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인천)

[바다가 들려주는 인천이야기·4]인천 신항 컨테이너 크레인 기사

45m 상공 한 평 남짓 조종실, 선박-야드 트랙터 쉴새 없이 컨 날라300만TEU시대 연 김세중 기사 "쉬워보이지만 섬세한 작업 고된 일"'국내 1호 컨 전용부두 인천항' 신항 STS 크레인 등 보면 격세지감세계 항만들과 컨 처리·속도 경쟁, 올해 '330만TEU 달성' 큰 그림무역과 수출입 동향 등의 소식을 전하는 TV 경제 뉴스를 볼 때마다 화면을 통해 반드시 만나야만 하는 영상이 있다. 드넓은 바다를 배경으로 알록달록한 컨테이너가 빼곡히 쌓여있는 컨테이너 터미널의 모습과 거대한 크레인이 긴 팔을 바다로 뻗어 배에서 컨테이너를 싣고 내리는 모습이다. 마치 하나의 상징처럼 이러한 이미지가 우리 머릿속에 자리 잡게 된 이유는, 수출과 수입이 이뤄지는 전초기지 역할을 하는 컨테이너 터미널이 그만큼 중요하고 우리 경제에 꼭 필요한 존재이기 때문일 것이다.1월 12일 오후 찾아간 인천 신항 선광신컨테이너터미널(SNCT)은 컨테이너를 실은 대형 트럭이 쉴 새 없이 드나드는 등 활기가 넘치는 모습이었다. 수출입 전초기지인 컨테이너 터미널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는 기계는 우리가 흔히 갠트리 크레인(Gantry Crane) 또는 컨테이너 크레인(Container Crane)으로 부르는 STS(Ship To Shore) 크레인이다.컨테이너 터미널은 크레인이 가장 효율적으로 작업할 수 있도록 설계·배치되어 있다.컨테이너 크레인을 조종하는 기사야말로 컨테이너 터미널에서 가장 중요한 핵심 인력이다. 수출입 항만 물류의 시작과 끝이 바로 이 컨테이너 크레인 기사의 손에 달려있기 때문이다.크레인 기사로 일하는 SNCT 김세중(42) STS 반장을 이날 만났다. 김 기사는 지난해 인천항의 300만 번째 컨테이너를 하역한 사람으로 유명세를 타기도 했다. 지난해 인천항의 연간 컨테이너 물동량은 처음으로 300만TEU(1TEU는 20피트 길이 컨테이너 1개)를 넘었다.김 기사는 1천700TEU급 컨테이너 화물선 'NordClaire'호에서 컨테이너를 내리는 작업을 하고 있었다. 전자 부품 등 원·부자재를 주로 실은 이 배는 컨테이너 239개를 내린 뒤, 215개의 컨테이너를 싣고 출항할 예정이었다.김 기사는 45m 높이의 크레인 조종실에서 크레인을 조작한다. 조종석 바닥은 투명한 유리로 돼 있어, 크레인 아래에 있는 컨테이너들을 내려다볼 수 있다.크레인은 배 위에 있는 컨테이너를 집어 올려 부두에 대기하고 있는 트럭 모양의 '야드 트랙터'에 올려놓는다. 야드 트랙터는 이 컨테이너를 터미널 안쪽의 넓은 곳으로 옮긴다. 컨테이너를 배에 싣는 작업은 반대의 순서로 진행된다. 야드 트랙터가 부두 근처로 컨테이너를 싣고 오면 컨테이너 크레인이 집어 배 위에 놓는다.김 기사는 크레인을 능숙하게 조종해 배 위에 있는 컨테이너를 야드 트랙터 위에 한 치의 오차 없이 정확히 내려놓았다. 그는 SNCT 소속 기사 중에서 '생산성'이 높은 기사로 인정받는데, 그는 한 시간에 63개의 컨테이너를 내린 적도 있다고 했다. 능숙함 때문에 길거리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인형 뽑기'보다 조작이 쉬워 보일 정도였다. 하지만 대형 크레인을 움직인다는 것이 간단한 일은 아니다. 그는 "고공 크레인 작업은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고된 작업이면서 동시에 섬세함까지 요구된다"며 "2시간 이상 작업하는 것이 금지돼 있을 정도"라고 했다.컨테이너를 옮기려면, 고공에 매달린 한 평 남짓한 좁은 공간에서 크레인의 긴 팔(붐)을 따라 앞뒤로 10~40m씩 움직이기를 수백 차례 반복해야 한다. 몸은 매번 녹초가 된다. 하역 작업을 진행하면 무게가 달라져 화물선의 높이가 변하는 것은 물론 선수(배 앞부분)와 선미(배 뒷부분)의 높이가 달라 경사가 생기는데, 이를 잘 파악해 크레인을 조작해야 한다.베테랑인 그도 긴장하는 순간이 있다. 컨테이너 화물선 갑판의 해치(덮개)를 옮기는 작업이다. 김 기사는 "해치를 옮길 때는 선박의 구조물을 손상하는 일이 없도록 작업해야 한다"며 "작업 과정에서 사고라도 일어난다면 위험 요소를 제거한 뒤 작업을 재개해야 하기 때문에 회사 입장에서 큰 손실을 보게 된다"고 했다. 컨테이너를 빨리 싣고 내리는 것이 중요하지만, 작은 사고에도 항상 주의를 기울여야 하는 이유다.지금 각국 항만은 컨테이너를 빨리 싣고 내리기 위해 속도전을 벌이고 있다. 하지만 '컨테이너'라는 철제 상자가 항만 물류에 상용화된 것은 불과 60여 년밖에 되지 않았다. 지금과 같은 모습의 현대화된 컨테이너를 발명한 사람은 미국의 운송업자 말콤 맥린(Malcom McLean)이다. 마크 레빈슨(Marc Levinson)이 쓴 'THE BOX'라는 책을 보면 1956년 4월26일 유조선을 개조한 '아이디얼X호'라는 배가 알루미늄으로 만든 35피트(약 10m) 길이의 상자 58개를 미국 뉴저지에서 휴스턴으로 5일 만에 운반한 것이 컨테이너 운송의 시작이다.세계적 석학 피터 드러커(Peter Ferdinand Drucker)는 이 컨테이너를 '세계 경제사를 바꾼 대혁신적 발명품'이라고 불렀고, 포브스는 컨테이너를 실제 화물 운송에 이용한 말콤 맥린을 '20세기 후반 세계를 바꾼 인물 15인' 가운데 한 사람으로 선정했다.인천항은 대한민국 최초의 '컨테이너 전용부두'라는 타이틀을 갖고 있어 관련 역사가 깊다.세계 항만 하역의 기계화가 진행되면서 컨테이너 하역 장비 등이 부두에 설치·운영됐다. 일반 잡화의 컨테이너화로, 컨테이너 운송 구조도 '문전에서 문전까지'(door to door)로 발전했다. 우리나라도 현대화된 하역 장비를 갖춘 컨테이너 전용부두의 필요성이 제기됐다.이 같은 시대적 추세에 맞춰 계획적으로 축조된 것이 인천항 내항 4부두 컨테이너 전용부두다. 이 부두는 1974년 5월10일 인천항 선거와 함께 준공됐다.2008년 인천항만공사가 펴낸 '인천항사'를 보면 4부두의 시설과 하역 능력은 5만t급 1선석을 포함해 5척의 선박이 동시에 접안할 수 있는 규모다. 컨테이너 크레인 3기(30t)가 설치됐으며, 27만 개의 컨테이너를 처리할 수 있는 능력을 갖췄다. 인천항 갑문과 4부두 컨테이너 전용부두 준공식에는 박정희 대통령도 참석했다.해운항만청이 1986년 발행한 '항만편람'에는 1969년 인천항에서 처리한 컨테이너 개수가 2천437개로, 부산항의 944개를 크게 앞섰다는 통계도 있다.대한민국 정부 공인 최초 도선사인 배순태(1925~2017) 전 (주)흥해 회장의 자서전 '난 지금도 북극항해를 꿈꾼다'에도 인천의 컨테이너 부두와 관련한 이야기가 나온다.인천항 갑문이 준공식을 한 달여 남짓 남겨두고 있을 무렵의 이야기이다.'준공 전 시험운전의 대상으로 한진 부두에 설치될 컨테이너 갠트리 크레인을 선적한 중량물 운송선 여수호의 선거 내 입항이 결정됐다. (중략) 당시 책임자였던 부청장인 김준경 씨는 만사 제쳐 놓고 매일 나를 찾아와 도선을 맡아달라고 졸라 대기 시작했다. (중략) 여수호가 최초로 갑문을 통과하는 데 성공한 것은 참으로 기분 좋은 일이었다. 1974년 3월27일 내가 올라탄 여수호의 브리지에는 밝은 햇살이 비쳤다.'지금과 같이 대형 STS 크레인을 갖춘 컨테이너 터미널이 조성되기 전에는 앵글 크레인(이동식 육상 크레인)에 와이어를 걸어 작업했다. STS 크레인과 앵글 크레인은 생산성 부문에서 3배 이상 차이가 난다.1970년대 후반부터 인천항에서 크레인 기사로 일한 SNCT 김갑태(59) 기사는 "앵글 크레인은 지상 인력도 4~6명이 필요해 지금 현대화된 STS 크레인과 비교하면 작업 효율이 많이 떨어졌다"며 "인천항 신항의 STS 크레인을 보면 격세지감이라는 말이 실감이 난다"고 말했다.인천 신항에서는 선광과 한진이 각각 컨테이너 터미널을 운영하고 있다. 컨테이너 크레인은 총 14대가 설치돼 있는데, 1대 가격이 100억 원에 달한다. 중국은 2000년대 중반부터 전 세계 컨테이너 크레인의 90% 정도를 공급하고 있다. 저렴한 인건비 때문이다.지난해 인천항이 처리한 컨테이너는 304만8천516TEU로, 올해 컨테이너 처리 목표는 330만TEU다.김세중 기사는 "컨테이너 크레인 안에서 한 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기도 했다. 그만큼 추억이 많다"며 "인천항의 컨테이너 물동량이 증가했다는 뉴스나 언론 보도가 내 소식처럼 반가웠다"고 했다. 이어 "아내와 세 자녀도 아버지가 수출입 현장의 최일선에서 일하는 것을 매우 자랑스러워한다"며 "컨테이너 처리량이 400만, 500만을 넘어설 때까지 인천항을 위해 일하고 싶다"고 말했다. 글/김성호기자 ksh96@kyeongin.com 사진/임순석기자 sseok@kyeongin.com인천 신항 선광컨테이너터미널(SNCT). 45m 높이의 컨테이너 크레인(Container Crane) 조종석에서 김세중 크레인 기사가 투명한 유리로 돼 있는 아래를 내려다보며 신중하게 크레인을 조종, 선박에 쌓여있는 컨테이너를 하역하고 있다. /임순석기자 sseok@kyeongin.com컨테이너 크레인을 이용해 하역되는 컨테이너가 운반차량에 실리고 있다. /임순석기자 sseok@kyeongin.com드넓은 바다를 배경으로 알록달록한 컨테이너가 빼곡히 쌓여있는 인천 신항 선광컨테이너터미널. /임순석기자 sseok@kyeongin.com부두에 즐비하게 서 있는 컨테이너 크레인들이 수출·입 컨테이너 선적과 하역 작업을 쉴새 없이반복하고 있다. /임순석기자 sseok@kyeongin.com조종석에서 잠시 휴식하고 있는 김세중 크레인 기사. /임순석기자 sseok@kyeongin.com

2018-01-31 김성호

[zoom in 송도]송도국제도시 브리핑… 송도 센트럴파크, 내달까지 해수로 환경개선 사업

■송도 센트럴파크, 내달까지 해수로 환경개선 사업인천경제자유구역청은 29일부터 다음 달 말까지 송도 센트럴파크 해수로 환경개선 사업을 진행한다. 인천경제청은 29일부터 센트럴파크 해수로의 물을 뺀 뒤 부직포와 해초류 등을 제거해 악취와 안전사고 발생을 예방한다. 다음 달 중순부터는 바닷물을 다시 채운다. 센트럴파크 해수로는 국내외 관광객이 많이 찾는 송도의 랜드마크다. 인천경제청 관계자는 "환경개선 사업을 시행하지 않으면 여름철에 악취가 발생한다"며 "부직포와 해초류가 보트 프로펠러에 감겨 안전사고가 발생할 수도 있다"고 설명했다.■이정미 정의당 대표 '테라스에서 만나는 인문학' 강좌정의당 이정미(당 대표) 국회의원은 송도 지역사무소(송도동 드림시티 409호)에서 '테라스에서 만나는 인문학'이란 이름으로 기획강좌를 진행한다. 강좌 내용은 ▲당신의 두뇌를 깨우고 성장시키는 생각지도그리기 '마인드맵'(1월31일) ▲현명한 리더는 스토리텔링으로 마음을 움직인다(2월7일) ▲아테네 시민들에게 배우는 광장 민주주의(2월13일) ▲평창올림픽으로 다시 시작된 남북 대화, 이제 평화의 길로 가자(2월21일) ▲매혹적인 연수구를 만나는 색다른 경험, 달빛기행(2월28일) ▲4차 산업혁명이 가져올 변화와 미래, 우리는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가(3월7일) 등이다. 강좌는 오후 7시에 시작하며 참가비가 있다. 문의 : (032) 833-5540■민경욱 의원·남인천세무서장 '연수세무서 건립' 논의자유한국당 민경욱(연수구을) 국회의원은 최근 남인천세무서장을 만나 (가칭)연수세무서 추진 현황 등을 점검했다. 남인천세무서는 연수구와 남동구 지역 납세자를 담당하고 있는데, 송도 등 대규모 개발사업으로 인해 연수구와 남동구 인구는 증가하고 있다. 인구 급증으로 민원증명발급 건수는 2013년 11만4천 건에서 2017년 18만1천 건으로 늘었다. 이런 점 때문에 민원 처리가 지연되고 세무서 주변에서 주차 혼잡이 발생한다는 게 민경욱 의원 지적이다. 민경욱 의원은 올해 연수세무서가 신설될 수 있도록 행정안전부와 국세청을 설득할 계획이다. /목동훈기자 mok@kyeongin.com송도 센트럴파크 해수로. /인천경제자유구역청 제공

2018-01-28 목동훈

[zoom in 송도]송도 8공구 초·중교 신설계획 살펴보니…

해양1중-해양1초·5초 설립통과해양5초, 학교2곳 통폐합 조건부학교총량제 제외 건의 수용 차질시교육청 "학교 2곳 신설 협의중"예술고 설립 목적 해양3고 '미정'인천 송도국제도시 8공구 (가칭)해양1중학교 설립 계획안이 최근 교육부 중앙투자심사를 통과했다. 해양1중 설립은 송도국제도시 현안 중 하나였다. 송도 8공구에서 아파트 등 주거시설 건설사업이 진행되고 있지만, 중학교 설립 계획은 확정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인천시의회 심의를 통과하면 설계 등 해양1중 설립 절차가 진행될 것으로 보인다. 해양1중 설립 계획 등 송도 8공구의 학교 문제를 들여다봤다.■ 해양1중, 2021년 3월 개교 목표송도 해양1중 설립 계획안은 지난달 27일 교육부 중앙투자심사에서 '적정'으로 결정됐다. 중앙투자심사 세 번째 만에 설립이 결정된 것이다. 2016년 4월과 12월 심사에서는 각각 '재검토' 판정을 받았다.시교육청이 시의회 임시회 안건으로 제출한 '2019~2021년도 시립학교 설립계획 변경안'에는 해양1중이 포함됐다. 변경안을 보면, 해양1중은 37개 학급 규모이며 2021년 3월 개교를 목표로 건립된다.송도 6·8공구 1만7천469세대 개발에 따른 유입 학생을 배치하기 위한 교육시설이다. 해양1중은 연수구 송도동 308의 4 1만2천55㎡ 부지에 건립되며, 건립 비용은 218억 원이다. 학급당 인원은 평균 37.8명으로 돼 있다.시교육청은 시립학교 설립계획 변경안이 다음 달 6일 폐회하는 제246회 시의회 임시회에서 통과될 것으로 보고 있다.■ 송도 8공구, 초교 추가 설립 필요송도 8공구에서 추진되고 있는 초등학교 건립사업은 '해양1초'와 '해양5초'다. 해양1초(면적 1만7천986㎡)는 해양1중 설립 대상지 아래에 계획돼 있으며, 내년 3월 개교 목표로 공사가 추진될 예정이다.해양5초(1만7천767㎡)는 2020년 3월 개교 예정이며 설계 단계에 있다.해양1초와 해양5초 역시 어렵게 교육부 중앙투자심사를 통과했다. 해양5초의 경우, 개교 전까지 인천지역 학교 2개를 통폐합하라는 조건이 달려 있다.교육부의 적정 규모 학교 육성정책(학교총량제) 때문에 인천 구도심의 학교 2개를 통폐합해야 하는 상황인 것이다.송도 등 인천경제자유구역은 학교총량제에서 제외해 줄 것을 지역정치권에서 여러 차례 건의했지만 수용되지 않고 있다.더욱 큰 문제는 송도 8공구 유입 학생을 수용하려면, 해양1초와 해양5초 외에 2개의 초교가 더 필요하다는 것이다.시교육청은 '해양6초'와 '해양7초'까지 필요한 것으로 보고 인천경제자유구역청과 협의를 벌이고 있다.해양6초 설립 부지는 송도 6·8공구 체육시설(골프장) 상부 1만3천171㎡로 돼 있다. 해양6초 설립계획은 당초 없었다. 2015년 12월 송도 8공구 공동주택이 2천700세대 늘어나면서 설립 필요성이 제기됐다. 시교육청은 송도 8공구 중앙부에 해양6초 부지를 달라고 요구했는데, 인천경제청은 체육시설 용지에 학교 부지를 잡았다.해양7초는 송도 8공구 R1, R2 블록과 송도 6공구 일부 지역 학생을 수용하기 위한 시설이다. 상업용지(R1블록)에 주거용 시설인 오피스텔 건립이 추진되면서 초교가 추가로 필요하게 됐다.송도 8공구에는 M1, M2블록 등 주상복합용지도 있다. 시교육청과 인천경제청은 해양7초 설립 부지를 송도 6·8공구 중심부 128만㎡ 개발사업과 연계해 마련하기로 했었다. 하지만 지난해 9월 6·8공구 128만㎡ 사업시행자 국제공모가 무산되면서 해양7초 설립 부지에 관한 구체적인 협의는 이뤄지지 않고 있다.한편, 시교육청이 해양5초 건립 대상지 위에 계획한 '해양3고'는 예고 설립을 위한 것으로 아직 구체적인 학교 설립계획은 없다. /목동훈기자 mok@kyeongin.com

