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인천)

[한국 근대음악의 발상지 인천·(10)]김영의 박사

영화학당 거쳐 서울 진학… 고교 졸업 무렵 두각이화여자전문학교서 연마하다 조교직도 겸해1930년대 美음대서 공부하며 안익태와 무대올라 국내 복귀 후엔 예술위원 등 다양한 활동 펼쳐다소 쌀쌀한 바람이 불던 초겨울 한낮에 서울 서대문구의 이화여자대학교를 찾았다. 정문을 통과해 우측으로 가다가 오른편 중앙도서관 옆에 있는 음악관 1층 현관문을 열고 실내로 들어섰다. 곧이어 김영의 기념연주홀(통상적으로 김영의홀로 칭함)을 만날 수 있었다.홀로 들어가는 문 옆 벽에 설치된 동판을 찬찬히 읽었다. 동판에 적힌 내용은 다음과 같다.김영의 박사는 1929년 이화여자전문학교 음악과를 졸업하신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음악예술계와 음악교육계의 지도자로써 활약하셨고 특히 이화여자대학교 음악대학에 봉직하시면서 학교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하셨기에 이를 기념하여 이 대연주실을 김영의 기념연주홀 이라 이름한다. 1981.8홀에 들어서니 나열된 객석과 그 너머에 펼쳐진 무대를 볼 수 있었다. 이내 무대 뒤 벽면에 설치된 파이프 오르간이 눈에 들어왔다. 점심시간 즈음이어선지 학생 두 명이 파이프 오르간을 치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악보를 보고 건반을 누르며 의견을 나누는 모습이 진지했다.우리 음악계의 미래인 학생들의 무한한 발전을 마음속으로 기원하며 돌아섰다. 김영의홀에 가기 전 출입문이 잠겼거나, 조명이 꺼져 있어서 홀의 전모를 보지 못할 것에 대한 우려가 있었다. 불 밝힌 홀을 여유롭게 둘러보고 가슴에 담은 후 나서는 발걸음이 가벼웠다.이화여대에 따르면 음악관은 지하 2층, 지상 6층 규모로 1981년에 완공됐다. 이 건물에는 김영의홀로 명명된 500여석의 대연주실, 국악연주실, 음악도서관, 관현악연습실, 시청각실 등 음악교육에 필요한 현대적 시설이 갖춰져 있으며, 음악대학이 전용하고 있다.인천 출신으로 영화학당(현 영화초등학교)을 졸업했으며, 미국 줄리아드 음대에서 유학한 우리나라 첫 피아니스트 김영의(1908~1986)의 흔적을 더듬었던 시간이었다.김영의의 대학 시절 이후의 활동들은 대체로 알려져 있으나, 인천에서 삶이나 흔적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하지만, 어린 시절 서양 선교사들을 통해 접한 음악과 스포츠 등이 20세기 중반 우리나라 최고의 피아니스트로 자리매김하는 데 중요한 기반이 됐을 것이다.김영의는 1920년 3월 영화학당 졸업 후 서울 이화학당을 거쳐 이화여자고등보통학교를 1924년 3월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다. 고교 졸업 즈음부터 뛰어난 피아노 솜씨를 선보였다고 한다.<영화 백년사>의 '멋쟁이 음악가 김영의 학장' 편에 고교 졸업 시기의 연주자로서 김영의에 대해 묘사된 대목이 있다. "그 당시 천부적 재질을 가진 김영의는 특히 음악에 뛰어난 솜씨로 피아노 건반위에서 손가락들이 번개같이 불꽃 튀기는 연주로 듣는 이들로 하여금 신비경으로 이끄는 무아지경으로 몰아넣어 황홀케 하여 서울 장안의 총인기를 끌기도 하였다."이 같은 음악적 재능을 더욱 연마하기 위해 1925년 3월 이화여자전문학교 음악과에 입학해 음악이론과 피아노를 전공하고 1929년 3월 졸업했다. 그해 이화여자고등보통학교 음악 강사로 부임해 2년간 있다가 1931년 3월 이화여자전문학교 음악과 조교로 자리를 옮겼다.언론인 홍종인(1903∼1998)은 '반도 악단의 만평'이라는 글을 통해 여러 음악인들을 하나하나 평가했다. 이 글은 1931년 6월 발간된 잡지 <동광>에 실렸다. "김영의 양 이전(梨專) 음악과를 나온 지 3년 퍽 실력 있다고 한다. 독주보다는 반주하는 것을 많이 보았다. 그만하면 퍽 능숙한 줄만은 믿으나 스테이지에서 좀 더 감격하여 보이는 듯한 침착미가 적어 보인다. 기량이 좋은 까닭인지." 아마도 홍종인은 충실한 전달자로서의 연주가 아닌 연주자 본인의 감정이 과하게 이입된 연주였음을 지적하는 듯하다. 글 말미 기량 자체는 인정하고 있다.이어서 <동아일보> 1935년 6월 20일자에 '김영의 양 송별 독주회'가 21일 오후 8시 이화여자전문학교 강당에서 열린다는 단신 기사가 게재됐다. 이 연주회는 이화여자전문학교 음악관 강당의 개관 기념 연주회이기도 했다. 그해 지어진 음악관은 당시로선 호화스러운 조명으로 장식된 무대를 갖췄다. 김영의는 강당 개관 기념과 자신의 고별을 겸한 연주회를 펼쳤으며, 청중으로부터 박수갈채를 받았다고 한다.연주회 후 도미한 김영의는 1939년 줄리아드 음대를 졸업했다. 미국에 있는 동안 각종 음악회에도 열심히 참관했으며, 연주회도 가졌다. 1937년 뉴욕인터내셔널하우스에서 한인들의 모임이 있었을 때 안익태가 첼로 독주를, 김영의가 피아노 독주를 했다는 기록도 있다.귀국 후 다시 이화여자전문학교에서 교편을 잡았으며, 1945년 해방 직후 37세의 나이에 대학 음악과장과 예림원장(예술대학장)을 겸직했다. 1944년 경성음악연구원 창설에 참여하고, 1949년 문교부 내 설치된 예술위원회의 음악위원으로 선임 되는 등 연주와 교육 외에도 활발한 활동을 벌였다. 한국전쟁 발발 후 부산 피난기였던 1951년 국방장관 신성모와 결혼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그해 12월 문교부 요청에 따라 단과대 명칭이 바뀌면서 예림원장에서 예술대학장이 되었다. 1958년 미국 퍼시픽대에서 1년간 연구 후 귀국해 복직했으며, 1973년 정년퇴직했다. 퇴직 후에도 1977년 이화학당 재단이사장으로 있었으며, 1986년 11월 26일 타계했다.인천지역 문화계 원로 중 한 명인 김윤식 시인은 "우리나라 교육계의 초기 지도자로서, 음악계의 주춧돌로서, 그의 공로는 적다고 할 수 없다"면서 "그가 비록 고향 인천에 아무런 족적을 남기지 않았다 하더라고 그의 모든 '한국적 업적'이 고스란히 우리 인천의 자랑거리가 될 수 있다"고 의미를 설명했다. /김영준기자 kyj@kyeongin.com김영의홀 출입구쪽 벽면에 장식된 동판. /이화여대 제공이화여자대학교 음악관 1층에 자리한 김영의홀에서 열린 연주회 모습. /이화여대 제공이화여자대학교 음악관 전경. /이화여대 제공김영의 박사 /이화박물관 제공

2018-12-06 김영준

[바다가 들려주는 인천이야기·46]하역원과 포맨

선박에 원료·제품 싣거나 내리는 역할 출항에 맞춰 신속하게 처리 정밀성 필요컨테이너·크레인 도입으로 맞은 '위기'내항TOC통합 등 변화 겪으며 활로 찾아최근 찾은 인천항 내항 부두. 한국지엠의 신차들이 부둣가 찬바람을 뚫고 파나마 선적(船籍)의 '메디터레이니언 하이웨이(MEDITERRANEAN HIGHWAY)'호로 줄지어 오르고 있었다. 작업자들은 차량 전후 30㎝, 차량 좌우 10㎝의 빽빽한 간격으로 차를 손상 없이 실어야 한다. 그만큼 전문성이 필요하다. 시간당 60~80대 정도를 실을 수 있는데, 배가 출항하는 시간에 맞춰야 한다. 작업 속도도 매우 중요하다. 정확한 수량을 파악하는 일 역시 이들의 몫이다. 배에서 먼저 내릴 차량을 가장 나중에 싣는 등 선적(船積) 순서도 신경 써야 한다. 이 배의 경우 총 15개 층으로 돼 있는데, 선적 순서가 뒤바뀌면 목적지에서 차량을 내리는 시간이 더 걸린다.차량을 직접 운전해 선내에 싣는 '드라이버', 실린 차를 정밀하게 주차하는 '키커', 키커가 정확한 위치에 차를 댈 수 있도록 돕는 '신호수' 등 하역원과 이들을 총괄 지휘·감독하는 '포맨' 간 호흡이 잘 맞아야 한다.이들은 배의 크기에 따라 십 수명씩 조를 이뤄 움직인다. 이번 선적 작업엔 80여 명의 인력이 6개 조로 구성돼 투입됐다. "하역원들을 오케스트라의 연주자라고 하면, 포맨은 지휘자"라는 말이 있다고 한다. 이들이 한 몸처럼 일사불란하게 움직여야 문제없이 작업을 마칠 수 있다는 의미다. 작업 현장에서 만난 포맨 송한섭(60) 감독은 "제품 손상 없이 계획된 물량을 무사히 소화할 수 있도록 항상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했다.지난 40여 년간 하역원과 포맨 등 하역업계에서 일한 그는 "조금만 일하겠다는 생각으로 들어왔는데, 결혼하고 자식 낳고 살다 보니 벌써 40년이 됐다"며 "여름엔 덥고, 겨울엔 추운 일이지만, 가족적인 분위기 속에서 열심히 하고 있다"고 했다. 포맨 송한섭 감독을 비롯한 하역원들의 이번 작업은 밤늦게까지 이어졌다.하역원은 부두에 있는 선박에 원료 등 각종 제품을 싣거나 내리는 일을 하는 사람들을 통칭한다. 항운노조가 하는 일 가운데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이기도 하다.삼국시대부터 고려와 조선시대까지 납세는 양곡 같은 물건으로 이뤄지는 경우가 많았다. 이런 양곡은 주로 배로 운송됐는데, 이때 양곡을 배에 싣거나 내리는 일을 했던 '조군(漕軍)'이라는 하역 인부가 오늘날 하역원의 시초격으로 평가된다. 임금을 목적으로 노동을 제공해 생계를 유지한다는 점에서 지금과 비슷한 측면이 많다.1883년 인천항 개항 후 물동량이 증가하면서 하역원을 포함한 부두노동자들이 늘어났다. 항만설비의 확충으로 하역기업들이 생겨나기 시작했고, 부두노동자들도 하역산업의 전문 노동자로 변모하기 시작했다. 일제강점기 노동력 착취와 한국전쟁의 어려움을 거친 하역업계는 1960년대로 접어들면서 경제적인 상태가 개선되기 시작했다. 인천항의 물동량 증가가 주된 요인이었다. 관련 통계에 따르면 1962년 130만8천828t을 기록했던 인천항의 화물하역실적은 1972년 949만5천105t으로 7배 이상 늘어났다. 이듬해(1973년)엔 1천509만2천830t으로 더욱 늘었다. 경제개발 추진에 따른 생산 규모 대량화와 유통 물량 팽창이 원자재와 생산품의 수출입 확대로 이어졌다. 이후 항만에 모습을 드러낸 '기계'는 하역원들을 위축시키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 지게차와 크레인이 대량 도입돼 무거운 화물을 내리는 일에 투입(1966년)됐고, 고철 작업 등을 하는 마그넷(자석)도 사용되기 시작(1968년)했다. 인천항 양곡 전용부두엔 진공 흡입식 사일로(silo)가 설치(1974년)되기도 했다. 수송과 하역에 혁명적인 변화를 불러온 '컨테이너'는 1970년대 초반 인천항에 모습을 나타냈다. 대한통운이 1970년 3월부터 인천항에 컨테이너선을 월 2회 정기 취항하기로 하는 등 컨테이너 운송을 본격화했다. 당시 인천항엔 1천여 명의 항만 노무자들이 있었다고 한다. 이들이 포함된 노동조합은 진정서를 내고 대량실업 방지 대책 마련 등을 요구하기도 했다. 1980·1990년대 산업화에 힘입어 인천항은 수도권 최대 항만으로 성장했고 하역원을 비롯한 하역업계는 항운노조 상용화 개편(2007년), 내항 TOC(부두운영사) 통합(2018년) 등 변화를 거치며 인천항에서 생존할 수 있었다.인천항 내항에서 만난 경력 25년의 포맨 김종현(60) 감독은 "불철주야 주어진 작업을 성실히 하고 있지만, 컨테이너가 아닌 물동량 규모가 줄어들고 있어 걱정"이라고 했다. 그의 말 속에선 위기감을 느낄 수 있었다. 인천항 내항의 지난해 기준 벌크(비컨테이너) 물동량은 2천353만3천t을 기록했다. 10년 전인 2007년 4천250만t에 비해 절반 가깝게 줄어든 것이다. 수년째 내리막이다. 벌크 화물이 진보된 컨테이너로 흡수되는 경우가 많아지면서 이런 상황이 나타나고 있다. 평택항, 군산항 등 인접 항만과의 벌크 물동량 유치 경쟁도 심화되고 있다. 내항을 포함한 인천항 전체 벌크 물동량은 최근 몇 년째 1억1천여t 수준에서 정체돼 있다. 지난해 300만TEU(1TEU는 20피트짜리 컨테이너 1대분)를 돌파하는 등 매년 증가세를 보이는 인천항 컨테이너 물동량과 대비된다.김종현 감독은 "펄프 같은 경우 대부분 인천에서 처리돼 지방으로 갔는데, 지금은 대부분 평택이나 군산항으로 빠졌고, 벌크로 들어오던 납이나 알루미늄괴(塊), 원목 등은 요새 컨테이너로도 많이 들어와 내항 물동량이 줄어드는 상황"이라고 했다. 이어 "인천항 하역과 관계되는 일을 하면서 먹고 사는 사람들이 아직도 몇천 명은 될 것"이라며 "(관계 기관들은) 인천항의 (비컨테이너) 물동량 확보를 위해 더욱 노력해야 한다"고 했다. 송한섭 감독은 "우리 손을 거친 제품들이 북중미든, 동남아든 해외 여러 나라에 대한민국을 알린다는 자부심으로 지금껏 일해왔다"며 "더욱 안전에 신경 쓰고 '하역만큼은 인천항이 최고'라는 소리를 들을 수 있도록 더욱 노력할 것"이라고 했다.글/이현준기자 uplhj@kyeongin.com 사진/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인천항 내항 부두에서 하역원들이 한국지엠의 신차를 메디터레이니언 하이웨이호에 선적하고 있다. 사진/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메디터레이니언 하이웨이호로 줄지어 오르고 있는 한국지엠 신차들.메디터레이니언 하이웨이호에 선적되는 차량마다 바코드를 찍어 확인하는 모습.

