꾹꾹 눌러 담으며 인천대공원에 완연히 찾아온 봄의 정취를 만끽했다. /경인일보경인일보와 가천문화재단이 주최한 '제17회 푸른 인천 글쓰기 대회'가 20일 1만8천여명의 학생·학부모 등이 참석한 가운데 인천대공원 문화마당(옛 야외극장)에서 열렸다. 참여자들은 녹색 도시 인천을 바라는 마음을 원고지에 꾹꾹 눌러 담으며 인천대공원에 완연히 찾아온 봄의 정취를 만끽했다. /경인일보경인일보와 가천문화재단이 주최한 '제17회 푸른 인천 글쓰기 대회'가 20일 1만8천여명의 학생·학부모 등이 참석한 가운데 인천대공원 문화마당(옛 야외극장)에서 열렸다. 참여자들은 녹색 도시 인천을 바라는 마음을 원고지에 꾹꾹 눌러 담으며 인천대공원에 완연히 찾아온 봄의 정취를 만끽했다. /경인일보경인일보와 가천문화재단이 주최한 '제17회 푸른 인천 글쓰기 대회'가 20일 1만8천여명의 학생·학부모 등이 참석한 가운데 인천대공원 문화마당(옛 야외극장)에서 열렸다. 참여자들은 녹색 도시 인천을 바라는 마음을 원고지에 꾹꾹 눌러 담으며 인천대공원에 완연히 찾아온 봄의 정취를 만끽했다. /경인일보경인일보와 가천문화재단이 주최한 '제17회 푸른 인천 글쓰기 대회'가 20일 1만8천여명의 학생·학부모 등이 참석한 가운데 인천대공원 문화마당(옛 야외극장)에서 열렸다. 참여자들은 녹색 도시 인천을 바라는 마음을 원고지에 꾹꾹 눌러 담으며 인천대공원에 완연히 찾아온 봄의 정취를 만끽했다. /경인일보경인일보와 가천문화재단이 주최한 '제17회 푸른 인천 글쓰기 대회'가 20일 1만8천여명의 학생·학부모 등이 참석한 가운데 인천대공원 문화마당(옛 야외극장)에서 열렸다. 참여자들은 녹색 도시 인천을 바라는 마음을 원고지에 꾹꾹 눌러 담으며 인천대공원에 완연히 찾아온 봄의 정취를 만끽했다. /경인일보경인일보와 가천문화재단이 주최한 '제17회 푸른 인천 글쓰기 대회'가 20일 1만8천여명의 학생·학부모 등이 참석한 가운데 인천대공원 문화마당(옛 야외극장)에서 열렸다. 참여자들은 녹색 도시 인천을 바라는 마음을 원고지에 꾹꾹 눌러 담으며 인천대공원에 완연히 찾아온 봄의 정취를 만끽했다. /경인일보

