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인천)

[실향민이야기 꿈엔들 잊힐리야·45]황해남도 청단군 용매도 출신 차학원 할아버지(上)

작은 섬에 황해도 육지 피란민들 몰려 새우잡이 배로 수송 1·4후퇴때 부모와 동생들 먼저 떠나고 곡식 지키다 노모 모시러 온 청년따라 노모 대신 '작은 배' 타고 南으로 거처 옮겨 다니느라 국민학교 4학년만 4번 다녀 천주교 지원으로 '공생조합' 만들어 수십만 평 간척"매일같이 돌·흙짐 지고 손바닥이 가죽이 되도록 땀 흘려" 인천서 정년퇴직 후 돌아와… 당시 땅은 다 팔고 없어인천 영종도 삼목선착장에서 뱃길로 10분이면 닿는 섬 신도(信島). 일명 '삼형제섬'이라 불리는 옹진군 북도면 신도·시도(矢島)·모도(茅島) 중에 가장 큰 섬이다. 신도선착장을 빠져나와 차량으로 1㎞ 정도 달리면 나오는 삼거리에서 오른쪽으로 가면 신도4리다. 올해 10월 기준 57가구, 인구 126명의 작은 마을 신도4리에 펼쳐진 너른 논과 폐염전이 실향민들에 의해 만들어진 땅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황해남도 청단군 용매도 출신의 실향민 차학원 할아버지는 고향을 잃고 신도에 정착해 맨손으로 땅을 일궈냈다. 1942년생 말띠, 일흔 여섯이다.전쟁은 할아버지가 국민학교 4학년 때 발발했다. 황해도 육지의 피란민들이 용매도로 밀려왔고 작은 섬은 난민촌이 됐다. 용매도 청년들은 '난민수송대책위원회'를 구성해 새우잡이 배로 난민들이 원하는 곳까지 연평도, 덕적도, 영흥도 등 남쪽 섬과 군산, 목포 등지로 수송했다. 피란길은 그야말로 아수라장이었다. 용매도민회가 1997년 발간한 '용매도지(龍媒島誌)'는 "선창가에서 배를 타려는 가족과 자식을 찾는 소리, 엄마 아빠를 찾으며 울부짖는 비명소리, 먼저 배에 오르려다 바닷물에 빠져 텀벙대며 허우적거리는, 어떤 여인은 젖먹이 아이를 해변가에 버려둔 채 홀로 배에 오르는 비정한 장면도 있었다"고 설명하고 있다.전쟁 직후 용매도에는 북한군이 들이닥치지는 않았지만 공산당 조직은 상주하며 사상 교육을 했다. 차학원 할아버지는 "선생들이 수업은 안 가르치고 맨날 '김일성 장군의 노래'나 가르쳤어. '장백산 줄기줄기 피 어린 조국, 우리는 자유조선 꽃다발에 아 그 이름도 빛나는 김일성 장군~' 내가 아직도 가사를 안 까먹었어"라고 말했다.고향을 지키고 있던 용매도 주민들은 1·4후퇴 때에야 피란 행렬에 동참했다. 차학원 할아버지네는 조와 수수 농사를 지었는데 수확한 곡식을 그냥 두고 가기가 영 아까웠다. 아버지는 먼저 어머니와 어린 두 동생을 피란시키고 꼭 다시 돌아오겠으니 곡식을 잘 지키고 있으라는 말과 함께 떠났다. 마을에는 '고향을 어찌 떠나냐'며 끝내 피란하지 않은 노인들이 주로 남았다. 이들은 밀물이면 바닷물이 차 섬이 되고 썰물이면 걸어서 들어갈 수 있는 용매도 끝자락 '묵골'이 안전하다며 이곳에 모여 살았다.차학원 할아버지는 할머니, 고모와 함께 아버지를 기다렸지만 뱃길이 막혔는지 몇 달이 지나도록 소식이 없었다.1951년 여름 용매도에 한 청년이 작은 배를 타고 홀로 나타났다. 노모를 두고 장봉도로 피란한 청년이 혼자 노를 저어 어머니를 모시러 온 거였다. 청년은 함께 떠나자고 했지만 노모는 고향을 못 떠난다며 버텼다. 아들과 한창 실랑이를 하던 이 노인은 어르신들 틈에서 그 광경을 보던 차학원 할아버지를 지목하며 "너는 어리고 남자니까 나 대신 이 아저씨를 따라가라"고 했다. 청년이 타고 온 배는 두 사람이 겨우 탈 수 있는 작은 배였다. 마을 주민 누구도 자기가 대신 타겠노라 나서지 않고 당시 11살이던 할아버지에게 자리를 내주었다. 노모의 희생으로 가족이 있는 남한으로 가게 된 할아버지는 지금도 그 배를 잊을 수가 없다. 할아버지가 기자의 취재수첩에 그려 준 배는 앞이 뾰족했고 뒤에서 노를 젓는 식이었다. "밤새 물살을 갈라 장봉도에 도착했지. 날짜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데 도착했을 때 매미가 울더라고. 할머니가 오이 먹으면 멀미 안 한다고 오이를 챙겨주셨으니 여름이 확실해."장봉4리 해안가 백사장에는 피란민들이 한데 모여 천막을 치고 살고 있었다. 난민촌에서 먼저 피란 온 외삼촌을 우연히 만났다. 황해도 피란민 대부분 인천 만석동에 모여 산다는 소문이 돌았다. 2달여 뒤 인천으로 가는 배를 타고 만석동으로 무작정 떠난 할아버지는 수소문 끝에 괭이부리마을 움막집에 사는 아버지를 만날 수 있었다.전쟁이 끝나자 아버지는 돈을 벌러 간다며 집을 나갔다. 할아버지는 어머니와 함께 외삼촌이 있는 장봉도로 다시 건너갔다. 그러다가 신도에서 바다를 막아 땅을 만드는 피란민 정착사업을 한다는 얘기를 듣고 사업을 하는 신도4리로 이주했다. 그때 나이가 18살 무렵이었다고 한다. 그 어린 나이에 한군데 있을 수 없었던 할아버지는 국민학교를 4학년으로만 4번이나 다녔다. 용매국민학교 4학년 때 피란했고 아버지를 찾아 인천 만석동에 와서 축현국민학교 4학년을 다녔다. 하지만 돈을 벌기 위해 '아이스케키' 장사를 하러 다니느라 학교는 가는 둥 마는 둥 했다. 장봉국민학교도 4학년에 편입했다가 신도로 건너가느라 유급했다. 그리고 신도에서 와서야 국민학교를 제대로 마칠 수 있었다. 신도국민학교 12회 졸업생인 할아버지는 동창들보다 나이가 4~5살 많다.1996년 옹진군이 발행한 '옹진군향리지(甕津郡鄕里誌)'에 따르면 신도4리는 사람 왕래가 거의 없는 땅이었다가 실향민이 모여 살아 새로 생긴 마을이라 '신촌'(新村)이라고 불렀다. 실향민들은 먹고 살길이 없다 보니 난민정착사업소의 구제사업 인가를 받아 간척사업을 시작했다. 당시 천주교구제회(NCWC·National Catholic Welfare Conference)는 개간을 하는 실향민들에게 구호물자를 나눠주는 사업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양곡도 지원을 받을 수 있었다. 이곳 신도4리뿐 아니라 영종도, 시흥 등에도 실향민들이 조합을 결성해 갯벌을 메웠다. 1958년 3월 31일 경향신문에는 "천주교구제회가 65개소의 농지개간, 염전개발 등 거주민 1만 세대에 대해 매달 쌀, 밀가루, 옥수수 1만 포대를 자활하는 날까지 지급한다"는 기사가 나온다. 2006년 한국교회사연구소가 발행한 '교회사연구(26집)'도 "NCWC가 1955년부터 미공법(PL) 480호에 따른 잉여 농산물 공여가 시작되면서 응급 구호에 사용됐던 양곡이 개간 사업, 정착 사업 지원용으로 사용돼 1955년부터 1963년까지 8억8만464파운드의 양곡이 지원됐다"고 설명하고 있다.신도4리 실향민들은 '공생조합'이라는 이름의 조합을 결성했다. 말 그대로 '서로 도우며 함께 살자(공생·公生)'는 의미였다. 당시 150가구 수백 명의 실향민이 제대로 된 도구도 없이 수십만 평의 땅을 만들었다. 한 집에 배당되는 땅은 3천 평씩이었다. 조합원들은 긴 제방을 쌓기 위해 맨몸으로 부딪혔다.지난 16일 오후 3시께 공생조합이 만든 신도4리 방조제를 할아버지와 함께 찾았다. 바다 너머 영종도가 멀지도 가깝지도 않게 보이는 곳이다. "싸리나무로 만든 지게를 짊어지면 양옆에서 두 명이 삽으로 흙을 퍼다가 쌓아줬어. '구루마'(손수레)도 없이 그저 지게로 옮겨 실어 '뚝매기(둑막이)'를 했지. 그때 천주교에서 구호를 많이 해주니까 천주교 신자들도 많이 늘어났어." 제방을 쌓는 데 필요한 돌은 당시 선착장이 있던 '하머리'와 섬 아랫자락에 있는 '고두구지'에서 가져왔다. 할아버지는 왼쪽을 바라보며 "저기 보이는 곳이 하머리인데 돌산에 다이너마이트를 박고 폭파해 돌을 떼어냈어. 도구도 없이 장갑 하나만 끼고 돌을 날랐어"라고 설명했다. 옹진군향리지는 "매일같이 나가 돌과 흙짐을 지고 갯벌에 빠지면서 등에 못이 박이고 손바닥이 가죽이 되도록 땀 흘려 일했다"며 그들의 처절함을 소개했다.땅을 만들고 나서는 3천 평씩 나눠 갖는 일이 문제였다. 산 쪽에 붙어 민물을 많이 머금은 땅은 좋았고 바닷가 쪽 땅은 소금기가 있어 땅의 질에 편차가 컸다. 결국 제비뽑기로 좋은 땅 하나 나쁜 땅 하나씩 2필지를 나눠 가졌다. 할아버지 땅의 토지 이력(5천94㎡)을 확인해보니 신규등록일(매립 준공)이 1964년 7월 3일이었다. 1989년 12월 발행한 '옹진군지(甕津郡誌)'의 염전 현황에 신도4리 염전의 준공일은 1964년 9월 19일로 돼 있다.신도4리 주민들은 새로 얻은 땅에서 농사를 지었지만, 썩 잘되지는 않았다. 일반 땅의 절반밖에 수확이 되지 않는 땅이었다. 급전이 필요한 사람들은 염전 사업자에게 땅을 팔고 육지로 떠나기도 했다. 정착사업을 위한 매립이 끝나 천주교구제회의 양곡 지원도 끊겼다. 누구 산인지도 모르면서 아무 산에 올라가 나무를 베어다가 육지에 내다 팔았다. 나무를 한 짐 실어주면 보리쌀 한 됫박을 받았다. 할아버지는 직장을 구하러 인천으로 떠났고 바다에 나갔던 아버지가 신도로 들어와 농사를 지었다.할아버지는 그때 받은 2필지를 모두 팔았다. 1필지는 아버지가 일찍이 팔았고, 나머지 1필지는 할아버지가 5년 전 아들, 딸들 결혼시키느라 팔았다고 한다. 2017년 5월 기준 이 땅의 개별공시지가는 1평(3.3㎡) 당 22만5천원이다. 실거래가는 더 비싼데 5년 전 판 땅은 평당 42만원을 받았다고 한다. 할아버지의 피땀이 고스란히 배어 든 재산이다.할아버지는 직장을 구하러 인천으로 떠났다가 정년퇴직한 뒤 신도에 돌아왔다. 예전 어머니를 모시고 살던 집은 사라져 같은 용매도 출신 고(故) 서상호 할아버지가 살던 집을 고쳐 살고 있다. 기자가 할아버지와 인터뷰를 하던 중 마침 서상호 할아버지의 딸과 사위가 할아버지네를 찾아왔다. 이들 부부도 신도4리에 살고 있다. 텃밭 농사 얘기며 말린 생선 얘기를 하다가 할아버지가 "신문기자가 와서 예전에 공생조합 얘기하고 있었어…"라고 하니, 부부는 "우리 아버지가 그 얘기 잘 아시는데 지금은 아는 사람이 별로 없다"고 말을 받았다. 한때 150가구였던 실향민은 1990년대 후반 20여 가구로 줄었고, 지금은 할아버지네를 포함해 몇 가구 남지 않았다고 한다. "여든이 넘은 1세대 어르신이 살아 계시는데 귀가 어두워 공생조합에 대해 설명해 줄 사람들은 이제 남지 않았지. 아마 신도4리 실향민 1세대도 내가 마지막일 거야."글/김민재기자 kmj@kyeongin.com 사진/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차학원 할아버지가 공생조합이 만든 옹진군 북도면 신도4리 방조제 위에 올라 실향민들과 함께 바다를 막아 둑을 세운 과정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할아버지 뒤쪽으로 보이는 언덕이 방조제 쌓는 돌을 구하던 '하머리'지역이다.차학원 할아버지가 옹진군 북도면 신도4리 자신의 집에서 피란 생활과 신도4리에 정착하기까지 과정을 설명하고 있다.차학원 할아버지가 용매도에서 장봉도로 피란할 때 탔던 배의 모양. 할아버지가 기자의 취재 수첩에 직접 그렸다.