2018-12-05 이현준

[zoom in 송도]송도 민간 임대·위탁시설 현황

경제청 소송 승소 신규 운영자 선정 축구장 점검후 내년 2월 '재가동'인천경제자유구역청이 송도국제도시 축구학교 등 민간사업자에 임대·위탁하는 방식으로 운영하는 시설들에 대해 정상화를 추진하고 있다.송도 내 대표적인 민간사업자 임대 및 위탁 운영 시설은 축구학교(옛 첼시FC 축구학교), 송도국제캠핑장(옛 호빗랜드), 골프연습장(송도블루오션 골프클럽)이다. 축구학교와 캠핑장은 새 운영자를 선정하기 위한 절차가 진행되고 있으며, 골프연습장은 이미 정상적으로 운영되고 있다. 애물단지로 전락했던 이들 시설의 정상화 진행 상황을 점검했다.'옛 호빗랜드' 정비·감정평가 완료제한경쟁방식 새 사업자 모집키로■ 축구학교 정상화 막바지 단계축구학교는 송도 4공구 인천도시철도 1호선 '지식정보단지역' 인근(인천타워대로25번길 31)에 있다. 인조단지 축구장(1만772㎡), 관리사무소(141㎡), 조명탑 4개로 이뤄졌다.축구학교는 특수목적법인 (주)엔에스씨가 2013년 인천경제청과의 협약에 따라 조성했다. 이 법인이 축구학교를 조성해 인천경제청에 기부채납하고 3년간 첼시FC의 축구 교육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방식이었다. 하지만 이 법인은 운영난을 겪으면서 인천경제청에 내야 할 사용료 약 3억 원을 체납했다. 축구장과 관리사무소를 만든 업체에 공사 대금을 주지 못하는 상황까지 됐고, 결국 2016년 7월 운영이 중단됐다. 인천경제청이 새 운영자 선정에 나서려고 했는데, 공사 대금을 받지 못한 업체가 유치점유권을 행사했다. 인천경제청은 지난해 3월 이 업체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해 올해 3월 승소했다.인천경제청은 최근 공개입찰 방식으로 새 운영자를 선정했다. 아직 정식 계약은 이뤄지지 않았다. 이 운영자는 내년 2월부터 축구학교를 운영할 계획이라고 한다. 내년 2월까지 축구장 내 첼시FC 마크 제거, 조명탑 보수 등 기존 시설을 정비하는 기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기존 시설 정비 공사는 인천경제청이 진행한다. 인천경제청 관계자는 "새 운영자의 축구학교 사용 기간은 5년"이라면서 "업체 대표가 축구계에 있었으며 지금도 다른 곳에서 축구학교를 운영하고 있는 것으로 안다"고 했다.자금재조달등 지급보증 문제 해결블루오션골프클럽 '영업 순항중'■ 캠핑장 새 운영자 검증 강화키로송도국제캠핑장은 송도24호 근린공원에 있다. 인천경제청이 2014년 39억원을 들여 조성한 뒤 민간사업자에 운영을 맡겼다. 운영 기간은 그해 8월부터 2017년 8월까지 3년간이며, 연 사용료는 4억2천만원이었다. 하지만 민간사업자가 경영난을 이유로 사용료를 제때 내지 못하자, 인천경제청은 민간 위탁 계약을 해지했다.민간사업자는 2016년 9월 민간 위탁 취소 처분이 부당하다며 소송을 제기했고, 인천경제청은 지난해 7월 소송에서 이겼다.인천경제청은 송도국제캠핑장 운영자를 선정하기 위해 시설 정비와 감정평가를 완료한 상태다. 이번에는 제대로 된 민간사업자를 선정하겠다는 게 인천경제청 계획이다. 인천경제청 관계자는 "운영자가 계약 기간 중간에 운영을 중단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는 생각"이라며 "신용 상태와 제안서 내용을 평가하는 제한경쟁 방식으로 새 운영자를 선정할 방침"이라고 했다.■ 골프연습장은 정상 운영 중송도24호 공원에 있는 '블루오션골프클럽'은 운영자가 올해 4월 인천경제청의 지급보증 문제를 해결하면서 정상화됐다.인천경제청은 2012년 12월 송도24호 공원 민자 골프연습장 사업시행자를 선정하고, 이듬해 7월 실시협약을 체결했다. 민간사업자가 골프연습장을 건립해 인천경제청에 기부채납하는 대신 일정 기간 운영권을 갖는 내용의 협약이었다. 민간사업자는 137억 원을 투자해 4만4천555㎡ 부지에 120타석 규모의 골프연습장을 건립하고 2014년 10월 영업을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인천경제청이 95억원의 지급보증을 섰다. 골프연습장은 경영난으로 정상 영업이 어려워지면서 2015년 12월 운영자가 한 차례 변경됐다. 인천경제청이 민간사업에 지급보증을 서는 것은 문제가 있다는 지적이 나왔고, 새 운영자는 부동산을 담보로 한 리파이낸싱(자금 재조달), 부동산 매각 등을 통해 올해 4월 인천경제청의 지급보증 문제를 해소했다. /목동훈기자 mok@kyeongin.com최근 새 운영자를 선정한 송도 축구학교 축구장. 정비 공사가 이뤄지기 전 모습이다. /김용국기자 yong@kyeongin.com

2018-12-02 목동훈

[한국 근대음악의 발상지 인천·(9)]교가(校歌)

국내 첫 서구식 교육기관, 1892년 영화학당순수 민간학교 첫 설립은 1903년 제녕학교각각 영화초교·창영초교로 현재까지 명맥대학수학능력시험이 이달 중순 전국 고사장에서 일제히 치러졌다. 해마다 그렇듯 이른 시간부터 수험장 마다 배치된 각 학교 후배들은 열띤 응원전을 펼치며 선배들의 '수능 대박'을 기원했다. 후배들은 수험생들을 위해 저마다 각종 구호와 힘찬 노래들로 응원전을 준비했다.(11월 15일 인터넷 보도) 이른 아침 시간에 모인 후배들이 목청껏 부르는 각 학교의 교가(校歌)들은 각별한 의미로 다가왔다. 마치 '학교의 모든 기를 모아서 응원을 보내니 힘을 내서 시험 잘 치르고, 학교의 이름도 널리 알려달라'는 바람이 담긴 듯한 모습이었다. 이렇듯 학교의 정신을 반영한 교가는 학생들로 하여금 애교심과 단결심을 갖게 한다. 또한, 학교의 교육관도 담고 있다. 교가는 학교의 의례나 체육대회, 축제 등 각종 행사에서 부르는 노래이다. 때문에, 졸업 후 성인이 되어서도 학교를 떠올리며 교가를 읖조리게 된다. 이처럼 학창 시절 부르는 횟수가 많은 교가는 학생들의 음악적, 심성적 측면에 미치는 영향이 크다. 수업 외 학교생활에서 부르는 교가의 교육적 영향력이 결코 무시될 수 없음을 알려주는 대목이다.1. 황해바다 푸른물결 소리 들으며 우뜩솟은 문학산봉 바라 보라 보면서 배움의 길 닦고 닦는 대한의 딸들 이룩하세 주의 뜻을 우리의 땅에2. 샛별보다 슬기로운 우리 눈동자 뿌리깊은 백향나무 기상을 삼고 한데뭉쳐 진리찻는 영화 학도야 삼천리에 새벽종을 등불이 되세3. 푸른 마음 높은 뜻을 길벗을 삼아 빛내리라 영화학당 힘을 합하여 거룩하다 주의 이름 길이 받들어 우리겨레 이강산에 빛을 삼으리영화학당 교가 (1913년), <영화 백년사(1892~1992)> 발췌개항지 인천은 신교육 발상지이기도 하다. 우리나라 최초의 서구식 초등 교육 기관인 영화학당(현 영화초등학교)이 1892년에 문을 열었다.(11월 16일자 9면 보도) 인천 관학의 효시인 관립인천외국어학교(현 인천고등학교)는 고종의 칙령에 따라 1895년 개교했다. '간추린 인천사'(인천학연구소 刊)에 따르면 인천외국어학교 초기 수업 연한은 3년 과정의 영어과와 일어과가 있었다.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자 영어과를 폐지하고 1909년 학교명마저 관립인천일어학교로 개정했다. 해방 후인 1949년 인천공립상업학교에 이어 1951년 인천고등학교로 교명 변경 후 현재에 이르고 있다.송도고 교가, 초기의 음악적 원형태 유지1906년 개성서 윤치호가 설립 첫 가사 써'천년고도' 등 표현 인천 이전前 작사 추정인천에서 종교 계통이거나 관학이 아닌 순수한 민간 학교로서 처음 문을 연 곳은 제녕학교였다. 1903년 6월 인천의 유지 서상빈이 신학문을 가르치기 위해 제녕학교를 설립했다. 러일 전쟁 후 침몰한 바랴크호의 인양을 맡아 거금을 쥔 김정곤이 도움을 줬다. 인천시가 펴낸 인천역사문화총서 74 '한국 최초 인천 최고 100장면'에 제녕학교에 대한 기록이 상세히 나와 있다. 서상빈은 우리나라 최초의 상인단체이자 상공회의소의 전신인 인천신상협회를 설립해 실질적인 사장 역할을 했다. 이처럼 제녕학교 설립에는 인천신상협회와 지역 유지들이 힘을 모았다. 제녕학교는 학생 수가 120명에 달할 정도로 발전했다. 그러나, 1906년 이후 학교 운영 경비를 전부 제공했던 인항전운회사 재정이 넉넉하지 못해 교비를 마련하기 어려운 지경에 봉착했으며, 1907년 인천공립보통학교(현 창영초등학교)에 통합돼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인천공립보통학교가 현재 명칭인 '창영'을 갖게 된 건 1936년 인천창영공립보통학교로 바뀌면서다. 창영초교 구 교사는 인천광역시 유형문화재 16호로 지정돼 있다. 학교들은 교표와 함께 교목, 교화, 교가 등 저마다의 상징을 갖는다. 100년 이상의 역사를 자랑하는 지역 학교들 중 개교 당시나 초기 교가의 원형을 확인할 수 있는 학교는 찾기 힘든 가운데, 송도고등학교의 경우 음악적 측면에서만 그 원형을 유지하고 있다. 1906년 개성에서 설립된 송도고 교가의 첫 가사는 학교 설립자인 윤치호(1865~1945)가 썼다. '애국가'의 작사가로 언급되는 그는 교회 '찬미가'도 다수 쓴 것으로 알려져 있다. '송도학원 90년사'(송도중·고등학교동창회 刊) 등에 따르면, 교가의 곡은 미국 남북전쟁 당시 군가로 사용됐던 노래다. 1857년 작곡된 이 곡은 코넬대학교와 에모리대학교, 밴더빌트대학교 등 미국 다수의 학교에서 교가로 사용되고 있다. 에모리대학교에서 유학한 윤치호가 미국 교가 문화를 우리에 접목한 것으로 유추할 수 있다. 당시 우리나라에선 스코틀랜드 민요인 '밀밭에서'와 '올드랭사인'에 각각 가사를 붙인 '경부철도가'와 '애국가' 등 서양음악 선율에 가사를 붙여 부르는 일명 '노래 가사 바꿔 부르기'가 유행할 때였다. 현재 송도고 교가 가사의 원형은 이상춘이 쓴 것으로, 1절 가사에서 개성을 나타내는 문구 '산수 좋고 역사 깊은/천년고도에'가 있는 것으로 볼 때 송도고가 인천으로 이전(1952년)하기 전에 쓴 것으로 보인다.해방·한국전쟁후 교가제정 관행 현재까지대부분 일률적 구성… 특색있는 작품 기대영화초등학교의 경우 1913년 3월 교가가 제정됐다. '영화 백년사(1892~1992)'(이성삼 박사 집필·영화학원 刊)에 3절로 이뤄진 당시 교사 가사 전문이 기록돼 있다. 하지만, 작곡자와 작사가의 이름은 알려지지 않았다. 교가 가사에는 '황해바다'와 '문학산봉' 등 공간적 배경이 나오며, '주의 뜻', '주의 이름' 등의 노랫말을 통해 신앙에 입각한 근면함과 성실성을 강조하고 있다. 현재 불리는 영화초등학교 교가는 1953년(이은상 작사·김용환 작곡)에 만들어졌다.이 밖에 역사를 지닌 지역 학교들의 현재 교가는 작사·작곡가의 이름 등을 유추해볼 때 해방 후부터 1950~1960년대 만들어진 곡들로 판단된다. 이전 곡들은 한자 용어가 많고, 전래 과정의 서양음악을 활용하다 보니 구조가 단순해서 이에 맞춰 가사가 짧을 수밖에 없었다. 또한, 일제시대와 해방 후 시기에 우리 학제가 바뀌면서 교명이 변경된 경우도 있고, 교육 내용도 수정됐기 때문으로 보인다. 우리나라 교가 대부분은 서양의 7음 음계를 바탕으로 만들어졌으며, 남녀 학교 구분 없이 박자(4분의4박자)도 행진곡풍으로 일률적이다. 해방 후와 한국전쟁 후에 이뤄진 교가 제정 관행이 그대로 이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앞으로는 학교의 이미지와 특성을 반영한 개성 넘친 다양한 교가가 나타나길 기대해 본다. /김영준기자 kyj@kyeongin.com제녕학교 설립을 주도한 인천신상협회의 장정(章程). /인천시 제공주민들의 성금으로 1907년 세워진 인천 최초의 공립보통학교가 지금의 창영초등학교이다. 인천 지역 교육사에 이정표를 세운 곳이며, 한국 근대사를 대표 할 수 있는 건축물이다. /경인일보DB