2019-04-21 경인일보

[독립운동과 인천·(9)]'성명회 사건' 오주혁과 무의도 유배

을사늑약 반대 상소·계몽운동하다 러 블라디보스토크 망명 해외 독립단체 '성명회' 조직1910년 망국직전 '일제 만행 고발·독립의지 천명' 8624명 서명서 美·佛등 외국정부에 전달'주도 혐의' 일제에 붙잡혀 소무의도에 발묶여… 알려진 내용 없지만 이동휘와 교류 유추이후 대한국민의회등 활동 '사회주의' 색깔론 묻혀 2006년에 애국장 추서… 행적 연구 필요 "장차 어떠한 일이 일어나더라도 진정한 대한국민은 자신의 자유와 국가의 광복을 획득하기 위해 죽을 각오가 되어 있다."1910년 8월 한국이 일본에 강제로 빼앗긴다는 소식은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한인사회에도 전해졌다. 경술국치일 엿새 전인 그해 8월 23일 결성된 해외 독립단체 '성명회(聲明會)'는 일제에 끝까지 맞서 싸우겠다고 선언하고 26일 한인 지도자를 비롯한 8천624명의 서명을 받아 세계 각국 정부에 발송했다.성명회 선언서 사건으로 일본은 러시아에 주동자 체포와 인도를 요구했고, 성명회 블라디보스토크 회장 오주혁(1876~1934)은 이 사건으로 러시아에서 쫓겨나 인천 무의도에서 1년간 유배생활이라는 고초를 겪었다. 오주혁은 2006년에 이르러서야 독립유공자로 추서되는 등 뒤늦게 공적을 인정받았던 터라 그의 행적이나 일대기가 제대로 정리되지 않았다. 이 때문에 그가 소무의도로 유배를 갔다는 일본 기록만 있을 뿐 이곳에서 어떤 생활을 했는지에 대해서는 알려지지 않았다. 학계의 관심과 연구가 절실한 상황이다.함경남도 단천 출신의 오주혁은 1905년 유생들과 함께 을사늑약을 반대하는 상소 운동을 벌이며 일제에 대한 항거를 시작했다. '헤이그 밀사'로 유명한 이상설도 이때 상소 운동을 주도하며 고종에 같은 내용의 상소를 5번이나 올렸다.오주혁은 애국지사들의 상소를 반박하는 선언서를 낸 친일단체 일진회(一進會)를 "개와 말만도 못한 것"이라고 비난하며 "간사한 계교와 여우 같은 아첨으로써 우리 선량한 백성을 몰아다가 남의 보호 지도, 감리하는 밑에 돌아가고자 하느뇨"라고 일갈했다.오주혁은 1906년 함경도 지역 인사들이 국권 회복을 위해 서울에서 결성한 계몽운동단체 '한북학회'(漢北學會)에 참여했다. 황성신문 1907년 12월 19일자는 같은 단천 출신 이동휘 등과 함께 오주혁이 평의원으로 선출됐다는 내용을 싣고 있다. 한북학회는 학교를 설립해 신교육을 실시하는 등 애국계몽운동에 앞장섰다. 한북학회는 훗날 평안도·황해도 출신 지식인들이 조직한 서우학회(西友學會)와 통합해 서북학회(西北學會)로 개편됐다.오주혁은 이후 이상설 등과 함께 해외로 망명해 교육사업을 벌였다. 그리고 소무의도 귀양의 결정적인 계기가 됐던 성명회 선언 사건을 주도했다. 성명회는 망국을 앞두고 연해주 각처로 망명한 유인석·이상설 등이 만든 단체다. 오주혁은 성명회의 핵심 근거지인 블라디보스토크 지역 회장이라는 중역을 맡았다. 연해주의 한인들은 1910년 8월 23일 블라디보스토크의 개척리 한민학교에서 한인대회를 열어 성명회를 조직하였다. 개척리는 블라디보스토크 서쪽 외곽인 초기 한인마을 이름으로 1910년 전후 항일 망명가들의 독립운동기지였다. 이 개척리는 1911년 5월 전염병 유발을 이유로 러시아 당국이 강제 철거해 기병대 주둔지로 삼으면서 사라졌고, 인근에 신개척리가 만들어졌다.개척리에서 만들어진 성명회 설립 목적은 '대한의 국민이 된 사람은 대한의 광복을 죽기로 맹세하고 성취한다'는 것이었다. 성명회라는 이름은 "적(일본)의 죄상을 성토하고 우리의 원통함을 밝힌다"는 의미의 '성피지죄(聲彼之罪) 명아지원(明我之寃)'에서 땄다. 성명회는 이어 8월 26일 합병무효를 천명하는 선언서를 여러 언어로 작성해 미국과 프랑스 정부 등으로 보냈다. 지금의 청원서처럼 뒤에는 서명인 연명부를 첨부했는데 그 숫자가 8천624명에 달했다. 성명회는 선언서를 통해 "한국인의 과업이 아무리 어려운 것이라 할지라도 한국인의 자유에 도달할 때까지 손에 무기를 들고 일본과 투쟁할 것을 각오하고 있다"고 밝히며 해외 열강들이 일제의 만행을 비난하고 한국인을 지지해 달라고 요청했다. 미국 워싱턴의 국립문서보관소에는 100여 장에 달하는 '성명회 선언서' 한 질이 보관되어 있다. 100장이 넘는 이유는 선언서 뒤에 붙은 중국·러시아 한인들의 서명부가 그만큼이나 되기 때문이다. 이 문서는 한일강제병합에 대한 민족의 반대결의와 독립의지를 천명한 최초의 선언서로 한국독립운동사를 상징하는 귀중한 자료 가운데 하나다. 독립운동사 연구자들은 이 선언서가 광복 때까지 줄기차게 전개된 항일독립선언의 원류가 됐다고 평가하고 있다.오주혁은 성명회 사건을 주도했다가 1911년 일제에 붙잡혀 국내로 압송된 것으로 여겨진다. 