2017-11-22 김민재

[zoom in 송도]'스마트시티' 해외수출 나선 인천경제청

플랫폼 개발 '저작·특허권' 획득IDC 도시행정분야 '최우수' 선정해외기업·정부 벤치마킹 러브콜태국 아마타그룹 기술협력 MOU송도국제도시 등 인천경제자유구역(IFEZ)에 구축된 '스마트시티'가 국내외에서 많은 관심과 호평을 받고 있다. 최근에는 인천경제자유구역청이 태국 최대 산업단지 개발회사 아마타(AMATA)그룹과 스마트시티 기술 협력에 관한 양해각서를 체결하는 등 해외 수출에도 속도를 내고 있다.■스마트시티 구축 공공서비스 향상스마트시티는 첨단 유비쿼터스 기술로 교통·방범·방재·환경·시설물 등을 통합 관리하는 미래형 도시 모델이다. 송도국제도시 유시티(U-City) 1단계 구축사업이 지난 3월 준공되면서 스마트시티 운영센터는 4월부터 송도와 청라국제도시를 통합 관리하게 됐다. 올해 말 영종하늘도시와 미단시티의 유시티 구축사업이 완료되면, 송도에 위치한 스마트시티 운영센터에서 IFEZ 모든 지역을 통합 관리할 수 있게 된다. 스마트시티 운영센터는 버스정보안내단말기를 통해 한국어·영어·중국어·일본어 등 다국어로 버스 도착 정보를 제공한다. IFEZ 곳곳에 설치된 CCTV를 활용해 거동 수상자를 탐지·조치하는 등 생활방범 서비스를 제공하고, 주요 교차로를 통과하는 차량의 번호를 수집한다.고층 건물 화재 감시, 환경 정보 수집·제공 등의 기능도 한다. 인천경제청에 따르면 수사기관에 CCTV 영상자료를 제공(열람 포함)한 것은 2014년부터 올 10월까지 1천353건에 달한다. CCTV 모니터링을 통해 특이 사항을 발견·조치하거나 민원을 처리한 건수도 611건이나 된다.■스마트시티 기술력 인정받아글로벌 시장 분석기관 IDC(International Data Corporation)는 지난 8월 IFEZ 스마트시티 운영센터를 도시행정 분야 최우수 프로젝트로 선정했다. IFEZ 스마트시티는 'GeoSmart Asia 2017 in Malaysia' 콘퍼런스에서도 전자지도·GIS를 활용한 소프트웨어 분야 최우수상을 받았다. 인천경제청 관계자는 "스마트시티 해외 수출 기술의 공신력을 확보한 것"이라고 평가했다. 우리 정부도 IFEZ 스마트시티의 우수성을 인정했다. 행정안전부의 '전자정부 우수서비스 사례 발굴'에서 IFEZ 스마트시티 프로젝트가 우수 사례로 뽑혔다. IFEZ 스마트시티 기술력의 중심에는 '스마트시티 플랫폼'이 있다. 인천경제청은 스마트시티 플랫폼을 자체 개발하고 올 3월과 6월 각각 저작권, 특허권까지 획득했다. 또한 인천경제청은 송도·청라·영종의 스마트시티를 통합 관리함으로써, 전문기관에서 설계한 사업비보다 120억원을 절감했다.■벤치마킹 및 협력 요청 쇄도송도 G타워 문화동 3·4층에 있는 스마트시티 운영센터는 세계 각국의 공무원과 기업인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 최첨단 기술을 적용한 'IFEZ 스마트시티 모델'을 벤치마킹하기 위해서다. 2014년 개소 이후 올 10월까지 누적 외국인 방문객 수는 8천413명이다. 여기에 내국인 방문객을 합하면 총 1만2천356명이 스마트시티 운영센터를 찾았다. ┃표 참조인천경제청은 지난 16일 태국 아마타(AMATA)그룹과 스마트시티 기술 협력에 관한 양해각서를 교환했다. 이를 계기로 '도시개발(스마트시티 분야) 기술 협력 체계 구축'과 '인적·노하우 교류' 등에 협력하기로 했다. IFEZ 스마트시티 플랫폼과 국내 업체의 스마트시티 구축·운영 기술을 해외에 수출하기 위한 발판을 마련했다는 평가다. 인천경제청은 베트남 주요 도시에 스마트시티 플랫폼을 수출하고자 타당성 용역을 진행하고 있으며, 인도에 수출하게 될 스마트시티를 기반으로 한 드론 환경모니터링 구축 R&D사업도 진행하고 있다. 인천경제청은 에콰도르, 콜롬비아와 각각 계약을 체결해 스마트시티 구축사업과 관련해 타당성 조사 용역 또는 컨설팅에 참여했으며, 사우디아라비아 등 다른 아시아 국가와도 스마트시티 수출에 관해 협의하고 있다.김진용 인천경제청장은 "스마트시티 서비스를 도시 공간에 융합해 시민에게 편의를 제공하고 도시의 경쟁력을 높여 나가고 있다"며 "스마트시티 모델 해외 수출도 적극 추진하겠다"고 했다. /목동훈기자 mok@kyeongin.com송도국제도시 G타워 문화동에 있는 스마트시티 운영센터. /인천경제자유구역청 제공

2017-11-19 목동훈

[송도국제도시 브리핑]'접근성 향상' 한국조지메이슨大 서울사무소 문열어

■'접근성 향상' 한국조지메이슨大 서울사무소 문열어인천 송도국제도시 인천글로벌캠퍼스에 입주해 있는 한국조지메이슨대학교는 지난 14일 서울 강남빌딩 16층에서 서울사무소 개소식을 개최했다. 서울사무소는 서울과 지방의 학생·학부모의 지속적인 요청에 따라 그들의 접근성을 높이고자 설립됐다.이날 행사에는 스티븐 리 한국조지메이슨대 총장, 정근모 전 과학기술처 장관, 송희연 아시아개발연구원 이사장, 김현명 한국수입협회 부회장, 김석오 수원세관장, 정헌 전 SK가스 대표, 이인자 한국조지메이슨대 학부모회장 등이 참석했다.서울사무소는 ▲입학전형, 모집요강에 대한 상담 ▲지원 전략 및 최신 정보 자료와 전망 제공 ▲입학접수 등 학생·학부모·교사들을 위한 다양한 입학 업무를 제공한다.■경제청, 30일 G타워서 '송도바이오프론트 심포지엄'인천경제자유구역청은 오는 30일 오후 2시 송도국제도시 G타워 23층 아뜨리움홀에서 '2017 송도바이오프론트 심포지엄'을 개최한다.올해 심포지엄은 '바이오산업 동향과 업종별 공간 수요의 특성'을 논의하는 자리다. 자유로운 분위기의 좌담회 형식으로 진행된다.좌담자는 바이오스펙데이터 이기형 대표(좌장), 셀트리온 윤정원 수석부사장, 코오롱생명과학 김수정 소장, 마크로젠 정현용 대표 등 5~6명이다. 인천경제청 관계자는 "송도바이오단지 잔여 부지와 11공구 신규 부지의 공간 수요를 파악하고 투자유치 계획을 수립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라며 "송도바이오프론트 인지도 제고도 기대된다"고 했다.인천경제청은 2012년 12월 송도바이오단지 명칭을 '송도바이오프론트'로 정하고, 2013년부터 심포지엄을 열고 있다. /목동훈기자 mok@kyeongin.com한국조지메이슨대학교는 지난 14일 서울 강남빌딩 16층에서 서울사무소 개소식을 했다. /한국조지메이슨대 제공

2017-11-19 목동훈

[실향민이야기 꿈엔들 잊힐리야·44]함경남도 단천시 출신 전진성 할아버지(下)

선교회활동 덕에 2003년 조평통 초청 '방북' 생존 알고도 밝히지 못해 어렵게 만남 성사신평휴게소서 재회 어릴적 얼굴 없어 '어색'동생이 할아버지 목 뒤 큰 점 알아보고 "확신""당시 단천은 온통 모래밭이라 사막 같았다"전씨 집성촌서 가장 큰집 농사도 짓고 '유복''지하의 박물관' 광산과 수력발전소로 유명'고향의 맛' 가자미식해는 지금도 즐겨먹어함경남도 단천 출신 전진성 할아버지는 2003년 겨울을 잊을 수가 없다. 할아버지는 이때 북한 조국평화통일위원회(조평통)의 정식 초청을 받아 평양 등지를 방문했고, 꿈에 그리던 이산가족 상봉을 했다. 폭설로 도로가 막혀 그렇게도 가고 싶었던 고향 땅은 밟지 못했지만, 함경남도 함흥과 원산 사이에 있는 일종의 여관인 '신평휴게소'라는 곳에 가서 사촌동생을 만났다. 피란 나올 때는 생존해 있었던 부모님뿐만 아니라 일가친척 대부분이 이제는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는 얘기를 동생에게서 들을 수 있었다. 가족의 생사라도 알게 된 것이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었다. 전진성 할아버지는 집에 돌아온 뒤 가장 먼저 부모를 기리는 추도 예배부터 드렸다. 그동안에는 생사를 직접 확인할 수 없는 부모님을 추모(追慕)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할아버지가 북한 땅을 밟을 수 있었던 것은 평소 활발한 사회활동 덕분이었다. 할아버지는 인천세광병원에서 나온 뒤에도 교회 일을 적극적으로 하면서 '한민족통일선교회' 위원으로 활동하기도 했는데, 이 단체가 북한 양로원, 고아원 등에 다년간 지원한 고마움의 표시로 조평통이 할아버지 등 4명을 공식 초청했다. 할아버지는 "기도했던 일이 현실로 이뤄진 것"이라고 했다. 제8차 남북적십자회담에 따른 결과로 1985년부터 남과 북의 이산가족 상봉이 시작됐지만, 상봉의 기회를 얻게 된 실향민은 전체로 따져봤을 때 극소수다. 대한적십자사에서 지난해 발간한 '이산가족 70년(1945~2015)'을 보면 상봉을 요청한 이산가족 13만 명 가운데 전진성 할아버지와 같이 실제 상봉의 기회를 가진 사람은 5천 명 내외로 전체의 4% 미만에 불과하다. 특히나 전진성 할아버지와 같이 조평통의 공식 초청을 통해 북한을 방문해 가족을 만난다는 것은 극히 어려운 일이었다.조평통의 공식 초청을 받은 할아버지는 2003년 12월 2일부터 13일까지 평양과 함경남도 원산, 함흥, 영흥 등지를 방문했다. 할아버지 집에는 김일성 생가, 김일성·김정일 선물관, 묘향산, 평양개선문 등에서 찍은 사진이 가득했다. 할아버지는 방북 때 가족을 만나보지 못할 뻔 했는데, 북한 당국에 애원해서 뒤늦게 기적적으로 사촌동생을 만나 볼 수 있었다. 북한 당국에서는 처음에 "가족을 수소문했으나 찾지 못했다"고 했는데, 할아버지가 "수십 대에 걸쳐 함경남도 단천군 복귀면 장내리에 살았다. 꼭 살아있을 테니 찾아달라"며 애원하자 막판에 가족을 찾았다는 연락이 왔던 거다. 할아버지는 여러 경로를 통해 삼촌과 사촌동생이 살아있다는 사실을 알고는 있었지만 이를 북한 당국에 이야기할 수는 없었던 터였다.할아버지보다 10살 밑인 사촌동생을 신평휴게소에서 만났다. "잠깐만 몸을 피했다 돌아오겠다"며 고향 집을 떠난 지 53년 만이었다. 할아버지가 피란을 갈 때 코흘리개 어린이였던 동생의 얼굴에는 주름이 가득했다. 처음 만났을 때 어릴 적 얼굴이 없어 서로를 전혀 알아보지 못했다. 어색한 표정을 짓던 동생은 느닷없이 할아버지의 목을 보더니 "맞다"는 말과 함께 큰절을 올렸다고 한다. 할아버지 목덜미에는 큰 점이 있는데, 이를 알아본 것이다. 친척들은 언젠가 남한에 간 전진성 할아버지를 만나게 된다면 목에 난 점을 보면 된다는 말을 해왔다고 한다. 할아버지는 외아들인 데다 장손이라 친척들이 피란 간 할아버지의 생사를 늘 궁금해했다고 한다.할아버지는 어렵게 만난 동생에게 가지고 있던 모든 것을 줬다. 할아버지는 동생을 만나기 전 묵고 있던 고려호텔 지하 기념품점에서 여러 물건을 사고, 차고 있던 시계와 반지까지 동생에게 끼워줬다. 할아버지는 반가운 마음에 입고 있던 코트와 모자까지 벗어줬다.이산가족 상봉의 기회를 한 번도 갖지 못하고 세상을 뜨는 실향민들이 많다. 북한을 직접 방문해 가족을 만난 전진성 할아버지는 매우 운이 좋았다고 할 수 있다. 현대경제연구원에서 올해 9월 발표한 '이산가족 상봉 현황과 시사점'에 따르면 2017년 8월 31일 기준 이산가족 상봉 신청자 13만1천221명 가운데 사망자가 54.2%(7만1천145명)에 달해 생존자(6만76명, 45.8%)를 크게 넘어섰다.지척에 가족을 두고도 생사조차 확인하지 못하는 이산가족의 절절한 사연은 가슴을 울린다. 분단문학의 거장으로 불리는 이호철(1932~2016·함경남도 원산 출신)이 1973년 낸 단편소설 '이단자(4)'의 주인공 현우가 북에 있는 동생에게 쓴 편지(신문 지상편지)에는 가족을 향한 절절한 심정이 담겨 있다. "……. 그때 네 나이 열다섯, 내 나이 열아홉이었다. 지금은 내 나이 갓 마흔이요, 네 나이 서른여섯이로구나. 아, 서른여섯 살 먹은 너, 네가 서른여섯 살이나 먹다니. 아무리 애를 써도 열다섯 살 먹은 네 얼굴만 떠오르지, 서른여섯 살 먹은 네 얼굴은 도저히 떠오르지 않는구나. 몹쓸 꿈치고는 너무도 긴 꿈이어서 참으로 허망하구나. 서른여섯 살 먹은 너와 만날 일이, 갓마흔 된 내 얼굴을 너한테 보일 일이 기쁘기 이전에 어쩐지 끔찍스럽고 처연해지기부터 하는구나.(…중략…) 내가 나오던 그때, 할아버지는 일흔셋인가였으니까 이미 저 세상으로 가셨겠지. 살아 계신다면 아마 아흔너댓이 될 것이다. 쉰이 못 되시던 아버지 어머니도(가만, 한참 따져봐야겠다) 일흔 살 안팎이겠구나. 누나들, 그리고 우리의 귀염둥이 누이동생, 아, 그애도 이제 서른 살이로구나! 모두 안녕들 하시냐. 청탁에 못 이겨 쓰다보니까 정말로 새삼스럽게 목구멍이 막혀오고 가슴이 막힌다. 이만 줄이겠다……."할아버지는 북한을 방문했을 때 고향집인 '함경남도 단천군 복귀면 장내리 392번지'에는 찾아가지 못했지만, 고향의 현재 모습은 전해 들을 수 있었다. 사촌 동생은 고향 마을에는 사람이 더는 살지 않는다고 했다. 할아버지의 고향 마을 '토성촌'에 있던 가옥은 모두 사라지고 인근에 있는 '화장'이라는 지역에 일자로 지어 놓은 집으로 옮겨갔다고 했다. 동생은 "화장의 양지바른 곳에 일자로 집을 지어줬다"고 했다.할아버지는 고향 장내리는 '마당 장(場)'이라는 이름대로 넓게 퍼진 지형이었다고 기억했다. 고향 땅 주위가 온통 모래밭이라 '사막' 같았다고 했다. '백마산'이라는 이름의 모래산이 있었고, 산을 넘으면 넓은 동해 바다가 한눈에 들어왔다. 남쪽의 평화문제연구소와 북쪽의 과학백과사전출판사가 1999~2005년 공동으로 편찬한 '조선향토대백과'는 장내리를 "북부와 서부가 그리 높지 않은 야산들로 되어 있으며 남동부의 동해 가까이에는 사취와 모래언덕이 분포되어 있다"고 할아버지와 비슷하게 설명한다. 장내리의 토질은 쌀농사를 짓기에는 적합하지 않아 동네 사람들은 밭에서 조, 수수, 감자, 피 등을 키웠다고 할아버지는 말했다. 장내리 토성촌은 전씨 집안(본가 강원도 정선)이 수십 대에 걸쳐 살아온 집성촌이었다. 마을에서 가장 큰 집이 할아버지네였다. 할아버지의 조부(祖父)는 한의사였고, 아버지는 크게 농사를 지어 집안은 유복했다. 당시 학비가 비싸 다니기 힘든 전문학교(북청전문학교 잠업과)를 다니기도 했다.당시 단천은 광산과 수력발전소가 유명했다. 할아버지는 "마그네사이트, 은, 유화철 등을 생산하는 광산과 허천강을 따라 큰 수력 발전소가 있었다"고 기억했다. 함경남도지편찬위원회에서 1968년 펴낸 함경남도지의 단천군 편을 보면 단천은 '지하의 박물관'이라고 불릴 정도로 자원 매장량이 많았다. 함경도지에는 단천군의 광업에 대해 "세계 제1의 36만톤의 매장량을 자랑하는 마그네사이트, 북두일면 용장광산을 위시하여 검덕의 구리, 납, 아연, 동양 최고의 코발트, 금, 운모, 철광, 신풍광산의 인탄석과 유화철, 석면, 카드미움, 사금, 은, 옥석, 흑연 등 유수한 지하 보고는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자원을 개발하고 있다"고 설명하고 있다. 서울대학교에서 2008년 발행한 통일학 연구총서 '남북한 환경정책 비교연구'는 단천 마그네사이트광에 대해 "노출된 것만도 길이가 7천600m, 깊이가 2~100m에 달하는 세계 최대의 마그네사이트 광산"이라고 했다. 함경남도지는 허천강수력발전전력을 '일명 단천수력발전소'라고 칭하며 "일제 재벌의 투자로 당시 조선 최대의 발전량을 과시한 발전소"라고 했다. 할아버지는 고향 단천에서 먹었던 음식으로는 콩과 쌀을 갈아서 만든 '콩떡'과 가자미, 좁쌀, 고춧가루, 무채 등을 버무린 뒤 숙성시켜서 만드는 '가자미 식해'가 기억에 남는다고 했다. 속을 다 꺼낸 동태에다가 두부와 생선 내장 등으로 만든 순대를 넣은 '통시미'도 생각만 해도 입맛을 다시게 되는 고향의 음식이다. 할아버지는 "1년에 2번은 강원도 속초 아바이마을에 있는 '단천식당'을 찾아 고향음식을 먹는다"고 했다. 할아버지는 인터뷰 중 아바이마을에서 사온 가자미식해를 냉장고에서 꺼내 보여주면서 "항상 먹을 수 있게 떨어질 때쯤 되면 다시 주문한다"고 말했다.단천식당 사장 윤복자(78·여) 할머니의 딸 김채현(50)씨는 "돌아가신 아버지의 고향이 단천이라 단천식당으로 이름 짓고 고향음식을 만든 것이 50년이 넘었다"며 "아버지는 생전에 단천에서 추울 때 먹을 게 없어서 겨울을 대비한 감자로 만든 냉면이나 가자미식해 등을 많이 먹었다고 하셨다. 북에서 만드는 방식 그대로 음식을 하고 있는데, 고향 음식을 맛보러 실향민분들뿐만 아니라 '새터민'들도 많이들 온다"고 말했다.글/홍현기기자 hhk@kyeongin.com 사진/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2003년 북한 조국평화통일위원회(조평통)의 초청을 받아 북한을 찾은 전진성 할아버지가 신평휴게소에서 사촌동생을 만나 큰절을 받고 있는 모습. /전진성 할아버지 제공전진성 할아버지가 지난 2003년 신평휴게소에서 사촌동생을 만났을 당시의 사진을 보여주고 있다. 할아버지가 가리키는 사진은 사촌동생이 할아버지 목에 있는 점을 확인한 뒤 "형이 맞다"며 좋아하는 모습이다. /전진성 할아버지 제공전진성 할아버지가 사촌동생과 함께 신평휴게소에 온 북한 단천시 대표자와 악수를 하고 있다. 할아버지 옆에 서있는 동생은 할아버지의 외투와 모자를 쓰고 있다. 할아버지는 동생에게 겉옷을 벗어주는 바람에 12월 추운 날씨 속에서도 옷을 얇게 입고 있다. /전진성 할아버지 제공전진성 할아버지가 위원으로 있었던 '한민족통일선교회'가 조평통으로부터 받은 초청장. /전진성 할아버지 제공

