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인천)

[zoom in 송도]인천 송도국제도시 '솔찬공원'

인천대 송도캠서 5공구까지 녹지·수변지대로 연결풍차전망대·골프연습장·캠핑장 등 편의시설 다양카페·전시장 갖춘 '케이슨 24'… 지역 명소 '입소문'출렁이는 바다와 아름다운 석양을 볼 수 있는 공원이 인천 송도국제도시에 있다. 송도 남측 해안을 따라 조성한 솔찬공원(24호 근린공원)이다. 시원한 바닷바람을 맞으며 여유를 만끽할 수 있는 곳이다. 송도 4공구 인천대 송도캠퍼스에서 송도 5공구 바이오단지(첨단산업클러스터)까지 녹지·수변 공간이 길게 연결됐다. 전체 넓이는 130만9천408㎡(수로부 포함)다. 인천경제자유구역청은 A지구, B지구, C지구, D지구, 복합문화시설지구, 골프연습장지구 등 단계별로 조성사업을 추진했다. 인천경제청 관계자는 "솔찬공원은 송도에서 바다를 조망할 수 있는 유일한 공원"이라며 "케이슨24, 야생동물구조관리센터, 캠핑장, 골프연습장 등 다양한 시설이 있다"고 설명했다.내비게이션에 '솔찬공원' 또는 '케이슨24'를 찍으면 솔찬공원을 쉽게 찾아갈 수 있다. 주차장이 있는데, 넓지 않다. 도로변에 주차하는 것은 불법이지만, 차량 통행이 적은 도로인 점을 고려해 봐주는 것 같다. 이중 주차 등 차량 통행을 방해하는 경우에는 불법 주차 단속에 걸릴 수 있다.솔찬공원에 가면 풍차 모양의 건물이 있다. 정식 명칭은 '풍차 전망대'다. 하지만 건물이 높지 않은 데다, 전망대까지 올라가지 않아도 바다가 잘 보이기 때문에 공원 관리사무소 기능을 하고 있다.풍차 전망대 앞에 직사각형 모양의 넓은 공간이 있다. 인천대교(송도~영종 연결도로) 건설에 필요한 케이슨(토목건축 기초 공사에 쓰는 철근 콘크리트 상자)을 만들던 곳이다. 길이 400m, 너비 33.7m 규모로 공유수면 위에 조성됐다. 바다 위에 커다란 '철재 데크'가 설치된 형태다.케이슨 제작장은 인천대교 건설 당시 교각 구조물 제작 및 자재 반입을 위해 조성한 접안시설이다. 이곳에선 송도 신항 컨테이너 터미널과 LNG 기지, 팔미도와 무의도, 인천대교 주탑이 보인다. 이곳은 인천대교 준공과 동시에 철거될 예정이었으나, 인천경제청이 벤치와 그늘막 등 편의시설을 설치해 2015년 시민에게 개방했다.복합문화공간 '케이슨24'는 솔찬공원의 명소다. 송도 개발사업에 참여한 업체들이 개발이익 환원 차원에서 복합문화시설을 지어 인천경제청에 기부채납했다.인천경제청은 공모를 통해 복합문화시설 운영자를 선정했고, 이 업체가 내부 시설을 꾸며 운영 중이다.케이슨24는 다양한 공간으로 구성됐다. 1층에는 커피 등 다양한 음료와 디저트를 맛볼 수 있는 '카페 드라페', 공연과 전시회 등의 행사를 열 수 있는 실내문화공간 '컬쳐 뮤지엄'이 있다. 외부에는 야외 공연과 스몰웨딩이 가능한 '사운드 가든', 버스킹 무대, 편의점과 휴게소처럼 여러 물품을 판매하는 '스위트 몬스터'가 있다.컬쳐 뮤지엄은 문재인 대통령이 공연과 토크 콘서트를 관람했던 곳이다. 문 대통령은 지난 4월2일 인천 송도 경원재(한옥호텔)에서 열린 확대 국가관광전략회의에 참석한 후 케이슨24를 방문했었다.1층 공간은 개방된 느낌이다. 카페 벽면에는 미술 작품이 걸려 있으며, 컬쳐 뮤지엄에서는 주말 오후 재즈·국악·팝·블루스 등 다양한 장르의 공연이 열린다.2층은 2개 공간으로 돼 있다. 레스토랑 '키사스'와 '파티룸'이다. 키사스에서는 파스타, 스테이크, 샐러드, 다양한 나라의 특별한 맥주를 만날 수 있다. 파티룸은 34명 정도가 들어갈 수 있는 공간으로, 동호회 및 기업체 모임에 좋을 듯하다. 파티룸과 공연장 등 각 공간은 대관이 가능하다. 케이슨24 박정언 마케팅 실장은 "컬쳐 뮤지엄에서 연극 공연을 여는 방안도 계획하고 있다"며 "포토 스튜디오로 사용했던 지하 1층도 전시 공간으로 쓰기 위해 준비하고 있다"고 말했다.지난해 '인천시 건축상'을 받은 케이슨24는 내부에서 석양을 잘 볼 수 있도록 설계됐으며, 건물 옥상에도 전망대와 소규모 야외공연장이 있다.솔찬공원 송도 5공구 구간에는 송도국제캠핑장이 있다. 인천경제청이 2014년 39억원을 들여 조성한 시설이다. 민간사업자에게 운영을 맡겼는데, 사용료를 제때 내지 못해 위탁 계약이 해지됐다. 캠핑장은 운영되지 않지만, 공원 시설은 이용할 수 있다. 일정 구역에 그늘막(4인용 이하)을 설치할 수 있다. 취사, 음주, 음식 주문, 야간 숙박은 금지하고 있다.인천경제청은 송도국제캠핑장 새 운영자를 찾고 있다. 입찰이 한 차례 유찰됐는데, 인천경제청은 재입찰에 나설 계획이다. 캠핑장 면적은 3만8천㎡다. 근린시설 및 사무실(연면적 632㎡), 데크 56개, 카라반 6개, 취사장 2개, 바비큐장, 화장실, 바닥분수, 어린이놀이터 등이 있다. /목동훈기자 mok@kyeongin.com바다를 조망할 수 있는 송도 '솔찬공원' 전경과 복합문화시설 '케이슨24' 모습. 바다 쪽으로 튀어나온 직사각형 모양의 데크가 인천대교 건설 당시 케이슨을 만들던 곳이다. /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

2019-06-02 목동훈

[독립운동과 인천·(14)]강화 출신 '유두희'

노동투쟁 등 활약에 비해 기록없어인천 강화 출신의 사회주의 독립운동가 유두희(劉斗熙·1901~1945)는 고향에서조차 지워진 인물이다. 1920~40년대 인천에서 청소년단체와 노동단체 결성을 주도했고, 일제의 공산당 탄압으로 체포돼 옥살이를 했다. 그리던 조국의 해방을 맞았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세상을 뜨고 말았다.사회주의 독립운동가들은 이승만 정권과 군사 정권의 '레드콤플렉스' 속에서 오랜 기간 제대로 조명을 받지 못했다. 같은 한국인 자본가와 지주도 투쟁의 대상으로 보는 급진적 사상 때문에 민족주의 기반의 독립운동의 역사에서 늘 외면을 당해왔다.일제강점기 중후반 인천의 사회단체와 노동운동 때마다 빠지지 않고 유두희의 이름이 등장하지만, 그의 연보조차 제대로 확인할 길이 없다.강화 출신으로 인천을 근거지로 활동했다는 기록을 과거 신문에서 확인할 수 있을 뿐 그가 어떤 경로를 통해 신사상(사회주의)을 흡수하고 단체를 조직할 수 있었는지 정확히 연구한 자료가 없다. 내리교회 존스 목사가 설립한 우리나라 최초의 서구식 초등교육기관인 영화학교 출신으로 알려졌으나 학적부를 통해 확인한 사실은 아니다. 대중강연에 나설 만큼의 지식인이었음은 분명하나 강의와 연설 내용이 전해지지 않는 부분도 못내 아쉽다. 어찌 이렇게 독립운동가 한 명의 흔적이 철저히 묻힐 수가 있었는지 놀라울 정도다.2008년 진실과 화해를 위한 과거사 위원회는 유두희의 항일 활동을 '진실'로 규명했다. 인천소년회 창립, 신간회 인천지회 조직, 4차 공산당 사건이 모두 항일 운동으로 인정받았다. 그러나 아직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지는 못했다. 인천 지역 사회의 관심과 학계의 추가 연구가 필요한 이유다. /김민재기자 kmj@kyeongin.com

