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인천)

[zoom in 송도]'아트센터 인천' 1단계 시설 준공… '바다 + 아트 + 인간' 담은 대표문화공간 설레는 하모니

글로벌 금융위기·주주사 갈등 극복8년6개월만에 준공 '국내 3위' 규모경제청 시험 운영 거쳐 상반기 개관오페라하우스 등 '2단계 사업' 계획 NSIC와 추진여부·운영 방식 '숙제'인천 송도국제업무단지에 건립된 '아트센터 인천' 콘서트홀이 마침내 준공 절차를 완료했다. 공사를 시작한 지 8년 6개월 만이다.그동안 글로벌 금융위기, 사업시행사 내부 갈등 등 우여곡절이 많았다. 인천경제자유구역청은 송도국제업무단지 사업시행사인 NSIC(송도국제도시개발유한회사)로부터 콘서트홀을 넘겨받아 올 상반기 중 개관할 계획이다.'아트센터 인천' 콘서트홀 건립 과정과 과제를 정리했다.■ 착공 8년 6개월 만에 드디어 준공인천경제청은 인천을 대표하게 될 문화시설 '아트센터 인천' 콘서트홀이 지난달 29일 준공됐다고 밝혔다.송도국제업무단지 사업시행사인 NSIC는 2009년 6월 '아트센터 인천' 콘서트홀 공사를 시작했다. 하지만 콘서트홀 건립공사는 글로벌 금융위기로 인해 얼마 지나지 않아 중단됐다. 2012년 10월 공사가 재개됐지만, 이번엔 NSIC 주주사 간 갈등이 발목을 잡았다.NSIC 주주사인 게일인터내셔널과 포스코건설이 갈등을 겪으면서 2015년 하반기부터 또다시 사업이 정상적으로 추진되지 못한 것이다. 이런 어려움 속에서도 콘서트홀은 완성됐다. 그러나 게일과 포스코건설 간 갈등이 지속되면서 준공(사용승인) 신청은 1년 넘게 지연됐다.'아트센터 인천' 콘서트홀은 NSIC가 주거시설(아파트 1천861세대) 개발이익금으로 건립했으며, 인천시에 기부채납하게 돼 있었다.인천경제청은 게일과 포스코건설의 갈등으로 송도국제업무단지 개발이 지연되자, 중재에 나섰다. 인천경제청·게일·포스코건설은 지난해 10월 회의에서 콘서트홀 준공부터 처리하기로 합의했다. 그 후속 조치로 NSIC는 문화예술진흥기금을 납부하고 12월22일 건축물 사용 승인 신청서를 인천경제청에 제출했다.인천경제청은 연수구청 등 관계 기관 협의를 거쳐 12월29일 준공 절차를 마무리했다. 인천경제청은 기부채납 완료, 시험운영 등의 절차를 거쳐 올 상반기 중 콘서트홀을 개관할 계획이다.■ 국내 3위 규모의 콘서트홀'아트센터 인천' 콘서트홀은 지휘하는 마에스트로의 손 모습에서 영감을 얻어 설계됐다. 독특한 외관을 가지고 있어 송도의 또 다른 랜드마크로 자리매김할 것으로 인천경제청은 기대하고 있다.콘서트홀은 '바다+아트+인간'의 개념이 고려된 독창적인 정체성(Identity)을 부각했으며, 외장은 컬러콘크리트를 적용해 건축학적으로도 의미가 있다. 내부는 세계적인 수준의 음향을 위해 내·외부 소음과 진동 차단시설을 갖추는 등 기능적으로도 우수하다. 1천727석으로, 규모 면에서 국내 3위에 해당한다.인천경제청 관계자는 "콘서트홀이 시민들에게 사랑받는 송도국제도시의 대표적인 문화공간으로 자리 잡고 세계적인 공연을 감상하려는 관광객을 끌어들이는 등 인천의 새로운 자랑이 될 것"이라고 했다.■ 콘서트홀 운영은 어떻게NSIC는 당초 '아트센터 인천'을 인천시에 기부채납하면서 운영비를 지원하기로 했었다. 하지만 '운영비 지원'은 일부 부대시설을 기부채납하는 것으로 변경됐다.인천경제청이 NSIC에게서 넘겨받은 부대시설을 임대해 운영비를 마련해야 하는 구조다. 인천경제청은 NSIC로부터 호텔(202실)을 기부채납 받을 예정이다.인천경제청 관계자는 "호텔 수익 일부를 콘서트홀 운영에 쓰고, 부족한 운영비는 예산에서 충당할 계획"이라고 했다. 올해 인천경제청 예산에는 콘서트홀 비품 구매비 및 관리·운영비로 63억 원이 반영돼 있다.내년부터는 콘서트홀 운영에 약 50억 원이 필요할 것으로 인천경제청은 추산하고 있다. 공연기획비를 어느 수준으로 책정하느냐에 따라 운영비 규모가 달라질 수 있다고 한다.■ 운영 조직 및 NSIC 내부 갈등 해소 필요인천경제청 조직에 '아트센터인천운영준비단'이 있지만, 이는 정식 부서가 아닌 TF(태스크포스)팀이다. 콘서트홀이 준공했기 때문에, 이제는 정식 부서를 만들 필요가 있다. 홍보·공연기획 전문가 등 인력 충원도 필요하다.콘서트홀 건립은 '아트센터 인천' 1단계 시설이다. 오페라하우스(1천439석)와 뮤지엄(2만 373㎡)을 짓는 2단계 사업이 계획돼 있다.그러나 NSIC 주주사 갈등, 사업성 악화 등으로 추진 여부와 방식도 아직 확정되지 않았다. NSIC 주주사 간 갈등이 해소되지 않으면, 콘서트홀 기부채납도 늦어질 수 있어 올 상반기 개관에 차질이 생길 수 있다.인천경제청은 향후 2단계 시설과 함께 운영비 마련을 위해 상업시설 2만9천388㎡를 기부채납 받을 예정이며, 1·2단계 사업이 모두 완료되면 (가칭)아트센터인천운영재단 설립을 검토할 방침이다. /목동훈기자 mok@kyeongin.com'아트센터 인천' 1단계 시설인 콘서트홀 외관 /인천경제자유구역청 제공콘서트홀 공연장 모습콘서트홀 연회장 모습

2018-01-07 목동훈

[실향민이야기 꿈엔들 잊힐리야·50(끝)]평안남도 강서군 봉황리 출신 황윤걸 할아버지(下)

부친 자수성가 땅 수천평 가진 '중농' 집안목화가꾸기 좋은 최씨 집성촌 '최촌' 거주밤참 '냉면' 손님 대접용 '노티' 맛 못 잊어고구마·함종밤도 유명… 바다와도 가까워고당 조만식 배출한 교육열 높은 강서지방유격부대 전력 탓 이산상봉 신청조차 못해"나 때문에 피해 본 가족위해 밤마다 기도"황윤걸(85) 할아버지 고향은 평안남도 강서군 함종면 봉황리다. 1952년 군·면·리 폐합에 따라 증산군 안석리로 개편됐다가 1958년 온천군 안석리가 됐다. 황윤걸 할아버지의 부친은 자수성가했다. 부친은 9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 본가가 있는 최씨네 집성촌에서 이집 저집 돌아다니며 농사일을 했다.낫 놓고 기역(ㄱ)자도 모를 정도로 일자무식이었지만, 누구보다 부지런했다. 돈을 모아 조금씩 땅을 샀다. 황윤걸 할아버지가 태어날 즘에는 수천 평을 가진 중농(中農)이 됐다. 근면과 성실로 가난을 극복한 것이다. "부모님은 해 뜨기 전에 논에 나가서 별을 보고 들어오곤 했어. 아버지와 어머니가 고생한 것을 보고 자라서 그런지 그 정신(근면·성실)을 잊은 적이 없어."황윤걸 할아버지가 살던 마을은 '최촌'이다. 최씨네 집성촌이라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최촌은 마을 옆에 큰 다리가 있다고 해서 '큰다리마을'이라고도 불렀다. 그 주변에 '어촌'과 '한촌'이 있어서 3개 마을 간 경쟁이 치열했다고 한다. "어촌은 고기 어(魚)자를 써. 어촌 사람들은 평범하게 살았어. 한촌은 머리 좋은 사람이 많았고, 우리 마을 최촌은 돈이 많았어."조선 후기 실학자 이중환(1690~1756)은 '택리지'에서 오곡과 목화 가꾸기에 알맞은 땅을 살기 좋은 곳이라고 했다. 황윤걸 할아버지 고향인 최촌이 바로 그랬다. 최촌은 목화가 많아서 겨울철 농한기에도 일거리가 있었다. 한 해 농사가 끝나면 아낙네들이 목화로 천을 만들어 팔았다. '택리지'에도 '평안도는 산속 고을 가운데는 심는 곳이 드물지만, 들판 고을에는 목화 가꾸기에 알맞지 않은 곳이 없다'고 기록돼 있다.고려 말 문신 문익점(1329~1398)과 그의 장인 정천익(생몰년 미상)이 목화 재배에 성공한 것은 1365년이다. 목화 재배는 삼남 지방을 중심으로 이뤄지다가 점차 평안도와 황해도 등 전국으로 퍼졌다. 1475년 성종 6년 4월27일자 '성종실록' 기록을 보면 국가 정책적으로 평안도에서 목화 재배가 이뤄졌음을 알 수 있다. "목화는 백성들의 옷감인데 남쪽에서만 생산되고, 평안도와 황해도 등 서북도에서는 생산되지 않습니다. 평안도 등에 목화씨를 보내 백성들이 재배해야 한다"는 신료들의 건의를 받고, 성종은 목화씨를 이들 지역에 보내 심게 한 후 관찰사에게 수확 상황을 보고하게 했다.여성의 일이 많다 보니 자연스럽게 가사 분담도 이뤄졌다. "여자들이 물레로 목화에서 실을 뽑고 베틀로 천을 짜야 하니까 바쁘지. 우리 동네는 겨울철에 남자들이 애를 봐야 했어."최촌 남자들은 겨울철에 윷놀이를 많이 했다. 날씨가 추우니까 방 안에 모여 앉아 팥알의 절반을 쪼개 윷놀이를 했다. 황윤걸 할아버지는 "팥으로 하는 윷놀이지. 바쁜 부녀자들 도와줘야 하니까 남자들이 등에 애를 업고 윷놀이를 했다"고 말했다.겨울철에는 냉면을 밤참으로 먹었다. 동치미 국물에 메밀로 만든 면을 넣어 만들었는데, 고향에서는 냉면이 아닌 '국수'라고 불렀다고 한다."겨울에 목화 일을 도와주면 냉면으로 밤참을 주는 집이 있어. 동치미 국물에 면은 메밀이지. 이북 곡식은 풀기가 많아서 메밀 면을 만들 때 밀가루를 조금만 넣어도 돼. 추운 날씨에도 몸을 부들부들 떨면서 먹었었지. 웬만한 집에는 면 뽑는 기계가 있었어."할아버지는 '칼국수'와 '노티'도 기억이 난다고 했다. 고향의 칼국수는 닭고기를 우려낸 국물로 만들었으며, 큰손님이 왔을 때나 먹을 수 있는 귀한 음식이었다. 전병의 일종인 '노티'는 추석 때 먹을 수 있었다. 할아버지는 "기장가루를 엿기름으로 삭혀서 만들면 설탕을 넣은 것처럼 달게 된다"며 "단지에 차곡차곡 넣어 두었다가 명절 때나 귀한 손님이 오면 기름에 지져서 먹었다"고 했다.작가 황석영은 지난 2001년 '노티를 꼭 한 점만 먹고 싶구나'라는 책을 냈다. 책 제목은 평양 출신의 모친이 암으로 돌아가시기 며칠 전에 몇 번이나 며느리에게 하셨던 말씀이다. 황석영은 1989년 방북했을 당시 평양에서 어머니의 여동생인 막내 이모를 만났다. 이모는 노티를 주면서 만드는 법까지 알려줬다.'요즈음 구수한 기장쌀을 구하기 힘들 테니 찹쌀을 빻아다 시루에 찐다. 엿기름가루에 물을 내려 우려낸다. 익은 찹쌀가루와 엿기름가루를 섞어 우려낸 엿기름 물을 붓고, 소금 간을 하고 참기름 넣어서 반죽을 한다.'"이남 것은 과일도 밭작물도 별로 맛이 없다"고 황석영의 어머니는 말씀하시곤 했다. 황석영은 위도나 기후상 이북 지방의 작물 맛이 월등한 것도 있지만 "어머니의 입맛은 고향을 그리는 향수였던 셈이기도 했다"고 여긴다.황윤걸 할아버지가 살던 집은 'ㄷ'자형 벽돌집이었다. 흙집과 초가집에서 살다가 부친이 마을 변두리에 집을 지었다고 한다. 동향집이며 안채·사랑채·부엌·광·외양간·뒷간으로 이뤄졌다. 'ㄷ'자 가운데 마당에는 우물이 있었다. 겨울에 고구마 등의 곡식은 안방에 보관했다고 한다."농사지은 거 밖에 못 내놔. 얼어버린다고. 안방 구석에 수숫대를 엮어서 그 안에 고구마를 뒀지."1997년 나온 '평안남도지'를 보면, 1938년 강서군에서 가장 많이 생산된 채소는 고구마다. 강서군의 고구마 생산량은 평남 16개 시·군 가운데 용강군 다음으로 많았다.할아버지 고향은 밤도 유명했다. 평남 함종은 밤이 많이 나는 곳으로, 여기서 나오는 밤을 '함종밤'이라고 했다. 최영전씨가 쓴 '한국민속식물'에 따르면 평안도에서 나는 함종밤은 알이 잘고 단 약밤으로, 중국 종의 감율(甘栗)이다. 함종밤은 속껍질이 쉽게 벗겨지는 특징이 있다."그게 함종밤이야. 유명하다고. 크지도 않은데 까면 잘 벗겨져. 푸석푸석하지 않고 차지면서 달아. 한 달 정도 둔 뒤에 발로 누르면 밤알이 쑥쑥 나와. 닦아서 말리면 오래 보관할 수 있지."황윤걸 할아버지 고향 '안석리'는 바닷가 안쪽에 있는 마을이라는 뜻이다. 실제로 바다와 가깝다. 할아버지는 "어렸을 때 망둥이 낚시를 많이 다녔다. 조개도 많이 잡았다"며 "겨울철에 논에서 썰매를 타는데 물에 많이 빠졌다. 바닷가 옆이라서 염분 때문에 딱딱하게 얼지 않는다"고 했다. 할아버지는 서해 바닷가에서 놀았던 추억 때문인지 강화도에 가면 고향에서 낚시했던 생각이 난다고도 했다.황윤걸 할아버지의 부친은 교육열이 대단히 높았다. 황윤걸 할아버지는 2대 독자다. 일제강점기 집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국민학교를 다니다가 해방 후 마을 근처에 개교한 초등학교로 전학을 왔다. 중등교육을 받아서, 한국전쟁 때 잠시 인민학교 교사로 일할 수도 있었다. 정치가이자 독립운동가인 고당 조만식(1883~1950)도 평남 강서군 출신이다. 고당기념사업회가 엮은 조만식 전기(북한 일천만 동포와 생사를 같이 하겠소) 발간사에는 강서군에 대한 설명이 있다.'1910년 한일병탄이 일어나기 전, 평안도에서 교육 열풍이 가장 크게 불어 닥친 곳이 바로 강서 일대였다. 강서 지방은 스스로 개화하고 근대화한 곳이라 할 수 있다. 기독교라는 종교의 힘도 컸지만 교육의 힘이 더욱 컸다.'평양 출신 시인 양명문(1913~1985)은 함종을 찾았다가 밤나무골에 있는 한 연못을 보고 시(詩) 한 편을 얻었다. '샘가에서'라는 시다.'푸른 산 솟은 밑에 솟는 맑은 샘 / 복숭아 꽃이파리 샘물에 떨어지니 / 그 옛날의 네 모습이 샘물 위에 그려진다 / 아 지나간 그 옛날의 아름다운 추억이여 / 아롱진 가지가지 감격에 찬 그때 일이 / 내 가슴에 펴오른다 내 가슴에 사무친다''샘가에서'는 평남 안주 출신의 작곡가 김동진(1913~2009)이 곡을 붙여 가곡으로도 사랑을 받았다.황윤걸 할아버지 가족은 조모, 부모, 누나, 여동생 3명 등 모두 8명이었다. 하지만 혼자 월남했다. 할아버지는 한국전쟁 당시 동키 제9부대(평남부대)에 소속돼 평남지역에서 작전을 수행하다가 휴전 한 달 전에 남한에 왔다. 동키 부대 유격대원으로 활동한 전력 때문에 이산가족 상봉 신청도 하지 못했다. 북한 땅에서 군번도, 계급도 없이 목숨을 걸고 싸웠지만 지금까지 제대로 된 보상도 받지 못했다."그냥 피란 나온 것도 아니고 서해안에서 작전하며 다닌 유격군 출신인데, 이산가족을 찾아? 이북에서 말하는 제일 악질분자가 바로 나야." 할아버지는 "내 신분이 노출됐을 거야. 나 때문에 가족들이 피해를 봤을 것으로 생각하고 있어…. 그러니까 지금도 나는 밤에 기도를 하고 자. 우리 가족에게 문안을 올리는 거지."황윤걸 할아버지는 죽기 전에 꼭 한 번 고향 집에 가보고 싶다고 했다. 특히 몸이 아플 때 고향 생각이 많이 난다고 했다. "왜 그런지는 모르지. 아프면 그냥 고향 생각이 떠올라." 할아버지의 눈시울이 붉어졌다.글/목동훈기자 mok@kyeongin.com 사진/임순석기자 sseok@kyeongin.com배구와 축구 등 운동을 좋아했던 평안남도 강서군 함종면 봉황리 최촌 마을의 청년이 80대 중반의 노인이 됐다. 황윤걸 할아버지는 한국전쟁 당시 홀로 고향을 떠나 유격대원으로 활동하다가 월남했다. 인천 부평 벽돌공장에서 일하는 등 고생도 많이 했지만, 그것보다 유격대원으로 활동한 자신 때문에 이북에 있는 가족이 피해를 본 것 같아 죄스럽다고 했다. 황윤걸 할아버지는 매일 밤 잠자리에 들기 전에 기도를 한다. 이북에 있는 가족에게 문안을 올리는 것이다. 할아버지는 이렇게 실향민으로서의 아픔과 괴로움을 간직한 채 살아왔다. 가족과 다시 만날 날을 기다리며. /임순석기자 sseok@kyeongin.com딱 한 장 남은 사진! 황윤걸 할아버지는 배구와 축구 등 운동을 잘했다. 평안남도 강서군 신정면에 있는 신정중학교를 다닐 때는 배구선수를 했다. 이 사진은 강서군에서 주최한 배구대회에서 우승한 것을 기념해 촬영한 것으로, 뒷줄 오른쪽에서 두 번째가 황윤걸 할아버지다. 1948년이나 1949년이라고 할아버지는 기억했다. 황윤걸 할아버지는 "중학교 3학년 때 군(郡) 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한 후 학교에 와서 찍은 사진"이라고 했다. 한편, 신정면은 1952년 군·면·리 폐합에 따라 증산군에 편입되면서 폐지됐다. /황윤걸 할아버지 제공일러스트/박성현기자 pssh0911@kyeongin.com

