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인천)

[실향민이야기 꿈엔들 잊힐리야·29]평안북도 영변군 출신 명창식 할아버지(下)

구룡강 기슭 용강리 약산동대 유명김소월 외에 많은 문인들도 매료돼"강화도 고려산도 여기는 못따라가"고구려때 쌓은 성곽 철옹성의 고장3대가 살던 소림면 농사짓기 좋은 곳당시 냉면은 손님 접대용 귀한 음식잔칫집에 빠지지 않던 온반도 '자랑'핵시설 들어서 풍경 많이 변했을 듯# 이야기 하나실향민 명창식(98) 할아버지가 고향인 평안북도 영변군(寧邊郡) 용강리(龍江里)를 떠난 지 어느덧 70년이 지났다. 긴 세월에 많은 기억이 씻겨 내려가기도 했지만 좀처럼 지워지지 않는 게 있다. 고향의 '멋과 맛'이다.영변 용강리는 관서지방을 흐르는 청천강 지류인 구룡강이 흐르는 동네라서 붙은 지명이다. 구룡강 기슭에는 김소월(金素月·1902∼1934)의 시 '진달래꽃'(1922)으로 유명한 약산동대(藥山東臺)가 있다. 약산동대는 제일봉(해발 488m), 동대, 학벼루와 거북바위 같은 기암괴석이 있는 곳을 통칭한다. "우리 집에서 구룡강을 건너면 약산이야. 여기저기 돌로 된 봉우리가 우뚝 솟은 돌산인데, 어릴 적엔 동네 친구들과 술래잡기하면서 놀았어. 조금 커서는 나무하러 다녔어. 봄에 제일봉 꼭대기에 오르면 분홍빛 진달래꽃이 산 전체를 수놓았더라니까. 오죽하면 소월이가 약산 진달래를 노래했겠나."평북 구성 출신의 김소월뿐 아니라 여러 문인이 깎아진 절벽과 기암괴석이 어우러진 약산동대에 핀 진달래꽃에 매료됐다. 시인이자 수필가 노자영(盧子泳· 1898~1940)은 기행문 '약산동대'에서 '붉고 붉고, 타고 타고, 만지홍(滿地紅) 만지적(滿地赤)의 동대로 가는 길이 모두 다 정열이요, 모두 불덩이가 아닌가'라고 극찬했다. 김소월의 스승인 김억(金億·1896~?)이 약산동대를 여행한 이후 제자 김소월의 '진달래꽃'에 관한 생각을 적은 글이 명사들의 기행문을 모은 '반도산하'(1944)에 실렸다.'진달래는 약산동대에만 있는 것이 아니외다. 반도의 산하에는 어디든지 있습니다. 그런 것을 우리는 약산동대 진달래라 하면서 다른 곳 진달래는 다 내어버리고 약산동대의 그것만을 노래하며 귀엽다 하니 이것은 약산이 아름다운지라, 진달래까지 또한 우리의 사랑을 받는 것이외다.'흔하디흔한 진달래이지만, 어딜 가도 고향에서 핀 꽃만큼 아름답지 않은 게 실향민의 마음이다. 명창식 할아버지는 "진달래로 유명한 강화도 고려산엘 가 봤는데 약산동대보다 못하다"고 했다. 영변은 약산동대를 낀 '철옹성(鐵甕城)'의 고장이기도 하다. 철옹성은 영변읍을 중심으로 주변 산봉우리와 능선을 따라 사방을 두른 둘레 14㎞, 높이 6~7m짜리 성곽이다. 고구려 때 처음 성을 쌓은 것으로 전해진다. 성은 고려와 조선을 거치면서 계속 개축됐다. 조선 중기에 편찬된 지리지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서는 '약산의 험한 것은 동방의 으뜸이라'는 고기(古記)를 전하며 국방의 요충지로 꼽았다. 명창식 할아버지가 영변에 살 때 만해도 영변읍은 성곽도시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었다고 한다. "철옹성 안이 읍내였고, 장도 성 안에 섰어. 약산에 올라가서 내려다보면 꼭 쇠로 만든 옹기 모양이었지. 산을 넘지 않으면 들어갈 수가 없으니까 그야말로 천혜의 요새야. 우리 동네서 40리(약 16㎞) 떨어졌는데, 길이 어찌나 험한지 새벽에 장 보러 읍내 나가면 한밤중에나 돌아왔어."임진왜란 때 왜적을 피해 평양에 머물던 선조(재위 1567∼1608)는 형세가 급박해지자 1592년 6월 다시 피란길에 올라 영변에 닿았다. '선조실록'의 임진년(1592년) 6월 13일 기사에 '상이 안주에서부터 비를 무릅쓰고 영변부로 들어가니, 성안의 아전과 백성들은 모두 산골짜기로 피하여 들어가고 관인 5~6명만 있을 뿐이었다'는 대목을 보면, 임금의 철옹성 입성 장면은 초라하기 그지없다. 그런데 이 장면은 효종(재위 1649∼1659) 때 새로 고친 '선조 수정(修正)실록'에서는 삭제됐다. 선조는 당시 세자이던 광해군에게 조정을 나누는 분조(分朝)를 명해 영변을 지키게 하고, 명나라가 코앞인 북쪽 의주로 향했다. 임진왜란 중에는 한성, 성주, 충주에 보관했던 조선왕조실록이 모두 불에 타고, 전주에 소장했던 실록만 남은 상황이었다. 유일하게 남은 실록은 영변에 보관했다가 강화도로 옮겨졌다. 이때부터 강화도에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하게 됐고, 임진왜란이 끝난 뒤 서울, 강화도, 영변, 봉화, 평창 등 5개 사고에서 나눠 관리했다. 조선 왕실 역사의 명맥을 잇는 데에 일조한 강화도의 정족산 사고는 1866년 병인양요 때 강화도를 침략한 프랑스군에 의해 약탈당했다.# 이야기 둘명창식 할아버지는 'ㄷ'자 기와집에서 3대가 살았는데, 머슴을 둬야 할 정도로 집이 컸다. 8살 때 동네에서 유일하게 소학교에 입학했고 혼자서 10리(3.9㎞)를 걸어 통학했다고 한다. 명창식 할아버지가 가정을 꾸리면서 'ㄷ'자 집에서 아래채를 증축해 'ㅁ'자 기와집이 됐다. 할아버지는 부인, 자녀와 함께 추가로 지은 아래채에서 지냈다고 한다. 구룡강 건너인 영변읍(철옹성)과는 달리, 할아버지 동네인 소림면은 땅이 넓고 비옥해 농사짓기 좋은 여건이었다. 당시 집마다 누에를 기르는 양잠 농사도 많이 했다고 하는데, 적어도 조선 때부터 영변 주민들의 주업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1454년 편찬된 '세종실록' 지리지에서는 영변의 토산물을 오곡, 뽕나무, 삼(麻), 닥나무, 왕골, 배, 밤, 꿀, 옻, 석이(石耳), 오미자, 잣, 지초 등으로 적었다. 1530년 나온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는 실(絲), 삼, 오미자, 인삼, 벌꿀, 잣, 사향(麝香), 자초(紫草) 등을 영변 토산물로 꼽았다. 실을 뽑아낼 누에의 먹이인 뽕나무는 양잠의 필수 작물이다. 명창식 할아버지의 고향 기억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게 바로 평안도 음식이다. 그중에서도 아주 어릴 적부터 먹었던 냉면 맛을 도저히 잊을 수 없다고 했다. 지금은 '국민음식'이 된 냉면의 본산은 평양을 중심으로 하는 평안도다. 조선 후기 홍석모(洪錫謨·1781∼1850)가 쓴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는 냉면을 '무김치나 배추김치에 메밀국수를 말고, 여기에 돼지고기를 섞은 것'이라고 전하며 '냉면은 관서지방의 냉면이 최고다'라고 평가했다. 명창식 할아버지가 10대 시절이던 1920~30년대만 해도 냉면은 손님 대접할 때나 내놓는 귀한 음식이었다. 메밀면을 뽑는 국수틀을 가진 집도 마을에서 한두 집밖에 없었다고 한다. "영변에서는 손님한테 점심 먹으러 가자고 하면 무조건 냉면 먹으러 가자는 뜻일 정도로 고급 음식이었어. 하얀 동치미 국물에다가 메밀면을 말아먹기도 했어. 고기를 푹 고아서 육수를 낸 다음 식혀서 면을 말고 고기를 얹어 먹는 게 제일 고급이지. 소나 돼지가 귀해서 산에서 꿩을 잡아다가 육수를 내기도 했어."냉면을 만들기 위해 고기를 준비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메밀면을 뽑는 작업도 보통 일은 아니었다.메밀가루는 점성이 별로 없어 잘 뭉쳐지지 않기 때문이다. 조선 말기 풍속화가 기산(箕山) 김준근(金俊根·생몰년 미상)이 국수를 뽑는 과정을 그린 풍속화를 보면 알 수 있다. 일꾼 한 명이 거꾸로 사다리에 올라 받침대에 등을 대고 온몸의 무게를 실어 국수틀을 누르며 면을 밀어내고 있다. 이게 바로 평양식 메밀국수 제조법이라고 한다. 평북 정주 출신인 시인 백석(白石·1912~1996)은 영변을 여행하면서 얼마나 진한 메밀 냄새를 맡았던지 그때의 경험을 쓴 시 '북신-서행시초2'에서 '거리에서는 모밀내가 났다'고 읊었다. 백석은 1941년 '국수'라는 제목의 평안도 냉면을 소재로 다룬 시를 발표하기도 했다. '아, 이 반가운 것은 무엇인가/ 이 히수무레하고 부드럽고 수수하고 슴슴한 것은 무엇인가/ 겨울밤 쩡하니 닉은 동티미국을 좋아하고 얼얼한 댕추가루를 좋아하고 싱싱한 산꿩의 고기를 좋아하고/ 그리고 담배 내음새 탄수 내음새 또 수육을 삶는 육수국 내음새 자욱한 더북한 삿방 쩔쩔 끓는 아르궅을 좋아하는 이것은 무엇인가'(백석 '국수' 중에서)명창식 할아버지는 고향 잔칫집에서 빠지지 않던 온반을 먹어보고 싶다고도 했다. 지금은 생소한 평안도 음식인 온반은 푹 삶은 닭고기 육수에 각종 고명을 얹어 밥을 말아먹는 국밥의 일종이다. 이북식 잔치음식이라고 한다. 영변군 영변읍과 용강리가 속한 소림면 일대는 북한이 1960년대 초반 원자로를 들여와 원자력연구소를 조성했다. 이후 북한에서 핵물질을 생산하는 시설은 대부분 영변에 들어섰다. 고향 땅의 모습이 크게 변했을 거라는 게 명창식 할아버지의 걱정이다. "이젠 고향이 어떻게 생겼었는지 가물가물해. 영변에 핵시설이 들어서면서 풍경이 많이 바뀌었다는 얘기도 들었고. 그런데 어린 시절 귀한 별미로 먹던 냉면 맛이랑 온반 맛은 잊히질 않아. 마지막으로 진짜 고향 음식을 한번 먹어보고 싶어."글/박경호기자 pkhh@kyeongin.com 사진/임순석기자 sseok@kyeongin.com 그래픽/박성현기자 pssh0911@kyeongin.com/아이클릭아트평북 영변 출신 명창식 할아버지는 고향을 떠난 지 70년이 지났어도 여전히 약산동대에 핀 진달래꽃과 고향에서 먹은 냉면 맛이 잊히지 않는다고 한다.김소월의 시 '진달래꽃'을 비롯해 수많은 문학작품의 소재가 된 약산동대. 특히 봄철 산을 분홍빛으로 뒤덮는 진달래 군락으로 유명하다. 아쉽게도 진달래가 만발한 사진은 남한에서 구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19세기 초 제작된 전국 군현지도집인 '광여도(廣輿圖)'에 수록된 영변 철옹성 일대 지도. 성 왼쪽 아래 소림면(少林面)이 명창식 할아버지의 고향이다. 출처/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조선 말기 풍속화가인 기산 김준근이 그린 메밀국수 면발을 뽑는 장면. 한글로 '국수 누르는 모양'이라 제목을 붙인 이 그림은 평양식 국수 제조 방식이다. 출처/민속원 발간 '기산(箕山), 한국의 옛그림 풍경과 민속'

