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인천)

[zoom in 송도]가상현실 테마파크 '몬스터 VR'… 40일만에 유료입장객 3만 '돌파'

지난달 4일 인천 송도 트리플스트리트에 개장한 도심형 가상현실 체험 테마파크 '몬스터 VR'이 한 달여 만에 유료 입장객 3만 명을 돌파했다. '몬스터 VR'을 운영하는 (주)GPM(대표·박성준)은 "지난 14일을 기점으로 개장 40일 만에 3만 명의 유료 입장객을 돌파했다"고 밝혔다.트리플스트리트 D동에 들어선 '몬스터 VR'은 문화체육관광부, 한국콘텐츠진흥원, 인천시 등 정부기관 및 지자체의 전폭적인 지원 속에서 문을 열었다. 이 같은 관심은 4차 산업혁명의 핵심인 VR산업의 대중화를 통해 청년들의 일자리를 창출하고, 미래 먹거리를 만들어 나갈 수 있다는 기대감 때문이었다.GPM이 지난 40일간 입장객을 분석한 결과, 가족 단위가 많았다고 한다. '몬스터 VR'이 새로운 개념의 가족 놀이 공간으로 성장할 가능성을 확인한 셈이다. 평일 입장객은 400명 안팎인데, 주말에는 1천200~1천500명에 달했다. 전체 입장객 중에서 성인이 65%, 어린이가 35%를 차지했다. 성인들은 주로 VR과 어드벤처 놀이 공간에 익숙한 20·30대의 입장객들이 주류를 이뤘다.정글존, 어드벤처존, 시네마존, 큐브존으로 나뉘어 있는 40여 종의 어트랙션 중에서 가장 인기를 끌었던 존은 큐브존이다. '몬스터 VR'은 GPM에서 만든 VR 서비스 플랫폼을 기반으로 운영된다. 정육각형 모양의 큐브 안에 들어가서 고글 모양의 헤드셋을 쓰고 다양한 게임을 즐길 수 있는 큐브존은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인기를 끌었다. 큐브존에서 구현할 수 있는 게임 중에는 좀비 게임과 고소공포 게임, 과일 자르기 게임, 전략 게임, 바닷속 체험 등이 인기를 끌었다. 정글존에서는 래프팅과 번지점프가 어린이 입장객들에게 인기가 높았으며, 시네마VR은 성인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어드벤처존에서는 롤러코스터 등이 젊은 층의 인기를 독차지했다. /목동훈기자 mok@kyeongin.comGPM이 개발한 플랫폼을 통해 많은 콘텐츠가 들어있는 몬스터 큐브에서 게임을 즐기고있다. 인천 송도에 있는 '몬스터 VR'이 지난 14일 개장 40일 만에 유료 입장객 3만 명을 돌파했다. /GPM 제공

2017-09-17 목동훈

[송도국제도시 브리핑]유타대 아시아캠퍼스, 고교 2곳과 '인재육성 MOU'

■유타대 아시아캠퍼스, 고교 2곳과 '인재육성 MOU'인천 송도에 위치한 유타대학교 아시아캠퍼스(대표·크리스 아일랜드)가 고등학교와 연이어 업무협약(MOU)을 체결하며 우수 고교 인재 육성에 본격적으로 나섰다. 유타대 아시아캠퍼스는 지난 7일 인천 중구에 있는 인천국제고등학교를 방문해 업무협약(MOU)을 체결했다. 이에 따라 유타대 아시아캠퍼스는 재학생들과 함께하는 영어 캠프, 대학생 멘토링 프로그램 등 인천국제고 학생들이 실제로 경험할 수 있는 진로 교육 프로그램을 제공한다. 교수들이 직접 진행하는 특강 등을 준비해 학생들의 관심 분야를 넓히고, 다양한 진로 체험을 위한 활동 기회도 제공할 예정이다.유타대 아시아캠퍼스는 지난 8일 서울공연예술고등학교에서 업무 협약(MOU)을 진행했다. 유타대 아시아캠퍼스는 이번 협약에 따라 영화영상 분야로 진로를 정한 학생들을 대상으로 다양한 전문 교육 기회를 지원하게 된다. 내달 10일에는 미국 선댄스영화제의 창립자이자 유타대 교수로 재직 중인 스털링 반 웨그넌(Sterling Van Wagenen) 교수 등이 서울공연예술고를 방문해 특별 워크숍을 진행할 예정이다.■'인천국제기계展', 27일부터 사흘간 송도컨벤시아서인천 유일의 기계산업 전시회 '2017 인천국제기계전(Incheon International Machinery Expo 2017)'이 오는 27일부터 29일까지 3일간 송도컨벤시아에서 진행된다. 인천관광공사, 경기인천기계공업협동조합, 전시전문기획사 이상네트웍스가 공동 주최하고 인천시 등이 후원하는 행사다. 인천은 남동·주안·부평 등 대규모 국가산업단지와 많은 기계 관련 기업들이 있지만, 기계 관련 전문전시회가 개최된 적은 없다. 이번 전시회는 국가산업단지 스마트화, 기계 관련 중소기업의 마케팅 및 판로 개척 지원 등 인천 기계산업 육성을 위해 기획됐다. 인천관광공사와 인천코트라지원단, 중소기업진흥공단, 인천지방중소벤처기업청은 공동으로 독일, 태국, 인도, 중국 등 약 7개국 30개 기업의 해외 바이어를 직접 초청해 27~28일 양일간 '일대일 매칭 수출상담회'를 진행한다. 자세한 사항은 사무국(02-3397-0075)으로 문의하면 된다. /목동훈기자 mok@kyeongin.com유타대학교 아시아캠퍼스는 지난 7일 인천국제고등학교와 업무협약을 체결, 진로 교육 등을 지원하기로 했다. /유타대 아시아캠퍼스 제공

2017-09-17 목동훈

[실향민이야기 꿈엔들 잊힐리야·36]함경북도 성진시 출신 김상국 할아버지(上)

인민군 소집앞둔 아들 떡 해주려던 모친온가족 집밖에 있을때 미군 포격에 숨져본인은 밭의 소 쫓으려 나왔다가 화 면해슬퍼할 겨를도 없이 국군부대 경비 맡아중국군 개입에 전세 역전 군인따라 후퇴北에서 온 사람들로 넘쳐났던 '흥남철수'민간인 신분이라 친구네 배 타고 부산行영도 피란민촌서 막노동하다 미군부대로김상국(87) 할아버지 고향은 함경북도 남단에 위치한 성진(城津)시다. 지금은 김책(金策)시라고 부른다. 김책(1903~1951)은 공산주의 운동가·정치가로 김일성을 북한 정권의 최고지도자로 만드는 데 기여한 인물이다. 김일성은 한국전쟁 때 전선사령관이었던 김책이 숨지자 그의 고향을 '김책'으로 개칭했다.한국전쟁 당시 김상국 할아버지는 20살이었다. 성진 시내에서 부모님과 여섯 남매가 함께 살았다."함경북도, 성진시, 성남동, 47번지, 3호. 바닷가 쪽이지." 할아버지는 기억력을 자랑이라도 하듯 고향 집 주소를 또박또박 한마디씩 끊어가며 말했다. 고향을 떠난 지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그의 기억은 생생했다. 어린아이가 아닌 청년 시절에 홀로 피란을 떠난 터라, 그만큼 고향과 가족에 대한 그리움이 클 수밖에 없다."친할아버지가 우리 집에서 한 20리 떨어진 촌에 사셨어. 전쟁이 나서 온 가족이 할아버지 집으로 피란을 갔는데, 미군이 폭격을 할 때 집에 포탄이 떨어진 거야. 그때 어머니가 돌아가셨어."김상국 할아버지가 인민군 소집장을 받은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다. 어머니는 아들을 군에 보내기 전에 떡이라도 해주겠다며 부엌에 계셨다. 형과 누나, 동생들은 밖에서 놀고 있었다. 김상국 할아버지의 조부와 부친은 밭에서 일을 하고 계셨다."방안에서 밖을 내다보니까 소가 밭의 곡식을 먹는 것이 보여. 그래서 소를 쫓아내려고 나가봤지. 소를 밭에서 떼어놓고 방으로 돌아오는데 집에 포탄이 떨어진 거야."미군의 폭격으로 입대를 앞둔 아들에게 떡이라도 먹이고 싶었던 어머니는 그 자리에서 숨지고 말았다. 집의 형태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였다. 가족의 마음도 무너져내렸다. 아버지와 외삼촌이 잔해 속에서 어머니의 시신을 겨우 찾아냈다. 전쟁 중이라서 아버지와 친척 몇 명이 간단하게 장례를 치른 뒤 시신을 밭에 묻었다. 그렇게 허무하게 어머니를 보내야 했다."어머니 돌아가셨을 때 울지도 못했어. 너무 갑작스러운 일이라 그런지 눈물이 안 나오더라고. 장례? 올 사람도 없고. 돌아가신 그 이튿날 바로 밭에 묻었어…. 고생만 하시다 돌아가신 거지. 그래서 나는 죄 많은 놈이야."소 덕분에 살아남게 된 김상국 할아버지는 어머니의 죽음을 슬퍼할 겨를도 없이, 성진을 점령한 육군 수도사단에서 경비를 서게 됐다. "국군이 성진까지 들어온 거야. 그래서 인민군 소집은 면했지. 우리 매형이 치안대에서 뭐를 맡았는데, 수도사단 부대 앞에서 경비를 서라고 하더라고."1950년 9월15일 인천상륙작전에 성공한 유엔군은 38선 북쪽으로 진격했다. 군사 전문가 남도현이 쓴 '끝나지 않은 전쟁 6·25'에 따르면 유엔군은 10월1일 국군 수도사단과 제3사단을 선두로 세워 38선을 돌파했다. 유엔군 지휘부는 전력을 둘로 나눠 북진했다. 서부전선은 낙동강에서 북진해 온 미 제8군이 제1군단과 제9군단, 국군 제2군단을 지휘하도록 했다. 함경도 동부전선은 미 제10군단과 국군 제1군단에 지휘를 맡겼다. 국군 수도사단은 10월17일 함흥·흥남을 탈환한 데 이어 28일 성진을 확보했다. 이로 미루어 볼 때 김상국 할아버지의 어머니는 10월 중하순 돌아가신 것으로 보인다."총 쏘는 방법도 배우지 못했어. 그냥 총을 메고 군부대 정문 앞에 서 있는 거야. 우리는 잘 모르니까 부대 안에서 군인들이 '들여보내'라고 하면 들여보내고 했지."경비 서는 일은 오래가지 못했다. 중국군 개입으로 전세가 급변했다. 김학준은 저서 '한국전쟁'에서 "10월25일 한국군과 중국군 사이의 첫 교전은 상황을 완전히 바꾸었다"며 "맥아더 사령관은 11월5일 중국군의 참전을 보고하면서 '완전히 새로운 전쟁'이 시작됐음을 알렸다"고 했다.김상국 할아버지는 국군과 함께 LST(상륙함)를 타고 흥남부두로 왔다. 당시에는 흥남부두로 이동하는 이유를 몰랐다. 흥남부두에 도착해 군인과 피란민이 모이는 것을 본 후에야 '후퇴'라는 것을 알았다. 그에게는 '피란'이었다. 경비를 섰을 뿐이지 군인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흥남부두는 군인과 피란민들로 인산인해를 이뤘다. 김상국 할아버지는 "북쪽에서 내려온 사람들로 바글바글했다"고 했다.당시 흥남부두 광경은 프랑스 종군기자 4명의 기록을 묶은 '한국전쟁통신'에 잘 나온다. '해 질 무렵에 나는 황폐한 흥남을 보러 갔다. 눈발이 희끗희끗 내리고 있었고, 군대가 자신들을 포기할까 두려워하는 주민들의 절망감은 이 도시 못지않게 처량했다.' 'LST 한 정이 부두에 나타나 육지와 배를 오가며 군중을 실어 나르기 시작했다. 보초들의 인솔을 받으며 폭력을 쓰지 않고는 도저히 막기 어려울 정도로 군중이 밀려들기 시작하면서 도선마다 만원이었다. 과적한 도선은 곧장 바닷속으로 가라앉기도 했다.'흥남철수 때 약 1만4천명의 피란민을 구출한 미국 상선 메러디스 빅토리(Meredith Victory)호. 저술가이자 한국전쟁 종군기자였던 미국인 빌 길버트는 이 배 선원의 기억과 당시 자료를 토대로 '기적의 배'를 출간했다.'흥남으로 가는 피란민들은 폭격과 기총사격을 당했다. 비행기들이 미국기였는지 소련기였는지 구분할 수 없었다. 사람들은 저마다 기총사격에 희생당하지 않으려고 이리저리 뛰었기 때문에 부모들은 거의 자식들과 헤어졌다.' 메러디스 빅토리 호 상급선원 로버트 러니는 이 책에서 "피란민들은 마치 화물처럼 실렸다. 나는 그들의 얼굴에서 공포를 봤다. 우리가 그들에게 '빨리, 빨리'라고 외쳤을 때 그들은 순수히 따랐다. 우리가 아는 몇 안 되는 한국말 중 하나였다"고 회상했다. 한국전쟁에 동원된 메러디스 빅토리 호는 인천상륙작전 때 미 육군 제7사단 제32전투연대를 인천에 상륙시켰으며, 10만t의 제트 연료를 일본 도쿄에서 흥남 부근 공항으로 운반하러 왔다가 흥남철수작전에 참여하게 됐다.김상국 할아버지는 흥남부두에서 미 군함이나 상선이 아닌 친구(임영록) 아버지의 배 '성진호'를 타고 부산으로 왔다."임영록이랑 경비를 함께 섰었어. 이 친구 아버지가 어선 선장인데, 우연히 흥남부두에서 만난 거야. 친구 아버지 배를 타고 결국 부산까지 간 거지."군인 10만5천명, 피란민 10만여명 등 약 20만명을 흥남에서 거제도로 옮긴 흥남철수작전은 12월24일 완료됐다. 김상국 할아버지가 40여 명과 함께 탄 '성진호'는 12월19일께 흥남부두를 떠났다."엔진이 달린 배라서 3~4일 정도 걸려서 부산 영도다리 밑에 내렸지. 영도극장(1946년 건립된 항구극장의 착각으로 보임. 영도극장은 1958년에 생겼음) 바닥에 가마니를 깔고서 하룻밤을 잤는데, 사람들이 크리스마스 노래를 부르더라고." 해방 후 처음 듣는 크리스마스 캐럴이었다. 이북에 북한 정권이 들어서면서 크리스마스 캐럴을 듣거나 불러본 적이 없다고 한다.부산 영도에 도착해서야 혼자라는 것을 알았다. "진짜 처음에는 막막했어. 부산에 와서 혼자가 되니까 그제야 가족 생각이 나더라고. 그전에는 당장 내가 살아야 하니까 생각이 덜했지."김상국 할아버지는 부산 영도 피란민촌에 방 하나를 얻고 부두에서 드럼통 굴리는 일부터 시작했다. 미군의 군수물자를 나르는 노동으로 겨우 끼니를 이어간 것이다. 할아버지는 "드럼통 미는 사람은 대부분 피란민이었다"며 "피란민이 가장 힘든 드럼통을 옮기고, 부산 토박이들은 다른 것을 날랐다"고 했다.영도구청이 발간한 '보물섬 영도이야기 스토리텔링 100선'에 따르면 1·4후퇴 당시 주로 함경도 출신의 피란민들이 영도에 많이 정착했다. 이들은 미군 군사·원조물자 포장 자재인 '보루박스'(골판지)와 음료수 깡통을 펴서 하꼬방을 만들었다. 영도다리 아래에는 피란민들이 모여 사는 '교하촌'(橋下村)이 생기기도 했다. 작품 '흰소' '가족' 등으로 유명한 평안남도 평원군 출신의 화가 이중섭(1916~1956)도 1951년 12월부터 1953년 3월까지 영도 등 부산에서 피란생활을 했다.영도 출신 가수 현인(1919~2002)은 부산에 정착한 함경도 피란민들의 아픔을 노래했다. '굳세어라 금순아'다. 이 노래에는 '피눈물을 흘리면서 일사 이후 나 홀로 왔다' '금순아 보고 싶구나 고향꿈도 그리워진다. 영도다리 난간 위에 초생달만 외로이 떴다'라는 가사가 나온다. 전쟁통에 피란민들은 "헤어지면 부산 영도다리에서 만나자"고 약속했다. 1934년 준공된 영도다리(옛 부산대교, 현 영도대교)는 국내 최초 연륙교로 유명했다. 실제 이곳에서 이산가족을 찾은 사람도 많다. 하지만 고향에 두고 온 가족을 그리워하다 차디찬 바닷속으로 몸을 던져 스스로 목숨을 끊는 피란민도 적지 않았다.김상국 할아버지는 부두에서 막노동하다 미군 부대 식당에서 일자리를 얻었다. "부두에서 100원을 벌었다면, 우두머리에게 30원 떼어 주고 70원으로 밥값과 방값을 할 정도로 생활이 어려웠어. 그래서 아는 사람 소개로 미군 부대에 들어갔지." 할아버지는 "처음에는 할 줄 아는 것이 없어서 설거지와 심부름을 했다"며 "식당에 취직하니까 끼니 걱정은 없어져 그나마 다행이었다"고 했다.글/목동훈기자 mok@kyeongin.com 사진/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함경북도 성진시 출신 김상국 할아버지가 인천시 남구 함경북도도민회 사무실에서 한국전쟁 흥남철수 당시를 회상하고 있다.김상국 할아버지는 한국전쟁 때 흥남부두에서 어선을 타고 부산으로 피란을 왔다. 할아버지는 1950년 12월19일께 흥남부두를 떠난 것으로 기억한다. 김상국 할아버지는 "북쪽에서 내려온 사람들로 바글바글했다"고 회상했다. 사진은 흥남부두철수작전 당시 모습으로, 그야말로 인산인해다. /(사)흥남철수작전기념사업회 제공김상국 할아버지는 한국전쟁 때 흥남부두에서 어선을 타고 부산으로 피란을 왔다. 할아버지는 1950년 12월19일께 흥남부두를 떠난 것으로 기억한다. 김상국 할아버지는 "북쪽에서 내려온 사람들로 바글바글했다"고 회상했다. 사진은 흥남부두철수작전 당시 모습으로, 그야말로 인산인해다. /(사)흥남철수작전기념사업회 제공김상국 할아버지를 실은 배는 부산 영도다리 밑에 도착했다. 영도다리는 1934년 준공된 도개식(跳開式) 교량이다. 한국전쟁 때 피란민들이 "헤어지면 영도다리에서 만나자"고 약속했던, 피란민의 애환과 고향·가족에 대한 그리움이 서려 있는 곳이다. /부산 영도구 제공