2017-12-27 목동훈

[실향민이야기 꿈엔들 잊힐리야·49]평안남도 강서군 봉황리 출신 황윤걸 할아버지(中)

8남매 둔 황인옥씨 부부 친아들처럼 챙겨평남부대·육군 복무하다 건강 탓에 제대부친 따라 몇년간 부평 벽돌공장서 일해당시 사택을 본적으로, 회사 주소와 일치브로커 통해 의정부 미군부대서 15년 근무이후 서울 수유리서 통닭집 열어 큰돈 벌어인천으로 터전 옮기자 장사안돼 다시 서울로1980년에 돌아와 우유 보급소·대리점 운영도한국전쟁 때 평안남도 앞바다 섬에서 동키 평남부대 유격대원으로 활동하던 황윤걸(85) 할아버지는 휴전을 한 달 정도 앞둔 1953년 6월 중순 인천 용유도에 왔다. 약 400명의 대원이 용유도에 왔는데, 이 중 절반은 각자 살길을 찾아 떠났다. 황윤걸 할아버지 등 나머지 대원들은 이듬해 2월 부대가 육군에 편입될 때까지 용유도 24인용 막사에서 군 생활을 했다.황윤걸 할아버지는 용유도에서 새로운 부모님을 만났다. 1911년생 황인옥 씨 부부다."부대가 주둔해 있으려면 주민들 협조가 필요하잖아. 면장도 지내고 학식이 있는 사람이라고 해서 찾아갔더니 그 집이 마침 황씨야. 그래서 나랑 결연이 됐어. 부모가 된 거야." 황윤걸 할아버지는 "슬하에 8남매가 있었는데, 나까지 9명이 됐다"며 "어머니가 나를 친아들처럼 잘 챙겨주셨다"고 덧붙였다.그때는 용유도와 영종도가 지금처럼 하나의 섬이 아니었다. 이 지역은 염전과 농경지 조성을 위한 소규모 매립만 있었는데, 1992년 인천국제공항 건설을 위해 대규모 매립사업이 이뤄졌고, 이때 용유도와 영종도 사이의 갯벌이 매립됐다. 영종·용유지역은 기존 토지 면적보다 매립된 토지 면적이 더 크다. '인천 중구사'에 따르면, 1990년대 국가사업으로 공항과 배후 신도시 건설이 이뤄지면서 4천813만5천㎡ 규모의 해안 매립이 시행됐다. 이 일대에서는 영종도 준설토 투기장 조성, 영종2지구 개발 등 지금도 공유수면 매립이 진행되고 있다.황윤걸 할아버지는 "옛날에는 영종도와 용유도 사이에 돌다리가 있어서 바닷물이 빠지면 건너다닐 수 있었다"며 "인천공항 전망대 아래쯤에 돌다리가 있었던 것 같다"고 말했다.할아버지는 평남부대가 육군에 편입된 뒤 505수송단 자동차대대에서 계속 군 생활을 하다가 간부후보생을 뽑는 시험에 합격했다. 하지만 교육을 받던 중 건강에 문제가 생겨 1955년 9월 제대할 수밖에 없었다.할아버지는 인천 부평으로 왔다. 새 아버지 황인옥 씨가 부평 벽돌공장에 취직하면서 가족이 용유도에서 부평으로 이사를 왔기 때문이다."아버지가 부개동 벽돌공장에 총무로 계셨어. 연와공장이라고 하는데, 허허벌판에 있는 공장이 엄청 컸어."황윤걸 할아버지도 벽돌공장을 다녔다. 기술이 없어서 모래와 흙을 차에 싣는 일을 했다."그때는 먼저 삽자루를 쥐는 놈이 일을 하는 거야. 새벽 4시쯤 통행금지가 해제되면 창고로 뛰어가는 거지. 지금으로 따지면 일당을 받는 거야."할아버지 본적은 부평구 부개동 120번지로 돼 있다. 황인옥 씨 집 주소를 본적으로 정한 것인데, 이는 부평연와주식회사 주소와 일치한다. 황인옥 씨 가족이 벽돌공장 사택에서 생활했기 때문에 공장 주소와 황윤걸 할아버지 본적이 같은 것이다. '우리나라 벽돌사'라는 책에는 연도별 연와공장 현황이 정리돼 있다. 황윤걸 할아버지가 일했던 '부평연와합자회사'는 최성순 씨가 1946년 경기도 인천시 부개동 120번지에 설립한 것으로 돼 있다.벽돌공장은 일제강점기에 많이 생겼다. 일제가 우리나라의 좋은 흙과 인력을 활용해 벽돌을 대량 생산한 것이다. 일종의 자원·노동력 착취였다. 해방 이후 우리나라 사람이 불하를 받아 운영했다. 한국전쟁으로 부산 등 일부 지역을 제외한 전국 대부분의 벽돌공장이 문을 닫았다. 하지만 휴전 이후 복구 작업이 이뤄지면서 벽돌공장은 호황을 누리게 됐다.인천 최초 벽돌공장은 1906년 4월 아키타(秋田)가 창립한 '추전상회요업부'다. 주소는 경기도 인천 비랑리로 돼 있다. 지금의 남구 용현동이다. 이후 1920년 4월 산야정(山野井)요업공장, 1932년 2월 인천요업주식회사, 1939년 4월 조선요업주식회사 등 일본인 벽돌공장이 생겼다.이들 공장에서 나온 벽돌은 인천 개항장 일대의 건축물을 짓는 데 사용됐을 것으로 추정된다. 인천시사편찬위원회가 발간한 '인천의 건축'에 따르면 1889년 인천에서 길성(吉盛)이라는 청국인 건축청부업자가 벽돌 성형기를 반입해 서구식 벽돌을 제조했다고 한다. 청국과 각국공동거류지에는 연와 또는 석재 혹은 철재로 견고하게 건축물을 지어야 한다는 규정(각국조계장정 제2조)이 있었다. 건축 자재는 인천항을 통해 들어왔으며, 1910년 이후 건축용 재료로 벽돌의 대량 제조가 가능해졌다.부평연와합자회사는 한국인이 운영한 인천의 첫 벽돌공장이다. 1947년에는 차태열 씨가 간석동 542번지에 조선요업주식회사를 세웠다. 이 회사는 한국적벽돌주식회사, 한국적연와주식회사, 한국적연와공업주식회사 등으로 상호가 변경되기도 했다. 1971년 북구 작전동에는 한일연와공업주식회사가 설립됐다.황윤걸 할아버지는 1957년 3월까지 부평 벽돌공장에서 일했다."구산동에 중앙병원(근로복지공단 인천병원) 있지? 그 근방에서 벽돌 만드는 모래가 나왔다고. 4명이 한 조가 돼 덤프트럭에 싣는 거지. 그때는 일반 트럭이 없으니까 군에서 후생사업이라고 해서 트럭이 나왔어." 모래를 한 차 가득 실을 때마다 마패를 1개씩 줬다고 한다. 이것을 사무실에 주면, 보름 또는 한 달 단위로 계산해 돈을 줬다.벽돌공장에는 다양한 일이 있었다. 황윤걸 할아버지처럼 모래와 흙을 차에 싣는 일부터, 벽돌을 굽는 사람, 차에 벽돌을 싣거나 내리는 사람 등도 있었다. '인천상공회의소 90년사'에는 1955년 부평연와합자회사 직원 수가 102명으로 나온다. 그 당시 부평지역 기업체 가운데 종업원 수가 가장 많다."상하차 작업은 벽돌 5장을 한 번에 던지고 받는거야. 맨손으로 하면 손바닥을 다치니까 자동차 타이어 튜브로 장갑을 만들어 썼어. 여자들은 '다대기'라고 해서 판때기로 벽돌을 두들겨 모양 잡는 일을 했지."부평연와합자회사가 있던 곳은 신도시 개발 등 택지개발사업으로 아파트 단지와 공원이 됐다. 부평연와합자회사는 부평동중학교 앞 사거리 북쪽에 있었다. 부평동중 인근 백영아파트와 대촌공원 자리에 사택이 있었다. 흙을 쌓아 놓고 흙벽돌을 만들던 공장 자리는 부개여고와 부개주공아파트가 차지했다. 가마 터에는 상일고와 웅진플레이도시가 들어섰다. 경기도 부천시 상동에 포함한다.황윤걸 할아버지는 "사택이 두 군데 있었다. 벽돌공장 위쪽 대부분이 논인데, 부천 상동 쪽으로 마을이 하나 있었다"며 "(인천과 부천 경계) 도로 가운데에는 수리조합에서 만든 개울이 있었다"고 했다.할아버지는 벽돌공장 일을 그만두고 의정부에 있는 미군 부대에 취직했다. 당시 미군 부대에 들어가려면 브로커에게 돈을 줘야 했는데, 황인옥 씨가 6개월치 월급에 해당하는 돈을 일수쟁이에게 빌려 마련해줬다. 황윤걸 할아버지는 1971년까지 미군 부대에서 일하다가 서울 수유리에 통닭집을 열어 큰돈을 벌었다."미군 부대를 15년 가까이 다니면서 집을 못 샀어. 근데 통닭집을 해서 4년 만에 수유리에 집을 산 거야. 생맥주를 함께 팔기 잘했지."처음에 7평짜리 가건물에서 장사를 시작했는데, 4년 만에 31평까지 확장했다. 장사가 잘되자, 건물주가 점포를 내놓으라고 했다. 그래서 권리금을 두둑하게 받고 그곳을 떠났다.황윤걸 할아버지는 1977년 인천 남구 주안동 인천법원·검찰청 도로 맞은편 건물 상가에 통닭집을 차렸다. 주안주공아파트 단지 옆에 있는 3층짜리 건물의 1층 코너 점포를 얻은 것이다. 집(주안주공 64동 501호)도 샀다. 하지만 벌이는 형편없었다."상권이 좋다고 해서 왔는데, 서울과 인천은 수준이 다른 거야. 인천사람들은 통닭을 안 먹더라고. 또, 아파트 사는 사람들은 죄다 석바위 쪽으로 가는 거야."통닭과 술장사로는 매출이 오르지 않자 점심에 순두부백반과 찹쌀막걸리를 팔았다. 하지만 석바위 사거리 상권을 이길 수는 없었다."석바위 쪽이 번창했지. 양주 파는 집도 있고, 생활필수품도 거기 다 있었으니까. 석바위가 신흥도시라고 해서 중구와 동구에 있는 사람들이 다 이사 왔어. 그때는 석바위가 엄청 커지는 줄 알았다고."법원·검찰청은 남구 학익동으로 이전했고, 공장이 차지하고 있던 그 자리엔 2016년 3월 인천가정법원과 인천광역등기국이 들어섰다. 5층짜리 연탄 난방의 주안주공은 고층 아파트(더월드스테이트)로 재건축됐고, 할아버지의 점포가 있던 곳에는 17층짜리 주상복합(보미리즌빌) 건물이 섰다.황윤걸 할아버지는 주안동 가게를 접고 서울에서 가구장사를 하다가 1980년 여름 인천에 다시 왔다. 서울우유 인천지구 구월보급소를 맡으면서 인천에 다시 정착한 것이다.할아버지는 간석동 희망백화점 인근에서 7년 정도 영업을 하다가 구월동 길병원 근처에 건물을 지어 1995년까지 직접 서울우유 대리점을 운영했다. 지금도 그 건물에 살고 있다."지금 시청 있는 곳은 배나무 과수원이었어. 주변에 인분을 모아 놓는 곳이 있어서 '똥고개'라고 했지. 구월주공, 상인천여중, 길병원 매점·식당에 우유를 납품해서 장사가 잘됐어."구월주공은 재건축을 통해 9천 세대에 가까운 대단지로 변했고, 상인천여중이 있던 곳에는 상인천초등학교가 들어왔다. 길병원은 본관을 중심으로 확장해 구월동에 '의료 타운'을 형성했다.할아버지는 도시가 변하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이런 생각이 든다고 했다."매제가 명절 때면 소래에 가서 고향 사람들을 만나고 했는데, 지금은 다 개발되고 없어지지 않았어? 요즘은 명절에 갈 곳이 없대. '형님은 고향이 있어 부러워요'라고 하더라고. 구글 지도로 고향(평남 강서군 함종면 봉황리)을 봤더니 건물만 바뀌었지 마을 형태는 변하지 않았어. 지금 당장에라도 찾아갈 수 있지. 갈 수 있어." 글/목동훈기자 mok@kyeongin.com 사진/임순석기자 sseok@kyeongin.com그래픽/박성현기자 pssh0911@kyeongin.com/아이클릭아트사진의 장소는 부평동중학교 앞 사거리다. 이 사거리 북쪽에 벽돌을 만드는 부평연와합자회사가 있었다. 황윤걸(85) 할아버지는 이 벽돌공장에서 모래와 흙을 덤프트럭에 싣는 일을 했다. 인천 부평과 경기도 부천 경계에 개울이 있었고, 그곳에서 목욕도 했었다고 한다. 황윤걸 할아버지가 1955~1957년 당시 벽돌공장 생활에 관해 설명하고 있다.1980년대 부평연와합자회사 벽돌막 모습. /부평역사박물관 제공황윤걸 할아버지가 부평연와합자회사 앞에서 동료들과 함께 찍은 사진. 뒷줄 오른쪽 첫 번째가 황윤걸 할아버지다. 할아버지는 1955년 9월 군에서 제대한 후 1957년 3월까지 부평 벽돌공장에서 일했다. /황윤걸 할아버지 제공

2017-12-20 목동훈

[zoom in 송도]'이름 바뀌는' 송도 컴팩스마트시티

시설 정체성 이해 어려워 지역 특성 담긴 명칭 변경1층 근대도시관으로 리모델링… 2·3층 단계적 공사인천모습 변화상등 다양한 체험·교육프로그램 준비인천 송도국제도시에 있는 컴팩스마트시티가 '인천도시역사관'으로 새롭게 출발한다.컴팩스마트시티는 2009년 9월 인천세계도시축전 당시 '인천도시계획관'으로 문을 열었다. 도시축전이 끝난 후 '컴팩스마트시티'로 명칭이 변경됐으며, 2014년부터 인천시립박물관이 분관 형태로 운영하고 있다. 시립박물관은 전시관 콘셉트를 '도시 인천의 역사와 변화 과정을 보여주는 공간'으로 설정하고 명칭을 인천도시역사관으로 변경했다. 새 명칭은 '인천시 행정기구 설치 조례' 개정안이 공포되는 19일부터 사용하게 된다. 시립박물관 배성수 컴팩스마트시티부장은 "전시관 이름만 봐서는 이곳이 무슨 공간인지 이해하기 어려웠었다"며 "전시관의 정체성을 고민해왔고, 그 차원에서 명칭 변경을 추진하게 됐다"고 설명했다.인천도시역사관은 근대도시관(1층), 현대도시관(2층), 도시생활관(3층)으로 꾸며질 예정이다. 1층을 근대도시관으로 만드는 공사는 최근 완료됐다. 내년에는 2층, 2019년에는 3층 전시관 리모델링 공사가 진행된다. 1층 전시관은 인천이 근대도시로 출발했던 1883년 개항부터 1945년 광복 때까지 인천의 공간 변화와 도시역사를 다루고 있다. ▲개항도시 인천(1883~1906) ▲감리서 폐지와 이사청 설치(1906~1914) ▲진센(Jinsen)과 인천-도시의 양면(1914~1936) ▲군수공업도시 인천(1936~1945)으로 구분돼 있다. 일본인 등 외국인이 만든 '조계지'가 아닌, 조선인이 생활한 '내동'을 중심으로 개항장을 봤다는 점이 특별하다. 배 부장은 "개항장을 조계지로만 보다 보니 외국 사람에게 관심이 집중되는 문제가 있다"며 "감리서가 있었던 내동에 중점을 뒀다. 강제 개항이 아니더라도 우리 스스로 충분히 근대화할 수 있었다는 것을 얘기하고 싶었다"고 했다. 이런 의미에서 '개항도시 인천' 전시 공간은 '개항장의 중심 내동'과 '그들만의 공간 조계'로 분리돼 있다.근대전시관에는 1879년 7월1일 설치된 화도진과 8개 소속 포대 등의 방어시설을 그린 관방지도인 '화도진도', 감리서 관련 문서, 해관 사진, 조선인 부두 위치도, 인천에서 생산된 군수품, 1907년 화재 감시를 위해 자유공원에 설치된 사이렌 탑 등이 전시돼 있다. 원본, 모형, 사진 등 다양한 형태로 돼 있다.시립박물관은 2층 전시관 일부 공간을 리모델링해 '작은전시실'을 만들었다. 이곳에서는 현재 '나도 인천도시계획가' 전이 열리고 있다. 내년에도 인천도시역사관에서 다양한 교육 프로그램이 진행될 예정이다. 올해에는 와글와글 박물관(100년 전 인천의 역사와 문화 체험), 고고박물관(도시계획을 중심으로 한 전시·체험), 수요다과회(인천사람의 소울푸드), 컴팩인문아카데미(한국 근대공원 산책) 등의 프로그램이 진행됐다.배 부장은 "하루 평균 200~300명이 방문하고 있다. 접근성이 좋고 공간이 넓다는 장점이 있다"며 "2층과 3층 리모델링 등 콘텐츠를 강화해 나갈 계획"이라고 했다.인천도시역사관은 연수구 인천타워대로 238번지에 있다. 관람 시간은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이며, 1월1일과 매주 월요일은 휴관이다. 월요일이 공휴일인 경우에는 문을 열고, 그 다음 날 쉰다. 관람료는 없다. /목동훈기자 mok@kyeongin.com