일제가 해외 독립운동가의 동향을 기록한 '불령단관계잡건(不逞團關係雜件)'의 시베리아 3편을 보면 오주혁은 1911년 7월 15일부터 1년 동안 이 사건으로 경기도 인천부 소무의도에서 거주제한 조치를 당했다. 국가보훈처의 독립유공자 공훈록에는 그가 1912년 유배를 갔다고 나오는데 이 문서의 생산연도가 '메이지(明治) 44년 8월 5일'인 점을 보면 1912년이 아닌 1911년이 확실하다는 게 전문가의 의견이다.소무의도 유배생활이 그의 독립운동 생애에 있어 어떠한 영향을 끼쳤는지 직접 확인하기는 어렵지만 한 가지 주목할 점이 있다. 그가 무의도 유배 처분을 받기 한달 전 동향 출신 독립운동가 이동휘가 '105인 사건'에 휘말려 유배처분을 받고 이미 대무의도에 가 있었다는 사실이다. 강화에서 의병 활동과 교육사업을 이끌었고, 임시정부에서는 초대 국무총리를 지내는 등 독립운동 역사의 중요한 지분을 차지하는 이동휘는 앞서 한북학회에서 오주혁과 만나 교류를 해왔다. 둘은 또 나란히 해외로 망명해 각자의 단체에서 독립을 도모하던 차였다. 동아일보 1935년 2월 15일자 신문은 이동휘의 사망 소식을 전하면서 그의 생애를 정리했는데 기사에 "어떠한 사건으로 오주혁과 같이 황해도 백령도에 귀양을 가게 되었다"는 내용이 나온다. 이동휘가 무의도에서 유배를 했다는 사실은 이미 여러 자료를 통해 확인이 됐기 때문에 기사에 나온 백령도는 무의도의 오기로 보인다. 하지만 그리 길지 않은 부고 기사에서 오주혁과 함께 귀양살이를 했다는 사실이 언급된 것을 보면 둘의 관계가 단지 알고만 지낸 사이는 아니었다는 것을 짐작하게 한다.대무의도와 소무의도는 지금은 인도교로 연결돼 있는 사실상 하나의 섬이다. 두 섬의 거리가 500여m에 불과해 언제든지 왕래가 가능했던 곳이기도 하다. 둘은 당시만 해도 인천의 외딴섬이었던 무의도에서 훗날을 기약하며 해외 독립운동의 원대한 꿈을 나눴을 것으로 유추할 수 있다. 유배 이후의 오주혁에 대한 직접적인 기록과 연구자료는 그리 많지 않지만, 이동휘의 발자취를 따라가다 보면 주요 사건마다 그의 이름이 등장하는 점도 이를 뒷받침한다.러시아 한인사회 우두머리급 지도자였던 이동휘는 1914년 12월 30일 하바롭스크 이남 순회를 마치고 오주혁이 있는 블라디보스토크로 귀환했다. 이상설이 앞서 1월 19일 러시아 지역 항일단체 '권업회'를 탈퇴했다는 소식을 듣고 사후 대책을 모색하기 위해서였다. 충청도 출신의 '기호파' 이상설은 권업회를 주도했던 함경도 출신과 갈등을 빚어왔다. 권업회 기관지 권업신문 1914년 2월 8일자 기사에는 이상설 탈퇴 후 재정비된 권업회 간부 명단이 나오는데 오주혁이 교육부장으로 기재돼 있다. 권업회는 1911년부터 러시아가 대일 관계를 우려해 강제 해산한 1914년까지 교민의 단결과 기념일 행사를 명분으로 항일독립운동 의식을 전파했고, 회원수는 8천500여명에 달했다.오주혁은 1919년 2월 25일 전로한족회중앙총회가 확대·개편해 만든 대한국민의회에 참여한다. 이는 임시정부 성격을 띤 최초의 조직으로 이동휘가 선전부장으로 장정 모집과 군사훈련을 담당했고, 오주혁은 군자금 모집 역할을 맡았다. 이동휘는 이후 상해 임시정부에 합류했다.오주혁은 1920년에는 홍범도의 대한독립군과 대한국민군, 군무독군부가 연합해 결성한 대한북로독군부 제1군사령부 참모로 활동했다. 1922년에는 흑룡강성에 조직된 항일무장단체 혈성단 일원으로 일제에 항거했고, 1936년 고국의 독립을 맞이하지 못하고 타국에서 숨을 거두었다.오주혁은 러시아를 무대로 했던 독립활동가들이 그러하듯 사회주의 색깔론에 의해 외면당하다 2006년에서야 애국장이 추서됐다. 그의 후손들은 중국에 흩어져 있다. 2018년 독립유공자 후손의 특별귀화법에 따라 오주혁 외증손자의 부인 설순화(62·여) 씨가 특별 귀화했다.만주·러시아 지역 한인 독립운동사 연구자인 변병설 한국외대 교수는 "오주혁은 성명회 사건의 주역이었고 러시아와 중국 항일 단체에서 활동을 했지만 큰 주목을 받지 못해 제대로 된 평가와 연구가 이뤄지지 못하고 있다"며 "오주혁의 형제와 자식들도 독립운동을 위해 싸운 것으로 알려졌지만 오주혁만 뒤늦게 애국장을 받았을 뿐이라 아쉽다"고 했다. /김민재기자 kmj@kyeongin.com왼쪽부터 성명회 선언서 불어본, 주한 독일 영사가 본국으로 보낸 성명회 전문과 성명회 선언서에 첨부된 서명인 명부. 총 112장의 서명부 8천624명의 이름이 적혀있다. /국가보훈처 제공오주혁의 소무의도 유배 처분 내용이 담긴 일본 외무성 자료의 첫 장. '不逞團關係雜件-朝鮮人의 部-在西比利亞 3)이라는 제목의 문서는 메이지 44년(1911년) 8월 5일자로 기록돼있다.성명회 사건 등 해외 국권회복운동의 무대였던 블라디보스토크 개척리의 1910년대 전경. /민속원 제공오주혁의 소무의도 유배 처분 내용이 담긴 일본 외무성 자료. 왼쪽에서 두번째 줄에 '경기도 인천부 소무의도에 거주를 제한한다'는 내용이 선명하다. /국사편찬위원회 제공