2017-07-26 박경호

[zoom in 송도]인천경제청 '투모로우시티 활성화' 연구용역 마무리

'u시티 비전센터' 4차산업 홍보관'u 복합환승센터' 주민공간 활용상가동, 앵커기업 유치 휴게시설연간 약 21억원대 수익발생 기대내년 개장 목표 리모델링 공사도인천 송도국제도시 국제업무지구에 있는 복합시설물 '투모로우시티'(Tomorrow City)의 운영 방안이 확정됐다. 연내 소유권 이전 절차와 리모델링이 이뤄지면, 내년부터 운영이 가능할 것으로 예상된다. 인천경제자유구역청은 한국산업관계연구원에 의뢰한 '투모로우시티 개편 및 활성화 방안 연구' 용역이 최근 완료됐다고 23일 밝혔다. ┃표 참조투모로우시티는 송도국제업무지구 E6-1블록에 있는 지하 2층, 지상 6층, 연면적 4만8천㎡짜리 복합시설물이다. 이 건물은 2008년 3월 건립 공사가 시작돼 이듬해 7월 완공됐지만, 공사비 정산 관련 소송으로 2011년부터 운영이 중단됐다. 수년간 방치돼 있는 셈이다. 인천경제청은 지난해 소송이 종결됨에 따라 투모로우시티 개편 및 활성화 방안 수립 용역에 착수했다. 투모로우시티는 ▲u-City 비전센터 ▲u-복합환승센터 ▲상가동 ▲광장 등으로 구성된다. 연구 용역 결과를 보면, 'u-City 비전센터'는 4차 산업혁명 관련 기술·시설을 홍보하고 체험하는 공간으로 활용된다. 4차 산업혁명 홍보관, VR(가상현실) 체험관, 드론 홍보관 등을 조성하는 방안이 제시됐다. 국토교통과학기술진흥원을 유치해 연구개발·기술혁신 전시관, 4차 산업 기술 전시관을 운영하는 방안도 검토됐다.'u-복합환승센터'는 대중교통 환승과 주민들을 위한 공간으로 사용된다. 인천경제청은 송도역 복합환승센터(2021년 개장 예정) 건립사업을 고려해 환승센터 기능을 축소하기로 했다. 1층만 환승센터 기능을 유지하고 나머지 2·3층은 주민을 위한 공간으로 쓰겠다는 구상이다. 인천경제청은 2층에 레스토랑 등 어린이·가족시설을, 3층에는 의료관광·뷰티·드론 관련 아카데미 시설을 유치할 계획이다. 인천경제청 관계자는 "인천공항과 지방 도시를 오가는 버스들이 투모로우시티를 경유하게 할 것"이라며 "투모로우시티 내부와 주변에 상업시설이 많이 있기 때문에, 공항 환승객들이 관광을 즐기는 공간이 될 것"이라고 기대했다. 'u-City 비전센터'와 'u-복합환승센터' 1층에는 인천관광을 홍보·안내하는 공간도 조성된다.'상가동'은 임대 수익을 창출하는 공간이다. 인천경제청은 지상 1~2층에 광역상권을 대상으로 하는 앵커기업을 유치하고, 지하 1층에는 판매시설과 휴게시설을 입점시킬 계획이다.'광장'은 워터 스퀘어, 아이스 스퀘어, 테라스 카페 등 이용자에게 휴식(아늑함)이나 경험(즐거움) 또는 편의(편안함)를 제공하는 공간으로 활용될 예정이다.투모로우시티 수익성 지수는 1.27로 나왔다. 기준치 1을 넘었다는 것은 사업성이 있다는 뜻이다. 이번 연구 용역에서도 연간 약 21억 원의 수익이 발생하는 것으로 예상됐다. 투모로우시티는 인천도시철도 1호선 '인천대입구역'과 연결돼 대중교통 접근성이 좋은 데다, 인천공항도 가깝다. 입지 조건은 뛰어나기 때문에, 경쟁력 있는 시설을 유치하는 게 수익 창출의 관건이 될 것으로 보인다.인천경제청은 인천시 공유재산심의위원회 심의, 인천시의회 의결 등의 절차를 거쳐 인천도시공사로부터 투모로우시티 소유권을 받을 방침이다. 이후 2018년 개장을 목표로 리모델링(개·보수) 공사와 시설 유치 활동을 추진할 계획이다. 인천경제청 관계자는 "우리가 투모로우시티를 직접 운영할지, 다른 기관에 운영을 맡길지는 아직 결정되지 않았다"고 말했다. /목동훈기자 mok@kyeongin.com최근 활성화 방안 수립 연구 용역이 완료된 송도 '투모로우시티'(Tomorrow City) 전경. 4차 산업혁명 등 첨단 기술을 전시·체험하는 공간과 환승센터로 활용된다. 환승센터 기능이 당초보다 축소되는 대신 주민들을 위한 공간이 늘어날 예정이다. /경인일보 DB

2017-07-23 목동훈

[송도국제도시 브리핑]G타워 가상현실기기 설치 'IFEZ 과거~현재 한눈에'

■G타워 가상현실기기 설치 'IFEZ 과거~현재 한눈에'송도국제도시 G타워 1층 로비를 방문하면 VR(가상현실) 기기를 이용해 인천경제자유구역(IFEZ)의 현재와 과거를 볼 수 있다.인천경제자유구역청은 최근 G타워 1층 로비에 VR 기기 2대를 설치했다. 이 기기를 이용하면 올 6월 촬영한 항공파노라마 영상 등을 통해 송도국제도시, 청라국제도시, 영종지구 모습을 현장감 있게 관람할 수 있다.인천경제청은 2009년부터 매년 IFEZ 항공-VR 자료를 구축해 투자유치와 홍보 업무 등에 활용하고 있다. 올해부터 PC와 모바일기기를 이용해 IFEZ의 발전상을 볼 수 있는 IFEZ 3차원 공간정보서비스(3dgis.ifez.go.kr)도 제공하고 있다. 인천경제청 관계자는 "IFEZ 3차원 공간정보서비스의 3D, 2D, 항공-VR 자료의 최신성을 계속해서 유지해 나가겠다"며 "이를 통해 IFEZ의 투자유치와 홍보 업무를 지원하고, 시민과 소통·협업할 수 있도록 하겠다"고 말했다.■송도컨벤시아서 '스마트 기술·조달展' 11월30일 개막'국제 지속가능발전을 위한 스마트 기술 및 조달 전시회'(이하 STS&P 2017)가 인천 송도컨벤시아에서 오는 11월 30일부터 12월 2일까지 3일간 개최된다.이 행사는 전 세계적으로 심각한 빈곤과 기아, 질병, 환경오염을 극복하기 위해 지난 2015년 UN 특별 합의가 이뤄진 '2030년 지속가능발전 의제 및 목표'를 전면에 내세운 새로운 형태의 산업 전시회다.'STS&P 2017'에는 지속가능발전과 기후변화 협약의 이행에 필요한 모든 기술(스마트 기술)이 전시될 예정이다. 지속가능발전 목표와 기후변화 협약 이행의 진행 상황 등을 공유하고, 이런 국제사회의 흐름이 국내외 기업의 중장기 경영 전략에 어떠한 영향을 줄 것인지를 논의하게 된다.STS&P 2017 조직위원회 관계자는 "한국은 세계에서 유일하게 OECD 수혜국에서 공여국으로 발돋움한 국가다. UN 등 국제기구의 원조 대상이었던 국가에서 미래 수요 개발과 국제조달 자원의 공유 및 발전을 위한 국제전시회가 열린다는 데 큰 의의가 있다"고 했다. /목동훈기자 mok@kyeongin.com송도 G타워 1층에 마련된 VR 체험 공간. /인천경제자유구역청 제공

2017-07-23 목동훈

[실향민이야기 꿈엔들 잊힐리야·28]평안북도 영변군 출신 명창식 할아버지(中)