2018-01-28 목동훈

[바다가 들려주는 인천이야기·3]바닷길로 세계를 잇는 외항선 선장

복잡한 항만 인근 벗어나면 항로 자유30년경력 박성택 선장 "정해진 길 없어"날씨·안전·연료 효율 등 고려해 선택1883년 개항 이후 급격히 성장한 인천항청도항로 폐지로 지역경제 큰 타격 받아산업화 시대부터 '수출입 항만' 자리매김국제화물 운송의 99.7% 바다 통해 교역車·식료품은 물론 스포츠·문화도 '전파'세계화 시대, 북극 루트 등 주도권 전쟁육지에는 차량이 다니는 도로와 사람이 다니는 인도가 있다. 하늘은 각 나라의 상공을 통과해야 하기 때문에 항공기가 이용할 수 있는 '하늘길'이 정해져 있다. 바다는 어떨까.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다'가 정답이다. 인천항과 같은 항만 인근에는 배들이 이용해야 하는 '바닷길'인 항로가 있다. 항만마다 많은 선박이 다니고 있어 충돌·좌초 등의 사고를 방지하기 위한 것이다. 예를 들어 인천 내항에서 출발한 배는 문갑도 인근 해역까지 정해져 있는 '서수도'라는 출항항로를 이용해야 한다. 서수도 항로는 출항하는 선박만 이용할 수 있는 '일방통행 길'이다. 마찬가지로 입항하는 선박만 이용할 수 있는 항로도 정해져 있다. 하지만 각국에서 정한 '항만 인근 항로'를 벗어나면 정해져 있는 길은 없다. 이곳에선 선박들이 자유롭게 오갈 수 있다. '없기도 한' 이유다. 국가와 국가를 오가는 선박들은 자신만의 '항로'를 선택해 바다를 항해한다. 초대형 유조선(VLCC, Very Large Crude oil Carrier) C.VISION호는 이란과 쿠웨이트에서 원유를 싣고 호르무즈 해협, 인도 남쪽 연안, 말라카해협, 싱가포르 해협 등을 지나 지난 13일 오후 인천 북항 SK인천석유화학 부두에 도착했다. 항해 기간은 20여 일. 하지만 정해져 있는 항로를 지난 기간은 하루도 되지 않는다. 나머지 기간은 선사와 선장이 배가 가는 길을 '선택'한다.이날 C.VISION호에서 만난 박성택(56) 선장은 "그 넓은 바다에 정해진 길이 있을 수 없다"며 "목적지와 출발지가 같더라도 매번 가는 길이 달라질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그가 말하는 항로 선택의 가장 중요한 기준은 안전이다. 그는 "위험을 무릅쓰고 태풍이 몰아치는 곳으로 갈 이유가 없다"고 했다. 효율성도 중요한 선택 기준이다. 30만t의 원유를 실을 수 있는 C.VISION호는 하루 운항하는 데 약 200t의 연료를 사용한다. 이 때문에 안전을 전제로 수송 기간과 연료 소모를 줄이는 항로를 선택한다.박 선장은 1987년부터 선원으로 일했다. 30년 동안 그가 배를 타고 간 곳은 56개국, 도시는 100곳이 넘는다.그는 "지금은 장비가 발달해서 주변에 섬과 같은 지형지물이 하나도 없어도 배가 있는 위치가 위·경도로 정확히 표시된다"며 "하지만 이러한 장비가 발달하지 않았을 때에는 별과 태양, 조류 등으로 배의 위치를 확인하고 항해했다"고 말했다. 이어 "3항사로 일할 때 1주일 동안 날씨가 좋지 않아서 해와 별을 보지 못했다"며 "해류 정보만 가지고 1주일 동안 항해를 했는데, 원래 목적지와 20㎞밖에 차이가 나지 않았던 적이 있다"고 회상했다.박 선장이 운항하는 배 C.VISION호는 한 번에 약 200만 배럴의 원유를 선적할 수 있다. 이번에도 202만 배럴의 원유를 싣고 왔다. 150만 배럴은 울산에 내리고, 나머지 원유를 인천항에서 하역했다. 이 배가 한 번에 싣고 온 원유량은 우리나라 전체가 하루에 쓰는 양과 비슷한 수준이다. 에너지경제연구원이 펴낸 에너지통계 월보를 보면, 2016년 한 해 동안 우리나라에서 소비한 석유는 1억1천476만toe(석유환산톤)으로 8억5천만 배럴에 해당한다. 우리나라 전체가 하루에 약 230만 배럴을 사용한 셈이다.박 선장은 "선원이라는 직업은 쉽지 않은 일이긴 하지만, 우리나라에 필요한 에너지를 공급한다는 자부심이 있다"며 "집채 만한 파도에 맞닥뜨리거나 해적을 만날 수 있는 위험을 감수하고서 이 일을 하는 이유 중 하나"라고 말했다. 이어 "아직도 소말리아, 싱가포르 인근 해역에서는 해적이 자주 출몰한다"며 "소말리아 해적은 총기 등으로 중무장을 하고 있기 때문에 선원들이 해적 피해를 막기 위해 '해적 불침번'을 선다"고 말했다.국토교통통계연보에 따르면 지난 2015년 바다를 통한 국제화물 운송량은 12억1천678만t으로, 전체 화물의 99.7%에 이른다. 항공화물은 352만t으로 분담률은 0.3%에 불과하다. 수출입 화물의 대부분이 바닷길을 통해 운송되고 있는 것이다.2017년 인천항에 들어왔다가 나간 외항선은 8천378척이다. 이들 배가 향한 곳은 전 세계 142개국 853개 도시다. 우리나라는 이들 배에 물품을 실어 외국에 수출하고, 우리에게 필요한 물품을 수입하기도 한다. 자동차, 전자제품, 식료품, 원유, 장난감, 의류 등 생활에 필요한 물품 대부분은 바다를 거쳐 우리에게 온다.바다는 물품뿐만 아니라 문화가 확산하는 데에도 역할을 한다. 우리나라에 처음 축구가 전파된 것도 영국 함정에 의해서다.대한축구협회가 펴낸 '한국축구 100년사'에는 '영국을 모태로 하는 근대 축구를 한국에 전파한 것은 1882년(고종 19년) 인천항에 상륙한 영국 군함 플라잉 피시(Flying Fish)호 승무원들'이라고 나와 있다.당시 플라잉 피시호 함장 리처드 호스킨(R.F.Hoskyn)은 인천부 제물포 일대 해역을 조사했다. 이때 조사한 해도(海圖)는 아직 남아 있으며 영종도와 월미도 인근 해역의 깊이 등이 표기돼 있다. 이 배가 인천에 정박해 있을 때 선원들이 축구를 하는 모습이 전해진 게 우리나라 근대 축구의 효시인 것이다.플라잉 피시호에 의해 축구가 전해진 이듬해인 1883년 인천항은 개항을 맞았다. 부산과 원산에 이어 세 번째 개항이었다. 인천은 삼국시대부터 바다를 통해 중국과 교류했으나, 이때 개항으로 인천과 당시 우리나라는 큰 변화를 맞았다. 개항 이후 정기적으로 외국을 다니는 상선이 생겨났고, 외국인과 새로운 문물이 인천으로 몰려들었다. 모두 바닷길 항로를 통해서였다. 특히 인천은 개항 직후 교역량이 가장 많은 항만이었다. 1908년 일본인 에바라 슈이치로가 쓴 '인천개항 25년사'에는 '한국 각항 무역을 살펴보면 1893년 무역 총액은 778만8천원인데 인천은 그중 5할 1푼1리를 점하며, 부산은 2할9푼9리'라고 기록돼 있다. 이 시기 교역국은 일본, 중국, 러시아, 영국, 미국 등이었다.인천항을 통한 무역액은 계속해서 증가했으며 지역경제에 큰 영향을 미쳤다. 동아일보는 1924년 3월21일자 신문에 '청도항노(로) 폐지는 인천의 중대타격'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내보냈다. 기사에서 '인천항으로는 사활 문제라고 할만한 문제가 생기어 기점의 편리를 들어 이상의 치명상을 당했다. 이에 인천상업회의소에서는 대책 강구에 나섰다'라고 했다. 인천항과 연결된 항로가 폐지되면서 인천항에 '사활'이 걸린 문제가 생겼다고 쓴 것이다.해방과 한국전쟁 등을 거치면서 바다를 통한 교류는 급속도로 확대됐다. 인천항은 산업화 시대에 대표 수입항만 역할을 했으며, 최근 컨테이너 항만으로 그 위상을 높이고 있다. 원유와 LNG, 자동차 등은 대부분 전용선박에, 냉동·냉장화물과 의류 등은 컨테이너에 실려 운송된다. 최근 컨테이너 화물의 비중이 높아지는 추세에 따라 인천항도 컨테이너 처리량이 증가하고 있다. 현대상선은 인천항에서 유일하게 미국을 잇는 정기 컨테이너 노선 서비스를 제공하는 선사다. 현대상선 이태현 인천지사장은 "정기 컨테이너 노선 서비스가 많아질수록 화주뿐 아니라 국가 경제에도 도움이 된다"고 강조했다. 미국 서비스를 처음 개설한 2015년에는 수입화물밖에 없었고, 그 품목과 물량도 한정적이었다. 하지만 노선 개설 이후 오렌지와 쇠고기 등 냉동·냉장 화물이 수입됐고, 지난해부터는 일부 기업이 이 노선을 이용해 수출을 시작했다.정기 컨테이너 노선 서비스는 점차 늘어나고 있다. 지난 2012년 기준 인천항을 경유하는 정기 컨테이너 항로는 38개였으나, 지난해 말 49개로 늘어났다.역사에서 보듯 배가 다니는 길은 세계를 잇는 역할을 해왔다. 각국은 바다를 정복하기 위해 새로운 항로를 개척해왔고, 이는 '세계화' 역사와 궤를 같이한다. 새로운 항로를 개척하기 위한 시도는 계속되고 있다. 우리나라도 경쟁력 강화를 위해 새로운 항로 개척에 힘쓰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은 올해 초 쇄빙선 건조 현장을 방문한 자리에서 "해양강국의 비전은 포기할 수 없는 국가적 과제다. 역사 이래 바다를 포기하고 강국이 된 나라는 없었다"고 말하며 최근 세계적인 관심사로 떠오르고 있는 '북극 항로 개척'을 강조했다. 북극 항로를 이용하면 아시아와 유럽을 오가는 기간이 크게 짧아진다.글/정운기자 jw33@kyeongin.com 사진/임순석·조재현기자 sseok@kyeongin.com1882년 영국 군함 Flying Fish호 선원들이 함장 R.F. Hoskyn의 명령으로 작성한 인천항 해도. 제물포와 영종도, 월미도 인근 해역의 깊이 등이 표시돼 있다. 인천 중구에 위치한 올림포스 호텔에 걸려 있는 것을 촬영했다. /임순석·조재현기자 sseok@kyeongin.com인천 북항에 정박 중인 C.VISION호. /임순석·조재현기자 sseok@kyeongin.com지난 13일 만난 C.VISION호 박성택 선장. 박성택 선장은 “정해진 바닷길은 없다. 날씨나 기상 등의 여부에 따라서 목적지가 같아도 다른 항로를 선택한다”고 말했다. /임순석·조재현기자 sseok@kyeongin.com30만t의 원유를 실을 수 있는 유조선 C.CHAMPION호가 22일 오전 인천대교를 통과하고 있다. 이 배는 인천항 북항 SK인천석유화학 부두에서 출항했으며, 원유 선적을 위해 중동으로 향한다. 인천신항과 LNG부두를 제외하면 인천항에서 출항하는 모든 선박은 인천대교를 통과해야 한다. /임순석·조재현기자 sseok@kyeongin.com

2018-01-24 정운

[zoom in 송도]송도국제도시 브리핑… G타워, 세계도시 '실시간 영상 서비스'

■G타워, 세계도시 '실시간 영상 서비스'인천 송도국제도시 G타워에서 세계 주요 도시 모습을 실시간으로 볼 수 있게 된다.인천경제자유구역청은 올해 '송도 G타워 세계 주요 도시 Live 영상 서비스' 사업을 추진한다. 인천경제청은 G타워 1층 콩코스홀과 33층 홍보관에 각각 미디어 파사드, 멀티스크린 룸을 설치할 예정이다. 올해 10월 중순부터 세계 주요 도시의 모습을 실시간으로 제공하는 것이 인천경제청의 목표다. 인천경제청 관계자는 "글로벌 도시 이미지를 부각하기 위한 것"이라며 "인천시 자매도시들의 모습도 제공할 수 있도록 할 계획"이라고 했다.■G타워 G갤러리 일반전시 희망자 모집인천경제자유구역청은 2018년 상반기 G타워 G갤러리 사용자(일반전시)를 모집한다.G타워 본동 2층에 있는 G갤러리는 194㎡ 규모다. 전시 기간은 일주일 이내이며 비용은 없다.신청 대상은 G타워에 입주한 국제기구·단체, 인천경제자유구역에서 활동하는 동아리·단체, 비영리 단체 등이다.사용 희망자는 내달 1~14일 인천경제청 운영지원과 재산관리팀(032-453-7154)을 방문하거나 우편으로 사용신청서와 전시계획서를 제출하면 된다.■지능형 통합관제플랫폼 기술 특허 획득인천경제자유구역청이 스마트시티 구축을 위해 자체 개발한 플랫폼의 '중앙집중 의사결정 방식의 지능형 통합관제플랫폼 시스템' 기술(인천스마트시티 주식회사와 공동 특허)이 최근 특허청으로부터 등록 결정 통보를 받았다.이 기술은 다양한 스마트시티 IoT(사물인터넷) 장비와 센서들을 연계하고 데이터를 통합 수집해 의사결정에 활용하기 위한 것으로, 제4차 산업혁명의 핵심인 스마트시티 플랫폼의 기틀이 된다.인천경제청은 스마트시티 플랫폼과 관련해 지난해 2건의 특허를 취득한 데 이어 올해 1건의 특허를 확보하게 됐다.인천경제청 관계자는 "이번 특허 획득은 인천경제자유구역이 전 세계의 스마트시티를 이끌고 해외 진출에 있어 기술적 우위를 확보할 수 있는 기반이 될 것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고 했다. /목동훈기자 mok@kyeongin.com

2018-01-21 목동훈

[zoom in 송도]컨벤션전시산업硏 지난해 분석

경제청 우수박람회 발굴·육성지원금 투자 대비 13.8배 달해인천경제자유구역청의 '송도컨벤시아 우수전시회 개최 지원사업'이 260억 원에 달하는 경제적 파급효과를 거뒀다는 조사 결과가 나왔다.인천경제청에 따르면 한국컨벤션전시산업연구원이 지난해 2~12월 인천경제청의 지원을 받은 5개 전시회의 참관객 지출액 등을 분석한 결과, 경제적 파급효과가 260억 원에 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인천경제청은 우수 전시회 발굴·육성과 지역경제 활성화를 위해 송도컨벤시아에서 열리는 우수전시회를 지원하고 있다. 지난해에는 ▲국제코팅접착필름산업전 ▲인천프랜차이즈 창업박람회 ▲케이펫 페스티벌 송도 ▲인천카페쇼 ▲인천국제식품음식박람회 및 홈·리빙생활용품전시회 등 5개 전시회에 예산을 지원했다. 케이펫 페스티벌 송도 행사에는 120개사가 286개의 부스를 차렸으며, 인천카페쇼는 3만 명 이상이 관람했다. 이들 5개 전시회의 직접지출효과는 94억 원, 생산유발효과는 115억 원, 부가가치유발효과는 51억 원, 취업유발효과는 140명으로 조사됐다. 인천경제청 관계자는 "전시회 개최 지원금 투자 대비 효과는 13.8배(경제적 파급효과 기준)에 이르는 것으로 조사됐다"며 "마이스(MICE)산업이 인천의 미래성장 동력이 되고 송도컨벤시아가 그 중심 역할을 수행할 수 있도록 지원을 아끼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송도컨벤시아 2단계 시설 확충 공사는 오는 7월 완료될 예정이다. 이 사업이 완료되면 송도컨벤시아 전체 연면적은 11만7천27㎡로 확대돼 900개 이상의 부스를 설치할 수 있게 된다. 대형 행사 개최가 가능해지는 것이다. 인천경제청은 송도컨벤시아가 송도 랜드마크 구실을 할 수 있도록 2단계 시설 확충과 함께 야간 경관시설물 구축사업도 추진하고 있다. /목동훈기자 mok@kyeongin.com국제코팅접착필름산업전인천국제식품음식박람회 및 홈·리빙생활용품전(왼쪽부터)인천프랜차이즈 창업박람회·인천카페쇼·케이펫 페스티벌 송도