2018-11-29 김영준

[바다가 들려주는 인천이야기·45]줄잡이와 라싱

수천~10만t넘는 선박 부두에 설치된 'ㄱ'자 모양 비트와 연결하는 '줄잡이'과거엔 항만 공간 효율적으로 활용하기 위해 50~100m 접안 위치 옮기기도라싱 작업자들, 컨테이너·화물 등 선적 하면서 철제기구·로프 이용해 고정파손 예방·평형 유지 '출항전 필수 업무'… 급하더라도 가장 꼼꼼하게 진행대한민국을 흔히 '통상 국가'라고 부른다. 우리나라는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여 있는 지리적 환경을 가지고 있고, 지하자원이 부족하다. 이런 점 때문에 교역의 중요성을 강조한 말이 바로 '통상 국가'다. 통상을 위해 필수적인 것이 항만과 선박이다. 우리나라 교역의 98%가 바다를 통해 이뤄진다.항운노조는 바다를 통한 교역에 있어 한 축을 담당한다. 선박이 항만에 접·이안하는 것을 돕고, 짐을 내리고 싣는 모든 과정에서 역할을 한다.지난 20일 오전 11시 인천항 내항. 인천과 중국 칭다오를 오가는 카페리선 골든브릿지5호가 입항을 위해 안벽 가까이 다가오자 등에 'Line Handling'이라고 쓰인 옷을 입은 항운노조원들이 배를 맞을 준비를 했다. '줄잡이' 또는 '강취방'이라고 불리는 이들은 선박이 부두에서 이탈하지 않도록 선박에서 제공하는 줄을 부두에 설치된 'ㄱ'자 모양 구조물인 '비트'에 고정하는 역할을 맡는다. 보통 한 척의 배는 앞뒤로 각각 4~6줄을 연결한다. 적게는 수천 t에서 10만t 이상의 무게인 선박을 고정하는 역할을 맡고 있기 때문에 줄의 너비는 10㎝ 이상으로 두껍다.작업은 선박에서 육지 부분으로 내린 줄을 끌어올리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줄은 비트에 연결하는 굵은 줄, 이와 연결된 '오소리 줄'이라고 불리는 얇은 줄로 구성된다. 선박에서 줄을 육지로 던지면 줄잡이들이 얇은 줄을 잡으면서 작업이 시작된다. 이때 비트에 묶어야 하는 줄은 바다에 빠져 있다. 줄잡이들은 먼저 얇은 줄을 끌어당긴 뒤, 비트에 연결하는 굵은 줄이 나타나면 비트에 연결한다. 줄 자체가 무거운 데다 바닷물을 머금고 있기 때문에 두 명이 힘을 합쳐 줄을 끌어당긴다. 줄을 비트에 건 뒤에는 선박에서 장비를 활용해 줄을 잡아당긴다. 느슨했던 줄은 팽팽해진다. 이러한 작업을 배 앞 뒤에서 각각 4차례 진행한 뒤에야 접안 작업이 마무리된다.줄잡이 업무는 카페리선뿐만 아니라 작은 어선부터 유조선이나 크루즈 등 대형 선박에서도 같은 방식으로 진행된다. 다만 선박의 규모에 따라서 줄의 두께와 비트에 연결하는 줄의 개수 등이 달라질 뿐이다.인천항에서 20여 년간 줄잡이 업무를 한 이성환(59) 소장도 이날 작업을 했다. 이 소장은 "밖에서 보기에는 쉬워 보일 수 있지만, 위험하고 힘들기도 한 작업"이라며 "선박에 타고 있는 선원들과 호흡이 맞지 않으면 줄의 무게 때문에 다치는 일도 발생한다"고 말했다.인천 신항과 남항이 조성되기 이전에는 인천항에 들어오는 선박 대부분이 인천항 내항으로 입항했다. 입항하려는 선박은 많았지만, 부두 공간이 충분하지 않았기 때문에 최대한 많은 선박을 접안하기 위해서 효율적으로 공간을 이용했다. 이 과정에서 줄잡이들이 선박을 옮기는 역할을 하기도 했다. 접안돼 있는 선박의 위치를 50~100m 옮기는 데 줄을 이용한 것이다. 고정돼 있던 줄을 해체한 다음 이 줄을 길게 늘어뜨린 뒤 이동하고자 하는 곳에 있는 비트에 고정한다. 그런 후 선박에서 줄을 잡아당기는 방식으로 배를 움직이게 하는 것이다.이 소장은 "과거에는 워낙 내항으로 들어오려는 배가 많았기 때문에 배 위치를 조정해서 더 많은 선박을 접안했다"며 "하지만 신항과 남항 등 항만이 잇따라 조성되면서 지금은 그러한 작업을 하지 않는다"고 말했다.이어 "다른 작업들은 많이 기계화가 이뤄졌지만, 줄잡이 작업은 앞으로도 기계로 하기 어려울 것"이라며 "우리 업무가 단순해 보이지만, 선박들이 안전하게 접안해야 선원과 승객이 안전하게 승·하선할 수 있다.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점에서 자부심이 있다"고 말했다.항운노조가 맡은 작업 중 또 다른 하나는 라싱(lashing)이다. '고박'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선적된 화물을 고정하지 않으면, 배가 운항하는 과정에서 화물이 움직이게 된다. 이는 화물이 파손될 수 있을 뿐 아니라 선박의 평형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이 때문에 선박 출항 준비에 있어서 필수 작업 중 하나가 바로 라싱이다.지난 26일 오전 10시 인천컨테이너터미널에 있는 'BOX ENDURANCE'호에선 컨테이너 선적 작업과 함께 이를 고정하는 라싱이 이뤄지고 있었다. 컨테이너 라싱은 철제 기구를 이용해 컨테이너와 선박을 'X'자 모양으로 연결하는 방식이다. 이날 선박에 실린 컨테이너는 361TEU이며, 모든 컨테이너에 대해 라싱 작업이 진행됐다.라싱 작업을 진행한 조성덕(56) 씨는 "컨테이너 선박은 정시성이 중요하기 때문에 작업 시간이 빠듯한 경우가 많다"며 "밤낮, 날씨를 가리지 않고 (라싱 작업이) 진행되기 때문에 힘든 부분이 있다"고 했다. 이어 "라싱은 선박 안전에 있어 가장 중요한 측면이기 때문에 급하더라도 가장 안전하고 확실하게 작업을 진행한다"고 강조했다.이날 라싱 작업에 투입된 항운노조원은 30명. 컨테이너 선적과 라싱 작업이 함께 이뤄지면서 평소보다 긴 2시간가량 소요됐다. 일반적으로는 1시간에서 1시간 30분 정도가 소요된다. 컨테이너를 'X'자 모양으로 라싱하는 것처럼 화물에 따라 작업 방식이 다르다. 자동차의 경우 4개 바퀴를 이용해 줄(벨트 형태)로 선박과 자동차를 연결하는 방식으로 고정한다.화물 선적에 이어 라싱 작업이 완료되면, 줄잡이가 선박과 부두를 연결하는 줄을 풀어 준다. 이날 컨테이너 선적과 라싱을 마친 'BOX ENDURANCE'호도 줄잡이들이 비트에 연결된 줄을 풀자 출항했다.인천항 등 전국 항만에서 기계화가 진행되고 있다. 그중에서도 인천 신항과 같은 컨테이너 항만은 자동화·기계화가 빠르게 이뤄지고 있다. 지난해 5월 문을 연 중국 칭다오항은 '자동화'된 항만이라는 점을 앞세우고 있다. 이곳에서는 사람이 하던 컨테이너 고정 작업을 로봇이 대신하고 있다.조성덕 씨는 "이 일을 시작한 지 20년이 넘었다. 처음에만 해도 수작업이 많았지만, 점차 기계로 대신하는 것을 경험하고 있다. 앞으로 인천항도 자동화 항만이 될 수 있을 것"이라며 "그 부분은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지금 내가 하는 일이 선박 안전을 위한 일이고, 현재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기 때문"이라고 했다.글/정운기자 jw33@kyeongin.com 사진/김용국기자 yong@kyeongin.com사진/김용국기자 yong@kyeongin.com줄잡이는 선박을 부두에 고정하는 역할을 한다. 지난 20일 오전 인천항 내항에서 인천항운노조원들이 카페리선 골든브릿지5호와 부두를 연결하는 작업을 하고 있는 모습. 사진/김용국기자 yong@kyeongin.com지난 26일 인천컨테이너터미널에 접안한 'BOX ENDURANCE'에 선적된 컨테이너를 선박과 연결하는 '라싱' 작업을 하고 있는 인천항운노조원들. 라싱 작업은 화물의 파손을 막고 선박의 운항 안전성을 위해서 반드시 필요하며, 컨테이너 선 뿐 아니라 다른 화물을 실은 선박도 라싱작업이 이뤄져야 출항할 수 있다. 사진/김용국기자 yong@kyeongin.com

2018-11-28 정운

[한국 근대음악의 발상지 인천·(8)]인천공회당

인천 송도국제도시 센트럴파크 인근의 인천도시역사관이 1년 전 내부 리모델링 후 현재의 모습으로 문을 열었다. 인천도시역사관은 2009년 인천세계도시축전 당시 '인천도시계획관'으로 개관했으며, 얼마 후 관명을 변경해 '컴팩스마트시티'로 운영되다가 2014년 인천시립박물관에 인수됐다. 2017년 12월 인천의 도시 역사와 발전과정을 담는 공간으로 거듭난다는 의미에서 현재의 이름을 달고 시민을 맞이하고 있다. 인천시티투어 버스의 출발지에 면해 있는 인천도시역사관은 전체적인 전시 구성을 크게 1층 근대 도시관, 2층 현대 도시관, 3층 도시 생활관으로 설정했다. 1883년 제물포 개항 이후 1945년 광복까지 인천의 도시 성격과 공간이 어떻게 변화되어 왔는지를 볼 수 있는 1층 전시관 한 쪽에선 20세기 초반의 인천 중심가를 만날 수 있다. 전시관에선 모형으로 제작된 당시 건물들 볼 수 있는데, 3개월 여에 걸쳐 붉은 벽돌 모형을 세심하게 구현했다는 '인천공회당(仁川公會堂)'이 단연 눈길을 끌었다. 모형 앞에 설치된 안내문에 '인천공회당'에 대한 설명이 이같이 되어 있다. 1914년 부제(府制) 실시와 함께 각국의 조계가 폐지됨에 따라 인천에 살고 있던 인천일본거류민단은 해체수순을 밟게 되었다. 현재 중구청 인근에 있던 거류민단 사무소는 공회당으로 용도를 바꾸었고, 일본인들을 위한 문화시설, 집회장소로 이용되었다. 1923년 인천공회당은 홍예문 부근에 신축된 2층 붉은 벽돌 건물로 이전했다. 이 건물은 두 가지 용도로 사용되었는데, 남쪽 중앙의 현관에는 인천공회당이라는 간판을 걸었고 홍예문 길에 면한 건물 좌측으로 또 다른 문을 내어 인천상공회의소의 입구로 사용하였다. 그 후 인천공회당에서 개항 50주년 기념 축하회, 인천주류품평회, 인천시민대회 등이 개최되었다. 광복 후 한국전쟁으로 건물 일부가 소실되었고, 1957년 그 자리에 시민관이 들어섰다. 건물 개보수 후 지금은 인성여고에서 다목적관으로 사용하고 있다. 1923년, 홍예문 부근 2층 붉은벽돌 건물 신축 6·25때 일부 소실, 現 인성여고 다목적관 사용 영화상영·무도회 등 요즘 '문화예술회관' 역할 현재 홍예문에서 인천항 쪽으로 100m 정도 내려오면 왼편에 인성여고 다목적관을 볼 수 있는데 그 자리(인천 중구 송학동3가)가 인천공회당이 있던 곳이었다. 1899년 경인선 철도가 개통하면서 제물포역(현 인천역)과 축현역(현 동인천역)이 개설됐다. 강화도 조약 이후 인천에서 조계지를 중심으로 세력을 확장하던 일본은 1905년 을사늑약 이후 본격적으로 영역을 넓혀 간다. 그 창구가 1908년 건립된 아치형 터널인 홍예문이었다. 홍예문은 조계지에서 축현역과 만석동으로 오가는 가장 짧은 통로가 됐다. 홍예문의 처음 이름은 혈문(穴門)이었다. 때문에 그 길을 '혈문통'이라고 불렀다. 유동 인구가 많았던 혈문통에 인천공회당과 상공회의소 신축 건물이 자리했음은 어렵지 않게 유추할 수 있다. 당시 건물 남측에는 인천경찰서가 있었다. 인천공회당 신축 전 개항장 조계지 의회격인 신동공사가 있었다고 한다. 그 자리에 500여명을 수용할 수 있는 붉은 벽돌로 이뤄진 2층 규모의 인천공회당이 신축 이전한 것이다. 인천공회당에선 영화상영과 연주회, 무도회를 비롯해 어린이날 행사에 이르기까지 다채로운 문화 이벤트들이 열렸다. 요즘으로 따지면 문화예술회관 혹은 시민회관의 역할을 한 셈이다. 1926년 6월 18일자 동아일보에선 인천 영화학교가 인천공회당에서 운동장 확장비용을 보충하기 위해 교육 강연과 음악회를 열기로 했다는 내용이 실렸다. 같은 신문 1927년 4월 7일자와 1933년 11월 21일자에는 각각 인천고려체육회 주최 음악무도회 개최와 현제명 독주 및 4중창단 연주 소식을 게재했다. 또한, 각종 근대음악사 자료에는 홍난파에게서 바이올린을 배운 박종성이 인천공회당과 내리교회 등에서 여러 차례 연주회를 개최했다는 내용이 있으며, 일본에서 바이올린을 배우고 만주에서 성악을 전공한 원종철이 1940년 인천공회당에서 독창회를 갖고 1년 후에는 독주회를 개최했다고 한다. 인천공회당이 보다 각별한 장소로 기억되는 이유는 해방 후인 1947년에 열린 인천관현악단 창단 연주회 때문이다. 우리나라 최초의 오케스트라인 고려교향악단(서울시립교향악단의 모체)의 1945년 창립 이전 우리나라에는 소규모 관현악과 관악 협주 활동이 있었다. 이 같은 상황에서 인천관현악단은 고려교향악단과 불과 2년 터울을 두고 창단한 것이다. 서양음악의 관문 역할을 한 인천의 선진성을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 해방후 1947년 인천관현악단 창단연주회 열어 1974년까지 시민관… '아트센터 인천' 이어져 인천관현악단은 김기룡 단장과 박수득 악장을 중심으로 현악과 관악, 타악 주자 23명으로 구성된 인천 최초의 오케스트라였다. 한국전쟁 발발로 오랜 기간 활동이 이어지진 못했지만, 1966년 창단하는 인천시립교향악단의 모태로서의 의미를 띤다. 한국전쟁은 인천공회당도 역사 속의 장소로 바꿔놨다. 휴전 이후 1957년 그 자리에 1천여석 규모의 '인천시민관'이 들어선 것이다. 시민관에선 콘서트를 비롯해 연극, 쇼, 영화 상영, 웅변대회 등 다채로운 문화행사가 열렸다. 시민관이 개관한 지 10여년이 지나면서, 시설 노후화가 진행됐다. 때문에 1974년 주안에 문을 여는 '인천시민회관'에 본연의 임무를 넘기고 학교 시설로 바뀌게 된다. 시민회관은 문화예술회관과 올해 개관한 아트센터 인천으로 이어진다. 인천도시역사관에서 만난 배성수 관장은 "관련 사료의 부재로 인해 인천공회당의 내부 공간이 어떻게 나뉘었는지 알 수 없어서 아쉽다"면서 "자료 사진에서 볼 수 있듯이 2층 창문이 1층 창문에 비해 현격히 큰 걸로 봤을 때, 1층이 사무 공간이고 2층이 강당 형태의 공간이 아니었을까 유추해 볼 따름"이라고 말했다. /김영준기자 kyj@kyeongin.com 일러스트/박성현기자 pssh0911@kyeongin.com인천공회당 모습(1923년). /인천 화도진도서관 제공인천공회당에서 열린 공연을 다룬 옛 동아일보 기사. / 인천 합창의 궤적 전 도록 발췌인천도시역사관에 전시된 인천공회당 모형.인천공회당에서 열린 공연을 다룬 옛 동아일보 기사. / 인천 합창의 궤적 전 도록 발췌