2017-09-13 목동훈

[zoom in 송도]알고 보면 더 재밌는 송도국제마라톤대회

센트럴파크서 출발해 다시 돌아오는 코스트라이볼·G타워 지나 동북아무역센터로공원·해수로·건물들… 이국적 색채 물씬바닷가 끼고 들어선 연구시설·대학멀리 인천대교·바이오산업교 '장관'경사·굴곡없는 코스 신기록 기대감'2017 인천송도국제마라톤대회'가 오는 24일 오전 9시 송도국제도시에서 열린다. 인천송도국제마라톤대회는 송도국제도시 '빌딩 숲'을 달리며 기량을 마음껏 발휘하는 행사로 국내외 엘리트 선수, 전국 마라톤 동호회 회원, 일반 참가자 등이 함께하는 대회다. 엘리트와 마스터즈(풀, 하프, 10㎞, 5㎞) 각 코스는 기록 수립에 적합하게 설계됐다. 코스를 달리다 보면 송도국제도시의 발전한 모습을 볼 수 있다. 인천송도국제마라톤대회 코스 주변에 어떤 건축물과 시설이 있는지 소개한다. 송도국제도시를 알고 마라톤을 즐기자는 취지에서다. 인천시와 인천관광공사에서 만든 인천관광 안내 자료 '인천관광 100+!' 등을 참고했다.인천송도국제마라톤대회 출발점과 도착점은 송도 센트럴파크 부근이다. 오전 9시 출발이다. 참가자들은 옷을 갈아입거나 가벼운 운동으로 몸을 풀어야 하기 때문에 1시간 정도 일찍 행사장에 오는 것이 좋다. 센트럴파크는 송도의 허파와 같은 녹지 공간이다. 3.6㎞ 해수로를 따라 수상택시가 공원을 가로지르며, 공원 주변에는 산책로가 조성돼 있다. 마라톤대회가 끝난 뒤 센트럴파크에서 가족 또는 직장 동료들과 여유를 즐겨보는 것도 좋을 듯하다. 센트럴파크 주변에는 인천 개항과 근대화의 시작이 된 인천을 모티브로 한 '해돋이공원', 한국 전통식 정원 형태를 보여주는 '미추홀공원'도 있다.송도 센트럴파크 호텔 옆에서 출발해 뛰다 보면 오른쪽에 특이한 모양의 건축물이 보인다. '트라이볼'과 'G타워'다. 트라이볼은 도자기 모양의 독특한 외형으로, 아래가 좁고 위로 올라갈수록 넓어지는 구조다. 독특한 외형 때문에 CF와 화보 촬영지로 인기를 끌고 있다. G타워는 인천경제자유구역청과 GCF(녹색기후기금) 등이 입주해 있는 건물이다. 전망대에 올라가면 센트럴파크 등 송도국제업무지구와 우리나라에서 가장 긴 사장교 '인천대교'를 한눈에 볼 수 있다.G타워를 지나면 오른쪽에 갈대숲이 펼쳐진다. 10㎞ 코스 참가자들은 인천 펜타포트 록 페스티벌 행사장으로 유명한 '달빛공원'을 한 바퀴 돌고 나온다. 펜타포트 록 페스티벌을 한 번이라도 관람한 참가자라면 색다른 느낌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10㎞ 코스 참가자들은 달빛공원을 나와 풀·하프·5㎞ 코스에 합류해 동북아무역센터를 향해 뛰게 된다. 동북아무역센터는 지하 3층, 지상 68층, 높이 305m, 연면적 19만5천220㎡ 규모다. 2006년 8월 착공해 2014년 6월 완공된 송도의 핵심 랜드마크다. 대우인터내셔널, 포스코A&C, 호텔 등 많은 기업이 입주해 있다. 넓은 공원과 해수로를 배경으로 우뚝 솟은 모습이 이국적인 풍경을 연출한다.코스는 송도컨벤시아 인근 사거리에서 '투모로우시티'를 향하게 된다. 2008년 10월 개관한 송도컨벤시아는 매년 수십 건의 전시회와 수백 건의 컨벤션·이벤트를 개최하고 있다. 대형 행사를 유치하기 위해 2단계 건립공사가 진행되고 있다. 투모로우시티는 지하 2층, 지상 6층짜리 복합시설물이다. 2009년 7월 완공됐지만, 소송 때문에 2011년부터 운영이 중단됐다. 인천경제청은 투모로우시티 활성화 방안을 마련, '4차 산업혁명 관련 기술 홍보·체험장' '복합환승센터' '주민 문화·휴식 공간' 등으로 활용할 계획이다.투모로우시티 다음에 기다리는 시설은 '아트센터 인천'이다. 인공호수 옆에 건립된 '아트센터 인천'은 클래식 전용 콘서트홀을 갖추고 있다. 건립 공사는 완료됐으나, NSIC(송도국제도시개발유한회사) 주주사 간 갈등 문제로 개관이 지연되고 있다.코스가 송도국제업무지구를 빠져나오면 해안도로가 펼쳐진다. 해안도로 왼쪽에는 2015년 프레지던츠컵이 열린 잭 니클라우스 골프클럽, 인기 드라마 '별에서 온 그대' 촬영지였던 인천대 송도캠퍼스가 있다. 오른쪽은 바닷가다. 인천 신항과 송도 LNG기지, 날씨가 좋은 날에는 인천대교 일부를 조망할 수 있다.풀 코스는 바이오산업교(송도4교)를 통해 남동국가산업단지 안까지 들어간다. 안말사거리에서 송도국제도시로 되돌아오는 코스로, 다리를 건너야 하기 때문에 오르막과 내리막이 있다. 해안도로를 따라 송도에서 남동국가산업단지를 향해 달리면서 보면 바이오산업교가 마치 '흰색 탑'처럼 보인다.풀 코스 참가자들은 송도로 되돌아와 도착점을 향해 달리면서 연세대 캠퍼스, 인천글로벌캠퍼스, 삼성바이오로직스, 셀트리온 등 송도에 입주해 있는 교육기관·바이오기업을 만나게 된다.인천글로벌캠퍼스 조성사업은 세계 유수의 글로벌 명문대학을 유치해, 인천을 '동북아 교육 허브'로 만드는 것이다. 한국뉴욕주립대, 한국조지메이슨대, 유타 아시아 캠퍼스, 벨기에 겐트대 등이 입주해 있다. 송도에는 셀트리온, 삼성바이오로직스, 삼성바이오에피스 등 바이오기업이 입주해 있다. 이들은 세계 시장 점유율을 높여나가면서 송도에 대한 투자를 확대하고 있다. 인천시와 인천경제청은 송도에 세계 최고의 글로벌 바이오클러스터를 조성·육성하겠다는 계획도 갖고 있다.인천송도국제마라톤대회 코스는 기록 경신에 적합하다고 한다. 인천송도마라톤조직위원회 관계자는 "도심 속 코스이기 때문에 땅이 평평하고 굴곡이 거의 없다"며 "안전하고, 기록 경신에 매우 유리하게 설계돼 있다"고 했다. /목동훈기자 mok@kyeongin.com

2017-09-10 목동훈

[실향민이야기 꿈엔들 잊힐리야·35]황해도 연백군 출신 김은중 할아버지(下)