2018-01-21 목동훈

[zoom in 송도]인천경제청 '송도 국제도시' 새해 주요사업은

아트센터 인천, 콘서트홀 상반기 개관송도 5·7 공구에 유시티 기반시설 갖춰300억 예산투입 송도 상징시설물 조성조류 인공섬 '버드 아일랜드' 4월 첫삽인천경제자유구역청이 최근 유정복 인천시장에게 '2018 주요업무계획'을 보고하고 새해 업무를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인천경제청은 주요업무계획에서 '2017 뉴시티 서밋(New Cities Summit)' 행사 개최로 송도국제도시 등 인천경제자유구역을 전 세계에 알리고 미래도시의 모델을 제시한 점, 삼성바이오로직스 제3공장이 준공돼 단일 도시 기준으로 세계 최대 규모의 바이오의약품 생산 역량을 확보한 점, 세계 5대 패션스쿨로 손꼽히는 FIT(Fashion Institute of technology)가 인천글로벌캠퍼스에 개교한 점 등을 지난해 성과로 꼽았다. 지난해에는 송도 워터프런트 1단계 1-1공구 실시설계 착수, '아트센터 인천' 콘서트홀 준공, 제3연륙교 건설 확정 등의 현안도 해결됐다. 지난해 미흡 또는 개선할 점으로는 송도 6·8공구 개발사업이 차질을 빚은 점, 영종지구 관광단지 조성사업들이 무산되거나 지연된 점 등이 제시됐다.인천경제청은 송도를 고품격 도시로 만들고, 영종과 청라의 투자 환경을 개선하기 위해 올해에도 다양한 사업을 추진할 계획이다. '2018 주요업무계획'에 담긴 송도국제도시 주요 사업을 정리했다.■ '아트센터 인천' 개관 등 중점 추진인천경제청이 중점(핵심)사업으로 꼽은 과제 5건에 ▲아트센터 콘서트홀 개관 ▲송도 워터프런트 조성 ▲송도 6·8공구 개발이익 환수 등이 포함됐다.아트센터 콘서트홀은 1천727석 규모로, 지난달 29일 준공됐다. 인천경제청은 시설 인수, 시험운영, 전문가 확보, 조례 제정 등의 절차를 거쳐 개관할 계획이다. 올 상반기에 문을 열겠다는 계획인데, 하반기 중 개관할 가능성도 있다.송도 워터프런트 조성사업은 수로와 호수를 연결해 친수공간 및 해양생태도시를 만드는 프로젝트다. 인천경제청은 기본·실시설계 및 타당성 조사(3월)와 지방재정 투자심사(5월)를 거쳐 올 10월 공사를 시작하겠다는 계획이다. 1단계 1-1공구 사업은 길이 950m, 너비 40m의 수로를 조성하고 교량 3개를 설치하는 내용이다. 사업비는 490억원이며, 2021년 12월 준공될 예정이다.송도 6·8공구 송도랜드마크시티 개발사업은 내부수익률 12% 초과분에 대한 개발이익을 사업시행자와 인천경제청이 50%씩 갖게 돼 있다.개발이익 정산·분배 시기가 쟁점이다. 인천경제청은 블록별로 나눌 것을 요구하는 반면, 사업시행자는 모든 사업이 완료된 후 정산·분배가 이뤄져야 한다는 입장이다. 인천경제청은 사업시행자와 협의를 벌여 개발이익 정산·분배에 관한 세부합의서를 체결할 계획이다.■ 스마트시티 조성, 기반시설 건설 '지속'ICT 기술을 활용해 편리하고 안전한 도시를 조성하는 스마트시티 구축·운영 사업은 올해에도 계속된다. 송도 5·7공구 유시티 기반시설 구축, 송도 6공구 대2-1호선 유시티 관로 설치 등이 계속사업으로 진행된다. 송도 8공구 유시티 기반시설 실시설계 수립 용역은 올해 새로 추진된다. 기반시설의 경우, 송도 11-1공구 기반시설 기본설계가 올해 8월 완료되고, 12월부터는 송도 6·8공구 2단계 기반시설 건설공사가 시작된다.송도 11공구의 개발계획과 실시계획을 변경하는 작업도 올해 본격화된다. 올해 계획된 공원·녹지사업은 ▲5·7공구 공원·녹지 신규 조성 등(29만 3천㎡, 254억 원) ▲6·8공구 공원·녹지 신규 조성 등(11만5천㎡, 37억 원) ▲달빛축제공원 등 이용자 편익시설 보완(138억원)이다. 올해 송도에서 열리는 문화행사로는 인천송도국제마라톤대회, 인천송도불빛축제, 굿마켓 등이 있다.인천경제청은 송도 상징시설물 기본·실시설계 수립 용역을 오는 7월 발주해 12월부터 공사를 시작할 계획이다. 예상 사업비는 300억원이며, 준공 시기는 2020년 12월이다. 인천경제청은 도시 브랜드 향상, 관광객 유치를 위해 랜드마크 구실을 할 상징시설물을 송도에 설치할 계획이다.송도 11공구 앞바다에 인공섬 형태의 조류 대체 서식지를 만드는 송도 버드 아일랜드 조성사업은 4월부터 공사가 진행된다.인천경제청은 송도전문병원 복합단지 조성과 관련해 1분기에 토지 매매계약을 체결하고 4분기에는 공사에 들어간다는 목표도 세웠다. 송도 국제병원 유치와 관련해선 상반기 중 사업 추진안을 마련할 방침이다. /목동훈기자 mok@kyeongin.com

2018-01-21 목동훈

[바다가 들려주는 인천이야기·2]'바다의 길잡이' 해상교통관제사

대이작도 인근~영종대교 남단 598㎢ 3교대 근무하는 18명, 밤낮없이 살펴하루 수백척에 달하는 선박들과 교신위치·움직임 파악… 정박·운항 지시바람·조류 등 끊임없이 바뀌는 환경첨단장비 발달에도 '사람' 역할 중요"인천항 VTS. 여기는 시노코인천호입니다. 콜사인(선박 호출부호) DSFR9. 현 시각 장안서 2마일 지점 통과 중 인천 관제 구역에 진입했습니다. 팔미도 도선점 통과예정시간은 9시 50분, 목적지는 송도 한진컨테이너터미널입니다."지난 9일 오전 9시 인천 연안부두 인근에 있는 인천항 해상교통관제센터(VTS, Vessel Traffic Service)에서 인천항에 들어오는 선박의 '입항 보고' 무전이 울렸다. 이 배는 중국 옌타이(煙臺)에서 인천항에 들어오는 컨테이너 선박이다. 인천항에 입항하는 화물선과 특수목적선, 대형 어선은 대이작도 인근 해상 3㎞(장안서 2마일) 전에 반드시 인천항 VTS에 입항 보고를 하게 돼 있다. 자유롭게 운항하다가 인천항 VTS 관제 구역에 진입하면 해경의 통제를 받는다.VTS는 인천 앞바다의 안전 길잡이다. 연안에 들어온 배가 안전하게 항만에 정박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이곳에서 일하는 해상교통관제사의 역할이다. 인천항 VTS에서 근무하는 방호철(31) 해상교통관제사는 "관제사의 임무는 인천항에 드나드는 배의 움직임을 관찰하고, 사고 예방을 위해 조언하고 지시하며, 사고가 발생할 경우 이 사실을 재빨리 전파하는 것"이라고 자신의 업무를 설명했다.방 관제사가 근무하던 지난 9일 인천항에 입항하는 도선(導船) 대상 선박은 46척이다. 이날은 전날 밤 10시부터 풍랑주의보가 내려졌기 때문에 다른 날보다 입항 선박이 적은 것이라고 한다. 평상시 인천항 도선 대상 선박은 60여 척 수준이다. 외국적 선박과 2천t 이상의 대형 선박에만 도선사가 탑승하기 때문에 일반 선박까지 합치면 하루 수백 척의 선박이 인천항 VTS와 교신하고 있다.방 관제사가 일하는 관제실은 6층 규모의 인천항 VTS 제일 꼭대기에 있다. 삼면이 바다가 보이도록 탁 트여 있는 관제실이지만, 눈으로 관찰할 수 있는 부분은 인천해양경찰서 전용부두에서 내항 일부분에 불과하다. 대이작도 남방 10㎞ 해상에서부터 영종대교 남단 5㎞ 해상까지 598㎢의 넓은 관제 구역을 관제사들은 이곳에 설치된 24개의 모니터를 통해 확인하고 있다. 모니터에는 전산화된 해도(海圖)가 펼쳐져 있다. 각 선박에서 보내는 신호를 수신한 해도는 인천 앞바다를 지나는 배들의 위치를 표시해준다. 이를 보고 충돌이 예상되면 관제사가 해당 선박에 사고 위험을 알리게 된다. 방 관제사는 "자동차는 브레이크가 있어 제동할 수 있지만, 배는 급브레이크가 없다. 이 때문에 관제사가 보고 있다가 속력과 중량을 가늠해서 사고 위험성을 일찌감치 선박에 알려야 한다. 그날 조류와 풍속 등도 끊임없이 살펴야 안전하게 관제를 할 수 있다"고 했다.이러한 이유로 관제사는 해당 항만이나 연안을 천리안처럼 꿰뚫고 있어야 한다. 배와 바다에 대한 소양을 갖춰야 하므로 5급 항해사 면허와 함께 1년 이상 승선 경력은 필수다. VTS가 과학기술의 발달로 레이더 등 최첨단 장비를 갖추게 됐지만, 여전히 해상교통관제의 중심에 '사람'이 건재한 이유다.타이타닉호 침몰 사고로 필요성 커져1948년 英, VTS 첫 설립 세계로 전파국내, 1980년대 잦은사고 탓 요구 늘어포항제철 지원으로 1993년 포항에 첫선기술없어 노르웨이 전문가에 교육 받아인천 1998년 도입·2006년 현위치 둥지지금은 바다의 안전을 위해 해상교통관제가 필수 요소로 자리 잡아 전 세계 모든 국가가 VTS를 운영하고 있지만, 100여 년 전만 해도 필수 요소는 아니었다. 해상교통관제에 대한 중요성이 커지게 된 것은 우리에게 영화로 잘 알려진 '타이타닉호 침몰 사고' 때문이다.1912년 대서양을 항해하던 타이타닉호는 거대한 빙산에 충돌하는 사고를 당했다. 배에 타고 있던 통신사들은 사고 직후 주변을 항해하던 선박에 구조 요청 신호를 보냈다. 하지만 이에 응답한 배는 단 한 척. 당시에는 무선통신 설비를 24시간 가동해야 하는 규정이 없었다. 결국, 통신 장비를 작동하고 있던 한 척의 배가 구조 보트에 타고 있던 타이타닉 승객 700여 명을 구했지만, 1천500여 명의 승객과 승무원은 목숨을 잃을 수밖에 없었다. 이 사고를 계기로 국제해사기구(IMO)는 '국제해상인명안전협약(International Convention for the Safety of Life at Sea)'을 채택했다. 협약에 따라 모든 배는 무선통신기기를 장착하고, 이를 24시간 가동해야 하며, 각 나라의 해안국은 이를 반드시 수신해야 하는 의무가 생겼다.1·2차 세계대전을 통해 발전한 레이더는 해상교통관제에도 영향을 끼쳤다. 1948년에는 영국 리버풀항에 전 세계 최초로 VTS가 만들어졌으며, 1960년대 이후 역할의 중요성이 강조되면서 급속도로 확대됐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는 1990년대 초반까지 무선통신에 의한 해상 관제가 주를 이루고 있었다. 대형 선박들이 오가는 해상의 안전을 무선통신에만 의지하는 것은 한계가 있었다. 1989년부터 10년 동안 포항지방해양항만청에서 통신사로 근무했던 인천항 VTS 김영국(58) 센터장은 "VTS는 레이더를 통해 선박의 현재 위치를 알 수 있지만, 통신 관제는 선박이 보내주는 신호를 그대로 믿어야 했다"며 "이 때문에 관제사가 지시하는 부두에 정박하지 않고 허위 신고를 하거나 정박해 있는 배들과 접촉 사고를 내고 도주하는 경우도 종종 발생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1980년대부터 급격히 늘어난 선박 사고도 VTS 설립에 대한 목소리를 키우기 충분했다. 해양수산부가 2013년 발간한 해상교통관제백서에 따르면 1980년 우리나라 선박 사고는 255건이었지만, 1990년에는 515건으로 10년 사이에 두 배 이상 증가했다.VTS 설립 필요성은 꾸준히 제기됐지만, 문제는 예산이었다. 당시 11억원에 달하는 VTS 설립 비용을 정부가 감당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포항해운항만청은 포항항 항로 준설공사를 시행할 예정이었던 포항제철에 도움을 요청했다. 포항제철이 VTS 공사에 필요한 자금을 대고, 공사가 완공된 이후 포항항 항만 이용세에서 공사비를 공제하는 방식이었다. 포항제철도 철을 만드는 데 필요한 철강석을 실은 대형 선박이 사고라도 난다면 그 피해가 막대했기 때문에 선박 안전 확보는 시급한 문제였다. 김 센터장은 "당시 이우극 포항항만청장이 '한 건의 선박 사고만 막아내더라도 11억 원의 설치비를 충분히 의미 있게 사용한 것'이라고 말하며 포항제철을 설득했다"고 말했다.포항제철은 VTS 도입에 적극적으로 찬성했고, 1993년 포항 VTS가 전국 최초로 문을 열었다. 김 센터장은 "당시에는 국내에 VTS 기술자가 없었기 때문에 노르웨이에서 기술자가 방문해 장비를 설치하고, 국내 통신사에게 장비 운용 방법을 교육했다"며 "1년 정도 교육을 받은 뒤, 7명의 직원에게 국내 최초의 해상교통관제사 자격증을 발급해줬다"고 말했다.1970년부터 운영되던 인천항 항무통신국에도 1998년 해상교통관제 시스템이 본격적으로 도입됐다. 이후 2006년 건물을 신축해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됐다. 이곳에서 일하는 18명(6명이 1개 팀으로 3교대 근무)의 관제사는 CCTV 18대, 기상장비 7대와 레이더 등 관제장비 24대를 이용해 인천항의 안전을 책임지고 있다.방 관제사는 "우리가 직접 배를 운항하지는 않지만, 선박의 안전을 책임지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며 "관제사는 바다를 의지해서 먹고사는 많은 사람의 버팀목이 돼야 한다. 그들이 안전하게 활동할 수 있도록 뒤에서 묵묵히 도와주고 있다"고 했다. 글/김주엽기자 kjy86@kyeongin.com 사진/임순석기자 sseok@kyeongin.com지난 9일 오전 인천시 중구 항동 연안부두 인근 인천항 해상교통관제센터(VTS, Vessel Traffic Service). 방호철 해상교통관제사가 인천항에 들어오는 선박의 '입항 보고' 무전 교신을 하고 있다. 인천항 연안에 입·출항하는 배가 안전하게 항만에 정박하고 출항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이곳에서 하는 해상교통관제사의 역할이다./임순석기자 sseok@kyeongin.com해상교통관제센터 전경. /임순석기자 sseok@kyeongin.com1992년 12월 전국 최초로 발급된 해상교통관제사 자격증. 당시에는 노르웨이 기술자들이 우리나라 통신사를 대상으로 교육을 진행해 자격증을 발급해줬다고 한다. /인천항 VTS 김영국 센터장 제공1975년 마산지방항만관리청 충무항무통신실 모습. /해양경찰청 제공해상교통관제센터 외경. /임순석기자 sseok@kyeongin.com

2018-01-18 김주엽

[바다가 들려주는 인천이야기]작은 어촌마을서 물건너온 수많은 사연

식민지·전쟁·산업화등 역사 순간도시를 움직인 인물·사건 재조명인천은 바다의 도시다. 바다는 인천이 성장하는 데 있어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고, 지금도 그렇다. 바닷길은 사람과 물품이 오가는 통로가 됐고, 인천 앞바다 섬들은 주민들의 삶의 터전이자 소중한 자원이 됐다. 135년 전, 작은 어촌마을 '제물포'가 개항하면서 인천은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된다. 그전에도 인천은 서해안 주요 도시와 서울, 그리고 중국과 일본까지 뱃길이 이어지는 등 해상 교역의 중심지였다. 그런 점에서 보면, 1883년 개항은 닫혀 있던 도시를 연 것이 아닌, 기존 국제무역항의 기능을 더욱 강화하는 계기로 봐야 할 것이다.일제 강압의 개항이라는 점에서 많은 아픔도 겪었다. 특히 일제강점기 때 식민지 경제 수탈의 창구가 됐고, 조선의 항만노동자들은 일제의 압박과 착취에 맞서 싸워야 했다. 한국전쟁 당시에는 항만시설 대부분이 파괴돼 항만기능을 상실했다.그 어려웠던 개항기, 일제강점기, 한국전쟁을 겪으면서도 인천항은 역사를 써 나갔다. 1918년 갑문식(閘門式) 제1선거가 건설되면서 10m가 넘는 조수 간만의 차를 극복했으며, 1974년 제2선거 건설로 최대 5만t급 대형 선박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됐다. 그해 내항 4부두에는 대한민국 제1호 컨테이너터미널이 건설됐다. 이후 인천항은 남항·북항·신항 개발로 외항시대를 열었으며, 지난해 드디어 '연간 컨테이너 물동량 300만TEU'를 달성했다. 이제 인천항은 세계 30위권 컨테이너항만 진입을 목표로 뛰고 있다.인천항 발전에는 많은 사람의 노력이 있었다. 부두에서 일하는 노동자와 기술자를 비롯해 선장, 등대지기, 어민 등 다양한 직종의 사람들이 인천항을 움직이고, 바다를 삶의 터전으로 삼아 살고 있다.인천에 올해는 큰 의미가 있다. 15년 만에 '바다의 날' 기념식이 개최되며 등대 올림픽이라고 불리는 '국제항로표지협회(IALA) 콘퍼런스'도 열린다. 인천항 갑문이 축조된 지 100년이 되는 해이기도 하다.경인일보는 이같이 의미 있는 해에 연중기획 '바다가 들려주는 인천이야기'를 진행한다. 인천항과 바다에서 일하는 사람들을 만나고 관련한 역사·인물을 소개하고자 한다. 독자들이 1년 동안 일주일에 한 번씩이라도 인천항과 바다에 관한 깊이 있는 기사를 만날 수 있을 터이다. 인천항과 바다에 대한 독자들의 관심이 높아졌으면 한다. /목동훈기자 mok@kyeongin.com

2018-01-11 목동훈

[바다가 들려주는 인천이야기·(1)프롤로그]2018년 바다의 날 기념식 개최지 '인천'