2019-05-29 김민재

[독립운동과 인천·(14)]사회주의 독립운동가 유두희

1901년 강화 출생… 1920년대 日 문화식민지배 시기소년회등 이끌며 계몽활동·항일정신 전파인천노동총연맹·조선공산당 간부 역임도1920~40년대 인천에서 청소년·노동단체를 이끌며 일제에 저항했던 독립운동가 유두희(劉斗熙·1901~1945). 공산당 경력과 사회주의 사상을 바탕으로 한 그의 활동 이력 탓에 그의 항일정신은 아직도 후세에 널리 알려지지 않고 있다. 2008년 '진실과 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원회)'는 유두희의 항일독립 활동을 진실로 규명했다. 그러나 이후 10년이 지나도록 진실화해위원회의 규명 결정문을 뛰어넘는 추가 연구와 재평가는 미진하다. 기대했던 독립유공자 서훈도 이뤄지지 않았다. 1901년 12월 24일 강화에서 태어난 유두희는 1920년대 초반 인천 지역에서 소년·청년 운동을 주도했고, 1927년에는 신간회 인천지회 설립을 이끌었다. 제4차 공산당사건에 휘말려 옥고를 치르고 해방 100일을 맞기도 전인 1945년 11월 11일 고문 후유증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는 지독한 가난과 병마와 싸우며 생애 마지막을 보냈다고 한다.민족·사회주의 항일단체 '신간회' 인천지회 설립 주도제국주의 맞선 계급투쟁 4차 공산당사건으로 고초 해방 맞은 해 고문 후유증 지독한 가난속 숨져1919년 3·1 운동 이후 일본은 무단 통치에서 문화 통치로 식민지배 노선을 변경했고, 1920년대부터 사회단체가 활발하게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언론사와 문화·체육·노동단체가 생겼고, 민족주의로 무장했던 항일운동에 사회주의가 한 자리를 차지하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이다. 러시아 혁명 이후 중국과 러시아 망명지에서 공산주의 사상을 흡수한 독립운동가들과 일본의 유학생들이 한반도에 이를 전파했다. 노동자와 농민의 계급투쟁은 일제의 수탈에 대응할 방편이기도 했다. 이런 시대 흐름은 인천도 예외는 아니었다.진실화해위원회 결정문에 따르면 1920년대 인천에는 55개의 청년단체와 25개의 소년단체가 활동하고 있었다. 일반적으로 계몽적, 교육적 성격을 보이고 있었다.유두희가 주축이 돼 1924년 7월 5일 인천 영화학교 강당에서 창립한 인천소년회도 그 80개의 청소년 단체 중 하나였다. 소년회는 겉으로는 가극과 동화구연 행사 모습을 띠었지만, 어린 학생과 청년들에게 항일정신을 전파하는 데 주력했다.인천소년회는 1925년 11월 8일 제물포청년회와 공동으로 전인천소년축구대회를 개최하기도 했는데 이 역시 운동경기를 통해 민족의식을 높이기 위해서였다.유두희는 인천소년회 외에도 인천청년연맹 간부로 활동하면서 사회주의 대중 강연에 자주 나섰다. 1926년 1월 15일 독일의 사회주의 사상가 로자 룩셈부르그 사망 7주기를 맞아 기념 강연회를 열 계획이었으나 경찰의 개입으로 무산됐다.그는 노동운동에도 적극적으로 가담해 인천노동총연맹과 인천청년노동조합의 간부로 활동하면서 노동자의 이익 보호를 위한 활동을 전개했다. 1924년 4월에 설립된 인천노동총연맹은 노동자 쟁의를 탄압하기 위해 만들어진 친일 폭력조직 '상애회'와 투쟁을 선포했고, 유두희는 이승엽과 함께 재일본노동자총연맹과 연대하기 위한 일본 특파원으로 선발됐다.그의 크고 작은 활약은 당시 신문 기사를 통해 엿볼 수 있다. 1926년 6월 23일 동아일보는 인천의 한 정미소에서 직원 100여명이 일본인 감독관의 구타를 견디지 못해 파업에 돌입한 사건에서 유두희가 불량 감독관의 퇴직을 두고 벌인 정미소 측과의 교섭에 대표로 나섰다고 보도했다.유두희는 신간회 인천지회 설립의 주역이었다. 신간회는 1927년 2월 민족주의자와 사회주의자가 결합해 만든 항일운동단체다. 유두희는 조선공산당 간부로서 신간회 인천지회 설립에 깊숙이 가담했다. 국사편찬위원회가 펴낸 한민족독립운동사는 신간회 인천지회가 시국강연과 계몽활동을 활발하게 했다고 설명하고 있다.유두희는 조선공산당과 고려공산청년회의 지역 간부로서 활동하다 1928년 7월 27일 일제의 제4차 조선공산당 검거사건으로 경찰에 붙잡혔다. 1925년 4월 18일 조직된 조선공산당은 일제에 의해 와해 됐다가 2차, 3차, 4차에 걸친 재건을 시도했지만 결국 대대적인 검거 작전에 의해 제대로 꽃을 피우지 못했다. 일제는 공산주의 계급투쟁이 결국 자본을 바탕으로 둔 제국주의 침략과 수탈에 정면으로 맞서는 위협이라고 인식해 이들을 탄압했다. 구속을 하고도 재판을 질질 끌어 일부러 구금기간을 늘렸고, 유두희는 4차 공산당사건으로 치안유지법위반죄를 적용받아 징역 4년형이 선고됐으나 실제 감옥에 갇혀있던 기간은 5년이 넘었다.당시 연해주 한인 공산당 기관지 '선봉'은 유두희 등 4차 공산당사건의 국내 재판 소식을 전하면서 "공산주의자들을 잡아다가 공판 없이 2~3년을 가둬두고 육형의 고문으로 거의 생명을 빼앗고는 소위 치안유지법이란 악법의 죄를 씌워 공판에 끌어내오는 일본 제국주의자의 발악을 보라"고 비판하기도 했다.유두희의 판결문은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연구자들은 국기기록원의 서고 어디 한 구석에 자리하고 있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을 뿐 그와 함께 재판을 받았던 동지들의 판결문으로 유두희의 행적을 짐작할 뿐이다. 당시 4차 공산당사건으로 같이 재판을 받은 이광, 조기승, 박경호 등의 판결문을 보면 일제는 "일본 제국주의의 지배를 배제하고 조선의 독립을 기도함으로서 사유재산제도를 부인하고 프롤레탈리아나 독재 사회를 세우고, 이를 통해 공산 사회의 실현을 원하고 그 목적을 달성하기를 혈망하거나 조선을 일본제국의 기반에서 이탈시키고자 하였다"고 이들의 혐의를 적시했다.유두희는 1933년 8월 20일 출옥했지만, 그가 사망한 1945년까지의 행적은 구체적으로 드러나지 않았다. 1934년 인천에서 양복점을 운영하며 독서모임(적색독서회)을 결성했다가 경찰에 붙잡혔다는 신문 기사 한 줄로 그가 인천에서 꾸준히 단체 결성에 나섰다는 것을 짐작할 뿐이다. 인천의 향토사가 신태범 박사(1912~2001)는 저서 '인천 한 세기'에서 "노동공제회 인천지부가 인천노동총동맹으로 개편되어 용동에 간판을 걸고 유두희가 해방 때까지 유지해왔으나 눈에 띌 만한 활동은 없었다"고 했다.유두희는 해방되던 해 11월 11일 생활고를 겪다가 고문 후유증으로 요절하고 만다. 대중일보는 '오호 동무여 왜 먼저 갔느냐'라는 제목의 기사로 그의 부고를 타전하면서 "옥중생활에 득병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출감 후 계속 활동 중 소위 대동아전쟁 이래 기막히는 탄압아래 기아와 고질로 극도의 생활난과 악전고투하다가 1945년 11월 11일 사망. 인천부 화방정 자택에서 동지장으로 장례를 치루었다"고 했다.2008년 진실화해위서 '독립활동 진실 규명' 불구 사회주의 노선탓 재평가 미진… 유공자 서훈 못받아사망 이듬해인 1946년 5월 1일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 인천지부 등 60개 단체가 참여한 메이데이기념식에서 그는 항일 활동을 인정받아 표창을 받았지만, 반공 이데올로기 속에서 제대로 된 역사적 평가는 받지 못했다. 신간회 인천지회 등에서 함께 활동했던 권평근은 2005년 독립유공자 서훈을 받았음에도 유두희는 깜깜 무소식이다. 수면 아래 잠자던 유두희의 항일운동 행적을 진실이라는 뭍으로 끌어올린 진실화해위원회는 2007년 유두희의 자녀들과 면담해 행적을 복원하려 했으나 큰 수확을 거두지는 못했다. 당시 80세가 넘은 장남 대관 씨는 아버지 유두희가 숨질 무렵 고등학생 나이였다. 찢어지게 가난했던 청소년기의 고통스러웠던 기억과 소위 빨갱이의 자식이라는 낙인 때문이었는지 아버지에 대한 추억이 그리 많지는 않았다고 한다.10여 년 전 진실화해위원회에서 유두희의 항일운동 진실을 규명했던 윤명숙 위안부문제연구센터 조사팀장은 "유두희의 아들은 1940년대 일제 군수공장에 강제 징용됐던 분이고 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많지 않았다"며 "진실 결정문을 유가족에게 전달해 주고 서훈 신청 여부를 확인해 봤지만 아직 신청이 들어오지는 않은 것으로 확인했다"고 말했다.진실화해위원회의 규명 작업은 2006년 당시 영화여자정보고등학교 교사이자 향토사 연구자인 이성진 골목문화지킴이 대표의 신청으로 이뤄졌다. 유두희의 말년 행적이 '눈에 띌 만한 행동이 아니었다'고 한 신태범 박사의 '인천 한 세기'를 읽고 재평가가 필요하다고 판단해서였다. 이성진 골목문화지킴이 대표는 "좌익 활동가였던 유두희 선생이 평가절하 당하고 있었다고 생각해 진실화해위원회에 진실 규명을 신청했었다"며 "진실로 결정이 나긴 했지만 학계의 추가 연구가 필요한 상황"이라고 말했다. /김민재기자 kmj@kyeongin.com 그래픽/성옥희기자 okie@kyeongin.com/아이클릭아트유두희와 유두희의 일제감시대상인물카드들. /국사편찬위원회 제공유두희의 부고 기사가 실린 1945년 11월 14일자 대중일보 지면. /미추홀도서관 원문DB4차 공산당사건으로 재판을 받는 유두희의 소식을 전하면서 일제의 사회주의 탄압을 비판한 러시아 연해주 한인 신문 '선봉'의 1930년 7월 16일자 지면. /독립기념관 제공

2019-05-29 김민재

[인천의 얼굴·(12)]인천사할린동포복지회관 '반장' 강정순 할머니

방직공장 다니며 징용 한국인과 결혼지금 생활 '행복' 보상금 일부 기부도우리 할머니 할아버지들은 당신들의 삶을 이야기하면서 소설 몇 권이 나올 거라고들 하십니다. 그만큼 격동의 시대를 살았고 그 삶은 고달팠습니다. 아무리 잘 만든 드라마라도 어찌 이들의 아픈 인생을 제대로 그려낼 수 있을까요.1999년 3월 생겨난 인천사할린동포복지회관이 연수구에 있습니다. 전국에 하나뿐인 시설입니다. 여기 사는 1932년생 강정순 할머니. 전남 순천에서 태어난 할머니는 열한 살이 되던 1942년 일본 최북단 사할린으로 이주했습니다. 부모님과 오빠, 남동생 둘, 온 가족이 떠났습니다. 일제가 사할린 탄광에서 일하면 먹고 살 수 있다고 꾀어낸 것이었지요. 아버지와 오빠가 탄광에서 일했습니다. 안전시설도 없어 무너지기 일쑤였지요. 참 많이도 죽어 나갔습니다. 사할린에 혼자된 부인들이 많았던 이유입니다. 6개월이나 지났을까요. 일제는 아버지와 오빠를 일본 남쪽 끝 규슈의 탄광으로 옮겼습니다. 생이별이었고, 그게 마지막이 되었습니다.태평양전쟁이 끝날 때 사할린은 옛 소련 땅이 되었습니다. 할머니는 거기서 15년 넘게 방직공장에 다녔습니다. 그 덕분에 아직도 러시아 돈으로 연금을 받기는 합니다. 스물이 되었을 때 역시 사할린에 징용돼 온 한국인 남자와 결혼해서 애들도 낳았습니다. 그 아이들은 러시아 사람들하고 결혼해 카자흐스탄 등지에 살고 있습니다. 그렇게도 착했던 남편은 사할린에서 세상을 떴습니다.20년이 된 사할린동포복지회관에는 82명의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생활하고 있습니다. 평균 연령 85세. 1주일에 5명이 세상을 떠날 때도 있습니다. 359명이 거쳐 갔습니다. 강정순 할머니는 2006년 이곳에 왔습니다. 지금은 복지관 입소자들을 대표하는 반장을 맡고 있습니다. 1991년 '사할린 동포 고국 방문행사'가 있었을 때 49년 만에 고향 땅을 밟았습니다. 그때 아버지와 오빠 이야기를 들었지요. 해방이 되자, 아버지와 오빠는 규슈에서 사할린 가는 배를 타려고 했다네요. 그런데 사할린이 불바다가 되어 모두 죽었다는 얘기가 나돌았답니다. 그 둘은 부산으로 오게 되었고요. 고향 방문 행사 때 아버지 산소에도 가봤습니다. 여든여덟 할머니는 지금 여기 복지관 생활이 그렇게 행복할 수가 없다고 합니다. 그 행복감이 더 어려운 이웃에게 눈을 돌리게 했나 봅니다. 4년 전 남편 앞으로 강제징용 보상금이 나왔는데 아무렇지도 않게 그 일부를 적십자사에 기부했거든요. 연수구 사할린동포복지회관은 일 년 내내 돌려보아도 질리지 않을, 세상 어디에도 없는 드라마 세트장입니다. 글/박경호기자 pkhh@kyeongin.com 사진/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인천의 얼굴'을 찾습니다. (032)861-3200 이메일 : say@kyeongin.com