큰아버지 명제세 선생 임시정부서 맹활약1919년 3·1운동 직후 2차 '만세운동' 추진강화도 출신인 유경근·윤종석과도 연결돼1920년대 조만식과 국산품애용운동 전개초대 심계원장 역임·전쟁 직후 납북 당해아버지 명제영 목사 영변교회 전도사 활동당시 담당 목사가 이후 강화 잠두교회 부임이동휘·조봉암이 다니던 곳… 민족애 영향아들 명창식 "후세에서 오래 기억됐으면…"평안북도 영변이 고향인 명창식(98) 할아버지의 집안 사람들은 인천 강화도 출신 독립운동가들과의 인연이 남다르다. 강화도 역사에서 중요한 위치에 있는 감리교 잠두교회(현 강화중앙교회)와도 묘하게 얽혔다. 할아버지의 큰아버지 명제세(明濟世·1885~?) 선생은 일제강점기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다. 1990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됐다. 명제세는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외국어학교에서 중국어를 배운 뒤 1910년대 초반 중국 톈진(天津)에서 무역상을 했다. 1919년 중국 상하이에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됐을 무렵 톈진에서는 조선 청년들을 중심으로 독립운동을 위한 비밀조직인 '불변단(不變團)'이 결성됐는데, 명제세는 부단장으로 참여해 단장까지 지냈다. 불변단은 결성 직후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비밀외곽단체로 편제돼 군자금을 모으고, 국내에서 첩보활동을 하는 임시정부 '특파원' 역할을 했다. 명제세는 1919년 3·1 운동 직후 '제2차 독립만세운동'을 추진하기 위해 9월 톈진을 떠나 서울로 향했다. 임시정부로부터 서울에서 강화도 사람들이 자주 묵는 '조선여관'에서 지내면서 강화도 출신 송암(松菴) 유경근(劉景根·1877~1957)과 시위운동을 논의하라는 지시를 받은 터였다. 유경근은 1905년 강화도 자택에 광창학교를 설립한 교육운동가이기도 했고, 잠두교회 분회를 지어 헌납한 종교인이기도 했다. 하지만 서울에 도착한 명제세는 유경근을 만나진 못했다. 유경근은 고종의 다섯째 아들인 의친왕을 상하이로 피신시켜 해외 망명정부를 세우려 했던 비밀독립운동 단체인 '대동단(大同團)' 활동에 참여했다가 일제에 체포된 뒤였기 때문이다. 대동단원이자 세브란스의학교 3학년 학생이던 강화도 출신 윤종석(尹鍾奭·1896~1927)도 대동단 사건으로 체포됐는데, 국사편찬위원회의 '한국독립운동사자료집' 6권에 실린 윤종석의 당시 심문조서에 이 같은 명제세와 유경근에 관한 내용이 나온다. 명제세는 이듬해까지도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제2차 독립만세운동을 계속 추진했지만 결국 실패했다. 이후 일본 경찰에 체포돼 징역 3년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고, 주요 간부를 잃은 불변단은 해산됐다. 불변단이 사라진 뒤 톈진에는 여러 조선인 단체가 생겼다. 그중 하나가 사회주의 계열의 '고려국민회'다. 이는 강화도에서 민족계몽운동을 했고, 상하이 임시정부 국무총리를 지내기도 한 이동휘(李東輝·1873~1935)가 지원한 단체였다고 한다. 명제세는 1920년대 초중반에는 민족주의계열의 독립운동가 조만식(曺晩植·1883~1950)과 함께 조선물산장려회를 결성해 국산품애용운동인 '조선물산장려운동'을 주도했다. 명창식 할아버지는 이때 모습을 기억하고 있다."큰아버지는 양복을 절대 안 입었고, 늘 선비처럼 길게 수염을 기른 채 하얀 한복만 고집하셨어. 겉보기와는 다르게 고지식하지 않고 호탕한 성격이어서 주변에 사람이 많이 모였어. 국산품을 애용해야 한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사셨지."조선물산장려운동이 일본의 탄압으로 와해된 1930년대 중반부터 해방까지 명제세 선생의 행적은 당시 신문이나 자료를 통해 찾아보기 어렵다. 명창식 할아버지는 "큰아버지가 요시찰 인물로 지정돼 본인은 물론 우리 가족까지 일본 형사가 따라다니면서 괴롭혔다"며 "영변에 탄광이 많은데, 해방될 때까지 탄광 여기저기를 옮겨 다니면서 은거했다"고 말했다. 해방 직후에는 월남해 이승만(李承晩·1875~1965)이 결성을 주도한 정치조직인 '대한독립촉성국민회' 부위원장을 지내며 남한 정부 수립에 깊숙이 관여했다. 명제세는 1948년 8월 정부 수립과 함께 대한민국 초대 심계원장(감사원장)에 임명됐다. 당시 명창식 할아버지 가족은 1947년 5월 북한 당국에 의해 고향 영변에서 쫓겨나 큰아버지 집에서 살고 있던 중이었다.큰아버지가 장관급인 심계원장에 오르면서 현 서울역 옆에 있던 중앙청(1996년 철거) 인근에 관사가 제공됐다고 한다. 명창식 할아버지 가족도 심계원장 관사로 거처를 옮겼다가 머지않아 노량진에 집을 얻어 독립했다. "큰아버지는 심계원 공무원들한테 출근할 때 무슨 일이 있어도 점심 도시락을 싸오라고 지시했어. 감사업무를 하는 공무원이니까 외부에 나가서 밥 얻어먹지 말라는 뜻이거든. 너무 강직하셔서 아랫사람들한테는 영 인기가 없었지."명제세 선생은 한국전쟁이 터진 직후 서울을 지키다가 납북됐다. 역사학자 김성칠(金聖七·1913~1951)이 1945년 12월부터 1951년 4월까지 쓴 일기를 엮은 '역사 앞에서'(정병준 해제)에는 명제세의 아들이 김성칠을 찾아온 장면이 나온다. 1950년 8월 6일 일기를 보면, 명제세의 아들은 아버지의 납북에 대해 "정부는 부통령도 내버리고 외국사신들에게까지 충분한 연락을 하지 않고 허겁지겁 도망하는 판"이라고 울분을 토했다. 이어 명제세의 아들은 "(아버지가) '40년 동안 일제의 몹쓸 착취와 닦달을 받고 나서 뼈만 앙상하게 남아 있는 가엾은 조선 사람들이 아닌가. 피차 서로를 위하고 아껴주어야지. 서로 칼부림질해서 함께 넘어져 죽을 까닭이 무엇이 있나'라고 하시며 순순히 포박을 받으셨다"고 말했다고 김성칠은 기록했다. 명창식 할아버지의 부친인 명제영(明濟英·1898~1966) 목사는 평북 영변에 살던 시절 감리교 영변교회 전도사로 활동했다. 당시 백학신(白學信·1899~?) 목사가 영변교회를 담당했다고 한다. 평북 용천 출신인 백학신 목사는 1942년부터 1944년까지 영변교회 주관자로 있다가 1948년 강화도로 부임했다. 1949년부터는 잠두교회 담임목사로 부임했다고 '강화중앙교회 100년사'에서 전한다. 백학신 목사는 한국전쟁 발발 이후 인천상륙작전으로 전세가 역전된 1950년 9월 말 강화도를 점령했던 북한 인민군이 철수하는 과정에서 납북됐다. 1900년 설립된 잠두교회는 이동휘가 초창기 교인으로 활동했고, 같은 시기 강화도에서 교육운동에 힘을 쏟은 독립신문 기자 출신 손승용(孫承鏞·1855∼1928) 목사 같은 걸출한 인물이 담임목사를 맡았다. 강화도에서 태어난 죽산(竹山) 조봉암(曺奉岩·1899~1959)도 어릴 적 잠두교회를 다녔다. 소설가 이원규가 쓴 '조봉암 평전'에서는 이동휘가 강조한 신앙을 통한 구국투쟁이 잠두교회 교인들의 마음에 깊이 뿌리를 내렸고, 이 같은 배경을 가진 교회를 다닌 어린 조봉암이 민족애와 조국애를 생각하게 됐을 거라고 했다. 죽산 조봉암은 1919년 3월 18일 강화읍에서 열린 '강화 만세시위'에 주도적으로 참여하게 되고, 같은 해 4월 중순에는 독립선언서를 비밀리에 배포하다가 경찰에 체포돼 약 3개월간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했다. 명창식 할아버지는 틈만 나면 평생 모은 할아버지 집안과 감리교회의 역사 관련 자료를 살필 정도로 배움의 열정이 남다르다. 명창식 할아버지를 세 번째 찾아간 지난 5일 오전 인천 남구 감리교 원로원을 찾았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돋보기안경을 쓴 할아버지는 인천지구 평북도민회가 1997년 펴낸 '평안북도지'를 소리 내어 읽고 있었다. 취재기자에게 설명할 자료를 준비하고 있었다고 한다. 이날 취재기자가 인터뷰를 위해 가져온 김성칠의 '역사 앞에서'에도 큰 관심을 보였다. 큰아버지 명제세에 관한 대목이 등장하기 때문이다. 할아버지는 인터뷰에 동석한 막내아들에게 "당장 책을 주문해달라"고도 했다. 실향민 명창식 할아버지는 고향 영변에 대한, 집안에 대한 자료 하나하나를 보물처럼 소중히 다룬다. 자신이 사라진다면 기억은 잊히겠지만, 자료는 오랜 시간 남을 거란 생각에서다. 그것이 할아버지의 마지막 소명이라고 여기고 있다. 할아버지는 1990년 감리교 원로원에 입주하면서 인천과 첫 인연을 맺었다. 스스로 그 이전까지는 인천과 특별한 인연이 없다고 했지만, 할아버지의 삶과 삶에 얽힌 인물들을 따라가다 보니 인천의 이야기와도 연결 지어졌다. 격동의 한 세기를 살아온 실향민 1세대의 이야기를 모으는 게 중요한 이유다. 명창식 할아버지는 "옛날에 만나던 사람들이 하나둘씩 세상을 떠나고 이젠 몇 사람 남지 않았다"며 "옛사람들의 이야기를 후세에서 오래도록 기억하고, 거기서 새로운 걸 찾았으면 하는 바람"이라고 말했다.글/박경호기자 pkhh@kyeongin.com 사진/임순석기자 sseok@kyeongin.com 그래픽/성옥희기자 okie@kyeongin.com /아이클릭아트사진/명창식 할아버지 제공·경인일보 DB·한국민족문화대백과명창식 할아버지가 인천 남구 주안동 감리교 원로원에서 낡은 책을 꺼내 읽으며 집안사람들에 얽힌 이야기를 회고하고 있다.

2017-07-19 박경호

[zoom in 송도]인천글로벌캠 4개 대학, 코엑스서 19일 공동 입시설명회

인천글로벌캠퍼스에 입주한 4개 대학이 오는 19일 서울 강남 코엑스 컨퍼런스룸 318호에서 '2017년도 인천글로벌캠퍼스 4개 대학 공동 입시설명회'를 개최한다.이날 오전 10시에서 낮 12시까지는 한국조지메이슨대학교와 유타대학교 아시아캠퍼스가, 오후 1~3시는 한국뉴욕주립대학교와 겐트대학교 글로벌캠퍼스가 입학 정보를 설명한다. 학교와 학과 소개, 장학금 제도 등 전반적인 입학 전형이 안내될 예정이다. 각 대학 입학처 관계자와의 개별상담을 통해 맞춤형 입학 컨설팅이 가능하다. 27일 오후 2~6시에는 부산 해운대 그랜드호텔 프라이빗홀에서 부산지역 학생과 학부모를 위한 공동입시설명회를 개최한다.29일 오전 10시~오후 2시에는 IGC 오픈하우스가 인천글로벌캠퍼스 대강당에서 개최된다. 오픈하우스 행사는 입학에 관심 있는 학생과 학부모 누구나 캠퍼스를 직접 찾아 설명을 듣는 자리다.각 공동설명회 참가 신청은 인천글로벌캠퍼스 홈페이지(www.igc.or.kr) 또는 각 대학 홈페이지에서 할 수 있다.공동설명회를 진행하는 4개 대학은 세계 100위권 미주·유럽 명문대학들로, 한국 정부 초청으로 인천글로벌캠퍼스에 입주해 있다. /목동훈기자 mok@kyeongin.com

2017-07-16 목동훈

[zoom in 송도]‘9월 개교 한국 FIT’ 찾은 올리바 뉴욕 FIT 부총장

패션디자인·패션경영학과 2년제 개설… 나머지 2년 美·伊 현지학습본교 동일수준 수업… 학생·기업간 산업 연계 글로벌 교육환경 목표'한국뉴욕주립대 FIT'(SUNY Korea Fashion Institute of Technology)가 9월 개교를 준비하고 있다.뉴욕주립대 패션기술대학(FIT)은 2015년 2월 인천경제자유구역청과 양해각서를 교환하고 한국캠퍼스 개교를 위한 절차를 시작했다. 올 2월 산업통상자원부 경제자유구역위원회는 '뉴욕주립대 FIT 한국캠퍼스 설립 승인안'을 의결했다.뉴욕 FIT는 미국 맨해튼에 위치한 패션 명문 학교다. 송도국제도시 인천글로벌캠퍼스에 입주하는 한국 FIT는 9월부터 '패션디자인학과'와 '패션경영학과'를 2년제 과정으로 개설해 운영한다. 한국캠퍼스에서 준학사 학위가 제공되며, 나머지 2년을 미국 또는 이탈리아에서 공부하면 학사 학위를 받을 수 있다.지난 12일 뉴욕 FIT 지아코모 올리바 교무 부총장과 캘리 브래넌 입학 부총장 등이 인천글로벌캠퍼스에 있는 한국뉴욕주립대를 방문했다. 9월 한국 FIT 개교를 앞두고 시설과 학사 일정 등을 점검·논의하기 위해서다. 지아코모 올리바 부총장과 서면 인터뷰를 진행했다.-한국 FIT는 뉴욕과 이탈리아에 이어 세계에서 3번째로 개교하는 캠퍼스다. 인천 송도를 선택한 이유는."학교를 개교할 때 가장 중요한 부분은 계획을 실행할 수 있는 기반이 있는지에 대한 고민이었다. 그동안 한국뉴욕주립대와 많은 대화와 논의가 있었다. 이런 시간을 통해 한국뉴욕주립대가 FIT에 큰 관심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됐고, 우리 FIT 역시 동일한 관심이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또한 뉴욕 FIT에 재학 중인 많은 한국 학생의 탁월한 학업 능력과 졸업 후 사회에 미치는 긍정적인 영향력을 볼 때 FIT가 한국에 있을 때 실현될 수 있는 많은 가능성과 역할을 생각하게 됐다."-한국 FIT 개교 준비 과정을 듣고 싶다. 어려움도 있었을 것 같다."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것 중 하나가 FIT 홈캠퍼스의 프로그램을 한국캠퍼스에 적용할 수 있는가였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여러 번 회의가 있었고, 동일한 수준의 교육을 제공하기 위해 우선 FIT 홈캠퍼스 교수 일부를 한국 FIT로 보내서 (학생을) 가르칠 계획이다. 한국 FIT가 성장하면, 한국에서 교수진을 선발할 수 있도록 함께 노력할 것이다. 한국 FIT를 통해 한국패션산업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학생과 기업 간 협력이 이뤄지기를 기대한다. 이것이 실제로 구현될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있다."-한국뿐만 아니라 중국과 일본 등 아시아 국가 학생을 타깃으로 운영된다고 봐도 되나."맞다. 중국과 일본뿐 아니라 베트남, 싱가포르 등 아시아 국가 학생들을 모두 타깃으로 생각하고 있다. FIT는 세계화에 중점을 두고 있기 때문에, 한국 FIT가 생기면서 아시아권에서 더 다양한 국가의 학생들을 만날 수 있길 기대하고 있다. 지금까지는 한국에서 많은 학생이 뉴욕 FIT에 가서 공부했다면, 이제는 반대로 많은 미국 학생과 재미교포가 한국 FIT에 와서 공부할 수 있는 환경이 만들어졌다. 서로에게 좋은 영향과 결과를 가져올 것이라 확신한다."-FIT 프로그램의 우수성과 특징을 설명해달라."FIT는 세계적인 패션 명문 학교라는 브랜드를 비롯해 다양한 교육 프로그램과 전공을 제공하고 있다. FIT에선 크게 패션과 경영으로 나누지만, 교육이 단지 두 가지 분야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다. 더 큰 영역을 가르치고 경험하게 하고 있다. 또한, 학생들이 전 세계 기업들과 협력해 더욱 다양한 경험을 할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하고 있다. FIT에는 1천명 이상의 교수들이 있는데, 많은 교수가 실제로 패션산업에 종사하고 있는 전문가들이다.-인천시는 송도에 패션 분야 산학연 클러스터를 구축하려고 한다. 한국 FIT가 클러스터 내에서 어떤 기능을 할 것이라고 기대하는가."중요한 것은 학생과 이들의 역할이나 연구에 대한 연결이라고 생각한다. 어떻게 학생들을 참여시킬 것인지에 대한 고민과 함께 단순히 문제 해결 능력만을 갖추는 것이 아니라 이 능력을 더 키워줄 수 있는지가 중요하다고 본다. 학생들에게 여러 기회가 제공되길 기대한다. 이를 위해서 우리 교수진과 학생들은 함께 노력할 것이다." /목동훈기자 mok@kyeongin.com지난 12일 한국뉴욕주립대를 방문한 뉴욕 FIT 지아코모 올리바 부총장(사진 왼쪽)과 로레타 대외협력 부총장(오른쪽)이 강의실과 오피스 등을 살펴보고 있다. /한국뉴욕주립대 제공