고대부터 대중교역 중심지였던 인천근대개항기 선진문물 유입 통로 역할현대엔 농어촌·물류·관광 복합도시로시민들 항만시설·섬등 소중함 잘몰라지역경제 대들보 '혐오 낙인' 안타까움2018년 대규모 관련 행사 연이어 열려'해양도시'로서 정체성 되돌아볼 적기①프롤로그인천은 다양한 빛깔을 가진 복합도시다. 농촌과 어촌, 공장지대와 주거단지, 70·80년대 모습을 재현해 놓은 듯한 구도심과 마천루가 즐비한 신도시를 갖추고 있다. 해방 이후 또는 한국전쟁 때 이북에서 내려온 실향민부터, 일자리를 찾아 삼남 지방에서 몰려든 사람들이 사는 곳이 '인천'이다.인천의 다양한 색깔 중 하나는 '해양도시'다. 태생부터 그렇다. 바다를 접하고 있는 인천은 삼국시대부터 국제무역항 구실을 했다. 중국과 가까운 데다 서울 접근성도 좋기 때문이다. 이러한 지리적 특성 덕분에 인천은 해상 교역이 발달할 수 있었다.1876년 강화도조약이 체결되면서 부산과 원산에 이어 1883년 인천이 개항된다. 조선 장악과 대륙 진출을 노린 일제의 강제적 개항이었다. 이로 인해 인천항은 쌀과 소금 등 자원 수탈의 창구이자 군사 기지가 되는 아픔을 겪게 된다.개항은 인천이 근대 문물을 받아들이고 인천항의 국제무역항 기능을 강화하는 계기도 됐다. 인천항은 1918년 10월 갑문식(閘門式) 제1선거가 건설되면서 조수 간만의 차를 극복했다. 이전에는 10m가 넘는 조수 간만의 차로 인해 썰물 때 대형 선박의 접안이 불가능했었다. 1974년 5월에는 제2선거가 완공됐고, 선거 남측에 소형 선박을 수용하기 위한 연안부두를 건설하게 됐다. 이후 우리나라 최초의 컨테이너 전용 부두 조성, 하역장비 기계화 등 인천항은 근대적 항만시설을 하나둘씩 구축해 나갔고, 대한민국 산업화를 이끌었다. 1992년 한중수교는 인천항 발전의 중요 계기가 됐다. 인천항을 통한 대(對)중국 수출은 매년 두 자릿수의 높은 증가율을 기록하기도 했다.2004년 남항을 시작으로 북항과 신항이 개발되면서 물동량이 많이 증가했다. 인천항은 2015년 광양항을 제치고 전국 2위의 컨테이너항만으로 자리 잡았으며, 지난해에는 연간 컨테이너 물동량이 300만TEU(1TEU는 20피트짜리 컨테이너 1대분)를 돌파했다. 이제는 세계 30위권 컨테이너항만 진입을 희망하고 있다. 인천항은 새 국제여객부두·터미널 및 배후단지(골든하버) 조성, 항만 기능 재배치 등을 통해 새로운 도약도 준비 중이다.특히 인천항은 인천경제를 지탱하는 축이다. 인하대학교 산학협력단이 2015년 4월 만든 '인천항이 지역 경제에 미치는 경제적 파급효과 분석' 보고서에 따르면 2013년 인천항(인천의 포괄적 항만물류산업)이 지역 경제에 미치는 생산유발효과는 지역내총생산(GRDP)의 33.8%에 달하는 것으로 조사됐다. 이는 2007년(33.3%)보다 0.5%포인트 증가한 수치다. 보고서는 2007년과 2013년 각종 수치를 비교·분석해 경제적 파급효과 등을 추정했는데, 모두 증가했다. 또 '크루즈산업 발전' '신항 개발' 등이 원활하게 이뤄질 경우, 항만물류산업이 지역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더욱 커질 것으로 예측했다.인천은 다른 광역시에 비해 운수업(항만물류산업) 비중이 높은 수준이다. 인천국제공항과 인천항이 있기 때문이다. 운수업 비중이 높아지고 있다는 것은 인천의 공항·항만 관련 산업의 비중이 계속해서 커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인천항은 대북 교류의 중심지다. 남북 관계가 개선될 경우 인천항에서 더욱 많은 경제적 효과와 일자리 창출이 기대된다. 또한 인천시는 해양산업을 육성하겠다는 계획을 갖고 있다.인천 바다에 항만시설만 있는 것은 아니다. 인천은 덕적도, 굴업도, 연평도, 대청도, 백령도 등 아름다운 섬을 갖고 있다. 섬 주민들은 중국어선의 불법 조업, 기후변화에 따른 어족 자원 감소, 식수와 농업용수 부족, 때론 남북의 군사적 긴장감 속에서도 묵묵히 섬을 지키며 살아가고 있다. 그들이 인천 앞바다에서 잡은 수산물은 몇 단계의 유통 과정을 거쳐 우리 식탁에 오르기도 한다.안타까운 것은 시민들이 인천항과 바다, 그리고 섬의 소중함을 잘 모른다는 점이다. 일부에서는 항만을 혐오시설로 여기는 분위기도 감지된다. '인천은 해양도시'라고 외쳐왔지만, 시민들에겐 멀게만 느껴졌던 것이 '바다'인 것 같다.경인일보는 2018년 연중기획에서 인천, 바다, 사람에 관한 이야기를 풀어보려고 한다. 인천항과 바다에서 일하는 사람들을 만나 이야기를 듣고 그와 관련된 역사와 옛 인물을 정리할 계획이다. 팔미도 등대지기의 삶을 이야기하면서 인천 등대의 역사를 알아볼 것이고, 한중카페리 선장을 소개하면서 한중 항로의 변화를 살펴볼 셈이다. 올해 10월 축조 100주년을 맞는 인천항 갑문도 찾아갈 예정이다. 인천항에 얼마나 다양한 직업이 있는지, 그 일이 세월의 흐름에 따라 어떻게 변했는지도 이번 연중기획을 통해 알 수 있을 것이다.'제23회 바다의 날' 기념식은 올 5월31일 인천 중구 내항 8부두에서 열린다. 1929년부터 4년마다 열려 '등대 올림픽'으로 불리는 '제19차 국제항로표지협회 콘퍼런스'는 5월27일부터 일주일간 송도컨벤시아에서 진행된다. 오는 10월에는 갑문 축조 100주년 기념행사가 있을 예정이다. 이들 굵직한 행사 외에 국립 인천해양박물관 예비타당성 조사 결과, 크루즈 전용 부두 준공, 인천항 330만TEU 돌파 여부 등의 관심사도 있다. 경인일보가 올해 연중기획 주제를 '바다'로 정한 이유다. 독자들의 많은 관심과 격려, 조언을 바란다.글/목동훈기자 mok@kyeongin.com인천항 북항 전경. /경인일보DB어시장 전경. /경인일보DB인천항 신국제여객부두에 입항한 크루즈선 '퀀텀 오브 더 시즈(Quantum of the Seas)'호. /경인일보DB인천해사고 실습생들이 오전 인천항에 입항 하선하고 있다. /경인일보DB인천항 내항 2부두에서 항만근로자가 배에서 화물을 내리고 있다. /경인일보DB어민들이 그물에 걸린 꽃게를 걷어 올리고 있다. /경인일보DB인천항 갑문 전경. /경인일보DB인천항 국제여객터미널에서 인천검역소 직원들이 승객들의 체온을 열감지 카메라를 통해 확인하고 있다. /경인일보DB우리나라 최초의 등대인 팔미도 등대. /경인일보DB

2018-01-10 목동훈

[zoom in 송도]'아트센터 인천' 1단계 시설 준공… '바다 + 아트 + 인간' 담은 대표문화공간 설레는 하모니

글로벌 금융위기·주주사 갈등 극복8년6개월만에 준공 '국내 3위' 규모경제청 시험 운영 거쳐 상반기 개관오페라하우스 등 '2단계 사업' 계획 NSIC와 추진여부·운영 방식 '숙제'인천 송도국제업무단지에 건립된 '아트센터 인천' 콘서트홀이 마침내 준공 절차를 완료했다. 공사를 시작한 지 8년 6개월 만이다.그동안 글로벌 금융위기, 사업시행사 내부 갈등 등 우여곡절이 많았다. 인천경제자유구역청은 송도국제업무단지 사업시행사인 NSIC(송도국제도시개발유한회사)로부터 콘서트홀을 넘겨받아 올 상반기 중 개관할 계획이다.'아트센터 인천' 콘서트홀 건립 과정과 과제를 정리했다.■ 착공 8년 6개월 만에 드디어 준공인천경제청은 인천을 대표하게 될 문화시설 '아트센터 인천' 콘서트홀이 지난달 29일 준공됐다고 밝혔다.송도국제업무단지 사업시행사인 NSIC는 2009년 6월 '아트센터 인천' 콘서트홀 공사를 시작했다. 하지만 콘서트홀 건립공사는 글로벌 금융위기로 인해 얼마 지나지 않아 중단됐다. 2012년 10월 공사가 재개됐지만, 이번엔 NSIC 주주사 간 갈등이 발목을 잡았다.NSIC 주주사인 게일인터내셔널과 포스코건설이 갈등을 겪으면서 2015년 하반기부터 또다시 사업이 정상적으로 추진되지 못한 것이다. 이런 어려움 속에서도 콘서트홀은 완성됐다. 그러나 게일과 포스코건설 간 갈등이 지속되면서 준공(사용승인) 신청은 1년 넘게 지연됐다.'아트센터 인천' 콘서트홀은 NSIC가 주거시설(아파트 1천861세대) 개발이익금으로 건립했으며, 인천시에 기부채납하게 돼 있었다.인천경제청은 게일과 포스코건설의 갈등으로 송도국제업무단지 개발이 지연되자, 중재에 나섰다. 인천경제청·게일·포스코건설은 지난해 10월 회의에서 콘서트홀 준공부터 처리하기로 합의했다. 그 후속 조치로 NSIC는 문화예술진흥기금을 납부하고 12월22일 건축물 사용 승인 신청서를 인천경제청에 제출했다.인천경제청은 연수구청 등 관계 기관 협의를 거쳐 12월29일 준공 절차를 마무리했다. 인천경제청은 기부채납 완료, 시험운영 등의 절차를 거쳐 올 상반기 중 콘서트홀을 개관할 계획이다.■ 국내 3위 규모의 콘서트홀'아트센터 인천' 콘서트홀은 지휘하는 마에스트로의 손 모습에서 영감을 얻어 설계됐다. 독특한 외관을 가지고 있어 송도의 또 다른 랜드마크로 자리매김할 것으로 인천경제청은 기대하고 있다.콘서트홀은 '바다+아트+인간'의 개념이 고려된 독창적인 정체성(Identity)을 부각했으며, 외장은 컬러콘크리트를 적용해 건축학적으로도 의미가 있다. 내부는 세계적인 수준의 음향을 위해 내·외부 소음과 진동 차단시설을 갖추는 등 기능적으로도 우수하다. 1천727석으로, 규모 면에서 국내 3위에 해당한다.인천경제청 관계자는 "콘서트홀이 시민들에게 사랑받는 송도국제도시의 대표적인 문화공간으로 자리 잡고 세계적인 공연을 감상하려는 관광객을 끌어들이는 등 인천의 새로운 자랑이 될 것"이라고 했다.■ 콘서트홀 운영은 어떻게NSIC는 당초 '아트센터 인천'을 인천시에 기부채납하면서 운영비를 지원하기로 했었다. 하지만 '운영비 지원'은 일부 부대시설을 기부채납하는 것으로 변경됐다.인천경제청이 NSIC에게서 넘겨받은 부대시설을 임대해 운영비를 마련해야 하는 구조다. 인천경제청은 NSIC로부터 호텔(202실)을 기부채납 받을 예정이다.인천경제청 관계자는 "호텔 수익 일부를 콘서트홀 운영에 쓰고, 부족한 운영비는 예산에서 충당할 계획"이라고 했다. 올해 인천경제청 예산에는 콘서트홀 비품 구매비 및 관리·운영비로 63억 원이 반영돼 있다.내년부터는 콘서트홀 운영에 약 50억 원이 필요할 것으로 인천경제청은 추산하고 있다. 공연기획비를 어느 수준으로 책정하느냐에 따라 운영비 규모가 달라질 수 있다고 한다.■ 운영 조직 및 NSIC 내부 갈등 해소 필요인천경제청 조직에 '아트센터인천운영준비단'이 있지만, 이는 정식 부서가 아닌 TF(태스크포스)팀이다. 콘서트홀이 준공했기 때문에, 이제는 정식 부서를 만들 필요가 있다. 홍보·공연기획 전문가 등 인력 충원도 필요하다.콘서트홀 건립은 '아트센터 인천' 1단계 시설이다. 오페라하우스(1천439석)와 뮤지엄(2만 373㎡)을 짓는 2단계 사업이 계획돼 있다.그러나 NSIC 주주사 갈등, 사업성 악화 등으로 추진 여부와 방식도 아직 확정되지 않았다. NSIC 주주사 간 갈등이 해소되지 않으면, 콘서트홀 기부채납도 늦어질 수 있어 올 상반기 개관에 차질이 생길 수 있다.인천경제청은 향후 2단계 시설과 함께 운영비 마련을 위해 상업시설 2만9천388㎡를 기부채납 받을 예정이며, 1·2단계 사업이 모두 완료되면 (가칭)아트센터인천운영재단 설립을 검토할 방침이다. /목동훈기자 mok@kyeongin.com'아트센터 인천' 1단계 시설인 콘서트홀 외관 /인천경제자유구역청 제공콘서트홀 공연장 모습콘서트홀 연회장 모습

2018-01-07 목동훈

[실향민이야기 꿈엔들 잊힐리야·50(끝)]평안남도 강서군 봉황리 출신 황윤걸 할아버지(下)