2017-12-17 목동훈

[송도국제도시 브리핑]한국조지메이슨大 첫 졸업생 탄생

■한국조지메이슨大 첫 졸업생 탄생송도국제도시 인천글로벌캠퍼스에 있는 한국조지메이슨대학교가 졸업생을 배출했다.한국조지메이슨대는 지난 16일 제1회 졸업식을 개최했다. 올해 한국조지메이슨대를 졸업하는 학생은 회계학과 1명, 국제학과 4명, 경영학과 6명 등 총 11명이다.한국조지메이슨대 스티븐 리 총장은 "한국조지메이슨대가 첫 졸업생을 배출했다"며 "대학에서 습득한 리더십을 적극적으로 활용해 글로벌 사회의 중요한 인재로 성장할 수 있기를 바란다"고 했다.한국조지메이슨대는 미국 버지니아 주의 최대 주립대학인 조지메이슨대의 글로벌 한국캠퍼스다.한국캠퍼스 학생들은 졸업 시 미국 조지메이슨대와 동일한 졸업장을 취득하게 된다.■송도 등 문화행사 매우만족 72%인천경제자유구역청이 송도·청라·영종에서 열리는 문화 행사와 관련해 설문조사를 진행한 결과, 응답자의 72%가 '매우 만족 또는 만족한다'고 했다. '불만족'은 3%, '매우 불만족'은 1%에 그쳤다.'문화 행사가 인천경제자유구역 인지도 제고에 도움이 되느냐'는 질문에는 '매우 그렇다 또는 그렇다'는 응답 비율이 64%를 기록했다.송도국제마라톤대회 만족도 조사 결과는 매우 만족 22%, 만족 51%, 보통 25%, 불만족 1%, 매우 불만족 1%로 나왔다.인천경제청은 송도국제마라톤대회, 인천송도불빛축제, 미래도시그리기대회 등 7개 행사 참가자를 상대로 설문조사를 했으며, 1천862명이 응답했다.■'스마트시티 모델' 마련 연구용역인천경제자유구역청은 '인천경제자유구역 산업특화형 스마트시티 서비스 모델'을 마련하고자 연구용역을 추진한다.연구용역은 인천경제자유구역의 스마트시티 비전을 수립하는 것으로, 5개월 동안 진행된다. 인천경제자유구역은 공공 기반시설 위주의 '유시티'에서 민간과 협업이 가능한 '스마트시티'로 발전해야 하는 전환기에 있다.인천경제청은 이번 용역에서 인천에 특화된 스마트시티 모델을 발굴한 뒤, 내년 예정된 국토교통부의 스마트시티 실증단지 R&D 사업 공모에 참여할 계획이다. /목동훈기자 mok@kyeongin.com

2017-12-17 목동훈

[실향민이야기 꿈엔들 잊힐리야·48]평안남도 강서군 봉황리 출신 황윤걸 할아버지(上)

한달간 환자 시늉하는 등인민군 되기 싫어 도망다녀노동당원인 담임선생님과전세 따라 서로의 피신 도와사범학교 들어가 신분 세탁교사 생활하다 월남 성공취라도 평남부대 대원으로환경 열악 위험한 작전수행가족들 두고 내려온 탓전쟁 끝나면 빨리 돌아가려고향 인근 부대에 잔류전쟁이 길어질 줄도 모르고1953년 6월 용유도에 도착평안남도 강서군 함종면 봉황리 농촌 마을에서 태어난 황윤걸(85) 할아버지. 1951년 11월 고향에서 피란을 떠났는데, 한국휴전협정 한 달 전에야 남한 땅을 밟을 수 있었다.1951년 겨울과 1953년 여름 사이의 오랜 기간, 황윤걸 할아버지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인민학교 교사 생활, 유격대원 활동 등 할아버지가 들려준 이야기는 한 편의 영화 같았다.황윤걸 할아버지는 1950년 6월25일 한국전쟁이 발발했을 당시 18살이었다. 인민군이 되기 싫어서 도망 다녔다.한 번은 '인민군 동원 지도원'과 싸움이 붙었고, 목 부위를 크게 다친 것처럼 속여 한 달 동안 환자 시늉까지 했다.부친은 인민군을 속이기 위해 3일마다 한 번씩 동네 의원에 가서 아들의 약을 지어오기도 했다.9월15일 인천상륙작전으로 전세가 뒤집어졌다. 유엔군과 국군이 황윤걸 할아버지 마을을 거쳐 북쪽을 향해 진격했고, 할아버지는 치안대원으로 활동하게 됐다.어느 날, 고등학교 담임선생이 집으로 찾아왔다. 노동당원이었던 담임선생은 오갈 데 없는 신세였다.북으로 후퇴하는 인민군을 따라 피란을 가자니 도중에 적군의 공격을 받을 거 같고, 자기 집으로 가자니 잡힐 것 같은 처지가 된 것이다.황윤걸 할아버지는 "담임선생님은 내가 빨갱이가 아닌 것을 알고 계셨거든. 낮에는 내가 인민군에 안 가려고 파놓은 땅굴에, 밤에는 우리 집 사랑방에 모셨다"고 했다.담임선생은 좀 더 안전한 곳으로 떠나기를 원했다. 황윤걸 할아버지는 치안대에서 통행증을 여러 장 끊어 담임선생에게 줬고, 담임선생은 다른 곳으로 피신했다."그때는 통행증이 있어야 했어. 치안대 직인이 찍힌 통행증 5~6장과 함께 보자기에 고구마와 밤 등 먹을거리를 싸서 드렸지."운명의 장난인가. 중공군의 참전으로 전세가 역전됐다. 황윤걸 할아버지는 치안대원으로 활동한 전력 때문에 산에 숨어 지낼 수밖에 없었다. 어느 날 집에서 연락이 왔다. 담임선생님이 찾아왔단다."집에 갔더니 안방에 담임선생님이 있는 거 아니겠어. 내가 치안대 생활을 했으니 걱정이 된 모양이야. '사흘 있다가 다시 올 테니 인민군에 잡히지 말고 있어'라고 하시고 떠나셨지."이틀 만에 담임선생이 다시 왔다. 담임선생은 "인민군에 잡히지 않으려면 사범전문학교에 들어가 교사가 되어야 한다"며 고향에서 멀리 떨어진 곳으로 할아버지를 데리고 갔다. '신분 세탁'을 하기로 한 것이다. 황윤걸 할아버지는 담임선생 추천으로 1951년 3월 인민교원양성소에 입학했다."학생이 40~50명 정도 됐어. 그 당시에 강의실이 어디에 있어, 동네 교회에서 수업을 받았지. 8월까지 교육을 받고 9월에 발령받았어. '어느 학교에 가겠냐'고 물어보기에 (치안대 활동 전력이 탄로 날 수 있어서) 고향에서 먼 곳을 희망했지."할아버지는 한 인민학교 4학년 담임을 맡게 됐다. 이름만 학교이지 교실도 없고 학생도 몇 안 됐다."1학년은 어느 부락, 2학년은 어디 교회 등 지역을 정해주는 거야. 나도 교회에서 수업을 했는데, 학생이 있어야지. 오전에는 수업하고 오후에는 학생을 모집하러 다녀야 했어."그렇게 2개월 정도 생활했다. 그러던 중 집에서 연락이 왔다. 월남하려면 며칠까지 어디로 오라는 내용이었다. 황윤걸 할아버지는 학교 교감에게 "주민등록 주소를 인민교원양성소에서 학교로 옮기러 간다"고 거짓말을 둘러대고 약속한 장소로 떠났다. 접선 장소는 인민교원양성소 반대편에 있었다. 위험을 무릅쓰고 산을 넘어 먼 길을 왔건만, 그곳엔 월남을 안내하기로 한 사람이 없었다. 길이 엇갈린 것이다."그날 월남을 돕겠다는 사람이 내가 안 온다고 누나네 집으로 찾으러 갔다는 거야. 그래서 그날 월남하지 못했어."월남에 실패한 황윤걸 할아버지는 다음 기회를 기약하며 밤늦은 시간 험한 산을 다시 넘어 학교로 돌아갔다. 다시 기회가 왔다. 할아버지는 "날짜도 잊어버리지 않는다. 10월28일 연락을 받고 다음 날 동창 집에서 만났다"며 "나 말고도 국군 패잔병 2명, 반공인사 등 10명 정도가 더 있었다. 해안가에 있는 지뢰를 피해 월남하는 배를 탔다"고 했다.엔진이 없는 작은 목선이었다. 밤 11시에 30명 정도가 배에 탔다. 배가 가라앉을 것 같았다. 풍랑에 금방이라도 뒤집힐 것 같은 배는 다음 날 오후 8시께 섬에 도착했다. 진남포 남서쪽에 있는 '취라도'라는 섬이다."아침에 일어나니까 밥을 주는데, 안남미 밥이야. 석유 냄새까지 나서 먹을 수가 있어야지. 밥이 목구멍을 넘어가지 않아. 토할 거 같아서 세 끼를 굶었어."황윤걸 할아버지는 이튿날 심사를 받고 유격대원이 됐다. 동키 제9부대(평남부대) 대원이 된 것이다. 노인, 여성, 아이 등 노약자는 연대본부가 있는 황해도의 '초도'라는 섬으로 옮겨졌다. 동키 평남부대는 적지를 드나들며 식량 확보, 반공인사·피란민 구출, 인민군 주둔지 기습 등의 작전을 벌였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가 펴낸 '한국전쟁의 유격전사'에 따르면 1951년 3월 중순 백령도에 동키 제9부대가 창설됐다. 평남 지방에서 온 치안대원 등 반공인사와 청년들로 구성됐다. 동키 제9부대는 미 제8군으로부터 식량, 무기와 탄약, 무전기 등을 받아 초도에 본부를 차렸다. 그리고, 취라도와 덕도 등에 파견대를 보내 작전을 수행했다.취라도에는 약 30명의 대원이 있었던 것으로 황윤걸 할아버지는 기억했다. 작전 환경은 매우 열악했다. 식량은 안남미가 전부였는데, 겨울철에는 보급로가 끊겨 그마저도 먹기 힘들었다. 할아버지는 "소금이 반찬이었다. 새우젓이랑 밥을 먹으면 진수성찬"이라며 "담요가 부족해서 3명이 1장을 덮고 자고, 해안가에 떠내려온 나무로 불을 땠다"고 회상했다. 또 "피복 보급을 51년인가 52년에 처음 받았다. PW라고 적혀 있는 포로수용소 포로들이 입었던 옷이었다"고 했다.작전은 위험했다. 작전을 수행하다가 인민군에 잡혀 처형을 당하거나 적의 공격으로 부상을 입은 경우도 많았다."저수지를 폭파하려고 대원들이 들어갔는데, 분대장이 인민군이 매설한 지뢰를 밟은 거야. 대원이 부상당한 분대장을 업고 오다가 또 '꽝'하고 지뢰가 터졌어. 분대장은 다리 하나를 잃고, 대원은 한 눈의 시력을 잃었지."1953년 4월께 덕도에서는 새로 지급된 무기(무반동포)를 시험하던 중 조작 미숙으로 오발 사고가 발생했다. 이 사고로 대원 1명이 그 자리에서 숨지고 안병기 대대장 등 5~6명이 중상을 입었다. 황윤걸 할아버지는 "초도에도 백령도 백사장처럼 비행장 같은 곳이 있었다"며 "안병기 대대장은 초도에서 남한으로 후송하던 중 비행기에서 숨졌다. 나중에 부대에 온 유품 손목시계에는 피가 그대로 남아 있었다"고 기억했다.평남부대에는 여성 대원도 있었다. 그녀들의 임무는 식사 준비, 빨래, 부상병 치료 등이다. 인천 동구 만석동에 사는 김찬일(86, 평남 강서군 함종면 계산리) 할머니도 평남부대원이었다. 황윤걸 할아버지와 비슷한 시기에 부모님 등 가족과 함께 취라도에 왔다. 김찬일 할머니는 "아버지가 치안대 활동을 해서 고향에 남아 있을 수가 없었다"며 "섬으로 내려와 대원들의 작전을 도왔다"고 했다. 또 "주먹밥을 만들어줘야 하는데, 안남미는 부스러진다"며 "보급품이 부족해 탄띠를 풀어 남자 대원들의 속옷을 만들어줬던 기억이 난다"고 했다. 김찬일 할머니는 휴전 후 인천에 정착했다. 역전에서 짐 나르는 일, 이 집 저 집 다니며 허드렛일도 하고, 인천항 부두 앞에 떠 있는 원목의 껍데기를 벗겨 내다 팔기도 했다.황윤걸 할아버지는 1953년 6월 중순 미군의 LST(상륙함)를 타고 용유도 을왕리해수욕장 부근에 내린 것으로 기억했다. 한국휴전협정(1953년 7월27일) 무렵에야 남한으로 온 것이다. 할아버지는 동키 평남부대가 육군에 편입된 이듬해 2월까지 200여 명의 대원과 용유도에서 훈련을 했다.황윤걸 할아버지는 한국유격군전우회총연합회 평남부대 전우회 D-9 1호 회원이다. "80년대 초반에 유격군연합회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됐지. 사무실을 찾아가서 평남부대에서 왔다고 했더니, 평남부대는 아직 등록되지 않았다는 거야. 우리 부대 옆에 안용부대 D-12라고 있었어. 여기 회장인 안용호씨와 사무국장 변철준씨가 인우보증을 서 등록할 수 있었지."황윤걸 할아버지는 1954년 용유도에서 헤어진 전우들을 수소문해 찾아 모았다. 그렇게 해서 60여 명의 대원을 참전유공자로 등록해줬다. 이북에서 작전을 수행하다가 숨진 대원 등 전사자 9명의 위패를 국립대전현충원에 봉안하는 일에도 앞장섰다.황윤걸 할아버지는 한국전쟁 때 조모, 부모님, 누나, 그리고 여동생 3명을 고향에 두고 혼자 월남했다. 고향과 가까운 섬에 주둔하면서 작전 수행을 위해 고향 근처를 드나들었지만, 집에는 갈 수 없었다고 한다. 인민군에 잡히기라도 하면 할아버지는 물론 가족까지 위험하기 때문이다. 가족의 곁에 있으면서도 함께할 수 없는 상황이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황윤걸 할아버지는 "취라도에서 남쪽으로 내려간 사람도 있다. 하지만 나는 동키 평남부대에 남아 있기로 했다"며 "전쟁이 끝나면 집에 빨리 돌아갈 수 있을 거 같았다. 그때는 전쟁이 이렇게 길어질 줄 몰랐다"고 했다.글/목동훈기자 mok@kyeongin.com 사진/임순석기자 sseok@kyeongin.com황윤걸 할아버지는 평안남도 강서군 함종면 봉황리에서 태어나 자랐다. 한국전쟁 때 고향 근처 해변에서 목선을 타고 진남포 서남쪽에 있는 작은 섬 '취라도'로 내려왔다. 여기서 동키 제9부대(평남부대) 대원이 된 황윤걸 할아버지는 적지를 드나들며 작전을 수행했다. 동키 제9부대는 백령도에 창설됐으며, 황해도 '초도'에 연대본부를 뒀었다. 취라도는 '상취라도'와 '하취라도'가 있는데, 동키 제9부대 파견대는 '상취라도'에 있었다. 일러스트/박성현기자 pssh0911@kyeongin.com/임순석기자 sseok@kyeongin.com황윤걸 할아버지가 인민군이 되기 싫어서 도망 다닌 일, 인민학교 교사 생활, 동키 제9부대(평남부대) 대원 활동 등 한국전쟁 당시 겪은 일들을 이야기하고 있다. /임순석기자 sseok@kyeongin.com

2017-12-13 목동훈

[실향민이야기 꿈엔들 잊힐리야·47]황해남도 청단군 용매도 출신 차학원 할아버지(下)