2018-11-22 김영준

[바다가 들려주는 인천이야기·44]인천항운노조

개항기 인천항으로 몰려든 부두 노동자들별다른 장비는 커녕 일자리 불안정 시달려항운노조 시초 '모군청' 조합해 취업 주선인천항운노동조합은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노동조합'에 그치지 않는다. 130여 년 인천항의 역사를 함께한 주역이자, 지금의 인천항을 있게 한 역군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변변한 장비 하나 없던 시절 부두 노동자들은 맨몸으로 항을 드나드는 짐을 날랐다. 일제강점기엔 항일 운동에 참여했고, 산업화 시대에는 인천지역 경제 성장을 이끌었다. 2000년 이후에는 기계화, 상용화(항만 인력 공급 체제 개편), 내항 통합 등의 고비를 극복하며 인천항 격동의 시기마다 온몸으로 맞섰다.우리나라에 부두 노동자가 처음 나타난 건 '개항기'다. 농촌에서 땅 한 평 없어 빌어먹기도 어려웠던 사람들이 '인천 드림'을 위해 제물포로 몰려들면서다. 이들은 처음에 어민, 소농민 등 일시적인 노동에 종사했다. 항만 물동량이 많아지면서 상시적 노동이 필요하게 되자 이들은 부두 노동자가 됐다. 처음에는 화주가 직접 고용하는 방식이었다. 부두 노동자 특성상 일정하지 않은 작업 시간과 작업량으로 안정적인 노동 공급이 어려워지자 한국인 하역원은 중구 내동에 '모군청(募軍廳)'이라는 하역조합을 꾸려 노동자의 취업을 주선했다. 이 하역조합이 항운노조의 시초다. 조합은 개항 이후부터 2007년까지 정부의 관리하에 독점적 노무공급체제를 인정받으며 성장했다.인천 부두 노동자의 노동쟁의는 일제강점기인 1923년부터 본격화했다. 일제의 침탈이 심해지면서 부두 노동자들은 임금 인상과 처우 개선을 요구했다. 당시 노동자들은 일본의 군수 물자와 수탈 물자를 하역했다. 강경애(1907~1943) 소설 '인간문제'를 보면 당시 인천항 부두 노동자들의 육체노동은 '고통'에 가까웠다."짐이 와르르하고 부두에 쏟아졌다. 짐에서 떨어지는 먼지며 바람결에 불어오는 먼지가 수천 명의 노동자들이 몸부림치는 바람에 가라앉지를 못하고 공중에 뿌옇게 떠돌았다. 사람을 달달 볶아 죽이고야 말려는 듯한 지독한 볕은 신철의 피부를 벗기는 듯했다."일제 수탈시기 파업으로 반제국주의 투쟁산업화 접어들면서 고용대책 등 관철시켜내항 TOC 통합·경쟁 심화로 줄어든 입지정부·정치권 접촉하며 시설투자 활로모색시대흐름 맞춰 성장 "인천항의 주인" 자부부두 노동자들은 살기 위한 몸부림으로 1926년부터 1936년까지 수차례에 거쳐 파업을 벌였다. 일제의 탄압으로 쟁의는 오래가지 못했지만, 이들은 민족적 차별에 대항하고 일제의 제국주의 정책에 반대하는 목소리를 냈다.부두 노동자들은 광복 이후 미 군정, 한국전쟁, 4·19혁명 등의 역사적 혼란기에서도 하역 작업을 계속하며 노동조합을 정비해 나갔다. 1945년 10월 부두노동자들이 '인천자유노동조합'을 창설했을 당시 조합에 가입한 노동자는 6천여 명에 달했다. 운송 사업을 중심으로 한 '인천부두노동조합'이 따로 설립되기도 했다. 이들 노조는 분열과 통합을 되풀이하며 세를 키워 나가다가 항만과 운수 분야 노동자들을 통합한 인천항운노조를 1981년 8월 설립했다. 1998년 경인항운노조로 명칭을 바꿨다가 2004년 인천항운노조로 다시 개칭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산업화 시대에 접어들면서 항운노조는 '기계'와의 투쟁을 시작했다. 1966년 인천항에 지게차와 크레인이 대량 도입되면서 중량화물 하역 작업이 기계화됐다. 1968년에는 마그넷(자석) 사용으로 고철, 철제류 작업도 기계화됐다. 항만 하역의 기계화는 노동조합의 존속을 위협했다.1978년 부두 노동자로 처음 조합에 들어온 이해우(69) 인천항운노조 위원장은 "당시 맨몸으로 일할 때는 어떤 물건이든 어깨에 지고 메는 게 전부였다. 석탄도 실제로 삽으로 떠서 포대에 담았다. 만석부두에 가면 속옷만 입고 막걸리와 원당(설탕)을 먹으며 일하는 사람이 태반이었는데 모두 부두 노동자들이었다"고 했다. 이어 "모든 게 기계화가 되면서 몸은 편해졌지만, 이후에는 실직의 두려움에 직면해야 했다"고 했다. 노조는 '근로자에 대한 대책 없는 기계화'를 반대하고 나섰다.대표적인 사건은 1974년 사료 도매업체 대한싸이로주식회사가 인천항에 양곡 전용부두와 진공 흡입식 하역기 2기를 완공한 것이었다. 1995년 인천항운노조가 발간한 '인천항변천사'를 보면, 당시 인천항의 양곡 하역량은 20~30%를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조합원들의 대량 실직은 불 보듯 뻔했다. 인천지부는 '대한싸이로에서 필요한 노무직은 조합원으로 둘 것', '작업 단계에서 감축한 분야는 보상할 것' 등의 대책을 강력하게 요구해 모두 관철했다.오광민 인천항운노조 쟁의부장은 "기계화로 사람들이 설 자리가 없어졌지만 이때까지만 해도 기계로 인해 손상되는 노동의 대가를 노조의 강력한 요구로 보상받아 실제로 잘리거나 임금이 감소하는 일은 많지 않았다"며 "그럼에도 컨테이너 도입 등 기계화의 큰 흐름을 이길 수는 없었다"고 말했다.노조는 1988년 인항고등학교를 설립하는 등 후학 양성에도 앞장섰다. 당시 노조 간부들이 "부두 노동자의 못 배운 한(恨)을 풀어보자"며 이 같은 결정을 내렸다고 한다. 전국 항운노조 중 학교를 설립한 곳은 인천이 처음이다. 이는 지금까지도 이어져 노조위원장이 인항학원 재단의 이사장을 겸하고 있다. 조합원 자녀들에 대한 복리 후생도 아끼지 않았다. 일찍이 고등학생과 대학생 자녀의 학비를 지원했다. 1978년부터 최근까지 1만여 명의 학생에게 장학금을 지급하기도 했다.2007년에는 '항운노조 상용화 개편'이라는 큰 고비를 맞는다. 상용화 개편이란 기존 조합 소속 일용직 인력을 하역 회사별로 상시 고용하도록 항만 인력 공급 체제를 바꾸는 것을 말한다. 노조 채용 비리 재발 방지, 항만 환경 개선 등을 위해 정부는 2000년대 초반부터 상용화 개편을 추진해왔다. 지난 100여 년간 부두 노동자를 공급해왔던 항운노조의 독점 고용권이 모두 깨지는 순간이었다.당시 신문 기사를 보면, 하역 노동자 1천700여 명 중 48%가 희망퇴직을 신청해 노조가 철회 기간을 두기도 했다. 정부가 희망퇴직 시 생계지원금을 최대 1억7천만원까지 줬기 때문이다. 2천800여 명에 달했던 전체 조합원 수는 1천 명 초반대로 추락했다. 노조는 "인천항이 뼈를 깎는 노력을 해야 한다"며 한발 양보해 합의를 이뤘다.최근 인천항을 두고 노조에서는 "이보다 더 나쁠 수 없다"는 말까지 나온다. 내항 TOC(부두운영사) 통합으로 부두 노동자 수가 대폭 줄어들게 될 처지인 데다, 물동량 유지·확대를 위해 평택항 및 부산항과도 경쟁을 벌여야 하기 때문이다.이에 항운노조는 '항만 배후단지 조성을 위한 정부 지원', '부두 임대료 인하 촉구' 등 인천항의 경쟁력을 갖추기 위해 정부와 기업 관계자, 국회의원 등을 만나며 발 빠르게 움직이고 있다.이해우 위원장은 "인천항이 수도권이기 때문에 다른 항보다 비용이 비쌀 수밖에 없다. 인천항만공사는 시설에 대한 투자를 아끼지 말아야 한다. 경쟁력을 갖출 수 있는 항으로 조성해야 한다"고 했다.그는 "인천항운노조는 인천항의 주인"이라고 당당히 말했다. 이어 "격동의 인천항 역사와 궤를 함께하며 인천항운노조는 다른 지역 노조보다 더 빨리 시대의 흐름에 발맞춰 변화하며 성장했다"면서 "앞으로도 조합원들이 주인 의식을 갖고 일할 수 있게 하는 것이 노조의 목표"라고 했다.글/윤설아기자 say@kyeongin.com 사진/김용국기자 yong@kyeongin.com인천항운노조는 지역 내 조합원들의 후생복지시설 마련을 위해 정부에 복지회관 건립을 건의, 2006년 '근로자의집'을 개관했다. 신협, 체력단련실, 인천항운노조 사무실, 휴게실 등의 시설을 갖췄다.1903년 제물포항 건어물 하역장에서 건어물을 나르고 있는 부두노동자들. /인천항운노조 제공1930년대 인천항에서 부두노동자들이 미곡 수출품을 나르고 있는 모습. /인천항운노조 제공1933년 가마니를 수송하던 우마차. /인천항운노조 제공1960년대 인천항에 하역된 밀가루 포대를 소형차에 싣고 있는 모습. /인천항운노조 제공1970년대 부두 내 적재한 화물을 나르고 있는 모습. /인천항운노조 제공

2018-11-21 윤설아

[한국 근대음악의 발상지 인천·(7)]선교와 음악(下)

여성대상 선교 위해 제물포 찾은 마거릿벵겔126년전 국내 첫 서구식 학교 '영화학당' 세워탄압 당하던 우리 음악 대신 찬송가 등 교육이를 시작으로 애국가·계몽가요까지 가르쳐졸업생 김영의, 국내 최고 피아니스트로 성장개항 이후 교회와 학교가 설립되면서 초기에는 이 두 곳이 음악 활동의 중심지였다. 인천 역시 교회와 학교가 음악 활동의 중심지였는데, 다른 도시와 차이점이 있다면 외국 군함의 입항과 함께 항구에서 울려 퍼지는 군악대의 연주 소리를 자주 들을 수 있었다는 점이다.우선 '교회'는 서양음악의 보급 및 활동의 중심지로서의 역할을 하였고, '선교사'는 서양음악 전달자 및 음악교사로서의 역할을 하였으며, 찬송가의 반주 악기인 '풍금'은 서양의 평균율이라는 음감각과 화음감이라는 음감을 심어주었고, 교회에서 찬송가를 익힌 신자들은 후에 서양음악 애호가와 청중으로 발전을 하게 된다.-<인천근현대문화예술사연구>(인천문화재단 刊)에 수록된 민경찬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의 '서양음악의 수용과 인천' 중에서1892년 당시 24세였던 미북감리교회 여선교사 마거릿 벵겔(Magaret J. Bengel)은 제물포(인천) 여성 선교를 위해 담당 선교사로 파견됐다. 제1대 전도부인(한국 개신교 초기의 유급 여성 사역자)으로 황해도 곡산 출신의 미망인 백헬렌도 파견돼 벵겔과 함께 본격적인 여성 선교를 시작했다. 그러나 병인양요와 신미양요 등 두 차례 서양의 침략을 겪은 인천 사람들은 미국에서 온 전도사들이 전파하는 종교에 대한 거부감과 두려움을 갖고 있었다. 이에 백헬렌은 가정에서 필요한 물건을 싸게 팔면서 여인들의 인심을 얻는 방식으로 전도를 시작했다.그러나 당시 우리나라 여성 대부분은 글자를 몰랐다. 이에 벵겔은 전도부인 강세실리아에게 한글과 찬미가를 가르치도록 했다. 벵겔은 어머니를 따라 교회에 온 아이들이 어깨너머로 배운 한글을 엄마보다 더 빨리 깨우치고, 찬미가도 잘 부르는 모습을 보게 된다. 그로 인해, 아이들만을 위한 교육 선교를 구상했고, 우리나라 최초의 서구식 초등학교인 인천 영화학당이 126년 전 문을 열었다.영화학당의 개교는 우리나라 어린이들을 위한 근대식 교육기관의 출발을 의미하며, 최초로 음악 교육을 실시한 곳이라는 의미도 지닌다.미션스쿨인 배재학당(1885년)과 이화학당, 경신학교(1886년) 설립에 이어 6년 후 인천 영화학당이 개교한 것이다.<영화 백년사(1892~1992)>(이성삼 박사 집필·영화학원 刊)에 따르면, 1890년 한국에 온 벵겔은 이화학당의 메리 스크랜튼(Mary F. Scranton) 여사의 총애를 받아 1891년부터 이화학당에서 음악을 가르쳤다. 성악과 오르간을 가르쳤는데, 주로 성악을 가르쳤다고 한다.이처럼 음악적 소양이 풍부했던 벵겔이 1892년 영화학당 설립 후 어린이들을 대상으로 음악 교육을 했을 것임은 어렵지 않게 유추할 수 있다.<영화 백년사>에는 아펜젤러가 쓴 '대한그리스도인회보' 1900년 7월 18일자를 인용해 그해 6월 23일 개최된 영화학당 방학식 모습을 묘사한 구절이 있다. 이 글은 당시 방학식이 폐회 찬미를 부르면서 마무리 되었음을 알려준다."(전략) … 이와 같이 모든 학도들은 이 말을 기억하여 두 달 동안 쉬일 때에도 정성으로 예배를 드리고 미귀의 유혹에 빠지지 말고, 오직 지극히 보배로운 진주를 사랑하며 잘 지니고 있기를 구주님의 이름으로 바라노라 하시고 폐회 찬미를 부르고 방학식을 마쳤다."우리 교회사와 근대 음악사 관련 자료에도 기독교 계열의 사립학교는 '창가'라는 이름으로 찬송가 교육을 했음을 알 수 있다. 예배를 드리기 위한 목적으로 풍금 반주로 찬송가를 가르쳤는데, 이를 시작으로 점차 나라를 사랑하자는 내용의 '애국가'를 비롯해 자주독립의 정신과 자유민권 사상을 고취시키는 '계몽가요', 학업에 열중하고 실력을 배양해 나라를 구하자는 내용의 '교육창가' 등을 가르쳤다.1910년 8월 을사늑약 이후 일제는 우리 생활 속 자유를 완전히 박탈했다. 언론과 집회, 결사의 자유를 앗아간 것이다.1917년 3대 헤스(M. I. Hess) 교장은 부설 영화유치원을 설립했다. 1914년 이화유치원에 이어 우리나라 두 번째 유치원이었다.<영화 백년사>에 실린 유치원 보육과목과정을 보면 1년 차 어린이들은 16시수로, 2년 차는 18시수(이상 1주일 단위)로 짜여졌다. 이 중 창가는 1·2년 차 각각 3시수로, 여타 과목에 비해 가장 많은 시수를 배정 받았다.당시 영화유치원에서 창가 과목을 통해 어떤 교육을 했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일본의 식민지 통치자들은 의도적으로 우리 음악을 탄압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찬송가와 함께 일제가 허용한 서구 음악을 교육했을 것으로 추측된다.영화유치원과 영화학당이 서울 지역 선교사들이 지은 학교들과 활발하게 교류한 부분도 들여다 볼 필요가 있다.앞서 언급했듯이 벵겔은 이화학당에서 음악을 가르치다가 인천에 와서 영화학당을 설립했다. 이후에도 서울의 배재학당과 이화학당, 경신학교 등과 활발한 소통을 했고, 영화학당 출신들이 이곳으로 많이 진학했다.인천 출신으로, 우리나라 첫 미국 줄리어드 음대에서 유학한 피아니스트 김영의(1908~1986)는 영화학당 출신이다. 김영의는 영화학당 졸업 후 서울 이화학당, 이화여자고등보통학교, 이화여자전문학교 음악과를 졸업했다.어린시절 서양 선교사들을 통해 접한 음악과 스포츠 등이 20세기 중반 우리나라 최고의 피아니스트로 자리매김하는 데 중요한 기반이 됐을 것이다.화창한 오후에 인천 동구 창영동의 영화초등학교를 찾았다. 언제나처럼 1910년 3월에 준공한 영화초교 본관동(인천광역시 유형문화재 제39호)에 눈길이 갔다. 100년이 넘은 지금까지도 그대로 남아있는 이 건물은 학생들의 예배와 체육 활동을 위한 강당으로 사용됐다. 현재 남아있는 건물은 1930년대 말 건물 출입구 돌출 부분을 증축한 것이다. 이 과정에서 건물 내부 구조는 'ㅁ자' 형 평면 형태로 설계됐다. 요즘 대부분 학교가 획일적인 일자형 구조로 지어진 점을 감안하면 신선한 시도였다.하상교 영화초교 교장은 "우리나라 교회와 교육 등 중요한 의미를 갖는 옛 본관 건물을 박물관 형태로 조성하는 방안을 추진 중"이라며 "순례객들도 많이 찾는 만큼, 인천시와 협의를 통해 진행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김영준기자 kyj@kyeongin.com 그래픽/성옥희기자 okie@kyeongin.com/아이클릭아트영화학당 설립 당시 교직원들(왼쪽부터 강세실리아, 마거릿 벵겔, 백헬렌). /인천영화초등학교 제공·경인일보DB1911년에 세워진 영화초등학교 본관의 옛 모습. /인천영화초등학교 제공·경인일보DB1930년대 말 건물 출입구 돌출 부분을 증축한 본관 건물 . /인천영화초등학교 제공·경인일보DB