전매국 염전 목수였던 아버지물 끌어올리던 수차도 만들어창고부터 제염도구까지 '뚝딱'생활력 좋은 모친은 약방 운영약사자격 없어 제조 아닌 판매1948년 연안중학교로 진학…당시 영어담당 박상준 교사 등학교 출신 유격대서 많이 활약이삭만 주워 먹고도 살았던 곳인심 넉넉한 고향 가끔 그리워황해도 연백 출신 김은중(83) 할아버지는 염전에서 제염 도구를 만드는 목수의 아들이었다. 지금도 고향 생각을 하면 넓은 소금밭과 평야, 항상 넉넉했던 마을의 인심이 떠오른다. 김은중 할아버지의 아버지는 조선총독부 전매국 소속 염전 목수로 일했다. 목수는 집안 대대로 내려 오던 가업이라고 했다. 전매국은 일제강점기 소금과 담배, 인삼류의 전매 사무를 담당한 곳이다. 일제는 생산성이 낮은 우리 전통방식인 자염(煮鹽) 대신 천일염(天日鹽)을 통해 소금 생산성을 높이려고 했다. 소금의 안정적인 확보를 위해 관영으로 염전을 운영했고 소금의 유통까지 담당했다.우리나라 천일염은 1907년 주안염전이 처음이었고 이후 전국으로 퍼져나갔다. 연백에는 1939년 염전 조성공사가 시작됐다. 할아버지가 건너간 1943년 연백염전의 규모는 1천250정보(町步)였다.염전에 무슨 목수냐고 물을 수 있겠지만, 당시 천일염전에서는 목수가 없어선 안 될 존재였다. 소금생산에 필요한 각종 시설과 도구를 만들려면 목수가 꼭 필요했다.할아버지는 부친이 수차를 만들던 모습을 어렴풋이나마 기억하고 있다. "사람들이 발로 밟아서 움직이는 수차를 아버지가 만들었어요. 손재주가 좋아서 뭐든 뚝딱뚝딱 잘 만드셨던 것으로 기억해요."수차는 염전에 물을 대는 기구다. 1차 증발 과정을 거친 함수가 저장된 '해주'에서 소금결정지로 물을 끌어올릴 때 쓴다. 물레방아와 같은 역할을 한다. 이 수차를 '무자위'라고 부르기도 했는데 물을 자아 올린다고 해 이름 붙였다고 한다. 박호석이 쓴 '한국의 농기구'를 보면 조선 중종 때 최세진이 지은 한자 학습서 '훈몽자회(訓蒙字會)'에서는 '물자새', 조선 헌종 때 정학유가 지은 '농가월령가'에서는 '자애'라고도 했다. 일반적인 형태의 무자위는 지름이 180㎝ 되는 나무 바퀴에 판자로 된 날개 19장을 바퀴 주위에 경사지게 배치했다. 무자위의 아랫부분을 물에 잠기게 설치하고 한 사람이 올라서서 비스듬히 세운 기둥을 잡고 날개를 밟아 내리면, 사람의 무게에 의해 바퀴가 돌고, 바퀴의 날개는 물을 쳐서 밀어 올린다. 올려진 물은 판자로 만든 물길(홈통)을 따라 흘러나온다. 무자위가 끌어올릴 수 있는 물은 1시간에 50~60t정도였다고 한다. 무자위가 있기 전에는 2명이 1조가 돼 두레박으로 물을 끌어 올렸는데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농사짓는 시인'으로 유명한 박형진은 그의 책 '농사짓는 시인 박형진의 연장 부리던 이야기'에서 두레박과 무자위를 함께 소개하면서 "소 같은 사람도 맞두레질을 한 날은 저녁 밥숟갈 놓자마자 통나무 쓰러지듯 쓰러져서 잘 수밖에 없다"고 설명한다.인천 출신 시인 유종인이 쓴 '염전, 소금이 일어나는 물거울'에도 수차 얘기가 나온다. 그는 수차를 '염전의 두레박'으로 요즘의 펌프 구실을 했다고 소개한다. 수차를 밟는 염부의 모습은 마치 다람쥐가 쳇바퀴 도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제아무리 두레박질보다 쉽다 한들 뙤약볕 아래 허벅지가 터질듯한 고통을 겪으며 수차를 돌리는 염부도 고생하기는 마찬가지다. 이 모습은 시인 김중석이 '수차'라는 시에서 형상화 했다."아무리 내딛고 올려 밟아도 제자리이지만//평생 그 걸음으로//수차를 밟는 염부//등을 뚫고 소금이 맺힐 때까지//염전은 자기 살을 태운다//아픈 시늉도 없이//수차 또한 삐걱이며 돌고 또 돌고 돌아//전라(全裸)인 바닷물이 여름 내내 땡볕에 피말려 소금을 만들어내는//아, 쓰라림의 환희//번쩍이는 건 발밑에 있다//놀라워라, 있다//죽을 때까지 그 걸음으로 내딛는 염부와//고통의 제자리거름 밑에서 아픈//시늉도 없이 돌고 도는 수차 밑에//땡볕이."무자위는 1980년대까지 사용됐다고 한다. 지금이야 전력이나 엔진을 사용한 양수기를 통해 물을 끌어올려 수차를 보기 어렵지만, 인천의 소래생태공원에 있는 염전에서는 여전히 전통식 수차를 볼 수 있다. 하지만 기계를 사용하면서 전력에 의한 감전사고가 종종 발생하거나 기름이 새기도 했다. 이리 되면 그 소금의 질은 보나 마나다. 인간이 손발을 써 정성을 다하는 데에는 기계가 대체할 수 없는 특별함이 담기게 마련이다.염전에서 목수가 만들어야 하는 제염 도구는 소금 결정지에서 천일염을 모으는 채염 장비가 있다. 이중 고무래는 목재로 된 넉가래에 타이어를 덧대 만든 도구다. 결정지 바닥에 밀착시켜 종으로 횡으로 움직이다 보면 소금이 봉우리처럼 우뚝 솟아오른다. 큰 것을 대파, 작은 것을 소파라고 했다.소금을 운반하는 도구를 만드는 것도 목수의 몫이었다. 장대 양옆에 바구니가 달린 운반도구 강고(목도)는 외발수레로 발전했고, 지금은 레일카를 이용해 손쉽게 운반한다고 한다. 소금창고를 만드는 큰 작업부터 손 도구를 만드는 자질구레한 일까지 염전에는 목수의 손이 닿지 않는 곳이 없었다. 김은중 할아버지의 부친은 전쟁 때는 인천 숭의동의 영국군 부대에서 목수로 일했고 인천에 정착한 뒤에도 신포시장에서 목수 일을 계속했다. 어머니는 생활력이 강하고 다재다능했다. 처음에는 소달구지에 이동식 방앗간을 달아 이집저집 끌고 다니며 쌀을 빻아주는 일을 하기도 했다. 그러다 지인과 함께 집 한 켠에서 약방을 운영했다. 정식 약사가 아니라서 약을 제조하지는 않았지만, '제중약방(製衆藥房)'이란 간판을 내걸고 약을 팔았다. 집이 오일장이 열리는 장터 근처여서 장사도 그럭저럭 잘됐다.2006년에 나온 '경기도약사회 50년사'를 보면 한약방이 중심이었던 우리나라 약업계에 서양 의약품이 들어오기 시작한 것은 개항기부터다. 일본인들은 서울, 인천, 부산 등 대도시에 약방을 세우고 약업계를 장악했다. 초기에는 비누, 치약으로 시작했지만 약품과 화학물질 등으로 사업을 확장했다.지금의 약사라고 할 수 있는 약제사가 처음 등장한 때는 일본인 유미스리(弓削龍藏)가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병원인 부산 제생의원에 근무하기 위해 들어온 1885년이다. 그는 일본 약제사면허증 2호를 받은 인물이기도 하다. 이후 1910년까지 50여 명의 일본인 약제사가 활동했다.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약국을 개설한 사람은 일본에서 약제사 자격증을 따 1910년 서울 종로3가에 인수당 약국을 세운 유세환이다. 조선약학교 1회 졸업생인 이정재가 1913년 종로 낙원동에 삼우당약국을 세웠고, 그 뒤로 약국이 줄줄이 늘었다.할아버지네 '제중약방'은 약사 자격이 없어 소분과 제조를 하지는 못하고 '매약(賣藥)'만을 했다. 일제 강점기부터 약종상 자격시험이 존재했지만, 할아버지는 어머니가 자격을 얻어 약방을 운영했는지는 기억하지 못한다."그때도 소화제는 활명수가 있었고, 머리 아플 때는 아스피린, 만병통치약은 다이아찡이었어요. 피란 때 어머니가 약을 많이 챙겨왔는데, 돈이 궁하면 약을 조금씩 팔아다가 살림에 보태서 썼어요."지금도 '부채표'로 유명한 동화제약의 활명수는 1897년 9월 서울에 세워진 동화약방이 만든 소화제다. '동의보감에도 나오지 않는다'는 궁중비방에 서양의학을 접목해 만든 약으로 '목숨을 살리는 물(活命水)'이라는 뜻이다. '한국기업 성장 100년사'를 보면 "계피 4그램, 정향 3그램, 감복숭아씨 6그램을 침출기에 넣고 적포도주 150그램을 가해 잘 혼합한 다음 3일간 침출시킨 뒤, 이 침출액에 다시 박하니 0.15그램, 장뇌 0.03그램을 넣고 백설탕 40그램과 증류수 70그램을 가한 후 잘 혼합해 용해한 후에 여과시켜 60밀리리터 작은 병에 담는다"고 활명수 제조법이 나온다. 활명수의 인기가 높아지자 당시 유명하다는 약방들이 유사 제품을 만들기도 했다. 동화약방은 모조품을 방지하기 위해 1910년 '부채표'를 국내 최초의 상표로 등록했다. 이밖에 해방 직후 미군이 상비약으로 가지고 들어온 '다이아찡'은 폐렴, 임질, 이질, 설사에 잘 드는 약이었는데 변변한 약이 없는 당시 만병통치약으로 통했다. 서양 약을 처음 접한 우리나라 사람들이 항생제에 대한 내성이 없던 때라 뭐든 잘 맞았기 때문이라고 한다.할아버지는 해성면 해남리에 있는 해남초등학교를 졸업하고 1948년 연안읍에 있는 연안중학교로 진학했다. 해주로 유학을 가고 싶었지만 연백 내에서 학교를 다니라는 부모님의 강권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고 한다.연안중학교는 해방 이후 부족한 교육시설을 늘리는 방침에 따라 1946년 5월 개교한 신설학교였다. 전쟁 후 학생들과 함께 반공유격대를 꾸려 북한에 대항했다가 미 8240부대에 편입된 강화 교동 울팩부대를 지휘한 박상준 여단장이 바로 연안중학교 영어교사 출신이다. 박상준 여단장은 휴전 이후 비정규군이었던 8240부대원들을 흡수한 육군 8250부대 제2연대장으로 정식 발령을 받았고 1955년 소령으로 예편했다."내가 전쟁 때 있었던 8240부대에 연안중학교 영어를 가르쳤던 박상준 선생님도 있었어요. 나는 그분이 선생님이니까 아는데 그분은 학생이었던 나를 기억하지는 못하겠죠. 그래도 연안중학교 출신들이 전쟁 때 유격대로 많이 활약했어요."김은중 할아버지는 태어난 곳은 강화이지만 연백을 고향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현재 이북5도민회 강화군지회장을 맡고 있기도 하다."연백은 먹을 게 풍족해서 동네에 거지가 없다고 할 정도였어요. 추수 후에 남은 이삭만 주워 먹고도 살 수 있었으니 말이죠. 그때는 찹쌀떡을 만들어도 팔뚝 만하게 만들어 먹고 부족함이 없었죠. 가끔 고향이 그리울 때가 있어요." 글/김민재기자 kmj@kyeongin.com 사진/임순석기자 sseok@kyeongin.com그래픽/성옥희기자 okie@kyeongin.com/아이클릭아트연백 출신 실향민 김은중 할아버지가 연백 염전에서 목수일을 했던 아버지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임순석기자 sseok@kyeongin.com/임순석기자 sseok@kyeongin.com/임순석기자 sseok@kyeongin.com

2017-09-06 김민재

[zoom in 송도]내년 7월 준공 앞둔 '송도컨벤시아 2단계 건립사업'

연면적 6만4천㎡에 사업비 1542억원900개이상 부스확보 '국제회의' 가능BTL방식 민간사업 20년 임차료 해법'국가적 성격' 정부차원 원조 있어야인천 송도컨벤시아 2단계 건립사업이 내년 7월 준공을 목표로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다. 이 사업은 미래형 고부가가치 산업인 '마이스'(MICE, 회의·관광·전시·이벤트) 및 경제 활성화를 위한 기반시설을 확충하는 것이다. 문제는 운영비(임차료)다. 송도컨벤시아 2단계 사업은 건립 목적과 효과 측면에서 '국가적 성격'이 강하기 때문에 국비 지원이 필요하다는 게 인천경제자유구역청 입장이다.■송도컨벤시아 2단계 내년 7월 준공인천경제청은 송도컨벤시아 2단계 건립사업을 내년 7월까지 완료할 계획이다.2단계 사업은 송도컨벤시아 1단계 시설 옆에 연면적 6만4천㎡ 규모의 컨벤션센터를 짓는 것으로, 이 사업이 완료되면 송도컨벤시아 전체 연면적이 11만7천27㎡로 확대된다. 2단계 주요 시설은 전시장, 회의장, 다목적 광장, 야간 경관조명 등이다. 총 사업비는 1천542억원이다.2단계 공사는 예비타당성 조사, BTL(임대형 민자사업) 한도액 확정, 사업시행자(더송도컨벤시아 주식회사) 지정 등을 거쳐 2015년 12월 시작됐다. 지난달 말 기준 공정률은 50.2%로, 정상적으로 추진되고 있다. 공정률을 올해 말까지 '70% 이상'으로 끌어올리겠다는 것이 인천경제청 목표다. 10월부터는 실내인테리어 등 마감공사가 진행될 예정이다.송도컨벤시아 2단계 사업은 인천과 대한민국의 도시·국가 브랜드 가치를 높일 것으로 기대된다.송도컨벤시아는 2단계 사업으로 900개 이상의 부스를 확보할 수 있게 된다. 1단계 시설은 전시 부스를 450개밖에 설치할 수 없어서 대형 행사 개최에 한계가 있었다. 인천경제청 관계자는 "2천 명 이상을 동시에 수용할 수 있는 규모의 국제회의를 유치할 수 있게 된다"고 설명했다. 또 "판매시설과 다목적 광장 등 편익시설 설치로, 방문객이 늘고 이들의 편의가 향상될 것으로 기대한다"고 예상했다. 다목적 광장은 야외음악회와 옥외 조형물 전시회 등을 열 수 있는 공간이다.인천경제청은 송도컨벤시아 2단계 효과로 ▲서비스산업 기반시설 확충 및 질적 향상 ▲상징성(랜드마크) 강화 및 송도국제업무지구 홍보시설 구축 ▲마이스 산업 활성화로 지역·국가경제 활성화 등을 내세우고 있다.■인천경제청 "2단계 임차료 국비 지원 필요"송도컨벤시아 2단계는 BTL 사업이다. BTL은 민간이 공공시설을 지으면 국가나 지자체 등 공공기관이 일정 기간 임차하는 방식이다. 송도컨벤시아 임차 기간은 20년(2018~2038년)으로, 임차료 지급을 위해선 국비 지원이 필요하다.송도컨벤시아 2단계 건립은 2010년 10월 기본계획 수립 당시 재정사업으로 계획됐으나, 관계 기관·부처 협의 과정에서 BTL 방식으로 변경됐다. 송도컨벤시아 2단계 사업을 BTL 방식으로 추진하는 안건(임대형 민자사업 한도액안)은 2014년 1월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다. 당초 국가사업으로 제출·추진했으나, 국고 보조 지자체사업으로 수정 의결됐다. 국회가 BTL 방식을 승인하고, 정부가 국비를 지원하기로 약속한 셈이다.인천경제청은 '지역발전특별회계 경제발전계정'에 송도컨벤시아 2단계 임차료를 편성해달라고 산업자원통상부와 기획재정부에 요구하고 있다. 그러나 이들 중앙부처는 '지역발전특별회계 생활기반계정'에서 2단계 임차료를 확보하라는 입장이다. 생활기반계정은 정부가 지역발전을 위해 각 지역에 주는 것이며, 경제발전계정은 중앙정부가 별도로 지원하는 예산이다. 중앙부처 입장대로 생활기반계정에서 송도컨벤시아 2단계 임차료를 확보하면, 다른 사업에 추진할 국비가 그만큼 줄어드는 것이다. 송도컨벤시아 2단계 시설 임차료 지급을 위해선 당장 내년에 36억원, 2019년부터는 72억 원의 국비가 필요하다.인천경제청 관계자는 "2단계 사업은 GCF(녹색기후기금) 유치 당시 정부와 국회에서 국비 지원을 승인한 사업"이라며 "송도 입주 국제기구의 국제회의를 지원하는 시설로, 국가적인 지원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또 "생활기반계정의 한도액 증액 없이 이 계정에서 임차료를 확보하라는 것은 실질적인 국비 지원이 아니다"며 "생활기반계정에서 20년간 매년 72억원을 쓸 경우, 다른 사업을 추진하는 데 한계가 발생한다"고 했다.송도를 '서비스 산업의 허브 도시'로 만들겠다는 정부의 계획은 유효하다. 마이스 산업 육성이 일자리 창출, 외국인투자 촉진, 무역 증대 등 국가 경쟁력 강화로 이어진다는 점도 인천경제청은 강조하고 있다. /목동훈기자 mok@kyeongin.com내년 7월 준공을 목표로 건설 공사가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는 인천 송도컨벤시아 2단계 공사 현장. 인천경제청은 송도컨벤시아 2단계 효과로 서비스산업 기반시설 확충 및 질적 향상과 마이스 산업 활성화로 지역·국가경제 활성화 등을 내세우고 있다. /임순석기자 sseok@kyeongin.co

2017-09-03 목동훈

[실향민이야기 꿈엔들 잊힐리야·34]황해도 연백군 출신 김은중 할아버지(中)