2019-05-27 박경호

22번째 '바다그리기' 3만6천여명 참여

경인일보와 가천문화재단이 주최·주관한 '제22회 바다그리기 대회'가 지난 25일 월미도 문화의 거리, 송도국제도시 솔찬공원, 인천항 갑문 등 3개 장소에서 성황리에 열렸다. 명실상부한 전국 최대 규모의 미술 축제로 자리 잡은 이번 대회엔 3만6천여명의 학생과 학부모가 몰렸다. 이날 송도국제도시 솔찬공원에서 진행된 바다그리기 대회 개회식에는 박남춘 인천시장을 비롯해 이용범 인천시의회 의장, 도성훈 인천시교육감, 이정미 정의당 대표, 박찬대 더불어민주당 국회의원, 고남석 연수구청장, 이태훈 가천대길병원 의료원장, 김광하 신명여고 교장 등이 참석했다. 박남춘 인천시장은 축사에서 "이번 바다그리기 대회가 가족과 함께 즐거운 추억을 쌓는 시간이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도성훈 인천시교육감은 "바다그리기 대회는 우리가 바다와 가까이 있음을 알 수 있게 해주는 굉장히 의미 있는 행사"라며 "상호존중 등 바다가 알려주는 우리 삶의 가치를 더욱 키울 수 있는 교육을 위해 노력하겠다"고 했다. 박찬대 국회의원은 "아이들에게 이번 대회가 인천을 늘 생각하고 사랑하는 시민으로 성장하는 계기가 됐으면 한다"고 했다.한편 이번 대회 시상식은 7월 11일 오후 2시 인천교육청 대회의실에서 열릴 예정이다. /이현준기자 uplhj@kyeongin.com송도 솔찬공원 가득 메운 인파 경인일보와 가천문화재단이 주최한 '제22회 바다그리기 대회'가 지난 25일 인천 송도국제도시 솔찬공원, 월미도 문화의거리, 인천항 갑문 등 인천지역 3곳에서 초·중·고 학생들과 학부모 등 3만6천여명이 참여한 가운데 성황리에 열렸다. 송도국제도시 솔찬공원에서 참가자들이 도화지를 배부받고 있다. /취재반

2019-05-26 이현준

고래뱃속 오물·그물감긴 거북… 병든바다 SOS

송명초 장다연, 상어 목 폐타이어 등 현재와 미래 청정 물속 나눠원당초 최성훈, 물고기 수술실 풍경… 깨끗한 바다 염원 도화지에지난 25일 열린 제22회 바다그리기 대회에 참가한 아이들이 그린 그림에는 최근 해양 쓰레기와 관련된 작품이 유달리 많이 보였다. 병들어가는 바다를 어서 구해달라고 그림으로 이야기하는 듯 했다. 인천송명초 3학년 장다연양은 쓰레기로 몸살을 앓는 '현재 바다'의 모습과 자신이 꿈꾸는 깨끗한 '미래의 바다'를 도화지 위아래로 나눠 배치했다. 어두운 모습인 현재의 바닷속에서는 폐타이어가 상어의 목을 조르고 있었고, 거북이는 그물에 온몸이 휘감겨 살려달라는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오징어도 시커먼 바닷속에서 인상을 쓰고 있었다. 싱싱한 해초가 자라는 미래의 푸른 바닷속 상어는 웃음을 짓고 거북이도 자유롭게 헤엄을 치고 있었다. 다연양은 "쓰레기 속에 사는 바닷속 물고기들이 너무 불쌍하다"며 "어른들이 바다를 깨끗하게 만들어 줬으면 좋겠다"고 했다.인천송현초 2학년 박태웅군은 잠수부가 상어 뱃속에서 페트병, 날카로운 캔, 비닐 봉투 따위의 쓰레기를 꺼내주는 모습을 그렸다. 기분이 좋아진 상어는 잠수부를 등에 태우고 바다 쓰레기를 청소했다.인천구산초 3학년 임서원 양은 비닐 봉투, 음료 캔 등이 떠다니는 바다 폐목재 위에서 휴식을 취하며 썩은 물고기를 입에 물고 있는 갈매기의 모습을 도화지에 옮겼다. 위기에 놓인 바다를 어서 빨리 도와달라는 뜻에서 'HELP'라는 문구도 그림에 넣었다. 서원양은 "학교에서 바다에 마구 버려진 쓰레기 때문에 멀리 북극에 있는 펭귄들도 힘들어하고 있을 정도라고 배웠다"면서 "바다에 쓰레기가 없어져 푸르게 됐으면 좋겠다고 생각해 그렸다"고 했다.인천원당초 2학년 최성훈군은 바다 쓰레기 때문에 아픈 동물을 치료하는 '바다 동물 수술실'의 풍경을 도화지에 담았다. 이날의 수술 목표는 '뱃속에서 쓰레기 빼내기'. 수술실에 대기 중인 환자 '흰 수염 고래님'의 뱃속에는 비닐 조각, 플라스틱, 노끈이 가득 들어있었고 로봇 꽃게 의사가 수술을 준비 중이었다. 성훈군은 "TV에서 본 다큐멘터리에 북극곰과 고래의 뱃속에서 엄청난 양의 플라스틱 쓰레기가 나오는 모습을 보고 마음이 좋지 않았다"고 했다.인천부개서초 4학년 강세희 양은 바닷속에서 페트병, 과자봉지, 담배꽁초 등 쓰레기를 줍는 잠수부를 그렸다.세희양은 "바다에 쓰레기가 많아 어부들이 힘들어한다는 이야기를 수업시간에 들어 바다에서 쓰레기를 줍는 그림을 그렸다"며 "바다에 쓰레기가 모두 사라져 물고기와 어부들이 행복했으면 좋겠다"고 소망을 전했다.한편 이번 제22회 바다그리기 대회는 월미도 문화의 거리와 송도국제도시 솔찬공원, 인천항 갑문 등에서 동시에 개최됐다. /취재반제22회 바다그리기대회에 참가한 아이들은 작품을 통해 바다 쓰레기로 병들어가는 바다를 어서 빨리 구해달라며 경고의 메시지를 보냈다. 사진왼쪽부터 순서대로 장다연(인천송명초 3) 박태웅(인천송현초 2) 임서원(인천구산초 3) 최성훈(인천원당초 2) 강세희(인천부개서초 4) 학생이 그린 작품. /취재반

2019-05-26 경인일보

[인천 바다그리기대회]도화지 가득 채운 푸른 동심 '작품이 된 인천 바다'

'제22회 바다그리기 대회'가 지난 25일 월미도 문화의 거리와 송도국제도시 솔찬공원, 인천항 갑문 등 3곳에서 열렸다. 전국 최대 규모의 사생(寫生) 대회로 자리 잡은 이번 대회 참가자들은 '바다사랑'의 마음을 화폭 가득 담았다. 또 준비해 온 음식 등을 가족과 함께 나눠 먹고 사진을 찍으며 즐겁고 특별한 추억을 쌓았다. #이모저모■대회 1주일 전부터 '머릿속에 그린 바다'○…인천 바다의 아름다운 장면들을 도화지에 그리는 학생들이 눈길. 김예은(신흥여중 2)양은 조수간만의 차에 따라 반으로 갈라지는 옹진군의 신비로운 섬 '선재도'를 담은 그림을, 노정아(인천동방중 2)양은 송도에서 바라본 반짝이는 '인천대교'를 담은 그림으로 실력을 자랑. 이들은 대회 전 1주일 동안 아름다운 인천 바다의 모습을 머릿속에 상상. 김예은 양은 "부산과 비교해 작은 편이지만 예쁘고 아름다운 곳이 많은 인천 바다"라며 "인천에 살면서 바다를 자주 볼 수 있는 것이 가장 좋다"며 웃음.■텐트에서 즐긴 자유, 외국인 가족 '엄지'○…바다그리기 대회에 참가한 외국인 가족들도 웃음꽃. 인도 출신 라오(41)씨는 그림 그리기를 좋아하는 딸 샤리카(인천구월서초 4)양과 함께 이번 그리기 대회에 참가. 솔찬공원 행사장 한편에 자리를 잡은 그는 "바다가 보이는 곳에 자유롭게 텐트를 치고, 가족들이 함께 즐길 수 있는 게 이 대회의 매력인 것 같다"고 강조. 라오씨는 "딸뿐만 아니라 우리 가족 모두에게 좋은 추억으로 남을 것"이라며 미소.■남는건 사진… 인증샷 찍기 위해 긴 줄○…바다그리기 대회 솔찬공원 행사장에선 중앙무대를 배경으로 '인증샷'을 찍기 위해 줄지어 기다리는 모습이 진풍경. 직접 그린 그림을 들고 포즈를 취하는 자녀의 모습을 오래도록 간직하기 위해 학부모들은 힘든 줄 모르고 촬영. 딸의 사진을 찍기 위해 줄을 기다리던 학부모 박은주(44·여·송도동)씨는 "오늘의 모습을 추억으로 남기기 위해 기다리고 있다"며 "소풍 분위기로 나와 즐겁게 시간을 보내다 간다"며 웃음. ■대작 완성한 아이들 '물놀이 삼매경'○…바다그리기 대회 월미도 행사장을 찾은 아이들은 일찌감치 그림을 그려놓고 해수족탕과 물놀이장, 분수대에서 물놀이 삼매경. 옷이 흠뻑 젖도록 맘껏 뛰노는 자녀를 흐뭇하게 지켜보던 이모(38·여·부평동)씨는 "평소에 바빠서 자주 못 만났던 친구들과 연락해 모이게 됐다"며 "아이들도 신이 나게 잘 놀아서 좋다"고 만족. 이어 "아는 언니, 동생네 가족들은 솔찬공원 쪽으로 갔다더라"며 "오랜만에 연락을 주고받았다"고 함박웃음.■SNS 수놓은 '#바다그리기대회'○…올해 바다그리기 대회 참가자들은 대회장소에서의 일상을 SNS에 공유. 대회 당일과 이튿날 오전까지 인스타그램에 '바다그리기대회'를 해시태그(#)한 사진은 500여 장. 참가한 학생들과 부모들은 작품 인증샷부터 대회 풍경, 간식 등 소소한 일상을 SNS로 나누며 소통. 게시물에서 참가자들은 '더 이상의 그리기대회는 없다', '빨갛게 불태웠다', '입상은 포기 ㅋ', '더웠지만 즐거웠다' 등 소감도.■월미도 놀이기구 타고 스트레스도 훌훌○…월미도 행사장을 찾은 어린이들은 그림도 그리고, 월미도에 있는 놀이기구를 타면서 즐거운 시간. 초등학생 아들과 월미도를 찾았다는 박정연(40·여)씨는 "고등학생 이후 월미도에서 처음 놀이기구를 타보는 것 같은데 정말 재밌었다"며 "대회에도 참가하고, 오랜만에 월미도를 관광한 것 같아서 좋았다"고 만족감.■경인여대 '뷰티' 부스, 아이들 취향 저격○…인천항 갑문 대회장에는 경인여자대학교 피부미용과 학생 6명이 운영하는 '뷰티' 부스에 300여명의 아이들이 몰리며 인기. 이 부스는 내년에 '뷰티스킨케어과'로 바뀌는 학과 홍보 겸 학생들의 재능 기부 봉사로 이번 대회에 참가. 부스는 70가지 도안이 있는 타투와 다양한 빛깔의 네일아트로 문전성시. 교내 뷰티 동아리 '스윗걸'의 회장 김지은(피부미용과 1) 학생은 "외부에 나온 것은 이번이 처음인데, 아이들이 재밌어 하니까 기분이 너무 좋다"며 "오늘을 위해 타투 도안과 잉크, 다양한 매니큐어 색을 준비했는데 많이 호응해줬다"고 웃음.■3대가 함께 한 대회, 아름다운 '웃음꽃'○…송도 솔찬공원을 찾은 중국 동포 장영준(35)씨 가족은 3대가 함께 대회장을 찾아 눈길. 딸 장예희(인천장도초 1) 양은 "할머니랑 같이 와서 좋아요. 인어공주랑 조개 그림을 그릴 것"이라며 함박웃음. 영준씨는 "딸 아이 그림 실력도 보고 오랜만에 바닷바람도 즐길 수 있어 기쁘다 "고 설명. /취재반 ■ 취재반 =이진호 부장, 이현준 차장, 김성호 차장, 김태양 기자, 박현주 기자(이상 인천본사 사회부), 김명호 차장, 윤설아 기자( 〃 정치부), 정운 기자, 김주엽 기자(〃 경제부), 임승재 차장( 〃 문화체육부), 김용국 부장, 조재현 기자( 〃 사진부)"제 그림 어때요"-25일 열린 제22회 바다그리기 대회 송도국제도시 솔찬공원 행사장에서 참가자들이 완성한 그림들을 들어 보이며 환하게 웃고 있다. /취재반한 폭의 그림-월미도 등대길 방파제에 설치된 대회 참가자들의 많은 텐트들이 영종하늘도시를 배경으로 이색적인 풍경을 연출하고 있다.집중-솔찬공원에서 대회 참가자들이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그림을 그리고 있다.진지한 꼬마 화가-인천항 갑문에서 대회에 참가한 언니를 따라온 어린이가 자기만의 화풍으로 그림을 그리고 있다.추억 한 컷-대회에 참가한 한 가족이 솔찬공원 행사장에 설치된 중앙무대를 배경으로 인증샷을 찍고 있다."응원합니다"-박남춘 인천시장, 이용범 인천시의회 의장, 도성훈 인천시교육감, 박찬대 국회의원, 고남석 연수구청장, 이태훈 가천대길병원 의료원장, 김광하 신명여고 교장, 이영재 경인일보 인천본사 사장 등 참석한 내빈들이 도화지를 배부하고 있다.뜨거운 열기-월미도 문화의 거리가 대회 참가자들이 설치한 형형색색의 텐트로 물결을 이루고 있다.