연평도 30㎞ 거리… 할아버지는 서쪽 온동리에 살아젓새우 많이 잡혀 말리거나 젓갈 담가 국내·외 유통외침 방어 진보 위치 예로부터 '군사적 요충지' 역할용매도 회담 앞두고 터진 '황태성 간첩사건'의 배경망둥어에 소주한잔으로 여생 보내 "신도가 제2 고향"차학원(76) 할아버지의 고향 용매도(龍媒島)는 해주만 어귀에 있는 섬이다. 과거부터 황해도 해주의 일부 지역이었던 용매도에 언제부터 사람이 살기 시작했는지는 정확하지 않지만, 최소한 고려 때에는 살고 있었다는 것이 역사 기록에 남아 있다. 조선 중종(1531년)때 편찬한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는 해주목(海州牧)의 위치를 설명하면서 '고려 성종 2년(983년)에 설치됐고 그 영역은 동쪽으로 평산부(平山府)까지 69리요, 용매량(龍媒梁)까지 95리다'고 했다. 용매도는 1938년 해주의 일부가 떨어져 나가 황해도 벽성군이 만들어지면서 벽성군 소속이 됐다가 1945년 해방 후 미군정 치하에 놓이면서 경기도 연백군 소속이 됐다. 전쟁이 끝난 뒤에는 북한의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황해남도 청단군 영산리 소속이 됐다. 연평도와는 30㎞ 떨어져 있다.1942년생인 차학원 할아버지는 벽성, 연백 시절을 겪었고 지금은 청단군이지만 복잡한 이력이 귀찮은지 "고향이 어디세요"라고 물으니 '황해도 벽성군 청용면'이라 대답했다. 1986년 이곳 실향민들이 모여 만든 용매도민회도 회칙에 공식 명칭을 '황해도 벽성군 청용면 용매도민회'라 칭하고 있다.용매도는 동쪽의 진동리(鎭洞里)와 서쪽의 온동리(溫洞里), 섬 중앙의 한동리(寒洞里) 3개 마을이 있다.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한동리 정상에 올라가 보면 진동산과 온동산이 황룡(龍)이 뒤틀어져 암룡과 숫룡이 맺어 있는(媒) 모양이라고 해 용매도라고 칭했다고 한다.할아버지는 온동리에서 살았다. 온동리는 300가구에 1천300여명이 사는 제법 규모가 있는 마을이었다. 온동 주위에는 크고 작은 섬이 있다. 여러 부속 섬 중에 육읍도(陸邑島)라는 섬이 있었는데 물이 빠지면 육지가 되는 곳이다. 겨울철에 아낙들이 건너가 며칠씩 굴이나 바지락을 캐오면 수입이 쏠쏠했다. 이곳은 여러 날 묵어가면서 일하는 곳이라고 해 '묵골'이라고 불렀다. 묵골은 바로 할아버지가 장봉도로 피란을 나오기 전까지 살았던 곳이기도 하다. 묵골의 서남쪽으로 있는 귀염도, 소렴도에서는 주꾸미가 많이 잡혔다. 낚싯줄에 소라 껍데기를 매달아 바다에 던져 놓으면 주꾸미가 산란을 하러 소라껍데기에 들어가 잡혔다고 한다."묵골은 연평도 방향에 있는 조그만 섬이었는데 원래는 노인네 한두 분밖에 안 사는 작은 동네였어. 여자들과 어린애들이 망둥어도 잡고 상합도 잡으며 사는 조용한 섬이었는데 전쟁이 나면서 미군이 주둔하게 됐지."차학원 할아버지네는 조와 수수 농사를 지어 먹고 살았는데 아버지는 가끔 바다로 나가 고기잡이 배를 부렸다. 할아버지는 "해산물이 흔하디흔했지만 그중에서도 젓새우가 가장 유명했지. 그때만 해도 마을 어르신들이 한강 마포나루까지 새우젓을 팔러 나가기도 했어"라고 말했다.용매도 앞바다 어장에서는 6~7월에 새우가 많이 잡혔다. 동아일보 1932년 7월 2일 자는 "해주군 청룡면 룡매도는 새우의 산지로서 해마다 생산고가 10여만원에 달한다고 한다. 그런데 지금이 막 새우의 어획 시기인데 금년도는 특히 기후의 순조로 예년에 없는 풍산(豊産)을 보게 되어 앞으로 생산 예상고가 평년보다 약 오할 이상이나 증가 될듯하다고 한다"고 보도했다. 당시 일제의 부역 노동자 하루 평균 임금이 80전(1원=100전)이었으니 엄청난 생산량인 셈이다. 새우는 소금에 절여 젓갈을 담가 먹는 것도 일반적이었지만 용매도 사람들은 새우를 쪄서 말린 뒤 중국과 일본 등지에 수출하기도 했다. 말린 새우는 가루로 만들어 '미원'처럼 국물에 넣어 먹으면 맛이 그만이었다고 한다. 용매도에는 1920~30년대 새우 건조 작업장이 40~50군데 생겨나기 시작했다.용매도의 새우젓은 한강 마포나루를 통해 육지로도 유통됐다. 마포는 양화진, 서강과 더불어 조선 초기 한강 하류의 항구로 발전했다. 그 마포는 삼남지방의 양곡이 모이는 곳이었고, 서해안의 소금배가 드나드는 곳이었다. 이곳에 황해도와 인천, 강화 지역의 새우젓 배가 본격적으로 드나들기 시작한 때는 일제시대 무렵이다. 서울시가 1985년 발간한 '한강사(漢江史)'는 "경인선의 부설로 한강의 선운(船運)이 활발치 못하게 되었으나 일제 때 이곳 마포는 서해에서 유입되는 새우젓 배의 선창으로 변하였다. 그러나 이 또한 6·25 동란으로 임진강과 한강이 합류하는 지점이 휴전선으로 인하여 서해에서 마포강으로 배가 직접 들어올 수 없는 상태가 되어 지금까지 지속되고 있다"고 설명했다. 또 연평도 어장과 가까워 조기가 많이 나 조기잡이 배도 마포를 오갔다.용매도는 과거부터 군사적 요충지로 큰 역할을 했다. 외침을 방어하는 진(鎭)이나 보(堡)가 용매도에 있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은 "해주목 내에는 '진보(鎭堡)'가 있었는데 그중 '용매량진'은 섬 가운데 있었고, 옛날에는 만호(萬戶)를 두었는데 수군동첨절제사(水軍同僉節制使)가 한 명 있었다"고 전하고 있다. 만호는 군사적 요충지에 설치된 진을 다스리는 무장을 일컫는다. 조선조 수군은 수군절도사(水軍節度使)의 예하에 첨절제사(僉節制使)가 큰 진을 관장했다. 그 밑에 동첨절제사와 만호가 관할하는 진이 있었다. 용매도에는 봉수(烽燧)가 있었다는 기록도 있다. 해주와 연평도를 이어주는 지리적 위치 때문이다. 이 같은 군사 지리적 이점 때문에 한국전쟁 때도 남북은 용매도를 두고 끝까지 전투를 벌였으나 결국 휴전을 앞두고 철수령이 내려지면서 북한의 차지가 됐다.이런 용매도에서 휴전 이후 최초의 남북회담이 열렸다는 것은 많이 알려지지 않았다. 남북은 1972년 7·4 남북공동성명이 있기 전 첫 비공식 회담을 용매도에서 가졌다. 지금도 공식 기록으로는 존재하지 않고 비사(秘史)처럼 전해지지만 일명 '황태성 간첩사건'의 배경을 설명할 때 꼭 등장하는 것이 '용매도 회담'이다. 할아버지는 고향 용매도를 이야기할 때 남북회담 이야기를 꼭 써달라고 당부했다. 김학민 이한열기념사업회 이사장과 이창훈 4·9통일평화재단 자료실장이 황태성 간첩사건의 전모를 밝힌다며 2015년 출간한 책 '박정희 장군 나를 꼭 죽여야겠소'에 용매도 회담 얘기가 나온다. 이 책은 황태성에 대한 자료와 그의 친손녀인 황유경씨 등 유족을 인터뷰한 내용을 토대로 만들어졌다. 책에 따르면 1961년 9월 28일 첩보부대 HID 소속 강성국 중령과 김석순 대위가 배를 타고 서해 북방한계선을 넘어 용매도에 갔다. 이들은 사실 '가짜 군인'으로 각각 광주와 서울에서 시의원을 지낸 민간인이었다. 이들은 첩보 훈련을 받고 회담 전 북한의 의중을 떠보는 임무를 수행하러 북으로 넘어갔다. 하지만 대표성을 확보하지 못한 회담은 성과가 없었고 빈손으로 돌아오게 됐다.1997년 용매도민회가 낸 용매도지(龍媒島志)에는 용매도회담의 장면을 각색해 극적으로 꾸몄다. 여기에는 비공식 회담의 합의사항도 나오는데 '서울과 평양에 각각 상대방의 비공식 대표부를 둔다', '대표위원의 교환은 유도(강화도 앞의 한강하구 섬)에서 한다' 등의 내용이 나와 있다.반대로 북한은 경북 상주 출신으로 박정희 대통령의 형 박상희와 죽마고우였던 황태성을 남파해 당시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과 접촉을 시도했다. 용매도 회담 이전부터 남한에 와있던 황태성은 1961년 10월 15일 박상희의 부인 조귀분, 그러니까 김종필 당시 중앙정보부장의 장모를 통해 고위층과 접촉하려 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김종필은 대공수사 인력에게 검거를 지시했고 황태성은 간첩 혐의로 체포돼 처형됐다. 황태성은 재판에서 자신의 남하(南下)를 "남한에서 간 (용매도 회담)밀사에 대한 환례(還禮)"라고 주장했지만, 2015년 중앙일보가 엮은 '김종필 증언록'에서 김종필은 이를 "육군첩보부대(HID) 서해지구 파견대가 정보수집을 위해 자체적으로 벌인 대북 공작"으로 규정했다. 또 "중앙정보부와는 관계가 없다"고 못박았다. 진실은 알 수 없지만 용매도에서 비밀스러운 남북 접촉이 있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차학원 할아버지는 용매도에 산 기억이 많지는 않지만 고향을 잊어본 적이 없다. 직장을 잡아 인천에 나와 살면서도 늘그막에 굳이 배 타고 들어가야 하는 섬 신도에 자리 잡은 것도 어쩌면 섬 용매도에 대한 그리움 때문일지도 모른다. 또 고향 사람들과 함께 일군 신도4리를 떠날 수 없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할아버지는 틈틈이 낚시로 잡은 망둥어를 깨끗이 손질해 빨랫줄에 널어 바닷바람에 말리는 일이 낙이다. 잘 말린 망둥어를 노릇노릇 구워 소주 한 잔 걸치면 이보다 더 좋을 수가 없다."함께 피란 나온 어르신들이 점점 돌아가시고 1세대가 사라지면서 고향에 대한 기억도 사라지고 있지만, 나라도 어르신들에게 들은 얘기를 섞어 이런 얘기 저런 얘기를 할 수 있어서 다행이야. 이제는 신도를 제2의 고향으로 생각하고 여생을 보내려고."글/김민재기자 kmj@kyeongin.com 사진/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차학원 할아버지는 300가구 1천300여명이 사는 용매도 서쪽에 위치한 온동리에 살았다. 사진은 동쪽 진동리 마을 전경. 그래픽/성옥희기자 okie@kyeongin.com사진/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온동리 거무녕뿌리에 있는 마을 주민들. 뒤에 보이는 섬이 소렴도다. /용매도지 제공용매도 앞바다에서 잡은 젓새우를 말리는 건하장 모습. /용매도지 제공

2017-12-06 김민재

[zoom in 송도]'송도 버드 아일랜드' 내년 상반기 착공

멸종위기종 저어새등 대체서식지11공구 동쪽 바닥면적 5600㎡규모실시설계 용역 완료 2020년 준공생태자원 콘텐츠·관광지 활용기대'송도 버드 아일랜드(Bird Island)' 조성사업이 내년에 본격화한다.인천경제자유구역청은 송도 버드 아일랜드 조성사업(1단계) 실시설계 용역을 완료하고 내년 상반기 공사를 시작한다고 3일 밝혔다. 이 사업은 송도 11공구 앞바다에 인공섬 형태의 조류 대체 서식지를 만드는 것이다.버드 아일랜드를 만드는 1단계 사업과 그 주변에 먹이터, 염생습지, 조류 관찰대, 완충녹지 등을 조성하는 2단계 사업으로 계획돼 있다. 1단계 사업은 2020년 준공을 목표로 진행된다. 2단계 사업은 송도 11공구 공유수면 매립과 송도 워터프런트 조성계획을 고려해 사업 시기가 결정될 예정이다.■조류 서식지로 인공섬을 조성하는 첫 사례인천경제청은 송도 11공구 동쪽 약 350m 지점에 바닥면적 5천600㎡, 노출면적 2천400㎡ 규모의 '버드 아일랜드'(1단계)를 조성한다. 공유수면 매립으로 갯벌이 사라지고 있기 때문에 멸종위기종인 저어새 등 새들이 서식할 수 있는 인공섬을 만드는 내용이다. 바닥면적은 바닷물이 완전히 빠졌을 때, 노출면적은 만조 시 인공섬의 넓이를 말한다. 1단계 사업 공사비는 72억원으로, 이 중 13억원은 내년도 예산안에 반영돼 있다.인천경제청은 내년 상반기에 공사를 시작할 계획이다. 공사 기간이 24개월인 점을 고려하면 2020년 준공이 가능할 것으로 인천경제청은 예상하고 있다.버드 아일랜드 조성공사는 '공사용 도로'를 설치해 인공섬을 만든 뒤, 그 도로를 없애는 방식으로 추진된다. 인천경제청은 저어새 서식을 유도하기 위해 새 모형을 제작·설치하고, 저어새가 둥지를 만드는 데 필요한 재료(나뭇가지와 풀 등)를 공급할 계획이다. 또 유지관리계획을 수립해 서식 환경 변화를 점검하고 방해 요인을 제거할 방침이다. 버드 아일랜드 조성은 송도 11공구 공유수면 매립 환경영향평가 협의 조건이며, 인공섬을 조류 대체 서식지로 조성하는 것은 처음이라고 한다. ┃위치도 참조■'생태자원 콘텐츠' 활용 기대감인천경제청은 버드 아일랜드가 송도국제도시의 중요한 생태자원 콘텐츠가 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인천경제청은 실시설계 용역을 진행하면서 송도 11공구 지역의 조류 서식 현황을 조사했다. 올해 1월부터 10월까지 월 2회 조사했는데, 총 48종 1만9천352개체가 관찰됐다. 민물도요, 큰뒷부리도요, 혹부리오리, 괭이갈매기, 알락꼬리마도요 등이 많았다. 조사 지역을 송도 6~11공구, 남동유수지, 오이도, 시화호, 시흥갯골 등 송도 일대 전체로 확대했을 때는 물닭, 홍머리오리, 흰죽지, 청머리오리, 민물도요 등 총 90종 9만5천362개체가 관찰됐다. 저어새의 경우에는 남동유수지(441개체)에서 가장 많이 관찰됐다. 다음은 오이도와 시화호, 송도 갯벌 일대, 시흥갯골 및 관곡지 등의 순으로 조사됐다. 도요·물떼새류는 송도 갯벌(1만3천341개체)에 가장 많았다.인천경제청은 버드 아일랜드 모니터링 활동을 통해 저어새의 생태 자료를 수집하고, 이를 보전·관리 및 생태 교육에 활용할 계획이다.인천경제청 관계자는 "새들에게 안정적인 서식 환경을 제공하는 것은 물론 송도의 중요한 생태자원 콘텐츠가 될 것"이라며 "조류 전문가뿐만 아니라 일반인도 많이 찾는 조류 생태 관광지가 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했다. /목동훈기자 mok@kyeongin.com인천 송도국제도시 11공구 앞바다에 인공섬 형태의 조류 대체 서식지를 만드는 송도 버드 아일랜드 조성사업이 본격 시작될 예정이다. 송도 공유수면 매립으로 갯벌이 사라지고 있어 멸종위기종인 저어새 등 송도 갯벌을 찾는 새들이 서식할 수 있는 인공섬을 만드는 사업이다. 사진은 송도 11공구 매립 전에 갯벌에서 먹이 활동을 하고 있는 저어새들. /경인일보 DB

2017-12-03 목동훈

[송도국제도시 브리핑]'목재산업박람회' 7일부터 나흘간 송도컨벤시아

■'목재산업박람회' 7일부터 나흘간 송도컨벤시아'2017 대한민국 목재산업박람회'가 7일부터 나흘간 송도컨벤시아에서 진행된다.이 행사는 목재산업 활성화를 위해 인천시와 산림청이 공동 주최하고 (사)목재산업단체총연합회가 주관하는 문화·전시·체험 행사로, 올해 주제는 '목재, 환경과 에너지를 아우르다'이다. 목재 산업계의 인력난을 해소하고자 한국산림복지진흥원, 산림조합중앙회 등 22개사가 참여하는 '산림 일자리 박람회'도 동시에 개최된다. 우드 스피커, 탁상시계, 모니터 받침대 만들기 등 목재문화를 체험할 수 있는 프로그램도 운영된다. 자세한 내용은 공식 홈페이지(www.woodexpo.kr)에서 확인할 수 있으며, 홈페이지를 통해 사전등록을 신청하면 전시회 무료 참관 혜택을 받을 수 있다.■유타大 아시아캠서 9일 '캠퍼스 일일 체험의 날'송도국제도시에 있는 유타대학교 아시아캠퍼스는 9일 오전 10시 '캠퍼스 일일 체험의 날' 행사를 개최한다.참가자들은 유타대 아시아캠퍼스에 개설된 4개 학부(커뮤니케이션학·심리학·영화영상학·도시계획학) 전공 중 원하는 강의를 들을 수 있다. 또 유타대 아시아캠퍼스를 돌아보며 영어글쓰기센터 등 다양한 시설과 캠퍼스 생활을 체험하게 된다. 유타대 아시아캠퍼스는 참가자에게 수료증과 함께 소정의 기념품을 주고, 희망자에 한해 일대일 맞춤형 입시 면담도 진행할 예정이다. 참가 희망자는 유타대 아시아캠퍼스 홈페이지에서 사전 참가 신청서를 작성해 제출하면 된다. 신청서에는 간단한 에세이 작성이 포함돼 있으며, 신청서 및 에세이 내용에 따라 참가 여부가 확정된다.■솔찬공원 케이슨제작장, 밤 12시까지 연장 개방인천경제자유구역청은 바다를 조망할 수 있는 송도국제도시 솔찬공원 케이슨제작장을 1일부터 밤 12시까지 개방하고 있다고 밝혔다.케이슨제작장은 센트럴파크와 더불어 송도의 대표적인 친수 공간으로, 인천대학교 송도캠퍼스 인근에 있다. 안전사고 발생 우려 등의 문제로 오후 10시까지만 개방했는데, 불편함을 제기하는 민원이 계속 발생해 개방 시간을 12월1일부터 자정까지 2시간 연장했다. /목동훈기자 mok@kyeongin.com외국인 김장담그기 체험-인천경제자유구역청은 최근 송도국제도시 등 인천경제자유구역에 거주하는 외국인을 대상으로 '외국인 김장 담그기 및 전통문화 체험행사'를 개최했다고 3일 밝혔다. 이번 행사에 참가한 외국인 20여 명은 김치를 직접 만들고 전통부채에 민화를 그려보는 등 한국의 전통문화를 체험했다. /목동훈기자 mok@kyeongin.com/인천경제청 제공

2017-12-03 목동훈

[실향민이야기 꿈엔들 잊힐리야·46]황해남도 청단군 용매도 출신 차학원 할아버지(中)