부친 자수성가 땅 수천평 가진 '중농' 집안목화가꾸기 좋은 최씨 집성촌 '최촌' 거주밤참 '냉면' 손님 대접용 '노티' 맛 못 잊어고구마·함종밤도 유명… 바다와도 가까워고당 조만식 배출한 교육열 높은 강서지방유격부대 전력 탓 이산상봉 신청조차 못해"나 때문에 피해 본 가족위해 밤마다 기도"황윤걸(85) 할아버지 고향은 평안남도 강서군 함종면 봉황리다. 1952년 군·면·리 폐합에 따라 증산군 안석리로 개편됐다가 1958년 온천군 안석리가 됐다. 황윤걸 할아버지의 부친은 자수성가했다. 부친은 9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 본가가 있는 최씨네 집성촌에서 이집 저집 돌아다니며 농사일을 했다.낫 놓고 기역(ㄱ)자도 모를 정도로 일자무식이었지만, 누구보다 부지런했다. 돈을 모아 조금씩 땅을 샀다. 황윤걸 할아버지가 태어날 즘에는 수천 평을 가진 중농(中農)이 됐다. 근면과 성실로 가난을 극복한 것이다. "부모님은 해 뜨기 전에 논에 나가서 별을 보고 들어오곤 했어. 아버지와 어머니가 고생한 것을 보고 자라서 그런지 그 정신(근면·성실)을 잊은 적이 없어."황윤걸 할아버지가 살던 마을은 '최촌'이다. 최씨네 집성촌이라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최촌은 마을 옆에 큰 다리가 있다고 해서 '큰다리마을'이라고도 불렀다. 그 주변에 '어촌'과 '한촌'이 있어서 3개 마을 간 경쟁이 치열했다고 한다. "어촌은 고기 어(魚)자를 써. 어촌 사람들은 평범하게 살았어. 한촌은 머리 좋은 사람이 많았고, 우리 마을 최촌은 돈이 많았어."조선 후기 실학자 이중환(1690~1756)은 '택리지'에서 오곡과 목화 가꾸기에 알맞은 땅을 살기 좋은 곳이라고 했다. 황윤걸 할아버지 고향인 최촌이 바로 그랬다. 최촌은 목화가 많아서 겨울철 농한기에도 일거리가 있었다. 한 해 농사가 끝나면 아낙네들이 목화로 천을 만들어 팔았다. '택리지'에도 '평안도는 산속 고을 가운데는 심는 곳이 드물지만, 들판 고을에는 목화 가꾸기에 알맞지 않은 곳이 없다'고 기록돼 있다.고려 말 문신 문익점(1329~1398)과 그의 장인 정천익(생몰년 미상)이 목화 재배에 성공한 것은 1365년이다. 목화 재배는 삼남 지방을 중심으로 이뤄지다가 점차 평안도와 황해도 등 전국으로 퍼졌다. 1475년 성종 6년 4월27일자 '성종실록' 기록을 보면 국가 정책적으로 평안도에서 목화 재배가 이뤄졌음을 알 수 있다. "목화는 백성들의 옷감인데 남쪽에서만 생산되고, 평안도와 황해도 등 서북도에서는 생산되지 않습니다. 평안도 등에 목화씨를 보내 백성들이 재배해야 한다"는 신료들의 건의를 받고, 성종은 목화씨를 이들 지역에 보내 심게 한 후 관찰사에게 수확 상황을 보고하게 했다.여성의 일이 많다 보니 자연스럽게 가사 분담도 이뤄졌다. "여자들이 물레로 목화에서 실을 뽑고 베틀로 천을 짜야 하니까 바쁘지. 우리 동네는 겨울철에 남자들이 애를 봐야 했어."최촌 남자들은 겨울철에 윷놀이를 많이 했다. 날씨가 추우니까 방 안에 모여 앉아 팥알의 절반을 쪼개 윷놀이를 했다. 황윤걸 할아버지는 "팥으로 하는 윷놀이지. 바쁜 부녀자들 도와줘야 하니까 남자들이 등에 애를 업고 윷놀이를 했다"고 말했다.겨울철에는 냉면을 밤참으로 먹었다. 동치미 국물에 메밀로 만든 면을 넣어 만들었는데, 고향에서는 냉면이 아닌 '국수'라고 불렀다고 한다."겨울에 목화 일을 도와주면 냉면으로 밤참을 주는 집이 있어. 동치미 국물에 면은 메밀이지. 이북 곡식은 풀기가 많아서 메밀 면을 만들 때 밀가루를 조금만 넣어도 돼. 추운 날씨에도 몸을 부들부들 떨면서 먹었었지. 웬만한 집에는 면 뽑는 기계가 있었어."할아버지는 '칼국수'와 '노티'도 기억이 난다고 했다. 고향의 칼국수는 닭고기를 우려낸 국물로 만들었으며, 큰손님이 왔을 때나 먹을 수 있는 귀한 음식이었다. 전병의 일종인 '노티'는 추석 때 먹을 수 있었다. 할아버지는 "기장가루를 엿기름으로 삭혀서 만들면 설탕을 넣은 것처럼 달게 된다"며 "단지에 차곡차곡 넣어 두었다가 명절 때나 귀한 손님이 오면 기름에 지져서 먹었다"고 했다.작가 황석영은 지난 2001년 '노티를 꼭 한 점만 먹고 싶구나'라는 책을 냈다. 책 제목은 평양 출신의 모친이 암으로 돌아가시기 며칠 전에 몇 번이나 며느리에게 하셨던 말씀이다. 황석영은 1989년 방북했을 당시 평양에서 어머니의 여동생인 막내 이모를 만났다. 이모는 노티를 주면서 만드는 법까지 알려줬다.'요즈음 구수한 기장쌀을 구하기 힘들 테니 찹쌀을 빻아다 시루에 찐다. 엿기름가루에 물을 내려 우려낸다. 익은 찹쌀가루와 엿기름가루를 섞어 우려낸 엿기름 물을 붓고, 소금 간을 하고 참기름 넣어서 반죽을 한다.'"이남 것은 과일도 밭작물도 별로 맛이 없다"고 황석영의 어머니는 말씀하시곤 했다. 황석영은 위도나 기후상 이북 지방의 작물 맛이 월등한 것도 있지만 "어머니의 입맛은 고향을 그리는 향수였던 셈이기도 했다"고 여긴다.황윤걸 할아버지가 살던 집은 'ㄷ'자형 벽돌집이었다. 흙집과 초가집에서 살다가 부친이 마을 변두리에 집을 지었다고 한다. 동향집이며 안채·사랑채·부엌·광·외양간·뒷간으로 이뤄졌다. 'ㄷ'자 가운데 마당에는 우물이 있었다. 겨울에 고구마 등의 곡식은 안방에 보관했다고 한다."농사지은 거 밖에 못 내놔. 얼어버린다고. 안방 구석에 수숫대를 엮어서 그 안에 고구마를 뒀지."1997년 나온 '평안남도지'를 보면, 1938년 강서군에서 가장 많이 생산된 채소는 고구마다. 강서군의 고구마 생산량은 평남 16개 시·군 가운데 용강군 다음으로 많았다.할아버지 고향은 밤도 유명했다. 평남 함종은 밤이 많이 나는 곳으로, 여기서 나오는 밤을 '함종밤'이라고 했다. 최영전씨가 쓴 '한국민속식물'에 따르면 평안도에서 나는 함종밤은 알이 잘고 단 약밤으로, 중국 종의 감율(甘栗)이다. 함종밤은 속껍질이 쉽게 벗겨지는 특징이 있다."그게 함종밤이야. 유명하다고. 크지도 않은데 까면 잘 벗겨져. 푸석푸석하지 않고 차지면서 달아. 한 달 정도 둔 뒤에 발로 누르면 밤알이 쑥쑥 나와. 닦아서 말리면 오래 보관할 수 있지."황윤걸 할아버지 고향 '안석리'는 바닷가 안쪽에 있는 마을이라는 뜻이다. 실제로 바다와 가깝다. 할아버지는 "어렸을 때 망둥이 낚시를 많이 다녔다. 조개도 많이 잡았다"며 "겨울철에 논에서 썰매를 타는데 물에 많이 빠졌다. 바닷가 옆이라서 염분 때문에 딱딱하게 얼지 않는다"고 했다. 할아버지는 서해 바닷가에서 놀았던 추억 때문인지 강화도에 가면 고향에서 낚시했던 생각이 난다고도 했다.황윤걸 할아버지의 부친은 교육열이 대단히 높았다. 황윤걸 할아버지는 2대 독자다. 일제강점기 집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국민학교를 다니다가 해방 후 마을 근처에 개교한 초등학교로 전학을 왔다. 중등교육을 받아서, 한국전쟁 때 잠시 인민학교 교사로 일할 수도 있었다. 정치가이자 독립운동가인 고당 조만식(1883~1950)도 평남 강서군 출신이다. 고당기념사업회가 엮은 조만식 전기(북한 일천만 동포와 생사를 같이 하겠소) 발간사에는 강서군에 대한 설명이 있다.'1910년 한일병탄이 일어나기 전, 평안도에서 교육 열풍이 가장 크게 불어 닥친 곳이 바로 강서 일대였다. 강서 지방은 스스로 개화하고 근대화한 곳이라 할 수 있다. 기독교라는 종교의 힘도 컸지만 교육의 힘이 더욱 컸다.'평양 출신 시인 양명문(1913~1985)은 함종을 찾았다가 밤나무골에 있는 한 연못을 보고 시(詩) 한 편을 얻었다. '샘가에서'라는 시다.'푸른 산 솟은 밑에 솟는 맑은 샘 / 복숭아 꽃이파리 샘물에 떨어지니 / 그 옛날의 네 모습이 샘물 위에 그려진다 / 아 지나간 그 옛날의 아름다운 추억이여 / 아롱진 가지가지 감격에 찬 그때 일이 / 내 가슴에 펴오른다 내 가슴에 사무친다''샘가에서'는 평남 안주 출신의 작곡가 김동진(1913~2009)이 곡을 붙여 가곡으로도 사랑을 받았다.황윤걸 할아버지 가족은 조모, 부모, 누나, 여동생 3명 등 모두 8명이었다. 하지만 혼자 월남했다. 할아버지는 한국전쟁 당시 동키 제9부대(평남부대)에 소속돼 평남지역에서 작전을 수행하다가 휴전 한 달 전에 남한에 왔다. 동키 부대 유격대원으로 활동한 전력 때문에 이산가족 상봉 신청도 하지 못했다. 북한 땅에서 군번도, 계급도 없이 목숨을 걸고 싸웠지만 지금까지 제대로 된 보상도 받지 못했다."그냥 피란 나온 것도 아니고 서해안에서 작전하며 다닌 유격군 출신인데, 이산가족을 찾아? 이북에서 말하는 제일 악질분자가 바로 나야." 할아버지는 "내 신분이 노출됐을 거야. 나 때문에 가족들이 피해를 봤을 것으로 생각하고 있어…. 그러니까 지금도 나는 밤에 기도를 하고 자. 우리 가족에게 문안을 올리는 거지."황윤걸 할아버지는 죽기 전에 꼭 한 번 고향 집에 가보고 싶다고 했다. 특히 몸이 아플 때 고향 생각이 많이 난다고 했다. "왜 그런지는 모르지. 아프면 그냥 고향 생각이 떠올라." 할아버지의 눈시울이 붉어졌다.글/목동훈기자 mok@kyeongin.com 사진/임순석기자 sseok@kyeongin.com배구와 축구 등 운동을 좋아했던 평안남도 강서군 함종면 봉황리 최촌 마을의 청년이 80대 중반의 노인이 됐다. 황윤걸 할아버지는 한국전쟁 당시 홀로 고향을 떠나 유격대원으로 활동하다가 월남했다. 인천 부평 벽돌공장에서 일하는 등 고생도 많이 했지만, 그것보다 유격대원으로 활동한 자신 때문에 이북에 있는 가족이 피해를 본 것 같아 죄스럽다고 했다. 황윤걸 할아버지는 매일 밤 잠자리에 들기 전에 기도를 한다. 이북에 있는 가족에게 문안을 올리는 것이다. 할아버지는 이렇게 실향민으로서의 아픔과 괴로움을 간직한 채 살아왔다. 가족과 다시 만날 날을 기다리며. /임순석기자 sseok@kyeongin.com딱 한 장 남은 사진! 황윤걸 할아버지는 배구와 축구 등 운동을 잘했다. 평안남도 강서군 신정면에 있는 신정중학교를 다닐 때는 배구선수를 했다. 이 사진은 강서군에서 주최한 배구대회에서 우승한 것을 기념해 촬영한 것으로, 뒷줄 오른쪽에서 두 번째가 황윤걸 할아버지다. 1948년이나 1949년이라고 할아버지는 기억했다. 황윤걸 할아버지는 "중학교 3학년 때 군(郡) 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한 후 학교에 와서 찍은 사진"이라고 했다. 한편, 신정면은 1952년 군·면·리 폐합에 따라 증산군에 편입되면서 폐지됐다. /황윤걸 할아버지 제공일러스트/박성현기자 pssh0911@kyeongin.com

2017-12-27 목동훈

[실향민이야기 꿈엔들 잊힐리야·49]평안남도 강서군 봉황리 출신 황윤걸 할아버지(中)

8남매 둔 황인옥씨 부부 친아들처럼 챙겨평남부대·육군 복무하다 건강 탓에 제대부친 따라 몇년간 부평 벽돌공장서 일해당시 사택을 본적으로, 회사 주소와 일치브로커 통해 의정부 미군부대서 15년 근무이후 서울 수유리서 통닭집 열어 큰돈 벌어인천으로 터전 옮기자 장사안돼 다시 서울로1980년에 돌아와 우유 보급소·대리점 운영도한국전쟁 때 평안남도 앞바다 섬에서 동키 평남부대 유격대원으로 활동하던 황윤걸(85) 할아버지는 휴전을 한 달 정도 앞둔 1953년 6월 중순 인천 용유도에 왔다. 약 400명의 대원이 용유도에 왔는데, 이 중 절반은 각자 살길을 찾아 떠났다. 황윤걸 할아버지 등 나머지 대원들은 이듬해 2월 부대가 육군에 편입될 때까지 용유도 24인용 막사에서 군 생활을 했다.황윤걸 할아버지는 용유도에서 새로운 부모님을 만났다. 1911년생 황인옥 씨 부부다."부대가 주둔해 있으려면 주민들 협조가 필요하잖아. 면장도 지내고 학식이 있는 사람이라고 해서 찾아갔더니 그 집이 마침 황씨야. 그래서 나랑 결연이 됐어. 부모가 된 거야." 황윤걸 할아버지는 "슬하에 8남매가 있었는데, 나까지 9명이 됐다"며 "어머니가 나를 친아들처럼 잘 챙겨주셨다"고 덧붙였다.그때는 용유도와 영종도가 지금처럼 하나의 섬이 아니었다. 이 지역은 염전과 농경지 조성을 위한 소규모 매립만 있었는데, 1992년 인천국제공항 건설을 위해 대규모 매립사업이 이뤄졌고, 이때 용유도와 영종도 사이의 갯벌이 매립됐다. 영종·용유지역은 기존 토지 면적보다 매립된 토지 면적이 더 크다. '인천 중구사'에 따르면, 1990년대 국가사업으로 공항과 배후 신도시 건설이 이뤄지면서 4천813만5천㎡ 규모의 해안 매립이 시행됐다. 이 일대에서는 영종도 준설토 투기장 조성, 영종2지구 개발 등 지금도 공유수면 매립이 진행되고 있다.황윤걸 할아버지는 "옛날에는 영종도와 용유도 사이에 돌다리가 있어서 바닷물이 빠지면 건너다닐 수 있었다"며 "인천공항 전망대 아래쯤에 돌다리가 있었던 것 같다"고 말했다.할아버지는 평남부대가 육군에 편입된 뒤 505수송단 자동차대대에서 계속 군 생활을 하다가 간부후보생을 뽑는 시험에 합격했다. 하지만 교육을 받던 중 건강에 문제가 생겨 1955년 9월 제대할 수밖에 없었다.할아버지는 인천 부평으로 왔다. 새 아버지 황인옥 씨가 부평 벽돌공장에 취직하면서 가족이 용유도에서 부평으로 이사를 왔기 때문이다."아버지가 부개동 벽돌공장에 총무로 계셨어. 연와공장이라고 하는데, 허허벌판에 있는 공장이 엄청 컸어."황윤걸 할아버지도 벽돌공장을 다녔다. 기술이 없어서 모래와 흙을 차에 싣는 일을 했다."그때는 먼저 삽자루를 쥐는 놈이 일을 하는 거야. 새벽 4시쯤 통행금지가 해제되면 창고로 뛰어가는 거지. 지금으로 따지면 일당을 받는 거야."할아버지 본적은 부평구 부개동 120번지로 돼 있다. 황인옥 씨 집 주소를 본적으로 정한 것인데, 이는 부평연와주식회사 주소와 일치한다. 황인옥 씨 가족이 벽돌공장 사택에서 생활했기 때문에 공장 주소와 황윤걸 할아버지 본적이 같은 것이다. '우리나라 벽돌사'라는 책에는 연도별 연와공장 현황이 정리돼 있다. 황윤걸 할아버지가 일했던 '부평연와합자회사'는 최성순 씨가 1946년 경기도 인천시 부개동 120번지에 설립한 것으로 돼 있다.벽돌공장은 일제강점기에 많이 생겼다. 일제가 우리나라의 좋은 흙과 인력을 활용해 벽돌을 대량 생산한 것이다. 일종의 자원·노동력 착취였다. 해방 이후 우리나라 사람이 불하를 받아 운영했다. 한국전쟁으로 부산 등 일부 지역을 제외한 전국 대부분의 벽돌공장이 문을 닫았다. 하지만 휴전 이후 복구 작업이 이뤄지면서 벽돌공장은 호황을 누리게 됐다.인천 최초 벽돌공장은 1906년 4월 아키타(秋田)가 창립한 '추전상회요업부'다. 주소는 경기도 인천 비랑리로 돼 있다. 지금의 남구 용현동이다. 이후 1920년 4월 산야정(山野井)요업공장, 1932년 2월 인천요업주식회사, 1939년 4월 조선요업주식회사 등 일본인 벽돌공장이 생겼다.이들 공장에서 나온 벽돌은 인천 개항장 일대의 건축물을 짓는 데 사용됐을 것으로 추정된다. 인천시사편찬위원회가 발간한 '인천의 건축'에 따르면 1889년 인천에서 길성(吉盛)이라는 청국인 건축청부업자가 벽돌 성형기를 반입해 서구식 벽돌을 제조했다고 한다. 청국과 각국공동거류지에는 연와 또는 석재 혹은 철재로 견고하게 건축물을 지어야 한다는 규정(각국조계장정 제2조)이 있었다. 건축 자재는 인천항을 통해 들어왔으며, 1910년 이후 건축용 재료로 벽돌의 대량 제조가 가능해졌다.부평연와합자회사는 한국인이 운영한 인천의 첫 벽돌공장이다. 1947년에는 차태열 씨가 간석동 542번지에 조선요업주식회사를 세웠다. 이 회사는 한국적벽돌주식회사, 한국적연와주식회사, 한국적연와공업주식회사 등으로 상호가 변경되기도 했다. 1971년 북구 작전동에는 한일연와공업주식회사가 설립됐다.황윤걸 할아버지는 1957년 3월까지 부평 벽돌공장에서 일했다."구산동에 중앙병원(근로복지공단 인천병원) 있지? 그 근방에서 벽돌 만드는 모래가 나왔다고. 4명이 한 조가 돼 덤프트럭에 싣는 거지. 그때는 일반 트럭이 없으니까 군에서 후생사업이라고 해서 트럭이 나왔어." 모래를 한 차 가득 실을 때마다 마패를 1개씩 줬다고 한다. 이것을 사무실에 주면, 보름 또는 한 달 단위로 계산해 돈을 줬다.벽돌공장에는 다양한 일이 있었다. 황윤걸 할아버지처럼 모래와 흙을 차에 싣는 일부터, 벽돌을 굽는 사람, 차에 벽돌을 싣거나 내리는 사람 등도 있었다. '인천상공회의소 90년사'에는 1955년 부평연와합자회사 직원 수가 102명으로 나온다. 그 당시 부평지역 기업체 가운데 종업원 수가 가장 많다."상하차 작업은 벽돌 5장을 한 번에 던지고 받는거야. 맨손으로 하면 손바닥을 다치니까 자동차 타이어 튜브로 장갑을 만들어 썼어. 여자들은 '다대기'라고 해서 판때기로 벽돌을 두들겨 모양 잡는 일을 했지."부평연와합자회사가 있던 곳은 신도시 개발 등 택지개발사업으로 아파트 단지와 공원이 됐다. 부평연와합자회사는 부평동중학교 앞 사거리 북쪽에 있었다. 부평동중 인근 백영아파트와 대촌공원 자리에 사택이 있었다. 흙을 쌓아 놓고 흙벽돌을 만들던 공장 자리는 부개여고와 부개주공아파트가 차지했다. 가마 터에는 상일고와 웅진플레이도시가 들어섰다. 경기도 부천시 상동에 포함한다.황윤걸 할아버지는 "사택이 두 군데 있었다. 벽돌공장 위쪽 대부분이 논인데, 부천 상동 쪽으로 마을이 하나 있었다"며 "(인천과 부천 경계) 도로 가운데에는 수리조합에서 만든 개울이 있었다"고 했다.할아버지는 벽돌공장 일을 그만두고 의정부에 있는 미군 부대에 취직했다. 당시 미군 부대에 들어가려면 브로커에게 돈을 줘야 했는데, 황인옥 씨가 6개월치 월급에 해당하는 돈을 일수쟁이에게 빌려 마련해줬다. 황윤걸 할아버지는 1971년까지 미군 부대에서 일하다가 서울 수유리에 통닭집을 열어 큰돈을 벌었다."미군 부대를 15년 가까이 다니면서 집을 못 샀어. 근데 통닭집을 해서 4년 만에 수유리에 집을 산 거야. 생맥주를 함께 팔기 잘했지."처음에 7평짜리 가건물에서 장사를 시작했는데, 4년 만에 31평까지 확장했다. 장사가 잘되자, 건물주가 점포를 내놓으라고 했다. 그래서 권리금을 두둑하게 받고 그곳을 떠났다.황윤걸 할아버지는 1977년 인천 남구 주안동 인천법원·검찰청 도로 맞은편 건물 상가에 통닭집을 차렸다. 주안주공아파트 단지 옆에 있는 3층짜리 건물의 1층 코너 점포를 얻은 것이다. 집(주안주공 64동 501호)도 샀다. 하지만 벌이는 형편없었다."상권이 좋다고 해서 왔는데, 서울과 인천은 수준이 다른 거야. 인천사람들은 통닭을 안 먹더라고. 또, 아파트 사는 사람들은 죄다 석바위 쪽으로 가는 거야."통닭과 술장사로는 매출이 오르지 않자 점심에 순두부백반과 찹쌀막걸리를 팔았다. 하지만 석바위 사거리 상권을 이길 수는 없었다."석바위 쪽이 번창했지. 양주 파는 집도 있고, 생활필수품도 거기 다 있었으니까. 석바위가 신흥도시라고 해서 중구와 동구에 있는 사람들이 다 이사 왔어. 그때는 석바위가 엄청 커지는 줄 알았다고."법원·검찰청은 남구 학익동으로 이전했고, 공장이 차지하고 있던 그 자리엔 2016년 3월 인천가정법원과 인천광역등기국이 들어섰다. 5층짜리 연탄 난방의 주안주공은 고층 아파트(더월드스테이트)로 재건축됐고, 할아버지의 점포가 있던 곳에는 17층짜리 주상복합(보미리즌빌) 건물이 섰다.황윤걸 할아버지는 주안동 가게를 접고 서울에서 가구장사를 하다가 1980년 여름 인천에 다시 왔다. 서울우유 인천지구 구월보급소를 맡으면서 인천에 다시 정착한 것이다.할아버지는 간석동 희망백화점 인근에서 7년 정도 영업을 하다가 구월동 길병원 근처에 건물을 지어 1995년까지 직접 서울우유 대리점을 운영했다. 지금도 그 건물에 살고 있다."지금 시청 있는 곳은 배나무 과수원이었어. 주변에 인분을 모아 놓는 곳이 있어서 '똥고개'라고 했지. 구월주공, 상인천여중, 길병원 매점·식당에 우유를 납품해서 장사가 잘됐어."구월주공은 재건축을 통해 9천 세대에 가까운 대단지로 변했고, 상인천여중이 있던 곳에는 상인천초등학교가 들어왔다. 길병원은 본관을 중심으로 확장해 구월동에 '의료 타운'을 형성했다.할아버지는 도시가 변하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이런 생각이 든다고 했다."매제가 명절 때면 소래에 가서 고향 사람들을 만나고 했는데, 지금은 다 개발되고 없어지지 않았어? 요즘은 명절에 갈 곳이 없대. '형님은 고향이 있어 부러워요'라고 하더라고. 구글 지도로 고향(평남 강서군 함종면 봉황리)을 봤더니 건물만 바뀌었지 마을 형태는 변하지 않았어. 지금 당장에라도 찾아갈 수 있지. 갈 수 있어." 글/목동훈기자 mok@kyeongin.com 사진/임순석기자 sseok@kyeongin.com그래픽/박성현기자 pssh0911@kyeongin.com/아이클릭아트사진의 장소는 부평동중학교 앞 사거리다. 이 사거리 북쪽에 벽돌을 만드는 부평연와합자회사가 있었다. 황윤걸(85) 할아버지는 이 벽돌공장에서 모래와 흙을 덤프트럭에 싣는 일을 했다. 인천 부평과 경기도 부천 경계에 개울이 있었고, 그곳에서 목욕도 했었다고 한다. 황윤걸 할아버지가 1955~1957년 당시 벽돌공장 생활에 관해 설명하고 있다.1980년대 부평연와합자회사 벽돌막 모습. /부평역사박물관 제공황윤걸 할아버지가 부평연와합자회사 앞에서 동료들과 함께 찍은 사진. 뒷줄 오른쪽 첫 번째가 황윤걸 할아버지다. 할아버지는 1955년 9월 군에서 제대한 후 1957년 3월까지 부평 벽돌공장에서 일했다. /황윤걸 할아버지 제공