2017-07-16 목동훈

[zoom in 송도]스마트디바이스 제작팀 한자리… 'K - 글로벌 스마트 디바이스톤'

미래창조과학부가 주최하고 정보통신산업진흥원 등이 주관하는 'K-Global 스마트 디바이스톤 2017' 인천지역 행사가 오는 22~23일 K-ICT디바이스랩 송도(송도 NIPA)에서 개최된다.이 행사는 4차 산업혁명의 주체가 되는 스마트디바이스 제작에 관심이 있는 기획자, 디자이너, 개발자와 일반인 등을 대상으로 진행된다.올해 4회째인 이 행사는 전국 6개 지역 디바이스랩의 스마트디바이스 분야 대학 동호회 및 예비창업자들이 팀을 구성하고 제한된 1박2일간 아이디어를 제품화하는 방식으로, 인천지역의 디바이스 창작 문화 저변을 확산하는 데 목적이 있다. 온라인(www.devicelab.kr)으로 접수하고, 심사 후 6개 팀 30명 내외를 엄선해 진행한다.최우수와 우수 팀을 선정 시상하고, 전국 심사를 거쳐 해외 탐방의 기회를 준다.행사를 주관하는 'K-ICT디바이스랩 송도'는 인천지역 중소기업·창업자·학생을 대상으로 3D 프린팅 출력 지원, 3D 모델링 및 아두이노(Arduino) 교육 등을 진행하고 있다. 올해에는 남동국가산업단지 입주기업 재직자를 대상으로 모델링 무상 교육을 실시했다. 또 삼성전자와 SK Telecom 등 국내 첨단기업 전문가를 초빙해 전자공학도를 대상으로 4차 산업혁명 관련 기술 트렌드 교육을 진행했다.'K-ICT디바이스랩 송도'는 인천지역 중소기업과 창업자를 위한 제품 설계 지원사업도 벌이고 있다. 최근에는 SK Telecom 협조를 얻어 인천지역 학생과 창업자를 대상으로 IoT 전용 광역망 LoRa 교육을 했으며, 와이파이 기반이 아닌 광대역 전용 스마트디바이스 개발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인천시와 'K-ICT디바이스랩 송도'는 이번 행사 참가팀이 창업을 원할 경우, 창업보육센터 입주 및 창업자금 지원기관을 안내하는 등 행정적 지원을 아끼지 않을 방침이다. 또 이번 행사를 계기로 일반 시민을 대상으로 한 창업교육과 3D 프린팅 지원 등에 협업해 나갈 계획이다. /목동훈기자 mok@kyeongin.com지난해 8월 열렸던 K-Global 스마트 디바이스톤 인천지역 행사. 참가팀들이 단체사진을 촬영하고 있는 모습이다. /'K-ICT디바이스랩 송도' 제공

2017-07-16 목동훈

[실향민이야기 꿈엔들 잊힐리야·27]평안북도 영변군 출신 명창식 할아버지(上)

올해 98세 인천 주안동 감리교 원로원서 지내소림면서 대대로 풍헌 지낸 사회 지도층 가문해방직후 농촌청년훈련소·조선민주당서 활동공산당과 패싸움 연루돼 반동분자 낙인 감옥행이후 정치가였던 큰아버지 도움으로 '서울살이'전쟁때 한강다리 폭파로 집 부서져 피란길 올라종전이후 전국 곳곳서 37년간 목회자로서 살아목사였던 부친과 함께 농촌서 농업활성화 노력'상수(上壽·100세)'를 바라보는 명창식(98) 할아버지는 3·1운동이 일어난 해인 1919년 평안북도 영변군 소림면에서 태어났다. 김소월(金素月·1902∼1934)이 쓴 시 '진달래꽃'(1922) 속 '영변에 약산(藥山)'을 낀 바로 그 동네다. 감리교 목사 출신인 명창식 할아버지는 1990년 은퇴한 뒤 인천 남구 주안동에 있는 기독교대한감리회 원로원에서 지내고 있다. 1층짜리 단독주택인 원로원에 딸린 마당에는 각종 채소와 과일을 기르는 텃밭이 소담하다. 할아버지가 지내는 단독주택과 인근 다세대주택으로 구성된 원로원에는 은퇴한 목사 50여 가구가 살고 있는데, 100세가 넘은 원로도 있다. 할아버지는 이곳에서 부인과 사별했고, 부친인 명제영(明濟英·1898~1966) 목사도 여기서 세상을 떴다.기독교대한감리회는 교단 원로를 예우한다는 차원으로 1964년 인천 주안동에 전국에 하나뿐인 감리교 원로원을 마련했다. 원로원 땅은 해방 이후 감리교 목회자들이 미군정으로부터 불하받은 적산(敵産)농지였다고 기독교대한감리회가 낸 '해방 후 감리교 농촌선교사' 자료에 나온다. 감리교 직영농장을 운영하면서 농촌선교운동본부로 쓰다가 은퇴 목사를 위한 주택을 지었다. 태어난 평북 영변에서 지금의 인천에 이르기까지 100년에 가까운 할아버지의 삶은 한반도 100년 역사를 그대로 관통한다. 할아버지 집안에는 근현대사에 굵직한 발자국을 남긴 정치인도 있다. 명창식 할아버지가 들려준 이야기는 그야말로 역사교과서 속에나 나올 법하다.할아버지는 해방되던 해에 이미 가정을 꾸린 20대 중반이었다. 명창식 할아버지 집안은 영변 소림면에서 대대로 풍헌(風憲)을 지낸 사회 지도층이었다. 풍헌은 조선 때 지방 수령을 보좌하는 일종의 지방자치기관인 향소에서 면 단위 행정을 맡은 지역 양반이다. 전답 60마지기(1만2천평)를 소유할 정도로 넉넉하게 살았다. 또 기독교 집안이기도 했다. 부친 명제영 목사는 평양신학교를 졸업해 영변에서 선교활동과 농촌운동에 적극적으로 몸담았다. "원래 기독교 집안은 아니었는데, 우리 아버지가 젊은 시절 술고래였어. 유학자인 할아버지가 보다못해 '교회에선 술을 못 마시게 하니 교회에 나가라'고 해서 30대를 넘겨 평양신학교에 입학하고 기독교인이 되셨지. 그때부터 농촌운동을 열심히 하셨어. 아버지가 평양신학교에 다닐 동안 장남인 내가 농사짓고 집안일을 봤어."명창식 할아버지도 소학교와 중학교를 마치고 평안북도에서 세운 농촌청년훈련소에 들어갔다. 당시 각 면에서 2명씩만 선발했다고 한다. 일제강점기 말엽부터 영변군 농회(農會·농협의 전신)에서 기수(技手)로 근무했다. 기수는 지금으로 따지면 기술직 공무원이다. 논과 밭의 수확량을 늘리기 위해 양수기를 도입해 농업용수를 끌어온 일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고 했다. 할아버지는 평남건국준비위원장인 조만식(曺晩植·1883~1950)이 1945년 11월 창당한 조선민주당에서 청년당원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평안북도와 평안남도에선 해방 직후 조선민주당을 비롯한 기독교 민족주의자들을 중심으로 건국운동이 활발했다.해방 직후만 해도 북한은 김일성(金日成·1912~1994)의 조선공산당(북조선분국), 기독교도와 민족주의자들이 모인 조선민주당, 천도교 정당인 청우당 등 3개 정치세력이 협력하는 모양새로 정국을 이끌었다. 이들 정치세력은 1946년 초 '북조선 임시인민위원회'를 수립해 같은 해 3월 토지개혁 같은 주요 정책을 본격적으로 추진했다. 명창식 할아버지 집안은 토지개혁 이전인 1945년 말에 미리 농민에게 토지를 나눠줬다고 한다. 역사문제연구소가 낸 '북한의 역사'를 보면, 북조선 임시인민위원회는 할아버지 집안 같은 경우를 '애국지주'로 인정해 주택이나 농기구를 몰수하지 않았다. "조선민주당 소림면당에서 활동하면서 토지개혁도 농회에서 일했던 내가 앞장서서 했어. 집에 딸린 식구에 따라 남자는 100점, 여자는 70점, 아이는 50점으로 점수를 매겼어. 점수가 높은 순으로 토지를 할당해줬어. 산지는 나라 소유가 됐고. 왜정 때 일본놈들이 땅을 하도 꼼꼼하게 정리해놔서 그나마 수월했지."토지개혁은 북한 내 소위 지주계급의 저항을 불렀고, 조선민주당을 지지하던 상당수 지주와 자본가가 월남을 택했다. 조선민주당과 공산당 간 대립도 점점 심해지면서 물리적 충돌도 잦았다. 명창식 할아버지도 1946년 초 영변군에서의 조선민주당원과 공산당원이 벌인 패싸움에 연루돼 5개월 동안 평양 보안국에서 수감생활을 했다. 1989년 평안북도민회에서 발간한 '평안북도 망향 40년사'를 보면, 이 사건으로 투옥된 영변군 조선민주당원 60명 명단에 명창식 할아버지가 포함돼 있다. "같은 동네에서도 민주당원이랑 공산당원은 사이가 나빴어. 나무로 창을 만들어서 서로 싸운다기에 내가 공산당 소림면 책임자랑 타협해 중재했는데도 보안국으로 들어오라는 거야. 싸움을 모략했다며 반동분자라고 나한테 뒤집어씌웠어. 그때부터 북한에서 살기 힘들어질 것 같더라고."할아버지를 평양 보안국에서 풀어준 이는 목사이면서 1970년대 북한 국가 부주석까지 지낸 정치인 강양욱(康良煜·1903~1983)이었다. 김일성의 외가 쪽 친척인 강양욱은 명창식 할아버지 부친의 평양신학교 3년 후배여서 가까웠다고 한다. 하지만 할아버지 식구들은 1947년 5월 당국에 의해 "숙청당했다"며 집에서 쫓겨났다. 결국 월남할 수밖에 없었다. 할아버지의 부친은 4남매 중 셋째다. 둘째 형과 당시 시집간 막내 여동생은 북에 남았다. 할아버지는 당시 서울에 있던 큰아버지에게 의탁했다. 큰아버지 명제세(明濟世·1885~?)는 중국 상해의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독립운동을 하다가 해방 후 귀국해 서울에서 정치활동을 했다. 그는 대한민국 초대 심계원장(지금의 감사원장)을 지내기도 했다. 큰아버지 도움으로 명창식 할아버지는 난지도 농장을 관리하는 일자리를 얻었다. 한강 하류에 있는 272만㎡ 규모의 범람원인 난지도는 당시 잡곡이나 콩·옥수수를 재배하는 밭이었다. 이후 1978년부터 1993년까지 서울시의 쓰레기매립장으로 쓰이다가 현재는 공원으로 조성됐다. 한국전쟁 직전까지는 노량진에 조그만 목조주택을 마련해 부모와 함께 살았다. 북한 인민군이 38도선을 넘어 남쪽으로 진격한 지 3일째인 1950년 6월 28일 새벽, 명창식 할아버지의 집이 마치 지진이 날 때처럼 흔들리기 시작하더니 흙으로 된 벽이 전부 떨어져 나갔다. 금방이라도 무너질 듯했다고 한다. 한국군이 서울을 점령한 인민군의 남하를 늦추기 위해 한강철교와 한강대교를 폭파한 순간이었다. 이날 한강 다리 폭파로 피란길에 오르려 다리 위에 있던 민간인을 포함해 500~800명이 폭사하거나 물에 빠져 목숨을 잃었을 것으로 당시 미군 군사고문단은 추정했다. 미군은 6월 29일부터 이틀간 폭격기를 동원해 한강 다리에 맹폭을 가했다. 역사학자 김성칠(金聖七·1913~1951)이 1945년 12월부터 1951년 4월까지 쓴 일기를 엮은 '역사 앞에서'(정병준 해제)에는 6월 27~28일 인민군이 막 점령하기 시작한 서울의 상황이 나온다. 당시 서울대학교 사학과 전임강사였던 김성칠은 이때 일기에 '비는 본격적으로 내리기 시작하고 대포알은 쉴새없이 머리 위를 날고 있었다. 휘잉하고 하늘을 찢는 듯 공중을 나는 소리, 이어서 탕 하고 포탄의 터지는 소리. 저것이 백에 한번 추호라도 겨냥을 잘못하면 우리는 죽을 운명에 놓여있다'고 적었다. 서울이 포화에 휩싸이자 명창식 할아버지 식구는 피란길에 올랐다."이북에서 반동분자로 찍힌 데다가, 집도 부서져서 피란을 떠날 수밖에 없었어. 경기도 이천의 교회로 갔다가 충남 조치원에서 기차를 타고 대구, 울산을 거쳐서 부산으로 내려갔지. 큰아버지만 서울에 남아있었는데, 서울이 수복되면서 사촌 형님이랑 둘이서 다시 상경했어. 큰아버지는 인민군에게 잡혀갔고, 노량진 집은 폭격 맞아서 흔적도 안 남았더라고."수복된 서울로 다시 올라온 명창식 할아버지는 1·4후퇴 때까지 중앙청(1996년 철거된 조선총독부·대한민국 초기 정부청사) 인근에서 미군 구호물자 배급일을 했다. 주로 밀가루를 주민들에게 나눠줬는데, 먹을 게 귀한 전쟁통이라 밀가루조차도 턱없이 부족했다고 한다.서울대 교수조차 배를 곯는 상황에서 예외일 수는 없었다. 김성칠의 1950년 10월 18일자 일기를 보면, 한 동료 교수가 '처음엔 매 세대에 밀가루 한 포대씩을 나눠주느니, 쌀을 5홉씩 배급 주느니 말만 들어도 푸짐하더니 5홉이 2홉으로 줄고 2홉이 다시 1홉 4작으로 줄고 그거나마 뚝 끊어지고 (중략) 인제는 꼼짝없이 굶어 죽는 수밖에 없이 되었어'라고 말하는 장면이 나온다. 명창식 할아버지는 전쟁이 끝난 뒤 아버지를 따라 경북 김천에 있는 아천교회 전도사로 활동했고, 얼마 후 목사로 부임했다. 명창식 할아버지는 대구, 경북 경주, 충남 천안, 논산(강경)을 비롯해 전국을 돌며 37년간 목회자로 살았다. 전쟁 이후에도 농촌운동에 적극적이었다. "아버지도, 나도 평생 농촌에서 목사를 지내면서 농업을 활성화하기 위해 노력했어. 1960년대까지도 농촌은 잘살지 못했거든. 연탄보일러도 직접 만들어서 교인들한테 나눠줬고…. 농촌을 살리고자 했던 그런 활동들이 내 인생에서 가장 보람돼."명창식 할아버지의 인생을 좇아가자니 인천의 이 원로원이 한국 현대사의 격동의 한 세기를 고스란히 보여주는 오래된 기억의 창고라는 생각이 들었다.글/박경호기자 pkhh@kyeongin.com 사진/임순석기자 sseok@kyeongin.com3·1운동이 일어난 해인 1919년 평안북도 영변에서 태어난 명창식 할아버지의 삶은 한반도 100년 역사를 그대로 관통한다. 할아버지가 살고 있는 인천 남구 주안동 감리교 원로원은 그야말로 한국 현대사의 격동의 한 세기를 고스란히 보여주는 오래된 기억의 창고다./아이클릭아트