2019-04-17 김민재

[독립운동과 인천·(9)]오주혁과 무의도 유배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항일 투쟁을 하다 인천 소무의도에서 유배생활을 한 독립운동가 오주혁(1876~1934)을 기억하는 이는 많지 않다. 러시아와 만주 지역에서 벌어진 항일운동에 거의 빠짐 없이 이름이 등장하나 그가 주인공으로서 주목된 적은 없다.함경남도 단천 출신의 오주혁은 블라디보스토크의 한인 마을에서 '성명회(聲明會)'라는 항일 조직을 이끌면서 일제의 강제합병이 부당함을 세계 각국에 호소했다. 이 때 만들어진 성명회 선언서에는 중국과 러시아 한인 8천624명이 서명해 뜻을 같이 했다.성명회 사건으로 러시아에서 쫓겨난 오주혁은 1911년 일제로부터 거주제한의 조치를 받고 인천의 외딴섬으로 귀양 보내졌다. 일제에 의해 강제로 묶인 몸이 됐지만, 그는 뜻을 굽히지 않았다.마침 러시아·만주 항일 운동가의 대부 이동휘가 한 달 먼저 대무의도로 유배를 왔고, 그와 긴밀하게 교류하면서 훗날 해외에서 무장투쟁을 벌일 수 있는 원대한 꿈을 품었다.2006년에서야 독립유공자로 추서된 오주혁은 간단한 연보조차 제대로 정리돼 있지 않다.정부의 공식 자료라고 할 수 있는 국가보훈처 공훈록조차 그가 소무의도에 유배됐던 해를 잘못 기록하고 있다. 인천에서라도 그의 행적을 연구하고 위상을 재정립할 필요성이 나오는 이유다. 독립유공자이면서도 그의 얼굴을 확인할 수 있는 사진조차 구하기 어렵다. 권업회와 대한국민의회, 혈성단 등 해외 항일단체에 참여한 화려한 이력에 비하면 너무나 초라한 연구 상황이다.해외 항일운동을 주로 연구한 변병설 한국외대 교수는 "성명회 사건 하나만으로도 오주혁은 중요한 인물인데 제대로 된 평가를 받지 못해 아쉽게 생각한다"며 "인천에서라도 그를 기억하고 조명해줬으면 하는 바람" 이라고 했다. /김민재기자 kmj@kyeongin.com