2017-11-15 홍현기

[zoom in 송도]송도랜드마크시티 사태 쟁점과 전망

경제청 '책임조항' 누락 사업지연 손 못써재협의때 초과 개발이익 사항 논의 '발목'시행자 기투입비용등도 제대로 검증 안해토지는 3.3㎡당 300만원 '특혜 논란' 여전개발이익 정산·분배 시기 "이달 중 합의"블록별로 정산하되 공급가 인상 힘들 듯국감 못밝힌 뒷거래 의혹은 검찰 숙제로인천 송도국제도시 6·8공구 내 공동주택용지 34만㎡를 개발하는 송도랜드마크시티(SLC) 사업이 송도는 물론 인천의 사회적 이슈로 부각됐다. 올 8월 정대유 전 인천경제자유구역청 차장이 페이스북에 언론·기업·사정기관·시민단체 간 유착 의혹을 제기하면서다. 정 전 차장이 개발이익 환수를 추진하고 있던 SLC 사업에 이목이 쏠렸고, 인천시의회는 '송도6·8공구 개발이익 환수 관련 조사특별위원회'(이하 조사특위)를 구성해 9월25일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했다. 이후 인천시에 대한 국회 국정감사, 인천시의회 시정질문에서도 SLC 사업이 최대 이슈였다. 정 전 차장이 페이스북에 글을 올린 8월 중순부터 조사특위 활동이 마무리 단계로 접어든 11월6일까지 약 3개월간 인천을 뜨겁게 달군 것이다. 이 과정에서 안상수·송영길·유정복 등 전·현직 시장의 책임 문제가 정치적 쟁점화되기도 했다.'줌인송도'에서는 조사특위·국정감사·시정질문에서 나온 내용을 정리하고, 앞으로 사업이 어떻게 진행될 것인지 전망해봤다.■ 특혜 논란의 발단이 된 '허술한 계약'SLC 사업은 민간이 송도 6·8공구 34만㎡에 아파트를 짓는 사업이다. 원래는 사업시행자가 송도 6·8공구에 151층짜리 인천타워와 골프장을 만들고 그 주변 228만㎡를 모두 개발하는 것(2007년 8월 협약 내용)이었다. 신도시를 조성하는 사업이 아파트 건립사업으로 축소된 것이다. 글로벌 금융위기에 따른 부동산 경기 침체 등이 그 이유였다. 인천타워 건립 등 사업이 계속 지연되자, 인천경제청은 SLC 사업시행자와 사업계획 조정 협상에 나섰다. 하지만 인천경제청은 불리한 위치에서 협상을 벌일 수밖에 없었다. '인천타워 건립 강제 시한'과 이 건물을 짓지 않을 경우에 대한 '사업시행자 책임'이 협약서에 없었기 때문이다. 이는 인천경제청이 사업시행자 지위를 취소하지 못한 이유이기도 하다. SLC 사업시행자가 협약 내용을 근거로 소송을 걸 경우, 이길 가능성이 높지 않은 데다 사업이 장기간 표류할 수 있는 문제가 있었다.'허술한 계약'은 2015년 1월 사업계획 조정합의에서도 나타난다. 인천경제청은 조정합의를 통해 공급 부지를 228만㎡에서 34만㎡로 줄이고, 땅값을 3.3㎡당 240만원에서 300만원으로 인상했다. 또 초과개발이익(내부수익률의 12% 초과분)을 절반씩 나누기로 했다. 그런데 개발이익 배분 시기는 조정합의서에서 빠졌다. 불리한 위치에서 협상을 벌이다 보니 이 부분까지 챙기지 못한 것이다. 이 때문에 인천경제청은 '블록별 개발이익 정산·배분'을 요구하는 반면, SLC 사업시행자는 '모든 블록 개발 후 정산·배분'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사업계획 조정합의 '특혜 논란'인천경제청은 2015년 1월 사업계획 조정합의가 인천시 재정 건전화에 큰 도움이 됐다고 주장한다. 조정합의를 통해 많은 땅을 회수했고, '토지 공급가 인상'과 '개발이익 환수 기준 마련'을 이뤄냈다는 것이다. 하지만 공동주택용지를 3.3㎡당 300만원에 공급하기로 한 것은 특혜라는 지적이 나온다. 인천경제청은 SLC 사업시행자가 기투입한 비용(890억 원), 땅의 상태와 주변 시세 등을 고려해 책정한 금액이라고 해명하고 있다. 그럼에도 특혜 논란은 계속되고 있다. SLC 사업시행자가 그동안 어디에 얼마의 돈을 썼는지를 철저히 검증하지 못한 상태에서 조정합의가 이뤄졌기 때문이다. 인천경제청이 SLC 사업시행자의 기투입비를 조사한 적은 있지만, 외부 전문기관을 통해 제대로 검증한 적은 없다. 인천경제청은 올 8월에야 'SLC 재무·회계 조사용역'을 발주한 상태다.■ 개발이익 분배 시기 합의될까특혜 논란이 일었던 SLC 사업 문제는 인천경제청과 사업시행자가 '개발이익 정산·배분 시기'에 합의하는 것으로 마무리될 가능성이 크다. 이미 인천경제청은 사업시행자와 협상을 벌여 11월 말까지 개발이익 배분 시기에 합의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인천경제청 요구대로 블록별로 개발이익을 정산·배분하거나, 블록별로 정산하되 전체 사업 완료 후 배분하는 방식이 유력해 보인다.'토지 공급가 인상'은 불가능할 것이란 전망이 우세하다. 사업시행자가 땅값 인상을 받아들일 가능성이 없고, 인천경제청도 땅값 재조정을 요구할 계획이 없다.SLC 사업과 관련해 외압 또는 뒷거래가 있었는지, 전·현직 시장의 행정 행위(계약체결과 조정합의)가 배임 등의 혐의에 해당하는지는 검찰 수사에서 가려질 전망이다. SLC 사업 문제는 검찰에 고소·고발된 상태다. 조사특위·국감에서는 외압과 뒷거래가 있었는지를 밝혀내지 못했다. /목동훈기자 mok@kyeongin.com송도는 물론 인천의 사회적 이슈로 주목받으며 특혜 논란이 일고 있는 인천 송도국제도시 6·8공구 내 송도랜드마크시티(SLC) 사업부지 전경. /경인일보DB인천의 상징 건물로 추진되다 무산된 '151층 인천타워'의 조감도./경인일보DB

2017-11-12 목동훈

[송도국제도시 브리핑]IFEZ 내·외국인 소통 체육대회

■IFEZ 내·외국인 소통 체육대회인천경제자유구역청(청장·김진용)은 지난 11일 송도국제도시에 있는 인천글로벌캠퍼스 실내체육관에서 '인천경제자유구역(IFEZ) 가족 체육대회'를 개최했다.이날 행사는 IFEZ에 사는 외국인과 내국인 가족이 함께 어우러져 소통하기 위한 것으로 약 200명이 참여했다. 행사 1부(운동회)는 7인 8각, OX 퀴즈, 미션 달리기 등 모든 연령층이 즐길 수 있는 체육행사로 구성됐다. 2부는 외국인 주민 동아리가 준비한 라틴댄스(브라질팀)와 패션쇼(인도 커뮤니티) 등으로 진행됐다.김진용 청장은 개회식에서 "IFEZ는 외국인과 내국인이 어우러져 함께 사는 국제도시인 만큼, 체육대회를 통해 뛰고 즐기면서 서로 다른 문화를 이해하고 소통하는 시간이 되길 기대한다"고 말했다.■5·7공구 공원 2개·녹지 6개 조성송도국제도시 5·7공구에 오는 2019년까지 공원 2개와 녹지 6개가 조성된다.인천경제자유구역청이 최근 인천시의회에 제출한 '주요업무보고' 자료를 보면 2019년까지 송도 5·7공구에 314억 원을 들여 20만7천㎡ 규모의 공원과 녹지를 조성할 계획이다.송도 문화공원 3·4지구(10만6천㎡)는 2019년 8월 준공될 예정이다. 연세대 송도국제화복합단지 주변 1호 근린공원(6천㎡), 6호 완충녹지(2만5천㎡), 7·8호 완충녹지(3만6천㎡)는 2019년 3월 준공을 목표로 조성공사가 진행된다. 첨단산업클러스터 주변에도 2019년 3월까지 3만2천㎡ 규모의 연결녹지(1·2호)와 경관녹지(1호)가 조성된다. 인천경제청 관계자는 "송도4교 연결 도로 주변에 공원과 녹지를 조성해 주민들에게 휴식 공간으로 제공할 계획"이라고 했다. /목동훈기자 mok@kyeongin.com

2017-11-12 목동훈

[실향민이야기 꿈엔들 잊힐리야·43]함경남도 단천시 출신 전진성 할아버지(中)