2018-11-15 김영준

[바다가 들려주는 인천이야기·43]인천 강화도 새우젓

국내 젓새우 70~80% 잡히는 강화도… 배에서 바로 염장해 뛰어난 품질 '전국 입소문'매년 김장철마다 북새통 이루는 외포항 수산시장, 저렴하고 맛 좋은 '추젓' 인기 높아 현대식 냉동 창고 갖춘 경인북부수협 경매장, 지역 모든 제품 거쳐가는 '유통 중심지'김장에 빠질 수 없는 젓갈의 원재료가 되는 젓새우는 인천의 바다가 선물하는 중요한 수산자원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특히 인천 강화도 인근 바다는 젓새우 황금어장으로 불린다. 강화에서 생산하는 새우젓 또한 많은 사람으로부터 명품 대접을 받는다.때문에 해마다 가을이 되면 강화의 포구는 새우잡이 어선으로 들썩이고 전국 각지에서 새우젓을 사러 온 손님들로 북새통을 이룬다.지난 6일 찾아간 강화군 외포리에 있는 외포항 젓갈 수산시장은 김장철을 맞아 새우젓 등 젓갈을 사러 온 손님과 관광객으로 북적였다.현재 외포항 젓갈 수산시장에는 18개 젓갈 판매 매장이 성업 중이다. 새우젓을 주력으로 밴댕이, 멸치 등 어림잡아 20여 종류가 넘는 젓갈을 판매하고 있다.이날 시장에서 만난 조경숙(50)씨는 서울 강남 수서에서 이곳까지 찾아왔다고 한다. 조씨는 추젓 12㎏을 샀다. 김장 100포기를 하려면 10㎏ 정도 필요하다고 한다. 그는 "강화 새우젓이 명품이라기에 올해는 강화 새우젓으로 김장을 담아보려고 멀리까지 찾아왔다"며 "김장 맛이 좋으면 앞으로 계속 강화 새우젓을 쓸 생각"이라고 했다. 그는 10여 년 동안 충남 논산 강경에서 젓갈을 구매해 김장을 했다고 한다.새우젓은 가을에 담근 것을 '추젓'이라고 부른다. 5월에 잡은 새우로 담근 젓을 '오젓', 6월에 담근 젓을 '육젓'이라고 하고, 겨울에 담근 젓을 '동백하젓'이라 부른다.김장철에는 가격이 저렴하고 맛도 좋은 추젓이 인기다. 오젓과 육젓은 추젓보다 가격이 비싸다. 이날 추젓이 1㎏에 2만원, 오젓은 2만5천원, 육젓은 4만원 선에서 판매됐다.잡히는 시기에 따라 새우 크기도 다른데, 추젓은 길이가 1~2㎝, 오젓은 2~3㎝, 육젓은 3㎝ 이상 된다.짠맛의 세기를 결정하는 염도 또한 시기별로 다르다. 가장 더울 때 잡히는 육젓은 부패 방지를 위해 소금이 많이 들어가야 해 짠맛이 강하다. 오젓이 중간 맛, 추젓이 가장 덜 짜다.이곳 상인들은 강화 새우젓이 다른 어떤 지역의 새우젓보다도 품질이 우수하다고 자랑했다.중국산 등을 속여 팔다가 적발돼 홍역을 치르기도 한 다른 지역과 달리, 오직 국산만을 고집하며 믿을 수 있는 새우젓이란 이미지를 지켜 가려고 노력하기 때문이란다.정찬요(54) 강화새우젓축제사무국장은 "우리나라 젓새우의 70~80%가 강화에서 잡히는데, 산지에서 잡아 배에서 바로 염장하는 강화 새우젓은 전국 어디보다 경쟁력이 있다"며 "국내에 유통되는 새우젓의 70~80%는 외국산으로 보면 되는데, 강화에서 사는 새우젓은 원산지를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젓갈 상점 곳곳에는 새우젓이 가득 담긴 드럼통이 보였다. 매장 한 곳에 진열된 물건만 수천만 원어치가 된다고 한다. 새우젓 국물이 닿지 않아 노랗게 색이 변한 부분을 '윗밥'이라고 부른다. 이 윗밥을 걷어내고 판매하는데 먹어도 상관은 없다. 따로 가져가는 곳이 있다고 한다.강화 새우젓이 명품 소리를 듣게 된 것은 강화의 자연환경과 큰 연관성이 있다. 강화도는 한강이 임진강, 예성강과 만나는 곳이다. 조석 간만의 차가 심하고 물살의 변동이 심해 갯벌도 발달해 있다. 민물과 짠물이 만나는 합류 지역이라 어종도 풍부해 큰 새우 어장이 형성될 수 있었다. 지금은 사라지고 없지만 석모도에 염전이 있던 시절에는 품질 좋은 소금이 생산되면서 뛰어난 새우젓이 생산됐다고 전해진다.젓새우는 조업 방법이 크게 두 가지다.'닻배'라고 부르는 배를 이용하는 연안자망 어업 방식과 '꽁지배'를 이용한 안강망 어업 방식이다.자망 어업은 새우가 그물코에 꽂히게 해 잡는 방식이다. 안강망 어업은 조석 간만의 차가 큰 지점에 자루그물을 투하해 닻으로 고정 부설한다. 그러면 새우가 조류에 의해서 자루그물 속으로 들어가 잡힌다.강화도 어민들은 젓새우에 집중하고 있지만 1900년대 초까지만 해도 다른 어종도 많이 났다고 전해진다. 과거에는 조기, 밴댕이, 민어, 병어 등을 잡는 데 주력했다. 지금은 홍어, 까나리, 농어, 숭어 등이 대표적이라고 한다. 강화부지(1783년)에는 민어, 숭어, 석수어, 새우, 가리맛조개, 굴 등이 당시 강화의 수산물로 기록돼 있다.어민들이 생산한 새우젓은 창고로 옮겨 보관 숙성된다.수산시장에서 300여m 떨어진 곳에는 경인북부수협이 운영하는 새우젓 보관창고 겸 경매장이 있는데, 이곳이 새우젓 유통의 중심 역할을 한다. 강화도에서 생산되는 새우젓이 모두 이곳을 거친다고 한다. 인천시와 강화군 등이 50억 원의 예산을 지원해 2011년 완공한 수산물 처리·저장시설이다. 저온 냉장창고, 냉동창고, 급속 냉동창고 등을 갖추고 있다.옛날에는 새우젓을 토굴에 보관했는데, 지금은 현대식 냉장·냉동창고 등 체계적인 방법으로 보관하고 있다. 지금은 판매를 위해 물건이 빠져나가 창고가 비어 있지만, 10월 초가 되면 창고들이 모두 새우젓으로 가득 찬다.김용순(54) 경인북부수협 판매사업소장은 "옛날에는 토굴에 새우젓을 보관하다가 이곳에 보관시설을 설치하고 장소를 옮겼다"며 "최신식 시설에서 새우젓을 잘 숙성시켜 강화 새우젓의 상품 가치를 높이는 데 큰 역할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글/김성호기자 ksh96@kyeongin.com 사진/김용국기자 yong@kyeongin.com /아이클릭아트강화 새우젓은 인천의 명품 수산물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특히 가을에 수확한 젓새우로 만든 '추젓'은 김장에 빠질 수 없는 재료로 많은 이들로부터 사랑을 받는다. 지난 9일 경인북부수협이 운영하는 수산물 처리·저장 시설에 보관 중인 새우젓이 숙성 중이다. 사진/김용국기자 yong@kyeongin.com외포항 젓갈 수산시장에는 판매장 18곳이 운영 중이다. 사진/김용국기자 yong@kyeongin.com/아이클릭아트김장철을 맞아 시장에서 젓갈을 고르는 손님들. 사진/김용국기자 yong@kyeongin.com낡은 시설을 고쳐 지난 2009년 새롭게 조성된 외포항 젓갈 수산시장 전경. 사진/김용국기자 yong@kyeongin.com

2018-11-14 김성호

[zoom in 송도]송도국제도시 브리핑

■IFEZ 스마트시티운영센터 누적 방문객 1만7178명송도국제도시 G타워에 있는 인천경제자유구역 스마트시티운영센터에 방문객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인천경제자유구역청은 센터가 문을 연 2014년 2월부터 올해 10월 말까지 1만7천178명이 방문했다고 밝혔다. 전체 방문객의 65%(1만1천204명)는 외국인이다.지난 7일에는 KOTRA(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와 연계해 독일, 중국, 오스트리아, 스위스, 일본, 이탈리아, UAE 등 세계 7개국 18개 주요 해외 언론사 관계자가 센터를 찾았다. 인천경제청은 "올해 46개국 2천215명이 센터를 방문했다"며 "쿠웨이트 주택부 장관, 노르웨이 환경부 장관, 에콰도르 산업부 장관 등 주요 인사들의 센터 방문이 잇따르고 있다"고 했다.365일 24시간 체제로 운영되는 센터는 ▲CCTV 실시간 영상 감시 및 관계기관 공조 체제 구축 ▲비상벨 호출 등 상황 발생 접수 및 전파 ▲방범·방재·교통·환경 정보 제공 등의 기능을 한다.■아·태 방송개발기구, 인천시청자미디어센터 견학송도국제도시에 위치한 인천시청자미디어센터(센터장·이충환)에 아·태 방송개발기구 관계자들이 방문했다.시청자미디어재단 인천시청자미디어센터는 최근 아·태 방송개발기구 10개국 관계자들을 대상으로 한국형 미디어교육 현장을 소개하고 센터의 미디어사업을 설명했다. 방송통신위원회가 주최하고 시청자미디어재단이 주관한 이번 행사는 아·태 지역 시청자의 권익 증진과 협력 방안 모색을 위해 마련됐다.말레이시아, 몰디브, 미얀마, 방글라데시, 브루나이, 인도, 캄보디아, 태국, 독일 등 10개국 방송·통신 관계자들은 해송중학교 '찾아가는 미디어나눔버스' 미디어교육 현장을 둘러본 뒤 센터에서 미디어사업에 관한 설명을 들었다. 이후 드론교육과 1인 방송 체험에 참여하는 등 스마트 미디어교육 프로그램을 참관했다.■경제청 "송도자원순환센터 고형연료시설 정상 운영"송도자원순환센터 고형연료 사용시설이 정상적으로 운영되고 있다고 인천경제자유구역청은 밝혔다.송도자원순환센터는 연수구 지역에서 발생한 생활폐기물을 고형연료로 만들어 사용하고 있다. 올해 3~9월 고형연료 사용 시설의 일평균 대기오염 물질 배출 농도는 배출 허용 기준 대비 먼지 4.9%, 질소산화물 6%, 일산화탄소 24.3%, 염화수소 32.5%다. 이 기간 시간당 평균 배출량은 먼지 0.02㎏, 질소산화물 0.2㎏, 일산화탄소 0.38㎏, 염화수소 0.2㎏ 수준이다. 염화수소의 경우, 굴뚝자동측정기 교정 과정 등에서 간헐적으로 배출 허용 기준을 초과했으나, 송도 주민에게 건강상 피해를 줄 정도의 농도와 양은 아니라고 인천경제청은 설명했다.인천경제청은 송도자원순환센터 시설·설비 운영 상황을 확인하는 시민검증단을 구성해 운영할 예정이다. /목동훈기자 mok@kyeongin.com/인천시청자미디어센터 제공

2018-11-11 목동훈

[zoom in 송도]美 팝아트 거장 '로버트 인디애나의 HOPE'

오라카이 송도파크호텔 개관5주년 기념희망찬 이미지 마지막 유작 설치 '눈길'오라카이 송도파크 호텔 앞에 미국 팝아트 거장 로버트 인디애나의 작품 'HOPE'가 설치됐다.오라카이 송도파크 호텔이 2019년 1월 개관 5주년을 앞두고 정문 앞에 조형물을 새롭게 설치했다. 이 조형물은 미국 팝아트 거장 로버트 인디애나(Robert Indiana, 1928~2018)의 작품 'HOPE'다. 작가의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LOVE' 'HOPE' 'EAT' 'DIE' 등이 있다.'HOPE'는 올해 5월 타계한 로버트 인디애나의 마지막 작품이라는 점에서 더욱 의미가 있다. 그의 작품은 전 세계 주요 도시 랜드마크로서 많은 이의 관심과 사랑을 받고 있다. 우리나라는 서울 명동 대신금융그룹 신사옥 앞에 'LOVE'가 설치돼 있으며, 인증샷 스팟으로 유명하다.호텔 관계자는 "내년 1월 개관 5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HOPE'를 설치했다"며 "오라카이 송도파크 호텔의 희망찬 이미지 형성과 더불어 큰 포부를 가지고 성장하겠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고 했다. 또 "호텔을 방문하는 고객분들이 정문 앞에 있는 작품을 가장 먼저 마주하게 된다"며 "환영 인사와 함께 작품으로 하여금 희망을 발견하고 품길 바라는 의미를 지닌다"고 했다.오라카이 송도파크호텔은 'Orakai Hotels & Resorts' 1호 브랜드로, 인천 송도 중심부에 있다. 275개 객실과 2개 연회장, 'Level 19 뷔페 레스토랑', 'Thirsty Monk 탭하우스', 'illy CAFF', 실내외 수영장, 남녀 사우나, 피트니스 센터를 갖추고 있다. /목동훈기자 mok@kyeongin.com오라카이 송도파크 호텔 정문 앞에 설치된 미국 팝아트 거장 로버트 인디애나의 작품 'HOPE'. /오라카이 송도파크 호텔 제공

2018-11-11 목동훈

[zoom in 송도]韓·우즈베크 교류 플랫폼 '송도시대' 열다

주한 무역대표부 포스코타워에 개소관련외국기관 최초 인천에 둥지 틀어수출입·투자 상담부터 특산품 전시장경제청 "통상 핵심役 기대 적극 지원"우즈베키스탄 주한 무역대표부가 인천 송도국제도시에서 공식 업무를 시작했다.우즈베크 주한 무역대표부는 지난 9일 송도 포스코타워(동북아무역센터) 29층에서 개소식을 하고 본격적인 운영에 들어갔다.무역대표부는 대한민국과 우즈베크 양국의 경제 발전을 위해 설립한 우즈베크 정부 공식 기관이다. 약 1년간 준비 기간을 거쳐 올해 8월 업무를 시작했으며, 우즈베크에서 파견한 공무원 3명과 주한대사관 상무 관련 외교관 2명 등이 근무하고 있다. 주로 서울에 위치하는 외국 무역대표부가 인천에 둥지를 튼 건 처음이다. 무역대표부 초대 대표는 김창건(에버그린모터스 대표이사) 주한 우즈베크 명예영사다.김창건 대표는 개소식에서 "우즈베크 무역대표부가 한국에 처음 설립돼 양국 발전에 중추적 역할을 하게 됐다"며 "초대 대표를 수행하게 돼 영광"이라고 했다. 이어 "무역대표부가 양국 교류·발전의 플랫폼이 될 수 있도록 개방하겠다. 적극적으로 활용해달라"며 "양국 우호 증진과 경제 발전에 초석을 놓을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덧붙였다. 무역대표부는 수출입과 투자 관련 협의를 진행할 수 있는 회의실등을 갖추고 있으며, 우즈베크에서 만든 제품들을 전시하고 있다.개소식에는 김창건 대표를 비롯해 우즈베크 비탈리 펜(Vitaly Fen) 주한 대사와 묵슨크자(Mukhsinkhuja) 페르가나주(Ferghana Regeion) 부지사, 김진용 인천경제자유구역청장, 신명진 한국수입협회 회장, 김승동 (사)유라시아21 이사장 등 우즈베크와 국내 기관·단체·기업 관계자들이 참석했다.비탈리 펜 대사는 축사를 통해 "(무역대표부는) 우즈베크의 특산품을 전시·수출하고, 관광과 직접 투자를 상담할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이라며 "양국 경제 발전에 큰 기여를 할 것으로 기대한다"고 했다. 우즈베크는 금, 원유, 가스 등 자원이 많고 정치적으로도 안정돼 있다.김진용 청장은 "포스코타워에는 중국 웨이하이(威海)관이 있고, 포스코대우가 들어와 있다"며 "무역대표부가 한국과 우즈베크 간 무역과 통상에서 중추적 역할을 할 것"이라고 했다. 또 "앞으로 인천경제청은 교류와 협력을 강화하고 적극적으로 지원하겠다"고 했다.우즈베크 사브카트 미르지요예프(Shavkat Mirziyoyev) 대통령은 경제자유구역 개발 등 한국의 경제·교육·관광 모델에 관심이 많다고 한다. 기존 3개 특별산업지구 명칭과 운영 제도를 경제자유구역으로 단일화했으며, 추가로 4곳을 경제자유구역으로 지정해 운영하고 있다. 서울이 아닌 인천 송도에 무역대표부를 개설한 것도 인천경제자유구역을 롤모델로 삼고 있기 때문으로 인천경제청은 보고 있다. 이와 관련, 인천경제청은 올해 4월 우즈베크 경제자유구역 개발 및 주한 무역대표부 활동 지원 등에 관한 상호협력 양해각서를 주한 우즈베크 대사관과 체결했다. 7월에는 우즈베크 페르가나주, 3월엔 부하라주(Bukhara Region)와 각각 협력 의향서를 체결했다. 이들 지역은 경제자유구역을 개발하는 등 우즈베크의 경제 성장을 이끌고 있는 도시다.인천경제청은 우즈베크 경제 관계 공무원을 위한 교육 프로그램이 송도에서 운영되도록 협의하고, 우즈베크 무역대표부 개소를 계기로 다른 나라의 무역대표부도 유치할 계획이다. /목동훈기자 mok@kyeongin.com우즈베크 무역대표부가 입주한 송도 포스코타워 전경. /경인일보DB우즈베크 주한 무역대표부 송도 입주 개관식 모습. /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옷,와인 등 우즈베크에서 만든 제품이 전시된 무역대표부 모습. /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

2018-11-11 목동훈

[한국 근대음악의 발상지 인천·(6)]선교와 음악(上)