2019-04-17 김민재

[인천의 얼굴·(7)남동소방서 김철수 주임 ]'나를 던져 남을 살리는 사명'… 당신은 이 시대 영웅입니다

18년간 1200여건 출동 동료도 많이 잃어딸이 '아빠가 자랑스럽다'고 할때 뿌듯어디 하나 모난 곳이 없습니다. 둥글둥글, 참으로 순한 인상입니다. 이글거리는 화마(火魔)에 맞서는 강력한 전사 소방대원이라고는 누구도 생각 못할 얼굴입니다. 인천 남동소방서 김철수(48) 주임입니다. 18년여간 1천200여 건의 화재현장에 출동했습니다. 이렇게 죽는구나 하고 생각한 적도 많았습니다. 그동안 선후배 동료들도 많이 잃었습니다. 불의 결과는 잿더미입니다. 살아 있는 것이거나 평생을 일군 것이거나를 가리지 않고 한순간에 날려버립니다. 초토화란 말이 여기서 나왔습니다. 망연자실한 피해자들만 남은 현장에는 늘 슬픔뿐입니다.소방관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빠른 판단력과 결기입니다. 큰불인 '대불'이 될지, 작은 불인 '소불'로 끝날지를 순간적으로 결정해야 합니다. 특히 불길 속으로 뛰어들어야 할 때 머뭇거리면 안 됩니다. 그 결기는 소방관이라면 누구나 갖고 있을 겁니다.여러분! 내 목숨을 내놓고 저 사람의 목숨을 건져야 할 순간에 맞닥뜨린다면 망설이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나를 던져 남을 살리는 소방관은 그 자체로 언제나 우리의 영웅입니다.불은 나지 않게 하는 게 최선이지만 났다 하면 빨리 끄는 게 그다음입니다. 이달 초 온 나라를 공포에 몰아넣었던 강원도 산불도 그나마 초동 대처가 잘 되었기에 더 이상의 피해를 줄일 수 있었습니다. 그때 전국의 소방관들이 강원도 현장에 출동했습니다. 다들 정말 물불 가리지 않고 달려들었습니다. 불을 끄는 데 망설임이 있어서는 안됩니다. 자칫하다가는 걷잡을 수가 없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번 강원도 산불 진압 이후 많은 국민들이 소방관의 대우를 걱정해줍니다만 그게 지나쳐 불쌍한 존재로 여긴다면 오히려 사기를 꺾는 겁니다. 영웅을 불쌍한 존재로 보아서야 되겠습니까.김철수 주임은 하나뿐인 딸이 "소방관인 아빠가 자랑스럽다"고 할 때가 가장 뿌듯하다고 말합니다. 이제 우리도 소방관을 자랑스럽게 여기자고요. 글/윤설아기자 say@kyeongin.com※'인천의 얼굴'을 찾습니다. (032)861-3200이메일 : say@kyeongin.com사진/김용국기자 yong@kyeongin.com