1960년대 동부동장 맡아 공직생활 '첫 발'노점상 계도·장마철 굴포천 범람 애먹어10년뒤 인천기독병원 사무장으로 새출발지역 첫 CT 도입 등 '대표 의료기관' 성장병원비 비싸 진료 못받던 환자들 안타까워1982년 세광병원 창설멤버로 참여하기도함경남도 단천 출신 전진성(88) 할아버지는 30여 년간 인천의 동사무소 행정과 의료 현장 최일선에서 일한 흔치 않은 경력을 갖고 있다. 특히 인천 최초의 민간 종합병원으로 볼 수 있는 인천기독병원(중구 율목동)에서 사무장(총무과장)으로 일하다가 인천세광병원(남구 주안동) 창설 과정에 참여한 할아버지는 1970~80년대 인천 지역의 의료환경을 더듬어 볼 수 있게 하는 '기억의 창'이기도 하다. 인천지역의 의료사가 체계적으로 정리돼 있지 않은 현실에서 할아버지의 오랜 기간 의료행정 경험은 소중한 사료가 된다.할아버지는 처음에는 동 사무소 동장으로 행정 일을 시작했다. 1961년 부평1동 동부동(현 부평4동)에서 별정직 공무원으로 일했다. 동부동은 부평시장 등 상권이 발달해 1960년대 부평에서 가장 인구가 많았다. 할아버지는 "다른 동과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동부동이 컸다"며 "직원 수도 훨씬 많았다"고 말했다. 부평사편찬위원회가 지난 2007년 발행한 '부평사'를 보면 1962년 12월 경기도 인천시 부평출장소 관할인 부평1동 동부동은 면적이 2.253㎢이었고, 3천121가구, 인구수가 1만6천857명이었다. 부평 지역 다른 동에 비해 압도적으로 인구가 많았다. 부평시장은 1962년 공설상설시장으로 설치됐고, 계속해 번창해 1971년 5월에는 사설시장인 부평자유시장으로 바뀌었다. 1970년대 부평자유시장의 대지 면적은 1천201㎡, 건평이 1천756㎡, 점포 수가 47개였다. 부평시장의 경우 미군부대와 연결돼 있었고, 1973년 미군이 대대적인 철수를 한 뒤에도 부평수출공단의 근로자들이 주로 이용하면서 성황을 이뤘다. 휴일이나 명절 때면 '궤짝에 돈을 담기 바빴을 정도'로 1970년대 최고의 전성기를 누렸다.당시 동 사무소 동장은 새마을운동이나 예비군, 민방위 등을 관리하는 것이 주요 업무였는데, 동네에서 일어나는 각종 문제도 챙겨야 했다. 할아버지는 1960년대 초중반 동부동장을 지냈다. 이때 시장 길가를 따라 즐비하게 늘어선 노점상 문제가 심각해 골머리를 앓았다. 당시 노점상으로 인해 자동차는 물론이고 사람의 통행도 어려울 정도였는데, 상인들의 반발이 거세 단속도 어려워 이들을 '계도'하는 데 애를 먹었다고 한다. 할아버지가 떠난 뒤에도 부평시장 노점상 문제는 심각했던 모양이다. 경향신문 1971년 8월 27일자에는 부평시장 노점상인 500여 명이 철거하러 나온 인천시 북구청 직원 80여 명과 경찰관 50여 명에게 돌을 던져, 10여 명이 중경상을 입었다는 기사가 실렸다. 할아버지는 1960년대 중후반에는 부평1동 서부동장으로 활동했는데, 이때는 장마철이면 굴포천이 범람해 직접 모래포대를 쌓는 일까지 해야 했다.할아버지는 10년간 동장 일을 하다가 다른 분야를 경험하고 싶어서 1970년 인천기독병원 사무장에 지원했다. 당시 사무장 채용 요건이 교회에 다닐 것, 공직 경험이 있을 것, 병원근무 경험이 있을 것 등 3가지였는데, 할아버지는 모든 요건을 충족했다. 할아버지는 부인이 다니던 부평 연합병원에서도 잠깐 근무했었다. "기독병원에 면접을 보러 갔는데 바로 다음날부터 출근하라고 해서 그날로 일을 시작했어."1952년 인천시 중구 율목동 237에 설립한 인천기독병원은 설립 초기 피란민 진료소 역할도 담당했다. 병원에는 '기독교대한감리회 인천기독병원'이라는 간판뿐만 아니라 '북한피난민연합회 진료소'라는 간판이 걸렸다. 1959년에 나온 '경기사전(京畿事典)'은 기독병원을 설명하면서, '약 40년 전(1919년께) 감리교 선교부 경영 인천부인병원으로 개설 후 왜정 말기에 폐쇄되었다가 8년 전에 인천기독병원으로 재출발하여 금일에 이르렀다'고 했다.기독병원은 이후 미국 감리교 선교부의 도움을 받아 당시 인천의 대표 의료기관으로 급성장했다. 1956년부터는 수련의가 들어왔고, 1958년에는 정부로부터 전공의 과정 신설 허가를 받으면서 종합병원의 면모를 갖추게 된다. 기독병원 설립 당시 인천에 어느 정도 규모를 갖춘 의료기관으로는 인천도립병원, 인천적십자병원, 동양방직 부속병원 정도가 있었고, 성모자애병원(현 인천성모병원)은 1955년에야 문을 열었다. 인천길병원은 전신인 이길여산부인과의원이 1958년 개원했고, 의료법인 인천길병원 법인설립허가는 1979년 이뤄졌다. 인하대병원의 경우 1996년에야 문을 열었다. 인천기독병원은 인근에 있는 도립병원(인천시 중구 신흥동 2가)과 경쟁할 수밖에 없었는데, 기독병원이 환자 선호도 면에서 앞선 것으로 보인다. 지난 2001년 나온 '인천의료원 70년사'에 따르면 이 병원의 전신인 인천도립병원의 1959년 병상 가동률은 44.5%, 기독병원이 60%였고, 1961년에는 각각 34.2%, 57.4%였다.이후 인천기독병원은 1969년 180병상, 1975년 250병상, 1981년 409병상으로 지속 확장한다. 이 병원이 지난 2003년 발간한 '인천기독병원 50년사'를 보면 기독병원은 경기도 일원 의료기관 가운데 가장 먼저 최신 의료기기를 들여놔 충청도, 전라도 등 지방뿐만 아니라 서울 환자들도 많이 찾았다. 1953년에는 X-Ray 기계가 도입됐고, 1980년부터는 컴퓨터 단층촬영기(CT)를 가동하기 시작했다. 당시 CT는 웬만한 병원은 설치할 엄두도 내지 못할 만큼 고가여서 보건복지부는 인천, 경기 지역의 여러 병원에 인천기독병원의 장비를 공동 이용해달라고 권장하기도 했다. 할아버지는 "인천에서 CT를 도입한 것은 기독병원이 최초였다. 당시 최신식 의료기술을 자랑했다"며 "병원에서 대한방직, 대우전자 등 인천지역 주요기업들의 건강진단을 다 맡는 등 인천을 대표하는 의료기관이었다"고 말했다. 인천기독병원 이종철 총무팀장은 "인천기독병원의 CT 도입은 서울 세브란스 병원보다도 빨라서 세브란스 환자들이 CT를 찍으러 기독병원에 오기도 했다"고 말했다.1979년부터 인천기독병원 부근에서 의료기기 상점을 운영해 온 박차영(67)씨는 "당시 인천기독병원 인근에는 은행이 2곳이나 있었고 극장에 예식장 등이 있었다"며 "지금의 모습을 보면 상상이 안 가겠지만, 당시 기독병원 주변이 인천의 중심지 역할을 했다"고 말했다.하지만 전진성 할아버지가 근무했던 1970년대에는 의료보험 적용이 제대로 안 돼 병원비가 비싸다 보니 기독병원 문턱을 넘지 못하는 사람도 많았다. 보건복지부가 지난 2015년 12월 발행한 '보건복지 70년사'를 보면 의료보험제도는 1963년 의료보험법 제정으로 도입됐지만 제대로 시행되지 못하다가 1977년부터 500인 이상 사업장을 대상으로 당연 적용 방식으로 시행됐다. 그 후 점차 대상이 확대되면서 1989년 전 국민 의료보험이 시행된다. 할아버지는 기독병원 총무과장으로 있으면서 병원비가 없어 진료를 못 받는 사람을 도와줄 길이 없어 안타까웠다고 했다. "의료보험제도가 없을 때는 병원비가 너무 비싸서 안 죽을 사람도 죽었다고, 병원비를 못 내서 진료받다가 환자가 도망가는 일도 비일비재했어. 미수 병원비도 엄청나게 쌓이고 그랬지."의료보험 제도가 확대 시행된 뒤에는 기독병원의 환자 수가 크게 늘기도 했다. '보건복지 70년사'에 따르면, 의료보험 제도가 500인 이상 사업장을 대상으로 확대 시행되기 시작한 1978년 기독병원의 외래 환자 수는 12만5천839명으로 전년 동기 대비 41% 가까이 증가했다.할아버지는 10년간 기독병원에 있다가 전의철 부원장과 함께 1982년 5월 인천세광병원(현 인천사랑병원) 창설 멤버로 참여해 세광병원에서 10년간 일했다. '인천기독병원 50년사'를 보면 전의철 부원장은 1965년 9월 귀국해 진료를 맡았다. 그는 감리교 십자군 장학생으로 미국 대학에서 유학을 마쳤는데, 현지 병원이 유리한 조건으로 머무를 것을 요청했는데도 인천기독병원에 복직했다고 돼 있다. 174개 병상으로 개원한 세광병원은 1990년 진로그룹이 인수했다. 이때 노조가 심하게 데모하는 등 사측과 갈등이 심해졌고, 이 때문에 할아버지는 병원에서 나오게 됐다. 인천사랑병원 관계자는 "의료운동을 벌여오던 '신문청년의사'그룹이 경영난으로 문을 닫은 세광병원을 고용 승계 조건으로 인수해 1998년 11월 28일 인천사랑병원으로 문을 열었다"고 소개했다.할아버지의 부인 박미자 할머니(83·황해도 옹진 출신)는 최근 몸이 많이 안 좋아져서 인천의 한 대형병원 중환자실에 입원 중이다. 할아버지는 8일에도 할머니 곁을 지켰다. 할머니는 수년째 중증근육무력증으로 치료를 받고 있고, 최근 급성패혈증으로 인해 병세가 위중해져 중환자실 신세까지 지게 됐다. 그동안 4차례 진행한 인터뷰 약속을 한 번도 어긴 적 없던 할아버지는 할머니가 중환자실에 간 뒤로는 취재에 동행하지 못했다. 그래서 지난달 30일 잡아놨던 인천기독병원, 인천사랑병원 등의 현장 취재에도 함께하지 못했다. 그런 할아버지는 지난주 경인일보 연중기획 상편 기사가 나간 뒤 한동안 소식이 뜸했던 지인 여러 명에게서 연락이 왔다며 상기된 목소리로 전화를 해왔다. 할머니 간병에 여념이 없는 할아버지는 "(할머니가) 힘들 것 같다. 조금씩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다"고 담담하게 말했다.글/홍현기기자 hhk@kyeongin.com 사진/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전진성 할아버지가 이북5도민회 인천지구 함경남도민회 회장으로 받은 대통령 포장증을 가리키고 있다.인천세광병원 개원식 모습. 왼쪽 4번째가 전진성 할아버지다. /전진성 할아버지 제공1983년 인천세광병원 직원수련회 모습. 왼쪽에 사회를 보는 사람이 전진성 할아버지다. /전진성 할아버지 제공전진성 할아버지가 부평1동 동부동 사무소 안에서 근무하는 모습. /전진성 할아버지 제공전진성 할아버지가 인천기독병원 총무과장 재직 시절 병원 앞에서 찍은 기념 사진. /전진성 할아버지 제공지금의 인천기독병원 모습. /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전진성 할아버지(왼쪽에서 5번째)가 부평1동 동부동 사무소 앞에서 직원들과 함께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전진성 할아버지 제공

2017-11-08 홍현기

[zoom in 송도]국내 최초 해외 명문대 종합캠퍼스 '인천글로벌캠퍼스'

겐트·유타대 아시아캠 등 속속 개교네덜란드 명문음대 설립 MOU 교환1·2단계로 나눠 10개 외국대학 목표 김진용 청장 "2단계 사업 조속 착공"국내 최초 해외 명문대학 종합(공동) 캠퍼스인 인천글로벌캠퍼스 사업이 순항하고 있다.인천경제자유구역청(청장·김진용)에 따르면 송도국제도시 7공구(연수구 송도동 187)에 위치한 인천글로벌캠퍼스는 지난 2012년 3월 한국뉴욕주립대 개교를 시작으로 한국조지메이슨대, 겐트대 글로벌캠퍼스, 유타대 아시아캠퍼스가 개교했다.올 8월에는 세계적인 패션 명문대학 '뉴욕패션기술대'(FIT) 신입생이 입학했다.인천경제청은 지난달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국립 콘서바토리(명문 음대)와 송도캠퍼스 설립·운영에 관한 양해각서(MOU)를 교환하는 등 더욱 많은 해외 명문대학을 유치하고자 노력하고 있다.인천경제청 관계자는 "인천글로벌캠퍼스를 벤치마킹하기 위한 문의도 끊이지 않고 있다"고 설명했다.인천글로벌캠퍼스 입주 대학은 본교의 엄격한 입학사정과 커리큘럼을 가지고 학생을 선발·교육하고 있다.학생들은 재학 기간 중 3년은 한국에서, 1년은 본교에서 수학 후 본교의 졸업장을 받게 된다.2017년 가을학기 현재 1천730명의 학생이 재학 중이며, 정원 대비 44% 이상의 충원율을 보이고 있다.대학들은 입학 심사 시 본교의 절대평가 방식으로 학생을 선발한다. 입학이 쉽지 않다 보니 충원율이 낮아지는 문제가 있지만, 입학생들의 만족도와 실력은 더욱 높아지는 결과로 이어진다.예컨대 한국뉴욕주립대 기술경영학과(2017 봄학기)의 경우, 96명이 지원했으나 입학 허가를 받은 학생은 24명뿐이었다.인천글로벌캠퍼스는 협업 모델도 갖추고 있다. 겐트대 글로벌캠퍼스는 인천대와 공동학위 제도를 운영하고 있으며, 유타대 아시아캠퍼스는 중앙대와 함께 '디지털복지연구센터'를 운영 중이다. 인천글로벌캠퍼스 사업은 1단계와 2단계로 진행되고 있다. 총 10개 대학을 유치하는 것이 목표다.인천경제청 김진용 청장은 지난 9월29일 취임사에서 "인천글로벌캠퍼스는 (인천이) 세계의 글로벌 교육도시가 되기 위해 필수불가결한 사업"이라며 "2단계 사업을 원래 계획대로 조속한 시일 내에 착공하겠다"고 강조하기도 했다. 인천경제청은 인천글로벌캠퍼스 2단계 사업을 위해 산업통상자원부와 협의를 벌이고 있다. /목동훈기자 mok@kyeongin.com인천글로벌캠퍼스 전경 /인천경제자유구역청 제공

2017-11-05 목동훈

[zoom in 송도]인터뷰|김기형 인천글로벌캠퍼스 운영재단 대표이사

인천글로벌캠퍼스운영재단 김기형 대표이사는 "10개 대학 중 4개 대학 5개 학부를 성공적으로 유치해 캠퍼스가 안정적으로 운영되고 있다"며 "지속가능한 성장을 할 수 있는 전략을 마련하는 데 역점을 두고 노력할 것"이라고 했다.올 9월 취임한 김기형 대표는 "대한민국 최초의 해외 명문대학 공동캠퍼스를 지원하는 재단의 대표로 취임해 무거운 책임감을 느낀다"며 이같이 말했다.김 대표는 "설립 초기 학생 수 부족 등의 어려움을 극복하고 정착 단계에 진입했다고 볼 수 있다"며 "국내외에서 우리 캠퍼스를 벤치마킹하기 위한 방문과 문의가 끊이지 않고 있다"고 했다. 이어 "올 가을학기 현재 1천700여 명의 학생이 재학 중이다. 이들이 향후 친한(親韓) 인천그룹을 형성해 인천이 글로벌도시로 발전하는 데 큰 역할을 할 것으로 본다"고 했다.학생 충원율은 아직 만족할 만한 수준이 아니다. 이에 대해 김 대표는 "입주 대학들이 커리큘럼 신설과 정원 조정을 추진하는 등 학생 교육과 유치를 위한 전략을 세우고 있다"며 "해외 유학보다 저렴한 비용으로 외국대학 본교와 동일한 학위를 취득할 수 있기 때문에 입학 희망자가 계속해서 늘어날 것"이라고 했다.김 대표는 '교수·학생 편의시설 등 인프라 구축'과 '지역사회 소통·협력' 업무에도 중점을 둘 계획이다. 그는 "우리 캠퍼스는 진행형에 있는 학교다. 이제 걸음마 단계"라며 "테니스장과 잔디운동장 등 편의시설을 확충하고, 캠퍼스와 입주대학들을 널리 알리는 데 중점을 두고자 한다"고 했다. 또 "캠퍼스 활성화를 위해 대강당, 공연장, 수영장 등을 지역사회에 개방하고 있다"며 "글로벌 인재 양성은 물론 산학 협력 촉진을 통해 인천경제자유구역의 지속적인 성장 동력이 될 것"이라고 했다. 인천글로벌캠퍼스 내에는 기업의 연구개발과 해외 진출 등을 돕는 '글로벌스타트업 캠퍼스'도 있다.김 대표는 "글로벌 종합대학으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더욱 많은 해외 명문대학을 유치해야 한다"며 "2단계 사업을 위해 인천경제청과 산업부, 교육부 등 관련 기관 간 긴밀한 협조가 필요하다"고 했다. 또 "2020년을 목표로 교수하우징 및 편의시설 확충, 학생 충원율 90% 달성, 해외 명문대학 추가 유치 등에 최선을 다할 것"이라며 "시민 여러분의 지속적인 관심과 격려를 부탁한다"고 했다.김 대표는 공직 생활 동안 인천경제청에서 개발국장, 도시개발본부장, 차장 등을 역임해 관련 업무에 밝다. /목동훈기자 mok@kyeongin.com인천글로벌캠퍼스운영재단 김기형 대표이사. 그는 편의시설 확충, 학생 충원율 향상, 해외 명문대학 추가 유치 등에 중점을 두겠다고 밝혔다. /인천글로벌캠퍼스운영재단 제공

2017-11-05 목동훈

[실향민이야기 꿈엔들 잊힐리야·42]함경남도 단천시 출신 전진성 할아버지(上)