2019-05-26 경인일보

[인천경영포럼]나경원 한국당 원내대표 "좌파가 베네수엘라 파탄… 文정부 같은 길"

차베스 무상정책에 국민 영양실조방송·사법권력 장악 신독재 평가연동형 비례대표제 '좌클릭' 우려자유한국당 나경원 원내대표는 23일 문재인 정부가 너무 빠르게 좌파 정책으로 치우치고 있으며 우리나라가 좌파 독재로 파탄 난 베네수엘라와 똑같은 길을 걷고 있다고 주장했다.나경원 원내대표는 이날 오전 인천 라마다 송도호텔에서 경인일보와 인천경영포럼이 공동 주최한 '제404회 인천경영포럼 강연' 연사로 나와 이같이 밝히며 "만약 선거법이 개정돼 연동형 비례대표제가 도입되면 정의당이 원내교섭단체가 돼 현 정부의 좌클릭 현상이 더 심화될 것"이라고 강조했다.나 원내대표는 "1996년 차베스가 정권을 잡기 전까지만 해도 잘 살던 베네수엘라가 무상 의료·교육·주택 등 무상시리즈를 하면서 국민 350만명이 영양실조 상태가 됐다"며 "문재인 정부도 문재인 케어와 무상교육을 하면서 이 길을 가고 있다"고 설명했다.나경원 원내대표는 "문재인 정부가 국민연금 스튜어드십으로 대한항공 (조양호) 회장을 사실상 내쫓았다"며 "시장 논리에 따라 기업을 경영하는 것이 아니라 정부가 무서워서 정부가 원하는 경영을 기업들이 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문재인 정부가 '신독재'의 길에 들어섰다고도 평가했다.나 원내대표는 "경제 주간지 이코노미스트가 신독재란 개념을 정리했는데 거기서 보면 카리스마로 정권을 잡은 뒤 끝없이 적을 찾고, 방송·사법 등 권력기관을 장악한 뒤 선거법을 개정하는 것으로 용어를 정리했다"며 "신독재 개념이 어디서 많이 들어본 모습"이라고 말했다. 이어 "문재인 정부는 촛불로 정권을 잡아 2년 내내 적폐청산만 부르짖다가 사실상 방송과 사법 권력을 장악했다"고 덧붙였다.나경원 원내대표는 이날 강연에서 인천은 특별한 인연이 있는 곳이라 더 애착이 간다고 했다.그는 "판사 시절 당시 주안 석바위에 있던 인천지법에서 3년간 일했다"며 "매일 아침 경인선 간석역에서 내려 석바위를 오가며 인천과 많은 추억을 만들었다"고 인천과의 인연을 소개했다.나 원내대표는 "원내대표 취임 이후 외부 강연은 거의 하지 않는데, 이런 인천과의 추억 때문에 특별히 찾았다"고 말했다. /김명호기자 boq79@kyeongin.com자유한국당 나경원 원내대표가 23일 오전 인천시 연수구 라마다 송도 호텔에서 열린 '제404회 인천경영포럼 강연'에서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 위기, 헌법 가치 수호라는 주제로 강연을 하고 있다. /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

2019-05-23 김명호

[제17회 푸른인천글쓰기대회 심사평]진솔한 표현에 비유도 참신, 읽는내내 '미소가 절로'

한 편의 글을 쓰는 일은 새로운 자기를 발견하는 과정과 연결됩니다. "푸른 인천 글쓰기 대회"에 응모된 작품을 보며 유년 시절 글쓰기 대회에 처음 나가 한 편의 글을 완성했던 기억을 떠올려 보게 되었습니다. 처음 주제를 알게 되었을 때는 막막했지만, 그 막막함은 글을 써 나가는 과정에서 '나'의 생활, '나'의 체험을 돌아보는 즐거움으로 변해갔습니다. 물론 그 즐거움은 재미있는 텔레비전 프로그램을 시청할 때만큼 즉각적인 쾌락을 가져다주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완성된 자기만의 글을 바라보며 느끼게 되는 뿌듯함, 그 글이 자기 안에 잠재되어 있음을 발견하게 되는 희열은 또 다른 글을 써나가는 원동력을 만들어냅니다.이번 '푸른 인천 글쓰기 대회'에 응모된 글들을 읽으면서도 인천 어린이들이 새로운 자기를 발견하는 과정에서 느낀 즐거움과 대면할 수 있었습니다. '나'의 체험과 느낌을 자기만의 방식을 통해 표현한 글들을 읽으며 미소 지을 수 있었습니다. 신수안(구산초 4학년) 어린이의 시에서는 봄바람이 되고 싶은 마음을 읽을 수 있었습니다. 그 마음에는 겨울잠을 자고 있는 동물들을 뛰어놀게 하고 싶은 생명력이 들어 있지만, 대머리 아저씨의 모자를 벗기게 되는 순간과 대면해야 되는 난처함도 담겨 있습니다. 이 시의 매력은 그 난처함을 봄바람이 가져다주는 웃음과 적절하게 결합시킨 데에서 생겨납니다. 박주하(인천 하늘초 2학년) 어린이의 시에서는 봄을 표현하는 다양한 비유들이 인상적이었습니다. 봄을 상징하는 개나리꽃, 벚꽃, 진달래를 달콤한 바나나, 거품목욕, 핑크색 줄넘기와 연결시키는 상상력이 흥미로웠습니다. 모두가 익히 알고 있는 봄에 대한 상징들을 자기 주변의 사물들과 결합시켜 새롭게 표현했다는 점에 이 시의 강점이 있습니다.이지산(길상초 5학년) 어린이의 시에는 할머니 댁에 놀러갔던 체험이 잘 녹아들어 있습니다. 이 시는 할머니 댁 마당에 있는 백구, 할머니 댁 뒤뜰 바위틈에 있는 꽃들을 형상화하며 '봄'이라는 일반적 소재를 '봄의 할머니 댁'이라는 자기만의 주제로 전환시킵니다. 무엇보다 이 글의 뛰어난 점은 손주를 기다리는 할머니의 포근한 미소를 진솔하게 표현했다는 점에 있습니다.그 표현을 생각하는 과정에서 이지산 어린이는 할머니와 자기가 만들었던 여러 체험들을 한 번 더 돌아볼 수 있었을 것입니다. 이 시는 그 돌아봄의 과정이 잘 드러났다는 점에서 높은 평가를 받을 만합니다. 이번 대회 응모작 가운데에서 가장 흥미로웠던 작품은 김태윤(단봉초 3학년) 어린이의 산문이었습니다. 이 글의 매력은 선생님에 대한 자신의 느낌을 솔직하게 표현했다는 점, 그 느낌을 받게 된 선생님과의 일화를 구체적으로 그려냈다는 점에 있습니다. 선생님의 머리카락을 '꼬불꼬불 덩굴식물'과 연결시킨 표현, 선생님이 자기의 마음에 심어준 자신감을 '금빛 날개'에 비유한 표현도 참신하고 인상적입니다. 이 산문을 쓴 어린이는 이미 글쓰기가 자기 자신을 변화시킬 수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이 산문이 주되게 그리고 있는 선생님은 이 어린이의 일기를 읽고 칭찬해주며 글쓰기의 즐거움을 알게 해주었습니다. 김태윤 어린이의 산문은 자기를 변화할 수 있게 도와준 선생님께 드리는, 봄꽃 같은 헌사입니다. 그런 점에서 이 글은 '푸른 인천 글쓰기 대회'가 만들고 싶었던 가치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작품이라고 생각됩니다. 김태윤 어린이의 산문을 읽는 많은 사람들은 입가에 웃음을 머금게 될 것입니다. 그 웃음이 글쓰기가 가져다주는 자기 변화의 힘을 한 번 더 생각하는 계기로 이어지기를 기대해 봅니다./강용훈 인천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