2019-04-14 윤설아

[독립운동과 인천·(8)]독립운동 주역 이동휘, 지우개로 지운듯한 유배행적

사회주의 혁명가 굴레 속에 '외면'평화시대 맞아 남북공동연구 필요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초대 국무총리를 지내는 등 일생을 항일 독립운동에 바친 성재 이동휘(1873~1935)는 사회주의 혁명가라는 굴레에 갇혀 오랜 기간 제대로 된 평가를 받지 못했다.남북분단 상황은 최초의 한인 사회주의 조직을 세운 그의 존재를 애써 외면했고, 광복 50주년인 1995년 독립운동 유공자 추서가 되기 전까지만 해도 연대기조차 정리하지 못했다. 이승만과 대립하고 사회주의 노선을 걸었던 그를 조명하기엔 시대적 상황이 너무나 엄혹했다.1990년대 후반부터 이동휘에 대한 연구 기틀이 체계적으로 잡혔지만, 해외 망명의 결정적 계기가 되었을 인천 무의도 유배생활(1911~1912년)을 비롯한 그의 일부 행적이 지우개로 지운 것처럼 쏙 빠져 있는 점은 큰 아쉬움이 남는다. 무의도 유배는 이동휘가 국내 항일운동에 마침표를 찍고, 해외 항일운동을 시작하기 전까지의 중요한 연결고리이지만 학계에서는 아직까지도 크게 주목하지 않고 있다.이동휘에 대한 연구는 대개가 2차 사료를 근거로 하고 있다. 냉전시기 남북분단과 중국, 러시아와의 단절은 그의 주된 활동무대에서 연구할 수 있는 기회를 허락하지 않았다.오늘날 이동휘는 민족주의와 사회주의의 접점에 있다고 평가받고 있다. 그는 민족의 단결을 부르짖으며 임시정부 초대 국무총리를 지냈고, 한인사회당을 조직한 사회주의 혁명가이기도 했다. 임시정부를 부정하는 북한과 사회주의를 부정하는 남한 그 어디에도 속하지 못했던 이유이기도 하다.3·1운동과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은 올해는 무의도 유배생활 등 이동휘 일대기에서 사라진 퍼즐 조각을 하나씩 찾아내 맞춰야 할 적기라고 할 수 있다. 함경남도 출신이지만 인천의 독립운동가라 해도 누구도 부정하지 못할 그를 남북이 공동으로 재조명하는 학술연구도 평화의 시대를 맞아 새로이 요구되고 있다. /김민재기자 kmj@kyeongin.com