마지막 배 '매러디스 빅토리호' 타고 거제로문재인 대통령 부모님도 같은 배 타고 피란몇십리 걸어 도착 "하룻밤 묵었다면 잡혔어""기중기 달린 어망에 담겨 승선" 증언 눈길장승포 초교·어망창고에 머물다 자원 입대대구 육군본부 행정병때 송해와 함께 근무부대행사 때마다 남다른 입담 자랑해 기억제대 후 부평서 결혼 60년 세월 떠나지 않아함경남도 단천 출신인 전진성(88) 할아버지는 1950년 12월 흥남철수 당시 흥남부두를 마지막으로 빠져나온 '매러디스 빅토리(MEREDITH VICTORY)'호를 타고 거제도로 피란을 나왔다. 빅토리호는 한 척의 배로 가장 많은 인명(1만4천여명)을 구한 기록으로 2004년 기네스북에 올랐다. 한국전쟁 종군기자였던 미국인 빌 길버트가 쓴 '기적의 배'를 보면 매러디스 빅토리호는 한국전쟁 중 부산, 일본 등을 오가며 군수물자를 실어나르는 역할을 했다. 1950년 9월15일 인천상륙작전 날에는 인천항에 들어와 탄약, 탱크 등을 해군 상륙함정(LST)에 실어줬다. 흥남철수 당시에는 부산에 제트기 연료를 운반한 뒤 작전에 투입됐다.문재인 대통령의 부모도 흥남철수 때 이 배를 탔고, 경남 거제에 온 지 2년 만인 1953년 1월 문 대통령을 낳았다. 문 대통령은 지난 6월 미국을 방문했을 때 장진호 전투 기념비를 찾아 "장진호 용사와 흥남철수 작전의 성공이 없었다면 오늘의 저도 없었을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군사전문가들은 흥남철수작전을 현대 전쟁사 최대 규모의 철수 작전인 덩케르크 철수 작전(Operation Dynamo)과 비교한다. 덩케르크 작전으로 33만8천명의 영국, 프랑스 병사를 잉글랜드로 철수시켰는데, 흥남철수작전으로는 유엔군 10만 명뿐만 아니라 전진성 할아버지와 같은 민간인 10만 명도 구출됐다. 두 작전은 모두 흥행 영화의 소재로 다뤄졌다는 공통점도 있다. 크리스토퍼 놀란의 영화 '덩케르크'는 국내에서만 270만명 이상의 관객을 동원하는 등 흥행에 성공했고, 흥남철수작전은 역대 2위 누적 관객(1천420만명)을 기록한 영화 국제시장에 나온다. 흥남철수작전기념사업회 황덕호 명예회장은 '흥남철수작전 역사서 아! 흥남철수' 축사에서 "덩케르크에서는 피란민 철수는 단 한 명도 없었고, 완전무장을 하고 상당한 기동성을 갖춘 정예대군이 오히려 민간인들의 도움을 받아가면서 철수하기에 바빴던 철수작전이다. 반면 흥남철수작전은 군 병력뿐만 아니라 노인과 아녀자들을 포함한 10만여 민간인이 군과 거의 동수로 함께 철수한 인도주의적 작전이었다"고 자부심을 드러냈다.전진성 할아버지는 고향인 단천에서부터 무릎 높이까지 오는 눈길을 뚫고 쉼 없이 걸어 흥남철수작전의 행렬에 들어갈 수 있었다. 함경도 피란민들은 흥남에서 남쪽으로 향하는 배가 있다는 소식을 듣고 흥남부두로 몰렸다. 할아버지는 "중간에 하룻밤을 묵기라도 했으면 중공군에 잡혀 무사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했다.할아버지는 1950년 12월 5일 새벽 동네에 주둔하던 국군이 사라진 것을 확인하고 친척 3명과 함께 보따리를 싸 들고 단천항구로 갔다. 할아버지는 단천항에 출발하는 배가 없는 것을 확인하고는 발이 푹푹 빠지는 눈길을 헤치고 함경철도를 따라 남쪽으로 무작정 걸었다. 그러다 화물열차를 탈 수 있었고, 북위 40도선에 있는 '퇴조'라는 지역에 도착했다. 그리고 흥남항까지 밤새 20리 길을 걸었다.당시 흥남부두에는 이미 10만 명이 넘는 많은 피란민이 몰려있었다. 당초 미군은 흥남항을 통해 군 병력만 철수시킬 계획이었는데, 나중에 민간인까지 함께 상륙함정과 화물선 등에 실어 피란을 시키기로 했다. 할아버지는 이런 흥남철수 작전이 '현봉학 박사'라는 사람 덕분에 가능했다고 했다. 현봉학 박사는 당시 미군을 설득해 민간인들을 구출한 흥남철수의 숨은 주역으로 꼽힌다. 그는 자신의 경험을 정리한 '한국의 쉰들러 현봉학과 흥남 대탈출'에서 미 10군단 알몬드 소장 등을 설득해 민간인을 배에 태울 수 있었다고 했다. 할아버지는 당시 흥남항구에 있으면서 미군 병력 철수를 위해 직접 군수물자를 실었다가 민간인을 태우기 위해 다시 각종 물자를 내리는 일을 했다.당시 가공식품 깡통 등 각종 군수물자를 항구에 내려놓은 뒤 중공군이나 인민군이 가져가지 못하도록 모두 불살랐다고 했다. 접안시설도 이용할 수 없도록 모두 부숴버렸다.김훈의 장편소설 '공터에서'에도 이 같은 흥남철수 과정이 묘사돼 있다. "미군은 흥남항에서 해상으로 철수할 작정이었다. 미군의 철수 계획은 중공군의 졸병도 알았고 피난민들도 알았다. 미군은 피난민들의 승선을 허락하지 않는다고 거듭 말했지만 피난민들은 흥남항으로 몰렸다. 북청에서 흥남에 이르는 해안 도로에 피난민들이 가득 차서 흘러갔다. …(중략)… 미군이 수송선에 피난민을 태우기로 했다는 소문은 발표도 없이 퍼져 나갔다. 수송선들이 모래 위로 선수를 들이밀고 철문을 열었다. … 손을 잡아라. 허리띠를 붙들어 …(중략)… 마지막 폭격기들이 항모로 돌아왔다. 항구 안에 남아 있던 구축함이 16인치 포로 흥남부두를 부수고 접안 시설을 부수었다. 함포가 부두를 부술 때 민간인들도 부두에 모여 있었다. 불길과 연기에 휩싸여서 부두도 산맥도 보이지 않았는데, 연기 속으로 포탄은 계속 날아갔다."당시 매러디스 빅토리호에 오르는 피란민의 모습을 형상화한 '흥남철수작전기념비'가 경남 거제 포로수용소 유적공원에 있다.피란민들이 배의 외벽을 따라 내려온 줄을 타고 경쟁하듯 올라가는 모습이다. 그런데 할아버지는 자신은 기중기에 달린 어망에 담겨 배에 끌어올려졌다고 했다. 피란민들이 어망에 실려 올려졌다는 얘기는 흥남철수 작전에 대한 각종 기록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증언이다."나는 기중기에 달린 어망에 탄 것 같아. 25~30명 정도가 어망에 타서 어떤 사람은 거꾸로, 어떤 사람은 가로로 처박혀서 어망에 실렸던 것 같아. 아니 그렇게 했던 것이 틀림없는 것 같아."1950년 12월 23일 흥남부두를 떠난 매러디스 빅토리호는 다음 날 부산항에 도착했지만, 정박할 곳이 없다는 이유로 당국의 하선 허가를 받지 못했고, 성탄절인 12월 25일 거제도의 작은 포구 장승포에 도착했다. 할아버지는 거제도에 도착한 뒤 장승포항 주변의 국민학교에서 잠시 추위를 피했다. 이때 머문 학교의 이름은 '장승포초등학교'로 1921년 개교한 뒤 지금도 같은 자리에서 교사(校史)를 이어가고 있다. 현재 학생 수는 약 650명이다. 이 학교 정원욱 교무부장은 지난 10월 31일 전화통화에서 "거제도로 피란을 왔을 당시 장승포항 주변에 국민학교는 장승포초등학교가 유일했다"며 "피란민들이 우리 학교에서 머물렀던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서울에서 중학교 교사를 지낸 김찬수 씨가 쓴 '내가 겪은 6.25'를 보면 당시 거제도에는 수만 명이 몰리면서 대규모 피란민 촌이 만들어졌다. "밤에 보니 주변 언덕과 높은 곳에 불빛이 휘황찬란하여, 개발하기 얼마 전의 서울 돈암동 산꼭대기의 판자촌 야경같이 높은 빌딩이 가득 들어서서 불을 켜 놓은 듯한 모습이었다."할아버지는 이후 어망창고에서 열흘 정도 있다가 연초면에 있는 학교에서 방위군 신청을 받아 자원입대를 했다. 전문학교(북청농업전문학교 잠업과)까지 나온 할아버지가 글씨를 잘 쓰자 감찰부에서 조서를 받는 일을 시켰다. 할아버지는 방위군이 해산된 뒤에는 '창설 멤버'로 제주도 육군훈련소에 입소하게 된다. "제주도 모술포에 훈련소가 있었는데, 우리가 직접 돌을 메다 날라서 훈련소 벽을 쌓고 사실상 우리가 만들었지. 당시 훈련소장이 백인엽 장군이었어. 변변한 총도 없을 정도로 열악했지. 총 대신에 대나무 죽창을 들고 훈련을 받았으니까. 한 달 정도를 그렇게 훈련을 받았던 것 같아."할아버지의 증언은 '디지털서귀포문화대전'에 나와 있는 '제주 구 육군 제1훈련소 지휘소'에 대한 설명과 일치했다. 서귀포문화대전은 육군 제1훈련소에 대해 "당시 백인엽 준장을 소장으로 1951년 3월 21일 창설되어 1956년 1월 해체되기까지 5년간 50만여명의 신병을 배출해 냈다. 신병들은 대체로 1개월 정도 훈련받고 전장에 투입됐다"고 설명했다.할아버지는 훈련소를 거쳐 부산에 있는 보충대대에서 통신학교로 배치를 받았고, 훈련을 거쳐 대구 육군본부에 있는 통신감실로 발령을 받았다. 할아버지는 인사행정과 소속으로 일종의 행정병 역할을 했다. 할아버지는 이때 전국노래자랑의 국민MC가 된 송해를 만났다. 송해는 무선통신사였는데, 이때도 남다른 입담을 자랑했다. 부대 안에서 열린 웅변대회나 연극대회 무대에 송해가 올라 농담을 시작하면 폭소가 터져 나왔다고 한다. 할아버지는 송해가 했던 대표적 농담으로 "옆구리를 찔러 창자를 꺼내서 빨랫줄을 만든다"고 했던 것을 기억했다. 지금 듣기에는 농담치고는 다소 '살벌'한데, 이때는 배꼽을 잡을 정도로 뜨거운 반응이 있었다고 한다.시인이자 문학평론가인 단국대학교 영어영문학과 오민석 교수가 쓴 '송해 평전'에도 송해가 통신학교 무선부를 거쳐 대구 육군본부 통신병으로 배치됐다고 돼 있다. 송해는 군 생활 중 3군 종합 콩쿠르 대회에 나가 최우수상을 받았다고 했다.군예대(軍藝隊)가 자신의 부대에 위문공연을 올 때마다 송해가 무대에 올랐을 뿐 아니라, 임시 휴가증을 끊어 군예대의 위문 공연장에도 자주 불려 나갔다고 한다. 전진성 할아버지의 기억과 거의 일치한다. 다만 오민석 교수는 송해가 제대 후 함께 군 생활을 한 장세균이라는 사람을 따라 '부천 싸전거리'에 와서 두부장사를 했다고 했는데, 전진성 할아버지는 다른 이야기를 들려줬다. 장세균이라는 사람이 현재 인천 부평구 부개동에 있는 우체국 송신소에 있었고, 송해도 이곳에서 함께 일하다가 유랑극단에 들어갔다는 것이다. 누구의 말이 맞든 간에 송해는 군 생활을 할 때부터 '남다른' 입담을 자랑했던 것만은 분명하다.할아버지는 대구 육군본부에서 강원도 원주에 있던 1통신단으로 전입됐다가 1954년 5월 제대를 한 뒤 부평으로 왔다. 군 생활을 할 때부터 만나던 아내가 부평에 있는 연합병원(현재 세림병원)에서 일하고 있어 부평에서 1955년 7월 결혼을 하고 이곳에 정착하게 됐다. 세림병원은 1940년 부평역 앞에서 부평의원으로 문을 열었고, 1963년 5월에 병원이 증축되면서 부평연합병원으로 이름을 바꿨다. 1983년 현재 세림병원 부지(청천동 302)에 새로 건물을 지어 병원을 이전했다. 할아버지도 연합병원에서 일을 하기도 했다. 이때부터 지금까지 60년이 넘도록 부평에서 살고 있다.글/홍현기기자 hhk@kyeongin.com 사진/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전진성 할아버지가 인천 부평구에 있는 자택에서 피란 당시의 기억을 이야기하고 있다.사진은 폭파되고 있는 흥남시가지. /흥남철수작전기념사업회 제공사진은 매러디스 빅토리호에 승선하고 있는 피란민들.지난 2005년 경남 거제도에 있는 흥남철수작전기념비를 찾은 전진성 할아버지. /전진성 할아버지 제공

2017-11-01 홍현기

[zoom in 송도]위기가정 어린이돕기·이웃사랑 나눔 '소중한 한걸음'

전망대까지 기록측정·완주 구분기업인·단체·시민 500명 '레이스'LH인천본부 행사후원·봉사활동참가자들 선물상자만들기 체험도위기가정 어린이를 돕기 위한 '2017 G타워 희망 계단오르기 대회'가 지난 28일 오전 인천 송도국제도시 G타워에서 성황리에 개최됐다. 대한적십자사 인천시지사와 경인일보가 주최한 이번 대회는 기업인, 개인, 단체 일반 신청자 등 약 500명이 참가했다. LH 인천지역본부, 우리은행 연수동지점, 국민은행 인천지역영업그룹, 한국자산관리공사 인천지역본부, 삼성바이오로직스, 남구 시설관리공단, 한국전력공사 인천지역본부 등이 도움을 줬다.G타워 1층 로비에 마련된 행사장에는 메인 무대와 함께 ▲심폐소생술 교육장 ▲미혼모 지원을 위한 자립형 이동식 카페 '토리양카페' ▲위기 어린이 돕기 선물상자 만들기 등의 부스가 설치됐다.LH 인천지역본부는 이번 행사에 후원금을 내고 봉사활동도 벌였다. 나눔봉사단원 등 25명의 직원이 행사에 참여해 '토리양카페' 운영 지원과 선물상자 만들기에 참여했다.전 레슬링 국가대표 심권호 LH 인천지역본부 경영지원부 부장도 참석했다. 심 부장은 "LH 인천본부는 자라나는 어린이에 관심을 갖고 여러 사회공헌활동을 하고 있다"며 "오늘 행사도 위기 상황에 있는 어린이를 돕는 취지라서 후원하게 됐다"고 말했다. LH 인천지역본부는 인천남동경찰서와 협력해 초등학교 통학로를 순찰하고 교통안전캠페인을 벌이는 'LH 안전마을지킴이' 활동도 하고 있다. LH 신입사원도 많이 참여했다. 같은 부서 김효영 차장은 "올해 입사한 젊은 직원들이 봉사활동에 많이 왔다"며 "이웃사랑과 사회공헌을 몸소 실천할 수 있는 시간이 될 것"이라고 했다.국민은행 인천지역영업그룹에서도 약 60명(가족 포함)이 참여했다. 국민은행 주안역지점 주안북출장소에 근무하는 김동수 차장은 피에로 복장을 하고 풍선아트를 선보였다. 김 차장은 "아이들과 소통하는 것이 좋아 14년째 풍선아트로 재능기부를 하고 있다"고 말했다. 국민은행 인천지역영업그룹 정기영 대표는 "지역사회의 좋은 행사에 기여할 수 있게 돼 기쁘다"며 "가정형편이 어려운 어린이를 돕고, 계단 오르기로 건강도 챙길 수 있는 매우 유익한 행사 같다"고 했다. G타워 희망 계단오르기 대회는 위기가정 어린이를 돕기 위한 행사로, 참가비(일시기부 1만 원 또는 정기후원 5천 원)는 위기가정 어린이의 의료·교육·생계비 등으로 쓰인다.공식 행사는 오전 10시에 시작됐다. 개회식에는 대한적십자사 인천시지사 황규철 회장과 배준영 부회장, 인천경제자유구역청 김진용 청장 등이 참석했다. 황규철 회장은 개회사에서 "위기에 놓인 어린이에게 희망을 주기 위한 행사"라며 "뜻깊고 소중한 추억을 만들어 가길 바란다"고 했다. 김진용 청장은 "저도 G타워 31층 사무실까지 매일 계단으로 걸어 다닌다"며 "계단오르기 대회가 건강 체크와 증진에 도움이 됐으면 한다"고 했다.대회는 1층에서 계단으로 33층 전망대까지 걸어 올라가는 방식으로, 크게 '기록 측정 경기'와 '완주 경기'로 구분돼 진행됐다. 완주 경기에 참가한 배현지(신송중1)양은 "가끔 아파트 계단을 걸어 다니는데, 오랜만에 걸어서 힘들다"면서도 "완주를 해서 기분이 좋다"고 말했다. 기록 측정 경기 1등은 작년에 이어 올해에도 안주업(41)씨가 차지했다.참가자들은 경기가 끝난 뒤 1층 행사장에서 '위기 어린이 돕기 선물상자 만들기'(학용품 선물세트 포장)를 체험했다.G타워 계단오르기 대회에는 많은 자원봉사자가 참여해 행사 운영 등에 큰 도움을 줬다. 김규분(71·여)씨는 "자원봉사활동을 한 지 10년이 넘었다"며 "위기 어린이 등 남에게 도움을 줄 수 있다는 것에 보람을 느낀다"고 했다. /목동훈기자 mok@kyeongin.com"조금만 참아"-지난 28일 오전 인천 송도국제도시 G 타워에서 열린 위기가정 어린이를 돕기 위한 '2017 G타워 희망 계단오르기 대회'에 참가한 시민들이 32층의 계단을 오르고 있다. /임순석기자 sseok@kyeongin.com몸풀기 체조-희망 계단오르기 대회 참가자들이 사전 몸풀기 체조를 하고 있다.나눔봉사단'파이팅'-LH 인천지역본부 나눔봉사단원 25명이 행사에 참여해 '토리양카페' 운영 지원과 선물상자 만들기에 참여했다.