2017-12-20 목동훈

[zoom in 송도]'이름 바뀌는' 송도 컴팩스마트시티

시설 정체성 이해 어려워 지역 특성 담긴 명칭 변경1층 근대도시관으로 리모델링… 2·3층 단계적 공사인천모습 변화상등 다양한 체험·교육프로그램 준비인천 송도국제도시에 있는 컴팩스마트시티가 '인천도시역사관'으로 새롭게 출발한다.컴팩스마트시티는 2009년 9월 인천세계도시축전 당시 '인천도시계획관'으로 문을 열었다. 도시축전이 끝난 후 '컴팩스마트시티'로 명칭이 변경됐으며, 2014년부터 인천시립박물관이 분관 형태로 운영하고 있다. 시립박물관은 전시관 콘셉트를 '도시 인천의 역사와 변화 과정을 보여주는 공간'으로 설정하고 명칭을 인천도시역사관으로 변경했다. 새 명칭은 '인천시 행정기구 설치 조례' 개정안이 공포되는 19일부터 사용하게 된다. 시립박물관 배성수 컴팩스마트시티부장은 "전시관 이름만 봐서는 이곳이 무슨 공간인지 이해하기 어려웠었다"며 "전시관의 정체성을 고민해왔고, 그 차원에서 명칭 변경을 추진하게 됐다"고 설명했다.인천도시역사관은 근대도시관(1층), 현대도시관(2층), 도시생활관(3층)으로 꾸며질 예정이다. 1층을 근대도시관으로 만드는 공사는 최근 완료됐다. 내년에는 2층, 2019년에는 3층 전시관 리모델링 공사가 진행된다. 1층 전시관은 인천이 근대도시로 출발했던 1883년 개항부터 1945년 광복 때까지 인천의 공간 변화와 도시역사를 다루고 있다. ▲개항도시 인천(1883~1906) ▲감리서 폐지와 이사청 설치(1906~1914) ▲진센(Jinsen)과 인천-도시의 양면(1914~1936) ▲군수공업도시 인천(1936~1945)으로 구분돼 있다. 일본인 등 외국인이 만든 '조계지'가 아닌, 조선인이 생활한 '내동'을 중심으로 개항장을 봤다는 점이 특별하다. 배 부장은 "개항장을 조계지로만 보다 보니 외국 사람에게 관심이 집중되는 문제가 있다"며 "감리서가 있었던 내동에 중점을 뒀다. 강제 개항이 아니더라도 우리 스스로 충분히 근대화할 수 있었다는 것을 얘기하고 싶었다"고 했다. 이런 의미에서 '개항도시 인천' 전시 공간은 '개항장의 중심 내동'과 '그들만의 공간 조계'로 분리돼 있다.근대전시관에는 1879년 7월1일 설치된 화도진과 8개 소속 포대 등의 방어시설을 그린 관방지도인 '화도진도', 감리서 관련 문서, 해관 사진, 조선인 부두 위치도, 인천에서 생산된 군수품, 1907년 화재 감시를 위해 자유공원에 설치된 사이렌 탑 등이 전시돼 있다. 원본, 모형, 사진 등 다양한 형태로 돼 있다.시립박물관은 2층 전시관 일부 공간을 리모델링해 '작은전시실'을 만들었다. 이곳에서는 현재 '나도 인천도시계획가' 전이 열리고 있다. 내년에도 인천도시역사관에서 다양한 교육 프로그램이 진행될 예정이다. 올해에는 와글와글 박물관(100년 전 인천의 역사와 문화 체험), 고고박물관(도시계획을 중심으로 한 전시·체험), 수요다과회(인천사람의 소울푸드), 컴팩인문아카데미(한국 근대공원 산책) 등의 프로그램이 진행됐다.배 부장은 "하루 평균 200~300명이 방문하고 있다. 접근성이 좋고 공간이 넓다는 장점이 있다"며 "2층과 3층 리모델링 등 콘텐츠를 강화해 나갈 계획"이라고 했다.인천도시역사관은 연수구 인천타워대로 238번지에 있다. 관람 시간은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이며, 1월1일과 매주 월요일은 휴관이다. 월요일이 공휴일인 경우에는 문을 열고, 그 다음 날 쉰다. 관람료는 없다. /목동훈기자 mok@kyeongin.com

2017-12-17 목동훈

[송도국제도시 브리핑]한국조지메이슨大 첫 졸업생 탄생

■한국조지메이슨大 첫 졸업생 탄생송도국제도시 인천글로벌캠퍼스에 있는 한국조지메이슨대학교가 졸업생을 배출했다.한국조지메이슨대는 지난 16일 제1회 졸업식을 개최했다. 올해 한국조지메이슨대를 졸업하는 학생은 회계학과 1명, 국제학과 4명, 경영학과 6명 등 총 11명이다.한국조지메이슨대 스티븐 리 총장은 "한국조지메이슨대가 첫 졸업생을 배출했다"며 "대학에서 습득한 리더십을 적극적으로 활용해 글로벌 사회의 중요한 인재로 성장할 수 있기를 바란다"고 했다.한국조지메이슨대는 미국 버지니아 주의 최대 주립대학인 조지메이슨대의 글로벌 한국캠퍼스다.한국캠퍼스 학생들은 졸업 시 미국 조지메이슨대와 동일한 졸업장을 취득하게 된다.■송도 등 문화행사 매우만족 72%인천경제자유구역청이 송도·청라·영종에서 열리는 문화 행사와 관련해 설문조사를 진행한 결과, 응답자의 72%가 '매우 만족 또는 만족한다'고 했다. '불만족'은 3%, '매우 불만족'은 1%에 그쳤다.'문화 행사가 인천경제자유구역 인지도 제고에 도움이 되느냐'는 질문에는 '매우 그렇다 또는 그렇다'는 응답 비율이 64%를 기록했다.송도국제마라톤대회 만족도 조사 결과는 매우 만족 22%, 만족 51%, 보통 25%, 불만족 1%, 매우 불만족 1%로 나왔다.인천경제청은 송도국제마라톤대회, 인천송도불빛축제, 미래도시그리기대회 등 7개 행사 참가자를 상대로 설문조사를 했으며, 1천862명이 응답했다.■'스마트시티 모델' 마련 연구용역인천경제자유구역청은 '인천경제자유구역 산업특화형 스마트시티 서비스 모델'을 마련하고자 연구용역을 추진한다.연구용역은 인천경제자유구역의 스마트시티 비전을 수립하는 것으로, 5개월 동안 진행된다. 인천경제자유구역은 공공 기반시설 위주의 '유시티'에서 민간과 협업이 가능한 '스마트시티'로 발전해야 하는 전환기에 있다.인천경제청은 이번 용역에서 인천에 특화된 스마트시티 모델을 발굴한 뒤, 내년 예정된 국토교통부의 스마트시티 실증단지 R&D 사업 공모에 참여할 계획이다. /목동훈기자 mok@kyeongin.com

2017-12-17 목동훈

[실향민이야기 꿈엔들 잊힐리야·48]평안남도 강서군 봉황리 출신 황윤걸 할아버지(上)

한달간 환자 시늉하는 등인민군 되기 싫어 도망다녀노동당원인 담임선생님과전세 따라 서로의 피신 도와사범학교 들어가 신분 세탁교사 생활하다 월남 성공취라도 평남부대 대원으로환경 열악 위험한 작전수행가족들 두고 내려온 탓전쟁 끝나면 빨리 돌아가려고향 인근 부대에 잔류전쟁이 길어질 줄도 모르고1953년 6월 용유도에 도착평안남도 강서군 함종면 봉황리 농촌 마을에서 태어난 황윤걸(85) 할아버지. 1951년 11월 고향에서 피란을 떠났는데, 한국휴전협정 한 달 전에야 남한 땅을 밟을 수 있었다.1951년 겨울과 1953년 여름 사이의 오랜 기간, 황윤걸 할아버지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인민학교 교사 생활, 유격대원 활동 등 할아버지가 들려준 이야기는 한 편의 영화 같았다.황윤걸 할아버지는 1950년 6월25일 한국전쟁이 발발했을 당시 18살이었다. 인민군이 되기 싫어서 도망 다녔다.한 번은 '인민군 동원 지도원'과 싸움이 붙었고, 목 부위를 크게 다친 것처럼 속여 한 달 동안 환자 시늉까지 했다.부친은 인민군을 속이기 위해 3일마다 한 번씩 동네 의원에 가서 아들의 약을 지어오기도 했다.9월15일 인천상륙작전으로 전세가 뒤집어졌다. 유엔군과 국군이 황윤걸 할아버지 마을을 거쳐 북쪽을 향해 진격했고, 할아버지는 치안대원으로 활동하게 됐다.어느 날, 고등학교 담임선생이 집으로 찾아왔다. 노동당원이었던 담임선생은 오갈 데 없는 신세였다.북으로 후퇴하는 인민군을 따라 피란을 가자니 도중에 적군의 공격을 받을 거 같고, 자기 집으로 가자니 잡힐 것 같은 처지가 된 것이다.황윤걸 할아버지는 "담임선생님은 내가 빨갱이가 아닌 것을 알고 계셨거든. 낮에는 내가 인민군에 안 가려고 파놓은 땅굴에, 밤에는 우리 집 사랑방에 모셨다"고 했다.담임선생은 좀 더 안전한 곳으로 떠나기를 원했다. 황윤걸 할아버지는 치안대에서 통행증을 여러 장 끊어 담임선생에게 줬고, 담임선생은 다른 곳으로 피신했다."그때는 통행증이 있어야 했어. 치안대 직인이 찍힌 통행증 5~6장과 함께 보자기에 고구마와 밤 등 먹을거리를 싸서 드렸지."운명의 장난인가. 중공군의 참전으로 전세가 역전됐다. 황윤걸 할아버지는 치안대원으로 활동한 전력 때문에 산에 숨어 지낼 수밖에 없었다. 어느 날 집에서 연락이 왔다. 담임선생님이 찾아왔단다."집에 갔더니 안방에 담임선생님이 있는 거 아니겠어. 내가 치안대 생활을 했으니 걱정이 된 모양이야. '사흘 있다가 다시 올 테니 인민군에 잡히지 말고 있어'라고 하시고 떠나셨지."이틀 만에 담임선생이 다시 왔다. 담임선생은 "인민군에 잡히지 않으려면 사범전문학교에 들어가 교사가 되어야 한다"며 고향에서 멀리 떨어진 곳으로 할아버지를 데리고 갔다. '신분 세탁'을 하기로 한 것이다. 황윤걸 할아버지는 담임선생 추천으로 1951년 3월 인민교원양성소에 입학했다."학생이 40~50명 정도 됐어. 그 당시에 강의실이 어디에 있어, 동네 교회에서 수업을 받았지. 8월까지 교육을 받고 9월에 발령받았어. '어느 학교에 가겠냐'고 물어보기에 (치안대 활동 전력이 탄로 날 수 있어서) 고향에서 먼 곳을 희망했지."할아버지는 한 인민학교 4학년 담임을 맡게 됐다. 이름만 학교이지 교실도 없고 학생도 몇 안 됐다."1학년은 어느 부락, 2학년은 어디 교회 등 지역을 정해주는 거야. 나도 교회에서 수업을 했는데, 학생이 있어야지. 오전에는 수업하고 오후에는 학생을 모집하러 다녀야 했어."그렇게 2개월 정도 생활했다. 그러던 중 집에서 연락이 왔다. 월남하려면 며칠까지 어디로 오라는 내용이었다. 황윤걸 할아버지는 학교 교감에게 "주민등록 주소를 인민교원양성소에서 학교로 옮기러 간다"고 거짓말을 둘러대고 약속한 장소로 떠났다. 접선 장소는 인민교원양성소 반대편에 있었다. 위험을 무릅쓰고 산을 넘어 먼 길을 왔건만, 그곳엔 월남을 안내하기로 한 사람이 없었다. 길이 엇갈린 것이다."그날 월남을 돕겠다는 사람이 내가 안 온다고 누나네 집으로 찾으러 갔다는 거야. 그래서 그날 월남하지 못했어."월남에 실패한 황윤걸 할아버지는 다음 기회를 기약하며 밤늦은 시간 험한 산을 다시 넘어 학교로 돌아갔다. 다시 기회가 왔다. 할아버지는 "날짜도 잊어버리지 않는다. 10월28일 연락을 받고 다음 날 동창 집에서 만났다"며 "나 말고도 국군 패잔병 2명, 반공인사 등 10명 정도가 더 있었다. 해안가에 있는 지뢰를 피해 월남하는 배를 탔다"고 했다.엔진이 없는 작은 목선이었다. 밤 11시에 30명 정도가 배에 탔다. 배가 가라앉을 것 같았다. 풍랑에 금방이라도 뒤집힐 것 같은 배는 다음 날 오후 8시께 섬에 도착했다. 진남포 남서쪽에 있는 '취라도'라는 섬이다."아침에 일어나니까 밥을 주는데, 안남미 밥이야. 석유 냄새까지 나서 먹을 수가 있어야지. 밥이 목구멍을 넘어가지 않아. 토할 거 같아서 세 끼를 굶었어."황윤걸 할아버지는 이튿날 심사를 받고 유격대원이 됐다. 동키 제9부대(평남부대) 대원이 된 것이다. 노인, 여성, 아이 등 노약자는 연대본부가 있는 황해도의 '초도'라는 섬으로 옮겨졌다. 동키 평남부대는 적지를 드나들며 식량 확보, 반공인사·피란민 구출, 인민군 주둔지 기습 등의 작전을 벌였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가 펴낸 '한국전쟁의 유격전사'에 따르면 1951년 3월 중순 백령도에 동키 제9부대가 창설됐다. 평남 지방에서 온 치안대원 등 반공인사와 청년들로 구성됐다. 동키 제9부대는 미 제8군으로부터 식량, 무기와 탄약, 무전기 등을 받아 초도에 본부를 차렸다. 그리고, 취라도와 덕도 등에 파견대를 보내 작전을 수행했다.취라도에는 약 30명의 대원이 있었던 것으로 황윤걸 할아버지는 기억했다. 작전 환경은 매우 열악했다. 식량은 안남미가 전부였는데, 겨울철에는 보급로가 끊겨 그마저도 먹기 힘들었다. 할아버지는 "소금이 반찬이었다. 새우젓이랑 밥을 먹으면 진수성찬"이라며 "담요가 부족해서 3명이 1장을 덮고 자고, 해안가에 떠내려온 나무로 불을 땠다"고 회상했다. 또 "피복 보급을 51년인가 52년에 처음 받았다. PW라고 적혀 있는 포로수용소 포로들이 입었던 옷이었다"고 했다.작전은 위험했다. 작전을 수행하다가 인민군에 잡혀 처형을 당하거나 적의 공격으로 부상을 입은 경우도 많았다."저수지를 폭파하려고 대원들이 들어갔는데, 분대장이 인민군이 매설한 지뢰를 밟은 거야. 대원이 부상당한 분대장을 업고 오다가 또 '꽝'하고 지뢰가 터졌어. 분대장은 다리 하나를 잃고, 대원은 한 눈의 시력을 잃었지."1953년 4월께 덕도에서는 새로 지급된 무기(무반동포)를 시험하던 중 조작 미숙으로 오발 사고가 발생했다. 이 사고로 대원 1명이 그 자리에서 숨지고 안병기 대대장 등 5~6명이 중상을 입었다. 황윤걸 할아버지는 "초도에도 백령도 백사장처럼 비행장 같은 곳이 있었다"며 "안병기 대대장은 초도에서 남한으로 후송하던 중 비행기에서 숨졌다. 나중에 부대에 온 유품 손목시계에는 피가 그대로 남아 있었다"고 기억했다.평남부대에는 여성 대원도 있었다. 그녀들의 임무는 식사 준비, 빨래, 부상병 치료 등이다. 인천 동구 만석동에 사는 김찬일(86, 평남 강서군 함종면 계산리) 할머니도 평남부대원이었다. 황윤걸 할아버지와 비슷한 시기에 부모님 등 가족과 함께 취라도에 왔다. 김찬일 할머니는 "아버지가 치안대 활동을 해서 고향에 남아 있을 수가 없었다"며 "섬으로 내려와 대원들의 작전을 도왔다"고 했다. 또 "주먹밥을 만들어줘야 하는데, 안남미는 부스러진다"며 "보급품이 부족해 탄띠를 풀어 남자 대원들의 속옷을 만들어줬던 기억이 난다"고 했다. 김찬일 할머니는 휴전 후 인천에 정착했다. 역전에서 짐 나르는 일, 이 집 저 집 다니며 허드렛일도 하고, 인천항 부두 앞에 떠 있는 원목의 껍데기를 벗겨 내다 팔기도 했다.황윤걸 할아버지는 1953년 6월 중순 미군의 LST(상륙함)를 타고 용유도 을왕리해수욕장 부근에 내린 것으로 기억했다. 한국휴전협정(1953년 7월27일) 무렵에야 남한으로 온 것이다. 할아버지는 동키 평남부대가 육군에 편입된 이듬해 2월까지 200여 명의 대원과 용유도에서 훈련을 했다.황윤걸 할아버지는 한국유격군전우회총연합회 평남부대 전우회 D-9 1호 회원이다. "80년대 초반에 유격군연합회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됐지. 사무실을 찾아가서 평남부대에서 왔다고 했더니, 평남부대는 아직 등록되지 않았다는 거야. 우리 부대 옆에 안용부대 D-12라고 있었어. 여기 회장인 안용호씨와 사무국장 변철준씨가 인우보증을 서 등록할 수 있었지."황윤걸 할아버지는 1954년 용유도에서 헤어진 전우들을 수소문해 찾아 모았다. 그렇게 해서 60여 명의 대원을 참전유공자로 등록해줬다. 이북에서 작전을 수행하다가 숨진 대원 등 전사자 9명의 위패를 국립대전현충원에 봉안하는 일에도 앞장섰다.황윤걸 할아버지는 한국전쟁 때 조모, 부모님, 누나, 그리고 여동생 3명을 고향에 두고 혼자 월남했다. 고향과 가까운 섬에 주둔하면서 작전 수행을 위해 고향 근처를 드나들었지만, 집에는 갈 수 없었다고 한다. 인민군에 잡히기라도 하면 할아버지는 물론 가족까지 위험하기 때문이다. 가족의 곁에 있으면서도 함께할 수 없는 상황이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황윤걸 할아버지는 "취라도에서 남쪽으로 내려간 사람도 있다. 하지만 나는 동키 평남부대에 남아 있기로 했다"며 "전쟁이 끝나면 집에 빨리 돌아갈 수 있을 거 같았다. 그때는 전쟁이 이렇게 길어질 줄 몰랐다"고 했다.글/목동훈기자 mok@kyeongin.com 사진/임순석기자 sseok@kyeongin.com황윤걸 할아버지는 평안남도 강서군 함종면 봉황리에서 태어나 자랐다. 한국전쟁 때 고향 근처 해변에서 목선을 타고 진남포 서남쪽에 있는 작은 섬 '취라도'로 내려왔다. 여기서 동키 제9부대(평남부대) 대원이 된 황윤걸 할아버지는 적지를 드나들며 작전을 수행했다. 동키 제9부대는 백령도에 창설됐으며, 황해도 '초도'에 연대본부를 뒀었다. 취라도는 '상취라도'와 '하취라도'가 있는데, 동키 제9부대 파견대는 '상취라도'에 있었다. 일러스트/박성현기자 pssh0911@kyeongin.com/임순석기자 sseok@kyeongin.com황윤걸 할아버지가 인민군이 되기 싫어서 도망 다닌 일, 인민학교 교사 생활, 동키 제9부대(평남부대) 대원 활동 등 한국전쟁 당시 겪은 일들을 이야기하고 있다. /임순석기자 sseok@kyeongin.com