2017-07-12 박경호

[zoom in 송도]송도에 둥지튼 대동도어… 자동차 부품산업 키운다

대동도어(주)가 송도국제도시 첨단산업클러스터에 제조·연구시설을 마련했다.대동도어는 송도 첨단산업클러스터 내에 부지면적 1만7천947㎡, 연면적 2만2천54㎡(4층) 규모의 제조·연구시설을 착공 10개월 만에 준공했다. 이 시설은 자동차 '도어 래치'(Door Latch, 자동차 손잡이를 포함한 문이 열리고 잠기게 하는 장치)와 신규 사업인 옆문 및 트렁크 자동개폐시스템 등을 만들고 연구하는 공간이다. 시설 구축에 426억 원이 투입됐다.대동도어는 자동차 도어 래치를 생산하는 자동차부품 중견기업이다. 지난해 기준으로 매출액과 종업원 수가 각각 1천960억 원, 264명에 달한다.인천경제자유구역청에 따르면 이번 사업에는 자동차용 도어 모듈, 윈도 레귤레이터, 슬라이딩 도어 생산 전문기업인 일본 하이렉스(HI-LEX)가 미화 1천800만 달러를 투자했다. 대동도어는 자동차 도어 래치 분야 세계시장 점유율 3위 기업인 일본 미쓰이(MITSUI), 자동차 도어 부품(Window Regulators) 분야 세계시장 점유율 1위 기업인 독일 브로제(Brose)로부터 각각 기술이전을 받아 자동차 옆문 및 트렁크 자동개폐시스템의 국산화를 추진한다.대동도어는 송도 제조·연구시설에 500여 명이 근무하게 되며, 자동개폐시스템 국산화로 연간 580억 원의 수입 대체 효과와 연간 816억 원의 매출 증대가 가능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인천경제자유구역에는 세계 100대 자동차 부품기업인 일본 스미토모(Sumitomo), 독일 헬라(Hella)와 브로제 등 자동차 관련 기업 15개사가 있다. 이들 기업이 훌륭한 R&D 인프라와 지리적 이점을 바탕으로 신제품 국산화 및 수출 확대, 국내 사업 확대, 인천지역 협력업체와의 상생협력 관계 강화, 고용 창출에 크게 기여할 것으로 인천경제청은 예상하고 있다. /목동훈기자 mok@kyeongin.com송도 첨단산업클러스터에 건립된 자동차부품 중견기업 대동도어(주)의 제조·연구시설. 대동도어는 이곳에서 자동차 도어 자동개폐시스템 등을 생산하고 관련 기술을 연구하게 된다. /인천경제자유구역청 제공

2017-07-09 목동훈

[zoom in 송도]송도국제도시 '고품격 경관 조성' 간담회

민경욱 국회의원·경제청 직원·건설사등 참석"유동인구 적으며 건축물중 아파트 비율 높아""외모보다는 송도만의 특색·정체성" 한목소리주거·상업·업무시설 조합 가이드라인 지적도인천 송도국제도시 경관을 주제로 한 간담회가 최근 인천경제자유구역청에서 열렸다. 송도의 경관 현황을 진단하고 개선 방안을 모색하기 위한 자리였는데 '송도'라는 도시에 대해 고민해보는 시간도 됐다.민경욱(자유한국당, 인천 연수구을) 국회의원은 지난 5일 '한국의 마리나 베이, 송도국제도시 위상에 걸맞은 고품격 경관 조성, 어떻게 추진할 것인가'를 주제로 간담회를 개최했다. 인천경제청 경관위원회 위원, 인천경제청 간부공무원, 송도 개발사업에 참여하고 있는 건설사와 설계사 직원, 송도 주민대표 등이 참석했다. 민경욱 의원이 직접 사회를 맡아 간담회를 진행했다.인천경제청 경관위원회 위원들이 지켜본 송도는 어떨까. 유동 인구가 적고, 건축물 가운데 아파트 비율이 높다는 게 위원들의 공통된 의견이었다. 외모(경관)보다는 내적인 가치(삶의 질)가 중요하고, 송도만의 특색을 찾아야 한다는 의견도 제시됐다.박경진 한양대 교수는 "밖에서 보면 송도가 비약적인 발전을 이뤘다. 하지만 안에서는 인간미가 떨어지는 측면이 있을 수 있다"며 "밖에 보여 주려는 도시가 아닌, 안에서 밖을 내다보는 송도를 지향해야 한다"고 했다.석주화 (주)피어인투스페이스 대표는 "(송도는) 경관적으로는 업적을 만들었다. 어느 정도 성공적"이라면서도 "도시에 사람이 별로 많지 않다. 주민들의 외부 활동을 유도할 수 있는 방안이 필요해 보인다"고 했다. 차량이 없으면 이동하기 불편하고, 보행 동선도 건물로 들어가는 폐쇄적인 구조라는 지적이다. 석 대표는 "경관도 국제업무지구에 한정된다는 아쉬움이 있다"며 "신도시다 보니 대형 고층 건물과 효율성을 우선시하는 문제가 있다"고 했다.신지훈 단국대 교수는 '예쁜 도시'보다 '살기 좋은 도시'를 추구해야 한다고 강조했고, 임종엽 인하대 교수는 "뉴욕 등 선진국 주요 도시를 쫓아가기보다는 송도의 특색과 정체성을 찾아야 한다"고 제언했다.김환용 인천대 교수도 '사람이 많은 도시' '살기 좋은 도시'에 대해 이야기했다. 김 교수는 "경관이 좋다고 사람이 많아지는 것은 아니다. 경관이 아름답다고 살기 좋은 도시가 되는 것은 아니다"고 했다. 이어 "선진 주요 도시는 주거·상업·업무시설이 적절히 조합돼 있다"며 "송도는 아파트 의존도가 높다. 앞으로 다양성을 가질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했다.송도 주민들은 경관에 대한 관심이 매우 높다. 아파트의 경우 층수, 동(棟) 배치, 외관 디자인, 외벽 도색 등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큰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층수와 동 배치는 인근 아파트의 조망권과 일조권에 영향을 주기도 한다. 특히 송도 6·8공구와 워터프론트 개발을 앞두고 주민들의 관심이 더욱 높아지고 있다. 송도 주민들은 6·8공구 해안가와 워터프론트 호수변을 '특별건축구역'으로 지정해 창의성과 특색을 갖춘 건축물을 건립해야 한다는 의견도 내놓고 있다. 간담회에 참석한 한 주민대표는 "송도가 유명한 것은 도시 경관이 멋있기 때문이다. 건설사는 가성비를 따지는데, 경관에 더욱 신경을 써야 한다"고 했다.건설사와 설계사는 어려움을 토로했다. 왕원식 포스코건설 설계그룹장은 "소비자들이 선호하는 것과 건물의 효율성 등 디자인보다는 엔지니어링에 신경을 많이 쓸 수밖에 없다"고 했고, 정효철 송도랜드마크시티 부장은 "건축 심의 등은 기준이 있어서 거기에 도달하면 통과할 수 있지만, 경관 심의는 기준이 없다. 가이드라인이 필요하다"고 했다.간담회를 주최한 민경욱 의원은 "경관은 공기·물과 같이 일상생활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며 "훼손된 경관은 돌이키기 어렵다. 독창적이고 선명한 이미지의 송도가 만들어지길 바란다"고 말했다. /목동훈기자 mok@kyeongin.com지난 5일 인천 송도국제도시 경관을 주제로 한 간담회에서 현재 송도 경관 현황과 개선 방안에 대한 다양한 의견이 제시됐다. 사진은 현재 송도국제도시 일대 모습. /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최근 민경욱 국회의원 주최·사회로 열린 송도국제도시 경관 관련 간담회. 인천경제자유구역청 경관위원, 인천경제청 간부공무원, 건설사와 설계사 직원, 주민대표 등이 참석했다. /목동훈기자 mok@kyeongin.com

2017-07-09 목동훈

[실향민이야기 꿈엔들 잊힐리야·26]평안남도 남포 출신 이호섭 할아버지(下)