美 유격대서 익힌 영어로 고교 편입 대학 준하는 인천대숙 법학과 수료 제무시 트럭 개조 버스회사 취직 우연히 만난 부대 장교 소개로 공군기지 순환버스 사업 시작 한진에 일감 빼앗기고 이후 연이어 사업 실패 전쟁 등 대비 정부 비상계획 업무 맡아 법원으로 옮기고 인천지법서 퇴직 법무사 자격 얻어 '지금까지…'황해도 연백 출신 김은중(83) 할아버지는 전쟁이 끝난 뒤 미 공군부대를 상대로 운수사업을 했다.이후 법원 공무원으로 일하다 법무사 자격을 얻어 30년 넘게 강화에서 법무사사무소를 운영하고 있다.김은중 할아버지는 전쟁이 끝나던 해 가을 고향에서 못다 이룬 학업을 마치기 위해 고등학교에 진학했다. 중학교는 3학년 때 전쟁이 나는 바람에 졸업을 하지는 못했지만 1953년 가을, 서울 숭문고등학교 2학년 2학기로 편입했다. 20세 때였다. 미군 부대에서 유격대원으로 복무하면서 익힌 영어 실력 도움이 컸다. 숭문고는 1906년 경성야학교에서 출발해 숭문상업중학교, 숭문고등학교로 발전한 역사가 오래된 학교다."중간에 들어갔기 때문에 교장실에서 특별면접을 봤는데 당시 서기원 교장이 영어를 잘한다고 입학을 허락해 줬죠. 그렇게 3학년까지 다니고 졸업을 했어요. 인천 집에서 서울까지는 기차를 타고 다녔어요."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대학에 진학하고 싶었지만, 가정 형편상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대신 '대숙'이라는 교육기관에 입학했다. 대숙은 당시 대학설치기준령이 정한 대학의 조건을 갖추진 못했지만 그에 준하는 기능을 하는 교육기관이었다.할아버지는 학교법인 청운학원이 운영하는 인천대숙 법학과를 수료했다. 인천대숙은 1976년 학원비리를 이유로 교육 당국에 의해 폐교 조치 됐다.1960년대 초반 일자리를 알아보던 김은중 할아버지는 고모부가 운영하는 서울의 한 버스 회사에서 내근으로 일했다. 서울 동대문구 신설동에 있는 이 회사는 군용 트럭에 철판을 덧대 버스를 만들어 운행했다."미군 '제무시' 트럭 후레임을 가져다가 도라무통 철판으로 겉을 둘러싼 버스였어요. 좌석도 요즘 지하철처럼 긴 좌석을 양쪽으로 마주보게 놨죠. 답십리에서 숙명여대, 효창공원까지 다니는 노선이었어요."할아버지가 말한 '제무시' 트럭은 미국 자동차회사 GM 브랜드 중 하나인 GMC가 생산한 트럭을 일컫는다. GMC를 일본식 '지-에무-시' 발음과 유사한 '제무시'로 불렀다. 카고트럭이라고도 하던 GMC CCKW(2.5t)는 세계2차대전과 한국전쟁에서 활약했다. 한국지엠 쉐보레 공식 인터넷 블로그는 CCKW가 1941년 첫 출시돼 60만대가 생산됐다고 전한다. 91.5마력의 6기통 가솔린엔진에 6개 바퀴가 모두 구동되는 6륜 구동식이었다. 현대자동차가 1997년 창사 30년을 맞아 쓴 사사(社史) '도전 30년, 비전 21세기'는 "한국전쟁으로 모든 공업시설이 파괴되었지만, 역설적으로 전쟁은 오히려 우리 자동차산업에 새로운 기회를 제공해줬다. UN군이 가지고 들어온 엄청난 군수물자와 각종 자동차 부품, 그리고 토막 난 미군용 폐차와 드럼통들이 천막공장으로 들어가면 이내 그럴듯한 자동차가 되어 나왔다"고 당시 상황을 묘사한다.한국전쟁 이후 미군 부대에서 흘러나오는 군수물자 쟁탈전은 그야말로 복마전이었다. 버스회사 대표가 군용 제무시를 뒤로 빼돌렸다가 구속되는 일도 있었다.동아일보 1960년 3월 21일자에는 "육군제15범죄 수사대는 19일 하오 6시 서울시 동대문구 신설동 XX교통회사 사장 최OO를 '장물취득' 및 '증회' 혐의로 구속하였다. 최씨는 전방 모 부대에서 부정 유출된 군용 GMC '후렘' 7개를 23만환으로 사서 '뻐스'로 개조하였으며 수사원을 1만환짜리 보증수표로 매수하려 한 것이라 한다"는 기사가 실렸다.할아버지는 버스를 수리하려고 서울 미도파 백화점 인근의 한 정비소를 찾았다가 과거 8240부대에서 알게 된 육군 통역장교(대위)를 우연히 만났다. 그는 할아버지가 서울의 버스회사에서 일한다는 얘기를 듣고는 며칠 뒤 미5공군사령부 계약처장인 모 중령을 소개했다. 미 공군이 한국에 있는 공군기지를 순환하는 버스운행을 민간에 맡기려는데 한번 해보지 않겠느냐는 제안이었다. 이른바 '콘트랙트(contract·계약) 버스'였다.할아버지는 고모부와 회사 임원들에게 콘트랙트 버스 사업을 하자고 설득해 제무시 버스 16대를 투자받았다. 버스 내부는 기존 2열 좌석식에서 요즘의 좌석버스식 구조로 변경했다. 콘트랙트 버스는 오산비행장을 근거지로 김포비행장, 김해비행장 등 전국의 비행장을 오가거나 비행장 내부를 순환하는 노선 등 다양했다. 계기판에 찍힌 거리(마일)에 따라 돈을 받았다. 마일 당 계약금액은 기억하지 못했지만 '상당한' 돈을 벌었다고 기억했다.1년 단위 계약으로 4년 동안 콘트랙트 버스를 운영하던 할아버지는 당시 한진상사 조중훈 회장에게 일감을 빼앗기고 말았다. 1960년대 중반이다. 구식 제무시를 운영하던 할아버지 앞에 조중훈 회장은 신식 일본제 '이스즈(いすず)'버스를 갖고 나왔다. 1916년 설립된 이스즈는 일본 자동차 회사 중에 가장 오래됐다. 지금도 버스와 트럭, 디젤엔진 분야에서는 독보적인 기술력을 자랑한다. 한진그룹의 전신 한진상사는 1945년 조 회장이 트럭 1대로 시작한 운수회사다. 한진상사는 전후 인천항으로 들어오는 미군 보급물자 수송사업에 뛰어들어 크게 성장했다. 한진상사는 미 8군과의 수송계약을 체결한 이듬해인 1957년 주식회사로 성장했고 본사를 인천에서 서울로 옮겼다. 연평균 300% 급신장을 거듭해 1960년 1년 동안 220만 달러의 외화를 획득하고 가용 차량이 500대에 이르렀다. 이 무렵 미 공군부대 콘트랙트 버스 사업에까지 발을 뻗었다는 김은중 할아버지의 얘기는 조중훈 회장의 자서전 '내가 걸어온 길'에도 나오지 않는 내용이다. 한진상사는 이스즈 버스를 들여오면서 관세법 문제로 검찰 수사를 받기도 했다. 1964년 7월 동아일보 보도에 따르면 그해 1월 한진상사는 이스즈 버스 50여 대를 군납용 명목으로 한대에 2천 달러에 무관세로 들여왔다. 원래는 시가 8천 달러의 버스였다. 하지만 한진은 이 중 15대를 군용이 아닌 경인노선에 투입해 막대한 관세를 포탈했다는 혐의를 받았다. 또 경인노선에 버스를 투입하기 위해 공무원에게 뇌물을 줬다는 의혹도 제기됐다. 관세포탈은 결국 무혐의로 종결됐지만, 당시 미군 관련 수송사업에 엄청난 이권이 있었음을 엿볼 수 있다."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조 회장이 미군 부대와 연줄도 있었던 것 같고, 뭐 경쟁해서 떨어진 거니까요. 하지만 내가 그때 계속 미군과 인연을 맺으며 운수회사를 발전시켰으면 인생이 바뀌었을 수도 있었겠죠."한진은 이후에도 미군과의 친화력을 바탕으로 베트남전쟁 병력·물자 수송 사업(용역 군납)에 뛰어들어 신흥재벌로 급성장했다. 한국학중앙연구원 윤충로 박사가 쓴 '베트남전쟁의 한국 사회사'를 보면 한진은 1966년 5월부터 1971년 12월까지 1억1천646만3천185 달러의 베트남전쟁 관련 사업 실적을 거뒀다. 이는 전체 용역 군납의 50%, 한국이 베트남 특수를 통해 얻은 수익의 11.5%에 해당하는 막대한 액수였다. 이로써 한진은 '월남재벌'로까지 일컬어지게 된다.할아버지는 제무시 버스를 다른 버스회사에 팔고 영등포에서 옷 공장을 운영했지만 실패했다. 그러다 지인의 소개로 충남 공주에 있는 마곡사 중수 사업을 했는데 사기를 당해 한 푼도 못 건지고 엄청난 손해만 입었다. 할아버지는 지금도 이 사건을 부처님을 위해 '중수불사(重修佛事)'한 것이라 여기고 있다.연이은 사업실패로 돈을 다 잃은 할아버지는 평소 알고 지내던 법무부 과장의 소개로 중앙청 총무처에 들어가 비상계획 업무를 했다. 비상계획은 전쟁 등 국가 비상사태가 발생할 경우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준비하는 정책이다. 지금도 매년 8월이면 을지연습이라는 이름으로 실시하는 민·관·군 합동 훈련이 바로 그것이다."만약에 전쟁이 나면 정부부처는 어디로 이동하는지 관공서는 어떻게 피란하고 치안을 유지하는 방법 등에 대한 정책을 세우고 관리하는 부서였어요."할아버지는 중앙청에 있다가 법원에도 비상계획 업무가 생기면서 대법원 소속이 됐다. '법원 공무원정원에 관한 규칙' 연혁을 살펴보면 1969년 9월 대법원 조직에 비상계획이라는 업무가 처음 등장한다. 당시만 해도 전국 판사의 정원이 455명, 직원이 2천94명일 때였다. 지금은 판사 3천214명, 직원 1만5천755명으로 크게 늘었다. 법원 조직이 점차 커지는 과정에서 할아버지도 인사이동 조치 돼 일선 지방법원 재판부의 계장으로 근무했다. 대전, 수원지법 등에서 민사·가사·형사재판 업무 등을 하다 1980년대 인천지법에서 마지막으로 근무했다. 당시 인천지법은 지금의 인천 남구 학익동이 아닌 남구 주안동 석바위 지금의 인천가정법원 자리에 있었다.김은중 할아버지는 1986년 법원에서 퇴직하면서 사법서사 자격을 얻었다. 사법서사는 지금의 법무사를 말하는데 1990년 법무사법이 생기면서 사법서사의 명칭이 법무사가 됐다. 당시 관련법은 검찰·법원 주사보 7년 이상의 경력 또는 검찰·법원 사무관 5년 이상의 경력이 있으면 사법서사 자격을 인정했다. 할아버지는 석바위 법원 근처에 사무실을 내려고 했으나 지인들의 권유로 출생지인 강화도에 자리를 잡았다. 대한법무사협회가 1997년에 펴낸 '법무사 100년사'를 보면 1986년 가입한 인천 소속 법무사 명단에 할아버지의 이름이 나온다. 벌써 30년 전이니 피란 이후 절반 가까운 인생을 법무사로 지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80대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김은중 할아버지는 지금도 강화군청 앞에서 법무사사무실을 운영하고 있다.글/김민재기자 kmj@kyeongin.com 그래픽/박성현기자 pssh0911@kyeongin.com김은중 할아버지가 지난 29일 인천 강화군청 인근 자신의 법무사사무실에서 업무를 보고 있다. /김종호기자 kjh@kyeongin.com위 사진은 세계2차대전과 한국전쟁 때 사용된 미 군용트럭 '제무시(GMC)'. 전후 운수회사들은 제무시 프레임에 철판을 덧대 버스로 개조했다(출처/한국지엠 쉐보레). 아래는 1950년대 서울 지역에 운행되던 '제무시(GMC)' 버스.김은중 할아버지가 근무했던 석바위 시절의 인천지법. 오른쪽이 법원, 왼쪽이 검찰청이다. /인천지검 제공

2017-08-30 김민재

자신과의 싸움 이겨낸 '도보 6박7일'

인천바로알기종주단(단장·이동렬)이 지난 26일 인천축구전용경기장 인터뷰실에서 제17회 종주대회 해단식을 개최했다.종주단은 이날 원예은(인천 석정여고1)양에게 최우수상(인천시장상)을 수여하는 등 20명에게 개인·단체 우수상을 시상하고 종주를 완주한 대원들에게 완주증을 전달했다. 또 각 조장과 팀장들이 무대에 나와 종주대회를 통해 얻은 교훈과 동료에 대한 고마움을 전했다.원예은 양은 "생각지도 못한 최우수상을 받아서 감사하다"며 "1주일 동안 170㎞를 걸으면서 힘든 것을 이겨내고 자신과의 싸움도 이겨냈다. 앞으로 뭐든 할 수 있겠다는 자신감을 얻었다"고 말했다.의료팀장으로 봉사한 조성현(26)씨는 "하루 종일 걷고 난 뒤 발에 피로가 오고 물집이 잡힌 친구들을 보살피고 부상을 예방하는 일을 하면서 큰 보람을 느꼈다"며 "의료 환경이 제한적인 상황에서 임기응변으로 대처하는 법을 배웠고, 앞으로 간호사의 꿈을 이루는 데 큰 도움이 될 것 같다"고 말했다.종주단은 지난달 31일부터 이달 5일까지 인천대공원, 계양산, 강화도, 영종도, 문학산 등 인천 전역 170㎞ 코스를 도보로 답사했다. 이동렬 단장은 "6박 7일 동안 고생한 대원들에게 감사하다. 종주기간 동안 새긴 다짐을 잊지 말고 살아가길 바란다"며 "앞으로 힘이 닿는 한 종주대회를 이끌겠다"고 말했다. /김민재기자 kmj@kyeongin.com'제17회 인천바로알기 종주 해단식'이 지난 27일 오후 인천축구전용경기장 인터뷰실에서 열렸다. 인천의 뿌리를 찾아 170㎞ 대장정을 마친 인천바로알기 종주단원들이 파이팅을 외치고 있다. /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

2017-08-27 김민재

[zoom in 송도]세계최고 패션스쿨 FIT '한국 개교'

세계 최고의 패션 스쿨 FIT(Fashion Institute of Technology)가 지난 25일 입학식을 했다.한국뉴욕주립대학교(총장·김춘호)는 지난 25일 송도 인천글로벌캠퍼스 대강당에서 입학식을 개최했다.이번 한국뉴욕주립대 입학식은 FIT 첫 신입생 50여 명이 참석해 그 의미를 더했다.FIT 첫 입학식을 축하하기 위해 미국에서 온 뉴욕 FIT 부총장 지아코모 올리바는 축하연설에서 "FIT 한국 유치를 위해 한국뉴욕주립대 김춘호 총장과 뉴욕 FIT 조이스 브라운 총장이 지난 2013년부터 많은 논의를 거쳤다"며 "한국 주변 국가 학생들이 FIT를 가까이 만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게 됐다"고 했다.한국뉴욕주립대 김춘호 총장은 "2012년 공과대학인 뉴욕주립대 스토니브룩대학교를 개교했고 이번에 세계 패션 명문인 FIT를 오픈하게 됐다"며 "뉴욕에 소재한 FIT는 이탈리아에 이어 세계에서 두 번째로 한국에 개교한 것으로, 한국뿐 아니라 세계 패션 업계 전반에서 활약할 우수한 패션 인재가 많이 배출될 것으로 기대한다"고 했다.FIT는 패션디자인학과, 패션경영학과를 개설했으며, 이곳 인천 송도에서 2년간 공부하고 나머지 2년을 뉴욕 본교나 이탈리아 분교에서 수학하면 학사 학위를 받게 된다.인천경제자유구역청은 한국뉴욕주립대 FIT가 ▲패션 분야 산학연 클러스터 구축 ▲유통 물류 산업 고도화·활성화 ▲동북아 교육 허브 자리매김 등에 기여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목동훈기자 mok@kyeongin.com지난 25일 열린 한국뉴욕주립대 입학식에는 세계 패션 명문 FIT 첫 신입생 50여 명도 참석했다. /인천경제자유구역청 제공

2017-08-27 목동훈

[zoom in 송도]IFEZ 글로벌센터 '교육·문화프로그램'