1960년대 초반 사진 DP점 '미광사' 취직숙식 해결돼 현상·인화작업 배우며 일해입대후 통신소대 배치 엉뚱한 지시 받아'남양사'로 불법 파견… '사진 업무' 수행결국 군인신분 민간인 행세로 체포 당해이후 베트남전 앨범제작위해 파병길 올라맹호부대 전쟁사 담긴 앨범 아직도 '간직'제대후 DP점 운영하다 목재사에서 새삶용매도 출신 실향민 차학원(76) 할아버지의 젊은 시절을 얘기하려면 '사진'을 빼놓을 수 없다. 할아버지는 옹진군 북도면 신도4리 땅 9천900㎡을 맨손으로 일궜지만, 정작 농사는 적성에 맞지 않았다. 그는 1960년대 초반 아버지와 어머니, 동생에게 땅을 맡기고 지인의 소개로 인천 도심으로 넘어가 싸리재에 있는 사진 DP점(店) '미광사(美光社)'에 취직했다. 'DP점'은 현상(現像·Developing)과 인화(印畵·Printing)의 영어 앞글자를 따서 만든 말이다. 현상은 필름에 담긴 잠상(潛像)을 눈에 보이게 만드는 작업이고, 인화는 종이로 사진을 뽑는 과정을 말한다. 여기에 'E(확대·Expansion)'까지 더해 'DP&E'라고 했지만, 흔히 DP점이라 불렀다고 한다. DP점은 현상·인화만 하는 곳이라 가게에서 사진을 직접 찍은 뒤 현상·인화를 해주는 사진관과는 달랐다. 당시만 해도 사진이 우리나라에 들어온 지 100년도 안 된 때였다. 할아버지는 먹여주고 재워주며 기술을 가르쳐 준다는 조건에 사진이 무엇인지도 잘 모르면서 뭍으로 나왔다.동아일보 사진부장 출신 최인진이 1999년에 낸 '한국사진사'에 따르면 우리나라에 처음 사진이 들어온 것은 1880년대 개화파들이 서양 신문물에 관심을 가지면서다. 본격적으로 사진을 수용한 것은 1882년 개화기 청년을 이끌고 중국에 신문물을 배우러 간 영선사 김윤식(1835~1922)이 처음이다. 사진이 도입되기 전에도 '사진'이라는 말은 있었다. 고려시대 문인 이규보(1168 ~ 1241)의 문집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 19권에 '사진'이라는 단어가 처음 등장한다. 그는 '달마대사(達磨大師)의 상(像)에 대한 찬(贊)'이라는 시에서 '어찌 반드시 상을 그려야 하나'라는 글귀를 '하필사진(何必寫眞)'으로 썼다. '베낄 사'에 '참 진', "실물의 있는 그대로를 똑같이 그린다"는 뜻이다. 지금의 '사진(Photography)'이란 개념은 1863년 중국에 있는 러시아인 사진관에서 초상사진을 촬영한 조선시대 문인 이익의(1794~?)가 처음으로 썼다고 한다.초창기 사진기는 일명 '어둠상자(暗箱)'라고 불리는 대형 사진기였는데 검정 보자기를 뒤집어쓰고 찍는 식이었다. 이후 사진기가 소형화 돼 휴대할 수 있는 크기가 됐다. 우리가 흔히 아는 '롤 필름' 사진기가 등장한 것은 1910년대 전후다. 미국의 코닥(Kodak)이 대중적이었고 독일의 라이카(Leica)가 최고급이었다. 할아버지는 "내가 DP점에서 일할 때는 캐논 카메라를 주로 사용했어. 라이카는 지금 자동차로 치면 벤츠급이었지. 돈 많은 사람만 카메라가 있던 시절이니까"라고 말했다.미광사는 지금의 중구 율목동 인천기독병원 인근 옛 상업은행 맞은 편에 있었다. 주인은 따로 있고 동료 1명과 함께 암실에서 현상과 인화 작업을 했다. 할아버지가 기억하는 다른 DP점은 하인천 '신호양행', 경동의 '군성양행' 정도였다. 대부분 DP를 하면서도 인화지와 필름을 팔고, 사진 약품 따위를 함께 파는 가게였다.미광사의 주 고객은 자유공원의 '출사원(出寫員)' 10여 명이었다. 꽃 피는 봄이나 낙엽이 지는 가을, 눈 내리는 겨울이면 자유공원에서 출사원이 찍어주는 사진이 전부였다. 사진 인화는 명함판(2×3인치), 중판(3×4), 대판(5×7) 등 크기에 따라 가격이 달랐다. 사진을 인화하는 데 드는 비용은 중판 한 장에 20원 정도였지만 출사원은 손님들에게 몇 백 원씩 받으며 이문을 챙겼다. 수학여행철이나 소풍 때가 되면 할아버지는 DP점에서 이틀 밤을 새워가며 사진을 뽑아야 할 정도였다고 한다.미광사에서 몇 해 일하다가 군대에서 영장이 날아와 1964년 9월 육군 논산훈련소로 입대했다. 기초군사훈련을 마치고 원주통신훈련소에서 '보이스병'(무전병) 교육을 수료해 자대에 배치됐다. 강원도 홍천에 있는 수도사단 1연대 본부 통신소대에서 군 생활을 시작했다. 제대 날짜를 세기도 어려운 신병 시절 뜻밖의 임무가 찾아왔다. 당시 통신대장 서모 대위가 사진광이었는데 마침 할아버지가 사진 DP점 근무 경력이 있다는 걸 알았다. 서 대위는 갓 전입한 할아버지에게 휴가를 준 뒤 고향에 가서 사복으로 갈아입고 오라는 엉뚱한 지시를 했다. 신병이 자대 배치 일주일 만에 휴가를 받는 상상도 못할 일이 벌어졌다. 서 대위는 할아버지를 차에 태워 부대 인근 사진 DP점 '남양사'로 데려갔다. 남양사 사장은 경찰 간부 출신으로 역시 사진에 취미를 두었다가 퇴직 후 아예 DP점을 차린 경우였다. 서 대위는 할아버지를 남양사에 파견 보냈다. 당시 통신부대는 민간 통신 교환 업무도 수행했는데 외부로 파견을 보냈다고 적당히 서류를 꾸민 것이다. 할아버지를 직원으로 부려 먹고 남양사 사장이 서 대위에게 어떤 대가를 지급했는지는 모를 일이다.처음에는 머리가 짧아 암실에서만 근무하다가 머리가 자라면서 대놓고 카운터에 자리 잡았다. 할아버지는 "여고생들에게 인기가 많았어. 당시 홍천여고에 사진을 찍으러 가기도 했는데 젊은 총각이라 인기가 좋았지. 월급을 안 받아도 편하게 생활을 하니까 나도 별다른 불만이 없었지"라고 회상했다.꼬리가 길면 밟히는 법. 할아버지가 군인이라는 소문이 돌면서 어느 날 밤 사단 사령부 감찰대에서 남양사에 들이닥쳤다. 늦은 밤 '똑똑' 노크 소리에 문을 열었더니 감찰대원들이 할아버지를 체포해 지프에 태워갔다. 불법 파견돼 민간인 행세를 했다는 것이 문제가 됐다. 서 대위도 공범 신세가 됐다.할아버지를 구원해 준 것은 남양사 사장이었다. 그는 홍천경찰서 경무과장을 지내다가 박정희 대통령 시절 공화당 관리장을 했다. 원래 정당은 면 단위 이하 행정구역에는 정당 기구를 둘 수 없는데 공화당은 면에 '관리장'을 두고 공공연하게 활동을 했다. 관리장이라는 완장을 찬 남양사 사장은 감찰대에 전화 한 통으로 할아버지를 꺼내왔다. "남양사 사장이 전화를 안 해줬으면 그날로 바로 영창에 갔겠지. 그때 관리장이 제일 '끗발'이 좋을 때였어. 서 대위도 징계를 안 받고. 옛날이야 그랬겠지만 지금도 뭐 뇌물이니 비리들이 많잖아."자대로 복귀한 할아버지는 1965년 9월 베트남 전쟁 파병(파월) 길에 올랐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가 발간한 '베트남전쟁 연구총서'를 보면 수도사단은 1965년 월남파병 전투부대 1진으로 선정돼 그해 9~10월 베트남으로 떠났다. 수도사단은 부대 재창설 수준의 개편을 거쳐 '맹호부대'라는 이름으로 베트남에 병력을 보냈다. 총인원 1만3천672명의 대규모 병력이었다. 할아버지는 직접 전투에는 참여하지 않았고 무전기 등 통신장비를 관리하는 '기재계'에 소속됐다. 월남에 가서도 할아버지는 사진과 인연을 맺었다. 당시 공보실에서 파월기념 앨범을 만드는 데 할아버지를 차출해 간 것이다. 할아버지는 사진병과 각 중·소대 통신병이 사진을 찍어오면 필름을 현상해 인화한 뒤 한국으로 보냈다. 편집은 귀국한 뒤 마무리했다.할아버지가 보여준 흑백사진 앨범은 맹호부대 베트남 전사(戰史)의 축소판이었다. 파병 준비 훈련부터 박정희 대통령이 참석한 여의도 환송식 장면, 부산항에서 가족과 헤어지는 부대원들의 모습, 베트남 '퀴논'에 상륙하는 장면과 전투 모습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또 각 작전마다 사살 인원과 적 무기 노획 등 전과(戰果)를 사진과 함께 기록했다. 우리 군에 사살된 일명 '베트콩(월남민족해방전선)'의 시신 사진도 모자이크 처리 없이 날것 그대로 담긴 것이 인상적이었다. 사진에는 "1965. 10. 28. 수색중대 전방 10m까지 전급하여 사살된 베트콩 2명"이라는 설명이 붙었다. 또 네이팜(Napalm)탄의 공중폭격으로 정글과 마을이 불타는 장면, 헐벗은 전쟁 난민들의 사진은 전쟁의 참상을 여과 없이 보여주고 있었다. 이밖에 1960년대 전쟁 속 베트남의 일상과 문화를 엿볼 수 있는 사진도 많이 수록됐다. 1966년 6월 24일 앨범 편집후기를 쓴 앨범 편집자 권병주 중위는 "우리들이 흘린 땀과 피는 결코 헛되지 않았고 또 앞으로의 영광스런 역사발전에 밑거름이 되리라. 이런 뜻에서 미흡하나마 이 조그마한 파월기념앨범이 지닌 뜻은 크다"고 했다. 이 앨범은 파월 1진 맹호부대 1연대 간부와 병사들 전원에게 배포됐다. 할아버지는 지금도 그 앨범을 가보처럼 간직하고 있다.1967년 12월 월남에서 돌아온 할아버지는 다음 해 3월 제대했다. 할아버지는 제대하면 남양사에서 일해달라는 주인의 말에 다시 홍천으로 갔다. 그리고 남양사 주인의 사촌 처제를 소개받아 결혼해 홍천에 신혼살림을 차렸다. 남양사에서 일하던 할아버지는 1973년 드디어 DP점을 따로 차려 독립했다. 말은 독립이었지만 사실 남양사의 자회사 개념의 사업이었다. 홍천 버스 회사 한편에 사무실을 내고 필름이나 인화지, 만년필을 팔면서 사진 DP도 했다. 할아버지 가게에는 장비가 없었기 때문에 밤에 남양사에서 작업을 한 뒤 낮에 손님들에게 사진을 줬다. 하지만 내기 당구와 노름에 한눈을 팔면서 문제가 생겼다. 가게를 자주 비우다 보니 손님이 줄기 시작했고 결국 사업을 접고 인천으로 돌아와야 했다. 할아버지는 인천으로 와서 선창산업이라는 목재회사에 취직해 통나무 제재 일을 했다. 이후 삼미사 원목반에 들어가 나무 수입 관련 업무를 했다. 삼미가 망하면서 주식회사 중동이라는 목재사에서 직장생활을 이어갔다. 할아버지는 60세에 정년퇴직을 하고 5년간 촉탁직으로 더 일했다.할아버지는 지금도 틈만 나면 북도면 신도4리 집에서 일출 사진을 찍는다. 영종도에서 서서히 올라오기 시작한 해가 할아버지네 집 앞의 나무에 걸리는 때가 포인트다. 사진 DP점을 했지만 정작 사진기에 대한 욕심은 없어 조작이 간단한 스마트폰이 최고의 사진기란다.글/김민재기자 kmj@kyeongin.com 사진/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차학원 할아버지가 근무했던 맹호부대 1연대 본부 통신소대 단체 사진. /차학원 할아버지 제공차학원 할아버지가 맹호부대 파월기념 앨범을 만드는 과정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맹호 파월부대 1진이 1965년 10월 베트남 퀴논 해변에 상륙한 직후 찍은 사진. /차학원 할아버지 제공차학원 할아버지가 홍천에서 사진 DP점을 했을 당시 인화한 사진 중 하나. 반공의식을 다지는 1970년대 군민승공대회 모습이다. /차학원 할아버지 제공차학원 할아버지가 DP점 취직을 위해 북도면을 떠나 인천으로 가는 길에 찍은 부두 사진. /차학원 할아버지 제공할아버지가 인화한 사진으로 만든 맹호부대 파월기념 앨범.

2017-11-29 김민재

[zoom in 송도]'송도 워터프런트 조성사업' 진행 상황은

방재기능·수질개선 위해선 필수경제성 문제 논란 사업일정 지연수로모양 ㅁ자 → ㄷ자 변경 불구송도 11공구쪽 별도로 물길 추진인천 송도국제도시 주요 사업 가운데 '워터프런트 조성'이 있다. 송도 주민들의 숙원 사업이기도 하다. '송도 워터프런트 조성사업'이 어떤 내용이고 어떻게 추진되고 있는지 궁금해하는 주민이 많다. '경제성 문제'에 발목을 잡히면서 사업 추진 일정과 방식 등 조성계획에 변화가 있었기 때문이다. 송도 워터프런트 조성사업의 진행 상황을 질의응답 형태로 정리했다. 답변은 최근 인천경제자유구역청으로부터 받은 자료를 토대로 재구성했다. ┃사업계획도 참조- 송도 워터프런트 사업은."쉽게 설명하면, 송도국제도시에 물길을 만드는 사업이다. 기존 수로와 호수를 연결하는 방식으로 물길을 만들어 수질 개선, 친수 공간 조성, 방재 기능 강화 등의 목적을 달성하게 된다. 볼거리와 즐길 거리를 마련해 관광산업을 활성화하겠다는 취지도 있다. 수로 길이와 너비는 각각 16㎞, 40~300m다. 면적으로는 5.33㎢가 된다. 물길 주요 지점에는 수변가든, 수변로드, 인공해변, 수상터미널, 교량 등이 설치된다. 총 사업비는 6천215억 원이며, 이 중 설계비 18억 원과 시설비 50억 원 등 68억 원이 내년에 투입된다. 사업 기간은 2027년까지다. 2012년 상반기에 워터프런트 타당성 용역을 추진하고, 2013년 2월부터 2014년 8월까지 기본계획 수립 용역을 했다. 작년 3월 시작한 기본설계는 57%(올 10월 기준)의 공정률을 보이고 있다. 사업 추진 과정에서 '경제성 문제'가 불거졌고, 현재 타당성 재조사를 진행 중이다."- 워터프런트는 왜 필요한가."방재 기능이 강화된다. 유수지가 제 기능을 할 수 있도록 용량을 확보하고 수문을 설치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이는 집중호우 발생 시 재산·인명 피해를 예방하는 데 반드시 필요하다. 또 하나의 기능은 수질 개선이다. 현재 송도에서는 악취와 녹조 등의 문제가 간간이 발생한다. 물이 순환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워터프런트 조성사업은 연결수로 및 수문 설치를 통해 수(水)순환시스템을 구축하게 된다. 인천은 바다와 접해 있는 '해양도시'이지만, 친수 공간이 매우 부족하다. 안전하고 깨끗한 물가에 다양한 시설을 조성해 시민들이 직접 바닷물을 접하고 즐길 수 있도록 하는 게 워터프런트 조성사업이다. 관광산업을 통한 일자리 창출, 관광객 유치 등 지역경제 활성화도 기대된다."- 수로가 원안(ㅁ자)과 달리 'ㄷ'자로 축소되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있다."결론부터 말하자면, 최종적으로 'ㅁ'자 수로가 된다. 인천경제청은 지난 2014년 기본계획을 수립할 때 수순환 체계 등을 고려해 'ㅁ'자로 계획했다. 'ㄷ'자 모양의 수로를 만들고, 송도 11공구 자체적으로 수로를 만들어 'ㅁ'자 수로를 완성하는 방안이었다. 그런데 본의 아니게 '경제성 문제'가 불거지면서 사업이 지연됐다. 인천경제청은 불필요한 논란을 해소하고 조속한 사업 추진을 위해 기본계획상 수로 모양을 'ㅁ'자에서 'ㄷ'자로 수정했다. 하지만 원안(ㅁ자)과 달라진 것은 없다. 송도 11공구 자체 기반시설로 수로를 건설하기 때문에, 'ㅁ'자 모양이 완성된다."- 앞으로 추진 일정은."현재 타당성 재조사와 기본·실시설계가 동시에 진행되고 있다. 내년 상반기에 '타당성 조사' '투자 심사' '설계' '각종 영향평가' 등의 절차가 완료되면, 하반기 착공이 가능하다. 내년 하반기 착공을 위한 사업비 50억 원도 내년도 예산안에 반영했다. 내년 하반기에 착공할 수 있도록 모든 행정력을 집중할 방침이다. 시민을 위한 시설이기 때문에 수로·산책로·시설의 세심한 부분까지 고민해서 설계하고 있다. 사업설명회를 열어 시민들 의견도 청취할 계획이다." /목동훈기자 mok@kyeongin.com인천 송도국제도시에 물길을 만들어 안전하고 깨끗한 물가에 다양한 시설을 조성, 시민들이 직접 바닷물을 접하고 즐길 수 있도록 하는 송도 워터프런트 사업. 송도 11공구 자체 기반시설로 수로를 건설해, 'ㅁ'자 모양이 완성될 예정이다. 송도 워터프런트 1단계 북측 수로 현재 모습. /임순석기자 sseok@kyeongin.com

2017-11-26 목동훈

[송도국제도시 브리핑]벨기에 국회의원단, 경제청·인천글로벌캠퍼스 방문

■벨기에 국회의원단, 경제청·인천글로벌캠퍼스 방문인천경제자유구역청(청장·김진용)은 벨기에 국회의원단 및 주한 벨기에 대사가 지난 24일 인천경제청과 인천글로벌캠퍼스를 방문했다고 26일 밝혔다.아드리앙 테아트르 주한 벨기에 대사와 로엘데세인, 얀센 베르네르, 베르뮬렌브레흐트 등 벨기에 국회의원들은 인천경제청 지창열 차장을 만난 자리에서 벨기에와 인천이 협력하기를 원했다. 벨기에 아스트리드 공주는 지난 6월 벨기에 겐트대학교가 입주한 인천글로벌캠퍼스를 방문해 유정복 인천시장과 교류 협력에 대해 논의하기도 했다.지창열 차장은 "인천은 짧은 시간에 세계적 도시로 발돋움한 저력을 가진 도시다. 이번 국회의원단의 방문을 계기로 앞으로 더욱 다양한 분야에서 벨기에와 협력 모델을 개발할 수 있기를 희망한다"고 했다.벨기에 국회의원단은 지창열 차장 면담 이후 인천경제청 홍보관과 스마트시티 운영센터 등을 둘러봤다. ■'국제기구 - MICE 커리어 페어' 840건 상담 등 성황인천시는 지난 17일 송도컨벤시아에서 열린 '2017 국제기구-MICE 커리어 페어'에 1천200여 명의 참가자가 몰려 대성황을 이뤘다고 밝혔다.올해 3회째를 맞은 이번 커리어 페어는 인천시가 외교부와 공동으로 개최했으며, 국내 소재 주요 19개 국제기구가 참여했다. 진로·채용 상담 부스에서는 약 840건의 상담이 이뤄졌다.MICE 분야에서는 '뜨거운 열정, 끝없는 도전'이라는 주제로 인천 출신 개그맨 박지선의 강연이 있었다. 더플랜 이주현 대표(PCO 분야), 이노션 김진문 국장(이벤트 분야) 등 총 5명이 멘토로 참가하는 토크콘서트도 진행됐다. /목동훈기자 mok@kyeongin.com인천경제자유구역청을 방문해 지창열(사진 오른쪽에서 두 번째) 차장과 면담을 가진 벨기에 국회의원단과 주한 대사. /인천경제청 제공

2017-11-26 목동훈

[실향민이야기 꿈엔들 잊힐리야·45]황해남도 청단군 용매도 출신 차학원 할아버지(上)