2019-05-23 강용훈

[제17회 푸른인천글쓰기대회]수상자 명단

<초등부>■대상▲인천광역시장상 =인천단봉초 3-2 김태윤 ▲인천광역시교육감상 =길상초 5-2 이지산■최우수상▲인천광역시장상 =인천구산초 4-2 신수안, 인천하늘초 2-3 박주하, 인천간석초 4-1 이량녹 ▲인천광역시교육감상 =인천능내초 3-6 서유진, 인천남부초 4-2 오승빈, 공항초신도분교장 6-1 이은솔 ▲인천광역시의회의장상 =인천학산초 4-5 홍수경, 인천한길초 5-4 박예리, 인천연화초 4-5 진서현 ▲가천문화재단이사장상 =인천갈산초 6-1 김성윤, 인천만월초 6-3 김서윤, 인천서창초 6-8 이하경 ▲인천상공회의소회장상 =인천목향초 6-5 정민규, 인천송일초 5-2 한영지, 인천함박초 5-2 이도연 ▲경인일보인천본사사장상 =인천능허대초 5-5 최준식, 인천미송초 6-2 김지유, 인천공촌초 4-2 천세현■우수상▲남부교육장상 =인천신선초 2-2 최은, 인천영종초 5-2 서민영, 인천서림초 2-2 원준연 ▲북부교육장상 =인천한길초 3-2 김희서, 인천부내초 2-1 김아율, 인천갈월초 4-3 김하영 ▲동부교육장상 =인천고잔초 6-3 정다민, 인천동방초 2-6 김서율, 인천논현초 5-6 송지윤 ▲서부교육장상 =인천부현동초 5-2 이가윤, 인천당산초 3-4 김연두, 인천원당초 1-1 정시원 ▲강화교육장상 =선원초 2-1 고은임, 갑룡초 4-4 이도율, 불은초 4-1 이우경 ▲인천대학교총장상 =인천당하초 6-2 박윤솔, 인천중산초 5-4 김승혁, 인천한빛초 6-7 위승연 ▲가천대학교총장상 =인천한길초 5-1 김연수, 인천청량초 3-2 이서현, 인천학익초 4-3 엄지율 ▲농협중앙회인천지역본부장상 =인천첨단초 6-7 주하연, 인천원동초 3-3 고은빈, 인천먼우금초 3-5 박지후 ▲가천문화재단이사장상 =인천부개초 6-2 김수혁, 연평초 6-1 김소연, 인천초은초 6-8 윤혜민 ▲경인일보인천본사사장상 =인천경서초 6-3 민예원, 인천논곡초 4-4 이민욱, 인천만수북초 6-1 구서연<학부모>■대상▲인천광역시장상 =조윤경■우수상▲가천문화재단이사장상 =박상미, 정진희, 정현진■장려상▲가천문화재단이사장상 =김지희, 천재경, 유미정, 이재은, 표세연, 이효은, 전금미, 윤영주, 김효숙, 이현정

2019-05-23 경인일보

[제17회 푸른인천글쓰기대회 수상작-학부모 대상(인천시장상)]엄마의 봄

엄마의 손톱 밑으로 까맣게 물든 봄이 내게 머물고 있다."엄마! 오늘 날씨도 좋은데 바람 좀 쐬러 갈까?"집에서 5분 거리의 원룸단지에 시골에서 작은 식당을 하시던 친정엄마를 모셔다 놓은지 4개월. 시골집에선 마당에 꽃도 심고 나무도 키우며 혼자 적적하지만 나름 자연인처럼 사셨었는데… 집안형편이 어려워 지면서 7평짜리 작은 원룸에서 하루종일 갇혀 계시니, 너무 안쓰럽고 마음이 쓰여 나는 우울증이 올 정도였다. 내가 이런데 엄마야 오죽 하실까 싶어 전화했더니 너무 좋아하시는게 눈에 보인다. 주섬주섬 간식거리를 챙겨넣고 엄마를 모시러 갔다."아휴, 집에서 쉬지, 뭐하러 왔어? 엄마 안가도 돼." 웃으며 말하신다.아라뱃길을 따라 벚꽃 십리길이 환하게 맞아준다. 엄마가 웃으신다. 정서진 물류센터 옆을 지날때 노오란 개나리가 바람에 흔들린다. 엄마가 웃으신다. 역시 나오길 잘했다, 이렇게 엄마가 좋아해줄줄은 몰랐는데, 진즉에 나올껄 하는 생각이 들었다. 울퉁불퉁한 산업도로를 지나 강화 약암마을에 왔을 때였다. 창밖을 보던 엄마가 다급히 소리쳤다."아이고 윤경아! 여기, 여기 좀 세워 봐봐!" 무슨 큰일이라도 난줄 알고 얼른 차를 길 한켠에 댔다. "왜 엄마? 화장실 가고 싶어?" "아이고 윤경아, 여기 민들레랑 쑥이 천지여…너 당뇨에 요 민들레 뿌리랑 잎이랑 생으로 먹으면 그렇게 좋대잖여, 여거 김서방 좋아하는 쑥도 웜청 많네이…" 골반이며 어깨며 무릎이며, 그동안 장사하느라 성한 곳 하나 없으면서, 또 밤새 끙끙 앓을 거면서, 기어이 검정 비닐 봉지 한가득 민들레랑 쑥을 뜯어 놓으신다. 호미나 칼도 안가져 갔는데 맨 손으로 흙을 파고 나물을 뜯으니 금새 손가락이 새카맣게 변해 버렸다. "엄마 고만해요, 손 다 갈라지것네…무릎 괜찮어? 고만! 고만!" 옆에서 재촉하니 그제서야 다리를 펴고 일어나시는 엄마. "요거, 꼭 잘 씻쳐서 먹어야 한다. 알았지? 요쿠르트 넣고 갈면 꿀떡 꿀떡 잘 넘어 가니께, 버리지 말고 꼭 먹어야혀."엄마의 손톱 밑으로 까맣게 물든 봄이 지금도 내게 머물고 있다.일러스트/박성현기자 pssh0911@kyeongin.com조윤경·학부모

2019-05-23 경인일보

[제17회 푸른인천글쓰기대회 수상작-초등부 대상(인천시장상)]벚꽃같은 나의 선생님

나는 벚꽃을 보면 생각나는 분이 있어요.그분은 따뜻한 봄에 우리를 반겨주는 벚꽃처럼 예쁘세요. 머리카락은 꼬불꼬불 덩굴식물을 닮았고요, 목소리는 달콤한 꿀을 머금은 것처럼 향긋해요.벚꽃을 닮은 그 분은 바로 우리 학교 한유라 선생님이에요. 한유라 선생님은 제가 2학년 때 담임선생님이세요.저는 소심하고 소극적인 성격을 가졌어요. 친구들과 선생님 앞에 서면 눈앞이 캄캄하고, 목소리는 졸졸졸졸 시냇물처럼 작아져요. 제 마음속에는 커다랗고 푸르른 산이 있는데, 남들 앞에만 서면 왜 조그마한 개미가 되어 버리는지 모르겠어요. 그런데, 한유라 선생님은 저의 개미같은 작은 소리에도 귀 기울여 주시고, 제가 쓴 일기를 친구들에게 자랑해주셨어요. 저는 제가 일기를 잘 쓰는 것도 몰랐고, 책을 좋아하는 것도 칭찬 받을 일인지 잘 몰랐거든요. 도서관에서 책을 많이 빌린 아이들에게 주는 작고 귀여운 돼지 인형을 받았을 때, 선생님이 친구들 앞에서 크게 칭찬해 주시고, 예쁘게 사진도 찍어 주셨어요. 저는 선생님 덕분에 세상에서 가장 멋진 사람이 된 것 같았어요. 푸르른 산 위에 멋지고 웅장한 바위가 된 것처럼 어깨가 으쓱 했답니다. 선생님 덕분에 저는 자신감이 많이 생겨서 이제는 발표할 때 천둥처럼 큰 목소리로 할 수 있어요. 얼마 전 공원으로 벚꽃구경을 갔을 때 봄바람에 날린 벚꽃 잎이 제 얼굴을 보드랍게 쓰다듬어 주었어요. 그 때 벚꽃을 닮은 선생님이 생각났답니다. 선생님은 제 마음 속에 금빛 날개를 심어 주신 것 같았어요. 이제부터는 저의 금빛 날개를 활짝 펼치고 붉은 태양을 향해 날아오르는 멋진 나비가 될 거예요.일러스트/성옥희기자 okie@kyeongin.com김태윤·단봉초 3년

2019-05-23 경인일보

[독립운동과 인천·(13)]윤응념과 인천사건

모금·밀항돕는 역할… 재조명 필요임시정부의 밀명을 받고 인천 섬 지역에서 독립운동 자금을 모집한 '인천사건'으로 옥고를 치른 인천의 독립운동가 윤응념(1896~?)은 여전히 반쪽 평가에 그치고 있다. 판결문과 각종 신문기사, 일제의 동향 보고를 통해 그의 국내외 독립운동 행적이 비교적 구체적으로 밝혀졌으나 독립유공자 명단에서 그를 찾아볼 수 없다. 그가 가족조차 모르게 중국으로 떠난 뒤 어떻게 살았고 언제 생을 마감했는지 등은 아직도 드러나지 않고 있다.황해도 재령 출신의 윤응념은 중국 유학 중이던 1920년 가을 상해 임시정부에 합류해 군자금 모집과 독립운동가의 밀항 루트 개발이라는 중요한 임무를 맡았다.그는 1922년 4월 중국 상인으로 가장해 인천으로 들어와 장봉도, 시도, 영종도, 대부도 등지를 다니며 지역 부호를 상대로 독립자금을 모집했다. 일제는 그가 협박으로 돈을 빼앗았다고 보고 강도죄를 적용해 징역 12년이라는 중형을 선고했다. 윤응념은 1924년 병보석으로 풀려나 서울 집에서 치료를 받다 이듬해 홀연히 자취를 감췄다. 아내와 세 아이에게는 재판소에 간다고 했지만 실제로는 중국으로 탈출했다.그의 탈출은 신문에 대서특필되고 일제는 추적에 나섰지만 찾지 못했다. 그리고 우리나라 독립운동사에서 그의 이름은 더 이상 나오지 않았다.전문가들은 당시 징역 12년형을 받을 정도의 인물이었다면 단순히 중국으로 탈출하는 데에서 활동을 끝내지 않았을 것이라고 보고 있다. 일제가 12년 동안이나 감옥에 가둬두고 싶을 정도의 요주의 인물이라면 그만큼 투쟁심도 강하고 애국심도 강했을 거라는 해석이다. 그는 임시정부의 밀명을 받고 활동할 때 가명을 사용하기도 했다. 다른 이름으로 활동했을 가능성도 있다.그는 지금까지 밝혀진 독립운동 활동만으로도 독립유공자의 자격이 충분하지만 문제는 훈격이다. 같이 활동을 했던 동지들은 애족장 또는 애국장을 받았는데, 그가 중국으로 넘어간 뒤 어떤 활동을 했느냐에 따라 훈격이 달라질 수 있다. 윤응념에 대한 재조명과 추가 행적 발굴이 요구되는 이유다. /김민재기자 kmj@kyeongin.com