2017-10-29 목동훈

[송도국제도시 브리핑]송도 지식기반서비스용지 입주기업 공모방식 매각

■송도 지식기반서비스용지 입주기업 공모방식 매각인천경제자유구역청은 송도 바이오단지 내 지식기반서비스용지(송도동 13의 27 2만2천546.3㎡)를 입주기업 공모 방식으로 매각한다. 인천대와 셀트리온 사이에 위치한 땅이다. 인천경제청은 바이오 업종을 영위하는 연구개발 역량 및 개발 재원 조달 능력을 갖춘 우량 기업·기관·학교법인을 유치해 첨단바이오클러스터의 성공적 조성을 유도할 계획이다. 유치 대상 업종을 영위하는 기업(연구소 포함), 기관, 대학 등이 단독으로 신청하거나 컨소시엄을 구성해 응모할 수 있다. 인천경제청은 내달 22~24일 사업계획서를 접수한 뒤, 12월 중 입주 대상 기업을 선정해 토지매매계약을 체결할 계획이다. 자세한 내용은 인천경제청 홈페이지 공고란을 참고하면 된다.■한국조지메이슨大, 내달3일 '미국세금 특별콘퍼런스'한국조지메이슨대학교는 내달 3일 인천글로벌캠퍼스 지원센터 소극장에서 한미택스연구포럼과 함께 '제3회 미국 세금에 관한 특별 콘퍼런스'를 연다. 한국에서 처음 열리는 '미국 세금에 관한 특별 콘퍼런스'는 한국 기업의 미국 진출을 돕고, 국제세금제도에 관심 있는 각계 전문가와 대학생들에게 다양한 정보를 공유하고자 마련됐다. 한미 양국의 세금 전문가들로 구성된 발표자와 패널들이 참석해 미국해외금융자산 및 금융계좌신고제도, 미국 진출 기업에 적용되는 기업 설립 절차와 세금제도 등을 설명할 예정이다. /목동훈기자 mok@kyeongin.com

2017-10-29 목동훈

[실향민이야기 꿈엔들 잊힐리야·41]황해남도 해주시 출신 호성신 할아버지(下)

용당포항 조성 이후 1930년대 고속성장누정 '부용당' 위치한 도청 인근에 살아황해도 행정중심이자 최대 '조기' 산지뱃길 30㎞ 연평도, 인천 편입전 해주권평양과 함께 '냉면 본산'으로 꼽히기도김구·안중근 고향… 장길산 주요 무대소설 속 인물·상권 남·북이 얽히고설켜실향민 호성신(81) 할아버지의 고향은 황해도 도청 소재지 해주시(海州市)이다. 조선 태종 17년(1417년) 황주(黃州)와 해주의 이름을 따서 생겨난 황해도는 한국전쟁 이후인 1954년 황해북도와 황해남도로 나뉘었고, 도청도 황해북도는 사리원시에, 황해남도는 해주시에 따로 뒀다.하지만 호성신 할아버지를 비롯한 황해도 실향민들은 여전히 고향을 '북도'와 '남도'로 구분하지 않는다. 호성신 할아버지가 태어난 1936년 당시의 해주는 전국에서 가장 급성장하는 도시 중 하나였다. 해주 남단 바다인 용당포(龍塘浦)에 근대 항만을 조성하는 축항공사가 마무리된 1930년 10월 이후부터, 해주는 재령평야와 연백평야 같은 황해도 곡창지대에서 생산한 쌀이 용당포항을 통해 일본으로 빠져나가는 '수탈기지'가 됐기 때문이다.항만 조성에 이어 용당포항을 중심으로 황해도지역 철도망이 해주에 집결했다. 일본은 용당포항 조성 이전까지 황해도 곡창지대의 쌀을 인천항이나 평안도 진남포를 통해 수탈해갔다. 손정목(1928~2016) 전 서울시립대 도시과학대학 교수가 1996년에 펴낸 '일제강점기 도시화과정 연구'를 보면, 해주 인구는 1930년 2만3천820명에서 1935년 3만447명, 1940년 6만2천651명으로 급증했다. 1930년대 인구 증가율로만 따지면 162.6%로 전국 3위를 기록하기도 했다.호성신 할아버지가 살던 해주시 선산동도 황해도청이 멀지 않은 도심지였다. 할아버지의 아버지는 해주에서 목수였다고 한다."여기저기 건축 공사가 많아서 아버지 목수 일도 호황이었어. 논밭은 시내 외곽으로 가야 볼 수 있었고, 우리 동네는 기와집 촌이었어. 도로가 닦이면서 동네에 오거리가 생기기도 했지. "당시 황해도청은 옛 해주읍성 자리인 부용동에 있었다. 할아버지 옛집이 있던 선산동의 북동쪽이다. 도청 앞 연못에는 1500년(연산군 6년)에 건립된 누정(樓亭)인 '부용당(芙蓉堂)'이 있었다. 앞채는 연못 가운데에 'ㄱ'자형으로 지었고 뒤채는 연못 바깥에 지었는데, 웅장하고 화려했다. 부용당은 임진왜란 때 선조(재위 1567∼1608)가 의주로 피란 갔다가 서울로 돌아오던 1593년 8월 18일부터 9월 22일까지 한달여간 머물렀던 곳으로도 유명하다. 선조가 친필(어필·御筆)로 '부용당'을 써서 현판으로 걸었다는 기록도 '정조실록'에 있다. 호성신 할아버지는 "연못에 연꽃이 만발할 땐 아주 운치가 좋았고 절경이었다"며 "보통학교(초등학교) 다닐 때 부용당으로 소풍을 가곤 했다"고 기억했다. 그러나 부용당은 한국전쟁 때 소실돼 돌기둥과 주춧돌만 남았다. 북한은 그 터를 국가지정문화재 국보급 제68호로 지정했다. 호성신 할아버지가 해주에 살던 당시에는 용당포 쪽으로 대규모 시멘트공장이 있었다고 한다. 일본 우베(宇部)시멘트회사가 설립한 '조선시멘트회사'로 할아버지가 태어난 이듬해인 1937년 6월부터 가동했다. 동아일보 1937년 6월 25일자 신문을 보면, 조선시멘트회사 해주공장은 연간 생산능력이 57만t으로 당시 국내 최대 규모였다. 현재까지도 해주는 북한의 최대 시멘트 생산기지이고, 제철·제강, 제지, 섬유 등 각종 산업이 발달한 공업도시다. 해주항은 인천세관에서 관할했다.해주의 공업도시화로 항만 수요가 점점 늘어나자 1940년 8월 인천세관 해주지서가 신설됐다. 해주는 조선 때부터 황해도의 행정중심지였다. 조선 중기에 편찬된 지리지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서는 '지역이 넓고 백성이 많으며, 관서(關西)의 큰 주(州)'라고 설명한다. 부용당 같은 화려한 누정이 해주 관청 앞에 있었던 것도 지금의 도지사 격인 황해도 관찰사가 해주에 머물렀기 때문이다. 또 해주는 한때 국내 최대 조기 산지이기도 했다. 지금은 인천 옹진군에 속한 연평도가 1945년 11월까지 황해도 해주의 섬이었다. '세종실록' 지리지에는 해주의 토산물로 가장 먼저 조기를 소개하며 '남쪽 연평평(연평도)에서 나고, 봄과 여름에 여러 곳의 고깃배가 모두 이곳으로 모이어 그물로 잡는데, 관에서 그 세금을 거두어 나라 비용에 쓴다'고 나온다. 조선 초기 이전부터 시작된 것으로 보이는 연평도 조기잡이는 일제강점기에도 전국 최대 규모의 '파시(波市·해상시장)'로 번성했는데, 남획이 심해지면서 1960년대 말부터 조기의 씨가 말랐고 결국 그 맥이 끊기고 말았다. 황해도지편찬위원회가 1981년 발간한 '황해도지'에는 1940년 해주의 조기 어획고는 2만8천986t으로 전국 생산량의 80%를 차지했다고 나온다. 연평도와 해주까지의 거리는 뱃길로 약 30㎞, 연평도와 인천 간 거리는 뱃길로 122㎞다. 연평도는 남북 분단과 함께 경기도를 거쳐 인천에 편입되기 전까지는 해주 문화권이었다. 조기파시로 한때 돈이 넘쳐나던 연평도에서 "연평어업조합장 했지 황해도지사 안 한다"는 말이 유행했던 것도 이 때문이다. 동아일보 1940년 1월 9일자는 김삼소(金三笑)의 '돈실러가세'를 신춘 민요 당선 기사를 실었다. '가세나 가세나 돈실러 가세나 해주 연평 섬에 돈 실러 가세나 봄이면 조기 한 철 황금물결이 섬바위에 넘실넘실 손짓을 하네 에헤이요 닻 감아라 돛을 달아라.'호성신 할아버지는 해주시장에 조기가 가장 많았고, 조기 못지않게 까나리도 많이 볼 수 있었다고 한다. 당시 이야기를 좀 더 자세히 듣고자 황해도민회 임원이기도 한 송용순(97) 할머니를 찾았다.할머니는 20대 중반까지 해주 시내에 살다가 1947년 서울로 피란을 왔다고 했다. 송용순 할머니는 "조기철이면 연평에서 올라온 굴비를 사가려고 용당포에 사람이 바글바글했고, 용당포 근처만 가도 굴비냄새가 났다"며 "아버지가 지주였는데, 소작인에게 쌀과 함께 굴비를 봉급으로 줬을 정도로 흔했다"고 회상했다.조기 말고도 먹을 게 넘쳐났다. 해주는 평양과 함께 냉면의 본산으로 꼽힌다. 해주냉면은 메밀에 전분을 섞어 평양냉면보다 면발이 굵고, 소고기가 아닌 돼지고기 육수를 많이 쓰는 게 특징이다. 백령도의 사곶냉면이 바로 '해주식'이라는 게 음식 전문가들의 설명이다. 평양과 해주가 냉면으로 유명한 까닭은, 두 지역 모두 각 도의 중심지로서 '기방(妓房) 문화'가 발달한 곳이었고, 냉면은 기방에서 양반들이 즐겨 먹던 음식이라고 '냉면열전'(2014)이란 책은 분석한다. 양반들이 주로 먹던 냉면은 근대 이후 서민층으로도 확산해 1934년 기준 해주에는 냉면 전문점 67곳이 성업했다. '홍길동전'의 저자 허균(許筠·1569 ~1618)은 우리나라 명물 토산품과 별미음식을 소개한 '도문대작(屠門大嚼)'에서 해주의 별미로 해조류인 '참가사리', '황각', '청각'을 꼽았다. 최영년(崔永年·1859~1935)이 1925년 쓴 '해동죽지(海東竹枝)'에서는 숭어, 잉어, 조기, 도미 등을 구운 뒤 갖가지 채소, 버섯, 당면을 넣어 끓인 전골인 '승가기(勝佳妓)'를 해주의 명물이라고 했다. 해주가 마냥 풍족한 것만은 아니었다. 조선 후기 박만정(朴萬鼎·1648~1717)이 1696년(숙종 12년) 3월부터 두달여간 황해도지역 암행어사로 활동했을 당시를 일기로 쓴 '해서암행일기(海西暗行日記, 2015, 서해문집)'를 보면, 신분을 숨긴 박만정 일행이 해주의 한 마을에서 하룻밤 묵을 곳조차 찾지 못하고 문전박대당하는 장면이 나온다. 기와집이 연이어 있어 부촌 같아 보였으나, 흉년이 심해 인심도 야박했다. 박만정은 해주를 포함한 황해도 곳곳에서 기아에 허덕이다 못해 얼굴이 부어오른 백성들의 몰골을 목격한다.해주는 백범(白凡) 김구(金九·1876~1949)의 고향이다. 김구는 자서전 '백범일지'에서 '해주읍 서쪽에 80리 떨어진 백운방(白雲坊) 텃골'이라고 고향을 설명했다. 10대 후반의 김구는 해주에서 동학농민운동에 참여해 동학군 선봉대를 이끌기도 했다. 당시 김구는 황해도 동학교도 대표단으로 뽑혀 충청도 보은에 있는 제2대 동학교주 해월(海月) 최시형(崔時亨·1827~1898)을 만나기도 했는데, 일행은 이때 해주의 대표적인 토산품인 '해주먹(海州墨)'을 선물했다고 한다. 해주산 송연(松煙·소나무를 태운 그을음)으로 만든 먹은 전국에서 으뜸으로 쳤다.지난 9월 2일부터 두 달 가까이 호성신 할아버지 취재가 이뤄지는 동안 할아버지의 고향 자랑은 명승지, 토산물, 음식, 산업, 인물까지 분야를 막론하고 끊이질 않았다. 할아버지는 "안중근(安重根·1879~1910) 의사도 해주 출신인데 깜빡했다"며 인터뷰를 마치고 자리를 뜨려던 기자를 붙잡아 다시 이야기를 이어가기도 했다. 조선의 3대 도둑 중 하나인 장길산(張吉山)의 일대기를 그린 황석영의 대하소설 '장길산'은 조선 숙종(재위 1674~1720) 때의 한양과 그 주변, 황해도 등지가 주요 무대다. 강화와 교동 또한 소설에서 많이 언급되고, 백령, 대청, 연평 등 서해5도도 아우른다. 소설 초반부터 장길산을 중심으로 강화에서 장사에 눈을 뜬 송상(松商) 박대근, 해주의 신복동 패거리, 용당포의 선상(船商) 임유학, 연평 출신의 뱃사공 우대용을 비롯해 인천과 황해도가 연관된 주요 인물들이 얽히고설킨다. 강화, 개성, 해주 용당포 같은 한강 하구 연안의 해상물류거점을 둘러싼 상권 다툼이 소설 속에서 치열하게 전개된다. 소설 '장길산' 속 배경이 남북으로 갈린 지금은 전혀 딴 세상 이야기다. 백범 김구와 소설 '장길산'의 흔적을 따라 인천과 해주를 오가며 여행할 수 있는 날이 언제쯤 올까. 호성신 할아버지는 "죽기 전에 통일되긴 다 틀린 것 같다"면서도 "멀지 않은 고향 땅인데 꼭 한번은 다시 밟아보고 싶다"고 소망했다.글/박경호기자 pkhh@kyeongin.com 사진/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그래픽/박성현기자 pssh0911@kyeongin.com/아이클릭아트사진/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한국전쟁 이전으로 추정되는 해주시 전경. 출처/'황해도지'(1981)축항공사를 끝낸 해주 용당포항. 출처/'황해도지'(1981)한국전쟁 때 소실된 해주 부용당의 옛 모습. 북한은 돌기둥과 주춧돌만 남은 부용당 터를 국가지정문화재 국보급 제68호로 지정했다. 부용당 너머로 황해도청 청사 건물도 살짝 보인다. 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