작은 섬에 황해도 육지 피란민들 몰려 새우잡이 배로 수송 1·4후퇴때 부모와 동생들 먼저 떠나고 곡식 지키다 노모 모시러 온 청년따라 노모 대신 '작은 배' 타고 南으로 거처 옮겨 다니느라 국민학교 4학년만 4번 다녀 천주교 지원으로 '공생조합' 만들어 수십만 평 간척"매일같이 돌·흙짐 지고 손바닥이 가죽이 되도록 땀 흘려" 인천서 정년퇴직 후 돌아와… 당시 땅은 다 팔고 없어인천 영종도 삼목선착장에서 뱃길로 10분이면 닿는 섬 신도(信島). 일명 '삼형제섬'이라 불리는 옹진군 북도면 신도·시도(矢島)·모도(茅島) 중에 가장 큰 섬이다. 신도선착장을 빠져나와 차량으로 1㎞ 정도 달리면 나오는 삼거리에서 오른쪽으로 가면 신도4리다. 올해 10월 기준 57가구, 인구 126명의 작은 마을 신도4리에 펼쳐진 너른 논과 폐염전이 실향민들에 의해 만들어진 땅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황해남도 청단군 용매도 출신의 실향민 차학원 할아버지는 고향을 잃고 신도에 정착해 맨손으로 땅을 일궈냈다. 1942년생 말띠, 일흔 여섯이다.전쟁은 할아버지가 국민학교 4학년 때 발발했다. 황해도 육지의 피란민들이 용매도로 밀려왔고 작은 섬은 난민촌이 됐다. 용매도 청년들은 '난민수송대책위원회'를 구성해 새우잡이 배로 난민들이 원하는 곳까지 연평도, 덕적도, 영흥도 등 남쪽 섬과 군산, 목포 등지로 수송했다. 피란길은 그야말로 아수라장이었다. 용매도민회가 1997년 발간한 '용매도지(龍媒島誌)'는 "선창가에서 배를 타려는 가족과 자식을 찾는 소리, 엄마 아빠를 찾으며 울부짖는 비명소리, 먼저 배에 오르려다 바닷물에 빠져 텀벙대며 허우적거리는, 어떤 여인은 젖먹이 아이를 해변가에 버려둔 채 홀로 배에 오르는 비정한 장면도 있었다"고 설명하고 있다.전쟁 직후 용매도에는 북한군이 들이닥치지는 않았지만 공산당 조직은 상주하며 사상 교육을 했다. 차학원 할아버지는 "선생들이 수업은 안 가르치고 맨날 '김일성 장군의 노래'나 가르쳤어. '장백산 줄기줄기 피 어린 조국, 우리는 자유조선 꽃다발에 아 그 이름도 빛나는 김일성 장군~' 내가 아직도 가사를 안 까먹었어"라고 말했다.고향을 지키고 있던 용매도 주민들은 1·4후퇴 때에야 피란 행렬에 동참했다. 차학원 할아버지네는 조와 수수 농사를 지었는데 수확한 곡식을 그냥 두고 가기가 영 아까웠다. 아버지는 먼저 어머니와 어린 두 동생을 피란시키고 꼭 다시 돌아오겠으니 곡식을 잘 지키고 있으라는 말과 함께 떠났다. 마을에는 '고향을 어찌 떠나냐'며 끝내 피란하지 않은 노인들이 주로 남았다. 이들은 밀물이면 바닷물이 차 섬이 되고 썰물이면 걸어서 들어갈 수 있는 용매도 끝자락 '묵골'이 안전하다며 이곳에 모여 살았다.차학원 할아버지는 할머니, 고모와 함께 아버지를 기다렸지만 뱃길이 막혔는지 몇 달이 지나도록 소식이 없었다.1951년 여름 용매도에 한 청년이 작은 배를 타고 홀로 나타났다. 노모를 두고 장봉도로 피란한 청년이 혼자 노를 저어 어머니를 모시러 온 거였다. 청년은 함께 떠나자고 했지만 노모는 고향을 못 떠난다며 버텼다. 아들과 한창 실랑이를 하던 이 노인은 어르신들 틈에서 그 광경을 보던 차학원 할아버지를 지목하며 "너는 어리고 남자니까 나 대신 이 아저씨를 따라가라"고 했다. 청년이 타고 온 배는 두 사람이 겨우 탈 수 있는 작은 배였다. 마을 주민 누구도 자기가 대신 타겠노라 나서지 않고 당시 11살이던 할아버지에게 자리를 내주었다. 노모의 희생으로 가족이 있는 남한으로 가게 된 할아버지는 지금도 그 배를 잊을 수가 없다. 할아버지가 기자의 취재수첩에 그려 준 배는 앞이 뾰족했고 뒤에서 노를 젓는 식이었다. "밤새 물살을 갈라 장봉도에 도착했지. 날짜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데 도착했을 때 매미가 울더라고. 할머니가 오이 먹으면 멀미 안 한다고 오이를 챙겨주셨으니 여름이 확실해."장봉4리 해안가 백사장에는 피란민들이 한데 모여 천막을 치고 살고 있었다. 난민촌에서 먼저 피란 온 외삼촌을 우연히 만났다. 황해도 피란민 대부분 인천 만석동에 모여 산다는 소문이 돌았다. 2달여 뒤 인천으로 가는 배를 타고 만석동으로 무작정 떠난 할아버지는 수소문 끝에 괭이부리마을 움막집에 사는 아버지를 만날 수 있었다.전쟁이 끝나자 아버지는 돈을 벌러 간다며 집을 나갔다. 할아버지는 어머니와 함께 외삼촌이 있는 장봉도로 다시 건너갔다. 그러다가 신도에서 바다를 막아 땅을 만드는 피란민 정착사업을 한다는 얘기를 듣고 사업을 하는 신도4리로 이주했다. 그때 나이가 18살 무렵이었다고 한다. 그 어린 나이에 한군데 있을 수 없었던 할아버지는 국민학교를 4학년으로만 4번이나 다녔다. 용매국민학교 4학년 때 피란했고 아버지를 찾아 인천 만석동에 와서 축현국민학교 4학년을 다녔다. 하지만 돈을 벌기 위해 '아이스케키' 장사를 하러 다니느라 학교는 가는 둥 마는 둥 했다. 장봉국민학교도 4학년에 편입했다가 신도로 건너가느라 유급했다. 그리고 신도에서 와서야 국민학교를 제대로 마칠 수 있었다. 신도국민학교 12회 졸업생인 할아버지는 동창들보다 나이가 4~5살 많다.1996년 옹진군이 발행한 '옹진군향리지(甕津郡鄕里誌)'에 따르면 신도4리는 사람 왕래가 거의 없는 땅이었다가 실향민이 모여 살아 새로 생긴 마을이라 '신촌'(新村)이라고 불렀다. 실향민들은 먹고 살길이 없다 보니 난민정착사업소의 구제사업 인가를 받아 간척사업을 시작했다. 당시 천주교구제회(NCWC·National Catholic Welfare Conference)는 개간을 하는 실향민들에게 구호물자를 나눠주는 사업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양곡도 지원을 받을 수 있었다. 이곳 신도4리뿐 아니라 영종도, 시흥 등에도 실향민들이 조합을 결성해 갯벌을 메웠다. 1958년 3월 31일 경향신문에는 "천주교구제회가 65개소의 농지개간, 염전개발 등 거주민 1만 세대에 대해 매달 쌀, 밀가루, 옥수수 1만 포대를 자활하는 날까지 지급한다"는 기사가 나온다. 2006년 한국교회사연구소가 발행한 '교회사연구(26집)'도 "NCWC가 1955년부터 미공법(PL) 480호에 따른 잉여 농산물 공여가 시작되면서 응급 구호에 사용됐던 양곡이 개간 사업, 정착 사업 지원용으로 사용돼 1955년부터 1963년까지 8억8만464파운드의 양곡이 지원됐다"고 설명하고 있다.신도4리 실향민들은 '공생조합'이라는 이름의 조합을 결성했다. 말 그대로 '서로 도우며 함께 살자(공생·公生)'는 의미였다. 당시 150가구 수백 명의 실향민이 제대로 된 도구도 없이 수십만 평의 땅을 만들었다. 한 집에 배당되는 땅은 3천 평씩이었다. 조합원들은 긴 제방을 쌓기 위해 맨몸으로 부딪혔다.지난 16일 오후 3시께 공생조합이 만든 신도4리 방조제를 할아버지와 함께 찾았다. 바다 너머 영종도가 멀지도 가깝지도 않게 보이는 곳이다. "싸리나무로 만든 지게를 짊어지면 양옆에서 두 명이 삽으로 흙을 퍼다가 쌓아줬어. '구루마'(손수레)도 없이 그저 지게로 옮겨 실어 '뚝매기(둑막이)'를 했지. 그때 천주교에서 구호를 많이 해주니까 천주교 신자들도 많이 늘어났어." 제방을 쌓는 데 필요한 돌은 당시 선착장이 있던 '하머리'와 섬 아랫자락에 있는 '고두구지'에서 가져왔다. 할아버지는 왼쪽을 바라보며 "저기 보이는 곳이 하머리인데 돌산에 다이너마이트를 박고 폭파해 돌을 떼어냈어. 도구도 없이 장갑 하나만 끼고 돌을 날랐어"라고 설명했다. 옹진군향리지는 "매일같이 나가 돌과 흙짐을 지고 갯벌에 빠지면서 등에 못이 박이고 손바닥이 가죽이 되도록 땀 흘려 일했다"며 그들의 처절함을 소개했다.땅을 만들고 나서는 3천 평씩 나눠 갖는 일이 문제였다. 산 쪽에 붙어 민물을 많이 머금은 땅은 좋았고 바닷가 쪽 땅은 소금기가 있어 땅의 질에 편차가 컸다. 결국 제비뽑기로 좋은 땅 하나 나쁜 땅 하나씩 2필지를 나눠 가졌다. 할아버지 땅의 토지 이력(5천94㎡)을 확인해보니 신규등록일(매립 준공)이 1964년 7월 3일이었다. 1989년 12월 발행한 '옹진군지(甕津郡誌)'의 염전 현황에 신도4리 염전의 준공일은 1964년 9월 19일로 돼 있다.신도4리 주민들은 새로 얻은 땅에서 농사를 지었지만, 썩 잘되지는 않았다. 일반 땅의 절반밖에 수확이 되지 않는 땅이었다. 급전이 필요한 사람들은 염전 사업자에게 땅을 팔고 육지로 떠나기도 했다. 정착사업을 위한 매립이 끝나 천주교구제회의 양곡 지원도 끊겼다. 누구 산인지도 모르면서 아무 산에 올라가 나무를 베어다가 육지에 내다 팔았다. 나무를 한 짐 실어주면 보리쌀 한 됫박을 받았다. 할아버지는 직장을 구하러 인천으로 떠났고 바다에 나갔던 아버지가 신도로 들어와 농사를 지었다.할아버지는 그때 받은 2필지를 모두 팔았다. 1필지는 아버지가 일찍이 팔았고, 나머지 1필지는 할아버지가 5년 전 아들, 딸들 결혼시키느라 팔았다고 한다. 2017년 5월 기준 이 땅의 개별공시지가는 1평(3.3㎡) 당 22만5천원이다. 실거래가는 더 비싼데 5년 전 판 땅은 평당 42만원을 받았다고 한다. 할아버지의 피땀이 고스란히 배어 든 재산이다.할아버지는 직장을 구하러 인천으로 떠났다가 정년퇴직한 뒤 신도에 돌아왔다. 예전 어머니를 모시고 살던 집은 사라져 같은 용매도 출신 고(故) 서상호 할아버지가 살던 집을 고쳐 살고 있다. 기자가 할아버지와 인터뷰를 하던 중 마침 서상호 할아버지의 딸과 사위가 할아버지네를 찾아왔다. 이들 부부도 신도4리에 살고 있다. 텃밭 농사 얘기며 말린 생선 얘기를 하다가 할아버지가 "신문기자가 와서 예전에 공생조합 얘기하고 있었어…"라고 하니, 부부는 "우리 아버지가 그 얘기 잘 아시는데 지금은 아는 사람이 별로 없다"고 말을 받았다. 한때 150가구였던 실향민은 1990년대 후반 20여 가구로 줄었고, 지금은 할아버지네를 포함해 몇 가구 남지 않았다고 한다. "여든이 넘은 1세대 어르신이 살아 계시는데 귀가 어두워 공생조합에 대해 설명해 줄 사람들은 이제 남지 않았지. 아마 신도4리 실향민 1세대도 내가 마지막일 거야."글/김민재기자 kmj@kyeongin.com 사진/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차학원 할아버지가 공생조합이 만든 옹진군 북도면 신도4리 방조제 위에 올라 실향민들과 함께 바다를 막아 둑을 세운 과정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할아버지 뒤쪽으로 보이는 언덕이 방조제 쌓는 돌을 구하던 '하머리'지역이다.차학원 할아버지가 옹진군 북도면 신도4리 자신의 집에서 피란 생활과 신도4리에 정착하기까지 과정을 설명하고 있다.차학원 할아버지가 용매도에서 장봉도로 피란할 때 탔던 배의 모양. 할아버지가 기자의 취재 수첩에 직접 그렸다.

2017-11-22 김민재

[zoom in 송도]'스마트시티' 해외수출 나선 인천경제청

플랫폼 개발 '저작·특허권' 획득IDC 도시행정분야 '최우수' 선정해외기업·정부 벤치마킹 러브콜태국 아마타그룹 기술협력 MOU송도국제도시 등 인천경제자유구역(IFEZ)에 구축된 '스마트시티'가 국내외에서 많은 관심과 호평을 받고 있다. 최근에는 인천경제자유구역청이 태국 최대 산업단지 개발회사 아마타(AMATA)그룹과 스마트시티 기술 협력에 관한 양해각서를 체결하는 등 해외 수출에도 속도를 내고 있다.■스마트시티 구축 공공서비스 향상스마트시티는 첨단 유비쿼터스 기술로 교통·방범·방재·환경·시설물 등을 통합 관리하는 미래형 도시 모델이다. 송도국제도시 유시티(U-City) 1단계 구축사업이 지난 3월 준공되면서 스마트시티 운영센터는 4월부터 송도와 청라국제도시를 통합 관리하게 됐다. 올해 말 영종하늘도시와 미단시티의 유시티 구축사업이 완료되면, 송도에 위치한 스마트시티 운영센터에서 IFEZ 모든 지역을 통합 관리할 수 있게 된다. 스마트시티 운영센터는 버스정보안내단말기를 통해 한국어·영어·중국어·일본어 등 다국어로 버스 도착 정보를 제공한다. IFEZ 곳곳에 설치된 CCTV를 활용해 거동 수상자를 탐지·조치하는 등 생활방범 서비스를 제공하고, 주요 교차로를 통과하는 차량의 번호를 수집한다.고층 건물 화재 감시, 환경 정보 수집·제공 등의 기능도 한다. 인천경제청에 따르면 수사기관에 CCTV 영상자료를 제공(열람 포함)한 것은 2014년부터 올 10월까지 1천353건에 달한다. CCTV 모니터링을 통해 특이 사항을 발견·조치하거나 민원을 처리한 건수도 611건이나 된다.■스마트시티 기술력 인정받아글로벌 시장 분석기관 IDC(International Data Corporation)는 지난 8월 IFEZ 스마트시티 운영센터를 도시행정 분야 최우수 프로젝트로 선정했다. IFEZ 스마트시티는 'GeoSmart Asia 2017 in Malaysia' 콘퍼런스에서도 전자지도·GIS를 활용한 소프트웨어 분야 최우수상을 받았다. 인천경제청 관계자는 "스마트시티 해외 수출 기술의 공신력을 확보한 것"이라고 평가했다. 우리 정부도 IFEZ 스마트시티의 우수성을 인정했다. 행정안전부의 '전자정부 우수서비스 사례 발굴'에서 IFEZ 스마트시티 프로젝트가 우수 사례로 뽑혔다. IFEZ 스마트시티 기술력의 중심에는 '스마트시티 플랫폼'이 있다. 인천경제청은 스마트시티 플랫폼을 자체 개발하고 올 3월과 6월 각각 저작권, 특허권까지 획득했다. 또한 인천경제청은 송도·청라·영종의 스마트시티를 통합 관리함으로써, 전문기관에서 설계한 사업비보다 120억원을 절감했다.■벤치마킹 및 협력 요청 쇄도송도 G타워 문화동 3·4층에 있는 스마트시티 운영센터는 세계 각국의 공무원과 기업인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 최첨단 기술을 적용한 'IFEZ 스마트시티 모델'을 벤치마킹하기 위해서다. 2014년 개소 이후 올 10월까지 누적 외국인 방문객 수는 8천413명이다. 여기에 내국인 방문객을 합하면 총 1만2천356명이 스마트시티 운영센터를 찾았다. ┃표 참조인천경제청은 지난 16일 태국 아마타(AMATA)그룹과 스마트시티 기술 협력에 관한 양해각서를 교환했다. 이를 계기로 '도시개발(스마트시티 분야) 기술 협력 체계 구축'과 '인적·노하우 교류' 등에 협력하기로 했다. IFEZ 스마트시티 플랫폼과 국내 업체의 스마트시티 구축·운영 기술을 해외에 수출하기 위한 발판을 마련했다는 평가다. 인천경제청은 베트남 주요 도시에 스마트시티 플랫폼을 수출하고자 타당성 용역을 진행하고 있으며, 인도에 수출하게 될 스마트시티를 기반으로 한 드론 환경모니터링 구축 R&D사업도 진행하고 있다. 인천경제청은 에콰도르, 콜롬비아와 각각 계약을 체결해 스마트시티 구축사업과 관련해 타당성 조사 용역 또는 컨설팅에 참여했으며, 사우디아라비아 등 다른 아시아 국가와도 스마트시티 수출에 관해 협의하고 있다.김진용 인천경제청장은 "스마트시티 서비스를 도시 공간에 융합해 시민에게 편의를 제공하고 도시의 경쟁력을 높여 나가고 있다"며 "스마트시티 모델 해외 수출도 적극 추진하겠다"고 했다. /목동훈기자 mok@kyeongin.com송도국제도시 G타워 문화동에 있는 스마트시티 운영센터. /인천경제자유구역청 제공

2017-11-19 목동훈

[송도국제도시 브리핑]'접근성 향상' 한국조지메이슨大 서울사무소 문열어

■'접근성 향상' 한국조지메이슨大 서울사무소 문열어인천 송도국제도시 인천글로벌캠퍼스에 입주해 있는 한국조지메이슨대학교는 지난 14일 서울 강남빌딩 16층에서 서울사무소 개소식을 개최했다. 서울사무소는 서울과 지방의 학생·학부모의 지속적인 요청에 따라 그들의 접근성을 높이고자 설립됐다.이날 행사에는 스티븐 리 한국조지메이슨대 총장, 정근모 전 과학기술처 장관, 송희연 아시아개발연구원 이사장, 김현명 한국수입협회 부회장, 김석오 수원세관장, 정헌 전 SK가스 대표, 이인자 한국조지메이슨대 학부모회장 등이 참석했다.서울사무소는 ▲입학전형, 모집요강에 대한 상담 ▲지원 전략 및 최신 정보 자료와 전망 제공 ▲입학접수 등 학생·학부모·교사들을 위한 다양한 입학 업무를 제공한다.■경제청, 30일 G타워서 '송도바이오프론트 심포지엄'인천경제자유구역청은 오는 30일 오후 2시 송도국제도시 G타워 23층 아뜨리움홀에서 '2017 송도바이오프론트 심포지엄'을 개최한다.올해 심포지엄은 '바이오산업 동향과 업종별 공간 수요의 특성'을 논의하는 자리다. 자유로운 분위기의 좌담회 형식으로 진행된다.좌담자는 바이오스펙데이터 이기형 대표(좌장), 셀트리온 윤정원 수석부사장, 코오롱생명과학 김수정 소장, 마크로젠 정현용 대표 등 5~6명이다. 인천경제청 관계자는 "송도바이오단지 잔여 부지와 11공구 신규 부지의 공간 수요를 파악하고 투자유치 계획을 수립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라며 "송도바이오프론트 인지도 제고도 기대된다"고 했다.인천경제청은 2012년 12월 송도바이오단지 명칭을 '송도바이오프론트'로 정하고, 2013년부터 심포지엄을 열고 있다. /목동훈기자 mok@kyeongin.com한국조지메이슨대학교는 지난 14일 서울 강남빌딩 16층에서 서울사무소 개소식을 했다. /한국조지메이슨대 제공