2019-04-10 김민재

[독립운동과 인천·(8)]임시정부 초대 국무총리 이동휘와 무의도 유배

함경도 출생 1903년 강화진위대장으로 인천과 인연 이후 계몽운동 펼쳐강화읍에 보창학교 세워 '훈맹정음' 창시 박두성 선생등 인재 다수 배출기독교 전도사로 간도 오가며 독립활동 1911년 '105인 사건'으로 귀양생활무의도 행적 구체 내용 확인안돼… 항일단체와 지속 교류 뒷날 도모 추정임시정부 초대 국무총리를 지낸 성재 이동휘(1873~1935)를 인천의 독립운동가로 평가하는 이유는 그가 해외로 망명하기 전 강화도에서 교육과 종교를 통한 독립운동을 펼친 이력 때문만은 아니다. 이동휘가 인천에 남긴 발자국은 강화도에만 국한돼 있지 않다. 한일강제병합 이후 이동휘는 인천 용유도에 딸린 섬 무의도에서 꼭 1년 동안 유배 생활을 했다. 그러나 이동휘와 관련한 각종 연구 서적이나 독립유공자 공적서를 보면 무의도 유배는 그의 위대한 여정에 잠깐 스쳐 지나가는 사건 정도로만 여겨지고 있다.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아 이동휘가 인천 무의도에 남긴 역사의 흔적을 이제라도 되찾아 복원해야 할 필요성이 제기되고 있다.함경남도 단천에서 태어난 무관 출신의 이동휘는 1903년 강화진위대장으로 임명되면서 인천과의 인연을 시작했다. 그는 강화 부윤과의 갈등으로 이듬해 스스로 군복을 벗은 뒤 기독교 신앙을 바탕으로 한 애국계몽운동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다. 이 무렵 "나라의 은혜에 보답하겠다"며 강화읍에 보창학교를 세웠고, 대중강연과 교육을 통해 민족의식을 일깨우려 노력했다. 1910년 한일강제병합으로 일제의 감시가 매서워지자 그는 기독교 전도사 직책을 갖고 북간도를 넘나들며 항일 독립운동을 모색했다.강화도와 함경도를 중심으로 애국 계몽운동을 펼치던 이동휘가 무의도로 유배를 가게 된 이유는 1911년 일본총독부가 민족해방운동을 탄압하기 위해 조작한 '105인 사건'에 휘말리면서다. 안명근이 국권 회복을 위한 무관학교를 설립하기 위해 모금을 하고 있었는데, 일제는 이를 데라우치 총독의 암살을 위한 군자금 모집으로 날조해 관련 인사들을 모조리 체포했다. 백범 김구도 이 사건에 연루돼 징역 15년이 선고됐고, 이동휘는 무혐의로 풀려나긴 했지만 섬으로 귀양을 보내는 '원도안치' 1년의 행정처분을 받아 무의도에서 유배 생활을 했다. 김구는 백범일지에서 "나는 이동휘와 상면이 없었는데 유치장의 명패를 보고서 역시 체포당한 줄 알았다"며 이 같은 사실을 기록했다.이동휘가 무의도에서 1년 동안 어떻게 지냈는지는 구체적으로 알려지지 않았지만 그를 따르던 항일단체와 끊임 없이 교류하며 뒷날을 도모했던 시기로 여겨진다. 또 기독교에 심취해 성경 공부에 매진했다고 한다.러시아지역 한인신문 '선봉(先鋒)'은 1935년 2월 15일자 신문에 이동휘의 부고 기사를 실으면서 '리동휘 동무의 일생'이라는 제목의 일대기를 썼는데 여기에 짧지만 중요한 대목이 등장한다. 그가 해외에 조직한 항일단체를 유배 생활 기간에도 이끌었음을 짐작하게 하는 내용이다."그는 삼년 안치의 처분을 받고 황해의 외로운 섬-무의도에서 삼년의 세월을 보내었다. 그러나 그가 간도에 있을 때 지도-조직한 철혈 광복단은 쉬지 않고 열렬히 활동하였다."기사에는 유배 기간이 3년이라고 나오지만 실제로는 1년이 맞다. 러시아 한인사회에서 이동휘의 국내 행적이 구전으로만 전해졌기 때문으로 보인다.여기서 등장하는 '철혈 광복단'은 이동휘가 105인 사건으로 일본 경찰에 체포되기 1~2개월 전 간도에서 기독교 전도 활동을 하면서 그를 따르는 항일 그룹 대표자를 소집해 조직한 비밀 항일운동 지도부다. 이동휘는 1911년 3월 한성 경무총감부로 압송됐다가 그해 6월 19일 무의도 유배 처분을 받게 됐다. 광복단 회원 명단과 구체적인 활동 내역은 자료 부족으로 학계에서도 정확히 파악하지 못하고 있지만, 훗날 이동휘가 조직한 사회주의 독립운동단체인 한인사회당과 대한국민회의, 북간도 국민회 등 해외 항일단체의 씨앗이 됐다. 이동휘는 무의도서 유배 생활을 하는 동안 자신이 조직한 광복단의 활동에 보이지 않는 영향력을 미쳤을 가능성이 높다. 실제 무의도 유배 생활은 그가 더는 국내에서 항일운동을 하기 어렵다고 판단해 해외 이주를 결심한 계기가 됐다. 1912년 6월 귀양 생활에서 풀려난 이동휘는 1년 뒤 기독교 전도사로 변장해 북간도로 탈출한다. 1919년 일제가 작성한 '재외배일조선유력자명부'에는 이동휘가 1913년 6월 4일 간도로 이주했다고 나와 있는데 이동휘가 안창호에 쓴 1913년 9월 22일자 편지를 보면 그보다 3~4개월 전에 망명했다고 나온다.