'지산소학교' 다니던 어린 시절 고향 기억집 앞서 합류해 줄맞춰 등교 '이북 스타일'과수원서 '진남포 명산물' 사과 따먹기도한국전쟁 후 마당에 '방공호' 새로 만들어'최고 명물' 제련소도 빼놓을 수 없는 추억'동향' 최영애 할머니와 부모 소개로 결혼외할아버지 돌본다며 北에 남은 둘째누나아픈 동생 약 구해다 주던 '어머니 같은 분'美군함에 폭격당하는 마지막 모습 못잊어이호섭(76) 할아버지 고향은 평안남도 진남포(鎭南浦) 비석리(碑石里)다. 남포특별시 남부 '항구구역'에 위치한 도시로, 남포항에서 멀지 않다. 1·4후퇴 시기에 남한으로 피란 왔으니, 10대 이전의 고향 기억이 전부다.이호섭 할아버지는 매일 아침 줄을 맞춰 학교에 갔던 일을 가장 먼저 떠올렸다."집에서 학교까지 한 2키로(㎞)? 멀어야 3키로 정도 된 거 같아. 근데 개인적으로 학교에 못 가. 문 앞에서 기다렸다가 단체로 줄을 맞춰서 가야 해. 그게 이북 스타일이야."대문 앞에 나와 있으면 서너 명이 줄을 지어 온다. 대열이 집 앞에 다다르면, 그 속으로 뛰어들어가 줄과 발을 맞춰 학교로 이동해야 한다. 이호섭 할아버지는 "학교에 거의 다 왔을 때는 학생 수가 10여 명 정도 돼. 다른 곳에서도 (학생들이) 줄 서서 온다"며 "학교 정문 앞에서는 복장 검사를 받아야 했다"고 말했다.이호섭 할아버지가 다니던 '지산소학교' 뒤편은 사과밭이었다. 할아버지는 "학교 뒤에 있던 과수원이 우리 것이라고 해서 사과를 따 먹었던 기억이 난다"고 했다.진남포는 사과가 유명했다. 1934년 7월 30일자 동아일보에 유치원 교사가 그 지방을 소개하는 '유치원에서 본 그 지방이야기'라는 기사가 실렸는데 유치원 교사 박옥향 씨는 "진남포를 사과의 산지라고 누구나 연상하지만 실로 사과가 많다"며 "송림이 자욱하게 들어서고 능금나무가 곳곳에 가득 서서 보기에 퍽 아름답다"고 했다. 남포지역 과수원 면적의 절반 이상은 사과밭이었다. 특히 이호섭 할아버지 고향이 있는 항구구역 등 남부와 중부지역에서 많이 산출됐다. 남포 사과는 알이 크고 맛이 좋아 그 지방의 명산물로 꼽혔다.'식민지 조선의 이주 일본인과 지역사회'(도미타 세이이치 지음, 국학자료원 펴냄, 2013년)에 진남포 사과 이야기가 나온다. 1905년 일본인이 야마모토촌(山本村)에서 사과 묘목을 가져와 조선인들에게 심게 한 것이 진남포를 사과 재배 산지로 만든 기원이라고 이 책은 설명한다.비석리는 도시 변두리에 있었다. "비석리는 큰 동네였어. 조금 변두리였지만 시내와 같아. 인천으로 따지면 내가 사는 만석동이랑 비슷해. 도시인데 약간 사이드에 있는 거지."할아버지가 살던 집은 초가집이었다. 하지만 끼니를 거르거나 풀죽으로 때울 정도로 가난하지는 않았다.초가집은 일(一)자 모양이었다. 부엌 1개와 방 2개로 돼 있었다. 마당에는 헛간, 장독대, 화장실이 있었다. 한국전쟁이 나면서 전에 없던 구조물이 생겼다. '방공호'다."전쟁 때 마당에 만들었어. 집안 식구들이 다 함께 팠어. 어른 키로 한 키 반 정도는 팠을 거야. 그 위에 통나무를 얹어 놓고 흙 가마니를 높이 쌓았지."다행히 폭격은 없었다. 그렇다고 피해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이호섭 할아버지는 "폭탄은 안 맞았지만, 미군 '쌕쌕이'(전투기)가 농토 위를 날아다니면서 움직이는 것만 보면 갈겨댔다"며 "미군이 마을 사람을 인민군으로 착각하는 바람에 많은 사람이 죽었다"고 했다. 이호섭 할아버지는 인민군이 남포 앞바다에 전쟁포로를 빠뜨려 죽이고 달아난 것도 목격했다. 할아버지는 "전쟁 때 선창에 나갔다가 (인민군이) 포로들을 새끼줄로 묶어서 바다에 넣는 것을 봤다"며 "혼자 같으면 헤엄쳐 나올 수 있지만, 열 명 이상을 묶어 놓았으니 살 수가 없었다"고 했다.진남포의 자랑거리 중에서는 제련소를 빼놓을 수 없다. 어마어마한 규모 하나로 명물이 된 것인데, 아픈 역사가 있는 곳이다. 남한의 '평화문제연구소'와 북한의 '과학백과사전출판사'가 2005년 펴낸 '조선향토대백과'에 따르면 남포에는 일제 침략자들이 대륙 침략을 위해 설치한 군수산업의 부속물이 많았다. 일제는 서해안 일대에서 생산한 쌀을 약탈하기 위해 제분소와 정미소를 설치했다. 유색금속광물 등 지하자원을 빼앗기 위해 제련소, 제강소 등 산업시설도 건립했다. 이들 시설은 남포항 주변에 집중됐다. 배를 이용해 쌀과 광물자원을 일본으로 실어가기 위해서였다.흰 연기를 내뿜는 커다랗고 높은 굴뚝은 아이들에게 신기하기만 했다. "남포제련소가 아시아에서 최고로 크다고 했어. 굴뚝이 얼마나 큰지, 전쟁 때 미군이 굴뚝을 쐈는데, 너무 커서 부러지지 않고 꺾였어." 이호섭 할아버지는 "제련소로 소풍을 간 적이 있는데, 약 40명이 손을 잡아야 에워쌀 수 있을 정도로 굴뚝이 컸다"며 "남포에서는 제련소가 가장 큰 구경거리였다"고 덧붙였다.이호섭 할아버지의 외조부는 남포제련소에서 일했다. 철판에 도면을 작성하고 제품을 만드는 기술자였다고 한다.설악산 계조암에 가면 흔들바위를 흔들어 보듯, 남포제련소를 방문하면 굴뚝을 에워싸는 게 코스였다. 이호섭 할아버지와 함께 평남도민회에서 활동하는 강일근(89·평남 용강군 금곡면) 할아버지도 이 같은 추억이 있다. 강일근 할아버지는 "굴뚝이 얼마나 큰지, 국민학생들이 재면 40~50명은 손을 잡아야 굴뚝이 잡힌다"며 "굴뚝이 바람에 쓰러지지 않도록 흔들린다는 얘기도 들었다"고 했다. 또 "굴뚝을 한 번 청소하면, 그 사람은 1년 내내 먹고 놀 수 있는 임금을 받는다는 얘기도 있었다"고 했다. 강일근 할아버지는 해방 이듬해 3월 혼자서 38선을 넘어왔다. 강일근 할아버지는 "기독교 가정이어서 그런지 해방 후에 우리 집이 숙청 명단에 올랐다는 얘기가 있었다"며 "아버지가 '여기 있으면 잡혀 죽으니 너라도 살아야 한다'며 나를 이남으로 보냈다"고 했다. 이어 "이북에 남아 있으면 손이 끊기니까 나를 보낸 것"이라며 "부모님을 모시지 못한 것이 평생의 한으로 남았다"고 했다.이호섭 할아버지 부인 최영애(73)씨도 한국전쟁 때 진남포에서 피란 나온 실향민이다. 둘은 인천에서 양가 부모님 소개로 만나 1966년 결혼했다. 이호섭 할아버지와 최영애 할머니 부부는 피란 과정과 인천에 정착한 시기가 같다. 최영애 할머니도 1·4후퇴 때 진남포에서 배를 타고 피란을 나와 군산에서 살다 인천에 정착했다. 친정아버지는 시아버지처럼 진남포에서 뱃일을 했고, 인천에 와서는 대한제분 일을 했다. 양가 부모들은 진남포에서 살 때부터 잘 아는 사이였다고 한다.최영애 할머니 고향은 진남포 후포리(後浦里)로, 남편 집과 멀지 않은 곳이었다. 최영애 할머니는 "남편은 변두리, 우리 집은 시내 한복판에 있었다"며 "집 근처에 중국인 학교와 간장공장, 극장도 있었다"고 했다. 이어 "아버지가 '인천과 서울 거리가 꼭 진남포와 평양 거리 같다'는 말씀을 자주 하셨다"고 했다.진남포는 '인천의 야구 영웅들'의 고향이기도 하다. 1950년 인천고 야구부 감독을 맡아 제8·9회 청룡기 야구대회 우승 등 화려한 성적을 낸 김선웅(1919~1978), 11년간 국가대표를 지내고 삼미슈퍼스타즈 초대 감독을 지낸 박현식(1929~2005)이 진남포 출신이다.이호섭 할아버지의 부친은 씨름을 잘했다."아버지가 씨름 선수는 아니었어. 몸은 호리호리했는데 힘이 상당히 셌어. 손으로 쥐면 풀지 못할 정도였지. 그때는 원정 다니듯이 친구들과 함께 평양, 황해도 등을 돌아다니면서 씨름 경기를 했어."진남포 출신이면서, 영화 '친구'를 만든 곽경택 감독의 아버지인 곽인완(83) 씨의 회고록 '소의 눈물'에서도 소 싸움 뒤에 이어진 아이들의 씨름 얘기가 실려 있다.'소싸움이 끝나면 소고삐를 소뿔에 칭칭 감아 소를 산속에 풀어놓고 이번엔 아이들 씨름판이 벌어진다. 씨름이 끝나면 서너 명씩 떼를 지어 산속을 누비며 머루도 따 먹고 개암도 따서 까먹다가 오후 서너 시쯤 되면 이웃 동네 밭에서 콩이나 밀을 서리해 먹었다.'이호섭 할아버지는 9남매다. 큰누나와 둘째 누나만 함께 피란 나오지 못했다. 이호섭 할아버지는 둘째 누나의 마지막 모습을 잊지 못한다.1950년 12월 초, 이호섭 할아버지가 부모님 등 가족과 함께 중공군·인민군을 피해 남포항을 떠나는 날이었다. 둘째 누나는 4살짜리 조카를 등에 업고 멀어져 가는 배를 보며 손을 흔들고 있었다. 어머니가 둘째 누나를 배에 태워야 한다며 남포항으로 되돌아가자고 애원했다. 배가 남포항을 빠져나왔을 때 황해도 쪽에 정박해 있던 미국 군함들이 남포항을 향해 포탄을 쏟아부었다. 남포항은 순식간에 뻘겋게 불바다가 됐다. 그 광경을 본 어머니는 정신을 잃었다. 둘째 누나는 몸이 불편한 외할아버지를 돌보겠다며 피란을 포기했었다. 당시 둘째 누나 나이가 23살이다. 출가했던 큰누나도 피란하지 못했다."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둘째 누님을 보고 싶다고 하셨어. 내가 이산가족 상봉을 신청하자고 한 적이 있는데, '살아 있겠느냐'며 단념하시더라고. 폭격하는 것을 봤으니 그럴 수밖에."이호섭 할아버지에게 둘째 누나는 어머니와 같은 분이었다. 이호섭 할아버지는 "(내가) 어렸을 때 머리카락이 빠지는 병에 걸린 적이 있다. 그때는 전염병에 걸리면 일본놈이 수용소로 잡아갔다"며 "둘째 누님이 약을 구해서 사과와 함께 삶아 먹였다"고 했다.1992년 인천항과 남포항을 오가는 화물선 항로가 개설됐다. 언젠가 사람도 남북을 자유롭게 왕래하는 날이 올 것이란 실향민의 기대는 컸다. 그러나 2010년 '5·24 대북 제재 조치' 이후 남북 교역의 해상 통로였던 인천~남포 뱃길은 끊기고 말았다. ■ 평안남도 남포와 인천 글/목동훈기자 mok@kyeongin.com 사진/임순석기자 sseok@kyeongin.com이호섭(76) 할아버지와 최영애(73) 할머니 부부가 인천 동구 만석동 자택에서 고향 평안남도 진남포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 부부는 1·4후퇴 때 각각 진남포에서 배를 타고 피란을 나왔다. 진남포에서는 서로 몰랐다. 양가 부모 소개로 인천에서 만나 결혼했는데, 부모들은 진남포에서 살 때부터 잘 아는 사이였다고 한다.2007년 인천항 1부두에서 북한 남포항으로 출항 준비하는 트레이드 포춘호. /경인일보 DB