2013년 G타워로 확장이전… 국내 정주 도움문화·역사 강좌·전통문화 체험 등 행사 다양의사소통 불편 해소 '한국어 교실' 최고 인기회의·모임장소 활용… 찾아가는 통역지원도인천경제자유구역(IFEZ) 글로벌센터가 외국인 정주 지원 구실을 톡톡히 하고 있다. IFEZ 글로벌센터는 송도국제도시 G타워 1층에 있다. 2011년 송도 미추홀타워에 문을 연 글로벌센터는 2013년 G타워로 확장 이전했다. 글로벌센터는 강의실과 휴식 공간 등을 갖추고 있다. 강의실에서는 한국어교실 등 다양한 프로그램이 진행된다. 회의, 모임, 스터디 장소로도 활용되고 있다.올 1월부터 7월 말까지 글로벌센터를 방문한 사람은 4천559명. 직접 방문하거나 전화 또는 이메일을 통해 상담을 받은 사람도 1천369명이나 된다.GCF(녹색기후기금) 등 국제기구 직원과 가족, 송도·청라·영종 등 IFEZ에 거주하는 외국인이 주로 찾는다. IFEZ에 거주하는 외국인은 송도 2천499명, 영종 1천201명 등 4천493명(6월 말 기준)이다. 지난 2003년 IFEZ 거주 외국인이 415명에 불과했던 점과 비교하면, 약 10배 증가한 셈이다. 국적별로는 중국이 921명으로 가장 많다. 다음은 미국인(599명), 한국계 중국인(345명), 베트남(264명), 일본(241명), 타이완(179명) 등의 순이다. 인기가 가장 높은 프로그램은 한국어교실이다. 의사소통에 어려움이 있기 때문이다.인천경제자유구역청이 올 5월29일부터 7월6일까지 IFEZ 거주 외국인 327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응답자의 42%가 의사소통에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음식점 이용 시 불편사항으로는 '외국어 가능 직원 부족'(45%), '영어 메뉴판 부재 및 오용'(29%), '언어로 인한 예약의 어려움'(26%) 등 언어로 인한 불편함이 대부분이었다. 이 때문에 통역이 필요할 때는 친구와 지인(25%), 글로벌센터(17%) 등의 도움을 받는 것으로 조사됐다.한국어교실은 한글반, 초급반, 중급반, 고급반, 생활한국어반, 회화고급반 등 단계별·수준별로 운영되고 있다. 한국어 수준에 따른 맞춤형 수업이 이뤄지고 있는 것이다. 수강생은 선착순으로 모집하며, 수강료는 없다. 지난달에는 정규반(초급·중급·생활회화) 116명, 특별반 16명, 기초회화반 30명 등 총 162명이 수강했다. 글로벌센터는 찾아가는 외국어(영어) 서비스도 제공하고 있다.글로벌센터 통역 자원봉사자들은 인천대입구역 등 인천도시철도 1호선 송도 구간 주요 역사, IFEZ 아파트단지 관리사무소에서 활동하고 있다. 길을 안내하거나 영어로 안내방송을 하고 있다. 안내문을 영어로 번역하는 일도 한다. 이들은 외국인들의 병원·은행 업무 지원, 휴대전화·인터넷 서비스 안내 등 행정 지원 서비스도 돕고 있다. 글로벌센터에서 진행하는 프로그램·행사로는 ▲한국 음식 만들기(분기별 1회) ▲한가위 전통문화 체험(9월) ▲문화강좌(분기별 1회) ▲역사탐방(연 2회) ▲성탄·송년이벤트(12월) ▲인문학 강좌(분기별 1회) 등이 있다.역사탐방, 성탄·송년이벤트 등의 프로그램은 내국인과 외국인이 서로 소통하고 이해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프로그램·행사 일정은 글로벌센터 게시판, 홈페이지(global.ifez.go.kr), SNS(페이스북 등)를 통해 공지하고 있다. /목동훈기자 mok@kyeongin.com/사진 인천경제자유구역청·그래픽/박성현기자 pssh0911@kyeongin.com/아이클릭아트

2017-08-27 목동훈

[실향민이야기 꿈엔들 잊힐리야·33]황해도 연백군 출신 김은중 할아버지(上)

강화 송해면 태생 부친따라 연백으로 '이주'1·4후퇴때 강화도 피란… 일 찾아 인천으로인력시장서 미군트럭에 실려가 유격대 배치오키나와로 간뒤 낙하만 70차례 고강도 훈련"사람 죽이는 법 배워 죽어도 모르는 소모품"8240부대는 미군·국군도 아닌 애물단지 전락이중 오키나와 한국인 유격대는 존재도 몰라정전 직전 서울로 전입… 2008년 '참전' 인정한국전쟁을 일본 오키나와에서 치른 한국군은 얼마나 될까. 황해도 연백군 출신의 김은중(83) 할아버지는 한국전쟁 때 오키나와에 주둔한 미군 부대에서 목숨을 건 특수 훈련을 받았다. 1958년 창설한 우리나라 육군 특수전사령부보다도 먼저 오키나와에서 공수 낙하훈련을 받았다.1934년 5월 10일 강화군 송해면에서 태어난 김은중 할아버지는 해방을 2년 앞둔 1943년 아버지를 따라 황해도 연백군 해성면 해남리로 이주했다. 목수였던 아버지는 일제의 징용을 피해 연백군으로 넘어가 염전에서 일했다.전쟁은 할아버지가 중학교 3학년이던 해 발발했다. 할아버지는 강화도로 다시 내려와 누나 집과 친척 집을 전전하다가 흉년이 심해 먹을 것이 부족해지자 연백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1951년 1·4후퇴 때 다시 강화도로 피란했다. 그리고는 또 일자리를 찾아 인천으로 나왔다. 아버지와 함께였다. 동구 송현동 쪽방촌에 방을 하나 얻어 둘이서 살았다.할아버지는 인천항에서 군수 물자 하역일을 했다. 지금의 인력시장처럼 아침에 인천항에 나가 있으면 미군들이 일자리를 배정해주고 급여로 쌀 한 됫박을 줬다고 한다. 10대 후반이던 그때 김은중 할아버지는 영문도 모른 채 미군 트럭에 실려가 특수부대원이 됐다. 아마 1951년이었을 게다. 여느 때처럼 쪽방촌 집에서 나와 배다리, 동인천역을 거쳐 인천항으로 가는 길이었다."열댓 명이 쭉 걸어가는데 미군들이 군용 트럭을 몇 대 세워 놓고 '유(You), 유, 유, 컴 히어(Come here)'라고 하는 거예요. 무슨 뜻인지는 모르겠는데 다른 미군 부대에 일하러 가는 줄 알고 트럭에 올라탔어요. 그런데 트럭이 서울로 가더라고. 아버지에게 소식도 못 전하고 끌려갔죠."노량진을 지나 한강 다리를 건너 용산 부근에 도착했던 듯하다. 미군은 할아버지를 철창에 가두더니 '바리깡'을 가져와 머리를 박박 밀었다. 그리고선 군복과 카빈 소총 한 자루를 주고는 미8군사령부 산하 유격대로 편성했다. 이른바 군번 없는 군인, 미군이 한국인 반공의용청년을 모아 만든 8240부대였다.할아버지는 남양주 덕소로 이동해 몇 개월 훈련을 받다가 1952년 봄 여의도 비행장에서 영문도 모른 채 C-46 수송선을 탔다. 목적지가 어디인지도 몰랐다. 몇 시간 뒤 내렸는데 숨이 턱턱 막히는 여름 날씨, 오키나와였다. 할아버지를 비롯한 중대 규모의 한국인 병력 100여 명은 산 중의 훈련장에 갇혀 외출도 외박도 없이 근 1년을 훈련만 받았다.할아버지는 기초적인 군사 훈련과 함께 낙하산 훈련, 무술, 인마살상, 폭파 등 그야말로 특수훈련을 받았다. 한국에서 간단한 제식, 사격 훈련과는 차원이 다른 '인간병기'가 되는 훈련이었다. 할아버지의 훈련 얘기는 2003년 개봉한 영화 '실미도'에 나온 특공대 684부대의 훈련 장면을 떠올리게 한다. 은밀히 북파돼 임무를 수행해야 하는 목적도 같았다. 젓가락이나 쇠꼬챙이로 급소를 찔러 사람을 죽이는 방법을 배웠고, 유도, 검도, 태권도 같은 동양 무술도 배웠다. 끼니는 전투식량 '씨-레이션'이었고, 쉴 틈도 없었다. 영국의 군사 전문가 휴 맥매너스(Hugh McManners)가 쓴 '세계 최강의 특수부대'는 한국전에서는 소규모 정예부대가 존재하지 않았다가 정찰과 상륙, 폭파와 같은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강도 높은 훈련을 받은 군인이 필요하게 됐다고 설명한다.김은중 할아버지는 수송기에 타 3천 피트 상공에서 낙하하는 훈련을 70차례 받았다. 낙하 도중에 낙하산을 펼치는 지금의 특전사 고고도 낙하훈련과는 많이 달랐다. 낙하산 고리를 수송선에 걸고 뛰어내리면 낙하산이 자동으로 펼쳐지는 방식이었다. 낙하를 하다가 잘못 착지한 동료가 목이 뒤로 꺾여 목숨을 잃기도 했다. 지금이야 지상으로 착지한 뒤에는 펼쳐진 낙하산을 다시 접는 정비부대가 따로 있지만 당시 오키나와에는 낙하산 정비부대가 없어 펼쳐진 낙하산을 모아 한꺼번에 하와이로 보냈다고 한다.현재 특전사사령부는 예하 특수전교육대 특전장비정비부대에서 낙하산을 포장한다. 강하훈련을 마친 대원들이 낙하산의 먼지를 털고 훼손 등 이상유무를 확인해 반납하면 11단계의 과정을 거쳐 포장병 3인 1조가 돼 낙하산을 다시 접는다. 강하하는 대원들의 목숨과 직결된 작업이다 보니 엄격한 품질 검사를 한다고 한다. 국방부에 따르면 특전장비정비부대는 매년 2만9천여개의 낙하산을 정비한다. 1년에 각 부대에서 이 만큼의 공수 훈련을 한다는 의미다.특전사라고 하면 '검은 베레모'를 떠올리지만 할아버지는 '팔각모'를 썼다고 기억했다. 공수훈련을 하면 주어지는 휘장은 동그란 모양에 푸른색 유엔 표식이 있고, 그 위에 낙하산이 그려져 있다고 했다. 별도의 부대 마크는 없었지만 소매 안쪽에 부착된 유엔군 표식이 신분을 증명했다고 할아버지는 기억했다. 미군 상사는 할아버지를 '쟈니 킴'이라고 불렀다."말 그대로 사람 죽이는 법을 배웠어. 지금 느끼는 것이지만 우린 소모품이었어. 많이들 죽어 나갔지. 죽으면 그냥 땅에다 묻어버리는 거야. 고향 생각이 안날 정도로 정말 쉴 틈도 없이 극한 훈련을 받았어요."낙하훈련 중 목이 꺾여 죽거나 다른 훈련을 하면서 맞아 죽기도 한 8240부대 소속 오키나와 한국인 유격군의 존재는 아직 드러나 있지 않다. 할아버지는 "인천에 8240부대 전우들이 많은데 오키나와에서 같이 훈련했다는 전우들은 아직 한 명도 만나지 못했어요. 나도 소식이 궁금해요. 암암리에 운영된 부대였기 때문에 아마 기록에도 찾기 어려울 거예요…"라고 말했다.우리나라 군인이 오키나와에서 공수훈련을 받았다는 기록은 육군 특수전사령부 연혁에서 처음 등장하는 데 그게 1958년 4월이다. 그해 4월 1일 용산에서 창설된 특전사 제1전투단 창설대원들은 보름 뒤부터 오키나와에서 훈련을 받았다.연합뉴스 국제부 김선한 기자가 쓴 '세계의 특수부대 비밀전사들 X'는 이들은 한국전 실전 경험이 있는 미 육군 제1, 제77 특전단 소속 요원들로부터 훈련을 받았다고 소개한다. 특수전사령부는 1951년 2월 창설된 미8군 소속 제1공수 유격연대, 즉 8240부대를 모태로 한다고 밝히고 있다. 이 같은 내용은 군사편찬연구소가 쓴 '한국전쟁의 유격전사'에도 나온다.할아버지는 왜 멀리 오키나와까지 가서 특수훈련을 받았을까. 오키나와는 태평양전쟁 이후 미국령이 되면서 미국의 동북아 군사 전진기지의 역할을 했다. 전후 일본 전문가인 남기정 서울대 일본연구소 부교수가 쓴 '기지국가의 탄생: 일본이 치른 한국전쟁'을 보면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전투기와 수송기들은 오키나와 기지에서 한국으로 출동했다. 오키나와 주둔부대는 대부분 한국 전장으로 이동해 전투에 참가했고, 새로운 보병부대가 오면 오키나와에 도착해 3주간 훈련을 받고 전선으로 파견됐다.미8240부대 산하 백호유격부대(동키3~4연대)에서 미국 고문관으로 전투에 참가한 벤 S. 말콤(미 육군 예비역 대령)이 쓴 '백호부대 유격전사'를 보면 한국전쟁 당시 유격작전과 관련해 근무하고 있는 미군은 장교 22명과 사병 37명이 전부였다. 이들에게는 전문적인 교육을 실시할 능력이 없었다. 그렇다면 고도의 전투능력이 필요한 특수부대 양성은 한국이 아닌 오키나와에 있는 미군들에게 맡겨야 할 필요성이 있었다. 우리나라 최초의 특전사들이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오키나와는 1972년 일본에 반환됐지만 지금도 미군이 주둔하고 있다. 2015년 일본 방위성 방위백서를 보면 현재 오키나와에는 미 육군 제1특수부대(공수) 제1대대와 제3해병기동전개부대 사령부 등 6개의 육·해·공군 기지가 있다.김은중 할아버지는 오키나와에서 고된 훈련을 받았지만 실제 작전에 투입되지 않았다고 한다. 평양 순안비행장 침투작전을 준비했다는 것만 어렴풋이 기억하고 있을 뿐이다. 존스홉킨스대학 작전연구실이 쓴 '한국전에서의 유엔군 유격전'에 따르면 전쟁 기간 한국에 있는 8240 유격대는 4천445회의 개별 작전을 수행했고, 작전활동의 93.7%가 황해도 서남부 지역에서 실시됐다. 유격대는 휴전 전까지 6만9천명의 적 살상, 5천 정의 무기노획, 2천700대의 차량노획 및 파괴, 3천800t의 식량노획, 80개의 교량 파괴 등 성과를 거뒀다고 보고했지만 실제로 3~10배 정도 과장됐다는 것이 존스홉킨스대 연구실의 설명이다.할아버지는 정전협정이 이뤄지기 직전 오키나와를 떠나 서울 중구 필동에 있는 한 부대로 전입했다. 자신에게 쟈니 킴이라는 이름을 지어준 미군 상사를 따라갔다고 한다. 미 8240부대는 전쟁 이후 미군에도 한국군에도 속하지 않은 애물단지 신세가 됐다. 8240부대는 편성 당시부터 한국인에 대한 신분을 '군인'으로 명확히 하지 않았다.이후 미국과 한국의 협정에 따라 만들어진 8250부대로 편입돼 우리나라 국방부의 통솔을 받게 됐다. 하지만 우리 국방부는 이들은 육군으로 배치했고, 이 과정에서 많은 탈영이 일어났다.할아버지는 8250부대로 편입되기 전 특수부대를 떠났다. 한국군 소속으로 복무한 적은 없지만 징집되지는 않았다고 한다. 할아버지는 한국전쟁 참전을 인정받아 2008년 9월 29일 국가유공자 인정을 받았다.글/김민재기자 kmj@kyeongin.com 사진/임순석기자 sseok@kyeongin.com일러스트/박성현기자 pssh0911@kyeongin.com/아이클릭아트황해도 연백 출신 실향민 김은중 할아버지가 한국전쟁 당시 일본 오키나와 특수부대에서 죽음을 넘나드는 훈련을 받은 이야기를 하고 있다. 오키나와 특수부대는 한국전쟁 유격사에 기록되지 않은 최초의 증언으로 드러났다. /임순석기자 sseok@kyeongin.com김은중 할아버지가 참전용사에게 수여하는 호국영웅기장을 바라보고 있다. /임순석기자 sseok@kyeongin.com