2017-12-13 목동훈

[실향민이야기 꿈엔들 잊힐리야·47]황해남도 청단군 용매도 출신 차학원 할아버지(下)

연평도 30㎞ 거리… 할아버지는 서쪽 온동리에 살아젓새우 많이 잡혀 말리거나 젓갈 담가 국내·외 유통외침 방어 진보 위치 예로부터 '군사적 요충지' 역할용매도 회담 앞두고 터진 '황태성 간첩사건'의 배경망둥어에 소주한잔으로 여생 보내 "신도가 제2 고향"차학원(76) 할아버지의 고향 용매도(龍媒島)는 해주만 어귀에 있는 섬이다. 과거부터 황해도 해주의 일부 지역이었던 용매도에 언제부터 사람이 살기 시작했는지는 정확하지 않지만, 최소한 고려 때에는 살고 있었다는 것이 역사 기록에 남아 있다. 조선 중종(1531년)때 편찬한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는 해주목(海州牧)의 위치를 설명하면서 '고려 성종 2년(983년)에 설치됐고 그 영역은 동쪽으로 평산부(平山府)까지 69리요, 용매량(龍媒梁)까지 95리다'고 했다. 용매도는 1938년 해주의 일부가 떨어져 나가 황해도 벽성군이 만들어지면서 벽성군 소속이 됐다가 1945년 해방 후 미군정 치하에 놓이면서 경기도 연백군 소속이 됐다. 전쟁이 끝난 뒤에는 북한의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황해남도 청단군 영산리 소속이 됐다. 연평도와는 30㎞ 떨어져 있다.1942년생인 차학원 할아버지는 벽성, 연백 시절을 겪었고 지금은 청단군이지만 복잡한 이력이 귀찮은지 "고향이 어디세요"라고 물으니 '황해도 벽성군 청용면'이라 대답했다. 1986년 이곳 실향민들이 모여 만든 용매도민회도 회칙에 공식 명칭을 '황해도 벽성군 청용면 용매도민회'라 칭하고 있다.용매도는 동쪽의 진동리(鎭洞里)와 서쪽의 온동리(溫洞里), 섬 중앙의 한동리(寒洞里) 3개 마을이 있다.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한동리 정상에 올라가 보면 진동산과 온동산이 황룡(龍)이 뒤틀어져 암룡과 숫룡이 맺어 있는(媒) 모양이라고 해 용매도라고 칭했다고 한다.할아버지는 온동리에서 살았다. 온동리는 300가구에 1천300여명이 사는 제법 규모가 있는 마을이었다. 온동 주위에는 크고 작은 섬이 있다. 여러 부속 섬 중에 육읍도(陸邑島)라는 섬이 있었는데 물이 빠지면 육지가 되는 곳이다. 겨울철에 아낙들이 건너가 며칠씩 굴이나 바지락을 캐오면 수입이 쏠쏠했다. 이곳은 여러 날 묵어가면서 일하는 곳이라고 해 '묵골'이라고 불렀다. 묵골은 바로 할아버지가 장봉도로 피란을 나오기 전까지 살았던 곳이기도 하다. 묵골의 서남쪽으로 있는 귀염도, 소렴도에서는 주꾸미가 많이 잡혔다. 낚싯줄에 소라 껍데기를 매달아 바다에 던져 놓으면 주꾸미가 산란을 하러 소라껍데기에 들어가 잡혔다고 한다."묵골은 연평도 방향에 있는 조그만 섬이었는데 원래는 노인네 한두 분밖에 안 사는 작은 동네였어. 여자들과 어린애들이 망둥어도 잡고 상합도 잡으며 사는 조용한 섬이었는데 전쟁이 나면서 미군이 주둔하게 됐지."차학원 할아버지네는 조와 수수 농사를 지어 먹고 살았는데 아버지는 가끔 바다로 나가 고기잡이 배를 부렸다. 할아버지는 "해산물이 흔하디흔했지만 그중에서도 젓새우가 가장 유명했지. 그때만 해도 마을 어르신들이 한강 마포나루까지 새우젓을 팔러 나가기도 했어"라고 말했다.용매도 앞바다 어장에서는 6~7월에 새우가 많이 잡혔다. 동아일보 1932년 7월 2일 자는 "해주군 청룡면 룡매도는 새우의 산지로서 해마다 생산고가 10여만원에 달한다고 한다. 그런데 지금이 막 새우의 어획 시기인데 금년도는 특히 기후의 순조로 예년에 없는 풍산(豊産)을 보게 되어 앞으로 생산 예상고가 평년보다 약 오할 이상이나 증가 될듯하다고 한다"고 보도했다. 당시 일제의 부역 노동자 하루 평균 임금이 80전(1원=100전)이었으니 엄청난 생산량인 셈이다. 새우는 소금에 절여 젓갈을 담가 먹는 것도 일반적이었지만 용매도 사람들은 새우를 쪄서 말린 뒤 중국과 일본 등지에 수출하기도 했다. 말린 새우는 가루로 만들어 '미원'처럼 국물에 넣어 먹으면 맛이 그만이었다고 한다. 용매도에는 1920~30년대 새우 건조 작업장이 40~50군데 생겨나기 시작했다.용매도의 새우젓은 한강 마포나루를 통해 육지로도 유통됐다. 마포는 양화진, 서강과 더불어 조선 초기 한강 하류의 항구로 발전했다. 그 마포는 삼남지방의 양곡이 모이는 곳이었고, 서해안의 소금배가 드나드는 곳이었다. 이곳에 황해도와 인천, 강화 지역의 새우젓 배가 본격적으로 드나들기 시작한 때는 일제시대 무렵이다. 서울시가 1985년 발간한 '한강사(漢江史)'는 "경인선의 부설로 한강의 선운(船運)이 활발치 못하게 되었으나 일제 때 이곳 마포는 서해에서 유입되는 새우젓 배의 선창으로 변하였다. 그러나 이 또한 6·25 동란으로 임진강과 한강이 합류하는 지점이 휴전선으로 인하여 서해에서 마포강으로 배가 직접 들어올 수 없는 상태가 되어 지금까지 지속되고 있다"고 설명했다. 또 연평도 어장과 가까워 조기가 많이 나 조기잡이 배도 마포를 오갔다.용매도는 과거부터 군사적 요충지로 큰 역할을 했다. 외침을 방어하는 진(鎭)이나 보(堡)가 용매도에 있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은 "해주목 내에는 '진보(鎭堡)'가 있었는데 그중 '용매량진'은 섬 가운데 있었고, 옛날에는 만호(萬戶)를 두었는데 수군동첨절제사(水軍同僉節制使)가 한 명 있었다"고 전하고 있다. 만호는 군사적 요충지에 설치된 진을 다스리는 무장을 일컫는다. 조선조 수군은 수군절도사(水軍節度使)의 예하에 첨절제사(僉節制使)가 큰 진을 관장했다. 그 밑에 동첨절제사와 만호가 관할하는 진이 있었다. 용매도에는 봉수(烽燧)가 있었다는 기록도 있다. 해주와 연평도를 이어주는 지리적 위치 때문이다. 이 같은 군사 지리적 이점 때문에 한국전쟁 때도 남북은 용매도를 두고 끝까지 전투를 벌였으나 결국 휴전을 앞두고 철수령이 내려지면서 북한의 차지가 됐다.이런 용매도에서 휴전 이후 최초의 남북회담이 열렸다는 것은 많이 알려지지 않았다. 남북은 1972년 7·4 남북공동성명이 있기 전 첫 비공식 회담을 용매도에서 가졌다. 지금도 공식 기록으로는 존재하지 않고 비사(秘史)처럼 전해지지만 일명 '황태성 간첩사건'의 배경을 설명할 때 꼭 등장하는 것이 '용매도 회담'이다. 할아버지는 고향 용매도를 이야기할 때 남북회담 이야기를 꼭 써달라고 당부했다. 김학민 이한열기념사업회 이사장과 이창훈 4·9통일평화재단 자료실장이 황태성 간첩사건의 전모를 밝힌다며 2015년 출간한 책 '박정희 장군 나를 꼭 죽여야겠소'에 용매도 회담 얘기가 나온다. 이 책은 황태성에 대한 자료와 그의 친손녀인 황유경씨 등 유족을 인터뷰한 내용을 토대로 만들어졌다. 책에 따르면 1961년 9월 28일 첩보부대 HID 소속 강성국 중령과 김석순 대위가 배를 타고 서해 북방한계선을 넘어 용매도에 갔다. 이들은 사실 '가짜 군인'으로 각각 광주와 서울에서 시의원을 지낸 민간인이었다. 이들은 첩보 훈련을 받고 회담 전 북한의 의중을 떠보는 임무를 수행하러 북으로 넘어갔다. 하지만 대표성을 확보하지 못한 회담은 성과가 없었고 빈손으로 돌아오게 됐다.1997년 용매도민회가 낸 용매도지(龍媒島志)에는 용매도회담의 장면을 각색해 극적으로 꾸몄다. 여기에는 비공식 회담의 합의사항도 나오는데 '서울과 평양에 각각 상대방의 비공식 대표부를 둔다', '대표위원의 교환은 유도(강화도 앞의 한강하구 섬)에서 한다' 등의 내용이 나와 있다.반대로 북한은 경북 상주 출신으로 박정희 대통령의 형 박상희와 죽마고우였던 황태성을 남파해 당시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과 접촉을 시도했다. 용매도 회담 이전부터 남한에 와있던 황태성은 1961년 10월 15일 박상희의 부인 조귀분, 그러니까 김종필 당시 중앙정보부장의 장모를 통해 고위층과 접촉하려 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김종필은 대공수사 인력에게 검거를 지시했고 황태성은 간첩 혐의로 체포돼 처형됐다. 황태성은 재판에서 자신의 남하(南下)를 "남한에서 간 (용매도 회담)밀사에 대한 환례(還禮)"라고 주장했지만, 2015년 중앙일보가 엮은 '김종필 증언록'에서 김종필은 이를 "육군첩보부대(HID) 서해지구 파견대가 정보수집을 위해 자체적으로 벌인 대북 공작"으로 규정했다. 또 "중앙정보부와는 관계가 없다"고 못박았다. 진실은 알 수 없지만 용매도에서 비밀스러운 남북 접촉이 있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차학원 할아버지는 용매도에 산 기억이 많지는 않지만 고향을 잊어본 적이 없다. 직장을 잡아 인천에 나와 살면서도 늘그막에 굳이 배 타고 들어가야 하는 섬 신도에 자리 잡은 것도 어쩌면 섬 용매도에 대한 그리움 때문일지도 모른다. 또 고향 사람들과 함께 일군 신도4리를 떠날 수 없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할아버지는 틈틈이 낚시로 잡은 망둥어를 깨끗이 손질해 빨랫줄에 널어 바닷바람에 말리는 일이 낙이다. 잘 말린 망둥어를 노릇노릇 구워 소주 한 잔 걸치면 이보다 더 좋을 수가 없다."함께 피란 나온 어르신들이 점점 돌아가시고 1세대가 사라지면서 고향에 대한 기억도 사라지고 있지만, 나라도 어르신들에게 들은 얘기를 섞어 이런 얘기 저런 얘기를 할 수 있어서 다행이야. 이제는 신도를 제2의 고향으로 생각하고 여생을 보내려고."글/김민재기자 kmj@kyeongin.com 사진/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차학원 할아버지는 300가구 1천300여명이 사는 용매도 서쪽에 위치한 온동리에 살았다. 사진은 동쪽 진동리 마을 전경. 그래픽/성옥희기자 okie@kyeongin.com사진/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온동리 거무녕뿌리에 있는 마을 주민들. 뒤에 보이는 섬이 소렴도다. /용매도지 제공용매도 앞바다에서 잡은 젓새우를 말리는 건하장 모습. /용매도지 제공

2017-12-06 김민재

[zoom in 송도]'송도 버드 아일랜드' 내년 상반기 착공

멸종위기종 저어새등 대체서식지11공구 동쪽 바닥면적 5600㎡규모실시설계 용역 완료 2020년 준공생태자원 콘텐츠·관광지 활용기대'송도 버드 아일랜드(Bird Island)' 조성사업이 내년에 본격화한다.인천경제자유구역청은 송도 버드 아일랜드 조성사업(1단계) 실시설계 용역을 완료하고 내년 상반기 공사를 시작한다고 3일 밝혔다. 이 사업은 송도 11공구 앞바다에 인공섬 형태의 조류 대체 서식지를 만드는 것이다.버드 아일랜드를 만드는 1단계 사업과 그 주변에 먹이터, 염생습지, 조류 관찰대, 완충녹지 등을 조성하는 2단계 사업으로 계획돼 있다. 1단계 사업은 2020년 준공을 목표로 진행된다. 2단계 사업은 송도 11공구 공유수면 매립과 송도 워터프런트 조성계획을 고려해 사업 시기가 결정될 예정이다.■조류 서식지로 인공섬을 조성하는 첫 사례인천경제청은 송도 11공구 동쪽 약 350m 지점에 바닥면적 5천600㎡, 노출면적 2천400㎡ 규모의 '버드 아일랜드'(1단계)를 조성한다. 공유수면 매립으로 갯벌이 사라지고 있기 때문에 멸종위기종인 저어새 등 새들이 서식할 수 있는 인공섬을 만드는 내용이다. 바닥면적은 바닷물이 완전히 빠졌을 때, 노출면적은 만조 시 인공섬의 넓이를 말한다. 1단계 사업 공사비는 72억원으로, 이 중 13억원은 내년도 예산안에 반영돼 있다.인천경제청은 내년 상반기에 공사를 시작할 계획이다. 공사 기간이 24개월인 점을 고려하면 2020년 준공이 가능할 것으로 인천경제청은 예상하고 있다.버드 아일랜드 조성공사는 '공사용 도로'를 설치해 인공섬을 만든 뒤, 그 도로를 없애는 방식으로 추진된다. 인천경제청은 저어새 서식을 유도하기 위해 새 모형을 제작·설치하고, 저어새가 둥지를 만드는 데 필요한 재료(나뭇가지와 풀 등)를 공급할 계획이다. 또 유지관리계획을 수립해 서식 환경 변화를 점검하고 방해 요인을 제거할 방침이다. 버드 아일랜드 조성은 송도 11공구 공유수면 매립 환경영향평가 협의 조건이며, 인공섬을 조류 대체 서식지로 조성하는 것은 처음이라고 한다. ┃위치도 참조■'생태자원 콘텐츠' 활용 기대감인천경제청은 버드 아일랜드가 송도국제도시의 중요한 생태자원 콘텐츠가 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인천경제청은 실시설계 용역을 진행하면서 송도 11공구 지역의 조류 서식 현황을 조사했다. 올해 1월부터 10월까지 월 2회 조사했는데, 총 48종 1만9천352개체가 관찰됐다. 민물도요, 큰뒷부리도요, 혹부리오리, 괭이갈매기, 알락꼬리마도요 등이 많았다. 조사 지역을 송도 6~11공구, 남동유수지, 오이도, 시화호, 시흥갯골 등 송도 일대 전체로 확대했을 때는 물닭, 홍머리오리, 흰죽지, 청머리오리, 민물도요 등 총 90종 9만5천362개체가 관찰됐다. 저어새의 경우에는 남동유수지(441개체)에서 가장 많이 관찰됐다. 다음은 오이도와 시화호, 송도 갯벌 일대, 시흥갯골 및 관곡지 등의 순으로 조사됐다. 도요·물떼새류는 송도 갯벌(1만3천341개체)에 가장 많았다.인천경제청은 버드 아일랜드 모니터링 활동을 통해 저어새의 생태 자료를 수집하고, 이를 보전·관리 및 생태 교육에 활용할 계획이다.인천경제청 관계자는 "새들에게 안정적인 서식 환경을 제공하는 것은 물론 송도의 중요한 생태자원 콘텐츠가 될 것"이라며 "조류 전문가뿐만 아니라 일반인도 많이 찾는 조류 생태 관광지가 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했다. /목동훈기자 mok@kyeongin.com인천 송도국제도시 11공구 앞바다에 인공섬 형태의 조류 대체 서식지를 만드는 송도 버드 아일랜드 조성사업이 본격 시작될 예정이다. 송도 공유수면 매립으로 갯벌이 사라지고 있어 멸종위기종인 저어새 등 송도 갯벌을 찾는 새들이 서식할 수 있는 인공섬을 만드는 사업이다. 사진은 송도 11공구 매립 전에 갯벌에서 먹이 활동을 하고 있는 저어새들. /경인일보 DB