1885년 아펜젤러, 인천에 내리교회 세워"초기 양악 개신교 선교와 때를 같이 해"오늘날 찬송가 통한 전파 통설로 굳어져인천 영화초등학교 학생들로 구성된 '영화 윈드 오케스트라'가 지난 1일 저녁 인천 남동소래아트홀 대공연장에서 창단 연주회를 했다. 명칭(윈드)에서 알 수 있듯이 관악 주자 30여명으로 구성된 영화 윈드 오케스트라는 2017년 11월 설립 이후 올해 학교 졸업식과 입학식을 시작으로 5월 동구청 주최 어린이날 기념행사 축하 공연을 비롯해 내리교회 행사 등에서 연주회를 했다. 지난 8월에 열린 제16회 춘천관악경연대회에선 은상을 획득했다.지난 1일 연주회는 영화 윈드 오케스트라의 이름을 내걸고 연 첫 번째 무대였다. 영화 윈드 오케스트라의 창단 연주회에는 역시 영화초교 학생들로 구성된 영화 엘피스(헬라어로 소망을 의미) 합창단이 참여해 의미를 더했다. 영화 엘피스 합창단은 지난해 열린 제2회 인천시 어린이 합창대회에서 우수상을, 올해 인천 소방동요대회에서 최우수상을 받은 바 있다.오케스트라와 합창단이 함께 꾸미는 제임스 스웨어린젠의 '아이거(Eiger)'와 골드먼의 '치리오 행진곡'으로 시작한 연주회는 금관5중주 무대와 영화 엘피스 합창단의 공연, 졸업생 임재인의 가야금 독주로 이어졌다. 후반부는 쇼스타코비치 '재즈 모음곡 2번 중 왈츠'와 영화 '미션' OST 중 '가브리엘의 오보에', 김광진의 '마법의 성', 최완규 편곡의 '코리안 사운드 셀렉션'까지 연주를 마무리하며 관객들의 박수갈채를 받았다.앙코르곡으로 '마징가 Z 주제곡'을 연주하며 더 큰 호응을 이끌어냈다. 영화초교는 1892년 미국인 선교사에 의해 개교한 우리나라 최초의 초등학교이다. 126년 전통의 영화초교 학생 오케스트라 창단 연주회는 그 자체로 흥미로운 자리였다.100년 앞서 천주교 박해때 '순교자들 성가'"군악대 창설후 양악 퍼져" 능동적 시각도일제의 국악 탄압… 감수성 변화 앞당겨"서양음악은 언제 어떻게 우리나라에 들어 왔을까"의 물음에는 3가지 정도의 답변이 존재한다.그중 개신교의 찬송가 전파로부터 한국의 양악이 시작되었다고 보는 설은 비교적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다. 이유선은 1985년에 쓴 '한국 양악 100년사'에서 "우리나라 초기 형태의 서양음악(찬송가 등)은 개신교의 선교와 거의 때를 같이 했다. 따라서 한국에 있어서 서양음악의 시작은 개신교의 선교를 기점으로 보는 1880년대 초부터 보는 것이 마땅하다"고 했다.1885년 4월 5일 부활절 아침에 인천(제물포) 해변에 배 한 척이 닿는다. 아펜젤러 목사 부부와 언더우드 목사가 우리나라 선교를 위해 파견된 것이다. 인천학연구소에서 발간한 '간추린 인천사'(1999년)에는 당시 인천에 도착한 선교사들이 뱃머리에서 "우리는 부활절에 이곳(제물포)에 도착하였습니다. / 부활하시던 날 죽음의 권세를 이기신 주님이시어/ 이 백성을 속박의 사슬에서 풀어주시고/그들을 당신의 자녀로 삼으사/ 빛과 자유를 주옵소서"라며 기도했다고 적었다. 당시 국내는 갑신정변으로 인한 어수선한 시국이어서 외국인 부녀자의 입경(入京)이 허락되지 않았다고 한다. 때문에, 언더우드만 서울로 향하고 아펜젤러 부부는 일본으로 돌아갔다. 그 해 6월 21일 다시 인천에 온 아펜젤러는 한 달 정도 머무르며 예배를 보았는데, 이때 국내 첫 감리교회인 내리교회가 세워진다.우리나라 개신교의 역사는 일반적으로 선교사의 입국을 시작점으로 본다. 선교사들이 들어오기 이전 만주에서 세례 받은 교인들이 있기는 했으나, 시기적으로 크게 앞선 것도 아니었고 수적으로도 약소했다고 우리 교회사와 근대음악사 연구서들은 전한다.1911년 평양에서 목사의 아들로 태어난 이유선은 미국 유학 후 귀국해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2005년 타계 때까지 '한국 양악 100년사'를 비롯해 서양(기독교)음악 관련 연구와 저서를 다수 남겼다. 이유선은 아펜젤러 목사 부부와 언더우드 목사 등이 인천에 온 1885년을 기점으로써 100년 후인 1985년에 '한국 양악 100년사'를 출간했다. 개신교의 시작을 기점으로 한 '한국 양악 100년설'이 통설로 굳혀지는 순간이다.천주교의 전례를 시점으로 보게 되면 그보다 100년이 늘어난다. 천주교에 관심을 가진 조선 사람들은 베이징에서 유입된 서적을 통해 복음의 내용을 알게 되었다. 이후 1784년 이승훈이 베이징에서 영세를 받고 돌아오면서 최초의 교회와 함께 조선교구가 설립됐다. 자생적인 교회의 모습을 지니고 있다가 1836년 모방 신부, 1837년 앵베르 주교와 샤스탱 신부의 입국 등 프랑스 성직자에 의해 탄압 속에서도 교세를 키워나갔다. 1866년 병인박해 때 외국인 신부였던 순교자들이 형장으로 압송될 때 성가와 성영(聖詠)을 부른 기록도 있다. 이때의 성가는 당시 프랑스 신부였던 이들이 그레고리오 성가를 교육받았기 때문에 찬송가와 시편(Psalm)의 낭독이었을 것으로 추측한다.서양 선교사에 의한 수동적 전래가 아닌 한국인 스스로 행한 능동적 측면을 부각해 바라본 견해는 국악학자 장사훈(1916~1991)에 의해 제기됐다. 그는 "미국의 선교사들이 한국에 들어와 찬송가와 창가를 가르쳤으나 당시의 사회실정은 지금과 달리 그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좀처럼 인식을 얻지 못했다"면서 "1900년대 우리 군악대 창설로 말미암아 비로소 한국에 양악이 들어와 퍼지게 되었다"고 했다. 이후 한국음악학 1세대 중 한 명인 송방송(76)도 '대한제국 국가'를 작곡한 프란츠 에케르트의 도착 이후 우리 땅에 양악이 뿌리를 내리기 시작했다는 견해를 더한다.1910년 8월 을사늑약 이후 일본의 식민지 통치자들은 의도적으로 우리 음악을 탄압했다. 여기에 더해 서구의 찬송가 또한 우리나라 사람들의 음악적 감수성을 크게 바꿔놓는다. 우리 음악을 듣고 즐기던 감수성이 서양식 노래를 듣고 즐기는 감수성으로 바뀌어 버린 것이다. 해방 이후 미군 주둔과 우리나라의 선진화 추구도 결국 서양에서 관습화된 음악이 이 땅에서 위세를 떨치는 데 이바지했다. 서양음악이 본래 음악이며, 우리 고유의 전통 음악은 국악이라는 통념으로 자리하게 된다. 오늘의 음악 상황에 대한 주체(반성)적 인식은 '우리 음악의 비전'이다. '서양 현대음악 기법을 통한 동아시아적 이미지의 표현'이라는 평가를 받으며 20세기 서양음악사에 거대한 획을 그은 작곡가 윤이상(1917~1995)은 큰 울림을 준다. /김영준기자 kyj@kyeongin.com1901년께 초창기 내리교회 모습. 1892년부터 1903년까지 내리교회 담임목사를 지낸 존스(G.H.Jones) 목사는 영화보통학교와 영화여자학교를 세우는 등 인천에 근대식 교육의 씨앗을 뿌렸다. 오른쪽은 1885년 4월 5일 부활절에 제물포를 통해 조선에 입국한 한국 최초의 감리교 선교사인 아펜젤러((H. G. Appenzeller) 목사. /내리교회 제공영화 윈드 오케스트라 창단 연주회에서 영화 엘피스 합창단과 합동 공연 모습. /영화초교 제공영화 윈드 오케스트라 창단 연주회에서 영화 엘피스 합창단과 합동 공연 모습. /영화초교 제공

2018-11-08 김영준

[바다가 들려주는 인천이야기·42]인천항 관문 '갑문' (하)

1910년대 미곡 수출 중심으로 떠오른 인천日, 곡물 반출위해 축항… 죄수등 강제동원처참했던 공사현장 '백범일지'에도 기록돼지금으로부터 100년 전인 1918년 10월 26일. 일본우선주식회사 깃발을 단 기선 한 척이 인천 앞바다에 있는 사도(沙島)를 지나 바다 위 거대한 철문 앞에 멈췄다. 두 개의 갑문을 지난 배는 400m가 넘는 거대한 길이의 부두에 정박했다. 8년여 동안 진행한 인천항 축항(갑문 건설) 공사를 마무리하고 준공식에 앞서 가진 시험 운항이었다. 이튿날 오전 10시 30분께 2대 조선총독을 지낸 하세가와 요시미치(長谷川好道) 등 700명의 관계자가 참석한 가운데 인천항 축항 공사 준공식이 개최됐다. 수심이 얕고 9~10m에 달하는 조수 간만의 차 때문에 24시간 선박 접안이 어려웠던 인천항에 4천500t급 기선 세 척이 항상 정박할 수 있는 항만시설이 만들어진 것이다.조선총독부는 물자를 원활하게 수탈하기 위해 1911년 현재 인천항 제1부두 근처에서 갑문 건설사업을 시작한다. 1933년 발간한 인천부사에 따르면 1911년부터 1918년까지 진행한 공사에는 391만 4천455엔이 사용됐다. 1918년 당시 일본 내 쌀 한 섬(150㎏) 가격이 10엔이었던 점을 고려하면 일본 돈으로 300억 엔, 우리나라 돈으로 3천억 원이 넘는 예산이 사용된 셈이다.조선총독부가 막대한 예산을 투입한 이유는 인천항이 우리나라 미곡 수출의 중심지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인천항은 1910년대부터 군산, 부산 등을 제치고 국내에서 가장 많은 쌀과 콩을 수출하는 항구 도시가 됐다고 한다. 1910년대 인천에서 투기의 일종인 '미두(米豆)'가 가장 성행한 것도 인천으로 쌀이 모였기 때문이다. 미두는 일정한 날짜를 정해 놓고 그 기간 내에 쌀을 사거나 팔아 시세 차익을 얻는 방식이다.일본이 우리나라 곡물을 자국으로 반출하기 위해 진행한 축항 공사에는 조선인이 동원됐다. 특히, 인천 내동에 있던 경성감옥 인천 분감에 수감된 조선인 죄수들이 대거 끌려갔다. 그 가운데 백범 김구(1876~1949)도 있었다. 김구는 1911년 '안악 사건'(1910년 11월 안명근 군자금 모금 사건)으로 서울에서 옥살이를 한다. 1914년 39세 때 인천 감옥으로 이감돼 축항 공사 현장에서 강제 노역을 했다.그는 백범일지에 '아침저녁 쇠사슬로 허리를 매고 축항 공사장으로 출역을 간다. 흙 지게를 등에 지고 10여 장의 높은 사다리를 밟고 오르내린다. 불과 반일 만에 어깨가 붓고 등창이 나고 발이 부어서 운신을 못 하게 된다. 너무 힘들어 바다에 빠져 죽고 싶었으나 그러면 같이 쇠사슬을 맨 죄수들도 함께 바다에 떨어지므로 할 수 없이 참고 일했다'고 참담한 심정을 기록했다. 인천항 내항 1부두 동쪽과 남쪽 시설은 콘크리트로 덧씌운 탓에 옛 축항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지만, 북쪽 석축은 100년 전 모습 그대로다. 석축 위로 정박한 배를 묶어 두는 계선주(繫船柱) 역시 당시 모습대로 열을 지어 서 있다. 1930년대 인천 지역에 군수공장이 늘어나면서 일본은 인천항을 확장할 계획(제2선거 건설)을 세웠다. 인천항만공사가 2008년 발간한 '인천항사'에 따르면 당시 제2선거를 계획했던 지역은 지금의 인천 북항 일대로 추정된다. 인천도시역사관 배성수 관장은 "조선기계제작소(현 두산인프라코어), 조선목재, 동양방적(현 동일방직) 등 군수 물자 보급을 위한 공장들이 세워지면서 인천항 물동량이 많이 늘어났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조선총독부의 제2선거 건설 계획은 태평양 전쟁이 확대되면서 공사 비용을 확보하지 못해 백지화됐다.경제개발로 화물 급증 1974년 새 갑문 준공한계 넘는 선박 드나들며 산업화 견인 역할역사적 명암 공존 '100년사 기념' 가치 충분일본이 시작하지 못한 공사는 1960년대 우리 정부에 의해 추진됐다.경제개발 5개년 계획에 따라 1965년 서울 구로와 인천 부평·주안에 한국수출산업공업단지가 차례로 조성되면서 인천항의 화물이 급격히 증가하기 시작했다. 1960년 46만 6천259t이었던 인천항 물동량은 1969년 279만 8천t으로 600%나 올랐다. 인천연구원 김창수 도시경영센터장은 "당시에는 육로 운송 인프라가 제대로 갖춰져 있지 않아 부산 등 다른 지역까지 화물을 운반할 여건이 충분하지 않았다"며 "구로, 부평, 주안 등 공장에서 필요한 원자재 가운데 대부분이 인천항으로 수입될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1974년 현재의 갑문이 만들어지면서 인천항은 컨테이너 하역 전용 부두인 4부두를 포함해 2부두와 3부두 등 5만t급 이상 대형 선박들을 동시에 접안해 하역할 수 있는 기능을 갖춘다. 항만 인프라가 만들어지면서 인천항 물동량도 급증했는데, 1979년에는 2천 400만t의 물동량을 처리했다.1980년대 들어서면서 인천항 물동량이 3천만t에 육박하기 시작했다. 당시 갑문은 항상 배들로 가득했다는 게 당시 근무자들의 설명이다. 1978년부터 인천항 갑문에서 근무한 김익봉 인천항만공사 갑문운영팀장은 "인천항 갑문에 하루 50척의 선박이 드나들 수 있는데, 58척의 선박이 통항한 적도 있었다"며 "인천 앞바다와 내항 안에는 갑문을 이용하려고 대기하는 선박이 항상 보였다"고 회상했다. 이어 "입출항 선박이 너무 많아 갑문을 거의 온종일 열어 놓다 보니 내항의 물이 계속 줄어들어 수심이 낮아지는 현상까지 벌어졌다"며 "내항이 일정 수위를 계속 유지할 수 있도록 외항의 물을 내항으로 공급하는 공사도 실시했다"고 덧붙였다.지난달 27일은 인천항 갑문이 처음 만들어진 지 100년째 되는 날이었다. 그러나 인천 지역에서는 별도의 행사 없이 이를 조용히 지나쳤다. 현재 남아있는 갑문이 100년 전 만들어진 것도 아닌 데다, 일제 수탈의 역사를 굳이 기념할 필요가 없다는 이유에서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우리나라 산업화의 상징이었던 인천항 갑문의 축조일은 역사적으로 기념할 가치가 충분하다고 지적한다.김창수 센터장은 "인천항 갑문은 100년 전 조선인의 피땀으로 만들어졌고, 우리나라 경제 발전의 견인차 구실을 한 시설"이라며 "명암이 함께 공존하는 시설이기 때문에 갑문의 의미를 다시 되돌아보는 일은 인천시 등 관계 기관이 반드시 추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글/김주엽기자 kjy86@kyeongin.com1918년 완공된 인천항 갑문에 선박이 입항하는 모습. 초창기 갑문은 현재 운영되는 '슬라이딩 게이트(미닫이)' 방식이 아닌 '마이터 게이트(여닫이)' 형태로 제작됐다.1911년 인천항 축항공사에 동원된 인천 내동 경성감옥 인천 분감 조선인 죄수들 모습. /인천항운노동조합 제공1918년 10월 27일 열린 인천항 축항공사 준공식 모습./인천항만공사 제공현재의 갑문이 지어지기 전인 1966년 인천항 전경.1974년 인천항 갑문타워 준공식에 참석한 박정희 대통령 모습. /인천항만공사 제공