2017-07-05 목동훈

[zoom in 송도]아파트·오피스텔 공급 재개된 송도

8공구A1블록 '송도더샵센토피아'10개 주택타입중 7개 1순위 마감포스코건설 '센트럴더샵 견본주택'주말 3일동안 3만명 이상 다녀가우수한 입지·개발 호재 인기몰이최근 인천 송도국제도시에 공급된 새 아파트가 1순위 최고 청약경쟁률 8.45대1을 기록하는 등 선방했다. 송도는 최근 정부가 부동산투기를 막겠다며 발표한 6·19부동산 대책 규제 대상에서 빠져 있어 실거주 내지는 투자 수요가 꾸준한 모습이다.금융결제원에 따르면 지난달 28~29일 1·2순위 청약을 진행한 송도 8공구 A1블록 '송도더샵센토피아'가 10개 주택 타입 가운데 7개 타입이 1순위에서 마감됐다.이번 일반분양 865세대(전체 885) 모집에 1·2순위를 합쳐 총 2천491건의 청약 접수가 이뤄졌다.전체 3천100세대 규모의 송도더샵센토피아는 지역주택조합 방식으로 사업이 추진됐다.이번에 공급된 일반분양 세대는 조합원 물량보다 적게는 5천만원에서 많게는 9천만원까지 분양가가 높다.이로 인해 부동산 업계는 일반분양에 대한 실수요자나 투자자 등의 관심이 비교적 덜할 것이라는 전망을 하기도 했다.송도더샵센토피아 대행사는 이번 청약 접수 결과에 대해 우수한 입지와 조망권 등이 일반 분양 물량에 대한 인기로 이어졌다고 평가했다.센토피아송담하우징(주) 관계자는 "송도 6·8공구 내 가장 우수한 조망권을 확보한 점 등이 많은 관심을 이끌어낸 원인으로 보고 있다"며 "기대했던 것보다 청약 성적이 좋았다"고 말했다.앞으로 송도에서 분양될 아파트, 오피스텔에 대한 관심도 비교적 높은 상황이다.포스코건설 등에 따르면 지난 30일 개관한 '랜드마크시티 센트럴 더샵' 견본주택에는 주말 3일 동안 3만명 이상이 방문한 것으로 집계됐다.송도 6·8공구 M1블록에 조성되는 이 단지는 아파트 2천230가구, 오피스텔 1천242실 등으로 구성됐다.송도의 경우 정부가 발표한 6·19대책 적용 대상이 아니라 이른바 '반사이익'을 누리고 있다는 평가다.강화된 대출규제의 적용을 받지 않고, 분양권 전매제한도 6개월로 짧다.랜드마크시티 센트럴 더샵 분양 관계자는 "대규모 단지, 우수한 입지, 송도에 계속되는 개발 호재 등으로 주목을 받고 있다"며 "특히 6·19부동산 대책에서 송도가 빠져 있어 관심이 더욱 커지는 것 같다"고 말했다.이 밖에도 현대건설은 송도 6·8공구 R1블록에 주거용 오피스텔 '힐스테이트 송도 더테라스(2천784실)' 공급을 앞두고 있다.대방건설은 송도 국제업무단지(IBD, 1·3공구) B1블록에서 아파트 580세대와 오피스텔 656실로 구성된 주상복합아파트 공급을 계획하고 있다.이 단지는 지하 3층, 지상 44층, 연면적 23만3천496㎡, 높이 121m 규모다. 다인건설 계열사 (주)로얄은 송도 IBD B5블록에 오피스 1천여 실, 오피스텔 387실, 상가 200호 등을 내놓을 예정이다. /홍현기기자 hhk@kyeongin.com1일 오후 인천 송도국제도시 '랜드마크시티 센트럴 더샵 견본주택'에 많은 방문객이 찾아 단지 모형도 등을 살펴보고 있다. 포스코건설은 견본 주택이 개관한 지난달 30일부터 2일까지 3일간 3만 명 이 상이방문한 것으로 집계했다. 송도 6·8공구 M1블록에 조성되는 이 단지는 아파트 2천230 가구, 오피스텔 1천242실 등으로 구성됐다. /임순석기자 sseok@kyeongin.com

2017-07-02 홍현기

[송도국제도시 브리핑]인천시·美 스탠퍼드대, 연구소 분원 설립 MOU 체결

■인천시·美 스탠퍼드대, 연구소 분원 설립 MOU 체결인천 송도국제도시 내 미국 스탠퍼드대학교 연구소 분원 설립이 추진된다. 인천시는 지난달 30일 인천시청 접견실에서 스탠퍼드대학교와 분원 설립과 관련한 양해각서(MOU)를 체결했다고 밝혔다. MOU 체결식에는 유정복 인천시장, 스탠퍼드대학교 브랜든 월시(Branden Walsh) 국제협력본부장 등이 참석했다. 이번 MOU 체결에 따라 양 기관은 송도 인천글로벌캠퍼스 내에 스탠퍼드대 스마트시티 연구소(SFinSC) 분원 설립 등을 협의하기로 했다. SFinSC는 도시의사결정·위험평가, 재무모델링, 도시정보학, 공공재정·지방정부 거버넌스 등을 연구분야로 두고 있다.■송도 G타워서 외국인 대상 '한국음식 만들기' 행사인천경제자유구역청이 지난달 30일 오후 송도국제도시 G타워에서 외국인을 대상으로 한국음식 만들기 행사를 개최했다.이번 행사에 참가한 외국인 20명은 '김밥'과 '화채'를 직접 만들어 먹었다. 인천경제청 관계자는 "외국인들이 한국음식문화에 대해 이해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됐다고 했다"고 전했다.인천경제청은 외국인 친화적 정주환경을 조성한다는 취지로 올해 들어 2번째로 한국음식 만들기 행사를 열었다. 3회 한국음식 만들기 행사는 오는 10월 있을 예정이다. /홍현기기자 hhk@kyeongin.com지난달 30일 인천시청 접견실에서 진행된 스탠퍼드대학교 분원 설립 관련 양해각서(MOU) 체결식. /인천경제청 제공인천경제자유구역청이 지난달 30일 개최한 '제2회 IFEZ 글로벌센터 한국음식 만들기' 행사. /인천경제청 제공

2017-07-02 홍현기

[실향민이야기 꿈엔들 잊힐리야·25]평안남도 남포 출신 이호섭 할아버지(中)