2017-12-03 목동훈

[송도국제도시 브리핑]'목재산업박람회' 7일부터 나흘간 송도컨벤시아

■'목재산업박람회' 7일부터 나흘간 송도컨벤시아'2017 대한민국 목재산업박람회'가 7일부터 나흘간 송도컨벤시아에서 진행된다.이 행사는 목재산업 활성화를 위해 인천시와 산림청이 공동 주최하고 (사)목재산업단체총연합회가 주관하는 문화·전시·체험 행사로, 올해 주제는 '목재, 환경과 에너지를 아우르다'이다. 목재 산업계의 인력난을 해소하고자 한국산림복지진흥원, 산림조합중앙회 등 22개사가 참여하는 '산림 일자리 박람회'도 동시에 개최된다. 우드 스피커, 탁상시계, 모니터 받침대 만들기 등 목재문화를 체험할 수 있는 프로그램도 운영된다. 자세한 내용은 공식 홈페이지(www.woodexpo.kr)에서 확인할 수 있으며, 홈페이지를 통해 사전등록을 신청하면 전시회 무료 참관 혜택을 받을 수 있다.■유타大 아시아캠서 9일 '캠퍼스 일일 체험의 날'송도국제도시에 있는 유타대학교 아시아캠퍼스는 9일 오전 10시 '캠퍼스 일일 체험의 날' 행사를 개최한다.참가자들은 유타대 아시아캠퍼스에 개설된 4개 학부(커뮤니케이션학·심리학·영화영상학·도시계획학) 전공 중 원하는 강의를 들을 수 있다. 또 유타대 아시아캠퍼스를 돌아보며 영어글쓰기센터 등 다양한 시설과 캠퍼스 생활을 체험하게 된다. 유타대 아시아캠퍼스는 참가자에게 수료증과 함께 소정의 기념품을 주고, 희망자에 한해 일대일 맞춤형 입시 면담도 진행할 예정이다. 참가 희망자는 유타대 아시아캠퍼스 홈페이지에서 사전 참가 신청서를 작성해 제출하면 된다. 신청서에는 간단한 에세이 작성이 포함돼 있으며, 신청서 및 에세이 내용에 따라 참가 여부가 확정된다.■솔찬공원 케이슨제작장, 밤 12시까지 연장 개방인천경제자유구역청은 바다를 조망할 수 있는 송도국제도시 솔찬공원 케이슨제작장을 1일부터 밤 12시까지 개방하고 있다고 밝혔다.케이슨제작장은 센트럴파크와 더불어 송도의 대표적인 친수 공간으로, 인천대학교 송도캠퍼스 인근에 있다. 안전사고 발생 우려 등의 문제로 오후 10시까지만 개방했는데, 불편함을 제기하는 민원이 계속 발생해 개방 시간을 12월1일부터 자정까지 2시간 연장했다. /목동훈기자 mok@kyeongin.com외국인 김장담그기 체험-인천경제자유구역청은 최근 송도국제도시 등 인천경제자유구역에 거주하는 외국인을 대상으로 '외국인 김장 담그기 및 전통문화 체험행사'를 개최했다고 3일 밝혔다. 이번 행사에 참가한 외국인 20여 명은 김치를 직접 만들고 전통부채에 민화를 그려보는 등 한국의 전통문화를 체험했다. /목동훈기자 mok@kyeongin.com/인천경제청 제공

2017-12-03 목동훈

[실향민이야기 꿈엔들 잊힐리야·46]황해남도 청단군 용매도 출신 차학원 할아버지(中)

1960년대 초반 사진 DP점 '미광사' 취직숙식 해결돼 현상·인화작업 배우며 일해입대후 통신소대 배치 엉뚱한 지시 받아'남양사'로 불법 파견… '사진 업무' 수행결국 군인신분 민간인 행세로 체포 당해이후 베트남전 앨범제작위해 파병길 올라맹호부대 전쟁사 담긴 앨범 아직도 '간직'제대후 DP점 운영하다 목재사에서 새삶용매도 출신 실향민 차학원(76) 할아버지의 젊은 시절을 얘기하려면 '사진'을 빼놓을 수 없다. 할아버지는 옹진군 북도면 신도4리 땅 9천900㎡을 맨손으로 일궜지만, 정작 농사는 적성에 맞지 않았다. 그는 1960년대 초반 아버지와 어머니, 동생에게 땅을 맡기고 지인의 소개로 인천 도심으로 넘어가 싸리재에 있는 사진 DP점(店) '미광사(美光社)'에 취직했다. 'DP점'은 현상(現像·Developing)과 인화(印畵·Printing)의 영어 앞글자를 따서 만든 말이다. 현상은 필름에 담긴 잠상(潛像)을 눈에 보이게 만드는 작업이고, 인화는 종이로 사진을 뽑는 과정을 말한다. 여기에 'E(확대·Expansion)'까지 더해 'DP&E'라고 했지만, 흔히 DP점이라 불렀다고 한다. DP점은 현상·인화만 하는 곳이라 가게에서 사진을 직접 찍은 뒤 현상·인화를 해주는 사진관과는 달랐다. 당시만 해도 사진이 우리나라에 들어온 지 100년도 안 된 때였다. 할아버지는 먹여주고 재워주며 기술을 가르쳐 준다는 조건에 사진이 무엇인지도 잘 모르면서 뭍으로 나왔다.동아일보 사진부장 출신 최인진이 1999년에 낸 '한국사진사'에 따르면 우리나라에 처음 사진이 들어온 것은 1880년대 개화파들이 서양 신문물에 관심을 가지면서다. 본격적으로 사진을 수용한 것은 1882년 개화기 청년을 이끌고 중국에 신문물을 배우러 간 영선사 김윤식(1835~1922)이 처음이다. 사진이 도입되기 전에도 '사진'이라는 말은 있었다. 고려시대 문인 이규보(1168 ~ 1241)의 문집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 19권에 '사진'이라는 단어가 처음 등장한다. 그는 '달마대사(達磨大師)의 상(像)에 대한 찬(贊)'이라는 시에서 '어찌 반드시 상을 그려야 하나'라는 글귀를 '하필사진(何必寫眞)'으로 썼다. '베낄 사'에 '참 진', "실물의 있는 그대로를 똑같이 그린다"는 뜻이다. 지금의 '사진(Photography)'이란 개념은 1863년 중국에 있는 러시아인 사진관에서 초상사진을 촬영한 조선시대 문인 이익의(1794~?)가 처음으로 썼다고 한다.초창기 사진기는 일명 '어둠상자(暗箱)'라고 불리는 대형 사진기였는데 검정 보자기를 뒤집어쓰고 찍는 식이었다. 이후 사진기가 소형화 돼 휴대할 수 있는 크기가 됐다. 우리가 흔히 아는 '롤 필름' 사진기가 등장한 것은 1910년대 전후다. 미국의 코닥(Kodak)이 대중적이었고 독일의 라이카(Leica)가 최고급이었다. 할아버지는 "내가 DP점에서 일할 때는 캐논 카메라를 주로 사용했어. 라이카는 지금 자동차로 치면 벤츠급이었지. 돈 많은 사람만 카메라가 있던 시절이니까"라고 말했다.미광사는 지금의 중구 율목동 인천기독병원 인근 옛 상업은행 맞은 편에 있었다. 주인은 따로 있고 동료 1명과 함께 암실에서 현상과 인화 작업을 했다. 할아버지가 기억하는 다른 DP점은 하인천 '신호양행', 경동의 '군성양행' 정도였다. 대부분 DP를 하면서도 인화지와 필름을 팔고, 사진 약품 따위를 함께 파는 가게였다.미광사의 주 고객은 자유공원의 '출사원(出寫員)' 10여 명이었다. 꽃 피는 봄이나 낙엽이 지는 가을, 눈 내리는 겨울이면 자유공원에서 출사원이 찍어주는 사진이 전부였다. 사진 인화는 명함판(2×3인치), 중판(3×4), 대판(5×7) 등 크기에 따라 가격이 달랐다. 사진을 인화하는 데 드는 비용은 중판 한 장에 20원 정도였지만 출사원은 손님들에게 몇 백 원씩 받으며 이문을 챙겼다. 수학여행철이나 소풍 때가 되면 할아버지는 DP점에서 이틀 밤을 새워가며 사진을 뽑아야 할 정도였다고 한다.미광사에서 몇 해 일하다가 군대에서 영장이 날아와 1964년 9월 육군 논산훈련소로 입대했다. 기초군사훈련을 마치고 원주통신훈련소에서 '보이스병'(무전병) 교육을 수료해 자대에 배치됐다. 강원도 홍천에 있는 수도사단 1연대 본부 통신소대에서 군 생활을 시작했다. 제대 날짜를 세기도 어려운 신병 시절 뜻밖의 임무가 찾아왔다. 당시 통신대장 서모 대위가 사진광이었는데 마침 할아버지가 사진 DP점 근무 경력이 있다는 걸 알았다. 서 대위는 갓 전입한 할아버지에게 휴가를 준 뒤 고향에 가서 사복으로 갈아입고 오라는 엉뚱한 지시를 했다. 신병이 자대 배치 일주일 만에 휴가를 받는 상상도 못할 일이 벌어졌다. 서 대위는 할아버지를 차에 태워 부대 인근 사진 DP점 '남양사'로 데려갔다. 남양사 사장은 경찰 간부 출신으로 역시 사진에 취미를 두었다가 퇴직 후 아예 DP점을 차린 경우였다. 서 대위는 할아버지를 남양사에 파견 보냈다. 당시 통신부대는 민간 통신 교환 업무도 수행했는데 외부로 파견을 보냈다고 적당히 서류를 꾸민 것이다. 할아버지를 직원으로 부려 먹고 남양사 사장이 서 대위에게 어떤 대가를 지급했는지는 모를 일이다.처음에는 머리가 짧아 암실에서만 근무하다가 머리가 자라면서 대놓고 카운터에 자리 잡았다. 할아버지는 "여고생들에게 인기가 많았어. 당시 홍천여고에 사진을 찍으러 가기도 했는데 젊은 총각이라 인기가 좋았지. 월급을 안 받아도 편하게 생활을 하니까 나도 별다른 불만이 없었지"라고 회상했다.꼬리가 길면 밟히는 법. 할아버지가 군인이라는 소문이 돌면서 어느 날 밤 사단 사령부 감찰대에서 남양사에 들이닥쳤다. 늦은 밤 '똑똑' 노크 소리에 문을 열었더니 감찰대원들이 할아버지를 체포해 지프에 태워갔다. 불법 파견돼 민간인 행세를 했다는 것이 문제가 됐다. 서 대위도 공범 신세가 됐다.할아버지를 구원해 준 것은 남양사 사장이었다. 그는 홍천경찰서 경무과장을 지내다가 박정희 대통령 시절 공화당 관리장을 했다. 원래 정당은 면 단위 이하 행정구역에는 정당 기구를 둘 수 없는데 공화당은 면에 '관리장'을 두고 공공연하게 활동을 했다. 관리장이라는 완장을 찬 남양사 사장은 감찰대에 전화 한 통으로 할아버지를 꺼내왔다. "남양사 사장이 전화를 안 해줬으면 그날로 바로 영창에 갔겠지. 그때 관리장이 제일 '끗발'이 좋을 때였어. 서 대위도 징계를 안 받고. 옛날이야 그랬겠지만 지금도 뭐 뇌물이니 비리들이 많잖아."자대로 복귀한 할아버지는 1965년 9월 베트남 전쟁 파병(파월) 길에 올랐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가 발간한 '베트남전쟁 연구총서'를 보면 수도사단은 1965년 월남파병 전투부대 1진으로 선정돼 그해 9~10월 베트남으로 떠났다. 수도사단은 부대 재창설 수준의 개편을 거쳐 '맹호부대'라는 이름으로 베트남에 병력을 보냈다. 총인원 1만3천672명의 대규모 병력이었다. 할아버지는 직접 전투에는 참여하지 않았고 무전기 등 통신장비를 관리하는 '기재계'에 소속됐다. 월남에 가서도 할아버지는 사진과 인연을 맺었다. 당시 공보실에서 파월기념 앨범을 만드는 데 할아버지를 차출해 간 것이다. 할아버지는 사진병과 각 중·소대 통신병이 사진을 찍어오면 필름을 현상해 인화한 뒤 한국으로 보냈다. 편집은 귀국한 뒤 마무리했다.할아버지가 보여준 흑백사진 앨범은 맹호부대 베트남 전사(戰史)의 축소판이었다. 파병 준비 훈련부터 박정희 대통령이 참석한 여의도 환송식 장면, 부산항에서 가족과 헤어지는 부대원들의 모습, 베트남 '퀴논'에 상륙하는 장면과 전투 모습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또 각 작전마다 사살 인원과 적 무기 노획 등 전과(戰果)를 사진과 함께 기록했다. 우리 군에 사살된 일명 '베트콩(월남민족해방전선)'의 시신 사진도 모자이크 처리 없이 날것 그대로 담긴 것이 인상적이었다. 사진에는 "1965. 10. 28. 수색중대 전방 10m까지 전급하여 사살된 베트콩 2명"이라는 설명이 붙었다. 또 네이팜(Napalm)탄의 공중폭격으로 정글과 마을이 불타는 장면, 헐벗은 전쟁 난민들의 사진은 전쟁의 참상을 여과 없이 보여주고 있었다. 이밖에 1960년대 전쟁 속 베트남의 일상과 문화를 엿볼 수 있는 사진도 많이 수록됐다. 1966년 6월 24일 앨범 편집후기를 쓴 앨범 편집자 권병주 중위는 "우리들이 흘린 땀과 피는 결코 헛되지 않았고 또 앞으로의 영광스런 역사발전에 밑거름이 되리라. 이런 뜻에서 미흡하나마 이 조그마한 파월기념앨범이 지닌 뜻은 크다"고 했다. 이 앨범은 파월 1진 맹호부대 1연대 간부와 병사들 전원에게 배포됐다. 할아버지는 지금도 그 앨범을 가보처럼 간직하고 있다.1967년 12월 월남에서 돌아온 할아버지는 다음 해 3월 제대했다. 할아버지는 제대하면 남양사에서 일해달라는 주인의 말에 다시 홍천으로 갔다. 그리고 남양사 주인의 사촌 처제를 소개받아 결혼해 홍천에 신혼살림을 차렸다. 남양사에서 일하던 할아버지는 1973년 드디어 DP점을 따로 차려 독립했다. 말은 독립이었지만 사실 남양사의 자회사 개념의 사업이었다. 홍천 버스 회사 한편에 사무실을 내고 필름이나 인화지, 만년필을 팔면서 사진 DP도 했다. 할아버지 가게에는 장비가 없었기 때문에 밤에 남양사에서 작업을 한 뒤 낮에 손님들에게 사진을 줬다. 하지만 내기 당구와 노름에 한눈을 팔면서 문제가 생겼다. 가게를 자주 비우다 보니 손님이 줄기 시작했고 결국 사업을 접고 인천으로 돌아와야 했다. 할아버지는 인천으로 와서 선창산업이라는 목재회사에 취직해 통나무 제재 일을 했다. 이후 삼미사 원목반에 들어가 나무 수입 관련 업무를 했다. 삼미가 망하면서 주식회사 중동이라는 목재사에서 직장생활을 이어갔다. 할아버지는 60세에 정년퇴직을 하고 5년간 촉탁직으로 더 일했다.할아버지는 지금도 틈만 나면 북도면 신도4리 집에서 일출 사진을 찍는다. 영종도에서 서서히 올라오기 시작한 해가 할아버지네 집 앞의 나무에 걸리는 때가 포인트다. 사진 DP점을 했지만 정작 사진기에 대한 욕심은 없어 조작이 간단한 스마트폰이 최고의 사진기란다.글/김민재기자 kmj@kyeongin.com 사진/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차학원 할아버지가 근무했던 맹호부대 1연대 본부 통신소대 단체 사진. /차학원 할아버지 제공차학원 할아버지가 맹호부대 파월기념 앨범을 만드는 과정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맹호 파월부대 1진이 1965년 10월 베트남 퀴논 해변에 상륙한 직후 찍은 사진. /차학원 할아버지 제공차학원 할아버지가 홍천에서 사진 DP점을 했을 당시 인화한 사진 중 하나. 반공의식을 다지는 1970년대 군민승공대회 모습이다. /차학원 할아버지 제공차학원 할아버지가 DP점 취직을 위해 북도면을 떠나 인천으로 가는 길에 찍은 부두 사진. /차학원 할아버지 제공할아버지가 인화한 사진으로 만든 맹호부대 파월기념 앨범.

2017-11-29 김민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