2017-10-25 박경호

[zoom in 송도]'제2회 희망계단오르기' 28일 송도 G타워서

작년 11월에 첫 행사 400명 참가올해 적십자·경인일보 공동주최참가비는 의료·교육·생계비 기부걸그룹 공연·VR체험등 이벤트도인천 송도국제도시 G타워에서 희망 계단 오르기 대회가 오는 28일 열린다.대한적십자사 인천시지사는 28일 오전 10시 송도국제도시에 있는 G타워에서 '2017 제2회 G타워 희망 계단오르기 대회'를 개최한다.G타워 희망 계단오르기 대회는 다가올 겨울에 추위와 허기 등 위기에 놓인 어린이들을 돕기 위한 행사다.참가자들이 낸 참가비(일시기부 1만원 또는 정기후원 5천원)는 위기가정 어린이들의 의료·교육·생계비 등으로 사용된다. 작년 11월 열린 1회 G타워 희망 계단오르기 대회에는 약 400명이 참가했으며, 정기후원에 130여 명 참여하고 일시기부는 약 2천800만 원이 모였다.올해 행사는 대한적십자사 인천시지사와 경인일보가 공동 주최한다.한국토지주택공사 인천지역본부, 우리은행 연수동지점, 국민은행 인천남지역영업그룹, 한국자산관리공사 인천지역본부 등이 후원 기관으로 참여한다.대회 참가자는 기업인, 개인, 단체 일반 신청자 등 약 500명이다.이들은 이날(28일) G타워 로비에서 33층 전망대까지 계단을 오르게 된다.이색 복장으로 계단을 오르는 이벤트 경기, 건강을 위해 천천히 계단을 오르는 건강 나눔 완주 경기, 개인·단체별 기록 측정 경기 등으로 구분된다.행사 전에는 재능기부 공연과 참가자들의 안전을 위한 간략한 건강검진 및 준비체조가 진행된다. 대한적십자사 인천시지사는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 응급처치 전문강사, 간호사, 안전요원, 구급차 등을 행사장에 배치한다.행사 사회는 개그맨 김인석이 맡는다. 공연에는 비타민엔젤(걸그룹), 정윤호 매직아티스트(마술 공연), 엠제로(힙합가수) 등이 참여하며 VR 체험, 캐릭터 포토 타임 등 다채로운 체험 행사가 열린다.G타워 희망 계단오르기 대회는 실생활 계단 오르기 운동을 확산하기 위한 행사이기도 하다.계단 오르기 운동은 짧은 시간에 하체 근육을 단련하는 데 최적이고, 걷기보다 칼로리 소모량이 많다. 보건복지부는 일상생활 속 비만 예방 실천법으로 '계단 이용하기' '걷기' '음료 대신 물 마시기' 등을 독려하고 있다.대한적십자사 인천시지사 관계자는 "건강한 삶과 나눔을 주제로 한 행사"라며 "인천 시민과 기업의 사회적 나눔 의식을 확산하고, 송도국제도시 랜드마트 건물인 G타워를 홍보하는 효과도 있을 것"이라고 했다.G타워는 2013년 5월 완공된 지하 2층 지상 33층 규모 건물로, 인천경제자유구역청과 GCF(녹색기후기금) 등 국제기구들이 입주해 있다. /목동훈기자 mok@kyeongin.com지난해 열린 제1회 G타워 계단오르기 대회 모습. /대한적십자사 인천시지사 제공

2017-10-22 목동훈

[zoom in 송도]송도에 글로벌패션스쿨 '활짝'

한국뉴욕주립대학교(총장·김춘호)는 지난 19일 세계 5대 패션스쿨인 FIT(Fashion Institute of Technology)의 한국 개교 축하행사를 성황리에 개최했다.한국뉴욕주립대 FIT는 미국과 이탈리아에 이어 세계에서 세 번째로 개교한 것으로, 한국뿐만 아니라 주변 아시아 국가 학생들에게도 FIT를 가까이 만날 기회를 제공하게 됐다는 의미가 있다.이날 행사에는 뉴욕 FIT 총장 조이스 브라운(Dr. Joyce F. Brown)을 비롯해 스토니브룩대학교 총장 사무엘 스탠리(Samuel L. Stanley, Jr. MD), 오명(한국뉴욕주립대 명예총장) 전 부총리, 송영길(전 인천시장) 국회의원, 김진용 인천경제자유구역청장 등 여러 정부기관 및 패션업계 관계자 등 800여 명이 참석했다.뉴욕 FIT 총장 조이스 브라운은 "FIT 뉴욕 외에 세 번째 글로벌캠퍼스를 한국에 오픈하게 된 것이 너무 감격스럽다"며 "여러 아시아권 학생들이 한국뉴욕주립대 FIT에서 마음껏 공부할 수 있기를 바란다"고 했다. 한국뉴욕주립대 김춘호 총장은 "FIT 개교로 5개의 스토니브룩 학위 프로그램에서 추가로 2개의 FIT 학위를 제공할 수 있게 됐다"며 "우수한 패션 인재가 많이 배출될 것으로 기대한다"고 했다. 이날 식전 행사로는 한국뉴욕주립대 C동 앞에서 리본 커팅식이 있었다. 본 행사는 가수 소향과 아이돌 그룹 더 킹의 축하 공연, 루마니아 크라이오바 올테니아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음악회, 패션쇼 등으로 다채롭게 꾸며졌다.2012년 개교한 한국뉴욕주립대는 한국정부가 국가사업의 하나로 유치한 학부와 석박사를 모두 갖춘 국내 최초의 미국 대학교다.미국 뉴욕주립대 스토니브룩대학교를 시작으로 이번 가을학기에 패션 명문 스쿨 FIT를 개교했다. 두 학교 모두 홈캠퍼스인 스토니브룩과 FIT의 교수진 그대로 동일한 커리큘럼을 제공한다. 졸업 시 각각 홈캠퍼스인 스토니브룩과 FIT 학위를 받게 된다. /목동훈기자 mok@kyeongin.comFIT 개교 축하행사 리본 커팅 세리머니. /한국뉴욕주립대학교 제공

2017-10-22 목동훈

[실향민이야기 꿈엔들 잊힐리야·40]황해남도 해주시 출신 호성신 할아버지(中)

크고 작은 기지 광범위하게 분포… 옷·음식 등 경제 영향력주둔 초기부터 범죄·기지촌 조성 등 심각한 사회적 문제도미군 장교 운전수·배차담당·중장비 하역감독 등 20년 일해월미도·중부서 자리 해상수송부 등 옛 위치 하나 하나 짚어부대 규모·기능 등 체계적 정리 없어… 할아버지 증언 의미황해도 해주 출신 호성신(81) 할아버지는 21살 되던 해인 1957년부터 20년 가까이 인천에 있는 미군부대 여러 곳에서 근로자로 일했다. 월미도 미군부대 장교 운전수로 시작해 미 해군 해상수송부 장교 운전수, 부평미군부대 차량 배차담당, 인천항 미군 중장비 하역감독을 차례로 맡았다."참 팔자가 좋았던 시절이야. 미군부대에서 장교를 상대하니까 혜택도 많고, 잘 보이려는 사람도 많고. 덕분에 보라색 양복 쫙 빼입고 신포동에서 오토바이 타고 다녔지."인천은 항만을 낀 데다 수도권이라서 해방 직후부터 곳곳에 미군부대가 들어선 '미군기지의 도시'였다. 군사장비와 시설을 운용하는 데 필수인 기름부터 미군 병사들이 먹는 빵까지 대부분의 미군 군수물자는 인천에서부터 전국의 미군기지로 퍼져나갔다. 미군 전용철도도 거미줄처럼 도시에 깔렸었다. 이렇다 보니 호성신 할아버지 같은 미군부대 근로자는 물론 인천 지역사회 전반에 걸쳐 이른바 '미군부대 경제'가 끼친 영향력이 지대했다. "옷, 음식, 약품까지 미군 PX물자가 어마어마하게 밖으로 흘러나왔고, 미군부대 출입증이 비싸게 거래됐어. 미군 기름창고에서 기름 빼돌리는 사람도 많고, 기지촌에 양색시도 많았고…. 솔직히 미군 때문에 먹고 산 사람이 인천에 많아."반면 미군의 한반도 주둔 초기부터 발생한 미군 범죄나 기지촌 조성 등은 심각한 사회적 문제로 불거지기도 했다. 한국전쟁 발발 이후 인천항 부근과 월미도부터 남구 숭의동, 용현동, 학익동, 문학산 일대까지 크고 작은 미군부대가 광범위하게 분포했다. 부평지역은 주한미군 군수지원사령부인 '애스컴(ASCOM·Army Support Command)'을 비롯한 미군부대가 대거 몰려있어 '애스컴 시티'라 불리며 도시 자체가 군사기지나 마찬가지였다. 현재 인천에는 부평 '캠프마켓(Camp Market)'과 강화도에 극히 소규모 부대만 남았을 뿐이고, 그 미군부대 터는 공원이나 아파트단지 등으로 바뀌었다.미군의 한반도 상륙 출발점은 1871년 강화도 일대에서 벌어진 조선군과 미군의 첫 교전인 신미양요(辛未洋擾)다. 이어 미군은 해방 직후인 1945년 9월 8일 인천항을 통해 두 번째로 한반도에 상륙했다. 당시 인천항에 몰린 환영 인파에 일본 경찰들이 치안 유지를 내세워 총격을 가해 2명이 숨졌다. 서울신문사가 1979년 펴낸 '주한미군 30년(1945~1978)'에서는 당시 사건을 이렇게 설명했다. '패전국 일본의 경찰이 승전국인 미군의 안전을 위한다는 이유로 승전국도 패전국도 아닌 한국인에게 발포한 불법 총격이었다. 해방을 맞고서도 일본 경찰에게 총격을 당한 인천시민의 분노는 대단한 것이었다. 하지만 맞서 싸울 총도, 정부도 없던 이들은 이틀 후 두 사람의 사망자를 시민장(市民葬)으로 치르는 것으로 무력함을 달랠 수밖에 없었다.' 해방 후 주한미군 규모는 1948년 5월 기준으로 약 3만명에 달했다. 인천항 주변과 일본군 군수기지인 부평 조병창도 미군이 접수했다. 다음은 소설가 이원규가 해방 직전부터 한국전쟁까지의 인천을 다룬 장편소설 '황해'(1992)에서 묘사한 해방 후 인천항 주변 풍경이다. '인천항은 온통 미군 함정들로 가득차 있었다. 반도 중부의 보급항 구실을 하기 때문인지 사람들이 아구리배라고 부르는 수송선들이 큰 입을 벌려 물자와 병력을 내려놓고, 외항에는 구축함과 순시선들이 떠 있었다. (중략) 남루한 옷을 걸친 아이들은 미군들에게 매달리며 어떻게들 배웠는지, 헤이 지아이 넘버원 기브미 추잉껌, 기브미 쪼코레트, 하며 따라붙었다.'1949년 6월 인천항을 통해 한반도에서 철수한 미군은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터지자, 그해 9월 15일 연합군을 이끌고 인천에 세 번째로 상륙했다.연합군의 상륙지점 중 하나인 월미도는 인천상륙작전 이후부터 미군이 '징발'해 미군부대를 구축, 미군이 떠나간 1971년까지 20년간 민간인 출입이 통제됐다. 한국전쟁 이전부터 월미도에 살던 주민들은 졸지에 실향민이 되기도 했다. 호성신 할아버지는 1957년부터 2년 정도 월미도 미군부대에 근무했다. 월미도 미군부대 땅은 인천시가 국방부로부터 사들여 2007년 월미공원을 조성했다.지난 추석 명절 직전인 9월 29일 호성신 할아버지와 월미공원을 찾았다. 할아버지는 옛 기억을 곱씹으며 옛 미군부대 시설이 있던 자리를 하나하나 짚어냈다. 월미공원 정문이 바로 미군부대 정문이었다고 한다. 현 미추홀 전통문화음식연구원 건물 자리는 장교 숙소였고, 주요 시설은 전통공원이 조성된 자리에 몰려있었다고 할아버지는 기억했다. 공원 내 동물원이 할아버지가 장교 차량 운전수로 근무하며 주로 머물던 수송대(모터풀·Motor pool) 터라고 했다. 각종 기록을 보면, 월미도 수송대의 부대명은 미 제202수송대대다. 할아버지가 몰던 차는 쓰리쿼터(3/4t) 트럭 같은 군용차가 아니라 포드(Ford) 승용차였다. "라이브러리(library·도서관), 피엑스(post exchange·군부대 매점), 짐나시움(gymnasium·체육관)도 갖췄고 없는 게 없었어. 부대 내 한국인 근로자들은 100명쯤 됐던 것 같아."월미도 미군부대에는 미군 병사의 각종 법무를 처리해주는 법무사무소(Legal office)도 있었다고 한다. 호성신 할아버지는 "미군 병사와 한국 여성이 리걸 오피스에서 법적으로 혼인신고를 하는 경우도 있었다"며 "이현호라는 한국사람이 리걸 오피스 사무원으로 일해 영어로 전화받으면서 타이프도 쳐서 유명했는데, 미국으로 이민갔다"고 회상했다. 소설가 오정희는 1979년 발표한 단편 '중국인 거리'에서 어린 아이의 시선으로 월미도 미군부대 인근 인천차이나타운을 그렸다. 소설 속 미군 병사는 호기심으로 미군부대를 훔쳐보던 동네 꼬마들을 향해 칼을 던지며 놀려댔다. 소설 속 아이들이 '양갈보'라고 칭하는 한국인 여성들은 일본인들이 살던 그 가옥에 거처하면서 미군 병사를 상대했다. 소설 '중국인 거리'처럼 미군 병사가 여성을 살해한 사건도 실제로 다수 있었다.호성신 할아버지는 현 인천중부경찰서 자리에 사무실을 둔 미 해군 해상수송부(MSTS·Military Sea Transportation Service)로 자리를 옮겨 10여 년 동안 미 해군 부대장의 차량 운전수로 일했다. 미 해군 해상수송부는 부대장을 포함해 8명밖에 되지 않았다고 한다. 인천항에 미 군함이나 군용수송선이 들어오면 행정적으로 관리하는 역할을 했다는 게 할아버지 설명이다. 미 해군 해상수송부 바로 옆에는 미 헌병대가 있었다고 한다. 미군 범죄수사대(CID)도 인근에 있었다. 근처 '한국 기독교 100주년 기념탑' 맞은편 선구점 거리에는 'US호'라는 간판을 단 미군만 출입할 수 있는 스낵바도 영업했다고도 했다. 중구 수인사거리에 있는 삼익아파트 자리에는 제법 규모가 큰 미군 PX창고가 있었는데, 여기서 '미제 군수품'이 민간으로 많이 빠져나왔다고 한다. '주한미군 30년(1945~1978)'을 보면, 1950년대 말 전국에 120곳이 넘는 미군 PX에서 취급한 물품의 60%는 시중으로 흘러나갔다고 추정했다. 호성신 할아버지는 "나도 해군 중령 자동차 시트 밑에 물건을 숨겨다가 밖으로 뺐다"며 "화수동에 집을 지을 때는 흑인 병사가 각종 건축자재를 갖다 주기도 했다"고 말했다. 남구 용현동과 학익동에는 미군 유류저장소(POL)와 이를 관리하던 미군부대가 있었는데, 지금은 대규모 아파트단지가 들어서 있다. 문학산 정상은 1959년부터 미군이 차지하다 1979년 한국군 공군이 인수했고, 2015년에야 개방됐다. 분단과 인천 미군부대를 소재로 여러 작품을 쓴 인천 출신 이원규(70) 작가는 "부평미군부대 폐품처리장에서 나온 맥주 깡통을 펴서 집 지붕으로 만든 사람도 있고, 양공주도 100명 넘게 봤다. 미군부대에서 경비로 일한 외가 친척이 준 미군 워커는 고등학교 내내 신고 다녔다"며 "미군부대는 인천사람들에게 삶의 일부였다"고 유년시절을 회상했다. 부평 애스컴으로 자리를 옮긴 호성신 할아버지는 운전수로 일하다가 차량 배차담당을 맡았다. 할아버지는 "애스컴 앞은 전부 색시촌과 맥주홀로 쫙 깔려있었다"며 "흑인은 흑인끼리 백인은 백인끼리 따로 놀았다"고 했다. '주한미군 30년(1945~1978)'에서도 신촌이라 불린 부평미군부대 앞에 대해 '서부영화에 나오는 미국 개척도시보다 더욱 미국적이었고, 밤의 여인들의 숫자는 한때 2천명을 훨씬 상회하기도 했다'고 나온다. 호성신 할아버지는 애스컴에서 인천항 미군 중장비 하역감독으로 승진했다. 해방 이후(1949년 미군 철수~한국전쟁 발발 사이는 제외) 인천항은 미군항만사령부(1958년 애스컴 편입)가 '징발'해 주둔한 미군용부두와 일반부두로 나뉘어 운영됐다. 미군용부두 내에는 미군 공병부대도 있었다고 할아버지는 기억한다. 미군이 미군용부두를 '징발 해제'해 운영권이 한국 정부로 넘어온 때는 1971년 6월이다. 인천에 미군부대가 정확히 어느 정도 규모로 어디에 위치해 있었고, 그 기능은 무엇이었는지는 아직까지도 체계적으로 정리되어 있지 않다. 이제는 미군부대를 기억하는 이들도 흔치 않다. 호성신 할아버지가 단편적이나마 되살려낸 인천 미군부대에서의 경험은 그래서 더욱 귀하게 다가온다.글/박경호기자 pkhh@kyeongin.com 사진/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황해도 해주 출신 호성신 할아버지가 1950년대 말 근무했던 월미도 미군부대 내 장교 숙소가 있던 자리를 가리키며 당시를 회상하고 있다.인천항과 월미도 일대에 있었던 미군부대를 포함한 주요 시설을 표기한 지도(작성 연도 미상). 월미도에 검은 사각형으로 표기된 미군부대 건물 배치 현황은 호성신 할아버지 기억과 상당히 일치한다. 할아버지가 장교 운전수로 근무했던 미 해군 해상수송대(MSTS)를 비롯해 미 헌병대, 공병부대도 지도에 표시돼 있다. /부평역사박물관 제공미군부대에 근무하던 시절 받은 문서를 설명하고 있는 호성신 할아버지.