2019-05-22 김민재

[독립운동과 인천·(13)]윤응념과 인천사건

황해도 출신 3·1운동 계기 임시정부 참여 1920년 교통국 참사로 임명돼인천·섬 부호 상대 독립자금 수급役 사기꾼 많아 신분상징으로 권총 사용강도 몰려 12년형 선고… '김마리아 망명' 주역 독립운동가 밀입국 돕기도 병보석후 중국으로 탈출 '행방묘연' 유공자 서훈 못받아 추가 조사 필요일제강점기 초기 경기도경찰부는 인천과 주변 섬 지역의 부호들을 상대로 한 연쇄 강도사건이 발생했다고 발표했다. 권총으로 무장한 일당이 돈을 빼앗아 달아났다는 이 사건은 이른바 '인천사건'으로 불리며 "인천 부근 일대의 부호를 전율케 한 사건"이라는 내용으로 신문에 대서 특필됐다. 강도죄로 재판에 넘겨진 이들의 실체는 독립운동을 위한 군자금을 모집해 상해 임시정부로 전달하라는 밀명을 받고 활동한 임시정부 교통국 소속의 특파단이었다.인천사건을 이끌었던 인물은 모두 10명으로 총 책임자는 황해도 출신의 독립운동가 윤응념(1896~?). 그럼에도 윤응념은 인천사건의 다른 주역과 달리 독립유공자로 추서되지 못했다. 인천사건으로 옥살이를 하다가 병보석으로 잠시 풀려난 틈을 타 중국으로 도망간 뒤로 그의 행적은 전혀 알려지지 않았다. 그의 삶과 죽음이 제대로 연구되지 못하다 보니 그에 대한 평가도 뒤로 밀려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인천의 독립운동가라 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이지만, 학계의 관심과 깊이 있는 연구는 미진하다. 2007년 진실과 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 위원회가 윤응념의 항일 활동을 '진실'로 규명했지만, 아직 국가보훈처는 그를 발굴해 독립유공자로 인정하지 않고 있다.윤응념이 이끌었던 인천사건의 배후에는 상해 임시정부가 있었다. 임시정부는 국내 각 지방과 긴밀한 연락체계를 유지하기 위해 '연통제(聯通制)'라는 기구를 설치해 운영했다. 이는 독립운동 자금 모집의 중요한 수단이기도 했다. 연통제는 초기부터 일제의 탄압을 받았고, 1919년 7월 교통국이 설치돼 연통제를 계승했다. 윤응념은 1920년 10월 5일 바로 이 교통국의 참사로 임명돼 독립운동가들의 밀입국을 돕고, 문서(정보)를 주고받거나 독립자금의 원활한 수급을 담당하는 중책을 맡았다.1896년 황해도 재령에서 태어난 윤응념은 미국 선교사의 도움으로 10대 후반 중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중국 선천 등지에서 수학하던 그는 미국으로 다시 유학을 가려 했으나 1919년 3·1 운동이 일어나자 독립운동에 가담할 뜻을 갖고 상해 임시정부를 찾아갔다. 그는 당시 임시의정원 비서였던 김정목의 소개로 임시정부에 참여했다.윤응념은 교통국 참사로 임명된 직후 조선독립을 선전하기 위해 발행한 독립신문과 잡지 신한청년을 국내로 몰래 들여와 배포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고향인 황해도 일대를 중심으로 수천부의 독립신문을 배포하며 첫 임무에 성공했다.그에게 주어진 다른 임무는 바로 독립운동을 위한 군자금 모집이었다. 임시정부는 지금의 주민세와 같은 인구세 등을 걷어 국내 지방조직을 통해 자금을 공급받았으나 일제의 탄압으로 위축되자 임시정부 요원을 직접 보내 모집을 맡겼다. 윤응념은 1922년 4월 임시정부의 밀명을 받고 인천으로 들어왔다. 그는 동지들과 함께 인천 장봉도, 시도, 영종도, 대부도 등지를 다니며 지역 부호를 상대로 독립자금을 모집했다.이들은 즉석에서 돈으로 받기도 했고, 임시정부가 발행한 공채를 매도하는 방식으로 군자금을 모집하기도 했다. 국가기록원이 지난 4월 발간한 '판결문에 담긴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국내 활동'을 보면 독립공채의 이자는 연 100분의 5로 나라가 독립한 뒤 5년부터 30년 이내에 상환하는 방식이었다. 100원권, 500원권, 1천원권의 3종류였다. 이들은 자신의 신분을 알리기 위해 임시정부가 인증한 여러 문서를 보여줬지만, 군자금 모집을 가장한 사기 사건이 발생하기도 해 쉽지 않았다. 그래서 이들은 '권총'을 신변 보호의 수단이자 신분의 상징으로 사용했다. 윤응념이 권총을 보여주며 군자금을 모집한 일은 결국 '강도사건'이 됐다. 10명 중 1명은 도주했고 1923년 5월 경찰에 9명이 체포됐다. 이들이 훗날 자금 지원을 약속받은 금액을 빼고 실제 걷은 군자금은 561원이었다.당시 판결문을 보면 윤응념은 독립운동자금 모집에 대해서는 시인했으나 강도에 대해서는 "위협이나 공갈은 없었다. 피해자에게 물어봐도 알게 될 것"이라고 답했다. 그가 권총을 소지했다는 것만으로 강도사건으로 단정 짓기는 어렵다는 게 학계의 일반적인 견해다. 윤응념은 그러나 결국 징역 12년을 선고받고 감옥에 갇히는 신세가 된다. 다른 동지들도 징역 1년 6월~10년형을 선고받았다. 인천사건이 발생한 이후 여성독립운동가인 김마리아 망명 사건의 주역이 바로 윤응념이었다는 사실도 드러나게 됐다. 이는 일본 경찰이 윤응념을 취조하는 과정에서 밝혀졌다. 그는 독립운동 군자금 모집 외에도 국내와 중국을 연결하는 밀항 루트 확보를 담당했다. 이를 위해선 중개 역할을 하는 외국인 상선 확보가 가장 중요하다. 독립운동가들이 교통국이 확보한 선박에 타고 서해의 섬으로 몰래 이동해 있다가 외국 상선으로 갈아타는 게 가장 안전한 방법이었다. 일제가 1921년 8월 20일 작성한 보고서 '밀도항자 경로에 관한 건'을 보면 윤응념이 관여했던 항로는 평안남도 남포항에서 출발해 중국의 옌타이 등지를 거쳐 상하이를 왕래하는 코스였다. 중국 상인이나 기독교 선교사들이 밀항을 중개했다. 김마리아 탈출도 바로 이런 방식을 택해 이루어졌다.김마리아는 서울 정신여학교 교사로 일하면서 항일여성단체인 애국부인회를 조직해 독립운동을 하다가 1920년 체포돼 징역 3년을 선고받았다. 고문 후유증으로 병보석을 얻어 치료를 받던 중 상해 임시정부가 그녀의 탈출을 계획했다. 건강 회복은 곧 재수감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임시정부 교통국 참사인 윤응념이 상해 임시정부의 특명을 받았다. 1921년 4월 중국인으로 위장해 국내에 잠입한 그는 그해 6월 서울에 있는 김마리아를 인천으로 몰래 데려오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며칠 뒤 인천과 황해도 사이의 한 섬으로 건너간 뒤 중국 웨이하이로 가는 소금장사 배로 갈아타고 망명했다. 김마리아는 이후 미국으로 떠났다가 1932년 귀국해 기독교를 중심으로 한 애국운동을 벌였다.인천사건으로 징역 12년을 선고받은 윤응념은 1925년 5월 15일 수감 도중 폐병에 의한 병보석으로 풀려났다. 그리고 이듬해 10월 25일 가족에게는 재판소에 간다고 말하고 집을 나선 뒤 중국으로 탈출했다. 사흘 뒤 창춘에 도착했다는 편지를 집으로 보낸 이후 그의 행적은 그야말로 오리무중이다. 병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객사했을 가능성도 있고, 신분을 감추고 아예 다른 삶을 살았을 수도 있다. 해방 이후 고향인 황해도 재령으로 돌아갔을 것이란 추측도 있지만, 윤응념 연구자들은 아직 북한에서의 행적을 찾지 못하고 있다.1927년 1월 25일 동아일보에 실린 윤응념 관련 기사에서 부인 김항엽(당시 30세)은 "작년 9월 19일(음력) 나에게 재판소 호출이 있으니 가봐야겠다고 집을 나가서는 들어오지 않더니 그달 22일에 중국 창춘에서 편지를 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 후로 길림으로 간 모양인데 편지의 내용은 병만 나으면 또 조선으로 가겠다는 간단한 말이었는데 그 편지는 전부 경찰에서 압수하여갔지요. 그리고 요새 매일 형사가 와서 무엇을 조사하고 묻고 합니다"고 했다.진실·화해위원회는 윤응념 가족이 서울 통의동에 살았다는 기록을 토대로 서울 종로구청에 옛 제적등본과 호적등본을 요청해 가족을 수소문하려 했지만, 구청 측은 관련 기록이 없다고 답변했다.윤응념의 독립유공자 서훈은 아직도 이뤄지지 못하고 있다. 윤응념과 군자금 모집을 했다가 체포돼 함께 옥살이를 했던 이호승(1878~1939)은 2006년 애족장을 받았다.전문가들은 윤응념의 중국 탈출 이후 행적에 대한 추가 연구가 더 필요하다고 강조하고 있다. 독립유공자 서훈이 늦어지는 이유도 이와 무관치 않다는 해석이다.임시정부 연구자인 김희곤 안동대 사학과 교수(경상북도독립운동기념관장)는 "윤응념은 징역 12년 형이라는 아주 무거운 형을 받았을 정도로 투쟁심이 강한 독립운동가였는데 중국 탈출 이후에 대해서 알려진 바가 없다"며 "서훈에 대해서는 10여 년 전에 내부적으로 검토 대상에 오른 적이 있었는데 윤응념은 여기서 끝날 게 아니라 분명 더 많은 활동을 했을 것이라는 평가가 있었기 때문에 계속 미뤄진 것으로 알고 있다. 훈격을 어느 정도 수준으로 해야 할지 정하기 어려웠기 때문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김민재기자 kmj@kyeongin.com인천 군자금 모집사건의 결심공판 모습을 보도한 동아일보 1923년 9월 19일자 기사의 사진(선두에 선 사람이 윤응념이다). /국가보훈처·국사편찬위원회·동아일보 제공임시정부 요원들의 국내 진입 경로를 표시한 일제 보고서 '밀도항자의 경로에 관한 건'. 상하이→옌타이→웨이하이 등을 경유해 진남포 또는 황해도로 들어오는 경로다. /국가보훈처·국사편찬위원회·동아일보 제공(왼쪽 아래부터)임시정부가 군자금 모집 때 사용한 공채들과 1919년 조선독립군사령부가 발행한 군자금 납입 명령서·봉투. /독립기념관 제공윤응념 검거 기사가 실린 1923년 5월 20일자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 지면으로 윤응념을 '수괴'라고 표현했다. /국가보훈처·국사편찬위원회·동아일보 제공윤응념의 도움으로 망명에 성공한 대한민국애국부인회 회장 김마리아. /국가보훈처·국사편찬위원회·동아일보 제공윤응념의 군자금 모집 사건 판결문. /국가보훈처·국사편찬위원회·동아일보 제공