2018-11-07 김주엽

[zoom in 송도]송도국제도시 브리핑

■'국제기구-MICE 커리어 페어' 9일인천시와 외교부가 공동 주최하고 인천관광공사가 주관하는 '2018 국제기구-MICE 커리어 페어'가 오는 9일 송도컨벤시아에서 열린다. 국제기구-MICE 커리어 페어는 국제기구와 MICE 분야 진출 희망 인력에 대한 전문교육 및 정보 교류의 장을 마련하고 해당 분야 일자리 창출을 위해 2015년부터 매년 열리고 있다.올해에는 UNDP(유엔개발계획) 뉴욕 본부, ICC(국제형사재판소) 헤이그 본부, FAO(국제연합식량농업기구) 등 9개 국제기구 본부 인사 전문가들과 태국 전시컨벤션뷰로와 인센티브&컨벤션협회 임원 등이 참석한다.주요 행사로는 ▲국제기구 분야별 주요 업무와 인사 채용 방법을 소개하는 '국제기구 진출 설명회' ▲국제기구 내 이벤트 매니지먼트에 이르기까지 MICE 분야의 참신하고 다양한 글로벌 커리어를 알려주는 '글로벌 MICE 아카데미' ▲NGO 채용 계획 및 진출 사례를 소개하는 'NGO 진출 설명회' 등이 있다. 국제기구 및 MICE 기관·업체 약 60여 개소가 참가하는 진로·채용 상담 및 홍보 부스도 운영된다.■이달중 'IFEZ 투자유치·일자리박람회'인천경제자유구역청은 '2018 IFEZ(인천경제자유구역) 투자유치 홍보 및 일자리 박람회' 개최를 준비하고 있다.이번 박람회는 핵심 국정과제인 '일자리 창출'을 위한 것이다. 송도 등 IFEZ 입주기업과 잠재투자기업의 일자리 정보를 구직자들에게 알려주고, 국내외 법인·기업에 IFEZ 투자 가치를 홍보하는 행사다. VR(가상현실), 로봇, 드론 등을 체험할 수 있는 부대행사도 진행된다. 인천경제청은 이달 중 송도컨벤시아에서 개최하는 것으로 계획하고 있다.■주한 우즈베크 무역대표부 9일 개소식송도국제도시 포스코타워 29층에 둥지를 튼 주한 우즈베키스탄 무역대표부가 오는 9일 오전 11시 개소식을 한다.우즈베크 무역대표부는 대한민국과 우즈베크 양국의 경제 발전을 위해 설립한 우즈베크 정부 공식 기관이다. 개소식은 우즈베크 통상부, 주한 우즈베크 대사관, 주한 우즈베크 무역대표부가 공동 주최한다. 주한 우즈베크 무역대표부 김창건(주한 우즈베크 명예영사) 대표는 "글로벌 국제업무지구로 급부상하고 있는 송도에서 무역대표부를 오픈하게 됐다"며 "양국 경제 발전에 중추적인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 노력하겠다"고 했다. /목동훈기자 mok@kyeongin.com

2018-11-04 목동훈

[zoom in 송도]송도 3개 조성계획 '정부 수요조사' 포함

인천 송도국제도시는 공유수면을 매립해 만든 도시이기 때문에 바다와 접하고 있다. 특히 외곽의 수로와 호수를 연결해 'ㅁ'자 모양의 물길을 만드는 워터프런트 조성사업이 계획돼 있어, 마리나(Marina) 조성의 최적지로 꼽힌다. 마리나는 스포츠 또는 레크리에이션용 요트와 모터보트 등을 위한 항구로, 선박 계류시설뿐만 아니라 주차장·호텔·놀이시설 등을 포함한 넓은 의미의 항만을 말한다. 해양관광산업 핵심 기반시설이다. 소득 수준 향상, 여가 시간 확대 등으로 해양스포츠 등 해양관광 수요는 증가하는 추세다. 중국도 해양관광산업이 성장하고 있어, 마리나 개발은 선택이 아닌 필수다. 하지만 '해양도시' 인천에는 영종도에 있는 왕산마리나가 유일하다. 2천552만 명의 수도권 인구를 배후에 두고 있지만, 그 지리적 이점을 살리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인천공항·항만 가까워 접근·시장성 '우수'항만公, 국제여객부두에 크루즈연계 전략연수구, 10공구 연구·수리시설 대규모 유치경제청, 워터프런트 남측 수로에 조성 추진해수부, 3곳등 현장조사 타당성 검토 거쳐 내년중 2차 계획·정책방향 수립 '귀추 주목'그나마 최근 인천시가 실시한 '(해양수산부) 제2차 마리나항만 기본계획(2020~2029년) 수요조사' 결과에 송도 마리나 조성계획 3개가 포함됐다. 1개는 '제1차 마리나항만 기본계획(2010~2019년)'에 반영된 사업이고, 나머지 2개는 신규 사업이다. 이들 사업은 아직 계획 또는 구상 단계이기 때문에 본격화까지 오랜 시간이 걸릴 것으로 보인다. → 표·위치도 참조■ 마리나 최적지 '송도'송도는 다른 수도권 마리나 예정지에 비해 접근성, 시장성, 이용성 등이 매우 우수하다.인천항만공사와 연수구 자료를 보면, 송도는 대한민국 관문인 인천국제공항·인천항이 가깝다. 인천공항은 제2여객터미널 개항 등으로 여객 처리 능력이 커지고 있고, 인천항은 국제여객부두 신설 등으로 경쟁력을 강화하고 있다. 인천항만공사는 "해양관광의 핵심 시설인 마리나를 도입해 국내외 해양관광 수요에 능동적으로 대처하고 지역 및 국가 활성화에 기여하고자 한다"고 했다.송도는 지하철과 도로 등 기반시설을 갖추고 있으며, 배후 수도권에 풍부한 인적·물적 관광 인프라가 있다. 송도와 서울을 잇는 GTX, 수도권제2순환고속도로 인천~안산 구간이 개통하면 접근성이 더욱 향상될 전망이다. 연수구는 "송도는 항공, 해상, 육상교통 등 접근 수단이 다양하다"며 "인천공항과 인접해 외국인 관광객 유치에 유리하고, 인천항 국제여객부두와의 연계로 시너지 효과도 발생한다"고 했다.■ 송도 마리나 조성 계획·구상인천항만공사는 송도 9공구 국제여객부두(크루즈·카페리 접안 시설)에 마리나를 조성할 계획이다. 육상 165척, 해상 135척 등 총 300척이 계류할 수 있는 규모다. 인천항만공사는 국제여객부두에 국제여객터미널을 건설하고 있다. 또 그 배후 부지에 숙박시설과 상업시설 등 다양한 분야의 시설을 유치할 계획이다. 크루즈와 카페리를 이용해 인천에 온 외국인 관광객들이 마리나에서 해양스포츠를 즐길 수 있는 것이다. 국제공항, 크루즈부두, 배후 단지가 연계된 국내 유일의 마리나가 될 것이라고 인천항만공사는 설명했다.연수구는 송도 10공구 준설토 투기장에 마리나를 유치할 계획이다. 사업비 6천787억 원, 119만 4천㎡, 2천800선석(육상 2천 척, 해상 800척) 등 규모가 크다. 연수구는 이곳에 선박 계류시설뿐만 아니라 마리나 관련 연구·전시·판매시설과 수리·공장시설도 계획하고 있다.인천경제자유구역청은 송도 워터프런트 2단계 사업 대상지인 남측 수로에 마리나를 조성할 계획이다. 워터프런트는 기존 호수와 수로를 연결하고 송도 11공구에 수로를 내 'ㅁ'자형 물길을 만드는 대형 프로젝트다. 수 면적 4.66㎢, 수로 연장 16.19㎞ 규모이며 2027년 완성을 목표로 한다. 인천경제청 관계자는 "남측 수로 너비가 400m 정도 되는데, 약 100m를 매립할 계획"이라며 "매립지를 매각해 워터프런트 사업성을 높이고 마리나 조성 비용을 마련할 계획"이라고 했다.한편, 송도 6·8공구 중심부 128만㎡ 개발사업 우선협상대상자로 선정됐던 '블루코어 컨소시엄'도 6공구 호수 변에 마리나 시설을 조성하겠다는 계획을 세웠었다. 블루코어 컨소시엄은 우선협상대상자 지위를 되찾고자 인천경제청과 법정 다툼을 벌이고 있다.■ 마리나 조성 시기는?마리나 조성사업은 경제성과 재원을 확보하는 것이 중요하다. 특히 연수구와 인천경제청이 계획한 마리나 사업은 우선 '마리나항만 기본계획'에 반영돼야 하고, 민간 투자도 유치해야 한다. 인천항만공사와 인천경제청 마리나 사업은 각각 국제여객부두 배후 단지 개발, 워터프런트 조성과 연계돼 있어 이들 프로젝트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연수구 사업은 규모가 크기 때문에 사업 타당성 확보 여부가 사업 추진의 관건이 될 전망이다.해수부는 지자체 등이 제출한 마리나항만 기본계획 수요조사 결과를 토대로 현장 조사, 타당성 검토 등을 벌여 내년 중 제2차 기본계획과 마리나 정책 방향을 수립할 예정이다. /목동훈기자 mok@kyeongin.com연수구 송도동 국제여객부두 인근 마리나 조감도. /인천항만공사 제공

2018-11-04 목동훈

[한국 근대음악의 발상지 인천·(5)]애국가

강제개항속 나라사랑·응원 민심 담아 등장1896년 제물포 '전경택 애국가' 가장 빠른 시기 발표자주독립·부국강병·문명개화 내용… 10여종 이르러1902년 '대한제국 국가' 통합… 경술국치 이후 금지돼대부분 양악에 가사, 서구학습 선진화 시대정신 반영1882년 8월 20일 러시아 모스크바의 그리스도 구세주대성당에선 차이콥스키(1840~1893)의 '1812년 서곡'이 초연됐다. 성당의 완공을 앞둔 1880년 당시 러시아 황제는 1812년 러시아를 침공한 나폴레옹의 프랑스 군대 후퇴를 기념하는 기념식을 거행하기로 했다. 아울러 기념곡이 있어야 한다는 여론이 생기면서 추천을 받은 차이콥스키가 곡을 쓰기 시작해 한 달 여 만에 완성했다. 완공된 성당에서 열린 전승 기념행사에서 '1812년 서곡'이 초연된 것이다.매우 극적이며 악상의 전개가 절묘한 '1812년 서곡'은 내용상 전개로 봤을 때, 평화로운 가운데 서서히 전운의 분위기를 드리우는 1부, 러시아군의 출진과 프랑스군의 침공이 어우러지는 2부, 프랑스군과 러시아군이 벌이는 격렬한 전투 이후 러시아의 승리를 알리는 클라이맥스에 해당하는 3부로 구성됐다. 프랑스 혁명 때 작곡됐으며, 현재 프랑스 국가이기도 한 '라 마르세예즈'는 이 작품에서 프랑스군의 침공 때 단편적으로 드러난 이후 양국의 전투와 퇴각 때도 음악에 어우러진다. 반대로 러시아를 의미하는 민요들이 작품 요소요소에 나타나며, 곡의 클라이맥스에선 제정 러시아의 국가인 '신이시여 차르를 보호하소서'가 대포 소리와 함께 울려 퍼진다.양국 국가를 활용한 전개는 20분이 채 안 걸리는 작품 속에서 서사적 구조를 명확히 드러내며 이 작품을 표제음악의 걸작으로 올려놨다. 단, 프랑스에선 잘 연주되지 않는다. 국가(國歌)가 작품에서 활용된 예시를 들어봤다. 국가의 사전적 의미는 '나라를 대표·상징하는 노래로, 그 나라의 이상이나 영예를 나타내며 주로 식전(式典)에서 연주·제창한다'이다. 김연갑 한겨레아리랑연합회 이사가 쓴 '팔도 아리랑 기행 1'(집문당)에 따르면 1882년 5월 22일 인천(제물포)에서 조선과 미국의 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하는 과정에서 티콘데로가(Ticonderoga) 호의 함상 군악대가 조선의 국가 격으로 '아리랑'을 연주했다.우리 국가가 없던 상황에서 당대 민중이 즐겨 부른 '아리랑'을 미국 측이 조선을 대표·상징하는 노래로 여겼을 것으로 추측된다. 이후 정부 차원에서 국가를 비롯해 국기와 군기의 필요성을 절감했을 것이다. 정부에 앞서 독립협회가 애국가를 '국가'로 제정해 전국민에게 보급할 것을 제안했다. 1896년 4월 7일 '독립신문'을 창간한 독립협회는 신문을 통해 '애국가 부르기 운동'을 전개했다. 독립협회는 인천박문협회 등 지역의 자매단체들과 함께 전국적으로 애국가 부르기 운동을 확산시켰다. 그로 인해 민중에선 외세의 침략과 강제 개항 속에서 나라를 사랑하고 응원하는 마음이 담긴 '애국가'가 만들어졌다. 서양 국가들을 참작해 여러 단체와 개인이 가사를 썼고, 선교사들을 통해 전례된 외국 민요와 찬양가에 가사를 얹어서 국가의식이나 시가행진 때 불렀다. 우리 국민이 자발적으로 만들기 시작한 '애국가'는 황제에 대한 충성과 나라사랑, 자주독립, 부국강병, 문명개화 등과 같은 애국심을 담은 것이 주를 이룬다. 인천(제물포)의 전경택을 비롯해 나필균, 새문안교회, 배재학당 등에서 지어 부른 것 등 당시 제목을 '애국가'로 단 노래들은 10여 종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이들 중 '전경택의 애국가'가 가장 빠른 시기에 나왔다. '전경택의 애국가'는 '독립신문' 1896년 5월 19일자에 실렸다. 민경찬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는 '인천근현대문화예술사연구'(인천문화재단 刊)에 수록된 논문 '서양음악의 수용과 인천'에서 최초의 애국가가 인천에서 등장했다는 사실은 우연이 아니라고 말한다. 민 교수는 "외세에 대한 위협(군함의 화포와 군악대의 나팔 소리 등)을 가장 먼저 감지한 곳인 만큼 이에 대응해 애국계몽운동으로 나라를 구하려는 생각을 다른 지역에 비해 먼저 가지게 됐을 것"이라며 "인천은 '애국가'가 최초로 탄생한 각별한 의미를 지닌다"고 설명했다.1897년 10월 대한제국 선포 이후 국가 제정의 필요성은 더욱 대두됐다. 국가 제정의 중심에는 1901년 2월에 초대 군악교사로 독일에서 초빙해온 악대 지도자였던 프란츠 에케르트(1852~1916)가 있었다. 1902년 8월 15일 '대한제국 국가'가 공식 제정됐으며, 지금까지 나온 애국가의 통합을 알렸다. 하지만 1910년 8월 경술국치 이후 더 이상 부를 수 없는 금지곡이 되고 만다.1900년을 전후한 인천의 서양음악을 발굴, 연주회의 테마로 구성해 선보이고 있는 인천콘서트챔버는 지난 8월 12일 인천 송도 트라이볼에서 '인천근대양악열전 - 두 강이 만난 바다, 인천. 그 곳의 근대 음악이야기'를 개최했다. 인천콘서트챔버는 이승묵 대표의 진행과 지역 역사학자들인 강덕우·강옥엽 박사의 근대 인천에 대한 설명이 어우러진 이날 연주회에서 '대한제국 국가'와 '안창호 애국가', '올드랭사인 애국가'를 바리톤 박대우와 함께 연주했다. 각 곡의 가사와 선율을 비교할 수 있었던 자리였다. 가사를 통한 당시 시대상을 들여다 볼 수 있었고, 우리 땅에 들어와 당시 활용된 서양음악의 형태를 가늠해본 의미 있는 기회였다.그러면서 도출해낸 결론은 현재 부르고 있는 '애국가'를 비롯해 과거 우리 '(애)국가' 곡조는 가사만 떼어내면 그 자체가 '서양음악'이라는 것이다. 유구한 우리 민족의 정신과 문화형태를 드러낸 '애국가'는 분명 아니다. 우리 국가가 '서양음악 학습으로 선진화하려는 시대정신'에서 나온 결과물이라는 데 다다르자 씁쓸함이 엄습했다. /김영준기자 kyj@kyeongin.com인천콘서트챔버가 지난 8월12일 트라이볼에서 열린 콘서트에서 '올드랭사인 애국가'를 연주하고 있다. /인천콘서트챔버 제공1900년을 전후해서 개인과 단체 등 애국가의 가사를 쓰고 무궁화 그림을 그리는 등 애국 사상 고취가 심화됐다. 배화여고 학생들이 그린 '무궁화 삼천리'(1914년) /국립 백두대간수목원 제공대한제국 국가(1902년) /노동은 '한국음악론'(한국학술정보 刊) 발췌