2017-11-19 목동훈

[실향민이야기 꿈엔들 잊힐리야·44]함경남도 단천시 출신 전진성 할아버지(下)

선교회활동 덕에 2003년 조평통 초청 '방북' 생존 알고도 밝히지 못해 어렵게 만남 성사신평휴게소서 재회 어릴적 얼굴 없어 '어색'동생이 할아버지 목 뒤 큰 점 알아보고 "확신""당시 단천은 온통 모래밭이라 사막 같았다"전씨 집성촌서 가장 큰집 농사도 짓고 '유복''지하의 박물관' 광산과 수력발전소로 유명'고향의 맛' 가자미식해는 지금도 즐겨먹어함경남도 단천 출신 전진성 할아버지는 2003년 겨울을 잊을 수가 없다. 할아버지는 이때 북한 조국평화통일위원회(조평통)의 정식 초청을 받아 평양 등지를 방문했고, 꿈에 그리던 이산가족 상봉을 했다. 폭설로 도로가 막혀 그렇게도 가고 싶었던 고향 땅은 밟지 못했지만, 함경남도 함흥과 원산 사이에 있는 일종의 여관인 '신평휴게소'라는 곳에 가서 사촌동생을 만났다. 피란 나올 때는 생존해 있었던 부모님뿐만 아니라 일가친척 대부분이 이제는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는 얘기를 동생에게서 들을 수 있었다. 가족의 생사라도 알게 된 것이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었다. 전진성 할아버지는 집에 돌아온 뒤 가장 먼저 부모를 기리는 추도 예배부터 드렸다. 그동안에는 생사를 직접 확인할 수 없는 부모님을 추모(追慕)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할아버지가 북한 땅을 밟을 수 있었던 것은 평소 활발한 사회활동 덕분이었다. 할아버지는 인천세광병원에서 나온 뒤에도 교회 일을 적극적으로 하면서 '한민족통일선교회' 위원으로 활동하기도 했는데, 이 단체가 북한 양로원, 고아원 등에 다년간 지원한 고마움의 표시로 조평통이 할아버지 등 4명을 공식 초청했다. 할아버지는 "기도했던 일이 현실로 이뤄진 것"이라고 했다. 제8차 남북적십자회담에 따른 결과로 1985년부터 남과 북의 이산가족 상봉이 시작됐지만, 상봉의 기회를 얻게 된 실향민은 전체로 따져봤을 때 극소수다. 대한적십자사에서 지난해 발간한 '이산가족 70년(1945~2015)'을 보면 상봉을 요청한 이산가족 13만 명 가운데 전진성 할아버지와 같이 실제 상봉의 기회를 가진 사람은 5천 명 내외로 전체의 4% 미만에 불과하다. 특히나 전진성 할아버지와 같이 조평통의 공식 초청을 통해 북한을 방문해 가족을 만난다는 것은 극히 어려운 일이었다.조평통의 공식 초청을 받은 할아버지는 2003년 12월 2일부터 13일까지 평양과 함경남도 원산, 함흥, 영흥 등지를 방문했다. 할아버지 집에는 김일성 생가, 김일성·김정일 선물관, 묘향산, 평양개선문 등에서 찍은 사진이 가득했다. 할아버지는 방북 때 가족을 만나보지 못할 뻔 했는데, 북한 당국에 애원해서 뒤늦게 기적적으로 사촌동생을 만나 볼 수 있었다. 북한 당국에서는 처음에 "가족을 수소문했으나 찾지 못했다"고 했는데, 할아버지가 "수십 대에 걸쳐 함경남도 단천군 복귀면 장내리에 살았다. 꼭 살아있을 테니 찾아달라"며 애원하자 막판에 가족을 찾았다는 연락이 왔던 거다. 할아버지는 여러 경로를 통해 삼촌과 사촌동생이 살아있다는 사실을 알고는 있었지만 이를 북한 당국에 이야기할 수는 없었던 터였다.할아버지보다 10살 밑인 사촌동생을 신평휴게소에서 만났다. "잠깐만 몸을 피했다 돌아오겠다"며 고향 집을 떠난 지 53년 만이었다. 할아버지가 피란을 갈 때 코흘리개 어린이였던 동생의 얼굴에는 주름이 가득했다. 처음 만났을 때 어릴 적 얼굴이 없어 서로를 전혀 알아보지 못했다. 어색한 표정을 짓던 동생은 느닷없이 할아버지의 목을 보더니 "맞다"는 말과 함께 큰절을 올렸다고 한다. 할아버지 목덜미에는 큰 점이 있는데, 이를 알아본 것이다. 친척들은 언젠가 남한에 간 전진성 할아버지를 만나게 된다면 목에 난 점을 보면 된다는 말을 해왔다고 한다. 할아버지는 외아들인 데다 장손이라 친척들이 피란 간 할아버지의 생사를 늘 궁금해했다고 한다.할아버지는 어렵게 만난 동생에게 가지고 있던 모든 것을 줬다. 할아버지는 동생을 만나기 전 묵고 있던 고려호텔 지하 기념품점에서 여러 물건을 사고, 차고 있던 시계와 반지까지 동생에게 끼워줬다. 할아버지는 반가운 마음에 입고 있던 코트와 모자까지 벗어줬다.이산가족 상봉의 기회를 한 번도 갖지 못하고 세상을 뜨는 실향민들이 많다. 북한을 직접 방문해 가족을 만난 전진성 할아버지는 매우 운이 좋았다고 할 수 있다. 현대경제연구원에서 올해 9월 발표한 '이산가족 상봉 현황과 시사점'에 따르면 2017년 8월 31일 기준 이산가족 상봉 신청자 13만1천221명 가운데 사망자가 54.2%(7만1천145명)에 달해 생존자(6만76명, 45.8%)를 크게 넘어섰다.지척에 가족을 두고도 생사조차 확인하지 못하는 이산가족의 절절한 사연은 가슴을 울린다. 분단문학의 거장으로 불리는 이호철(1932~2016·함경남도 원산 출신)이 1973년 낸 단편소설 '이단자(4)'의 주인공 현우가 북에 있는 동생에게 쓴 편지(신문 지상편지)에는 가족을 향한 절절한 심정이 담겨 있다. "……. 그때 네 나이 열다섯, 내 나이 열아홉이었다. 지금은 내 나이 갓 마흔이요, 네 나이 서른여섯이로구나. 아, 서른여섯 살 먹은 너, 네가 서른여섯 살이나 먹다니. 아무리 애를 써도 열다섯 살 먹은 네 얼굴만 떠오르지, 서른여섯 살 먹은 네 얼굴은 도저히 떠오르지 않는구나. 몹쓸 꿈치고는 너무도 긴 꿈이어서 참으로 허망하구나. 서른여섯 살 먹은 너와 만날 일이, 갓마흔 된 내 얼굴을 너한테 보일 일이 기쁘기 이전에 어쩐지 끔찍스럽고 처연해지기부터 하는구나.(…중략…) 내가 나오던 그때, 할아버지는 일흔셋인가였으니까 이미 저 세상으로 가셨겠지. 살아 계신다면 아마 아흔너댓이 될 것이다. 쉰이 못 되시던 아버지 어머니도(가만, 한참 따져봐야겠다) 일흔 살 안팎이겠구나. 누나들, 그리고 우리의 귀염둥이 누이동생, 아, 그애도 이제 서른 살이로구나! 모두 안녕들 하시냐. 청탁에 못 이겨 쓰다보니까 정말로 새삼스럽게 목구멍이 막혀오고 가슴이 막힌다. 이만 줄이겠다……."할아버지는 북한을 방문했을 때 고향집인 '함경남도 단천군 복귀면 장내리 392번지'에는 찾아가지 못했지만, 고향의 현재 모습은 전해 들을 수 있었다. 사촌 동생은 고향 마을에는 사람이 더는 살지 않는다고 했다. 할아버지의 고향 마을 '토성촌'에 있던 가옥은 모두 사라지고 인근에 있는 '화장'이라는 지역에 일자로 지어 놓은 집으로 옮겨갔다고 했다. 동생은 "화장의 양지바른 곳에 일자로 집을 지어줬다"고 했다.할아버지는 고향 장내리는 '마당 장(場)'이라는 이름대로 넓게 퍼진 지형이었다고 기억했다. 고향 땅 주위가 온통 모래밭이라 '사막' 같았다고 했다. '백마산'이라는 이름의 모래산이 있었고, 산을 넘으면 넓은 동해 바다가 한눈에 들어왔다. 남쪽의 평화문제연구소와 북쪽의 과학백과사전출판사가 1999~2005년 공동으로 편찬한 '조선향토대백과'는 장내리를 "북부와 서부가 그리 높지 않은 야산들로 되어 있으며 남동부의 동해 가까이에는 사취와 모래언덕이 분포되어 있다"고 할아버지와 비슷하게 설명한다. 장내리의 토질은 쌀농사를 짓기에는 적합하지 않아 동네 사람들은 밭에서 조, 수수, 감자, 피 등을 키웠다고 할아버지는 말했다. 장내리 토성촌은 전씨 집안(본가 강원도 정선)이 수십 대에 걸쳐 살아온 집성촌이었다. 마을에서 가장 큰 집이 할아버지네였다. 할아버지의 조부(祖父)는 한의사였고, 아버지는 크게 농사를 지어 집안은 유복했다. 당시 학비가 비싸 다니기 힘든 전문학교(북청전문학교 잠업과)를 다니기도 했다.당시 단천은 광산과 수력발전소가 유명했다. 할아버지는 "마그네사이트, 은, 유화철 등을 생산하는 광산과 허천강을 따라 큰 수력 발전소가 있었다"고 기억했다. 함경남도지편찬위원회에서 1968년 펴낸 함경남도지의 단천군 편을 보면 단천은 '지하의 박물관'이라고 불릴 정도로 자원 매장량이 많았다. 함경도지에는 단천군의 광업에 대해 "세계 제1의 36만톤의 매장량을 자랑하는 마그네사이트, 북두일면 용장광산을 위시하여 검덕의 구리, 납, 아연, 동양 최고의 코발트, 금, 운모, 철광, 신풍광산의 인탄석과 유화철, 석면, 카드미움, 사금, 은, 옥석, 흑연 등 유수한 지하 보고는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자원을 개발하고 있다"고 설명하고 있다. 서울대학교에서 2008년 발행한 통일학 연구총서 '남북한 환경정책 비교연구'는 단천 마그네사이트광에 대해 "노출된 것만도 길이가 7천600m, 깊이가 2~100m에 달하는 세계 최대의 마그네사이트 광산"이라고 했다. 함경남도지는 허천강수력발전전력을 '일명 단천수력발전소'라고 칭하며 "일제 재벌의 투자로 당시 조선 최대의 발전량을 과시한 발전소"라고 했다. 할아버지는 고향 단천에서 먹었던 음식으로는 콩과 쌀을 갈아서 만든 '콩떡'과 가자미, 좁쌀, 고춧가루, 무채 등을 버무린 뒤 숙성시켜서 만드는 '가자미 식해'가 기억에 남는다고 했다. 속을 다 꺼낸 동태에다가 두부와 생선 내장 등으로 만든 순대를 넣은 '통시미'도 생각만 해도 입맛을 다시게 되는 고향의 음식이다. 할아버지는 "1년에 2번은 강원도 속초 아바이마을에 있는 '단천식당'을 찾아 고향음식을 먹는다"고 했다. 할아버지는 인터뷰 중 아바이마을에서 사온 가자미식해를 냉장고에서 꺼내 보여주면서 "항상 먹을 수 있게 떨어질 때쯤 되면 다시 주문한다"고 말했다.단천식당 사장 윤복자(78·여) 할머니의 딸 김채현(50)씨는 "돌아가신 아버지의 고향이 단천이라 단천식당으로 이름 짓고 고향음식을 만든 것이 50년이 넘었다"며 "아버지는 생전에 단천에서 추울 때 먹을 게 없어서 겨울을 대비한 감자로 만든 냉면이나 가자미식해 등을 많이 먹었다고 하셨다. 북에서 만드는 방식 그대로 음식을 하고 있는데, 고향 음식을 맛보러 실향민분들뿐만 아니라 '새터민'들도 많이들 온다"고 말했다.글/홍현기기자 hhk@kyeongin.com 사진/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2003년 북한 조국평화통일위원회(조평통)의 초청을 받아 북한을 찾은 전진성 할아버지가 신평휴게소에서 사촌동생을 만나 큰절을 받고 있는 모습. /전진성 할아버지 제공전진성 할아버지가 지난 2003년 신평휴게소에서 사촌동생을 만났을 당시의 사진을 보여주고 있다. 할아버지가 가리키는 사진은 사촌동생이 할아버지 목에 있는 점을 확인한 뒤 "형이 맞다"며 좋아하는 모습이다. /전진성 할아버지 제공전진성 할아버지가 사촌동생과 함께 신평휴게소에 온 북한 단천시 대표자와 악수를 하고 있다. 할아버지 옆에 서있는 동생은 할아버지의 외투와 모자를 쓰고 있다. 할아버지는 동생에게 겉옷을 벗어주는 바람에 12월 추운 날씨 속에서도 옷을 얇게 입고 있다. /전진성 할아버지 제공전진성 할아버지가 위원으로 있었던 '한민족통일선교회'가 조평통으로부터 받은 초청장. /전진성 할아버지 제공

2017-11-15 홍현기

[zoom in 송도]송도랜드마크시티 사태 쟁점과 전망

경제청 '책임조항' 누락 사업지연 손 못써재협의때 초과 개발이익 사항 논의 '발목'시행자 기투입비용등도 제대로 검증 안해토지는 3.3㎡당 300만원 '특혜 논란' 여전개발이익 정산·분배 시기 "이달 중 합의"블록별로 정산하되 공급가 인상 힘들 듯국감 못밝힌 뒷거래 의혹은 검찰 숙제로인천 송도국제도시 6·8공구 내 공동주택용지 34만㎡를 개발하는 송도랜드마크시티(SLC) 사업이 송도는 물론 인천의 사회적 이슈로 부각됐다. 올 8월 정대유 전 인천경제자유구역청 차장이 페이스북에 언론·기업·사정기관·시민단체 간 유착 의혹을 제기하면서다. 정 전 차장이 개발이익 환수를 추진하고 있던 SLC 사업에 이목이 쏠렸고, 인천시의회는 '송도6·8공구 개발이익 환수 관련 조사특별위원회'(이하 조사특위)를 구성해 9월25일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했다. 이후 인천시에 대한 국회 국정감사, 인천시의회 시정질문에서도 SLC 사업이 최대 이슈였다. 정 전 차장이 페이스북에 글을 올린 8월 중순부터 조사특위 활동이 마무리 단계로 접어든 11월6일까지 약 3개월간 인천을 뜨겁게 달군 것이다. 이 과정에서 안상수·송영길·유정복 등 전·현직 시장의 책임 문제가 정치적 쟁점화되기도 했다.'줌인송도'에서는 조사특위·국정감사·시정질문에서 나온 내용을 정리하고, 앞으로 사업이 어떻게 진행될 것인지 전망해봤다.■ 특혜 논란의 발단이 된 '허술한 계약'SLC 사업은 민간이 송도 6·8공구 34만㎡에 아파트를 짓는 사업이다. 원래는 사업시행자가 송도 6·8공구에 151층짜리 인천타워와 골프장을 만들고 그 주변 228만㎡를 모두 개발하는 것(2007년 8월 협약 내용)이었다. 신도시를 조성하는 사업이 아파트 건립사업으로 축소된 것이다. 글로벌 금융위기에 따른 부동산 경기 침체 등이 그 이유였다. 인천타워 건립 등 사업이 계속 지연되자, 인천경제청은 SLC 사업시행자와 사업계획 조정 협상에 나섰다. 하지만 인천경제청은 불리한 위치에서 협상을 벌일 수밖에 없었다. '인천타워 건립 강제 시한'과 이 건물을 짓지 않을 경우에 대한 '사업시행자 책임'이 협약서에 없었기 때문이다. 이는 인천경제청이 사업시행자 지위를 취소하지 못한 이유이기도 하다. SLC 사업시행자가 협약 내용을 근거로 소송을 걸 경우, 이길 가능성이 높지 않은 데다 사업이 장기간 표류할 수 있는 문제가 있었다.'허술한 계약'은 2015년 1월 사업계획 조정합의에서도 나타난다. 인천경제청은 조정합의를 통해 공급 부지를 228만㎡에서 34만㎡로 줄이고, 땅값을 3.3㎡당 240만원에서 300만원으로 인상했다. 또 초과개발이익(내부수익률의 12% 초과분)을 절반씩 나누기로 했다. 그런데 개발이익 배분 시기는 조정합의서에서 빠졌다. 불리한 위치에서 협상을 벌이다 보니 이 부분까지 챙기지 못한 것이다. 이 때문에 인천경제청은 '블록별 개발이익 정산·배분'을 요구하는 반면, SLC 사업시행자는 '모든 블록 개발 후 정산·배분'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사업계획 조정합의 '특혜 논란'인천경제청은 2015년 1월 사업계획 조정합의가 인천시 재정 건전화에 큰 도움이 됐다고 주장한다. 조정합의를 통해 많은 땅을 회수했고, '토지 공급가 인상'과 '개발이익 환수 기준 마련'을 이뤄냈다는 것이다. 하지만 공동주택용지를 3.3㎡당 300만원에 공급하기로 한 것은 특혜라는 지적이 나온다. 인천경제청은 SLC 사업시행자가 기투입한 비용(890억 원), 땅의 상태와 주변 시세 등을 고려해 책정한 금액이라고 해명하고 있다. 그럼에도 특혜 논란은 계속되고 있다. SLC 사업시행자가 그동안 어디에 얼마의 돈을 썼는지를 철저히 검증하지 못한 상태에서 조정합의가 이뤄졌기 때문이다. 인천경제청이 SLC 사업시행자의 기투입비를 조사한 적은 있지만, 외부 전문기관을 통해 제대로 검증한 적은 없다. 인천경제청은 올 8월에야 'SLC 재무·회계 조사용역'을 발주한 상태다.■ 개발이익 분배 시기 합의될까특혜 논란이 일었던 SLC 사업 문제는 인천경제청과 사업시행자가 '개발이익 정산·배분 시기'에 합의하는 것으로 마무리될 가능성이 크다. 이미 인천경제청은 사업시행자와 협상을 벌여 11월 말까지 개발이익 배분 시기에 합의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인천경제청 요구대로 블록별로 개발이익을 정산·배분하거나, 블록별로 정산하되 전체 사업 완료 후 배분하는 방식이 유력해 보인다.'토지 공급가 인상'은 불가능할 것이란 전망이 우세하다. 사업시행자가 땅값 인상을 받아들일 가능성이 없고, 인천경제청도 땅값 재조정을 요구할 계획이 없다.SLC 사업과 관련해 외압 또는 뒷거래가 있었는지, 전·현직 시장의 행정 행위(계약체결과 조정합의)가 배임 등의 혐의에 해당하는지는 검찰 수사에서 가려질 전망이다. SLC 사업 문제는 검찰에 고소·고발된 상태다. 조사특위·국감에서는 외압과 뒷거래가 있었는지를 밝혀내지 못했다. /목동훈기자 mok@kyeongin.com송도는 물론 인천의 사회적 이슈로 주목받으며 특혜 논란이 일고 있는 인천 송도국제도시 6·8공구 내 송도랜드마크시티(SLC) 사업부지 전경. /경인일보DB인천의 상징 건물로 추진되다 무산된 '151층 인천타워'의 조감도./경인일보DB