2019-05-22 김민재

[인천의 얼굴·(11)]가천대 길병원 조진성 응급실장

전국 첫 운행 2011년부터 자리 지켜와"기피 부서지만 진짜 의료서비스 소명"사람을 살리는 일보다 더 소중한 일이 또 있을까요. 인천의 가장 큰 특성은 바다와 섬입니다. 뱃일은 거센 파도만큼이나 거칩니다. 목숨을 내걸어야 할 정돕니다. 촌각을 다투는 환자가 많게 마련입니다. 아무리 빠른 배를 타더라도 기회를 놓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하늘을 나는 응급실, 닥터헬기가 있어 인천 앞바다의 섬 주민들은 안도합니다.2011년, 전국 최초로 인천 하늘에 닥터헬기가 떴습니다. 조진성(43) 가천대 길병원 응급실장은 그때부터 지금까지 닥터헬기를 떠나지 않고 있습니다. 작은 헬기에 탄다는 것은 바이킹 탈 때보다도 더 무서운 일입니다. 고소공포증이 있는 의사들은 엄두도 내지 못하지요. 닥터헬기는 당직의사 10명이 돌아가면서 탑니다. 헬기는 웬만한 응급실이 갖추고 있는 장비들을 싣고 있습니다.2012년, 100번째 닥터헬기 이륙 때가 생각이 납니다. 네 살 여자아이가 강화도에서 물놀이 사고를 당했습니다. 20분만에 도착한 학교 운동장에는 아이가 의식을 잃고 사색이 되어 있었습니다. 심폐소생술을 여러 차례 해야 했습니다. 10여 분이 지나서야 심장이 뛰었습니다. 헬기에 태워 이송하는 내내 '꼭 살아야 한다'고 되뇌었습니다. 그 아이는 다행히 1주일 가까이 지나서 건강하게 퇴원했습니다. 벌써 초등학생이 되었겠네요. 이처럼 닥터헬기가 아니면 살릴 수 없는 경우가 많습니다. 충남 일부 지역까지, 사고를 당한 참으로 많은 사람들이 닥터헬기를 타고 살아났습니다.닥터헬기는 사람을 살리는 필요 장비인데 어떤 이들은 그 소리가 싫다고 귀를 막습니다. 헬기가 오르내리는 계류장을 군부대로 옮겼는데도 병원 근처 주민들은 이따금 소음 민원을 제기합니다. 내 가족이 사고를 당해 닥터헬기를 타야 할 경우에도 그 소리가 시끄러울까요. 닥터헬기 프로펠러 소음은 생명을 살리는 빛의 소리입니다. 어릴 때 동의보감을 읽고 의사의 꿈을 키웠다는 조진성 응급실장은 응급의학과는 의사들이 기피하는 부서이지만 진짜 의료 서비스를 한다는 생각에 참아냅니다. 헬기 소리를 '오늘도 누군가 살아난다'며 기쁘게 여겨주세요. 그게 힘이 됩니다. 글/윤설아기자 say@kyeongin.com 사진/김용국기자 yong@kyeongin.com※'인천의 얼굴'을 찾습니다. (032)861-3200이메일 : say@kyeongin.com사진/김용국기자 yong@kyeongin.com

2019-05-21 윤설아

[독립운동과 인천·(12)]女교육자이자 독립운동가, 김란사(下)

보훈처 평안남도 안주 기록달리 유족들 평양 출생 주장 논란 '이주 가능성''국제관계 능통' 조선 관리 하상기와 전처 죽은뒤 혼인 '첩·기생설' 사실아냐아내 적극 외조 경찰서장·감리등 역임 인천 총괄 이후 중국 망명 행적묘연김란사 생애 체계적 복원위해 함께 살펴봐야… 파리가던길 독살설도 '과제'김란사(金蘭史·1872~1919)가 여성교육의 선구자이자 독립운동가로 발돋움하는 데에는 남편 하상기(河相驥·1855~1920)의 적극적인 외조가 있었다. 하상기는 인천 개항장의 행정·사법·국제관계 업무를 총괄하는 인천감리를 수차례 지내면서 인천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한 고위 관료이다. 그렇지만 드러나지 않은 측면이 많은 수수께끼의 인물이기도 하다. 아직 뚜렷하게 밝혀지지 않은 김란사의 생애를 복원하기 위해선 하상기도 함께 연구돼야 한다.지금까지 진행된 바로는 김란사나 하상기와 관련한 연구 작업의 중심에 인천의 이원규 작가와 김창수 인천연구원 부원장 등이 있다. 잘 알려지지 않은 독립운동가들의 생애를 조명해 온 이원규 작가는 김란사와 하상기에 관한 각종 자료를 모으고 행적을 추적해 작품에 반영하거나 강연하고 있다. 이원규 작가가 지난해 쓴 '김경천 평전'(도서출판 선인)에는 1904년 10월 조선 황실유학생단이 일본으로 떠나기 전 방문한 인천감리서에서 황실 유학생 김영은(金英殷·1888~1942)과 그의 아버지 김정우(金鼎愚·1857~1908)가 인천감리 하상기를 만나는 장면이 나온다. 김란사에 대한 언급도 있다. 훗날 김경천(金擎天)이란 이름을 쓰게 되는 김영은은 '백마 탄 김 장군'의 전설을 낳은 독립군 지도자다. 철저한 고증 없이는 묘사하기 힘든 장면이다. 이원규 작가는 "김란사의 고향이 북한 쪽이기 때문에 남한에서는 관심을 갖고 연구한 사람이 드물다. 그나마 연고가 있는 인천에서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김란사와 하상기가 언제 결혼했는지를 정확히 알 수 있는 자료조차 아직 전해지지 않고 있다. 김란사의 친정 조카손자인 김용택씨가 공개한 하상기의 제적등본에는 딸이 1891년 12월 출생으로 기재돼 있어 혼인시기를 추정할 수 있을 뿐이다. 1891년 김란사의 나이는 19세이고, 하상기는 36세였다. 하상기는 전처가 있었기 때문에 김란사가 '하상기의 첩이었다'거나 '기생 출신'이라는 설이 오랫동안 나돌았다. 실제로 김란사가 기생 출신이라는 내용이 담긴 기사를 1990년대 보도했다가 현재는 해당 기사를 삭제한 언론사도 있다. 김용택씨는 "증조부(김란사의 아버지)는 서울에서 청나라 포목을 가져와 파는 무역업을 했다"며 "김란사 할머니는 아버지 일을 돕다가 하상기의 전처인 조씨 부인이 사망한 이후 인근에 살던 집안끼리 혼담이 오가서 혼인했다"고 말했다.일본이 한국의 주권을 장악하기 위해 1906~1910년 설치한 통감부의 '한국 관인의 경력 일반'이라는 문서를 보면, 하상기에 대해 '원래 기부(妓夫)로 학문과 지식이 없지만 종종 협잡에 종사하였다. 일찍이 기녀 하나를 얻어 함께 일본으로 건너가 망명자 유인운동을 행하였다'고 썼다. 이 문서로부터 김란사가 기생 출신이라는 설이 나왔는데, 일본이 자국과 반대 입장에 있는 조선 관리들에 대해 쓴 문건이기 때문에 신뢰도가 떨어진다는 연구자들의 분석이 많다. 일본은 해당 문건에 올린 관인 153명 대다수에 대해 비방하는 내용을 담았다.또 일본 통감부는 같은 문건에서 하상기가 '러시아와 일본 양국에 대해서도 임기응변의 운동을 행해 러시아 탐정이라는 혐의가 있다'고도 평가했는데, 그가 국제관계에 능통한 인물이었음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하상기가 사료에 등장하는 첫 기록은 '승정원일기' 1897년 7월 19일 기사로 그가 6품 벼슬에 올랐다는 내용이다. 1895년 봄 김란사와 함께 일본에 유학을 갔다가 먼저 돌아온 직후다. 하상기는 1897년 말 일본 요코하마를 거쳐 미국 샌프란시스코로 입국해 김란사의 미국 유학길에 동행했다가 혼자 돌아왔는데, 이듬해 초 인천항 경무관(경찰서장)을 맡게 된다. '고종실록'에 따르면 하상기는 1899년 7월 인천감리 겸 인천부윤으로 승진하고, 1902년 7월 경무청 경무국장으로 자리를 옮겼다가 한 달쯤 지나 또다시 인천감리로 부임했다. 이후 육군 보병 정위(대위), 일본공사관 1등 참서관과 주임관 등을 거쳐 1905년 10월 인천감리로 되돌아왔고, 1906년 3월 농상공부 공무국장으로 임명됐다. 7년에 걸쳐 여러 차례 인천감리를 지내면서 사실상 인천지역을 총괄했다. 러일전쟁을 비롯해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정세가 긴박하게 돌아가던 시기에 고종은 하상기를 국제도시인 인천을 맡을 적임자라고 판단했다. 이원규 작가는 "하상기가 일본 등지에서 첩보를 수집해 왔을 것"이라며 "경찰 간부, 인천감리 등을 지낸 것도 이와 관련이 있어 보인다"고 했다.하상기가 인천감리로 재직할 때 김란사는 미국 유학 중이었기 때문에 남편과 인천에 머물지는 않았을 것이다. 다만 김란사의 부친은 1911년 인천으로 이주해 평양, 경성, 인천 등 3개 도시를 아우르는 '평경인상회'를 운영하는 등 무역업에 종사했고, 이후 후손들 상당수도 인천에 정착했다고 한다. 김란사가 유학을 마치고 귀국해 1907년부터 이화학당에서 학생들을 가르칠 때는 서울에서 살았을 것으로 보인다. 당시 김란사는 여성교육에 힘쓰면서 황실 통역사 등으로 활동하며 고종에게 은장을 받는 등 황실과 깊은 관계를 맺고 있었다.김란사가 돌아온 이후 관직에서 물러난 하상기는 어디에 있었을까. 이때 그의 행적을 보여주는 공식적인 기록은 없지만, 언론인 김동성(金東成·1890~1969)이 경향신문 1967년 11월 8일자에 기고한 '나의 사우사 <13> 하란사 부인'에는 1908년께 하상기가 중국 상하이에 망명 중이었다는 내용이 나온다. 중국 유학 중 여름방학을 맞아 귀국하다가 상하이에서 김동성을 만난 하상기는 "집에서 아무도 모르게 중국으로 피신한 지 두 달이 되어 나의 생사를 우리 집에서 모르고 있으니 편지 한 장 전해주면 고맙겠소"라고 부탁했다. 김동성은 편지를 갖고 귀국해 서울 동대문 밖에 사는 하상기 집에 들렀고, 김란사가 반갑게 맞으며 극진하게 대접해 줬다고 회고했다. 하상기가 왜 상하이로 망명했는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이후에도 하상기의 행적은 묘연하다.김란사는 당시 여성들에게 '시대의 아이콘'이었다. 고종이 1919년 1월 21일 갑작스럽게 승하하면서 무산됐던 파리강화회의 한국 대표 파견 계획이 재추진되면서, 여성계에서는 김란사를 파리에 보내자는 움직임이 일었다. 독립운동가 황에스터(1892~1971)는 서울신문이 발행한 월간지 '신천지' 1946년 3월호에 쓴 '3·1운동과 여성의 활약'이라는 글에서 "나는 조선 안 여학생을 단합하여 운동을 일으키고 파리회의에 하란사씨를 파견할 기금 모집을 할 겸 귀국했다"며 "파리회의에 우리 대표를 보낸다 하니까 돈을 낸다 의류를 낸다 노리개 화장품을 내놓는다 야단이었다"고 했다. 황에스터는 일본 유학 중인 1919년 2월 귀국해 3·1운동 이후 평양에서 김란사를 파리로 파견할 비용을 모금했고, 같은 해 3월 19일 기금을 전하려다 서울에서 체포됐다.파리로 향하던 김란사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지금까지도 명확하게 풀리지 않은 의문이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기관지 '독립신문' 1920년 1월 22일자에 실린 애국부인회의 김란사 등 세 애국여사 추도회 기사에는 그가 1919년 봄 고종의 다섯째 아들 의친왕의 밀칙으로 파리강화회의에 출석하려고 중국 베이징에서 여행을 준비하던 중 유행성 감모(감기)에 걸려 세상을 떴다고 나온다. 이원규 작가가 발굴한 베이징 일본영사관의 김란사 사망 관련 보고서도 현지 중국신문을 인용해 유행성 감기가 사인이라고 했다. 하지만 세간에는 독살설도 퍼졌다. 미국 내 한인교포들이 발행한 '신한민보'는 1919년 4월 24일자 신문의 김란사 부고 기사에서 '그 사유는 도무지 알 수 없는 일인바'라고 보도했다. 김동성도 앞서 경향신문 글에서 '일본인 앞잡이에게 살해를 당했다고 하나 그 진상은 오리무중에 파묻혀 밝혀지지 않았다'고 썼다. 조선일보 기자였던 최은희(崔恩喜·1904∼1984)도 생전에 김란사에 대해 쓴 글을 통해 '장례에 참가했던 미국 성공회 책임자 베커에 의하면 시체가 시커먼 게 독약으로 인한 타살로 추측된다고 말했다'고 전했다. 또 최은희는 같은 글에서 장례를 치르기 위해 베이징에 온 하상기가 '베이징에 가는 도중 봉천에서 어떤 동지를 만나 속뜻을 이야기한 게 오히려 그녀가 위해를 입은 원인이 됐다'고 한탄했다는 소문이 파다했다고도 썼다. 3·1운동 전후로 일본의 탄압이 더욱 거세진 당시 상황을 고려하면, 김란사의 독살설은 뚜렷한 증거가 부족하다는 이유로 지나칠 수 없는 좀 더 검증이 필요한 역사과제다.출생지 또한 명확하지 않다. 국가보훈처 독립유공자공훈록은 '독립신문' 1920년 1월 22일자 기사를 근거로 김란사의 출생지를 평안남도 안주라고 기록하고 있으나, 유족들은 평양 출신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안주에서 태어나 평양으로 이주했을 가능성도 있다. 김란사가 미국 오하이오 웨슬리언대학에서 취득한 한국 여성 첫 '문학사'(Bachelor of Literature) 학위는 최근까지 쓰인 상당수 글에서 현재 통용하는 문학사(Bachelor of Arts)로 다르게 표기하고 있다. 인천시여성단체협의회가 2008년 펴낸 '역사 속의 인천 여성'에서 '하란사'로 소개된 김란사 이야기는 미국 유학 과정, 문학사 학위 취득 시기, 중국 망명 등 틀린 내용이 허다하다.김란사와 하상기 부부를 인천 개항장의 '도시서사자원'으로 활용하자고 제안한 김창수 인천연구원 부원장은 "선각자적 여성인 김란사와 인천감리 하상기 이야기는 교차구조로 극적 구성이 가능한 콘텐츠이지만, 아직 기초연구가 미비하다"며 "연구를 통한 체계적인 정리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박경호기자 pkhh@kyeongin.com미국 오하이오 웨슬리언대학 유학 당시 김란사. /이원규 작가·이화여대 이화역사관 제공주일공사관 1등 참서관 재직 당시로 추정되는 하상기. /이원규 작가·이화여대 이화역사관 제공'독립신문'에 실린 김란사 등 '삼 애국여사의 추도회' 기사. /이원규 작가·이화여대 이화역사관 제공고종이 1909년 해외 여성 유학생 환영회와 관련해 김란사에게 수여한 은장. /이원규 작가·이화여대 이화역사관 제공김란사가 중국 베이징에서 사망한 사실을 담은 주일본공사관 보고서. /이원규 작가·이화여대 이화역사관 제공김란사는 1916년 미국 뉴욕 사라토가에서 열린 세계감리교총회에 한국교회 평신도 대표로 파견되기도 했다. 세계감리교총회 한국 대표 파견 기념사진으로 앞줄 왼쪽에서 5번째 서양식 복장을 입은 여성이 김란사다. /이원규 작가 제공