인천서 철부선으로 대한제분 일하던 父기계설비 들어서 많은 인부와 함께 실직'항만하역산업 기계화'로 분쟁도 계속돼본인은 부두 앞 철공소서 배 부품 만들어군 제대후 한국기계서 열차바퀴 등 제작창립 80년 된 현재 두산인프라코어 전신돈 벌기위해 1978년 해외 근로자로 진출배추·무농장 경영에 車정비업체 운영도2000년대 귀국 예전 일자리 인근서 살아1·4후퇴 때 고향 평안남도 진남포를 떠난 이호섭(76) 할아버지는 군산에서 5~6년 정도 살다가 인천으로 왔다. 인천에 온 이유는 아버지 직업 때문이었다. 젊었을 때부터 뱃일을 했던 아버지는 남포항에서 화물 수송용 범선(帆船)을 몰았고, 피란 후 군산항에선 군사·원조 물자를 배로 실어 날랐다. 인천에 온 아버지는 대한제분 일을 했다. 500t짜리 철부선(鐵艀船) '대한호'를 이용해 외항선에 있는 밀을 인천항으로 옮기는 작업을 했다."대한제분 직원은 아니고 그 밑에 있는 업체에 소속됐던 것 같아. 대한호는 엔진이 없어서 예인선이 끌고 다녔어. 처음에는 인부들이 가마니를 메고 다녔는데, 나중에는 기계가 일을 다 했어."대한제분은 1952년 창립했다. '인천상공회의소 90년사'에 따르면 1950년대 대한제분 종업원 수는 1천여 명에 달했으며, 하루에 4천 부대의 밀가루를 생산했다. 하지만 한국전쟁으로 건물과 시설이 파괴되는 등 큰 피해를 봤다. '일본제분주식회사 인천공장'에서 '대한제분주식회사'로 등기를 마친 것은 1952년 12월 25일이다. 해방 이후 정부의 귀속사업체였던 공장을 불하받아 재건한 것으로, 한국전쟁 직후 국내 최대 규모의 제분공장이었다. 대한제분은 양곡을 하역·관리하는 자회사 '대한싸이로'를 1971년 5월 12일 설립했으며, 인천항에 국내 최초로 현대식 곡물 전용 자동하역시스템을 구축했다.이호섭 할아버지는 때때로 아버지 일을 도왔다. 중구 북성동1가 '월미도입구삼거리'에 대한제분 인천공장 출입구가 있다. 그 왼편으로는 북성포구 가는 길이다. 이호섭 할아버지는 "(북성)포구에 배를 대면 기계가 위에서 에어(air)로 밀을 빨아들였다"며 "인천에 왔을 때는 대한싸이로가 없었고, (지금) 큰길가에 있는 건물로 (밀이) 바로 들어갔다"고 설명했다.1960년대에는 '대한호'처럼 작은 크기의 부선이 많았다. 60년대 중반부터 배를 탔다는 예인선 '한성호' 홍두표(71) 선장은 "예전에는 작은 부선을 '고무신발짝'이라고 불렀다"며 "빠지(바지선)는 성냥갑처럼 생겨서 윗부분이 평평하지만, 부선은 겉에 철판 테두리가 있거나 가운데가 파여 있어서 현미나 강냉이 등을 담을 수 있었다"고 했다. 먹고살기 힘든 시절이라 '뗏마'(작은 배 일종)를 타고 다니며 양곡을 도둑질하는 사람도 있었고, 갯벌에 떨어진 양곡을 체로 건져 부대에 담아 가는 '뻘치기'도 흔했다.이호섭 할아버지의 아버지는 대한제분이 기계화 설비를 갖추면서 일자리를 잃었다. 기계화는 경제성과 효율성을 높였지만, 일자리를 빼앗았다. 특히 부두와 배에서 짐을 나르는 인부가 가장 큰 피해를 봤다. 당시에는 노자(勞者)라고 불렸다.'하역노동운동사(항운노동조합 111년사)'를 보면, 항만하역산업 기계화는 60년대부터 서서히 시작해 1970년대 들어 본격화했다. 하역사들이 다투어 시설을 확충하고 장비를 도입하면서 기계화에 따른 분규는 빈번하게 발생했다. 인천은 1975년 제7부두 양곡 작업 기계화를 둘러싼 대한싸이로와 부두노조 인천지부 간 분쟁이 대표적이다. 이호섭 할아버지는 화수부두, 한염부두, 객선부두 등 부두 앞에 있는 철공소에서 일했다. 배 엔진을 수리하고 부품 만드는 일을 했다."화수부두 철공소에서 월급 생활을 했지. 철공소 이름은 생각이 나지 않아. 옆에 조선소가 있었는데, 배 문제 때문에 그 조선소 사장하고 싸움도 많이 했어."철공소가 있던 자리는 횟집 등 식당들이 차지하고 있다. 울퉁불퉁하고 흙먼지 날리던 도로는 포장도로가 됐다. 할아버지는 "당시 철공소 건물은 함석으로 돼 있었다"며 "그 앞이 지금은 다 매립됐지만, 당시에는 (거기까지) 배가 들어왔다"고 했다.화수부두에는 철공소가 꽤 많았다. 화수부두 덕영철공소 공장장 출신인 권태명(81) 할아버지는 "옛날에는 화수부두에만 철공소가 8개 정도 있었다"며 "차츰차츰 없어지더니, 모두 사라진 지 오래됐다"고 했다. 또 "철공소에서 '야끼다마'(燒球·hot bulb, 통통배에 장착하는 엔진)를 설치하거나 수리하고, 부속품을 만들어 썼다"며 "배 엔진이 대량으로 생산되면서 철공소는 필요가 없어졌다"고 했다.개풍군에서 태어난 권태명 할아버지는 한국전쟁 때 인천으로 피란 와 철공소에서 일했다. 할아버지가 일했던 덕영철공소 자리에는 얼음 가게 '세창얼음'이 영업 중이다.이호섭 할아버지는 '항구철공소'와 '광일철공소'에서도 일했다. 항구철공소는 객선부두가 있던 올림포스호텔 인근에 있었고, 광일철공소는 월미도입구삼거리에서 월미도 방면으로 가는 코너에 있었다.항구철공소는 신태범(1912~2001) 박사가 쓴 '인천 한 세기'에도 잠깐 나온다. '소형선박과 공장이 늘게 되어 30년대에는 한국인에게도 철공소를 차릴 기회가 왔다. 일본 오사카에서 공업학교를 마친 후 그곳에서 기술연마를 하고 돌아온 李河泳(이하영) 씨가 해안동에 금성철공소를 개업하여 곧 경인, 조선 등 일본인 철공소를 누르고 선박 수리 분야에서 단연 일인자가 됐다. 그 후 해안동에 항구철공소(黃學根), 칠복철공소(현존) 등이 늘어났다.'이호섭 할아버지에게 항구철공소 사장 이름을 묻자 "이름은 기억나지 않는데, 아무튼 황 씨였다"고 말했다. 상호와 사장 성(姓)까지 일치하는 것으로 볼 때, 같은 곳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인천에 철공업소가 처음 생긴 것은 1892년 일본인이 경영하는 오츠카철공장(大塚鐵工場)이다. 하지만 이는 대장간 수준으로, 본격적인 철공소가 생긴 것은 러일전쟁 직전 인천철공소(仁川鐵工所)라고 '인천상공회의소 120년사'는 기록하고 있다. 양준호 인천대 교수가 인천상공인명록(1936년판)을 근거로 쓴 '식민지기 인천의 기업 및 기업가'에 따르면 당시 대장업·철공업 부문은 일본 업체 비율이 상대적으로 높았다. 하지만 영업세액으로는 조선인 최경운이 경영하던 업체가 가장 높아, 일본인과 조선인 간 경쟁이 치열했음을 알 수 있다.올림포스호텔 근처에서 동광철공소를 운영하는 길철근(70) 사장도 이호섭 할아버지 얘기처럼 항구철공소의 위치를 기억하고 있다. 길철근 사장은 "여기가 (객선부두) 부둣가였을 때, 철공소들이 배 엔진 보링 작업을 했다"며 "지금은 여기(동광철공소) 하나만 남았다"고 했다. 이어 "옛날에는 '배 못'(목선 조립에 들어가는 쇠못)을 만들었다"며 "목선이 다 없어지면서 닻을 만들고 있다"고 했다. 길철근 사장은 황해도 해주에서 피란 나와 아버지 밑에서 철공소 일을 배웠고, 지금까지 가업을 유지하고 있다. 월미도입구삼거리 '광일철공소' 옆에는 한염부두(현재 8부두)가 있었다. 이호섭 할아버지는 "한염해운이 소금을 부린다고 해서 한염부두라고 했어. 그때는 이 기다란 (곡물)창고도 없었어. 부두 건너편 노란색 건물(하이젤냉장보세창고) 있는 곳이 소금을 쌓아 놓았던 곳이고, 그 옆에 소금 창고와 공장들(동일아파트 자리)이 있었어"라고 했다.이호섭 할아버지는 1965년 군에서 제대한 후 '한국기계공업'(현 두산인프라코어)에 입사했다. 그곳에는 열차 바퀴와 프레임(바퀴와 바퀴를 연결하는 뼈대) 만드는 일을 했다. 작업이 기계화되면서 일자리가 줄고 철공소가 하나둘씩 사라졌지만, 이호섭 할아버지는 또 다른 일을 찾아 기계화 속으로 들어간 셈이다."한국기계 위치는 그대로야. 두산인프라코어가 되면서 더 확장됐지. 내가 일했던 공장 건물도 그대로 있는데 뭐. 선반(旋盤) 작업장이 소형반·중형반·대형반으로 나누어지는데, 나는 대형반에 있었어."이호섭 할아버지는 "철공소에서 배운 기술로 한국기계에 들어갔다"며 "열차 바퀴와 프레임도 깎고, 주문이 들어오면 일반 산업기계도 가공했다"고 덧붙였다.두산인프라코어는 지난 4일 창립 80주년을 맞았다. 두산인프라코어가 소장하고 있는 몇 안 되는 한국기계 당시 자료 가운데 한 공원(工員)이 열차 바퀴를 만드는 사진이 있다. 그 사진 속 현장에서 치열하게 일했던 사람 중 한 명이 바로 이호섭 할아버지다. 이 사진을 본 이호섭 할아버지는 "내가 일했던 작업장이 맞다"고 했다.두산인프라코어의 시작점은 1937년 국내 최초 대단위 기계회사 '조선기계제작소'다. 인천에 설립된 조선기계제작소는 200t급 잠수함까지 만들었다. 이후 한국기계공업(1963년)으로 명칭이 바뀌었으며, 이 회사를 1976년 대우실업(대우중공업)이 인수하면서 2005년부터는 두산그룹의 일원이 됐다.이호섭 할아버지는 한국기계공업에서 4~5년 정도 일하다가 서울에 있는 모토로라 회사로 이직했다. "선반으로 전화기 만드는 기계의 부품을 깎아 줬다"고 했다.이호섭 할아버지는 한 푼이라도 더 벌기 위해 1978년 이란에 해외 근로자로 나갔다. 이후 리비아에서 배추·무 농장을 경영해 큰돈도 만져보고, 케냐와 우간다에서 자동차 정비업체도 운영했다. 이호섭 할아버지는 "고관절이 좋지 않아서 다 접고 2006년인가, 2007년쯤 귀국했다"고 했다. 할아버지는 대한제분 인천공장, 옛 철공소 자리, 두산인프라코어 인천공장과 멀지 않은 아파트 단지 '인천만석비치타운'에 살고 있다. 글/목동훈기자 mok@kyeongin.com 사진/임순석기자 sseok@kyeongin.com이호섭(76·사진 오른쪽) 할아버지가 인천 올림포스호텔 인근에 있는 동광철공소 앞에서 이 공장 길철근(70) 사장과 대화를 나누고 있다. 이호섭 할아버지가 일했던 '항구철공소'가 이 근방에 있었다. 이호섭 할아버지와 길철근 사장은 오랜만에 만난 직장 동료처럼 '팔미도 다방'에서 외상 커피를 마셨던 일, 배 엔진을 수리하러 가면 기관장이 술부터 권했던 일 등 옛 추억을 떠올리며 반가워했다. 두 분 모두 한국전쟁 때 고향을 떠나 피란 온 실향민이다.김식만 치과의사 블로그 '인천의 어제와 오늘'에 실린 항구철공소 사진. 인천상륙작전(1950년 9월 15일) 다음 날 촬영한 사진이라고 한다. 철공소 위치는 올림포스호텔 인근으로, 이호섭 할아버지가 기억하는 장소와 일치한다. 할아버지는 사진을 보고 "올림포스호텔 밑에 있던 항구철공소가 맞다. 그런데 내가 이곳에서 일할 때는 건물이 이렇게 낡지 않았다"고 했다. /김식만 치과의사 제공1960년대 한국기계공업(현 두산인프라코어) 작업장 모습. 이곳에서 일했던 이호섭 할아버지는 "보통 하루에 (열차 바퀴를) 열댓 개 정도 깎은 기억이 난다"며 "외경(外徑)하고 내경(內徑)하고 깎고, 양쪽 바퀴를 잡아주는 프레임 가공 작업도 했다"고 말했다. /두산인프라코어 제공이호섭 할아버지는 1981~1986년 리비아 서북부 도시 '미스라타'에서 농장을 경영했다. 배추와 무를 재배해 리비아에 나와 있는 한국 기업에 팔았다. 농장을 하게 된 이유가 재미있다. "리비아 오일회사에서 근무할 때 현대건설 현장에 김치를 얻어먹으러 간 적이 있어. 김치를 양배추로 담갔는데, 맛이 별로였어. 배추와 무를 팔면 돈이 될 거 같더라고. 그러고 나서 한국에서 배추와 무 씨앗을 가져와 심었더니 잘 자라. 배추와 무를 키워서 현대, 대우, 삼성에 팔아 돈 좀 벌었어." '박정희시대와 중동건설1'(정성화 엮음, 도서출판 선인)을 보면, 1973년 12월 삼환기업이 사우디아라비아에서 고속도로 공사를 수주한 것이 우리나라 중동건설 진출의 효시다. 우리나라는 1980년의 경우, 수주고가 무려 100억 달러를 넘기는 등 중동에서 미국 다음인 세계 2위의 수주 강국으로 전성기를 맞았다. /이호섭 할아버지 제공

2017-06-28 목동훈

[제20회 바다그리기 대회 수상작|심사평]초등부/엄규명 서양화가

경인일보사가 주최한 바다그리기대회가 제20회 행사를 성황리에 개최한 것은 문화예술의 메마른 감성에 활기를 넣는 기회이며 다채로운 어린이들의 예술의 향기를 느낄 수 있는 문화와 미술의 전파가 이뤄지고 있는 고무적인 일입니다. 그동안 1회부터 시작한 어린 꿈나무들이 20회에 이르는 동안 성장해 청년 및 중장년작가가 돼 지역 문화 발전에 많이 공헌하고 있습니다.어린이들의 순수한 감성 표현이야말로 꿈의 세계이며 창조적인 우리 사회의 건설적 미래입니다. 어린이 수준에 맞는 감성적이고 순수한 생각의 표현, 창의성, 예술성 그리고 현장에서 바라본 사생 풍경의 완성도를 심사 기준으로 삼았습니다. 심사위원 15명이 각 교육지원청별로 배치돼 학교별, 학년별로 20%정도의 작품을 2차례에 걸쳐 예선 심의하여 모든 학교가 고르게 입선권에 들게 했습니다. 2차 본선 심사에서는 학교별, 학년별 구분 없이 전체 작품 입선 중에서 8차에 걸쳐 약 2%정도(특선, 우수, 최우수, 대상)를 전원 합의제 토의를 거쳐 투표로 선정했습니다. 유치부는 입선 중에서 약 4%를 특선으로 선정했습니다.아울러 항상 미래의 발전을 위하여 노력하시는 주최측과 각 기관장, 사회단체장, 심사위원, 행사위원, 자원봉사자께 깊은 감사의 글을 올립니다.

2017-06-27 경인일보

[제20회 바다그리기 대회 수상작|심사평]중·고등부/박인우 가천대 예술대학 교수(서양화)

바다그리기대회는 2017년을 맞아 20년의 장구한 역사를 기록한 사생대회다. 인천이라는 장소에 걸맞게 '바다'를 주요 테마로 하는 이 행사는 5월 말의 찬란한 태양 아래서 중·고등학생이 나름대로의 개념과 모색을 최대한 표현해 내는 사생대회다. 이에 심사에서도 미술이라는 시각예술이 단지 보고 그대로 묘사해내는 기술의 우열을 중시하는 것이 아니라, 조금은 본질적인 문제로서 사실이나 사물에 대한 본인의 내적인 사고를 표현이라는 행위를 통해 창작에 이르는 과정을 더욱 중시하는 쪽이 심사위원 회의를 통해 타당하다 생각돼 원칙으로 하였다.금년도엔 예년과 다른 현상이 눈에 띄었다. 소위 미술을 전공으로 하는 학교 학생들의 참여가 많이 줄어든 반면 서구와 도서 지역 학교 학생들의 참여가 많이 증가했다는 사실이다. 지난해까지만 하더라도 도서 지역 학생의 수준은 도시학생들의 그것에 비해 저조했는데 올해는 깜짝 놀랄 정도의 향상이 있었다. 어떻게 그렇게 되었는지는 정확히 모르겠으나 누군가의 훌륭한 가르침이 있었다는 방증이 아닐까 한다. 개념적 측면, 메시지, 묘사 및 표현력 등에서 나무랄 데 없으며 매우 솔직하고 대담한 실력을 발휘한 작품들을 추려내면서 행복했다.

2017-06-27 경인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