2017-08-23 김민재

[송도국제도시 브리핑]유타대 아시아캠퍼스, 입학상담 동아시아 콘퍼런스

■유타대 아시아캠퍼스, 입학상담 동아시아 콘퍼런스인천글로벌캠퍼스에 있는 유타대학교 아시아캠퍼스는 지난 13~15일 국제 대학입학상담학회 동아시아지역 콘퍼런스를 진행했다.이번 콘퍼런스에는 미국 콜롬비아대, UCLA, 보스턴대, 오하이오대, 요크대 등 미주 및 유럽 지역을 포함해 나고야대, 홍콩대 등 전 세계 21개국의 대입 전문가 143명이 참석했다. 국내에서는 고려대, 연세대, 대원외고, 용산국제고 등의 입학 담당자가 참여했다. 외국 대학 대입 전문가들은 글로벌 최신 입시 트렌드를 논의했으며, 국내 대학 입학 담당자들은 한국 대학 입시의 특수성과 지원 절차를 설명했다.콘퍼런스는 고등학교 과정과 대학교 과정으로 각각 세션을 분류해 원하는 코스에 선택적으로 참여할 수 있도록 운영됐다. 고등학교 코스의 경우, 참가자들의 경력 수준 및 요구에 따라 기본 과정과 심화 과정 중 원하는 세션에 참가할 수 있게 했다.특히 중국, 싱가포르, 대만, 태국 등 다양한 동아시아 국가의 입시 전문가들이 한자리에 모여 심도 있고 집중적인 토론과 발표를 진행했다.한편, 유타대 아시아캠퍼스는 2018학년 봄학기 신입생을 모집하고 있다. 이번 신입생 모집은 ▲커뮤니케이션학 ▲심리학 ▲영화영상학 ▲도시계획학 등 4개의 학부 과정과 석사 과정인 ▲공중보건학 ▲생명의료정보학 ▲국제법학과를 대상으로 진행된다. 원서 접수는 오는 11월27일 우선 마감, 2018년 1월19일에 최종 마감된다. ■경제청, 송도 11공구 개발·실시계획 변경용역 추진인천경제자유구역청은 '송도국제도시 개발계획 및 실시계획 변경 수립용역'을 추진하고 있다.이번 용역은 송도 11공구 첨단산업클러스터 등 기존 개발사업지구에 대한 토지이용계획 재배치가 필요함에 따라 추진되고 있다.송도는 국제업무단지, 지식정보산업단지 등 사업지구별로 개발계획과 실시계획이 수립되고 있다. 중간에 계획이 변경되는 경우도 많아, 송도 전체를 체계적으로 관리하기 위해선 이번 용역이 필요하다.용역 기간은 착수일로부터 36개월이다. 인천경제청 관계자는 "지금의 송도 개발계획이 결정된 지 몇 년 지났다. 그동안 여러 여건 변화가 있었다"며 "특히, 이번 용역은 송도 11공구 첨단산업클러스터와 대학교 용지 등 11공구 기존 토지이용계획을 어떻게 재배치할 것인가가 핵심"이라고 설명했다. /목동훈기자 mok@kyeongin.com최근 인천글로벌캠퍼스 유타대 아시아캠퍼스에서 '국제 대학입학상담학회 동아시아지역 콘퍼런스'가 열렸다. 참석자들은 입시 트렌드에 대해 발표하고 토론했다. /유타대 아시아캠퍼스 제공

2017-08-20 목동훈

[zoom in 송도]'GTX-B 신설'·도시철도 급행화 가속도

'송도 ~ 마석' 수도권 광역철 추진인천 1호선 '급행열차' 도입 결정송도~계양 - 서울 접근성 편해져'국제회의 복합지구' 지정 계획도인천시가 문재인 정부의 국정과제와 연계해 다양한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각 실·국·본부는 '국민이 주인인 정부'와 '더불어 잘사는 경제' 등 5개 국정 목표에서 총 100개의 인천시 연계사업을 발굴했다. '국정과제 연계사업'을 보면, 신규 사업보다는 추진 또는 구상하고 있었던 것이 많다. 정부의 정책 방향과 함께해 국비 확보와 제도 개선 등 추진 동력을 얻겠다는 의도로 풀이된다. 송도국제도시와 관련된 '국정과제 연계사업'은 어떤 것이 있는지 살펴봤다.주민들의 관심이 높은 분야는 '교통'이다. 교통 문제는 교육, 녹지, 편의시설, 일자리 등과 함께 주거 지역을 선택할 때 매우 중요한 기준이 된다. 송도의 경우, 공원과 도로 등 도시 인프라는 잘 갖춰져 있지만, 서울 접근성이 떨어진다는 지적이 많았다.인천시는 국정과제 '교통·통신비 절감으로 국민 생활비 절감'과 연계해 수도권광역급행철도(GTX) B노선(인천 송도~경기 마석, 80.08㎞) 건설을 추진한다.GTX 건설은 서울 접근성을 획기적으로 개선할 수 있는 것으로, 송도 주민 등 시민들의 대중교통 편익이 크게 향상될 것으로 기대되는 사업이다.특히 GTX B노선은 최근 기획재정부 예비타당성 조사 대상에 포함되면서 건설 가능성이 높아졌다.예비타당성 조사를 통과하면, 2019년 기본계획 고시 및 2020년 사업시행자 선정 등을 거쳐 2021년부터 공사가 시작될 것으로 인천시는 내다보고 있다.'국정과제 연계사업'에는 인천도시철도 1호선 급행화 사업도 포함됐다. 이 사업은 송도국제업무지구와 계양구를 잇는 인천 1호선에 급행열차를 도입하는 내용이다.사업비(예상)는 1천952억원이다. 인천시는 '인천 철도망 효율화 방안 연구용역' 결과에 따라 급행열차 도입을 결정했으며, 송도에서 계양까지의 이동시간(현재 54분)이 21분 단축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인천시의 광역버스 확충사업도 계속된다. 송도의 경우, 서울 여의도·잠실을 잇는 노선 2개를 추가로 확보해 버스 9대를 투입하겠다는 목표가 있다.인천시는 국정과제 '국민외교 및 공공외교를 통한 국익 증진'과 관련해 국제기구 클러스터를 송도에 구축할 계획이다.송도를 제네바와 같은 세계적 국제기구 집적도시로 육성하겠다는 것이다.송도는 공항 접근성이 좋고, 송도컨벤시아 등 회의·전시·관광·숙박시설 등을 갖추고 있다. 송도에 입주해 있는 국내외 대학·기업과 협력도 가능하다.이와 관련, 'GCF(녹색기후기금) 활성화를 통한 녹색환경 금융도시 송도 건설'은 문재인 대통령 지역공약에 반영된 상태다. 인천시는 GCF 연관산업 육성 및 집적화 방안을 마련하기 위한 연구용역을 추진 중이다.인천시는 송도와 영종도 일부를 '국제회의 복합지구'로 지정하겠다는 계획도 이번 '국정과제 연계사업'으로 선정했다.국제회의 복합지구는 개발부담금 및 교통유발부담금 감면, 용적률 완화, 국비 지원 등의 혜택이 있다. 인천시는 내년 7월 지구 지정 공고를 목표로 조례 개정, 용역 실시, 문화체육관광부 승인 신청 등의 절차를 밟을 예정이다.인천시 투자유치산업국에서는 송도 11공구 바이오융합 산업기술단지 융합센터 내에 (가칭)'인천바이오공정전문센터'를 설립하겠다는 계획을 내놨다.인천경제자유구역청은 복합쇼핑몰과 우수 외국인투자기업 유치로 일자리를 창출하고, 수도권정비계획법 개정 등 규제 완화를 계속해서 정부에 건의할 방침이다. /목동훈기자 mok@kyeongin.com

2017-08-20 목동훈

[실향민이야기 꿈엔들 잊힐리야·32]황해도 벽란도 출신 이춘화 할머니(下)

교통·물류 중심지로 신문물 빨리 접해어릴적 기차 타고 개성에 소풍 갈 정도예성강 하류 위치… 민간 무역도 활발고려시대 수도와 송나라간 교류 통로드넓은 곡창지대 배고픔 모르고 자라연백 온천욕으로 피부병 완치 일화도상인들과 10여년전 '개성관광' 다녀와정몽주 피살 선죽교 등 변함없어 놀라이춘화(83) 할머니의 고향 황해도 연백군 해월면 벽란도(碧瀾渡)는 교통·물류 중심지로 명성을 떨쳤다.서해 바닷길을 따라 들어온 배는 예성강 하류의 벽란도를 거치게 마련이었다.이 벽란도는 개성과 같은 주요 도시를 연결하는 물류·교통의 허브였다.할머니의 유년시절에도 고향 앞바다에는 조기, 새우를 잡는 배가 널렸고, 화물선도 많이 다녔다. 개성과 벽란도는 철도로도 연결됐다.중간에는 토성역(개풍역)이 있었다. 할머니는 교통 여건이 좋은 곳에 산 덕분인지 '국민학교' 시절 기차를 타고 개성까지 소풍을 갔던 기억이 생생하다.10살 때는 배를 타고 인천에서 열린 친척의 환갑잔치에 오기도 했다. 월미도 근방이었는데 배를 타고 5시간 정도가 걸린 듯싶다.할머니는 당시 벽란도가 인천에 비해서도 신식 문물을 받아들이는 속도가 크게 뒤처지지 않았다고 했다."일정 때 고향에 전기가 들어왔고, 고향집 근처 방개월에는 금을 빻는 공장도 있었어. 발전이 빨랐던 거지." 금을 가공하던 금점(金店)이 있었다는 게 이채롭다.벽란도는 뛰어난 입지 덕분에 개성이 수도였던 고려 시대에는 중국 송나라와의 교류의 통로 역할을 했다. 벽란도를 굽이도는 강의 이름 '예성(禮成)'도 '교빙(交聘)의 예(禮)가 성립(成立) 한다는 의미'로 붙여졌다. 조선 중기 편찬된 지리지 '신증동국여지승람'의 '개성부'편에는 "고려에서 송나라에 조회를 할 때에, 모두 여기서 배를 띄우기 때문에 예성이라 하였다"고 기록돼 있다.송나라 휘종(徽宗) 국신사(國信使)로 1123년 고려를 방문했던 서긍(徐兢·1091~1153)도 예성항(벽란도)을 통해 개성으로 갔다. 당시 금(金)이 고려와 송의 중간에 자리 잡고 있어 육로가 막혔다. 바닷길도 산둥반도에서 출발하지 못하고 지금의 절강성 연안의 항구에서 떠나 전라남도 근해에 왔다가 다시 예성강까지 북상하는 노선을 택할 수밖에 없었다.서긍은 3개월 동안 고려에서 보고 들은 이야기를 글과 그림으로 정리해 고려견문록 '선화봉사고려도경(宣和奉使高麗圖經)'을 남겼는데, 이곳에 당시 '예성항'의 풍경도 담았다. 서긍은 예성항에 있는 '벽란정(碧瀾亭)'에서 왕의 조서를 봉안하고, 하루를 묵은 뒤 육로를 따라 왕성(王城)으로 들어갔다. 당시 항구에서 이뤄진 송나라 국신사에 대한 예(禮)는 상상을 초월하는 규모였다. "조류를 따라 예성항에 이르자 정사·부사는 신주(神舟)로 옮겨 탔다. 낮 12시쯤(午刻) 정사·부사가 도할관·제할관을 거느리고 채주(采舟)로 조서(詔書)를 봉안했다. 1만 명 되는 고려인들이 병기·갑마(甲馬)·기치·의장물(儀物)을 가지고 해안가에 늘어서 있고 구경꾼이 담장같이 둘러섰다. 채주가 해안에 이르자 도할·제할관이 조서를 채색 가마에 봉안했다. 하절이 앞에서 인도하고 정사·부사는 뒤에서 따라갔으며 상절·중절은 그 다음으로 따라갔다. 벽란정으로 들어가서 조서를 봉안하고 그 일이 끝나자 지위에 따라 나뉘어 잠시 휴식을 취했다. 다음날 육로를 따라 왕성으로 들어갔다."고려대학교 이진한 교수가 쓴 '고려시대 무역과 바다'를 보면 고려시대 벽란도에서는 민간 차원의 무역도 활발했다. 송나라 상인 '송상'은 사실상 고려 왕실이 지정하고 관할하는 항구인 예성항에 도착해 개경 등지를 무대로 장사를 했다.'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당시 송나라 상인과 관련된 일화가 실렸다. 당시 예성강을 통해 출입하던 송나라 무역상 중에는 '하두망(賀頭網)'이라는 자가 있었다. 그는 예성강 주변에서 체류하는 동안 절세의 미인을 보고는 반해버렸다. 그 미인의 남편이 바둑을 즐긴다는 사실을 알아낸 하두망은 바둑에서 일부러 지고는 많은 재물을 잃었다. 뜻밖의 횡재에 마음이 동한 남편은 결국 아내까지 걸게 됐고, 하두망이 아내를 차지하게 됐다. 하두망은 배에서 미인을 범하려 했지만, 아내는 절개를 지켰다고 한다. 바다 한가운데에 이르러서 배가 빙빙 돌며 나가지 않았는데, 점치는 사람의 말이 '절부가 있기 때문'이라 했고, 하두망은 배를 돌려 미인을 내려놓고 가게 됐다 한다.이 얘기는 '예성강곡'이라는 노래로 당시 고려인들에게 널리 불렸다. 남편이 아내를 보내면서 후회하고 한탄하는 노래가 '전편'이고, 아내가 배에서 내리면서 부른 한이 서린 노래가 '후편'이다. 지금은 전하지 않지만, 고려 시인 정포(1309~1345)가 지었던 시를 보면 많은 사람이 예성강곡을 불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림같은 청산이 배 창에 들어 가득한데, 가는 비 실같이 돌다리에 뿌리네. 밤 벌써 깊었지만 맑은 후에 잠 못 이루는데, 뱃사람들은 다시 예성강곡 부르네."벽란도 일대에는 예성강을 따라 펼쳐진 드넓은 평야도 있어 곡창지대를 이뤘다. 이춘화 할머니의 가족도 농사를 지었는데, 추수철이면 학교도 못 가고 온종일 일을 하고는 했다. 농번기면 온 가족이 함께해도 일손이 턱없이 부족해 일당을 주고 전라도 등지에서 온 사람들을 부렸다. "고향 주변이 모두가 평야였지. 연백평야 끄트머리였는데 평야가 정말 넓었어. 쌀이 많이 나와서 유년시절에 배고팠던 기억은 없어."할머니는 유년 시절 연백군에 있는 온천에 갔던 기억도 또렷이 간직하고 있다. 연백에는 연안온천과 배천온천이 있었는데, 전국적으로 유명세를 떨쳤다. 할머니도 피부병이 도졌는데 연안온천에서 10일간 온천욕을 하고 완치됐다. "어른들 말이 거기가 물이 좋다 그랬어. 옴이 와서 머리도 헐어서 옷을 입지 못할 정도가 됐는데 열흘을 (온천욕을) 하고 왔더니 깨끗이 없어졌어. 그때 약이 있겠어, 민간요법으로 하다가 안 돼 온천에 갔더니 바로 나았던 거지."온천은 지금 대중탕의 모습과 흡사했는데, 탕에는 호랑이 모습의 조형물이 있었던 게 생각난다. 할머니는 어린 나이여서 그런지 물이 그렇게 뜨거울 수가 없었다. 물을 식혀서 씻어야 했다. 탕에 들어갈 때는 가마니를 뒤집어썼다. 이북5도청 황해도에서 지난 1970년 발행한 '황해도지'를 보면 연안온천은 연안읍에서 동쪽으로 15리 떨어진 온정면 금성리에 있었다. 황해선 연안온천역이 있어 교통이 편리했다. '황해도지'는 "부근에는 특히 토탄이 많이 나며 온천은 이러한 토탄지대에서 솟아나는데, '루마지스' '피부병' '부인병' '치질' 등에 모두 특효가 있다고 해 원근(遠近)에서 욕객이 답지한다. 욕탕의 설비가 완전하고 여관 등의 시설도 갖추어 있어 유숙, 휴양에 불편이 없다. 본도의 남부지성에 위치해 전의 고려조의 수도 개성에 가까웠기 때문에 먼 옛날부터, 배천온천과 함께 널리 알려졌다"고 했다.국어학자 일석(一石) 이희승(1896~1989)도 소학교 교사였던 19살 때 배천온천에서 옴 치료를 했다고 회고했다. 이희승의 고향은 경기 개풍(출생은 경기도 시흥)으로, 서울에서 수학하다 낙향(落鄕)한 뒤 사립 소학교 교원으로 취임한 적이 있었다. 그는 자서전 '다시 태어나도 이길을'에서 "배천온천은 후에 유명한 온천으로 발전했지만, 당시만 해도 아무 시설이 없는 자연 그대로였다"고 설명하고 있다.할머니는 유년시절 개성으로 소풍을 가기도 했다. 할머니가 본 개성의 첫인상은 '하얗고 환하다'는 느낌이었다. 밭과 논도 잘 정리돼 있었다. 이 같은 느낌은 소설가 박완서(1931~2011)가 자전 소설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에서 처음 송도(개성)를 봤을 때 느꼈던 바 그대로다. 박완서는 서울에 있는 국민학교에 가려고 고향 경기도 개풍군에서 걸어 송도까지 갔다. 박완서는 당시 고개 위에서 내려다본 송도의 풍경을 이렇게 표현했다. "발 아래 생전 처음 보는 풍경이 펼쳐졌다. 말로만 듣던 송도였다. 나는 탄성을 질렀다. 은빛으로 빛나는 아름다운 도시였다. 길도 집도 왜 그렇게 새하얗게만 보였던지. 나중에 안 것이지만 송도고보, 호수돈고녀를 비롯한 신식의 큰 건물들은 모두 화강암으로 지었고, 토지도 사질(砂質)이어서 길이나 바위가 유난히 흰 게 개성 지방의 특징이었다. 사람이 저렇게도 살 수 있는 거로구나, 나는 벌린 입을 못 다물고 그 인공적인 정연함과 정결함에 오직 황홀한 눈길을 보냈다."이춘화 할머니는 양키시장에서 함께 장사하는 이북 실향민 상인들과 10여 년 전 개성관광을 다녀왔다. 60여 년 만에 개성의 모습을 다시 한 번 두 눈으로 확인할 수가 있었다. 크게 달라진 것이 없어 놀라웠다. 유년 시절에 봤던 선죽교나 박연폭포 등이 그대로 보존돼 있었다. 그 모습에 다들 놀라워 했다. "선죽교에 갔는데 달라진 것이 있다면 사람들이 못 들어가게 막아놨다는 거였어. 어렸을 때는 핏자국이 그대로 있다고 신기하다며 발로 비비고 그랬는데, 개성관광 때는 그렇게는 못하게 해놓은 거지. 우리 같았으면 개발하고 그랬을 텐데 그대로더라고." 할머니와 함께 개성관광을 갔던 양키시장 '평양집' 할머니가 찍은 사진을 보니 선죽교 옆에 세워져 있는 '선죽교 비'의 글자도 또렷했다. 이 비의 글씨는 조선시대 명필로 알려진 석봉 한호가 썼다고 한다. 선죽교는 1392년 정몽주가 훗날 조선 태종이 된 이방원 일파에 피살된 장소다.지난 7월 21일, 할머니는 취재팀과 함께 고향 땅 지척의 모습이라도 보기 위해 강화평화전망대를 찾았다. 할머니는 전망대에 있는 망원경을 이리저리 돌려봤지만, 흐린 날씨 탓인지 북녘의 모습을 제대로 볼 수가 없었다. 할머니가 피란 때 오갔던 산이포(강화군 양사면 철산삼거리 일원)도 둘러봤다. 예전 나루터는 사라지고 해안 경계 철책이 강을 둘러싸고 있었다. 수풀이 무성한 철책가에는 '지뢰매설지역 위험'이라고 쓰인 표지판과 북쪽의 대남방송이 손님을 맞이할 뿐이었다. 할머니는 "정말 많이 변했다"며 "다시 또 북에 갈 기회가 있을지 모르겠다"고 아쉬워했다.글/홍현기기자 hhk@kyeongin.com 사진/임순석·조재현기자 sseok@kyeongin.com지난달 21일 경인일보 취재진과 함께 강화도를 찾은 이춘화 할머니가 피란 때 배를 타고 오갔던 산이포(강화군 양사면 철산삼거리 일원)에서 고향인 벽란도 쪽을 쳐다보고 있다. /임순석·조재현기자 sseok@kyeongin.com대동여지도에 표시된 개경과 예성항. 출처/고려대학교 이진한 교수가 쓴 '고려시대 무역과 바다'이춘화 할머니와 함께 개성관광을 갔던 양키시장 '평양집' 할머니. 선죽교비에 '善竹橋'라는 글자가 또렷하다. /평양집 할머니 제공양키시장 '평양집' 할머니가 직접 찍은 선죽교의 모습. /평양집 할머니 제공이춘화 할머니가 강화평화전망대에서 고향 벽란도에 대한 추억을 이야기하고 있다. /임순석·조재현기자 sseok@kyeongin.com