2019-05-15 박경호

[독립운동과 인천·(12)]여성교육자 김란사(下)

감리 출신 사위 하상기 영향력 도움인천고와 인연등 복지·교육에 힘써김란사(金蘭史·1872~1919)와 인천의 인연은 인천감리를 지낸 남편 하상기(河相驥·1855~1920)에게서만 찾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평양과 서울에서 객주업을 했던 김란사 집안은 1911년 인천 중구 유동(율목동)으로 이주해 '평경인상회'를 운영했다고 한다. 평양~경성(서울)~인천을 잇는다는 의미인 평경인상회는 평양·서울·인천지역을 중심으로 해외에서 비단, 면직물을 떼다 판 무역회사였다. 인천이 평양과 서울의 중간지대이자 상권의 중심지 역할을 했다는 역사적 근거로도 볼 수 있다. 김란사의 친정 조카손자인 김용택씨는 "증조부의 사업을 조부가 이어받았고, 아버지가 평경인상회를 맡아서 해방 직전까지 운영했다"며 "이후에도 후손들이 인천에 정착해 살았다"고 말했다.김란사 집안은 사위인 하상기의 영향력에 도움을 받기 위해 사업거점을 서울에서 인천으로 옮긴 것으로 보인다. 하상기는 1899년부터 1906년까지 7년여에 걸쳐 여러 차례 인천감리를 지냈다. 인천감리는 당시 제물포 개항장이 중심인 인천의 행정과 국제관계는 물론 재판소 판사까지 겸임한 지역의 최고 관리였다. 특히나 하상기는 열강의 각축장인 개항장을 총괄하는 직책을 맡을 정도로 고종의 신임을 받았다.하상기는 인천에서 복지사업과 교육사업에도 힘썼다. 대한매일신보는 1906년 3월 8일자 신문에 '하씨미정'(河氏美政)이라는 제목으로, 인천감리 하상기가 인천항의 회사들과 협의해 민의소를 창설하고, 매달 60~70명의 가난한 병자를 무료로 치료해줬다고 보도했다. 황성신문은 1899년 10월 13일자에 '인천감리 하상기씨가 영종진에 소학교를 세워 인민을 교육하겠다고 학부에 청원했다더라'는 기사를 썼다. 하상기가 인천감리로서 외국어학교 교장을 겸임했다는 황성신문 1903년 6월 3일자 기사도 있다. 이 기사에 나오는 외국어학교는 현 인천고등학교의 전신인 관립한성외국어학교 인천지교(1895년 개교)다. 하상기가 인천고등학교와도 연결된다는 점이 눈길을 끈다. /박경호기자 pkhh@kyeongin.com

2019-05-15 박경호

[인천의 얼굴·(10)]고려인 빵집 사장 이가인씨

옛 소련지역으로 옮겨 살아온 '한인 3세'2004년 남편과 이주…연수구에 6천명 살아인천 연수구에 사는 우즈베키스탄 출신 고려인 3세 이가인(36) 씨입니다. 2004년 우즈베키스탄인 남편과 함께 한국에 왔습니다. 꼭 1년 전인 작년 5월 연수동 함박마을에 '아써르티'란 이름의 빵집을 차렸습니다. '아써르티'는 러시아어로 '종류별로 다 있다'는 뜻이라고 합니다. 이름대로 빵뿐만 아니라 한국에서는 구하기 어려운 우즈베키스탄과 러시아 식료품도 팝니다. 빵을 주식으로 해서 그런지 종류만 10가지가 넘습니다. 가게를 하기 전 집에서 만든 것을 나누어 먹은 주위 사람들이 '고향의 맛'이라면서 빵집을 권유했습니다. 장사가 잘 됩니다. 한국 사람들이 30% 정도를 차지합니다.옛 소련지역에 이주해 살던 한인과 그 후손을 고려인이라고 하지요. 고려인은 3세까지 동포로 인정받아 재외동포비자를 받아 한국으로 이주할 수 있습니다. 국내에는 고려인 7만여명이 살고 있습니다. 이들 중 연수구에만 약 6천명이 살고 있지요. 이가인씨의 원래 이름은 '제버 사비로사'입니다. 한국식 이름을 쓰는 게 여러모로 나을 것 같아 이주하면서 바꾸었습니다. 이주 이듬해 한국에서 태어난 딸은 이제 중학교 1학년이 되었습니다.이가인 씨의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는 한반도 동북쪽인 러시아 연해주에 살았었는데 1930년대 스탈린 정권의 이주정책으로 정반대쪽인 우즈베키스탄 호라즘 지역으로 강제로 옮겨야 했습니다. 이가인 씨의 어머니는 6남매 중 넷째였는데 우즈베키스탄인과 결혼했습니다. 어머니 형제들은 한국말로 대화를 했습니다. 또한 외할머니는 끝까지 온돌방을 고집했습니다. 어머니가 한국말을 쓰고, 외할머니가 한국식을 잊지 않으셨던 것처럼 이가인씨는 한국에서 계속 살 생각입니다.그런데 우리는 왜 러시아로 이주한 한인들은 고려인이라 하고, 중국으로 넘어간 사람들은 조선족이라고 할까요. 이가인씨를 보면서 문득 그런 생각이 듭니다. 글/박경호기자 pkhh@kyeongin.com 사진/김용국기자 yong@kyeongin.com※'인천의 얼굴'을 찾습니다. (032)861-3200이메일 : say@kyeongin.com사진/김용국기자 yong@kyeongin.com

2019-05-12 박경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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