2018-11-01 김영준

[바다가 들려주는 인천이야기·41]인천항 관문 '갑문' (상)

"NGB 인천대교 통과. 10시 20분에 갑문 도착합니다."지난달 19일 오전 10시 10분께 인천항 갑문 관제탑에서 무전이 울렸다. 인천항에 들어오는 선박에 탑승한 도선사가 보낸 것이다. 'NGB'라고 지칭된 이 선박은 인천항과 중국 웨이하이(威海)를 오가는 3만 1천t급 대형 카페리선 '뉴골드브릿지7호'. 인천 내항에 있는 제2여객터미널에 입항하려면 반드시 갑문을 통과해야 하기 때문에 갑문 관제탑에 필요한 정보를 제공한 것이다.10시 20분께 뉴골든브릿지7호가 갑문 앞에 모습을 나타냈다. 갑문 주변에는 경고음이 울렸고, 1천50t에 달하는 외측 갑문이 천천히 열렸다. 배가 갑거(수로)에 완전히 진입하자 외측 갑문이 닫혔고, 배에서 내린 4개의 줄을 줄잡이들이 고정하기 시작했다. 인천항만공사 갑문운영팀 강석현 차장은 "내항과 외항의 수면 높이를 맞춰야 한다. 수로에 물을 채우는 과정에서 배가 흔들려 갑벽에 부딪힐 수 있기 때문에 배를 고정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배가 고정되면 수로에 물이 들어온다. 이날 10시 20분께 외항의 수위는 4.7m. 내항의 해수면 높이는 최소 7m로 유지되기 때문에 수로에서 내항과 외항의 수위를 맞춰야 한다. 강 차장은 "내항의 수위가 높은 경우에는 내항 쪽에서 (수로로) 물을 보내고, (배가 수로에 들어온 후) 외항의 수위가 높으면 바다 쪽 외항으로 물을 흘려보낸다"고 했다.1883년 개항한 인천항은 세계에서 세 번째로 큰 9~10m의 조수 간만의 차를 극복해야 했다. 썰물 때 갯벌이 훤히 드러날 정도여서 큰 배는 물론 작은 배도 인천항에 접안하기 어려웠다. 이 때문에 선박이 인천 앞바다에 정박해 있으면 작은 배가 다가가 사람과 짐을 날랐다.김탁환과 이원태가 쓴 소설 '아편전쟁'에서도 이 같은 초창기 인천항의 모습이 묘사된다.'인천은 수심이 얕고 아직 부두가 만들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외국 상선이 곧바로 바닷가에 닿지 못한다오. 바닥이 평평한 짐배가 나가서 상선에 붙소. 승객과 상품을 짐배에 옮겨 싣는 게요.'인천항을 통한 물동량이 늘어나면서 일본은 만조와 간조를 가리지 않고 언제나 선박이 입항할 수 있는 시설을 원했다. 이에 1911년 항만 설비 확장 공사를 시작했고, 1918년 10월 27일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적 갑문이 인천항에 설치됐다.1962년 시작된 경제개발 5개년 계획에 따라 당시 7~8%대의 경제성장률을 기록했는데, 인천항의 화물 증가 추세는 이보다 3배가 넘었다고 한다. 경인 공업지역의 원자재와 소비재 물동량이 급격히 늘었기 때문이다.하지만 당시 갑문 안쪽의 인천항 시설은 4천500t급 3선석에 불과해 수도권 지역 물동량을 감당하기 어려웠다. 정부는 1964년 인천항 갑문 제2선거 공사에 착수했고, 1974년 현재의 인천항 갑문이 설치됐다. 100년 전 축조한 갑문은 바닷속에 가라앉았다. 현재는 인천 내항 1부두 주변에서 일부 흔적을 확인할 수 있다. 인천항 갑문은 최대 길이 306m, 너비 32m를 가진 선박이 이용할 수 있는 5만t급과 길이 215m, 너비 19m 선박이 이동하는 1만t급 등 총 2개 수로로 운영되고 있다.갑문 축조와 내항 확장으로 안정적인 하역 환경이 조성되면서 인천항의 수출도 증가하기 시작했다. '인천항사'에 따르면 인천항의 수출액은 1973년 3억 1천791만 3천 달러에서 갑문 완성 이듬해인 1975년 5억 9천941만 8천 달러로 급증했다. 1978년에는 사상 처음으로 10억 달러를 돌파했다.2004년 인천 남항이 개항하기 전까지 인천 내항은 몰려드는 배를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해양수산부가 1999년 펴낸 '수도권 항만 기능정립·재정비계획'을 보면, 수도권 화물의 인천항 폭주로 인천항의 체선·체화 현상이 가장 심했던 때는 1990년이다. 그해 체선율은 48.2%였다. 체선율은 선박이 부두에 접안하지 못하고 12시간 이상 대기한 선박의 비율을 말한다. 100대 중 48대가 12시간 이상 기다렸다가 인천항에 들어올 수 있었던 셈이다. 인천항의 체선율은 전국 항만 중 가장 높았다. 당시 평균 체선 시간은 70시간 정도로 길게는 일주일 이상을 바다에서 대기해야 갑문을 통해 인천항에 들어올 수 있었다.인천 남항에 이어 북항, 신항까지 문을 열면서 내항을 찾는 선박은 줄어들고 있다. 인천항만공사에 따르면 인천항 갑문을 입출항하는 선박은 2005년 1만 3천140척을 정점으로 계속 감소하고 있다. 벌크화물 하역항인 북항이 개항한 2010년 8천395척, 컨테이너 전용부두인 내항 4부두가 가동을 멈춘 지난해에는 5천 52척만이 갑문을 이용했다. 2005년에 비해 60% 이상 입출항 선박이 줄어든 셈이다. 지난해 물동량도 내항 하역량이 가장 많았던 2004년(4천529만t)의 절반 수준에 불과한 2천353만 3천730t으로 떨어졌다. 하역 장비의 발달로 수심과 관계없이 선박에서 짐을 싣고 내릴 수 있다 보니, 30분 이상 걸리는 갑문을 출입하기 꺼리는 것이다.하지만 갑문 속에 있는 내항은 아직 항만으로서 가치가 충분하다는 게 갑문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설명이다. 1978년부터 갑문에서 근무한 인천항만공사 김익봉 갑문운영팀장은 "갑문은 24시간 해수면 높이가 일정하고, 물이 잔잔하기 때문에 정밀기계나 자동차 하역에 적합한 항구"라며 "인천항 발전을 이끌어온 항구라는 자부심을 품고 일하고 있다"고 말했다. 글/김주엽기자 kjy86@kyeongin.com 그래픽/성옥희기자 okie@kyeongin.com/아이클릭아트인천항 갑문으로 3만1천t급 대형 카페리선 뉴골드브릿지 7호가 들어오고 있다. 인천항은 세계에서 세 번째로 큰 9~10m의 조수 간만 차이가 있어 갑문 운영이 필수적이다. 사진/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인천항 갑문 관제탑 모습. 사진/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인천항 갑문 관제실. 이곳에서 인천 내항과 외항의 수면 높이를 조절한다. 사진/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

2018-10-31 김주엽

[zoom in 송도]송도국제도시 브리핑

■인천글로벌캠퍼스 31일 입주대학생 '뮤직 페스티벌'인천글로벌캠퍼스운영재단(대표이사·김기형)은 오는 31일 오후 5시 30분 체육관에서 입주대학 학생들이 끼와 재능을 마음껏 뽐내는 '인천글로벌캠퍼스 뮤직 페스티벌'을 개최한다.인천글로벌캠퍼스에는 현재 한국뉴욕주립대 스토니브룩, FIT(패션기술대학교), 한국조지메이슨대, 겐트대 글로벌캠퍼스, 유타대 아시아캠퍼스가 입주해 있다. 이번 페스티벌은 이들 대학 학생들이 악기 연주와 노래, 춤을 선보이는 자리다. 동아리 홍보 전시회와 초청 공연(몽니, 윤미래)도 열린다. ■내달 1일 '2018 국제기후금융·산업콘퍼런스' 개최인천시와 인천연구원은 11월 1일 오전 9시 30분부터 송도컨벤시아에서 '2018 국제기후금융·산업콘퍼런스'를 연다.인천시는 GCF(녹색기후기금) 송도 유치를 계기로 2014년부터 매년 국제기후금융산업 콘퍼런스를 개최하고 있다. 올해 콘퍼런스에선 기후변화 협상과 대응 동향을 파악하고, 도시를 포함한 다양한 이행 주체들의 노력을 살펴본다. 기후금융 조성과 녹색기술 개발에 관한 국제 동향과 우리나라 역할도 모색하게 된다. 행사는 개회식, 기조연설에 이어 4개 세션이 진행된다. 세션 주제는 ▲파리협약 이후 국제 기후변화정책 동향 ▲기후변화 대응을 위한 도시의 전략 ▲포용적이고 회복 가능한 도시를 통한 기후변화 대응과 지속가능한 발전 ▲기후기술과 글로벌 협력 등이다. 문의:인천기후환경연구센터 (032)715-5795■개관 앞둔 '아트센터 인천' 사전 테스트 공연 성료인천경제자유구역청은 최근 '아트센터 인천' 콘서트홀 사전 테스트 공연 '재즈 빅밴드 브라소닛 콘서트'를 개최했다. 인천경제청은 11월 16일 '아트센터 인천' 개관을 앞두고 공연장 시설과 운영 시스템을 점검하고자 이번 공연을 열었다. 인천경제청 관계자는 "사전 공연을 통해 공연장의 우수성을 전문가로부터 검증받는 기회를 가졌으며 향후 안정감 있는 공연장 운영을 위해 철저하게 준비할 예정"이라고 했다.아트센터 인천은 지하 2층, 지상 7층, 연면적 5만 1천977㎡, 1천727석 규모의 클래식 전용 콘서트홀이다. 11월 16일과 17일 양일간 개최하는 개관 공연에는 인천시립교향악단과 이탈리아 명문 악단 산타 체칠리아 오케스트라(협연 조성진)의 무대가 준비돼 있다.■송도 재미동포타운, 오피스텔등 1단계 사업 마무리송도 재미동포타운 1단계 사업이 완료됐다.재미동포타운 조성사업은 재미 동포들의 고국 내 정주 공간 마련을 목적으로 2012년 8월부터 추진됐다. 민간기업이 추진했는데, 글로벌 금융위기에 따른 국내 부동산 경기 침체로 2014년 중단 위기를 맞았다. 인천경제자유구역청이 설립한 인천투자펀드(주)가 자본금을 출자하고 민간기업으로부터 사업권 양수 및 단계별 추진 계획 수립 등 사업 정상화를 추진해 드디어 1단계 사업이 마무리됐다. 1단계 사업은 아파트 830가구, 오피스텔 125실, 상업시설 113실 규모다. 2023년 10월 준공 예정인 2단계 사업은 아파트 498가구, 오피스텔 674실, 상업시설 1만 9천47㎡로 계획됐다. /목동훈기자 mok@kyeongin.com재즈 빅밴드 브라소닛 콘서트. /인천경제자유구역청 제공

2018-10-28 목동훈

[zoom in 송도]외국법인·기업 투자 본격화

日 '아마다코리아' 지식정보산단에 이달 문열어美 오티스 R&D센터·獨 머크 한국 자회사 착공佛 생고뱅 바이오제조시설 토지매매계약 체결등차부품·반도체… 다양한 산업·국적 외투 쏟아져인천 송도국제도시에서 최근 외국인투자기업(이하 외투기업)들이 건물 건립 공사를 시작하거나 준공 후 본격 운영에 들어가는 등 '송도 시대'를 열어가고 있다. 일본, 미국, 독일, 프랑스 등 다양한 국적의 외국 법인·기업들이 송도 투자를 본격화하는 것이다. → 표 참조일본 아마다 자회사 '아마다코리아'는 지난 17일 송도 지식정보산업단지에서 인천테크니컬센터 개소식을 했다. 이 센터는 연면적 4천5㎡ 규모로 지난해 9월 착공해 올해 8월 준공됐다. 1946년 설립한 일본 아마다는 판금·절삭·공작기계사업, 프레스사업, 정밀용접사업 등을 하는 금속가공 기계 종합 기업이다. 아마다코리아는 인천테크니컬센터에서 아마다의 고기능 기계를 소개(전시)하고, 고객사의 기계 오퍼레이터를 대상으로 기계·소프트웨어 운영 교육을 한다. 인천 주요 대학 및 산업교육기관과 협력해 정밀판금 가공에 대한 이론·실기 교육을 진행하는 등 국내 산업 인력 육성에도 이바지하게 된다.미국 오티스의 엘리베이터 R&D센터 및 첨단생산시설은 지난 12일 착공했다. 이들 시설은 송도 지식정보산업단지내 1만5천600㎡ 부지에 들어선다. 사업 주체인 '오티스코리아'는 전국에 분산된 연구개발 및 생산 조직을 송도로 통합하고, 현대화시스템센터 등 서울 여의도 본사 기능 일부를 이곳으로 이전한다. 인천경제자유구역청은 "송도 R&D센터는 아시아 태평양 지역 연구개발의 허브 역할을 하게 된다"며 "전 세계 오티스 연구개발 센터와의 기술 교류도 이뤄진다"고 했다.독일 머크의 한국 자회사 머크(주)는 지난 11일 송도에서 '한국 생명과학 운영본부' 착공식을 개최했다. 머크는 올해 설립 350주년을 맞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글로벌 제약·화학·생명과학기업이다. 국내 다수의 바이오기업에 생명과학 분야 바이오 공정 관련 제품 및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한국 생명과학 운영본부는 독일 머크가 사업비 260억원을 전액 투자하는 사업이다. 1만141㎡ 부지에 지하 1층, 지상 5층, 연면적 8천319㎡ 제조 및 부대시설을 내년 5월까지 짓게 된다.프랑스 기업 '생고뱅'은 송도 바이오클러스터에 첨단 바이오 공정 제조시설을 건립하기 위해 지난달 20일 인천경제청과 토지 매매계약을 체결했다. 생고뱅의 자회사 '생고뱅코리아'는 약 218억원을 투입해 지하 1층, 지상 2층, 연면적 1만3천293㎡ 규모의 제조시설을 내년 말까지 건립할 계획이다. 1665년 창업한 생고뱅은 세라믹 재료, 고성능 플라스틱 기술 분야 제품을 개발·생산해 생명과학, 항공, 자동차, 반도체 등 다양한 분야에 공급하고 있다.인천경제청이 개청한 2003년 10월부터 올해 9월 말까지 송도국제도시 외국인직접투자(FDI) 누적액은 약 63억2천550만달러다. 영종국제도시(약 47억3천870만달러)와 청라국제도시(7억6천680만달러)보다 많다. 송도 외투기업은 2011년 36개에서 2018년 63개로 증가했다.인천경제청 신성장산업유치과 '외투기업 유치 현황' 자료에 따르면 일본·미국·독일·프랑스 외에 홍콩(송도애니파크·제이엠테크노·엔바이로테크놀러지 등), 스위스(규델리니어텍), 핀란드(파이박스텔레메트리), 네덜란드(얀센백신), 벨기에(오덱), 싱가포르(비알씨 등) 등 다양한 국적의 해외 법인·기업이 송도에 투자했다. 이들 외투기업의 사업 분야도 바이오, 반도체, 자동차부품, LED, 로봇 등 다양하다. 인천경제청은 최근 스위스 취리히에서 로슈, 노바티스 등 바이오기업을 대상으로 인천경제자유구역 투자 환경을 홍보하는 등 외투기업 유치에 적극 나서고 있다. /목동훈기자 mok@kyeongin.com인천경제자유구역청과 생고뱅코리아 관계자들이 지난달 20일 첨단 바이오 공정 제조시설 건립을 위한 토지 매매계약을 체결한 후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인천경제자유구역청 제공'아마다코리아'의 인천테크니컬센터 전경. /인천경제자유구역청 제공지난 12일 열린 미국 오티스의 엘리베이터 R&D센터 및 첨단생산시설 착공식 모습. /인천경제자유구역청 제공

2018-10-28 목동훈
1 2 3 4 5 6 7 8 9 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