2017-08-16 홍현기

[zoom in 송도]송도 센트럴파크 수로 확장· 보행교 설치사업 본격화

국내 최초 해수공원내 아트센터인천 건설센터앞 수로 끊겨 '수상택시 운항' 걸림돌120m구간 폭 30m·반원형 보행교도 조성공사예산 38억 소요… 내년 하반기 마무리송도국제도시 센트럴파크 '아트센터 인천'(콘서트홀) 앞 수로를 확장하고 보행교를 설치하는 사업이 추진된다. ┃위치도 참조인천경제자유구역청은 '송도 센트럴파크 수로 확장 및 보행교 등 설치사업'을 본격적으로 추진할 계획이라고 13일 밝혔다.송도 센트럴파크는 주민과 국내외 관광객이 많이 찾는 곳이다. 약 41만㎡ 규모의 국내 최초 해수 공원으로, 송도 국제업무단지 중앙부에 위치해 있다.동북아트레이드타워 앞에서 G타워 인근을 지나 아트센터 부근까지 수로(길이 약 1.8㎞)가 연결된다.문제는 수로가 아트센터 부근에서 단절되는 데다, 너비도 좁아진다는 점이다. 이 때문에 수상택시가 아트센터 앞까지 운항하지 못하고 있다.인천경제청은 아트센터 앞 수로 120m 구간의 너비를 30m로 확장할 계획이다.또 단절된 부분을 개선해 수로 전체가 연결되도록 하고, 반원형 형태의 보행교를 설치할 계획이다. 사람의 이동을 위해 수면 높이로 나 있는 길을 없애는 대신 보행교를 설치하겠다는 것이다.인천경제청은 수로를 확장하고 보행교를 설치하면서 수목 식재 등의 방식으로 그 주변을 정비하기로 했다. 야외 전시장을 설치하거나 주민과 관광객이 물을 접할 수 있는 공간을 조성하는 방안도 구상하고 있다.인천경제청 관계자는 "아트센터 수로 인근에 상가가 들어설 예정인데, 지금은 나무가 적고 지장물이 많다"며 "상가와 수로 사이의 공원을 잘 정비하면, 경관과 상권 활성화에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기대했다. 또 "주민과 관광객이 물에 발이라도 담글 수 있는 (물놀이) 시설도 생각하고 있다"고 말했다.수로 확장 및 보행교 설치 공사는 올 10월쯤 본격화할 전망이다.수로 확장 8억~9억원, 보행교 설치 15억원 등 약 38억원의 예산이 소요될 것으로 인천경제청은 추산하고 있다. 연내 공사가 시작되면, 내년 하반기 중 사업이 완료될 예정이다.아트센터는 '송도국제도시개발유한회사'에서 건립한 후 인천시에 기부채납하도록 돼 있는 시설물이다. 공사(1단계)는 완료됐으나, 사업 주체 내부의 갈등으로 준공 신청이 늦어지면서 개관까지 지연되고 있다. 개관이 지연되고 있는 문제는 있지만, 우리나라 문화예술 분야의 주요 인프라이자 송도의 랜드마크가 될 것이란 평가를 받고 있다.인천경제청 관계자는 "수로 확장과 보행교 설치는 아트센터로 관광객을 모으기 위한 것"이라며 "많은 돈을 들여 새로운 시설을 설치하는 것이 아닌, 기존 시스템을 활용하고 개선해 사람이 모이고 쉴 수 있는 공간으로 만드는 게 이번 사업의 목적"이라고 말했다. /목동훈기자 mok@kyeongin.com인천 송도국제도시 센트럴파크 '아트센터 인천'(콘서트홀) 앞 수로를 확장하고 보행교를 설치하는 사업이 추진된다. /임순석기자 sseok@kyeongin.com

2017-08-13 목동훈

[zoom in 송도]국대 최대 한옥호텔서 '동·서양 맞춤 웨딩'

국내 최대 한옥 호텔 '경원재 앰배서더 인천'이 올해 말까지 실속 웨딩 패키지를 선보인다.패키지는 전통혼례로 치러지는 '클래식 패키지'와 서양식으로 진행되는 '로맨틱 패키지' 두 가지다. 두 패키지 모두 1인당 5만원대의 가격에 식사·음료뿐만 아니라 웨딩 장식과 각종 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어 실속 있는 웨딩이 가능하다.경원재 앰배서더 인천의 특화 상품으로 자리 잡은 전통 혼례의 경우 '클래식 패키지'로 이용할 수 있다. 패키지에는 식사, 음료, 주류, 대관료, 폐백실 사용료, 각종 웨딩 소모품, 신랑·신부 전통의상, 장식, 삼현육각(전통음악 연주) 등이 포함된다. 가격은 세금을 포함해 1인당 5만8천원부터 시작된다. 전통 혼례는 고즈넉한 한옥에 둘러싸인 호텔 안마당 또는 대연회장인 아리랑홀에서 할 수 있다.일반 서양식 웨딩으로 진행되는 '로맨틱 패키지'의 경우, 1인 가격이 세금을 포함해 5만5천원부터 시작된다. 패키지에는 식사, 음료, 주류, 대관료, 폐백실 사용료, 각종 웨딩 소모품, 기본형 생화 장식, 피아노 3중주가 포함된다.두 패키지 모두 200명 이상 예약 시 이용 가능하다. 식사는 전통한식 세트 또는 뷔페를 이용할 수 있으며, 하루에 최대 2개 팀만 예약받기 때문에 여유롭게 예식을 진행할 수 있다.경원재 앰배서더 인천은 한옥 호텔 최초로 5성 등급을 획득한 국내 최대 한옥 호텔이다.건축 단계부터 국내 전통 명장들이 다수 참여해 한옥 건축의 완성도를 높였으며, 고즈넉하고 고풍스러운 분위기로 국내외 관광객들에게 한옥 숙박 명소로 인정받고 있다. /목동훈기자 mok@kyeongin.com야외 마당에서 진행되고 있는 전통혼례.서양식 웨딩을 준비 중인 아리랑홀(대연회장). /경원재 앰배서더 인천 제공

2017-08-13 목동훈

[실향민이야기 꿈엔들 잊힐리야·31]황해도 벽란도 출신 이춘화 할머니(中)