상해 임시정부의 첫 번째 국무총리로 잘 알려졌지만, 그가 해외에서 펼친 사회주의 독립운동 이력 탓에 왜곡된 평가를 받기도 했고, 군사정권이 종식된 1990년대에 들어서야 제대로 된 조명을 받기 시작했다. 정부는 광복 50주년을 맞은 1995년에서야 그에게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다. 일부 기록은 구전 중심으로 서술되다 보니 무의도 유배 사건에 대한 기록도 제각각이다.대표적인 사례가 그의 유배 기간이다. 독립유공자의 공식 정보라고 할 수 있는 독립유공자 공훈록에는 이동휘가 1911년 105인 사건으로 함경도에서 체포돼 황해도 무의도에서 3년간 유배되었다고 나와 있다. 또 1912년 가을 외국인 선교사의 도움으로 유배지를 탈출하여 북간도로 망명했다고 설명하고 있다. 3년의 유배 처분을 받았으나 중간에 탈출했다는 내용으로 이는 사실과 다르다. 영종·용유지역 향토지도 독립투사 이동휘가 무의도 3년간 은신했다고 썼다.이는 이동휘 부고 기사에서 일대기를 쓴 신문 '선봉'과 이동휘의 아들이 남긴 여러 버전의 이동휘 전기 내용이 뒤섞인 것으로 보인다. 이동휘의 아들 이일영은 직접 집필한 전기를 1991년 공개했는데 "황해도 무의도 섬에서 정배사의하고 있던 이동휘 선생은 섬 중에 사는 어부들의 도움과 전우들의 활동 아래에서 예수교 전도사로 변장하고 1912년 무의도 섬에서 탈주하여 무사히 두만강을 건너갔습니다"라고 했다.그러나 재미 한인단체가 발행한 신한민보는 1912년 7월 29일자 기사로 이동휘가 1년 간의 유배 생활을 마쳤다는 소식을 전했다. 학계는 이동휘의 일대기 전체를 살펴봤을 때 "작년 6월 18일부터 인천부 대무의섬에 안치를 당하였던 대한교육가 이동휘씨는 1년 기한이 찼음으로 해방되어 그 고향 성진군으로 보내었는데 이씨는 섬에 있을 때에 성경 연구에 전심하였다고 한다"는 신한민보 기사 내용이 사실에 가깝다고 보고 있다.이동휘와 인천의 인연은 그의 유배 생활 종료로 끝났지만, 20여 년이 지난 1935년 2월 그의 죽음이 국내에 전해졌을 때 강화도 주민들은 추모 행사를 계획했을 정도로 이동휘가 인천에 남긴 공적은 뚜렷하다. 강화의 유지들은 이동휘 추모식을 준비했지만 강화경찰서가 허가하지 않아 불발됐다.이동휘가 강화에 설립한 보창학교는 우수한 인재를 다수 배출했다. '훈맹정음'의 창시자 송암 박두성 선생이 대표적이다. 1888년 교동에서 태어난 박두성은 1895년 되던 해 이동휘가 보창학교에서 신교육을 받았고, 이동휘의 주선으로 한성사범학교에 진학해 교육계에 몸담았다. 한일병합의 굴욕을 맞은 1910년 이동휘는 망명을 권유했으나 그는 남아서 후진 양성에 힘쓰기로 헀다. 이에 이동휘가 소나무의 절개를 지키라며 송암(松岩)이란 호를 지어주고 '남이 하지 않는 일에 평생을 바치라'고 당부했다고 한다. 그리고 우리나라 최초의 점자가 박두성에 의해 만들어졌다.이동휘는 교육가이자 웅변가이기도 했다. 이동휘는 1907년 군대 해산령이 내려지자 강화도 진위대원과 주민을 모아놓고 다음과 같은 연설을 했다."우리는 지금부터 배워야 하겠고 알아야 하겠다. 군함도 있어야 하겠고 대포도 있어야 하겠다. 독립군도 양성해야 하겠다. 그러므로 10리 사이에 1교씩을 설립하고 삼천리 강토에 3천교를 설립하여 3천만 동포의 애국정신을 배양하여야 하겠다. 이것은 오늘부터 또 내일부터 시작하여야 하겠다."이동휘는 망명 이후 만주와 블라디보스토크 등지에서 독립운동을 하다 상해 임시정부에 합류했다. 그러나 민주주의를 주창하는 대통령 이승만과 갈등을 빚었고, 독자적인 사회주의 노선을 걷는다. 그는 우리나라 최초의 사회주의 단체인 한인사회당을 조직했고, 러시아 공산당과 교류하며 독립을 꾀한다. 이동휘는 혁명적 방법으로 조국 광복을 이루려는 의지가 강했고, 무장을 통한 항일 투쟁 방식을 선호했다. 그는 시베리아에서 강한 눈보라를 만나 독감에 걸려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에서 치료를 받던 중 1933년 1월 31일 서거했다. /김민재기자 kmj@kyeongin.com그래픽/박성현기자 pssh0911@kyeongin.com1921년 1월 1일 대한민국 임시정부 및 임시의정원 신년축하식 사진. /독립기념관 제공이동휘(앞줄 왼쪽에서 두번째)가 중국 상하이에서 고려공산당 핵심 간부들과 함께 찍은 사진. /독립기념관 제공이승만 대통령의 상하이 도착 환영식. 꽃목걸이를 걸고 있는 이승만 대통령 왼쪽이 이동휘다. /독립기념관 제공1935년 2월 15일자 러시아 한인 소식지 '선봉'에 실린 이동휘의 부고 기사. /독립기념관 제공천안독립기념관에 조성된 이동휘 어록비. /국가보훈처 제공

2019-04-10 김민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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