2017-10-18 박경호

[실향민이야기 꿈엔들 잊힐리야·39]황해남도 해주시 출신 호성신 할아버지(上)

목수였던 부친, 넉넉한 형편 불구부녀자 희롱 등 심해져 월남 결심개성구호소 거쳐 인천으로 '이주'전쟁 터져 목포에 잠시 머물기도고교땐 짝사랑 따라 서울로 통학졸업 후 미군부대 운전기사 취직영어공부 덕에 정식 군무원 '승진'영진공사로 옮겨 바레인서도 일해대한항공 '인연' 고속버스 기사로이후 30년째 고령에도 택시 몰아황해남도 해주에 살던 호성신(81) 할아버지는 1947년 인천 동구 화수동으로 내려왔다. 한국전쟁 때 잠시 전남 목포로 피란을 떠난 것을 제외하곤 고향을 떠나온 70년 세월을 한동네에 살고 있다. 할아버지는 30년 경력의 현직 개인택시 운전사이다.인천에 80대 이상 고령의 택시운전사는 호성신 할아버지를 포함해 14명뿐이다. 할아버지의 운전 내력을 보자니 첫 근무지였던 인천 미군부대 역사까지 살필 수 있다. 우리나라 중동 진출 현장인 바레인에서도 일했다.호성신 할아버지가 태어난 해주시 선산동 28은 황해도 도청 인근의 도심지였다. 할아버지의 부친은 일제강점기 집 짓는 목수였는데, 솜씨가 뛰어나 일이 많이 들어왔다고 한다. 덕분에 집안 형편도 넉넉했다고 할아버지는 기억한다. 고향에서는 아버지와 어머니, 누나 이렇게 4식구가 함께 살았다.하지만 해방 후 소련군이 38도선 이북에 주둔하고 정세가 급변하자, 단란했던 할아버지네에도 위기가 닥쳤다. 할아버지는 소련군 병사가 어머니에게 몹쓸 짓을 하려고 했던 기억을 힘겹게 꺼냈다. 초등학생이던 10살 때 일이다."1946년 여름이 지나서부터 소련군이 해주에 엄청나게 들어왔나 봐. 여기저기 헤집고 다니면서 물건도 빼앗고 부녀자들 희롱하고 횡포가 심했어. 소련군 병사가 우리 집에 막 들어와 어머니를 해코지하려고 해서 부엌으로 숨고 그랬는데…. 그 일이 있고 아버지가 이남으로 내려가자고 결심했지. 아버지가 (해방 전에) 일본사람들이랑 같이 근무하며 어울린 것도 월남한 이유 중 하나야."호성신 할아버지 가족은 1947년 봄에 새벽을 틈타 남쪽으로 내려왔다. 아버지는 거울 속에 돈을 숨겼고, 어머니도 배에 전대를 차서 담을 수 있는 만큼 돈이 될 만한 것을 담았다. 그게 할아버지 식구가 가지고 내려온 전 재산이다. 군인이던 친척이 식구들을 체포해 가는 것처럼 꾸며 해주 남쪽 바닷가인 용당포로 데려가 줬다고 한다. 친척이 미리 준비해준 조그만 목선을 얻어탔다. 바지락을 싣는 배였다. 배 밑에 어머니와 남매가 숨었고, 아버지는 머리에 수건을 동여매고 뱃사공과 함께 노를 저어 갔다. 얼마쯤 시간이 지났는지 정확히 기억나진 않지만, 질퍽질퍽한 갯벌에 배가 닿은 뒤 남한 경찰 2명에게 발견됐다. 남한 경찰은 할아버지 식구를 개성에 있는 월남인 수용소인 개성구호소로 보냈다. 1946년 중반 북쪽이 토지개혁 같은 체제정비를 본격화하면서 38도선을 넘어 남한으로 들어온 이북 출신 주민이 급속도로 늘어났다. 미군정은 개성, 의정부, 동두천 등에 임시 이재민구호소를 설치해 북쪽 주민들을 며칠간 머물게 하고 전국 각지로 이주시켰다. 1947년 4월 말 기준으로 월남 인구가 45만명을 돌파했다고 동아일보는 1947년 5월 31일자에서 보도했다. 당시 인천에도 5만 명 넘는 북한 출신 주민이 정착했다. 같은 시기 수도 서울로 유입된 북한 주민은 약 11만2천명이었다. 해방 직후 인천에서 태동한 대중일보는 인천에 실향민이 몰리자 개성으로 특파원을 보내 구호소를 취재하기도 했다. 대중일보 1947년 11월 18일자는 실향민들이 대개 옹진에서 배를 타고 청단으로 건너와 기차를 타고 토성을 거쳐 개성에 이른다고 실향민 이동 경로를 파악해 보도했다. 개성구호소는 미군 천막을 치고 내부에는 접이식 침대가 2열로 놓여 있었다. 천막 수는 총 82개인데, 한 천막에 35~40명을 수용했다. 구제품은 거의 '운라(UNRRA·연합국구제부흥기관) 구제품'이었다고 한다. 당시 실향민들은 대부분 침구와 옷가지를 준비해 내려왔고, 현금도 1천원 정도는 가지고 있었다고 대중일보는 전했다.호성신 할아버지네는 개성구호소에 4일 정도 머물다가 인천 동구 화수동으로 이주해 판잣집에 살았다. 할아버지의 아버지가 다시 목수 일을 하면서 인천에 정착하기 시작할 때 한국전쟁이 터졌다. 호성신 할아버지는 송림초등학교 6학년에 재학 중이었다."6·25가 일어나자마자 월미도로 건너가는 길목에 지금 있는 선창산업 공장 쪽에서 화물선 타고 많이들 피란길에 올랐어. 이북 출신이 많았을 거야. 원래는 부산에 가기로 했는데 파도가 너무 심해서 목포에서 멈췄지. 목포역 앞에 있던 커다란 창고가 피란민 수용소였는데, 5개월 정도 지내다가 아버지가 화수동으로 돌아가자고 해서 다시 인천으로 올라왔어. 아버지가 목수 일감 찾으면서 빵 장사도 하고, 담배도 말아서 팔고 하면서 우리 남매를 키웠어."전쟁통에 인천으로 돌아온 호성신 할아버지는 1947년 허섭(許燮·1925~2010)이 설립한 성광중학교를 다녔다. 남구 도화동 선인중학교의 전신인데, 할아버지가 학생일 때는 동구 만석동 현 삼화제분 인천공장 자리에 있었다. 허섭은 성광중학교로 출발해 1953년 재단법인 성광학원을 설립, 인천에서 성광고등학교, 성광고아원도 운영했다. 그러다 갑자기 1950년대 중후반 군 장성인 백인엽(白仁燁·1923~2013)에게 성광학원을 넘겼다. 이때 출범한 게 한때 국내 최대 사학으로 이름을 떨친 선인학원이다. 이 선인학원은 나중에 사학비리가 문제가 돼 진통 끝에 사회환원 조치됐다. 호성신 할아버지는 성광학원 설립자 허섭을 "엄청난 부자였다"고 기억했다. 그런데 성광학원을 백인엽이 인수할 당시에는 사정이 달랐던 듯하다. 사회운동가인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장이 2009년 쓴 자서전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에는 1956년 여름 허섭을 만난 이야기가 나온다. 백기완 소장은 '그즈음 그분은 준심(정권)을 쥐고 있던 이승만의 자유당이 못살게 굴어 손수 일군 인천 성광고아원과 성광상업선배울(고등학교)을 빼앗기고선 서울 마포 구석에서 남의 집을 빌려 살고 있는 터라'고 언급하며 어려운 처지에서도 경제적 보탬을 준 허섭에게 감사를 표했다. 호성신 할아버지는 중학교를 마치고 서울 성북동 성북고등학교(현 홍익대 사대부고)에 진학했다. 짝사랑했던 동네 여학생이 용산에 있는 신광여자고등학교로 간다기에 함께 경인선을 타고 통학하기 위해서였다. 그 여학생과는 단지 짝사랑으로 끝나고 말았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에는 곧바로 운전면허를 땄다. '취직할 때 써먹을 데가 있겠지'라는 생각이었다고 한다. 할아버지는 1957년 초반 인천시청(현 중구청) 쪽 시내에서 월미도 미군부대 근로자를 모집한다는 팻말을 봤다. 돗자리가 깔린 바닥에 수십 명이 앉아있었다. 호성신 할아버지도 냉큼 돗자리에 앉았는데, 운전면허가 있는 사람은 할아버지뿐이었다. 그렇게 월미도 미군부대 소속 장교 차량 운전기사로 뽑혔다. 당시 미군부대 한국인 근로자는 부대에서 필요할 때마다 수시로 고용했다. 부산 미군기지에서 1954년부터 20년 동안 일한 박원찬 씨가 1978년 쓴 수기 '미군과의 20년'을 보면, 부산에서도 매일 미군부대 정문 앞에 100명에 가까운 사람이 몰려들어 오전 10시마다 나오는 인사담당 직원을 기다렸다고 한다. 미군부대 장교와 한국인 인사담당 직원이 정문 밖으로 나오면 구직자들이 서로 앞줄에 서기 위해 밀고 당기고 치고 하면서 소란도 벌어졌다.호성신 할아버지는 월미도 미군부대에서 장교 운전기사로 2년 정도 일한 뒤 인천항에 파견된 미 해군 군사고문실로 일터를 옮겼다. 지금의 인천중부경찰서 자리에 사무실을 두고 미 해군 대령 1명을 포함해 부대원 8명이 근무했다고 한다. 할아버지는 미 해군 군사고문실에서 10년 동안 미 해군 대령의 차량을 몰았다. 이후 주한미군 군수지원사령부인 부평 '애스컴(ASCOM·Army Support Command)'에서 차량 배차를 담당하다가, 영어시험을 치르고 정식 군무원(Government Service)인 인천항 미군 중장비 하역감독으로 승진했다. "월미도 미군부대 모터풀(Motor pool·수송대) 드라이버에서 시작해 군용차 디스패처(Dispatcher·운행관리원), 미군 중장비 하역감독으로 승진하기까지 영어공부를 무진장 열심히 했어. 문법책 달달 외운 끝에 승진시험에 딱 붙었지. 말뿐 아니라 글까지 영어로 쓸 줄 아는 한국인 미군부대 근로자가 흔치 않을걸."인천항에서 주한미군 군수물자 하역작업은 영진공사와 국제실업이 하청을 맡았다. 호성신 할아버지는 "인천항 중장비 하역작업 때 미군 소속은 나 하나뿐이라 타임 스케줄도 내가 다 짰다"며 "하청업체들이 내게 잘 보이려고 신포동 기생집을 데려가려고 애도 많이 썼지만, 나는 술 담배를 전혀 하지 않았다"고 했다. 이때의 인연으로 할아버지는 애스컴이 대폭 축소된 이후인 1970년대 말 영진공사에 입사해 중동 바레인으로 떠났다. 우리나라에 '중동붐'이 한창일 때인데, 바레인 항만에서도 중장비 배차과장으로 일했다. 동아일보 1977년 9월 19일자는 인천을 기반으로 둔 영진공사가 물류산업 분야 최초로 바레인과 항만·공항 하역계약을 독점 체결해 하역요원 800명을 현지로 파송했다고 보도했다. 앞서 대한항공은 1976년 중동국가 가운데 처음으로 서울~바레인 간 정기노선을 취항하기도 했다. 우리나라 중동 진출 최전방에 있던 호성신 할아버지는 바레인 현지에서 대한항공으로 이직해 항공기 기내식 총괄과장을 지내기도 했다. 그러나 아버지의 부음을 듣고 1년 6개월 만에 귀국해야 했다. 귀국 후 대한항공 임원 소개로 한진고속 소속 고속버스 기사가 됐다. 1987년까지 부산, 대구, 포항, 마산 등지를 사고 없이 달려 내무부장관 표창을 받았다. 내무부장관 또는 교통부장관 표창이 있으면 개인택시 면허를 발급받을 수 있어 할아버지도 혜택을 봤다. 호성신 할아버지가 개인택시 운전대를 잡은 지 올해로 꼭 30년째다. 올 5월 국가로부터 25년 무사고 표창을 받은 할아버지는 "착오가 있어 5년 경력을 인정받지 못해서 그렇지 실제론 30년6개월 경력의 무사고 택시운전사"라고 했다. 2014년 인천아시안게임 때는 수송요원으로 자원봉사를 하면서 주로 외국인 감독을 자신의 택시에 태우고 경기장 이곳저곳을 누볐다. 할아버지의 영어 실력에 외국인 감독들이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을 정도였다고 한다. 글/박경호기자 pkhh@kyeongin.com 사진/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81세 고령에도 불구하고 현직 택시운전사로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는 황해남도 해주 출신 호성신 할아버지가 피란 후 70년 세월을 회상하고 있다.대중일보 개성구호소 특파원 취재 보도-북한 실향민이 몰린 개성구호소를 특파원이 현장취재한 대중일보 1947년 11월 18일자 기사. 한국전쟁 전 개성은 남한이었다.1969년 촬영된 인천내항 미군 전용부두 잔교. 호성신 할아버지는 주한미군 군수지원사령부인 부평 '애스컴'에서 미국 중장비 하역감독을 맡아 인천내항에서 일했다. 출처/인천항사(2008·인천항만공사)

2017-10-11 박경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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