남편 제대금으로 좌판 3개 사 50년째 장사1930년대 조성 정식명칭은 송현 자유시장철거 후 다시 재건 미군 물건 팔면서 '명성'군복 자체가 패션이던 시절 가장 많이 팔려당시 한달 수익이 대기업 부장 월급의 2배군복 염색 안하고 팔면 '불법' 벌금 물기도부대물건 줄어 미제 청바지 등 수입품 대체의류산업 발전 등으로 쇠퇴… 명맥만 유지경인전철 동인천역 4번출구(북광장) 오른편에 '중앙시장 전통혼수거리'가 있다. 한눈에 봐도 지은 지 수십 년은 돼 보이는 건물이 나란히 줄지어 서 있다. 미군부대에서 흘러나온 물품이 거래됐다고 해서 '양키시장'으로 불렸다. 인천 동구가 행정 명칭으로 정한 이름은 '송현 자유시장'이다. 양키시장은 1930년대에 조성됐다가 철거되는 등 우여곡절을 거쳤다. 양키시장은 1980년대까지만 해도 골목을 지나기 어려울 정도로 사람이 붐볐다고 하는데, 지금은 을씨년스럽기 그지없다. 이춘화 할머니는 50년이 넘도록 이곳 양키시장을 지키고 있다. 할머니는 직업 군인 남편을 만나 결혼할 때까지 서울 청량리 '태창방직' 공장에 다녔다. 결혼 뒤에는 남편 근무지를 따라 강원도 춘천 등지에서 살았다. 1966년께 남편은 대위로 제대를 했는데 제대금이 15만원이었다. 당시 15만원이면 한 가족이 살 수 있는 넓은 집을 한 채 살 수 있었다고 한다. 이 돈으로 양키시장의 좌판 3개를 샀다. 당시 집안 식구들이 인천 동구에 살아 양키시장과 인연이 닿았다. 양키시장은 주식회사 형태로 돼 있어 회사 지분을 취득하는 방식으로 좌판 계약을 했다. 가게 이름은 '은영사'로 정했다. 인천 동구 화평동에 조그만 전셋집을 얻었다. 옷 장사를 시작한 뒤 둘째 아들을 낳았는데 올해로 51살이 됐다. 할머니는 둘째 아들의 나이를 이야기하다 양키시장에서 50년이 넘도록 장사를 했다는 것을 깨닫고 "세월이 오래됐다"고 말했다. 요즘은 재고나 팔아 볼까 하는 생각으로 나오지만 손님이 없어 매일같이 허탕이다.양키시장의 역사는 193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종합시장으로는 인천에서 가장 오래됐다. 양키시장이 생기기 전인 1890년대에 중구 신포동에는 어물전(생선전)이 있었다. 채소를 취급하는 '푸성귀전'도 있었다. 신태범의 책 '인천 한 세기'는 "일찍이 19세기 말에 이곳(신포시장)에 자리를 잡은 청국인의 푸성귀전이 현재 인천에서 으뜸가는 권위를 지니고 있는 신포시장의 전신"이라고 소개하고 있다.양키시장 자리는 바닷물이 들어오던 갯골이었는데, 1925년 매립됐다고 한다. 인천학연구원에서 기획한 '인천전통시장의 성장과 쇠퇴'라는 책에 따르면, 1937년 이 자리에 '송현일용품시장'이 들어섰다가 1940년대 중반 태평양전쟁 시기에 일제에 의해 전술적인 이유로 철거되기도 했다. 미국이 1945년 3월 일본 도쿄에 '소이탄(시가지와 밀림을 태우는 목적으로 개발한 포탄)'을 이용한 공격을 했고, 목조건물이 많았던 일본이 큰 타격을 입은 바 있다. 이에 일제는 소이탄 공격으로 인한 화재 확산을 예방하기 위해 인천을 비롯한 한반도 주요 시가지를 중간중간 공터로 만드는 일명 '소개공지'를 조성했다. 인천의 경우 만석동, 송현동 일대에 3곳이 지정됐는데 양키시장 자리가 포함됐다. 해방 후 제물포상인보존회의 주도로 시장 재건이 추진됐고, 노점상들은 송현동 100번지에 사무실을 두고 소성자유시장자치조합을 출범시켰다. 이후 부평 미군기지(캠프마켓) 등에서 시장으로 물건이 흘러들었고, 미군 물건을 팔면서 '없는 것이 없는 시장'으로 명성을 떨쳤다. 고일의 '인천석금'(仁川昔今)에도 양키시장과 신포동 일대의 시장 성장사가 잘 설명돼 있다. 전국적으로 이 같은 양키시장이 많았다. 서울 남대문시장, 부산 국제시장이 전국적으로 유명했고, 인천과 대구의 양키시장도 규모가 큰 편에 속했다.인천 양키시장은 1980년대까지만 해도 장사가 잘 됐다. 시장 골목골목에 인파가 몰려 제대로 이동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그때는 사람이 미어졌어." 할머니는 1980년대까지만 해도 하루 매출이 50만~70만원이었다고 했다. 이 중 10만원 정도가 남았다. 한 달이면 250만원 이상을 벌었다. 대기업 부장 월급의 2배 정도였다. 아들 둘에 딸 하나를 교육시키는데 어려움이 없었다. 아파트도 샀다.할머니가 양키시장에서 가장 많이 판 것은 군복이었다. 1960년대는 국내 옷감 생산량이 수요를 따라가지 못할 때다. 미군 부대에서 흘러나온 군복은 그 자체가 유행이었다. 할머니가 장사를 시작했을 당시 군복의 인기가 절정에 달했는데, 80년대까지도 군복을 구하러 시장에 오는 사람이 많았다.우리의 현대 의류 역사를 정리한 책 '현대패션 110년'은 1950년대 우리나라의 패션 경향을 군복으로 설명한다. "군용담요는 겨울옷을 만드는 원단이 되었고, 미군의 털양말은 어린이용 스웨터로 활용되었으며, 카키색의 군복 바지는 몸뻬로 개조되었다. 염색한 군담요 의상과 군 점퍼, 미처 염색이 끝나지 않은 카키색 군복을 줄여서 수선한 바지, 그리고 군화를 신고 거리를 누비는 모습은 익숙한 광경이 되고 있었다. 미군 군수물자에 찍힌 'UN'이나 'U.S.A.'라는 글자는 염색을 해도 지워지지가 않아서 미군 담요에 물감을 들여 코트를 만들어 입으면 'U.S.A'라는 글자가 비쳐 나와 그 옷 주인의 별명이 'U.S.A.'라고 불리는 웃지 못할 서글픈 추억도 있었다."양키시장에서는 군복 이외에 미군 부대에서 나온 각종 물품이 팔렸다. 할머니도 군복 이외에 미군 군화, 반합 등을 팔았다고 했다. 다른 상인들은 통조림, 담배, 과자를 팔고 시장에는 암달러상도 있었다. 할머니는 이들 물품이 인천 부평의 '캠프마켓'뿐만 아니라 서울 용산, 경기도 문산, 동두천 등 수도권에 있는 미군 부대에서도 흘러왔다고 했다.동아일보 1955년 5월16일자는 당시 양키시장의 물품이 어떻게 미군 부대에서 빠져나오는지 4단계로 구분해 소개했다. 미군 육지 수송을 할 때 빼돌리기, PX에서 빼돌리기, 미군 부대 출입하는 개인이 가져오기 등이 있었는데, 대다수는 한국에 수송되는 단계에서 대량으로 빼돌린다고 했다. "흔히 '양키' 물건은 미군인들이나 또는 미군부대에 드나드는 한국인 종업원 등에 의해서 새 나오고 구호품 등에서 시장에 흘러나온다고 알려져 있으나 이는 전혀 이 방면의 내막을 모르고 하는 이야기다. 물론 약간의 양키 물건은 호주머니 속에 감추어 빼내오는 소위 '얌생이'에 의해서 시장으로 나오는 것도 사실이지만 그러나 현재 우리가 하루하루 소비하고 있는 엄청난 수량의 '양키' 물품은 도저히 그러한 미미한 공급으로는 충당할 수 없는 것이다. (중략) 첫째 단계가 미군 수송선에서 물품이 양륙(揚陸)될 때 그 방면의 요로와 사전 연락이 있은 후 교묘한 수단을 써서 감쪽같이 집더미만한 (때로는 반톤급) 짐 덩어리가 괴짝으로 송두리째 옆으로 흘러나온다. 때로는 조고만 발동선이 동원되고 때로는 한번 덤벙 바닷물 속에 가라앉았다가 다시 바깥 세상에 나오게도 된다."당시 군복을 그대로 입을 경우 불법으로 단속의 대상이 됐다. 단속을 피하기 위해 야전점퍼나 전투복 상의를 검은색으로 염색해 팔았다. 전투복 하의를 염색한 '스모루바지'도 인기였다. 당시 한국 사람들에게 맞는 사이즈가 '스몰(small)'밖에 없어 스모루바지라는 이름이 붙었다. '현대패션 110년'은 "시장골목은 염색집으로 넘쳐났고, 드럼통 염색 솥은 수증기를 뿜으며 쉴 새 없이 군용물자를 삶고 있는 모습도 낯설지 않았다. 남학생들은 일부러 모자를 찢어 다시 재봉틀로 누벼 쓰고 다니는 것이 유행이었으며 역시 군복을 염색한 옷을 입었다"고 했다.이춘화 할머니는 염색하지 않은 옷을 팔다가 여러 차례 단속을 당했다. 단속되면 옷을 빼앗기고 벌금을 물어 한 달 치 수익이 고스란히 날아가니 상인들은 항상 촉각을 곤두세워야 했다. "미군 헌병이나 경찰이 와서 군복을 뺏어가고 그랬지. 뭐 알려주는 것도 없어. 갑자기 와서 다 뺏어가고 그러는 거야. 그래서 일부러 군복을 많이 내놓지 않고 다른 데 숨겨 놓기도 하고 그랬어."방일영문화재단에서 발간한 한국문화예술총서 '우리생활 100년·옷'에도 이 당시 단속 풍경이 그려진다. "관공서에서 군복 군화 등 미국 구호 물자를 일반인에게 배급하였는데, 배급하는 것 외에도 도난품이 많아져 경찰 당국으로선 큰 두통거리였다. (중량) 미군 원조 물자 구제품을 염색하는 전문 염색점이 서울 청계천변에 생기기도 하였다. 군용 기름 드럼통에 검정물을 끓여서 카키색 군복을 물들이는 곳이 즐비하고, 방파제로 쌓아 놓은 돌 위에 염색한 옷을 말리는 광경은 복개하기 전 청계천변의 풍속도였다."할머니는 양키시장에서 군복뿐만 아니라 작업복, 청바지, 체육복 등도 팔았다. 일주일에 2번은 전철을 타고 서울 동대문 평화시장에서 양키시장까지 옷 보따리를 머리에 이고 날랐다. 할머니와 같은 상인이 많아 역전에서 보따리를 든 사람의 탑승을 막기도 했다. 할머니는 "시간이 지나면서 상인들이 봉고차를 빌려다 장을 보게 됐고, 나중에는 택배로도 물건을 받아보게 됐다"고 했다.양키시장에서는 인천항을 통해 뱃사람들이 가져온 미제 청바지도 팔았다. 일본서 외항선을 타는 사람들이 가져온 가죽점퍼도 있었다. 남대문시장에서 나오는 소위 '짝퉁'도 많았다. 해외 스포츠 브랜드 등이 많았다. 인천학연구원이 낸 '인천전통시장의 성장과 쇠퇴'는 "1970~80년대 부평 미군기지에서 나오는 물건들이 거의 없어졌고, 인천항을 통해 들어오는 수입 물건들이 대신 자리를 잡았다. 90년대 양키시장은 나이키나 아디다스 같은 유명 브랜드의 모조품들, 소위 말하는 짝퉁을 파는 시장이었다"고 설명하고 있다. 할머니는 "예전에는 가짜 메이커도 좋다고 학생들이 찾아 입었는데, 이제는 아무도 가짜를 입지 않으려고 한다"고 말했다.국내 의류산업이 발전하고, 생활 수준이 높아질수록 양키시장은 경쟁력을 잃어갔던 거다. 2000년대 초반 단행된 '수입소화물규제'로 중구 항동 제2국제여객터미널 통해 수입상들이 개인적으로 들여오던 물건의 제한량이 40㎏에서 절반으로 줄어든 것도 시장 쇠퇴의 원인으로 꼽힌다.지금은 시장에 있는 90여 개 좌판 중 절반은 비어 있다. 양키시장 상인 가운데 이북 출신이 절반 이상으로 수십 명은 있었는데, 지금은 대부분 장사를 그만두거나 세상을 떠났다. 양키시장에서 여전히 장사하는 실향민은 할머니를 포함해 3명뿐이다.글/홍현기기자 hhk@kyeongin.com 사진/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50년 넘게 인천 동구 송현동 양키시장에서 장사를 하고 있는 이춘화 할머니가 가게에 진열된 물품을 정리하고 있다. /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이춘화 할머니의 가게 '은영사'. 할머니는 "별다른 이유 없이 그냥 예뻐서 지었다"고 했다. /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

2017-08-09 홍현기

[zoom in 송도]트리플스트리트에 국내최대 '몬스터VR'

문광부·콘텐츠진흥원 ‘VR체험존’ 첫 결실GPM과 국내개발사 협업 콘텐츠 40종 선봬정글존·익스트림·시네마구역 볼거리 다양관람객들 실제같은 몰입감에 ‘즐거운 비명’인천 송도국제도시 복합쇼핑몰 트리플스트리트 D동 6층에 국내 최대 규모의 도심형 VR(가상현실) 테마파크 '몬스터 VR'이 지난 4일 개장했다. 몬스터 VR은 국내 VR산업의 놀라운 성장을 한눈에 보고 체험할 수 있는 곳으로, 국내 VR업체들이 개발한 25종의 VR콘텐츠와 15종의 어트랙션을 즐길 수 있다.특히 몬스터 VR은 문화체육관광부와 한국콘텐츠진흥원이 미래 먹거리와 문화·관광산업 육성을 위해 추진하고 있는 VR 콘텐츠 체험존 구축 지원사업의 첫 결과물이다.공모를 통해 선정된 게임 개발 및 게임 서비스플랫폼 회사인 'GPM'은 (주)비브스튜디오, (주)미디어프론트 등 국내 VR 개발업체들과 협업해 몬스터 VR을 조성했다.GPM 박성준 대표는 "시행착오와 험난한 길이 많았다"며 "많은 파트너사, 문체부와 진흥원의 도움이 없었다면 몬스터 VR을 만들지 못했을 것"이라고 했다.몬스터 VR은 작은 놀이공원을 연상케 한다. 테마파크에 들어가면 열기구와 번지점프, 외다리 건너기, 슈팅, 래프팅 등을 즐길 수 있는 '정글존'이 가장 먼저 눈에 띈다. 중앙에는 GPM이 개발한 5개의 '큐브'가 있다. 가로와 세로 3.3m, 높이 2.7m 규모의 큐브에서 고글 모양의 헤드셋을 쓰는 순간 새로운 세계가 열린다.'익스트림' 구역에서는 VR을 통해 카레이싱과 봅슬레이 등을 체험할 수 있다.카레이서가 돼 자동차를 운전하고, 롤러코스터를 타고 중국 만리장성과 캘리포니아 해변까지 시공간을 넘나드는 짜릿한 여행을 즐길 수 있다.'시네마' 구역은 VR 영상 콘텐츠를 경험할 수 있는 곳이다. 아프리카 정글을 탐험하고 하늘을 날아다니고, 닌자가 돼 칼 솜씨를 뽐낼 수 있다. 세계적인 축구 선수들이 차는 페널티 킥을 막는 골키퍼도 될 수 있다. 단순한 오락게임뿐 아니라 어린이들에게 새로운 세계를 체험시켜 줄 교육용 콘텐츠도 있다.이날 오전 11시 개장식이 열렸다. 문체부 김상욱 콘텐츠정책관은 "인천 송도가 첨단도시, 한류 관광도시로 발전하는데 몬스터 VR이 기여할 것"이라고 했고, 인천시 조동암 정무경제부시장은 "바이오와 첨단산업이 어우러진 송도에 몬스터 VR이라는 의미 있는 시설이 들어왔다"고 했다.몬스터 VR은 개장식이 끝난 후 본격적인 운영에 들어갔다. 개장 첫날에도 적지 않은 사람이 몬스터 VR을 찾았으며 곳곳에서 즐거운 비명이 터져 나왔다.경기도 용인에서 아이들과 함께 온 윤연(45·여)씨는 '정글래프팅'을 탔다. 정글래프팅은 정글을 테마로 협곡, 동굴, 폭포 등 다양한 공간을 연출해 체험의 몰입도와 재미를 극대화한 실감형 기기다.윤연씨는 "예상보다 세밀하다. 실제와 가깝고 리얼리티가 있다"며 "우리 업체 기술이 이렇게 발전했는지 몰랐다. 잘 만들었다"고 말했다.몬스터 VR 운영 시간은 오전 10시30분부터 오후 10시까지다. 자유이용권 가격은 청소년·성인 기준으로 평일(월∼목) 2만8천원, 주말(금∼일, 공휴일) 3만8천원이다. 소인(8~13세) 자유이용권은 청소년·성인보다 9천 원 싸다. /목동훈기자 mok@kyeongin.com그래픽/박성현기자 pssh0911@kyeongin.com/아이클릭아트

2017-08-06 목동훈

[송도국제도시 브리핑]한국조지메이슨대, 소외계층 청소년 '영어캠프' 개최

인천 송도국제도시에 위치한 한국조지메이슨대학교는 지난 2~4일 경기도 광명시 소외계층 청소년 20명을 대상으로 여름 영어캠프를 운영했다. 한국조지메이슨대와 광명시는 지난해 6월 글로벌 교육 협력을 위한 업무협약(MOU)을 체결한 바 있다. 지난 2일부터 사흘간 진행한 여름 영어캠프에서 한국조지메이슨대 학생들은 광명시 학생들의 멘토로서 영어 자기소개, 영어 일기 쓰기, 해외 문화 체험하기 등 다양한 프로그램의 진행을 도왔다.스티븐 리 한국조지메이슨대 총장은 "이번 첫 여름 영어캠프를 계기로 지속해서 지역 내 소외계층을 위한 교육 프로그램을 개발하고 추진할 계획"이라며 "여름 영어캠프에 참여한 광명시 청소년들이 글로벌 시대에 맞는 경쟁력 있는 인재로 성장하기를 바란다"고 했다.한국조지메이슨대는 미국 버지니아 주립대학인 조지메이슨대학교의 글로벌 한국 캠퍼스로, 본교와 동일한 커리큘럼과 학위를 제공한다. 현재 한국조지메이슨대는 경영학, 회계학, 재무금융학, 경제학, 국제학, 분쟁분석 및 해결학 등 6개 학사 과정을 제공하고 있으며, 내년에 '시스템공학' 석사 학위 과정을 개설할 예정이다. /목동훈기자 mok@kyeongin.com

2017-08-06 목동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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