2017-11-12 목동훈

[송도국제도시 브리핑]IFEZ 내·외국인 소통 체육대회

■IFEZ 내·외국인 소통 체육대회인천경제자유구역청(청장·김진용)은 지난 11일 송도국제도시에 있는 인천글로벌캠퍼스 실내체육관에서 '인천경제자유구역(IFEZ) 가족 체육대회'를 개최했다.이날 행사는 IFEZ에 사는 외국인과 내국인 가족이 함께 어우러져 소통하기 위한 것으로 약 200명이 참여했다. 행사 1부(운동회)는 7인 8각, OX 퀴즈, 미션 달리기 등 모든 연령층이 즐길 수 있는 체육행사로 구성됐다. 2부는 외국인 주민 동아리가 준비한 라틴댄스(브라질팀)와 패션쇼(인도 커뮤니티) 등으로 진행됐다.김진용 청장은 개회식에서 "IFEZ는 외국인과 내국인이 어우러져 함께 사는 국제도시인 만큼, 체육대회를 통해 뛰고 즐기면서 서로 다른 문화를 이해하고 소통하는 시간이 되길 기대한다"고 말했다.■5·7공구 공원 2개·녹지 6개 조성송도국제도시 5·7공구에 오는 2019년까지 공원 2개와 녹지 6개가 조성된다.인천경제자유구역청이 최근 인천시의회에 제출한 '주요업무보고' 자료를 보면 2019년까지 송도 5·7공구에 314억 원을 들여 20만7천㎡ 규모의 공원과 녹지를 조성할 계획이다.송도 문화공원 3·4지구(10만6천㎡)는 2019년 8월 준공될 예정이다. 연세대 송도국제화복합단지 주변 1호 근린공원(6천㎡), 6호 완충녹지(2만5천㎡), 7·8호 완충녹지(3만6천㎡)는 2019년 3월 준공을 목표로 조성공사가 진행된다. 첨단산업클러스터 주변에도 2019년 3월까지 3만2천㎡ 규모의 연결녹지(1·2호)와 경관녹지(1호)가 조성된다. 인천경제청 관계자는 "송도4교 연결 도로 주변에 공원과 녹지를 조성해 주민들에게 휴식 공간으로 제공할 계획"이라고 했다. /목동훈기자 mok@kyeongin.com

2017-11-12 목동훈

[실향민이야기 꿈엔들 잊힐리야·43]함경남도 단천시 출신 전진성 할아버지(中)

1960년대 동부동장 맡아 공직생활 '첫 발'노점상 계도·장마철 굴포천 범람 애먹어10년뒤 인천기독병원 사무장으로 새출발지역 첫 CT 도입 등 '대표 의료기관' 성장병원비 비싸 진료 못받던 환자들 안타까워1982년 세광병원 창설멤버로 참여하기도함경남도 단천 출신 전진성(88) 할아버지는 30여 년간 인천의 동사무소 행정과 의료 현장 최일선에서 일한 흔치 않은 경력을 갖고 있다. 특히 인천 최초의 민간 종합병원으로 볼 수 있는 인천기독병원(중구 율목동)에서 사무장(총무과장)으로 일하다가 인천세광병원(남구 주안동) 창설 과정에 참여한 할아버지는 1970~80년대 인천 지역의 의료환경을 더듬어 볼 수 있게 하는 '기억의 창'이기도 하다. 인천지역의 의료사가 체계적으로 정리돼 있지 않은 현실에서 할아버지의 오랜 기간 의료행정 경험은 소중한 사료가 된다.할아버지는 처음에는 동 사무소 동장으로 행정 일을 시작했다. 1961년 부평1동 동부동(현 부평4동)에서 별정직 공무원으로 일했다. 동부동은 부평시장 등 상권이 발달해 1960년대 부평에서 가장 인구가 많았다. 할아버지는 "다른 동과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동부동이 컸다"며 "직원 수도 훨씬 많았다"고 말했다. 부평사편찬위원회가 지난 2007년 발행한 '부평사'를 보면 1962년 12월 경기도 인천시 부평출장소 관할인 부평1동 동부동은 면적이 2.253㎢이었고, 3천121가구, 인구수가 1만6천857명이었다. 부평 지역 다른 동에 비해 압도적으로 인구가 많았다. 부평시장은 1962년 공설상설시장으로 설치됐고, 계속해 번창해 1971년 5월에는 사설시장인 부평자유시장으로 바뀌었다. 1970년대 부평자유시장의 대지 면적은 1천201㎡, 건평이 1천756㎡, 점포 수가 47개였다. 부평시장의 경우 미군부대와 연결돼 있었고, 1973년 미군이 대대적인 철수를 한 뒤에도 부평수출공단의 근로자들이 주로 이용하면서 성황을 이뤘다. 휴일이나 명절 때면 '궤짝에 돈을 담기 바빴을 정도'로 1970년대 최고의 전성기를 누렸다.당시 동 사무소 동장은 새마을운동이나 예비군, 민방위 등을 관리하는 것이 주요 업무였는데, 동네에서 일어나는 각종 문제도 챙겨야 했다. 할아버지는 1960년대 초중반 동부동장을 지냈다. 이때 시장 길가를 따라 즐비하게 늘어선 노점상 문제가 심각해 골머리를 앓았다. 당시 노점상으로 인해 자동차는 물론이고 사람의 통행도 어려울 정도였는데, 상인들의 반발이 거세 단속도 어려워 이들을 '계도'하는 데 애를 먹었다고 한다. 할아버지가 떠난 뒤에도 부평시장 노점상 문제는 심각했던 모양이다. 경향신문 1971년 8월 27일자에는 부평시장 노점상인 500여 명이 철거하러 나온 인천시 북구청 직원 80여 명과 경찰관 50여 명에게 돌을 던져, 10여 명이 중경상을 입었다는 기사가 실렸다. 할아버지는 1960년대 중후반에는 부평1동 서부동장으로 활동했는데, 이때는 장마철이면 굴포천이 범람해 직접 모래포대를 쌓는 일까지 해야 했다.할아버지는 10년간 동장 일을 하다가 다른 분야를 경험하고 싶어서 1970년 인천기독병원 사무장에 지원했다. 당시 사무장 채용 요건이 교회에 다닐 것, 공직 경험이 있을 것, 병원근무 경험이 있을 것 등 3가지였는데, 할아버지는 모든 요건을 충족했다. 할아버지는 부인이 다니던 부평 연합병원에서도 잠깐 근무했었다. "기독병원에 면접을 보러 갔는데 바로 다음날부터 출근하라고 해서 그날로 일을 시작했어."1952년 인천시 중구 율목동 237에 설립한 인천기독병원은 설립 초기 피란민 진료소 역할도 담당했다. 병원에는 '기독교대한감리회 인천기독병원'이라는 간판뿐만 아니라 '북한피난민연합회 진료소'라는 간판이 걸렸다. 1959년에 나온 '경기사전(京畿事典)'은 기독병원을 설명하면서, '약 40년 전(1919년께) 감리교 선교부 경영 인천부인병원으로 개설 후 왜정 말기에 폐쇄되었다가 8년 전에 인천기독병원으로 재출발하여 금일에 이르렀다'고 했다.기독병원은 이후 미국 감리교 선교부의 도움을 받아 당시 인천의 대표 의료기관으로 급성장했다. 1956년부터는 수련의가 들어왔고, 1958년에는 정부로부터 전공의 과정 신설 허가를 받으면서 종합병원의 면모를 갖추게 된다. 기독병원 설립 당시 인천에 어느 정도 규모를 갖춘 의료기관으로는 인천도립병원, 인천적십자병원, 동양방직 부속병원 정도가 있었고, 성모자애병원(현 인천성모병원)은 1955년에야 문을 열었다. 인천길병원은 전신인 이길여산부인과의원이 1958년 개원했고, 의료법인 인천길병원 법인설립허가는 1979년 이뤄졌다. 인하대병원의 경우 1996년에야 문을 열었다. 인천기독병원은 인근에 있는 도립병원(인천시 중구 신흥동 2가)과 경쟁할 수밖에 없었는데, 기독병원이 환자 선호도 면에서 앞선 것으로 보인다. 지난 2001년 나온 '인천의료원 70년사'에 따르면 이 병원의 전신인 인천도립병원의 1959년 병상 가동률은 44.5%, 기독병원이 60%였고, 1961년에는 각각 34.2%, 57.4%였다.이후 인천기독병원은 1969년 180병상, 1975년 250병상, 1981년 409병상으로 지속 확장한다. 이 병원이 지난 2003년 발간한 '인천기독병원 50년사'를 보면 기독병원은 경기도 일원 의료기관 가운데 가장 먼저 최신 의료기기를 들여놔 충청도, 전라도 등 지방뿐만 아니라 서울 환자들도 많이 찾았다. 1953년에는 X-Ray 기계가 도입됐고, 1980년부터는 컴퓨터 단층촬영기(CT)를 가동하기 시작했다. 당시 CT는 웬만한 병원은 설치할 엄두도 내지 못할 만큼 고가여서 보건복지부는 인천, 경기 지역의 여러 병원에 인천기독병원의 장비를 공동 이용해달라고 권장하기도 했다. 할아버지는 "인천에서 CT를 도입한 것은 기독병원이 최초였다. 당시 최신식 의료기술을 자랑했다"며 "병원에서 대한방직, 대우전자 등 인천지역 주요기업들의 건강진단을 다 맡는 등 인천을 대표하는 의료기관이었다"고 말했다. 인천기독병원 이종철 총무팀장은 "인천기독병원의 CT 도입은 서울 세브란스 병원보다도 빨라서 세브란스 환자들이 CT를 찍으러 기독병원에 오기도 했다"고 말했다.1979년부터 인천기독병원 부근에서 의료기기 상점을 운영해 온 박차영(67)씨는 "당시 인천기독병원 인근에는 은행이 2곳이나 있었고 극장에 예식장 등이 있었다"며 "지금의 모습을 보면 상상이 안 가겠지만, 당시 기독병원 주변이 인천의 중심지 역할을 했다"고 말했다.하지만 전진성 할아버지가 근무했던 1970년대에는 의료보험 적용이 제대로 안 돼 병원비가 비싸다 보니 기독병원 문턱을 넘지 못하는 사람도 많았다. 보건복지부가 지난 2015년 12월 발행한 '보건복지 70년사'를 보면 의료보험제도는 1963년 의료보험법 제정으로 도입됐지만 제대로 시행되지 못하다가 1977년부터 500인 이상 사업장을 대상으로 당연 적용 방식으로 시행됐다. 그 후 점차 대상이 확대되면서 1989년 전 국민 의료보험이 시행된다. 할아버지는 기독병원 총무과장으로 있으면서 병원비가 없어 진료를 못 받는 사람을 도와줄 길이 없어 안타까웠다고 했다. "의료보험제도가 없을 때는 병원비가 너무 비싸서 안 죽을 사람도 죽었다고, 병원비를 못 내서 진료받다가 환자가 도망가는 일도 비일비재했어. 미수 병원비도 엄청나게 쌓이고 그랬지."의료보험 제도가 확대 시행된 뒤에는 기독병원의 환자 수가 크게 늘기도 했다. '보건복지 70년사'에 따르면, 의료보험 제도가 500인 이상 사업장을 대상으로 확대 시행되기 시작한 1978년 기독병원의 외래 환자 수는 12만5천839명으로 전년 동기 대비 41% 가까이 증가했다.할아버지는 10년간 기독병원에 있다가 전의철 부원장과 함께 1982년 5월 인천세광병원(현 인천사랑병원) 창설 멤버로 참여해 세광병원에서 10년간 일했다. '인천기독병원 50년사'를 보면 전의철 부원장은 1965년 9월 귀국해 진료를 맡았다. 그는 감리교 십자군 장학생으로 미국 대학에서 유학을 마쳤는데, 현지 병원이 유리한 조건으로 머무를 것을 요청했는데도 인천기독병원에 복직했다고 돼 있다. 174개 병상으로 개원한 세광병원은 1990년 진로그룹이 인수했다. 이때 노조가 심하게 데모하는 등 사측과 갈등이 심해졌고, 이 때문에 할아버지는 병원에서 나오게 됐다. 인천사랑병원 관계자는 "의료운동을 벌여오던 '신문청년의사'그룹이 경영난으로 문을 닫은 세광병원을 고용 승계 조건으로 인수해 1998년 11월 28일 인천사랑병원으로 문을 열었다"고 소개했다.할아버지의 부인 박미자 할머니(83·황해도 옹진 출신)는 최근 몸이 많이 안 좋아져서 인천의 한 대형병원 중환자실에 입원 중이다. 할아버지는 8일에도 할머니 곁을 지켰다. 할머니는 수년째 중증근육무력증으로 치료를 받고 있고, 최근 급성패혈증으로 인해 병세가 위중해져 중환자실 신세까지 지게 됐다. 그동안 4차례 진행한 인터뷰 약속을 한 번도 어긴 적 없던 할아버지는 할머니가 중환자실에 간 뒤로는 취재에 동행하지 못했다. 그래서 지난달 30일 잡아놨던 인천기독병원, 인천사랑병원 등의 현장 취재에도 함께하지 못했다. 그런 할아버지는 지난주 경인일보 연중기획 상편 기사가 나간 뒤 한동안 소식이 뜸했던 지인 여러 명에게서 연락이 왔다며 상기된 목소리로 전화를 해왔다. 할머니 간병에 여념이 없는 할아버지는 "(할머니가) 힘들 것 같다. 조금씩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다"고 담담하게 말했다.글/홍현기기자 hhk@kyeongin.com 사진/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전진성 할아버지가 이북5도민회 인천지구 함경남도민회 회장으로 받은 대통령 포장증을 가리키고 있다.인천세광병원 개원식 모습. 왼쪽 4번째가 전진성 할아버지다. /전진성 할아버지 제공1983년 인천세광병원 직원수련회 모습. 왼쪽에 사회를 보는 사람이 전진성 할아버지다. /전진성 할아버지 제공전진성 할아버지가 부평1동 동부동 사무소 안에서 근무하는 모습. /전진성 할아버지 제공전진성 할아버지가 인천기독병원 총무과장 재직 시절 병원 앞에서 찍은 기념 사진. /전진성 할아버지 제공지금의 인천기독병원 모습. /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전진성 할아버지(왼쪽에서 5번째)가 부평1동 동부동 사무소 앞에서 직원들과 함께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전진성 할아버지 제공

2017-11-08 홍현기

[zoom in 송도]국내 최초 해외 명문대 종합캠퍼스 '인천글로벌캠퍼스'

겐트·유타대 아시아캠 등 속속 개교네덜란드 명문음대 설립 MOU 교환1·2단계로 나눠 10개 외국대학 목표 김진용 청장 "2단계 사업 조속 착공"국내 최초 해외 명문대학 종합(공동) 캠퍼스인 인천글로벌캠퍼스 사업이 순항하고 있다.인천경제자유구역청(청장·김진용)에 따르면 송도국제도시 7공구(연수구 송도동 187)에 위치한 인천글로벌캠퍼스는 지난 2012년 3월 한국뉴욕주립대 개교를 시작으로 한국조지메이슨대, 겐트대 글로벌캠퍼스, 유타대 아시아캠퍼스가 개교했다.올 8월에는 세계적인 패션 명문대학 '뉴욕패션기술대'(FIT) 신입생이 입학했다.인천경제청은 지난달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국립 콘서바토리(명문 음대)와 송도캠퍼스 설립·운영에 관한 양해각서(MOU)를 교환하는 등 더욱 많은 해외 명문대학을 유치하고자 노력하고 있다.인천경제청 관계자는 "인천글로벌캠퍼스를 벤치마킹하기 위한 문의도 끊이지 않고 있다"고 설명했다.인천글로벌캠퍼스 입주 대학은 본교의 엄격한 입학사정과 커리큘럼을 가지고 학생을 선발·교육하고 있다.학생들은 재학 기간 중 3년은 한국에서, 1년은 본교에서 수학 후 본교의 졸업장을 받게 된다.2017년 가을학기 현재 1천730명의 학생이 재학 중이며, 정원 대비 44% 이상의 충원율을 보이고 있다.대학들은 입학 심사 시 본교의 절대평가 방식으로 학생을 선발한다. 입학이 쉽지 않다 보니 충원율이 낮아지는 문제가 있지만, 입학생들의 만족도와 실력은 더욱 높아지는 결과로 이어진다.예컨대 한국뉴욕주립대 기술경영학과(2017 봄학기)의 경우, 96명이 지원했으나 입학 허가를 받은 학생은 24명뿐이었다.인천글로벌캠퍼스는 협업 모델도 갖추고 있다. 겐트대 글로벌캠퍼스는 인천대와 공동학위 제도를 운영하고 있으며, 유타대 아시아캠퍼스는 중앙대와 함께 '디지털복지연구센터'를 운영 중이다. 인천글로벌캠퍼스 사업은 1단계와 2단계로 진행되고 있다. 총 10개 대학을 유치하는 것이 목표다.인천경제청 김진용 청장은 지난 9월29일 취임사에서 "인천글로벌캠퍼스는 (인천이) 세계의 글로벌 교육도시가 되기 위해 필수불가결한 사업"이라며 "2단계 사업을 원래 계획대로 조속한 시일 내에 착공하겠다"고 강조하기도 했다. 인천경제청은 인천글로벌캠퍼스 2단계 사업을 위해 산업통상자원부와 협의를 벌이고 있다. /목동훈기자 mok@kyeongin.com인천글로벌캠퍼스 전경 /인천경제자유구역청 제공

2017-11-05 목동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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